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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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전학생 온다는 소문 들음? 그거 우리 반일 수도 있다는데?”

뜨거운 물을 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컵라면 뚜껑을 굳이 들춰보며 하는 질문은 생뚱맞았다. 답을 듣기도 전에 컵라면으로 코를 박는 하마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다 고개를 내렸다. 백미에 제육볶음, 콩나물국에 콩나물무침 그리고 김치와 요구르트. 힘이라고는 없는 콩나물 대가리들이 스텐 식판 끝자락에 걸려 있는 풍경은 지겹도록 본 것이라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담임이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둔 급식표를 줄줄 외우고 다니던 놈 중 하나가 어느 날 낄낄대며 하던 소리나 떠올랐을 뿐.

‘야, 너네 그거 아냐? 콩나물이 정력 죽이는데 직빵이래.’

‘씨발, 어쩐지. 내가 유독 급식에 그거 나오는 날엔 힘을 못 쓰더라.’

‘이 새끼 진짜 아다 뗀 척 지린다.’

교실 한복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도 열다섯 명은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웃고, 어쩌다 듣게 된 열다섯 명조차 피식대고 마는 남고에 재학하는 건 적응의 문제다. 처음에야 눈치라도 볼 다른 성별이 없다는 이유로 머릿속에 든 원초적이고도 더러운 이야기를 최소한의 거름망도 없이 뱉는 그들이 생경했지만, 그 속에 섞여 2년쯤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무뎌졌다.

물론 여전히 이 시기 남자애들의 머릿속에는 딱히 건더기라고 할 법한 어떠한 것조차 없다는 생각은 한다. 속설의 진위성은 몰라도, 만약 이 학교의 어른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콩나물을 하루가 멀다시피 식단에 올리는 거라면 그럭저럭 이해는 할 정도로.

“안 그래도 박인후 그 소리 하길래 구씹이겠지 했는데 진짜였다고?”

정력을 죽이는 콩나물을 묵묵히 씹어 삼키는 나 대신에, 이미 제 몫의 짜장라면을 끝낸 너구리가 말을 받았다. 입 주변을 까맣게 물들인 채로 다음 타자인 제육볶음을 입에 쑤셔 넣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입맛이 없는 게 맞다는 사실만 확신하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둘러본 주변 환경은 눈앞의 꼴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전시하는 남자애들로 가득했다. 점심시간 전 체육 수업을 하는 반은 많아 봐야 두 반이 전부일 텐데도, 급식실 사방에서 정제되지 않은 호르몬이 풍기는 탁하고 더운 냄새가 났다.

하마와 너구리. 입이 크다고, 혹은 그냥 툭 튀어나온 볼 같은 게 그런 동물들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들이 이름보다 더 자주 불리게 된 이 둘이 그나마 그중 깔끔한 축에 속한다는 건 가끔은 신기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깔끔한 놈을 찾아 급식실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러고 보니 이지훈네 반이야말로 방금 체육을 마치고 왔을 텐데. 운 좋게 1학년 때야 같은 반이었대도, 2학년에 올라오며 반이 나뉜 이지훈과 나는 학기 초까지만 해도 밥을 같이 먹으려고 시도하곤 했었다. 물론 오래가진 않았다. 이동수업이다 뭐다, 거기다 이번 해에는 이지훈도 실장을 맡게 된 탓에 둘 다 점심시간에도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몇 번 우리 반 뒷문을 어슬렁대던 이지훈과 몇 번 급식실 앞을 지키고 섰던 내가 엇갈린 경험 이후 우리는 빠르게도 현실에 적응했다. 어차피 서로의 얼굴은 등하교를 같이 하면서도 실컷 봤다. 이지훈이나 나나 고작해야 밥 먹으며 얼굴을 보게 될 20분에 목매는 타입이 아니기도 했고.

그러나 가끔 이렇게 급식실을 둘러볼 때마다 이지훈을 생각하곤 한다. 동시에 이 급식실 안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다들 똘똘 뭉친 호르몬을 어떻게든 흘려보낼 곳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느라 정신없는 이 공간에서, 그런 행위마저 미뤄둔 채 누군가가 밥이나 먹었는지 궁금해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잘못됐다고. 그 누구도 정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다들 알아서 피하곤 하는 그 선 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언제나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도 나는 그 선을 더 파헤치기를 포기하고 애써 생각의 추를 현재 내가 놓인 상황으로 돌렸다.

“오늘 담임이랑 교장이랑 얘기하는 거 누가 봤다잖냐. 담임 좀 하기 싫은 표정이었다는 거 보니까, 억지로 받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반이 2학년 반 중에서 인원 제일 적잖아.”

“박인후는 강제 전학 당한 놈이라고 어쩌고저쩌고하던데.”

“에이, 설마… 그래도 학교가 가오가 있지. 누구는 시험 봐서 들어오는 학교를 심지어 강제 전학생한테 열어준다고?”

“빽이 존나 센가 보지. 교장 머리에 하이모라도 심어준다고 딜을 했거나.”

“아, 씨발. 그 말 들으니까 어째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하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식판을 든 채로 앞서 걷던 너구리가 뒤돌았다.

“뭐야. 실장 감기 걸렸어?”

가벼운 걱정이 어린 너구리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마른기침은 주말부터 앓던 감기가 미처 다 떨어지지 않은 흔적이었다.

“아니. 그냥 잔기침.”

“그러면 다행이고. 여름 감기가 독하대, 실장. 조심해. 걸리면 개고생이야.”

싱거운 걱정을 건네고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는 놈을 보며 어제 아침에 깨자마자 마루 위에서 발견한 봉투를 떠올렸다. 뭐가 든 건지 두툼한 봉투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누가 놓고 간 건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네모난 사각 플라스틱 통 안에 보이는 하얗고 노란 죽들.

‘내가 잘할게, 내가. 그러니까 너도 다음에 아플 것 같으면 꼭 말해라. 형이 호박죽, 전복죽, 참깨죽까지 사서 달려갈게. 알았지, 우리 선욱이?’

호박죽, 전복죽, 참깨죽.

어떻게 그 순서조차 잊지 않고 포개어뒀을까. 어떻게 주말 아침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죽집까지 가서 죽을 사 올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이지훈은 내가 감기에 걸린 걸 알았을까. 심지어 나는 아프다고 한 적도 없는데. 기껏해야 지금처럼 잔기침 한 번 하고 말았을 텐데. 같은 반에서 매일 10시간도 넘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애조차 의심 없이 납득 후 넘기는 내 변명을, 넌 왜 귀담아들었을까.

그래서 네가 특별한 걸까. 나는 그 어떤 사람의 친절조차 이리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같은 남자애가 건네는 다정함 따위를 이런 식으로 곱씹어본 적이 없는데.

잔반 처리기에 거의 다 남은 음식들을 털고 돌아서며 급식실 안을 한 번 더 훑는다. 욕을 뱉거나 저질스러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대고 장난을 치는 남자애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그 어떠한 속성도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공간에 이지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미련 없이 발을 떼었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점심시간이 끝나기 30분 전 매점은 붐볐다. 학년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남자애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입 안으로 무언가를 욱여넣고 혹은 떠드는 광경은 정신 사나웠다. 라면 냄새부터 시작해 피자빵을 비롯한 냄새들이 가득한 곳에 지루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나는 출입구와 가까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자세를 유지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누구.”

“…아, 저 기억 못 하시는구나… 하긴 그때 지나가듯 인사하긴 했죠. 영은이랑 학원 가던 길이었는데 거기서 영은이 형님을 마주칠지는 저도 몰랐거든요.”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을 덧붙이는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언젠가 마주쳤던 영은이 친구임이 기억났다. 둘이 같은 학원을 다닌다고 했나. 태안 시내의 한 노래방 앞에서 강영수와 같이 서 있던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보이던 까까머리의 남자애는 그새 머리가 좀 길어 있었다. 최근 들어 학교 평판에 부쩍 신경을 쓰는 교장 덕분에 신입생들부터는 두발 규정이 대폭 완화되었다는 걸 떠올린 나는 그래 봐야 겨우 이마의 반을 가릴 정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보다 허리를 조금 세웠다.

“아… 어. 미안. 같은 학교 다니는 줄은 몰랐는데.”

“아닙니다. 저도 영은이로부터 이야기 듣긴 했는데,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라서….”

남자애가 손을 과장해서 내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하마와 너구리가 파묻혀 있는 계산 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때도 우연찮게 마주쳤을 뿐이고, 영은이의 학원 친구와 내가 따로 나눌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사를 받아줬으니 지나쳐 가리라 생각했는데, 남자애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댔다.

“…저기.”

무언가를 고민하던 남자애가 시선을 올려 눈을 맞췄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형. 갑작스럽겠지만, 제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나는 대답 대신 남자애의 파란 명찰에 시선을 뒀다.

강정규. 그러고 보니 영은이와 성이 같았다. 그게 흔한 일은 아닐 텐데, 신기했다.

“혹시 영은이랑… 사귀세요?”

뜬금없이 건너온 질문은 느닷없었다. 한동안 그 얼굴을 빤히 보게 될 정도로. 그날 마주쳤던 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걸어가고 있던 둘을 먼저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떤 게 강영수였고, 고개를 돌린 영은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황한 표정부터 지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남자애의 표정까지 떠올랐다면 이 질문을 하는 의도를 파악하기가 보다 쉬웠을 텐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했다. 사실 이렇게 나한테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얼굴도 잊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듯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힐끔대는 남자애에게는 이 문제가 퍽 중요한 모양이었다. 형으로도, 선배로도 부르기 힘든 나를 붙잡고 이런 걸 묻는 것만 봐도 그랬다.

“영은이가 형 이야기를 자주 해서요. 안 궁금하시겠지만… 제가 영은이를 좋아하거든요.”

“…….”

“걔 남자친구 없는 거야 아는데, 그날 마주쳤을 때도 그렇고 영은이 반응이 좀… 신경 쓰여서요. 근데 영은이한테 이런 거 대놓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그래서… 어차피 알려주지도 않을 것 같고.”

이 동네의 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다 이런가. 누구에게든 솔직하고, 거침없고, 원하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고, 기껏해야 한 번 마주친 게 다인 나한테 제 순정을 털어놓는 것까지.

어젯밤 영은이로부터 왔던 메시지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료 영화 티켓이 생겼다며, 기말고사가 끝나면 강영수와 이지훈까지 넷이서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던 문자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지난 두 차례의 고백과 이어진 거절 이후에도 영은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기회를 만들고는 했으니까. 둘이서 보든, 넷이서 보든 일단 그 안에 우리 둘만 있으면 언제든 또 다른 기회는 생길 수 있다는 듯이.

익숙한 미안함을 저 밑으로 잡아 누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사귀어.”

“…네?”

“안 사귄다고.”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하마를 확인한 순간에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괜히 꾹 잡아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답장을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미뤄두었던 게 생각났다. 영은이는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여전히 멍한 표정인 남자애를 향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영은이한테 직접 물어봐. 네가 뒤에서 이렇게 묻고 다니는 거 알면 안 좋아할 거야.”

멈칫한 남자애에게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 네… 감사합니다… 어물대는 듯한 인사가 건너왔다. 어색하게 자리를 뜬 남자애의 빈자리는 아이스크림을 든 하마와 과자를 든 너구리가 채웠다.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건넨 하마가 남자애가 사라진 방향을 눈짓했다.

“누군데?”

