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브 바이 파이브(5x5) 2권
2x5
조직이 크든 작든 구멍은 있다. 내가 국가 조직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배운 사실이기도 했다. 밖에서 안으로 뚫은 구멍보다는, 안에서 밖으로 뚫린 구멍이 더 많다는 것 또한.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뚫은지 모를 틈 사이로는 많은 것들이 쏟아지거나, 혹은 흐른다. 때로는 그걸 뚫은 사람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존만이 말만 믿고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거 아니냐? 지금 투입된 것만 몇이야.”
옆자리에 앉은 하 선배는 오는 길 내내 그랬던 것처럼 투덜대는 중이었다. 오면서도 줄곧 핸드폰으로 이곳저곳 연락하던 그는 최근 관심을 쏟아붓는 마장동 함정수사가 아닌 다른 일에 차출되었다는 사실부터가 짜증이 난 듯했다. 나는 그를 흘긋대면서도 대답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 선에서 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던 데다가, 그가 딱히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형량 가지고 딜한 건데 조금 믿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놈 입은 가벼워도 최정호 멕시코 갈 때도 따까리 짓 한답시고 따라가기도 했고 이것저것 주워들은 건 많은 눈치라고 하더라고요.”
뒷자리의 정 선배가 나 대신 말을 받았다. 3분 전에 사 온 햄버거는 이미 해치운 모양인지 말소리가 나름 분명했다. 쪼옥하고 빨대로 음료를 끝까지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주워들은 게 많아 봤자 피라미인데 뭐.”
“피라미 맞죠, 맞는데. 저희한테는 지금 피라미라도 간절한 게 맞고요. 솔직히 최정호 관련해서 다들 너무 사리는 통에 진척도 없었고. 어제도 간부 회의 다녀와서 반장님 줄담배 피우시던 거 보면 또 상부로부터 한 소리 들으신 모양입니다.”
나보다 하 선배와 오래 일한 그는 상사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받아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뜻을 최대한 공적으로 전달한 후배를 모르지 않을 하 선배가 불만스러운 얼굴로도 입을 다물었다.
햄버거와 감자튀김에서 나는 기름진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좁은 차 안에서도 그 누구 하나 문을 열자고 말하지 않았다. 익숙한 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모두의 신경이 허름한 건물의 입구에 쏠려 있는 것조차.
번화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이라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중 누구도 이 낡은 건물에 시선을 주거나 혹은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거래 장소를 민간인들이 많은 번화가 근처로 정한 건 꽤 맹랑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은 한 시간 뒤면 이 허름한 건물 안에서 몇백억 규모의 거래가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반장님 아직 연락 없으시지?”
“예.”
밖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이 골목에 있는 사람 중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정해져 있었다. 세 블록을 지나야 있는 편의점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 서성대는 사복경찰 하나. 건물 바로 옆 블록 포장마차에서 30분째 어묵을 먹고 있는 커플로 위장한 경찰대생 둘. 그리고 우리처럼 투입 명령만을 기다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을 사람들까지.
“쟤네 실습생들 아니냐?”
“아, 네. 반장님이 현장에서는 어차피 도움도 안 될 테니 차라리 저런 거라도 시키라고 하셨습니다.”
“하이고, 샌님들 데려다 놓고 별… 막말로 쟤네들이 나중에 이걸 수사 현장이라고 기억이나 하겠어?”
어이가 없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던 하 선배의 시선이 날 향했다.
“그래 봐야 우리 지 경위처럼 마약수사대 자원해서 오는 놈들도 없을 텐데. 안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저 때는 제가 마약수사대 올지 몰랐습니다.”
경찰대생이 마약수사대에 자원한 것부터가 흔치 않은 일이라는 건 이 팀에 온 후 너무 지겹도록 들어서 이제는 그 이면의 의미조차 생각해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편한 길 두고 굳이 왜 험한 길로 가냐며 말리던 동기들이 걱정한 것보다는 수월히 적응했다. 지금 나와 함께 이 차에 앉아 있는 정 선배며 하 선배조차 순경 공채 출신 형사들이었지만, 내게 텃세를 부리기보다는 자원해서 구르길 택한 이상한 놈이라며 놀리고 핀잔을 주었던 데에서 그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잉- 핸드폰 진동 소리에 각자 무릎 위와 잠바 안주머니를 더듬대던 두 명의 시선이 곧 내게 몰렸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서에서 나오기 전 들었던 작전 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인데 벌써 연락이 온 걸까 싶어 의아했다.
이지훈
오후 7:30
내일은 그래도 얼굴 보겠네 오후 7:31
나랑 달리 밥 먹을 시간은 내주는 놈의 생일이기까지 하니까 오후 7:32
이지훈이 보낸 사진은 강영수의 SNS를 캡쳐한 거였다. 오늘 잠깐 외근이 있어 경찰청 근처에 들른 강영수와 점심을 먹었는데 하필 그 사진을 올린 모양이었다. 강영수가 자그마치 30분을 우겨서 간 솥밥 집이 태그된 정사각형의 사진 안에는 내 옆모습이 함께 찍혀 있었다. 같이 온 메시지는 이지훈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구절마다 날이 서 있는 메시지를 보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여간, 강영수 이 도움 안 되는 새끼….
“뭐야. 반장님?”
정 선배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뒤집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깐 다른 연락이 와서요.”
잠깐이라기에는 이번 주 내내 이지훈으로부터 이러한 연락을 받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나를 찾는 메시지는 집요한 데가 있었다. 덕분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놈이 내가 도망갈 마지막 구멍까지 틀어막으려 집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곤 했다.
11월 3일
이지훈
오늘 늦냐? 오후 8:30
오후 10:30 어
이지훈
알았어 오후 10:31
11월 4일
이지훈
오늘도? 오후 8:30
오후 11:50 어
11월 5일
이지훈
삼일 연속 집에 안 들어오는 건 에반데 오후 8:40
오후 10:00 바빠
오후 10:01 기다리지 말고 너 할 일 해
이지훈
너 기다리려고 내 할 일 때려쳤잖아 오후 10:04
내일도 집에 안 들어오면 삼단 도시락 싸 들고 찾아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오후 10:06
오후 10:39 오지 마. 너 볼 시간 없어.
이지훈
그래서 그 귀한 시간 아껴주겠다잖아 오후 10:41
집에 들어와. 좋은 말 할 때. 오후 10:42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집에 들어앉은 저 때문에 내내 숙직실에서 밤을 새우는 나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지훈은 집에 들어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심지어 어젯밤엔 전화까지 왔다. 받지 않으니 금방 끊기긴 했어도 놈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됐다. 나는 이지훈이 애초에 인내심을 발휘하는 곳이 몇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이미 너덜너덜해진 우정에까지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번에야 깨달았지만.
“뭐야. 저거.”
하 선배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댔다. 정 선배 또한 창문에 바짝 붙어 밖을 살피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보이지 않던 하얀 차 하나가 골목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의 얼굴이 얼핏 익숙하기도 했다. 귀에 핸드폰을 댄 채로 주변을 살피듯 두리번대는 모습이 꼭 살쾡이 같았다. 별다른 특이사항을 찾지 못한 듯 뒷문으로 다가서서 문을 잡아주려던 놈이 갑자기 핸드폰을 귀에서 내리고는 문을 서둘러 닫았다. 조수석으로 돌아가는 몸짓이 재빨랐다.
지잉-지잉-지잉-
진동음이 연이어 울렸다. 당장 밖으로 튀어나갈 기세의 정 선배와 하 선배가 멈칫하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두가 직감했다. 정보는 샜고 놈들은 방금 그 사실을 눈치챘다. 정보가 어디서 샌 건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오늘 이곳에서 있기로 했던 거래는 방금 취소되었다. 그런데도 당장 뛰쳐나가기 전에 핸드폰부터 확인한 이유는 명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화면에 뜬 반장님의 문자는 다행히도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오늘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명호 반장님
일단 잡아.
나는 핸드폰을 던지고는 급히 핸들을 잡았다. 정 선배와 하 선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미 예상한 것처럼 각자 자리에서 잡을 수 있는 것들부터 꽉 붙잡았다. 난 둘이 안전벨트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앞으로 튕겨 나가듯 질주했다. 급하게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놈들의 차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앞을 막기에는 늦었으므로 뒤에서 들이박기라도 해야 했다. 다행히 골목 끝에서 하얀 차를 따라잡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몸이 크게 휘청이고 에어백이 터졌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약속한 것처럼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마찬가지로 연기를 뿜으며 퍼져 있는 앞차를 향해서였다.
* * *
“입을 통 안 여나 본데.”
“두 놈 다요?”
“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하 선배가 한숨을 푹 쉬며 방금 알게 된 정보를 읊었다. 퍼진 차 안에 남아 있던 건 운전사 역할을 하던 부하 한 놈뿐. 빈 조수석을 확인하자마자 뛰어가 골목을 급히 빠져나가려던 놈을 잡긴 했으나 그렇게 넘긴 놈조차도 입을 다물고 있어 심문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에 타 있던 셋 중 둘을 검거했지만, 잘 풀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뒤늦게야 올라가 본 건물에도 필요한 정보는 이미 증발한 뒤였다.
“아으.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 진짜….”
소득 없는 몸싸움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덩치가 곰만 한 놈에게 수갑을 채운다고 차에 붙어 엎치락뒤치락했던 하 선배는 유독 피곤한 낯이었다. 목을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차를 박았을 때 유독 크게 휘청거리던 게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목 엑스레이 한 번 찍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 선배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칼빵 맞은 놈 놔두고 산재 처리할 서류부터 떼러 가리?”
그의 못마땅한 시선이 내 팔에 꽂혀 있었다. 코너를 돌던 놈의 목덜미를 잡아채다 놈이 쥐고 있던 잭나이프에 팔 안쪽이 깊게 베였다. 칼빵이라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상처였지만 방금까지도 피를 지혈해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던 건 맞았다. 선배들은 내가 다치는 걸 싫어했다. 반장님으로부터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몸싸움이냐고 욕을 먹을 때 내가 늘 예시로 소환되어서인지도 몰랐다. 아까도 나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며 병원으로 가라고 떠밀기부터 했던 반장님을 떠올린 나는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너 젊다고 몸 막 굴리지 마.”
“…예.”
“그냥 하는 말 아냐, 새꺄. 너 진짜 그러다 젊어서 골로 가. 안 그래도 요새 네가 흘려대는 코피 때문에 내 자리에 휴지가 없다, 휴지가.”
말이 많지 않은 편인 하 선배의 잔소리가 길어지는 걸 보니, 최근 내 행동이 조금 과하긴 했던 모양이다. 이지훈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쳐보겠다고 일에 더 무게를 두었던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제야 하 선배의 표정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치료는 다 했어?”
“꿰맨 부분 피가 더 안 나는지만 한 번 더 확인하고 나면 가도 된다고 합니다.”
“의사가 확인한다는 거야?”
“예. 곧 온다고 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소리가 들렸다. 차트를 든 채 줄줄이 늘어선 응급실 침대들을 헤치고 내가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긴 가운 차림이었다. 아까 간호사가 불러온다고 했던 의사인 게 분명했다. 늦은 밤 응급실은 놀라울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의료진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도 반대편 침대에서는 욕실에서 넘어져 실려 온 할머니가 끙끙 신음을 내고, 옆 침대에서는 복통을 호소하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피곤한 낯으로도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여자를 응시했다.
멀리서 본 순간부터 깨달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아.”
순간 팔에 힘이라도 들어갔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내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흐른 것과 동시에 여자가 차트에서 시선을 뗐다.
“지선욱 씨 팔… 어?”
늦은 평일 밤, 응급실에서 환자를 볼 때 보일 만한 적당히 무심하고 피곤한 낯이 무너지고 안경 너머의 눈이 당황한 것처럼 연이어 깜빡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팔에 최대한 힘을 풀려고 노력하며 의사 가운에 적힌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의사 유 혜 은]
“거, 난 전화가 와서… 그 김에 나가서 정산하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단순히 의사와 환자가 자아내기에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하 선배가 자리를 피해줬다. 둘만 남았다는 걸 눈치챈 유혜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표정에 남아 있던 기억의 부산물부터 깔끔히 지웠다. 가까이 다가선 그녀에게서는 상처를 더 잘 보고자 하는 의도 말고는 감지되는 게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다시 마주치게 된 사실을 반가워할 정도까지 친하진 못했다. 반장과 부반장으로서 함께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던 걸 생각하면 의외일지는 몰라도, 유혜은이나 나나 사담에는 재주도 흥미도 없는 스타일이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팔 좀 들어볼래?”
그래도 다른 환자들에게는 이렇게 반말부터 하진 않겠지. 난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 대신 유혜은이 보기 좋게끔 팔 안쪽을 뒤집었다. 팔꿈치를 조심히 붙잡은 유혜은이 상처를 눈으로 꼼꼼히 훑었다. 벌어진 곳을 꿰맨 곳 주변은 소독약인지 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 흐른 흔적들로 꽤 지저분했다. 인상을 찡그리던 유혜은은 결국 옆에 놓인 알코올 솜을 집어 들었다.
“피가 조금씩 새네. 꿰맨 데가 터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닦아내고 조금 더 지켜볼게.”
상처 주변을 조심히 닦아내며 건네는 말에는 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겠다는 말이 사실인지 유혜은은 피를 다 닦아내고도 가만히 서 있었다.
“…….”
“…….”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리다 유혜은과 눈이 마주쳤다. 가운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유혜은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외라는 생각을 한 것과 동시에 유혜은이 질문했다.
“…경찰 일 하는 거야?”
순간 유혜은이 내 직업을 어떻게 알았나 해서 놀랐다가, 하긴 이 시간에 칼에 찔려서 병원에 오는 놈이 몇이나 되겠나 하는 데에 생각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다가올 때 차트도 보고 있었지.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 위에는 내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을 건 유혜은이 뻘쭘하지 않도록 적절한 질문을 찾아 건네며.
