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5)

0x5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가 있죠. 가만히 눈만 감아도 함께 갔던 곳, 함께 들었던 음악, 함께 먹었던 음식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사람이요. 함께한 추억이 많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추억에도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 사람과 만날 때마다 나는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 나이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에요.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있나요? 나를 다섯 살 아이로, 열다섯 살의 중학생으로, 열아홉 살의 고등학생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 언제라도 그 앞에 서면 그때 그 나이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하는 사람이요. 오후의 음악 광장도 여러분께 그런 아련한 감정을 선사하는 추억으로 남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전하며 오늘의 마지막 신청곡 띄워드립니다. 핸드폰 뒷자리 1516님이 보내주셨어요.]

별생각 없이 틀어둔 라디오인데, 오늘따라 클로징 멘트가 귀에 박혔다. 아마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피곤한 하루의 끝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이지훈이라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삶의 반을 지속해온 일이다. 싫었으면 마음을 이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올림픽 대로는 붐볐다. 마치 하나하나 추억을 되짚어볼 시간을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나는 핸들에 얹어둔 팔을 끌어와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이지훈을 처음 만난 날, 걔가 날 처음 껴안은 날, 소중한 친구라고 여겼던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어서 눈 뜬 채로 밤을 새워야 했던 나날. 내 인생과 거의 한 몸처럼 붙어 있어서, 떨쳐낼 용기조차 가지지 못했던 추억들.

이지훈

10월 17일 07:30 인천 출발, 싱가폴 도착 KE643편 /

10월 20일 10:00 싱가폴 출발, 인천 도착 KE612편 오후 11:39

오늘 근무 중 시간이 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지훈이 어젯밤에 보낸 메시지를 곱씹었다. 놈은 비행을 갈 때마다 비행 스케줄을 내게 꼭 알렸다. 덕분에 대화랄 게 많지 않은 우리 둘의 메시지 창에는 이지훈의 비행 스케줄만이 빼곡했다. 이지훈의 휴가 스케줄을 묻는 강영수에게 메시지를 확인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무슨 메시지?’ 되묻는 해맑은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이지훈이 내게만 이런 의무 없는 보고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 번도 그 이유를 물은 적은 없다. 보나 마나 특별한 이유도 아닐 텐데, 괜한 기대로 마음을 쑤시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 탓인지 이런 메시지를 받는 일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보내는 족족 놈의 스케줄을 외우는 나도 미친놈이지만, 꼬박꼬박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이지훈 또한 미친놈이었다. 특히 어제는 내가 이유 없이 자신을 바람맞혔는데도, 걔는 질책하는 것 대신 평소처럼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내일 셋이 한번 볼래?’

‘…….’

‘애인 데리고 와. 우리 한번 소개해줄 때도 됐잖아.’

오기로 이어간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나가야 했을 술자리였다. 알면서도 나가지 않았다. 약속까지 다섯 시간 정도 남았을 때 급하게 야간 근무가 생겨 술자리에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단체채팅방에 전했다. 이지훈을 쫓아낸 후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한 보람도 없이 비겁한 처사였다. 우는 이모티콘으로 대화창을 범벅하는 강영수와 다르게 이지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메시지 옆에 자리한 읽지 않음 표시 ‘1’은 원래대로라면 술자리에 참석했어야 했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라졌다.

