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25)

* * *

볼을 간질이는 손길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머리가 멍했다. 꿈을 꿨다는 건 기억나는데, 무슨 꿈인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 정도로 현실과의 경계선이 흐렸다. 겨우 중심을 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멀지 않은 곳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는 이지훈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부터 짓던 놈은 이내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깨네.”

내가 깬 걸 확인하고서도 놈의 손가락이 볼 위를 한 번 더 간질이듯 눌렀다. 산들바람처럼 가볍고도 산뜻한 동작이었다. 그 손짓만으로도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이지훈의 손이었기 때문일까 생각부터 들 정도로.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몸을 서둘러 일으키며 묻다 말고 목을 감싸 쥐었다. 목이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나는 눈을 거듭 깜빡이며 침대 헤드 쪽으로 기대듯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이지훈이 침대에 앉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민망했다.

몸을 일으킨 나 때문에 허공에 떠버린 손을 아무렇지 않게 회수한 이지훈이 피식대며 말을 받았다.

“잠꼬대 엄청 하더라, 너.”

“아….”

“눈도 안 떴으면서 왜 자꾸 대답해? 방에 안 들어왔으면 아직 자고 있는지도 몰랐겠다.”

이지훈이 장난치듯 건네는 말들이 낯설지 않았다. 내가 잠꼬대를 한 것도, 날 깨우러 온 이지훈이 그걸 언급한 것도 처음은 아니니까. 그럴 때마다 민망하긴 했지만.

딱히 스스로가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누가 깨워줘야만 일어날 수 있는 타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지훈이 집에 들어오고는 그런 횟수가 부쩍 늘었다. 내 출근 시간을 제 출근 시간처럼 여기고, 출근하기 전에 밥을 꼬박꼬박 챙겨준 놈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제 그렇게 들어와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지쳐 쓰러졌다. 먼저 씻으라고 배려해준 이지훈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던 것 이후로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그래 놓고 아침에 깨우러 온 것 또한 이지훈이라니. 머쓱함에 옆 탁자에 올려둔 시계부터 확인한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근하게?”

그러고 보니 이지훈은 모자만 쓰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완벽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출근하는 직장인이 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하고도 단정한 모습이 새삼 놈이 하는 일의 특성을 깨닫게 했다. 나는 튀어나온 한 올의 머리카락조차 없이 깔끔하게 잘 넘긴 머리와 빳빳하게 잘 다려진 놈의 정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었다. 이지훈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깨웠어.”

이 집에 들어온 후 이지훈이 출근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기 전 따로 인사를 하려 드는 것도. 그걸 의식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이지훈도 잠깐 이 상황이 어색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침대 시트에 시선을 내린 채로 침묵하던 놈이 어렵게 서두를 뗐다.

그리고….

“나 돌아올 때까지는 이야기 안 하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고, 너 혼란스러울 것도 아는데.”

“…….”

“그래도 이 말은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빛은 그 잠깐의 망설임조차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곧았다.

“어제 내가 키스한 거.”

그 한마디에 어젯밤의 기억이 눈앞에서 다시 펼쳐졌다. 이지훈도 그런 것 같았다. 놈의 눈 안에서 내가 낯설어하는 감정들이 일렁댔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돼.”

“…….”

“난 뭔가를 증명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네 마음을 우습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었어.”

이지훈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잔잔했던 표면에 파도가 일 듯이, 놈의 동요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몇 번의 파도를 지나 보낸 후에야 이지훈이 조심스레 다시 나를 찾았다. 이지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안면 근육을 긴장시킨 놈은 그러나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했어. 너랑 키스하고 싶었고… 그거 외에 다른 생각은 안 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지훈을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대고 아팠다.

“이제 좀 알 것 같아. 왜 우리가 헤맸고, 어떻게 해야 더는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

왜 사랑한다는 말 하나 없는 이런 문장들이 고백같이 느껴지는 걸까.

“더는 헤매기 싫어.”

“…….”

“그러려면 너나 나나, 솔직해져야 할 것 같고.”

내 눈에 시선을 둔 채로, 이지훈이 다짐하듯 말을 끝맺었다.

“난 준비됐어.”

말이 끝나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나는 그게 옆에 놓인 이지훈의 핸드폰으로부터 온 알림임을 알았다. 계획형인 놈은 중요한 일 전에는 항상 알람을 따로 설정해두곤 했다. 오늘도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는 일을 두고 미리 알림을 해둔 것이 분명했다. 이지훈은 내 예상처럼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화면을 잠깐 응시했다. 내게로 고개를 돌린 놈이 한숨을 쉬듯 고했다.

“가야 해.”

그러면서도 놈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입을 뗐다.

“생각해보니까 나흘 뒤 도착하는 시간이 밤이더라. 오래 쉬었다고 벌이라도 주는지, 도착한 후 삼 일 뒤에 바로 또 비행 스케줄이 있고.”

“…….”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급해. 그래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거 아는데도.”

손을 들어 턱을 만지작대며 한숨을 쉬던 이지훈이 고개를 돌리다 말고 작게 웃었다. 놈의 시선이 내 얼굴로 쏠려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놈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내 목덜미 뒤를 마사지라도 하듯 가볍게 주무르며, 이지훈이 자조적으로 중얼댔다.

“잠도 덜 깬 애를 두고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기억 못 하는 거 아냐?”

피식댄 이지훈이 손을 아래로 내려 내 어깨를 가볍게 잡아 눌렀다. 힘을 주지 않고 있던 몸이 쉽게 아래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나를 침대로 밀어 눕힌 이지훈은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다 덮어줬다.

“더 자. 깨워서 미안해.”

허벅지 옆, 이지훈의 무게가 얹혔던 곳이 가벼워졌다.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놈의 발소리가 방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지훈.”

이지훈의 말처럼 잠에서 덜 깬 나는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이지훈이 뱉은 말들 역시 여전히 내가 아는 언어로 소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놈이 떠나면 며칠간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알았다. 이지훈이 방금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멀쩡한 걸 꺼냈다.

“조심히 다녀와.”

멀어질 줄 알았던 발소리가 도리어 가까워졌다.

“다녀올게. 밥 차려놨으니까, 일어나면 먹고.”

나는 한 박자 늦게 눈을 떴다. 볼에 놈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음을 뒤늦게 깨닫고서야.

문이 닫혔다. 이지훈의 발소리가 밖을 향해 멀어졌다. 나는 머뭇대면서도 손을 올려 볼 위로 얹었다. 손가락을 움찔대지조차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얹어두고만 있었다. 만지는 순간,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온기가 느껴질까 두려워서. 그리고 문지른 순간에는 순식간에 사라질까 봐 또 두려워서.

* * *

-와, 드디어 받네. 너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계속 외근이어서 이제 봤어. 미안.”

-요새 그렇게 바빠? 너 바쁜 거 하루 이틀 아니긴 해도, 나 엊저녁부터 전화 다섯 통은 한 것 같은데 이 시간까지 메시지 하나 없길래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네가 경찰이라서 포기했어.

전화만 다섯 통을 한 게 아니라 메시지도 스무 개를 넘게 보내두었던 게 나름의 걱정임을 아는지라 말을 끊을 수 없었다. 이틀 전 수도권의 한 변두리 클럽에서 마약이 거래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줄곧 내려가 있었다. 선배들은 홍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바쁜지라, 신입만 데리고 나가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마약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걸 속여 파는 피라미 같은 놈 하나를 잡는 것으로 해결됐지만, 보고를 비롯해 처리해야 할 후속 일들이 남아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새벽에 복귀해 사건 보고서를 쓴 뒤에야 집으로 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니 오후 3시였다. 정신없이 씻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탄 후 쌓인 연락들을 겨우 확인했다. 뒤늦게 사건 보고서를 살펴본 선배들에게서 더 쉬다 저녁쯤 천천히 출근하라는 메시지들이 와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우리 팀의 문화를 생각하면 못 할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줄곧 자리를 비웠던 반장님이 돌아오시는 날임을 기억해내고는 차에 올라탔다.

반장님에게 최혁준 관련 일을 보고해야 했다. 틈틈이 모니터링을 하던 신입이 건넨 정보에 따르면, 오늘 오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먼젓번 기사보다는 한 시간 늦은 시간에 올라왔고, 이번엔 20분 뒤 삭제됐다. 공유 버튼 또한 저번처럼 막혀 있었다. 기사를 올린 곳은 지난번보다는 인지도가 높은 신문사였다. 채워진 족쇄를 하나둘씩 푸는 방식으로 기사가 풀리고 있었다. 계단식처럼 이뤄지고 있는 일들은 다음 스텝을 예고했다.

다음은 유명 일간지에서, [단독]을 달고 기사가 올라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지만 신기해. 어떻게 매번 이러냐. 꼭 내가 좀 한가해질 만하면 바통 터치하듯 네가 바쁘거나 이지독이 바빠져. 이러니까 같이 여행 한 번을 못 가지.

한가해졌다는 말이 사실인 듯 강영수의 말이 끝을 모르고 길어졌다. 시야에 들어온 경찰청을 확인한 나는 강영수의 말을 끊어야 할 타이밍임을 알아챘다. 지금 이 통화도 몰아친 사건들 때문에 사건에 인력을 협조한 지방 경찰청부터 사복 경찰들까지, 복잡한 부재중 전화 목록을 훑다 겨우 시선에 걸린 이름을 발견하고 전화한 거였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웅?

“맨 처음에 전화한 용건이 뭐였는데. 나 또 일 들어가야 해서.”

-아, 어엉. 오케, 오케. 빨리 말할게. 딴 건 아니고, 너 이지독 집 비밀번호 알지. 나 그거 좀 문자로 찍어서 보내주라.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몸이 우뚝 굳었다. 때마침 바뀐 신호에 정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내린 채로 의아히 대꾸했다.

“…이지훈 집에는 왜?”

-엄마가 반찬 보내줬는데, 그 김에 아저씨가 이지훈한테 보낼 것도 같이 섞어 넣으신 모양이더라고. 걔 비행 갔다며? 오늘 칼퇴할 거라 걔 집 들러서 넣어주고 오게. 우리 회사에서 가깝잖아.

“근데 아직 공사 중이잖아. 들어가 봤자….”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엄마 말로는 지난주에 끝났다던데? 예상보다 빨리 잘 끝났다고 아저씨가 그랬대. 내가 이지훈 아직 네 집에서 지내고 있다니까 오히려 신기해하더라고. 공사도 끝났는데 왜 거기 있냐고.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정보였다. 지난주에 아침을 먹다가 이지훈에게 공사 일정에 대해 넌지시 질문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만 짧게 답한 놈이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묻던 것도.

‘너 내가 공사 끝났다고 하면 또 집에 가라고 할 거지.’

답이야 뻔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놈에게 더 말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던 기억이 났다. 그로부터 한 주 전에 사라진 이지훈을 찾는답시고 이지훈의 집에 갔을 때도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봤던지라 당연히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우리가 약속한 두 달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공사를 맡은 사람들은 이지훈네 아버님이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었다. 아버님이 알고 계신 정보가 틀릴 리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아는 걸 이지훈이 알지 못할 리도 없고, 무언가 이상했다.

-여보세요? 욱아?

끊긴 줄 알았는지, 거듭 나를 부르는 강영수의 말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어. 미안. 뭐라 했지? 비밀번호 알려달라고?”

-엉. 그 치사한 새끼 내가 지네 집 더럽힐지도 모른다고 비밀번호 절대 안 알려주잖어. 그래두 너한테는 알려줬을 것 같아서.

“…….”

-바쁘겠지만, 나 퇴근하기 전까지만 찾아서 보내주라. 알았지? 바쁜 것 같으니 끊는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엉아가 조만간 또 맛난 거 사 들고 놀러 갈게!

전화가 뚝 끊긴 것과 동시에 뒤에서 경적이 크게 울렸다. 어느새 바뀐 신호를 확인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차를 움직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고서야 이지훈과의 개인 메시지 방을 발견했다. 돌아올 때까지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겠다는 것처럼, 이지훈은 지난 나흘 동안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 해도, 우리는 평소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는 편이 아니었다. 메시지 할 시간이 있으면 통화를 하곤 했고, 가끔 메시지를 할 때도 강영수가 있는 단체채팅방일 때가 많았다. 그를 증명하듯 스크롤을 계속 올려도 놈의 비행 일정만이 가득했다. 대화방을 훑으며 스크롤을 끌어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훈의 집 비밀번호를 발견했다. 2년도 더 전에 놈이 보내둔 거였다.

321516. 의미를 알 수 없는 여섯 개의 숫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복사해 강영수에게 보냈다. 대화 창을 나오려다 말고 놈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지훈

11월 29일 11:00 인천 출발, 뉴욕 도착 KE082편 /

12월 2일 17:25 뉴욕 출발, 인천 도착 KE091편 오전 11:02

가슴이 포위망을 좁히듯 조여들었다. 방금 확인한 핸드폰의 시계에 따르면 지금은 12월 2일 화요일, 4:23분이었다. 이지훈은 지금 하늘에 있었다. 뉴욕에서 출발했을 놈은 몇 시간 후에는 공항에 도착할 것이고, 곧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지난주부터 지방으로 내려가 철야 작업을 지휘했던 반장님은 일주일 만에야 경찰청으로 복귀했다. 카키색 야상을 펄럭거리며 들어선 그를 본 팀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오셨습니까, 반장님.”

“식사는요.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시죠. 드릴 말씀도 있고.”

“반장님. 아까 메시지로 간략히 보내드리긴 했는데….”