“너는 의사?”
“응. 그래 봤자 아직은 인턴이긴 한데….”
안경 뿔테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유혜은이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제야 그 위로 반 애들 앞에 나서야 할 일이 있으면 그러기 한참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열여섯의 부반장이 겹쳐졌다. 힘없이나마 웃음이 터졌다. 그냥 좀 신기했다. 서로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온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구나 싶어서.
“잘 어울린다, 가운.”
예상치 못했던 말인 듯 눈을 키운 유혜은이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방금 내가 그랬듯 그 멋대가리 없는 칭찬에서 과거 자신이 알던 내 모습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피곤한 낯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유혜은은 핸드폰을 들어 자신을 찾는 급한 연락이 없다는 것까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내 옆에 앉았다.
“그런 말 처음 들어 봐.”
“왜?”
“그냥. 어릴 때부터 나 알던 사람들은 다 신기해하더라고. 몸이 그렇게 약하더니, 그게 싫어서 의사 되기로 결심한 거냐고 묻기나 하고.”
몸이 약했었나. 그러고 보니 몇 번인가 조퇴하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게 병원에 가기 위한 것임은 몰랐지만. 뒤늦게야 알게 된 사실을 곱씹다 빤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유혜은의 시선은 내 팔 언저리를 훑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칼에 찔린 상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유혜은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난 사실… 좀 의외긴 해.”
“…뭐가?”
“네가 경찰이 될 줄은 몰랐거든. 이렇게 다친 모습으로 마주치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고.”
다친 팔도, 내 얼굴도 아닌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잇는 유혜은은 추억에 잠긴 낯이었다. 기억 속에 있는 나와 지금의 나를 견주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유혜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와 만난 자리에서 직업을 밝혔을 때 몇 번이고 듣곤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기분이 한층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미지도 그렇고, 넌 뭔가 몸을 쓸 일이 별로 없는 일을 할 것 같았어. 검사나 변호사라든가… 뭐 그런 거.”
유혜은이 말을 멈췄다. 난감한 표정으로 내 눈치부터 살피는 걸 보니 방금 발언이 무례하게 들렸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 미안. 내 말은 지금 네 직업이 너랑 안 어울린다는 게 아니라….”
나는 늦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무슨 말인지. 기분 안 나빴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응.”
유혜은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고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 한쪽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을 견뎌내려 눈을 길게 감고 있다가 떴다. 최근 들어 자주 나타나곤 하는 증상이었다. 특히 밤을 새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면 유독 그 횟수가 잦았다. 새삼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피로감 때문일 터였다. 하얀 병원 벽에 걸린 시계가 알리는 정보에 따르면 벌써 새벽 2시였다. 이러고 있는 사이 병원비 정산도 얼추 끝이 났을 테고, 경찰청으로 돌아가 오늘 벌어진 일에 관한 보고서도 써야 했다. 그래야 잠깐 눈이라도 붙일 시간이 날 것이다. 잠이 고픈 건 아니지만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이 둘로 보일 정도의 극심한 피로는 수면으로라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모래가 들어찬 것처럼 뻑뻑한 눈을 감았다 뜨던 나는 유혜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팔 한 번 더 봐줄래? 슬슬 가야 할 것 같아서.”
“아… 응.”
다행히도 이번에는 상처 위를 덮은 거즈가 깔끔했다. 유혜은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난 유혜은이 주의사항을 빠르게 읊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보였는지 급한 투였다.
“당분간은 상처 부위에 물이 안 닿는 게 좋아. 그래야 상처가 안 덧날 테니까.”
“그럴게. 고마워.”
옆에 놓여 있던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은 것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응급 호출이라고 생각했는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가운 주머니를 더듬던 유혜은이 갸웃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진동은 다른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보다 탁자에 더 가까이 서 있던 유혜은이 나를 대신해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유혜은이 멈칫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앞에 서 있는 내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눈에 보이는 동요였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됐다. 내게 핸드폰을 내민 유혜은이 조용하게 덧붙인 말 때문에.
“둘은 여전히 잘 지내나 보네.”
나는 핸드폰을 건네받자마자 확인한 화면 속 알림에 시선을 뒀다.
부재중 전화
[이지훈] (1)
“이지훈은 잘 지내?”
이미 끝난 줄 알았던 대화를 이어 붙이는 유혜은의 마음은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지훈의 이름에 궁금해져서 건넨 질문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내 그 질문을 참고 있다가 더는 미루지 못하고 뱉어낸 것 같기도 했다. 전자냐 후자냐에 따라 내가 다른 답을 해야 할까? 내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잠깐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던 걸 다른 의미로 이해했는지, 유혜은이 뻘쭘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말해주기 곤란한 거면 말 안 해줘도 돼. 난 그냥….”
“…….”
“사실 너 보자마자 걔가 생각나긴 했거든. 근데 네 핸드폰에 바로 이름이 떠 있는 거 보니까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건 설명이었다. 동시에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그를 이미 잃어버렸다면 늘 그의 소식 앞에서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떠한 변명 같기도 했다.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만약 나 대신 이지훈이 여기에 있었다면, 유혜은은 이걸 걔한테 직접 물을 수 있었을까. 물었다면 이지훈은 무슨 말을 했을까. 중학교 3학년 그때처럼 유혜은의 마음을 모르는 척 대했을까, 아니면…
“…이지훈 번호 알려 줄까?”
유혜은이 멈칫하고는 날 올려다봤다.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이게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어쩌면 내가 방금 목격한 유혜은의 어떠한 흔적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짧은 순간을 잡아낸 이유는 거울 안의 내게서 지겹도록 본 모습이어서였다. 평생 이지훈 앞에서 속 시원히 마음을 까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잊지도 못한 채로 머뭇대는 꼴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아.”
그러나 아직도 그 거울 안에 서 있는 나와 달리 유혜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의사 가운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이렇게 미련 없이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에 감사하듯이.
“어떤 사람은 추억에만 있어서 더 좋을 때가 있더라.”
“…….”
“어릴 때긴 해도, 나 걔 진짜 좋아했었거든. 서울로 다시 전학 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생각났을 정도로. 남자한테 그렇게 차여본 게 처음이라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유혜은은 모든 문장을 과거형으로 말했다. 잠깐 그 말을 곱씹던 나는 여태껏 나누던 대화들처럼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했다. 뇌의 어느 곳에 턱 걸린 듯한 한 문장을 차마 넘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차였다고?”
내가 알기로 이지훈은 유혜은을 찬 적이 없다. 다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처럼 모른 척했을 뿐. 그러나 유혜은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과거의 파편 중 하나가 어긋났다. 내가 그걸 여태 몰랐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놀란 것처럼 보이는 유혜은과 눈을 맞춘 채로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 *
11월 6일
강영수
영수의 29번째 생일잔치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오시면 영수의 동생 영은이와 그녀의 피앙세도 보실 수 있어요.
늦으시는 분에게는 선빵을 선물해드립니다~^^ 오후 3:00
일시: 11월 7일 오후 7시, 선릉역 Sulic 오후 3:02
아, 그리고 여기 발렛 가능~~! 오후 3:03
이지훈
생일파티는 원래 남이 열어주는 거 아니냐? 오후 5:02
강영수
그래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니네들이 안 열어주길래ㅗ 걍 내가 자기 PR하기로 큰 마음 먹었다 오후 5:15
니한테는 큰 거 안 바라니까 오셔서 안주나 축내주세요 ㅅㅂ롬아 오후 5:16
선욱씨 오늘도 일한다고 읽씹 오지시지만 오실 걸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당신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니 빈손으로 오셔도돼애플워치요♡♡ 오후 5:18
이지훈
애플워치밖에 안 보이는데 오후 6:54
강영수
안과맥북 가 봐요 지훈씨 오후 8:00
11월 7일
이지훈
(사진) 오후 6:50
강영수 없는 강영수 생일파티 오후 6:51
강영수
좆됌
용주지랄ㄹ남
아놔시발 오후 6:52
태근5분남기고시작하더니필리ㅣ버스텨중
이거ㅓ실화냐 오후 6:53
나지금책상및츤로치는즁이야얘드류 오후 6:54
ㅠㅡㄱㅜㅡㄱㅈㄱㄴㄱㄴ 오후 6:57
이지훈
죽어 걍 오후 6:58
강영수
ㅜ일단먹꼬있셔ㅕ 오후 6:58
횽이날ㄹㅑㅏ간댜 탭시탈게 오후 6:59
커서를 괜히 죽 당겨보아도 강영수의 오타 가득한 메시지가 끝이었다. 말하는 꼴을 보니 강영수가 제시간 안에 도착하기는 그른 듯했다.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약속된 시간 정각이었다. 난 이지훈이 보낸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영은이 옆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남자는 영은이의 약혼자일 터다.
“…….”
아마 이 레스토랑 안에 셋이 앉아 있겠지. 이제 나까지 추가되면 넷이 될 거고. 이지훈과 영은이는 그렇다 쳐도, 영은이 약혼자와는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무슨 대화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조합이었다. 거기다 이지훈은…
이지훈
주차 중? 오후 7:00
이지훈의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이번에는 단체방이 아니었다. 정각에 맞춰 온 메시지는 놈이 내가 제시간에 맞춰 이곳에 올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으며, 오늘만은 어떻게든 결판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켰다. 지독한 놈답게 죄다 맞아떨어졌다. 어찌 됐든 난 7시 정각에 강영수 줄 선물까지 사 든 채로 레스토랑 앞에 서 있으니. 돌아설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집에 가 봤자 어차피 이지훈과 만나게 될 거였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도 결국 레스토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강영수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은 입구부터 소란스러웠다. 계산대 주변에 치렁치렁 붙어 있는 할로윈 장식을 바라보던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온 가족이 계산을 마치는 걸 기다렸다가,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서버에게 강영수의 이름을 댔다. 안내하는 그녀를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테이블 간격이 가까운 편인 이곳에서 유일하게 다른 테이블과는 눈에 보일 정도로 동떨어진 테이블에는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내게서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남자를 알아본 나는 서버에게 더는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인을 했다.
“어, 선욱 오빠 왔다!”
가장 먼저 날 알아본 건 영은이였다. 벽 쪽에 붙어 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까지 날 반기는 이유는 곧 알게 됐다. 본 지 꽤 오래되긴 했어도 반응이 어째 격하다 했더니, 영은이 옆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일어서는 남자를 보자 의문이 쉽게도 풀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 잠깐 사이에도 앞에 앉은 이지훈의 눈치를 봤다. 기합이 바짝 든 모습이었다.
영은이보다 한살이 어리댔나. 강영수한테 대충 전해 들은 바로는 인생에서 그 어떤 역경도 겪어보지 않고 자란 도련님 스타일이라 오히려 그게 걱정이랬는데, 지금 나나 이지훈의 눈치를 살피는 위축된 모습은 그 말만 들었을 때 상상되는 모습들과는 죄다 겉돌았다.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이지훈이 그 짧은 새에 기를 꺾어놨겠지.
그건 이지훈의 특기였다. 지금도 대화를 하던 셋 중 둘이나 갑자기 일어서서 긴장을 깨뜨려줄 누군가를 열심히 반기는 상황에서 이지훈은 슬쩍 눈만 돌려서 물었다.
“왔냐?”
“어.”
이번 주 내내 집에 들어오라며 쪼던 놈이나 그 말을 개무시하던 놈이 하기에는 시시한 대화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은 현재 우리의 상황과 관련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강영수의 생일과 영은이의 결혼 소식 같은 일에 그 정도는 미뤄둘 수 있을 정도로 컸다는 점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도 이지훈은 내가 눈을 피하는 것도 모르는 척해주며 내 쪽으로 메뉴판을 툭 밀었다.
나는 메뉴판을 흘끔 보고는 앞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십니까. 김성준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은이, 아니, 저희 누나, 누님한테 정말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더듬대며 영은이에 대한 호칭을 세 번이나 고치는 와중에도 남자는 이지훈의 심드렁한 낯을 흘끔대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 이지훈이 어떻게 지랄을 해뒀을지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지선욱입니다. 두 살 차이라고 들었는데, 저한테 그렇게까지 존칭 안 쓰셔도 돼요. 편히 앉으시고요.”
“아… 예. 감사합니다.”
남자의 감동 어린 표정에서 시선을 떼 테이블을 훑었다. 강영수가 다섯 명으로 예약을 해두었는지,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반대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영은이와 영은이 약혼자를 생각하면 이지훈처럼 그 건너편에 앉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지훈의 옆자리에 앉는 것 대신 한 자리를 띄워 앉고는 우리 사이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대신 두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닿아오는 이지훈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영은이에게 물었다.
“잘 지냈어?”
“응. 오빠도? 우리 오랜만에 본 거긴 하다, 그치. 엄마가 안 그래도 오빠 따로 만나서 청첩장 안 줬다는 이야기 듣자마자 내 머리 쥐어뜯으려고 그랬어.”
그 상황을 재연하기라도 하듯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순간마저도 영은이는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는 안색이 훨씬 좋아 보였다. 능청맞게 웃는 얼굴에는 강영수도, 나를 제 아들처럼 대해주는 이모도 담겨 있었다. 늘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이들이라 이번 주 내내 애쓰던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오늘 줘도 되고, 너 편할 때 줘. 어차피 결혼식은 갈 거니까.”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 듯 영은이가 활짝 웃었다. 대화를 멀뚱히 관람 중이던 제 약혼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들으란 듯 크게 중얼대기도 했다.
“자기야. 봐 봐. 둘이 오니까 딱 구분되지? 누가 누구인지 딱 알겠지?”
둘이 미리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면서도 끝내는 동의하듯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는 남자를 본 이지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영은이가 생긋 웃으며 이지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렇게 물어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거든. 둘 다 잘생겼지만 싸가지가 없으면 이지훈.”
