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방금 나간 오빠 친구분이요.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지선욱이 방금 나간 문을 흘끔대며 묻는 영은이 친구를 보는데 피식 웃음부터 났다. 친구는 끼리끼리라더니, 보는 눈도 비슷하네.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나를 따로 붙잡기까지 하며 묻는 걸 보니 나름대로는 절박한 모양인데,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지선욱을 오늘 처음 본 얘나, 지선욱을 옆에서 오래 지켜본 나나 놈의 연애 상대에 대해서는 똑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어린 양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 그거 모르는데.”
“헐. 왜요? 친한 사이 아니에요?”
“친해.”
“근데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그 물음에 얼마 전에 본 택배 상자를 떠올린다. 보내는 사람에 ‘김수빈’, 받는 사람에 ‘지선욱’이 적혀 있던 상자를. 잘 정리된 상자 안을 바라보던 지선욱의 표정을. 최대한 가볍게 누군지 묻던 내 말에 돌아온 가볍지 않던 대답을.
길어지는 상념을 의식적으로 끊고는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게.”
한 번 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마치 관심이라고는 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편의점을 나가자마자 지선욱이 보였다. 중학생 때 소각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나가던 나를 한심하게 보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담배를 개발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도 물고 있는 모습이 생경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바뀌는 것들이 있겠지. 내가 알던 모습보다 모르는 모습이 더 많아질 거고. 내가 그 사실에 준비되었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담배를 물었다.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담배조차 덤덤하게 피우는 놈을 돌아봤다.
보지 못한 기간 동안 키가 좀 더 크고, 살까지 내려 얼굴을 이루는 선마저 짙어진 놈은 꼭 내가 모르는 사람 같다. 얘가 겪은 성장통은 뭐였을까. 김수빈, 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에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에 누군가를 만났냐고. 그랬으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놈의 입으로 직접 들으면 많은 게 정리될 것 같아서.
“다 지난 얘기 해 봤자 뭐 해.”
“…….”
“헤어진 순간부터 남인 건데, 그 사람한테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선욱의 연애 상대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미뤄뒀던 생각을 뒤늦게 마주한다. 그러고는 의식적으로 이어지려는 생각을 차단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계의 일처럼 유리시켜야만 무뎌질 수 있으니까.
‘어차피 나중엔 다 헤어질 건데.’
그래도 이건 내가 알고 있던 지선욱의 면모이기도 해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사람이기에 다를 줄 알았더니, 그런 사람조차 끝났으니 이제 다시 볼 일 없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미련한 짓을 하는 걸까 봐 망설였지만, 답을 듣고 나니 물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얘의 삶에도 머물지 않고 지나갈 사람들이 있겠지만, 다 지난 얘기조차 하지 않겠다는 걸 보니 내가 그걸 마주하며 헷갈릴 일도 더는 없을 것 같고.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스쳐 갈 일이 없을 테니까.
“내가 남자야?”
“…그럼 여자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호기롭게 내뱉은 말에도 지선욱은 참 본인처럼 답한다. 한결같은 놈이 너그럽게 내미는 주먹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수긍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지를 지우길 참 잘했다고.
그래, 너한테 난 남자이기 전에 친구지.
“…맹세.”
나는 마주친 놈의 눈동자 안에서 더는 흔들리지 않는 나를 본다. 오래 곁에 있겠다는 목표를 이루려 다른 선택지를 모두 지우고 나니, 비로소 그 안에 머무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오래 네 눈에 비친 나를 확인하겠다는 말을 바꿔서 이야기할 방법을 찾았다.
“맹세.
* * *
발단은 지선욱 집에 가면서 면도기를 챙기지 않은 거였다.
“…….”
집보다는 일터에 있는 시간이 긴 지선욱은 그 사실에 저항하긴커녕 전기면도기마저 일터에 가져다 두길 택하는 놈이다. 그걸 씻고 나서야 깨달은 나도 참 나였다. 길었던 비행시간을 티 내듯 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이 거슬렸다. 혀를 차면서 일회용 면도기라도 찾으려고 화장실을 샅샅이 뒤지다가 세면대 아래에 붙은 작은 서랍을 발견했다. 몇 번 시선에 걸렸던 것도 같은데, 굳이 열어볼 일이 없었기에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별 고민 없이 서랍에 달린 고리를 잡아당겼다. 지선욱은 제집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확히 정해주는 편이다. 내가 외우고 사는 그 리스트에 이 서랍을 열지 말라는 건 없었다.
서랍에 면도기가 들어 있긴 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것들도 같이 있었을 뿐. 지선욱이 쓴 적 없던 향수와 누구와 쓸 작정으로 샀는지 모를 콘돔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헛웃음이 터졌다.
“깜찍한 건지, 끔찍한 건지….”
이런 곳에 이 세 개를 모아둔 건, 딱 봐도 지선욱이 했을 법한 짓은 아니다. 아마 지선욱이랑 만나는 누군가가 해둔 짓일 가능성이 컸다. 뭘 바라고 이런 짓을 했을지가 쉽게 그려져서 웃겼다. 영역 표시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경계하려거나, 혹은 경고하려거나. 목적은 빤한데 열어본 사람이 나라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향수를 코 가까이 가져왔다. 알 듯 말 듯 익숙한 냄새를 되짚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 지선욱 차에서 2년 전쯤 이런 냄새가 났었지. 그때 만났던 애인가 보네.
패키지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우리도 헤어졌는뎅? 욱이도 일 생겼다구 바로 갔어.’
회사에 복귀할 일이 생겨서 약속 중간에 자리를 떠야 했던 어느 날. 생각보다 빨리 일이 해결되어 약속 장소로 다시 돌아가던 길에 강영수에게 전화했다. 둘이 아직 약속 장소에 그대로 있다면,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좌회전 한 번만 더 하면 도착이었다.
‘회사 일?’
‘아닌 것 같던데. 뭔 일인지는 몰라도 급해 보이긴 했어. 야, 끊어. 나 데이트 장소 도착함.’
차를 돌리려다 말고 문득 시선이 멎은 창밖, 대로변에 세워진 자동차가 익숙했다. 번호판 숫자까지도 내가 알던 지선욱의 차가 맞았다. 바로 놈에게 전화를 걸려다 말고 멈칫했다. 차가 세워진 곳 바로 뒤에 있던 죽집에서 지선욱이 나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쥔 놈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한 손에 죽이 든 봉지를 든 채로 운전석에 탄 놈이 차를 끌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차가 향하는 곳이 지선욱의 직장이 아니라는 것까지 확인했을 때는 생각했다. 아마 그 급한 일은 내가 평생 몰라도 되는 일이겠다고.
스무 살 이후 연애 이야기는 아예 서로 꺼내지 않는데도, 지선욱이 누군가 만나고 있을 때는 대충 느낌이 온다. 지선욱에게 스며든 타인의 냄새를 가려내는 게 나한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내가 직접 듣고 목격한 것으로는 세 번째다.
처음은 영화관, 다음은 죽집, 이제는 화장실 안 서랍. 나이가 들수록 지선욱이 한 연애의 흔적을 발견하는 장소도 점점 사적인 곳으로 옮겨온다. 마지막은 입이 무거운 지선욱이 티 내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어떻게든 존재를 드러내겠다는 의지가 보여서 웃기기까지 했다. 그럼 다음은 라스베가스에서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고서야 알게 되려나? 피식대다 말고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친구의 화장실에서 마주친 전 애인의 흔적에 짜증 난 것보다는 서랍 속 면도기를 써도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에 가까운 표정은 그새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너랑 함께하는 미래가 안 그려져. 너도 그래 보이고.’
최근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착잡한 얼굴로 뱉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헤어짐의 사유가 될 만한 나이가 됐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 났다.
미래…
지선욱도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생기려나? 묻질 않아서 모르겠다. 하긴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한 게 9년 전이고, 그사이 연애를 여러 번 했을 테니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면도기를 꺼내지 않고 서랍을 닫았다. 편의점으로 가기 위해 옷을 껴입으면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다음에 또 이렇게 놈의 연애와 관련한 어떤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는 먼저 슬쩍 이야기를 해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까 브리핑 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캐빈크루용 입국심사대 앞에서 붙잡혔다. 퍼스트 클래스 담당으로 다른 승무원들보다는 조금 더 안면이 있는 사무장이었다. 카트 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뻗은 가늘고 긴 손가락이 뭘 의미하나 했더니, 대충 얹어둔 캐리어가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캐리어를 추스르는 그 순간마저도 나를 흘끔 살피는 그녀를 향해 뒤늦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이 있다기보다는, 조금 피곤하네요.”
“하긴… 이번에 차임 콜만 세 번이었죠. 잘 해결돼서 다행이긴 하지만.”
다행히 직전 비행 승객들이 유독 까다로웠던 관계로, 가벼운 호기심은 사라지고 일상과도 같은 업무 이야기로 돌아갔다. 안 보는 척해도 보는 눈만 수십 개인 곳이다. 쥐가 날 정도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마주친 모두와 인사하면서도 캐리어를 빠르게 끌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운전석에 앉는 순간에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룸미러에 미소조차 꾸며내지 않는 파리한 얼굴이 비쳤다. 삼 일 내내 이어진 악몽의 결과물이다.
수십 번은 들여다본 통화 내역 속 이름 세 글자에 신경이 갉아먹혔다.
‘우리… 연락하지 말자, 이제.’
지선욱이 내 연락을 피한 건 스무 살이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그때도 연락하지 말자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비록 오래 걸리기야 했지만, 놈이 먼저 전화해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하던 것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요새 누구를 만나는지 물어볼 수 있는 거였다. 내가 더는 헷갈리거나 잘못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9년 사이 바뀌지 않은 안내음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악몽이 시작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상황에 다시 놓이지 않아서였지 내가 달라져서가 아니라고.
지선욱과 같이 살기로 한 건, 언젠가는 휘발될 감정을 착각해 나를 버리려는 듯한 놈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함이었다. 내가 한참 전에 헷갈렸던 문제를 제멋대로 풀고 그 문제를 감당할 수 없으니 아예 버리기까지 하겠다는 놈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이미 풀었고, 답지까지 제거한 문제를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해설지라도 만들어서 설명하려면 일부러 묻어두었던 과거마저 뒤져야 했다.
다시는 이 문제를 풀지 않을 요량으로 같이 풀자고 떼를 쓰고 애원하듯 놈을 붙잡았는데, 지선욱이 못 이기듯 내놓은 문제지가 이상했다. 답지마저 내가 알던 것과 다르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거 네 문제지 맞아? 물으려고 쳐다보면 지선욱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을 짓고 날 봤다. 눈이 마주치면 멍해졌다. 때로는 도망치면서까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키려고 했던 건 그 눈 안에서 머무르는 것뿐이었는데, 걔 눈에 비치는 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볼 때면 속이 울렁댔다.
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옷 한 번 들춘 적이 없던 걸 후회하게 만드는 온몸의 흉터를 본 순간에는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지?
그저 네가 건강히 내 옆에서 오래 머무를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하나만 보고 다른 답지를 모두 지워버렸는데.
근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그 모든 게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이런 식으로 증명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내가 그걸 몰랐을 수가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어. 난 적어도 도망부터 치려 들지는 않았을 거야.
눈앞이 흐릿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고통 앞에서, 나는 스물아홉으로 서 있질 못한다. 열아홉이 되었다가 열여섯이 되었다가, 문제를 푼 적조차 없던 나이로까지 돌아가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차를 끌었다. 어디든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이면 됐다. 바다도 없고, 산도 없는 곳에 도착해서 바로 보이는 호텔에 체크인하기가 무섭게 잠을 청했다. 커튼을 치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좋았다. 악몽으로 깨어나도, 다른 악몽으로 그 악몽을 덮으려는 것처럼 바로 잠들었다. 나중엔 악몽마저 내게서 도망쳤다. 열 번 잠들면 다섯 번쯤은 나타나지 않았다.
접착력 없는 풀로 간신히 이어 붙였던 잠을 깨운 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나가니 문 앞에 선 직원이 눈에 띄게 안심한 낯으로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 전화를 드렸는데도 받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새 이틀이 지나 있었다. 추가 요금을 지불하며 근데 여기가 어디죠? 멍청하게 묻는 나를 본 직원이 당황한 낯으로 천안이라고 설명했다. 그 와중에 그렇게 태안과 먼 곳으로 오지도 못했구나. 허탈한 웃음부터 나왔다. 대충 씻고 면도를 하려다가 세면대 위에 놓인 일회용 면도기를 확인한 순간에는 한 번 더 웃었다.
그러게, 장소가 문제가 아니지.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야말로 문제지.
이틀 전 눈이 온 건 서울뿐이었던 모양이다. 겨울치고는 맹렬한 기세의 햇빛이 죽은 잔디마저 살리려는 것처럼 내리쬐는 걸 보며 걸음을 옮겼다. 사시사철 잘 버티는 나무로 심은 보람이 있는지, 소나무가 그새 많이 자랐다.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일주일이 멀다 하고 다녀가는 사람이 잊지 않고 챙겨서이기도 할 터다. 오늘도 비석 옆에는 꽃이 올려져 있다. 주말에 아빠가 또 왔다 간 모양이다.
올 때마다 주변의 묘목이 늘어나는 것 같다. 처음에만 해도 꽤 거리를 둔 채 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수목원 입구에 자리한 묘목들만 봐도 나무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게 보인다. 수목장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늘어서겠지. 그런데도 엄마의 바로 옆자리는 비어 있다. 아빠가 비싼 돈을 주고 미리 맡아둬서다. 대놓고 내게 말하진 않지만, 이곳에 온 아빠가 나무 아래의 작은 나뭇가지들을 치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 옆에 묻힐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한다.