보고할 일이 밀려 있던 선배들이 앞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안부를 물었다. 반장님이 들어온 걸 보자마자 나부터 찾는 신입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신입이 프린트해준 서류가 있었다.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이 터진 주였다. 보고를 한대도 당연히 선배들에게 차례가 밀릴 거라고 여겼는데, 가방을 자리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반장님은 예상을 뒤엎었다.

“다들 할 말 많은 거 알겠고. 밥은 일단 급한 일부터 끄고 먹자. 지 경위,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따라와.”

나를 콕 집어 지명한 그가 사무실을 바삐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선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얼떨떨한 채로도 우선 서류부터 챙겼다. 일단 그를 따라가야 했다.

오늘도 반장님의 개인 사무실은 뜸하게 방문하는 주인을 먼지로 반겼다. 나보다 먼저 들어선 그는 저번처럼 창문을 활짝 열어뒀다. 겨우 여섯 시인데, 밖은 밤처럼 어두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방충망 틈으로 들어왔다. 반장님의 뻗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나는 그가 자리에 앉길 기다렸다가 들고 있던 서류부터 내밀었다.

“지난주부터 차혁준 실명 거론 기사가 이틀 간격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취재원 통해서 알아본 바로 소속사 쪽에서 벌인 일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알아.”

“…예?”

시큰둥한 태도의 반장님은 받아든 서류를 대충 훑고는 옆으로 밀어두었다. 야상 주머니를 더듬던 그가 담뱃갑을 꺼내다 말고 내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피울래? 내가 고개를 젓자, 더 권하지 않고는 하나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두리번대는 그를 본 나는 소파 옆에 있던 재떨이를 끌어와 그에게 내밀었다. 흘긋 나를 본 반장님이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며 머리를 의자에 깊게 기댔다.

보지 못한 새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의식한 것처럼 이마의 주름을 툭툭 두드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최정호 그 새끼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왜 내가 순서를 당겨 지목되었는지 말해주는 문장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딱히 그렇다 할 만한 움직임은 없었는데요. 최정호 쪽도, 차혁준 쪽도 잠잠했고요.”

바쁜 와중에도 태항건설을 비롯한 최정호의 움직임은 늘 주시하고 있었다. 저번에 잡혀 들어온 최정호 따까리들에게 면회 오는 인물들까지도 보고받고 있었고, 아직 구금되지 않은 최혁준 집 주변에도 사복 경찰들이 상주했다. 그중 어느 곳에서도 수상하다고 여길 만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던 반장님이 몇 번 빨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쪽 아니야.”

“그럼….”

“몸통 말고 수족. 법률사무소 쪽에서 대신 움직이고 있어. 이야기 새어 나오는 것 보니까 이미 변호인단 꾸린 모양이고, 돌아가는 꼬라지 보니 지키려는 건 차혁준이 아니라 최정호인 것 같고.”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렀다. 생각지 못했다. 반격하려는 움직임이 없기에 최정호가 최혁준이라는 꼬리를 차마 자르지 못하고 결국은 품고 가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척을 하는 것까지가 계획이었음을 모르고.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반장님은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차혁준한테 모든 혐의 씌운 후 꼬리를 자르겠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땅바닥까지 끌어내려 차혁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거고.”

“…….”

“그것 때문에 잠잠했던 모양이야. 시간 벌려고. 이제는 다 준비됐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는 태도고.”

한숨을 쉰 반장님이 야상 앞주머니를 뒤적댔다. 주머니 안에서 나온 건 직사각형의 네모난 명함이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명함을 민 그가 물었다.

“여기래. 최정호 맡을 법률사무소.”

나는 명함을 내려다봤다. 특별할 것 없는 하얀 배경에, 까만 글자로 적힌 글자들을 훑었다.

JI & YOU Partners.

(지앤유 법률사무소)

일하며 명함을 주고받을 때는 소속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어디서 나온 사람인지를 알아야, 그들의 목적을 파악하고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며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변호사들과 만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조사 단계부터 변호사를 대동해 앞세우는, 죄의식 얕고 돈 많은 소수의 마약 중독자들이 보통 그 대상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맡은 의뢰인이 죄의식은 얕고 돈 많은 새끼임을 확신하게 하는 법률사무소 이름을 확인한 후 위로 시선을 올렸다. 정자로 적힌 이름을 확인한 순간에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이름이 그 위로 박혀 있었다.

[지성근 대표]

* * *

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건물의 입구에 선 채로, 층별 안내도를 잠깐 바라보았다.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강남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건물이었다. 지앤유파트너스는 이 건물을 13층부터 17층까지 홀로 쓰고 있었다.

지앤유파트너스 로고 옆에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다른 회사의 로고가 붙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그 흔적을 보고서야 이곳이 내가 알던 곳임을 확신했다.

이 건물에 와본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였다. 나들이하다 말고, 급한 전화를 받은 아빠의 손을 잡고 이 건물에 들어섰었다. 아마 어린이날이었던 것도 같다. 아빠는 그런 날이 아니면 굳이 시간을 내어 나를 바깥에 데리고 나갈 만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돌아오겠다는 아빠를 기다리며, 로비의 카페에 앉아 홀로 시간을 때웠다.

이곳은 아빠의 직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보았던 로고는 정앤유파트너스였다. 이곳에 오지 않은 동안 앞 글자가 하나 바뀌었다. 아빠는 늘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목을 꺾었다. 그렇게라도 위를 바라보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라면 로고 앞에 제 성을 달아두기 위해서 기꺼이 제 삶의 모든 걸 바쳤을 것이다. 아내와 아들을 떨쳐내고 나서는 오히려 더 날아오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감상은 그뿐이었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을 넘긴 회사 로비는 한산했다. 1층의 사내 카페는 기억하고 있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페 이름은 바뀌었지만, 카운터 옆으로 놓인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들의 구조가 낯익었다. 늦은 시간을 입증하듯 카운터는 닫혀 있었다.

불이 꺼진 카페 안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꼰 채로 손에 들린 자료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안경을 쓴 채였다. 누가 쳐다보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한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나도 모르게 카페로 다가서며 희미하게나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을 정도로.

“…아버지?”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화하며 웃는 얼굴을 본 순간에는 맥이 탁 풀렸다. 왜 겹쳐 봤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낯선 얼굴이었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어쩌려고 여기 온 걸까. 그를 만난다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텐데. 나는 결국 발을 돌렸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차에 타서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댄 채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존재처럼, 일부러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곧 이지훈을 만나 이야기해야 할 텐데, 무슨 말을 할지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경찰청으로도 돌아가야 한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9시 뉴스에서 김명림 게이트 최혁준 사건으로 바꿔서 크게 때릴 거야.’

경찰청을 나서기 전, 반장님이 귀띔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라 당황했을 뿐, 최혁준이 전면에 드러나게 되는 게 최혁준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거였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이용해 최정호에게도 반격할 수 있었다. 반장님도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남은 건 증거 싸움이었다. 내가 최혁준 집에서 발견한 증거가 사건의 핵심 단서가 될 터다. 그러고 보니 그 증거 파일도 한 번 더 훑어봐야 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자꾸만 머릿속이 충돌했다. 이지훈이 당연히 1순위지만, 놈이 준 시간 안에서도 이렇다 할 만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나는 자꾸만 그 사실을 외면하려 들고 있었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지훈에 대한 생각만은 놓지 못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날의 키스가, 이지훈의 일렁거리는 눈이, 솔직해지자는 말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곱씹을수록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대체 어딜 헤맸다는 걸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를 붙잡으려고 굳이 길을 이탈해 헤매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데. 연인이 할 법한 스킨십을 흉내 내면서, 나를 위해서는 이것까지 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 같은데.

그날 내가 겪은 일은 심증이라고 보기에도, 물증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확실한 건, 확증이 없었다. 나는 이지훈은 이미 감을 잡은 듯한 문제를 두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핸들에 한 번 더 머리를 쿵 박으며 한숨을 쉬던 나는 멈칫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강영수

욱아 퇴근해써??? 오후 7:04

덕분에 비번 잘 치구 이지독 집 잘 다녀옴ㅋㅋ 보고하러 연락했지이 오후 7:05

아참 집 공사 끝난 거 맞더라

깨끗하던데? 세 집 살림도 이제 끝 >< 오후 7:06

그래두 간 김에 우렁 총각처럼 냉장고도 채워주고, 우편물도 정리해주고 그랬다

잘했지 오후 7:07

핸드폰을 집어 들자마자 상단에 떠 있던 강영수의 메시지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엔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이지훈이 내게 숨기려 드는 걸 파고든 적이 없었다. 애초에 뭔가를 숨기려 들지 않는 놈이기도 하고, 드러낸 것만 보기에도 때로는 벅찼다.

‘평소 하던 짓을 의식이라도 하듯이 반대로 구는 것만큼 확실한 경험적 증거가 있나 싶다, 난.’

언젠가 평소 같지 않은 강영수를 두고 놈이 꺼낸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이지훈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내가 모르는 이지훈이 있는 곳. 놈이 비밀번호까지 말해줬음에도, 내 발로 쉽사리 들어가 보려 하지 않았던 곳. 난 그곳을 늘 내가 가서는 안 될 공간으로 여겼다. 놈이 이사하자마자 한 집들이, 그리고 술에 취한 강영수를 데려다 놓기 위해서 들렀던 일 이후로는 거의 방문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곳에 내가 놓치고 있던 증거가 있을지도 몰랐다. 직감이 내가 그곳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옆좌석으로 던진 후 핸들을 쥐었다. 이지훈의 집으로 가야 했다.

공사가 끝났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지훈의 집 앞은 깔끔했다. 공사 부자재가 이리저리 널려 있던 그때와는 달랐다. 먼지 하나조차 없이 잘 정리된 집 앞을 보다가 도어락에 손을 올렸다.

321516. 그 짧은 새 완전히 외워버린 번호를 도어락 위로 입력했다.

띠릭-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손쉽게 열렸다. 잠깐 문고리를 잡은 채로 멈춰 있던 나는, 심호흡하듯 숨을 가다듬고서야 그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주인이 없음을 알리듯 집 안은 고요했다. 내가 들어서자 실내를 밝혀준 현관의 불빛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 상태였다. 신발을 천천히 벗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놈의 집은 내가 알던 것보다도 더 잘 정리되어 있었다. 흔한 페인트 냄새조차 나지 않는 게, 생각보다 더 오래전에 공사가 끝났음을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

깔끔히 정리된 집에서 튀는 거라고는 소파 옆에 놓인 택배 상자뿐이었다. 강영수가 내려놓고 간 게 분명했다. 강영수와 이지훈의 짐을 섞어 보냈다는 말을 증빙하듯, 테이프 뜯은 자국이 남은 택배 상자 속 생활 물품들을 잠시간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이내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덜렁 놓여 있는 우편물에 박혔다. 강영수가 이 또한 정리했다고 말한 게 기억났다.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긴 했다. 꼼꼼한 놈답게 이지훈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며 우편물을 받을 주소 또한 바꿔뒀다. 가끔 야근하고 돌아오면 이지훈이 분류해둔 우편물이 테이블에 놓여 있곤 했기에 알고 있었다.

그게 나만의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듯, 이지훈이 두 달 동안 집을 비우면서도 이 집 앞에 쌓인 우편물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정리했다는 강영수의 말이 생색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래전에 신청해서 뒤늦게 주소를 바꿀 수조차 없었던 것이든가, 혹은 일부러 이곳으로 보내둔 것이겠지.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우편물로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우편물은 통상적인 직사각형의 우편 봉투에 담겨 있지 않았다. 대신 투명한 비닐로 쌓인 잡지 위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선배님. 수정해주신 주소로 직접 배달했습니다♥

다시 한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치없이 급하게 추가 촬영까지 요청드렸는데... 저희 다 감동받았어요... 인쇄소에서 나오자마자 배달한 따끈따끈한 초본이니, 부족한 점이 있어도 너그러이 봐주세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월간스카이’ 편집자이자 항공운항학과 후배 정현, 예원 드림]

포스트잇 위의 글자를 읽은 것만으로도 어떤 잡지이며 왜 이지훈에게 배달됐는지 어렴풋이 가닥이 잡혔다. 학교 후배들에게 추가 인터뷰를 요청받았다던 이지훈의 말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지난주에 있던 일이었는데, 그새 초본이 나온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수정해주신 주소’라는 문구에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전자에 기울었던 생각과는 달리 후자의 가정이 확실시된 순간이었다.

이지훈은 잡지를 보낼 주소를 수정해 이곳으로 보내뒀다. 자신의 인터뷰가 담긴 잡지를.

나는 비닐 사이로 보이는 잡지의 표지를 응시했다. 항공 잡지임을 티 내듯 비행기가 확대되어 크게 담겨 있었다. 한참 그걸 바라보고서야 전에도 비슷한 잡지를 보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나 악몽 꿨어.’

일도 잠시 쉬면서 내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놈이 선언하듯 말하던 날, 거실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던 이지훈이 무릎 위에 얹어두고 보던 잡지가 이와 비슷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잡지를 집어 들었다.

이 또한 이지훈이 늘 갖고 있었지만, 한 번도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는 물건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는 놈이 부러 숨기기까지 했다는 특이점이 있었다.

비닐을 벗기는 손이 떨렸다. 비이성적이고도 허락받지 못한 행위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안 돼, 처음으로 겁을 내듯 날 잡아 세우는 목소리보다 행동이 빨랐다.