손가락 끝으로 지목당한 이지훈이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디 한번 더해보라는 표정이었다. 그에 질 영은이라면 애초에 약혼자를 앞에 두고 이런 기 싸움을 시작하지조차 않았을 테였다. 지금도 이 테이블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영은이의 약혼자밖에 없었다.
“잘생겼는데 싸가지가 있으면 지선욱.”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둘이 가끔은 게임처럼 즐기곤 하는 기 싸움이었다. 그때마다 그러했듯이, 이지훈은 놀라는 기색이라곤 없이 능청맞게 받아쳤다.
“그게 다야? 난 더 재미있는 기준을 아는데.”
씩 웃는 얼굴이 왠지 모를 불안함을 자아냈다. 비슷하게 느낀 듯한 영은이가 슬쩍 이마를 찌푸렸다. 이지훈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날 지목하듯 가벼운 턱짓을 하면서.
“여긴 강영은이 좋아한 오빠.”
다음으로는 검지를 들어 제 가슴께를 콕 찍은 이지훈이 빙글대며 말을 마쳤다.
“여긴, 안 좋아한 오빠.”
모두가 침묵했다. 나는 건너편에 앉은 영은이 약혼자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관찰했다. 정적을 깬 건 영은이의 코웃음이었다. 방금 이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팔짱부터 낀 채로 몸을 앞으로 내미는 영은이는 어쩐지 더 약이 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좋아할 틈은 줬고?”
이지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안 줬나?”
“안 줬지. 나 머리 좀 크고 나서는 둘만 남을 때마다 교육이라도 시키듯이 오빠 좋아하지 말라고 가르쳤잖아. 말이 가르친 거지, 세뇌였지 거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학창 시절의 일이라고는 해도 내가 영은이의 고백을 거절했던 일은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 넷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끔 넷이서 만나곤 해도 연애 이야기만은 의식적으로나마 피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나를 뺀 셋이서는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자리에선 아니었다. 나는 불편한 속을 들키지 않으려 목을 축였다. 이지훈은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대답 없이 웃었다. 옆의 의자에 팔을 기댄 채로 영은이에게 까딱 고갯짓하는 모습은 여유롭고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라고 묻는 듯한 제스처를 본 영은이가 이지훈이 내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덧붙였다. 옆에서 목석같이 굳어 있는 약혼자에게 팔짱을 끼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이면서.
“그리고 오빠 아까부터 우리의 사랑을 심히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네? 결혼할 사람들끼리 옛사랑 이야기도 한번 안 해 봤을까 봐? 그치, 자기야. 내가 이야기해줬지? 잘생겼는데 싸가지 없는 오빠가 이런 이야기도 막 꺼낼 테니까 절대 당황하지 말라고 경고도 해줬잖아. 그치?”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애매한지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영은이 약혼자는 영은이의 말마따나 떨떠름해 보이긴 해도, 처음 듣는 이야기를 대하듯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이지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단 말이지.”
미적지근한 동의는 기 싸움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메뉴판 줄래?”
영은이가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내내 외면받고 있던 메뉴판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 앉은 게 언제인데, 아직 메뉴판조차 보지 않았다. 영은이의 말대로 해주려는 것처럼, 이지훈은 메뉴판 위를 툭툭 두드리던 성의 없는 손짓까지도 거뒀다. 이지훈이 밀어준 메뉴판 위로 영은이와 영은이의 약혼자가 머리를 맞대는 게 보였다. 나는 이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멈출 놈이 아닌데, 이상하다 싶었다.
“근데 영은아.”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어렵게 찾은 평화에 머리를 맞댄 채로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어린 커플이 흠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특히 막 물잔을 집어 목을 축이려던 영은이 약혼자가 유독 놀란 것처럼 보였다. 이지훈은 그걸 눈치챘을 거면서도 한발 물러서 주는 대신 웃었다. 팔짱을 낀 채로 테이블 가까이 몸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하는 놈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커 보였고, 심지어 믿을 수 없게끔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말라고 했지, 눈을 낮추라 한 건 아니었잖아?”
“…커헉!”
또 한 번 새우의 등이 터졌다. 이지훈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은 영은이 약혼자가 몸을 새우처럼 동그랗게 말며 반도 삼키지 못한 물을 허공으로 뿜었다. 사레가 들려 컥컥대는 약혼자의 등을 두드리며 영은이가 이지훈을 빠르게 눈으로 흘겼다. 아우 진짜! 이를 갈며 질린 표정을 짓길 잠시, 영은이는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허공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서버를 급히 부르는 모습이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저희 주문할게요!”
무엇을 주문할지는 지금부터 정할 예정인지 고작해야 세 장인 메뉴판을 휙휙 넘겨대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일부러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대화의 주제를 어떻게든 돌려야만 이지훈이 또 한 번 제 약혼자를 공격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내린 이지훈이 웃음기를 싹 뺀 무표정한 눈으로 메뉴판을 훑는 것까지 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뭔지는 몰라도 영은이 약혼자가 이지훈의 심기를 심히 거스른 게 분명했다.
“저희 티본 스테이크 하나랑요. 샐러드 파스타랑, 음. 그리고 혹시 추천 가능할까요? 여러 명이 오면 보통 어떤 메뉴를 많이 먹어요?”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려 노력하는 영은이 옆에서 그녀의 약혼자는 여전히 목을 붙잡은 채로 콜록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주머니를 더듬었다. 여러모로 분위기를 끊고 갈 타이밍이었다.
[정우리 선배]
때마침 정 선배로부터 온 전화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줬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는 방향대로 쭉 따라오는 이지훈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허공에 행선지를 고했다.
“나 잠깐 전화 좀.”
지나가는 서버에게 안내받은 흡연 구역은 원래 테라스가 있었던 곳을 개조한 듯했다. 레스토랑의 뒷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보게 되는 난간과 문 사이의 공간은 테이블을 놓기에는 꽤 좁았던 데다가, 보이는 풍경이라고 해 봐야 뒷골목이 다였으니 식사 공간보다는 흡연 구역으로 삼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흡연 구역은 썰렁했다. 겨울이 훌쩍 다가온 게 느껴질 만큼 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귀한 금요일 밤에 레스토랑을 찾은 사람 중에는 굳이 식사 중간에 흡연하겠답시고 자리를 비울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깨끗한 재떨이를 확인한 나는 시선을 거뒀다. 인기 없는 흡연 구역이든 뭐든,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에는 좋았다. 나는 난간에 팔을 얹어둔 채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지난달 울산 밀반입 관련 서류 말씀하시는 거죠?”
-어어, 그거. 그제 회의 때문에 프린트해놨던 거 기억나는데, 공용 캐비닛에 없네?
“어제 반장님이 잠깐 본다고 가져가셨습니다. 휴게실로 들고 가시는 거 봤는데 그 이후에 약속 있어서 바로 나가셨으니까 아마 휴게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쩐지… 반장님이 가져가신 거구만. 휴게실은 생각도 못 했네. 오케이. 고마워. 이제 진짜 연락 안 할 테니까 푹 쉬어. 어제 병원까지 다녀온 놈을 와서 일하게 냅뒀다고 반장님이 아까 하 선배 엄청 깼어. 하 선배 억울해하더라. 분명 말렸는데 네가 괜찮다고 우겼다며?
“정말 괜찮아서 그랬습니다. 병원에서도 씻는 것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고요.”
-너 마음 편히 못 쉬는 거, 그것도 병인 거 알지? 너 없으면 조직 멈출 것 같고 그렇겠지만 멀쩡히 잘 돌아가고, 사람들 어떻게든 일 해결해내. 물론 서류 하나 못 찾아서 삐삐친 내가 하기엔 좀 염치없는 말이긴 해도 새겨들으라고, 좀.
“…….”
-잔말 말고 쉬어. 내일 당직이지? 그것도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오늘 이 자리에 오려고 대충 뭉갠 일이 떠오르니 그러겠다는 대답이 쉽게 안 나왔다. 눈치챈 것처럼 정 선배가 목소리를 깔았다.
-어쭈. 대답이 늦다?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라 이렇게 쉬라고 등 떠미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어제 일로 정말 선배들이 번갈아 깨지기라도 한 건지 휴식을 종용하는 기세가 자못 거칠었다. 오전에 체력훈련실에서 운동했을 때 외에는 오늘 하루 아무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던 팔을 내려다보던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부터 칼에 찔리는 일만은 피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답이 없긴 했다. 고통의 정도만 따져 보면 다른 부상들과 별다르지 않은데도, 칼이 주는 상징성 때문인지 큰 부상인 것처럼 취급받는 게 불편했다.
-그래. 나중에 보자.
“예. 들어가십시오.”
-아, 잠깐만. 나 하나만 더 물어보자.
“예.”
-응급실 로맨스는 대체 뭐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말고. 벌써 서 내에 소문 다 퍼졌으니까.
“…로맨스요?”
-왜, 그 새벽에 다친 팔 치료받으러 갔다가 아는 사람 마주쳤다며. 하 선배 말로는 둘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던데?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눈치챘다. 아… 한 박자 늦게 터져나간 희끄무레한 신음은 긍정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정 선배는 킬킬대며 물었다. 이렇게 놀릴 수 있는 건수가 생긴 것 자체가 기뻐 보이는 말투였다.
-뭔데. 우리 드디어 지 경위가 사주는 국수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선배님.”
-뭐가 아니야. 예쁜 의사 선생님이었다며? 의사면 허구한 날 구르고 다치는 게 일인 지 경위 치료도 해줄 수 있겠고 아주 딱이구만.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인 것뿐인데, 남들에게는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새삼 입맛이 썼다. 그날 유혜은과 내가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니 더더욱. 유혜은도, 나도 존재가 희미했던 그 대화의 주제는 그 자리에 없었던 이지훈이었으니까.
“학창 시절 친구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야야, 다 그러다가 만나는 거야. 나도 와이프랑 거의 부랄친구 급으로 친했다니까? 근데 지금은 애가 둘이야.
쓴웃음을 지을 땐 소리가 안 난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난간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굳은 얼굴을 대충이나마 문질렀다. 잠을 몇 시간 자지 못한 것 때문인지 온몸의 세포가 둔해진 것 같았다. 어제 유혜은이 술도 먹지 말라 했었나? 유혜은과 나눈 다른 대화에 잠식된 뇌가 기억하길 거부하는 듯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녹슨 철문이니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법도 한데 통화하느라 놓친 모양이었다. 뭐가 됐든 아무래도 10분 넘게 혼자 독차지하던 이곳을 비켜줄 때가 된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을 뗀 나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선배님. 저 약속 자리 중간에 나온 거여서요.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어, 그래. 쨌든, 내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만 다들 지 경위 연애에 관심 많은 건 알아두라고. 명색이 마약수사대 간판이잖아. 삼십 줄 들어서기 전에 화려하게 스캔들 한번 내야지?
힘겹게 쥐어짜낸 웃음소리가 최선의 반응이었다. 어렵게나마 통화를 끝낸 나는 난간에 기댄 몸을 세우며 뒤돌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던 뒤를 향해서였다.
“…….”
“…….”
흡연 구역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그렇듯 스치고 말 눈맞춤이 길어진 건 그 사람이 이지훈이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공기에도 외투 하나 없이 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놈은 이렇게 귀한 금요일에도 식사 중간에 자리를 비운 친구를 찾아 나올 정도의 사람이긴 했다.
“줘?”
나와 달리 흡연 구역에 담배를 챙겨 나올 정성을 보인 놈이 들고 있던 담뱃갑을 내밀며 성의 없이 물었다. 이미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있어서인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나는 관성처럼 고개부터 저었다.
“됐어. 피우고 들어와.”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헛돌았다. 시야를 차단하고 선 이지훈 때문이었다. 나는 테라스와 안을 구분하는 철문 중간에 동그랗게 뚫린 유리창에 비치는 이지훈의 뒤통수와 내 굳은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이지훈의 이 행동으로 암묵적인 휴전 선언마저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누군데?”
이유 없이 가려던 길을 막아서고 던지기에는 무책임한 질문임을 알기는 하는지, 내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친절히 덧붙였다.
“학창 시절 친구인데.”
“…….”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고.”
“…….”
“앞으로도 없을 사람?”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이지훈이 말할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였다.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건 이지훈이 그쯤은 우습게 조절 가능한 흡연자이기 때문일 거였다. 담배가 당겨 죽겠다는 표정으로도 내 대답을 듣는 게 우선이라는 것처럼 라이터조차 들지 않는 놈은 끝끝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더는 웃는 척조차 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그치?”
나는 대답 대신 이지훈의 입에 물린 담배를 응시했다. 담배 줄까 물었을 때 그냥 하나라도 집을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
“…….”
“…….”
그러나 내게서 대답을 들을 때까지 필터를 입에 물고만 있을 것 같은 고집스러운 표정을 본 순간엔 생각이 바뀌었다. 그럴 리가. 난 굳은 얼굴을 쓸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어차피 이지훈이 이렇게 굴기 시작한 이상 이 대화가 끝나기 전까지 저 문을 열고 나가기는 글렀다.
“그게 왜 궁금한데?”
“넌 왜 말하기 싫은데?”
둘 다 대답은 안 하고, 버티기만 했다. 당연히 대화란 게 성립이 안 됐다. 답을 정해놓고 묻는 놈이나 그 답을 뱉기 싫은 나나 답이 없었다. 이 자리에 오면 이지훈과 이렇게 대거리를 해야 할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던 것보다 시점이 일렀다. 찬 공기에 뇌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머리가 안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돌아갈 수 있을까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묘안이 없었다. 셔츠 차림의 이지훈은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는 와중에도 꿈쩍 않고 나만 보고 있었다.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며 바지 주머니에 꽂은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불량한 것치고는 얌전한 기다림이었다.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내가 놈의 성화에도 이번 주 내내 집에 안 들어가고 버틴 이유이기도 했다. 매번 이 지랄이 날 걸 알아서.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나는 결국 이 자리에 왔다. 이지훈의 인내심이 끝을 보이는 동안, 나도 더는 놈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두고 볼 수는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저를 둘러싼 풍경과는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구는 이지훈은 이제 막 불씨를 댕겼을 뿐이다. 어차피 장작으로 쓸 건 많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말할 의사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는지 이지훈이 고개를 원위치했다. 출근하지 않는 이지훈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내려와 있었다. 학창 시절에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 시기를 지나 이곳에 섰다. 그 사실을 더는 무시할 수도 없었고.