그날이 오면 둘이 묻힌 나무 밑의 나뭇가지들을 치우는 건 내 몫이 될 거라는 것도.
“엄마. 영감이 요새 자꾸 꿈에 나오는데… 뭐 아는 거 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이별을 너무 빨리 겪었다. 꼭 죽지 않아도 사람끼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별을 죽음이라는 가장 잔인한 형태로 먼저 배워서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아픈 모습부터 상상했다.
“영감이 엄마 따라가려는 건가 싶어서 무서워. 누워 있던 것만 벌써 몇 년인데 갑자기 왜 그러나 싶고.”
무언가를 더 바라거나 기대하고 싶어지면 마음을 다잡듯 말했다. ‘괜찮아. 아프지만 않으면 돼.’ 어쨌든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암시라도 걸듯이.
“뭐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줘. 아니다, 나 말고 선욱이한테 말해주라고 엄마가 영감한테 텔레파시 좀 보내. 엄마가 보내는 거면 자다가도 받을지도 모르잖아. 선욱이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렇다고 말하진 않는데, 그냥 눈치가 그래.”
엄마는 눈치챘을까. 내가 이곳에 서서 이야기할 때마다 지선욱 이름이 어떻게든 나오고야 만다는 걸. 엄마는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적 없던 남자애가 내 인생에 가장 깊게 박힌 뿌리라는 걸.
“엄마. 선욱이가….”
어렸을 때, 엄마랑 영화를 보다가 묘지 앞에 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은 들을 수도 없는 말을 줄줄이 쏟아내는 장면을 볼 때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못 듣잖아.’ 시큰둥한 아들 옆에서도 포기라고는 모르던 엄마가 지치지도 않고 가르치던 사랑. ‘아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마음으로 하는 말은 어떻게든 전해지게 되어 있어.’
사실 나는 마음으로조차 말해 본 적이 없다. 말하는 순간 사랑이 듣고 도망갈 것 같아서.
“선욱이한테 내가 몰랐던 흉터가 너무 많아.”
잃지 못해서 사랑인 건데, 가지려고 하다가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아예 몰랐으면 몰랐지, 알고 나서도 모른 척은 못 할 것 같아. 아니, 못 해.”
근데 이젠 안 되겠어. 일단 부딪쳐 봐야겠어.
“나 걔 옆에 있어야겠어.”
이틀 만에 핸드폰을 켰는데, 가장 먼저 뜨는 알림이 선욱이 생일 2주 전 알림이었어.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혹시나 잊을까 봐 설정해 둔 거야.
근데 엄마. 내 핸드폰에 그렇게 해둔 사람은 걔밖에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지선욱밖에 없을 거야.
14년 동안 걔와 해보지 않은 건 ‘사랑’밖에 없어. 근데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라면, 그리고 놀랍게도 지선욱조차 꿈꿔본 적이 있던 것이라면.
“해볼게. 엄마 방식대로.”
끝을 담보로 한 마음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겠지. 잃을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도망치거나 숨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니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도 가장 단단하게 사랑했던 엄마한테 제일 먼저 말할게.
걔의 지나간 흉터가 될 바에는, 나을 수 있는 상처가 되겠어. 설령 그게 같이 다쳐야 하는 일이 될지라도.
* * *
예술가의 거리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그래도 동네 자체가 많이 발전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확인해 본 거리는 여전히 친숙했다. 벽돌로 지어진 것도 아닌데 아파트의 겉면이 황토색인 것도, 갤러리마다 관람객보다는 전시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인종은 제각각이지만 피곤해 보인다는 점만은 같은 유학생들이 길거리에 가득한 것도. 당시 2층에 살던 유학생 둘이서 어차피 티도 안 날 거라고 자신하며 외벽에 같은 색의 마카로 낙서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벽을 조금 더 지켜보다 벤치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1층, 2층, 3층, 4층…
5층의 가장 오른쪽 방, 창문이 두 개 붙어 있는 곳에 시선이 멈췄다. 커튼 대신 달아놓은 천에 가려 안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부의 구조가 눈에 보이듯 선했다. 한때 살던 곳이기까지 했으니까.
지선욱이 날 따라 저 방에 들어서던 순간에도 옆방의 드럼쟁이 놈은 드럼으로 영혼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벽이 얇은 걸 알면서도 그걸 이용해서 옆방을 향해 파스타 면이나 빌려달라고 소리치는 새끼들이 태반인 곳이라 익숙했는데, 지선욱은 놀랐을 거였다.
‘시끄럽지?’
‘아니. 별로.’
귀가 째질듯한 심벌즈 소리를 듣자마자 벽을 돌아보길래 물은 거였는데, 내 눈치를 힐끔 본 놈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걸 보고서는 웃었던 기억이 났다.
태어나서 가장 돈이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 같은 유학생들이 모여 살았던 8층 아파트는, 층마다 돈은 없어도 살인적인 월세를 감당할 낭만이나 악바리만은 그득한 놈들이 모여 살았다. 세탁기를 놓을 곳마저 아껴서 공간을 임대 놓고, 타인과 나눠 썼다. 우리 집 거실 반도 안 되는 크기의 방을 심지어 반으로 나눠서 침대를 두 개 놓고 월세를 백오십씩 내면서 살았다. 멋모르고 다섯 명이서 나눠 쓰는 방을 구했다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바로 다시 집을 구해야 했던 나는 그걸로도 만족했다. 방이 좁아서 룸메이트도 한 명이었으니까.
학교에 다니는 시간 빼고는 숨 쉴 틈 없이 일하는데, 훈련비 내고 월세랑 식비만 빼도 주머니에 남는 돈이 없었다. 지선욱이 날 보러 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잠깐 망설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오겠다는 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쪽팔린다고 해서 놓치기에는 아쉬운 기회였다. 한국에 들어가지 않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고, 가끔은 목소리만 들어도 울컥할 정도로 보고 싶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지선욱은 오랜만에 본 나를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게 신기한지 지하철에서도 자꾸 나를 흘끔대고 쳐다봤다. ‘왜?’ 그래도 오랜만에 본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깔끔히 면도하기까지 한 턱을 문지르며 뱉은 멋쩍은 물음에 ‘살 빠졌어?’라는 뜬금없는 물음이 돌아왔다. 빠졌나? 잘 모르겠는데.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서도 시선을 떼지 않던 지선욱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돌리며 내가 대신 들고 있던 캐리어를 제 쪽으로 당겼다. ‘내가 들게.’ 하면서.
…그랬지. 그랬었지, 우리.
그것도 기억하고 있으려나, 넌.
“이지훈?”
이어가던 상념이 반으로 접혔다. 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본 곳에는 10분 전 이곳에 도착했던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대로인 거 보니 우리만 늙은 기분 들지 않냐.”
내가 방금 보고 있던 황토색 아파트를 눈짓하며 씩 웃는 그는 이곳에서 나랑 삼 년간 같이 방을 썼던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코트에 숄까지 깔끔히 차려입은 멀끔한 남자의 낯 위로 일어나자마자 하얀 헤어밴드부터 이마에 걸치던, 그래 놓고는 운동 대신 사진을 찍으러 나가던 꽁지머리 유학생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졌다.
“전 잘 모르겠는데, 형은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땅 보러 가요? 멋을 심하게 부리셨네.”
“네 싸가지는 좀 시들어도 될 텐데. 늘 놀랍도록 싱싱해.”
가끔 연락은 해도, 각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진 않는다. 그래도 어색함이라곤 없는 건 한때 힘든 시기를 함께 견딘 자들의 동지애 덕분이겠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웃던 형이 앞장섰다.
“코너에 있던 피자집 기억나냐? 레스토랑으로 바뀌고 미슐랭 달았대. 예약해 놨으니 가보자.”
“저 C라는 연예인 차혁준 맞대. 기자인 친구가 말해주더라.”
정치인들이 외교할 때도 한류로 떠드는 이유가 있긴 한지, 2차로 온 펍 안에 딸린 여러 개의 TV 중 하나에서 한국 연예 뉴스를 틀어주고 있었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지 못한 형이 서버가 가져다준 피자를 받아들며 툭 던진 말에 고개를 들었다.
차혁준? 이름이 익숙한데, 성이 다르다. 예명으로 성만 바꾸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근데 애초에 그 새끼가 연예인을 할 수나 있나?
“그래요? 누군지 모르겠네.”
연예계 소식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형을 따라 TV를 힐끔 봤으나 이미 다른 소식으로 넘어갔는지 유명한 감독의 신작 광고만 나오고 있다. 하긴, 한참 전에 삶에서 떨어져 나간 새끼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생각해 낼 가치조차 없다.
피자를 먹으라고 눈짓하는 형도 딱히 큰 관심은 없는 눈치라서 화제를 전환하듯 물었다.
“갤러리 오픈 준비는 잘돼요?”
“뭐, 그냥저냥. 이제야 구색 정도 갖춘 것 같아.”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긴 휴가 후 첫 비행지가 뉴욕인 것도, 지선욱의 상자 안에서 그때의 뉴욕을 추억하게 만든 뮤지컬 표를 발견한 것도, 그로 인해 생각난 형과 때마침 닿은 연락이 이렇게 만남으로 이어진 것도.
몇 달 전 뉴욕에 들어와서 갤러리 오픈을 준비 중이었다던 형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다 대화의 틈이 생겼다. 그런 게 어색한 사이는 아니라 말없이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내가 맥주 한 잔을 해치우는 동안 피자를 해치우던 형이 막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친구 건강검진은 잘 받았대?”
그러고 보니 이 형한테 밥 사는 걸로 퉁치면 안 되는 일이 있긴 했지. 카드를 맡길 서버의 위치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살면서 이 형한테 부탁해 본 게 딱 두 번이었는데, 그 두 번 다 지선욱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네. 형 아버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연말이면 예약 힘든 병원인 거 아는데, 거의 바로 했어요.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이미 뭐 보냈드만 뭘 또 감사해. 아빠가 좋아하더라. 구하기 힘든 와인이라고.”
손사래 치며 인사마저 제대로 받지 않으려 드는 형은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대학병원 교수에 어머니가 평창동 갤러리 오너. 숨만 쉬어도 먹고 사는 집에서 굳이 사진을 공부하겠다고 뛰쳐나와 평생 해본 적 없던 고생을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제 갤러리만 두 개째 오픈한 지금까지도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긴 한 게 퍽 재미있었다. 공사 자퇴를 결심한 후 아빠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미국까지 건너온 나와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근데 친한 친구인가 봐?”
“왜요?”
“너 나한테 그런 부탁 잘 안 하잖아. 좀 의외긴 했어.”
냅킨으로 입을 닦던 형의 시선이 내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나른한 눈이 웬일로 빤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야? 여기 놀러 왔었던?”
들어보니 내가 자신에게 한 첫 번째 부탁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선욱이 뉴욕에 놀러 오는 게 결정되고 나서 그에게 친구가 며칠간 머물러도 되냐고 미리 양해를 구한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눈으로 날 잠깐 바라보던 형이 이내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둘 다 남자치고는 예민했고 시끄러운 걸 싫어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방을 쓸고 닦았고 굳이 규칙으로 정하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잘 데려오지 않았었다. 삼 년간 살면서 내가 데리고 온 사람도 지선욱뿐이었다.
사적인 질문을 잘 하지 않는 형이 이런 걸 묻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맞긴 한데, 형 그거 기억해요? 의외네.”
“나름 강렬한 기억이었으니까?”
“내가 누구 데려온 게 처음이라서?”
“아니. 네 친구 잘생겼잖아. 흔한 느낌도 아니고.”
“…….”
“피사체로도 괜찮겠다 생각했어서 기억해. 물어보기도 했는데, 어렵겠다더라.”
덤덤히 말하고는 고개를 내리는 형과 달리 나는 그러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보가 마구 엉켰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지선욱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종 겪게 된 일.
“…형 걔 본 적 없잖아요. 어떻게 물어봤어요?”
친구를 내 침대에서 재우겠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한 건데도, 형은 배려라도 하듯 그 시간 내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고맙고도 미안해서 나야말로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에 형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을 조용히 깜빡이던 형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렀다. 아… 실수했을 때나 나올 법한 한숨과 함께, 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이야기 있어요?”
“…야, 내가 헛소리했다. 사진은 네 책상에서 본 것도 같은데,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 참. 딴 사람이랑 헷갈렸어, 잠깐. 무시해.”
“형.”
삼 년간 그 좁은 공간을 함께 썼기에 이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다. 웬만한 일로 이렇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는 것도. 수습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묘하게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는 형은 어떤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지선욱은 알고 있을 일에 대해서.
이 형이라고 모를 리 없다. 내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을.
“저 며칠 전에 걔랑 키스했어요.”
“…….”
“형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라고요. 말해주세요.”
잠깐 굳은 것처럼 보이던 형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팔짱을 꼈다. 내가 남자랑 키스했다는 것에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라서 말한 거긴 하지만.
“사귀는 거야?”
“이번 비행 끝나고 돌아가면 이야기해보기로 했어요.”
“…….”
“무슨 얘긴데요.”
잠깐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는 형은 더 숨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표정이었다.
“네 친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에, 옷 갈아입으러 아침에 잠깐 집에 갔었어.”
“그날 형 본 기억이 없는데.”
“그럴 거야. 도착했을 때 너 없었거든.”
“…….”