비닐 사이로 잡지가 드러났다. 인쇄소에서 바로 가져왔다는 말을 입증하듯, 만지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빳빳한 잡지는 완전한 새것이었다. 학교에서 발행하는 홍보용 잡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이지훈의 말과는 달리 꽤 본격적이었다. 상업 잡지처럼, 잡지 안에서 다루는 내용을 한 줄로 정리한 노란색 타이포가 표지 위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동문 인터뷰

-SS Airlines 부기장 이지훈

날 흔드는 누군가도 없는데, 조금만 방심해도 시선이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는 잡지를 넘겼다. 그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됐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손이 멈췄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인 듯, 재킷을 제외한 유니폼을 모두 차려입은 채로 정면을 보고 있는 이지훈의 얼굴이 페이지 한쪽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담겨 있었다. 양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똑바로 편 채로 서 있는 놈은 멀끔하면서도 얼핏 도전적으로 보일 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볼의 보조개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사진 속의 놈과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내렸다.

인터뷰는 얼굴이 나온 페이지를 제외하고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지훈의 경력을 비롯해 지금 하는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해둔 줄글에 이어 후배 인터뷰어와의 인터뷰가 대화 형식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현) 이렇게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사실 섭외하면서도 나와주실 거라고는 기대조차 못 했던지라, 나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배로 기뻤다.

(지훈) 그런 것치고는 섭외할 때 굉장히 절절하던데.(웃음) 내가 군대 갔을 때 편지 썼던 것까지 언급하면서 막… 안 나오면 역적이 될 것 같았다.

(예원) 군대 갔을 때 편지를? 제가 편집부에서 일하며 이것저것 주워들은 일화가 꽤 되는 편인데도, 이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듣는다.

(정현) 이 김에 고백할 게 있다. 당시 동기 중에 지훈 선배를 흠모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난 그냥 과방에 있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과대라는 이유로 우체통에 모인 편지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넣고 있더라. 그렇게 간 편지가 많으니 선배님은 아마 제 편지를 기억도 못 하실 거다. 다만 그 이야기를 꺼내며 애원할 정도로 섭외에 절박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지훈) 기억한다.

(정현) 제 편지를?

(지훈) 그렇다. 일단 남자 후배한테 받은 건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대충 쓴 티가 너무 나서 알았다. 볼펜 똥도 여기저기 막 묻어 있고. 할 말도 더럽게 없어 보였다. ‘선배님 초코파이 좋아하시나요?’ 이랬었나.

(예원) 아하학.

(정현) 변명을 하자면, 군인이면 다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줄 아는 미필이던 때였다. 이 기회에 사죄드리겠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다 기억하시면서 왜 저는 편지 쓴 다른 후배들과 달리 밥을 안 사주셨는지…

(지훈) 그 편지를 쓴 정성에 버금가는 식사 메뉴가 없었다.

(정현) 이 또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자, 바쁜 일정 속에서 시간 내어 나와주셨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 당시 참여하셨던 「F LY YOURSELF!」 프로그램이 올해로 10년 차를 맞았다. 2회 참가자이셨던 지훈 선배가 길을 잘 닦아주신 덕분에 그 후로도 많은 후배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지금도 지훈 선배님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혹시 감회가 어떠신지.

(지훈) 인터뷰한다고 너무 띄워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그냥 내가 앞으로 가기 위해 놓인 돌들을 치웠다. 철저히 날 위한 행위여서, 길을 닦았다고 칭찬받는 건 양심이 없는 행위 같다.

(정현) 그게 길을 닦은 거라고 저희는 생각한다. 프로그램 참여 후에 따로 학교 측에 제출하신 솔직한 피드백이 이후의 활동에 많이 반영되었다고 들었다. 2회 때와 비교해서 학교 측의 지원이 배로 늘었다. 이제는 프로그램 참가자에게 생활비까지도 일부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훈) 그건 다행이네.(웃음) 그냥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그러다 보면 뭐든 길이 보이겠지. 그게 활주로면 더 바랄 바 없는 거고.

이지훈의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활자 너머로 이지훈의 얼굴까지 어른거렸다. 때로는 과할 정도로 저를 띄우는 후배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그들의 고충에 공감하듯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일 놈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했다.

인터뷰는 몇 번 더 그 과정을 반복하고서야 끝부분에 다다랐다. 마지막 질문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미약한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예원) 아쉽지만 이제 정말 선배님을 보내드릴 때가 된 것 같다. 마지막 코너만이 남아 있다.

(정현) 개인적으로 정말 선배님의 반응이 기대되는 코너다.

(지훈)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무서워졌다. 이만 가도 되나?

(예원) 안 된다. 딱 하나의 질문만 남은 거니까, 이건 무조건 하고 가셔야 한다. 자, 이름하여, 「선배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코너다.

(지훈) 슬슬 왜 이 잡지를 간청까지 해가며 나와달라고 섭외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고 있다. 관리하는 유투브 구독자가 지금 몇 명이랬지?

(정현) 132명...

(지훈) 매해 신입생만 해도 200명은 넘지 않나.

(정현) 하하. 정말 아픈 데를 잘 찌르신다. 노력 중이고, 선배님의 인터뷰가 나가면 그보다 늘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질문에 꼭 답변해주셔야 한다.

(예원) 나름 유서 깊은 코너다. SNS에서 비슷한 밈이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이 코너를 운영해왔다. 심지어 교수님조차 이 코너를 피해가시지 못했다.

(정현) 세상에 첫사랑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시기 바란다.

(지훈) 난 없다.

(정현)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게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지 않나.

(지훈) 시작하기도 전에 망했다면 가능하지.

(정현) 망한 사랑도 첫사랑이다. 실은, 성공하는 첫사랑이 더 드물다.

(지훈)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전에 뭉갠 거에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기 싫다.

(예원) 그럼 첫사랑 말고, 그 시작하기도 전에 뭉갠 이야기를 듣고 싶다. 왜 뭉갰는가.

(지훈) 건넸다가는 버려질 것 같고, 쥐고 있으면 녹을 아이스크림 같아서. 그딴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손이 끈적끈적해지기 전에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잡지를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것을 중얼대며 잡지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눈가가 연이어 움찔대고,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그러면서도 다음 글자를 찾아 읽었다. 난 이것도 알아야 했다. 이 집에 들어온 이상, 내가 모르는 이지훈의 모습을 알아야 했다.

(정현) 뭔가 선배님이 그러셨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혹시 그 사람의 옆에 있기 위해서 그랬던 건가?

(지훈) 그랬다. 그리고 그 친구 옆에도 내가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 친구가 행복해지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원) 그런 이유라면 아쉽다. 선배님이 옆에 있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나.

(지훈) 글쎄. 물어봐야 알 텐데, 그때 이후로는 물어본 적이 없어서.

(정현) 혹시 지금이라도 고백할 생각은 없나. 어쩌면 그분이 이 잡지를 보실 수도 있지 않은가.

(지훈) 둘에게는 미안하지만 바쁜 친구라 이런 잡지까지 볼 시간이 없다. 그리고 이걸 확인해서 알게 하기도 싫다. 말해도 내가 직접 말해야지.

(정현) 그 말은, 지금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건가?

(지훈) 이미 대화하고 있다, 제조사랑. 그래야 탈이 안 날 것 같아서.

(정현) 일부러 헷갈리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제조사라면 그분 맞나?

(지훈) (웃음) 그만 말하고 싶은데. 질문 하나라며.

(정현)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모르지만, 선배님이 좋아하셨을 그분이 이 잡지를 보실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본인임을 확신할 수 있게 힌트 하나만 주실 수는 없나.

(지훈) 16번.

(예원) 선배님, 16번은 세상에 너무 많다. 하다 못 해 오늘 제가 이곳까지 타고 온 버스도 16번이었다.

(지훈) 상관없다. 나한텐 한 명이라서.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잡지를 줍지도 못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내가 인터뷰를 읽는 내내 울고 있었음을 알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선욱.’

나는 이지훈이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행복해?’

그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리고 내 사물함 번호가 16번일 때였다.

이응과 지읒. 이름순으로 부여된 사물함 번호처럼, 우리는 늘 붙어 있었다. 이동수업을 위해 움직일 때마다 늘 이지훈 옆자리를 찾아가던 나였고, 내 옆자리를 찾아 앉던 이지훈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았다. 내가 겁을 내며 한 번도 제대로 들어와 보지 않았던 놈의 마음 위였다.

캐리어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다니고, 서로를 다시 돌아보지 않고 지나치는 곳임에도 나는 그 바퀴가 나를 향해 구르고 있음을 알았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지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창백한 얼굴로 캐리어를 서둘러 끄는 놈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처럼. 앞을 본 채로 캐리어를 참을성 없이 끌던 놈의 시선은 도착지에 닿고서야 멎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의 차에 기대어 있는 나를 본 순간에야.

제1여객터미널 주차타워 B3층 D구역 33번에서, 나는 보닛에 기대어 있던 몸을 천천히 뗐다.

나를 발견한 이지훈의 표정이 멍해졌다. 내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내가 사라져버릴까 겁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어디선가 또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우리의 구역은 아니었다. 그 소리가 지나고서야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말을 뱉은 것과 동시에 놈이 캐리어를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한 걸음을 뗐다. 답지 않게 흐트러진 앞머리가 이마로 내려와 있고, 매고 있던 타이 또한 비틀려 있었다.

“솔직하게 대답해준다고 약속해.”

또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씹어 말하는 놈의 눈가가 붉었다.

나만큼이나 어딘가를 헤매고 온 것 같은 놈을 보며, 나는 한참 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뱉었다.

“약속할게.”

이지훈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때 뉴욕 왔을 때, 나 모르게 내 월세 대신 내줬어?”

나조차 잊고 있던 정보를 꺼내놓은 이지훈은 떨고 있었다. 뱉는 순간마저도 그 말이 지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지훈의 눈에 비칠 나도 별다르지 않은 꼴일 테다. 나는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최혁준, 네가 잡았어?”

십 년이 지난 지금 이지훈의 입에서 뱉어진 최혁준의 이름을 듣고서야, 우선순위에서 밀린 일이 떠올랐다. 9시 뉴스는 10시 뉴스가 되고, 포털사이트의 헤드라인 기사가 되고, 지나가는 승객들의 가십이 된다. 이지훈이 그 정보를 접했을 루트를 떠올린 순간, 인터뷰 속 이지훈이 한 말이 온전히 이해가 됐다.

그러게. 네가 그런 이야기를 그런 과정으로 알게 해서는 안 됐는데. 내가 직접 말했어야 했는데. 그거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였다. 네가 나를 향해 찾곤 하던 확신이란 건 그런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거였을지도.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러기 전에 이미 한 걸음을 뗀 이지훈이 더 가까워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을 뻗어 서로를 붙잡는 대신 묻는다.

“왜 그랬어?”

그 대답이 앞으로 내디딜 모든 걸음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걸 묻는 이지훈의 눈에 갇힌 나를 본다. 나는 처음으로 그 안의 나를 향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너라서.”

우리는 한 공간에서 헤매면서, 혹시 같은 길에 서 있을지도 모를 타인의 신호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눈먼 사람처럼 사랑을 탐색하다 코앞에서 멈춘 채로, 누군가 들을까 숨조차 쉬지 않았지.

“너라서… 했어.”

내 인생을 견인한 수많은 사건은 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조차 않았을 일임을 네게 말해야 했는데.

그럴 수 없다면, 그냥 그 길에 내가 서 있음을 밝히듯 숨이라도 크게 한번 쉬어 볼 것을.

그걸 못해서 너와 내가 헤맸다. 영영 닿지 못할 곳에 서로가 있는 줄 알고,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만 걸으려 애썼지.

이지훈이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내가 거울처럼 이지훈을 비추는 순간에야 나는 거울을 향해 이끌리듯 다가섰다. 눈을 떨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거울 속 인물이 나와 닮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처럼.

숨이 가까워지고, 붉은빛이 일렁이는 눈을 코앞에서 마주 봤다. 숨소리를 가장 가까이 들려주고 싶은 대상을 향해서 걸었다. 마찬가지로 이지훈이 걸음을 뗐다. 같은 지점에 멈춰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입을 맞댔다. 붙은 입술 사이로, 터지는 숨 사이로 우리가 차마 꺼낼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흩어졌다.

더 나눌 숨조차 없을 때가 되어서야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뗐다.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이지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주친 눈 또한 그랬다. 이지훈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갔다. 홀린 사람처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이지훈이 입술을 달싹댔다.

“나 너랑 자야 할 것 같아.”

붉어진 눈가를 보는데, 언젠가 놈을 저지하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대신 섹스하고 나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야.’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친구 할 사람이랑은 안 자.’

내가 잊지 못하는 그 순간을, 이지훈이 잊었을 리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건 선언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도.

나는 대답 대신 이지훈의 볼을 감싸 쥐었다. 한 번도 내가 욕심내지 않았던 것을 쥔 사람처럼 손을 떨면서도 놈에게 응답했다. 가벼운 소리를 내며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동시에 놈에게 대답했다.

“알아. 나도 너랑 잘 거야.”

오늘 밤, 우리의 관계는 끝난다. 그래야만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므로.

일단은 이지훈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인적이 드문 점을 감안해도, 이지훈과 키스 이상의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누군가 지나갈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이지훈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 순간에는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그 잠깐의 시간조차 견딜 수 없는 듯 다시 몸을 붙이려 드는 이지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자리부터 옮기자. 호텔을 가든지.”

그제야 내 말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주변을 잠깐 둘러보던 이지훈은 다시 내게 시선을 박았다. 호흡을 가다듬던 놈이 판단을 끝낸 것처럼 다시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냐. 집으로 가.”

이지훈이 집이라고 칭하는 곳이 내 집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에는 이상하게 목뒤가 쭈뼛하게 솟는 듯했다. 이전에 우리가 네 집이나 내 집이라고 칭했었던 공간은 오늘이 지나면 그 경계가 흐려질지도 몰랐다. 수식어 없이 그냥 ‘집’으로만 칭해도 되는 공간.

