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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밖이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방문을 열자마자 반대편 방에서 나오는 중이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무뚝뚝한 얼굴이 이상할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순간마저도 굳게 다물려 있는 입이 아니었다면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봤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거실에 있는 뻐꾸기 모양의 시계가 지금이 겨우 새벽 2시임을 알리고 있었음에도.
“무슨 일이라도….”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한 박자 늦게 시선이 멎은 마당에는, 지나가다 몇 번 얼굴을 익힌 마을 사람들 몇 명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마치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를 말해줘도 되나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르신.”
마당에 있던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부른 것과 동시에 시선이 끊겼다. 할아버지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집에 있어라.”
그가 남긴 말은 그게 끝이었다. 할아버지가 마당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주변을 둘러쌌다.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선 한 아주머니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이름 모를 아저씨 또한 표정이 비통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사람들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울었거나, 혹은 울 준비를 하는 듯이.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방금 보았던 할아버지의 옷차림을 비롯해 마당에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까만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다 같이 장례식이라도 참석하려는 것처럼.
녹슨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오신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앉은뱅이책상을 밀어두고 몸부터 벌떡 일으켰다. 새벽에 마주친 풍경 때문인지 공부에 집중도 잘 못 하고 있던 터라 차라리 반가웠다.
“할아버지?”
그러나 마당에 나가자마자 마주친 풍경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쭈뼛쭈뼛 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닌, 방학이 시작하고 처음 본 학교 친구였으며.
“너… 울어?”
강영수가 그 물음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끄윽, 할아버지가 아직 장례식장에 계시니까, 너도, 끅, 밥 못 먹었을 거라고, 흐윽, 그래서, 이거.”
“…알았어. 이해했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강영수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진이 빠져 더 말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얼룩덜룩할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강영수가 울면서도 반찬 통에서 꺼내 상 위로 이것저것 덜어놓은 음식들을 먹어야 했다.
강영수의 어머니가 집에 혼자 있을 날 위해 따로 챙겨주신 반찬이라고 했다. 그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먹었다. 내가 식사하는 동안 강영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이 마을까지 버스로 겨우 20분 걸리는 거리를 오는 내내 쉴 새 없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대던 평소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새벽에 마당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방금 강영수의 입에서 나온 ‘장례식장’이라는 단어 또한.
밤새 누군가 죽었다. 할아버지도, 강영수도 아는 마을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곳으로 내려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을을 오며 가며 마주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숙연해졌다. 한참 말을 고르다 강영수와 눈을 마주했다.
“…너는 왜 안 갔어?”
강영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망설이다 조그맣게 덧붙였다.
“장례식장.”
“…….”
“너도 아는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나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니 할아버지가 일부러 장례식장에 데려가지 않은 거겠지만, 이렇게 울면서도 그곳이 아닌 내 옆에 있는 강영수를 보니 궁금했다. 강영수가 내 물음을 소화하려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겨우 한 번 그랬을 뿐인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순간 심장이 철렁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말하기 힘든 거면 말 안 해도 돼. 나는 그냥, 궁금해서. 미안. 내가 말 잘못 했어. 미안해. 울지 마.”
내가 당황해서 손을 내젓고, 휴지를 가져와서 건네주든 말든 강영수는 계속 울었다. 울어도 된다는 큐사인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 놓고 우는 놈은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신경한 질문으로 놈을 찌른 기분이었다. 둥근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릴 때마다 혼나는 기분이었다.
강영수는 10분이 더 지나고서야 가까스로 진정했다. 티슈를 가져다 댄 눈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강영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가랬어… 내가 거기서 이렇게 울면, 끄윽, 이지훈이 더 힘들 거라고. 가서 좀 진정하고 오라고….”
이지훈? 갑자기 등장한 이름은 생뚱맞았다. 내가 멈칫한 것을 보지 못한 강영수가 와르르 울음을 터뜨렸다.
“어떡해… 나 벌써 이모 보고 싶어….”
입을 벌리고 또 엉엉 울기 시작하는 그 애를 보면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금 들은 정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강영수가 이모라고 부르는, 이지훈과 관련된 이. 그 사람이 이지훈의 엄마임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 번 마주친 적조차 없던 누군가의 죽음인데도, 그게 몇 번 말을 나눠본 남자애의 가족이라는 사실만으로 심장이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 *
개학식이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호출당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2학년 담임 선생님과 달리 학생들의 성적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들은 더했다. 2학년일 때부터 틈만 나면 미리부터 고등학생처럼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두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비록 그 강도는 다를지라도 한국의 입시환경 아래에 있는 한 이곳도 그런 압박으로부터 아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반에서 가장 성적이 높다는 이유로 투표조차 없이 나와 어떤 여자애에게 반장과 부반장을 시키겠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나만큼이나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애를 흘끔 본 나는 담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욱이 너는 특히 서울 그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었다믄서.”
처음 듣는 소식이었는지, 옆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내리깔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거, 잘하면 우리 반에서 전교 1등 나오겄네.”
함박웃음을 지으며, 담임이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우리 반장, 부반장. 기대가 크다잉.”
어색하기 짝이 없는 면담 시간이 끝나고 반으로 돌아왔다. 담임이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라며 건넨 유인물을 교탁 위로 내려놓고는 반을 훑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다. 강영수랑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좀 나았으려나. 쓸모없는 생각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그래도 담임이 아침부터 내가 반장을 맡을 거라며 제멋대로 선포한 게 효과는 있는 모양인지, 교탁 앞에 선 것만으로도 시선이 얼추 몰렸다. 나는 반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집중 좀 해줘. 담임 선생님이 전달하라고 하신 게 있어서.”
내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반이 조용해졌다. 어차피 관심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은 많아 봐야 1분 남짓일 것이다. 수도 없이 해보았던 반장 생활이 남긴 교훈을 되새기며 나는 받아온 유인물 한 장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거 진로 상담서인데, 고등학교 진학 상담할 때 참고할 거니까 부모님이랑도 상담해서 적으라고 하셨어. 이번 주 금요일까지 내야 하니까 참고하고. 분단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가져간 뒤에 뒤로 넘겨주면 될 것 같아.”
고등학교 진학과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잠깐 조용해졌던 아이들은 이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래도 분단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애들이 군말 없이 나와서 종이를 받아 가져가는 걸 보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유혜은에게 된 것 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종이를 보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앞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은 낯선 아이들로 가득한 이 반 안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러나 그 애를 처음 본 것처럼 응시해야만 했다. 야구복을 입지 않은 모습은 정말 처음 보는 거기도 했고.
“…….”
저렇게 불량해 보이는 놈의 모습 또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눈이 마주쳤으나, 이지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눈을 돌렸다. 한참 늦은 시각에 등교했으면서도 앞문으로 등장한 놈의 뻔뻔함은 뒷자리로 휘적휘적 걸어갈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어, 지훈이!”
뒷자리에 몰려 있던 애들이 이지훈을 반기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진로 상담서를 챙긴 것과는 반대로 종이비행기로 접기부터 한 이들이었다. 이지훈이 그중 한 명의 어깨를 툭 치며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는 걸 보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을 지리에 좀 익숙해진 뒤로 할아버지는 종종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주로 마을회관에 무언가를 가져다주거나 혹은 말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날은 마을회관에서 단체 김장을 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액젓 두 통을 가져다주는 심부름 중이었다.
‘갸가 지금 속이 속이겠어유. 안 그래도 합숙 훈련 안 간다고, 지 어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옆에 있겠다고 했다가 소 끌려가듯이 간 건디. 하필 그때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 가지구.’
‘야구부 훈련이 어디 그게 맘대로 뎌? 사정을 봐주는 놈들도 아니구.’
‘에휴, 그날 장례식장서 애 보는데 내 마음이 다 걸레짝이 되는 것 같구 막….’
‘거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딨겄어. 다 큰 것 같아도, 그렇게 졸도할 정도로 우는 게 영락없는 애드만. 에휴, 애도 아직 어린디, 너무 빨리 갔어야.’
‘그런 말을 이제 와서 해 봤자 뭐 혀유. 이미 간 사람 두고. 그리고 가고 싶어서 갔나. 갑자기 쓰러져서 한참을 앓다 간 건디.’
‘안타까워서 하는 말 아녀. 난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어. 이렇게 있다 보믄 지훈이 어매가 당장이라도 마당에 들어서면서 형님 부를 것 같고 그려.’
마을회관 대문 앞에 서서 엿들은 말소리는 심부름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귓가에 머물렀다.
‘그만뒀다고 하드만.’
‘워메. 야구를?’
‘그려. 이 반장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도 않고, 안 할 거라고 못 박았댜.’
방학이 끝났다. 이지훈은 야구부를 그만뒀다.
제대로 안 적조차 없었지만, 내가 알던 이지훈의 모습 또한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 * *
이지훈이 그렇다며… 이지훈 걔가… 지훈이가…
같은 반인데도 이지훈의 소식은 내가 직접 본 것보다는 전해 듣는 것이 더 많았다. 쉬는 시간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데다가 하교하는 길에서도 당최 찾아볼 수 없는 놈의 소식은 학교를 꽤나 뜨겁게 달궜다.
그게 이지훈이 야구를 관둬서인지, 양아치 같은 애들과 어울리기 시작해서인지, 아니면 머리를 기르고 나서 한층 더 양아치스러워진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를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지훈이 어떤 형이랑 친하네, 그래서 싸움에도 불려 다니네, 어떤 누나랑 사귀네.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소문은 그러나 한곳으로 모였다.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이지훈은 야구선수라는 기차에서 내렸음에도, 옆에 정차된 기차들을 무시하고는 그냥 철도 길만 걸었다. 의도된 탈선이었다.
“그냥 내버려 둬.”
강영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늘 웃는 것만 봐서 걔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놈답지 않게 짜증을 내며 하는 말은 어딘가 가시가 있었다. 이미 수없이 겪어 봐서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슬쩍 본 강영수가 뒤늦게 표정을 관리하며, 보고 있던 만화책을 넘겼다.
“그 새끼 지금 말린다고 해서 들을 상태도 아니고.”
“…….”
“자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걸 거래, 우리 엄마가. 이모….”
멈칫한 강영수가 코를 짧게 훌쩍였다.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에게조차 완전히 잊히지 못한 사람을 이지훈이 잊을 수 있겠냐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처럼.
“어쨌든, 야구도 그만두고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걸. 아저씨도 계시고 하니까. 조금만 놔두면 금방 돌아올 거야.”
강영수와 이지훈은 태어나서부터 친구였다고 했다. 둘 다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쭉 함께 자랐다. 이지훈을 제일 오래 보았으며, 가장 잘 알고 있을 놈에게서 나온 답이니 믿을 만했다. 오지랖이 태평양에 가까워 보이는 놈이 저러는 건 이미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할 거였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 이상으로 말할 처지도 아니긴 했다. 따지자면 난 이지훈과는 아침에 같은 버스를 타는 것 말고는 그렇다 할 만한 연결고리조차 없었다. 그마저도 지각이 잦아진 이지훈 때문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가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다 지각생들 사이에 있는 이지훈을 발견하곤 했다. 맞추기라도 한 듯 티셔츠를 교복 바깥으로 빼입은 아이들과 함께 벌을 받는 이지훈에겐 꼭 한 번 더 시선이 머물렀다. 야구부에서 기합을 많이 받아 봐서 이 정도는 시시하다는 걸까. 학생부장 선생님에게 못 하겠다고 개기거나 무작정 뻗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묵묵히 속도를 유지하며 운동장을 도는 이지훈에게서 계획적인 탈선의 향기가 났다.
그래서일까. 난 그 광경이 거슬렸다. 걔가 그러는 게, 꼭 알아달라는 것 같아서.
“너 벌점 위험하다던데. 이대로면 학생부에 영향 갈 수도 있대.”
버스정류장, 하품을 쩍쩍하며 나타난 이지훈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 담임이 시킨 심부름을 하러 교무실에 갔다가 귀동냥으로 들은 소식이었다. 선생들끼리 교무실에서나 하는 소리이니 이지훈은 당연히 모르고 있을 정보였다. 이지훈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이마부터 팍 찡그렸다. 그 와중에도 날 보지는 않았다. 게임 중인지 혹은 누군가와 문자를 하는지 자판을 눌러대는 손이 꽤 빨랐다.
“근데?”
짧은 답변은 무성의했다. 그러나 네가 뭔데 그런 걸 간섭하냐는 듯한 냉소의 어조가 느껴지기에는 충분한 문장이기도 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입을 다물고서야 이지훈이 슬쩍 눈을 들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놈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뒀다. 눈에 보이는 싸늘한 태도에 더 말하려던 마음조차 사그라들었다.
묻지 않은 버스 시간표마저 일러주던 이지훈과 지금의 이지훈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곱씹었다.
평소보다 2분 늦게 도착해서 이지훈에게 말을 걸 시간을 벌어준 버스가 다가오는 걸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바라는 것처럼 신경을 꺼야 할 때였다.
그날도 이지훈은 운동장을 돌았다. 이번엔 두발 규정을 위반해서였다. 오늘따라 유독 못생겨 보인다 했더니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서였나. 꼭 양아치 같은 머리였다. 노란 머리가 운동장을 동그랗게 두 바퀴 도는 것까지 본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고는 수학 문제집으로 시선을 내렸다.
* * *
교복을 맞출 때 할아버지를 따라오며 대충 번화가의 지리를 기억해둔 덕분인지, 번화가 입구의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어렵지 않게 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참고서를 구매해야 했다.
“두 개 해서 만 구천 원이요.”
서점 직원의 말에 지갑을 꺼내다 말고 멈칫했다. 참고서를 구매할 때마다 늘 쓰던 부모님의 카드를 써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집에 내려온 지는 어느덧 석 달이었으나 부모님으로부터는 한 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한 달 넘게 마주치지 못했던 일이 빈번했던 걸 떠올려 보면 딱히 의식할 만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떨어져서 살고 있으니 그 사실이 괜히 더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날 데리고 온 거긴 했지만, 가끔은 버림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마지막에 스쳤던 아빠의 얼굴을 생각하면 어쩌면 아빠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준 카드를 써도 되는 걸까. 나는 결국 카드 대신 지갑 안에 있던 현금을 꺼내 결제했다.
나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가끔 집의 물건들을 고칠 때 쓰던 할아버지의 목장갑이 닳아 있던 게 생각나서였다. 수세미와 주방 세제도 함께 샀다. 3월이지만 아직은 조금 추워서인지 시내를 조금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코가 얼얼했다. 교복 마이 위로 입고 있던 코트를 한 번 더 여미고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할아버지가 일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집에 도착해야만 했다. 혹시 날 찾으실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정거장까지의 거리를 조금 남겨둔 채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
“…….”
눈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이지훈은 유독 튀었다. 교복은 그저 구색 맞추기용으로 갖춘 듯 하나씩만 선택해 걸치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이지훈만이 그나마 상의와 하의까지 가장 잘 갖추어 입고 있는 사람이어서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걔가 그렇게 교복을 입은 채로 뻔뻔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일지도. 며칠 전 쓰레기통을 비우러 소각장에 가던 중 그 앞에서 이지훈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와이셔츠 위에 춘추복 조끼만 입은 차림의 이지훈이 옆을 지나친 순간 담배 냄새가 훅 코를 스쳤던 것도. 나를 보고서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이 옆을 지나치던 이지훈은 이번에는 답지 않게 내 눈을 피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키고 만 사람처럼. 이지훈의 얼굴에 아주 짧게 스친 감정이 부끄러움임을 확신한 순간에 발이 묶였다.
“…….”
나는 시선을 이지훈에게서 돌려 골목을 메우듯 서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당연한 거지만, 아는 얼굴이라고는 없었다. 골목에 서 있는 사람 중 이지훈은 가장 어려 보였다. 입에 담배를 물고 서로의 머리를 거리낌 없이 후려치는 사람들의 팔은 문신으로 얼룩덜룩했다. 운동장을 열 바퀴 넘게 뺑뺑이 돌게 만들었던 이지훈의 노란 머리는 이들과 비교하면 수준부터가 달랐다. 덜컥 겁부터 났다.
변호사인 아빠와 검사인 엄마 사이에서 크다 보면 법정 견학쯤은 쉽게 하게 된다. 언젠가 견학차 참여했던 소년보호재판에서 이지훈처럼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가해자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읽던 사과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던 어구가 불현듯 떠올랐다.
‘질이 나쁜 친구를 만나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지금은 이지훈이 골목의 끝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떼어도 큰길로 나올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고, 골목 안의 사람과 시시껄렁한 말 몇 마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몰랐다. 그러나 저곳에 속해 있게 된다면 점점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중에는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악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점점 숨게 되어 있으니까.