강영수는 몰라도 이지훈은 알았을 것이다. 내가 또 이런 대화를 하는 걸 피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사실에 대놓고 화내거나 무시하는 것 대신, 평소처럼 이런 메시지를 보내오는 놈의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메시지를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따라 읊어보았다. 일곱 시 반 출발이면 오늘 밤은 일찍 자겠네. 새벽 네 시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할 거고. 벌써 자려나. 아니다, 보통 이 시간에 가볍게라도 뛰어야 잠들 수 있는 놈이니까. 어렵지 않게 놈의 스케줄을 예상하는 내가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게 설계된 우리의 삶부터 돌아보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일이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잘 모르겠고. 어떨 땐 그 관성에 대놓고 기댔다. 굳이 무언가를 손대지 않고도 이지훈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과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그 시간 동안 너한테 사귀는 여자 이야기 한 번 못 들어본 거에 대해 생각을 안 해 봤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마음을 감추는 데에만 기를 쓰느라, 놈이 오히려 그 사실을 의심쩍게 여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했다. 그래서인지 따지자면 쿡 찌른 것에 불과한 질문에도 모든 게 흔들렸다. 심지어 이지훈이 한 말은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걸 안다는 말도 아니었는데, 내가 게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그런 말이었을 뿐인데도. 마치 찔려서 지레 벌컥 화를 내는 사람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냐며 화를 내고, 없는 애인까지 만들어 보여주겠다는 약속까지 잡은 뒤 취소하기까지 했다.

나는 여전히 꽉 막혀 있는 도로에서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강영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반나절 전에 온 거였다.

강영수

아 맞다 어제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오후 3:05

이지독이 너 이번에 같이 못 봤으니까 비행 다녀오면 셋이 보자던데 ㄱㅊ?? 오후 3:06

“…아.”

그제야 알 것도 같았다.

강영수

근데 그 새끼 헛소리하더라ㅋㅋㅋ

네가 애인을 소개시킨다나 뭐라나 오후 3:07

(이모티콘) 오후 3:08

선욱씨 나 모르는 사이에 연애했니?

실망이야 헤어져ㅠ 오후 3:09

이지훈은 내가 어제 술자리에 나오지 않은 걸로 굳이 실망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우리 열다섯 살에 만났고, 내년이면 서른이야. 내가 너랑 만나기 전의 세월보다 만나고 나서의 세월이 더 길어진다고.’

이지훈의 가정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할 것이므로.

그날 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지훈이 강영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신호탄과도 같았다. 이지훈은 더는 이 문제에 있어 모르는 척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강영수

뭐야...진짜임...?ㄷㄷ 오후 3:13

누군데? 그때 배우 걔랑은 연락 안한다며 오후 3:14

이지훈이 내가 이미 강영수한테 커밍아웃했다는 걸 몰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인생 최초의 커밍아웃 상대가 강영수가 될 줄은 나도 몰랐고, 강영수도 몰랐었다. 이지훈과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강영수는 전화할 때마다 화해하라는 말을 추임새처럼 했다. 하필 내가 이지훈을 잊으려고 발버둥을 치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본 이지훈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누가 시키지도 않은 훈련까지 자처해가며 몸을 갈아 넣던 시절. 자존심 센 이지훈이 웬일로 숙이고 들어와 한 전화를 무시하고, 이지훈이 보낸 메시지마저도 모조리 씹을 때. 그래 놓고도 신경은 모두 놈의 연락에만 쏠려 있던 때. 한심함과 절망스러움에 스스로를 잠식시키던 그때. 멀리 떨어져 있던 이때마저 이지훈을 떨쳐내지 못하면 평생 이 마음을 갖고 가야 함을 직감한 나는 생애에서 가장 필사적이었다. 그 속도 모르고 자꾸만 이지훈 이야기를 하는 강영수가 반가울 리 없었다.

이지훈 이야기를 피하고 피하다 심지어는 자신의 연락까지도 무시하는 나를 보다 못해 학교 앞까지 찾아온 강영수가 알아 온 이래 처음으로 화를 냈다. 터미널 앞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서 자릿세로 시켜둔 햄버거를 얼굴로 집어 던지며 이딴 식이면 그냥 다 같이 절교하고 남같이 살자며, 오래된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쌍욕을 했다. 씨발놈, 개씨발놈, 의리도 없는 놈들. 쥐 죽은 듯한 단체채팅방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느라 나름 쌓인 게 있었는지 욕이 멈추질 않았다. 누군가를 해하는 욕에는 소질이 없는 놈이라 무섭지도 않고, 앞에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나까지 합해진 그림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근데도 눈물이 났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고개를 숙이자마자 감자튀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욱아, 너 설마… 울어?’

