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경찰 아저씨 오후 10:02
일하는 건 좋은데 잠은 집에 와서 주무세요 좀 오후 10:03
이번 주에 야근만 세 번째다 인마 오후 10:05
또 코피 줄줄 흘리려고 오후 10:06
스크롤을 위로 조금 더 올렸다.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몇 개 더 보였다.
이지훈
28일에 일하지? 오후 2:29
6시 전에는 서울에서 출발하고 싶은데 네가 가능할지 모르겠어서 오후 2:30
기각? 오후 5:29
오후 2시 29분부터 밤 12시 29분까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놈을 오래도 기다리게 했다. 최근에는 야근이 있거나 늦게 들어갈 것 같으면 이지훈에게 미리 꼬박꼬박 말을 하곤 했다. 시작은 이지훈이 버린다는 발언을 했던 때부터 조금 더 신경을 쓴 거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사실을 서로 고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이지훈이 물을 때도 있고, 내가 먼저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오늘따라 아무 연락이 없으니, 무슨 일이 있나 의아했던 모양이다. 이지훈이 우기듯이 밀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 그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정면에 놓여 있는 달력에서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시게요?”
내가 의자를 넣는 것을 보자마자 반갑게 묻는 신입을 보고 멈칫했다가, 이내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릴 것 같아서….”
“웬일이야?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문소리를 들었는지 현관 쪽으로 고개를 쭉 뺀 이지훈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 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깨어 있는 놈을 보니 얕은 한숨부터 새어 나갔다. 더 늦어질 것을 알면서도 내가 들어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을 놈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가정을 뒷받침하듯, 거실 테이블 위가 혼잡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고, 집을 밝히는 불이라고는 소파 옆 스탠드에서 나오는 빛밖에 없었다. 이지훈은 나를 기다리며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에 든 것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이지훈은 다가서는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온 이유가 여전히 궁금한 것처럼.
나는 놈의 시선을 피하며 외투를 소파 옆으로 던지듯 놓았다. 네가 이러고 있을까 봐 왔다고, 며칠 뒤엔 다시 비행해야 할 놈의 수면 패턴이며 컨디션이 신경 쓰였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말을 돌리며.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안 자고 뭐 하냐?”
테이블 위로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공통점이라고는 물건이라는 것밖에 없는, 분류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었다. 서류, 물건, 사진…. 일하고 온 티라도 내는 것처럼 증거물 보듯 감정 없이 훑던 행위는 테이블 바로 아래에 있던 상자를 확인한 순간에야 멈췄다.
“한번 제대로 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상자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고 굳은 나 대신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때 네가 줬을 때는 그렇게 못 했거든. 뭐가 뭔지 이해도 잘 안 갔고.”
꼭 그때 같았다. 다만 그때는 나 혼자 말하기 바빴고, 이지훈이 지금 나처럼 굳어 있었지만.
‘우리… 연락하지 말자, 이제.’
그저 건네는 것만으로 끝일 줄 알았던 그 상자가 돌아와서는 내 발밑에 놓여 있었다. 정리하겠다고 상자에 어떻게든 욱여넣은 추억들이 테이블 위에 낱낱이 펼쳐진 모습이 현실감이 없었다. 이지훈은 그걸 하나하나 꺼내어 들여다보는 중이었던 듯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얼어붙은 듯 서서 이지훈을 멀거니 응시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묵묵히 내 시선을 받던 이지훈은 옆자리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앉을래? 같이 보자.”
앉기 싫다고,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해야 하는데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멍청하게 선 나 대신에 이지훈이 몸을 조금 일으켜 내 팔을 잡았다. 순식간에 놈의 옆에 털썩 주저앉게 됐다. 딱딱하게 굳은 등을 푹신한 천이 감쌌다. 이지훈은 앉아서도 내 왼쪽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힘을 주지 않고 셔츠 자락 위를 감싸듯이 잡은 손은 그래서인지 더더욱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보다 한참 전에 들어와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을 놈에게서는 아직 바깥의 공기를 미처 다 떨치지 못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온기가 풍겼다. 헐겁게 붙들린 팔에도, 앉는 과정에서 스친 다리에도 그 온기가 남은 것처럼 화끈댔다. 나는 그게 화상을 입어서일 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느라 한참을 멈춰 있다가, 왼쪽 다리가 이지훈의 오른쪽 다리와 또 한 번 부딪치지 않도록 오므리듯이 접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직사각형의 종이를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아직 이거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진작 버렸을 줄 알았는데.”
놈이 내민 건 티켓이었다. 영어로 된 글자가 프린트된 노란 티켓. 그렇지만 그 영어들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지훈과 내가 평생을 통틀어 같이 본 공연이라곤 그때 뉴욕에서 봤던 그 뮤지컬뿐이니까.
THE LION KING
THU DEC 24, 201X 8:00 PM
“그때 우리 같이 봤던 거 맞지?”
확인하듯 물으며 이지훈이 내 표정을 살폈다. 방금 한 말도 그렇고, 과거의 일을 완전히 기억해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묘하게 확신 없는 말투였다. 나야 뉴욕 방문이 처음이었고, 이지훈은 거기서 몇 년을 살기까지 했으니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도 보러 갔을 터다.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티켓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 너랑 나랑… 둘이 봤었지.”
이지훈의 시선이 다시 티켓에 고정됐다. 자주 꺼내 보지도 않았는데, 티켓은 그새 색이 좀 바랬다. 함께 닳은 티켓의 모서리를 만져대던 이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날….”
“…….”
“진짜 개추웠는데.”
티켓에 시선을 둔 놈은 그러나 그 안에 담기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소리 내어 피식대기도 했다.
“근데 넌 목도리도 하나 안 하고 와서는. 얼굴이며 귀며 다 빨간데 내가 춥냐고 물어봐도 ‘별로.’ 이러고, 목도리 사줄까 물어도 ‘됐다.’ 그러고.”
이지훈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맞춘 채로 웃는 놈의 볼에 둥글게 떠오르는 무지개 같은 인디언 보조개.
“그래 놓고 너 극장 안 카페 들어가니까 따뜻한 라떼 시켰잖아.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면서. 카페 가도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시켰으면서.”
이지훈의 신난 목소리가 바랜 추억에 숨을 불어넣는다. 제자리에 1분만 서 있어도 평균적으로 세 명 이상의 사람과는 부딪치거나 혹은 발을 밟히게 된다는 그 복잡한 거리에 서서 나한테 억지로 목도리를 떠넘기려던 이지훈의 고집 가득한 표정이 떠오르고, 뒤에서 장사하는 동안 한 번은 청소하긴 했을까 싶을 정도로 때가 낀 진열창을 끌고 지나가던 핫도그 아저씨가 떠오르고, 그 외에도 눈을 마주친 것과 동시에 서로를 잊어버렸던 이름 모를 행인들의 행색이 눈앞에서 살아났다.
“그럴 정도로 춥긴 했어. 그때 너 보내고 존나 후회했잖아. 그냥 여름에 오라 할걸, 이러면서. 그러면 구경도 더 잘 시켜줄 수 있고….”
이지훈이 돌연 말을 멈추고 표를 만지작댔다. 나 혼자 복원해낸 추억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 놈의 얼굴 위를 구름처럼 떠돌았다. 내가 모를 이유로 씁쓸해하는 놈을 지켜보다 말고 멈칫했다. 그게 완전히 낯선 표정만은 아님을 알게 돼서.
공항에서 날 바라보던 이지훈의 얼굴이 이랬다. 한참을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목도리를 기어코 내 목에 칭칭 감고서야 조금이나마 웃을 때.
추억은 반복되고, 이지훈은 그때 날 보내기 전처럼 잠깐 머뭇댄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라도 너 보니까 좋다.’
기분 탓인지 그때보다 긴 머뭇거림을 지켜보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좋았어.”
이지훈이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티켓은 색이 바랬지만, 그 조각으로 불러온 추억 속의 우리는 여전히 생생했다. 내가 네 옆에 있었고, 네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말을 뺏긴 이지훈과 눈을 맞춘 채로, 이제야 비로소 할 수 있게 된 말을 건넸다.
“나도 좋았어. 너랑 있을 수 있어서.”
그러니 그 추운 날씨에 도로에 서서 너를 보고 있었지. 한국행 비행기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시끄럽게 울리는 공항에서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꿋꿋이 서서 너를 바라봤지. 몇 년이 지나도 이렇게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든 기억에 완벽한 형태로 박제하려고 애쓰면서.
비록 그때의 나는 널 사랑했고, 너는 내게 고마웠던 것뿐이겠지만. 그래도 좋았지, 함께일 수 있어서.
