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브 바이 파이브(5x5) 5권
지훈 시점
그 애는 내가 처음으로 표정을 읽을 수 없던 또래였다.
사람이 추가되기는커녕, 있던 사람들마저 빠져나가는 좁은 시골 마을에서는 소문이 빠르다. 더군다나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부모의 자식이라면 소식을 접하기가 배로 쉽고.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김씨 아줌마네 집에 소환되어 집의 전구란 전구는 다 갈아주고 느지막하게 병원에 온 아빠는 그날도 엄마와 나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그 이야기에 등장한 영감의 손자가 아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애일 거라고, 버스정류장의 투명한 창에 비치는 희멀건 얼굴을 본 순간 대충 눈치는 깠다.
‘그, 그 이장님 아들 있다 아이가. 서울에서 변호사 한다 안캤나?’
‘그기 아들은 무슨 아들이고. 명절에도 얼굴 하나 안 비치는데. 내가 고향 떠나서 태안 온 지 십육 년은 됐는데 그동안에 그 잘난 아들내미 얼굴 한 번을 몬 봤다! 지 애비 우예 사는지 궁금도 안 한갑지. 서울에서 변호사 하는 거믄 그래도 먹고 살 만은 하다는 긴데, 내 같으면 내려와서 비 새는 천장이라도 좀 고쳐주겠다.’
‘뭐… 사정이 있지 않겠나. 어쨌든 간에, 이혼 소송한다고 아를 내팽개쳐 놔가, 이장님이 데리고 내려오셨나 보데.’
‘하이고. 그제 아재 공장 안 오셨다 하지 않았나. 그게 그 일 때문이었는갑지?’
‘그런 것 같더라. 말씀을 안 해가 몰랐지.’
‘아재 입 무거운 기 하루이틀이가. 아이고, 속 터진다. 집에 있으모 한번 들여다보기라도 할 낀데 몸이 이래가 그것도 못 하고. 지후이 아빠, 니 조만간 내 대신 고기라도 사 가가 이장님 집 좀 들여다봐라.’
‘안 그래도 그럴라 캤다. 걱정 마라.’
‘아가 몇 살이라는데.’
‘지훈이랑 동갑이란다. 야, 훈아. 그러고 보니 니 학교에서 본 적 없나?’
‘그제 내려왔으믄 교복 사느라꼬 학교는 못 갔지 않겠나. 동네에서라도 마주칬을라나.’
‘누구.’
‘영감님 손자. 김씨 아주머니 말로는 이장님이랑 윽수로 닮았다카데.’
보조 침대에 앉아 감을 깎던 아빠와 링겔을 꼽지 않은 손으로 아빠의 입에 감 조각 하나를 넣어주고, 다른 하나를 입에 가져가던 엄마가 날 나란히 흘끔대던 순간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하나 있는 아들이 당연히 자신들처럼 학교 친구들의 이름에 빠삭하리라고 생각하는 우리 동네 최고 오지라퍼들.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고 뭐고 시큰둥한 나 대신 밤새 머리를 맞대고 반 애들에게 돌릴 생일 파티 초대장을 만들어 가위로 오리던 모습에서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화장실에서 갈아입은 유니폼을 스포츠백팩에 구겨 넣던 내가 퉁명스럽게 말해 봐야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란 소리이기도 했다.
‘몰라. 어떻게 알아. 나 우리 반 애들 얼굴도 모르는데.’
역시나 내 대답을 듣자마자 서로를 흘끔대기부터 한 엄마 아빠는 심각한 얼굴이 됐다. 문제를 풀기보다는 밀린 잠을 자기 바빴던 내 성적표를 보고는 배꼽을 잡으며 웃더니, 꼭 그런 순간에만 둘도 없는 걱정꾼들이 되어 날 타일렀다.
‘훈아, 니 반 애들은 몰라도 그 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장님 손자다.’
‘그래. 내가 뭐랬노. 아재는 니한테 친할아버지나 다름없댔제. 서울 아가 갑자기 내려와서 이 촌바닥에서 살믄 어렵고 모르는 것도 많을 텐데 잘 챙겨주고 그래라. 어? 엄마 장난으로 하는 소리 아이다.’
엄마 아빠는 영감과 각별했다. 가끔 입을 열어도 집을 고쳐주러 온 아빠나 반찬을 가져다주러 간 엄마한테 그럴 필요 없다는 말밖에 안 하는 그 무뚝뚝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파란 대문의 집을 쉴 새 없이 들락댔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포대기에 업은 채로 대문을 넘었고, 조금 더 자라자 손을 잡고 넘더니 이제는 나한테 영감 집에 뭘 가져다주라고 혼자 심부름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할아버지란 단어를 떠올리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보다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만큼 그 좁은 동네에서도 유독 더 자주 보고 살았으니까. 매번 인기척도 안 내고 다가와서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툭 무언갈 던지고 사라지지만, 어렸을 때 강영수와 내가 뻔질나게 타고 다니던 자전거부터 우리보다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영은이까지도 공평하게 받은 책가방조차 영감이 사준 거였다.
말로 표현 받아야만 그게 애정인 줄 아는 강영수는 그런 영감이 퍽 어렵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다기보다는 좀 신기했다. 저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 사람의 죽음 후 말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는 게. 마을에서 소문 난 잉꼬부부였다던 영감과 영감의 죽은 아내가 함께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엄마 말로는 영감의 아내가 나를 그렇게 제 손주처럼 예뻐했다는데,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
어쨌든 영감의 손자를 걱정하던 엄마 아빠조차도 눈앞의 남자애를 직접 봤다면 내게 신경 써서 챙기라고 잔소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온 거면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을 텐데, 처음 입어 봤을 교복을 매일 입고 다니던 옷처럼 익숙하게 차려입고는 그 위에 윤이 나는 까만 코트까지 걸친 채로 무표정하게 시계를 내려다보는 내 또래의 남자애는 딱 봐도 보통은 아니었다. 먼저 와 서 있던 나를 보고도, 시간을 확인한 후에도 미동조차 없는 얼굴이 차분하고 심지어 무료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도, 강영수보다는 똘똘해 보이고 영감만큼 무뚝뚝해 보였다.
누가 저 얼굴을 보고 이혼 소송 중인 부모님으로부터 내팽개쳐져서 할아버지를 따라 내려온 애라고 생각할까. 제 의지로 부모님을 이혼시키고 잠깐 생각을 정리하러 내려온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라도 가겠네.
“…….”
“…….”
엄마 아빠가 바라는 대로 친구가 되긴 글렀다. 버스 시간을 잘 모르는 듯 시계를 연이어 흘끔대면서도 내게 말 걸 생각은 안 하는 쟤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이고.
경기에서 타자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저 거만한 표정이 뻥카일까 아닐까 머리 굴리는 걸로도 충분히 삶이 바빴다. 경기장 밖에서 관심도 없는 또래의 생각까지 읽으려 노력할 시간은 없다. 물론 그런 또래가 처음이라 좀 신기하긴 한데, 귀찮음을 이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고.
애초에 내가 지금 친구를 더 만들 상황이긴 한가. 이 새벽에 나와 버스를 타는 것도 혹시나 엄마 병간호하느라 훈련에 소홀하다는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애써 시간 쥐어짜는 건데. 챙길 사람이 더 생겨 봤자 번거롭고 귀찮기만 할 테다.
엄마, 아빠, 외할머니, 막냇삼촌, 영감, 강영수, 그리고 이모랑 영은이. 희망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프로야구팀에 들어간다면 경기를 보러 오라고 표를 주고 싶은 사람들은 그게 다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했던 생각은 중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특히 지랑 안 놀아준다고 징징대는 또래는 태어나면서부터 강제로 생긴 친구 하나로도 족했다.
“…….”
다시 보니 강영수는 좋아하겠다 싶다. 드라마광 엄마 밑에서 크고 순정만화란 순정만화는 다 섭렵한 여동생과 사는 그 새끼는 희한하게 같은 거 달린 놈들도 잘생겼다는 이유로 드럽게 쳐줬다. 그런 놈들이 보통 여유 있고 성격도 좋다나, 뭐라나. 묻지도 않았는데 넌 유일한 오류라고 버럭 성을 내던 모습이 우스워서 기억이 났다. 이른 아침부터 떠올리기 거북한 강영수의 얼굴을 하품으로 깔끔히 떨친 나는 창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72번 버스가 언덕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야, 이지훈! 똑바로 던지라고, 새꺄!”
김중협은 그렇게 버텼음에도 1지망 학교로부터 스카웃은커녕 테스트도 못 받고 3지망 학교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던 무렵부터 쭉 저기압이다. 그래 봤자 감독이랑 코치가 지켜보고 있을 때는 콧김도 못 뿜으면서 코치가 없기만 하면 후배들을 쥐잡듯 잡으며 나대는 꼴이 웃기지도 않았다. 그것도 선배라고, 혹은 손이 크고 두꺼워서 맞으면 아프다고 동기나 후배 투수들은 김중협의 지랄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피했다. 비위를 못 맞춰준다는 이유로 잘 소환하지 않던 나까지 굳이 체력단련실에서 불러내 캐치볼 훈련에 동원한 이유가 뻔했다. 고개를 돌려 봐도 운동장에 나 말고 투수가 없다. 울면서 도망갔거나, 맞은 부위에 약을 바르러 갔거나, 좆같아서 때려치우러 갔거나.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실력 대신 키운 육중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배트를 협박이라도 하듯 허공에 휘두르는 꼴을 같잖게 지켜보다가 자세를 잡았다.
까라면 까야지. 발로 얼굴을 확 깔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싶긴 한데. 초등학생 때 군기 잡던 한 학년 위 선배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친 나 때문에 일하다 말고 학교로 불려와야 했던 엄마 아빠 얼굴을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글러브에 공을 품은 채로 김중협을 봤다. 내가 공을 곧 던질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김중협이 투덜대면서도 자세를 잡는다. 배트를 꼭 쥔 채로 긴장한 것처럼 아랫입술을 핥는 걸 보는데 왜 나가리 됐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공을 멀리 쳐내야 할 새끼가 후배가 던지는 공 하나 못 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으면,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건지.
예상처럼 김중협은 받으라고 거저 던져준 직구가 제 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멍청하게 공을 놓쳤다. 치지 못한 공이 뒤의 그물망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김중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게 됐다.
“야이 씨팔놈아! 준비됐을 때 던져야지, 네 멋대로 막 지르면 돼?”
양심이라고는 다 뒤진 지가 봐도 공을 못 던졌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그냥 헛소리를 한다. 타자가 타석에 배트 들고 서 있고, 투수가 공 글러브에 넣었으면 시작인 거지. 그럼 던진다고 말로 예고해주고 던져야 하나? 저게 진짜 야구가 지 마음처럼 안 된다고 아무 말이나 하네.
처맞을 각오를 하고서도 펄펄 뛰며 받아칠 가치조차 없는 말을 쏟아내는 김중협을 뚱하게 보고만 있는데 뒤에서 감독과 코치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모여!”
“…아, 네! 코치님!”
화들짝 놀란 김중협이 배트를 내리고는 어정쩡히 대답부터 지르고 본다. 코치 앞으로 달려가기 전 나를 보고 경고하듯 인상을 팍 찌푸리는 퍼포먼스는 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글러브를 빼고 뛰었다. 곧 사라질 김중협보다는 감독이나 코치한테 잘 보이는 게 중요하다.
“용수 없냐? 화장실 갔다고? 강현민이도? 이 새끼들이 진짜… 가서 얼른 데리고 와.”
겨울의 낮치고는 햇빛이 강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모자를 더 눌러써야 할 정도로. 혼자 선글라스를 쓰고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을 아끼는 감독 옆에서 코치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어디에 숨어 있었나 궁금했던 투수들까지 기합이 바짝 든 모습으로 뛰어오고서야 연습게임이 시작됐다.
밖에 나가면 한 팀이지만, 연습할 때는 그 팀 안에서도 팀이 또 한 번 나뉜다. 다음 주 경기에 나갈 테이블 세터와 선발/불펜을 골고루 배치해둔 걸 보니 의도는 대충 알겠는데, 김중협이랑 또 같은 팀이 된 건 좀 억울했다.
우리 팀이 먼저 수비했다. 생각보다 쉽게 두 개를 잡아냈고, 이제 하나만 더 잡으면 됐다. 타석에 선 사람은 김중협과 같은 학교로 진학하는 선배이자 7번 타자. 의욕 뒤진 눈이 비슷한데, 그래도 김중협보다는 표정을 잘 숨겼다. 깡 소리를 내며 배트에 맞은 공이 애매한 높이로 붕 뜬다. 3루수와 유격수 사이의 위치다. 유격수 자리의 김중협이 금방 잡아낼 수 있는 공임을 확신한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 휜 공 때문에 옆에 있는 3루수가 더 가깝고 이미 그 방향으로 글러브를 뻗은 것도 봤으면서, 어떻게든 감독한테 눈도장 한 번 더 찍겠다는 거다. 진학할 고등학교의 감독이 지금 감독이랑 고등학교 동문이랬나. ‘체육 하는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생각하며 선배들이 후배 군기 잡는 걸 모르는 척 봐주는 감독 앞에서도 유독 내숭을 부리며 빌빌대는 이유가 있다.
점프까지 하며 기세등등하게 공을 잡아채려던 김중협이 어정쩡한 포즈로 착지하고는 뒤돌아보았다. 좌익수 자리에 서 있던 날 향해서였다. 글러브 끝을 스치면서 오히려 동력을 받고 튀기까지 한 공이 심지어 펜스를 넘고 있었다. 친 사람도 얼떨떨해 보이는 홈런이다.
