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브 바이 파이브(5x5) 4권
0x4
“개춥다.”
골목길 초입에 서 있던 이지훈이 날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놈답게,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였다. 나는 말없이 코트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핫팩을 꺼내어 놈에게 건넸다. 갓 쪄낸 고구마라도 받아들듯이 호들갑을 떨던 이지훈은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서야 그 짓을 그만뒀다.
별다른 말 없이 나란히 서서는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강영수와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국어에서 갈릴 것 같지?”
정거장이 보일 때쯤 이지훈이 물었다. 수능을 친 놈의 총평이었다. 나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문학 문제가 문학 문제보다 많았고, 지난 6년 동안 수능에서 출제된 적 없던 고전 시가가 꽤 큰 비중으로 등장했다. 모두가 헤맸음을 증명하듯 국어 시간이 끝나자마자 반 분위기가 처참했다. 국어 1등급 커트라인이 95점이었던 9월 모의고사는 물론, 까다로운 편이었던 6월 모의고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난이도였으니 다들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이지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리 가형은 어땠어?”
“무난. 나가면 국어에서 하나 정도 나갈 것 같은데. 넌?”
“나도.”
수능임에도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치던 모의고사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다른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친 것만 빼면, 수능을 쳤다는 사실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수능이 끝난 지금 머릿속에 딱히 남는 건 없다는 점에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치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지훈도 마찬가지인 듯, 정거장 의자에 앉아 장난이라도 치듯 허공으로 밭은 숨을 후후 뱉어내는 얼굴에서는 그 어떤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과 좀 떨어진 정거장에서 만나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 강영수가 올 때까지도 정거장에는 우리뿐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강영수가 보였다. 시내와 바로 붙어 있는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본 우리와 달리 조금 더 먼 곳에서 시험을 친 놈은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뛰어온 모양이었다.
“사람 존나… 존나 많더라. 아저씨한테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한 거 잘한 듯.”
숨을 헉헉대면서도 그런 말부터 하는 강영수의 머리를 흩뜨린 이지훈이 생색을 냈다.
“내가 뭐랬냐. 형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댔지.”
“그래. 네 좆 크다. 야. 찹쌀떡 먹을래? 나 영어 끝나고 먹으려고 갖고 갔는데 까먹어서 남았엉. 자, 여기. 후니랑 우기 하나씩 사이좋게 먹어용. 집 가서 고기 먹어야 하니까 하나씩만 먹기예요. 아가리 벌려, 얼렁. 엉아가 넣어준다.”
강영수가 입에 쑤셔 넣듯이 건넨 찹쌀떡이 녹아 없어질 때쯤, 강영수가 엄마로부터 우리 집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며 보여줬다. 정거장에서 내리자마자 골목길을 올라오시던 앞집의 백 할머니를 마주쳤다. 텔레비전에서 수능 소식을 보았다며 말을 건 백 할머니가 고생했다며 우리에게 만 원씩 용돈을 줬다. 받아도 되나 싶어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내 몫의 돈까지 받은 이지훈이 환히 웃으며 허리를 90도로 숙였고 옆에 있던 강영수는 한술 더 떠 할머니를 껴안더니 볼에 뽀뽀까지 했다.
들어선 마당에서는 강영수 어머니가 우리를 반겨주셨다. 손에 상추와 깻잎이 가득 담긴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장독대 위로 서둘러 소쿠리를 내려놓은 그녀가 다가와 내 볼을 쥐었다. 아무리 겨울바람에 시달린 볼이 차가워도 찬물에 담갔던 그녀의 손만큼 차갑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온기를 나눠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키를 낮추듯 허리를 조금 숙이자, 마주친 눈이 둥글게 휘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어. 고생 많았다. 추웠지?”
“엄마. 미안한데 배 아파서 낳은 아들 여기 뒤에 있어.”
“그래. 가장 덜 잘생긴 아들아. 차례를 기다리라.”
“우리 집 여자들의 외모지상주의 정말 지긋지긋해.”
짜증을 내며 팩 돌아선 강영수가 마루로 서둘러 올라섰다.
“아저씨. 아들 왔어용.”
“오야. 왔나.”
거실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이지훈의 아버지가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강영수를 보고 허허 웃었다. 그의 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날 확인한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그를 본 나는 망설이다가 가방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가방을 받은 그가 외투도 벗으라는 몸짓을 하길래 그렇게 했다.
외투와 가방을 들고 내 방 쪽으로 돌아서던 그가 멈칫하더니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잠시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주름진 손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나는 나이 든 노인의 조용한 눈빛에서 나를 향한 깊은 애정을 읽었다.
“수고혔다.”
그건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표현이었다. 나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뒤로 보이는 거실에는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잘 볼 수 없는 커다란 상이 놓여 있었다. 모퉁이에 앉아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든 영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멈칫하던 영은이는 이내 웃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미소였다. 마주 웃은 나는 영은이의 곁으로 다가가 상 위로 수저 놓는 일을 도왔다.
강영수의 어머니와 한참 농담을 주고받던 이지훈이 옆에 와 제 아버지한테서 집게를 뺏어 들었다. 마루 위가 여러 개의 발소리로 시끄러웠다.
텔레비전에서 연신 떠들어대는 것처럼 수능 날은 추웠다. 그러나 그 사실이 잘 느껴지진 않았다. 내 옆을 지키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달 후엔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며 정자 안에 엎어져 칭얼대던 강영수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곧바로 시선을 뒤로 돌린 나와 달리 여전히 어두운 바다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이지훈이 심드렁히 답했다.
“그래 놓고 서울 올라가면 제일 잘 놀 새끼가 무슨.”
강영수가 이지훈의 뒤통수에 대고 중지를 들어 올리는 걸 보며 피식대길 잠시,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강영수의 말이 잊고 있던 상념을 불러왔다. 그 말처럼 몇 달 후에는 이렇게 밥을 같이 먹고 정자로 올라오는 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셋이 모이는 것도 방학 때가 아니면 힘들겠지. 우리 셋은 희망하는 대학교부터가 달랐다. 희망하는 대로 되면, 대학을 다닐 지역조차 찢어질 가능성이 컸다. 강영수는 아마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할 가능성이 컸고, 이지훈은 공군사관학교로, 나는 경찰대학교로 갈 테니까.
“욱아. 나 서울 가게 되면 꼭 놀러 와. 알았지. 내가 이지독은 몰라도 넌 꼭 재워줄게. 베개도 양보해줄게. 이지훈은 서울역에서 신문지 하나 덮고 자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둘이 꼭 재미있게 놀자?”
강영수가 허리에 매달리며 평소처럼 애교를 부렸다. 저를 겨냥한 말에 이지훈의 고개가 처음으로 이쪽으로 돌아왔다. 인상을 찡그린 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안 가, 씨발놈아. 누가 니 보러 서울 간대?”
“뭐. 나 보러는 안 와도, 여친 보러는 어쨌든 올라올 거 아냐.”
강영수가 그렇게 대꾸할 줄은 몰랐는지, 티 나게 멈칫하던 이지훈은 그러나 다음 순간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걔랑 헤어졌는데.”
“뭐? 진짜야?”
“가짜로 헤어지는 것도 있냐.”
“아니, 언제? 왜? 뭐 때문에?”
눈이 터질 듯이 커진 강영수가 이번엔 이지훈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이지훈이 짜증을 내며 밀어내든 말든,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강영수는 머리가 쥐어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놈이었다. 한참 엎치락뒤치락 싸움하던 둘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강영수의 머리를 멀찍이 떨어뜨린 이지훈이 뒤로 벌러덩 누우며 잠정적 휴전 상태가 됐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정자의 천장을 노려보던 놈이 강영수가 던진 질문 중 몇 개만 선택적으로 골라 답했다.
“우리 수능 백 일 남았던 때가 언제였지? 그쯤.”
“미친 새끼야. 그때 헤어져 놓고 이제야 말을 한다고?”
“왜 말을 해야 하는데? 수능 백 일 남긴 시점에서 그게 뭐 중요한 정보쯤이나 된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년부터 1년 가까이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일을 수능에 비교할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말은 얼핏 냉정하게까지 들렸다. 나는 이지훈의 핸드폰 뒤에 붙어 있던 스티커 사진을 생각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능을 앞두고 우리는 핸드폰을 꺼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집에 가는 봉고차에 탈 때쯤에는 기진맥진해서 조각 잠을 청했다. 마치 우리가 일 년 전에 보았던 독서실의 3학년 형과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지훈은 언제쯤 그 스티커를 뗐을까. 아니, 떼긴 했을까. 별일도 아니란 것처럼 이런 순간에야 그런 소식을 전하는 놈은 그걸 떼는 일조차 수능 뒤로 미뤄두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나도 강영수처럼 이지훈을 멍하니 바라보게 됐다.
“와, 이 새끼 진짜….”
이지훈과 연애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강영수는 평생이 가도 이지훈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니 원래도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방금은 존나 대박이었다. 네 전여친이 이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남아 있는 한 톨의 미련조차 사라질 수 있게.”
“걘 원래도 미련 없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런 애인 줄 알고 사귄 거니까 알지.”
알쏭달쏭한 표정의 강영수를 슬쩍 본 이지훈이 웃었다. 그도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팔을 모아 머리 뒤에 댄 채로 눈을 감은 놈이 담담히 대화를 끝냈다.
“미련이 있으면 헤어졌겠냐, 애초에.”
강영수는 설핏 인상을 찡그리며 당장 반박하고 싶은 표정을 짓다가도,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강영수보다는 조금 더 늦게 이지훈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바다는 오늘도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의 모래성 또한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했다.
이지훈의 연애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고 끝났다. 그건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다. 울타리 안에 들어온 줄 알았던 이지훈의 전 여자친구는 너무나도 손쉽게 밖으로 밀려났다.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나갔다 해도, 이지훈이 아무런 미련 없이 그녀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몇 달 후에 우리는 헤어진다. ‘장거리’도 ‘연애’도 나와는 관련이 없는 단어들이지만, 이지훈과 헤어진다는 사실만은 같았다. 더는 같은 동네에 살지도 않고, 같은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나는 이지훈의 옆에 언제까지 붙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제 발로 이지훈의 울타리 안에서 나가겠다고 선언하면, 이지훈은 그때도 저렇게 미련 없이 순순히 나를 떠나보낼까.
언젠가 이지훈에게 떼버리면 그만일 핸드폰 뒤의 스티커 사진처럼 취급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다.
* * *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엄마가 태안으로 날 만나러 왔다. 엄마를 본 건 거의 일 년 만이었다. 연례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한 해에 한 번씩은 할아버지의 집에 들러서 참고서부터 시작해 생활 물품을 잔뜩 건네고 사라졌던 엄마는 아직도 태안 시내의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헤맸다. 한참 차를 끌던 엄마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차를 댄 곳은 강영수가 저런 곳은 대체 누가 갈까 의아해하던 시내 어귀의 한 한정식집이었다.
“그래. 집 안에 네 나이대의 경찰 간부가 하나쯤 있으면 나쁘진 않겠지. 나중에 셋째 외삼촌과 한 번 자리를 만들 테니, 인사드리렴. 예전부터 그쪽에 줄이 많으신 분이었으니, 눈도장 찍기에 좋을 거야.”
처음에만 해도 경찰대라는 선택지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던 엄마는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그 유용성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그게 뭐든, 다른 선택지를 들이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어색한 친척과 자리를 만들겠다는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인 이유이기도 했다.
엄마는 이혼 후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식사 중에도 일 관련 전화를 여러 번 받아야 할 정도로 바쁘고 여유가 없는 건 예전과 같았지만, 적어도 더는 아무도 없는 식탁에 혼자 앉아서 울 것 같지는 않았다. 방금도 세 번째 통화를 끝낸 엄마는 방석을 당기는 척 시계를 확인했다. 초조한 눈치였다. 나는 그녀가 떠나야 하는 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당겨졌음을 눈치채고는 말을 걸었다.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집까지는 버스 타고 갈게요.”
