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5)

No signal

좆됐다. 그것이 현우가 퀴퀴한 커튼 뒤에서 할 수 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마약 한 이들을 잡는다고 클럽을 한바탕 들쑤시고 사라진 줄 알았던 경찰이 아직 남아 있을 줄, 그리고 그 경찰이 고작 바닥에 떨어뜨린 핸드폰 소리의 출처를 찾아 커튼 뒤까지 걸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고개를 든 현우는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눈부터 질끈 감았다.

난 스크린엔 평생 못 나오고 이렇게 배우로서의 생을 마감하겠구나. 심지어 기사가 나간대도 배우 지망생으로 언급되겠지, 직업란에 배우라고 온전히 써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억울하긴 했다. 마약은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미숫가루조차 좋아해 본 적이 없구만 무슨….

대학로에서 연극하던 시절 용하다고 유명한 사주 집에서 자신을 앉혀놓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사람 잘 만나야 해. 특히 남자.’ 당시 현우가 하던 공연은 어떻게라도 설 무대가 간절하고 돈은 없으며 얼굴 하나만 볼만한 연극영화과 남학생들을 뽑아서 올렸냐는 혹평을 듣던 연극이었다. 바로 전 타임에 줄줄이 사주를 보고 갔다던 연극 단원들조차 모두 남자였다. 할아버지 딴에는 경고였지만 현우에게는 사람 조심하라는 말이나 똑같은 소리였다는 뜻이다. 대놓고 티 낼 수는 없어도 속으로는 점심 메뉴나 생각 중이던 현우에게서 시선을 뗀 할아버지가 혀를 쯧 찼다. ‘근데 또 남자를 좋아하고.’ 멈칫한 현우와 눈을 맞춘 그가 단언했다. ‘남자 복 없어, 너. 네가 좋아하는 놈은 널 안 좋아하고, 널 좋아하는 놈은 네 성에 안 차. 평생 남 좋을 일만 해줄 팔자니 일이나 열심히 하고 살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살다 보니 그의 말을 따르게 됐다. 일이나 열심히 하고 좆 빠지게 굴렀다. 그런데도 이런 역경이 닥쳐오다니. 얼마 전 들어간 기획사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새로 배정받은 매니저의 먼 친척이라던 감독이 문제였을까, 그 감독이 클럽에서 방을 잡아 주최한다던 파티가 실은 마약 소굴이었다는 걸 모르고 온 자신이 문제였을까. 생각해보니 셋 다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좆같은 인생. 현우가 허탈한 한숨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꾹 물었다.

커튼이 휙 젖혀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경찰의 습격으로 룸 하나가 벌컥 뒤집어지는 광경을 에어컨 뒤에 숨어서 다 지켜봤던 현우기에 다음에 이어질 일이 어떤 것일지 뻔히 알았다. 날 체포하겠지. 감독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심문하고. 하나, 둘, 셋…. 근데 당연히 들이닥칠 줄 알았던 고함이나 심문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현우가 꾹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제 위로 지는 그림자를 보아하니 키가 꽤 큰 것 같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겁니까?”

커튼을 열어젖힌 사람이 처음으로 낸 목소리였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어리숙한 대답부터 튀어나갔다.

“어… 아니요.”

왜냐면 그 남자는 겁내던 것조차 잊고 얼떨결에 대답부터 하게 될 정도로….

“저기, 경찰… 아니시죠?”

심히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명문이라고 유명한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거치고, 젊고 잘생긴 애들이 구르고 구르는 대학로에서만 3년을 앞구르기 한 현우조차 잠깐 얼이 빠진 채로 감상하고 말았을 만큼. 거기다 아까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줄줄이 체포해가던 험악한 인상의 형사 중 저렇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에어컨 뒤에서 숨죽인 채로 범인들보다 더 험상궂고 무섭게 생겼던 그들을 강제 관람해야 했던 현우라 더 잘 알았다. 당연히 경찰일 거라 생각하며 겁부터 먹은 게 무색해졌다.

근데 그럼 누구지? 나처럼 눈도장 찍으러 온 배우? 아니면 그냥 클럽에 놀러 온 사람? 목까지 올라온 까만 목폴라를 재킷 안에 받쳐 입은 그는 바지의 색까지도 까맸다. 색채라고는 하나도 끼어 있지 않은 옷차림을 훑던 현우가 갸웃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시선을 뺏는 얼굴을 감안해도 담백하기보단 심심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관찰하는 제 눈빛을 받으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태도만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만.

남자는 그러나 현우의 기대를 가볍게 박살 냈다. 무심히 현우에게서 시선을 내리는 행위에 이마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맞는데요.”

그가 손을 뻗었다. 현우는 한 박자 늦게 어어 소리를 내며 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패딩의 지퍼를 잡아 아래로 쭉 내렸다. 패딩 안에 있던 옷이 훤하게 드러났다. 현우를 위아래로 훑던 그의 시선이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현우의 앞에 서고 처음으로, 그가 눈썹을 꿈틀댔다.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그에게 기세가 눌린 현우에게는 크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했다.

“학생?”

아까는 그래도 존댓말을 해줬는데 순식간에 말이 짧아졌다. 그럴 만한 명분을 제공한 게 자신임을 아는 현우는 침만 꿀꺽 삼켰다. 해명해야 하는데 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현우를 재촉하듯 얼굴로 올라온 눈을 똑바로 마주친 순간에야 경찰이라던 그의 말이 사실이 맞음을 직감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씨발, 진짜 경찰인가 봐…. 눈을 못 피하겠다. 그렇게 하면 당장 죄지은 사람 취급당하며 잡혀갈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패딩 안에 교복을 입고 왔었다. 교복이 예쁘기로 유명한 학교에 다녔던 극단 후배에게 치킨 기프티콘까지 쏴주며 얻어온 거였다. 다음 작품을 위해 청소년기까지 폭넓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다던 감독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한 일이었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이런 곳까지 기어 왔냐는 힐난의 눈초리를 받을 줄은 몰랐지만.

“아, 아뇨. 이건 그냥… 그냥, 저는 졸업했고요. 몇 년 됐어요. 교복도 후배한테 빌린 거예요. 감독님이 교복 입은 모습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

해명하려다 보니 결국 그가 묻지조차 않은 사정조차 술술 불게 됐다. 방금 복도에서 수갑까지 채워진 채로 끌려가던 감독 이야기를 제 입으로 꺼낸 순간에야 현우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깐 채로 듣던 남자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당연하다는 듯 명령했다.

“신분증.”

무뚝뚝한 말투는 아까와 다름이 없는데도, 순간 스친 시선이 칼날처럼 서늘해서 현우는 쫄았다. 거기다 분명 해명을 했는데도 남자는 말이 짧았다. 못 믿겠다는 건가?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는데도, 현우는 급하게 주머니부터 뒤져서 지갑을 공손히 갖다 바쳤다. 남자는 지갑을 열더니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현우의 얼굴 가까이 들어 올렸다. 대조라도 해보는 것처럼. 바짝 얼어 있던 현우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그가 팔을 들어 올린 그 찰나에 보았던 허리춤의 수갑을 힐끔 확인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변호했다.

“저,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상황인 거 같은데 저는 진짜 마약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하늘에 맹세컨대 마약에 관심 가진 적도 없고요. 앞으로도 절대! 절대 없어요. 클럽도 사실 뒤풀이 아니면 잘 안 오거든요? 근데 온 건 감독님이 오신다고 해서, 매니저 형이 자기가 힘써주겠다고 한 번만 가보라고 해서 눈도장이나 찍어보려고 온 거예요. 근데 방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저기, 저기 코너에 달린 CCTV 확인해보면 아실 거예요. 저 진짜 이런 일이랑 관련 없는 선량한 사람이에요. 군대도 멀쩡히 잘 다녀왔고요. 진짜로요.”

남자가 믿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현우의 해명을 듣는 척조차 안 했고, 다음 순간에는 들고 있던 주민등록증까지 밑으로 내렸다. 아까나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 했어요?”

무심한 말투에 침을 꿀꺽 삼킨 현우가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어… 네. 일단은 그런 것 같은데요. 최선을 다해 한 변호가 먹혔는지 아니면 주민등록증 사진과 얼굴이 비슷하다는 걸 알았는지, 남자가 현우의 지갑을 돌려줬다.

“다음에 스스로 변호해야 할 때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마약 사범들도 열에 아홉은 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남자는 그 와중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말을 끄는 법이 없는 딱딱한 말투는 그러나 듣기 좋은 음역대의 저음 때문인지 깔끔하게 들렸다. 볼일이 끝난 것처럼 몸을 돌리던 남자가 멈칫하고는 뒤돌았다. 그의 시선이 현우의 교복 와이셔츠 깃에 박혀 있었다.