이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놈이 내 숨소리 하나에까지 집중하며 듣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더 꺼낼 말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이지훈이 움직였다. 몸은 여전히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 놈이 머리만 뒤로 누였다. 뒷머리가 소파에 눌리고 엉망이 될 텐데도, 목젖이 툭 불거질 때까지 고개를 젖힌 놈은 딱히 그런 걸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생각에 빠진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이지훈은 내가 훔쳐보던 걸 들킨 사람처럼 티켓으로 시선을 내릴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말을 왜 믿기 어려운 건지 생각해 봤는데.”
차분하게 말을 잇는 와중에도 이지훈의 시선은 천장에 박혀 있지만, 나는 이지훈이 그 너머의 것들을 그려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놈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나와 달리, 내 고백을 부정해왔던 이지훈은 어쩌면 내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네가 뭘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못 봐서 그런 것 같아.”
“…….”
“그래서 늘 추측했지. 짐작하고.”
넌 이 집에서 내가 없는 시간을 보내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서로가 다르게 기억하는 추억을 들춰보고, 추측하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그 물건 안에 담겨 있을 의미를 알아내려 노력하면서. 그래도 알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가 보잘것없는 고백을 했던 순간에야 네게 안긴 이 물건들을 꺼내 본 걸까. 내가 너에게 쏟은 사랑의 흔적을 증거물이라도 관찰하듯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는 절박함을 짝사랑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범인이 자백한 순간부터 완전무결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가 의미 없어지듯이, 짝사랑하던 사람도 고백한 순간부터는 사랑이 아님을 증명하려 애썼던 수많은 순간이 의미가 없어진다.
내게 돌아온 이지훈의 시선을 마주한다. 웃지 않는 이지훈은 드물게 진지하고, 그만큼 떨쳐내기가 힘든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이지훈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신경 세포의 축이 앞으로 쏠렸다. 이지훈은 그것을 눈치채고도 그저 내버려 둔 채로 말을 잇는다. 더는 도망갈 수도, 강영수를 끼울 수도 없다는 걸 내게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처럼.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한숨처럼 모아 뱉는 말임이 느껴졌다.
“그게… 어려웠어.”
“…….”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네가 싫어하는 것만 안 하려 노력했어. 그러면 네 옆에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지훈이 웃는 것도,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까.”
“…….”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거였다는 생각이 드네.”
어려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놓였다. 이지훈은 그걸 애써 헤치려고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두며 중얼대듯 말했을 뿐.
“뭐든 증명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순간에야 비로소 느껴진다는 게 신기해.”
나는 티켓 가장자리가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힘을 주던 행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고요히 날 바라보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들은 말이 귓가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요새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움을 이지훈 또한 느끼고 있다는 게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던 밤, 날 뒤에서 껴안았던 이지훈이 한 이야기를 기억해낸 순간에는 입이 절로 움직였다.
“굳이….”
“…….”
“이렇게까지 노력할 필요 없어.”
무리해서 휴가까지 낸 채로 내 집에 들어오고, 친구일 때는 해보지 않은 스킨십을 시도하고, 과거 우리가 절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이지훈은 내 고백 이후로 줄곧 노력해왔다. 놈이 말했듯이 우정을 증명하려는 행위였다.
나는 그때마다 반박해야 했다. 어떻게든 거부하려 했다. 놈이 있는 집에 어떻게든 늦게 들어오려 하고, 다시는 그딴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도록 겁을 주고, 연애 관련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거나 감춰버리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들여다볼 필요가 없던 감정을 이제야 마주한다. 이지훈이 우정임을 증명하는 것 대신 내 사랑을 어떻게든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려는 게 느껴지는 지금이 되어서야. 덜컥 겁부터 났다.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놈의 모습은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수없이 그리고 상상했던 우리의 끝이 흐려지는 것 같아서. 그걸 증명하듯 이지훈의 뒤에 있던 이정표는 이제 보이지조차 않는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유보되었던 두 달도 끝을 보였다. 이지훈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겠지. 일부러 그 기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가 그 사실에 누구보다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건 이제 새롭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밤에서마저 그 사실을 모른 척하며 이 물건들을 볼 수는 없다. 이지훈에게도 그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입을 뗐다. 놈이 모를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고백했던 거 아냐.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알아.”
“…….”
“나 노력 안 해.”
놈의 마지막 말에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이지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불안했다. 그건 놈이 진심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내가 한참 그 증거물을 읽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서야 이지훈이 손을 느리게 뻗었다.
“그냥 있는 거야. 너랑. 하고 싶은 거 하면서.”
“…….”
“또 뭘 할 수 있나 보면서.”
손에 있던 티켓의 끝이 가볍게 당겨졌다. 나는 이지훈이 그걸 가져가도록 내버려 뒀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티켓 위의 글자를 따라 눈을 굴리던 이지훈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야. 쪽팔려서 못했던 이야기 하나 해줄까.”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이지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너랑 무슨 뮤지컬을 봤는지는 기억 못 해도, 이 티켓 가격은 기억해.”
눈을 내리깐 이지훈이 피식대며 티켓을 앞뒤로 뒤집었다. 그 한 장에 담긴 추억의 무게와 비교했을 때 종이 한 장은 너무나도 가볍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사람처럼.
“그때 나 거지였잖아. 살면서 그렇게 돈 없어 본 것도 처음이었고.”
“…….”
“그래도 괜찮았거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지. 밥 좀 덜 먹고, 물건 좀 덜 사고, 좀 더 걷고 그런 게 뭐 대수라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유학생들 절반 이상이 그러고 살기도 했고… 아빠한테 공사 자퇴한다고 했을 때 손 안 벌리고 자립하겠다고 했던 말들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돌이켜 보면 나중에는 반쯤 오기였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나름대로 할 만하다 싶었거든.”
나 또한 그 시기의 이지훈을 기억하고 있다. 미국 비행학교의 학비는 과할 정도로 비쌌고, 이지훈의 학교는 막 신설된 프로그램의 장학생에게 학비를 전액 제공해주는 것 이상의 투자를 하려 들지 않았다. 이지훈은 물가가 살인적인 뉴욕에서 살면서 입학한 순간부터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부터 시작해 집세까지도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이지훈은 그런 이야기들을 세세히 전하지 않았다. 다만 눈치로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시차를 감안하고서도 통화할 때마다 늘 피곤에 젖은 목소리를 통해서, 2년이 넘게 명절에도 한국에 한 번 들어오지 못하고 일해야 했던 놈의 빈틈없는 스케줄을 통해서.
“근데 너 왔을 때 처음으로… 아, 좀 좆같다 싶었어.”
“…….”
“네가 이 공연 보고 나왔을 때 재밌다고 했잖아. 그럼 바로 다른 것도 보여줄까 물어봐야 하는데, 그 말을 못 한 게 계속 생각나더라. 뉴욕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 아닌데, 다른 공연도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
“나중에 다시 보러 오라고 말하려면 비행기 표라도 끊어주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 해주니까.”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이지훈만 알고 있던 이야기가 합쳐진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 날 바라보다가 목도리를 둘러주고서야 겨우 표정을 풀던 스물세 살의 이지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기분을 똑같이 느끼게 된 것처럼, 이지훈이 쓸쓸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로 입술을 여러 번 물었다 놓았다. 얕은 한숨을 쉬고서야 놈이 입 안에 숨기고 있던 말을 마저 꺼내놓았다.
“너 돌아가던 날, 공항에서 너 보는데… 되게 미안하고 쪽팔리고 그랬어.”
“…….”
“근데 그런 말은 못 하겠어서, 대신 다음에 또 같이 오자고만 했지.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을 때.”
이지훈이 이제는 완전히 꾸깃하게 접힌 티켓을 테이블 위로 툭 밀어둔다. 덩달아 추억에서 쫓겨난 나는 이지훈을 말없이 응시했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맞춘 이지훈이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구겼다.
“그게 6년 전 일이고 난 이제 준비됐는데, 넌 아직도 내가 운전하는 비행기 한 번 탄 적 없고.”
가벼운 타박을 넘기지 못하고 멈칫한 이유는 정말 그랬다는 사실을 방금에야 깨달아서였다. 공항에 서서 내게 그 말을 하던 이지훈의 표정은 기억하고 있어도, 그 약속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물론 핑계는 있었다. 뉴욕을 다녀온 다음 해에 할아버지가 또 쓰러졌고, 의경으로 근무하는 거긴 했어도 군대도 가야 했고, 제대하고 나니 일하기에도 바빴다. 이지훈은 주로 국외선 비행기를 운전하니까, 해외로 나가야 놈이 운전하는 비행기도 탈 텐데 연달아 휴가를 내는 일조차 잘 없던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티켓을 구해줄까 묻던 놈의 제안조차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고개를 젓기 바빴고.
뉴욕에서의 일을 그렇게 신경 쓰는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는 게 나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려는 것처럼 따라붙는 이지훈의 시선에는 머쓱한 변명이 튀어나갔다.