저 씨발놈 나대더니 일 칠 줄 알았다. 나는 김중협을 노려보던 걸 멈추고 뒤돌았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재수가 없으면 펜스를 넘은 공이 지나가던 학생을 칠 때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다본 곳에 역시나 학생이 있었다.
다행히 공은 정거장까지 굴러가지 못하고 펜스 바로 아래로 이어지는 언덕 중반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마운드는 보지도 않고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감독이 보였다. 감독은 연습경기라 해도 공을 잃어버리는 걸 싫어했다. 마음을 정한 나는 비탈 아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정거장에 서 있던 남자애가 곧장 뒤돌았다. 개미조차 없이 한적한 그곳에 자신을 부를 사람이라고는 언덕 위의 나밖에 없음을 빠르게도 눈치챈 듯이. 선배일 수도 있으니 일단 말부터 높이자고 생각하면서 다시 감독 쪽을 흘긋댔다. 여전히 이야기 중이었다. 그 때문인지 타석으로 다가가는 상대 팀 타자도 애매한 표정으로 머뭇댔다. 그가 보지 않는데 공을 쳐도 되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처럼.
“거기 공! 공 좀 주워주세요.”
펜스에 바짝 붙어 크게 외친 순간에야 정거장에 있던 남자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남자애는 체력이 좋은 편인지 언덕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쭉쭉 오른다. 금세 중턱에 도착해 야구공을 주워 이게 맞냐는 것처럼 머리를 들어 확인하는 남자애에게 대충 끄덕여주고는 다시 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를 보니 대화가 슬슬 끝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용하곤 하는 펜스 아래의 구덩이로 손을 넣은 채 알려주듯 말했다.
“여기로 주면 돼요.”
귀에 핸드폰을 댄 감독이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자리를 비운 그를 대행하게 된 코치가 그제야 경기장을 향해 뒤돌았다. 아, 미스다. 그는 감독과 달리 공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경기의 텐션이 떨어지는 걸 더 싫어했다. 예상처럼 나를 찾아낸 그가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이지훈! 뭐 해, 이 새꺄. 안 오고!”
소리를 치는 와중에도 다른 애들에게 홈으로 들어오라고 손 사인을 하는 걸 보니 연습게임은 여기서 끝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들어갈 거면 공이라도 가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을 아래에 대고 까딱였다. 공을 주운 남자애가 언덕을 거의 다 올랐으니까, 이제 공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 주워 가겠습니다!”
“됐으니까 그냥 와!”
감독이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코치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잠깐의 틈조차 못 견디고 인상을 쓰는 그에게 더 개기길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괜히 공을 주워 달라고 해서 언덕까지 다 오르게 해놓고, 이제 와 됐다고 말하려니 미안했다. 머쓱하게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렸다 내리며, 언덕을 다 올라온 남자애를 처음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햇빛 때문인지 이마 위를 손으로 가린 애는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한쪽 눈을 살풋 찡그린 채였다. 더 위에 있는 나를 보려는 듯 턱을 살짝 든 채로 인상을 쓴 얼굴을 본 순간에는 멍해졌다.
그제야 알아챘다.
“…….”
나 얘 아는구나.
그날 병실에서 아빠로부터 영감네 손자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가 아니라, 아침에 정거장에서 같이 서 있어서가 아니라…
기억하고 있어서.
그건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막 시작될 무렵. 영감네 집이 거대하고 오르기 힘든 산 같은 곳으로 여겨지던 시절. 영감네 집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의 지루한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방이란 방의 문은 죄다 열어젖히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저곳 누비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던 것들을 탐구하기 위해 열어젖혔던 가장 작은 서랍장 속에서 발견한 종이 한 장.
세수할 때마다 얼굴이며 목을 가리지 않고 비누칠을 해대던 아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낑낑대던 내가 거울을 확인했을 때 보이던 얼굴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남자애가 그 종이 안에 있었다. 나처럼 세수를 당하고 찍은 사진일까? 생각하며 고개를 내렸던 나는 사진 밑에 쓰여 있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따라 읽었다. 지…성…욱? 나랑 맨날 받아쓰기 시합을 했던 엄마가 니은과 이응은 분명 다르다고 했는데, 이 남자애는 엄마랑 받아쓰기를 안 했던 건지 니은과 이응이 구분이 안 됐다. 혼자 동화책도 꽤 잘 읽는 어린이였던 내가 겨우 세 글자인 삐뚤빼뚤한 글씨를 읽는 데 한참이 걸렸을 정도로. 부루퉁하게 종이를 보던 나는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음을 알고는 그 또한 따라 읽었다.
‘꾸…움. 우…주? 비이…행….’
‘아이고, 지훈아! 니 언제 여기 들어왔노! 이리 막 어질러 놓으면 할아버지가 이놈 한다 캤지? 어?’
마지막 글자만 읽으면 되는데 그러기도 전에 종이를 뺏겼다.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린 엄마가 나를 옆구리에 끼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서랍 안으로 돌려놨다. 반항하려 발을 구르던 행위는 거실에 있던 아빠가 물려준 과자에 쉽게도 멈췄다.
쭉 잊고 살았다. 이렇게 인상을 찡그린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넌 내가 모르던 사람이라 하기엔 애매하네.
“그거….”
웃기다면 웃긴 우연에 피식 웃음부터 흘렀다.
“기념으로 너 해라, 그냥.”
예기치 않은 우연이 겹쳐 미스가 난 순간에야, 너를 기억 속에서 퍼 올린 기념.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고 살던 남자애의 존재가 비로소 선명해졌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멀뚱히 선 남자애를 내버려 둔 채로 나는 몸을 돌려 뛰었다. 코치가 시킨 추가 훈련을 끝내고 라커룸에 들어가는 순간에야 하늘을 올려다봤다. 셔터 소리에 눈을 찡그리기부터 했던 그 어린애는 왜 그 어린 시절 우주비행사를 꿈꿨을까 뒤늦게 궁금해하면서.
* * *
“민지네 학교에도 소문 쫙 났대. 나한테 막 물어보더라고. 막, 너네 학교에 개잘생긴 애 전학 왔다던데 맞냐고 그러면서.”
예상대로 강영수는 며칠 만에 전학생 빠돌이가 되어서 나타났다. 지 딴에는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한 배려로 늘어놓는 것 같지만 내게는 그냥 밀린 운동을 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견디는 시간에 불과한 일요일의 학교 소식 전하기 코너가 영감네 손자 이야기로 범벅이 됐다.
다른 반인 강영수도 얼굴을 본 걸 보니 이제 제대로 버스를 타고 다니기는 하나 보지. 아무리 봐도 그 시간대에는 나올 이유가 없는데 혹시나 해서 부려본 오지랖이 통하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팔을 당겼다. 침대 헤드 끝에 걸어놓은 스트레칭 밴드가 늘어났다. 가동범위까지 팔을 돌리면서도 시선은 앞으로 고정했다. 회전근개가 자극받으며 일주일간 혹사당한 팔 근육이 스트레칭되듯 늘어났다. 잇새로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팔을 한 번 더 천천히 돌렸다. 아프긴 해도, 그래야 효과가 있을 테니까.
“어제 우리 반 애들도 정보와 통신 시간에 걔 미니홈피 들어가서 막 봤다? 글 하나도 없거든? 다 막혀 있는데도 투데이 백 넘고 그렇던데? 일촌평도 개많고. 다들 어디 갔냐고 막 찾더라. 전학 가는 것도 말 안 하고 왔나 봐. 아, 그리고 일촌평 중에 여자친구가 남긴 것도 있어서 걔 미니홈피도 들어가 봤거든? 프로필에 소속사 이름도 적어뒀던데, 아이돌 준비하는 것 같더라고.”
반응을 안 하면 적당히 알아서 닥칠 줄 알았는데 강영수는 내가 팔을 한 번 더 크게 돌릴 때까지도 영감네 손자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민지가 어쩌고저쩌고, 반 애들이 어쩌고저쩌고, 미니홈피 어쩌고저쩌고. 의자 등이 가슴에 닿도록 거꾸로 앉은 채로 핸드폰을 두드리면서도 강영수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덕분에 필요 없는 정보들이 쉴 새 없이 귓가에 꽂혔다. 좀 닥치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때마침 핸드폰을 내민 강영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거 봐 봐.”
핸드폰 화면에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 하나가 화면을 새초롬히 응시하고 있었다. 앞머리 없이 긴 생머리를 목 옆으로 늘어트린 여자애는 조그만 얼굴 크기만큼이나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했다. 멈칫한 내가 머릿속으로 비슷하게 희멀겋던 영감네 손자를 떠올린 것과 동시에 강영수가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며 빠르게 말했다. 맞아, 걔 전 여자친구.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리는 나를 슬쩍 본 강영수가 핸드폰을 제 쪽으로 되돌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놈의 시선이 여전히 화면 속에 박혀 있었다.
“이런 말 좀 그렇긴 하지만, 우리 돼지랑 닮지 않았냐?”
영은이? 앞에 시선을 둔 채로 팔을 한 번 더 돌리며, 방금 보았던 얼굴의 잔상 위로 어렸을 때부터 본 친구 동생의 얼굴을 그려 봤다. 뭐, 전체적인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긴 했다. 애매하게 수긍하는 나를 본 강영수가 툭 던졌다.
“이런 상이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봐. 자기 좋아하는 애 말고, 자기한테 관심 없을 것 같은 나쁜 남자 스타일.”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강영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우리 돼지 전학생한테 반한 것 같아.”
순간 스트레칭 밴드를 놓칠 뻔했다. 그 정도로 뜬금없고 의외였다.
“내가 아는 강영은 이야기하는 거 맞냐?”
“아, 그니까. 너도 안 믿기지. 나도 걔 그러는 거 처음 봐서 낯 가릴 뻔.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깨워도 안 일어나던 애가 아침마다 고데기 한다고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는 거 보니까 진짜인 것 같아서 좀 무서워.”
“…….”
“나 걔가 누구 좋아하는 거 처음 봐, 진짜. 강영은이 누구야. 지 좋다고 해도 시큰둥하고 고백하면 심지어 울려서 보내는 애잖어. 너도 기억하지, 초딩 때 걔한테 고백했던 남자애가 어떻게든 반응 보려고 머리 잡아당겼다가 혼쭐난 거. 손톱으로 그놈 뺨 다 긁어놓고도 그러니까 누가 귀찮게 굴라 했냐고 소리치던 거.”
기억만 할까. 슈퍼를 봐줄 사람이 없어 자리를 비우지 못한 이모 대신에 영은이를 데리러 갔던 강영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는 강영은을 업은 채로 걷고, 나는 그 옆에서 둘의 책가방까지 같이 들고 하교하던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은 잊히기엔 퍽 강렬했다. 우리 집에는 폭력을 쓰는 유전자가 없는데 대체 웬 돌연변이냐고 혀를 차는 이모 옆에서 엄마는 배꼽을 잡으며 웃고 아빠는 방울이 달린 머리끈으로 영은이의 머리를 다시 묶어주며 남자애가 먼저 머리를 잡아당긴 게 문제이니 오히려 영은이가 잘한 거라고 편을 들던 것까지도.
“…뭐, 왜인지 이해는 가는데. 말해 보니까 성격도 뭐, 생각보다 까칠해 보이진 않고. 야야, 금요일마다 새벽장 서잖아. 그래서 지난 금요일 아침에 버스 탔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근데 다음 정거장에서 자리 하나 나자마자 걔가 돼지한테 양보해주는 거 있지. 대박이지 않냐? 딱히 둘이 말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자리 나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돌아보더라고. 돼지 얼굴 개빨개져서는 머뭇거리다가 가서 앉고. 걔도 혹시 울 돼지한테 마음 있나? 둘이 정말 잘될 수도 있으려나?”
강영수의 이런 반응조차 의외였다. 그렇게 얼굴을 다 긁어놨어도 끊이지 않던 남자애들의 구애에 어쩌면 영은이보다 더 질린 놈이었다. 딱히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놈이었지만 동생과 관련된 문제라면 퍽 예민하게 굴었다. 혹시나 해서 영은이랑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집으로 데려오지도 않는 놈이니까.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강영수는 그런 센서를 아예 내려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눈치 없는 것처럼 보여도 제 동생에게 유해할 만한 놈들은 기가 막히게 잡아내서 뿌리부터 잘라내는 놈임을 알기에 더 신기했다.
우리 엄마 아빠만큼이나 이모도 영감이랑 각별했다. 생각해보니 영은이와 영감네 손자의 조합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내 무반응이 오히려 긍정의 뜻인 걸 아는 강영수는 신나서 몇 분을 더 떠들다가, 이모한테 전화가 오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말엔 강영수와 영은이가 돌아가며 슈퍼 카운터를 봤다. 오늘은 강영수 차례인 모양이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일어서던 강영수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야, 방학식 날도 연습?”
“아닐걸. 코치 별말 없던데.”
“오예. 그날 서든 한판 갈기실?”
“맨날 발리면서 존심도 없나.”
“씨발놈아. 어쩌다 운 좋게 이겼으면서 질릴 정도로 우려먹네. 진짜 존나 발라준다, 내가.”
투덜대면서 문으로 걸어가는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본 순간에야, 며칠 전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문고리에 손을 얹는 놈이 문밖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에 불렀다. 야. 뒤돈 강영수의 얼굴에 대고 일부러 힘을 주지 않고 툭 뱉었다.
“엄마가 너 보고 싶대.”
