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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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는 그래도 이사를 자주 다녔다. 누군가와 조금 친해질 만하면 학교와 학원을 옮기는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아 온 친구는 없었다. 가끔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다던 친구들을 발견하면 신기했다. 서로에 대한 아주 작은 것까지 알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니 지금 급식실에 영단어집 들고 왔냐? 밥맛 떨어지게?”

“강영수 많이 컸다. 이게 영단어집인 것도 알고.”

“알지. 지훈아. 네가 밖에서 공 던질 때 나는 학교에서 abc라는 걸 배웠어.”

“그랬어? 조기교육도 때로는 소용이 없구나.”

“하하, 이 새끼 또 잡채 나온 날에 내 기분 잡치네. 네가 날 영어 실력으로 무시해? 198등이었던 네가 187등이었던 나를?”

“잡채가 영어로 뭐게.”

“아이 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강영수가 짜증을 내며 식판 위로 내팽개친 젓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잡채가 하늘을 날았다. 공교롭게도 당면 두 가닥이 날아간 방향이 이지훈 쪽이었다. 재빠르게 피한 이지훈은 애초에 싸움의 발단이 된 영단어집 표지에 묻은 당면 두 가닥을 툭툭 털어내더니 강영수의 얼굴에 대고 영어 단어를 읊었다.

“페일. 에프. 에이. 아이. 엘.”

서로에 대해 아주 작은 것까지 아는 사이는 서로를 아주 작은 것까지 놀릴 수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딱 두 달이 걸렸다. 이 답이 없는 애들과 같이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싸움을 더 보길 포기하고 시선을 내렸다.

“내가 다른 건 참겠는데, 네가 나보다 똑똑한 척하는 건 못 참겠어. 진심 열 받아.”

“사돈 남 말 자제 부탁드립니다.”

“저기요. 내 사돈은 선욱 씨예요. 지훈 씨가 아니라.”

“뜬구름 잡는 소리도 자제 부탁드립니다.”

“이 씨발놈이, 뜬구름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 돼지 무시해? 선욱 씨. 한마디 해줘요. 저 막되어 먹은 놈이 선욱 씨 미래의 와이프를 부정하고 있잖아요.”

그 싸움이 지겨울 만하면 나를 갖다 파는 것도 두 달간 끊이지 않는 이 만담 콤비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눈이 마주친 강영수가 이지훈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혼내달라고 이르는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이지훈은 꿈쩍도 안 했다. 단어집에 눈을 박은 채로, 유유히 국을 떠먹기도 했다. 이 또한 중간고사 이후로 부쩍 자주 보는 모습이었다.

이지훈과 나는 반 번호가 붙어 있었다.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고 뒤도는 이지훈의 표정을 본 게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나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러다 뚫어지겠다 싶을 정도로 종이를 노려보던 이지훈은 그날부터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점심시간까지도 공부하려 들어 강영수를 질색하게끔 했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손을 뻗어 이지훈의 손에 있는 영단어집부터 뺏었다.

“밥 먹고 해. 어차피 너 지금 집중도 못 하는 것 같은데.”

“…….”

“그리고 잡채 같은 단어는 시험에 안 나와. 외래어 표기법상 그냥 잡채로 불리기도 하고.”

단어집을 뺏은 순간 불만 있는 것처럼 눈을 치켜뜨던 이지훈은 곧 국을 떠먹으며 얄밉게 중얼댔다.

“뭐, 전교 1등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허- 저 새끼 봐라? 내가 내려놓으라 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지훈을 격렬하게 삿대질 중인 강영수의 손가락도 잡아 내렸다.

“너도 그만 놀리고. 친구가 열심히 공부하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그러는데.”

“…아니이…. 쟤가 솔직히 존나 오버 떠는 건 맞잖아.”

“오버 좀 하면 어때. 성적 올리려고 공부하는 건데. 공부도 안 하고 돌아다니던 때보다는 낫지.”

그 말엔 강영수도 더 반박하지 않았다. 겨우 두 달 전이긴 했어도, 그 시절의 이지훈보다 지금의 이지훈이 훨씬 나아 보인다는 데에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입을 다문 둘 덕분인지 드디어 식탁에 평화가 찾아왔다. 젓가락을 드는 강영수를 지켜보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 미룰 수 없음을 깨닫고 말했다.

“그리고 너 동생이랑 나 엮는 것도 좀 그만해. 네 동생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다.”

강영수가 선욱 씨니 뭐니 하며 나를 동생의 짝으로 대하듯 장난친 건 꽤 됐다. 처음에야 학년이 다른 동생까지 나랑 친하게 지내게 하려고 치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끊이지 않는 장난에 이젠 강영수의 동생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강영수가 아무리 대책 없이 해맑은 애라도 그렇지 이건 좀 선을 넘은 장난 같기도 했다. 보통 오빠가 자신의 친구랑 여동생을 엮나? 반대의 경우만 수두룩하게 들은 것 같은데.

적당한 선에서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름 진지하게 건넨 말인데, 강영수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마자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강영수와 이지훈을 발견했다. 방금까지 유치하게 싸워댔던 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처럼 나란히 실실대고 있는 둘을 보니 괜히 불안했다.

“…뭔데. 왜 웃는데.”

못 들은 것처럼 킥킥대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이지훈이었다.

“내가 말했지. 이 새끼 은근히 눈치 없는 것 같다고.”

여기서 말하는 이 새끼가 나인가…? 떨떠름한 나를 흘깃 본 강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 바쁜 입매와 달리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고 있어서 표정이 희한했다.

“우리 돼지 아침마다 패션쇼 하는데… 이거 들으면 울겠다, 진짜. 어떡해. 미니홈피 보면서 진작 눈치채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강적이야.”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짜증을 내려던 찰나 팔이 잡혔다. 강영수였다.

“선욱 씨! 그렇지만 저는 당신의 그런 고자 같은 면까지 좋아요. 꼭 그대로 깨끗하게 살다가 우리 집 호적에 피처링하는 거예요. 알았죠? 약소옥-”

식판까지 밀어놓고는 내 옆으로 와 팔에 앵기는 강영수를 떨쳐내려다 뒤에 식판을 들고 일어서던 남자애와 부딪쳤다. 다행히 옷에 튀진 않은 것 같아서, 재빨리 사과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좀!”

멈칫하기는커녕 그 틈을 타 팔에 굳게 매달린 강영수는 이제는 허리까지 껴안고 아주 난리법석을 떨어대고 있었다. 힘으로는 이길 수 있는데, 끈기로는 이길 수 없는 대상인 게 문제였다. 아무리 밀어내도 지치지 않고 돌아오는 머리통을 밀어내던 나는 뒤늦게 멈칫했다. 막 떠오른 궁금증 때문이었다.

“…근데 네가 내 미니홈피를 어떻게 알아?”

강영수의 머리통이 처음으로 밀려난 그대로 고정됐다. 눈을 끔벅대던 놈이 교과서를 읽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직 일촌이 아니었었죠, 선욱 씨?”

“어. 나 거기 안 들어간 지 다섯 달은 된 것 같은데.”

내 방에 개인 컴퓨터가 있었던 서울에서조차 잘 확인하지 않았던 SNS를 개인 컴퓨터조차 없는 이곳에서 확인했을 리가 없었다. 흔들림 없는 날 본 강영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알죠, 선욱 씨. 태안은 바다와 가깝고.”

“…….”

“바다엔 파도가 치죠.”

“…….”

“파도를 타고 또 타고 가다 보니~ 선욱 씨의 미니홈피가 나타났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누가 들으면 동화라도 말하는 줄 알 것 같은 과장된 어투를 듣던 나는 더는 듣고 있을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팔을 냉정히 털어냈다. 철푸덕 하고 급식실 바닥에 넘어진 강영수는 무시하고는 이지훈에게 물었다.

“그렇다 치고, 깨끗한 거랑 미니홈피랑 뭔 상관인데?”

헛소리만 하는 강영수보다는 나은 답을 줄 줄 알고 물어본 건데, 정작 이지훈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강영수가 대신 대답했다.

“그걸 오염된 애한테 물어보면 어떡해요, 선욱 씨!”

“씨발. 저것도 병이다, 병.”

치킨 너겟을 살벌하게 씹으며 중얼대던 이지훈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강영수한테 버럭 소리쳤다.

“야, 그러고 보니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이 새끼도 홈피 보니 장난 아니더만!”

버럭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너도 내 미니홈피 봤냐?”

뜨끔한 표정의 이지훈이 내 눈을 피했다. 강영수에게 팔을 뻗어 머리통을 후려치기도 했다. 시선을 돌리려는 것 같았다.

“왜 차별하냐고, 씹새끼야!”

손으로 주먹을 방어한 강영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건! 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더러웠고, 선욱 씨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더러웠기 때문이에요.”

“…더럽다고?”

“괜찮아요, 선욱 씨. 그리고 당신은 새 남자잖아요. 헌 남자인 이지훈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요.”

강영수는 한술 더 떠 이지훈의 말을 듣지 말라는 듯 손으로 내 한쪽 귀를 막아주기까지 했다. 황당함에 할 말을 잊은 사이, 2차전이 시작됐다. 당연하게도 강영수와 이지훈의 싸움이었다.

“고추 안 깠다고, 씨발놈아! 존나 어떻게 놀았는지 보지도 못한 게 말끝마다 더럽대.”

“으. 그걸 왜 봐야 함? 우리 민지가 더러운 건 쳐다보지도 말랬는뎅.”

“뭐야. 니 아직 쥬만지랑 사귐?”

“쥬만지 아니고 주민지라고 했다.”

“만주벌판인지, 쥬만지인지….”

“남의 여자 이름으로 테트리스하지 마라.”

“냼의 여자 이름으로 테트리스햬지 먜라~”

“이 씨발놈이 진짜!”

유치한 싸움을 말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난 더 듣지도 않고 일어섰다.

점심시간에 그 난리를 치고 나니 기운이 쭉 빨렸다. 내가 먼저 떠난 이후에도 강영수와 티격태격하느라 좀 더 에너지를 소비했을 이지훈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하필 5교시가 이동수업이었던 탓에, ‘정보와 통신’ 교과서를 챙긴 우리는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어쩐지 반이 텅 비어 있다 했더니, 아마 컴퓨터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려고 서두른 반 아이들이 먼저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이지훈과 내 자리만 제외하고 꽉 차 있는 컴퓨터실을 훑어보던 나는 16번이라고 되어 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뒤를 따라온 이지훈이 옆의 의자를 빼 앉는 게 느껴졌다. 15번과 16번 자리는 붙어 있었다.

컴퓨터 하단의 시계는 수업 시작까지는 5분 정도만이 남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반대편에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는 반 애가 켜고 있는 창에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흘긋 보기만 해도 뭘 보고 있는지는 뻔했다. 줄지어 앉은 다른 애들이 보고 있는 창 또한 비슷해서 더욱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처럼 미니홈피를 확인하는 것 대신 수업 때 배울 것들을 예습했겠지만, 오늘은 사정이 좀 달랐다. 방금 점심시간에 강영수와 이지훈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접속하지 않긴 한 모양인지, 들어가자마자 쌓인 알림들만 한가득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기에는 귀찮아서 커서를 대강 내리며 훑어보던 행위는 최근에 친구신청을 한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하다는 걸 깨닫고 조금씩 느려졌다.

작년 이곳으로 전학 온 나를 일주일 동안 챙겨주었던 반장부터 지금 같은 반 아이들 중에서도 친구신청을 보내둔 아이들이 꽤 됐다. 신청을 보낸 날짜는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내게 묻거나 재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어딘가 미안했다. 민망한 표정으로 수락 버튼을 연달아 누르다가 멈칫했다. 상단에 뜬 이름이 익숙했다.

“…미친 새끼.”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옆의 이지훈이 흘깃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취소 버튼을 누르고는 창을 닫았다.

미니홈피도 상황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리도 하지 않는 내 미니홈피에 열어둔 곳이라고 해 봐야 일촌평을 남기는 공간과 방명록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전학 오기 전 친구들이 잘 지내냐는 연락으로 온통 도배해두어 정신이 사나웠다. 커서를 내리다가 전 여자친구의 연락을 발견하기도 했다.

[잘 지내? 전학 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시간 나면 연락 줘 (♥ 김현주)]

끄트머리에 자리한 일촌명을 보니 왜 강영수가 호들갑을 떤 건지도 알 것 같았다. 사귈 때 저렇게 맞추자고 해서 그렇게 했던 건데, 헤어지고 보니 이렇게 이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 친구를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지우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사방에서 각자 딴짓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서둘러 창을 끄는 게 보였다. 마찬가지로 창을 끄려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멈췄다.

친구신청 알림함에 새롭게 불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나는 아직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은 앞문을 흘끔 확인하고는 알림함을 눌렀다.

바로 창 하나가 떴다.

피식, 어이없는 웃음부터 샜다. 옆으로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뭔데?”

이지훈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앞만 보더니, 선생님이 들어오고서야 내게로 몸을 좀 기울였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윙크하듯 한쪽 눈을 슬며시 감았다 뜬 놈이,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였다.

“세탁.”

* * *

이지훈이 결석했다. 비어 있는 이지훈의 자리를 확인하고도 담임이 별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유혜은이 머뭇대며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제 짝이 아직 학교에 안 와서요… 혹시 무슨 일 있는지….”

체육대회 이후 급격히 가까워진 둘은 부쩍 붙어 있는 일이 잦았다. 급식실에서, 복도에서, 가끔은 집에 가는 길에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쳤다. 밖에서 논 적 없는 사람처럼 피부가 하얀 유혜은 때문인지, 야구를 그만둔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조금 그을린 피부의 이지훈 때문인지 둘이 같이 있으면 유독 눈에 띄곤 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지, 가끔 강영수는 이지훈에게 둘이 무슨 사이냐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유혜은의 질문에도 담임은 놀라지 않았다. 보고 있던 출석부를 탁 닫으며, 조례를 성의 없이 끝냈다.

“어. 아파서 결석.”

예상치 못한 답이었던 듯 유혜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뒤돌아 뒷자리의 친구에게 무언가 소곤대기도 했다. 표정을 보니 걱정하는 것 같았다. 왜 아픈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쩌면 이 반에서 유일하게 그 답을 알고 있을 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을 해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유혜은은 이지훈이랑 친한 거지, 나랑은 필요한 일 외에는 말조차 잘 하지 않았으니까.

‘병났단다.’

아침 밥상머리 위로 툭 떨어진 말은 생뚱맞았다.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설명했다.

‘지 애비랑 닮아서 대충 하는 요령이라고는 죽 쒀 먹을래도 없는 놈.’

쯧쯧대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이미 그 부자에 질릴 대로 질린 것 같았다. 그가 덧붙이는 짧은 정보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지훈은 병이 났다. 다른 병도 아니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생긴 병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잠들 때까지 책상에만 앉아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꼼짝도 안 하고 몇 날 며칠을 그러고 있던 놈을 보다 못한 이지훈의 아버지가 제발 좀 자라고 말하며 놈의 어깨를 잡았더니 몸이 이미 불덩이였다고. 아닌 밤중에 남자 둘만 사는 집이 왈칵 뒤집어졌다고 했다.

타고난 건강 체질에 무시무시한 운동 능력까지 갖춘 아들이 그렇게 앓는 건 처음 봤을 이지훈의 아버지가 특히나 놀란 것 같았다. 애를 업어서 응급실까지 다녀왔다고. 링겔을 맞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던 이지훈은 눈을 뜨자마자 영단어집부터 찾았다고 했다.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나도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징한 새끼였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할아버지가 질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그게 오늘 새벽의 일이라 했으니, 이지훈이 등교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자꾸 학교에 가겠다며 우기는 이지훈 때문에 교복을 세탁기에 돌려버리기부터 했다던 이지훈의 아버지도 아버지였지만, 아침을 다 먹기가 무섭게 나한테 전화를 건 이지훈도 무서우리만치 집요했다.

‘…야. 나 오늘 학교 못 가.’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괜찮냐?’

‘몰라. 아빠가 누워 있으래.’

‘누워 있는 거 아냐 지금?’

‘아니. 아빠한테 이 전화하는 거 들킬까 봐 창고에 숨어서 전화 건 건데.’

‘…….’

‘어쨌든, 야. 오늘 수학 수업에서 쪽지 시험 범위 나오면 나한테 문자 좀 찍어주라.’

고열로 정신을 못 차려 응급실까지 다녀왔다면서 그 와중에 금요일에 볼 쪽지 시험까지 기억하고 있는 놈의 집념이 놀라웠다. 금요일까지 학교에 올 수는 있고? 뭐부터 먼저 물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침묵하는 동안, 핸드폰 건너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지훈이 몰래 숨어 있던 걸 들킨 모양이었다. 이지훈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이지훈! 인마 이거 진짜 돌았나! 핸드폰 내놔라, 이 시끼야!’

‘나 이것만 말하고. 시험 범위 물어봐야, 아악! 왜 때려! 이러면 누워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데! 아픈 사람 때릴 거면!’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번갈아 들리는 걸로 추측하건대 아마 이지훈이 얻어맞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맞아도 입을 다물기는커녕 따박따박 반박하는 이지훈 때문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치열한 말싸움을 듣던 나는 전화를 끊고 범위를 알게 되는 대로 말해주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10분 뒤에야 답장이 왔다.

부자간의 다툼이 그제야 끝난 모양이었다.

“자, 다들 책 펴!”

이지훈 하나 없는 것뿐인데 반 분위기가 맹숭했다. 부쩍 학구열이 높아진 이지훈의 질문 세례에 내내 고통받던 수학 선생님마저 수업하다 말고 돌아서서 이지훈의 빈자리를 힐끔거렸다. 시험을 앞두고 자습이 주어진 시간, 나는 유혜은에게 다가가 이지훈의 자리를 곁눈질하며 무언가를 묻는 그를 보았다. 유혜은이 입을 열자마자 귀를 기울이던 그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도.

강영수는 요새도 여자친구를 만난다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라지기가 일쑤라, 나랑 이지훈 둘만 집으로 가는 일이 잦았다. 그렇기에 혼자인 하굣길이 어딘가 낯설고 어색했다. 버스에 타 손잡이를 잡고 바깥 풍경을 보면서, 생각보다 내가 이지훈과 있는 시간을 꽤 익숙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이지훈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니 밖을 볼 시간이 생긴 것만 봐도.

지나가던 죽집의 간판에 시선이 꽂힌 것도, 지금은 걔의 아버지조차 일을 나갈 시간인데 과연 밥은 챙겨 먹었을까 하는 걱정이 스친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런 생각부터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외로 하차 버저를 누를 때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정거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죽집에 들어서는 순간마저도 그랬다.