“어쨌든 그날 새벽에 집주인한테 연락이 왔었는데, 내년부터 월세를 천 달러 올리겠다고 하더라고. 거의 통보였고, 못 내겠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배 째란 듯 구는 게 막막해서 친구랑 통화하면서 방에 들어갔는데… 네 친구가 어쩌다 그걸 들었나 봐. 나가려는 나 붙잡고, 대뜸 본인이 너 대신 일 년 치 월세 인상분을 미리 내겠다더라.”
말을 멈춘 형이 내 얼굴을 훑었다. 입술을 씹는 형은 무언가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감으로 그 대상이 지선욱임을 알았다.
“돈까지 뽑아와서는 내미는데… 솔직히 처음엔 안 받으려 했어. 부담스럽기도 하고, 상황 파악도 안 되고… 근데 네 친구가 그러더라. 너 주면 절대 안 받을 거라고. 그래서 부탁하는 거니까, 너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꺼낸 말소리마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형. 그래도… 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
“걔는 저한테 여태까지 그거 숨긴 새끼인데.”
“…….”
“형 아니었으면 저 이거 평생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스물셋의 겨울을 함께 추억한 건 고작해야 며칠 전의 일이다. 뮤지컬 표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지선욱이 생생했다. 한 번도 가까이서는 들여다본 적 없던 걔의 행복해하는 얼굴이 낯설어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얼굴만 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선욱은 내게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랬을 테니까.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형이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때 네 친구 표정 봤으면 그런 말 못 해.”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치고는 단호한 말투였다.
“너였어도 절대 못 했을 거야.”
뉴욕-인천 구간은 최단 루트로도 14시간이 걸렸다. 장거리 비행이 으레 그렇듯 조종사들의 업무 과중을 막기 위해 파일럿들이 두 조로 나뉘어 편성됐다. 이번 비행은 이착륙 담당과 순항 담당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으로 브리핑이 끝났고, 나는 이착륙 담당이라 이륙 후 일정 궤도에 진입한 걸 확인 후에 B조 PIC(Pilot In Command)에게 자리를 넘기고 벙크로 넘어왔다.
같은 조 기장은 이미 독실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닫힌 문을 보다가 옆의 독실로 발을 들였다. B조 부기장의 짐으로 보이는 태블릿 컴퓨터가 덱 위에 놓여 있었다. 치우는 것 대신 긴 좌석 위에 앉아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MP3를 꺼냈다.
“…….”
색이며 모양이 익숙한 MP3는 내 것이 아니었다. 요즘의 기준으로 촌스러운 디자인인데도, 낡진 않았다. 페이가 세다는 이유로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한인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설거지가 산처럼 쌓인 곳은 구석진 데다가 대부분 나 혼자만 있어서, 누군가와 통화하기엔 딱이었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도 로밍비만은 꼬박꼬박 내는 보람을 느끼곤 했다.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뒀던 핸드폰을 물 위로 빠뜨리기 전까지는. 그 이후로는 통화는커녕 플리마켓에서 3달러에 사 온 지지직대는 라디오나 틀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언젠가 지선욱이랑 통화하던 중 우스갯소리로 그 이야기를 했는데 웃지 않던 놈이 MP3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도 못 했던 건데 듣고 보니 괜찮을 것도 같아서 그럼 뉴욕에 올 때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렇게 건네받은 MP3는 비행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곁에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오면서는 따로 천에 감싸둘 정도로 아끼던 것이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지선욱이 건넨 상자 안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이 기기였다. 놀라서는 생각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그냥, 그때 너 주고 나니까 필요한 일이 생겨서 새로 샀어. 거기 들어가 있는지 몰랐네.’
지선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은 더 쓸 일이 없다며 내게 주고 가기까지 했으면서, 필요해서 다시 구매했다니. 거기다 이건 지선욱이 나를 정리하겠다고 나와 관련한 것들을 모아 건넨 상자 안에 있던 거였다.
그러나 뉴욕으로 가던 길에 열어본 MP3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플레이리스트를 비롯한 모든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지선욱의 말처럼 필요한 일이 있어서 샀고, 일이 끝나자마자 모든 파일을 지워버렸나 생각이 들 정도로. 지선욱 성격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이미 한 차례 살펴본 MP3를 한 번 더 켜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자꾸만 생각이 났다. 밥을 먹을 때도, 호텔에서 쉴 때도, 심지어 조종석에 앉은 순간마저도.
‘돈까지 뽑아와서는 내미는데… 솔직히 처음엔 안 받으려 했어. 부담스럽기도 하고, 상황 파악도 안 되고… 근데 네 친구가 그러더라. 너 주면 절대 안 받을 거라고. 그래서 부탁하는 거니까, 너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내가 그것처럼 아예 모르고 지나간 일이 있을까 봐. 지선욱이 내게서 기를 쓰고 감췄던, 그리하여 오히려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일이 있었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MP3 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중엔 습관처럼 메뉴 버튼부터 시작해 휠이라도 돌리듯 버튼을 돌아가며 꾹 눌렀다. 그래 봐야 어떤 파일도 나타나지 않을 걸 이미 알면서도.
한 시간째 그 짓을 하다가 MP3를 드디어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어?”
반쯤 누워 있던 자세를 바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눈을 의심했지만, 화면에는 정말 내가 보지 못했던 파일이 떠 있었다. 커서처럼 파랗게 반짝이는 글씨를 확인한 순간에는 멍해졌다.
음성 메모 001 (3:51)
음성 메모? 저번에 MP3를 켜 하나하나 눌러보았을 때는 확인하지 못했던 거였다. 나는 파일 위에 떠 있는 ‘휴지통’이라는 글씨를 확인했다. 있는지조차 몰랐던 기능이었다. 음악 파일을 옮기거나 지울 때는 보통 컴퓨터로 하곤 해서, 이렇게 기기에서 직접 삭제한 적이 없었다. 존재조차 몰랐으니 확인을 해 봤을 리 없었다. 아마 버튼을 마구 누르는 과정에서 내가 알지 못하던 루트를 통해 접속된 것 같았다.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바깥의 동태를 한번 살피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벙커 안에서의 음악 감상과 독서는 원칙적으로는 불가했다. 3분 51초의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벨에 시선을 둔 채로,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만 꼽았다.
분명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까지 빼며 한 번 더 확인했지만, 화면에는 0:13이라는 숫자가 막 지나고 있었다. 파일이 문제없이 재생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버튼을 잘못 눌러 녹음된 파일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운 모양이고.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김이 샜다. 그래도 이어폰은 빼지 않았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0:50. 정말 잘못 녹음된 건가 보다 생각하며 벨을 흘깃 확인했다.
[…큼.]
몸이 굳었다.
[아…]
짧은 신음만으로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던 목소리였다. 스물셋이었던 내가 핸드폰을 세제와 물이 섞인 곳으로 풍덩 떨어뜨리기 직전에 듣고 있던, 아무도 없는 방에서 불 꺼진 거리를 내다보며 로밍비를 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때마다 귓가를 울리던 그 목소리.
발표 전 목을 가다듬는 것처럼 단발성으로 짧게 울리던 신음이 끝난 건 1분하고도 30초가 지난 후였다.
[아… 이거 못하겠다.]
들어본 적 없던 말투로 지선욱이 말하고 있었다. 살면서 못해본 게 없는 애가, 자조 어린 목소리로 중얼댔다. 흩어지는 웃음소리 뒤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못하겠다는 말이 진짜인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던 지선욱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지훈.]
한 글자, 한 글자 곱씹듯이 말하는 것 같은 투였다. 나는 음량을 올렸다. 그런 나를 아는 것처럼 지선욱이 한 번 더 말했다.
[…이지훈.]
아까보다는 무겁게 들리는 부름이었다. 음량을 올려서인지, 아니면 지선욱이 숨을 크게 고르는 탓인지 숨소리가 한층 더 가까이 들렸다. 귀 기울여 듣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이걸 녹음할 당시 지선욱이 술을 먹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평소보다는 좀 더 자주 웃고, 솔직하게 구는 것이라는 걸.
난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기억해. 네 사물함 번호까지도.’
눈이 오던 날 새벽, 건너편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놈에게서.
[저번에 너랑 통화했을 때… 뉴욕으로 놀러 가도 되냐고 했을 때 있잖아.]
스물셋의 지선욱이 말을 시작한다.
[그날이 사실 할아버지 정기검진 날이었는데… 의사 말로는 할아버지 머리에 물혹이 생겼다는 거야. 다행히 악성은 아닌데 크기가 좀 크니까 수술하자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필요 없다고 말하더니 더 듣지도 않고 나가버리시더라.]
내가 모르던 이야기다.
[처음으로 싸웠어. 병원 로비에서 할아버지한테 대들었거든. 의사 말 못 들었냐고, 그게 잘못 터지기라도 하면 그땐 어떡할 거냐고.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그러더라.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죽을 거라고, 조금 더 오래 살려고 병원에 처박혀 있고 싶지는 않다고…]
지선욱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꼭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그러나 훌쩍대는 소리 하나 없이 놈은 말을 잇는다.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 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처럼.
[근데 갑자기 너한테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MP3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네 생각이 났어.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해보면 늘 그랬어. 평생 그런 거 모르고 살았는데, 언젠가부터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난…]
[너부터 생각해.]
지선욱의 말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안 그러려고 해 봤는데… 나도 노력해 봤는데…]
목소리가 뚝 끊겼다. 끝이 아니라는 건 지선욱의 가쁜 숨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다시 입을 연 지선욱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나한테 너 같은 사람은…]
숨소리가 말 사이사이마다 섞여든다. 이윽고 포기한 것처럼, 그것 말고는 더는 답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듯이 지선욱이 힘없이 속삭였다.
[너밖에 없을 것 같아.]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미안해. 좋아해서.]
침묵, 그리고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귓가가 텅 비었다. 음성이 끝났다는 신호를 눈치채고서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버튼을 다시 눌렀다.
[…큼.]
스물셋의 지선욱이 헛기침을 하는 부분부터 파일이 다시 재생된다. 나는 손을 들어 볼을 감싸 쥐었다. 얼굴을 감싼 손 사이로 눈물이 터졌다.
등을 툭 치며 옆에 앉는 메인 기장 제프는 캐나다 출신이었다. 나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데다가 몇 번 같은 조로 비행할 때 죽이 잘 맞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날 볼 때마다 퍽 친근하게 굴었다. 푹 잤는지 아까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교신을 마무리했다. 칵핏의 계기판을 확인한 그가 헤드셋을 쓰다 말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본다. 무언가가 막 떠오른 표정이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Heading Home(집으로)?”
내 고향을 기억하고 있는 게 퍽 자랑스러운 듯한 푸근한 미소를 바라보며 도착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봤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향이자 집, 그리고 한 사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봤다. 구름 사이를 헤치고, 정확한 좌표를 향해 나아갈 일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Heading Home(집으로).”
네게로 돌아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비행을 문제없이 잘 마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머릿속에 온통 지선욱뿐이었다. 집에 가면 놈이 있을 거라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일단 발부터 바삐 옮기고 봤다. 초조한 게 티가 났는지 크루 전용 출입국 심사 줄에서 마주친 사무장이며 크루들이 급한 일이라도 있냐며 말을 걸었다. 평소였다면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여유롭게 답했을 텐데, 그럴 정신조차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입국장을 서둘러 빠져나오다 말고 멈춰 선 건 누군가 말을 걸어서가 아니었다. 입국장 근처에 설치된 큰 텔레비전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인파를 헤집고 뒤돌아 나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남자의 사과를 대충 받아주며 그 뒤를 흘긋 봤다. 화면 안에서 앵커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일이 흔치는 않으니 내가 없던 사이 한국에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헤드라인에 절로 눈길이 갔다.
[배우 차혁준 기자회견 열어 “홍천 별장 사건” 폭로]
차혁준이라면 뉴욕의 펍에서 틀어둔 뉴스에서도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그에 대해 말을 얹던 형을 떠올리며 앵커 옆에 조그맣게 보이는 자료 화면을 응시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헤드라인에 보이는 홍천이라는 지명이 언젠가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러고 보니 경찰청 앞 국밥집에서 나오던 뉴스도 비슷한 소재를 다뤘었다.
이름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감독의 마약 유통책 논란을 다루는 뉴스에서 내가 관심이 있던 건 ‘마약’이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앞의 놈이 마약 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밥 먹듯 야근을 하고 가끔은 다치기까지 하는 걸 안 후라 더욱 그랬다.
‘저거 잡느라고 바빴냐?’
당시에 야근이 부쩍 잦았던 것도 그렇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질문에 지선욱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잠깐 고민하던 나는 결국 텔레비전 쪽으로 캐리어를 끌었다. 관련 사건이 이렇게 크게 다뤄지는 거면 혹시라도 지선욱에게 영향을 끼치게 될 일인지도 몰랐다.
“어….”
펍에서는 보지 못했던, 차혁준이라는 놈의 얼굴이 떠 있을 곳을 향해 옮기던 시선이 우뚝 멈췄다. 뉴스의 대략적인 얼개만 확인하고, 이름을 듣자마자 떠올린 놈과 저 배우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갈 길을 가려던 계획이 뭉그러졌다. 우스울 정도로 얼이 빠졌다.
…저 새끼가 왜 저기에 있지?
[배우 차혁준은 12월 3일인 오늘 오후 8시경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습니다. 지난달 15일 연예인들이 대거 연루되어 큰 충격을 안겼던 홍천 별장 사건과 관련하여, 수차례 언급된 이니셜 C가 자신임을 인정하며 관련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더불어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달리 마약 공급책으로 김명림 감독이 아닌 태항건설의 최정호 회장을 지목했습니다.]
