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story 2.
힘멜이 한스를 찾아온 것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어둑한 저녁이었다.
정확히는 ‘찾아왔다’기보다는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한스와 더불어 일했던 그는, 사람들이 다 퇴근하는 와중에도 미적거리며 남아 있는가 싶더니 한나마저 돌아가 그들 둘만 남게 되자 “저어……, 한스,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라며 무겁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의논? 그래, 좋지. 무슨 일이야? 음, 일단 저기 앉아서 얘기할까?”
한스는 속으로 ‘드디어!’라고 쾌재를 부르며 힘멜을 집무실 한쪽의 테이블로 이끌었다.
힘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한스가 알아챈 것은 지난주부터였다. 어쩌면 그 전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 힘멜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기색으로 쳐다보는 걸 한스가 알게 된 건 지난주였다. 그것도, 지난달 굵직한 건수의 일거리가 들어와 정신없이 바빠서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던 한스에게 눈치 빠른 한나가 귀띔을 해 줘서야 눈치챘다.
‘한스. 힘멜이 요즘 좀 이상한데, 뭐 짐작 가는 거 없어요?’
‘힘멜이? 이상해요? 왜요?’
적대시하고 있는 두 강대국의 모 정부 부처 수뇌 사이의 은밀한 접선에 대한 자료를 훑어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한스에게, 한나가 혀를 차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얼마 전부터 계속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틈만 나면 당신을 쳐다보고 있잖아요?’
한스는 그제야 한나를 보았다. 그런 뒤 무심코 힘멜의 자리로 눈을 돌린 그는, 한나의 말마따나 어둡고도 불안한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힘멜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기 무섭게 움찔하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리는 힘멜의 뒷모습을 보며, ‘그러게요, 이상하네요.’라고 그는 중얼거렸고 한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죠?’라고 대꾸했다.
‘굳이 먼저 물어봤다간 힘멜의 성격에 외려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릴지 모르니까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라고 한나와 의견일치를 본 한스는 그 뒤부터 힘멜의 그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을 말없이 견디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꾹 참고 기다린 끝에, 오늘에야 힘멜은 결심이라도 한 듯 드디어 한스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아무도 없는 집무실의 드넓은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은 힘멜에게 손수 차까지 끓여 건네주면서 한스는 다정하게 물었다.
장고 끝에 한스에게 말을 걸고서도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로 찻잔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기만 하던 힘멜이 겨우 입을 뗀 것은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간신히 넘긴 뒤였다.
“그,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말인데요.”
“……!”
그거였나.
한스는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했던 마음이 약간 풀어짐과 동시에, 한편으로 묵직하게 얹히는 가슴을 슬슬 쓰다듬었다.
힘멜은 타르텐의 젊고 유능한 인재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정식으로 타르텐에서 일하게 되어 얼마 전까지 아시아에 머무르며 타르텐을 돕던 그는 몇 달 전 귀국해 드레스덴의 본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각국을 돌아다니며 험하게 구른 것치고 힘멜은 대단히 올곧은 젊은이였다. 유능하고 명석할 뿐 아니라 심성까지 반듯하고 상냥한 그를, 한스는 내심 재목감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한스가 불의의 사고로 한 달 동안 입원해야만 했을 때 자신의 업무 일부를 힘멜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때 문제가 생겼었나 보다. 아니, 굳이 문제랄 건 없지만.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신호를 무시하고 교차로를 지나가던 차량에 들이받혀 한 달간 입원하게 된 한스는 리하르트를 보좌하는 일 약간을 힘멜에게 맡겼다.
물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무량에 파묻혀 있는 리하르트를 전적으로 보좌할 수는 없었고, 정규 업무 시간 이후의 보좌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그 정도라 해도 보통 사람들의 배쯤은 더 과한 업무였지만― 힘멜이 맡아볼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리하르트는 힘멜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스는 퇴원 후 업무로 복귀한 뒤에도 아무 걸릴 게 없었는데.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스도 알고 있죠?”
힘멜이 한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한스는 차를 마시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 그 1.