누구한테 죽을 사 줘 본 적은 없어서, 어떤 죽이 좋을지조차 몰랐다. 결국은 죽집 사장님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픈 친구에게 줄 거라는 말에 사장님이 좋은 친구라고 칭찬을 해줬다. 칭찬받으려고 한 행위도 아닌데 그런 말을 듣는 게 민망해서 죽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가게를 나왔다.

중간에 내린 탓에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원래 종착지였던 마을에 내렸을 때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계세요?”

오늘도 이지훈네 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애초에 이 동네에서 대문을 닫고 사는 집이 딱히 없긴 했지만.

몇 번 와보긴 했어도, 늘 이지훈이 나를 끌고 오거나 앞장섰지 내가 제 발로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지훈이 늘 할아버지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것을 생각하고서야 마당으로 조심히 발을 들이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몰라 인사까지 꾸벅하며 들어선 집은 고요했다. 이지훈의 아버지는 역시 일을 나가신 듯했다. 텅 빈 마당을 훑어보던 나는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번 더 거쳐야 하는 문 앞에 서서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야. 이지훈.”

내가 말을 하든, 말을 하지 않든 조용한 사위가 이상할 정도로 민망해 괜히 목소리를 키웠다.

“이지훈. 안에 있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을 자느라 듣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순간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

깨워야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아픈 애를 깨우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현관 손잡이에 죽을 걸고 가려던 대안은 무게 균형이 맞지 않는지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봉지를 본 순간 방향을 틀었다. 내가 어떻게든 봉지를 걸려고 씨름하는 동안 저항 없이 열려버린, 보안이라고는 허술한 현관문의 탓도 컸다.

허락도 안 받고 이렇게 들어가도 되나.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얼른 죽만 두고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집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이지훈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놈은 아마 안에서 잠을 자는 중인 것 같았다. 거실의 끝에 놓인 책상 위가 너저분했다. 언젠가 강제성을 위해서라도 거실에서 공부한다던 이지훈의 말이 떠오른 나는 책상 위에 널린 참고서며 서적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이지훈 때문에 이지훈 아버지가 일부러 문을 닫아두고 일을 가신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공부하려는 아들이 얼마나 걱정됐으면 그럴까 싶다가도, 아침에 이지훈으로부터 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그럴 만하다 싶기도 했다.

나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이지훈이 쓰는 책상 위로 죽 봉투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대로 두고 갈까 고민이 되었으나 그렇게 하면 저녁이 되어 죽이 다 식을 때까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들었다.

별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쓰니 굉장히 걱정하는 사람 같아 보여서 민망했다.

아, 괜히 샀나. 두고 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들고 갈 수도 없고.

메시지를 다 써놓고도 보낼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마당에서 버린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30분째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거였다. 더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삐그덕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건.

“사람 살려어….”

“아, 씨발! 뭐야!”

순간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자기 나타난 괴생명체는 바닥에 몸을 죽죽 끌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좀비 같은 몸짓이었다. 고개조차 들지 않고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산했다.

“물… 물을 줘….”

이 집에서 저렇게 등장할 사람이라곤 이지훈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철렁했다. 놀라서 얼어붙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훈은 하체를 한 번 더 바닥에 끌더니 내 발을 잡고는 매달렸다.

“물 주면 안 잡아먹지….”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투로, 장난을 치고 있는 놈을 보니 기가 찼다. 괘씸한 마음에 놈이 매달린 발부터 털었다. 내 발을 피해 몸을 튼 이지훈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발라당 누웠다.

“아… 존나 죽겠다 진짜….”

자세히 보니 눈 밑이 시꺼멨다. 간헐적으로 색색 내뱉는 숨까지, 정말 물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몰골이었다.

“하여간 진짜….”

나는 씩씩대면서도 결국 부엌으로 발을 틀었다.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살겠다.”

그 말이 사실인지, 이지훈은 물잔을 내려놓는 순간에야 조금 나아진 얼굴을 했다. 움직일 기운을 얻은 놈은 그러기가 무섭게 소파로 올라가 누웠다. 그 와중에도 손에는 트로피를 꼭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방에서 나왔을 때도 저걸 들고 있었다.

“그건 왜 들고 있는데.”

태안센트럴병원장배 우수투수상. 내가 트로피 아래의 문구를 다 읽은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아래로 고개를 틀어 트로피를 응시했다. 표정을 보니 뭔지 알고 들고 나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건이 뭔지 알아챈 놈은 트로피를 옆으로 휙 던졌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힘없이 중얼대기도 했다.

“혹시 강도면 때려잡으려고….”

“…그 몸 상태로?”

아까부터 느끼긴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긴 했다. 새벽부터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게 이해가 됐다. 학교에 올 수 없는 상태였던 것도.

“뭐….”

“…….”

“정 안 되면 미남계라도 쓰려고 했지….”

많이 아파서 그런지 사리 분별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헛소리의 레벨이 한층 높았다.

어차피 물까지 대령해줬고 이렇게 영양가 없는 소리를 농담이라고 하는 걸 보면 상태는 생각보다 양호한 것 같기도 하니, 더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다 말고 문득 이지훈의 책상 위에 올려둔 죽 봉투에 시선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가져다주려고 왔던 건데. 내가 가는 걸 붙잡을 힘까지는 없는지, 인기척을 느꼈을 거면서도 뭐라 말하지 않고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숨만 쉬는 놈을 보니 제 발로 걸어가 먹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약은 있나. 응급실 갔다 왔으면 뭐든 처방받았을 것 같긴 한데.

“…….”

나는 놈을 대신해 움직였다. 죽이 든 봉투를 소파 앞의 긴 테이블 위로 올리고, 부엌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이지훈 이름이 적힌 약 봉투도 찾아왔다.

“…야. 죽 사 왔으니까 먹고 자.”

그새 정말 잠이 들기라도 한 건지, 이지훈은 답이 없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치려다 말고 깜짝 놀랐다. 이지훈의 몸이 너무 뜨거웠다. 이러다 애가 증기가 되어서 사라지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태어나서 겪어본 타인의 체온 중 가장 높은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소파에 바짝 붙었다. 이지훈의 어깨를 감싸고는 말을 붙였다.

“이지훈?”

이지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어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손안에 쥔 놈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흔들었다.

“야! 대답해!”

분명 몇 분 전까지는 말도 하고 움직이기까지 한 놈인데,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내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는 어깨가 불안했다. 손안에서 축축 늘어지는 몸을 느낀 순간에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또 응급실 가야 하는 거 아냐? 나 얘네 아버지 번호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정신 차려 봐. 야. 야! 내 말 들려?”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이럴 때 뺨을 치던데. 거기까지 생각이 멎은 내가 손을 허공에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저기….”

쿨럭하고 헛기침을 뱉은 이지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후려갈길 것처럼 허공에 떠 있는 내 손을 본 놈이 눈을 아주 느리게 끔벅거리며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이지훈에게서 실시간으로 흘러나오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어깨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다행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던 듯했다.

“날 죽이려고 온 거야, 살리려고 온 거야?”

반만 떠진 눈에서도 용케 장난기가 읽혔다. 미친 새끼, 그 말을 뱉을 힘조차 없었던 나는 놈의 몸을 들어 감싸고 있던 손부터 놓았다. 그 짧은 시간에 긴장을 어찌나 했던지 손끝이 아렸다.

“…아!”

예고 없이 소파 헤드에 머리를 처박게 된 이지훈이 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번쩍 일으켰다. 아까보다는 생기 있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내가 몸을 흔들었을 때도 반쯤은 제정신이었을 게 분명했다.

예상처럼 이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놈의 눈이 소파 아래에 앉아 있는 나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죽 그리고 약 봉투를 훑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거 뭔데?”

뭔지 뻔히 알 거면서, 괜히 묻는다. 하여간 볼수록 성격이 존나 희한했다. 아픈 건 저놈인데, 어째 내가 더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더는 빨릴 기운조차 없는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뭐긴 뭐야. 보면 모르냐?”

“…….”

“죽 식기 전에 먹어. 먹고 나면 약도 먹고. 그래야 금요일에 학교에 와서 수학 시험을 보든 말든 할 거 아냐.”

내 말을 듣기나 하는 건지 의심이 갈 만큼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응시하던 이지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코를 훌쩍였다.

“와, 존나 감동….”

“…감동은 무슨.”

평소처럼 오버하는 것이려니 하며 가볍게 받아치려다 말고 멈췄다.

“진짜 나 때문에 사 온 거라고?”

확인하듯 묻는 이지훈은 진지했다. 어? 어… 대답하는 나를 본 놈의 시선이 다시 죽 봉투에 박혔다. 감동한 듯한 표정을 본 순간엔 민망했다.

“그냥 오다가 산-”

“나 이 죽집 어디인지 아는데.”

“…….”

“거기 들렀다 온 거면 너 버스 두 번 갈아탔겠네. 평소보다 삼십 분은 더 걸렸을 거고.”

아까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던 건 언제고, 반박할 틈도 없이 다다다 이어지는 놈의 말에는 반박할 구멍이 없었다. 입을 다문 나를 본 이지훈이 씩 웃었다. 살이 쪽 빠진 탓인지 고작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이유로 꼭 함박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입술만 말아 물었다. 그새 소파 아래로 내려가 테이블 앞에 앉은 이지훈은 죽 봉투를 끄르고 있었다. 죽과 함께 들어 있는 반찬이며 젓가락을 꺼내놓는 중에도 놈의 입은 쉬지 않았다.

“엄마 병원에 있을 때 다른 죽은 다 싫어했는데 유독 이 죽집 건 잘 먹었거든. 그래서 아빠랑 나랑 엄청 번갈아서 사다 날랐는데.”

“…그랬냐?”

“어. 아까 오랜만에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빠 출근하고 나서야 생각나서 그냥 포기하고 있었거든. 근데 네가 사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뭐… 그냥… 버스 타는데 보여서….”

“여하튼 잘 먹을게 진짜. 아, 존나 맛있겠다.”

이지훈은 정말 신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아픈 자신을 이렇게 챙겨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 말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내 반응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수다라도 떨듯이 쉴 새 없이 말을 잇는 놈을 보는데 이상하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죽은 전해줬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가방을 아래에 다시 내려놓았다.

“또 내가 전복죽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어색하게나마 소파 밑에 다시 자리를 틀고 앉은 나를 본 이지훈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당장이라도 집에서 나설 것처럼 가방까지 들고 일어섰던 내가 갑자기 옆에 앉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궁금한 게 생기면 그게 해결될 때까지 한곳에 머무르는 눈은 꼭 사람을 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난 이 순간 유독 더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피하면서도 테이블 쪽으로 엉덩이를 끌었다. 이지훈이 유일하게 건들지 않은 반찬 뚜껑 하나를 열고는 죽이 담긴 용기 옆으로 슬쩍 밀었다.

“그… 너 이거 먹고 약 먹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

“…….”

“감시하려는 거야. 너 또 공부한다고 나대면 안 되니까. 지금은 아저씨도 안 계시니까 나 가면 감시할 사람도 없고….”

나름대로 민망함을 이기려 이것저것 주절대본 건데, 평소라면 몇 배는 더 호들갑을 떨 이지훈이 말이 없었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으로 날 샅샅이 핥고 있던 놈을 발견했다. 날 탐구하던 놈은 답을 찾지 못한 표정으로도, 눈이 마주친 순간엔 작게 중얼거렸다.

“너 나 버릇 잘못 들이는 것 같은데.”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차분하고도 고요했다.

“나중에 이렇게 안 해줬을 때 내가 섭섭해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협박이었다. 그 이유가 왜일지를 생각해보는 사이, 이지훈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아까 환하게 웃던 것과는 어딘가 다른 웃음이었다. 무언가 느리고, 그래서인지 더 깊어 보이는 웃음.

그런 웃음을 지으면서 이지훈이 숟가락을 들었다. 애초에 답을 들으리라고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자문자답하면서.

“어쩌긴 뭘 어째. 내가 잘해야지. 나한테 계속 잘해주고 싶도록.”

“…….”

“내가 잘할게, 내가. 그러니까 너도 다음에 아플 것 같으면 꼭 말해라. 형이 호박죽, 전복죽, 참깨죽까지 사서 달려갈게. 알았지, 우리 선욱이?”

죽에 수저를 푹 꽂으면서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유독 컸다. 마치 방금 본 그 진지한 표정이 진짜였던 게 맞나 의심하게 될 정도로.

이지훈은 10분도 안 되어서 죽을 싹싹 다 비웠다. 약도 한 번에 다 털어먹고 뭐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얌전히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정말 내가 집에 갈 수 있게 도와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죽 먹는지만 지켜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놈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지훈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지금은 아니어도, 곧 잠이 들 것 같다는 것 정도야 눈치챌 수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져서 수학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한테 수학 시험 범위를 알려줘야만 했다. 별표 표시를 해둔 곳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데, 이지훈이 나를 불렀다.

“…지선욱.”

아까 소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지훈은 눈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마워.”

이지훈은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솔직하게 굴었다. 그건 내 또래의 남자애들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기도 했다. 얘는 같은 성별의 남자애에게도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았다. 신기하고도 낯설어서, 가끔은 그 사실을 곱씹게 됐다. 이지훈과 달리 나는 죽을 전해주는 것조차 한참을 망설이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금도 내가 잠깐 머뭇거린 사이, 이지훈은 마치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편한 얼굴로 바로 잠이 들었다. 귀를 기울이면 이지훈의 편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수학 쪽지 시험의 범위를 적어 책상 위에 올려둘 수 있었다. 이지훈은 여전히 잘 자고 있었다. 벽 쪽으로 뒤돈 등이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걸 확인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방을 집어 들다 문득 붉은 이지훈의 볼에 시선이 닿았다.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침대에 다가섰다. 왼손을 뻗어 이불 위에 놓인 이지훈의 팔 위로 아주 잠깐 손을 올렸다. 아까만 해도 닿는 순간 놀랄 정도로 뜨거웠던 몸의 온도는 이제는 얼추 미지근했다. 열이 내렸다는 뜻이었다. 잠깐 이지훈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나는 비로소 이지훈의 방에서 나왔다.

놈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배로 조심해서 집을 빠져나왔다. 대문으로 막 들어오는 참이었던 이지훈의 아버지와 마주친 건 의외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나를 본 이지훈의 아버지가 자리에 멈춰 섰다. 잠깐 놀란 것처럼 보이던 그의 얼굴이 이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이고, 선욱아. 지훈이 보러 왔나. 그놈 아마 자고 있을 낀데.”

“아… 잠깐 깨긴 해서요.”

“금마가? 전화는 안 받더니만, 진짜 깨 있드나.”

이지훈의 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내 뒤를 힐끔댔다. 평소보다는 이른 시간에 퇴근한 걸 보면 이지훈이 걱정되어서 일찍 일을 마치고 오신 모양이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에 적힌 이름이 익숙했다. 이지훈은 자다 일어나서도 또 같은 죽을 먹게 될 것 같았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좋아하겠지.

“네. 그리고….”

잠깐 망설이던 나는 말을 보탰다. 전화조차 받지 않는 이지훈에 걱정했을 그라면, 궁금해할 정보 같아서.

“죽이랑 약 먹고 자요, 지금은. 혹시 몰라서 제가 지켜봤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 맞나.”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민망함에 고개를 꾸벅 숙이다 말고 팔이 붙잡혔다.

“선욱아.”

이지훈이 고쳐줬다는데도, 이지훈의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성욱과 선욱 그 언저리의 이름처럼 불렀다. 지금도 그랬다. 나를 불러 세운 그는 내 앞으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초록색 지폐 몇 장을 확인한 순간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런 거 안 주셔도….”

“에헤이, 어른이 이런 거 주면 그냥 받는 기다.”

받지 않으려는 내 손에 기어이 지폐 다섯 장을 쥐여준 그가 웃었다.

“아저씨는 선욱이 니가 참 좋다. 늘 고맙고. 알제?”

“…….”

“맛난 거 사 먹고. 앞으로도 우리 꼴통들이랑 친하게 지내도. 알겠제.”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한 번 더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어쩌면 돈을 돌려줄 수 있는 타이밍은 그때뿐이었을 텐데, 난 그를 어색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그가 볼수록 이지훈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받은 지폐를 손에 어색하게 쥔 채로 집으로 돌아가던 길, 이지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중에 이렇게 안 해줬을 때 내가 섭섭해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지훈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마치 나중이라는 시점을 벌써 내다보고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구와 시간을 보내든 그와 있을 나중의 일까지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에겐 낯선 가정법이었다.

장난기도 많고 유치한 놈은 이상한 부분에서 어른 같은 구석을 보일 때가 있었다. 우리의 나이대에서는 생각하지 못할 것들을 지레 걱정할 때가 유독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모두 그렇게 되는 걸까. 어떤 의미로 할아버지를 영영 잃어버렸을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도 할아버지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을까. 그 질문에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대문이 열려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파란 대문 안을 들여다보던 나는 그러자마자 굳어야만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5개월 만에 보는 듯한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침을 삼켰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본 순간,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 또한 마당을 향해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곳에 서서 마당을 천천히 둘러보는 한 여자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아는 그녀는 제때 뒤돌았다. 대문 앞에 멍청히 선 우리 둘을 보고도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보다는 뒤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다 끝났어요, 아버님.”

그건 이혼 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는 엄마만의 우아한 방식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노인을 두고, 엄마의 시선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느긋한 말이 흘렀다.

“방학은 재밌었니?”

지금은 5월이었다. 학기가 시작하고도 두 달이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보지 못한 그 5개월가량의 시간을 모두 방학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마치 그 이후에 이어질 삶에는 영향을 줄 수 없는 어떤 시간으로 분리라도 하려는 것처럼.

모든 게 명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나, 나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올 수 있도록 손을 쓴 사람은 엄마였으며, 이제 그녀가 나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여긴 정말 그대로네. 마치 세월이 멈춘 것처럼….”

담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응시하는 표정이 잔잔했다. 나는 잠깐 엄마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로 다시 돌아온 얼굴에서는 그러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표정을 소거한 엄마는 해야 할 일을 치르는 사람처럼 딱딱해졌다.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스치듯 확인한 후 마당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등엔 그 어떠한 망설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가 마당으로 끌고 온 건 캐리어였다. 내가 태안으로 내려오며 가져온 유일한 짐이기도 했다.