멈칫한 강영수의 얼굴이 급속도로 가라앉는다. 저번에 병문안을 왔을 때, 몇 달 새 심각할 정도로 마른 엄마를 보자마자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놈은 그 이후로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표정을 못 숨긴다. 아마 엄마도 그 사실을 알아서 강영수를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도… 보고 싶긴 한데.”
머뭇댄 강영수가 발치에 시선을 둔 채로 작게 중얼댔다. 그때 이모한테 병실 밖으로 불려 나가서 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놈은, 이제는 표정을 숨기지 못할 것 같으면 눈물을 나게 만드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새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굵은 눈물방울을 외면하며 스트레칭 밴드를 풀었다.
“그럼 보러 와, 등신아.”
“…….”
“대신 와서는 처울지 말고.”
한참 뒤에야 강영수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알겠다고 답했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내 눈치를 쓱 본 놈이 머뭇대다가도 뭐라 더 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묻지 않아도 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던 놈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방바닥에 점점이 남아 있는 눈물방울을 잠깐 바라보다가, 스트레칭 밴드를 다시 헤드에 걸었다. 세 세트만 더 하고 엄마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가서 강영수가 조만간 보러 올 거라고 말하면, 엄마는 손뼉을 치며 좋아할 것이다. 안 그래도 요새 그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참 많이도 그리웠다고 말하면서.
엄마의 병실은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 오늘은 엄마의 대학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대면 수업이라고 해 봐야 한 학기에 세 번이 고작인 사이버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친구를 여럿 사귄 엄마는 그들을 병실로 불러 모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를 증명하듯 병실 침대 옆에 둘러앉은 친구들의 얼굴은 어둡기보다는 한바탕 즐거운 수다를 떨고 떠나는 듯 개운한 표정만 남아 있었다. 개중 엄마랑 유일하게 비슷한 나이대인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다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네가 우리 희야 아들내미?”
“안녕하세요.”
“언니야, 우리 훈이 처음 보나?”
“말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디? 오매. 이렇게 키도 크고 잘생겼는지는 몰랐제.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봐도 바로 알아보겄어.”
“알아보기만 하면 되나. 말 나온 김에 지금 사인도 받아둬라, 언니. 혹 아나. 나중에 비싸질지.”
보자마자 꾸벅 인사는 했지만, 날 앞에 두고도 깔깔대는 둘의 대화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링거대에 처음 보는 링거액이 두 개나 늘어 있었다. 오늘 오전의 진료 결과가 별로였고, 새로운 약물을 투여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뜻이다. 엄마의 혈압이 지난 주말부터 떨어지질 않는다. 어제는 잠깐 정신을 놓기도 했다. 깨자마자 나를 집에 보내라고 억지를 부린 엄마 때문에 결국 집에 나를 데려다 놓은 아빠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엄마가 정신을 놓는 일이 또 생길까 봐 그랬겠지. 아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했을 것이다.
나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올까 봐, 혹은 돌아오지 않을까 봐. 엄마가 아픈 후 우리 가족의 삶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수면 부족이 일상이고, 그보다 더 큰 스트레스가 습관이다.
조용한 나를 돌아본 엄마는 이미 바닥에 꼬라박은 내 기분을 눈치챈 표정이다. 애써 웃으며 고개를 돌린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을 배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링거액 위 작게 붙여진 스티커에 시선을 둔 채로, 읽을 수도 없는 영어를 해독하려 노력했다. 읽을 수는 없어도, 지난번에 달았던 것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입원한 지가 벌써 육 개월인데, 자꾸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과연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언니야, 수정이 차 빼놓고 기다린다고 한참 전에 내려가지 않았나. 얼른 쫓아가라. 어린애들은 우리보다 속도가 빨라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쫓아다녀야 된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알았다. 내가 또 연락할게.”
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엄마의 친구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잠깐 머뭇대던 그녀가 다가와서는 엄마의 야윈 손을 꼭 쥐었다. 방금까지도 엄마의 농담에 장단을 맞추며 웃던 사람치고는 눈가가 촉촉했다.
“지금도 잘하고 있응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 봐. 아들 텔레비전 데뷔하는 건 봐야 하지 않겄어?”
“아이고. 이 언니 갑자기 와 이러노. 부담스럽그로.”
“아들 야구 경기도 보러 가고.”
“…….”
“데뷔하는 것도 보고. 성공하는 것도 보고. 성공한 아들이 태워주는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도 가보고 그래야제.”
친구의 말이 이어질수록 엄마는 말을 잃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그렇게 오만 친구들을 다 불러놓고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결국 나온 병 이야기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공치사조차 늘어놓지 못한 지가 꽤 됐다. 지금도 엄마는 친구의 눈가를 쓸어주면서 자신이 외려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그 꼴을 더 보지 못하고 스포츠백팩을 든 채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유니폼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핑계가 있어 다행이었다.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고도 한참을 복도에 앉아서 시간을 죽인 후에야 병실로 들어갔다. 벽시계는 열 시를 알리고 있었다. 병실 안이 깜깜했다. 엄마의 반대편 침상에 있었던 회사원은 그제 퇴원했다. 4인실 병실에 이렇게 엄마 외에 아무도 없는 건 오랜만이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을 썼던 나머지 세 명은 다 퇴원해서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가물했다. 엄마만이 이 병실에 줄곧 남아 있었다. 병원을 싫어하고, 평생 병원이라는 곳은 날 출산할 때 말고는 가보지도 않았다던 엄마만이.
“훈아. 니 오늘도 여기서 잘 거가.”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엄마는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천을 들추자마자 고개를 들어 묻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보조 침대를 옆으로 꺼내 그 위로 누웠다. 행동 하나하나에 엄마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일부러 뒤돌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하면 이어질 말이 뻔했다. 엄마는 또 집에 가라고 할 것이다. 내일도 훈련이 있을 텐데, 이런 보조 침대에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편히 자라고 하겠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깎여나가는 기분이 든다. 가끔은 소리 내어 크게 반박하고 싶다. 내가 집에 가면 잠이 오겠냐고.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게 고작 침대가 불편해서였을 것 같냐고.
한숨 소리와 함께 탁, 하고 침상 주변에 남아 있던 불 하나가 마저 꺼졌다. 엄마가 책을 더 보길 포기하고 누운 모양이었다.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훈아. 대화 좀 하자. 응?”
내 등을 쿡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묻는 엄마는 끈질기다. 내가 짜증을 내도, 결국에는 자신의 말에 대답할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나는 번번이 지고 만다. 애초에 병실에 누운 사람을 이길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
“…집에 가라는 소리 안 하면.”
“아이, 그래도 내일은 고추 마당에 널어야 하는데. 비 온다고 며칠간 못해가.”
“…….”
“알았다. 오늘은 안 할게. 약속.”
평소라면 한참 실랑이를 했을 주제인데, 오늘따라 엄마의 포기가 빠르다. 뒤돌자마자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씩 웃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내 쪽으로 돌아누워 팔을 포갠 엄마의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다. 흘긋 엄마를 확인하고는 천장을 향해 누웠다. 아들이 대화할 마음이 드디어 생겼다는 걸 눈치챈 것처럼 엄마가 준비한 질문을 꺼내놓는다.
“혹시 유혜은이라고 아나? 느그 학교라던데.”
엄마의 입에서 생뚱맞은 이름이 툭 튀어나온다. 처음에만 해도 의아했지만, 조금만 상태가 좋아도 병실을 나가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바쁜 엄마를 아는지라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오늘도 진료 때문에 아래층에 내려갔다가 내 또래의 아이를 마주친 모양이다. 나와 같은 교복을 보자마자 먼저 다가가서 스스럼없이 말을 붙였을 엄마가 눈에 선했다.
“몰라.”
“맞나? 갸는 니 아는 눈치던데.”
“…….”
“반장이라카대. 공부도 잘하게 생긴 아가 대답도 참 잘하고 윽수로 착하데. 아쉽다. 둘이 서로 알면 좋을 긴데.”
“좋긴 뭐가 좋아.”
“야 봐라. 또 정 없이 이야기하네. 좋은 거, 안 좋은 거 하나하나 다 따져가면서 만나면 사람 몬 만난다 캤지.”
“…….”
“일단 친해지는 거지. 그러다 보믄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어지고, 그러다 연애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겠나. 엄마랑 아빠처럼 이래 결혼해가 같이 살 수도 있는 거고. 니 엄마랑 아빠 첫 만남 이야기 기억하제? 따지고 보믄 <사람 찾기>가 우리를 이어준 게 아이고, 그 종이 보자마자 아빠를 끌고 결승선 통과한 엄마가 인연을 이은 기다. 노력을 안 하는데 사랑이 절로 굴러올 수는 없다.”
링거대를 끌고 다니는 깡마른 아줌마한테 착하게 대답해준 죄로 이름조차 모르는 같은 학교 여자애는 순식간에 내 미래의 여자친구 취급을 받는다. 친구를 사귀는 데에 관심이 없는 걸 두고 뭐라 한 적은 있어도,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는 걸 가지고 엄마가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넘기자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말일 텐데도, 아까 엄마가 친구 손을 잡고 미래를 약속하지 못했던 게 떠올라 울컥했다.
요새 엄마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군다. 말에서, 행동에서 느껴진다.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 보고 가려 하는 거.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하려고 하는 거. 모른 척은 해줄 수 있어도, 이런 순간에마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엄마가 아들이 언젠가 누구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옆에 없을 것을 가정하고 미리 충고라도 하듯 말을 건네는 순간에는.
“엄마가 그렇게 말해도 걔랑 만날 일 없어.”
“아이고, 이름도 모른담서 또 그란다.”
엄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강영수한테 엄마를 보러 오라고 했는지 알면.
“난 아픈 사람 안 만나. 싫어.”
엄마 아빠는 농담 삼아 내 고집은 아빠를 닮았고, 눈치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한다. 지금도 내가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챈 엄마는 즉시 입을 닫고 내 눈치를 살핀다.
“아팠던 사람도 안 만나고.”
“…….”
“아플 것 같은 사람도 안 만날 거야.”
대화를 시작한 지 3분도 안 되어 몸을 돌렸다. 쪽팔리게, 성질이란 성질은 다 대놓고 눈앞이 뿌옇다. 이 병실에 들어오고 는 건 티 안 나게 우는 방법밖에 없다. 15년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보다 이 보조 침대에 누워 삼킨 눈물이 더 많다. 노력하면 뭐든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엄마가 안 아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살아온 인생이 거짓 같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등 뒤의 엄마가 내 등을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훈아. 살면서 한 번도 안 아픈 사람은 없다.”
“…….”
“몸이든 마음이든. 한 번쯤은 아픈 게 인생이고, 그걸 극복하는 게 또 인생 아니겠나.”
“…….”
“아파도 네 옆에 있으려고 극복하는 사람이면 괘안타. 네 옆에 있는 엄마부터 안 그러고 있나. 오늘 의사쌤이 무리하지 말라캐가 병원 밖에도 안 나갔다. 아까 니 학교 친구 만난 것도 진료실 바로 앞에 의자에 앉아 쉬다가 본 기다. 니 엄마 요새 밥도 얼마나 잘 챙겨 먹는지 모르제. 지금처럼만 잘하면 혈압도 떨어질 거랬다, 의사쌤이.”
조곤조곤 날 달래는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엄마가 저렇게 말해줬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좀 멈춘다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엄마는 내가 멀쩡한 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내가 다시 천장을 향해 돌아누울 때가 되어서야 손을 거뒀다.
엄마도 나처럼 천장을 보고 누운 채였다. 조용한 병실에 엄마와 내 숨소리만 번갈아 들렸다. 눈을 감고 색색 숨만 내쉬던 엄마는 내가 이불을 끌어 올려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훈아, 니 요새도 야구 재밌나.”
잠깐 망설이는데, 눈을 스르르 뜬 엄마가 조건을 붙였다.
“솔직하게.”
엄마는 이미 답을 눈치챈 얼굴이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땡볕 아래에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하는 거라고는 공 던지는 것밖에 없다. 그 익숙하고도 때로는 지루한 행위에 재미를 따지지 않은 지 꽤 됐다는 소리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뱉었다. 엄마가 병실에 누워 주문하는 건 몇 개 안 된다. 이런 거라도 들어줘야 다음 날 공을 던지며 왜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었나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
“근데 잘해, 나.”
“…….”
“코치쌤이 지금처럼 하면 계속 선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부상만 좀 조심하래.”
뭐라 말하려는 것처럼 마른 입술을 달싹대던 엄마가 마음을 바꾼 듯 미소 짓는다.
“맞나. 우리 아들 진짜 엄마 비행기 태워주겠네….”
요즘 세상에 비행기 태워주는 게 뭐가 대수냐고, 엄마가 낫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일 년 치 용돈을 포기해서라도 당장 태워줄 수 있다는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런 말을 하는 엄마가 정말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어서. 엄마는 잠드는 순간마저도 행복한 내 모습을 그려보는 사람 같았다.
당장이라도 잠들 사람처럼 눈꺼풀을 잘게 깜빡대던 엄마가 눈을 완전히 감기 전 조그맣게 중얼댔다.
“그래도 재미도 있으면 좋을 긴데….”
“…….”
“엄마는 비행기 타는 것보다 아들이 행복한 게 더 좋은 사람이라가….”
갈수록 작아진 말소리는 나중에 가선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나랑 대화하겠다고 이 시간까지 잠이 오는 걸 꾸역꾸역 참은 탓이다. 나는 엄마가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엄마 쪽으로 돌아누웠다. 숨 쉬는 것조차 참으며 집중하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하얀 달빛을 받아내는 엄마의 몸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검지와 중지를 붙여 엄마의 동맥 근처에 가져다 댔다. 미약하게, 그러나 손가락 끝에서 그 파동이 느껴질 정도로는 맥박이 뛴다. 간호사 누나들이 하던 일을 눈여겨본 건 이렇게 잠든 엄마의 목에 실습하듯 손을 가져다 대기 위해서다. 눈을 감은 엄마가 죽은 게 아니고 아직 내 곁에서 살아 있다는 걸 직접 느끼기 위해.