“클럽에 교복 입고 오라고 시키는 감독 작품은 더더욱 하지 말고.”

또 한 번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건너왔다. 조언 같은 내용과는 다르게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상황과 맞지 않게도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서도 또 한 번 던진 반말은 의도가 있는 걸까.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 적을지 궁금했다.

“이틀 뒤에 서울특별시경찰청 방문해서 신분증 찾아가요. 주장한 것처럼 아무런 죄도 없는 게 확실하면 앞에 맡겨둘 테니까.”

뭘 맡긴다는 거지? 현우는 한 박자 늦게 그에게 돌려받은 지갑을 열어 봤다.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현우는 다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벌컥 뒤집어진 룸의 사정이라고는 모르는 클럽 스테이지로부터 쿵쿵 들려오는 비트 소리가 제 심장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현우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복도 끝을 걸어가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단정했다.

“네, 반장님. 현장 한 번 더 확인했고 특이사항 없습니다.”

* * *

그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튀는 비주얼 때문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생김새까지 외울 정도로 빤히 들여다본 덕분이기도 했다. 혹시나 제 기억에 있던 모습이 왜곡되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할 찰나, 현우는 눈을 번쩍 키웠다. 그 남자였다.

“저, 저기요!”

언제 나올지 모를 그를 기다리느라 내내 추위 속에서 떨고 있었던지라 덩달아 얼어붙었던 입술 사이로 말이 어눌하게 튀어나갔다. 정확한 발음이 생명인 배우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현우가 습관처럼 속성으로 입을 풀었다. 아이우에오. 걸음을 멈춘 남자는 현우를 기다려줬다. 정확히는, 현우가 다급하게 소리부터 치며 무작정 앞으로 뛰어들어서겠지만.

그사이 입 풀기를 마친 현우가 앞을 봤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빛을 확인한 순간에는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입을 열었다.

“저 기억나세요? 그때 왜 클럽에서….”

“…아.”

남자가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아. 흩어지는 입김처럼 가벼운 호응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저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현우는 목을 큼큼 다듬는 걸로 서운함을 털어냈다. 어차피 제게는 명분이 있었다.

“그거 신분증 찾으러 왔는데.”

“1층 가서 이름 말하면 줄 겁니다. 맡겨뒀으니까.”

어엇… 이게 아닌데…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잠깐 넋을 놓았을 뿐인데 남자가 이내 까마득히 멀어졌다. 정신을 차린 현우는 또 한 번 달리기부터 했다. 아까 두 시간 넘게 경찰청 입구 주변을 어슬렁대다가 그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움직였던 것처럼.

“…….”

또 한 번 앞길을 막아선 현우를 본 그가 멈칫했다.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을 본 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다. 남자는 제 취향이었다. 이런 미친 짓까지 감행하게 할 정도로. 현우가 호기롭게 말을 걸었다.

“저 그 사건이랑 관계없는 거 확실해진 거죠?”

현우는 오늘 아침에 뜬 기사를 봤다. 최형복 영화감독을 비롯해 체포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다던 영화배우들의 이니셜이 거론된 기사들. 실명을 밝히지는 않기로 합의가 된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추측은 웹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때 패딩 만지는 척 제 머리카락도 몇 가닥 뽑아가셨잖아요. 검사 끝난 거죠? 그런데도 딱히 이상 없으니까 신분증도 돌려주시는 거고요.”

그걸 눈치챈 게 의외라는 듯, 남자가 처음으로 현우를 빤히 보았다. 그와 눈을 맞춘 채로 현우는 침을 삼켰다. 이 말을 하려고 두 시간 내내 기다렸다. 제 발로는 직접 걸어올 일 없는 곳까지 찾아와서. 사실 신분증을 찾기 위해서는 매니저 형에게 부탁만 했어도 됐다. 그러지 않고 직접 찾아온 건, 눈앞의 남자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앞에 선 그의 목에 걸린 아이디카드에서 확인한 이름을 재빨리 속으로 되뇌었다.

지선욱.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대사처럼 그 이름을 외우며, 동시에 패기 넘치게 뱉었다.

“그럼 저랑 밥 먹어요.”

“…….”

“술도 좋고요. 뭐든 먹고 싶은 걸로요.”

남자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까인 걸까? 두려워질 정도로. 그래도 어디 가서 까여본 적은 없는데, 대시를 받았으면 받았지. 재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현우는 기다렸다. 을은 자신이니까. 지금 이 사람이 제게 보이는 태도만 봐도 관심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뭐, 그거야 앞으로 알아가며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고.

“고향이 어디예요?”

남자가 한참 뒤 뱉은 질문은 생뚱맞았다. 어떤 대답이든 받아칠 자신이 있었던 현우조차 당황해 되물을 정도로. 네? 현우의 눈을 무감각하게 들여다보던 남자가 물고 있던 담배를 옆의 재떨이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현우보다 키가 컸다. 가까이 서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사투리 쓰는 것 같아서.”

남자가 제게 건넨 첫 사적인 질문이었다.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좋은 신호 같았다. 그나저나 배우 생활하며 제일 먼저 고친 게 사투리라 이렇게 알아채는 건 어려운데. 갸웃하길 잠시, 현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저 충청도 출신인데… 서산이라고, 아세요?”

놀라지도 않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현우가 이어 말하려는데 남자가 그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현우가 하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는 것에 그치던 그가 대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보인 의지였다.

“제 친구랑 닮았어요.”

“저요? 어떤 점이요?”

“이렇게 앞뒤 안 가리고 들이대는 거.”

“…….”

“그래도 걔는 제가 싫다면 안 해요. 애초에 장난으로 하는 짓이라.”

현우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대놓고 꼽을 주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도,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재주가 있다. 굳이 선을 넘지 않아도 벽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현우는 어떻게든 그 벽을 뚫어보려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도 일단 친구부터 하면 안 될까요?”

남자가 담배를 빼어 물려다 말고 눈만 올려 현우를 봤다. 필터를 느슨하게 물며 그가 짧게 웃었다. 그게 웃음이었는지 비웃음이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거뒀지만.

“굳이?”

그 두 글자는 마치 이 상황에 대한 요약본 같았다. 마스크를 끼고 롱패딩으로 몸을 꽁꽁 감싸면서까지 오늘 경찰서 앞에 내내 서 있던 행동이나, 이렇게 저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행위를 돌아봤을 때 적절한 평가긴 했다. 저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참 열심히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해야만 했다.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자의 이런 말조차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는 걸로 털어내고는 빠르게 말했다.

“친구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

“그러다가 더한 거 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고작 두 번째 만남에서 이렇게 가진 패를 다 까게 될 줄은 몰랐지만, 눈앞의 남자는 설렁설렁 뱉은 말에 쉽게 넘어가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닌 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현우는 속마음을 완전히 까발렸다.

“마음에 들어서요. 그쪽이.”

처음 들어보는 고백은 아니겠지. 남자에게 들은 건 처음일지 몰라도.

아까 확인했음에도, 현우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더 남자의 왼쪽 손가락부터 확인했다. 약지에는 반지 대신 담배만이 걸려 있었다. 그가 갑자기 등장한 현우 때문에 불조차 붙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다시 봐도 정략결혼을 약속한 약혼녀쯤은 있게 생겼다. 귀공자 같은 외모며, 타인에게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묘하게 관조적인 태도까지도.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현우를 빤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치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생각하는 사람처럼. 현우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에게 고백했을 수많은 사람들과 차이를 둬야 할 필요를. 도박이었으나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서 싫어요?”

멈칫한 남자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현우는 모순적이게도 그 얼굴에서 희망을 읽었다. 마치 지나가는 행인을 대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던 태도가 처음으로 진지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현우가 진심이라는 것을 막 알아챈 사람 같았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음을 표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돌아온 대답에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정도는 아니었다. 저 얼굴에 저 몸인데 엮인 누군가가 없다면 그게 더 수상할 터였다. 그래도 ‘애인 있어요’가 아닌 게 어디야? 현우가 호방하게 받아쳤다.

“잘됐네. 저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난 헤어지지도 못해요.”

“…….”

“그럴 생각도 없고.”

어, 인정. 방금 건 좀 셌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아쉽다. 어차피 사귀는 것도 아니라면서. 물러서는 것 대신, 더 깊이 파고든 이유였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못 헤어진다는 게 이상한데요. 자의예요, 타의예요?”

