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5)

* * *

“야. 아까 누구였지? 정이? 정인영? 어쨌든 그 친구는 상 받는다는데도 졸업식에 안 온 거 좆간지 아니냐? 나였으면 팬티만 입고도 뛰어왔당.”

졸업식 내내 강당 2층에서 사진기를 들고 나대던 강영수는 우리를 보자마자 저 말부터 했다. 개근상도 상이라며 으스댈 때는 언제고, 실은 졸업식 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상을 받는 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강영수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안희연이 교무실 갔다가 들었다며 슬며시 전해준 정보로는 강영수도 상을 받을 예정이라는데, 지금 미리 말해줬다가는 내일 있을 놈의 졸업식에 턱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못 보게 될 테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은근히 강영수에게 약한 지선욱은 제가 오늘 받은 상을 잠시 들어달라고 하는 척하며 이미 넘긴 터다. 제 상도 아니면서 무거운 상패를 가득 껴안은 강영수는 힘들기는커녕 즐거워 보인다.

“할아버지랑 지훈이 오빠네 아저씨는 어디 갔어?”

“미리 차 빼놓으러 갔다. 지금 안 해놓으면 음청 막힐 기라고 하믄서. 허이고, 그 말이 맞긴 하네. 운동장에 저 차들 봐라.”

“아, 나 빨리 짜장면 먹고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니는 가만 보믄 꼭 친구들이랑 놀 때는 그런 말 안 하다가, 엄마가 어디 가자고만 하면 그르드라.”

“그거랑 이거랑 같아?”

“엄마, 엄마. 영은이랑은 집에서 마저 싸우고 우리 사진 찍어줘. 사람들 뒤에 오니까 빨리빨리. 배경으로 얘네 학교까지 다 보이게 찍어줘, 우리 다리도 길어 보이게.”

제 졸업식도 아닌데 아침부터 불려 나와 볼이 팅팅 부어 있는 영은이와 티격태격하던 이모가 강영수가 억지로 들려준 카메라를 어설프게 쥔다. 이거 누르라고? 작동법이 익숙지 않은 것처럼 여러 번 묻는 이모에게 번번이 달려가던 강영수를 보다 못한 영은이가 결국 한숨을 쉬면서도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꽃다발 때문에 지훈 오빠 얼굴이 잘 안 보여! 좀 내려 봐!”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포즈 수정을 요구하는 영은이의 목소리에 강영수가 기다렸다는 듯 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위에서 아래로 내팽개쳤다. 저 새끼가… 다른 손에 남은 꽃다발을 흉기처럼 쥐다 말고 마음을 바꿔 똑바로 섰다. 지선욱을 가운데에 둔 채로 왼쪽에 서 있는 강영수의 뒷머리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긴 것과 동시에 영은이를 향해 외쳤다.

“영은아. 지금이야! 찍어!”

아악! 하고 강영수가 고통으로 몸을 비튼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이 씨발 새끼가! 이거 고데기 한 건데!”

달려드는 강영수를 밀어내고 도망치다가 결국 지선욱에게 나란히 뒷덜미가 잡혔다.

“니네가 일곱 살이냐? 사진 하나 찍기가 이렇게 힘들게? 똑바로 서.”

질린다는 듯 말한 놈이 강영수를 등 뒤로 숨긴 채 우리가 난리 치느라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주웠다. 뭐가 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품에 든 것 중 세 개를 당연하다는 듯 내게 내미는 놈을 보다가, 내가 원래 들고 있던 꽃다발들로 바꿔 가져왔다. 이제 지선욱의 품에 남은 건 세 개의 꽃다발이다. 하나는 아빠가 준 거고, 다른 하나는 이모가 준 거고, 남은 하나는 영감이 준 거다.

“야들아, 꽃은 하나씩만 들고 찍어라. 잘생긴 얼굴 다 가린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이모가 제안하듯 말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아래로 우수수 쏟았다. 옆을 보니 지선욱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놈이 결국 품에 하나만 골라 안게 된 파란색 꽃다발을 확인한 순간에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주긴 했지만, 고른 건 나니까.

지선욱은 강영수의 돌발행동을 막겠답시고, 강영수를 우리 사이에 세웠다. 씩씩대면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머리를 공들여 정리할 때는 언제고, 자신이 센터 자리에 섰다는 것을 깨달은 강영수는 그것만으로도 퍽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우리를 번갈아 돌아본다. 누가 보면 지 졸업식인 줄 알겠다. 눈을 접으며 해맑게도 웃던 놈이 나와 지선욱의 허리를 잡아 제 몸통 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기고는, 상체를 장난스레 앞으로 숙였다.

“돼지야, 지금 우리 포즈 좋다, 얼렁, 얼렁!”

“아, 알았다고!”

말 안 듣는 오빠들에게 질린 영은이가 인상을 찡그린 채로도 뷰파인더를 눈 가까이에 가져다 댄다. 옆에 선 이모가 웃는 얼굴로 사진 찍을 타이밍을 같이 카운트 해 주듯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세 개 중 하나가 접히는 게 보였다.

자, 하나-

“얘들아, 사랑한다!”

준비한 것처럼 외치는 강영수의 말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사랑? 같은 포인트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묘한 표정으로 강영수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중인 지선욱이 보였다.

둘-

힐끔 앞을 확인한 나는 손부터 뻗었다. 지선욱의 왼쪽 어깨에 어깨동무하듯 손을 얹자,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웃어. 시범을 보이듯 씩 웃어주자 지선욱이 한 박자 늦게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짓는다.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처럼 앞을 본 놈이 과연 계속 웃고 있었는지는 어차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셋-

구름 한 점 없는 겨울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햇살을 닮은 플래시가 터진다. 나는 사진이 찍히는 순간 나란히 선 지선욱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순간을 추억할 미래의 우리를 향해 찬란히 웃어 보였다.

* * *

답을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 말 안 들려?”

더 큰 문제는 답을 아는데도 그 답대로 할 수 없을 때 생긴다. 지금도 나는 답을 외면하듯이 아래에 엎어진 놈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엎어진 놈의 대가리를 툭툭 힘주어 밀어내던 소리가 우뚝 멎는다. B가 몸을 일으켰다.

“대답해야지?”

건들대며 웃고는 있지만, 눈빛을 보니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타이밍이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내 대답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육십 명도 넘는 인원이 있는 운동장이 소름 끼치게 조용하다. 왜냐하면, 말해도 된다고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교한 지 오래되지 않아 모두가 몸으로 습득한 규칙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낼 수 있는 의견은 없다. 복종과 불복종이 있을 뿐.

“그래서 고민의 결과는 뭐야?”

“…….”

“못 들은 척 개기기는 아닐 거 아냐.”

2월이래도 새벽 5시는 춥다. 간밤의 기합으로 다섯 시간도 채 자지 못한 데다가 옷이라고 해 봐야 달랑 체육복 하나 걸친 게 다인 신입생들은 못 버티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오늘 지도를 맡은 B는 그런 사정을 봐줄 리 없는 새끼였다. 오늘의 타깃은 우리 중에서도 유독 체력이 약한 동기였다. 쪼그려 앉아서 하품이나 쩍쩍하던 B가 팔굽혀펴기를 하다 말고 쓰러진 놈에게 다가간 순간부터, 나란히 얼차려를 받고 있던 동기들 사이에서는 단순 침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두가 알고 있다. B가 어떤 새끼인지를. 그랬기에 누가 봐도 한국인인 새끼를 특징이라고는 없는 알파벳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특정되는 별명으로 부르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좆되니까.

“이지훈 생도.”

뒷덜미가 잡혔다. B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번 주에만 생도 열댓 명을 거뜬히 울린 놈치고는 비틀린 구석 없이 잘 주차된 이목구비를 대충 훑다 가장 안전한 코끝과 인중 사이로 눈을 내렸다. 동시에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한 대까지는 버틴다 쳐도 방금 맞은 곳을 축구공이라도 굴리듯 연이어 차이는 것에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쓰고 말았다. 결국엔 잇새로 흐르고 만 신음을 듣고서야 B가 멈췄다.

“그래. 이렇게 신음 나올 때까지 걷어차면 된다고. 시범을 보여줘야 감이 와?”

기다렸다는 듯 빙그레 웃는 B의 얼굴이 말하고 있다. 이건 ‘길들이기’라고.

앞에 있는 동기의 체력이 눈에 띌 정도로 약한 것도, 그걸 벌할 대상으로 같은 동기인 나를 택한 것도. ‘야’라는 말이 후배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는 이곳에서 이름으로 기억된다는 건 찍혔다는 표현이나 다름없다. 지금이라도 만회하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밖에서 후배를 대놓고 패다가 들키면 군기 잡는 놈으로 몰려 좆되기라도 할까 봐 마음에 안 드는 조무래기 손 빌리겠다는 영악한 계획에 못 이기는 척 발맞추면 된다는 소리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창백한 얼굴로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펴 정강이를 내보이는 동기가 시야에 잡혔다. 말도 안 되는 폭력에 익숙해져서, 그냥 차라리 이렇게라도 넘어가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 같은 지친 표정을. 내면에서 무언가가 꿈틀댔다. 참아, 이성적인 목소리가 나를 막아서기 전에 입이 열렸다.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뭐?”

“괜찮으시다면 강현수 생도의 팔굽혀펴기를 제가 이어서 하고 싶습니다.”

“누가 그러래?”

“강현수 생도가 오늘 새벽에 고열 때문에 응급실에 다녀왔습니다.”

“…….”

“힘든 일도 늘 곁에서 함께하는 전우의 마음으로, 제가 강현수 생도의 몫까지 맡아서 하겠습니다.”

입교 후 나조차 내 비위를 못 맞추고 어긋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난다. 상식을 벗어나는 짓거리를 해대는 선배의 앞에서는 유독 뻑 나는 횟수가 잦다. 가끔은 스스로를 쥐어패고 싶을 정도니, 선배들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답을 모르는 게 아니라, 그 답을 따를 수가 없다는 이유로.

복종도, 불복종도 아닌 대답에 B는 말이 없다. 인중이 움찔대더니, 이내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짧은 웃음 뒤에는 싸늘한 침묵이 길게 붙었다. 한 번 더 아래를 내려다본 B가 이내 목을 좌우로 우두둑 꺾었다.

“다들 들어가. 이지훈 빼고.”

