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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1권) (1/25)

파이브 바이 파이브(5x5) 1권

prologue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마주쳐도 이지훈만은 마주쳐선 안 되는 날이 있다.

손에 꼽을 만큼 힘든 날이 주로 그랬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얼른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린다던 사람들과는 퍽 달랐다. 나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앞에서 이지훈을 떠올렸으니까. 할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듣고 온 날, 직장에서 일이 이상할 정도로 안 풀리던 날. 그런 날에 너덜너덜한 꼴로 이지훈의 앞에 서기라도 하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놈에게 절대 들킬 수 없는 것을 가진 나로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이지훈의 존재는 이 순간 차라리 독에 가깝다.

“늦었네?”

배를 긁으며 심드렁히 묻는 놈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옷까지 갈아입은 걸 보니 이미 도착한 지가 꽤 된 모양이었다. 거실에 걸린 옷부터 시작해 시선이 가는 것들마다 온통 이지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요 며칠 몰아친 야간 근무로 바빠 치우지 못한 집이 이상할 정도로 깔끔했다. 이지훈의 손길이 닿았다는 뜻이었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놈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친구 집 청소라는 것은 놈을 15년 가까이 알아 온 내게는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장식장이었다. 뭐 하나 볼 것 없는 거실에서 유일하게 값을 들인 장식장 안에는 이상한 물건들이 나란히 줄 세워져 있었다. 장식장 안의 물건 개수까지 세고 있는 멍청한 새끼가 나라서 이지훈이 새로운 물품을 추가해뒀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26번째 비행 기념품. 첫 비행 때부터 꾸역꾸역 사 오는 놈과 요청한 적조차 없는 기념품을 고이 받아 진열해두고 있는 나 때문에 갈수록 개수가 늘었다. 굳이 이제 와 그 이유를 묻고 또 대답을 들을 사이는 아니라, 난 오늘도 수납장에서 시선을 떼며 퉁명스럽게 묻기나 했다.

“밥은.”

“치킨 시켰어. 씻고 나와. 같이 먹게.”

소파에 누워 심드렁히 말하는 꼴이 집주인은 저놈인가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 오늘따라 유독 거슬리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세 가지 악조건이 겹쳤기 때문이겠지.

길고 긴 하루였다. 삼 주 만에 보는 이지훈의 얼굴조차 달갑지 않을 정도로.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조치는 이미 다 한 것 같습니다. 사실상 더 이상의 의료 행위는 의미가 없는 상태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언제까지만 붙들어야 그게 미련이 아니라는 걸 인정받을 수 있을까. 서울에서 가장 시설 좋고 비싼 병원에 할아버지를 입원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했던 게 아득히 먼 시절의 일처럼 느껴졌다. 진료 예약에만 3개월이 걸린다는 명의를 만나고, 의식조차 없는 할아버지를 동그란 통 안에 넣어 갖가지 검사를 받게 하며 느꼈던 안도감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상담 후 병실로 돌아가 잡은 할아버지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를 위해 돈을 내는 건데도, 몸 전체에 빽빽하게 붙어 있는 이 생명유지장치만 없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찰나의 증기같이 느껴져서 마음이 저렸다. 더 견디지 못하고 병실을 나서려던 나를 붙잡은 건 화장실에서 돌아온 간병인 아주머니였다. 그녀가 다른 간병인을 구하는 건 어떻게 되어가냐고 넌지시 물으며, 최근 들어 팔이며 다리가 유독 말썽을 부리는 탓에 더는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재차 말했다. 이 병원에 오면서부터 할아버지를 돌봐준 사람이었다. 그새 깊어진 눈가의 주름을 보는데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죄송하다고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간병인을 구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에 접속했다.

75세/남/의식불명 상태

거기까지만 적었는데도 차마 더는 쓸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내가 아무것도 적지 않으니 깜빡대기만 하는 커서가 꼭 할아버지의 목숨같이 느껴졌다. 끝끝내 아무런 게시물도 올리지 못한 채로 핸드폰을 닫았다.

