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3권) (10/25)

파이브 바이 파이브(5x5) 3권

“무단결석했냐?”

내 뒤를 흘긋 확인한 이지훈이 물었다. 이지훈이 빠뜨린 주어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화 받는다고. 먼저 가래.”

잠깐 인상을 찌푸리던 이지훈은 곧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뺀 놈이 옆으로 왔다. 점심시간을 맞이한 교정은 소란스러웠다. 슬리퍼가 닳도록 달리는 놈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들처럼 천천히 걸었다.

“4교시 국어였어?”

“아니. 물리.”

점심시간에 이지훈과 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대수롭잖은 대화를 하는 것 또한. 체육복을 빌리는 거든, 밥을 먹는 거든, 복도에서 마주치는 거든 최근엔 늘 옆에 최혁준이 있었다. 짝인 데다 이동을 할 때면 늘 붙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지훈은 생각보다 그 사실에 빨리 적응한 것 같았다. 그때 화장실에서 당장이라도 최혁준과 한바탕 붙을 것처럼 굴던 것과는 퍽 다른 태도였다. 그날 집으로 가던 길 내내 말을 고르던 내가 점심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웃으며 내 어깨를 퍽 치던 게 떠오르기도 했다.

‘누굴 걱정하는 건데, 대체? 난 사고 안 쳐.’

그러는 자신이야말로 내가 최혁준 이름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사고란 말부터 꺼냈으면서. 그러나 이지훈은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깡패 새끼니 뭐니 불러댔던 건 잊어버린 것처럼 최혁준을 제 반 애들 대하듯 했다. 그걸 최혁준이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겪은 바로 최혁준은 저를 특별 취급하는 사람들보다는 평범한 학생 대하듯 하는 사람에게 유했다. 최혁준이 반 애들 대부분을 무시하는 것과 달리 나를 사람 취급하는 것 또한 저를 두고 수군거리지 않기 때문임을 나는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셋이 있을 때 많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가끔 이지훈과 최혁준이 틱틱대며 말을 주고받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서로에 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인지 대화가 오래 이어지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최혁준과의 점심이 편할 리 없는데도 이지훈은 꿋꿋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꼭 점심을 함께했다. 혹시 나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가는 행위일까 싶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려다가도 나를 돌아보는 놈을 볼 때마다 번번이 입을 다물었다. 이지훈이 나를 그렇게 챙길 정도로 특별 취급 한다는 전제하에서야 꺼낼 수 있는 말이라 그랬다.

‘행복해?’

그 겨울부터 마음속에는 이지훈에게 꺼낼 수 없는 말들이 눈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 꺼낸 순간 무언가 뒤바뀔 것 같다는 두려움이 크게 일렁일 때면 눈들이 녹았다. 차마 다 녹지 못한 얼음의 결정들이 기어코 목을 타고 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들 때는 겁내듯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지금도 나는 이지훈에게 물리는 네가 노력한 만큼 점수가 안 나오는 유일한 과목이고, 그렇기에 수업 후 늘 물리 선생님에게 달려가 질의하던 행위를 오늘 이 식사 때문에 포기한 게 아닌지를 묻는 대신에 그냥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급식실 입구에 서서 아이디 카드를 찍던 이지훈이 나를 돌아보았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막 생각난 듯한 태도였다.

“나 다음 주 주말에 영화 보러 못 간다.”

갑자기 무슨 영화. 나를 돌아본 이지훈이 울상을 짓듯 입술 끝을 죽 늘였다.

“흑흑. 불쌍한 우리 영은이.”

“아….”

그제야 다음 주 주말이 영은이랑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던 날인 게 떠올랐다. 무료 영화표 4매라는 말에 강영수와 이지훈까지 당연하게 넷이 가기로 정해졌었다는 것도. 내 무안한 얼굴을 바라보던 이지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건 좀 적어놔라, 새꺄. 애 섭섭하게 하지 말고.”

충고라도 하듯 가볍게 툭 던지고는 식판을 집는 이지훈의 옆모습에서 겨우 시선을 뗐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영은이에 대한 이지훈의 애정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동생을 챙기듯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중학생 때부터 나와 영은이를 엮어주려 들었던 이지훈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처남이니 뭐니 장난을 치는 강영수 옆에서 늘 함께 웃고 있던 이지훈을 떠올릴 때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바늘에라도 찔린 듯 쪼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를 엮어주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절대 없을 때야 가능한 거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지훈의 뒤에 서 있는 게 다행이었다. 반찬을 다 받은 순간에야 나는 어색하게 중얼댔다.

“아, 어. 그래야지.”

셋이 밥을 먹을 때면 늘 앉던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선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와 가까워 아이들이 여간해서는 가길 꺼리는 자리이니 당연했다. 오늘도 그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이지훈은 예상과 달리 다른 곳으로 발을 틀었다. 평소에 자주 앉던 자리에서 두 블록 정도가 떨어진 곳이었다. 급식실 한복판에서 멈칫한 나에게 자리를 알려주듯 빈 곳을 고갯짓하는 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근데 토요일에는 왜 못 가?”

수저를 쥘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물었다. 국을 떠먹던 이지훈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아… 나는 고개부터 끄덕였다. 2학기에 참석할 모의토론이 생각보다 꽤 규모가 큰 행사인지, 벌써 사전과제를 공유하는 등 참여해야 할 활동이 많았다. 이지훈의 말로는 주최 측이 SNS에도 카페 같은 것을 임시로 만들어 토론에 참가하는 학생들끼리 서로 소통하게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참가자들끼리 미리 사전 모임 한대. 토요일 아침이래서, 방학식 끝나고 바로 올라가려고.”

그때도, 지금도 이지훈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탈퇴했던 SNS를 다시 가입해서 주최 측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놈은 이번에도 어찌 됐든 최선은 다하려는 것 같았다. 잠깐 방황했던 시기를 의식이라도 하듯 그 후로는 교과 활동에 남들보다 배로 적극적으로 덤벼들던 놈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럴 걸 알아서 이지훈네 담임이 굳이 이지훈을 이 활동에 참여시킨 걸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이지훈이 서울에 간 동안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을 안 본 날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잠시 망설이던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요일에 내려오는 거야, 그럼?”

다음 주 금요일은 방학식이었다. 말이 방학식이지, 주말을 제외한 일주일의 짧은 휴가가 지나면 보충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로 와야 했다. 강영수가 이 얼마만의 진정한 방학이냐며 같이 놀자고 읊어대던 계획을 생각했을 때 주말은 내내 함께할 가능성이 컸다. 이지훈이 뒤늦게라도 합류한다면 일요일 하루라도 같이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못 들었어.”

이지훈이 시선을 올리며 되물었다. 테이블 아래에 내리고 있는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키패드 위에 놓인 손을 보니 누군가와 문자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이지훈이 자주 보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모의토론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잘 다녀오라고.”

“누가 어딜 가는데?”

툭, 하고 식판이 밀리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모를 최혁준이 서 있었다. 내 옆의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던 최혁준이 대답을 보채듯 내게 시선을 뒀다. 대화를 대충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지 시선이 나와 이지훈을 오갔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최혁준과는 아예 관련 없는 주제였기에 대답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나 말고 이지훈.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 있어서 서울 간다고.”

슬쩍 인상을 찌푸리던 최혁준이 별말 없이 수저를 들었다. 흘깃 최혁준을 본 이지훈도 딱히 별다른 말 없이 핸드폰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셋이 있으면 늘 그렇듯이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뚫고 입을 연 건 의외로 최혁준이었다.

“네가 모이는 애들 중에서는 제일 양아치 아니냐?”

비꼬는 거라기에는 표정이 무덤덤했다. 마치 정말 궁금한 것을 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질문을 받은 이지훈도 별다른 타격이 없는 듯했다.

“너처럼 걸레는 아니니까 괜찮을 듯?”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하는 이지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양아치, 걸레 등의 단어를 주고받는 게 친구 사이에서 할 법한 대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말려야 하나 싶다가도, 싸울 의지를 비치기는커녕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각자 심드렁히 할 일을 하는 놈들을 보면 애매해졌다. 둘이 애초에 친구라고 엮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

볼일이 끝났는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던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하고 있는 생각만큼이나 애매할 내 표정을 본 놈은 씩 웃었다. 젓가락을 들더니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 들어 최혁준의 식판 위로 착착 쌓는 행위가 자연스러웠다.

“콩나물 팍팍 먹어. 그래야 형들 키를 따라잡을 거 아냐.”

지랄을 해요, 지랄을… 빈정대며 이지훈이 넘겨준 콩나물을 죄다 국 칸에 밀어 빠뜨리는 최혁준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 식판으로도 무언가가 넘어와 있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받은 음료였다. 내가 받은 파인애플맛 음료와 달리 자두맛이라 적혀 있는 음료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이 윙크하며 능청맞게 설명했다.

“너는 그냥 많이 먹고. 그래야 힘내서 공부하지.”

지잉.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이지훈이 시선을 내렸다. 잠시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던 놈이 피식대고 웃었다. 메시지를 보낸 대상이 웃을 만한 말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모의토론을 하는 참여자 중 당연히 여자 학생들도 있겠지, 하는 새삼스럽고도 쓸데없는 궁금증이었다.

눈은 단위로 셀 수 없다. 그러나 마음속에 차가운 것이 쌓일 때면 난 그것을 알알이 느낄 수 있었다. 더 깊은 곳을 향해 가라앉는 속을 느끼며, 나는 표정부터 정돈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수저를 움직였다.

* * *

28. Drug addiction has been considered as a complex and chronic…

마약 중독은 / 여겨져 왔다 / 복잡하고도 만성적인…. 습관처럼 문장을 끊어내리다 말고 멈췄다. 예전이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읽었을 문장에 시선이 오래 머무른 이유는 마약이란 단어가 더는 이런 문제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일 터다. 밥 먹듯이 제 아빠의 이야기를 꺼내는 최혁준 때문이기도 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렀다. 최혁준은 방학과 동시에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방학식 전날, 불만스럽게 중얼대던 말에 따르면 해외로 가족 여행을 간다고 했다. 기꺼워하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러고도 따라간 걸 보니 딱히 뿌리칠 명분도 없는 듯했다. 매일같이 책상에 누워 잠이나 자면서도 학교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행위였다.

방학식 이후로 쭉 비어 있던 옆자리는 이제 더는 어색하지조차 않았다. 이왕 고개를 돌린 김에 나는 반 전체를 훑었다. 새로운 교육관을 실현하겠다며 보충수업도 강제하지 않겠다던 교장의 포부가 먹혔는지,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였다. 우리 학교가 태안에서는 가장 학구열이 높은 분위기인 걸 고려해 봤을 때는, 논다기보다는 학원에 가서 자습하길 택한 애들도 많을 거였다. 마치 강영수나 이지훈이 저번 주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이지훈은 최근 학원에서 심화반으로 올라갔다. 서울대부터 시작해 사관학교나 경찰대를 준비하는 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소수정예 반이라고 들었다. 애초에 심화반에 속한 애들은 시설 좋은 자습실을 따로 만들어줄 만큼 몇 배나 더 신경 써서 관리한다고 유명한 학원이었다. 이지훈과 반이 갈라지게 된 강영수가 보낸 메시지에 따르면 이지훈은 쉬는 시간에도 강영수랑 놀지 않고 자습실 자리에 붙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종일 공부를 한 뒤 밤에 독서실까지 와서 공부를 이어가는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평생 해온 일이라 습관처럼 공부하는 나조차도 가끔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심심하면 이지훈의 책상에 얼굴을 들이밀고 동상이 눈을 깜빡인다며 깐죽대는 강영수가 이해 갈 정도였다.

저번 주에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온 뒤로는 한층 더했다. 시간만 나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방금 눈으로 외운 영어 문장을 반복하는 놈은 또래들에게 크게 자극을 받은 듯했다. 몇몇과는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더 친해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가끔은 통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존나 어렵다 진짜….’ 독서실 앞,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숨을 쉬는 이지훈의 말투에 어린 웃음기와 놈의 손 사이로 흘러나오던 누군가의 해맑은 웃음소리 같은 것들. 엉거주춤 멈춰 선 날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선 이지훈이 전화를 끊기 전 한 번 더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덧붙이던 인사말. ‘나 친구 나왔다. 어, 내일 통화해.’

‘욱아. 이거 봐 봐. 다들 졸라 똑똑하게 생겼어. 이 사람은 잘생기기까지 했네. 아, 아니다. 방금 한 말 취소. 취소. 이지독이었잖아. 으, 씨발. 어, 근데 이분은 진짜… 와, 이지독 이 새끼 어떻게 그 옆을 꿰찼지 또. 좋냐? 이 새끼 웃는 거 봐, 선욱아. 너 이 새끼 이렇게 건치인 거 알았니?’

집념의 강영수가 기어코 인터넷에서 찾아내 보여준 모의토론 오리엔테이션 사진을 떠올리며, 그날 들었던 웃음소리가 이지훈의 옆에 서서 웃고 있는 사람 중 누구였을지를 추측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을 궁금해하는 이유가 나의 마음 때문이라는 건 적응하기 힘들었다. 왜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가 치닫는 걸까. 그래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데도.

엉키는 생각을 서둘러 끊어낸 것과 동시에,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책걸상 안의 핸드폰에 시선이 멎은 순간 마침 액정이 반짝인 건 뜻밖이었다. 메시지가 화면 위로 떴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는데도, 메시지를 본 순간 그게 최혁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최혁준과 메시지를 한 적이 없었다. 학교 외에는 딱히 볼 일조차 없는 관계에 연락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뜻밖의 연락에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데, 액정에 빛이 진동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진동을 무음으로 바꾸기부터 했다. 5초 정도 더 화면에 떠 있던 번호는 부재중 전화 표시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액정이 까맣게 물드는 것을 보고서야 시선을 돌려 반을 둘러보았다. 오후 자습 시간이었다. 한 시간만 더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습하고 더운 여름날이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짜증이 나는 날씨에 굳이 몇 명 안 되는 아이들을 잡겠다고 복도에 나와 있길 자처하는 선생은 없었다. 선생님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반 아이들은 자고 있거나, 혹은 딴짓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비교적 수월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여보세요.”

텅 빈 화장실로 들어와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최혁준이 전화를 잘못 걸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사말을 한 것도 걔가 잘못 전화했음을 알아서 깨닫고 전화를 끊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고.

그러나 최혁준은 내가 여러 번 목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기다리던 나는 투둑, 투둑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장실 끝에 붙은 창문의 틀 위로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유독 아침부터 습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싶었는데 비가 오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오늘 우산을 가져왔었나. 내일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예정이라던 기상 캐스터의 예보를 보았던 게 어제였나, 그제였나를 생각하며 기억을 뒤적였다. 늘 갖고 다니던 3단 우산은 저번 주 토요일,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 영은이에게 쓰고 가라며 건넸었다. 우산 손잡이를 집으면서 머뭇대던 영은이가 같이 가지 않을 거냐고 묻던 말에 고개를 젓던 순간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독서실에 가야 한다는 내 말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던 영은이는 나중에 우산을 돌려주겠다고 했었다. 그 후 내가 우산을 새로 샀었나. 다음 날 서점과 붙은 상점에 들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죽죽 내려오는 빗줄기는 소나기보다는 약하고, 이슬비라기에는 꾸준했다. 한 시간 뒤에는 그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공부 잘되냐?

최혁준은 뜻밖의 말로 대화를 열었다. 꼭 이지훈이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 간극에서 오는 이질감을 곱씹으며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창틀 대신 밖으로 나간 팔이 대신해서 젖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 같은데, 그러면서 나는 소리가 달랐다. 나는 조금씩 젖어 드는 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냥 그런데. 왜?”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에게 전화하진 않았을 거였다. 당연히 나가야 하는 물음이었는데도, 최혁준은 말문이라도 막힌 것처럼 또 한참 입을 열지 않았다. 최혁준의 숨소리와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가 귓가를 나란히 어지럽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물었다.

“너는. 돌아왔어?”

핸드폰을 대고 있는 오른쪽 귀에서도 빗소리가 울렸다. 최혁준도 어디선가 비를 맞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희미하게 들려야 할 빗소리는 입을 다물고 있는 최혁준 때문에 선명할 정도로 강하게 들렸다. 비는 내리는 찰나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인지한 순간 이미 바닥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결코 나와 눈을 맞출 수 없을 빗줄기들을 보며, 최혁준의 대답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내가 웃긴 이야기해줄까.

그런 말을 꺼낸 것치고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만 있어도 최혁준이 말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처럼 오래 지나지 않아 최혁준이 말을 시작했다.

-나 과외 해주던 대학생이랑 우리 아빠랑 바람났대.

과외를 받고 있었구나. 방학 전 치른 1학기 기말고사에서 최혁준의 성적이 생각보다 높았던 게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런 성적을 받게 하려고 아들에게 과외를 시킨 최혁준의 약쟁이 깡패 아빠는 제 아들과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대학생이랑 바람이 났고.

한 문장에 이해할 수 있는 말과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섞였다. 나는 그걸 굳이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그걸 스위스에서 알게 된 새엄마가 새벽부터 한바탕 지랄하더니 비행기 표 끊고 한국으로 갔어. 아빠는 뭘 잘했다고 성질내더니 지 따까리들 끌고 사라졌고. 나는 그냥 다음 날 일어나서 비행기 탔거든.

“…….”

-근데 지금 와 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집만 지랄이 나 있네. 애새끼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들은 그대로 다 있는데, 그 새끼들 옷은 없어. 집이 존나, 무슨…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아.

듣다 보니 최혁준이 전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혁준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나 말고는 없었다. 애들이 떠들던 소문처럼 최혁준은 학교 밖에 저처럼 강제 전학을 당하거나 혹은 퇴학을 당한 친구가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게 이런 말을 꺼내어놓을 때마다 묘하게 긴장한 것처럼 침을 삼키는 놈만 봐도 알았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나를 앉혀 두고 최혁준이 하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또 이지훈이 합류한 순간부터 최혁준이 침묵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런 행위가 몇 주간 이어지다 보니 확신할 수 있게 됐다. 최혁준은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만 했다. 마치 그런 우울함까지 털어놓는 일은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나는 최혁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었다. 최혁준의 말에 따르면 헤까닥 돈 게 분명한 그 대학생이 겁도 없이 호텔에 전화해서 새엄마에게 모든 걸 일러바쳤다는 이야기와 그 사실을 들킨 순간에도 당당하던 제 아빠, 그런 아빠 앞에서 방을 장식하던 꽃병을 죄다 들어 깨부쉈다던 새엄마에 관한 내용이 줄줄 나왔다. 최혁준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킬킬댔다. 가끔은 그 대단한 꼴을 혼자 본 게 아쉽다는 듯이 말하며, 너도 같이 봤으면 웃겼을 텐데, 했다.

빗소리에는 묻힐 수 없는 누군가의 음울한 가정사. 담벼락 밑에 서서 비슷한 꼴로 서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화를 붙든 채로 엄마에게 사과하던 나의 모습. 내 달팽이관에 끈끈하게도 달라붙던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 그러니까,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털어놓을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들.

빗줄기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밖으로 내민 팔을 타고 물방울이 거듭 미끄러져 내렸다. 아래로, 그보다 더 아래로. 아마 비는 내가 집에 갈 때까지도 멈추지 않을 거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꿉꿉하고 더운 장마가 턱 끝까지 추격해 왔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뭐. 아, 아빠는 뭐 하냐고? 몰라. 또 어딘가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

“아니. 그거 말고.”

-…….

“괜찮냐고, 너.”

최혁준의 당황한 숨소리가 귓가를 눅눅하게 만들었다. 잠깐의 침묵 후, 걔가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스스로 알아챈 것처럼 갈수록 작아지던 웃음소리는 나중에 가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최혁준이 조용히 뇌까렸다.

-괜찮아야지 그럼. 처음도 아닌데.

“…….”

-우리 엄마 때도 이랬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난리였고.

나는 밖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안으로 다시 들여놓았다. 축축해진 팔을 허공에 털며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온 연락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직 일하고 계실 시간이고, 이지훈과 강영수는 학원에 있을 테니까. 다들 우산은 있겠지, 그래도. 비를 안 맞아야 할 텐데. 누구를 위하는 건지 모를 말을 둘러대며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댔다. 최혁준이 침묵을 깼다.

-애새끼들이 엠피며 게임기까지 다 놔두고 갔어. 네 거보다 새건데, 줄까?

“…….”

-어차피 버릴 거라 물어보는 거야. 내일 되면 집 싹 정리되어 있을 거라, 주고 싶어도 못 줘.

최혁준은 혼자 있기 싫다는 말을 참 희한한 방식으로 했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않은 채로 뒤돌았다. 거울 안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는 그 안의 쓸쓸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댔다.

“집이 어딘데?”

외로워하는 목소리는 왜 다 비슷한 걸까. 외면할 수조차 없게.

“우산 없었냐?”

문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며, 최혁준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는 자신도 젖어서, 앞머리가 착 가라앉아 있으면서. 나는 학교 앞을 나오자마자 발견한 까만 차를 떠올렸다. 최혁준이 제집까지 타고 오라며 보내준 차였다. 처음 보는 내가 뒷문을 여는데도 앞을 본 채로 움직이지 않던 네모난 뒤통수는 집 앞에 나를 내려주는 순간까지도 뒤로 한 번 돌려지지 않았다.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는 순간마저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하고도 각진 어깨를 보던 나는 최혁준이 왜 매일 깡패란 말을 달고 사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저런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살면서 그 사실을 잊고 산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였다.

집을 묻는 내 말에 어차피 넌 찾아오지도 못한다며 딱 자르던 말을 들었을 때 대충 예상은 했지만, 최혁준의 집은 기묘히 숨겨져 있었다. 부러 외딴곳에 지은 별장 같기도 했다. 개인의 소유일 리 없는 숲길 사이의 잘 가공된 길을 지나고서야 있는 집인 것부터 시작해 마당에 있는 연못과 삼단 분수가 일반 가정집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생활감이라고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한 데다가, 이웃조차 없는데 겉이 번드르르하게 꾸며져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집이 전혀 들어설 예정이 없던 곳에 갑자기 지은 집처럼 풍경과 죄다 따로 놀았다.

그렇게 급조된 집이어서인지 최혁준도 딱히 애정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하얀 집 대문을 발로 뻥 차듯 열어젖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도된 공백이라는 사실은 거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랄이니 뭐니 하던 최혁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거실이 강도라도 든 것처럼 혼잡했다. 누가 봐도 악의로 점철된 혼란이었다. 거실로 들어선 순간 발을 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멈춰 선 나와 달리 최혁준은 익숙하다는 듯 난장판을 헤쳤다. 산산조각이 난 TV며 마주 본 채로 넘어진 유리 장식장들을 가볍게 건너뛴 최혁준이 계단 아래에 붙어 있는 방으로 사라졌다.

