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5)

4x5

“저 새끼, 또 빡쳤다.”

베란다를 내다본 강영수가 콜라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지훈이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며 베란다로 나간 이후부터 1분에 한 번씩 중계라도 하듯 이어가고 있는 짓이기도 했다.

“누구 들이받는 중인 것 같아? 엉? 표정 저 지랄 났는데도 못 끊는 거 보니까 지보다는 높은 사람인 것 같지?”

“몰라.”

“왜 몰라? 같이 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놈을 무시하고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둘러대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이지훈과 나는 일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강영수가 팀장님의 둘째 아들 돌잔치까지 다녀왔다는 건 알아도, 휴가가 끝나지 않은 이지훈이 금요일 밤에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런 정보는 보통 본인이 털어놓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니까.

왜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느냐며 이지훈을 탓하기엔, 나 또한 비슷했다. 어차피 다루는 사건만 달라질 뿐 해결하는 방식은 동일하니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일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도 많고 말도 많은 강영수가 유별날 뿐,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대도 그동안 서로의 삶에 있던 굵직한 일들만 다루기에도 바빠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은 굳이 잘 하지 않으니까.

마약수사대에 후임이 하나 들어왔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내가 들어온 후 처음 받는 신입이라 반길 만한데도, 다들 급한 사건을 처리하느라 바빠 거의 신경을 못 써줬다. 팀에서 가장 연차가 낮은 내가 신입을 떠안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서빈

선배님 주무십니까? 오후 7:53

체험 학습이라도 시키듯이 현장에 끌고 다니는 내가 말조차 몇 번 섞어보지 않은 선배들보다야 편한지, 쭈뼛대면서도 다가와 무언가를 묻던 신입의 모습이 메시지 위로 겹쳐졌다. 가끔은 쓸데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걸 보니, 제 딴에는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업무 시간을 지나 연락이 온 건 의외였다. 이 시간에 나한테 연락할 일이 뭐가 있지. 분명 먼저 퇴근하는 거 보고 나도 퇴근한 건데.

뭔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개중에는 가장 편해서 물어본 것일 테니 답변을 하긴 해야 했다.

오후 8:03 아뇨. 무슨 일 있어요?

메시지를 보낸 것과 동시에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졌다. 바로 답변이 올 눈치라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군데?”

핸드폰과 내 팔 사이에 고개를 쑥 내민 강영수가 시야를 가리기 전까지는.

“박서…진? 박서빈? 박수빈? 박수진?”

“비켜.”

“아, 왜! 누군지 제대로 못 봤단 말이야!”

내가 밀어내지 못하도록 힘을 주고 버티는 놈이 끝까지 화면을 보려고 애쓰길래, 아예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어차피 힘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강영수가 포기하듯 팔을 거두다 말고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입을 가렸다. 이상할 정도로 기대에 찬 눈을 마주한 순간 느낀 불안감은 곧 현실화됐다.

“욱아. 너 연애하니?”

이 새끼의 머릿속에는 연애 말고는 든 게 없나. 황당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강영수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아니면 아니지, 그렇게 덜떨어진 놈 보듯 볼 필요는 없잖아….”

“갑자기 여기서 연애 이야기가 왜 나와.”

“네가 갑자기 핸드폰을 숨기니까 수상해서 그렇지.”

“뭘 숨겨. 회사 사람이랑 메시지 하는 걸 보여줄 이유는 또 뭔데.”

“뭐? 회사 사람? 너 사내 연애하니?!”

“…….”

“…알았다고오. 장난 좀 친 거라고요.”

뭘 잘했다고, 입까지 삐죽대며 투덜대는 놈을 두고는 슬쩍 베란다를 확인했다. 다행히 꽉 닫힌 베란다 문 덕분에 이지훈은 사내 연애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통화 중인 놈은 입을 꾹 일자로 다문 채였다. 제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눈치였다. 강영수의 말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긴 했다. 무슨 일일지 잠깐 생각해보다 말고 아래에 시선을 뺏겼다.

“욱아. 너 근데 이지독이랑 진짜 싸웠엉?”

언제 소파로 올라온 건지, 강영수가 내 무릎에 머리를 댄 채 누워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놈의 걱정 어린 눈망울을 확인한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최근 일이 바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강영수가 휴식마저도 포기하고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이유를 알아서였다. 이지훈의 행방을 물으려 했던 전화가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그 주 내내 틈날 때마다 단체채팅방에서 수십 개의 떠보기용 질문을 던지던 놈은 제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다며 결국 치킨까지 사 들고 친히 방문했다. 우리 둘을 나란히 앉힌 채로 하려던 질문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으러 나간 이지훈 때문에 결국 내게로만 향하게 되었지만. 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거.”

“그럼 그때 전화해서 이지독이랑 연락이 되는지는 왜 물었어. 너랑 싸우고 연락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건….”

잠깐 말을 망설이는 사이 강영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놈의 눈을 피해 뒤로 숨겼던 핸드폰부터 앞으로 꺼냈다. 그새 신입으로부터 답장이 와 있었다. 나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척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잠깐 연락이 안 되어서 물어봤던 거고. 어쨌든, 지금은 문제없으니까….”

“진짜지? 믿는다?”

“어.”

“이지독 통화 끝나고 들어오면 똑같은 질문 한다? 유도 신문한다, 막?”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굴 놈이 아닌데, 스무 살 때 이지훈과 내가 싸운 일이 겹쳐지기라도 하는지 유독 성화였다. 나는 답을 재촉하듯 팔꿈치를 잡아당기는 놈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지.”

이지훈도 어차피 싸웠다고 답을 하진 않을 거였다. 나보다 말을 잘하는 놈이니, 어떻게든 둘러대겠지. 우리 둘은 암묵적으로 이 문제에 강영수를 끼우지 않았다. 따지자면 결론이 나기 전까지 보류해두는 것에 가까웠다. 이지훈이 이 집에 들어오며 약속한 기한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가 어떤 합의에 다다르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지훈이 우정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내가 사랑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어딘가 애매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날 기다리느라 잠들지 않은 이지훈을 마주치고, 하루 동안 내 몸에 난 상처가 없는지 살피는 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만, 그건 우리가 어떠한 결론에 다다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요즘의 나는 어떻게든 결론이 난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국밥집에서 이지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놈이 망설이면서 털어놓은 과거의 조각은 지금도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만을 내놓은 건 어쩌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얼마 전, 바쁜 와중에도 나를 불러 태안 전근 건에 대해 넌지시 떠보던 반장님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무언가를 숨겨본 적 없는 사람답게 내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몇 년 만에 팀에 신입이 온 게 과연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가 지나가듯이 한 신입을 잘 챙기라는 당부는 어쩌면 신입이 내 역할을 맡을지도 모르니 떠나기 전 많은 것을 가르치고 가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 또한 은연중에 신입에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것들까지 일러두고 가르쳤다.

어쩌면 신입도 그걸 느낀 걸까. 나보다 한 살이 어린 그는 적응이 어려운 듯 헤매긴 해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아무리 매뉴얼 없이 닥치는 대로 부딪쳐 가며 배워야 하는 곳이라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를 시기에 너무 많은 것을 배워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어떻게든 헤치려 노력하며, 신입이 보낸 메시지를 한 번 더 훑었다.

박서빈

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오후 8:04

선배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업무 외 시간에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 드렸습니다. 오후 8:05

시간 괜찮으시면 혹시 잠깐이라도 뵐 수 있을까요? 제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오후 8:06

과하게 예의를 차리면서도 만날 수 있냐는 말을 어렵게 꺼내는 걸 보니 예삿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어디냐고 짤막하게나마 답변을 보냈다.

