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제정신이야?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그날 이후 매일 같은 꿈을 꾼다. 냉정하게 말하는 이지훈의 표정은 늘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내게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그 사실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지훈은 내가 고백했을 때조차 그런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고.
‘- - -’
알람 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옆 침대로부터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렸다. 2인실 기숙사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정현준은 아침잠이 많았다. 그래 봐야 10분 뒤에는 울상을 하고도 일어나서 외투를 껴입고 있을 것이다. 아침 구보를 위해 집합하기까지는 이제 이십 분이 남았다.
매일같이 꾸는 꿈 때문에 오늘도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눈을 떠야만 했던 나는 천장에서 눈을 떼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머리맡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든 순간 여러 개의 알림이 앞다투어 떴다.
[Faceb**k]
지선욱 님, 새 알람 21개 – 확인해주세요
[Faceb**k]
강영수 님이 회원님이 태그된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타임라인 검토에서…
밤새 강영수가 무슨 사진을 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별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게시글이 떴다.
언제 찍은 건지 기억도 안 나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강영수가 가운데에서 환히 웃고 있고, 양옆으로 이지훈과 내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어색한 표정의 나를 보다가 이지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 핸드폰을 귀에 댄 놈은 그 와중에도 화면을 향해 씩 웃고 있었다. 눈썹 하나를 들어 올린 모습이 퍽 능청스러워 보였다.
강영수 님이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김범수 형님이 부릅니다. 보고싶다...
-이지훈, 지선욱 과 함께
약 6시간 전 | 좋아요 | 댓글 달기
이현영님 외 72명이 좋아합니다.
이현영 WOW 좋아요 11
박진혁 ㅎㄷㄷ 좋아요 2
김민지 @강영수 대체 네가 왜 센터...? 아니, 그보다 어쩌다 친해진...? 대체 네가 왜 저기에...? 좋아요 20
└정현영 확실히 과대는 과대다 그 누구도 대놓고는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좋아요 18
└강영수 @김민지 민지야 카톡해; 여기서 나 패지 말고 좋아요 33
└임정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강영수 존나 웃겨 좋아요 3
└조민준 얘들아 영수 꼽주지 마라 이래 봬도 우리 영수 경영대 간판이다 좋아요 4
└한유리 @조민준 루머 고소할게요; 좋아요 8
└강영수 @조민준 아무리 봐도 여기서 니가 나 제일 꼽주는 거 같은데... 좋아요 18
└천기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유정 영수야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좋아요 3
└정현영 22 나 사실 영수를 늘 좋게 생각했다 좋아요 1
정민선 우와ㅋㅋㅋㅋ영수 친구들이야? 좋아요 1
└강영수 넹 제 베프들ㅋㅋ 누나 제가 젤 잘생겼죠 좋아요 3
└정민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영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민선 미안 나 거짓말 못햄ㅠㅠ
└강영수 ㅠ_ㅠ 좋아요 1
└정민선 ㅋㅋㅋㅋ오늘 몇 교시야? 시간 맞으면 밥 먹자 좋아요 1
└강영수 저 34요 누나ㅋㅋ 끝나고 연락할게요! 좋아요 1
댓글을 훑어봐도 강영수의 대학 동기들의 댓글들만 가득할 뿐 이지훈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본 메시지 애플리케이션 또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강영수
이번주도 면회 노노? 오후 7:37
이지훈
어 오후 11:39
표 끊지 마 오후 11:40
강영수
또 1학년만임? 존나 치사하다; 오후 11:42 1
군기를 누가 요새 그렇게까지 잡음? 오후 11:43 1
군대도 요새 그러면 잡혀간다는데 ㅅㅂ 오후 11:44 1
일단 알았응 오후 11:45 1
어젯밤 강영수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옆의 숫자가 1로 변했다. 이지훈은 지난 한 달간 그랬듯 이 메시지 또한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할 것이다. 사관학교의 군기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적이 있긴 하나, 이런 식으로 체감할지는 몰랐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훈련과 기합 때문인지 핸드폰을 잘 확인하지 못하는 건 일상인 데다가 가족이며 친구들이 면회를 가는 일마저도 아직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지훈 아버님조차 면회 한 번 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강영수는 그를 대신해 어떻게든 이지훈을 보겠다는 사명감까지 더해 매주 면회 일정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지훈은 매번 안 된다는 말만 보내왔고. 그마저도 급하게 보낸 것처럼 답은 읽지도 않고 사라졌다.
단체채팅방을 나온 나는 커서를 죽 내렸다. 한참 아래로 내리고서야 이지훈과의 개인 메시지 방을 발견했다.
이지훈
여기는 많이 춥진 않네 그래도
옷 잘 챙겨입고 다녀. 감기 걸리면 개고생이야. 오후 3:03
입소한 날 이지훈과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던 메시지이기도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메시지를 보내볼까. 이제 더는 춥지조차 않은 완연한 봄이 되었지만, 그래도 밤에는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많이 바쁘냐 영수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나도 너 걱정|
많이 바쁘냐 영수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영수가 너 많이 걱정하더라|
많이 걱정|
걱정|
몇 번을 고쳐 써도 자신 있게 보낼 수 있는 단어가 두 음절뿐이었다. 나는 지난 한 달간 그랬던 것처럼 끝내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못하고 핸드폰을 껐다.
‘- - -’
알람이 한 번 더 울렸다. 구보 시간까지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현준이 욕을 중얼대면서도 이불을 치우고 일어섰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로 외투를 껴입은 놈이 남은 10분이라도 다시 잠들 요량으로 눕는 걸 힐끔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경찰대생 4학년까지 합해서 정원이 총 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탓인지 분명 대학교인데도 가끔은 고등학교 생활을 이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침 구보 훈련부터 시작해서 오전 수업, 점심, 저녁 수업, 동아리 활동을 하며 늘 보는 사람들만 보는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그 배경에는 주변에 대학교는커녕 또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에 있다는 환경적 조건도 있을 터였다.
동기들의 사이가 끈끈해지기는 쉬웠지만, 그만큼 지루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입학 후 한 달이 지나자마자 다들 경쟁이라도 하듯 외출이며 외박이며 주말이라도 이곳을 탈출하려고 성화였다.
“야, 선욱. 토요일 미팅 자리 하나 비는데 갈래?”
이런 요청을 듣는 것도,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는 것도 지겹도록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에만 해도 계속해서 나를 꼬시려 들던 동기들도 이제는 그래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버린 것처럼 내가 한 번 싫다고 말하고 나면 두 번 세 번 권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음에 또 이런 건수가 생기면 넌지시 물어보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대학교 1학년, 공부만 해야 했던 학창 시절과 경계라도 짓듯 그때 하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하려 마음먹은 동기들은 노는 일에 반쯤은 눈이 돌아 있었다. 이성과 교제하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도 빠르게 그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듯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밥을 먹기 전 확인했던 핸드폰에 여전히 이지훈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주말을 보낼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야야. 치사하게 먼저 먹고 있냐. 새끼들이 의리가 없어, 하여간.”
의자를 빼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식판을 내려놓던 정현준이 나를 보고 웃었다.
“오, 선욱이. 많이 먹어.”
방금까지 혀를 쯧 차며 동기들에게 면박을 주던 것과 달리 나를 향해 건네는 인사가 퍽 곰살맞았다. 옆에 있던 동기 중 한 명이 의외라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보다 이내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너네 룸메랬지.”
가끔 있는 일이었다. 하고 있는 동아리만 세 개에 홍보단 일까지 하는 정현준과 나는 함께 다닐 일이 그다지 없었다. 시간표가 대부분 비슷한 과 특성상 같이 밥을 먹는 일은 종종 있어도 이렇게 마주 앉기까지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내 입에서 정현준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 또한 없었다. 그 때문인지 동기들은 정현준이 가끔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서야 우리가 룸메이트라는 사실을 깨닫는 듯했다.
“엉. 너네 그거 아냐? 선욱이 이 새끼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조차 잘생긴 거. 나 가끔은 그거 보러 일어나잖아.”
잠깐의 정적. 그러나 테이블은 곧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함께 앉아 있던 동기들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 빈 통을 정현준의 식판 쪽으로 던지거나 혹은 말을 한마디씩 얹으며 정현준의 농담을 받아쳤다.
“아- 이 새끼 또 여자 꼬시는 버릇 나오네. 너 그러다 나중에 게이한테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 나. 오해 제대로 받는다고.”
“저 새끼 저번 주 미팅 가서도 내내 저 지랄 했다니까. 그러니 내가 상대가 되냐?”
“그건 그 이유만이 아닌 것 같다. 정호야.”
“그래. 잘났다, 잘났어. 아주 경찰대 안에서 인기 순위 1, 2위 너네들이 다 해 드세요.”
야유를 듣고도 정현준은 씩 웃으며 시선을 내리기만 했다. 제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농담으로 어떤 대화가 파생되든 거기까지는 자기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것처럼. 언제든 제가 원할 때 대화를 끊을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같았다. 가장 늦게 테이블에 도착했으면서도, 식사의 속도를 높일 생각은커녕 핸드폰을 확인하며 음식을 여유롭게 씹는 놈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놈의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르는 이지훈이 그 위로 겹쳐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기숙사에 입소하던 날, 먼저 도착해 짐을 정리 중이던 정현준이 날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말을 걸었을 때부터 종종 느끼곤 하는 감정이었다.
‘너 나랑 같이 홍보단 들어갈래?’
‘…뭐?’
‘딱 보니까 너도 선배들한테 먼저 제안받게 생겼는데, 그냥 나랑 같이 지원하자. 룸메이트면 같이 움직이기도 쉽고 좋잖아.’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쑥 건넨 말은 뜬금없었다. 한 학번에 많아야 두 명이나 뽑을까 말까 한 홍보단쯤은 당연히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듯한 자신감의 원천은 같이 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모든 게 쉬운 애였다. 택배를 직접 시키는 것조차 귀찮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 전화해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말했고, 다음 날 아침이면 그 물건이 기숙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이유도 언제 일어나든 제시간 안에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전속 기사가 있어서였다. 평생 먹고 놀지 뭐 하러 힘든 일 하려고 하냐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굳이 경찰대까지 온 이유가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인 애.
“야, 현준. 미팅할래?”
“서울?”
“어. 무용과랑 삼 대 삼이고, 신촌에서 보기로 함. 너 간다고 하면 주찬이랑 나랑 이렇게 셋이야.”
“어디서?”
“신촌에서 토요일 4시.”
“그래, 그럼. 장소만 찍어줘. 나 집 들렀다가 가게.”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로 답하는 정현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댔다.
이지훈도 지금은 밥을 먹고 있겠지. 남자애들끼리 모여서 하는 대화는 거기서 거기일 테니 분명 이지훈한테도 누군가가 미팅을, 혹은 소개팅을 제안하겠지. 그럼 이지훈은 뭐라고 할까.
내가 그랬듯 거절하는 모습도, 방금 정현준이 그랬듯 수락하는 모습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떨지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게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국 식판을 들고 먼저 일어섰다.
“…나 먼저 간다.”
정현준이 핸드폰으로부터 눈만 올려 나와 눈을 맞췄다. 잠깐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던 놈은 그러나 곧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욱이 잘 가. 장난스럽고도 다정한 대답을 들으며 나는 뒤돌았다. 자세히 뜯어볼수록 정현준은 이지훈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쟤 앞에서 자주 그리고 쉽게 불편해졌다. 어딘가에서 이지훈이 꼭 누군가에게 저러고 있을 것 같아서.
* * *
강영수가 새벽같이 전화를 했다. 이지훈이 드디어 면회를 허락받은 주 주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던 놈의 목소리에서는 지친 기색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 귀한 얼굴을 드디어 본다며 꿍얼대면서도, 면회 음식으로 도넛을 사갈지 아니면 치킨을 사갈지 묻는 목소리가 붕붕 떠 있었다.
평소라면 적당한 타이밍에 끊을 전화를 굳이 중간중간 호응해가며 끝까지 들었다. 덕분에 강영수가 학교 앞에 도착해서 어떤 절차를 거쳐 면회실에 들어가는지까지도 알게 됐다. 이지훈의 아버님이 택배까지 부쳐가며 미리 챙겨주길 부탁했다던 식혜마저 챙긴 놈은 정문을 통과한 순간에는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으로는 먹거리를 잔뜩 들고 있으려니 힘든 모양이었다.
-욱아. 여기 근데 지인짜… 아무것도 없다. 이지독 엄청 심심하겠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인터넷으로 찾아본 적이 있던 이지훈네 학교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갔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꾸준히 면회를 가고 싶다고 피력하던 강영수와 달리 난 면회를 가고 싶다는 말조차 못 했었다. 그 덕분인지 한 명만 면회가 허락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강영수가 면회자로 꼽혔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근황을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면회실로 들어가던 순간까지도 강영수는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저 외에는 다 애인 보러 온 사람들이거나, 혹은 가족들이 왔다며 속삭대면서도 기죽지 않고 통화를 이어갔다. 곧 입장할 것 같다고 전하는 목소리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욱아, 근데 그 새끼 머리 좀 길었을까? 머리빨이냐고 존나 놀려야지. 그러고 나서는…
곧 볼 이지훈을 놀릴 생각으로 들떠서 말을 잇던 강영수가 일순간 말을 멈췄다. 완벽한 침묵이 낯설었다. 특히 그 침묵을 내는 게 강영수라는 점에서.