“야. 여기.”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온 놈이 선이며 본체가 구분되지 않은 것들을 내게 마구 안겼다. 순식간에 사용감조차 별로 없는 신제품 게임기와 핸드폰, MP3가 손에 들렸다. 나는 그것들을 잠시 내려보다가 발을 뗐다. 가죽이 죄다 찢긴 소파 위로 물건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왜? 별로냐?”

최혁준의 시선은 내가 방금 내려놓은 물건들에 꽂혀 있었다.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이것일 텐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내가 태안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본인들이 무언가를 사줄 때마다 갚으려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던 강영수와 이지훈이 떠올랐다. 그들과 달리 그런 것을 설명할 의지가 없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라면 있냐? 배고픈데.”

놈의 뒤로 깨진 시계가 보였다. 저렇게 큰 괘종시계를 깨려면 무엇으로 얼마나 세게 내리쳐야 하는 걸까. 나는 바닥에 쏟아진 파편들로 쏠린 시선을 주워 담고는 부엌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결과적으로 최혁준 집에는 라면이 없었다. 내가 부엌의 찬장이란 찬장은 모두 열어보는 동안 뒤에서 애매한 자세로 서 있던 최혁준이 중얼대던 말에 따르면 새엄마가 그런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했다고 했다. 신문들 사이에 끼어 있던 중화요리집 전단지를 겨우 찾아 전화했을 때쯤엔 이미 밤이었다.

짜장면 두 개와 탕수육. 짜장면을 앞에 둔 채로도 최혁준은 머뭇대기만 했다. 먹기 싫냐? 물은 순간에야 젓가락 뜯는 척을 했다. 이 난리통에 뭘 먹었을 리 없는 최혁준을 생각해 한 말이었지만, 막상 짜장면을 앞에 두니 배가 고프긴 해서 젓가락을 집었다. 왜 이렇게 집이 머냐며 짜증부터 내던 배달원을 보며 눈치는 챘지만 짜장면은 죄다 불어 있었다. 그래도 젓가락으로 대충 뒤적이니 먹을 만은 했다. 세 젓가락쯤 들었을 때 최혁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닌 짜장면에 눈을 고정한 채였다.

“너 걔한테도 이랬냐?”

느닷없는 물음에 단무지를 집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최혁준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 새끼가 네 앞에서 그렇게 착한 척 내숭 부리는 건가 싶어서.”

걔, 그 새끼. 최혁준과 내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은 많지 않았다. 이지훈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마주친 시선부터 뚝 끊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걔 내숭 안 부리는데, 내 앞에서.”

“…….”

“‘척’하는 게 아니고, 바뀐 거야. 네가 안 본 사이에.”

말을 끝내고서야 확인한 최혁준의 표정이 묘했다. 그래도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최혁준이 방금 꺼낸 말 때문에 중학생 때 이지훈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골목길 안에서 나를 밀쳐내던 이지훈의 황급한 손길.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붙잡으려 버티던 나.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지훈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던 순간.

우습게도 그 순간을 돌이켜본 순간에야 지금 최혁준과 마주 보고 있는 이 상황이 비슷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 추억은 이지훈의 우는 얼굴이 끼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지만, 지금 이 난장판에 선 채로도 난 최혁준을 안쓰러워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최혁준에게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내 친구라는 생각은 안 해.”

예상은 했지만, 최혁준은 그런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한 적 없던 가정사를 털어놓을 수는 있어도, 핸드폰 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은 이상한 관계였다. 최혁준이 내 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나는 최혁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여태껏 눈이 마주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말을 건넨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마 그건 비가 와서, 그리고 최혁준이 또 한 번 버림받아서겠지.

나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어서일 테고.

“그래도 네가 바뀔 수 있다고는 생각해. 네가 있는 환경을 바꾸거나, 네 옆에 있는 사람을 바꾸거나. 뭐든. 지금보다는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야.”

“…….”

“네 아빠처럼 살지 마.”

“…….”

“혐오하는 사람을 닮지 않으려면, 두 배로 노력을 해야 해. 냉정하게 봤을 때, 네가 해오던 방황은 그냥 너도 그 사람이랑 별다를 거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아.”

짜장면이 오기 전에 제 방을 구경시켜주겠다며 2층으로 올라가던 최혁준이 별안간 이죽대며 물었다. ‘야. 저거 보여?’ 눈짓하는 곳을 보니 작은 문이 있었다. 구석에 있다는 것 말고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문이었다. 의아해하는 내 눈빛을 확인한 최혁준이 물었다. ‘저 문 열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있어.’ 물음이 한 번 더 건너왔다. ‘내려가 볼래?’ 최혁준은 이미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눈빛이었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이 등을 타고 올랐다. 약이며 깡패며, 집 안 구조나 가구들만 보았을 때는 딱히 이상함을 느낄 수 없는 부잣집 가정의 모습. 과할 정도로 잘 꾸며진 집이 의도적으로 감춘 공간엔 이 모든 것을 흉내 내면서까지 숨기려 했던 것들이 들어가 있는 걸까. 최혁준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계단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놈을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순간 최혁준이 내 대답에 안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놈은 그 사실을 확신할 틈조차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너도 열지 마.’ 잠깐 멈칫하던 최혁준은 그러나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계단을 올랐다. 최혁준이 듣지 못한 척만 했을 뿐 아니라 끝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르게 사는 방법이 꼭 공부일 필요는 없으니까, 노력해 봐.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때도 지금도, 최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떨구더니, 말을 돌렸을 뿐이다.

“내가 볼 때 너는 의사가 아니라 선생이 천직이다. 틈만 나면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것만 봐도.”

젓가락을 짜장면 위로 꽂은 놈은 면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부엌에 난 조그마한 창 너머로 빗줄기가 잦아드는 게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혁준네 집에서는 오래 있지 않고 나왔다. 최혁준네 집에 올 때 데려다줬던 네모난 아저씨가 한 번 더 나를 차에 태워 독서실 앞에 내려놓았다. 독서실에 들어가기 전 확인한 시계의 시침이 10시를 가리켰다. 이지훈에게 저녁을 먹었나 연락해 보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비는 더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잘 들어왔겠지, 뭐. 어차피 집에 갈 때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한 나는 핸드폰을 가방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마을과 독서실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 마음씨 좋은 독서실 아저씨는 독서실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소유하고 있는 봉고차에 태워, 구역을 나눠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원래는 주변의 아파트 단지에만 하던 서비스인데, 알고 보니 우리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였던 그가 나와 이지훈까지도 선뜻 그 안에 포함해주었다. 날 보자마자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부터 한 걸 보면 할아버지에게 갖고 있는 호감이 생각보다는 큰 듯했다. 2학년이 된 후 부쩍 귀가 시간이 늦어진 이지훈과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가장 늦게 귀가하는 무리에 섞였다. 나중에는 같이 봉고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눈에 익을 정도였다.

오늘도 봉고차 안에 타 있는 사람은 익숙했다. 자연스레 정해진 지정석으로 가던 나는 옆에 이미 타 있고도 남았을 이지훈이 안 보인다는 사실에 멈칫했다. 늘 나보다 먼저 내려와서 영어 단어집을 내려다보고 있던 놈이라 더욱 의아했다. 곧 오겠지,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고개를 빼서 독서실 위를 올려다보게 됐다.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딱히 온 연락이 없었다.

어느덧 봉고차의 시계가 12시 5분을 알리고 있었다. 3학년 형과 누나들까지도 다 차에 탔다. 이지훈만 타면 출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독서실 정리를 끝내고 나온 아저씨가 차에 올라탄 순간에는 괜히 긴장하게 됐다.

“다 왔지?”

시동을 걸며 백미러를 통해 묻는 그는 이미 모두가 타 있으리라고 확신한 모양새였다. 나는 다급히 조수석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저… 아직 한 명이 안 왔는데요.”

“어? 누구?”

“제 친구인데. 잠시만요. 연락해 볼게요.”

핸드폰을 들어 이지훈에게 문자를 작성했다.

아니다. 그냥 전화할까? 혹시 자고 있는 거 아냐?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려다 말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몇 번 독서실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3학년 형이었다. 보고 있던 수능 필수 영어 단어장으로 시선을 내린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댔다.

“걔 오늘 독서실 안 왔는데.”

“…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네 친구 말이야. 정보를 덧붙이는 목소리가 평이했다.

“자리 계속 비어 있었다고. 나올 때도 그랬고.”

“아….”

“…….”

“…감사합니다.”

멍청하게 대답을 내놓은 순간에야 나는 그가 익숙한 이유를 알아챘다. 그는 이지훈과 같은 방을 쓰는 형이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아저씨가 출발하겠다고 말하며 차 안의 불을 모조리 껐다. 단어장을 보던 형과 누나들이 눈을 감거나 팔짱을 끼고는 잠깐 난 틈을 이용해 눈을 붙이려는 노력에 돌입했다.

난 그들과 달리 아래만 보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다 돈 차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지훈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함께 독서실을 다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독서실에서 자정이 넘어 돌아오기 시작하고서부터 할아버지의 취침 시간이 늦어졌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열려 있는 문 쪽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거실을 향해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몸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 있던 선풍기를 할아버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느리게 끔벅이다 천천히 뜨인 눈이 내게 고정되는 순간엔 조용히 중얼대기도 했다.

“저 다 씻었어요. 얼른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몸을 천천히 돌렸다. 끄응, 한숨인지 신음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에 이어 무뚝뚝한 인사가 돌아왔다.

“…그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백발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매년 더 하얗게 세는 것같이 느껴졌다. 방금 들은 목소리처럼 미약한 선풍기 바람에도 허리가 꺾이듯 흔들리는 흰 머리카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소리를 죽여 내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 위에 얹어두었던 수건을 벽에 건 후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빵이 든 봉지가 올려져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사둔 것 같았다. 내가 씻는 것을 확인하면 바로 잠드시기에 몇 시까지 공부하는지는 모르실 텐데도 늘 간식을 준비해 두셨다. 단팥빵, 소보로빵, 등등. 내가 한 번도 돈을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던 빵이 그득 들어 있는 까만 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단팥빵 하나를 집었다.

양치야 어차피 한 번 더 하면 되는 거니까.

집에 와서 한 거라고는 씻은 것밖에 없는데 어느덧 한 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면서도 나는 스탠드 불을 켰다. 오늘 최혁준 집에 간다고 독서실에 늦게 도착해 채우지 못한 공부량을 지금이라도 끝내야 했다. 다행히 내일은 토요일이니 늦게까지 공부해도 될 것 같았다.

세 입 만에 해치운 단팥빵 껍질을 버리려고 쓰레기통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 옆 콘센트에 꽂혀 있는 핸드폰에 시선이 스쳤다. 충전 중일 때는 보통 빨간빛만 뿜곤 하던 단자 입구에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화가 왔거나 문자가 왔을 때 보이는 색이었다.

내가 씻는 새 온 연락이 이지훈에게서 온 연락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봉고차에서 내내 쥐고 있던 핸드폰이 잠잠했던 걸 떠올린 순간에는 괜히 막막한 숨을 뱉게 됐다.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실망하는 기분은 이상했다. 다시는 그런 감정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하게 될 정도로. 나는 애써 핸드폰을 외면하고 샤프펜슬을 쥐었다.

28. Drug addiction has been considered as a complex and chronic…

집중하자고 되뇌며 문제집을 바짝 끌어당겼다. 문장을 끊으려 노력하던 행위는 이번에도 1분도 가지 못하고 중단됐다. 문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족족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하.”

결국엔 샤프펜슬을 집어 던졌다. 핸드폰을 확인해 이지훈에게 연락이 왔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공부하기는 글렀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몸을 구부려 핸드폰을 쥐어 들었다. 홀드 버튼을 살짝 누르자마자 화면이 밝아졌다. 역시나 문자가 와 있었다.

저장명이 아닌 번호가 뜬 순간 잠시 부풀어 있던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최혁준이 보낸 메시지임을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잠시 멈춰 있던 나는 손을 움직여 [ㅇㅇ]라는 간단한 답장을 보낸 후 메시지 함을 나왔다. 최혁준의 메시지를 꾹 누르니 전화번호부에 새로운 사람을 추가하겠냐는 물음이 떴다. 나는 최혁준의 이름 세 글자를 등록한 후 화면을 껐다.

이 집에 사람이라고는 둘뿐, 할아버지는 잠드신 데다 나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사방이 고요했다. 나는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멈춘 줄 알았던 비가 다시 오는지, 처마 끝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

따지고 보면 이지훈은 메시지를 잘 확인하는 편은 아니었다. 1학년이었던 작년엔 아예 핸드폰을 집에 두고 다니기도 했다. 굳이 핸드폰을 학교에 가져가 아침마다 담임한테 내는 것도 귀찮고, 강영수나 아버님이나 급한 일이 있으면 어차피 내게 대신 연락할 테니 구태여 필요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집에 오는 순간까지 대부분 붙어 있던 때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번 해부터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는 우리는 같은 반이 아니고, 예전처럼 어딜 가든 함께 다니지도 않으니까. 작년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며 핸드폰 소지에 대한 건의사항도 받아들인 덕에, 올해부터는 교사가 핸드폰을 걷으라고 명령하는 일 또한 없어졌다. 이지훈이 핸드폰을 갖고 다니기 시작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래도 독서실에서 집에 오는 길은 늘 함께였기에 크게 바뀐 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나만 그 사실에 안정감을 느낀 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서야 하게 됐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더 많아지겠지. 대학을 가고, 군대에 가고, 취업한다면. 사는 곳도 달라지고 매일 시간을 쏟는 일조차 달라질 텐데, 줄곧 서로의 옆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은 솔직히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몇 년이 흐른 후에도 이지훈의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이지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동안, 나만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누군가 이지훈의 옆으로 다가오고 머무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지훈이 내게 연락하지 않는 동안 혹시 그 사람과 있을까를 궁금해하면서. 때로는 연락이 올까 봐, 때때로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마음을 졸이면서.

‘행복해?’

그러는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

인중으로 무언가가 주룩 흐르는 느낌이 들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팽개쳐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 앞에서 5분 가까이 코 밑을 훔치고서야 피가 멎었다. 혹시 몰라 휴지를 작게 뭉쳐 콧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공부를 겨우 끝내고 잠드는 순간까지도 핸드폰은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코 밑이 간질간질했다. 또 코피인가. 눈조차 뜨지 않은 상태로 손을 들어 코 밑을 닦아냈으나 손에 딱히 묻어나오는 게 없었다. 다만 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은 여전히 얼굴 곳곳에 존재했다. 볼이 간지럽다가, 다음으로는 턱이 간지러웠다. 계속해서 부위가 바뀌는 걸 보니 모기나 파리가 얼굴 근처에서 얼쩡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니 어제 모기향을 피우고 자긴 했었나. 생각해보던 나는 일단 손부터 들어 대충 눈앞을 휘휘 쫓았다. 다행히 몸까지 비틀며 방어에 나선 보람이 있는지 더는 볼이 간지럽지 않았다.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던 나는 다음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쭈. 요거 봐라.”

모기가 낼 리 없는 목소리였다. 올려다본 시야 속엔 이지훈이 가득했다. 꿈인가? 눈을 의심하며 두어 번 감았다가 떴지만, 이지훈의 표정이 더욱 장난스러워지는 꼴만 실시간으로 관람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눈앞에서 날 약 올리듯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는 강아지풀을 보니 방금까지 내 얼굴을 간지럽히던 정체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한 것들을 멍하니 훑어보던 나는 황급히 몸부터 일으켰다. 눈을 비벼 봐도 내 머리맡 부근에 쪼그려 앉아 있던 이지훈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란 증거였다.

“…뭐야. 언제 왔어?”

갈라진 목소리로 따져 물으며 뒷머리를 더듬댔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자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강아지풀을 옆으로 내팽개쳤다. 아구구,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며 내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자리에 발라당 드러눕는 놈은 흰 반팔에 까만 반바지 차림이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10시라는 시간을 확인한 순간에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주말이래도 이렇게 늦게까지 자는 일은 흔치 않았다. 거기다 매일 맞춰놓는 알람이 오늘도 분명 울렸을 텐데, 왜 못 들었지.

당황한 내 앞으로 이지훈이 무언가를 툭 던졌다.

“그거 찾냐?”

내 핸드폰이었다.

“…네가 이걸 왜 갖고 있어?”

“알람은 계속 울리는데 너는 깰 생각이 없어 보이셔서요.”

심드렁히 대꾸하는 놈은 방금까지 내가 베고 있었던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선풍기 바람에 하늘하늘 휘날렸다. 그러고 보니 선풍기는 또 왜 내 방에 있지.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눈앞에 가득했다. 핸드폰을 들어 꺼져 있는 알람부터 확인한 나는 망설이면서도 물었다.

“몇 시에 왔는데?”

주말에는 보통 알람을 9시에 맞춰놨다. 이지훈이 말하는 걸 보니 알람 소리를 들은 모양인데, 그러면 한 시간 전부터 이 방에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크게 하품한 이지훈이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말을 받았다.

“몰라? 여덟 시였나 여덟 시 반이었나. 아빠가 영감이랑 낚시 갈 거라고 하길래 따라왔지.”

“아… 가셨어?”

“진작 갔지. 둘 다 성격이 오죽 급하냐. 너 일어나면 밥 같이 먹으라고 돈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그제야 상황이 대강 감이 잡혔다. 가끔 일어나곤 하는 일이었다. 같이 낚시터에 가기 위해 할아버지를 데리러 오는 이지훈네 아버지를 따라 이지훈이 우리 집에 오는 일도, 두 분이 나서는 길을 우리가 배웅하는 일도. 다른 게 있다면 이렇게 이지훈이 내 방에 들어와 나를 깨운 건 처음이라는 것 정도. 상황을 파악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씻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 가.”

이지훈이 내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발에 매달렸다. 맨 발등에 이지훈의 볼이 닿는 느낌이 소름 끼쳤다. 발을 털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발목을 감싼 이지훈의 팔 힘만 더욱 거세어지는 것 같았다. 강영수나 할 법한 장난이었다. 그러나 차이점은 강영수를 떨쳐낼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 나는 굳어가는 표정을 관리하지도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쪽 눈만 슬그머니 뜨고는 위를 올려다보던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뭐 하는 짓이야. 비켜.”

“날 두고 어디 가냐고.”

“…아니, 씻을 거라고.”

“같이 씻자, 그럼.”

아침부터 헛소리가 심했다. 내 표정을 본 이지훈이 킥킥대고 웃었다.

“또, 또 내외한다. 또.”

가벼운 타박과 함께 잡혀 있던 발이 자유로워졌다. 방금까지 누워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지훈이 내 등을 밀었다. 정신을 차릴 틈조차 없이 등을 민 놈 때문에 순식간에 방을 나와 거실을 건너 화장실 앞에까지 섰다. 문을 열어준 이지훈이 귓가에 대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속삭였다.

“얼른 씻고 오셔요, 서방님. 제가 계란찜까지 예쁘게 해둘게용.”

엉덩이를 툭 친 놈이 뒤로 물러섰다. 야! 뒤늦게 소리쳤지만 들어야 할 놈은 이미 주방으로 달아난 뒤였다. 저게 아침부터 진짜 돌았나… 쫓아가려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멈췄다. 귓가며 목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답이 없었다. 지를 좋아한다는 것도 모르고 저렇게 구는 저 뻔뻔한 새끼나, 저런 뻔뻔한 새끼의 말장난에 휘둘리는 나나. 나는 욕을 중얼대면서도 물을 틀었다. 몸에 올라온 열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씻고 나오니 정말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다른 거야 원래 집에 있는 반찬이래도 김이 올라오는 계란찜은 이지훈이 방금 한 게 분명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냄비 받침대 위로 된장찌개를 내려놓던 이지훈의 눈이 날 향했다. 때마침 궁금한 게 있었던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시켜 먹으라고 돈 받았다면서 뭘 또 밥을 차렸냐.”

예상했던 질문인 듯, 이지훈은 시선을 거두더니 수저부터 내밀었다.

“아침부터 뭘 또 시켜. 그 돈으로는 점심을 먹든가, 저녁을 먹든가 하면 되지.”

별말도 아닌데, 괜히 침을 삼키게 됐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까지 같이 있겠다는 말로 들려서 그랬다.

“…오늘 학원 안 가게?”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던 듯 이지훈이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막 떠올린 표정이었다. 그도 잠깐, 놈이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움직였다.

“보고.”

애매한 답변이었지만, 안 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을 먹었다. 방학이니 나야 주말에는 학교에 안 가는 게 당연했지만, 평일과 주말 구분이 없이 학원에 가는 이지훈은 오늘도 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툭, 하고 상 아래의 무릎이 부딪치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의도한 것임을 티 내듯 이지훈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근데 너 왜 새벽에 나한테 문자했냐?”

“…뭐?”

“어디냐고, 열두 시에 문자했잖아.”

어젯밤 보낸 메시지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그 문자를 보낸 것 자체가 의아한 투였다. 같이 타는 거든 아니든 이제는 그냥 말 안 하는 게 당연하다 이건가?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마주친 시선부터 끊어내고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제 봉고 타러 안 내려오길래. 됐어. 그냥 확인차 물어봤던 거니까 신경 꺼.”

“뭔 개소리야. 너 어제저녁에 내 문자 못 받았어?”

“…무슨 문자? 받은 적 없는데.”

눈을 들자마자 나보다 더 황당해하는 것 같은 이지훈을 발견하게 됐다. 나를 잠깐 더 바라보던 이지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 얘 또 사람 이상하게 만드네.”

“아니, 야. 밥 먹다 말고 어디 가는데.”

“니 폰 가지러 간다. 왜.”

3초도 되지 않아 돌아온 이지훈의 손에 내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동그란 상 위로 핸드폰을 툭 떨어뜨린 놈이 고갯짓했다.

“열어 봐.”

“뭘.”

“문자함 열어 보라고.”

“왜?”

“뭘 왜야. 네가 나한테 문자 받은 적 없다며. 나는 보냈는데 네가 못 받았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같이 알아보자 이거지.”

팔짱을 낀 채로 기다리는 놈은 내가 문자함을 열어볼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떠밀리듯이 핸드폰을 집어 든 나는 문자함에 접속했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새벽 3시에 온 메시지는 아까 이지훈이 짓던 표정처럼 꼭 황당해하는 것같이 보였다. 핸드폰을 만지는 나를 보고만 있던 이지훈이 고개를 들이민 것도 동시였다. 봐 봐, 하고 핸드폰을 뺏어간 놈이 인상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터치했다.

