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니 내가 일 끝나고 왔을 때도 열 지금처럼 나믄 병원 다시 데꼬가가 입원시킬 기다. 아빠 지금 장난하는 거 아이다. 알았나.”
내가 병원을 싫어하는 걸 아는 아빠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협박이었다. 으름장을 놓는 아빠를 피해 이불 안에 숨긴 영어 단어장을 보다가 또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이 나이 처먹고 엉덩이 맞는 게 웃기긴 한데, 아빠의 손이 솥뚜껑만 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별로 안 웃겼다. 몸이 뜨거운 건지 맞은 엉덩이가 뜨거운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나중에는 그냥 냅다 드러누웠다. 새벽에 응급실 천장이 그랬던 것처럼, 집 천장도 빙빙 돌았다. 내가 아프긴 하구나 싶었다. 아플 거면 쪽지 시험 안 치는 주에 아프지. 힘든 운동도 안 하면서 쉬게 해줬더니 그새 거기에 익숙해져서는 이렇게 엄살을 부리는 몸이 야속했다.
마음이 급했다. 기말고사를 잘 쳐야 청포고등학교에 원서라도 써보는데. 매일 밤늦게까지 책상에 들러붙어서 이제야 겨우 중학교 2학년 교과서까지 따라잡았는데, 이렇게 쉬고 있으면 눈 깜짝할 새에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몇 번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일어날 때마다 벽시계의 시간이 훅훅 지나 있었다.
아빠가 점심 차려놨으니까 챙겨 먹고 약도 먹으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까지는 그래도 몸을 일으키려 해 봤지만, 세 번째부터는 그것마저 귀찮아서 눈을 감고 다시 잤다. 배가 고픈지는 모르겠지만 눈은 뜨고 있기만 해도 눈알이 화끈화끈 불타는 것 같았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건 어찌 보면 기적이었다. 눈을 슬그머니 떠서 확인한 시계는 아직 아빠가 돌아올 시간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그럼 엄마? 와, 내가 이제 엄마로 농담을 다 하네. 존나 아프긴 한가 봐.
“…아, 미치겠네.”
눈에 힘을 주려 해도 자꾸 흐려졌다. 그 와중에 집에 들어온 누군가는 살금살금 거실을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의 속도나 세기를 보니 강도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굴리듯이 말아 겨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 힘을 줘 책상 가장 밑에 처박힌 트로피를 든 채로 바닥을 가슴으로 밀 듯이 해 문고리를 잡았다.
고개조차 들기 힘들어서 발만 봤다. 교복 바지를 입은 걸 보니 강영수인가 보다. 아빠한테 나를 봐달라는 말을 듣고 온 것 같았다. 존나 부려 먹어야지, 생각하며 목소리를 냈다.
“사람 살려어….”
“아, 씨발! 뭐야!”
“물… 물을 줘.”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강영수를 놀라게 할 작정으로 몸을 끌던 행위는 강영수에게 날 리 없는 냄새를 맡은 후에야 멈췄다. 고개가 저절로 휙 위로 들렸다. 그곳에는 우리 집까지 날 살펴보러 와줄 것 같은 인물 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인물이 서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나? 여전히 시야가 흐린 탓에 분간이 안 됐다. 그 상태로도 나는 일단 그 사람의 발에 매달리기부터 했다.
“물 주면 안 잡아 먹지….”
일단 냄새는 너무 지선욱인데… 아, 모르겠다. 일단 물을 먹으면 정신이 들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겠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손을 내려 방금 지선욱이 만지고 간 팔 안쪽을 더듬댔다. 그래도 느낌상 아까보다는 열이 좀 내린 것 같긴 한데, 놈이 손으로 옮긴 온기가 남은 부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 한참을 만지작거려야 했다. 그나마 가장 짐작 가는 곳 위를 손바닥으로 덮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나중에 이렇게 안 해줬을 때 내가 섭섭해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울컥해서 꺼낸 말이었다. 모르고 살면 좋을 것들이 있는데, 오늘 이곳까지 찾아온 지선욱이 내게 해준 행위가 모두 그랬다. 지선욱이 아픈 나에게 이런 것까지 할 줄 아는 애라는 걸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앞으로 아플 때마다 기대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당연하게도 실망하게 된다.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이라도 하던 그 체육대회 날이 반복되는 거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물었다가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하는 표정에 흠씬 두들겨 맞고 말 것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 기대하고 실망하는 게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라는 걸 지선욱 때문에 매일 깨닫는다. 그 대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또래의 남자애라는 사실은 또 한 번 나를 갉아먹고. 다시는 그런 표정을 안 보려고 내 딴에는 노력을 하는데도 이렇게 놈이 들이닥치듯 다가올 때는 모든 게 수포가 되는 것 같다. 어느 한구석이 크게 찔린 사람처럼 과잉반응하고는, 그런 반응 때문에 놈이 다시는 내게 살갑게 굴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며 눈치를 본다.
죽이랑 약까지 잘 챙겨 먹은 속이 괜히 야단이다. 천장이 또 한 번 빙빙 돌았다. 나는 눈을 꾹 감으며 다짐하듯 중얼댔다. 요새 책상에 앉을 때마다 매일 하는 일이다.
“…미친 새끼야. 정신 차려.”
너 그렇게 하면 걔 옆에 오래 못 있어. 튕겨 나가.
눈을 다시 뜨니 아빠가 집에 와 있었고, 아빠가 방까지 가지고 온 죽과 약을 먹고 다시 자고 일어나니 다음 날 오후였다. 여전히 몸 어디를 만지든 열이 느껴지긴 하는데, 눈앞이 빙빙 돌거나 눈알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보기에도 상태가 훨씬 나은지 오늘도 빨리 퇴근한 아빠는 죽과 약을 챙겨준 후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계속 잤더니 이제는 아예 그냥 습관처럼 잠이 온다. 한 번 더 자고 일어나니 밤이었다. 그래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질어질하진 않은 걸 보니 내일은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걸음을 옮겨 책상에 앉았다. 펼쳐 놓은 수학 교과서 위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수학 쪽지 시험 범위
2단원 인수분해~4단원 이차함수(p68~p123)]
파란색 포스트잇 위로 적힌 글씨가 익숙했다. 이걸 쓰느라 방에 좀 더 앉아 있었던 거구나. 한 번 그 위를 만졌다고 끝이 들뜨는 포스트잇을 꾹 누르다 말고 마음을 바꿔 스탠드 위에 붙였다.
…그냥. 부적 같은 거지, 공부 잘하는 애가 적어준 시험 범위니까.
수학 쪽지 시험 범위를 찾아 연습문제를 다섯 문제쯤 풀었을 무렵 현관문이 열렸다. 검붉은 얼굴의 아빠가 들어서고 있었다. 웬만큼 술을 먹어서는 티도 안 나는데 저 지경이 된 걸 보면, 윗사람과 술을 마셨다는 소리다. 내게서 나올 잔소리를 예상한 것처럼 눈을 찔끔 피하며 바로 욕실로 향한 아빠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찬물을 끼얹었는지 얼굴의 붉은 기가 좀 가신 채다.
“누구랑 마셨는데?”
내 질문에 양말을 벗다 말고 멈칫한 아빠가 킁, 코를 짧게 들이켜며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장님.”
간결한 대답을 보니 아빠는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아빠가 말한 의외의 인물이 내 흥미를 잡아끌었다. 영감은 술을 즐기지 않는다. 마을에서 좋은 일이 생겨도 기껏해야 반주를 들이켜는 게 끝이고, 평소에는 술을 거의 입에 안 댄다. 아주 가끔 아빠랑 술을 마실 때는 보통 무슨 일이 있어서다. 아빠는 혼자 남은 이후 날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웬만해서는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건 영감이 만든 술자리일 가능성이 컸다. 샤프를 놓고 뒤돌았다. 찔리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나를 외면하고는 리모컨을 드는 아빠한테 물었다.
“영감이 먼저 술 먹쟀어?”
“니 영감이라 하지 말랬제.”
“영감이 괜찮다는데 아빠가 왜.”
“그기야 니 어릴 때나 귀여버서 오냐오냐 했던 기고. 지금도 그라믄 이장님도 싫어할걸?”
“앞에서는 할아버지라 해.”
“이 시끼가, 입만 살아 가지고. 이제 안 아프고 좀 살 만한 갑다?”
“어. 그래서 아빠가 말 돌리는 것도 너무 잘 느껴지는데.”
“…….”
“뭔데. 왜. 영감 무슨 일 있대?”
뭐라 말하려던 아빠가 입을 꼭 다물고는 채널을 돌렸다. 일단 이 상황만 어떻게 모면해보려는 눈치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몸을 일으켜 아빠가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런닝 하나만 걸친 아빠의 어깨에 일부러 이마를 집중적으로 비비적댔다.
“아빠, 나 그래도 아직 좀 아프긴 한데. 봐 봐, 열나지.”
“비켜라, 인마! 다 큰 놈이 징그럽그로…. 심심하면 드가서 더 자든지.”
“말해주면 바로 들어가서 잘게. 그리고 이게 나만을 위한 행위야? 어? 영감 밑에 내 친구도 있어, 이제. 나는 알 권리가 있어.”
식겁해서 날 밀어내던 아빠가 별안간 우뚝 멈췄다. 표정을 보니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보채 봐야 역효과만 나는 걸 아는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 보람이 있게 아빠가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니 요새도 선욱이랑 잘 지내제? 하긴, 어제도 왔다 간 거 보이까 잘 지내는 것 같긴 하드만.”
“선욱이.”
“선욱이라 했다 아이가, 방금.”
“발음이… 아, 됐어. 어쨌든 잘 지내. 왜?”
“…앞으로도 잘 지내라꼬. 학교에서도 잘 챙겨주고, 니 용돈으로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였어?”
인상을 찡그린 나를 보던 아빠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양치로도 다 덜어내지 못한 술 냄새가 순간 훅 끼쳤다.
“선욱이 서울 간단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폭탄선언을 한 아빠는 태연하게 이마를 긁고 있었다. 이런 걸 말해도 되나, 하는 표정이 짧게 스쳤지만 결국엔 말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처럼 술술 정보를 뱉었다.