-…….
순간 통화가 끊긴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나는 통화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한참이 지나서야,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냐?
“강영수?”
-너 이 씨발… 면회 금지된 거 아니었지.
평소와 다르게 장난기 하나 없이 욕을 뱉어내는 놈은 낯설었다. 귀로 듣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과 면회실에 들어간 강영수니 당연히 저런 말을 뱉고 있는 대상도 이지훈일 거였다. 그런데 이지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언가를 참는 듯한 강영수의 가쁜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강영수. 무슨 일이야.”
반응이 이상한 걸 보니 무슨 일이 나긴 한 것 같은데 말해주지 않으니 뭔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왜 그래. 이지훈한테 무슨 일 있어? 뭔데?”
강영수를 거듭 부르면서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무슨 일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강영수는 내가 그렇게 재촉하는데도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겨우 들려온 말소리는 아주 작았다.
-…선욱아.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말하는 강영수의 목소리는 습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놈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내가 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강영수에게 다시 전화가 온 건 그날 밤이 되어서였다. 면회는 오후에 끝났으니, 이지훈과 헤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일 거였다. 그런데도 강영수는 입을 떼자마자 이지훈 이야기를 했다. 술이라도 먹었는지 혀가 잔뜩 꼬여 있었다.
-내가… 그 새끼… 그럴 줄 아라써어…. 그러니까, 내가… 그런 데 가면 안 된다고 부운명히… 말을 했단 말이지… 어? 야구 할 때도 그랬어… 씨발 새끼가… 그냥 어? 시키는 거 좀 하면 덧나냐? 꼭 지 마음에 안 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아… 뜯어고치려고….
“…….”
-그 지랄을 하니까 자꾸… 눈에 엇나가는 거 아냐. 어? 씨발… 얼굴이 그게… 어? 뭐야. 그게. 그 새끼 얼굴밖에 볼 게 없는데….
말끝이 죄다 뭉개졌다. 강영수는 반쯤은 울분에 차 있고, 반쯤은 그냥 울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식혜도 먹지 말라고 했어…. 넌 그거 먹을 자격도 없다고… 아저씨가 네 얼굴 보면 이걸 먹이고 싶긴 하겠냐고 하면서… 씨발, 내가 이거 기필코 어딘가에든 찌르고 만다… 어? 아무리 애가 좀 싸가지가 없어도 그렇지 얼굴을 그딴 식으로 만들어놔? 어?
트랙 끝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아 종일 강영수의 전화를 기다렸다. 사실 강영수의 전화를 기다렸다기보다는 강영수가 전해줄 이지훈의 안부를 기다렸다. 아까 강영수가 전화를 끊기 전에 했던 말에서 찾은 단서를 종합해보며 수도 없이 상상했다. 강영수가 이지훈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고 내게 당장 전하지 못한 소식의 가장 나쁜 버전이 무엇일지를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듣고 난 순간에야 깨닫는다. 정작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이지훈이 선배들한테 맞고 또 맞느라 다른 1학년들이 면회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에게는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겨우 좀 낫고 나서 강영수에게는 보여도 되겠다 생각한 모습조차 강영수가 보자마자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꼴이었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이지훈은 팔팔 뛰는 강영수에게 뭘 이런 걸 가지고 유난을 떠냐며 끝끝내 거기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의지를 비쳤다는 사실을.
강영수는 한참을 더 훌쩍대다가 조용해졌다. 혼자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지 그녀가 전화를 뺏어 들었다. 나는 염치없지만 강영수를 부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지난 한 달간 이지훈한테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내 만지작거리기만 한 핸드폰 위에서 손이 드디어 움직였다. 전화번호부에서 이지훈의 번호를 검색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도 들여다봐서 이미 번호를 외웠기 때문이었다.
이지훈이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쓰는 것만 봐도 가끔 얻어맞고 종종 핸드폰을 뺏기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이지훈은 그 짓을 몇 번 당하다 못해 그냥 핸드폰을 꺼버렸다고 했다. 그러니 이 통화는 연결되지 못한 순간 통화 목록에 묻힐 터다. 그리고 점차 아래로 내려가겠지.
그럼에도 전화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다행히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알림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영영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신호음이 길어졌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신호음이 늘어지다 못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나오며 전화가 끊기면 다시 걸었다. 다리가 저렸다. 강영수의 전화를 기다리며 여덟 시간을 내리 이곳에 한 자세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었다. 이지훈 목소리만 들으면 모든 게 씻은 듯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핸드폰 배터리가 10%만 남았다는 알림이 떴다. 나는 알림을 무시하고는 또 한 번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귀에 익다 못해 뇌가 외워버린 듯한 소리가 지치지도 않고 재생됐다.
그리고.
-…여보세요.
29번째 통화 시도 만에 이지훈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알고 있던 것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어.”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이지훈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에야 잊고 있던 몸의 감각이 하나둘 돌아왔다.
지난 한 달간 걱정했다. 이렇게 전화했을 때 이지훈이 왜 전화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까 봐. 그냥 보고 싶어서, 네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하면 마음을 들켜버리기라도 할까 봐. 근데 이지훈은 내가 그런 고민을 할 틈조차 안 줬다.
-너 왜 이 시간까지 안 자냐.
“…….”
-잠이 안 와?
마치 지난 한 달의 공백은 우리에게 아무런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놈의 말을 듣는데 그제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강영수가 한 말과는 정반대로, 힘든 상황을 견뎌내는 걸 하나도 티 내지 않으려 하는 놈의 모습조차.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영수가 그러는데.”
이지훈이 침묵했다. 마치 내가 어떤 말을 꺼낼지를 이미 아는 사람처럼. 그래서 난 이지훈이 예상하지 못할 이야기부터 꺼냈다.
“강릉에 동기 할머니가 하시는 민박집이 있대.”
-…….
“옆에는 숲도 있고. 바다가 바로 코앞이라더라.”
그게 이지훈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
“여름에 셋이 놀러 가자. 너 바쁜 거 끝나면… 그리고 영수 기말고사도 끝나면.”
한참을 침묵하던 이지훈은 그러자고 했다. 그 후에도 우리는 한참을 더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 청주 하늘에는 별이 떴지만 아산 하늘은 흐리기만 하다, 학교 앞 떡볶이집은 싱겁다, 태안의 단골 떡볶이집만은 못하다 등의 그 누구도 감정을 쏟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
통화를 받는 내내 나는 이지훈이 밟고 있는 나뭇가지 소리를 들었다. 걔가 이 전화를 받기 위해 뒷산으로 뛰어가야 했을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고집 세고 자존심 센 놈에게 그 이야기만은 먼저 꺼내지 않으려 하면서.
핸드폰 배터리가 1%가 남고, 손이 밤바람에 얼어붙었을 무렵엔 그렇게 때울 말마저 떨어졌다. 우리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어려운 침묵을 뚫고 용기를 낸 건 이지훈이었다.
-야, 나 괜찮아.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 사이로, 이지훈이 피식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넌 좀 보고 싶다.
전화가 뚝 끊겼다. 난 까맣게 물든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지훈이 끊은 건지, 핸드폰이 먼저 꺼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후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중간고사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건네받은 핸드폰을 복도로 나와서야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쌓여 있던 알림이 앞다투어 떴다. 그중 이지훈의 이름이 끼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손이 절로 움직였다. 클릭한 순간, SNS 게시글이 떴다.
강영수 ▶ 이지훈
지훈아 오늘 강한유도 관장님께서 내게 연락하셔서 넌 잘 지내냐고 물어보시더라
네가 자그마치 13년을 다닌 그곳 기억하지?
특전사 출신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이신 그분이 너한테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잖아^^ 살상 능력 빼고는 다 가르쳐주시지 않았나?ㅎㅎ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로부터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너의 내공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친구야. 강한 힘은 강한 인내에서 오니까, 맞지?
유도 3단 합기도 3단 검도 3단 도합 총 9단의 지훈아, 오늘도 파이팅!*^^*
28일 전 | 좋아요 | 댓글 달기
강영수가 이지훈의 담벼락에 남긴 글이었다. 면회를 가 이지훈의 다친 모습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에 쓰인 글은 누구를 겨냥한 글인지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미 한 달 전에 본 것인데 왜 또 알림이 떴는지 의아했는데, 한 번 더 살펴보고서야 그때만 해도 없었던 이지훈의 댓글이 눈에 보였다.
이지훈 @강영수 ?
강영수 @이지훈 뒷북 머임? 한 달 전에 쓴 글인데;; 어쨌든 형이 다 생각이 있어서 썼었던 글이니까 좋아요나 누르쇼
이지훈 @강영수 내 담벼락에 오줌 갈기지 마
강영수 @이지훈 씨밸럼이 진짜 도와주려는데도 지랄이야
이지훈 @강영수 도와주려는 건 모르겠고 일단 수치스럽다
남이 다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가는 놈들의 댓글을 보자니 웃음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벌써 시간이 한 달이나 흘렀다. 핸드폰조차 잘 확인하지 못하던 이지훈은 이제 가끔 SNS에 접속해 강영수의 글에 시비를 걸거나 뜬금없는 시간대에 셋의 단체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걸 두고 강영수는 내게 이지훈이 거기서도 성격을 죽이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생 시절 야구를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맞고 돌아와서 집이 왈칵 뒤집어진 적도 있었는데, 야구를 그만두라고 성화인 부모님 앞에서도 이지훈은 끝끝내 그만둔다는 소리를 안 하고 버텼다고. 멍이 점차 옅어지고 나중엔 맞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질 무렵에 이지훈은 전국대회에서 상을 타왔다. 그렇게 자신을 패고 괴롭힌 선배들은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유일하게 이지훈만이 트로피를 들고 귀가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이지훈을 건드리지 못했다고 했다. 강영수는 이번 일도 그러한 과정일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름길을 훤히 두고 돌아가더라도, 어쨌든 이지훈은 제가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가긴 했으니까. 그것도 지름길을 택하며 자신을 비웃었던 사람들보다 더 빨리.
그러니까 지금 이지훈의 얼굴에서 멍이 옅어지는 것도 그때와 같은 것 아니겠냐며. 이지훈이 전이라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받아쳤을 선배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든, 그냥 참는 것이든, 어찌 됐든 나름대로는 안식처나 혹은 돌파구라도 찾았으니 버티는 거겠지 여기면서.
‘내 동기의 친구의 누나가 공사 3학년이라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이지훈 알더라? 들어보니까 3학년 선배 새끼가 신고식이라도 하듯 튀는 애들 잡고 괴롭힌 모양인데, 이지훈이 그중 하나였나 봐. 기를 죽이려고 한 행위인데 기가 죽기는커녕 곧이곧대로 들이박으니까 선배란 새끼들도 빡 돈 거고. 이지훈도 위계질서 좆 까고 들이박긴 했으니까 어디에 찌르지도 못하고. 선배들은 그거 알아서 더 심하게 괴롭히고. 근데 요새는 그냥 조용하대. 찔러도 이전만큼 반응이 안 오니까 괴롭히던 새끼들도 덜한 눈치고.’
들은 이야기가 있다며 전해주는 강영수는 그래도 안심한 눈치였다. 나는 어제 이지훈의 타임라인에 떴던 하나의 게시글을 떠올렸다. 이지훈의 동기가 올린 것 같은 단체 사진 안에 있는 이지훈의 얼굴은 말끔했다. 강영수가 다시 말하기조차 꺼리는 그러한 상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번 주에는 이지훈 아버님도 면회를 다녀왔다고 들었다. 강영수와 나는 이지훈이 우리 모두에게 면회 금지인 척해야만 했던 이유를 굳이 아버님께 전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서로 말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기도 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 상단에 알림이 하나 더 떴다.
[Faceb**k]
이지훈 님이 게시물에서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알림을 굳이 클릭하지 않고, 한 번 더 창을 새로고침 하듯 커서를 아래로 끌었다. 아까만 해도 없었던 댓글이 하나 늘어 있었다.
이지훈 @강영수 도와주려는 건 모르겠고 일단 수치스럽다
이지훈 @지선욱 형이 강영수 관리 잘하랬지
댓글 옆에는 34초라고 적혀 있었다. 이지훈이 이 댓글을 단 지 34초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지훈과 같은 시간에 SNS에 접속 중이라니 어딘가 낯설었다. 비록 며칠에 한 번 답장이 오던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이지훈은 아침이나 늦은 저녁이 아니면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과 조금 더 말을 해 봐야 하나 생각부터 들 정도로.
