외전 1 : 3 Months
“지선욱 환자님. 들어가시면 됩니다.”
“…….”
“지선욱 환자님?”
“…아, 네.”
당연히 내가 아니리라고 생각하며 흘려버린 소리가 정확히 날 겨냥한 것임을 뒤늦게 눈치챘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흘끔 본 간호사가 진료실을 친절히 가리켰다.
“선생님이 안에서 기다리세요.”
2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까지 하고서도 나처럼 환자란 사실 자체를 어색해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더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진료 시간은 언제나와 같았다. 이제는 소독조차 필요 없는 상처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오늘 촬영한 뇌 사진을 보며 행여나 혹이 다시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한다. 혹시라도 머리에 통증을 느낀 적은 없는지,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요새 생활 습관은 어떤지,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한 증상을 느낀 적은 없는지 등의 질문에 답하고 나면 2주 뒤에 보자는 말이 돌아온다.
다행히 오늘 진료를 마친 의사의 입에서는 2주가 아닌 한 달 뒤에 보자는 말이 나왔다. 수술 후 두 달이 지나면 통원 치료의 텀이 길어진다고 들었는데도 혹시나 해서 마음을 졸였던지라 안도감부터 들었다. 들어올 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나서다 말고 뒤돌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진료 결과가 괜찮다면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저….”
타자 치는 소리가 멎는다.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 중이던 의사의 사무적인 눈빛을 받으며, 내가 할 말을 점검했다. 두 달간 2주에 한 번씩 진료를 받으면서도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던 말을 드디어 꺼낼 수 있었다.
“혹시 일상생활은 언제쯤부터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의사의 시선이 내게 머무른다.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오늘 진료하며 무언가를 틈틈이 기록하던 곳을 짧게 확인한다. 실컷 아무런 문제 없다고 대답 잘해놓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둘러 묻듯이. 나는 그가 더 헤매기 전에 입을 열었다.
“운전이나, 운동… 그런 것들이요.”
“아….”
“할 수 있으면 가능한 한 안 하는 게 좋은 건 아는데….”
“…….”
“좀 답답해서요.”
그제야 내가 묻는 바를 제대로 이해한 듯한 의사의 입에서 아, 하는 짧은 신음이 흘렀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손을 들어 이마를 긁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곤란한 표정을 확인한 순간에는 이미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눈치챈 듯했다. 이걸 상황이 조금 나아진 지금에야 물어보는 이유도. 말을 고르던 그가 날 향해 어설프게나마 웃어 보였다. 어떤 대답을 내놓든 날 실망하게 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듯이.
“이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운전이나 운동 모두 하셔도 괜찮습니다. 잠깐 운전하시는 거나 가벼운 산책 등이 무리가 될 상태는 아니라, 오히려 권장드리는 바이기도 하고요.”
“…….”
“다만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돌아가시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환자분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걱정하시는 주변인들을 위해서도 그게 더 나을 테고요.”
예상대로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낱같은 희망조차 죽인다. 차라리 묻지 말걸, 생각하게 될 정도로. 확답을 받지 않았다면 몰랐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 이런 말까지 듣고도 그런 짓을 한다면 대놓고 주의사항을 어긴 셈이 되니까.
사실 그의 입에서 주변인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반박할 의지가 아예 사라졌다. 이렇게 확답을 듣기 전부터 같은 말을 해오던 놈이 떠오른 탓에.
수술 후 두 달이 지났고, 운전하지 않은 것도 그쯤 됐다. 처음엔 일상생활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자제하라는 병원 측의 가벼운 권고였을 뿐인데, 의사의 지나가는 당부 하나 놓치지 않는 이지훈이 그 말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고 제안했다.
‘당분간은 운전 안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나 있을 거고, 필요하면 택시 타면 되잖아.’
뇌 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퇴원 후 운전하다가 어지럼증과 함께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을 느낀 탓에 결국 사고가 났다는 사례까지 꺼내 들며 날 설득하는 놈의 얼굴은 진지했다. 과잉보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놈이 날 위해 포기하는 게 많았다. 특히 최근의 이지훈은 내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것조차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굳이 짧은 일정의 비행만 고집하면서 하루라도 시간이 나면 한국에 들어와 날 챙기려 들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겨우 답답해서라는 이유로 놈을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더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뱉었다. 감사합니다. 다음 외래 진료 예약을 잡고 병원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이지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은 오후 3시. 오늘 진료 시각이 2시였음을 기억한 놈의 계산이 철저히 반영된 전화였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목부터 가다듬었다. 이지훈이 처음으로 동행하지 않은 진료였다. 자신의 비행 일정도, 나의 진료 일정도 바꿀 수 없음을 알자마자 강영수에게라도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려 들던 놈을 뜯어말린 보람이 있으려면 괜찮아 보여야 했다.
“어.”
-진료 어땠어?
역시나 첫 질문부터 이지훈은 이 전화의 목적을 상기시킨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로비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방금 받아온 약 봉투를 옆으로 툭 던져두면서.
“괜찮아, 다.”
-뇌 사진도 봤어?
“어. 검사 결과도 다 정상이고 이상한 점도 없고, 다음 진료도 한 달 뒤로 잡혔어.”
-다행이네. 약은?
“줄여도 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일단 2주 치만 받아왔어.”
준비해 둔 것처럼 질문을 이어가던 이지훈이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안도감이 드러나는 숨소리를 들으며 시계를 내려다봤다. 이지훈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도시가 한밤중임을 계산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아까 의사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마를 긁었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대도 해야 할 말은 있다. 비록 그 상대가 나랑 사귀는 놈이고, 내가 전혀 걔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나 괜찮으니까 전화 끊고 얼른 자. 새벽 세 시잖아, 거기.”
잠깐 말이 없던 이지훈이 피식대며 대꾸했다.
-맨날 재워. 내가 애기냐?
애기라는 말과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볼을 뻘쭘하게 긁었다. 최근 통화할 때마다 자라는 말을 유독 자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생각해보면 그건 이지훈 탓이기도 했다. 그곳이 어디든,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자꾸 전화하니까. 근데 그 사실을 지적하려면 왜 놈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내 건강을 점검하려 드는지를 말해야 했고, 그러면 또 같은 결론을 반복하게 된다. 나는 우리가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말 중에서도 놈이 설득될 확률이 가장 높은 말을 꺼냈다.
“오전 비행기잖아. 컨디션 관리해야지.”
다행히 이지훈도 그 말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놈과 통화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병원 로비는 오늘도 붐볐다. 아픈 사람들, 아팠던 사람들, 언젠간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바삐 서로를 지나쳤다. ‘아팠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인 나는 주변을 굳이 둘러보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발길을 가까스로 멈춰 세운 순간에는 내가 아직 아픈 사람임을 깨달았지만. 멈칫하길 잠시, 택시를 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통화를 끊지 않고 있던 이지훈이 때마침 마무리하듯 물었다.
-아직 로비인가 보네?
잠깐 말이 없던 새에 또 내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인 모양이었다. 그 사실에 놀라기에는 놈을 너무 오래 알았기에 대수롭잖게 답했다.
“어, 택시 타러 가는 중이야.”
-그러지 말고 기다려.
“왜?”
-강영수 십 분 안에 도착할 거야.
“…뭐?”
-어, 나도 사랑해. 내일 보자.
돌아올 질타를 예상한 것처럼 전화가 빠르게도 끊겼다. 통화 시간만이 반짝이는 화면을 어이없게 내려다보는데, 언제 왔는지 위에 떠 있는 메신저 알림이 보였다.
강영수
욱아 나 좌회전 신호 한 번만 더 받으면 도착><전화하면 나와 춥다앙 오후 2:57
한숨을 삼키면서도 걸음을 물렸다. 굳이 몸을 일으킨 보람도 없게 아까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옆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약 봉투와 그 위에 박힌 내 이름을 본 순간에야, 내가 그걸 버리고 갈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 봉투부터 쥐어 무릎 위에 올려뒀다. 환자인 걸 잊고 사는 건 나뿐인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렇듯 입 안이 썼다.
[이곳의 특성 중 하나는…]
한 시간 전부터 틀어둔 영상이었지만, 기억나는 말이 몇 없다. 멕시코 최대의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산해진미를 소개하는 리포터의 익살스럽고도 풍부한 표정을 보면서도 그와는 전혀 닮지 않은 이지훈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랬다. 나를 어제 집까지 데려다준 강영수가 별것 아니란 듯 툭 던진 정보가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내.