타르텐가의 같은 항렬 친척 형제.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 그 2.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마찰을 빚으며 원수처럼 지내 온 앙숙.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 그 3.
그런데 어느 사이에 은밀하고 내밀하게 엮이기 시작한 관계.
1번은 타르텐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관계이고, 2번도 타르텐을 좀 더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3번에 이르러서는 외부적으로 딱히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리하르트와 가까이 지낸다 할 만한 이들이라면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일이었다. 눈치를 채고서도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 회피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그중 하나인 한스는 어둡고 무거운 낯을 하고 있는 힘멜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힘멜은 일단 말을 꺼내고 나자 간신히 가두고 있던 둑이 터진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한스가 없는 동안 리하르트의 곁에 있으면서 저 3번 관계를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긴 여태 해외에 나가 있느라 저 1번과 2번 정도까지만 알고 있었을 힘멜에게 3번의 관계는 당연히 놀라울 만도 했다.
아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곤혹스러워 할 일인가.
한스는 힘멜의 저 반응에 되레 곤혹스러웠다.
물론 한스도 처음 저들 둘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때 당황하긴 했다.
다른 이들도 아닌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다.
같은 하늘을 지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으르렁대며 가끔은 진심으로 목숨을 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둘이었는데, 심지어 지금도 겉보기로는 독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관계인데, 그런 둘이 알몸으로 열렬하게 부둥켜안고 뒤섞이는 상황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한스 역시 우연히 직접 그 현장을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힘멜이 놀라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저렇게까지 어둡고 괴로워하는 얼굴이라니.
힘멜이 알고 보니 호모포비아였던가. 힘멜의 종교가 뭐였더라. 아니면 아예 발상을 전환해, 사실은 힘멜이 저 둘 중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
다채롭게 머리를 굴리던 한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찰에 알려도…… 소용없겠죠?”
불현듯 바싹 소리 낮춰 속삭이는 힘멜의 말이 한 박자 늦게 귀에 들어왔다.
“응? ……경찰?”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단어에 한스는 눈을 껌벅이며 어벙하게 중얼거렸다. 힘멜은 여전히 심각한 낯으로 혼잣말처럼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요. 그전에 먼저 리하르트를 설득해 보긴 해야겠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과연 그가 납득해 줄지…….”
“아니, 잠깐, 힘멜. 경찰이라니,”
“물론 아무런 시도도 해 보지 않고 대뜸 그럴 수는 없겠죠. 그리고 경찰에 알린들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것도 알아요. 아무렴, 그들이 어떻게 리하르트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당사자인 크리스토프가 과연 증언을 하고 싶어 할지도……. 아, 세상에.”
“잠깐, 이봐, 힘멜?”
허공을 보며 탄식하던 힘멜이 번득 한스를 쳐다보았다. 그 심각한 눈빛에 한스는 말문이 막혔다.
“한스. 저는 리하르트를 존경해요. 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모든 일들을 철두철미하게 잘 다루는 사람은 없지요. 그가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가 모르겠어요? 고작 한 달 남짓 그의 곁가지 일이나 거들었던 저도 녹초가 되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정말로 감탄스럽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에요, 인정해요. 사적인 부분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결함이니까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하지만!”
“……이봐, 힘메,”
“물론 저도 알죠. 그가 크리스토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요. 저도 크리스토프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단 말이에요. 아니, 굳이 따지자면 싫어한다고 해야겠죠. 그 잔인함, 냉혹함,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온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성정. 그래요, 저는 그에게 아무런 정도 없어요. ……그래도!”
“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강간은 안 되잖아요?!”
한스가 끼어들 여지도 주지 않고 줄줄이 말을 늘어놓던 힘멜은 점점 더 격앙되던 끝에 분연히 외쳤다.
“……응……? ……강……,”
머릿속이 하얘진 한스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힘멜이 부릅뜬 눈으로 한스를 쳐다보았다.
“한스, 몰랐어요?”
“어……, 어……?”
“하긴 그래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힘멜은 길게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파묻은 그는 초조하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들이 그런, 육체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사이인 줄은 알고 있었어요. 타르텐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작했죠.”