“컴퓨터도 없고, 전화조차 잘 안 터지는 곳에서 고생 많았어.”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또한 없었다.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만 해도 나처럼 놀란 것처럼 보였던 할아버지는 그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뚝뚝하게 서서 엄마를 잠시 쳐다보던 그는 우리 둘을 남긴 채로 휙 하고 걸어가 버렸다. 마치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할아버지가 옆을 스쳐 간 순간 잠깐 말을 멈췄던 엄마는 그러나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순간에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도 전교 1등을 했다며.”

“…….”

“네 담임 선생님이 칭찬하더라. 반장 일도 잘하고 있다면서, 전학을 가서도 네가 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신다길래 나도 동의한다고 말했어.”

엄마가 나를 칭찬하려고 이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는 건 간만이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닫힌 할아버지의 방문을 힐끔대며 내내 생각하던 것을 물었다.

“엄마가 절 데려가기로 결정이 났나요?”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내게 설명하지 않았던 한 가지를 묻기 위해서.

“그게 결정 날 때까지 저를 할아버지에게 맡기신 거였어요?”

엄마와 아빠는 서로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늘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나는 가끔 생각했다. 둘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 닮았기에,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싸우는 것이다.

방금도 나에게 가장 먼저 설명해줬어야 할 이야기를 일부러 빼놓고 하는 엄마의 위로 누가 나를 데려갈 거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행인 건 엄마가 그보다는 내게 조금 더 친절하다는 것뿐.

“…그게 싫니?”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으나, 내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이라는 데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면 엄마가 바쁜 일상을 쪼개어 날 이렇게 데리러 왔을 리도 없었으니까. 상황에서 유추한 증거들을 돌아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

“근데 미리 설명해주셨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집에 오는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지폐에 시선이 멎었다. 어른들은 평일에 일해야 하니 집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내게 핀잔주듯 말하던 이지훈이 떠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걔에겐 일해야 하는 시간까지 쪼개어 죽을 사 들고 집으로 달려온 아버지가 있었다. 저를 대신해 아들을 돌봐준 아들 친구에게 거침없이 용돈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평생 모르고 산다. 나도 그랬다. 그런 부모가 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 보지는 못해서 그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몰랐다. 이지훈의 아버지가 건넨 지폐가 낯설었던 이유는, 우리 엄마나 아빠가 내게 용돈을 지폐로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가 각각 내밀었던 카드는 내 지갑에 늘 나란히 박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감기에 심하게 걸린 적이 있었다. 입맛조차 없어서 계속 굶다가 겨우 죽집에 갔다. 카드로 결제하자마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죽집에서 쓴 카드가 엄마가 준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엄마는 아프냐고 묻더니, 오늘 학원을 가지 말고 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쥐 죽은 듯 조용한 집에서 죽을 먹자마자 내내 잤다. 엄마와 아빠는 새벽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날따라 잠에서 여러 번 깨 방문부터 확인하던 내겐 당연하지 않았다. 어쩌면 난 그날 그들 중 누구든 한 번이라도 방문을 열고 물어봐주길 기대했던 것도 같다. 내가 왜 죽집에서 카드를 긁었는지를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약국에는 왜 가지 않았는지 물어봐주길. 그런 결제 내역 따위로 내 일상을 짐작하는 게 아니라, 직접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가 괜찮은지를 확인해주길.

할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나를 궁금해했다. 아침에 내가 밥을 먹었는지, 얼굴에 상처가 난 이유는 뭔지 같은 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물었다. 그건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달랐지만, 낯설기는 했을지언정 싫진 않았다. 그가 궁금해하니 나도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것들을. 오늘 아침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도 설거지를 못 했고, 이지훈과 강영수는 요새도 틈만 나면 싸우고, 화장실 전구가 나간 것 같아서 갈았다고.

“…방학 전까지는 그냥 여기서 다니면 안 돼요?”

엄마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의 나라면 그냥 말없이 따라나섰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무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더는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아들이라는 말을 못 듣는다 할지라도, 나는 저 캐리어를 들고 당장 이 집에서 떠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냥 우겨 봤자 먹히지 않을 걸 너무나도 잘 아는 아들인 건 그대로라, 나는 엄마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줄줄이 설명을 덧붙였다.

“기말고사가 한 달 남았어요. 지금처럼 하면, 기말고사에도 1등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반장으로서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끝까지 잘해서 좋게 평가받아야 학생부도 깔끔하게 보일 거 같고요.”

엄마는 말없이 날 보기만 했다. 나는 결국 그녀가 가장 탐탁지 않아 할 것 같은 부분을 대비한 계획까지도 말했다. 만나자마자 전교 1등 이야기부터 한 그녀니, 내가 계획을 세워뒀다고 하면 딱히 뭐라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외고 준비는 어차피 방학 때부터 해도 충분하니까, 학기 끝나고 올라가도-”

“참 신기한 곳이야.”

뜬금없는 곳에서 내 말을 끊은 엄마의 시선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아까 본 엄마의 표정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같은 곳에서 자란 어떤 사람은 서울로 갈 날만 기다렸다는데.”

“…….”

“다른 사람은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하네.”

“…….”

“재미있지 않니? 심지어 그 둘이 부자 관계인 걸 생각하면.”

한참이나 더 바다를 감상하던 엄마가 내게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 때문인지, 엄마의 차가운 얼굴에도 주황빛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러니까,

“…그래. 원한다면 그렇게 하렴.”

슬퍼 보였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서울로 올라오면 새로운 집에서 새로 시작하게 될 거야.”

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를 놓은 엄마가 대신 마루에 놓여 있던 각진 업무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내 어깨를 잠깐 쥐었다 놓은 그녀가 대문을 나서다 말고 뒤돌았다. 아, 맞다. 생각난 게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용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카드를 써도 괜찮고. 그러라고 준 거니까.”

엄마의 시선은 내가 이 순간마저도 손에 꼭 쥐고 있는 지폐들에 박혀 있었다. 엄마는 그에 대한 대답만은 꼭 들어야 하는 것처럼, 조급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와중에도 참을성 있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결국 느리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골목을 올라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지금 가요. 아, 네. 대화가 좀 길어져서요. 네. 이 검은 뭐래요?”

엄마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엄마와 내가 대화를 하는 내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엄마의 부탁으로 인해 나를 데리러 왔을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거기다 더는 내가 이 집에 있든 말든 상관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쿡쿡 찔렸다.

망설였지만 결국 할아버지의 방문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대신 마당에 있는 캐리어를 끌고 다시 방으로 옮겨 두었다. 마루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할아버지는 끝내 방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 * *

“그래서 유혜은이랑 사귄다고, 안 사귄다고.”

“재미없다고 했다.”

“와, 설마 아직 안 사귐?”

“재미없다는데 존나 3절까지 처하고 앉았네. 그 정성으로 공부를 해 봐라, 영수야. 평생 187등 할 거니?”

“너야말로 어장을 4절까지 하고 계세요.”

“어장은 또 무슨 개소리야.”

“마음 없으면서 연락하고 장난치고 둘이서만 놀고 그러면 어장이지. 딴 게 어장이냐? 어? 남이 하면 어장 관리고, 네가 하면 뭐 유람선 투어세요?”

“…아이 씨발 새끼가 진짜 아니라는데 지랄하네, 떡볶이 먹을 맛 안 나게.”

“그런 것치고 매우 잘 드시고 계세요. 내가 쏜다고 아주 튀김까지 야무지게 시키시고. 선욱 씨, 이 어부 새끼가 다 처먹기 전에 얼른 드세요. 미래의 처남 입에 들어가면 아깝지라도 않지, 내가.”

“또 처남이란다, 이 멍청한 새끼. 처남은요. 네 미래 아내의 남동생에게 하는 소리예요. 네 동생의 미래 남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또또 시작이다. 내가 모른다고 구라 치지, 또?”

“물어보든가, 네 선욱 씨한테.”

“…선욱 씨. 이 새끼 말이 맞아요? 아이 씨, 그런 거면 왜 안 고쳐 줬어용! 내가 선욱 씨 이름 처남으로 저장해놨다고 했잖아용!”

기말고사까지는 2주가 남았다. 얼마 전 외고 지원할 때 필요한 자기소개서는 잘 쓰고 있냐며 물어보던 담임은 이미 내가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전학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엄마에게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 언제냐는 물음이 담긴 간단한 메시지였다. 교무실에 걸린 달력에 크게 표시까지 되어 있는 날짜를 잊을 리가 없음에도,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메시지에 답장하지 못했다.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났다. 2주 뒤엔 이곳에 없을 거라는 사실이.

“…선욱 씨?”

“…….”

“우리 우기?”

“…….”

“야. 지선욱.”

“어?”

등을 툭 치는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누구와 함께 무얼 하고 있었는지 잊은 채로 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한 이지훈과 강영수의 의아한 표정이 낯설지 않았다. 2주 전부터 대화의 맥이 끊길 때마다 마주하는 모습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나는 머쓱하게 마주친 시선부터 끊었다. 실용음악학원을 그만둔 강영수가 떡볶이를 쏘기로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종례가 먼저 마쳤다는 이유로 뒷문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강영수는 장난을 치며 인사하는 이지훈과 유혜은을 본 후로 오는 길 내내 이지훈을 놀려댔다. 끊이지 않는 투닥거림에 잠깐 한눈을 팔았던 게 길어졌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평소라면 재빠르게 정적을 채웠을 강영수와 이지훈은 뭐라 대답하는 것 대신 시선을 교환했다. 불안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이마가 턱 하고 붙잡혔다.

“아… 좀! 하지 마.”

이 자리에 이렇게 남의 몸을 주물럭댈 놈이라면 당연히 한 놈밖에 없긴 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강영수의 이런 스킨십에는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싫다는 뜻으로 뒤로 고개를 빼 봤자, 어깨에 매달린 채로 손을 뒤집어가며 이마에 대보는 놈은 집요했다.

“열은 없는데? 응? 선욱 씨 요새 왜 이렇게 대화에 집중을 못 하지?”

“그냥 생각한 거야. 별일 아니니까 네 자리로 좀 가.”

“대화하다 멍하고, 같이 있는데 자꾸 딴생각하고. 혹시 사랑의 열병인가? 응? 걱정할 쪽은 어부 새끼가 아니었던 건가?”

어부 새끼는 또 무슨 얘기야.

혹시나 해서 앞을 보자마자 포크에 떡을 세 개씩 찍어 먹고 있는 이지훈을 발견했다. 강영수에게 중지를 들어 보이면서도 착실히 음식을 먹고 있는 이지훈 덕분에 과하게 시켰다고 생각한 떡볶이며 튀김, 순대까지도 어느새 반이나 사라졌다. 강영수가 쏜다는 말에 반짝 눈부터 빛내던 이지훈을 생각하니 놀랍지조차 않았다.

난 한숨을 쉬며 어깨를 뒤로 뺐다.

“…사랑은 무슨. 아니니까 손 치우라고.”

“어어? 이게 더 섭섭한데? 그럼 우리 돼지는 뭐예요. 어제 매점에서 과자 사줬다며! 어? 사나이가 한번 과자를 사줬으면 어? 다음 날엔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그러다가 결혼반지도 사주고 그래야지. 애먼 사람 마음에 불을 지르고 그렇게 쌩까는 거야?”

“무슨 불을 지르….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어제 강영수 동생을 매점에서 마주치긴 했다. 계산 줄에서였다. 바로 앞에 강영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서 있으니 모르기도 어려웠다. 아침마다 같이 버스를 타지만 이렇게 따로 마주칠 때는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어색한 관계라, 서로 눈이 마주쳐도 피하기만 했다. 그런 사이에서 굳이 과자를 사주게 된 계기도 사실 대단한 게 아니었고.

아니, 사백 원이 모자라서 과자 못 산다고 울상 짓고 있는 애를 그럼 그냥 지나치냐고. 남도 아니고.

그 순간 강영수가 옆에 없어서 오히려 더 마음 놓고 사준 건데, 이걸 어떻게 알아서 뒤늦게 이 지랄인지. 내 질문에 들켰다는 표정으로 이지훈 쪽을 향해 스윽 고개를 돌리는 강영수의 시선을 따라갔다.

“…뒤질래?”

그러고 보니 어제 매점은 강영수가 아닌 이지훈이랑 갔었다. 그걸 과장해서 강영수에게 전했을 인물이 누구인지는 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슬그머니 눈을 피한 이지훈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어. 쏘리. 근데 죽이려면 이거 다 먹고 나서 죽여줘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고. 이모, 저희 순대도 2인분만 더 주세요.”

사과하다 말고 손을 들어 순대를 더 주문하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을 보니 더 말할 의지조차 상실됐다. 방금까지 2주 뒤면 얘네들도 못 보겠지 생각하며 감상에 잠겼던 것마저 민망할 정도였다. 내가 가도 이런 데서 3분에 한 번꼴로 싸우면서 떡볶이나 처먹고 있겠지.

나는 이지훈과 강영수가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다던 떡볶이집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혼란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모두가 잊고 있는 것 같은 아까의 대화 주제부터 끄집어냈다. 주제를 전환해야 했다. 아니면 강영수가 또 이마를 주물럭대며 내가 멍했던 이유를 캐내려 할 테니까.

“그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는데.”

“엉?”

“나한테 뭐 물어보려 한 거 아니었어? 불렀는데 내가 못 들었잖아.”

“아… 그거. 맞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던 강영수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밀이라도 말하듯 내 어깨에 바짝 붙은 자세와는 딴판으로, 음식에 코 박고 있는 이지훈까지도 들을 정도로 볼륨을 키워 말했다.

“이지훈 유혜은이랑 사귄대.”

“…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 눈빛을 본 강영수가 킥킥대고 웃었다. 너도 몰랐지!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은과 이지훈은 두 달째 짝이었다. 비록 강영수가 오버하긴 했어도, 둘은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꽤 친밀해 보이긴 했다. 유혜은과 이지훈이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거나 혹은 매점을 다녀온 이지훈이 유혜은에게 과자나 빵 같은 것을 건네줄 때 그걸 빤히 보거나 숙덕대는 애들도 있었고. 그래도 정말 사귀는 건지는 몰랐는데.

난 같은 반인데 그런 것쯤은 미리 말해줄 수 있지 않나. 아닌가, 그런 것까지 말해주기는 좀 그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지훈의 숙인 머리통을 보다 멈칫했다.

“야.”

천천히 고개를 든 이지훈이 강영수를 불렀다. 강한 어조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강영수와 장난을 칠 때 짜증을 내는 건 봤어도 저렇게까지 정색하는 건 처음 봐서 놀랐다. 강영수도 마찬가지인지 멈칫하는 놈이 보였다.

“적당히 하라고, 좀.”

“…….”

“아니라잖아. 내가.”

꼭 경고처럼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싸늘한 눈빛이며 사나운 태도가 학기 초에 보았던 양아치 같은 모습을 떠올리게끔 했다. 다행히도 바로 말을 잇는 강영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지훈의 그런 모습에 전혀 쫄지 않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씹새끼가 눈깔 그렇게 뜨면 내가 쫄 줄 알고. 니나 적당히 어장 쳐, 새끼야. 학기 초에 하고 다닌 짓 때문에 뒤에서 니 소문 존나 더럽게 나고 있는데 그건 아냐? 넌 아니래도 솔직히 유혜은은 너 좋아하는 걸걸? 어디 한번 몰랐다고 말해 봐.”

이지훈만큼 정색하는 강영수를 보니 가볍게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기 초에는 제일가는 양아치였다가, 갑자기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운 모범생처럼 구는 이지훈에 대해 사방에서 쑥덕쑥덕 말이 많은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같은 반인 데다가 늘 이지훈과 붙어 다니는 내 귀에까지 들어온 말이니, 다른 반인 데다 마당발이기까지 한 강영수는 더 많이 들었을 거였다. 그러나 이지훈은 신랄한 비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를 강영수에게 고정한 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혜은이 그렇게 말했어?”

“…뭐?”

“유혜은이 나 좋아한다고 말했냐고.”

강영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다 봤으면서도 이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접시에 남은 떡볶이 하나를 포크로 쿡 찍었다.

“난 유혜은한테 들은 적 없는데?”

허…. 헛웃음을 치길 잠시, 강영수가 반박했다.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말 못 했나 보지!”

“고백할 용기도 없는 마음에 내가 대답까지 해줘야 해?”

즉각 돌아온 대답에 강영수가 입을 떡 벌렸다. 말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앞에서 대놓고 자신을 욕하는데도 이지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포크를 우아하게 내려놓은 놈이 옆의 티슈를 집어 입 주변을 꼼꼼하게 닦았다. 딱히 뭐가 묻어 있지도 않은 입 주변이 마치 아무것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더 깨끗해졌다.

이지훈이 아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퍽 다른 눈빛이었다. 방금까지 강영수와의 아슬아슬했던 분위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끝!”

양손을 들어 올린 채로 씩 웃으며 선언하는 놈을 본 강영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와락 건너편으로 달려들었다. 레슬링 하듯 이지훈의 목을 손으로 감싼 놈이 주먹으로 이지훈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퍽! 퍽!

“이 씨발놈이! 지 혼자 다 처먹고 끝 같은 소리 하네!”

옆 테이블에 떡볶이를 가져다주러 오던 이모가 흘깃 보더니 소리쳤다. 아이고, 뇌세포 다 죽는다!

화장실에 간 강영수와 이지훈을 기다리다가 떡볶이집 바로 옆에 있는 문구점 앞 나란히 놓인 게임기들에 시선이 멎었다. 그중 하나에 철권 게임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게임하는 사람이 없을 때면 으레 그렇듯, 빈 게임기 화면 안에서는 프로그래밍 된 캐릭터들이 마치 정해진 순서에 맞춰 싸우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시선을 주다 말았을 테지만, 마침 시간도 비었고 움직일 때마다 주머니에서 짤랑대는 동전도 신경 쓰이던 차였다. 어제 강영수의 동생에게 과자를 사주고 애매하게 남은 금액이기도 했다.

동전을 모두 꺼냈다. 총 삼백 원이었다. 나는 백 원을 들어 앞의 투입구에 넣었다. 머리가 마치 선인장처럼 삐죽빼죽 솟아 있는 캐릭터를 고르자마자 게임이 시작됐다. 자동 지정된 대련 상대는 유도복을 입고 있는 캐릭터였다.

Game Start!

알림음처럼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스틱을 어색하게나마 움직였다. 이쪽인가? 아, 아니다. 빨간색 버튼도 같이 눌러야 하는구나. 잠시 헤맸을 뿐인데 금세 위에 표시된 바가 줄어들더니 내 캐릭터가 바닥에 엎어져 피를 토했다.