‘이지훈 요즘 그 무리랑 논다며. 박철승 형 패거리들.’
‘와, 양형 해준다는 소문 진짜였음?’
‘빽 개오지네. 근데 너무 양아치 무리 아니냐, 거기는. 소문도 더럽고.’
언젠가 이지훈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만으로도 귓속에 감겨들었던 말소리들이 맞닥뜨린 풍경과 이질감 없이 맞물렸다. 골목의 가장 안쪽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너 여기서 뭐 해.”
원래 가려던 정거장 쪽이 아닌,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망이라도 보듯 골목에서도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이지훈의 앞에 서는 건 쉬웠다. 이지훈은 다가오는 나를 보며 굳었다. 내가 당연히 지나칠 거라 생각했는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도 잠깐, 이지훈이 재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며칠 전 아침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놈이 위협하듯 물었다.
“니 나 알아?”
말을 끝낸 이지훈이 골목 안쪽을 빠르게 곁눈질하는 걸 보고서야 나는 얘가 지금 이 골목 안에서 신경 쓰는 인물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목 안을 시끄럽게 울리던 목소리들이 내가 이지훈 앞에 선 순간 알게 모르게 한풀 꺾였다는 것도. 시선을 이지훈에게만 두고 있는데도, 우리에게 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라도 골목 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이지훈만을 시야에 담았다. 어차피 내가 이 골목에서 건져내고 싶은 건 이지훈뿐이었으니까. 이지훈은 그런 나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워 보였다.
“뭔데 갑자기 시비야. 가던 길이나 가, 새꺄.”
이지훈이 나를 골목 바깥으로 밀쳤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몸짓이 꽤 컸던 탓에, 이지훈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마저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며 몸에 힘을 더 줬다. 뭔가 이 순간 버티지 않으면, 영영 이지훈을 이 골목 바깥으로 꺼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버티고 서서는 도리어 이지훈의 팔을 밀쳐냈다. 놀란 듯 바라보는 놈에게 단호히 대답을 돌려주면서.
“알아.”
“…….”
“나 너 안다고. 우리 반이잖아.”
이지훈의 흔들리는 눈이 내게로 고정됐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이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가자.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아까처럼 골목 안을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는 이지훈의 팔을 끄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 가면 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지훈을 놓은 건 타의에 의한 일이었다. 나는 내 손을 정확히 치고는 아래로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다방. 까만색 라이터에 박힌 글자를 바라보다가 그 물건이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뭐냐?”
깊은 골목 안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보필하는 것처럼 서 있던 체구가 비슷한 남자들이 물러섰다. 옆의 벽에 기대서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어? 쟈 전학생이자너?”
날 아는 것처럼 말하며 손가락질하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익숙했다.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언젠가 복도에서 바닥에 침을 뱉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려냈다.
“전학생?”
“왜. 유미 깠다고 한 애.”
“얼레.”
“다시 봐도 잘생기긴 했다야. 너 요새도 그렇게 콧대 높게 살고 그르냐?”
옆에서 묻는 남자에게 낄낄대며 정보를 전하는 목소리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웃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둘을 제외한 골목 안의 모두가 입을 다문 채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중 거구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남자가 방금까지 낄낄대던 여자와 남자에게로 서둘러 다가섰다.
“야, 느그들은 어째 그리 눈치가 없냐. 입 좀 싸물어.”
둘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합 다무는 순간이었다. 골목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거구와 눈이 마주쳤다.
“니 이리 와 봐라.”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날 향해 손만 까딱이는 행위가 거만했다.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내가 제 앞으로 걸어올 거라고 믿는 것처럼. 나는 그의 손가락마다 자리한 반지들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좀 얼어 버린 것도 있었다. 도장 밖에서 누군가와 싸울 일이 생기리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거기다가 저런 덩치와는 싸움이라는 말조차 사치였다. 처맞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지훈을 홀로 골목에 두고 갈 마음이 들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철승이 형, 아니에요.”
이지훈이 앞으로 나선 건 의외였다.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선 이지훈 때문에 골목 안 모두의 시선이 놈에게로 쏠렸다.
“얘, 그냥,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부만 하는 찐따 새끼예요. 뭣도 모르고, 그냥.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말 건 거예요.”
이지훈은 실실 웃고 있었다.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미는 놈의 손을 보고서야 놈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중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지훈이 등 뒤에 있는 나를 한 번 더 밀었다. 야, 빨리 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니 지금 저거 감싸냐?”
나에게도 느껴지는 걸 거구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헛웃음 친 박철승이 기어코 눈치를 주는데도 이지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날 골목 밖으로 밀어내려는 손마저 그대로였다.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몸짓이었다.
“형. 이런 애 건드리면 피곤해져요. 그냥 피우던 담배 계속 피우시면 제가 쫓아낼게요. 얼마 걸리지도 않아요. 진짜, 금방….”
이지훈이 뭐라 계속 말을 거는데도, 박철승은 계속해서 걸어왔다. 가까워질수록 심술궂고 험한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그 얼굴과 둔탁한 몸짓을 마주하고 있으니 왜 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도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어떻게 이 내로라하는 양아치들 사이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는지도.
“그래서, 나는, 그냥 담배나 피우고 빠져 있으라고?”
“…형. 그게 아니고요.”
“뭐가 아녀, 새끼야. 니 요새 준희가 좀 예뻐해 준다고 아주 겁대가리를, 단단히 상실혔네?”
그가 말을 멈출 때마다, 두꺼운 손이 하늘을 붕붕 날았다. 장난삼아 툭툭 치는 것 같은데도 갈수록 힘을 싣는 박철승 때문에 타격음이 컸다. 소리만 큰 게 아닌지 이지훈이 뒤로 밀려나고, 고개가 이쪽저쪽으로 홱홱 돌아갔다. 이지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잠깐 걔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스친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마치 운동장에서 벌을 받을 때 가끔 보이던 반항기 어린 표정처럼. 그러나 이지훈은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 부러 실실대고 웃기도 했다.
“…형 또 이러신다. 이런다고 맷집 느는 것도 아닌데요. 제가 맞아 봐서 알아요.”
이지훈은 맞는 와중에도 변죽 좋게 말을 붙였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이는데도 피하기는커녕 고집스레 내 앞을 막고 있었다. 그 노력 덕분인지 나는 어느새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아!”
순간, 이지훈이 욕을 뱉으며 볼을 감싸 쥐었다. 잠깐 그대로 멈춰 있던 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나부터 확인했다. 얼른 안 꺼지고 뭐 하냐는 눈빛을 쏘기 위해서였다. 이지훈의 뒤로 손을 들어 올리는 거구가 보였다.
나는 이 난리 중에도 쥐고 있던 책 봉투부터 놨다.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모두가 볼 수 있게끔 허공에 들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치켜든 핸드폰의 자판 속 숫자 세 개를 눌렀다. 평온하다면 평온한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내 손으로 누를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번호였다.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들키지 않게 꼭 힘을 주며, 핸드폰 음량을 최대로 키웠다.
“거기 경찰서 맞죠?”
드디어 타격음이 멎었다. 박철승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지훈의 시선도 내게로 돌아왔다. 미쳤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놈을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남면사거리 정거장 앞인데요.”
“…하, 별 웃기는 새끼를 다 보네. 아주 쌩쇼를-”
“학교폭력 신고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폭행하는 현장을 목격해서요. 지금 바로 신고하려고요.”
골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한계치까지 올려놓은 핸드폰 음량 덕분에 건너편에서 뭐라 대답하는 경찰관 아저씨의 목소리가 웅웅대고 흘렀다. 나는 꼬박꼬박 대꾸했다.
“가해자요?”
나는 이지훈의 한껏 붉어진 뺨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무섭게 굳은 험상궂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태안공고 박철승이요.”
따지자면 도박이었다. 박철승의 소속으로 댄 학교 이름조차 언젠가 한 번 스쳐 가듯 들어보았던 근처 공업고등학교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꿰뚫는 어떠한 본능을 믿기로 했다. 확신은 할 수 없대도 가능성을 걸어볼 가치는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돌았나!”
순식간에 골목 안이 분주해졌다. 당장이라도 내 핸드폰을 뺏을 기세로 다가오려는 친구들을 만류한 건 박철승이었다. 손을 뻗어 더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부터 취하는 와중에도, 놈은 내 얼굴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니 재밌네?”
입가의 근육까지 떨어가며 동요하는 티를 낸 것치고는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마치 내가 지금 경찰관과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박철승은 그제야 내가 장난을 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 지능인 걸 감사해야 할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찰서에 장난 전화를 걸지 않는다. 나는 박철승이 그 사실을 명백히 알고 넘어갈 수 있도록, 언젠가 들었던 학교폭력 세미나에서 강사가 반복해서 알리던 내용을 떠올렸다.
신고는 신속하게, 내용은 정확하게 전달해야 피해자가 즉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4시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의 볼을 15번 정도 가격했고, 저를 비롯한 피해자가 골목을 나가지 못하게 협박했습니다. 저희는 재항중학교 삼 학년 학생이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가해자들과 한 골목 안에 있으니 얼른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신고하길 꺼리는 이유는 또 마주치게 될지도 모를 가해자들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꼭 학교란 공간에서만 폭력이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게는 학교와 크게는 사회의 노력까지도 필요하다고, 강사가 말했었다.
“태안공고와 재항중학교 교무실로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굳어버린 얼굴을 보며 나는 도박에 성공했음을 알았다. 그러니 이지훈이 처맞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할 일 또한 더는 없으리라는 것도.
‘철승아. 가자. 너 한 번 더 걸리면 진짜 위험하다고 했어, 저번에.’
가해자보다 더 겁을 집어먹은 그의 무리가 박철승을 채근했다. 경찰관으로부터 출동하겠다는 말까지 듣고 핸드폰을 내렸을 때는, 이미 골목 안이 텅 빈 후였다.
“…….”
“…….”
상황이 놀라우리만큼 빨리 정리됐는데도, 나조차도 아직은 방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떨떨했다.
“학생이 신고했어?”
뒤늦게 도착한 경찰관 아저씨는 내가 혹시 장난 전화라도 한 걸까 봐 의심하는 낯으로 이것저것을 물었다. 나는 방금 녹음한 파일까지도 들려주었다. 가만히 서 있는 이지훈을 대신해 나와 이지훈의 신상까지 읊었다. 골목 안쪽에서 박철승과 함께 서 있었던 몇 명의 인상착의를 말하자마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메모하던 수첩을 덮었다. 그러고는 우리 보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좀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한 그가 골목을 빠져나가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지훈이 뺨을 맞은 시간이 차라리 더 길었을 것이다.
이런데도 사회는 학교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걸 제안하는 걸까. 나였다면 절대 피해자 둘을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당장 도망친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일단 최대한 빨리 이 골목을 벗어나 집으로 가야 하는 건 맞았다. 도망친 놈들이 다시 이 골목에 나타날 확률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판단을 마친 나는 내가 경찰관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물러나 있던 이지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가자. 그 사람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이지훈은 듣지 못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박철승에게 맞은 흔적이 남은 놈의 볼을 보며 발을 뗐다.
“가자ㄱ….”
말이 뚝 끊겼다. 나는 방금 이지훈에게서 밀쳐져 허공에 붕 뜬 팔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이지훈은 날 노려보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을 보고서야 나는 이지훈이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볼을 그렇게 처맞을 때조차 실실 웃던 얼굴이 사납게 굳어진 채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니 나 알아?”
아까와 같은 질문인데도, 퍽 다른 태도였다. 아까만 해도 날 골목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쓰던 놈은 이젠 날 벽으로 가두며 고함치듯 물었다. 마치 쌓아둔 것이 한 번에 터진 듯한 표정이었다.
“씨발. 니가 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이 지랄이야! 내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
“애초에 니가 못 본 척하고 그대로만 지나갔으면 이럴 일도 아니었어, 개새끼야! 니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신고하니 마니 개지랄을 떠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조차도 스스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강영수한테 이지훈 이야기를 꺼내고, 이지훈한테 벌점이니 뭐니 언질 해주려 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해 봐야 꼴랑 한 번 해본 애의 일을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 끼어들었다.
저지른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니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됐다. 그런 나를 보며 이지훈은 더욱 열이 받은 것 같았다. 눈매가 한층 사나워졌다. 붉은 볼은 이제 맞아서가 아니라, 올라온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너 아까 그 형들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 미친 새끼야. 한번 찍히면-”
“…너는 알아?”
“뭐?”
말을 이어 나가던 이지훈이 멈칫했다.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아까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그제야 왜 내가 이지훈을 줄곧 거슬린다고 생각했는지를 깨달았다. 더군다나 이렇게까지 남의 일에 겁 없이 끼어드는 오지랖까지 부리면서.
나는 이지훈이 그 형들처럼 되는 게 싫었다. 이지훈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는 애라는 것뿐인데도, 이상하게도 걔가 저런 사람들처럼 살 거라고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어떻게든 만류하고 싶었다.
“그러지 마. 너는 그런 거 안 어울려.”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거장 뒤에 있는 두 건물 사이의 좁고 깊은 골목, 나는 이지훈에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줄줄이 뱉었다.
“괜히 반 분위기 해쳐 가며 또래 친구들 겁주는 것도, 너보다 나이 많고 할 짓 없는 형들이랑 몰려다니면서 이상한 소문 쌓는 짓도, 이렇게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서 담배나 피우고 학생들은 하면 안 되는 짓 하는 것도.”
“…….”
“너한테 도움 되는 거 하나 없는 행동들이라고.”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아까처럼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리를 뜨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순순히 들어주는 놈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고집스러웠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제게 하등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주장하듯이.
그 얼굴을 보는데 어젯밤 화장실을 가다 엿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방문 사이로 새어 나오던 노란 불빛.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인 남자의 그림자가 거실에 아른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심더, 이장님. 다 제 잘못 같고요. 지훈이 엄마 그래 보낸 것도, 애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돌보고….’
‘약한 소리 할 거면 그만둬.’
‘…….’
‘이제 겨우 석 달 되었어. 애가 어떻게 벌써 괜찮을 수가 있겄어. 자네조차 이러고 있는데.’
엿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숨소리를 죽일지언정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울음을 참는 소리가 울음소리보다 더 처절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으면서.
‘…어제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지후이 금마가 요새 학교에 안 온다고 하는 깁니다. 일찍 퇴근해가 일부러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데요. 자정 다 되어서야 들어오는 놈 붙잡고 왜 그랬냐니까 대답을 안 합디다. 학교 안 다니고 싶은 거냐고 물어도, 화를 내고 지랄해 봐도 듣는 척도 안 하데요.’
‘…….’
‘지 엄마 혼자 병원에서 외로울까 봐 맨날 훈련 끝나자마자 병원까지 두 시간 거리 버스 타고 댕기던 놈입니더. 그러면서도 학교 한 번 늦은 적이 없는 놈인데….’
‘…….’
‘지 엄마 없다고 이래 다 놓은 것 보니까… 지가 무슨 말을 해도 하나도 안 들리는 것 같고요. 근데 뭐라고 못 하겠심더. 이장님 말씀처럼 지부터가 천치같이 이카고 있는데….’
이지훈은 자신의 아빠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어쨌든, 야구도 그만두고 마음이 복잡하겠지.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걸. 아저씨도 계시고 하니까. 조금만 놔두면 금방 돌아올 거야.’
강영수가 믿고 있던 마지막 벽은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조차 더는 무엇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랬다. 이지훈만 엄마를 잃은 건 아니다. 이지훈의 아버지 또한 아내를 잃었다.
나는 이지훈의 고집스러운 표정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읽었다. 누군가는 이지훈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게 그를 오래 보지 못한 나일지라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너한테는 아버지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지훈의 주먹이 내 뺨을 강타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원초적인 방법일 줄은 몰랐다.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맞은 탓에 얼굴이 홱 돌아갔을뿐더러 넘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팔로 바닥을 짚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한테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꽉 쥐었던 주먹은 이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힘없이 풀렸다.
씩씩대며 내 멱살을 쥔 이지훈의 눈가가 붉었다.
“네가…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입에 담아.”
“…….”
“우리 엄마 봤어? 이야기라도 해 봤어?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지껄여!”
여차하면 한 대 더 칠 것처럼 꽉 쥐고 허공에 치켜든 주먹은 한참을 기다려도 내 얼굴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 치켜든 주먹이 아닌 이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네 어머니도 못 뵀고, 이야기조차 나눠본 적 없어.”
“…….”
“그랬으면 나도 아무런 말도 못 했겠지. 네 주변 사람들처럼.”