반색하며 일어날 줄 알았던 엄마는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할 말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화 내내 옆에 놓인 업무 가방의 손잡이에 닿을 듯 말 듯 하던 손끝이 오히려 멀찍이 떨어졌다. 의아해하는 나와 눈을 맞춘 엄마는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 몸짓이 조금 이어진 후, 엄마가 팔짱을 꼈다. 어정쩡해 보이는 자세인데도 엄마는 그런 자세를 취하고서야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친 내게 말을 거는 표정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아냐, 괜찮아. 그렇게까지 급한 일도 아니고. 음… 갖고 싶은 건 없니? 수능도 잘 봤는데, 엄마가 선물해줄게.”
내가 없다고 말했음에도, 바로 옆 유리창을 통해 건너편 대로변의 디지털 프라자를 발견한 엄마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정신을 차리니 손에 들린 핸드폰이 신형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묵직한 노트북 가방도 들고 있게 됐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편에 멀거니 서 있기만 한 나를 대신해 영업사원과 게임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엄마를 보던 나는 뻘쭘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음악 관련 기기를 모아둔 곳이었다. 헤드폰이 걸려 있는 거치대부터 스피커들이 가격대별로 정리된 진열대 안을 무의미하게 훑던 나는 익숙한 물체를 발견한 순간에야 흘리던 시선을 멈췄다. 이지훈이 선물해준 MP3와 똑같은 모델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받은 하얀색 외에도 다양한 색들이 있었다.
“갖고 싶니? 사줄까?”
집중해서 보느라, 엄마가 어느새 옆에 선 것도 몰랐다. 진열대 안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로 묻는 엄마는 내가 어떤 물건에 먼저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운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사줄 것처럼 묻는 그녀를 본 영업사원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까다롭게 굴지 않고 척척 카드를 내미는 손님을 보며 횡재 잡은 티를 숨기지 않던 그는 이번에도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물품들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새로운 버전이 나왔는데, 아드님이 기가 막히게 알아보셨네요. 여기 실버랑 골드색이 특히 잘 나가요. 요새 핸드폰으로 노래 듣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전문 기기만은 못 하잖아요.”
“실버가 새로 나온 거예요?”
“네, 어머님. 색도 깔끔하고 예뻐서, 요새 많이들 오셔서 대학 입학 선물로도 사주시고 그래요.”
“이거 할래?”
엄마가 한 번 더 물었다. 나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엄마가 기어코 이것을 사줄 것을 알았다. 노트북과 핸드폰을 살 때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굳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걸로 주세요.”
그래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이거요? 화이트?”
샘플까지 앞으로 내밀며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색상이 아닌 다른 색을 지목한 나에게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영업사원이 되묻는데도, 엄마가 의외라는 낯으로 날 보는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게 포장된 기기가 든 종이 상자를 든 순간에야, 심장이 뒤늦게 쿵쿵 뛰었다. 이걸 받은 이지훈의 표정을 얼른 보고 싶었다.
* * *
졸업식 전 학교를 나오는 마지막 날이었다.
12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선생들은 아이들에게 훈계하는 척하는 것조차 그만뒀다. 어차피 그래 봐야 듣는 이는 없고 입만 아프다는 사실을 선배들을 통해 학습한 사람들다웠다. 남은 수업 일수를 채워야 한다는 지루한 의무로 학교를 출석한 애들은 교복을 입고 온 성의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책상이나 반 뒤 사물함 위에 널브러져서는 시간을 죽이기 바빴다. 빌려온 만화책을 보거나, 전자 기기에 담아온 영화를 보거나, 혹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든가 했다.
그렇게 버텨야 하는 시간은 4교시까지였다. 자정이 다 되도록 학교에 붙어 있던 수험생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임에도 상황이 바뀐 아이들은 그조차 지겨워했다. 그런 아이들의 징징대는 모습을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담임은 마지막 종례를 치르는 순간엔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가라, 이놈들아. 졸업식까지 사고 치지 말고!”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좌중을 훑어본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하교를 허락한 순간, 수십 개의 발소리가 서둘러 흩어졌다. 가방걸이에 걸려 있던 가방을 집어 들려다 말고 반을 나서던 담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급하게 이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교무실에 다다를 때쯤 이지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솔직히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니 먼저 가버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올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당연하다는 듯 먼저 말해주니 고마웠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담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담임이 말하길, 내가 졸업생 대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성적에 예민한 학교답게 늘 전교 1등을 학년 대표로 내세우던 그들 덕분에 이미 몇 번 겪은 일이긴 하나, 졸업생 대표는 입결로만 따지면 나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 간 친구가 맡을 거라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긴 했다. 담임은 내가 그날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일러주며, 졸업식의 순서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행사의 식순과 그날 상을 받을 학생의 이름이 적힌 종이였다. 별생각 없이 훑어보던 종이에서 이지훈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종이의 끝을 꼭 쥐었다.
달빛이 들어오는 작은 비품실에서 말하던 이지훈의 목표가 모두 이뤄졌음을, 이지훈보다 한발 빨리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지훈이 그 과정에서 한 고생을 알고 있어 더욱 벅찼다.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줘야 할까. 사놓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해주지 못한 MP3까지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지금 당장 졸업식 축사를 시킨대도 별로 망설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MP3를 주며 할 말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고백처럼 들릴 것만 같았다.
이지훈. 그리고 고백. 나란히 놓기에도 낯선 말을 곱씹으며 걷던 나는 어느새 교실 앞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걸음의 속도를 멈췄다. 마지막으로 나간 사람이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반으로 접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문으로 다가서던 나는 유리창 너머를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이지훈만 남아 있을 줄 알았던 반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뒷모습을 잠시 본 것만으로도 그게 정이영임은 알아챘으나, 왜 정이영이 이지훈 앞에 서 있는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마주 서서 대화할 정도면 꽤 친분이 있다는 걸 텐데, 나는 둘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커녕 서로 인사하는 것조차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게 나만의 착각이 아님을 말하듯 이지훈 앞에 서 있는 정이영은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패딩 아래로 주먹까지 꼭 쥔 채 서 있는 뒷모습은 얼핏 비장한 것처럼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나?”
내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보는 중이던 이지훈이 시선을 들어 흘깃 앞을 확인했다. 놈의 시선이 내가 서 있는 뒷문까지 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숨부터 죽였다. 역시나 날 발견하지 못한 이지훈은 시선을 다시 떨어뜨렸다.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놈은 게임 중이었다. 강영수와 최근 랭킹 싸움이 붙은 유치하기 짝이 없던 총 게임이 분명했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든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손만은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신경한 태도였다.
“어. 해. 듣고 있어.”
“…여기서?”
“왜. 어디 가야 해?”
“아, 아냐. 그냥 여기서 할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지훈을 봐서도, 반에 다른 인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이 분위기를 알았다. 누군가의 앞에서 잔뜩 긴장해 숨을 고르고, 그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절부절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무는 광경이 선사하는 풍경은 익숙했다. 왜냐면, 나 역시 늘 그런 상대방의 모습을 보아왔으니까.
비록 이곳이 남고라고 해도, 고백을 받는 대상이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고 해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정이영이 숨길 생각도 않고 온몸으로 뿜어대는 신호는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다.
본능이 입을 모아 말했다. 듣지 말라고. 네가 몰래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고. 굳은 몸은 그 말을 반만 따랐다. 뒷걸음질 치듯 발을 뒤로 끌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발소리가 짧게 울렸다. 단발성에 그친 발소리였지만 누군가가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어붙어 숨조차 멈췄던 나는 정이영의 말소리가 들리고서야 숨을 쉬었다.
“좋아해.”
걱정했던 발소리는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들 외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면 정이영은 저렇게 털어놓지 않았을 테니까.
“너는 몰랐겠지만, 꽤 오래됐어. 한 번이라도 너한테 말하고 싶었고. 당황스러울 거 알아. 그렇지만… 나는 진심이야. 마음이 생긴 후부터는 쭉 그랬어.”
더는 둘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없는 곳까지 멀어지고서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으나, 뒷문의 열린 틈 사이로 둘이 나누는 말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나는 도망가지 못했다. 고백을 받는 사람이 이지훈이라는 이유만으로.
“…….”
“…….”
말소리가 뚝 끊겼다. 둘 다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소리라고는 이지훈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총소리뿐이었다. 두두두, 두두두.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총소리가 멎은 건 그쯤이었다. 음향을 줄이는 것처럼 차츰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배경 음악처럼 작동하던 총소리가 뚝 멎자 그에 가려져 있던 침묵이 공간을 집어삼킬 것처럼 커졌다. 나는 나무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렇게 조각내서라도 삼키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있는데, 말하면 너 더 울까 봐.”
이지훈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어떤 의도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이영에게는 독처럼 느껴지는 처사인 모양이었다. 방금의 울먹대던 목소리마저 지운 정이영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관없으니까 그냥 해.”
“그래?”
“어. 어차피 이 말 한 것도, 다시는 너 볼 일 없을 거란 거 알고 한 거야.”
나는 한 번 더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지만 그래도 도망칠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도망치지 못하고 멈췄다.
“제정신이야?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이지훈은 정해진 대사라도 뱉는 사람처럼 매끄러운 투로 말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상처입히기 위해 꾸며냈다기엔 너무나 순식간에 나온 말은, 놈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 말을 하고 있을 놈의 얼굴을 못 본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이지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그걸 본 나는 정이영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건 내가 그려본,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이지훈의 반응 중 가장 최악의 버전이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차피 앞으로 안 볼 생각이었다니 할 필요 없겠네.”
쇠로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그게 가방걸이에서 가방을 낚아챌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말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정이영이 아닌, 이지훈이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또한.
주변부터 살폈다. 옆 반 앞문이 반쯤 열려 있음을 확인한 순간에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숨기고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거리가 가까워져서인지 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히 들렸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난 네가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라 싫은 거야.”
“…….”
“볼 일도 없겠지만, 본대도 아는 척은 하지 마라. 그때는 지금처럼 좆같은 기분 티 안 낸다고 장담 못 해.”
익히 잘 아는 발소리가 저벅저벅 복도를 울렸다. 몇 분 후에는 힘없는 발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복도가 조용해지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남아 있는 학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복도에 나오자마자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못 박힌 듯 바닥에 붙은 다리를 겨우 움직였다. 열린 뒷문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다가서자, 정거장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내 자리의 가방걸이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방금 보고 들은 일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귓가에서는 이지훈의 목소리가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하얀 꾸러미를 서랍 가장 아래 칸에 처박기부터 했다. 그해 겨울을 지내며 나는 그 서랍만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이지훈과 헤어져 다른 학교로 가기 위한 짐을 싸는 순간마저도 그랬다.
* * *
정현준과 싸웠다. 개강한 지 5일이 지났고, 정현준이 방학이 끝나고 서울에서 방으로 다시 돌아온 지 7일, 그리고 이지훈과 강릉에서 그렇게 싸우고 70일가량이 흐른 날이었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난 네가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라 싫은 거야.’
그 겨울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꾸던 꿈은 그날조차도 날 놓아주지 않았다.
하필 교내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놈이랑 치고받고 싸운 탓에, 원치 않은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싸움이 시작된 순간, 우리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싸움의 이유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어쩌다 그중 하나를 듣게 된 순간엔 웃음이 샜다. 좋아하는 여자를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싸우다니, 그것만큼 정반대의 헛다리가 없다 싶어서.
정현준은 싸우면서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답지 않게 침묵했다. 나 또한 굳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제공할 생각은 없었다. 당사자들이 묵묵부답인 것만으로도 소문은 빠르게 시들해졌지만 그래 봐야 좁은 학교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는데도 모든 걸 눈치챈 건 그 선배뿐이었다.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대기부터 하던, 정말이지 눈물이 많았던 그 선배.
“왜 그랬어.”
대련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묻던 그의 손에는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손까지 벌벌 떨며 묻는 그의 손에서 약 봉투를 뺏어와 안을 들여다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붕대들 사이에 빼꼼 고개를 내민 연고를 확인한 순간에는 웃음이 터졌다.
“선배 바가지 쓴 것 같은데요.”
“…….”
“멍에는 후시딘 안 들어요.”