빤히 나를 내려다보는 이지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이지훈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 수도 있는데, 혼자 앞서나가는 내가 우스운 것도 같아서. 그러느라 차가운 손끝이 귀에 닿은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엄지와 검지로 귓바퀴를 둥글게 문지르며, 이지훈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중얼댔다.

“네 냄새 나는 곳에서 눈뜰 거야.”

애끓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멀리서 보면 꼭 내 어깨에 머리를 푹 숙인 것처럼 보일 동작이었다. 오랜 시간 비행을 하고 온 놈에게서는 잘 씻은 후에야 뿌렸을 향수의 잔향과 함께 시간이 쌓였음을 증명하는 날것의 체향이 섞여서 났다. 맡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가 느껴졌다. 생각을 거칠 필요 없이 달아오른 몸을 비비는 동물들이나 나눌 법한 신호였다.

귓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이지훈이 나머지 한 손으로 허리를 묵직하게 끌어당겼다. 조르듯이, 혹은 애원하듯이. 나는 놈의 손아귀에 몸을 내준 채로 고개만 살짝 꺾었다. 그렇게 한 것만으로도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는 열감에 젖은 눈과 마주쳤다. 마주친 눈에서 내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처럼 이지훈이 이번에는 볼을 은근하게 붙였다. 놈에게는 누군가가 지나가든 말든, 그런 건 이제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입술이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택시 타. 나 이 상태로 운전하면 일 칠 것 같아.”

바닥을 보이는 이성을 증명하듯 놈이 귓바퀴 안으로 흘려낸 목소리조차 뜨겁고도 습했다. 볼과 귀, 그 언저리에서 느리게 숨을 뱉는 놈의 호흡이 피부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맡고 있었던 냄새를 되새기듯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쉬는 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할 수 없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지훈이 나 때문에 이토록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래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열린 조수석 창문 사이로 택시 기사에게 집 주소부터 줄줄 읊던 놈이 앞 좌석에 앉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뒷좌석 문을 연 놈은 나를 그 안으로 먼저 밀어 넣더니 그 옆에 앉았다. 정거장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차는 새벽의 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렸다. 속도를 줄이는 법 없이 영종대교 위를 쌩쌩 달리는 차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빛을 뿜어냈다.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다 말고 멈칫한 건 갑작스러운 순간에 채이듯 붙잡힌 손가락 때문이었다.

“…….”

고개부터 돌린 나와 다르게 이지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끼워 앉으면 성인 남성 세 명이 앉을 수도 있는 뒷자리 중 가운데 자리는 당연히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얹혀 있지 않은 매끄러운 가죽 위로 손이 얽혔다. 어정쩡히 굳어 있던 내게 깍지를 껴서 제 손마디를 구석구석 밀어 넣은 놈이 얼얼할 정도로 힘을 줬다. 벌어진 틈 사이로 이지훈의 손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손가락 사이의 움푹 팬 홈 부분에 자리한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위치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까딱댔다. 나는 유독 더디게 움직이는 듯한 중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크기와 굵기가 다를 뿐, 꾸물꾸물 꺼덕대는 게 발기한 좆을 연상시켰다.

“한 시간 정도 걸릴까요?”

참을성 없이 손가락을 비벼대는 것치고는 퍽 멀쩡한 목소리였다. 룸미러로 이지훈을 흘깃 확인한 택시 기사도 그렇게 묻는 이지훈의 멀끔한 얼굴에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도로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늘였다.

“예예… 뭐 그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새벽이라 도로에 차가 없어서 십 분 정도 빨리 도착할 수도 있고요.”

“운전 잘하시죠? 면허증 발급 연도 보니 베테랑 같으신데.”

나는 방금 이지훈의 시선이 스치듯 지나간 보조석을 쳐다봤다. 보조석 앞에는 ‘택시운전자격증명서’가 붙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신경도 쓰지 않는 부분이, 목표를 정한 이지훈에게는 꼼꼼히 여겨볼 만한 가치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나만큼이나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운전기사와 달리 이지훈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시간 십 분 단축해주실 때마다, 두 배로 얹어드릴게요.”

도발적인 발언에 손끝이 움칫, 하고 떨렸다. 그게 손을 빼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이지훈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아까보다도 더 단단히 고쳐잡았다. 땀이 잔뜩 배어나 습한 손가락을 비벼대면서, 이지훈이 산뜻하게 덧붙였다.

“아, 도로 규정은 어기지 않는 한에서요. 그건 제가 혼날 것 같아서.”

급한 일이 있냐며 말을 건네고 허허 웃으면서도 택시 기사는 좌석을 조정하듯 앞으로 당겼다. 저 멀리 영종대교의 끝이 보였다. 긴 다리가 끝나면 다가올 신호를 가늠하듯 앞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택시 기사를 확인하고서야 이지훈이 몸을 물렸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차 문에 반쯤 몸을 기댄 이지훈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언젠가 본 것 같은 풍경이었다. 우리 사이에 강영수가 있고, 우리의 새끼손가락이 짧게나마 붙어 있었던 때.

이지훈은 그때와 달리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눈이 마주친 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놓지 마.

택시 기사가 띄워둔 내비게이션 화면의 도착 예상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앞자리를 향해 약속처럼 빳빳한 오만 원 지폐를 네 장 건넨 이지훈은 그 순간에야 땀으로 축축해질 정도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택시에서 내려서는 오히려 팔을 흔들면 스칠 법한 거리만 둔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복도를 걸으면서도 그랬다. 평소보다 서둘러 걷는 걸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다 어쩌다 엉킨 발 때문에 멈추고 서로를 흘긋 바라볼 때에야 둘 다 인내심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며 간신히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뿐이었다.

앞서 걷던 이지훈은 문 앞에서야 뒤돌았다. 방금 지나온 복도에서 우리를 따라 하나둘 켜진 불빛이 모두 꺼진 순간이었다. 손으로 목덜미를 제 쪽으로 잡아당긴 놈이 입술부터 거칠게 붙였다. 그 와중에도 이가 부딪치는 일은 없도록 고개를 꺾어 깊이 혀를 집어넣는 놈 때문에, 입 안의 점막이 긴장하듯 확 조여들었다. 닥치듯 다가온 놈이 나를 뒤로 밀었다. 딱딱한 문에 등이 부딪치는 순간 터진 신음조차 입술 안으로 집어삼켜졌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고서야 잠깐 고개를 뗀 이지훈은 삐비빅,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 사이로 나를 거칠게 붙잡아 넣었다.

“…큿!”

신발을 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급하게 입술을 빨며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들 위를 밟았다. 허리를 끌어당겨 제 아래와 붙이며, 이지훈이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안에 입고 있던 니트 위를 더듬대는 손길이 다급했지만, 허리의 선을 따라 지분대듯 만지는 손길은 타인의 살과 친해지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니트를 이룬 실이라도 풀어내듯 끈질기게 살살 움직이던 손은 이윽고 그 안으로 무리 없이 파고들었다.

“읏….”

나는 입술 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택시 안에서만 해도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던 손이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오는 동안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이지훈의 손이 닿은 살갗이 흠칫댄 건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그걸 용케 느낀 이지훈은 내내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고는 사과했다.

“미안. 금방 따뜻하게 해줄게?”

손을 뺀 이지훈이 손끼리 맞붙여 비비더니 끝내 제 허벅지에 대고 열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거듭 문질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입을 열려는데 또 한 번 입술이 먹혔다. 혀가 목구멍 바로 앞까지 말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키스였다. 입천장을 긁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혀를 말아 끝까지 밀어 올리는 놈은 굳이 손으로 잡지 않고도 키스하는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할 줄 알았다. 혀의 미뢰까지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딱딱한 신발장에 기대어 있는데도 자꾸만 뒤로 밀리는 몸 때문에 졸지에 성인 남성 두 명의 무게를 감당하게 된 신발장이 경고라도 하듯 덜컹댔다.

신발장 안에 있던 무언가라도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은 큰 소리가 난 후에야, 우리는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걸리적거린다는 듯 발을 허공에 대고 흔들어 구두 한 짝을 마저 벗은 이지훈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래를 여전히 붙인 채였다. 선이 살아 있을 정도로 빳빳하게 잘 다려진 정장 바지의 감촉이 생생했다.

“윽….”

“…하.”

입술이 잠깐 떨어질 때마다 어딘가 부딪쳤을 때나 날 법한 신음부터 흐르는 키스였다. 숨을 쉴 타이밍이 생기면 허겁지겁 들이마셔야 할 정도로 벅찬데도, 나는 다음 순간에는 놈의 혀가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입을 조금 더 벌려주며 내 입 안으로 들어온 혀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놈의 등이며 목을 힘껏 껴안았다. 코트 안에 손을 넣어 널찍한 어깨에 붙은 근육들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듯 쓸어내렸다. 이지훈은 내가 그럴 때마다 더욱 흥분하는 것 같았다. 성난 근육들이 내 손에 반응이라도 하듯 꿈틀댔다. 내가 쥘 수 있도록 머리를 순순히 맡긴 놈은 다음 순간 나지막한 신음을 입술 새로 흘리면서 정신없이 내 입 안을 탐했다.

입술이 서로가 넘겨준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고 느껴진 순간에야, 나는 미지근해진 이지훈의 손이 얌전해진 살갗 위를 무리 없이 문지르고 있음을 알았다. 허리를 가볍게 주물럭대던 큰 손이 어느새 길을 따라 배 위를 간질이듯 올라가고 있었다. 나 또한 이지훈의 코트를 막 벗겼을 때였다. 수월하게 벗길 수 있도록 팔 한쪽을 들어준 이지훈이 잠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나를 가볍게 밀었다. 턱, 하고 허벅지 뒤에 침대가 걸린 순간 이지훈이 무릎으로 나를 한 번 더 밀었다.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일으키려 드는 내 위로 놈이 덮치듯 몸을 숙여 혀를 내어 입술을 길게 핥았다.

“하… 하아….”

집요하고도 길었던 키스에 입술 사이의 타액이 실처럼 늘어났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그것을 지켜보던 이지훈은 입술을 짧게 붙였다. 가볍고도 질척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지훈이 다가올 때마다 긴장이라도 하듯 조여든 입술은 내가 내 입으로는 평생 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소리를 만들어냈다. 다섯 번을 연이어 듣던 내가 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빼자, 이지훈이 그러지 못하게 잡고는 한 번 더 잽싸게 입술을 갖다 붙였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쪽쪽, 빠는 소리를 내며 사이사이에 중얼대기도 했다.

“귀여워서 그래. 그새 부은 거 귀여워서.”

설명이랍시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웃음기라고는 없는 놈의 표정 때문에 두 배로 민망해지기만 했다. 살면서 귀엽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사선으로 기울던 고개가 놈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볼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서 절 바라보도록 고정한 이지훈이 씩 웃었다.

“이제 안 차갑다. 그치.”

직접 판단하라는 듯, 양 볼을 가득 잡아 만지작대는 놈의 손이 따뜻했다. 답을 바라듯 쳐다보는 놈에게 고개를 느리게 끄덕인 것과 동시에 입술이 다가왔다. 붙은 입술의 모양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내밀한 입맞춤이었다. 쏟아붓듯이 키스하는 와중에도 이지훈은 몸의 온도와 비슷하게 맞춰진 손으로 내가 입고 있는 니트를 부드럽게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입술을 잠깐 떨어뜨린 사이, 니트가 벗겨졌다.

키스에 집중하며 놈을 받아내느라 몸이 뒤로 자꾸만 밀렸다. 등에 딱딱한 원목이 닿고서야 움직임이 멈췄다.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밭은 숨을 쉬는 나를 두고, 이지훈이 눈을 맞춘 채로 천천히 몸을 아래로 숙였다. 목에 놈의 입술이 닿은 순간에는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말리기는커녕 놈이 하는 대로 끌려가던 걸 멈추고 처음으로 손을 뻗어 이지훈을 만류했다.

“아, 잠깐만….”

달아오른 분위기에 씻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잊을 뻔했다. 나야 이지훈 체향마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지훈은 어떨지 몰랐다. 남자와의 경험 자체가 처음일 놈에게 오늘 하루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몸 이곳저곳에 스며들었을 땀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순순히 밀려난 이지훈을 향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씻고. 씻고 하자.”

“…….”

“일하고 바로 간 거라, 아직 못 씻었….”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입이 다물렸다. 앓는 신음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고개를 내린 이지훈이 턱을 따라 키스하고 있었다.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어지는 입맞춤이 간지럽다가도 특정 부분에서 멈춘 후 입술을 깊게 묻는 놈 때문에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지금도 내 목과 쇄골 사이에 고개를 묻은 이지훈은 그 위를 핥고 있었다. 살갗에 코를 바짝 갖다 댄 탓에 놈의 코며 볼이 짓눌리듯 뭉개지고 있었다. 이지훈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살에 반쯤 파묻힌 날카로운 콧날이 쫑긋대며 움직였다. 음미하듯 깊고도 천천히 숨을 들이켜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좋은데, 왜. 흥분한 지선욱한테서는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싶고.”

아까 주차장에서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을 보자 순간 입 안이 말랐다. 이지훈의 표정 때문인 것도 같았다. 놈의 혀는 정말 거부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내 살 위를 핥고 있었다. 달콤한 무언가라도 맛보듯 살살 핥다가 돌연 그 위를 콰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기도 했다. 아… 참지 못한 신음이 희미하게 튀어나갔다. 이지훈이 흘긋 위를 보더니 내 등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허공에 떠 있던 내 손부터 잡아 눌러 침대에 붙인 놈이 바로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향수로 만들어서 뿌리고 다니고 싶을 정도니까 그냥 해. 어?”