다들 그만하라고 둘러말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의식을 되찾을 일이 없을 테고, 너 혼자 서서히 죽어가는 그 노인을 놓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너만 놓으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을 테니 부디 미련을 버리라고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고작 이런 생명유지장치를 달아놔 생을 연장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는 할아버지까지도.

‘집에 가고 싶다.’

할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가 한 말들은 대체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의식을 잃기 전,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가 한 말조차 그랬다. 집에 가고 싶다고. 병원에서 죽느니, 집에서 죽고 싶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를 견딜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집에 가면 병은 어떻게 할 거냐고,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말라고. 화를 내는 나를 본 할아버지는 다시는 그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나는 그가 여전히 같은 것을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침묵하는 노인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주곤 하니까.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화장실 밖의 발소리에 이지훈이 여전히 거실에 있음을, 그리고 거실로 나가면 놈을 마주해야 함을 떠올렸다. 자꾸만 내가 처한 상황을 주입시키듯 떠올려야 할 정도로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이럴 때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봤자 좋은 일이 생길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막 비행에서 돌아온 애를 이유 없이 몰아낼 자신이 없다는 게 참담했다.

이 또한 지겹도록 학습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울 속 누추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덜떨어진 놈을 외면했다.

“대충 입고 나오지, 뭘 또 다 챙겨 입고. 기다리느라 다 식었다, 새꺄.”

이지훈은 욕실에서 나온 날 보자마자 핀잔부터 던졌다.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 놓인 치킨에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내가 머리를 털며 상 앞에 앉자마자 이지훈이 젓가락을 뜯어서 건넸다. 젓가락을 건네받으며 정면으로 보이는 녀석의 상체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저런 반나체 정도야 대충 무시할 수 있게 됐다는 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만루로 들어옵니다.]

집에 들어올 때부터 틀어져 있던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야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닭 다리를 씹던 이지훈이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저 새끼들이 나보다 연봉이 높다니….”

생각할수록 열 받는지 들고 있던 뼈로 화면을 겨냥하는 놈을 흘긋 봤다. 표정을 보니 입에서 나올 말이 뻔했다.

“이거 인셉션이냐? 가기 전에도 지고 있었는데 오고 나서도 지고 있네. 스코어도 똑같잖아, 이 씨발.”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게 빠를 거라고 했지.”

대충 대답하며 닭 조각을 집으려다 문득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졌다. 봉지에 적힌 치킨집 이름을 그제야 발견한 탓이다. 대쪽 같은 취향은 어쩜 이렇게 변하지도 않을까. 이 집에 놀러 온 첫날에 시켰던 치킨집을 2년이 지나도 고집하는 놈은 이지훈밖에 없을 거다. 장식장 안의 물건처럼, 냉장고 옆에 붙을 자석이 하나 더 늘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바닥을 쳤다.

이지훈은 떠나겠지만 냉장고 자석은 남는다. 붙이는 놈과 버리는 놈은 다르다. 마치 기념품을 사 오는 놈과 간직하는 놈의 마음이 다른 것처럼.

지긋지긋했다. 바닥을 기는 성적의 야구팀조차 바꾸지 않고, 같은 치킨집을 2년째 고집하는 놈을 두고 무얼 바라나 싶어서. 어차피 바뀌지 않는 건 나도 같았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굳이 곱씹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면 될 텐데. 평소에는 잘하는 짓이 오늘따라 유독 버거웠다. 이 순간에도 이지훈이 남기고 갈 것들만 생각하고 있는 것만 봐도.

때마침 집어 든 맥주가 김이 다 빠져 있던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지훈을 잠깐이나마 외면할 좋은 핑계를 찾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놈의 시선이 따라왔다.

“어디 가.”

“맥주 가지러.”

“가 봤자 없는데? 사 와야 해.”

“네가 못 찾은 거 아니고?”

“그럴 리가. 냉장고 청소까지 했는데.”

뭐?