“엄마 따라서 서울로 다시 전학 간다고 하데. 그것 때문에 이장님이 심란하신 모양이고.”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이다. 원래도 이혼 소송하는 동안에만 잠깐 맡아달라고 한 거였으니까네.”
“…….”
“하여간, 니 남은 기간 동안 더 잘해주라고 특별히 말해준 기다. 선욱이가 전학 간다 이야기 꺼내기 전에 괜히 나대지 말고 모른 척해라. 영수한테도 일단은 말하지 말고. 알았나.”
강조하듯 눈에 힘을 주던 아빠는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뒤를 긁적이며 깊은 한숨을 쉬는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특히나 선욱이 오고 나서 얼굴이 그리 좋아지셨는데. 다시 가고 나면 이장님이 괜찮으실지 모르겠다. 괜찮으셔야 할 긴데….”
말을 잇던 아빠가 무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멈칫하더니, 오버하며 코를 크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 분명 약속했제. 얼른 들어가 자라. 이따 방 들어가서 확인한다.”
안방으로 향하는 등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거실에는 아빠와 내가 유일하게 남기기로 합의한 엄마의 사진이 있다. 마흔두 살의 엄마는 오늘도 그 안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지훈아… 엄마 여기 있다.’ 할 때의 그 미소를 그대로 짓고는.
그 미소를 추억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또 깨닫는다. 어쩌면 내 삶의 징크스는 누군가를 잃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 * *
다시 악몽을 꾼다.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원리를 역으로 질문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이제 악몽의 주인공은 엄마가 아닌 지선욱이다. 순식간에 주연을 꿰찬 놈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만 보자고 말하고는 미련 없이 뒤돈다. 나는 엄마 때와 달리 따라 달리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서 걔가 멀어지는 모습을 본다.
“일단 x값은 무시하고, 여기 y값을 이용해서….”
꿈에서조차 아는 것이다. 지선욱을 잡는다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그리고 잡아 봤자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아빠로부터 지선욱이 전학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지선욱은 여전히 나나 강영수에게 전학 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아주 잠깐, 혹시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기대하기도 했다. 물론 그 후 교무실에서 선생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지선욱의 전학을 위한 절차가 이미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얘한테 나는 뭘까. 친구? 그 단어도 너무 거창한 거면 점심을 같이 먹고 등하교를 함께하는 애?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같은 반 애? 그것도 아니면… 가정 속의 내가 점점 작아진다. 이래서 꿈에서도 목소리를 못 내는 걸까 싶을 정도로.
“야.”
울렁이는 속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간 부름에 지선욱의 손이 느리게 멈췄다. 고개를 드는 놈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문제집과 연습장을 한 번에 내 쪽으로 끌어왔다.
“설명 들으니 대충 알 것 같다. 다음부터는 내가 풀어볼게. 땡큐.”
슬쩍 나를 본 지선욱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지선욱 옆에 앉은 짝이 자신의 문제집을 내민다. 기말고사를 앞둔 반에서는 지선욱한테 모르는 문제 물어보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덕분에 내가 문제집을 들고 가서 묻는 건 어떻게든 말 한 번 붙여보려는 애들 속에서 가볍게도 묻혔다.
자리로 돌아와 지선욱이 이미 반은 풀어놓은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웬만한 문제는 1분도 되지 않아 답을 내놓는 놈 때문에 지금 내 학습 수준에는 턱도 없는 심화 문제집에서도 별 네 개 이상이 붙은 문제만 가져가서 물어보는데, 그래도 지선욱에게는 원리만 역으로 생각하면 풀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 어쩐지 우습다. 놈이 아래에 적어둔 해설을 무시하고, 원리를 역으로 질문했다는 말을 떠올리며 내 힘으로 풀어보려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
이렇듯 쟤한테는 쉽고, 나한테는 어려운 게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이별 같은 것. 근데 그건 이런 문제와 달리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보면 그때처럼 날 바라볼 것이다. ‘왜 이런 걸 나한테 묻지?’ 하는 표정으로.
오늘도 강영수는 수업이 마치기 무섭게 튀었다. 쥬만지가 우산이 없다나, 뭐라나. 둘이 쓸 수나 있을까 싶은 비닐우산을 들고 좋다고 뛰어가는 놈을 보내고 지선욱이랑 둘이 버스를 탔다. 앞뒤로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지선욱이 등을 툭 치더니 볼일이 있어 시내에 잠깐 들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쟤는 같이 하자는 말을 안 하고, 꼭 자기가 뭘 할 테니 너는 먼저 가라는 식으로 말한다. 어이없게 보다가 나도 살 거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같이 내렸다. 당연히 서점으로 갈 줄 알았는데, 지선욱이 향한 곳은 의외의 곳이었다. 언젠가 놈을 위한 후시딘을 산 적이 있던 약국 앞에서 우산을 접고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파스 하나 주세요. 효과가 빠른 거였으면 좋겠고….”
갑자기 웬 파스? 좋은 체력을 공부할 때나 쓰는 놈이. 의아한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선욱이 눈을 내리며 조용히 덧붙였다.
“…할아버지 드리려고.”
“…….”
“비 올 때마다 다리가 아프신 것 같아서.”
지갑을 꺼내던 놈이 잠깐 멈칫하더니 똑같은 파스를 두 개 더 줄 수 있냐고 약사에게 물었다. 총 세 개의 파스가 책밖에 없던 책가방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질적인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다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바깥 풍경에 시선이 멎었다.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유월이지만, 곧 장마가 올 거라는 걸.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지선욱은 떠난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없는 동안 홀로 장마를 견뎌야 할 영감을 위한, 놈 나름의 이별을 대비하는 행위다.
그나마 제일 친하게 지내는 나나 강영수한테도 전학 간다는 말을 안 하고, 누가 봐도 전학 가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선욱이 처음으로 보인 미련이기도 했다. 그건 이상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내가 아예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얘가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느라, 정작 얘가 이곳에 살면서 의미를 둔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고민하지 못했다. 그건 애초에 나일 수도 없고, 강영수일 수도 없고, 영은이나 안희연일 수도 없는 거였는데.
‘내가 왜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님이 아니라 여기까지 내려와서 할아버지랑 살고 있는지 알아?’
‘…….’
‘그렇게 해도 나를 궁금해하는 부모가 없어서 그래. 내가 잘 지내긴 하는지, 집에 몇 시에 들어오는지조차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서.’
거스름돈을 받아드는 놈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너한테도 이 이별이 쉬운 건 아니겠구나. 부모랑 떨어져서 이곳에 내려온 다음 날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때도, 지금도 어른들은 네 의사 없이 결정해버렸겠지. 너한테는 고작 이런 파스를 사서 미리 쟁여둘 시간만 주고는. 나도 겪어 봐서 안다. 그게 정말 좆같다는 걸. 다른 게 있다면 넌 나처럼 반항하질 못하고 이것조차 모범생처럼 그러려니 따르는 거고.
가방을 뒤로 멘 지선욱이 나를 돌아보며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자신의 볼일이 끝났으니 내가 볼일을 볼 차례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놈을 알아서, 멀지 않은 서점으로 가자고 한 뒤 샤프심이나 한 뭉텅이 샀다. 서점을 나올 때쯤 비는 한층 더 거세어져 있었다. 버스 차창에 물방울이 맺힐 틈조차 없이 빗줄기가 스쳐 갔다. 불투명한 창에 지선욱의 옆얼굴이 비쳤다. 생각해보니 샤프심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지선욱 자리로 종종 찾아갔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뭉텅이로 사버렸으니 그 짓도 이젠 쫑났다. 나는 손에 쥔 샤프심 통을 조금 더 세게 눌렀다. 그렇게 해도 부러지지 않을 걸 알면서, 괜히.
아빠는 비 오는 날마다 청승을 떤다. 분명 밖에 차가 있는 걸 봤는데도 거실이나 안방에 없다 했더니, 역시 엄마의 취미 방에 처박혀 있었다. 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한동안 엄마의 물건만 보이면 죄다 갖다 버리기부터 한 아빠가 유일하게 손도 대지 못한 공간이기도 하다. 침대조차 들어갈 수 없는 이 공간은 좁다. 그것조차 낭만적이지 않냐고 행복하게 말하던 사람의 취향을 반영한 것처럼.
“…아빠.”
비디오 플레이어 앞의 1인용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아빠는 내가 부르고서도 몇 초가 더 지나고서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어, 왔나! 언제 왔노!”
무릎에 놓여 있던 비디오들이 우수수 떨어지는데도, 허겁지겁 일어나며 괜히 목소리를 키우는 아빠는 그것보다 이 미련 가득한 행위를 해명하는 게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건 니가 생각하는 게 아이고, 방 한 번 청소해야 할 것 같아가…!”
얼핏 필사적으로까지 보이는 모습을 보는데 어깨에서 힘이 쭉 풀렸다. 나는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방 안으로 완전히 발을 디뎠다. 엄마가 죽은 후 이 방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다. 그를 모르지 않을 아빠가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누가 뭐래?”
“…….”
“어디까지 봤어? 혼자 청승 떨지 말고 같이 봐.”
아빠는 어쩐지 말문이 막힌 표정이다. 대답을 듣기는 그른 것 같아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리모컨을 집어 들고는 리와인드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튼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프가 처음부터 재생됐다.
나는 서 있는 아빠를 두고 1인용 소파 바로 밑에 등을 대고 앉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수천 번은 들은 것 같은 느린 재즈 음악이 흘렀다. 내가 몸을 못 가누는 아기일 때도 옆에 눕혀두고 봤을 정도로 엄마가 좋아했다던 영화다. 그 때문인지 나는 뜻조차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대사를 타이밍에 맞춰 중얼중얼 따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기다리고서야 소파가 뒤로 푹 파이는 소리가 났다. 자그만 창문을 통해 빗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앉아서 앞을 보고 있지만, 실은 뒤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이곳에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을 보려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아빠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추억을 더듬으려 이 방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엄마가 좋아하던 배우가 엄마가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를 읊는다. 따라 하듯 입술을 달싹대며,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느끼하다고 토하는 시늉을 하던 철없는 아들에게 엄마가 웃으며 하던 말을 기억했다.
‘훈이 니가 아직 무언가를 포기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나 봐서 그칸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니 모르제?’
실행력이 삶의 신조인 내게 포기란 실패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포기한 게 아쉬울 정도로 아끼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더욱 실패할 수 없었고.