‘뭐, 그 새끼 직장 들어가기 힘든 데인 거 알아서 의외긴 한데… 한국에 정착할 거면 나쁘진 않은 선택일지도? 어쨌든 옮기려는 데도 메이저 항공사긴 하니까.’
이지훈이 국내 항공사로의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리를 전하는 강영수는 태평했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친구니까 의외라는 감상 정도야 덧붙일 수 있는 거고, 한편으로는 친구이기에 그 이상으로 개입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거니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최근 비행을 위해 집을 나서기 전 나를 돌아보던 이지훈의 표정부터 떠올린 나는 이제 친구가 아니라서 이걸 그대로 넘길 수가 없는 걸까.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국내 항공사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던 놈이 갑자기 이직을 마음먹은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닐까, 의심부터 하게 되는 사이가 되어서?
진동 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재빨리 찾아 쥔 핸드폰 화면에 이지훈의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공항에 도착했으며, 지금 집으로 출발한다는 내용이 예상 시간과 함께 적혀 있었다. 내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 공항까지 마중이라도 나갈까 봐 지레 겁부터 먹은 놈이 얼마 전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따지자면 이것도 그런 일인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
“…….”
잠깐 메시지를 내려다보던 나는 운전 중인 놈이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알겠다고 답장을 간단히 보내두었다. 여전히 내용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다큐멘터리를 조금 더 틀어두다가, 이지훈이 도착하기 10분 전에야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을 마중 나갈 예정이었다. 그게 내 바람과는 달리, 몇 걸음도 채 걷지 않아 도착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라고 해도.
이지훈은 출발하기 전 미리 메시지로 말했던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다. 그로부터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과거 택시 기사에게 두 배로 돈을 더 얹어주며 단축한 시간보다는 10분 정도 느리고, 도로 상황을 고려하며 제한속도로 운전했을 때의 시간보다는 5분 정도가 빠른 시각이었다.
“안 추워? 왜 나와 있어.”
어째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빠르다 했더니, 이지훈의 차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던 순간 멈칫하던 게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해서가 맞았던 모양이다. 이지훈은 헤매지조차 않고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앞에 선 놈이 가장 먼저 한 건 나의 가디건 단추를 여미는 일이었다. 그렇게 보자마자 아픈 사람 대하듯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놈이 끌고 온 캐리어부터 뺏어왔다.
“바로 밑인데 춥긴 뭐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뱉은 말이 내 귀로 듣기에도 꽤 퉁명스럽게 들려서였다. 통화든, 실제로 만나서든 이지훈의 첫마디가 늘 나를 걱정하는 것이란 사실이 기껍지 않음을 여태까지는 나름대로 잘 숨겨왔다. 방금은 너무 티를 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어제 강영수에게 들은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뒤늦게 입술을 말아 물며 이지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냐? 난 좀 추워 가지고.”
다행히 이지훈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씩 웃고만 넘겼다. 캐리어를 다시 가져가려던 손마저 뒤로 물린 놈이 내 팔뚝을 잡았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등을 밀어주는 놈의 손을 느끼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놈이 뒤로 와 내 어깨를 쥐었다. 꼭 어깨동무라도 하듯이.
“그리고 현관에서 보면 바로 뽀뽀할 수 있어서 좋거든.”
이지훈이 눈을 들어 힐끔 내 뒤를 확인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가 진입할 때마다 바퀴와 바닥이 부딪쳐 삑삑 소리가 났다. 우리 말고도 누군가가 이곳에 있음을 알려주는 듯한 소리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삐삑. 또 한 번 들리는 소리에 슬쩍 인상을 찌푸린 놈이 어깨를 으쓱하며 재빨리 표정을 정돈했다.
“뭐, 지선욱 입술 어디 가는 거 아니니까. 그치?”
그렇게 묻는 놈의 손가락이 어느새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놈의 눈을 피해 슬쩍 고개를 뒤로 빼는 순간마저도 귀가 화끈했다. 이런 말은 들어도 들어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내 입술이 제가 알던 곳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부터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지훈은 문이 닫히자마자 입술을 붙였다. 혀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가벼운 뽀뽀에 불과한 입맞춤인데도, 횟수가 잦고 속도가 빨라서인지 숨이 찼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마저 다시 붙일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는 듯한 놈은 정말 쉴 새 없이 입을 붙였다. 뽀뽀로 내는 소리라기에는 집요한 마찰음이 연이어 울렸다. 낯간지러운 소리에 차라리 입술을 떼지 말고 그냥 계속 붙이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생각부터 들 정도로.
손에서 캐리어 손잡이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귀신같이 알아챈 놈이 내 손에서 캐리어를 뺏어 옆으로 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혹시 깨지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어서 고개를 돌리려다 저지당했다.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 제게로 고정시킨 이지훈이 빠른 속도로 입을 열었다.
“나 보고 싶었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이 또 붙었다.
“나는, 존나… 응?”
쪽쪽. 부리로 쪼는 듯한 뽀뽀였다. 입술이 떨어지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말을 하는 이지훈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러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한 번, 두 번, 세 번. 입술이 연이어 붙었다. 내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릴 때마다 벌려진 입술과 닫힌 입술이 부딪치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 또한 만만치 않게 부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대답이 필요해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하지 못하니 대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나도 마음먹은 게 있었다. 이지훈이 뽀뽀를 마음껏 쏟아붓도록 조금 더 내버려 두다가, 입술을 부딪치는 속도가 느려진 순간 놈의 허리에 손을 올려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멈칫하는 놈이 느껴졌지만, 놈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놀란 것처럼 움칠한 혀를 부드럽게 감으며, 이지훈의 목을 애무하듯 만졌다.
이지훈의 혀에서는 민트 향이 났다. 집으로 운전하는 내내 씹고 있었을 사탕에서 옮은 향일 터다. 이지훈은 최근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나 때문일 거다. 입이 심심해진 놈은 다른 걸 물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장 부엌에만 해도 무설탕 사탕이 종류별로 구비돼 있었다. 사탕을 직접 먹는 건 별로지만, 이지훈의 혀를 통해 간접적으로 먹는 건 괜찮았다. 코까지 화해지는 것 같은 깔끔한 향을 느끼면서도 나는 미끈한 혓바닥을 빨아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이지훈의 허리에 둔 왼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키스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벨트의 끝을 잡아 고리에서 빼낸 것과 동시에 입술이 급작스럽게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섹스도 곧이리라고 믿을 수 있을 뻔했다.
“선욱아.”
고개를 뒤로 슬쩍 빼기부터 한 이지훈은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는 것처럼.
“우리 일단 밥부터 먹을까? 키스도 식후경인데.”
지난 두 달간 지겹도록 당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처음에야 멋모르고 할 기분이 아닌가 보다 싶어 그만뒀지, 바짝 붙은 아래를 통해 좆이 팽팽하게 서 있는 게 느껴지는데 이러는 건 그냥 분위기를 끊고 가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밥 먹고 다시 키스할 분위기가 잡힌대도, 정신을 차리면 놈의 유치하고도 낯간지러운 애정행각에 진이 다 빠져서는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어주는 이지훈 옆에 누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되짚어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픈 후부터 이지훈이 숨 쉬듯 하는 과잉보호의 일종이었다. 나랑 섹스하지 않으려 드는 것. 뽀뽀는 하면서, 가벼운 키스도 하면서. 그에 당연히 이어질 행위는 일부러라도 쳐내고 막아내는 것.
지겹도록 당하는 환자 취급을 끊어낼 때가 됐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하고.”
이지훈의 표정이 한층 더 난감해졌다. 놈이 내가 하자는 게 뭔지 모를 리 없었다. 비행을 다녀온 놈과 현관에서부터 입을 맞추는 행위는 이제 통과 의례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섹스를 위한 전초전을 치르듯 나선 적은 없으니까. 나는 해야 하는 이유를 말로 설명하는 것 대신, 놈의 볼을 감싸 쥐고는 아래로 내렸다. 말을 막듯 놈의 입 안으로 혀를 깊숙이 넣으며, 이지훈의 벨트를 마저 풀어냈다. 동시에 침실 쪽을 향해 차근차근 걸음을 옮겼다.
