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5)

이지훈이 사 온 건 타코뿐만이 아니었다.

“짜잔.”

“…뭔데?”

“뭐겠냐. 케이크지.”

“…….”

“내일 크리스마스잖아. 남들 다 하는 건 우리도 해야지.”

먼저 씻으라고 등을 떠밀더니, 이걸 몰래 준비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이지훈이 불쑥 코앞으로 들이민 초코케이크 위로 앙증맞은 초가 꽂혀 있었다. 초에 불까지 붙여놔서 우리가 말할 때마다 촛불이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휘청댔다. 방의 불도 죄다 꺼둔 탓에, 케이크를 들고 있는 이지훈의 얼굴만 겨우 보였다.

케이크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본 이지훈은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끌었다. 이지훈의 침대 밑에 담요 하나가 깔려 있었다. 먼저 담요 끄트머리에 앉은 이지훈이 케이크를 바닥에 내려두고는 나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앉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내가 어색하게나마 앉고서야 이지훈이 케이크를 나란히 앉은 우리의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촛불을 보호하듯 케이크 주변에 손을 두른 놈이 나를 향해 재빨리 말했다.

“소원 빌어.”

가까이서 보니 촛불의 길이가 꽤 짧았다. 이지훈이 내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며 계속 불을 붙이려 했으리라는 걸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촛농에 시선을 둔 채로 머뭇대며 물었다.

“원래 크리스마스에 소원 비는 건가?”

“몰라. 근데 새해에는 빌지 않나.”

“…아직 새해 아니잖아.”

“어. 근데 네가 새해 전에 돌아가니까, 이 김에 같이 하려고.”

대답하는 와중에도 이지훈은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촛불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불기 전에 그걸 꺼지지 않게 해야만 하는 임무라도 맡은 사람 같았다. 놈의 집중한 표정을 보는데,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 그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뉴욕이어서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를 몇 분 앞둔 이브여서도 아니고. 다만 그날을 어떻게든 특별하게 만들어주려 노력하는 이지훈과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너도 소원 빌 거야?”

뜻밖의 질문인지 이지훈이 나를 흘끔 봤다. 그러기가 무섭게 다시 촛불로 눈을 돌렸지만.

“나 딱히 소원 빌 거 없는데. 너도 여기 있고.”

정말 별생각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그거면 다 됐다는 듯이. 멍하니 이지훈을 바라보다가 불이 꺼졌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어둠 속에서 이지훈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씨… 꺼졌다.”

탁, 탁, 치익. 싸구려 라이터의 끝에서 불이 솟아올랐다. 재빨리 그걸 초 위로 가져다 댄 이지훈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빨리. 빨리. 이번엔 꺼지면 안 돼. 열두 시까지 이제 일 분 남았어.”

케이크를 나한테 가깝게 들이댄 놈 때문에 눈앞에서 불빛이 일렁대며 타올랐다. 나란히 앉은 터라 이지훈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놈이 내가 소원을 빌길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뭇대면서도 눈을 감았다. 입술 새로 후- 작게 바람을 불면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지훈은 바로 앞에 있었다. 어떻게든 지키려던 하나의 촛불마저 꺼진 방은 어두웠다. 그래도 크림을 찍어 내 볼에 문지른 놈이 코앞에서 웃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다, 친구야.”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12라는 숫자 위에 빈틈없이 겹쳐 있는 분침과 시침의 윤곽을 확인한 후 고개를 들었다.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놈과 둘이서만 보낸 건 처음이었다. 여기에 나를 위한 소원까지 빈다면 내가 신이라도 괘씸해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소원을 빌었다.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에는 이 도시가 이지훈에게 조금 더 친절하길.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사는 놈에게 자존심이 아닌 꿈을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남을 수 있길 바라면서.

눈을 뜬 순간, 방에 이지훈이 없다는 사실부터 깨달았다. 옆 침대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잘 정리되어 있기까지 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확인한 시계는 8시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 방에서 같이 잤던 3일 동안 이지훈은 늘 나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지만, 이렇게 말없이 방을 떠난 건 처음이라 당황했다.

아침부터 어딜 갔지. 침대까지 정리해놓은 걸 보니 급하게 나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연락해 볼까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것 대신 베개에 머리를 다시 처박았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 탓인지 농담 따먹기를 빙자한 대화가 길어져서,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그래서 이지훈이 나가는 기척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몽사몽인 채로 엎드려 있다가 출입문을 돌아봤다. 문에 도어 스토퍼가 달려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잠깐 나갈 때면 열쇠를 대신할 신발 한 짝을 문틈 새로 자연스레 끼워 넣던 이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도 그렇게 해두고 나간 모양인지 열린 문 사이로 복도의 소음이 소소히 흘러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헤어드라이어를 켜고 끄는 소리, 씻는 물소리. 조악한 방음을 티 내듯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을 뚫고 계단을 오르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 이 집에서는, 문을 닫고 있을 때조차 종종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계단의 끝에 다다른 발소리는 다음 층을 향해 이어지거나, 혹은 뚝 끊기고는 했다. 그 경우에는 대신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울리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뚝 끊기고도 복도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복도를 웅웅 울리는 말소리는 내게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음높이로 전개되고 있었다.

“몰라. 꼭두새벽부터 전화해놓고 한다는 말이 렌트비를 올려야겠다잖아. 하여간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르신들 잠 없는 건 똑같아. 집주인들이 갑질하는 방식도 똑같고. 코딱지만 한 방 150씩 주며 사는 것도 열 받는데, 심지어 천 달러를 올리겠다네. 아, 나눠서지. 각각 50씩이긴 해도. 월세 생각하면 갑자기 30%를 올린 거라고. 말이 되냐?”

타국에서 들린 한국어는 낯설었다. 무엇보다 짤그랑대는 열쇠 마찰음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는 이지훈의 것이 아니었다. 마주치는 이웃들마다 날 인사시킨 이지훈 덕분에 이 층에는 이지훈과 이지훈 룸메 형 외에는 한국인이 없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문밖에 선 대상의 범위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어, 뭐야. 벌써 일어났나? 문이 왜 열려….”

문이 삐걱하고 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나는 문간에 선 남자가 이지훈의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나를 발견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황상, 그 사람이 이지훈과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형이라는 사실도.

나는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다행히 침대 위의 내가 문에서 뒤돈 채로 엎드려 누워 있어서 그런지 자는 척하긴 쉬웠다. 몇 초간 말이 없던 남자도 안심한 것처럼 다시 통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보다는 말소리가 한층 작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

“어? 아니, 아니. 룸메가 친구 데리고 왔거든. 자고 있네. 순간 깨웠을까 봐 놀랐어.”

내가 자고 있다고 오해한 남자는 배려하듯 조심조심 움직였다. 덕분에 마룻바닥이 삐걱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 자고 있었다면 그가 온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깨어 있었다. 발소리를 죽인 그가 옷장과 부엌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대충 씻고만 나가려고. 그 김에 룸메 만나면 미리 언질도 좀 해주려고 했는데 없네. 어. 월세 내는 날이 며칠 뒤거든. 그래야 방을 새로 구하든 여기 계속 살든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나? 뭐… 좆같아도 계속 살아야지. 스튜디오랑 가깝기도 하고. 마음 같아서는 얘도 계속 같이 살았으면 좋겠는데. 뭐… 내 성격에 2년 같이 산 거 보면 모르겠냐. 애 괜찮아. 깔끔하고, 열심히 살고.”

거기까지가 내가 엿들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면서 소리가 뚝 끊겼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안에서 웅웅대는 말소리가 조금 더 들리다가, 이어진 물소리에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나는 샤워를 시작한 그가 화장실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자마자 벌떡 몸부터 일으켰다. 분명 방을 나올 때까지는 발소리를 죽이려 노력했던 것 같은데, 계단을 내려가면서부터는 반쯤 뛰고 있었다.

폭설은 그친 뒤였다. 다만 밤새 쌓인 눈이 얼었는지 미끄러웠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준 채로 차 없는 도로에 서서는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댔다.

“ATM이….”

여기 어디쯤 있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ATM을 발견했다. 어제 집까지 걸어오며 봐두었던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무작정 ATM에 카드부터 넣었다. 오기 전에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해외에서도 쓸 수 있는 카드를 만들어 통장 계좌를 연결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통장 안에는 내가 모아둔 돈이 있었다. 모아뒀다기보다는, 엄마가 입학 전 4년 치 등록금으로 미리 준 돈을 보관만 해둔 것에 가까웠다. 학교는 국비로 모든 재학생에게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했다. 등록금이 필요 없어진 내가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됐다고 했다. 언젠가 큰돈을 쓰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가지고 있으라며.

이때까지는 큰돈을 쓸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수술 및 입원에 관련해서는 보험회사에서 대부분의 비용이 나왔다. 할아버지의 일이 아니라면, 그런 큰돈을 쓸 순간이 오긴 할까 막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까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이지훈의 룸메이트 형이 통화하는 걸 엿들은 순간에 깨달았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그랬기에 망설임조차 없이 지갑을 쥐고 뛰쳐나왔다.

“아….”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ATM은 한 번에 천 달러 이상을 인출 할 수 없다고 떴다. 나는 천 달러가 인출되어 나오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또 천 달러를 인출했다.

머릿속으로는 이지훈이 비행학교를 마치기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이지훈이 뉴욕에 온 건 2년이 됐고, 교육 과정은 총 3년이었다.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이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최소 1년 치의 금액이 필요했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넉넉하게 뽑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손은 돈을 인출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머리로는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와중에도 멀리 보이는 아파트 입구를 초조히 살폈다.

이지훈의 룸메이트 형은 아까 통화 상대방에게 샤워만 하고 나갈 거라고 말했다. 이지훈이 돌아오기 전, 그리고 이지훈의 룸메이트 형이 떠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조금만 늦어도 모든 게 엉켜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급했다.

“빨리. 빨리….”