“휴가 내기가 힘들어서….”
“어련하시겠어요. 대한민국 경찰이 할 일을 혼자 다 하고 계신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지훈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해탈한 표정이었다.
“아쉬운 놈이 비행기를 대령하는 수밖에.”
뜻 모를 말을 남기고는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붙는 내 시선에는 부러 부담을 덜어주듯 웃으며.
“존나 피곤해 보여, 너. 보내줄 때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
자리를 마무리하듯 말을 던진 이지훈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하나둘씩 상자 안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손 빠른 놈 때문에 순식간에 테이블 위가 깔끔하게 비었다. 놓친 게 있는지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기까지 하던 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숙였다. 별생각 없이 놈의 행동을 따라가다가 바로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갸웃한 이지훈이 내게 물건을 내밀었다.
“야, 근데 이게 왜 너한테 있지? 미국 왔을 때 나 주고 가지 않았냐?”
이지훈의 손에 들린 건 하얀 MP3였다. 이지훈이 내게 선물해줬던 MP3와 똑같은 제품이기도 했다. 이지훈에게 주겠다고 사놓고, 정작 건넨 적은 없는 물건이었다. 스물셋에도 저걸 주겠다고 들고 갔다가 주지는 못하고 혹시 몰라 챙겼던 내 MP3만 건네고 돌아왔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MP3 안에 든 파일을 모두 지워버린 것을 알면서도, 순간 놈이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조각이라도 봤을까 봐 심장이 조여들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놈의 손에 들린 MP3를 가져왔다. 순순히 내준 이지훈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손안에 들어온 네모난 음향기기를 살펴보는 척하며 대충 둘러댔다.
“그냥, 그때 너 주고 나니까 필요한 일이 생겨서 새로 샀어. 거기 들어가 있는지 몰랐네.”
그래도 내 MP3와 착각하는 걸 보니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살펴본대도 남은 건 없겠지만. 6년이 지나는 동안, MP3는 우리에게 잊혀진 물건이 됐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매일같이 신제품이 출시되는 세상에서, 한참 전 효용 가치를 잃은 물건에 둘 관심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래?”
“어.”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이지훈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래의 상자로 몸을 굽혀 크기와 부피가 다른 물건들이 쌓인 틈 사이로 MP3를 쑥 밀어 넣었다. 다음에 놈이 상자를 다시 뒤지더라도 잘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굽혀져 있던 몸을 곧게 펴다가 옆에 서 있던 이지훈과 어깨가 부딪쳤다. 몸이 이렇게 가까이 서 있다는 걸 몰랐던지라, 둘 다 당황해서 멈췄다. 어색한 시선 교환이 이어지길 잠시, 이지훈은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옷에 손을 뻗었다. 그게 어딘가 익숙한 행위임을 눈치챈 순간에야, 나는 움직였다. 다행히 놈의 손이 니트에 닿기 전에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늘 샤워 후에야 옷을 들춰 봤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나는 몸을 뒤로 뺐다. 잡힌 손에 시선을 두고 있는 놈을 보고는 급하게 덧붙였다.
“내근이었어, 오늘. 서빈 씨랑 연락했으니 알 거 아냐.”
처음에는 나 말고 공통점 하나 없는 둘이 연락을 이어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증인처럼 갖다 팔 수 있는 걸 보니 나름의 장점은 있는 것 같았다. 반박할 말을 잃고 손을 거두던 이지훈이 돌연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히죽 웃었다.
“점심 또 국밥 먹었다며?”
“…둘이 그런 것도 얘기하냐?”
황당해하는 게 티가 났는지,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넌 싫을지 모르겠지만 난 좋던데. 너보다 답도 훨씬 빠르고, 심지어 충성스러워. 네가 어디 가서 칼 맞고 있어도 옆에서 중계는 해줄 것 같더라.”
“…….”
“그렇다고 매일 묻진 않을 테니까 표정 풀어, 새꺄. 너 답장 없길래 대신 28일 스케줄 떠보다가 얻어걸린 거야.”
28일이란 일자가 등장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런 반응에도 이지훈은 가볍게 웃었다. 내 거절을 당연히 예상한 듯한 얼굴로, 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신경 쓰지 마. 근무 있다고 전해 들었으니까. 요새 부서 바쁘다며. 제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네 후임이….”
“반차 낼까 생각 중이야.”
“…진짜?”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고민했던 거지만, 해탈한 표정을 짓는 이지훈을 본 순간 뱉어버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묻는 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정리되긴 했지만 여전히 바쁜 것도 사실이고, 반차를 내려면 그 전날에 좀 더 고생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 내일 반장님께 보고드리려고.”
이지훈과 둘이서 생일을 보내는 건 어쩌면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와, 대박이다. 나 반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곱절로 더 벌었네. 뭐 하지?”
그래 봤자 네 시간 이르게 퇴근하는 것뿐인데, 이지훈은 평생 받은 적 없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한다. 죄책감부터 안기는 미소를 보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배가 훌러덩 까이는 느낌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야!”
내가 붙잡을 새도 주지 않고 옷을 놓고 후다닥 물러선 놈이 항복하듯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래 봐야 활짝 웃고 있어서 진정성이 의심되긴 했지만.
“아, 더블 체크. 더블 체크. 내가 의심이 많아 가지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았는지 면피용 미소부터 짓던 이지훈이 부산스레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이없어하는 나를 흘긋 보고는 걸음을 훌쩍 옮겼다. 나도 한숨과 함께 조명을 끄고는 소파에 내려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어이없기만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귀부터 열이 올라왔다. 아직 씻지도 않아서 신경 쓰이는데 속도 모르고 남의 옷을 아주 제 옷처럼 훌러덩, 훌러덩. 미친 새끼.
“야.”
유독 화끈대는 왼쪽 귀를 만지작대며 문으로 다가서다 말고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진작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이지훈이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날 보고 있었다.
“후회 안 하게 해줄게.”
문득 실감이 났다. 얼마 후에는 이런 이지훈의 얼굴도, 이런 이지훈과의 시간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게.
“…뭘 준비했길래 그렇게 거창해.”
한참이 지나서야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장단을 맞추는 나를 보며, 이지훈이 씩 웃었다. 대답 대신 인사가 돌아왔다.
“잘 자.”
능청맞게 대답을 피한 놈이 방 안으로 발을 들이고,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놈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방금까지 놈과 앉아 있던 소파를 비롯한 거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멎은 곳은 장식장이었다. 이지훈이 비행을 다녀올 때마다 준 기념품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떠날 것들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생각했다.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이 이 집에 있는 매 순간 느껴진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문고리를 잡았다. 미뤄둔 피로가 뒤늦게 몰아치듯, 왼쪽 눈 뒤가 욱신거렸다.
* * *
“선배님. 오늘 오후 반차시라고 들었는데… 나가시기 전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이지훈
11월 29일 11:00 인천 출발, 뉴욕 도착 KE082편 /
12월 2일 17:25 뉴욕 출발, 인천 도착 KE091편 오전 11:02
“…선배님?”
말의 공백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신입이 멋쩍은 얼굴로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이미 여러 번 불렀던 모양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부터 내려놨다. 이지훈의 일정을 곱씹느라 주변 상황에 대한 반응 센서를 아예 꺼놓고 있었던 것 같아 민망했다.
“아,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신입이 들고 있는 서류로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방금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후 1시 17분. 이지훈이 2시에 본청 앞으로 차를 가지고 온다고 했으니, 신입의 업무를 봐준 후 나가면 얼추 맞을 듯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나가시기 전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말해요. 이게 관련 서류예요?”
“네, 그런데….”
서류를 받아들다 말고 망설이는 듯한 신입의 얼굴빛을 읽었다. 덩달아 멈칫한 내가 묻기 전에, 등 뒤가 시끄러워졌다. 아침부터 각자의 업무로 자리를 비웠던 선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신입이 기합 든 모습으로 꾸벅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오셨습니까.”
“어어. 밥 먹었어?”
“네! 먹었습니다!”
이쑤시개를 옆의 쓰레기통에 툭 던지며 인사를 받아준 하 선배가 건너편 자리로 갔다. 외투를 벗은 그의 시선이 나와 신입에게 번갈아 닿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막 꺼낸 커피 쿠폰을 내 책상을 향해 툭 던졌다.
“자, 12개 다 모았다, 가져라.”
본청 앞에 있는 카페 쿠폰이었다. 쿠폰 몰아주기, 종종 선배들이 날 챙긴답시고 하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의 가격보다는 어떻게든 뭐라도 챙겨주려 하는 마음을 알기에 고개를 꾸벅하고는 쿠폰을 옆의 서랍에 넣었다. 가까이 다가온 정 선배가 파티션에 팔을 기댄 채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막내들끼리 잘 지내니 보기 좋다?”