고민해 봤지만 댓글을 달 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지훈 댓글 옆에 있는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놈이 오랜만에 SNS로 장난을 걸기까지 하는데, 뭐라도 봤다는 흔적은 남겨야 할 것 같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탓인지 이런 단체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려면 거창한 핑계가 필요했다. 주말 외박이나 외출까지 포기하고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겠다는데 더 빼기도 곤란했다. 방에 붙어 있는 시간이 더 드문 정현준마저도 저녁 술자리에 가려는 생각인지 내내 방에 있다가 시간이 되자 같이 가길 종용했다. 열린 문 사이로 각 방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말하는 동기들의 소리가 들렸다. 난 한숨을 쉬면서도 더 버티는 것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앞의 꽤 넓은 고깃집 안이 경찰대학교 1학년생들로 꽉 찼다. 동기생회장이 친한 애들끼리 앉지 말라며 자리를 굳이 한 번 휘젓기까지 했지만, 사실 이미 태반이 훈련이든 수업이든 한 번씩은 마주친 인물들이기에 별다른 어색함은 없었다.
“내가 구울까?”
“아냐. 됐어.”
건너편에 앉은 동기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집게를 고쳐 쥐었다. 고깃집에 들어온 지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사방에서 취한 동기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떠드는 통에 시끄러웠다. 아까 옆 테이블에서는 사이다가 든 잔을 불판에 쏟아, 수습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는 사람이 굽는 게 나았다. 이 테이블에서는 그게 나였다.
“태그 다 한 거 맞아?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보자.”
“90명… 98명….”
“아, 솔직히 100명을 하나하나 어떻게 다 태그하냐. 그냥 해. 빠진 애들 있으면 나중에 추가하고.”
바로 옆 테이블에서 여자 동기들 몇몇이 머리를 모으고 떠들었다. 아까 들어오자마자 찍은 단체 사진을 SNS에도 올리려는 모양이었다. 취기로 볼을 붉힌 채로 화면을 뚫어질 듯 보는 그들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옮기려는지 이쪽으로 걸어오던 정현준과 눈이 마주쳤다. 정현준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오, 선욱이. 오늘 술 좀 먹었나 봐?”
내 볼을 훑는 시선을 느끼고는 손을 들었다. 손등을 대어본 볼에서는 딱히 뜨거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방금까지 뜨거운 집게를 잡고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사방에서 음료를 쏟고 잠들고 난리인지라 그런 일 없이 고기까지 굽고 있는 내가 딱히 취했다는 생각은 못 해 봤는데, 남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나 싶었다. 머쓱하게 손을 내린 나를 본 정현준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니까. 거기 옆에 자리 있어?”
친근하게 물어오는 놈이 비어 있는 내 옆자리를 눈짓했다.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남자친구와 통화를 한다고 자리를 비운 동기가 생각나서였다. 뭐가 더 궁금한지 가만히 서서 쳐다보길래 끝내 동기의 이름을 뱉었다.
“지민이.”
“아, 강지민 자리라고?”
“어.”
“아쉽네. 뭐, 이따 만나자. 어차피 술자리 돌고 도니까.”
미련이라곤 없는 대답을 남긴 채로 다른 테이블로 가려던 정현준이 자리에 멈췄다. 그러더니 옆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는 여자애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핸드폰 위를 툭툭 치면서.
“어어? 아 뭐야!”
“정윤이랑 상준이 없다, 얘들아.”
“어… 맞네? 와, 너 어떻게 알았냐? 대박.”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저를 돌아보는 세 명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 정현준이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던 놈이 곧 뒤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에 자연스레 끼는 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너 정현준이랑 룸메랬나?”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지민이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무도 훈련 시에 여러 번 파트너로 짝지어진 적이 있어서 그나마 이곳에서는 가장 편한 이이기도 했다. 나처럼 정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묘했다. 곧 내게로 고개가 돌아왔다. 궁금한 게 있는 듯한 눈동자를 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쟤 여자친구 있어?”
이어온 질문이 뜬금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과에서 정현준이 여자친구가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도 있는 동기 몇 명이 정현준에게 고백했다가 어색한 사이가 된 건 공공연한 가십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동기들의 고백을 거절한 정현준이 그러한 사실을 티 내지 않듯 오히려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거나 장난을 건다는 사실이 그 호기심들에 불을 더 붙이는 것 같기도 했고.
혹시 관심이 있어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생각했지만, 지민이는 방금까지도 남자친구와 통화를 한다고 자리를 비웠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닌다는 동갑내기 남자친구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었다. 마주친 눈빛에서도 조바심을 내는 기색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지난주 주말만 해도 미팅을 간다며 아침부터 방을 나서던 정현준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 전했다.
“딱히 들은 적은 없는데.”
“그래?”
고개를 갸웃한 지민이가 주위를 돌아봤다. 우리에게 집중한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내놓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나 사실 저번 주 주말에 남자친구랑 신촌에서 데이트했거든. 거리에서 마주친 커플 한 쌍이 팔짱 끼고 지나가는데, 아무리 봐도 남자 쪽이 정현준 같은 거야. 처음엔 미팅이라도 한 걸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미팅이나 소개팅이면 첫 만남인데 그렇게 팔짱을 끼고 갈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잠깐 본 거긴 해도 되게 친해 보였거든. 처음 만난 사람 느낌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생각에 잠긴 낯으로 말을 잇던 지민이의 눈이 어느새 다시 정현준의 뒷모습에 박혀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듯 이마를 찌푸리던 지민이는 그러나 내 표정을 확인한 순간 어색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진 것을 의식하기라도 하듯이 일부러 털털하게 말을 끝맺기도 했다.
“룸메이트인 네가 모르는 거면 없는 거 맞겠지. 내가 잘못 봤나 봐.”
“…무슨 옷 입고 있었는데?”
“어? 그날?”
“응.”
“까만 반팔 티였나 그랬을걸. 사실 너무 흔한 차림이라 더 헷갈렸던 것도 있어.”
나를 슬쩍 본 지민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겠지, 뭐. 괜한 거 물었다, 미안. 잊어버려. 와, 근데 애들 빨리 달린다 싶더니 그새 진짜 많이 죽었네. 이거 기숙사까지 어떻게 옮기냐.”
말을 돌리는 지민이는 이 문제에 대해 더 파고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정현준은 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동기들과도 두루두루 친했고, 교수님들도 대놓고 아낄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는 것치고 그다지 뒷이야기가 돌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떠들 수 없는 대상이란 뜻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파고들어 봤자 걔의 명보다는 암에 가까운 일이 될 게 뻔했기에.
나는 지민이가 한참 전에 시선을 돌린 정현준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며칠 전 빨래 망 사이로 보았던 까만 반팔 티의 잔상을 애써 지워내면서.
* * *
“…미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하기엔 어색하지 않은 사이래도 이렇게 둘이 나와서 걸을 정도의 친분은 없다는 걸 눈치채고 거절했어야 옳았던 걸까. 평소 새하얬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비틀대길래 그냥 편의점까지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부른 건 줄 알았다.
고백하는 내내 눈을 들지 못하던 그 애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을 내놓았다.
“아….”
민망한 표정으로 눈을 거듭 깜빡이는 그 애의 손에는 손도 대지 못한 쭈쭈바가 들려 있었다. 아까 편의점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도 만지작대고만 있길래 내가 대신해서 포장을 까주기까지 한 것이었다. 맨손으로는 잡지 못할 정도로 차갑던 쭈쭈바 겉면은 이제 척 보기에도 녹아 있었다. 아마도 입에는 들어갈 일이 없을 듯한 그 물체를 만지며, 그녀가 기어들어 갈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런 질문에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매번 들은 순간 말문이 막히기부터 했다. 내가 한 번도 이 마음을 뱉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방금 내게 용기를 내 고백한 사람을 두고 이지훈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그 애처럼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응.”
이 답변으로 그 애가 가지게 될 미련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길 바라며.
“그렇구나….”
잠깐 말을 끌던 동기가 고개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것처럼 울고 있진 않았다.
“우리 학교는 아니지?”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대도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진 않아서일까. 어딘가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야.”
고개를 주억댄 미연이가 먼저 떠났다. 나 먼저 들어갈게. 넌 좀 있다가 들어와. 자리를 뜨기 전 그녀가 부탁하듯 남긴 말을 떠올린 나는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었다. 고깃집으로부터 두 블록이 떨어져 있는, 필로티형으로 지어진 원룸의 지하 주차장은 어둡고도 조용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움직였다. 고깃집 바로 옆 담벼락을 지나치던 찰나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어? 선욱이.”
거의 동시에 나를 알아본 정현준이 웃었다. 놈은 드물게도 혼자인 채였다.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려 흔드는 중에도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뿜고 있는 놈의 흐트러진 머리와 상기된 볼을 응시했다. 늘 웃고는 다녀도 나름대로 각이 있는 놈인데, 취한 탓인지 분위기가 느슨했다. 눈이 마주친 내게 여자애들한테나 그러듯 실실 웃는 것만 봐도 그랬다.
“같이 피울래?”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뻔히 아는 놈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평소처럼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마음을 바꿔 담벼락 안으로 발을 들이민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내가 늦게 들어가면 늦게 들어갈수록 미연이에겐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정현준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여기.”
내 쪽으로 입을 벌린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뽑아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가벼운 무게를 느낀 순간, 정현준이 라이터를 내밀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건 알아도, 그게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는 뜻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막상 이렇게 눈앞에 드니 잠깐 망설여졌지만 또 못 할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거창한 생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다. 굳이 피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길거리에서 보았던 흡연자들의 모습을 흉내 내듯 입술을 이용해 가볍게 물고는 라이터를 담배 끝에 가져다 댔다. 탁-탁- 생각보다는 불이 잘 안 붙었다. 허공으로 연기를 뿜어내던 정현준이 나를 흘긋 보는 게 느껴졌다.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라이터의 부싯돌에 조금 더 힘을 줬다. 불이 타오르듯 켜진 순간에는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숨을 들이쉰 순간 코끝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매캐한 감각이 느껴졌다. 코와 입 사이로 밀려 들어온 낯선 공기를 잠시 느끼다 한꺼번에 모아 뱉었다. 입술 사이로 흐르듯이 빠져나간 하얀 연기는 정현준이 허공으로 뱉고 있는 것과도 비슷했다. 별로 어렵지 않게 해냈다고 생각했다. 정현준이 피우는 담배는 생각보다 독했다. 그렇지만 물고 있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어 번 더 연기를 뱉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정현준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담배를 문 채로 쪼그려 앉은 놈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익숙한 SNS 로고가 보였다. 핸드폰 화면 위의 손이 바쁘게 오가는 중에도 정현준의 핸드폰은 새로운 알림으로 웅웅 울리고 있었다.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담배를 입에서 완전히 뺐다.
“너 여자친구 있어?”
손이 우뚝 멈췄다. 정현준이 고개를 뒤로 아예 젖힌 채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걔의 눈 대신 타들어 가고 있는 담배 끝에 시선을 뒀다. 정현준도 고개를 다시 떨궜다. 팔랑대듯 가벼운 말투로 대답을 내놓으면서.
“많지? 일단 우리 과에만 서른 명이고.”
1학년 경찰대생 중 여자 학생이 총 서른 명이었다. 여자친구라는 말을 여자인 친구로 제멋대로 환산해 답한 놈의 답변은 내가 기대한 게 아니었다. 한 번 더 물으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나.
고민하는 사이 정현준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핸드폰을 내려다보기 바쁘던 놈이 별안간 나를 불렀다.
“선욱아. 내가 너랑 같이 방을 쓰며 느낀 건데… 넌 여자애들이 진짜 좋아할 만한 스타일인 것 같아.”
“…….”
“내가 여동생이 있다면 널 소개해줬을 텐데, 아쉽게도 동생이 없어 가지구.”
아쉽다는 듯 중얼댄 정현준이 짧아진 담배를 아래로 뱉었다. 읏차- 소리를 내며 일어선 놈과 눈을 맞춘 순간, 주머니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정현준의 핸드폰이 아닌 내 핸드폰이 울린 건 골목에 들어선 뒤 처음이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물지는 않아도 계속 들고는 있던 담배가 툭 아래로 떨어졌다. 당황한 상태로도 일단 아래에 떨어진 담배를 신발 밑창으로 비벼 껐다. 그 순간마저도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지훈]
010-xxxx-xxxx
술기운에 착각했나 의심부터 들었지만, 다시 확인해 봐도 화면에 떠 있는 건 이지훈의 번호가 맞았다. 이지훈 아버님이 면회 갔을 때 전화를 걸어오셔서 잠깐 통화하긴 했지만, 이렇게 이지훈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대학 입학 이후 처음이었다.
정현준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던 것만 아니면 바로 받았을 텐데. 사실 이렇게 망설이는 중에도 전화가 끊길까 봐 초조했다. 그게 느껴졌는지 정현준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흘깃댔다.
“전화야? 받아도 되는데.”
“아….”
잠깐 망설였지만 생각해보니 때를 가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정현준과의 대화와 이지훈과의 통화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미안.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
급히 뱉으며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처음 봤을 정현준은 놀란 표정을 짓길 잠시, 곧 몸을 돌렸다. 아마 자리를 피해주려는 듯했다.