입출구 앞에 손을 갖다 댄 채로 기계를 재촉하듯 중얼댔다. 돈을 넣을 봉투를 따로 가져오지 못한 탓에, 천 달러가 튀어나오자마자 그걸 뭉텅이로 접어 입고 있는 추리닝 바지 주머니 안으로 구겨 넣기부터 했다. 주머니가 무거워졌다. 1분, 5분, 10분. 시간이 지나감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천만다행으로, 돈을 다 뽑을 때까지 이지훈이 건물에 들어가거나 이지훈의 룸메이트 형처럼 보이는 한국인이 건물에서 나오는 광경을 보진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온 돈을 움켜쥐기가 무섭게 달렸다.

계단을 질주하듯 올랐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쉬지 않고 뛴 탓인지 두통이 일고 숨이 가빴다. 문 앞에 도착하고서야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을 고르던 나는 그러기가 무섭게 고개를 쳐들어야만 했다

“…어?”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집에서 나오려던 남자는 나를 발견한 순간엔 당황한 표정부터 지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말을 건 건 그였다.

“혹시?”

그가 몸을 반쯤 돌렸다. 손가락 끝이 아까 내가 누워 있던 이지훈의 침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동일 인물이 맞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내가 누군지를 확인하자마자 예의 바른 미소부터 지었다.

“아… 저 잠깐 씻으러만 왔던 거라 이제 나가요. 편하게 있으셔도 돼요.”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준 남자가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를 추슬렀다.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보이는 그를 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주머니 속에 뭉텅이째로 들어가 있는 지폐들을 계산했다. 그걸 꺼내 내밀었을 때 이 사람이 얼마나 당황할지도.

“저기요.”

누군가를 당혹스럽게 할 걸 알면서도 붙잡는 건, 원래의 나라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었고, 이지훈이 없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그의 앞에서, 나는 주머니를 빠르게 뒤졌다. 왼쪽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엎어둔 채로,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그 위로 빠르게 쌓았다. 남자는 갑자기 의미 모를 행동을 하는 나를 멀뚱히 지켜봤다.

하나, 둘, 셋… 일곱.

동그랗게 말린 묶음의 개수를 확인한 후, 손을 남자에게로 쭉 내밀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건 애써 무시했다.

“친구분과 통화하시는 걸 들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들으려 한 건 아닌데, 사실 문을 여실 때부터 깨어 있었고… 나중에는 지훈이랑도 관련 있는 이야기 같아서 듣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 한 박자 늦게 신음을 내놓은 남자의 태도가 어색해졌다. 아랫입술을 물며 실수했다는 표정부터 짓는 그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지훈보다 세 살이 많다고 했나. 우리보다 조금 더 어른인 덕분인지 그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포기가 빨랐다. 눈을 맞춘 순간에는 멋쩍게나마 미소 짓기도 했다. 자신의 태도에 따라 이게 그다지 큰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복기하듯.

“월세 이야기 들으셨구나. 그거 아직 지훈이한테도 얘기 안 한 건데.”

“네. 그런 것 같아서… 그래서….”

“…….”

“제가 대신 내고 싶어서요.”

두 번이나 돈뭉치들을 눈앞에 들이댄 나 때문에 그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한 눈치였다. 오묘하게 바뀌어 가던 그의 얼굴에 돌연 물음표가 떴다. 그는 내가 이지훈의 친구이고 통화를 엿들은 것까지는 알았지만, 내가 왜 이걸 이지훈이 아닌 자신에게 주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질문이 날아왔다.

“그럼 지훈이한테 직접 주시지, 이걸 왜 저한테….”

상황을 대강 파악한 그는 난감해 보였다. 처음 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싫은 것처럼 조심스럽긴 했으나, 이런 부탁이 부담스럽다는 의중은 충분히 전해졌다. 에둘러 거절을 당했는데도, 나는 손을 움찔할 뿐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내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을 눈치챈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시선이 돈뭉치에 박혀 있었다.

“대충 봐도 큰돈인데요. 한 달 치 월세라기에도 많아 보이고.”

“…일 년 치 월세예요.”

“네?”

“월세 오른 거, 그거 일 년 치 드리고 가려고요.”

놀란 표정을 보면서도 나는 물러서는 것 대신 오히려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어쩌면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엔 온통 이지훈뿐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나는 이 돈을 이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하고 가야만 했다.

“당황스러우실 거 알고, 저도 제가 초면에 무리한 부탁하는 거 아는데. 근데… 이거 제가 지훈이 주면 절대 안 받을 거라서요.”

“…아니, 그래도.”

“오해하실 수 있는데 이상하게 번 돈 아니에요. 이걸로 사기 치려는 것도 아니고. 안 믿기시면 제 번호랑 신분증도 드릴 테니 확인해보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냥, 그냥 받으셔서 지훈이한테 월세 올랐다고 말씀하지 마시고 대신 써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오늘 아침, 눈을 뜰 때만 해도 이렇게 누군가한테 애원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이상해 보이든 상관없으니 제발 내 진심을 믿고 이걸 받아주기만을 빌면서.

“저는 오늘 오후에 비행기를 타요. 가면 또 언제 지훈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제가 신경 써주고 싶어도 못 써주니까… 이거라도 해주고 가고 싶어서 그래요.”

긴장한 걸 티 내듯 손바닥이 땀으로 미끌미끌했다. 혹시 지폐가 젖을까 싶어 손을 바꾸면서도 남자를 초조히 응시했다. 그 와중에도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닫힌 문을 곁눈질했다. 이지훈이 나타나서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건 수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지훈과의 관계도 위기를 맞을지 몰랐다. 내가 저를 보러 온 곳에서 커피 한 잔 사는 것조차 싫어하던 놈이, 이 모습을 보고 괜찮을 리는 없으니까.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복도를 향해 멀어졌다. 안심하는 만큼, 불안해졌다. 당장이라도 이지훈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남자를 간절히 응시했다. 이지훈의 룸메 형은 이제 돈이 아닌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선을 긋던 남자가 거절의 말을 꺼내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품게 될 정도로.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던 그는 내가 말을 멈추고서야 입을 열었다. 미소조차 사라진 얼굴이 진지했다. 그는 내가 진심인 걸 눈치챘고, 그렇기에 진심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친구 자존심 상할까 봐 이렇게 몰래 주려는 거죠?”

“네. 그렇긴 한데….”

“알아요. 저도 그놈 자존심 센 건 아는데… 이렇게 몰래 내주는 거 알면 괜찮아할 놈이 아닌 것도 알아서.”

“…….”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이유만으로 몰래 내주기에는 금액이 크기도 하고… 지훈이 친구면 스물셋이죠? 아직 돈 벌 나이도 아닌데, 몇백을 이렇게 갑자기 써도 괜찮아요? 내 이야기 때문이라면 미리 계획했던 것도 아닐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요.”

어른스러운 충고였다. 이지훈이 이 형과 오래 룸메이트로 지낼 수 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내게 유리한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러는 중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는 점이 나를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저는 생각 더 안 해도….”

일단 내뱉기부터 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위해 두었던 거리마저 좁혔다. 가까워진 나 때문에 거리를 셈하듯 아래를 흘끔 보던 남자가 멈칫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물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이거 신고 나갔다 왔어요?”

나는 그를 따라 아래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내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음을 알았다. 시간에 쫓겨 뛰쳐나가기에 바빠 신경조차 쓰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눈길을 뛰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다.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만 쏠려 있었으니까. 무심한 주인을 탓하듯 슬리퍼 위로 삐죽 튀어나온 발가락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나는 뒤늦게 발을 들었다 놓으며, 머쓱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몰랐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아… 몰라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발을 뒤로 끌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의 룸메 형은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한 후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이게 어떠한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그와 차분히 눈을 맞췄다.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실내용 슬리퍼. 막 자다 일어난 꼴이지만 마음만은 꼭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면접을 앞둔 사람 같았다. 나는 그가 한 질문을 곱씹었다.

내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지금 이 형이 맞닥뜨린 상황처럼,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게 와서 돈을 한 무더기로 맡기며 제발 누군가한테 말하지는 말아 달라고 비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이 내게 애원했을 때, 내가 설득당할 것 같은 문장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걔가… 자존심 상하지 않는 게 저한테는 중요해서요.”

그런 문장 따위는 없다. 그렇게 할 만한 사람이 있을 뿐.

“어차피 제가 말 안 하면 되니까, 이거 준 거 평생 몰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늘 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을 하게 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이니까. 그것 외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주고 싶어요. 그래야 후회 안 할 것 같아서.”

이지훈이니까. 이지훈이라서.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뒤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뚝 끊긴 발소리가 다시 시작되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이지훈의 발소리가 아니며, 그렇기에 놈이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낼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이지훈은 룸메 형이 떠나고서도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내가 깨어 있을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부터 짓던 놈은 그래도 별말 없이 다가왔다. 들고 있던 큰 봉투를 내게 대뜸 내밀면서.

“이게 뭔데?”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봉지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은 놈이 내게로 뒤돌았다. 손에 들린 두꺼운 패딩을 확인한 순간에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 했지만 다가온 이지훈은 기어이 태그가 달려 있는 새 패딩을 내 어깨 위로 얹었다.

“야, 너. 이거….”

설마 이걸 사러 아침부터 나갔던 걸까. 그럴 필요가… 아니,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돈도 없었을 텐데. 가격표로 향하는 내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이지훈이 태그를 뚝 떼어버렸다. 동시에 패딩 지퍼를 잡아 끝까지 쭉 올리기부터 한 놈 때문에 순식간에 얼굴이 반이나 가려진 꼴이 됐다. 패딩의 모자까지 당겨 씌우고서야 이지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내 소원이야. 너 이거 입고 공항 가는 거.”

“…….”

“그러니까 ‘아니’, ‘별로’, 둘 다 금지.”

이지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침대에 앉은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아래로 굽혔던 상체를 편 놈은 곧바로 뒤돌았다. 내가 뭐라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쓰고 있던 후드티 모자를 벗는 놈의 낡은 점퍼 어깨 부근에 뭉쳐 있던 눈이 마룻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이놈의 징글맞은 눈은 대체 언제까지 오려고….”

고개를 돌리다 말고 징글이라는 말에 꽂힌 이지훈이 캐롤의 한 소절을 반복해서 흥얼댔다. 나는 이지훈을 더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감정을 창밖으로 보이는 눈 쌓인 거리 위로 힘겹게 밀어내면서.