질문이 의외였는지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현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틈을 파고들었다.

“그것도 모르는 거면 일단 나랑 먼저 해 봐요. 누가 알겠어요?”

“…….”

“당장 저조차 지난주만 해도 경찰한테 이렇게 들이댈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남자가 뭐라고 입을 떼려던 순간,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 지 경위. 여기 있었네? 점심 아직인가? 정 기자랑 요 앞 국밥집 갈 건데, 같이 갈래?”

누군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은 순간, 현우는 그가 남자의 직장 동료임을 눈치챘다. 나이대가 꽤 있는 그들은 친숙하게 말을 걸며, 옆에 있던 현우를 대놓고 흘깃댔다. 가볍게 훑어보는 건데도 눈초리가 날카롭고 노련했다. 마치 그게 업인 사람들인 것처럼.

“누구예요? 선욱 씨 친구?”

직장 동료가 부르기에는 애매한 호칭에 고개를 돌린 현우는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작년 말 현우가 출연한 독립영화 GV에 들어왔던 연예부 기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 또한 현우가 낯이 익은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현우를 빤히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듯 간간이 이마를 찌푸리기도 했다. 현우는 마스크부터 재빨리 위로 올려 썼다. 아마 그 감독 일 때문에 경찰청에도 연예부 기자가 드나들게 된 모양인데, 비록 혐의가 없다고는 하지만 현우를 이곳에서 보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게 없었다.

“고향 동생입니다.”

현우는 눈을 끔벅였다. 제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등을 보며, 그게 연예부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몸짓임을 눈치챘다. 다행히 그는 자신보다는 신임이 높은지 별다른 의심 없이 일행들이 떠나갔다. 주차장을 벗어나기 전 한 번 더 뒤돌아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뻔한 현우는 롱패딩의 모자부터 푹 눌러썼다.

남자가 제게로 뒤돈 것도 동시였다. 현우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을 걸었다. 이렇게 보호해주려는 걸 보니, 더는 자신을 무시할 일은 없겠다 싶어서.

“그쪽 얼굴 보려고 두 시간 넘게 기다렸어요. 배고파요.”

“…….”

“저 앞에 유명한 국밥집 있는 것 같던데… 그 옆에 파스타 집도 평 좋더라고요. 둘 중 끌리는 데 아무 데나 가요. 참고로 저는 뭐든 잘 먹어요.”

언제 나올지도 모를 사람을 내내 기다리며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문 맞은편의 국밥집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훌륭한 눈요기가 됐다. 파스타 집은 혹시 몰라서 찾아본 거였고. 따지자면 국밥은 제 취향이 아니지만 일단 던져는 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 머리가 벗겨진 남자도 국밥집에 가자고 했었지. 제 취향은 둘째치고, 남자가 좋다면 기꺼이 따라갈 의사가 있었다. 현우를 두고 남자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됐지…. 자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짧게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정리했다. 정문 앞에 음식점들을 훑던 그의 눈이 현우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자 좋아해요?”

그가 고른 건 국밥도, 파스타도 아닌 제3의 메뉴였다. 그러나 현우는 그가 제시한 중재안이 마음에 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유였다.

“완전 좋아하죠.”

* * *

나는 주변부터 살폈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대도, 이렇게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을 텐데 이상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현우의 일행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대신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힐끔거리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앳된 얼굴들이 서로 귓속말을 하며 연신 이쪽을 기웃거렸다. 현우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들 말고는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고 있으니 위험한 상황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었다. 관계는 끝나도 습관은 남는다. 같이 있을 때 타인의 시선부터 의식하게 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머릿속으로는 이 마트에서 가장 붐비지 않는 곳이 어디일지를 생각하면서.

“혼자 왔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놈은 눈이 똑바로 마주친 순간에야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 형은 주차 중이고, 나만 먼저 올라왔어.”

대답을 마치자마자 경직된 몸짓으로 마스크를 조금 더 올리는 걸 보니 그제야 자신이 혼자 이곳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뭔데?”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들고 있던 고기 팩을 카트 안으로 던진 놈의 시선은 현우가 아닌 내게 박혀 있었다.

누구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뭐냐니. 그러나 이지훈다운 질문이었다. 불쑥 등장한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것조차. 마치 어떤 대답을 듣는지에 따라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겠다는 것처럼.

이지훈은 평소같이 구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현우랑 함께 있는 걸 본 사람들이 묻던 때처럼 고향 후배니 친구니 둘러대면 될 일인데, 그럴 수 없었다. 이지훈은 현우가 내게 고향 후배는 물론이고 친구도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지훈?”

나를 따라 이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던 현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댔다. 작은 소리였으나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우리 셋의 귓가에는 무리 없이 닿았다. 말하는 순간마저도 긴가민가한 것처럼 보이던 현우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그게 사실임을 확인받은 것처럼 헛웃음을 쳤다.

“형, 진짜….”

마스크 때문에 얼굴의 반이 가려졌는데도, 놈이 방금 발견한 이 사실에 질려 하고 있다는 건 여실히 느껴졌다. 현우와 헤어진 지는 2년이 넘었다.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현우는 방금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게 됐다. 헤어진 그때나 지금이나 이지훈만은 여전히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뭐냐니까.”

이지훈이 길어지던 침묵을 끊고 내게로 다가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대답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현우 쪽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였다. 그걸 눈치챈 듯 주춤했던 현우는 그러나 다음 순간 내게 다가서며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좀 해.”

“…….”

“형한테 할 말 있어. 그것 때문에 연락했다가 번호 바꾼 거 알게 된 거고.”

눈이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지만, 말투는 역설적일 정도로 차분했다. 마치 정말 준비해 둔 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아까 마주친 순간 느꼈던 감정들과는 무관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까 밀어냈던 현우의 손이 또 한 번 팔꿈치께에 닿았음을 느꼈다. 이지훈의 눈 또한 그 부분에 쏠려 있다는 것도.

나는 아까 교복 입은 학생들이 서 있던 곳부터 한 번 더 확인했다. 그중 한 명이 핸드폰을 들어 이쪽을 찍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쭈뼛대며 핸드폰을 내리는 그녀를 보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이쪽을 흘긋대며 호들갑을 떠는 학생들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의 관심도 차츰 모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만두를 굽는 중이던 아주머니가 학생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것까지 보니 결심이 섰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현우 쪽은 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는 발언은 무책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그것도 이지훈 때문에.

“먼저 차에 가 있어. 잠깐 이야기하고 갈게.”

상황을 정리하고자 뱉은 말이었다. 이지훈이 그렇게나 재촉하던 답을 드디어 내놓은 순간이기도 했다. 듣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이지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가는 게 맞냐?”

“…….”

“우리가 먼저 같이 있었고. 저쪽이 끼어든 건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따져 묻는 이지훈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말랐다. 이지훈에게 전 애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 적 없다. 남자를 만난 것조차 숨기고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현우는 이지훈의 존재를 알지만, 이지훈은 현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이지훈에게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고백했음에도, 이 순간 현우가 전 애인이라는 사실조차 고하지 못하는 나는 어쩌면 그 시절에 계속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지훈이 의미 없이 던진 저런 말에 마치 꿰뚫린 사람처럼 이렇게 멈춘 거겠지.

대답 없는 나를 보던 이지훈이 피식대며 고개를 저었다.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카트 팔걸이에 팔을 기댄 채로 쭉 늘이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헷갈리게 하네, 진짜….”

물음처럼 들리는 말은 그러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딴 곳을 보던 이지훈은 다시 고개를 든 순간에는 표정을 싹 지웠다. 아까 장을 보던 때와 별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차 키 줘.”

어찌 됐든, 내 말을 따라주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도 점점 몰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던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 마트로 올라오며 이지훈에게서 건네받았던 차 키를 다시 놈에게로 던졌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받아내는 이지훈을 확인하고서는 현우에게로 뒤돌았다. 현우가 들고 있던 작은 장바구니부터 뺏어와 옆으로 치웠다. 어차피 매니저가 쇼핑은 알아서 해줄 터였다.

“비상계단 쪽으로 가자.”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잘 없는 데다가, 매니저가 있는 주차장이랑도 연결되어 있을 테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를 이끌려던 때였다.

“근데.”

당연히 나를 부르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렸는데, 시선이 엇갈렸다.

“나 알아요? 나는 그쪽 모르는데.”

이지훈이 현우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답할 수 없는 처지일 현우는 입술을 깨물며 이지훈의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둘이 오늘 전까지는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는 사실을 막 알아챈 것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현우를 바라보던 이지훈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차 키를 달랑달랑 흔들면서도, 걸음을 옮기는 몸짓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현우와 나 사이에서 멈춘 이지훈이 현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지훈.”