입을 열었다. 숨을 뱉듯 허공에 이름을 던졌다.
“유혜은.”
“누구?”
이지훈이 슬쩍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어쩌면 바로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도 나와 이지훈 단둘이서는 유혜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문제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가볍게 물고 있던 입술을 놓은 나는 덤덤히 정보를 추가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너랑 짝이었잖아. 기억 안 나?”
그제야 이지훈이 가까스로 기억에서 무언가를 건져낸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아아, 하고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음성은 감탄사라기엔 시시했다. 동창회에서 별로 접점이 없던 동창의 이야기를 들을 때나 나올 법한 반응은 평범하기 그지없어서 오히려 허무했다.
“부반장?”
이지훈 나름의 성의일 기억의 조각에는 픽 하고 웃음이 샜다. 날 보자마자 이지훈부터 떠올린 유혜은과 달리 이지훈은 그새 유혜은을 자신이 아는 명사 중 하나에 가뒀다. 우리가 학창 시절을 지내오며 겪은 수많은 반장과 부반장 중의 한 명으로밖에 남지 못한 유혜은을 생각하니 내가 다 입이 썼다.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튀어나와?”
이지훈의 시선이 내 입매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왜 웃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 걔랑 안 친했잖아.”
방금까지 유혜은 이름조차 기억 못 했으면서, 나랑 안 친하다는 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건지. 허탈하게 웃던 나는 중얼대듯 말했다.
“일하다가 마주쳤어. 회사 사람들이 봐서 오해했고.”
“…아. 난 또 뭐라고.”
궁금증을 해결한 이지훈은 무섭도록 심드렁해졌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끊은 놈이 담배를 문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난간 바로 옆에 붙은 재떨이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느릿느릿했다. 축축해졌을 담배를 입에서 빼 미련 없이 흙 사이로 꼬라박는 놈에게서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철문이 열렸다.
“앞담으로도 모자라서 뒷담 중?”
영은이였다.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로 장난스럽게 묻는 영은이는 이지훈과 달리 외투를 챙겨 입은 차림이었다. 자리를 비운 우리를 일부러 찾아 나섰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예상처럼 영은이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힌 후엔 담뱃갑을 쥐고 있는 이지훈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나도 하나만.”
담배를 피우는지는 몰라서 내심 놀랐는데, 이지훈은 익숙한 일인 것처럼 담뱃갑을 내밀었다. 빽빽이 들어찬 담배 중 하나를 집으며 한 박자 늦게 나를 돌아본 영은이가 웃었다.
“아, 오빠 앞에서는 처음인가? 자주는 아니고 가끔만 피우는 거니까 잔소리하기 없기.”
마주친 눈빛에서 놀란 게 티가 난 것 같았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비슷한 생각일 영은이도 더 말하는 것 대신 이지훈에게서 라이터를 뺏었다. 불을 붙인 영은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과 동시에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힘조차 들이지 않고 가볍게 필터를 빨아들이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생각보다는 꽤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혼수 전쟁 이야기 전해 들은 모양이지?”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확인하는 것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영은이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새로운 담배에 막 불을 붙인 이지훈 쪽이었다. 흘긋 영은이를 본 이지훈은 대답 없이 씩 웃기만 했다. 흐릿하게나마 나타났던 보조개가 눈을 한 번 깜빡인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어째 영은이 약혼자 기를 과하게 죽인다 싶더니,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보고 들은 세월 때문인지, 영은이는 내게도 여동생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보다 더 오래 본 이지훈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었다. 나는 동그란 창문 너머에 시선을 뒀다. 영은이 약혼자가 아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혼자서 남아 기다리고 있겠지만, 더는 안타깝지조차 않았다.
이지훈의 말에 동감했다. 영은이는 눈을 심하게 낮춘 것 같았다.
“강영수가 또 어떤 악마의 편집을 해서 떠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당사자들끼리 합의 잘 하고 끝냈으니 여기까지만 해. 내 약혼자 기 좀 그만 죽이라고, 엉? 이게 청문회야? 청문회냐고.”
당사자 입에서 전쟁이라고까지 비유되었으니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거다. 어떻게든 고생했을 영은이를 대신해 약혼자를 괴롭힌 게 이지훈 나름의 애정 표현임을 알고 있을 영은이는 그래서 화를 내기보다는 툴툴대며 핀잔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영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지훈이 피식하고 웃었다. 겨우 한 번 물었던 담배를 미련 없이 지져 끈 놈이 생뚱맞은 물음을 건넸다.
“영은아. 왜 벌써 결혼하려고?”
당장 3개월 후에 결혼할 사람에게 던지기에는 그릇된 질문이었다. 조금 놀란 듯하던 영은이는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이지훈이라는 점에서 금세 이해를 마친 듯했다. 장단이라도 맞춰주려는 듯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그득 묻어 있었다.
“왜. 섭섭해?”
“응.”
이렇게 순순히 시인할 줄은 몰랐는지, 영은이가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지훈이 개구지게 웃었다. 레스토랑 안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결혼하지 말고 오빠들이랑 좀 더 놀자.”
어깻죽지가 붙잡혔다. 갑자기 어깨동무를 시도한 이지훈 때문이었다. 어제 다친 곳 근처라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뻔했다. 가까스로 참아낸 나는 옆을 돌아보는 것 대신 앞을 봤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가 대화에 끼게 된 순간이었다. 영은이의 앞이었고, 굳이 이 상황에서까지 어색하게 굴어 불필요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영은이는 강영수와 달리 눈치가 빨랐다.
그것까지 계산해 굳이 이렇게 우정을 과시하고 있을 이지훈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깨에서 놈의 손가락이 까딱대고 있었다.
“여기 네가 나쁜 놈 만나면 잡아줄 오빠도 있고.”
“…….”
“비행기 태워줄 오빠도 있고.”
“얼씨구?”
아까 레스토랑 안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나나 저를 번갈아 가리키는 건 똑같은데, 풍기는 뉘앙스며 말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을 영은이도 결국엔 못 말리겠다는 듯 따라 웃었다.
“나 승무원 할 때도 안 놀아주고 바쁜 척이란 척은 다 하더니, 이제야 놀아준다는 거 봐.”
“영은아. 그건 다르지.”
“뭐가 달라?”
“그땐 오빠가 부기장 달기 전이었잖아.”
“아아, 이젠 부기장이 됐으니 좀 시간이 난다?”
“아니지. 귀한 시간이라고 생색을 배로 낼 수 있다, 이거지.”
능청맞은 답변을 돌려받은 영은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긴장을 완전히 푼 채로 웃는 하얀 얼굴이 꼭 처음 만났던 그때 같았다. 젖살이 가득하던 뺨이 이제는 갸름해지고, 하나로만 질끈 묶고 있던 머리가 잘 정리되어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는 걸 보는데도 그랬다. 웃을 때마저도 제 오빠와 똑 닮은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마침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쪽을 돌아보던 영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멈칫하길 잠시 환히 웃는 영은이를 보며 나도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세 명 안에는 여러 개의 두 명이 있다. 지금은 세 명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나눌 때였다.
웃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본 이지훈이 임무를 마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큰 웃음 뒤에는 늘 그러하듯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지훈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허공을 가볍게 스쳤다.
“비록 이 시간까지 붙잡혀 있긴 해도 네 오빠도 대감댁 노비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같이 놀다가 너 없으면 죽겠다는 사람 만나서 결혼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듯, 아까보다는 웃음기 없는 표정이 꽤 진지했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듯 아래를 내려다보던 영은이가 입을 삐죽댔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아직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지훈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구태여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지훈은 별말 없이 다시 영은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준이도 나 없으면 죽겠다고 하거든?”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쳤다.
“글쎄. 나는 아직 옛날 사람인가 봐.”
“…….”
“전쟁에 끌어들이는 사람보다는, 혼자 나가서 명예롭게 싸우고 뒤지면 뒤졌다고 전보나 때리는 사람이 더 멋있는 것 같은데.”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리면서도 영은이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며 말을 돌렸다.
“하여간 오빠는 한마디를 안 져줘. 그것 때문에 강영수가 오빠보다는 빨리 결혼할걸?”
“당연하지. 네 오빠는 애정 결핍이잖아.”
“오빠는 뭐 달라?”
“다를걸?”
어떻게? 오기가 생긴 것처럼 묻는 영은이와 눈을 맞춘 이지훈이 흐음, 하고 잠깐 말을 늘였다. 허공으로 잠깐 던진 시선은 3초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그사이 판단을 마친 듯한 이지훈이 망설임조차 없이 말했다.
“난 아무래도 애정 결핍보다는 지랄병에 가깝지?”
자폭과도 같은 발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영은이가 내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 한마디를 안 진다. 그치?”
동의를 구하듯이 묻는 말에는 뭐라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요새 그 지랄병을 더 도지게 한 게 나인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애매하게 웃은 건데, 영은이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 다가와서 내 손을 꼭 잡기까지 했다. 가끔 태안에 내려가면 이모가 그러하듯이, 내 손 위를 위로하듯 툭툭 두드리면서.
“오빠가 애정 결핍 환자와 지랄병 환자 사이에서 균형 잡느라 고생이 많아.”
날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말끝에 이지훈을 곁눈질하는 걸 보니 장난기가 더 짙게 묻어나는 행위였다. 이지훈이 피식대며 미끼를 물었다. 놈의 시선이 영은이가 잡고 있는 내 손에 박혀 있었다.
“와, 약혼자를 두고 나와서는 옛사랑 손을 막 잡네.”
“어쩔. 이를 거야?”
“당장은 말고. 일단 사진부터 찍어서 증거로 남겨놓을까?”
“와, 오빠 이러다 진짜 내 결혼식에 와서 깽판 치겠다?”
둘의 말장난을 듣던 중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나는 습관처럼 코 밑부터 더듬었다. 찰나의 불안함은 이내 현실이 됐다. 손마디에 축축하게 묻어나온 무언가를 확인한 순간에는 고개부터 아래로 내렸다.
“…오빠?”
손을 확 뺀 것 때문인지 영은이가 놀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뭐야? 코피 났어?”
얼굴을 가려서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에 묻어난 피가 보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나는 고개부터 저었다.
“별것 아냐. 요새 가끔… 아!”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다친 오른팔의 상처가 시큰거리듯 아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온 손길은 이지훈의 것이었다. 아까 어깨를 끌어당길 때와는 악력부터가 달랐다.
“고개 들지 마.”
잠깐 균형을 잃은 몸 때문에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마저 흐트러졌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내 몸을 아예 제 쪽으로 돌려놓은 이지훈이 내 뒤통수를 꾹 잡아 아래로 눌렀다. 다른 한 손은 콧등을 압박하고 있었다. 피가 묻을 텐데,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인내심조차 없어 보이는 행위와는 딴판으로 차분한 어투였다.
“영은아. 안에 들어가서 얼음 있나 좀 확인해 봐.”
“어? 어어. 휴지도 가져올까?”
“아니. 어차피 화장실 들렀다 갈 거야. 그냥 넌 서버한테 얼음 있나만 물어봐. 있다고 그러면 주머니 만들어달라고도 하고.”
“아, 알겠어!”
애매하게 낮아진 시야에 이지훈의 하얀 와이셔츠가 담겼다. 엉겁결에 가까이 붙은 몸이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다. 차라리 담배 향이라도 나면 좋았을 텐데, 기껏해야 한 번 빨고 버린 놈 때문에 코끝에 스치는 건 이지훈의 향수 냄새였다. 이 상황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 중 가장 놀란 것 같은 영은이의 급한 발소리가 멀어진 것과 동시에 몸에 힘을 줬다. 뒤통수를 누른 힘이 생각보다 세다는 걸 느낀 순간에는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축축한 숨이 튀어나갔다.
“놔.”
이지훈은 답하는 것 대신 내 코 밑을 한 번 더 더듬었다. 머리 위로 얕은 한숨 소리가 흘렀다.
“언제부터 이랬어?”
나는 그 어떠한 얼룩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지훈의 와이셔츠를 노려보던 행위를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알아서 화장실 갈 테니까 놓으라고.”
“대답하고 가.”
“…….”
“별것도 아닌 질문 두 번 묻게 하지 말고.”
대화가 또 한 번 평행선을 달렸다. 누군가가 대화에 끼기라도 하면 그래도 교차로라도 지나는 기분인데, 아닐 때는 둘 다 앞만 보고 끝없는 경주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몸에 주고 있던 힘부터 풀었다. 이 와중에도 코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새는 한번 터지면 끝을 모르고 줄줄 흘렀다. 지칠 줄 모르고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별것도 아닌 대답을 숨기게 만드는 건 이지훈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네가 집 들어왔을 때부터.”
이지훈이 침묵했다. 머리를 잡아 누르던 손에 잠깐 힘이 풀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이지훈의 손부터 쳐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놈을 무시하고는 철문을 향해 걸었다.
화장실은 생각보다 붐볐다. 그래도 뒤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고 있는 나를 본 중년의 남자가 깜짝 놀라 자리를 비켜준 탓에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코피가 멎을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덧 화장실 안에는 나만 남아 있었다. 빈 화장실을 둘러보던 나는 코 밑을 한 번 더 훔쳤다. 더는 묻어나오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세면대 위로 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세 걸음 뒤에서 걸음을 멈춘 이지훈과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는 옆에 놓인 티슈를 빼서 코 밑을 대충 닦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구두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내가 참 답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 봐 봐.”