“그냥. 후배.”

인파를 헤치느라 그새 녹기라도 한 건지 손에 든 쭈쭈바는 이미 축축했다. 비록 몸 상태가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당장 어제까지도 죽을 먹었던지라,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망설여졌다. 그래도 감기가 아니라고 말까지 해놓고는 굳이 이런 말까지 꺼내며 물리기가 귀찮아 그냥 별말 없이 받았다. 대충 먹다가 버리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넌 어째 아는 후배도 잘생겼냐.”

“야야, 그거 다 머리빨이야.”

“하마. 형이 뭐랬냐. 그런 속 좁은 질투심이 너를 더 못생겨 보이게 만든다고 했지?”

“그래. 그래서 니랑 다니잖아… 니한테는 질투심이 요만큼도 안 들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척을 하면서도 요령 좋게 그 사이사이 아이스크림을 씹어 넘기는 놈들 틈에서 한 입을 물었다. 질겅이는 촉감의 아이스크림 통을 누르자 소다 맛의 아이스크림이 입 안으로 넘어왔다. 꽤 녹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차갑기는 했다. 겨우 한 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을 아래로 내린 순간, 손이 붙잡혔다.

교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아도 학생 두세 명은 나란히 서서 오를 수 있는 곳에서 이렇게 타인과 손을 접촉할 일은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올리자마자 한 계단 위에 서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좀 살 만한가 봐?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질량도 잴 수 없을 것 같은 가벼운 타박이 따라왔다. 그 와중에도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던 이지훈은 혀를 쯧쯧 차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이고서야 내 손을 놓아줬다. 따라오지 않는 나를 눈치챈 하마와 너구리가 뒤돌자 시선을 그쪽으로 자연스레 돌리면서.

“선욱, 우리 5교시… 어, 지훈이.”

“뭐야. 어디 가냐?”

한 번도 같은 반을 해본 적이 없는 놈들이 건네기에는 심히 친근한 인사였지만 그 대상이 이지훈이라는 점에서는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내가 딱히 소개해준 적이 없음에도, 내게 체육복을 빌린다 뭐다 하며 반에 자주 드나드는 이지훈과는 둘도 이미 안면을 튼 지 오래였다. 하마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전에도 이지훈이 화장실에서 먼저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지선욱 친구면 제 친구나 다름없다는 오지랖 넘치는 말까지 해가며. 그 덕분인지 둘도 이지훈을 퍽 가까이 느끼는 것 같았다. 가끔은 내게 먼저 이지훈의 소식을 묻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지훈이 야구를 했다던가 하는, 어디서 들은 듯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어, 하마, 너구리 안녕. 나 담임이 좀 불러 가지고.”

팔에 낀 출석부를 들어 보이던 이지훈이 별안간 날 가리켰다.

“야, 근데 얘 감긴데.”

“엉?”

이지훈의 시선이 하마와 너구리의 입에 사이좋게 물린 아이스크림에 꽂혀 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끔벅대는 둘을 보고서도 이지훈은 씩 웃기만 했다. 더 설명할 필요성을 굳이 못 느낀다는 것처럼.

‘----’

5교시 수업까지는 겨우 십 분이 남았음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이지훈이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에 힘을 줬다. 훈계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흉내 내듯이.

“이건 압수.”

아까보다는 조금 더 깊게 손이 부딪쳤다. 예고 없는 마주침과 짝이라도 맞추듯 이지훈이 인사도 없이 옆을 지나갔다. 옆구리에 출석부를 낀 채로 계단을 겅중겅중 내려가는 놈의 입에는 방금 내게서 뺏어간 아이스크림이 물려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5분 전의 복도는 혼잡하다. 입을 헹구는 수준으로라도 양치하겠다고, 혹은 사물함에서 참고서를 꺼내겠다고, 매점에서 털어온 과자를 먹겠다고, 못다 끝낸 축구를 하겠다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란한 복도를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던 행위는 가까워지는 하나의 숫자에 점차 느려졌다.

2-7. 교실의 앞문 위에 붙어 있는 숫자 두 개에 시선을 둔 채로 걸었다. 굳이 이지훈네 반과 가까운 화장실에서 양치하는 이유를 증명하듯이.

수업까지는 이제 겨우 3분. 앞문인지 뒷문인지 알 수 없는 문을 닫는 소리가 분주히 들리는 복도의 중간에 서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

놈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지훈은 휴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에 몸부림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고고히 앉아 문제를 풀고 있었다.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인 채 참고서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자칫 날카롭기까지 했다. 옆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문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놈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샤프를 가볍게 돌린다. 에어컨 한 대로는 안 된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학생들을 견디지 못해 결국 교장이 수거하지 못한 오래된 선풍기가 사방에서 털털대고 돌아갈 때마다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는 이지훈의 머리카락을 간헐적으로 흔들었다.

땀이 맺힌 이마. 더 나아가서는 빳빳이 서 있는 하복 셔츠 목깃. 더 내려가서는 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자국이 흐리게 남은 흰 반팔 티셔츠의 가슴팍. 그리고 샤프를 돌릴 때마다 언뜻 드러나곤 하는 손등의 핏줄.

이렇게 창을 통해서 놈을 관찰한다. 이지훈이 잠깐 멈칫하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입 안에 든 아이스크림을 빼는 걸 바라보면서.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드는 놈이 연락할 대상이 제발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나, 둘, 셋… 숨을 고른 것과 동시에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는 창 안에 있는 이지훈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본 순간에는 심호흡해야만 했다. 그렇게 집중하던 와중에도 떠오른 게 나한테 사준 죽이라는 사실에 심장이 뛰는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며.

멀리서 수업을 하러 오는 선생님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한 글자를 써넣기만 하면 되니, 그 짧은 시간에도 핸드폰 대신 이지훈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화면을 확인한 이지훈이 가볍게 웃는다. 놈이 미련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것까지 보고서야 겨우 시선을 뗐다. 그제야 나는 나 외의 또래 남자애라고는 없는 복도를 걸을 수 있게 됐다. 더운 교정 안에서도 느끼지 못한 열이 겨우 여름을 견뎌내는 어떤 남자애의 모습으로 인해 아래서부터 훅 끓어오른다는 사실에 끝도 없는 아득함부터 느끼면서.

사랑을 깨달은 지 2년이 지났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그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때로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남자를, 하루에도 수십 번 마주치는 친구를 사랑하는 건 내게는 너무 낯선 일이었으므로.

* * *

하마의 말처럼, 그 주가 끝나기 전에 전학생이 왔다.

“새 친구가 왔다. 다들 호들갑 떨지 말고 잘 대해주고.”

교장과 이야기하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던 소문이 사실인지, 담임은 전학생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꽤 성의 없게도 했다. 그러나 그의 낯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초연히 받아들이고 마는 어른 특유의 책임감으로 적당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태안에 전학 왔을 때 나를 소개하던 담임의 모습이 그의 위로 겹쳐 보였다.

담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애는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꽤 달랐다. 실체 없는 소문이 그러하듯 눈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사납게 생긴 데다 크고 우락부락한 인상이라든가, 시내 유명한 양아치들과 싸워서 몇몇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렸다든가, 그런데도 퇴학 처분된 이들과 달리 혼자만이 그걸 다 쉬쉬하고 강제 전학 처분만으로 끝낼 정도로 집안이 대단하다든가.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쉬는 시간마다 흘러 들어오던 정보들은 실제로 보게 된 전학생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전학생은 사납게 생기지도, 우락부락하지도 않았다. 키가 또래보다 좀 더 크고 얼굴이 작은 편이긴 했으나 그건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담임 뒤를 따라 누군가 들어선 순간 숨까지 죽인 채로 집중하던 반 아이들은 김이 샌 듯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교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는데도, 전학생은 그런 것 따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교복을 차려입은 채로 담임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은 문제아보다는 도련님에 가까운 인상을 줬다. 못해도 육십 개는 될 눈깔들이 저를 품평하듯 훑고 있는데도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짧게 자기소개라도 하고 들어가.”

담임의 말에야 전학생은 의미 없이 반 안을 훑던 시선을 거뒀다. 얼핏 지루함까지 엿보이던 얼굴에 잠깐 스위치라도 켠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최혁준이야. 잘 부탁한다.”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앞에 앉은 남자애들을 한 명 한 명 훑던 시선은 내게로 와서 멈췄다. 유독 오래 머무르는 시선을 느낀 순간, 남자애가 발을 뗐고 담임이 나를 불렀다. 실장, 잠깐 나 따라와.

“비켜줘야 할 것 같은데.”

“…나? 여기 내 자리인데?”

“선생님이 그러라고 하셔서.”

너구리가 나와 전학생을 번갈아 봤다. 갑자기 들은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선욱. 뭐야?”

자리를 바꾸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담임 때문에 출석 번호순으로 배정된 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던 자리였다. 이해가 갈 만한 설명을 덧붙여야 했을 담임은 무책임하게도 이미 반을 나서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지 않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리란 것을 눈치챈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따로 불렀으니, 뭐든 할 말이 있긴 할 터다. 추측해 보건대 아마 이 전학생에 대해 따로 뭔가를 말해줄 가능성이 컸다.

“가서 여쭤보고 올게.”

너구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한 후 고개를 돌렸다. 전학생은 그때까지도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예고조차 없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는 건데도 한 톨의 미안함이나 혹은 어색함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다 걸음을 뗐다.

나도 태안으로 갑자기 전학을 오게 됐을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다만 난 적어도 누군가의 배려로 이뤄지는 일을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 중 전학생의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거북함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담임은 예상했던 시나리오와 비슷한 말을 했다. 다만, 조금 더 피곤해 보이는 낯이긴 했다. 이것저것 말을 덧대는 그의 얼굴은 썩 내키지 않는 말이라도 하듯이 내내 찌푸려져 있었다.

담임은 내가 전학생이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길 바랐다. 학교도 구경시켜주고, 교과 진도도 잘 따라잡을 수 있게 도와주고. 그러나 잘 챙겨주라는 말은 그 대상이 열여덟 남성이라는 점에서 과한 보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굳이 묻지도 않았건만, 담임은 말하는 자신도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걸 강조하듯 부탁의 말미에는 두 손을 모아 마른세수했다.

“실장 네가 많이 귀찮을 거야. 알아. 공부하기도 바쁜 애한테 이런 말 하는 거 나도 면목 없는데, 그래도 부탁 좀 하자.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거니까.”

교장 선생님? 나는 그가 교무실에 오자마자 책상 위로 툭 던졌던 출석부에 두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담임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러나 곧 별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고는 교무실 안부터 돌아봤다. 전학생만 소개하고 교무실로 바로 왔기 때문인지 아직 조례를 마친 다른 반 선생님들이 없는 2학년 교무실은 한산했다. 안심한 눈치의 그가 내 등을 툭 쳤다. 대화가 끝났으니 반으로 돌아가라는 사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교무실을 나왔다.

1교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끄러운 복도와 다르게 반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묘한 긴장감이 도는 이유는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뒷문을 열자마자 너구리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비어 있던 맨 뒷자리에 앉은 너구리는 초조하고도 억울한 표정이었다. 나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재빨리 돌아온 고개에 대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중에 설명해주겠다고 짧게 말하며 어깨를 짚자 너구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걸음을 뗐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게 나와는 무관하지 않은 일이 됐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야 했다.