강영수처럼, 그리고 이지훈의 아버지처럼.
이지훈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놀랍지는 않았다. 이지훈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멋대로 구는 이지훈의 행위마저 슬픔의 연장선 안에서 이해해주려 했다. 돌아가신 엄마 관련 이야기를 쉬쉬하며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도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내가 꺼낸 이야기에 참고 있던 모든 울분을 터뜨리듯 달려드는 이지훈을 보고서야 난 알았다. 그건 이지훈에게는 또 다른 못 견딜 고통이었을 거라고. 그거야말로 누군가를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거니까.
그러나 고통은 어떻게든 지나간다. 특히 이지훈처럼 옆에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 또한 이지훈은 모르는 것 같아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네 아버님은 뵀어. 두 번이나.”
“…….”
“한 번은 너 아냐고 물어보시더니 너랑 잘 지내라고 하셨고, 다른 한 번은… 네 이야기 하다가 할아버지 앞에서 우셨어. 새벽 내내.”
이지훈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면서,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침에 피가 섞여나오는 걸 보니 입 안이 터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질질 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지훈에 대한 소문이 순 엉터리라는 것만 확신했다. 이런 주먹 솜씨를 가진 놈을 싸움에 데리고 가 봐야 소용이 있을 리가. 검도 대련 중에 잘못 얻어맞았을 때가 배는 더 아팠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확인하듯 물었다.
“다 때렸지?”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멱살을 쥐고 있는 이지훈의 손 위로 내 손을 얹고는 슬쩍 힘을 줬다. 저항 없이 가볍게 툭 떨어지는 손을 보니 더 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별일 아니란 듯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이지훈의 시선이 일어선 날 따라 움직였다. 언뜻 드러난 혼란스러운 눈빛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지훈의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린 죄로, 나도 내 약점을 공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왜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님이 아니라 여기까지 내려와서 할아버지랑 살고 있는지 알아?”
“…….”
“그렇게 해도 나를 궁금해하는 부모가 없어서 그래. 내가 잘 지내긴 하는지, 집에 몇 시에 들어오는지조차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려온 이후로 종종 하던 생각이었으나, 누군가에게 말로 꺼내놓은 건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집에 내려온 지 어느덧 3개월이었다. 그간 엄마와 아빠는 내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널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있을 때 잘해.”
“…….”
“맞지 않는 옷 입고 우겨 봤자 넌 그런 사람 아니야. 널 잘 알지도 못하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네가 오히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고 싶었어.”
나까지 입을 다무니 골목이 조용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울 것 같던 이지훈의 표정이 뇌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내가 이지훈에게 한 말을 되돌아보게 됐다. 그 말이 걔한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도.
집에 와 거울을 보니 이지훈한테 맞은 볼에 푸르딩딩한 멍이 올라와 있었다. 모른 척해주던 할아버지는 된장찌개를 한 술 떠먹는 순간에야 넌지시 물었다.
“얼굴이 그게 무슨 꼴이냐.”
난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아래로 좀 더 처박았다. 내겐 이제 이런 걸 궁금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머쓱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잠깐 망설였지만, 그 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이겼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주제 모르고 끼어들다 맞았어요.”
“누구한테.”
“…….”
“설마 이지훈 그놈이냐.”
바로 이지훈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눈부터 들었다. 그러고서야 방금 한 반응이 그 자체로 긍정의 뜻으로 비쳤으리라는 걸 깨달았지만. 다행인 건 할아버지가 내가 그러기 전부터 이미 답을 눈치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거였다.
이미 모든 게 까발려진 눈치라 순순히 털어놓았다.
“…제가 맞을 만한 짓을 했어요. 돌아가신 아주머니 이야기를 꺼냈거든요.”
“…….”
“아버님이 걱정하시는데 그러지 말라고 주제넘은 훈수도 뒀고요.”
할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밥을 먹기가 무섭게 어딘가로 휙 나가 버렸다.
그가 돌아온 건 세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것도 등 뒤에 이지훈을 달고서. 쭈뼛대며 마당에 들어선 이지훈에게 할아버지가 단호히 명령했다.
“뭐 하냐. 안 오고.”
이지훈은 눈에 보일 정도로 어색해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신발을 꾸물꾸물 벗었다. 마루에서 공부하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선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입술을 깨물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슬쩍 본 얼굴이 엉망이었다. 퉁퉁 부은 데다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 멍으로 얼룩덜룩한 얼굴이 누가 봐도 맞고 온 꼴이었다.
“앉아.”
이지훈은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순순히 앉았다. 이번엔 할아버지가 마루 끝에 서 있던 내게 명령했다.
“넌 들어가고.”
난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문이 얇은 집이었다. 둘이 거실에서 이야기하는 한 어떻게든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설프게 닫힌 문을 보고도 별말 하지 않는 걸 보니, 할아버지도 나를 굳이 그 이상으로 배제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문 바로 옆의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가 그리 피우고 싶더냐.”
“…….”
“여기 있다. 네 마음껏 피워 봐라.”
“…할아버지.”
“얼른.”
봉지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이어 무언가를 툭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틈 사이의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좁은 틈 사이로 내가 방금까지 책을 펴놓고 있던 작은 상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그 위로 던진 물건을 본 순간에는 눈을 의심했다.
“…….”
아무리 혼을 내려 한대도 청소년한테 담배를 권하다니. 할아버지가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겁만 주려는 거겠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기어코 상 위의 담뱃갑에 손을 댔다. 담배 하나에 불을 붙여 물고는 또 하나를 들어 불을 붙이더니 이지훈에게로 곧장 내밀었다. 이지훈이 받지 않자 입에 물려줄 기세로 가까이 들이댔다. 머뭇대던 이지훈이 고개를 슬그머니 피한 순간에는 장렬하게 꾸짖기도 했다.
“어른 앞에서는 못 피울 담배면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래를 향해 있던 이지훈의 눈이 들렸다. 기합을 받던 운동장에서, 담임한테 혼나던 교무실에서 종종 보던 반항기 어린 표정이었다. 그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으니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둘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만 숨을 쉬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전 이거 안 피우는데요.”
할아버지의 고압적인 태도가 드디어 이지훈 안에 있는 반항의 불씨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네놈 거 피워.”
이지훈은 정말 할아버지에게 라이터를 건네받고, 바지 주머니에서 구긴 담뱃갑을 꺼내 하나를 빼내더니 기어코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모습은 길에서도 종종 마주쳤다. 이지훈과 할아버지가 맞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지훈은 그렇다 쳐도,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건 처음 봤다. 할아버지가 여태껏 살아오며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조차 없을 거라 예상했던 건 아니지만, 저렇게 연달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떨떨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도 담배를 연달아 네다섯 대 피웠다. 이지훈이 물고 있는 담배가 짧아질 때면 무뚝뚝하게 말했다. 겨우 그게 다냐? 피우는 내내 후회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지훈은 그 말에 자극받아 오기 어린 얼굴로 할아버지가 상 위에 던진 라이터를 쥐고는 또 불을 붙이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싸움이었다. 쉬지도 않고 담배를 피워대는 둘 때문에 거실에서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 연기가 매캐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연기가 코끝을 알싸하게 만들었다. 내가 더는 참지 못하고 기침한 순간, 이지훈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쿨럭 상 위로 뱉어냈다. 다섯 대째였다.
“…씨발.”
이지훈이 들으란 듯 뱉어낸 욕설은 문 너머까지 닿았다. 그러고도 이지훈은 한참을 헛기침했다. 쿨럭대는 기침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뚝 멎었다. 할아버지도 그제야 앞의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둘이 대결이라도 하듯 피워낸 담배 연기가 가시지 않은 거실에서, 그가 꼿꼿이 앉은 채로 말을 시작했다.
“네 이름 내가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서두였다. 내가 숨을 죽인 순간, 이지훈이 아래로 고개를 처박았다. 마치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네 엄마가 밤낮없이 쫓아다니며 졸랐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으로 지어달라고.”
“…….”
“태어나기도 전부터 배를 이렇게 뻥뻥 차는 걸 보니 뭐라도 할 놈 같다고. 크게 될 놈이니 이름도 제일 멋지고 좋은 걸로 지어줘야 한다고.”
이번엔 이지훈의 어깨가 움찔했다. 할아버지는 동요하는 이지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쫓아다닐 때도, 네 엄마 내가 담배 피우고 있으면 주위에 얼쩡도 안 했다. 니 요만할 때도 귀엽다고 사람들이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려고 하면 니 엄마 성화에 손부터 씻고 와야 했고.”
“…….”
“혹시 니한테 나쁜 영향이라도 갈까 봐 그랬겄지.”
“…….”
“네 엄마가 니 그렇게 키웠다. 이렇게 막 사는 거 볼라고 한 기 아니라.”
묵직한 훈계는 이지훈의 약점만 줄곧 찔러댔다. 이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상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소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지훈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꼭 어제 새벽 같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아까처럼 문틈 새로 이지훈을 보고 있지 않은데도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눈물은 소리가 없을수록 더욱 처절하다는 걸. 얇은 벽 너머로 이지훈의 아픔이 손에 잡힐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지훈이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럼 어쩌라고요. 어차피 엄마는 이제 세상에 없는데.”
“…….”
“나 놔두고, 나 이렇게 혼자 놔두고 갔는데!”
울먹이는 목소리로도 이지훈이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거짓말했어요, 엄마가. 훈련 잘 다녀오라고, 그때까지 잘 있겠다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 거라고.”
“…….”
“인사도 못 하게 했다고요,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하면서… 코치님 말만 듣고 꼭 가야 하는 훈련인 줄 알고, 내가 갈 필요 없다고 해도 내 말은 안 믿고 자꾸 등 떠밀었어요.”
“…….”
“엄마가 먼저 나 버렸어요. 엄마가… 엄마가 거짓말했다고요. 그러니까 나도 엄마 말 안 들을 거예요. 착하게 살 필요도 없고, 아빠 말 잘 들을 필요도 없고… 그냥… 그냥 이렇게 살 거예요. 그래 봐야 엄마는 어차피 뭐라 말도 못 할 테니까….”
할아버지는 침묵했다. 치기 어린 말에 대응할 수야 있지만, 그러기 전에 미리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주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과연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이지훈의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한차례 잦아든 후였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쓸쓸했다.
“그런 말 할 때….”
“…….”
“네 엄마가 무슨 심정이었을 거 같냐, 이놈아. 옆에서 지켜보는 네 아빠는 또 무슨 심정이고….”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깊게 한숨을 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도 얼핏 고통이 엿보였다. 그 먹먹함은 차마 그조차 다 소화할 수 없다는 것처럼.
숨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게, 이지훈이 애처럼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더는 무언가로 숨길 수도 없는 것처럼, 석 달을 넘게 끙끙 앓고 있었을 마음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엄마가….”
“…….”
“엄마가 자꾸 사라져요, 할아버지….”
이지훈이 처음으로 열여섯 살 같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너무 빨리 엄마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남자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남자애가 뱉어내는 말들은 그래서 그 어떠한 포장도 없이 마음에 푹푹 박혀 들었다. 말로 뻗어진 고통의 줄기가 마음속에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안방에 들어가도… 엄마 옷에 코를 박아도 엄마 냄새가 안 나요, 이제.”
“…….”
“근데 아빠는 엄마 흔적을 지우려고 해요. 나한테 엄마 이야기도 안 하고, 엄마 물건을 자꾸 치워요. 그게 너무 짜증 나요… 자기도 똑같으면서. 엄마 없어서 죽고 싶으면서. 난 못 살 것 같은데, 난… 엄마가 없는 세상에 적응이 안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지훈은 참 오래도 울었다. 꿇고 앉아 있던 무릎 아래의 바닥이 축축하게 젖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지훈이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둔 할아버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지훈을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돌아오길 조금 더 기다리다가 거실로 나갔다. 재떨이와 담배 빈 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을 치우려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눈물방울에 시선이 멎었다.
“…….”
마른 수건으로 한 번 훔치기만 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들이지만, 그 안에 이지훈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상을 치우길 포기하고 마루에 가 앉았다.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릎 위로 얼굴을 묻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엄마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정거장 앞에서 이지훈을 만났다. 이지훈이랑 버스를 같이 타는 건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한 게 나 혼자만은 아닌지, 정거장에 다가서는 나를 보는 이지훈은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듯 볼만큼이나 퉁퉁 부어 있는 눈에 자연스레 시선이 멎었다. 대놓고 보면 민망할 것 같아서 곁눈질하듯 봤는데, 이지훈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슬쩍 입술을 물었다 놓는 놈이 보였다. 망설이던 것치고 사과는 재빠르게도 건너왔다.
“야. 미안하다, 어제.”
놈이 내민 후시딘을 보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시내에서 사 온 거야?”
집에 가지고 있던 걸 챙겨 왔다기에는 너무나 새것처럼 보였다. 잠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던 놈은 툴툴대며 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내가 화해하자는데?”
이 마을에는 약국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시내의 약국조차 문을 열지 않았을 아침이니까. 이건 아마 어제 시내에서 날 그렇게 때리고 나서 사 온 것이라는 말이 된다. 추리를 마치고 나니 이렇게 마주 보는 순간마저도 내 광대 부근을 흘끔거리는 이지훈이 이해가 갔다. 다짜고짜 후려갈길 때는 언제고, 뒤늦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순간마저 퉁퉁 부어 있는 놈의 얼굴이 조금 웃겼다.
“중요하진 않지. 근데.”
“…….”
“너 진짜….”
누군가한테 대놓고 이런 말 해본 적 없긴 한데, 이지훈을 계속 보고 있으니 그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개못생겼네.”
이지훈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놈을 내버려 둔 채로 버스를 타러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야야, 얘들아! 버스 잡아줘! 나 달린다, 달리고 있다!”
강영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렸다. 아마 언덕을 바삐 오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후시딘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버스에 먼저 올라탔다. 금방 내 뒤로 따라붙은 이지훈이 버스 아저씨에게 능청맞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그냥 출발하시죠. 동네에서 유명한 미친놈이라 저러고 달려오는 거지, 어차피 이 버스 안 타요.”
그러고 보니 버스 기사는 얼마 전 강영수가 신입 기사님이시냐며 넉살 좋게 말을 붙였던 이이기도 했다. 기사 아저씨가 이지훈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는지, 치익- 하고 버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따라 버스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앉을 자리가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내리는 문과 가까운 곳에 가 섰다. 이지훈도 옆에 와 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엔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 머리털 나고 못생겼다는 소리 처음 들어 봐.”
얼굴은 찐빵처럼 부은 데다가 눈은 평소의 반도 못 뜬 채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듯한 놈을 잠시 보다가 손을 들어 샛노란 머리를 가리켰다.
“그 머리부터 좀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하든가.”
“뭐, 머리? 왜? 미용실 누나는 예쁘댔는데.”
“손님이니까 그렇게 말했나 보지.”
“또 오라고 나한테 번호도 줬는데?”
뭐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떨떠름한 날 본 이지훈이 머리를 만지작대며 고개를 돌렸다.
“아씨,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존나 신경 쓰이잖아.”
창문이 거울이라도 되듯 빤히 바라보던 이지훈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나도 너처럼 머리 까맣게 할까? 얼굴도 사이좋게 얻어터진 김에 약간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리에 곁눈질하며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그득했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화내더니, 하루 만에 사이좋은 친구에게 하듯 농을 거는 놈이 신기했다. 어색함이라고는 없는 말투에 거부감조차 들 새가 없었다.
“박철승 찾아오면 니가 나인 척하고 좀 싸워. 이번에는 내가 경찰에 신고할게. 목소리 존나 착 깔고, ‘태안공고 박철승이요.’”
하다 하다 겨우 하루 지난 일 가지고도 농담을 한다. 이쯤 되니 신기했다.
“왜. 안 돼? 그런 말은 너만 할 수 있는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인상을 찡그린 날 본 이지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이리저리 머리를 비춰보는 얼굴이 아까와 달리 능청맞았다.
“아, 나 지금도 인기 감당 안 되는데. 더 피곤해질까 봐 고민되네. 너는 어떻겠어?”
“뭐가.”
“매일 아침마다 지나치게 잘생긴 나를 보고도 심장이 떨리지 않을 자신 있겠어?”
“…미친 새끼.”