정현준이 담벼락 옆을 걸어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음량 조절 버튼을 거듭 눌렀다. 이지훈의 목소리를 조금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목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꼭 쥐었다. 그러고서야 말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 무슨 일이야.”
분명 통화 창으로 화면이 바뀌는 걸 봤는데 이지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전화가 끊긴 건 아닐 텐데 의아했다. 혹시나 해서 음량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더는 소리를 올릴 수 없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나서야 뻘쭘하게 손가락을 멈췄다.
“…이지훈?”
한 번 이지훈을 부른 순간, 정현준이 담벼락 끝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욱! 이따 내 테이블로 와! 방에 같이 가게.”
담벼락 끝에 있는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하려는지 목소리가 꽤 컸다. 순간 놀라서 송화구부터 막았던 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현준이 사라지고 나서야 골목길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더는 통화를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나는 송화구에서 손을 뗐다.
내내 조용하던 건너편에서 처음으로 말소리가 건너왔다.
-누구랑 방을 같이 가려고, 이 밤에?
소리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은 탓인지, 이지훈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꼭 농담할 때와 같은 말투인데, 이상하게 웃음기가 없는 음성을 듣던 나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비교적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안 먹은 이지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게 내 착각이라는 걸 알겠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두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는 것만도 그랬다.
송화구를 막았어도, 정현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끝내 이지훈한테까지 닿은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아… 룸메이트야. 같은 방이니까 같이 가자고, 그 말이지 뭐.”
이지훈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아아, 현준인가 뭔가 걔?
내가 정현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멈칫한 찰나에 이지훈이 이어 말했다.
-강영수가 말해줬어.
이번엔 내 입에서 성의 없는 감탄사가 터졌다.
“아아… 어.”
강영수라면 충분히 친구의 룸메이트 이름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도 남았다.
-근데 왜 둘만 있어?
“어?”
-술자리 아니야? 너 뒤로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안을 굳이 살피지 않는 한 모르고 지나칠 법한 좁고 깊은 골목 안에는 나 외의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담벼락 하나를 두고 고깃집이 있는 터라 사람들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긴 하는데, 통화인데도 공간이 다르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소리에 예민한 놈이니 새롭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가끔은 강영수가 어디서 통화하는지 정도야 쉽게 알아채곤 했다. 그러기도 전에 제가 뭘 하는지 술술 부는 놈 때문에 굳이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뿐.
“잠깐 나왔어. 고깃집 옆 골목이야. 나 혼자만 서 있고.”
-왜 나갔어. 취했냐?
“취하긴 뭘 취해. 그냥….”
절로 입이 닫혔다. 고깃집을 빠져나온 이유가 기억이 나서였다. 동기한테 고백을 받았고, 너를 생각하며 찼다는 이야기를 이지훈에게 말할 순 없었다. 잠깐 말을 고르던 나는 바닥에 운동화 끝을 쿡쿡 찍었다.
“공기가 답답해서 나왔어.”
등을 기대고 있던 걸 떼고 고깃집 쪽을 돌아봤다. 아직도 안에 있으려나. 어색하게 굴지 않으려 둘 다 노력하겠지만, 들어가는 순간 눈만 마주쳐도 어색함을 느끼게 되겠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제는 인사조차 마음 편히 하기 힘든 세 명의 동기가 더 떠오른 순간에는 한숨이 흘렀다. 5월 초였다. 더는 허공에 입김을 뱉는다 해서 하얀 공기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까 담배를 피울 때 그냥 뱉기만 해도 하얀 숨이 새어 나가던 걸 생각했다. 무언가를 물고 또 숨을 뱉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바로 보이는 게 있다니.
고백하지 않는 이상 결과조차 알 수 없는 짝사랑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걸까. 답답한 상황에 뭐라도 결과가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서.
아래에 널브러진 담배꽁초들을 보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이지훈은 어떤 담배를 피웠을까. 놈이 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뱉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이지훈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스무 살이 된 날, 편의점에 달려간 강영수가 패기 넘치게 담배를 구입할 때마저도 이지훈은 옆에서 로또나 사고 있었으니.
잠깐 귓불을 만지며 생각하던 나는 이내 발끝으로 바닥을 차던 행위를 멈췄다. 생각해보니 이런 소리까지도 이지훈한테는 들릴 것 같았다. 발을 애써 가만히 둔 채로 말을 돌렸다.
“야.”
-어.
“나 방금 처음으로 담배 피워 봤는데….”
-…담배?
되묻는 놈은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그려졌다.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면서, 더 말해 보라는 듯 기다리겠지. 나는 이지훈이 앞에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생각보다 독하더라.”
-…….
“근데 왜 피우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까 그 룸메야?
“어?”
-너한테 담배 가르친 거.
공감이 돌아오길 기대하고 한 말이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갑자기 정현준 이야기는 왜 하지. 아까 정현준이 고개를 들이밀었던 골목 끝을 바라보던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깐 침묵했다. 따지자면 담배랑 라이터를 주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걸 어떻게 물라든지 가르침을 받은 적은 딱히 없던 것 같아서. 아무래도 가르친 건 아닌 것 같은데? 확신이 서서 부정하려던 순간, 이지훈이 선수 치듯 말했다.
-이래서 애를 집에서 멀리 보내면 안 된다고 하는 거구나. 일부러 안 가르친 것까지 다 배워오네.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 중간중간에 피식대던 놈은 허무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한테, 아빠가 아들에게 한탄이라도 하듯이.
-지선욱 못 본 새 양아치 다 됐네. 새벽까지 술을 먹질 않나, 담배도 피우고. 한 달 뒤에 만날 때는 오토바이 타고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도 막 맥주로 샛노랗게 물들여서는. 강영수를 어깨에 올리고, 나를 뒤에 매단 채로 동해안 고속도로를 막 달리겠지. 귀에 건 열 개의 피어싱이 바람에 휘날리다가 내 뺨을 철썩철썩 때리고.
듣다 보니 황당했다. 겨우 담배 한 번 피운 거 가지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인상을 찌푸린 내가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이지훈의 터무니없는 상상이 섞인 한숨 메들리는 계속됐다. 할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고한대도 이렇게까지 잔소리를 듣지는 않을 텐데.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이지훈이 과장해서 내던 한숨 소리를 집어치우고는 웃었다. 드디어 장난을 끝내주려는 것처럼.
“하나도 안 웃겼거든.”
-솔직히 맥주로 물들이는 부분은 좀 웃겼잖아. 그건 인정하자.
“비웃음이랑 웃음은 다른 거라고.”
-동해안 고속도로는?
자신이 뱉은 말들을 하나씩 꺼내며 키득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까 잔소리 메들리에 잠깐 내려두었던 음량을 슬그머니 다시 올렸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이지훈은 저렇게 웃는 일조차 드물어져서, 들을 수 있을 때 많이 들어두어야만 했다. 한참 더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발열된 핸드폰이 뜨거워지고, 담벼락 뒤 고깃집에서 한꺼번에 우르르 나온 듯한 동기들로부터 수많은 말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야야. 없어진 애들 없지?”
“없어, 없어. 좀 가자. 이러다가 여기서 밤새우겠다. 어우.”
“화장실 확인했고. 뒤뜰 확인했고. 또 어디 있을 만한 곳 있나?”
그나마 정신이 남아 취한 동기들을 챙기려는 것 같은 놈들의 혀도 죄다 꼬여 있었다. 음량 크기를 잘못 조절한 라디오처럼 증폭된 소음은 바로 뒤 담벼락에서도 생생히 들렸다. 나는 송화구를 막고 있던 손을 슬며시 뗐다.
-들어가야 하지?
그래 봐야 소용도 없는 것 같지만. 귀가 대체 얼마나 밝은 건지. 감탄하면서도 난 등을 곧추세웠다. 화장실과 뒤뜰까지 뒤지며 동기들을 알뜰히 챙기는 애들이 내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얼마나 걸릴지를 생각해보며.
“어. 가야지.”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새벽 1시였다. 아까 편의점에서 확인한 시각이 오후 11시 30분 무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 시간이 흐른 거였다. 고백도 거절했고, 정현준한테 처음으로 사적인 질문도 해 봤고, 담배까지 처음 피워 봤는데 이지훈과 통화를 했던 것 말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볼은 뜨거웠다. 이지훈과 통화를 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끊기가 너무 싫었다. 언제 또 통화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누가 봐도 통화를 끊을 타이밍인데도 모른 척 핸드폰을 들고만 있었다. 먼저 끊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던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야.
“아, 왜 또.”
-나쁜 친구랑 놀지 마. 특히 네 룸메 같은 애.
아까 정현준 이름을 마뜩잖게 부를 때부터 눈치챘지만 이지훈은 아무래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내 룸메이트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담배를 준 게 그렇게 큰 죄인가.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사는 동기들에게는 호평을 받는 놈을 두고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이지훈이 신기하면서도 조금 웃겼다.
“걔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나빠.
“대체 뭐가.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볼 필요도 없어. 초키포키 좋아하던 애가 담배 왜 피우는지 알겠다고 말하게 한 것만으로도 개호로잡놈이야.
듣다 보니 정현준이 들으면 억울할 정도의 욕이었다. 거기다 초키포키가 왜 나와, 여기서. 학교 매점에서나 먹던 아이스크림의 이름을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애가 고백하는 내내 꼭 붙잡고 있던 말랑말랑한 쭈쭈바가 그거였던 것도 같아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이지훈이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이전엔 무의식중에 집었던 거라면 앞으로는 그것만 먹게 되지 않을까. 망설이면서도 말을 뱉었다.
“너도.”
-…뭐, 인마.
“나쁜 놈들한테 당하지 말고. 한 달 뒤에 볼 때까지 밥 잘 먹고, 잘 자고. 그러고 있어.”
-…….
“나도 담배 안 피울게.”
부끄러움을 참고 뱉었다. 술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이었다. 와글와글 시끄럽던 담벼락 뒤가 조용했다. 동기들이 나를 찾지 않고 고깃집을 떠났다는 신호였다. 메시지 알림을 전부 무음으로 바꿔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를 찾는 메시지들이 계속해서 떴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지훈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담벼락과 가로등 사이의 빈틈에 몸을 숙여서 앉기까지 했으니까.
내가 겨우 이 말을 하기 위해 이러고 있다는 걸 모를 이지훈이 가볍게 받아쳤다.
-나 괜찮다니까.
꼭 그날과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그렇게 씩씩하게 말하는 놈이 조금 더 보고 싶어졌다는 것뿐.
“알아.”
이지훈은 더는 나뭇가지를 밟으며 나와 통화하지 않는다. 숨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메시지를 보내면 하루 안에는 답장이 온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놈이 그렇게 할 수 있기까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놈이 잘 버텨내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안식처나 돌파구를 찾았다고 지레짐작하며 기뻐하기 전에, 그런 걸 찾을 필요가 아예 없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걸 대신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나는 그냥 내가 이 자리에 늘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밥은 잘 챙겨 먹을지, 잠은 잘 자고 있을지, 나쁜 사람은 만나지 않을지를 걱정하는 사람이 네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라며.
“그냥 내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너처럼.”
한참을 침묵하던 이지훈이 졌다는 듯 웃었다.
-…알았어, 인마. 얼른 들어가. 너무 늦었다.
동기들에게서 온 메시지 말고도 쌓인 메시지들이 꽤 많았다. 당장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대강 눈으로 넘기며 손가락을 멈췄다. 강영수, 이지훈과 셋이 있는 단체채팅방에도 새로운 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강영수
야야야야 6월 19일 토일 예약한다 그럼? 오후 6:00
9시까지 대답 없으면 걍 한다? 오후 6:01
오후 9:01
민박 예약 완료^_^V 오후 9:03
6월 19일?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게 느껴지는 날짜였다. 왜인지 생각하려다 말고 아래의 메시지들에 시선을 뺏겼다.
이지훈
어 오후 10:58
그날 나 ㄱㅊ 오후 10:59
강영수
당연히 그렇겠져; 일부러 바쁜 님 스케줄 맞춰서 날을 골랐으니까여;; 오후 11:01
이 정도면 산타할아버지가 올 한 해 착한 친구 짓 많이 했다고 선물을 주시지 않을까 얘들아? 핀란드에 삐삐 좀 쳐주랑ㅎ 오후 11:02
강영수의 메시지 이후 답장은 없었다. 아마 6월 19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아까 일자를 듣자마자 익숙함부터 느꼈던 이유를 생각해보던 나는 메시지 방을 나왔다. 뭐, 생각날 때 되면 생각나겠지. 어차피 일이 있대도 이지훈을 못 볼 정도의 큰일은 아닐 거였다. 이번 학기에 외출조차 몇 번 하지 못한 이지훈의 첫 외박이었다. 어떻게든 우리가 맞춰야 했다.
바로 위에 있는 메시지에 시선이 갔다. 정현준이 보낸 거였다.
정현준
서눅 어디야? 오전 12:03
동기들이 찾지 못하게 숨을 때조차도 딱히 별생각은 안 들었는데, 기숙사에 다다르고 나서야 정현준이 방에 같이 가자며 거듭 말했던 게 떠올랐다.