내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듯 화면이 한 번 더 바뀌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 측면 사진이 아닌, 이목구비가 선명히 보이는 프로필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떴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뒤집었다.
15일? 왜인지 익숙한 날짜였다. 돌이켜 보다가 떠올랐다. 그날은 평소처럼 아침을 먹다 말고 바삐 나서야 했던 지선욱이 다시 돌아와 커피를 사주고 간 금요일이었다. 집주인 없는 집에서 강영수와 퐁듀를 해 먹었고, 밤에 눈이 왔고, 그걸 새벽에 일어나 받은 지선욱의 통화로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일이 없던 놈이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던 날.
‘이제는 안 아파?’
나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상처를 바라보는 놈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건 지선욱이 내가 최혁준과 싸운 그날에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14년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꺼내며, 내 이야기를 하며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기에 굳어서 놈을 바라보기만 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기억해. 네 사물함 번호까지도.’
설마…
아무리 뉴욕에서 지선욱이 내 일 년 치 월세를 대신 내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비행기에서 놈이 내게 전하기는커녕 지워버리길 택한 메시지를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 사건에 지선욱이 개입되어 있는 것조차 어쩌면 나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사고였다. 과도한 망상이나 다를 바 없고 우습기까지 하다고.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쥐어짜는 와중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와 생각의 저변을 건드리고 깎아내렸다.
지선욱이라면 그런 일을 하고도 내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사람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놈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늘 그랬던 것 같아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로 모래 위를 걷고, 남은 발자국마저 쓸려온 파도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도록 두는.
발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발자국조차 볼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놈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밖에 없겠지.
놓칠 뻔한 캐리어 손잡이를 힘주어 쥐었다. 몰려 있던 인파가 떠나간 텔레비전 앞이 한산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분명 처음에는 걸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뛰고 있었다. 공항 안을 채운 사람 중에 지선욱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당장 지선욱을 봐야 했다.
보게 되면 물을 것이다. 내가 착각이라 치부했던 일들이, 네게는 당연했던 적이 있냐고. 네가 착각이라고 믿었던 것이, 내게는 당연했던 것처럼.
* * *
어떤 공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몸을 직각으로 일으켰다. 찬물을 흠뻑 맞은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본 순간에야 내가 걸어 나온 공간이 꿈임을 알았다. 그것도 지나치게 생생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안한 꿈.
“…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꿈을 되짚었다.
오늘도 꿈에는 영감이 나왔다. 한 달 전부터 삼 일에 한 번꼴로 꿈에 등장하는 영감은 최근 들어 찾아오는 빈도수가 늘었다. 지선욱도 아니고, 내 꿈에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휴가 동안 자주 찾아가서 그렇다기에는 바빠진 요새보다 더 자주 방문했었던 시기에는 아예 나오지조차 않았다.
꿈에서 나는 스무 살 가을의 비 오던 날 밤처럼, 건너편 방에서 누워 있는 영감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영감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가 죽은 게 아니라 단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듯 오르내리는 날개뼈 부근을 바라보며 안심했을 뿐이다. 마치 영감의 병문안을 가서, 온기가 도는 손을 잡으며 안도감부터 느꼈던 때처럼.
오늘 꿈은 어딘가 달랐다. 나는 비 오는 날 밤이 아니라, 해가 쨍쨍 내리쬐던 낮에 영감과 마당의 평상 위에 마주 앉아 있었다. 허튼 말을 하는 법이 없는 영감이 아침부터 장에 나가서 사 온 고기가 보였다. 익숙한 구도와 풍경을 되짚다 말고 깨달았다. 실제로 겪은 적 있는 일이었다.
그날은 가을치고는 유달리 더웠었다.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땀이 났다. 영감은 몇 번 나한테 집게를 뺏으려다가 실패한 뒤 특유의 무뚝뚝한 낯으로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내가 구운 고기를 앞접시에 놔줘도 몇 점 먹다 말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딘가 지선욱이 떠오르게끔 하는 표정이었다. 괜히 찔려 눈을 피하는 나를 본 영감이 혀를 찼다.
‘…애도 아니고, 다투긴 왜 다퉈.’
지선욱이 나랑 싸운 것까지 털어놓을 놈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꼭 모든 걸 아는 듯이 말하는 영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볼을 머쓱하게 긁다가 이틀 전 B랑 싸우느라 남은 생채기를 건드리고서야, 그걸 보고 한 말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날을 똑같이 재현하는 꿈에서마저 그랬다. 정말 그 말을 들었던 당시처럼 정신을 차리자마자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내가 답하기도 전에 영감이 잔소리했기 때문이다.
‘걱정 안 해도 되게끔 잘들 지내라.’
‘…예?’
‘쓸데없는 일로 다투지 말란 소리다. 애도 아니고 다 큰 놈들이 무슨….’
이상하다. 영감은 그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몇 대 몇으로 싸운 것처럼 보이냐는 내 싱거운 농담에 못마땅한 신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내렸던 게 다였는데. 날 똑바로 바라보는 영감의 눈빛이며, 혀를 차는 모습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는 겹쳐지지 않았다.
꿈속의 내가 그 사실을 막 깨달은 것처럼 우뚝 멈춰서는 주변을 새삼스럽게 둘러본 순간, 마당이 일그러졌다. 고기가 놓인 판도, 2인용 반상도, 심지어 앞에 앉아 있던 영감의 구부정한 어깨까지도 어딘가로 빨려가듯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빛을 대신해 찾아온 어둠 안에서 나는 뻣뻣이 굳었다. 내가 엄마 옆에서 마지막으로 잠든 날, 꿈에 찾아왔던 엄마가 행복하라고 거듭 말하던 게 떠올라서였다.
떠나는 사람들은 꼭 명령처럼 들리는 소망을 빈다. 그 말이 자신이 이곳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운이라기에는 불안한 잔상이 오래 남는 꿈이었다. 영감이 말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쓸어 올린 앞머리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그것마저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날과 같았다. 아무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듯했다. 이틀 뒤에는 또 비행을 떠나야 할 테니까. 그 전에 영감이 괜찮은지를 확인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말 나온 김에 지금이라도 갈까. 겨울임을 증명하듯 햇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은 방은 어두워서 시간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베드 테이블 위의 시계를 확인하려던 시도는 이불을 나눠 쓰고 있던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멈췄다.
“…….”
곤히 잠들어 있는 하얀 얼굴을 본 순간에는 우습게도 몸의 모든 긴장이 풀렸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던 불안이 소리조차 내지 않고 꺼져 들었다. 일어나려는 계획을 바꿔 다시 누웠다. 세상 모르게 잠든 놈의 얼굴을 두 눈에 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혹시라도 깰까 봐 몸을 감싼 이불을 그대로 둔 채 뒤에서 껴안은 보람이 있는지, 지선욱은 이마 한번 찌푸리는 법 없이 얌전했다.
순순히 딸려온 몸에 바짝 붙어서, 지선욱의 목에 깊게 코를 박았다. 바디워시 향이 희미하게 남은 목덜미에 대고 공기 대신 피어오르는 살냄새를 호흡했다. 지선욱의 침대, 지선욱의 베개, 지선욱의 몸. 늘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잠에서 깨고 난 후에도 내 곁에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한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잘 믿기지 않아서 만지며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되새긴다.
그래, 우리가 어제 잤지. 알아 온 세월 동안 한 번도 이렇게 가까운 적은 없었지, 하면서.
눈을 뜬 놈이 나를 밀쳐낼 리가 없다는 걸 복기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지선욱의 이름을 불렀다.
“…선욱아.”
지난 14년 동안에도 수없이 불러본 이름인데, 이렇게 불러본 적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기 전과 후가 결코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꺼지지 않을 열을 올곧이 품고 나간 부름은 어딘가 낯간지럽다. 이상하고도 신기해서 한 번 더 불러볼 정도로.
“선욱아.”
말이 비틀댄다면 이런 꼴이 아닐까 싶다. 뱉으면서도 그 부름의 무게가 아직은 실감이 안 나 한 번 더 입속말로 중얼대다 고개를 들어 지선욱을 확인했다. 내가 베개에 팔꿈치까지 댄 자세로 본격적으로 자신을 감상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에는 피식 웃음부터 흘렀다.
“…너 이래서 출근하겠냐.”
나야 오프지만, 지선욱은 오늘도 별다를 바 없이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씻고 나오자마자 기절하듯 널브러진 놈에게 옷을 입히고 이불을 끌어 올려 준 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다. 그 일을 하는 내내 깨지 않던 놈은 기껏 입혀준 옷을 다시 벗긴대도 모를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뒤척이지 않고 얌전히 잘 자는 게 참 놈답다 생각했는데, 이불을 들자마자 드러난 흰 살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이불에 딸려 같이 올라간 티셔츠의 끝을 잡고 들어서 안을 살폈다. 어느새 눈에 익은 흉터들 사이로 내가 남긴 흔적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놈의 하얀 피부 탓에 더욱 도드라진 흡입의 결과물들에 민망하길 잠시, 상체와 달리 비교적 깨끗한 하체가 아쉬운 걸 보니 나도 참 미친 새끼라는 생각을 했다.
애새끼도 아니고, 혈기 왕성한 짓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그래도 목 부근은 깔끔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개를 저으며 티셔츠를 내려줬다. 지선욱의 몸 위로 이불을 한 번 더 꼼꼼히 덮어준 순간에야 확인한 전자시계는 지금이 여섯 시임을 알리고 있었다. 꽤 이른 시각이라, 영감을 보러 병원에 잠깐 다녀온대도 지선욱이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는 아래를 봤다.
“선욱아.”
아까와는 달리 들으란 듯 지선욱을 부르며, 정성 들여 놈의 몸을 감싸놓은 이불부터 젖혔다. 빈자리에는 내 몸을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이불만큼 부드러울 리 없는 딱딱한 맨몸이 낯선지, 처음으로 이마를 설핏 찡그리며 뒤척이려는 놈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 꼭 껴안았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이 온기만은 남아 있길 바라며.
“나 영감 보러 병원 좀 다녀오려고. 너 출근하기 전엔 올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밥은 차려두고 갈게. 먼저 일어나면 먹어.”
귀에 대고 속삭이다 말고, 놈의 뒷머리가 눌린 걸 발견하고 웃음이 터졌다. 혹시라도 드라이기 소리를 듣고 깰까 봐 수건으로 조심조심 누르듯 말려줬던 어젯밤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될 터다. 잠든 지선욱은 몰라도, 지선욱 옆에서 잠들었던 나는 알 수 있는 것들. 지선욱이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보일 리 없는 모습들.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눈을 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이토록 감성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인지 몰랐다. 잠을 자는 공간에 그치던 침대가 지선욱의 냄새가 가득하다는 이유로 떠나기를 주저하는 곳이 됐다. 지선욱한테 출근하지 말고 같이 이 침대에서 하루 정도는 더 보내자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제는 허기진 이들처럼 서로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드느라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연인에게 허락된 이 공간을 벗어나지 말자고. 직장 생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마저도 하지 않았던 유치한 생각을 접어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음을 굳게 먹은 보람이 없게 옆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지선욱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옆자리가 빈 것도 모르고 여전히 잠자기 바쁜 놈을 본 순간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짓궂은 마음이 들어 무릎을 굽혔다.
지선욱의 잠꼬대하는 버릇이 생각나서였다. 최근 들어 아침잠이 부쩍 많아진 놈을 깨우며 알게 된 것이기도 했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이름을 부를 때는 대답도 안 하면서,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며 딱딱하게 보채듯 지선욱이라고 부를 때에만 희미하게나마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몇 번 그러고서야 지선욱의 얼굴에 대고서도 딱딱하게 뱉을 수 있었다.
“지선욱.”
“…예….”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온 맥 빠진 대답에는 웃음부터 샜다. 눈도 뜨지 않은 상태로도 부름에 반응하듯 일단 대답부터 하고 보는 놈의 버릇은 아마 일하면서 생긴 것 같다.
그 사실이 안쓰러워서 부러 만들어낸 목소리의 날카로움이 한풀 죽었다.
“지선욱.”
봐 봐. 이렇게 부드럽게 부르면 또 대답 안 하지.
코앞에 있는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번 더 목을 가다듬었다. 놈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질 만큼 귀 가까이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하기에는 우스운 말을 했다.
“지선욱.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
“…와, 이건 또 대답을 안 하네?”
투덜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놈을 한 번 더 불렀다.
“지선욱.”
이번에는 대답을 보채듯 볼도 슬쩍 문질러 봤다. 간지러운지 눈가를 찡그리던 지선욱의 입이 열린다. 예예…. 두 번 대답하는 모습이 꼭 먹고 떨어지라는 것 같았다. 그게 우습고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놈의 볼에 결국 입술을 갖다 붙였다. 볼의 점 위에 마지막으로 입술을 쿡 박듯이 부딪치고는 유치한 소동을 마무리하듯 말했다.
“어. 나도 너 좋아해.”
자는 애 데리고 잘하는 짓이다. 자조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가려다 말고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얌전히 자는 놈을 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본인이 잠꼬대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놈이니 내가 한 말은 기억하지 못할 게 당연했고, 혹시라도 내가 돌아오기 전에 깬다면 빈 옆자리를 보고 놀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메시지를 남기려다가 그러려면 간밤에 꾼 영감의 꿈이 불안했다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만 썼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침대 아래에 널브러져 있던 지선욱의 바지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가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웃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지선욱이 깨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영감은 엄마 병문안을 올 때마다 꽃을 사 들고 왔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다. 있는 꽃도 필요 없다고 가져다 버릴 것 같은 사람이 먹고사는 일과는 하등 관련 없는 꽃다발을 직접 돈 주고 사 오기까지 하다니. 웬만한 건 자급자족하는 영감은 손재주가 좋았다. 동네 사람들의 세간살이를 고쳐준다고 집마다 불려 다니기 바쁜 아빠가 공구를 쓰는 법을 배운 것 또한 영감으로부터였다.