듣자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서. 내 가차 없는 대꾸를 듣고서도 이지훈은 실실 웃었다. 어제 박철승 앞에서 필사적으로 짓던 것보다는 한결 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따라 웃게 됐다. 피식 웃음이 터진 날 본 이지훈은 목적이라도 달성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몰랐는데, 이지훈의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있었다. 눈보다는 낮고 광대보다는 높은 곳에 위치한 보조개는 환하게 웃을 때에만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게 정말 이지훈일까. 다는 몰라도, 나는 이게 이지훈의 모습과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방금 본 인디언 보조개는 따지자면 걔가 나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맨살이었다. 버스 창가에 이지훈과 내가 나란히 비쳤다. 걔는 나보다 딱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가 더 컸다. 늘 다 열고 있던 단추가 얌전히 잘 잠겨 있는 걸 보며 난 이지훈의 벌점이 더는 늘어날 리 없다는 걸 직감했다. 이지훈은 드디어 철도 위를 의미 없이 걷던 행위를 멈추고 지나가는 어떤 열차든 잡아 올라탔다.
강영수도 용케 버스에 타긴 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놈은 이지훈의 엉망인 얼굴을 본 순간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이지훈의 어깨부터 세게 후려갈겼다.
“니가 기사님한테 나 미친놈이라고 유언비어 퍼뜨렸냐?”
“웅!”
“뭘 잘했다고 발랄하게 대답하는데, 이 씨발놈이!”
한 대까지는 맞아주던 이지훈이 두 번째에는 어깨를 휙 뒤로 뺐다. 때마침 급정거한 버스 때문에 이지훈의 몸이 내게로 쏠렸다. 멈칫하다 이내 매달리려는 것처럼 무게를 실어 오는 놈을 진저리 치며 밀어낸 것과 동시에 벨이 울렸다.
소란스러운 우리 셋을 힐끔댄 한 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헛기침하며 창밖을 봤다. 2주 뒤면 중간고사를 볼 테고 그다음 주엔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4월은 코앞이었다.
* * *
등교하자마자 이지훈과 함께 교무실로 소환됐다. 한 명은 볼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멍투성이니 교무실 내 다른 선생님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3초에 한 번씩 떨어졌다. 우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착잡한 표정부터 지었던 담임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는 눈치였다. 경찰관이 해야 할 일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언질을 들었다 해도 그렇지 당사자인 우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담임은 뻔한 훈계만 한참 늘어놓았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느니, 지금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줄 모르냐느니. 공평한 훈계인 척해도 시선은 줄곧 이지훈을 향해 있었다.
이지훈이라고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놈은 몇 번 지나가다 보았던 반항기 어린 얼굴은 싹 지운 채로 유순히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잘못했으니 혼나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담임의 말이 끝날 때마다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는 놈 때문인지 담임의 훈계도 어째 갈수록 더 탄력을 받는 것 같았다. 이제는 교무실 안의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을 모아두고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담임이 과장된 손짓으로 이지훈의 머리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도, 봐 봐라. 내가 저번에 분명히 두발 규정 맞춰서 단정하게 하고 오라고 그으렇게-”
그때였다. 이지훈이 끼어들 기회라도 찾은 것처럼 재빨리 입을 연 건.
“염색할 거예요.”
“…뭐?”
“아빠한테 퇴근할 때 염색약 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 오늘 밤에 바로 염색하려고요.”
당황한 낯으로 눈을 깜빡이던 담임이 헛기침과 함께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시선이 이지훈의 노란 머리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지난 몇 달간 입고 다녔던 꼴보다는 단정했지만, 이지훈은 재킷 없이 춘추복 조끼만 입고 있었다. 담임이 내 상의를 슬쩍 쳐다보는 걸 보니 다음으로 트집을 잡을 부분이 어디인지는 빤했다.
예상대로 담임이 들고 있던 막대기로 이지훈의 어깨를 툭 찔렀다.
“대체 교복 마이는 어디다가 팔아먹고-”
“빨았어요. 담배 냄새 나서요.”
저런 미친놈.
이번에는 나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교무실 안에서 그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놈이 제정신인지 확인해야 했다. 고분고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을 본 순간엔 맥이 턱 풀렸다. 일부러 이러는구나, 확신했기 때문이다.
“학생한테 그런 냄새가 나면 안 되니까요. 맞죠?”
그러고 보니 만화책을 넘기던 강영수가 그런 말도 했었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 새끼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데.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못 말려. 어차피 남 말 듣는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냥 지가 알아서 정신 차리기만 기다리고 있으면 돼.’
상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강영수의 말소리부터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마음먹은 이지훈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관람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제 핸드폰도 있는데 가져가실래요?”
“…큼, 흠. 아니. 그건 반 애들 걷을 때 한꺼번에 걷어도 되고.”
“아니에요. 지금 가져가 주세요. 어차피 어제부터 욕 문자만 쌓여서 딱히 볼 것도 없고….”
“…욕 문자가 온다고?”
“네. 경찰에 한 번만 더 신고하면 죽여버린다고 막… 무서워서 잠을 설쳤어요. 핸드폰을 선생님한테 내면 선생님이 경찰서에 가져다주시는 거 맞죠? 저 혹시나 보복당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죠?”
훈계는 담임이 끝끝내 쓰고 있던 무테안경까지 코끝까지 내리고는 이지훈이 보여주는 욕 문자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모습으로 얼렁뚱땅 마무리됐다. 이지훈은 정말 담임한테 핸드폰을 넘겼다. 자신은 핸드폰을 다시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꼭 경찰서에 전해주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멍하니 보고만 있던 나는 교무실에서 나온 순간에야 이지훈에게 물을 수 있었다.
“…그래도 돼?”
“뭐가?”
“핸드폰 그렇게 넘겨도 되냐고.”
아무리 어제 상황이 그렇게 마무리됐어도, 뭘 믿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그 배짱이 궁금했다. 앞서 걷던 이지훈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엉. 어차피 아빠한테 핸드폰도 새로 사 오라 했는데?”
순식간에 염색약에 새 핸드폰까지 사 오게 될 이지훈의 아버지가 불쌍했다. 그것도 철딱서니 없는 아들 때문에. 아니다, 이건 철이 있는 건가? 잠깐 혼란스러워하는 찰나, 이지훈이 교실의 앞문을 열었다.
1교시가 시작되기 10분 전, 반은 분주했다. 사방에서 반 애들이 장난을 치고 떠들었다. 난장판 속에서 부반장 유혜은이 고군분투 중이었다. 교탁 앞에 선 채로 허공에 종이를 흔드는 몸이며 목소리가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얘들아, 잠시만. 발야구 나갈 사람 남자랑 여자 두 명씩 뽑아야 하거든? 미안한데 잠깐만 집중 좀 해줘!”
최선을 다해서 내지르는 듯한 목소리는 교실 바닥까지 울리는 듯한 발소리 사이에서 손쉽게도 묻혔다. 오늘로부터 한 달 뒤에 열릴 체육대회 종목과 관련해서 반 애들로부터 참가 희망하는 종목을 지원받고 명단을 추리라는 담임의 지시를 떠올린 나는 발을 뗐다. 교무실로 소환된 나 때문에 홀로 고생하고 있던 것 같으니 도와줘야 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발을 떼기도 전에,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
책걸상까지도 밀어둔 채로 뒤에서 축구공으로 족구를 하며 장난을 치던 놈 중의 한 명이 크게 소리를 지른 게 시작이었다. 이름이 박동연이었었나. 이지훈과 친하게 몰려다니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조용해진 반의 대다수의 시선은 박동연이 아닌 교실의 앞쪽에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이지훈 쪽이었다.
방금 슬리퍼 한 짝을 벗어서 누군가에게 던진 건 아무런 일도 아닌 양, 뻔뻔하게 반을 둘러보는 등짝이 보였다.
“자, 집중! 일단 나 한 명. 또 발야구 할 사람?”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맞자마자 누가 던졌는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눈을 험악하게 부라리던 박동연을 비롯한 남자애들은 그 대상이 이지훈인 걸 알고는 당황한 눈치였다. 장난이라기에는 거친 행위였고, 시비라기에는 장난 같은 태도였다. 당장 뭐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반 아이들조차 숨을 죽였다. 유혜은도 하얗게 질려서는 날 봤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면서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지훈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우, 또 오버 싼다. 이지훈 저 새끼.”
개중 입을 가장 빠르게 입을 연 건 박동연 뒤의 사물함에 기대서 있던 다른 놈이었다. 소각장 근처에서 이지훈을 마주쳤을 때 그 옆에 있던 놈이기도 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거면서 일부러 크게 웃는 게 왜 무리 안에서도 이지훈과 유독 친하게 지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오 안 살게 발야구는 또 뭔 발야구야. 그런 거 여자애들이나 하는 거지.”
그쯤 되자 박동연도 억지로 표정을 풀고 웃었다. 옆에서 눈치만 보던 놈들도 웃음을 터뜨리거나 이지훈한테 가벼운 욕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이렇게 꼽을 주는 것으로 이 순간을 넘기자고 암묵의 합의라도 한 것처럼.
“와. 개후지다.”
문제는 이지훈이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지만.
“뭐?”
실실대고 웃던 놈이 얼굴을 확 굳힌 걸 정면으로 보면서도, 이지훈은 친절하게 한 번 더 반복했다.
“존나 후지다고, 그런 말 하는 거.”
되물은 게 듣지 못해서가 아니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손 있고 발 있으면 하는 운동에 남자랑 여자 나누는 게 의미가 있냐?”
“…야, 이지훈.”
“그래, 됐다. 넌 나가지 마라. 그딴 마음으로 나가 봤자 지기나 하지. 고추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뛰긴 하겠냐?”
진심으로 한심해하는 것 같은 투였다. 이지훈의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옆 분단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뒤에 서 있는 놈들의 표정이 무섭게 굳은 것도 동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다녔던 무리를 등진 이지훈은 그런 반응에 하등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뒤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스스럼없이 물었다.
“야, 발야구 할래?”
잠깐 이지훈과 뒤쪽의 남자애들을 번갈아 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너랑 나. 발야구 남자 두 명은 됐고.”
겨우 슬리퍼를 한 짝만 신은 차림으로도 이지훈은 콩콩 잘 뛰었다. 교탁으로 다가선 놈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 있는 유혜은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야.”
“…어? 나?”
“어. 너한테 묻는 건데.”
“아… 응.”
“일 등 하면 뭐 주냐, 보통? 난 이런 데 나가 본 적이 없어 가지고.”
“아… 그… 잘은 모르는데, 소문으로는 상품권 준다고….”
“상품권? 한 오만 원 주나?”
“…그, 그렇지 않을까?”
“오. 존나 이겨야지, 그럼.”
이지훈의 눈이 반짝거렸다. 한층 더 적극적인 태도로 유혜은이 들고 있던 종이를 제 쪽으로 끌어오기도 했다.
교탁에 가까이 선 둘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의식한 것처럼 눈을 어색하게 깜빡이는 유혜은의 볼이 서서히 빨개졌다.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서도, 이지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놈의 손가락이 종이 어딘가를 쿡 찍고 있었다. 목표물이라도 되는 양.
“너 달리기 잘하냐?”
“…나? 왜?”
“나랑 2인 3각 달리기 나갈래? 나 달리기도 잘하거든.”
지켜보던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영수의 말이 맞았다. 이지훈은 지독한 새끼였다. 남 말은 듣지도 않는 놈이, 지가 마음먹은 방향으로만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부터가 그랬다.
이지훈의 미친 짓은 하루 내내 이어졌다. 학업에 도통 관심이라고는 없던 주인 덕분에 개학 이래 사물함에 처박혀 있던 교과서를 가져와 유혜은으로부터 빌린 페브리즈를 그 위에 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수학 선생님께 다가가 일차방정식도 모르는데 이차방정식을 어떻게 아냐며 진지하게 묻고, 쉬는 시간에 담배를 같이 피우자는 것처럼 옆으로 다가온 무리에게 금연 선언을 하기까지 했다.
‘나 담배 끊었는데.’
‘…야, 이지훈. 너 진짜 돌았냐? 어제 철승이 형한테 개겼다는 거 듣긴 했어도… 이 정도면 그냥 머리가 훼까닥 돈 거 아니냐? 야구 그만두고 빌빌대는 거 불쌍해서 데리고 다녀줬더니 갑자기 무슨….’
‘어, 그래. 나 존나 불쌍하지? 답 없는 새끼니까 이 김에 탈퇴도 시켜줘라.’
‘하. 탈퇴가 무슨 새끼야, 이렇게 그냥 툭 말한다고 해서 그게 탈퇴-’
‘그럼, 뭐. 탈퇴 선언이라도 해야 해?’
‘아니, 이 씨발….’
‘나는 이제 담배나 피우고 다니고 쓰잘데기없이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는 행위를 하는 무리에서 탈퇴하겠습니다. 학생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 무리에 있었던 건 평생 가도 존나 쪽팔리겠지만, 더 쪽팔려지기 전에 정신 차리겠습니다.’
‘…….’
‘됐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 나 일차방정식 풀어야 돼. 존나 바뻐.’
뭐라 반박도 못 하고 입만 방긋대며 멍청히 서 있던 남자애의 표정이 가히 압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훈이 바로 고개를 내려 쉬는 시간에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받아온 중1 수학 참고서에 머리를 처박는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미친 짓은 이게 아닐까.
“…힘든 일 있었던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만두는 건 아니지. 어리광 그만 부리고 돌아와.”
“어리광은 지금 코치님이 부리시는 것 같은데요. 전 안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이지훈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났을 때쯤 교실로 찾아온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지훈! 뭐 해, 이 새꺄. 안 오고!’
‘공 주워 가겠습니다!’
‘됐으니까 그냥 와!’
공을 받으려고 펜스에 바짝 붙어 기다리던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불호령에 몸을 돌려 뛰기부터 하던 이지훈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의 이지훈은 달랐다.
그때 이지훈의 태도만 떠올려도 저렇게 말대꾸를 꼬박꼬박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닐 텐데. 이지훈은 저를 설득하러 온 코치한테도 한결같이 불퉁했다. 아침에 담임을 대하던 태도와는 퍽 달랐다.
이지훈이 그렇게 말대꾸를 할 때마다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그렇게 참을 정도로 이지훈의 실력이 뛰어난 걸까 생각했다. 보통 어리광을 부린다는 말을 듣고도 참을 수 있는 어른은 없으니까. 심지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제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지훈아.”
그는 그러나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끈질겼다. 누가 봐도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없는 이지훈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지금 이 중학교에서 너만큼 공 던지는 놈 없다.”
“…….”
“다음 주부터 전국대회인 거 알지. 너 가고 싶어 하던 체고 감독도 온단다. 눈도장 찍을 좋은 기회야.”
“…….”
“새끼야, 내가 누구 그만둔다고 해서 이렇게 다 찾아오는 줄 알아? 훈련하기에도 바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로 시작해도-”
“왜 그러셨어요?”
“…뭐?”
이지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단조로운 톤을 벗어났다. 기계처럼 답하던 투를 버린 이지훈의 목소리가 빠르게 사나워졌다.
“왜 그 훈련 가야 한다고 엄마한테까지 전화해서 설득하셨어요?”
“…….”
“제가 이번 훈련만 빠지게 해주면 두 배로 열심히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아예 안 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 엄마 혈압만 정상 수치로 돌아오면 그것만 보고 간다고 코치님한테 부탁했잖아요. 아니, 빌었잖아요.”
“…지훈아.”
“공 저만큼 던지는 놈 없다고 했죠.”
“…….”
“당연하죠. 난 코치님이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못하면 아픈 우리 엄마 탓할까 봐 남들보다 일찍 학교 와서 30분씩 공 던졌어요. 그거 알면서 코치님, 그 새벽에 한 번이라도 나와보신 적은 있으세요?”
대답 없는 코치에 이지훈이 씁쓸하게 헛웃음 쳤다. 그가 그러리라고 예상했고, 그렇기에 놀랍지도 않다는 것처럼.
“저만큼 공을 던지는 놈이 없으면… 저한테 그러지 마셨어야죠.”
“…….”
“내가… 내가 왜 야구를 했는데요.”
“…….”
“엄마랑 아빠가 내가 잘하면 행복해하니까. 조금이라도 웃는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서 공 던진 건데.”
“…지훈아, 네 맘 안다. 아는데.”
“안다고요? 코치님이 욕심 한 번 부린 날에 우리 엄마가 죽었어요. 그것도 알아요?”
“…….”
“진짜 경기도 아니고, 합숙 훈련 중에 한 연습 경기, 그게 뭐라고 씨발, 엄마 상태 안 좋다고 아빠가 코치님한테 연락했을 때 나한테 한번 말이라도 해줬으면! 그랬으면 저도 이렇게까진 안 했어요.”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이지훈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방끈을 쥐었다 놓았다. 누군가를 불러와서라도 이 대화를 끝내야 하나 생각했다. 숨소리만 들어도 이지훈이 괴로워하는 게 느껴졌으니까.