“네! 선배님께서 오늘도 절 잘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하이고, 그러셨어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참. 지 경위. 반장님이 너 오늘 반차라던데. 왜 아직 안 나가고 이러고 있어?”
“2시까진 시간이 좀 남아서요.”
“이야… 하 선배랑 밥 먹으면서 너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우스갯소리처럼 하긴 했는데, 정말이네. 얌마. 어차피 점심시간에도 일했을 거면서, 무슨 그것까지 지키겠다고 앉아 있어? 여기에 너 1시에 나간대도 뭐라 할 사람 없어. 있어도 내가 해결할 테니까 얼른 짐 싸서 들고 나가. 너 반차도 거의 육 개월 만에 처음 아니냐? 건강검진한 날도 결국 밤에 들어왔잖아.”
“괜찮습니다. 이게 더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요.”
“하 선배. 지 경위 요놈 또 말 안 듣고 뻗대는데, 한마디 하시죠.”
서류철을 살피다 말고 고개를 든 하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마구 휘저었다. 얼른 꺼지라는 몸짓이었다. 아군을 얻은 정 선배가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더니 내 품에 떠안겼다.
“선배님. 저 진짜 괜찮….”
“씁.”
“…….”
“나 담배 피우고 올 건데, 그때도 있으면 혼난다.”
본인의 책상으로 돌아가 담배를 챙겨 든 정 선배가 한 번 더 눈을 부라렸다. 말했다, 분명. 장난이긴 한데 장난만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이도 저도 못 한 채로 눈치를 보는 신입에게 소리 죽여 말을 걸면서.
“나 따라와요. 나가면서 이야기하게.”
신입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책상 위 서류를 끌어모아 품에 안았다. 핸드폰을 비롯해 짐을 간단히 챙긴 나는 남아 있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서를 빠져나왔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온이 종종 영하로 내려가곤 했다. 그런 계절이 도래한 것치곤, 몇 안 되는 청명한 날씨였다. 구름조차 없이 맑게 갠 하늘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숨을 쉴 때마다 습도 낮은 공기가 폐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주차장의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다 자리에 서서히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푸른 하늘에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내일 이지훈이 비행할 때도 저런 하늘을 보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지훈이 생각난 김에 핸드폰을 들었다. 평소에 그랬듯 비행편을 알리는 메시지 이후로 이지훈에게 온 메시지는 없었다. 아침을 먹으며 놈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저번에 한 인터뷰 일로 오전에는 학교 후배들을 잠깐 만나야 한댔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 오후 1:40 어디야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뒤따라오던 신입에게로 몸을 돌렸다. 때마침 정문 밖이었다. 이곳이라면 담배를 피우던 선배들의 눈에 띄진 않겠지. 마주치더라도 기껏 빨리 퇴근해 놓고 밖에서도 일하냐며 핀잔 정도 들을 뿐, 혼이 나진 않을 거였다.
“오프 더 레코드예요?”
서류를 눈짓하며 물었다. 내가 바로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신입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건네받은 서류를 짧게 살폈다. 신입이 건넨 서류는 프린트 된 인터넷 기사였다. 인지도가 거의 없는 인터넷 신문의 로고를 훑고 그 밑의 기사를 읽던 나는 몇 문단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이거….”
신입은 고개를 끄덕이기부터 했다.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아는 것처럼.
“저도 아직 차혁준 관련해서는 확실해지기 전까지 이름 공개하지 않기로 협의한 거로만 알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래서 보고드려야겠다 생각했고요.”
“…이 기사 언제 떴어요?”
“오늘 오전 일곱 시에 올라왔고, 검색 포털이 아닌 신문사 자체 홈페이지에만 떴습니다. 올라온 지 십 분 만에 삭제됐고요. 그래도 본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만, 유명한 신문사가 아닌 데다 그마저 본 사람들도 팬인지 아직 퍼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기사 자체가 공유가 안 되게 아예 막혀 있기도 했었고요.”
신입 말이 맞았다. 비록 별장 사건과 관련해 꽤 정확한 지라시가 퍼지긴 했어도, 최혁준이 거론된 기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최정호네 집에서 발견한 증거들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다 적합한 시기에 터뜨리기 위해 다들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다. 그 전까지는 굳이 최정호에게 최혁준이 배신했음을 알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 최혁준 기사가 나오지 않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최정호가 힘을 쓰고 있는 거든, 소속사가 힘을 쓰고 있는 거든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는.
굳은 내 표정을 힐끗댄 신입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긴 합니다. 기사도 바로 삭제됐고, 혹시 몰라서 모니터링 했는데 지금까지도 차혁준 관련된 기사는 올라온 게 없습니다. 만약 오피셜로 터졌으면, 다들 떡밥 물 듯 줄줄이 기사 쏟아냈을 텐데 잠잠한 거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요. 꽤 큰 일간지에서 연예 기자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떠보니, 차혁준 관련 이야기는 계속 도는데 소속사에서 잘 막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다만 제가 걱정되는 건 이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서요. 사이버수사과에서 일할 때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접했거든요. 주로 연예인들 대상이긴 했는데, 이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신문사에서 먼저 정보를 흘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의 올리자마자 삭제하는데 그러면 일반 대중은 못 봐도….”
“소속사 직원은 보죠. 모니터링을 하고 있을 테니까.”
“아, 네! 맞습니다. 역시 선배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방식이었다. 마약 사건에 휘말린 연예인들이 비슷하게 당하는 걸 보곤 했으니까. 재계약이 얼마 남지 않은 소속사가 연예인과 관련한 루머를 퍼뜨려 볼모 잡듯이 할 때도 있고, 혹은 소속사 외의 외부 세력이 개입해 사건을 일부러 진창으로 끌고 가려 할 때도 있었다.
최혁준의 경우는 두 개 다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후자에 더 힘이 실렸다. 소속사를 자극하면서까지 최혁준을 끌어내리려 하는 세력…. 잠깐 생각하던 나는 서류를 신입에게 돌려줬다.
“모니터링 계속하고, 또 최혁준을 거론한 기사가 나타나면 바로 나한테 말해줘요.”
“아… 네. 반장님께도 보고드려야 할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직접 말씀드리기엔 아직 좀 부담스러워서….”
“제가 할게요. 일단 주말 지나고요. 지금 어차피 다른 사건 때문에 먼 곳으로 나가계셔서, 당장은 통화도 힘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신입이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인 것과 동시에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입과 나는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정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지훈의 차를 확인한 순간에는 주머니부터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찍혀 있었다. 무음으로 해둬서 놓친 모양이었다.
“어, 서빈 씨도 있네.”
창문이 내려가고, 이지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을 차창에 걸친 채로 능글맞게 묻는 놈은 꼭 출근할 때처럼 세팅된 머리에 흰 셔츠까지 차려입은 멀끔한 차림이었다. 아침에 밥을 먹으며 본 모습과 새삼 거리감이 느껴졌다. 후배들과 추가 인터뷰가 있다더니, 신경 써서 차려입은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바로 이지훈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신입이 이내 화들짝 놀라서 몸을 급하게 앞으로 숙였다.
“어, 형님. 안녕하세요! 순간 못 알아뵈고….”
고개를 드는 와중에도 얼떨떨한 낯으로 차와 이지훈을 번갈아 바라보는 걸 보니 제 기억 속의 이지훈과 눈앞에 있는 이지훈을 대조해보는 중인 모양이었다.
“어. 서빈 씨도 안녕해. 그나저나 둘 다 너무 워커홀릭 아니야? 밖에 나와서까지 서류를 들고서는.”
“아, 그게 아니라….”
뭐라고 말하려는 신입의 앞을 막아섰다. 혹시라도 이지훈의 페이스에 말려 최혁준의 이야기까지 술술 불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나는 이지훈이 입 모양조차 읽을 수 없게 등을 보인 채로 신입에게 소리를 죽여 경고했다.
“우리 한 얘기 반장님한테 말씀드리기 전까지는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아…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러겠습니다. 저, 선배님.”
“네?”
이지훈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 마음이 급했다. 그게 티가 났는지, 나를 붙잡은 신입이 잠깐 머뭇대더니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셔츠 입고 머리 위로 올리신 거, 되게 잘 어울리십니다.”
“…….”
“이렇게 하신 건 처음 본 것 같아서요. 그래서 더더욱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입이 엄지 두 개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짱….
“아….”
겨우 나간 내 어색한 반응에는 한층 더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빨리 물러선 신입이 꾸벅 몸을 숙였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신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몸을 돌렸다. 경찰청 앞에서 흔히 볼 법한 차가 아니어서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걸음의 속도를 높여 놈의 차로 성큼 다가섰다. 재빨리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매고 옆을 돌아봤다. 이지훈의 얼굴보다 길쭉한 손가락 두 개에 먼저 시선이 쏠렸다. 놈이 말을 하기 전부터 한숨이 터졌다.
