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5)

3x5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내가 잠든 동안 집에서 소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지부터 생각했다. 예상처럼 이지훈이 머리맡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놈은 벽에 대고 있던 손부터 뗐다. 침대 위 벽을 두드렸을 손가락의 구부린 마디들이 천천히 펴지는 게 보였다.

“씻고 나와서 밥 먹어.”

그 말을 끝으로 놈이 자리를 떴다. 반쯤 열린 침실 문을 통해 부엌으로 걸어가는 등이 보였다. 나는 얼굴을 더듬대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에 걸린 시계는 7시 30분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 들어왔지만, 오늘도 제시간에 출근해야 했다. 이지훈도 그걸 알기에 굳이 이 시간에 나를 깨웠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밥을 하겠다고 부엌에서 저러고 있는 것일 테고.

‘어떤 약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이지훈도 나도 그날 일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구했다. 나를 욕실에 둔 채 돌아서는 놈의 얼굴을 보며 어쩌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며 놈이 집에서 나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지훈은 그러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밤늦게 돌아온 놈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평소처럼 툭툭 말도 잘 걸었고, 아침에는 나를 깨워 밥을 먹이고 밤에는 내가 일에서 돌아오는 걸 보고서야 잠드는 것 같았다. 겉으로만 보자면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도, 이지훈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꺼낸 순간 또다시 맞이하게 될 충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침묵하길 택했을 뿐.

내가 일어날 때까지 침대 머리맡에 꽤 오래 서 있던 것 같았던 이지훈의 자세를 떠올렸다. 원래였다면 어깨를 흔들어 깨웠겠지만, 이지훈은 그 쉬운 방법 대신 내가 일어날 때까지 벽을 두드리길 택했다. 오늘이 되어서야 확신했다. 그날 이후 이지훈은 어떤 식으로든 나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조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신 섹스하고 나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야.’

내게는 최선이었던 협박이 먹혀든 걸까. 키스부터 시작해 섹스까지 해치울 기세이던 놈을 막기 위해 뱉은 말은 결과적으로 놈에게 그 어떤 스킨십을 한대도 원하던 결론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 같았다.

내가 씻기 위해 욕실로 가는 동안, 발소리를 들었을 거면서도 못 들은 척 움직이기 바쁜 등을 보며 생각했다.

이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쩌면 이건 앞으로도 한 달은 같은 집에서 지내야 할 우리의 최선일지도 모르겠다고.

계란말이, 메추리알 장조림, 오징어채, 배추김치. 딱 한 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만 잘 덜어놓은 반찬들 사이로 김이 올라오는 된장찌개가 놓였다. 사둔 기억도 없는 주방 장갑을 벗으며 건너편에 앉는 이지훈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늦게 들어와 기절한 듯 자고, 알림이 울리자마자 씻고 나가기 바쁜 내가 아침을 거르는 건 습관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번 주 내내 일어나자마자 보게 된 밥상이 낯선 이유이기도 했다.

“매번 이렇게 차리는 거 귀찮지 않냐?”

망설이다 꺼낸 질문에 찌개를 한술 뜨던 이지훈의 시선이 돌아왔다. 슬쩍 인상을 찌푸린 놈이 반박했다.

“이것도 귀찮으면 일은 어떻게 하고 사냐? 할 만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괜히 아침부터 일어나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번갈아 하는 거면 몰라도, 매일 너만 차리잖아. 나는 아침 안 먹어도 상관없어. 너도 굳이 나 챙기지 말고 편한 시간에-”

“나 원래 오프인 날 이 시간에 일어나. 그리고 시간 남는 사람이 하는 거지, 그게 왜. 나 먹는 김에 1인분 더하는 거라 어렵지도 않고. 어차피 아빠가 보낸 반찬도 해치울 겸 하는 거야. 너랑 같이 먹으라고 많이도 보냈더라.”

끝끝내 에어프라이어를 보내고 만 아버님이 함께 동봉하셨던 반찬까지 언급한 놈은 내가 더 반박할 여지마저 없앴다. 입을 다물고 수저를 드는 나를 보고서야 이지훈이 시선을 거둬갔다. 한동안 식기가 달그락대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말들도 없이 식사가 이어졌다.

“너 잠꼬대하더라.”

침묵을 깬 건 이지훈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얼떨떨한 대꾸가 튀어나갔다.

“…내가?”

“어. 방 밖에서 일어나라고 말했는데,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안 나오길래 들어가 봤더니 자고 있더라고.”

“아… 그랬냐.”

“어. 일부러 들어간 거 아니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일주일 전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해명을 하는 이지훈의 표정은 덤덤했다. 내 방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이 상황에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잠시 그런 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려준 놈의 성의를 생각해서 밥 한 공기는 비우려 했지만, 반 이상은 먹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침에는 작전 전에 마지막으로 세부 사항을 확인하기로 한 큰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찍 출근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간을 확인한 내가 수저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물었다.

“오늘도 늦냐?”

큰 작전을 앞두고 부서 전체가 바빴다. 나부터가 지난주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새벽 한 시 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늘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건 아니었지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꼭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던 놈이니 오늘도 늦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달려들어야 할 정도로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숙직실은 일주일 내내 빈 적이 없었다. 내가 몇 걸음만 옮기면 잘 수 있는 숙직실을 두고 꼬박꼬박 집에 온 건 이지훈이 기다릴 걸 알아서였다. 정확히는 ‘버린다’라고 표현한 놈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고.

오늘도 이지훈은 나를 기다릴까. 내가 매번 한 공기를 미처 못 비우는 걸 보고서도 늘 밥공기를 꽉 채워 건네는 놈이라면 그럴 것도 같았다. 나는 놈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많이 늦을 것 같아. 잘하면 못 들어올지도 모르고.”

그러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괜한 말인 것 같아 참았다.

인상을 슬쩍 찌푸린 이지훈은 뭐라도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입을 굳게 일자로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표정으로도 이지훈은 꽤 멀쩡하게 말을 이을 줄 알았다.

“알았어. 영수 새끼는 네가 알아서 달래라.”

“강영수?”

“네가 오늘 같이 놀자고 했다며. 수요일부터 퐁듀, 퐁듀 지랄하길래 스위스로 보내버리려다 참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리 둘만 산다며 떼를 쓰던 강영수를 달랠 겸 말해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도 내가 참가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그에 대해 미리 언질조차 해놓지 않고 강영수에게 전해 듣게 한 건 내 잘못이었다. 뒤늦게 입술을 말아 무는 나를 본 이지훈은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더 얹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내가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사과부터 했다.

“미안. 오지 말라고 연락할게.”

“됐어. 그 새끼 벌써 기계도 샀대. 이 김에 부숴버려야지.”

이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는데도 괜히 그 등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죄지은 기분이 드는 건, 아무래도 그날 일이 있어서일까.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싱크대로 다가가려다 말고 뒤돈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 주 들어 가장 긴 눈 맞춤이었다. 이지훈은 아까처럼 무언가를 참듯 입을 다물었다가, 도저히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은 것처럼 말을 꺼냈다.

“오늘 지나면 바쁜 일은 좀 끝나냐?”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답할 수는 없었다. 오늘 밤에 있을 작전을 생각했다. 마약 파티 주최자로 꼽히는 김명림 감독을 비롯해 파티 참석자로 알려진 연예인 중 거물급까지도 줄줄이 엮일 수 있는 사건인 탓에, 팀원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오늘 밤 실시될 작전이 계획대로 잘 풀린대도 한동안은 안팎으로 시끄러울 것이다.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연예부 기자 몇몇이 선배들한테 연락하는 것만 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본 이지훈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그릇들 위로 물을 튼 놈은 싱크대 양옆을 짚은 채로 잠깐 침묵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연 놈의 낮은 목소리가 물소리를 뚫고 다가왔다.

“병원에서 연락 왔어. 검사 일정 잡으려고 문자도 보냈고 전화도 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이 연락처가 맞냐고 물어보더라.”

“…….”

“바쁜 거 알겠어. 알겠는데, 오전만이라도 시간 내서 다녀오면 안 되냐? 그러면 더는 잔소리 안 할게.”

일주일에 서너 번 코피를 흘리면서도 그냥 넘기고 마는 나와 달리 이지훈은 그러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타인의 몸 상태에 이렇게 신경을 기울이는 건 놈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특별한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애정의 유통기한을 생각하며,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바쁜 일만 지나면….”

“…….”

“바로 가서 받을게. 지금은 좀 힘들어.”

잠시 멈칫했던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무장갑을 꼈다.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부엌을 나가려다 말고 제자리에 멈췄다. 부엌에서 거실로 나가는 입구에 커피머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언제 샀는지조차 잊고 있던 것이니 이지훈이 그곳에 놔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발소리가 멈춘 걸 눈치챘는지 뒤돈 이지훈이 간단히 설명했다.

“고장 났길래 내놨어. A/S 보내든지, 버리든지 하게.”

이지훈의 집에 있던 커피머신이 떠올랐다. 비행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것 때문인지 그다지 집 안 물건들에 정성을 들이지 않는 놈이 늘 최상급으로 마련하는 유일한 물건이 커피머신이라는 것도.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버려. 내가 새걸로 사 올 테니까.”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던 이지훈은 그러나 긍정하는 것 대신 고개를 돌렸다.

“뭐 하러 그래. 얼마나 있을 줄 알고.”

주어가 없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많았다. 접시를 들어 헹구는 중인 이지훈의 옆모습에 시선이 오래 머무른 이유이기도 했다.

“야.”

“…어?”

“너 핸드폰 울리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린 이지훈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음을 알았다. 주머니에서 꺼내자마자 핸드폰 화면 위로 뜬 반장님의 이름을 확인했다.

“예, 반장님.”

통화하며 지갑과 차 키를 챙긴 나는 집을 나서기 전 부엌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이지훈은 여전히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놈은 나를 돌아보거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이번 주 내내 내가 이렇게 급히 자리를 뜰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반장님과의 통화가 끝났다. 반장님 뒤로 들리던 소음들을 생각했을 때, 이미 팀원들 대다수가 출근을 마친 듯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있긴 했어도, 미리 가 있는 게 좋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경찰서에 도착하는 대로 개인 사무실로 올라오라는 말로 끝맺은 반장님과의 통화를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핸들을 돌리다 말고, 길가의 작은 카페에 시선이 멎은 건 우연이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내 또래의 여자가 카페 앞에 입간판을 내놓고 있었다. 유리 위에 프린트된 글자 중 ‘coffee’란 글자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운전해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시간이 넉넉히 남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결국 핸들을 틀었다. 카페를 향해서였다.

나선 지 20분도 되지 않아 돌아온 집에서 이지훈은 찾을 수 없었다. 물 흐른 흔적조차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싱크대에서 시선을 돌린 나는 닫힌 욕실 문과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듣고서야 놈이 씻고 있음을 깨닫고 자리에 멈췄다. 현관에 잠시 멈춰 있던 나는 발소리를 죽여 부엌을 향해 걸었다. 식탁 위로 커피잔을 내려두고 다시 나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거실 서랍에 있던 포스트잇을 가져왔다. 무슨 말을 적을까 망설였지만, 막상 펜을 든 순간에는 한 문장만이 떠올랐다.

[미안]

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정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심히 문을 닫고 나온 나는 핸드폰을 든 채로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정말 서둘러야 했다.

경찰청에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도착하는 대로 자신을 찾아오라던 반장님은 내가 찾아갈 겨를도 주지 않고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그의 성미를 떠올리면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그가 바쁜 일정 속에서 까마득한 후임을 마중 나올 정도의 실없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경계할 만했다. 특히 그가 지금 앞장서서 나를 데리고 온 개인 사무실은 현장을 중시하고 허례허식에 질색하는 그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찾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것을 입증하듯 끝도 없는 프린트물들만 높게 쌓인 긴 테이블을 지난 그는 닫혀 있던 창문 하나를 열고서야 내게 말을 걸었다.

“밥 먹었냐?”

“예.”

“잘했다. 자, 지 경위. 시간 없으니까 우리 후딱 끝내고 내려가자.”

오랜만에 방문한 주인을 반기듯 하얗게 일어나는 창틀 위 먼지에서 시선을 뗐다. 의자에 앉은 반장님의 몸이 앞으로 돌아왔다. 눈은 흔들림 없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수더분한 인상의 사내는 그러나 눈을 맞춘 순간 그런 이미지조차도 계산된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내가 경찰이 되리라고 다짐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구른 사람이었다. 쌓인 연륜부터가 달랐다.

“너 최정호랑 뭐 있냐?”

그가 들고 있던 프린트물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책상 앞에 서 있던 나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위치였다. 두꺼운 프린트물 위로는 「16-20 태항건설 법률 실사 보고서」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내가 모를 리 없는 자료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내가 그런 답을 할 줄이야 예상했다는 듯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차혁준은?”

그가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프린트물을 헤쳤다. 두꺼운 프린트물 아래 깔려 있던 또 다른 서류가 드러났다. 증인으로서 보호될 거라는 약속하에 마약 파티에 대해 증언하기로 한 배우들의 사진과 말들이 하얀 종이 위에 드러나 있었다. 나는 현시점 가장 큰 증거가 되어주고 있는 현우 소속사의 신인 배우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앳되다고 생각하면서.

“차혁준 데뷔 오 년 차고, 멋모르는 신인들 때나 할 법한 작은 잡지 인터뷰까지 털어 봐도 제 입으로 가족 이야기 한번 꺼낸 적 없는 놈이야. 소속사도 한통속인지 연예부 기자들 떠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그 안에서는 철저히 오프 더 레코드로 취급되던 정보란 소리지.”

“…….”

“배우 차혁준이 최정호 아들이라는 정보, 너한테서 가장 먼저 새어 나왔다는 뜻이야. 알아?”

그의 눈이 날카로이 날 훑었다.

“태항건설 꾸준하게 뒷조사해서 자료 만들어둔 거? 뒤 봐주는 정치인 많아서 쉽사리 엄두를 못 냈을 뿐이지, 네 선배들만 해도 폴더 하나쯤은 만들어둔 곳이니 그럴 수 있다 치자.”

“…….”

“김명림 감독이 주최하는 마약 파티에 차혁준을 비롯한 연예인들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 접하고 뛰어든 거? 믿을 만한 취재원 있으면 가능은 한 일이지. 이것도 패스.”

막대 끝으로 프린트물 위를 쿡쿡 찌르던 행위가 멎었다.

“근데 차혁준이 태항건설 전 사장 최정호의 아들이며, 어쩌면 김명림 감독한테 마약을 대주는 중간 공급책일 수도 있다?”

“…….”

“여기부터는 어딘가 흐름이 수상하지. 안 그래?”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눈이 경고하듯 나를 뚫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내놓는 대답에 따라 오늘 밤 현장에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갈리리라는 걸.

그가 더 말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차혁준이랑 뭐 있냐는 말에 아직 대답 안 한 거 알지.”

“…….”

“두 번 안 묻는다. 똑바로 대답해. 사심 있어?”

간단한 질문이었다. 나는 비슷한 이유로 그에게 소환된 적 있는 선배들을 떠올렸다. 반장님은 그런 문제에서만큼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팀원 중 누구든 조금이라도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사건이라는 판단이 들면 아예 그 사람을 빼버렸다. 그의 칼 같은 태도는 팀 안에서도 종종 화제가 되어, 과거에 동료를 잃은 후임 하나가 마약상에게 달려들었던 것을 막지 못해서 생긴 거라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사실이라면 존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나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어깨의 긴장을 털어내듯 눈꺼풀부터 깜빡였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잔뜩 주고 덤벼 봐야 오히려 역효과를 줄 것을 알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어깨에 힘을 빼고 읊조렸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래서.”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선배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적어도 나처럼 사심이 있다고 바로 인정한 사람은 없었겠지.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런 거짓말을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근데 그걸로 일 그르칠 생각 없습니다.”

“…….”

“그런 태도가 검거에 더 이로우리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요. 제 손으로 망칠 거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마주친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반장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어느 정도는 확신했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차혁준 잡으려면 제가 가야 합니다. 반장님. 보내주십시오.”

“반장님은?”

“잠깐 통화하고 내려오신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 선배가 담배를 들고 지나갔다. 회의는 어차피 반장님이 내려와야 시작될 테니, 그가 오기 전에 피우고 올 모양이었다. 따라갈까 하다가 자리에 멈춰 선 이유는 간단했다.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을 본 순간 그 이유가 이지훈의 연락임을 알았다.

이지훈

오전 9:38

사진 속에서 커피잔을 들어 올린 놈은 장난스레 미소 짓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찍은 사진인지, 사진으로도 머리가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 놈을 본 것만으로도 날뛰던 신경이 잦아들었다. 방금까지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이지훈

나 점심에는 커피랑 샌드위치 먹고 저녁에는 퐁듀 먹어 오전 9:40

이러면 미국인이냐 스위스인이냐 오전 9:41

놈의 메시지가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읽혔다. 피식하고 웃음이 흘렀다. 창을 켜둔 탓에 놈이 보내는 메시지 옆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야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오전 9:42 한국인

마찬가지로 창을 켜뒀는지 내가 보낸 메시지 옆 숫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지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끔 보면 니가 제일 웃겨 오전 9:42

자음들의 연속일 뿐인 문자를 바라보면서 이지훈의 웃는 얼굴부터 그리는 나도 참 답이 없었다. 나는 창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이지훈의 사진을 꾹 누르자 저장하겠냐는 물음이 떴다.

“지 경위, 반장님 내려오셨어.”

“아, 네. 들어가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에 힘을 얻어 저장 버튼을 누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복도를 떠나려다 말고, 창틀에 시선이 멎었다. 비틀린 낙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 위로 조각난 가을 햇살이 내리쬈다. 나는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낙엽은 가을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놓아준 것일까. 바라보는 사람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쩌면 당사자인 둘도 매번 같은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떡하죠. 영화 찍을 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요.”

의자에 앉은 배우는 초조해 보였다. 하얀 밴이 오솔길에 접어들고 점차 주변이 한적해질수록, 커튼을 걷어 바깥을 확인하거나 나나 앞에 앉은 선배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정말 아무 일 없이 잘 끝날 수 있겠죠?”

작전을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했다. 오늘 밤 열릴 마약 파티를 앞두고 김명림 감독 측이 현우네 회사로 직접 연락을 취한 건 시기적절하게 굴러들어온 행운이었다. 소속 신인 배우가 마약으로 위세척까지 받고도 문제 삼지 않은 현우네 소속사 사장이 제 편이라고 확신이라도 한 건지, 김명림 감독은 거침없었다. 무려 소속사 사장을 통해 배우를 마약 파티에 초대한 배경에는 어차피 이 바닥은 제 손바닥 안이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으리라. 동시에 그런 식으로 관계자를 끌어들여, 나중에 어떤 일로 엮이든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수 없게끔 미리 포섭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제 영향력을 과시하며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해온 모양이었다.

사건을 들여다볼수록 심각해지던 선배들이 떠올랐다. 소수의 인원만 출입 가능한 프라이빗 파티는 쉬쉬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다. 어렵게 포섭한 업계 관계자들조차 그 파티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파티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업계의 유명한 감독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기에는 다들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렸다. 오히려 그 사실이 내가 제공한 정보에 힘을 싣기는 했다. 아마 이 마약 파티의 배후에는 폭로한 자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으리라. 최혁준, 태항건설, 그리고 최정호.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바로 눈에 보이시진 않겠지만, 별장 주변에 인력들도 배치될 예정이고 혹시 몰라서 저희 측 인물도 하나 붙이지 않았습니까.”

매니저를 대신해 운전 중이던 하 선배가 룸미러로 뒤를 흘긋 보며 답했다. 그의 눈이 배우에게서 내게로 옮겨왔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확인한 순간에는 웃기도 했다.

“어이, 지 경위. 언제까지 그렇게 들고만 있으려고? 슬슬 써야지. 오 분 뒤엔 도착이야.”

내가 왜 가면을 쥐고 있기만 하는지를 이미 눈치채고 놀리는 투였다.

“…예.”

나는 한숨을 삼키고 가면을 들었다. 더는 미루기 어렵다는 사실은 마지막 이정표를 지나오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이라면 굳이 잘 가지 않을 산속 깊은 골짜기 별장에 숨어 마약이나 하면서 그 와중에 가면이니 뭐니 서구의 무도회를 흉내 내는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내가 쓸 가면은 옆에 앉은 배우가 쓴 하얀색 가면보다는 무난했다. 사선으로 지르듯 오른쪽 얼굴만 가려지도록 설계된 까만 가면이었다. 검은색 비즈가 천 위를 빼곡하게 덮고 있어서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지 않는 한 신원이 크게 들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현우네 소속사 사장은 나를 곧 데뷔할 예정인 신인 배우로 소개했다고 했다. 그들이 입장 패스처럼 파티에 쓰고 오라며 소속사로 미리 보내준 가면은 두 개였고, 그중 얼굴을 더 가릴 수 있는 가면이 이거였다.

가면을 대충 쓴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선배와 이야기하며 긴장을 던 것처럼 보이던 얼굴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뻣뻣이 굳었다. 마치 내가 경찰이며, 그렇기에 지금부터 할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막 깨달은 것처럼.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면 당연히 흩어지겠지만, 일단 괜찮은 곳에 계신지 확인한 후에 따로 움직일 거예요.”

“아….”

“저든 팀원들이든 위험하게 만들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정 힘들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연기요?”

“네. 액션 영화인데, 액션을 하실 필요는 없는 그런 내용으로요. 와이어도 저한테만 달려 있고.”

이 경우는 와이어가 아닌 무전기겠지만. 귓바퀴 안쪽에 붙여둔 작은 무전기를 꺼내어 보여주자 그가 웃었다.

“어쩌죠. 제가 그런 액션 영화 찍으려면 한참은 걸릴 텐데. 그래도 오늘 실전에서 잘 배워가 볼게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푸는 걸 보니 긴장이 한결 풀린 듯했다.

“뭐, 나중에 영화 들어가신다면 나중에 저희 지 경위 같은 캐릭터 하나 만들어서 연기해보셔도 될 것 같고.”

아닌 척 다 듣고 있었는지 하 선배가 능글맞게 끼어들었다. 오는 내내 뻣뻣이 굳어 있던 강우진이 내심 신경 쓰였는지, 이 김에 그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줄 요량인 듯했다.

“제가 보기에는 경위님이 직접 찍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나를 흘끔댄 강우진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행히도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하 선배가 있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돌리는 속도며 태도가 한층 자연스러워진 걸 확인한 나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선 차 밑으로 돌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흘렀다.

“어어, 캐스팅은 안 됩니다. 배우인 척할 수 있는 형사는 몇 없는데, 형사인 척할 수 있는 배우는 많은 걸 생각해보셔야죠.”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아무렴요. 마약수사대의 흔치 않은 인재입니다. 지 경위 없었으면 빠그라졌을 수사들 많죠. 호스트바 잠입 수사했을 때도 우리 지 경위 없었으면….”

“정말요? 호스트바에도 이렇게 잠입하셨었다구요?”

핸들을 요령 좋게 꺾으면서도 하 선배의 눈은 좌우를 기민하게 살폈다. 별조차 뜨지 않은 밤이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까만 길은 헤드라이트에 의존해서만 가기에는 심히 어둡고 위험했다.

다행히 단체채팅방에서 우리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도착지로 표시된 곳에 가까워지는 점이 보였다. 밴 아래에 붙여둔 GPS가 쏘아 보내는 정보이기도 했다. 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차를 미리 대고 있던 팀원들이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으며, 연예인을 태운 밴이 시간을 두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했다. 등장한 차의 등록번호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 번호를 두고 기존에 조사해두었던 정보들과 비교 및 대조해보는 식이었다. 일정 시간을 두고 자동차 등록번호와 그에 해당하는 연예인들의 이름이 번갈아 떴다. 나는 화면을 내렸다.

[291나 2321]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 아래로, 누군가 메시지를 입력하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나는 번호에 시선을 둔 채로 숨을 죽였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이미 알고 있는 번호였다.

[차혁준 도착했습니다.]

예상이 맞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헤드라이트가 비추지 못하는 곳에 최혁준이 있었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 철문에 새겨진 새의 문양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유, 들어가기만 했나요. 선수인 척한다고 여자 손님 무릎 위에 앉기까지-”

문 앞을 지키는 가드들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덩치가 크고 험악했다. 나는 방금 철문 안으로 사람을 들였던 그들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뒤도는 걸 보았다.

“선배. 문 보입니다.”

“어? 어… 오케이.”

하 선배가 돔 라이트를 껐다. 이 또한 가면을 보낸 그들이 요구한 거였다. 매니저는 파티에 함께 참석할 수 없었다. 초대받은 배우들만이 입장할 수 있으며, 그조차 가드들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철문까지의 거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차가 천천히 섰다.

“선욱아. 오늘 눈 온단다.”