“돌아가세요, 그냥.”
이지훈은 그러나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문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이지훈의 표정 또한 가라앉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거 다 코치님이 자초한 거니까 다시는 저 찾아오지 마시고요.”
“…다 그러고 살아.”
“…….”
“네가 동경하는 애들, 어디에든 얼굴 비추고 자기 이름 알린 애들. 까보면 다 이런 스토리 하나쯤은 있어. 근데 걔네들이 그럴 때마다 너처럼 포기했을 것 같아? 포기를 안 했으니까 성공도 한 거야.”
“상관없어요. 이런 거 포기해서 성공할 수 있는 거면 안 할 거니까.”
“그럼 어쩔 건데? 평생 야구만 하고 산 놈이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
“뭐든 해요, 전.”
“…….”
“야구 하던 만큼만 하면 뭐든 성공할 거구요.”
할 말이 끝났다는 것처럼, 이지훈이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복도는 적막했다. 이지훈은 복도에서 자신의 책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날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가방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고요한 표정이었다. 문틈 사이로 코치의 얼굴이 보였다. 낭패 어린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지훈에게 군말 없이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이지훈이 눈짓했다. 버스정류장 쪽이었다. 가자는 뜻임을 눈치챈 나는 놈의 뒤를 따라 걸었다.
* * *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침보다는 부기가 가라앉은 것 외엔 별다를 게 없는 얼굴임에도 자꾸 힐끔대고 보게 됐다. 뭐라고 위로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 코치 진짜 쓰레기더라. 잘했어.
너 근데 야구 진짜 그만둬도 괜찮은 거야?
그 어느 것도 타인이 함부로 말을 얹기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정거장에서 내려야만 했다.
어쩌면 이럴 때는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나는 인사하듯 이지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잘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야. 우리 집 가서 라면 먹을래?”
물음을 듣자마자 뒤돌아 확인한 이지훈의 얼굴은 아까와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이지훈과 나는 집에 가기 위해 이용하는 골목이 달랐다. 늘 정거장에서 헤어진 이유기도 했다. 이지훈의 뒤로 보이는 골목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오늘은 함께해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할아버지도 아직은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고, 마침 배도 고팠다.
이지훈네 집에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쭈뼛대는 날 본 이지훈이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핀잔을 던지더니 이내 내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는 질질 끌었다. 순식간에 이지훈네 집 거실에 덜렁 앉아 있게 됐다. 할아버지 집보다는 조금 더 현대식의 집은 내가 살던 아파트 내부와 비슷했다. 깔끔히 정리된 집을 둘러보다 고개를 돌렸다. 날 소파에 성의 없게 앉힌 사람은 부엌에 들어간 채였다. 부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식탁 때문에 반쯤 가려진 이지훈의 등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라면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참 더 뻘쭘하게 앉아 있다가 부엌 쪽으로 소리를 높여 물었다.
“…너 혼자야? 아버님은?”
“일 갔지. 평일 이 시간에 집에 있으면 돈을 어떻게 버냐, 어른이.”
심드렁히 돌아온 대꾸에는 머쓱해졌다. 거실 속의 시계가 3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훈이 냄비 양쪽을 붙들고 다가왔다. 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신문지를 양옆으로 민 놈이 랩 하듯 빠르게 말했다.
“야야. 밑에 대는 거 깔아. 얼른.”
“어? 어.”
놈이 시키는 대로 옆에 있던 깔개를 식탁 위로 놓았다. 그 위로 양은 냄비를 놓은 이지훈이 또 한 번 주방으로 사라졌다. 돌아온 놈의 손에는 수저가 두 짝 들려 있었다.
“네가 냄비 뚜껑에 먹어라.”
선심 쓰듯 툭 건네주는 냄비 뚜껑을 받아든 채로 머리꼭지를 보이며 먹는 놈을 잠시 감상했다. 정확히는 걔의 뒤로 보이는 집이라는 공간을. 이지훈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집 안에는 이지훈의 흔적이 참 많았다. 잠깐만 시선을 돌려도 태권도복을 입은 채로 이상한 발차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독사진이 보였고, 어떤 여행지에서 찍은 건지 유추하기 힘든 사진도 있었다. 세 사람이 웃고 있는 사진도 여럿 있었다.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맞벌이 부모님을 가진 죄로, 나는 서울에서 늘 이런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숙제나 게임도 했다. 이지훈도 그랬을 것이다. 걔의 말처럼 우리 같은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어른은 일해야 하니까.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느라 우리의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다만 이지훈과 내가 다른 게 있다면 난 그 공간에 친구를 초대할 생각까진 못 했다. 외로운 게 티 날까 봐 그랬다. 혼자이면 감출 수 있는 외로움이, 누군가와 함께일 때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불쑥 드러나곤 하니까. 친구들이 집을 가득 메운 내 외로움의 흔적을 보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그리고 친구들이 잠깐 채워줬던 빈자리는 어차피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빠르게 지워질 걸 알고 있어서. 이상하게 다른 것과 달리 그 사실에는 둔해지기가 어려웠다.
“뭐야. 왜 안 먹는데?”
한참 후루룩 면발을 흡입하던 이지훈이 눈만 든 채로 물었다. 막 끓인 라면을 앞에 두고 가만히 있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라면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본 놈이 이유를 알아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 많은 거 싫어하냐?”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샜다.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이지훈은 수저까지 냄비 테두리에 탕 쳐가며 어른같이 훈수를 두고 있었다.
“그냥 먹어, 새꺄. 나트륨 많이 섭취하면 안 좋대. 일부러라도 싱겁게 먹으랬어.”
“누가 그래.”
어른도 아니고, 우리 나이부터 나트륨 생각하는 애는 처음 봤다. 별생각 없이 받아치듯 한 대꾸였는데 이지훈이 이상할 정도로 오래 멈칫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이지훈은 재빠르게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우리 엄마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이지훈은 말을 물리는 것 대신 보탰다.
“맨날 그런 잔소리 하면서 라면을 싱겁게만 끓여줘서, 어렸을 땐 엄마가 라면 끓여주면 싫었는데. 아빠한테 대신 끓여달라 하고 그랬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이지훈은 우는 것 대신 웃었다. 나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돌려 텔레비전 위에 올려진 사진 속의 여자를 응시했다. 환하게 웃는 여자는 이지훈과 웃는 입매가 닮았다. 아마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장난기조차 어쩌면 그녀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이 공간에서 그녀의 존재가 평생 잊힐 수 없는 것임을 직감했다. 착잡한 마음이 티가 났는지, 이지훈이 건너편에 있는 내 허벅지를 툭 찼다.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으며 말을 걸기도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너 부른 거야. 이거 먹고 할 일 있어서 챙겨주는 거니까 잔말 말고 먹기나 해, 새꺄.”
이지훈은 그 이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고 놈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라면은 확실히 싱거웠다. 그러나 서울에서 혼자 계량컵을 들어 물의 양까지 칼같이 맞춰가며 끓여 먹던 라면보다는 맛있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지훈에게나 나에게나.
밥을 다 먹자마자 이지훈은 나보고 잠깐 마당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가지고 올 것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마당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훈이 등장했다. 놈이 안고 있는 상자 안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상자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얇은 이불부터 시작해서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쌓인 게 보였다.
“이게 다 뭔데?”
물음을 듣자마자 멈칫한 이지훈이 들고 있던 상자부터 아래로 내려놨다. 나는 상자 안을 보는 것 대신 이지훈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 숨을 고르던 이지훈은 이윽고 덤덤히 말했다. 놈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엄마 유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덩달아 침묵하던 나는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유품은 장례식 끝나고 다 태우는 줄 알았는데.”
“어. 근데….”
“…….”
“숨겨놨었어. 아빠가 태울까 봐.”
“그럼 이젠….”
“…태워야지. 그래야 엄마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이지훈이 날 초대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지금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이지훈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털어놓지 못할 종류의 슬픔이었으리라는 것도. 강영수도, 이지훈의 아버지도 이지훈이 이런 슬픔을 내놓기에는 무거운 대상이었다. 이지훈네 엄마 장례식에서 이지훈보다도 더 울었다던 강영수의 이야기까지 떠올리자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다. 쓰레빠 밖으로 나온 이지훈의 하얗게 질린 발가락을 보면서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쪽으로 가야 해?”
이지훈은 상자에서 시선을 둔 채로 한참 멈춰 있다가, 이내 내게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미세하게 움직였다.
바다에는 쓰레기들이 많았다.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것들도 있고, 마을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도 있고. 강영수의 말을 들으니 가끔은 주민들끼리 순번을 정해 바닷가를 돌며 쓰레기를 줍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아둔 쓰레기는 쓰레기차가 와서 실어 가지만, 가끔 마을 주민들은 드럼통 안에 불쏘시개를 넣고 쓰레기를 태우기도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가 보았던 어느 날 밤의 풍경을 떠올린 나는 이지훈이 드럼통 앞에 멈춰서 그 안으로 가져온 물건들을 차례로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라앉은 낯으로도 이지훈은 한 번 망설이는 법 없이 차곡차곡 물건을 쌓았다. 쉬지 않고 쌓은 것들을 한 번에 태워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렇게 하면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그리움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몇 분이 지나자, 이지훈이 도저히 태울 수 없어 숨기기까지 한 유품이 드럼통 안에 모두 들어갔다. 더는 넣을 것이 없음에도 무언가가 더 들어갈 곳이 있나 가늠이라도 하듯 이지훈은 드럼통 안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보던 내가 무언가를 떠올린 것도 동시였다. 나는 이지훈의 등부터 두드렸다. 돌아보는 놈에게는 빠르게 말했다.
“불붙이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뭐?”
“잠깐만 기다리라고. 금방 올게. 금방 올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
나의 급박한 당부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 이지훈은 내가 백사장을 벗어날 때가 되어서야 나를 소리쳐 불렀다. 야!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뛰었다. 언덕길을 숨이 찰 정도로 뛰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덕분에 신발조차 벗지 않은 채 마루를 성큼성큼 밟고 들어가 방 안을 샅샅이 뒤지는 나를 말릴 사람도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장롱 위에 올려두었던 캐리어 안에서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열다섯 번째 생일에 받은 선물이었다. 바란 적도 없던 선물이라는 이유로 굳이 다시 열어보지도 않았던 엄마의 선물이기도 했다.
그 선물을 든 채로 나는 다시 바닷가로 뛰었다. 다행히 이지훈은 내가 한 말을 어길 수 없었는지 막막한 얼굴로도 가만히 서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입을 떼려던 이지훈의 표정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흐려졌다.
나는 이지훈한테 천천히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카메라로 드럼통 안의 물건을 찍었다. 물건을 하나하나 뒤져가며 차례대로 찍고 나서야 드럼통 뒤로 물러났다.
“이제 해도 돼.”
“…….”
“불붙여.”
이지훈은 아무 말 없이 날 보다가, 한참 뒤에야 성냥을 들었다. 불을 붙인 성냥 하나가 드럼통 안을 화르륵 밝혔다. 옷의 성분 때문인지 불은 금방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안을 내려다보던 이지훈이 휘청대듯이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드럼통 옆에 주저앉았다. 나는 말없이 그 옆으로 가 앉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물건이 모두 타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우리는 한 시간 내내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팔이 닿는 거리였지만, 움직이는 것 대신 그저 함께 견뎠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 주말 아침부터 시내에 다녀온 내가 현상해온 사진들을 내밀었을 때 이지훈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한참 사진을 내려다보던 걔는 사진을 받는 것 대신 한 걸음 더 다가와서 나를 껴안았다. 우리 사이에 있는 사진이 아스러지는데도 이지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뜨겁고 축축한 눈을 내 어깨에 대고 비볐다. 그러고는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그 아이의 견고한 세계 안에 편입되었음을 깨달았다. 왜냐면, 누구와도 웃으며 대화하고 장난을 칠 수 있는 그 아이는 그러나 아무나 껴안지 않기 때문에.
1x5
어떤 사람이야?
그 형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관계였다. 연인이 할 법한 짓은 다 하면서,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마다 남의 이야기만 했다. 정확히는, 남이었으면 좋겠으나 남일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형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랑 사귀었다고 했다. 일 년인가 사귀었다가 그 남자애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고,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그 남자친구랑 정현준이 닮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지난 이야기라며 아무것도 아닌 양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는 언제고 말을 끝낼 때는 꼭 울었다. 동그란 눈이 새빨개진 걸 보면서도 난 눈물을 닦아주는 것 대신 옆의 티슈만 뽑아 건넸다. 그딴 새끼들만 만나고 다니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까지 꺼내진 못했는데도, 못내 티가 났는지 형이 코를 훌쩍대면서도 팔뚝을 툭 쳤다. 눈을 흘기는 걸 보니 내 표정이 말도 아닌 모양이었다. 반격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형이 서둘러 물었다.
‘너는? 그 앤 어떤 사람인데?’
그 애라는 말이 간지러웠다. 이지훈은 한 번도 내게 ‘그 애’였던 적이 없었다. 걔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서, ‘그’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부터가 어색하고 힘들었다. 내가 걔를 ‘그’라고 지칭할 수 있을 만큼 멀어진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어쩌면 난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거리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득바득 부정하려다가 그렇게 화를 내고 결국에는 이런 상황을 만든 걸지도. 강릉에서의 일은 그 후로 몇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떠올랐다. 내가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던 이지훈의 표정까지도 생생했다.
‘말해주기 싫어?’
형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내젓기도 했다.
‘말해주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먼저 배려해주듯 말하는 형을 본 순간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형은 왜 이렇게 내 눈치를 봐요. 내가 뭐라고.’
늘 말해주고 싶었던 거였다.
‘형은 어차피 말로 사람들 상처 줄 수 있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으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지 마요.’
잠깐 말이 없던 그 형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팔짱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없는 웃음이 샜다. 이지훈을 생각하기만 하면 나오는 한숨은 꼭 걔를 향한 내 마음과 닮아 있었다. 분명 존재하나, 남길 수 있는 건 없다는 점이 특히나 그랬다.
‘말해주기 싫은 게 아니라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
‘…모르겠어요, 솔직히.’
‘…….’
‘걔를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는 게 나인데, 심지어 그 새끼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 근데… 가끔은 그래서 더 모르겠는 것 같기도 하고. 공부랑은 정반대인 것 같아요. 내가 걔를 이렇게 오래 좋아하면서 어떤 사람인지 공부했다고 치면, 그만큼 아는 거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냥… 모르겠어요. 어려워요.’
수도 없이 생각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한테 말해 본 적 없던 것. 누군가에게 처음 꺼내놓는 온전한 진심이 그 대상의 앞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금세 무뎌졌다. 나는 내가 기어코 이지훈을 보지 않는 상황에서마저 놈을 사랑하는 법까지 배웠다는 사실을 짙은 무력감과 함께 받아들였다.
‘근데 걔는 내가 자기를 쉽게 생각하는 줄 알아요. 어쩌면 그렇게 오해하게 두는 게 나한테 편한 것 같아요. 진짜 자존심이 센 새끼거든요. 누구한테 사과하기 싫어서 아예 잘못하질 않는 놈인데, 그래서인지 나는 그 새끼가 자존심 굽히고 들어올 때마다, 오히려 더 비참해져요.’
‘…….’
‘나는 걔한테 특별한 사람인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특별한 게 아니니까.’
마음 약한 형은 내가 말을 이을수록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끝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저렇게 잘 울어서 눈 밑에 눈물점이 생긴 걸까. 아니면 눈물점이 있기 때문에 저렇게 자주 우는 걸까. 눈꼬리 바로 밑에 위치한 작고 까만 점을 바라보며, 나는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그거 그만하려고 이러는 거니까.’
‘…….’
‘괜찮을 거예요.’
형이 머뭇대며 내 옷깃을 잡았다. 나는 그 위로 손을 얹으며 형과 눈을 맞췄다.
‘…괜찮아야만 하고.’
형은 뭐라 말하는 것 대신 입을 맞댔다. 우리가 제일 잘하는 방식의 위로였다.
오랜만에 그 시절의 꿈을 꿨다. 내년이면 십 년이 될 이야기였다. 이제는 그 형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했다. 석 달도 채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그걸 만났다고는 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젓고 몸을 일으켰다.
숙직실의 침대에서 잠을 청한 지도 어느덧 사흘째였다. 밤샘 근무를 하고 돌아와 쓰러지듯 자고, 일어나면 밥을 먹고 또 잤다. 나는 침대 건너편에 있는 달력에서 어렵게 시선을 뗐다. 그렇게 몸을 고되게 하고서도, 오늘이 이지훈이 돌아오는 날인 걸 잊지 못하는 스스로가 지겨웠다.