“아니, 이거 말고. 안희연 폰 번호로 문자 안 왔어?”

“…안희연 폰?”

“어. 나 어제 학원에서 폰이 배터리 없다고 꺼져서, 안희연한테 빌려서 보냈지. 이상하네. 분명 간 것까지 확인하고 폰 돌려줬는데. 그게 왜 안 갔냐. 너 번호 이거 아냐?”

고개를 갸웃한 이지훈이 열한 가지 숫자를 줄줄 뱉었다. 내 번호였다.

“…맞는데.”

인상을 쓴 채로 키패드를 꾹꾹 눌러대던 이지훈이 다음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언가 답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야, 찾았다. 여기 있었네.”

놈이 내 앞으로 핸드폰을 내민 것도 동시였다. 화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 끈 건 스팸문자함이라는 문구였다. 온갖 특수문자들이 난무하는 광고 문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특수문자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문자 메시지가 시선을 끌었다. 클릭하자 화면 가득 메시지가 떴다.

이지훈이 누군가의 핸드폰을 빌려 문자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리고 그 문자가 내 핸드폰에 스팸문자함으로 향했을 거라고는 더더욱. 마찬가지로 그렇게 됐을 거라고는 상상 못 했을 이지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더니 내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가 옆으로 툭 던졌다. 상 옆에 나동그라진 핸드폰을 멍하니 보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잇는 이지훈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댔다.

“섭섭했냐?”

그럴 리가 없는데도, 순간 어젯밤 하던 생각을 죄다 들킨 것 같은 느낌에 심장이 덜컥댔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가 애냐. 뭘 그런 거 가지고 섭섭해.”

“왜. 나였으면 섭섭했을 것 같은데.”

“…….”

“난 어디냐고 문자 보낼 시간에 전화했다. 안 받으면 집으로 쳐들어가고.”

장난스러운 입꼬리와는 달리 말투가 꽤나 진지했다. 말문이 막힌 나를 본 이지훈이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안희연 폰이 잘못했네. 얼마 전에 번호 바꿨다더니, 이전 폰 주인이 스팸문자 보내던 새끼였나 보지?”

마침표라도 찍듯 요약하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하는 이지훈을 보는데 괜히 민망했다. 저런 것도 모르고 밤새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게 우스워서. 나는 한 박자 늦게 수저를 들며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외삼촌 오셨었냐?”

“어. 잠깐. 회만 먹고 아침에 다시 올라갔어. 바쁘대.”

이지훈의 외삼촌 이야기는 종종 들은 적이 있다. 이지훈의 어머니랑 꽤 나이 터울이 있는 어린 남동생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지훈네 어머니를 잘 따랐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이지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이지훈 아버지는 물론 이지훈과도 꽤 허물없이 지냈다. 나는 직업군인인 그가 이지훈이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려고 마음을 먹은 데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그가 가끔 이렇게 태안에 들렀다 갈 때마다, 이지훈이 묘하게 가라앉는다는 사실 또한. 이지훈네 아버지는 외삼촌과 술을 먹으면 꼭 그렇게 운다고 했다. 늘 씩씩한 그가 누군가를 붙잡고 우는 광경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하던 이지훈의 표정만은 생생했다. 이지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여러 번 말했었다.

‘삼촌이랑 엄마는 하나도 안 닮았거든? 근데 그래도 상관없나 봐. 아빠는 그냥 그 핑계가 필요했던 사람처럼 울어.’

어머니의 유품 사진을 전해준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그날 이후, 나는 이지훈이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내 앞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에서도 울지 않았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우는 모습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놈이 스스로 우는 걸 허락할 리 없었으니까. 어떨 땐, 그런 고집이 이지훈을 지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도 이지훈은 울기는커녕 질린다는 듯 투덜대기나 했다.

“아빠는 안 괜찮지. 겨우 세 잔 먹은 소주도 눈물로 다 나왔을걸.”

“…….”

“어제는 거기다 삼촌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둘 다 질질 짜고 난리 나 가지고. 와, 회를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지훈이 별안간 뚝 말을 멈추고는 나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내 뒤를 보고 있었다. 놈을 따라 고개를 돌려 봤지만, 마당에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자비라고는 없는 여름 햇빛이 마당 구석구석까지 쫓아가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 공부하기 싫다.”

중얼댄 놈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잘 하지도 않는 말을 해 귀를 의심하게 한 것치고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야. 자전거 타러 갈래?”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쭉 달렸다. 누구 하나 앞서 있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의 뒤꽁무니를 보지 않으려 엎치락뒤치락하며 쉴 새 없이 발을 굴렸다. 둘 다 숨을 헐떡일 때가 되어서야 자전거를 멈췄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불꽃놀이를 볼 때마다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불꽃놀이가 언제라고 했었지. 강영수가 들떠서 중얼대던 날짜를 가까스로 떠올린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물병을 던져줬다.

물로 목을 축이고는 이지훈 옆에 가 앉았다. 이지훈은 정자 안에 팔과 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로 누워 있었다. 방금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오르막길을 오르던 것 때문인지,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숨이 달리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옷으로 닦아내며 절벽 아래의 풍경에 시선을 뒀다. 정자 안에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가라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이지훈이었다.

“너 최혁준이랑 많이 친해졌더라. 문자도 하고.”

뜻밖의 물음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훈이 누워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내렸지만 이지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는 놈의 가슴팍은 여전히 평소보다는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최혁준과 문자한 건 어제 일어난 일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다가, 아까 문자함을 같이 보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사이 최혁준의 이름을 본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연락이 왔길래.”

“너한테?”

“어.”

“뭐 하러? 그 새끼 어차피 방학에 학교도 안 나오잖아.”

“…뭐.”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떠드는 건 아닌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바로 대답하지 않는 내가 의아했는지 이지훈이 눈을 가리던 손까지 치운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옆에 두었던 물병을 끌어오며 놈의 시선을 피했다.

“나름… 사정이 있더라고.”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지훈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더 말할 용의가 없는 나를 눈치챈 것처럼 이지훈이 상체를 일으켰다.

“세상에 사정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작게 흘린 비웃음 소리는 그러나 꽤 선명했다. 멈칫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누구 사정을 들어주고 싶은지가 문제인 거지.”

그게 최혁준은 아니라는 것처럼 일갈하듯 뱉은 것치고, 이지훈은 덤덤했다. 격한 운동으로 인해 올라온 홍조마저 사라진 볼이 깨끗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잠시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너 최혁준 진짜 기억나?”

이지훈은 최혁준을 꺼려 했고,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최혁준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날 화장실에서 이지훈은 최혁준이 기억난다고 했지만,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자세히 말해준 적이 없었다.

한참 말이 없던 이지훈이 시선을 바다에 둔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철승 본드 했던 거 알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걸로도 충족이 안 되는지, 다른 거에 손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때쯤 옆에 있던 게 최혁준이야.”

순간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최혁준이 밥 먹듯이 꺼내던 이야기가 이지훈이 방금 꺼낸 이야기 위로 무리 없이 겹쳐졌다. 최혁준은 이지훈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지훈이 꺼낸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겹치는 데가 있었다. 본드보다 더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약을 말하는 건가. 그때쯤 최혁준이 옆에 있었다는 건 그 약을 제공해줬다는 거고? 그런데 최혁준이 어떻게?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 안에서 회오리쳤다. 딱딱히 굳은 내게로 이지훈의 고개가 돌아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텐데도, 놈은 내가 긴장한 것을 알아챈 것처럼 웃기부터 했다.

“뭘 또 그렇게 쫄고 그러냐. 어차피 너랑은 상관도 없을 이야기야.”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오버해서 웃는 놈을 보면서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이지훈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내 머리 위로 놈의 손이 올라왔다. 가볍게 머리를 헝클이고 손을 뗀 이지훈이 방금보다 가시를 죽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이를 안심시킬 때나 쓸 법한 다정한 말투였다.

“난 너 안 그렇게 생겨서 착한 거 좋아. 나도 그거에 도움받았다고 생각하고.”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 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너무 순진하게 굴진 말라고.”

“…….”

“그 새끼 네가 사정 고려해줄 만큼 착한 놈 아니니까.”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밥 먹고 공부해야지, 또. 할 말을 끝낸 것처럼 자전거를 향해 다가서는 놈의 뒷모습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 * *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선잠에서 깼다.

버스는 그 순간마저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기는 했다. 창밖으로 휴게소 표지판이 크게 보였다. 우리 반 버스가 엔진을 점검한다고 가장 늦게 출발했으니, 다른 반은 이미 휴게소에 도착했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했다. 밖에는 얼굴이 익은 아이들이 이미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지훈네 반 숫자가 적힌 버스가 어디 있는지부터 살피며 어디냐고 답장을 보냈다.

버스가 완전히 멈춰 선 것과 동시에 담임이 앞 좌석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십오 분 휴식. 다들 늦지 말고 버스에 타. 제시간에 안 오는 놈은 놓고 갈 테니 그렇게 알고.”

그 말이 움직여도 된다는 허락이었던 것처럼 버스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몸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혹은 버스에서 당장 뛰어내리려는 듯 복도에 서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움직임조차 없이 조용한 건 최혁준뿐이었다. 멀미가 심한 편인지 차에 탄 순간부터 팔짱을 낀 채로 미동도 없이 내내 자던 놈을 떠올린 나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 때문인지, 잠을 청하는 최혁준의 얼굴은 언뜻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약 중독자가 보이는 증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선, 식욕 또는 수면 패턴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전과는 달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거나 혹은 잠이 과도하게 많아지는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

잠이 오지 않았던 어느 날 밤, 컴퓨터를 통해 찾아보았던 마약 중독자 증상이 떠올랐다. 이지훈에게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1학기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최혁준의 모습들은 이젠 때때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최혁준을 깨워 휴게소라고 일러주는 것 대신 버스에서 내렸다. 이지훈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나가다가 붙들린 것처럼, 모여 있는 선생님들 앞에 잠깐 서 있던 이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선생님들에게 꾸벅 인사부터 했다. 나를 확인한 체육이 웃으며 자리를 떠도 된다고 허락이라도 해주듯 이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부리나케 다가오는 놈의 손에 핫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야야, 받아. 아뜨, 아, 존나 뜨거워.”

내게 하나를 건네자마자 허공에 손을 급히 털어대는 걸 보니 갓 나온 핫바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선생님들 앞에서 모범생 흉내를 내며 얌전히 서 있을 때는 언제고, 내 앞에 섰다고 펄쩍 뛰면서 오버하는 꼴이 꽤 웃겼다. 받은 핫바의 꼬치는 적당히 따뜻했다. 저러고 오버하는 게 놈의 장난임을 눈치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별로 안 뜨거운데.”

내 표정을 쓱 본 이지훈이 코 밑을 훔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언제 올지 모를 널 위해 이걸 사서 들고 있던 내 마음이 뜨겁다는 거지. 국어 시간에 마음의 촉각화라고 안 배웠니? 대한민국 수험생들은 그걸 공감각적 감각이라고 불러.”

가만두면 국어 선생님 대신에 국어 수업까지 할 기세였다. 나는 이지훈이 헛소리를 더 늘어놓기 전에 핫바부터 베어 물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먹었던 이른 점심 식사가 부실해서인지 배가 고프긴 했다. 둘 다 사이좋게 입에 들어온 것을 우물대며 휴게소 끝 쪽에 있는 벤치에 가 앉았다.

“야. 체육이 이따 밤에 반별 장기자랑 끝난 다음에 나한테 뭐 시킬 거 있대서 너랑 하겠다고 했어.”

핫바를 다 먹어갈 무렵 이지훈이 통보하듯 뱉었다. 체육? 그러고 보니 아까 체육 선생님 앞에 서 있었지. 뭘 시키려고 불렀었던 건가. 잠깐 생각하던 나는 슬쩍 인상을 쓰며 이지훈을 돌아봤다.

“나는 왜?”

잠깐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이던 이지훈은 그러나 곧 습관 같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구 좋은 게 뭐냐. 어? 그 김에 얼굴 한 번 더 보면 좋고.”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는 척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담임이 보였다. 야, 2학년 1반 얼른 버스 타!

“할 거지?”

“보고.”

이지훈은 내 무뚝뚝한 대답을 듣고서도 웃었다. 그렇게 말은 해도 내가 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 오는 놈들 놓고 간다고 했다!”

이어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이지훈네 담임의 불호령이 휴게소 주차장을 울리듯이 퍼졌다. 다행히 핫바는 한 입만 더 깨물면 됐다. 이지훈과 나는 거의 동시에 핫바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버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 큰 놈들을 강당에 반별로 줄을 서게 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통솔을 위해 앞에 서 있다가 원래 자리를 찾아간 나는 가방끈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뒤돌았다. 최혁준이었다. 잠에서 깬 지 오래일 텐데도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은 그대로였다. 놈이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야.”

“왜.”

“소지품 검사 언제 한대.”

“…몰라.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그럴 리 없다는 듯 나를 빤히 보던 최혁준은 바라던 답을 듣지 못한 표정으로도 고개를 뒤로 물렸다. 최혁준이 한 말이 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등장한 건지 알 수 없는 빨간 모자의 교관들이 갖고 온 가방을 앞에 놓으라고 고함치듯 말했다. 이런 건 미디어에서 아주 옛날의 학교를 보여줄 때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학생인권조례가 나온 시대에, 심지어 훈련도 아니고 수학여행에서 이런 권리 침해적인 행위를 한다고? 나와 같은 생각으로 벙쪄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다른 이유로 얼어붙었다는 건 금방 알게 됐다. 옆 반은 물론이고 우리 반 아이들의 가방에서도 소지품 검사를 할 만한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앞에 선 놈의 텀블러에서 구겨진 담뱃갑 네 개가 연이어 나온 순간에는 교관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새끼들, 놀러 온다고 빠져 가지고. 엉? 부모님들이 니들 이러라고 제주도까지 보내준 줄 알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맞으라고 보내주신 것도 아닐 텐데. 담뱃갑으로 머리를 연타 당하는 놈을 쳐다보다 교관과 눈이 마주쳤다. 담뱃갑을 들고 있던 상자에 쑤셔 박은 교관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앞에 내려둔 가방을 들어 이곳저곳을 뒤지는 손길이 재빨랐다. 마치 어디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소지품 검사가 필요한 이유조차 잘 이해하지 못했던 내 가방에 걸릴 만한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방을 탈탈 털 정도로 뒤집어대는 교관이 의아할 정도로.

“…이상한데.”

나와 가방을 힐끔대며 중얼대던 교관은 가방을 두어 번 더 뒤진 후에야 밑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일어나는 교관과 눈이 마주쳤다.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잘 안 보였던 눈과 코를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는 어려 보였다. 대학생이려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눈치라도 챈 것처럼 교관이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야, 너. 주머니 빼 봐.”

이건 왜 시키는 거지. 앞에 지켜봤던 다른 애들한테도 이런 것까지는 안 시켰던 것 같은데. 당황하길 잠깐, 나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를 보여주고서야 교관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날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나는 슬쩍 몸을 돌렸다. 교관이 최혁준이 아래로 내려두었던 스포츠 가방을 드는 것이 보였다. 최혁준은 뒷짐을 진 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순종적인 자세치고는 오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교관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최혁준의 가방을 뒤지는 걸 보다가 눈을 위로 올렸다. 눈이 마주친 최혁준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뭐.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몸을 돌렸다. 자리를 옮기는 교관의 발소리가 들렸다. 최혁준에게서도 압수할 만한 물건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사실에 안심하는 나를 느끼며, 내가 이지훈에게서 최혁준에 대해 들었던 그날 이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최혁준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본드니 마약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최혁준은 나와 같은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약팔이 깡패인 아빠를 혐오했다. 그런 최혁준이 박철승에게 본드가 주는 자극을 뛰어넘을 무언가를 제공하는 공급책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솔직히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최혁준네 집에 가서 보았던 그 문이 떠올랐다. 저들끼리 싸움이 났다고 고등학생 아들을 혼자 여행지에 떨구고 올 정도로 관심이 없는 주변인에게 둘러싸인 최혁준이라면, 누군가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은 쉬웠을 것이다. 어쩌면 그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가자는 제안을 박철승에게 했을지도 모르지. 박철승만이 아닐지도 모르고.

생각을 끊으려 고개를 돌렸다. 이름에 따른 출석 번호로 서게 된 줄이라, 다른 반이긴 해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이지훈을 발견했다. 이미 소지품 검사를 끝냈는지, 앞의 놈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이지훈이 때마침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장난부터 친 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들더니 작게 흔들었다. 확인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가방 앞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이지훈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까 소지품 검사를 받던 걸 멀리서 본 모양이다. 눈도 좋다, 참.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지훈은 노란색 깃털 숄을 두르고 나타났다. 앞줄에 앉아 있는 놈들 중 가장 잘생겼다는 이유로 사회자로부터 무대로 불려 올라간 이지훈을 응원한다고 이지훈 반 애들이 앞다투어 목에 걸어주던 숄을 그대로 하고 온 것 같았다. 놈이 입고 있는 체육복 바지가 한쪽만 돌돌 올라가 있었다. 춤을 추면 추가 점수를 주겠다는 사회자의 호기로운 말에 이지훈이 무대 앞 조명에 발부터 턱 올린 채로 걷어 올리던 모습 그대로였다. ‘얘들아, 오빠 춤추잖아.’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고는 호응을 유도하는 이지훈의 능청스러운 발언이 마이크를 통해 흩어진 순간, 사방에서 중후한 목소리들이 모여 오빠라는 소리를 구호라도 되듯이 연이어 외치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재생됐다. 벽 쪽에 붙어 구경하던 선생님들 중 체육이 유독 낄낄대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던 모습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강영수는 이지훈의 장기자랑 시간이 끝나자마자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춤을 춰 결국 반에 줄 치킨을 받아 간 놈이나, 같은 학교도 아니면서 승부욕을 발휘하며 연습을 시작하겠다고 하는 놈이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저 둘이 오랫동안 친구인 데는 이유가 있겠거니,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을 뿐.

“야, 이거 먹어.”

떨떠름하게 저를 위아래로 훑는 나를 보고서도 이지훈은 종이컵을 내밀었다. 종이컵 안에 후라이드 닭 다리와 날개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이지훈이 장기자랑에 크게 기여해 받아 간 치킨인 듯했다.

“아, 빨리. 애새끼들 치킨 보자마자 눈 돌아 가지고 겨우 이거 쌔벼 오는데도 존나 힘들었어.”

학을 떼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이지훈은 주머니에서 젓가락까지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먹을 때까지 지켜볼 것 같은 기세길래 결국은 닭 다리를 집었다. 내가 입 안에 든 치킨을 우물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이지훈이 한쪽 팔로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책상 위로 와르르 쏟았다.

“이거 종이 간격 두고 잘라서 네임 태그 안에 넣으면 된대. 일단 나 먼저 하고 있을 테니까 넌 천천히 먹어. 어차피 금방 끝날 것 같네, 뭐.”

간단한 설명 후 가위를 두 개 꺼내 올려둔 놈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 반과 이름만이 적힌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똑같이 자른 후 네모난 네임 태그 안에 넣는 행동이 재빨랐다. 단순 작업이라 오래 지나지 않아 끝날 것 같았다. 나는 먹고 있던 것을 삼킨 후에 가위를 끌어와 쥐었다.

“더 안 먹게?”

“다 먹었어. 맛있네.”

닭 날개만 남아 있는 종이컵을 확인한 이지훈이 별말 없이 시선을 거뒀다. 학생들이 묵는 숙소와 달리 선생님들과 교관들이 묵는 건물은 대체로 조용했다. 그래도 가끔은 복도 끝 방에서 큰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게 체육을 비롯한 내가 아는 2학년 담임들의 웃음소리임을 눈치챈 순간,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체육 신났더라.”

“왜?”

“술 안 사와도 되겠다고.”

나를 흘끔 본 이지훈이 복도를 눈짓했다.

“소지품 검사했던 거, 다 저 방으로 가 있더라고. 니네 반 담임은 담배 고르던데. 어린 새끼들이 비싼 거 피운다고 감탄하면서.”

아… 이해를 마친 나를 본 이지훈이 피식대고 웃었다. 그 와중에도 놈이 들고 있는 가위는 종이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종이가 사각대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내가 모르는 애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숨길 애들은 숨긴 모양이던데. 너구리도 오자마자 화장실에 숨겨뒀던 거는 살렸대.”

같은 방을 쓰게 된 너구리가 직접 알려준 거였다. 이틀 동안 묵게 될 방은 7명씩 배정됐다. 단순하게 이름순대로 같은 방을 묶어버린 담임 때문에, 출석 번호로 앞뒤에 붙은 애들과 같은 방이 됐다. 최혁준과도 같은 방이 됐다는 소리기도 했다. 최혁준을 보며 불편한 표정부터 짓던 너구리는 그러나 나도 같은 방이라는 사실에는 안심한 것 같았다. 내가 체육이 시킨 일을 하러 간다는 말에는 네 건 따로 빼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며 내 등을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술을 숨긴 애들이 여럿 있지 않을까. 너구리도 아까 이야기하며 화장실에 저와 같은 용도로 숨겨져 있던 배낭을 몇 개 발견했다고 했으니.

이지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중인지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그렇겠지.”

싱거운 답변을 끝으로 둘 다 한동안 말없이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데에만 집중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관광지를 몇백 명의 남자애들과 몰려다녔던 데다가, 방금까지도 음악 소리며 정신 사나운 것들이 가득한 강당에 있었던지라 가까스로 맞게 된 평화가 기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책상 두 개만 붙어 있는 작은 방,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다. 바로 뒤에 있는 산에서는 가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지훈의 뒷머리가 산들산들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7반까지 끝낸 네임 태그를 밀어두고는, 마지막 8반의 종이를 끌어왔다.

“체육 요새 나한테 되게 친한 척해. 근데 그게 왜인지 아냐?”

나처럼 종이를 넣은 네임 태그를 책상 한쪽으로 밀어두던 이지훈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휴게소에서 본 풍경이 아니더라도, 복도에서 이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기도 했다.

가위를 다른 방향으로 들며, 이지훈이 나를 흘긋 봤다. 답을 알아내지 못했음을 눈치챘는지 놈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조종사가 꿈이었다더라.”