첫날에 했던 말을 지키려는지, 이지훈은 공항으로 갈 때는 올 때와 달리 택시를 타길 고집했다. 콜택시까지 불러서 짐을 실었는데, 문제는 눈 오는 도로가 빚어낸 정체였다. 넉넉히 시간을 잡아 출발했음에도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도착했다. 비행기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탑승 수속과 보안검색대를 거치는 시간까지 더하면 빠듯했다.

티켓 발권 후 수화물까지 맡기고 돌아왔을 때, 이지훈은 출국심사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넓고 사람도 미어터지게 많은 공항에서는 쉴 새 없이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가이드라도 주려는 것처럼. 이지훈은 혹시나 그중에 내가 들어야 할 정보가 있진 않을까 걱정되었는지 방송이 나올 때마다 말을 멈췄다.

자그마치 세 번쯤 그 짓을 했을 때, 이지훈이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고개를 돌린 놈은 출국심사대 입구의 반대편 창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곧 하늘을 날 비행기들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비행기를 쳐다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씁쓸한 중얼거림을 듣고서야 그게 아님을 알았다.

“눈 안 올 때 왔으면 더 좋았을걸.”

이지훈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강풍 때문에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지 못했던 뉴욕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앞에서 그랬고, 자그마치 열 명의 사람에게 물어보고 정했다던 21번가 코너 레스토랑의 갑작스러운 휴무 소식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냐.”

나는 그때마다 했던 말을 지금도 또 했다. 이지훈이 그 말에 딱히 위로받지 않음을 알면서도.

적어도 이지훈은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웃긴 했으니까.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아니’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웃긴 모양이었다. 방금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웬일로 웃지 않고 그렇게 말한 날 가만히 보더니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지난 며칠간 질리도록 이어진 패턴임을 눈치챈 나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기부터 했다. 거절하듯 손을 홰홰 저으면서.

“아, 됐어. 하지 마. 이제 곧 비행기 타는 데 무슨.”

“한국 춥대.”

“그럼 겨울인데 안 춥냐? 거기나 여기나. 아, 됐다니까?”

온 힘을 다해 밀어내는데도 어째 더 가까워지기만 했다. 반동을 이용해 더 바짝 붙는 이지훈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깐 멈칫한 사이 목이 무거워졌다. 내가 쉽게 풀지 못하도록 매듭까지 짓고서야 이지훈이 뒤로 물러섰다. 제가 사준 패딩에 목도리까지 두른 내 꼴이 만족스러운지 웃던 이지훈은 입을 가린 목도리를 내린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멈칫했다. 곧이어 놈이 생각에 잠긴 낯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너 보니까 좋다.”

시끄러운 공항 속 앞에 선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목소리로 말하는 놈은 이상할 정도로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지훈이 차라리 그 말을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훈은 달고 사는 장난기마저 접어둔 채로 그 말을 진지하게 했고, 덕분에 그게 놈의 진심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계획했던 것만큼 구경시켜주진 못해서 솔직히 기분은 좀 구린데, 그래도….”

아래에 시선을 둔 채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이지훈은 그러나 곧 옅게나마 미소 지었다. 고개를 든 놈의 얼굴에서 희망이 읽혔다. 눈마저 빛내는 이지훈은 그 짧은 사이 실망하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 것 같았다.

“어차피 이게 끝은 아니니까. 다음에 또 오자.”

“…….”

“그때는 내가 태워주는 비행기 타고 와. 이번에 못 해준 것들까지 몇 배로 해줄 테니까. 뮤지컬도 매일 보고, 전망대도 가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하자.”

놈이 찾은 희망이 우리의 미래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3박 4일 내내 시끄럽던 마음이 풍랑을 지나친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아침에 월세 이야기를 듣자마자 지갑부터 들고 계단을 내려가던 때처럼.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냥 결과부터 받아들이게 됐다.

이지훈의 미래 안에 내가 있는데, 내 미래에 이지훈이 없을 수는 없다고.

고백하지 않고 참아도 되니까.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되니까. 나를 제 미래에 포함시키고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놈 옆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하지 않겠냐고.

사랑을 참으면 미래가 있는데. 이지훈의 옆에 있을 수 있는데.

“…….”

지금도 내가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 안에는 고백을 녹음한 MP3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뉴욕에 온 이후로도 그 MP3의 존재를 잊은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난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그걸 정말 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됐다.

어떤 비행기가 곧 게으른 승객을 두고 출발할지도 모른다는 안내 방송이 시끄럽게 울리는 공항에서.

“들어가라, 슬슬. 혹시라도 늦으면 개쫄려. 기다리더라도 미리 들어가 있는 게 나아.”

늘 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는 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아무것도 겁내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이지훈.”

그러고서야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곳에 온 후로 어떻게든 모른 척해주려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홀쭉한 지갑이나 낡은 운동화, 충혈된 눈은 너의 상태일 뿐 너를 정의하는 건 아니라고. 그것들은 견뎌낼 현재일 뿐 다가올 미래일 순 없다고.

“한국에서 비행기를 보면….”

내 등을 떠밀려던 이지훈이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언젠가는 저런 걸 직접 운전하겠구나 상상해.”

이건 고백이 아니라, 그걸 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게 된 나의 선언이다.

“근데 그것만 상상하는 게 아니라….”

“…….”

“네가 그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상상해.”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돌아와도 돼.”

‘나는’이라고 뱉으려던 주어를 바꾼다. 더 넓고, 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할 수 있는 문장을 이지훈에게 전해주기 위해.

“우리 다 알고 있으니까.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놀란 표정으로 듣던 이지훈의 표정이 차츰 허물어졌다. 놈이 결국엔 웃었다.

“와, 자주 못 보니까 지선욱이 이런 말도 다 해주네. 감동이다.”

대답을 고민하던 중 머리 위에서 또 한 번 보딩 콜이 시작됐다. 이지훈은 이번에도 그걸 무시하지 못했다. 굳어 있던 몸을 돌려 나를 밀어내는 몸짓은 이제 단호하기까지 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가, 인마. 이러다 진짜 늦겠다.”

비행기 표에 적힌 시간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이지훈의 말을 따라야 하는 때인 걸 아는데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미련이 남았지만 나는 애써 가방을 추슬렀다. 아마도 다시 볼 때까지는 마주 보고 건네지 못할 인사를 마지못해 꺼내며.

“갈게.”

“어. 도착하면 전화해.”

날 제시간에 보내겠다는 것에 집중한 이지훈은 열린 자동문 사이로 내 몸을 밀어 넣기에 열심이었다. 공항 직원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밖을 쳐다봤다. 아까 우리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이지훈이 보였다. 손이라도 흔들어주거나 눈인사라도 하려 했건만, 자동문으로부터 뒤돌아 있는 이지훈 때문에 그냥 힐끔대기만 했다.

똑같은 모자를 쓴 4인 가족이 입장한 덕분에,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나는 어느새 버릇이 된 것처럼 이지훈이 서 있던 자리부터 확인했다가,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놈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그 후로는 자동문이 열릴 때조차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한 번 더 놈을 봤을 때엔 이곳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부러 뒤돌지 않고, 밖의 놈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창문 좌석을 배정받았다. 오른쪽 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벨트를 매자마자 팔짱을 끼고는 잠들 준비를 했다. 나는 타원형 창문 안의 풍경을 오래 응시했다. 떠나기 전에, 이지훈을 품어줄 도시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서.

성장통은 성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 도시가 이지훈이 성장통을 끝낼 곳이리라고 주문 걸듯 되뇌며 가방의 가장 깊은 곳에 넣어뒀던 MP3를 꺼냈다. 이륙하는 순간, 전하지 못한 고백이 손을 떠났다. 나는 숨을 내쉬며 몸을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 * *

자신을 정우리라고 소개한 선배는 내가 반장님을 아직 뵙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혀부터 찼다. 일 말고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라느니, 두문불출인 상사 덕분에 범인이랑 숨바꼭질도 잘하게 된 것 같다느니. 흉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찬사에 가까운 설명을 줄줄이 뱉던 그는 이곳저곳을 들쑤신 보람이 없게 경찰청 바로 앞 흡연 구역에서 상사를 맞닥뜨린 순간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반장님! 신입이랑 아직 인사도 안 하셨다면서요? 거참, 위에 죽는소리 백번 해서 겨우 받아온 신입인데 끼고 어화둥둥 해주시진 못할망정.”

어제 발령이 났다. 그러니 이 부서의 분위기를 다 파악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동기들이 겁을 주던 것처럼 상명하복이 심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네 새끼냐? 잔소리는. 나도 바뻐.”

반장님이라고 불린 남자는 카키색 야상을 입은 채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회색 머리를 벅벅 긁는 와중에도 정 선배를 혼내기는커녕 변명하듯이 투덜댔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책임지고 챙겨주십쇼? 점심 먹이고 후식까지 풀코스로 사주시고요.”

“넌 왜 같이 안 먹고.”

“익산 건 담당자랑 만나서 밥 먹기로 했습니다.”

반장님이 미련 없이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짧은 눈인사를 남기고 정 선배가 멀어졌다. 그러기가 무섭게 시선이 돌아왔다. 어긋나는 눈높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그가 심드렁히 물었다.

“어화둥둥 해주길 원하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부터 저었다.

“아닙니다.”

“왜. 너 경찰대 수석이었다며.”

그가 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서 뺀 그가 어딘가가 간지러운 사람처럼 코를 찡긋했다.

“약간 호기심 이런 건가? 간부 되기 전에 개같이 구르는 곳에서 한번 체험이나 해보자?”

가벼운 혼잣말인데도 마주친 눈빛은 묵직했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눈길이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또 한 번 면접장에 선 기분이었다. 말을 고르던 나는 감을 따르기로 했다. 남자는 이런 정적인 집단의 우두머리라기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가공된 것보다는 날것을 선호할 것 같았다.

“호기심으로 일을 결정할 성격은 못 되어서요.”

“그럼?”

“구를 각오는 하고 왔습니다.”

잠깐의 정적.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린 반장님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그는 아쉬워하는 것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꽁초를 지근지근 밟는 그의 표정이 나쁘진 않았다.

“속 모를 놈 하나 들어왔네.”

“…….”

“다른 건 모르겠고, 깡다구는 있어 보여서 마음에 든다.”