“…어, 안녕하십니까. 계신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을 열며 들어오던 놈이 멈칫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익숙했다.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이 말아주는 술을 넙죽넙죽 주워 마시던 신입 중 한 명이라는 게 천천히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려 다니면서 눈치는 엄청 보고 다닐 시기였다. 어제도 형사 강력팀에서 신입들 대상으로 거나하게 자리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숙취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 혹사당했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문 닫아드릴까요?”
당장 누워서 쉬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얼굴로도 어떻게든 흠을 안 잡히려고 노력하는 게 웃겼다. 하긴, 저 때는 다 그렇지. 피식대며 시선을 거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흰 티를 마저 벗어서 관물대 안으로 처박았다.
“됐어. 들어와. 어차피 나가려 했어.”
관물대 문을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비상용 셔츠를 놓아두던 구석의 칸이 텅 비어 있었다.
“저….”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이지훈의 물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지 경위님….”
“어, 왜.”
셔츠를 입다 말고 뒤로 시선을 돌렸다. 자라고 자리까지 비켜줬는데 아직도 문가에서 알짱거리는 중인 신입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어려워하는 낯으로도 놈이 조심스레 침대 쪽을 가리켰다.
“전화가….”
“…….”
“침대에 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지잉- 지잉-
셔츠를 입던 걸 멈추고 뒤로 돌았다. 놈의 말처럼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 중이었다.
“안 받으십니까?”
마치 제 일인 것처럼 신경 쓰는 신입에게 고개를 저었다.
“…어. 놔둬.”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진동 소리가 완전히 멎고 난 후에야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전화 건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이지훈] (3)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임을 확인한 순간에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어제도, 그제도 같은 시간에 전화한 놈이라 놀랍진 않았다. 두 번의 전화를 무시당하고 나서도 이지훈은 ‘왜 전화를 받지 않냐’고 묻는 그 흔한 메시지 하나 보내질 않았다. 마치 이런 건 메시지로 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압박하듯이.
내게는 마지막이었던 그 순간이 대체 이지훈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진 걸까.
쌓여 있는 세 건의 부재중 전화가 마치 어긋난 신호 같아서 착잡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14년을 알아 온 사이였다. 쉽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놈이 이렇게 바로 연락을 취해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신입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없는 시간 쪼개고 쪼개서 왔을 텐데, 괜히 내가 바로 비켜주지 않아 시간만 잡아먹은 것 같아 미안했다. 옆 탁자에 놓인 세면용품을 챙겨 일어나며, 기합이 바짝 들어간 어깨를 툭툭 쳤다.
“미안. 얼른 자라. 저녁에 또 부서 돌 거 아냐.”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등 뒤로 문을 닫는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상하게도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언대학교 응급실]
업체 정보를 등록해놓은 곳인지, 저장한 적 없는 번호가 이름과 함께 떴다. 나는 응급실이라는 글자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무작정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 * *
“…일은 어쩌고 왔냐. 아, 오늘은 야간 근무인가?”
도착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였다. 옆에는 방금 벗어둔 듯한 환자복이 고이 개어져 있었다. 나는 방금 의료진으로부터 듣고 온 말을 곱씹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내게 보호자냐고 묻고, 교통사고로 이곳에 도착한 이지훈이 어떤 검사를 받았으며, 딱히 보이는 이상이 없으니 입원 없이 바로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말해주던 그들의 말을. 그리고 그들이 당연하게 나를 이지훈의 보호자로 여기는 것 같던 이 상황을.
“많이 다쳤을까 봐 쫄았냐? 표정이 왜 그래.”
날 흘깃 본 이지훈이 웃었다.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침대에서 훌쩍 일어나 보이기까지 했다. 찌뿌듯한 몸을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보니 이미 들은 것처럼 큰 이상은 없는 것 같긴 했다.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어떻게 된 거야.”
“뭘 어떻게 돼. 그냥 흔하디흔한 교통사고가 이번엔 나한테 일어난 거지.”
심드렁히 대답한 이지훈이 옆 탁자에 놓여 있던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마치 방금 교통사고를 당해 보호자를 소환하기까지 한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지훈.”
견인차까지 왔다고 했다. 같이 이 병원으로 실려 온 트럭 운전자는 팔이 붕대로 감겨 있었다. 복도에서 보험사 직원을 붙잡고 하소연 중이던 그가 억울하다는 듯 강조하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내 귀에 끈끈히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 그래도 과실 비율이 최소한 70 대 30은 나와야지. 신호 바뀌었는데 바로 출발 안 한 것도 도로에서는 엄연한 죄 아닙니까?’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난 사고라고 했다. 이지훈은 원동기부터 시작해 움직이는 기계 관련 자격증만 수십 개인 아버지에게서 운전을 제대로 배웠다. 한 번은 강영수랑 같이 차를 탔다가, 운전 중에 핸드폰을 잠깐 봤다는 사실만으로 다시는 강영수가 모는 차에 타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독한 놈이기도 했다. 그걸 다 알고 있는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곧이곧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당사자인 이지훈이야말로 이 상황에서 유독 튀는 오류를 모르지 않을 거였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듯 침묵하던 놈이 이내 순순히 털어놓았다.
“잠깐 다른 생각 중이었어. 신호 바뀐 지 5초는 됐나. 그 잠시를 못 참고 뒤에서 성질 급한 아저씨가 들이박은 거고.”
“왜 그랬는데.”
“궁금하면 네가 가서 물어봐. 목소리도 크시던데 신나서 알려줄걸.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뭘 어떻게 말을 하면 복도에서 여기까지 70이니 30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냐.”
“아니, 너 말하는 거야. 왜 그랬냐고.”
“…….”
“왜 운전을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해. 공항 근처면 화물차도 많다는 거 알아서 조심하던 거 아니었어? 비행 끝나고 피곤했던 거면 평소처럼 택시를 타고 오지 그랬어. 만약 다쳤으면, 너도 저 아저씨처럼 깁스라도 해야 됐어 봐, 이 새꺄!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병원에서부터 온 전화는 그 특유의 느낌이 있다. 전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사실이, 그 사실을 통보받는 사람에게는 느닷없고 폭력적인 악몽이 된다. 그렇게 바로 연락이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 그런 사이인 사람이 응급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겨우 전화로 처음 알게 되는 거니까.
‘이지훈 님 보호자분 맞으시죠?’
단조로운 어조가 뱉는 세 음절에 순간 복도가 일그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어떤 공간에 서 있으니 이런 전화도 받을 수 있는 것일 텐데,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뭘 타고 병원까지 왔는지조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얀 커튼 너머로 보이는 이지훈의 멀쩡한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온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손을 말아쥔 순간 쥐고 있던 종이가 구겨졌다. 구겨진 택시 영수증을 내려다본 순간에야 내가 택시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멈칫한 이지훈은 시계를 마저 차고 다른 한 손에 핸드폰까지 챙기고서야 날 향해 완전히 뒤돌았다.
“왜 그랬냐고?”
차분히 묻는 놈과 눈을 마주친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입부터 다문 나를 보고도 이지훈이 한 번 더 묻는다.
“왜 그랬을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놈이 드물게 보이는 낯이었다. 웃지 않는 것과 화를 내는 건 다르다. 그러나 방금 이지훈은 둘 다를 했다. 잠깐 내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피던 이지훈은 이내 참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날 이후 이지훈을 처음 보는 거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우리가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말없이 놈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지훈의 넘긴 앞머리는 출국한 날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단정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두 올가량이 내려왔을지언정 크게 흐트러지진 않았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같았다. 내가 낸 건 딱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 두 올만큼의 혼란이다. 잘 정비된 놈의 인생에서 당장은 큰일처럼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아니게 될 거라는 걸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이야기를 하든, 마저 혼을 내든지 해.”
“…….”
“내 차 뒤에 범퍼 다 나가서 정비소로 보냈어. 네가 안 태워주면 나 집에도 못 가.”
복잡한 표정을 순식간에 지운 이지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말투와 행동이었다. 집에 가자고 하면서 네 집, 내 집 구분조차 안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왜냐면 우리는 그런 것쯤은 특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로 지내왔으니까.
이지훈이 어제도, 그제도 내게 전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얘는 그날의 내 고백도 우리가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고난쯤의 하나로 생각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야기하자는 말부터 나오는 거겠지.
그렇지만 이지훈을 탓할 수가 없다. 놈이 다쳤다는 사실만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내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이지훈을 비난할 수가 있을까? 놈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모든 걸 잊어버렸던 나는 앞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 텐데.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이지훈의 옆에서 계속 살게 된다면.
“…….”
무언가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잘못된 거였음을 깨닫는 순간에는 이지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오히려 명쾌해졌다. 나는 집요하게 뻗어오는 이지훈의 시선부터 끊었다. 방금 이지훈의 몸 상태 중 유일하게 눈으로 괜찮은 걸 확인하지 못한 발 부분에 잠시 눈길을 준 뒤 어렵게 눈을 뗐다. 의료진의 말처럼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어 보였다. 그건 확인하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마음을 달랬다.
그제야 난 대답하지 않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강영수 불렀어.”
“…뭐?”
“근처라 했으니 곧 올 거야. 걔 차 타고 집에 가.”
응급실에 도착해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있던 중 마침 오늘 휴가를 내 쉬고 있었다던 강영수로부터 전화가 왔던 게 다행이었다. 이 순간에 오니 감사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아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 대신에 했어야 할 말을 했다.
“그리고… 왜 내가 네 보호자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것도 바꾸는 게 좋겠다. 나는 이제 네가 불러도 못 올 테니까.”
아까는 ‘이지훈’이라는 이름이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지만, 이제는 ‘보호자’라는 말이 그랬다. 이지훈의 인생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선언한 나는 더는 그런 호칭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야, 지선욱.”
팔뚝이 붙잡혔다. 내게 성큼 거리를 좁힌 이지훈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커튼이 휙 젖혀졌다.
“뭐야! 왜 멀쩡해! 선욱이 목소리 엄청 심각하길래 기껏 목발까지 챙겨 왔구만!”
강영수였다. 다급하게 커튼을 열어젖힐 때는 언제고, 멀쩡히 서 있는 이지훈을 보자마자 황당한 표정부터 지은 놈이 끌어안고 있던 목발을 내팽개쳤다. 갑자기 등장한 강영수에게 이지훈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붙잡힌 팔을 털어냈다. 그러자마자 따라붙는 시선을 피해 강영수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검사 결과에 이상 없어 보이니 퇴원하래. 나 일 가야 하니까, 네가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어어. 고생했다. 얼른 가. 아나, 근데… 모처럼 데이트 있던 거 팽개치고 왔는데. 이지독 이 새끼 심하게 멀쩡해 보이는데? 야. 너 아픈 거 맞냐?”
“간다.”
목발 끝으로 이지훈을 쿡쿡 찌르며 투덜대는 강영수와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하는 이지훈을 뒤로하고는 서둘러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다 빠져나오고 나서야 이지훈을 떼어낸 손이 계속해서 시큰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택시를 타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손을 펴 봤다. 손바닥 중간에 긴 상흔이 그어져 있었다. 빨갛게 난 생채기 사이로 아까의 기억이 끼어들었다. 그래, 아까 택시에서 내리다 말고 넘어졌다. 서두르다가 그랬다. 카드를 돌려받는 그 잠깐 동안 이지훈이 잘못됐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근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예 겪어본 적도 없는 일처럼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숨이 막혔다. 다른 게 아니고.
이지훈이 날 붙잡으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휘청이는 마음 때문이 아니고.
* * *
쫓겨나다시피 서에서 나왔다. 꼴이 그게 뭐냐며 얼른 집에 들어가라는 반장님의 말을 시작으로, 옆에서 한두 마디를 보탠 사람들 때문이었다. 며칠간 집에만 들어가지 않았다 뿐이지, 면도도 잘하고 옷도 매일 갈아입었는데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모습은 어떻게든 티가 나고 마는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눈치 없이 코피가 터졌다. 나를 본 반장님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갑 티슈를 던지며 문을 손짓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손 가게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얼마 전 따로 불러 승진 시험 준비가 그렇게 힘드냐고 묻기까지 한 그를 기억한 나는 더 반박해 봐야 좋을 게 없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왔다. 숙직실 사물함 안에 있던 셔츠를 대충 쑤셔 담은 종이봉투와 함께 차에 탔다.
새벽 2시를 알리는 시계를 물끄러미 보다가 핸들에 머리를 묻었다.
“…하.”
코피는 멎었지만,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댔다. 근무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떠오르던 이지훈의 눈빛은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강영수에게 자신을 떠맡기듯 넘기고 가는 나를 보던 놈의 표정이 조금만 방심해도 의식을 잡아먹을 기세로 덤벼들었다.
처음이었다. 아픈 이지훈을 두고 그렇게 돌아선 건. 어쩌면 이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아픈데도 돌아서는 걸 보니, 정말 내가 떠나려는 거구나 생각했을지도.
그러나 이제 그건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당장은 어색해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지훈의 흔적을 죄다 들어낸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로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가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강영수한테 전화가 왔다. 마지막으로 놈을 보았던 게 이지훈을 내버려 두고 온 응급실이었다는 걸 기억하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기부터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벽 두 시였다. 강영수가 이미 이지훈을 집까지 데려다주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상념을 털어낸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선욱 씨 뭐 해용. 일하는 중?
예상대로 강영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가끔 심심할 때 전화를 걸어 실없는 대화를 시작할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어깨의 긴장마저 풀리는 듯했다. 나는 핸드폰을 봉투를 들고 있던 왼손으로 옮겨 든 채로 도어락 캡부터 열었다.
“아니. 퇴근했어.”
새벽 시간의 아파트 복도는 조용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곳이니 번호를 틀려 소음을 얹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3-1-8…
-뭐야. 웬일로 이 시간에 퇴근시켜줌?
“…그냥. 들어가래.”
-잘됐네. 흔치 않은 기회인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어. 집이야?”
-집 앞. 이제 막 들어가려다가 너 생각나서 전화했지.
“…이제 들어간다고? 왜?”
3-1…
대답하느라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도어 패드에 있던 모든 숫자가 반짝였다. 시간이 초과되었으니 다시 입력하라는 사인이었다.
-그게… 술을 좀 먹었어….
뜬금없는 답변이었다. 잠깐 딴 데로 생각이 새서인지 손이 뻣뻣이 굳었다. 이번에는 8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입력해야 하는 숫자 8개 중에 겨우 2개를 받아낸 패드가 또 한 번 현란하게 반짝였다. 한 번 더 틀리면 이제 이웃들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음이 생길 터였다. 나는 손을 아예 아래로 내렸다. 망설였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지훈 데려다주고 나서 마셨단 소리지?”
평소라면 물어보기도 전에 혼자 4절까지 풀어놓고도 남았을 강영수가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통화가 끊기진 않았으니 의도적인 침묵일 테다. 나는 검지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러고 보니 5일 중 3일은 술을 먹는 놈이, 술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뜸을 들이는 것부터가 불안했다.
“야. 강영수.”
-…….
“대답 안 해?”
-…혼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대답할게.
찔린 듯 내어놓는 답변을 보니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숫자를 더 입력하길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미친 새끼들이 진짜…
-아니, 이지훈 그 새끼가 자꾸 먹자잖아! 나는 진짜 집 가서 쉬라고 하려고 했다? 어? 내비에 이지훈 집까지 딱! 입력해놓은 상태였다고. 근데 자꾸만 지가 괜찮다는데 왜 지랄이냐고, 응급실에서 멀쩡하다고 한 소견서라도 가져다줘야 하냐고 난리를 피우는 거야. 너 그 새끼 우길 때 말빨 존나 세지는 거 알지. 내가 집에 데려다줘도 다시 소견서 떼러 응급실까지 혼자 택시 타고 갈 기세였다니까? 그런 놈을 어떻게 이겨. 어?
“…그래서.”
-어어?
“진짜 술을 먹었다고? 오늘 사고 난 새끼를 데리고?”
-…어엉… 그렇긴 한데….
사고가 난 몸으로 술을 먹겠다고 우기는 놈이나 그런 놈에게 말려드는 놈이나 그게 그거였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나는 그조차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런 헛짓거리를 못 하게 감시하진 못할망정 도망치듯 자리를 뜨기나 했으니 화낼 명분도 없긴 했다. 그래도 취했다고 보기에는 멀쩡한 강영수의 말투를 보니 전화할 정도의 정신까지는 있는 것 같았다. 대리를 불러서든 뭐든 이지훈을 집에 데려다 놓긴 했겠지. 거기까지만 알면 된 거였다.