곤란해하던 것치고는, 이지훈은 제 입 안을 휘젓는 내 혀를 적당히 받아줬다. 아래를 빳빳이 세워놓고도 이 상황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침대에 누우면 달라질 것을 알기에 일단은 밀어붙이듯 놈을 끌었다. 방문을 넘는 순간이나, 침대를 옆눈으로 슬쩍 본 놈이 머뭇댈 때면 오히려 내가 좀 더 과감하게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침대 앞에 서서야 입술을 뗐다. 이지훈의 어깨를 침대 헤드 쪽을 향해 부드럽게 밀며 놈의 위에 올라탔다. 놈의 머리가 헤드에 부딪히지 않도록 뒤통수를 감싼 순간 이지훈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거 좀 그런데….”
입술을 다시 붙이려던 행위가 우뚝 멎었다. 침대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곤란해 보이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의 표정이 복잡했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익숙한 표정을 발견한 순간에는 맥이 풀렸다.
얘랑 자본 경험이 있어서 안다. 지금 이지훈은 꼴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걸. 침대까지 끌고 오면 그래도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단호한 마음을 먹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더 이어갈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해서 섹스해 봤자 하는 거 같지도 않을 것이다. 하는 내내 날 걱정할 놈을 생각하니 착잡했다.
아무래도 글렀다. 판단을 마친 나는 침대에 올라서며 벗었던 흰 티부터 다시 주워 입었다. 꼭 거절당한 기분에 이지훈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시트에 시선을 둔 채로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알았어. 밥 먹자.”
침대 아래로 내려서려던 나를 막은 건 이지훈이었다.
“야. 선욱아.”
답지 않게 팔에 힘을 준 놈 때문에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지훈이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내가 아픈 걸 안 순간부터 당장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대하던 놈이 오랜만에 행사한 힘이었다.
“…아!”
놈의 가슴 위로 엎어지듯이 넘어졌다.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마저 무산됐다. 내 등 뒤로 손을 모아 깍지를 낀 놈 때문이었다. 인상을 쓰며 위를 올려다보기 무섭게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지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내렸다. 입술의 주름까지도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아까처럼 뽀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지훈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혀를 집어넣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꼭 말하는 듯한 키스였다. 지름길을 아는데도 굳이 긴 시간을 함께하려 먼 길을 돌아가는 산책 같은 키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 안의 여린 살들을 간지럽게 쓸었다. 이지훈은 내가 따뜻한 혀와 그를 조이듯 감싸는 연한 점막의 느낌을 즐기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입술을 뗐다. 포근했던 키스의 여운이 남은 탓인지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시선을 나눌 수 있었다. 이지훈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 너랑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냐.”
“…그래 보여.”
“알아. 그래서 말하는 거잖아. 오해하지 말라고.”
“…….”
“그냥 좀….”
이지훈은 말을 흐렸지만, 알아서 생략한 말조차 뻔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로채듯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도 환자같이 느껴져?”
“…….”
“섹스 한 번 하면 부러질 것 같냐? 머리도 터질 것 같고?”
이지훈이 대답하려다 말고 날 빤히 봤다. 어쨌든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니 긍정의 의미 같아서 마음이 상했다. 이지훈이 이러는 게 날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정도가 과하긴 해도, 어쨌든 목적은 날 보호하려는 거고 이유 또한 날 걱정해서이니까.
“나도 알아. 네가 왜 이러는지… 근데….”
말하다 말고 울컥했다. 참아온 감정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 탓이었다. 겨우 가둬두었던 감옥에서 탈출한 것처럼 입 안에서 마구 날뛰는 말을 잠재우려 시선을 돌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해오던 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하러 가는 것.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것. 마중 나가고 싶은 곳으로, 배웅하고 싶은 곳으로. 평생 그런 것을 할 때 제약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일까. 의식조차 하지 않고 해오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게 어렵고, 그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게 지치고, 배웅이나 마중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주 무력해지고, 가끔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적어도 이지훈의 옆에서만큼은 멀쩡하고 싶다. 바쁜 놈한테 걱정 좀 그만 끼치고, 이지훈이 나 때문에 무리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필요한 일인 건 알아도, 그 시간이 좀 빨리 갔으면 좋겠다.
아무리 연습해도, 이지훈에게 솔직해지는 건 여전히 어렵다. 나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다시 한번 삼키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렇게 떼쓰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해.”
한차례 폭풍 같은 감정이 지나니 미안함만 남았다. 애도 아니고, 사정 뻔히 다 알면서도 긴 비행을 다녀온 놈에게 투정만 부린 듯해 민망했다. 뒤늦게나마 표정을 정돈하며 까끌까끌하게 일어난 감정 또한 잠재웠다.
“배고플 텐데 밥 먹자. 아주머니한테 너 좋아하는 반찬 부탁드렸어.”
일주일에 두 번 살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오신다. 이것 또한 이지훈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한 일이고, 놈의 마음을 알아 필요 없다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 일이었다. 이지훈이 들으면 안심할 만한 정보를 뱉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불쑥 눈앞에 나타난 핸드폰 때문이었다.
화면에 떠 있는 달력을 확인하고는 이지훈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번 달이 아닌 다음 달 달력인 것 말고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게 뭔데? 물으려던 때에 이지훈이 먼저 털어놓았다.
“나 디데이 세.”
“무슨….”
“너랑 섹스해도 괜찮은 날까지 디데이 세고 있다고.”
“…….”
“의사한테 물을까 했는데 나중에 알면 네가 나 가만 안 둘 것 같아서, 해외 논문이랑 사례 싹 다 뒤졌어.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 석 달 뒤부터는 안전한 것 같더라.”
“…….”
“그래서 그때까지는 참아보자고 스스로 정했어.”
입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대체 누구 마음대로? 겨우 그딴 이유로?
그러나 이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더 말할 게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은 오래가질 않았다. 관자놀이 부근을 긁으며 잠깐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놈이 마저 고백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걱정되는 것보다는 내가 걱정되는 게 좀 더 커.”
“…뭔 소리야.”
“나 요새 네 목소리만 들어도 서. 어제도 너 전화 끊자마자 좆 쥐고… 하….”
“…….”
“하여튼. 섹스하면 오죽하겠냐? 그럴 바에야 시작도 안 하는 게 낫지.”
허…. 입술 사이로 멍청한 신음이 흘렀다. 이지훈이 이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놈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았다면 스스로는 절대 생각지 못했을 이유였으니까. 내 몸을 걱정한다기보다는, 못 참을 자신이 더 걱정된다니. 뭐,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나를 걱정하는 거긴 한데. 아니, 맞나?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와 달리 이지훈은 태평했다. 지난 2개월 동안 나름대로는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덕인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나를 빤히 보던 놈은 한술 더 떠 손까지 냉큼 뻗었다. 잘빠진 검지 끝에 내 입술이 투둑 걸렸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처럼 장난처럼 건드리고는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아까와 달리 이지훈의 손가락은 내 아랫입술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만지작댔다. 그새 좀 부은 입술을 고무줄놀이라도 하듯 잡아당기던 놈이 손을 슬금슬금 옮겨 입꼬리 끝까지 꾹꾹 눌러댔다. 마치 그렇게 해도 망가지지 않을 걸 알고 건드리는 것처럼. 당기는 대로 늘어나는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지훈이 중얼댔다.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대는 놈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지는 자위도 안 했을 거면서….”
입술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퉁 튕겨 나간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놈의 손이 내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쑥 들어오기가 무섭게, 몸이 휙 돌았다. 순식간에 놈과 나의 위치가 뒤바뀌었음은 뒷머리에 딱딱한 것이 닿은 순간 알았다. 어느새 나는 방금까지 이지훈이 기대 있던 침대 헤드에 등을 댄 채로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이지훈은 갑작스럽게 바뀐 위치에 갈 곳을 잃고 흩어져 있는 내 발을 잡아 올렸다. 위치를 조정하듯 내 허리를 잡아 아래로 쑥 끌어당긴 놈이 날 사이에 둔 채 무릎을 꿇었다.
“선욱아.”