“아빠.”
아빠가 나를 돌아본다. 나는 아빠를 보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나 선욱이 안 갔으면 좋겠어.”
포기할 수 없는 누군가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는 걸 겪는 건 한 번으로도 족했다. 그 과정은 나를 망가뜨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이걸 두 번 겪느니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악몽의 주인이 바뀐 순간에야 나는 내가 또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애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이유도 잘 모르면서.
지선욱은 엄마 아빠나 강영수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했던 존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 삶에 들어왔다. 걔보다 더 오랜 시간 얼굴을 보고 나름대로 잘 지냈던 야구부 애들 몇몇과도 엄마 이야기는 잘 안 했는데, 걔와는 서로에 대해 잘 알기 전부터 엄마 이야기를 했다. 엄마 유품도 함께 태웠고, 심지어 걔는 엄마 유품 사진까지 찍어서 나한테 줬다.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을 때 옆을 보면 걔가 있고, 울고 싶을 때 옆을 봐도 걔가 있었다. 걔 옆에 있고서부터 나한테 행복하라고 말하는 엄마가 나오는 악몽을 더는 꾸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걔 옆에 있으면 행복하라는 말을 안 해도 행복할 거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악몽에서 벗어나서 좋았는데, 좀 살 만해지니까 왜 벗어났는지가 궁금해졌다. 답을 줄 수 있는 건 걔뿐인 것 같아서 자꾸 관찰하고 들여다봤다. 생각해보면 걔는 내 인생에 너무 빠르게 투입돼서 내가 관계를 정의할 틈도, 그 관계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틈도 안 줬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강영수와 달랐고,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걔는 엄마의 빈자리를 메꿔준 게 아니라, 그 빈자리를 같이 꽃으로 꾸며주고는 그 옆에 제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너 왜 거기 있어? 물어보려고 쳐다보면 걔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보는 것 같았다. 가끔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관계를 견디지 못해서 발버둥을 치다 말고 멍해졌다. 내가 발버둥을 친 건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걔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내 울타리 안을 보느라 걔 울타리 안을 볼 생각을 못 했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게 걔가 되는 동안, 걔가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뭐가 됐는지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오늘에야 알았다. 걔한테 지금 필요한 건 가족이다. 이런 시골에 처박아 두고 한번 와보지도 않는 엄마 아빠가 아니고, 자신이랑 똑같은 무뚝뚝한 얼굴로도 걔가 요청하지 않을 때조차 옆에 있어 주는 영감이 삶에 있어야 한다. 관찰하면서 이걸 몰랐을 리 없는데, 나는 이걸 중요히 여길 생각을 못 했다.
그걸 알았다면 지난 일주일간 언제 그 사실을 나한테 말해줄까 생각하며 속을 끓이진 않았을 텐데. 그러기보다는 걔가 못 하는 말을 대신 전해줄 좋은 친구 역할을 했을 텐데.
늦었지만, 아주 늦지 않았다. 만회할 수 있어. 나는 9회말 투아웃 상황에 선 투수처럼 집중해서는 뒤늦게나마 주변을 살핀다. 이번 공은 무조건 잘 던져야 한다. 왜냐면 모든 게 판가름이 날 것이기 때문에. 섣불렀다간 망치고, 괜한 여유를 부렸다가는 모든 걸 잃는다. 마음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가라앉히고 나서야 시야가 걷힌다. 그제야 걔 울타리 안에 있는 내가 선명히 보였다. 강영수와 내가 동그란 원에 붙어서 같이 앉아 있다. ‘친구’라는 테두리 안에.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 보이게 하려는 것처럼 몸을 부풀리며 약 올리듯이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악몽이라는 타자를 무시하고는 공을 던진다. 걔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하여 가능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영감은 나보다 더할 테니까 아빠가 한번 설득해 봐.”
“…….”
“나도 선욱이랑 이야기해볼게.”
악몽을 꾸는 건 걔가 소중해서야. 걔한테 내가 소중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러니 난 내가 잘 알던 것마저 잊어버리게 만드는 이 감정을 파헤치길 포기하겠어. 이 악몽이 짙어지기 전에 끝을 낼 거야. 소중한 것이 다른 방식으로 더 소중해지기 전에 뭉개고, 내가 잘 알던 이름 안에 욱여넣겠어.
아빠는 말없이 내 머리 뒤를 쓰다듬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비가 그칠 때까지.
* * *
“…행복한 게 뭔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지선욱의 표정을 본 순간에는 안도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행복할 준비가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선욱의 뒤로 보이는 대문 안쪽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영감이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지선욱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걸 모르겠으면, 네 옆에 평생 있어 줬으면 좋겠는 사람한테 물어봐.”
“…….”
“행복하냐고.”
그 대상은 내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지선욱이 솔직하게 말만 한다면, 영감은 지선욱을 절대 서울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직감이었지만, 그렇게 되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난 경기마다 바뀌는 타자보다 영감의 얼굴을 더 자주 봤다. 영감은 16년 만에 본 손자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잘 안 마시던 술을 찾아 마신다. 그건 그 말 없는 사람에게는 죽겠다는 표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집에 가는 척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다가 백 할머니네 집 담벼락 밑에서 멈춰 섰다. 담벼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는 발소리를 죽여 언덕을 살금살금 다시 올랐다. 영감네 파란 대문은 오래되어 녹슨 탓에 문이 완벽히 닫히지 않는다.
대문 바로 옆 담벼락에 몸을 낮춘 채로 기대어, 대문 귀퉁이에 조그맣게 난 틈 사이를 들여다봤다. 뒤돈 영감의 등과 그걸 바라보고 있는 지선욱이 보였다.
“저 사실 행복이 뭔지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그냥… 그냥 마음이 편해요. 밥도 잘 넘어가고, 밤에도 안 무서워요. 외롭지도 않고요.”
지선욱은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제가 엄마를 설득해볼게요.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엄마가 꼭 서울로 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면, 방학에라도 여기 올 수….”
지선욱의 말이 뚝 끊겼다. 영감이 움직이고 있었다. 창고 쪽으로 걸어가는 것까지 보고는 담벼락에 머리를 기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영감은 창고에 둔 컴퓨터를 꺼낼 것이다. 얼마 전 아빠한테 내가 쓰는 컴퓨터 종류를 물어봤다고 했으니, 아마 같은 종류의 컴퓨터일 가능성이 컸다. 지선욱이 파스를 사는 동안, 영감은 컴퓨터를 샀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두 사람이 최대한으로 내놓을 수 있는 진심이다.
그 진심이 드디어 통한 것처럼 껴안고 있는 둘을 확인한 후에는 더 보지 않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냥,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둘의 특별한 순간이니까. 나의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자전거를 끌려다 말고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 시선이 멎었다. 아까 정자에서 봤을 때는 하늘이며 바다를 가리지 않고 쏘아지는 불빛들로 꽤 화려해 보였는데, 축제가 끝난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훈아. 소원 타임이다. 소원. 얼른 손 모아라.’
작년 빛 축제는 정자에서 못 보고, 병원에서 엄마랑 같이 봤다. 병원 창밖으로 하늘을 수놓는 불빛을 보고 아이같이 좋아하던 엄마가 소원을 빌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바로 손을 모으는 걸 보며, 내년에도 엄마가 빛 축제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돌이켜보니 그건 나를 위한 소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선욱 씨. 소원 빌어요, 얼른. 일 년에 한 번 오는 기회야.’
같은 실수를 하기 싫어서, 이번에는 나를 위한 소원을 비는 대신 지선욱을 위한 소원을 빌었다. 그냥 내 옆에 있는 애가 바라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으니까 걔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만 되면 아무것도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저렇게 바로 이뤄지는 걸 보니까, 역시 문제는 내가 욕심을 부린 거였던 게 맞는 것 같다.
오늘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 * *
차가 좁은 길을 달려 집 앞에 서는 소리를 듣자마자 뛰쳐나온 외할머니는 내 팔을 잡고 한참 주무르더니 짐을 내려놓던 아빠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글썽댔다. 그새 왜 이렇게 말랐냐고,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고 아빠를 혼내며 등을 거듭 내리쳤다. 아빠는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붉어진 눈가를 숨기며 고개를 아래로 몇 번 주억이기나 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닮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겠지.
나는 외할머니와 아빠가 집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눈물로 한바탕 진을 빼기 전에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고 둘의 등을 떠밀었다. 외할머니의 집은 마당이 넓어서 구경할 것도 많았다. 막내 외삼촌이 내려놓고 갔을 게 분명한 운동 기구들부터 시작해서 줄지어 선 장독대들까지 구경하다가, 구석에 있는 돗자리에 시선이 문득 멎었다. 가지와 호박이 큼지막하게 잘려서는 거리를 두고 널려 있었다. 태안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할머니 집 근처에 오자마자 귀신같이 그치던 걸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다 말고 뒤돈 할머니가 내가 뭘 보는지를 눈치채고 이번 주 내내 비가 와서 널지도 못했다며, 이렇게 잠깐이라도 갰을 때 바짝 널어놔야 한다고 설명하더니 호박 몇 개를 소쿠리에 주워서 안으로 들어갔다. 식재료로 쓸 모양이었다.
“…….”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돗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나를 보는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한참 뒤에야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는 오후 내내 삼촌의 방에서 컴퓨터 게임과 핸드폰 게임을 번갈아 했다. 저녁에는 아빠랑 외할머니가 고스톱 치는 걸 조금 구경하다가, 속이 안 좋아져서 몰래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하고 왔다. 된장찌개에 들어 있던 호박이 소화되지 못하고 형체 그대로 나온 토사물을 잠깐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아닌 척 변기 레버를 내렸다. 조금 어지러워서, 엄마가 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썼던 방으로 돌아가서는 누웠다. 당연하게도 이 집을 오래전 떠난 엄마 냄새는 안 났다. 나는 대신 엄마의 손길이 닿아 반들반들해진 책 하나를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아빠랑 외할머니가 내 손을 하나씩 잡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란히 눈가가 붉었다. 외할머니는 눈을 뜬 나를 보자마자 다리의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아서는 곡소리를 냈다.
빙빙 도는 병원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다. 괜찮은 게 아니었네. 나 안 괜찮았네, 아직. 이상하게 그 생각이 드는 순간에야 울컥했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데, 문득 지선욱이 보고 싶었다.