난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도어락 캡을 열었다. 전화도 곧 마무리될 테니, 이제는 진짜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됐어. 술을 먹든 뭘 하든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됐지. 병원에서도 이상 없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고.”
-어어… 근데…
석연찮게 말을 끄는 강영수 때문에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기 전에 또 한 번 뜸이 떴다. 나는 숫자 패드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뭐. 또 할 말 있어?”
-…그게… 내가 이지훈을 집까지 데려다 놓긴 데려다 놨는데 말이지….
“…….”
-네 집에 데려다 놨다, 선욱아. 하하.
삐-삐-삐-
“…뭐?”
세 번 이상 틀린 사람은 침입자로 간주하라고 프로그래밍 된 도어락이 경고하듯 알림을 울린 것과 동시에, 강영수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놀라운 반전이지? 등골이 오싹했을 거야. 그치? 알아, 알아. 네 맘 안다고. 그렇지만 일단 들어 봐 봐? 이지훈 그 약은 새끼가 웬일로 오늘따라 나서서 개 달리잖아? 어어? 분명 페이스만 맞추려고 했는데 테이블 위에 소주병만 벌써 다섯 병?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몰래 계산하고 왔는데?
“…….”
-자리에 이지훈이 엎어져 있더라고. 야, 참, 내가 이 새끼 스무 살 이후로 이렇게 술 먹는 건 또 처음 봐서 신기… 아아, 어쨌든 그래도 일단 이 새끼를 데려다 놓긴 해야 하니까 내가 일단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 새끼를 업었어. 업고 나오는데, 이것 참. 바로 눈앞에 네 아파트가 보이네? 심지어 걸어갈 수도 있을 만한 거리잖아?
주인도 없는 집에 누군가를 던져놓기까지 한 사실이 민망하긴 한지 강영수가 묻지도 않은 정보를 한참 늘어놓는다. 이지훈이 꼭 가야겠다고 주장한 술집이 하필 내 집 근처였던 게 대박이지 않냐는 둥, 그 집의 안주가 맛있긴 했었다는 둥, 마침 며칠 전 너 없는 집에 엄마가 보내준 반찬 놓아두고 가려고 도어락 비밀번호 물어봤었던 것도 기막힌 우연이었다는 둥.
난 그런 말을 들으며 이지훈의 별명이 이지독이 된 이유나 생각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서도 난 이미 지독할 정도로 계획된 파티의 흔적을 찾았다. 아무것도 모를 강영수를 조종해 이곳까지 끌고 온 건 파티의 피날레 의식이고. 이 사실을 지적하려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강영수까지도 이 싸움에 끼워야 할 거였다. 이지훈은 그래도 상관없으니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을 테지만 난 그럴 준비까지는 안 되어 있었다. 강영수가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안대도 그 대상이 이지훈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면 일이 배로 복잡해졌다. 가운데에 낀 놈이 곤란할 건 당연지사였다.
삐-삐-삐
가만히 문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일깨우듯 한 번 더 알림이 울렸다. 나는 일단 손을 뻗어 도어락 캡부터 닫았다.
“…끊어.”
-아이, 선욱 씨. 목소리 깔지 말기예요. 저 쫄아서 잠 못 자용 진짜!
“화 안 났어. 알겠으니까 일단 끊으라고.”
-넵! 화난 거 있으면 이지훈한테 마저 풀고요. 저 그럼 끊을게용, 선욱 씨! 잘 자용!
강영수의 방정맞은 목소리마저 사라진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복도의 동작 센서가 꺼질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서 있다가 마침내 손을 들었다. 여덟 개 숫자를 쉬지 않고 입력한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띠릭-
집 안은 방금까지 홀로 서 있던 복도보다도 더 조용했다. 부엌과 거실을 훑고, 현관 옆 작은 방에도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걸음은 자연스레 마지막 남은 방으로 향했다. 내가 늘 잠을 청하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연 순간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잠시 멈칫했던 나는 그러나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치 방금 도어락을 열고 집을 들어올 때처럼.
“…….”
침대에 이지훈이 정자로 누워 있었다. 눈에 손을 얹어놓은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놈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보였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때문인지 방은 추웠다. 바닥을 디딘 발이 금세 차가워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나보다도 추위를 타는 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핏 보면 잠이 든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옷장으로 곧장 걸어갔다. 옷장 안에 걸려 있던 셔츠를 마구잡이로 잡아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 쑤셔 넣었다. 어두운 탓에 어떤 셔츠인지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냥 그렇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봉투가 묵직해졌다. 갖은 힘을 써가며 침대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방을 나서기 위해서는 이제 딱 세 걸음만 더 가면 됐다.
“야광별 다 뗐네.”
그렇게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썼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이지훈이 뱉어낸 그 한마디에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옆을 향했으니까. 아까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있는 놈이 보였다. 여전히 손등을 눈 위에 얹어둔 채였다. 눈을 가렸으니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는데, 놈은 모든 게 보이는 것처럼 말했다.
2년 전 이 집에 이사를 오던 날 이 방 천장에 붙어 있던 야광별이나, 자신을 봤음에도 모른 척 셔츠만 들고 방을 떠나려 했던 나나.
그 물음 하나에 내가 발이 묶이리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질문이 또 건너왔다.
“언제 뗐냐?”
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지훈은 정말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디지털 시계부터 확인했다.
오전 3시 2분.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에 3시 3분이 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늦은 시간이었다. 근무를 제시간까지 수행한 후 돌아왔다면 아마 새벽 6시는 되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이지훈은 나를 기다리려 했을까. 생각하다 보니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나는 스스로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마저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지훈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꽤 됐어.”
그러니까, 이지훈이라면.
2년 전에 이사를 온 이 집은 그 전까지 신혼부부가 세 살배기 아이와 함께 살던 집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아이를 데리고 안방에서 잔 그들 덕분인지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의 천장에는 야광별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이사하던 날,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채고 가리킨 건 이지훈이었다. 당장 떼어주려는 듯 의자를 들고 온 강영수를 만류한 것도.
‘야, 그냥 놔둬. 이 새끼 어차피 너무 어두우면 잠 못 자.’
이지훈은 내 대답을 듣고서야 눈 위에 있던 손을 치웠다. 이제는 없는 야광별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연신 천장을 향해 눈을 깜빡대더니, 새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냐. 몰랐네.”
침묵이 무거웠다. 나는 까끌하게 느껴지는 입 안을 축였다. 아까 그런 일이 있고서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이지훈에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떠오른 말 중 가장 무난한 문장을 꺼냈다. 그 어떤 사이가 아니라도, 취한 사람에게 건넬 만한 말을 고르고 골라서.
“…피곤할 텐데 더 자라. 술 먹었다며.”
대답 대신 이지훈의 고개가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도 날 보는 놈의 눈빛은 퍽 잘 느껴졌다. 내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에 유독 길게 머무르던 시선을 느낀 순간에는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잠깐 셔츠만 가지러 왔어. 다시 서로 돌아가야 해.”
이지훈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나는 놈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응급실에서 마주쳤던 놈의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눈빛마저도 잊지 못하는 마당에, 지금 눈을 마주치면 꼭 이지훈의 페이스대로 말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뗄 준비를 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방을 나설 수 있었다. 노린 거든 뭐든 술에 취해서 업혀 오기까지 한 놈에게 나가라 할 수는 없으니, 내가 나가야 했다. 왜 다시 왔냐고 질타를 듣더라도 경찰서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냐.”
걸음이 또 멈췄다. 한 걸음만 더 떼면, 그 말 한마디만 무시하면 방을 나갈 수 있는데 난 그걸 못 했다. 이지훈의 목소리가 들은 적 없이 낮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가 이 집을 그렇게 자주 들락거렸는데, 왜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나 몰라.”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빨리 방을 나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종이봉투 안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던 셔츠가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게 꼭 지금 이 상황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여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이지훈과 내가 평소처럼 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티를 내고 마는 것처럼.
이 일방향적인 대화부터가 그랬다. 이지훈은 내가 한 말을 무시하고, 차마 혼잣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말만 계속했다. 마치 들으란 듯이.
“그게 이상해서 생각을 좀 해 봤거든? 그러다 알았어.”
“…….”
“네가 나한테 이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거든.”
“…….”
“그리고 난 네 말대로 했고. 강영수가 가끔 네 방에서 잤다고 말해도, ‘미친 새끼. 싫다는데 말 존나 안 듣네.’ 하고 말았지, 말 잘 들은 대가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이지훈이 말끝에 짧게 헛웃음을 쳤다. 그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편으로는 그렇게 알게 된 정보로 대체 뭘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듯이.
“도어락 비밀번호 바꾸고.”
“…….”
“문자랑 전화도 다 개무시하고.”
“…….”
“다음은 뭐야. 이사 가기? 핸드폰 번호 바꾸고 잠적하기?”
가벼운 툭툭 던지는 어투와는 달리 굳은 얼굴은 사나워 보이기까지 했다. 응급실에서는 말을 참았지만, 들을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이 방에서 놈은 더는 참을 이유조차 찾지 못하는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이 방을 증인으로 내세워서라도 모든 걸 다 헤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내가 놈을 향해 품어온 지겹디지겨운 마음이었다.
“말해 봐. 나도 그 정도는 알아야지. 또 강영수 등에 업혀서야 이 집에 들어올 수는 없잖아.”
“…….”
“아니면, 그게 네가 바라는 방식이야? 이렇게 모른 척하면서 그냥 시간이 지나고, 내가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길 기다리는 거?”
이지훈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붙잡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몇 번 더 나한테 연락을 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쳐들어와서 당장 모든 걸 알아야겠다는 것처럼 화를 낼지는 몰랐다. 걔와의 관계를 유지하느라 뒤집어쓴 ‘우정’이라는 허물이 가진 유일한 장점을 믿고 있어서 그랬다.
친구라는 속성의 얄팍함. 얼마나 오래 사귀고 함께 시간을 보냈든, 한 명만 관계를 끊고자 해도 그 어떤 법적인 속성으로도 붙잡아 둘 수 없는 관계. 이지훈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그 사실을 제일 잘 아는 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는 놈을 보니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자만해 왔던 걸지도 모른다. 당장 처음 보는 얼굴로 화를 내는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굳었으니까. 나는 한참을 노력해서야 겨우 그럴듯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런 뜻 아니었어.”
“…….”
“꼭 이야기해야겠다면… 다음에 해. 지금 말고. 너도 취했고, 나도 지금은 준비가 안 됐어.”
당장으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해 꺼낸 말에 이지훈이 헛웃음 쳤다. 침대가 출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지훈이 어느새 바로 앞에 있었다. 손에 있는 종이봉투를 낚아챈 놈이 그것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종이봉투에 어설프게 담겨 있던 셔츠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다시 주운다 해도 한번 주름이 간 셔츠는 옷장에 얌전히 걸려 있을 때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다음이 어딨어.”
그걸 이지훈이 모를 리 없다.
“구라 까지 마. 너 나한테 다음 기회 안 줄 거잖아.”
그런데도 놈은 그렇게 했다. 지금 관계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우리가 그 셔츠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대화가 끝난 뒤 우리는 친구라는 그 얄팍한 허울마저 지킬 수 없으리라는 것까지 각오한 사람처럼.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날의 오피스텔 복도로 돌아가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이지훈은 내 등 뒤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내가 넘긴 상자를 들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앞에서 하나 남은 출구마저 틀어막고 있었다.
“그때 할 수 있는 이야기면, 그냥 지금 해.”
“…….”
“또 도망갈 준비하지 말고, 지금 하라고. 지선욱.”
더 도망갈 수 없음을 눈치챈 나는 눈을 들었다. 이지훈의 까만 눈이 날 빈틈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
“…….”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이지훈은 이분법적으로 인생을 살았다. 지켜보고 있으면 신기할 정도였다. 놈은 애매하게 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조차 안 했고, 마음먹은 거면 지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물고 늘어져서라도 어떻게든 끝을 봤다. 대신 그것들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들은 손쉽게 놓았다. 모든 것에 목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인이라면 걔가 눈이 돌 정도로 붙잡고 있는 것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야구를 할 때는 야구였고, 야구를 그만두고 나서는 시험 성적이었다. 조종사가 될 준비를 할 때는 비행 경험이었고.
방금 마주친 눈은 지금 이지훈이 우리의 관계를 두고 그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친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건 동시에 이지훈에게 여전히 ‘친구’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이지훈이 응급실로 나를 불렀을 때 놈에게 있었을 선택지를 생각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더는 친구일 수 없는 이유를 납득하기 전까지 놈은 그 선택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지훈이 이렇게 구는 이상, 어차피 애매하게 관계를 끝내기는 텄다.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지만 이 대화는 끝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또 사과할 줄은 몰랐는지, 이지훈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같은 사과였지만 어떻게 보면 아예 달랐다. 생각해보면 이지훈 집에 쳐들어갔던 때는 어른스럽지 못했다. 묵혀온 마음을 와르르 쏟아내고 도망치듯 떠나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이렇게 모든 걸 털어놓고 어른스럽게 헤어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함께 지낸 세월만큼 많은 것이 엮인 사이이니까, 털어낼 것도 많고.
“황당했을 거 알아. 당장 붙잡고 뭔 말인지 묻고 싶었는데 일 가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을 거고.”
“…….”
“그거 알면서도 그 시간에 일부러 찾아간 거라서, 할 말 없다. 비겁했던 것도 알고.”
“…….”
“전화는… 받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한 건지도 모르겠고.”
나는 어렵게 찾은 이성을 놓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눈을 마주한 채로, 최대한 어른 흉내를 냈다. 그건 내가 이지훈 앞에서 제일 못하는 거였다. 놈 앞에서는 늘 열여섯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지훈 앞에서 스물아홉 살의 나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열여섯 살의 지선욱이라면 못 할 말을, 스물아홉의 나는 해야 했다.
“이지훈.”
대화하자고 덤벼들 때는 언제고, 이지훈은 내가 말을 시작한 순간부터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놈의 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한 뼘 사이를 두고 서 있기 때문인지 생각에 잠긴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잘 보였다. 나는 의미 없이 침을 두어 번 삼켰다. 한참 그렇게 목울대를 움직이고서야 놈의 기대를 부술 용기가 났다.
“나 이제 너랑 친구 못 해.”
이지훈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고개를 떨궜다. 힘을 잃은 입술 사이로 바람 같은 말소리가 흘러나갔다. 그 선택지를 직접 버려주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우리 사이에 쌓인 시간이 무겁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오히려 우습기까지 했다.
내 잘못이다. 친구면 친구답게 굴면 됐는데, 저지르듯 사랑해버리고는 지겹도록 오래 끌어서.
“말은 이래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건 알아. 영수도 있고, 아버님도 계시고. 지금 당장 끊는 게 힘들면, 서서히 멀어지자. 서로의 집에도 더는 드나들지 말고, 연락도 줄이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익숙해지겠지.”
“…….”
“그런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잖아, 우리.”
‘다음은 뭐야. 이사 가기? 핸드폰 번호 바꾸고 잠적하기?’
이지훈의 질문을 곱씹었다. 이지훈이 그 질문을 한 건, 정말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임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이제 그런 것쯤은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이지훈이 예시로 든 것들은 내가 이미 그러려고 생각해둔 것들이었다. 내년 2월에 전세 계약이 만료될 예정인 집도 곧 내놓을 예정이고, 지방의 경찰서로 옮겨 근무하는 방법도 알아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가 됐다는 핑계까지 끌어오며.
그러니까, 난 도망치는 거였다. 이지훈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도망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지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지훈은 내가 평생 이 마음으로부터 도망쳐왔다는 걸 알까. 그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 되어서도 또 도망쳐야 하는 게 얼마나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일인지도.
“…미안하다. 이런 것까지 부탁해서.”
그러나 난 나를 추스르는 대신 놈에게 사과부터 했다. 그게 사랑은 아니었대도, 이지훈은 그만큼의 우정을 내게 내주긴 했다. 그게 숨 막힐 때도 있었지만, 나를 숨 쉬게 할 때가 더욱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옆에 있을 수 있다는 달콤한 핑계가 되어서.
이지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까는 입을 달싹대기라도 하더니,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없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기만 했다.
“난 지금 나갈 거니까 더 자. 내일도 집에 안 들어올 거니까 쉬고 싶을 때까지 쉬다 가고.”
몸을 돌렸다. 그때도, 지금도 이지훈 앞에서 눈물은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비상연락망이 너야.”
내 손목을 붙든 힘은 세지 않았다. 그런데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방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이지훈이 날 몸을 이용해 붙잡은 순간이었다. 힘보다는 가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스킨십이었다.