앞을 보던 하 선배가 입을 연 것과 동시에, 가드들이 움직였다. 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눈은 번호판에 박혀 있었다. 회사 측으로부터 미리 받아두었던 자동차 등록번호와 비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랜턴에서 나오는 하얀빛이 짙게 선팅 처리가 되어 있는 창을 뚫고도 느껴질 정도로 환했다.

“일기 예보 확인하셨습니까.”

“어. 홍천은 잘 모르겠는데, 서울은 열 시부터는 무조건이라네.”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딱히 눈 올 것 같진 않았는데요.”

“기상청이 틀린 걸 수도 있고. 한두 번인가.”

“그래도 사실이면 빨리 끝내고 가야죠.”

“뭐, 그럼 좋기야 하지. 이번에 회식 장소 내가 잡은 거 알지. 경찰서 근처긴 해도, 할증 붙는 시간대에 도로 상황까지 구리면 집에 또 못 들어간다.”

잠깐 뜸을 들인 후, 가드 중 한 명이 확인을 마쳤다는 뜻으로 다른 가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가드들조차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신분을 확인해야만 입장이 가능하지만, 그 누구도 서로의 신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비밀스러움이 당연한 하나의 절차처럼 느껴지는 곳. 나는 팔을 들어서 내려도 된다는 사인을 하는 그들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초조하게 말아 물던 강우진은 그래도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리듯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나는 확인하듯 물었다.

“손수건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죠?”

직접 투입한 미끼가 있는 만큼, 작전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빠르면 한 시간, 적어도 두 시간 내에는 별장 안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다. 호흡기에 가져다 댄 순간 바로 기절할 수 있는 액을 손수건에 뿌려두어 건넨 건 그 전에 강우진이 마약을 입에 대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를 대비한 마지막 보루였다. 출발하기 전부터 몇 번이고 일러준 사실이라 그런지, 강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이 들어 있을 재킷 안쪽 주머니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때마침 뒤돈 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적들을 앞에 두고도 일기 예보 이야기를 건넬 줄 알던 그는 가드들이 들고 있던 랜턴 불빛이 차에서 돌려진 그 짧은 틈새를 이용해 입을 열었다. 조수석 헤드를 짚는 흉내를 낸 손이 귀를 스치듯 지나가 내 오른쪽 귀 안에 붙어 있는 무전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외이도 안쪽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오는 차가운 물체의 감각이 느껴졌다. 낮고 빠른 목소리가 정보를 속삭이듯 말했다.

“오른쪽 놈 허리춤에 총 있다.”

“네. 봤습니다.”

대답을 들은 하 선배가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버튼을 눌렀는지, 문이 열리고 있었다.

“오늘은 몸빵하지 마, 인마.”

한숨 쉬듯 가볍게 덧붙이는 투가 학교 가는 애한테 준비물을 챙겨주며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답하듯 피식 웃고는 차 밖으로 몸을 먼저 빼냈다. 뒤를 따라 내린 강우진은 의연한 기색이었다. 연기하듯이 상황을 대하라는 충고가 잘 먹힌 걸까. 그들에게 내가 신인으로 알려져 있으니, 자신이 먼저 이끌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그가 선배다운 얼굴로 앞장섰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은 지나칠 정도로 몸에 달라붙어 걸을 때마다 내 몸 구석구석에 매달려 있는 장치의 존재를 깨닫게 했다. 그러나 나는 불편함 따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걸었다. 가드들은 다가오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섯 걸음을 남겼을 때, 그들이 가면을 위로 들어 올리라는 사인을 했다. 잠깐 머뭇대던 강우진은 곧 아무렇지 않게 가면을 들어 올렸고, 나도 따라 했다. 팡,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를 내려놓은 가드가 문으로 다가섰다. 거대한 철문이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르 열렸다. 강우진과 나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솔길의 끝에는 어둠 속에서 은근하게 빛을 뿜는 대저택이 있었다.

‘우산 없었냐?’

생생한 기억이 밀어닥쳤다.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별장 같은 집. 마당에 있는 연못과 삼단 분수. 생활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겉으로 보기에만 번드르르한 공간.

최혁준이 복사해둔 공간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가면을 다시 썼다.

미끼는 나였다. 누가 낚싯대를 들어 올릴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입구부터 나란히 붙잡혔다. 가면을 쓴 사람은 가드라기에는 키와 몸집이 작았음에도, 저를 내려다보는 사내 둘을 가로막고 손을 내미는 모습에서 신기할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비롯한 소지품은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 맡겨주시면 됩니다. 나갈 때 가져가실 수 있게 저희가 안전한 곳에 보관할 예정입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강우진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기 전부터 예상한 것이기도 했다. 공간을 철저히 비밀로 굴리려면, 참석자들로부터 쓸데없는 정보가 새어 나가게 둬서는 안 됐을 테니. 핸드폰을 뺏는 건 원시적인 방법이었으나, 동시에 아주 효과적이기도 했다. 초대된 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이 공간은 허락된 자들만 퇴장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퇴로를 막는 행위이기도 할 테다. 현우네 소속사 신인 배우도 그렇게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곳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현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김명림 감독에 관해서 이야기가 안 좋게 돌아. 강원도에 별장이 하나 있는데, 이 주에 한 번 배우들을 초대해서 푸지게 노나 봐. 들리는 말로는 난리인 모양이야. 참석자들은 해가 뜰 때까지 나가지도 못하게 잡아두고,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리며 갑질한다고.’

‘몰라. 듣기로는 룰이 있대.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 비밀 클럽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리고 있나 봐. 참석자들 입단속도 철저히 시키고.’

미리 챙겨 왔던 공기계를 내밀자, 남자가 받아들더니 옆으로 넘겼다. 나비넥타이를 한 웨이터가 지퍼백 안으로 핸드폰을 넣었다. 강우진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핸드폰을 수거한 남자가 몸을 뒤로 물리며 깍듯이 인사했다. 집사 혹은 지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상 떨며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그는 뱀 껍질로 만든 듯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코 아래까지 내려와 중안부를 가리고 있는 가면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고, 옆의 웨이터가 쓰고 있는 가면보다 화려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의 등 뒤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웨이터가 보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열린 문 사이로 귀가 폭발할 정도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파티가 열리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 했더니, 이 문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였던 모양이다. 이 짓을 위해 세운 방음벽이 어마어마하리라는 사실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중세 시대의 저택을 흉내 낸 것처럼 천장에서부터 길게 장막을 늘어뜨린 연회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찔할 정도의 커다란 음악 소리는 곳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코너마다 위치한 스피커들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았다.

일부러 빛을 최소한으로 줄여둔 것처럼, 연회장 안은 어두웠다.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누구인지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어두컴컴한 공간은 공간 설계자의 의도를 반영한 것처럼 비밀스러웠다. 사람들은 헤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가면을 쓴 그들은 나아갈 곳을 잘 아는 것처럼 발길을 옮기다가도, 가끔은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옆을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스치기도 했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강우진은 그 짓을 두 번 당한 뒤 내 옆으로 바싹 붙으며 속삭였다.

“미쳤다. 방금 지나간 사람 봤어요? 설안나예요.”

경악한 목소리였다. 관심이 없는 나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배우였으니, 아마 강우진에게는 이곳에서 차마 보리라 생각지 못한 거물급인 게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미리 입수해두었던 배우 리스트에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스쳐 간 설안나는 2층과 연결된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나선형의 계단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매니저조차 같이 들어올 수 없는 곳임에도, 옆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두고 있었다. 플로어보다도 더 어두운 2층의 입구에는 덩치 큰 가드가 한 명 서 있었다. 설안나 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 다가가 말을 걸고서야, 가드가 계단 끝에 달려 있는 쪽문을 열어줬다.

누군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층에는 VIP룸이 있으며, 그 공간은 이곳에 입장했다고 해서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또한. 나는 연회장에 들어선 이후 유일하게 확인하지 못했던 긴 탁자 뒤를 훑고선 고개를 돌렸다.

최혁준은 이곳에 없었다. 그러니 2층으로 가야 했다.

지나가던 웨이터와 눈이 마주쳤다. 일부러 빛을 죽여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을 옮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트레이 중간에는 작은 양초가 띄워져 있었다. 양초 주변에 샴페인 잔들이 가득했다. 내가 쳐다보는 이유를 예상한 듯 트레이를 내미는 그의 나비넥타이 매듭 부분에서 시선을 뗀 나는 샴페인 잔 두 개를 잡았다. 강우진에게 그중 하나를 건네며 속삭였다.

“따라와요.”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지만, 나는 웨이터가 우리에게 다가선 순간 이쪽으로 몰린 시선을 느꼈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우리가 이곳에 처음 참석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참석했던 신인 배우의 증언에 따르면, 탐색전이 꽤 길다고 했다. 무리에 들어온 신입은 자신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평가 방식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자신이 눈을 떴을 때 긴 탁자의 중간에 홀로 앉아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뒤로 보이는 괘종시계의 시침이 11을 가리키고 있는 건 보였다고.

괘종시계는 창문과 창문 사이의 공간에 자리해 있었다. 버려진 대저택처럼 꾸며진 곳에서 벽에 붙은 키가 큰 갈색의 괘종시계는 튀는 듯 튀지 않는 듯 어울렸다. 나는 괘종시계에 기대듯 섰다. 옆의 창문에 달려 있던 긴 레이스 커튼이 밟혔다. 괘종시계 뒤로 샴페인이 담긴 잔을 강우진에게 건넸다.

“마셔요.”

“…그래도 돼요?”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샴페인 잔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방금 샴페인 잔 안에 슬쩍 넣었다 뺀 손가락이기도 했다. 잔 안에 마약이 들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을 액을 묻혀둔 손가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앞으로 이곳에서 함께 비밀을 공유할 신입의 자격을 평가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혹은 정신을 잃게 할 방식일지도 모르고.

나는 샴페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당부하듯 덧붙였다.

“턱 끝에 점이 있는 웨이터가 주는 술만 받아먹어요. 다른 웨이터가 준 것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시계 뒤에 버리고요. 그러니 웬만해서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연회장 곳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면 아래의 입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들리는 말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 공간을 설계한 자의 의도일 것이다. 심지어 심장 소리마저 죽이려는 것처럼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잊게 만들고, 서 있는 공간을 잊게 만들기 적합했다. 코너에 서서 떠들던 무리가 우리가 선 쪽을 흘끔거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한 명은 몸을 아예 우리 쪽으로 돌리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올지도 몰랐다. 나는 방금 그 무리의 옆을 스친 웨이터가 옮긴 빛을 통해 가면 아래로 보이는 하관을 확인했다. 리스트에서 미리 확인한 배우였다. 해당 배우의 소속사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수사에 협조할지 간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배우도 어느 정도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가시게요? 그러니까… 저 혼자서 괜찮을까요?”

강우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샴페인을 홀짝였다. 여전히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이 반짝 빛났다.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죠. 일단 잘 버텨볼게요.”

마지막 회의 시간에 옆에 함께 앉아 있었으니 그도 작전이 어떻게 진행될 건지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제 옆을 계속 지키고 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 터다. 나는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당부를 덧붙였다.

“시계 뒤에 소화기 있어요. 창문에 던지면 깨질 거고요.”

강우진이 몸을 돌리는 척 괘종시계 뒤를 확인하는 걸 본 후, 걸음을 옮겼다. 가운데 심이 거의 다 녹은 양초 외에는 텅 빈 트레이를 아래로 내린 웨이터가 왼쪽 끝에 붙은 문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문이 열린 순간 잠깐 쏟아지던 환한 빛은 웨이터가 사라짐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옆에 달아둔 커튼이 휘날리듯 나풀댔다. 나는 그 잔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옆을 스쳐 가려던 웨이터를 붙잡았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턱에 점이 있는 웨이터가 연회장 반대편을 가리켰다. 방금 웨이터가 들어간 문 쪽이었다. 나는 감사를 표하듯 가볍게 묵례하며 트레이에 있던 샴페인 잔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어두운 빛 아래에서야 그럴듯해 보였지, 막상 환한 빛 아래에서 보게 된 가면은 다소 조잡했다. 뱀 껍질은 무슨. 가볍게 조소한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응시하며 나비넥타이를 한 번 더 만졌다. 입에 양말을 물린 탓에 욱욱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던 화장실 마지막 칸에서는 이제 더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곧 풀어줄 거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먹혀들었는지 아니면 지쳐서 포기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쓰고 보라색 셔츠에 나비넥타이까지 걸치니 얼추 비슷한 꼴이 됐다. 체격이 비슷한 놈의 뒤를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귀 안으로 손가락을 깊이 집어넣었다. 소형 무전기의 테를 굴리듯 몇 번 만지자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제되지 않은 잡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반장님.”

셔츠의 소매 단추를 잠그며 잠깐 기다린 것만으로도, 무전기 안의 소리가 급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선명해진 음질과 함께 반장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어디야.

“1층 서쪽 화장실입니다.”

-차혁준은?

“2층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지키고 있고요.”

-접근 가능하겠어?

“해 봐야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직전에 입수한 설계도에 따르면, 1층과 2층은 구조가 확연히 달랐다. 클럽의 플로어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1층과 달리 2층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가장 큰 방은 안쪽에 있었지만, 최혁준이 그중 어느 방에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산술적으로 계산한 시간을 댔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들이닥칠 타이밍을 다시 조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수 있어도, 나는 그가 말하는 걸 들을 수 없게 기기를 조작해두고서야 나는 앞에 내려두었던 샴페인 잔을 휴지통 안으로 던졌다. 혹시 몰라 확인한 손가락 끝은 여전히 깨끗했다. 아마 강우진은 괜찮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계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술은 딱히 숨겨둘 필요도 없다는 듯 쉽게 열린 창고로 들어선 나는 샴페인을 따 잔 안으로 부은 뒤 밖으로 나왔다. 트레이를 들고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VIP들 입장은 이미 얼추 끝났는지, 가드는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것과 같은 자세로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설안나 이후 아무도 이 계단을 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쪽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가 입을 열었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시선에 혹시 내가 웨이터가 아님을 눈치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아닌 내 가면을 보고 있었다.

“1층 웨이터가 2층에는 무슨 일이지?”

의심쩍은 듯 묻는 그의 시선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의 테두리를 훑고 있었다. 등 뒤로 2층 어두운 복도를 걸어 다니고 있는 웨이터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가면이 내가 쓰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길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공간에서, 직원들을 구분하는 이들의 기준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이었다. 가면을 보고서야 1층 웨이터인 걸 알아챈 걸 보니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확률은 희박해 보였다.

“1층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배우님이 특별 주문하셨습니다. 위층에는 샴페인이 없으니, 가져와 주면 좋겠다고요.”

2층에는 창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의심이 조금 풀린 얼굴로도 가드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어느 배우님이?”

“정한영.”

리스트에 있었고, 1층에는 없었던 배우의 이름을 댔다. 가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러섰다. 어떻게 보면 같은 직원인데 이렇게 의심한 게 뒤늦게 멋쩍어졌는지 친근하게 말을 걸기도 했다.

“기분 나빠하지는 마. 다들 보안에 어찌나 예민하신지.”

강아지가 있을 집에서나 달아둘 법한 무릎까지 오는 쪽문은 철컥거리는 섬뜩한 소리를 냈다. 나는 문을 열어준 가드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트레이를 얼굴 가까이 들어 올렸다. 2층의 복도는 깊었다. 거리를 둔 채로 서 있는 방들에는 문이라고 할 게 없었다. 방금 가드가 지키고 있던 계단을 지나고 나서야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인 것처럼, 투명한 천이 방 안을 훤히 노출시켰다.

“하, 읏, 하윽-”

가면을 벗어둔 사람들이 문을 훤히 열어놓고 정사를 즐겼다. 웨이터가 옆을 지나가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서로를 탐하기 바쁜 그들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미꾸라지처럼 헤엄치듯 움직였다. 나는 달뜬 신음을 뱉기 바쁜 사람 중 최혁준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방에서는 포커가 한창이었다. 시중에 풀려서는 안 되는 칩들이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콜이야, 콜. 으하하. 이 새끼들, 다 죽었다. 다 죽었어.”

정 선배가 대기 시간마다 돌려보곤 하던 주말 드라마 속의 원로 배우가 허공으로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눈이 풀린 방 안에 있는 이들은 다들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담배는 아니었다.

한동안 연예기사란 한 번 볼만하겠군. 나는 나비넥타이를 한 번 더 매만지고는 방에서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 붙여둔 소형 카메라는 넥타이의 중간 부분에 박혀 있었고, 별장 주변에서 투입되길 기다리고 있는 차들에게로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복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은 2층에서 유일하게 문이 있는 곳이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과 가까이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뭐야?”

기대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이 묻던 그는 내가 쓰고 있는 가면과 들고 있던 트레이를 발견한 순간 별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등장함으로써 잠깐 끊겼던 말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방 안은 어두웠고, 그런 것치고는 놀라우리만치 반짝였다. 좌우 벽이 네모난 어항이자, 수영장의 한 벽면처럼 꾸며져 있었다. 누군가가 그 안에서 정말 헤엄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인지 발바닥이 물을 밀어내는 소리, 물이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큰 테이블을 가운데에 둔 채로 ㄷ자 모양으로 생긴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은 많지 않았다. 남자의 건너편에 베레모를 쓰고 앉아 있는 김명림 감독까지 확인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룸 안에 있는 사람은 총 여섯 명이었다.

“아니, 그니까요. 감독님. 제 말은 그게 사과까지 할 흠이 되냐 이거죠.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솔직히 학창 시절에 문제 한 번 안 일으키고 얌전히 산 사람 있어요?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기억도 잘 안 나는 일 가지고 이제 와서 정신적 배상이니 뭐니 배 놔라 감 놔라 하면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진짜 억울하긴 했나 보다. 저 오빠 도통 말을 쉬질 않네.”

남자의 좌측에 설안나가 앉아 있었다. 지겹다는 표정으로 긴 머리를 뒤로 넘긴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샴페인을 달라는 뜻인 걸 눈치챈 나는 소파의 뒤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설안나의 반대편에 눈에 익은 남자 배우가 앉아 있었다. 언젠가 현우가 닮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 배우는 손에 주사기를 든 채였다. 채도가 낮은 빛 아래에서 가는 주사기를 채운 액이 반짝댔다.

“어찌 됐든 결론은 기사 터지기 전에 돈으로 막긴 했다는 거 아녜요. 그 정도면 해피 엔딩이구만, 뭐. 형은 진짜 협박을 안 당해 봐서 그래요. 나 미국으로 미팅 가는 비행기에서 전여친이 고소한다는 연락 받았잖아.”

투덜대는 와중에도 혈관이 흐르는 곳을 정확히 겨누고 약을 밀어 넣는 그는 이런 일쯤은 수도 없이 해본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주사기를 탁자 위로 팽개치듯 던진 남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여자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마침 나를 보고 있던 그녀가 싱긋 웃었다. 회의 시간 들여다보던 프린트 속, 흐린 화질의 사진 속에서 수줍게 웃어 보이던 여자가 그 위로 겹쳐졌다. 그녀가 내가 이곳에 올라올 핑계를 댄 배우라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혁준 씨, 이러기야? 가만히 보면 내가 잘생긴 애들 좋아하는 거 알면서 꼭 뉴페이스는 1층에 다 몰아넣더라. 웨이터든 배우든.”

그녀가 장난스레 눈을 흘기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2층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 ㄷ자 소파 가장 안쪽에 파묻혀 있던 인영을 드디어 보게 된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저를 불렀음에도 반응 없이 늘어져 있는 몸은 꼭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해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세히 보게 이쪽으로 좀 와볼래요? 괜히 돌아서 오지 말고 이 소파 뒤로 지나쳐서 바로 와요.”

그 어떠한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최혁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경로까지 정해준 그녀 덕분에, 최혁준의 등 뒤로 지나가게 됐다. 소파의 경계를 넘어 뒤로 젖혀진 작은 머리통에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스친 순간에는 트레이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최혁준은 내가 자신의 뒤를 지나서 정한영의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최혁준을 완벽히 지나친 순간에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정한영이 앉아 있는 소파와 최혁준이 앉아 있는 소파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정한영은 내게 몸을 낮추라고 명했다. 고개만 우로 돌리면 최혁준이 보이는 곳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옆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한영과 눈을 맞췄다.

“가면 벗어 봐요. 아니면 내가 벗겨줄까요?”

턱을 손으로 괴며 묻는 얼굴이 천진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바라보던 내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빼려던 순간이었다.

“여기 섹스방 아닌데.”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몸 안의 모든 감각이 최혁준에게 쏠려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파임에도 최혁준이 몸을 일으키는 기척만은 세세하게 느껴졌다.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 안에서 흐르는 그 어떤 대화와도 따로 놀던 최혁준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윽!”

푹신한 바닥에 떨어진 트레이는 그 흔한 균열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샴페인 잔을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균형을 잃은 몸이 최혁준에게 기울어 있었다. 내 머리채를 잡고 제가 앉아 있는 소파에 처박은 최혁준이 몸을 반으로 접듯 아래로 굽혔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충혈된 눈이 시간을 두고 깜빡였다. 마치 초점을 잡으려고 조리개가 조여들듯이. 나는 숨을 참았다. 동시에 가면 위를 성의 없이 훑던 놈이 자신 없는 어조로 중얼대듯 말했다.

“뉴페이스가 맞긴 한가?”

코 아래에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

방 안이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모두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음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채를 잡아 고정하기까지 했으면서, 최혁준의 눈은 내 얼굴 위에서 어지럽게 떠돌았다. 안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눈깔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최혁준은 노력하길 그만뒀다.

“씨발, 또 시작이네.”

헛웃음 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머리를 옭아매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소파에 내팽개쳐진 상태 그대로 눈만 들었다. 최혁준이 비틀대면서도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가려고? 벌써?”

내가 방 안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김명림 감독이 입을 열었다. 그는 어딘가 초조한 듯 보였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인지 기우뚱대는 최혁준을 잡아주지는 않아도, 최혁준이 방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거듭 최혁준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거래도 제대로 시작 안 했는데. 오늘 중요한 거래 많은 거 알지? 차 이사가 있어야 해.”

차 이사. 그가 거리낌 없이 꺼내는 호칭은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상에 불과했던 것들이 하나둘 형체를 갖춰 현실로 드러났다. 나는 마침내 똑바로 서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최혁준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로 나비넥타이를 고쳤다. 심호흡하듯 가파르게 움직이던 최혁준의 등이 점차 잠잠해졌다.

“좀 자고 올게요. 그때까지 홀드해 두세요.”

몇 번 숨을 고른 보람이 있는지, 최혁준의 목소리가 비교적 멀쩡해졌다. 느리긴 했지만, 걸음을 옮기는 놈은 더는 비틀대지 않았다. 놈이 멈춘 건 김명림 감독이 소파 옆을 지나치던 최혁준의 팔을 붙잡고 나서였다.

“언제까지? 현 회장님이 늦어도 1시간 뒤엔 오실….”

김명림 감독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거칠게 팽개쳐진 팔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당황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

“사람 얼굴 하나 제대로 못 알아보는 미친 새끼를 위에 두고 왜 네 멋대로 유통망을 늘려.”

“…….”

“누가 그러랬어?”

50대 중반의 김명림에게 최혁준은 아들뻘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최혁준이 최소한의 예의마저 버린 채 내뱉는 반말은 상대를 찍어누르는 데 의미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옆에는 김명림이 데리고 왔을 게 뻔한 배우들이 앉아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데. 최혁준이 의도했을 수치심을 그대로 느낀 듯 뻘겋게 달아오르는 김명림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헛기침하며 최혁준의 시선을 피했다.

“큼, 차 이사가 많이 피곤하긴 한가 보네.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쉬어야지. 가서 쉬어. 정 필요한 일 생기면 사람 보낼 테니까.”

최혁준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러 간다고 했었나.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룸 안에 있는 사람 중 최혁준만이 홈웨어처럼 편한 차림이었다. 통이 넓은 새틴 재질의 까만 바지가 최혁준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부작사부작 움직였다. 호텔에서나 줄 법한 슬리퍼를 신은 놈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줄 알았다. 멀어지는 최혁준을 보던 남자 배우가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어우, 분위기 살벌하다. 기분 좋자고 모인 건데 이래서 되겠어요? 자자, 안나도 잔 들고.”

좌우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그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조용히 일으켰다.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서 최혁준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나랑 나갈래요?”

벽에 붙어 걸음을 옮기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기부터 하는 그녀는 방금 있었던 일에는 하등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가면을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호기심 가득해 보였다. 어떻게 밀어내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나가.”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최혁준이 이쪽을 돌아봤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놈은 한쪽 눈을 찡그린 채였다. 여전히 초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로 놈이 무표정하게 명령했다. 손끝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고라고, 너.”

“아니… 혁준 씨. 이건 좀 억지다. 내가 좀 데리고 놀겠다는데 왜 그래?”

정한영이 보란 듯 인상을 찡그리며 항의했지만, 최혁준은 가볍게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너도 같이 해고당하든가.”