친구 집 거실 청소 해주는 건 그렇다 쳐도, 냉장고 청소까지 해주는 건 심히 이상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깨를 으쓱하는 놈의 얼굴에서는 딱히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리할 것도 없던데, 뭐. 여전히 밥 거르는 게 취미인 모양이시고.”

“…….”

“말 나온 김에, 밥 좀 잘 챙겨 먹어. 너나 나나, 이제 어리지도 않아. 뼈 삭는다고. 정신 차리고 관리해야 해.”

잔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냉장고를 확인차 열어 봤지만, 맥주는커녕 이지훈이 냉장고를 탈탈 뒤집어놓았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다. 허무하게 자리로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물었다.

“딴 거 볼래?”

김빠진 맥주를 든 채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동시에 화면이 바뀌었다.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이게 너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면 말이 안 돼. 이렇게, 네가 다른 누구 만나는 거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은 게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믿어.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하잖아.]

나도 모르게 시선이 들렸다. 스크린 안의 얼굴부터 그 뒤로 보이는 풍경, 대화까지도 익숙하다 했더니 영화관에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였다.

‘형. 이 영화 감독님이 꼭 보고 오랬어. 심지어 과제도 주더라. 보고 감상문 제출하래.’

함께 본 사람마저 생각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다섯 커플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끝내는 모습을 병렬식으로 담아냈었다. 영화에 나온 다섯 커플 중 한 커플만이 동성 커플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5분의 1.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20%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늦은 시각 용산의 큰 영화관을 적잖이 채우고 있는 수많은 커플 중 남자와 남자가 영화를 보러 온 이들은 우리 둘뿐인 걸 생각하면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용도 나름대로는 현실적이었다. 평소라면 영화 중간중간 나를 돌아봤을 놈조차 그 커플이 나온 후부터는 꼼짝도 하지 않고 영화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영화에서 나온 모든 커플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같은 장소에서 찍었는데, 그 동성 커플 또한 그랬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은 처음에 만났던 장소에서 헤어지기까지 했다. 둘 다 남자인 것만 빼면 별다를 것 없는 이별이었다. 이별 앞에서 서로 조금이라도 덜 나쁜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어느새 앞에는 얼음이 다 녹은 음료만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아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둘의 대화가 끝났을 즈음 그들의 앞에 놓인 음료는 시켰을 때의 상태 그대로 조금 탁해져 있기만 했다.

헤어지는 장면이 끝인 줄 알았는데, 영화는 둘이 헤어지기로 합의한 후 한 명은 자리를 뜨고, 다른 한 명이 자리에 남는 모습까지도 보여줬다. 왜인가 했더니 새로운 등장인물이 있었다. 그들이 카페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해서 지켜봤던 카페 손님 중 하나가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남자에게 가서 번호를 물어봤다. 익숙하게 고개를 저으려던 남자는 멈칫하고는 자신의 전 애인이 된 사람이 지나가는 창밖을 한 번, 앞에 선 여자를 한 번 번갈아 봤다. 남자는 끝내 마음을 바꾸고 자신의 번호를 여자에게 넘겼다. 남자와 사귀기 전, 여자와도 만난 과거 때문에 사귀는 내내 애인에게 필요 이상의 불안감을 안겨준 그였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긴, 그가 이전에 여자랑 헤어졌을 때는 그러자마자 누군가 다가와 번호를 묻지는 않았을 테니까.

영화가 끝나고 차에 탈 때까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방금 본 영화를 생각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 감상문 안 쓸래.’ 차에서 내리기 전 놈이 대화를 종결하듯 한 말에는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영화를 누군가와 함께 본다는 건 생각보다는 큰일 같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영화 내용보다는 같이 본 사람의 얼굴부터 생각나는 걸 보면. 다음 장면을 생각해보던 나는 본 체도 하지 않던 리모컨부터 집어 들어 채널을 옮겼다.

“왜? 나 보고 있는데.”

이지훈이 리모컨을 뺏어가 채널을 돌려둔 건 예상외의 행동이었지만.