욕설이 멈췄다. 강영수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서 묻는데, 우느라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강영수 입에서 나온 ‘절교’라는 말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이지훈이랑 절교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중인데, 강영수가 이지훈이랑 절교라는 말을 같이 꺼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보니 가망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인 내가 너무 싫었다.

이런데 절교는 무슨 절교. 대체 어떻게 관계를 끊겠다고, 이렇게 얼굴 한 번 못 보는 상태에서도 이름만 들으면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서.

나중에서야 들었는데, 숨도 못 쉬면서 꺽꺽대고 우는 날 본 강영수는 정말 심장이 떨렸다고 했다. 친구들 화해시키겠다고 팔자에도 없는 센 척 한번 했다가 호되게 벌을 받는구나 싶었다고. 내가 우는 건 정말 할아버지가 죽을 때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걸 패스트푸드점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그 충격이 내가 게이라고 말한 충격보다 더 커서 강영수는 남자 놈들로 가득 찬 그 사람 많은 곳에서 나를 자꾸 껴안으려 들었다. 내 머리를 끌어안으며 울먹대고, 자꾸 괜찮다고만 말했다. 당황하면 목뒤에서 땀부터 나는 놈답게 땀 냄새가 배어나는 어깨에 머리를 박고 쪽팔린 줄도 모르고 울었다.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있으니 시선이 몰렸다. 다행히도 나보다는 먼저 정신을 차린 강영수가 내 뒷덜미를 잡고는 끌고 나왔다. 건물 뒤 흡연 구역에 선 강영수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싫어한다며 담배를 끊었다고 한 놈이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연달아 피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또 하나를 꺼내 드는 놈을 만류했다.

강영수는 왜 못 피우게 하냐는 것도 아니고, 왜 갑자기 자신에게 커밍아웃했냐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는 걸 물었다.

‘너 그것 때문에 이지훈이랑 싸운 거야? 그때 강릉에서.’

남자가 좋다고 했지, 이지훈이 좋다고 한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알아채고 묻는 걸까 생각한 순간, 강영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이런 고민 하느라 죽겠는데, 이지훈 그 새끼는 속 편하게 여자친구 이야기해서?’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이 상황에서마저 이런 선택지가 더 자연스러울 놈에게 커밍아웃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와 이지훈을 지켜본 놈조차 내가 이지훈을 좋아해서 일을 이렇게까지 끌고 온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내가 이지훈을 좋아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정답으로 고쳐줄 자신이 없는 나는 침묵했다. 입을 다문 나를 본 강영수는 그게 답임을 확신한 듯했다. 차라리 답을 알게 되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솔직히 나나 이지훈이면 그럴 수 있다? 근데 그 상황에서 네가 그렇게 뛰쳐나가는 건 존나 그 누구의 예상에도 없었다고. 너 그렇게 가고 나서 이지훈 그 새끼도 눈 빡 돌아 가지고 그날 밤에 지 여친이랑 통화하다가 개싸우고. 아오. 강릉까지 가서 바다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다음 날 눈뜨자마자 올라왔잖아.’

‘…….’

‘됐어. 다 지난 이야기 해서 뭐 하냐. 앞으로가 중요하지. 이 기회에 그냥 이야기하고 다 풀자. 서울 한번 와, 욱아. 재워줄게. 오랜만에 셋이 술 먹으면서 속에 있는 이야기 다 하고 속 시원하게 풀자. 이지훈한테도 되는 날 언제인지 물어볼 테니까, 하루만 시간 내. 응?’

멈칫한 나는 고개부터 저었다. 안간힘을 써 목소리를 쥐어짰다.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는 지독하게도 볼품없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애원이라도 하듯 말했다.

‘이지훈한테… 말하지 마.’

‘…야. 욱아. 그래도 그 새끼 그렇게 꽉 막힌 놈은 아냐.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인데.’

‘알아.’

‘아는데 왜-’

‘…내가 말할게. 내가 준비되면… 그때 말할게.’

강영수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에 대고 힘없이 고갯짓하던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라는 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지금은 싫어. 안 돼.’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서른을 앞둔 지금까지도 ‘그때’는 오지 않았다.