그 또한 명령이기에 거역할 수 없다. …예! 눈치를 보던 동기들은 한 박자 늦은 대답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숙소로 부리나케 뛴다.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머뭇대는 마지막 놈에게 나는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가, 얼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강현수까지 절뚝대며 뛰어가고 나니 운동장에는 둘만 남았다. 마지막 놈까지 생활관 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B가 나를 향해 뒤돌았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지?”

“…….”

“엎드려.”

바로 엎드려서는 팔굽혀펴기 자세부터 취했다. 시큰대는 정강이를 티 내지 않기 위해 다리를 꼿꼿이 뻗었다. 어차피 이 또한 무너질 테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애매하게 할 수는 없다.

“네 동기가 강현수뿐이야?”

“아닙니다!”

“그치? 그러면 공평하게 모두의 짐을 나눠 들어줘야겠지?”

“…….”

“지금부터 천 개 센다. 자세 무너지는 순간 하나부터 다시 시작이야.”

대답 대신 팔꿈치를 굽혔다. 사실 호명된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것도 답을 알았지만, 행하지는 못한 일 중 하나였을 뿐.

기합은 운동할 때도 지겹도록 받아 봤다. 다만 그때는 야구라는 목표가 있어서 참았을 뿐이다. 내가 수십 번 팔을 굽히는 동안, 흔들림 없이 서 있는 B의 삼선 쓰레빠를 보며 생각했다.

하늘을 보러 온 곳에서 땅바닥만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어떤 목표를 위해서 이걸 참고 있는 걸까.

입교식 전에 미리 입소해 선배 생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가입교 기간만 버티면 된다고, 동기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신입생들 겁주려고 처음에는 일부러 더 빡세게 군대, 라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말은 누군가에게는 믿을 만한 가치가 있던 말로 증명됐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입교 후에도 내게는 또 다른 B가, 새로운 C가, 지겨운 D가 생겼다. 본인이 이끄는 동아리에 나를 억지로 가입시킨 B는 점점 더 교묘한 방식으로 불러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가입 당한 신입생은 나 말고도 서넛 정도가 더 있었는데, 공통점이라고는 B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운동 기구로 가득한 동아리방은 누가 더 버틸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고문실이나 마찬가지였다. CCTV는커녕 시계조차 없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갈굼 당하고 맞다 보면 생각이란 걸 할 기력조차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는 매 순간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겨우 탈출해서 방에 돌아오면 씻지도 못하고 잤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니 고문실 안에 남은 후배라곤 나뿐이었다. 이 방에서 탈출한 동기들은 이 학교에 다니는 한 B를 피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자퇴했다. 말이 자퇴지, 학교는 자퇴라는 말로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내보내는 것처럼 단어를 바꿔서 ‘퇴교’라고 했다.

연이은 퇴교의 뒷배로 꼽힐 법도 한데, B는 학교 측의 의심 망에 오르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지켜본 동기들만이 알았다. 면회도 할 수 없을 만한 면상이 매일 갱신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나를 안쓰러워했던 동기 중 하나가 새벽에 내 방까지 찾아와서는 B의 아버지가 이 학교 출신인 데다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령이느니 뭐니 일러주면서 나한테 깨갱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입생 중 너만 이렇게 죽일 듯 잡는 건 네가 그렇게 당하면서도 납작 엎드리지 않아서가 아니겠냐며.

듣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B에게 굴려지는 건 모두가 알았어도, 그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보다 더 납작 엎드리려면 네발로 기는 수밖에 없다’고.

고문실 안에서 나는 B를 비롯한 선배들의 말에 반항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혹시라도 왜 그렇게 얼굴에 상처가 많냐고 물으면 대련 중 다쳤다고 말하라는 B의 말마저 그대로 따랐다.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동아리방으로 와서 머리부터 박고 있으라는 말에도 그렇게 했다. 가끔은 내 존재를 잊었는지 밤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창밖이 까맣게 물들 때까지도 몸 한번 내리는 법 없이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로 기다렸다. 그 선배들이 패러 올 테니까, 만약에 패러 왔는데 내가 그러고 있지 않으면 더 지랄할 테니까.

그렇게 했는데도 기합을 빙자한 길들이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모를 수 없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건 내 행동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그건 때린다고 해서 길들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아니라고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버티는 것뿐이고.

참을성이 먼저 바닥난 건 B 쪽이었다. 텅 빈 동아리방 때문에 이제는 내가 누구를 보호한답시고 나섰다는 핑계로 때릴 수가 없어서인 것 같기도 했다. 두 시간째 제 동기들에게 묵묵히 구타당하던 내 어깨를 붙잡아 일으킨 놈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 독한 새끼 진짜… 맷집이 센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어제 관자놀이 부근을 제대로 얻어맞은 탓에 눈 한쪽이 퉁퉁 부어올랐다. 눈을 뜨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지경이라 시야에 B의 모습이 반만 담겼다. 그건 좀 좋은 것 같다고 멍하니 생각하면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통에 젖은 신음만 울렸다. 그게 내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사실을 막 깨달았을 때, 어깨가 거칠게 뒤로 밀쳐졌다. 나를 한 번 더 노려본 B가 제 동기들을 끌고 사라졌다.

“…윽….”

나는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야,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허벅지가 꺾인 탓에 쓰러지듯 눕게 됐다. 꼴에 유도 동아리 흉내를 낸다고 두꺼운 매트를 깔아놨다. 푹신한 곳에서마저 뒤로 제대로 누울 수가 없어 옆으로 몸을 돌린 채로 둥글게 말았다. 온몸이 부어오르고 욱신대는 고통을 견뎌내기에는 이 자세가 그나마 나았다. 숨을 내쉬며 축축한 코 밑을 익숙하게 훔쳤다. 태어나서 몇 번 흘린 적도 없던 코피를 이곳에 와서는 밥 먹듯이 흘린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럴 때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코피를 자주 흘리던 놈을 떠올린다.

‘욱이? 잘 지내는 것 같던데. 걔 타임라인에서 예전 미니홈피 같은 일 일어나고 있는 거 못 봄? 거기서 혼자만 원시인처럼 살고 있으니까 모르지. 나 면회만 가게 해주면 1부터 10까지 다 말해줄게. 연예가중계 대신에 영수가중계 해준다.’

강영수와의 통화에서 알게 된 정보를 곱씹으며 멀쩡한 오른쪽 눈마저 감았다. 나만 이러고 있다는 절망적인 사실은 잘 지내는 지선욱을 떠올리는 순간엔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강영수는 목소리만 들어도 별일 없는 걸 알 수 있으니 다행인데, 지선욱은 목소리만으로는 딱히 뭔가를 추측할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먼저 말할 리도 없는 놈이라서.

여기만큼은 아니라도 군기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학교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래, 그럼 됐지. 잘 지내면.

군기 잡히는 일 없이, 맞는 일 없이…

잘 지내면 됐다. 안 아프다니 다행이고.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나면, 나을 시간이라도 주겠다는 건지 안 보이는 곳을 집요하게도 조져댔다. 각목으로 맞은 허벅지 뒤가 덧났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점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리를 이 정도로 희생한 덕분에 그나마 덜 맞은 얼굴을 보고서도 충격받아 말을 잇지 못하던 강영수를 떠올리니 새삼 쓴웃음이 나왔다. 아빠나 지선욱한테 말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는 순간마저도 내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놈을 생각하면 불안했다. 식은 치킨을 입 안에 마구 쑤셔 넣고 식혜를 한 번에 들이켜는 기행까지 선보였는데도 웃는 것 대신 훌쩍대던 걸 보면 적잖이 충격받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는데 자꾸 온다고 지랄을 해서는.

덩달아 가라앉은 기분이 쉽사리 회복이 안 됐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주말이기도 하고, 신입생들이 대대적으로 면회를 나가는 날이라 그런지 B가 날 찾지 않았다. 오늘 밤만이라도 잘 넘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을 제대로 자본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엎어질 요량으로 방문을 열다 말고 우뚝 멈췄다. 같은 방을 쓰는 동기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손톱을 깨물며 좁은 방 안을 빙빙 돌던 놈은 눈에 띌 정도로 초조한 표정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날 보자마자 반짝 얼굴이 밝아졌다.

“…야! 잘 왔다. 안 그래도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게 있잖아.”

적당히 잘 지내던 놈이었지만, 내가 방에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반길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곤란한 낯으로 말을 고르는 놈을 두고, 나는 놈의 뒤로 보이는 방을 훑었다. 정확히는 내 침대, 내 옷장, 내 책상 위를. 건너편에 있는 동기의 깔끔한 소지품들과 달리 엉망이 되어 있는 것들. 마치 누군가가 뒤집어놓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절뚝대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침대며, 책상이며 이미 널려 있는 것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는 것치고 지갑이며 핸드폰까지도 제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서랍을 열고, 혹시라도 방바닥에 떨어진 건 없는지를 살펴봐야 했다.

가장 간절하게 찾는 것만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최소한의 짐만 내놓은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붙여둔 사진이, 내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던 단 하나의 사진이 사라졌다.

엉망이 된 책상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을 놈에게 말을 걸었다.

“…B 왔다 갔냐?”

“지훈아, 그게….”

“그 새끼가 내 물건에 손댔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놈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아찔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어느새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걸음을 뗄 때마다 나를 괴롭히던 통증은 더는 느껴지지조차 않았다. 마치 머릿속을 활활 태우는 분노에 통각마저 마비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석식 시간이었다. 식당 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B가 보였다. 제 주변에 앉은 동기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앉기는커녕 가까이 갈 수도 없는 테이블이었다.

“야. 이지훈, 너 어디….”

식판을 들고 돌아서던 동기 여자애 하나가 나를 보자마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붙잡았지만 곧바로 팔을 비틀어 떨쳐냈다. 걸음마다 사방에서 달라붙는 눈들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걷던 내가 멈춘 건 한 테이블 앞에서였다.

“돌려주십시오.”

잠깐 멈칫한 B가 팔짱을 낀 채 뒤로 몸을 기댔다.

“뭘?”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B는 내가 이렇게 나온 순간에야 오히려 확신한 것 같았다. 사관생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던 내 소지품 중 유독 튀는 그 사진이, 아무리 처맞아도 제게 대놓고 기지는 않던 날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얼마 전, 고문실에서 날 보며 짓던 그 질린 듯한 표정과는 퍽 상반됐다.

반응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아는데도 또 답안을 따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코끝도 아니고, 인중도 아니고, B의 눈을 똑바로 보며 부탁하는 게 나의 최선이었으므로.

“제 방에서 가져가신 사진.”

“…….”