내가 망설이면서도 대답하지 않자 놈이 기어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에야 존재를 알게 된 점 위를 애무라도 하듯 빨고, 핥고, 혀로 굴리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얼굴 근육까지 파르르 떨려왔다. 이런 미세한 간지러움에는 면역이 없었다. 움찔대며 바르작거리는 몸을 꽁꽁 붙든 채로 결국 까만 점 위로 멍 같은 울혈을 남긴 이지훈이 고개를 뗐다.

“내가 네 앞에서 너무 잘 참아서 지금 괜찮은 줄 아는 모양인데.”

까만 눈동자 안에 내가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던 애욕이 일렁거렸다. 어쩐지 피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시선까지 제게 붙잡아둔 이지훈이 붙들고 있던 내 손목을 끌어 자신의 아래로 가져갔다. 손끝이 벨트를 스친 순간에는 입술을 깨물게 됐다. 그런 내 반응 하나까지 관찰하고 있는 놈 때문에 표정을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지훈의 정장 바지 앞섶이 도드라질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설마, 했지만 정말 그 위로 내 손을 가져다 댄 이지훈이 그 안에 존재감이라도 확인시키듯 위를 뭉근하게 눌렀다. 왼쪽 허벅지 위로 수납되어 있던 좆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열을 품은 채로 꺼덕대고 있었다.

“너도 남자니까 알 거 아니야. 좆이 이렇게 섰을 때 급한 건 섹스야. 샤워가 아니고.”

남의 손에 좆을 쥐여준 사람치고는 태연하게 날 바라보는 놈을 보다가 손끝에 처음으로 힘을 줬다. 잘 뻗은 기둥을 따라 천천히 손을 놀렸다. 집에 들어와 내가 한 애무라고는 등을 껴안고 근육을 더듬는 것밖에 없었는데도 이 정도로 선 건 의외긴 했다. 나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숨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빨아줄까?”

“…뭐?”

놀란 표정을 짓는 놈을 무시하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당황한 얼굴로도 이지훈은 아래로 손을 뻗는 날 저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벨트의 끝을 잡고 끌어내듯 끌렀다. 까만 가죽 벨트가 구멍 사이로 뱀처럼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벨트를 침대 밑으로 던지고는 지퍼를 붙잡아 내렸다.

짙은 색의 드로즈 밴드 끝이 살짝 들려 있었다. 아마 안에서 크기를 키운 이지훈의 좆 때문일 거였다. 나는 밴드 안으로 손을 미끄러뜨리듯 넣었다. 딱딱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잘 짜인 둔부의 근육을 따라 손을 굴리다가 유독 윤곽이 도드라진 부분의 밴드를 조금 튕기듯 아래로 내렸다. 이지훈의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드로즈 위로 퉁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이지훈의 좆을 본 건 아무 생각도 없이 같이 씻는 게 가능했던 중학생 때였다. 그때와 달리 곧 저게 내 입 안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고 크기를 가늠해 보는 건 느낌부터 달랐다.

별생각 없이 봤을 때만 해도 크다 싶었는데, 거기서 더 커질 수도 있는지는 몰랐다. 좆이 계속 자라기도 하나. 하긴 고등학교 때도 키가 일 년에 5cm 넘게 계속 크던 놈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심지어 쿠퍼액이 새어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완전히 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

잠깐 막막하게 바라봤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지훈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린 채 아래로 입술을 가져갔다. 끝을 완전히 물기 전 위를 힐끔 보다가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놈이 마른세수하듯 볼을 감싸며 헛웃음 쳤다.

“…좆되네, 진짜.”

놈은 그러나 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그저 내가 앞으로 뭘 할지 파악이 끝난 것처럼 다음 행동을 기다리듯 날 빤히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에서도 눈만큼은 여전히 감추지 못한 열로 가득했다.

“뭐 해? 빤다며.”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이지훈이 무릎에 힘을 줘 세웠다. 더 빨기 쉽도록 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는 놈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로, 이지훈의 좆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크기도 그렇고 어차피 처음부터 입 안에 다 담지는 못할 것 같아서 끝부분만 살짝 물었다가 입술을 뗐다. 귀두 끝 둥그런 부분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친 나는 기둥을 따라 입을 맞추다가 곧이어 끝을 빨아들였다. 이지훈의 좆은 아무리 빨아도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두툼한 아이스크림 바 같았다. 다 물지도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크다는 것과 깨물어 먹지 못한다는 것 빼고는 비슷했다. 이를 세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잇몸에 힘을 빼고 점막을 이용해 흡착하듯 가볍게 빨아들였다. 끝을 완전히 머금자 이지훈의 바디워시 향이 스치듯이 나는 것 같았다. 그 향의 흔적을 쫓듯 혀를 놀렸다. 샤워하며 거품이 지나갔을 곳을 찾아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콕콕 박고, 혀의 넓적한 면을 이용해 기둥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하….”

무언가를 참는 것 같은 응축된 한숨을 흘리면서도 이지훈의 시선은 줄곧 날 향해 있었다.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놈이 날 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수 없었다. 뜨거운 시선을 받아내는 볼 부근이 화끈했다.

입 안의 좆이 크기를 키우는 와중에도 놈은 흔들림 없이 제가 입고 있는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툭툭, 하고 단추 풀리는 소리가 났다. 셔츠를 말아 던져버린 놈 덕분에 나란히 상체를 탈의한 차림이 되었다. 손으로만 더듬더듬 만졌던 큰 가슴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직각의 어깨부터 허리 아래까지도 빈틈없이 근육이 자리했다. 좆에 힘을 주고 있어서인지 갈라진 복근과 이어지는 곳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에서 시선을 뗀 나는 눈을 감았다. 남의 몸을 보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건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놈의 좆은 빨리면서 꾸준히 부피를 키웠다. 이러다 입가가 찢어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입을 한계치까지 벌려야 했다. 턱에서 뻐근함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해야 놈의 좆을 다 머금을 수 있었다. 그런 보람이 있게 이지훈의 성기는 크기를 키우다 못해 점차 움찔대기 시작했다. 혀가 지나가는 곳마다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일부만 삼킨 탓에 처음엔 혀 끝부분까지만 들어왔던 이지훈의 좆이 이제는 목구멍 안을 스칠 정도로 커졌다. 잘못하면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할 것 같아서, 머리를 조금 더 이지훈의 배에 박고는 아예 목구멍을 열고 좆을 끝까지 삼켰다. 잘 관리된 이지훈의 꺼끌꺼끌한 음모가 볼에 닿았다. 거슬렸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계속 하던 짓을 했다.

“…잘하네, 거슬리게.”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이지훈이 아래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헤집었다. 두피를 따라 내려가던 손이 귀를 한 손에 쥐었다. 귓바퀴 안으로 손가락을 넣으며 주변을 마사지라도 하듯 조물대는 손은 내가 혀를 깊게 놀리는 순간에만 간혹 멈췄다. 거슬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위를 힐끔댔지만, 다행히 화가 나거나 거부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싫었으면 이미 몸을 물렸겠지.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갈라진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놈의 흥분이 커지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행동으로 이지훈이 착실히 흥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포기하기도 싫었다.

펠라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허리를 움직이지 않는 놈을 대신해 나는 고개를 뒤로 뺐다가 이내 다시 앞으로 당기기를 반복했다. 입 안의 점막이 이지훈의 성기를 제 것처럼 흡착해 꽉 물고는 이내 놓아주길 반복했다. 목구멍 안까지 깊숙하게 이지훈의 좆을 처박을 때마다 고환이 턱 끝을 스쳤다. 돌 같은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을 떼 고환을 감싸자 이지훈이 거친 신음을 흘리며 뒷덜미를 제 고간 사이로 끌어당겼다. 좆을 목 안으로 박아 넣을 만도 하건만, 참기라도 하듯 계속 태연함을 유지하던 놈이 처음으로 보인 급한 신호였다. 사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나는 이지훈의 복근에 손을 올린 채로 피스톤질하는 것처럼 고개를 뒤로 뺐다. 순간 움직인 좆 때문에 목구멍이 아닌 볼로 놈의 좆을 받아내야 했다. 좆의 모양대로 볼 위가 툭 튀어나왔다.

“야, 그만해.”

갑자기 뒷머리가 잡힌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입에 담고 있던 이지훈의 성기가 입술 사이로 꿀렁 빠져나갔다. 입 안에 품고 있던 것을 한 번에 잃어버린 입술이 벌어졌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느껴졌다. 두피가 당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의 꺾이듯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놓았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촌스러운 기분 들게 하는 데 재주 있어, 하여간.”

그게 뭔 뜻이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입이 맞물렸다. 내 허리를 잡은 이지훈이 나를 뒤로 눕혔다. 세워져 있던 몸이 뒤로 급하게 넘어갔다. 방금까지 제 좆을 담고 있었던 곳인데 거부감도 없는지, 거칠게 밀고 들어온 이지훈의 혀가 입 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좆이 드나들었던 목구멍 입구까지 들어찬 혀 때문에 숨이 달렸다. 웁… 뭉개진 신음을 뱉으며 놈을 잡으려 뻗은 손이 허공을 휘젓다 말고 이지훈의 손에 잡혔다.

이쯤 되면 거의 손깍지는 습관인 것 같았다. 내 위로 엎드리듯 몸을 숙인 놈 때문에 맞닿은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지훈은 아까보다도 더 급하게 입술을 파묻었다. 도장이라도 찍듯 아래로 내려가던 놈의 입술이 가슴께에 닿은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생경하고도 불편한 감각이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를 눈치챘는지 슬쩍 위를 본 이지훈은 물러나는 것 대신 손으로 가슴 주위의 살까지 아예 그러쥐며 물었다. 큰 손이 가슴 한쪽을 무리 없이 움켜쥐었다. 손이 뭘 쥐고 있는지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계속 조물거리며 만졌다.

“왜. 하지 마?”

“…….”

“싫으면 안 할게.”

“싫다기보다는….”

“낯설어?”

낯설다기보다는, 굳이 그런 수단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해야 옳겠지. 애매한 내 반응에 흐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좁히던 이지훈이 짧게 웃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네.”

순간 어깨를 수그리다가 신음을 흘릴 뻔했다. 놈의 손끝이 유두의 오돌토돌한 살을 긁어내듯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다.

“남의 좆 자주 빨아준 티 내서 기분 잡치다가도, 또 이럴 때 보면 제대로 빨려본 적 없는 사람 같고.”

무표정한 얼굴로 줄줄이 뱉는 말을 듣고서야 아까 펠라를 멈추게 한 놈의 행동이 이해됐다. 거슬리니 뭐니 하는 말이 내 지난 경험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말문이 막힌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놈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워 문질렀다. 평생 받아본 적 없던 자극이 한꺼번에 몰린 탓에 유두 끝이 빳빳해지고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이지훈의 손톱이 표피의 한 곳을 꾹 누를 때마다 덩달아 놀란 복근이 조여들 듯이 움칠 떨렸다. 그 떨림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래가 묵직했다.

내 허벅지 위로 하체를 겹치고 있던 이지훈은 그 사실을 나보다도 먼저 파악한 것 같았다. 아래를 슬쩍 본 이지훈은 다음 순간 고개를 내렸다. 놈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유두를 손쉽게 삼켰다. 방금까지 놈의 손에서 굴려지느라 쓰리게까지 느껴지던 유두가 한층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눈앞이 아찔했다.

“아… 좀….”

숨이 자꾸만 안으로 고여 들었다. 불편하다가도 아찔하고, 아찔하다가도 불편했다. 풀려난 손으로 놈의 어깨를 힘없이나마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유두를 빠는 힘만 강해졌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는 이지훈의 어깨에 손을 어정쩡하게 얹은 채로 멈췄다. 놈의 이런 행동이 치졸한 질투나 심술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낯설어할수록 내가 이런 행위를 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자신하고 일부러 하는 것임을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에.

내가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자 유두를 굴리는 혀 놀림이 부드러워졌다. 고양이가 솜뭉치를 갖고 놀 듯이, 이지훈의 혀가 내 유두를 이리저리 굴리며 놀았다. 판판한 가슴을 집요하게도 핥는 놈이 바라는 건 나의 흥분뿐이라는 사실에 배꼽 아래가 당기는 것 같았다. 유두를 자극받는 것보다는 그 사실 때문에 호흡이 가빠졌다.

“…하.”

이지훈의 머리를 끌어당겨 왁스가 거의 다 풀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었다. 겨우 빨리는 느낌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른 쪽 유두로 입술이 옮겨갔다. 그러고는 또다시 시작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위로 올린 채 내가 정말 싫어하는지 반응을 살피는 놈의 눈초리 때문에 아래에 시선을 두는 시간이 점차 짧아졌다. 이지훈이 다른 쪽 유두를 물기 위해 뱉은 유두가 오랜 시간 시달렸음을 증명하듯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런 행위를 하는 걸 멈추지 못하면, 나라도 안 볼 요량으로 손을 엎어 눈 위를 가렸다. 그러나 그조차 오래가지 못하고 손이 붙들렸다. 내 손을 꽉 잡아 깍지를 낀 이지훈이 오른쪽 유두를 뱉었다. 열심히 빨아댄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이 침으로 반들반들했다.

“무슨 생각해?”

대답하지 않으니 이지훈이 방금까지 물고 있던 유두로 다시 입술을 가져갔다. 앞니로 살짝 깨무는 행동에서 통증을 닮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나마 숨소리를 가다듬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한참 이 짓만 할 것 같았다. 한숨 같은 말이 분절되어 흘러나갔다.