순간 왜 이 기계 하나에 사람들이 오래 붙어 있는지를 알게 됐다. 오기가 생긴 나는 동전을 게임기 바로 위에 올려두고 그중 하나를 집어 기계에 넣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캐릭터를 골랐다. 우연의 일치인지, 상대 캐릭터가 아까와 같았다.

“…아!”

집중한 덕분에 아까보다는 조금 더 오래 버티긴 했지만, 또 내 캐릭터가 바닥에 누운 꼴만 구경하게 됐다. 이렇게 된 거 한 번은 이겨야겠다. 오기가 생겨 동전을 빠르게 투입구에 넣었다. 내게 남은 마지막 동전이었다. 마지막 판이라 생각하니 긴장이 되긴 해서, 조이스틱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래, 발 걸었고. 다음은 주먹을 날리고.

“선욱 씨.”

누군가 내 등에 붙어서 머리 위에 턱을 올린 것도 동시였다. 장난처럼 뱉어내는 말이며 거침없는 스킨십을 보니 누구인지가 뻔했다. 나는 뒤를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로 등에 힘을 주고 밀어냈다.

“아, 붙지 마.”

그 와중에도 게임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대련 상대 캐릭터의 체력 게이지가 내 캐릭터의 체력 게이지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빨랐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빨간 버튼을 힘주어 누르며 강영수가 팔로 누르고 있는 어깨를 비틀었다. 놈의 무게가 얹혀 무거운 데다가 몸을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떨어지라고! 강영수.”

한 번 더 경고하듯 소리치고 나서야 강영수가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말을 들어줄 마음이 생겼나 보다. 어깨가 가벼웠다. 해방감을 즐기려 노란 버튼을 누르려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멈칫해야만 했다.

“저는 영수가 아닌데요?”

머리 위가 가벼워졌다. 아까만 해도 어깨 위로 무게만 실었다 뿐이지 헐겁게 붙어 있던 몸이 완전히 붙은 것도 동시였다. 아까는 머리 위에 턱을 대고 있던 거였다면, 이제는 아예 뒤에서 껴안은 것과 다름없는 자세였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조이스틱을 쥐고 있던 내 손 위로 내려앉더니 이내 조종하듯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상대편 캐릭터가 허공을 붕 날더니 이내 바닥에 처박혔다. 굳은 나를 대신해 손을 현란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 덕분이었다.

“영은이도 아니고.”

뒤에서 껴안다시피 해서인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나는 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로 화면만 보았다. 뒤에서 날 껴안은 남자애가 강영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막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깨달음은 아주 이상한 기분을 선사했다. 왜냐면, 그 남자애는 평소에 나한테 이런 스킨십을 장난삼아 하는 애도 아니고 더군다나 날 선욱 씨라고 부르는 애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YOU WIN!

커다랗게 뜬 안내 문구 밑에서 내 캐릭터가 환호성을 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상대편을 때려눕히기에 성공해서였다. 그럴 수 있게 도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은 눈이 마주치고서야 내 손을 놓았다. 개구진 표정의 놈은 웃고 있었다.

“지훈이에용.”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면 섭한데?

중얼대듯 뒷말을 뱉은 이지훈이 드디어 떨어졌다. 나를 뒤에서 안기 위해 덩달아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 놈이 기지개를 켰다. 멀뚱히 바라보는 내게 버스정류장을 고갯짓하기도 했다.

“가자, 집. 형이 데려다줄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건지, 버스에서 내린 이지훈은 거리를 둔 채로 내 뒤에서 걸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가끔 이지훈이 집에 놀러 오거나, 아니면 내가 이지훈의 집에 놀러 가던 때와는 뭔가 달랐다. 그럴 때는 보통 같이 공부를 하거나, 혹은 게임을 하러 간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같이 하자고 말을 맞춘 것도 없는데 이렇게 따라오는 놈이 이상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도 오늘 지겹도록 지켜본 모습에 머물렀다. 아까 게임기 위에서 날 짓누르던 이지훈의 무게마저도. 백날이면 백날 장난을 치는 강영수와 이지훈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한숨부터 쉬었다. 떡볶이를 먹자마자 학원을 마친 여자친구를 데리러 간다며 사라진 강영수 때문에 장난을 칠 사람이 없으니 나한테 이러는 모양이다. 물론 그게 이지훈이라는 점에는 쉽사리 익숙해질 수가 없었지만. 강영수는 속을 드러내놓는 투명한 타입이기라도 하지, 이지훈은 가끔 뻔한 장난을 칠 때마저도 속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할 때가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장난은 결국 돌담길을 다 내려올 때까지도 이어졌다. 이지훈이 떡볶이집 앞에서 한 말처럼, 정말 날 집 앞까지 데려다준 꼴이 됐다. 대문을 마주 보는 백 할머니네 집에서 버리려 내놓은 듯한 긴 거울에 이지훈과 내가 비쳤다. 둘 다 목 위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의 키가 거울을 넘겼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새벽에 잠을 깨게끔 하는 성장통을 떠올린 나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변성기 때문인지 목소리조차 요샌 내 것 같지가 않아서 낯설 때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몸을 완전히 이지훈에게로 돌린 채로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

발소리가 그제야 멎었다. 세 걸음 뒤에서 낭창하게 걸어오던 이지훈이 멈춰 선 탓이었다. 막대사탕을 물고 있는 놈의 볼 한쪽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왼쪽 볼에 있던 사탕이 오른쪽 볼로. 그 의미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날 향해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없는뎅?”

사탕을 입에 물고 말해서인지 발음이 죄다 뭉개져 들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왜 저렇게 귀여운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봐야 하나도 안 귀여운데.

떨떠름하게 이지훈을 보던 나는 의미 모를 말싸움을 이어가는 것 대신 파란 대문을 툭 열며 인사했다.

“어. 그래. 가라, 그럼.”

“야.”

대문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뒤돌았다. 이지훈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사탕을 드디어 입에서 뺐는지, 말소리가 분명했다.

“너야말로 나한테 할 말 없냐?”

뜬금없는 물음을 던져놓고서, 이지훈이 기다렸다. 마치 내가 당연히 할 말이 있고, 자신은 응당 그 말을 들어야 한다는 듯이.

할 말? 있어도 굳이 이곳까지 따라온 네가 있어야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온 내가 있을 리가. 근데 그걸 곧이곧대로 뱉기에는 이지훈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침묵했다.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대개 더 아쉬운 쪽이 정보를 털어놓게 되어 있으니까.

“…….”

“…….”

문제는 이지훈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는 거였다. 덕분에 침묵만 길어졌다.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던 우리 둘 중 먼저 짜증을 낸 건 이지훈이었다. 정확히는 짜증보다는 투덜거림에 가까웠지만.

“와, 이렇게 바로 쌩깐다 이거지.”

내가 언제 쌩을 깠다고 그러는지. 지금도 당최 이해조차 안 되는 말마저 다 들어주고 있는데.

황당한 말에는 곧장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너를 쌩깠는데.”

“방금.”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덜렁 남긴 이지훈은 한술 더 떠서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대문의 문고리부터 도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나를 잡아당기듯 끌었다.

“야. 일로 와. 영감님이 듣겠다.”

이지훈의 입에서 나온 ‘영감님’ 소리에 멈칫했다. 대문을 닫기 전 슬쩍 문틈 사이로 마당을 살피더니, 놈은 그새 할아버지가 집에 있는 사실마저 확인한 모양이었다.

근데 할아버지가 벌써 돌아오셨다고? 평소에 퇴근하는 시간보다는 좀 이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뒤를 돌아보려던 행위마저 참을성 없이 팔을 끄는 이지훈 때문에 저지됐다. 이지훈은 고개를 들어 확인해야만 파란 대문이 보이는 곳까지 나를 끌고 가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못 듣게 하려는 목적은 맞는 듯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이어서 하고 있는 이지훈을 응시했다. 애초에 순순히 끌려와 준 것도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뿐이니 이지훈이 설명할 때라고 생각했다.

“야.”

과연 이지훈은 아까처럼 의미 모를 물음을 던지는 것 대신 날 부르는 것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이지훈의 뒤로 바다가 보였다. 여름이 성큼 거리를 좁히는 시기였다. 길어지는 해가 바다 위로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잘 보였다.

“그니까….”

나는 반짝거리며 시선을 빼앗는 물의 표면으로부터 가까스로 시선을 떼 이지훈에게로 뒀다. 이지훈의 머리 위로도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꼭 머리 위로 노른자가 깨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것치고 이지훈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끈적거리는 액체도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성장기를 견뎌내는 중인 이지훈의 얼굴은 매끈하기보다는 거칠었다. 가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생각했다. 얘도 나랑 같은 시기를 거치고 있구나. 그러니 어느 날은 내가 얘를 내려다보는 것 같고, 어느 날은 동등한 것 같기도 했다가, 또 지금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허리에 힘을 줘 똑바로 섰다. 그렇게 한 것만으로도 이지훈과 어긋났던 눈높이가 얼추 다시 비슷해졌다.

나를 부를 때만 해도 거침없었던 이지훈은 웬일로 망설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그 찰나의 망설임마저 착각이었다고 느낄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놈이 삐딱하게 물었다.

“니 서울로 다시 전학 간다며.”

놀라기도 잠시, 나는 이지훈이 아까 물고 있던 사탕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찾아 눈을 굴렸다. 슬쩍 고개를 돌린 것만으로도 전봇대 옆 쓰레기봉투 위에 성의 없이 버려져 있는 막대사탕을 발견했다. 알 크기가 거의 그대로인데도 가까이에서 입을 연 이지훈에게서는 달큼한 냄새가 훅 풍겼다. 딸기 맛을 먹은 게 뻔했다. 이지훈은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긁었다.

그제야 왜 쌩까느니 뭐니 말했는지가 이해 갔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이지훈은 내가 기말고사가 끝난 후 바로 전학 간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2주 전까지도 먼저 언급하지 않는 내가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작년 겨울, 내가 하루아침에 태안으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친구들의 반응이 떠오르기도 했다. ‘말이라도 해주지.’ 그중 한 명의 메시지 위로 방금 이지훈이 던진 말이 겹쳐진 순간에야 나는 어색하게 신음을 흘렸다. 아…

“…어떻게 알았어?”

이지훈이 슬쩍 미간을 모았다. 내가 그 대답부터 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놈은 곧 순순히 털어놓았다.

“교무실 갔다가 쌤들 이야기하는 거 들었는데.”

외고 지원서에 관해 묻기 위해 담임이 날 불렀을 때, 옆자리의 수학 선생님이 날 힐끔 봤던 게 떠올랐다. 한 학기에 벌써 전학만 두 번째인 학생이라면 선생님들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최근 학업에 대해 부쩍 열의를 보이느라 교무실에 밥 먹듯 출입하는 이지훈이 그들이 지나가듯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이해를 마친 나는 마치 그때의 수학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지훈의 얼굴을 힐끔댔다.

“아… 그랬냐.”

이해가 되고 나니 미안했다. 다 알면서도 괜히 할 말 없냐고 묻던 이지훈의 마음이 뭔지도 알 것 같고. 강영수나 이지훈과 비록 친해진 지 오래된 건 아니었어도, 거의 한 학기 내내 붙어 다녔다. 등하교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따지자면 서울에 두고 온 친구 몇몇과도 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서울을 떠나올 때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곳을 떠날 때는 이지훈과 강영수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둘에게는 떠난다는 말을 못 했다.

그걸 내뱉는 순간 꼭… 진짜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날 것만 같아서.

강영수는 아마 엉엉 우는 척을 하겠지. 그래도 진짜 울진 않을 거다. 이지훈은… 글쎄, 이지훈은 무슨 말을 할까. 어젯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했던 생각이 또 한 번 떠올랐다.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이렇게 들켜버린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지훈이 그걸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좀 어이없었겠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

이지훈이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바로 사과할지는 몰랐는지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놈은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했다. 요 며칠 강영수와 이지훈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언제 꺼낼지를 고민하던 말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갑자기 결정된 거야. 부모님 이혼 소송이 이제야 끝났고, 엄마가 나를 맡기로 결정된 게 얼마 전 일이라….”

새삼 이지훈과 서울에 있던 친구들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꺼낼 수 없던 부모님의 이혼 소식을 이지훈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만 봐도.

“나도 사실 아직까진 잘 실감이 안 나서, 설명하기도 어려웠어.”

“…….”

“그래도 다음 주 전에는 말하려 했어. 시험 기간 되면 너네도 바쁠 것 같아서.”

상상 속에서마저도 망설이던 마지막 말을 결국 입 밖으로 꺼냈다.

“서울 가서도 연락할게. 너네만 괜찮으면 언제든 놀러 와도 되고. 물론 지금처럼 자주는 못 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못 보는 건 아닐 테니까.”

가만히 듣기만 하던 이지훈이 움직였다. 걸음을 옮긴 곳은 내 옆이었다. 돌담길 앞에 서 있던 나와 달리, 돌담길에 등만 기댄 삐뚜름한 자세로 선 이지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놈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다에 시선을 둔 채였다.

“연락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나를 본 이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하는 추임새를 흘리면서.

“아닌데. 내가 보기에 넌 절대 연락 안 할 것 같은데.”

팔을 끌고 내려와서 따져 묻듯 말하던 때와는 표정이 사뭇 달랐다. 장난스러운 말투가 꼭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아까처럼 서운해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긴장이 풀리는 것도 잠시 오기가 일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지훈에게로 몸을 틀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 심지어 연락하겠다고 먼저 말한 게 나인데.”

이지훈의 시선이 내게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그도 잠시, 눈을 다시 바다로 돌린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느낌?”

주관적이라 오히려 더 반박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날 돌아보지 않고 이지훈이 말을 이었다.

“나나 강영수가 서울에 가는 건 우리가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었을 때나 가능할 거고. 그때쯤이면 너는 우리가 가물가물할 거고. 우리도 그렇겠지?”

“…….”

“만에 하나 연락이 닿아도 중학생 때 고작 한 학기를 같이 보낸 추억으로 무슨 이야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번 만나서 밥이야 먹는다 쳐도 그 이후로는 딱히 만날 일도 없을 거고.”

“…….”

“그렇다고 해서 네가 여기로 내려오는 일? 그것도 없을걸. 왜냐면….”

이지훈이 가정하는 우리의 미래는 지나치리만큼 현실성이 있었고,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한 내 말문을 틀어막기에도 충분했다. 잠깐 말을 멈춘 이지훈이 나를 돌아봤다.

“너는 15년 동안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다 늙은 영감 집에 손자가 왔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났던 거고.”

이지훈의 말은 옳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멍한 기분이 드는 거겠지.

말을 마친 이지훈이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영감은 뭐래?”

“…뭐가?”

“너 가는 거. 뭐라 안 해?”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가끔 느끼기도 했지만 이렇게 서슴없이 할아버지에 대해 묻는 이지훈을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이지훈은 나보다 할아버지를 잘 알았다. 때로는 그게 부럽고, 한편으로는 막막할 정도로.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안 해 봐서 모르겠어.”

“영감이 네가 가는 걸 모른다고?”

“아니. 알고는 계시겠지. 저번에 보니 엄마와도 연락하시는 것 같았고….”

“근데.”

“그게… 엄마가 다녀간 이후로 나랑 이야기를 잘 안 하셔. 언제 가는 거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니나 영감이나 진짜 존나 똑같다.”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훈은 아까처럼 다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내 양어깨를 잡고는 앞뒤로 탈탈 흔들었다.

“대화를 좀 하세요, 대화를. 영감님한테 물어봐. 너 가는 거 알고 있냐고, 그래도 괜찮냐고.”

“…….”

“말로 안 하면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영감은 이미 그러고 산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못 고친다 쳐도,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

평소처럼 말을 받아치거나 혹은 강영수가 매달릴 때마다 하듯 어깨를 털어 놈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이지훈이 꼭 어른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충고를 건네는 와중에도 나를 살피는 걱정스러운 눈길까지.

이지훈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를 더 생각한다는 게 느껴지는 흔적들이었다.

“대화 중간중간에 멍 때리지 말고. 강영수한테 집중 못 하는 거 들킨 거면 갈 데까지 간 거다. 어?”

모든 게 의외였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지훈의 손아귀에서 흔들리던 나는 어깨를 흔들던 움직임이 멈춘 후에야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방심하다가 이지훈의 뒤에 있던 해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눈을 찡그려야 했다.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인 뒤에야 이지훈과 눈을 맞췄다. 이지훈은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처럼.

“…….”

“…….”

난 어깨에 주려던 힘을 풀었다. 다음 순간, 이지훈이 내 어깨를 놓고 거리를 다시 벌리리라 예상해서였다. 그러나 이지훈은 내 예상과 다르게 행동했다. 우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질겁하는 것 대신 웃기부터 했다. 입이 가로로 크게 벌어지고, 볼 위의 보조개가 드러나는 큰 웃음이었다.

“대화에 집중도 못 하는 것 같더니 그 와중에 떡볶이를 드시긴 하셨어요?”

이지훈이 어깨에서 뗀 손을 내 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엄지의 끝으로 볼과 입술 사이의 어딘가를 크게 문질러댔다. 그게 무언가를 닦아내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내가 뒤늦게 손을 볼 위로 올렸지만, 이지훈에게 저지당했다.

“야. 됐어. 내가 닦을….”

“다 했어, 인마. 가만히 있어.”

내 손을 쳐낸 이지훈이 한 번 더 볼을 문질렀다. 다 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머지않아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지훈이 내 볼에 묻은 걸 훔쳐낸 손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교복 바지에 대충 닦는 것까지 보고서야 뒤늦게 볼을 더듬댔다. 딱히 묻어나오는 게 없었다.

오늘 하루 이지훈이 하는 행위가 죄다 낯설다. 여자친구한테도 못 받아본 행위를 이지훈이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훈은 더 할 게 없는 것처럼 물러섰다. 날 향해 파란 대문을 눈짓하기도 했다.

“들어가라. 영감님이랑 대화도 좀 하고.”

곧바로 뒤돈 이지훈이 돌담길을 내려가는 걸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 말처럼 집으로 가긴 해야 했다. 가서 할아버지랑 대화할 수 있을지는 이 순간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대문을 열자마자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내가 생활하는 공간 바로 옆에는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안이 서늘하고도 건조한 창고였다. 쓰지 않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임에도 그곳엔 먼지 하나 없었다. 오늘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창고를 정리하기에 바쁜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를 따라 들어가 보았던 창고 안 물건들이 마트의 선반 위 물건들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던 걸 떠올린 나는 그가 이른 퇴근을 한 오늘조차도 과거의 흔적을 정리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 과거에는 곧 나도 섞일 터였다. 예를 들어, 내가 남기고 간 수저라든지 다 푼 문제집 같은 것들.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그런 보람이 없는 말을 뱉었지만.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꿈쩍없던 할아버지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할아버지의 눈이 내 얼굴을 지나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을 훑었다. 이지훈에게 맞은 그날 이후 그가 학교에 다녀온 날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려.”