“저한테 소중한 겁니다. 소지품 수칙에 어긋난 거 없는 물건입니다. 잘못 가져가신 거면 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B가 내 방에 들어간 것까지는 몰랐을 옆자리의 선배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곳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어오르는 신입생을 덩달아 아니꼽게 보고 있던 그들의 표정에도 당황스러움이 깃들었다. 아무리 ‘길들이기’니 뭐니 해도 후배 방까지 쳐들어가서 물건을 가지고 나온 B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사실은 정상인이라면 알았다.

B는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할 멍청한 새끼가 아니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딱딱한 얼굴로 내게 명령하듯 읊조렸다.

“따라와.”

산 아래로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기숙사가 보였다. 아마 점호 중일 테다. 다들 내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쯤은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지선욱에게 부재중 전화가 스물다섯 통이나 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절뚝대면서도 뛰쳐나온 내게는 고려할 문제조차 못 됐다.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점호 시간이 끝나면 기숙사 문이 닫힌다. 그러기 전에 뛰쳐나와서는 뒷산을 오르기 위해 20분가량을 쉬지 않고 달렸다. 폐가 쪼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다행히 지선욱의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연달아 울리던 핸드폰은 이제 3분에서 5분의 텀을 두고 이어졌다. 기숙사에서 나올 때만 해도 스물다섯 통이었던 부재중 전화가 어느덧 스물여덟 통이 됐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깊게 한번 숨을 내쉬고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이마며 볼이 미끌미끌했다. 땀이어야 할 텐데, 손이 축축해지도록 훔쳐낸 것들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으면서 핸드폰을 쥔 손을 바꿨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꽤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석식 시간부터 자정까지 내내 처맞은 새끼처럼 들리진 않아서 안심했다.

“너 왜 이 시간까지 안 자냐.”

-…….

“잠이 안 와?”

아니면 놈한테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묻지는 못했을 테니까. 일상적인 대화는커녕 아까 면회를 왔던 강영수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한테 그렇게 맞았냐고 취조나 당하겠지. 문득 급식실에서 소동을 피운 나 때문에 울던 지선욱이 떠올랐다. 별거 아닌 상처를 보고도 그렇게 놀랐으니, 지금 이 얼굴을 보면 아마 기겁을 할 터다.

애초에 놈이 면회를 오겠다고 한 적도 없지만, 지금 내 모습을 지선욱이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흘러 들어간 이야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강영수는 기어코 약속을 어기고 오늘 본 꼴에 대해 지선욱에게 죄다 말했을 테고, 그걸 그냥 넘기지 못한 놈은 이렇게 답지 않게 집요할 정도로 전화한 거겠지.

열다섯 살부터 지선욱과 함께하며 받은 전화보다, 오늘 받은 전화 수가 더 많은 것 같다. 그 사실이 넌지시 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서 내 목표는 얘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조차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영수가 그러는데.

역시나 지선욱은 내가 예상한 이야기부터 꺼낸다. 이어질 말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숨을 죽였다. 들키거나 붙잡히지 않으려 철조망 친 곳까지 넘어서 뛴 덕분에 사방이 고요했다. 말을 고르느라 작아지는 지선욱 숨소리까지도 잘 들릴 정도라, 이곳까지 도망치길 잘했다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선욱이 말을 고를 때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마다 놈은 꼭 내가 잊지 못할 말을 하기 때문이다.

-강릉에 동기 할머니가 하시는 민박집이 있대.

“…….”

-옆에는 숲도 있고. 바다가 바로 코앞이라더라.

오늘도 놈은 그랬다. 나를 달래는 법이 다가올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임을 아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놈의 미래 안에는 내가 있었다. ‘언젠가’라는 말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깊게.

-여름에 셋이 놀러 가자. 너 바쁜 거 끝나면… 그리고 영수 기말고사도 끝나면.

그럭저럭 괜찮은 흉내를 잘 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울컥했다. 나는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린 채로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골랐다. 입 안의 다 헤진 볼살을 깨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야, 나 괜찮아.”

이럴 줄 알아서 여태껏 지선욱한테 전화 한 번을 못 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울 것 같고,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저녁 내내 처맞고 결국은 빌다시피 했는데도 사진을 못 찾아왔다. 강영수가 실수로 삭제해버리는 바람에 결국에는 미리 인화해뒀던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졸업식 사진이었다. 현재 내가 가진 유일한 우리의 사진이기도 했다.

굴복과 복종은 다르다. 그 둘은 결국 같은 거라고 스스로 속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게 다름을 인정해야 했다.

그 새끼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하고, 건드린 게 내 약점이었음을 뻔히 인정하면서, 사진을 되찾을 수 있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애원하는 과정에서.

그러나 그런 말이 지선욱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울 것을 알아서, 나는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바꿔 뱉는다.

“그래도 넌 좀 보고 싶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뚝 끊겼다. 지선욱의 핸드폰이 꺼진 건지, 내 핸드폰이 꺼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후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까맣게 물든 핸드폰 화면을 잠시 더 바라보다가 흙 위로 대충 앉았다. 점호가 끝나자마자 기숙사 입구의 문은 닫힌다. 아침 점호 시간이 될 때까지는 어쨌든 이곳에서 보내야 했다.

방금 지선욱에게 여긴 별이 떠 있다고 했는데, 막상 누워서 보니 별이 없다. 어쩌면 방금 내가 본 건 별처럼 반짝이던 비행기였을 수도 있겠다고 뒤늦게 생각했다.

올해 여름 우리가 볼 강릉의 하늘에는 별이 떠 있을까. 그때는 비행기가 아닌 별이었으면 좋겠는데.

* * *

첫 외출을 나갈 수 있었던 건 5월 말이 되어서였다. 아무리 B라도 학교 측이 허락해주는 외출을 막을 권한까진 없었다. 하지만 외출 나가는 날 아침부터 불러 훼방 정도는 놓을 수 있는 집요한 놈이라는 걸 지난 몇 주간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다행히 오늘 B는 학교에 없었다. 그래도 날 못 나가게 하려면 얼마든지 지 동기라도 동원했을 놈이니 이건 자비라도 베풀듯 놓아준 거에 가까웠다. 사진을 돌려달라며 빌빌댄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요새는 그런 식으로 나를 봐주듯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두 달 만에 학교 밖으로 나온 기분은 이상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쓴 캡 모자를 어색하게 만지작대며 버스터미널로 갔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표로 무작정 끊고 보니 목적지가 서울이었다.

차창에 기댄 채로 핸드폰을 켰다. SNS에 접속해 커서를 내리기만 해도 며칠 동안 못 본 소식들이 범람하듯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것들로 군기를 잡는 놈들은 내가 핸드폰을 꺼내서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비를 걸어댔다. 그게 싫어서 핸드폰을 종일 확인하지 않곤 했는데, 우습게도 B에게 굴복한 그날 이후부터는 그걸로 시비가 걸리지 않았다. SNS에 접속했을 때마다 보이는 강영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접속해서 소식을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오늘도 상단에는 강영수의 글이 가장 먼저 떠 있었다. 꼴랑 몇 달 사귄 여자친구를 일생일대의 사랑인 척 호들갑 떠는 꼴을 보다 말고 커서를 확 내렸다. 아무리 커서를 내려도 고등학교 동창 놈들의 궁금하지도 않은 소식뿐, 지선욱은 이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욱이? 잘 지내는 것 같던데. 걔 타임라인에서 예전 미니홈피 같은 일 일어나고 있는 거 못 봄? 거기서 혼자만 원시인처럼 살고 있으니까 모르지. 나 면회만 가게 해주면 1부터 10까지 다 읊어줄게. 연예가중계 대신에 영수가중계 해준다.’

하긴, 강영수 말처럼 중학생 때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면 얘가 뭘 올리지 않아도 주변에서 대신 난리를 피우는 거겠지.

예상대로였다. 지선욱 피드에는 본인이 직접 올린 글은 없고 대신 남들이 올려준 글들만 가득했다.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는 놈이 아니라서 그런지, 수많은 글을 살펴봐도 사진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단체 사진의 귀퉁이에 조그맣게 찍혀 있거나, 혹은 누군가 몰래 찍은 듯한 뒷모습이거나 그랬다. 심지어 검도 동아리에서 지선욱을 태그해 올려준 사진에서조차 놈은 투구를 쓴 채였다. 투구 속으로 보이는 얼굴만으로도 지선욱을 한눈에 알아본 내가 더 어이없을 정도로.

혹시나 해서 살펴봤지만, 피드에 선배며 동기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빈도만 봐도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면을 끄고는 의자에 머리를 깊숙이 묻었다. 운전기사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앞에 크게 붙은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요새는 B가 하란 대로 하고, 맞추란 대로 맞췄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는 덜 맞았다. 볼의 부기도 빠졌고 광대 부근에 노랗게 변한 멍 빼고는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는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다음 주에는 아빠가 이모랑 함께 면회를 오고 다음 달에는 강릉에서 강영수와 지선욱을 만난다. 내가 원할 때 통화할 수 있고, 알고 싶은 사람들의 소식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머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물음을 무시하고 현실에 순응한 결과로 얻게 된 것들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칭찬하듯, 혹은 벌하듯 중얼거리던 걸 반복했다.

그래, 계속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모텔로 갔다. 지은 후부터 환기라고는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마저도 잠이 고팠다. 모자를 벗고 침대에 엎드린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쥐 죽은 듯이 잠들어서는 한 번도 깨지 않다가, 프런트로부터 독촉 전화가 오고서야 일어섰다. 허기진 배를 채우듯 모자란 잠을 채운 기분이 들었다. 웬일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또렷했다. 어느덧 오후 4시였다.

대충 씻고 나와서는 터미널로 가 학교로 가는 표부터 끊었다. 가장 빠른 시간대로 끊었는데도 한 시간 반 후에야 출발하는 버스였다. 시간이 빈 김에 터미널 옆에 붙어 있는 백화점에 가서 곧 생일인 아빠한테 줄 깔끔한 셔츠와 운동복을 한 벌씩 샀다. 갖다주면 뭘 이런 걸 비싸게 주고 샀냐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보면 잘 입고 다닐 거였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두 개를 해치우고서도 시간이 남았다. 하품을 참으며 옆의 카페로 들어섰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가져오는데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계속해서 내 자리를 힐끔댔다. 내가 자리를 맡을 용으로 미리 던져뒀던 지갑 안에서 삐져나온 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공사 다녀요?”