날 부르며 투두둑, 입고 있는 셔츠를 풀어내는 손길이 재빨랐다.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순식간에 벗은 놈의 상체가 눈앞에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을 확인한 순간 덜컥 불안해졌다. 이지훈의 손이 어느새 내 흰 티 안에 들어가 있었다. 티셔츠 끝단이 놈의 손에 슬금슬금 위로 밀려났다.
“하긴. 내가 섹스를 너무 좁게 생각한 걸 수도 있어, 그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물을 수도 없게 놈이 입술을 붙였다.
“읍-”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막는 것에 가까운 키스였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문질렀다. 이지훈이 내내 이러고 싶은 걸 참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소 급하게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이지훈의 손 또한 참을성 없이 몸 이곳저곳을 문지르고 만져댔다. 복근을 쓸며 올라간 손이 유두에 다다른 건 순식간이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로 가볍게 잡아 비트는 손길에 유두가 바짝 긴장해 꼿꼿하게 섰다. 이지훈은 봐주기는커녕 손가락이 핀셋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두를 바짝 쥐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장난스레 굴리다가도 한순간 마개라도 뽑듯 쭉 잡아당겼다. 따끔한 감각에 상체가 저절로 둥글게 말렸다. 읏, 입 안으로 신음을 힘겹게 삼킨 나는 이지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던 놈이 대체 뭐 하자는 짓거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 하아, 지금 무슨….”
“꼭 들락날락해야만 섹스인가? 정의하기 나름이지.”
“…뭐?”
“자, 만세.”
얼빠진 나 대신 이지훈이 내 팔을 덜렁 들어 올렸다. 상황을 파악하려 잠깐 멈췄을 뿐인데, 아래서부터 끌어 올려진 옷이 볼을 스치는 느낌이 든 것과 동시에 반나체가 됐다. 맨살을 더듬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간신히 손을 뻗어 이지훈의 어깨를 밀었다.
“야, 야, 잠깐.”
그제야 이지훈이 멈췄다. 나는 놈이 더 다가오지 못하게 놈의 가슴에 손을 둔 채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석 달까지 섹스 안 할 거라며.”
“응.”
“지금 왜 벗는 건데, 그럼.”
“미니 섹스 한 번 해보려고.”
“미니… 뭐?”
황당함에 차마 다 뱉지도 못한 말을 이내 안으로 꾸역꾸역 다시 삼켜야만 했다. 내가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와 드로즈까지 한 번에 내린 놈이 좆을 꺼내 쥐었다. 아까 한 키스 때문에 좀 서 있긴 했어도, 발기했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의 좆이었다. 그걸 눈치챈 놈은 엄지로 요도구부터 사정없이 문질렀다.
“아윽, 야… 잠깐만.”
다급히 이지훈의 어깨를 밀며 신음을 삼켰다. 수술 이후 운동도 못 하고, 밖에 나가는 일도 적었던 게 몸을 예민하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모든 자극이 평소보다 훨씬 거셌다. 몸을 일으키는 간단한 행위조차 못하고 아랫입술을 말아 무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로. 전희도 없이 찾아온 자극을 반기듯이 몸은 빠르게 흥분했다.
“흐… 이지훈, 좀….”
저지하듯 놈을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내 좆을 문지르기에 열중한 놈은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사정하길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흣, 아….”
놈의 손아귀 안에서 좆이 제멋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이지훈 말이 맞았다. 이지훈과의 섹스를 마지막으로 난 자위조차 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만에 제대로 만져지고 있는 데다가, 손가락을 세워 요도구와 기둥 사이의 틈을 끈질기게 공략하는 이지훈의 손 때문에 끊임없이 자극당하고 있는 좆에 피가 몰렸다. 이지훈의 어깨를 밀려던 손이 자꾸 놈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몸이 붙을수록 위에 있는 놈의 몸이 성기를 누르는 느낌이라 더욱 자극이 거셌다.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신음을 참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좀… 그만! …아….”
이지훈의 손을 좆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도 번번이 가로막혔다. 내가 원했던 건 섹스였지, 이런 식으로 대신 자위를 당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마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진행되는 탓에 머리가 얼얼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숨을 가쁘게 뱉었다.
“…손, 손.”
“손 뭐. 좋아? 더 세게 해?”
“아니, 그만… 좀 치우, 라고….”
겨우 손에 힘을 줘 이지훈의 팔뚝을 꽉 쥐었지만, 그럴수록 놈의 손길이 한층 더 과감해지는 것만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신음을 참기가 점점 더 힘들었다. 내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기둥을 흔드는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뱃가죽까지 움칠 떨릴 정도로 사정감이 몰려온 것과 동시에 놈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하, 하아….”
고작 사정 한 번 했을 뿐인데 몸에 힘이 없었다. 겨우 추스르고 아래를 보던 나는 그러기가 무섭게 굳었다.
“…뭐 하냐?”
이지훈은 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점액질의 액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무엇보다 이상한 건 놈의 표정이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놈은 실험 표본이라도 옮기듯이 정액을 내 복근 위에 슬쩍 묻혀 관찰하더니 이내 정액이 남은 손가락을 눈앞에 가까이 가져가 손끝을 비볐다. 얼핏 보면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사람처럼 보일 법한 표정과 행동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손을 내린 이지훈이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단언했다.
“봐 봐. 자위 한 번 안 했을 줄 알았다.”
넋 놓고 구경하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침대 옆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티슈를 뽑아서 놈의 손을 닦아줄 예정이었다.
“더럽게 무슨… 야, 손 닦아, 얼른.”
“싫어.”
“뭐가 싫….”
순간 쌀 뻔했다. 몸을 내린 이지훈이 이번에는 좆 끝을 물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아랫입술을 물었지만, 그럼에도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입술 새를 비집고 튀어나갔다.
“허윽….”
나도 모르게 다리 사이에 있는 이지훈의 머리칼부터 쥐었다.
이 미친 새끼가 펠라 한 번 배웠다고….
사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좆을 그대로 문 탓에 선단 근처에 묻은 액까지 함께 먹어야 했던 놈의 입에서 추릅대는 소리가 났다.
“후으… 하….”
이지훈은 끝내 그걸 다 빨아 먹었다. 그러고도 아쉬운지 주름까지 핥을 것처럼 구는 놈 때문에 이번에는 사정이 더 빨랐다. 놈이 쥐고 있는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그래도 좆을 빨리면서 계속 팔을 허우적대며 노력한 덕에 사정 직전 이지훈의 머리를 잡아 뒤로 뺄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백탁액이 시트 위로 뿌려졌다.
“아, 왜. 비교해보고 싶었는데.”
이지훈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미친 새끼. 이를 악문 나는 배가 뻐근할 정도로 힘을 줘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다. 그리고 이지훈의 멱살을 잡고는 놈을 뒤로 무너뜨렸다. 침대가 출렁대며 흔들렸다. 나처럼 침대 헤드에 기대게 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대체 어떤 미니 섹스를 생각하고 있어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처럼 끌려가는 건 질색이었다.
“오, 박력.”
비록 깔아뭉개는 나를 보며 헛소리를 지껄이긴 했지만, 다행히 이지훈은 웃으며 순순히 입을 대줬다. 민트 향이 정액 향을 이길 정도로는 세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시큼하긴 했다. 찰나의 순간에 눈을 찡그리는 나를 봤는지 이지훈이 킥킥댔다. 나는 놈을 무시하고는 놈의 바지를 마저 벗겼다. 내가 드로즈 안으로 손을 넣는 동안, 이지훈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이마를 쓸던 손이 관자놀이 부근을 가볍게 두드리고 이내 귀로 올라갔다가 그 옆의 수술 부위를 더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고도 애틋한 손길이었다. 하던 행동마저 멈춘 채 이지훈의 내리깐 속눈썹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지훈은 아주 천천히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아이처럼 눈을 휘어 웃었다.
“진짜 안 터지네. 다행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놈이 날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설렘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으니까.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지훈의 엉덩이를 쥐려던 손이 움찔 떨렸다. 뭘 하려 했는지조차 잠깐 잊고 이지훈을 멍하니 보게 됐다. 정확히는, 살짝 부은 것 같은 놈의 입술을. 아마 집에 들어온 후부터 쉬지 않고 입을 맞대서겠지.
“…….”
“…….”