왜 이렇게 날을 세우는 건지는 몰라도 이지훈이 상황을 거북하게 만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이름을 부른 게 기분이 나쁠 수는 있대도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시비를 걸 일은 아니었다.

“뭐 하는 짓이야. 하지 마.”

경고하듯 이지훈을 부르며 놈의 팔을 잡았다. 나를 흘깃 본 이지훈은 잡힌 팔을 가만히 둔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난 그쪽 이름을 몰라도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쪽은 그럴 수가 없었다는 뜻이죠. 아쉬운 쪽도 그쪽일 거고. 그러니까….”

현우는 이지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위를 똑바로 쏘아보는 눈빛을 받아치던 이지훈이 대화를 마무리하듯 씩 웃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예의부터 차리기. 싸가지 없이 남의 이름 막 부르지 말고. 오케이?”

빙글대고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게 경고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현우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지훈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내게로 무언가를 던졌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받아내고서야 그게 아까 카트 안에 들려 있던 냉동식품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무표정해진 놈이 명령하듯 말했다.

“그거 녹기 전에 와.”

“…….”

“한번 녹은 건 다시 얼려 봐야 맛없으니까. 알았지?”

아, 면도 크림도 사 오고. 다 떨어졌더라.

귀로 흘러 들어온 말을 미처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지훈이 사라졌다.

* * *

사랑에 대한 영화가 참 많다는 걸, 나는 현우와 사귀면서야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 전에는 일부러 피했던 것 같기도 했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사람은 내가 해본 가장 오래된 사랑뿐이었는데, 그러려면 이지훈을 생각해야 하고, 그건 걔를 사랑하고 나서부터 매 순간 더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온 내가 차마 반길 수 없는 행위였다.

처음으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날, 의자에 어정쩡히 앉은 나를 본 현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따분한 얼굴 하지 말지? 대놓고 면박을 준 이유를 알게 될 정도로 현우는 영화 내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나조차 놈을 따라 화면에 어떻게든 시선을 두게 되었을 만큼.

사랑 영화들은 풀어내는 방식이 달랐을 뿐 다루는 이야기가 거의 비슷했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면 뒤에는 꼭 싸우는 장면이 나오고, 남들과 별다를 것 없는 연애를 하다가, 필연적으로 이별했다. 근데도 현우는 그 영화를 보며 울었다. 헤어질 때 주인공 표정이 너무 슬펐다며, 어쩌면 평범한 이별이 가장 슬픈 이별일 수도 있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나는 머쓱하게 앉아 있다가,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팸플릿이나 들춰 봤다. 크게 적힌 홍보 문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그래서 특별한 연애>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그 말이 기억났다. 심지어 현우가 내게 헤어짐을 통보한 순간까지도. 그건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던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야근을 하느라 늦고, 날 기다리던 현우가 혼자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 것마저 그랬다.

‘꽤 됐더라.’

‘뭐가.’

‘우리 이러고 지낸 지.’

오랜만에 본 거였다. 신인 시절 눈도장을 잘 찍어두었다던 감독의 신작에 들어간 현우가 대중으로부터 슬슬 반응을 얻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바빠졌고, 만나는 빈도수가 줄었다. 그러려니 했다.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설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자리였지만, 애초에 우리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만난 사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현우는 세상에서 가장 지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같은 배를 타고 있었지만 늘 노를 저었던 건 자신뿐이었음을 막 깨달은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대면서 내게 서러움을 토로했다.

‘몰랐는데, 나도 지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봐.’

‘…….’

‘힘들다, 형. 나 혼자 이러는 거.’

그건 우리가 만나고 나서 현우가 처음으로 꺼낸 힘들다는 말이었다. ‘혼자’라고 자신을 뚝 떼어 말한 것도. 관계의 끝에 다다라서야 뱉을 수 있던 그 말은 어쩌면 우리의 연애놀음을 정의하는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짓은 다 하고 지냈는데도 걔는 그 모든 시간을 혼자 애쓰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미안해.’

그게 왜인지를 알아서 미안했다.

그러나 그건 현우가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을 거다. 큰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면서도, 난 그걸 닦아주고 달래줄 생각까지는 안 들었다. 그건 내 한계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 연애를 흉내 내도, 정작 그 핵심에는 가닿지도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난 사랑을 한곳에만 쏟았으니까. 내게 늘 사랑을 갈구하는 그 애를 두고서도.

‘형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늘 그 흔한 핑계도 하나 안 대주더라.’

‘…….’

‘그래서 힘들어도 티를 못 냈어. 내가 아무리 티 내 봤자, 형은 알아채 줄 성의조차 없고 알아챈대도 바로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았거든.’

‘…….’

‘형이 한 번만 내 처지가 되어 봤다면….’

지금 생각하면 걔는 핑계조차 대지 않는 나에 질렸던 것 같다.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눈을 붉힌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 키며 지갑을 외투 주머니 안으로 마구 쑤셔 넣는 걸 보면서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붙잡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한 이 년가량의 시간이 쪼개지는 순간이었다. 둘 다 그 소리를 들었지만 쪼개진 장작에 불을 붙일 엄두는 못 냈다.

‘아니다. 형은 이미 알지.’

‘…….’

‘형도 그런 처지라서 나한테 이렇게 정 못 붙이는 거잖아.’

눈물로 젖은 마른 장작을 보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한 번 더 말했다.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현우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방금까지 현우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보았다.

매운 걸 좋아하는 놈이 나를 먹이겠다고 시켜 놓은 맹탕 같은 감자탕을 보는데 그제야 언제 도착하냐는 질문에 먼저 먹으라는 성의 없는 대답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대화를 한 건 오후 9시였고, 현우는 그 이후 내게 그 어떤 메시지도 받지 못하고 새벽 1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생각해보면 현우와의 연애 내내 그랬다. 뭘 물어봐도, 정해진 답변만 했다. 시시한 추가 질문 한 번 덧붙이는 법이 없었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걔가 그렇게 물어봤을 때 뭐 먹고 싶은 건 없냐며, 내가 사갈까 한 번 물어보기만 했어도 좋아했을 텐데.

후회조차 될 수 없는 미적지근한 미안함을 소화하며,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더 써 전송하고는 테이블 위의 음식을 정리했다. 탕이며, 반찬이 죄다 식어 있었다. 손을 댄 흔적도 없는 음식을 버리며, 우리의 한 번도 뜨거워 본 적조차 없던 그 관계가 정리됨을 느꼈다.

다행히 현우는 잘 극복 중인 것 같았다. 놈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보이기엔 그랬다. 아는 사람이 길에서든 티비에서든 얼굴을 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좋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다. 광고도 곧잘 나왔고, 주연도 턱턱 맡았다. 지나가다 전광판에 있는 놈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빈도수가 늘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 잘되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살면 좋겠다고.

언젠가 마주치면 묻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좋은 사람과 있냐고, 네가 날 잊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둘이 같이 살아?”

그러나 아까 마주친 것만으로도 눈물을 글썽이는 현우를 본 순간, 나는 평생 현우에게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잊으라고 말하는 건 권력이었다. 아직도 권력은 내가 쥐고 있었고, 현우는 내가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기꺼이 내게 목줄을 쥐여줄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다다르자마자 현우가 급하게 뱉은 말은 그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주친 시선부터 끊었다. 대화가 다른 곳으로 뻗어가지 못하게, 아예 가지부터 잘라냈다.

“할 말 있다며.”

“…형.”

“얼른 이야기하고 돌아가. 사람들 더 몰려 봐야 너한테 좋을 것 없어.”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눈을 외면하고는 고개를 틀어 현우 뒤의 회색 벽을 응시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날 애매한 악인으로 만들었다. 현우는 나와 헤어졌어도, 나를 미워하지는 못했다. 미적지근한 마음은 어차피 도움이 안 된다. 그런 미적지근함은 누군가에게는 온기로 다가가겠지만, 나보다 마음의 온도가 높은 사람에게는 절대 원하던 만큼의 온기를 줄 수 없을 것이므로.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는 알겠는데….”

“…….”

“그러지 마. 형이랑 안 어울려.”

멈칫한 고개가 현우에게로 돌아갔다. 현우가 고개를 한 번 더 저었다.

“못되게 굴고 그런 거… 진짜… 진짜 안 어울려, 형이랑.”