2열씩 삼 분단으로 나뉘어 있는 책상들 사이, 앞에서 세 번째 자리. 선생님이 교탁에 섰을 때 가장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 학기가량 그 자리를 차지했던 너구리를 밀어낸 최혁준은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발을 무릎 위로 느슨히 올려둔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 자판을 두드려대는 자세가 껄렁껄렁했다. 나는 내 자리의 의자를 뒤로 잡아 뺐다.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음에 옆을 돌아본 놈에게 말을 걸면서.

“1교시 끝나면 교무실에 교과서 받으러 가. 담임 선생님이 준비해 두신대.”

최혁준은 말없이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나는 책상 아래에서 꺼낸 국어 교과서를 붙어 있는 책상의 틈 사이에 폈다. 1교시는 국어였다. 수업이 시작함을 알리는 종이 울린 순간, 최혁준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 학교 전교 1등이라던데.”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최혁준과 무덤덤하게 시선을 맞췄다. 애초에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최혁준도 날 가만히 보기만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알아챌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본 최혁준에게서는 그다지 도련님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머리칼 사이에 교묘히 숨겨져 있던 귀에 난 수많은 피어싱 자국만 봐도 그랬다.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마저도 미동조차 없는 메마른 눈가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 좆나 불공평하다. 안 그르냐?”

뜻을 알 수 없는 애매한 말을 던지며, 최혁준이 시선을 끊었다. 너구리의 교과서가 모두 사라진 빈 책상 안에 핸드폰이 처박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나는 최혁준이 내가 교무실에 다녀온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그 일들을 가능하게 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앞문으로 들어온 국어 선생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실장, 인사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최혁준이 중얼댔다.

“노친네. 꿈도 크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얼굴이며 목소리에 비치던 혐오의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최혁준은 눈을 내리깐 채로 국어 교과서를 뚱하게 응시했다. 그러고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혁준에게 느닷없이 자리를 빼앗긴 일이 영 기분이 나빴는지, 전학생을 잘 챙기라는 담임의 전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너구리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마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최혁준의 빈자리를 힐끔댔다. 그런 둘에게 최혁준과 함께 점심을 먹어야 하는 불편한 의무까지 나누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당분간은 알아서 식사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두었다.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라도 걸리는 것처럼 미안한 표정을 짓는 너구리의 등을 쳐주고는 뒤돌아 최혁준을 찾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앞문으로 들어오는 최혁준을 발견했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는지, 젖은 손을 허공에 털던 놈이 반을 훑던 시선을 내게로 고정했다.

“밥 먹으러 가자.”

이동수업이 끝난 후의 점심시간이었다. 반 아이들이 교과서를 책상 위로 내려놓기 바쁘게 앞다투어 급식실로 달려간 후의 교실은 썰렁했다. 예상처럼 최혁준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내가 그런 제안을 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최혁준은 급식실까지 얌전히 잘 따라왔다. 내가 하라는 대로 아이디 카드를 급식소 입구의 기계에 찍고, 급식실 아주머니가 퍼주는 대로 급식을 받아서, 내가 앉는 곳 반대편에 앉았다.

오늘도 급식엔 콩나물무침이 나왔다. 나는 건너편에 앉은 최혁준을 한 번 보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입맛에 맞지 않대도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담임도 내가 그 정도까지 챙기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최혁준이 입을 열었다. 헐겁게 젓가락을 쥔 채로 계란국에 들어간 무 따위를 쿡쿡 찌르는 놈은 무료해 보였다.

“우리 아빠가 니네 교장 차 뽑아줬어.”

젓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사고 쳐서 학교에서 쫓겨난 새끼, 이 학교 전교 1등이랑 붙여달라는 조건 내걸고.”

“…….”

“팔자에도 없는 시다바리 짓 하게 됐는데 이유는 알아야 공평하지 않나 싶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데없이 이런 말을 건네는 저의가 궁금했다. 최혁준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음식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는 무분별한 찌르기에 이번에는 돈가스 소스에 섞여 있던 파인애플 조각이 형편없이 조각났다. 본인이 직접 엉망으로 만든 것들을 바라보는 눈이 무감각했다.

“무식한 사람이거든? 영어로 약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를걸, 아마.”

가벼운 비웃음.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도 드러나는 짙은 혐오.

“그걸 지도 알긴 아는지 어딜 가든 옆에 너 같은 사람을 비서라고 달고 다녀. 공부 잘하고, 평생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살아온 애들 있잖아. 그렇게 하면 지 신분까지 같이 세탁이라도 될 거라고 기대하는 건지, 뭔지….”

생각만 해도 웃긴지 최혁준은 연이어 피식댔다. 처음으로, 난 최혁준이 진심을 담아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건 열여덟의 남자애가 전시하기에는 어딘가 과하게 비틀린 웃음이었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게 될 정도로.

“그래 봤자 약팔이가 약팔이지. 깡패 새끼가 아무리 대접받아도 깡패 새끼고.”

최혁준의 아빠가 지금 이 앞에 있다면, 제 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교장한테 차를 사주기까지 하며 시내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아들을 억지로 쑤셔 넣은 그가 바라던 건 이게 아니었을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오늘 처음 본 놈에게 아빠가 약팔이이자 깡패라는 것까지 털어놓는 최혁준은 그딴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죽대며 동의를 구하는 기세가 가만두면 한참을 더 그 짓만 할 것 같길래,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최혁준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저 혼자만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뱉었다. 최혁준이 입을 연 순간부터 궁금했던 거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지 모르겠거든.”

최혁준이 오기 전부터 돌던 소문들이 떠올랐다. 터무니없는 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최혁준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진위가 증명되기도 했다. 소문은 대개 부풀려지고 공신력이 없지만, 이번에는 희한하게도 그중 몇 개의 알맹이가 맞아떨어졌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사내놈들의 덜 자란 몸에서 뿜어지는 열로 후텁지근하게 달아올라 있는 급식실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이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최혁준 바로 뒷줄에 앉아 식판으로 몸을 기울인 이름도 모르는 놈의 등판에 난 희미한 땀자국이나 방금 듣게 된 이야기나, 어차피 내가 신경을 기울여야 할 얼룩은 아니었다.

“겨우 책 한 번 같이 보고 밥 한 번 같이 먹어주는 걸로 내가 니 시다바리라 생각한 적도 없고.”

“…….”

“이걸 알려주는 게 왜 공평하다고 네 멋대로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고.”

최혁준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눈썹을 들어 올린 채로 날 빤히 보는 표정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나를 멈추거나 내가 한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갈수록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은 오만했다. 최혁준을 만나고부터 계속해서 느낀 불편함이기도 했다.

말하는 꼴을 보니 본인은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최혁준은 그토록 증오하는 자신의 아빠를 닮았다. 내가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리라고 가정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모두가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믿는 사춘기 청소년의 거대한 자아가 빚어내곤 하는 착각. 나는 마주친 시선을 끊어내고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이 와중에도 한정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식사를 마친 후 반으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건방진 전학생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협조할 마음이 없는 듯한 최혁준에게 슬슬 짜증이 났다.

“그런 불만 가진 채로도 결국 끌려온 거면 니네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 옆에서 진짜 시다바리 해야 할 짓 만들지 말고.”

내가 말을 끝내고도 최혁준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젓가락이 스텐 식판 위를 긁는 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들었다. 급식실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최혁준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돈가스를 우물대던 놈이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게.”

아까 제 아빠를 흉볼 때 그랬던 것처럼 눈까지 휘어지는 진짜 웃음이었다. 마주친 눈이며 내게로 기울인 몸에서 이상할 정도의 호의가 감지됐다. 나는 본능적으로 놈이 내게 간헐적으로 비치던 적의가 자취를 감췄음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방금 던진 말이 최혁준의 어떤 빗장이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넌 시다 짓 하기에는 깡이 너무 센 놈이네. 깡패 아들한테도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것만 봐도.”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최혁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뺐다. 젓가락을 식판 위로 던지며 툴툴대기도 했다.

“여기 급식 수준 맨날 이따위냐? 존나 못 먹어주겠네.”

깡패 아들보다는, 급식실에 있는 그 어떤 동급생이라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말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요구르트를 끌어오며 대수롭잖게 답했다. 어, 원래 그래.

교무실에서 나온 이지훈은 손부터 뻗었다.

“안 무겁냐? 줘.”

시선이 내가 대신 들고 있는 자신의 가방에 쏠려 있었다. 이지훈을 기다리던 내가 놈의 반에 들러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 방과 후 둘 중 하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늦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당연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어차피 둘이 만나 같이 버스를 타러 갈 테니까, 시간도 절약할 겸.

들고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딱히 무겁지도 않았는데.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이지훈이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고 있던 영단어집을 접어 한 손에 쥐었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복도가 조용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애들은 이미 별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머지는 귀가해서였다. 두 살 위 선배들 때만 해도 예외 없이 무조건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학교로 유명했다던데, 작년에 지금의 교장으로 바뀌며 그 규칙 또한 바뀌었다. 대입을 앞둔 3학년들이야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하더라도, 그 아래 학년들은 야간자율학습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1학년 때까지는 야간자율학습을 했던 이지훈과 나는 이번 해부터는 수업이 끝나면 학교를 벗어나길 택했다.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고, 이지훈은 시내에 있는 학원에서 부족한 과목 보충수업을 듣길 택했다. 상의조차 하지 않았는데 둘 다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기로 한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연이든 뭐든 이지훈과 등하교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은 좋았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둘만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예상했던 대로 강영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우리 학교보다는 조금 더 내륙의 안쪽에 위치한 강영수의 학교 때문에, 강영수는 늘 우리보다 20분가량 빨리 버스를 탔다. 혼자 먼 학교로 떨어진 강영수에게 시간을 잘 맞추면 버스를 같이 탈 수 있다며 달래긴 했지만 정말 실행하게 된 이유는 강영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져서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엉겨 붙으려는 놈 때문에, 뱉는 순간마저도 가능할지는 몰랐던 일을 심지어 두 달 가까이 해오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놀자고 졸라도 우리가 들어주지 않자 울상인 채로도 공부하는 우리 사이를 비집고 앉아 교과서를 뒤적이기까지 하던 강영수를 생각해보면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긴 했다. 이지훈은 그런 강영수의 행위를 두고 ‘발버둥’이라고 간단히 정의 내렸다. 강영수가 3년 넘게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빈자리를 우리로 채우려 하니, 저런 떼쓰기 같은 행위를 하나하나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고 강영수의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분해 보이던 강영수는 그러나 이지훈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아예 대놓고 자신이 불쌍하지도 않냐며 당당히 동정을 구걸하기도 했다.

이지훈은 단칼에 무시했지만, 여자친구와 헤어진 날 눈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던 강영수의 눈을 기억하는 나는 어쩐지 그러기가 어려웠다. 오늘 이지훈이 제 담임과의 면담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고 강영수에게 평소보다 두 타임 늦게 버스를 타라고 말해준 것도 나였다.

간단히 메시지를 보낸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기다려주던 이지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3월부터 덥다고 난리를 떨던 놈들이 에어컨을 지나치게 빨리 틀기 시작했을 뿐, 아직 여름은 아니었다. 적당히 더운 공기가 우리를 포근하게 감쌌다. 서서히 기우는 해 때문인지 학교의 그림자가 운동장 위를 크게 침범해 있었다. 이지훈은 앞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없던 놈이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노을빛이 반만 든 얼굴이 고요했다.

“담임이 나 서울 가라는데.”

“…서울?”