의외로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았구나. 하긴 타르텐에서 굴렀으면서 그 정도 눈치가 없었을 리는,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 둘이 그런 사이가 되었을까 이상하고 놀라웠죠. 하지만 리하르트가 워낙 성품이 좋은 사람이니, 크리스토프가 감화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아니, 눈치가 좀 없는 듯도 싶다. 하긴 나도 리하르트의 보좌를 맡기 전까지는 리하르트가 성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었지……. 먼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한스였다.
“그들이 사이가 좋다면 무슨 관계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뭐 어때요? 서로가 좋다면 좋은 일이죠. ……하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여기까진 한스와 생각이 같았다. 서로가 좋다면야 무슨 관계든 아무렴 어떨까. 그래서 한스도 군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 둘의 내밀한 관계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할 거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째서 이토록 고뇌하는가 하니,
“오, 세상에, 한스……, 그게 아니었어요.”
갑자기 힘멜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면?”
저절로 초조해진 한스가 다그쳐 물었다.
“강간이었어요, 한스. 그건 강간이었다구요.”
“――.”
한스도 우연히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일부러 본 것은 아니었고, 설마 자정 넘은 시각에 집무실에서 그들이 그런 몹시 개인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잊어버린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현장을 맞닥뜨렸던 것이다.
원래 리하르트의 성향이 어느 일각에서는 상변태라 불릴 정도로 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울며 매달리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서로 간에 합의된 성적인 취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서로 취향이 그런 것 아닐까? 가벼운 플레이를 하던 중이었다든가.”
“아니에요. 그건 결코 합의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요! 크리스토프는 진짜로 괴로워하며 울고 있었고,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가 소리치지 못하게 입을 강제로 틀어막고 있었어요! 소리도 못 내게 입을 틀어막은 채 그 짓을 하고 있었다구요!”
오, 세상에, 그때 내가 도왔어야 하는데……, 나는 비겁한 놈이야, 너무 놀라고 두려웠던 나머지 그대로 돌아 나오고 말았어요, 도와줬어야 했는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선량한 청년을 내려다보며 한스는 아연해졌다.
*
기실 한스는 리하르트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정착하기 전, 그가 사귀었던 여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이미 암암리에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상변태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개인의 취향인 데다, 어쨌든 합의된 관계라면 성인 남녀가 무슨 일을 하든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내고 있던 어느 날.
크리스토프가 한스를 찾아왔다.
‘한스.’
여느 때와 같이 뭘 생각하는지 모를 무표정하고 냉랭한 얼굴을 한스는 의아하게 마주보았다.
‘으응?’
자신과는 딱히 교분이 없는 그가 여길 왜 찾아왔을까.
그래도 예전만큼 거북하진 않았다. 리하르트 때문에 꾸준히 얼굴을 보는 사이에 이 인간도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 백정인 것만은 아니구나 싶게 되었다.
‘몇 명한테 물어봤는데, 네가 제일 정상적이고 일반적일 거라는 데에 중론이 모였어.’
‘……?’
그러나 원활한 대화는 어렵다. 가끔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거든…….
‘뭔지는 몰라도 고맙군. 그런데 뭐가?’
‘성적인 취향이.’
뿜을 뻔했다. 뭔가 마시고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뿜었을 거다.
한스는 공연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훔치며, 여전히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거 고맙군. 그래, 그래서?’
몇 명이라니 그게 대체 몇 명이고 또 누구일까, 내 성적인 취향을 그들이 어떻게 아는가, ……아니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매우 일반적이고 보통일 것 같긴 하지만.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
‘……뭘.’
이 예측할 수 없는 대화가 왠지 무서워졌다. 등줄기가 서늘하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침묵하던 크리스토프가 못마땅한 듯이 입을 연 것은 몇 초쯤 지난 뒤였다.
‘사실 나는 어떤 행위가 일반적이고 어떤 행위가 일반적이지 않은지 정확히 몰라. 그래서, 네가 알려 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성적인 행위에 대해 알려 달라. 어떻게? ――순간 아주 무서운 상상이 떠올랐으나 황급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한스였다.