상상 범위 안에 있던 답변이 아니었다. 조종사를 꿈꾸던 체육 선생님의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 운동선수였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했었고,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이지훈이 왜 친한 척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알 것 같았다. 체육은 그 어떤 학생에게도 이런 내밀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공군사관학교 가기에는 성적이 부족했고, 사립 학교 가기에는 당시 집 형편이 별로였다던데. 최선을 택한 거니 후회는 안 한대. 지금 일에 만족하고 사는데도, 그때 생각하면 가끔 아쉽기는 하다더라.”

“…….”

“나 중학생 때 야구 했었고, 엄마 없는 것도 어디서 알았는지 나 볼 때마다 자꾸 자기 옛날 모습 생각난다고, 공부할 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래. 도와준다고.”

이지훈이 말을 잇는 내내 계속 움직이던 가위를 내려놓았다. 간격이 똑같이 잘린 종이를 네임 태그 안에 넣는 순간에는 잠깐 갸웃하기도 했다.

“꿈이란 게 그런 건가? 나이 들어도 못 잊고, 계속 생각나고.”

나도 가위질을 멈췄다. 뭐가 이상한지 비로소 깨달았다. 이지훈은 체육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꼭 저와는 상관없는 일을 말하듯이 했다. 들은 정보를 그대로 전하는 것처럼 읊었다. 그게 이상했다.

이지훈은 고등학교를 들어오기 전부터 조종사가 될 거라고 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놈이 가지게 된 새로운 꿈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너도.”

“엉?”

“너도 조종사가 꿈인 거 아냐?”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한 말을 생각해보듯 눈을 끔벅대던 놈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아닌데?”

“그럼….”

“그건 목표지. 꿈이라기보다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는 이지훈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저만의 답을 도출한 것 같았다. 그제야 한 번도 놈과 이런 대화를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며 목표며, 사실 나는 그런 걸 한 번도 나눠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해야 하는 것들만 했다. 그렇기에 그걸 구분하는 놈의 발언은 생각보다 꽤 충격이었다. 내가 은연중에 이지훈은 꿈이 있으리라고 추측했고, 그 점을 동경해왔다는 걸 알게 될 정도로.

“그럼 네 꿈이 뭔데?”

어떻게든 이해하려 뱉은 물음에 이지훈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잠깐 생각하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놈은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어깨를 으쓱했다. 옆으로 밀어둔 네임 태그를 제 앞으로 끌어와 정리하는 표정이 무심했다.

“예전엔 엄마 안 아픈 거였고, 지금은… 몰라. 없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흘끔 나를 본 이지훈이 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돌아가신 어머님 이야기가 나와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늘 하던 것처럼.

“애초에 내가 꿈에 목숨 걸 정도로 낭만적인 새끼가 아닌 것도 있고. 목표만으로도 인생 잘 굴러가니 다행이지, 뭐.”

대화를 끊듯,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했냐?”

내 앞의 네임 태그들을 흘깃대며 묻는 놈은 벌써 작업을 마친 물건들을 가져온 상자 안에 착착 쌓고 있었다. 내가 정리를 마친 것까지 쓸어가서 상자 안으로 넣는 손길이 야무졌다. 다행히 나도 이 종이만 네임 태그 안으로 넣으면 됐다. 내가 마지막으로 건넨 네임 태그를 안에 넣은 이지훈이 상자를 옆에 안은 채로 앞장섰다.

조금만 열려 있던 문을 끝까지 열자, 복도 끝 방에 있을 선생님들의 대화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진 것도 동시였다.

너구리였다.

문자를 내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나가라는 듯 문을 잡고 있던 이지훈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소지품 검사 또 했다는데?”

내 말을 듣고도 이지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치 아까 내가 소지품 검사에도 걸리지 않은 애들이 있다고 했을 때처럼.

“혹시 알고 있었냐?”

느낌이 이상해서 물었다. 방금 든 생각인데, 왠지 이지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반의 누구든 데리고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을 굳이 다른 반인 나를 콕 집어서 함께 하겠다고 한 행위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이지훈은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문에 머리를 살짝 기댄 놈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한테 목표가 뭔지 말한 적 있나? 파일럿 되는 거 말고.”

멈칫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지훈이 흐음, 짧은 신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말해주지, 뭐. 그쯤은 어렵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전교 1등 해보는 거. 그리고….”

이지훈이 똑바로 섰다. 문에 삐뚜름히 기대 있던 놈과 내가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는 자세가 됐다. 이지훈이 턱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이렇게 서니 놈과 나 사이에 키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년에만 해도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됐는데, 고작 일 년 새에 우리의 시선이 어긋나 있었다. 묘한 기분으로 놈의 턱 부근을 바라보던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지훈이 웃었다.

“너랑 졸업식 때 같이 상 받는 거. 이렇게 서서.”

자세를 슬쩍 바꾼 놈이 내 옆으로 와서 어깨를 부딪쳤다. 마치 언젠가 우리가 같이 강당에 서서 함께 상을 받을 때 서 있을 자세를 흉내 내기라도 하듯이. 그럴 리 없음에도 순간 우리가 서 있는 이 작은 방이 학교 강당 위로 바뀌어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 생기부 관리 잘하면서 착하게 살자.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이지훈이 상자를 한 번 더 옆구리에 끼우면서, 다른 손으로 내 등을 툭 밀었다. 아무런 힘도 주지 않고 있었던지라, 복도로 쉽게도 밀려났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야, 나 체육한테 이거 주고 갈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라.”

말을 끝낸 이지훈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멀어지는 등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지훈이 복도의 끝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소지품 검사를 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아까 장기자랑 후 막 숙소로 돌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건물이 조용했다. 매점도 따로 없는 곳이라 그런지 이 시간에 굳이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놈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물로 올라가는 옆 계단으로 걸어가던 나는 까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형체를 보고 멈췄다.

분리수거를 하는 곳과 계단 사이에 난 어두운 틈 사이에 서 있던 최혁준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어디 갔다 와?”

느릿하게 묻는 놈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아까 소지품 검사 때 최혁준이 방에 있었을지부터 생각했다. 그때 방에 없었으니 저런 걸 뺏기지 않고 물고 있는 게 당연할 텐데도. 그러고 보니 최혁준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까 건물에서 나오며 옆구리에 상자를 낀 교관들이 줄지어 들어오던 모습을 마주쳤던 걸 생각하면 더 이상 최혁준이 걸리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몰라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잠자코 기다리던 놈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들 숙소에 잠깐 다녀왔어. 시키실 일 있대서.”

잠깐 날 바라보던 최혁준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퉤 뱉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 끝의 불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너도 참 피곤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는 놈에게서는 독한 향이 났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이었다.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나는 늘 담배 향을 뭉뚱그려서 여겼다. 담배가 어떤 종류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각각이 어떤 향을 풍기는지를 구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방금 최혁준에게서 난 향은 어딘가 이상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익숙한 불안의 속도로 뛰었다.

발걸음 소리가 멈춘 걸 알았는지 뒤돌아보는 놈을 본 순간, 질문이 연기처럼 입 밖으로 스르르 흘러나갔다.

“소지품 또 검사했다며. 용케 담배를 안 들켰네?”

최혁준은 두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혁준네 집 계단에서 같은 구도로 서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최혁준은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사람을 빤히 내려다봤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와 달리 최혁준이 웃었다는 것뿐.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놈이 피식대는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쪼다들이나 들키는 거지, 무슨….”

턱, 턱, 턱. 최혁준의 운동화가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멈춰 있던 나도 곧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기합이 생각보다 고됐는지, 방의 애들은 더는 무언가를 도전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텔레비전조차 없는 방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사방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놈들조차 일부고, 벌써 베개와 이불을 들고 누워버린 놈들이 더 많았다. 내가 씻고 나오자 방의 불은 이미 다 꺼진 채였다. 최혁준은 방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그리 큰 방도 아닌데, 최혁준을 꺼리는 애들의 심리적 거리감을 반영하듯 이미 잠들어 있는 다른 애들과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 옆으로 가 누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혁준과 가장 반대 방향에 누워 있는 너구리의 좁은 옆자리에 누웠다.

“어엉? 실장 여기서 자게?”

“응. 좁지. 미안.”

너구리가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도 아니라고 웅얼대며 자리를 조금 더 넓게 만들어줬다. 고맙다는 말 대신 이불을 아래에서 끌어 올려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수학여행 일정 안내용으로 받았던 종이에 적혀 있던 내일의 기상 시간은 6시였다. 나는 4시에 알람을 진동으로 맞춰두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 두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주머니의 핸드폰이 진동을 시작하려는 듯 움직인 순간에 바로 손을 뻗어 끌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아무도 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났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라 그런지, 새벽 4시는 동조차 트지 않은 완연한 밤과 별다를 게 없었다. 이 건물에 있는 사람 중 깨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핸드폰 빛조차 최소한으로 줄인 채로 발소리를 죽여 걷던 나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어제 최혁준이 서 있던 자리를 추측하며 걸음을 옮겼다. 비닐 수거함에서 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아래의 공간에 핸드폰 빛을 비췄다.

다행히 어제 최혁준이 피우던 담배는 손상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발로 짓이겨진 흔적조차 없는 하얀 필터를 바라보던 나는 어젯밤 씻으며 주머니에 챙겨두었던 비닐 팩 하나를 꺼냈다.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필터를 집어 든 순간, 어제 최혁준에게서 났던 향이 한 번 더 느껴졌다. 잠들면서도, 방금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솔직히 내가 과하게 받아들인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두 번째임에도 쉽사리 적응할 수 없는 역한 향을 맡은 순간에는 헛구역질이 났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머리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굳어버린 머리 대신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비닐 팩 안으로 하얀 필터를 집어넣고는 비닐 팩을 여러 번 말았다.

내려갈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죽여 다시 방에 돌아왔다. 잠자리 근처에 두었던 짐가방을 열고는 바닥 깊이 비닐 팩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속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왔다. 샤워를 마치고 너구리 옆에 다시 누워 옆을 바라봤다. 방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여러 번 눈을 깜빡이고서야 등을 보인 채로 창문 쪽을 향해 누워 있는 최혁준의 실루엣이 흐리게 보였다. 등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것까지 재차 확인하고서야 눈을 감았다.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해놓고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은 내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 * *

수능이 다가올수록, 2학년 담임 선생님들도 예민해졌다. 진로 상담의 횟수 또한 잦아졌다. 특히 우리 반 담임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문과 반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편이었던 우리 반의 상위권 애들이 최근 모의고사에서 전국 석차 순위를 낮게 받은 것이 꽤 충격인 듯했다. 조례며 종례며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을 쏟아붓는 그 때문인지 이번 달에는 야간자율학습을 신청하는 반 아이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이지훈 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2학년 담임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유하다고 평가되는 이지훈네 반 담임조차 최근엔 뒷문에 다른 반 아이들은 출입할 수 없다고 안내문을 붙여두었다. 그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다른 반 담임들도 앞다투어 그런 안내문을 걸어 두었다. 과할 정도로 몰아치는 선생님들 때문인지, 이번 기말고사에서 반 평균 성적이 가장 높은 반에는 교장이 특별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지금이나 친구일 뿐, 어차피 너네는 경쟁자라고 대놓고 말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던 애들조차 수능이 다가올수록 조용해졌다. 가끔은 쉬는 시간임에도 복도에 나와 떠드는 놈들이 없을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이지훈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공부했다. 이것저것 빼는 법은 없는 놈이래도 애초에 수업 시간에는 그 흔한 장난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최근 본 모의고사 결과에서 이과 전체 3등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적이 수직 상승하는 이지훈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꽤 화제인지, 저번에 담임의 심부름을 한다고 교무실에 갔다가 선생들끼리 이지훈을 칭찬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원래 운동했던 애들이 공부하면 진짜 독하게 한다니까요. 내가 장담합니다. 그놈 반드시 일냅니다.’ 자기 반 학생이 아닌데도,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는 체육 선생 옆에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이지훈네 담임의 모습까지도.

이지훈의 목표는 아마 이뤄질 것 같았다. 전자는 아직 확신할 수 없대도, 적어도 후자만은 그랬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면 불안정했던 마음조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모든 건 괜찮았다.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요새 좀 뜸하다?”

“뭐가.”

“네 친구.”

같은 반 놈들에게도 관심이 없는 최혁준이 내 친구라고 특정할 사람이라곤 이지훈뿐이었다. 멈칫할 뻔했지만 늦지 않게 수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최혁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부러 고개를 들지 않고 콩나물국을 떴다.

“선생들이 다른 반 애랑 밥 먹으면 눈치 주잖아.”

선생들이 지나칠 정도로 부추기는 경쟁 심리가 하나의 핑계로 작용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이지훈이 최혁준과의 점심에 합류하는 횟수가 줄었다. 이지훈이 다가오는 모의토론 준비로 바쁘기도 했지만, 내가 일부러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끔 피하는 것도 있었다. 다행히 이지훈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일주일 뒤 도에서 주최하는 수학 경시대회에도 나가게 된 이지훈이 수업이 끝나고도 종종 선생님들한테 붙잡히는 통에, 같은 시간에 하교하지 못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수학여행은 하나의 기점이 됐다. 그때 새벽에 가져온 꽁초는 아직도 내 책상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혁준이 약을 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대도, 최혁준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점은 확실히 깨달았다. 다만 그걸 티 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상태로 지내다가 학년이 갈려서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편이 나았다. 굳이 일을 크게 만들어 최혁준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나 때문에 다시 최혁준과 엮이게 된 이지훈을 밖으로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 최혁준과 이지훈이 부딪칠 일을 최소화해야 했다. 은근히 해오던 일을 최혁준이 짚고 넘어갈 줄은 몰랐지만.

최혁준은 요새 더 잠이 많아졌다. 그래도 예전에는 귀에 무언가를 꽂고 노래를 듣고 있기라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무작위로 잠에 빠져들었다. 놈이 엎드려 있지 않은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그 사실을 과대 해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놈을 깨우지도, 왜 그렇게 잠이 많아졌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이지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생각보다 빨리 깨달은 놈에게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물잔을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

“하긴.”

그래도 최혁준은 점심을 먹을 때만큼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말투며, 행동도 평소와 같았다. 지금도 최혁준은 늘 그랬듯 이지훈을 비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선생들 앞에서는 어찌나 내숭을 떠시는지.”

대답하지 않고 수저를 움직였다. 진작 떨어져 나갔을 줄 알았던 시선이 계속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최혁준은 눈이 마주치고서도 한참을 망설이듯 입술만 달싹대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 오늘 학교 끝나고 바쁘냐?”

여름방학에 최혁준네 집에 갔을 때 이후 최혁준과 학교 외의 공간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그걸 아는 것처럼 그렇게 묻는 최혁준의 목소리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표정만은 원래대로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나는 놈의 시선을 애매하게 피하며 밥을 한술 떴다.

“어. 할 일 있어서 바로 독서실 갈 것 같은데. 왜?”

아예 거짓말도, 그렇다고 해서 사실도 아니었다. 독서실에 갈 예정이긴 했지만 바쁘지는 않았다. 시간을 내려면 낼 수야 있겠지만 최혁준에게는 굳이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아 앞을 봤다. 최혁준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듯이 대화를 끝냈다.

“아니다. 됐다.”

남은 식사 시간 동안 말은 더 오가지 않았다. 식판을 들고 일어서며 반에 돌아가면 소화제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서점 앞에서 영은이를 마주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놀라서 걸음을 멈춘 나와 다르게, 영은이는 환하게 웃기부터 했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먼저 가라며 등을 떠미는 손길이 재빨랐다.

“너 먼저 학원 가. 난 오빠랑 이야기하고 알아서 갈게.”

바로 가지 않고 머뭇대는 남자애의 얼굴이 익숙했다. 나는 그 남자애가 언젠가 매점에서 나를 붙잡았던 학교 후배임을 눈치챘다. 그때도 지금도, 남자애는 나를 보며 망설였다. 마치 영은이보다는 내 마음을 의심하듯이. 그러나 영은이가 등을 밀자 남자애는 푹 한숨을 쉬며 서점 문을 잡았다. 방금 그들이 나온 곳이기도 했다.

“나 생각해보니까 노트 안 샀다. 만약 사고 나왔을 때 이야기 끝나 있으면 같이 가든가.”

“어어, 그러든지 그럼.”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은 영은이가 내게로 뒤돌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도는 남자애를 보다가 앞으로 눈을 돌렸다.

“참고서 사러 왔어?”

눈을 반짝이며 묻는 영은이를 보며 지난번 영화관에서의 만남 후 시간이 꽤 지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이후로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오던 영은이의 문자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랐다. 저번 주말에 얼굴을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잘 실감하지 못했는데, 그새 영은이의 머리가 많이 길어 있었다.

“응. 너는 이미 사고 나오는 길인가 보네.”

영은이가 들고 있던 봉투에 내가 방금 들어가려던 서점 이름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아래를 내려다본 영은이가 봉투를 제 몸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어, 뭐… 그렇긴 한데. 생각해보니까 샤프심을 안 산 것 같기도 하네? 오빠 서점 들어갈 거지? 같이 들어가서 고르면 되겠다.”

거절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잇는 영은이를 보다가 서점 안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티가 나는 얼굴은 내가 그걸 알아챘다는 것을 안 순간 부자연스럽게 휙 돌려졌다. 누가 봐도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나는 입을 열었다.

“샤프심은 1층 문구 코너에서 살 수 있잖아. 참고서는 2층까지 올라가야 하고. 같이 가서 고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영은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을 모두 뺏긴 사람처럼 날 응시하는 영은이의 눈빛에 끓는 감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너 시간 뺏을까 봐 그래.”

나를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약해지는 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부터 생긴 변화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영은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일단 같이….”

영화를 보고, 서점을 가고, 가끔 같이 놀자고 하면 놀고. 그러면서 절대 그 마음에 응할 수는 없는 내가 과연 영은이를 상처입히지 않는 중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막막한 생각을 하며 서점 문을 잡으려던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다. 이런 곳에서 보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해서였다.

비슷한 타이밍에 나를 발견한 최혁준도 제자리에 멈춰 섰다. 팔짱을 낀 채로 걷던 옆의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대형 서점은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한 데다가, 번화가의 입구에서도 멀지 않아 늘 사람이 많았다. 지금도 최혁준의 뒤에서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다녔다. 그렇기에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최혁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최혁준을 이런 곳에서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비슷한 생각인지 날 가만히 보고 있던 놈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게 내 옆에 서 있는 영은이를 향한 것임을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오빠?”

뒤에서 영은이의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갑자기 앞에 서서 당황스러운 듯했다. 나는 대답을 삼키며 최혁준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내가 아는 놈이라면 그냥 지나치리라고 생각했는데, 놈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의아해하는 듯한 옆의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영은아. 미안한데 먼저 서점 들어가서 나 참고서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어?”

“어? 응. 그럴 수 있기야 한데… 같이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

“그러려 했는데 갑자기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아. 2층인 거 알지? 제일 안쪽 c열에 있는 수능 문제집이야. 초록색 표지.”

영은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나마 서점 문을 잡은 손을 보니 일단은 내가 부탁한 대로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초록색?”

“응. 부탁할게. 그 김에 샤프심도 사서 천천히 나와.”

최혁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몸을 움직였다. 때마침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서점으로 다가오며 시야를 막았다. 인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등 뒤가 비었음을 확신한 것과 동시에 최혁준이 눈앞에 섰다. 서점 입구엔 문턱이 있었다. 계단 두 개 정도 차이. 당연하게도 최혁준과 눈높이가 어긋났다.

“독서실 간다며.”

최혁준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그 와중에 최혁준의 눈이 서점 안을 흘긋 확인하는 걸 눈치챈 나는 최혁준이 내 옆에 누군가 서 있는 걸 이미 보았음을 확신했다. 나는 문턱에서 내려와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섰다. 최혁준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내게로 돌아왔다.

“참고서 사야 하는 게 생각나서 잠깐 나왔어.”

자리를 옮긴 덕분에, 서점을 등지고 선 최혁준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서점 안이 보였다. 영은이는 2층으로 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c열은 2층에서도 한참 안으로 들어가야만 찾을 수 있는 책꽂이였다. 그 와중에도 맨 아래 칸에 꽂힌 초록색 표지의 문제집을 찾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간을 벌어두었으니, 이제는 재빨리 최혁준을 돌려보내야 했다.

“넌 여기서 뭐 하냐. 과외 하는 시간 아니야?”

“혁준이 오늘 과외 안 하는데. 그래도 생일인데, 파티해야지.”

대답은 최혁준의 옆에 서 있던 여자애가 대신 했다. 뜻밖의 단어에 최혁준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최혁준이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와 최혁준을 번갈아 바라보던 여자애가 웃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최혁준한테 이렇게 생긴 친구도 있었나 긴가민가했는데.”

“…….”

“오늘이 생일인 것도 모르는 거 보니 친구는 아닌가 보다. 그치?”

최혁준이 팔에 매달린 여자애를 떼어냈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짜증 나니까.”

짜증을 내는 놈을 보고서도 여자애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한술 더 떠, 최혁준에게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에이. 일 년에 한 번 오는 생일에 짜증을 내면 쓰나.”

풍기는 분위기며 나누는 말들이 둘에게는 익숙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해 온 사이처럼. 태안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애의 명찰을 바라보다가 최혁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생일인지 몰랐다. 미안.”

아까 학교 끝나고 뭐 하냐고 묻던 게 혹시 생일이어서 그랬던 걸까. 추측이긴 해도,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최혁준은 내 사과에도 이렇다 할 만한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도 말을 이은 건 여자애였다.

“미안하면 너도 생일 파티에 올래? 오랜만에 최혁준 친구들 다 모이는 거라 재밌을 텐데.”

“야.”

여자애를 저지한 건 최혁준이었다. 팔을 잡아당기며 정색하는 최혁준을 보고서야 여자애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린 것도 동시였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영은이가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이렇게 빨리 c열을 찾을 줄 몰랐는데, 서점 아저씨한테까지 물어봤다는 걸 보니 곧 서점에서 나올 것 같았다. 서점의 투명한 창 너머 1층으로 내려온 영은이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최혁준이 함께 시야에 잡혔다.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줄 알았던 최혁준은 의외로 날 보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걸 확신한 듯 서점을 향해 뒤돌려는 놈을 급히 불렀다.

“야.”

최혁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결단을 내릴 타이밍인 걸 알았다.

“갈게. 어디서 하는데?”

최혁준이 대답 없이 눈을 내렸다. 놈의 시선이 내 핸드폰에 향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는 손부터 말아쥐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영은이의 문자가 떠 있었다. 홀드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 문자를 봤대도 뭔가를 눈치챌 수는 없었을 텐데,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최혁준은 한참이나 내 텅 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네가 이미 와 본 곳이야. 우리 집.”