우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짓이 아니긴 한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냥 그 상황이 좀 웃기긴 했다. 왜 순간 눈이 돌았을까. 당신 때문에 싸웠다는 걸 말하는 것조차 멋쩍은 사이인데.
“손톱 관리도 잘하는 새끼라 그런지, 긁힌 데도 없어요. 봐요.”
답지 않게 장난을 치는 나를 보면서도 그 선배는 입술을 떨었다. 내 볼이며 이마를 훑는 시선이 불안해 보였다. 나보다는 정현준 얼굴이 더 엉망이 됐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애새끼 같은 짓 같아서 그만뒀다. 그런 걸 안 해도 벌써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생각할수록 웃긴 관계였다. 나는 선배가 우는 게 싫고, 선배는 내가 다치는 게 싫은데 서로를 사랑하진 않는다는 게.
“알았으니까 울지 좀 마요. 이거 바르면 안 울래요?”
지금도 나는 후시딘이 멍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우는 걸 멈추는 데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멍 위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면서도 그 선배의 눈물을 닦아줄 생각은 안 했다. 그 선배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그랬다. 매 순간 깨닫곤 했다.
그래, 우리는 이런 사이구나. 이 이상으로 서로의 삶에 관여하면 그게 부담이 되는 사이. 왜냐면 그 이면에는 사랑이 아닌 서로에 대한 동정만이 존재하니까. 마치 내가 선배의 눈물을 닦아줄 마음까지는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선배가 이 순간 내게 애틋함을 느끼기보다는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절대 사랑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그걸 편하게 흉내 내는 사람들 같았다.
그 선배는 내 볼이 연고로 끈적해질 때가 되어서야 눈물을 그쳤다. 운 티라도 내듯 붉은 눈가를 바라보다 멈칫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그가 그런 질문을 한 건 처음이었다.
“요새 네가 좀….”
그 선배는 머뭇댔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오히려 결심한 듯한 눈빛을 했다. 늘 내 눈치를 보던 그는 처음으로 내 기분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본능에 따랐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그가 순간의 충동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님을 눈치채게끔 했다.
“불안해 보여서 걱정돼.”
아주 잠깐,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생각했다. 지난해 겨울, 정이영에게 고백받는 이지훈을 본 이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악몽 같은 잔상. 강릉에서 그렇게 싸웠음에도 얼마 전부터 내게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이지훈. 여전히 우리 둘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 하고 눈치를 보는 강영수.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할 방법을 알면서도, 매일같이 실패하는 나.
그러나 잠깐 마음에 파도처럼 일었던 말들은 결국 목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해 멀찍이 시선을 뒀다. 우리가 앉아 있는 도서관 뒤의 벤치 옆 게시판에는 조악한 디자인의 영화 포스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빨간 글씨로 적힌 개봉 일자는 내일이었다. 9월 2일. 따라 읽던 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일 영화 보러 갈래요?”
놀란 눈빛의 그를 보고서야 우리가 학교를 벗어난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물은 것 또한 처음이라는 것도. 그는 내게서 다른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할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숨을 쉬면서도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 * *
“영화 하나 더 볼래요?”
여덟 시 반. 영화를 두 개 보고 나오자마자 내가 꺼낸 말이었다. 두 번째 영화를 보면서 그가 손목시계를 거듭 확인하는 등 집중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지르듯이 물었다. 선배는 예상처럼 곤란한 얼굴을 했다. 물러설 기미가 없는 나를 보고서야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망설이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러면 버스가 끊길 것 같은데.”
“끊기면 택시 타면 돼요.”
“그래도 좀… 마음에 걸려서.”
“…….”
“우리 외박이 아니라 외출 쓰고 나온 거잖아.”
선배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기 싫은 것처럼 조심스러운 어투로 건네는 말들은 죄다 옳았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말이 없고, 감성적으로 호소할 자신도 없었다. 말없이 들고 있던 영화 포스터를 구기는 나와 눈을 맞추려 애쓰며 그 선배가 물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야?”
잠깐의 망설임. 그러나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포스터를 훑어보았음에도, 기억나는 것 하나 없는 영화였다. 나는 영화 포스터를 휴지통으로 던져 넣었다. 선배의 시선이 쭉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왜 보고 싶지도 않았던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냐고 그가 물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신발에 시선을 둔 채로 사과했다. 쓰고 있는 모자의 챙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다는 게 차라리 감사했다.
“우겨서 죄송해요. 버스 타러 가요.”
앞장서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머뭇대는 기색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래도 그는 나를 따라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을 나오고, 횡단보도를 건너 정거장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정거장에 붙은 알림 창은 우리가 탈 버스가 5분 뒤에 도착한다는 걸 알렸다. 알림 창을 흘끔 확인하는 나를, 선배가 티 나게 흘긋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고, 평소처럼 눈을 맞추면 그는 용기를 내어 묻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끝끝내 버스에 탈 때까지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늦은 밤, 버스는 한산했다. 우리가 내린 학교 앞 정거장조차 그랬다. 토요일 밤이었다. 토요일에 학교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동기들은 보통 주말을 누군가와 보낼 요량으로 외박까지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토요일 밤에 학교로 다시 돌아온 건 우리뿐이었다.
정거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에서 막 내리던 정현준과 마주친 건 의외였다. 정현준은 원래도 방에 붙어 있는 날이 몇 안 되는 놈이었지만, 나와 싸운 어제는 방에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 학기 동안 룸메이트로 지낸 경험은 서로의 생활 패턴 정도야 쉽게 예측하도록 했다. 그런 놈이니 주말도 당연히 외박할 줄 알았다. 이런 시간에 학교로 돌아온 놈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별다르지 않은 듯 나를 보자마자 크게 멈칫한 정현준은 옆에 있던 선배를 확인하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푸른 멍이 남아 있는 볼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선배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요.”
정현준을 멍하니 바라보던 선배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걷는 우리의 뒤로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야.”
정현준의 부름에 멈춘 건 내가 아닌 선배였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날 보는 선배에게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인상을 쓴 정현준이 점차 가까워졌다. 한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선 정현준이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짙은 한숨을 쉬는 놈은 하기 싫은 짓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건 놈이 방금 내 앞으로 불쑥 내민 것과 관련이 있을 테다.
“이거 가져가.”
정현준이 내민 건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크게 적혀 있는 종이 가방이었다. 받아들 생각 없이 그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정현준이 짜증을 냈다.
“나도 주고 싶어서 주는 거 아니거든? 터미널에서 만난 네 친구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준 거야.”
“…….”
“마음 같아서는 버려버리고 싶었는데, 남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그러는 건 찝찝해서 가져온 거라고. 곱게 줄 때 얼른 가져가. 내 얼굴 이따위로 만든 놈 챙겨준다고 이러는 거 나도 썩 달가운 일 아니니까.”
나는 시선을 들었다.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빛은 쉽게도 퍼졌다. 방금까지 눈알이 빠지게끔 노려본 브랜드 로고에 박힌 색들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점멸하듯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걸 깨달은 나는 더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정현준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달싹였다. 홍보단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붙어 있는 경찰대 배지 모양의 스티커를 본 순간에는 덤덤히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 저걸 보고 정현준이 경찰대인 걸 알았겠구나. 그러니 터미널에서 만난 낯선 이를 붙잡고 부탁했을 테고.
“상관없으니까 버려.”
“뭐?”
“버리라고.”
“…너 제정신이야? 네 친구가 준 거라니까? 내가 산 게 아니라고.”
정현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선배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나를 돌아봤다. 이 학교에 온 후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 둘인데, 그들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왜냐면 난 그 둘에게 어떤 것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찝찝해서 못 하겠으면 줘. 내가 버릴 테니까.”
멍하니 입을 벌린 정현준은 빠르게 다가선 내게 종이봉투를 쉽게도 내줬다. 낚아채듯 빼앗은 종이봉투는 정거장 옆에 있던 위가 열려 있는 투명한 재질의 쓰레기통 안으로 봉투째로 처박혔다.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쓰레기통 근처에서 머뭇대는 선배를 부르면서.
“형.”
정현준도, 선배도 흠칫했다. 그건 정현준이 그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했으니까. 다른 선배들과 달리 특별 취급이라도 하는 척을 하며 정현준이 그를 갖고 놀 때나 썼던 친근한 호칭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가질 생각도 없었던 그 선배를 내게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정현준의 것도 아니었다. 굳이 자신의 앞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사납게 치뜨는 정현준을 무시하고는 선배와 눈을 맞췄다.
“계속 여기에 서 있을 거예요? 전 볼일 다 끝났는데.”
순간 선배가 울컥했다고 생각했다. 마주한 눈이 눈물을 흘릴 때나 그랬던 것처럼 잠깐 빛났으니까. 그러나 정현준을 한 번 뒤돌아보고, 다시 나를 본 선배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 대신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돌아보지 마요.”
세 걸음을 뗐을 때, 나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선배가 돌아보고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으면서. 그걸 아는지 선배는 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현준을 뒤에 내버려 둔 채로 학교를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제정신이야?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또 꿈인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비를 느끼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의식의 경계가 흐렸다. 귓가에서는 늘어진 테이프처럼 같은 구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차피 앞으로 안 볼 생각이었다니 할 필요 없겠네.’
목덜미에 닿는 물방울보다도 차가운 이지훈의 목소리는 이제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난 네가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라 싫은 거야.’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는 어쩌면 내가 아닐까. 완전히 도망치지도 못하고, 이딴 테이프나 돌려 들으면서 지금 이 너절너절한 꼴이 그렇게 끝을 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고 자위하는 내가.
그걸 인정해야만 이 테이프를 재생하는 일이 끝나는 걸까. 대체 어떤 끝을 봐야지만, 나는 이지훈이 주지도 않은 상처를 핑계로 삼는 일을 그만둘 수 있나.
대체 어떤 끝을 봐야지만…
“선욱아.”
이지훈을 그만 좋아할 수 있을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눈을 간신히 깜빡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란색 컨버스화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몇 시간 전 버스터미널 앞 정거장에서 나와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선배의 운동화.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 앞에는 그 겨울, 고등학교 복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을 사람이 서 있었다. 날 보는 선배와 눈을 맞춘 순간에야 깨닫는다.
꿈이 아니었구나. 이 비도, 내가 앉아 있는 버스정류장도.
“왜….”
내가 쓰레기통에서 건져낸 다 녹은 아이스크림도.
우산을 쥔 선배는 비에 젖어 있을 내 얼굴을 보다가, 내가 앉아 있는 정류장 의자를 보다가, 이내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섞인 아이스크림과 그를 담고 있는 종이컵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흐물흐물해진 종이 위에 유독 한참을 머물렀다. 그쯤 되었을 때 그는 더는 말을 잇길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모든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내가 이 밤, 결국 이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온 이유까지도.
“선배.”
귀로 듣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습해서, 어딘가에 매어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입 안에 끈끈하게 달라붙는 말들을 겨우 떼어내 그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
“아까 멋대로 형이라고 불러서요.”
미련을 죄다 펼쳐 놓은 광경에 앉아서는 이딴 사과나 하는 나를 견디는 그가 불쌍했다. 나는 이지훈에게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가 되기 싫어서, 그에게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처럼 굴고 있었다.
“…괜찮아.”
창백해진 얼굴로도 나를 용서부터 하려 드는 그를 보고서야 깨닫는다.
이럴까 봐 그에게 말하지 못했었다는 걸. 요새 무슨 일 있냐는 질문에도 말을 돌리고, 보고 싶은 영화여서 이렇게 학교 밖에서 시간을 죽이려는 거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나는 어쩌면 이 선배의 입에서 나올 ‘괜찮다’라는 위로를 겁내기부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선배.”
“…….”
“안 괜찮아요.”
왜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저 선배랑 잘 때마다 그 새끼 생각해요.”
흉내란 흉내는 다 내면서 함께하는데, 우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못 했다.
“나도 그래.”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도 나를 외롭게 하지 않으려 장단을 맞춰주는 그 선배를 보면서도, 여전히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은 안 드는 게.
“알아요. 근데….”
“…….”
“사랑하는 척 흉내 내면서도 그 새끼 생각하는 건.”