생각보다 병문안을 오며 꽃을 들고 오는 사람은 잘 없다. 비타민 음료며, 과일 바구니는 병실 구석에 쌓여가는데 화병 안에 꽃이 꽂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영감이 주는 꽃다발을 받을 때 유독 더 기뻐 보였다. 우리 아재가 보는 눈이 있다며, 매번 달라지는 꽃다발에 코를 박고는 킁킁댔다. 꽃다발을 건네준 영감이 한 거라고는 침대 끝에 꼿꼿하게 서서 엄마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가끔 몇 마디 대꾸하는 것이 다였는데도,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종일 싱글벙글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영감은 엄마에게 꽃다발을 줌으로써 바깥세상을 안긴 거라는 걸.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풀꽃을 꼭 주변부에 두르고는, 매번 색이 다른 꽃들을 중심부에 가득 박았다. 그 꽃다발은 위로보다는 축하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그 꽃을 볼 때만큼은 환자가 아닌 것 같았다.
더는 꽃을 살 수 없는 영감을 대신해, 이제는 내가 꽃다발을 안고 간다. 언젠가 영감이 일어난다면 머리맡에 꽂혀 있는 꽃을 확인하고, 누군가가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며. 병원에서 멀지 않은 꽃집은 주인과 안부를 나눌 정도로 자주 들르는 곳이 됐다. 일주일에 두 번쯤은 새벽부터 꽃시장에 다녀온 사장님이 일찍 가게를 연다는 것 정도야 무리 없이 알 정도로.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은 열려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꽃보다는 풀냄새에 가까운 향이 코를 찌르듯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잎이 커다란 나무를 옮기던 사장님이 나를 내다봤다.
“우리 단골님 오셨네?”
에구구, 몸을 일으키는 얼굴에 자리한 친근한 미소를 따라 하듯 웃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바쁘시네요.”
“하루 이틀인가, 뭐. 오늘 꽃 상태 좋은데 잘 왔네. 늘 하던 것처럼 해드려?”
확인하듯 묻는 사장님의 손 사이로 지난번에 병실에 가져갔던 것과는 종류가 다른 꽃이 들려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능숙하게 꽃을 쥐는 그의 뒤로 신문지에 쌓인 꽃들이 가득 보였다. 슬쩍 보아도 종류가 다양했다. 구경하듯 하나하나 훑던 시선이 파란색의 꽃 위에서 멈췄다. 잠깐의 망설임은 고개를 돌린 순간 자취를 감췄다.
“저거 장미인가요?”
포장지를 주름지게 접던 사장님이 뒤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파란 장미. 싱싱하지? 상태가 좋길래 평소보다 좀 많이 업어왔어.”
그의 말처럼 신문지에 싸인 장미는 싱그러웠다. 장미잎 사이로 물방울이 보일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를 뒤늦게 눈치챈 듯 사장님의 시선이 흘끔 나를 스쳤다.
“저걸로 해드려?”
이미 반쯤 완성된 꽃다발을 든 채로 묻는 그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바로 바꿔줄 기세였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뒤돈 그가 꽃다발을 얼추 완성한 것을 본 순간에야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파란 장미로도 꽃다발 하나 더 만들어주실 수 있죠?”
“어이고, 병문안을 두 번 가시는 날인가 봐?”
“아뇨. 장미는 병문안에 가져갈 건 아니고.”
“그럼?”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들르면서도 한 번도 병문안용 외의 꽃다발을 사간 적이 없던 내 요청이 의외인가 보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사장님의 얼굴에, 그제야 내가 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다. 어젯밤을 지났기에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지선욱이 받아줄 테니까.
‘안 망했어, 우리.’
‘우리’가 망하지 않았다고 해줄 놈과 함께라면 앞으로도 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려고요.”
장미가 남자 사이에 건네기에는 퍽 간지러운 꽃이라는 이유로, 그걸 포기할 필요는 없다. 졸업식 날 가득 품에 안았던 꽃다발 중에 놈이 사진을 찍기 위해 쥐었던 하나의 꽃다발이 내 것이라는 사실에 아닌 척 기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나는 그냥 지선욱이 파란색을 조금 더 좋아하는, 그리고 어쩌면 그 파란색보다는 나를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놈이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예상치 못한 답인 것처럼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장님이 한 박자 늦게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거면 내가 또 배로 신경을 써 줘야지!’ 배를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뒤돈 그의 손에서 크고 작은 가시가 다듬어진다.
꽃다발을 안아 들고 나선 거리는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을 한 꺼풀 벗겨낸 모습이었다. 코트가 가리지 못한 곳을 파고드는 추위를 무시한 채로 병원의 입구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파란 장미를 안은 지선욱의 표정이 얼른 보고 싶었다.
영감은 다행히 잘 자고 있었다. 가끔은 지켜보는 사람의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긴 잠이었다. 그러나 그게 자고 싶어서 자는 잠이 아님은, 방금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던 지선욱의 얼굴을 봐서 알았다.
미동조차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몇 시간 전 영감이 내게 말을 했던 모습이야말로 정말 꿈이어서 가능했던 일임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꿈이 아닌 현실에서 영감이 말을 하는 모습을 다시 볼 일은 없으리라는 것도. 얼마 전 영감의 병실을 다녀간 아빠의 착잡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닌 척해도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까맣게 물들었을 지선욱에게는 직접 묻지 못하고 담당 의사를 찾아간 아빠는 다녀오더니 영감에게 시간이 오래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지선욱의 옆에서 놈이 다가올 끝을 준비할 수 있게 잘 챙겨주라고 전하면서.
의자를 끌어 앉았다. 시트 위에 힘없이 놓여 있던 손은 따뜻했다.
“영감.”
영감이 깨어 있었다면 오히려 하지 못했을 일이다. 앞에서 영감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일도, 살이라고는 없는 주름진 손을 힘주어 쥐어 보는 일도.
“선욱이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 버틴 거 알아.”
옛날 사람인 영감은 책임지는 방식으로 사랑을 했다. 그에게는 책임질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먼저 떠난 아내, 그리고 우연찮은 기회에 그에게 다시 온 손자. 그가 미련을 가질 만한 대상도 그 둘뿐일 터였다. 혹을 제거하는 수술이 잘 끝나고 순조롭게 회복 중이던 영감이 예고 없이 찾아온 뇌졸중에 혼수상태가 되었을 때, 병원에서조차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고전했다고 들었다. 그들이 착잡하게 내놓은 전망에 따르면 영감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에 들어온 내가 병실에 서 있는 지선욱의 표정을 본 순간을 기억한다. 보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했다. 어쩌면 영감은 지선욱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버틸지도 모르겠다고.
영감이라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손자를 혼자 남겨두고 가진 않을 테니까.
놀랍게도 그 예상은 맞았다. 영감은 그 후로도 5년이란 시간을 버텼다. 병원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었고, 지선욱은 그 사실에 희망을 거는 것 같았다. 둘은 서로가 있어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만 있어서.
무엇이 버티고 버티던 영감으로 하여금 더 버틸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영감이 아빠도 아니고, 내 꿈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다.
‘걱정 안 해도 되게끔 잘들 지내라.’
‘…예?’
‘쓸데없는 일로 다투지 말란 소리다. 애도 아니고 다 큰 놈들이 무슨….’
영감은 한 번도 나한테 지선욱과 어떻게 지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집에 놀러 가면 밥상에 수저를 하나 더 놔주고, 갑자기 찾아와 자고 가겠다고 하면 베개와 이불을 내주긴 했어도.
어쩌면 영감은 그때부터 내가 어떻게든 지선욱 옆에 붙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꿈에 찾아와서도 그런 말을 하고 가는 것이다. 앞으로 붙어 있을 건 뻔하니, 대신 싸우지만 말라고.
한 번도 직접 들어보지는 못한 잔소리를 곱씹으며 영감의 손에 이마를 기댔다. 온기만 남은 손에 매달린 채로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는 솔직히 영감이 더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영감 말고 누구한테 지선욱 흉을 봐.”
장거리 비행을 나가기 전엔 늘 병실에 들렀다. 떠나 있는 동안 하지 못할 이야기라도 풀어놓을 심산으로 영감을 붙잡고 이것저것 말했다. 지선욱이 본인의 입으로는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이었다. 지선욱이 이사를 했다는 소식부터, 먹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선욱 집의 냉장고를 열어보고 놀랐다는 소식, 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일에 미쳐 있냐는 투덜거림까지.
분명 혼자만 미친놈처럼 떠드는데 이상하게도 가끔은 영감이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게 잡힌 손이 움직이는 듯도 했다. 꼭 지선욱 이야기를 할 때만 그랬다.
“그게 너무 힘든 거면… 꼭 가야 하는 거면….”
타고나길 신을 믿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닌데, 빠져나가는 온기를 부여잡겠다고 절박해지는 이런 순간에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대놓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도 듣고 있다고, 그러니 말해도 된다고.
“내가 선욱이 책임질게.”
그러니까…
“마음 편히 가.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또 한 번 손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 그 느낌을 받은 순간 병실로 불렀던 의사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게 떠오른다. 놀랍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은 신기한 존재라, 그렇게 믿고 싶다는 이유로 가끔은 감각마저 꾸며낸다. 촉감도 그 감각 중 하나고.
뒤에 남은 사람의 환상통에 지나지 않을 촉감마저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꽉 쥔 채로, 갈라진 목소리로나마 다짐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 괜찮으니까.”
내가 책임질 거야, 선욱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병문안을 간 적은 없어서, 병원에서 지선욱네 집으로 오는 시간대가 하필 러시아워와 맞물린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9시 남짓한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집에는 당연하게도 지선욱이 없었다. 야근이 잦은 부서라서인지, 가끔은 9시가 아니라 10시까지 느지막이 출근하는 일이 종종 있길래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오늘은 그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 날인 모양이었다.
텅 빈 침대를 확인하고서도 괜히 주변을 맴돌며 흐트러진 옷가지나 줍다가 더 할 게 없어서 거실로 나왔다. 들어오자마자 내려놓은 파란 장미 다발만이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도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욕실이나 싱크대에 담긴 밥그릇을 통해 놈의 동선을 그려볼 수 있다는 건 좋았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따로 온 연락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라도 걸고 싶은데 아침마다 정신없이 나가기 바쁜 놈이 오늘 아침에는 몇 배로 더 바빴을 것을 생각하면 괜히 미안했다.
다행히 아침에 보내둔 메시지는 확인한 모양이었다. 메시지 확인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보고서는 아래에 이어 썼다.
1 오전 9:12 출근 잘했어?
1 점심시간에 시간 나면 통화 좀 하자.
1 오전 9:13 목소리 듣고 싶어.
화면이 까맣게 물들기 무섭게 시선이 꽃다발로 돌아갔다. 이건 아무래도 퇴근 후에야 전해줄 수 있겠지. 아까 꽃집에서만 해도 싱싱해 보였던 꽃잎이 그새 좀 시든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화병이 있을 리 없는 집을 둘러보다가 아예 밖으로 나왔다. 장을 보는 김에 쓸 만해 보이는 화병도 같이 사 왔다. 꽃다발째로 화병에 꽂힌 파란 장미를 잠깐 보다가 못 이기는 척 확인해 본 핸드폰은 여전히 잠잠했다.
많이 바쁜가? 벌써 점심시간인데. 걱정부터 하다가 평소 놈의 연락 패턴을 그려보고는 목뒤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바쁜 것 같으니까 이따 연락해 봐야겠다. 퇴근할 때 데리러 가도 되냐고도 물어봐야지.
-욱이? 오늘 연락 못 했는데, 바빠서. 왜?
겨우 연락이 닿은 강영수의 주변이 시끄럽다. 한 사람이 낼 리 없는 소음들이 줄지어 쏟아지는 순간부터 강영수 옆에 내가 찾는 놈이 없으리라는 걸 반쯤은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통화를 끊지 못하는 건 이게 내게 남은 하나의 동아줄이기 때문이었다.
거실 카펫 위를 정처 없이 맴돌던 발은 베란다로 향했다가,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단지 안으로 진입하는 차 번호판을 확인한 순간엔 다시 거실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목이 탔다.
새벽 1시였다. 지선욱을 보지 못한 지가 어느덧 하루가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야근이 일상인 놈이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렇게 초조함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 건 종일 놈에게 한 연락 중 답을 받은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아침부터 틈틈이 보내둔 메시지는 이 시간까지도 읽지 않음 표시만 남아 있고, 여러 번 걸었던 전화도 매번 연결이 될 수 없다는 신호음만 듣고는 끊어야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는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선욱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나를 대놓고 피하던 때를 떠올리며 이것도 별것 아닌 일일 거라고 애써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를 피하던 그때와 지금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참지 못하고 찾아간 경찰청에서도 지선욱의 차를 보지 못했고,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들른 영감의 병실에서도 지선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차를 찾으러 인천공항에 가서도 놈의 차가 내 차 옆에 잘 주차되어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강영수마저 아무것도 모른다면 내게는 이제 남은 게 없다.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셨지만 얻은 수확이란 건 지선욱의 직장 후임으로부터 들은, 어쩌면 지선욱이 외근을 나간 건지도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두통으로 지끈대는 머리를 짚은 채로, 이를 악물었다. 집중해야 했다.