여자는 한술 더 떠 모자 안으로 죄다 가려지는 내 머리의 기장을 가늠하듯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정이며 말투가 이미 반쯤은 확신하고 묻는 것 같았다. 우연히 마주친 여자가 공군사관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일반인이라기에는 짧은 머리가 생도이기 때문임을 알 확률을 계산해본 적은 없지만, 이곳이 버스터미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가족이나 남자친구, 그것도 아니면 아는 누군가가 사관생도겠지. 반가워서 말을 건 걸 테고.

“네.”

짤막한 대답과 함께 시선을 끊었다. 몇 달 만에 푹 잔 덕분에 컨디션은 괜찮았지만, 모르는 여자의 관심에 친절히 장단 맞춰줄 정도까진 아니었다. 내가 대화를 이어 나갈 의지가 없음을 깨달은 듯한 여자도 나를 한 번 더 빤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쓸데없이 말을 건 이유가 궁금할 정도로 바빠 보였다. 노트북을 쉴 새 없이 두들기고, 동시에 통화하면서 대리님, 과장님, 팀장님을 연이어 찾다가 이제는 외국어로 미스터 제임스까지 찾는다.

터미널 안 프랜차이즈 카페는 주말 오후를 어떻게든 더 잘 보내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 있는 건 나뿐인 것 같다. 학교에서는 처맞느라 이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다가 모자를 푹 눌러쓴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차피 버스를 탈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플랫폼에 나가 기다릴 셈이었다.

“잠깐만요.”

카페를 벗어나기 전 팔이 붙들린 건 뜻밖이었다. 그게 내가 일어서기 전까지도 통화에 열중이던 여자라는 건 더 의외였고. 내가 팔을 빼기도 전에 여자가 빠르게 말했다.

“내 동생이 그쪽이랑 같은 학교 다녀요. 공사요.”

예상했던 이야기다. 어쩌라는 건지… 지루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웃는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주눅 드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처음 보는 타인에게 말을 걸어 놓고 심드렁한 반응에 멈칫하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것을 고려해보면.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걸 빌미로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려고 했거든요. 음… 근데 아시다시피 그건 별 소득이 없었고.”

내 앞을 막고 선 여자의 머리 위로 창을 통과해 들어온 햇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햇빛을 곧이곧대로 흡수하는 얼굴에는 생명력이 넘쳤다. 마치 제가 태어나서 그런 햇빛만 받아온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밝게 빛나기까지 했다.

“이제 저한테 남은 건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어서요.”

“…….”

“번호 줄 수 있어요? 저 그쪽한테 관심 있는데.”

짤랑.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 무리가 이쪽을 흘끔대며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나를 두고 저렇게 호들갑을 떨 리는 없으니, 아마 웃고 있는 이 여자 때문일 터다. 그런 시선을 눈치챘을 텐데도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자는 살면서 그런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던 모양이고.

“주는 게 부담스러우신 거면 제 명함 가져가셔도 돼요.”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쟁취해 내며 살아왔을 테다.

생명력, 쟁취하려는 용기. 지금 내게 결핍된 것들을 자랑이라도 하듯 뽐내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짤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햇살과 함께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대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우연히 마주친 여자가 공군사관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일반인이라기에는 짧은 머리가 생도이기 때문임을 알 확률. 그리고 그 여자가 대화의 소재로 꺼낸 동생이, 당장 어제저녁에도 나를 동아리방으로 불러 팬 선배였을 확률.

모르긴 몰라도, 날 확인한 저 새끼의 안색이 안 좋아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확률인 건 알겠다. 나를 알아본 순간 인상부터 찌푸린 B의 표정은 그 앞에 선 여자를 본 순간 급속도로 바뀌었다.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여자를 불렀다.

“…누나?”

“어, 잠깐만.”

흘끔 B를 확인하고서도 여자의 고개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저를 부른 동생보다는 내 쪽이 더 급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듯이. B의 초조한 시선이 내 얼굴에 닿는다. B의 손에서 찢길 뻔한 졸업식 사진을 보던 내 표정도 저랬을까. 나는 익숙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웃었다.

“연락드릴게요.”

여자의 손가락 사이의 명함을 집어 들면서.

B와 같은 버스를 탔다. B의 좌석이 나보다 두 자리 앞이었다. 버스를 탄 순간부터 지랄할 거라 각오했던 것치고 B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다. 청주로 내려가는 두 시간 동안 오히려 나를 외면하듯 창밖만 보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보다 말고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지갑에 끼워두었던 명함부터 꺼냈다. 적혀 있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그쪽 동생 알아요.”

나는 인사 대신 그런 말부터 했고, 여자는 그 말로도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챈 것 같았다. 내가 왜 명함을 받아 갔는지도.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퍽 밝았다. 마치 그 사실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내 동생 싫어하죠? 말투 보니 그런데.

“혐오하는데요. 볼 때마다 저렇게는 살지 말자고 다짐도 하고.”

-…….

“명함도 그래서 받았어요. 얼굴 구겨지는 거 한번 보려고. 그쪽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B의 얼굴을 바라보며 명함을 가져오는 일은 재미있었다. 다만 그 재미는 거기서 끝나야 했다. 혹시라도 기대할지 모를 여자에게 사실을 말해주러 전화한 거였고. 그러나 여자는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걔가 좀 꼰대 같은 면이 있긴 하죠?’ 맞장구치듯 말을 이으며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한참 웃다가 막 생각난 것처럼 묻기도 했다.

-혹시 그것 때문에 나랑 연락 안 하겠다는 건 아니죠? 내 동생이 싫다고 해서 나까지 싫을 건 없잖아요.

그리고 하나 더. 조건이라도 걸듯 말하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나 걔랑 별로 안 친해요. 난 그 집에서 벗어나는 게 평생의 목표였는데, 걔는 거기 녹아드는 게 목표인 인간이라.

“…….”

-등교 도우미까지 있는 집에서 뛰쳐나와서 타지에서 벌어먹고 사는 이유가 뭐겠어요? 꼰대랑 꼰대 새끼 못 견뎌서지.

알 필요도 없는 남의 가정사가 술술 흘러나왔다. 아까 카페에서 여자에게 다가가는 순간 B의 얼굴을 스치던 당혹감을 되새겼다. 여자가 내게 명함을 내민 걸 확인했을 때조차 말리기는커녕 답지 않게 머뭇대던 모습을.

그러니까, 이 여자에겐 B가 제 아빠의 나쁜 면만 닮은 꼰대 새끼 같은 동생이겠지만 B에게는 후배를 갈굴 기회도 포기하고 서울까지 올라와 만나고 갈 정도의 누나는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나한테 지랄했다가는 지 누나한테 그 사실이 알려질까 봐 겁을 내기까지 하고.

따지자면, 이건 B가 내게 절대 보여줄 리 없는 가족사진을 보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쓰레기통에 처박으려던 명함을 다시 들여다봤다.

해외사업부 사원 한재영(Jeniffer Han)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가는 걸 보며, 정거장에 비스듬히 기대서서는 물었다.

“그래서 누나 몇 살인데요?”

* * *

한동안 부르질 않길래 제 누나 눈치라도 보나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내일 첫 외박 나간다며?”

자정이 가까운 시각, 동아리방으로 나를 소환하고는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내가 이 새끼를 과대평가했음을 알았다. 얘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었던 거고, 내 동태를 지켜보며 기다릴 인내심이 있었을 뿐이다. 애초에 내가 지 누나를 이용하거나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던 모양이다. 반면 자신은 나를 언제든지 협박할 수 있는 무기를 갖췄다는 것도 아는 거고.

어째 매 순간 최악을 갱신한다. 친누나 입에서 손절할 타이밍만 엿본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누구랑 가? 이 친구들?”

친근하게 묻는 B의 손에는 오늘도 내 사진이 들려 있다. 그새 보관을 어떻게 했는지 사진 상태가 얼핏 봐도 최악이었다. 일부러 구기기라도 한 것처럼 접힌 흔적이 여럿인 사진을 바라봤다. 내 얼굴보다 지선욱과 강영수의 얼굴 위로 파인 자국이 더 여럿이었다. 마치 일부러 그걸 노리고 구기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실물을 보니까, 사진을 돌려받겠다고 그보다 큰 걸 걸어서는 안 된다고. 이런 도발에 넘어가서 괜히 일을 크게 만들면 내 손해다.

대답하기에 앞서 자세부터 고쳤다. 지금부터 내 목표는 이어질 기합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는 거다. 내일 아침에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니까. 그러려면 밤새 이곳에 붙들려서는 안 됐다.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는, 표정을 지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B에게도 내가 반항할 마음이 없음을 알려야 했다.

“예. 그렇습니다.”

순순히 건너온 대답에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B는 비웃으며 사진을 제 눈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흐음… 일부러 내는 듯한 뜸 들이는 소리가 적막한 동아리방 안을 메웠다.

“경찰대랬나, 이 친구가?”

이 씨발 새끼가 또 시작이다. 그때 사진을 돌려줄 듯 말 듯 약 올리며 해대던 호구조사를 다시 하는 목적이야 뻔했다. 그래 놓고도 한 거라곤 그렇게 신상을 알게 된 남의 친구 얼굴을 구겨버리는 거였으면서.

“예.”

뒤로 팔을 모은 자세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먹을 꽉 쥐었지만, 적어도 대답하는 목소리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야 유리한 게임인 걸 알아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티를 내거나 대답을 망설이면 그 순간부터는 집중 공격당할 만한 약점이 된다.

“볼수록 여자 잘 후리게 생겼네. 같이 놀면 여자 꼬실 때 재미 좀 보겠다?”

“…아닙니다.”

“왜? 얘도 너처럼 여섯 살 연상 후려서 사귀는 중이래?”

절로 고개가 들렸다. B가 피식 웃으며 걸터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어쭈. 표정 봐라.”

“…….”

“기분 나빠? 네 친구나 너나 그게 그거라고 해서?”

어깻죽지가 잡혔다. 눈 말고는 다 웃고 있는 새끼가 피할 길마저 막아둔 채로, 정면에서 날 향해 이죽대고 있었다.

“볼수록 웃긴 새끼네. 다른 거 다 잘 참으면서, 친구 이야기만 나오면 왜 좆같은 기분을 못 숨겨서 처맞지?”

정말 궁금한 것처럼 묻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친구가 좋으면 경찰대도 따라가지 그랬어.”

“…….”

“뭐 하러 여기 와서 나한테 처맞고 있어? 저 사진 하나 돌려받겠다고 무릎도 꿇고? 응?”