할아버지의 고개가 앞으로 돌아갔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끝났을 대화였겠지만, 아까 들은 이지훈의 말 때문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한참이 지나도 들어가지 않자 이상했는지 할아버지가 뒤돌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입 안 깊은 곳에 감춰두고 있던 말이 흘러나갔다.

“방학식 날에요.”

할아버지가 방학식 일자를 모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주 뒤에요.”

할아버지는 묵묵히 들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보니 헤어짐을 갑작스럽게 느끼는 건 나뿐인 듯해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엄마가… 절 데리러 오실 것 같아요. 여기로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표정할 할아버지를 볼 자신이 없어 그가 끼고 있는 목장갑으로 시선을 내렸다. 할아버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만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아빠나 엄마, 둘 중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나를 찾아준 사람이 그여서 다행이었다. 비록 엄마가 부탁한 거였대도, 할아버지가 내게 해준 것들을 단순히 부탁에 의한 행위라고 생각하긴 싫었다. 설령 그에겐 내가 귀찮은 짐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겐 그가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므로.

“그동안 저 때문에 힘들고 귀찮은 일도 많으셨을 텐데….”

“…….”

“제가 그런 거 못 느끼게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끝내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훅 올라온 감정이었다.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하는 순간에야 정말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2주 뒤면 이런 말을 할 수조차 없을 테다. 그는 내 옆에 없을 테니까.

‘너는 15년 동안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다 늙은 영감 집에 손자가 왔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났던 거고.’

이지훈의 말이 떠오른 순간에는 잊지 않고 덧붙였다.

“연락드릴게요. 꼭이요.”

더 있으면 정말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눈을 맞출 자신은 없었던 나는 황급히 신발을 벗고는 마루 위로 올라섰다. 방문을 닫은 순간에야 숨을 쉬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방에 걸려 있던 아빠의 졸업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곳에서 자란 어떤 사람은 서울로 갈 날만 기다렸다는데.’

‘…….’

‘다른 사람은 이곳에 더 있고 싶다고 하네.’

‘…….’

‘재미있지 않니? 심지어 그 둘이 부자 관계인 걸 생각하면.’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말을 비로소 이해한 순간이었다.

아빠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예로, 난 서울에 갈 날이 전혀 기다려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이곳에 혼자 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아빠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빠는 어떻게 그랬어요?”

그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아예 인생에서 없었던 사람인 양 취급하고 살았을까.

그와 겨우 6개월을 함께한 나조차 평생 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인데.

* * *

강영수는 내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경 썼다. 아침에 정거장에서 만나면 아련한 표정으로 디데이를 세기도 했다.

‘선욱 씨가 완전히 떠나기까지 일주일….’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하라고 말이라도 꺼내려 치면, 강영수의 촉촉해진 눈가를 마주하게 됐다. 예상했던 것처럼 강영수는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는 척을 했지만, 이지훈이 강영수 동생으로부터 입수했다는 정보에 따르면 집에서는 진짜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쉬는 시간마다 와서 재롱을 떨고 가는 놈이 신경 쓰여 떨쳐낼 수조차 없었다. 짧은 시간에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나조차도 놈을 두고 갈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이런 미친 짓까지 하게 됐다. 기말고사가 당장 모레인데, 나는 강영수가 빛 축제를 보기 위해 미리 맡아두었다던 명당으로 출발하기 위해 책을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를 확인하고선 미리 사두었던 감자칩을 챙겼다. 강영수가 명명한 오늘 밤 만남의 테마는 과자 파티였다. 마루에 나와 본 밖은 깜깜했다. 내 방에서 나오는 희미한 스탠드 빛 말고는 온통 어둠이었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나처럼 등을 보인 채 잠든 그의 등을 잠시간 바라보던 나는 발걸음 소리를 죽여 집에서 나왔다.

명당으로 날 이끌 임무를 맡은 이지훈은 밖에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놈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또 나만 준비물을 챙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가만 보면 습관이었다. 당장 어제만 해도 강영수에게는 체육복을, 이지훈에게는 샤프심을 빌려줬다. 지금도 강영수가 가지고 오라 한 과자는 찾아볼 수 없는 이지훈의 행색을 떨떠름히 살피다 그 앞에 놓인 자전거를 확인했다. 때마침 이지훈이 짜잔, 오버스러운 효과음을 내며 자전거를 가리켰다.

“…뭐냐?”

“자전거.”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냐?”

대놓고 핀잔을 주고서야 이지훈이 장난치길 멈췄다. 똑바로 선 놈이 자전거 다리를 툭 차면서 뒤늦은 설명을 보탰다.

“아빠가 오토바이를 안 빌려주더라고.”

당연히 명당까지 걸어갈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자전거를 왜 갖고 왔냐고 물은 거였지, 왜 오토바이를 가져오지 못한 건지를 물은 건 아니었는데, 아예 애먼 데를 짚고 있었다. 그마저도 어이가 없긴 했다.

“…너 같으면 너한테 오토바이를 빌려주겠냐?”

몇 달 전만 해도 비행을 일삼던 이지훈에게 자전거라도 가져가게 해준 게 다행이었다. 나였으면 혹시나 자전거 폭주족이라도 될까 봐 두려워서 그마저도 못하게 했을 거였다. 아니, 아예 애초에 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게 해주지조차 않았겠지.

뭔 말인지 알아들은 이지훈은 머쓱한 표정부터 지었다.

“나 그래도 그때 오토바이는 안 탔는데… 형들이 태워준대도 싫다고 했다고.”

변명하듯 웅얼대는 소리가 유달리 작았다. 가끔 집에 놀러 왔을 때, 할아버지가 이지훈이 담배 대신 물고 있는 막대사탕을 유심히 살펴보기라도 하면 괜히 사탕을 뱉어서 보여주기까지 하며 투덜대던 때와 비슷했다. 고작 몇 개월 전의 일임에도, 생각할수록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작아지는 법이 없는 놈이어서 그런지 그럴 때마다 배로 웃겼다. 나는 픽 웃으며 자전거로 다가섰다.

“아버님한테 잘해라.”

이지훈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섰다. 놈이 자전거를 받치고 있던 아래 버팀목을 가볍게 뒤로 툭 찼다.

“너는 나한테 잘하세요. 내가 이 밤에 자전거까지 태워주겠다는데.”

나는 안장을 보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었다.

“…네가 날 태워준다고?”

이지훈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럼? 아예 그 사실까지도 정해두고 온 것 같은 놈과 달리 나는 방금 알게 된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나도 서울 집에 내 소유의 자전거가 있다. 당연히 누군갈 뒤에 태울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근데 그건 초등학생 때처럼 몸집이 작을 때의 이야기지. 안장 뒤에 있는 자그만 짐받이에 내가 앉을 수 있기나 할까.

내 표정을 보던 이지훈의 시선 또한 짐받이에 멈춰 섰다. 동시에 고개를 휙 쳐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내가 운전을…!”

“내가 앞에서…!”

오디오가 맞물렸다. 잠깐 말을 멈춘 우리는 정확히 3초 후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나만큼이나 억울한 표정을 보니 하려던 말까지 비슷하리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허리에 손을 얹은 이지훈을 본 나는 결국 먼저 말하라는 것처럼 턱짓했다. 그래도 자전거 주인이긴 하니 기회는 줘야 했다.

이 논쟁에서 이길 방법을 고민하는 듯하던 이지훈이 팔짱을 꼈다. 묘안이 떠오른 표정이었다.

“저기 앉으면 나 거기 눌려서 아픈데.”

“…….”

“클수록 더 아프잖아. 너 내가 고자 되는 거 보고 싶어?”

설마 그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진짜 그 이야기였다. 그물처럼 철사가 구부러져 있는 짐받이를 한 번, 제 고간을 한 번 더 가리키며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듯 아픈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이지훈을 보니 새삼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난 이지훈처럼 팔짱을 꼈다.

“너만 크냐?”

입을 허- 벌렸던 이지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네. 화장실에서 직접 보기도 했어 가지고.”

“아이 씨, 더럽게.”

내 고간을 눈짓하는 놈에게 감자칩을 던졌다. 웃는 와중에도 놈은 내가 던진 감자칩 두 개를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공을 잡아내듯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능글맞은 웃음 때문에 하나도 안 멋지고 이상하기만 했지만. 히죽대는 걸 보니 내가 질색할 것까지 예상하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하여간 가만히 보면 강영수에게 1절만 하라고 할 처지가 못 되는 놈이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방금 떠올린 묘안이 꽤 타당성이 있었다.

“옆으로 앉으면 되잖아. 해결됐지?”

이지훈이 괜히 말을 무를 수 없도록 재빠르게 안장에 엉덩이부터 붙였다.

“빨리 뒤에 타. 강영수 기다린다.”

사실이긴 했다. 아까부터 이지훈과 내 핸드폰에 번갈아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어디쯤 왔냐는 강영수의 문자일 거였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전거에 다가선 이지훈이 짐받이를 한 번 더 내려다보더니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눈을 깜빡대며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손수건이라도 얹어줘야지?”

내가 끝내 마당의 빨랫줄에서 걷어온 수건을 반으로 접어 짐받이 위에 올려주고서야 이지훈이 뒤에 앉았다. 기껏 찾아낸 방안처럼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앉는 것 대신에 양옆으로 벌리고 앉긴 했지만. 자전거가 방지턱에 걸릴 때조차 장난스레 소리를 낼 뿐, 딱히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걸 보니 그럭저럭 탈 만은 해 보였다.

나 대신 감자칩을 든 이지훈은 한 손으로만 내 허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차 때문에 잠깐 멈춰야 할 때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을 걸기도 했다.

“야. 근데 너한테 비누 냄새 난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돌아보자마자 웃고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오이 비누.”

나는 대답 없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태껏 조심했던 것과 달리 방지턱에서 유달리 속도를 냈다. 악! 뒤에서 이지훈의 비명이 들린 순간엔 응징의 이유를 밝혔다.

“나 샴푸 쓰거든, 개새끼야.”

그래도 이지훈이 자전거를 가지고 온 이유가 있었다. 이마에 땀이 밸 때가 되어서야 해안도로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던 자전거가 멈췄다. 큰 정자 안에 앉아 있던 강영수가 우리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 왜 이제 와! 혼자 존나 무서웠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 왜 없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무서울 정도로 깜깜했다. 강영수가 들고 온 듯한 후레쉬 조명 두 개만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다가서다 말고 강영수의 뒤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이 뺏겼다.

고도가 높은 이곳에서는 바다와 하늘이 꼭 한 군데에서 만난 것처럼 보였다. 검은색인 것마저 같은데 구별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부터 흘러나왔다. 빛 축제는 이미 시작된 듯했다. 하늘 위로 여러 가지 색들이 펼쳐졌다.

“예쁘지! 보러 오길 잘했지!”

뿌듯함이 가득 느껴지는 강영수의 목소리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예뻤으니까.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늘이었다. 그 빛이 바다에 반사되는 풍경까지도 꼭 투명 데칼코마니 같아서 아름다웠다.

얼마나 그렇게 보고 있었을까.

“이제 마지막 차례다.”

강영수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이 축제가 끝에 다다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와 달리 매년 이 축제를 보았을 강영수와 이지훈이 감자칩도 먹고 수다도 떠는 내내 나 혼자만 넋이 빠진 것처럼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것 또한. 그 사실을 민망해할 틈도 없이 이지훈과 강영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마지막 피날레는 함께 보려는 모양이었다. 나만 앉아 있던 정자의 끄트머리에는 어느새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셋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와 이지훈이야 그렇다 쳐도, 강영수마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의외이긴 했다. 그게 신기하고도 이상해서 옆을 돌아본 순간, 유독 더 화려한 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빨간빛이 모여 ‘소원을 비세요’라는 문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선욱 씨. 소원 빌어요, 얼른. 일 년에 한 번 오는 기회야.”

옆구리를 찌른 강영수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어색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유치하다고 핀잔을 줄 줄 알았던 이지훈은 의외로 강영수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손을 모으진 않았지만, 놈 또한 소원을 빌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강영수와 이지훈의 흔치 않은 진지한 모습 때문인지 자연히 그들이 빌고 있는 소원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추측해 보게 됐다.

내게도 그런 간절한 것이 있을까. 소원을 비는 순간이 오면 눈을 감고 손부터 모은 채로 바로 말할 수 있는 것.

나는 한 번 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도 넘게 꼼짝없이 하늘을 지켜보는 와중에도 내내 제자리에 멈춰 있던 손을 처음으로 꿈틀댔다. 가까스로 모은 손을 아래로 내린 채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빌었다.

평생 이 순간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날 이곳으로 데려와 준 할아버지를, 이 아이들을.

빛 축제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강영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챙겨 온 기타를 부랴부랴 붙들고 우리를 관객 취급하며 앞에 앉혀 둔 것부터가 그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강영수가 실용음악학원을 그만둔 게 자의가 아님을 알고 있는 나는 말리는 것 대신 그냥 들어주길 택했다.

물론 그 생각은 강영수가 누구보다 심취한 표정으로 기타를 두드리기 시작한 순간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나 또한 본능적으로 느꼈다. 강영수는 엄청난 음치였다.

아니, 분명 실용음악학원을 일 년이나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의문을 해결해줄 유일한 사람인 이지훈은 손을 헤드폰처럼 귀에 대고 있었다. 음악을 감상하는 척하지만 실은 그냥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에 가까운 짓거리였다.

강영수가 일 년 넘게 소질 없는 행위를 하는 걸 말리기는커녕 가만히 지켜만 봤을 이이기도 했다. 나는 강영수가 옥타브를 올리느라 우리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 확인한 후 이지훈에게 빠르게 말을 걸었다.

“…네가 그러고도 쟤 친구냐?”

못 들은 척하던 이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변명이랍시고 뱉었다.

“진정한 친구는 하고 싶은 일을 조건 없이 응원해주는 거야.”

이럴 때 보면 둘이 왜 친구인지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지훈에게 책임의 소재를 더 묻는 것 대신 뒤로 몸을 뺐다. 그러고는 기타를 쥔 채로 날 행복하게 바라보는 강영수에게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강영수의 음정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손을 간신히 모아 억지 호응해주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반응이 되었는지, 강영수는 꽤 우쭐한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나 재능 있는 것 같은데….”

다 들리게 말해놓고는 나를 슥 쳐다보는 걸 보니 동조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박수까지는 어떻게 쳤지만 그 이후로도 거짓말을 칠 자신이 없었던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너 이 노래… 그니까, 여자친구한테도 들려줬냐?”

강영수의 기타 연주를 듣는 내내 궁금한 거기도 했다. 이지훈은 그렇다 쳐도, 꽤 오래 사귀었다는 강영수의 여자친구는 왜 말을 안 해줬을까?

“민지?”

여자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늘 표정이 밝아지는 강영수는 방금도 목소리부터 높아졌다. 기타를 뒤로 치우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이기도 했다.

“당연히 들려줬지. 민지는 나를 가장 응원해주는 사람이라고. 가끔은 자기 앞에서 세레나데도 못 부르게 한다니까? 목 아껴서 더 연습하라고. 그래야 좋은 상태에서 더 많은 노래를 부르지 않겠냐며. 최고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음치를 견뎌내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래도 어찌 보면 강영수의 여자친구가 제일 똑똑하게 대처한 것 같기도 했다. 강영수에게 솔직히 말해서 상처를 주는 것 대신 칭찬을 해주며 다시는 그 노래를 듣지 않을 방법까지 찾아낸 거니까.

“민지 이야기하니까 생각났는데. 야, 이지독. 그러고 보니 너 왜 문자에 답장 안 하냐?”

“뭘.”

“시험 끝난 주 일요일에 민지 친구랑 넷이서 놀자고 했잖아. 우리 민지가 커플 데이트가 소원이래. 딱 한 번만 해보고 싶다는데 좀 도와주라. 어? 내가 쏜다니까? 돈 다 낸다고.”

잠깐 강영수 여자친구의 처세술에 감탄했을 뿐인데, 어느새 이지훈과 강영수가 싸우고 있었다. 주제는 익숙했다. 미팅이나 다를 바 없는 제안을 끈질기게 내놓는 강영수나, 끈질기게 고개를 젓는 이지훈이나 이미 지겹도록 본 풍경이었다.

이지훈이 사귀지도 않는 여자애들과 잘 지내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강영수지만 여자친구가 특별히 부탁까지 했다는 점에서 이번 주 내내 평소보다 배로 끈질기게 굴고 있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끼어들지 않는 싸움에 끼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냥 한번 나가주지 그러냐.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강영수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는 감자칩을 주워 먹던 이지훈의 시선이 대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날 향했다. 넌 갑자기 왜 지랄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지원군을 얻은 강영수만 신났다.

“아, 그니까아. 내가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 어? 지독아. 이지독아. 한 번만 기회를 다오. 형이 잘할게.”

이지훈의 팔에 달라붙은 강영수의 움직임이 커졌다.

“민지 친구들 다 존나 예쁜 거 모르지. 너? 응? 못 믿겠으면 이상형 말해 봐. 어떤 스타일이든지 형님이 책임지고 맞춰준다.”

“…이상형?”

이지훈이 처음으로 대꾸다운 대꾸를 했다. 솔깃해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강영수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넘어온 걸로 보였는지 말투가 호기로웠다.

“어! 이상형! 말하라니까?”

잠깐 고민하던 이지훈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안 아픈 사람.”

“…….”

“그리고 내 옆에 평생 있을 수 있는 사람.”

강영수도, 나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강영수의 팔을 밀어낸 이지훈이 앞에 있는 감자칩을 주워 먹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으면서.

“근데 지금 만난 애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면 개또라이 같을 테니까 그냥 안 할래.”

“…….”

“…….”

“그리고 나 어차피 공부도 해야 돼, 존나 바빠.”

이번 학기 내내 습관처럼 달고 살던 말과 함께 이지훈이 대화를 끝냈다. 그렇게 해도 강영수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을 아는 것처럼.

난 아까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빌던 이지훈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소원은 방금 말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별, 별로 안 또라이 같은데? 그런 사람은 지금 못 만날 것 같다는 것까지 아주 객관화가 잘되어 있네.”