서눅은 오타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 좀 취한 것처럼 보였었지… 부축이라도 해달라고 미리 말했던 건가? 미안해서 계단을 오르는 속도를 높였다.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등 뒤로 문을 조심히 닫으며 정현준의 침대를 확인했다. 인기척을 죽인 보람이 없게 정현준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대신 닫힌 화장실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현준은 화장실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취해서 토하고 있는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화장실을 확인해보려던 행동은 예상하지 못한 말소리에 멈췄다.
“선화? 계속 만나고 있지.”
정현준은 토하고 있지도, 몸을 못 가누고 쓰러져 있지도 않았다. 대신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목소리만 들리긴 해도, 놈이 생각보다 멀쩡한 상태인 건 알 수 있었다. 타인의 통화 소리를 엿들을 생각은 없기에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200일은 무슨, 저번 주가 일주년인가 그랬어. 나 그것 때문에 그 주엔 미팅도 못 했잖아. 아, 몰라. 원래 안 그러더니 요새는 어디서 뭐 주워듣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 뭐 하는지 궁금해하고 물어봐. 저번 주는 신촌을 가자고 하더라니까? 뭐래. 지나가다 봤을 리가 있냐? 일부러 걔 학교에서 존나 먼 신촌에서만 하는데. 야. 누가 미팅을 진지하게 하냐. 그냥 재미지. 가는 멤버도 매번 다르니까.”
고개를 돌렸다. 빨래 망은 며칠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의자에 걸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꽤나 선명히 보이는 까만 티셔츠를 본 순간 피식 웃음이 흘렀다. 정현준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떠들었다. 동기며, 선배며, 사귄 지 1년 된 여자친구까지 걔의 허세 섞인 대화에서 죄다 해체되고 또 뭉개졌다. 조금 더 듣던 나는 정현준의 입에서 내 이야기가 나온 순간 더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내가 동기들 단체채팅방에 잠깐 일이 있어 사라졌던 거며 방에 잘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6월 19일이란 날짜가 왜 익숙했는지 깨닫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현준은 친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문을 열었다.
“…어? 언제 왔어?”
날 발견한 놈은 당황한 표정부터 지었다. 나는 뭐라 대답하는 것 대신 책상에 올려두었던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는 화장실로 다가섰다. 정현준이 내 눈치를 살폈다. 언제 도착한 건지 말해주지 않는 내가 자신이 친구와 통화하던 내용을 일부분 들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막 깨달은 것처럼. 취해서 저런 대화를 하는 걸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이런 눈치까지 볼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는 걸 보니 굳이 말을 보탤 필요도 없어 보였다.
“씻으려고?”
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며 묻는 놈을 보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야.”
“…어?”
“화장실 벽 얇아.”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의아하게 쳐다보는 정현준과 눈을 맞춘 순간, 이지훈이 생각났다. 정현준이 이지훈과 닮은 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아까 이지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다 들린다고. 네가 들려주고 싶지 않은 말까지.”
여러모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놈이었다. 얼빠진 표정의 정현준을 내버려 두고 문을 쾅 닫았다. 6월 19일, 1학년이면 무조건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훈련을 빠지고 강릉에 가면 이지훈에게 해줄 이야기 하나가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 * *
“선우우우우우욱씨이이이이이이이이.”
지난달에 아산까지 직접 찾아와 날 만나고 가기까지 했으면서, 강영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양팔을 마구 흔들며 달려온 놈이 버스에서 막 내린 내 허리를 마구잡이로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냈다. 보고 싶었다, 오늘을 매일같이 기다렸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내 얼굴이 떠돌아다녔다 등등. 옆에서 부둥켜안느라 정신이 없던 커플마저 이상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봤다. 강영수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을 줄줄이 쏟아내는 중이었다. 이미 통화로도 말한 정보를 한 번 더 반복하는 놈에게 아무리 이미 들은 이야기임을 어필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냥 포기하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12시 50분이었다. 각자의 대학교 때문에 서울, 청주, 아산에 흩어져 지내고 있는 우리는 아예 민박집이 있는 강릉의 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1시에 만나기로 했고 지금은 12시 50분이니 이지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대도 이해가 가능했다. 어깨에 힘을 풀고 강영수를 내버려 뒀다. 어차피 10분 후 이지훈이 오면 강영수를 떠넘길 수 있을 터였다.
“나 이번에 그거 해 봤잖어, 욱아. 금메달. 너 그거 뭔 뜻인지 알아? 아 참, 기말고사는 잘 봤어? 거기서도 1등 하는 거 아냐, 너? 그럼 나 막 자랑해야지.”
사실 기말고사는 아직 보기도 전이고, 심지어 오늘은 수업까지 무단으로 빠졌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만남의 일자를 정할 때 진작 했어야 할 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지훈을 아예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사정을 말하면 날짜를 다시 정해야 할 테고, 이번 학기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놈을 다음 학기라고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지훈을 좋아하는 것조차 모르는 강영수에게 그런 이유를 댈 수는 없기에 난 그때도 지금도 침묵했다. 강영수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인 게 이 순간엔 차라리 다행이었다.
“뭐지?”
강영수는 30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시계를 내려다본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지독 무슨 일 있나?”
나도 슬슬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이지훈이 약속에 늦는 건 처음이었다. 20분이면 시간 약속을 틈만 나면 어기는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시간일지라도, 이지훈을 아는 우리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전화해볼까?”
대답을 듣기도 전부터 이지훈에게 통화를 시도한 강영수가 그러기가 무섭게 인상을 찌푸렸다.
“욱아. 이 새끼 핸드폰 아예 꺼져 있는데?”
“꺼져 있다고?”
“어. 잠깐만. 일단 다시 한번 걸어볼게.”
3초 후 핸드폰을 아래로 내린 강영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여전히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안내음만 나오는 모양이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본 나는 들고 있던 짐가방부터 내려놓았다.
“혹시 도착했는데 이 주변에서 헤매고 있는 거 아냐? 핸드폰이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을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그 새끼 성격에 헤매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지나가던 사람 붙잡아서 핸드폰이라도 빌리고도 남을 놈인데.”
석연찮다는 듯 말하면서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는지 지나가는 행인을 돌아보는 강영수를 보다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터미널 주변 한 바퀴 돌아보고 있을 테니까 넌 여기 앉아 있어. 이지훈 오면 나한테 연락하고.”
터미널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왔다. 당연히 고속버스터미널로 오겠지 생각하고 있었나 싶어서 고속버스터미널과 붙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확인했다. 카페나 편의점에서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블록 너머의 프랜차이즈 카페까지 다녀왔으나 어디서도 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30분이 지나서야 나는 이지훈이 이 주변에 없음을 확신하고 터미널로 돌아갔다.
날 보자마자 강영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었던 듯 내 뒤를 슬쩍 살피기부터 했던 강영수는 한숨부터 쉬었다. 시계를 내려다본 놈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선욱아. 근데 2시에 민박 사장님이 데리러 와 주시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뭐?”
“아니, 거기가 좀 외진 데인가 봐.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안 해주시는데, 내가 손자 동기인 거 아시고는 시장 가는 겸 태워주신다길래 감사하다고 했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아… 진짜 이 새끼 무슨 일이지? 혹시 몰라서 아저씨한테 전화해 봤는데 아저씨는 우리 여행 가는 것도 모르고 계시더라고. 요새 이지훈이랑 연락도 잘 못 하셨나 봐. 훈련 바쁘다길래 그런가 보다 하셨대. 괜히 걱정하실까 봐 대충 둘러대고 끊었어.”
잠깐 서로를 막막히 바라보고 있는데 강영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풀민박사장님 이라고 저장명이 뜬 화면을 강영수가 내게 보여주며 어떻게 하냐는 눈빛을 쐈다. 나는 이지훈이 등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잠깐 동작을 멈춰버린 것 같던 뇌를 애써 굴렸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였다. 석 달 만에 보는 이지훈과의 만남이 비록 내 예상과는 달랐대도,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가자. 그래도 큰일이었으면 아저씨한테 가장 먼저 연락이 갔을 텐데 그러진 않은 거 보면 그런 소식은 아닌 것 같고. 일단 연락 기다려보고, 혹시 모르니 민박 주소도 메시지 방에 보내놔.”
“걔 민박 주소는 알 텐데. 저번에 링크 미리 보내놔서.”
“그럼 그건 됐고 일단 먼저 간다고만 적자.”
“어어, 알았어. 일단 잠시만.”
고개를 끄덕인 강영수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네, 저희요? 아, 여기 그 버스 플랫폼 있는 쪽인데. 네네, 아. 거기로 나가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난 버스들이 늘어선 플랫폼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지금이라도 그중 하나에서 이지훈이 내렸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고서.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승객마저 샅샅이 훑었기 때문에. 그중에는 이지훈과 닮은 사람조차 없었다.
이지훈은 다섯 시간을 늦었다. 그런 것치고는 태연하고도 뻔뻔했다. 이유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든 채로 다가온 놈이 저녁에 굳이 마트에 갈 필요도 없게 필요한 걸 다 사 온 탓이었다. 가볍게는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해서 쌀, 라면, 김치 심지어 고기까지. 누가 보면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엠티에 가기 위해 장을 본 거라고 오해라도 할 법한 규모의 음식과 장비가 이지훈의 손에 가득 들려 있었다. 5시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는 이지훈 때문에 발을 구르기도 하고 구시렁대기도 하던 강영수조차 봉지 안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합 다물었다. 이지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씩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봉지를 끄르더니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기도 했다. 야, 먹어. 얼떨결에 받아든 아이스크림은 적당히 녹아 있었다. 바로 물 수 있을 정도로 말랑말랑한 아이스크림을 만지며, 난 내가 더운 여름 안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꼭 산소가 부족해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그늘로 갈 생각은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난 자그마치 석 달 만에 보는 이지훈이 건네준 아이스크림을 든 채로, 걔가 사 들고 온 것들에 멀거니 시선을 뒀다.
그렇게 늦게 일어났음에도 청주에서 강릉까지 그리 늦지 않게 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한데 정작 그중 하나도 물을 수가 없었다. 왜 방금 나를 지나친 이지훈에게서 타인의 냄새가 나고, 걔의 손에는 내가 못 보던 것들이 걸려 있고, 혼자서는 들고 올 수 없을 법한 물건들을 한가득 들고 올 수 있었는지.
때마침 강영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욱아. 이 새끼 늦잠 잤는데 사귀는 누나가 데려다준 거래.”
나는 뒤돌았다. 웃고 있는 강영수에게서 그 옆에 앉은 이지훈에게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강영수가 거짓말한 거라면 뭐라도 아니라고 부정했을 텐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파리를 쫓는 이지훈을 본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제야 내가 왜 오늘 이지훈을 본 순간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무서웠다. 고작 그 석 달 만에 내가 알 수 없는 거리로 훌쩍 멀어져 버린 놈이.
이지훈이 여자친구를 사귀는 걸 처음 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그 순간에야 이지훈이 정말 타인처럼 느껴졌다. 3개월 만에 처음 본 놈의 입에서 여자친구라는 말이 나온 순간에야 이지훈이 정말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내가 잠을 자지 못하고 이지훈의 SNS 계정을 새로고침 한다고 해서, 어쩌다 한 번 통화를 했다고 해서, 겨우 필수훈련 하나를 때려치우고 이런 산골에서 1박 2일을 보낸다고 해서 해결 가능한 게 아니었다.
난 비로소 알게 된 거였다. 이지훈이 찾은 안식처며 돌파구는 내가 아니고, 심지어 내가 알던 것들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건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이지훈만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도.
“그 정도면 완전 널 키우는 거 아니냐?”
“또 깝싼다. 이래서 니한테는 말을 하기가 싫어.”
“아, 왜. 말해 봐. 어떤데. 몇 살 차이인데? 어디서 만났는데? 학교? 미팅? 소개팅?”
질문을 쏟아부으며 엉겨드는 강영수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지훈은 차라리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이것저것 정보를 툭툭 내놨다. 사귀는 사람은 이지훈보다 여섯 살이 많고, 서울의 한 카페에서 이지훈의 번호를 먼저 따간 사람이기도 하며,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바로 취업한 능력자고, 늦잠 잔 연하 애인을 강원도까지 군말 없이 데려다줄 수 있는 차주고.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들이 귀로 박히는 도중에도 나는 멍하니 이지훈만 보고 있었다.