“엄마.”
깨어 있는 엄마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나 준비가 안 됐어.”
언제쯤 준비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줘.
“…미안해.”
제발 죽지 마.
* * *
“헉… 허억, 헉….”
거친 숨을 뱉으며 몸을 급히 일으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에 적응하고서야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내가 여전히 엄마의 병실 안에 함께 있음이 실감 났다. 나는 황급히 손부터 뻗었다. 엄마는 목을 창가 쪽으로 슬쩍 비튼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동맥으로부터 느린 맥박이 느껴진 순간에야, 바짝 들어가 있던 어깨의 힘이 풀렸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거듭 쓸었다.
악몽을 꿨다. 엄마가 내 어깨를 붙잡고 행복하라고 거듭 말하는 꿈. 엄마가 점점 멀어지는데, 아무리 뛰어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절대 좁혀지지 않는 꿈. 발을 더 구를 수가 없을 정도로 지친 내가 어떻게든 이를 악물면서 발을 뗀 순간, 엄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꿈.
모든 것들이 섬뜩할 정도로 현실 같았다. 평소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 데다가 그마저도 깨고 나서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는 꿈은 몇 안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불길하기까지 했다. 나는 엄마가 숨을 멀쩡히 쉰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을 목에 손을 대고 있다가, 엄마의 손끝이 움찔 미동하는 것을 보고서야 손을 거뒀다.
공포에 질려 먹통이 되었던 귓가에 병실의 소음이 뒤늦게나마 하나둘 찾아든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좀 심하게 어둡다 했더니 창문으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가득한 밖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빠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10분 전에 온 문자는, 지금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해 두라고만 짧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합숙 훈련을 떠나는 날이다. 감독이랑 친한 후배가 지도 중인 부산의 한 학교 야구부와 어렵게 연습게임을 잡았다는 이유로, 감독은 이탈자가 없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3학년들은 방학과 동시에 아예 빠졌기 때문에, 이제 3학년이 될 나를 비롯한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야 했다. 선발투수로 날 내세우겠다던 코치는 끝끝내 엄마에게 전화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이 훈련이 절대 빠지면 안 될 훈련인 것처럼 세뇌라도 당한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까지도 3박 4일이면 길지도 않은데 다녀오라며 거들어서 엄마가 혈압 떨어지는 걸 보고 가겠다는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그나마 마지막 타협안이 가기 전날 엄마 옆에서 자는 거였다. 아침 일찍 아빠가 날 데리러 와 집결지인 학교까지 태워다주기로 했다.
늦는 법이 없는 아빠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이르게 도착했다. 비에 젖은 머리를 털털 털며 병실로 들어온 아빠는 깨어 있는 날 보고도 놀라는 대신 보조 침대 위에 놓아둔 내 가방을 들어 올렸다. 바로 가자는 뜻인 걸 알면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따라나서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뒤돈 아빠는 엄마가 깨지 않도록 입 모양으로 묻는다. 왜.
나는 누워 있는 엄마를 흘깃댔다. 다음으로는 또 내가 읽을 수 없는 것들로 바뀐 링거액을 흘끔댔다. 결국 머뭇대면서도 입을 뗐다.
“아빠. 나 안 가고 싶은데.”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기만 한다.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사람 좋은 미소가 습관인 아빠가 저럴 때는 보통 지나치게 슬프거나, 혹은 화를 내야 할 때다. 출발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엄마와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 나 때문에 아빠는 주말에도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미안한 일임을 알아서 머뭇대면서도 결국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꿨는데….”
“…….”
“쨌든, 오늘은 아닌 것 같아. 코치님한테는 내가 전화해서 사정 설명할 테니까 그냥 안 가면 안 돼? 그 이상은 고집 안 부릴게, 나도. 다음부터는 다 갈게. 응?”
여태까지 엄마 병실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은 있어도, 훈련을 거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엄마가 아픈 걸로 신경을 쓰는 낌새라도 보이면 감독이나 코치가 엄마한테 알리기라도 할까 봐 훈련 시간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몰두해서 임했다. 내가 훈련을 아예 빠지겠다고 이렇게까지 떼써 본 적이 없다는 걸 아는 아빠가 망설이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선뜻 가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 걸 보니, 날 꼭 보내겠다고 엄마랑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나중에 결과로서만 알게 되는 약속을 참 많이 했다. 침묵을 지키는 아빠 때문에 엄마의 병실과 멀지 않은 스테이션에서 간호사 누나들이 수다 떠는 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지훈아… 엄마 여기 있다.”
침묵을 깬 건 아빠가 아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있는 엄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막 잠에서 깬 얼굴로 눈을 힘없이 깜빡이던 엄마는 초점을 잡자마자 웃기부터 했다. 잠기운을 굳이 쫓아내지 않은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빗소리보다 작았다.
“다녀와도 여기… 있을 긴데… 뭘 그렇게 겁내노.”
“…엄마.”
“비 많이 오네. 차 조심하고… 뛸 때도… 조심하고… 잘 다녀와.”
엄마가 내가 뻗은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잠들었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엄마의 손을 힘주어 쥔 것과 동시에, 가만히 서 있던 아빠가 다가왔다.
“엄마 말 들어라.”
엄마에게서 겨우 눈을 뗐다. 나를 보조 침대에서 억지로 일으킨 아빠 때문이었다. 눈가가 붉은 채로도, 아빠는 흔들리지 않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 있으면, 아빠가 코치님한테 바로 연락할 테니까네.”
“…….”
“가자. 지금 출발해야 안 늦는다.”
끌려가듯이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엄마는 자고 있었다. 늘 그렇듯, 창가 쪽으로 고개를 살짝 비튼 채였다. 빗소리라도 들으려는 것처럼.
합숙 훈련의 둘째 날이었다. 실력이 비등비등한 학교라더니, 사실이었다. 스코어가 계속해서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겨우 삼진을 잡아서 방어해놓으면, 다음 판에서 우리 팀 타자들이 죽을 쒔다. 7회 말인데도 승부가 판가름 나기는커녕 점수마저 똑같았다.
한술 더 떠 비까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뭐가 떨어지긴 했나 하늘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부슬비여서인지 감독들은 경기를 중단하는 일 없이 얼마 남지 않은 경기를 마저 치를 작정인 듯했다. 슬쩍 본 코치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별다른 신호가 없었다. 끝까지 투수 교체 없이 나로만 갈 모양이었다. 뻐근한 어깨에 힘을 주어서 한 번 돌리고는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4번 타자. 아까 홈런을 쳤던 놈이기도 했다. 2학년이랬지. 바짝 기합이 든 모습이다. 점점 거세어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이 꽤 매서웠다. 숨을 고르며 움직임을 읽는다. 하나, 둘, 셋. 길어지는 눈싸움에 타자의 이마가 움찔했다. 지금이다.
챙, 헛스윙. 포수가 공이 들어간 글러브를 들어 올리더니 내게 다시 던진다. 이걸로 투 스트라이크. 한 번만 더 잡으면 우리 팀 공격이었다. 일부러 숨을 고르듯 다른 곳을 보다가 코치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손으로 턱을 감싸 쥔 채로 이곳을 보고 있던 코치가 슬쩍 고개를 틀었다. 내 눈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이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경기 중 텐션이 떨어지는 걸 혐오하다시피 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내가 쳐다보면 집중하라고 소리를 치면 쳤지.
“지훈이!”
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글러브를 아래에 멍하니 내려놓고 있었음을 알았다. 머리가 멍한 상태로도 몸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몸을 돌리는 와중에도 한층 강해진 빗줄기가 모자챙 위로 벌이라도 주듯 쏟아졌다.
코치에게서 겨우 눈을 떼 잔뜩 긴장한 낯의 상대 팀 4번 타자와 눈을 맞췄다. 하나, 둘. 셋까지 세지도 않고 공을 던졌다. 챙, 소리와 함께 포수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글러브 안에 공이 잡혀 있다.
호루라기 소리. 경기장 안에 흩어져 있던 팀원들이 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음 이닝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 안에 섞여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팀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다가오는 나를 보고서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감독과 달리, 코치는 초조한 낯으로 날 보고만 있다. 그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원래라면 경기장 밖에 있는 사람의 표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빠가 연락하기로 한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흙탕물이 된 웅덩이를 그냥 지나버린 탓에 야구복 바지가 엉망이 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편없이 젖은 신발에서 철벅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 걷고 또 걸어서,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듣지 못했을 정보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앞에 서기 위해서.
사방을 울리는 빗소리 사이에서 울음소리는 언제나 볼품없이 작다.
“우리 엄마….”
코치의 턱이 잘게 떨린다. 거기서 이미 답을 읽은 사람처럼, 나는 확인하듯 물었다.
“죽은 거죠.”
감독이 놀란 얼굴로 코치를 돌아본다. 코치가 부러 긴장시키듯 팽팽히 당기고 있던 입매를 풀고는 고개를 떨궜다. 고갯짓이나 다름없는 그의 행동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끝났다. 문제는, 그게 나를 이룬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장례 내내 비가 왔다.
“아이고, 이걸… 이걸…!”
집에 들어선 아빠는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우산을 내팽개치고 마당으로 달려갔다.
마당에 펴놓은 돗자리 위에는 아빠가 지난주에 널어두었을 고추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 집에서는 질리도록 보던 풍경이다. 엄마가 늘 그러도록 만들었으니까. 해가 뜨는 날이면 고추를 널기 좋은 날이라는 말부터 했고, 병실에 있으면서도 아빠나 나한테 마당에 고추 좀 널어놓고 말리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아빠는 엄마가 죽기 전날에도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소쿠리에 모아둔 빨간 고추를 그냥 돗자리 위에 펼쳐 놓은 것에 의의를 두는 나와는 달리, 아빠가 널어둔 고추들은 비를 맞고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쏟아진 비를 내내 맞아야 했던 탓에 생기를 잃고 일부는 곪기까지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걸로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만들 수는 없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아빠는 돗자리 위에 무릎을 댄 채 황급히 고추를 소쿠리에 주워 담았다. 아빠의 어깨 위로 굵은 빗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졌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내 어깨도 젖고 있다는 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재생되는 빗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줍지 마.”
덜덜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가 삼 일 내내 입 한 번 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걸 모르지 않을 아빠가 나를 돌아봤다. 빗속에서 아빠의 얼굴이 뭉개지는 것 같은 환상을 본다. 그러나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몸을 돌린다. 돗자리 위에 남아 있는 쓸모가 없어진 것들을 주우며, 내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이딴 걸 신경 쓸 엄마는 이제 없는데, 그게 아닌 것처럼 구는 아빠를 견딜 수가 없었다.
“줍지 말라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아빠는 듣지 않았다. 입고 있는 검은 상복이 흠뻑 젖을 때까지도 돗자리에 거의 엎드려서는 줍고 또 주웠다.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 것을,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수거했다.
그걸 보면서 알게 됐다. 아빠가 엄마랑 또 약속했으리라는 걸.
엄마가 없어도 내 삶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렇게 약속했겠지. 그러기 위해서 엄마의 빈자리조차 지우겠다고.
잔인한 어른들은 아이의 동의 없이 그런 걸 합의한다. 잊을 수 없는 이를 아예 없었던 사람인 양 지우는 게, 또 다른 폭력인 걸 모르고. 그리하여 그 폭력에 거부감부터 느끼고 반대로 엇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걸 모르고.
* * *
“가자.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당연히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양아치들이나 몰려다닐 법한 으슥한 골목 앞에서 걔가 멈춰 선 순간에도 그게 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학교에서도 늘 그랬으니까.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놈은 곧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제 갈 길을 갔으니까. 눈을 마주치는 일도 내가 같잖은 비행을 저지를 때만 일어났다. 복장 불량으로 학교 정문에서부터 잡히거나, 선생들의 눈을 피해 소각장 뒤에서 담배를 피울 때나,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 사이에 섞여 하교할 때. 그 안에서 가장 거슬리는 사람이 나라는 것처럼 쭉 뻗어오던 시선은 이내 옆으로 흩어지고, 3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다. 다만 재수 없게 같은 반이 되어서 그 표정을 마주하게 되는 횟수가 는 것뿐.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표정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칸을 비워서 낸 내 진로 상담서를 본 순간 들린 얕은 한숨 소리가 그것을 증명하기도 했고, 사실 누구라도 제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한심하게 볼 거였다.
중학생한테 담배 피우는 법부터 알려주는 무리가 정상일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속해 있는 내가 더 우습긴 했다. 엄마가 죽은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악몽을 꿨다. 엄마가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뛰고 있는 꿈이었다. 다리가 더는 뛸 수조차 없을 정도로 퉁퉁 붓고, 비틀대며 제자리에 쓰러질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땀 범벅이 되어 몸을 일으키면 열어둔 문 사이로 아빠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내가 자고 있다고 확신할 때만 울었다. 그러라고 지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문을 등지고 누워 벽을 노려보고 있으면 해가 떴다. 엄마가 없어도 하루가 시작된다는 사실은 매일 생각해도 매일 화가 났다. 버석한 얼굴의 아빠가 밥을 먹고 가라고 깨우면,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가방을 싸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면 아빠가 버리려고 내놓은 엄마의 물건들이 있었다. 그걸 들고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아빠가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되면 집에 다시 돌아와 내놓은 물건 중 일부를 내 방 침대 밑에 숨겨두고 학교에 가는 일상이 지겹도록 반복됐다.