한참이 지나서야 강영수가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잠깐 머뭇대던 놈은 이내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지훈의 머리를 말없이 한 번 헝클어뜨렸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밀쳐냈을 이지훈도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었다. 나는 뭐라 말하는 것 대신 이지훈에게 감자칩을 조금 더 밀어주기만 했다.

우리 셋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소원은 이지훈이 누군가를 잃은 순간과 닿아 있고, 그렇기에 지금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는 것까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는 조용했다. 아까 이지훈이 한 말을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갈 때와 달리 오는 길 내내 말이 없었던 이지훈 때문일 수도 있고.

‘…안 아픈 사람.’

‘…….’

‘그리고 내 옆에 평생 있을 수 있는 사람.’

이상형을 그렇게 대는 사람은 처음 봤다. 사실 내 또래뿐만 아니라 어른 중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거였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을 잃어보기까지 한 사람이 아니라면.

“왜.”

흘긋대는 시선을 내내 모른 척하던 이지훈은 파란 대문 앞에 서서야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또 이지훈이 날 집 앞까지 데려다준 꼴이 됐다. 이지훈이 갈림길에서 자연스레 발을 트는 걸 보고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탓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나는 괜히 콧등을 쓸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냥….”

“…….”

“자전거 집까지 끌고 가기 귀찮지 않냐? 아니면 여기 놔뒀다 나중에 시험 끝나고 가져갈래?”

“나중에 언제?”

“…어?”

“나중에 너 없잖아.”

피곤해 보이는 놈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물은 질문에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몰랐지만.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상황에서 들으니 괜히 눈치를 보게 됐다.

‘그리고 내 옆에 평생 있을 수 있는 사람.’

오는 내내 곱씹은 말이 그새 뇌에 박혀버렸는지 바로 떠올랐다. 이지훈이 누구를 이상형으로 꼽든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그랬다.

“뭐… 그건 그렇지.”

안 하는 것만 못한 대답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지훈의 옆에 평생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막 깨달아서였다. 그건 이지훈에게 생각보다 큰 의미일 수도 있다는 걸 오늘 밤에서야 깨달았다. 심지어 한 학기만 안 나임에도.

흘긋 나를 본 이지훈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막 생각난 것처럼 묻기도 했다.

“영감님이랑 대화는 했냐?”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한 건 맞으니까. 비록 별로 달라진 건 없대도.

“어.”

나처럼 알겠다는 듯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 줄 알았던 이지훈은 의외로 파고들 듯 물었다.

“뭐라 했는데?”

“그냥 엄마가 데리러 올 거라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그러니까 영감님이 뭐라든?”

나는 잠깐 망설였다. 대답 없던 할아버지가 떠올라서였다. 내가 곤란해하는 티를 내는데도 이지훈의 시선은 떨어져 나갈 기미가 없었다. 마치 모든 전말을 전해 듣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결국에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그 대화를 입 밖으로 다시 꺼내야만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대화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준 게 이지훈인 걸 알아서.

“그냥…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데.”

이지훈은 가만히 날 쳐다보기만 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다냐고 한심해하는 것 같기도, 아니면 그런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민망했다. 아까 이지훈이 학기 초 자신의 모습을 민망해하며 덧붙인 것처럼, 나도 변명하듯 덧붙이게 됐다.

“다행일진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가는 걸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으셔. 갑자기 나까지 챙겨야 해서 오히려 번거로우셨을 텐데, 잘됐지 뭐….”

“…….”

“엄마가 나 부탁하셨을 때부터 이미 이야기 들으셨던 걸 거야. 이게 맞지 뭐.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도 없는 거고… 할아버지도 바쁘신데 내가 여기 있으면서 자꾸 신경 쓰이게 해 봤자 좋을 게 없잖아.”

어째 말하다 보니 할아버지를 대신해 변명하는 쪽으로 말이 흘러갔다. 나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에야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마치 아까 정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야.”

침묵을 깬 건 이지훈이었다. 눈을 들었으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이지훈은 내 뒤에 있는 파란 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을지도 모른다며 손을 끌고 아래로 내려가던 그때와는 퍽 달랐다. 그 간극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이지훈이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랑 영감님이랑 같은 공장 다니는 거 아냐?”

솔직히 몰랐다. 이지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아빠가 공장장이야. 영감님이 수위로 일하는 곳.”

“…아.”

“아침마다 영감님 태우고 출근하는 것도 우리 아빠고. 그렇게 한 지 벌써 십 년은 됐을걸.”

“…몰랐어.”

이곳에 지금보다 더 오래 있게 된대도 그 사실을 알기나 했을지 모르겠다. 내 뻘쭘한 대답에도 이지훈은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그쯤 되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지훈이 이런 정보들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라는 걸.

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그러기 무섭게 이지훈이 털어놓았다.

“근데 그런 우리 아빠가 그랬어. 네 할아버지,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지훈이 할아버지를 내 앞에서 ‘영감’이 아닌 ‘네 할아버지’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 사실에 놀라기도 전에 이지훈이 줄줄이 말했다. 처음 듣는 정보들은 그러나 나 아닌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정보였던 것 같았다.

“너 오기 전까지는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했을걸.”

“…….”

“이장직도 아마 사람들이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은 하라고 시킨 걸 거다. 입에 거미줄 치지 말라고.”

이곳에 온 후 저녁만은 꼭 할아버지와 같이 먹었다. 할아버지는 대체로 말이 없었지만, 가끔은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당장은 기억할 수도 없을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물음이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가 내게 매일 열 마디 이상 했다는 것 정도야 알았다.

“진짜야?”

나는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숨을 내쉬었다. 이지훈이 가볍게, 그러나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걸 삼키는 것 대신 뱉었다.

“근데 그렇대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나도 여기에 있을 수 있으면 있고 싶어. 할아버지 옆에서. 근데 그러면 엄마가….”

할아버지에게도, 엄마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때로는 나 스스로에게까지 숨겼던 속마음이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할아버지도 원치 않을 테니까. 엄마도 화를 낼 테니까. 엄마 아빠가 내 장래를 위해 세워두었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질 테니까. 그럼 또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더 이유를 찾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가까스로 찾은 이유마저도 죄다 뭉개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이지훈은 꼭 그걸 아는 것처럼 말했다.

“네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쪽으로 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충고였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어쩌면 그래서 더욱이 마음을 파고드는. 그래서인지 나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행복한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입 밖으로 뱉은 순간에야 그게 비참하기 짝이 없는 문장임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나는 행복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 단어를 이리 오래도록 생각한 것조차 처음이었다. 이지훈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지훈은 놀라지도, 날 불쌍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저번 주 금요일과 똑같은 낯으로, 자신이 아는 방법을 공유했다.

“그걸 모르겠으면, 네 옆에 평생 있어 줬으면 좋겠는 사람한테 물어봐.”

“…….”

“행복하냐고.”

이지훈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흔들림이 없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곱씹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놈이 떠날 준비를 했다. 잠깐 옆에 기대두었던 자전거를 다시 곧바로 세우는 이지훈을 멍하니 보다 물었다.

“왜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말해주는 거야?”

안장에 앉던 이지훈이 멈칫하더니 나를 돌아봤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왜겠냐?”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고 비꼰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난 이번에도 정답을 몰랐다. 내 표정을 확인한 이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퉁명스러운 말투로도 답을 알려주면서.

“네가 계속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대답과 동시에 페달에 발을 올린 놈 때문에, 자전거가 곧바로 출발했다. 바람이 휙 일었다. 나는 그때처럼 이지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발견했다.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한 늙은 노인을.

그의 앞에 있는 재떨이를. 그 위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들을.

어쩌면 내가 밖에 있던 내내 그의 옆을 지켰을 것들을.

“…밤에 어딜 그렇게 나돌아다니냐.”

할아버지는 오늘도 아껴 썼을 열 마디 중 한 마디를 나에게 기꺼이 썼다.

이 순간 나를 무너지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임을 안 순간에는 더는 괜찮은 척조차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 짧은 타박을 끝으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할아버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엄마 안 따라가고, 그냥 여기에서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어요.”

“…….”

“엄마처럼 검사 되기도 싫고, 아빠처럼 변호사 되는 것도 필요 없어요.”

“…….”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고 싶어요.”

이지훈은 그런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라고 했지만, 나는 물을 수 없었다. 내가 떠나고 나면 할아버지가 더는 행복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냐고 묻는 것 대신 말했다.

“저 사실 행복이 뭔지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그냥… 그냥 마음이 편해요. 밥도 잘 넘어가고, 밤에도 안 무서워요. 외롭지도 않고요.”

설득보다는 토로에 가까운 어설픈 문장들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제자리에 선 채로 모두 들어줬다. 그가 그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이지훈의 말처럼, 할아버지도 나와 헤어지기 싫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생겼다.

“여기서도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제가 엄마를 설득해볼게요.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엄마가 꼭 서울로 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면, 방학에라도 여기 올 수….”

말이 뚝 끊겼다. 할아버지가 움직인 탓이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할아버지는 방 쪽이 아닌 창고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저번 주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붙어 있던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지켜보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창고의 문을 열더니 이내 그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상자는 깔끔했다. 마치 신상품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상자 위의 문구를 읽었다. 익숙한 문구를 읽어낸 순간에는 절로 숨이 가빠졌다.

그건 컴퓨터였다. 내가 아니라면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박스가 크대도 할아버지가 그것보다 작을 리는 없는데, 어둠 속에 서서 날 보는 노인은 유독 작아 보였다.

“…네 엄마가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매달 돈을 부쳤다.”

“…….”

“다 모아놨으니 그건 나중에 너 필요할 때 쓰거라.”

나는 숨을 뱉었다. 할아버지가 왜 저번 주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창고 쪽을 기웃거렸는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는 이걸 사놓고도 나한테 어떻게 줘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평소보다 이르게 퇴근하기까지 했으면서. 이걸 몰래 숨겨놓으려고 창고를 뒤집어 정리하기까지 했으면서.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너는 내가 책임질 거다. 네 애미 애비가 아니고. 내가.”

‘컴퓨터도 없고, 전화조차 잘 안 터지는 곳에서 고생 많았어.’

엄마의 그 한마디를 그냥 넘기질 못하고, 나한테 컴퓨터를 사줄 테니 여기 있으라는 말도 차마 못 해서.

나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애처럼 천천히 발을 뗐다. 할아버지는 보지 못했을 내 어렸을 때의 모습을 뒤늦게나마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할아버지는 다가오는 나를 보고도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딱딱하고 흔들림 없는 고목 같은 몸을 껴안았다.

두껍고, 주름이 가득한 손이 올라와 내 등을 감싸 안은 순간에야 우리 둘 다 울고 있음을 알았다.

* * *

“앗추, 앗, 추워!”

강영수는 등장부터 요란했다.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뛰어들어 온 놈의 발걸음 소리가 꼭 첨벙대는 소리처럼 났다. 젖은 빨판이 바닥에 달라붙는 소리를 들으니 쓰레빠를 신고 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제집에서 이곳까지 가까워도 그렇지, 우산도 안 쓴 채로 심지어 쓰레빠까지 신고 뛰어? 나라면 굳이 하지 않을 선택지를 택한 강영수는 그러나 혼내 봤자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인물이기에 뭐라 말하길 포기했다. 난 한숨을 쉬면서도 개고 있던 수건 하나를 들었다.

마루로 나가서 가까이에서 본 강영수는 생각보다도 더 젖어 있었다. 노란 티부터 회색 추리닝 바지까지 빗방울이 튀어 엉망이었다. 젖은 개처럼 몸을 부르르 털며 빗방울을 털어내던 강영수가 내가 앉아 있던 거실 쪽을 확인하자마자 물었다.

“빨래 개고 있었어용, 선욱 씨? 신랑 수업 뭐 그런 건가용?”

비에 꼴딱 젖은 꼴로 덜덜 떨면서도 입은 도통 쉬질 않는다. 그러나 날 볼 때마다 눈을 접어 웃기부터 하는 놈의 하늘을 뚫을 듯한 기분이 나로 인한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뭐라 할 수 없었다. 내가 서울로 다시 전학 가지 않는다는 걸 안 이후부터 강영수가 일주일 내내 보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험 기간 내내 콧노래를 부르는 놈을 보다 못해 시험을 얼마나 잘 봤기에 그러냐고 물었다던 강영수 어머니의 질문까지 생각하니 더 민망했다.

“잠만! 잠만, 나 이것 좀 내려놓구.”

지금도 강영수는 내가 건네는 수건을 집는 것 대신 헤죽대며 들고 있던 것들을 와르르 마루 위로 쏟아놓기부터 했다. 비에 젖은 봉지에는 내가 강영수 집에 놀러 갔을 때 한 번인가 들춰보았던 만화책들이 가득했다. 같이 들어가 있는 과자까지 확인한 나는 그게 언젠가 강영수의 성화에 집어 들었다가 입맛에 맞아 조금 더 주워 먹었던 과자라는 걸 깨닫고 괜히 그 과자 이름을 따라 읽어보았다.

하여간… 볼수록 유난스러운 놈이었다.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방식으로 우정을 표현하는 강영수 앞에서는 늘 내가 과하게 뻣뻣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노력을 해야 하나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할아부지, 안녕하세요! 이거 수박이요. 엄마가 할아부지 드리래요. 선욱이랑 먹으라구.”

그새 창고에서 일하는 중인 할아버지에게 다가간 강영수는 들고 온 수박까지 통째로 넘기고 왔다. 냉큼 마루로 올라선 놈이 고개를 홰홰 돌리며 해맑게 물었다.

“컴퓨터 어디에 있엉?”

그러고 보니 강영수가 굳이 놀러 온 이유가 있었다. 내 방을 눈짓하자 강영수가 조금 열려 있던 문을 완전히 젖히고는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와! 컴퓨터 완전 새거네 진짜. 부팅 속도도 개빠르겠다.”

방구석에 놓인 컴퓨터를 발견해낸 놈이 눈을 빛내며 다가서다 말고 갸웃했다.

“근데 이 책상도 원래 있었나? 저번에 봤을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놈이 그 차이를 알아챌지는 몰라서 놀랐다. 겨우 저번에 한 번 집에 같이 왔었던 걸 기억하고 이렇게 말하다니. 놀라길 잠시, 나는 어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어.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어. 앉아서 공부하라고.”

강영수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렇지. 그랬겠지. 할아버지는, 널, 그만큼 사랑하시-읍!”

“오버하지 말랬다.”

할아버지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은 것도 아닌데, 겨우 몇 개 주워들은 사실을 조합해낸 강영수는 할아버지와 내가 무슨 가족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평소엔 도저히 끌 수 없는 라디오를 틀어둔 것처럼 무시한다고 쳐도, 할아버지가 언제라도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집에서는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난 강영수가 더는 안 하겠다며 손을 싹싹 모아 빌고서야 놈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줬다.

“가만 보면 너도 진짜 육체파야. 사람이 대화를 해야지, 대화를. 몸으로 말하지 말고.”

힘으로 제압당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는지 잠시 부루퉁해져 투덜대던 강영수는 그러나 컴퓨터를 켜주자마자 고개까지 쭉 빼고 집중했다. 그렇게까지 집중해가며 하는 게임이 그 흔한 스타나 서든도 아니고, 겨우 날쌘돌이 캐릭터가 입을 벌려 금화나 먹는 게임이라는 게 웃겼지만.

열어둔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들렸다. 강영수가 하는 게임의 배경 음악과는 겉도는 소리였던 탓에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밖을 확인하게 됐다. 에이 씨, 연이어 절벽 아래로 떨어진 캐릭터를 보고 시시하다는 듯 중얼댄 강영수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 이지독한테 전화해볼까?”

“갑자기 왜?”

“그냥. 약 올리자. 우리만 잘 놀고 있다고.”

이지훈은 오늘 방학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외갓집으로 떠났다. 어젯밤 굳이 우리 집에 들러 자전거를 마당 한구석에 떡하니 맡겨두고 가기도 했다. 집에 두면 누가 훔쳐 갈까 봐 겁이 난대나, 뭐라나.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야 있겠지만 짐받이 위에 내가 그날 올려주었던 수건이 그대로 얹혀 있는 걸 보니 그럴 수 없었다. 그게 강영수와는 또 다른, 이지훈만의 내가 여기 남아서 좋다는 표현 방식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만화책을 덮고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방충망에도 물방울이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했다. 그러니까, 이지훈의 외할머니 댁에도 비는 오는지.

이번 해에는 장마가 이르게 시작된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같이 본 뉴스의 끄트머리에서 나온 장마 소식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내가 대답을 하기 전부터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강영수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친구한테 단순히 전화를 거는 것치고는 심히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보니 이지훈에게 장난부터 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앞으로 들을 전화 내용이 뻔했다. 비가 오냐는 질문은커녕, 3초 만에 전화가 안 끊기면 다행이다.

“어이, 헌 남자. 어디야. 내 생각 하고 있어? 톨게이트 지날 때마다 하기로 했잖아.”

과연 강영수는 이지훈과 통화 연결이 되자마자, 느끼한 목소리부터 냈다. 경악하며 고개를 쳐든 내게는 윙크를 하기도 했다.

“아이. 내가 전화해준 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욕을 하고 그래. 나 그런 취향 아닌 거 알면서 또.”

능글맞게 말을 이어가던 강영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이 새끼가 지멋대로 끊어?”

아마 이지훈이 통화를 종료해버린 듯했다. 오기가 생긴 듯 계속 다시 전화를 걸던 강영수는 기어코 내 핸드폰까지 뺏어갔다. 강영수가 우리 둘이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던 이지훈은 아무런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물론 그러자마자 또 강영수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내가 선욱 씨 핸드폰을 왜 갖고 있기는. 같이 있으니까지. 그래. 네가 톨게이트를 지날 때, 나는 선욱 씨와 우정을 쌓고 있다고. 너야말로 선욱 씨한테 그런 소유욕 보이지 말아주세요. 지금 같이 있는 거 누구? 네. 저예요.”

소꿉친구인 둘이 겨우 안 지 6개월이 지난 나를 끼워 넣어서 우정 다툼을 하는 건 특별 취급보다는 놀이하는 것에 가까웠다.

“자고 갈 건데? 비 그치면 네가 두고 간 자전거도 같이 탈 거다. 왜? 꼬와? 꼬우면… 아씨, 왜! 다 이겼는데.”

오늘도 그 의미 없는 놀이를 3분까지는 참던 나는 강영수가 쥐고 있는 핸드폰부터 뺏어왔다. 눈을 홉뜨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놈에게는 컴퓨터를 눈짓했다.

“가서 게임이나 해라.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아니, 그래도!”

“싫으면 집에 갈래?”