칭찬이라기엔 애매한 말이었지만, 적어도 곤란한 질문이 더 이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밥 먹으러 가자며 앞장서던 그가 돌연 뒤돌았다. 내가 서 있는 흡연 구역을 눈짓하는 얼굴이 무심했다.

“야, 신입. 너 여기서 담배 피우면 좋은 게 뭔지 아냐?”

애초에 출근한 지 이틀 된 신입에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을 그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햇살이 바삐 내리쬐는 봄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려면, 지금 반장님이 하는 것처럼 눈 한쪽을 당연하게 찡그리게 되는.

반장님의 두 번째 손가락이 파란 하늘을 쿡 집었다. 저길 보라는 듯.

“여기서 하늘 보면 가끔 비행기 지나가는 거 보여.”

“네.”

“뭐야, 그 반응. 누가 벌써 말해줬냐?”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는 그를 향해 힘들이지 않고 웃었다.

“아뇨. 면접 날에 봤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보던 반장님이 웃었다.

“비행기 좋아하나 보다? 우리 막내가 비행기 볼 때마다 짓는 표정이네.”

막냇자식을 내 위로 겹쳐보듯 웃는 반장님을 따라가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시선이 닿는 반경 안에서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대고 입속말하듯 중얼댔다.

“…네. 좋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모를 하늘을 날고 있을 놈을 생각한다.

이지훈의 낭만이 안전한 곳에서 비행기는 난다. 더 멀리, 더 높이. 두 개의 엔진을 가지고, 혹은 그것이 없더라도.

오늘도 네 하늘이 낭만적이기를. 그리하여 나의 꿈 또한 안전할 수 있도록.

5x5

소독약 냄새 속에서 눈을 떴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급하게 몸부터 일으켰다. 동시에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더는 귓가를 가득 메우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여전히 내 옆에 이지훈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괜찮아?”

다행히 이지훈은 침대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놈의 뒤로 보이는 하얀 커튼 사이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이 응급실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링거대에 걸린 수액을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걸 맞아서인지는 몰라도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침대 시트에 프린트된 병원명을 보니 장례식장 바로 옆 응급실인 듯했다. 날 이곳까지 데리고 왔을 이지훈은 그새 옷까지 갈아입은 상태였다. 나는 놈의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와 차려입은 까만 정장을 보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부터 가늠했다. 그러다가도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이지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끝까지 맞고 가자. 강영수가 빈소 지키고 있어.”

일어나자마자 두리번거린 내가 누가 빈소를 지키는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도록 미리 설명해주는 놈을 물끄러미 보다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서울의 병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었고, 놈에게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았음에 감사했다. 장례식장 앞에서 이지훈을 본 순간 내가 간신히 지키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게 무너졌다. 멍한 머리로도 생각했다. 이제 더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이지훈도, 나도 생각에 잠긴 것처럼 말이 없었다. 둘 다 조심스러워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먼저 일어선 건 이지훈이었다.

“다 맞은 것 같다고 말하고 올게.”

커튼을 젖히려던 이지훈이 멈칫하고는 뒤돌았다. 놀란 눈과 마주친 순간 놈의 팔을 붙잡은 손끝이 흠칫댔지만, 그럼에도 힘을 빼지는 않았다. 내게 잡힌 팔을 내려다보던 놈의 눈이 천천히 내 얼굴로 올라왔다.

눈높이가 엇갈린 채로도 꽤 깊은 시선을 나눴다. 옷을 갈아입으며 물기를 털어냈을 놈의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빗속에서 보았던 그 흔들리는 얼굴이 내가 간절하게 바라서 벌어진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듯.

나는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지훈이 팔을 밀어낼까 봐 걱정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나는 괜스레 잡은 팔을 한 번 더 고쳐 쥐었다. 그러고도 밀어내지 않는 놈을 보고서야 말할 용기가 났다.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

“일단 장례가 끝나면. 네가 그때까지만 기다려주면….”

나는 말을 멈췄다. 손아귀에서 이지훈의 팔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그걸 깨닫자마자 숨이 막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을 맴돌던 시선을 붙잡은 건 이지훈이었다.

“그래.”

놈의 대답을 들으며 숨을 토해내듯 쉬었다. 동시에 알게 됐다. 이지훈은 나를 밀쳐낸 게 아니라, 링겔 주사가 꽂혀 있던 내 손을 아래로 내려준 것뿐이라는 걸. 이지훈은 그런 후에야 내 팔 위에 손을 얹었다.

“기다릴게. 끝나고 나서….”

“…….”

“그때 다시 얘기하자.”

눈이 마주친 순간엔 놈이 내 팔꿈치를 슬며시 잡았다가 놓았다. 옆에 있겠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몸을 아플 정도로 누르던 긴장이 풀렸다.

커튼을 젖힌 이지훈은 나가는 것 대신, 고개만 커튼 밖으로 뺀 채로 지나가던 의료진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옆으로 돌아온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목을 쥐어짜듯이 뱉었다.

“고마워.”

새벽 3시. 문상객이 거의 없는 시간대였다. 빈소에 돌아오자마자 맞닥뜨린 누군가의 뒷모습에 멈칫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 남자가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신발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강영수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뛰어왔다.

“선욱아. 괜찮아?”

혼비백산한 얼굴로 다급히 묻는 놈의 목소리가 꽤 컸는지, 움직이는 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서 있던 남자의 고개마저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뒤도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확인한 그 또한 그랬다. 우리는 거리를 좁힐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옆에 선 강영수가 내 팔을 당기며 소곤댔다.

“너 아는 분이야? 어떻게 오신 거냐고 여쭤봤는데도 대답이 없으셔서….”

대답은 내가 아닌 이지훈의 입에서 나왔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내쫓는 거든, 뭐든 도와줄 테니까 말해.”

이지훈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면서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것처럼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뭐래.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내쫓아.”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강영수를 본 이지훈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봐 봐. 누구 닮았는지.”

갸우뚱하던 강영수가 남자에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더니, 곧이어 입을 가렸다.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발을 뗐다. 그러기 전 눈이 마주친 이지훈을 향해서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그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에게 다가서는 일은 놀랍도록 쉬웠다. 단 세 걸음 만에 그의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는 그러고서도 그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다만 말을 걸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과 눈을 맞춘 채.

“나가서 이야기해요, 아버지.”

아빠와 장례식장 입구에 있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거리를 두고 앉은 우리 사이에는 두 명은 족히 더 앉을 공간이 있었다. 눈치를 보던 강영수가 가져다준 생수병 두 개만이 대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둘 중 누구도 거리를 좁히려 들지는 않았다. 벤치에 등을 댄 채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아빠는 어쩐지 멍해 보였다. 처마 밑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비싼 코트며, 시계, 구두 위를 적시는 순간마저도 피하지조차 않고 멈춰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린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내가 질문한 순간에야 아빠는 비로소 옆에 누군가가 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생각이라는 긴 통로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눈을 깜빡대던 아빠는 그 순간마저도 나를 보지 않았다. 목울대를 의미 없이 움직이던 그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눈치챈 사람처럼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엄마가 연락했다.”

아빠의 입에서 엄마 얘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던 터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잠시 멈춰 있어야 했다. 몇 시간 전 이곳에서 아빠 이야기를 하던 엄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엄마는 책임감이 없는 아빠를 너무 잘 알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했던 걸까.

사람들은 내게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을 말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그러나 가장 먼저 내 곁을 떠난 사람이 누누이 하던 말이 있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부탁이었어요. 아빠한테 연락하지 말라는 거.”

“…….”

“처음 아팠을 때부터… 의식 잃으시기 전까지요.”

“…….”

“모를 거면 끝까지 아예 모르고 사는 게 낫다고… 짐 떠안기 싫어서 떠난 사람한테 할 짓도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아빠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동요라도 하듯 그의 눈가가 떨리는 모습을 무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시려면 충분히 아실 수 있었겠죠. 저한테 물어보셨다면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우리 사이에는 남은 대화가 별로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아마 끝까지 그럴 것 같았다. 어떤 관계는 망치는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지만, 어떤 관계는 끝맺는 순간마저도 이것이 최선이라는 걸 실감하고 만다. 아빠와의 관계는 늘 후자에 해당했다. 어쩌면 아빠의 만류에도 짐을 싸 할아버지를 따라간 순간부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태안에 내려와 할아버지가 치워둔 아빠의 방에 들어섰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후 벽에 걸린 아빠의 졸업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아빠가 모든 걸 버리고 떠난 뒤에도 당신의 아버지는 이 사진 하나 버리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14년이 흘러, 또다시 태안에 선 나는 새삼스럽게 곱씹는다. 우리 셋은 모두 다르다는 걸. 같은 피가 흘러도, 같은 성을 가져도, 같은 식으로 도망쳐도.

아빠는 할아버지를 버릴 수 있어도, 나는 할아버지를 놓을 수 없었던 걸 깨달으면서. 할아버지는 책임지는 방식으로 자신이 아픈 걸 밝히지 않는 쪽을 택했지만, 나는 책임을 지기 위해 모든 걸 말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나는 아빠처럼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병원을 갔는데, 머리에 혹이 있대요.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기 전 수술해야 했던 혹이랑 비슷한 혹이요.”

고집스럽게 앞만 보던 아빠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게 돌아온 순간이었다. 아빠는 내가 한 말 중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까지 멍하니 벌린 채로, 조금 더 기다리면 내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리라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거대한 세계에 갑자기 떨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망연자실한 여행자처럼.

“유전적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

“크기랑 모양까지 비슷한 걸 보니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모르니까, 아버지도 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빠에게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래야만 했다고, 입술을 떠는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아빠의 물건 하나 버리지 못했던 할아버지 역시 그걸 바랐을지도 모른다고.

아빠가 평정심을 회복하기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 아빠의 눈가가 터질 듯이 붉었다.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니.”

아빠한테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수많은 곳을 헤매느라 정작 필요한 곳에는 너무나도 늦게 당도한 그 말을 곱씹으며,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먼저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수위로 일하시던 공장이 최정호 거였어요.”

“…….”