“선욱 씨. 요새 바빠서 운동 못 해요? 허벅지의 단단함이 약 삼 퍼 정도 줄어든 느낌인데? 어? 이런 식이면 복근도 불시 검문 들어갑니다.”

“옷에 손 넣으면 죽는다.”

몇 달 전 개인 트레이닝 좀 받았다고 헬스 트레이너라도 흉내 내듯 허벅지를 주물럭대며 능글맞게 묻는 강영수의 머리를 밀어낸 것과 동시에, 뒤에서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강영수가 이지훈에게 해맑게 물었다.

“이겼엉?”

“뭔 개소리야, 씨발. 니 왜 안 갔냐? 얼른 치킨이나 처먹고 꺼지랬지.”

인상을 팍 찡그린 채로 싸가지 없이 대꾸하는 이지훈을 본 강영수가 고개를 내게 슬며시 틀어 중얼댔다. 속삭이는 척하지만 정작 들려오는 목소리는 꽤 컸다.

“지랄하는 거 보니까 개발린 듯….”

“얼굴 보고 말해라.”

“아이고, 전화가 또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핸드폰을 쥔 강영수가 재빨리 베란다로 사라졌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창밖으로 강영수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강영수를 따라갈 것처럼 눈을 흉흉하게 빛내던 이지훈도 한숨을 쉬며 거실로 걸어왔다. 핸드폰을 테이블로 툭 던진 놈이 시선을 느낀 것처럼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강영수에게 지랄하던 것보다는 순한 말투긴 해도 미처 가다듬지 못한 표정이 여전히 살벌했다. 강영수가 부리나케 베란다로 도망간 이유가 있었다. 저런 상태의 이지훈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앞의 치킨을 눈짓했다.

“치킨 먹으라고. 아까 배고프다며.”

내가 눈짓하는 곳을 확인한 이지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답지 않게 티를 낼 만큼 기분 나쁜 일이 생긴 모양이지만, 잠시 가만히 두면 금세 제 페이스를 회복하고도 남을 놈인 걸 알아서 그냥 시선을 거뒀다.

허벅지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다 말고 헛손질을 했다. 손아귀에서 미끄러질 뻔한 핸드폰을 힘겹게 잡아낸 나는 아래부터 확인했다.

“야. 나 좆됐어.”

허벅지가 또 한 번 무거워졌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뻔뻔하게 머리를 들이민 놈은 강영수가 아니었다. 내가 방금 제 얼굴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는 표정이 천연덕스러웠다.

이지훈의 머리 무게나, 강영수의 머리 무게나 그게 그거일 텐데, 난 아까와 달리 하체를 꽁꽁 묶여버린 사람처럼 움찔대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머리를 댄 이지훈은 편해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강영수는 몰라도, 이런 스킨십을 이지훈과 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지훈이 머리를 대고 있는 위치가 새삼 신경 쓰였다. 눈이 이지훈의 입술과 내 허벅지를 번갈아 오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조금 더 빼기 위해 움직였다.

“회사에서 예정보다 빨리 복귀하래.”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아마 신입의 메시지가 와서일 거였다. 나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왼쪽 허벅지를 슬쩍 들었다 놨다. 머리를 대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이지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직접 머리를 치우지 않는 한 놈이 이 자세를 유지하려 들 것을 눈치챈 나는 핸드폰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틀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타이밍에 놈의 머리를 밀어내야 자연스러울지 계산했다.

“…근데?”

박서빈

저 사실…이미 근처에 와 있습니다ㅠㅠ 오후 8:15

분명 메시지를 읽고는 있는데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거기다 이게 뭔 소리지. 어디 근처라는 거야. 메시지를 한 번 더 확인한 것과 동시에, 목과 쇄골 사이의 어딘가가 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태연한 척하려던 것조차 잊고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애매모호한 경계를 훑는 중이던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을 붙잡아둔 채, 이지훈이 방금 찌른 곳을 확인하듯 한 번 더 눌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이 입술을 달싹댔다.

“너 여기 점 있네.”

나는 이지훈의 손이 한 번 더 그곳을 찌르기 전에야 겨우 움직였다. 허공에서 이지훈의 손을 잡아챈 것과 동시에 시선이 깊숙이 부딪쳤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강영수가 같은 장난을 쳤다면 할 법한 반응이 무엇일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자연스럽게 나와야 할 행위를 의식하고 하려니 이상했다. 개중 가장 평범한 반응을 끌어내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순간 이지훈이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왜 좆됐냐고 안 물어봐?”

그제야 당황스러운 스킨십에 잊고 있던 이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이른 복귀를 시키느니 뭐니 말했던 것도. 방금의 장난이야 그렇다 쳐도, 이지훈이 평소 잘 하지 않던 일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는 이유는 궁금했다. 그건 어쩌면 이렇게 답지 않게 구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데.”

무릎에서 밀쳐내는 것까지 미뤄두고 한발 물러서듯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이지훈은 대답하는 것 대신 시선을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가다 말고 멈칫했다. 놈의 손끝이 또 한 번 내 몸 어딘가를 쿡쿡 찌르는 것을 막겠다고 뻗은 손 때문에 우리의 손이 아직도 맞닿아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손바닥에 닿은 이지훈의 검지가 슬쩍 움직였다. 힘주어 긁은 것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아.”

흠칫한 내가 불에 덴 사람처럼 물러나는 것과 달리, 이지훈은 덤덤했다. 내가 과잉반응하듯 급히 손을 놓은 사실엔 별다른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계획이 어그러졌어.”

마침내 이지훈이 입을 열었음에도,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이지훈의 손이 내 손을 끌어가듯 쥐었기 때문이었다. 검지 하나를 쥐었던 것에 불과한 아까보다도 더 깊게, 단단히 손이 맞닿았다. 손바닥이 빈틈없이 붙었다. 서늘함을 품은 타인의 살갗을 피부로 느끼고서야, 그게 방금까지 밖에 서 있었던 이지훈이 가진 온도임을 눈치챘다. 그 사실을 의식한 순간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힘을 준 놈 때문에 꼼짝하지 못했다.

“이번 네 생일은 같이 보내려 했는데.”

“…….”

“회사에서 하필 그날부터 복귀하라네?”

손깍지까지 낀 채로 날 올려다보는 이지훈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른손은 핸드폰을 쥐고 있고, 왼손은 이지훈에게 붙들린 채였다.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할지조차 몰랐다. 허벅지 위에 놓인 놈의 머리마저 나를 그 자리에 꽁꽁 묶는 것 같았다.

균형이 어긋난 순간이었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돌아가던 세계에서 갑자기 무질서의 세계로 떨어진 느낌. 놈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습관처럼 해오던 합리화조차 소용이 없었다. 강영수와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강영수는 어딨지? 베란다를 돌아보려던 행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시선을 뺏은 이지훈 때문이었다. 손이 한 번 더 훅 당겨진 것과 동시에 손가락 사이사이에 놈의 손마디가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다시 제게로 돌아온 시선을 확인하고서야 이지훈이 한쪽 눈썹을 제 위치로 돌려두며 말을 재개했다. 여전히 손깍지를 낀 채였다.

“열한 시 비행기인데, 어쨌든 생일은 자정부터 시작이잖아?”

“…….”

“그래서 나 그 시간 다 끌어 쓰려고.”