“아.”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에 황급히 코 밑을 훔쳤다. 살짝 가져다 댄 것뿐인데도 손가락 위로 빨간 피가 점점이 묻어났다. 최근 잦은 야간 근무 때문인지 코피를 흘리는 횟수가 늘었다.

조수석의 글로브박스를 뒤져 급하게 티슈를 찾다가 미러에 머리를 박았다. 자주 다니는 주유소의 이름이 박혀 있는 싸구려 티슈로 코를 틀어막은 순간, 뒤의 차가 경적을 빵- 하고 울렸다. 순간 시야가 짧게 흔들렸다. 그러나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가볍게 흔든 것만으로도 균형을 찾았다. 묵은 숨을 토하며 핸들을 잡고는 차를 출발시키며 이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목요일 밤이 내게 주는 교훈을 억지로 삼켜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미뤄왔다. 그건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 * *

“밤새웠냐?”

새벽부터 찾아온 나를 보고 놀랄 법도 한데, 이지훈은 익숙하다는 듯 묻기부터 했다. 새벽 3시라는 이례적인 시간조차 야간 근무 때문이리라 당연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놈이 열어준 문 사이로 발을 들였다.

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 잘 정리된 집 안을 훑었다. 하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집주인 때문인지 집은 당장 모델 하우스로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이런 집에서 살고 있으니 내 집에 올 때마다 그렇게 경악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입구 옆에 세워둔 캐리어 하나 외에는 튀는 부분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집은 꼭 이지훈을 닮았다. 허락을 받아야 들어설 수 있는 곳인 것까지도. 반대로 놈은 내 마음이든 집이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나는 눈을 거두며 그 사실도 함께 무시하려 애썼다.

새벽 3시 3분. 못해도 20분 안에 이지훈은 집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공항까지 운전해 갈 수 있을 테고, 늦지 않게 비행 준비를 마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놈의 사정을 뻔히 알고도 이 시간에 들이닥친 이유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자고 가라 해도 말도 안 듣더니 웬일이냐.”

“…….”

“잘 거면 거실 말고 내 방에서 자. 어제 매트리스까지 청소해서 깨끗해.”

근무하는 곳에서 우리 집까지의 거리보다, 이지훈 집까지의 거리가 더 짧았다. 그래서인지 이지훈은 피곤하면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도 된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제집의 도어락 번호를 아예 메시지로 보내놓기도 했다. 집에 누굴 들이는 것에 까다로운 놈이 답지 않게 너그럽게 구는 것치고 내가 이 집에 온 건 기껏해야 세 번 정도였다. 이지훈이 내 집에 드나드는 횟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횟수였다. 그 이유를 잘 아는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고 온 거 아냐.”

“그럼?”

나를 현관에 세워둔 채로 현관 옆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이지훈이 심드렁히 물었다.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며 출근용 옷맵시를 갖추기 위해 노력 중인지라 딱히 내가 뭘 하는지는 상관하지 않는 투였다. 새벽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유독 낮은 것 빼고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잠깐 답을 고민하다 아직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손을 뻗었다. 집 안에 들어서기 전에 복도에 잠깐 내려두었던 상자를 끌어와 품에 안았다. 놈이 예상한 것처럼 야간 근무를 하진 않았지만, 밤을 새운 건 맞았다. 이 시간까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였다. 집 안을 둘러보며 상자 안에 추억이 담긴 물건을 담았다. 늘 언젠가 하겠지 생각하며 미뤄두었던 일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어진 순간에야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역설적이게도 차분해졌다.

대답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한 올의 머리카락조차 튀어나오지 않고 고르게 정돈된 놈의 얼굴은 단정하기 그지없어서, 새벽 내내 들춰보던 추억 속의 얼굴과 자연스레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입술 새로 어처구니없는 웃음부터 샜다.

나는 정말 많은 네 얼굴을 사랑해왔구나 싶어서.