그런 정보를 늘어놓는 놈의 웃는 얼굴을 보며, 걔와 나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생각했다. 이지훈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다시는 닿지 못할 것처럼, 평생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나는 이지훈의 울타리를 내 방어선으로 여겨왔다. 우리가 비록 이전처럼 매일같이 보지는 못할지라도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의 수는 바뀔 리 없다고 은연중에 확신했다. 이지훈을 짝사랑하며 얻은 최고의 업적이 내가 그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뿐이어서 그랬다. 걔가 울타리 안에 함부로 누군가를 넣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내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
내가 이지훈을 짝사랑해오며 가지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이 찢겼다. 짝사랑의 나침반이 방향을 잃고 사방을 헤맸다. 나침반의 바늘이 터질 듯 팽창하다가 이내 펑 타올랐다. 뾰족한 끝이 이내 그 어떤 색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매졌다. 색을 마구 섞으면 결국엔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여러 감정이 섞인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위장이 뒤틀리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이런 말은 좀 우습지만, 나는 그런 것엔 면역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날 급습한 다양한 감정들에 흠씬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꼭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이성과 감정의 경계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뭐라도 뱉지 않으면 죽는 사람처럼 입에 가득 찬 것을 거르지도 않고 뱉어냈다.
“그게 다야?”
장난을 치던 이지훈과 강영수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강영수가 눈을 크게 떴고 멈칫한 이지훈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게 내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분노를 터뜨린 것 때문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사과는 안 할 거고?”
그건 화풀이였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서 나온 떼 같은 거. 아주 어렸을 때조차 떼 한 번 쓴 적이 없다던 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친구에게 되도 않는 걸로 떼를 썼다.
그러니까, 강제할 수 없는 남의 마음 같은 것을 두고. 내가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고 도전이라도 하듯 자꾸 한계를 넘으려 들면서.
“연락도 없이 다섯 시간이 넘게 늦었잖아.”
“…야아. 욱아. 그래도 이 새끼 음식도 사 왔고.”
“아무리 그래도 셋이서 한 달 전부터 세운 계획인데 넌 책임감도 없이, 씨발. 늦잠 자고 연락은 받지도 않아서 내내 사람 걱정시키다가 이렇게 등장하기만 하면 끝이냐?”
“…….”
“우리 둘은 네 들러리야? 이딴 거 사 와 줬다고 박수라도 쳐 줘야 해?”
입에도 대지 못하고 만지작대던 아이스크림은 이 순간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바닥에 팽개쳤다. 퍽, 하고 짧은 소음을 내는 게 끝인 이 아이스크림을 무겁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겨우 이딴 소음만을 남길 수 있는 물체를 무겁다고 느낀 거라면, 그것 따위에 내준 마음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야야. 뭐 하는 거야.”
강영수가 화들짝 놀라서 마루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빠르게 다가온 놈이 내 팔을 쥐고는 뒤로 밀었다.
“야, 선욱아. 왜 그러냐. 더워서 그래? 야, 일루 와. 선풍기 바람부터 좀 쐬어. 응? 아이, 시원하다. 그치? 야, 더워서 그래. 더워서 화가 나는 거야. 형이 달래줄게.”
셋 중에서 싸우는 건 늘 강영수와 이지훈이었다. 내가 이지훈과 싸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싸울 만한 일도 없었고, 나야 이지훈과 척지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마음도 숨겨가며 여태껏 살아온 놈이었다. 근데 그게 도리어 일을 낸 모양이었다. 나는 이지훈과 제대로 싸운 적이 없어서,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는 화마저 얘한테는 어떤 방식으로 표출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던 방식으로 화를 내야만 했다.
“됐어. 놔 봐.”
그 와중에 이유 없이 나의 갑작스러운 분노를 감당해야 할 강영수한테는 미안했다. 집 안쪽으로 끌려는 놈의 손을 밀어내고는 이지훈과 눈을 맞췄다. 땅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말없이 내 얼굴만 빤히 보는 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생각이 끝난 것처럼 입술이 움직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들러리가 왜 나와, 새끼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겨우 이딴 걸로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 평소의 이지훈이라면, 그리고 이렇게 쏟아붓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놈은 더 심한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걔는 꾹 참는 게 보였다. 이지훈이 가끔 내게 보이는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더 참기 힘들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이지훈은 다음 순간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함이 뚝뚝 흘러내리는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 옆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이지훈이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이를 악문 채로도 제법 온순한 목소리를 냈다.
“늦은 건 잘못했어. 어제 기합받아서 새벽에야 방에 들어왔어. 기절하듯 잠들었고, 일어나니 너무 늦었더라. 누나한테 부탁하고 바로 온다고 왔는데도 늦었어. 핸드폰 충전을 못 해서 중간에 핸드폰이 꺼지는 바람에 연락도 못 했고. 누나 폰으로라도 하려고 했는데 너랑 강영수 핸드폰 번호가 순간 기억이 안 났어.”
“…….”
“연락도 없이 늦은 건 미안. 사과할게.”
차라리 이지훈이 버럭 화를 냈다면, 혹은 뭐 이딴 걸로 분위기를 이렇게 만드냐고 실실 웃으며 농담이나 했다면 나았을까. 차분하고 이성적인 대꾸는 오히려 이런 상황조차 유연하게 넘기지 못하고 화를 낸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전투의 의지가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이지훈은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나의 마음이다. 나는 둘을 놔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훈의 사과를 듣는 순간 안심하는 눈치던 강영수가 뒤늦게 사색이 됐다. 급하게 방으로 뒤따라오는 놈의 발소리가 우당탕 울렸다.
“야, 선욱아. 이 새끼가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과하는데… 야. 너 그건 왜 챙겨. 갈 거야?”
“…놔.”
“내가 너 이지훈한테 뭐라 하는 건 이해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진짜 오바야. 완전 오바. 어딜 가. 이렇게 셋이 모인 것도 거의 삼 개월 만인데! 야. 여기까진 택시도 안 들어와! 기숙사엔 어떻게 돌아갈 건데?!”
따라 들어온 강영수가 모터라도 단 것처럼 빠르게 말하며 내가 쥔 가방을 뺏어 들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손을 내밀었다.
“강영수.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아니…. 선욱아.”
“줘, 빨리.”
내 눈에서 바뀌지 않을 고집이라도 읽은 것처럼 강영수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 틈을 타 놈의 손에 들린 가방을 뺏어온 나는 마루로 나왔다. 이지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가 마루로 나오자마자 고개를 위로 올린 놈은 내가 들고 있는 짐가방을 확인한 순간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쳤다.
“뭐 하냐, 진짜?”
내가 진지한 만큼 이지훈도 진지해졌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나운 눈빛을 확인한 순간에는 덜컥 겁이 났다. 얘랑 진짜 싸우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무리 남자애들끼리 치고받고 잘 싸우고, 그만큼 잘 화해한다 쳐도 우리는 어딘가 달랐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을 제외하고는 혈기 왕성한 그때조차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지낸 적이 없어서 싸우는 이 순간이 서로 어색했다. 둘 다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는 면역력이라는 게 없었다.
건조하다 못해 버석하게 말라붙은 이지훈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열이 올라온 눈가를 주먹으로 쓸었다. 마음에서 불이 일어 눈까지 올라온 열기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만약에 지금 강영수에게 못 이기는 척 붙잡혀서 여기에 남아 예정대로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시간 내내 난 이지훈을 똑바로 보지 못할 거라는 것도.
“너 지금 진짜 이상하게 구는 거 알지.”
내가 이러는 이유를 찾기라도 하려는 듯 날 아래부터 위까지 샅샅이 훑으며, 이지훈이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지막 경고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는데, 넌 왜 이렇게까지 굴어? 적당히 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멈칫했던 나는 가까스로 이지훈을 무시하고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둘을 등진 채로 재빨리 마당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발은 그래도 착실히 방향을 찾아 걸었다. 방금 이지훈이 차를 타고 왔던 숲길을 향해서였다. 울창한 숲은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지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고사하고 차조차 없었다.
“야, 지선욱! 미친놈아! 너 진짜 가게? 야!”
이지훈의 눈치를 보랴 내 눈치를 보랴 바쁜 강영수가 숲길 입구까지 따라왔다. 속도를 늦추지 않는 나를 더 쫓아오길 포기한 놈이 자리에 멈춰서 크게 소리쳤다.
“선욱아! 우리 이러지 말자, 진짜! 어?”
날 잡는 목소리가 갈수록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숲길은 길었다. 한 시간 반을 빠른 걸음으로 쉴 새 없이 걷고서야 막 손님을 내려놓고 떠나려던 택시 한 대를 발견했다.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도중에 가방 안에서 간헐적으로 울려대던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강영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나는 열 번째로 걸려 오는 중인 전화를 끊으며, 강영수에게 터미널로 가고 있다며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산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서야 강영수에게 문자가 왔다. 욕 문자였다. 그래도 3분 뒤에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메시지가 이어서 왔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쉴 틈 없이 내게 메시지를 보낸 강영수와 달리 이지훈은 그렇게 떠난 내게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처음 와 본 강릉의 버스터미널에는 커플이 많았다. 나는 먹먹한 눈빛으로 헤어지는 커플들 사이를 헤쳐 버스에 올랐다. 가방을 발밑으로 던지고는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명치가 쿡쿡 찔리듯 아팠다. 버스가 출발할 때야 고개를 들었다. 멀어지는 강릉 버스터미널 간판을 바라보며 나는 이번 여름, 어쩌면 짝사랑을 끝내기도 전에 이지훈과 먼저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부터 소화해야만 했다.
방어선이 찢긴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지훈의 울타리 안에서 뛰쳐나왔다. 어쩌면 다시는 들어가지 못할, 그 공고하고도 숨 막히는 울타리 안을 벗어났다. 어떻게든 숨만은 내쉬어보겠다고 절뚝대며 튀어나왔는데, 문제는 울타리 밖에서도 여전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암흑이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두워지던 숲길처럼, 그리고 우리가 결국 보지 못한 강릉의 밤바다처럼.
* * *
기숙사는 조용했다. 1학년이면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할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놈은 나뿐이니 당연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기숙사 복도를 걷던 나는 멈칫했다. 누군가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몇 번 지나가다 인사를 한 적 있는 선배였다. 수석으로 입학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정현준같이 홍보단에 동아리만 세 개씩 하는 놈이라면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러지 않는 이상 선후배가 사적으로 가까이 지내는 일은 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동기들과도 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인데 마주칠 때마다 정현준 옆에 있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몇몇 동기들은 그의 뒤에서 대놓고 수군대기도 했다. 굳이 저런 이야기까지 듣고 다니면서 후배랑 어울릴 필요가 있나 생각하던 중, 그가 어딘가 좀 나사 빠지게 구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는 정현준을 볼 때마다 내가 아는 표정을 지었다. 늘 멀리서 보던 나조차도 쉽게 관찰할 수 있던 걸 그와 붙어 다니는 정현준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정현준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서슴없이 그와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 몇 번 나와 마주친 기억이 남은 탓인지 그는 날 알아본 듯 반가운 표정부터 지었다.
“지선욱. 맞지?”
나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자료에서 시선을 내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몸을 돌리다 말고 잠깐 멈춰서 발을 바닥에 콩콩 찧었다. 발이 뻣뻣한 듯했다. 아까 오자마자 보았던 모습도 그렇고, 꽤 오래 이곳에 서 있었던 눈치였다. 그는 그러나 그런 기다림을 티 내는 것 대신, 웃으며 손에 든 자료를 내밀기부터 했다.
“이거 현준이한테 주려 했던 건데, 내 연락을 안 받아서. 혹시 안에 있는지 좀 확인해줄래? 대신 전해줘도 되고.”
그 선배가 건넨 건 종이 뭉텅이였다. 첫 장에 큰 글씨로 적혀 있는 글씨를 보니 그가 무슨 자료를 주겠다고 여기까지 내려와 있는지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동기들 몇몇이 수군거리던 것처럼 정현준에게만 주어지는 이 선배만의 족보이겠지.
누군가에게는 호감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운 좋게 떨어지는 콩고물 같은 것들.
“걔 여자친구 있어요.”
대뜸 튀어나간 말이었다. 그런 말이 나갈 줄은 나도 몰랐다. 크게 멈칫한 선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막상 운을 떼고 나니 그동안 쭉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술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내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정현준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이 선배를 보면서 줄곧.
“선배가 이런 거 가져다 바치고 아무리 잘해줘 봤자, 하나도 소용없다고요.”
“…야.”
그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겨우 두 마디 했는데도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눈치챈 것처럼 나름 위협적인 목소리도 냈다. 정색하고 말하는 꼴이 그만하라는 뜻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숲길을 걸어오는 내내 욱신대던 발바닥이, 이지훈의 연락이라고는 남지 않은 핸드폰을 쥘 때마다 타오르는 것 같던 마음이, 목 아래까지 차오른 미련이 나를 등 떠밀었다.
“왜 그러고 살아요.”
마침내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선배는 입술을 꼭 깨문 채로 날 올려다봤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툭 한 번만 더 치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얇은 화장실 벽을 타고 흐르던 정현준의 말소리가 떠올랐다.
‘내가 가끔 연락 안 받거나 조금이라도 시큰둥하게 굴면 울 것 같은 표정 짓거든? 그럼 솔직히 꼴릴 때가 있어. 남자치고는 좀 예쁘장하거든.’
남자‘치고’, ‘예쁘장.’ 고작 그 두 단어 안에 그 새끼가 선배 같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죄다 드러나는데. 고작 그런 새끼한테 갖고 놀아지려고 이딴 것을 바쳐요.