강영수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놈이 슬금슬금 다시 컴퓨터 앞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이지훈 성격이라면 나랑 강영수가 싸우는 소리만 듣고도 진작 끊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는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로 만화책을 들었다.

“아직 가는 중이지? 어디까지 갔냐.”

-…….

“이지훈?”

끊겼나? 핸드폰을 다시 내려다본 순간에야 이지훈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건너왔다. 그러고 보니 통화 시간도 여전히 깜빡거렸다. 2분 12초. 나는 숫자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뭐라고? 못 들은 말을 확인하듯 물으면서. 이지훈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너 왜 강영수 방에 들였어?

왜 놀러 오게 뒀냐는 것도 아니고, 왜 방에 들였냐니 뭔가 표현이 이상했다. 잠깐 놈의 말을 곱씹다 말고 반박했다.

“내가 들인 게 아니고 지가 쳐들어온 건데?”

이지훈이 코웃음 쳤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거지, 무슨.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는 몰라도 말투가 불퉁했다. 강영수의 시답잖은 질투 유발 작전이 먹히기라도 한 건지, 뭔지. 가만 보면 강영수와 이지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정을 확인하려 들었다. 나는 만화책을 다음 장으로 넘기며 심드렁히 답했다.

“어디까지 갔냐는데 왜 생뚱맞은 소리야. 어딘데?”

-이제 십 분만 더 가면 도착.

다행히 이지훈은 강영수보다는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 순순히 넘어온 답을 듣던 나는 만화책을 덮었다. 통화하면서 책까지 보려니 둘 중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옷장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혔다. 오랫동안 액자가 걸려 있던 곳인 걸 티 내듯이 유일하게 하얗고 네모나게 비어 있는 공간에 시선이 머물렀다. 원래는 아빠의 사진이 걸려 있던 곳이었지만, 난 이곳에 남겠다고 결심한 다음 날 그의 사진부터 떼어냈다. 할아버지는 액자를 들고 마루로 나간 내가 그걸 창고로 가져가는 걸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창고 한구석에 쌓여 있던 아빠의 옛 물건들 옆에 놓아두었다. 이제 그 방은 아빠의 방이 아닌 내 방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벽에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도 비 와?”

-조금. 많이 오는 건 아니고.

“다행이네. 잘 다녀와. 할머님 밭일도 잘 도와드리고. 아버지 말씀도 잘 듣고.”

-알았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오버하지 마.”

-네, 경찰관 아저씨.

“…다음부터 강영수한테 4절까지 한다고 뭐라 하지 마. 너도 똑같아.”

말장난에 질린 티를 내고서야 이지훈이 장난치길 멈추고 웃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이 등하교를 하고, 같은 반인 이지훈과는 통화할 일이 잘 없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만 해도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던 전화 목소리였건만, 놈의 웃음소리만은 내 기억 속에 있던 것과 같았다. 나는 콧등 위를 어색하게나마 쓸었다. 새삼 놈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게 실감 나서였다. 이렇게 통화하면서 웃고, 안부를 전하기까지 하는 사이라는 게.

“그럼… 끊어라. 곧 도착이라며.”

머쓱하게 건넨 마무리 인사에 이지훈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타지 말라고.

이지훈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앞부분을 놓친 나는 아까처럼 한 번 더 되물었다. 뭐라고? 잠깐의 침묵 후 이지훈이 한 번 더 말했다.

-강영수랑 자전거 타지 말라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강영수의 뒷모습을 확인한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잠깐 답이 없던 이지훈은 그러나 곧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

-걔 오이 알레르기 있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통화가 뚝 끊겼다. 핸드폰을 어이없이 내려다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중얼댔다.

“이 미친놈이 진짜….”

오늘도 슈퍼에서 일하고 계실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저녁으로 할아버지가 숯불로 구워준 고기까지 야무지게 먹은 강영수의 기분은 하늘을 찔렀다. 비가 그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가져온 잠옷까지 챙겨 입은 놈은 빠르게도 잘 준비를 마쳤다. 씻고 나온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제 옆에 누우라며 베개를 팡팡 치기도 했다. 내일 여자친구와 데이트가 있다며 동생에게 받아왔다는 팩을 얼굴 위로 올린 채로 눈만 굴리고 있는 강영수는 확실히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래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여동생이나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으면 보통 저런 건지, 아니면 쟤만 저런 건지를 모르겠다. 너도 할래? 라고 묻는 강영수에게 잽싸게 고개를 저은 나는 강영수가 재차 묻기 전에 불부터 껐다.

종일 비가 내려서인지 집 안팎이 죄다 습했다. 습한 기운을 내보내겠다고 할아버지가 창고에 있는 선풍기까지 모두 꺼낸 덕분에 사방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방에 하나, 마주 보는 내 방에 하나. 마루에 하나. 내 방에 있는 선풍기가 그나마 제일 새것이라 소음이 적었다.

화음이라도 이루듯 조금의 간격을 두고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의 소리를 듣던 나는 눈을 감았다.

“바로 자게?”

그러기가 무섭게 다시 떠야 했지만.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바짝 옆으로 붙은 강영수가 보였다. 언제나처럼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와 이지훈만큼은 아니래도 또래 중에서는 키가 큰 편에 속하는 강영수까지 함께 누워 있으니 방이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좀 떨어지면 안 되냐?”

뱉은 순간 후회했다.

“싫어싫어잉. 이 밤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옹.”

강영수는 이런 말을 들어도 물러서기는커녕 한술 더 뜨고 마는 놈이기 때문이었다. 발까지 올려 내 허리를 꽁꽁 감싼 놈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나는 몸의 힘을 뺐다. 경험상 반응을 안 해줘야 그나마 빨리 나가떨어졌다.

예상처럼, 강영수는 곧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다. 제자리로 돌아간 놈의 얼굴에는 아직도 팩이 붙어 있었다. 불까지 꺼진 곳에서 보니 꼭 달걀귀신 같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게 끝이 아니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눈 감고 이야기해, 눈 감고.”

그러면 잠들 확률이라도 높아질 거였다. 다행히 강영수는 내가 내민 선택지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감은 채로도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나 사실 너 만나기 전까지 너네 할아버지 좀 무서웠다?”

웬일로 속삭이듯이 말한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나는 왼쪽 눈만 슬쩍 떠서 건너편에 있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강영수가 굳이 그렇게 작게 말하지 않아도 말소리보다는 선풍기 소리가 더 큰 데다가, 오늘따라 일찍 잠자리에 든 그의 등은 일정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듣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서 강영수에게 물었다.

“왜.”

“그냥. 마을 사람들 다 모여도 진짜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나랑 우리 집 돼지가 인사해도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이시고.”

어렵지 않게 상상 가는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나 잘 치대는 강영수가 할아버지를 어려워할 만도 했다. 강영수가 소곤소곤 말을 덧붙였다. 내게 조금 더 붙은 놈 때문에 팔 부근이 뜨끈했다.

“근데 지금은 안 무서워.”

“왜.”

“너랑 닮았거든.”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강영수가 내 얼굴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너 늙으면 너네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을 것 같아.”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가끔 할아버지가 시킨 심부름을 하러 마을회관에 갔을 때 마주친 동네 아주머니들이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도 기억이 났고. 사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건 내게는 욕보다는 칭찬처럼 들렸다.

“뭐… 유전적으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너도 너네 할아버지랑 닮지 않았어?”

내가 묻기도 전에 제 할아버지의 생김새를 낱낱이 말할 것 같던 강영수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날 향해 있던 몸마저 돌려 똑바로 누운 채로 천장에 시선을 두는 중인 놈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팩을 붙인 상태를 유지하려 가만히 있던 때와는 어딘가 다르게 조용히 멈춰버린 얼굴을 보던 나도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

“…….”

유일하게 떠들던 우리가 입을 다무니, 다른 소리들이 더욱 크게 들렸다. 특히 할아버지가 막 창고에서 꺼내왔던 거실의 선풍기 소리가 가장 컸다. 이런 소리가 나는데도 고장이 난 게 아니라니. 잠깐 거실을 돌아보는 새 강영수가 말을 시작했다.

“음, 나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서 닮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

“아빠 죽고 나서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우리를 거의 없는 취급 하거든. 아주 어렸을 때 봤다고는 하는데, 잘 기억이 안 나.”

틈만 나면 우는 놈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는 오히려 울지 않았다. 즐겨 쓰는 이응 받침을 뺐다는 것 외에는 평소와 똑같은 어조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들었다. 천장을 바라본 채로 말을 잇는 강영수가 바라는 것도 그거일 거 같아서.

“그런 생각 하면 아빠가 좀 미운데. 그러다가도 또 미안해. 아빠가 이럴 줄 알고 죽은 건 아니니까.”

강영수 집에 놀러 갔을 때, 거실 탁자 위에 올려진 가족사진을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내 시선이 멎은 곳을 확인한 강영수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 ‘아, 우리 아빠 처음 보나? 잘생겼지? 근데 지금은 없어. 하늘나라에 있거든.’ 마치 잠깐 어디 외국에라도 나간 사람을 이야기하듯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던 강영수는 다음 순간 책가방을 소파로 던지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묻기도 했다. ‘선욱 씨, 라면 먹을래요옹?’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나 다음으로는 동생의 방을 두드리며 물었다. ‘돼지야, 라면 먹을래? 진라면은 없어. 대신 선욱이가 있어.’

그때도 지금도 딱히 해줄 말은 없었다. 난 잠깐 고민하다가 강영수의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강영수가 아까 내밀었던 분홍색 패키지를 집어 들었다. 내가 얼굴에 팩을 붙이는 광경을 믿기지 않는 것처럼 지켜보던 강영수는 내가 다시 자리에 눕기가 무섭게 허리를 발로 감싸며 매달렸다.

“내가 역시 남자 보는 눈이 있다니까. 선욱 씨를 본 순간 깨달았지. 이 남자가 내 새 남자다, 난 이제 야구 한다고 연락도 잘 안 되는 남자를 버릴 때가 됐다.”

“…이거 몇 분이나 하고 있어야 되냐?”

“날 사랑하는 만큼.”

하여간, 진짜… 한숨을 쉬다가 실실대고 웃고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결국 강영수를 따라 웃고 말았다. 비록 처음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얼굴 위로 얹은 팩은 생각보다 시원하고 좋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빗소리도, 옆에 붙은 강영수의 뜨끈한 체온도 익숙해지자 눈이 슬슬 감겼다. 강영수도 마찬가지인지 쓸데없이 말을 걸던 놈의 말소리가 점점 뜸해졌다. 허리를 감싼 놈의 다리가 풀리는 걸 느낀 나는 이불을 좀 더 끌어 올려서 강영수 위로 덮어줬다. 강영수의 시선이 힐끔 닿아왔다.

“근데 너 진짜 우리 돼지 별로야?”

다 졸린 목소리로 내놓기에는 뜬금없는 문장이었다. 팩까지 뗀 강영수는 그러나 날 또렷이 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넌 진짜 네 동생이랑 나랑 사귀면 좋겠어?”

강영수가 흐음, 하는 신음을 내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아니, 결혼했으면 좋겠어.”

평소처럼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하니 오히려 더 이상했다. 얼마 전 매점에서 마주친 강영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접했는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과자를 내밀었던 것도. 빨개져 있던 귀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보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강영수는 이걸 훨씬 전부터 알았고, 그렇기에 여동생과 나를 자꾸 엮으려 했던 거라는 걸.

자칫 심각해진 내 얼굴을 흘긋 본 강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건너편 할아버지 방을 보고는 급히 웃음소리를 줄이긴 했지만. 놈이 내 귀에 붙어 속삭였다.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그냥 거절해. 알았지.”

너무 바짝 대고 말해서인지 귀가 간지러웠다. 내가 어깨를 움츠리건 말건, 강영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돼지가 차인 상처를 회복할 때까지는 너랑 말 안 할게. 그건 네가 이해해줘야 돼. 그래도 오빠로서 의리를 지켜야 하니까.”

장난인지 진심인지를 알 수 없는 문장이었다. 멈칫한 나와 눈이 마주친 강영수가 아래의 내 손을 가져와서 억지로 제 손과 맞잡게 했다. 새끼손가락끼리 걸고는 위로 들어 올린 놈이 날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약속.”

나는 강영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정말 그럴 때가 온다면, 강영수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강영수는 빠르게도 주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선욱 씨.”

진지한 이야기는 이쯤이면 됐다는 것처럼, 장난칠 때마다 쓰는 호칭을 끌어온 놈이 하품을 쩍 했다.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

“…….”

“나 빛 축제에서 소원 빌 때, 선욱 씨 전학 가지 말라고 빌었다.”

나는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강영수를 내려다보았다. 강영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늘어지는 말투로도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이 말만은 하고 자야겠다는 듯이.

“근데 이게 비밀이 아니고.”

강영수가 킥킥댔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이지훈도 그거 빌었대. 웃기지.”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대신 숨소리가 깊어졌다. 나는 놈이 잠든 걸 확신한 순간에야 강영수의 머리 아래로 베개를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도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잠깐 그 이유를 생각해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강영수가 잠들어 있는 내 방과,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방을 번갈아 보던 나는 처마 밑에 기대어져 있던 검은 장우산을 들고는 대문을 살며시 열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내려가다가 2주 전, 이지훈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돌담길 앞에서 멈췄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 후 화면에 뜬 날짜를 응시했다. 7월 2일. 원래대로라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이곳에 온 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바로 전화가 연결됐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을 들으며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세 번의 신호음 후에 달칵,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말이 없었다. 혼자 있는지, 주변에 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나는 어렵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엄마.”

사실 전화를 걸기 전부터 오늘도 그녀가 혼자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엄마는 토요일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집에 돌아오고, 불 꺼진 부엌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마셨으니까. 난 겨우 중학생이었지만, 가끔은 직장인들보다도 늦게 퇴근했다. 공부가 일처럼 느껴지는 곳에 살아서였다. 집에 들어온 순간 마주친 엄마의 외로운 등은 눈을 떼기가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유 없이 부엌에 들렀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준비해놓은 간식을 찾는 척 냉장고를 뒤지거나, 우유를 따라 마시는 척을 하면서. 그러면서도 한 번도 엄마의 옆에 앉진 못했다. 엄마가 한 번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오늘도 그 테이블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위스키가 든 잔을 흔들면서, 절대 바뀔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겠지.

할아버지는 내게 엄마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신이 알아서 엄마와 이야기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그는 엄마나 아빠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고자 했다.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내가 여기 머무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엄마를 무슨 말로 설득했는지, 그녀가 정말 설득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알았다. 그녀는 내 선택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들였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모습을 비췄을 오늘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엄마에게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일 년에 한 번 소원을 비는 기회에서조차 그녀를 아예 배제해두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죄송해요.”

분명 숨소리가 들리는데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쥔 채로 조금 더 기다렸다. 지금 귓가에 들리는 빗소리가 서울에도 비가 오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어서인지를 가늠해보며.

엄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최고의 부모가 아닌 건 알아.

“…….”

-그렇지만, 난 최선을 다했어. 네게 좋은 것만 주려고 했고.

나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처럼, 엄마는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엄마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았다. 엄마는 아까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거 알고 있니?

“…….”

-네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지금 네가 한 이 선택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도?

“…….”

-나중에 후회하게 된대도 시간은 널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지 않을 거야.

그건 꼭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원래는 가족이 둘러앉아야 하는 식탁에 덩그러니 앉아서, 제집에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불편해 보이는 정장을 그대로 갖춰 입은 채로, 주말에도 연락조차 되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엄마가 늘 했을 생각들.

그 사실이 빚어낸 외로움을 알기에 나는 그녀를 혼자 남겨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엄마의 말이 맞았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내가 지게 될 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근데 저는요.

“서울로 가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

“이곳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가, 이지훈이, 강영수가….

한 번도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건 엄마와 나의 대화방식이기도 했다. 우린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침묵에 대고 마저 사과했다.

“죄송해요.”

빗소리 아래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서야 헤어졌다.

* * *

고등학교 배정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반 분위기가 종일 어수선했다. 선생들마저도 그러려니 이해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곳에서는 학교를 뺑뺑이 추첨 형식으로 돌린다고 했다. 모든 걸 운에 맡겨야 하며, 예상도 못 했던 고등학교에 배정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다.

유일하게 예외인 곳은 청포고등학교뿐이었다. 지금 내가 다니는 중학교부터 시작해 시내 모든 중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소수의 학생만이 지원서를 넣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같은 재단인 우리 중학교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담임은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부터 반에서 10등 안에 든 아이들을 모두 불러서 지원서를 쓰라고 했다. 끙끙 앓을 정도로 공부를 한 보람이 있는지, 이지훈은 아슬아슬하게 지원서를 받았다.

고등학교 배정 결과가 나오는 오늘은 청포고등학교에 진학할 학생들이 최종 발표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아침부터 앞자리에서 보는 내가 불안할 정도로 다리를 달달 떨었다.

곧 진학을 앞둔 아이들의 마음이라도 달래기 위해서인지 뭔지, 각 반의 담임들은 반 애들을 한 명씩 불렀다. 진학 상담을 하던 때처럼, 선생님들이 애들한테 가게 될 고등학교가 적힌 하얀 종이를 주며 이것저것 말을 붙이는 형식이었다. 긴장을 덜어주겠다며 역순으로 부르기까지 해서, 이미 모든 결과를 알게 된 뒷번호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앞번호가 섞여 앉아 있는 반은 한차례 풍랑을 지난 후였다.

“선욱이는 가서도 하던 대로만 혀. 외고도 갈 아가 오히려 눈을 너무 낮춘 거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외고 진학을 포기했다는 것에 아직까지도 나보다 더 아쉬워하고 있는 듯한 담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외고를 언급했다. 그래도 그가 나름 나를 아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건네받은 종이에 적힌 글자에서 시선을 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다음 차례인 이지훈을 마주쳤다.

“들어가.”

평소라면 뭐라도 장난을 쳤을 놈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긴장한 낯이었다. 3학년 성적이 내신에 크게 반영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2학기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내내 밤을 새웠던 놈을 떠올리니 발길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교무실 앞에 섰다. 아무래도 이지훈이 나오면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지훈은 5분쯤 지나서 나왔다. 하얀 종이를 교복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는 놈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아까 긴장한 낯과는 퍽 다르기도 했다.

혹시 떨어졌나? 청포고등학교에 이지훈의 지원서를 넣는 순간까지도 고민하던 담임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는 이지훈이 운동하느라 아예 손을 놓은 1, 2학년 성적 때문인지 3학년 성적이 꽤 높은 편에 속함에도 전체로만 봤을 때는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었다.