어쩌면 이 새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의지를 벗어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차, 하는 망설임조차 없이 튀어나간 말은 내가 듣기에도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들렸다.

“그럴 걸 그랬습니다.”

“…뭐?”

“선배님 말씀처럼, 경찰대에 가면 좋았겠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지선욱이 이딴 새끼의 입방아에 오를 일은 없었을 터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B는 잠시간 날 바라보더니 이내 승리에 도취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방금 한 대답이 어쨌든 자신이 바라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됐음을 확신한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명령이 떨어졌다. 엎드려. 순순히 그 말에 따르며, 그 흔한 벽시계 하나 없는 벽을 훔쳐봤다.

자려고 눕다 말고 소환된 탓에 핸드폰이며 시계를 죄다 방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닫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새끼한테는 유리한 상황이 되리라는 것도.

“윽….”

신음을 토하며 눈을 떴다. 잠든 기억이 없으니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일 가능성이 컸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의자에 앉아서 헛구역질하는 나를 따분하게 바라보던 눈빛이었다. 밤새 걷어차인 명치 부근이 아릿했다. 매트 위로 커튼마저도 미처 가리지 못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잠깐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동아리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불안할 정도로 주변이 조용했다. 현기증이 이는 걸 무시하고는 무거운 몸을 급히 일으켰다. 복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절뚝대며 당도한 생활관까지도 한적했다. 오늘은 나 말고도 다수의 동기가 외박을 신청한 날이었다. 외박 날엔 대부분 오전 중에 학교를 떠났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학교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들이 이미 대부분 떠난 오후라는 뜻이기도 했다.

생활관 로비의 시계는 불안을 현실화했다. 적어도 10시에는 출발했어야 했는데, 시침은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기를 잠시 일단 방으로 뛰어 올라가기부터 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집어 든 핸드폰은 켜지지조차 않았다. 밤새 충전하지 못해서였다.

“…씨발.”

욕을 뱉으면서도 일단은 핸드폰을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이미 충분히 늦었다. 택시라도 탄 후에 어떻게 놈들에게 연락할 건지를 생각해 봐야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뛰고, 또 뛰었다. 겨우 버스정류장 앞에 섰을 때는 기어코 속이 뒤집혔다. 헛구역질인 줄 알고 숨만 고르려 했는데 흙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노란 액을 보고서야 내가 토하고 있음을 알았다. 몸을 대충 추스르며 미지근한 물로 입을 헹궜다. 몸이며 정신까지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감당하기 버거웠다. 하긴 시계조차 없는 방에 밤새 처박혀서 맞거나 구르기만 했는데 제정신이면 그거야말로 희한한 일이었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렇게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며 초점을 잡으려 노력했다.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버스정류장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택시라면 잡아야 했다.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도 손부터 위로 들어 흔들며 옆에 두었던 가방을 쥘 때였다. 또 한 번의 현기증, 그리고 이어지는 구토.

빵-빵-

경적 소리가 들렸다. 버스정류장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날 향해 물었다.

“괜찮아?”

누나였다.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되길래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진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지.”

누나는 나한테 듣지 않고도 상황을 대강이나마 파악했는지 한숨부터 쉬었다. B가 일부러 보이지 않는 곳을 노려서 때린 탓에, 드러난 흉터라고는 볼에 있는 것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B가 눈치를 보는 줄 알았던 기간에도 B를 대신해 나를 기합 주는 선배들은 있었다. 노린 것처럼 데이트 전날마다 불러서 평소보다 심하게 지랄을 해대니 누가 시킨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데이트에 늦거나, 데이트하던 중 몸에 난 상처를 알게 되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만 해도 누가 그랬냐고 심각하게 묻던 누나는 나중엔 묻지조차 않았다. 가끔은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입에서 제 동생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 눈속임에 동조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누나는 나를 강릉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같이 분노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됐다.

아까 전부터 입술을 달싹이던 누나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나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누나한테 빌린 핸드폰이 손안에 있었는데, 막상 연락하자니 늦은 이유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하도 맞아서 외우고 있던 지선욱의 핸드폰 번호 끝자리마저 가물가물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계속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댔다.

“친구들이 뭐래?”

멀미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쳐다보는 누나에게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냥 연락 안 하려고. 나 없다고 지금까지 기다릴 놈들은 아니야. 알아서 갔겠지.”

생각해보니 안 하는 게 낫겠다 싶다. 몇 개월 만나고 말 사람 핸드폰에 지선욱의 번호가 남는 것도 찝찝하고.

강영수가 얘기한 바로는 펜션 사장님이 터미널까지 데리러 온다고 했다. 나를 기다린다고 그 차를 그냥 보냈을 리는 없다. 아마 펜션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대신 내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를 비우지는 못했을 테니, 장이나 미리 봐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마트 있으면 내려줄 수 있어? 장 좀 봐가게.”

“그래, 그럼.”

핸드폰을 돌려주다 말고 눈이 깊게 마주쳤다. 차에 탄 후 처음이었다. 누나의 머리카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씻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알코올 함유량이 유독 많은 듯한 스킨 향이 차 안에 가득했다.

“어디서 왔어?”

잠깐 멈칫한 누나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어디긴. 서울에서 왔지.”

“늦게 일어났나 보네.”

“응. 어제도 야근했거든. 집 오자마자 기절하듯 잤다가 일어나서야 씻었어.”

나는 대답 대신 누나처럼 앞을 봤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가 국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문 좀 열어도 돼? 머리 아파.”

핸들을 꺾던 누나가 에어컨을 꺼줬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창문을 열어서인지 그나마 토기가 가라앉았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늦어놓고, 몸 상태가 최악인 것까지 티 내서는 안 되니까. 나는 창틀에 팔을 기댄 채로,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저 멀리 보이는 안내 표지판에 강릉이란 글자가 보였다.

‘그게 다야?’

지선욱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

‘사과는 안 할 거고?’

나를 똑바로 쏘아보는 놈의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차가웠다. 땡볕 아래에 있는데, 얼음물에 온몸을 담근 것처럼 살갗이 싸하게 얼어붙었다.

‘아무리 그래도 셋이서 한 달 전부터 세운 계획인데 넌 책임감도 없이, 씨발. 늦잠 자고 연락은 받지도 않아서 내내 사람 걱정시키다가 이렇게 등장하기만 하면 끝이냐?’

‘…….’

‘우리 둘은 네 들러리야? 이딴 거 사 와 줬다고 박수라도 쳐 줘야 해?’

들러리라는 단어가 거기서 대체 왜 나온 거지? 넌 한 번도 내 삶의 들러리인 적이 없었는데.

‘늦은 건 잘못했어. 어제 기합받아서 새벽에야 방에 들어왔어. 기절하듯 잠들었고, 일어나니 너무 늦었더라. 누나한테 부탁하고 바로 온다고 왔는데도 늦었어. 핸드폰 충전을 못 해서 중간에 핸드폰이 꺼지는 바람에 연락도 못 했고. 누나 폰으로라도 하려고 했는데 너랑 강영수 핸드폰 번호가 순간 기억이 안 났어.’

‘…….’

‘연락도 없이 늦은 건 미안. 사과할게.’

그 사과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잠든 것 대신, 차가운 매트 위에서 기절했던 것만 빼면 모두 사실이기도 했다. 기합받았다는 얘기도 웬만하면 안 하고 싶었는데 내가 늦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놈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꺼냈다. 같이 나를 기다렸을 강영수는 넘어가 줄 만한 사과였다. 근데도 지선욱에게는 부족했다. 알아 온 시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화를 내고 떠나버린 놈을 잡질 못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부터 알 수 없었으니까.

지선욱을 쫓아갔던 강영수가 혼자 돌아온 걸 보고서야 정말 놈이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강영수는 날 보자마자 고개부터 저었다. 지선욱에게 거절당한 전화 내역을 보여주며, 지금은 놈이 흥분한 것 같으니 시간을 주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방금까지 마루에 서 있던 지선욱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가 뭘 했어야 놈이 그렇게 가버리지 않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건… 친구가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서울에 도착했다고 전화한 누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슨 일이냐고 묻더니, 대충 상황을 전해 듣고는 그렇게 말했다. 사진을 뺏어간 게 B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도, 선배들에게 소지품 검사를 명목으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뺏겼다는 말은 한 적이 있었다. 그걸 아는 누나는 내가 그렇게 애틋하게 구는 친구들과 이런 상황을 맞았다는 사실 자체가 잘 이해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네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잖아. 기합받아서 그런 거라고도 말했다며.

“…….”

-근데도 화를 내고 갔다고? 더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바로?

누나는 지선욱을 모른다. 우리 중에 아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으니, 내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그걸 아는데도 지선욱을 탓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해. 어쨌든 내가 늦은 거고, 잘못한 것도 맞으니까.”

-아니, 나는…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고, 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내가 기름값 준다고 하면 누나가 안 받을 것 같아서, 글로브박스에 넣어놨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애초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받은 전화였다. 직장인이 주말에 자기 일도 아니고 남의 일로 강릉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또다시 돌아가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니까. 예의를 차리는 내 인사에 누나도 뭘 그런 걸 했냐며 말을 받았다. 통화가 얼추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 자.”

-응. 너도 그 친구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원래 여행 가면 친구들끼리 많이 싸워. 그러다 안 보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고. 고등학교 친구랬나?

“…….”

-나도 네 나이 때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평생 갈 줄 알았어. 그 시절에 만난 친구들만이 진짜 친구니 뭐니, 다들 말이 많기도 하고. 근데 살아보니까 별로 그렇지도 않더라. 애초에 친구라는 것 자체가 영원한 게 아니잖아. 한쪽만 노력을 안 해도 금방 끊기는 관계이기도 하고. 그냥 이 기회에 좋은 교훈 얻었다고 생각해.

“…누나.”

-어?

“뭘 안다고 그렇게 말을 막 해?”

-아니, 나는 네가 속상해 보이니까…

“어. 속상해. 근데 누나한테 같잖은 충고 들을 정도는 아냐.”

비꼬듯이 튀어나간 말에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나는 헛웃음을 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까 지선욱이 버리고 간 아이스크림이 그대로 굴러다니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누나랑 끝낼 생각은 해도, 걔랑 끝낼 생각은 안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 만난 누나한테 전 남자친구 향수 냄새 나는 건 참아도, 평생 볼 내 친구 욕하는 건 참기 힘들단 말.”

-지훈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해명하지 마. 그거 듣자고 말한 거 아니니까.”