정현준과 싸운 날. 개강한 지 5일이 지났고, 정현준이 방학이 끝나고 서울에서 방으로 다시 돌아온 지 7일, 그리고 이지훈과 강릉에서 그렇게 싸우고 70일가량이 흐른 날.
며칠 전, 이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않으니 장문의 메시지가 이어 도착했다.
얼굴을 보자고 했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나만 괜찮다면 학교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미리 보기 창으로 뜨는 메시지를 보면서도, 난 이지훈과의 대화방을 들어가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또 한 번 더 연락이 왔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미안하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메시지 또한 읽지 않음 표시가 뜨도록 내버려 뒀다. 그러고는 정현준과 싸웠다. 정현준의 시비를 핑계 삼아 선배를 보호하는 척, 이지훈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인 척을 했다.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하진 않았을 테니, 선배 때문이긴 했다. 그러나 선배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지훈이 없었으면 그런 짓을 하는 일조차 없었을 거였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에요. 역겹고요.”
나는 내가 답하지 않는다 해도 이지훈이 끝끝내 찾아올 놈인 걸 알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한 번도 밖에서 만난 적이 없는 선배한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서 아침부터 학교를 벗어났다. 면회 시간이 끝났으니 놈이 학교 근처에 머무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밤늦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죽이려 노력했다. 아침부터 꺼둔 핸드폰은 내가 그러는 내내 서랍에 박혀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선배는 들고 있던 우산을 아래로 내렸다. 비가 멎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는 더는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온통 젖어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컨버스화의 끝과 슬리퍼의 끝이 맞닿았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울지 마. 선욱아.”
그는 평소처럼 우는 것 대신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의 판판한 배에 머리를 박은 채로, 눈을 감았다. 살집이라고는 없는 그 선배의 딱딱한 몸에 기댄 채로 참고 있던 눈물을 죄다 쏟았다.
“네가 그렇게 울면….”
“…….”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잖아.”
그 선배는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여름 내내, 우리가 가장 솔직했던 새벽이었다.
목을 가다듬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켜고, 불이 들어오는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키패드를 눌렀다. 신호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이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
-…….
놈의 숨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그것조차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고이려는 눈물을 빠르게 털어낼 요량으로 눈을 깜빡댔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있었던 곳에 시선을 두고서야 말을 걸 용기가 났다. 2개월 만이었다.
“사실 강릉 가는 날 신입생들이면 다 가야 하는 훈련이 있었는데.”
-…….
“오랜만에 너네 볼 기회라고 생각해서 불참했어.”
악몽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재구현한 거나 다름없는 꿈에서 깨면, 늘 새벽이었다. 불이 모두 꺼져 있고, 깨어난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 것 같은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지훈을 다시 보려면, 놈의 울타리 안에 다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영수처럼 넘길 수도 있는 일을 그러지 못하고 화를 내며 떠나서는, 연락조차 씹으며 놈을 무시했던 날들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밤들 중에서 가장 그럴듯해 보였던 시나리오를 꺼냈다.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술술 나오는 말을 내 귀로 들으며, 내가 생각보다 이지훈에게 돌아가는 계획에 진심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실패를 예감하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매달렸었던 걸지도 모른다.
“연락 안 되는 너를 기다리는데 동기들한테 연락이 왔어. 내가 불참해서 교수가 화났다고, 지금이라도 올 수 없겠냐더라. 못 간다고 답은 했는데, 내심 불안했나 봐.”
-…….
“그래서… 좀 오버해서 화냈던 것 같아, 네가 왔을 때.”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는 이지훈 덕분에 준비한 시나리오를 쉴 틈 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어느덧 시나리오는 중반을 지났다. 나는 숨을 잠깐 멈췄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학교로 찾아오기까지 한 이지훈을 보지 않은 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목소리까지는 어떻게든 흉내 낼 수 있어도, 턱까지 덜덜 떨리는 상태로 괜찮은 얼굴을 흉내 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화 좀 가라앉으면 연락해서 풀어야지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쪽팔리더라. 별것도 아닌 걸로 지랄한 것 같아서. 그렇게 뛰쳐나와 놓고 다시 연락하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
“그래서 연락 못 했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막 이렇게 찾아오고 그럴 필요 없다고. 네 잘못 아니니까.”
생각해뒀던 시나리오의 분량이 모두 끝났다. 나는 컷, 사인을 듣지 못한 배우처럼 어떻게든 말을 이으며 마가 뜬 구간을 자연스럽게 넘기려 노력했다. 숨을 두어 번 쉬고, 어색하지 않은 웃음도 간간이 섞어가면서.
“그냥 좀 기다려줘. 내가 네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어떻게든 다시 만날 때까지 너를 포기해 볼 테니까.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듣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따라붙는 이지훈의 조심스러운 숨소리를 들었다. 울타리를 뛰쳐나간 나를 어떻게든 되돌리겠다고 저답지 않은 짓을 하는 중인 이지훈의 기다림에 아득함부터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 사실에 안심하는 나를 느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자정까지 1분 남았음을 확인했다.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나 다름없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참은 보람이 없이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목 안의 수분이 증발한 순간에야 입을 열었다. 막 떠올린 것처럼, 이제야 생각이 난 것처럼.
아, 맞다. 그리고…
“생일 축하해.”
9월 2일. 오늘은 이지훈의 생일이었다.
* * *
똑똑.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들린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들고 있는 차트를 보던 동기생회장이 눈을 들어서 내 등 뒤로 보이는 방 안을 훑었다. 정현준이 방 안에 없음을 확인한 놈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씻었냐?”
벗은 상체를 보고 묻는 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활짝 열었다. 동기생회장이 따로 시간을 내어 이렇게 방에 찾아오기까지 하는 경우는 보통 할 말이 있어서였다. 손에 든 종이를 보니 가끔 그러던 것처럼 모임 참석 인원을 파악하거나 혹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건지를 물으러 온 것 같았다. 1학년 대부분이 기숙사생이라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나처럼 단체채팅방을 잘 확인하지 않는 놈들에게 여러 번 연락해 쪼기보다는, 문 앞까지 직접 찾아와서 갈구는 방식이었다. 예상대로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온 놈은 정현준의 침대 위로 앉기가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너 검도 대회 나간댔지. 일자가 언제야?”
맨투맨에 머리를 쑤셔 넣은 뒤에야 책상 위의 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팔을 넣을 수 있도록 옷을 위로 당기며 답했다.
“12월 3일.”
“4일엔 돌아와?”
“그렇겠지. 왜?”
“정 교수님이 참여 독려하신 훈련 하나가 있는데, 프로그램 대충 훑어보니까 개빡세서 지원자가 별로 없을 것 같아. 어쩐지 거시는 조건이 좋더라고. 출결 점수에 플러스 후하게 들어갈 거고, 기말도 면제해준대.”
“…….”
“선욱이 너 1학기 때 빠졌던 훈련 정 교수님 거였지? 이번에 다녀오면 만회 가능할 것 같은데, 혹시 생각 있나 해서.”
나는 대답 대신 놈에게 다가서서 손을 내밀었다. 건네받은 종이는 학교로 내려온 공문의 복사본인 듯했다. 글자가 조금 번진 흰 종이 위로 훈련의 개요와 일자, 그리고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수신처에 적힌 대학들 리스트를 보니 어떤 훈련일지 대충 감이 잡혔다. 말이 훈련이지 해병대 캠프나 다름없었다. ‘연합’ 등의 어구를 구절마다 강조해둔 걸 보니 각지의 학생들을 불러 모아 체력 싸움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교수들 중 유일하게 경찰대 출신이 아닌 정 교수가 그를 만회라도 하려는 것처럼 유독 그런 줄 세우기 성의 행사에 목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찰대생들은 없었다. 베이스캠프, 통나무 나르기, 단체 구보 등의 문구를 한 번 더 훑어본 나는 동기생회장에게 종이를 돌려줬다.
“할게. 이름 넣어줘.”
“…괜찮겠어?”
권할 땐 언제고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묻는 동기생회장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가라고 말한 거 아냐?”
나는 머리를 털며 건너편 침대에 주저앉았다. 새삼 이렇게 침대에 앉아 건너편 침대를 보는 일조차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룸메이트인 정현준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지는 꽤 됐다. 심지어 그 선배와 헤어진 이후에도 그랬다. 애초에 방을 벗어난 공간에서는 같이 다니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없는 곳에서도 종종 내 이야기를 꺼내며 룸메이트인 걸 과시하던 정현준이 나를 피하는 걸 모두가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먹싸움을 한 후였으니 인과성을 찾기는 차라리 쉬울 거였다. 처음에만 해도 우리 둘의 눈치를 보던 동기들조차 이제는 익숙해진 것처럼, 굳이 내게서 정현준을 찾지 않았다.
“아니, 그렇기야 한데… 너 요새 스케줄 빡센 거 알아서 그렇지. 애들이 뭐라는 줄 아냐? 너 보려면 대련실 가면 된대. 전화하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를 거라더라.”
놈이 나 빼고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들이미는 정보 속 내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 민망했다. 최근 들어 과할 정도로 몸을 몰아붙이는 건 맞았다. 그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방법이라서 그랬다. 공부든, 훈련이든 지나칠 정도로 했다. 종일 머리든 몸을 한계까지 혹사한 후 방에 돌아와 기절한 듯이 잠들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게 좋았다.
그런 이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던 동기생회장도 뒤늦게나마 이 방에 방문한 목적을 상기한 것처럼 종이를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눈치였다. 똑같이 눈치가 빨라도 정현준과는 달리 선을 넘지 않을 줄 아는 애였다.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 치는 태도가 유들유들했다.
“어쨌든 잘 생각했어. 지원자 별로 없을 것 같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지원한대서 아무나 갈 수 있는 훈련은 아닌 것 같더라고. 정 교수님도 너랑 몇 명 미리 집어서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중 너한테 제일 먼저 온 거야.”
“너도 가냐?”
“…아니. 난 뭐 굳이… 딱히 말씀도 없으셨고….”
화색이 돌던 얼굴이 돌연 머쓱하게 변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가는 사람 등 떠밀 듯 말을 보탤 수는 있어도, 자기는 갈 생각 없다 이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문을 손짓했다.
“문 똑바로 닫고 가라.”
“옙.”
장난치듯 허리를 꾸벅 숙인 놈이 재빠르게 사라졌다. 젖은 수건을 세탁 망으로 던지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에 시선이 멎었다. 12월 29일에 쳐져 있는 동그라미를 보자 강영수의 입대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마 전 태안에 언제 내려올 거냐고 넌지시 묻던 강영수의 메시지도. 강영수는 이제 단체채팅방에 그런 사실을 묻지 않는다. 우리에게 설령 답이 돌아오더라도, 그 메시지 방에서일 리는 없다는 사실을 습득한 사람처럼.
‘다른 건 몰라도, 이 새끼 입대하는 날엔 무조건 가야지.’
‘헐… 우리 후니 그래도 완전한 씹새끼는 아니었으.’
‘아무래도 그날만큼 못생긴 날이 없을 테니까. 영상으로 남겨서 결혼식장에서 틀어야지.’
‘완전한 씹새끼였구나….’
1학년이 끝나자마자 군대에 가는 강영수와 달리 이지훈과 나는 통상의 절차대로 입대하지 않았다. 다니는 학교의 특성상 그랬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이지훈이 언젠가 강영수를 놀리듯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덤벼드는 강영수를 막아내는 와중에도 이지훈의 장난스러운 얼굴은 날 향해 있었다. 당연히 강영수가 입대하는 순간에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나눌 수 있던 눈빛. 이지훈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 비록 우리가 연락하지 않은 지 석 달이 가까워지지만, 그래도 강영수의 입대날에는 함께할 거라고. 친구란 그런 거니까.