“어. 모의 UN인지 뭔지 참석하래. 내가 간다고 하면 밀어준다고.”

듣다 보니 익숙했다. 학기 초 진로 상담에서, 담임이 한 번 지나가듯 언급했던 프로그램 이름이었다. 1학년 때 이미 비슷한 토론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던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앞에 널린 모의고사 성적표며 내신 기록부를 훑는 중이었던 담임은 빠르게 수긍했다.

‘그래, 선욱이 너는 다녀와 봤자 특기란에 더 적을 곳도 없겠다. 만약 간대도 올림피아드 쪽이 나을 것 같고. 이건 다른 애들한테 양보하자.’

양보란 말이 어색했지만 그들의 기준에는 그럴 거였다. 입학 후 첫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이후 운 좋게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나를 향한 학교의 기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이 지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교라 해 봤자, 학교의 위신이 설 만한 대학교에 보낼 수 있는 학생의 수는 정해져 있었다. 좋은 대학을 보낼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학교가 생활기록부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그런 프로그램을 제안받았다는 건 어쩌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지훈은 1학년 때만 해도 성적으로 이렇게 주목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지훈의 성적은 작년 2학기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대폭 상승했다. 꾸준하고도 지독하리만치 매달렸던 공부가 이지훈에게 굴복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서울에 있던 시절 대치동 학원에 다니면서부터 느낀 거지만, 성적 상위권들의 차트에서는 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실수로 한 문제를 더 틀리고, 누군가 운 좋게 한 문제를 더 맞았대도 순위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다. 항상성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다른 것들이 외려 중요했다. 20위권은커녕 50위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이지훈의 이름이 전교 10위 안에 등장했을 때, 선생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던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하루만이라도 옆에서 이지훈이 공부하는 걸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렇게 공부한다면 한 번에 계단을 다섯 개씩 뛰어넘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번 제안은 이지훈이 훌쩍 뛰어오른 그 계단이 단순히 우연이 아님을 인정한다는 학교의 인정과도 같았다. 당장 수락하고도 남았을 이지훈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안 가게?”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 질문이었건만 이지훈이 긍정이라도 하듯 대답하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나오자마자 갈아 신은 운동화가 운동장 모래에 툭툭 치이는 소리가 났다. 터벅터벅 걷던 이지훈이 별안간 뒤돌았다. 바로 뒤에 서서 걷던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툭 말을 던졌다. 햇빛을 등진 놈의 이마가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11월 28일이라는데.”

11월 28일?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11월 모의고사도 끝난 후 아냐? 괜찮은데. 오히려 더 부담도 없을 것 같고.”

이지훈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박혔다. 잠깐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리던 놈은 이내 혀를 쯧 찼다.

“됐다. 지 생일도 까먹는 놈 앞에서 내가 지금 무슨 걱정을 하고 있냐.”

아….

그제야 이지훈이 한 말이 뭔지를 이해했고, 당연하게도 얼이 빠졌다. 이지훈이 좋은 기회를 두고 고민을 한 이유가 나랑 관련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극적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햇빛이 들지 않는 목뒤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목부터 가다듬었다. 뭐라도 답변하지 않으면, 꼭 그 이유를 들킬 것 같았다.

“…내 생일 어차피 11월 29일인데.”

이지훈은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쳤다.

“그래, 새꺄. 하필 그게 또 1박 2일이라기에 형님이 네 생각부터 났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사이 버스정류장에 다다랐다. 이지훈이 가방 앞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가 탈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강영수가 소리를 질렀다. 얘드라라아아아아아. 눈을 깜빡일 때마다 호들갑을 떠는 강영수가 가까워졌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이지훈이 한 말만 맴돌고 있었다. 정차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버스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발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애매한 시간대인 탓에 이지훈과 나만 서 있는 정거장이니 내 운동화를 찬 범인도 뻔했다. 발끝으로 내 운동화 앞코를 가볍게 툭툭 차는 이지훈 때문에 운동장을 건너오느라 묻은 모래가 툭툭 아래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마자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

“…….”

내 표정을 확인한 이지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저와 달리 방금의 대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것처럼.

그러나 놈은 나와 달리 피식 웃기부터 했다. 방금 운동화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때처럼 가볍고도 미련 없이. 내 운동화를 한 번 더 툭 차면서.

“뭐. 니 어차피 상관없다매.”

꼭 틱틱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이지훈이 내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가방 앞에 달린 작은 주머니의 지퍼를 건드리는 와중에도 놈은 개구지게 웃고 있었다. 이지훈이 내린 지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내 지갑을 보고서야 왜 이지훈이 그런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됐다. 나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지갑을 꺼냈다. 방금 버스에 올라탄 이지훈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여기! 여기! 빨리 와 앉아!”

강영수는 버스 뒤편에 앉아 있었다. 때마침 앞에 난 자리 두 개를 가리키며 얼른 앉으라고 손짓하는 놈을 향해 걸었다. 먼저 그쪽으로 걸어갔던 이지훈은 강영수의 호들갑에도 앉지 않고 통로에 서 있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안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먼저 앉지. 왜?”

얼떨떨하게 나간 물음에는 단출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먼저 내리잖아. 괜히 두 번 일어날 필요 있냐.”

효율성을 추구하는 놈다운 답변이었다. 학원에 가는 이지훈과 강영수가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하차하는 건 사실이긴 했다. 같은 성별에게 베풀기에는 과한 매너를 받는 게 머쓱했을 뿐. 남자들끼리 무슨… 그러나 이지훈은 나와 달리 어떠한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몸을 숙인 놈 때문에 하복 아래의 팔꿈치가 슬쩍 맞닿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팔을 가만히 뒀다.

“그래, 그래. 선욱 씨 내외하지 마시구 얼른 앉으세용. 우리 사이에 무슨.”

뒤에 앉은 강영수가 얼굴을 불쑥 내밀며 장난을 쳤다. 못 들은 척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나 대신 이지훈이 노란색으로 형광펜을 쳐둔 영어 단어를 빠르게 훑으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새끼 우리랑 내외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버스 타기 전에도 이미 한 건 하셨다.”

이지훈이 가방에서 꺼내 들여다보고 있는 프린트물 가장 위에는 다니고 있는 학원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바로 밑에 흘림체로 적힌 이지훈이라는 글씨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 없이 침을 삼켰다.

강영수와 이지훈은 뭐든 표현을 참 잘했다. 좋으면 좋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그와 비교하면 나는 늘 과하게 뻣뻣했다. 따지자면 이유는 있었다. 우선 태안으로 전학 오기 전까지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어 지낸 친구가 없었고, 감정을 표현할 일도 잘 없었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강영수와 이지훈의 모습은 낯설었다. 애정을 돌려주는 행위 자체를 해본 적 없는 내가 그럴 때마다 삐걱댄 이유이기도 했다. 강영수와 이지훈은 나의 그런 모습을 두고 ‘내외한다’라고 장난이라도 치듯 표현했다. 방금 내가 내 생일을 나보다 크게 여겨주는 이지훈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뚝딱댄 것마저, 이지훈은 뻣뻣한 내가 아직도 자신의 표현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구는 것쯤으로만 이해한 모양이었다.

내외라는 말이 따지자면 남녀 사이에나 쓰일 법한 말인 것부터 시작해 바로잡고 싶은 오류가 많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걸 타인의 애정 행위에 면역력이 없는 나의 성정쯤으로 여기는 둘은 내가 가끔 이지훈 앞에서 할 말을 잊거나 평소보다 반응이 느려도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둘의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표정이 단순하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데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날 좋아하긴 하나 궁금할 때도 많고.’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재미없다, 이렇게 자주 못 보는데 사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등의 이유로 헤어진 적은 있었어도 그런 말을 대놓고 들은 건 처음이었다. 당황한 나와 눈을 맞춘 현주는 한숨을 폭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봐 봐, 이렇게까지 말해도 넌 눈 하나 꿈쩍 안 하잖아.

내가 털어놓지 않는 이상 이지훈이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좋은 걸까. 내가 평생 고백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고백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꽉 쥐였다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멀미와 닮은 감정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창밖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또 뭔 일 있었어? 아나 시발, 니네 자꾸 이러면 나도 진짜 전학 알아본다. 어? 내가 나 없을 때 재미있게 놀지 말랬지!”

“1절만 해, 등신아. 닌 오고 싶어도 못 온댔지.”

“왜? 니네 학교에 전학생 왔다며. 아까 우기한테 확인했는데 맞다던데?”

이지훈이 프린트물을 보던 눈을 들었다. 갸우뚱한 강영수의 시선까지도 나란히 내게 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후에 강영수에게 전학생이 왔냐며 문자가 왔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 우리 반이야.”

이지훈이 슬쩍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그거 너네 반이라고?”

“어.”

“괜찮냐? 말 많던데.”

나름 들은 게 있는지,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긴 최혁준이 오기 전에 학교에 떠돌던 소문을 생각하면 나라도 저렇게 물었을 거였다.

뭐….

나는 제 입으로 깡패 새끼니 뭐니 떠들던 것치고는 오후 내내 얌전하던 최혁준을 떠올렸다. 점심시간 후 입을 연 거라고는 ‘여기 몇 교시까지 하냐?’를 묻기 위한 것밖에 없었던 전학생을. 그 물음조차 내리 두 시간을 자고 난 뒤 한 거였다. 당당하게 책상에 엎드려 자는 최혁준을 깨우려고 다가가다가도, 그가 전학생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별말 없이 지나가던 선생들을 기억한 나는 책상에 붙여둔 시간표 위를 툭 두드리는 것으로 답했다. 부은 눈을 끔벅대며 시간표를 바라보던 최혁준은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는 놈 때문에, 오히려 너구리랑 앉았을 때보다 더 조용하고 공부에 집중하기 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교장에게 차까지 사주며 이곳에 처박은 아빠에 대한 불만이 있든 없든, 지금처럼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와 엮일 일도 그다지 없을 터였다. 학교 구경도 이미 시켜줬고, 교과서 받아오는 것도 봤으니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수업 내내 자던데. 걱정할 일 만들 것 같지는 않아.”

최혁준이 전 학교에서 어떤 말썽을 부려서 쫓겨난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이 학교에서 비슷한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날 찬찬히 들여다보던 이지훈은 별다른 이상 사항이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고개를 원위치했다.

“뭐, 그럼 다행이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믿겠다는 투였다.

“왜, 왜? 말이 왜 많아? 난 그것까진 못 들었… 어?”

‘이번 정거장은 농협, 농협입니다. 다음에 내리실 정거장은 은어사거리입니다.’

궁금한 표정으로 이지훈과 나를 번갈아 콕콕 찌르던 강영수가 닫히는 문에 시선을 두더니 좌석 사이에 끼워뒀던 얼굴을 뒤로 쑥 뺐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아유, 아녀. 나 어차피 두 정거장 지나면 내리는디.”

“에잉. 저도 어차피 쪼오금만 더 가면 내려서 그래요.”

살갑게 웃으며 거듭 손을 젓는 할머님께 자리를 양보한 강영수가 앞으로 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와 이지훈의 어깨를 잡아 앉힌 놈이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다이빙하듯 우리의 무릎 위로 몸을 던져 누웠다.

“아 씨….”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반사적으로 프린트물을 위로 들어 올린 이지훈를 본 강영수가 과장되게 눈을 깜빡였다.

“지훈 씨. 저 착한 일 했으니까 컵볶이 사주시는 건 어때요?”