배우들의 근로 환경과는 관련이 없는 이곳에서 최혁준이 말하는 ‘해고’란, 다시는 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인 걸까.

그 우스운 협박이 먹혀들긴 했는지, 정한영이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애초부터 반항이 돌아오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처럼 최혁준은 이미 방 밖으로 발을 뻗은 상태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놈의 뒷모습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최혁준이 이미 자리를 떴음에도, 방 안에 남은 배우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한영을 달래듯 술을 채워 건네는 김명림 감독을 본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트레이를 들었다. 최혁준이 명한 이상, 아무도 나를 잡지 못할 거라는 계산하에서였다. 그리고 예상처럼 트레이를 옆구리에 낀 내가 방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잡지 않았다.

복도는 아까처럼 어두웠다. 2층으로 이어지는 쪽문을 지키는 가드도, 배경의 일부인 것처럼 움직이는 웨이터들도 그대로였다. 나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벽에 붙어 움직였다. 놈이 나가자마자 거의 바로 따라 나왔음에도, 최혁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까 미리 살펴보았던 두 개의 방 풍경을 떠올렸다. 그중 어느 곳도 최혁준이 쉴 만한 곳으로 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면 적어도 침대가 있어야 할 테고, 그런 것들을 놓아두려면 다른 방들과는 따로 분리된 공간일 가능성이 컸다.

지나가는 웨이터들을 살폈다. 미리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2층에 창고가 없다고 했는데, 웨이터들은 1층에 다녀오지 않고도 술을 가지고 나타났다. 술이나 음식들을 쌓아두는 공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처럼 벽에 붙어 걸음을 옮기던 웨이터 중 하나가 두꺼운 커튼 사이로 사라지는 걸 발견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코너에 숨겨진 공간이었다. 마침 그곳으로 발을 옮기던 웨이터 뒤에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던 그는 내 가면을 힐끔 보고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바로 했다. 문이 열리고,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섞여 흐르는 공간은 왜 웨이터들의 옷을 보라색 셔츠로 맞췄는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투명한 장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 사이를 누비며 제가 필요한 물건들을 주워 트레이에 담거나 혹은 들고 있는 와인 병주머니 안으로 털어 넣는 웨이터들은 그들을 둘러싼 배경 속에 손쉽게 섞여들었다.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술로 가득한 이곳에 샴페인만 없다는 사실이 내가 오늘 밤 가진 대단한 행운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술을 보관하는 곳이라 그런지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2층에 있는 방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게끔 방 곳곳에 있는 웨이터들이 움직이는 속도를 흉내 내 걸음을 옮겼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가끔 같은 진열장 앞에서 멈춘 웨이터들이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설안나 왔다며?”

“미친. 그거 진짜야?”

“용진이가 1층에서 봤대.”

“개부럽네. 그 방은 몰래 들어갈 수도 없는데.”

“왜. 개새끼 때문에?”

“그럼 누구겠냐? 개꿀 알바 안 잘리려면 알아서 기어야지. 눈도 마주치면 안 된다니까.”

1층에서 웨이터의 옷을 빼앗아 입으면서도 느꼈지만, 마약부터 시작해 난교와 도박까지 성행하는 곳의 웨이터들로 두기에는 지나치게 허점이 많은 이들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수없이 마주칠 여느 20대 남성들이나 할 법한 대화를 늘어놓는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정호의 수족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유명 감독조차도 쩔쩔매는 ‘차 이사’이자 동시에 눈도 마주쳐서는 안 되는 ‘개새끼’로 불리는 최혁준의 위치는 이곳에서 대체 어디쯤일까. 최혁준이 지배하는 곳처럼 꾸며진 이곳에서 최혁준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지?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섰다.

‘여기 내 방 아니야.’

음습하지도 않고,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숨을 한참 고를 필요도 없던 열여덟 최혁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여기서 한 번도 마음 편했던 적 없어.’

한눈에 보아도 최상급의 것들로만 꾸며진 방을 둘러보던 최혁준이 심드렁하게 내뱉던 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날 돌아본 놈이 손을 들어 가리키던 천장.

‘먼지투성이여도 차라리 저기가 편하지.’

나는 이 집에 들어온 순간 가장 먼저 마주했던, 가드들이 열어준 철문 뒤로 보이던 이층집의 모습을 생각했다. 과거 가보았던 최혁준의 집을 본뜬 것처럼 비슷하던 집의 구조와 앞에 놓인 분수대.

우리는 보통 층수에 따라 집을 나눈다. 층이 두 개로 나눠진다면 이층집, 세 개로 나눠진다면 삼층집. 그렇게 간단히 정의 내리는 과정에서 모두가 알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하는 지붕 밑의 비좁고도 은밀한 공간을 나 또한 잊고 있었다. 그 집이 최혁준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집도 최혁준의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최혁준이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강우진은 여전히 괘종시계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를 찾듯 가끔 옆을 돌아보긴 했어도,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괘종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트레이를 올려 들고는 강우진의 옆으로 다가섰다. 해고니 어쩌니 하는 발언에 최혁준이 나를 퇴장시키는 조치라도 취해놨을까 긴장했는데, 아직 아래층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진 않았는지 아무도 웨이터 노릇을 하는 내게 딴지를 걸지 않았다. 다가선 나를 확인한 강우진이 매너 있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가면 아래의 하관을 짧게 훑고 떨어지는 시선을 보니, 자리를 뜨기 전 내가 내린 지침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한 번 더 트레이를 내밀었다. 강우진이 밟고 있는 레이스 커튼의 끝을 질근 밟아 내 쪽으로 조금 끌어오기도 했다. 천이 발에 걸려 기우뚱한 강우진의 몸이 가까워졌다.

“아, 죄송합니다.”

“나예요.”

당황해서는 황급히 몸을 제자리로 돌리려고 하던 강우진이 멈칫했다. 눈가를 훑은 강우진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했다. 날 드디어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다….”

갑자기 웨이터 차림으로 나타난 내가 믿기지 않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더 말하지 말라고 명하듯 고개를 젓고는 트레이를 강우진 쪽으로 기울였다. 강우진은 이번엔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트레이 가운데의 촛불이 위태롭게 움직였다. 나는 촛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웨이터들이 그러하듯 한 손을 뒤로 보내 예의를 차리는 척, 강우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따라와요. 티 나지는 않게.”

긴장된 표정으로 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화장실로 들어선 내가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진이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강우진이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문의 손잡이부터 발로 찼다. 구둣발 끝으로 힘을 주어 몇 번 내리친 것만으로도 손잡이가 애매한 방향으로 휘었다. 뒤돌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예요.”

어차피 이곳에 화장실까지 숨어들어 약을 할 사람은 없다. 내가 마지막 칸에 묶어둔 웨이터가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만 봐도.

“와, 진짜 현실이 더하네….”

혀를 내두르는 강우진을 흘긋 보고는 넥타이를 벗었다. 예상은 했지만, 나비넥타이 사이에 박아둔 소형 카메라는 이미 망가진 채였다. 어차피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또 예산 문제로 한 소리 듣게 생겼군. 판단을 끝낸 나는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넥타이에서 떼어냈다. 함께 망가진 넥타이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카메라는 강우진 쪽으로 내밀었다.

“잠깐 주머니에 넣고 있어요.”

“네? 아니, 잠깐, 또 어딜 가시려고요?”

“건물 밖으로 나갈 거예요.”

“밖으로요? 왜요?”

“차혁준 있는 곳으로 짚이는 데가 있거든요.”

“아니, 내부에서도 못 찾았는데 외부에서는 어떻게 찾으려고요. 아까 작전 설명할 때는 이런 내용 없었지 않아요?”

연이어 불안한 목소리를 내는 강우진에게 답해주기를 그만두고 세면대 위로 올라섰다. 그래야만 창문을 넘기가 쉬울 거였다. 1층과 2층을 통틀어 창문이 있는 곳이라고는 이 화장실뿐이었다. 미리 확인했던 설계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마저도 창문이 크지 않아서, 세면대 위에 올라서고서도 몸을 반으로 구긴 다음에야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최혁준이 어떻게 숨겨둔 건지는 몰라도, 2층에서 다락방과 연결되는 계단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밖에서라도 타고 들어가야 했다. 들어오면서 스치듯 확인한 간이 옥외 계단을 떠올린 나는 망설임 없이 행동했다. 창문은 꽤 높이 달려 있었다. 성인 남성치고도 키가 큰 편인 내가 세면대 위에 올라서서도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몇 번 헛손질을 한 후에야 손가락이 닿은 창문은 마치 한 번도 누군가의 손에 열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냈다.

열린 문 사이로 바깥의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나눌 공기마저 제한해둔 것 같은 이곳에서는 귀한 것이기도 했다. 가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던 나는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던 강우진을 발견하고는 귀 안으로 손을 넣어 무전기를 꺼냈다.

테를 굴려 반장님에게 말을 거는 것 대신, 강우진을 향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낸 강우진은 멍한 표정이었다. 무슨 물건인지는 알아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를 게 뻔하니 설명해야 했다.

“무전기예요. 내가 이십 분 안에 안 돌아오면 그걸 귀에 꽂고, 테를 두드리듯 만져요. 그럼 바깥이랑 바로 연결될 거예요.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는 건 신호를 잡는 거니까 겁먹지 말고 기다린 후에 사람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1층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전해요. 그럼 대충 상황을 알아들을 거예요.”

“…그럼 경위님은요? 뭘 하실지는 모르겠어도, 지금 보아하니 완전 위험한 일 하실 것 같아서 불안한데.”

창문과 나를 번갈아 보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 선배와 힘을 합쳐 힘겹게 풀어둔 긴장까지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가볍게 대꾸했다.

“걱정 마요. 안 죽어요.”

작전의 내용을 내 멋대로 바꾸었다고는 해도,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가볍게 점프하듯 창문에 매달린 것과 동시에 강우진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해요! 영화에서 그런 얘기하는 사람은 꼭 죽는다구요!”

그 와중에도 숨어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제 손으로 입을 텁 틀어막기부터 한 강우진을 흘긋 보고는 발을 굴렀다. 창문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 채로, 화장실 벽을 클라이밍이라도 하듯 타고 올랐다. 발 한쪽을 창문 밖으로 먼저 빼낸 것과 동시에 강우진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저 진짜 십오 분만 지나면 바로 신고할 거니까 꼭 그 전에 돌아오셔야 해요! 아셨죠? 저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들리시죠?”

내가 분명 20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고쳐줄까 하다가 그럴 시간조차 아끼자는 생각에 발을 마저 창밖으로 빼내기부터 했다. 밖에 나와서야 알게 된 거지만 화장실의 창문은 저택의 뒤쪽과 이어져 있었다. 경호 인력이 따로 배치되지 않은 이유인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어떤 미친놈이 창문을 타고 밖으로 나가 옥외 계단에 매달리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냐마는.

옥외 계단은 비상 탈출 계단처럼 건물 벽에 바로 붙어 있었다. 흔히 건물들에서 많이 택하곤 하는 아래로 내려가거나 혹은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설치된 계단이 아니라, 내려오는 그 누구도 스칠 수 없게끔 일자로만 쭉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계단 바로 아래에는 덩굴장미가 자라 있었다. 관리된 듯, 관리되지 않은 모양새로 들쭉날쭉 자라 있는 장미에서 시선을 떼고는 상체에 힘을 주어 몸을 계단의 마지막 칸 위로 끌어 올렸다. 힘을 주는 과정에서 상처가 벌어졌는지 몇 주 전 다쳤던 팔이 아릿했다. 나는 팔 아래를 지혈하듯 꾹 잡은 채로 몸을 숙여 계단을 올랐다. 배치된 경호 인력이 없다고는 해도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아무런 방해도 없이 계단을 오르는 게 가능했다. 어느덧 마지막 계단이었다.

나는 건물 뒤에 숨겨진 맨 마지막 계단에 서서, 달빛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는 자그만 푸른 창 안을 응시했다.

“…….”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렇기에 그 틈을 타고 흘러 들어간 바람이 다락방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를 흔드는 것도 가능했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나풀대듯 움직이는 하얀 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창문 사이로 몸을 숙였다.

다락방 안은 좁고 어두웠다. 내가 발을 뗄 때마다 아래에서부터 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런 것 따위 보이지도, 혹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처럼 걸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침대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최혁준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저벅저벅 흐르던 발소리가 멈춘 곳에서, 나는 몸을 굽혔다. 한쪽 무릎만 세워 앉은 자세로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최혁준은 아까 방에서 보았을 때와 같이 꼭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시선을 둔 채로 눈을 깜빡인 순간, 팔뚝이 잡혔다. 재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목 옆을 스쳤다.

“읏….”

볼이 잡힌 채로 베개 사이로 처박혔다. 나는 저항하는 것 대신 위를 올려다보았다. 최혁준은 내 목 아래에 칼을 바투 가져다 댄 채였다. 조금만 고개를 움직여도 날이 목을 찌를 수 있는 위치였다.

“웨이터 따위가 여길 어떻게 알았지? 누가 알려줬어?”

“…….”

“빨리 말해. 죽여버리기 전에.”

“죽여 봐.”

칼날 끝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해보라고.”

최혁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칼을 쥔 손을 위로 끌어서 내 얼굴에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댔다. 최혁준의 충혈된 눈이 떨리고 있었다. 손 또한 그랬다. 흔들리는 칼날 앞에서, 난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말투로 뱉었다.

“넌 사람 못 죽여.”

최혁준은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놈이 칼을 들이밀며 위협적으로 구는 때조차, 내 눈에는 모든 행위가 서툴러 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놈이었다면, 애초에 최정호 밑에 이렇게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하수처럼 살아 숨 쉬기보다는, 차라리 최정호를 죽이는 걸 택했겠지. 그 애매한 양심은 최혁준의 인생에서 늘 걸림돌처럼 기능했다.

멍하니 듣던 최혁준의 표정이 급속도로 사나워졌다.

“너… 누구야.”

내 가면 위를 훑는 눈이 불안정해 보였다. 나는 최혁준이 가면을 벗기려 손을 뻗은 순간 몸을 뒤로 뺐다.

“누구냐고 묻잖아, 이 개새끼야!”

최혁준이 달려든 힘을 역으로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을 걷어차인 최혁준이 빠르게 일어나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여전히 한쪽 손에는 나이프를 든 채였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놈의 팔을 잡아 꺾었다.

“…읏….”

나직한 신음이 들린 순간, 최혁준의 몸을 침대로 거세게 밀었다. 침대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출렁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피어오른 먼지를 뒤집어쓴 최혁준이 콜록댔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최혁준의 몸 위로 올라타 무게를 실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혁준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충혈된 눈이 초점을 잡으려는 것처럼 바삐 깜빡대고 있었다. 나는 그 죽은 것만도 못한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최혁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있던 베드 테이블 위로 힘껏 처박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필요하다면 그 이상도 할 각오로 봐주지 않고 처박았다.

“…윽!”

내 손아귀 안에서 늘어져 있던 최혁준은 세 번째에야 신음을 냈다. 마침내 그게 제가 알던 자극을 벗어난 아픔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 사람처럼.

나는 그제야 놈의 머리채에서 손을 뗐다. 어둠 속에서도 최혁준의 코 밑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엉망인 꼴을 하고서, 최혁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놈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던 아까보다도 빨리 나를 찾아냈다. 핏줄이 가득 선 눈이 깜빡임조차 없이 나를 또렷이 응시하는 걸 느끼고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 최혁준을 만나고서는 처음으로, 그 앞에서 멀쩡하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과거를 긁으면 현재가 나오는 복권을 앞에 둔 나는 그걸 긁어낼 수 있는 동전을 던졌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

“늘 네 아래에 있다고 여기고 깔보는 것들이 언젠간 네 뒤통수를 칠 테니까.”

어둠 속에서, 나는 놈의 수축하는 동공을 본다. 겁에 질리듯, 혹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나는 그곳에 대고 축축한 숨을 뱉었다.

“경계하랬잖아, 이 씹새끼야.”

아래에 깔린 채로 발버둥 치던 최혁준의 행동이 불시에 멎었다. 최혁준의 표정이 멍하니 풀렸다. 가면이 아닌, 가면이 드러내고 있는 몇 안 되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놈의 눈길을 느낀 것과 동시에 최혁준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뱉는 순간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지선욱?”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발음해보는 사람처럼 묻는 놈의 부르튼 입술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그 순간에야 내가 터무니없이 망가진 사람을 앞에 두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대도,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한 손을 뒤로 가져가 가면을 풀었다. 최혁준은 움직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나의 맨 얼굴을 믿기지 않는 것처럼 훑는 놈의 눈빛을 느껴졌다. 아주 천천히 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진짜… 너야?”

이 순간을 종종 상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최혁준이 이지훈을 해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십 년 넘게 놈의 흔적을 쫓았으니까.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 가능성, 무시할 가능성, 혹시 나를 잊었을 가능성까지도 폭넓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최혁준이 실제로 보인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입술을 덜덜 떨며 묻는 놈은 내가 진짜인지부터 묻고 있었다. 마치 가짜인 나를 수없이 보았던 것처럼.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드러내는 동요가 닿은 몸으로 느껴졌다. 범인을 잡을 때처럼 잔뜩 긴장해서 놈을 억누르던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먹먹한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장명희.”

최혁준을 놈이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방식으로 불렀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춘 최혁준의 안면 근육을 보니, 놈이 평생 그 이름을 잊은 적 없었으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47세의 나이로 사망. 사인은 집 앞 교차로에서 당한 교통사고. 10분 뒤 근처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처치 중 사망.”

“…….”

“무연고 시신으로 접수 후 가족을 찾아 연락하였으나, 전 남편은 시신 인수 포기. 시에서 장례 처리.”

경찰들은 사건 속의 사람을 우리가 아는 손쉬운 기준으로 분류한다. 나이, 생사, 가족 관계.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얼굴도 잃고, 목소리도 잃고, 살아온 자취도 잃는다. 평생 나와 만난 적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덤덤히 읊을 수 있는 그 정보란 건, 사실 누군가에게는 삶을 포기할 이유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까지가 네가 알던 정보였을 거고.”

한 사람을 온전히 미워하려면, 그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

최혁준이 이지훈에게 어떠한 위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최혁준의 삶을 멀리서나마 관조하게 됐던 내가 낸 결론이었다. 최혁준은 대체로는 도련님 같은 삶을 살았다. 아빠의 밑에서, 자연스레 얻게 된 것들을 혐오하지 않는 척하며. 그런 놈이 혐오를 숨기지 못할 때면 꼭 데이터가 튀었다. 강제 전학이라든가, 마약 거래라든가. 몇 걸음 물러서서 보니, 그 순간들은 놈이 아홉 살에 잃어버리게 된 엄마라는 존재와 늘 관련이 있었다.

“사고 난 날, 장명희 씨가 다녀오던 곳이 인력개발센터였어. 최정호랑 이혼한 뒤 10년째 다니던 곳이고, 5년째 이어오던 마지막 상담이 끝나는 날.”

“…….”

“마지막 상담일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

“이제 널 데리러 갈 수 있겠다고. 5년 전에 네가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했을 때, 경제적인 이유로 그러지 못하겠다고 답한 자신이 얼마나 죽을 것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와 함께.”

최혁준의 안면 근육이 떨리는 게 보였다. 겨우 초점을 찾은 눈이 차츰차츰 흐려지는 것도.

“말을 하지 그랬어. 엄마한테 구해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그게 꼭 버림받은 것 같아서 죽고 싶었다고.”

“…….”

“그냥 붙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고. 그게 친구든, 그냥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애든 상관없이. 같이 아빠를 혐오해주고 너는 다를 거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걸.”

그때만 해도 최혁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걔는 내가 혐오할 만한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나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열여덟 최혁준의 맨 얼굴을 본다. 모순으로 얼룩져 있던 열여덟의 촌극 같던 청춘에 반짝이처럼 흩뿌려져 있던 증거를 이제야 그러모아 우리 둘의 눈앞에 펼쳐 놓으면서.

“그 말을 못 해서, 넌 네가 가진 수단 중 가장 편한 걸 택한 거야. 그걸로 평생을 합리화하며 살아온 거고.”

그러니 최혁준의 죄는 옹호 받을 수 없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살길 택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을 제가 겪는 고통 안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던 자들.

엄마를 잃은 이지훈이 그랬고, 아빠를 잃은 강영수가 그랬고, 동생을 잃은 너구리가 그랬던 것처럼.

“너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서도 꿋꿋이 살아가던 애들한테 부끄러울 짓 한 거라고.”

살다 보면, 잃은 후가 상상조차 안 되는 사람을 당연히 마주하게 되는 법이다. 그 위대한 존재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간절해진다. 몇 년째 깨어나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붙잡으며 느꼈다. 나도 할아버지를 한 번에 잃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한 번도 아파본 적 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해. 죽고 싶다고.”

“…….”

“그럼 살려줄게.”

눈가가 온통 빨개질 때까지 참았는데도, 기어코 최혁준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최혁준의 손을 잡고 있던 힘을 풀었다. 얼굴 근처로 내려간 칼이 최혁준의 눈썹 위를 스치듯 지나치는 것조차 그저 내버려 뒀다. 침대 아래로 툭 떨어진 최혁준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칼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목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최정호를 죽여줄게.”

최혁준이 얼굴을 마음 놓고 찡그렸다. 마지막 보루라도 되듯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던 입술이 열렸다. 최혁준은 끝끝내 죽고 싶다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처럼 숨도 쉬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쩌면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처절해 보이는 울음이었다.

‘-. -. -. -.’

열 대가 넘는 경찰차들이 작정하고 울려대야만 들릴 법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최혁준은 그걸 들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최혁준을 완전히 놓고는 옆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15분이 지났구나’ 생각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팔에 뒤늦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까 몸싸움을 하며 자극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그새 피가 셔츠를 뚫고 새어 나왔는지 축축했다. 나는 지혈이라도 하듯 그 위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끝이 났다. 최혁준의 입에서는 끝내 이지훈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승리의 이유 중 가장 크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다락방 안으로 다섯 명이 넘는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최혁준이 울음을 어느 정도 멈춘 뒤였다. 수갑을 채우려는 경찰에게 순순히 손을 내민 최혁준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갔다. 팔짱을 낀 채로 뒤에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한마디 더 하려는 듯이 입을 열던 반장님은 최혁준의 코 밑에 말라붙은 피의 흔적과 그와 비교해 멀쩡한 꼴의 나를 번갈아 본 뒤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중간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키기는 했대도, 성공적으로 끝난 작전이었다. 별장 안에 있던 이들 모두가 검거됐고, 2층 창고에 있던 약들도 모조리 압수됐다.

밴에 다시 오르기 전, 올려다본 홍천의 하늘은 말끔했다. 이곳의 일기 예보는 잘 맞아떨어지는 모양이라고 중얼대는 하 선배 옆에서 강우진이 신난 채로 이것저것을 떠들었다. 나 대신 무전기를 이용해 작전에 도움이 된 경험이 꽤 인상 깊었는지 그는 서울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흥분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쉬지 않고 떠들었다. 밴에서 내리면서는 내 번호를 묻기도 했다. 액션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던가. 그가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먼저 홀랑 내려버린 하 선배를 찾다가 지친 나는 차라리 그냥 번호를 찍어주고 그를 매니저에게 빨리 넘기길 택했다.

“자자, 잔 들어.”

우리 팀만이 가진 특이하다면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큰 작전이 터진 날에는 꼭 술자리를 한다는 게 그랬다. 평소에 술자리를 잘 하지 않아 술이며 담배를 달고 사는 강력형사계에서는 이단아로 취급받는 팀이라서 한층 더 이상하게 여겨지는 일이기도 했으나, 맨날 눈 풀린 놈들만 보고 사는 우리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습관처럼 되뇌는 반장님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작전 날짜가 잡히자마자 자주 가는 고깃집에 예약부터 해놓은 하 선배 덕분에, 마약수사대의 인원 전부가 작은 고깃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왜 굳이 넓은 데 놓고 이렇게 좁은 곳에 모여 앉게 만들었냐는 정 선배의 투덜거림에 하 선배가 팀워크 모르냐며 정 선배의 머리를 후려쳤다. 다들 오늘 마주한 풍경들은 잊은 것처럼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셨다. 일 이야기는 일부러라도 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내일부터 한동안은 팀원 모두가 밤낮없이 매달려서 정신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쁠 거였다. 구석에 앉아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던 나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선배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순간에 고깃집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고깃집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만 해도 팔을 들 때면 상처 부위가 화끈하게 타오르듯 아팠는데, 술을 먹어 감각이 둔해지기라도 했는지 괜찮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상처가 아니기도 하고. 알려 봤자 또 야근 금지니 뭐니 골치 아픈 잔소리만 들을 것 같아 숨겼는데, 경찰차 안에서 찾은 가벼운 패딩까지 입어 가린 보람이 있는지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산 붕대로 대충 응급 처치만 해둔 팔을 들여다보던 나는 패딩 안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꺼냈다. 하나를 빼 불을 붙이려던 찰나, 전화가 왔다.