모든 게 너무나도 가깝다. 이지훈의 눈빛이나, 살갗이나, 향까지도. 그걸 의도한 것처럼 사이에 뜨는 시간조차 없이 말을 잇는 놈의 눈빛은 확고했다.

“너도 나한테 그 시간 다 주라.”

이지훈은 정말 내 생일 계획을 이야기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조차도 가끔은 바빠서 잊고 사는 그날이 뭐라고 이렇게 미리 확인까지 받으려고 드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이지훈을 알게 된 후로 함께 생일을 보냈던 게 몇 번이나 되는지 떠올려 봤다. 적지 않은 횟수로 함께했었고, 그만큼이나 많은 횟수로 함께하지 못했다. 멀리서 대학을 다니고, 접점이라고는 없는 직장에 다니고, 다른 곳에 살다 보니 당연한 거였다. 나는 이번 생일만은 함께하려고 했다는 놈의 말이 왜 이상하게 느껴졌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여태껏 우리가 한 번도 서로의 생일을 독점하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이지훈은 할 말을 다 마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 허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한참을 침만 삼키다가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너머에서 통화에 열중하고 있는 강영수의 뒷모습을 확인한 순간에야 우습게도 숨이 트였다. 간신히 목울대를 움직여 이지훈에게 답을 내놨다.

“강영수도 같이….”

“아니.”

뚝 자른 대답은 단호했다. 눈을 맞춘 채로, 이지훈이 강조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너랑 나만.”

내가 늘 다니던 대피로가 사라졌다. 나는 어디로든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막 깨달은 여행자처럼 앞에 선 이지훈을 응시했다. 그 뒤로 이정표가 있다는 건 알지만, 앞에 선 이지훈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지훈은 그걸 의도한 양 당당하게 이정표를 가린 채로 내게 명령하고 있었다.

“지선욱.”

이래도 되나? 머뭇대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참고할 만한 그 누군가도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됐다. 기준점이라는 것이 사라진 곳. 다시 제게로 고개를 돌린 내게 이지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 이제 너랑 관련해서 멋대로 짐작하고 추측하는 짓 안 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그냥 바로 물어볼 거야.”

이지훈의 확고한 눈동자 안에 헤매는 내가 보였다.

“그러니까 강영수 끼우지 말고,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네 입으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지금 서 있는 곳이 이지훈의 울타리 안이 아니었음을, 그렇기에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지키고 살던 규칙들이 이곳에서만은 효용성이 없음을, 나는 한참을 두리번대고서야 깨닫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서 있었을까.

“나랑 생일 보내기 싫어?”

이정표 앞에서 흔들림 없이 내게 묻고 있는 이지훈을 본다. 우정을 증명하겠다, 혹은 사랑을 증명하겠다 싸울 때마저도 건재하던 울타리가 사라진 곳에서 나만을 응시하고 있는 놈을. 그 뒤에 있는 이정표가 아닌 자신을 보라고 손짓하는 놈을.

이지훈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은 실로 이정표에 가까워지는 일과 같다. 그러나 나는 홀린 듯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야 깨닫는다.

“…아니.”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눈앞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이정표가 아닌 이지훈의 얼굴이라는 것을. 나는 눈을 감는 것조차 잊고 있었음을 느끼고는 뒤늦게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잠깐 뿌옇던 시야가 개이고 곧 씩 웃고 있는 이지훈이 보였다.

“잘됐다. 나 너랑 이번에 꼭 하고 싶었던 거 있어.”

손을 꽉 잡고 있던 힘이 약해졌다. 헐겁게 쥔 손을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며 웃는 놈을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마치 손가락 끝을 딱 부딪쳐서 내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갇혀 있던 어떤 순간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이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풀린 분위기를 확인한 나는 습관처럼 도망칠 곳부터 찾아 손을 뒤로 뺐다. 따라오는 이지훈의 시선에 변명하듯 어색하게 중얼대기도 했다.

“뭐길래 이렇게까지….”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능청맞은 표정을 지은 이지훈이 돌연 손을 뻗었다. 뿝, 하는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볼이 찔린 것도 동시였다.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장난기 어린 눈빛을 마주했다. 뿝. 이번엔 다른 쪽 볼이었다.

다행히 손끝이 한 번 더 볼에 닿기 바로 직전에 뒤로 고개를 뺄 수 있었다.

“아… 뭐 하는 짓이야, 자꾸.”

아까부터 안 하던 짓을 계속하는데, 하필 그게 이지훈이어서 더 신경에 거슬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놀라서 굳는 것 대신에 질색하며 타이밍에 맞게 내뱉을 수 있었다. 강영수는 이렇게 하면 눈치라도 보는데, 내 표정을 보고서도 이지훈은 웃기만 하는 걸 보니 소용은 없는 것 같았지만.

“알아가는 짓.”

“…뭐?”

“디게 예민하네. 간지러움 많이 타나 봐?”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할 말을 잃은 채로 잠깐 놈을 바라보던 나는 대답하길 포기하고는 놈의 머리를 밀었다.

“무거워. 내려가.”

눈을 마주치고 말하면 아까의 일이 떠오르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시선을 비낀 채로 퉁명스럽게 뱉었다. 다행히 이지훈도 더 버틸 마음은 없는지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봤자 머리 무게 하나 덜어진 건데 몸이 과할 정도로 가벼워졌다. 내내 쥐고만 있었던 핸드폰에 나눠줄 관심이 생긴 건 다음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신입이랑 메시지 중이었지. 답장해줘야 하는데. 황급히 화면을 켠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헐. 벌써 8시 30분임? 야, 나 티비 틀어줘. 드라마 봐야 해. 5번, 5번!!! 아, 빨리! 오늘 키스 신 나온댔단 말이야.”

“닌 가전회사 다니는 새끼가 집에 티비도 없냐? 볼 거면 가서 봐.”

“집 가던 중에 키스 신 나오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 내가 그거 보려고 여태까지 오기로 버틴 거 알면 너 그런 말 못 한다 진짜.”

“저기요. 혹시 석기시대에서 오셨어요? 여기 핸드폰이라는 게 있어요. 드라마를 라이브로 보여주는 애플리케이션도 있고요. 혹시 자동차가 뭔지는 아세요? 바퀴가 네 개 달린 건데….”

“아, 라이브는 화질 깨진다고!”

강영수와 이지훈이 서로 리모컨을 사수하려 엎치락뒤치락 몸싸움하는 걸 흘긋 보고는 대화방에 접속했다.

박서빈

저 사실…이미 근처에 와 있습니다ㅠㅠ 오후 8:15

아까 온 메시지 이후 추가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아마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시간에 왜 근처까지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할 말이 있는 거면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이지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20분 가까이 답장하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했고.

근처면 집 앞인가? 이 시간에 기다릴 만한 곳이 별로 없을 텐데. 갸웃하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어디 가?”

싸우느라 바쁜 줄 알았던 강영수와 이지훈의 시선이 어느새 내게 쏠려 있었다. 이지훈은 내내 쥐고 있던 강영수의 뒷머리까지 놓은 채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강영수가 이지훈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탈취하는 것까지 지켜본 나는 외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패딩을 대충 걸치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또 둘과 눈이 마주쳤다. 강영수는 텔레비전과 나를 번갈아 보기라도 하지, 소파에 앉은 이지훈은 팔짱을 낀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한쪽 눈썹을 구기며 질문하기도 했다.

“어디 가냐니까 왜 대답을 안 해.”

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고 흔들었다.