“벨트도 짱 잘 매네.”
그래, 이 기회를 놓치면 이지훈이 아니지. 신입이 방금 그랬던 것처럼 엄지를 모아 붙인 이지훈은 실실 웃고 있었다.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이걸 넘기면 틈날 때마다 저 지랄 하는 걸 봐야 했다.
“부러뜨리기 전에 접어라.”
이를 악문 채로 경고하듯 말하고서야 이지훈이 손을 거뒀다.
“그건 절대 안 되지. 특히 오늘은.”
시선도 함께 거두려던 놈이 멈칫하고는 손을 뻗었다. 나는 어색하게 굳기부터 했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놈의 머리가 턱 바로 밑에 있었다. 이지훈에게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수 냄새가 났다.
“이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냐.”
중얼댄 놈이 끝이 꼬여 있던 부분을 뒤집어 풀었다. 안전벨트에서 손을 떼던 이지훈이 멈칫하고는 나를 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처럼.
잠시 고개를 내려 내 목 언저리를 응시하던 놈은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전에 몸을 뒤로 완전히 물렸다. 나도 헛기침을 뱉으며 창밖을 봤다.
“야.”
느닷없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핸들에 손을 얹은 놈이 양쪽 입꼬리를 모두 끌어 올려 웃고 있었다.
“좆나 설렌다. 그치.”
놈의 가지런한 손가락들이 핸들 위를 리듬이라도 타듯 두드렸다. 선팅된 앞 유리를 비집고 들어온 하얀빛이 이지훈의 얼굴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췄다. 이지훈이 준비된 사람처럼 말했다.
“가자.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러.”
오늘 계획에 대해 끝까지 함구하던 놈 때문에, 아마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 가게 될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기에 익숙한 병원이 눈에 들어온 순간에는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왜?”
주차를 끝낸 놈이 벨트를 풀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여상한 대꾸가 뒤를 이었다.
“요새 바빠서 잘 못 왔을 거 아냐.”
“…….”
“원래 계획보다 두 시간 정도 남는데, 이 기회에 같이 들렀다가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사실이었다. 저번 주에는 그래도 시간을 내어 새벽에라도 한번 들렀는데, 이번 주에는 그러지조차 못했다. 이지훈이 그걸 알고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준 건 의외였지만. 찾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몸까지 아예 뒤로 돌려서 뒷좌석으로 손을 뻗는 놈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몸을 다시 돌린 놈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 병실에 꽃을 사 간 게 언제였더라. 할아버지가 언젠가 일어나서 그걸 볼 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품던 때? 꽃다발에 시선을 둔 채로 과거를 되짚는 나를 이지훈이 툭 쳤다.
“가자. 영감 보러.”
그러고 보니 이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영감’이라는 말 또한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듯한 눈을 괜히 감았다가 뜨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나보다 이지훈을 더 반가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지훈은 꽃과 함께 준비해온 마카롱을 그녀에게 내밀 줄 알았고, 우리 둘이 할아버지와 있을 테니 잠깐 쉬다 오시라고 살갑게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할아버지는 오늘도 잠들어 있었다. 이지훈이 꽃병 속의 꽃을 교체해도, 내가 옆에 가서 앉아도, 간병인 아주머니가 이 병실을 나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아주 깊은 잠에 빠진 채로 침묵했다. 나는 하얀 시트에 가지런히 놓인 주름진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멀거니 응시했다. 오늘 아침 간병인 아주머니가 면도를 해줬는지, 수염이 깔끔하게 정리된 턱 언저리와 굳게 닫힌 입술을 잠깐 바라봤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영상이라도 찍어두었다면 그걸 보며 기억이라도 할 텐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는 말조차 잘 하지 못하던 손자인 죄로 받은 벌이었다. 할아버지가 이 병원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것도 벌써 5년째다. 나는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싫어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순전한 내 욕심으로. 그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희망과 만일 무언가가 잘못됐을 때 그래도 최고의 의료진들에게 치료받는 게 좋을 거라는 굳센 고집으로.
손끝을 만지작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이 건너편에 서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순간마저도, 침대 옆에 선 놈의 시선은 할아버지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너 여기 오면 영감이랑 무슨 대화하냐.”
이지훈이 묻는 게 꼭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아는데도, 순간 목이 콱 막히듯 조였다. 보통 대화라고 하면 두 사람 이상을 필요로 했다. 할아버지는 어쨌든 살아 있고 사람이니까 대화의 조건도 성립하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이곳에 온 후로 한 번도 그와 대화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아주 가끔은 말을 걸었으나 그마저도 세 마디를 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곤 했다. 텅 빈 벽에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괴로워서였다.
대답하지 않는 내게로 이지훈의 시선이 잠깐 왔다 갔다. 놈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시범이라도 보이듯 먼저 털어놓았을 뿐이다.
“난 여기 오면 너 이야기해.”
병실에 이지훈의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팔짱을 푼 놈이 침대로 몸을 기울였다. 이지훈이 병원복에 가려진 할아버지의 왼쪽 팔을 잠깐 쥐었다 놓는다. 그새 할아버지가 얼마나 야위었는지를 가늠이라도 해보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제가 알게 된 정보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놈은 그러나 할아버지의 팔 위로 다시 손을 올렸다. 마사지하듯이 조물조물 문지르면서.
“보나 마나 넌 네 이야기 영감한테 잘 안 할 테니까….”
“…….”
“나라도 해줘야 영감이 너 어떻게 지내는지 알 것 같아서.”
팔을 따라 쭉 마사지하던 놈은 할아버지의 손 앞에서야 멈칫했다.
“되게 신기한 게… 가끔은 영감이 듣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
“언젠가 한 번은, 영감 손이 움찔하는 것 같은 거야. 간병인 아주머니한테 여쭤보고 결국엔 의사까지 데리고 왔는데, 아니라더라. 그냥 내가 착각하고 싶어서 그렇게 느낀 것 같다고 하더라고.”
이지훈의 얼굴에 잠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걸 떨쳐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젓던 놈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욱아.”
눈을 맞춘 채로, 이지훈이 말을 고른다. 길지 않은 고민을 끝낸 놈의 눈빛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졌다. 동정보다는 위로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영감 너 보러 살아 있는 거야.”
“…….”
“네가 자기 없어도 잘 사는 거 보고 가려고. 네가 붙들어서 억지로 연명하는 게 아니라, 영감도 어떻게든 네 옆에 있어 주려고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거라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하필 눈을 내린 곳에 할아버지의 손이 있었다. 늘 가볍게만 쥐던 할아버지의 손을 조금 더 힘을 줘 잡은 채로 이지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힘들겠지만, 영감한테 네 이야기 해.”
“…….”
“후회하지 않을 만큼 털어놓고, 너 괜찮게 잘 살고 있다고 안심도 시켜주고 그래.”
이지훈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나는 눈물이 지나가고서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맞은편 손을 잡은 이지훈이 날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서였다. 이곳에 올 때마다 꾹 참곤 하던 울음이 처음으로 말의 형태로 변해 나왔다.
“고마워.”
이지훈의 이름을 꺼내지 않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지훈의 말처럼 할아버지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완전히 보내주려면. 나를 위해서 더 버틸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려면.
다시 차에 타자마자 이지훈은 라디오를 틀었다. 주파수를 잘못 잡아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뽕짝이 나오는 순간에는 오히려 잘됐다는 것처럼 소리를 키웠다.
“영감이 또 우리 배웅해준다고 이런 노래를 틀어주네.”
“…할아버지는 이런 노래 안 좋아하실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영감 장날에 춤추는 거 봤어?”
“넌 봤냐?”
“아니. 그니까 멋대로 날조할 수 있는 거지. 알면 양심에 찔려서 거짓말 못 할 테니까.”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뻔뻔한 말에 결국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런 웃음도 웃음이라고, 이지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노래의 끝음절을 따라서 흥얼대면서.
긴 터널을 지나며 라디오를 끈 뒤에는 주제조차 없는 이야기를 툭툭 던지듯 했다. 오랜만에 우리의 사이가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터널을 두 개쯤 더 지났을 무렵 강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에 왔다 간 후부터 매일 야근 중인 강영수는, 우리가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같이 있다는 건 알게 된 후부터 너무 재미있게 놀지 말라며 쉬지 않고 찡찡댔다. 이지훈은 3분까지는 참아주다가 멋대로 전화를 종료했다. 다시 전화가 오면 오는 대로 족족 끊어버리던 놈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 새끼 요새 연애하는 것 같던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강영수한테 연애 이야기를 들은 지가 한참 됐다. 소개팅 나간다고 옷을 골라 달라 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누군가를 사귀면 그 순간부터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늘어놓을 놈인데 의아했다.