[이현종]

나는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어.”

-어어. 선욱. 어디야?

“회식 중.”

-진짜? 야, 그럼 끊어. 괜히 눈치 보이겠다.

“아냐, 말해.”

-그래도….

추억이란 참 신기한 거라서, 내가 회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망설이는 놈의 목소리 뒤로 수없이 나를 돌아보고 챙기던 착한 동창의 얼굴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입술 새로 웃음이 흘렀다.

“말하라니까. 어차피 밖이야. 너 전화 올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

몇 번 더 안심을 시켜주고서야 목소리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사라졌다.

-일단 순찰은 했고, 딱히 이전과 별다른 점을 발견한 건 없어.

“그래? 오고 간 사람도 없고?”

-응. 혹시 몰라서 언덕 아래 슈퍼 CCTV도 봤는데, 늘 오가는 정원사 외에는 방문한 사람도 없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가 의심돼. 잘 꾸며져 있긴 한데, 묘하게 사람의 흔적이 없단 말이지.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그러려니 할 것 같아. 숲 깊은 곳에 있는 것도 그렇고.

태안에서 순경으로 일하고 있는 놈에게 종종 최혁준네 집 근처 순찰을 부탁하곤 했었다. 주변에 집조차 없는 곳이라 따로 말을 해 요청을 해둬야 했다. 그때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나온 예방 차원의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방 안까지 들어온 얼룩덜룩한 빛들과,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윽박과 고함 그리고 비명. 자신을 잡아갈 사람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최혁준은 차분했다.

‘태안으로 가. 우리가 서 있던 곳으로.’

숨을 고른 놈은 짧게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줄 수 있는 힌트는 그게 다라는 것처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최혁준의 집이었다. 최혁준과 내가 같이 추억할 곳은 많지 않았다. 학교일 리는 없으니 집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집이면 수사가 배로 까다로웠다. 수색영장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아직은 반장님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정보였다. 당장은 가볼 수 없는 곳이니 일단 평소처럼 순찰만 부탁해둔 거였고.

큰 기대를 하고 물은 게 아니었는데도, 잠깐 말을 멈춘 게 실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했는지 너구리가 사과했다.

-어떡하냐. 매번 실망시켜서.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냥. 나도 여기서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데 맨날 별거 없다고만 하니까, 좀 민망하기도 하고.

멋쩍게 웃은 놈을 따라 나도 웃었다. 그게 어쩌면 가장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아서.

“너구리 너도 참… 그대로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서서히 입에서 멀어지다 끝내 툭 떨어져 버리고 만 추억 속의 별명을 괜히 한 번 불러 봤다. 놀란 것처럼 잠시 말이 없던 놈이 킥킥대며 말을 받았다.

-나 그 별명 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은데, 실장?

실없는 농담을 몇 번 더 하다가 숨을 골랐다. 그러고 보니 너구리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오늘… 최혁준이 현장에서 검거됐어.”

잠깐의 침묵 후, 너구리가 물었다. 딱히 놀란 뉘앙스는 아니었다.

-어때?

비록 마약수사대에서 같이 일하지는 않았지만, 경찰로 일하는 놈에게는 종종 최혁준과 관련된 상황을 공유해왔다. 최혁준 집의 순찰을 부탁하면서 그런 얘기를 빼놓을 수 없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너구리를 떠올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던 어른스러운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고깃집 반대편에는 한참 전에 폐업한 듯한 미용실이 버리고 간 거울 조각이 남아 있었다. 들쭉날쭉한 사각형 모양으로 생긴 거울 속에서 너구리와 별다르지 않은 표정을 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담담히 답했다.

“엉망이야.”

-…그렇구나.

한때 자신을 괴롭힌 대상이 엉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 어떤 기쁨도 비치지 않는 어른이 되어버린 친구를 두고, 나는 최혁준이 영영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했다. 제때 울지 못하고, 제때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제때 어른으로 크지 못한 사람은 망쳐버린 것들을 되찾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상황을 봐야겠지만, 태안에 한번 내려갈 것 같아.”

-진짜?

“어. 내려가면 연락할 테니까, 하마랑 같이 밥 먹자.”

-셋이? 와, 하마 새끼 신나서 날뛰겠다.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너 이야기하는데.

“그래. 내가 살게.”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던 너구리가 통화를 끊기 전 덧붙였다. 야, 지훈이도 데리고 와. 나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통화하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불을 붙이지도 못하고 굽혀 앉은 무릎 위에 늘어뜨리고 있던 담배를 물다 말고 멈칫했다. 담배가 불을 붙일 수도 없게끔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유는 고개를 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처마 밖으로 나가 있던 손을 움찔한 것만으로도.

“…….”

눈이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일기 예보가 맞았다.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오랜만의 술자리를 즐기기 바쁜 팀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 대신에 핸드폰을 들었다.

내가 아닌 눈이 대신 그랬다는 핑계라도 대려는 듯, 핸드폰을 처마 밖으로 둔 채 번호를 찾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찾은 번호 위로 눈송이 하나가 미끄러지듯 안착했다. 나는 그 눈송이가 물로 변하기 전에 화면 위를 꾹 눌렀다.

새벽 2시이고, 이건 미친 짓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신호음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눈이 쌓이기도 전에, 이지훈의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는 망설이면서도,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자냐?”

뱉고 보니 멍청한 물음이었다. 자고 있다면 전화를 받지 못했을 거고, 전화를 받았다는 건 깨어 있다는 뜻이니까. 어이가 없는 건 이지훈도 마찬가지인지 헛웃음 소리와 함께 핸드폰 너머가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으니 이불을 밀치고 몸을 세워 앉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로, 이지훈이 부루퉁하게 답했다.

-니가 방금 깨우셨는데요.

“아… 그랬냐. 미안.”

술을 먹긴 했나 보다. 아니면 평생 안 해본 짓거리를 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든지. 열 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는 숨을 골랐다.

근데 있잖아, 이지훈.

“눈이 와.”

하 선배가 그러는데 올해 첫눈이래. 그러니까… 이 정도쯤은 욕심내도 되지 않나.

“그거 알려주고 싶어서.”

너랑 첫눈 정도는 한 번 같이 맞아보고 싶을 수 있잖아, 나도.

-여보세요.

이지훈은 영문 모를 소리로 대답했다. 통화를 다시 시작하듯 인사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능청스러웠다.

-누구세요.

“…뭐?”

-누구시길래 지선욱 흉내를 내시죠. 납치해서 협박이라도 하는 거면 좋은 말 할 때 돌려주세요. 대신 잡아갈 놈 집 주소 불러드릴게요. 참고로 걔는 퐁듀 기계도 있어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할 말을 잃은 채로 벙찐 나를 두고, 이지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편하게 웃는 소리를 듣는 건.

“어이가 없다, 진짜….”

나는 볼을 쓸어내리면서도 장단을 맞추듯 피식댔다. 내가 평소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놈만의 장난스러운 표현이 좋았다. 혹시라도 이상하게 느낄까 봐 걱정했는데, 차라리 이렇게 장난스럽게 넘겨주니 편했다.

웃음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이지훈의 말을 곱씹었다. 두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바로 어제가 금요일이었다. 원래였다면 놀러 온 강영수와 셋이서 저녁을 보냈을 날이기도 했다.

“퐁듀 먹었냐?”

-말도 마라. 지금도 속이 니글거려.

“영수 새끼 진짜 기계를 사 온 거야?”

-어. 그것도 어디서 기능 희한한 거 사 와서는, 좀만 긴장을 늦춰도 치즈가 아주 사방팔방으로 튀는데… 잘못하면 치즈한테 싸대기 맞는 희대의 명장면이 탄생할 것 같더라고. 이거 혹시 깜짝 카메라인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강영수는 옆에서 ‘치즈로 줄넘기 가능하겠다’ 이 지랄하고.

덤덤히 말하는 것치고 표현이 신랄했다. 강영수와 이지훈의 저녁 풍경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호들갑을 떠는 강영수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였을 이지훈을 생각하다 보니 웃음이 났다.

-기분 좋은 일 있냐? 오늘따라 웃음이 후하네.

그렇게 큰 소리로 웃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용케 들었는지 이지훈이 물었다. 신기해하는 듯한 놈의 반응에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그런가. 잠깐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마음 한편에 둔 짐 같았던 최혁준을 만났고, 최정호까지 함께 잡아넣을 수 있는 단서도 손에 넣었다. 작전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잘 마무리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게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오늘 밤 누굴 만났는지 모르기에 물을 수 있는 네 질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게 여겨지는 몇 안 되는 밤일지도 모르겠다고.

그걸 말할 수는 없어서, 말을 돌렸다.

“뭐… 그냥.”

-…….

“어쨌든, 나 야근이 아니라 회식 중이야. 곧 끝날 것 같은데. 갈 때 소화제라도 좀 사가?”

-소화제?

“속 안 좋다며.”

약국은 이미 닫고도 남았을 시간이니, 편의점을 좀 돌아봐야 할까. 주변에 편의점이 있었나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집에 소화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TV장 밑에 한번 봐 봐. 있으면 먹고 자고 없으면 메시지 해. 까스활명수라도 사갈게.”

-…….

“여보세요?”

-야.

“어?”

-너 오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몸조차 제대로 다 일으키지 못하고 어정쩡히 굳은 채로 침을 삼켰다. 나와 통화하며 잠기운마저 사라진 이지훈의 목소리는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처럼 들려서, 아까 그랬던 것처럼 얼버무리거나 그냥 말을 돌리는 걸로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눈이 와서인 거야, 아니면 새벽 두 시에 통화하는 사람한테는 원래 다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답하지 않는 나를 두고, 이지훈이 대신 고뇌하는 듯한 신음을 냈다. 놈은 나와 다르게 금방 결론을 도출했다.

-행운이든 기회든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나 너 올 때까지 안 잔다.

“…….”

-소화제는 됐으니까, 맥주나 좀 사 와. 깔끔하게 한 캔씩만 먹고 자자. 이 시간까지 야근에 회식까지 한 거면, 내일은 출근 안 할 거 아냐.

어쩌면 내일도 출근할지도 모르고, 행운이며 기회며 겨우 한 번 마음에 따라 행동한 걸로 듣기에는 거창한 것들임을 알았지만 나는 아니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더는 침묵에 기댈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았을 뿐이다.

“…그래.”

등 뒤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와… 택시 잡히겠나, 이거.’, ‘야야, 느그들도 나와서 눈 구경해라. 눈 온다, 눈!’ ‘지 경위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혼자만 눈 보기 있냐?’ 꼬부라진 목소리들이 골목이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외쳤다.

“어쭈. 누구랑 통화해. 어? 그때 그 의사분이야 혹시?”

담배를 헐렁하게 문 채로 내 등을 마구 두들기는 하 선배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핸드폰만 꽉 쥐고 있었다. 힘을 푼 순간 놓쳐버릴 것 같은 건 눈 쌓인 골목의 풍경뿐만이 아니라서.

평소였다면 짧은 새에도 입 안에서 조각나고 또 해체되길 반복하는 단어들이 정제되어 뱉을 수 있는 깨끗한 말이 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지면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눈을 한참 보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네 말처럼 눈이 올 때 전화를 걸어본 게 처음이라서일까.

나는 참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거울 속에 촌뜨기 같은 남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이 어지러운 밤이 남긴 홍조를 지우지도 못한 채로, 태어나서 처음 눈을 마주한 사람처럼 얼어 있는 내가.

선배들의 걱정처럼 택시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비닐봉지를 든 손에 감각이 거의 없어질 때쯤에야 교차로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을 놓고 사라지는 모범택시를 잡았다. 눈은 점차 그쳐 가는데도, 영하로 내려간 온도 때문인지 그새 얼어붙은 일부 도로가 꽤 미끄러웠다. 기사 아저씨는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차를 천천히 몰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급했다. 20000이라는 숫자를 띄운 미터기를 바라보던 나는 배터리가 없다는 이유로 한참 전 꺼져버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럴 거면 오래 안 걸린다는 말이라도 하지 말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택시는 평소에 차로 출퇴근하는 시간의 두 배를 걸려서야 동네에 진입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편의점 로고를 확인한 나는 원래 말했던 목적지 대신 그 앞에서 내리겠다고 말했다. 꾸벅대며 졸던 아르바이트생이 비몽사몽인 얼굴로 맥주의 바코드를 찍었다. 편의점 벽에 붙은 시계는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에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훈과 통화한 지 한 시간 반이 넘은 후였다. 기다리겠다고 하긴 했지만, 이지훈도 지금쯤이면 아마 다시 잠들었을 것이다. 일로 인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들쭉날쭉한 것 때문인지, 수면 시간만은 칼같이 지키는 놈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택시에서 내릴 때만 해도 잔뜩 서두르던 걸음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편의점에서 오피스텔까지는 걸어서 오 분 정도 걸렸다. 오피스텔까지는 하나의 횡단보도만 더 건너면 됐다. 사 온 떡볶이는 어쩌지. 영업을 종료하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잔뜩 담아주었던 떡볶이와 서비스로 받은 순대, 튀김까지 생각하니 괜히 손이 무거웠다.

“…아.”

이마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올렸다. 철물상의 파란 천막 아래에 서 있다는 걸 안 순간에는 녹은 눈이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도로 위에 차라고는 없는 시간대의 신호등은 노란빛을 간헐적으로 내뿜고 있었다. 빨간빛도, 푸른빛도 아닌 색은 애매하기 짝이 없어서 보행자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보류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좌우를 살피는 것 대신 앞만 보고 걷던 걸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췄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는데도, 걷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지훈?”

불이 꺼진 택시 정거장에 홀로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것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어둠 속이었는데도, 남자는 몸을 일으키기부터 했다. 회색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 위로 까만 패딩을 껴입은 차림의 사람이 점차 가까워졌다. 허공으로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숨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까만 장우산을 쥐고 있는 길쭉한 손 마디마디가 빨갛게 얼어 있는 것도. 기다림의 흔적을 잔뜩 달고 앞에 선 남자가 익숙하게 말을 붙였다.

“왜 거기서 걸어와. 택시가 여기까지는 못 들어오겠대?”

내가 걸어온 길을 가늠해보려는 듯, 뒤를 기웃대는 놈의 빨개진 볼을 홀린 듯 보았다. 한 시간 전에 거울을 통해 보았던 나와 비슷한 꼴을 하고 서 있는 놈을.

몰라도 좋았을 텐데. 그 이유가 꼭 사랑은 아니더라도, 이지훈은 나를 기다린다고 한참 전부터 추운 밖에 나와 기다릴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이건 또 뭐야. 맥주 두 캔만 사 오라니까 뭘 또 이렇게 사 왔어.”

순식간에 손이 가벼워졌다. 봉지를 뺏어간 놈이 안을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그 움직임을 따라 후드 모자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평소보다 정돈되지 않은 생머리가 아래로 쏟아지듯 흔들렸다. 한참 전에 씻었을 놈에게서는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나는 그 모습과 향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덕분에 알게 됐다. 철물점 간판 아래 파란 천막에서 녹은 눈이 떨어진 게 아니라, 한참 전에 그친 게 아니라…

“…눈 온다.”

다시 오기 시작한 거였구나. 어쩌면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나만 그걸 이제야 알았구나. 이지훈의 머리카락 위로 하나둘 내려앉는 눈을 보는 순간에야.

“그래? 그친 것 같았는데?”

이지훈이 아까 내가 그랬듯이 하늘로 눈을 올렸다 내린다. 애매하던 놈의 표정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허물어졌다. 그 궤적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이지훈이 손을 올렸다. 허공에 들 때만 해도 주춤대던 손은 어느 순간부터 갈 곳을 아는 것처럼 자연스레 움직였다.

볼을 가볍게 쓸 듯 지나가는 이지훈의 손가락. 마치 잠깐 앉았다가 사라진 눈송이를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그러게.”

“…….”

“눈 오네.”

나는 이지훈을 앞에 둔 채로 눈만 깜빡였다.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이 물로 변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얼어붙은 나와 눈을 맞춘 이지훈이 멈칫한다. 방금의 짧은 스킨십이 일주일 만에 우리가 처음으로 살을 맞댄 순간이라는 걸 의식한 것처럼. 잠깐 답지 않게 어색한 표정을 짓던 놈은 그러나 웃는다. 그 사실에 대해 말을 얹기보다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게 낫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오늘도 나쁜 놈들 많이 잡고 왔어?”

눈썹과 이마 사이. 어둠 속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이지훈의 흉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나는 호흡했다. 내가 가진 수많은 흉터 중에서도,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흉터는 너를 향한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그래.”

스쳐 가는 고통이 남긴 흉터는 보통 언젠가는 사라지던데, 그래서 이 흉터는 영영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스쳐 가는 고통 대신에 사랑만이 남은 것 같다.

누구보다 쉽게 내 안의 질긴 마음을 소환해내는 흉터 앞에서, 나는 먹먹히 뱉었다. 너를 안 후 내가 제일 처절히 배운 것을 복습이라도 하듯이.

“다녀왔어.”

또다시 네게로. 염치도 없이.

* * *

들어선 집은 생각보다 환했다. 왜인가 했더니 부엌으로부터 새어 나온 희미한 빛이 현관문까지 뻗치고 있었다. 이지훈이 집을 나오기 전에 미리 불을 켜두고 나온 모양이었다. 뺏어간 비닐봉지를 든 채로 앞장선 놈이 자연스럽게 부엌을 향해 발을 트는 걸 보다 고개를 돌렸다. 강영수가 왔다 갔으니 한바탕 엉망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집은 예상외로 깔끔했다. 심지어 아침에 보았던 것보다 더 깨끗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물 흐른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식탁 유리까지 확인하니 누구 짓인지 대강 감이 잡히긴 했다.

“강영수 가기 전에 청소시켰냐?”

“그럼. 어지른 놈이 청소해야지, 누가 해?”

대답이 1초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강영수는 제가 어질러놓은 것들을 치울 염치는 있어도, 이렇게 제 흔적을 싹 감출 만한 청소 능력을 갖춘 놈은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 쓸고 닦은 건 이지훈의 감독이라 쓰고 감시라고 욕했을 간섭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패딩부터 벗어 의자에 걸쳐둔 놈은 무언가를 찾듯 싱크대 위의 찬장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등 뒤의 내가 거실을 둘러보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설명을 덧대기도 했다.

“구슬려서 화장실 청소도 같이 시키려고 했는데, 눈치챘는지 개삐져서 갔어. 파자마도 준비 안 한 새끼가 일만 존나 시킨다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퐁듀 기계를 챙겨 떠났을 강영수가 상상되어 웃겼다. 피식대며 부엌과 거실의 경계선에 있는 벽에 잠깐 기댔다. 자연히 이지훈의 뒷모습에 시선이 멎었다.

“아, 분명 봤는데….”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휙휙 돌려대는 이지훈은 찾는 게 있는 눈치였다. 나조차 무엇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찬장 이곳저곳을 들추어보는 것만 봐도 그랬다. 미닫이장 앞에 서서 기웃대다가 아래 칸을 보려고 허리까지 굽히는 놈을 멍하니 보았다. 문득 이 밤 자체가 꿈 같다고 생각했다. 이지훈과 눈이라도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이지훈은 눈이 없는 곳에서도 나와 함께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난 몇 주 내내 그랬는데, 그 사실이 이렇게 닿아온 건 처음이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이지훈이 있다니. 그것도 내 집에서 함께.

감상이 길었던 모양인지, 뒤돈 이지훈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도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어정쩡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친 이지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거기 서서 뭐 하냐? 안 앉고.”

이지훈의 손에 파티에서나 쓸 법한 큰 접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언제 사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니, 아마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누군가를 초대할 일도 딱히 없고, 음식을 그렇게 많이 덜어 먹을 일조차 잘 없는 내가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는 다시 꺼내 본 적 없는 물건일 터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냥.”

“…….”

“이렇게 보니까 네가 집주인 같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들여본 적 없는 공간인데, 왜 너한테는 뭐든 그렇게 쉬운지. 집이든, 마음이든 늘 깨끗하게 정리하는 사람을 두고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갖는 내가 문제겠지만.

자조하듯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의자를 빼 앉는 것까지 지켜보던 이지훈이 시선을 회수했다. 봉지 안에 든 떡볶이며 순대를 접시 위로 부으며 심드렁히 덧붙이기도 했다.

“뭘, 새삼스럽게. 오늘만 해도 너 없이 이 집에서 네가 초대한 불청객이랑 둘이 퐁듀 파티도 했는데.”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피식대기만 했다. 이지훈이 내 패딩을 눈짓했다.

“근데 그 패딩은 언제까지 입고 있을 건데? 안 덥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었다. 후드티를 위로 들어 올리듯 끌어 올려 머리를 가볍게 쑥 빼내는 놈의 몸짓을 따라 안에 입고 있던 흰 티셔츠의 끝이 덜렁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온 뒤 추위를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딱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발을 대고 있는 부엌 바닥부터 시작해 집 안에 훈기가 도는 걸 보니 나를 마중 나오기 전에 난방도 미리 켜둔 모양이었다. 나는 후드티를 옆에 걸어 두자마자 돌아온 시선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패딩 안에 입고 있던 옷을 아직 갈아입지 못했다. 보라색 셔츠의 팔 부분이 아직 피에 젖어 있을지도 몰랐다. 코피 몇 번 흘렸다고 병원에 끌고 가려는 놈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맥주 한 잔만 하고 말 건데, 뭐.”

“그래도 편하게 먹으면 좋잖아. 보일러 온도 좀 더 올려줘?”

패딩 차림의 내가 불편해 보였는지 한 번 더 묻는 놈에게 됐다고 말하며, 나는 옆에 있던 까만 봉지를 끌러 사 온 맥주캔들을 꺼냈다.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차가웠다. 나는 개중 쥐어 봤을 때 조금 더 손을 얼얼하게 만든 맥주캔을 따서 이지훈 쪽으로 밀어줬다.

“자.”

당장 받아들 줄 알았던 이지훈은 그러는 대신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먼저 한 입을 들이켠 내가 맥주캔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그랬다. 왜? 내가 묻고서야 놈이 느리게 손을 뻗어 맥주를 가져갔다.

“근데 너 술 더 마셔도 되겠냐?”

뜬금없는 질문을 툭 뱉은 놈의 시선이 내 얼굴 곳곳을 훑고 있었다. 마치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디 가서도 받아본 적 없는 걱정에 헛웃음부터 났다.

“왜. 그만 먹어야 할 것 같아?”

이지훈과 나는 주량이 비슷했다. 둘 다 한계치까지 가보자고 덤빈 적은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서로가 웬만하게 먹어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내 등을 무겁게 짓누르는 건 취기보다는 피곤함이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내 타박에도 말을 물리는 것 대신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가를 슬쩍 찡그리기만 했다. 손톱마저 깔끔히 정리된 손가락이 내가 미리 따 놓은 캔 따개 주위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다기보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맥주 주위에서 배회하던 이지훈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맥주를 짧게 들이켠 놈의 얼굴에서는 잠깐 엿보였던 혼란스러움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좀 헷갈리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할 때마다 그렇게 웃음이 많아지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야말로 피식대고 있으면서. 노란빛의 조명이 비추고 있는 이지훈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손을 들어 얼굴 이곳저곳을 쓸어보기도 했다. 뜨겁다고 할 수도 없고, 차갑다고 할 수도 없는 살갗의 미지근한 온도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지훈이 느낀 내 감정의 온도는 늘 이 정도였을까. 사실 그러길 바라고 살았던 것 같다. 우리의 살은 생각보다 아주 약해서, 조금만 온도가 예상보다 높아지거나 혹은 낮아지면 그 즉시 이상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서기부터 하니까. 어떻게든 놈에게 그런 대상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의 한 톨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던 나날들이 눈앞에 스쳐 갔다.

허탈한 웃음부터 나왔다.

“글쎄, 보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난 잘 모르겠는데. 웃는 건….”

“…….”

“그냥 웃고 싶었나 보지.”

그게 뭐 별말이라고 괜히 목이 탔다. 내가 맥주캔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팔짱을 낀 채 등을 의자에 기댄 놈은 나를 관찰이라도 하듯 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뭐가?”

“그냥. 함께한 세월도 세월이고, 난 너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지훈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부엌부터 시작해 거실까지 천천히 훑던 놈의 시선이 다시 맥주캔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집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것들이 꽤 있는 것 같아서.”

“…….”

“너 잠꼬대하는 것도 그렇고.”

이지훈은 말하면서 그 사실을 다시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를 곱씹는 중인지, 현실을 받아들이는 중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너 그때 미국에 놀러 왔을 때만 해도 잠꼬대 안 했거든.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안 했었던 것 같고, 고등학생 때는 확실히 안 했었고….”

놈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비행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까지도 반추해보듯 잠깐 말이 없는 놈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내가 추억하는 것과 이지훈이 추억하는 것의 교집합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서.