눈과 코끝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도, 목소리만은 떨리지 않았다. 아까 팔을 급하게 붙잡던 것과는 딴판으로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놈을 생각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사이 현우가 어딘가에서부터 배운 것일 터였다. 헤어진 후 시간이 흘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알겠는데, 난 형 붙잡으려는 거 아니야. 다시 만나자는 말 하려는 것도 아니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

“아까는 그냥… 그냥 오랜만에 형 보니까 반가워서 그랬어. 얼마 전에 인터뷰하면서 형 생각났었거든. 근데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게 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거야. 괜히 나한테 날 세울 필요 없어.”

설명을 이어가는 내내 진심을 전하듯 시간을 두고 조용히 깜빡이는 눈을 바라보는데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습관처럼 나가려던 미안하다는 말을 꾹 참고는, 겨우 다른 말을 뱉었다.

“…그래. 알겠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깬 건 현우였다. 아까 내가 그랬듯 주변을 한 번 더 살핀 놈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볼륨을 줄였다. 마치 그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얼마 전에 업계 모임 나갔다가 이야기를 하나 들었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현우가 하는 이야기는 왜 헤어지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전화를 하려고 마음먹었는지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을.

“김명림 감독 알아?”

낯선 이름이었다. 고개를 젓는 나를 본 현우가 설명했다.

“그때 잡혀갔던 최형복 감독이랑 친하기로 유명한 감독이야. 듣기로는 동창이래.”

최형복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도 누군지가 떠올랐다. 강남의 한 클럽의 룸에서 끌려 나오던 그가 약에 취해 팔을 휘두르던 것도. ‘야 이 새끼들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최형복이야! 최형복이라고오!’

“김명림 감독에 관해서 이야기가 안 좋게 돌아. 강원도에 별장이 하나 있는데, 이 주에 한 번 배우들을 초대해서 푸지게 노나 봐. 들리는 말로는 난리인 모양이야. 참석자들은 해가 뜰 때까지 나가지도 못하게 잡아두고,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리며 갑질한다고.”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아직은 선연히 닿아오는 게 없었다. 내 표정을 본 현우가 잠깐 망설이듯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빠르게 말했다.

“이상한 건, 그런데도 참석자가 줄기는커녕 늘어.”

“…….”

“왜인지는 몰라. 듣기로는 룰이 있대.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 비밀 클럽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리고 있나 봐. 참석자들 입단속도 철저히 시키고.”

“…….”

“얼마 전에 우리 회사 신입 배우 하나가 멋모르고 거기에 초대되어 갔다가 다음 날 발작하면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위세척까지 해야 했고. 근데 죽다 살아난 건데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하려 하는 거야. 대표님이 협박하다시피 일주일을 구슬리고서야 겨우 뱉었어.”

낯설게 시작한 이야기는 익숙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낭떠러지를 향해 올라가는 수레바퀴를 보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가장 약한 거로라도 먹어야만 했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 같았다고. 근데 몸에서 생전 처음 들이켠 약물을 못 받아들인 거야. 그러니 실려 간 거고.”

“…….”

“웃긴 게 뭔지 알아? 지들이 숨 못 쉬는 애 죽일 수는 없으니까 응급실 차를 부르기까지 해놓고, 퇴원하는 날에는 귀신같이 전화해서 떠봤대. 청소하려고 둔 왁스 물을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에 놓아둔 가정부를 해고했다 어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면서. 근데 대표님은 그 말 듣고서도 그냥 덮기로 했나 봐. 어차피 건드려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바쁘게 움직이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물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참지 않고 물었다.

“너 갔어?”

“…….”

“현우야.”

“걱정하지 마. 안 갔으니까. 마약 이야기 듣기 전까지는 하도 말이 많길래 궁금해서 직접 가보고 싶었는데, 보다 보니 잘못 엮이면 좆되겠다 싶어서.”

고개를 젓는 얼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습게도 안도했다. 방금 들은 정보를 한 번 더 곱씹는 날 보던 현우가 입을 달싹였다.

근데, 형. 있잖아.

“그 별장에 관한 소문 퍼지기 한참 전부터 그곳을 다녔다고 유명한 배우가 있는데….”

잠깐 말을 끌던 현우가 마치 당기고 있던 방아쇠를 풀 듯 놓았다.

“차혁준이야.”

형이 가끔 나한테 물어보던 사람 맞지? 그거 듣고 나서 어떻게든 형한테는 꼭 말해줘야겠다 싶었어.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마지막에 냉동식품을 안기며 녹기 전에 오라고 꼬장 아닌 꼬장을 부렸던 놈이니 먼저 가버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걱정과는 달리 이지훈은 주차된 차 안에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보조석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시선은 쉬이 들리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심드렁히 묻기는 했다.

“면도 크림은?”

아… 맞다. 어쩐지 뭔가를 잊은 것 같더라니. 차에 탈 때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 그걸 사 오지 않은 걸 콕 집어 물은 걸 신기해하기도 전에 머쓱해졌다. 나는 들고 있던 냉동제품부터 뒷좌석에 얌전히 올라가 있는 봉투 두 개 위로 얹어둔 뒤 보조석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까먹었다. 얼른 사 올게.”

문은 열리기는커녕, 오히려 철컥대며 잠겼다. 고개를 돌린 순간, 핸드폰을 앞으로 던지듯 놓는 놈을 발견했다. 방금 내가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을 잠근 게 이지훈이라는 뜻이었다.

“됐어.”

“다 떨어졌다며.”

“어. 없길래 내가 샀으니까 됐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놈을 보는데 장난인 건지, 진담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엔 몸을 돌려 봉투 안을 확인했다. 봉투 안에 손을 넣어 휘저을 필요도 없게, 봉투 상단에 자리한 4개들이 면도 크림을 확인한 순간에는 이지훈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살 거면서 나한테 왜 사 오라고 했는데?”

“네가 기억하고 사 올지가 궁금해서.”

“…뭐?”

“혼자 이렇게 기다리던 나도 같이 상기시킬 겸?”

별 지랄을 다 한다. 나는 의미 없는 말씨름 하기를 관두고 안전벨트를 끌어와 맸다. 보고 있던 핸드폰까지 내려놓길래 바로 출발할 줄 알았더니, 이지훈은 시동을 거는 대신 내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덜렁 부사만 내어놓더니 한참을 말없이 날 보는 놈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길을 터주듯 물었다.

“뭐가.”

기다렸다는 듯 이지훈이 말을 받았다.

“네 전 남자친구가 뭐라는데?”

앞으로 몸을 숙여 핸들에 팔을 얹은 놈은 차를 운전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앞으로 할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는.

“…….”

“…….”

도망칠 수 없는 공간에서, 정적이 안개처럼 낮게 깔렸다. 이지훈은 내 반응을 굳이 두 눈으로 관찰해야겠다는 양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보조석 문을 잠그며 퇴로까지 차단해놓고서도 굳이 눈으로도 날 구석으로 몰았다. 낮이든 밤이든 똑같이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에서 빛을 내는 건 주차할 자리를 찾기 위해 같은 자리를 맴도는 차들이 뿜어내는 불빛뿐이었다.

“민현우. 맞지?”

끼익. 바퀴가 크게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이지훈의 몸 위로 그늘이 졌다가 사라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지는 불빛들 속에서 우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이지훈이 그냥 던진 말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대답했다.

“언제 알았어.”

또 한 번 타이어가 공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훈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차를 흘깃 확인하는 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 번잡함 속에서도 눈가 한 번 찡그리지 않은 놈의 입술이 매끄럽게 열렸다.

“뭘 언제 알았냐고 묻는 건데?”

“…….”

“걔가 포털사이트에 이름 치면 나오는 사람인 거, 아니면 네 전 남자친구인 거?”

포털사이트 이야기까지 꺼내는 걸 보니 현우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도 이미 눈치챈 듯했다. 언제부터 알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나온 이상 더는 모른 척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 이 사실을 들킨 나에 반해 이지훈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았는지 정도야 가볍게 숨길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굳어 있던 혀를 움직였다.

“둘 다.”

이지훈이 희미한 신음과 함께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목뒤를 주무른 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 화장실 서랍 확인은 하냐? 구석에 있는 거.”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으며, 왜 묻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하고서야 그게 세면대 아래에 붙은 작은 서랍을 말하는 거란 걸 알았다. 수건이며 면도기 등을 놓아두는 서랍은 옆에 따로 있어 신경조차 쓰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있었던 가구이니 굳이 제거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뿐. 나조차 잊고 있던 걸 언급하는 이지훈의 의도를 돌이켜보려던 행동은 얼마 전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서야 멈췄다.