‘거기도 비 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묻던 걔를 당장 봐야 할 것 같았다. 지선욱이 어디 안 가고 그 자리에 있는 걸 봐야만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아빠… 나 집…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숨을 헐떡이며 겨우 뱉은 말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안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아빠에게 지선욱네 집에 다녀온다고 말하고는 아빠가 붙잡기도 전에 집을 빠져나왔다. 분명 나올 때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영감네 집 마당에 섰을 때는 손에 들린 게 없었다. 마당에 멍청히 서서 자전거를 보는 동안에도, 빗줄기는 계속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지훈?”
비에 젖어 무거운 몸을 천천히 돌려 뒤를 봤다. 어두운 마루에 지선욱이 서 있었다. 답지 않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묻던 놈이 마루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처마 밑에 기대어져 있던 까만 장우산을 다급히 펼쳐 들고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비가 멎었다. 머리 위로 생긴 하나의 가림막 덕분이었다.
“벌써 돌아온 거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얘가 이렇게 말을 빨리하는 건 처음 본다. 그만큼 내가 심각한 꼴로 서 있다는 거겠지.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그런데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눈앞의 지선욱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나는 지선욱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야. 나도 자고 갈래.”
너 여기 계속 있었구나. 다행이다.
야밤에 찾아와서 갑자기 재워달라고 했으니 솔직히 거절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선욱은 내 예상보다 쉽게 알겠다고 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자다 말고 마루로 나온 영감에게는 내가 자고 갈 거라고 본인이 먼저 말해주기도 했다. 영감은 쫄딱 젖은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방에 있는 장롱에서 이불을 한 채 더 내줬다. 내일 아침을 먹고 가라고 말한 뒤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영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지선욱은 방바닥에 매트와 이불을 깔고 있었다. 매트는 하나고, 이불은 두 개였다. 거리를 조금 둔 채로 떨어져 있는 베개 두 개를 보다가 지선욱과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 놈이 나를 욕실로 밀면서 문틈 사이로 제 옷을 넣어줬다. 포장도 뜯지 않은 드로즈 하나가 위에 얹어져 있었다.
씻고 나오니 지선욱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늘 자정까지 공부하는 놈이니, 앞으로도 한 시간은 더 책상에 붙어 있을 터였다. 방해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려던 때였다.
“야, 이거.”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 팔을 붙잡은 놈이 내민 건 연습장이었다. 수학 문제와 풀이 과정이 네모난 면 위에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지선욱이 설명했다. 빗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는 방 안에 놈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지난주에 네가 물어봤었는데 내가 못 풀었던 문제.”
“…….”
“그거 풀었어.”
그제야 좀 기억이 났다. 시험을 앞두고 내가 가져가 물어봤던 수학 문제를 말하는 모양이다. 사실 어떤 문제였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심화 문제집에서도 별이 다섯 개 붙어 있는 문제는 처음 봤고, 해설지만 봐도 종이 한 장 가득 빽빽이 적혀 있길래 이 정도면 어렵겠지 싶어서 가져갔었다. 지선욱이 1분 내로 풀지 못하길래 어렵긴 한가 보다 했다. 샤프를 쥔 채로 고민하던 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른다는 소리에 나를 올려다보며 ‘나중에 풀어줘도 돼?’라고 말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문제가 아니었던 데다가, 문제를 푸는 지선욱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지켜본 터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고, 이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렇게 놈이 다시 내밀기 전까지는.
지선욱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책상 위로 널린 문제집이 여러 개였다. 문제집조차 책상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한 권 이상은 꺼내놓지도 않는 놈이 저렇게 책상 위를 어지럽힌 건 아마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방 한편에 자리한 문제집 탑도 조금 흐트러져 있다. 이 문제를 푸느라 다른 문제집을 가져와 들춰 봤기 때문일 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해서 잠깐 호흡을 참았다. 진정하고서야 손을 뻗어 예상치 못했던 마음의 끄트머리를 쥐었다. 이건 얘가 준 거니까 괜찮아.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고맙다. 내일 갖고 갈게.”
“어.”
대수롭잖게 답한 놈이 연습장을 다시 책상 위로 돌려두고는 옆에 어질러둔 문제집을 하나둘 치웠다. 오래 지나지 않아 탁, 하고 스탠드 불이 꺼졌다. 방 안이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아직 12를 가리키지 않는 시침을 확인하며 머뭇대는 나와 달리, 당연하게 내려가서 누운 지선욱이 나를 올려다봤다. 뭐 해? 안 눕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놈의 옆에 누웠다.
사방에서 선풍기가 돌아간다. 비가 와서 집은 습한데 에어컨은 없으니 영감이 선풍기를 있는 대로 다 내놓은 듯했다. 활짝 열린 반대편 방 안에서 영감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다. 지선욱은 매번 저런 영감의 등을 보면서 자겠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지선욱은 당장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감은 채다. 예상은 했지만, 잘 때마저도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게 좀 웃겼다. 피식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지선욱이 옆을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지선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불러놓고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눈만 깜빡이던 놈이 툭 뱉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빗속에서 서 있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어쩐지 순순히 재워준다 했더니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머뭇대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뭐라도 말을 꺼내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말이 맞는지를 가늠해보듯 놈이 웬일로 날 조금 더 오래 쳐다봤다. 그러더니 또 한 번 툭.
“나 강영수랑 자전거 안 탔어.”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던 놈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물으면서도 그게 사실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너 정말 그거 확인하러 빨리 온 건 아니지?”
“…아니거든.”
아빠 일 때문에… 겨우 입을 열어 어물대듯 말을 끝맺고서야 지선욱의 표정이 좀 풀렸다. 따지고 보면 밥을 먹을 때나 같이 버스를 탈 때도 이 정도로 가깝게 서 있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같이 누워 있다고 놈의 표정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된 게 신기했다.
아니면, 내 모든 신경이 얘한테 쏠려 있어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얘가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살 게 된 게 좋다는 이유로 덩달아 나한테도 벽을 낮춰줘서 그런가.
앞의 이유가 다 아니면, 얘는 같이 눕는 사람한테는 원래 이렇게 해주나.
“그럼 다행이고.”
“…….”
“가끔 보면 너넨 꼭 쓸데없는 장난에 날 끼워. 봐줄 때 적당히 해.”
강영수와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지친 법관 같은 표정을 하고서, 지선욱이 다시 눈을 감는다. 내가 알던 것보다 더 투명한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지선욱의 숨소리가 완전히 고르게 가라앉기 전에야 말을 걸었다.
“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듣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도 못 푸는 문제가 있냐.”
잠시 침묵하던 지선욱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는 것처럼.
“당연히 있지. 내가 무슨 괴물도 아니고….”
“그때마다 어떻게 하는데? 시험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를 돌아본 놈이 진지한 내 표정을 확인하고서는 멈칫했다. 입가의 웃음이 점차 희미해졌다.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 놈의 침묵이 길어졌다. 한참 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체크만 해두고 넘어가.”
“…답은 안 고르고?”
“골라야지. 안 그러면 못 넘어가니까.”
“…….”
“가장 가능성이 큰 걸로 하나 고르고, 대신 다른 문제 풀면서는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려. 그래야 그 문제를 틀린대도 그거 하나만 틀리는 거야.”
모범생다운 답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그 말을 따라 곱씹었다. 방금 들은 말은 지선욱이 삶이란 시험을 헤쳐 나가는 나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럴 때마다 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주지는 않을 테니까, 헤쳐 나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주고 때로는 도와주려면 이런 걸 미리 알고 있는 게 도움이 되겠지.
다행인 건 전교 1등의 습관이라도 따라 하려고 관찰한 게 도움이 되긴 했는지, 난 답변을 듣기 전에도 얘와 관련된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풀었다는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큰 답을 골랐고, 이제 다른 문제를 풀면서는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기만 하면 된다. 그건 내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지선욱의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처음이니 괜찮을 거였다.
한 번 더 결론을 낸 나와 대답을 끝낸 지선욱이 번갈아 뱉는 숨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대로면 잘 자라는 인사조차 없이 둘 다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방은 조용하고도 따뜻했다. 나는 이불을 조금 더 위로 끌어 올리며 천장을 봤다. 이 천장은 빙빙 돌지 않네,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지훈.”
잠에 겨운 목소리가 들린 순간에는 괜히 어깨를 움칫 떨었다. 말을 건 지선욱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나 서울에 있을 때, 내 주변에 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공부하고 싶어서 하는 애들은 한 명도 없었어. 다 선생님이 시켜서 하고… 부모님이 시켜서 하고….”
“…….”
“근데 넌 아무도 안 시키는데도 하잖아.”
널 위해서 하잖아. 그러니까…
“몇 문제쯤은 몰라도 괜찮아. 지금처럼 계속해.”
그러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너도.
“넌 앞으로 더 잘할 일만 남았어. 언젠가는 나보다 잘할지도 모르고.”
지선욱이 우리의 미래를 가정하듯 말한 건 처음이었다. 놈은 장난으로라도 미래에 대한 언급을 안 했으니까. ‘너 전학 간다며.’ 먼저 말을 꺼낸 나한테 미안한 듯 눈치를 보며 누가 봐도 급조한 것 같은 답변을 대는 순간에는 내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함께할 미래를 이야기해 봤자 그게 사실이 될 리 없다는 걸 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처럼.
그러나 지선욱은 이 순간에, 내가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 답했다. 그것도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며.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였다.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맞아, 친구인 우리에겐 확실한 미래가 있지. 끝나지 않고 계속될, 보장된 미래. 내가 너를 지켜보는 만큼, 너도 나를 지켜볼 거지. 내 옆을 떠나지 않고 지켜볼 거지.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지.
대답을 기다리다 잠들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조차 안 했는지 그새 지선욱이 잠들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올려둔 판판한 배가 놈이 색색 숨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회전하는 선풍기에서 나온 바람이 목 근처를 스치던 순간에만, 간지럽다는 듯 슬쩍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어. 잘할게.”
잠든 얼굴에 대고 늦은 대답을 뱉었다. 오래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고개를 비튼 덕분에 드러난 놈의 목덜미에 검지와 중지를 붙여 가져다 댔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하얀 피부 아래에서 맥박이 힘차게 뛴다. 엄마의 동맥이 전해주던 파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고 건강한 박동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살아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삶의 주파수.