나를 망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간편하고도 죄책감이 없었다. 그냥 아빠가 슬픔을 잊을 정도로 질색하고, 엄마가 나를 두고 떠난 것을 후회할 정도의 일을 하면 됐다.
“니 이리 와 봐라.”
늘 맞아주고 끝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박철승의 시비에 기겁한 건 처음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튀어나가듯 놈의 앞을 막아선 순간에야 내 등을 타고 오르는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누구를 건드린 건지도 모르고 등 뒤에서 멀쩡하게 서 있는 놈은 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에 휘말릴 만한 애가 아니었다. 놈을 잘 알지 못함에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얘, 그냥,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부만 하는 찐따 새끼예요. 뭣도 모르고, 그냥.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말 건 거예요.”
박철승을 막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이면서도 등 뒤로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이러다가 이 새끼가 정말 맞기라도 하면 어쩌지? 박철승이 무리로 끌고 들어오겠다고 하면?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혼란했다. 얼굴이 여자애들이랑 놀 때 쓸 만할 것 같다는 이유로 나를 무리에 끼워준 이들이 얘한테는 안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상황을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이 났다.
박철승은 위험한 새끼였다. 자발적으로 인생을 말아먹기로 결심한 나 같은 새끼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피하고 사는 게 좋았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등 뒤의 인기척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내가 손으로 밀어낼수록 힘주어 버티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박철승이 손을 들었다. 하여간, 맞는 사람 기분 좆같아지게 때릴 줄 아는 새끼였다. 맞을 때마다 강도가 올라갔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 맛이 났다. 나는 피를 꿀꺽 삼키면서도 그 틈을 타 고개를 돌려서 가라고 눈으로 외쳤다. 대체 왜 버티고 서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거기 경찰서 맞죠?”
순식간에 모든 게 정리되고, 골목 안이 텅 비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덜컥 겁부터 났다. 박철승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집요한 면이 있는 놈이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당장은 물러갔대도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몰랐다.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해서 골목 안을 뒤집어놓은 놈을 보는데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참지 않고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박철승이 어떤 새끼인 줄 아냐고, 왜 끼어들어서 일을 더 좆같이 만드냐고.
“아까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근데 돌아온 대답이 저딴 거여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지 마. 너는 그런 거 안 어울려.”
걔는 내가 새벽마다 벽을 노려보면서 하는 생각을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괜히 반 분위기 해쳐 가며 또래 친구들 겁주는 것도, 너보다 나이 많고 할 짓 없는 형들이랑 몰려다니면서 이상한 소문 쌓는 짓도, 이렇게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서 담배나 피우고 학생들은 하면 안 되는 짓 하는 것도.”
“…….”
“너한테 도움 되는 거 하나도 없는 행동들이라고.”
복장 불량으로 운동장을 돌 때, 담배꽁초를 버리고는 그 위를 슬리퍼로 문지를 때, 시내버스 맨 뒷자리를 차지한 채로 침이나 찍찍 바닥에 뱉어대는 놈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마다 들던 생각을 그 애는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여전히 나오지 못하고 헤매는 내게 밖으로 나오라고 단호히 잘라 말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알게 됐다. 걔는 나를 볼 때마다 한심해하던 게 아니었다는 걸. 도리어 지금처럼 돕고 싶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걸. 그건 내가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였다. 엄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간 주먹을 순순히 맞아주더니,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까지도.
그런 말을 하는 얼굴조차 무덤덤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그게 걔의 갑옷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널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있을 때 잘해.”
“…….”
“맞지 않는 옷 입고 우겨 봤자 넌 그런 사람 아니야. 널 잘 알지도 못하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네가 오히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고 싶었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난 놈이 골목에서 나갔다. 한참 전에 나갈 수 있던 골목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맞고서야 뒤늦게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정거장에 앉아 있는데, 문득 눈물이 찔끔 났다. 죄책감이 들어서였다. 박철승한테 열 대는 넘게 처맞은 볼이 아픈 게 아니라, 평생 한 번도 맞아본 적 없었을 것 같은 그 애의 볼에 멍을 만든 게 미안했다. 불행의 종류는 다르지만, 나는 눈에 보이게 엇나가며 불행을 뽐내듯이 굴었고 걔는 평생을 지어 만든 갑옷을 뒤집어쓰고 불행을 견뎠다.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정거장 뒤에 있던 약국에 들어갔다. 집에 후시딘이 있음을 알면서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후시딘 하나를 더 구매했다. 강영수를 통해서라도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영감 손에 끌려서 집에 온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장례식장에서도 고작해야 눈가를 빨갛게 물들인 게 다였던 아빠가 그렇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아이처럼 우는 건 처음 봤다. 나는 그 이유가 장례식 이후 독하게 눈물을 참던 내 앞에서 아빠가 울 수 없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운 내 얼굴을 보고서야 아빠는 슬픔을 드러내길 허락받은 사람 같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주룩주룩 울기만 했다.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다음 순간 괜찮다고 했다. 그것도 계속하다 보니 민망해져서 그냥 나중에는 아빠한테 배고프다고 핑계를 댔다. 뭐가 보이긴 하나 궁금할 정도로 눈이 부은 아빠가 끓여준 라면을 먹고는 텔레비전 앞에서 꾸벅꾸벅 잠든 아빠의 위로 이불을 대충이나마 덮어주고 집을 나왔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영감네 집으로 향했다. 주머니 안에는 아까 전해주지 못한 후시딘이 있었다. 영감네 집은 돌담이 낮은 편이라 슬쩍 보기만 해도 집에 불이 켜져 있는지 아닌지를 볼 수 있었다.
뒤꿈치를 들어 안을 살폈다. 안쪽의 영감 방은 불이 꺼져 있는데, 창고 옆에 있는 방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닌 것 같았다. 들어가서 줘야 하나, 대문을 보며 고민하던 찰나에 영감네 마당으로 새어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창고 옆 방의 불이 꺼진 거였다.
“…에이, 씨.”
주머니 속의 후시딘을 만지작대던 것도 잊고, 손목시계부터 확인했다. 열두 시 정각이었다.
설마 잠도 시간을 정해두고 자나. 쟤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지나가면서 어쩌다 시선에 걸린 거긴 했지만, 놈의 책상에는 늘 스톱워치가 올려져 있었다. 문제를 풀 때마다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강영수가 전교 1등 어쩌고저쩌고했던 것 같기도 한데. 좀 더 귀담아들을걸, 처음으로 후회하며 담 안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마루를 사이에 둔 채로 두 방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거였다.
나는 슬리퍼를 직직 끌며 집에 돌아왔다. 나가기 전 이불을 덮어준 보람도 없이 본격적으로 배를 까고 잠든 아빠의 목 아래로 베개를 넣어주고 씻은 뒤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올려둔 후시딘이 그대로 잘 있는지 확인한 후에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누워서 벽 대신 천장을 바라본 건 오랜만이었다. 무늬라고는 없는 집 천장을 바라볼 때마다 보조 침대에 누워서 올려다본 병원 천장이 생각나서 괴로웠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본 자세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내일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면 어떻게 후시딘을 전해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성욱 말고 선욱이야. 지선욱.’
언젠가 이름을 고쳐주던 고저 없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성이 아니라 선. 외우듯 여러 번 반복하며 눈을 감았다.
걔는 선이야. 선. 잊지 마.
그날 밤에는 악몽을 안 꿨다. 엄마가 죽고 난 후 처음이었다.
* * *
“도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뭐랬지? 그래. 점, 선, 면 이 세 개야. 점은 도형을 이루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쉬워. 그 때문에 ‘위치는 있지만, 부분이 없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 내리는 사람도 있지. 다음은 선. 선은 쉽게 생각하면 점과 점의 모음이야. 점을 이렇게 촘촘하게 계속 찍고 나서 멀리서 봐 봐.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 점과 다른 부분을 꼽자면 선은 연속성이 있고 그러므로 경계가 되는 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거지. 마지막으로, 면은 윤곽이라 생각하면 돼. 그로 인해 입체감이라는 게 생겨나는 거야.”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두고, 미술 선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강조한 이론 수업에 한창이다. 분필까지 든 채로 나름대로는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열심인데, 하필 점심시간 바로 뒤인 5교시이기까지 해서 애들의 반 이상이 꾸벅대거나 혹은 나처럼 겨우 눈을 뜬 채로 껌벅대고 있다. 학기 초만 해도 막 나가기 바빠서 수업도 절반은 흘려듣거나 절반은 잠을 청했으므로 별다른 문제를 못 느꼈는데, 나 잘 때 안 자던 애들까지 졸려 죽으려 하는 수업을 눈 똑바로 뜬 채 필기까지 하며 들으려니 몸 이곳저곳이 쑤셨다.
잠을 깨기 위해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것을 찾아 반을 훑었다.
야구를 하던 때의 습관이 아직 남아서, 반 애들을 이름 대신 포지션으로 외운다. 타자의 습관이나 특성을 외우는 것처럼 그들의 습관이나 특성을 외운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경기장에서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 눈에 힘부터 주는 선수들과 달리 반 아이들은 행동이며 표정이며 숨길 생각이 없다. 읽기가 지나치리만큼 쉽다는 소리다. 지금 내 대각선에 앉은 놈은 문장마다 욕을 붙이지 않고서는 말을 못 잇는 놈인데, 일주일 전 짝을 바꾼 뒤로 욕설을 뱉는 빈도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선생이 짝이랑 같이 하는 과제를 줄 때는 얼어서 옆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한숨을 쉬면서도 자기 대신 종이를 가져가 그 위로 반과 이름을 적는 옆자리 애를 겨우 훔쳐보는 얼굴이 빨간 걸 보니 짝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쉽게 예측했다. 두 자리 앞에 앉은 여자애는 펜이 많다. 뭔지 모를 것들로 가득 찬 빵빵한 필통이 심지어 두 개다. 볼 때마다 필통을 앞에 둔 채로 무언가를 공책 위에 쓰거나 혹은 붙이고 있다. 필기할 때마다 펜을 바꾸곤 하는데, 지금은 그런 걔조차도 펜을 바꿀 생각을 못 하고 책상에 거의 엎드려 누워 있다.
옆 분단으로 시선을 옮긴다. 지난 몇 주간 이미 완벽히 행동 패턴을 외운 애들은 그대로 두고 외워도 외워도 읽히지 않는 한 곳에 시선이 꽂힌다.
옆 분단 세 번째 줄의 오른쪽 자리 위에는 스톱워치가 놓여 있다. 지금 이 반에서 유일하게 졸지 않는 놈의 자리다. 시선은 칠판 앞의 선생님에게, 교과서는 책상의 정중앙에, 펜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지우개는 교과서의 바로 위에 있다. 필기할 때도 팔만 살짝씩 움직이곤 하는 놈의 자세는 곧고 바르다.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은 채 똑바로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는 자세가 마치 도덕 교과서에 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미술 선생도 잠든 아이들을 깨우는 대신 유일하게 제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모범생과 눈을 맞춘 채로 일대일 과외라도 하듯 수업을 이끌어나가고 있고.
3교시 때 봤던 것과 같은 놈의 모습을 잠깐 지켜본 나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몸을 곧추세웠다. 전교 1등을 머리로 못 따라가면, 행동이라도 비슷하게 따라가야 한다고 습관처럼 되뇌면서.
* * *
“가슴에 뭐냐, 그거?”
강영수가 밥을 한술 뜨다 말고 물었다. 시선이 내 가슴팍에 꽂혀 있었다. 앉자마자 시비를 터느라 바빠서 내 가슴팍에 있는 파랗고 노란 얼룩을 이제야 알아본 모양이었다.
“최신 유행 패션.”
대충 던지고 고개를 내리려다 강영수 옆에 있던 지선욱과 눈이 마주쳤다. 수저를 들기 전까지도 들러붙는 강영수를 밀어내느라 정신없던 탓인지, 이마를 조금 찌푸린 놈이 강영수처럼 내 얼굴과 얼룩이 묻은 가슴팍을 번갈아 본다. 아까 미술 끝나고 같이 반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면서, 강영수가 말을 꺼낸 지금에야 안 눈치다. 쟤의 관심사야 한정되어 있으니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빤히 바라보는 게 혹시나 궁금해하는 건가 싶어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물통 든 유혜은이랑 부딪쳐서.”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미술 선생은 수채화 수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이제 조는 애들은 없는데, 대신 붓을 들고 설치는 애들이 생겨났다. 옆에 가만히 놓여 있는 것 말고는 죄가 없던 물통이 갑자기 엎질러지는 일이 꽤 잦았단 뜻이다.
“유혜으으은?”
대충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지선욱과 달리 강영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을 늘이기부터 했다. 유혜은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여자 이름 같다 싶으면 일단 저렇게 난리부르스를 치는 건 내가 양아치 짓 할 때 벼르던 걸 제 나름의 방식으로 화풀이하는 셈이다. 반응을 해주면 지랄의 강도만 한층 더 세질 것이 뻔해서 중지만 한 번 들어 올리고는 밥에 집중했다. 오래가지 않아 조용해진 강영수가 식판을 반납할 때가 되어서야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체육복 없냐? 빌려줘?”
제 딴에는 생각해서 물어보는 것 같은데도, 팍 인상부터 쓰게 됐다. 언젠가 한 번 빌렸던 강영수의 체육복이 떠올라서였다. 체육 시간마다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어디서 칼싸움이라도 하고 오는지 옷이 넝마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서 당기면 갈기갈기 찢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니 체육복 냄새나.”