[네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

[뭐 내가 증명이라도 하길 원하는 거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줘, 그럼.]

[야.]

[네가 말해주는 방식 그대로 할게.]

저렇게 유치한 대화도 했었나. 나름대로 절절한 장면인데 보잘것없는 둘의 마지막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우습기만 했다. 헛웃음 소리가 꽤 컸는지 이지훈이 옆을 돌아봤다. 왜? 의아하다는 듯 묻는 놈은 내가 웃은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는 이지훈의 시선을 피해 눈부터 내리깔았다.

“그냥.”

문득 이 상황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잖아. 남자 둘이 저러는 게.”

사람이 방어적으로 변할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나를 지켜야 할 때. 두 번째, 나 아닌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

방금은 그 두 가지가 합쳐졌다. 거기다 난 이지훈과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이유로 나도 두 남자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 정도야 가볍게 숨기는 놈이었다. 인생의 반을 남자들이 드글드글한 곳에 살면서 자연스레 익힌 처세술이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리모컨 줘.”

채널과 함께 대화의 주제라도 바꿀 요량으로 이지훈에게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이지훈은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는 놈이 새삼스러운 건 아닌데 이런 대화를 하다 말고 그런다는 건 신경을 긁었다. 우리 둘은 스무 살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암묵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이지훈이 갑자기 이렇게 구는 게 짜증 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긴 한가 보다. 그냥 넘길 법한 일도 오늘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지훈이 치킨이든 뭐든 얼른 먹고 꺼져줬으면 했다.

“다른 거 보자고. 재미없으니까.”

리모컨을 잡으려는 행위가 또 실패했다. 내가 손을 뻗지 못할 곳으로 리모컨을 던져둔 이지훈의 시선은 내가 아닌 텔레비전에 박혀 있었다. 남자 배우 둘이 붙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화면을 보는 놈의 턱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넘어간 후에야 입 안이 빈 놈이 묻는다.

“뭐가 웃긴지 모르겠는데, 대체. 남자 둘이 저러면 안 되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대답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서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응시했다. 이지훈이 낯설었다. 이지훈도 내가 낯설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취했냐?”

심장이 내려앉는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할 일을 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놈의 말을 받아치면서도 빠져나갈 구멍부터 바삐 찾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들킬 것 같은 일이 생기면 바로 꽁무니를 내빼려는 듯이.

“…….”

“…….”

순식간에 조용해진 우리 때문에 창밖의 소음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오토바이가 요란하게 밤의 거리 위를 운전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지훈의 눈과 코 그 사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거실의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은 평소와 달리 아무런 세팅도 하지 않은 이지훈의 머리카락을 하늘하늘 흔들고 있었다. 낮에는 여름 같고, 밤에는 꼭 가을 같은 날씨였다. 경계에 선 듯한 미지근한 바람은 놈의 머리를 참 부드럽게도 헤집었다.

수없이 본 풍경이었다. 난 이럴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흉내 내듯 눈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깜빡였다.

“어휴, 새끼 하여간.”

침묵을 깬 건 이지훈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던 놈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졌다. 아주 잠깐 복잡해 보이던 표정이 말끔히 사라진 얼굴은 김이 빠진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지지부진하고 바뀌지 않는 야구팀의 성적을 보던 때처럼.

“어려워, 존나.”

“…….”

“말할 준비 안 된 거면 됐다. 치킨이나 먹어라.”

대놓고 한발 물러서 주는 놈을 보는데, 순간 뒷목이 서늘했다. 이지훈이 리모컨을 뺏은 순간 느꼈던 불안한 예감이 현실화됐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누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일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발길을 트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난 입을 열었다. 그 안이 영영 알 수 없는 어둠이라 해도, 그 뒤에 이지훈이 있다면 난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야.”