“지랄 말고 일어나.”

“아아아, 나 지갑 안 갖고 왔단 말이야. 니 저번에 안희연한테는 그냥 사줬잖아!”

“그럼 여자애랑 이천 원을 뿜빠이하냐? 그리고 그거랑 니랑 뭔 상관.”

“나는 왜 안 사줌?”

“니를 왜 사줌?”

“가만 보면 존나 선택적 스크루지야. 내가 안희연보다 너한테 못 해준 게 뭐야.”

“비교할 걸 해야지, 이 미친놈이.”

“아, 나도 사달라고!”

강영수가 떼라도 쓰듯 몸을 비틀 때마다 복도까지 튀어나간 운동화가 달랑댔다. 이지훈은 그럴 때마다 강영수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으로 답했다. 이까지 악문 채로 힘을 실어 때리는 탓에 퍽퍽 소리가 났다. 아악! 아악! 몸을 비틀며 고함을 지르면서도 우리의 무릎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강영수도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하도 자주 봐서 감흥조차 없는 풍경이었으나 언제나 그렇듯 부끄러웠다. 나는 둘과 한 무리가 아닌 척 창문 쪽으로 조금 더 붙어서는 밖을 응시했다. 무릎을 슬쩍 들어 강영수의 머리를 떼어내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안내음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둘이 내리려면 아직 두 정거장이나 더 가야 했다.

“바지 좀 작작 줄여, 미친 새끼야. 빤스 무늬 보이겠다.”

“헐. 지금도 보임?”

“그래.”

“오늘 안 입었는데 어떻게 보이지?”

말문이 막힌 이지훈을 본 강영수가 킥킥대고 웃었다. 말로는 어딜 가도 지지 않는 둘이 붙으면 보통 먼저 말문이 막힌 사람이 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강영수가 이지훈을 이긴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강영수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별안간 버스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대기 시작한 이지훈 때문이었다.

“빤스를 안 입었다고?”

“엉.”

“그러니까, 강영수 너 지금 빤스를 안 입었다는 거지?”

국어책이라도 읽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지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나는 황급히 강영수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렇- 읍!”

띵-동. 버저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하려는 학생들이 뒷문 쪽으로 몰렸다. 안타깝게도, 그 안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강영수의 호들갑 때문에 두어 번인가 같이 논 적이 있는 강영수의 전 여자친구였다. 내가 아는 그녀의 얼굴을 이지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 일부러 강영수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도 그래서일 가능성이 컸다. 예상대로 친구와 함께 서 있는 강영수의 전 여자친구는 누가 봐도 이쪽을 의식하는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빤스며 뭐며, 이지훈과 강영수가 떠든 말을 모두 들은 사람처럼.

“주민지, 안녕.”

갑자기 왜 이러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억울하게 위를 쏘아보는 강영수의 입을 한 번 더 틀어막은 순간, 이지훈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어어… 오랜만이다.”

‘저거 미친놈 아냐….’ 하는 표정으로 강영수의 전 여자친구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강영수의 눈이 터질 듯 커진 것도 동시였다.

“…….”

“…….”

“…….”

“…….”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뒷문이 열렸다. 친구를 따라 내리려던 강영수의 전 여자친구가 이쪽을 흘깃 보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를 던진 그녀가 후다닥 내렸다.

“그… 강영수. 나 진짜 아무것도 못 들었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러리라고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강영수의 입을 막은 손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런데도 강영수의 떡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이지훈은 이미 옆의 봉에 기대어서 등까지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한참을 뻐끔대던 강영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

“내가 방금 삼 개월 만에 본 전 여자친구 앞에서 빤스 이야기를 한 게 맞아?”

“…….”

“아니… 나 빤스 입었는데… 장난이었는데….”

“…….”

“빤스가… 아니… 내가 빤스를….”

마치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강영수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둘이 내릴 정거장이 다가왔다. 이지훈이 강영수의 목덜미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키더니 강영수의 지갑을 대신 가져가 카드를 찍었다. 띠딕 소리와 함께 빤스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정차하려는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나는 눈이 마주친 이지훈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떡볶이집을 눈짓하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그냥 사줘.”

컵볶이든 뭐든 사주라는 뜻이었다. 강영수가 먼저 시작한 거긴 했지만, 그래도 미리 강영수 전 여자친구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강영수에게 알려주지 않고 놀려댄 이지훈도 너무했다. 그걸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이지훈은 눈 한쪽을 찡긋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강영수가 못 보게 오른손을 들어서 내게만 오케이 사인을 보내기도 했다. 지갑을 통째로 들어 기계에 찍던 놈이 슬쩍 지갑을 벌려 안의 지폐를 확인한 후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먹고 갈래? 사줄게.”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둘의 학원 수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데다가, 아까 점심을 불편한 분위기에서 먹긴 했는지 소화가 덜 된 음식물들이 아직 위 안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 속이 별로 안 좋아서.”

“감기 때문에?”

“아니. 점심을 좀 급하게 먹었나 봐.”

내가 대답한 것과 동시에 버스가 정차했다. 이지훈이 더 묻지 않고 인사했다.

“알았어. 저녁에 봐.”

이지훈과 나는 같은 독서실을 다녔다. 오늘도 놈은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독서실로 올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강영수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버스에서 내렸다. 번화가인 데다가 시내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학원 앞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버스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덕분에 버스가 정차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강영수와 이지훈이 학원으로 걸어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거리의 소음들이 흘러 들어왔다.

넋 나간 강영수를 끌고 가던 이지훈이 제자리에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 중 하나가 이지훈의 팔뚝을 붙잡은 탓이었다. 웃는 낯으로 이지훈에게 말을 거는 여자애의 얼굴이 익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안희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영수랑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강영수가 입고 있는 교복 바지 패턴과 비슷한 조끼와 치마를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여전히 충격에 빠져 헤롱대는 강영수를 본 안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지훈이 뭐라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연이 폭소하며 강영수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시계를 확인한 이지훈이 뭐라 말하자, 강영수와 안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의 침묵을 뚫고 세 명의 목소리가 창밖의 바람을 타고 들렸다.

“가자. 울 우울한 영수를 위해 오빠가 쏜다.”

“네, 오빠. 저 존나게 우울하니까 순대도 시켜주세요. 개새끼야.”

“오빠래, 강영수 이 미친 새끼 진짜 개처돈 걸로 컨셉 잡았나 봐!”

이지훈은 어느새 그 둘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손을 올린 것뿐인데도, 셋 중에 가장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이지훈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꼭 그 둘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안희연은 이지훈에게 가려져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띠딕, 띠딕. 쉴 새 없이 카드를 찍던 소리가 멎었다. 사람들로 묵직해진 버스가 당장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배기음을 냈다.

“야야, 나 조끼 때문에 팔 못 든다고.”

“너네 학교는 그렇게 교복 줄여 입고 다녀도 누가 안 잡냐?”

“누가 뭐라 해. 다 이러고 다니는데. 아, 영수처럼 노팬티면 잡긴 하겠다.”

“희연아. 나 우는 거 안 보여…?”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야 하는 타이밍인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끝까지 돌려서 분식집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훑었다. 이지훈이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안희연이 들어갈 수 있게 분식집 문을 잡아주는 것까지 보고서야 간신히 고개를 원위치로 돌릴 수 있었다.

“…….”

속이 안 좋긴 해도, 학원 수업 때문에 먹다 말고 일어나는 둘을 봐야 한대도, 그냥 먹고 간다 할 걸 그랬나. 후회가 한 박자 늦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떨치려는 것처럼 목을 가다듬으며 앞을 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감정에는 한참을 더 지나도 익숙해지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리를 죽여 문을 여는 소리에 이어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일 거였다. 그러고 보니 가장 안쪽 자리를 차지한 고3 형이 독서실로 오는 시간이 이쯤이었던가. 수능특강을 비롯한 교재가 천장까지 쌓인 자리를 흘끔 본 나는 참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겼다. 한 방에만 여섯 개의 책상이 빽빽이 들어찬 독서실 방은 좁았다. 덩치가 큰 그 형이 지나가며 나를 칠 필요가 없게 미리 피해주는 거였다.

금방 지나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등 뒤의 인기척은 여전했다. 한술 더 떠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까지 느껴졌다. 나는 오른쪽으로 뒤돌았다. 노란빛인지 하얀빛인지 알 수 없는 책상 등 아래에서 책을 오래 보고 있었던 탓인지, 어두운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나는 선명해진 누군가의 인영을 확인한 순간 입을 벌렸다.

“아….”

무방비 상태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생각보다 컸는지 다른 방의 누군가가 주의라도 주듯 헛기침을 했다. 소음에 민감한 독서실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지훈이 내 책상 쪽으로 바짝 붙은 것도 동시였다.

“휴게실 가자.”

책상에 앉은 내 뒤에 서기 위해 놈은 상체를 반쯤 구부리고 있었다. 참고서 옆에 손을 짚은 이지훈이 나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봤다. 이 독서실에 있는 그 누구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를 죽여 말하는 놈의 얼굴이 매끈했다. 하복은 학원에서 벗기라도 한 건지, 흰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이지훈에게서는 섬유탈취제 냄새가 풍겼다. 코가 예민한 데다 깔끔까지 떠는 놈이 학교든, 독서실이든, 제 방이든 하나쯤은 늘 갖추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푸른색 섬유탈취제의 향은 이제 내게는 그냥 이지훈의 향으로만 인식됐다.

이지훈이 입을 한 번 더 벌렸다. 심지어 아까보다도 더 소리를 죽여 묻는 놈은 거의 속삭이듯이 말하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말을 유추해야 할 정도로.

“싫어?”

크흠. 이번에는 아까보다 헛기침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주의보다는 경고에 가깝게 들릴 정도로. 이지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방이 나누어져 있어도 책상 위의 공간은 뚫려 있어 어느 방에서 들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비록 방금은 좀 오버스러운 반응이긴 했어도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이 나가는 게 맞았다. 나는 책상 등부터 끄고는 휴게실에 가서 볼 영어 단어 책을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 있는 이지훈의 등을 툭툭 쳤다. 하여간 지 기준에 이해가 안 된다 싶으면 참지 않는 성정은 더는 양아치 짓을 하지 않는대도 바뀌지를 않았다.

‘꼭 공부도 안 하고 있던 새끼들이 유난….’

중학생 때, 샤프심 가는 소리조차 못 참고 눈치를 주는 독서실 진상으로 유명했던 고3 형과 같은 방을 썼다가 기어코 한 소리를 해서 싸우기까지 했다던 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다 보니 그 성질머리를 늘 1열에서 직관해야 했던 강영수는 그 일화를 내게 전하며 이지훈이 계속 야구를 했대도 언젠가는 반드시 인성 논란이 터지고 말았을 거라고 혀를 찼었다. 지금도 이지훈은 기어코 한 번 더 흉흉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봤다. 그래도 나이를 먹긴 했다고 이제 예전만큼 바로 뱉고 보는 건 안 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인상을 찡그린 채로도 문고리에 손을 얹는 이지훈의 오른손에 걸린 비닐봉지를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봉지 겉면에는 바다약국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자.”

복도를 걸으며 혹시나 생각은 했지만, 휴게실 구석에 자리를 잡자마자 이지훈은 내게 그 약 봉투를 내밀었다.

“…뭔데?”

바로 받지 않는 날 보면서 답답한 표정을 짓던 놈은 내 손을 끌고 가 봉지를 쥐게 했다.