달력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물기를 겨우 잃은 발에 운동화부터 꿰신었다. 아무래도 자기 전에 운동장이라도 뛰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에 모여서 대기하던 순간부터 모인 이들 중 반은 턱을 덜덜 떨었다. 12월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숨을 쉬는 순간 몸으로 들어온 공기가 얼음으로 만든 조그만 창처럼 폐부를 찔러댔다. 배에 탈 때부터 욕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체대생 중 한 명은 베이스캠프라는 곳에 도착한 순간엔 욕조차 할 힘을 잃고 주위를 멍하니 살폈다. 같이 온 한 학년 위의 얼굴만 아는 선배가 뒤에서 내게만 들리게 중얼댔다.
“정 교수 이 씨발놈.”
프로그램을 진행할 교관으로 특수부대 조교를 초빙해왔다는 소문은 믿을 만한 것 같았다.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줄지어 등장해 다짜고짜 참석자들을 집합시키더니 바구니를 내밀었다. 뭘 원하는지 몰라 눈치를 보며 머뭇대는 참석자들에게는 핸드폰이 없냐며 윽박질렀다. 다들 그 기세에 눌린 것처럼 빠르게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들을 바구니 위로 던져 넣었다. 이름표조차 붙이지 않은 핸드폰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뒤로 밀어둔 교관은 훈련을 끝내고 섬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돌려받지 못할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놨다.
학교를 두 개씩 붙여 팀이 여러 개로 나뉘었다. 나는 c조였다.
훈련은 힘들었다. 팀에서 유일하게 군필자였던 다른 학교의 형은 군대보다도 힘든 것 같다고 푸념했다. 누구 한 명 낙오라도 될까 봐 사방에서 눈을 빛내고 다그치면서도, 낙오자가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잠잘 시간이 다가오면 반갑기까지 했다. 간이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뜬 것뿐인데 아침이 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마다 내가 밤새 두들겨 맞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게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나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옆자리의 다른 학교 학생은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기합을 당할 걸 알면서도 누워 있었다.
“저 진짜 못하겠어요, 진짜….”
울먹대는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였다.
삼 일째가 되던 날에는 옆 팀에서 두 명의 낙오자가 나왔다. 10kg의 군장을 멘 채로 뒷산을 쉬지 않고 뛰어 열 바퀴를 도는 구보 중 뒤처진 사람들이기도 했다. 훈련에 뒤처지면 낙오자가 되고 싶냐고 하도 겁을 주길래 어떻게 하려나 했더니, 낙오자들을 앉혀 두고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몫까지 고생하는 꼴을 보여줬다. 자신들 몫을 대신해 스무 바퀴를 뛰어야 하는 팀 사람들을 보던 낙오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옆에서 그 꼴을 보던 우리 팀의 사람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음 날 팀에서 가장 체력이 약한 사람의 군장 속 짐을 빼서 모두가 나눴다. 나는 그가 보지 못한 사이에 아령을 하나 더 챙겨서 내 군장에 넣었다. 그가 낙오되느니, 내가 좀 더 고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들어! 구령 붙이고!”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저 멀리서 섬 구석의 바닷가에 내놓아져 있던 100kg 상당의 보트를 드는 훈련이 그날의 마지막 훈련이었다. 여섯 명씩 나눠서 드는데도, 교관의 구령에 따라 물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보트를 들어 올릴 때마다 어깨에 얹힌 무게가 늘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무거웠다. 우리 팀에서 그나마 체력이 좋은 편이던 선수 출신의 체육교육과 형이 비틀대는 걸 잡아주며 나는 그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힘을 한계치까지 끌어 쓰고 있는 팔이 호소하는 고통을 무시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밤중이라 물가에 선 교관의 얼굴이며,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견딜 뿐이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날 것을 알아서.
“자, 하나! 둘!”
쪼그려 앉을 때마다 가슴께에서 얼음 같은 물이 찰랑댔다. 살은 물론 그 안의 심장까지 어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에 튄 바닷물이 얼기라도 했는지, 눈을 감을 때마다 무언가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첨벙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 순간이었다. 좌측에는 b조, 우측에는 d조가 있으니 그중 한 명이 보트를 놓치고 물에 빠지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쓰러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훈련이었다.
그러나 낙오자를 호명하는 소리는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소리쳐 불렀다.
“지선욱! 있으면 대답해.”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보트 사이를 누비는 교관은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가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가져다 대고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멀어지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한 번 더 깜빡인 후에야, 나는 그의 입에서 호령되는 이름이 내 이름임을 알았다.
“지선욱 없어? 경찰대학교에서 온 지선욱!”
빨간 모자를 쓴 채로 두리번대는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그가 나를 지나쳐 가기 직전에야 보트를 어깨에 기대고는 몸을 보트 바깥으로 빼냈다.
“저….”
입이 얼었는지 발음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들은 것처럼 멈칫하고는 뒤돌았다. 더 잘 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린 그의 시선이 내가 입고 있는 훈련복 상단에 박혔다. 이름이 실로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낙오자들 외에는 굳이 이름으로 훈련생들을 호령하지 않는 그들이 잘 확인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지선욱이 맞다는 걸 확인한 순간, 그는 내 어깨부터 잡아끌었다.
“나 따라와.”
“…저 빠지면 대형 무너집니다.”
“알고 있으니까 그냥 놔두고 따라오라고.”
의아한 명령이었다. 모두에게 떨어지는 명령이면 몰라도, 나에게만 별도로 떨어진 명령을 수행할 이유가 빈곤했다. 이유를 듣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의 나를 돌아본 그가 한숨을 쉬며 앞에 서 있던 교관에게 눈짓했다. c조는 보트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재빨리 보트를 내려놓은 팀원들이 뒤늦게 이유가 궁금한 것처럼 나를 힐끔댔다.
“됐지. 얼른 나와. 이럴 시간 없어.”
허리에 손을 얹은 교관이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였다. 물 밖으로 나간 그를 따라갈수록 물의 높이는 점점 낮아지는데, 이상하게 몸은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베이스캠프였다. 모두가 훈련을 나간 베이스캠프 안은 고요했다. 내 간이침대 옆으로 다가선 교관은 침대 아래에 놓아두었던 짐가방을 꺼내 위로 툭 던졌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 모든 행동이 급해 보였다.
“10분 뒤에 배 올 거다. 그거 타고 나가서 버스터미널로 가. 가자마자 표 끊으면 그래도 자정되기 전에는 도착할 거야.”
왜 갑자기 훈련에서 빠져나와 배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고, 표를 끊고 자정 전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계획만을 줄줄 읊는 그를 응시했다. 나를 무시하고 침대맡 간이 옷장에 걸린 옷을 짐가방 위로 거듭 던져대던 그는 침대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고서야 모든 행위를 멈췄다. 나는 아직도 얼어붙은 듯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아직 설명 안 해주셨습니다.”
방금까지 바닷물을 먹었던 훈련복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아직도 차갑고 까만 물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존나 피곤한 새끼네, 이거….”
아까처럼 이유를 말해주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나를 눈치챘는지, 들으란 듯 중얼대는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혀로 입술을 한 번 훑은 그가 얼굴을 굳힌 채로 날 봤다.
“네 할아버지 병원에 계시다고 방금 학교로부터 연락 왔다.”
“…….”
“수술 중이시래. 네 핸드폰이 꺼져 있던 탓에 연락이 이제야 닿은 모양이고. 그러니까 얼른 정신 차리고 짐 챙겨, 새꺄. 곧 올 배 못 타면 너 내일에야 육지로 나갈 수 있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움직인 기억이 없다. 분명 어떤 일을 했는데, 몇 초 후엔 그 사실을 잊는 식이었다. 마치 모든 기억이 점선으로 이어진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기억하지 못하는 큰 틈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니 소형 배 위에 타 있었고, 정신을 차리니 버스터미널이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를 둘러싼 풍경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장면을 잇는 곳들이 뚝뚝 끊겨 있었다.
어떤 표정으로 배에 탔고, 어떤 걸 생각하며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끊었고, 어떤 말을 하며 목적지를 고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또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뛰었다.
내가 멈춘 곳은 한 번도 온 적 없는 병원의 복도였다. 병실로부터 새어 나오는 빛조차 없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야 스스로 질문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어디에 있지?
알고 있는 것들을 죄다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내 숨소리를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걸 당장 멈춰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딨지. 주머니를 더듬는 순간에야 내게 아무런 짐이 없음을 깨달았다. 택시에서 두고 내린 건지, 아니면 버스에 두고 내린 건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나는 눈을 한 번 더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이지훈?”
그곳에 놈이 있었다.
입 밖으로 이름을 낸 순간에야, 나는 내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기와 만난 순간 사라져버린 조용한 부름은 그러나 병실 문을 조심스레 닫고 돌아서던 놈이 날 발견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지훈이 천천히 뒤돌았다. 손에는 가습기를 든 채였다. 나는 놈이 방금 문을 닫고 나온 병실에 붙은 이름을 확인했다.
지청우 환자. 정자로 적힌 할아버지의 이름을 두 번 읽은 후에야 내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제대로 찾아왔으나, 이곳에서 정말 그의 이름을 보길 바라지는 않았다는 것도.
공포에 질려 잊고 있던 현실 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맞닥뜨린 상황들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었다. 나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벽 아래를 보던 시선을 들었다.
“영감 괜찮아.”
“…….”
“수술 잘 끝났고, 의식도 돌아왔어.”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듯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에야 숨이 터졌다.
“왜….”
이지훈을 마주 보고서야 잊고 있던 감각들이 떠올랐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심장의 박동이 돌아오자, 저릿한 손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얼어 있다가 녹은 사람처럼, 몸 안의 세포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감각을 되찾고 나서야 나는 내가 이 겨울에 훈련복 하나만 입고 이곳까지 달려왔음을 깨달았다.
6시간 내내 밖에 있었으면서도 추위란 걸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뒤늦게나마 벌벌 떨리는 몸으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고.
“너 기다렸어.”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대답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린 시야 사이로 이지훈의 쓰레빠가 가까워진다. 가습기를 내려놓았는지 빈손이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내 어깨에 손을 얹기 위함이었다. 덜덜 떨며 서 있는 나한테 어떻게든 온기를 나눠주려고.
“너 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린 시야 속에서도 이지훈만이 선명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이 잠깐 말을 멈췄다. 놈은 6개월 만에 마주 본 내 눈동자 안에서 자신이 알던 무언가를 찾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울컥한 것처럼 눈가를 찡그린 이지훈이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 꼴 못 봐.”
다짐이라도 하듯이 중얼댄 놈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나를 조심히 껴안았다. 나는 놈의 어깨에 머리를 박은 채로, 중력에 항복하듯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할아버지는 일하다 말고 쓰러졌다고 했다. 늘 함께 퇴근하던 이지훈 아버지가 평소보다 이르게 수위실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한참이 더 지나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병원은 할아버지 뇌의 혈관 하나가 막혀 있고, 그 때문에 뇌에 혈액을 공급받지 못해 쓰러진 거라고 이지훈 아버지에게 설명했다. 곧바로 혈류의 흐름을 개선하기 위한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래도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에 실려 왔고, 할아버지가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수술은 수월히 진행됐다고 했다. 그를 증명하듯 할아버지는 수술을 마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로 깨어났다.
2인실 병실이었다. 침대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큰 커튼 때문에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를 배려하듯 소리를 죽여 설명하는 이지훈의 말을 들으며 할아버지를 멍하니 응시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잠든 그는 수술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지난 추석에 보았던 것보다 한층 야윈 얼굴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집에서 잠들 때마다 그랬듯이 왼쪽의 창으로 상체를 조금 비튼 채였다. 몸이 습관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의식을 차렸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손이라도 잡으면 그가 깰까 봐, 나는 할아버지의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한 채로 병실을 나왔다. 이지훈이 뒤를 따라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잠깐 밖에 있는 것만으로도 콧등이 시린 겨울밤이었다. 병원 뒤 주차장 옆에 있는 벤치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로등 아래의 벤치에 앉아 통화 중인 이지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네, 그거 맞아요.”
짐가방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타고 온 택시 번호를 기억하냐고 묻던 놈은 택시 회사를 거쳐 이제는 버스터미널의 직원과 통화 중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인 걸 알면서도 손을 놓은 채로 놈을 바라보기만 했다. 몸에서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풀린 긴장이 피로감과 한 몸으로 엉켜 나를 덮쳤다. 자고 싶다고 생각하며 노란빛을 내뿜는 가로등을 응시했다. 잠을 쫓기 위해 한 행위에 너무 몰입한 탓인지, 통화 소리가 멎었음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어느새 이지훈이 옆에 와 있었다.