이지훈과 연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오래된 일이었다. 스무 살부터 시작되어 어느 순간에는 그게 당연한 불문율처럼 자리 잡았다. 나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시간을 내서라도 친구를 봐야만 하는 놈과 그런 놈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내게, 연애란 건 마치 절대 내 입으로 먼저 꺼내서는 안 되는 대화의 주제처럼 느껴졌으니까.

적어도 이지훈에게는 그런 이야길 할 수 없었다. 뭘 말해도 진심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연애하는 도중에도 이지훈의 그림자 하나 깔끔히 숨기지 못해서 번번이 시시하게 차이는 내가 이지훈에게 연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리가. 거기다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할 거라면 내가 남자를 만나는 이유부터 까야 했다.

그 이유조차 이지훈과 관련된 거였기에 차라리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길 택한 거였다.

그런데 이지훈이 우리가 그랬던 이유를 내가 게이라는 데서 찾았다면, 내가 남자를 만나는 것까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면. 그게 내가 자신에게 연애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눈감아 줬고 지금처럼 파고들지 않았던 거라면.

“무슨 뜻이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는? 미련할 정도로 지켜온 이 관계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겨우 떠오르는 질문들조차 마구 뒤엉켰다.

“말할 준비가 됐냐는 거, 무슨 뜻이냐고.”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던 이지훈 턱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걸 보며, 목 안의 가시를 뱉어내듯 물었다.

“몰랐는데, 내가 너한테 뭐 말해야 할 게 있었냐?”

내가 듣기에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물은 순간 이미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기회는 지나쳤음을 실감했다. 이지훈 또한 나를 빤히 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것처럼. 마주친 시선이 길어졌다.

“…….”

“…….”

나는 피의자를 심문할 때나 쓰던 표정을 뒤집어쓴 채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표정이라는 것을 소거한 채로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는 숨조차 안으로 삼켰다. 상대를 떠보면서도 그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될 때 하는 짓이었다. 습관처럼 하던 행위를 의식해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야 내가 지금 잔뜩 긴장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밤은 이미 우리의 예상과는 한참을 빗나간 곳을 노리고 있었다. 난 이지훈이 그 방향을 노리고 화살을 쏘았을지, 아니면 이 밤의 어떤 구석이 날던 화살을 제멋대로 이쪽으로 휘게 했을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이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 씨….”

손을 올려 이마를 긁던 놈이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대화를 시작하고 놈이 처음으로 비친 곤란한 기색이었다. 아주 잠깐 어쩌면 여기서 대화를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말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 놈을 본 순간 그 기대는 흔적조차 없이 희미해졌다.

“야.”

우습게도 겁부터 집어먹었다. 직감했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칼을 보면서도 일단 맞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별생각 없이 서 있던 내가, 곧 이지훈의 입에서 나올 말에 흠씬 두들겨 맞고 말 거라는 사실을.

두터운 예감은 함께한 시간을 기반으로 한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답게, 알고 지낸 세월 동안 말을 망설이는 걸 몇 번 보지 못했다.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진다. 놈이 앞으로 꺼낼 이야기는 반드시 무언가를 동강 낼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든, 관계든, 마음이든. 어쩌면 그 모두를 한꺼번에.

“우리 열다섯 살에 만났고, 내년이면 서른이야. 내가 너랑 만나기 전의 세월보다 만나고 나서의 세월이 더 길어진다고.”

진작 아슬아슬했던 대화가 더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이지훈이 선을 당기고서야 나는 내내 같이 걸어오고 있다고 믿었던 우리가 실은 뒤에 내내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음을 알았다.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엉킨 선이었다. 그렇기에 모르는 척하는 게 낫겠다고 서로를 속일 수 있었던 질긴 끈.