“…….”

“8시. 늦지 않게 와.”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인상을 찌푸린 여자애는 그러나 최혁준을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최혁준이 정색하는 것을 보아서인 것 같았다.

“알았어.”

내가 대답하자, 최혁준이 용건을 끝낸 사람처럼 미련 없이 뒤돌았다.

“오빠?”

나는 인파 속에 섞여 멀어지는 둘을 끝까지 바라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서점 문 사이로 영은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친구는? 갔어?”

내 옆을 훑으며 해맑게 묻는 얼굴이 무해했다. 몸속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영은이와 성큼 거리를 좁혔다. 최혁준이 가는 걸 지켜보았는데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안했다. 영은이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은아.”

“응. 오빠 근데 내 문자 봤어? 초록색 표지 책이 수특 말하는 거 맞지? 그거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학원 가.”

“어어, 가긴 갈 건데 그 문제집….”

“영은아.”

“…….”

“내가 괜찮다잖아.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냥 가.”

영은이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눈을 연신 깜빡였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뒤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중이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손에 한참 전에 샀을 노트 세 권이 들려 있었다.

“야.”

“…저, 저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하게 묻는 남자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남자애가 주춤대며 다가왔다. 나는 빠르게 물었다.

“너 샤프심 있지?”

“아… 네.”

“그거 영은이 빌려줄 수 있어?”

“네. 당연히….”

영은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부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됐네. 곧 수업일 텐데 여기서 시간 더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 시장 안쪽으로 가는 길 말고. 거긴 밤에 어두워. 돌아서라도 큰 길가로 가고.”

나와 영은이를 번갈아 보던 남자애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왜 자꾸 가라고 그래. 우리 대화도 못 했는데.”

뒤돌려다가 교복 마이 끝자락이 잡혔다. 영은이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오늘 마주친 뒤 한 거라고는 나를 대신해 문제집 찾은 거밖에 없고 대화라고는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는데, 내가 갑자기 가라고 등 떠미는 게 황당한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영은이가 원하는 대로 따라줬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주지는 못해도, 따뜻하게는 대해줄 수는 있을 거라고. 누군가를 좋아해주지 못한다고 해서, 굳이 그 사람을 상처입힐 필요는 없으니까.

“영은아. 너네 학원 밑에 서점 있잖아.”

영은이가 이 서점에 오는 이유가 나 때문인 걸 안다. 학원 밑에 바로 이곳보다 더 큰 서점이 있는데도 굳이 10분을 넘게 걸어야 하는 이 서점에 다니는 건, 독서실이 가깝다는 이유로 내가 이 서점에 자주 들르는 것을 알아서임도. 그러지 말라고 지적하면 오히려 상처를 줄까 봐 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걸로 인해 영은이가 나와 깊이 엮이고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거기로 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쓸데없는 고생하지 말고. 너 그러는 거 볼 때마다….”

“…….”

“솔직히 신경 쓰이고 불편해.”

영은이한테 이렇게 단호히 말한 건 처음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 영은이가 날 잡은 손을 놓았다. 그 틈을 타, 나는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시야에 담겼던 글썽대는 눈의 잔상을 힘겹게 지워내며 서점을 나섰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순간에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5시 15분. 내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우, 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택시비를 거슬러 주던 택시 기사가 한쪽 귀를 막으며 짜증을 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오는 동안 이런 곳에도 집이 있냐고 신기해하던 그는 이제 얼른 이곳을 뜨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택시에서 얼른 내렸다. 택시에서도 느껴지던 비트 소리는 땅 위에 발을 디딘 순간에는 배로 크게 들렸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진동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크게 틀어둔 음악 소리가 온몸을 때리는 듯했다.

최혁준의 집은 몇 달 전에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호화스러운 분수대를 비롯해서 잘 정리된 잔디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서도 비교적 선명히 보였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창문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부터 시작해 빨간빛과 노란빛들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뿐. 창마다 커튼이 쳐져 있는데도 틈 사이로 어떻게든 쏟아지는 빛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만 초대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듯 하얀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집에 더 가까워진 것 때문인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찢어질 듯한 웃음소리들이 귓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혹시 이런 거 본 적 있어?’

한 시간 전에 했던 대화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가득했다. 서점에서 나와서도 독서실은 가지 못했다. 대신 집으로 갔다. 책상 맨 아래 칸 깊숙이도 숨겨뒀던 비닐 팩을 뜯었다. 책상 위로 그것을 올려두고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몇 년 전에 전화번호를 받고도 한 번도 연락해 보지 않았던 외사촌 형에게 사진을 전송한 후 전화를 걸었다. 아주 어렸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오래 지냈던 형은 딱딱하고 틈만 나면 고상한 말로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쁜 외갓집 식구들 사이에서 티 날 정도로 겉돌았다. 그가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거라고 대놓고 선언했던 모임에서, 들으라는 듯 이죽대면서 했던 말을 기억했다.

‘학비가 몇억인 사립 학교에 보냈다고 뭐 특별히 다른 고상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꿈 깨세요. 걔네들이 그 폐쇄성을 어떻게 이용해서 노는지 아세요? 마약으로 잡혀가는 놈들이 없는 건, 걔들이 철저해서가 아니라 걔네 부모가 철저해서예요.’

형은 오랜만에 연락한 내가 의외라는 듯 툭툭 장난기 어린 말을 던지다가, 내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깊은 신음을 내놓던 그가 단언했다.

‘weed인 것 같아. 그래. 다시 봐도 맞는 것 같다. 끝 모양을 보면 알 수 있지.’

‘weed? 마약이라는 거야?’

‘뭐라 설명해야 하지. 따지자면 그런데, 마약 중에서도 가장 흔하고 약해. 담배처럼 피우는 부류에 가깝달까. 미국에서도 주마다 허용하는 데가 있고 아닌 데가 있어서, 어떤 주에서는 피우는 것만으로도 잡혀가지만 어떤 데서는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피우는 놈들도 여럿 있어.’

쿵, 쿵, 쿵. 불안을 소리로 형상화한 소리가 머리며 가슴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물었다.

‘혹시 한국에서도 합법일 가능성은 없어?’

사촌 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가끔 모임에 나와서 제게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친척들을 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럴 리가. 당연히 불법이겠지.’

‘…….’

‘그나저나 이걸 어디서 주웠다고? 너 고등학생 아니었나? 한국도 갈 데까지 갔네. 이런 게 버젓이 학교 근처에 돌아다니다니.’

대문과 달리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바로 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굳이 벨을 눌렀다.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가 뚝 멎었다. 귀가 터져가라 울리던 음악 소리 또한 불시에 멈췄다. 순식간에 집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 변화를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벨에 붙은 카메라에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집 안의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러 다가오는 듯,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예고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진짜 왔네?”

고개를 내민 건 아까 최혁준 옆에 있던 여자애였다. 아까보다 짙게 화장을 하고, 옷을 사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하기도 했고.

날 흥미롭다는 듯 훑던 여자애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돌려 소리쳤다.

“야. 짭새 아니야! 노래 다시 틀어!”

화답이라도 하듯 노래가 재생됐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큰 음악인데도, 여자애는 신난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

집 안은 엉망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집이 세간살이가 죄다 깨진 모습이었던 걸 생각해 봐도 그랬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확신했다. 최혁준의 아빠는 그때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들이 이런 것들을 거실에 늘어놨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거겠지.

집은 방치되어 있었다. 최혁준이 바라는 대로.

구석의 당구대에 붙은 덩치 좋은 놈들이 뻑뻑대며 담배를 피웠다. 한데로 뭉쳐 위로 흘러가는 담배 연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물들였다. 거실에 있는 큰 소파에서는 몇 쌍의 커플들이 붙어 시시덕대는 중이었다. 그중 최혁준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술병이 발에 채었다. 발에 걸려 바닥에 쓰러진 커다란 플라스틱 맥주 통에서 꿀렁대며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내 옆을 뜨지 않고 나를 관찰하며 서 있던 여자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애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담배를 내밀었다. 피울래? 묻는 입 모양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몸을 아래로 숙인 여자애가 이번에는 술을 내밀었다. 방금 내가 밀어 넘어뜨린 술병을 들고는 먼저 먹으라는 듯 주둥이를 기울이기도 했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기 무섭게 여자애가 손에 들고 있던 피쳐 병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거리를 성큼 좁힌 여자애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볼수록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우리 부류가 아닌데, 왜 최혁준이랑 놀지? 겁도 없이?”

눈썹부터 시작해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나가는 눈은 취해 있지 않았다. 아까 처음 날 보았을 때처럼 호기심에 빛나는 눈은 차라리 솔직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최혁준은 어딨어?”

여자애가 피식대고 웃었다. 담배를 물며 한참이나 나를 가늠하듯 바라보던 여자애가 마침내 답을 하듯 옆으로 고갯짓을 했다. 시선을 따라가니 계단이 보였다. 그때 최혁준의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이용해본 곳이었다. 계단 한가운데에 커다란 스피커가 올라가 있었다. 올라가지 말라는 표시를 해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복잡한 거실과는 다르게 계단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여자애가 알려준 것과 달리 최혁준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계단 근처에 머물던 시선은 점차 옆으로 옮겨 갔다.

‘내려가 볼래?’

구석에 있는 작은 문에 시선이 멎은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을 뗐다. 문은 그때 보았던 것처럼 닫혀 있었다. 여자애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작은 문이 있는 반대 방향에는 안방이 있었지만 여자애는 내가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마치 내가 점점 가까워지는 그곳에 최혁준이 있는 게 맞다는 걸 알려주듯. 오래전부터 최혁준을 알아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여자애 또한 저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들었을까. 최혁준으로부터 저 문을 열어보겠냐는 질문을 들었을까.

나는 문에서부터 단 세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문이 열렸으니까.

숨겨두었으나, 성의라고는 없이 방치되어 있던 구석의 작은 문이 열리고 내가 알던 얼굴들이 등장했다.

“시간 되면 알아서 끌고 사라져준다니까 더럽게 뭐라 허네, 이 새끼가. 뭐, 우리 보내고 부를 사람이라도 있냐?”

두 사람이 등장했을 뿐인데 익숙한 냄새가 났다. 살면서 가끔 보고 맡았기에 익숙한 냄새가 아니라, 내가 그것이 뭔지를 파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쥐고 만지며 알게 된 냄새였다. 나는 끝이 도톰하게 뭉쳐진 진녹색의 뭉치를 물고 있는 박철승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문을 나오기 전 마지막 계단에 선 최혁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집을 떠들썩하게 물들이는 음악 소리를 뚫고 무거운 괘종시계의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이 집에 왔을 때만 해도 깨져 있던 괘종시계는 그새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눈속임이라도 하듯이.

‘- .- .- .- .- .- .-.’

종소리는 정확히 일곱 번 울리고 멈췄다. 나는 그게 7시 정각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임을 알았다. 8시에 오라고 했던 최혁준은 내가 이 소리를 듣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 또한.

“…….”

나는 최혁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발을 뒤로 끌었다. 몇 번 더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겠지. 설마… 생각하며 이 순간을 미뤄왔던 대가였다.

위선자는 내가 아니야.

“지선욱!”

이런 짓을 벌이면서도 내 앞에서 깡패를, 약팔이를 혐오하는 척했던 너지.

음악 소리는 집 밖에서도 들렸다. 달릴 때마다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음악 소리가 빚어낸 진동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 두 개를 구분해야 하는 책임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뛰던 발을 멈췄다. 뒤에서 꾸준히 따라오던 발소리에 의해 잡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그렇게 했다.

“멈춰! 멈추라고, 지선욱!”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어깨가 아플 정도로 세게 붙잡혔다. 나는 팔을 떨쳐내거나 도망치는 것 대신 순순히 뒤돌았다. 내가 제게서 뒤돈 순간부터 나를 쫓아오기 바빴던 최혁준은 정작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멍하니 벌렸다. 놈은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처음 본 사람처럼 놀랐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가 없기에 어떤 놀라움을 안겼는지조차 알 수 없음에도, 나는 표정을 관리하는 수고를 들이는 대신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왜 나를 여기로 불렀어?”

최혁준의 얼굴이 창백했다. 누가 보면 최혁준이 피해자이고, 내가 가해자인 줄 알 정도로.

“시간만 바꿔서 부르면 괜찮을 것 같았어? 나는 평생 저 문을 열자고 할 일 없을 테니까, 평생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뒤집어지는 속과 달리 생각보다는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머릿속의 문장들이 정립되지 않고 이리저리 튀는 와중에도 말은 생각보다 논리정연하게 나왔다. 씨근덕대듯이 숨을 뱉으면서도 나는 동시에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숨길 거였으면, 끝까지 숨겼어야지.”

“…….”

“내 앞에서 묻지도 않은 가정사 늘어놓으며, 약 파는 깡패 들먹이면서 욕한 이유는 대체 뭐야. 어차피 너도 똑같잖아. 그렇게 지랄해 놓고는 집에 와서는 박철승한테 줄 마약 꽁치면서 살았을 거잖아. 대체 너는 다른 척, 안 그런 척은 왜 했는데?”

토 대신 튀어나간 말들이 최혁준의 얼굴을 정확히 겨냥했다.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찡그려진 놈의 얼굴이 어둠에서도 비교적 선명히 보였다. 나는 말을 멈췄다. 속을 메슥거리게 하는 감정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은 순간에는 눈을 감았다. 울컥하고 목에 걸린 말이 힘겹게 튀어나갔다.

“너… 지금 네가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해?”

그건 배신감이었다.

‘세상에 사정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 사정을 들어주고 싶은지가 문제인 거지.’

부정하려 했지만, 나는 최혁준의 사정을 들어주고 있었다. 담배일 수가 없는 것을 주우며, 몇 시간을 깨지 않고 잠든 놈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도,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길 바랐다. 놈이 내 앞에서만 보이는 것들 중에는 외로움이 빚어낸 흔적들이 꽤 있었고, 난 거기서 과거의 내 모습과 비슷한 점을 여럿 목격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이 순간까지 놈을 내버려 뒀다.

“…나는 아빠랑 달라.”

눈을 떴다. 최혁준은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놈은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치 말하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저건 진짜 약팔이한테는 팔 만한 약 취급도 못 받는 것들이고, 버려진 것들 재미 삼아 갖고 노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

“언제든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출 수 있어. 이건 내가 장난삼아서….”

“그럼 지금 당장 해 봐.”

“…….”

“멈춰보라고, 네 의지대로.”

최혁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나는 최혁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명령했다.

“당장 돌아가서 박철승한테 다시는 너한테 그런 거 안 판다고 말하고. 네 집 안에 있는 애들 다 내보내. 할 수 있어?”

최혁준이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그러나 놈의 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하기 전부터도 사실 알고 있었다. 놈은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는 걸. 그걸 할 수 있다면 애초에 약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최혁준 집에 있던 사람 중 나만큼 박철승을 혐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박철승이 약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가서 인생을 말아먹지 않기를 바랐다.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빠가 상습적으로 마약을 했다는 혐의로 조사받던 재벌가 아들을 변호했던 것을 기억한다. 웬만해서는 돈에 따르는 모든 행위에 토를 달지 않던 그가 질린 표정으로 의뢰인을 욕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만 보면 제일 답 없는 새끼들이야. 내일이 공판 기일인데도 마약상 만나러 가야 된다고 약속을 미루더라니까?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사방에서 말리는데 듣지도 않아요. 이미 눈이 뒤집혔어. 말을 안 들어주니까 이러다 나 죽는다고 바닥을 벅벅 기질 않나. 좀비도 아니고, 소름이 돋아서 원.’

최혁준이 한 말 중 일부분은 사실이었다. 외사촌 형의 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마약상에게는 진정한 약 취급도 받지 않는 가벼운 약일 수 있다. 거부감 없이, 언제라도 끊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시작했겠지.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그다음 단계를 향해 간다. 언젠가는 그보다는 조금 더 센 약을 원할 것이고. 더 큰 자극이 있다면 기꺼이 투자할 것이다.

지금 끊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영 끊을 수 없다. 망설인 순간, 이미 그것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으니까.

“…….”

“…….”

마약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누군가를 끌어들이기까지 한 놈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 그럼에도 순간 기대했다. 내가 방금 한 말이 어쩌면 놈에게 돌파구라도 되어 단호히 끊어낼 결심을 할 계기가 되길.

그러나 최혁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백한 낯빛으로 날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얼굴을 본 순간엔 마음속에 남은 한 꺼풀의 기대마저 사라졌다. 할 말을 모두 뺏긴 것처럼 최혁준에게 뱉을 그 어떤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최혁준으로부터 시선을 끌어내듯이 뗐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발을 옮겼다. 어차피 숲길에 들어선 순간 택시를 잡기는 글렀다. 이곳이 어딘지 설명해 봐야 택시 기사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아래로 걸어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이지훈이었어도.”

최혁준은 내가 세 걸음도 못 떼고 멈춰 서게 만들었다. 그게 날 멈추게 할 수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비장의 카드라도 꺼내는 것처럼 이지훈을 입에 담았다. 이지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몸을 돌린 나를 보고서도 놈은 놀라지조차 않았다. 당연히 내가 그럴 것을 예측했다는 것처럼.

“네가 날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에야 최혁준이 날 왜 이곳으로 초대했는지를 알게 됐다. 숨기는 척했지만, 놈은 내가 언젠가 이런 행위를 발견하리라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고는 바랐던 것이다. 내가 자신을 눈감아 주길.

그게 최혁준이 내게 기대한 우정이었다. 나는 최혁준이 처음으로 대놓고 드러낸 그 흐린 형체의 단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나한테 대체 어떤 우정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배려의 한계는 이걸 보고도 신고하지 않는 게 다야.”

최혁준의 얼굴을 보는데 헛웃음이 났다. 이지훈?

“걔라면 애초에 나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어.”

후미진 골목 안. 그 어떠한 대화도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내가 박철승에게 찍히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밀어내기부터 하던 놈이었다. 방황하면서도, 최혁준과 이지훈은 퍽 다르게 행동했다. 나오라고 말하는 내게 제가 가진 어둠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놈과 내가 이끄는 대로 나와서 햇볕 아래서 같이 걷는 놈은 당연히 내 삶에서 가진 무게가 달랐다.

걔는 너랑 달라. 네가 혹시나 나한테 나쁜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 옆 건물에서 수업이 있는 날에도 같이 밥을 먹으러 뛰어오던 애야. 내가 어쩌다가 반 애들한테 휩쓸려서 술을 먹다 기합이라도 받을까 봐 나를 빼낼 생각부터 한 애고.

‘너랑 졸업식 때 같이 상 받는 거. 이렇게 서서.’

어깨 끝을 나란히 붙인 채로 웃어 보이던 얼굴이 떠오른 순간에는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차오른 분노를 정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뱉었다. 윽박이라도 지르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삼키면서.

“우정 같은 한가한 소리 지껄일 시간 있으면 약부터 끊어.”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

“이지훈한테 말 걸지 마.”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하는 최혁준에게서 등을 완전히 돌렸다. 30분을 내리 걸어 큰 길가에 다다를 때까지도 등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 늦잠을 잤다. 이지훈이 경시대회 준비로 먼저 간다고 미리 내게 말해두었던 날이어서 다행이었다. 서두른 덕에 그래도 1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아침 자습 중일 복도는 조용했다. 담임에게 미리 문자를 보내두었고, 답장을 받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자습 중인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뒷문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2학년 1반 외 출입 금지]

뒷문의 창에 붙어 있는 커다란 문구에서 시선을 떼고 손잡이를 잡았다. 문고리에 힘을 주어 연 순간,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듯이 멈췄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최혁준에 의해 뒷자리로 밀려나야만 했던 너구리의 뒤통수가 가장 먼저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 위에 쏟아진 우유가 목을 타고, 옷깃을 물들이고, 이내 책상으로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우유가 제 자리까지 넘어오는데도 옆에 앉은 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샤프조차 쥐지 않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말을 꺼낸 순간 그 전까지의 공백까지도 홀로 떠안을 것 같은 무게의 침묵이 반 전체에 깔려 있었다. 모두가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눈앞의 광경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었을 누군가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허공에서 200ml의 우유갑을 털었다. 정확히는, 너구리의 머리 위로.

정신을 차리니 최혁준이 눈앞에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 개새끼야!”

내가 급하게 쳐낸 우유갑이 바닥을 뒹굴며 보잘것없는 소리를 냈다. 최혁준은 그 소리가 멎고서야 입을 열었다.

“말 걸지 말라며.”

네가, 나한테, 말 걸지 말라며. 강조하듯 한 번 더 끊어서 말하는 최혁준의 얼굴에는 딱히 표정이랄 게 없었다. 오히려 지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너구리의 자리 밑에 떨어진 우유갑 개수가 하나가 아님을 비로소 눈치챘다. 너구리의 춘추복 조끼는 완벽히 젖어 있었다.

“그럼 네가 나한테 말을 걸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안 그래?”

최혁준이 어깨로 툭, 나를 치고 지나갔다. 순간 역겨울 정도의 우유 향이 풍겼다.

* * *

최혁준의 괴롭힘은 반 아이들로부터 묵인되었다. 최혁준이 굳이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음에도, 다들 알아서 먼저 눈을 내리깔고는 입을 다물었다. 너구리의 춘추복 조끼가 젖을 때, 말리려 달려들었던 하마는 최혁준에게 맞아 다리에 깁스를 했다. 갑자기 조퇴증을 끊어줘야 했을 담임이 분명 무슨 일이냐고 물었겠지만, 하마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 같았다. 최혁준은 아무런 조치를 받지 않았으며, 담임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 절뚝이며 나타난 하마는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목발 소리를 듣고 있을 애들 또한 하마와 눈을 마주치거나, 괜찮은지를 묻지 않았다. 평상시였다면 떠들거나 장난을 쳤을 쉬는 시간에마저 반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다들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공부했다. 그게 최혁준의 괴롭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걸 눈치챈 것처럼.

‘그럼 네가 나한테 말을 걸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안 그래?’

문과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반답게 우리 반 애들은 똑똑했다. 다들 그 말에서 나와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아챈 것처럼 나까지 함께 엮어 피했다. 중요한 시험을 일주일 남긴 때였다. 최혁준이 무서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굳이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나만이 최혁준을 견디면 되는 일이니까.

‘다른 애들한테 피해 주지 마. 유치하게 굴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하라고, 이 개새끼야!’

고작해야 우유 몇 방울 튀었을 손을 씻는 중이던 최혁준은 뒤를 급하게 따라온 내 고함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 내가 말을 걸게 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행위는 사라졌다. 다만 방식이 교묘하게 바뀌었을 뿐.