“할아버지가 의식 잃으시고 나서 공장에 짐을 가지러 갔었는데, 수위실 안에서 할아버지가 노트에 적어두신 숫자들을 봤어요. 이 주마다 한 번씩, 공장이 쉬는 날인데도 자꾸 출입문이 열렸다는 기록이 떠서 이상하게 여기고 혹시 몰라서 날짜를 기록해두신 거였어요. CCTV 기록도 따로 빼놓으셨고요.”

“…….”

“덕분에 증거가 됐어요. 할아버지가 기록해두신 날짜가 부산에서 잡혔던 최정호 부하 증언 속에 등장한 날짜와 일치했거든요.”

아빠는 이제 허공조차 보지 못하고 아래만 봤다. 나는 그 대신 그의 무릎 위에서 떨리는 손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끝맺었다.

“뭐가 옳은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

“저희 부끄럽게 하지 마세요.”

나는 그가 그 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굳이 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헤질 대로 헤진 하나의 끈이 완전히 끊겨 물 위에 떴다가 이내 심연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영혼의 무게를 덜었을 뿐인데, 할아버지는 아주 작아졌다. 옥색 단자 안에 들어가고도 공간이 넉넉히 남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뼈가 됐다가, 이내 조각이 되고, 종이 안에 싸일 수 있는 가루가 되었다. 나는 어떤 순간에 작별인사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기만 했다.

할아버지의 유골함은 고작해야 길이가 성인 남자 무릎까지 올 법한 네모난 공간에 들어갔다. 복도를 채운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투명한 진열장 너머의 유골함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마지막 눈인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옆을 보니 꽃을 달아두거나 유리창 안에 사진을 같이 넣어두기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준비한 게 없었다.

“선욱아. 이거… 이거 넣을까?”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는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퉁퉁 부은 강영수가 내게 꼬질꼬질해진 지폐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려 노력하던 놈이 한 소절도 잇지 못하고 포기했음에도, 나는 본 순간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강영수가 군대에 가기 전 할아버지가 준 용돈이었다. 강영수는 언젠가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돈은 쓸 수가 없다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적같이 늘 지갑 한편에 자리하게 되어버렸다고.

받은 순간부터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돈이니 어쩌면 할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을까. 할아버지의 손길만 닿았다고는 볼 수 없는 낡은 지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내 입을 마구잡이로 벌려 손을 넣고, 심장을 힘껏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게 남아 있는 한 줌의 슬픔마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엉 우는 강영수 대신 이지훈이 유리장에 달린 손잡이를 잡는 걸 지켜봤다. 진열장 문이 닫히고, 자리를 지켜주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진열장 앞을 뜨지 못하는 내가 마음이 쓰이는지 사람들은 자꾸 자신들과 같이 가자고 권했다. 날 걱정하여 건넸을 제안을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고 말하며 수없이 거절해야만 했다. 내일 꼭 집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받은 강영수 어머니까지도 떠나고 난 후에야 복도에 혼자 남을 수 있었다.

머뭇대면서도 유리장 위로 손을 올렸다. 각인된 할아버지의 이름을 보며, 내가 이제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건 이곳뿐임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정말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인사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잘 안 돼서 한참을 유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만 있었다. 차가운 유리가 내 손의 온도를 흡수한 것처럼 미지근해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행복하세요.”

더는 행복하냐고 물을 수 없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작별인사였다.

나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서 있었다. 내가 서 있던 곳 아래에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비칠 때까지. 그러다가 차츰차츰 사라질 때까지.

“선욱아.”

어깨를 쥐는 손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진작 간 줄 알았던 이지훈이 그곳에 서 있었다. 놈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놈이 그걸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것임을 눈치챘다. 아까처럼 진열장을 연 놈이 들고 있던 작은 종이를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지훈이 가져온 건 낡은 종이였다. 그 안에는 내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이지훈은 낮은 목소리로 사진에 대해 설명했다.

“영감은 이거 필요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놈의 시선이 유리장 안에 있는 내 사진에 박혀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지훈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자. 아빠가 너 기다려.”

이지훈의 아버지가 날 기다린 이유는 할아버지의 유산 처리를 위해서였다. 그는 내 앞으로 할아버지가 미리 맡겨두었다던 집문서와 통장들을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걸 내 앞으로 남겼다고 했다.

“이장님은 선욱이 니가 알아서 잘할 기라고 카셨다. 대신 집이랑 산 마지기 파는 건 아무래도 혼자 하긴 힘들 테니까네, 그런 것만 옆에서 좀 도와주라고.”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삼 일의 장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게 하는 과정이었음에도, 이렇게 그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믿었던 마음의 높이가 한 단계씩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던 문서들이 사망 신고 한 번으로 의미가 없어진다. 한 인간이 몇십 년간 살았던 흔적이 이렇게 쉽게 정리될 수 있다니. 인생이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다니.

어떻게든 멀쩡한 척을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아래의 서류에 시선을 둔 채로 의미 없이 입술을 달싹대기만 했다.

“당장 하라는 소리는 아이다, 선욱아.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가….”

아저씨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치였지만, 할아버지가 이런 중요한 일의 처리를 대신해서 맡긴 사람답게 설명하길 멈추지 않았다. 최근 할아버지의 집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하는 그는 내가 그러겠다는 말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대신 모든 걸 거뜬히 처리해줄 기세였다.

“아빠.”

아저씨를 멈추게 한 건 이지훈이었다. 균형을 잡아주듯 어깨 위를 단단히 누른 손을 느끼고서야, 나는 내가 몸을 떨고 있음을 알았다. 이지훈은 옆에 놓인 종이봉투에 아저씨가 내놓은 문서며 통장들을 차곡차곡 넣고 있었다. 아저씨가 만류하려 손을 뻗을 때마다, 족족 그 손을 밀어내거나 피하면서.

“나중에 해. 지금 말고, 나중에.”

“이런 건 다 때가 있는 기다, 이놈아. 선욱이 또 서울 올라갈 긴데 또 언제-”

“그래 봐야 한국이야. 세 시간이면 오는데 뭐가 걱정이야?”

“선욱이 바빠가 연락 안 되기라도 하믄-”

“그럼 얘 대신 내가 듣고 전해줄게. 됐지?”

말문이 막혀서 눈만 끔벅대는 아저씨를 두고, 이지훈이 단호하게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니 이지훈 집의 마당이었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이지훈이 종이봉투를 건넸다. 나는 말없이 받아들었다. 말로 꺼내지 않았음에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걸었다. 할아버지가 없는 집을 향해서였다.

집은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인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루 끝에 걸레가 반듯이 접혀 있는 걸 보고서야 이지훈 아버님이 그간 이곳을 관리해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마루의 끝에 비스듬히 기대어진 지팡이 하나가 보였다. 주인이 일어서질 못해서, 마찬가지로 일어설 기회를 갖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나는 못 박힌 듯 서서는 한참 그 지팡이만 바라봤다. 이지훈이 집 안 곳곳을 둘러보고, 보일러를 켠 후에 돌아와 날 내려다볼 때까지.

내가 뭘 보고 있는지를 확인한 이지훈은 손부터 뻗었다.

“올라와.”

나는 이번에도 입술을 달싹대며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나마 말할 수 있었다.

“…못 하겠어.”

거동이 불편했던 할아버지도 아니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리 없다. 그런데도 난 이 집에 사는 동안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거실로 올라설 수가 없었다. 한 발이라도 내딛는 순간, 내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간신히 제쳐두었던 슬픔이 모조리 쏟아질 것 같았다. 내게 이 집은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가 눈 한번 뜨지 못하고 누워 있던 순간마저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그랬기에 할아버지와 보냈던 모든 시간이 한 번에 몰려와서 나를 무너뜨릴까 봐 겁부터 내는 것이다.

이지훈은 내 말을 듣고도 손을 물리지 않았다.

“잡아줄게. 잡고 올라와. 그러면 돼.”

나는 시선을 들어 마루에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지훈과 눈을 맞췄다. 흐린 시야 속 흔들리지 않는 건 이지훈뿐이었다. 놈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난 후에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이지훈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신발이 발에서 떨어져 나간 순간, 이지훈이 엄지로 내 손등을 감싸며 가볍게 힘을 줬다.

날 마루 위로 올리기에 성공한 이지훈은 날 두고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다. 장롱을 열어 이불을 꺼내고 바닥에 펴는 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지훈은 기어코 할아버지가 자주 쓰던 목침까지 꺼내놓았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놈의 눈을 피했다. 이지훈은 이번에도 물러서는 것 대신 내게 손짓했다.

“들어와.”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무서운 거잖아.”

“…….”

“같이 있어 줄게.”

이지훈은 할아버지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굳이 팔을 끌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내게 말을 걸었다.

“갈수록 영감 냄새 안 날 거야. 맡을 수 있을 때 맡아둬야 돼.”

놈의 눈을 바라보며 홀린 듯 발을 뗐다. 문지방 앞에서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래도 방 안에 발을 디뎠다. 할아버지의 방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소지품들마저 주인이 마지막으로 놓아둔 장소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방을 찬찬히 훑다가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이지훈은 이부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침 대신 제 팔을 머리 뒤에 가져다 댄 채로. 여전히 하얀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의 이지훈은 재킷을 구겨 옆으로 밀어놓았다. 누가 봐도 바깥에 다녀온 티가 나는 차림 그대로 누운 놈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중이었다. 슬픔의 경력자처럼, 이렇게 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나는 놈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도록 무릎을 굽혔다.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옆으로 밀어두고, 이지훈의 옆에 일자로 누웠다. 할아버지의 목침은 딱딱했다. 이런 걸 어떻게 매일같이 베고 누워 있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이지훈이 난방을 틀어둔 덕분에 바닥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밤이었다. 이지훈은 이 시간까지도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도 봉안당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날 기다려주고, 밥을 먹인 후 아저씨한테 데려다줬다가, 지금은 나와 함께 누워 있었다.

나는 당연하지 않은 그 사실을 천천히 곱씹었다. 놈이 재촉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워.”

이지훈이 내게 해준 것들에 보답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말을 돌려준 순간에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것을 닦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지훈은 내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지 않았다. 모른 척 천장으로 시선을 돌린 놈이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우리 스무 살 때.”

주인을 잃어버린 집은 아주 고요해서, 이지훈의 말소리가 크게 들렸다.

“강릉에서 싸우고, 네가 나 다시 안 볼 것처럼 굴었을 때.”