나를 바라보던 이지훈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이지훈에게 턱이 잡혔다. 손으로 내 턱을 단단히 잡아 고정한 놈이 당장이라도 나를 눕힐 기세로 돌진해왔다. 키스하며 복근을 더듬어 올라가는 놈의 손길이 급했다. 만진다는 것보다는 주물럭댄다는 표현에 더 적합한 몸짓이었다. 허벅지에 붙은 이지훈의 좆이 단단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
턱이 얼얼해질 때가 되어서야 놈은 키스를 멈췄다.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나를 밀어낸 놈이 빠르게 중얼댔다.
“하… 잠깐만. 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적당히 못 할 것 같은데.”
이지훈은 아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지훈의 성기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목소리만 듣고도 선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까 싶었는데, 키스가 조금 깊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커질 줄은 몰라서 나도 당황했다. 당장이라도 콘돔을 씌워야 할 정도였다.
“이거 진짜 고문이다, 씨발….”
마른세수하던 이지훈은 한참 더 숨을 고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키스하다가 멈춘 탓에 둘 다 자세가 어정쩡했다. 나를 흘끔 본 이지훈이 내 팔을 잡았다. 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로, 이지훈과 마주 보고 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자세를 조정한 이지훈은 내 좆을 다시 드로즈 안으로 넣어주고는, 내가 벗기다 말아서 허벅지까지 내려가 있는 바지를 마저 벗었다. 이로써 둘 다 걸친 옷이라고는 드로즈밖에 없는 차림이 됐다.
잠깐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지훈이 먼저 입을 뗐다. 놈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야. 속성으로 해치우자.”
“…속성으로?”
“어. 나 이러다 일 칠 것 같아서 무서우니까, 빨리 한 번씩 제대로 싸고 끝내자고.”
침대에서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게 말을 하는 것도 재주다. 그래서 섹스를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거리를 바짝 좁히는 놈을 의아히 응시했다. 꿇은 무릎끼리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지고서야 이지훈이 멈췄다.
“올라와.”
“…뭐?”
이지훈은 더 설명하는 것 대신 제 무릎을 툭툭 쳤다.
“얼굴 잘 볼 수 있게 올라오라고.”
“…….”
“너 느끼는 표정 보면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말은 둘째 치고, 들어주기도 어려운 요청이었다. 어딜 올라가라는 거야. 설마 저 무릎 위에?
경악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나 대신에 이지훈이 움직였다. 무릎걸음으로 걸어오는 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허벅지가 절로 움찔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조차 지켜보고 있던 이지훈이 내 허벅지 아래로 손을 쑤셔 넣었다. 허벅지를 움켜쥔 놈이 힘을 주더니 이내 나를 제 허벅지 위로 덜렁 올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야!”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비명보다는 고함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가 아닌 등으로 침대 헤드가 느껴졌다.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이지훈의 허벅지 위에 올려져서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이지훈이 겨우 무릎으로 내 체중을 다 버티고 있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했고. 상황을 파악한 나는 몸에 힘부터 줬다. 일단 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자세부터 고치고 봐야 했다.
“야, 씨발… 내려. 내리라고.”
내려주지 않으면 직접 내려가기라도 할 기세로 접혀 있던 무릎을 펴려던 때였다.
“우읍…!”
입이 틀어막히며 몸이 휘청하듯 뒤로 넘어갔다. 침대 헤드에 등이 바짝 닿은 것과 동시에 이지훈의 손이 내 머리를 보호하듯 감쌌다. 놈의 커다란 손이 수술 부위를 덮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 위로 동그란 원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혹시라도 잘못 건드릴까 봐 숨조차 죽인 손길과는 정반대로, 혀는 날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자꾸 숨이 달리고, 어떻게든 호흡해보려 고개를 비틀게 될 정도로.
“…하.”
코가 부딪치며 숨을 급하게 몰아쉴 때마다 지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놈의 단단한 허벅지는 움찔하지조차 않았다. 벗어나려 휘두르던 손조차 단단히 잡혀서는 깍지까지 끼워진 상태였다. 나는 더 이상의 반항이 소용없음을 알고 몸의 힘을 뺐다.
내가 순응하자 키스는 점차 부드러워졌다. 이지훈의 혀는 제가 아는 곳들을 기가 막히게 헤집었다. 강약 조절을 하며 살랑대는 혀는 꼭 나를 꾀어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만 같았다. 그에 나는 홀린 듯 따라나서고, 놈의 숨이며 넘겨주는 침까지 꿀꺽꿀꺽 삼켰다. 놈의 무릎에서 내려가기 위해 잔뜩 주고 있던 힘이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미니 섹스라는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이지훈은 좆으로 내 몸을 휘젓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날 끝까지 가게 할 심산인 것 같았다.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 하아….”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떨어진 순간 입술 사이로 가늘고 긴 실이 이어졌다.
이지훈의 혀가 여전히 입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목에 느껴지는 간지러운 느낌에 그게 아님을 깨달았지만. 방금까지 입 안을 농밀하게 탐하던 혀가 살갗 위를 샅샅이 핥아나가고 있었다. 혓바닥의 넓은 면적을 이용해서 침을 바르듯 하다가도, 가끔은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혀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는 사이사이 이지훈이 들이쉬는 가쁜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까지도 함께 흥분하는 느낌이었다.
“후으….”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허리를 들썩대거나 몸을 비트는 그 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붙은 허벅지 때문에 더 잘 느껴졌다. 이지훈이 숨을 깊이 내쉬며 귓바퀴를 핥던 순간에는, 당장이라도 삽입하고 싶은 것처럼 움찔대는 놈의 아래를 느낄 수 있었다.
“…하, 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지훈의 머리나 헤집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얼굴만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놈이 흥분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고, 이 상태에서 무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이지훈이 허리를 움찔할 때마다 아래의 좆이 어색하게나마 부딪혀 와 짜릿했다. 엇갈리는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나 오기 전에 씻었어?”
이지훈이 갑자기 물었다. 쇄골 근처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잡히는 살갗을 죄다 핥고 빨기 바빴던 놈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헝클어진 앞머리 속의 까만 눈과 마주친 순간 배가 아플 정도로 당겼다. 내가 흥분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지훈의 눈가가 터질 듯 붉었다. 온몸의 열이라도 몰린 것처럼.
“나랑 섹스하고 싶어서 씻었구나. 그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마저 참지 못하고 놈이 쇄골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뼈까지 흡입할 기세로 빨아들이는 힘이 꽤나 셌다. 아프다 못해 쓰라릴 정도였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지훈의 입술이 지나간 곳마다 잇자국이 나 있을 것 같았다. 이지훈은 살갗 안에 제가 찾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집스러웠다. 피가 새어 나오면 그것마저 죄다 핥아 먹을 것 같았다.
“지선욱, 대답해 봐. 어?”
“읏… 아, 거기, 그만….”
“씻었지? 나랑 섹스하려고… 이렇게 빨리려고.”
“아흣….”
“내가 빨아줄 거 알았잖아, 너. 그치.”
살 위에 입술을 붙인 채로 읊조리듯 말하는 놈 때문에 꼭 소리가 내 몸 안에서 나는 것처럼 울렸다. 그르렁대는 소리는 갈증을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대답을 재촉하려는 건지 아까 흡입한 부분으로 입을 다시 가져가는 놈을 본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씻었어. 씻었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빨릴 것 같았다. 갈비뼈 부근을 만지작대던 이지훈의 손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랬구나. 우리 선욱이 빨리려고….”
“…아윽, 아!”
“아주 그냥 빨아달라고… 응?”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간 이지훈이 허겁지겁 고개를 수그리듯 처박았다. 가슴 윗부분의 살이 이지훈의 입 안으로 한꺼번에 먹히듯 사라졌다. 입을 크게 벌려 앙 물고는 이내 그 위를 소리 내어 할짝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배 아래가 휙 당겨지는 것처럼 조여들었다.
놈이 내 좆을 찾아 쥔 것도 동시였다. 이지훈이 흥분할 때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좆이 함께 움찔댔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에는 거센 자극이었다. 이지훈의 한 손이 그 와중에도 내 머리 위를 보호하듯 잡고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흣, 으윽, 아… 이지훈….”
내가 흐느낄수록 이지훈은 헐떡댔다.
“아, 존나 좋아….”
“…아!”