힘을 주어 볼 필요도 없게, 내가 몸을 돌릴 수밖에 없던 곳에 이미 서 있던 이지훈이 말했다. 나는 이지훈을 무력하게 응시했다. 이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손을 올려 내 얼굴에 얹었다. 차가우면서도 물기가 스민 티슈가 볼을 스쳤다. 다음은 코 밑, 입술 옆. 그리고 목까지. 방금까지 내가 피를 닦아내기 위해 스쳤던 모든 곳을 꼼꼼히 훑는 손길은 꼭 애가 아플 때 부모님이 해주는 행위 같았다.
이지훈은 눈까지 내리깐 채로 그 행위에 집중 중이었다. 마치 내 얼굴에 핏자국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사랑이 아님을 어떻게 증명할 건데?”
턱 끝을 간질이던 티슈가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이미 다 닦아냈다고 생각한 피가 점점이 묻어 있는 티슈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지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듣게 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일단 퇴로부터 막을 작정으로 저지른 거라 아직 마땅히 떠오른 게 없는 거야?”
“…….”
“그런 거면 내가 방법 알려줄게.”
이지훈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언제였더라.
“나한테도 유혜은한테 했던 것처럼 해.”
‘모르겠어. 사실 오래된 데다가 당시에는 그게 너무 충격이어서 그랬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그런 뉘앙스였던 것 같아. 어머니 이야기도 하면서, 자신이 없다고. 왜 갑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건지는 모르겠는데 쨌든 결론은 그거였어. 같은 마음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나한테 묻더라. 자기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같은 마음이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거절하고. 이제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물어봐.”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유혜은과 나에게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있다면 하나, 이지훈을 좋아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지금은 좀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유혜은은 아버지의 일로 인해 중학교만 태안에서 졸업하고는 바로 서울로 갔다고 했다. 그 이후 다시 태안으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내가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자마자 엄마를 따라갔다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돌담길 앞에서 내가 서울로 올라가면 자신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하던 이지훈의 모습을 기억했다. 지금에야 인정한다. 맞다, 난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나도 이지훈에게 ‘반장’ 정도의 존재감으로만 남았겠지.
그러나 나는 다른 선택을 했고, 유혜은에게 이지훈이 좋은 과거로 남은 동안 나에게 이지훈은 마주 봐야 할 현재가 됐다. 어쩌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더 돌이킬 수도 없어진 지금에 와서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더는 너랑 친하게 못 지내겠다고,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면, 그냥 알겠다고 해.”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끄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거든. 걔가 말하는 것들이 다 변명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모르는 척해달라고 그랬어, 반 친구로서 아는 척만 하되 더는 친하게 지내지 말자고. 그랬더니 걔가 알겠다더라. 그러고는 정말 그 말을 철저하게도 지키더라. 나중에는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게 후회될 정도로. 난 그래서 너도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어. 둘이 친해 보였으니까. 뽑기함 줬을 때도 네가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알겠다고만 하길래….’
내가 미련해서 끌고 온 짝사랑으로 이지훈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근데 이쯤 되니 좀 궁금했다. 영은이한테 그랬듯 좋아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고, 유혜은에게 하듯이 거절을 한 적도 없으면서 대체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사랑이 아님을 깨닫게 하겠다는 건지.
이 순간마저 이지훈의 눈은 흔들리지조차 않았다. 이유가 있는 것이길 바라며, 나는 말을 끝맺었다.
“왜 네가 제일 잘하는 거 두고 삽질해.”
이지훈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선욱아. 말은 똑바로 하자.”
말투가 차분했다. 얌전하게 내려와 있는 머리나, 증명사진을 찍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 또한 그랬다. 자세 또한 평소처럼 꼿꼿했다. 완벽한 모습으로 선 놈에게서는 그 어떠한 균열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방금 던진 질문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듯이.
“삽질하고 있는 게 내가 맞냐?”
힐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모르고 있던 사실을 짚어주듯 명료하고도 확신 가득한 말투였다.
“한참 생각해야지만 떠올릴 수 있는 동창을 동일 선상에 두는 네가 아니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이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비교하려면 너랑 비슷한 체급인 애를 갖다 붙여야지. 적어도 십 년은 알아 오고, 집안의 대소사마다 얼굴 비치는 게 당연한 사이는 되어야지.”
“…….”
“네가 그냥 중학교 친구였으면, 내가 일주일에 삼백씩 내버리면서 친구 집 화장실이나 청소하고 있진 않겠지?”
내가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지훈의 표정도 단출해졌다. 끝내 바닥이 어딘지 알 수 없게끔 가라앉은 눈이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고개를 비틀었다. 변명인지 반박인지 애매한 것을 간신히 뱉으며.
“…너한테 그런 거 하라고 한 적 없어.”
내 볼을 훔치려던 물티슈가 허공을 맴돌았다. 멈칫한 이지훈은 그러나 아까처럼 모른 척 손을 움직이는 것 대신 물티슈를 옆의 쓰레기통으로 처박듯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물티슈를 깔끔하게 빨아들인 쓰레기통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바로 시선을 낚아챈 이지훈이 보란 듯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눈에 보일 만큼 턱에 힘을 주고 있던 놈은 한순간에 얼굴에서 힘을 풀었다. 그런 방식을 써 봐야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왜 안 하는데?”
사람을 상처 입힐 때는 몸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어쩌면 가장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그게 네가 날 좋아하는 방식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좋아하다가 고백과 동시에 포기하고 도망치는 거? 그럼 나는 일단 쫓아가야지만 네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거고?”
뱉기에만 십 년이 넘게 걸린 짝사랑은 당사자의 입에서 저렇게도 짧게 요약된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지훈이 입을 열 때마다 나조차 볼 자신이 없어서 일단 덮어두었던 깊은 마음속 내핵까지 파헤쳐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 안에는 굳이 볼 필요 없는 것들이 숨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욕심이라는 게 없을 수는 없어. 네가 날 좋아하면서 바라던 게 이딴 말 같지도 않은 꼴이 맞아?”
그러니까, 놈이 이렇게 어떻게든 끝을 보려고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어설프게 숨겼던 것들. 나는 당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듯한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낸 욕심은 이곳이 이렇게 엉망이 되기 전에 도망치길 바랐던 것까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본 이지훈이 처음으로 망설였다. 오늘 마주하고서는 처음이었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러나 나와 달리 놈은 뱉는다. 언제나처럼. 그 말을 뱉음으로써 일어날 일을 감당하는 게, 그 말을 참는 것보다는 훨씬 쉬울 테니까.
“선욱아. 난 없어.”
그건 이지훈과 나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야구 포기할 때도, 공사 자퇴하고 나올 때도 남들이 다 미쳤다고 했어. 그래도 나 그 결정 후회한 적 없어.”
“…….”
“근데 너 내 일상에 못 돌려놓으면 후회할 것 같아.”
나는 내가 고백함으로써 일어날 일을 감당하는 게, 그 말을 참는 것보다 늘 어려웠으니까.
이지훈을 잃을까 봐, 친구라는 도피성 자격조차 잃게 될까 봐, 나중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지훈 옆에 있을 수가 없게 될까 봐.
아주 오랫동안 해온 일은 결국엔 습관이 되어서 이 순간마저도 날 제자리에 붙든다. 그걸 아는 것처럼 배로 집요하게 구는 이지훈을 보며 나는 이제 그 습관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됐다.
“…이미 후회해.”
이지훈이 말을 쏟아내던 걸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꾸역꾸역 뱉었다.
“다른 거 말고, 너한테 고백한 거. 그거 하나 후회해.”
“…….”
“그게 내가 너 좋아하면서 처음으로 대놓고 욕심내본 순간이었어.”
난 타고나길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인데, 이지훈과 관련한 건 예외였다. 수도 없이 상상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내가 보게 될 풍경들.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마음을 숨기고 산다면, 친한 친구라는 틀에 만족하고 산다면 이지훈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자격은 얻게 되겠지. 결혼식 전에 이지훈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신랑에 이지훈의 이름이 당연하게 적힌 청첩장을 받게 될 터다. 결혼식장 입구에 강영수와 함께 서서 이지훈의 축의금을 대신 받아주고 결혼식 사진을 찍을 때도 이지훈 옆에 서 있겠지.
보통 상상을 많이 하면 무뎌지니까, 나도 내가 괜찮을 줄 알았다. 뭐 그리 어렵겠냐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현실은 늘 들이닥친다. 그 자리에서 거들먹대던 환상이며 상상 같은 것들을 보기 좋게 박살 내며. 이지훈이 내게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내가 줄곧 선명하게 보고 있다고 믿었던 사진 같은 미래가 실은 이지훈으로부터 불어온 바람 하나에도 휘청거리는 커튼에 비친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찰나에 부서진 것들을 보며 이게 내 한계였음을 인정했다. 앞으로 맞게 될 풍랑을 견딜 자신이 없다는 것도.
“결과는 이딴 꼴이고.”
문이 열렸다. 우리 또래의 남자가 우리 둘을 대놓고 힐끔대며 소변기로 다가섰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는 것 대신 마주 보고 눈싸움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했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나만을 보고 있는 이지훈을 두고 고개를 내렸다.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내가 받지 않으니, 진동 소리는 이지훈에게로 넘어갔다. 이지훈도 나처럼 받지 않았다. 시간을 두지 않고 나와 이지훈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내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 순간,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볼일을 마친 남자가 세면대로 다가오길래 슬쩍 몸을 돌려 이지훈과 멀어졌다. 거울 속으로 허공에 손을 털며 나가는 남자가 보였다.
쾅. 문이 닫히고 화장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전화기 너머 강영수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선욱 씨, 저 진짜 다 왔어요. 진짜예요. 바로 앞이에요. 골목이라 아저씨가 못 올라간대서 지금 존나게 뛰는 중!
달리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꽤 거셌다.
-나 너무 늦어서 화난 거 아니지? 응? 이지훈 그 새끼는 갔어? 그 새끼 지각하는 거 극혐하는 거 알아서 일부러 전화해 봤는데 안 받네. 밥은 좀 먹었어? 시키긴 했지? 거기 먹물 리조또 맛있다고 아까 돼지한테 카톡 보내놓긴 했는데.
늦은 게 미안한지 말이 평소보다 더 길었다. 말이 비는 틈마다 제 살 곳을 찾으려는 듯 끼어드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있어. 천천히 와. 괜히 뛰지 말고.”
-오케이! 나 이제 진짜 진짜 앞! 끊엉!
전화가 뚝 끊겼다. 핸드폰을 아래로 내린 나는 눈을 들었다. 거울로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은 말없이 날 보고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강영수까지 왔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이지훈이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라도 먼저 나가야만 했다.
돌리려던 몸을 멈춘 건 시야에 잡힌 이지훈의 손 때문이었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핏자국들은 아까 내 코를 압박할 때 묻은 게 분명했다. 내 얼굴을 물티슈로 닦아내는 동안 정작 이지훈의 손가락은 줄곧 저렇게 엉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망설이면서도 난 입을 열었다.
“손 닦고 나와. 피 묻어 있어.”
이지훈이 고개를 내려 제 손을 내려다봤다. 마치 그제야 손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걸 안 것처럼. 손에 시선을 둔 채로 움직이지 않는 놈을 그대로 두고 걸음을 옮겼다.
“아는 형이 서언대학병원 내과 교수 아들이야.”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훈은 내게서 등을 보인 채 손을 씻고 있었다. 물비누를 손에 짜고, 문질러 씻어내는 행동이 정갈했다.
“검사 부탁해둘 테니까 시간 만들어서라도 가서 검사받아. 아무리 피곤하대도, 너 입시 때 이후로 코피 흘린 적 없어.”
분명 물이 흐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데도 이지훈의 말소리 하나 묻히지 않았다. 내가 이지훈의 말을 흘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일까 아니면 이지훈이 힘을 줘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헷갈렸다. 대답하지 않으니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놈과 조금 더 시선을 맞추던 나는 대답 없이 문을 닫고 나왔다.
멀리서부터 보였지만, 테이블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사람 한 명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아까와는 퍽 달랐다. 인기척을 눈치채고 뒤돈 강영수는 날 보자마자 팔에 매달렸다.
“아이, 빈손으로 오랬더니 뭘 또 사 왔어요!”
손에 내가 사 온 선물이 들려 있었다. 매달리는 놈을 대충 받아주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등 뒤로 신경이 몰렸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서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이지훈의 구두 소리만은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나와 강영수를 스쳐 가더니 의자를 빼 앉는 이지훈의 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지훈을 어려워하는 눈치인 약혼자의 얼굴이 빳빳이 굳고, 영은이가 눈이 마주친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또한.
“괜찮아? 일단 얼음 받아놓긴 했는데 그새 좀 녹은 것 같아서….”
“엉? 뭐가 괜찮아?”
“선욱 오빠 코피 났어, 아까.”
“뭐? 어디, 어디. 봐 봐.”
“됐어. 닦았어.”
“갑자기 코피가 왜 나?”
“…그냥. 피곤했나 보지. 별일 아냐.”
“그래도 그렇지. 나 너 코피 나는 거 고딩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때는 진짜 자주 흘리긴 했는데. 아니 근데, 요새 좀 무리한다 싶긴 했어. 전화할 때마다 야근하고 있었잖아.”
“뭐….”
“적당히 해. 그런다고 회사에서 딱히 알아주지도 않는다니까? 우리 용주가 방금 뭐랬는지 아냐? 야근해서 수당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시간 내에 할 일을 모두 마칠 방안을 강구해 보래. 씨발 새끼. 그게 불금에 지 때문에 야근하게 생긴 사람들 앉혀놓고 할 말이냐?”
“알겠으니까 앉아서 이야기해.”
선 채로 줄줄 수다를 이어 나갈 기세인 강영수의 등을 떠밀다 말고 멈칫했다. 영은이와 영은이 약혼자의 반대편에 놓인 세 개의 의자. 이 자리의 주인공이기도 한 강영수를 가운데 의자에 앉힐 계획이 깨졌다. 이지훈이 이미 그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탓이었다. 이로써 난 아까와는 달리 어느 의자를 택하든 이지훈의 옆에 앉아야만 했다.