바로 그 순간 리하르트가 외부 손님을 응대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등 뒤에서 그가 유심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싹했다.
아냐. 절대 아냐. 난 절대로 크리스토프에게 흑심 따위는 품은 적도, 품을 일도 없다고. 이놈이 아무리 조각상처럼 생겨먹었다 해도 난 절대 아냐, 난 정상적이고 일반적이니까!
한스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은 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뜸을 들이며 침묵하던 크리스토프가 툭 말을 던졌다.
‘시청각 자료를 좀 줘.’
‘……응?’
잔뜩 긴장해 움츠리고 있던 한스는 다시금 눈을 껌벅였다.
‘네가 보기에 정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싶은 걸로, 시청각 자료를 몇 개만 좀 내놔. 그러면 나도 어떤 행위가 보통의 범위에 들어가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시청각…….’
성적인 행위에 대한 시청각 자료.
설마하니 아동용 성교육 영상을 달라는 건 아닐 테고, 요는 야동을 내놓으라는…….
‘……, ……, ……갑자기 왜?’
아득해지려는 정신줄을 억지로 붙들고 한스가 물어보자, 조금 전보다 더 오래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벌레 씹은 듯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리하르트가, ……보통 이런 것쯤은 다들 한다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하는데, ……이상해서.’
‘이런저런…….’
‘……yam을 몸속에 바르고서 그걸 하는 게……, 보통이야?’
진지하게, 사뭇 심각하게 물어보는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일순 울 것 같은 빛을 띤 건 기분 탓일까.
‘yam……?’
계속 이상한 단어가 나오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나올 이유가 없는 단어들이 나오고 있어.
yam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엊저녁에 동양식 만찬을 즐기는데 메뉴로 참마를 갈아 만든 샐러드가 나왔었지, 참마를 직접 강판에 갈았더니 손이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다고 주방에서 엠마가 투덜거렸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그걸 왜 몸속에 바르고, 그런 뒤에 뭘 했다는…….
‘――.’
거기에서 한스는 생각을 멈춰 버렸다.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한스의 낯을 읽었는지 크리스토프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보통 아니지?! 가끔 특별하게 즐기고 싶을 때에 모두들 흔히 하는 거라더니, 리하르트 이 사기꾼 개새끼가……!’
‘잠, 잠, 잠깐,’
낯이 붉어지더니 당장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돌아 달려 나가려는 크리스토프를 한스는 황급히 붙들었다. 크리스토프가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고 있는 게 무엇일지 두려웠다.
‘아, 아, 아냐. 그렇게, 아주 드문 일은, 아냐. 그 정도는 가끔씩들 하곤 해, 아마.’
나는 해 본 적 없지만. 하고 싶지도 않지만.
‘정말이야……?’
미심쩍게 돌아보는 크리스토프의 주머니 안에서 비죽하게 튀어나온 실루엣이 보였다. 주먹으로 콱 움켜쥐고 있는 저 비죽한 건, 칼이다. 분명히 칼이야. 그리고 지금의 리하르트라면 무방비하게 크리스토프한테 두 팔을 벌리고도 남을 터.
유혈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스는 애써 웃었다.
‘그럼, 그럼. 가볍게 자극도 되고, 그렇잖아? 좀…… 가려웠겠지만.’
‘――좀이 아냐. 지독하게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오죽했으면 내가――.’
크리스토프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엔 억울함과 서러움마저 섞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냐, 상상하지 말자.
다들 미쳤어, 그런 걸 보통으로 한다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분통을 터뜨리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다시 씻은 듯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한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이야,’
그 으스스한 말투에 한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놔. 시청각 자료.’
‘시청각 자료라니, 무슨,’
‘어떤 게 일반적으로 하는 짓들인지 내가 좀 알아 둬야겠어. 얼른 줘. 빨리.’
‘――지금? 당장? 아니……, 집무실 컴퓨터가 누가 그런 걸 넣어 놔!’