“그래 봤자 걘 여자만 만나요.”
“그만해.”
“선배처럼 남자 좋아할 수 있는 새끼가 아니라고요.”
“그만하라고 했지, 이 새끼야!”
벽으로 나를 떠민 그가 황급히 내 입을 막았다. 내가 아웃팅이라도 시킬까 봐 겁이 난 건지, 내 입에서 나올 정현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그만 듣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 봐야 이 복도에는 들을 사람이 없는데. 그걸 아는 이유는 내가 경찰대학교 1학년이라면 무조건 참여해야 하는 합숙 훈련마저 쌩까고 이지훈을 보겠다고 강릉까지 갔기 때문이고, 이 선배가 이렇게까지 목매는 정현준 그 새끼는 그런 합숙 훈련이 있다는 사실조차 이 선배에게 말해줄 정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나란히 지랄 맞을 수가. 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왜….”
내 멱살을 쥔 손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가 뒤로 몸을 물린 채로 나를 응시했다. 흔들리는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눈이 커서 그 안에 비치는 내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그의 시선 안에 갇힌 내 모습은 엉망이었다. 유독 길었던 하루가 지친 몸 위로 얹혀 있는 듯한 모습. 난 그의 눈 안에 있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겨우 목울대를 움직였다.
“왜 그러고 살아요, 대체.”
왜 나는 이러고 사는 걸까. 바라본 적조차 없던 것을 욕심내고, 가져본 적조차 없는 것을 뺏긴 양 질투하고, 누구인지 특정할 수조차 없는 대상을 원망하며.
멱살을 쥐어틀고 있던 손의 힘이 약해졌다. 그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주먹을 쥐어 내 어깨를 세게 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때리는 대로 맞았다. 거울에 던지듯 한 막말이래도 그의 몸을 빌린 건 사실이니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때리던 그가 멈췄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씨근덕대며 말했다.
“그딴 말 해놓고, 울긴 왜 울어, 너.”
우리는 나란히 한참을 울었다. 울다가 지친 내가 결국 방문을 열고, 그가 건넨 족보를 방 안 쓰레기통으로 처박는 순간까지. 그는 내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쓰레기통에 자신이 준비한 마음이 버려지는 걸 보면서도 멈칫할지언정 날 말리지는 않았다.
“…….”
“…….”
문을 닫고 그에게 먼저 다가선 건 나였다. 선배는 다가오는 나를 밀어내지도, 입술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나를 밀쳐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턱을 붙잡자마자 나를 위로하듯 내 팔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는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여름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상처받았고, 영원히 그들과는 같은 길을 가지 못하리라는 걸. 고작 그런 말을 하면서 우는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건 자신이 아니기에 오히려 상관없다는 것 또한.
눈물로 흠뻑 젖은 볼을 감쌌다. 나보다 작은 그 선배를 내려다보며, 나보다 큰 이지훈을 생각했다. 그 새끼도 키스를 할 때는 이런 구도로 상대방을 내려다보겠지. 그러나 나와는 절대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려볼 일조차 없을 거다. 친구 사이에는 지켜야 할 거리란 게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는 건 그 범주 안에 없었다.
제대로 아는 것조차 없는 이와 하려는 일이 이지훈과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숨이라도 대신 빼앗으려 들었다. 사랑을 받지 못해 헐떡이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이라도 하듯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
“…….”
눈물로 젖은 입술이 맞닿은 순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처음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첫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지훈과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들이닥치듯 강하게 부닥쳐온 기세와 달리 이지훈은 내 입술을 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에는 뒤로 고개를 슬쩍 빼기도 했다. 움직일 생각이 없는 나 대신 아랫입술만 쭉 늘어났다. 이지훈은 입술이 더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움직였다. 얼굴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나도, 이지훈도 눈을 감고 있지 않았기에 바로 시선이 부딪쳤다.
“눈 뜬 채로 하는 게 취향이야?”
남의 입술을 물고 있는 것치고는 발음이 선명했다. 음절을 하나하나 씹듯이 말하는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을 하느라 혀를 움직이는 것 외에도 일부러 이를 세워 안쪽 살을 잘근잘근 약하게 물어오는 몸짓이 느껴질 때마다, 콧등이며 윗입술까지 더운 숨이 훅 끼쳤다. 방금 복도를 걸어오며 느꼈던 가벼운 한기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면 벌써 후회하는 중?”
눈을 내리깐 놈은 내 얼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치 어떤 식으로 입술을 부딪쳐야 좋을까 각도라도 맞춰보듯이. 얼굴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슬며시 멀어지길 반복했다. 놈의 코끝이 볼을 가볍게 스치던 순간에는 침이 크게 넘어갔다. 그 작은 움찔거림조차 놓치지 않은 이지훈이 가볍게 웃었다. 놈이 내내 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퉁 하고 튕겨 나왔다. 드디어 입술이 자유로워졌는데도 그 사실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멍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얼얼해진 건 입술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전자는 맞춰줄 수 있는데, 후자는 못 맞춰줘.”
이지훈이 마지막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선택권이라도 주듯 말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놈의 몸은 여전히 날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밀치고 도망갈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지훈이 대답을 듣기 위해 날 가두는 공간이 점점 좁아졌다. 처음엔 집이고 다음은 자동차고, 이제는 이 좁은 신발장이었다. 인내심이며 참을성도 그 공간과 비례해서 바닥을 드러냈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지훈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지훈에게 남자랑 키스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말은 도발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놈이 여태껏 살며 한 번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에 쓸데없이 도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것에 가까웠다.
숨결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놈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몸을 써서 내가 신발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것 외에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태도로 날 응시하는 놈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충동성이나 비자발적인 행동의 근거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어제 보았던 표정이 떠오르긴 했다.
‘사랑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나 사랑이 아님을 증명하는 방식이나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니야?’
‘…….’
‘여태 너랑 나랑 한 번도 안 해 봤던 거 해. 그게 뭐든, 네가 하고 싶었던 거 있으면 하라고. 그럴 수 있게 해줄게.’
‘…….’
‘그러다 보면 알게 되겠지. 누가 어디에 환상을 품고 있었는지.’
이게 사랑이 아님을 증명하는 이지훈의 방식인 걸까. 그러니까, 이전에 우리라면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스킨십을 일단 저질러라도 보는 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이 저절로 열린 순간에는 차라리 감사했다. 한 번도 그려보지조차 않은 상황이래도, 내게는 놈의 떼 같은 행위에 대처하는 나름의 매뉴얼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너랑 하는 키스에 환상 품은 적 없어.”
아무리 상자를 들고 있다고 해도, 범인들을 대하듯 한다면 이지훈을 밀쳐낼 수는 있을 거였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놈은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밀쳐낸다고 해서 제압이 가능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상자를 설령 제 발 위에 떨어뜨리더라도, 이지훈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언제든 만들 거였다. 그 사실이 내 몸을 제자리에 묶었다. 상자를 쥔 손아귀에서 힘을 빼기는커녕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이지훈의 목울대로 시선을 내린 채 한 번 더 강조하듯 말했다.
“네가 이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는 소리야.”
미동조차 없는 목울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이지훈이 멈칫했다고 생각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부러 더 빙글대며 웃는 놈은 방금 본 잠깐의 망설임마저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전자, 후자를 고르랬지. 그런 선택지는 준 기억이 없는데?”
“…….”
“오케이. 그럼 내 마음대로 전자.”
선언하듯 뱉은 이지훈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긴장을 즐기듯이, 천천히 다가오는 놈의 궤적을 따라 풍선껌의 냄새가 함께 따라왔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거리를 좁히는 놈을 보며 전자의 선택지가 뭐였는지를 떠올렸다. 미친 새끼. 중얼거린 순간 이지훈이 입술을 물었다. 아까 아랫입술을 당기던 것과는 다르게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기부터 한 놈이 손을 들어서 내 뺨을 감쌌다. 큰 손이 볼을 빈틈없이 쥐고는 바짝 끌어당겼다. 광대를 둥글게 문지르던 검지가 눈가를 살짝 긁은 순간에는 잇새로 작은 신음이 터졌다.
“…읏….”
그러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이지훈이 윗입술을 빨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원치 않을 때 남의 입 안으로 불쑥 급습한 것치고 놈은 매너라도 지키려는 것처럼 굴었다. 급할 게 뭐 있냐는 듯이 여유롭고 상냥했다. 혀로 볼 안의 깊은 곳을 넌지시 누르고, 입천장을 훑다가도 이내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가볍게 부딪치거나 온도가 다른 살을 이리저리 맞대가며 빨았다.
“…….”
“…….”
몸의 가장 부드럽고도 말캉한, 어디든 박아댈 수 있는 미끄러운 신체 부위가 붙어 있는데도 현실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훈과 키스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은 입술을 빨아대는 와중에도 눈 한 번 감지 않고 내 반응을 살피는 놈과 눈을 맞출 때뿐이었다. 숨을 쉬기 편하게끔 적절한 때에 고개를 비틀며 입술을 부딪쳐오는 놈은 확실히 능숙했다. 그러니 상대방이 키스에 응하지 않아도, 아무런 신음조차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상관없이 제 속도에 맞춰 키스를 이어갈 수 있는 거겠지. 볼을 어루만지고, 혀를 간지럽게 빨고, 입술 끝에 제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기나 하면서.
“…아!”
볼을 감싸던 손은 이제 귀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귓바퀴의 모양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이 좁은 귓구멍 안을 긁듯이 내리누르자, 숨이 잠깐 거칠어졌다. 혀까지 덩달아 움찔댄 순간, 이지훈이 두 다리 사이로 제 발을 끼워 넣었다.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이지훈의 허벅지가 조금만 더 움직이면 내 중심에 닿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나를 좇기 바쁜 놈과 눈을 맞춘 순간, 나는 이지훈의 혀를 피하겠다고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던 혀의 힘을 뺐다. 동요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놈을 노려보던 것마저 멈추고는 시선을 차단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것뿐인데, 처음으로 이지훈이 반응했다. 젖은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꽤 선정적이었다. 나는 고개부터 틀었다. 볼이며 귀를 만지작대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멈칫한 이지훈의 손은 더는 날 제멋대로 만지려 들지 않았다. 내내 참고 있던 숨이 허공에 급히 흩어졌다.
“…하….”
“…….”
키스를 멈췄다 해도 놈이 물러선 건 아니었다. 나처럼 숨을 고르는 놈의 숨소리가 올곧이 느껴졌다. 눈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꺼풀에 힘을 줘 밀어 올리자, 키스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표정 변화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남자랑 키스할 수 있네.”
또 한 번 볼이 잡혔다. 양손으로 볼을 잡은 이지훈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세로 빠르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예고 없이 부딪친 입술 사이로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꼭 마무리라도 하는 것 같은 가벼운 뽀뽀였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이지훈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뿐. 방금 내가 그랬듯,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이지훈의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겼다. 이지훈도 내 눈동자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냐.”
그건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혹은 내 눈에 비치는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마치 그 안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지훈은 다음 순간에 무덤덤하게 뱉었다.
“후회하길 바란 것 같은데, 난 그게 아니라서.”
제 체온이 남은 내 볼을 한 번 더 어루만진 손이 곧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이지훈이 마침내 뒤로 물러섰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처럼 가벼운 몸짓이었다. 순식간에 나를 가로막고 있던 것이 모두 사라졌다. 옆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뒀던 봉지를 든 이지훈이 구두를 벗었다.
“배고프다. 일단 사 온 물건 정리만 대충 하고, 밥 먹자.”
부엌을 향해 걸어가는 놈의 뒷모습에 멍하니 시선을 뒀다. 방금 이지훈이 한 말이며, 그 어떠한 어색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일상적인 태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 이지훈만 보면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이 집에서, 좁은 신발장에 서서 그런 키스를 하는 건 이상하게 여길 일조차 아니라는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못 박힌 듯 서 있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이지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부엌은 이미 정리를 끝낸 모양인지, 다시 현관으로 다가온 놈이 화장실 앞에 던져두었던 봉지를 끄르며 나를 돌아봤다.
“거기 계속 서서 뭐 하냐. 안 무거워?”
그러고 보니 상자를 계속 들고 있었다.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놈을 본 순간에야 몸을 굽혔다. 나를 이 자리에 묶어두었던 상자를 아래로 내려놓고는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이지훈이 아래로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봉지에서 꺼낸 것들을 한 손에 몰아 들고, 화장실 스위치를 켜고,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것을 지켜봤다.
화장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눈을 깜빡였다. 잊고 있던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밥 먹기 전에 씻으려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이지훈은 돌아볼 정성조차 들이지 않고 대꾸했다. 이 집에서 저 말고 문을 열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다는 걸, 내가 이렇게 저를 따라 화장실 문을 열 이유도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처럼.
세면대 앞, 면도기와 수건이 들어찬 서랍 앞에 선 이지훈의 손에는 방금 봉지에서 가져간 면도 크림이 들려 있었다. 나는 대꾸하는 것 대신 시선을 내렸다. 이지훈이 무언가를 채워 넣을 서랍이 아닌, 이지훈이 사용조차 하지 않을 세면대 아래에 붙은 작은 서랍을 찾아서.