“오늘 따로 일정 있다고 이야기 들은 거 없어?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말해 봐.”
-뭐? 안 들려. 잠깐만, 좀만 기다려. 아, 네네. 과장님. 저 이거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 가지구. 네네. 좀 있다 그쪽 테이블로 갈게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영수 주변이 조용해졌다. 비로소 술이 좀 깬 목소리의 놈이 되묻는다. 선욱이 뭐?
“연락이 안 돼, 지선욱이.”
-하루 이틀이냐, 선욱이 일한다고 바쁜 거. 나 저번에 이틀 만에 답장받은 적도 있는데 뭐.
“일하느라 연락이 안 되는 게 아닌 것 같아.”
-뭔 소리야.
“오늘 지선욱 경찰청으로 출근 안 했다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침묵하던 강영수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답했다. 몇 분 뒤 입을 연 놈의 목소리가 한층 심각해져 있었다.
-톡방 다 읽어 봤는데 딱히 뭐 없는데? 돼지도 모른대.
“…….”
-뭔데. 언제부터 연락이 안 됐는데? 무슨 일 있었어?
사정을 모르는 놈이 당연히 할 법한 질문인데도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게 이 시간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 지선욱의 행동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 행위라서.
나는 목울대를 의미 없이 넘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테이블 위의 차 키를 다시 한번 집어 들면서.
일단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가서 주변을 돌든 어디라도 돌아다녀야지. 이렇게 집에서 언제 들어올지 모를 놈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야. 이지훈. 들려?
다급히 움직이던 걸음은 신발장 앞에서 멈췄다. 띡띡띡띡띡띡. 단조롭기 그지없는 도어락 소리를 들은 순간에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동안의 그 잠깐의 침묵마저 버거웠다. 이윽고 드러난 얼굴은 내가 종일 찾던 사람이 맞았다.
“…….”
“…….”
눈을 아무리 깜빡여 봐도 지선욱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사라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찾았어, 끊어.”
핸드폰을 아래로 내린 순간에야 내내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하던 심장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속이 울렁대다 못해 아팠다. 저녁 시간 내내 나를 옭매던 멀미에서 드디어 벗어난 기분이었다. 말과 몸이 동시에 나갔다. 나처럼 나를 보자마자 제자리에 멈춘 놈에게로 먼저 성큼 다가서며, 팔을 붙들었다.
“너….”
한 박자 늦게 파도처럼 밀려온 울컥함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못 본 시간이라고 해 봐야 만 하루가 되지 않는데, 온갖 나쁜 생각만 들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답을 듣고 싶은 수많은 질문을 미뤄놓고는, 일단 지선욱의 몸부터 살폈다. 까만 니트에 청바지. 평범한 차림인 놈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듯 만지며 혹시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부터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
니트를 들춰보려던 손이 내쳐진 건 순식간이었다. 밀어내는 것보다는 저지하는 것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등 뒤로 신발장이 느껴지고서야 내가 놈으로부터 밀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잘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지선욱이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댔다.
“…만지지 마.”
“…….”
“괜찮아. 다친 것도 없고.”
변명하듯 빠르게 말하는 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침에 껴안고 있기까지 했던 놈이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그렇게 느끼는 건 지선욱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놈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던 내게 무언가를 묻기보다는, 신발을 벗고 나를 피하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야. 선욱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지선욱을 따라잡았다. 거실에 서 있던 놈의 어깨 위로 손을 조심스레 얹은 순간에는 또 한 번 밀쳐질까 봐 겁부터 났다. 다행히 지선욱은 몸을 움찔 떨 뿐 아까처럼 나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그 사실에 힘을 얻어,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연락 안 돼서 걱정했는데.”
연락도 없이 왜 이렇게 늦었는지, 또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선욱의 상태가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것까지는 느낄 수 있었다.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 놈이지만, 잘 물어본다면 대답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이제 대화하기로 했으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는데도 지선욱의 고개는 내게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놈의 동태를 관찰하듯 살피다가 지선욱의 시선이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꽃병에 꽂혀 있음을 눈치챘다. 홀린 것처럼 그걸 바라보는 놈은 그 꽃다발이 원래 거실에 없었던 것임을 알아챈 것 같았다.
나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이것보다는 조금 더 낯간지러운 상황에서 주고 싶었던 거긴 한데, 그래도 놈이 발견한 이상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 놈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 그거 내가 아침에 꽃집에 갔다 산 건데….”
“야근해서 늦었어.”
말이 뚝 끊겼다. 나는 여전히 내게 뒤돌지 않는 지선욱의 뒤통수만 멀거니 봤다. 지선욱이 딱딱하게 뱉어낸 말이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답임을 깨달은 순간에야 멍하니 되물었을 뿐이다.
“뭐?”
지선욱이 그제야 날 향해 뒤돌았다. 제 거짓말에 말문이 막힌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에, 놈은 오히려 더 침착해진 것처럼 보였다. 동요를 찾아볼 수 없이 단단한 얼굴은 얼핏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애를 쓰고 무시했던 모든 신호들이 하나로 좁혀진 채로 불안한 예감의 정수를 뚫는다.
“우리….”
이상하다. 더는 헤맬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친구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려 쟤랑 잔 건데.
“이야기 좀 하자.”
지선욱의 표정이 하나도 읽히지 않는다.
4x5
‘♩♪♬♩♪♬♩♪♬♩♪♬’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알람 소리에 깼다.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팔부터 뻗어 휘저었다. 핸드폰이 손에 걸리기는커녕 허공에 대고 허우적대는 기분만 들어서 결국 몸을 일으켜야 했다. 마른세수를 연이어 한 후에야 겨우 한쪽 눈을 뜰 수 있었다. 베드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시선에 겨우 걸린 침대 밑 바지에서부터 흐르는 알람 소리는 그 이유를 소명했다.
“윽….”
핸드폰을 줍겠다고 침대 아래로 몸을 숙였을 뿐인데, 잇새로 앓는 신음이 터졌다. 온몸이 뻐근했다. 꼬리뼈로부터 올라온 아릿한 통증은 덤이었다. 이런 근육통은 또 처음이었다. 어제 한 운동이라고 해 봐야 이 침대 위에서 한 섹스뿐인데도.
알람을 끈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지훈과 같이 씻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암전이었다. 나는 이불 안을 들췄다.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치고는 옷을 잘 찾아 입은 채였다. 물론 아래는 브리프만 입은 차림이긴 했지만.
“…….”
바지는 찾을 정신이 없었나?
깊게 생각할수록 어째 민망해지기만 해서 관뒀다.
…뭐, 설마 입혀줬겠냐. 알아서 입고 잤겠지. 일상적인 과정이라 오히려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 잊은 건지도 몰랐다. 샤워하면서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애초에 이 정도만 챙겨 입은 것도 대단했다. 당장 잠들 것 같은 나를 용케 눈치채고는 샤워볼을 뺏어가 대신 내 배 위를 문지르던 이지훈의 킥킥대던 웃음소리가 떠올라 멋쩍기만 했다.
근데 진짜 어딨는 거지.
방에 없길래 혹시 씻는 중인가 했는데 귀를 기울여 봐도 물소리는커녕 온 집 안이 조용한 걸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린 순간 척추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을 무시하고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베드 테이블 위의 전자시계는 8시를 알리고 있었다. 알림이 왜 발작하듯 울어댄 건지도 이해가 갔다. 평소였다면 일어나자마자 지각임을 직감했을 만한 시간이었다. 어제 공항으로 가기 전에 반장님과 최혁준 건으로 통화하며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미리 말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지훈?”
이름까지 부르며 찾았지만, 거실에도 이지훈은 없었다. 비어 있는 욕실을 나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엌을 돌아봤다. 제일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우스울 정도로, 그곳에 이지훈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밥공기를 제외한 그릇 위에 반찬들이 한 끼 먹을 수 있는 양만큼 소담히 담겨 있는 걸 확인한 순간엔 웃고 말았다.
밥 못 먹여 죽은 귀신이 붙었나.
팔짱을 낀 채로 식탁 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로 가 핸드폰을 찾았다. 역시나 핸드폰에도 이지훈이 남긴 흔적이 있었다. 잠깐 나갈 일이 생겼다며, 가능하면 내가 출근하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이 적힌 메시지 바로 뒤에 찬밥 먹지 말고 밥솥에서 따뜻한 밥을 바로 꺼내먹으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막 생각나기라도 한 것처럼 1분의 시간을 두고 온 잔소리를 보다가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밥그릇만 왜 덩그러니 비워뒀는지를 알 것 같아서.
어차피 오후 출근인데, 같이 먹으면 되지 않나? 아침은 같이 간단히 먹고 점심은 나가서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지훈이 돌아온 후의 계획을 그려보며, 밥을 먹기보다는 일단 씻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후 출근이긴 해도 이지훈과의 시간을 끼워 넣으려면 꽤 빡빡할 터였다.
따뜻한 물을 맞고 나니 근육통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쥔 핸드폰 위에 내가 씻는 동안 확인하지 못한 알림이 여러 개 있었다. 당연히 이지훈이거나 혹은 동료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 연락이었다.
서언대학교 건강검진센터
건강검진 관련 안내
[Web발신] 지선욱님, 서언대학교 건강검진센터입니다.
건강검진? 낯선 단어에 손부터 멈칫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거기다 우편으로 결과물을 받기로 했었는데, 따로 문자까지 보내면서 안내할 일이 뭐가 있지.
의문을 미처 다 해결하기도 전에, 손에 들린 핸드폰이 잘게 진동했다.
[서언대학교 건강검진센터] (3)
전화 창 아래로, 이전에도 같은 번호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있음을 알리는 부재중 기록이 함께 떴다. 날짜를 훑어보니 일주일 전부터 이틀 간격으로 전화가 찍혀 있었다. 최근 외근도 많고 특히 협조 수사가 많았던 터라 초면의 경찰관부터 시작해서 외부인의 번호가 통화기록란에 빼곡했다. 그러다가 검진센터로부터 온 전화를 놓쳤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진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도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검진센터 직원이었다.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여러 번 통화 시도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며 빠르게 설명하던 그녀는 톤을 바꿔 검진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와야 할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오늘 오전에도 예약이 캔슬된 건이 있으니 바로 와도 된다고 말하는 투가 급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우편으로 검진 결과를 받기로 했는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예고치 않았던 침묵이 따라붙었다. 말을 고르는 사람 특유의 간헐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8시 30분. 건강검진을 한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센터의 직원이 출근하자마자 전화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병원으로부터 이런 식의 연락을 받는 일은 흔치 않았다. 연락을 받는다 쳐도 할아버지의 일일 때가 많았고, 그마저 할아버지가 입원한 후였기 때문에 이렇게 내 건강 상태에 대해서 통보받는 일이 낯설고도 어색했다.
불안한 심경을 반영하듯 헤매던 시선이 부엌에 멎었다. 나는 소파로부터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갔다. 밥솥의 알림판에 1H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밥이 다 된 지 1시간쯤 됐다는 뜻임을 생각해보면, 이지훈이 언제쯤 나갔을지가 감이 잡혔다. 메시지가 온 시간을 보니 새벽에 나간 모양인데, 그 와중에도 나한테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쌀을 안쳐뒀을 놈을 생각했다. 밥솥을 여는 순간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화로 듣는 것보다는 와서 직접 의사와 상담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사무적인 말은 유독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갓 한 밥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씀하신 시간대에 갈게요.”
전화를 끊고도 제자리에 잠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주걱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 밥을 한술 뜨는 순간에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지훈이 옆에 없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훈 옆에서 이런 전화를 받았으면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보이시죠?”
내 앞에 앉은 의사가 할아버지 담당의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엑스레이 위로 가느다란 지시봉을 가져다 대며 설명하는 담당의의 차분한 표정에는 비극을 말하면서도 침착해야 하는 의료인의 숙명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또한 지겹도록 보아온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이 내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주 천천히 엑스레이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건강검진센터에서 잡아준 외래 예약을 따라 도착한 곳이 신경외과라는 팻말이 달린 곳임을 확인한 순간부터 굳은 몸은 그 쉬운 행위를 하는 것마저 버거워하며 삐걱댔다.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던 나의 뇌 사진을 확인한 순간에는, 바지 위의 손을 그러모으듯 쥐었다. 설명을 이어 나가던 의사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려운 말을 하기 전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무거운 신음을 내며 안경을 추켜올리기도 했다. 남자는 할아버지가 아닌 나를 보면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환자에게나 지어 보일 법한 표정을 하고서는.
“정밀검사를 통해 혹이 악성이 아닌지도 확인하고 혈관조영술을 통해서 혈관도 한 번 더 자세히 확인한 이후 치료 행위를 결정해야겠지만 우선 CT, MRI 검사 결과를 통해 저희가 진단하기로는….”
그가 뜸을 들이듯 멈췄음에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았다.
왜냐면, 내 뇌 사진이 몇 년 전 보았던 할아버지의 뇌 사진과 놀랍도록 비슷했기 때문에. 혹의 위치와 크기마저. 마치 복사해서 옮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할아버지의 머리에 물혹이 있다고 처음 진단받던 순간, 건너편에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의사의 얼굴이 앞에 앉은 의사의 얼굴과 겹쳐졌다. 두 개의 상이 하나로 겹쳐지고, 이윽고 하나가 된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몸이 축 처질 정도로 피곤하거나, 두통이 심할 때마다 나타나던 증상들을 떠올렸다. 알면서도 별일 아닐 거라고 여겼던 것들.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도 나와는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얼얼했다.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허벅지를 꽉 쥐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균형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약물로 치료하기엔 어려운 크기라 수술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의 위치가 좋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환자분 나이도 젊으시고 크기도 이대로 더 커지지만 않는다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왜냐면 할아버지도 당시 의사로부터 이런 희망찬 말을 들었었기 때문에. 수술하지 않겠다고 말한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내가 외우듯이 한 말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은 건 나였다. 생에 미련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에게 나를 혼자 두지 말라고 매달리면서.