이제는 사정액이 어디에 튀었는지조차 신경 쓸 수 없었다. 네 번째 사정인데도, 이지훈의 손길은 멈출 줄 몰랐고 좆 역시 보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충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어느새 이지훈의 어깨에 고개를 반쯤은 처박은 채였다. 놈이 받치고 있으니 무너지지 않을 걸 아는데도 이렇게 매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이지훈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부분들이 간지럽거나 혹은 쓰렸다. 보지 않아도 목부터 아래가 죄다 울긋불긋할 게 분명했다. 이지훈이 내 허리를 잡고 위로 조금 들어 올렸다. 유두를 머금기 위함이었다.
“읏…!”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뒤로 몸을 젖힐 뻔한 나를 단단히 잡은 이지훈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위아래로 가해지는 자극에 이미 빳빳해져 있던 유두가 놈의 입 안으로 빨리듯 들어갔다. 강한 흡착력에 살마저 쓸리는 느낌은 잠시였다.
이지훈이 그 위를 쪽쪽 빨기 시작하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가슴을 더 잘 빨기 위해 나를 누르듯이 헤드에 고정시킨 이지훈은 그렇다 쳐도, 이제는 이지훈의 손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내 좆 때문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만지는 대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위아래로 주어지는 자극이 거셌다. 나는 어느새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하, 하아, 으읏….”
열중해 빨아대는 꼴이 꼭 뭐라도 나올 거라 믿는 것 같았다. 혀의 넓은 면으로 돌기를 감싸고 놓치지 않을 것처럼 집요하게 빨던 놈은 왼쪽 유두가 너덜너덜하게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입 안에서 그걸 놓아주었다. 입술이 번들번들했다. 이지훈의 눈은 이제 완전히 풀린 채였다. 꼭 처음으로 섹스하던 그때처럼. 나는 더듬더듬 쥐고 있던 이지훈의 좆이 크게 휘청이는 걸 놓치지 않으려 손에 힘을 줬다. 이지훈이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다시 허겁지겁 내렸다. 유두 위로 놈의 더운 숨이 닿았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허리라도 비틀라치면 이지훈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옴짝달싹 못 하고 놈을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선욱아… 빠는 데마다….”
“…윽, 조금, 만, 천천….”
“네 냄새 나서 미칠 것 같아.”
이지훈의 눈이 몽롱했다. 이제는 더 참을 수도 없다는 듯 이지훈이 손으로 오른쪽 가슴을 그러모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곳을 쥐어짜는 것처럼 만지는 놈 때문에 유두로 모든 감각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너 젖꼭지 색깔이랑… 좆 색깔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거 생각하면서 혼자 좆 쥐고 흔든 거니까.”
“…흣.”
“근데 젖꼭지에서, 내가 쓰는 바디워시 냄새가 날 줄은… 씨발.”
“하윽….”
나는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이지훈의 좆을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기 위해 애썼지만, 그마저도 이지훈의 손가락이 드로즈를 슬금 젖힌 후 골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순간에는 어려웠다. 긴 손가락이 구멍 위를 더듬대는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줄곧 이지훈의 손에서 사정했던지라, 손이 내 정액으로 미끌미끌했다. 꼭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이미 구멍은 삽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푼 구멍이 이지훈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마다 뻐끔대듯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이지훈도 그걸 느낀 것처럼 멈칫했다. 구멍 안으로 부드러이 진입했던 손가락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슴에서 얼굴을 뗀 놈이 나를 보았다. 나지막하게 헛웃음 치면서.
“…여기도 풀어놨네?”
마치 섹스를 위해 씻기만 한 게 아니라, 그런 것까지 준비했냐고 묻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서 답을 읽은 것처럼 붉은 눈가 속 까만 눈동자가 더 크게 일렁댔다.
“…….”
“…….”
웃음을 지을 여유조차 잃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날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는 놈은 명백히 날 향해 욕정하고 있었다. 애욕이 짙게 드러나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미 놈에 의해 벗겨진 탓에, 더 벗을 옷이 없는데도. 동시에 손에 어설프게나마 쥐고 있던 이지훈의 좆이 꺼덕댔다. 귀두 끝에서 분출된 정액이 손을 흥건히 적시고도 부족해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지훈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제가 사정한 것조차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아.”
이상하게도 놈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얕은 신음을 흘리는 얼굴이 민망해 보이기까지 했다. 혹시나 아까 그랬던 것처럼 또 행위를 멈출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지훈이 다시 내 허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어진 행위는 예상과 달랐다. 이지훈은 나를 무릎에서 내리고는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머리에 베개까지 대어주는 놈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붙였다. 입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한 군데도 제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하려는 것처럼 꼼꼼하게, 빈틈없이. 방금까지 내 몸을 쥐고 그게 어디든 게걸스럽게 빨아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이지훈의 어깨를 쥐었다. 복근에 난 흉터 위로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다 대려던 이지훈이 멈칫하고는 눈을 올렸다.
“…안 하게?”
목이 그새 조금 쉬어 있었다. 그렇게 신음을 흘려댔나 싶어 민망했지만, 참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해.”
“…….”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그냥 하자고. 하다가 무리일 것 같으면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미니 섹스니 뭐니 해 봤자 삽입만큼 좋을 리는 없다. 여태 한 행위마저도 놈보다는 나를 흥분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더 쥐어짜일 정액조차 없는 내 좆과 달리 손 아래로 줄줄 흐를 정도의 정액을 뿜어대는 이지훈의 좆만 봐도 알았다. 대답 없이 날 바라보는 놈을 보며 나는 말없이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이지훈이 고민 없이 할 것 같았다. 나를 따라 아래부터 확인한 이지훈이 혀로 아랫입술을 짧게 쓸었다. 꼭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지훈이 손을 내려 제 좆을 드로즈 밖으로 아예 꺼냈다. 방금 사정한 것치고는 빳빳하게도 살아 있었다. 당연히 삽입이 시작될 줄 알고 긴장했는데, 내 다리를 잡아 양쪽으로 더 벌리기는커녕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놈 때문에 몸이 순간 움칫 굳었다.
이지훈의 손이 내 허벅지를 모아 붙이고 있었다. 엉덩이까지 주물럭대며 힘을 주는 놈 때문에 허벅지가 일자로 붙었다.
“야, 뭐 하는….”
“기분만 내자. 기분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이지훈이 몸을 굽혔다. 침대 옆에 있던 세 번째 서랍에서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젤이 나왔다. 이지훈은 그 젤을 허벅지 사이에 꼼꼼히도 발랐다. 가끔은 손이 미끄러져 허벅지와 샅 사이의 공간까지 침투하는데도, 그것조차 노린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놈이 하려던 행위를 대충이나마 눈치챈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젤을 치덕치덕 바르던 행위를 멈추고 날 일으켰다. 뒤돌아 침대 헤드를 잡게 한 놈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슴을 더듬는 놈의 손길과 함께 허벅지 사이에 닿는 딱딱한 좆이 느껴졌다.
“무릎 세워 봐.”
이지훈이 귀를 깨물며 흘리듯 뱉은 것과 동시에, 허벅지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놀라서 굳은 허벅지 안쪽 살이 이내 팽팽히 긴장하며 조여들었다. 그래서인지 이지훈이 붙인 허벅지 사이로 좆을 느리게 박아넣을 때마다 섹스할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허벅지에 얼얼할 정도로 힘을 준 탓에 근육마저 뭉개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지훈의 좆이 연한 살을 스칠 때마다 찌릿할 정도의 감각이 느껴졌다. 통증 같기도 했고, 쾌락과도 닮아 있었다.
“하, 아아….”
좆이 닿는 곳마다 꼭 전기라도 통한 듯 따끔한 느낌이었다. 간 보듯 허벅지 사이로 좆을 스치기만 하던 이지훈이 내 유두를 비틀며 한 번에 허벅지 사이를 뚫었다. 고개를 내리면 이지훈의 핏줄 선 좆이 보였다. 구멍에 넣을 때는 볼 수라도 없었지, 놈의 팽창한 좆이 아래를 드나드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땀이 얼굴선을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뒤에 있는 이지훈의 몸이 꼭 돌처럼 단단했다.
“윽… 읏….”