“내가 그 시간 동안 너한테 사귀는 여자 이야기 한 번 못 들어본 거에 대해 생각을 안 해 봤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이지훈이 지금 잡은 선은 내가 한 번도 놈의 앞에서 내보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거였다. 그 선의 끝에 어떤 썩은 감정이 있는지도 모른 채 이지훈은 내게 아직 때가 타지 않은 흰 부분을 내밀고 있었다. 붙잡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걸 붙잡기 위해서는 엉킨 부분부터 풀어야 했다. 내가 그 선을 등 뒤로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털어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참 뒤늦은 후회를 했다. 최악을 달리던 컨디션부터 시작해, 유독 오늘따라 좋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경과, 몰아치던 일터에서의 하루까지 모여 만들어낸 흉작이었다. 그냥 지나갈 수 있을 일을 키우고, 심지어 파고들었다.

왜 그런 겁 없는 짓을 했을까. 이렇게 말문이 막히고 말 거면서. 피의자를 대하듯 놈을 대하지도 못할 거면서.

간신히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관리하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다일 거면서.

굳은 나를 본 이지훈의 표정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네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

“…….”

“말할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이야기 꺼낸 거면 미안하다.”

날카로운 질문의 끝부터 뭉툭하게 만들며, 이지훈이 순순히 사과했다. 나를 상처입히려고 한 질문은 아니라는 걸 강조라도 하듯이.

“네가 이 주제를 먼저 꺼내길래 이제는 준비가 된 줄 알았어. 남자 둘이니 뭐니, 말도 안 되게 깎아내리는 거 혹시 내 눈치 보느라 그런 건가 싶어서 이번 기회에 말하고 넘어가자 싶었고. 아니었으면 됐어. 너 편할 때 네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이야기해.”

수없이 미리 이 상황을 그리고 생각이라도 해본 것처럼 줄줄 뱉는 말에는 오히려 비참해졌다. 자존심도 강하고, 어디서든 말싸움이라고는 지지 않는 놈이 자꾸 한 걸음 물러서 주는 건 내가 이 패를 깔 자신이 없다는 걸 이미 눈치채서일 터였다.

난 이 순간마저 이지훈의 좁은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건 기분이 좆같은 일이었다. 얼마나 좆같았냐면,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잃을 것 없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연애 얘기 꺼낸 적 없다는 것만으로 생각이 바로 내가 남자를 만나는 쪽으로 갔다고.”

이지훈이 멈칫했다. 놀란 표정으로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차분하게 날 기다리는 게 일단 내가 하려는 이야기부터 들어주려는 것 같았다. 얘가 이렇게 대놓고 져주는 와중에도 나는 터무니없는 패자고, 얘는 승자였다.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이 순간엔 그 사실이 유독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나를 괴롭게 한 수많은 일들 중에 이 일이 최악인 것 같다. 그게 겨우 이지훈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나를 할퀴었다. 나는 더는 아무것도 내줄 수 없는 사람처럼 여유 없이 받아쳤다. 이지훈 들으란 듯 대놓고 비웃기까지 하면서.

“그냥 네가 연애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고?”

이지훈이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팔짱을 낀 놈의 시선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놈의 시선을 받았다.

“내가 연애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적합하진 않지. 가끔 강영수 하는 말 들어보면 네가 딱히 연애를 잘하는 편도 아닌 것 같고.”

“웃기는 새끼네. 넌 뭐 잘하냐?”

‘형은 평생 그러고 살 거야?’

이지훈의 말 위로 더빙처럼 겹쳐지는 목소리를 애써 지워내고는 답했다.

“너보다야 나을 것 같은데.”

팔짱을 푼 이지훈이 고개를 뒤로 젖혀 크게 웃었다. 그도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놈이 이내 고개를 짧게 저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그 와중에도 피식대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짓을 이어 하는 얼굴을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나보다 연애 잘하는 지선욱 씨는 지금 연애 중?”

“…….”

“얼레. 진짜?”

책임지지도 못 할 짓 하지 마, 지선욱 이 미친 새끼야.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다. 안전바처럼 나를 붙드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멈췄지만, 이지훈은 망설임에 가까운 그 침묵조차 긍정의 뜻으로 오해한 것처럼 이어 물었다.

“강영수는 아냐?”

나조차 모르는 가짜 애인을 강영수가 알 리가. 애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오해임을 말할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 나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게 고작이었다.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린 이지훈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렇게 묻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내일 셋이 한번 볼래?”