“실장. 이거 담임이 전해주라고… 아!”

최혁준이 대놓고 발을 걸었음에도, 보지 못하고 다가오던 반 아이가 꽤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나는 저절로 나갈 뻔한 손부터 급히 말아쥐었다. 최혁준이 보는 앞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 지난 며칠간의 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었다.

이동수업이 끝난 후 교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 최혁준과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 아이도 나와 거리를 둔 채 걷던 최혁준을 보지 못하고 내게 말을 걸었을 테다. 그 결과는 이렇게 넘어지게 된 거고.

나한테 전해주라고 건네받았을 종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남자아이가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최혁준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제자리에 서서 그 모든 것을 방관했다.

종이 울렸다. 최혁준이 걸음을 뗀 건 동시였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유유히 걸어가는 최혁준의 등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나는 몸을 황급히 굽혔다.

“괜찮아?”

다리가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는 반 아이의 어깨 아래에 손을 넣어 일으켰다. 나보다 키가 작고 말라서인지 부축이 쉬웠다. 팔을 어깨에 두르며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정이영. 반에서 입을 떼는 걸 몇 번 본 적 없을 정도로 조용한 애였다. 나와 출석 번호가 바로 붙어 있음에도 그다지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나눠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작은 체구에 두꺼운 안경을 쓴 놈의 세상에는 공부 말고는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던 애라고 너구리가 말해준 적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그 성적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충격이었는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마저 책을 파고드는 놈은 일부러 고립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 고립되는 꼴을 못 보는 하마가 부러 말을 걸었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알아서 한다는데. 자기 신경 쓰지 말라고.’

“걸을 수 있어? 아니면 양호실 갈래?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려 놓을게.”

그러니 이건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자기 의지로 그 어떤 세상에도 끼어들지 않는 애의 인생에 이유 없이 발을 걸고 아래로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어서는 안 됐다. 참담하고도 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묻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놔.”

“거슬릴 거 아는데, 미안해서 그래. 양호실까지만이라도 내가….”

“네가 왜? 가도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놔.”

눈빛이며 말투가 단호했다. 무엇보다 표정에 언뜻 비친 경멸스러움이 날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 날 밀어낸 정이영이 내 팔을 밀쳐내고 제자리에 섰다. 비틀대긴 했지만 일단 걷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아래로 몸을 굽힌 놈이 흩어져 있는 종이를 한데로 모아 수습했다.

종이가 뒤죽박죽 섞인 이면지들이 내 손 위에 쌓였다. 종이 뭉치를 같이 내려다보는 내게 정이영이 말을 걸었다.

“네가 저 새끼한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결 방법을 모르겠으면 가서 빌기라도 해.”

최혁준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정이영은 꼭 무언가를 질려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경멸의 대상은 최혁준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해결 보고 반에 더는 피해 끼치지 말라고. 내가 왜 너네 기 싸움 때문에 피해를 봐야 해?”

“…….”

“이렇게 다 끝나고 구해준다고 누가 너한테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 같아?”

정이영이 입술을 꼭 깨문 채로 시선을 돌렸다.

“지는 어차피 1등이니까 상관없다는 거야, 뭐야….”

한숨처럼 말을 흘린 정이영이 뒤돌았다. 접질린 오른쪽 발을 절뚝대듯이 끄는 놈의 발소리가 사람 없는 복도에 울렸다. 그 뒤로 비슷한 꼴을 하고 걷고 있는 하마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너구리가, 그 뒤로는…

나는 눈을 감았다. 속이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울렁댔다. 아무리 호흡을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아 결국은 화장실을 향해 뛰어야 했다. 수업이 시작된 시간,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칸으로 숨어들 듯이 뛰어든 나는 문을 잠그자마자 변기 위로 몸을 구부렸다. 소화되지 못하고 속에 머물러 있던 모든 것들이 쏟아졌다. 나는 노란 위액 말고는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순간에야 기진맥진해서 고개를 들었다. 구석 칸에 있는 그물망 모양의 쓰레기통 사이로 짧은 꽁초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나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변기를 붙잡았다. 뱉어 봐야 더 나올 게 없는데도 여전히 토하고 싶었다.

“어?”

이지훈과 독서실 계단에서 마주쳤다. 놈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놈은 나와 갈 방향이 다른 게 뻔해 보였는데도, 자리에 멈추더니 통화 중이던 상대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나 선욱이 만났어. 어, 나중에 전화할게.”

내 이름을 당연하게 대는 걸 보니 꽤 친숙한 사이인 것 같은데, 저런 목소리를 내며 통화할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멈칫해 서 있는 내게 이지훈이 몸을 돌렸다.

“이제 오냐?”

“…어. 넌?”

그러고 보니 일주일 만이었다. 경시대회는 어제였다. 지난 2주일 내내 등굣길부터 시작해 집에 갈 때까지 시달리던 이지훈과는 등교 시간은 물론이고 하교 시간까지도 엇갈리기 일쑤였다.

좋은 성적을 거뒀을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궁금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이지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어딘가가 아릿했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이지훈은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나 학원 보충 잡혀서 교재만 가지러 왔어. 안 그래도 문자 하려고 했는데 마주쳤으니 잘됐네. 나 오늘 봉고 안 타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어. 가.”

굳이 길게 답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일상적인 대화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목소리는 평범하게 흘러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에 몸이 벌써 익숙해진 것만 같았다. 특히나 이지훈한테는 내가 최근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절대 알릴 생각이 없었다.

이지훈만은 절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닥친 상황들이 그럴 수 있게 도왔다. 최혁준을 겁내는 반 애들 때문인지, 다른 반에까지는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올해의 마지막 시험이 이틀 뒤였다. 내년 입시 결과를 예측하게 될 많은 요소가 결정되는 시험이었다. 타 반 학생의 출입까지 엄격히 통제하며 눈치를 주는 담임 선생들이나 학생들까지도 잔뜩 긴장해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얼마 전 수업을 마친 담임을 따라갔을 때, 그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내가 망설이다 뱉은 최혁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내가 겪고 있을 고충을 안다는 것처럼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는 말했다.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그래도 네 덕분에 모두가 잘 지내고 있지 않냐고 했다. 그가 반 아이들의 성적이 아닌 반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기울였다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며,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몇 달만 지나면 3학년이 된다. 아마 그는 더는 내 담임 선생님이 아니게 될 것이다.

참는 건 끝이 정해져 있을 때나 하는 짓이었다. 어디까지 참아야 끝이 오는 걸까. 오늘도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내일은? 모레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난 그럴 때마다 되뇌던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쉬었다.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팔을 휘저으며 이지훈을 지나쳤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이지훈이 갑자기 팔을 붙잡은 건 뜻밖이었다.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나는 붙잡힌 팔뚝에서 시선을 떼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이지훈은 예상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만 놈의 눈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바삐 훑었다. 내 팔뚝을 좀 더 안으로 깊숙이 잡으며 설핏 이마를 찌푸리기도 했다.

“요새 공부가 많이 빡세? 아니면 뭔 일 있냐?”

눈빛에 담긴 옅은 걱정을 눈치챈 순간에는 혀가 목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꼬인 혀를 풀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부터 끌어 올리며 놈의 팔을 떨쳐냈다.

“강영수한테 옮았냐? 오버는.”

애를 쓴 보람이 있는지 이지훈이 날 따라 웃었다.

“선욱아, 뭐든 시초는 형이라고 몇 번 말하니. 내가 영수 새끼보다 생일 더 빠른 거 너 알아, 몰라.”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 말을 반복하는 놈을 보며 입꼬리를 내리지 않기 위해 힘을 줬다. 놈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는 아래로 툭 밀기도 했다. 버티듯이 힘을 주는 놈에게 헛웃음을 섞어 말하면서.

“그니까 웬 헛소리야,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면 너한테 이야기를 했겠지.”

“그치? 이 울트라캡숑짱 형한테 이미 말했겠지?”

웃으며 되묻는 놈을 보는 순간에야, 나는 이제 이런 거짓말쯤은 아무렇지 않게 이지훈의 얼굴에 대고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고 만다. 나는 이지훈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퉁명스럽게 대화를 잘랐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보충 있다며.”

“하여간 잔소리는 네가 울 아빠보다 더해. 알았어. 야, 간다. 나중에 봐.”

다행히 시계를 확인한 이지훈이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놈이 마지막 계단에서 별안간 뒤돌았다. 야. 놈의 등에 두었던 시선을 위로 천천히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지훈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 별일 없는 거 맞지?”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서야 그 말을 이해한 것처럼 웃었다.

“없다니까. 좀 가라, 진짜. 여기서 밤새울래?”

그런 핀잔까지 듣고도 이지훈은 이상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지훈이 몸을 반쯤만 내려두고 있는 1층 복도의 빛이 깜빡대다가 이내 팍 꺼졌다. 이지훈이 손을 들어 조명 쪽을 향해 팔을 휘휘 흔들었다. 팟-하고 다시 들어온 불 밑에서 이지훈이 빠르게 시계를 확인했다. 놈이 대화 내내 왼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됐다는 신호를 최선을 다해 무시한 놈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야, 이번 시험 끝나면 같이 놀러 갈래? 하마랑 너구리도 시간 되냐고 물어보자.”

더는 실현될 수 없는 계획을 언급하는 놈의 발언에 오히려 안심됐다. 그건 이지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담임이 그러던 때와는 달리 난 그 사실에 거대한 안정감부터 느꼈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그러자.”

그제야 이지훈이 웃는다. 장난치듯 손을 크게 흔들기도 했다. 이번에는 제 위에 있는 조명을 켜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명이 꺼지고도 혼자 남아 있을 나를 위해서. 나는 이지훈의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조금 더 서 있다가 계단참으로 올라섰다. 옆에 붙은 커다란 창문으로 다가선 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한 일에 가까웠다.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남자애가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얼마나 속도를 내는지, 메고 있는 가방이며 옷들이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부대끼는 게 보였다. 흔들리지 않는 건 꼭 쥐고 있는 핸드폰뿐. 놈이 쫓아간 버스를 무사히 올라타는 것을 보고서야 발을 뗐다.

‘그래. 적어도 이지훈은 안전해. 괜찮아.’를 외우듯 중얼대면서.

* * *

점심 식사는 여전히 최혁준과 함께였다. 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내가 일어서면 최혁준이 따라서 일어나는 것도 같고, 둘만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이전과 비슷했다. 그러나 따지자면 그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대화라는 게 모조리 소거된 곳에서, 우리는 마주 앉은 서로를 견디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죽이기만 했다.

“…….”

“…….”

2학년으로 치르는 마지막 모의고사이자 지금 모두가 가장 긴장하며 준비하고 있는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시험이 끝나면, 담임과의 마지막 진로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능 전까지 함께하게 될 3학년 반을 편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3학년에 한해서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편성해 반으로 묶었다. 나는 최혁준의 성적을 알고 있었다. 3학년에 올라간 놈이 나와 같은 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식판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체육 선생님이 보였다. 국을 받은 그가 걸음을 틀었다. 자리에 앉으며 옆에 미리 앉아 있던 이지훈네 담임에게 말을 거는 것까지도 잘 보였다. 오늘도 최혁준과 내가 교직원들만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기 없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는 이 식사 자리에 없는 이지훈의 고집만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너구리의 일 이후, 최혁준에게 먼저 말을 건 건 처음이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그냥 말을 해.”

젓가락질 소리가 멈췄다. 최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식판을 향해 있었다. 내 귀로 듣는 내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그러려고 노력을 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깡패 짓을 할 거라면, 나한테 직접 하라는 소리야. 죄 없는 애들 건드리지 말고.”

일주일간, 나에게 말을 거는 애들부터 시작해 조금이라도 연관된 애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최혁준의 손길이 나만은 피해 갔다는 사실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정이영의 말은 옳았다. 책임을 져야 할 나만이 오히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최혁준의 철저한 의지로.

“넌 정말 이쪽 세계에 대해서는 좆도 아는 게 없구나.”

고개를 들었다. 최혁준은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와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입 안에 든 것을 천천히 씹던 놈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한 번에 꿀꺽 삼켰다.

“깡패들이 왜 주변 인물부터 인질로 잡는 줄 알아?”

최혁준과 시선이 어긋났다. 놈은 더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앞에 앉은 나보다는 먼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비웃음이 스며들었다.

“그게 제일 효과가 좋거든.”

“…….”

“그래야 잃게 해서 망가뜨리거나, 그게 안 되면 혹시라도 잃을까 봐 빌빌대는 꼴이라도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나는 놈의 시선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가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 소리가 서서히 거세어지다가, 최혁준의 시선 끝에 있는 대상을 확인한 순간 빠르게 뛰었다. 아까 체육이 서 있던 자리에서, 식판을 든 이지훈이 주변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같이 급식을 받았던 친구에게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은 놈은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다. 기웃대면서 무언가를 찾던 놈의 시선이 오래 지나지 않아 이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놈이 비로소 목적지를 찾은 것처럼 발을 뗐다. 나와 최혁준이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 내내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은 눈을 마주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약점을 노출해왔음을, 그리하여 놈이 날 가장 효과적으로 망가뜨릴 방법을 알아내게 만든 시간을 비웃는 눈빛.

나는 얼어붙은 손끝을 겨우 움직였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식판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최혁준이 말했다.

“앉아. 저 새끼 진짜 좆되는 꼴 보기 싫으면.”

최혁준의 내리깐 눈은 내가 당장 들고 일어서려던 식판을 향해 있었다. 굳이 눈을 맞추지 않아도 협박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게 놈의 진심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지금보다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때도, 최혁준은 반 아이들을 꼼짝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저보다 덩치가 큰 새끼조차도 순식간에 제 앞에서 벌벌 떨게 만들 줄 알았다. 그건 최혁준의 실행력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내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순간, 최혁준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지훈에게 위해를 가하고 말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일단 놈이 시키는 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 마.”

내가 살면서 내본 목소리 중에 가장 볼품없었고, 간절했다. 그걸 알아챈 것처럼 최혁준의 젓가락질이 멎었다.

“네 말 들을게. 뭐든 들을 테니까, 쟤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

“그날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 이지훈은 아무것도 몰라. 나만 알아. 네가 원한다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토하듯 뱉은 말은 항복 선언과도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애원부터 하고 봤다. 내가 줄곧 빌빌대길 기다렸을 최혁준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는 중에도 이지훈은 착실히 가까워졌다. 주변에 앉은 놈이 없는 탓에, 놈의 발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꼭 멀미라도 난 것처럼 속이 울렁댔다. 나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최혁준처럼 식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부러 이지훈의 시선을 피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을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고 바랐다.

이지훈이 제발 이대로 지나치길. 옆에 앉지 않길.

“밥 앞에 두고 뭐 하냐, 둘이. 눈 뜨고 기도하냐?”

발소리가 멎었다. 의자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어코 내 옆의 의자를 빼서 앉은 이지훈에게서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향이 풍겼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이지훈이 식사에 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일상이었던 것들이 일상이 아니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생각해보려 해도 머리부터 어깨까지 뻣뻣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한곳을 오래 보고 있던 탓인지 눈이 따끔거렸다. 식판에 시선을 둔 채로 움직이지 않는 우리 둘에게 핀잔을 던진 이지훈의 눈은 최혁준에게 박혀 있었다.

최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지훈의 말을 의식이라도 한 것처럼 수저질을 다시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나도 수저를 쥐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일단 장단을 맞춰야 했다. 어쩌면 아까의 볼품없는 애원이 먹혀서, 최혁준이 이대로 넘어가 줄지도 몰랐다. 이지훈은 대답 없는 최혁준을 슬쩍 보더니 더 말을 걸지 않고 밥을 먹었다. 둘의 시비는 늘 쌍방향보다는 일방향으로 이뤄졌다. 최혁준이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오늘도 점심으로는 콩나물국이 나왔다. 제육볶음과 콩나물무침, 그리고 오이소박이. 흑미밥과 요구르트 하나.

식기들에 음식을 담고 비우는 소리가 각기 다른 속도로 울려 퍼졌다. 나는 기계적으로 밥을 입에 넣고 삼켰다.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사실만 인지될 뿐,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른 식사를 끝내고 반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최혁준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 이지훈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야 했다.

“아, 맞다. 너 진로 상담 했냐?”

나는 앞부터 확인했다. 최혁준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 이지훈과 내가 대화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최혁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만이 달랐다. 나는 대화 사이에 간격이 생겼음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와 최혁준을 번갈아 보고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렇게나 뱉었다.

“아직 안 했어. 이번에 시험 끝나고 몰아서 한다고….”

“그래? 늦게 하네. 우리 반은 벌써 한 바퀴 다 돌았는데.”

고개를 갸웃댄 이지훈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이지훈이 숟가락을 쥐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자마자 이지훈이 이어 질문했다.

“마음은 정했냐? 어디 갈지?”

저와 달리 아직 가고자 하는 대학조차 확실히 정하지 못한 나를 아는 이지훈이 종종 건네던 질문이었다. 최혁준으로 인해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적당히 둘러대면 넘어갈 텐데, 두려움에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가까스로 할 말을 찾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해 봤자 의미 없지 않나? 장학금 준다는 데 있으면 알아서 기어가야지.”

대답을 뺏어간 최혁준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곧장 제게로 돌아온 이지훈의 시선 정도야 예상했다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잠깐 멈칫하던 이지훈은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인 이지훈이 이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치 최혁준을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 이 새끼 못 본 사이 자아가 존나게 비대해졌는데?”

“…….”

“뭘 어떻게 자위해야 내가 니까짓 거의 의견을 궁금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긍정적이어도 너무 긍정적인 거 아니냐?”

최혁준의 표정이 굳었다. 정면에서 놈을 보면서도 이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어 밥을 푹푹 펐다. 놈은 그 와중에도 들으란 듯 피식댔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양.

“하긴, 그렇게 대가리 꽃밭인 채로 살면 편하기야 하겠다. 박철승 따까리 짓 하며 애들 패고 다니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라. 대신 형들 진지한 이야기할 때는 알아서 입 싸무는 센스는 좀 갖추시고?”

빈정거림이라기에는 성의가 없는 말을 연이어 던지던 이지훈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고민 중인가 보네, 대답 없는 거 보니까. 하긴 아직 시간 많다. 천천히 생각해. 담임이 뭐라 해도, 괜히 부담 갖지 말고.”

지나간 질문을 환기하듯 이지훈이 다시 꺼낸 말의 방향은 최혁준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완벽한 무시이자, 더는 끼어들지 말라는 듯 최혁준과 나 사이에 그은 명백한 선이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최혁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지훈의 말에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까 봐 겁을 내면서. 그러면서 얻은 건 겨우 최혁준의 입술이 비틀린 순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는데, 놀랍게도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됐다.

“긍정적인 건 내가 아니라 너지. 거지새끼한테 법대, 의대, 경찰대 골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희망 고문하는 너.”

최혁준의 목표는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는 것.

“얘 거지잖아. 부모 없어서 경비 일 하는 할아버지랑 둘이 사는 불쌍한 애.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

이지훈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최혁준은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다만 시선은 내게 고정된 채였다. 마치 내가 이 순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여기서나 쳐주는 성적이지. 날고 기는 새끼들이 돈 처발라주는 부모들까지 끼고 덤비는 데서 장학금을 받을 수나 있고? 노친네 등골이나 안 빼먹으면 다행이지.”

최혁준이 또 한 번 웃었다. 이지훈이 방금 제 얼굴에 대고 그러던 것을 따라 하듯이.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순진한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듯 비웃는 놈의 얼굴은 여러 갈래로 비틀려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천천히 가라앉는다. 셋이 앉아 있는 공간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사이로 둥둥 떠오르는 넝마 같은 기억들을 응시했다.

언젠가 최혁준에게 볼펜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집에 굴러다니던 볼펜 중 하나였다. 볼펜의 옆선을 따라 조그맣게 적힌 글씨를 바라보던 최혁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하는 회사라는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던 놈은 다음 날에 지나가듯 말을 꺼냈었다. 아빠가 얼마 전 인수한 공장이라며. ‘거기 돈 많이 주긴 하냐? 별로 크지도 않던데.’ 인상을 찌푸리며 묻던 부잣집 도련님 같은 하얀 얼굴은 내 MP3를 보고 경악하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딱히 교정하려 들 필요가 없는 타인의 악의 없는 무례함, 딱 그 정도. 그러나 목적을 가진 최혁준은 창을 거꾸로 쥔다. 그러고는 덮어두었던 짚 안을 마구 쑤신다. 그 안에 무엇이 있든, 이지훈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상관조차 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앞만 보고 있는데도, 이지훈의 고개가 내게로 돌아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놈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놈과 제대로 눈을 마주친 순간 모든 걸 털어놓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불길한 예감을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이 멈춰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될 테니까.

“얼마나 됐어?”

들쑤셔진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돌아보지 않는데도 놈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집요할 정도로 오래 눈을 두고 살폈다.

“이 새끼가 이딴 말을 지껄이는데….”

“…….”

“너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참고 앉아 있는 거.”

“…….”

“언제부터야?”

내가 대답하지 않을수록 이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나 놈은 금세 말투를 교정했다.

“이유가 있어서 참는 거야?”

아까보다 조금 더 사근사근한 투로, 괜찮다고 나를 달래듯이.

“괜히 소란 만들어 봐야 너한테 도움 될 거 없으니까? 일 커져 봤자 생기부만 더러워질 거고.”

나를 대신해 변명을 대는 이지훈은 그렇게라도 스스로 설득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떻게라도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것처럼 끈질기게 묻는 이지훈을 본 최혁준이 또 한 번 입술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얼굴까지 일그러트리며, 더욱 맹렬히 이지훈을 비웃었다.

“그놈의 모범생 흉내, 좆같아서 더 못 봐주겠네.”

최혁준은 이제 더는 창을 숨기려 들지조차 않은 채 대놓고 이지훈을 찔렀다. 이렇게 해도 놈이 가만히 있을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왕 흉내 낼 거면 제대로 하든가. 네가 꼬리 흔들어 제끼면서 빨아대기 바쁜 선생들 바로 뒤에 있네. 가서 일러 봐. 그러려고 여기 앉은 거 아니었냐?”

“…….”

“대신 나 혼내달라고 질질 울면서 이르라고, 씨발놈아. 생기부 더럽히지 않고 날 치우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냐? 왜. 그것도 쫄려서 못 하겠어?”

이지훈은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최혁준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대신 몸을 아예 내 쪽으로 돌렸다.

“선욱아.”

고작 그 세 음절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물밑에서 참고 있던 숨을 뱉듯이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걷히듯 선명해졌다.

