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25)

* * *

“여기가 스토어팜인가…?”

병실로 퇴근한 강영수의 짧은 소감이었다. 뜨악한 놈의 시선이 소파 옆에 층층이 쌓인 귤 상자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 지금 이지훈이 다섯 개째 깎고 있는 애플 망고에 차례대로 머물렀다. 이지훈은 듣는 척도 안 하고 과도를 움직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꽤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강영수가 꿍얼대면서도 합류해 이지훈이 잘라놓은 과일을 날름 집어 먹는 것마저도.

“우리 욱이 인기 이렇게 많아서 어뜨카지?”

“그런 거 아냐.”

“그럼 뭐야? 과일이 제 발로 굴러서 들어왔어? 제발 한 번만 먹어달래?”

“야 이 씨발, 하나씩 쥐고 처먹어 좀. 드러워 죽겠네.”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났다. 하루에도 여러 번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일어나는 일이 차츰차츰 줄어들었고, 낮에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체력적으로도 별다른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른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던 뇌의 반응성과 관련한 검사 결과도 좋았다. 오늘 오후 진료를 봤던 담당의는 지금 같은 추세면 원래보다 일정을 당겨 다음 주쯤 퇴원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내가 젊은 사람치고도 회복력이 좋은 편이라며,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진료실을 나오던 이지훈은 그 이유를 알아서 찾았다. ‘웬일로 밥을 잘 먹고 잘 자서 그래.’ 반박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는 내 식단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여기서 한마디를 했다가는 이틀 내내 금가루가 뿌려진 잣죽 따위를 먹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도 신기했다. 모든 건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아 보였다.

“지훈아. 지훈아. 여기 봐 봐.”

“뭐.”

“뻐큐.”

“…….”

“아, 잠깐만, 잠깐만. 내 정신 좀 봐. 이거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기다려 봐?”

“…….”

“…….”

“여기 있다. 내 진심을 담은 쌍뻐큐.”

어떤 건 너무 제자리로 돌아가서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지만.

이제는 옆에 붙어 간호할 필요도 없는데, 퇴근 후 꼬박꼬박 병원에 들르는 강영수와 매일 병실에 붙어 있는 이지훈은 아침저녁으로 티격태격대던 학창 시절처럼 유치하게 굴었다. 어른이 되고서도 장난이야 쳤지만, 저렇게 중지를 쳐들고 앞다투어 허공으로 찔러대는 식의 원색적인 짓은 이제 졸업한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쉰 나는 이지훈이 영상까지 찾아보며 가지런하게 자르려 노력한 애플 망고가 놓인 접시에서 과도부터 치웠다. 그러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강영수에게로 달려가 머리를 팔 사이에 끼우고는 마구 꿀밤을 먹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둘 때문에 침대 위의 식탁마저 덩달아 흔들렸다.

“중지가 하필 처길어서 더 열 받아.”

“그래? 개이득, 아악! 아! 존나 뇌세포 죽는다고!”

벗어나려 몸을 마구잡이로 비틀던 강영수가 침대 시트를 잡아당기는 모습까지 이번 주 내내 지겹도록 본 것이었다.

저 꼴을 안 보기 위해서라도 빨리 퇴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비록 그렇다 해도 바로 업무에 복귀할 수는 없을 테지만. 의사는 최소한 3개월 이상은 쉴 것을 권했다. 오전에 병문안 왔던 반장님이며 선배들이 창가에 주르르 놓아두고 간 미니 화환들이 보였다. 최혁준과 최정호의 법정 공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고 들었다.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긴 했어도, 재판의 주요 쟁점이 될 증거가 우리 손에 있으니 주시하긴 해야 했다. 나는 관자놀이 부근을 긁었다. 며칠 전 머리를 감싸던 붕대까지 완전히 제거한 탓에 붕대가 아닌 살이 곧바로 느껴지는 게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까 성당 간다며. 이번 주 내내 가야지, 가야지 하더니 가는 꼬라지를 못 봤다. 여기가 성당이냐?”

“너나 가. 가서 제발 내면의 사탄을 몰아내, 지훈아. 늦었어도, 아주 늦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개소리하지 말고 집이든, 성당이든 좀 가라고. 와서 과일 하나 안 깎으면서 처먹기만 존나 열심히 처먹어. 개빡치게.”

“먹으라고 잘랐으면서 왜 먹으면 지랄하는데!”

“네 입으로 들어가라고 잘랐겠냐고.”

“욱이가 먹어도 된댔어!”

“하… 잠깐만. 너 설마 또 헤어졌냐?”

둘의 육탄전을 끝낸 건 이지훈의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창가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강영수가 입만 뻐끔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시에 공격당한 표정이었다.

“헤어졌네. 그래서 또 집에 가지도 않고 버티고, 앵기고….”

이지훈은 오히려 강영수의 침묵에 확신을 얻은 눈치였다. 나도 낯설지 않은 패턴이긴 했다. 강영수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대체로 연락이 조금 뜸해지고, 헤어질 때쯤 연락의 빈도수며 만나자고 조르는 횟수가 늘었다. 이지훈은 놈이 그럴 때마다 가차 없이 잘라냈고 그 연락마저 다시 내게로 왔다.

강영수는 어버버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것처럼 눈만 끔벅대던 놈은 한참이 지나서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누구 만나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묻는 강영수의 표정이 초조해 보이거나 말거나, 이지훈은 심드렁했다. 팔짱까지 끼고는 강영수를 위아래로 훑던 놈이 혀부터 찼다.

“웬일로 호들갑도 안 떨길래 진지하게 만나나 했더니. 그새 또 개버릇을 못 버리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강영수가 발끈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놈이 재빨리 반박했다.

“헤어지긴 누가 헤어져! 존나 잘 만나고 있거든?”

“그래?”

“그래!”

“…누구? 너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갑자기 끼어든 내 목소리에 둘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강영수는 아차 하는 표정부터 지었다. 이 방에 나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이지훈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강영수가 누군가를 만나는 눈치라고.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미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을 놈이라 아닐 거라고 대수롭잖게 답했던 것도 기억났다. 근데 지금 강영수의 반응을 보니 이지훈이 맞고, 내가 틀린 것 같았다. 진위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쳐다보는 내 시선에 강영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놈은 벌써부터 쩔쩔매고 있었다. 내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욱아. 일부러 비밀로 한 건 아니고… 사실 처음에는 나도 이렇게 진지한 관계가 될 줄 몰라 가지고. 뭐라 해야 하지? 정신 차려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해야 하나. 아, 설명이 어려운데. 어쨌든 내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그런… 그런 희한한… 내 의지를 벗어나서 진행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약간 정신을 못 차리겠는 그런….”

“외계인인가?”

“…뒤질래, 진짜?”

나는 이지훈을 쏘아보는 강영수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전에, 팔부터 당기며 물었다.

“어디서 만난 사람인데.”

연애 상대가 워낙 자주 바뀌던 놈이라 이야기를 매번 들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처음으로 궁금했다. 방금 강영수가 설명하는 자신조차 혼란스럽다며 늘어놓은 수식어들은,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는 강영수가 특별한 상대를 만난 것 같다던 이지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이지훈도 마찬가지인지, 평소라면 충분히 더 시비를 걸고도 남았을 놈이 팔짱을 낀 채로 강영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강영수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마지못해 단어 하나를 뱉었다.

“그, 소개팅….”

“뻔한 이야기를 존나 뜸 들이면서 하네. 시상식인 줄.”

“그때 그 셔츠 골라달라 했던 소개팅?”

상반된 반응을 내어놓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강영수의 표정이 한층 애매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조차도 그랬다.

“어엉, 맞긴 한데… 그때 소개팅했던 사람은 아니구….”

소개팅에서 만났는데, 소개팅했던 사람은 아니고?