같은 학교에 간다면 좋았겠지만, 아니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지훈을 위로하기 위해 내가 느낀 아쉬움을 숨기고 표정을 정비했다. 별것 아니란 듯이 이지훈의 등을 툭 쳤다.

“야. 고등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서 뭘 하는지가 중요한 거야. 너 성적도 많이 올랐으니까 가서 지금처럼만 하면 잘할 수 있어.”

이지훈은 또 선생님이니 경찰관 아저씨니 하며 놀려대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이지훈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지훈은 말없이 내가 툭 친 어깨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같은 학교를 가는 건 안 중요하고?”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내 표정을 본 이지훈이 종이를 쓱 내밀었다.

“…어!”

하얀 종이에 적힌 고등학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탄성이 터졌다. 이지훈이 나를 끌어당겨 어깨동무한 것도 동시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만 해도 바짝 굳어 있던 얼굴이 이제는 흐물흐물 풀리다 못해 아주 장난기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선욱아, 형이랑 같은 학교 가니까 좋아? 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겼다. 아까는 바짝 쫄아 있었으면서.

“고등학교 가기 전에 1절만 하는 버릇부터 들여. 알겠냐?”

듣다 못한 내가 가슴팍으로 종이를 던지자마자 이지훈이 황급히 주워 들었다.

“야, 이거 이 순간부터 우리 집 가보야! 어딜 막 던져!”

손가락 한 마디인 종이를 들어 소중히 안는 척을 하는 놈을 뒤로한 채로 뒷문을 열었다. 반은 수선했다. 그러고 보니 담임이 가르치는 영어 과목 시간에 배정 결과를 듣게 되었을 뿐, 다음 수업까지 들어야 하교할 수 있었다.

나는 시간표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이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야, 다음 시간 특활이다.”

대답 없는 이지훈을 뒤돌아보려다 말고 멈칫했다. 앞문을 쾅 열고 나타난 강영수 때문이었다.

“너네, 너네 어디야?”

헐떡대며 들어온 강영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가 들고 있는 종이로 달려들었다. 입을 벌린 놈이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이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이지훈이 품에 안고 있어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은 듯했다. 3초 후, 스르르 종이를 놓은 놈이 중얼거렸다.

“씨발….”

나와 이지훈이 청포고등학교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모르던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눈으로 보니 새삼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뒤의 사물함에 기대 있던 이지훈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이 씨발놈이 자기 일 아니라고!”

강영수가 마구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지훈의 약 올림을 멈추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노랫소리만 한층 더 커졌다.

“아, 이지훈. 미쳤나 봐. 진짜.”

사물함 뒤에 서 있던 여자애 무리 중에서도 이지훈과 유독 친한 안희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옆의 여자애들을 비롯해서 멀리 있던 애들조차도 무슨 일이 있나 쳐다보다가 그게 이지훈인 걸 알고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뭔가 했는데 이지훈이네.’ 하는 듯한 표정들에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게 이지훈이면 놀랍지도 않다는 것처럼.

초반에만 해도 이지훈이 반에 들어오면 긴장하던 반 애들은 점점 이지훈을 편하게 대하더니 놈이 체육대회 때 체육복 바지를 반 걷어 올린 차림으로 응원상부터 시작해 계주, 2인 3각까지도 1등을 쓸어온 이후 대하는 태도가 아예 바뀌었다. 거기에는 남녀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는 이지훈의 영향도 있었다. 탈퇴 선언이니 뭐니 하며 이지훈과 껄끄러워졌던 애들조차도 요샌 가끔 이지훈과 축구를 하고 노는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지만, 그러게 만든 사람이 이지훈이라고 생각하면 놀랍지는 않았다. 그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이지훈의 능력이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아, 아니다. 만나지는 말아요~”

강영수가 펄펄 날뛸수록, 이지훈의 노랫소리 또한 끝을 모르고 높아졌다. 시계를 확인한 나는 말릴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발을 뗐다. 강영수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노래를 부르던 이지훈이 허공에 펄럭이듯 흔드는 종이 안의 글자를 보고서야 사태의 원인을 알았다. 강영수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까지도.

“너 연주고야?”

내 떨떠름한 물음에 강영수가 타깃을 바꿔 내게 달려들었다.

“그니까. 나 어떡하냐? 나 누구랑 등교해, 이제!”

“…….”

“존나 멀잖아, 심지어!”

강영수의 말이 맞긴 했다. 다른 고등학교들이 적어도 한 구역으로 묶일 만큼 모여 있는 것에 반해 강영수의 학교는 산골짜기에 위치했다. 같은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가긴 한대도,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와 함께 등교하긴 힘들 거였다.

덩달아 심란해진 내가 종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노랫소리가 우뚝 멎었다. 나를 지나쳐 간 이지훈이 옆에 걸려 있던 가방 안으로 책상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쓸어 모았다. 갈 때가 되었다는 것처럼 내게 말을 걸면서.

“야. 종 치겠다.”

강영수가 세모눈으로 이지훈을 흘겼다.

“지금 내가 혼자 놀게 생겼는데 특활 따위가 중요하냐?”

“어. 중요해. 매우 중요해.”

“…인생 헛살았다, 헛살았어.”

강영수가 시무룩하게 뒤돌았다. 나는 강영수가 앞문을 통해 퇴장하는 걸 흘깃대면서도 가방을 들었다. 종례가 없는 날이라 특활수업만 듣고 바로 하교하면 됐다. 특별활동 수업은 바로 위 영상시청실에서 이루어지니 지금 짐을 챙겨 가는 게 나을 거였다.

이지훈도 나처럼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지훈과 나 둘 다 영화 감상부에 속해 있었다.

“아.”

먼저 가방을 멘 채로 뒷문으로 걸어가던 이지훈이 멈칫했다. 막 뒷문으로 들어오던 반 애와 맞닥뜨린 탓이었다. 나는 이지훈의 등에 시선을 둔 채로 천천히 멈춰 섰다. 이지훈의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둘을 번갈아 보게 됐다.

이지훈과 정면에서 맞닥뜨린 유혜은은 급히 고개부터 떨어뜨렸다. 이지훈을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는 것처럼 몸을 비틀기도 했다. 물론 이지훈이 부른 탓에 소용이 없어졌지만.

“유혜은.”

이지훈이 아래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유혜은이 방금 떨어뜨린 필통을 대신 주운 이지훈이 받으라는 듯 내밀었다.

“너 이거 떨어뜨렸는데.”

유혜은은 잠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난 그 이유를 알았다. 방금 유혜은이 떨어뜨린 필통은 이지훈이 유혜은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게 된 이유는 이지훈이 어느 날 문구점에서 그 필통을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다음 날부터 유혜은이 그걸 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한창 둘이 붙어 다닐 때였다. 석 달째 짝을 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어느 날 장난을 치듯 유혜은에게 하던 말을 기억했다.

‘어떻게 우리만 계속 짝이지? 솔직히 말해. 너 보름달에 대고 빌었어, 안 빌었어.’

‘뭐래, 진짜!’

‘달님. 다음 달에도 지훈이랑 같이 앉게 해주세요 했어, 안 했어. 딱 말해. 오빠가 이해해준다.’

유혜은이 앉은 의자에 팔까지 건 채로 능글맞게 장난을 거는 이지훈에게 그만하라는 것처럼 손을 들어 보이던 빨개진 얼굴과 나 말고는 아무도 없던 교실에서 내게 뽑기함을 내밀며 울 것 같던 표정을 짓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이거… 지금부터는 네가 해줄 수 있어?’

나는 알고는 있었으나 그런 방식으로는 한 번도 주의를 기울여본 적 없던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었다. 유혜은은 부반장이었다. 자리 뽑기를 주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 고마워.”

지금도 유혜은은 꼭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걸 이지훈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지만.

이지훈은 그걸 정말 모르는 걸까.

나는 유혜은의 머리꼭지를 잠깐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내게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걸 보게 됐다. 유혜은과 달리 동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태연했다.

‘뭐야. 이제 네가 내 짝이야?’

‘몰랐음? 오늘 자리 바꾸는 날이잖아.’

‘그래? 몰랐네. 야. 근데 좆됐다. 우리 둘 다 목소리 커서 쌤들이 개싫어할 듯.’

유혜은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제 옆자리가 아닌 자신과 가장 먼 뒷자리로 떨어졌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옆자리에 앉게 된 안희연에게 장난을 걸던 것처럼. 나는 자리를 바꿨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지훈이 뒷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유혜은을 힐끔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지훈은 유혜은에게 왜 자리를 바꿨냐며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유혜은이 이전과 달리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고, 아예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데도.

“뭐 하냐?”

잠깐 상념에 빠졌을 뿐인데, 어느새 뒷문에는 이지훈만 남아 있었다. 안 오고 뭐 하냐는 것처럼 보는 놈을 확인한 나는 가방을 마저 닫았다. 강영수는 아직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지훈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눈짓하고는, 마치 잡아달라는 것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멀어지는 놈의 뒤를 쫓았다.

“야. 강영수.”

놈을 따라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등을 툭 치자마자 돌아보는 강영수에게 대고 말했다.

“거기 멀긴 해도, 시간 잘 잡으면 버스 같이 탈 수 있을걸. 잘하면 집에 올 때 마주칠 수도 있고. 네가 먼저 출발한다고 문자 주면 우리가 나중에 타면 되잖아.”

눈만 깜빡이던 강영수는 한 박자 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는 달려들었다. 선욱아! 역시 형은 너를 믿었다. 이지훈은 쓰레기라도 너는 쓰레기가 아니지. 15년의 우정 필요 없다. 나는 너와 앞으로 15년의 우정을 쌓을 거야. 저 개새끼 말고, 너랑. 너랑 나랑만. 온리 둘. 오직 우리 둘만. 유독 자신을 겨냥한 것처럼 뱉는 말을 듣고는 있었는지 뒷문에 기댄 채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중지를 쳐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야, 58분이야.”

알려주듯 말한 이지훈이 다가와 강영수의 머리를 툭 쳤다. 그래도 내 말이 위로되긴 했는지 강영수는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강영수가 반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영상시청실까지는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상시청실에는 오늘 보게 될 영화의 이름이 칠판에 하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제목이 익숙하다 했더니 1학년 시절 잠깐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가 좋아한다며 몇 번 언급했던 영화였다. 나는 칠판에 적힌 영화 제목에 시선을 꽤 오래 뒀다. 옆에 서 있던 이지훈이 물었다. 봤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신에 들어가는 성적까지 모두 산출된 시점이니 이제는 그 어떤 시험도 칠 필요가 없었다. 고등학교 배정까지 끝난 마당에 성적표에 점수조차 들어가지 않는 특별활동에 열의를 보이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아이들은 책을 아래에 댄 채로 잠들 준비를 하거나 핸드폰으로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앞에 앉아 영화를 잘 보고 있나 감시할 선생님조차 자리를 비운 걸 보니 그도 알게 모르게 이 유보된 자유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 같았다. 듬성듬성 앉은 아이들을 둘러본 이지훈은 뒷자리에 가 앉았다. 제 옆의 의자를 빼는 놈이 내 자리를 맡아둔 게 뻔해서 나도 걸음을 옮겼다. 수업 종이 울린 것과 동시에, 선생님을 대신해 영화를 틀 임무를 맡게 된 듯한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재생 바를 눌렀다.

텔레비전 화면이 까맣게 물들더니, 이내 낯선 외국어가 쏟아졌다. 아래에 자막이 떴다.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한 프레임은 죄다 낯설었다. 한참을 그 의미 모를 시퀀스의 주인공이라도 알아내려 시선을 두어야 할 정도로.

몰랐는데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영화를 본다고 커튼까지 쳐 두어 교실 안이 어두운 데다가, 간간이 울리는 빗소리까지 더해져 잠들기 좋은 분위기였다. 가방 안에 우산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수다를 떨던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잦아든 교실은 조용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난 뒤부터는 연기하는 배우들의 목소리만 울렸다. 집중력을 깬 건 불쑥 말을 건 이지훈이었다.

“야.”

이지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나한테 말을 건 게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같은 학교 가서 다행이다.”

주어조차 명확하지 않은 발언은 뜬금없었다. 아까 교무실 앞에서 웃으며 내 어깨를 껴안긴 했어도, 한참 전에 지난 줄 알았던 이야기를 또 한 번 꺼내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무뚝뚝하게 물었지만 궁금하긴 했다. 이지훈이 원래 이런 걸 굳이 여러 번 말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갑자기 영화를 보다가 뜬금없이. 영화가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지훈은 대답 대신 책상 위로 드러누웠다. 한 팔을 책상에 늘어뜨리고는 그 위로 얼굴을 기댄 놈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파란색 체육복이 이지훈의 볼에 닿아 있었다. 조금만 시선을 올리면 체육복 상의에 새겨진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지선욱.

아… 맞다. 체육복 빌려줬었지. 까먹고 있었다. 이지훈이나 강영수나 심심할 때마다 내 체육복을 빌려 가는 통에 이젠 내 사물함에 있으면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대수롭잖게 시선을 거두려다 말고 멈칫했다.

내가 빌려준 체육복이니 당연한 건데도, 순간 내 이름이 새겨진 체육복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지훈이 끝없이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작년 이맘때 보았던 파란 모자의 남자애가 떠올랐다. 평생 말 한 번 섞어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야구부 남자애는 어느덧 내 체육복을 서슴없이 빌리고 그 위에 얼굴까지 파묻을 정도로 내 인생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속도와 깊이로.

“…….”

“…….”

이지훈도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이렇게 말없이 서로를 오래 쳐다본 건 또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고개를 돌리려던 행위는 입술을 달싹대는 이지훈으로 인해 멈췄다. 영화의 OST가 크게 재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마를 맞댄 채로 춤을 추는 연인의 위로 흐르는 느린 재즈 선율 사이로 이지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냥.”

“…….”

“다른 애한테 체육복 빌리기도 싫고.”

이지훈은 여전히 내 체육복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었다. 말하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촌스러운 파란색 면에 이지훈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너랑 다른 학교 됐으면 좀 좆같았을 것 같아.”

이지훈이 그런 말을 나한테 직접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특별하다는 것처럼 티를 낸 건. 사실 걔뿐만이 아니라 원래 남자애들끼리는 그런 말을 안 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하는 장면을 들켰다면 게이냐며 놀림을 당할지도 몰랐다. 가끔 강영수가 이런 말을 하긴 했어도, 걔는 그 순간마다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장난을 치듯 웃으면서 말하는 놈이기에 보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장난인 걸 알고 따라 웃었다.

근데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이지훈은 달고 사는 웃음조차 한 번 짓지 않았고, 그 사실이 나를 당황케 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던져진 직구에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얼얼했고 숨이 막혔다. 그건 내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여태까지 남들과 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숨을 쉬고 살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불편한 감정. 근데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누군가가 싫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감정을 자아낸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어지는 기묘한 느낌. 이지훈이라는 존재가 나조차 모르던 세계의 문을 열어준 기분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 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낸 이지훈의 얼굴만 뚫어질 듯 쳐다봤다. 마치 아까 영화에 집중하던 것처럼, 내게 그런 말을 뱉고 있는 이지훈에게 집중했다. 눈을 맞추고 있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누구 하나 눈을 떼는 순간 무언가가 크게 바뀔 것처럼. 침묵 또한 끝을 모르고 길어졌다. 영화가 후반을 향해 가는데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말은 없었다. 먼저 입을 뗀 건 이지훈이었다.

“지선욱.”

책상에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로 이지훈이 손만 뻗었다. 뻣뻣이 굳은 얼굴로 다가온 손이 내 볼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곧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둔 이지훈이 조용히 물었다. 영화를 보던 애들은 듣지 못하고, 가까이 앉은 나조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질량의 속삭임.

“행복해?”

들은 즉시 굳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행복하세요?’

나는 태어나서 그 질문을 딱 한 사람에게만 해 봤다. 엄마한테였다. 엄마는 내가 그 질문을 한 순간에야 흐느꼈다. 살면서 그런 질문을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엄마는 한참 울고 나서도 평소의 차분함을 반마저도 회복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형편없이 떨면서도 엄마는 이 말만은 내게 전해야 하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선욱아.’

엄마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엄마의 흩어지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숨소리를 모으는 이유는 이어질 말이 그녀의 인생을 좌우한 어떠한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한순간을 사랑해버린 죄로, 영원히 불행할 필요는 없단다.’

왜 하필 이 순간 그 말이 떠올랐을까.

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말을 이 순간에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난 그 강렬한 예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못해서 숨만 간신히 쉬었다. 내가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도 세상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책상을, 사물함을, 커튼을 얼룩덜룩 물들이는 빛들은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싼 표피 아래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넌?”

난 내가 대답을 했다는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건 사실 대답을 한 게 아니라, 대답을 미룬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 사실을 지적할 줄 알았던 이지훈은 그러나 웃기만 했다.

“뭐….”

잠깐 말을 끌던 이지훈이 손을 올려 눈썹뼈를 어색하게 긁었다. 다음엔 대답을 회피하듯이 눈을 꾹 감기도 했다. 난 이지훈이 할 수 있는 반응은 그게 끝인 줄 알았다. 사실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왜냐면 그래야만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이지훈은 다시 눈을 떴다. 약간의 졸음기가 담긴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것 같은데?”

이지훈이 날 느리게 훑었다. 마치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를 꼭 확인이라도 하듯이. 이윽고 이지훈이 느리게, 그러나 환하게 웃었다. 확신에 가득 찬 미소였다.

“앞으로는 더 그럴 것 같고.”

나를 움직일 수 없게 꽁꽁 못 박아두었던 시선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야, 나 잔다. 영화 끝나면 깨워. 웅얼대며 말을 마친 이지훈이 모은 팔 사이로 머리를 깊이 파묻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지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걔만 보고 있었다. 걔가 정말 곧 잠들었고,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건 내게 한순간이 아니었다. 꼭 영원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겨우겨우 숨을 쉬면서도 같은 반 친구이자 당장 이 수업이 끝나면 같이 집에 갈 남자애의 뒷모습을 외웠다. 잠든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걔가 나처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고는 한참 늦은 질문을 했다.

엄마. 근데 헷갈려요.

혹시나 이게 사랑이라면요. 그리고 이게 날 평생 불행하게 한다면요.

그래도 내가 얘를 탓할 수 있을까요? 왜냐면…

‘그걸 모르겠으면, 네 옆에 평생 있어 줬으면 좋겠는 사람한테 물어봐.’

‘…….’

‘행복하냐고.’

그 애가 나한테 행복이 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난 평생 내가 불행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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