그렇게 수술을 받은 할아버지는 벌써 5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 수술도 잘되고, 회복도 잘하던 중 갑자기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 멈춰버린 이유는 병원조차도 모른다. ‘원인 미상.’ 희망과 절망 사이, 그 중립 지대에 자리한 네 글자는 나를 티 나지 않게 갉아먹었다.
“우선은 입원하셔서 정밀검사부터 하시고….”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이어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당황한 낯을 한 의사가 책상 밑에서 주워 건네는 핸드폰을 받고서야, 의자에서 급히 일어난 내가 벌인 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내 몸인데도 꼭 내 몸 같지가 않았다. 마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아….”
나는 멍청히 선 채로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일어선 건 충동적인 행위였고, 저지른 나조차 상황을 한 박자 늦게 파악했다. 문제는 정신을 차렸는데도 다시 앉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보통의 환자들이 그러하듯이 의사의 희망 어린 말을 믿고, 그의 말을 따라 당장 입원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선택지를 잃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행위라곤 의사를 향해 손을 뻗는 거였다. 핸드폰을 건네주는 의사의 얼굴이 난처해 보였다. 내 얼굴을 살피며 말을 거는 그는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결과를 듣게 되어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 압니다. 마음을 추스르실 시간도 필요하실 거고요. 그렇지만 혹시라도 악성일 경우나 혹이 커지기라도 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대답해야 한다. 뭐든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해 보일 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떨리는 눈가를 멈추려 손을 가져다 댄 순간에야, 나는 등 떠밀린 것처럼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아뇨. 저는….”
“…….”
“다음에, 다음에요. 지금은….”
순간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치밀었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몸을 앞으로 구부린 나는 몸을 돌려 진료실을 뛰쳐나왔다. 복도에 있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뭉개지는 것 같은 어지러운 시야를 견디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비틀대면서 걸은 후에야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앞에 다다랐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이미 나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이어질 행위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지훈이 해준 밥이라는 이유로 먹은 것들이, 지난 세월을 견디며 내 안에 쌓여 있던 두려움과 회한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쏟아졌다. 목을 컥컥대며, 숨을 헐떡이며 속을 게운 후에야 변기 안으로 쏟아지고 있던 것들이 그게 다가 아님을 알았다.
‘아니, 아까 변기통 붙잡고 토를 하던 총각이 있었거든. 얼굴도 새하얗게 떠서는 한참을 그러고 있길래 응급실에라도 가보라고 등 떠밀었는데 한사코 안 가고 잠시 앉아만 있겠다는 거야. 일행이 있다나 뭐라나. 보통 고집이 아니길래 알아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청소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혹시 총각은 봤나 싶어서. 간 거면 응급실로 갔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이지훈이 그날 이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비좁은 화장실 칸에 갇혀서, 내 몸에 남아 있던 지난 고통의 흔적조차 견딜 수가 없다는 이유로 속을 게워냈겠지. 옆에 있는 누군가가, 울타리 안에 둔 누군가가 아픈 걸 못 보는 놈이니까. 아끼는 사람을 엄마처럼 잃게 될까 봐, 그런 상황에 가까워지기라도 할까 봐 그 트라우마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애니까.
“하… 하아….”
흐려지는 시야를 느끼며 간신히 숨을 토했다. 중력이라는 게 사라진 세계에서, 허공으로 떠오르는 사람들 중 나만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마를 적시던 식은땀이 뚝뚝 떨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볼을 더듬거리듯 훑었다. 축축한 볼을 느낀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고 화장실 벽에 머리를 박았다. 장대비처럼 굵은 눈물이 계속해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할아버지를 처음 이 병원으로 옮겼던 날이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후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뇌 분야에서 명의로 유명하다던 의사와 상담하고, 간병인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그러고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우러 나갔다가 이곳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대학병원이라 그런지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둔 산책로도 두 개나 있었고, 흡연 구역도 곳곳에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이 휴게 공간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 외의 사람이 방문한 걸 보지 못했다. 병원 후문과 응급실 사이에 있는 으슥한 오솔길을 따라 쭉 걷다가 코너를 한 번 더 돌면 보이는 공간은 있는 거라고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벤치 하나와 재떨이 하나가 다인 곳이었다. 나무 벤치 위로 철 지난 나뭇잎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있고, 늘 비어 있는 재떨이만 봐도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는.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여기서는 날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 때문인지 할아버지 병실에서보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날이 지날수록 더디게 피어오르는 희망을 점검할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었다.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서, 철마다 바뀌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이번 계절은 넘길 수 있을까?
한 번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해본 적이 없음에도, 할아버지를 포기하진 못했다. 할아버지 또한 그걸 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내 안에서 슬금슬금 기어오를 때마저도 필사적으로 외면하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벤치 위로 떨어진 잎들은 색을 수없이 바꿨다. 나무가 그렇게 잎들을 놓아주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도록.
“…….”
겨울의 나뭇잎은 볼품없게 말려 있었다.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마저도 별다르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만 거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위태한 꼴을 바라보며, 차라리 겨울까지 버티지 않고 가을에 떨어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언제 나무가 자신을 떨굴지, 바람이 불지 따위를 계산하며 숨을 죽이는 것보다는 그냥 미련 없이 자력으로 포기해버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위에 빨갛게 부르튼 손을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에야 내가 손발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이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화면에 줄지어 뜬 알림을 보자 입 안이 텅 비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가득 떠 있는 걸 애써 무시하고는 얼어붙은 손을 움직였다. 스크롤을 기계적으로 내리며, 전화 기록 속에서 내가 통화해야 하는 사람을 찾았다.
몇 번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됐다. 말을 만들어내려 입술을 움직이고서야 얼어붙은 건 손만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황량한 입술 사이로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반장님. 접니다.”
-알아 인마, 왜? 쉰다는 메시지는 봤어. 답장 보냈는데 못 받았냐?
“봤습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어, 말해. 혹시 차혁준 건 때문에 전화했냐?
“…또 무슨 일 생겼습니까?”
-아니. 따지자면 이제 우리 손은 떠났지 뭐. 네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건 아닌 모양이더라, 그놈. 나름대로 차근차근 제 아빠에게 맞설 준비를 하고는 있었던 모양이야. 아까 차혁준이 선임했다던 변호사랑 통화했는데, 생각보다 어리긴 해도 보통은 아니더라고. 차혁준이 최정호 밑에서 세뇌당한 것처럼 세팅해서 아예 법정 공방전으로 갈 느낌이더라. 태안의 차혁준 집에서 최정호 관련 증거 잡은 것도 알고 있는 눈치고.
“…….”
-판 커지며 부자지간의 개싸움으로 흐르겠지만 솔직히 우리한테는 땡큐지. 안 그러냐? 사건 파헤치며 폭로전으로 가기 시작하면 소명하느라 나오는 증거들만 잘 받아먹으면 돼. 일단은 지켜보자고. 우리 선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여보세요? 뭐야. 안 들려?
“…아니요. 잘 들립니다.”
-들었는데 왜 말이 없어. 아직도 많이 아프냐? 내일도 쉬어야겠어? 심각한 거면 참지 말고 말해. 솔직히 놀랍지도 않다, 새꺄. 내가 너 한번은 이런 날 올 줄 알았어.
반장님이 나를 볼 때마다 으름장이라도 놓듯 하던 일상의 잔소리가 더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 몸의 신호를 조금 더 빨리 알아챘다면, 그랬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지난 다음에 해 봐야 소용없는 후회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경련이 오는 것처럼 저리기 시작한 눈가를 매만지며 어렵게 입을 뗐다.
“반장님.”
-어.
“…….”
-뭔데 자꾸 이렇게 목소리를 깔아. 무섭게.
“그때 서산에 자리 났다고 하신 거.”
발치에 있는 죽은 나뭇잎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을 크게 삼켰다. 말할 준비를 마친 목울대가 아프게 넘어간다. 마치 앞으로 나갈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경고를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자리 지금도 유효한지 알고 싶습니다.”
낮부터 이 시간까지, 종일 그 공간에 앉아서 한 거라고는 희망을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이지훈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이지훈을 보자마자 알았다. 준비됐다고 생각한 건 이지훈을 종일 마주치지 않아 품을 수 있던 착각일뿐이란 걸.
늘 잘 손질했던 머리마저 흐트러진 채로, 눈가를 비롯한 얼굴 곳곳이 흥분한 것처럼 붉게 물든 초조한 낯의 이지훈은 따뜻한 실내에 있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놈이 움켜쥐고 있는 차 키를 확인한 순간에는 멍해졌다.
나를 찾았구나, 종일. 그랬겠구나, 너.
“너….”
미뤄뒀던 감정이 삽시간에 몰려와 울컥했다.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선연히 드러나는 감정들을 보자마자 우습게도 겁부터 먹었다. 발이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비로소 실감 났다. 우리가 이제 하루 연락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초조함부터 비치는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
그걸 실감한 순간이 하필 지금이라는 게.
나는 그 사실을 못내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람처럼 발작하듯 놈의 손을 떨쳐냈다. 신발장으로 밀쳐진 놈의 표정을 보는 순간엔 내 안의 무언가가 죽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이지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만지지 마.”
“…….”
“괜찮아. 다친 것도 없고.”
머리가 언 상태로도 몸은 연습한 일을 성실히 한다. 걱정한 것과 달리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생각해보면, 이지훈에게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다. 친구인 척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써야만 했고,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피하거나 입을 다물고 있기를 택했던 나라서.
“아, 그거 내가 아침에 꽃집에 갔다 산 건데….”
“야근해서 늦었어.”
이렇게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야 깨닫게 된다.
말하지 않는 것과 거짓말하는 건 다르다는 걸. 후자의 경우 죄책감의 무게가 훨씬 더 무겁고, 그 말에 대한 책임도 더 많이 지게 된다.
거실의 탁자 위에는 내가 처음 보는 꽃이 있었다. 함께 살았던 지난 두 달 동안, 그리고 우리가 알아 온 14년간 한 번도 서로에게 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강영수를 기준으로 세워도 선을 넘었고, 그냥 남자 둘끼리 주고받을 물건이라 하기에도 낯설다. 이지훈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거실 한가운데 꽂힌 꽃이 꼭 증표 같았다.
놈의 항복. 더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지훈은 내가 아니라면 할 이유조차 찾지 않았던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하면서,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겠지.
한층 더 잃을 수 없는 존재로.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존재로.
“뭐?”
뒤돌자마자 보인 놈의 흔들리는 눈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또 한 번 마음 한구석이 까맣게 죽었다. 그곳에 남은 재마저 치우고서야 나는 손을 말아쥐었다.
“우리….”
“…….”
“이야기 좀 하자.”
대치하듯 서서는 서로를 바라봤다. 길어지는 시선을 끊고 고개를 돌린 건 이지훈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내린 놈이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미치겠다, 진짜….”
나오는 말은 없는데, 이지훈의 목울대만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그걸 내뱉을 수가 없어서 삼키고만 있는 것처럼. 참고, 참고, 또 참던 이지훈이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목과 귀가 이어지는 부분까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 나를 바라보는 눈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을 찾았다. 음의 높낮이마저 애써 죽인듯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이야기하는 거 좋고. 다 좋은데….”
제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얼굴 근육들을 어떻게든 통제해보려고 노력하는 놈은 마지막 지푸라기도 잡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단 나한테 왜 거짓말한 건지부터 설명해 봐.”
그럴 리가 없는데도 순간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을 이지훈도 안다고 착각할 뻔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랑 연락이 안 되길래, 네 후임한테 연락했어. 너 오늘 출근한 적 없다는 말 들었고.”
“…….”
“야근했다고 거짓말한 이유가 궁금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침착한 말투로도 심각성이 가려지지 않는 엉망진창의 거짓말을 놈이 눈치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내쫓기듯 몰렸다. 앞으로 할 거짓말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지훈은 그것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놈을 보는 나도 덩달아 흔들렸다.
이지훈이 방금 이를 악물며 참아내고 참아낸 건 나에 대한 실망감이다. 그걸 알아챈 것만으로도 절벽에 매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선욱아.”
나에게 실망하는 일조차 미루는 놈의 깊은 인내심의 바탕을 들여다보기가 무섭다.
“무슨 일이야. 괜찮으니까 말해 봐.”
그걸 들여다보려 한 순간에는 모든 게 수포가 될 테니까.
한 걸음 더 다가온 이지훈이 내 팔꿈치를 잡는 순간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잡힌 팔부터 황급히 뒤로 뺐다. 멈칫한 이지훈의 시선이 팔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걸 무시하고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종아리 뒤로 딱딱한 무언가가 닿은 순간에는, 내가 테이블을 건드렸음을 알았다. 크게 흔들린 꽃병이 옆으로 쏟아진다. 꽃병 안에 들어 있던 물이 테이블 위로 엎질러지다 못해 카펫까지 적시는데도, 이지훈과 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
이지훈을 밀쳐낸 건 어느새 두 번째다. 이지훈은 이번에는 그 사실로부터 회복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지해 있었다. 놈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엎어진 꽃병에 꽂혀 있었다. 나는 놈의 그 모습을 외면한 채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자신 없어.”