“잠깐 누가 좀 왔대서, 다녀올게. 신경 쓰지 말고 놀고 있어.”

“누구길래 이 밤에 집 앞까지 찾아와.”

“혹시 아까 연락하던 그 회사 사람? 이름이 뭐랬더라? 서진 씨? 수빈 씨? 수진 씨?”

“…누구? 다시 말해 봐.”

말해준 적도 없는 정보를 두고 퍼즐 놀이를 하는 놈들을 내버려 둔 채 집을 나왔다. 현관 밖으로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목뒤가 꽤 서늘할 정도로 날이 추웠다. 어디냐고 메시지를 하는 것보다는 전화하는 게 빠를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예, 선배님.

역시나 신호음이 세 번 가기도 전에 신입이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했지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바람 소리나 입이 얼어서 나올 법한 불분명한 발음을 봤을 때 내내 밖에서 내 답장을 기다린 모양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긴 했어도 주변 지리에 익숙하지는 않은 듯 어디냐고 물었더니 대답조차 잘 못 했다. 대신 주변에 뭐가 보이냐는 질문에 카페라고 답하며 이름을 댔다. 이름을 곱씹다 보니 익숙한 곳이었다. 이지훈 줄 커피를 산다고 한번 가본 적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곳으로 갈 테니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집이 멀지 않은 편이라 차를 한 번 태워준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듯 말해준 걸 기억하고 비슷하게나마 찾아온 게 신기했다. 아니면 주소록을 봤나. 팀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주소록을 신입에게도 알려준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층수 버튼에 손을 얹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달려오는 듯했다. 나는 층수 버튼 대신 열림 버튼부터 눌렀다. 신입에게는 실내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으니 그리 서두를 필요도 없고, 이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가구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니라, 지금 달려오는 사람도 아마 얼굴이 눈에 익은 이웃일 거였다.

그러나 다시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인 인물은 예상과 달랐다. 눈에 익긴 했는데, 심히 익은 게 문제였다. 나는 겨우 2분 전까지 보고 있던 얼굴을 또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멍하니 응시했다. 입술 사이로 얼떨떨한 물음이 튀어나갔다.

“…어디 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냉큼 발을 들이민 이지훈은 곧장 엘리베이터 벽으로 돌더니, 거울을 보며 복도를 달려오는 사이에 헝클어진 모습을 정돈했다. 옷매무새부터 머리 모양까지 금세 깔끔히 정리한 놈이 옆눈으로 날 확인하며 대꾸했다.

“넌?”

“…나 이 앞에 카페 가는데.”

“어. 나도 카페 가.”

“…이 시간에?”

멈칫한 이지훈이 나를 돌아봤다.

“왜. 너는 이 시간에 누구 만나러 나가도 되고, 나는 이 시간에 커피 마시고 싶으면 안 되냐?”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이지훈이 1층 버튼을 꾹 눌렀다. 나는 불투명한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옆을 돌아봤다. 이지훈은 뻔뻔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종량제 봉투를 들고 서 있는 것치고는.

손잡이를 잡으려다 말고 결국 뒤를 돌아봤다.

“왜? 안 들어가고.”

한 걸음 뒤에 선 채로 내가 돌아보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묻는 이지훈을 발견한 순간에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간다는 카페가 여기야?”

야밤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뛰쳐나온 것도, 빈 종량제 봉투를 들고 있는 것도 저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한 블록만 내려가도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을 두고 날 따라 이 작은 개인 카페에 가겠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특히 근처의 맛집을 찾던 강영수가 이 카페 이름을 대며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땐, 두 번 갈 곳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하기까지 했으면서. 커피 맛에 까다로운 놈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일이지만 이렇게 밤중 뛰쳐나와서까지 찾는 곳이 이 카페라면 부자연스럽긴 했다.

“두 번 갈 곳은 아니라며.”

“…내가?”

“강영수한테 그랬잖아.”

이지훈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댔다. 놈이 드물게 보이는 곤란한 낯이었다. 이마를 문지르면서 흘끔 내 눈치를 보기도 했다.

“너 그거 듣고 있었냐? 딴짓 중인 줄 알았는데.”

딴짓 중에 들은 거긴 했다. 강영수와 이지훈이 대화하는 걸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늘 그랬듯이. 반은 흘리고, 반은 듣는데 이건 우연히 후자였을 뿐이고. 이지훈은 그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다음 순간엔 그랬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날 뻔뻔스레 응시했다.

“뭐… 어쨌든 내 마음이지?”

“…뭐?”

“그리고 그때는 테이크아웃으로 먹은 거고, 이번에는 매장에서 먹는 거니까 다를지도 모르고?”

심지어 커피를 사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매장에서 먹고 간다고? 나도 모르게 카페 안부터 확인했다. 자리라고 해 봤자 안쪽 벽에 세 개의 원형 테이블이 연달아 붙은 게 전부인 작은 카페였다. 내부를 한 번 더 훑다가 안쪽 자리에 홀로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신입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것처럼 벌떡 일어난 신입이 다가와야 할지 아니면 내가 들어오길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듯 안절부절못하는 걸 본 순간에는 한참 늦은 고민을 했다.

그냥 딴 데 가자고 할까?

“안 들어가냐고.”

뒤에서 날개뼈 부근을 쿡 찌르며 묻는 이지훈은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문손잡이를 쥔 손이 움찔한 순간, 이지훈이 나와 같은 계단으로 올라섰다. 나는 놈의 몸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문으로 서둘러 다가섰다. ‘딸랑’하는 유치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순간에는 이미 이지훈과 같은 곳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신입이 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래 봐야 작은 카페라 뛰어올 것도 없는데, 의전이라도 하듯 과히 깍듯한 태도에 커피머신 앞에 서 있던 사장마저 이쪽을 흘깃댔다. 이지훈에게 줄 커피를 샀을 때도 쿠폰을 찍어주며 이것저것 정보를 먼저 알려주던 그녀였기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날 알아본 듯 반가운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묵례한 나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들어설 때만 해도 뒤에 있었던 이지훈이 어느새 카페 카운터에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눈치채서였다.

팔짱을 낀 채로 유리 진열창을 들여다보던 놈은 카운터 너머의 카페 사장에게 무언가를 묻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손에는 여전히 정사각형으로 잘 접힌 종량제 봉투가 들려 있었다. 마치 마트에서 종량제 봉투를 처음 샀을 때의 상태처럼 각 잡힌 채로.

한 가지만 꼬집어 말할 수는 없고, 총체적으로 이상했다. 그래도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서 떨어진 걸 보면 딱히 아는 척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치기에는 매장에서 먹고 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테이블이라고는 겨우 세 개뿐인 이 좁은 곳에서 서로를 모른 척할 수가 있긴 한가.

“…선배님?”

신입의 조심스러운 물음을 듣고서야 상념에 빠졌던 시간이 길었음을 눈치챘다. 애초에 카페에 온 이유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그의 메시지 때문이었다는 것도. 나는 힘겹게 시선을 돌려 신입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테이블 위를 확인했다. 신입의 것으로 추측되는 핸드폰 외에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차 묻긴 했다.

“시켰어요?”

“아, 아뇨. 오시면 주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선배님 아메리카노 드시는 거 아는데 밤이라 혹시 다른 거 드시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미리 여쭤봤어야 했는데.”

“됐어요. 죄송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니까. 뭐 먹을래요?”

평소처럼 쩔쩔매는 신입을 대충 달래며 카운터로 다가섰다. 다행히 이지훈은 주문이 끝났는지 비켜서 있었다.