나만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 옆을 봤지만, 이지훈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강영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쨌든, 나도 때 되면 이야기하려 했어. 그분…도 너네 궁금해하는 눈치고… 오늘은 약간 의심도 하는 것 같더라고. 내가 계속 친구 병문안 가느라 못 만난다고 하고… 맨날 울고 그러니까… 음, 그러니까…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분? 여자친구를 칭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단어임을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닌지 눈이 마주친 이지훈도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어깨를 으쓱한 이지훈이 대수롭잖게 툭 던졌다.

“기회야 만들면 되는 거고. 한번 데려와 보든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특히 이지훈이 그간 강영수의 연애에 늘 심드렁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 때문인지 강영수도 당황스러워 보였다.

“뭘… 뭘 데려와!”

“늘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왜 판 깔아주니까 사려? 보여달라고.”

“갑자기 지랄이야. 지는 보여준 적도 없으면서.”

“보여줄게. 지금 당장도 가능한데?”

순간 먹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커컥- 목이 막힌 나를 슬쩍 본 이지훈이 티슈를 던져줬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닦았다. 그러고 보니 강영수한테도 말을 해야 할 텐데. 말조차 맞추지 않은 상황에서, 이지훈이 저렇게 앞뒤 없이 지를 줄 몰랐다. 이지훈은 내 눈빛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개를 돌렸다.

“미친놈이 진짜 이기려고 별말을 다 하네….”

다행히 강영수는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이지훈을 논리로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직감한 것처럼 옆에 팽개쳐둔 서류 가방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틈이라도 나면 재빨리 도망가려고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예상처럼 강영수는 우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섰다.

“큼. 나 그럼 성당 갈게?”

이유는 몰라도 강영수는 이 대화를 어떻게든 피하려 들었다. 등을 보이면 잡히기라도 할까 봐 겁을 내는 동물처럼,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놈을 본 이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강영수가 필사적으로 이지훈을 못 본 척하며 나를 향해 전화기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을 딸랑딸랑 흔들어 보였다.

“욱이 애플 망고 많이 먹고. 밤에 코 잘 자고. 잠 안 오면 전화해?”

주의라도 돌리려는 것처럼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으면서도 꾸준히 멀어지던 강영수의 등이 문에 닿았다. 그 반동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고리를 잡은 강영수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럼 나 갈게, 얘들아? 잘 있… 악! 다인 씨!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강영수의 말이 뚝 끊겼다.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병실에서 나가기는커녕, 튕겨 들어온 것도 동시였다. 제 의지로 그런 게 아니란 건 얼빠진 강영수의 어깨를 소싸움이라도 하듯 제 어깨로 밀어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서야 알았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영수 씨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요. 그간 수상쩍었던 부분도 있고 해서 날 잡고 미행했죠, 뭐.”

“아니….”

“병원 온 건 확인했고. 기왕 온 김에 친구분들한테도 인사 좀 드려도 되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강영수에게 태연하게 답하는 여자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회색 바지 정장을 위아래로 칼같이 갖춰 입은 여자는 일하다 말고 뛰쳐나온 것처럼 보였다. 볼에 볼펜 자국이 묻어 있는 데다가, 팔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건지 모를 토시가 팔꿈치까지 끼워져 있으며, 대충 올려 하나로 묶은 머리에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잔머리들이 아래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들이닥친 상황에서 태연한 건 여자뿐이었다.

“어유,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

이지훈과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능청맞게 말을 잇기부터 하던 여자의 말이 우뚝 멎었다. 나는 우리보다는 병실 안을 둘러보기에 한참이던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여자가 내게로 뒤돌았다. 입을 떡 벌린 채로 나를 보는 얼굴이 얼떨떨해 보였다. 방금까지의 뻔뻔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마약수사대…? 그러니까, 우기우기가 마약수사대 지선욱?”

여자의 손끝이 창가에 있는 미니 화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 선배가 장난이라도 치듯 화환의 띠에 크게 삽입해둔 문구를 확인한 것 같았다. 여자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어 침묵하던 나 대신 이지훈이 나섰다.

“얘 아세요?”

“예? 아….”

여자는 이지훈의 질문이 큐 사인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손을 들어 볼을 짝짝 치더니 옷을 툭툭 턴 그녀가 한층 정돈된 표정으로 다가섰다. 정장 안주머니를 뒤져 이지훈과 내게 명함을 내미는 모습이 단정했다.

“안다고 말하기는 어딘가 애매하지만, 그렇기에 앞으로 더 잘 알아가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애매?”

눈썹 한쪽을 휙 올리며 되묻는 이지훈을 향해 여자가 서둘러 말했다.

“제가 이래 봬도 변호사라서요. 경찰청에서도 일 잘하시는 분들은 꿰고 있죠.”

예의 바른 영업직원처럼 팔꿈치 밑에 손까지 가져다 댄 채로 우리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여자는 신뢰를 주려 노력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여러모로 모르기가 더 어렵긴 하겠지만….”

이지훈은 그 미소보다는 여자가 맥락 없이 뱉어낸 터무니없는 칭찬을 곱씹는 것 같았다. 경계심이 옅어진 얼굴이 묘하게 뿌듯해 보였다. 여자가 그 사실을 눈치챈 듯 날 향해서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인사가 늦었죠. 죄송합니다. 영수 씨 약혼자 최다인이라고 합니다.”

약혼? 명함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고개가 들렸다. 이지훈과 나의 강렬한 시선을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강영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최다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혼이요? 저희… 우리가요?”

여자는 강영수의 말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들어온 순간부터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보조 침대 위로 올려놓으며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일 비싼 걸로 사 가지고 왔는데, 미행 중에 과일 바구니까지 사 온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제 것을 가능한 한 많이 드셔주셨으면 좋겠어요.”

“…….”

“…….”

“…….”

“애플 망고 또한 제 것이 최상품이리라고 장담합니다. 아니면 말씀해주세요. 단골집 과일가게 아저씨와의 오랜 신뢰가 걸린 문제입니다.”

이지훈이 까다 만 애플 망고가 놓여 있는 식판대를 흘긋 본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이는 말을 듣고 있으니 왜 강영수가 사귀는 여자친구를 그분이라 칭하는지, 또 설명하기 어려워했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문득 이지훈의 반응이 궁금해져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은 놀랍게도 실실대고 있었다.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속삭대기도 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봐 봐. 내가 저 새끼 임자 만난 것 같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영수가 그토록 조르던 더블데이트 한 번 안 해주던 놈치고는 상당히 친근한 제스처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나 궁금할 정도로.

“이지훈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 이래서였구나.”

“뭐가요?”

“이제 좀 감이 와서요. 영수 씨가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편인데, 그에 비교해서 지나치게 겸손한 게 늘 의아했거든요. 아무래도 친구들이 이렇게 생겼으니까.”

“그 점은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뭐, 그러실 필요까지 있나요. 덕분에 저한테까지 기회가 온 거 아니겠어요?”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나누는 둘의 뒤로 반쯤 넋이 나간 강영수가 보였다. 나는 받은 뒤에 제대로 보지 못한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최다인 변호사 ㈜ JUNG & KIM

* * *

“체스 잘해요?”

애초에 내 대답은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식판을 올려두는 곳 위로 체스판이 펼쳐졌다. 나는 네모난 상자에서 체스 말들을 꺼내는 강영수의 여자친구를 어색하게 응시했다. 정신없던 첫 만남 때 일단 나가자고 애원하던 강영수의 손에 붙들려 나가면서도 다시 오겠다고 외치는 그녀를 보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다시 병문안을 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오늘은 그녀와 나의 유일한 매개체인 강영수조차 옆에 없다. 이지훈도 웬일로 별말 없이 자리를 피해준 탓에 병실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체스 할 준비를 모두 끝낸 뒤에야 그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색한 분위기를 파악한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들고 있던 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좌우로 짧게 저었다.

“이거 찔려서 안 되겠네.”

“…예?”

“게임하면서 좀 친해지고 경계심 풀리면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얼굴 보니까 자꾸 찔려서 차라리 그냥 먼저 툭 까놓고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요.”