“존나 열심히도 빤다… 그런 생각….”

이지훈이 킥킥대고 웃었다. 위로 고개를 올린 놈이 볼을 붙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쪼듯이 여러 번 키스하고서야 이지훈이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뒤로 뺐다.

“어딜 또 존나 열심히 빨 수 있는지 한번 볼까.”

장난스럽게 말한 놈이 답을 정해둔 것처럼 내 청바지에 손을 댔다. 그러더니 손끝으로 유독 묵직한 곳 위를 툭툭 쳤다. 이지훈만큼은 아니어도 나 또한 아래가 발기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놈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굴 줄은 몰랐을 뿐이지. 당장 펠라라도 할 기세로 고개를 가져가는 놈을 본 순간에는 덜컥 손부터 튀어나갔다.

“야.”

다행히도 이번에는 놈이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어깨를 잡을 수 있었다. 난 황급히 고개부터 저었다.

“안 그래도 돼.”

“뭐?”

“안 빨아줘도 된다고,”

“무슨 말이 그러냐. 넌 다 빨아놓고.”

“넌 나랑 다르잖아. 남자가 처음이고.”

멈칫한 이지훈과 눈을 맞췄다. 놈과 잘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쉽게 말할 수 있었다.

“무리할 필요 없어. 그런 거 바라고 자자고 한 거 아니야.”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입을 맞추고, 옷을 벗기는 순간에도 거리낌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막상 저와 같은 남자의 좆을 보고 그걸 입에 물면 거부감을 느낄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지훈과 자고 싶었던 건, 이지훈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시험해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놈이 나와 같은 마음인지를 살을 부대끼며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건 놈이 내 좆을 빨아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실은 이렇게 눈을 맞추고 한 번도 욕심내지 못했던 놈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금도 좋아. 그냥… 너랑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꿈 같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치 이상으로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잠깐 날 응시하던 이지훈이 서서히 다가왔다. 가까운 곳에서 놈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로의 눈 안에 서로가 투명하게 비쳤다. 이지훈이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푸스스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운데.”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얼굴 곳곳에 키스를 쏟아붓던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그보다 더한 것을 바라는 것처럼 내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얼른 입을 맞대고 싶은데, 할 말이 있어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다.

“네 말에 맞는 부분이 있고 틀린 부분이 있어.”

잠깐 한숨을 쉰 놈이 고개를 움직였다. 볼, 광대, 눈가까지 간지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내가 뒤로 고개를 빼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어깨를 짚은 놈의 손조차 가벼웠다. 그런데도 뿌리칠 수가 없어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아까 놈의 벗은 몸을 봤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귓불 위로 지분거리다 못해 잠깐 그 위로 입술을 대고 있던 이지훈이 속삭이듯 말했다. 비밀이라도 말해주듯이.

“내 인생에 남자가 너 하나뿐인 건 맞는데.”

“…….”

“너 나한테 지금보다 더 바라도 돼. 좆 빠는 건 바랄 필요도 없이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거고.”

코끝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콧등을 따라 입술이 지나간 흔적이 남는 것 같았다. 눈 앞머리까지 쫓아온 입맞춤에 눈이 자동으로 감겼다. 떨리는 눈꺼풀 위로 입술을 붙인 이지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준비됐다는 말, 그냥 한 거 아니야. 너한테 다 준다는 의미야.”

진지한 눈을 본 순간에는 모든 것이 잊혔다. 이렇게 누운 순간까지도 날 두렵게 하던 것들, 혹시나 하고 나를 뒤로 잡아 누르던 걱정들까지도 모조리 분해되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거 바라도 나 너한테 뭐라 안 해. 무리한다는 건 선이 정해져 있고 그거 넘는 게 싫다는 건데, 난 너이기만 하면 그게 뭐든 안 싫어.”

“…….”

“그냥 지금처럼 솔직하게만 말해. 그런 생각 하면서 도망치지 말고.”

응? 입술로 내려온 놈의 입술이 대답을 재촉하듯 내 입술 근처를 지분댔다. 간지러운 스킨십에 자꾸만 뒤로 빼고 싶은 걸 참고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의 손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잠깐 멈칫한 나는 아까처럼 만류하는 것 대신 지퍼를 내린 놈이 바지를 수월히 벗길 수 있도록 허리를 들어줬다. 청바지를 벗겨 옆으로 밀어낸 놈이 드로즈 위로 드러난 좆을 쥐며 중얼댔다.

“…그때보다 더 커졌네.”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감상을 뱉는 놈을 보자 등골이 찌릿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알몸을 보았을 때를 이지훈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며 서로의 크기를 견주듯 장난이나 쳤지,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하며 그걸 어떻게 삼킬까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관찰을 넘어 이젠 여러 각도에서 감상이라도 하듯 뚫어지게 지켜보던 놈이 드로즈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렸다. 이미 발기해 있던 좆이 드로즈 밖으로 기다렸다는 것처럼 튀어나온 순간 바로 이지훈의 손에 잡혔다. 단정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을 지나칠 정도로 잘 지키는 놈이라 늘 손톱마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특별히 마디가 굵지 않으면서도 잘 뻗은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붉은 좆이 생경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이지훈이 그것을 꽤 잘 흔든다는 것조차.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그 안에 기둥을 넣고 흔들면서도 엄지손가락으로 선단의 끝에 적당히 힘을 줘 문대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집중한 표정으로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는 놈은 나보다도 더 흥분한 낯이었다. 나는 그 낯선 낯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몸에 힘을 풀었다. 내 좆으로 이지훈이 자위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몸에 전류라도 흐른 것처럼 배 안이 찌릿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서서히 올라오는 흥분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후으….”

별것 아닌 손장난인데, 이지훈의 손에 잡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의 속도가 빨랐다. 부풀 듯 팽창하는 내 좆을 바라보던 이지훈이 몸을 서서히 숙였다. 좆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놈이 끝을 베어 물듯 살짝 머금었다. 아껴먹기라도 하듯 야금야금 좆을 삼키는 놈 때문에 아래로 열이 몰려 뭉치는 기분이었다. 원래 걸리던 것과 비교하면 턱도 없는 시간에 지나칠 정도로 흥분했다.

“잠깐, 만… 아….”

“잠간 엄어, 이에.”

좆을 문 채로 말하는 놈 때문에 입 안의 여린 점막이 좆을 조물조물 삼키는 게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파정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발끝이 긴장한 것처럼 빳빳해지고, 허리가 추삽질을 예행하듯 뒤에서 앞으로 바짝 당겨졌다.

“야… 야, 비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를 밀어내려 다급히 뻗은 손 위로 제 손을 덮은 이지훈이 그제야 물고 있던 성기를 뱉었다. 사정 직전까지 팽창한 좆에 얼굴을 가져다 댄 놈이 날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볼이 성기에 눌려 있었다.

“네 좆이 나 좋대.”

눌린 볼 위로 보조개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게 이지훈이 진짜 기분이 좋을 때나 짓는 미소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손을 말아쥐며 가까스로 참고 있던 마지막 힘마저 풀렸다.

아, 씨발…

눈을 질끈 감은 것과 동시에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겨우 그 전에 발에 힘을 줘 발바닥으로 가슴을 차듯 밀어냈지만, 이미 이지훈의 턱까지 정액이 튄 뒤였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놈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러지 못하게 막는 속도가 더 빨랐다. 팔 한쪽을 뻗어 내 가슴팍을 막아낸 채로 턱 밑에 묻은 액을 닦아낸 이지훈이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덤덤히 중얼거렸다.

“색이 짙네. 그간 자위도 잘 안 했나 봐?”

“…아, 좀. 손 내놔. 핥지 말고.”

“왜? 향이랑 맛이 똑같을지 궁금한데.”

상상도 못 한 말을 뻔뻔하게 지껄이는 놈 때문에 귀까지 뜨거웠다. 비리기까지 한 정액 냄새를 맡으면서 신상 음료라도 시음하듯 말하는 놈이 진짜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이 없어 보여서 놀라울 정도였다. 내 표정을 봤는지 놈이 왜? 물었다. 웃지 않는 걸 보니 장난으로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거 바라도 나 너한테 뭐라 안 해. 무리한다는 건 선이 정해져 있고 그거 넘는 게 싫다는 건데, 난 너이기만 하면 그게 뭐든 안 싫어.’

진짜 나여서 저게 다 괜찮다는 건가. 눈으로 보는데도 잘 믿기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놈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한 나는 이지훈의 좆으로 눈을 내렸다. 그새 더 부피를 키운 좆은 뱃가죽에 달라붙을 정도로 빳빳하게 서서 꺼덕대고 있었다. 참고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제 좆을 그렇게 방치한 채로, 내 좆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는 이지훈을 보니 결심이 섰다. 나는 이지훈의 어깨를 잡아챘다. 의아하게 위를 올려다보는 놈에게는 설명하듯 빠르게 말했다.

“잠깐 눈 감아.”

“왜?”

“일단 감아 봐.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잠깐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꾸 재촉하는 나를 이기지 못한 이지훈이 눈을 감았다. 나는 옆으로 살짝 몸을 일으켜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했는데, 다행히도 언제 사둔 건지조차 모를 젤과 콘돔이 있었다. 콘돔을 이지훈의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고 젤을 쥐었다. 그러면서도 이지훈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눈이 꾹 감겨 있었다. 나는 젤을 손 위로 죽 짰다. 한 번 숨을 깊게 쉬고는 젤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아래의 구멍으로 가져갔다. 이지훈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혼자 뒤를 풀 예정이었다. 원래였다면 씻으면서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미 그러기에는 늦은 것 같았다.

과정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뒤를 풀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을 뿐인데도 구멍이 낯선 침입자에 대비라도 하듯 긴장해서는 한층 더 꽉 다물렸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몸을 이완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주름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놀란 것처럼 구멍이 빠르게 조여들었다. 손가락에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입술을 물고 있던 힘까지 풀릴 뻔해서 재빨리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새어 나오는 신음을 이지훈이 들어서는 안 됐다. 아래를 푸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눈까지 감긴 상태인데.

나는 이지훈의 좆을 흘끔대며 구멍 안에서 손을 조금씩 움직이려 애썼다. 네 개를 다 넣어도 놈의 좆 굵기에 갖다 댈 수나 있을지 의심이 가는데, 이 속도로는 턱도 없었다. 판단을 마친 나는 뻑뻑한 구멍을 무시하고는 손가락 한 개를 더 욱여넣었다. 아까와 똑같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입술을 아득 깨문 탓인지 신음은 흐르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덩달아 긴장한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렸다. 등 사이의 골에 땀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나머지 한 손으로 시트를 그러쥔 채로, 신음을 참으며 손을 놀렸다. 그래도 손가락을 빼고 싶은 충동을 참고 계속 휘젓고는 있으니 아래의 감각이 아주 느리긴 해도 점차 무뎌지는 것 같긴 했다.

조금만 더… 조금 더… 안의 점막을 긁어내듯 세 번째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깊숙이 넣던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갈수록 어차피 이지훈에게 이걸 하라고 시킬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으니까. 이 사이로 흐르는 신음을 막기 위해 짓씹은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왜 너 혼자 섹스하냐?”

순간 숨을 멈춰야만 했다. 아픔에 눈조차 질끈 감느라 정작 이지훈을 감시하지 못했다. 점막에 붙어 있던 손가락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순간에는 허억… 하고 참고 있던 숨이 거칠게 터졌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물고 있던 입술이 풀린 탓이었다.

“상 줄 줄 알고 눈 감았는데, 벌이었네?”

“이지, 훈, 손… 손 빼.”

“씨발, 하나 넣었을 때는 표정 못 봤잖아.”

이지훈이 급하게 삽입한 손가락이 이미 내 손가락만으로도 버겁던 비좁은 구멍 안을 꾸물대며 파고들고 있었다. 놈의 손이 들어선 것만으로도 구멍이 빠듯하게 좁아졌다. 이지훈의 손가락까지 합해서, 구멍 안에 있는 손가락만 이미 네 개였다.

“아직… 흣… 넣으면, 안, 된다고….”

더하면 아래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물감을 호소하듯 뻐끔대는 아래가 뻑뻑했다. 손가락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강하게 조여드는 안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이지훈이 내 허벅지를 쥐고는 양쪽으로 더 벌렸다. 허벅지 안쪽이 오므라들지 않도록 제 무릎으로 고정하는 와중에도 놈의 손은 안을 헤집고 있었다. 혼자서 꽤 풀어놨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지훈이 손 흔드는 속도를 견뎌내지 못하고 안이 옴쭉대는 게 느껴졌다. 이지훈의 손을 빼려고 뻗던 손은 물론 몸까지도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꿋꿋하게 손을 놀리며 아래를 넓히던 이지훈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명령했다.

“안 되겠다. 빼.”

내가 손에 힘을 주기도 전에 놈이 내 손목을 잡고 구멍 밖으로 빼냈다. 구멍 안의 이물감이 줄어들어 숨을 편하게 쉬던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지훈의 손길에 몸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베개에 머리를 처박혔다. 앞으로 풀썩 가라앉은 상체와 달리 허공으로 덜렁 들린 하체 때문에 자세가 무너졌다. 눈을 뜨기도 전에 고통에 찬 신음부터 뱉어야 했다.

“하으… 윽!”