“사천 원입니다.”

사장의 말을 들으니 결제 단계만 남은 것 같았다. 결제가 끝나고 놈이 자리로 가면, 나도 어느 곳이든 놈이 앉은 곳과 가장 먼 자리에 앉아서 모르는 척을 이어가면 될 터였다. 아마 벽 쪽의 자리가 좋을 것 같았다. 이지훈이 볼 수 있는 거라곤 내 등밖에 없을 자리. 눈이 마주치면 자꾸 신경이 쓰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몇 분 후의 계획을 세우며, 나는 계산대에서 조금 물러나서는 진열대 안의 케이크를 보는 척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냈다.

“저는 그냥 간단히 아메리카노… 아, 제가 사겠습니다, 선배님!”

“아메리카노면 돼요? 디저트 먹고 싶으면….”

“괜찮습니다. 그리고 결제도 제가….”

허둥대며 들고 있던 지갑을 내밀던 신입과 고개를 젓던 나는 말도 마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췄다. 우리의 시선은 서로가 아닌,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와 하등 관계없는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왜? 나 지갑 없어.”

더 정확히는, 오늘 밤만 해도 벌써 세 번째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

“…….”

“…….”

나는 내 쪽으로 내밀어진 이지훈의 손을 한 번, 뻔뻔하게 묻는 놈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옆에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나와 이지훈을 번갈아 보는 신입을 한 번 보고서야 이지훈이 정말 내게 지갑을 달라고 요청한 것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건 들어온 순간부터 서로를 모른 척한 사이에서 오고 가기에는 무척이나 이상해 보일 법한 대화라는 것도.

“종량제 봉투 살 현금만 챙겨 나온 거 알잖아. 집 앞 마트에서 낱장은 무조건 현금만 받는다고.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면서 내가 분명 설명해줬는데 또 안 들었지?”

이 새끼가… 미쳤나?

이지훈의 손에 들린 빈 종량제 봉투는 즉시 이지훈이 꾸며낸 이야기를 뒷받침할 증거가 됐다. 상황극이라도 하듯이 도리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이지훈을 흘끔댄 신입이 뒤늦게 말을 붙였다.

“아! 같이 사시는… 분이시구나… 몰랐어요. 따로 들어오시길래.”

이지훈은 신입의 말에 대꾸하는 것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날 보기만 했다.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정말 그런 말을 들었었나? 생각해보게 될 정도였다. 넋 놓고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냥, 친구예요.”

무슨 생각으로 강영수나 할 법한 이런 상황극을 벌이는지는 몰라도, 놈이 이렇게 미친놈처럼 굴기로 마음먹은 이상 내가 잡아떼 봐야 상황이 더욱 우스워지기나 할 거였다.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 신입에게로 몸을 돌린 이지훈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영수가 가식적이라며 치를 떨며 싫어하는, 이지훈의 사무적인 얼굴이었다. 일할 때나 짓는, 친절하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같이 사는.”

“…네?”

“같이 사는 친구요.”

‘같이 사는’을 저렇게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나. 아아… 그러시구나… 나와 비슷한 의문을 느끼는 중일 신입이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원하는 반응을 얻었는지 이지훈이 타깃을 재조정했다. 이번에는 나였다.

“그나저나 너무하네. 이 시간에 카페 가자고 하는 거면 당연히 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생판 처음 듣는다는 표정은 뭐지?”

상황극 속의 이지훈이 한 말일 뿐인데 내가 아닌 옆의 신입이 괜히 움찔했다. 방금 전 지갑을 내미는 나를 보고 불편한 티를 내던 신입이 떠올랐다. 지금도 신입은 이지훈의 말로 인해 제가 지켜야 하는 예의가 떠오른 사람처럼 계산대로 성큼 다가서기부터 했다. 내 친구라고 소개된 이지훈에게 몸을 반쯤 돌린 채로 묻지도 않은 것을 구구절절 해명하듯 풀어놓기도 했다.

“그게 사실… 제가 근처라고 뵐 수 있냐고 급하게 여쭤본 것 때문에 선배님이 카페로 나와주신 거여서요. 친구분과 같이 계시는 중인지 몰랐습니다. 혼자 사시는 줄 알아서….”

“그랬구나. 어쩐지 급하게 나가더라고요.”

“아, 제가 좀 예고 없이 찾아오긴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 그랬는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제가 당연히 사야죠. 선배님, 아메리카노 괜찮으신가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친구분 음료도 제가 사겠습니다.”

“어휴, 그러라고 드린 말씀은 아닌데.”

“아닙니다. 제가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사장님, 이 친구분 것까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뭐 시키셨죠?”

“아뇨. 정말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고….”

신입을 말리며 먼저 지갑을 내미는 것과 동시에 팔이 뒤로 잡아당겨졌다. 정작 날 제 쪽으로 끌어당긴 범인은 그런 적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앞을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경악한 나의 시선을 무시한 이지훈은 오늘 처음 본 신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다. 신입이 돌아보자 진열대를 가리키며 멋쩍은 척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정말 괜찮으시면, 저 바스크 치즈케이크 한 조각 먹어도 되나요? 원래 친구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대신 사주신다고 하니까….”

“야, 이지훈.”

여태껏 이지훈이 카페에서 케이크를 시키는 꼴은 본 적이 없다.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놈이기도 했고, 몸 관리에 철저한 편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민망한 흉내까지 내가며 뻔뻔하기 그지없게 케이크까지 뜯어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황당함이 지나치다 못해 말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정작 움츠러들거나 입을 다물어야 할 이지훈은 신경도 안 쓰고, 이번에도 필요 없는 죄책감까지 떠안은 신입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히, 당연히 사드려야죠. 사장님, 저희 바스크 치즈케이크도 하나 같이 주시겠어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아이스크림도 한 스쿱 추가할 수 있다고 듣긴 했는데….”

“아, 네네. 아이스크림도 추가해주세요, 사장님.”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됐다. 정신을 차리니 이지훈은 이미 자리로 떠난 뒤고, 사장님으로부터 카드를 돌려받은 신입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카페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님, 금방 나온다고 하니까 제가 음료 들고 가겠습니다. 가서 앉아 계십시오.”

등 떠밀리듯 고개를 돌린 곳에 이지훈이 있었다. 안쪽에 놓인 세 개의 테이블 중 굳이 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다리를 꼰 놈은 예민한 낯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중이었다. 다른 손에는 옆의 북 선반에서 집어 든 듯한 잡지가 들려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놈이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뗐다. 중간에 앉은 이지훈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떨어져 앉을 수 있는 왼쪽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래 봐야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잡지를 보고 있는 이지훈의 오른쪽 얼굴과 마주치는 곳이긴 했다.

아직 음료를 받는 곳에서 서성대고 있는 신입에게서 시선을 돌려 뻔뻔하게 앉아 있는 이지훈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고 있는 건지 감조차 안 잡혔다. 막막함이 담긴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이지훈이 말을 걸었다. 여전히 눈은 잡지에 둔 채였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해.”

그럼 지가 먼저 신경이 안 쓰이게 했으면 될 것 아닌가. 지갑도 없으면서 굳이 남의 후배한테 커피랑 케이크까지 얻어먹으며 저렇게 버티고 있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집에 있던 종량제 봉투를 구태여 가지고 나와서 거짓말까지 하고.