“기사님이 한 시간 전에 터미널 분실센터에 맡기고 가셨대. 옆으로 메는 까만색 나이키 가방 맞지?”
“…아, 어.”
“…….”
“고맙다.”
“아빠 내일 병원 올 때 들렀다 오라고 할게.”
“아냐. 내가 가면 돼. 아버님 바쁘신데 굳이….”
“야.”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말을 끊은 이지훈은 정작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놈은 하고 싶은 말에 가시를 모두 뺐다는 걸 확신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네가 나한테 특별한 것처럼, 우리 아빠한테도 영감이 특별해.”
“…….”
“뭐라도 해주면서 도움이 되고 싶을 거라고. 마음이 없으면 시킨대도 안 해.”
뱉고 싶은 수많은 덩어리 중에 가장 고운 모래들만 꺼낸 것 같은 말이었다. 특별함. 나는 내가 오지 못한 시간 동안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을 이지훈의 행위가 보통의 친구라면 할 수 없는 일임을 떠올리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의 말이 맞았다. 그건 특별한 일이고, 누군가 시킨다 해도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던 이지훈은 그러나 아무런 말 없이 내 옆에 앉길 택했다. 나란히 앞을 본 채로 시간을 죽였다. 여름에 그딴 식으로 헤어져서 겨울에야 만났다. 그간 서로의 일상에서 밀려나 있었으니,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소식들이 한 아름일 것이다.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함을 알면서도, 우리 둘은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침묵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또 한 번 시야에 들어온 이지훈의 쓰레빠를 본 순간에야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너 학교는.”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12월이긴 했지만, 강영수를 봐도 그렇고 일반 대학교들은 아직 종강 시즌이 아니었다. 일반 대학교와 다른 커리큘럼을 가진 학교에 다니긴 한대도 기숙사에 살고 있는 이지훈이 이렇게 편한 차림으로 태안에 있는 것부터가 의아했다.
힐긋 나를 돌아본 이지훈은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목뒤를 만지작대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이유는 곧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
“나 학교 관뒀어.”
“뭐?”
순간 잠이 깰 정도로 놀랐다. 학교를 관뒀다니, 아무리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대도 이 정도의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폭탄선언을 던진 것치고 이지훈은 태연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한 걸 텐데, 그게 어떤 일이든 놈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쓰레빠 뒤축으로 바닥을 툭툭 찬 놈이 대수롭잖게 설명을 덧붙였다.
“좀 됐는데? 두 달 전에 자퇴 신청서 내고 태안에 내려와 있었어.”
“…….”
“아, 나 수능도 봤다. 공부 별로 안 하고 시험장 들어가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문제 보니 생각은 나더라. 그래서인지 결과도 괜찮은 편이고. 확실히 작년 국어가 좆같긴 했나 봐.”
내가 모르고 있던 놈의 정보가 쏟아졌다. 나는 장대비 같은 소식들에 놀란 티를 내는 것을 관두고, 뒤늦게나마 표정을 관리했다. 여전히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보지 못하는 동안 이지훈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야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이지훈의 말은 솔직했다. 일상을 나누지 못한 대가로 우리는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있었을 수많은 사건의 중요도를 선별해서 내놓게 됐다. 그건 생각보다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이지훈은 고등학교 내내 공군사관학교에 가는 걸 목표로 하고 공부했다. 하나하나 세지도 못할 노력을 꾸준히 하며, 그 목표에 모든 걸 맞췄다. 그렇게 이룬 결과물을 제 손으로 그만두고 나오기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내가 모르는 이지훈의 밤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마음이 잡혔다. 나는 이지훈의 옆얼굴에 시선을 둔 채로 손을 뻗었다. 내 손이 어깨에 닿은 순간 이지훈의 몸이 움칫 놀란 게 느껴졌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손을 떼는 대신, 천천히 날 돌아보는 놈과 눈을 맞췄다.
“…고생했다.”
“…….”
“힘들었겠네. 고민도 많았을 거고.”
등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고는 손을 뗐다. 이지훈은 여전히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놈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질문했다.
“앞으로는 뭐 하고 싶은데?”
이지훈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대도 놈이 헤쳐갈 수많은 여정에 늘 함께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뒤에서나마 따라가기 위해서.
말로 꺼내지 않았는데도, 이지훈은 내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눈을 맞춘 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그 미래에 포함되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놈의 얼굴에 비 온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미소가 아주 천천히 피었다. 가로등 빛 위로, 인디언 보조개가 노랗게 번지듯 떠올랐다.
“…비행.”
공군사관학교를 자퇴하고 나온 놈이 하기에는 이상한 말일지 몰라도, 놈의 낭만을 기억하고 있던 내게는 설득력 있는 문장이었다. 그래, 이지훈이 언젠가 한 말처럼 학교는 놈의 목표일 뿐 꿈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결정을 하든 네 결정이면 믿고 응원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항상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정작 말로 해준 적은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별함이란 말을 되새기며, 내게 이만큼을 해주는 놈에게 나도 이쯤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스스로 설득했다. 그래서인지 늘 망설이던 이전과는 달리 수월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넌 잘할 거야. 잘될 거고.”
날 따라 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훈이 다짐하듯 말했다.
“어. 잘할게.”
어쩌면 그 결정은 이지훈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지훈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 닿아 있으니까. 마치 나의 불행을 제 불행으로 여기는 이지훈이 오늘 보여준 행위처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달아나던 나는 우리가 함께 올라선 줄이 생각보다 질기고 튼튼하다는 사실만 깨닫고는 다시 중심을 잡았다. 내가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휘청대던 줄이 드디어 출렁임을 멈추고 잔잔해졌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대신 앞에 있는 이지훈에게 집중했다. 이 상태가 부디 앞으로도 쭉 지속되길 바랐다.
* * *
할아버지는 수술 후 삼 주가 지난 뒤 퇴원했다. 병원에서는 입원하며 경과를 좀 더 지켜보자고 했으나, 단호하게 퇴원 후 통원 치료를 주장하는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그 나이대치고 정정한 할아버지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칭찬하듯 말한 게 그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잠깐 마비되었던 왼쪽 얼굴의 근육도 얼추 다 돌아왔을 때였다. 그래도 물리치료도 자주 받으러 오고 정기적으로 검진도 꼭 받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의사의 말에 할아버지는 마뜩잖은 표정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평상복을 입은 할아버지는 목발과 비슷한 지팡이를 짚은 채로 왼쪽 다리를 조금 끌며 걷긴 했지만, 그래도 무리 없이 걸어 마루에 앉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신 동안 이지훈 아버지가 마루의 일부를 허물어 만들어놓은 경사로를 확인한 그는 바쁜 와중에 별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이지훈 아버지를 나무랐지만, 그래도 그걸 곧잘 이용해 마당과 집을 평소처럼 오갔다.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행인지 몰라도 훈련을 갔던 시점에 이미 대부분의 시험을 치른 후였고, 시험을 치지 않은 수업 하나는 정 교수 거였다. 그는 내가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보내자마자 답장했다. 성적은 걱정하지 말고, 할아버지를 잘 돌보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빼앗긴 핸드폰 때문에 연락을 받지 않는 나 대신 결국 학교로 꽂혔다던 연락이 그에게도 닿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베이스캠프에 함께 있었던 선배들이 학교로 돌아가 전하기라도 했는지 동기들도 연락이 왔다. 언제 돌아올 예정이냐는 메시지에 잘 모르겠다는 답장을 보내며,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마루를 흘끔거렸다. 병실 침대맡에 선 나를 보자마자 학교는 어쩌고 왔냐는 말부터 꺼낸 그답게 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옆에 있는 게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다음 학기에 휴학계를 낼까 고려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화까지 낼 것 같은 분위기라서, 일단은 말을 참고 있었다. 의사는 할아버지가 퇴원해서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를 흥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나는 드러내는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할아버지가 나를 보호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예민하게 굴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것부터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만 했다.
그걸 누군가는 이기심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쓰러진 순간 옆을 지키지 못하는 건 한 번이면 됐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을 자신이 없었다. 그걸 아는지 할아버지를 제외한 사람들은 내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사람 중에는 이지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전 대학 원서를 낸 후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이지훈은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쩌면 고등학생 때보다도 더 자주 보는 것 같았다.
지금도 놈은 내가 씻고 나온 사이 제 방처럼 들어앉아서는 방에 들어선 나를 향해 물었다.
“밥 먹었냐?”
“아니.”
“먹자, 그럼.”
말하는 걸 보니 오늘도 이지훈 아버지가 반찬을 챙겨주신 모양이었다. 보고 있던 만화책을 엎어둔 채로 당장이라도 나가서 밥을 차릴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놈을 따라가려다가 문득 방문 옆에 놓여 있는 상자에 시선이 갔다. 원래는 없던 것이니 이지훈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컸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지훈이 설명했다.
“대문 앞에 놓여 있길래.”
“…나한테 온 거야?”
“받는 사람에 너 적혀 있던데.”
딱히 주문한 물건도 없고, 내게 따로 뭔가를 보낼 사람도 없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자에 바투 다가섰다. 이지훈의 말처럼 ‘받는 사람’ 란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연한 절차처럼 그 위에 적힌 ‘보낸 사람’ 란을 확인하던 나는 멈칫했다.
김수빈.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아래로 굽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상자를 포장했을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 깔끔하게 붙어 있는 테이프를 뜯자, 상자 안에 담겨 있던 물건들이 드러났다. 속옷부터 시작해 내가 자주 입는 생활복, 즐겨 읽던 책과 칫솔까지 잘 정리된 채로 들어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나를 대신해 방을 정리하고 당장 필요할 것 같은 짐을 챙겨 보내준 모양이었다.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하면서도, 면목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따로 생색내며 연락하는 것 대신, 이런 방식으로 뒤에서 묵묵히 나를 챙기는 게 오히려 그다웠다.
“누군데?”
이지훈의 물음을 듣고서야 놈이 아직 방을 나서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나만큼 상자에 가까이 서 있지는 않아도, 방문 앞에 서서 이쪽을 돌아본 놈이 상자 위에 적힌 이름을 읽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리라는 것도. 예상처럼 이지훈의 시선은 반이 열린 상자 겉면에 적힌 선배의 이름에 박혀 있었다.
학교 선배라고 대충 둘러대려 했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검도복 위에 올라와 있는 비타민에 문득 시선이 멎었다. 내가 산 기억이 없는 물품이었다. 그에 붙어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확인한 순간에는 먹먹한 숨이 터졌다.
[쾌유하시길 기도할게. 너도 몸 잘 챙기고.]
내가 따라 하지 못할 방식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메모를 한참 더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책 사이로 조심히 끼워 넣었다. 이지훈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인 놈에게, 나는 느리게나마 답을 내놨다.
“이번 학기에… 나랑 제일 친하게 지냈던 사람.”
선배란 말에 가둬서 감추기에는 과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상자를 다시 닫고는 이지훈에게 돌아섰다. 가만히 선 놈의 어깨를 툭 치며 재촉했다.
“뭐 해. 밥 먹자며.”
“아… 어. 먹어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해 보이던 이지훈이 즉각 등을 돌렸다. 방을 한 번 더 돌아본 나도 이내 그 뒤를 따랐다.
* * *
“나는 진짜… 나느은, 너무 슬퍼.”
강영수는 한 시간째 같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온 놈이 할아버지가 무심하게 건넨 용돈을 받자마자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던 순간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집을 나오면서는 우리의 어깨를 잡고 오늘 한번 죽어보자고 허세를 부리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연말이라서인지 들어가는 곳마다 꽉꽉 찬 술집을 배회하다 못해 태안 시내 가장 구석의 호프집을 찾아온 건 지금에 와서 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끔 뻥튀기를 채워주러 오신 주인아주머니가 신기한 꼴을 본다는 듯 눈물범벅인 강영수의 얼굴을 흘끔거리는 것 외에 놈의 주정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라를 지키는 거 좋다 이거야. 근데 내가 나라를 지키면, 어? 울 엄마랑, 우리 돼지랑, 우기 할아버지는 누가 지키냐구우….”