꼭 그때처럼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내가 따라잡을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그쪽 뒷조사 좀 했어요.”

갑작스러운 토로에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그런 사실을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그것도 세상 누구보다 심각한 얼굴로. 어이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날 보고서도 흔들림이 없는 걸 보니 이걸 발단으로 시작할 이야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장난이면 장단이라도 맞춰줘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변호사 아니에요?”

“왜요. 변호사는 뒷조사 못 할 것 같아요?”

“아뇨. 오히려 더 쉽겠죠.”

“맞아요, 더럽게 쉬워요. 인맥 몇 개 당기면 집에 있는 숟가락 개수까지 알게 되고요.”

“…그게 형사 처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저 고발하게요? 그러지 말라고 자백한 건데. 봐줘요.”

범인 흉내라도 내듯이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보이며 당당히 요구하는 얼굴에 긴장감이라고는 없었다. 만만치 않게 뻔뻔한 강영수가 왜 유독 쩔쩔매는지 알 만했다.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강영수와는 정반대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삐끗하지조차 않은 표정으로 장난스레 들었던 손을 내리는 얼굴에는 딱히 읽히는 게 없다. 이런 사람들의 말은 더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로, 순순히 물었다.

“왜 했어요?”

“그날 당신이 마약수사대 지선욱인 거 알게 돼서요.”

“그게 뒷조사랑 관련이 있어요?”

“있죠. 제가 차혁준 변호 맡았거든요.”

뜬금없이 등장한 이름에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그때 경찰청 동료들이 올려두고 간 미니 화환을 유심히 보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얼굴로 뒤돈 그녀가 내게 거듭 묻던 것까지도. 그게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뒤늦게나마 여자의 명함에 적혀 있던 로펌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로펌과는 경쟁 관계에 있는 로펌이었다. 나랑은 별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방금 이 소식을 내게 말하기 전까지는.

“자,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던졌고. 이제 하면서 이야기할까요?”

폭탄 같은 소식을 던져놓고도 여자는 태연했다. 체스판 옆에 서 있던 말 중 하나를 들어 한 곳에 올려두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내 차례라는 듯 턱짓하는 여자를 보다 손을 움직였다. 여자가 방금 말을 놓은 자리를 살펴본 뒤 대각선 방향에 폰을 놓았다. 다행히 체스라면 조금 둘 줄 알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다니던, 회원제로만 운영되던 클럽에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이런 것을 가르치곤 했었다. 한국에서는 딱히 즐기지도 않는 게임을 허례허식에 몰두한 부모들의 의지로 앉아 배웠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앞의 여자도 비슷하게 배웠던 걸까. 흐음, 체스판을 보며 뜻 모를 신음을 내던 여자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일할 때 확률을 믿는 편이에요, 아니면 사람을 믿는 편이에요?”

체스와는 관련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상황에 따라서 달라요.”

“그래요?”

“네. 그쪽은요.”

“전 사람이요.”

말을 들어 올린 여자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확률 믿으면, 차혁준 변호를 맡으면 안 됐죠. 상대가 거물이잖아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의미로 나한테 이런 것을 말하고 묻는지를 가늠하면서. 다행스럽게도 여자는 내가 혼자 그 수수께끼를 풀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바로 말을 이었다.

“승소율에 목숨 거는 우리 회사가, 왜 굳이 이 사건을 맡아서 나 준 줄 알아요?”

“아뇨.”

“지라고 줬어요.”

내가 멈칫하자 여자가 곧바로 설명했다.

“내가 좀 재수 없게 굴었거든요. 꼰대들 비위도 잘 못 맞추고, 내가 같이 들어온 동기 중 제일 성적 좋은 거 알면서 왜 케이스는 거지 같은 것만 주냐고 따지고. 아마 차혁준 의뢰받았을 때 이거다 싶었을 거예요.”

“…….”

“콧대 높은 여자 변호사 하나 기죽이고, 그 김에 차혁준한테 수임료까지 넉넉하게 챙기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잖아?”

줄곧 덤덤하던 말투에 처음으로 웃음이 끼었다.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릴 대로 질린 표정이었다.

“나한테 리드 롤을 주더라고요. 책임이란 책임은 다 몰아서, 망해도 책임 다 지고 나가라 이거지. 개고생하면서 갈릴 때도 절대 안 해주던 짓거리를 하는 속내가 너무 투명해서 웃긴 거 있죠.”

웃음이 잦아들더니, 여자가 나와 눈을 맞췄다. 건너오는 도전적인 눈빛을 보고서야 나는 여자가 모멸적으로까지 들릴 이야기를 왜 웃으며 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그 눈빛은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게 망신을 주고, 그보다 더 큰 것을 쟁취할 미래를 꿈꾸는 눈.

그 눈빛에 나 또한 담겨 있다는 게 이상했다. 여자는 이번에도 내가 그걸 스스로 알게 하는 것보다 친절히 설명하길 택했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태도가, 법정에서 판사를 비롯한 배심원을 설득해야 할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근데 그 사람들이 확률적으로 따져 보지 못한 게 있다면, 내가 이렇게 당신을 마주칠 확률이었겠죠?”

다음은 설득의 근거를 댈 차례. 생각보다 원리원칙에 충실한 그녀는 내 예상을 그대로 따랐다.

“지앤유가 최정호 소송 드랍했어요. 미리 받은 돈만 수십억이라고 들었는데, 그거 다 내팽개친 이유를 아무도 몰라서 오히려 못 덤벼들고 있고. 거기서 포기한 거면, 다른 로펌에서도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다는 거니까.”

“…….”

“춘천지검 지청장으로 발령 날 예정이던 차장검사가 마음 바꿔서 서울에 남기로 했다죠? 그것도 정확한 이유는 안 알려져 있고. 한동안 검찰청 세력 싸움하는 꼴 볼만할 거예요. 평검사 때부터 그 차장검사 집안이 장난 아닌 건 유명했던 데다가, 차장검사 대신 라인 타려던 새끼가 최정호 측근이거든.”

여자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온 정보들이 낯설다. 그러나 여자가 명사로 빗댄 사람들은 낯설지 않았다. 문득 왜 여자가 뒷조사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일 테니까.

이제 내게 남은 의혹은 여자가 굳이 이렇게 솔직해지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겁니까?”

“당신이 내 편인 게 중요하거든요.”

“…….”

“프로가 할 말처럼 들리진 않겠지만, 나 내 의뢰인한테 딱히 별 대단한 보호 본능 없어요. 어쨌든 마약 한 건 맞잖아? 벌 받아야지.”

“…….”

“근데 횡령, 마약 밀반입, 특수폭행 의혹까지 있는 아빠 죄까지 덤탱이 쓰는 건 말이 안 돼. 안 그래요? 나온 작품 개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애매한 배우가 무슨 담력과 재력이 있어서 두고두고 게이트라고 회자 될 만한 스케일 큰 일을 벌였을까?”

비로소 여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 편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우리 편에 선욱 씨같이 생태계 교란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는 소리예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에요.”

“아뇨, 맞아요.”

“…….”

“우리에게 유리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것 같아요? 그리고….”

입을 다문 나를 보던 여자가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소개팅 당사자가 아니긴 했어도, 당신이 영수 씨한테 소개팅에 입고 나가라고 골라줬다는 셔츠가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요. 내가 그 셔츠에 사이다를 쏟은 거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죠. 이렇게 내가 당신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고.”

몰랐는데, 여자는 강영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을 반짝댄다. 애정이 가득 담긴 여자의 눈을 보며 강영수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를 다 외우고 다니는 놈이라면, 방금 들은 이 말 또한 멋있다고 줄줄 외웠을지도 모른다.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영수랑 진짜 결혼할 거예요?”

“왜요. 하지 말까요?”

“아뇨.”

그 짧은 대답이 자신이 해독할 수 있는 어떠한 수수께끼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경고하기도 했다.

“부부 싸움하고 둘의 집으로 도망가도 절대 재워주지 말고 돌려보내요.”