“…….”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뭘 해도 더 나빠질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으면 너랑 이렇게 영영 멀어질 것 같고.”

“…….”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안 되니까 결국엔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도망 온 곳이 여기였어.”

이지훈은 내게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한밤중에 쳐들어와서는 영감한테 이불 달라고 하고, 영감이 자려고 누운 뒷모습에 대고 내일 고기나 구워달라고 조르고. 영감도 귀찮았는지, 나중에는 대답도 안 하더라고. 근데….”

잠깐 말을 멈췄던 이지훈이 피식댔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음 날 일어나니까 고기가 있는 거야. 영감이 아침부터 장에 나가서 사 왔더라고.”

“…….”

“영감 성격은 또 오죽 급하냐. 세수도 못 했는데, 사 온 고기 왜 안 먹냐고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아침 열 시부터 고기를 굽고 또 먹고….”

“…….”

“그러고 있는데 영감이 묻더라. 싸웠냐고. 누구랑 싸웠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짜고짜 싸웠냐는 거야.”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풀어놓던 할아버지의 일화들이 떠올랐다. 가끔은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것들. 이지훈이 풀어놓는 일화 속의 할아버지는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우리 싸운 걸 네가 말했을 리도 없고, 뭐… 그때 내 얼굴 꼴이 워낙 안 좋았으니까 영감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근데…

“우리 잔 다음 날, 새벽에 영감이 꿈에 나와서 너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더라.”

잠깐 말을 멈췄던 이지훈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중얼댔다.

“그때 알았어. 영감이 그때 싸웠냐고 물어본 게, 너랑 나한테 신경 쓴 거라는 거. 말한 적은 없어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도 싸울까 봐 마음 편히 가지 못하고 있는 거일지도 모르겠다고.”

“…….”

“일어나자마자 영감을 보러 가서는 널 책임지겠다고 했어. 왜냐면… 영감은 그런 소리를 들어야 안심할 것 같았거든. 아무래도 좀 옛날 사람이잖아.”

어떻게든 농담을 하려 들던 이지훈의 노력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그렇게 웃을 때조차도 눈물이 나곤 하는 시기라는 걸 증명하듯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이지훈이 할아버지의 앞에 서서 그 말을 했을 순간을 그려 봤다. 늘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올 때마다 가져왔던 꽃다발을 화병에 꽂고, 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서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이지훈은 몰랐겠지. 내가 그날 밤 자신을 밀어낼 거라고는. 자신 없다고,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하리라고는.

“그래서 그날 밤에….”

한참 뒤 입을 연 이지훈의 목소리는 낮았다. 적합한 말을 고르는 놈의 조심스러움을 피부로 느끼며, 나는 그날 놈이 겪어야 했던 일을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닌 천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같은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날의 내가 뱉은 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이유에 대해서.

나는 눈물을 삼켰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이지훈이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가로채듯 말을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

“…….”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고, 상담이 필요하니까 들르라고.”

최대한 절제해서 말하려고 했는데도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진정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흠뻑 젖은 볼을 훔쳐냈다. 내게 남은 용기를 모두 그러모은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도 날 보고 있었다. 뻣뻣이 굳은 놈은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병원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흔들리는 눈을 보며 내가 이 순간을 너무나도 두려워했음을 새삼 실감했다.

이지훈에게 내가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것, 어쩌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끝내는 네 곁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리하여 놈을 상처 주는 것.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렇지만 내가 방금 깨달은 건, 우리 중 늘 미래를 겁내며 도망친 건 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지훈이 방금 말해준 그 일화에서조차, 이지훈은 실제로 도망친 적이 없었다. 도망친 건 나였다. 잔인한 현재가 잃어야 할 미래보다는 나을 거라고 애써 위안하면서.

도망친 자에게 미래는 없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결국은 할아버지나 엄마, 그리고 나와 같은 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그렇기에 나는 지금이 내가 가진 마지막 기회임을 또 한 번 곱씹었다. 이지훈이 주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내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낼 수 있는 마지막 용기라고 주문을 걸면서.

“머리에….”

“…….”

“내 머리에 혹이 있대.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것과 위치랑 크기가 비슷해 보이는 혹.”

이지훈에게만은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 입으로 직접 이지훈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벌어질 일조차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감당하기 위해서.

“일단 혹이 악성인지를 검사하고 난 후에 입원해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어.”

이지훈은 설명을 꾸역꾸역 이어 나가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말을 끝내길 기다리는 놈은 침착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다. 이지훈의 턱이 떨리고 있는 걸, 나를 담고 있는 눈에 익숙한 절망과 불안이 차오르는 걸. 놈이 겁내고 있다는 걸.

나는 당장이라도 말을 멈추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를 바라보는 이지훈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걸 듣는데… 내가 할아버지한테 그 혹을 없애는 수술을 받으라고 설득했던 게 생각났어.”

“…….”

“이것만 받으면 끝일 거라고. 그렇게 해서 병원 생활이 싫다고, 짐이 되기 싫다고 말하기까지 한 할아버지를 기어코 설득해서 수술받게 했는데….”

이지훈은 나의 고집이 빚어낸 결론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수술 이후 5년간 깨어나지 못했다. 이 집에, 평생 누워 잠들었던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잘 때면 늘 옆으로 누워 잠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천장을 보고 뻣뻣한 자세로 누워 있어야 했다. 제힘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만 있다가 죽었다.

눈가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목침에 닿은 관자놀이 부근이 축축했다. 나는 어떻게든 말을 끝맺기 위해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짓씹었다. 침이 아프게 넘어가는 걸 참고 목울대를 움직여서, 울음이 아닌 온전한 말의 형태를 전하려고 애썼다.

“나는 너한테….”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어느새 나는 이지훈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네가 그 짓을 하게 둘 자신이 없었어.”

말을 멈춰가며 고친 보람이 없게 내가 가진 두려움을 표현하는 문장은 너무 단출하다.

“미안해…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너한테 어떻게 그걸 감당하라고 할 수 있겠어. 내가 다 봤는데… 내가 해 봤는데….”

횡설수설 사과를 이어가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나를 끌어당겨 안은 이지훈 때문에. 이지훈은 나로 인해 셔츠가 더럽혀질 수 있다는 건 상관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선욱아.”

나를 있는 힘껏 껴안은 놈이 내 머리를 조심스레 감쌌다. 그 안에 있는 뇌까지도 보호하듯이.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는 손길을 느낀 순간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떨고 있는 놈이 내가 한 말을 모두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때 아프지 말라고, 감당 못 할 것 같단 말 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품에 안고 있는 내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할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억눌린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놈의 손은 내 등을 다정히 쓸고 있었다.

“그거 잊어버려.”

얼굴을 보지 않고 껴안고 있는데도 이지훈이 나처럼 눈을 감고 있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다. 이지훈은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한곳을 노려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게 너면… 너랑 관련된 거면 뭐든 해.”

나는 축축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지훈처럼 눈을 뜨고는, 손을 위로 올렸다. 땀이 배어나 축축한 등을 껴안으며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마주했다.

“넌 늘 내 예외였고, 이번에도 다른 건 없어. 괜찮아. 나는 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괜찮아. 괜찮아. 다짐하듯, 위로하듯 중얼대던 이지훈이 나를 한 번 더 껴안았다. 뒷머리에 닿는 놈의 숨결이 느껴졌다. 우리는 자세를 바꿀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창밖의 달빛이 흐려지고서야, 이지훈이 몸을 떼고 이불을 끌어 올려줬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병원에 가자. 같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내리기가 무섭게 눈물을 훔쳐주는 손길을 느끼면서.

* * *

“반대야. 나는, 나는 싫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슨… 아냐. 선욱이 수술 못 시켜. 절대 안 돼.”

할아버지의 장례식 내내 하도 눈물을 흘려대 부르튼 강영수의 볼은 나을 새도 없었다. 이지훈에게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온 놈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날 본 순간 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며 다시 한번 설명을 요구하는 순간마저도 눈이 그렁그렁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해 보였다. 강영수의 의식보다 이런 비극적인 분위기를 몇 번 겪어 봤던 몸이 먼저 직감하고 반응부터 한 것처럼.

내 혹이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안 강영수는 곧장 수술을 반대하고 나섰다. 다행히 혹은 악성이 아니며, 그렇다 해도 크기가 커서 수술밖에는 답이 없다는 이지훈의 설명을 듣고서도 그랬다. 강영수는 할아버지의 혹 또한 그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놈은 그로 인해 빚어진 결과를 알고, 그걸 또 한 번 겪게 될까 봐 겁을 내는 거였다.

“애초에 정확한 진단인 건 맞아? 오진일 수도 있잖아. 다른 병원 갔는데 거기서는 혹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 혹이 맞대도, 약물 치료로 된다고 하는 병원이 있을 수도 있고. 다짜고짜 수술부터 할 게 아니라 좀 더 잘 알아보자. 우리 회사랑 제휴된 병원도 있어. 일단 거기부터 가자. 내가 예약 잡을게. 어떤 수를 써서든 최대한 빨리 잡을 테니까 일단 거기 가서도 상담해보고, 그러고 나서….”

“그렇게 낭비할 시간 없어.”

“…뭐?”

“떼써 봐야 바뀌는 거 없는 상황이니까 애처럼 굴지 말고 적당히 하라고.”

이지훈이 말을 이을수록 강영수의 표정이 무섭게 굳는 게 보였다. 나는 몸을 급히 일으켜 내게서 더 가까이 서 있는 이지훈의 팔을 급히 잡아 세웠다.

“이지훈.”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강영수에게 부러 냉정히 말하는 걸 알긴 해도, 정도가 심했다. 이지훈은 내가 뻗은 손에 주삿바늘이 달려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내 팔을 밀어냈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은 강영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강영수 또한 그랬다.

“너야말로 씨발, 말 좆같이 할 때 아닐 때 가려. 이 개새끼야. 네 일 아니라고 막말하지 말고!”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이지훈에게 사납게 다가선 강영수가 악을 써댔다. 폭발한 놈은 저와 달리 침착한 이지훈을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수술 잘못되면… 할아버지 때처럼 의식 안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게 되면 네가 뭘 할 수 있냐? 어? 어쩔 거냐고!”