한스가 항변하자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시계를 본다. 그 역시 떠날 때가 되었다. 주말을 보내러 엊그제 베를린으로 왔다가 이제 곧 드레스덴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평소에는 저녁 전에 떠나는 걸 생각해 보면, 이미 늦은 셈이다.
‘알았어. 메일로 보내 줄게. 서너 편이면 되지?’
결국 한숨을 내쉰 한스는 두 손을 들며 말했고, 잠깐 고민하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더. 잘 알아 둘수록 좋지. 한…… 열 편쯤.’
‘열 편? 오케이. 2, 3일 안에 보내 주겠어.’
한스의 대답에 그제야 만족한 듯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얼마 있지 않아 크리스토프의 차가 저택을 나서는 게 창밖으로 보였고, 그때까지 넋 나간 듯 멀거니 서 있던 한스는 그제야 의자에 도로 털푸덕 주저앉고 말았다.
리하르트,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데리고 대관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입속으로 앓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한스는 컴퓨터를 켰다.
야동……, 야동 검색이야 어렵지 않지.
그중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건……, ……널리고 깔렸다.
어차피 휴일 밤이라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도 대충 다 정리되었던 참이다. 한스는 한숨을 쉬며 하릴없이 야동을 고르기 시작했다.
‘집무실 컴퓨터라고 없으란 법 있나……, 웹하드도 있는데. 쟤는 어째 그런 것도 모르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동영상 몇 가지를 내려받던 때였다.
‘뭐하는 거지, 한스?’
소리 소문 없이 어느새 뒤에는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일순 움찔한 한스였지만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 보니 크게 놀랄 기력도 없었다. 무엇보다, 따지고 보자면 자신이 지금 이러고 있는 원흉이 이 남자 아니었던가.
‘……, 넌 안 가렵냐?’
한스가 스산하게 돌아보며 묻자 리하르트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무시무시하게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빠른 이 남자는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아, 크리스토프와 그런 얘기를 나눴나?, 하고 그가 비뚜름하게 웃는다.
‘그야 나도 가렵지. 듬뿍 발라 준 데에다 넣었으니까. 그놈에게 발라 주고 그 모습을 한동안 즐기다가 넣었으니 그놈보다야 훨씬 덜했겠지만, 나도 가렵긴 했어.’
‘……넌 그 가려운 걸 어떻게 참았어?’
‘참아? 어째서?’
‘……. ……. …….’
그래, 안 참았겠지. 크리스토프가 하룻밤 새 바싹 야위었던 게 떠올랐다.
떨떠름한 낯으로 입맛을 다시며 다시 컴퓨터로 고개를 돌리는데, 한스의 어깨 너머로 리하르트가 몸을 숙이는 기척이 났다. 그의 손이 한스 대신 마우스를 쥐더니 파일들을 살핀다.
‘그래서, 네가 이 시간에 여기서 지친 얼굴로 이런 걸 뒤적이는 게 그놈이랑 관련이 있나 보지. 왜, 참고 자료 좀 달라던가?’
하여간 눈치는 백단이다.
‘어떤 게 정상인지 좀 알아야겠단다. ……적당히 해 둬. 가엾지도 않아?’
혀를 차며 리하르트를 돌아보던 한스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의 눈매가 서늘해지는 게 보인다.
‘전혀 가엾지 않아, 한스. 그놈과 나의 관계에서 총체적으로 따지자면 가엾은 사람은 나일걸.’
‘……네가 왜.’
‘그놈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얼마나――.’
리하르트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입매가 씁쓸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혀를 차고 만다.
한스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얼마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얼마나 애타고 있는지, 바로 곁에서 그를 봐 온 한스가 모를 수 없다. 가끔은,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해 알지도 못하는 크리스토프가 잔인하다고 여겨질 만큼.
이 남자는 죽도록 열렬하게 크리스토프만 보고 있었다.
‘어찌 됐든, 좋아. 마침 잘됐군. 크리스토프도 좀 배워 두긴 해야겠지. 그래, 잘된 일이야.’