우리는 정말 함께 컸구나. 그랬기에 모든 걸 끝내려고 선 이 순간, 나는 네가 어떻게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는지를 생생히 그려볼 수 있는 거겠지.

그래서… 아니, 그러니까 이제는 더는 함께할 수 없는 거겠지.

마음을 숨기는 대가로 네 옆에 서 있길 택했던 내가 그것까지는 욕심내면 안 되니까.

“뭔데, 이거?”

상자 안을 흘깃댄 이지훈의 눈이 의아한 빛으로 물든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두고 간 이지훈의 속옷이며 장식장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비행 기념품까지 모조리 담고서도 상자 안에는 공간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지훈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것들까지 그 안에 구겨 넣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무슨 모양으로 쪼그라든 건지도 모를 마음이라든가.

“맞아.”

어디가 시작인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나를 보며 설핏 인상을 찡그렸던 이지훈은 금세 표정을 정돈했다. 더 말해 보라는 듯 기다리는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입 안에서 사막같이 말라붙은 혀를 움직이는 순간에야 나는 내가 지금 뭘 하려는지를 온전히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와 하는 후회는 의미가 없다. 이지훈도 바라지 않을 테다.

“나 남자 만나.”

이지훈은 예상했던 것처럼 그 흔한 멍한 표정조차 짓질 않았다.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뭐라도 말할 것처럼 입을 열려는 놈을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지훈이 뭔 말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들을 말보다는 앞으로 할 말이 중요했다.

“근데 너한테 여태까지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안 한 건.”

이지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너무나 오래되어 녹이 슬어버린 것 같은 고백을 꺼내 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열아홉 살에, 스물세 살에. 그리고 언젠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날이 오면 그때는 꼭. 그러니까, 한 번쯤은 말이야. 내가 내 입으로 너한테 직접 말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한 남자가 너였거든.”

이지훈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치 어떤 근육을 움직여서 반응해야 하는지조차 까먹은 듯한 놈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뤄뒀던 고백을 하는 이 순간은 결국 열아홉도 아니고, 스물셋도 아니고, 내가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순간도 아니라는 게.

난 결국 이 순간마저도 이지훈을 너무 사랑해서 이딴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은 오래 준비할수록 퇴화하듯 알갱이가 점점 작아진다. 나는 오랜 시간을 지나 작아지고 또 작아진 말들을 모으고 모아 뱉었다. 멋대가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심심한 이 고백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언이라는 점에 그나마 위안을 얻으면서.

“하필… 내가 제일 오래 좋아한 남자가 너라서.”

“…….”

“그래서 그랬다. 미안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놈이 직접 상자를 받을 것 같지는 않아서 결국 상자는 바닥에 내려둬야만 했다. 몸을 숙여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야구공이었다.

‘기념으로 너 해라, 그냥.’

네가 연습을 하며 수도 없이 던져본 공과 별다를 바 없는 발언이었을 텐데, 그 말은 내 인생에 길게 남았다. 대체 뭘 기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 야구공을 지겹도록 오래 보고 또 보았지. 그래서인지 이 야구공에는 이제 흙 대신 마음이 얼룩덜룩 묻었다. 나는 이제야 네 말을 따를 수 있게 됐다.

이 마음을 끝내는 기념으로 이 공을 돌려줘야겠다, 네게.

그때 펜스 위를 날던 공조차 몰랐을 테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오래 간직하리라고는.

미련의 집합체처럼 똘똘 뭉친 공 안에 마지막 미련을 불어넣는다. 열다섯의 추억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 갇혀서 더는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니까.

“우리… 연락하지 말자, 이제.”

얼떨결에 야구공을 받아든 이지훈의 표정이 묘해진다. 잠깐 의아해하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굳어버린 얼굴. 마치 이게 왜 이 상자에 담겨 있는지를 막 눈치챈 것처럼.

이지훈이 야구를 그만둔 건 열다섯 때의 일이다. 내가 그 야구공을 간직해온 건 14년이 됐다. 그렇기에 이 야구공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 둘만 알 수 있는 사인이 됐다. 이지훈은 포수의 사인을 알아채고도 차마 공을 던질 수 없는 투수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겨우 입을 열어 나온 말은 희미했다. 뱉으면서도 그 사실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이거 혹시….”