그러니까 얘는…
“…….”
반에서 나 다음으로 키가 큰 애. 100m 달리기를 12초대 안에서 끊는 애. 종일 뛰어다닌 날에도 12시까지 공부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은 애. 징징대며 매달리는 강영수를 등에 달고도 흔들림 없이 정거장까지 걸을 수 있는 애.
동시에,
하늘을 조금 오래 바라볼 때마다 어릴 적 꿈을 생각하는 걸까 궁금해지게 하는 애. 내가 넘지 않아야 할 선 같은 애. 휘어질 곡선이라고는 없어서, 내가 점으로나마 그 선 안에 존재하려면 자꾸만 옆을 돌아보고 열을 맞춰야 하는 애. 내가 잘못하지만 않으면 내 삶에 머물러줄 애.
나한테…
나한테 소중한 애. 절대 잃을 수 없는 애.
“지선욱.”
소리를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불러본다. 이 밤이 아니면 영영 이렇게 부르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라도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사실 말이야. 나 그 문제를 틀릴 뻔했어. 틀리진 않았는데, 거의 틀릴 뻔했어. 틀리고 싶었어. 그리고 해설을 보기 전에 너한테 묻고 싶었어.
왜냐면 나는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란 글을 본 순간 너부터 떠올렸을 거거든. 네 이름의 마지막 글자에야 이응이 들어가 있는데도, 넌 여자가 아닌데도, 그냥 너한테 달려갔을 거거든.
근데 넌 절대 안 그럴 거지. 넌 내 이름 첫 글자에 이응이 들어간 걸 기억했어도, 나보다 안 친한 여자애 손을 잡을 거지.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뛸 거지.
근데 그거 알아? 괜찮아. 난 네가 뛸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네가 뛰는 걸 옆에서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네가 아프지 않고 튼튼한 심장과 다리로 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해.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도 가끔은 내 옆으로 돌아올 거잖아. 강영수한테 하던 것처럼 장난을 받아주고 반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내가 모르던 문제를 풀어줄 거잖아. 난 그거면 돼. 그게 악몽을 꾸지 않는 조건이니까. 이번 기회에 그걸 제대로 알았으니까,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다시는 내 악몽이 되지 말아줘. 부탁할게, 제발. 제발 내 옆에 있어 줘. 떠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내 옆에서 사라지지 마.
* * *
남자 고등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인권 감수성이 뒤진 애들과 그것보단 나은 애들. 놀랍게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전자가 나대고, 생각이 있는 편인 후자가 몸을 사린다. 무식한 놈들이 목소리가 크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후자들은 소음을 견뎌내는 것 말고도 전자가 주류처럼 보이는 현실까지도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착각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도 이런 게 처음이긴 한데….”
당연하지. 넌 일주일 전까지도 클리어 파일 홀더에 걸그룹 사진을 붙이고 다니던 애니까.
하필 양아치 새끼랑 같이 주번이 된 탓에 이번 주 내내 혼자 청소하는 게 눈에 걸려서 우유팩 재활용하는 거 한 번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체육관 뒤에서 붙들렸다.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는 놈은 말을 꺼내면서도 확신이 없는 눈치다.
“네가 그때 나서서 내 편 들어준 거. 정말 고마웠거든.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났고….”
역시나 놈은 내가 붙들린 순간부터 예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고작 삼 일 전의 일을 가지고 고백할 마음을 먹은 것부터가 신기한데, 여태껏 나한테 고백한 놈들도 비슷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새끼들의 특징인가 싶다. 이럴 때 보면 안희연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여자보다 남자들의 착각이 심하고 답도 없다는 거. 누군가가 허우적대는 자신에게 로프 하나 던져줬다고, 그 로프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과 그걸 던져준 마음이 당연히 사랑일 거라고 손쉽게 착각하는 것만 봐도.
같은 반 애한테 고백을 받고, 학년이 바뀔 때까지는 얼굴을 봐야 할 걸 고려해 거절할 말을 고르는 일을 남고에 와서도 계속해야 할 줄은 몰랐다. 다행인 건 그래도 이 새끼들은 가오에 죽고 사는 종족이라 울진 않는다는 것뿐.
“승현아. 좋게 봐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뭔 말을 한대도 울 것 같지는 않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일단 친근하게 부르며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며 한 번 더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한승현. 오케이, 이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았고.
“너 그거 나 좋아하는 거 아닌 것 같은데. 잘 생각해본 거 맞아?”
“…어?”
“다들 모르는 척하는데 내가 나서줘서 고맙고, 그러고 보니 내가 너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좀 괜찮은 애인 것 같고, 다음에 그런 일 있으면 또 대신 싸워줬으면 좋겠고. 그런 복합적인 마음을 퉁치기엔 좋아한다는 말이 가장 그럴듯해 보였던 건 아니고?”
역시나 내가 꺼낸 말에 놈은 말문이 막히기부터 한다. 그렇게 정확히 제 속마음을 짚어낼 줄은 몰랐는지 뜨끔한 표정이다. 반박하지 못하는 놈에게 나는 웃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너 이 주 전까지는 여자친구도 있었잖아. 그때 나한테 사진도 보여줬었고.”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는 놈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그게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마음을 숨기다 내가 먼저 눈치채게라도 했으면 진정성이라도 느껴졌겠다. 내가 그런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을지는 몰랐는지 어버버하는 놈은 뒤늦게 부끄러운 눈치다.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하던 감정을 남에게 해체당하니 이렇게 우스워 보일 수가 없겠지. 나는 주눅 든 놈의 어깨를 괜찮다는 듯이 크게 한번 주물러주고는 물러섰다.
한승현은 양심 없는 새끼들이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튀는 환경 미화까지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다. 안 그래도 학생부 광내 보겠다고 맡은 실장 일이 생각보다 할 게 많아서 빡치는데, 반에서 몇 안 되는 대화 통하고 제 몫의 할 일 딱딱 해치우는 애랑 어색해져 봤자 내 손해고. 이 대화를 좋게 끝내는 게 나한테도 유리하다는 소리다.
“수준 낮은 새끼들이랑 같이 학교생활 하려니 좆같지?”
“…….”
“근데 어떡하겠냐? 걔들이 그렇게 태어난걸.”
삼 일 전, 한승현은 성교육 시간에 받은 콘돔으로 덩치 작은 놈 하나를 데리고 마운팅 하는 척 놀리던 놈들한테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는 이유만으로 게이냐고 놀림 받았다. 아니라고 펄펄 뛰는 거야말로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놈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모욕적인 말을 던지던 게 분위기를 탔다. 남을 밟고 올라가 제가 어딘가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짐승의 본능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건 남고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런 분위기를 끊을 수 있는 나 같은 놈들조차 한정적이라는 사실은 절망감과 동시에 희망을 품게 했을 거고.
그러나 그 구원이 정말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나? 난 당하는 게 이 새끼가 아니었더라도 그 분위기를 똑같이 좆같이 만들었을 텐데. 애초에 구원이 애정에서 나온 행위라고 믿는 것부터가 순진했다. 그렇게 착각이야 할 수 있대도 상대방은 그런 생각 없이 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덤벼들어야지.
“공부 열심히 해서 지금보단 수준 높은 새끼들 있는 곳으로 가.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한다 쳐도 티를 안 낼 상식은 있거나 혹은 말 한번 잘못하면 잃을 게 많은 새끼들 있잖아.”
“…….”
“네가 딱히 도움받을 필요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서, 거기서도 남자가 좋다는 마음이 들면. 그때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자격증도 없는데, 청소년 상담만 주구장창 하는 기분이다. 한숨을 삼키며 대화를 마무리하듯 어깨를 툭 쳤다.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혹시나 걱정하지 말고.”
“…어, 어어. 고맙다.”
이젠 머쓱해 보이기까지 하는 놈으로부터 고개를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10분 정도 소요될 줄 알고 따라온 건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지선욱네 반 담임이 잔소리가 심해 종례가 우리 반보다 좀 더 긴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교하기 전에 교무실에 들르라던 담임에게 다녀오기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 지선욱이 또 교무실 앞에서 내 가방 들고 기다리는 일을 만들겠다 싶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놈이 생색도 안 내고 묵묵히 해주는 일은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걸리곤 했다. 놈에게 낭비처럼 여겨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애초에 2학년 올라오면서 점심도 따로 먹기 시작한 이유가 뭔데.
황급히 걸음부터 떼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 시계를 내려다봤지만, 결국엔 뒤돌았다.
“야, 그리고.”
“…어?”
멍한 얼굴에 대고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재수 없을 것 같긴 한데, 생각해보라느니 뭐라느니 설교해 놓고 이 말도 안 하면 더 재수 없지 않을까 싶어서.
“나중에 진짜였다고 해도 나한테 연락은 하지 말라고.”
“…….”
“난 남자랑은 안 되겠더라. 어쩌다 게이 야동 본 적 있는데 하나도 안 꼴리더라고.”
뭐, 넌 그것까지 고민해 보지도 않고 나한테 고백부터 싸질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은 거 달린 놈들한테 고백을 받을 때마다 그 사실을 새삼 확인받는 건 어쩌면 다행이다. 그 말까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넋 나간 얼굴이라서 그냥 한 번 더 어깨를 쳐주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부턴 진짜 뛰어야 했다.
* * *
강영수가 전 여자친구한테 노팬티임을 깠다는 우스운 일화가 강영은의 고백 이야기로 흐르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까 버스가 떠나기 전 그 짧은 새에도 차창 너머의 지선욱을 훔쳐보는 데 성공한 안희연이 지선욱 키가 더 컸냐고 물은 말에 강영수가 더 신나서 자랑해대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과는 관련도 없는 고백의 성공 여부를 진지하게 떠들고 있었다.
“까고 말해서 니 동생 존나 예쁘잖아. 취향으로 갈릴 그런 게 아님.”
“나도 돼지가 그런 이유로 까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모르지. 욱이가 여기 와서 누구 사귀는 걸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전여친은 연습생이었잖어….”