“아프다며, 새꺄. 약 안 사 먹었을 거 뻔해서 사 왔으니까 먹어.”

속이 안 좋댔지, 아프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이런 거 사다 달라고 한 말도 아니었고. 하지만 약을 사 먹지 않았을 거라는 놈의 추측만큼은 맞았기에 앞선 말을 하기가 민망했다. 봉지 안에는 알약으로 된 소화제 하나와 액상 소화제가 들어 있었다. 옆에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노란색 통을 바라본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건 네 거야?”

내가 갖고 나온 영어 단어집을 들춰보는 중이던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통을 확인한 놈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대꾸했다.

“아니. 그것도 네 거.”

“…….”

“비타민인데 수험생들이 많이 먹는다고 붙여놨길래. 먹어 봐. 비타민 부족해서 코피 나는 거일 수도 있잖아.”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놈을 보며 코 밑을 괜히 한 번 더듬었다. 2학년이 되고 나서 공부 시간을 평소보다 조금 더 늘렸다. 최근 들어서 공부를 하다가도 자꾸 딴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내린 벌이기도 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밤이나 새벽의 시간을 끌어 써야 했다. 수면 시간을 한 시간 줄인 것 때문인지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도 종종 코피가 났다. 휴지로 막고 있으면 금방 멎긴 했으나, 가끔 버스를 탈 때까지 멎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 봐야 겨우 한두 번 그랬을 뿐인데, 이지훈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억력이 좋은 놈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심장이 뛰었다. 내가 헛기침한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고개를 쳐들었다.

“야. 이거 뭔데? 존나 모르는 단어 왜 이렇게 많아?”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아는 단어라도 찾으려는 듯 종이를 휙휙 넘겨대는 놈을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엄마가 보내준 거야. 수능 출제자들이 자주 참고하는 문헌에서 시중에 나온 단어집에 없는 용어들만 뽑아서 추린 거래.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개다행이다. 씨발, 나 순간 중학생 때로 돌아간 줄. 야, 이거 어디서 사냐?”

제목만 알면 바로 구매할 기세인 놈을 보는데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갔다.

“뭐 하러 사.”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사야지.”

“사지 마. 내가 다 보면 줄게.”

“…나 준다고?”

“어.”

“그럼 넌.”

“괜찮아. 필요하면 다시 너한테 달라 하면 되고. 어차피 매일 얼굴 보는데 뭐….”

멈칫한 이지훈이 날 빤히 응시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나. 따지고 보면 고작 학습 교재 하나 공유하겠다는 말인데, 그것마저 이렇게 간지럽고 못 할 짓처럼 느껴지는 걸 보니 새삼 내가 진짜 표현에 서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지훈의 시선을 피해서 괜히 한 번 더 헛기침했다. 화제를 돌리듯 약 봉투를 동그란 테이블 위로 밀기도 했다.

“그리고… 고마워, 이거. 잘 먹을게.”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뻘쭘함을 이겨내고 한 말이었는데, 듣던 이지훈이 느닷없는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렸다. 의아함이 담겼을 내 시선에 대고는 손을 내젓기도 했다.

“아니, 그냥… 안희연이 너 키 더 컸냐고 물어봤을 때는 모르겠다고 했거든. 근데 이렇게 보니 좀 크긴 한 것 같아서.”

“…….”

“키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또 한 번 등장한 안희연의 이름을 곱씹느라, 이지훈이 내 머리에 손을 뻗은 걸 뒤늦게 눈치챘다. 힘이 적당히 담긴 손길로 내 머리를 가벼이 흩뜨리는 이지훈은 웃고 있었다. 안을 헤집기보다는 위를 툭툭 두드리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가끔 달래듯 강영수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대는 건 봤어도, 내가 그 대상이 된 건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피할 방도조차 없었다. 다행히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할 필요도 없게끔 손은 금방 거둬졌다.

“돈 준다고 안 하고 고맙다고 말해줘서 나야말로 고맙다.”

이지훈이 내 눈을 마주한 채로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누군가가 그 미소에 대고 어떤 기대와 실망을 하는지 모르기에 내놓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지훈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에 따라 심장이 바이킹이라도 타듯 위로 덜컹덜컹 올라갔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끊는 놈을 따라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영어 단어 책을 덮어 내 쪽으로 밀어주더니 봉지를 끄르는 이지훈을 따라 눈이 절로 움직였다.

“얼른 먹어. 먹고 들어가서 또 공부해야지.”

강영수였어도 이렇게 소화제를 사 왔을까. 그랬겠지. 하루가 멀게 싸워대면서도 이지훈은 나름의 방식으로 강영수를 잘 챙겼으니까. 실연을 겪었다는 이유로 방에 처박힌 강영수 대신 강영수의 어머니를 공략해 기어코 같은 학원에 등록하게 만든 것도 이지훈이었다. 내가 왜 학원을 가야 하냐며 투정하던 강영수를 붙잡아놓고 진지하게 묻던 이지훈을 기억한다. 너 이모 몇 살까지 일하게 할 건데? 영은이는? 강영수에게 네가 언젠가는 가장이 될 거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고작 가볍게 칭얼댄 걸로 그런 말을 들을지는 몰랐던 강영수가 정색하는데도, 이지훈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었다. 정신 차리고 한번 생각해보라고, 지금 우리 나이에서 가장 하기 쉬운 게 뭐일 것 같냐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 말을 하는 이지훈은 웃음기라고는 없어서, 강영수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얼떨결에 그 과정을 목격하게 된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술을 깨물던 강영수는 그러나 다음 날부터 예전처럼 까불대며 이지훈을 따라 학원에 다녔다. 그 덕분인지 최근 강영수의 성적이 많이 오르기도 했다. 이모는 그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 덕분이라며 우리를 치켜세웠지만, 나는 그 공을 모두 이지훈에게 돌려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영수와 자신이 자존심을 굳이 세울 필요가 없는 사이임을 이용하기 위해, 놈은 강영수를 혼내듯 하는 그 순간에는 달고 사는 흔한 장난 한 번을 안 쳤다. 그게 이지훈의 방식이었다. 제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책임지고 끝까지 챙기려는 태도이기도 했다.

내게 주는 배려들도 놈에게는 그런 거겠지. 액상 소화제 뚜껑을 까서 내미는 놈을 보다가 느리게나마 손을 뻗었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은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이지훈은 이제 알약을 뜯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놈이 함께 넘겨준 알약까지 쥐어서는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방금 나온 쓰레기를 들고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던 이지훈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서 물었다.

“야. 너네 반은 진로 상담 언제 한대?”

잠깐 고민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다음 주?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말이 없는 걸 보니, 담임은 기말고사 성적까지 나온 후 상담을 할 모양인 듯했다. 수시와 정시 지원 방식이 다름을 늘 강조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떤 의도인지는 대강 감이 잡혔다. 이유가 있어 물은 말인 줄 알았는데, 이지훈은 별말 없이 싱겁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방이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는 독서실 복도는 좁아서 일렬로 걸어야 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이지훈은 제 방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놈이 날 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입 모양으로 말을 걸기도 했다.

열공. 기합이라도 전하듯 주먹 쥔 양손을 허공에 들어 보인 놈이 방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들을 사람도 없는 복도에서 뒤늦은 웃음이 터졌다. 나는 비타민이 남은 봉지를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최혁준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조용히 잠만 잤다. 전학 온 첫날과 다른 게 있다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는 것뿐. 그것까지 눈감아 주는 선생들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끔 자습 시간에도 불쑥 아이들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고 공부와 관련 없는 음성을 듣고 있는 게 아닌지 감시하던 걸 생각하면 의도적인 방조였다. 마치 깍두기 취급이라도 하듯이.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계속해서 이어폰을 꽂고 있던 최혁준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이어폰 하나를 귀에서 빼내며 들고 있는 MP3를 제 책상 위로 툭 던지는 놈은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액정이 까맣게 물들어 있는 MP3를 확인했다. 배터리가 없어 꺼진 것처럼 보였다.

“야. 너 엠피 있냐?”

최혁준의 물음에 나는 내 책상 한쪽을 눈짓했다. 방금 영어 듣기 파일을 듣느라 잠깐 꺼내 둔 MP3가 줄에 돌돌 말린 채로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최혁준은 그 눈짓이 봐도 된다는 허락 같았는지 내 MP3를 덥석 집었다.

“와, 개꼴았는데. 이거 켜지긴 하냐?”

혼잣말인지 진짜 묻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나는 놈을 흘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 MP3는 방금 최혁준이 책상 위로 던진 것과 비교했을 때 예전 디자인의 것이긴 했으니까. 태안으로 전학 올 당시에만 해도 최신의 것이던 MP3는 더는 그렇지 않았다. 원한다면 엄마나 할아버지에게 새로 사달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냥 쓰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노래를 즐겨 듣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에서 파일을 옮길 수만 있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저렇게 앞에서 대놓고 유물 취급을 하는 건 최혁준이 처음이긴 했다. 꼽이라도 주려고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아서 뭐라 말을 얹기도 귀찮았다. 그게 뭐? 내 무덤덤한 반응을 확인한 최혁준이 고개를 돌려 MP3 버튼을 이것저것 만졌다.

“뭐… 선욱이 너 어차피 엠피 잘 안 쓰지 않아?”

대신 내 앞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하마가 머뭇대며 말을 걸었다. 최혁준 쪽으로 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은 뻣뻣한 상태로 내 눈치를 보는 행동이, 최혁준의 무신경한 말에 내가 기분이라도 상했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서지 않는 나를 대신해서 하마 나름대로 한 최선의 방어였다. 잘 있던 너구리의 자리를 뺏었다는 이유로 반 애들이 아직도 최혁준을 경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마는 아마 이렇게 점심시간을 틈타 내 앞에 앉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냈을 거다. 나는 하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마가 문제를 봐달라며 갖고 온 수학 문제집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어, 지훈이.”

그러기가 무섭게 고개를 뒤로 돌려야 했지만. 하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손에 내 체육복을 들고 있는 놈은 다가오다 말고 멈칫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어, 하마. 밥 맛있게 먹었냐. 오늘 닭강정 나왔던데.”

하마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이지훈이 내 책상 위로 체육복을 올려두었다. 잘 개어져 있는 체육복 가슴팍에는 지선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지훈이 이틀 전 반에 들러 빌려 간 것이기도 했다. 촌스러운 파란색 옷 위로 익숙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야, 말해 뭐 하냐. 너구리 1학년인 척하고 세 번 퍼먹으러 갔다가 두 번째에 걸림.”

방금까지 최혁준 앞에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하마가 낄낄대며 웃었다. 제가 닭강정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기억해주는 이지훈과 대화를 하는 게 퍽 즐거운 듯싶었다. 하마와 너구리가 늘 다른 반이었던 데다가 나와 다니기 전까지는 딱히 따로 말해 본 적도 없는 이지훈과 금세 친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지훈은 누구에게든 장난스레 말을 잘 걸고, 대화도 막힘없이 잘 이어 나갔으니까. 특히 나와 붙어 다니는 놈들에게는 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평소보다 더 살갑게 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정 자체가 그랬다.

“얼, 이지훈이. 니 이번에 이과 십 등 했다며.”

옆을 스쳐 가던 놈들마저 이지훈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한마디씩 말을 붙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야, 문과 소문 존나 빠르네? 이지훈이 웃으며 대강 말을 받아준 것과 동시에 뒷문에서 누군가 이지훈을 불렀다.