“와인은 뭐로 시켰어?”
그에 딴지 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강영수는 영은이가 쓱 밀어준 메뉴판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이것저것 묻느라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도 걸음을 옮겼다. 이지훈의 왼쪽 자리였다. 내가 옆에 앉자 이지훈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행위를 멈추고는 테이블 위로 핸드폰을 툭 던졌다. 가장 먼저 시선이 스친 놈의 손은 깔끔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자, 늦었지만 다들 한 잔씩 하자.”
자연스럽게 안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강영수가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비록 우리 용주가 지랄하며 피날레를 장식하긴 했어도 나 오늘 성과급 받았다. 제대로 쏠 테니까 다들 많이 먹어.”
“오예. 완전 탈탈 털어먹어야지. 자자, 다들 잔 드시고!”
눈을 빛내며 잔을 드는 영은이를 필두로 자리에 있던 모두가 와인 잔을 들었다. 와인 잔을 한곳으로 모아 부딪치는 과정에서 이지훈과 팔이 닿을 뻔했다. 왼손잡이도 아닌 놈이 왼손으로 와인 잔을 든 탓이었다. 함께한 술자리만 해도 수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흘긋 이지훈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까만 눈동자가 왜? 라고 묻는 것 같았다.
“…….”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뻔뻔한 얼굴에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나는 마주친 시선부터 끊고는 와인을 든 손을 왼손으로 바꿨다. 입을 대지 않고 잔을 그대로 내려놓는 나를 봤는지, 강영수가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왜 안 먹어? 차 끌고 와서 그런 거면 대리비 줄 테니까 같이 먹자.”
“…그런 거 아냐. 자리 끝나면 경찰청 들러야 해.”
일부러 보지 않았지만, 이지훈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음은 느껴졌다. 경찰청으로 가야 된다는 말을 할 때는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헛웃음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던 시선은 느리게 물러났다. 이지훈이 손을 들어 강영수의 등을 내리친 것도 동시였다.
“아악! 씨발, 뭐 하는 짓이야!”
“늦으면 선빵이라며.”
“…아.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이지훈 씨발놈아? 제 생일인 건 잊어버리시고?”
“영은아. 거기 발밑에 있는 큰 박스 버려라. 네 오빠가 필요 없단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세요, 지훈 씨. 인디언 밥 안 해도 되시겠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고요.”
“와, 진짜 사 왔어? 미친 거 아냐? 애초에 오빠가 맥북이 왜 필요해? 전자제품이 널린 회사에 다니면서.”
“영은, 아. 아니. 누나. 그렇게 열다 손 다쳐. 내가 할게.”
모두가 한마디씩 했지만 우리 둘만은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저녁을 버텨내는 동안엔 쭉 그럴 것이었다.
10시에 자리가 파했다. 내일 아침부터 결혼식장에 들를 일이 있다던 둘이 먼저 사라지고, 강영수가 남은 사람끼리라도 2차를 가자며 붙잡았지만 끝끝내 일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지훈도 별말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강영수가 우리가 같이 산다는 걸 알았다면 왜 같이 가지 않냐며 뭐라도 말을 걸었을 텐데, 운전석에 앉은 내게 택시비를 굳이 쥐여주던 강영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핸들을 돌렸다.
아까 그렇게 전화로 여러 번 혼나기까지 했는데 다시 일터에 얼굴을 들이밀 염치는 없었다. 갔다가 쫓겨날 게 뻔했다. 갈 곳 잃은 내가 갈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발길이 뜸하긴 했더랬다.
“…….”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병원 복도는 한산했다. 간호사들이 있는 데스크 외에는 병동 내 불이 대부분 꺼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불이 꺼진대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지난 몇 년간 질리도록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어느새 복도의 끝에 붙은 2인실 병동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며 짧게 시선이 스친 환자명은 익숙했다.
[지청우 환자]
원래대로라면 같이 병실을 쓰는 환자의 이름이 적혀 있을 자리가 깔끔했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한 번도 말하는 것을 본 적 없던 그가 어디로 사라졌을지를 생각해보다가 그만뒀다. 병동에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의 결과물은 대개 예상 가능한 방향이므로.
드르륵.
매번 느끼지만, 들어설 때마다 꼭 거대한 무덤에 들어서는 것같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몸에 붙은 생명유지장치가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그렇다. 사람의 말소리는 없다. 말을 걸어도 받아줄 사람은 몇 년째 잠이 들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혼잣말을 해 봤자 무덤 속에서 그렇듯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창가에 붙은 침대로 다가섰다. 침대를 빙 둘러싸고 있는 커튼이 반쯤 젖혀져 있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었다. 불이 꺼져 있는 화장실 쪽을 힐긋 본 나는 그녀를 찾는 것 대신 의자를 침대 옆으로 바짝 끌어와 앉았다.
“…….”
할아버지는 오늘도 미동조차 없이 자고 있었다. 실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잘 때면 늘 왼쪽으로 등을 돌려 잤으니까. 건너편에 있는 내 방에서 자기 전에 꼭 본 모습이었기에 알고 있었다. 이렇게 천장을 본 채로 똑바로 누워서 잠이 든 건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나는 움직이는 모양대로 접혀야 할 이불이 막 세탁되었을 때처럼 빳빳하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그 위에 얹혀 있던 할아버지의 손을 끌어왔다.
“…요새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조금 바빴어요.”
그가 궁금해할지는 모르겠으나, 내 안부를 전했다. 사실 할아버지가 이렇게 되고 나서도 몇 년간은 이 행위조차 못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의 손도 잡아보고, 어색하게나마 말을 걸어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몇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곤 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는 거였다. 5년 넘게 식물인간이었다가 기적같이 의식을 찾은 사람의 후기를 본 적 있다. ‘가족들이 말을 할 때마다 답을 하고 싶었어요. 분명 들리는데, 나 여기 듣고 있다고 말해줄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매일매일 하다 보니 손가락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의식을 되찾는 일이 말도 안 되는 확률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내게는 1%의 확률일지라도 소중했다.
주름진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다. 따지자면 심전도 그래프나 다른 의학적 증거들도 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 정도는 증명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촉각으로 느껴지는 이 증거에 가장 마음이 끌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마사지하듯 조금씩 주물렀다. 그러고 보니 손톱을 깎아드려야 하는데, 요새 일에 바빠 그것조차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래도 간병인 아주머니가 대신 깎아주기라도 한 건지 손톱은 많이 자라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이불을 들춰 확인해본 발톱도 깔끔했다. 나는 이불을 그의 몸 위로 한 번 더 꼼꼼히 덮어주었다.
드르륵-
“어, 선생님. 오셨어요?”
간병인 아주머니였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찾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이고, 오신 줄도 모르고.”
첫인사 이후 두 번째 만남이라 그런지 아직은 내가 어려우신 듯했다. 왔을 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는 게 신경이 쓰이기라도 한 건지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방금 왔습니다. 잠깐 뵈러 온 거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새로 구한 간병인 아주머니는 전 간병인 아주머니가 구해주신 분이었다. 고향 후배인데, 경력이 길진 않아도 한번 환자를 맡으면 오래 맡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 5년 동안 할아버지를 잘 챙겨주신 전 간병인 아주머니를 믿기에 더는 묻지도 않고 그냥 알겠다고 했었다. 잠깐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손에 들린 가습기를 옆 탁자 위로 올려두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일어서느라 놓칠 뻔한 할아버지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은 것과 동시에,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수첩을 손에 든 그녀는 무언가가 궁금한 기색이었다.
“이번 주가 혹시 할아버님께 특별한 날인가요?”
“…네?”
“선생님도 오랜만에 오셨고, 아까 오신 분도 그렇고.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오시는 건데 제가 모르는 건가 해서요. 명희 언니로부터 인계받을 때 딱히 오늘 날짜에 관해서 들은 건 없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라 해 봐야 정해져 있었다. 할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 태안에 계신 강영수 어머님이나 이지훈 아버님은 올라올 때마다 내게 꼭 연락하셨다. 최근에 딱히 받은 연락이 없던 것을 깨달은 내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그녀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친구분이 연락 안 하고 오신 거였나 보네.”
친구? 멈칫한 나를 본 그녀 또한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분 맞을 텐데. 명희 언니도 얘기해줬거든요. 선생님 말고도 친구가 종종 찾아오니까 놀라지 말라고. 여기 적어놓기도 했을 텐데요. 잠시만요.”
수첩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눈가를 찌푸렸다. 힌트가 될 것들을 더 생각해내야만 하는 것처럼.
“되게 잘생긴 친구던데. 성격도 좋던데요. 처음 본 건데 붙임성 좋게 말도 잘 걸고. 오늘은 저 먹으라고 초밥도 사주고 갔어요.”
“…….”
“키도 컸어요. 선생님이랑 비슷했는데? 아닌가. 조금 더 큰가? 이 정도?”
손아귀의 힘이 풀릴 뻔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가까스로 물었다.
“…언제 왔다 갔나요?”
“어… 오늘은 열두 시쯤이었나? 이번 주는 거의 매일 오셨죠. 다른 날에는 아침에도 오고, 점심에도 오고. 와서 할아버님 손톱도 깎아드리고 이곳저곳 주물러드리면서 한참 수다를 떨고 가끔은 책도 읽어주고 그러셨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친구 잘 두셨어요. 그런 친구가 어딨어요. 제가 그래도 간병인 생활 꽤 해 봤는데, 친구가 와서 그렇게 하는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웃으며 칭찬을 덧붙이는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꾸준히 찾아와준 사람이 있어 좋았다는 것처럼. 나는 아까 특별한 날이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를 세어보던 행위를 멈췄다. 아, 하는 작은 신음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내렸다. 할아버지의 손을 괜히 꼭 잡아보았다. 그렇게 세게 힘주어 잡아도 손톱이 내 손바닥을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이지훈이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아주머니가 내 눈치를 살피고 계심을 눈치채고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특별한 날은 아닌데,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들렀나 봐요.”
“아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기, 좀 쉬다 오세요. 제가 조금 더 있을게요.”
“네. 그럼 저 이 앞에 있을게요. 도움 필요하시면 편하게 부르시고요.”
간병인 아주머니까지 나가시고 나니 병실에는 할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둘이지만,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는 나뿐이었다. 나는 듣지 못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내 인생에서 이지훈을 도려낸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누워 있는 할아버지에게서도 이지훈을 뺏어야 했다. 이렇게 내가 없는 사이에 병실로 와 할아버지의 곁을 지켜주고 손톱까지 잘라줄 줄 아는 또 다른 손자 같은 애를.
그리고 그런 사실만은 절대 생색내지 않는 그 애를.
* * *
집은 내가 없는 동안 많이도 바뀌었다. 이렇게 현관에서부터 놓여 있는 실내용 슬리퍼만 봐도 그랬다. 먼지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신발장까지도. 잠깐 아득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이지훈이 이걸 사 왔을 때의 상태 그대로 전시라도 된 듯 반듯하게 놓여 있는 실내화에 발을 꿰었다.
집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부엌이며 욕실을 대충만 훑어봐도 이지훈의 손길이 닿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어둠 속에서도 잘 정돈된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이니. 이번 주에 매일 할아버지 병실에 출석 도장을 찍는 와중에도 집을 뒤집어놓듯 청소한 모양이다.
“…….”
어둠이 눈에 익자 거실의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이지훈도 무리 없이 알아볼 수 있었다.
누울 시간이 있으면 침대를 택하는 내게는 별 효용성이 없는 소파였다. 강영수가 집들이 선물이라며 사준다고 몇 주를 귀찮게 굴길래 제대로 보지조차 않고 골랐던 기억이 났다. 딱히 길이를 생각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사둔 소파는 들여다볼 일조차 많지 않았다. 이지훈의 키를 차마 다 받아내지 못해 팔걸이 너머로 발목을 덜렁 노출시키고 있는 소파를 본 순간에야 길이가 짧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정도로.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누워 있는 놈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아까 술자리에서 본 차림 그대로 항의라도 하듯이 이불조차 덮지 않고서는. 그 와중에 텔레비전은 켜놨다. 나는 알 수 없는 외국어를 뱉는 배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왔다. 그러는 내내 미동조차 없던 이지훈의 위로 이불을 대충이나마 덮어줬다. 깨우지 않으려 손을 조심히 움직이다 보니 이불의 위치가 이상했다.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이지훈의 얼굴 근처에 튀어나온 이불 끝만 살짝 매무새를 고쳐주고 말 예정이었다.
“만져.”
내가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고 있어야 할 이지훈이 해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아까만 해도 손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눈이 보였다. 이지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취기도, 잠기운도 찾아볼 수 없는 또렷한 눈빛이었다.
“욕심내라고.”
뒤늦게야 손을 뒤로 빼려던 시도는 갑자기 손목을 틀어쥔 이지훈 때문에 무산됐다. 손목을 내주게 된 나는 주먹부터 꽉 쥐었다. 그렇게 힘을 줬는데도 이지훈의 손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오히려 한층 악력이 강해지기만 했다. 둘 다 힘을 주고 버티는 탓에 손에 나란히 핏줄이 섰다.
이지훈은 여전히 누운 자세 그대로였다. 나를 올려다보며, 놈이 강한 어조로 뱉었다.
“허락해줄 테니까 하라고.”
이지훈은 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나라는 걸 강조하려는 것처럼.
“사랑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나 사랑이 아님을 증명하는 방식이나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니야?”
“…….”
“여태 너랑 나랑 한 번도 안 해 봤던 거 해. 그게 뭐든, 네가 하고 싶었던 거 있으면 하라고. 그럴 수 있게 해줄게.”
“…….”
“그러다 보면 알게 되겠지. 누가 어디에 환상을 품고 있었는지.”