“야이 씨, 너 오빠라고 객관성 뒤진 발언하지 말고 똑바로 봐. 니 동생 우리 학교까지도 예쁘다고 소문날 정도인데 무슨…. 저번에 시내에서 만났을 때 한번 인사해 보니까 성격도 좋드만. 내가 봐서는 다른 이유가 있어. 너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와서 그런 쪽으로 생각이 절대 안 든다거나.”
“아아… 몰라, 몰라. 생각하면 머리 아퍼. 내가 봤을 때 잘되려면 진작 잘됐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어떻게 끼어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이러다 둘이 서로 못 볼 사이 되기 전에 얼른 해결 봤으면 좋겠는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크를 그릇 위로 툭 던지는 강영수를 힐끔 보고는 다시 분식집 구석에 달린 조그마한 텔레비전에 시선을 뒀다. 학원 밑에 있는 이 분식집은 다 좋은데, 공부하다가 숨 돌리러 온 학생들에게 교육 방송을 틀어주는 건 좀 센스가 없다고 느껴진다. 아까 PMP를 통해서도 본 수학 선생 하나가 칠판 앞에서 바삐 움직이는 걸 무료하게 지켜보다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안희연은 내가 여태껏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막 눈치챈 사람처럼 의아한 표정이었다.
“넌 왜 이렇게 조용하냐?”
“뭐가.”
“너도 옆에서 지켜봤을 거 아냐. 추측 가는 거 없어?”
“없어. 둘이 알아서 하겠지.”
살다 보면 모르고 사는 게 나을 것들이 있고,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어깨를 으쓱하며 떡볶이나 하나 더 집어 먹는 나를 본 강영수가 투덜대며 대신 대답했다.
“이 새끼는 오작교 노릇하기 싫다고 무려 중학교 3학년 때 미리 선 그으셔서, 지금까지도 운 좋게 물러서 계셔.”
“역시 재항중에서 가장 재빠르던 새끼답다.”
“그니깡. 존나 얄미웡, 씨발.”
나한테까지 화살이 넘어온 걸 보니 대충 마무리된 것 같아서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뺐다. 계산을 마치고 오니 자리를 대충 정리한 둘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고 있었다.
“야야, 잘 먹었어. 다음엔 내가 쏨.”
“됐어. 뭘 또.”
“올. 그럼 나도 쏠 필요 없겠당.”
“그래라. 아무래도 돈이 있으면 팬티부터 사 입어야 할 테니까.”
“씨발놈. 겨우 잊고 있었는데….”
깔깔댄 안희연이 먼저 분식집을 빠져나가고, 그 뒤를 따르던 강영수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문을 잡은 채로 뒤돌았다.
“야. 다음 주에 강영은이랑 넷이서 영화 보러 가기로 한 거 있잖아. 그냥 너랑 나랑 둘이 빠져주는 거 어떰?”
영은이를 돼지로 부르지 않는 건, 강영수가 웬일로 진지하단 소리다. 강영수가 동생의 마음을 가지고 놀리지도, 그렇다고 지선욱한테 받아주라고 쉽게 장난을 치지도 못한 지는 꽤 됐다. 이제 강영수에게는 두 사람 다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애초에 선택지를 가르기조차 싫은 거다. 지금도 놈은 심란한 표정으로 장난기라고는 없는 제안을 한다. 나름대로는 고민을 통해 완성한 답지인 듯싶었다.
“대충 떠봤는데, 이번에 선욱이 생일 때 마지막으로 고백해 보려는 눈치더라고. 올해 지나면 우리 고3이니 이젠 말하기도 어려울 거고.”
역시나 근거가 따라붙는다. 영은이와 같이 살고, 지선욱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여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옅은 한숨과 함께 강영수가 설득하듯 덧붙였다.
“너 아예 신경 쓰기 싫어하는 건 아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 빠져주자. 엉?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밀어준 적은 없잖아.”
“…언제였지?”
“뭐, 영화?”
“어.”
“다음 주 토요일.”
다음 주 토요일이면 7월 13일. 날짜가 왜 익숙한가 했더니, 담임이 모의 UN 프로그램 참여를 독려하며 말해준 오리엔테이션 날짜였다. 잊고 있던 것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내 생일 어차피 11월 29일인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2학기에 있을 프로그램 날짜와 제 생일이 겹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묻던 무뚝뚝한 얼굴이다. 그때도 아차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오버한 것 같다. 생일이야 늘 다 같이 모여서 보내긴 했대도, 제 생일도 까먹는 놈이 생일 파티에서 나 하나 빠졌다고 의미를 크게 둘 리도 없고.
지선욱한테 어디까지 해도 되나 헷갈릴 때는 강영수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된다. 지선욱과 강영은을 모두 아끼고, 더군다나 한 걸음 물러서 있던 나보다는 둘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놈이기도 하니. 게다가 지금은 강영수가 내게 답을 내밀고 있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공부를 거저 한 건 아니어서, 아닌 거 같다 싶으면 답을 고치고 넘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건 따로 표시를 해둘 필요조차 없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강영수한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지선욱한테는 내가 말할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놈 뒤에서 문을 잡으면서,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 하듯 늘였다. 내일 학교에 가면 교무실부터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래도 모의 UN 프로그램은 참석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렇게 잠깐 고민한 걸 보니,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 * *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역시나 지선욱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내가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게 된 것도, 제 생일날 내가 태안에 없을 거라는 것도 자신과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서울에서 참가자들끼리 미리 사전 모임 한대. 토요일 아침이래서, 방학식 끝나고 바로 올라가려고.”
관심 없어 보이는 놈에게 굳이 몇 마디 더 덧붙이다 말고 고개를 떨궜다. 진동한 핸드폰 화면 위로 아빠가 보낸 문자들이 떠올랐다.
몇 초 더 기다리니 아빠가 보낸 사진이 떴다. 사진을 너무 정직하게 찍어놔서 웃긴데, 핸드폰으로 사진 보내는 것도 며칠 전에야 터득한 아빠에게는 이것조차 쉽지 않았을 걸 알아서 잔소리하길 포기했다. 어쨌든 사진 속에 보이는 MP3가 내가 생각해 두고 있던 모델이 맞으니 됐다. 비디오 플레이어를 새로 산다고 시내에 있는 큰 전자용품점에 간다던 아빠한테 내가 찾는 MP3가 있는지, 있다면 가격은 어떤지를 물어놨다. 지선욱 생일에 사줄 건데, 가격을 알아야 지금부터 미리 용돈에서 빼놓든 할 수 있으니까.
아빠로부터 연이어 답장이 도착했다. 18만 원이라는 숫자를 보며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최근 들어 학교랑 학원만 반복하느라 딱히 돈 쓸 데도 없었고… 뭐, 강영수 떡볶이 몇 번 덜 사주고 저축해 둔 거 합치면 어떻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지선욱이 방금 뭔 말을 했는데 놓친 것 같아서.
“뭐라고? 못 들었어.”
곧바로 되물었지만, 지선욱은 별거 아니란 듯 고개를 젓기부터 했다.
“…아냐. 잘 다녀오라고.”
그런 말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지선욱 위로 진 그림자 때문이었다. 불청객이 자연스레 지선욱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누가 어딜 가는데?”
“나 말고 이지훈.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 있어서 서울 간다고.”
“네가 모이는 애들 중에서는 제일 양아치 아니냐?”
생각해보면 생일 선물이 시계에서 MP3로 바뀐 것도 저 새끼 때문이다. 뒤늦게 끼어들어서 처묻는 꼬라지 하고는. 자문자답은 거울을 보고 하면 될 텐데, 지 얼굴을 보고 하기에는 쏠리는 모양이지.
“너처럼 걸레는 아니니까 괜찮을 듯?”
떠오르는 말 중 가장 무난한 걸로 답했는데도 지선욱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지선욱은 내가 최혁준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짓곤 한다. 내가 저 새끼를 상대하느라 예전 양아치 시절의 버릇이라도 나올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전 양아치와 현 양아치 사이에 애매하게 낀 놈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잡는다. 어느 쪽에도 무게 추가 기울 필요는 없다는 듯이.
하긴 내 입장에서야 박철승이랑 같이 본드 빨던 새끼랑 비교되는 게 억울하지, 평생 모범생처럼 살아온 지선욱의 눈에는 그게 그거일 거다. 그래도 날 조금 더 빨리 구원했다고, 시선이 내게 조금 더 머물렀다. 얘는 그래도 넌 그러면 안 되지, 그러라고 내 옆에 둔 게 아닌데. 넌지시 혼이라도 내는 것처럼.
한숨을 삼키곤, 대신 웃었다. 저번에 저 양아치 새끼가 콩나물국에는 손도 안 대던 게 떠올라, 일부러 가득 덜어주며 눈을 맞췄다.
“콩나물 팍팍 먹어. 그래야 형들 키를 따라잡을 거 아냐.”
참는 게 누구인데, 지야말로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걸 보니 웃기지도 않았다.
“너는 그냥 많이 먹고. 그래야 힘내서 공부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새끼가 지선욱 앞에서 내숭을 부려대고 있다는 거다. 방금도 눈알 빠지게 나를 노려보던 놈은 내가 지선욱한테 쥬시쿨을 밀어주자 제 식판에 담긴 쥬시쿨이나 쳐다보고 있다. 지선욱에게 줄까 고민하는 눈치다.
어떤 의도인지는 몰라도 성질까지 죽여가며 지선욱 앞에서만 교화되는 척 눈속임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래 봐야 하교하는 순간부터는 몰고 다니는 새끼들조차 똑같으면서. 무슨 속셈인가 싶어 슬쩍 알아본 나한테까지 슬슬 풍기는 구린내를 지선욱이 결국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모든 건 시간문제다. 지가 못 견디고 튕겨 나갈 게 뻔한데 그 시기를 당기기 위해 굳이 손 더럽힐 필요도 없고. 물론 지선욱한테 피해라도 끼치면 그때부터는 남 일이 아니게 되겠지만, 이런 점심시간마저 외톨이 흉내를 내며 징글맞게도 붙어 있으려는 걸 보니 그런 기미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지금은.
나는 옆에 달린 냅킨통에서 휴지를 뽑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콩나물을 국통으로 모두 밀어낸 후 짜증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양아치 새끼와 눈이 마주친 건 그다음이었다. 지선욱이 잠깐 아래로 고개를 내린 틈을 놓치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좆. 까.