허벅지 사이로 좆을 들이밀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몇 번인가 더 처박던 이지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좆을 뒤로 물렸다. 손이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예민한 안쪽 살을 더듬듯 거침없이 주물러댔다.
“아흐….”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참는 듯한 신음을 냈다. 좆에 쓸리기라도 했는지, 쓰라렸다. 동시에 이지훈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이건 허벅지에 살 좀 더 찌우고.”
몸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따지자면 한 것도 없는데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지훈은 그걸 아는 것처럼 나를 조심히 눕혔다. 내 위에 거의 폭삭 주저앉듯이 몸을 기대고는 팔 사이에 손을 넣어 나를 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숨이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지훈이 혀를 내어 볼을 할짝이는 것조차 저지할 힘이 없어 내버려 뒀다. 아주 길고 긴 레이스를 뛴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운동이라고 칠 수 있나.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의사의 말이 맞았다. 아직은 확실히 좀 벅찬 감이 있었다. 심지어 삽입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
고개를 슬쩍 내리자마자 마주한 울긋불긋한 흔적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차라리 삽입하고 싼 후에 끝냈다면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뭐… 개도 아니고…
살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제 흔적을 남겨둔 이지훈 때문에 기가 찼다.
“선욱아.”
“…….”
“지선욱.”
“…왜.”
등을 쓸어내리는 놈의 손을 느끼며, 나도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가 좀 높아지자 그제야 엉망이 되어 있는 시트가 한눈에 보였다. 이지훈은 팔로 얼굴을 지탱한 채로, 나한테 반쯤 돌아누운 자세였다. 놈의 왼손이 내 허리를 살살 주무르고 있었다. 꼭 가벼운 마사지라도 해주듯이. 몇 분 전만 해도 이지훈 때문에 잔뜩 긴장했던 근육들이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방금까지 했던 짓이 무색하게도, 평온한 분위기였다. 눈이 마주친 이지훈이 고요히 입을 열었다.
“환자 취급 답답할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마워.”
허리에서 올라온 손이 어느새 내 가슴을 토닥이고 있었다.
“내가 좀 유난 떠는 거 알아. 네가 나라서 참고 있는 것도.”
“…….”
“그거 알면서도 이러는 건, 이 시기만 잘 지나면 네가 건강해질 걸 알아서 그래. 다시는 안 아프고, 더 튼튼해질 거 아니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내 보호자는 이지훈이 됐다. 서로 당연하게 받아들인 사실이지만, 이 순간에야 온전히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는 기분이었다. 놈보다 나를 더 신경 쓰고 걱정할 사람은 없으리라는 걸. 티 내는 대신 참고 넘겼다고 생각한 감정들마저 놈이 이렇게 신경 쓰고 있던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눈에 힘을 준 채로 침을 삼켰다. 이지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지훈.”
자신 없는 부름에도 나를 응시하며 기다려주는 놈을 향해 오랫동안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환자 취급 그만 당하고 싶어서 자자고 덤빈 것도 맞는데….”
혼자 있을 때 연습하듯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음에도, 막상 말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까.
눈치가 빠른 놈조차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일이 있다. 그것들을 내 입으로 직접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두 달 넘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마저 꺼내려면 한참을 머뭇거려야 할 정도로 아직은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서 놈을 상처 주는 일은 정말이지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 마지막으로 자고 나서 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어.”
“…….”
“내가… 후회니 뭐니, 마음에 없는 소리 했잖아.”
“…….”
“그게… 생각할수록 미안하더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흐지부지되기 전에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날 나도 너랑 잔 거 좋았다고.”
눈을 마주치고 말할 자신이 없어 시트를 보고 있었지만, 이지훈이 놀랐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껴졌다. 뭐라 말을 잇고도 남았을 놈이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것만 봐도.
“…….”
“…….”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이지훈에게선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말 없는 놈이 신경 쓰여서 고개를 들어 흘긋 확인했다. 얼굴만 보고 뻘쭘하게 제자리로 돌리려던 행위가 우뚝 멎었다. 민망함조차 잊고 빤히 쳐다볼 정도로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됐다. 얼떨떨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야, 너 얼굴이….”
이지훈의 얼굴이 새빨갰다. 살면서 처음 보는 꼴이라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관찰하듯 뚫어져라 보게 될 정도로.
“아, 좀… 보지 말아 봐. 잠깐만.”
이지훈이 뒤늦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손으로 가려지지 못한 귀가 터져나갈 듯이 새빨갰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건가? 갑자기? 대체 왜?
내가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것처럼 이지훈이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웠다. 그래도 잠깐 숨을 고른 보람이 있는지 얼굴은 얼추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놈이 투덜대듯 말을 이었다. 시선이 묘하게 나를 비껴가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어떡하냐. 준비도 안 됐는데….”
“…….”
“아, 씨발. 쪽팔려….”
중얼댄 놈이 말끝에 나를 흘끔 확인했다. 아까 내가 했던 짓을 똑같이 하는 놈을 본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마다 느끼곤 한다. 이지훈도, 나도 평생 해본 적 없던 짓을 하고 있다는 거. 누가 들을까 무서운 말을 뱉으면서도 표정 하나 삐끗하지 않는 놈이 나의 한참 늦은 고백에도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나는 이지훈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턱에 손을 얹은 채 내게로 고개를 돌려 고정되도록 했다. 멈칫한 이지훈은 그러나 이끌리듯 순순히 따라왔다. 내가 다음에 뭘 할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서는, 마무리는 뽀뽀로 했다. 이지훈이 그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입술을 떼자마자 이지훈의 가슴이 크게 들썩댔다.
“하….”
참고 있었던 숨을 몰아쉬듯이 잘게 호흡하는 놈의 눈이 내게 박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놈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이 자세면 서로 적당히 민망해하며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직하려는 거….”
“…….”
“나 때문이면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지훈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한숨과 함께 털어놓듯 말했다.
“해외 나갈 때마다 너 신경 쓰여. 옆에 같이 못 있어 주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알아. 그거 알아서 나도 더 빨리 낫고 싶었던 거니까.”
“…….”
“잘 낫고 있고, 앞으로 더 나아질 테니까 내 걱정은 지금 정도로만 해. 회사 만족하고 잘 다녔잖아. 찾아봤는데, 이직해 봤자 너한테 손해야.”
말없이 날 보는 놈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입을 열어 다짐하듯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남은 한 달도 회복에만 집중할게. 너 걱정 안 되도록.”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이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약속해?”
어렸을 때도 안 해본 짓을 하려니 낯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이런 유치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내가 진심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에 있을 테니까. 여태껏 놈이 손가락을 걸자고 말할 때마다 거절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놈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어.”
내가 그렇게 한 이유를 아는 것처럼 웃는 놈을 보며 어색하게 중얼댔다.
“…그래도 환자 취급은 조금씩 줄여. 디데이까지도 한 달밖에 안 남았잖아.”
이런 말을 하기에 지금만큼 적당한 시간이 없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이지훈은 웃었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능글맞게 제안했다.
“얼마만큼 줄여줄까? 숫자로 제시해 봐.”
“…2 정도?”
“100에서 시작인데?”
“그럼 20.”
“5.”
“15.”
“5.”
“…양아치냐?”
인상을 찌푸리며 묻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벌린 채로 크게 웃던 이지훈이 나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끌려가듯 머리를 댄 곳에서는 이게 진짜 심장 소리인가 싶을 정도의 박동이 느껴졌다. 이지훈과 함께 누워 있을 때마다 듣는 소리였다. 처음에만 해도 놀랐지만 이제는 얼추 익숙했다. 때로는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지훈이 없는 밤 혼자 이 침대에서 잠들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뒤척이고, 꼭 새벽에 한 번씩 깨는 걸지도.
나는 거부하는 대신 눈을 감으며,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놈의 등에 손을 올렸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노란빛이 보였다. 한밤중인 것처럼 알몸으로 붙어 뒹굴었지만, 아직은 낮이었다. 당장 낮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이지훈도 비슷한지 내 어깨를 끌어안고는 제 얼굴을 비벼댔다. 길게 숨을 뱉으며 몸을 바짝 붙인 놈이 귀에 대고 느릿하게 속삭였다.
“남은 한 달 동안 그런 것도 해보자. 옷 벗기 게임 같은 거.”
“…옷 벗기 게임?”