“우리 아빠는 왜 빼는데.”
“그래. 후니 아저씨두. 어? 나는, 킁, 나느으으은, 그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슬퍼 가지구 잠이 안 와. 진짜 막, 누워서도 울고 그래. 진짜 나는… 아흑, 이 돈 이거 어떻게 쓰냐. 어? 나 이거 저어어얼대 안 써! 아니, 못 써. 이거 내가 백 배, 아니 천 배 뻥튀기해서 돌려 드린다! 어? 할아부지 나 믿으시죠? 우가, 얼른 할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나 믿으라고 전해죠. 빨리! 나 급해. 모레면 입대잖아, 씨바알! 머리도 존나 짧게, 킁, 깎아야 한다고! 민지가 나 머리 빨이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민지는… 민지는 어디서 뭐 할까? 나를 생각이나 할까? 내가 군대 간다고 하면 잘 다녀오라고 말해줄까? 우리 싸가지 없는 후나,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꼬라보지 말고 아가리 털어 봐. 응?”
그 와중에도 평소처럼 이지훈이 짜증 낼 만한 짓만 골라 하는 걸 보니 완전히 맛 간 건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말을 저렇게 수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꼭 메들리 같은 주정이었다. 저러다 강영수의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던 이지훈이 더는 참지 못하고 뻥튀기를 강영수에게 던져대고, 그걸 받아먹은 강영수가 울면서 또 주정을 시작하는 패턴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밖을 흘끔 확인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강영수의 주정이 또 한 바퀴를 돌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다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웬일로 강영수의 얼굴에 뻥튀기를 던져대지 않은 이지훈이 갸웃하며 물었다.
“지금 찾는 민지가 내가 아는 그 선사시대 민지냐?”
“…그런 것 같은데.”
강영수가 일주일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의 이름이 민지가 아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는 내가 자신 없게나마 대꾸하자마자, 이지훈이 턱을 꽉 물었다. 뻥튀기가 강속구처럼 휘둘러졌다.
“민지도 지금쯤 자고 있겠지, 이 씨발놈아! 라디오도 아니고 같은 소리를 천 번째 처하고 있어.”
“어어엉, 민지야… 후니 씨발놈이 나 때려… 같이 욕해줘어어….”
이지훈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돌아봤다. 어떻게 할까?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카운터를 눈짓했다. 오가는 시선 속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바깥쪽에 앉아 있던 이지훈이 계산하러 카운터에 튀어나간 사이, 나는 강영수를 일으켰다.
“우와아아아아아! 우가, 나 난다. 비행기다, 비행기!”
헛소리하며 버둥대는 강영수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놈을 부축해 카운터까지 걸을 수는 있었다. 카드를 건네받는 중이던 이지훈이 허공에 뜬 강영수의 팔을 매몰차게 쳐냈다. 팔을 감싸 안은 강영수가 또 울기 시작했다. 어어어엉, 존나 아퍼. 씨발 새끼. 강영수가 징징대는 틈을 타서 팔 하나를 마저 들쳐멘 이지훈이 유리문을 어깨로 밀며 앞장섰다.
택시를 타서야 강영수가 간신히 진정했다. 택시를 기다리던 이지훈이 목말을 태워달라며 징징대는 놈을 더는 참지 못하고 머리에 꿀밤을 먹인 게 뒤늦게 효과를 본 것 같기도 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놈을 지탱하기 위해 양쪽에 앉아 있던 우리를 차례대로 돌아본 강영수는 이내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팔을 하나씩 끌어 팔짱을 꼈다. 이지훈의 어깨와 내 어깨에 번갈아 볼을 비벼대는 놈은 실실대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나사가 풀린 얼굴인 것치고는 팔을 빼지 못하게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셌다.
“그래두… 나 입대한다고 너네들이 화해한 거 보니까 쪼끔 감동이긴 해.”
따지자면 그런 건 아니었으나 이지훈도, 나도 고쳐주지 않았다. 잠깐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의 일 이후 다시 예전처럼 이지훈과 지내고 있지만, 화해했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애매했다. 이지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 진짜, 좀 그랬다. 어? 나는 그래두, 어디서 뭘 하고 살든 너네 이길 친구들 없다고 생각하구… 진짜 평생 갈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서 남한테 한 번 할 연락 너네한테는 두 번 하구, 남한테 두 번 할 연락 너네한테는 네 번 하구 그러는데. 너넨 그거 좀 싸웠다구 단톡방도 안 보구. 나만 얘기하구, 또 씹히구….”
“…….”
“…….”
“야, 솔직히, 싸울 수는 있어. 싸울 수는 있는데… 그 후가 중요한 거지. 이야기하고 풀어야지, 그렇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구는 건 쫌 그래. 우리가 보통 사이냐? 어? 욱이 할아부지 생일 누가 또 알어. 이지훈 아저씨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홍콩 영화인 거 누가 또 알어? 어? 우리 엄마 요새 갱년기 와서 힘들어하는 거 너네 말구 누가 또 아냐구우.”
“…….”
“…….”
“어렸을 때부터 고추 보고, 고추잠자리도 같이 잡고 그랬던 놈들끼리 의리도 없이, 진짜… 다시는 그러지 마. 응? 이번엔 형 말 들어라. 아랐지? 형 잠깐 없다구 또 싸우고 그르믄 안 돼! 휴가 나오면 물어본다! 나 진짜… 존나 화낼 거다, 진짜!”
우리의 반응이 어딘가 걸쩍지근한 것까지는 신경 쓸 수 없는 정신의 강영수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만도 열심이었다. 이지훈과 내가 연락하지 않았던 시간 동안 꽤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잡힌 팔을 어떻게든 빼내려 움찔대던 걸 멈추고 강영수의 볼에 묻은 강냉이 껍질이나 떼어줬다. 헤 웃은 놈이 힘이라도 얻은 것처럼 꼬물꼬물 손을 움직였다. 나는 순간 손끝에서 찌릿 인 정전기에 움찔했다. 강영수의 손 아래로 이지훈의 검지와 내 약지가 맞닿아 있었다.
“아… 좀.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적당히 해라.”
뭔 짓을 하려는지 알고 손을 빼내려 했지만, 술에 취한 강영수는 내가 알던 것보다 힘을 잘 썼다. 남자 셋이 앉은 택시 뒷좌석이 몸을 피하기에는 극히 좁은 공간이라는 점도 놈의 억지스러운 행위에 힘을 실었다. 진작 강영수를 떼어놓고도 남았을 이지훈은 웬일로 가만히 있었다. 눈이 마주친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맞춰주는 게 더 빨리 끝난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숨을 쉰 나도 손을 움찔대길 멈췄다. 강영수는 기어코 우리의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어릴 적 소꿉놀이를 할 때나 하던 것처럼 유치한 방식으로. 우리를 번갈아 돌아본 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슬슬 잠이 오는지 눈이 일 초에 다섯 번씩은 깜빡이고, 문장 사이 사이에 하품이 끼어드는 걸 보니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듯해 다행이긴 했다.
“자… 이 자리에서 손 걸고 약속해. 다시는 싸우지 않기로.”
강영수가 말하다 말고 또 한 번 하품을 쩍 했다. 눈은 벌써 반쯤 감겨 있었다. 손을 붙잡고 있던 힘도 느슨해졌다.
“아, 아니다. 약속은 약하니까 맹세… 와, 얘들아… 나 눈이, 눈이 안 떠진다.”
“…….”
“나 쪼끔만 잘 테니까 약속… 아니, 맹세하고 있어… 알았지.”
강영수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를 포기하고는 뒤에 고개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창틀에 팔 한쪽을 올린 채로 강영수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하던 이지훈의 시선이 처음으로 날 향했다. 취한 강영수의 정신을 깨울 요량으로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이지훈의 까만 머리를 하늘하늘 흐트러뜨렸다. 더는 지켜야 할 두발 규정이 없는 탓인지, 놈은 그새 머리가 꽤 길어 있었다. 앞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콧대 옆의 눈까지도 가려질 듯 말 듯 했다. 만취한 강영수에게 나는 건지, 그래도 술을 같이 먹긴 했던 우리에게서 나는 건지 모를 알코올 향이 훅 불어온 바람과 함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나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거둬 강영수의 손 아래에서 어색하게 닿아 있는 우리의 손을 응시했다.
다시는 싸우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강릉에서처럼 참지 못하고 친구의 경계를 넘지만 않는다면. 내가 조심하면 될 일이다.
그새 입을 벌리고 잠든 강영수가 더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참을 연습이라도 하듯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려 봤다.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
“…….”
강영수의 머리가 내 어깨로 툭 떨어진 틈을 타 겹쳐 있던 손을 뒤로 물렸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이지훈은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맹세한다는 말조차.
강영수를 방에 눕혀놓고 나왔다. 강영수 집에 다녀올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고도 꼬불꼬불한 골목을 나란히 서서 걸었다. 늘 헤어지곤 하던 갈림길이 가까워질 때쯤 이지훈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캔맥 한 잔 더 하고 갈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놈은 벌써 바다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린 채였다. 최근에 바다 옆 산책로를 만드는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다더니, 결국 만들기로 정리가 된 건지 공사 현장처럼 보이는 곳 옆에 처음 보는 편의점이 서 있었다. 불이 꺼진 강영수네 슈퍼를 확인하고 온 참이니 선택권이라면 저곳밖에 없긴 했다.
그렇게 묻는 이지훈은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 또한 놈의 눈에 그래 보일 거였다. 강영수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바빠 술은 뒷전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영수 그 새끼 지금은 좀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군대 빨리 다녀오기로 한 거 잘한 거야.”
“왜.”
“빨리 취직해서 돈 벌어야 이모 편의점이라도 하나 차려줄 거 아냐. 이거 사업 정리되면 관광객들 점점 많아질 텐데 편의점이랑 슈퍼 있으면 둘 중 어딜 가겠냐, 상식적으로.”
어째 술 사러 가는 편의점을 살펴보는 것치고는 자세히도 뜯어본다 싶더니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나 싶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는 이지훈에게 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딸랑.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카운터에 선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닿아왔다. 아직은 사업이 진행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늦은 밤이어서인지 편의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담배 진열대에 기대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우리를 번갈아 힐끔대는 아르바이트생을 본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은 들어서자마자 맥주가 늘어선 진열대로 직행했다. 알아서 골라올 테니 굳이 신경을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사기에 지금만큼 적기가 없었다. 성인이고, 딱히 뭐라 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도 친구 어머님 가게에서 담배나 술을 사는 건 여전히 어색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대도 지금이 기회 같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내가 말한 담배를 한 번에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비슷한 패키지 앞에서 허둥대는 걸 보니 일이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요?”
“아, 그 옆에… 1미리 말고 3미리요.”
“그럼 이거… 아, 죄송해요. 제가 일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괜찮습니다. 그러면 저 그냥 그거 주세요. 들고 계신 거.”
“아… 찾던 거 아니신 거 같은데, 정말 괜찮으세요? 제가 한 번 더 볼게요. 세 번째 칸 맞죠?”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밀기까지 했는데도, 아르바이트생은 그걸 건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담배 진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뭔데?”
맥주캔을 품에 안은 이지훈이 등장해 물었다. 나와 아르바이트생을 번갈아 보던 이지훈의 표정이 묘해졌다. 거의 동시에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어, 어… 지훈 오빠 맞죠?”
눈치로 보니 둘이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맥주를 계산대 위로 내려놓은 이지훈이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것만 봐도 그랬다.
“너 여기서 일해? 이 주위에 안 살잖아.”
“어, 네. 알바 자리가 없어 가지구… 그나저나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넌 똑같다.”
“오빠도요. 와, 순간 진짜 깜짝 놀랐어요.”