그 한마디에 양아치 새끼의 눈가가 매섭게 변했다. 이번엔 노력하지 않고도 웃음이 나왔다.
이건 따지자면 뜸 들이기다. 좆같음을 견디고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이긴다. 가진 건 오만함밖에 없는 양아치 새끼는 이런 가벼운 조롱조차 참아본 적이 없어서 열 받아 뒤지려는 게 곧이곧대로 티가 났다. 나를 노려보다 말고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놈을 본 지선욱이 아주 천천히 따라 일어섰다. 난 놈과 지선욱이 잔반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둘을 시야에 둔 채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내게 있어 저 새끼의 참을성은 너무나 우습다. 당연하다. 저 새끼는 지선욱을 위해 참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지선욱을 위해 뭐 하나 포기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 *
사람 쪽팔리게 소란스러운 조개구이집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던 두 사람 중 그래도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날 찾으러 나온 건 막내 외삼촌이었다. 담배를 찾는 것처럼 가슴팍을 연이어 더듬던 삼촌은 이내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주저앉았다. 둘 다 쪼그려 앉아서는 바다만 멀거니 봤다. 먼저 입을 연 건 삼촌이었다.
“훈아. 새우 더 시키주까?”
“됐어.”
“왜. 까기 귀찮아서 그라나. 삼촌이 까줄게.”
덩치가 저만 한 열여덟 살 조카를 어린아이 달래듯 달래려 드는 막냇삼촌에겐 확실히 나이답지 않게 철없는 면이 있다. 저런 모습을 볼 때면 삼촌을 볼 적마다 대체 저래서 군 생활은 어떻게 하는 건지 걱정된다고 혀를 내두르던 엄마부터 떠오른다. 엄마와 외삼촌은 뭐 하나도 닮은 게 없다. 그래도 삼촌이 이렇게 살갑게 굴 때면 엄마가 떠오르곤 한다. 삼촌의 등 너머로 보이는, 울다 지쳐서 테이블에 거의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는 아빠도 비슷한 이유로 삼촌에게서 엄마를 봤겠지.
대부분의 조개구이집이 그렇듯 바로 앞이 바다다. 집에서도 조금만 더 나가면 보는 바다인데, 이렇게 시끌벅적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깜깜한 어둠 속 홀로 움직이는 바다를 보다가 뒤늦게 조카 비위를 맞추기 바쁜 삼촌에게 고개를 돌렸다.
“삼촌, 그 누나랑 헤어졌지?”
아빠야 울 핑계가 필요했다 치고, 평소였으면 묵묵히 아빠의 잔을 채워주기 바빴을 삼촌이 따라 우는 건 좀 예상외였다. 5년도 넘게 끼고 다니던 반지가 사라진 약지를 발견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런데 꺽꺽 넘어갈 정도로 우는 삼촌을 보니 의심이 됐다가, 내 물음을 듣자마자 술이 확 깬 표정을 짓는 걸 보니 확신하게 됐다. 언젠가 엄마의 병실로 병문안까지 왔었던 삼촌의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엄마가 둘이 돌아가자마자 결혼은 꼭 봄에 했으면 좋겠다고 설레발을 떨었던 것도.
삼촌은 코를 한 번 들이켜고는 괜히 어깨를 쭉 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그 모든 게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처럼 머쓱하게 물었다.
“티 나나.”
“엄청.”
엄마와 나이 터울이 큰 편이긴 했지만, 서른 후반의 남성치고 삼촌은 그렇게 어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조카 앞에서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지금도 삼촌은 뭐라도 변명하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다 보이게 머뭇대더니, 더는 숨기지 않고 툭 털어놓았다.
“그 누나 유학 갔다.”
“유학?”
“독일로.”
“겨우 유학 간 것 때문에 헤어졌다고? 삼촌이 따라가면 되잖아. 아니면 장거리 연애를 하거나.”
“따라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가.”
“…….”
“사람은 좋아하는 걸 앞에 두고 뒤쫓아갈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걸 뒤에 두고 혼자 먼저 갈라 카면 숨부터 턱턱 막히는 법이거든. 근데 보이까 그런 마음까진 아닌 것 같길래 그냥 내가 먼저 헤어지자캤다. 마음에 걸리는 거 없이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삼촌이 한 박자 늦게 팔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는 내 머리 위에 손을 뻗어 마구 헝클기도 했다.
“내가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아를 두고 별소리를 다 한다.”
“…알고는 있어?”
“인마, 이거 좀 컸다고 말대꾸가 습관이다. 어? 니 요새도 책상에 몸 묶어놓고 공부하나.”
“언제 적 이야기를 해. 그땐 습관 잡으려 그랬던 거고, 이젠 안 그래.”
“맞나. 야. 니 그래도 성적 많이 올랐다 카던데?”
“기특하면 용돈 줄래?”
장난스럽게 위로 내민 손에 지폐 여러 장이 떨어진다. 농담이었지, 진짜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받아도 되나 고민하는데 씩 웃어 보인 삼촌이 날 일으켜 세우고는 지폐를 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누나가 니 너무 야구에만 올인해가 공부 머리는 일절 없는 것 같다고 걱정했었는데, 지금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기다. 그제.”
“…….”
“지금처럼만 해라.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쭉 가서 니 원하는 거 다 하고 살아라. 느그 아빠는 내가 잘 보필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나.”
어깨를 한 번 더 팡 두드린 삼촌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사람처럼 후련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내 머리를 헝클고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조개구이집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 대리 좀 부르려고 하는데요.”
아직도 얼굴이 벌건 것치고는 비교적 멀쩡한 말투를 흉내 내는 삼촌의 등을 보다가 바다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삼촌이 말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누군가를 보내줄 수 있는 마음과 두고 떠날 수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아빠는 그렇게 마시고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낚싯대부터 챙긴다. 중얼대는 말을 들어보니 영감이랑 낚시를 가기로 약속해둔 모양이다. 영감의 집에 갈 눈치길래 나도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아빠 뒤를 따라나섰다. 한두 번이 아니라서인지 아빠는 왜 따라오느냐고 묻지도 않고, 영감도 도착한 나를 슥 보고 만다. 성격도 급한 둘이 아이스박스까지 챙겨 집을 떠나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둘이 떠나기 전 지선욱이랑 밥 사 먹으라고 준 용돈을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마루로 올라섰다. 영감이랑 아빠가 수선을 떠는데도 내다보지 않길래 혹시나 하긴 했는데, 지선욱은 정말 자는 중이었다.
“…….”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나. 얘가 웬만해서는 늦잠을 자는 애가 아닌데.
방문을 연 자세 그대로 놈을 빤히 내려다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 걸음을 옮겼다. 충전기에 꽂힌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끄고서는 뒤부터 황급히 돌아봤다. 갑자기 울린 알림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흔들림조차 없이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서야 잠잠해졌다. 10분 뒤에 울릴 추가 알람마저 마저 끈 후 핸드폰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놨다.
안 그래도 조용한 놈인데 자고 있기까지 하니 방 안이 소름 끼치게 조용했다. 잠깐 망설이다가 방 문턱쯤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여기에 앉으면 허락도 받지 않은 공간에 막 침입한 느낌은 안 들면서도 자는 중인 지선욱을 훔쳐볼 수 있으니까.
“…안 덥냐? 선풍기 틀어줘?”
잠든 놈이 대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 역시나 답이 없는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거실에 있던 선풍기를 가져왔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하얀 이마 쪽으로 선풍기 머리를 고정했다.
어쩐지 지선욱이라면 깨어 있었더라도 덥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남한테 뭐 해달라고 한번 부탁이라도 하면 죽는 줄 알지, 넌.
애초에 혼자서 뭐든 잘하는 놈이라 그럴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걸 아는데도, 남에게 곁을 내주질 않는 그 특성이 어쩌면 학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시나 외롭지 않은 척까지 너무 잘해서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말하질 않으니, 내가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지선욱이 행복해지지 않았나 싶긴 한데.
‘행복해?’
왜냐면, 일단 나부터가 지선욱이 행복한지를 지켜보려고 붙어 있으니까.
등 뒤로 팔을 뻗은 채로 놈을 내려다봤다. 마지막으로 이 방에 누워 있던 놈을 본 게 언제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귓전을 때리던 빗소리였다. 그렇기에 더욱 가까이에 붙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던 지선욱의 숨소리, 그리고 손을 갖다 댄 곳에서 피어오르던, 지선욱이 내 곁에서 건강히 살아 있다는 모든 증거.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수많은 문제를 풀었던 사람치고는 생생하리만치 기억나는 것들. 그러나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문제를 다시 풀려고 한 적이 없다는 걸.
“…야.”
다만 어젯밤 삼촌이 한 말처럼 내가 뒤에 둔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가끔 그 문제가 있었다는 것 정도야 떠오른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그때 정답을 골라서 다행이라고.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같이 있을 수조차 없었겠지. 가지려 노력하지 않았기에, 잃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던 거니까.
방 안에 들어서는 것 대신 방문턱에 애매하게 걸터앉아서, 손을 뻗어 이마의 땀을 훔쳐주는 것 대신 선풍기의 미풍이 지선욱 머리를 살살 쓸어 넘겨주길 바라며 내가 지켜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의 끝에는 늘 모양만 바꿔서 하는 부탁이 따라붙는다.
“더우면 나한테 꼭 선풍기 틀어달라고 해.”
알았지. 난 너한테 그거 말고 바라는 거 없으니까.
여전히 답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놈을 두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열여덟의 지선욱의 방에서는 열여섯 지선욱의 방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바람의 냄새가 난다. 소금기라고는 없는, 그러나 햇빛을 듬뿍 받은 바다와도 같은 푸른 냄새가.
조금 더 놈을 자게 한 후에는 같이 밥을 먹고, 오랜만에 같이 자전거를 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선욱은 그것까지는 너그럽게 해줄 것이다.