리하르트가 열려 있던 웹하드의 폴더를 멋대로 열어 보며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괜히 자신의 비밀을 들키는 것 같아 당황한 한스가 어이, 야, 하고 말리기도 전에, 무작위로 몇 가지를 열어 대충 넘겨본 리하르트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래. 네 취향이야 이렇겠지. 그러니 크리스토프가 널 찾아왔을 테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는데 왠지 욕 같은 기분이 든다…….
‘얼마나 보내 주기로 했지?’
‘어? 열, 열 편.’
열 편, 하고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골라서 네게 보내 주도록 하지. 그걸 크리스토프에게 줘.’
‘엉?’
‘크리스토프가 참고 자료로 쓰기에 적합한 영상을 내가 찾아서 네게 줄 테니, 그걸 크리스토프에게 전해 주라고.’
‘…….’
물론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진 말아야겠지, 라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는 리하르트에게, 한스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은 채 더듬더듬 말했다.
‘그걸……, 내가 주는 것처럼 해서……, 주라고?’
리하르트가 태연하게 어깨를 추어올린다.
‘그러잖아도 그놈이 너무 뭘 몰라서 천천히 가르쳐 가려니 감질나던 참인데, 잘됐어. 그놈도 좀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지.’
‘……뭘 주려고?’
‘그놈 수준에 적당한 걸로.’
‘아니, 잠깐, 그럼 내가 뭐가 되냐…….’
막 항의하려던 한스의 어깨를 리하르트가 부드럽게 잡았다. 뱀한테 붙들린 개구리처럼 움찔한다.
‘한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뱀의 혓소리 같다.
‘네 역할은 나를 돕는 게 아니던가? 나는 바쁘고 일이 많아. 다른 데에 신경 쓰일 일이 생기면 그걸 없애는 게 네 역할이지. 그러지 않으면 일에 분명히 지장이 생길걸. 내 일이든 네 일이든.’
꿀꺽, 한스는 마른침만 삼킬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가볍게 한스의 어깨를 두드려 준 리하르트는 곧 몸을 떼고 돌아섰다. 괜찮은 걸로 골라 봐야겠군, 오늘밤 안에 보내 주겠어, 라고 남기는 말소리가 왠지 흥겹다.
삽상하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한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
……그리고 비겁하게도 권력에 짓눌린 한스는 리하르트가 그에게 건네 온 영상 몇 가지를 말없이 크리스토프에게 전송하고야 말았다.
그 영상이 대관절 어떤 건지 궁금해서 슬쩍 하나 켜 봤지만, 대충 중간쯤 켠 영상에서 대뜸 웬 젊고 해사한 청년이 ‘제발! 제발 그걸 좀 넣어 줘! 그 큰 걸 제발 나한테 좀 쑤셔 박아 줘! 더, 더 깊이! 더 세게! 제발!! 진짜로 미쳐 버릴 것 같아!!’라고 눈물콧물로 울부짖으며―대체 앞에 무슨 내용이 있었던 건지, 결코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구로 고정되어 잔뜩 벌어져 있는 엉덩이를 뒤흔드는 장면을 보고는 재빨리 꺼 버렸다.
무서웠다.
저런 걸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영상이라 생각하며 보게 될 크리스토프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차마 진실을 전해 줄 수도 없는 스스로의 얄팍한 비겁함을 꿀꺽 삼키며 한스는 그 영상들은 두 번 다시 볼 생각도 않고 자신의 전송 기록에서 지워 버렸다.
미안해, 크리스토프.
그래도 꼭 내 탓을 하지는 말아 줘.
변명처럼 말하자면, 그 나이에 그 정도 상식도 없는 너도 문제가 없지는 않…….
“어찌 됐든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의 판단이지. 본인의 선택이고.”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다 자라 머리가 굵은 성인이잖아. 본인이 어떤 선택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남이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
“아아,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다만, 그게 관계자 사이에서 합의만 되었고, 또 누군가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물론이지. 뭔들 어떻겠어? 강간 같은 것만 아니라면야.”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비유라 해도 그건 쓰레기지, 해서는 안 될 일이야, 왁자하게 지껄이는 말들이 한스의 귀에 화살처럼 들이박혔다.