그 말을 한다고 해서 상처받을 놈도 아니기에 잠깐 고민했으나, 말들이 입술을 넘기 전에 트레이를 들고 다가온 신입 때문에 일단은 참았다. 쭈뼛대며 좁은 공간에 다가서는 신입을 흘끔 본 이지훈이 잡지를 위로 들어 올려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케이크와 음료 잔을 가지런히 내려놓은 신입은 이지훈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바닐라 아이스크림만 가능하다고 하시던데, 괜찮으실까요?”

“예, 뭐….”

“다행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심히 깍듯한 인사에 뒤늦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이지훈에게 신입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신속한 동작으로 꺼낸 물건은 어딘가 익숙했다.

“그리고 여기… 제 명함입니다. 처음 뵙는 건데 소개도 못 드린 것 같아서… 박서빈입니다.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감사하게도 선욱 선배님이 많이 이끌어주고 계시고요.”

“…선욱이가 대학 선배예요?”

“어, 아뇨. 저는 경찰대 출신은 아니라… 팀에서 제가 후배입니다. 선배님보다 나이도 어리고요. 편하게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선배님 친구시면 당연히 저보다 나이 많으실 거고요.”

“아….”

“아까 제대로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팀 옮긴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정신이 없네요. 명함도 어제야 나왔고… 어쨌든 말이 길었는데, 맛있게 드십시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훈에게 한 번 더 꾸벅 인사한 신입이 트레이를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제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신입과 일대일 면담 겸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던 하 선배가 혀를 차며 말하던 걸 기억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놈 뒤를 이어서 생각 많은 놈 하나가 들어왔구만.’

“선배님. 여기 음료 내려놓을까요?”

“아… 네. 고마워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입을 다문 채로 명함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니 어쨌든 아까처럼 갑자기 말을 걸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본인 입으로 먼저 말하기도 했고.

갑자기 같이 끌려 나온 척하는 선배의 친구에게 마음이 편해질 정도의 예의도 차렸고, 음료도 나왔고, 이제 할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신입은 앞에 앉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준비해온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예의상 한 입 마신 음료를 옆으로 밀어뒀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예요?”

“네? 아… 그렇다기보다는… 이 이야기를 하면 선배님이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말씀드리려니 너무 사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뭔 얘기인지는 몰라도 그냥 해요. 어차피 들어주려고 나온 거니까.”

이 시간에 집 근처까지 와서 불러낸 것부터 직장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대답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잠복근무가 일상인 데다 야간 근무도 많은 탓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우리 팀은 유독 공과 사의 경계가 흐린 편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 시절, 어디든 날 데리고 다녔던 선배들은 뭐 이런 걸 묻나 싶은 것까지 궁금해하고 신경 써 주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그게 최소 여덟 살 최대 열다섯 살 넘게 차이 나는 후배와 친해지려는 그들 나름의 노력이었음을 알게 됐다. 선배들의 말을 빌리자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을 어떻게든 조직에 녹이려는 시도였다는 것도.

내가 떠나고 나면, 선배들은 신입에게도 비슷한 노력을 기울이겠지. 이렇게 바쁠 때가 아니었다면 진작 그랬을 분들인데, 시기가 아쉽긴 했다. 일이 정리되고 팀원들이 온전한 관심을 쏟아줄 때까지는 나라도 그래야 한다는 책임감에 늦은 시간임을 감안하고도 나온 거였고.

북돋듯 한 번 더 눈짓하자, 신입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선배님. 사실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쨍그랑.

갑작스러운 소음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신입과 내 시선을 동시에 받은 이지훈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묻기도 전에 먼저 소음의 출처를 고하기도 했다.

“아, 포크가 떨어졌네.”

“…안 주워?”

“어. 그러려고.”

이지훈이 테이블 아래로 천천히 몸을 숙이는 것까지 보고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신입 또한 다시 말을 이을 기세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쨍그랑. 고개가 어쩔 수 없이 또 돌아갔다. 이번에는 카운터 뒤에 있던 사장님이 뛰어나와서 이지훈이 주워 든 포크를 새 포크로 바꿔줬다.

“어머, 죄송해요. 포크를 너무 작은 걸 드려서 그런가 봐요.”

나는 손댄 흔적 하나 없는 케이크와 이지훈이 방금 건네받은 새 포크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얼떨결에 두 번이나 말을 방해받은 신입이 곤란한 낯으로 이지훈 쪽을 흘긋대고 있었다. 나는 신입의 어깨를 툭 쳐서 시선을 내게 다시 끌어왔다.

“저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해요.”

“아아… 네. 제가 드리려 했던 말씀은, 저한테 아주 오래전부터….”

쨍그랑.

“사귀어온 여자친구가 있는데 제가 마약수사대 온 걸 싫어합니다!”

“아이고, 포크가 왜 자꾸 손에서… 예?”

“포크 내놔, 새꺄. 입에 처넣어줄 테니… 예?”

벌떡 일어나 이지훈의 테이블로 다가서던 나, 자그마치 세 번째로 떨어뜨린 포크를 주우려 몸을 숙이던 이지훈, 눈을 꾹 감고 지르듯 말했던 신입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맞부딪쳤다. 제자리에서 멈춘 우리 둘을 어색하게 번갈아 본 신입이 목뒤를 긁으면서도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선배님이라면 분명 저와 같은 문제 겪어보신 적이 있을 것 같아서… 팀에서 저희 둘만 미혼이기도 하고, 하 선배님이 어제 귀띔해주시기로는 선배님이 이런 쪽으로 빠삭하실 거라고 하시길래….”

“…….”

“…….”

“여자친구분이 응급실에서 일하신다고… 제 여자친구도 간호사거든요. 그것 때문인지 더 싫어하는 것 같고요. 이번 주 내내 싸웠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해도, 어디서 들었는지 마약 중독자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서 다쳐오고 그런 사람도 있다고 그러는데 직접 와서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잡아떼기도 뭐하고… 선배님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궁금해서요.”

“…….”

“…….”

“…그… 제가 혹시 말 잘못 했나요?”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이네.”

신입에 대한 이지훈의 총평이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현실임을 증명하듯 놈의 손에 덜렁덜렁 들린 종량제 봉투 안에는 한라봉 세 개가 들어 있었다. 헤어질 무렵, 신입이 내밀었던 한라봉 상자에서 이지훈이 선별하듯 집어 든 것이기도 했다. 이런 건 특정 선배한테 통째로 가져다 안겨 부담스럽게 할 게 아니라, 탕비실이나 팀 회의실에 가져다 두고 작은 포스트잇이나 붙여두는 게 훨씬 낫다는 충고를 건네던 이지훈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에 메모라도 할 기세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신입의 모습은 덤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입을 다문 나 대신 신입의 고민 상담을 완벽하게 끝내준 이지훈은 그새 신입의 멘토라도 된 것 같았다. 카페를 나오기 전에 번호 교환까지 하던 둘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신입이 내민 한라봉 상자를 통해, 그게 제주도에서 크게 귤 농장을 한다던 여자친구 가족의 선물임을 알아낸 이지훈은 잘하면 내년에 치를 예정이라던 둘의 결혼식 사회까지 맡을 기세였다. 카운터 앞에서 이지훈에게 쩔쩔매던 때는 언제고, 신입은 이지훈이랑 헤어지는 순간엔 눈에 띌 정도로 아쉬워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어처구니없는 일만 가득했다. 우리를 배웅하던 카페 사장님이 이지훈과 신입을 번갈아 보며 갸웃할 정도로, 누가 봐도 둘이 선후배고 내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끼어 있었다.