‘네가 그냥 중학교 친구였으면, 내가 일주일에 삼백씩 내버리면서 친구 집 화장실이나 청소하고 있진 않겠지?’

강영수의 생일, 레스토랑의 화장실에서 이지훈이 꺼낸 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문장을 다시 화두에 올리는 놈은 아마 내가 알지 못하던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확인해본 적 없지? 있다는 것도 잊고 살았겠지, 분명.”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묻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니 걔가 그런 걸 속 편히 숨겨두지.”

“…….”

“향수, 면도기, 콘돔까지 다 그 안에 있어.”

이지훈이 확신하고 말하는 걔는 현우인 걸까.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와 헤어졌다. 그 이후로 만난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그런 걸 놓고 갔다면 현우일 수밖에 없긴 했다. 나는 2년간 열어보지 않았던 서랍을 생각했다. 현우가 어떤 의미로 남기고 간 건지 알 수 없는 그 물건을 가장 처음 확인한 사람이 이지훈이라는 게 얼마나 얄궂은 우연인지에 대해서도.

“그중 네가 쓰는 브랜드 건 없고.”

아까 현우에게 다가서던 이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 놈은 확신했던 걸까. 현우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 안의 면도기를 확인해서인지, 아니면 현우의 향수 냄새를 맡으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헛웃음을 삼키며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뱉어낸 고백의 후유증이 꽤 깊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그간 궁금해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연애 이야기를 이지훈과 하게 된 것들만 봐도 그랬다. 무엇보다 앞으로 두 달간 이런 일이 종종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 껄끄러웠다. 그때마다 놈은 이렇게 모든 걸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덤벼들겠지. 아마 거기서 어떻게든 찾아낸 빈틈으로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긋난 집착이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막막한 한숨을 뱉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이야기해. 뭐가 궁금해서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는데.”

이지훈을 보는 것 대신 차 키조차 꽂혀 있지 않은 운전석에 시선을 박았다. 이 대화를 어떻게든 끝내야만 차가 움직일 거라는 사실이 아득했다. 이지훈의 차가 고장이 났고, 욕조 공사 때문에 집에 물이 샜고. 하나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위기를 어떻게든 기회로 바꾸려는 이지훈의 의지까지 섞이니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됐다.

이전처럼 잘 대화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깨닫게 된다. 우리가 다른 목적으로 지금 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걸.

“소속사 위드현컴퍼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영화과, 연극 <벼락 맞은 남자들>, 제65회 백상예술대상 남우 신인상.”

외운 것처럼 줄줄 읊는 정보들이 익숙했다. 현우의 프로필이었다.

차에 올라탔을 때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지훈의 옆태를 떠올렸다. 집중해서 화면을 내려다보던 행위가 현우의 프로필을 보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에는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돌아본 이지훈이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정보의 출처를 고하는 목소리가 평온했다.

“마트 나오는데 사방에서 민현우, 민현우 난리더라고. 덕분에 이름은 쉽게 알았어.”

“…….”

“궁금한 게 뭐냐고?”

“…….”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이런 쓸데없는 정보들 빼고 싹 다.”

단순히 전 애인을 소개한 적 없다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지훈과 연애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스무 살 이후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일부분을 모르면서도 줄곧 함께했다. 그래서 이지훈은 서른을 앞둔 지금에야 그 경계를 묻고 있는 거였다. 애매한 관계에서 어딜 당겨야 조금 더 확실해질까 고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넌 어디까지 말해줄 수 있는데?”

약간의 호기심마저 읽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한참 목구멍 안을 괴롭히다 나간 말치고는 생각보다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강영수한테도 이랬어?”

“뭐가.”

“전 여자친구랑 마주친 자리에서 예의 없이 굴고, 사귈 때 뭘 했는지 묻고.”

나와 이지훈이 서로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동안에도, 강영수만은 예외였다. 나의 커밍아웃 이후 강영수도 셋이 있는 자리에서는 암묵적으로 연애 이야기를 제외하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우리 각자와 연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강영수가 현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지훈은 강영수의 과거 연인은 물론이고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에게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강영수가 자그마치 중학생 때부터 조르고 있는 더블데이트 한 번을 안 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 그랬지?”

묻는 순간마저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는 이지훈을 보니 확실해졌다. 갑자기 등장한 강영수의 이름에 이마를 찌푸리기부터 한 놈이 조용한 이유는 내가 뱉는 말들이 죄다 사실이라 그럴 거였다.

“그럼 나한테도 하지 마.”

“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물음을 뱉은 이지훈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한 번 더 물었다.

“왜 하면 안 되는데?”

놈의 눈은 계속해서 나를 좇고 있었다. 진작 지나간 질문에 답하는 순간마저도.

“어. 강영수한테 이런 적 없어. 근데 그건 애초에 걔 전 여자친구가 날 그렇게 야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

“근데 너 여기에 강영수 끌고 들어올 거면 네가 나한테 고백한 지점부터 다시 돌아봐야 해. 네 입으로 한번 말해 봐. 강영수가 나 좋다고 하고 도망친 적 있어?”

그리고…

잠깐 말을 멈췄던 이지훈은 그러나 다음 순간 대수롭잖게 뱉었다.

“나 강영수가 여자친구랑 뭐 하는지는 좆도 안 궁금한데, 네가 걔랑 어쩌다 자게 된 건지는 궁금해.”

이번엔 헛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고 잠자코 기다리는 이지훈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 이걸 어떻게든 알아야겠다는 듯한 의지 또한.

“왜. 남자라서? 남자끼리 어떻게 잤는지는 네가 알아서 뭐 어쩔 건데.”

딱딱한 말이 정제 없이 튀어나갔다. 어차피 이지훈이 먼저 저질스럽게 굴었으니 나도 딱히 말을 고를 필요는 없었다.

강영수와도 이런 대화까지는 해본 적 없었다. 순식간에 선이란 걸 지워버린 이지훈 때문에 대화가 아슬아슬한 수위로 치달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자르고 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의 호기를 받아줘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이지훈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대놓고 비웃었다.

“그렇게 알게 된 정보로 네가 남자랑 키스를 할 거야, 섹스를 할 거야.”

“…….”

“너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하잖아. 평생 쓸 일도 없는 정보 알아내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 시간이 안 아까워?”

내 혀를 움직여 말하는 순간조차도 우스웠다. 남자랑 키스하고 섹스하는 이지훈이라니. 평생을 통틀어서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남자랑 못 할 것 같다고?”

묘한 표정으로 듣던 이지훈이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평소보다 한 박자 느린 대꾸를 내놓은 것치고 뻗어오는 눈빛만은 직선이었다. 아까부터 놈은 모든 말을 내게서 확인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이.

“키스든, 섹스든?”

십 년 넘게 둘이 있을 때는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주제인데도 이지훈은 그새 그 말이 혀에 붙은 사람처럼 자연스레 썼다. 꼭 연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 말이 혀에든 뇌에든 익어서, 당장이라도 남자랑 키스든 섹스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게 객기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은 이지훈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거였다. 어제 소파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곧은 눈을 떠올리니 그저 한숨이 났다. 나는 마주친 시선을 끊으며 무감각하게 답했다.

“못 할 것 같은 게 아니고, 넌 그냥 못 해.”

끝내 저를 짝사랑하는 새끼가 제 입으로 이런 말을 뱉게 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했다.

나는 마주친 시선부터 끊었다.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은 건지 이지훈도 나를 만류하진 않았다. 이지훈이 더 우기지 않았고, 나도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대화가 종료됐다. 눈앞이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이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지나간 차만 벌써 몇 대인지 몰랐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빈자리라고는 찾기 힘들었던 주차장은 어느새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뜻이었다.

“지랄은 그 정도 했으면 됐어. 헛소리 그만하고 시동 걸어. 집에 가게.”

하루가 지나치게 길었다. 대화가 잦아드니 아까 현우와 한 이야기가 대신 그 자리를 꿰찼다. 태안에 내려가기 위해 당직 순서를 바꿨으므로 내일 저녁에 출근해야 했지만 아까 현우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생각했을 때는 아침에 출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만큼 살펴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핸들에 올라갈 기미조차 없어 보이는 이지훈의 손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안 할 거면 내려서 여기 앉든가. 내가 할 테니까.”

여차하면 자리라도 바꿀 요량으로 안전벨트를 풀려는데 드디어 시동 걸리는 소리가 났다. 핸들에 손을 올린 채로 이지훈이 말을 걸었다.

“강영수 집부터 들렀다가 가.”

“왜.”