잠깐 내 팔꿈치를 감싸듯 쥐었을 뿐인데 얇은 니트를 뚫고 이지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게 느껴졌다. 나를 찾아다닌 것이든, 아니면 나를 찾지 못해서 피가 통하지 않은 것이든. 이지훈은 추위에 약했다. 지나가다가 핫팩이라도 보면 늘 이지훈부터 떠올렸던 나라서 알았다. 내가 아픈 걸 알고 나면 오늘 같은 일은 이지훈에게 일상이 될 테다. 제 손이 차갑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인생의 중심에 나를 세우고 살아가겠지. 그러느라 손이 몇 배는 차가워지고, 때로는 온몸이 덜덜 떨리게 된대도 물러서지 않을 거다. 내 옆에서 내가 죽을까 봐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심경으로 살아가겠지.
나는 그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황하던 이지훈을 봤다. 이지훈이 그 상처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안다. 그러고도 그 잔상을 지우지 못한 놈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아프지 말라고. 나 그거 감당 못 해.’
전자의 조건은 실패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랬다. 그랬으니 나는 후자라도 책임져야 한다. 이지훈이 그걸 감당할 필요가 없도록.
“오늘 하루 동안 생각해 봤는데… 성급했던 것 같아, 어제 너랑 잔 거.”
이지훈이 화병으로부터 시선을 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서 나마저 덩달아 떨리는 환영을 보는데 말이 입 안에서 헛돌기만 했다. 나는 한참을 나 자신과 싸우고서야 오늘 내내 연습한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네 집에 갔어. 네 후배들이 가져다 놓은 잡지가 있길래 봤고, 인터뷰 보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공항 간 거고….”
“…….”
“일어나자마자 후회했어. 네 문자 보자마자 내가 뭔 짓을 했는지가 실감 나서.”
설득력 없는 알리바이를 견디지 못하는 직업병을 그대로 적용한 것처럼 종일 앞뒤를 끼워 맞춘 시나리오를 줄줄이 뱉었다.
“우리가 어린 나이도 아닌데, 네가 헷갈린 적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도 너 좋아했던 그 나이대처럼 행동했던 것 같아서.”
말을 이어갈수록 이지훈의 얼굴이 차가워진다. 동요하는 얼굴을 절제할 수 없다면 그걸 얼리는 방법밖에 없음을 막 깨달은 사람처럼. 나는 나처럼 가면을 쓰기 시작하는 놈의 얼굴 위로 쉬지 않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같이 동굴 안에 갇히는 결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멈춘 기차를 뒤에서 들이받아서라도 동굴 밖으로 나가게 하려는 사람처럼.
“네 탓 하려는 거 아냐.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돼. 우리가 뭘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 잔 것….”
말이 멈췄다. 양팔이 붙잡힌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놓치지 않을 것처럼 내 팔뚝을 꽉 쥔 이지훈이 내가 밀쳐내기도 전에 몸을 붙였다.
“겨우 한 번 잔 거라고?”
“…….”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면 두 달 전에 나랑 자지 그랬어. 잔 사람이랑 친구 못하겠다고 한 거 너야, 내가 아니라.”
“…이거 놔.”
“너야말로 이 지랄 해대지 말고 그냥 말해.”
“말하고 있잖아. 자신 없다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거 지껄이지 말고. 그냥 너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얘기하라고 얼른!”
기껏 가면을 쓴 보람도 없게, 고함치는 이지훈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최소한의 방어선으로 구축해둔 것마저 무너지는 광경이 처참했다.
“이렇게 말해달라고 구걸하는 거 비참해. 알아? 열두 시간 전에 저기서 같이 잔 애한테!”
새벽까지 같이 누워 있었던 내 방을 삿대질하는 이지훈은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목에 핏대가 서고, 눈가가 붉어졌다. 이지훈이 힘 조절조차 하지 못하고 붙든 팔이 허공에서 떨렸다. 내 몸이 흔들리는 건지, 이지훈의 몸이 흔들리는 건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네 주변 사람들 다 꿰고 있어도, 너에 대한 거 아무리 외워도… 결론적으로 네가 말 안 하면 지금처럼 난 아무것도 몰라. 함부로 추측하고 짐작하고, 그러고 또 틀려야 해!”
“…….”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나중에 그거 안 사람 환장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지금 말해. 무슨 일이야. 할아버지 일 아닌 거 알고, 직장 일도 아닌 거 알아. 내가 아무리 알아보려 해도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으니까 네 입으로 설명해. 너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뱉는 순간 놈의 말에 따르겠다고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이지훈은 그 침묵 안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놈은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애처롭게 물었다.
“안 망했다며.”
이지훈이 내 얼굴 위에서 어젯밤에 제가 봤던 무엇이라도 찾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였다. 밀쳐내지 못한 채로 붙잡힌 팔뚝이 그나마 남은 희망인 것처럼 그 위를 여러 번 고쳐잡으면서.
“안 망했다고 했잖아, 네가 어제… 어?”
물음이지만 물음이 아니었다. 애원에 가까운 그 행위에는 몸이 딱딱히 굳었다. 나는 이지훈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서야 할 말이 떠올랐다. 표정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목소리마저 죽인 채로 뇌까리듯 말했다.
“다 정리하고 서산으로 내려갈 거야.”
“…서산?”
“서산 소재지 경찰서로 갈 거고, 할아버지도 모시고 내려갈 거야.”
“너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잖아. 언제 결정된 건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이 팔을 놓아준 것도 동시였다. 잠깐 아래를 바라보던 놈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놈이 입을 열었다. 착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됐다. 이미 결정 난 거 되돌릴 수도 없고. 말하는 거 보니 한참 전부터 준비했던 것 같네.”
이지훈의 말투며 태도가 한결 차분해졌다. 이게 내가 숨기는 이야기라면 그 정도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투였다. 어떻게든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거듭 끄덕인 놈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런 거야? 그 말 하기가 어려워서?”
“…….”
“내가 갈게. 서산이면 태안이랑 멀지도 않고, 그게 무슨 문제씩이나 된다고. 서울에서 지내나, 거기서 지내나 난 상관없어. 너 편한 대로 해. 근데 서산에 괜찮은 병원은 있냐? 태안에서 원래 다니던 병원이 낫지 않아?”
쉴 틈 없이 말을 잇는 이지훈은 내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올 어떤 말을 막고 싶거나, 혹은 내가 이미 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오늘 한 거라고는 자신을 헤매게 하고, 거짓말을 하고, 손을 밀쳐낸 것밖에 없는 나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크게 침을 삼켰다. 이지훈의 말소리가 잦아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을 뗐다.
“발령 신청하며 알아본 건 두 달 전이 맞는데….”
잘하고 있는 게 맞겠지. 후에 놈이 더 상처받을 일을 막으려고, 지금 상처를 주는 게 낫긴 한 거겠지. 이지훈이 받을 고통의 총량을 두고 저울질했다. 무게를 재보겠다고 양손에 들고 있는 놋쇠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무시했다.
“가겠다고 결정한 건 오늘이야.”
땡땡땡. 경고음인지 경적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리고, 이지훈이 멍해지는 게 보였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어떠한 신호를 알아챈 것처럼 굳어가는 얼굴을 무력하게 응시했다.
이지훈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서산 가기 전에 정리하겠다는 게 나인 거네?”
“…….”
“상의하려고 말한 게 아니라, 또 네 멋대로 낸 결론 통보하려는 거고.”
내가 한 말을 정리하듯 말하면서, 놈은 그 말이 새삼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부정하지 않자 곧 공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는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이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미련이 없어. 늘 나랑 끝낼 순간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매번… 매일…
어떻게…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해.”
힘겹게 고개를 든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가면을 쓴 나를 본 이지훈이 입술을 떨며 고개를 틀었다. 나를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지 올라오는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놈의 눈가가 터질 것처럼 붉었다.
안간힘을 쓰느라 목의 근육이 경직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누구 앞에서든 여유로운 놈이 내 앞에서 종종 평정심을 잃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래 놓고 너 다시 못 봐.”
“…….”
“네 말처럼 하루 자는 거 별일 아닌데, 우리한테는 별일이야.”
“…….”
“너랑 나 너무 멀리 왔어. 여기서 놓치면 시작한 곳으로도 못 가고, 그렇다고 해서 조금만 돌아가지도 못해. 어느 곳에서든 못 만난다고.”
이지훈이 꾸역꾸역 감정을 삼켜 내며 물었다. 바닥에 시선을 둔 놈은 더는 나를 볼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너 내가 마지막이라 해도 이럴 거야?”
난 이게 이지훈이 내게 주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이 밤에만 해도 벌써 내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준 놈이, 자존심마저 버리고 내밀 수 있는 최후의 손길임을 알았다. 여기서 내가 아닌 척 넘어가면 놈은 앞의 말들마저 감싸줄 거라는 것도.
왜냐면 이지훈은 한 번도 내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건 놈이 나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꺼낸 단어다. 나는 그 단어의 무게를 안다. 그래서 그 기회를 놓쳐야만 했다.
“…미안해.”
이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나한테서 멀어지는 놈의 소리를 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내가 알 수 없는 깊이로 이지훈이 물러선다. 하필 그게 꽃병이 서 있는 쪽임을 안 순간에는 생각을 거칠 새도 없이 몸부터 튀어나갔다.
“거기 위험….”
손이 거칠게 밀쳐졌다. 감정을 담지 않으려다 핏기까지 사라진 창백한 얼굴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시는….”
“…….”
“나한테 손대지 마.”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놈이 나를 참 오래 봐줬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나는 이지훈이 한참 전부터 이럴 수 있었던 사람임을 깨닫게 됐다. 감정이 없다고 믿었던 행위들의 이면에는 나를 향한 마음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알아서 짐 뺄 테니까 그대로 놔둬. 손대지 말고.”
이지훈이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쥔 적도 없던 이지훈이 내게서 완전히 떠나가고 있었다. 거친 발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파른 숨을 뱉으며 고개를 내렸다. 내내 깨진 화병의 조각을 밟고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집에 들어가는 건 삼 일 만이었다. 숙직실에서 버티고, 간이 면접을 보고, 발령 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실은 그럴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그렇게 종일 정신을 압박하고, 몸을 혹사시키며 어떻게든 잊어버리려고.
집 앞 복도는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집주인인 내가 모를 만한 일이 벌어졌을 리도 없는데,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마저도 다가올 일을 목도할 자신이 없어 머뭇댔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걸어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집 앞에 커다란 소포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문을 막고 있는 택배는, 내가 집에 오지 않은 동안 그 문을 연 사람이 없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항상 문 앞의 택배를 대신 확인하고, 그걸 집 안으로 들인 사람이 있어서였다.
나는 바닥에 붙들린 발을 질질 끌 듯이 걸었다. 상자는 컸다. 그걸 확인할 자신이 없음에도, 도저히 보지 않고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도어락에는 손도 올리지 못하고 결국 아래를 내려다봤다. 택배에 붙은 송장 번호를 의미 없이 훑다가, 그 옆에 있는 주문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심장이 수축하듯 조여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주문자: 이지훈
이걸 언제 시켰을까. 적어도 그날 전이겠지.
‘뭐 하러 그래. 얼마나 있을 줄 알고.’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함을 아는 이지훈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이후의 시간은 놈이 그 마음을 바꿀 만큼의 확신을 줬던 것 같다. 아니면 이 집으로 이런 물건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니까. 확신이 없다면 이런 행위를 할 놈이 아니니까.
그걸 알면서도 밀쳐낸 건 나다.
“…….”
그러니 난 이 사실에 슬퍼할 자격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에 힘을 줬다. 일단 집에 들어갈 요량으로 상자를 주워 들었다. 도어락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섰다. 집은 까맣게 잠들어 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사람 하나가 나갔을 뿐인데, 폭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 같다. 굳이 이지훈의 방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지훈이 이 집에서 빠져나갔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슬리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은 신발장이, 신발장에서도 보일 정도로 훤히 열려 있는 이지훈이 머물렀던 방이, 그리고 화병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이 깨끗한 테이블 위가 대신 말해주고 있으니까.
나는 차마 텅 비어버린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대신 들고 있는 상자를 내려다봤다.
송장 번호, 주문자, 집 주소들이 빼곡하게 적힌 송장 위를 의미 없이 훑는다. 모든 게 빠져나간 공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지훈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그러다 아까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시킨 사람조차 두 번은 보지 않을 배송 메시지는, 그러나 시킨 사람이 자신을 위해 쓴 게 아닌 걸 눈치챈 순간에는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배송 메시지]
벨은 누르지 말아 주세요. 동거인이 스케줄 근무 때문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려고 이를 악문 보람이 없게 몸이 떨렸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서 밀어낼 수 없다면 보지라도 않을 요량으로.
‘생각해보니까 나흘 뒤 도착하는 시간이 밤이더라. 오래 쉬었다고 벌이라도 주는지, 도착한 후 삼 일 뒤에 바로 또 비행 스케줄이 있고.’
기억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바로 떠올리고 말았다. 오늘은 이지훈이 비행을 떠난 날이다. 그러나 그때 그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왜냐면 이지훈이 내게 메시지로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놈이 일을 시작한 후 처음이었다.
이지훈이 내 인생에서 빠져나갔다. 그 또한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게 우리의 마지막인 것이다. 내가 통보함으로써 이뤄진 끝이 아니라, 이지훈이 받아들임으로써 벌어진 끝.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