-어제 딱 한 번 만났어. 정말이야.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하길래 잠깐 얼굴만 본 거야. 다시 만날 생각도 없고. 너 만난다고 확실히 말하고 정리하려고….

“안 궁금하다니까.”

-…….

“눈치챈 지 꽤 됐어. 지금에야 말할 마음이 든 거고.”

어렸을 때부터 후각이 유독 발달해 있었고, 내 것이 아닌 냄새에 예민했다. 엄마가 스킨만 바꿔도 알 정도로, 탈의실에서 신발 벗는 새끼가 아침에 발을 씻었는지 안 씻었는지 가려낼 정도로, 몇 주 전부터 차 곳곳이나 그녀의 몸에 스며든 타인의 냄새 정도야 무리 없이 가려낼 정도로.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나 지금이나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질 거였는데, 뭐. 휘발성 만남에 대단한 순정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기대하는 거야말로 웃긴 일이고. 어찌 보면 나도 공범이었다. 이걸 무기로 쓸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알며 헤어질 타이밍을 보고 있었던 것부터가 관계에 진심인 새끼가 할 짓은 아니니까.

땅에 떨어지면서 돌에 부딪혔던 아이스크림이 포장 봉지 안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찢긴 마개 부분에 개미들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냉동고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어서 팔을 깊게 집어넣어 꺼내야만 했던 꽝꽝 언 아이스크림은 이제 더는 먹을 수조차 없게 됐다. 햇빛에 녹고, 분노에 녹고, 그러면서도 결국 주려던 사람에게는 닿지 못해서.

-하… 이러지 말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설명할게.

“우리 충분히 만났어. 방금 그만하고 싶어졌고.”

-…너 정말 내가 친구 이야기 꺼낸 것 때문에 이러는 거면, 과민반응이야.

“그러니까.”

그래도 누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같이 있으면 재밌고, 적당히 이야기 잘 통하고, 취향도 비슷했다. 그래 봤자 끝은 보잘것없다. 이렇게 보잘것없이 끝날 것을 알고 만난 사람이기에 그렇겠지만.

애초에 끝을 담보로 한 모든 애정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통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관계라는 것부터가 증명하듯이.

“왜 내가 과민반응할 말을 꺼내.”

-…….

“내가 너한테 그래도 된댔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예의까지 버린 내가 정말 끝을 말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어서일 테다. 나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버려진 아이스크림으로부터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밖에서 통화하는 걸 엿듣고 있던 강영수일 것이다. 역시나 불 꺼진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금 자는 척을 시작한 것처럼 어색하게 벽에 붙어서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등이 보였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보다가, 놈과 멀지 않은 곳에 누웠다. 아까도 느꼈던 거지만, 셋이 머물 방치고는 지나치게 넓었다. 그럼에도 셋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좋았겠지.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 위로 팔을 얹었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다 했더니 눈가를 비롯한 얼굴 전체가 뜨끈뜨끈했다. 몸살이 온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선풍기 한 대가 외로이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 위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까끌까끌한 입 안을 혀로 쓸었다.

“뭐 타고 갔대.”

훅,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에 이어 강영수가 푸-푸 소리까지 낸다. 아무도 안 믿을 자는 척에 혼자만 진심인 놈을 조금 더 참아주다가 한숨을 쉬었다.

“안 자는 거 알아. 대답해.”

“…흐음…냐….”

“뭐 타고 갔냐고, 지선욱.”

내 입에서 기어코 지선욱의 이름이 나오고서야 강영수의 거짓된 숨소리가 끊겼다. 한숨부터 쉰 놈이 이불을 크게 젖히며 들으란 듯 꿍얼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궁금하면 직접 전화를 해보든지….”

“니 전화도 안 받는데 내 전화를 받겠냐?”

할 말이 없는지 강영수가 입을 다문다. 부스럭 소리가 조금 더 들리더니 이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이 건너왔다.

“버스터미널로 간다구 아까 문자 왔어….”

“몇 시에.”

“일곱 시쯤.”

그때 버스를 탔으면 지금쯤은 학교에 도착했겠네. 강릉에서 지선욱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본 후 눈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강영수는 나처럼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냐?”

강영수가 또 한 번 한숨을 쉰다. 복잡한 표정이다. 내가 묻기 전에도 이미 한참 동안 그 생각을 해본 것처럼.

“아니… 너 존나 안 온다고 걱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 화가 난 느낌까지는 아니었는데.”

“…….”

“버스터미널에서 너 찾는다고 선욱이가 고생하긴 했어…. 핸드폰 충전한다고 어디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 근처 카페랑 편의점까지 뺑뺑 돌고 그러긴 했거든. 근데 그걸로 생색낼 애는 아닌데…. 아이 씨… 진짜 뭐지?”

답을 찾지 못한 강영수의 꿍얼거림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뚝 멎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화해할 거지?”

초조한 얼굴의 강영수가 대답을 보챘다.

“그렇게 간 건 선욱이가 좀 오버하긴 했어도 일단 네가 늦은 건 잘못이긴 하니까,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

“…….”

“잘못했다고. 어? 할 거지?”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강영수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땅이 꺼질 듯 한숨 쉬던 놈이 이불을 끌어당기며 중얼댔다.

“오랜만에 셋이 놀러 온다고 존나 기대했는데 이게 뭐야….”

그래도 나한테 확답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긴 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창호지 문을 통해 바깥의 푸른 어둠이 스미듯 방 안에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별이 떴는지, 안 떴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다. 종일 한 헛구역질처럼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애써 눈을 감았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근데 화해는 어렵다. 사과해도, 지선욱이 안 받아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난 그게 두렵다. 놈의 뒷모습을 또 보는 게. 그때는 지금처럼 흥분했으니 좀 더 있다가 연락해 보자는 희망조차 못 품게 될까 봐.

* * *

퇴교당하러 갔다. 한 달간의 휴가와 4주간의 군사훈련이 끝난 지 5일이 지났고, 기숙사 방으로 다시 돌아온 지 7일, 그리고 지선욱과 강릉에서 그렇게 싸우고 70일 가량이 흐른 날이었다.

“네가 미쳤구나.”

제 구역에 침범해 있는 나를 본 B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B의 공간을 둘러봤다. 그래 봐야 기숙사 방이긴 해도, 1인실은 넓었다. 혼자 쓴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수납할 공간이 차고 넘쳤다. B가 훔쳐 간 내 사진은 그 넓은 공간에서 수납되지조차 못하고, 책상의 마지막 서랍에 모인 잡동사니들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구겨지고, 심지어 모퉁이가 조금 찢어지기까지 한 채로.

B는 눈알 빠지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이 새끼를 어떻게 죽이지, 생각하는 눈깔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실현 가능한 여러 개의 시나리오가 돌아가고 있을 거였다. 하여간 뻔한 새끼. 몰라서 당했겠냐, 당해야 하니까 당했지. 지금이라도 대놓고 비웃어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퇴하기 전에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김에 돌려받을 것도 있고.”

일단은 내가 제게 엎드릴 거라는 그 기대부터 죽여야 했다. 내가 들어 올린 액자를 확인한 B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보면서도 액자를 아래로 던졌다. 사진을 감싸던 유리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몸을 숙여 액자 안 사진을 봤다. 내가 아는 얼굴만 둘인데, 그중 한 명은 웬일로 달고 사는 웃음을 지운 채다. 나는 사진 대신 그 위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꼴에 자존심은 강해서, 다가가는 나를 보고만 있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코앞까지 다가선 나는 그걸 그 새끼의 몸에 가져다 대는 것 대신에 옆으로 던졌다.

겨우 이깟 새끼 때문에 인생 종 칠 수는 없다. 그래 봐야 나보다 이 새끼한테 좋은 일 만들어주는 건데, 내가 왜?

대신 주먹을 써서 얼굴을 후려갈겼다. 두 번째로 주먹을 뻗기 전에 팔이 잡혔다.

“이 개새끼가!”

몸이 뒤로 쏠렸다. 순식간에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뒹굴게 됐다. 아무리 빽이 좋대도 아무한테나 신입생을 지도할 권력을 주진 않는다. 나보다 두 학년 위이니 겪은 훈련도 배로 많다. 그래도 주먹싸움의 승자는 늘 조금 더 분노한 쪽이다. 쥐어패던 후배가 기어오르는 것 때문에 화난 놈보다는, 눈앞에 뵈는 거 없어 선배 방까지 침입한 새끼가 이긴다는 뜻이다. B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깔아뭉갠 채로,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후려 팼다.

한 대를 때릴 때마다 자퇴한 동기들의 이름을 중얼댔다. 이건 강현수 몫이고, 이건 김예림 몫이고, 이건 한종운 몫이고, 이건 이정구 몫이다. 더는 댈 이름이 없어지고서야 주먹을 멈췄다. 나중에는 피하지도 못하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하던 새끼를 내려다봤다.

“이… 씨팔…. 흐… 내가 너 꼭 좆되게 만들 거야, 이 개새꺄!”

피 섞인 침을 뱉는 모멸감으로 얼룩진 얼굴이 우스웠다. 이 새끼 때문에 자퇴한 동기만 벌써 넷인데, 그중 이 새끼가 여태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팼다. 내가 동기들처럼 조용히 자퇴한다면 이 새끼는 뭐 하나 영향받지 않고 똑같이 살 테니까. 괴롭히는 대상만 바뀔 뿐, 반드시 누군가를 괴롭힐 테니까.

아무도 자신에게 대들지 못하고 피했다는 이유로. 권력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이유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려서 더러운 턱을 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을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꼭 그렇게 해.”

“…뭐?”

“이 학교 벗어나서. 선배 후배도 없고, 네 뒤 봐주는 아빠도 없는 곳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

“꼭 나한테 1학기 때 했던 것처럼 시비 털어 봐. 알았지.”

그리고 네가 군림하던 이 세상이 얼마나 널 편애하던 곳이었는지를 직접 깨달아 봐.

“그럼 내가 너 인정해줄게.”

이 새끼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 이곳은 얘의 왕국이지만, 세상에는 얘보다도 더 큰 왕국을 거느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거 알아?”

오지 않는 이 새끼를 기다리며 방을 둘러보며 느낀 건데, 침대 옆 늘어선 트로피들이나 삐까뻔쩍한 개인용품 중에서 소중해 보이는 게 없다. 유일하게 먼지가 쌓이지 않은 건 저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뿐이었고.

이 새끼가 왜 내 방에 들어와서 딴 것도 아닌 사진을 훔쳐 갔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네 누나는 나랑 헤어졌어도 나보다는 널 더 혐오해.”