둘의 집? 멈칫한 나를 본 여자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지훈 씨랑 같이 산다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아…

아마 강영수에게 우리가 같이 산다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비록 강영수는 이지훈이 내 집을 나가게 된 일을 모르지만. 그리고 이지훈과 나도 아직은 퇴원 후 우리가 어떻게 살지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지만.

아래를 보며 고민하던 나는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기부터 했다.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빤히 보고 있던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손에는 어느새 말 하나가 새로 들린 채였다.

“선욱 씨 동거인이 만만치 않던데요.”

“…….”

“내가 이 시간을 쉽게 얻은 줄 알죠? 경주 최씨 29대손에 외동딸인 것까지 탈탈 털리고 들어온 거예요.”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멈칫하든 말든, 체스 경기는 이어졌다. 말을 둔 그녀가 곧 승리한 운동선수처럼 양팔을 허공으로 번쩍 쳐들며 외쳤다. 체크메이트!

* * *

“터미널 안까지 잘 모셔다드렸어?”

“어. 아빠가 너 이거 주래.”

패딩을 벗던 이지훈이 내 앞으로 고급제과점 이름이 박힌 커다란 상자를 밀어줬다. 태안에서 서울까지 병문안 오면서도 양손을 무겁게 해온 이지훈의 아버지가, 내려가는 순간마저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더 챙겨줬다던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덕분에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갚지 못할 정도로 큰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는다. 태안에 도착하셨을 때쯤 전화를 해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옷걸이에 옷을 걸고 뒤도는 이지훈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뒤돌던 이지훈은 그러자마자 곧바로 눈이 마주친 나를 보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볼을 더듬었다.

“왜?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연이어 이어지는 병문안도 그렇고, 시시때때로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하는 의료진들도 그렇고, 틈날 때마다 찾아와 시간을 보내고 가는 강영수도 있어서인지 이지훈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뚫어지게 보는 것조차 아직은 익숙지 않아 보이는 놈을 바라보다가 창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층이 꽤 높은 병실인 탓에 창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여는 아침이 아닌 한, 바깥 날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도 창밖에는 온도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나는 핸드폰을 통해 찾아본 일기 예보 속의 기온을 떠올렸다. 0도. 영상도, 영하도 아닌 애매한 숫자. 춥지는 않은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방금 밖에 다녀온 이지훈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밖에 춥냐?”

“어.”

“걷기도 힘들 정도로?”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나가서 같이 좀 걸을래?”

이지훈이 멈칫하고 날 본다. 뜻밖의 제안에 놀란 놈을 보면서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침대 아래로 내려서서 신발을 신었다. 퇴원하는 날까지 계속 달고 다녀야 할 링겔이 좀 거추장스럽기는 해도,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선 채로 기다리는 나를 만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한 이지훈이 다가와 어깨 위로 제 패딩을 얹어줬다. 나는 뭐라 말하는 것 대신 패딩이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리지 않도록 쥔 채로 걸음을 뗐다.

“이런 곳이 있었네. 왜 이제 알았지?”

사람 하나 없는 휴게 공간을 둘러보는 이지훈은 신기한 눈치였다. 선 채로 두리번대는 놈을 보니 내가 이곳에 누군가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이라는 게 실감 나기도 했다.

나는 벤치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지훈은 순순히 날 따라 앉았다. 그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벤치 바로 위에서 앙상한 가지를 드리우는 나무를 흘긋 확인하긴 했지만.

“…….”

“…….”

간혹 볼을 스치는 바람이 쌀쌀하긴 했지만 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뉴스에서 말하던 것처럼 환경 오염이 빚어낸 이상고온 현상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병실에서 누워 있는 동안 이번 겨울의 가장 추운 날들이 이미 지나간 거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다행이었다.

이지훈은 추위를 많이 타니까. 날씨가 너무 춥지 않아 이렇게 나와서 같이 걸을 수도 있는 거고, 덕분에 놈에게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한층 쉬울 테니까.

나는 준비를 마쳤음을 확신하기 위해 입 안의 말들을 가지런히 정렬했다. 가장 서두에 와야 할 이야기를 되짚고서야 이지훈을 돌아봤다.

“회사에 언제 복귀하기로 했어?”

이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본다.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수술 직후에 비슷한 질문을 했다가, 어물쩍 말을 돌리는 이지훈 때문에 모른 척 넘어가 준 뒤 처음으로 묻는 거였다.

그날 이후로 궁금하지 않아서 묻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놈이 내가 밀어내는 것처럼 느낄까 봐 망설였을 뿐. 지금도 나는 이지훈이 혹시라도 그런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도록 최대한 말을 골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신경을 쏟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 대상이 이지훈이니까.

“저번 휴가 때 예상보다 빨리 복귀한 거랑 이런저런 사정 감안해도… 휴가는 이미 다 썼을 것 같아서.”

내일이 퇴원일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입원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 숙제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 수술과 회복에만 초점을 맞춘 채로, 그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일들은 일단 제쳐뒀다.

나는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지훈도 그럴 준비가 됐는지를 먼저 물어보고 싶었다.

“다음 비행이 언제야?”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지훈이 앞을 향해 몸을 숙였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둔 놈이 아래로 툭 시선을 떨어뜨리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일모레긴 한데, 대체할 사람 찾는 중이야.”

그렇게 말하는 놈의 손에는 다 마신 레몬티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이지훈은 특별할 것도 없는 테이크아웃 잔 두 개를 겹쳤다가 이내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는 행동을 통해 그것만큼 제가 전하는 말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표현하고 있었다.

이지훈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지훈처럼 앞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나란히 앞을 보며,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때로는 그 사실을 말로 꺼내어 서로 불안할 일이 없도록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지금 사는 집 전세 계약이 곧 끝나.”

준비했던 말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병실에서 이지훈을 볼 때마다 속에서 발표문을 고치듯 몇 번이나 다듬은 덕분이었다.

“서산으로 내려가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이지훈이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듯 끌었다. 이제부터 할 말이 중요했다.

“정리할 것들이 좀 있어.”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눈이 마주친 놈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그것부터 해야, 너랑 뭔갈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번 놈에게 상처를 줬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각자의 이유로 떨어져 있다가 맞이해야 했던 그 밤은 여러모로 좋은 기억일 수가 없었다. 입원 기간 내내 불편한 소파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병실을 떠나지 않는 놈을 볼 때면 혹시라도 그 일이 남긴 어떠한 상처 때문이 아닐까 괴로웠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상처를 마주하고 이지훈과 나의 미래를 그 아픔을 극복하는 데서 찾는다. 그 밤에 이지훈이 표출한 불안의 조각 중에는 내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그 조각을 버리는 것 대신 방향을 바꿔 들기로 했다. 그리고 이지훈에게 이게 너를 상처 주려고 들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혀야 했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피하려는 거 아니야.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

“난 너한테 다시는 그런 짓 안 해.”

그리고 무엇보다…

“아팠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돌아와 줬다고 해서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아.”

“…….”

“어렵게 시작한 만큼 잘하고 싶어. 그래서 그래.”

“…알아.”

이지훈에게서 그런 대답이 돌아온 건 의외였다. 탕. 비어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겹쳐진 테이크아웃 잔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고개만이 아니라 몸마저 내게로 완전히 돌린 이지훈을 본다.

“너 믿어.”

기어코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만 패딩을 여며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여며주기가 무섭게 또 흘러내리는 패딩에 아예 지퍼를 잡아 위로 쭉 올리기까지 한 이지훈은 그러고서야 나와 눈을 맞췄다. 이지훈이 웃는다. 그것만으로도 됐다는 것처럼. 이렇게 가까이에서, 패딩의 지퍼를 올려주고 시선을 교환할 수 있다면 자신은 다 괜찮은 것처럼. 나는 그 미소에서 언젠가 비슷하게 웃던 놈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주친 눈에서 놈 또한 그때를 떠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네가 이렇게 나한테 먼저 말해주고 있으니까.”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도 반짝대는 눈을 보며, 날 향한 이 황금빛 애정이 얼마나 어렵게 찾아온 행운인지를 되새긴다.