나를 엎드리게 한 이지훈은 검지와 중지를 한데 붙여 구멍 안을 쑤셨다. 안에 뭐가 있는지를 확인하듯 꾹꾹 누르던 때와는 달랐다. 손을 세워 안을 둥글게 휘젓다가 탁탁 소리를 내며 손목을 털 때마다 몸이 앞으로 처박히듯 고꾸라졌다. 녹은 젤과 구멍이 부딪쳐서 찔걱대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막혀 있던 수챗구멍을 뚫었을 때나 흐를 법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던 젤이 안에서 녹기 시작했는지 이지훈의 손이 닿는 곳마다 펄펄 끓는 것 같았다.

“아! 아… 잠깐, 잠깐만.”

안이 엉망으로 짓이겨지면서 이지훈의 휘젓는 대로 늘어나는 듯했다. 떨리는 몸 때문에 뒤로 팔을 뻗어 놈을 밀어내려던 행위조차 불가능해졌다. 내 양손을 뒤로 잡아 모은 채로 힘을 주는 이지훈 때문이기도 했다. 아래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쑤셔지는데도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벽을 누르며 파고드는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순간에야 다급히 뱉었을 뿐이다.

“젤, 젤 좀 더….”

섹스라도 하듯 뒤로 빠져나갔다가도 다시 속도를 더해 안으로 치받는 손가락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참아야 하는 걸 아는데도, 이지훈이 손가락을 깊이 휘저을 때마다 자꾸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이 기어가듯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이지훈이 내 손을 모아쥔 악력만 더욱 강해졌다. 그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내 손을 놓은 이지훈이 배 위로 손을 얹은 채로 제게 바투 끌어당겼다. 나만큼이나 거친 호흡을 내뿜는 놈의 숨소리가 귓전에서 들렸다.

“허벅지 벌려.”

몽롱한 아픔에 허덕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겨우 다리에 힘을 줘 허벅지를 벌린 채로 무릎을 세운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내 허벅지 뒤로 제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골 사이로 놈의 좆이 툭툭 지나가듯 스쳤다. 딱딱하고 컸다. 그걸 삽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일 것이 뻔했다. 참는 게 습관인데도, 그건 참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이지훈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귀로 들리는 소리를 보니 젤을 짜는 중인 것 같았다. 얼마나 짜고 있는 건지, 다 쓴 치약을 쥐어짜낼 때나 날 법한 소리가 났다.

“선욱아.”

따지자면 다정한 말투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흠칫했다. 아마 무서울 정도로 낮아진 놈의 목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부름만으로도 나를 긴장하게 한 이지훈이 상체를 내 등에 바짝 붙였다. 땀으로 미끌대는 등과 틈조차 주지 않고 밀착한 이지훈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붙은 몸을 통해 평균치 이상으로 뛰어대는 심박수가 느껴졌다.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이지훈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고꾸라질까 봐 걱정이라도 됐는지, 놈의 손이 가슴팍 위를 더듬듯 올라왔다. 간지러울 정도로만 유두를 꼬집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결박과 다를 바 없는 자세였다. 엉덩이골 사이에 이지훈의 발기한 좆이 느껴져 허벅지가 움칠 떨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느릿느릿한 목소리는 얼핏 달콤하게도 들렸다. 몸을 제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자세를 설계한 놈의 몸짓이 아니었다면.

“나 그냥 쌍팔년도 사람 할까?”

갈라진 목소리에 깃든 것이 욕망뿐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네 개의 손가락이 한 번에 구멍으로 들어온 후였다.

신음조차 되지 못한 소리가 입술 새로 엉망으로 뭉개졌다. 앞으로 무너질 뻔한 몸을 뒤로 고정시킨 것으로 부족했는지, 이지훈이 내 어깨를 끌어안듯이 뒤로 당겨 강하게 안았다.

“아… 아, 흐읏!”

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참으려는 것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지훈의 쇄골 근처에 기대어진 머리가 위로 흔들렸다. 이지훈이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내 목덜미에 혀를 내어 핥았다. 아까 한바탕 빨아둔 점 위를 다시 빠는 입술이 축축했다. 방금까지도 살살 핥아 내리던 점 위를 콰득 씹듯이 문 순간에는 입술이 참지 못하고 크게 벌어졌다. 이지훈이 귓가에 속삭였다.

“참고 있는데 잘 안 참아지네.”

“…하아, 큿, 아…!”

“특히 네가 이렇게 좆질에 훈계할 때.”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좆이라도 쥐고 흔들려던 내 손을 쳐낸 이지훈이 제 손으로 내 좆을 잡았다. 구멍을 파고들기 위해 넘치도록 바른 젤이 구멍 대신 좆 위에 묻어 껄쩍대는 소리를 냈다. 속도도, 세기도 아까 내 좆을 흔들던 것과는 달랐다. 빠른 사정을 유도하듯 좆을 쥐어짜는 놈 때문에 들리는 말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정감이 뻑적지근하게 몰려들었다.

“으읏, 흐!”

질척한 사정이었다. 사정 후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입술을 짓이기며 신음해야 했다. 방심하고 있던 구멍에 구겨 넣어진 손가락들 때문이었다. 젤과 정액이 뒤섞여 끈끈해진 손가락 세 개가 예고 없이 한꺼번에 구멍 안을 뚫듯이 밀고 들어왔다.

“급하다는 이유로 누구랑 썼을지도 모를 젤 눈감아 주는 것까지가 내 인내심의 끝 같은데. 어디까지 더 질투 나게 하려고?”

정신을 차리고 놈에게 기대 있던 머리라도 들라치면 손가락 개수가 늘었다. 이지훈은 그러면서도 목이며 쇄골을 게걸스럽게 빨았다. 구멍이 제 것인 양 드나드는 손 때문인지 안이 점점 눅진하게 풀려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지훈의 손이 들어갈 때마다 내벽이 쫀득대며 쫀쫀히 들러붙었다가도 놈이 손을 빼려 하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촌스러운 사람 되는 거 감수하고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좋은 말 할 때 그만해?”

“하… 흐읏, 아!”

“형이 알아서 할게?”

짓궂게 말하면서도 이지훈은 왼손으로 꼭지를 비틀고, 오른손으로는 구멍 안의 상태를 확인하듯 안으로 네 개의 손가락을 한꺼번에 넣었다 빼길 반복했다. 구멍이 이물감 없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가슴을 둘러 잡고 있던 손을 풀어줬다.

해방되는 듯한 기분은 잠시였다.

침대 헤드를 손으로 잡으며 숨을 고르는 내 어깨를 이지훈이 제 쪽으로 잡아 돌렸다. 힘조차 주지 못한 채로 놈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 어렵지 않게 허벅지를 잡아 아래로 끌어내린 놈이 내 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렸다. 내가 오므릴 수조차 없게 무릎 끝으로 허벅지를 고정한 놈 때문에 아래가 훤히 다 보였다. 나는 언뜻 스친 광경을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도 그게 편했다. 눈꺼풀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지선욱.”

구멍에 놈의 좆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번은 삽입한 기분이었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눈까지 내려왔는지, 젖은 눈가가 따끔거렸다.

“선욱아.”

눈을 여러 번 깜빡이고서야 눈앞이 개었다. 비로소 재촉하듯 부르는 놈에게 시선을 둘 수 있었다. 숨을 고르느라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가슴 위로 턱을 괸 놈이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마를 쓰다듬고 그 위에 엉킨 앞머리를 뒤로 넘겨줬다. 눈이 제대로 마주친 순간에야 이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넣을 건데….”

몸을 물린 놈의 손에 콘돔이 들려 있었다. 내가 서랍에서 꺼낸 건 아니었다. 눈을 맞춘 상태로 콘돔 껍질을 뜯은 이지훈이 제 좆 위로 천천히 콘돔을 씌웠다. 공기가 유입되는 일이 없도록 귀두에 콘돔을 바짝 붙여 삽입하는 놈은 그 와중에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그 광경을 잘 볼 수 있도록 상체를 조금 뒤로 빼기까지 한 놈 때문에 벌어진 어깨와 이어진 큰 가슴 근육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까지도 선명히 보였다. 그 와중에도 가장 시선을 뗄 수 없는 건 놈의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내 뒤를 푸는 내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아래가 쑤셔진 게 오히려 이해가 갔다.

달고 살던 여유라는 걸 완전히 잃어버린 놈의 표정에 이미 벗고 있음에도 한 번 더 벌거벗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놈이 거침없이 드러내는 정복욕의 형체가 거대했다. 발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사람처럼 마른침을 삼키게 됐다. 이지훈이 나를 상대로 욕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알지 못하던 흥분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난 너 눈 감게 해줄 생각 없으니까 눈 뜨고 똑바로 봐.”

말을 끝내자마자 다가와 입술을 집어삼킨 놈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감을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키스가 깊어졌다. 둘 다 눈을 감지 않은 상태로, 코끝이 스치는 그 순간마저 아쉬운 사람들처럼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혀를 얽었다. 좆이 골 사이를 스치는 게 느껴져 멈칫하자 이지훈이 혀를 더 깊게 넣었다. 부은 입술은 입술이 비벼질 때마다 흠뻑 젖은 소리를 냈다. 입술의 주름 사이 약이라도 바르듯 혀로 아랫입술을 살살 빨던 이지훈이 귀두를 잡고 구멍에 갖다 붙였다. 넘치게 발라둔 젤이 남아는 있는지, 구멍에 들어가기 전부터 고무의 끝이 미끌미끌했다. 이지훈의 다른 손은 반쯤 선 내 좆을 쥔 채였다. 입술을 붙인 채로 이지훈이 호흡이라도 불어넣듯 말했다.

“내가 네 안에 넣으며 어떤 표정 짓는지 보라고.”

“…….”

“그거 보면 너 내가 구멍에 못 쑤실까 봐 걱정된다는 소리 못 해.”

귀두가 구멍의 입구를 꾸욱 누르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풀어놨다고는 해도 애초에 말이 안 되는 크기와 굵기였다. 놈이 타이밍을 조절해 잘 밀어 넣었는데도, 순간 내장을 비롯한 모든 장기가 모조리 위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버거웠다. 눈을 피하지 말라는 놈의 말을 기억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으으…으, 윽!”

입술을 거칠게 씹으며 어떻게든 고통에서부터 벗어나려 좌우로 도리질을 해야만 했다.

고개를 비틀 때마다 이지훈의 손이 어떻게든 다시 앞으로 돌려놨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이지훈만이 굳건했다. 그러는 놈도 그 큰 좆을 들일 엄두조차 못 내겠다는 듯이 꽉 다물린 구멍에 좆을 넣은 채로 버티느라 미간에 힘을 준 채였다. 귀밑각이 날카롭게 드러날 정도로 턱에 힘을 준 놈은 몸을 뒤로 물리는 것 대신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다문 내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정액 냄새가 나는 손가락이 내가 입술을 씹지 못하도록 입 안을 가위질하듯 벌렸다.

“씹지 말고 빨아.”

입술을 씹는 것 대신 그걸 빨라는 것 같았다. 내가 손가락을 물고서야 이지훈이 내 좆을 쥐고 흔들었다. 아픔 때문인지 반쯤 죽어 있던 좆이 다시 놈의 손에서 점차 크기를 키웠다. 고통을 따라가듯 서서히 고개를 드는 쾌감이 척추를 느리게 곧추세웠다.

그제야 숨이 조금 쉬어졌다. 이지훈이 물려준 젖은 손가락을 빨기 위해 턱을 움직이면서, 눈꺼풀에 힘을 줘 들어 올렸다. 날 보고 있던 이지훈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가 다음 순간엔 좆을 구멍 안으로 조금 더 밀어 넣었다. 느낌상 아까보다는 더 깊게 들어온 것 같았다.

얇은 뱃가죽 위로 손을 얹은 놈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를 가늠하듯 골반뼈를 꾹꾹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내 좆을 문지르며 성기를 미끄러뜨리듯 끈기 있게 집어넣었다. 탁, 탁, 탁, 탁. 이지훈이 빈틈없이 쥔 성기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멍에 박은 좆이 내는 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귀를 어지럽게 울렸다. 입에 물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입 안에서만 맴돌아야 했을 신음들이 뭉개진 발음으로 흘러나간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응으… 으, 읏!”

고통과 쾌락이 비등비등하게 올라가며 속도를 겨뤘다. 나를 배려하듯 안에 들어가서도 움직이지는 않는 이지훈 덕분에 배를 들썩이며 신음을 뱉어내는 일이 더 많아졌다. 5분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사정감을 버티지 못해 발바닥이 시트를 힘겹게 밀어내는 와중에도, 위에 있는 이지훈만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비트는 나 때문에 점막이 조여들 때마다 인상을 쓰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던 놈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계속 시트만 잡고 있나 했는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중얼대는 놈의 입술이 천천히, 꼬이듯이 뒤틀렸다.

“네가 남자 목에 손 거는 법을 모르는구나.”

삐뚜름한 미소를 짓길 잠시, 이지훈이 움직였다. 꽤 오래 안에 가만히 있던 탓인지 구멍의 일부처럼 느껴지던 이지훈의 좆이 갑자기 움직인 것만으로도 조밀한 내벽이 크게 꿀렁였다. 구멍 안의 모든 세포가 좆에 붙어 안으로 함께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손으로 낸 길과는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듯한 좆이 뚫고 가는 길마다 투둑, 하고 옷깃이 튿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까지 들었다. 몸이 덜컹거리며 경련했다. 낭떠러지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처럼 뻗은 손에 돌부리 대신 이지훈의 목이 걸렸다. 나는 몸을 어떻게든 가누려는 것처럼 손에 들어온 것을 꽉 쥐었다.

“…아흣!”