더 정확히는, 땀을 존나 흘린 후에도 안 빨고 다음 체육 수업 전까지 사물함에 처박아 둔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양심이 있어서 냄새난다는 말은 부정 못 하고,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린 강영수가 중지를 들어 올리며 비꽜다.
“그래요~ 님은 걸음마다 페브리즈고 나는 걸음마다 스컹크예요~”
“야.”
“뭐, 씨발아.”
“좋은 말 할 때 스컹크한테 사과해라. 그러다 고소당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진짜 재수없다, 니….”
강영수와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하며 반까지 걸어왔다. 우리가 쪽팔린 것처럼 조금 떨어져서 걷던 지선욱이 돌연 나를 불렀다. 야. 못한 숙제가 이제야 생각났다며 눈썹 휘날리게 뛰어가는 강영수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찰나였다. 눈앞에 무언가가 불쑥 등장했다.
“입어.”
세탁하고 햇빛에 말린 후 바로 접은 것처럼 깔끔하고도 각 잡힌 체육복이었다. 그제야 지선욱이 서 있는 곳이 우리 반 앞 복도에 놓인 마지막 사물함, 16번 앞임을 깨닫는다. 놈이 몸을 아래로 반쯤 숙인 이유가 사물함에서 제 체육복을 꺼내 내게 내밀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냄새 안 나. 어제 빨아서 오늘 가져왔어.”
내가 받지 않고 머뭇대자 그걸 걱정하는 줄 알았는지 정보를 추가하는 얼굴이 태연했다. 마치 아까 점심을 먹으면서부터 이 계획을 생각해둔 것처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조차 얼떨떨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얘가 아무렇지 않게 할 때마다 그런 생각부터 하게 된다. 내 예상보다 얘가 나를 생각해주는 게 아닌가 하고. 근데 그걸 묻는 순간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거리만큼 멀어질 것 같아서 쉽게 물을 수가 없다. 그때 엄마 유품을 함께 태워줄 때와 같은 기분이다. 내가 그래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옆에 같이 앉아 있어 주는 게 신기한데, 그걸 말한 순간 ‘아, 맞다.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 하고 막 깨달은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버릴 것 같아서 무섭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 지금도 나는 어정쩡히 체육복을 받아들고는 냄새를 맡는 척하며 “어, 넌 고소는 안 당하겠다.” 하는 농담이나 지껄이는 게 다다.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둔 지선욱이 칫솔과 치약을 꺼내 들었다.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먼저 화장실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등을 보다 내 사물함을 열었다. 칫솔과 치약을 꺼내고 사물함을 닫고서야 좌측 모서리에 적힌 15번이라는 숫자와 체육복이 들어 있었던 지선욱의 사물함 위 16번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다.
“…….”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가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고개를 숙여 체육복 위로 코를 슬그머니 박았다. 우리 집에서 쓰는 것과 같은 종류는 아니어도 섬유유연제임은 알 수 있는 향 사이로 가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지선욱에게서 나던 바람 냄새가 섞여 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이것도 냄새는 냄새다. 땀을 하루에도 몇 리터씩 흘려대는 중학생 남자애들에게서 나는 역겹고도 거슬리는 냄새가 아닐 뿐.
목뒤를 긁으며 지선욱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뒀다.
쟤는 어렵다. 꾸준하고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는 것만 봐도.
* * *
“얼레? 이게 누구여. 가위바위보에서 졌나벼?”
이모는 내가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슈퍼로 강영수 대신 간식을 받으러 올 이유가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봉지를 뒤에서 꺼내 건네면서도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람이 또 너무 맨날 이기고 그러면 인간미 없으니까.”
이모는 내가 이렇게 능청맞게 대꾸하는 걸 좋아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지금도 이모는 깔깔대며 웃더니 내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고는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더위 안 먹게 아이스크림부터 먹고 재미있게 공부하라고 덧붙였다. 노래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은 강영수에게 실용음악학원을 끊고 다른 진로를 찾는 게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봤다던 이모는 강영수가 공부하는 우리 사이에 어떻게든 끼어서 책상 앞에 앉아라도 있는 게 퍽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지선욱이나 날 볼 때마다 간식 챙겨줄 테니 집에 와서 공부하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그나저나 재미있게 공부하라니, 우리 셋 중 그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강영수는 아예 공부를 안 하고, 나는 이거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거고, 지선욱은…
글쎄. 걔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숨 쉬듯 공부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공부의 매개체인 책에도 미련이 없다. 일주일 내내 붙들고 있던 문제집도 다 풀고 나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린다. 한 번 이모가 시킨 심부름을 하러 영감네 집에 갔다가 지선욱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고 온 강영수가 속닥거리며 전한 정보에 따르면, 방 한편에 문제집이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그 문제집들도 풀기가 무섭게 버려지겠지. 한순간 지선욱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거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고, 버리는 것만 줄기차게 보고 있어서인지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쟤는 사람을 버릴 때도 저렇게 쉽게 버릴까. 미련이라고는 없고, 다시는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봐도 봐도 알 수 없는 놈 생각을 하느라 걸음이 느려졌다. 찌는 듯한 날씨에 목뒤가 땀으로 흥건히 젖은 것도 강영수의 집 앞에서야 눈치챘다는 뜻이다. 들어가면 샤워부터 해야겠다 생각하며 신발장을 확인했다. 영은이의 신발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야, 계란 넣는다?”
라면을 끓이다 말고 뒤돌아서 묻는 강영수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봉지를 식탁 위에 던져뒀다.
“영은이 집에 없는 거 맞지?”
티셔츠부터 벗어 던지려다 말고 혹시 몰라 한 번 더 확인차 던진 질문에 강영수가 뒤돌지도 않고 대답한다. 엉, 걔 학원. 덧대는 정보에 안심하고는 티셔츠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쳤다.
“나 좀 씻는다.”
“어어, 대신 라면 금방 익을 것 같으니까 2분 내로 씻어. 고추에 물만 묻히는 수준으로.”
“…씨발놈아. 니 우리 집에서 잘 때 내 팬티 훔쳐 입으면 뒤질 줄 알어.”
화장실 문은 왜 또 처닫아놨어. 통풍되게 열어놓으라고 이모가 그렇게 강조를 하는데.
짜증 내며 화장실 문을 벌컥 열기 무섭게 뒤에서 강영수가 황급히 외쳤다.
“어! 야! 그러고 보니 선욱이가 먼저 씻으러 들어갔는데!”
더럽게 빨리도 말해준다. 그것도 먼저 씻고 있던 놈이랑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순간에야.
“…….”
“…….”
운동할 때는 같은 거 달린 놈들이랑 매일 한 공간에서 씻었다. 같은 거 달린 남자 새끼의 알몸이야 질리도록 봤다는 뜻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예상 못 했다 뿐이지, 이 상황이 그렇게 당황할 만큼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뭐 하냐? 안 닫고.”
쟤가 몸을 가리기는커녕 똑바로 선 채로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는 듯이 묻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고.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눈도 못 바라보겠고. 쟤가 걸친 옷 하나 없이 내 앞에서 벗고 있다는 게 갑자기 실감 난다. 이래도 되나 싶다. 심지어 나도 위는 아예 벗은 상태이면서.
어어…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최대한 어색한 티가 나지 않게 들어가서는 뒤로 문을 닫았다. 샤워기 헤드를 든 지선욱이 샤워 호스를 끌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었다. 옆에 있는 수건을 끌어와 젖은 뺨 위를 닦아내며 질문하는 얼굴이 태연했다.
“씻게?”
“…어.”
“나 다 씻었어. 네가 이쪽으로 와.”
차가운 물로 씻었는지, 벗은 지선욱이 욕조에서 나와 내 쪽으로 다가선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까지 덩달아 시원해진다. 훅 끼치는 냉골 같은 기운에 흘끔 지선욱을 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분명 눈만 보려고 한 건데 어쩌다 보니 목 아래까지 시야에 담겼다. 체육복 사이즈가 나랑 비슷한 걸 보고 대충 예상은 했는데 생각보다 어깨가 넓었다. 탈의실에서 새로 들어온 신입들 몸을 볼 때처럼 고기 품평하듯 훑어보던 버릇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놈의 몸을 아래까지 쭉 스캔하며 훑었다.
…가릴 필요가 없어서 안 가린 거였네. 뽐내지는 못할망정 굳이 뭐 하러 숨기냐 이거지.
탈의실에서조차 몇 번 해본 적 없던 감탄을 삼키는 순간에야 진작에 고개를 돌린 놈을 나 혼자만 훔쳐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세면대 앞에 선 지선욱은 벌써 몸을 다 닦고 속옷을 주워 입는 중이었다. 물도 못 튼 채로 저를 흘끔거리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근데 애초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이게 뭐라고.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강영수와 같은 공간에서 씻은 횟수는 두 손으로 세지도 못한다. 한참 늦은 생각을 하며 바지와 속옷까지도 한 번에 벗었다. 잊고 있던 강영수가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얘들아, 라면 분다! 라면!”
그새 옷을 다 챙겨 입은 지선욱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내가 그랬듯 슬쩍 위아래로 나를 훑더니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쾅. 문이 닫히고, 화장실 안이 조용해졌다. 잠깐 같이 멈춰 있던 나는 물을 틀고는 샤워기 헤드를 얼굴로 바짝 가져갔다. 등골이 짜릿할 정도의 냉수를 거듭 끼얹고서야 몸을 덮은 끈적한 더위가 좀 가시는 듯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찝찝하지 않은 선에서 대충 씻고 나왔다. 강영수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라면은 멀쩡했다. 냄비 안을 확인하자마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본 강영수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얄밉게 말했다.
“내 덕분에 꼬들꼬들한 라면 먹는 줄 알아라.”
지선욱이 별말 없이 수저를 집어 들었다. 먼저 나온 뒤에도 딱히 머리를 말리지는 않았는지 앞머리가 여전히 젖은 채였다. 평소와 달리 앞머리를 뒤로 넘겨 하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잠깐 바라보던 나는 수저를 냄비 안으로 넣었다.
텔레비전 그만 보고 공부하라는 이모의 잔소리에 요즘 눈치가 보인다고 하더니, 밥 먹을 때만이라도 얼마 안 되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영수가 채널을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놈이 한참 뒤에야 드디어 채널을 고정한 곳은 위에 재방송이라는 문구가 떠 있는 드라마였다. 본방송을 꼬박꼬박 챙겨보면서도 굳이 또 한 번 보겠다고 우긴 의도는 곧 알게 됐다. 우리가 같이 봐주기를 바란 것이다. 젓가락까지 팽개친 강영수가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본격적으로 드라마의 줄거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 남자랑 여자랑 맞선으로 만났단 말이야? 근데 사실 여자한테는 오래전부터 좋아한 사람이 있었어. 근데 고백을 했다 까였어. 한 번 더 고백하면 얼굴도 못 볼 것 같으니까, 마음을 접은 척하고 늘 그 곁을 맴돌기만 한 거야. 그러다가 만난 거야, 저 남자를. 사실 처음에는 엄마 아빠가 막 보라고 협박해서 선 자리에 나간 거였다? 막 호텔 커피숍 같은 데 있지. 그런 데서 둘이 처음으로 만났는데….”
“…넌 이게 재밌냐?”
“아, 끊지 말고 들어봐. 다 듣고 나서 판단해. 그렇게 만났는데, 저 남자가 여자한테 첫눈에 반한 거야. 그래서 여자한테 바로 이야기한다? 당신이 좋은 것 같으니까 진지하게 만나보자고? 그러니까 여자가 미쳤냐고 해. 어떻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쉽냐면서, 우리 방금 만났잖아욧 하면서. 그런데 남자가 그런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거야. 자기 마음은 자기가 아는데. 크으. 명대사지, 완전.”
“어쩌라고. 쥬만지한테 써 보든가.”
“안 돼, 들켜. 민지도 이거 본단 말이야. 어쨌든 이게 끝이 아니고. 어찌저찌 해서 남자랑 여자랑 만나게 됐다? 근데 여기서 반전. 전에 여자 고백 깠던 남자 있지. 걔가 갑자기 둘의 사이를 막 질투하는 거야. 그러더니 여자애를 자꾸 헷갈리게 하기 시작해, 막. 어디냐고 물어보고. 예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면서. 근데 여자애가 또 흔들린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아직 마음이 남은 거야. 근데 그걸 어제 편에서 그 선본 남자가 알았어. 마지막에 남자가 ‘나 갖고 노는 거예요?’ 하고 끝났다? 대박이지.”
강영수는 제가 그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아련해졌다가, 이내 선본 남자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가, 뒤늦게 여자의 마음을 뺏으려 드는 그 남자처럼 비열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주 원맨쇼를 했다. 나만큼이나 질색할 줄 알았던 지선욱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는 걸 보면, 그냥 틀어놨으니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혀. 새로운 사랑과 옛사랑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거잖아. 너네가 보기엔 누구랑 이어질 것 같음? 어느 쪽이 더 사랑이 커 보여?”
“…그걸 따지는 게 소용 있나?”
물으면서도 그나마 답을 들을 수 있는 건 내 쪽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던 강영수의 고개가 서서히 옆으로 돌아갔다. 지선욱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중엔 다 헤어질 건데.”
여주인공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 번 더 툭 던지듯 말하는 놈의 표정은 무료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소거한 탓에 텅 비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답변이 그것도 지선욱에게서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강영수가 유독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대꾸했다.
“어… 그래도 결혼하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결혼해도 헤어질 수 있어.”
“…어?”