이지훈이 입을 열 때마다 치약 향이 났다. 나는 운전석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던 강영수에게서 나던 술 냄새를 떠올렸다. 이지훈과 강영수는 거의 같은 속도로 잔을 비웠다.
알리바이라도 만들어내듯 술을 먹은 이지훈이 집에 들어오며 했을 일을 상상했다.
택시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서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셔츠 단추를 풀고, 슬리퍼를 신고 들어와 양치했겠지. 그러고는 텔레비전을 틀고 그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로 이 소파에 줄곧 누워 있었겠지. 내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면서.
어렵지 않게 이어가던 행위는 하나의 물음 앞에 멈춰 선다. 그 시간 내내 이지훈은 줄곧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해온 게 사랑이 아닌 우정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내줄 수도 있다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랑 안 해본 거라곤 이런 거밖에 없어.”
그러니까, 이지훈은 지금 우정을 과시하는 거였다. 자신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음을 알리는 행위를 통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눈을 피하지 않으며, 나는 손에 주고 있던 힘부터 풀었다.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던 행위를 멈추자, 이지훈의 손에 꼼짝없이 붙들린 꼴이 됐다. 내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잠깐 멈칫하던 이지훈은 이내 내 손을 가져가서 자신의 몸 위에 얹었다. 셔츠 깃이 있는 곳이었다. 단추가 이미 두어 개 풀린 셔츠는 벌어진 틈 사이로 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손을 친절하게 단추가 있는 곳 위에 얹어준 놈 때문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결국 셔츠 사이에 닿았다. 놈의 맨살이었다.
아까 와인 잔을 들 때 팔이 부딪쳤던 게 떠올랐다. 그게 이지훈이 화장실에서 나온 뒤였다는 것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놈은 그때부터 이래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을 한 걸까. 굳이 내가 어느 쪽이든 옆에 앉을 수밖에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왼손으로 잔을 들어 굳이 팔을 부딪치는 스킨십까지 해가며.
“왜. 막상 만질 생각 하니까 안 꼴려?”
도전적으로 묻는 놈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린 정말 다시는 친구조차 되지 못하겠구나.
평생 남자랑 손조차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놈이 자처해서 양치까지 하고 오게 만든 내가 무얼 바랄 수 있겠냐만, 그래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스쳐 지나갈 수는 있을 정도의 인연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뒤로 빼지도 못하고, 앞으로 숙이지도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멈춘 자세부터 고쳤다. 손에 힘을 주고는 몸을 천천히 앞으로 숙였다. 이 정도는 각오했다는 듯, 이지훈은 가까워지는 나를 보고서도 움찔하지조차 않았다.
“…….”
“…….”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는 허공에서 노려보듯이 맞서던 시선까지도 뭉개졌다. 이지훈의 셔츠 위를 그러쥐듯 잡은 손은 얼핏 보면 멱살을 쥔 것처럼도 보였다.
그 자세로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이제 이지훈에게서는 내가 모르는 향이 났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은 적이 없어서 몰랐던 놈의 살냄새 같은 것들. 향수와 비누, 그리고 치약 향이 경계 없이 뒤섞인 누군가의 숨에서 풍기는 조심스러움. 멈춘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했는지, 이지훈이 재촉하듯 말했다.
“해.”
내리깐 눈이 내 입술을 보고 있었다.
“받아줄 테니까 하라고.”
하나도 꼴리지 않는 표정으로. 마치 숙제라도 하나 해치우듯 뱉는 놈을 보니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역설적으로 손에는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 반동을 이용해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았다.
“…아!”
누워 있는 이지훈의 들린 상체를 대신 지탱해주던 힘을 전부 수거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자기 딱딱한 소파 팔걸이에 뒷머리를 부딪치게 된 이지훈이 머리를 감싸 쥐면서 소리를 지르는 걸 무시하고는 몸을 완전히 뒤로 뺐다.
“술 처먹었으면 곱게 자. 헛소리하지 말고.”
“야이 씨, 갑자기 그렇게 놓으면. 아… 진심 개아파. 씨발… 뇌세포 몇억 마리 죽은 것 같은데 지금?”
“잘됐네. 그 김에 정신이나 차려.”
이지훈의 불만스러운 시선이 일어선 나를 따라 쭉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뒷머리를 마구 문지르던 놈은 그러나 이내 모든 행위를 멈춘 채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는 걸 막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나 또한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고백한 이후 만날 때마다 팽팽히 맞섰던 탓에 이렇게 평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오랜만이었다.
사실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래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갑자기 만지라니 뭐니, 헛소리해댈 줄은 몰라서 당황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러나 여태껏 그랬듯 뒤돌거나 도망치지 않은 채로 제자리에 서서 놈을 바라봤다. 이지훈도 그걸 눈치챈 듯했다. 당장 뭔 일이라도 낼 것처럼 비장해 보이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까처럼 헛소리를 뱉는 것 대신,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앉는 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도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차 수리 언제 끝나.”
그때 응급실에서 뒤의 범퍼가 완전히 망가진 차를 수리 맡겼다는 것까지만 듣고, 그 이후로는 근황을 전해 듣지 못했다. 이지훈은 인상부터 팍 찡그렸다.
“왜. 수리 끝나면 차로 내쫓으려고?”
일주일 내내 나가라는 소리만 들었으니 딴에는 합리적인 추론일 터였다.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으니 이지훈의 표정도 점차 띠꺼워졌다. 놈이 나를 외면하고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텔레비전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비꼬듯 답하기도 했다.
“그거 물어보려고 왔냐? 참 대단하다, 대단해.”
“딴소리하지 말고 대답해. 언제냐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홍길동처럼 구시느라 못 들었나 본데, 나 차 버렸어. 그냥 비행기로 출퇴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렇게 알아라.”
뭔 지랄을 해도 제 발로는 나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저딴 식으로 한다. 비행기로 출퇴근 같은 소리 하네. 아까 강영수랑 차 수리비 이야기하는 것까지 다 들었는데.
내가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이지훈은 한술 더 떠 소파의 팔걸이에 얼굴까지 딱 갖다 붙였다. 내가 소파에 있는 자신을 떼어내기라도 할까 봐 미리 대비하는 사람처럼. 나 대신 텔레비전을 눈 빠질 듯 노려보고 있는 놈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하여간, 고집은….
“야.”
이제는 쳐다보지조차 않는다. 오기가 생긴 난 발을 들어 소파를 툭 찼다. 소파가 카펫에서 슬쩍 밀려나기까지 했는데도, 이지훈은 시선조차 안 줬다. 대놓고 귀를 후비기도 했다.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이럴 때 보면 이웃집 꼬마보다도 더 말을 안 듣는 것 같다. 이지훈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진한 한숨부터 뱉으시는 이지훈 아버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는 더 씨름하길 포기하고 그냥 본론부터 내놓았다.
“내일 휴가 냈어.”
힐끔 날 확인한 이지훈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소파 밖으로 나온 발이 흥미 없다는 듯 건들댔다. 나는 참을성 있게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내 차로 다녀오자.”
“어딜.”
“태안.”
그제야 최선을 다해 날 외면하던 일이 멈췄다. 몸까지 일으켜 날 보는 놈은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집에 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을 꺼냈다. 따지자면 제안이었다.
“새벽에 출발하면 그래도 어머님 산소 다녀오고 아버님이랑 밥 한 끼 먹을 시간은 될 것 같아.”
간병인 아주머니의 질문에 이번 주 들어 처음으로 날짜를 셌다. 주간 근무와 야간 근무가 구분 없이 섞인 일을 하며 가끔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잊고 사는 내가 오랜만에 한 짓이었다. 그러다 떠올랐다.
이번 주는 할아버지에게는 특별한 주간이 아니지만, 이지훈에게는 그랬다. 내일이 이지훈 어머님의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자막이 없으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가 상영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사실 난 이 영화를 알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커튼이 쳐진 그 영상시청실에서 보았던 외국 영화기도 했다. 시청실에 들어가자마자 칠판에 크게 적혀 있던 영화의 이름을 보던 내게 이지훈이 물었었다. 봤어? 그때는 그냥 고개를 젓고만 말았다. 그렇게 물어보는 놈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지훈 옆에 있다 보니 그때만 해도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다. 나는 이제 이지훈이 왜 그때 그 질문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왜 보지도 않는 영화를 틀어놓고 새벽을 보내는지 정도는 알게 됐다.
‘지선욱.’
그 영화는 이지훈의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였다. 어렸을 때부터 틈날 때마다 영화의 테이프를 틀고 또 틀어두었던 그녀 덕분에 이지훈은 이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를 외웠다. 그러니 그때도 보지조차 않고 고개를 푹 수그린 것이다.
우연은 얄궂다. 영화감상부 선생님은 왜 하필 그날 그 영화를 골랐을까. 그게 열여섯 소년에게는 상실부터 깨닫게 하는 매개체인 것도 모르고.
‘행복해?’
평생 옆에 있어 줬으면 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이지훈은 내게 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걔한테는 아프지 않고 평생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이지훈.”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연은 얄궂다.
이지훈에게는 내가 친구라서 빌 수 있는 소원이, 나에게는 친구에게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을 확신하는 매개체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나는 13년이 지난 질문에 이제야 답한다. 그때만 해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평생 입 안으로 숨겨두었던 답이었다.
“난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욕심이라는 게 없을 수는 없어. 네가 날 좋아하면서 바라던 게 이딴 말 같지도 않은 꼴이 맞아?’
“행복했으면 좋겠어.”
넌 모르겠지. 네가 나로 인해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아니고 네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만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건지를.
근데 괜찮아. 몰라도 돼.
대신, 그 감정을 너한테 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날 때는 내가 네 옆에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 말 들어.”
“…….”
“넌 그냥 시간이 필요한 거야.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이지훈이 이렇게까지 할지는 몰랐지만, 나를 어떻게든 자리에 붙잡아두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심장이 제대로 뛰기 위해서는 혈관이 필요한 것처럼, 내 인생 한가운데에 박힌 이지훈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이리저리 거미줄같이 엮인 것들이 많았다. 이지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나라는 혈관을 과대평가하고 있을 뿐. 그러나 사람은 혈관이 막혀도 산다. 당장은 그중 하나만 막혀도 큰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라는 작은 혈관 하나가 끊긴다 해서 이지훈이 무너질 일은 없다.
“집수리 끝날 때까지 나가란 말 안 할 테니까 그때까진 있어. 대신 두 달 뒤에는 나가. 그때는 네가 이렇게 우긴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알아두고.”
나름의 타협안이었다. 그게 현 상황에서 최선의 방안인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나는 몸을 숙였다. 소파에 누운 이지훈을 피해, 반대쪽 팔걸이와 가까운 소파의 몸통에 등을 대고 앉았다.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누운 채였지만 적어도 나란히 앞을 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침묵하던 이지훈은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그때도 같은 결론이면 어떡할 건데?”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굳이 말로 뱉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피곤한 한 주였다. 집에 오지도 못하고, 병원에도 들르지 못하고, 이지훈과 날을 세우고 싸우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은 얼추 해결됐다. 집에 왔고, 병원에도 다녀왔고, 이지훈과도 휴전했다.
드디어 모든 걸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고서야 잠이 몰려왔다. 나는 이번 주에 처음으로 다가온 그 달콤한 유혹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 * *
‘지 경위. 내일 출근 안 한다며.’
‘예. 하 선배가 당직 순서 바꿔주셨습니다. 혹시 문제 있을까요?’
‘아냐. 잘했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 아, 그리고 월요일 날 오면 면담 좀 하자? 아까 상부에서 연락 왔어.’
‘연락 말입니까?’
‘너 전근 신청한 거. 서산에 자리 하나 난 모양이야. 1차 신청지가 아니어서 확인이라도 해보려고 물어보는 눈치더라고.’
‘아… 네.’
‘안 갈 거지? 태안이야 고향이니 그렇다 쳐도… 거기다 저번에도 말하긴 했지만 난 영 안 내켜. 왜 거기까지 가서 능력 썩히려 들어. 너 이번에 승진 밀어주려고 네 선배들까지 노력하고 있는 거 몰라?’
‘…….’
‘여보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반장님. 저 서산은 힘들 것 같습니다.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야, 잘 생각했다. 네가 봐도 조금 이상하긴 했지? 다들 어떻게든 서울로 전근 오려고 난리인데 넌 왜 거꾸로 가려고 해.’
‘아뇨. 태안에는 자리 나면 갈 겁니다.’
‘야이, 너 진짜 다른 거엔 네네 하며 말도 잘 듣는 놈이 왜 이 문제엔 쓸데없이 고집부려?’
‘월요일 날 뵙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휴 진짜… 끊어, 인마!’
‘예. 들어가십시오.’
* * *
“귤은 안 받아왔지?”
보조석에 걸터앉아 있던 이지훈이 나를 발견하고는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리며 물었다. 통화 중인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들고 있던 상자 하나를 트렁크 안으로 마저 밀어 넣었다. 내려올 때만 해도 운동 가방 하나만 덜렁 굴러다니던 트렁크 안이 어느새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고구마며, 곶감이며, 식혜며, 귤까지 가져가라며 마당에 내어둔 이지훈의 아버님 때문이었다.
크면서 그런 아버지를 질리도록 보아왔을 이지훈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담배를 피우는 척 냅다 줄행랑을 쳤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 탓에 지금 짐만 세 번을 옮기고 있었다.
“네. 부탁드릴게요.”
대답이 없는 내가 수상했는지 이지훈이 통화까지 마무리하고는 트렁크 쪽으로 다가왔다. 가득 찬 트렁크를 본 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부터 지었다.
“한 상자를 더 받아왔어, 심지어?”
그새 귤 상자의 개수를 센 모양이었다. 나는 헛기침하며 이지훈을 밀쳐내고는 트렁크부터 닫았다. 더 있으면 잔소리할 거리만 찾아낼 테니 아예 차단해야 했다. 물론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내 뒤에 따라붙는 놈을 보니 그다지 소용은 없어 보였지만.