“짐 좀 덜어내게. 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네가 미리 전화 좀 해.”

듣다 보니 괜찮은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는 게 감사했다. 나는 잔말 않고 강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걸 듣고 있는데 이지훈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너 신검 때 키 얼마 나왔댔지? 182cm?”

무슨 소리인가 해서 이지훈을 흘깃 본 순간 강영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욱 씨. 몰랐는데 오늘도 제 생일이었던가요? 웬일로 이 귀한 주말에 전화를 먼저 주셨어용!’ 텐션 높은 목소리가 핸드폰을 넘어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인 이지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핸드폰을 붙들었다. 강영수는 다행히 집이라고 했다. 10분 뒤 나오라고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툭 던졌다. 차가 지하 주차장에서 야외로 막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연예인 프로필 믿을 거 못 되네. 네가 내려다보는데 걔가 어떻게 183cm냐.”

이지훈은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껌을 씹고 있는지 턱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움직였다. 이지훈이 껌을 씹는 건 오랜만에 봤다. 낯선 듯 익숙한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나는 전방을 주시하는 놈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뗐다. 창문을 열자 머리를 식히는 차가운 바람 사이로 아까 나눈 대화가 흘러 들어왔다.

‘근데 정말 같이 사는 거야?’

대화가 끝나갈 무렵, 현우가 한 번 더 질문했다. 묻는 현우의 표정이 아까와 달랐기에 나도 대답할 수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잠깐만 같이 지내기로 했어.’

현우는 듣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형은 평생 그러고 살 거야?’ 언젠가 울분에 가득 차 묻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현우는 더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 안타까워했다.

‘형. 나는 잘 모르겠어. 그게 형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길 만한 사정이긴 해?’

그새 또 한 번 울린 핸드폰을 초조히 확인한 현우가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발을 떼기 전 나를 돌아본 놈이 미룰 수 없는 또 다른 일을 해치우듯 말했다.

‘형을 너무 축내지 마. 걱정이 돼서 그래.’

그건 충고이자 위로였다.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돌아봐주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서 마음이 축나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자리를 떠날 수 있게 된 현우와 달리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 서서 생각했다.

마음이 축나는 순간이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 늘 넘치는 걸 퍼내어서 버리기만 했던지라 잘 몰랐다.

* * *

“뒤에 야산을 그대로 옮겨왔니?”

차 트렁크 안을 확인한 강영수가 뱉은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훈은 강영수에게 이것저것을 떠안겼다. 강영수가 혹시 몰라서 가지고 나왔다던 두 개의 종이백 끈이 팽팽하게 될 정도로 가득 찼다. 귤 박스까지는 못 가져가겠다며 손을 젓는 강영수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한 이지훈은 조금의 공간이 남은 백 하나에까지 귤들을 쑤셔 넣는 중이었다. 말리길 포기한 강영수는 이지훈이 그러도록 내버려 둔 채로 앞 좌석으로 와 찡찡거리는 중이었다.

“나 빼고 둘이 사니까 좋아? 막 행복해? 밤에 둘이서만 초콜릿 퐁듀에 마시멜로 찍어 먹으면서 파자마 파티도 하고 그래?”

대체 어떤 남자 둘이 같이 산다고 그런 짓을 하지?

내 떫은 표정을 뻔히 보면서도 강영수는 떼라도 쓰는 아이처럼 팔이며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같이 놀다가 가라고 꼬시는 강영수 말에 이지훈이 ‘우리 집’에 가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답한 것을 계기로 이지훈이 잠깐 나랑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영수가 5분 전부터 지치지 않고 해오는 짓이기도 했다.

“그런 거 안 한다고. 아, 좀! 머리 치워.”

“이래 놓고 할 거잖아. 둘이 살 거라고도 말한 적 없는데, 갑자기 살고 있었잖아!”

“계속 사는 게 아니고 잠깐이라니까.”

“그거든, 그거든! 나도 그럼 잠깐이라도 같이 살래.”

“멀쩡한 집 놔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근데 너 머리는 감았냐?”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 진의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떼쓰기의 강도가 거셌다. 창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강영수의 머리를 밀어낸 나는 괘씸한 마음으로 뒤부터 힐끔 확인했다. 이지훈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트렁크 앞에 쪼그려 앉아서까지 귤을 어떻게든 백에 쑤셔 넣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강영수한테 말 안 한 눈치길래 다행히 강영수를 안 끼우고 넘어간다 싶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확 말해버릴 줄은 몰랐다.

“나도 들어가게 해주면 너 머리도 감겨줄게. 아침마다 존나 빡빡 씻겨줄게. 당신의 이 풍성한 모발의 건강을 제가 책임지겠어요.”

“아니… 같이 산다고 해도 보통은 그런 짓을 안 한다고.”

지치지도 않고 들이대는 놈을 보니 한숨이 났다. 겨우 두 달인데 얽힌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지훈 아버님도 알게 되셨고, 강영수도 알았으니 이제 영은이나 강영수 어머님한테까지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일 거였다.

당장 강영수부터 자신도 같이 들어가 살겠다며 말도 안 되는 땡깡을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끼리 동거하는 일에 지나치게 환상을 품고 있는 놈이기도 했다. 겨우 달래서 매주 금요일마다 놀러 오는 것으로 협상을 마치고 나서야 진정한 강영수가 또 한 번 창문 안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욱아. 나 내일 소개팅한다?”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 소리였다.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술자리든, 만난 곳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결국에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은 같았다. 그때마다 그랬듯 어어, 대충 대답하고 말려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너 여자친구 있잖아.”

흔치 않게 입을 꼭 다문 강영수가 눈을 과장되게 깜빡댔다. 마치 그걸로 대신해서 어떠한 사실이라도 전하듯. 이 또한 수도 없이 보아온 표정이나 매번 기가 찼다. 더군다나 응급실에서 전화할 때만 해도 데이트를 준비하니 뭐니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헤어졌냐?”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강영수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며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소개팅하는 날에 이거 입을까? 아님 이거?”

차이를 딱히 알 수 없는 옷들을 보여주며 묻는 얼굴에는 실연을 겪은 사람의 특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남 연애 걱정해줄 형편은 아니라지만 강영수는 정도가 심했다. 연애가 끝나도 다음 연애까지의 틈이 비는 걸 못 견디는 놈은 이번에도 그러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놈이 안정적으로 연애하는 것 같아서 내심 마음이 놓이기도 했던 터라, 갑자기 접한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헤어진 지 이 주도 안 된 상태에서 누굴 만나려고.”

“…….”

“사람 가지고 장난치지 마.”

“장난치려는 거 아닌뎅….”

“그럼 뭔데.”

내 눈치를 슥 본 강영수가 핸드폰을 추리닝 주머니에 넣으며 변명하듯 중얼댔다.

“아니이, 들어보니까 그쪽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피차 상처받은 마음이나 달래주면 좋잖아…. 곧 겨울이라 옆구리도 시린데… 뭐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고 그러냐…. 내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것두 아니구… 나 상처받어….”

이지훈은 이런 강영수의 행위를 두고 애정 결핍이라고 일축했다. 나도 동의하지만 가끔은 모르겠다. 강영수는 사귀는 사람이 누구든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잘했다. 자아마저 내려놓고는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끼워 맞췄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래서인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별해지는 느낌보다는 언제든 대체될 사랑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끔 하는 모양이었다. 강영수 나름대로도 문제를 찾아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듯하지만 번번이 이 꼴이 났다. 그걸 아는 탓인지 빠르게 시무룩해진 놈 앞에서는 늘 마음이 약해졌다. 꼭 지금처럼.

“…두 번째 입어.”

“두 번째? 파란 셔츠? 그게 더 예뻐?”

“어.”

“알았어, 나 꼭 그거 입고 갈게. 들어가서 바로 다림질하고 인증샷도 보낼게? 만약에 그거 입고 나갔는데도 나한테 뿅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쿨하게 굴어야지. ‘제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가 골라준 건데 이게 안 멋져 보이다니, 아무래도 우리는 힘들겠어요….’ 하면서.”

장단을 한 번 맞춰준 것만으로도 시무룩한 표정을 단번에 지운 강영수가 방긋대며 내 목을 껴안으려 들었다. 대충 받아주다 떨치려던 계획은 볼에 입술까지 가져다 대는 놈의 오버스러운 행위로 인해 속도가 빨라졌다. 그 짧은 새에 두 번이나 입술을 가져다 댄 탓에 볼에 침이라도 남은 것처럼 찝찝했다. 아이 씨! 질색하며 강영수를 밀쳐낸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등장했다.