지훈이. 니 체육이 부르는데? 뭐야. 이지훈 옴? 사방에서 이지훈의 이름이 날아다녔다. 고개를 돌린 이지훈이 저를 부른 반 애한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간다고 해. 여유롭게 대꾸한 놈이 내 어깨를 쥐었다.

“오늘도 상담 안 하지?”

“아, 어.”

진로 상담에 관해 묻는 거라는 걸 깨달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이 질문이 참 잦다는 걸 느끼며. 내게도 강영수처럼 미래에 대해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혼날 짓은 딱히 안 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지훈이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집 갈 때 봐, 그럼.”

마무리하듯 하마의 어깨까지 두드린 놈이 미련 없이 뒤돌았다. 뒷문으로 나가는 놈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야.”

최혁준이 나를 부른 순간에는 내심 놀랐다. 갑자기 등장한 이지훈 때문에 최혁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내 MP3를 손에 쥔 최혁준의 시선은 뒷문에 박혀 있었다. 마치 내가 방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쟤 이름이 뭐라고? 이지훈?”

늘 짓고 있는 세상 재미없다는 얼굴에 웬일로 조금의 흥미가 엿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싸하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최혁준이 제 아빠가 깡패니 뭐니 떠들어댔을 때조차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날 엄습했다. 동시에 최혁준이 중얼대듯이 말했다.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미간을 좁힌 채였다.

“어디서 봤지. 낯이 익은데. 놀다가 마주쳤나.”

최혁준이 오기 전 아이들이 소문을 두고 떠들던 소리가 떠올랐다.

‘박철승인가. 왜 그 존나 양아치 있잖아. 그 형이랑 존나 친하다는 말도 있고.’

흘려들었다고 생각한 말소리가 비로소 귓가에 알알이 박혀 드는 듯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최혁준을 응시했다.

난 늘 행동과 말을 같이했다. 행동이 말보다 빠르거나, 말이 행동보다 빠른 경우는 잘 없었다. 그러나 난 순간 그렇게 하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행동보다 말이 빨랐다. 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엎지르고 봤다.

“아니. 네가 본 적 없을 텐데.”

최혁준이 대놓고 멈칫했다. 빠르고, 냉정한 어투로 자르듯이 말하는 내가 낯설다는 듯이.

“쟤 나랑 같은 중학교 나왔어. 그때도 공부만 열심히 했고.”

하마의 얼떨떨한 눈빛이 느껴졌다. 이지훈이 중학생 때 야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내 말에 숨은 맹점을 금방 알아챘을 거였다. 그러나 최혁준은 그러지 못했을 거고, 앞으로도 그 사실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처음 해보는 거짓말에 심장이 평소보다 거세게 뛰었다. 나는 아무것도 티 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와중에도 최혁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잘 먹히긴 했는지, 잠깐 내 얼굴을 훑던 최혁준은 다행히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뭐, 아니면 됐고.”

이지훈에게서 흥미를 거둔 놈이 MP3 버튼을 이곳저곳 누르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야, 집에서 애새끼들 거 하나 쌔벼 줘? 최혁준은 점심을 먹을 때마다 묻지도 않은 가족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최혁준과는 엄마가 다르나 성만은 같다던 열 살 아래의 쌍둥이 동생들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최혁준은 지금도 감정이라고는 딱히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이라고는 붙지 않은 동생들이나, 점심을 같이 먹어주는 실장이나 어차피 제게는 별 차이도 없다는 듯이.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최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문제집 위로 고개를 돌리며 참고 있던 숨을 입술 새로 흘려보냈다.

한동안 이지훈이 반에 못 오게끔 해야겠다. 아니라고 망설임 없이 뱉어낸 말과 달리, 나는 이지훈과 최혁준이 어딘가에서 마주쳤다는 사실을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이지훈이 다시 그 길로 돌아갈 리는 없다. 그건 의심치 않았다.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작은 불씨라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멈칫했다. 이지훈도 최혁준을 알아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내 짝이라는 이유만으로 너구리와 친해지고 나와 급식을 먹는 친구라는 이유로 하마와 말을 텄던 이지훈이 방금 내 옆에 앉아 있던 최혁준에게는 말조차 걸지 않았다는 걸.

“실장. 나중에 물어볼게. 예비종 울렸어.”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하마를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집을 하마에게 다시 건넸다. 최혁준은 이미 책상에 다시 엎드린 후였다. 귀 사이로 보이는 이어폰이 내 MP3와 연결되어 있었다.

* * *

체육 시간이 끝난 뒤였다. 반 전체가 쓴 농구공을 정리하느라 손에 먼지가 가득 묻었다. 찝찝한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는 내 뒤에 최혁준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점심시간에도, 이동수업 시간에도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선생님의 챙기라는 말을 기억한 내가 의식적으로 동행한 거였대도, 이제는 최혁준의 의지가 더 컸다. 졸졸 따라붙는다기에는 늘 적정 거리를 둔 채로 느릿하게 걷는 놈을 떨칠 명분은 별로 없었다. 최혁준은 나를 제외한 반 애들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낯을 가린다기보단 누구든 눈이 마주치면 그 사람이 먼저 피할 때까지 빤히 쳐다보는 걸로 보아, 그냥 선택적으로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나와 같이 다니던 놈들이 최혁준을 불편해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이동하고, 둘이서 무언가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최혁준은 말이 없는 편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지금도 최혁준은 손을 씻는 내 옆에서 심드렁히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씻으며 보니 체육복 소매에도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팔 부분까지 얼룩이 이어진 걸 보니 아까 농구공을 정리하며 그물망에 손을 깊게 넣던 과정에서 테두리에 쌓여 있던 먼지가 묻은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체육복 상의를 벗었다. 어차피 안에 하복을 받쳐 입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얼룩이 있는 곳에 물을 부어 살짝 문지른 순간, 문이 쾅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울을 통해 보니 마지막 칸 쪽에서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

“씨발, 그래서 내가….”

하나, 둘, 셋. 한 칸에서 세 명이나 나온 이유는 문이 열린 순간 화장실 전체로 퍼진 담배 냄새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저들끼리 떠들며 세면대로 다가오던 놈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 얼굴을 아는 놈 하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 야. 안녕.”

“어.”

너구리의 중학교 친구랬나. 한 번 지나가다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옆의 놈들이 뭐라 속삭이며 너구리 친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이를 거 아니지?”

친구들의 성화에 망설이면서도 묻는 걸 보니 왜 굳이 말을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전체 조회를 할 때 앞에 나가는 일이 잦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나는 선생들과 친한 애로 여겨지는 일이 잦았다. 내가 선생들한테 자신들이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봐 겁나는 모양이었다.

선생들이 웬만해서는 잘 와보지 않는 체육관 화장실에 숨어서 피울 정성까지 들이면서, 참 겁들도 많다고 생각하며 나는 심드렁히 대답했다.

“뭘?”

“어? 어… 아냐. 그냥 헛소리한 거야. 무시해.”

손을 내저은 너구리 친구를 비롯해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놈들이 앞다투어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시선을 내리다 말고 거울을 통해 날 보는 중이던 최혁준과 눈이 마주쳤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이 익숙한 불안의 불씨를 잡아당겼다. 최혁준은 예상처럼 문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본능적으로 이끌리듯이.

“야.”

마주칠 일조차 잘 없는 동급생에 불과한 애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과 담임이 부탁한 같은 반 놈이 비행을 저지르는 건 중요도가 달랐다. 뒤늦게나마 저지하듯 불렀지만, 최혁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문 앞에 도착한 놈이 발을 들어 문을 쾅 찼다. 좁은 칸 안을 훑어보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꽁초 하나를 주워 든 놈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피울래?”

끝까지 피우지 않았는지 꽁초치고는 길었으나 그래 봐야 꽁초가 꽁초였다. 남의 침이 범벅되어 있을 쓰레기를 들고 그렇게 묻는 놈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서 지켜보았던 최혁준의 소지품들을 생각했다. 교복이야 새로 전학 왔으니 그럴 수 있다 해도, 놈이 걸치거나 소유한 것 중에는 신상품이 아닌 게 없었다. 최혁준을 꺼리는 너구리조차도 가끔 지나갈 때면 최혁준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부럽다는 표정으로 티 나게 힐끔거리고는 했다. 모은 용돈을 거의 매번 신발에 탕진하는 신발 애호가인 너구리에게는 싫은 감정을 미뤄두고 훔쳐볼 정도로 퍽 탐이 나는 신발인 모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부잣집 도련님에 지나지 않는 최혁준은 가끔 이렇게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굴 때가 있었다. 얘가 이 학교에서 말을 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이유로, 그걸 지켜보는 사람도 내가 된다는 게 짜증이 났을 뿐. 비행을 저지르자는 말을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제안이라도 하듯이 가볍게 물어보는 놈이 성가셨다. 대답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질문을 하고는 답을 기다리듯 서 있는 놈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왜?”

“더러워.”

최혁준이 피식대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꽁초를 내려다보면서 중얼댔다.

“이게 더러우면 넌 평생 약은 못 하겠다.”

비웃듯이 말하면서도, 최혁준은 그것을 제 입에 무는 것 대신 쓰레기통으로 순순히 던지고는 다시 세면대 쪽으로 걸어왔다. 최혁준은 잊을 만하면 이런 식으로 약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제가 약팔이 깡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되새김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담배꽁초를 본 순간 약부터 떠올리는 열여덟의 삶이 무엇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생각이 길어진 사이 내 옆으로 돌아와 화장실 벽에 기대선 놈이 내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체육복을 턱짓하며 물었다.

“그냥 새로 사지 그래?”

도련님 스위치라도 켠 듯이 오만하게 묻는 놈을 무시하고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체육복 소매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온 것도 동시였다. 거울로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수도꼭지 아래의 손이 움찔했다. 다소 급한 몸짓으로 화장실로 들어온 남자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고르며 씩 웃었다. 나를 계속 찾았고, 이렇게 보게 되었으니 안심하는 것처럼.

“야. 호루라기 니한테 있지. 체육이 니한테 맡겼다던데.”

등을 툭 치며 묻는 이지훈은 체육복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과 나 모두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 반이 6교시고 이지훈이 7교시였나. 나는 상황 파악이 덜 된 얼떨떨한 상태로도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체육 선생님은 호루라기를 실장들한테 맡겼다. 수업하다가 사라지기 일쑤인 그가 실장에게 지도를 맡기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기도 했다. 오늘도 체육은 통화한다고 호루라기를 맡기고 사라졌었다. 수업이 끝나고 체육의 사무실에 놓아둬야지 생각은 했었는데, 바로 화장실로 오느라 잊고 있었다.

늘 넣어두는 대로 체육복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어? 당황하는 나를 본 이지훈이 세면대로 다가섰다.

“없냐?”

“어. 잠깐만.”

“천천히 해. 어차피 쉬는 시간 남았어.”

시간이라도 벌어주려는 것처럼 손을 씻는 이지훈을 보며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툭, 하고 세면대 옆으로 무언가가 굴러왔다. 찾고 있던 호루라기였다. 손을 씻던 이지훈도, 바지를 뒤지던 내 시선도 옆으로 돌아갔다.

“아까 니 농구공 주울 때 떨어뜨렸어.”