가령 오늘 같은 경우도 내가 이 밤으로부터 추억할 건 배우부터 시작해 수많은 인원이 동원됐던 작전도, 십일 년 만에 본 최혁준도 아닐 것이다. 대신 이지훈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던 택시 정거장, 흘러내린 후드 모자 사이로 드러난 머리카락 위에 내리던 눈송이 하나.

그리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마음속에서는 한 번도 흐려진 적 없는 흉터를 본 순간 조금이나마 풀어지던 응어리 같은 것들이 남겠지.

급식실에서 최혁준과 싸운 날, 이지훈의 얼굴에는 여러 개의 멍과 생채기가 생겼다. 터진 입술과 볼의 멍은 점차 사라져서 나중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는데, 눈썹 끝머리에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다. 최혁준이 날카로운 식판 끝으로 내리친 부분이었다. 눈썹에 가깝게 붙은 흉터인 데다가 가로 폭이 짧은 흉터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가끔은 이지훈마저도 그런 흉터가 있는 걸 잊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당사자도 아닌데, 나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가끔은 그 흉터와 눈이 스치기라도 할까 봐 시선을 피했던 적도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럴 때마다 다짐했다. 다시는 이지훈의 인생에 그런 손톱만큼의 흉터가 나는 일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게 내가 놈 앞에서 조금이나마 더 떳떳할 수 있는 법이라고 날 달래면서.

홀린 듯 그 흉터를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나는 그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눈썹….”

이지훈이 눈만 들어 날 확인했다. 나는 말을 고르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어 뱉었다.

“이제는 안 아파?”

평생 못 할 것 같았던 말이 목을 넘어간 순간에야, 가슴에 달고 있던 무게 추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짐을 느꼈다.

“…눈썹?”

이지훈이 생뚱맞은 말을 들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나를 바라보던 놈은 내 시선이 박힌 곳을 알아챈 순간에야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거?”

이지훈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흉터를 기억하고 묻는 내가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흉터 부위를 괜히 힘주어 슥슥 문지르기도 했다. 마치 이렇게 마구 만져대도 아프지 않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난 또 무슨… 야, 이게 언제 적 일인데. 아프기는커녕 거기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이지훈은 변하지 않았다. 흉터를 기억하진 못해도, 내가 그 흉터를 기억하는 이유는 금방 알아채고 별것도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놈이 울타리 안의 사람을 지키는 방식이란 늘 그랬다.

“고등학교 다닌 지도 벌써 십 년은 넘지 않았냐? 난 이젠 담임들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더라. 그때 몇 반이었는지도.”

문제는 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포크로 떡볶이 하나를 쿡 집으며 중얼대는 놈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흉터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아닌 척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그때의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처럼. 놈의 추억 속에 자리 잡지 못한 것들을 대신 곱씹던 내가 입을 연 건 어쩌면 충동이었다.

“7반.”

“…….”

“3학년 때만 5반이었고.”

멈칫한 이지훈이 고개를 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날 보는 놈은 나를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혹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주친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늘 나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었던 마음에 처음으로 면죄부를 줬다. 말을 물릴 마지막 기회를 주듯 깨물고 있던 입술이 힘없이 풀렸다.

난…

“기억해. 네 사물함 번호까지도.”

눈가를 왈칵 찡그리는 순간에야, 내가 선을 넘었음을 알았다. 이지훈의 말을 듣고 보일러 온도를 더 올려달라고 했다면, 취했냐는 말에 그렇다고 거짓말이라도 했다면, 고등학생 때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맞장구치듯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면.

평소에 잘하는 그런 것들을 익숙하게 했다면 이런 순간이 오진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막아버린 퇴로 앞에 멍청히 서서는 길에 남은 한 사람을 응시했다.

눈썹에 난 흉터가 아닌, 조금만 시선을 내려도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매번. 너를 찾아 눈을 굴리고, 너의 흔적을 쫓아 발길을 돌리고,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 나는 기억해.

“매번 숨부터 참았었어.”

가끔은 내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사람이 없는 복도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너를 훔쳐보던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달라지긴 했을까. 막 하나 없이 건너편에 앉은 이지훈은 여전히 평생을 지나도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만 하는데.

버릇처럼 조소하며, 나는 이지훈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쓸어내렸다. 찰나에 입술 새로 흐른 한숨이 뜨거웠다. 내가 뱉은 숨에 내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들킬 것 같았고.”

“…….”

“네 옆에 친구로도 남지 못할 것 같았거든.”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나길 바라는 사랑이 있다. 그런 찌그러진 형태의 마음을 유지하는 법을 누군가 가르칠 리 없다. 알아서 독학하고 습득했다. 네가 이 마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혼자 끝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려면, 이 마음이 절대 닿을 수 없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했다.

막 움트려는 씨앗을 짓밟았다. 그래도 꿈틀꿈틀 올라오는 마음을 보고서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아래에 처박았다. 그 위를 덮은 흙을 일부러 들추어보지 않는다면 절대 들킬 리 없는 곳. 함께한 세월을 흙처럼 덮으면, 드러난 겉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우정이란 화분으로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지훈이 퍼주는 애정을 그 화분 위로 쏟을 때면 세뇌라도 하듯 수십 번을 말했다. 이건 우정이라고. 준 놈은 꿈도 꾸지 않을 것들을 피우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애정은 물과는 성분부터가 달라서, 시간이 지나도 화분 아래 구멍으로 빠지기는커녕 그걸 곧이곧대로 흡수해 화분만 무거워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화분이 너무 무거워져 버렸다. 옮길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는 기어코 흙을 뚫고 나온 빨간 마음을 마주하게 됐다.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넌 절대 수면 위로 오를 수 없다고 수백 번 말했는데도 나를 비웃듯 척박한 땅을 타고 올라온 질긴 뿌리를 본 순간에는 인정하게 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구나. 애초에 한 화분 안에서 그걸 같이 키운다는 생각부터가 멍청했다. 그래서 화분을 깨뜨렸다. 눈속임용처럼 심어둔 우정이란 뿌리도 같이 버려야만 질긴 사랑도 끊어낼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어떤 약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

우정만으로도 무거운 화분을 든 채로 나를 원망하던 놈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잠깐 제 화분을 내려놓은 놈이 깨진 화분 조각이라도 주워 다시 맞추려는 것처럼 몸을 굽힐 때마다 파편에 베이기라도 할까 봐 입 안이 말랐다. 놈을 막아서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네가 힘들게 주워서 다시 맞춘다 해도 결코 네가 원하는 형태로 조립될 수는 없어.

왜냐면… 내가 해 봤어. 해 봤고 장렬히 실패했어.

“그게… 내가 널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깨진 화분 사이로 함께한 세월이 흙처럼 흩어졌다.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것도 있고, 이지훈은 모르고 나만 아는 것들도 있다. 나는 이 새벽에서야 조각을 주우려는 이지훈 옆에 앉는다.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조각을 줍고 있는 놈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지훈.”

서 있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던 놈의 고개가 옆에 앉은 내게로 돌아오는 환영을 본다. 내가 말을 이을 때마다 흔들리는 눈을 보며 이지훈에게 진작 이렇게 설명했어야 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마음을 낱낱이 해석해 풀어놓을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그냥 화분을 깨뜨리고는 그 사실이 감당 안 되는 놈처럼 서 있기만 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 나란히 서서 같은 토양과 햇빛을 주고 키웠으리라 생각한 놈에게는 내가 자신의 앞에서 그것을 보란 듯이 깨뜨린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을 텐데.

“미안해. 버림받는다는 기분 느끼게 해서.”

주우려는 이지훈의 마음이 뭔지 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럴 수 있다고 해주고 싶다. 어쩌면 나보다 더 간절히 이지훈의 말을 들어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데 깨진 화분은 내가 그럴 수 없게 한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은 이지훈에 대한 부채감을 드디어 덜어낸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뿌리는 웃기지 말라고 나를 비웃는다.

“나를 얼마든지 원망해. 욕해도 되고. 대신…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하면 안 되냐.”

“…….”

“버린다고 말하면 네가 꼭 뭘 잘못해서 내가 두고 가는 것 같잖아.”

그런 부채감이 이지훈을 사랑하는 근간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최혁준을 내 손으로 잡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 그 순간이 되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이지훈 옆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도 몰라.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이지훈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 최혁준이라고 기억나냐고, 걔가 네 얼굴에 남긴 흉터를 내가 돌려줬다고. 그때 네가 내게 보여준 거대한 우정을 내가 조금이나마 갚았다고.

눈 속에서 걸어오는 이지훈을 보는 순간 알았다. 난 평생 그러지 못하겠구나. 왜냐면 이지훈은 내게 한 번도 우정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이렇게 한 이유도 결코 우정일 수는 없었다. 우정만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우기기라도 하려면 내리는 눈을 보자마자 이지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됐고, 네가 불 꺼진 새벽의 거리에서 날 기다렸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면 안 됐다.

마지막 희망조차 부서진 자리에서 나는 내게 남은 온전한 사랑만을 곱씹었다. 더는 흙을 덮어 가릴 수도 없는 뿌리를 쥔 채로 서서 쉰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눈가를 처음으로 노출한 채로, 이지훈 곁에 있기 위해 몇 겹이고 두르고 있던 방패와 갑옷을 모두 버렸다.

“그냥 내가 너한테 모자라서.”

더는 못하겠어. 널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거.

“관계를 끊는 것도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라고.”

“…….”

“그래서 그런 거라고… 비웃고 넘어가.”

마음을 모두 쏟아낸 탓인지 허했다. 나는 그런 허기를 처음으로 느낀 사람처럼 뭐라도 채우려고 맥주캔을 쥐었다. 빈 캔이 내는 공허한 소음을 듣고서야 이 밤이 내게 쥐여준 마지막 고해성사의 시간도 끝났음을 깨달았다. 옆에 있는 맥주캔들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선욱.”

여전히 날 낯설어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도 이지훈이 나를 붙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무는 걸 보니 일단 나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이름부터 부르고 본 것 같았다. 먼저 시선을 끊은 건 나였다. 술과 이 밤을 핑계로 나야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낸 거라지만, 갑자기 그것들을 흠뻑 뒤집어쓰게 된 이지훈에게는 느닷없을 것이다. 어차피 더는 할 말도 없긴 했다. 나는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취한 거 맞다, 나. 더 먹으면 안 될 것 같고.”

“야.”

“치우는 건 내일 하고 그냥 자자. 늦었다.”

의자가 끼익 끌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나는 덩달아 일어선 이지훈 쪽을 부러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깜깜했다. 닫힌 문 앞에 서서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지훈 앞에서 그렇게 마음을 까뒤집듯이 내놓은 건 처음이었다. 후련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미친 새끼.”

한숨과 함께 자학하듯 중얼거린 후에야 겨우 베드 테이블 위의 스탠드를 켰다. 방 안의 풍경은 아침에 나가기 전과 똑같았다. 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무 시간 가까이 깨어 있는 몸이 무거웠다. 근육통부터 시작해 미뤄둔 피로감까지 한 번에 몰려와 눈앞을 흐리게 했다. 초점을 잡으려고 애쓰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일단 패딩부터 벗었다. 자려면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아….”

패딩에서 팔을 빼내다가 신음이 흘렀다. 상처라도 스쳤는지 순간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아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래를 내려다봤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서야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진 얼룩이 비로소 보였다. 짐작 가는 상처 위로 대충 감아뒀던 붕대가 거의 다 풀린 채로 헐렁하게 걸려 있었다.

정말 취하긴 했었던 건가. 덧난 상처에 비해 느낀 아픔이 너무 소박했다. 감상은 그뿐이었다. 다른 데에 정신을 놓는 동안 참을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친 적도 있었고, 낫는 속도가 느리긴 했어도 끝내 아물긴 했으니 이것도 그렇겠지. 일단 셔츠부터 벗을 작정으로 붕대를 대충 벗겨냈다.

셔츠의 세 번째 단추를 풀어내려다 말고 멈춘 건, 발소리가 들려서였다. 내가 문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야. 미안한데 나랑 이야기 좀 더….”

조심스럽지만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표정으로 들어서던 이지훈이 제자리에 멈췄다. 상황을 파악한 내가 팔을 이미 아래로 내린 후였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라도 들킨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얼굴을 비껴간 놈의 시선이 내가 숨기듯 뒤로 뺀 팔에 박히는 게 보였다.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날 보던 표정이 걷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지훈.”

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놈이 움직인 뒤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에 앞에 선 놈이 몸을 휙 잡아 돌렸다. 방심한 찰나, 신음이 흘렀다.

“윽….”

나는 급하게 입술부터 말아 물었다. 이지훈은 내가 피하지 못하게 앞을 막아선 채로 다치지 않은 내 팔뚝을 꾹 쥐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야, 이거 놓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잇던 나는 멈칫했다. 잡힌 팔뚝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채서였다. 인정사정없이 쥐어 잡힌 팔이 아프긴 했지만 팔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너… 이거 뭐야.”

핏기가 없는 얼굴을 마주했다. 이지훈은 손만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핏발이 선 눈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오른쪽 팔과 내 얼굴을 오가는 시선이 불안했다. 놈이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온몸으로 뿜어내는 감정들이 팔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얼어붙듯 멈췄다. 그러자마자 놈이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뭐냐고 묻잖아, 이 씨발!”

윽박지르는 와중에도 이지훈은 손을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팔뚝을 쥔 힘만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를 결박이라도 하듯이 세졌다. 이지훈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힘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있던 몸이 놈의 손아귀 안에서 쉽게 흔들렸다.

“대답 안 해?”

윽박지르듯 묻는 놈의 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 정도로 순간 긴장했다. 침을 삼킨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에 들어간 힘부터 뺐다. 걱정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내가 다쳤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한 것 같은 이지훈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일단… 이거부터 놔. 설명해줄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하며 다친 팔을 들어 이지훈의 가슴께를 밀어냈다. 뻐근할 정도로 올라오는 아픔을 참으며 힘을 준 보람이 없이 놈은 쉽사리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 밀려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제자리에 버틴 채로 나를 쳐다봤다. 오히려 내 몸이 침대 쪽으로 휙 밀려났다. 자연히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지훈! 좀 진정하라고!”

이지훈이 그제야 멈칫했다. 피에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내 손으로 옮겨갔다. 다치지 않은 팔을 쥐고 있던 힘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 나는 빠르게 말했다.

“보이는 것만큼 심각한 거 아니야. 일하다가 예전에 다쳤던 상처가 좀 벌어졌어.”

그래, 셔츠가 피로 물들어 있으니 놀랄 수는 있다. 나와 달리 현장에서 이런 일을 자주 접하지 않는 이지훈은 큰일이라고 여겨 겁났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 번도 놈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집에 온 거고. 일단 자고 일어나서도 아프면 그때 병원 갈….”

“…일하다가 다쳤다고?”

이지훈의 시선이 드디어 내게 고정됐다.

“일하다가 이딴 꼴이 됐다고?”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되묻는 이지훈의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다. 이지훈은 나를 한 번 더 훑었다. 피에 젖은 셔츠에 다시 시선이 꽂힌 순간, 놈이 중얼대듯 뱉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근데 네 팀 사람들은 이런 너한테 야근을 시키고 회식을 했어?”

“…….”

“이걸 보고… 이 꼴을 보고도 그랬다고?”

이지훈이 답을 묻듯 날 보았다. 흥분을 떨치지 못한 놈의 가슴팍이 여전히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지만, 그래도 아까와 달리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것처럼 이를 악물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궁하듯 떨어지는 시선에 고개를 틀어 놈을 피했다. 따지자면 이지훈한테 잘못한 건 없는데도, 창백하게 질린 채로 바라보는 얼굴을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다들 몰라. 내가 일부러 말 안 했어.”

“…….”

“별일도 아닌데 괜히 걱정 끼치기 싫어서.”

이지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침묵이 불안했다. 놈의 눈을 피해 아래로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팔이 가벼워진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놓아준 이지훈은 두 손을 늘어트린 채로 날 보고 있었다. 할 말을 모조리 뺏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놈이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댔다. 꺼내기조차 어려운 말을 하는 것처럼 표정이 괴로워 보였다.

“그럼 나한테는?”

까만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몇 톤이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말할 생각이 있긴 했냐?”

물으면서도 이지훈은 이미 답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보고 해탈한 듯 헛웃음을 짧게 친 놈은 다음 순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씨발, 진짜….”

이지훈은 욕설을 뱉는 와중에도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손아귀의 힘조차 조절하지 못하고 얼굴을 아래위로 벅벅 거칠게 문댈 때마다 놈의 눈가며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가 다시 하얘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지훈이 그러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말리지도 못한 채로 숨을 죽였다. 이렇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놈의 모습은 우리가 더 어렸을 때조차 잘 보지 못해서 낯설었다. 상황을 설명했고, 어느 정도는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여전히 화나 있었고, 그걸 감추는 방법마저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감조차 안 잡혔다.

다시 고개를 든 이지훈의 얼굴이 온통 붉었다. 달아오른 눈가 속의 눈동자가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마저 성큼 좁히는 놈을 응시했다.

“벗어.”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을 꺼내놓은 이지훈은 태연했다. 차분하게 돌아온 표정은 얼핏 사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한 말이 아니란 건 이미 단추 세 개가 풀린 내 셔츠 앞섶에 꽂힌 시선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이지훈이 반복해서 명령했다.

“셔츠 벗어 보라고.”

“…이지훈. 적당히 해. 당황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당황?”

이지훈이 코웃음 치며 말을 끊었다. 잠깐 비틀렸던 차가운 표정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딱 잘라 말했다.

“당황한 게 아니라 널 안 믿는 거야. 이딴 몸 상태로도 나한테는 맥주 먹자는 말밖에는 할 게 없다는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더 믿어.”

“…….”

“별일 아닌지 맞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테니까 벗어.”

이지훈은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멍해진 나 대신 거리를 좁힌 놈이 주저 없이 손부터 위로 올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못 하겠으면 내가 해줘?”

대답하거나, 혹은 밀쳐낼 틈도 없이 놈이 셔츠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양쪽으로 당겼다. 단추 마감이 엉망인 싸구려 셔츠였다. 이지훈이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도 셔츠의 단추들이 모두 튕겨 나갔다. 투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이지훈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로 내 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을 뿐이다. 한참 전에 생겨 노랗게 변한 멍부터 시작해 오늘 최혁준과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들었을 푸르고도 붉은 멍이 남은 복근을 지나 갈비뼈 부근에 자리한 길고 얇은 흉터까지 놈의 시선이 흐르듯 움직였다. 그 모든 것들이 이지훈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것들임을 깨달은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손끝을 주춤하며 몸을 가리듯 피했다.

“넌….”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뱉을 것처럼 미세하게 들썩이던 이지훈의 입술은 어느 순간 미동조차 없었다. 이지훈은 한참 후에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탠드가 뿜는 노란빛으로부터 멀어진 탓인지 이지훈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마저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간 것 같았다.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근육들을 모두 잠재운 것 같은 핏기 없는 냉한 얼굴이 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을 맞추는 것같이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일자로 굳게 다물린 놈의 입술에 시선을 뒀다.

“병원 갈 거니까 옷 입어.”

“…….”

“먼저 내려가서 아래에서 택시 잡고 있을 테니까, 내가 전화하면 그때 내려와.”

이지훈이 몸을 돌리는 걸 보고서야 무슨 말인지 온전히 이해했다. 나는 급히 몸을 움직여 이지훈을 붙잡았다.

“지금 나가 봐야 밖에 택시 없어. 이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불과 한 시간 전에 겪었던 도로 사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밤새 쌓였던 눈이 얼고 심지어 그 위로 미끄러운 눈까지 덮인 새벽 도로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았다. 택시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은 눈이 안 오는 날조차도 새벽에는 택시가 자주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지금 나가 봐야 한참 헤매고 고생만 할 거였다.

내가 어깨를 잡자마자 멈춰 선 이지훈은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놈의 시선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쥐고 있는 문고리에 고집스레 박혀 있었다.

“지선욱.”

무섭도록 가라앉은 목소리로 뱉은 이지훈이 어깨를 비틀어 내 팔을 치웠다.

“나 참고 있어. 건들지 마.”

오래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방금까지 놈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던 손끝이 아릿했다. 그사이 놈이 내뿜는 냉기가 옮기라도 한 것처럼.

“서언대학교병원이요.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친구가 다쳐서요.”

“어이구.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뛰어왔구먼. 알겠어요. 내가 바퀴 살살 달래서 잘 가볼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이지훈이 택시를 잡는 데는 15분이 걸렸다. 옷을 입고 바로 따라 나간 나를 본척만척 뛰기부터 했던 놈은 세 블록이 떨어진 아파트 정문에서 나오던 택시를 기어코 잡아 나를 그 안에 앉혔다. 뒷좌석에 떠밀리듯 앉은 나는 보조석에 앉은 이지훈의 빨갛게 얼어붙은 귀를 보았다. 이지훈의 고개는 택시에 탄 후 앞으로 고정되어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지훈의 옆태를 거울처럼 비추는 차창에서마저 이지훈은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지훈이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 분노의 조각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새벽의 응급실, 그때와 달리 유혜은은 없었다. 누울 곳만 있으면 당장 잠이 들 것 같은 피곤한 낯만은 비슷한 남자 의사가 내 팔의 상처를 보더니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한 것처럼 상처가 벌어졌다고 했다. 환부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 같으니 일단 소독 후에 응급 수술을 진행하자고도 했다. 술을 먹었다고 하니 마취가 잘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괜찮겠냐고 묻는 의사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독약을 부어 따끔거리는 환부보다는 옆에서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는 이지훈이 더 신경 쓰였다.

간단한 수술이라고는 해도 공간을 옮겨서 진행해야 했다. 보호자는 동행할 수 없었다. 자리를 떠나기 직전에야 이지훈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시선이 내가 아닌 의사를 향해 있었다.

“쇄골 근처도 한번 봐주세요.”

“아… 그러네요. 여기도 다치셨구나. 이따 같이 처치해드릴게요.”

아까 최혁준이 들고 있던 칼이 스쳤던 부분이었다. 나조차 잊고 있던 상처를 언제 보았는지 묻기도 전에, 이지훈은 끝끝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놈이 문을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주먹을 쥐었다 펴는 의미 없는 행위를 멈췄다.

수술은 빠르게 끝났다. 의사의 말처럼 마취가 잘 들진 않았지만,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몸에 남아 있는 아직은 덜 아문 몇 개의 상처들 위로 연고를 바르고, 흉부 CT도 찍었다. 뼈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은 순간에는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지훈에게 걱정할 거리를 더 안기고 싶지 않았다. 큰 거즈를 테이프로 붙여 고정해둔 상처 위로 옷을 조심히 껴입었다. 원무과에서 내 이름을 들은 직원이 카드를 돌려주며 안내했다.

“아까 보호자분이 오셔서 이미 정산하셨어요.”

나는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를 대신해 그런 과정을 모두 처리했을 놈을 찾아야 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게, 이지훈은 병원 로비에 있는 원무과에서 코너만 돌면 보이는 구석 화장실 앞에 앉아 있었다. 환자나 혹은 보호자들을 위해 마련되었을 긴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인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놈은 잠깐 눈을 붙이지조차 않은 것 같았다.

“…….”

아침이라고 칭하긴 애매한 시간, 대학병원의 로비는 고요했다. 내가 다가서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이지훈은 내가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게 벌이라도 내리듯 하는 행위가 끝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듯이 해서는 이지훈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깨문 탓인지 입술이 따갑도록 부르텄다. 잠시 말을 고르며 아랫입술 위를 혀로 꾹꾹 누르던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끝났어. 가자.”

이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점 말고는 볼 것도 없는 병원 바닥 무늬라도 세는 것처럼 아래를 향한 자세도 그대로였다. 병원 벽에 걸린 시계는 6시 30분임을 알리고 있었다. 복도 끝 조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이지훈이 신고 있는 운동화 위를 넘실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이 운동화를 신은 걸 본 것도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아까 날 마중 나왔을 때와 달리 흰 반팔 티셔츠 위로 후드티를 겹쳐 입지조차 못하고 까만 패딩을 바로 껴입은 놈의 옷차림에서 눈을 떼며 읊조리듯 사과했다.

“놀라게 한 거 알아. 미안해.”

끝끝내 둘 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몇 시간 전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보호자 노릇까지 해야 했던 이지훈은 당연히 피곤하고 지칠 거였다. 이런 차가운 복도에 더 내버려 두기보다는, 얼른 집으로 데려가 잠이라도 재워야 했다. 수습하기 힘든 분위기를 한풀 꺾기 위해서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일단 한숨 자고 있어.”

“…….”