“…딱히 못 들었는데.”
“나도.”
확신을 담아 말하길래, 들은 거라도 있는 줄 알았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고개가 돌아갔다. 이지훈이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더 수상하지. 분명 연애하는 것 같은 눈치인데, 평소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것 대신 입 꾹 다물고 있으니까.”
“…….”
“뭐가 됐든 잘됐지. 지긋지긋한 애정 결핍도 끝낼 때 됐고.”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조차 확실히 듣지 못한 상황인데도 이지훈은 거의 강영수가 비밀로 사귀는 그 상대와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그럴 만한 심증이 있나 싶다가도, 확증이 없다면 앞서 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긍정할 수가 없었다. 애매한 반응을 눈치챘는지 옆을 돌아본 이지훈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왜. 아닌 것 같아?”
웃으며 묻는 놈에게서 시선을 미끄러뜨리듯 돌리며, 콧잔등을 긁었다.
“뭐… 그렇다기에는 들은 게 없으니까.”
침묵하던 이지훈은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때가 되어서야 나지막이 말했다.
“평소 하던 짓을 의식이라도 하듯이 반대로 구는 것만큼 확실한 경험적 증거가 있나 싶다, 난.”
그쯤 되니, 더 대꾸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꾸준히 굴러가던 차는 내가 알지 못하는 길로만 가고 있었다. 점점 더 주위가 한산해지는 것 같긴 한데 그 이유는 몰랐다. 단서라도 찾기 위해 주변의 표지판을 눈여겨보려고 하면, 이지훈이 갑자기 산만한 짓을 하며 부러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몇 번 당한 후 뭘 하든 꿈쩍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는 ‘안대를 가져왔어야 했는데….’라며 다 들리도록 중얼대기도 했다. 그래 봐야 알아낸 건 30분 전 제천시를 지났다는 것뿐이었는데도.
그래도 느낌상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길이 점점 좁아지다가 다음 순간에는 좌우가 확 트였다고 느낄 정도로 넓어지길 반복했다.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닌 가지런한 평야가 이어졌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간혹 풀 냄새가 스쳤다. 서울보다 바람이 거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34. 6시 전에 서울에서 출발할 수 있냐고 했던 이지훈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의 해조차 완전히 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이지훈은 말을 아꼈다. 이지훈의 잘 세팅되어 있던 머리가 바람에 헝클어지는 걸 옆눈으로 보다가도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을 몇 번 반복하고서야 차가 멈춰 섰다.
차가 멈춘 곳은 방금 지나온 평야와 별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보이는 건물조차 없이 주변이 휑했다. 차에서 내려야 뭐가 좀 보이려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덕을 기웃대며 당장이라도 내릴 것처럼 안전벨트를 푸는 날 이지훈이 만류했다.
“잠깐 앉아 있어.”
“…어차피 도착한 거 아니야?”
“맞아. 맞는데 잠깐만.”
뭐라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놈이 차에서 훌쩍 내렸다. 앞 유리를 통해 언덕을 향해 뛰어가는 놈이 보였다. 놈이 입고 있는 흰 셔츠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바람에 펄럭댔다.
“…….”
잠깐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지훈은 금방 돌아왔다. 갈 때처럼 올 때도 뛰는 놈 덕분에, 하얀 셔츠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나는 이지훈의 말처럼 기다리며, 운전석이 아닌 보조석으로 다가오는 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람에 한 번 휘청이는 법 없이 직선으로 다가온 놈이 문을 열었다. 나는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나는 이지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친 숨소리가 잠깐 귓가에 맴돌다 스쳐 지나갔다. 그게 계속 뛰었던 이지훈이 숨을 고르는 소리라는 건 상기된 볼을 보고서야 다시금 깨닫게 됐다.
“내려.”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이지훈의 머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흩날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이지훈의 말에 따라 엉거주춤 내렸다.
날 가장 먼저 맞아준 건 바람이었다. 왜 이지훈의 옷이, 머리가 그렇게 휘날리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주듯이 몰아치는 바람.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 정도로 거셌다.
세찬 바람에 적응하고서야 눈을 깜빡이듯 뜰 수 있었다. 그러자마자 마주했다. 차 안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 그곳에 있었다. 날개를 가진 은색의 경비행기가, 잘 자란 잔디 사이로 위치한 긴 활주로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 그 모든 게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해를 등지고 있어 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놈이 내가 평생 보지 못했던 종류의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지훈의 뒤로 석양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을 이지훈이 확인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 오늘 너랑 비행할 거야.”
경비행기에 타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덕 위 관리소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이의 설명을 듣고 서류에 사인했다. 안전 규칙 같은 것도 쓰여 있던 것 같은데, 대충이나마 읽었음에도 무슨 내용인지 단어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멍했다. 내내 옆에 있었던 이지훈은 출발 전 미리 확인할 것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가자마자 이지훈을 볼 수 있었다. 경비행기에서 몸을 반쯤 뺀 채로,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무엇인가를 말하던 놈이 날 보고는 한쪽 발을 마저 내렸다.
다가오는 놈을 보다가도 자꾸만 뒤에 있는 경비행기에 시선이 꽂혔다. 미디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대도, 실생활에서 이런 광경을 접할 일은 흔치 않았다. 특히 다른 누구도 없이 둘만 탈 비행기라면 더욱 그랬다.
“다 했어?”
다가온 이지훈은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상적인 표정이었다. 이보다 몇 배는 큰 비행기를 운전하는 놈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싶다가도, 나만 이렇게 긴장을 하나 싶어 묻게 됐다.
“…진짜 우리 둘만 타?”
질문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는 듯 눈썹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던 이지훈이 헛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면서 묻기도 했다.
“일단 지금 내가 비행기에 태우고 싶은 건 너밖에 없긴 한데.”
“…….”
“왜? 누구 더 탔으면 좋겠어?”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라서 벙쪘다. 입을 다문 나는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이지훈이 더 말하지 않고 내 팔을 끌었다.
“가자. 노을 완전히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봐야지.”
흔히 알던 경비행기보다는 커 보이는데도,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다. 계기판 앞의 나란히 붙은 두 좌석이 끝이었다. 이지훈은 나를 오른쪽 자리에 앉혔다. 제대로 앉으려면 무릎을 반쯤은 굽혀야 했다. 어정쩡한 자세를 보던 놈이 무릎을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다리 모아.”
평소처럼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려다가도, 장난기 없이 진지한 놈과 눈을 마주친 순간에는 그냥 어색하게 몸을 굳힌 채 하라는 대로 움직였다. 내가 그렇게 할 동안 이지훈은 나머지 일을 했다. 알아서 자리를 정돈해주고 차를 탈 때와는 달리 양쪽으로 해야 하는 안전벨트를 매는 것도 대신 해준 뒤 머리 위로 헤드셋까지 씌워줬다.
아까 이지훈과 대화하던 남자가 내 쪽의 문을 닫아줬다. 남자와 잠깐 더 이야기를 나누던 이지훈이 비행기를 빙 둘러서 다가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돌아본 놈이 내 가슴팍 부근에 매어진 안전벨트를 한 번 더 확인하듯 꽉 당긴 후 놓았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밖으로 손을 모아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열려 있던 하나의 문을 닫았다. 언덕 위에서도 간헐적으로 귀를 맴돌던 바람 소리가 멎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헤드셋 때문인지 침을 삼킬 때마다 귀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기판 위를 이것저것 만지던 이지훈이 뒤로 몸을 돌려서 안전벨트를 맸다. 툭, 하고 위로 민 어떤 버튼이 전원 역할이라도 하는 것처럼 앞의 프로펠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체가 흔들리고, 앞에 놓여 있던 조종석 모니터가 켜졌다. 순간 기체가 튀어나가듯 속도를 높인 탓에 몸이 뒤로 쏠렸다.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준 손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헤드셋을 쓴 이지훈이 개구지게 웃고 있었다.
“나 믿어?”
나는 점점 더 크게 흔들리는 기체 속에서 떨떠름하게나마 입을 열었다.
“…여태 안 믿었더라도 지금은 믿어야 할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한 이지훈이 웃었다.
“완벽한 대답이네.”
고개를 돌리는 놈을 보다 말고 숨을 잠깐 참았다. 가슴팍에서 내려간 이지훈의 손이 어느덧 내 무릎 위에 놓여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 오른쪽 무릎을 꽉 잡았다 놓은 이지훈이 나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도 안심되게 형이 지금처럼 무릎 잡아줄게? 일단 뜨고 나서.”