설명을 덧붙이는 최혁준은 심드렁했다. 내가 떨어뜨린 걸 주워서 갖고 있던 거니 도와준 거나 다름없는데 그 사실을 인지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한 채로 잠깐 최혁준을 바라보던 나는 일단 호루라기부터 주워 들었다.

“어… 몰랐네. 고맙다. 야, 여기.”

세면대 위로 떨어진 호루라기를 주워 들고는 이지훈에게 내밀었다. 바로 받아 갈 줄 알았던 놈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울로 보이는 이지훈의 시선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최혁준이 있었다. 최혁준도 그걸 알아챘는지 이지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은 거울을 통해 최혁준을 바라보고, 최혁준은 바로 이지훈을 보고 있다는 것이 달랐지만 둘이 서로를 보고 있는 건 맞았다. 잊고 있던 불안감이 몸을 감싼 건 동시였다. 내가 최혁준으로부터 이지훈을 차단하듯 둘 사이에 서려던 순간, 손이 가벼워졌다. 호루라기를 가져가 목에 건 이지훈이 세면대로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농구 3점 슛 연습하라고 시키든?”

방금까지 눈을 맞추고 있던 최혁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추측에 불과했던 것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지훈은 의도적으로 최혁준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어도, 이지훈이 여태껏 나와 함께 다닌 친구들에게 취하는 것과 퍽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행인 일인 게 맞을까. 이 와중에도 이지훈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최혁준을 본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 그래? 가볍게 말을 받은 이지훈이 젖은 손을 허공에 두어 번 털었다.

‘-----’

예비종이 울렸다. 6교시와 7교시 사이에는 20분의 쉬는 시간이 있었다. 방금 울린 건 7교시가 시작하기 5분 전임을 알리는 거였다.

“간다. 집 갈 때 봐.”

인사를 던진 이지훈이 몸을 돌렸다.

“야.”

떠나려던 이지훈을 잡은 건 단 한 마디였다. 이지훈보다 내가 먼저 뒤를 돌아봤다. 최혁준은 이지훈을 보고 있었다. 꼭 아까 담배꽁초를 주워 들 때랑 비슷한 표정이었다. 내가 최혁준으로부터 세 번째로 보게 된 흥미 어린 표정이었다. 그중 두 번이 이지훈과 관련되어 있었다.

“너 나 알지 않냐?”

이지훈은 나와는 달리 천천히 뒤돌았다. 마침내 최혁준을 마주 보고 선 이지훈의 표정에선 딱히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지훈의 무표정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무심해 보이기도 했고, 이미 본 사람을 대하듯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인사조차 나눠본 적 없는 애가 저를 붙잡는데도 딱히 놀란 것 같지 않다는 사실만 간신히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한 2년 전이었나. 박철승이랑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혁준은 답지 않게 친절했다. 벽에 기대서 있던 상체를 일으켜 이지훈을 관찰이라도 하듯 훑으며 설명을 덧대는 놈에게서 담배 냄새가 옅게 풍겼다. 꽁초를 들고 있던 그 짧은 새에 옮기라도 한 것처럼.

‘쟤 나랑 같은 중학교 나왔어. 그때도 공부만 열심히 했고.’

내 거짓말에 최혁준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수긍했었다. 그리고 나는 우습게 안도했었고. 나는 손바닥이 얼얼해진 것을 느끼고서야 눈을 깜빡였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바닥이 따끔한 이유가, 짧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을 자극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 순간마저도 뒤에 있는 이지훈의 존재가 못 견디게 신경 쓰였다.

“야. 최혁준.”

최혁준을 통해 알게 된 게 있다면, 내가 이지훈과 관련된 일이면 나도 모르게 나서고 만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나는 최혁준의 이름을 꼭 선생들이 주의 줄 때처럼 불렀다. 아까 너구리 친구가 두려워하던 것처럼,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그러고 보니 최혁준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 놀라 멈칫한 사이, 최혁준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서도 놈은 딱히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이쯤은 예상했다는 것처럼 가볍게 받아치기도 했다.

“왜. 너한테 공부 잘하는 착한 놈이었으면 남한테도 다 착한 놈이었을 것 같아?”

“…….”

“담배도 안 피우고, 오토바이도 안 타고?”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다는 듯 하나하나 언급하면서도 최혁준의 시선은 여전히 이지훈에게 박혀 있었다. 마치 이지훈의 입으로 꼭 어떻게든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제야 나는 내 거짓말에도 별말 없이 넘어갔던 최혁준이 사실은 언젠가 벌어질 이런 상황을 두고 양보하듯 물러섰던 거였음을 알게 됐다. 나는 최혁준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빠르게 뒤돌았다.

“야. 수업 곧 시작해. 가.”

이지훈의 시야를 차단하듯 앞을 막아섰다. 이지훈은 아직 최혁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했을 놈이었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불안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최혁준은 위험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놈이었고, 그중 일부는 사실이었다. 이지훈이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지훈. 가라고.”

꿈쩍도 하지 않는 이지훈을 재촉하듯 팔을 잡아당긴 순간에야 이지훈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잠깐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지훈은 다음 순간 발을 옮겼다. 나를 가볍게 옆으로 밀어낸 놈이 최혁준에게로 다가선 것도 동시였다.

“어. 나 너 알아.”

뚝-. 뚝-. 젖은 체육복 소매에서 미처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이 세면대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나는 의도된 침묵을 정면으로 맞서는 이지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놈이 선명한 발음으로 긍정하는 것들과 부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근데 인사까지 해야 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네.”

이지훈은 고개를 까딱 기울인 채였다. 입술마저 삐뚜름히 비틀려 있었다. 균형이 어긋난 입술 새로 이지훈이 연신 헛웃음을 뱉었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이마 가운데를 문지르는 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어쩌자고. 박철승 따까리 짓 하던 새끼들끼리 쎄쎄쎄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장난이라도 치듯이 껄렁대는 말투에 최혁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늘 남을 깔보듯 대하는 놈이니, 이지훈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최혁준의 표정이 변하는 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면서도 이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말끝마다 피식대는 웃음을 섞는 놈은 최혁준이 만들어낸 긴장감 따위를 우습게 만들고 있었다.

“체육대회라도 할래? 술값 대신해서 삥 뜯던 새끼. 담배 대신 뚫던 새끼. 기분 더러우면 맞아주던 새끼들 줄 세워서?”

“…….”

“넌 어느 줄에 설래? 내가 그것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만두고 나온 지가 꽤 돼서.”

마지막 말에 최혁준이 처음으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만둬? 이지훈이 뱉은 단어를 한 번 더 중얼대는 모습이 꼭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우스워 보였다. 근데도 이지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혁준이 그 단어를 집어낸 걸 기꺼워하듯 빙글대며 웃기까지 했다.

“왜. 네가 못 하는 거라 비웃는 것 말고는 덜 비참해질 방법이 없어?”

경련하듯 떨리던 최혁준의 입가가 마침내 일자로 다물렸다.

“…….”

“…….”

최혁준에게 남은 웃음마저 몽땅 빼앗아 가고서야 이지훈이 고개를 똑바로 했다. 농 같은 시비를 거는 와중에도 내내 건조하던 눈빛이 최혁준의 눈에 고정됐다.

“체육대회를 하든, 박철승 밑에서 따까리 짓을 하든 니 좆대로 해. 대신….”

이지훈이 처음으로 잠깐 망설였다. 나는 대화에서 내내 밀려나 있던 내게로 짧게 닿아오는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이지훈은 1초도 되지 않아 눈을 앞으로 돌렸다. 더는 웃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턱이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그 어떤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랑 쟤는 빼.”

이지훈이 시선을 거뒀는데도, 최혁준의 시선은 내게 계속해서 머물렀다. 마치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표정이 바뀌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최혁준이 이지훈을 향해 물었다.

“…쟤는 왜 빼는데?”

이지훈은 최혁준의 질문을 듣자마자 웃었다. 별 희한한 질문을 다 들어보겠다는 듯이.

“법대, 의대, 경찰대. 쟤가 1학년 배치고사 때부터 지금까지 순서만 바꿔가며 듣는 지망 대학들이야.”

“…….”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해 봐. 그중에서 깡패 새끼랑 어울리는 게 있는지.”

깡패 새끼란 단어가 언급된 순간 최혁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그게 최혁준의 약점임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지훈은 최혁준의 역린을 건드렸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깡패이자 약팔이인 아빠에 대해서, 뭘 할 때마다 제 눈치를 보는 새엄마와 어린 동생들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떠들던 최혁준을 떠올렸다.

자신을 깡패의 ‘새끼’로 만든 그들에 대한 혐오와, 그럼에도 그들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깡패’ 새끼로 남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점철된 말투, 표정, 행동.

“그게 싫으면 너도 나같이 좆 빠지게 노력을 하든가. 누가 알아. 너한테도 탈퇴할 마음을 먹게 할 친구가 생길지.”

저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최혁준을 내버려 둔 채로 이지훈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놈은 웃고 있었다. 내가 방금의 일을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평소와 같은 웃음이었다. 최혁준과 있었던 기 싸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이제 선도부 아니다 이거야?”

생뚱맞은 소리와 함께 손이 불쑥 뻗어왔다. 급하게 나가느라 체육복 안에 그대로 입었던 하복의 맨 윗단추가 열려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한 손만으로도 단추를 잠그는 것에 성공한 놈이 물러서는 대신 내 얼굴 가까이에서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꼭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순간 긴장했다. 그 짧은 새에 내게도 담배 냄새가 배었을지 걱정하면서. 잠깐 담배꽁초를 쥔 것만으로 최혁준에게도 옮은 담배 냄새가 이 화장실에 내내 서 있던 내게 옮겨붙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이지훈은 미소 지었고,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오랜만에 밥 같이 먹을까?”

내게로 고정된 두 눈동자. 나는 힘이 들어갈 뻔한 손을 애써 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친 이지훈이 걸음을 옮겼다. 더는 돌아볼 것도 없다는 듯이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가는 등에서 시선을 뗀 것과 동시에, 7교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다음 시간은 수학이었다. 깐깐한 수학 선생님은 이미 반에 들어가 있을 거였다. 그런데도 나와 최혁준은 수업 시간이면 학생이 교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은 사람들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예 구라는 아니었네.”

침묵을 깬 건 최혁준이었다. 혼잣말하듯이 말을 시작한 최혁준은 다음 순간에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보다는 회복 시간이 느렸지만, 그래도 얼추 평소와 비슷하게 돌아온 얼굴의 놈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친한 친구는 맞나 봐. 깡패 새끼 앞에서 겁 없이 지껄이는 꼴마저 닮은 걸 보면.”

깡패 새끼. 이지훈이 ‘깡패’에 강세에 두고 한 말을, 최혁준은 ‘새끼’에 강세를 두고 반복했다. 그걸 알아채고는 굳은 나를 뚫어져라 보면서도 최혁준은 거침없이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아까 이지훈과 끝까지 일정 거리를 둔 채로 서 있던 것과는 퍽 상반된 태도로 다가오는 놈을 바라봤다.

심장을 둘러싼 혈관들이 좁아지는 감각. 떨림과 불안은 그 혈관 하나가 수축하고 말고의 차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뛰는 맥박.

“재밌네. 나도 종종 끼워주라.”

그 차이를 깨닫게 만든 최혁준이 가볍게 조소하면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일부러 치고 간 어깨가 툭 하고 밀렸다. 코끝에 맴도는 냄새가 여러 개였다. 그중 내가 곱씹을 냄새의 주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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