“순진하게 굴지 말라는 말이 무시하고 참으라는 말처럼 들렸어?”

“…….”

“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비로소 이지훈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놈이 웃었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작정하고 하는 쓰레기 짓에는 끝이 없어. 그걸 어디까지 참으려고?”

옅은 한숨과 함께 이지훈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전자 손목시계를 찬 왼쪽 팔을 이리저리 비틀어본 놈이 시계를 풀러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중얼댔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냐.”

그제야 난 이지훈이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 손으로 식판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본 순간, 속에서 울컥하고 신물이 올라왔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뛰었다. 나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최혁준에게 애원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간절히 애원하려고.

“내가 친구 생기부 걱정할 정도의 낭만은 있는 새끼인 게.”

그러나 손을 뻗기도 전에 이지훈이 던진 식판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정확히 최혁준의 얼굴을 겨냥한 식판이 어지러운 소음을 내며 급식실 바닥을 굴렀다.

“…뭐야?”

식기를 반납하러 걸어가던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자리에 멈춰 이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다음으로는 건너편에 있던 남자애들이. 그다음으로는 선생님들이 앉아 밥을 먹던 테이블이. 차곡차곡 쌓이는 시선 속에서, 백 명이 넘는 인원이 각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존재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최혁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온갖 양념을 뒤집어쓴 얼굴보다 눈에 선 핏줄이 더 크게 보이기도 전에, 이지훈이 최혁준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말해, 봐, 이 좆같은 새끼야. 거지가 뭐?”

이지훈이 이를 꽉 문 채로 음절에 힘을 주어 말할 때마다, 아래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살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최혁준이 손에 잡힌 식판으로 이지훈의 머리를 가격했을 때도.

엎치락뒤치락 급식실 바닥을 구르는 둘의 싸움이 개싸움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조용했던 급식실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다.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는 체육 선생님이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이지훈의 담임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뒤도는 우리 반 담임도.

“지훈이!”

누군가가 이지훈의 이름을 고함치듯 부른 순간에야, 나는 최혁준 위로 올라타 주먹질을 하는 이지훈을 말리는 사람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싸우는 둘을 말리기 위해 점점 더 커지는 원. 그와 비례하여 밀려나는 테이블과 의자. 호루라기를 문 체육이 원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밀쳐낸 아이들로 인해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시계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추락하는 시계의 로고가 익숙했다. 작년 이지훈 생일에 내가 선물한 시계였다.

시계가 깨지고서야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내내 무시하고 싶었을 현실에 대한 감각이 폐를 아프게 할 정도로 한 번에 들이닥쳤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광경은 꿈일 리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가 이지훈이 입학 이래 쌓아온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도.

“…안 돼. 안 돼, 이지훈.”

입에 남은 말을 꺽꺽대며 뱉은 순간에야, 나는 그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 때문에. 겨우 그 보잘것없는 이유 하나로.

시험을 하루 앞두고 터진 싸움에 교무실이 뒤집어졌다. 사내놈들끼리 모여 있으면 열에 다섯은 그렇듯, 내일이면 잊어버릴 싸움을 한 것으로 가볍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음을 선생님들은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싸움을 지켜본 눈이 많은 데다가, 교무실에 와서까지 으르렁대는 둘을 따로 격리해 가두기까지 한 상황에, 화해를 시킨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애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 건 순식간이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훈의 아버지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가 불려온 것 같았다. 그를 보자마자 말문이 막힌 나와 달리, 그는 나를 보고서도 별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선생님들을 둘러봤다.

“선욱이 니 설마 계속 여기 이러고 있었나. 선생님, 야는 싸운 아도 아닌데 붙잡아둔 이유가 따로 있습니꺼.”

서로 눈치를 볼 뿐 답하지 않는 선생님들을 본 이지훈의 아버지는 그들을 다그치듯 해 내가 반에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말을 얻어냈다. 내가 제 발로 나가지 않을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등을 밀어 내쫓은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선욱아, 아저씨 왔으니까 괘안타. 걱정하지 말고 반으로 가서 공부해라. 응?”

나는 그가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지훈이 어제 그 계단에서, 아까 급식실에서 내게 그러던 것처럼. 그걸 본 것만으로도 참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아저씨. 지훈이 저 때문에…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괴롭힘당하는 줄 알고… 저 때문이에요. 제가… 선생님들한테 말했는데 안 믿어주셔서요. 그래도 제가 바로잡을 수 있어요, 아저씨.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대신 고해성사라도 하듯 말하는 나를 보던 이지훈의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달래듯 두드렸다.

“그게 왜 선욱이 니 탓이고. 주먹을 휘두른 건 금만데. 그리고 아저씨 아들이 생각보다 이기적인 놈이거든?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기다.”

“…….”

“이장님한테는 아무 말씀 안 드렸으니까, 굳이 니도 말 얹지 말고. 괜히 걱정하신다.”

그가 얼른 가라며 날 밀어내고는 교무실 문을 닫았다. 떠나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던 나는 복도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에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동급생이라고 합니다. 다른 반이고요.”

교무실 쪽으로 두 명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등 뒤에 따라붙어 보고라도 하듯 빠르게 말을 중얼대는 젊은 남자와 그 말을 듣고는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중년의 남자. 앞만 보고 걷던 남자는 교무실 간판을 발견하고서야 고개를 슬쩍 돌려 물었다.

“다음 일정이 몇 시지?”

“두 시에 한영해운 사장님과 라운딩 약속 있습니다. 미룰까요?”

“놔둬. 오래 걸릴 일 아냐.”

혀를 쯧 찬 남자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졌다. 키가 작은 편인데도 온몸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딱히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음에도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알 것 같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최혁준의 아빠임을 알았다. 남자가 나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은 순간, 그 등에 대고 말을 건 이유이기도 했다.

“저 그 집에 가 봤어요.”

남자는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눈이 번뜩하고 짧게 빛났다. 그 빛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 집이 왜 사람들이라고는 없는 곳에 지어져야 했는지, 1층 작은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

“누군가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오늘 이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따라 말할 수도 있어요.”

“학생.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나랑 이야기해.”

젊은 남자가 내게 다가와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자마자, 나이 든 남자가 한 손을 들었다. 그만하고 물러서라는 뜻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젊은 남자가 물러선 곳에 그가 대신 섰다.

“네가 그 전교 1등 아이구나.”

한 걸음 더 다가오는 그에게서는 짙은 코롱 냄새가 풍겼다. 가까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그러나 결코 어떤 감정의 조각도 티 내면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위험한 냄새였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돈을 그렇게 썼는데도, 우리 집 애새끼는 지 편들어줄 친구 하나 만드는 것조차 실패한 모양이고.”

우리 집 애새끼. 실패. 남자는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썼다. 남의 일이라도 말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안타깝게 됐어. 똑똑한 놈 하나 옆에 두면 나쁠 것도 없는데.”

남자가 젊은 남자를 향해 눈짓했다. 문고리를 잡은 비서가 각 잡힌 자세로 교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저를 위해 만들어진 판으로 발을 뗀 그가 손뼉을 치며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제가 최혁준 애비 되는 최정호입니다. 일이 있어서 10분 안에 자리를 떠야 하는데, 얼마 안 남은 시간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을지 알려주실 분 계신지요?”

수완 좋은 사업가처럼 말을 거는 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교무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시험 전날에는 야간자율학습을 진행하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하라는 뜻이기도 했고, 맡은 교과목의 시험 준비까지 함께 해내야 하는 담임들에게 마지막으로 숨을 돌릴 여유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선생들은 오늘만큼 그 사실이 기껍게 느껴지는 날이 없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분위기는 쉽사리 수습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고 뒤숭숭했다. 반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최혁준과 이지훈에 대해 떠들었다.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끌려 나가 오후 수업이 끝난 현 시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두 명의 인물이 어떻게 싸웠고, 왜 싸웠고, 누가 이겼고, 졌고.

모두가 귀가하고 난 빈 교실, 더는 아무도 떠들지 않는 곳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후 내내 그랬던 것처럼.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는 그래야 했던 이유를 확인시켜줬다. 잠시 멈칫하던 발소리는 그러나 다시 이어졌다. 나는 그 발소리가 충분히 가까워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괴롭힌 애들 이름, 하나라도 기억하고는 있어?”

최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해서인지, 그냥 대답하기 싫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쯤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놈인 건 진작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난 최혁준을 자극할 수 있는 다른 말을 꺼냈다.

“닮았더라. 너랑 네 아빠.”

최혁준이 멈칫하고는 제자리에 섰다. 이지훈한테 맞은 흔적이 볼이며 입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음식물과 핏자국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응급 처치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푸르스름한 멍이 크게 진 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발을 들어 최혁준의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책상이 옆으로 넘어졌다. 소리가 제법 크게 났지만, 그래 봐야 발길질 한 번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최혁준은 제 책상이 걷어차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없이 정작 남에게는 그런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래도 오늘 보니 다른 점이 있더라고.”

“…….”

“적어도 네 아빠가 너보다는 말이 통한다는 거.”

최혁준은 대답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넘어진 자신의 자리를 보는지, 그 밑에 깔려 있는 가방을 보는지 가려낼 수 없는 표정엔 한 줌의 미련도 엿보이질 않았다.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오길 택한 게 의외의 결정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나는 최혁준이 이곳으로 올 걸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최혁준도 그랬을 것이다.

이건 우리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네가 경계해야 할 건 네 아빠가 아니야. 마약도 아니고.”

쉬는 시간마다 고집스럽게 교무실 앞을 지키는 나를 본 담임이 한숨을 쉬며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최혁준은 전학을 간다고 했다. 머뭇대면서도 그 앞에 ‘강제’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담임을 보며 이지훈의 징계를 두고도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졌으리라는 걸 예측했다. 난 최혁준의 아빠가 그걸 예고한 10분 안에 해치웠으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예전이었다면 나를 멈칫하게 했을 사실들은 그러나 더는 나를 망설이게 하지조차 못했다.

“네가 늘 네 아래에 있다고 여기고 깔보는 것들이 언젠가 네 뒤통수를 칠 순간이지.”

“…….”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

최혁준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핏줄이 선 붉은 눈을 응시하며 급식실에서 이지훈을 먹잇감처럼 노려보던 놈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 자리에는 이지훈이 아닌 내가 서 있어야 했다. 난 그러지 못한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평생 남 탓하면서. 네 탓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망치고, 죽도록 혐오하는 사람 도움에 기생해서 살라고.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최혁준의 턱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걔의 남은 양심일지 모르는 그 흔적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더는 탓할 사람조차 없어서 너 자신을 죽이고 싶어질 때가 오면, 그때 내가 널 도와줄게.”

들고 있던 물건을 최혁준의 발치로 던졌다. 받고 난 후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신형 MP3가 최혁준의 발목에 맞고 튀어나갔다. 뒷좌석까지 굴러간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뒷문을 연 순간에야 최혁준이 입을 열었다.

“이지훈.”

내가 최혁준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빠에 대해 말하면 되는 것처럼, 최혁준은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지훈의 이름을 꺼내면 되는 걸 알았다. 멈칫한 나를 보지도 않고 놈이 말했다.

“그 이름은 안 잊을 것 같은데.”

반에 들어선 놈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이제야 돌아왔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너야말로 그 새끼 말대로 해 봐. 의사가 되든, 변호사가 되든, 학비가 없어 빌빌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보라고.”

“…….”

“그래야 네 겁대가리 없는 친구를 지금처럼 구해줄 수 있지 않겠냐?”

최혁준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있는 MP3에 시선을 둔 채로, 놈이 읊조리듯 말을 끝냈다.

“찌른다고 해서, 아무나 깡패 새끼 아들한테 덤벼들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두고.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한 새끼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발을 옮겼다. 최혁준을 혼자 버려두고 문을 닫은 순간에야,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지훈은 상담해줄 선생님조차 없는 학업상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지훈의 가방을 든 채로 교무실 앞에서 버티듯 서 있는 나를 본 체육이 못 이기는 척 말해주었던 것처럼, 반성문을 쓰는 대신 팔짱을 낀 채로 침묵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대체 이딴 걸 왜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놈은 아마 오후 내내 이러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놈을 설득하지 못했기에 최혁준과 달리 이 시간까지도 풀려나지 못했던 거고.

어떤 면에서는 이지훈다운 일이었다.

설득하려 문을 열고 드나들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놈은 고개를 들어 문을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고서야 눈을 들어 보는 척이라도 했다.

제대로 보게 된 이지훈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따지고 보면 큰 상처는 없는데도, 멍이 든 눈과 볼에 가득 붙은 반창고 때문에 배로 심각해 보였다. 나는 이지훈의 터진 입술에서 시선을 뗐다. 내 눈치를 보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들이며 친구들까지도 당황할 정도로 눈이 돌아 사람을 쥐어팬 게 겨우 몇 시간 전인데, 놈은 이제야 그걸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처럼 당황스러워 보였다.

“사고 안 친다며.”

‘누굴 걱정하는 건데, 대체? 난 사고 안 쳐.’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모르고 놈이 뱉었을 과거의 발언을 끌고 온 순간에야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몰아쳤다. 가슴에 불이라도 번진 것처럼 뜨겁고, 목이 모래알로 가득 찬 것처럼 따가웠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나를 갉아먹었다. 어떻게 해야 이런 감정을 모를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막막했다. 내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이었다.

“사고 안 친댔잖아, 이 개새끼야.”

이지훈의 우정을 과소평가했다. 나는 나를 깎아내린다는 이유만으로 이지훈이 최혁준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최혁준을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이지훈이 가끔 나를 챙기듯 밥을 같이 먹는 것 이상으로는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몰랐다. 그럼에도 이지훈을 배제하고자 했던 건, 그것조차 싫었던 거고.

근데 이지훈은 내가 상상치도 못했던 것까지 겁내게 했다. 나로 인해 이지훈이 쌓아온 모든 것이 망가지고, 혹시 이 일이 이지훈의 삶에 어떤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일은 정말이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겁도 없이, 미친 새끼가… 그렇게 하면 내가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할 것 같았어?”

“…….”

“아저씨 일하다가 달려오셨어. 이 씨발놈아. 잘하면 너 정학당할 수도 있었다고. 모의 UN? 사관학교? 지랄하지 마. 네가 여태까지 아무리 학교생활 잘했어도, 성적 그렇게 올려도! 이제 담임들 너 그런 데에 절대 추천 안 해줘. 급식실에서 쌈박질이나 하는 새끼한테 누가 그런 걸….”

울컥울컥하고 차오르는 울음 때문에 자꾸 말이 막혔다.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충 훔친 나는 더 말을 잇길 포기하고는 메고 있던 이지훈의 가방을 던졌다. 이지훈이 받아내는 걸 보고는 아래에 던져두었던 내 가방을 주워 테이블로 다가섰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반성문 써. 네가 안 쓰면 나라도 쓸 테니까.”

필통 속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 이지훈의 앞으로 밀었다. 이지훈은 생각보다 순순히 펜을 쥐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기하다는 듯 내 얼굴을 살피긴 했지만.

“와, 내가 살다 살다 지선욱이 우는 걸 다 보네.”

못 들은 척 아래에 시선을 뒀지만, 이지훈의 손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놈이 안 쓴다면 나라도 대신 쓸 생각으로 종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줘.”

“아, 알았어. 알았어. 쓰면 되잖아.”

“…빨리 써. 체육이 삼십 분에 여기 문 잠글 거래.”

“체육 이제 나 미워하나 보다. 어제는 내가 원하면 답지도 꽁쳐줄 기세더니.”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나.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자마자 실실대며 웃고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뻗어온 손이 내 양 볼을 빠르게 닦아냈다. 서투르지만, 따뜻한 손에는 휴지가 들려 있었다.

“사나이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우는 거 모르냐. 너 이제 두 번 남았어. 강영수 결혼할 때랑, 나 결혼할 때.”

날 웃기겠다고 그런 농담을 하는 놈을 사랑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 두 번 제때에 울려면 군대에서 방독면 쓰고도 참아야 한다. 알았지?”

그렇지만 그런 놈을 사랑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서.

“그리고….”

이지훈이 들고 있던 휴지를 옆으로 툭 던지며 종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펜을 두어 번 돌리며, 고민하듯 아래를 내려다보던 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따지고 보면 널 위해 한 게 아니라, 날 위해 한 거야.”

“…….”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다른 거 생각한다고 그 순간을 그냥 넘기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느낌.”

“…….”

“난 그런 예감이 들면 보통 맞더라. 엄마 죽은 날에도 그랬어. 내 의지 아닌데도 떠밀리듯 갔다가 좆됐고.”

이지훈의 손이 종이 위를 오간다. 잘못한 이유를 쥐어짜내느라 멈칫대는 손과는 달리 미리 생각이라도 해본 것처럼 술술 이어지는 말들.

“모의 UN 못 가면 그게 뭐. 사관학교도 뭐… 애초에 내가 되고 싶은 건 파일럿이야. 공사 가는 게 가장 그럴듯해 보였던 거고. 안 되면 다른 방법 찾으면 돼.”

이지훈은 오후 내내 여기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고작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저지른 일이 지난 2년간 매달렸던 것들을 포기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너 그거 아냐? 엔진이 고장 나도 비행기가 날 수 있는 거.”

이지훈은 자신이 낭만이 없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지금 놈의 눈을 보는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넌 언제라도 낭만을 꿈꿀 수 있는 애고, 나야말로 네 낭만이 늘 건재하길 바라는 것 말고는 꿈꿀 게 없는 새끼라고.

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랠 동안에 난 나로 인해 네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너덜너덜해졌고, 널 이곳에서 빼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최혁준이 네게 어떤 상처를 냈든 그 이상의 고통을 걔한테 주고 싶었어. 의자로 걔의 머리를 후려치고,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서 이 방으로 데리고 온 후 네 상처 하나하나에 대고 사과하게 하고 싶었어.

그게 내가 오후 내내 꿈꾸던 거야.

“하나가 고장 났을 때는 가까운 공항에 착륙해서 엔진 점검을 하면 되고, 심지어 두 대가 다 고장 났을 때도 글라이더처럼 잠시간은 날 수 있대.”

“…멋있네.”

“어. 나도 그게 제일 마음에 들더라. 어떻게든 굴러가는 게 내 인생 같잖아.”

그러니까 지훈아. 이 자리에서 약속할게.

“야, 근데 나 강영수한테는 17 대 1로 싸웠다고 구라 깔까?”

“…….”

“너무 뻔해? 그냥 5 대 1로 가? 참고로 내가 5야. 1이라고 해 봤자 그 새끼는 안 믿더라. 내가 제법 잘 키웠어.”

그 새끼가 네 인생에 흠집을 내려고 하는 순간, 나는 꼭 그 두 배를 돌려줄 거야. 그러고는 그 새끼의 인생에, 네 눈썹의 상처보다 더 큰 흠집을 낼게.

* * *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간지럽지 않은 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 의사 선생님 말 들으니까 겨울이라 그나마 이 정도지, 여름에 깁스하면 죽는다더라고 진짜.”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얼굴로 혀를 내두르던 하마가 계단을 폴짝 올랐다. 2주 만에 반깁스를 푼 하마는 계단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듯했다. 발이 어디까지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를 시험하듯 조심성 없이 계단을 오르는 걸 두고 보다 못해 그만하라는 뜻으로 팔을 잡고서야 하마가 뒤돌아서는 이를 보이고 웃었다.

“미안한데, 양치하기 전까지는 가능하면 그렇게 입을 쩍쩍 벌리는 행위를 자제해줄래?”

너구리가 고개를 뒤로 빼며 투덜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코를 막는 척을 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최혁준이 떠난 지 2주가 흘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놀랍게도 제자리를 찾았다. 하마가 멀쩡한 다리를 신기해하는 것처럼, 나도 가끔은 둘이 내 곁으로 돌아온 게 신기했다.

“야, 근데 실장. 지훈이 집에서는 게임 안 한다는 거 구라지? 내가 그날 피시방 다녀와서 틈날 때마다 따져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들어가는 맵부터가 초보자가 들어갈 수 없는 거라니까?”

이지훈이 그때도, 지금도 내 곁에 있다는 사실 또한 그랬고.

양칫물을 뱉던 너구리가 한 질문에 하마의 시선까지 쏠렸다. 나는 물로 입가를 닦던 걸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 걔 밤에는 게임도 안 해.”

“헐. 왜?”

“혹시 눈 나빠질까 봐. 파일럿 되려면 시력 좋아야 하거든.”

하마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건 이지훈이 하는 노력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걸 알면 하마와 너구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면서.

“근데 지훈이 진짜 할 것 같지 않냐.”

“뭐. 파일럿?”

“어.”

“백퍼지. 걔 성적도 좋은데. 이번 일도 어쨌든 잘 넘어갔….”

칫솔을 허공에 털며 대화를 나누던 둘이 흠칫하고는 뒤를 돌아봤다. 아차, 하는 표정을 보니 그때의 일에 내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네 덕분이지.”

너구리가 목뒤를 긁었다. 그런 말이 퍽 쑥스러운 것처럼.

“에이… 뭐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전에도 먼저 담임한테 찾아가서 그놈한테 괴롭힘당했다고 고백한 애 있었다며.”

“그래도. 너네가 도와준 게 도움이 된 건 사실이야.”

“그거야 그런데… 아, 말하다 보니까 존나 오글거린다. 이런 거 하지 말자, 우리. 징그럽다, 좀.”

처음에야 어른들 사이에서 모종의 타협과 합의로 이뤄진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지훈이 최종적으로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고 넘어간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이지훈과 최혁준이 싸웠고, 그 옆에 내가 있었다는 걸 들은 하마와 너구리는 다음 날 담임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고는 최혁준에게 당했던 괴롭힘을 고발했다. 이지훈이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걸 시사한 행위이자, 따지자면 같은 반도 아닌 이지훈을 보호해보겠다고 베푼 호의였다. 그 사실을 내게 고하던 둘의 표정이 생생했다.

둘은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을 이지훈을 도운 이유로 댔다. 너구리 동생 장례식에 내가 참석했던 거나, 하마의 공부를 돕겠다고 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도 해줄 수 있는 행위를 이번에는 자신들이 돌려줬음을 강조하면서. 내가 새로 산 춘추복 조끼를 너구리에게 건넬 때도 쓰일 수 있던 핑계라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간지러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너구리가 저 멀리 뛰어가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

“야야, 대박이야. 빨리 와.”

설명조차 없이 나와 하마의 팔을 이끄는 얼굴이 다급해 보였다. 이유도 모른 채로 끌려가던 나는 교무실 팻말을 보고서는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쌤들 없어?”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멈칫한 하마의 물음에 너구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한 번 더 우리의 팔을 힘주어 끌며 재촉하기도 했다.