‘확인해본 적 없지? 있다는 것도 잊고 살았겠지, 분명.’
“곧 밥 다 돼. 빨리 씻을 거 아니면 그냥 먹고….”
이지훈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서랍 안에 넣으려고 들고 있던 면도 크림을 그대로 손에 쥔 채로,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씻으려고 온 것치고는 그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거리를 더 좁혔다.
한 번 더 이렇게 가까이 서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상상했을 때보다 이지훈은 키가 더 컸다. 근데 그렇게 큰 건 나도 마찬가지라, 이렇게 선 우리의 키 차이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손이 큰 이지훈의 기준으로는, 반 뼘 정도 될까.
“…….”
“…….”
어긋난 시선 속에 나는 비로소 거짓말하기를 멈췄다.
몽정하게 만드는 새끼와의 첫 키스를 상상하고 꿈꾸지 않았을 리가 있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 대신, 나는 이지훈의 멱살부터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반 뼘 위에 있는 놈의 입술을 물었다. 그때의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속도와 세기로.
스무 살의 내가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웃을까. 아니면 울까. 확실한 건 어떻게든 이지훈과 닿아 있고 싶던 그 시절의 나라도 이딴 식의 키스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지훈의 볼은 구태여 잡지 않았다. 대신 이지훈과 나 사이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허벅지 앞면이 나란히 붙을 정도로. 동시에 몸에 힘을 줘서 놈의 상체를 뒤로 밀었다.
“…아.”
그 어떠한 애태움도 없이 부딪친 입술 사이로 아플 때나 낼 법한 소리가 흘렀다. 그게 갑자기 입술부터 갖다 붙인 나 때문에 이지훈이 저도 모르게 흘린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이지훈의 입 안으로 혀를 넣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토록 내 혀를 쥐고 빨았음에도 달콤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껌 향을 완전히 옮기지 못한 입 안으로 혀를 넣어, 가지런하게 난 이 사이의 속살을 집요할 정도로 샅샅이 핥았다.
숨 쉴 틈이라도 주는 것처럼 여유롭고 애태우듯이 하던 키스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러려고 한 키스는 아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키스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멈칫하던 이지훈은 그러나 금세 제 페이스를 회복했다. 미는 대로 밀려나 주더니, 세면대와 서랍 사이에 이어진 작은 툴에 가볍게 걸터앉은 상태로 한 손을 들어 내 허리를 감싸기부터 했다. 서 있는 나에 맞춰주듯 턱을 살짝 들고 키스에 응하는 놈은 어떤 것이든 맞춰줄 기세였다. 속도를 맞추듯 혀를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 손을 볼 위로 올리는 놈은 역시나 능숙했다. 꼭 아까 신발장에서 키스할 때 그랬던 것처럼.
더는 상자를 들고 있지 않은 나는 내 볼을 감싸려는 이지훈의 손부터 잡아 내렸다. 이지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쯤은 신경 쓰지 않고 놈의 입 안을 내 멋대로 휘저었다.
“…….”
“…….”
혀를 빨고, 입술을 비비다 못해 넘어오는 침까지 모두 삼킬 것처럼 키스했다. 숨을 고를 틈조차 주지 않고 놈의 윗입술을 짓이기듯 빨고 그 안으로 혀를 박아 넣었다. 그 짓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이지훈의 숨이 거칠어졌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놈이 지금 날 보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시선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했다. 강하게 부딪친 입술의 감각이 점차 둔해질수록, 내가 이지훈이 숨을 쉬기 위해 잠깐 혀를 물린 순간마저도 고개를 바꿔 콧대를 부딪칠수록,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입맞춤이 쓸데없이 깊고 집요해질수록. 그래도 참고 참던 이지훈은 내가 힘을 주어 빨던 아랫입술이 터진 순간에야 팔을 올렸다. 이번엔 내 볼을 잡기 위한 게 아니었다.
놈은 그제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꼴려서 하는 키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야.”
꼭 경고라도 하는 음성과 함께, 이지훈이 양팔을 들어 나를 밀어냈다. 나는 놈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밀려났다. 이지훈은 인상을 쓴 채였다. 찌푸려진 미간을 보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놈의 아랫입술이 퉁퉁 붓다 못해 찢어져 있었다. 피가 흐르는 걸 눈치챘는지, 손등으로 아랫입술을 훔친 놈이 나지막이 헛웃음 쳤다. 핏자국이 흐리게 남은 손등에서 시선을 올린 놈이 물었다.
“뭐 하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사나운 표정을 보고서야 스무 살의 내가 원하던 키스는 아니라도, 스물아홉의 내가 원하던 키스는 했음을 깨닫는다. 나는 대답 대신 상체를 이지훈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랑 키스.”
“…….”
“아무래도 넌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 같아서.”
찢어진 입술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내가 또 한 번 같은 흠집을 남길지도 모르는데, 이지훈은 피하는 것 대신 눈을 치켜뜬 채로 다가오는 나를 지켜봤다. 입술을 움직이면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어서야 비릿한 피 향이 느껴졌다. 나는 키스 내내 가만히 두고만 있었던 손을 그제야 움직였다. 이지훈의 뒤, 세면대 아래 붙은 서랍을 향해서였다.
2년 넘게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서랍은 부드럽게도 열렸다. 어쩌면 이 공간을 굳이 찾아내 그 안을 들여다보기까지 한 이지훈 때문일지도 몰랐다. 향수, 면도기, 그리고 콘돔은 네모난 공간 속에 정돈되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그 공간만은 이지훈의 손이 닿지 않았음을 보여주듯이.
나는 서랍을 그대로 열어둔 채로, 향수부터 주워 들었다. 파란색 손잡이의 향수는 작아서, 손아귀에 가볍게 쥘 수 있었다. 반도 안 되는 양만이 남은 하얀 통을 보다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몸을 뒤로 물리고 세면대 위에서 향수 병을 뒤집었다. 거칠 것 없이 콸콸대며 쏟아져 나온 향이 좁은 공간을 빠르고 강렬하게 채웠다. 후각 세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자극하듯이 톡 쏘는 강한 우디 향 속에서 입을 열었다. 나 대신 향수 병을 노려보고 있는 이지훈에게 시선을 둔 채로, 목 안을 텁텁하게 만들던 말부터 몰아냈다.
“현우가 첫 주연을 맡았던 상업 영화 시사회 날이 네가 미국에서 돌아온 날이었어.”
“…….”
“걔한테는 인생에서 한 번 있는 일이었고, 너는 아니었지. 그래도 비행이다 뭐다 하며 일 년에 네다섯 번은 한국에 왔다 갔다 하던 때였으니까.”
이지훈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덤덤히 그 시선을 받아내며 처음으로 물었다.
“내가 그날 어디에 갔을 것 같아.”
답은 나도 알고, 이지훈도 안다. 그러나 이지훈은 답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저를 마중 나간 사람이라는 걸 잊을 리가 없는 놈인데도,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보기만 했다. 놈에게 시선을 거두고 비어버린 향수 병을 아래 휴지통으로 던지며, 현우가 이 물건들을 남기고 간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 걔가 그런 걸 속 편히 숨겨두지.’
이지훈은 이걸 미련이라도 묻은 행위로 여기는 듯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어쩌면 현우는 그냥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은 이지훈이 내 집에 드나든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데, 이지훈은 자신의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내 집에 온 이지훈이 한 번쯤은 이걸 확인하리라는 기대를 하며 잘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이곳에 굳이 둔 걸지도.
‘형을 너무 축내지 마. 걱정이 돼서 그래.’
내가 이지훈과 같이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이 서랍에 남기고 간 물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던 현우를 떠올렸다. 잊어버렸든, 혹은 더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아서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희미한 안도감 속에서 또 한 번 미안함을 느낀다. 마음을 축내는 것을 걱정해주는 애한테, 나는 마음의 어떤 공간조차 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이름 한 번 불렀다고 남의 전 애인한테 지랄 떨기 전에, 그 사람이 왜 헤어진 지 2년이 지나고서도 네 이름을 기억하는지부터 궁금해하지 그랬어.”
휴지통 안에 들어간 향수가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 대신, 서랍 안에 있던 면도기를 들어 그 위로 한 번 더 처박았다.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내내 그곳에 있었던 것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음에도, 다시는 볼 필요 없는 것들. 버려진 물건은 어쩌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마음을 닮았다.
“포털사이트에 안 나오는 정보. 남자랑 자는 법.”
“…….”
“그걸 알면 내가 모르던 우정을 깨우쳐줄 어떤 방법이라도 떠올라? 어떤 우정인데. 저 좋다는 남자 새끼도 친구니까 한 번쯤은 자 줄 수 있겠다 다짐할 정도의 우정?”
마주친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피가 배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욕을 읊조리는 이지훈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서랍에 남은 마지막 물건을 집어 들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얇은 콘돔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이게 관계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종종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그럼 자든가.”
“…….”
“지금 너 하는 꼴 보니까, 어차피 오늘 아니래도 언젠가는 있을 일 같기도 하고. 내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너 좋은 식으로 해석해가며 밀어붙일 거잖아. 그럴 바에 그냥 지금 하고 끝내.”
그 보잘것없는 무게감은 혼자 질 수는 없는 것이라 이지훈에게 나눴다. 힘을 빼고 가볍게 툭 던진 콘돔이 이지훈의 어깨를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타일 위에 널브러진 네모난 것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만을 응시했다. 막다른 곳에 다다라 좁은 골목에 붙어선 탓에 서로 외에는 시선을 돌릴 곳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대신 섹스하고 나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야.”
반 뼘이 무너진 자리에는 위치가 어긋난 시선만이 남았다. 피가 멎은 이지훈의 부은 입술에 시선을 뒀다. 이제 저 자리에는 딱지가 앉겠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몇 달 뒤에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테다. 그 위로 얇은 표피가 덮이고, 그 위로 누군가의 입술이 부딪치든 이전에 한 번 찢어졌다는 건 알지도 못할 테다.
“네가 벌어놓은 두 달의 시간을 하루로 단축하는 일이라고.”
왜냐면…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친구 할 사람이랑은 안 자.”
내가 사라진 이지훈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어쩌면 난 그에 대한 상상을, 이지훈과 키스하는 상상보다는 더 많이 한 것 같다. 근데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서. 특히 나를 사랑할 일이 없는 새끼를 생각하면서 자위나 하던 놈이 가지는 환상이 얼마나 얕고 당장이라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운지를 생각해보면.
“그래도 할래?”
놈이 절대 응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던졌다. 그리하여 더는 이지훈이 이렇게 변할 수 없는 것에 대고 떼라도 쓰는 행위를 방지하려고.
“…….”
이지훈은 예상한 것처럼 그러자고 말하지 못했다. 우정을 지키겠다고 하던 일마저 잠깐 멈추고 이 집에 자리를 튼 놈이니 당연했다. 나는 잠시 더 기다려주는 척을 하다가 몸을 아래로 굽혔다.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 콘돔을 주워 들어 휴지통으로 던졌다. 이지훈은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이지훈은 이 문제만큼은 더 고집을 부리지 못할 것이고, 나도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더는 주워 들 것조차 없는 서랍을 닫고는 몸을 돌렸다.
먼저 나가려 욕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이럴 거면….”
의식도 하기 전에 고개가 돌아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지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더는 필요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찬 휴지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놈이 흘리듯 말했다.
“왜 평생 내 옆에 있을 것처럼 굴었어.”
겨우 한 문장이었는데도 몸이 굳었다. 누군가 숨구멍이라도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달리고 목 안이 아릿하게 아팠다.
“네가 나 잘못 길들인 거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히 떠올랐다.
‘너 나 버릇 잘못 들이는 것 같은데.’
‘나중에 이렇게 안 해줬을 때 내가 섭섭해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달고 살던 웃음기를 접어둔 소년의 고요하고도 차분한 경고 위로 세월이 씌워지고, 소용돌이 안에서 걸어 나온 이지훈은 온통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이렇게 쉽게 버릴 거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로 놈의 고개가 돌아왔다. 미처 아물지 못한 아랫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데도, 이지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기어코 놈의 입술 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넌 네가 이 관계의 약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다시 생각해 봐.”
눈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놈의 눈가가 발갛다. 마치 그곳으로 몸의 모든 열이라도 몰린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선 놈에게서 꼭 열을 닮은 기운이 훅 끼쳤다. 종일 앓느라 결석까지 해야 했던 열여섯의 이지훈이 온몸으로 뿜어내던 그 눅진하고도 땀에 젖은 열기처럼.
“툭하면 버린다고 협박하는 새끼랑, 그런 놈을 잡겠다고 빌빌대는 새끼 중 누가 더 약자인지.”
내가 놓친 손잡이는 이지훈이 대신 잡았다. 문은 쉽게도 열렸다. 우릴 가두고 있던 공간 밖으로 걸음을 떼는 이지훈의 어깨에 멍하니 시선을 뒀다.
“어떤 약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도망갈 정도로만 사랑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