행운을 행복으로 바꾸는 건 확률이 아닌 사람이다. 내게 그 사람은 이지훈뿐이고. 일할 때는 확률에 기울던 추가 이지훈과 관련해서는 늘 사람에 기울었던 이유기도 했다.

나는 어렵게 알게 된 것을 절대 잃지 않으려는 듯 입을 꽉 다물었다가 이내 하얀 숨으로 바꿔 뱉었다.

“잘 다녀와. 기다릴게.”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투르지만, 어색하진 않게 미소 지었다. 가까이 붙어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예. 그대로 가져가 주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인부 둘이 침대 프레임까지 나눠 들고 사라졌다. 이로써 방은 그 어떠한 사람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깔끔해졌다. 거실도, 침실도, 부엌마저도 그랬다. 짐을 모조리 뺀 집은 황량했다. 마치 내가 이 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정리하며 이미 한 번씩은 확인했던 곳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냉장고 옆면에 붙어 있던 여섯 개의 치킨집의 로고가 크게 박힌 자석들을 발견한 순간에는 피식 웃었다. 버릴까 하다가 다음 세입자가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찬장 위에 올려두었다.

신발장 가장 아래 칸에 있던 신발 상자 안에서는 불가사리같이 생긴 야광별들을 발견했다. 유독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밤, 천장을 보는 순간마저 이지훈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떼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 놓고도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이곳에 넣어두고는 깜빡 잊고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야광별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모든 물건들이 이미 내 손을 떠난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남겨둔 상자 안으로 조심히 집어넣었다.

“…….”

이제 더 확인할 곳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는 상자를 들었다. 현관문을 향해 걷다가 우뚝 멈춰 뒤돌았다. 2년 넘게 살았던 집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훑어보며, 이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을 떠올렸다. 이지훈이 있어도, 없어도 늘 이지훈을 생각했던 공간.

어쩌면 이 집은 내 마음을 닮은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을 닫고 있으면 아무것도 새어 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마음을 알아내겠다고 들어온 놈에게 결국 모든 것을 들키고 만 공간.

나는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내가 갇혀 있던 마음 밖으로 발을 뗐다.

* * *

이지훈은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다. 도어락 소리를 들은 순간 긴장하긴 했어도, 놈이 거실로 들어오기 전에 소파에서부터 일어나 있을 수는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관 타일 위로 캐리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다 말고 멈췄다. 벗은 구두가 신발장에 부딪히는 소리에 이어 긴 비행의 피로감이 담긴 듯한 한숨이 그 뒤를 이었다. 나는 그 일상적인 소음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거실로 온 놈이 나를 발견했을 때, 잊지 않고 말하려고.

“…왔어?”

이지훈은 러그까지 오지도 못하고 거실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멍한 표정을 지은 놈은 내가 제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게 믿기지 않는 사람처럼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놀란 표정을 회복하지 못하는 놈 때문에 눈을 마주치자마자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내가 한 행동이 놈의 예상 범주를 넘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색하게 뒷덜미를 긁적이면서도 몸을 움직였다. 삐걱대는 한이 있더라도 계획한 일은 해야 했다.

옆으로 슬쩍 몸을 옮기는 나를 따라 이지훈의 시선 또한 이동했다. 놈의 시선이 내 뒤에 가려져 있던 상자에 박혔다. 이지훈의 눈은 착실히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에 머물렀다.

테이블 위 화병에 놓여 있는 파란 장미, 그리고 담을 공간이 부족해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오기까지 한 상자까지. 이지훈은 이미 이 상자를 알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빨리 내게로 시선이 돌아온 것이다.

“이거….”

놈이 말을 이으려다 말고 입을 다문다. 나는 설명을 바라는 듯한 놈의 눈빛을 마주 보며 침을 삼켰다. 생애 처음으로, 이지훈에게 닿고 싶은 고백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야구공부터 들어 올렸다. 도어락 소리가 들리기 한참 전부터 쥐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보여주려고 했던 것.

이건 내가 이지훈을 처음으로 선명히 인식하고 느꼈던 최초의 순간을 기념하는 물건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뭘 기념해야 할지 몰라서 쥐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지훈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그 물건을 한 번씩 꺼내서 바라보는 내 마음이 흙처럼 묻었다. 그걸 볼 때마다 지난 물건조차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내가 미련스럽다는 생각을 떨치질 못했다.

나는 이제야 그 야구공에 묻은 것들을 털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이미 공 깊이까지 스며든 것들을 그대로 둔 채로 이지훈에게 보여줘도 될 것 같았다. 이지훈은 그 공이 아무리 더러워도 버리지 않을 테니까. 대신 받아서는 한참을 살펴보다가, 내게 묻겠지. 이건 뭐야? 하고.

나는 놈이 묻기 전에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물건들에 가지고 있던 미련을 모두 밀어 넣은 나 때문에, 내가 자신에게 미련이라고는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게 된 놈에게 그게 아니었음을 직접 말해주기 위해서.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이 공은….”

“기억해.”

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춰야 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대답을 하는 놈 덕분이었다. 나는 야구공을 보고 있는 이지훈의 표정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그게 나처럼 추억을 회상하는 빛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너인 거 알고 줬던 거니까.”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상자 안에 있는 건 나만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어야 했다고. 서로에게 크기가 다른 기억일 거라고 생각하며 굳이 대조해볼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기에, 이 순간이 이제야 온 걸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네 이야기는 모르니까 말해줘. 듣고 싶어.”

상자를 눈짓하며 웃는 놈을 본 순간, 온몸을 휘감는 깨달음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나는 말을 뱉기 전 습관처럼 거르기부터 하던 일을 멈췄다. 돌아올 이지훈을 기다리며 세워뒀던 계획들 중 반은 이뤄졌고, 반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의 미래도 어쩌면 그럴 테니까.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는 일이 있는 반면에 그만큼 예상외의 방식으로 흘러가는 일도 생기겠지. 그렇지만 괜찮았다. 그 모든 순간에 우리가 함께일 테니까.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원래는 널 보자마자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하려고 했어.”

“…….”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자고.”

처음 세팅했을 때처럼 깔끔해지는 머릿속이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 하얀 도화지 위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나와 이지훈을 그려 봤다. 온통 내 물건만이 가득하던 집에서, 내가 따로 챙겨 들고 나올 만큼 소중한 것들이 한 상자 안에 담겼을 때 느낀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을 말했을 때 도화지 속 놈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상할 필요가 없다. 직접 보면 되니까.

나는 이지훈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웃는 놈을 보고서야, 놈이 나를 기다려줬음을 알았다.

“지금은 달라?”

“어.”

“왜?”

물으면서도 이지훈은 이미 답을 아는 표정이다. 나는 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발을 뗐다. 우리는 굳이 짐작하고 추측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흔들림 없이 나를 품은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에는 마음이 울렁댔다. 비좁은 경비행기 안에서 놈이 선물한 노을을 봤을 때처럼. 그때의 내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이지훈을 응시했다. 내가 보아야 할 하늘을 눈에 담은 놈과 앞으로도 쭉 같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제대로 알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좌표를 수정하듯이?”

“…그래. 좌표를 수정하듯이.”

코끝이 마주칠 거리에서, 이지훈이 근사한 미소를 짓는다.

“누구 애인이 이렇게 똑똑해.”