핏줄이 선 눈이 잘게 흔들린다. 만나고 나서는 처음 보는 꼴이다. 남자들만 웃고 있는 저 반쪽짜리 사진이 본인에겐 퍽 소중했던 모양이다. 그 안에 담긴 여자들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봤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텐데.

“네 아빠랑 너랑 하는 짓거리가 똑같다고, 질린다고 말하더라.”

“…닥쳐.”

“네가 서울에 갈 때마다 엄마는 집에 없고, 누나는 너를 터미널에서나 잠깐 만나주는 게 기가 막힌 우연 같아?”

“닥치라고 했어, 이 씨발 새끼야!”

살다 보면 이런 부류를 마주하게 된다. 제 티끌만 한 상처는 특별하고, 남의 상처는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이기적인 새끼들. 제 안의 결핍을 못 이겨서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뺏어야만 만족감을 느끼는 인간말종.

“남들도 너처럼 상처 줄 수 있어. 사람같이 살려고 안 하는 거지.”

핏줄 선 눈 위로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고서야 일어섰다. 처음으로 남에게 상처를 해부당한 새끼는 턱을 떨며 나를 노려보는 게 고작이다. 부어오르고 피딱지가 진 얼굴이 볼만했다. 이 학교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꼴일 테다. 그렇지만 처음이라는 말이 붙는 건, 그다음이 있을 수도 있어서다. 이 새끼도 누군가한테는 흠씬 두들겨 맞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무소불위의 권력에는 일종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이 언젠가는 헐거워져서, 일방적인 폭력으로 숨겼던 볼품없는 모습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이다.

나는 그걸 지켜볼 시간까지는 없어서, 그 새끼의 방을 나왔다. 몸과 마음을 조국과 하늘에 바친다는 슬로건이 크게 적힌 정문을 통과하며, 주머니 안에 있는 사진의 귀퉁이를 한 번 더 매만졌다.

후회는 없다. 소중한 사람마저 저버린 채 내가 몸과 마음을 바칠 곳은 아님을 확인한 시간이었으니.

솔직히 찾아가면 만나줄 줄 알았다. 내 연락을 피하다 못해 강영수의 연락까지도 피하던 놈이었지만 그래도 버스터미널 앞까지 찾아온 강영수를 만나주긴 했다기에. 거기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아무리 무뚝뚝한 놈이래도 내 생일 때만큼은 선물을 챙겨주면서 유독 더 유하게 굴어줬던 걸 기억하고 있으니까. 만나서 혹시 또 그때처럼 싸우게 될지라도, 날 보러 나오긴 할 거라고 은연중에 기대했다. 그래도 우리가 다시 안 볼 사이는 아니니까, 한 번 싸웠다 해서 평생 쌩깔 사이는 아니니까.

면회 시간이 끝나서 내쫓기듯 나왔다. 지선욱은 이 시간까지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모든 정황이 날 볼 의사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걸 아는데도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버스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버스를 탔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내가 같이 먹으려고 샀던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여전히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리에 앉아 스티로폼으로 된 포장지를 열자 케이크의 형체조차 사라진 아이스크림이 보였다. 아르바이트생이 케이크와 함께 넣어준 드라이아이스 포장지마저 텅 비어서는 흐르는 액 위에 흐물흐물 떠 있었다.

이런 걸 먹일 수는 없다. 만약 이대로 계속 기다려야 한대도, 그렇게 했는데도 지선욱을 정말 못 만나고 돌아간대도, 이딴 케이크를 준비한 채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터미널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다시 가 아까와 똑같은 케이크를 샀다. 아침에 왔던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르바이트생이 초를 챙기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이번에도 똑같이 말했다. 초는 큰 거 두 개만 주면 된다고. 그러고는 아까와 달리 덧붙였다. 드라이아이스를 최대한 많이 넣어줄 수 있겠냐고. 아르바이트생은 드라이아이스를 세 봉지 넣어주며 그래도 상온에서 유지 가능한 최대 보관시간은 두 시간이라고 강조하듯 말했다.

터미널로 돌아와 다시 앉았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지선욱의 이름을 찾고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수신은 없고, 발신 연결이 안 된 기록만이 가득한 내역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면회장에서 한 번, 경찰대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번. 총 두 번 들었던 안내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 외출을 나갔다고 했으니까. 핸드폰을 깜빡해서 방에 두고 나갔을 수도 있다. 이미 학교를 벗어나고서야 핸드폰이 없음을 깨달은 거면 다시 돌아오긴 귀찮았을 테니까. 다녀와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내가 정말 면회를 왔었다는 걸 알면 혹시라도 연락을 줄지도 모른다. 밤늦게라도 택시를 타고 가면 학교 앞에서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었다.

경찰대 앞을 떠나기 전, 버스정류장으로 걸어오던 또래의 남자애를 붙잡고 지선욱에 관해 물어봐서 알게 된 정보를 외우며 기다려볼 만하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에도 경찰대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염색하지 않은 까만 머리에 일정 길이 이상을 넘지 않는 머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녁 시간대라서인지 외출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혹시라도 지선욱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유심히 봤다.

어깨선에 닿지 않는 단발 기장의 또래 여자애 두 명이 앞의 의자에 앉는 걸 지켜본 이유이기도 했다. 앳된 얼굴이며 주변을 두리번대며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긴장한 듯한 모습이 신입생처럼 보였다.

“야야, 빨리 먹어. 선배들 보면 혼난다.”

“정복 입은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저번에 주희가 너같이 말하다가 걸려서 혼났잖아. 품위 유지가 딴 거냐고 하면서.”

“아… 그랬었지. 알았어. 빨리 먹긴 해야겠다. 버스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급히 베어 물던 여자가 다른 한 명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버스터미널 출입구 쪽을 눈짓하는 옆얼굴이 장난스러웠다.

“야. 그러고 보니까 아까 주희 연락 왔었는데. 오늘 저기 유플레스 쪽 영화관에서 지선욱 봤다고.”

“지선욱? 미친. 누구랑? 둘만?”

“어어. 그 선배랑 같이 있었다더라. 그, 그, 2학년 선배 있잖아.”

“선배랑? 어떤 선배? 무슨 선배? 와씨, 돌았네? 걔 누구랑 외출 나간 거 처음 아냐?”

“요새 자주 같이 다니는 그 선배 있잖아. 저번에 애들이 농담도 했는데. 사귀는 거 아니냐고.”

“아… 김수빈 선배?”

심장이 쿵쿵 뛴다. 그들의 입에서 등장한 지선욱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이름 때문에. 내가 메시지하고, 전화하고, 면회실에 앉아 있는 동안 지선욱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아예 상상조차 못 했다.

여자애 중 한 명이 눈짓하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 사이로 큰 건물이 반쯤 보였다. 건물마다 뭐가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듯, 건물 외벽에 브랜드들의 로고가 크게 적혀 있었다. 1층에는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있고, 2층부터 4층까지는 마트가, 5층부터 7층까지는 영화관이 있는 곳.

지선욱이 내가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곳. 지금이라도 가면 지선욱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곳. 홀린 것처럼 운동화 앞코가 움찔댔다.

갈까? 일단 가서…

“난 또 뭐라고. 단톡방에 따로 말 없던 이유가 있었네. 하긴 그랬으면 난리 났겠지. 영화까지 보러 갔다는데.”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나는 다시 앞부터 봤다. 지선욱의 이름이 등장한 순간부터 열성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던 여자애의 표정이 그새 심드렁해져 있었다. 정보를 전해준 여자애와 눈을 마주친 순간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빈 아이스크림 막대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던진 여자애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뭐, 그 선배랑 계속 붙어 다니는 게 동기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엔 좋을 수도 있겠다.”

“야야, 슬슬 가야겠다. 일어나.”

재빨리 일어선 두 명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은 거라고는 투명한 쓰레기 비닐 안으로 처박힌 두 개의 아이스크림 막대뿐. 나는 막대에서 어렵게 시선을 뗐다.

‘내가 너랑 둘이서 영화를 왜 봐. 아씨, 머리 안 치워?’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며 졸라대던 강영수를 질색하며 떨쳐내던 놈이 의식조차 하지 않고 뱉던 말부터 떠올랐다.

내가 알던 정보들이 혼재된다. 지선욱이 외출까지 나와서 단둘이 영화를 본다면 상대는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방금 들은 말은 내가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던 것을 뒤집었다. 지선욱의 동기들은 오늘 지선욱과 첫 외출을 함께 나온 사람에게 아무런 경계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했다. 오히려 지선욱이 그와 있으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어지러운 머릿속이 잠잠해지면서 하나의 가정만이 남는다.

설마…

“…….”

설마 그 선배란 사람이 남자인가?

몸이 딱딱히 굳는다. 입력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기계처럼 머리가 공회전한다. 일어선 채로 멈춘 내 곁으로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지선욱을 알았다. 강영수의 스킨십에도 늘 떨떠름해하며 저와 같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행위에 한계를 두는 놈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으리라는 걸. 고작 한 학기 동안 놈에게 그런 사람이 생겼다면 단순한 사이는 아닐 거라는 것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남자를 만나는 지선욱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지선욱이 다른 사람과 함께일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놈의 곁에 남자가 서 있을 수 있다는 가정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그건 내 금기였기 때문이다. 절대 돌아봐서는 안 될 문제였다. 의구심조차 제기하지 않고 해설 없이 그냥 문제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 하나의 물음이었고.

“저기요. 잠깐 지나갈게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내고서야 내가 길목을 막는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음을 알았다. 바로 뒤에서 짜증 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또래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는 핸드폰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멎었다. 경찰대 로고가 핸드폰 뒷면에 붙어 있었다.

비로소 이곳에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처럼 숨이 터졌다. 나는 자리를 비켜주기가 무섭게 더듬더듬 옆자리에 있던 케이크 상자부터 쥐었다. 어느새 출입구 쪽으로 걷고 있는 등을 따라 뛰었다. 어깨를 잡힌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경찰대 다니시죠?”

경찰대 앞에서 지선욱의 동기를 붙잡고 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까는 지선욱의 소식을 어떻게든 듣고 싶어서였다면, 이제는 이거라도 지선욱한테 전해주고 싶어서.

“죄송한데 이것 좀 제 친구한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

“제 친구도 경찰대인데… 제가….”

“…….”

“제가 오늘은 친구를 못 보고 갈 것 같아서요.”

의식하기도 전에 급하게 입에서 나간 말을 내 귀로 듣고서야 내가 오늘 지선욱과 만나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인상을 찡그리던 남자가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한테요? 당연하게 돌아온 물음에 숨을 골랐다.