“일어나면 나 돌아와 있을 거야. 그때 이야기해.”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당직이 아닌 한 평소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지만, 어제 있었던 작전 때문에라도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팀원들만 있는 단체채팅방은 이른 시간부터 소란스러웠다. 냄새를 맡은 기자 몇몇이 이젠 아예 경찰청 근처에 와 어슬렁대는 모양이었다. 얽힌 사람들이 많은 일이니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다. 이지훈이 깨기 전에 돌아오려면 평소보다 배로 애써야 할 것이다. 나는 이지훈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출근하자마자 쳐낼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이지훈의 정수리를 초조하게 내려다봤다.

이지훈이 입을 연 건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한 대 칠래?”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인지 목이 잠겨 있었다. 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곱씹으며 숨을 짧게 들이켰다. 때마침 고개를 든 놈과 시선이 부딪쳤다. 나를 올려다보는 이지훈은 무표정했다.

“뱉는 순간 후회할까 봐 참은 말이 있는데.”

“…….”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이지훈이 앞으로 숙이고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허리를 곧추세운 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까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진 얼굴이 마치 태풍이 지나고 난 뒤의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너랑 대화하려면 이 말부터 해야겠으니까, 그냥 네가 나 한 대 때리고 시작하자.”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말들에 정신이 팔려 놈이 내 손을 잡아챈 것도 한 박자 늦게 알았다. 이지훈이 뭘 하려는지를 눈치챈 내가 손을 빼려는 것보다, 놈이 내 손을 단단히 감싸 쥐고는 제 볼을 내리친 속도가 더 빨랐다. 뒤늦게나마 이지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손을 오므린 것 때문에 덜 쥐어진 주먹이 휘둘러진 것과 같은 역효과만 났다.

작정하고 주먹을 날렸을 때보다도 둔탁하고 큰 소리와 함께 이지훈의 고개가 돌아갔다. 동시에 손이 자유로워졌다.

“이지훈!!”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이름을 부르는 거라기엔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는 내가 낸 것이 맞음에도, 한 박자 늦게야 내 귀로 꽂혀 들었다. 나는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다. 얼얼한 손끝을 움직여보고서야 내 손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잊고 있던 현실 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정신을 차린 나는 이지훈의 어깨부터 그러쥐었다. 고함을 닮은 말소리가 또 한 번 귓가를 찢듯이 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돌았어?”

이지훈이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이지훈은 이런 짓을 저런 얼굴로 자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내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추궁하듯이 묻는데도, 이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느릿하게 제자리로 돌렸다. 방금 뺨을 맞은 사람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내가 펄펄 뛸 것까지도 예측한 것처럼 무덤덤한 놈은 뺨을 만지는 대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선욱아.”

눈이 마주쳤다. 나는 벌써 조금 부어오른 이지훈의 오른쪽 뺨에 멍하니 두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이지훈이 병원에 온 후 처음으로 날 무시하지 않고 말을 걸기까지 했는데, 이상하게 놈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부터 들었다.

“몸 그렇게 걸레짝처럼 만들지 말고 그냥 그만둬라.”

예감이 적중했다. 나는 이지훈에게 쏟아내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린 채로 입을 다물었다. 이지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미 대가를 치렀으니, 이런 말을 해도 된다고 허락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너 똑똑하잖아. 애초에 경찰대 아니더라도 어디든 골라갈 수 있는 성적이었고.”

“…….”

“그래 봐야 스물아홉이야, 우리. 지금 시작해도 안 늦었어. 삼 년, 혹은 오 년까지 넉넉히 잡고 공부해서 이렇게 다칠 필요 없는 일 해. 자리 잡을 때까지 집, 차, 생활비 그리고 뭐든 간에 내가 다 지원해줄게.”

미리 계획이라도 세워둔 것처럼 줄줄이 읊는 말 중 그 어떤 것도 내가 동의한 건 없었다. 터무니없는 말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늘어놓는 이지훈을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만해.”

한참 숨을 골랐음에도 정제되지 않은 딱딱한 말투가 튀어나간 순간에야, 이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대치하는 사람들처럼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너 이거 과민반응이야.”

이지훈이 놀란 걸 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제 딴에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쁜 의도가 아닌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놈은 방금 선을 넘었다. 나의 고백으로 이미 한참 전에 경계가 엉망이 된 선이라 해도 이지훈이 지금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말들이 정상적인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내가 다친 거 처음 봐서 놀랐고,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는데.”

“…….”

“이렇게까지 할 일 아니라고. 알아들어?”

이지훈의 특별한 애정 속에서 평생 그 선과 싸워온 나는 헷갈릴 때라도 생기면 늘 강영수를 대입해 정도를 가늠했다. 강영수도 내가 이렇게 다친 모습을 보면 놀라겠지. 어쩌면 놈답지 않게 화를 내고, 병원에 데려와 치료를 받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강영수는 내게 일을 그만두라거나, 새 일을 찾기까지 지원해준다거나 하는 말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이지훈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베푸는 것을 감안해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어쩌면 이지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 뺨을 치는 짓까지 해가며 이런 말을 꺼낸 거겠지.

생각을 이어갈수록 착잡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통으로 뒷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여러모로 한계였다. 나는 표정을 정돈하려 애쓰며 이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집부터 가자, 일단. 가서 씻고….”

“너한테 별일은 대체 뭔데?”

“…뭐?”

이지훈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놈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만, 내가 아닌 내 몸을 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수술을 받고 온 부위였다. 이지훈은 홀린 듯 말을 이었다. 눈동자 한 번 깜빡이지 않는 놈은 발만 이곳에 붙이고 있을 뿐, 마치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일 년 중에 반 이상은 하늘에 있거나 해외에 있어.”

“…….”

“그사이 네가 어디서 칼 맞아서 곧 뒤질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비행기를 타도, 한국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는 소리야.”

“…….”

“근데 너는 그 형편없는 기회조차 나한테는 안 주고 땅에 내버릴 새끼야. 그치?”

내게로 돌아온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입술을 당기던 힘이 풀렸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던 이지훈의 가면이 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을 투과한 햇살이 기어코 범위를 넓혀 놈의 꽁꽁 얼어붙어 있던 얼굴을 녹였다. 잘 정돈된 얼음이 깨지자 그 밑에 숨어 있던 분노와 회한과 후회가 서로 나오려는 것처럼 앞다투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내가 예전에 마약수사대면 눈 돈 새끼들 최전방에서 대하는 곳 아니냐고, 왜 굳이 거기여야 하냐고 물었을 때 너 나한테 뭐라 그랬어.”

이지훈이 나조차 잊고 있던 기억을 긁는다. 병원 복도는 그 즉시 어디인지 기억조차 안 나는 어두운 골목으로 변한다. 마약수사대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고, 강영수와 이지훈에게 처음으로 그 사실을 고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 있던 이지훈은 쉬는 날이 거의 없는 수준의 비행 스케줄을 수행하는 중이라 연락이 어려웠다. 메시지 방에 내가 무언가를 적기가 무섭게 걸려 온 놈의 전화에 놀란 이유이기도 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선배들과 함께 있던 차에서 내려 가로등에 기대선 나는 예고 없이 걸려 온 이지훈의 연락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고, 걱정하듯 넘어온 말에는 당연하게도 놈을 안심시키려 들었다.

“그런 거 다 옛날이야기라고, 있다 해도 어차피 네 직급에서는 그렇게 몸 쓸 일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 그 말만 믿은 나나 강영수가 속 편하게 호빠 같은 이야기나 하면서 장난칠 때 너 한 번이라도 솔직하게 말한 적 있어? 네 몸에 있는 칼빵, 하다못해 멍이 든 일에 대해서라도 지나가듯 먼저 말해준 적 있어?”

책임감 없이 뱉은 말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별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문득 이지훈이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언젠가부터 통화의 말미에 꼭 붙던 인사가 기억났다. 아픈 데는 없냐?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친구 사이에 흔히 나눌 법한 안부로 여기고 거짓말했던 나도 어쩌면 선을 넘었던 걸까. 만약 강영수가 물어봤다면… 그랬다면 나는…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본 이지훈이 울컥한 것처럼 눈가를 찡그렸다. 놈은 말을 뱉으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을 새삼 깨닫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이게 너한테는 별일이 아니라고? 알아서 하겠다고?”

“…….”

“너는 대체….”

숨 쉴 틈조차 없이 쏟아내던 이지훈이 질끈 눈을 감는다. 놈의 얼굴이 절망에 물드는 게 보였다. 아래로,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눈빛.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더 내려갈 공간도 없음을 알아챈 것처럼 튀어 오른 말소리가 먹먹하게 귀를 울렸다.

“얼굴도 모르는 새끼들 잡느라 네 몸이 이렇게 된 걸 자랑스러워해 줬으면 좋겠어?”

“…….”

“이 몸을 하고도 다시 경찰서로 돌아간다는데 고분고분 고개 끄덕이며 잘 다녀오라고 손이라도 흔들어주길 바라?”

정말 그런 거면…

“난 그거 못 해.”

이지훈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놈이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못 해. 난 못 해. 점점 작아지는 말소리는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한참을 멈춰 있던 이지훈이 일어섰다. 놈이 발을 떼는 방향을 따라 바람이 일었다. 멍한 상태로도 놈이 날 두고 떠나는 것임을 직감했다. 그 목적지가 집이 아니리라는 것도. 나는 놈이 내 시야를 벗어나기 직전에야 가까스로 몸을 움직였다.

“가지 마. 너 이렇게 가면….”

나는 말을 멈췄다. 이지훈은 아까처럼 어깨를 잡혀주는 것 대신, 내가 그럴 수도 없게끔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날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놈의 얼굴빛이 창백했다.

“지금 네 얼굴 볼 자신 없어.”

“…….”

“한동안 집 안 들어갈 거니까 찾지 마.”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선 이지훈의 거칠한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어쩌면 이지훈이 내내 저런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중에는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총각.”

이지훈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기만 했다. 팔을 툭 치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양손에 커다란 양동이와 대걸레를 나눠 든 아주머니 한 분이 옆에 서 있었다.

“여기 앉아 있던 총각 혹시 어디 갔는지 봤수?”

방금까지 이지훈이 앉아 있던 자리를 기웃대는 그녀는 찾는 사람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유니폼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가 방금 나온 곳을 확인했다. 내가 서 있는 의자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이었다. 손에 든 도구를 보니 방금 청소를 마치고 나온 모양이었다.

여전히 텅 빈 복도에서 목격자라고는 나밖에 없음을 눈치챈 듯한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그 사람을 찾는지 설명이라도 하듯이.

“아니, 아까 변기통 붙잡고 토를 하던 총각이 있었거든. 얼굴도 새하얗게 떠서는 한참을 그러고 있길래 응급실에라도 가보라고 등 떠밀었는데 한사코 안 가고 잠시 앉아만 있겠다는 거야. 일행이 있다나 뭐라나. 보통 고집이 아니길래 알아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청소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혹시 총각은 봤나 싶어서. 간 거면 응급실로 갔을 텐데.”

나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혹시 까만 패딩 입은….”

“그랬나? 어어… 맞아. 여기 가슴에 로고 작게 있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뒤에 둔 채로 나는 뛰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 로비를 지나, 아까 택시가 내렸던 곳까지.

귀에 댄 핸드폰은 지치지도 않고 같은 음성만을 재생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감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안내음을 열 번째 들은 후에야 나는 멈춰 섰다. 아침부터 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사방의 눈을 녹이고 있는 풍경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젖은 신발을 내려다봤다. 짓밟힌 눈의 흔적이 신발 밑창에 남아 물처럼 맺혔다.

핸드폰을 아래로 내리며 눈을 가렸다. 난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하얀 숨이 흩어졌다.

“아, 씨발….”

어디에도 이지훈이 없었다.

* * *

[18일 소속사 CK 엔터테인먼트 측은 공식 입장을 통해 “정한영이 현재 마약 투약 관련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지난 15일 광고 스케줄이 끝난 후 참석한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마약류 흡입이 있었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중이며 성실하게 조사에 임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현재 김명림 감독, 이근진 배우를 비롯한 강원도 홍천 별장에서 벌어진 것으로 밝혀진 대규모 마약 파티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한편, 경찰은 지난 16일 ‘지라시’로 시작되어 불거진 홍천 별장 사건에 대해 “다수의 연예인 관계자들이 참석한 파티는 맞다”면서도 관련해 수사를 받은 것으로 밝혀진 인물 외에도 참석 리스트를 모두 공개하라는 요청에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연예 뉴스가 단독으로 입수한 취재 결과에 따르면 경찰 관계자는 “현장에서 체포된 자들을 상대로 증거 확보를 위해 간이 시약 검사를 시행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병원 로비. 벽에 붙은 벽걸이 텔레비전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선 사람들이 수군댔다.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쉴 새 없이 달싹이는 아나운서의 얼굴 바로 옆에 성의 없이 모자이크 처리가 된 김명림 감독의 사진이 떠 있었다. 다음 소식도, 그다음 소식을 전할 때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사진을 잠시 더 지켜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통화 중이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김명림이 다 덮어쓰기로 된 겁니까?”

-뭐, 일단은 그래. 애초에 우리도 김명림 게이트로 잡고 접근했던 거잖아. 이전에도 업계 내에서 계속 이야기 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최형복이랑 친했던 건 유명했으니까 엮어서 다루기도 쉽겠지.

같이 뉴스를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하 선배는 이미 어떻게 보도가 되고 있는지쯤은 훤히 꿰고 있는 투였다. 나보다 오래 마약수사대에서 일한 그는 업계의 생리에 대해 잘 알았다. 유명인의 마약 투약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명되는 인물과 숨겨지는 인물이 나뉜다는 사실마저도. 예상처럼 그가 혀를 차면서도 말을 이었다.

-너 석현민 아빠가 H전자 임원인 거 알고 있었냐? 어떻게 알았는지 그쪽 홍보팀이 토요일 새벽부터 거의 삼십 분에 한 번씩 연락 쏟아붓는 중이야. 대충 들어보니 뻔뻔하게도 요구했나 보더라고. 이번만 어떻게 잘 넘겨주면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다면서.

“반장님 그런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말해 뭐 해. 녹음도 다 해놓으셨더라고. 그래도 당장 터뜨리기 애매한 건 맞아. 왜 그렇게 뻔뻔하게 구나 했더니, 본부에 줄이 있더라고.

“…차혁준은요.”

-소속사가 간 보는 중. 공식 입장도 안 냈지, 아마? 재계약 얼마 안 남았다나 봐. 버릴지, 안고 갈지 계산기 두드리고 있겠지. 일단 시약 결과는 나왔으니까, 윗선에 보고 후에 상황 정리할 것 같아. 이니셜 기사는 토요일부터 돌았잖아. 거기서 몇몇은 사실로 확정 나는 거고, 몇몇은 묻고 가겠지. 그래도 지라시가 꽤 정확하게 돌아서, 피해 간다 쳐도 골치 아프긴 할걸.

소속사보다는 뒤에 서 있는 최정호가 간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물밑에서 어떤 일인지 파악하고 있겠지. 최혁준을 버리는 것으로 꼬리를 자를지, 말지도. 그래 봐야 시간문제였다. 파티에 꾸준히 마약을 공급한 공급책을 찾다 보면 최혁준의 뒤를 캐게 될 테고, 그러면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최혁준에게 이사라고 부르던 김명림의 모습만 봐도 김명림이 마약 공급책이 아닌 중개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속사가 최혁준이 최정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잠깐 생각해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로. 그러니 이건 최혁준이 아닌 최정호와의 싸움이라 봐야 옳았다.

-그건 그렇고, 병원이지?

걸음이 멎었다. 제자리에 멈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길 잠시, 목뒤를 쓸며 어색하게 답했다.

“예. 아직 대기 중입니다.”

복도에는 나처럼 건강검진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연말까지는 한 달 넘게 남은 시점임에도, 월요일부터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2년마다 한 번씩, 직장에서 요구하는 건강검진조차 매번 미루다가 마지막 날에야 경찰서 근처의 내과를 찾아가 미룬 숙제를 처리하듯 후다닥 해치우기 바빴던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누군가가 재촉하지 않아도 몸 상태를 확인하러 검진하고, 상담하고, 관리하고.

그런 식으로 몸을 챙기며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만성 질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끔 병원에 올 일이 생긴다 해도 몸에 이상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갑자기 생긴 상처들 때문일 때가 많았으니까. 특히 할아버지의 입원 이후로는 부러 더 거리를 두기도 했다. 병원을 방문하는 일은 아픈 할아버지를 보러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온통 소독된 냄새를 풍기는 공간은 안정감보다는 불안감을 안겼다. 긍정적인 소식보다는 부정적인 소식을 들을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은 대부분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고.

‘지선욱 씨 맞으시죠? 서언대학교 건강센터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 오전,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도 평소였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을 거다. 이번에 그러지 못한 이유는 주말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지훈 때문이고. 오후에 때마침 취소된 검진 예약이 있다는 말에 그럼 오늘 내로 가겠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일로 일하던 중 자리를 비우는 건 처음이었다. 주말에 출근하지 않은 이유로 이미 팔을 다친 사실을 털어놓은 덕분인지 반장님은 갑작스러운 반차도 별말 없이 승인했다. 검진만 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자 날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시기가 아니면 아예 쉬라고 등을 떠밀고도 남았겠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과 팻말이 붙은 곳 아래의 의자에 앉은 나는 센터에 오자마자 건네받은 번호표의 끝을 구기며, 벽에 붙은 모니터부터 확인했다. 다음으로 의사와 상담할 환자들의 번호를 띄워놓은 모니터에 010이라는 숫자가 크게 떠 있었다. 내가 든 종이에는 011이 적혀 있었다. 차례가 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바쁜 시기에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겠습니다.”

-야, 됐어. 우리야 그렇지, 와이프 보니까 건강검진 받는 날에는 직장에서 아예 하루를 통째로 휴가 주더라. 마음 같아서는 너도 그냥 하루 쉬라고 하고 싶은데, 상황이 이래서 그러라고 못 해주는 게 미안하네.

“아닙니다.”

-너 건강검진 받은 지 얼마나 됐댔지? 2년 채웠나?

“예. 재작년 겨울에 받고 처음입니다.”

-그땐 별다른 이상 없었지?

“예.”

-그래. 이왕 한 김에 천천히 끝내고 밥도 먹고 오고. 야, 반장님 왔다. 끊는다.

급속도로 톤을 죽인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뚝 끊겼다. 통화하느라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연이어 떴다.

강영수

욱아 전화함???ㅠㅠㅠㅠㅠ 오후 3:05

나 회의하느라 못받아써ㅠㅠ용주새끼또필리버스터함 오후 3:06

오래 앉아있어서 엉덩이 아포 흑흑 호해줘

(이모티콘) 오후 3:07

왜왜애애애애애ㅇ 먼데먼데 오후 3:28

잘못 검?? 오후 3:40

강영수로부터 온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 기록 또한 시간을 두고 두 건이나 존재했다. 센터로 오는 길에 전화했던 기록을 뒤늦게 확인하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이지훈과 싸운 걸 알면 호들갑부터 떨 게 뻔한 놈이라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뒀지만, 센터에 오기 전 들른 이지훈의 집에서도 공사를 진행 중인 인부들을 확인한 것 외의 수확을 얻지 못한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카드 내역을 조회해보는 등 놈의 행적을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찾지 말라고 단호히 박아두고 떠난 놈이 싫어할 거라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한숨을 삼키면서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모니터에 뜬 숫자가 바뀌었다.

011. 번호표에도 있는 숫자가 연이어 깜빡댔다.

“11번 환자분 안 계세요?”

때마침 모니터 아래에서 차트를 들고 있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가 볼 수 있게 번호표를 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훈이 아는 형 아버님이랬나. 희끗희끗 보이는 새치조차 없이 진회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중년의 의사는 적당히 사무적이고, 적절히 친절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가 그에게 문진을 받을 것이다. 제 차례를 기다리며 작성했던 문진표를 그에게 제출하고, 이렇게 앞에 앉아 그의 입이 열리는 걸 지켜보고 있겠지. 대형 병원이라 그런지 검진표가 조금 더 자세하고 길었던 걸 제외하면 건강검진 때마다 겪어본 일이기도 했다.

“네, 지선욱 씨. 스물아홉 살이시고. 검진 결과물은 우편으로 받기 선택하셨고요.”

하루에 수도 없이 나 같은 환자를 대할 그도 별다른 안내 없이 물 흐르듯 문진을 진행해 나갔다. 어차피 중요한 건 검사를 하는 것이지, 검사 전 이상 사항이 있나를 구두상으로 확인하는 이런 대화가 아님은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펜 끝이 문진표 위를 툭툭 짚었다.

“흡연하시네요. 그래도 하루에 4개비 이하면 평균보다는 적게 피우시고. 음주는 딱히 즐기시진 않는 것 같고. 신체 활동은… 운동 자주 하시나 봐요?”

“네. 직업상 몸을 움직일 일이 많습니다.”

“실례지만 직업이?”

“경찰입니다.”

그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던 의외라는 빛은 금세 사라졌다. 그가 자문자답할 때마다 들고 있는 펜이 별이라도 그리듯 문진표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활보했다. 검토를 끝낸 것처럼 고개를 든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캔슬된 예약 자리에 들어오신 거라 들었는데. 내시경은 꼭 오늘이 아니라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아… 어제 8시 이후로 먹은 게 없어서 괜찮습니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는 그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 먹었다기보다는 못 먹었다는 게 맞지만. 더 정확히는, 이지훈이 어디에 갔는지에만 신경이 쏠려 있어서 끼니를 거른 것조차도 잊고 있었다.

“예. 어쩌다 보니….”

“식사 자주 거르시는 거 안 좋아요. 지금이야 젊으니 괜찮다 쳐도.”

의사는 의사인지, 점잖게 충고를 건네는 그를 보던 나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시선을 거둔 그가 내려두었던 문진표를 다시 쥐었다. 나를 내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별다른 이상 사항 없다고 하셨고. 나가셔서 안내에 따라….”

이미 펜으로 한 번 훑었던 문항들을 눈으로 대강 살피면서 기계같이 읊던 그가 별안간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 가족력이 있으시네요?”

그가 들고 있는 펜 끝이 문진표 어딘가에 콕 박혀 있었다. 질환력(과거력, 가족력)이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보았던 문항을 응시했다.

‘다음과 같은 질병으로 진단을 받았거나, 현재 약물 치료 중이십니까?’

문항 아래에는 수많은 질병들이 위치했다. 뇌졸중, 심근경색, 고혈압, 당뇨병….

의사의 눈은 그중 유일하게 ‘네’ 표시가 되어 있는 항목에 머무르고 있었다. 보고도 별문제가 없어서 지나가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문항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할아버지가 아프셔서요.”

“뇌졸중으로 진단받으셨나요?”

“처음에는 뇌경색이 왔고, 몇 년 후에 또 뇌졸중 진단을 받았습니다.”

“혹시….”

“네. 아직 입원해 계십니다. 이 병원에요.”

그는 할아버지의 성함을 물었다. 내가 말하자 그 이름을 옆에 있던 컴퓨터에 조회해보기도 했다. 화면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눈치던 그는 내게 문진표를 돌려주며 검사 몇 개를 추가했다고 안내했다.

“부모님께선 따로 앓고 계신 질병이 없으시다고 하셨고 젊기도 하시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예방 차원이라 생각하시면 편해요. 너무 걱정하시진 말고.”

문진표를 내려다보는 내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설명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끔이긴 해도 큰일이 있다면 알 수 있을 정도의 빈도로는 연락하는 엄마야 그렇다 쳐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아빠가 앓고 있는 질병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5시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검진실을 빠져나왔다.

-웅!

강영수는 발랄하게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보니 이지훈과 나 사이의 일을 모르는 거 같았다. 이지훈의 소식부터 물으려고 했는데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낌새가 느껴지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도로를 멀거니 바라만 보던 나는 핸들에 두고 있던 손을 올려 이마를 긁었다.

“바쁘냐?”

-엉, 야근 중. 그래두 너랑 통화하려구 옥상으로 나왔어. 왜? 오늘 근처에서 근무야? 나 너 오는 거면 저녁 먹으러는 나갈 수 있긴 한데.

“그게 아니고….”

-아니고?

커피를 마시는 중인지, 빨대를 쭉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물을 빨아당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입 안이 말랐음이 실감 났다. 검진을 끝낸 뒤 복도의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빼 먹은 게 오늘 먹은 것의 전부였다. 밥을 먹긴 해야 하는데. 음식보다는 다른 것이 고픈 것 같다. 예를 들어 이지훈이 지금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라든가. 나는 한숨을 쉬듯 뱉었다.

“…이지훈 연락돼?”

이지독? 강영수가 의외라는 어투로 되물었다. 평소라면 전화하지 않을 시간대에 연락한 내가 이런 걸 물을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같이 사는 걸 알고 있는 강영수에겐 뜬금없을 만도 했다. 빨대를 뱉었는지 선명해진 목소리가 건너왔다.

-몰라? 금요일 이후로 연락 안 해 봤는데.

“…네 집에도 안 왔고?”