오랜만에 봤다고는 해도 안부를 나누는 모습이 퍽 편해 보였다. 대략적인 인사를 마친 둘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이지훈이 나에게 아르바이트생을 눈짓했다. 누구인지 설명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영은이 중학교 친구.”
아…
뒤늦게나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당황한 것 같던 아르바이트생도 인사를 돌려줬다. 나를 힐끔 보더니 이지훈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오빠. 저 죄송한데, 담배 좀 찾아주시면 안 돼요?”
“나 담배 안 피우는데.”
“아… 그래요? 오빠 친구분이 찾으시는데, 제가 너무 못 찾아서 민망해서 여쭤봤어요.”
“그랬어?”
아르바이트생과 대화를 나누던 이지훈의 질문이 갑자기 내게로 방향을 틀었다.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묻는 놈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 앞에서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피워 봤다는 말을 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잠깐 대답을 망설이는 나를 본 것만으로도 이지훈이 답을 알아챈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계산대로 다가선 놈이 물건 내려놓는 부분을 접듯이 해 위로 올렸다. 순식간에 아르바이트생의 옆에 선 놈이 날 마주 봤다.
“너 몇 미리 피우는데.”
“…삼 미리.”
뒤를 돌아 진열대를 잠깐 살펴보던 이지훈이 이내 담뱃갑 하나를 집어서 내게 흔들어 보였다. 이거? 종류가 뭔지도 말 안 했는데 용케 한 번에 찾아낸 놈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얼떨떨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카운터로 넘어온 놈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건네며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장난스럽게 중얼대기도 했다.
“하여간, 까져 가지고는.”
나오기 전, 아르바이트생이 이지훈을 붙잡았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흘긋 내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옆에 내가 있으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봉투를 들고 먼저 빠져나왔다. 눈이 마주친 이지훈에게는 먼저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겠다는 말도 덧붙여줬다.
앞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면 상가들이 더 들어올지 몰라도, 지금은 편의점뿐이었다. 휑하게까지 느껴지는 주위를 훑던 나는 결국 바닷가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쯤 빨았을 때 이지훈이 나타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놈이 앞에 서서는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내가 들고 있는 담뱃갑에 꽂힌 시선을 보자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안 피운다며.”
“어. 근데 네가 피우길래.”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장과 함께, 놈이 내가 물고 있는 담배를 턱짓했다. 뻔뻔하다면 뻔뻔한 태도였다. 뭐라 말씨름하기도 웃긴 주제다 싶어 그냥 담뱃갑을 통째로 건넸다. 담뱃갑 뒤를 잡고는 제 손바닥 위에 툭툭 친 이지훈이 하나를 빼 입에 물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로 날 보는 놈이 바라는 게 뻔하다 싶어 라이터를 던져줬다. 내가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자마자 헛웃음을 치던 놈은 바람이 불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서서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타닥, 하는 그 흔한 소음도 없이 라이터가 타올랐다. 이지훈이 문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는 게 보였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켜며 시선을 돌렸다. 편의점 간판에서 나오는 형광 빛을 확인한 순간 방금 보았던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눈을 슬쩍 든 이지훈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뺐다. 그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치고는 연기를 뿜는 게 심히 자연스러웠다.
그래 놓고 누가 누구보고 까졌다는 건지.
“할 얘기가 많은 사이는 아니니까?”
성의 없고 불량한 대꾸를 한 놈이 일순간 행위를 멈추더니 웃었다. 막 무언가가 생각난 표정이었다.
“내가 아까 영은이 친구라 했었잖아.”
“어.”
“이제 영은이랑 친구 아닌가 봐.”
“…너한테 그렇게 말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 번호 물어보더라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을 줄 예측했다는 것처럼 웃던 이지훈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때마침 골목 안으로 휘몰아치듯 들어온 바람에 놈의 앞머리가 짧게 흔들렸다.
“영은이랑 지금도 친구면 걔가 너 좋아했던 것도 알 테니까 번호를 물어보진 않았을 거 아냐. 안 그래?”
얼핏 들었을 때는 질문 같지만, 딱히 내 대답이 필요해서 물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지훈의 말투는 이미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관심을 표하는 건 처음 겪어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이지훈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어색했다. 목뒤를 괜히 주물럭대며 이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난 아니고 진짜야?”
이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날 돌아봤다.
“왜. 장난 같냐?”
“…….”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든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놈이 내 옆에 와 섰다. 팔이 닿을 만한 위치에 선 놈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지 않는 한 방금처럼 가까이에서 마주 볼 필요가 없는 자세라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됐어.”
이지훈은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전해주기까지 하길래 잘되라고 밀어주려는 건가 싶어 순간 겁먹었는데, 그럴 생각까진 없는 듯했다. 한동안 둘 다 앞을 본 채로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
“야.”
이지훈이 다시 말을 건 건 내가 들고 있는 담배가 꽤 짧아진 후였다.
“요새 누구 만나?”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시선이 곧장 맞닿았다. 이지훈은 고요한 낯이었다. 담배마저 아래로 내린 채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놈과 시선을 나눴다. 만난다는 말이 가진 수많은 함의 중에, 놈이 방금 말한 건 보지 못한 사이 누군가를 사귀었는지를 묻는 것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지훈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담배를 다시 물었다. 이전보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이어 묻기도 했다.
“만났던 적도 없고?”
앞으로 이지훈과 이런 대화를 종종 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때마다 지금처럼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영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밤이고, 술을 먹었고, 담배까지 피우고 있으니 눈을 피하듯 뭉갤 수 있는 것들이 많았지만 대낮에 서로의 표정이 훤히 드러나는 곳에서 놈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담뱃재를 허공에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다 지난 얘기 해 봤자 뭐 해.”
“…….”
“헤어진 순간부터 남인 건데, 그 사람한테 예의도 아닌 것 같고.”
내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놈과 할 마음이 없다는 걸 넌지시라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지훈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수긍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의미 없지.”
비겁하게도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옆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지훈은 발밑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낯을 잠깐 지켜보다 때마침 고개를 든 놈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보던 놈이 이윽고 입술을 달싹댔다.
“나 이번에 지원한 대학교, 일부러 조종사 양성 연계 과정이 있는 데로 골랐어.”
다소 뜬금없이 시작된 이야기긴 했지만, 내심 궁금했던지라 잠자코 들었다. 이지훈이 이번에 지원한 학교는 항공 쪽으로 꽤 유명한 학교긴 했지만, 그래도 원서를 넣으러 찾아간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할 정도로 의외의 선택이긴 했다. 놈의 선택이니 뭐라 하진 않겠지만,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내가 듣고 있다는 표를 내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훈이 말을 이었다.
“1학년 말에 학생 선발하고, 2학년부터 연계된 미국 비행학교로 보내서 졸업할 때까지 학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고.”
“…….”
“선발되면 적어도 3년은 미국에 있을 거야.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고. 이야기 들어보니 흔치는 않아도, 바로 현지 항공사에 취업해서 일하는 케이스도 있긴 한가 봐.”
말을 마친 이지훈이 엄지를 들어 이마를 슬쩍 문질렀다. 처음으로 놈이 착잡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도. 그 이유가 뭔지를 생각해보던 나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가면 안 들어오려고?”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목부터 가다듬었다. 이지훈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지나치게 놀란 티를 내기부터 하는 몸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지훈은 내가 표정을 정비한 후 다시 고개를 바로 할 때까지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흘리듯 털어놓았다.
“모르겠어. 처음에는 그러려 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들도 있고 그래서….”
제가 하려는 일과 관련해서는 늘 망설임이 없던 놈이 그렇게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인 건 처음이라 놀랐다. 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평생 가본 적 없는 곳에 가서 대학을 다니고, 훈련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누군가에겐 망설여질 수도 있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겠지만, 내가 아는 이지훈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놈을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 건 아마도 다른 요인일 가능성이 컸다.
“아버님 혼자 계시는 게 걱정돼서 그래?”
이지훈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애매한 반응이긴 했지만, 부정하진 않았으니 아예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놈을 안심시킬 말을 생각해보다 그중 하나를 꺼냈다.
“너 없어도 내가 잘 챙길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준비 잘해서-”
“너.”
“…뭐?”
“마음에 걸리는 거 너라고.”
갑작스러운 말을 해서 놀라게 한 건 자신이면서, 이지훈은 내 표정을 보고는 외려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아래로 버려 발끝으로 질근질근 밟은 놈이 내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위에 있던 가로등 불빛이 이지훈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이지훈이 짧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목구비를 반 넘게 가린 손가락 사이로 놈의 말소리가 흐르듯 새어 나왔다.
“내가 세상에서 친구라 생각하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처음부터 너무 쉬웠고, 다른 한 명은….”
손을 아래로 내린 이지훈이 날 봤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한 가지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 그게 무엇인지조차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너무 어려워.”
이지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비낀 놈의 시선은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 꽂혀 있었다.
“가까이 있어도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
“멀리 있으면 오죽하겠냐. 그렇다고 네가 강영수처럼 무슨 일 있을 때마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지훈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지난 6개월간 우리가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놈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을 알 수밖에 없었다. 먼바다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이렇게 골목에 서기 한참 전부터도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났을 파도를 생각한 순간에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지훈의 앞에 설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던 파도를 생각했다. 언젠가는 바닥이 무너질 것처럼 큰 소리를 내며 몰려오다가도 어떤 날에는 허무한 거품만 남기고 모두 쓸어가 버리듯 사라지던 것들.
그렇지만 파도는 바다가 아님을 안다. 어떤 파도가 친대도 그 가장 아래에는 이지훈을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있다. 마음에 이는 파도 소리를 들킬까 봐 무서워 내가 늘 이곳에서 바다처럼 서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조차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말할게.”
이지훈의 놀란 눈을 마주한 채로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네 말처럼, 나 그런 거 잘 못 해. 힘들다고 먼저 말하고, 도와달라고 말 꺼내고 그런 거.”
“…….”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떠올려 봤다.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그 5년은 살아오며 가장 의미 있던 순간이었다. 종류는 달라도 아끼는 마음만은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이지훈 앞에서 나는 가지고 있던 마음 중 가장 작은 조각을 내보일 용기를 냈다.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침전물을 끌어 올려 그 위를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다른 더러운 것으로 착각할 일이 없게끔 반짝반짝해질 때까지 닦아서 놈에게 내놓는다.
“너한테는 하려고 노력할게.”
이지훈한테만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새끼로 남고 싶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하고….”
“…….”
“도와달라고 할게. 너 미리 사서 걱정 안 해도 되게.”
이건 내가 이지훈에게 건넬 수 있는 마음 중 가장 작은 거였다. 유일하게 줄 수 있는 거였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했다. 놈이 부디 내가 지금 내미는 이 작고 예쁜 마음의 조각을 우정이라고 여겨주길.
가만히 나를 보던 이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맹세?”
유일하게 접히지 않은 길쭉한 새끼손가락을 확인한 순간에는 헛웃음이 났다. 강영수나 할 법한 짓이었고, 이미 한 시간 전 택시에서 취한 놈에게 이끌려 할 뻔한 일이기도 했다. 이지훈은 웃는 나를 보고도 손을 거두지 않고 재촉하듯 손을 좀 더 내밀었다. 능청맞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놈을 이기지 못해 손을 들었다.
“남자끼리 간지럽게 무슨….”
힘을 줘 이지훈의 새끼손가락을 굽혔다. 주먹을 꼭 쥐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 됐다. 제 손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물었다.
“내가 남자야?”
“…그럼 여자냐?”
어처구니없어 되묻자마자 놈과 눈이 마주쳤다. 헛소리를 던진 건 저면서, 이지훈이 딴청이라도 피우듯 내 시선을 피했다. 놈을 무시하고는 같은 형태로 접은 내 손을 이지훈의 손 가까이 가져갔다. 주먹과 주먹이 가볍게 부딪쳤다.
택시에서부터 연습했던 말을 드디어 할 수 있었다.
“…맹세.”
작게 말했지만 가까이 붙어 있는 이지훈은 들었을 거였다. 예상처럼 이지훈은 피식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주먹이 아까보다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내 주먹과 부딪쳤다.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놈이 입속말하듯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일렁이는 파도가 없는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맹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