“그래. 그니까 쌤들 오기 전에 빨리 봐야 한다고.”

“뭘 보냐고, 그니까.”

“아이 씨. 체육 모니터에 성적 다 떠 있다니까? 11월 모고 성적? 켜놓고 밥 먹으러 갔나 봐.”

호들갑을 떨던 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너구리의 말이 사실인지, 교무실 안에는 원래 있어야 할 선생님들 대신 교복 입은 아이들만이 가득했다. 아마 우리처럼 양치하고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거나, 혹은 너구리가 그랬듯 친구들을 끌고 온 것처럼 보였다. 특히 체육의 것으로 보이는 한 컴퓨터 앞이 혼잡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까치발을 드는 놈들부터 시작해, 모인 모두의 시선은 한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모니터 안의 엑셀 창이었다.

“아, 씨발. 좆됐다.”

확인한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욕을 중얼대며 자리를 빠져나온 한 놈의 자리를 재빨리 꿰찬 너구리가 우리의 팔을 끌었다. 앞에 키 큰 놈 두엇이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면을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20xx학년도 11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 전체 석차_문이과 통합 정리본]

상단의 제목을 보니 문과와 이과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성적에 따라 정리해둔 서류 같았다. 아직 성적표조차 받지 못한 모의고사의 결과가 석차 순으로 정리되어 있기까지 하니, 아이들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됐다. 내년 3월 모의고사를 칠 때까지 진로 이야기와 함께 계속 거론될 성적이자, 3학년 반 배정 시에도 이용되는 자료였다.

성적을 확인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하마와 너구리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놈들이 나를 대놓고 흘깃대고 있었다. 안타까움이라도 느끼는 듯한 표정을 본 순간에는 이게 그 모의고사라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놀라는 눈빛들은 내가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하지 못해서겠지.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누나가 그 꼴통 새끼랑 친구야. 같은 학교 다니다가 그 새끼가 강제 전학 간 거라 대충 어떻게 된 건지도 알고.’

‘…….’

‘내가 괴롭힘당했다고 증언해줄게. 어차피 사실이긴 하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단순히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습적인 행위였음이 밝혀지면, 상황이 이지훈한테 유리해질 거고.’

최혁준과 같이 있던 여자애의 명찰에 적혀 있던 이름, 정민영.

멍하게 앉아 있던 나를 불러낸 정이영은 누나와 이름 말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그렇게 듣지 못했다면 알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대신 너도 나 도와줘.’

‘…….’

‘내가 전교 1등 할 수 있게, 네가 한 번만 실수해주면 돼. 수학에서 한 문제, 아니 두 문제만 틀려줘.’

그 말을 듣는데, 정이영이 나한테 먼저 말을 걸었던 순간이 기억났다. 너 학원 어디 다녀? 내가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자 믿지 않는 것처럼 찌푸려지던 미간도. 그 이후로는 놈이 내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다만 종종 시선이 느껴졌을 뿐이다. 시험을 칠 때마다 늘 내 뒷자리에 앉는 놈이 내 답안지를 걷어가며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무는 걸 보면서도 난 아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중학생 때도 질리도록 겪은 일이었다. 따지자면 그때가 더욱 심했다. 다만 이렇게 딜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

성적을 위해서 나를 돕다니, 차라리 이해는 쉬웠다. 점심시간에서 두 시간이 흐른 뒤였고,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절박한 건 정이영보다는 내 쪽이었다. 내가 절대 뿌리칠 수 없는 것을 두고 딜을 하려 드는 정이영에게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일부러 틀리는 일만은 이상하게도 내키지 않아서, 나는 차라리 마지막 두 문제의 답을 통으로 비우길 택했다. 답지를 걷어가던 정이영은 내 답지를 확인한 순간 멈칫했고, 비어 있는 두 칸을 확인한 순간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3점짜리 문제를 연달아 틀려두었고, 그날 수학 문제는 꽤 어려운 편이었으니 정이영은 문제없이 1등을 할 수 있을 거였다.

내가 1등을 하지 못했다는 게 다른 애들이야 놀라울지 몰라도, 내게는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대수롭잖게 고개를 돌리려던 나는 그러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충격에 빠진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정이영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1위를 거머쥔 사람이라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마우스 휠을 쥐고 있던 누군가가 커서를 맨 위로 끌어 올렸다.

[20xx학년도 11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 전체 석차_문이과 통합 정리본]

난 제목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름이 있었다.

“지훈이? 몰라. 갔나 본데? 연락 남긴 거 없어?”

이지훈의 행방을 묻는 내게 이지훈의 반 애가 한 말이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더 의외라는 듯 묻는 놈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몰랐는데,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지훈이 연락을 남겼대도 당장은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뭐, 어찌 됐든 저녁에는 독서실에서 만나겠지.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가다 이렇게 엇갈리는 일이 있던 걸 기억한 나는 혼자 버스를 탔다. 아까 이지훈의 석차를 확인한 탓인지, 괜히 마음이 들떴다. 컴퓨터에 붙어 석차를 확인하던 애들 중에는 분명 이지훈네 반 애들도 있었을 테니, 이미 소식은 전해졌을 테다.

목표로 꼽을 정도로 바라던 일이니, 당연히 기뻐했겠지. 이럴 때면 같은 반이 아닌 게 괜히 아쉬웠다. 같은 반이었으면 기뻐하는 표정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고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다가 빵집에 시선이 멎었다.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내리겠다고 하차벨을 누른 정거장은 평소 내리던 정거장과는 두 정거장이 차이 나는 곳이었다.

“이걸로 주세요.”

고민하다가 빨간색 딸기가 올라가 있는 작은 케이크를 샀다. 고작 두 정거장인데 다시 버스를 타는 것도 애매한 것 같아서 독서실까지는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걸어가면서도 케이크가 든 상자를 자주 내려다봤다. 오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지울 수가 없으나, 그래도 어떻게든 축하를 해주고 싶긴 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가 1등을 할 때보다도 기뻤다.

독서실에 도착해서는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아두고 바로 이지훈의 방으로 향했다. 이지훈이 쓰는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문을 열 때마다 보이던 형이자 언젠가 내게 이지훈이 방에 들어온 적 없다는 걸 알려주었던 고3 형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수능이 끝났으니 짐을 뺀 모양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자리를 보던 나는 건너편의 이지훈 자리를 확인했다. 선반 위에 스톱워치 하나만 올라와 있는 책상은 이지훈의 정리벽을 반영하듯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누군가가 지정석으로 쓰는 자리임을 알리는 거라곤 의자에 걸려 있는 까만색 후드 집업 상의밖에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이지훈의 방을 나왔다. 아무래도 놈은 학원에 있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켰다. 이지훈의 방을 다녀오는 그사이에 충전이 됐는지 홀드 버튼을 누르자마자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쓴 지 3년이 넘은 핸드폰이라 그런지 핸드폰이 켜지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수능이 끝나면 커플폰으로 바꾸자고 앵기던 강영수의 말에는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핸드폰을 바꾸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옆으로 조금 치우고 핸드폰을 책상 중간에 올려두었다.

가방에서 참고서를 다 꺼내고 뒤돌았을 무렵에는, 핸드폰 액정이 환히 켜져 있었다. 핸드폰을 꺼둔 동안 왔을 메시지들이 앞다투어 떴다. 강영수에게서 온 것, 엄마에게서 온 것, 하마에게서 온 것.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지훈을 찾아 헤맸다.

이지훈의 메시지는 내가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중 가장 아래에 있었다.

서울?

앞에 세워두었던 달력에 시선이 멎은 건 우연이었다. 한 박자 늦게 신음이 터졌다.

“…아.”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11월 27일이기도 했다. 28일 아침부터 시작되는 프로그램 때문에, 하루 일찍 올라갈 예정이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이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지훈이 여름에 다녀왔던 모의 UN 오리엔테이션, 여름 내내 잠깐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붙잡고 있던 핸드폰, 그리고 얼굴의 상처가 덜 아문 놈과 마주 보고 앉은 분식집에서 보게 된 놈의 핸드폰 뒷면.

내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무른 이유를 눈치챘는지 핸드폰을 아예 뒤집어 붙어 있는 스티커 사진을 보여주던 이지훈의 피식대는 얼굴.

‘야, 누가 더 잘 나왔냐. 혜주는 자꾸 이 사진만 보면 지가 더 아깝다는데.’

처음 들어보는 여자애의 이름이었다. 이지훈은 장난을 걸지 않는 한 또래 여자애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본 영은이는 유일한 예외였다. 영은이처럼 오래 알지도 않았고, 장난을 치는 중이 아닌데도 성을 떼고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여자애. 난 그 여자애가 이지훈의 삶에 스며든 중요한 사람임을 굳이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사진 속에서 이지훈과 여자애는 나란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같은 교복이 아닌 것을 의식하듯, 넥타이를 사이좋게 매지 않은 둘은 첩보영화의 포스터라도 따라 하듯 등을 맞댄 채로 서 있었다. 손을 총처럼 맞대고 진지한 표정으로 컨셉을 지키기에 충실한 이지훈과 달리 여자애는 그렇게 능청맞게 구는 이지훈을 도저히 더는 견딜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입을 가린 채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환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여자애였다. 찰랑대는 긴 머리 위에 누가 그린 건지 모를 토끼 귀가 그려져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둘만 존재했을 그 작은 공간이 그려졌다. 그 공간을 내내 채웠을 사이좋은 웃음소리까지도.

이지훈은 그런 방식으로 내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렸다. 강영수가 여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이름은 뭐며,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프로토콜이라도 되듯 내 귀에 줄줄이 읊던 것과는 퍽 달랐다. 일상 속에서 그 이름이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왔을 뿐.

그래서인지 나는 생각만큼 놀라지 않았다. 귀로 들리는 내 목소리도 멀쩡해 보였다.

‘그건 모르겠고… 잘 어울리네, 둘이.’

이지훈이 눈썹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전해줘야겠다. 걔 너 되게 좋아해. 강영수 사진 보여줬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이거 말해주면 강영수 그 새끼 존나 삐지겠지?’

포크로 떡볶이를 찍는 이지훈을 보며 고개를 내렸다. 내가 생각보다 꽤 괜찮다는 사실을 느끼며 동시에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독서실 밑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이지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집으로 가는 봉고차에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의 옆얼굴을 볼 때마다, 모의 UN 준비에 열을 올리는 놈을 볼 때마다.

그냥 난 이 순간을 미뤘을 뿐, 몰랐던 게 아니었다는 걸.

볼에 난 생채기의 크기가 작아져서인지, 이지훈은 얼굴에 일주일 넘게 붙이고 다니던 밴드를 모두 뗐다. 이렇게 옅어지다 보면 흉터는 점차 보이지 않을 테고, 나중에는 그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 아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희미해질 거야.

널 향한 내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겠지.

너랑 네 여자친구가 잘 어울린다고.

평소와 같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든 채였다. 집 앞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이제 오는 거야?”

영은이였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추위로 볼이 빨갰다. 그런데도 영은이는 나를 보자마자 웃기부터 했다. 놀라서 제자리에 선 나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이거 주려고 왔어.”

영은이가 내게 내민 것은 케이크 상자였다. 내가 들고 있는 케이크와 비슷한 크기의 상자 위로는 리본이 묶여 있었다. 가만히 상자를 내려다보는 내게 영은이가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 사이로 초조함이 엿보였다.

“아까 시내 나갔다가 곧 오빠 생일인 거 생각나서 샀어. 다 같이 케이크 불긴 하겠지만, 따로 챙겨주고 싶어서….”

영은이는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을 흐렸다. 꼭 거절이라도 당할까 봐 무서운 사람처럼.

몇 년 전, 내가 태안을 떠나는 줄 알고 과자를 건네던 영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영은이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내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인데도, 내가 혹여라도 받지 않을까 봐 두려운 눈빛으로 내 반응을 살피곤 했다.

그래서 나는 번번이 물건을 받아들었다. 내가 선물을 받자마자 환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영은이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다고. 그에 답하듯 선물을 안기기도 했다. 영은이가 지금 하고 있는 목도리는 2년 전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포장해 봤자 그건 희망 고문에 불과한 무책임한 행위이며, 영은이를 더 괴롭게 만들 것이기도 했다.

“영은아. 고마워.”

“…….”

“고마운데… 나 이거 못 받아.”

내가 오늘 이지훈을 위해 케이크를 사지 않았더라면, 영은이가 내가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케이크 상자를 고르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그러나 나는 이미 겪었고, 어떤 마음으로 이런 걸 준비했는지 알아버렸다. 내가 가진 마음을 복제하듯 똑같이 쥔 채로 그걸 건네겠다고 선 애한테 이런 걸 받을 자신이 없었다.

영은이는 잠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서점에서 내가 자신을 보내려 할 때와 비슷한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멍하니 봤다. 내가 이렇게 냉정히 구는 게 믿기지 않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보던 영은이는 이내 원망하듯 물었다.

“왜?”

눈물을 글썽이는 영은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이전처럼 선물을 받으려 손을 내밀지도, 다가서지도 않았다. 다만 영은이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영은이는 더욱 서러워 보였다.

“나는 왜 이것조차 못 하는데? 여자친구가 아니라서?”

“…….”

“고백하는 거 아니야. 그냥 이거라도 받아달라는 거야. 곧 오빠 생일인 거 아니까. 따로 챙겨주고 싶어서 주겠다는 거잖아. 왜 나한테 이것도 못 하게 해? 그럼 난 뭘 할 수 있어? 오빠 친구 대하듯 하면서, 강영수라도 데리고 와서 같이 건네줬어야 해?”

영은이는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했다. 강영수는 그 사실을 언급하며 이상하다고 했다. 저와 싸울 때는 지기는커녕 잘도 덤비는 동생이 막상 무언가를 욕심낼 기회가 생기면 그냥 참기만 한다고. 어쩌면 일찍 철이 든 걸지도 모르겠다고,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제법 오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렇기에 나는 영은이가 더는 참지 않는 이 순간에야, 모든 걸 떨쳐낼 준비를 마쳤음을 알 수 있었다. 속에 쌓이고 쌓인 것들을 털어놓듯,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포기한 거 아냐. 안 한 게 아니고, 못 해. 내 딴에는 이런저런 노력해 보는데도 안 된다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 혹시라도 내가 안 본 사이에 오빠 여자친구 생겼을까 봐 늘 마음 졸여. 오빠 전 여자친구들 홈피 들어가서 혹시라도 오빠 이름 있을까 봐 지켜보고, 강영수한테 틈만 나면 뭐 아는 거 없냐고 묻고 그래.”

“…….”

“그래도… 포기가 안 되는 마음이란 게 있는 거잖아. 오빠 아직 여자친구 없으니까, 그런 사실에 희망을 걸 수도 있는 거잖아. 오빠가 지금은 나 안 좋아해도,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은 해도 되는 거잖아. 그거 알아? 생각해보면 오빠는 나한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 적 없어. 내가 더 크면 생각해본다고 미루고,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피했잖아. 오빠는 나한테 한 번도!”

“영은아.”

어쩌다 우린 이런 걸 닮았을까.

“나는 널 안 좋아하는 게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평생 걸어온 길에서는 가장 익숙했고, 나는 영은이를 충분히 좋아하고 아꼈으니까. 영은이가 강영수의 동생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말을 나눠 봤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마음이 더 가면 사귀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이지훈을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좋아해.”

처음이었다. 이지훈을 좋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한 번도 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지훈을 좋아한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숨겼다. 나조차 인정할 수가 없어서였다.

어쩌면 나는 그게 지나가는 마음이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영은이의 날 향한 마음이 지나갈 한순간의 바람 같은 존재이길 바라는 것처럼, 이지훈을 향한 내 마음 또한 그런 것이길 기대하면서.

“미안해.”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멈춘 영은이의 눈빛에 내가 고스란히 비쳤다. 그 눈 안에 비친 나를 향해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미안해, 영은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나가길 바란 마음은 내내 한자리에 머물고 있었으며, 어쩌면 평생 보답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제 그만 인정할 때가 됐다고.

늦은 밤이었다. 같은 마을이라 먼 거리는 아니어도, 영은이가 싫은 티를 내도, 영은이를 집까지는 데려다줘야 마음이 편했다. 내가 뒤에서 걷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던 영은이는 문을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 돼지다. 달밤에 체조하고 오시는 길?”

집 앞에 서 있던 강영수는 장난을 받아주지 않고 쌩 지나치는 영은이를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물었다.

“쟤 왜 울어?”

심각하게 묻던 놈의 표정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점차 바뀌어 갔다. 설명이 없이도 많은 걸 눈치챈 눈빛이었다. 비슷한 상황은 이미 있었다. 다만 영은이가 우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영수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욱아. 그때 우리 했던 말 기억나지.”

“…그래.”

“섭섭해하지 말고. 어찌 됐든, 난 쟤 오빠잖아.”

오래전 일이었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내 방에서 잠들기 직전의 강영수가 날 껴안고 웅얼대면서 했던 이야기. 강영수가 같은 순간을 떠올리고 있음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등을 두드린 강영수가 급하게 집으로 따라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이미 잠들어 계셨다. 늦게 집에 오는 나를 위해 늘 켜두곤 하는 창고 위의 조명만 누르스름하니 살아 있었다. 나는 지친 걸음을 뗐다. 오늘만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 방으로 곧장 들어온 나는 들고 있던 케이크부터 책상 위로 올려뒀다.

외투를 벗으려다 말고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이 향했다.

케이크 옆에는 내가 올려둔 적 없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포장하지 않은 탓에 겉면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는 그대로 노출된 상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책상을 향해 다가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위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내 방에 그걸 두고 간 사람이 붙인 게 분명한.

[어디 가서 촌스럽다는 말 듣고 다니지 마. 형 마음 찢어진다.]

익숙한 누군가의 필체를 확인한 순간에는 손가락으로 그 위를 툭 건드려보게 됐다. 급하게 쓴 게 분명한, 그래 봐야 컴퓨터 사인펜으로 대충 휘갈겨 썼을 글씨체 위로 마음이 와르르 쏟아지는 걸 어쩔 수가 없어서.

이지훈이 준비한 내 생일 선물은 MP3였다. 아마도 놈은 그날 최혁준이 한 말을 들었고, 오늘까지 잊지 못한 모양이다.

“뭐 찾냐.”

발소리를 죽인 보람이 없게, 할아버지는 내가 거실에 있던 서랍장 하나를 열어본 것만으로도 잠에서 깼다. 부스스한 머리로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본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 할아버지 체했을 때 손 따시던 거 찾고 있었어요. 좀 체한 것 같아서요. 참아보려 했는데, 자꾸 아파서….”

할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끙끙대면서도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 거실로 나왔다. 내가 찾던 사혈침은 거실의 서랍장이 아니라, 부엌 입구에 있는 작은 서랍에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사혈침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옆에 있던 휴지에 손을 뻗기만 했다. 네 칸 정도의 휴지를 손으로 둘둘 말고는, 거실로 앞장섰다.

새벽 4시였다. 동이 트지 않은 밖은 깜깜했다. 밤새 눈이라도 왔는지, 마당에 얇게나마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바투 쥐며 가까이 끌어당기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왼손의 엄지를 단단히 잡은 그가 다른 손으로 사혈침의 버튼을 눌렀다.

“…아.”

굳이 소리를 내어 신음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스쳐 가는 고통이었다. 엄지손톱의 바로 아랫부분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을 따는 모습은 자주 봤어도, 내가 사혈침을 이용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대하던 것처럼 속이 바로 괜찮아지진 않았다. 다만 어딘가 막혀 있던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는 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피가 멎을 때까지 엄지손톱 밑을 꾹꾹 눌러주던 할아버지는 이내 나의 오른손을 쥐었다. 할아버지의 방에서 흘러나온 빛은 꽤 환했다. 내게로 숙여진 하얗게 센 머리를 바라보던 나는 더는 피가 나지 않는 왼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뱉고 보니 이런 밤에야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 담임 선생님이랑 마지막 진로 상담을 했어요.”

할아버지는 잠깐 멈칫했지만,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쥘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여태까지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한 번도 내 성적을 물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그가 귀 기울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경찰대 가려고요.”

아빠가 할아버지랑 진로를 두고 오래 싸웠다고 들었다. 아무리 대화를 해도 의견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았고, 갈등만 깊어졌다고. 결국에 아빠는 서울로 가며 할아버지를 더는 보지 않길 택했다.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가 단편적으로 내놓은 정보였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가 나의 진로를 두고 어떻게 생각할지 긴장되긴 했다. 나는 아빠와 달리 할아버지를 더는 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고쳐 잡았다. 순간 손이 따끔했다. 할아버지가 옆에 두었던 휴지를 끌어와 그 위를 꾹 눌렀다. 그는 아래에 둔 시선을 내게 올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을 뿐이다.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내 손에 집중하고 있는 그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네.”

할아버지는 경찰이었다. 아빠가 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그랬다고 들었다.

“…그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피가 멎었을 내 엄지손톱 아래를 휴지로 누르고 있는 그는 마당에 멀거니 시선을 두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마당의 장독대 위로, 빨랫줄 위로 무게 없는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나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이상하게 자꾸 코피가 나요.”

할아버지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흘리듯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쌓이는 눈이 아닌 흩날리는 눈을 좇아가고 있었다.

“네 애비도 그랬었다.”

할아버지가 아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잠시 되새겨보다가, 눈이 오는 날 가끔 거실에 오래 서서 밖을 바라보던 아빠를 떠올렸다. 어쩌면 둘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도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을 맞춘 순간엔 쓸쓸히 웃었다. 내가 그렇게 묻는 이유를 꼭 눈치챈 것처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희미한 웃음이 사라지기 전에 말했다.

“그럼 할아버지 닮은 걸로 할래요, 전.”

부엌의 구석 서랍장 위에 새로 산 미역이 봉지째로 올라와 있던 것을 떠올렸다. 내 생일을 기억한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분명한 그 애정의 증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 조금 더 눈을 구경하고 잠이 들어야지. 일어나면 내일은 평소처럼 공부하고, 모레는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준비해 두신 미역국을 먹고, 함께 케이크를 먹으며 조촐한 생일을 보내야지.

그때쯤 되면 새벽 내내 나를 뒤척이게 했던 이유 모를 복통도, 가끔 이유 없이 흘리곤 하는 코피도 멎어 있을 테다.

마치 새벽 내내 쌓인 눈이 어느 순간에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지훈에 대한 마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놈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 것뿐. 쌓이고 녹아내리길 반복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녹아버리고, 올 때처럼 소리조차 없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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