“지선욱이요.”

지선욱과 친한 건 아닌지 떨떠름하던 남자는 내가 한 번 더 부탁한다고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사실 어떤 표정이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으로 표를 끊고, 플랫폼 앞의 의자에 앉은 건지도.

정지해 있던 나를 깨운 건 빗소리였다.

“갑자기 무슨 비가 예고도 없이 이렇게 오고 지랄이여, 지랄이!”

머리를 턴 버스 기사의 투덜거림을 시작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허둥댔다. 비 소식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플랫폼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버스를 탈 때까지만이라도 비에 맞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림막이 있는 곳으로 와 섰다.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보다가 나도 고개를 들었다. 투둑, 하고 빗줄기가 얼굴에 떨어졌다.

‘야. 나도 자고 갈래.’

꼭 그날처럼. 내가 너와 관련된 문제를 풀길 멈추기로 다짐했던 그날처럼.

그러니까 만약에 그때의 내가 지금 쉴 새 없이 되뇌고 있는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하… 하아… 운행하시는 거 맞죠?”

“맞죠, 그럼.”

“…….”

“어이구, 택시가 없어서 한참 뛰셨나 보네. 아주 꼴딱 젖으셨어! 어디까지 가셔.”

네 문제지에도 그런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경찰대 앞이요.”

우리한테 어떤 미래가 있는지를 직접 너한테 물어봐야겠다고, 빗속에서 다짐했다.

그러고는 바로 후회했지만.

“…….”

오늘만 해도 두 번째로 오는 버스정류장 옆, 투명한 쓰레기봉투 안에 스티로폼 포장지에 둘러싸인 케이크가 통째로 버려져 있다. 쓰레기통으로 다가서는 내가 꼭 예고편만으로도 슬픈 영화인 게 뻔한 영화를 굳이 예매한 후 영화관에 들어서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포장지를 열어 아직 형체가 남아 있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보고,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세 개의 드라이아이스 포장지를 본 순간에는 작게 헛웃음까지 치면서.

대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전달해주려 했던 그 사람이 버린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게 아님을 안다. 지선욱 이름을 들은 순간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사람보다는, 70일 넘게 내 연락을 무시하고 면회 온 나를 만나주는 대신 다른 사람과 외출했던 지선욱이 이걸 버릴 확률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 이게 내가 알던 너지. 구름 낀 하늘 같던 머릿속이 까맣게 물든다. 해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올 확률은 없다. 구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은 오히려 신경 쓸 것이 없다. 잔인할 정도로 확실한 하나의 결과값만이 남는다.

녹지 않아도 버려질 수 있다. 녹아서 버려진 거라고 믿고 싶은 게 잘못이지.

내 문제지에야 답지가 네 이름으로 적혔던 거지. 네 문제지에 답지가 추가됐다고 해서 그게 내 이름인 건 아닌 것처럼.

“어어? 뭐 놓고 가셨어요?”

“아뇨. 버스터미널로 다시 가려고요.”

“…누구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만났어요.”

돈을 세다 말고, 뒤를 돌아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 부근을 기웃대는 택시 기사를 향해 웃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서, 도망가려고요.”

그 말만으로도 무언가를 눈치챈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택시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뒤돌아보는 것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끊어둔 표 시간을 보려고 한 건데, 손에 걸린 건 어제 B에게서 찾아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우리의 졸업사진이다. 어두운 뒷좌석에서 사진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다른 주머니에 있던 버스표를 꺼냈다. 빗방울이 튄 데다가 땀에 젖은 손으로 잡고 있던 탓에 꼬깃꼬깃해진 표에 적힌 버스의 출발 시각을 확인하고는, 그 시간까지는 도착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비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마를 대고 있는 창문을 때리는 물방울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게 보였다. 흐려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삼촌의 말이 옳다. 소중한 사람을 뒤에 두고 돌아보지 않는 일이, 소중한 사람을 쫓아가는 것보다 힘들다. 그러니 못 견디겠으면 뛰기라도 해야 한다, 마치 도망이라도 가듯이.

태안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학교는 어쩌고.”

인기척을 듣고 나와 본 영감이 앞뒤 자르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 손에 들린 짐가방을 확인하는 눈초리가 의미심장했다. 영감이라면 아빠로부터 이미 내가 학교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다. 그러면서도 굳이 내게 묻는 영감을 보면서 나 또한 동문서답했다.

“대문 좀 고쳐요. 요새 외지 사람들도 많이 온다던데,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도, 영감이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서 준다. 여름도 아닌데, 마루에 선풍기가 나와 있다. 비가 오기 때문일 거다. 곳곳에 틀어둔 선풍기는 떠나고 없는 사람의 방까지도 털털대며 훑고 지나간다.

사람 한 명이 빠졌을 뿐인데 집이 너무 커 보인다. 그에 비해 영감은 너무나도 작아 보이고.

목침 하나와 이불만 나와 있는 게 다인 간소한 안방을 보다가 영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이불 좀 줘요. 선욱이 방에서 자고 가게.”

“…느이 아빠 있는 집 놔두고 왜.”

“아빠 나이가 벌써 마흔여덟인데, 혼자 잘 때도 됐죠.”

일부러 동문서답만 해대는 내가 어이없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영감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몸을 돌렸다. 영감 방의 장롱에서 이불 한 채와 베개가 나온다.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는지 섬유유연제 향이 풍기는 것들을 받아들고는 건너편의 지선욱 방으로 발을 들였다.

방은 잘 정리되어 있다. 지선욱의 성격대로, 그리고 지선욱이 이곳을 떠난 후에도 시간 나는 대로 쓸고 닦았을 영감의 성격대로.

이불을 펴고 바로 누워서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감은 그새 등만 보이고 누운 채다. 선풍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 끄떡없는 등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나 오늘 생일이었는데.”

끄응, 작은 신음에 이어 영감에게서 느린 답변이 넘어왔다.

“…안다.”

여전히 등은 미동조차 없다. 내가 뭔 말을 한대도 돌아보지는 않을 걸 알아서 오히려 안심됐다.

“선물 필요 없으니까, 내일 고기나 좀 구워주세요.”

그래야 힘내서 도망가지.

뒷말을 뱉지 않았는데도 영감은 고민하는 눈치다. 무거운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생일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인 보람이 있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 영감의 답변이 넘어왔다.

“…알았다.”

그만 자라. 꾸짖듯 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감은 더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고르게 움직이는 등을 보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도망가야지 생각만 하고 계획을 안 세웠으니 내일부터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이 이 방에서 뻘생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 밤이다.

지선욱이 없는 방에서도 지선욱 냄새는 희미하게 난다. 여름방학 때 잠깐 내려와 있었으려나. 듣지 못해서 모르는 정보들을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러고 보니 핸드폰 충전해야 하는데.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을 든 것과 동시에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손이 움직였다. 의식조차 없이 행한 일이었다. 어쩌면 지난날 동안 수도 없이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생각했다.

“…….”

-…….

정말 지선욱의 숨소리였다. 오늘도 지선욱은 말을 길게 고른다. 내가 기억에 남겨야 할 말을 정해주기라도 하듯이. 나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사실 뭐라도 말을 뱉는 순간, 전화가 끊길까 봐 겁나기도 했다.

-사실 강릉 가는 날 신입생들이면 다 가야 하는 훈련이 있었는데.

“…….”

-오랜만에 너네 볼 기회라고 생각해서 불참했어.

‘그랬구나.’ 뱉는 것 대신 들었다.

-연락 안 되는 너를 기다리는데 동기들한테 연락이 왔어. 내가 불참해서 교수가 화났다고, 지금이라도 올 수 없겠냐더라. 못 간다고 답은 했는데, 내심 불안했나 봐.

“…….”

-그래서… 좀 오버해서 화냈던 것 같아, 네가 왔을 때.

‘나라면 그러진 않았겠지만, 너는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화 좀 가라앉으면 연락해서 풀어야지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쪽팔리더라. 별것도 아닌 걸로 지랄한 것 같아서. 그렇게 뛰쳐나와 놓고 다시 연락하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

-그래서 연락 못 했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래도 너한테 난 이런 걸 소명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긴 한 거겠지.

-막 이렇게 찾아오고 그럴 필요 없다고. 네 잘못 아니니까.

비록 예고 없이 찾아가면 네 얼굴을 볼 수 없고, 앞으로도 너랑 생일 때 둘이서만 케이크를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안 되겠지만.

-그냥 좀 기다려줘. 내가 네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적당히 도망쳐서 거리를 지키다 보면 네 곁에 남을 수는 있겠지.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 정도야 받을 수 있는 친구 정도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전화가 끊겼다. 놈이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 다시 전화가 올 때까지 나는 지선욱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조금 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에 대고, 지선욱이 들을 수 없는 사과를 뒤늦게 뱉으며.

“…미안해.”

오늘 지선욱을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실은 선배들한테 맞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났다고. 근데 난 꽤 많이 맞았으니까, 네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한 셈이라고. 근데 그럴 때마다 너한테 연락하면 웃기잖아. 힘들 때 친구가 생각날 수는 있어도, 힘들 때마다 친구 사진부터 찾아보는 새끼가 어디 있어? 그래서 연락을 안 했어. 처음에는 못 했는데, 나중에는 안 했어.

“잘못했어.”

아무래도 내가 친구라고 정해둔 선이 너무 내 위주였던 것 같아. 우정으로도 이것까지는 할 수 있다고 정해둔 선이, 어쩌면 눈속임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면 그 흔한 빗소리에 그날부터 떠올리고 다시 경찰대로 달려가진 않았겠지. 네가 남자랑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진 않았겠지. 이걸 고치지 않으면 분명히 문제가 될 거야. 언젠가 반드시 지금보다 더 큰 문제를 만들고, 네 곁에 있기도 힘들어질 거야.

다행히 오늘 내가 멍청한 짓을 했으니까, 답을 고르고 넘어간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이 김에 고민한 것처럼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남아 있던 곳 위에 수정액을 붓고 넘어갈게. 아예 그 답지가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럼 괜찮겠지. 답이 없는데 어떻게 고를 수가 있겠어?

아까 대문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간헐적으로나마 오던 비가 완전히 멎었는지 이제는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정적을 느끼며 핸드폰을 내렸다. 건너편 방을 습관처럼 확인했다. 영감의 등은 아까처럼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고 있다. 그를 따라 온몸의 힘을 빼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손쉽게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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