신입이야 그렇다 쳐도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이지훈이었다. 일 이야기조차 잘 하지 않던 우리 둘이 공통으로 아는 서로의 회사 동료가 있을 리 없었다. 혹시 강영수의 회사 동료에게도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나? 이 또한 아는 정보가 없으니 비난할 수가 없었다.

됐다, 원한다면 누구든 제 편으로 만드는 걸 식은 죽 먹듯 쉽게 해내는 놈을 두고 혼자 이렇게 깊이 생각해 봤자 의미도 없고. 나는 착잡함을 한숨으로 털어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신입과의 메시지 방에는 제 꼬리를 잡듯이 빙빙 돌면서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하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가득 떠 있었다. 카페에서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 이모티콘을 사준 것도 그의 7년 사귄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이지훈이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 그럴싸한 대답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듣도 보도 못한 개인의 역사까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던 신입의 모습을 보니, 내 앞에서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이지훈처럼 살갑지 못해서였다는 것만 알게 됐다.

“네 팀 들어가려고 오래 준비했다던데, 애인이 싫어하니까 일 포기할 생각까지 하고. 그거 물어본다고 어려운 선배 집 앞까지 한라봉 상자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흔하진 않지. 옛날 감성이라 오히려 더 신선한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장단 맞춰주는 이지훈은 또 어떻고. 이 시간에 직장 사람이 왜 집 앞까지 찾아오냐고 짜증스럽게 묻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 네 후배 하든가.”

“그러기엔 널 너무 존경하던데. 애초에 마약수사대도 너 밑에서 배우고 싶어서 지원한 거라잖아.”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던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슬쩍 보이는 화면에 송금을 마쳤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송금 보내요

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조차 잊고 경악해서 물었다.

“…너 지금 걔한테 돈 부쳐주냐?”

“나 원래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얻어먹으면 밤에 미안해서 잠을 못 자.”

이거 정말 미친 새끼 아닌가? 뭐가 됐든, 남의 후배한테 메뉴판에 없던 아이스크림까지 굳이 추가해서 얻어먹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날 흘긋 본 이지훈이 잽싸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따라 타라며 손짓하는 게 얄밉기 그지없었다.

“안 타? 후배 말로는 내일 아침 일찍부터 회의 있다며. 가자마자 영수 새끼 달래서 쫓아내기에도 밤이 짧다.”

사실이긴 했다. 가만두면 밤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지훈과 신입의 대화가 끝난 것도 드라마 시청을 마친 강영수로부터 3초가 멀다 하고 쏟아지던 전화 때문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타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바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미동 없이 잠잠했다. 그게 먼저 타 놓고서는 층수 버튼조차 누르지 않은 이지훈 때문이라는 걸 안 순간에는 뒤돌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놈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장난하냐, 진짜?”

“뭘?”

뭘 묻는 건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는 놈을 보자 헛웃음이 터졌다.

“됐다. 말을 말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몸을 돌렸다. 감정이라도 싣듯이 층수 버튼을 꾹 누르며, 이지훈을 무시했다. 나이가 들며 또라이 짓도 때와 장소는 가리는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보다. 이지훈에게 놀림당할 때마다 한결같이 길길이 날뛰는 강영수가 비로소 이해 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목적지를 정한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움직였다. 투명하지 않은 엘리베이터 문은 사람의 표정까지는 비춰주지 않는데도, 뒤에 선 이지훈이 날 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꿋꿋이 서서는 바뀌는 숫자를 응시했다.

2… 3…

이지훈이 벽에서 몸을 떼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나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입술만 움직여 대꾸했다.

“참아.”

잠깐의 침묵 후, 이지훈이 나지막이 헛웃음 쳤다.

“뭔지 알고 참으래?”

“몰라도 되니까 참으라고.”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인상을 찡그린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숫자 계기판을 보던 시선을 조금 올리자마자 놈과 눈이 마주쳤다.

“난 상관있어서.”

띵. 이지훈의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우리가 내려야 할 층이었다. 그러나 이지훈도 나도 꿈쩍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너 아까부터 존나 이상하게 구는 거 알지.”

“어. 알아.”

이지훈의 대꾸는 예상과 달랐다. 내가 멈칫한 틈을 타 이지훈이 역으로 질문했다.

“근데 넌 알아?”

“뭘.”

“내가 왜 이상하게 구는지.”

“…….”

“물어보면 답해줄 텐데 왜 안 물어보는데? 참는 거야,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거야.”

이지훈이 이상하다.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방금 던진 질문을 통해 확실해졌다. 나는 턱을 조금 더 든 채로 놈의 얼굴을 세세히 훑었다. 그 어떤 충동의 흔적도 없는 정돈된 낯빛을 확인하고서야 이지훈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던진 말이 아님을 알게 됐다. 아까 놈이 소파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나 이제 너랑 관련해서 멋대로 짐작하고 추측하는 짓 안 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그냥 바로 물어볼 거야.’

그 말을 하던 놈의 흔들리지 않고 내게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는 지금도 그대로였다.

이지훈이 지금 하는 건, 제 입으로 뱉은 말을 지키려는 행위다. 그럼 나는?

“이유가 뭐든, 내가 안 묻겠다는데 네가 왜.”

머릿속으로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는데도,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듯 답부터 튀어나갔다. 이지훈은 그조차 예상했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말을 잇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는 속도마저도 평소와 같았다.

“안 그랬으면 좋겠어서.”

“…뭐?”

“참는 거면 참지 말라고 말하고, 관심 없는 거면 너랑 관련된 거니까 관심 가지라고 말하려고.”

이지훈은 설명을 해주는 것 같은데, 어째 들을수록 혼란스러움만 커졌다. 내 표정을 본 이지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놈이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기색을 느꼈다. 그러나 이지훈의 망설임은 그 어떤 때보다도 바삐 자취를 감췄다. 눈을 잘게 깜빡임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표정이 된 놈이 툭 뱉듯이 말했다.

“김수빈.”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기억 속에서 끌어 올린 이름은 이지훈이 이런 순간에 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강영수가 네 직장 동료라면서 마구잡이로 뱉었던 이름 중에 수빈이라는 이름도 있었잖아.”

“…….”

“너랑 대학생 때 사귀었던 그 사람인 줄 알고 나갔어.”

나는 숨을 삼켰다. 목울대를 의미 없이 몇 번 움직이고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나 너한테 그 사람이랑 사귀었다고 말한 적 없어.”

이지훈이 김수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그 선배가 부쳐준 상자에 있던 그 이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잠들어 있는 추억 속 한 장면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 내 인생에, 그리고 이지훈과 공유하는 내 인생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것치고 이지훈은 김수빈의 이름을 퍽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나는 지금 서로를 응시하며 침묵을 지키는 우리가 그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중임을 인식했다. 이지훈은 나보다 더 빠르고 쉽게 그 과정을 거쳤다.

“알아. 그래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짐작만 한 거니까.”

이지훈의 눈에 충격받은 표정의 내가 비쳤다. 내가 보는 것을 이지훈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이지훈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내서라도 내가 알아야 하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처럼.

“네가 나한테 말 안 했던 것처럼, 나도 너한테 말 안 했던 게 있는데.”

“…….”

“너 면회 갔던 날, 터미널에서 네 동기들이 너랑 그 사람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둘이 영화 보러 갔다고. 듣자마자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들더라. 넌 강영수랑도 둘이서는 영화를 안 보는 앤데.”

“…….”