“입사 후부터 쭉 그랬어.”
“…….”
“나한테 뭔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조종한 비행기가 네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 오착륙해서 죽기라도 하면, 우리 아빠도 아니고. 죽은 엄마도 아니고.”
“…….”
“너한테 가장 먼저 연락이 간다는 뜻이야.”
고장 난 사람처럼 멈춰 섰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지훈이 손목에 힘을 주고는 날 끌어당겼다. 기껏 벌린 거리가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서 날 내려다보는 놈과 눈을 맞춘 순간에는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근데 선욱아.”
이지훈의 눈은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놈의 눈빛은 마치 갈 곳을 아는 것처럼 명료했다.
“난 그거 바꿀 생각 없어.”
그러니까…
“너 그딴 식으로 얘기하면 안 돼.”
“…….”
“내가 이야기하자고 한 건, 우리가 앞으로 못 본다는 결론은 빼고 말해 보라는 소리였어. 너 혼자 생각하고 끝낸 결론 다시 브리핑하라는 게 아니라.”
“…야. 이지훈.”
정신을 차리고 겨우 놈을 불렀지만, 이지훈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날 대놓고 무시했다. 잡고 있던 내 손목까지 놓은 놈은 몸을 아래로 숙였다. 아까 바닥에 내팽개친 종이봉투를 들더니, 떨어져 있던 셔츠를 하나씩 그 안으로 집어넣는 놈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뭘 물어야 할지 몰라서 멍했다.
“여기.”
이지훈이 묵직해진 종이봉투를 내게 건넸다. 받을 생각이 없는 내 손을 잡아 억지로 끈을 쥐여준 놈이 덤덤히 덧붙였다.
“경찰청 돌아가야 한다며. 가, 얼른. 나도 너 봤으니까 이제 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속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실은 방금 들은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지훈은 나를 지나쳐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대화하는 내내 함께 가라앉아 있던 알코올 향이 코끝을 스친 순간에야 정신이 들었다.
“야.”
결국은 내가 이지훈을 먼저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지훈은 내가 그럴 걸 예상했다는 것처럼 순순히 잡혀줬다.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내심 없게 물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바꿀 생각 없다는 거.”
“…….”
“내 말 못 들었어? 내가 분명 방금….”
당황한 나를 보면서도 이지훈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 말이 끝난 순간에야,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짧게 웃었을 뿐이다.
“들었어. 존나 잘. 근데 그렇다고 내가 따라야 해?”
“…….”
“그리고 나도 마음먹었거든. 이제 네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기로. 말 잘 들어 봐야 좆같은 결론이나 나는 것 같고.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나도 부탁 하나 하자.”
이지훈을 붙잡고 있던 손이 가볍게 밀려났다. 시선을 거둔 놈은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지훈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끝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귓가에서는 이지훈이 떠나기 전에 한 선전포고 같은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네 결론과 내 결론은 달라.’
‘…….’
‘다음에 볼 때까지, 넌 그 사실부터 이해하고 있어.’
* * *
이지훈을 다시 만난 건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늦었네?”
거실에 앉아 묻는 놈은 어느 날의 기억을 불러왔다. 사실 어느 날도 아니었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편하게 앉아서 고개를 돌리는 놈은 낯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수도 없이 본 풍경이었으니까.
“…뭐 하는 짓이야, 너.”
그러나 더는 볼 수 없어야 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이지훈과 관련된 흔적을 모두 몰아냈다고 믿었던 집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날 반기는 이지훈은 더욱 말이 안 됐다.
“너한텐 이게 다 장난 같아?”
그렇기에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서 이지훈의 신발을 확인한 순간부터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내게는 할 말을 고를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에 볼 때까지, 넌 그 사실부터 이해하고 있어.’
일주일 내내 생각했으나 여전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지훈은 나타났다. 그 사실부터가 이지훈의 결론과 내 결론이 다르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거진 감정으로 볼썽사나울 내 표정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이지훈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며 딴소리를 했다.
“나 악몽 꿨어.”
뜬금없는 서론을 내놓은 이지훈이 무릎 위에 얹어두었던 잡지 페이지를 넘겼다. 팔랑, 하고 종이가 성의 없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가 크게 그려진 잡지의 표지로부터 시선을 뗀 나는 이지훈이 신고 있는 실내화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실내화는 내가 산 것도, 이 집에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이지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랑 관련된 악몽이야.”
“…….”
“왜, 지금처럼 네가 나 쌩깠을 때 있잖아.”
이지훈이 꺼낸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다. 나조차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라서 그랬다.
다만 이지훈이 그때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처음이었다. 가끔 강영수가 추억팔이라도 하듯 그때 우리가 싸웠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당사자인 우리 둘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웠던 일이 머쓱하고 어색해서였다. 난 더했다. 그날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내게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이지훈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지훈이 합의라도 한 것처럼 서로 일절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근데 꿈에서는 그때랑 달리 우리가 화해를 못 하더라.”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하며, 이지훈이 보고 있던 잡지를 앞의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던졌다. 그제야 놈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거실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예상외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장소만 달랐을 뿐, 도망가고자 하는 사람과 보내줄 마음이 없는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풍경은 그날 새벽과 다를 게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이지훈이 더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너 그거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이지훈의 결론이었다. 의문형이 아닌 평서형의 문장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단단한 말에는 파고들 구석조차 없었다. 왜냐면, 그거야말로 이지훈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임을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놈의 모습마저 알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랑 연애 한번 한 적 없으면서, 뭘 보고 사랑이라고 단정해.”
“…….”
“네가 나랑 키스한 적이 있어, 아니면 섹스를 한 적이 있어. 하다못해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으면서.”
따지자면 못 했다. 너랑 손잡고, 키스하고, 섹스하려면 친구를 못 하니까. 그러나 이지훈은 그런 행위가 불가능했던 이유를 그게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 안 믿어. 서로를 연애 대상으로 인식한 후부터 사랑이든 뭐든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없어.”
말을 멈춘 이지훈이 내 눈을 빤히 보았다.
“너랑 내가 그런 적이 있었어?”
자신 있게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지훈을 사랑해온 방식은 그런 게 아니긴 했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것조차 곁에서 몇 년을 더 지내고서야 알았고. 날 한 번도 연애 대상으로 못 느끼는 놈을 대상으로 욕정하기까지 했으니까.
무슨 말도 할 수가 없는데, 처음으로 질문을 내놓은 놈은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지훈의 눈을 피했다. 잡지에 시선을 두고서야 겨우 입술을 달싹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
“…….”
“네 이해 바란 적 없어. 그런 걸 바랐으면 다신 보지 말자는 말도 안 했겠지.”
이 말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놈의 말처럼 사랑이 아님을 인정하면 옆에 계속 있어야 할 테고, 사랑인 걸 설득하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지훈에게 고백하는 그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그런 시도를 하는 내 모습은 상상해본 적 없으니까. 사랑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끝이리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이지훈은 잠깐 침묵했다. 처음으로 놈한테서 망설이는 기색을 느꼈다. 그러나 이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참지 않았다.
“왜 지금이야?”
순수하게까지 들리는 질문이었다. 마주친 눈빛에서 놈이 정말 궁금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내가 그 불친절한 질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인 게 슬펐고,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난 입을 열었다. 그건 지금 이어가는 대화 중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너랑 연애 이야기할 자신 없어.”
“…….”
“결혼하는 거 옆에서 지켜볼 자신도, 이런… 마음 가지고 네 가족 될 사람 볼 자신도 없어.”
이건 내 결론이었다.
평행선처럼 절대 만날 수 없는 결론을 두고 우리는 잠시간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침묵을 깬 건 이지훈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연애는 내가 먼저 질문했으니 그렇다 쳐. 결혼은 무슨 개소리야?”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 놈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결혼 이야기는 이지훈이 직접 꺼낸 게 아니었다. 강영수가 지나치듯 한 이야기에 자연스레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갔을 뿐.
“…영수가.”
“강영수가 뭐.”
“네가 신형 가전 출시 시기 물어봤다면서 결혼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 꺼내서 생각이 났어.”
이지훈이 대놓고 헛웃음을 쳤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영은이 결혼식까지 석 달 남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거 해주고 싶었어. 그 김에 강영수는 뭐 해줄 건지 떠보기도 하고.”
“…….”
“어떻게 그 말 하나에 바로 결혼까지 생각하냐. 아주 쌍으로 맨땅에 삽질하네. 신혼 가전용이라는 단어 들으면서도 곧 결혼할 자기 동생은 생각도 못 하는 놈이나, 그 헛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놈이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쏘아붙이는 폼이 열 받은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더했다. 버럭 화를 내거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게 약점이 되리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아는 것처럼. 이지훈이 웬만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나의 그 보잘것없는 고백이 어떤 식으로든 이지훈에게 상흔을 남긴 일이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결론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내 표정을 본 이지훈이 멈칫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한테 그 말 하기 전에도, 영수한테 다시 전화 와서 알고 있었어. 너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결혼하는 거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들었고.”
“…….”
“지금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런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어.”
어쩌면 이지훈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지훈과 사랑이란 걸 해본 적도 없으면서 짝사랑만 지겹도록 오래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속성은 빛이 바래서, 가끔 그 안에 뭐가 있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었다. 난 먼지인지 찌꺼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 결론 알겠어. 알겠는데… 그만해라, 이제.”
부탁인지 애원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먹먹한 한숨이 섞여들었다.
“나한테도 쉬운 일 아니니까, 이쯤 하자고 부탁하는 거야.”
“…….”
“조금이라도 멀쩡하게 끝낼 수 있을 때 끝내고 싶어.”
내가 들어도 허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우리가 함께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내가 이지훈이라도 허무하겠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중학교 때 방황하던 자신에게 정신 차리라고 오지랖을 부려대던 애가, 언제든 거리낌 없이 서로의 집에 쳐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 이십 대를 어떻게든 같이 지내고 서른 살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함께해왔는데.
그런 내가 자신을 계속 사랑해왔다고 한다면, 그래서 더는 볼 수 없겠다고 하면 믿기지 않겠지.
이지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얹어둔 손가락을 유리 위로 툭툭 두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바로 반박하지 못하는 걸 보니 내 말이 최선인 걸 느낀 듯했다.
“…그래. 끝내자.”
이지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끝내 그 말을 꺼내준 순간엔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드디어 끝났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파도처럼 덮쳤다. 나는 시선부터 피했다. 그래, 진작부터 이렇게 진행됐어야 할 일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대도, 그래도 이렇게나마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래. 조심히 가고. 영은이 결혼식 때는 어색한 티 내지 말….”
“어색할 이유가 뭐가 있어? 결혼식에 같이 갈 건데.”
“…뭐?”
이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은 내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마치 어딘가로 향하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는 놈의 등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지훈은 어느새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집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하나였다. 큰 행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 가끔 강영수나 이지훈이 오면 자고 가는 방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나를 돌아보더니, 다른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마치 그 안에 있는 걸 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방 안의 풍경은 집주인인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침대가 들어서 있는 것부터 그랬다. 큰 캐리어가 두 개,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상자 여러 개가 있었다. 어수선한 풍경이 막 이사라도 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방 안을 훑기가 무섭게 이지훈을 봤다. 기다린 것처럼 이지훈이 말했다.
“나 여기 살 거야.”
“…뭐?”
“말도 없이 욕조 개조한 윗집의 미친놈 때문에 물이 새서 공사해야 했거든. 기왕 할 거 앞당겼어. 그 김에 간단한 인테리어 공사도 같이 할 거고. 저번 주부터 공사 들어갔고, 두 달 정도 걸린대. 아까 너한테 집세 보냈는데 못 받았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으나 이지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참, 그리고 나 휴가도 냈다.”
과도하게 쏟아지는 정보 중에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알 필요도 없는 거였다. 방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말 우리가 끝을 낸다면.
“비행만 하느라 쌓아놓은 휴가가 꽤 되더라. 당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언젠간 쓸 일 있겠지 하며 미뤄뒀는데, 그게 지금인 거 같아서 바로 휴가계 올렸어.”
“…….”
“적어도 한 달간은 비행할 일 없어. 가끔 회사 간대도 비행 가는 건 아닐 거고.”
“…왜?”
겨우 꺼낼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너?”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이지훈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가오는 놈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놈이 쏟아낸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빙빙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이지훈은 우리의 발이 부딪치기 전에 멈췄다. 나를 빤히 보는 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면 그 악몽이 예지몽이 될 거 아냐.”
그제야 이지훈이 날 보자마자 한 말이 떠올랐다. 내게는 현실을 일깨우는 하나의 사건이었던 그 일을 이지훈은 악몽이라 칭했다. 그걸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거였나 보다. 그때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욕심으로 파헤치는 것 대신 묻어두었던 일 때문에, 우리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달이야.”
“…….”
“그동안 내가 증명할게. 네가 한 게 사랑이 아니었음을.”
“…….”
“그게 싫으면 넌 사랑인 걸 증명해.”
“…….”
“그러면 알게 되겠지. 누구 말이 맞는지.”
미친 소리였다. 그리고 미친 짓이었다.
“…제정신이야?”
아무리 내 고백이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대도 이건 아니었다. 친구의 선을 넘은 게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선조차 파괴됐다. 같이 살아? 휴가를 내? 겨우 나 하나를 친구로 붙잡겠다고? 현실성이 없다 못해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 이지훈은 지독할 정도로 무표정했고,
“싫어? 왜?”
난 놈이 지금 너무나도 진심임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한 번 말을 잃었다.
“어차피 넌 잃는 게 없잖아.”
이지훈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내 어깨를 잡은 놈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야. 나는 까딱 잘못하면 너 잃는데?”
“…….”
“너는 어차피 나 버릴 생각이었잖아. 이래도, 저래도 너한테 손해인 건 없는데 왜 그런 표정을 해?”
놀란 눈가가 떨려오는 듯했다. 나는 간신히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그새 잠긴 목소리가 볼품없게 흘러나갔다.
“이지훈. 이거 아니야.”
나는 그러나 목을 가다듬는 것 대신 한 번 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잠깐 이지훈이 멈칫한 틈을 타서, 붙잡힌 어깨부터 빼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지금 하는 말들, 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이라고. 아무리 당황스럽고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도 그렇지. 너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알기나 해? 이런 짓 하면서 말도 안 된다는 걸 진짜 생각 못 했냐?”
말이 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 차려. 평생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개소리하지 말고 돌아가. 강영수 집에 들어가든, 호텔로 가든 너 알아서 해. 돌아가서 네 인생 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렇게 당연하게!”
“…지선욱.”
이지훈이 말을 끊고 날 불렀다. 나는 허공을 헤매던 시선을 이지훈에게 고정했다. 그 와중에도 턱이 떨려오는 것 같아서 이까지 악물어야만 했다. 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차분한 얼굴을 한 이지훈이 묻는다.
“네가 없는데 그게 어떻게 내 인생이야?”
맥이 풀렸다. 그건 내가 뱉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입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이지훈이 말을 이었다.
“넌 정말, 내가 그 정도도 아닌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 시선을 맞받아치는 놈의 눈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런 반응을 할 것까지 예상했고, 그럼에도 이 일을 자행했다는 걸 티 내듯이.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본 이지훈이 피식대고 웃는다.
“선욱아. 이게 미친 짓인 건 옆집 꼬마도 알아.”
“…….”
“근데 내가 그냥 하겠다잖아. 기꺼이.”
꼭 선전포고같이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찬찬히 날 훑어보던 이지훈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시계를 확인하더니 덤덤한 말투로 덧붙이기도 했다.
“잠깐 회사 들어가야 해. 인계할 게 남아 있어서. 짐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좀 자도 되고. 다녀와서는 같이 야식이나 먹자. 배고프다.”
정말 동거인에게라도 하듯이 줄줄이 행선지를 고한 이지훈이 멀어졌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집에 들어온 순간 마주해야 했던 이지훈이라는 존재에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곳들을 돌아보았다. 이지훈이 선물해줬던 시계부터 시작해서 텔레비전 밑 서랍 위에 올려진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내가 버렸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떨리는 시선은 마지막으로 장식장 안을 확인했다. 나는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하나, 둘……. 습관처럼 기념품의 개수를 세던 행위는 27번째 비행 기념품에 멈췄다.
“…미친 새끼.”
내가 고백을 하고 나서 바로 떠난 비행에서도 이지훈이 비행 기념품 따위를 사 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난 비로소 깨달았다. 이지훈은 진심이었다.
걔의 결론과 나의 결론이 맞닿을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끝을 보기 전까지 놈은 절대 이 집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