이지훈이라고 모르지 않을 테다. 생판 남한테조차 싫은 소리 못하는 강영수가 이렇게 거칠게 구는 이유를.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는 놈의 바르작거림을 보란 듯 무시한 게 자신이니까.

그러나 제 어깨를 밀친 강영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걸 보면서도 이지훈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강영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을 뿐이다.

“가 봤어.”

“…뭐?”

“MRI랑 CT 결과 담긴 CD 들고 너네 회사 제휴병원부터,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이란 대학병원은 이미 다 돌았다고.”

강영수가 멈칫했다. 나 또한 그랬다. 할아버지 집에서 이지훈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서울로 올라온 후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에 대한 조직검사를 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회사에 병가를 내러 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지훈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놈이 나를 대신해 그런 일까지 하고 있어서인지는 몰랐지만.

“다 똑같은 얘기 했어. 수술해야 한다고. 개중 가장 빠른 일자에 수술할 수 있고, 관련해서 수술 경험도 많은 곳이 여기야. 심지어 그것도 갑자기 마음 바꿔서 수술 안 받기로 한 환자 덕분에 겨우 받은 일자고. 지금 안 받으면 언제 수술할 수 있는지 알아? 석 달 뒤야.”

“…….”

“…….”

“못 깨어나면 어떡할 거냐고? 손 놓고 있다가 석 달 안에 혹에 더 큰 문제라도 생기면 그때는 어떡할래. 혹이 더 커지면? 입원 미룬 그사이에 벌써 조금 커졌다더라. 할아버지랑 다르게 얘는 젊어서 세포가 활발히 움직이고, 앞으로 더 커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대. 그렇게 더 커져서 수술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어떡할래? 이 새끼 하는 일이라고는 범죄자들 잡는다고 이리저리 구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어디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럼 넌 어떻게 책임질 건데?”

끼어들 틈도 없이 쏟아내던 이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애써 참는 것처럼 이를 악문 놈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말을 이어갈수록 흐느끼던 강영수를 부러 보지 않으며, 명령하듯 말하기도 했다.

“내일모레면 수술할 사람 괜히 심란하게 하지 말고 나가서 울어. 다 울고 들어오든, 눈물을 참든 여기서는 울지 말라고. 알아들어?”

강영수는 이번만큼은 이지훈의 말을 들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훌쩍이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나는 저 멀리 소파로 걸어가 나까지도 외면하고 있는 이지훈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발치에서 강영수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어깨조차 들썩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영수야.”

불린 강영수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나는 강영수가 주먹으로 눈가를 훔쳐내는 걸 무력하게 지켜봤다. 말을 건 날 볼 자신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곳에 시선을 둔 강영수가 힘겹게 목을 가다듬었다.

“어어, 욱아. 나 어차피 회사 좀 다녀와야 하거든.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거여서….”

애써 평소와 같은 톤으로 밝게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강영수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결코 눈물을 멈추지 못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처럼.

“가서 반차도 내구 모레까지 휴가 낼 수 있는지도 보고 올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메시지 해. 알았지? 뭐든 괜찮으니까… 생각나는 거 있으면 연락해. 나 금방 올게?”

답도 듣지 않고 강영수가 몸을 돌렸다. 반쯤은 뛰쳐나간 놈 때문에 문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날 외면하고 있는 또 다른 놈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어.”

“…….”

“나중에라도 사과해. 너도 마음 안 좋을 거잖아.”

이지훈이 침묵한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반박하고도 남았을 놈이니 지금 이 침묵이 이지훈의 수긍이라는 걸 안다. 함께한 세월이 길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슬픔을 견뎌내는 서로의 버릇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가끔은 그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다.

이지훈은 고집스럽게 보고 있는 척을 하던 입원 안내문에서 시선을 떼고서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쟤가 울 때마다 그게 울 만한 일이라는 걸 확인받는 것 같아서 못 참겠어.”

문이 드르륵 열렸다. 고개를 내민 간호사가 보호자라는 단어를 뱉자마자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훈은 바로 가겠다며 답한 뒤 내게로 다가왔다. 강영수와 이지훈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아래로 내리고 있던 다리를 침대 위로 다시 올려준 놈이 그 위로 이불을 덮어줬다. 그 와중에도 눈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링거액을 흘끔대고 있었다.

“이거 들어가는 속도가 좀 빠른 것 같은데. 가서 물어봐야겠다.”

투액 속도를 조절하는 휠을 만지작대며 대수롭잖게 말하는 놈과 달리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간병인처럼 구는 놈이 그런 걸 언제 배웠고, 어쩌면 다시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가 나 때문인 것도 알고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 쉬고 있어.”

1인실 문이 닫히고, 나 홀로 남기가 무섭게 혼자 버티지 않기로 한 내 결정이 이기적이지 않았는지부터 돌아본다. 이지훈이 제집을 청소하듯 깨끗하게 닦아 먼지 한 점 없는 창틀에 오후의 따스한 빛이 스며드는 걸 보면서.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주문을 걸듯 속삭이던 이지훈의 절박한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그래, 괜찮아야지. 꼭 괜찮아져야지. 대답을 돌려주듯 다짐하며 주먹을 쥐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걸 이겨내야 했다. 이지훈을 위해서라도.

손가락 사이로 느리게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감촉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게 오른쪽 보조 침대에 누운 채로 내 손을 잡고 있던 강영수의 손에 힘이 풀려서였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침대 아래로 몸을 굽혔다. 무릎까지 내려가 있던 모포를 올려 덮어줄 때까지도 놈은 깨지 않았다. 수술 전 컨디션이 중요하다며 나를 8시부터 자게 하려고 용을 쓰더니, 그걸 이뤄서인지 얼굴이 이 병실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편해 보였다.

나는 우기는 강영수를 거들던 놈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반대편 보조 침대나 소파까지 훑었는데도 이지훈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도 결국 링거대를 쥐고 일어섰다.

오래 걷지 않아 이지훈을 찾았다. 이지훈은 1인실이 죽 늘어서 있는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곳 앞이었다. 벽에 달린 시계는 새벽 4시임을 알렸다. 놈의 뒷모습을 향해 걸으며, 이지훈이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걸 눈치챘다. 나는 말없이 링거대만 끌었다. 조용한 복도에 링거대에 달린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흘렀다. 기척을 들었을 거면서도 이지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끝내 뒤돌지 않았다.

언젠가 놈의 이런 뒷모습을 보았던 게 기억이 났다. 뉴욕 공항의 번잡한 출국심사대 앞에서, 3초에 한 번씩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보였던 모습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지훈은 한쪽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길 자신도, 고개를 들 자신도 없는 것처럼.

나는 이지훈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멈췄다. 이 이상 다가가면 이지훈이 싫어할 것 같았다.

대신 목소리를 내어 놈을 불렀다.

“…지훈아.”

이지훈은 대답하지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놈의 어깨 너머로 보름달이 보였다. 창을 향해 선 놈의 머리 위로 노란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이지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이거 진짜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형편없이 젖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놈이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꼭 옮은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알아.”

너무나 잘 안다. 가끔은 그래서 너를 병실 밖으로 밀어내고, 이 모든 것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해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안다. 내가 아픈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너는 지옥 속에 사는 기분일 테니까. 내가 여기서 널 책임지는 방법은 아프지 않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미안해.”

복도에 나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강영수에게 울 거면 나가서 울라고 말하던 놈이 병실에 없는 걸 눈치챈 순간부터, 내가 보지 못할 곳에서 이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이기부터 하는 놈에게로 발을 끌었다. 이지훈의 어깨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울 만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싫어 눈물조차 보이지 않던 놈이었다. 지금 저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놈과 나란히 어깨를 겨눌 정도로 가까이 섰다가, 끝내 놈의 앞에 섰다. 그래야 우는 놈을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지훈의 발밑에 뿌려져 있는 굵은 눈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학생 시절 놈이 마룻바닥 위로 떨어트린 그 슬픔을 걸레로 훔치기 힘들었던 것처럼, 이 슬픔 또한 쉬이 넘길 수 없다.

내 손길에 딸려온 이지훈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억눌린 숨소리와 함께, 이지훈이 내 팔을 더듬더듬 쥐었다. 놈이 힘을 준 모양대로 환자복이 구겨졌다.

“미안하면 어떻게든 살아.”

“…….”

“절대 죽지 말고… 나 버리지 말고….”

원망조차 애원의 재료로 삼는 스물아홉의 이지훈에게 남아 있던 열여섯의 이지훈을 본다. 매일 밤 아픈 엄마의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던 남자애가 죽음이라는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하던 모습을 상상하면서. 다시는 아픈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남자애를 불러낸 게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내 옆에 있어. 제발.”

나는 손을 뻗어 이지훈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놈이 할아버지의 방에서 내게 그랬던 것처럼, 젖은 볼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주문을 걸듯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수술은 11시에 시작된다고 했다. 강영수는 9시부터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옆에 있다면 제지했을 이지훈조차 보호자에게 할 설명이 있다는 부름에 불려간 탓에, 강영수가 냉장고의 음료수를 재배치하는 것만 20분째 보고 있었다. 일부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이유가 울지 않기 위해서임을 아는 나는 가만 보고만 있다가, 10시를 가리키는 시침을 보고서야 강영수를 불렀다.

강영수는 못 들은 척 뻐기다가, 내가 연거푸 세 번을 부르고서야 혼날 걸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머뭇대며 다가왔다.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대 시트 위를 툭툭 쳤다.

“할 이야기 있으니까 앉아 봐.”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려 내 눈치를 본 놈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내리깔기부터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마다 놈이 취하는 방식이었다. 지난 이틀간 모른 척 넘겨줬지만, 이 순간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강영수의 어깨를 쥐고, 고개를 기울여 눈부터 맞췄다.

“수술 몇 시간 걸리는지 들었어?”

어깨가 잡힌 채로도 필사적으로 내 눈을 피하던 강영수가 멈칫했다.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보는 놈의 눈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한숨을 쉬면서도 나는 놈을 달래듯 어깨를 서툴게나마 어루만졌다.

“내가 뭐 죽으러 가냐? 낫겠다고 수술받는 건데 왜 그래.”