하필 그 순간 헤드셋에 달린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한 놈 때문에, 장난기 어린 놈의 말이 반복되듯이 좁은 기체 안을 웅웅 울렸다. 됐다는 말은 입술을 넘지 못했다. 활주로를 달리며 점차 가속도가 붙는 경비행기처럼 몸도 같이 활주로 위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퀴 구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기어를 끝까지 밀고 있는 이지훈은 흔들림 없이 앞을 보고 있었다.
덜컹, 하고 기체가 한 번 더 크게 움직이면서 바퀴가 땅에서 떨어졌다. 기우뚱하는 느낌은 잠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발을 대고 있던 땅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활주로도, 저 멀리 우리가 차를 대어두었던 잔디도.
“선욱아. 하늘.”
뒤를 돌아보는 나와 달리 줄곧 앞을 보고 있던 이지훈이 말을 걸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
한 번도 보지 못한 빛이 그곳에 있었다. 산 너머 해가 기울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치 태양이 내뿜는 빛 속으로 달려드는 하루살이가 된 기분이었다. 말들이 차마 입 밖을 나오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그러는 중에도 고도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 600피트, 900피트, 1500피트. 어떠한 분기점을 넘을 때마다 어디에 보고라도 하듯이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이지훈 때문에 우리가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앞의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릎을 톡 치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이지훈이 옆에서 나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지훈은 나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가본 곳을 훑듯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익숙하게 어루만지던 놈의 시선은 내 눈 위에서 멈췄다. 놈의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그 눈동자 안에도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지훈이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술을 조용히 달싹였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생일 축하해.”
평생 이 순간을 뛰어넘는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물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선물을 준 게 이지훈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 응당 그러듯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목을 쥐어짜듯이 한참 목울대를 넘기고서야,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넌.”
“…….”
“이런 걸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해?”
의식조차 하지 않고 나간 물음이었다. 순수하게 궁금했다. 입을 벌리고 감탄하게 만드는 광경 앞에서, 나는 이지훈과 함께일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부터 했다. 이지훈은 한 달에도 셀 수 없이 비행기를 탄다.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세계와 까마득히 멀어지고 그만큼 멋진 하늘로 뛰어드는 경험을 하겠지.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때로는 별이 떠 있을 광경들. 내가 잘 알던 것들과 멀어진 순간에야 보이는 것들.
그런 하늘을 마주칠 놈이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이지훈은 그러나 끝내 대답을 내어놓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적정한 고도를 찾은 비행기는 이제 위로 더 올라가는 것 대신 고도를 유지한 채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강에 시선을 뒀다. 사라지는 햇빛을 아쉬워하듯이 강물 위의 반짝이는 빛이 아른거리듯 움직였다. 나는 눈을 깜빡인 순간 그것들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 눈조차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네가 이런 풍경을 자주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좋네.”
“…….”
“하늘에 뜰 때마다 행복할 것 같아서.”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지훈이 물었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비행기를 운전하는 놈은 차를 운전할 때와는 다르게 내게로 자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지금도 이지훈의 시선은 앞, 더 나아가서 우리가 떠 있는 상공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 순간만큼은 조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어.”
“…….”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
“최선을 다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지훈에게 그렇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난 이지훈이 고개를 돌려 내 표정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는 계속해서 날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 속에 잠긴 마을에서 하나둘 불이 켜질 때까지.
“이제 돌아갈 거야.”
이지훈이 말하고서야 땅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착륙 전 근처의 공항에 보고해야 한다며 뭔지 모를 생소한 용어로 교신하던 이지훈을 신기하게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대답을 기다리느라 잠깐 말을 멈춘 틈을 타 이지훈이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가, 놈이 보고를 모두 끝내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고도, 위도. 그런 거 보고하는 거야?”
항공 용어는 잘 모르지만, 숫자를 연이어 이야기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나를 흘긋 돌아본 이지훈이 가볍게 긍정했다.
“어. 그런 거. 지금은 약식이고, 일할 때는 고도, 위도, 경도, 비행 속도 다 말하지. 교신의 기본이 그런 거니까.”
“틀릴 때도 있어?”
“뭐가?”
“그중 하나라도.”
잠깐 생각하던 이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난 없어. 애초에 미스 내는 거 싫어해.”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어본 거긴 했지만, 단단한 답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 하긴 놈의 성격상 그런 걸 틀린다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했다. 저 멀리 익숙한 언덕이 보였다. 이지훈의 말처럼 점점 착륙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까 막 이륙했을 때처럼 기체가 좌우로 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틀린다면.”
이지훈의 말소리가 들렸다. 작은 말소리였지만 마이크에 대고 말한 덕분에 귓가에 무리 없이 내려앉았다.
“좌표를 수정하면 돼. 다시 시작하듯이.”
콰콰쾅. 세 개의 바퀴가 낸 소리 때문에 내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지훈이 한 번 더 반복했다. 다시 시작하면 돼. 나는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착륙을 대비하듯 눈을 감았다. 잠깐 흔들린 몸은 순식간에 다시 고정됐다. 부드럽고도 매끄러운 착륙이었다. 활주로의 끝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비행기는 어느덧 땅에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이윽고 아주 천천히 비행기가 멈췄다. 프로펠러의 속도가 줄어드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완연한 밤이었다. 비행기 밖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바람이 내는 건지, 프로펠러가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타다닥, 귓전을 때렸다.
나는 이지훈이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내려야 하냐고 물어볼 셈이었다. 그러나 입을 떼기도 전에 이지훈이 움직였다. 놈은 어느새 헤드셋을 벗은 채였다. 몸이 바투 붙었다. 무서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지훈이 가까워졌다. 이 좁은 비행기에서도,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사람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붙었다. 이지훈의 숨에 섞인 달뜬 망설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볼을 감싸다 못해 헤드셋까지 누르고 있는 이지훈의 손은 습했다. 내내 손에 땀이 나고 있던 사람처럼 축축하고 더웠다. 내 눈앞에 있는 이지훈의 모든 게 낯설었다. 제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놈을 응시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술로 돌진하던 이지훈은 입술이 닿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놈의 시선이 처음으로 위를 향했다. 지는 석양을 비춘다고 믿었던 눈은 내가 알지 못하는 붉은빛을 담고 흔들리고 있었다. 이지훈이 입술을 떨었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데, 그게 잘 안되는 사람처럼. 그러나 다음 순간 놈은 참길 포기하고는 입술을 놓았다.
“너.”
마이크에 대고 말하지 않는데도, 이지훈의 음성이 생생했다. 아마 내 입술과 닿을 듯 말 듯 부딪치는 놈의 입술이 직접 일러주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이지훈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내가 알지 못하던 정보들이 전해졌다.
“난 하늘에 있을 때마다 너 생각해.”
그게 한참 전 놈이 대답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음을 눈치챈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눈을 감고 입술을 깊게 포갰다.
붙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된 떨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혀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넘겨주는 타액을 삼키지도 않는 입맞춤은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깊고 습했다. 끈적하고 달아날 수 없었다. 이지훈의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빨듯이 머금는 감각이, 그럴 때마다 내 볼을 붙잡고 있는 이지훈의 손가락 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마치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처럼 느껴졌다.
이지훈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혀조차 넣지 않고 대신 내 입술 위를 핥았다. 마치 들어가게 해달라고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입술에 슬쩍 힘을 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의 그 다물린 일자 위를 부드럽게 눌렀다. 가슴팍이 비스듬히 붙었다. 셔츠 너머로 놈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놈의 왼손이 내 허리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탁, 탁. 상공에서 나를 지탱해준 안전벨트가 풀렸다. 고정될 곳을 잃은 벨트가 리와인딩 되듯 위로 감기다 말고 멈췄다. 가슴팍 부근에서 애매하게 멈춘 벨트의 끝부분이 붙은 몸 사이에서 달랑댔다. 나는 그것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손끝을 움찔댔다. 이지훈이 멈칫하고는 눈을 떴다. 닿아 있던 입술이 그제야 떨어졌다.
하지만 이지훈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코끝이 스칠 듯한 아슬아슬한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코나 입술 등의 부위는 볼 수 없는,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볼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지훈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싫은 거 아니지.”
경험해본 적 없는 놈의 목소리였다. 낮고도, 무거웠다. 물음보다는 확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지훈이 내 의사를 묻는 게 이 행위에만 국한된 게 아님을 눈치챘다. 내가 싫다고 말한 순간 놈이 더 이어가지 않고 뒤로 물러설 거라는 사실도.
전적으로 모든 게 내게 달린 상황인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놈을 바라본 채로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을 어떻게든 소화하려 애썼다. 그러느라 맞닿은 몸을 밀쳐내지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
“…….”
이지훈은 들을 수 없는 대답을 대신 읽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말아쥔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아… 내내 참고 있던 숨이 터진 순간, 이지훈의 시선이 내 입술로 내려갔다. 헤드셋을 부여잡은 손아귀의 힘이 약해지고, 이지훈의 눈빛이 짙어졌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놈이 깃털보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닿기 바로 직전에야 눈이 깊숙하게 마주쳤다.