멈칫한 지선욱이 텔레비전에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싸늘하던 얼굴은 강영수와 나를 확인한 순간에야 원래의 온도를 되찾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미적지근하게 바뀌어 갔다. 지선욱이 그런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건 처음 봤다. 팔을 뒤로한 채로 반쯤 누워 있던 나조차 자세를 고쳐 일어났을 정도로.
지선욱이 태안에 내려온 날부터 마을에서는 알게 모르게 이미 소문이 다 돌았다. 부모가 이혼 소송 중이라 내팽개쳐진 거라느니 애가 불쌍하게 됐다느니 하면서. 그러나 우리 셋이 그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지선욱이 이런 식으로 티 낸 것도 처음이고.
당황한 우리를 본 지선욱도 그 사실을 막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눈을 내리깐 놈은 침묵을 깨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그냥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야, 라면 다 먹었으면 치우자.”
말을 돌리는 놈을 본 강영수가 내 눈치를 봤다. 어떻게 하지? 묻는 듯한 눈빛을 쏘던 강영수가 혼자 답을 찾아내고는 손뼉을 짝 쳤다.
“와, 그러고 보니 엄마가 아이스크림 먹으라고 줬는데! 이거 치우기 전에 일단 그거부터 먹자. 짠 거 먹었으면 다음에는 단 거지.”
강영수를 슬쩍 본 지선욱이 놈의 노력을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져올게. 냉동고에 있는 거 맞지?”
“어엉? 안 그래두 되는데.”
“됐어. 앉아 있어.”
강영수의 만류에도 자리에서 일어난 지선욱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놈이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고서야 내게로 몸을 기울인 강영수가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가 초키포키 넣어줘서 다행이다. 우리 욱이 기분을 달래줄 수 있겠어.”
“…쟤 초키포키 그 정도로 안 좋아해.”
“내 빅데이터를 우습게 보네. 내기할래?”
강영수가 내기 조건을 미처 걸기도 전에 지선욱이 돌아왔다. 손에 색이 다른 쭈쭈바 세 개가 들려 있었다. 우리 앞에 선 채로 고르라는 듯 세 개의 쭈쭈바를 동시에 내미는 지선욱을 본 강영수가 나를 흘끔대고는 말했다.
“가져온 사람이 제일 먼저 골라야지. 너 좋아하는 거 골라.”
“…딱히 좋아하는 거 없는데.”
“에이, 그러지 말고 골라 봐.”
여차하면 또 앵길 태세로 들러붙는 강영수를 본 지선욱이 몸을 뒤로 빼며 쭈쭈바 중 하나를 반대쪽 손으로 옮겼다. 나머지 두 개의 쭈쭈바를 받아들고는 내게 하나를 넘긴 강영수의 표정이 제법 의기양양했다. 봤지? 하는 것처럼.
강영수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아 쭈쭈바 포장지를 까고 있는 지선욱의 조금 풀린 얼굴을 한 번 보고, 손에 들린 쭈쭈바 포장지에 적힌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지선욱이 고른 게 초키포키라는 사실이 어쩐지 생경했다. 지선욱이 사랑에 대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알았다는 것조차도.
* * *
엄마가 아프다는데도 훈련을 빼주지 않던 코치나 감독이 내게 체육대회를 허락해줬을 리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후로 처음으로 참여해본 체육대회는 솔직히 왜 운동부 애들이 참여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기본 체력과 운동량부터가 다르니 어쩌면 당연했다. 이기기가 너무 쉬워서, 나중에는 다른 팀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계주를 뛰면서는 중간에 멈춰 서서 운동화 끈이 풀린 척, 다시 묶기도 했다. 일부러 천천히 맸는데도 일어설 때가 되어서야 반 바퀴 뒤에서 쫓아오는 다른 팀 주자들을 발견했다.
여유롭게 결승선을 통과한 뒤 우리 반이 앉은 쪽을 돌아봤다. 반에서 제일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나와 같이 응원단장을 맡은 안희연이 어디서 구해온 건지도 모를 확성기로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서 웃었다. 형광색부터 시작해서 어떻게든 조금 더 튀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형형색색의 반티 사이에서 우리 반 애들이 입고 있는 파란색과 분홍색의 민무늬 티셔츠는 얌전하기 짝이 없어 오히려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익숙하게 그 안에서 내가 아는 얼굴을 찾아 헤매다 말고 멈칫했다. 안희연이 내려와 있는 스탠드 앞의 응원석에도, 파란색 티셔츠가 몰려 있는 운동장 스탠드 위쪽에도 지선욱은 없었다. 의아했지만 일단 스탠드 쪽을 향해 걸었다. 미니 머리띠를 쓴 안희연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오우 지훈. 개빨라, 개빨라~ 특히 신발 끈 묶는 퍼포먼스 얄밉고 아주 좋았어. 내가 다른 반이었으면 열 받아 뒤졌을 듯. 이거 아까 담임이 쏜 건데 받아. 니 주려고 미리 빼놓음.”
“어. 땡큐.”
안희연이 던져준 이온 음료 캔을 받아내 바로 뚜껑을 따 목 안에 콸콸 쏟아붓는 와중에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걸어오면서 확인하긴 했지만, 역시나 지선욱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눈이 마주친 반 애들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서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뒷머리를 슥슥 문지르고 갔다. 대충 받아주며 강영수네 반 스탠드를 슬쩍 봤지만 스탠드 앞에서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나대는 강영수의 뒷모습 외에는 건질 게 없었다.
“야. 반장 어딨냐?”
내 물음에 뒤를 돌아본 안희연이 나만큼이나 헤맸다. 응원하느라 바빠 지선욱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막 알아챈 듯했다. 반장이라는 이유로 스탠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선욱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어, 그러게. 어딨지?”
스탠드에서 지선욱을 찾지 못하고 결국 경기중인 아이들이 마구 섞여 있는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따라 주변을 둘러보던 안희연이 돌연 내 어깨를 쳤다. 표정을 보니 무언가를 막 깨달은 눈치였다.
“야, 맞다. 반장 그거 준비하러 갔나 보다. <사람 찾기>.”
“뭐? 갑자기 왜. 걔 그거 하는 거 아니었잖아.”
“손성철이 아까 축구하다 넘어진 것 때문에 다리 아프다고 개지랄 떠는 거야. 못 나갈 것 같대서 급하게 대타 찾는데 체력장 달리기 기록 보니까 너 다음에 반장이길래 부탁했지. 응원상도 우리 반이 받을 것 같고, 기왕 한 김에 다 이기자고 설득하니까 생각보다 쉽게 알겠다던데?”
“…….”
“맞네, 저기 서 있네. 봐 봐.”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가리켜주기까지 하는 안희연 덕분에 쉽게 지선욱을 찾았다. 지선욱은 정말 아까 내가 계주를 뛸 때 바통을 받았던 곳에 다른 놈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학년별로 모인 남자애들이 열댓 명 가까이 됐다. 경기가 곧 시작되려는지 앞에 선 체육 선생이 경기의 룰을 설명하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서 있는 곳이 하필 햇빛이 직격으로 쏟아지는 자리인 탓에, 이마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든 채 짝다리를 짚고 듣는 놈들과는 달리 혼자 허리에 손만 짚은 정자세로 서 있는 지선욱은 오히려 더 쉽게 눈에 띄었다. 우리 반 여자애들 중 지선욱한테 제일 관심이 없는 안희연조차 단번에 찾아냈을 정도로.
출발선이라고 하얗게 줄을 그어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자리에 하얀 천으로 뒤덮인 긴 책상이 있었다. 커다란 어항처럼 생긴 큰 볼 안에는 종이들이 반으로 접힌 채 들어가 있었고.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룰이었다. 일단 출발해서 50m가량을 달린 후에, 책상 앞에 멈춰 서서 볼 안에 있는 종이를 뽑은 뒤 그 종이 안에 적혀 있는 특징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손을 잡고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아 결승선으로 들어오면 되는 게임이었다.
“반장이 이것도 이겨서 오면 진짜 대박이겠다, 그치. 문상이 내 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만 해도 반 애들 모두가 경기 우승 상품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안희연만 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사람 찾기> 게임이 시작될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스탠드에 앉은 아이들로부터 단순히 게임을 이기고 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묘한 기대감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바로 뒤에 앉은 여자애들이 킥킥대며 사람을 찾는 게임이 아니고 사랑을 찾는 게임이라며 말장난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대충 감이 잡혔다. 몇백 명이 모인 공간에서 어떤 사람의 특징을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가 같이 뛰자고 권하는 게 쉬울 리 없다. 대부분은 아는 애한테 다가가 손을 뻗어 가자고 하겠지.
속이 울렁댔다. 단순히 뛰고 이기기만 하면 됐던 운동장이 순식간에 무언가를 쟁취해야 하는 곳으로 변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은 일화가 있다.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같이 다닌 엄마 아빠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한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엄마가 피부가 흰 사람을 찾아오라는 종이의 글자를 무시하고 피부가 까만 아빠를 끌고 결승선을 통과한 후 심판을 맡은 선생님에게 자신한테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고 주장했다던 일화는 엄마 아빠의 동창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주제였다. 엄마는 그 순간을 회상할 때마다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랑은 쟁취하는 기다, 안 그랬으면 우쩔 뻔했노. 니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훈아.’ 옆에서 허허 웃던 아빠도 긍정했다. ‘맞다. 그 순간 내가 코가 꿰인 기라.’ 엄마의 자신감만으로 그게 가능한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신감이 아빠에게 확신을 준 건 맞았다. 그 이후 아빠는 정말 엄마의 인생에 단단히 꿰였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던 엄마가 갑자기 태어나면서부터 살았던 경상도 집을 벗어나 충청도 한 시내의 은행에 덜컥 취직했을 때, 외할머니처럼 말리기는커녕 하던 일까지 때려치우고는 따라나서서 근처 공장에서 면접부터 보며 아예 처음부터 다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아빠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 말을 하던 엄마 아빠의 목적은 내게 사랑은 쟁취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거였겠지만, 나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크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그건 엄마 아빠여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내가 일찍이 눈치챘다는 걸. 엄마 아빠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말도 안 되는 헌신을 담보로 해야만 가능하고, 모두가 그러고 살지는 않는다는 걸. 홀로 남은 아빠를 보며 생각한다. 아빠도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한 사랑을 하는 게 나을 뻔했다고. 아빠한테 엄마는 친구였고, 애인이었고, 아내였고, 인생의 전부였다. 아빠는 엄마를 잃음으로써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잃었다. 모든 걸 토해낸 것처럼 텅 비운 속으로 겨우 나를 제대로 키우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산다. 그 약속조차 떠난 사람이 맡긴 것임을 생각해 봤을 때 엄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심지어 영감이 그러고 사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면서.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안 하고 말겠다. 한 사람에게 인생을 거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내가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한 사람만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끔찍한 일이야.
잃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려고.
‘탕!’
1학년부터 경기를 하는 모양이다. 모인 애들 중 가장 키가 작은 애들이 총소리가 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렸다. 종이를 펴자마자 달려가는 애, 도착해서 종이를 뽑고도 한참을 제자리에서 머뭇대는 애, 스탠드로 달려오면서 벌써 마음속에 정해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준비하라는 듯 외치는 애. 1학년들이 모여 앉아 있는 스탠드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종이를 펴자마자 가장 먼저 움직였던 애가 제 또래 여자애의 손을 잡아끌고 달리고 있다. 선두인 데다가 학년을 가리지 않고 이상한 호응까지 더해진 운동장 분위기에 여자애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다. 그래도 발만은 속도를 맞추듯 움직여서, 결국엔 둘이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그 뒤를 따라 2등, 3등, 그리고 마지막 6등까지 들어온다. 6등은 아까 스타트는 가장 빨랐는데 머뭇대느라 가장 늦게 스탠드로 달려간 애였다.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다른 애들과 달리 유일하게 제 또래 남자애의 손을 잡고 온 애이기도 하다. 손을 잡기도 싫은지 팔꿈치를 잡고 뛰다가 결승선에 들어오자마자 그마저도 내팽개치며 인상을 쓴다. 그 때문인지 스탠드 곳곳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쟤네 봐. 존나 웃긴다.’ 안희연도 옆에서 나를 쿡쿡 찌르며 웃었다.
웃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굳은 내 시선은 출발선 언저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2학년 남자애들을 보느라. 더 나아가서는 그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로 발목을 돌리고 있는 파란 옷의 남자애를 관찰하느라.
2학년 게임도 순식간에 끝났다. 아수라장이던 1학년 경기에서 교훈을 얻기라도 했는지 다들 종이를 펴자마자 일단 스탠드로 달려가고 본다.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지는 상관없고 일단 저랑 친하거나 이번 기회를 통해 친해지고 싶은 여자애한테 손을 내미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중요한 건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지가 아니다. 덕분에 이번에는 동물 잠옷을 입고 있는 애가 중간에 넘어진 것으로 웃음이 터졌다.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다고 남자애의 손을 잡아끈 애 때문이 아니라.
지선욱이 출발선에 선다. 2반이라서, 끝에서 두 번째 자리다. 제자리에서 콩콩 뛰거나 뒤늦게 팔다리를 죽죽 늘리는 애들과 달리, 앞을 바라보고 선 놈의 시선은 50m를 달려 도착해야 할 책상 위에 박힌 채로 흔들리지 않는다.
“아, 개떨려. 어떡하지? 이겼으면 좋겠는데. 제발. 제발.”