강영수가 울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입을 삐죽대더니, 그것도 소용이 없었는지 이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어깨가 들썩이고,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나는 혹시 몰라 준비해 뒀던 티슈를 들어 놈의 볼을 훔쳤다.

“죽는다는 말 하지 말라고… 부정 타….”

“알았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아….”

“알았어. 안 할게. 약속.”

준비해 둔 티슈를 다 쓰고서야 강영수는 눈물을 그쳤다. 훌쩍대는 놈을 두고는 문부터 흘깃 확인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이지훈이 돌아오기 전에 강영수에게 일러두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채 닦아내지 못한 눈물방울이 맺힌 강영수의 턱을 손등으로 닦아주며,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예상 수술 시간은 여덟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더 길어질지도 몰라. 예상치 못한 출혈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혹 제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고. 할아버지 때도 그랬어. 설명 들은 것보다 더 오래 걸렸거든.”

“…끅, 왜 자꾸 무섭게 그런 말 하는데….”

“너네가 수술실 앞에서 밥도 안 먹고 계속 기다리고 있을까 봐.”

찔린 강영수가 딸꾹질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내려가서 밥 먹고 오라는 말에 뻐팅긴 전적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야 수술 전이라 뭘 못 먹는다 해도, 멀쩡한 식욕을 가진 성인 남자 둘이서 배도 안 고프다며 버티는 꼴을 보는 건 한 번이면 충분했다. 이 둘이 밤까지 수술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수술 끝나도 중환자실로 옮길 거고, 의식 회복하고서야 이 병실로 돌아와. 너네가 나 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소리야.”

“…….”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그러고 있으면 나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고 있어. 알았지?”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로도 강영수는 끊지 않고 들었다. 이게 내가 둘에게 최선으로 내놓을 수 있는 진심이라는 걸 눈치챈 것처럼. 말하면서도 문을 연이어 흘끔대는 날 깨달은 순간에는, 강영수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을 건네야 할 때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말을 해야 편한 마음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걸.

나는 눈이 마주친 강영수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강영수가 의아한 눈빛을 할 때가 되어서야 이지훈의 이름을 꺼낼 수 있었다.

“혹시 이지훈이 버티면, 네가 때려서라도 끌고 가서 밥 먹이고 자게 해.”

“…그 싸가지 없는 새끼 뭐 예쁘다고.”

“그래. 안 예쁜 거 나도 아는데….”

“…킁.”

“그 새끼 며칠째 잠을 못 잤어. 어제도 그랬고.”

그것까지는 몰랐는지 입을 다문 강영수와 눈을 맞췄다.

“나 너 믿고 수술하러 간다?”

훌쩍댄 강영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시울이 붉은 놈을 향해 팔을 벌려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영수가 품에 안겨들었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수술 잘 끝나면 뭐 할지부터 생각해. 좋은 생각만. 어차피 수술 잘될 거니까, 평생 아플 거 한 번에 몰아서 다 아픈 걸 테니까… 욱아. 나 어제 교회 처음 가 봤다? 다음 주엔 성당도 갈 거야. 너 그거 알지? 우리 엄마는 절 다니는 거. 수술 당연히 잘될 거지만, 그래도 더 잘되라고 기도하고 있을게. 너는 걱정 그런 거 하나도 안 해도 돼. 나일론 신자여도 뭐 어때. 소원 들어줄 신이 많으면 오히려 좋은 거잖아. 신들도 이해할 거야. 내가 얼마나 간절한지, 내가… 내가….”

닿은 몸을 통해 강영수의 불안함이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날 안심시키려 노력하는 놈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대듯 아팠다. 나는 강영수의 동그란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수술 잘 끝나면 셋이 여행 가자.”

셋이 여행 한번을 못 간다고 찡얼대는 걸 질리도록 봤으면서도, 이런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이 말 한번 해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응… 꼭. 꼭 가자, 우리.”

강영수는 내게 안긴 채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늦었든, 그건 상관없다는 듯이.

강영수가 얼굴을 씻겠다고 화장실로 들어간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병실로 돌아왔다. 이지훈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의료진들이 보였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손에 밴드 같은 걸 달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누웠다. 의료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자연스레 밀려난 이지훈은 창가 근처에 서 있었다. 나는 이제 침대를 옮기겠다는 의료진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이지훈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순간 겁내듯 망설이던 놈은 그러나 빠르게 다가왔다.

“왜. 떨려?”

침대안전바 위로 손을 올린 채 나를 향해 침착하게 묻는 놈을 보며 나 또한 손을 움직였다. 이지훈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놈의 손등 위를 덮었다. 내 손바닥이 품은 온기를 전해주기 위해.

내가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임을 알려주듯이 이지훈의 손을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지훈의 눈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를 본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어떻게든 살아서 다시는 놈의 이런 표정만은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나를.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지훈이 달고 사는 미소를 따라 하듯이.

“이지훈.”

“어.”

“수술 잘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지훈이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따라 지었을 때, 침대가 움직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강영수가 오른쪽 안전바에 붙었다. 여기서부터는 따라올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간호사 너머로,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닫히는 수술실 문 사이를 응시하고 있는 강영수와 이지훈이 보였다.

수술실 안은 추웠다. 그 와중에도 몸에 차가운 것들이 잔뜩 붙었다.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싼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몸에 모든 힘을 푼 채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 조명들을 응시했다.

영화에서와 달리 의료진들은 손가락을 눈앞으로 들이대지 않는다. 이제 마취 들어갈 거예요. 목과 쇄골 사이를 짚은 채로 설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나는 의식마저 가라앉기 전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꼭 일어나야 한다고. 그래야 이지훈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파란 장미의 꽃말을 찾아봤고, 네가 그걸 왜 사 왔는지를 이제는 안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취 상태에서 꿈을 꾸는 건 드문 일이니까. 꿈을 꾸면서도 그게 꿈인 것을 알아채는 일은 더더욱 드물고.

그러나 나는 그곳에 누워 있었다. 수술대가 아닌, 태안의 집이었다.

계절을 추측할 수 없는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의 방향을 추측하려 몸을 돌렸고, 그러자마자 건너편 방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우리는 문을 사이에 둔 채로 누워 있었다. 우리가 그 집에 살면서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할아버지가 등을 보이고 누운 게 아니라는 것 정도. 어쩌면 난 그 점 때문에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아챈 게 아닐까.

할아버지는 꿈에서도 목침을 벤 채였다. 겪어보니 딱딱하기만 했던 그 목침을 한 몸처럼 자연스럽게 벤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다디단 낮잠을 즐기는 중인지 표정이며 자세가 편안해 보였다. 나를 등지고 누워 있었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할아버지가 내 꿈에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 귀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원하는 만큼 한참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서야 목 끝에 걸려 있던 말을 건넸다.

‘행복하세요?’

내 물음에 할아버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선풍기도 없는데,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웃고 있었으니까. 눈이 마주친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내가 본 할아버지의 미소 중 가장 컸고, 그가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몸이 떨렸다. 나는 그 순간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어떠한 감각을 느꼈다. 황금색에 가까운, 생명력을 가지고 움트는 감정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나를 지켜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이건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하는 작별인사라는 것도.

‘오래 있다 와라. 쓸데없이 싸우지 말고.’

그 말이 익숙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그럴게요, 속으로 대답하면서. 할아버지에게 그 대답이 닿았음은 더욱 깊어진 그의 미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태안의 집이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태안이 아니었다. 다만 수확 전의 황금빛 들판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감각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손끝을 움직였다. 그 작은 행위가 어떠한 신호라도 되듯이 몸의 감각들이 앞다투어 깨어났다.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찾은 일. 의사로부터 수술이 잘되었으며, 다음 날이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은 일. 일반 병실에 도착한 후 잠깐 눈을 떠 발치에 초조하게 서 있는 강영수와 이지훈을 확인했던 일.

그리고 지금. 내가 눈을 뜨길 기다리며 이지훈이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이 순간.

“…나 보여?”

묻는 와중에도 이지훈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내가 눈을 감고 있을 때도 계속 그랬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훈은 할 말이 많은데, 그중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부터 지었다. 나는 놈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먼저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선반 위 먼지를 터는 것처럼, 목 안을 한참 정리하고서야 말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제… 점심 메뉴가 뭐였어.”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현미밥, 된장찌개, 어묵볶음, 양배추샐러드, 배추김치.”

자세히도 말해주는 놈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내가 이걸 확인하는 이유를 이지훈 역시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외웠으리라는 사실이 새삼 웃겨서. 생각해보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수술실 앞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질릴 대로 질린 강영수에게 기어코 내가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야 말았겠지.

고집쟁이를 상대하느라 고생했을 강영수는 보조 침대에 구겨진 채로 자고 있었다. 침대안전바 근처에 엎어져 있는 손을 보니, 오늘도 잠들기 전까지 내 손을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놈을 조금 더 눈으로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팔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오고 있는 진통제 때문인지, 아프지는 않은데 자꾸 잠이 왔다. 중환자실에서 의사가 이미 설명해준 부분이기도 했다. 수술은 길었고, 뇌 또한 지쳤다. 몸이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잠을 원할 거라고 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잠자는 간격이 줄어드는 건 좋은 징후라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눈을 뜬 지 얼마나 됐다고 자꾸만 붕대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눈이 감기려 했다. 내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얼굴 대신에 손에 힘을 줬다. 그럴 때마다 내가 눈을 뜨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손을 마주 꽉 잡아 오는 이지훈을 느끼면서.

뇌의 의지를 어떻게든 이기려 애쓰며, 입을 움직였다. 또 까무룩 잠들기 전에 이지훈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어.”

이지훈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놈의 목소리가 습했다.

“영감이 뭐래.”

나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꿈에서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우리가 싸우는 게 진짜 싫은가 봐….”

조금 늦게, 내 말뜻을 이해한 이지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에 완전히 빠져들기 전 손에 한 번 더 힘을 줬다. 방금 고개를 돌렸을 때 보았던 침대맡의 파란 장미를 떠올리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파란 장미는 거실 테이블 위로 넘어진 화병에서 튀어나온 그 파란 장미도 아니고, 병실에 꽂힌 이 파란 장미도 아니고, 햇살 좋은 날 선선히 웃는 이지훈에게 건네야 할 파란 장미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이제 우리는 정말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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