-왔겠냐. 그 새끼 저번에 내 집 왔을 때 더럽다고 삼 분에 한 번씩 기침 퍼포먼스 선보이다 갔는데.

“…….”

-근데 왜? 이지독이랑 연락 안 돼? 혹시 너한테도 기침 퍼포먼스 선보이다 싸웠어? 드러워서 못 살겠다고 가출했어? 달래려고 청소 도구 들고 찾으러 가는 길이야?

상상만으로도 웃긴 것처럼 강영수가 히히덕거렸다. 놈이 장난을 치는 걸 알면서도, 또 그게 완전한 헛다리는 아니라 웃음이 안 나왔다. 제집도 아닌 곳에서 나간 놈을 두고 가출이란 단어를 쓰는 게 맞나 싶긴 한데, 또 틀린 것도 아니니까. 두 달만 들어와 살겠다고 한 놈의 모든 짐이 여전히 내 집 안에 있는데, 이지훈만 없었다. 차조차 수리가 안 끝난 상황에서, 대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감조차 안 잡혔다. 목소리라도 들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이지훈의 전화기는 삼 일 내내 꺼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해본 이지훈의 아버님 또한 별다른 소리가 없으셨다. 태안으로 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강영수가 웃음을 뚝 멈추고는 심각하게 물었다.

-헐, 뭐야. 진짜야? 너네 싸웠어? 언제? 왜? 어떻게? 얼마나?

이래서 이야기 안 하려 했던 건데. 순식간에 톤이 세 단계나 올라간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은 것과 동시에 앞에 있던 차가 움직였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옆으로 돌기만 하면 바로 경찰청이었다. 퇴근 시간이라는 이유로 분잡한 도로와 달리, 빽빽하게 들어찬 경찰청 주차장을 훑어보던 나는 핸들을 돌렸다. 아무래도 빈자리가 없는 것 같으니 옆에 있는 민원용 주차장을 이용하는 게 나을 듯했다. 강영수는 내가 주차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떠들었다.

-설마 그래서 퐁듀 파티에도 안 온 거야? 와, 나 방금 존나 소름 돋았어. 이래서 친구들끼리 같이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건가 봐. 평생 안 싸우던 새끼들이 갑자기 왜 싸워! 아니다, 평생은 아니구나. 강릉 때 지랄 났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싸웠어? 아니지? 안 되겠다. 아무래도 이번 주에 내가 한 번 더…

“나 들어가야 돼. 끊는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통화를 종료했다. 블루투스에 연결되어 있던 강영수의 목소리가 뚝 끊긴 차 안이 적막했다. 나는 옆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가져와 내려다보았다. 검진을 받는 사이 온 연락이 꽤 됐지만, 이지훈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놈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못 해도 오십 번은 들은 것 같은 안내음이 지치지도 않고 반복됐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전화를 끊으려다 생각이 바뀌었다. 삐-소리가 들렸다. 이후에 건네는 말은 소리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성사서함에 모두 녹음될 터다. 수많은 연락 수단이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샘에 음성을 남기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지훈.”

고작 놈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이었다.

“집에 와.”

성인 남성은 실종 신고조차 쉽지 않다. 제 발로 사라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지훈이 실종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비록 서로 보인 적 없던 모습을 보이며 싸웠다고는 해도, 놈이 그런 극단적인 일을 벌이지 않을 인물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로 인하여 벌어진 놈의 부재가 견디기 벅찼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또 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지훈도 내가 제 인생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까. 사라진 놈이 어디에서 뭘 할지 모르게 된다는 게, 어쩌면 가장 무서운 일처럼 느껴지는 기분.

눈은 주말 새에 깨끗하게 녹았다. 이제는 눈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창밖을 보며, 나는 눅눅한 목소리를 냈다.

“안 오면… 네가 싫어해도 찾을 거야.”

녹음이 끝나고서야, 통화가 비로소 끊겼다. 핸드폰을 챙긴 나는 차에서 내렸다. 식사하고 오라는 하 선배의 말이 떠올랐지만, 도통 내키질 않아서 그냥 경찰청 쪽으로 발을 틀었다. 팀원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듯 창밖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불이 환했다. 그 불을 향해 앞을 보고 걷던 나는 주차장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민원용 주차장의 끝에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외제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시선을 내려 익숙한 번호판부터 확인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채로 보닛 위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인물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생각지도 않고 말이 튀어나갔다.

“나 건강검진 받았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이지훈이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다.

“주말에도 일 안 했어.”

마주한 풍경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사막에 선 이방인처럼 말하고 나서야, 삼 일 내내 목을 깔깔하게 만들던 모래를 비로소 털어낸 기분이 되었다. 나는 다소 뜬금없었을 앞의 문장을 이을 접속사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지훈.

“…화내지 마.”

그렇게 사라지지도 말고.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나 네가 그럴 때마다 좀 벅차.”

미동 없이 나를 지켜보던 이지훈이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무언가를 들어 올린 후 내 쪽을 향해 흔들었다.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물체의 윤곽을 확인했다. 이지훈의 손에는 삼단 도시락통이 들려 있었다.

몸을 일으킨 이지훈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선 놈이 허공으로 숨을 뱉더니 이내 눈을 맞췄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야위거나 핼쑥하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먹은 걸 게우거나 그걸로 고생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오늘 한 끼라도 먹었냐?”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놈에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평소였다면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겠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지훈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밥 먹자.”

음식집들이 몰려 있는 반대편을 향해 턱짓하는 놈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걸음을 옮기려는 이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그건….”

“아, 이거?”

삼단 도시락통에 박혀 있는 내 시선을 확인한 이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샌드위치 좀 싸 왔는데, 첫 끼부터 빵 먹긴 그렇잖아.”

“…….”

“이건 이따 줄 테니까 가져가서 팀원들이랑 나눠 먹어.”

제 차에 다시 도시락을 가져다 놓고 온 이지훈이 눈치를 보는 나를 보고 피식댔다.

“야.”

가까이 다가서서 어깨를 툭 치는 놈에게서 담배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가자고. 나 배고파.”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앞장서 걸어가는 놈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나도 붙박이듯 서 있던 걸음을 옮겼다.

이지훈이 앞장서서 들어선 곳은 가끔 동료들과도 오곤 하는 경찰청 앞 국밥집이었다. 맛도 괜찮고, 음식도 빨리 나와서 늘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퇴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비교적 한산했다. 이지훈은 가게에 익숙하게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돼지국밥? 묻는 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과 예전에도 한 번 같이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큰 사건이 터졌을 때라 밥이고 뭐고 못 챙길 정도로 한창 바빴는데, 이지훈이 근처에 왔다는 연락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오기부터 했었다. 어딜 데려가야 할지조차 생각지 못하고 나온 탓에 두리번대는 나를 본 이지훈이 이곳을 가리켰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놈한테 겨우 이런 걸 먹여도 되나, 자리에 앉아서까지 고민한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안 그래도 국밥이 끌렸느니 어쩌니 늘어놓던 놈은 밥을 다 먹자마자 얼른 들어가라며 나를 떠밀었다. 뒤로 넘어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ID 카드를 앞으로 돌려주고 엉망이 되어 있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던 놈이 건넸던 마지막 인사가 생생했다.

‘야, 그래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잘 챙겨 먹어. 간다.’

붙잡을 새도 없이 손을 흔들고 사라졌던 놈은 오늘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빠진 새에 우리 둘의 앞에 나란히 대령된 뚝배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있었어. 영수도 너 어디 있는지 모르던데.”

물을 먹는 중이던 이지훈의 시선이 흘깃 돌아왔다. 놈은 입 안의 물을 넘기고서야 성의 없게나마 답변을 했다.

“그냥, 뭐. 호텔도 가고.”

말을 흐리며 수저로 국물을 한 번 뜬 놈이 인상을 찡그렸다.

“와, 존나 뜨거워. 혀 다 데겠다, 넌 천천히 먹어라.”

빠르게 중얼중얼 뱉는 말들은 그 전에 한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은연중에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단색의 블루종 안에 까만 티셔츠를 입은 놈의 옷차림은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달랐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궁금증이 생겼다. 어디에 있었고, 대체 저 샌드위치는 또 어디서 싼 거고.

수저도 들지 않은 채로 저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힐끔 확인하고서도 이지훈은 내 등 뒤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리기나 했다.

[한편, 김명림 감독 측은 홍천 별장 사건에 대해…]

아나운서의 얼굴과 복장만 다르고, 다른 것들은 지겹도록 같은 보도가 이곳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식당 안에 흩어져 앉은 사람들은 뉴스를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대각선에 앉아 있던 아저씨 둘이 김명림의 관상에 대해 크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던 이지훈은 아나운서의 얼굴 옆에 떠 있던 사진이 사라지고서야 내게 고개를 돌렸다.

“저거 잡느라고 바빴냐?”

순간 최혁준을 잡았냐고 묻는 줄 알고 놀랐지만, 아직 최혁준의 이름이 나온 보도는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긴 최혁준이었다면 이지훈이 저렇게 덤덤하게 묻지도 않았겠지. 표정을 보니 이지훈은 이 뉴스 자체를 처음 접한 눈치였다. 평소에도 연예 뉴스에는 관심도 없고 굳이 찾아보지도 않는 놈이니 놀랍진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눈가를 찌푸리던 이지훈은 그러나 별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수저로 국밥을 푹푹 뜨던 놈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행동을 뚝 멈췄다.

“야.”

나한테 말을 건 놈의 시선은 여전히 양파가 담겨 있는 앞접시에 꽂혀 있었다. 양파 조각의 개수라도 세는 것처럼 한참 그것을 노려보던 이지훈은 한숨부터 쉬었다.

“개오바 떨어서 미안.”

느닷없는 사과를 듣던 나는 수저를 아예 내려놓았다.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다닥다닥 붙은 식탁 아래의 공간은 좁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신발 끝으로 이지훈의 발을 툭 찼다. 그제야 내게로 올라오는 시선을 붙잡으려 재빨리 입을 열었다. 토요일 날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되뇌고 있던 말이었다. 이렇게 이지훈을 다시 보게 되면 바로 말해주려고.

“진심으로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 안 했어. 괜한 말 해서 걱정 끼치기도 싫었고.”

“…….”

“상처들은… 보기에는 이래도, 입원할 정도로 심각했던 적은 없어. 진짜야.”

말없이 듣던 이지훈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잠긴 듯한 놈의 시선은 다시 국밥에 박혀 있었다. 국밥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둘이 기를 쓰고 피하던 이야기에 대해서도 털어놓았고, 사과도 했다.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국밥을 휘휘 젓는 놈에게서 시선을 거두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멈췄다. 머뭇대듯 입술을 잘게 깨물던 이지훈이 결심한 것처럼 툭 던진 말 때문이었다.

“엄마 병원에 있을 때.”

이지훈이 돌아가신 어머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한 나와 달리 이지훈은 차분한 낯이었다. 적어도 보이기에는 그랬다.

“제일 무서웠던 게 내가 옆에 없을 때 엄마가 죽는 거였어.”

이지훈이 덤덤히 털어놓는다. 오랜 세월을 알았음에도 우리가 굳이 말하지는 않았던 이야기다. 혼자 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털어놓았을 때는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조심하게 되는 것들.

“그래서 밤에도 자꾸 보조 침대에서라도 자고 가겠다고 우기고. 전지훈련도 안 가겠다고 하고.”

“…….”

“엄마는 그게 싫었나 봐. 돌 지나자마자 떨어져서 잘만 자던 애가 안 하던 짓 하는 거 보니까 다 자기 탓인 것 같아서 신경 쓰인다고. 아빠한테 말해서 나 맨날 집에 데려다 놓고, 전지훈련도 가라고 몇 날 며칠을 설득하고 그랬거든.”

그때를 추억하듯 쓸쓸하게 웃던 이지훈이 눈을 내리깔았다. 놈이 말을 멈춘 이유를 아는 나도 덩달아 숨죽였다. 과거가 아픈 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지훈은 침묵을 통해 과거를 곱씹는 어른이 됐다. 슬픔을 감출 줄 아는 어른이 된 놈이 선택적으로 드러내는 슬픔이 입을 열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엄마 죽고 나서 처음으로 집 떠나본 게 여름방학에 외할머니 집에 간 거였는데.”

“…….”

“아빠 말로는 내가 밤에 자다가 발작했대.”

그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놓는 놈 위로 열여섯의 이지훈이 겹쳐졌다. 놀랍게도 함께 떠오른 추억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 컴퓨터를 구경하겠다고 집에 놀러 왔던 강영수가 자고 간 다음 날. 잠자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내가 마당에서 발견했던 놈의 뒷모습.

“숨도 잘 못 쉬고, 불러도 정신도 못 차리고 그랬나 봐. 놀라서 병원에 데리고 간 아빠가 별별 검사를 다 시켰는데, 병원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고.”

“…….”

“근데 난 사실 알았거든. 왜 그랬는지.”

“…….”

“밤에 자다가 불현듯 깨달아서 그랬어. 여긴 태안이 아니라고. 그러니 엄마가 죽어도 바로 가볼 수 없을 거라고.”

이지훈은 빨랫줄로부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전거 안장 앞에 서 있었다.

“아빠한테 차마 그 이야기는 못 하겠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했어. 그러면 나아질 것 같다고.”

‘…이지훈?’

긴가민가하며 묻던 내게 천천히 뒤돌던 놈의 젖은 등.

‘벌써 돌아온 거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제 외할머니 댁에 갔다던 놈이 왜 벌써 돌아와 우리 집 마당에 서 있는지부터 궁금해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놈이 뜬금없이 꺼냈던 말.

‘야, 나도 자고 갈래.’

어느 여름날. 내가 엄마가 아닌 할아버지를 택한 날. 우리는 언젠가 괜찮아질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기를 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그날.

“그리고… 진짜 괜찮아지더라고. 태안 오고.”

“…….”

“너 보니까.”

이지훈은 그날 나를 택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 다친 거 보는데… 오랜만에 그때 생각났어. 미칠 것 같더라. 숨도 안 쉬어지고.”

머쓱하게 웃는 놈의 다 자란 얼굴 위로 자고 가도 되냐는 말을 던져놓고 내 대답을 기다리던 어린 중학생의 얼굴이 이물감 없이 겹쳐졌다. 나는 마루에 서 있던 그때만 해도 몰랐던 감정을 안은 채로 이지훈에게 먹먹히 물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 안 했어.”

어불성설이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면, 떠나는 게 더 힘들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친한 친구에게 하기에는 과한 반응이라 느꼈던 것이, 어느 정도는 극복했을 거라고 여겼던 과거의 상처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함부터 느끼면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놈한테 슬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곁에서 떠나려고 했던 것마저 똑같이.

“몰라. 약해 보이기 싫었나 보지.”

이지훈은 뒤늦게 민망해 보였다. 딴청이라도 피우듯 국밥 안을 휘휘 젓던 행위가 서서히 멎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놈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네가 내 옆에 있으면 괜찮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지훈을 떠나는 것도, 떠나지 않는 것도 내게는 괴로운 선택지가 되어버려서.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인생에 깊게 파고들었을까.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만 서로를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지훈.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서투르게나마 입을 연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까지 이지훈이 바랐을 것을 어떻게든 약속해주고 싶어서.

“안 아플 거야.”

“…….”

“건강할게. 관리도 잘하고.”

눈썹을 꿈틀대며 고개를 든 이지훈의 표정이 빠르게 허물어진다. 진지한 내 표정을 보니 웃긴 모양이었다. 피식대던 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밥이나 먹어, 새꺄.”

“…진심인데.”

“밥을 드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겠어요? 손도 안 대놓고는, 무슨.”

숟가락으로 뚝배기 끝을 탕탕 두드리며 핀잔을 던지는 놈의 표정은 그래도 한층 개어 있었다. 양놈들의 나쁜 문화까지 기어코 들여온 나라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한참을 떠들던 아저씨들까지 나간 가게가 급속도로 조용했다. 나는 티슈를 뽑아 입 주변을 닦는 중인 놈을 흘끔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지훈.”

“왜.”

“웬만하면 핸드폰은 꺼놓고 다니지 마.”

“왜.”

“위험하니까. 적어도 누군가는 행방을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잠깐 나를 바라보던 이지훈이 시선을 가벼이 회수했다. 놈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던진 휴지가 옆 테이블 아래의 휴지통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나한테 바라는 게 많네, 이 경찰 아저씨.”

남은 진지한데 장난질이다.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서도 이지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벽에 기댔다. 어이없던 것도 잠시, 그래도 웃고 있는 놈이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저를 들며 타협하듯 말을 건넸다.

“그럼 그것만 바랄게. 다른 거 안 바라고.”

못 들은 것처럼 대답하지 않던 놈은 내가 수저를 내려놓을 때쯤에야 툭 말을 던졌다.

“핸드폰 안 끌 테니까, 너도 네가 한 말 지켜.”

“…….”

“아프지 말라고. 나 그거 감당 못 해.”

계산서를 들고 일어선 이지훈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다. 답을 요구하듯 눈빛을 던지는 놈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지훈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직감했다. 나는 이제 이지훈 앞에서 아플 수조차 없을 거라고. 어떻게 내가 얘한테 똑같은 상처를 안길 수 있을까. 오늘 들은 이 이야기조차 나는 남은 생 동안 잊지 못하고 내내 가슴 아파할 텐데.

* * *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 선배는 최혁준 집 앞에 서서도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얕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그의 걱정스러운 태도의 배경은 익히 알고 있었다. 상부 회의에 다녀온 반장님의 언질에 따르면, 최혁준이 구속되지 않고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대기업 임원 아들이라는 이유로도 풀려나는 놈이 있는데 정치인들과의 연줄도 있는 최정호의 아들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 아무래도 최정호의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마약을 운용하는 데 있어 최혁준의 존재가 컸던 듯했다. 자르고 도망가기에는 질긴 꼬리니 일단 품자는 게 결론인 듯싶었다.

문제는 이미 최혁준의 앞으로 받아둔 압수수색 검증영장이 있다는 거였다. 윗선에서 굳이 사건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신호가 내려온 상황에서는 영장이든 뭐든 모르는 척 뭉개는 게 이 보수적인 집단에서 어떻게든 발붙이고 사는 방법이겠지만, 반장님은 그걸 잘 못 한다는 이유로 쉰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 건지를 묻듯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나는 태안에 내려가 보겠다고 답했다. 다만 누군가를 데리고 가 이목을 끄는 대신 혼자 조용히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반장님은 날 말리지 않았다. 다만 나보다 경력이 많은 하 선배를 동행으로 붙여주었을 뿐이다.

다행일지는 몰라도 최혁준의 집 주변에서는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년 전에 소유권이 최혁준의 앞으로 완전히 이관되며 최정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서류상으로 정리가 되었더라도, 최정호의 부하 하나도 얼쩡거리지 않는 게 조금 수상하긴 했다.

집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당에 있는 연못과 삼단 분수마저 기억하던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속마저 같을까. 나는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한 연못 안의 초록 물을 조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날 보는 중인 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잡히기 전 최혁준이 굳이 내게 태안으로 가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정호가 제 엄마의 시신조차 거두길 포기했다고 했을 때 잠깐 최혁준의 눈에 비친 살기는 내게 확신을 줬다. 이곳에 최정호를 망가트릴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그건 최정호와 최혁준을 서류상만이 아닌 확실히 분리 지을 어떠한 요소가 되기도 할 터다.

“잘될 겁니다, 선배.”

하 선배가 푸시시 긴장이 풀린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쳤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장비가 담긴 공구 가방이 그의 어깨에서 출렁대듯 흔들렸다.

“‘잘될 겁니다’가 아니고 기필코 잘되어야 한다, 인마. 태안까지 왔는데 뭐라도 건져야지.”

사람 하나 없는 숲 사이 오솔길을 타고 올라온 건 우리뿐임을 이미 확인했음에도 한 번 더 좌우로 고개를 돌려 한참을 살피고서야 현관문에 다가서는 하 선배의 뒤를 엄호하듯 섰다. 현관문에 장치가 있는지를 살펴보던 하 선배가 눈썹을 우그러트리며 뒤돌았다. 이유는 곧 알게 됐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툭 친 것만으로도 열린 현관문 때문에.

“아무리 처박아 둔 집이라 쳐도 문도 안 잠가둔 채로 이러고 뒀다고? 아주 털어달라고 애원을 하는 수준인데.”

헛웃음을 치는 하 선배는 그러나 아까보다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뒤로 젖혔다. 허술한 보안이 그에게 도리어 어떠한 오기라도 자극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나도 걸음을 옮겼다.

“…….”

해가 드는 낮이긴 해도 불을 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스위치를 탁 누르자 주변이 밝아졌다. 나는 방 가운데로 걸어가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거실을 가로질러서 놓인 긴 소파, 고풍스러운 탁자, 유리 장식장, 거실 한편에 세워진 괘종시계마저 과거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것들이 죄다 흐트러지고 쏟아져 있던 모습과 더불어 거실에서 파티를 즐기던 최혁준 친구들의 모습까지도 번갈아 떠올랐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 위를 가볍게 쓸었다. 하루 이틀 새에 쌓인 먼지가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를 대신해 이 주변을 여러 번 순찰해준 너구리 말로는 이 집에 꾸준히 드나든 건 정원사뿐이라고 했다. 정원사는 말 그대로 정원을 손볼 뿐, 집 안을 쓸고 닦을 의무까지는 없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구들에 먼지가 쌓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작은 문이라고 했지. 이거야?”

차로 내려오며 내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던 하 선배는 문부터 찾아 나선 듯싶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문 앞에서 확인하듯 묻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문이라고 생각했던 그 문이 다른 존재라고 말해준 건 최혁준이었다.

‘야. 저거 보여?’

두 계단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놈의 어딘가 비틀려 있던 눈과 뒤틀린 입꼬리.

‘저 문 열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있어.’

문을 툭툭 두드린 하 선배가 의심 가는 부분이 딱히 없는지 이내 문을 활짝 열었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최혁준의 생일에 방문한 이 집에서 본 풍경에 따르면, 최혁준과 박철승이 함께 오른 계단이기도 했다. 그 안을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최혁준이 몰래 유통했을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공간이라고 여긴 곳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하 선배의 뒤를 따랐다. 작은 문은 예상처럼 긴 계단과 이어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실탄 대신 공포탄이 들어간 총은 허리 뒤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한 손을 허리춤에 댄 채로 아래로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투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내가 타고 내려가던 어둠이 걷힌 것도 동시였다. 갑자기 계단을 비롯한 모든 공간이 환할 정도로 밝아졌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선 하 선배가 스위치에 손을 얹은 것을 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황당한 얼굴의 그가 주위를 살피던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이야… 이 새끼들 이미 싹 정리하고 튄 모양인데?”

그의 말마따나 긴 계단과 이어진 공간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주차장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꽤 넓은 정사각형의 공간이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래로 몸을 구부린 하 선배는 공간의 끝에 있는 셔터에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겨우 바닥에 난 스키드마크를 발견했다. 자동차가 이곳에 드나들었다는 걸 알 수 있는 흔적이자, 말 그대로 쓸려나간 것 같은 공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종적이기도 했다. 혀를 차다가도 사진기를 꺼내 스키드마크를 찍는 선배를 내버려 두고,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태안으로 가. 우리가 서 있던 곳으로.’

누군가가 여길 방문해서 저곳을 치웠다 치자. 최혁준이 잡히기 전에든, 후에든. 최혁준이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점부터 돌이켜 봐야 한다. 최정호가 최혁준을 자르지 못할 꼬리라고 여기는 동안, 최혁준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집 대문을 발로 차고, 거실에 있는 것들을 가볍게 뛰어넘고, 그렇게 애정이라고는 없던 이 집을 물려받은 건 최혁준의 의지일까, 아니면 최정호의 의지일까.

하나 확실한 건, 나보고 이 집에 가라고 한 게 최혁준의 의지였다는 사실이다. 놈은 확실히 말했다. 우리가 잠시나마 함께 있었던 곳으로 가라고.

우리가 서 있었던 곳.

우리가 ‘함께’ 서 있었던…

반짝 떠오른 것에 걸음이 멎었다. 마지막 계단에 다다른 참이었다. 나는 열린 문을 바라보며 그때의 나는 정작 이 계단을 내려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려가 볼래?’

최혁준이 내게 가겠냐고 물었지만, 내가 고개를 저음으로써 가지 않게 된 곳.

그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었던가.

두 계단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최혁준. 아래에서 두 계단 위를 올려다보던 나. 시간을 알리듯 울리던 괘종시계.

나는 홀린 듯 걸었다. 충동에 가까운 행위는 목표하는 곳을 향해 정확히 이동했다. 나는 계단을 올랐다. 추억을 따라 옮기던 발을 멈추고 뒤돌았다.

“선배. 저 공구 가방 좀 주시겠습니까.”