제가 다 긴장되는지 안희연이 제자리에서 발을 마구 굴렀다. 확성기를 켜서 반 애들한테 반장 이름을 외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안희연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각 반의 응원단장들 때문에 3학년 스탠드가 시끄러웠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그래서 심판을 맡은 도덕 선생님이 신호총을 허공에 치켜드는 행위에 집중해야 했다. 탕! 손을 치켜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선에 서 있는 애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야! 미친! 됐다, 됐다! 야야, 지금 1등이야, 1등!”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지선욱이 가장 앞에 있다. 책상으로 달려간 놈이 볼 안에 손을 넣어 종이를 집어 드는 게 보였다. 종이를 펴본 놈은 2학년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스탠드로 몸을 틀었다. 달리는 방향을 보니 우리 반 쪽이었다. 가장 선두에서 달리는 애라는 이유로 쏠리던 시선이 점차 그게 지선욱이라는 이유로 더 집중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양옆의 반은 소란스러운데, 우리 반 주위만 묘하게 조용했다.
지선욱이 발을 구를 때마다, 그러면서 달릴 때마다 걔가 지나가는 흙 위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지선욱은 내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나?”
안희연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지선욱이 손을 내민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안희연은 어안이 벙벙한 눈치다. 답지 않게 당황해서는 확성기까지 아래로 내린 안희연에게 지선욱이 한 번 더 재촉하듯 손을 내밀었다. 목표를 정한 지선욱은 안희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만 걔를 볼 수 있었다.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땀줄기를 훔쳐보며 방금 걔가 몰고 온 바람 냄새가 오늘 아침에야 뜯어서 한 번도 세탁한 적 없는 반티에서도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지선욱이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이기고 싶다며.”
짧은 그 한마디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안희연이 지선욱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안희연의 손을 단단히 쥔 지선욱이 몸을 돌렸다. 파란색 티셔츠와 분홍색 티셔츠가 한 세트처럼 붙어서 뛰기 시작했다. 손을 꽉 잡고 있어서인지 그렇게 속도를 내어 뛰는데도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선두를 달리고 있던 3반 남자애가 뒤에서 맹렬하게 쫓아오는 것을 보고 여자애 팔을 황급히 잡아끄는데도 한마음으로 뭉친 안희연과 지선욱한테 결국 선두를 내주게 됐다. 결승선이 가까워지자 1등을 확신한 반 애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환호를 닮은 고함들 속에서, 안희연보다 빠른 지선욱의 가슴팍이 팽팽하던 결승선을 무너트렸다.
뒤늦게 눈을 깜빡인 순간에야 알게 됐다. 내가 방금 실망했으며, 그건 내가 기꺼이 지선욱과 함께 웃음거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다는 걸.
결승선을 통과한 건 둘이었는데, 스탠드로 돌아오는 건 안희연뿐이었다. 뒤를 보니 지선욱은 선생들이 모인 천막 쪽에 서 있었다. 스탠드로 오기 위해 천막 앞을 지나가다가 담임에게 붙들린 모양이다. 역시나 담임이 지선욱의 어깨를 두드리고 옆의 탁자에 놓여 있던 음료를 쥐여주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전속력을 내어 달린 것 때문인지 평소에는 죽어라 사수하는 앞머리까지도 헝클어진 채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안희연의 얼굴이 온통 붉었다. 안희연이 내가 건네는 이온 음료 캔을 받고서도 숨만 고르는 걸 지켜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라 적혀 있었어?”
“…엉?”
“종이.”
잠깐 머뭇댄 안희연이 곧 오버해서 손사래를 쳤다. 표정을 보니 멈칫했던 게 뒤늦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아아, 그거. 별거 아니었어. ‘이름에 이응 들어간 사람’이었나.”
“…이응?”
“어. 나 아니었어도, 이름에 이응 들어간 여자애면 누구든 데려갔을걸. 그냥 내가 제일 먼저 보였던 거고.”
볼을 긁던 안희연이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댔다. 마침내 발견한 지선욱에게 시선을 둔 채로 중얼대며 말을 이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 아니었으면 백퍼 오해했다. 잘못 걸리면 진짜 인생 좆돼….”
가볍게 고개를 저은 안희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확성기를 찾았다.
“야야, 이지훈. 너 빨리 미키 머리띠 찾아 써라. 이렇게 된 이상 응원상까지도 무조건 받아야 함.”
안희연이 스탠드를 뒤져서 찾은 머리띠를 받아들 생각은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선욱은 뒷짐을 진 채로 담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방금 저한테 관심이 없던 여자애의 볼까지 잠깐 빨갛게 물들였다는 사실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처럼.
유일하게 하교 시간이 다른 1학년까지 같이 하교하는 몇 안 되는 날인 탓에 72번 버스가 붐볐다. 좌석이 아닌 곳에도 애들로 꽉꽉 들어차 있어서, 안 부딪치려고 몸을 비틀다 보면 무리로 모여 서 있는 것이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가서야 맨 뒷자리에 붙은 좌석 두 개가 비었다. 그걸 용케 발견한 강영수가 잽싸게 엉덩이를 갖다 붙이고는 내게 오라며 손짓했다. 가려다 말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지선욱을 발견하고는 소리 내어 불렀다.
“야. 지선욱.”
야. 여러 번 불러도 쳐다보질 않길래 왜인가 했더니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지선욱 대신 그 옆에 서 있던 키 작은 여자애 하나가 뒤돌아서 나를 흘긋댔다. 영은이랑 같은 색의 명찰인 걸 보니 아래 학년인 것 같았다. 아, 미안. 짧게 사과하고는 최대한 여자애와 부딪치지 않도록 몸에 힘을 준 채로 손잡이 위에 있는 봉을 잡았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툭 치고 나서야 뒤돌아보는 지선욱의 손에는 영어 단어집이 들려 있었다. 슬쩍 봐도 알 수 없는 단어들만 가득한 걸 보니 또 고등학생용인 모양이었다. 문제집에서 시선을 떼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난 강영수가 있는 뒤를 눈짓했다.
“네가 가서 앉아.”
뒤를 확인한 지선욱이 귀 한쪽에서 이어폰을 뺀다. 눈 한쪽을 살풋 찡그린 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네가 안 앉고?”
“…어?”
“오늘 많이 뛰어서 다리 아플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 다리 상태를 확인하듯이 슬쩍 아래를 본 지선욱이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았다.
“난 괜찮으니까 너 가서 앉아.”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까지 돌려버리는 지선욱을 멍하니 보다가 나를 한 번 더 뒤돌아보는 한 학년 아래의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얼떨떨하게 몸을 움직였다. 강영수 옆자리는 다행히 아직도 비어 있었다. 무서운 부분이라고는 하나 없는 강영수도 3학년이라고, 뒤에 몰려 있던 아래 학년 애들이 딱히 그 옆자리를 탐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욱이 안 온대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물은 강영수가 하품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평소였으면 버스에 탄 순간부터 쉬지 않았을 문자질도 하지 않고 곧장 감길 것 같은 눈을 깜빡대기만 했다. 강영수뿐만이 아니라 버스를 탄 학교 애들의 대다수가 꾸벅대고 졸거나, 아니면 곧 잠들 것처럼 눈을 느리게 끔벅댔다. 나야 오랜만에 조금 뛰었다고 생각되는 날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운동 능력을 죄다 끌어서 쓴 날이었으니. 버스의 창을 통해 함뿍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머리 위를 노랗게 물들였다. 버스 내에 빈 곳을 바라보면 햇빛과 함께 들어온 아지랑이 같은 잔상이 사람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지선욱 머리 근처에도 그런 아지랑이가 두어 개 있었다. 강영수는 내 어깨에 머리를 처박고는 입까지 동그랗게 벌린 채로 자는 중이었다.
버스가 시내와 가까운 정거장에서 두 번 더 정차하고 나서야 사람이 가득 차 있던 버스가 한적해졌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 형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것처럼 아래에 둔 가방을 드는 걸 보자마자 흘끔 앞부터 확인했다. 설마 이걸 거절하진 않겠지 싶어서. 나 대신 앉으라는 것도 아니고, 너도 앉으라는 거니까. 예상처럼 차창 밖을 한 번 더 본 고등학생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차벨 소리와 함께 내릴 사람들이 출입구 쪽으로 몰렸다. 이미 사람이 좀 내린 후라 그런지 굳이 뒤까지 와 앉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몰라 좌석에 손을 걸쳐둔 채로 앞을 봤다. 지선욱은 아까 그 자리 근처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야. 지선….”
말은 끝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해서였다. 지선욱은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는 좌석 앞에 서 있었다. 놈 앞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 또한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고.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고데기까지 하게 만드는 오빠가 제 앞에 서 있다는 걸 모르는 강영은은 제 오빠랑 똑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입까지 동그랗게 벌린 채로, 기댈 사람이 없으니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무아지경으로 꾸벅댔다. 한 손으로는 영어 단어집을,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은 지선욱의 시선은 버스가 멈춘 순간에야 제 밑에 앉은 사람을, 이어서는 그 사람이 머리를 박고 있는 창을 향했다. 정확히는 창을 뚫고 들어와 잠든 영은이가 간헐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햇빛에 시선이 닿았다. 지선욱이 손에 든 영어 단어집이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흔들리는 머리통과 멀지 않은 곳에서 조심스럽게 멈춘 영어 단어집이 영은이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나처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법한 웃음이 지선욱의 입가에 아주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서투른 애정을 닮은 미소가.
무표정해진 지선욱은 다시 단어집에 집중했다. 그 후로 두 정거장을 더 가야 했음에도 나는 지선욱을 부르지 못했다. 뒤에 와서 앉으란 말을 또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거절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하루에 두 번이나 거절당할 자신이 없었다. 따지자면 걔가 싫다고 말로 꺼내놓은 적은 없는데, 나는 선택받지 못한 걸로도 거절당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에 약한 강 남매는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어어… 말조차 없이 대충 손만 들어 올려 흔들고는 비척비척 언덕을 내려 걸어가는 둘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방금 본 그 둘처럼 몸을 돌리는 지선욱은 당장이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질 기세였다. 의식도 하기 전에 몸부터 움직였다.
“야.”
다행히 놈이 언덕을 다 내려가기 전에 가방의 끈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귀에서 뺀 이어폰을 감는 중이던 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할 말이 있냐고 묻는 표정을 보며, 입 안에서 회오리치듯 뭉치는 말 중 꺼내도 되는 것을 고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괜히 혀로 핥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 있잖아….”
초조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들은 순간에는 당황했다. 이렇게 찌질하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괜히 한 번 헛기침했다.
가볍게 물어봐야지, 가볍게. 이걸 진지하게 물어보면 웃기기만 할 테니까.
가방끈을 잡은 손부터 떼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로 지선욱을 응시했다. 내일 학교 숙제를 물어보듯이 가볍게, 다음 주에 있을 국어 쪽지 시험 범위를 물어보듯 가볍게. 정말 몰라서 묻는 것처럼.
“너 아까 왜 안희연 데리고 갔냐?”
들은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던 지선욱의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아… 말이라기에는 애매한 신음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이해한 것처럼. 그러나 이걸 왜 물어보는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예상 못 한 질문이 당황스럽긴 했는지, 늘 읽기 어렵던 표정이 처음으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가볍게 물어보기로 했던 것도 잊고는, 지선욱의 눈치를 보며 왜 이런 걸 묻는지 해명하듯 늘어놓은 이유이기도 했다.
“종이에 뭐 적혀 있었는지 들었는데, 이름에 이응 들어가 있는 사람 찾는 거면 우리 반만 해도 사람 많잖아.”
“…….”
“뭐, 일단 나부터가 이씨인데… 걔보다는 너랑 친하고.”
별것 아닌 질문처럼 들리게 하려고 말소리 중간중간에 웃음을 섞었다. 그 와중에도 자꾸 입 안이 말랐다. 웃는 일이 힘들었던 적은 없는데, 지금은 좀 힘들었다. 별로 웃고 싶은 기분도 아닌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걸 묻겠다고 이러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사실 물으면서도 내가 정말 답을 듣고 싶은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이 대답을 듣지 않으면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그게 내 등을 이 언덕까지 밀었다. 답을 알지 못한 채 멋대로 추측하고 짐작하느라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빨랐다.
“너 데리고 갔으면 이상했을 것 같은데.”
웃음이 뚝 멈췄다. 지선욱은 입 밖으로 내뱉고서야 그 솔직한 발언이 냉정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처럼 나를 슬쩍 본 후 무심하게 덧붙였다.
“너 말고. 상황이.”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입술을 움직이려고 시도해서 그나마 아까 지선욱처럼 아… 하는 작은 신음을 내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중얼거리며 동조했다.
“아… 그렇긴 하지. 남자 두 명이니까.”
시계로 시선을 내린 지선욱이 동조하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지선욱이 다른 남자애들과는 굳이 나눌 필요도 없는 대화를 할 때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인 것처럼 보였다. 이어폰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은 지선욱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걸 물어본다고 꽤 멀리까지 따라온 걸 뒤늦게야 깨달았는지, 영감 집 쪽을 고갯짓하며 묻기도 했다.
“집 가서 같이 공부할래?”
나는 침을 삼켰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목을 가다듬는 순간에야, 내가 어색하게나마 계속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적어도.
“아니. 나 오늘 존나 뛰어서인지 좀 피곤해서… 그냥 집 가서 자려고.”
“그래, 그럼. 내일 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지선욱이 어깨를 툭 치며 대화를 끝냈다. 내가 붙잡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놈의 등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까처럼 넓은 운동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놈이 뛰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멀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놈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지고서야 애매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에서 힘을 풀었다. 차갑게 식은 얼굴을 감싸 쥐며 후회했다. 답을 가진 사람에게 확실히 대답을 듣고서야 내가 그딴 대답을 바란 게 아님을 알았다.
묻지 말고, 알아보려 하지 말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모르는 게 더 나을 뻔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