자연스럽게 이지훈의 목에 매달리게 됐다. 어설프고도 헐겁게 제 목 주위로 둘러진 손에 힘이라도 실어주듯, 이지훈이 내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숙였다. 허공에 뜬 허리 밑으로 베개를 끼워주며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엉덩이를 토닥이기도 했다.

“어. 그렇게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놈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선단의 끝에서 프리컴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사정이었다. 이지훈의 손이며 사정 직전부터 움칠 떨리던 복근 위로 아까보다 한층 묽어진 정액이 흩뿌려지는 광경을 멍하게 지켜봤다.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물러난 이지훈이 손에 묻은 정액으로 콘돔 위를 매만지며 묻혔다. 놈이 내 양쪽 다리를 들어 제 어깨 위로 걸치자 허리가 들리며 접합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곳을 빤히 내려다보는 놈을 보자 뒤늦게 수치심이 들었다. 움찔대며 뒤로 물러나려는 엉덩이를 놔주기는커녕 꽉 쥔 놈이 보란 듯 그 위를 주물럭대며 중얼댔다.

“살 좀 찌워야겠다. 조금 더 하면 멍들겠어.”

“하… 하아….”

놈의 말처럼 이지훈이 붙어서 고간을 잠깐 쳐올린 것만으로도 엉덩이가 붉어져 있었다. 한 번 치고 들어올 때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위로 쳐올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뭐가 됐든, 나조차 제대로 본 적 없는 곳을 관찰하던 놈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의 근육을 따라 갈라진 선 위를 꾹꾹 누른 뒤 그 위에 입술을 붙이다가 오금 뒤에 코를 박고는 냄새를 맡듯 호흡했다.

“아, 지선욱 냄새….”

다시 위로 고개를 올린 놈의 눈은 조금 풀려 있었다. 덩달아 멈칫한 순간 이지훈이 다리를 조금 더 깊이 끌어당기며, 좆을 구멍에 끼워 맞췄다. 그러고는 한 번에 끝까지 박아넣었다. 고환이 엉덩이에 닿는 게 느껴질 정도로 깊숙한 삽입이었다.

“으읏…!”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고통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치받는 고통에 혀까지 굳어 멈췄다. 힘을 빼라는 듯 엉덩이를 툭툭 치는 이지훈에게도 반응할 수 없었다. 이지훈은 보채는 것 대신 몸을 숙여 내 몸 곳곳을 핥았다.

이지훈의 좆이 여전히 구멍 안에 있었다. 좆의 모양을 따라 안이 통째로 뚫린 기분이었다.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침이 흘렀다. 볼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생리적인 눈물이 흐르기 시작해서였다.

이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내 몸을 만졌다. 속도를 조절할 뿐, 좆을 쳐올리는 힘은 갈수록 세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리는 내 몸 위로 바짝 누운 놈이 젖꼭지 위로 혀를 내 춥춥 빨았다. 그러면서 엇박으로 아래를 쳐올렸다. 비좁은 구멍 안으로 진입한 좆이 둥글게 회전하며 안을 더 깊이 헤집었다. 점막 또한 먹여주는 대로 씹는 것처럼 오물오물 이지훈의 좆을 품고는 움직였다. 그것을 반기듯 이지훈이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잘 먹네. 그치?”

동의를 구하듯 물은 놈이 내 손을 가져가 아래 접합부를 더듬게 했다. 겹쳐진 손이 벅찬 삽입을 받아내느라 부푼 주름을 더듬어 훑었다. 흔들리는 몸 때문에 계속 손이 미끄러지는데도 이지훈은 자꾸 손을 붙들어 그곳에 가져다 댔다. 회음부에, 엉덩이골에, 이지훈의 음모에 닿게 된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만져 봐. 피 안 나지, 선욱아.”

“하윽, 큿… 아!”

“이제, 안 봐주고, 후으, 해도 되겠지?”

여태까지는 내 상태를 배려해 봐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놈의 추삽질이 한층 거칠어졌다. 이지훈이 뿌리까지 박아넣을 때마다 허리가 뒤틀렸다. 놀란 것처럼 덩달아 수축하는 점막을 느낀 이지훈이 한층 더 자극받은 것처럼 욕을 지껄였다.

“씨발… 존나, 끝을, 모르고 조이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쳐올린 이지훈이 좆의 끝을 안의 어느 지점에 누른 채로 뭉근하게 돌렸다. 좆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근육들이 느껴질 때마다 몸을 뒤흔들던 아픔이 점차 둔해졌다. 하체에 감각이 사라지는 건지, 아니면 이지훈 말처럼 정말 내 구멍이 이지훈의 좆을 잘 먹게 된 건지는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둔부와 고간이 붙었다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추잡스럽게 들릴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놈과 이성을 놓은 채로 붙어먹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될 뿐이었다.

“아, 아… 아흐, 읏!”

통감을 느끼는 부위가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는 생소한 간지러움이 피어났다. 이지훈이 봐주지 않고 처박는 좆 끝에서, 수축했다가 풀리길 반복하는 내벽의 한 지점에서. 어딘지 몰라도 그곳을 긁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눈자위가 자꾸 뒤집혔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런 말이나 뱉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나 낼 법한 신음을 뱉어야 했다. 다시는 정상적인 호흡이 불가능할 것처럼 숨이 찼다.

“숨, 막혀… 숨….”

그때, 척추가 아릿할 정도의 쾌락이 뇌를 관통했다. 순간이었으나, 몸의 모든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 끼쳤다. 나는 천장에 시선을 둔 채로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그곳을 한 번 더 찌른 이지훈의 좆 때문에 그게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됐다. 내가 내는 게 맞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신음이 연이어 터졌다. 그럴수록 이지훈은 감을 잡은 것처럼 골반을 잡고는 집중적으로 허리짓을 시작했다. 반복해서 극점을 찌르는 좆이 느껴질 때마다 뇌가 녹아버린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아찔했다.

“잠깐, 잠, 흣! 아!”

더 하면 어딘가 망가질 게 분명했다. 당장 그만둬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절대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매달려야만 무언가를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은 찌꺼기와 다를 바 없는 욕망이 나를 자꾸 몰아붙였다.

“흐윽, 읏… 흐….”

시야가 점멸하듯 까매졌다가 하얘질 때마다 이지훈의 어깨 너머로 종아리가 덜렁대며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허리짓을 하는 게 이지훈뿐만이 아님을 눈치챘다. 비슷한 타이밍에 같이 허리를 움직이는 나는 그래야만 이지훈의 좆이 조금 더 깊이 들어와 그곳을 엉망으로 짓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같았다. 거친 움직임 때문에 베개가 등 뒤에서 밀려나고 시트마저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굳이 말로 보채지 않아도 내가 바라는 게 뭔지를 아는 것처럼 물러났다가도 이내 정확히 한곳을 찧듯이 돌진하는 놈 때문에 몸이 반으로 접히며 굽혀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아! 아, 씨발….”

이지훈의 목 주위로 걸린 손은 이제 붙잡고 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 손을 놓으면 이지훈이 더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힘을 주는 게 고작이었다.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두텁게 감쌌다. 뿌옇게 흐려진 눈앞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야에 든 모든 것들이 한 방향으로 뭉개지는 것 같았다.

절정이 다가온 건 이지훈도 마찬가지인지, 피스톤질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놈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타고 떨어지는 땀방울이 가슴팍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지훈이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물었다. 놈의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나만큼이나 맛이 간 상태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더, 욕, 해 봐.”

“아아으, 흐!”

“존나 야하니까 더 해보라고.”

“허억….”

“네가 지금, 네 얼굴을, 봐야 하는데.”

음절마다 끊어 말하면서도 이지훈의 손이 내 볼을 잡아서 모았다. 눈물과 침으로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훑는 시선이 끈적했다. 거친 숨을 몰아쉰 놈이 혀를 내어 내 볼을 핥은 것과 동시에 따뜻한 액체가 안에서 팍 퍼지는 느낌이 났다. 참은 시간이 길어서인지 사정 시간 또한 길었다. 축축한 볼을 눈물 자국조차 사라질 정도로 꼼꼼히 핥던 놈은 끝의 끝까지 싸지르고서야 느리게 구멍을 빠져나갔다. 콘돔을 벗겨낸 이지훈이 끝을 묶어 옆으로 던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콘돔을 그 위로 씌웠다.

왼손으로 내 좆을 조물조물 만지며 이지훈이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아까와 달리 어깨 위로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 대신, 내 손을 끌어 오금 뒤를 붙잡게 한 뒤 예고 없이 끝까지 삽입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목울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목뒤가 짜릿하게 당겼다.

“으으읏!”

부푼 구멍을 짓누르며 수월히 진입한 귀두가 방금까지 짓찧던 극점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새 내벽의 밀도가 이지훈에게 완벽히 맞춰진 기분이었다. 벅찬 크기의 좆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점막이 수축함과 동시에 이지훈이 좆을 흔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지훈의 손에 뭉개지듯이 잡힌 요도구가 쓰릴 정도였다. 더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사정감만은 여전했다.

이지훈의 좆이 전립선을 짓이기듯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손아귀에 잡힌 귀두가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선욱아.”

“허억… 흐, 흐으…!”

“선욱, 아, 지선…욱.”

이지훈은 이제 좆을 찧을 때마다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내 이름을 처음 안 사람처럼. 그렇게 부를 자격을 이제야 얻은 사람처럼.

흐물흐물하게 뇌가 녹는 감각 사이로 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부르르 몸을 떤 것과 동시에 선단 끝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듯 튀어 올랐다. 더 나올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액이 쏘듯이 날아가 이지훈의 턱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튀었다.

이지훈의 풀린 눈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나를 연이어 부르던 놈이 팔로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틈 없이 맞물린 접합부 사이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손을 들어 이지훈의 뒷머리에 얹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내게 끌어당겼다.

동시에 찾아온 후희가 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신음이 터졌다.

“하….”

“…후우….”

맞닿은 가슴팍이 같은 속도로 오르내렸다. 내 목덜미에 처박았던 고개를 든 이지훈이 볼에 짧게 키스하고는 몸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여전히 아래가 맞붙은 채였다. 아래로 내려간 놈의 손이 곧장 엉덩이골 사이로 향했다. 허벅지에 흐른 액을 확인한 놈이 혀를 찼다.

“망했다. 내 사이즈 아니라 샌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좆 때문에 밀려 나온 젤이 아니라, 놈의 정액이었던 모양이다.

“긁어내야겠는데. 어떡하냐.”

곤란한 목소리를 뱉은 이지훈이 일단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 듯 몸을 뒤로 당겼다. 기껏 뚫어놓은 길을 뭉개는 것처럼 뒤로 빠져나가려는 좆을 느낀 순간에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나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냥 있어.”

괜찮아.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벅찼다. 그저 감각이 없는 하체에 미진하게나마 힘을 줘서 다리로 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차피… 나중에, 긁어내면 되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이지훈의 등이 미끌미끌했다. 놈이 나만큼이나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고, 입술이 부르텄고, 목이 따끔따끔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내 목소리로 말을 끝맺고 싶어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 채로 이지훈을 응시했다.

“같이 있자.”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던 놈의 눈가가 허물어졌다. 이지훈이 뒤로 몸을 빼는 것 대신 아까처럼 몸을 겹쳤다. 놈의 입술이 향한 곳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오른팔 부근에서 멈춘 놈이 길게 나 있는 상처 위로 입술 끝을 가벼이 가져다 댔다. 흠칫했지만, 간지러워서지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을 들어 묻는 놈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아파?”

꿰맨 지 이 주 정도 지난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음에도 이지훈은 방금 한 행위 이상을 하지 않았다. 상처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끝나는 부분까지, 입술이 품고 있는 온도를 묻히듯 가벼운 입맞춤을 했을 뿐이다.

팔에서부터 시작된 입맞춤이 가슴으로, 복근으로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 좆까지 빼낸 이지훈은 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흉터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발견한 것조차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미한 노란색의 작은 멍을 부드럽게 핥다가 고개를 든 놈이 흉터가 가득한 복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댔다.

“이거 상처 났을 때 핥아줬으면….”

“…….”

“더 빨리 나았으려나.”

생경하게까지 느껴지는 놈의 씁쓸한 표정을 보는데 순간 목 안이 쓰릴 정도로 아팠다. 나는 우는 것 대신 목울대를 움직였다. 다 쉰 목소리로도 놈을 불렀다.

“이지훈.”

고개를 들어 날 보는 놈에게 부탁하기 위해.

“이리 와.”

내가 뭘 할지도 모르면서, 이지훈이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더 가까이.”

이지훈에게 이런 부탁을 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머리 양옆에 손을 짚은 채로 천천히 가까워지는 놈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이렇게 정면으로 놈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피해야만 했던 눈썹의 상처로.

상체에 억지로 힘을 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지훈의 눈썹 위에 있는 흉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그 위로 입술을 가져갔다. 한참 전에 아물었을 상처는 핥을 흔적마저 희미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그 위로 여러 번 입 맞췄다. 한참을 그러고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뒤로 빼자 내가 그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던 이지훈의 눈가가 붉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놈은 내가 어떤 의미로 이런 행위를 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마주친 채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안 망했어.”

모든 것들이 단 한 번만 존재할 거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첫 키스, 첫 경험. 흔히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 한때는 그 처음을 이지훈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놈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야 알겠다. 처음이라는 속성의 가치는 함께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걸.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서로의 처음을 겪을 것이다.

“안 망했어, 우리.”

우습게도 그 말을 하는 순간에야 이지훈과 줄곧 같은 길에 서 있었음이 실감 났다. 이지훈이 입술을 말아 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지훈의 눈 안에 있는 나 또한 비슷한 꼴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맞댔다. 젖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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