* * *
선생들은 최혁준이랑 내가 주먹싸움을 하는 걸 바로 눈앞에서 보고서도 상황이 일차적으로 수습되자마자 우리를 같은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교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투명한 창이 있어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처벌을 논의 중인 교무실 한복판에 앉혀놓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방금까지 급식실 바닥을 굴렀던 새끼들을 반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일단 눈에 보이는 곳에 격리해 두자는 심산인 듯했다. 그 증거로 우리가 있는 방 바로 앞을 지키고 앉은 체육의 한숨 어린 눈길이 투명한 창을 통해 3분이 멀다 하고 한 번씩 꽂혔다. 최혁준보다는 내게 기대한 것이 많았는지, 나를 볼 때면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일부러 서로를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앉혀 둔 탓에, 최혁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놈이 종종 피 섞인 침을 모아 바닥에 뱉는 소리가 들렸다. 길바닥도 아니고 실내에서 침을 뱉는 것부터가 양아치 습성을 못 버렸다고 광고하는 셈인데, 이제는 다 뽀록 났다는 건지 뭔지 숨길 생각도 않는 게 좀 웃기긴 했다.
참지 못하고 피식 웃자마자 입술 끝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끝을 가져다 대니 점점이 피가 묻어났다. 휴지도 없는데 그냥 나중에 한 번에 모아 닦는 게 낫겠다 싶어서 손을 뗐다. 대신 비슷한 꼴로 앉아 있을 뒤의 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난 너 이 학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침을 뱉던 소리가 뚝 멎었다.
“아직도 박철승 그 새끼 밑에서 따까리 짓 하는 게 뭔 자랑이라고, 먼저 아는 척할 때부터 천지 분간 못 하고 나대는 새끼인 거 알아봤거든.”
“…….”
“그래서 경고했는데, 좆도 안 들었지 니가?”
밖에서 내가 최혁준에게 말을 거는 걸 유추할 수 없도록 입술을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옆눈으로 흘긋 본 체육은 역시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눈치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지 우리를 감시한 이후 처음으로, 그의 관심이 우리에게서 벗어났다. 수업 중에 전화를 받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비우던 것과 달리 혹시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리가 일이라도 칠까 봐 경계하듯 잠깐 고민하던 그는 각자 앞을 보고만 있는 우리를 본 후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체육에게서 시선을 돌려 벽에 붙은 시계부터 확인했다. 점심시간은 12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고, 지금은 1시 55분이다. 5교시 수업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흘렀다는 소리고, 아까 선생들이 말하던 바에 따르면 점심시간에 외출한 양호 선생님은 2시에 돌아온다고 했다. 최혁준과 내 얼굴 상태를 보자마자 기겁하면서 양호 선생님한테 연락하라며 호들갑 떨던 선생들을 생각하면 양호 선생은 돌아오자마자 이곳으로 소환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은 최대 5분. 그것도 체육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했다. 판단을 끝내자마자 입을 열었다.
“버림받는 거에 페티쉬 있냐?”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와 비슷한 꼴을 한 채로 입술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는 양아치 새끼와 눈이 마주쳤다.
“…더 처맞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봐.”
입술을 비틀며 태연한 척하는 와중에도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뻗지 않으려 애쓰는 꼴을 보니 웃겼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다. 이 새끼가 그렇게 내숭을 떨어대면서 지선욱 옆에 있었던 건, 나와 비슷한 이유였던 모양이다. 지가 봐도 지선욱은 제 세계로 끌어들일 수 없는 인물이니까, 어떻게든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버림받지라도 않으려고.
그런 것치고 꼬리가 길어서 밟혔겠지. 그걸 알아챈 지선욱이 거리를 두려고 하니까 미쳐버린 거고.
“난 또 지리게 내숭 떨길래 드디어 사람 흉내라도 내나 싶었지. 그게 이렇게 공들여서 버려지고 싶어서 버틴 거였는지는 몰랐다.”
“닥치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떠냐? 짜릿해?”
이제 이 새끼는 턱까지 떨고 있다. 참는 척해 봤자 이미 눈깔이 반쯤 돌았다. 그래 놓고도 제 딴에는 주먹을 쥐고 참는 게 우스웠다. 그 지랄을 해놓고도 이 학교에 붙어 있고는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지선욱을 건드려 놓고.
겁이라고는 없는 애를 덜덜 떨게 만들어 놓고, 이 씨발 새끼가.
박철승을 보고도 겁먹기는커녕 경찰에 신고하던 애한테 어떤 협박을 해서 자신을 견디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감을 언급하던 걸 보면 대충 감이 잡히기도 했다. 내가 아까와는 달리 직접 듣지는 못했을, 지선욱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참게 할 정도로 비열하고도 저열한 협박의 말들을 상상만 해도 머릿속의 전구가 쉬지 않고 깜빡댔다. 아까 급식실에서는 그 전구 중 하나가 파괴적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꺼졌다. 그렇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이상 또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덤벼드는 행위가 내게도, 지선욱에게도 이로울 리 없으니까. 나는 가까스로 감정을 삼켜 내고는 대신 웃었다.
“축하한다. 널 구원해줄 수 있는 마지막 애한테도 버려진 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멱살이 붙잡혔다. 순순히 잡혀준 채로, 허공에서 들린 주먹을 곁눈질했다. 정확히는 최혁준 뒤로 보이는 벽시계를.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시각을. 눈이 돈 이 새끼는 몰랐겠지만, 이미 복도에는 발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벽시계는 이미 2시를 가리킨 지 오래고.
“최혁준! 이 새끼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턱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 순간, 체육이 문을 급하게 열어젖혔다. 그 뒤에 선 양호 선생의 떨리는 시선이 내 볼에 닿았다. 나는 완전히 터져버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체육에게 양팔을 붙들린 최혁준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들이닥친 체육을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놈은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채고는 하얗게 질렸다. 선생들은 급식실에서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침묵시위 중인 우리 때문에 싸움의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또래들의 다툼 정도로 일단락 짓고 넘어가겠지. 그렇지만 방금 그들이 목격한 건 싸움이라고 볼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이 새끼가 나를 일방적으로 팬 것으로 보일 터다.
나는 더는 필요 없어진 웃음을 버린 채로 최혁준이 끌려 나가는 걸 봤다. 방에서 나가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덜떨어진 놈에게 입 모양으로 말하기 위해서.
꺼지라고.
지선욱의 삶에서. 너 같은 새끼가 아니면 굳이 보호받을 필요도 없는 걔의 단단한 세계에서.
아니면 내가 널 죽여버릴 테니까.
지선욱이 우는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나는 얘가 웃길 바랐던 거지, 울길 바랐던 적은 없으니까.
“사고 안 친댔잖아, 이 개새끼야.”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니 우는 표정이 다른 것도 당연한데, 지선욱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운다. 강영수처럼 울게 만든 상대방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아빠처럼 목소리가 떨리거나, 삼촌처럼 말소리에 울음이 섞이지도 않는다. 얘는 울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그 잘못을 짚어주려는 것처럼 운다.
“겁도 없이, 미친 새끼가… 그렇게 하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할 것 같았어?”
“…….”
“아저씨 일하다가 달려오셨어. 이 씨발놈아. 잘하면 너 정학당할 수도 있었다고. 모의 UN? 사관학교? 지랄하지 마. 네가 여태까지 아무리 학교생활 잘했어도, 성적 그렇게 올려도! 이제 담임들 너 그런 데에 절대 추천 안 해줘. 급식실에서 쌈박질이나 하는 새끼한테 누가 그런 걸….”
그 와중에 걱정하는 게 우리 아빠나 모의 UN인 것마저 얘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겼다. 영감을 부모처럼 섬기는 아빠가 영감네 손자인 너를 대신해서 싸웠다는 걸로 혼내는 건 말이 안 되고, 모의 UN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만한 주제도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좀 감동받은 것도 있었다. 내가 예전 버릇 못 버리고 양아치처럼 싸워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방을 들고 직접 데리러 오기까지 할 줄은 몰라서.
“좋은 말 할 때 빨리 반성문 써. 네가 안 쓰면 나라도 쓸 테니까.”
특히 놈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가 짜증이 났는지, 지선욱이 앞에 있는 종이를 끌어갔다. 그제야 비로소 말이 나왔다.
“와, 내가 살다 살다 지선욱이 우는 걸 다 보네.”
종이를 내 쪽으로 끌어오며 한 번 더 지선욱을 힐끔댔다. 볼이 그새 흥건히 젖어 있다.
아까 들어오면서 두루마리 휴지를 하나 봤는데. 아, 저기 있네. 종이를 가져오며 다른 손으로는 옆의 의자 위에 놓여 있던 휴지를 챙겼다.
“아, 알았어. 알았어. 쓰면 되잖아.”
“…빨리 써. 체육이 삼십 분에는 여기 문 잠글 거래.”
“체육 이제 나 미워하나 보다. 어제는 내가 원하면 답지도 꽁쳐줄 기세더니.”
지선욱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뀐다.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놈을 보다가 고개를 아까처럼 숙이기 전에 재빨리 볼로 휴지를 가져갔다. 흠칫한 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에 고인다.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휴지로 닦아내며, 새삼 얘가 잘 울지 않는 애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우정만으로 얘한테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도.
“사나이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우는 거 모르냐. 너 이제 두 번 남았어. 강영수 결혼할 때랑, 나 결혼할 때.”
사실 지선욱이라면 그 두 번 다 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저 어이없는 표정이라도 유지하게 하려면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두 번 제때에 울려면 군대에서 방독면 쓰고도 참아야 한다. 알았지?”
임시방편이 통했는지 지선욱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진정된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는 놈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눈물을 멈출 때도 농담을 해야 하다니, 언젠가 마주치게 될 네 신부도 이런 걸 알게 되겠지. 우는 지선욱 옆에서 지선욱을 달래려고 웃긴 행위를 하는 신부라… 아직은 잘 그려지지 않긴 한데.
“너 그거 아냐? 엔진이 고장 나도 비행기가 날 수 있는 거.”
사실 쓸 마음이 안 드는 반성문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생기는데, 다른 대학교에 갔을 때 네가 괜찮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하나가 고장 났을 때는 가까운 공항에 착륙해서 엔진 점검을 하면 되고, 심지어 두 대가 다 고장 났을 때도 글라이더처럼 잠시간은 날 수 있대.”
“…멋있네.”
“어. 나도 그게 제일 마음에 들더라. 어떻게든 굴러가는 게 내 인생 같잖아.”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너는 늘 두 개의 엔진을 가지고 나는 애일 테니까.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갈 거니까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그냥 그 옆에서 네가 잘 날고 있나 확인만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하늘을 비행하겠지만, 적어도 바로 옆에서 서로가 날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테니까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