“…….”

“애인 데리고 와. 우리 한번 소개해줄 때도 됐잖아.”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고개가 돌아왔다. 거절할 것 같았는지 이지훈이 기어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너 여태까지 한 번도 안 했잖아, 그런 거.”

강제성이 있는 말도 아닌데, 아니라는 말이 쉽게 안 나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기롭게 뱉었던 발언부터 모두 주워 담아야만 했으니까. 널린 쓰레기들을 망연히 내려다보는 나 대신에 이지훈이 맥주를 홀짝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차피 나도 할 이야기 있었고. 잘됐네.”

할 이야기?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얼마 전 강영수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진짜 결혼할 수도 있을 것 같던데? 우리 회사 가전 신제품 언제 나오냐고 물어봤다니까.’

지겹게도 끌던 끝이 다가오는 순간은 놀랍도록 평소와 같았다. 마치 지금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온갖 탈것의 소리들처럼, 장식장 안에 기념품 하나가 올라간 그 사소한 무게처럼, 냉장고 옆에 치킨집 자석을 붙이는 그 의미 없는 행위처럼. 익숙한 일상을 깨고 아무런 징조 없이 다가왔다. 나는 이 방의 모든 정적을 뚫고 날 꿰찬 예감을 패배자처럼 받아들였다.

“…그래.”

토할 것 같았다. 난 그 생각이 들자마자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그러든가, 그럼.”

앞에 놓여 있던 상을 발로 슬쩍 밀며, 이지훈의 눈을 피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방금 저지른 거짓말보다 더 큰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후퇴해야 했다.

한참 늦긴 했어도, 지금 물러선다면 도망칠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터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라.”

“어딜.”

“네 집.”

“나 자고 갈 건데?”

“아니. 가, 그냥.”

당연히 그러리라 추측했음에도 애초에 그런 선택지 따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난데없는 축객령에 눈을 홉뜨는 놈의 팔을 잡아 일으켜 현관으로 밀었다.

“야. 야, 야. 씨발. 나 운전 못 해. 술 먹었잖아, 아 좀!”

“대리 불러.”

당황한 티를 내면서도 이지훈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나는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이지훈의 허벅지를 툭툭 차면서까지 놈을 현관으로 무작정 밀어냈다.

가끔 앞뒤 없이 쳐들어오는 강영수와 이지훈을 내쫓을 때 했던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그때와는 달리 이유 없이 쫓겨나야 할 놈은 황당할 테지만, 나 또한 지금은 그런 것까지 걱정해줄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고 어떻게 나가, 새꺄. 옷도 덜 입었는데!”

난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가 보이는 곳에 잘 걸려 있던 이지훈의 옷을 대충 가져와 품에 마구잡이로 안겼다. 순식간에 신발장으로 밀려난 놈이 두 손을 황급히 쳐들고는 협상이라도 하자는 것처럼 외치는 소리를 무시해가면서.

“나 신발! 신발만이라도 제대로 좀 신자, 어?”

“삼 초 준다.”

“구두를 어떻게 삼 초 안에 신냐. 너무하네, 진짜.”

그래도 더는 몸싸움을 걸지 않는 걸 보니, 버텨 봐야 어차피 잠을 자고 갈 수는 없으리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상황을 파악한 이지훈은 엄살을 부리면서도 구두 안으로 발을 잽싸게 넣고 있었다. 나는 감시하듯 서서는 팔짱을 꼈다.

“일.”

“야, 근데 이렇게 급하게 쫓아내는 건 진짜 좀 오바인데?”

“이.”

“애인이라도 와? 이제는 더 숨길 것도 없다, 뭐 이런 거야?”

이지훈이 예고 없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뒷목을 잡고는 제게 가까이 끌어당기는 손. 그 단단한 손을 내 뒷목에 둔 채로 능글맞게 웃는 놈의 오른쪽 볼에는 오늘도 인디언 보조개가 푹 패어 있었다.