나는 놈의 말을 끊었다. 이지훈, 하고 부르면서.

“앞으로 못 할 것 같은 말들이니까 그냥 지금 말할게.”

“…….”

“결혼 축하한다.”

몇 시간 전 강영수랑 통화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놈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그랬다. 이지훈 여자친구랑 헤어졌대. 우리 회사 가전 신제품 물어본 거는 그냥 궁금했던 거였나 보더라고. 그래? 몇 초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나는 그 사실에 영원히 무뎌질 수가 없구나. 이지훈이 결혼할 때까지 앞으로도 이런 고문 같은 행위를 몇 번은 더 반복해야 할 것이다.

이지훈이 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는지 아닌지를 매번 추측하는 일 따위에 신경을 갉아먹혀 가면서. 전에는 연애 이야기를 안 하기라도 했지, 이제 나와 연애 이야기마저 툭 터놓고 하겠다는 놈은 내게 그런 이야기까지도 빠짐없이 털어놓을 것이다. 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지훈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말해야 했다. 그것이 사랑보다는 내 한계를 고백하는 것일지라도.

“결혼식에는 부르지 마라. 내가 아무리 상판이 두꺼워도 이런 고백까지 해놓고 거기 서서 축의금 받고 있을 염치까지는 안 된다.”

“…야.”

이지훈이 처음으로 말을 끊고는 내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은 이미 내가 무엇을 말할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친구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몇 번의 고비가 떠올랐다. 그때마다 날 붙잡은 사람이 오히려 이지훈이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이지훈이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해 아득바득 붙어 있던 건 나인데, 이지훈은 그 반대인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아무리 친해도 고작해야 결혼식장에서 축의금 받아주는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놈한테 뭘 바라는지.

“기장 달 것도 미리 축하하고.”

“…….”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몇 년 안에는 되지 않겠냐. 그보다 빠를 수도 있고.”

앞으로 이지훈의 삶에 있을 굵직한 일들을 미리 축하하며, 제때 놈의 옆에서 축하하기 위해 죽여두었던 마음을 되살렸다. 하나를 죽여야만 하나가 산다는 것 자체가 이 마음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하며.

“그니까 내 말은… 잘 살라고. 지금처럼.”

“…….”

“이런 말 안 해도 잘할 거 아는데…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에는 이지훈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이지훈의 표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끊고 뒤로 물러섰다.

“간다.”

뭐라 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열어둔 문 사이로 발을 끼워 넣고 몸을 내뺐다. 등 뒤에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내가 도망칠 준비를 마치는 동안에도 뒤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놈이 따라올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나는 그 새벽의 아파트 복도를 뛰어야만 했다. 숨이 막힐 때까지 뛰고서야 내가 방금 14년의 추억으로부터 도망쳤음을 알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견디지 못하고 쿨럭 기침한 순간 코피가 터졌다. 어제와 달리 휴지조차 없는 나는 빈손으로 코 밑을 대충 훔치며 빠르게 걸었다. 차는 일부러 이지훈이 사는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이 아닌 먼 곳에 주차해놨다.

주차해둔 차에 타서는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골랐다. 닦지 못한 코피가 아래 발 매트로 뚝뚝 떨어졌다. 뒤늦게 떠올랐다. 이 발 매트 또한 이지훈이 선물해준 것이었음을.

‘차 꼴이 그게 뭐냐. 세차 한번 해주려다가 식겁했네. 제일 좋다는 걸로 갈았으니까 오래 써. 관리 좀 잘하고.’

이것도 상자 안에 챙겨 넣었어야 했다는 것을 잊었다.

그러나 지금 알았어도 내가 이걸 이지훈에게 들고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끄윽….”

첫사랑을 버린 자리에서 나는 눈물을 토해냈다.

방금 모든 걸 잃었다. 그때도 지금도, 난 준비되지 않았는데.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