쪽. 상이라도 주듯 이지훈의 입술이 볼을 스쳤다. 놈이 얼굴을 가까이할 때마다 바깥바람이 묻은 차가운 코트 깃이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의 목 부분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얼굴 곳곳에 쏟아지는 입맞춤이 간지러웠음에도 나는 고개를 물리지 않았다. 갈급한 표정의 이지훈이 당장이라도 입술을 붙일 기세로 고개를 내리다 말고 멈췄다.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코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지훈이 어떤 걸 말하듯,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아는 것처럼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느리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단 과육을 문 것처럼 은근했다.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허리를 파고든 손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내 대답이 중요하다는 듯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놈을 어색하게 응시했다. 시선이 부엌을 향해 절로 돌아갔다. 방금 몸이 밀착되자마자 냄새를 맡듯이 숨을 짧게 들이켠 이지훈을 보고서야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을 위해 준비하려던 것이 있긴 했다. 예상대로 되지 않아 보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개코인 놈이 그 냄새를 기어코 맡은 모양이었다. 뻘쭘하지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생각보다 요리를 못하더라. 그냥 시켜 먹자.”

김치찌개를 두 번이나 끓이려 시도했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는 것까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지훈은 웬일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선욱한테 내가 너무 어려운 걸 요구했지?”

무슨 소리야, 이건 또. 내 표정을 보고 피식대던 놈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놨다. 허벅지에 두어 번 쓸고서야 내 양 볼 위로 올라온 손은 따뜻했다. 이지훈은 내 얼굴을 잡아 제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꼭 집중할 곳을 일러주는 코치같이. 또박또박 말하면서.

“요리는 내가 잘하니까 됐고.”

“…됐고?”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

“저 상자를 보면 알 수밖에 없는데, 정작 너한테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는 말이야.”

이지훈이 다시 천천히 다가온다.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닿기만을 기다리게 되는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놈과 눈을 맞췄다. 이지훈이 속삭이듯 물었다.

“해줄래?”

내가 일평생 사랑해온 얼굴에 활짝 피어나는 둥근 행복의 흔적을 보며, 나는 전례 없이 용감해진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말을 하기 위해 목울대를 움직이는 행위는 어색했지만, 그 끝에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지훈.”

왜 이지훈이 이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건 나조차 형태를 제대로 갖춘 채로 입 밖에 꺼내 본 적이 없는 말이니까. 한 번도 상대방에게 닿겠다고 욕심내지 않았던 단어이니까.

내 세계에서 이 단어를 탄생시킨 건 너지. 말이란 건 뱉을 수 있어야만 형체가 생기는 거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영영 발굴되지 않았을 단어였을 지도.

나는 그 단어가 우리가 헤맨 세월을 단계처럼 만들어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는 걸 본다. 도화지 위에 그 단어가 떠오른 순간에야, 혀끝이 둥글게 말렸다.

같은 거리 위에 선 놈에게 말하기 위해서.

“사랑해.”

모음의 여운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붙었다. 그 말을 기어코 뱉어낸 혀에 상이라도 주듯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으며, 나는 이 고백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서로가 서 있던 곳을 돌아보고 그곳이 사실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시간. 함께 찾아낸 곳으로 좌표를 수정하고도, 사랑한다고 고백할 시간이.

* * *

제83주년 「경찰의 날」을 기념하여 서울시 시 강당에서 이뤄진 행사에서는 하반기 특진자 19명에 대한 시상식이 치러졌다. 시상식은 짧았는데, 이어진 행사가 길었다. 대표 수상자라는 이유로 강당 맨 앞줄에 앉은 나는 추가된 경찰 배지의 무게를 느끼기는커녕 행사가 끝나자마자 차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루트를 생각하기 바빴다. 3분 전 확인한 시계를 한 번 더 흘깃댄 순간, 옆 의자에 앉아 있던 반장님이 허벅지를 툭 쳤다. 간부들이 빽빽이 앉은 주변을 둘러본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화장실 가고 싶냐?”

“…아닙니다.”

행사 전 미리 전달받았던 안내문에 따르면 5분 안에는 행사가 끝나야 했다. 심지어 제시간에 끝난대도 간당간당한 계획을 세워두었던 터라, 아직 세 개의 순서가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행사장에 들어오기 전 무음으로 바꿔둔 핸드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어쩌면 이지훈으로부터 출발했냐고 묻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을지도 몰랐다.

행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20분을 넘겨서 끝났다. 미리 회식에 갈 수 없는 이유를 통보해놓은 나는 인사를 나누기 바쁜 사람들 사이를 바삐 헤치며 강당에서 튀어나왔다. 빠져나오는 것에만 신경을 쓴 터라 차 앞에 도착해서야 주머니에 차 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황당했다. 차 키도 없이 차로 달리기는 왜 달려?

지하 주차장에 서서 멍하니 내가 저지른 일을 되짚다 급히 몸을 돌렸다. 이럴 시간조차 없었다.

“어이, 지 경위… 아니다. 이제 경감이지. 쨌든 이거 네 거 아니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반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던 그는 날 향해 손에 든 무언가를 흔들었다.

“반장님!”

익숙한 물건을 확인한 나는 그에게 뛰듯이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부터 내밀고 있던 손바닥 위로 차 키가 툭 떨어진 순간에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손을 말아쥐며 허리부터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디서 주우셨어요?”

“네 자리 밑에서. 줍자마자 불렀는데 이미 자리에 없더만.”

“아…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그래 보인다, 인마. 뭐가 그렇게 급해?”

혀를 쯧쯧 찬 반장님이 내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뛰느라 돌아갔을 모자를 정돈해줬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복은 물론이고 평소라면 쓸 일 없는 모자까지 찾아 쓴 채였다. 나와 같이 특진한 반장님 역시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색한 감각에 움찔하던 나는 더 움직이는 것 대신, 코앞에 있는 그의 회색 머리를 바라보며 다리를 슬쩍이나마 굽혀주길 택했다. 오늘 이후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자가 잘 씌워졌나 보는 척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반장님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삐뚜름히 비튼 그에게서 떠보는 듯한 물음이 건너왔다.

“거기 가서 이제 안 구를 생각하니까 좋지?”

“아닙니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빠르게 뱉었지만 진심이었다. 눈을 흘긴 반장님이 핀잔을 줬다.

“뭐가 안 좋아. 좋아야지. 또 뇌에 혹 만들 일 있냐?”

나는 그의 시선이 내 모자 속, 완전히 아물어 머리카락에 가려진 흉터를 훑고 있음을 눈치챘다. 내가 병가를 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그가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던 것도. 병문안을 온 정 선배가 귀띔해준 바로는, 반장님이 내가 그렇게 아픈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의사조차 왜 생겼는지 이유를 정확히 댈 수 없는 혹이었는데도, 통상적인 이유로 꼽히는 스트레스나 외상으로 인한 충격에 혹시 본인이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이라도 있을까 봐.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나는 그가 내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특진과 함께 팀을 옮기게 된 데에는 반장님의 입김도 적잖이 작용했다고 들었다. 반장님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간 내게 위의 결정이라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다. 그렇지만 모를 수 없었다. 특진자 중에서도 내가 가는 그 부서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일의 강도가 비교적 낮으면서도 경력을 쌓기에는 좋다고 유명한 부서였다. 복직하고 일에 다시 적응하느라 바빠 그 사실에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던 나를 밀어준 건 정황상 반장님일 수밖에 없었다. 옮긴 부서의 장이 반장님의 친한 동기인 것만 봐도.

“가. 오늘 고생했다.”

무뚝뚝한 말을 던져두고는 몸을 돌리는 반장님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반장님.”

“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

“제게도 소중한 팀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이지훈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긴 했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반장님은 내 눈을 잠깐 바라보더니 내가 진심임을 눈치챈 것처럼 너털웃음부터 지었다. 내 등을 차 쪽으로 쭉 밀면서.

“별말을 다 한다, 이놈아. 이럴 시간은 있냐? 아까는 미친 듯이 뛰어가더니.”

“아….”

“가, 얼른.”