“…얼씨구?”

한 놈은 보조석에 앉아서 밖으로 머리를 밀어내고, 다른 놈은 문에 바짝 붙어서 어떻게든 얼굴을 붙이려는 꼴을 본 이지훈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놈이 발을 들어 강영수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악!”

“가져가, 얼른. 존나 무거워.”

엉덩이를 문지르며 뒤돈 강영수가 욕하면서도 종이백을 건네받았다. 얼핏 봐도 가방이 아까보다 두 배는 무거워 보였다. 강영수의 어깨가 순식간에 아래로 축 처졌다. 그래 봤자 금방 균형을 잡고 손잡이까지 고쳐 잡았으면서, 눈이 마주친 나를 향해 엄살을 피웠다.

“영수 어깨 아포….”

“아프면 병원을 가세요. 아니면 혀 짧은 소리 못 내시게 아예 혀를 뽑아드려요?”

이지훈의 냉정한 대꾸에 입을 삐죽댄 강영수가 뒤로 물러섰다. 차가 나갈 수 있게 비켜주려는 것처럼.

“잘 가, 얘들아. 담 주까지 다른 건 먹어도 퐁듀는 절대 먹지 말고. 알았지~!”

무거워진 양손 대신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며 인사하는 놈을 사이드 미러로 돌아본 이지훈이 물었다.

“퐁듀는 또 뭔 개소리야.”

“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메뉴.”

이지훈이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인상을 쓰는 걸 보면서도 나는 더 설명해주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날 나는 야간 근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둘이 파자마를 입고 퐁듀를 먹든 말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강영수에게 상당수를 넘기고 온 탓인지 집까지 들고 올라가야 할 음식들은 확 줄어 있었다. 당장 들어야 할 짐들만 가운데에 깔끔히 놓여진 트렁크 안을 보던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마트 주차장보다도 더 어두운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트렁크 구석에 대충 굴러다니던 부동액과 스노우 체인까지 묶어 정리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지훈밖에 없을 터였다.

한 손으로는 마트 봉지 하나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귤 상자와 고구마 상자를 겹쳐서 든 이지훈이 내게 남은 것들을 눈짓했다.

“넌 저거나 들어.”

저거라고 하기에 남은 거라곤 곶감 한 봉지와 식혜 한 통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마트에서 사 온 식료품이 든 봉지 한 개에 대충 쑤셔 넣고 나니 손이 널널했다.

“안 무겁냐? 이리 줘.”

뻗은 손은 거절당했다. 내가 물건을 가져갈 수 없도록 몸까지 뒤로 뺀 이지훈이 명령했다.

“비켜 봐. 문 닫게.”

트렁크에서 조금 물러나자마자 이지훈이 발을 들어 올려서는 트렁크 문을 아래로 내리찍듯 쾅 닫았다. 저렇게 문을 닫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은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서 내가 언제 오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야. 빨리 와서 버튼 눌러.”

그래도 엘리베이터 버튼은 발을 들어 누를 수 없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남은 것들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바삐 걸었다.

“강영수 헤어졌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는 짐을 힐끔대는 내게 이지훈이 물었다. 트렁크 안을 정리하면서도 강영수와 내가 나누던 대화를 대강 주워듣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 확인한 시간이 10시 30분이었다. 밥을 안 먹고 바로 잘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이지훈이 또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놓을 것 같기도 해서 망설여졌다.

거울을 통해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올라가는 층수를 보느라 내가 고개를 끄덕인 걸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하품을 삼키며 말로도 대답을 내놓았다.

“아… 어. 내일 소개팅한대.”

“그래서.”

“뭐.”

“잘하고 오라고 뽀뽀 받아줬어?”

멈칫한 내가 고개를 돌리는 타이밍에 맞춰, 이지훈도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거울 등의 거름막조차 없이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둘 다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 나란히 서 있던 것 때문인지 거리가 꽤 가까웠다. 문득 이지훈이 아까 내게 던진 질문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이 신검 때 나온 키가 얼마랬더라. 강영수가 제 정보인 양 떠들어댔던 소리가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알고 있던 키보다는 조금 더 큰 게 분명했다. 미세하게 어긋난 눈높이 속에 눈을 맞추며 오늘 하루 이지훈과 둘이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 갇힌 일이 유독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리 사이에 전혀 필요 없는 어떠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받아줘. 걔가 그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그건 그렇지.”

시시하게 긍정하는 걸 보니 별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

“…….”

아까 차에서도 한 생각이지만, 이게 꼭 줄다리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뽀뽀며 키스며 친구 사이에서도 타자화시켜 말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는 이지훈과 내가 시작하면 꼭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끔 했다.

난 이지훈 쪽을 부러 돌아보지 않은 채로 바뀌는 숫자를 띄우는 계기판만 확인했다. 어차피 같은 집에 들어가긴 해야 하지만, 일단은 이 좁은 공간에서라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8… 9…

“가만 보면 넌 나 빼고는 다 하고 다니네. 뽀뽀든 섹스든.”

띵- 10층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안내 음성이었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이지훈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야 열림 버튼을 겨우 눌렀다. 복도를 걸어가던 놈은 집 문 앞에 서서야 뒤를 돌아봤다. 안 오고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짐으로 무거운 양손 때문에 도어락 버튼을 열 수가 없으니 얼른 와서 열어달라는 듯했다.

어딘가 뒤틀린 것 같던 목소리는 착각이었을까. 날 기다리는 이지훈의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을 보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귓가를 울리는 것 같은 말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문 앞에 도착해서 들고 있던 것들을 아래로 내려놨다. 이지훈만큼은 아니어도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긴 했으니 도어락 번호를 치려면 그래야 했다. 손이 가벼워진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말을 걸었다.

“야. 잠깐 들어 봐.”

이지훈이 들고 있던 상자들을 한꺼번에 넘긴 탓에 양손이 방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거워졌다. 당황한 나는 얼마 전 다친 팔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손에 힘을 줬다. 차례대로 쌓인 상자 위로, 내가 내려둔 것들까지 한 손에 몰아서 든 채 도어락 번호를 입력하는 이지훈의 옆모습이 보였다. 띠릭. 도어락 해제 소리와 함께 문을 연 이지훈이 먼저 들어가라는 듯 문을 발로 잡았다.

그냥 내가 문을 열게 뒀으면 됐는데, 굳이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난 일단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정장 구두인 탓인지 잘 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이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너 먼저 들어가.”

다 큰 장정 둘이서 어정쩡히 서 있기에는 현관이 좁았다. 한 명이라도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거동이 쉬울 터였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듣고 행동할 줄 알았던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뒤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뭐 해. 들어가라니….”

고개만 뒤로 돌려 놈을 채근하려던 행위가 우뚝 멈췄다. 짐을 모두 아래로 내려놓은 이지훈이 나와는 달리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막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윽!”

몸이 휙 뒤로 밀렸다. 신발장에 등이 부딪치고 몸이 흔들렸다. 상자의 무게 때문에 순간 기우뚱한 내가 넘어지지 않게 허벅지 사이로 다리부터 집어넣은 이지훈은 지척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아까 엘리베이터 안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이지훈이 그때보다도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는 것뿐.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지훈이 가까워졌다. 눈을 맞춘 채로 천천히 다가오는 놈은 도망칠 틈이라도 주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흘깃 아래를 확인한 나는 무게가 꽤 되는 이 상자들을 놓는 순간 이지훈의 발 위로 곧바로 떨어져 상해를 입힐 것이라는 사실만 깨닫고는 다시 고개를 올려야만 했다.

이지훈의 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다행히 눈은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목울대를 의미 없이 두어 번 삼키고서야 말했다.

“…비켜.”

긁힌 목소리를 듣고서도 이지훈은 움직이지조차 않았다.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이기만 했다.

“그렇게 싫으면 상자 떨어뜨려, 그냥.”

“…….”

“왜. 날 너무 사랑해서 그건 못 하겠어?”

턱 근육이 긴장되듯 조여들었다. 그사이 이지훈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소파에서 마주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이제 이지훈의 숨에서 묻어나는 희미한 껌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코끝이 맞닿은 순간, 내가 겨우 뱉어낸 마지막 말이었다. 이지훈이 웃었다.

“응.”

이지훈이 얼굴을 잠깐 뒤로 당겼다. 아주 잠깐 놈이 이대로 물러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아니었다. 반동이라도 준 것처럼 아까보다 더 가까이 전진한 놈의 입술이 내 입술을 문 순간에야 깨달았다.

여태 그러한 긴장감을 의도한 것은 모두 놈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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