동시에 귓속에서 환상처럼, 힘멜의 떨리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세상에, 한스, 그건 강간이었어요!
‘아니 설마 리하르트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취향이 좀 특이하긴 해도 그가 강제적으로 그럴 사람은…….’
‘진짜예요.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니까요. 울며 버둥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게, 그럼 강간 아니면 뭐겠어요? 도움을 청할 수도 없게, 말 한마디 못하게 입을 막은 채로 그 짓을 하고 있었는데!’
귓속에서 계속해서 메아리치는 기억들 속에서 한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점심식사로 나온 것은 한스가 아주 좋아하는 슈니첼이었지만,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어떡하지…….
만일……, 만일 자신이 모른 척하고 보내 준 영상에서 크리스토프가 잘못된 지식을 얻고, 그로 인해 범죄가 버젓이 통용되게 되었다면, 그 노릇을 어떡하나…….
위장 속에서 슈니첼 조각들이 날뛰는 것 같아 억지로 물을 마시던 때, 식당의 문이 열리며 크리스토프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물을 토할 뻔했다.
첫 번째 주말이라 크리스토프는 드레스덴으로 와 있었다.
타르텐의 우아한 저택에 딱 맞는 빛나는 외모는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을 몰랐다. 창가에 자리 잡고 앉은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게 잘 어울린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낯빛이 거뭇하고 눈가도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었는데, 그래도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낯빛이 거뭇하고 눈가도 불그스름……. 심지어 이제 보니 의자에 앉는 움직임마저 어딘가 몸이 불편한 듯 느리고 어색하다.
맞은편에서 크리스토프를 살피던 힘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스 역시 마찬가지.
영상들을 보내 주었던 그 다음 주, 업무차 베를린으로 갔다가 크리스토프와 마주쳤던 때 ‘너, 정말로 그 영상들이 일반적――’하고 말하다 어둡게 말을 멈추고 말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양심이― 뜨끔뜨끔 아팠다.
‘어어……, ……저기, 그건 정말로 전적으로 개인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다른 거니까, 꼭 그 영상들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그래, 뭐, 그중 어떤 거에 비하면 그놈은, 그래도 나름대로 담백한 편이었지……, 그래…….’
크리스토프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우울하게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으며 한스도 우울해졌다.
그 어떤 거가 대체 뭐였을까. 순서까지 정해 뒀던 걸 보면, 한스가 잠깐 틀었던 그 첫 번째 영상이 가장 가볍고 소프트한 내용이었을 성싶은데.
‘음――, 그―…, ……괜찮아?’
한참 말을 고르다 겨우 물어본 한스에게, 크리스토프는 낮게 혀를 차더니 못마땅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견딜 만은 해. 게다가 정 힘들 땐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다른 방법?’
‘음. 얼마 전에 우연히 찾아냈는데……, ……그 방법을 쓰는 것도 아주 안 내키긴 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못 견디겠다 싶을 때엔 써먹을 수 있으니.’
‘? 그건 어떤,’
그러나 그때 마침 누군가 크리스토프를 부른 탓에 그 대답은 듣지 못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거나 최후의 보루 같은 건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약간쯤은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은 한스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저렇게 가냘프고 고운 미청년이―그 실상이야 어떻든― 금세라도 쓰러질 듯 파리한 안색으로 퀭하게 앉아 있는 걸 보면, 그 중 일부는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다시금 양심이 따가워 오는 것이었다.
한스가 욱신거리는 위장을 문지르며 애꿎은 슈니첼만 해체하고 있을 때, 리하르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달아난 연인을 찾아 헤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두르는 기색이던 그는 크리스토프를 발견하곤 걸음을 늦추었다.
보아 하니 오전 내내 집무실에서 일하다 점심때가 되어 침실로 돌아갔더니, 그때까지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사라지고 없어서 놀라기라도 했나 보다. 한스는 곁눈질로 그들을 보며 슈니첼인지 뭔지 모를 것을 입에 쑤셔 넣었다.
“왜 혼자 왔어. 부축해 주겠다고 했는데.”