“네. 돌아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거의 뛰면서 했다. 반장님이 애써 모양을 다시 잡아준 모자가 또 한 번 삐뚤어질 정도로. 나는 룸미러로 보이는 내 모습을 고칠 정신도 없이, 시동부터 걸었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걸 아슬아슬하게 했다. 발권과 탑승 수속도, 보안검색대 통과도. 조금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이지훈이 내 짐까지 들고 가겠다고 할 때만 해도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수화물 부칠 시간마저 아까운 지금에 와보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떻게든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타는 것만이 목표였고, 그랬기에 출발 시각을 몇 분 남기지 않고 비행기에 발을 들인 순간엔 결국 해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제야 몸의 긴장을 푼 채로, 나는 비행기 입구를 지키고 있는 승무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표만 보여준 후 안으로 걸음을 떼려던 행위가 가로막혔다.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후 당연하다는 듯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려 드는 승무원의 뒤를 어리둥절한 채로도 따랐다. 너무 늦게 타서 안내해주는 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이코노미 좌석을 지나친 것에 이어 비즈니스 좌석들을 지나면서도 멈추지 않는 등을 본 순간에야 이상함을 느꼈다. 앞만 보고 나아가던 승무원이 처음으로 멈춰 칸막이처럼 생긴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힌 순간, 내가 알지 못하던 공간이 나타났다. 어느새 나는 비행기 맨 앞칸에 다다라 있었다.

“고객님의 좌석, 1A입니다. 담당 승무원이 곧 인사드리러 올 테니,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사방이 널찍하게 뚫려 있고, 옆에 커튼까지 달린 채로 분리된 좌석을 확인하고서야 표를 다시 확인했다. 시간 안에 탑승하는 것을 목표로 계속 달리기만 한 탓에 좌석을 자세히 확인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다니는 항공사니 대신 예약해주겠다는 이지훈 때문에 좌석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고, 급하다는 이유로 카운터가 아닌 기계에서 셀프 체크인을 했다.

그랬으니 놈이 이런 짓을 해놓은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1A라고 적힌 좌석 번호와 티켓 가장 위에 적힌 FIRST라는 단어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겨우 네 시간 가는 비행에 이런 돈 지랄을 하지?

의문을 제기하기가 무섭게, 차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이지훈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지훈

자기 존나 바쁜가 봐? 오후 6:29

비행기에서는 꼭 보자? 오후 6:30

비행기에 타서 하는 일이야 다르대도 어쨌든 같은 비행기를 타는 거긴 하니 별 뜻 없이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두려워졌다. 가끔가다 괴상한 기장을 만나면 퍼스트클래스의 승객들에게 나가서 인사하는 일마저 대신 하라고 시킬 때가 있다며 짜증을 내던 이지훈이 떠올라서였다.

에이, 설마…

고개를 저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두리번대게 됐다. 전담 승무원의 과하게 친절한 안내에 따라 넓은 좌석에 홀로 앉는 순간이 되어서야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 꾹꾹 눌러 담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같이 살면 이지훈에게 대응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길 줄 알았는데, 노하우가 생기기가 무섭게 갱신되는 또라이 짓에 고개를 젓는 일만 느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지훈은 기장을 대신해 인사를 하러 오는 미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인사하기 위해 커튼을 열어도 되냐는 승무원의 말을 들은 순간 등 뒤로 땀이 주룩 흐르던 게 기억났다. 비록 자리마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듯 커튼이 쳐져 있긴 해도 옆이나 뒤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렸다. 이지훈과의 대화를 누군가가 듣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래서인지 승무원 세 명을 뒤에 둔 채 서 있는 파란 눈의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안심하고 어색하게나마 같이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이지훈은 기장이 떠나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커튼을 젖히고 빼꼼 고개를 내민 놈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경악한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미소가 한층 더 깊어지기까지 했다. 놈이 눈을 휘며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기장 이지훈입니다. 편안한 여행을 하시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한국인 부기장한테 직접 인사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언제?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나를 두고 이지훈이 상체를 뒤로 뺐다. 잠깐 주변의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 보이던 놈은 곧 커튼부터 닫았다. 그러기 무섭게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놈을 경악하며 바라봤다.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단 세 걸음 만에 이지훈이 내 앞에 도착했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놈이 허리를 숙여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마자 허리를 끌어안고 겁도 없이 입술을 들이대려는 놈을 급히 밀쳐내면서도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밖의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소리를 죽여 뱉는 나와는 다르게 이지훈은 지나치리만큼 뻔뻔스러웠다.

“미쳤냐, 진짜?”

“응. 점심까지는 괜찮았는데, 저녁부터는 진짜 좀 미치겠더라. 보고 싶어서.”

이지훈이 능글맞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밀치지조차 못하게 하려는지 내 등 뒤로 손을 겹쳐 깍지까지 꼈다.

“뽀뽀해줘.”

“…여기 네 일터야.”

“그래서 키스 말고 뽀뽀로 합의 봤잖아. 그래도 안 돼?”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린 나를 흘깃 본 이지훈이 입을 쩝 다셨다.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들어줄 리 없다는 걸 드디어 깨달은 것처럼. 허리를 끌어당기던 손의 힘이 비로소 약해졌다. 그제야 이성을 찾은 건지 놈이 거리를 두고는 날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를 아는 것처럼 미리 설명하면서.

“친한 기장이라 허락받고 나왔어. 그만 혼내.”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비싸잖아, 여기.”

“왜? 이것 때문에 남은 한 달 손가락만 쪽쪽 빨며 지내야 할까 봐?”

씩 웃은 이지훈이 내 손을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앙 무는 시늉을 하면서.

“예습할까?”

“적당히 까불어라, 진짜.”

내가 거칠게 손을 뿌리친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킥킥대고 웃었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처럼 커튼이 쓸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동시였다. 놀라길 잠시 나는 이지훈의 어깨를 급히 끌어당겼다. 몸을 강제로 숙이게 한 다음 백허그하듯 끌어안고, 손을 들어 이지훈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자동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꼭 위급상황에서 인질을 보호할 때처럼.

다행히 커튼 소리는 내 좌석이 아닌 옆 좌석으로부터 난 것이었다. 위스키를 가져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남자의 점잖은 소리에 이어 사방이 조용해졌다. 밤 비행기인 탓에 기내 조명까지 꺼진 복도에는 이제 돌아다니는 사람들보다 잠든 사람들이 더 많았다. 20분에 한 번씩 커튼을 열고 필요한 게 있는지 체크하던 담당 승무원이 들르는 텀 또한 길어졌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음을 확신하고서야 손을 풀어줬다.

“쓸데없는 장난치지 말고 빨리 돌아가, 빨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자꾸만 속삭이듯 말하게 된다. 이지훈이 웬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다. 나 방금도 설 뻔.”

나도 모르게 일어서던 이지훈의 바지춤부터 확인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웃던 이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기어코 벌려져 있던 내 입술에 제 볼을 가져다 대는 방식으로 억지 뽀뽀를 받아내고서야 놈이 일어났다.

“다리 편하게 펴고 있어.”

순식간에 다리가 덜렁 들렸다. 반대편 좌석에 다리를 얹어주고 마사지하듯 크게 한 번씩 주물댄 이지훈이 옆에 벗어둔 모자를 들어서 내 머리 위로 씌웠다.

“모자도 쓰고 있고. 캔틴에서 한 번만 더 너 잘생겼다는 말 들리면 나 또 뛰쳐나올지도 몰라.”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커튼 앞으로 훌쩍 멀어진 이지훈을 바라봤다. 그려낸 듯한 미소가 익숙했다. 강영수가 싫어하는 이지훈의 비즈니스용 미소였다.

“제공해드린 서비스가 만족스러우시다니 저도 너무나 기쁩니다.”

일부러 들으란 듯 목소리를 키워 말하던 이지훈이 ‘제공해드린 서비스’라는 대목에서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뻔뻔한 얼굴과 친절한 말투가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지훈은 웃는 나를 보고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튼을 젖혔다.

‘조금 있다 봐.’ 입 모양으로 말을 걸면서.

강영수

또 나 빼고 오후 2:03

또 오후 2:04

또 나만 빼고ㅠㅠㅠㅠㅠㅠ 오후 2:05

욱아 기억나? 아주 오래전에 우리가 셋이 여행가기로 약속한 거 오후 3:05

어…? 생각해보니 오래전이 아니잖아? 오후 3:07

올해였잖아?^^… 오후 3:07

오후 4:39 얼마 전에 강릉 갔었잖아.