환하게 웃을 때야 볼 수 있는, 더는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내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과거의 흔적.

“와, 그런 거면 선욱아.”

“…….”

“너 진짜 의리 다 뒤졌네?”

어쩌면 이제 내게는 정말 과거로만 남을지도 모르는 것들. 나는 그 흔적에서부터 시선을 떼며, 입을 달싹였다.

“…벌써 십 초는 지났겠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 얼른.”

문을 열고, 이지훈을 그 사이로 밀었다. 그 틈에 이미 구두를 신고 어깨를 한 번 돌릴 여유까지 챙긴 놈이 문 틈새로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얼굴을 빼꼼 내밀어 사람 속을 뒤집는 것도 잊지 않고서는.

“그렇게 좋냐?”

이지훈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내고는 문을 닫았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편이었다. 잠깐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는 이유만으로, 복도로 쫓겨난 이지훈이 옆집 사는 꼬마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까지 꼼짝없이 듣게 되었다.

“어, 경찰관 아저씨다!”

“나는 파일럿 아저씨야.”

“아, 맞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래. 이 시간에 어디 가니?”

“친구들이 같이 놀재서요.”

“이 시간에?”

“네. 근데 아저씨. 왜 바지만 입고 있어요?”

“아저씨 수영 가려고.”

“근데 왜 또 셔츠 입어요?”

“응. 생각해보니 이렇게 가면 길에서 경찰 아저씨한테 잡힐 것 같아서.”

“아저씨 친구처럼요?”

“그렇지. 그나저나 넌 참 궁금한 게 많구나?”

“네. 어린이들은 원래 그런 거래요.”

“누가?”

“우리 엄마가요.”

“응, 그래. 그렇게 아저씨 옷 다 입을 때까지 서서 구경할 거니? 친구들 기다릴 텐데.”

“종민이가 3분 늦는다고 톡 와서 괜찮아요. 그래서, 아저씨 친구는 어딨어요?”

“경찰 아저씨? 아저씨는 집에 있어.”

“근데 아저씨는 왜 가요?”

“응. 경찰 아저씨가 자기 애인 온다고 나는 그냥 꺼지래.”

“꺼져요? 헉. 그거 나쁜 말 아니에요?”

“맞아. 왜? 네가 보기에도 좀 쓰레기 같아?”

저게 진짜….

“그나저나 아무리 쓰레기 친구라도 차 키는 줘야 할 텐데, 그리고 내가 대리를 부를 수 있게 핸드폰도 주어야 할 텐데. 개쓰레기 친구야, 듣고 있니?”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 옆 작은 탁자 위에 줄지어 놓여 있는 이지훈의 핸드폰과 차 키를 발견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는 핸드폰과 차 키를 낚아채듯이 쥐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은 익숙했다. 말소리만 들어도 예상가던 꼴 그대로 서 있는 옆집 꼬마와 이지훈을 발견한 순간에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 경찰 아저씨다!”

“어, 안녕.”

반갑게 손가락질하는 이웃집 아이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주며, 물건을 쥔 주먹으로 이지훈의 등부터 쳤다. 예상했다는 얼굴로 뒤돈 이지훈이 빙글대고 웃었다.

내가 둘의 대화를 듣다 이렇게 나오게 될 것을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우리 쓰레기 왔니?”

방음이 되지 않는 집인 걸 뻔히 알면서도 부러 복도에서 큰 소리로 떠들던 놈다웠다. 차마 애 앞에서 욕은 할 수가 없으니 경고하듯 눈짓하고는 문을 닫았다. 이 정도면 가겠지. 옷도 대충 다 챙겨 입은 눈치고.

“어, 이거 경찰 아저씨 차다. 꼬맹아. 우리 반포대교에서 경찰과 도둑 한번 찍어볼까?”

고개를 돌리자마자,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자동차 키 케이스에 박힌 로고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 것은 아니니 놈의 것일 터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여간, 지독한 새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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