뒤따라온 하 선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방을 던져줬다. 나는 드라이버 하나를 꺼내고는 무릎을 꿇었다. 나무 계단의 끝에 있는 십자 구멍에 드라이버를 넣고는 돌렸다. 관리된 흔적이라고는 없는 집에서 덩달아 방치된 계단. 쌓인 먼지들과 마모된 구멍으로 인해 힘들어야 할 작업은 놀랍도록 쉬웠다. 나는 나사를 거의 다 풀었다고 생각할 때 반대편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또 그 옆으로 손을 옮겨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나사를 모두 뺀 후, 헐거워진 나무 판자때기를 잡고 당겼다.

“아니, 갑자기 멀쩡한 계단은 왜….”

계단을 따라 올라온 하 선배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시선이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계단 아래의 공간에 박혔다.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아야 할 나무 계단의 디딤판 아래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분자가 고울수록 독성은 높다. 아름다운 동물일수록 저를 지킬 독쯤은 품고 있는 것처럼.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하얗고 고운 색을 뽐내는 가루가 밀봉되어 있었다. 셀 수도 없는 양이었다.

“이거 정말 미친 새끼들 아냐….”

하나를 집어 든 하 선배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양의 마약이 집에, 그것도 이런 버려진 집 계단 아래에 숨겨져 있을 것을 예측하지 못한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런 꼴은 처음 본다는 듯 연신 헛웃음을 뱉는 그를 내버려 둔 채로 나는 몸을 돌렸다.

‘태안으로 가. 우리가 서 있던 곳으로.’

최혁준의 말이 맞았다. 우리가 함께 서 있던 곳 아래에 이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다만, 이것뿐만은 아니어야 했다. 최혁준 소유의 집에서 마약을 대량 발견해 봤자 최혁준의 손해지, 최정호의 손해는 아니니까.

최혁준이 이 집을 아무 이유도 없이 겨냥했을 리는 없다. 어떻게든 최정호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분명 이곳에 있었다.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고 지나칠 만한 곳에 숨겨두었을 것이다.

나는 어지러운 시선을 집 안 곳곳으로 돌렸다. 나의 모든 직감이 이곳에 무언가가 더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댕-댕-’

계단에 선 채로 거실을 향해 뒤돌기만 하면 바로 보이는 곳에, 관리하지 않아도 유일하게 저 혼자 움직일 줄 아는 물체가 있었다.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진자가 황금색의 시계추와 같이 좌우로 크게 스윙하듯 움직였다. 최혁준의 집에 처음 왔을 때도, 이 집의 조금 더 큰 버전인 홍천 별장에 잠입했을 때도 있던 물건이었다.

잘 꾸며진 가정집을 흉내 내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집. 최혁준이 늘 아닌 척 바랐던 정상적인 가정의 조건을 하나도 충족시켜주지 못한 곳.

그게 누구의 취향이지?

옆으로 제쳐두었던 가방을 다시 들었다. 맨 아래에 있던 망치를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돈 하 선배가 계단 아래에 선 내게 황급히 물었다.

“뭐야. 왜. 또 어디 짚이는 데 있어?”

나는 말을 고르듯, 혹은 숨을 고르듯 잠깐 침묵했다.

“네.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답한 것과 동시에 망치로 괘종시계의 몸통을 내리쳤다. 유리가 와장창 깨진 순간에는 몸을 뒤로 피했다. 이지훈과 한 약속이 떠올라서였다. 다행히도 유리는 빠르고 쉽게 깨졌다. 마치 계단에 박혀 있던 나사들이 쉽게도 풀렸던 것처럼.

월령판을 비롯한 시침과 분침이 망가졌다. 나는 그 사이로 최혁준이 잃어버린 시간을 본다. 걔가 그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생각했을 조각들을 응시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그 시계를 지탱하고 있던 받침대뿐.

네모난 받침이 거듭된 망치질에 움푹 파였다. 워낙 세게 쥐고 있어서인지 이제는 아려오기까지 하는 엄지손가락 아래의 손바닥을 한 번 더 만진 후에,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내리쳤다.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받침대마저 부서졌다. 나무 조각들이 부서진 곳에서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 뿌연 먼지가 사라진 폐허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것들.

“…선배.”

마치 순서대로 정리라도 해둔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서류를 확인한 나는 첫 장을 집었다.

Choi, Jeong-ho.

복사본인 것처럼 글씨가 번진 하얀 종이 안에서도 최정호의 이름만은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든 채로 뒤돌았다. 몇 걸음 뒤에서 날 지켜보던 하 선배는 눈이 마주친 순간 핸드폰부터 들었다. 놀란 낯을 숨기지 않는 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서류의 윗단에 적힌 최정호의 이름에 박혀 있었다.

“반장님. 아무래도 한 번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제야 손에 있는 종이를 놓았다. 손아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빠져나갔다. 삶의 권력을 쥐고 있던 시계가 깨지고서야 흐르는 시간이 있다. 제 아빠와 닮지 않길 택한 최혁준의 삶이 그럴 것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건 그 반대인데 어떻게 불러야 하냐. 저 새끼, 저거. 일부러 네 얼굴 팔아먹으려고 오늘 오픈한다고 한 거 아닌지 몰라.”

결과적으로, 태안에 내려온 김에 하마와 너구리와 함께 밥을 먹으려던 계획은 불발됐다. 친구와 함께 디저트 가게를 준비한다던 하마는 계획한 날보다 하루 당겨 가게를 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내려온 나를 두고 이곳저곳을 데려갈 생각이었다던 둘의 원대한 계획도 엎어졌다. 예약까지 해뒀다던 인당 십만 원의 코스요리가 아닌 회덮밥으로 저녁을 때운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지 막 오픈한 가게의 파라솔 아래에서마저 투덜대던 너구리는, 우리를 보자마자 미안한 표정부터 지은 하마가 자그마치 세 번째로 가져다준 단호박 케이크를 거의 해체하듯 쪼개고 있었다. 계산대에 선 하마의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이 1분이 멀다 하고 한 번씩 꽂혔다. 오픈 이벤트다 뭐다 홍보를 미리 꽤 해둔 모양인지 첫날치고 제법 많이 찾아온 손님들을 대하느라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친구가 보란 듯 틱틱대고 있으니 신경이 쓰일 법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티격태격하던 둘의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그리 달라진 거 같지 않았다. 순경 시험에 합격한 너구리가 태안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에 싫은 척하면서도 실은 제일 기뻐했다던 하마의 반응도 놀랍지 않았다. 내년 가을 하마와 결혼한다는 여자친구는 너구리의 소꿉친구였다. 저런 식의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친해야 가능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단호박 케이크가 복구가 불가능할 수준으로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밀어줬다.

“먹기 싫으면 이거 먹든가.”

“그거 저 새끼가 너 먹으라고 챙겨준 건데.”

“뭘 그런 걸 따져. 먹고 싶은 사람이 먹으면 되지. 난 지금 별생각 없어.”

파란 컵 안의 한 스쿱만큼 퍼진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내밀고서야, 너구리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었다. 쌀 맛 젤라또라고 했던가. 바쁜 와중에도 테이블 옆에 선 하마가 열성적으로 설명해주던 메뉴의 이름을 떠올린 것과 동시에, 너구리가 피실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나이 든 거 실감 난다.”

덩치에 비해 턱도 없이 작은 아이스크림용 스푼을 쥐고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웃기긴 했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쌀쌀한 날씨에도 바깥 자리를 찾아 앉는 건 아마 이렇게 바로 바다를 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 밀려오는 파도에 시선을 둔 채로 입 안에 남은 말을 툭 뱉었다.

“뭘, 새삼….”

“그렇잖아. 너 이제 아이스크림 별로 안 좋아하는 것만 봐도.”

“그건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너 고등학교 때 다른 건 몰라도 아이스크림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어. 기억 안 나? 그거 때문에 우리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나가서 쭈쭈바부터 사 왔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너구리는 억울하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랬었나. 입에 차가운 걸 물고 있으면 두통이 덜해서 좋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런 지가 너무 오래라 잊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반박하는 것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토론할 만큼 중요한 주제도 아니었다.

내 시시한 반응에 더 따지고 들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아이스크림 스푼을 물던 너구리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야. 웃음기 가득한 음성이 날 불렀다. 너구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너 그거 지훈이한테도 이야기해 봐.”

“…이지훈?”

“어. 예전부터 아이스크림 안 좋아했다고 말해 보라니까?”

“갑자기 무슨… 걔한테 그런 이야기를 왜 해.”

“걘 술 먹다가도 너 줄 아이스크림 사러 간다고 사라졌던 새끼잖아. 백퍼 기억하고 내 편 들어줄걸.”

다짜고짜 꺼내는 이야기들이 생소했다. 술 먹다가도 사라져?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다고?

“…뭘 어쨌다고?”

“왜, 기억 안 나? 그때 너 군대 있을 때. 지훈이 태안 내려와서 하마랑 나랑 술 마셨는데, 2차 옮기는 도중에 지훈이 그 새끼 튀었잖아. 너 아이스크림 주러 간다고.”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너구리가 날 보고는 멈칫하더니 이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진짜 몰라? 그 새끼 그때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 가지고 너 부대 앞까지 택시 타고 간다고 그 새벽에 쌩난리를 치고 갔는데?”

“…걔 그런 적 없어.”

“있다니까? 그럼 그때 우리가 말린 새끼는 뭔데? 와. 존나 답답해. 야, 권도경! 너 일로 와 봐.”

끝내 하마까지 소환당했다. 마침 카운터 앞에 선 손님을 마지막으로 잠깐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이쪽으로 잽싸게 다가온 하마가 무슨 일이냐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너구리한테서 대강의 설명을 들은 하마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너구리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그날 못 만났다고? 지훈이 모범 타고 갔는데, 심지어.”

“그니까! 야, 너 기억나지. 처음엔 개꼴아서 치는 장난인 줄 알고 우리 다 웃고 있다가 모범택시 잡는 거 보고서야 식겁했던 거.”

“기억나지. 개꼴은 건 맞았을걸? 우리를 떨치고 가는 힘이 취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올 만한 힘이 아니었어. 근데 진짜 못 만났어? 이상하다. 선욱이 너 그때 의경으로 근무했었잖아? 주말이라 외박도 가능했을 테니 문제없이 만났을 줄 알았는데.”

입을 다문 나를 놓고 한참 대화를 이어가던 둘은 나름의 결론을 내고 이해를 마친 것처럼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근데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 이후로 지훈이 딱히 본 적이 없네. 만났냐고 물어보지도 못했고.”

“그니까. 이번 기회에 보면 좋았을 텐데. 바쁘댔지?”

“어. 선욱이 말로는 대학교 후배들이랑 무슨 인터뷰인가 한댔대.”

맞지? 확인하듯 묻는 너구리를 보고서야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내가 태안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도, 이지훈은 오늘 일정이 있다고 했었다. 너구리랑 같이 만났다면 의도치 못한 곳에서 최혁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들이 돌아다녔다. 나는 파도에서 시선을 거뒀다. 예기치 못하게 들은 소식에 마음이 울렁댔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더 있다 가라며 붙잡는 하마와 너구리에게 차를 가져와서 어차피 술은 못 먹는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일어선 게 10시 무렵이었다. 한 번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렸음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주말을 앞둔 고속도로가 어지간히 붐빈 탓이었다.

집에 들어서며 자연스레 이지훈의 방부터 확인했다. 태안에 내려가기 전 많이 늦을지도 모른다고 놈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여차하면 자고 올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해뒀으니, 이지훈은 기다리지 않고 잠들었을 것이다. 예상처럼 닫혀 있는 방문 아래로 나오는 빛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씻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헤어드라이어기 소리가 나면 놈이 깨기라도 할까 봐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말린 후 그 위에 얹어둔 참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터느라 가슴께에 튄 물방울들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며 문을 열던 나는 침대로 다가서기도 전에 멈췄다.

“도둑이냐? 집에서 왜 고양이처럼 걸어?”

뻔뻔하게도 남의 침대에 앉아 그렇게 묻는 이지훈은 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나 때문에 깬 건지는 몰라도,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도, 놈이 잘 때나 입는 반팔 티셔츠나 트레이닝 바지의 흐트러진 모양새까지도. 만지면 따끈함부터 느껴질 것처럼 나른하고 평온했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하품을 쩍 하는 놈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어?”

얼떨떨하게 뱉은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한쪽 발을 침대 밖으로 턱 내밀었다.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도 동시였다. 얼떨결에 끌려가듯이 앞으로 전진한 무릎이 침대 프레임에 턱 걸렸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이지훈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뭘 하는지를 몰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입고 있는 티셔츠가 휙 까뒤집히는 느낌이 들고서야 겨우 소리를 냈다.

“야!”

내 고함에도 이지훈은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티셔츠를 쥔 손부터 잡아 내리려는 나를 가볍게 제압하고는 옷을 조금 더 위로 올리기도 했다. 놈처럼 위에는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나온 탓에 옷 안의 살이 바로 드러났다. 이지훈은 티셔츠 안으로 얼굴이라도 넣을 기세였다.

“뭐 하는 짓이야! 안 떨어져?”

“가만히 있어 봐.”

“돌았냐?”

“어허.”

훈장님이 훈계라도 하듯,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타이르듯 올려다보는 놈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행동을 멈춘 날 본 이지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까처럼 티셔츠를 까뒤집은 놈이 내 몸을 훑어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놈의 시선이 쇄골부터 시작해 갈비뼈 부근까지 찬찬히 훑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꼼꼼히도 보는 시선은 배에 나 있는 흉터들과 멍에 닿을 때만 잠깐 멈췄다.

“오케이. 이상 없고.”

티셔츠가 휙 내려갔다. 이번에는 팔이었다. 팔꿈치를 조심히 잡은 이지훈이 팔 안쪽이 보이도록 천천히 돌렸다. 방금 샤워를 하며 새로 붙여둔 방수밴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손끝으로 밴드의 끝을 아주 살짝 건드려본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표정이었다.

팔을 내어준 채로, 나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이지훈의 옆이자 스탠드 아래, 베드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응급 키트를 확인한 순간에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손.”

이지훈의 눈은 여전히 내 몸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저와 떨어져 있는 사이 내게 새로운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나는 개한테 시키듯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놈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내가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와서임을 비로소 눈치챘다.

머뭇대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이지훈은 손을 덥석 잡아 손바닥과 손등을 꼼꼼히도 살폈다.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여기 왜 다쳤어?”

놈이 설명이라도 요구하듯 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엄지와 손바닥이 이어지는 부분에 살이 조금 까져 있었다. 아까 최혁준네 집에서 망치를 휘두를 때 생긴 상처인 듯싶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뭐 좀 부수다가.”

“뭘 부쉈는데?”

“있어. 그냥… 물건. 별거 아니고.”

시원찮은 대답에 인상을 찡그리던 이지훈은 그러나 별말 없이 넘어갔다. 응급 키트에서 꺼낸 연고를 상처 위로 펴 바르는 놈은 거의 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였다. 밴드를 붙이는 데 집중한 놈의 숨결이 손바닥을 간질간질 스쳤다.

“…….”

“…….”

벌이라도 받는 애처럼 서서는, 그런 애라면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잡은 네 손의 온도가 좋다거나, 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고 싶다거나, 내 살갗에 닿는 네 숨결을 잡아두고 싶다거나.

그중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이지훈의 숙인 머리에서 시선을 떼 침대의 어딘가에 고정했다. 침묵이 등 떠미는 충동적인 감정들이 버거워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늘 태안 갈 일이 있어서 너구리랑 하마 만났는데.”

“어.”

물어도 될까. 운을 떼놓고 정작 입이 안 떨어졌다. 말을 잇지 않으니 이지훈의 시선이 돌아왔다. 밴드를 찾느라 건성으로 답하는 것 같더니, 듣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만났는데?”

말을 잇길 종용하듯 물은 놈이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응급 키트에서 찾아낸 작은 반창고의 껍질을 벗겨내고서는 다시 손바닥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또 한 번 아찔한 숨결이 손을 스쳤다. 나는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입술을 놓았다.

“너 걔네랑 술 먹다가 나 보러 간다고 택시 탄 적 있다며.”

이지훈의 머리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나는 밴드의 양쪽을 붙잡은 이지훈의 손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었다. 집으로 운전하는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되뇌었을 정도로 궁금하긴 했다.

“난 기억도 안 나고…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아서.”

“…….”

“…맞아?”

이지훈이 대답 대신 손을 움직인다.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밴드가 연고를 발라둔 상처 위로 이물감 없이 달라붙었다. 밴드의 끝을 한 번 더 고정하듯 문지른 이지훈이 고개를 뒤로 뺐다.

“어.”

짧게 긍정한 놈이 몸을 베드 테이블 쪽으로 돌렸다.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넌 당연히 기억이 안 나겠지.”

후시딘이며, 남은 밴드들을 응급 키트 안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이지훈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물어봐도 되나 한참을 망설인 게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줄줄이 쏟는 말들은 내게는 한없이 낯선데, 이지훈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네 생일쯤에는 항상 눈이 오더라. 춥기도 드럽게 춥고.”

“…….”

“그날도 술 먹다가 밖을 봤는데, 눈이 오더라고. 그래서 달력을 봤는데 네 생일이 이틀인가 남은 거야.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거 알아서 늘 아이스크림 케이크 한번 사주고 싶었는데, 맨날 생일 때 일 생기고 그래서 못 사줬잖아. 이번이 기회다 싶어서 택시 탔는데….”

막힘없이 말을 잇던 이지훈이 처음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볼을 슬쩍 긁으며 웃었다. 그날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착하니까 케이크가 다 녹았더라고. 그날 눈 와서 차도 좀 막히긴 했거든. 아, 진짜… 초 챙겨달라는 말 할 시간에 아이스팩 좀 빵빵하게 넣어달라고 할걸.”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이지훈의 회상이 끝났다. 그게 그날의 결론이라는 것처럼 더 말하지 않는 놈을 보던 나는 그냥 넘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냥 갔어?”

태안에서 서울까지 겁 없이 택시를 타고 왔으면서. 친구들이랑 술을 먹다가 중간에 뛰쳐나와서 산 케이크가 다 녹았다는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럼. 그 시간에 그런 케이크 사 가지고 너 불러낼까?”

그게 가당찮은 이야기이긴 하냐는 듯 되묻는 놈을 보는데 숨이 턱 막혔다. 나를 흘끔 본 놈이 더 말하지 않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와, 오늘 하루 진짜 존나게 길었다….”

천장을 응시하는 이지훈의 눈이 느리게 깜빡댔다. 내 몸 상태를 살피느라 미뤄뒀던 잠이 이제야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쁜 하루를 보냈을 터다. 학교 후배들과 인터뷰도 있다고 했고, 회사도 잠깐 출근해야 한다고 했으니.

나는 침대로 다가섰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감고 숨만 내쉬는 이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그냥 여기서 잘래? 내가 네 방 갈게.”

그새 잠이라도 든 건지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답을 듣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스탠드의 스위치를 끄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아!”

와락 허리가 잡힌 것과 동시에 몸이 푹신한 이불에 닿았다. 엎어 메치듯 침대에 강제로 눕힌 이지훈 때문이었다.

“돌았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방어라도 하듯이 나간 손마저 이지훈에게 잡혔다.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치듯, 뒤에 붙은 놈은 웃고 있었다.

“네, 돌았어요. 방금 180도로 휙 돌았잖아요.”

“아, 씨. 장난치지 말고 놔라.”

“그냥 자자. 나 너무 피곤해서 내 방까지 못 가겠어.”

“그니까 내가 가겠다고.”

“왜? 침대도 넓은데.”

빠져나가려고 힘을 쓰면 그만큼 놈도 힘을 줬다. 의미 없는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이어 나가다 말고 멈춘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

“…….”

한 박자 늦게야 내 등과 이지훈의 가슴이 바짝 붙어 있음을 실감했고, 이지훈의 손이 내 배를 덮듯이 감싸고 있다는 것도 의식됐다. 나는 바로 뒤에 있는 이지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커튼이 반쯤 닫힌 창문을 응시했다. 달빛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스탠드를 끄며 방 안의 모든 불이 사라졌음에도, 노력하면 물건들의 윤곽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배 위에 있는 이지훈의 손을 잡아서 떼며 말을 걸었다.

“…야. 장난이 아니고.”

“…….”

“자세 진짜 이상해. 떨어져.”

날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 장난을 할 때만 해도 계속되던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이지훈도 뭐가 이상한지 느낀 모양이었다. 조용한 숨소리를 듣던 나는 상체를 슬그머니 일으켰다.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아예 침대에서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발을 침대 밖으로 떼기 전, 이지훈이 나를 붙잡았다.

“그냥 있어.”

아까와 달리 웃음기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나를 잡아 끌어당긴 것도 동시였다. 아까처럼 침대에 눕게 됐다. 다시 일어나려던 순간에는 뒤에서 뻗어온 손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세가 아까와 똑같아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지훈에게 잡힌 건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몸이 너무나도 가까웠다. 그러니까, 고개만 돌리면 얼굴이 부딪치겠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미국 생활 접고 한국에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한 날.”

“…….”

“그날도 눈이 왔던 거 알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느 부분이라도 움직이면 그 즉시 무언가가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은 나를 모른 척하며, 놈이 한 번 더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공항 의자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눈을 보면서 생각했어. 올해는 너한테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아니라….”

볼인지, 목인지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쏟아지는 놈의 따뜻한 숨결. 중얼거리듯이, 혹은 한숨이라도 쉬듯이 허공에 퍼져나가는 말들.

“그냥 케이크조차 못 챙겨주겠다고.”

이지훈은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간에 하는 걸까. 내가 자신한테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오늘만큼 나쁜 날이 없을 텐데.

“그걸 두고 누가 이상하다고 말한다면.”

“…….”

“같은 거 달린 친구 새끼한테 하기에는 특별한 취급이라고, 유난 떤다고 한다면.”

이지훈이 아무리 힘을 준다고 해도, 아예 떨쳐낼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나는 놈을 밀쳐내기는커녕 입술만 겨우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놓아버리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라도 낼 것 같아서.

“나 솔직히 할 말 없어.”

이지훈의 말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놈이 아주 천천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끈한 얼굴의 온도가 어깨로 온통 쏠렸다. 이지훈이 하는 말들이 살을 통해 내게 전달됐다.

느릿느릿하게, 잠이 들기 전 가장 좋아하는 곰 인형을 껴안은 아이가 웅얼대며 하는 말처럼.

“근데 선욱아. 너 그거 알고 있어야 해.”

“…….”

“나는 네가 특별해서 친구가 된 거야.”

“…….”

“친구라 특별한 게 아니고.”

어깨에 머리를 댄 이지훈이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 특별함을 부르는 방식이 너랑 나랑 다른 거면.”

“…….”

“그걸 뭐라 부르든지 상관 안 해, 이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말이 없던 이지훈은 내 어깨와 목 사이에 턱을 올렸다. 자세라도 잡듯 조금씩 움직이던 놈은 편한 곳을 찾은 것처럼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지훈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나는 놈을 깨울까 봐 발소리를 죽이기부터 했던 아까처럼 숨을 참았다.

어쩔 줄 모르고 달빛에 도피해 있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배를 감싸 안고 있는 큰 손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상상했던 것과 꼭 같은 온도의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생전 다뤄본 적 없는 것을 대하듯 조심히 감싸 쥐고는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놈과 나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는 걸 알고서야 어깨를 돌렸다.

바로 앞에 이지훈의 얼굴이 있었다. 잠든 척하는 놈을 두어 번 보고 나니 알겠다. 진짜 잠든 이지훈은 잠든 척을 하는 이지훈보다는 조금 더 천천히 숨을 내쉰다는 걸. 놈이 제대로 호흡하고 있음을, 그리고 완전히 잠들었음을 깨닫고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아래로 꼭 말아쥐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어쩔 줄 모르고 떠 있기만 하던 손은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걷어내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해내다가도 눈썹 위 흉터는 만져 보지 못하고 멈췄다. 나는 손끝을 말아쥐고는 습관처럼 숨부터 참았다. 이지훈이 듣기라도 할까 봐. 그리고 내가 이렇게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그런데도 난 이 밤이 내게 선물한 특별한 순간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어코 욕심을 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으면서, 이지훈이 내가 특별하다고 말해줬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욕심을 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이지훈의 턱 아래에 머리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지훈의 숨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짧게 숨을 들이켰다.

“…….”

이지훈 손의 온도를 느끼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고, 살갗에 닿는 숨결까지도 잡았다.

그러니 나는 언젠가 이 순간을 분명 후회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걸 그리워할 수는 없으니까, 아예 알지조차 못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었던 것들을 죄다 어겼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후에 놈에 대해 그리워할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우습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생각해보면 난 늘 그랬던 사람 같다. 우는 법보다는 울음을 참는 법부터 배우고, 사랑하는 법보다는 사랑을 참는 법부터 깨쳤지.

처음으로 참지 않은 순간이었다. 나는 놈의 숨소리에 대고 사과했다.

“미안해.”

널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았을 텐데.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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