“너, 이렇게 거절 못 하는 것도 병인 거 알지?”
이게 진짜…. 인정사정없이 손부터 내젓는 아들놈인 저와 친구라는 죄로 두 배를 껴안게 된 걸 알지도 못하면서 말만 많았다. 문을 열려다 말고 황당한 표정으로 뒤돈 나를 향해 이지훈이 눈썹을 올렸다. 반박할 수 있으면 반박해보라는 듯이. 무시하고는 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아까 트렁크를 열며 분명 차 키를 꽂아두었던 것 같은데, 그새 운전석 문이 잠겨 있었다.
“이거 찾아?”
뒤에 선 이지훈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일부러 현란하게 돌려 보이는 손끝에 차 키가 달랑달랑 들려 있었다. 오는 내내 조용하다 싶더니, 이렇게 지랄하려고 힘이라도 비축해둔 건가 싶을 정도로 느닷없었다. 무엇보다 안 될 일이었다. 남이 운전하는 걸 못 믿는 이지훈은 남이 운전대를 잡을 때는 조용하지만, 제가 운전할 때는 마음 놓고 퍼부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했다. 나는 단호하게 손부터 내밀었다. 생각해보니 경찰의 물건을 훔칠 생각을 하고, 겁을 상실한 것 같았다.
“내놔.”
“싫어. 갈 땐 내가 운전할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어깨를 으쓱하는 게 얄밉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어서, 이지훈이 그렇게 좋아하는 논리적인 답변을 들이밀었다.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할 건데? 내 차인 건 알지? 나밖에 보험 안 들어가 있어.”
“그건 문제가 안 돼.”
“어떻게 문제가 안 되냐? 일단 도로법상 문제가 되는데.”
“방금 설계사님께 전화해서 나도 네 차에 동승자보험 넣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럼 방금까지 통화하고 있던 게… 부탁한다느니 뭐니 이야기하길래 당연히 회사 사람인 줄 알았다. 기겁하길 잠시, 나는 바로 생겨난 궁금증부터 뱉었다.
“…내 보험 설계사가 누군지 알고?”
“내가 그걸 왜 몰라? 네 성격에 직접 꼼꼼히 따져가며 알아볼 정성 들이지도 않았을 거고, 강영수가 갖다 나른 데에 그냥 등록했을 게 뻔한데.”
기정사실인 양 뱉는 것들이 족족 사실이라 말문이 막혔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언덕 아래로 보인 이지훈의 아버님 때문이었다.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로 언덕을 올라오던 그는 호미를 들고 있었다. 아까 마당에 내놓은 고구마를 보고 아쉽다는 듯 혀를 차던 그의 모습까지 떠오르고 나니 그가 방금까지 뭘 하다 온 건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선욱이 니도 이번에 같이 내려온다고 하루만 더 빨리 말해줬으면 미리 고구마라도 좀 더 캐놨을 긴데.’
내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사라지시길래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그게 고구마를 더 캐기 위해서인지는 몰랐다. 꽤 먼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소쿠리 위로 가득 쌓여 있는 고구마들을 본 나는 트렁크의 공간부터 확인했다. 방금 가져온 귤 상자까지 들어찬 트렁크에 남은 공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황을 파악하고는 재빨리 이지훈의 옆구리부터 찔렀다.
“차 키 내놔, 얼른.”
“내가 운전한다니까?”
“아버님 소쿠리 들고 오신다고! 얼른!”
멈칫하고는 뒤를 돌아본 이지훈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런, 씨발… 놈이 욕한 것과 동시에 언덕을 올라오던 아버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님이 반갑게 소리쳤다.
“선욱아! 이것도 쪼매 갖고 가라!”
이지훈이 나를 밀치더니 재빨리 운전석으로 향했다. 말씨름할 시간조차 없음을 깨달은 나도 어쩔 수 없이 보조석으로 뛰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겁지겁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시동을 건 이지훈이 핸들을 재빨리 돌리며 액셀을 밟았다. 언덕 위 주차장이 모두 비어 있어 다행이었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우리에 갸우뚱하던 그가 속도를 높여 언덕을 올라오는 걸 확인한 나는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빼냈다.
“아버님. 저희 갈게요! 추운데 들어가세요, 얼른.”
“아이고, 그럼 고구마는!!!”
“아, 아빠! 얘네 집에 에프도 없다고!”
반대쪽 창문을 연 이지훈이 고함쳤다. 언덕을 꾸준히 오르던 이지훈의 아버님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멈춰 섰다.
“뭐? 집에 에프도 없다꼬? 사줄까 선욱아?!”
“네? 아뇨! 괜찮아요. 절대 보내지 마… 윽!”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를 보며 손부터 내젓던 행위가 저지됐다. 갑자기 차를 뒤로 후진시킨 이지훈 때문이었다. 뒤부터 확인했지만, 주차장에 차라곤 없었다. 차도 안 오는데 굳이 한 행위라는 뜻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운전을 좆같이… 한마디 하려고 한 순간 차가 주차장을 벗어났다.
“아빠, 우리 간다!”
이지훈이 크게 소리쳤다. 들었는지 언덕을 다 올라온 이지훈의 아버님이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멀어지는 차 안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치시기도 했다.
“선욱아! 담 주에 도착할 기다!”
“아뇨, 아버님! 정말 그럴 필요 없….”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열심히 소리를 지르던 중 창문이 올라갔다. 범인은 뻔뻔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 중이었다.
“그냥 사달라 해. 없으니 불편하긴 하더라.”
“난 불편함 느낀 적 없는데?”
“내가 불편하다고요, 내가. 네 집에 두 달간 살게 될 내가요.”
도통 말이라고는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자태를 본 나는 한숨을 쉬고는 창문으로 기울어 있던 몸부터 바로 했다. 사이드미러로 아직 그 자리에 서 계신 이지훈의 아버님이 보였다. 들어가라고 몇 번을 더 말씀드려도 아마 우리가 탄 차가 아래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저렇게 바라보고 계실 것이었다.
“왜.”
차가 완전히 도로에 진입하고서야 이지훈이 말을 걸었다. 사이드미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힐끔 닿아오는 시선과 눈을 맞추기가 껄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삭이지 못한 말이 한숨처럼 튀어나갔다.
“아니, 그냥. 맨날 아버님께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이미 집에 이지훈 아버님이 사주신 것들이 차고 넘쳤다. 이지훈이 올 때마다 한 번씩 뒤집고 가는 냉장고조차 그가 사준 거였다. 거기에 다른 가전제품까지 더할 걸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불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용돈이나 더 드릴걸. 안 받으실 걸 알아 일부러 마루에 놓고 왔는데, 이렇게 또 이것저것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남의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이지훈은 비아냥대기부터 했다.
“허이고. 그게 이제야 걱정이 되세요? 거절도 못 하고 족족 받아와 놓고.”
“주시는데 어떡하냐, 그럼. 놔두고 와?”
“어. 그냥 놔두고 와.”
“…….”
“네가 결국엔 이렇게 다 받아줄 거 아니까 아빠가 더 그러는 거 아냐. 나한테는 애초에 저렇게까지 들이밀지도 않아.”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아까 이지훈이 사라졌을 때는 찾지도 않으셨긴 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놈을 보니 괜히 반발심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 가족도 아니고 자기 가족인데도 저렇게 정 없이 이야기를 한다. 내게 건네긴 했어도, 분명 그 안에는 이지훈을 위하는 마음이 더 많을 텐데.
“아니… 제주도에서 너 주려고 가져오신 거라는데, 귤도.”
“그게 뭐. 직접 가서 따온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시킨 건데. 세상 좋아져서 이제 인터넷에서도 시키면 제주도에서 이틀 안에 도착해. 옛날 같은 촌인 줄 아냐?”
따박따박 돌아오는 말대꾸를 듣고 있자니 언젠가 이지훈과 한 번 차에서 싸운 후로 다시는 갇힌 공간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강영수가 떠올랐다. 나는 그 발언을 완벽히 이해했다. 말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는 대상과 한 공간에 갇히는 건 끔찍했다. 나는 더 말하길 포기하고는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너 설마 또 우리 아빠 용돈 준 거 아니지?”
그러기가 무섭게 물어오는 놈에 흠칫하긴 했지만, 고개를 돌리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눈까지 감고 창에 머리를 기댄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헛웃음을 쳤다.
“이야… 돈이 막 썩어나나 봐?”
“…….”
“요새 마약 사범들 많아서 그래? 포상금이라도 후하게 받았어?”
“…….”
“너 우리 아빠 서울에만 아파트 두 채인 거 알지. 우리 중에 제일 부자한테 돈을 알아서 갖다 바치는 이유가 뭐야?”
“갖다 바치는 게 아니라!”
참았어야 했는데 한 단어를 못 넘기고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나를 보고서도 놈은 놀라지조차 않았다. 자는 척임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숨을 쉬길 잠시, 나는 이지훈의 발언부터 정정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해서. 심지어 그 사람이 아들이기까지 하니까.
“그냥 내 나름의 성의 표시야. 심지어 그렇게 하는데도 아버님이 주시는 게 더 많아. 얼마를 드리든 그 이상을 주신다고.”
“아… 원금 보장에 이율도 좋은 적금이다?”
미친 새끼…
“잘됐다, 야. 그 적금 모아서 우리 아빠 환갑잔치도 네가 열어, 그냥.”
“…….”
“사람들이 너한테 아드님이세요? 하면 꼭 이렇게 대답하고. ‘아, 진짜 아들은 저랑 절교해서 못 와요. 여긴 그 절교한 아들보다 저랑 더 애틋한 분이시랍니다.’ 하고.”
듣다 보니 단순히 오늘 있었던 일을 가지고만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게 된 아버님 앞에서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던 게 배알이 꼴리기라도 한 게 분명했다.
뒤끝 없는 게 장점인 새끼가 이번 일에는 진짜 지독하리만치 성질을 부려대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더는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는 걸 아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완전히 다물고는 몸을 창 쪽으로 돌렸다. 무슨 말을 해도 더는 답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곳에 잔소리를 퍼붓는 것도 지겨웠는지, 다행히 이지훈도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자는 척도 열심히 하다 보니 꽤 자연스러워져서, 해안도로를 벗어날 때쯤에는 정말로 꾸벅꾸벅 졸게 됐다. 그나마 앞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꽤 강렬해 30초에 한 번은 깨게 된다는 게 다행일지.
차가 톨게이트를 지나는 것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나는 몸에 힘을 풀고는 창에 머리를 완전히 기댔다. 옅은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왜인지 고개를 돌려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터널을 지나가는지 햇빛이 차단되어 편했다. 왠지 더는 깨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눈앞이 온통 캄캄했다. 아까만 해도 물먹은 듯 가라앉아 있던 몸이 한결 가뿐했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마자 이상함부터 느낀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일어났냐?”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은 순간, 내가 혼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잠들었던 기색이라고는 없는 이지훈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밖을 눈짓하며 설명했다.
“마트 주차장이야. 장 간단히 봐서 들어가자.”
어쩐지 집 앞이라기에는 주위에 차가 너무 많다 싶었다. 그나저나 언제 도착한 거지. 차 안의 시계부터 확인하려던 행위는 시동이 꺼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멈췄다.
나도 모르게 힐끔 이지훈부터 확인하게 됐다. 그러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언제 도착했는데?”
지하 주차장 안이라 그런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 도착하고서도 놈이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을지 모르겠다고.
따라가는 시선을 느꼈는지 안전벨트를 풀고는 문을 열려던 이지훈이 나를 돌아봤다. 몸을 반 이상 밖으로 내민 상태로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기억 안 나.”
싱거운 대답을 던지고 차 밖으로 아예 몸을 빼는 놈을 봤다. 잠에서 덜 깼는지, 멍했다.
“차에 있을래?”
참을성 없는 이지훈이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 순간에야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려와 있는 선바이저를 확인한 순간 멈칫했지만 일단은 차에서 빠져나왔다. 하품을 갈무리하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간다, 가.”
주말이라 그런지 마트 안이 붐볐다. 심지어 오후 9시 무렵의 애매한 시간대인데도 그랬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이지훈에게 차가 많이 막혔냐고 물었지만, 놈은 그냥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더니 카트를 끌고 앞으로 휙 나가버렸다.
사려고 계획해둔 것이라도 있는 듯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이지훈 옆에서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애초에 장을 본다는 행위 자체도 오랜만에 해보는 거고. 오래 자긴 했는지 눌려 있는 뒷머리를 대충 만지다 손을 내렸다. 이지훈은 어느새 정육 코너에 가 있었다.
“이모님, 여기 살치살은 없어요? 한우요.”
가판대를 살피며 옆의 이모님께 살갑게 묻는 이지훈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습관처럼 주변을 스캔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낯선 곳에 설 때마다 하는 짓이기도 했다. 사선의 냉동식품 코너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30대 부부가, 옆의 음료 코너에는 영문으로 대학명이 크게 적힌 야구잠바를 입은 대학생들 다섯 명, 그리고…
익숙하게 이어 나가던 행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멈췄다. 느리게나마 걷던 걸음도 멈췄다. 그렇게 정지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걸어오던 마스크 낀 남자 또한 그랬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후드 사이로 얼핏 보이는 머리 모양이며, 걸친 옷들조차. 그러나 나를 발견하자마자 커지는 눈만은 내가 알던 모습과 꼭 같았다. 멈칫한 그와 시선을 나누던 나는 머지않아 고개를 돌렸다.
왜 매니저조차 없이 이런 곳에 혼자 나와 있나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궁금하다고 해서 물을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예 몸까지 돌려 이지훈에게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형.”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느라 붙게 된 몸 때문인지,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이 크게 심호흡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그게 꼭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놈의 성정에서 오는 버릇임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번호는 왜 바꿨어?”
눈이 빨개진 채로 따져 묻는 얼굴을 본 순간 난 현우와 연애를 하며 느꼈던 익숙한 감정부터 느껴야 했다. 미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