이지훈은 확신을 바라고 있었다. 좀 더 단단하고, 손에 쥘 수 있는 선명한 무언가를. 그것부터가 낯설었다. 나는 그걸 가진 적이 없으니까.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한 이런 키스를 놈과 해본 적이 없다는 것뿐.
확신하지 못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이지훈은 나와 달리 그걸 직접 알아내려는 것처럼 굴었다. 숨을 뱉느라 입술이 벌어진 틈새로, 이지훈의 혀가 들어왔다. 부드럽게 들어온 혀가 입 안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어정쩡하게 멈춘 손을 잡아 내리는 손길을 느낀 순간, 나는 움찔하듯 눈을 감았다.
손바닥끼리 붙었다. 혓바닥이 스쳤다. 손가락이 어지러이 얽혔다. 혀가 둥글게 말렸다. 키스하면서, 손도 그와 비슷하게 움직였다. 온몸으로 키스하는 기분이었다. 미끌미끌하고 축축했다. 누구의 땀인지, 누구의 타액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이 떨어질 때면 탁한 신음이 흘렀다.
“하아….”
이지훈은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비튼 그 짧은 틈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곧바로 입술을 맞댔다. 이지훈은 어쨌든 내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한 것 같았다. 입술에 닿는 놈의 숨이 거칠었다. 이지훈이 걸리적거린다는 듯 밀어버린 헤드셋의 마이크는 오히려 젖은 입술이 부딪치고 뒤엉키고 빨리는 소리를 적나라하게 중계했다. 달아오른 코끝으로 내뿜는 숨이, 축축한 입 안을 헤집는 뒤엉킨 혀가 점점 더 높은 온도를 품었다. 한계치를 넘기고 어딘가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이지훈의 상체가 내 좌석으로 거의 반쯤 넘어와 있었다. 손깍지가 풀리고, 이지훈의 손이 내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붙은 몸이 자세를 잡듯 들썩댔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질 때마다 셔츠가 감싸고 있는 이지훈의 골격까지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우리가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현관에서 오기로 날 몰았던 놈과 키스를 해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이지훈은 이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나와 이 순간에 있길 원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멈췄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지훈도 턱을 움직이길 멈췄다. 그 틈을 타 나는 손을 들었다. 축축한 손으로 이지훈의 가슴을 밀어내고는, 따라오는 시선을 피했다.
다행일지는 몰라도 시선을 돌린 곳에서 누군가의 형체가 어른대는 걸 발견했다. 아까 서류 사인을 위해 들렀던 관리소 부근이었다. 비행기가 한참 전에 멈췄는데도 아무도 내리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긴 누군가가 확인을 하러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흥분을 미처 다 떨치지 못했음이 호흡에 그대로 드러났다.
“뒤에….”
“…….”
“뒤에 사람 와.”
그러나 이지훈의 시선은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앞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여전히 놈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간신히 깨물었다. 그러는 순간마저도, 방금 이 안을 헤집던 이지훈의 혀가 생각나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손을 들어 헤드셋부터 벗었다. 방금까지도 귀를 울리던 질척한 소리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숨을 가다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이지훈과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
“…내려야 될 것 같은데.”
그제야 이지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허리와 골반 사이에 얹어져 있던 손이 물러나고, 몸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앞을 확인한 이지훈이 제 앞머리를 헝클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숨을 완벽히 가다듬고서도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지훈은 관리소에서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내리자.”
핸드폰을 차에 두고 내렸었다. 확인하지 못한 동안 쌓인 부재중 전화가 꽤 됐다. 목록에 끼어 있는 반장님의 이름을 본 나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전에 잡았던 마약 사범 하나가 또 한 번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일차적으로 진압은 됐다면서도 관련 서류의 행방을 묻는 그에게 답을 해준 후 관련 건으로 야근 중인 선배들과도 차례대로 통화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거의 이를 악문 채로 기억을 헤집어야만 했다. 일부러 차에서 내려 등을 보인 채로 통화 중인데도, 기다리는 이지훈이 신경 쓰이는 통에 도저히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 네 번을 연달아 해치운 후에는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가벼운 두통도 동반됐다. 핸드폰을 귀에서 내리며 뒤돌다 말고 멈칫했다. 이지훈과 곧장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와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팔짱을 낀 채로 보조석 문 쪽에 기대 있던 놈이 차에서 몸을 뗐다. 나는 다가오는 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던 아까와 달리 셔츠 소매의 단추가 끝까지 다 잠겨져 있었다. 날 기다리며 한 일인 것 같았다. 한 발짝 앞에서 이지훈이 멈췄다.
“다시 들어가야 해?”
사건이 터지긴 했으나, 당장 복귀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이지훈이 통화 내용을 들으며 이미 그 사실을 유추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니라고 바로 말하는 것 대신 입술만 말아 물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이지훈과 다시 좁은 차 안에 갇히는 것도 지금으로선 자신이 없었다. 아까의 키스가 생각날까 봐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놈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지훈의 정장 구두에 시선을 둔 나는 핸드폰을 고쳐 쥐며 내 얼굴로 계속해서 쏟아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기 바빴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지막한 말소리를 들은 순간에는 숨이 턱 막혔다. 시선이 절로 들렸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던 이지훈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주머니에서 한 손을 뺐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린 것 같은 속도였으나 볼에 와 닿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손을 뒤집어 손등으로 오른쪽 볼을 가볍게 문지르던 놈이 내 얼굴에 시선을 둔 채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일단 네가 너무 지쳐 보이고.”
추운 날씨와 달리 따듯한 손이었다. 마주친 눈빛만큼이나.
“우리, 이야기도 해야 하잖아.”
이지훈이 자연스럽게 자신과 나를 하나의 단어에 묶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쓰이는 단어인데, 그런 키스를 하고 이렇게 볼을 쓰다듬는 놈을 보니 가볍게 해석이 안 됐다. 비어 있던 머릿속까지 심장이 침투한 기분이었다. 쿵쿵 뛰는 심장이 내는 엇박자가 설렘 때문인지, 불안함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온통 내가 모르던 것들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거지. 방금의 키스에 대해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키스에 응한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에 대해서? 하늘에 있을 때마다 날 생각한다던 놈의 발언이 친구의 범주를 넘은 건지 아닌지에 대해서? 그중 내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확실한 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 나와 달리 이지훈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이지훈의 뒤로 보이는 차를 응시했다. 앞으로도 두 시간은 저 차 안에 이지훈과 있어야 함이 새삼스레 상기되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나는 놈과 함께일 것이다. 이지훈이 내일 비행을 나갈 때까지 계속…
멍하니 차에 시선을 두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홀린 것처럼 입이 움직였다.
“지금 말고 나중에….”
“…….”
“나중에 하면 안 되냐?”
비어 있는 머리로 쥐어짠 최선의 답변이었다. 이지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천천히 거뒀다. 차분한 물음이 잇따랐다.
“그러고 싶어?”
힐난하는 투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심했다. 아직도 비좁은 비행기 안에 있는 것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은 몸은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을 선사했다. 나는 가까스로 긍정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알았어.”
이지훈이 날 따라 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을 내게 둔 채였다.
“대신 언제 이야기할지는 지금 확실히 정하자.”
“…….”
“나 이번에 비행 갔다가 돌아오는 날 어때. 나흘 뒤야.”
이지훈은 한발 물러서 줬지만, 져준 건 아니었다. 그 유연한 태도가 오히려 그렇게 해서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당위성에 힘을 실었다. 나는 이 협상안이 놈이 참고 물러날 수 있는 최선의 범주임을 눈치챘다. 어떤 수를 써서든 놈을 마주해야 함을 인정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야 이지훈이 뒤로 완전히 물러났다.
서울로 돌아가던 중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와는 달리 침묵을 지키는 우리 때문인지, 적막한 차 안에 빗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앞 유리 위로 와이퍼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톨게이트로 들어서기 바로 전 터널에서는 사고가 났는지 가드레일 근처에 모인 차들이 뿜는 테일램프 불빛이 어지러이 번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머리를 헤드 레스트에 기댄 채로 자고 있었다. 빗소리는 여전했지만 주변은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두웠다. 나는 차창을 통해 운전 중인 이지훈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미끄러지는 빗방울들 사이에서 복잡한 표정의 이지훈이 지워졌다가 또 나타나길 반복했다. 무릎 위로 무게감 있는 담요가 놓여 있었다.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운전석과 어긋날 정도로 뒤로 밀려 있는 보조석을 느끼자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부터 잠들었고, 이지훈은 언제 이 일들을 한 걸까. 잠깐 생각하던 나는 차창에 비치는 이지훈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이번에도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나를 어렵지 않게 잠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