“응.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옷을 벗는 거야. 재밌겠지?”
그 와중에 누가 봐도 지한테만 유리한 게임을 하자고 하는 게 어이없었다. 나는 습관처럼 뱉으려던 말을 삼키고는 주먹을 쥐었다.
“죽는다, 진짜….”
주먹으로 놈의 어깨를 툭 밀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오버하며 뒤로 물러섰다. 황당한 내 표정을 본 놈이 눈을 휘어 웃더니 입술을 맞댔다. 치열을 둥글게 핥는 혀를 느끼며 놈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처음으로, 남은 하루가 길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밥 잘 먹고.”
“어.”
“잠도 잘 자고.”
“…환자 취급 덜하기로 약속했잖아.”
문 앞에 서서 같은 말만 벌써 다섯 번째 듣는 거였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고, 다 신은 구두를 괜히 바꿔 신으며 뻐기던 이지훈은 더는 미룰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에야 허리를 똑바로 펴고 나를 마주 봤다.
“오케이. 그럼 이번엔 사랑하는 애인한테 하는 버전 간다.”
“…….”
“밥 잘 먹고.”
“…어.”
“잠도 잘 자고.”
그 둘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놈의 행동에 조금 멋쩍어졌다. 관자놀이께를 긁는 나를 본 이지훈이 씩 웃으며 볼을 내밀었다.
“자, 이제 뽀뽀.”
훤한 대낮에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집 안이고, 아무도 볼 리 없다는 걸 앎에도 머뭇대다가 천천히 놈의 볼로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당연하다는 듯 다른 쪽 볼도 내밀었다. 뻔뻔한 요구를 하는 이유가 간단했다.
“솔직히 한 번은 정 없다.”
하… 다 들리게 한숨을 쉬어 봐도 못 들은 척 버티는 놈이 물러설 리가 없다는 사실만 또 확인받고 만다. 오늘 비행 나가면 적어도 닷새는 못 보니까 그거 생각하면서 다 해주자. 가고 나서 또 후회하지 말고. 눈을 질끈 감고는 이지훈의 볼로 입술을 가져갔다. 쪽, 하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고개를 뒤로 뺐다. 아니, 빼려고 했는데 돌연 목뒤가 잡혀 끌려갔다.
“아….”
쪽쪽쪽. 번개 같은 입맞춤이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몸이 떨어진 뒤였다. 이지훈은 어느새 몸을 굽혀 구두를 바꿔 신고 있었다. 그 난리를 쳐놓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아까 처음 신었던 구두라는 사실에는 어이없어할 겨를도 없었다.
“지훈이 출근할 때 뽀뽀뽀.”
이지훈이 구둣주걱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며 음을 붙여 흥얼대는 곡조가 이상할 정도로 친근했다. 그게 제 맘대로 개사한 철 지난 동요라는 건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훈이 돌아와도 뽀뽀뽀.”
…설마 밖에 나가서도 저런 걸 부르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경악하던 중, 문고리를 잡고 뒤돈 놈과 눈이 마주쳤다. 흥얼대는 것을 멈춘 놈은 이상하게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황당해하던 것조차 잊고 집중할 정도로.
“선욱아. 다음에 병원 가면 그거 물어봐. 아니다, 내가 같이 가서 물어봐야겠다.”
“…뭘.”
“격렬한 운동에 혹시 횟수도 정해져 있는지.”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문을 열었다. 돌아올 반응을 예상했고, 그렇기에 미리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이.
“자기야, 돈 많이 벌어 올게!”
닫히는 문 사이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끝까지 나를 놀리고 갈 수 있는 게 심히 기뻐 보였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듣고서야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여간… 오전 11시부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터였다.
어제 병원에서 상태가 좋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시는 횟수도 이번 주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미리 생필품이라도 좀 사둘 요량으로 차 키를 챙겼다. 자그마치 석 달 만에 몰아보는 차였다. 그새 조금 낯설어진 것 같은 차 키의 감촉을 익히듯 고쳐 쥐며 걸어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딘가 이상했다. 분명 내 차가 맞는데. 차종도, 번호판도… 근데 저 차창 뒷면에 문구는 대체 뭐지? 붙인 기억이 없는데.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차를 향해 걸었다. 차가 가까워질수록 문구가 더 잘 보였다. 내 눈을 믿지 못하고 한참을 제자리에 선 채로 그걸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짓을 했을 대상으로 짚이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차를 어디다 대어두었는지 알고, 나 몰래 이런 걸 붙여둘 생각을 했을 사람.
신호음이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달칵 소리가 났다. 나는 인사를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돌입했다.
“네가 내 차에 이거 붙였냐?”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다시 한번 봐도 믿기지 않는 문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주위에 누가 없는지 확인했다. 누군가가 이 문구가 적힌 차 앞에 선 나를 보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철렁했다. 도로에서도 잘 보일 만큼 하얗고 큰 글씨가 나를 놀리듯 반짝대고 있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와, 빨리도 확인했네. 그새 차를 끌러 나갔어?
이지훈은 뻔뻔스럽게도 대답했다. 그게 뭐야? 하고 발뺌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그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짓거리였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생각나는 말부터 뱉고 봤다.
“…아니, 이거 언제부터… 무슨 생각으로… 대체 왜?”
-너 차 몰래 타고 나간 거 알기에는 그것만 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
-봤으면 분명 전화했을 테니까, 지금처럼.
애인이 약속 지키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이딴 스티커를 몰래 붙여두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듣도 보도 못한 짓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혼을 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할 줄 아는 놈이 능글맞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애기 지금 어디 가는데?
뚝. 전화를 끊은 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이지훈에게 전화가 다시 왔지만 오는 족족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무시했다. 스티커를 어떻게 떼어내나 고심하는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쌓였다. 그만하면 다신 이딴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겠지 싶어 여섯 번째 전화는 받았다. 이지훈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또 전화가 뚝 끊기기 전에 미리 방지라도 하듯이.
-아, 안 해, 안 해! 진짜 약속!
그 와중에도 웃고 있는 목소리가 열 받긴 했지만, 지금 놈의 전화를 또 끊어 봤자 내 손해였다. 이지훈이 미리 공유해줬던 비행 스케줄에 따르면 놈은 곧 비행기를 탈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어이없는 상황을 그냥 넘겨줄 건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더 주변을 살피며 차에 다가섰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는 재빨리 스티커 끝을 잡고 떼어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문구가 ‘기가 타고 있어요’로 바뀌었다.
볼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이를 악문 채로 이지훈에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다시는 그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 하지 마.”
-뭐가 문젠데. 애기?
“…끊는다.”
-아이! 아, 확인차 물어본 거잖아요, 경찰 아저씨! 거참 성격 되게 급하시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런 스티커는 진짜 필요한 사람이 붙이는 거야. 악용하거나 위조하면….”
-알겠어요, 경찰 아저씨. 다시는 안 할 테니까 제발 그만 좀 혼내세요.
나보다 더 지친 것 같은 놈의 목소리에 결국 헛웃음이 터졌다. 용케 그 웃음소리를 들은 듯한 이지훈이 따라 웃었다. 한차례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 놈이 입을 열었다. 웃음기를 제쳐둔 목소리가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선욱아.
-나 내일 데리러 올래? 빨리 보고 싶다.
나는 핸드폰을 조금 더 꼭 쥐었다. 그 말을 듣길 기다린 나처럼, 그 말을 할 수 있길 기다린 놈을 알아서. 몸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간질거림이 서서히 올라와 목 아래에 고였다. 나는 그 간지러움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했다.
“어. 갈게.”
-…….
“너 도착하면 나 있을 거야.”
내일 놈을 데리러 가면 일단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한 것에 대해 응징부터 하고, 그런 후에 비행이 어땠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가 어쩌면 먼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주는 어땠냐고, 긴 레이오버 기간 동안 그곳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보긴 했냐고. 나는 네가 뭘 했을지를 상상하며 호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모두 보았다고. 그래서 그곳에 있는 바다에서 건진 생선을 바로 튀겨주는 피쉬앤칩스를 파는 유명한 맛집의 이름도, 파도가 크고 두꺼워 서퍼들이 선호하는 해변의 이름도 알게 됐다고. 지난 세 달간 그런 식으로 탐구한 나라들이 벌써 열 곳이 넘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