“거기다 네 기숙사 방에 들어가서 속옷까지 챙겨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네가 그거 알고도 화내는 것 대신 그런 표정을 지을 사람이면 사귀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한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밀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지훈은 그런 나를 기다려주듯 같이 입을 다물었다가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타이밍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지훈의 입술이 움직이는 순간, 이지훈이 지금 꺼낼 질문을 위해 앞의 말들을 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남자였지, 그 사람?”

참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방금 이지훈이 내게 하라고 명령한 것들은 놈을 사랑하는 내내 내가 지키던 금기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이 순간에 와서야 이지훈이 뭘 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눈치챘다. 놈은 지난 세월, 우리에게 무엇보다 강력하게 작용했던 금기에 맞서고 있었다. 우리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 또한 오랜 시간 두르고 있었을 금기를 먼저 풀어버리는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이지훈을 바라봤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나는 이지훈에게 가려진 탓에 글씨조차 잘 보이지 않게 된 이정표에서 시선을 떼며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그래.”

“그 이후로도 쭉 남자였고?”

“…….”

“…….”

“…어.”

잠깐 목울대를 움직이던 이지훈은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놈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한 걸음으로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럼 너 아까 그 카페 가지 마.”

“…….”

“그 카페 사장 너한테 관심 있어. 나한테 커피 사줬을 때, 컵 홀더 안에 자기 번호 써놨더라. 분리수거 하다가 발견했어.”

멈칫한 나는 그러나 대답 없이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앞서서 걸어가던 이지훈은 문 앞에 서서야 나를 돌아봤다. 이지훈과 내가 걸음을 멈춘 것만으로도 내딛는 걸음을 따라 켜지던 아파트 복도 조명이 꺼졌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서로의 윤곽을 응시했다. 이지훈은 어둠을 그리 오래 더듬지 않고도 날 찾아냈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선언하듯 말했다.

“불편한 주제여도, 너랑 나랑은 대화를 좀 해야 해. 그걸 제때 안 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 같아.”

놈은 내가 그 말에 답하지 않을 걸 아는 것처럼 뒤돌아서 번호를 입력했다. 나는 이지훈의 등에 시선을 둔 채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라떼! 내 라떼 어딨어?”

이지훈이 달려드는 강영수에게 라떼 대신 종량제 봉투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강영수가 떫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거실로 걸어가는 이지훈에게 눈을 흘겼다.

“라떼 사 오랬더니 한라봉을 사 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둘의 공통점이 ‘라’라는 글자 말고 또 있어?”

강영수는 투덜대면서도 한라봉을 하나 꺼낸 뒤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종알댔다.

“그나저나 저 새끼 집 공사 끝날 때 되지 않았냐, 욱아? 나 네 집 와도 저 새끼 봐야 하니까 세 집 살림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엉….”

“…….”

“그나저나 수진 씨는 잘 만나구 왔엉? 뭐래? 사랑한대?”

“…야.”

“웅.”

“너 그냥 집에 가라.”

강영수를 억지로 떼어놓고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삼켜대기만 했던 말을 겨우 몇 개 뱉었을 뿐인데도, 목 안이 사막처럼 건조했다. 물을 따를 컵을 꺼내다 말고 구석에 있던 분리수거함에 시선이 멎었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익숙한 컵 홀더를 발견했다. 나는 분리수거함에 다가가서 컵 홀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지훈의 말처럼, 컵 홀더 안쪽에 작은 글씨로 숫자 열한 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베란다 창 너머로 이지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지훈의 실루엣 옆으로 담배 연기가 번지듯 퍼지고 있었다.

* * *

“선배님.”

팔에 느껴지는 감촉에 잠에서 깼다. 의자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신입이 놀란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깨우면서도 이렇게 바로 반응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뒤로 기대어 있던 몸부터 일으켜 세웠다. 왼쪽 눈이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자꾸 아파서 잠깐 감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벽시계는 자정을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를 증명하듯 주변이 한산했다. 퇴근했거나, 퇴근하지 못했다면 사우나나 숙직실 등 나름의 길을 찾아 눈이라도 잠깐 붙이러 떠났을 법한 시간대였다.

신입이 그러지 못하고 남아 있는 건 내 탓일 가능성이 컸다. 평소에는 적당한 시간이 되면 알아서 집으로 보내주던 내가 잠들어 있으니 이도 저도 못 하고 이 시간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신입에게 사과부터 했다. 목이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아… 미안해요. 나 때문에 못 간 거죠? 얼른 가요.”

“아닙니다. 어차피 알아볼 것도 있었고요. 피곤하시죠? 숙직실까지도 못 가고 여기서 잠든 걸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라고, 반장님이 깨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신입이 머뭇대며 전하는 정보를 들으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그려졌다. 미쳤구나, 지선욱. 아무리 누군가 깨우지 않았대도 그렇지,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침에는 밥을 해먹이고 밤에는 다친 데가 없나 몸까지 살피는 이지훈 덕분에 평소보다 배로 잘 먹고 잘 자는데도, 몸을 쥐어짜는 듯한 피로가 쉬이 가시질 않았다. 까끌하게 느껴지는 턱을 매만지다, 신입이 여전히 옆에 서 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안 가고 뭐 해요.”

“아….”

“내일 출근은 조금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나와요.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말고 퇴근 시간 됐으면 알아서 가고요. 뭐라 할 사람도 없겠지만, 누가 뭐라 한대도 신경 쓰지 말고.”

“선배님은 안 가십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집에 가서 주무시는 게….”

“전 조금 더 있다가요. 확인할 게 남아서….”

나는 아직도 뻑뻑하게 느껴지는 왼쪽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하며, 그럴 때마다 그러던 것처럼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던 피로회복제 하나를 끌어와 들이켰다. 효과는 몰라도,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하는 행위였다. 뭐라도 안 먹는 것보다야 낫겠지. 빈 갈색 병을 쓰레기통에 처박다 말고 앞에 불쑥 등장한 것에 시선이 멎었다.

“선배님. 이거….”

신입이 내민 건 종이봉투였다. 겉면에 이름만 들어본 근처 초밥집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가격도 꽤 나가는 탓에 임원급 인물이 와야만 예약 후 방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신입이 야식으로 사 오기에는 부담스럽고 생뚱맞았다. 받지 않고 이유를 묻듯 쳐다보는 내게 신입이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지훈이 형한테 연락이 왔거든요. 선배님과 오후부터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무슨 일 있냐고… 안에서 잠깐 눈 붙이시는 중이라고 했더니 오셔서 이거 주고 가셨습니다. 선배님 깨시면 같이 먹으면서 하라고.”

예상치 못한 이름이 들린 순간에야 왼쪽 눈이 완전히 뜨였다. 나는 이 안에 이지훈이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리번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확인했다. 어둠을 뚫고 보이는 거라고는 창문에 나뭇가지를 걸쳐 놓은 나무뿐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몇 시쯤 왔어요?”

“네?”

“이지훈이요.”

“예? 아… 열 시쯤?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처음에 연락 주신 건 아홉 시쯤이었고요.”

피로감에 눌려 몽롱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갰다. 나는 책상 끄트머리에 밀려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최근 사건 처리와 관련하여 접촉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통화 목록이 혼잡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누가 전화를 했는지도 놓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지훈의 이름은 오늘 날짜의 부재중 통화 목록에 두어 번 찍혀 있었다. 오후 6:15, 오후 8:50. 퇴근 시간대와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신입으로부터 내 상태를 전해 들었을 9시 이후로 놈에게서 온 전화는 없었다. 대신 메시지들이 몇 개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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