강영수

…ㅠ 오후 4:40

국내랑 해외 각각 한 번씩 가야지ㅠㅠㅠ 오후 4:40

해외가 섭섭해하지 않도록ㅠㅠㅠㅠ공평하게 챙겨줘야지 오후 4:40

나도 연차 있어 오후 5:39

나도 승진했어 오후 5:45

나도 비행기 탈 줄 알아 오후 6:00

얘들아 장난이 아니고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 오후 6:12

내가 진짜 너네끼리 파자마 입고 퐁듀 먹는 건 참겠는데 오후 6:13

아니다 못 참겠어 오후 6:14

이럴 거면 절교해!!!ㅠㅠ 오후 6:15

이지훈

ㅇㅇ 오후 6:16

강영수

뻐ㅇ 오후 6:16

이지훈

ㄱㅅㄱㅅ 오후 6:16

강영수

뻥ㅇㅣ야 오후 6:16

뻥이라고 오후 6:17

@이지훈 이씨발놈 느낌표에 잉크 마르기도 전에 대답하는 거 봐 오후 6:18

.

.

.

강영수

상 잘받구 비행기 탔어 욱아?ㅠ바쁜가보네? 오후 7:00 1

지훈씨발놈은 저 대답 하고 비행기 타러 가신 모양이고?ㅎ 오후 7:02 1

싸가지 어떻게 날이 갈수록 느는 거임? 밤마다 연마함? 오후 7:03 1

.

.

.

강영수

얘들아… 잼께 다녀와… 오후 11:02 1

비록 바빠서 이번에는 같이 못 가긴 했지만ㅠㅠ 오후 11:03 1

그래도 다니면서 내 생각 틈틈이 하고 그래… 알았지… 오후 11:03 1

이지훈과는 공항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놈이 정리하고 나오길 기다리며 핸드폰을 훑어보다가 발견한 강영수의 메시지가 끝이 없었다. 한국이 이곳과 시차가 별로 나지 않음을 떠올리며 늦은 답장을 보냈다.

오후 11:53 기념품 뭐 사갈까.

보내기가 무섭게 답장이 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강영수

망고 젤리 맛있다더라 거기... 오후 11:54

오후 11:54 알았어

강영수

맥주도 기가 막히다던데… 공항에서도 파는 것 같더라구… 오후 11:55

오후 11:55 사갈게. 다인 씨 건?

강영수

위의 정보 다 다인 씨가 말해준 건뎅… 오후 11:56

오전 12:00 같이 있어?

강영수

웅 오전 12:00

오전 12:01 많이 사갈게. 같이 먹어.

강영수

웅>_< 오전 12:01

오전 12:03 다음엔 같이 오자.

강영수

웅♡♡♡♡♡♡♡♡ 오전 12:04

“누구 마음대로 같이 와?”

어이없어하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지, 정복 차림이었다. 몇 시간 전 기내에서도 본 얼굴인데, 밖에서 보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그게 표정에서도 느껴졌는지 눈썹을 휙 올리던 놈이 씩 웃으며 내 모자 위를 툭 쳤다.

“말 잘 듣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벗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벗으려고 손을 들다 말고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됐어. 모자 쓴 거 이런 날 아니면 또 언제 봐.”

나를 만류해놓고서, 정작 이지훈이 내 모자를 슬쩍 쥐어서는 위로 들어 올렸다. 이미 아물고도 남은 상처 위를 눈으로, 손으로 꼼꼼히 확인하는 놈을 보며 눈가를 슬쩍 찌푸렸다. 아파서가 아니고, 이지훈이 여전히 그 사실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음이 느껴져서였다. 처음 본 사람들은 거기에 흉터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물었는데, 이지훈은 매번 조심스러웠다. 가끔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그래도 놈의 마음을 아는 나는 순순히 머리를 맡긴 채 서 있기로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안심한 표정의 이지훈이 눈을 내려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비행기 떴을 때 머리 아프진 않았지?”

기체가 뜨며 몸에 느껴지는 압력 때문에 내가 혹시라도 영향을 받았을까 봐 걱정한 모양이었다. 비행기를 타도 괜찮다는 병원의 확인까지 받아놓고도 굳이 가까운 여행지를 고집한 놈을 알기에 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아팠어.”

“진짜? 하나도?”

“어. 다음에는 더 멀리 가도 될 것 같은데.”

이지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뉴욕처럼 먼 곳?”

우리에게 특별한 장소부터 떠올리는 놈 때문에 따라 웃게 됐다.

“그래. 뉴욕부터 가, 그럼.”

서로의 눈을 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이지훈이 다가오며 내 허리를 익숙히 둘러 안았다. 한 손이 정복의 깃 위를 훑고 있었다. 전에는 없었던 배지를 금방 발견해낸 놈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야?”

“어.”

“좀 더 큰 거 달아주지. 그 개고생을 했는데.”

개고생을 한 게 자신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기부터 하던 놈은 그러나 곧 그걸 만회할 만한 무언가가 생각 난 것처럼 표정을 정돈했다. 배지가 좀 더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도록 그 위를 꾹 누르면서. 타이밍 좋게 고개를 든 놈과 눈이 마주쳤다.

“멋있다, 지선욱.”

휘어지는 눈 안에 내가 가득했다. 나는 그 안에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이지훈의 뒤로 이 나라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큰 건물이 보였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크고 둥근 조형물이 주변의 건물을 향해 빨갛고 푸른 빛을 알록달록 쏘고 있다. 처음 와본 곳이지만 우리 둘만은 이곳을 익숙히 기억했다. 우리는 이 공항의 옥상이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그러나 늘 낭만을 꿈꾸던 여인이 제일 좋아하던 영화의 촬영지임을 안다.

나는 우리가 열여섯을 지났지만, 서로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때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건 어떻게든 서로의 옆을 지키려 했던 우리에게 내려진 포상이라는 것도.

영화에서 왈츠를 추듯 서 있던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향해 자연스레 몸을 기울이기부터 했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붙어서서는, 서로의 몸 위로 손을 올렸다. 우리가 직접 찾아낸 이 각도가 참 편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놈을 불렀다.

“이지훈.”

나 또한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의 열여섯이, 열여덟이, 스물이, 스물셋이, 스물아홉이 남긴 점 같은 교훈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서 있음을 안다. 누구 하나 뒤처지거나 혹은 따라가는 것 없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음을.

확신에 차서 묻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 입술 새를 가르고 튀어나갔다.

“행복해?”

이지훈은 세월이라는 골짜기를 돌아 굽이쳐 돌아온 질문에 놀라는 것 대신 웃었다. 그 질문을 하면서, 들으면서 웃을 수 있는 우리가 이미 그 답을 찾았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사람처럼.

아무도 없는 공항 옥상 위로 바람이 소용돌이치듯 분다. 서로의 정복에 붙은 견장이며 배지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옷을 추스르는 것보다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게 급한 사람들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사랑한다 말하고 싶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나 꿈이 생겼어.”

“꿈?”

직접 부딪치고 깨지며 익힌 속도로 서로를 향해 가까워진다.

“네가 내 꿈이라고 매일 말해주는 꿈.”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놈의 눈에 깃든 사랑을 읽는다. 놈이 웃는 이유가 내 눈에서 같은 것을 읽었기 때문임을 안다. 난 웃으며 놈의 넥타이를 끌어당겼다.

이지훈의 뒤로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누군가에게는 목표이자 꿈인 그곳을 향해서.

우리는 늘 그곳에 있었다. 꿈이자 목표인 서로를 위해서. 날아오르지 않아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상대를 위해서.

수신인과 발신인이 같음을 뜻하는 신호가 울리는 길에서야 서로를 찾았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의 눈이 보이는 곳에서는 그 어떤 신호도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5x5(파이브 바이 파이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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