“병자처럼 대하지 마. 혼자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
불퉁하게 대꾸하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자리에 앉던 그가 문득 한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한스.”
공연히 움찔하며 “어, 응?”하고 고개를 드는 한스에게 리하르트가 말했다.
“중요한 일들은 다 처리해 뒀으니 나머지 일정은 미뤄 줘. 오후부터는 쉬겠어.”
그러려고 오전 내내 일했구나, 한스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난 승마할 거야.”
마치 그 한가한 오후에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더럭 염려하는 것처럼, 선수 치듯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몸으로?”
할 수 있겠어?,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게, 정말로 염려스럽기라도 한 것 같다. 사납게 입을 다무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정 하고 싶다면. 나도 한동안 승마로를 돌지 못했으니 오랜만에 돌아 보도록 하지.”
“승마로, 네가, 날, 쫓아오겠다고?”
크리스토프가 비웃듯 말했다. 리하르트가 선선히 빙긋이 웃는다.
“평소라면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몸 상태라면 될 것 같은데.”
“――할 수 있으면 해 봐. 내 말의 꼬리털도 구경조차 못할 테니.”
“자신만만한데. 그렇게 자신이 있나 보지.”
승마로는 자신만만할 만도 하다. 한스는 여태 크리스토프보다 우수한 기수를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그 말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만 치고 말았다.
“그러면 내기라도 할까?”
리하르트가 수프를 한 술 뜨며 아무렇잖게 말했다.
내기라는 단어에 조건반사라도 하는 듯 크리스토프가 움찔하더니 리하르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승마로?”
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토프는 다시금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코웃음 쳤다가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이기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오늘 편하게 자고 싶어.”
타르텐의 주인이 뭐든 들어준다는데!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을 들었다 놓을 수 있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는데! 고작 오늘 편하게 자고 싶다니.
그 소박한 희망이 애틋하고 안타까워 눈물이 날 뻔한 한스였다.
“좋아.”
리하르트는 선선히 승낙하며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럼 내가 이기면? 뭘 해 줄 거지?”
크리스토프가 멈칫했다. 기본적으로 내기의 대가는 동급이어야 한다.
말없이 리하르트를 응시하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가 웃음 지었다.
“불안해?”
“――승마로? 천만에. ――그래, 그러면 나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밤을 새우든 뭘 하든.”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표정을 그으며 선언했다. 리하르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뒤 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 역시 전투적인 기세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
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리하르트를 바로 앞에 둔 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스가 보기에도 지금 크리스토프의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은 물론, 크리스토프의 애마가 바로 엊그제 산책을 하다가 독성이 있는 풀을 잘못 먹어 아직껏 배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도, 크리스토프가 가장 즐기며 그의 장점을 살려 시원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승마로는 늦가을에 예정된 사냥 일정 때문에 지난주부터 폐쇄되었다는 것도.
……왜 난 사기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런데도 왜 난 아무 말도 못하는가. 나의 이 비겁함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지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궁지로 몰리고 말았는가.
거무죽죽한 낯으로 힘멜이 흘끔 쳐다본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이, 저러다 정말로 경찰을 찾아가기라도 할 것 같다. 그것이 한층 더 한스를 고뇌에 빠뜨렸다.
힘멜이 부르짖는 강간설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점점 심증이 굳어만 갔다.
사기를 치는 놈이 강간이라고 못할까. 원래 범죄는 범죄를 부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 범죄 조장에 한몫을 하는 것은 방관자나, 방조자나, 혹은 조력자.
“――.”
한스는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위장에서 슈니첼이 춤을 춘다.
“왜 그러지, 한스?”
리하르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사려 깊고 사람 좋아 보이는 평소의 면모 그대로. 지금은 저 성품 좋아 보이는 모습이 더더욱 뼈아프다.
“아니, 속이 좀……, 먼저 실례하지.”
한스는 결국 일어나 자리를 뜨고 말았다. 연약한 양심이 바늘처럼 그를 찔러 대고 있었다.
*
위장약과 더불어 양배추즙을 바가지로 퍼마시고 그럭저럭 달래 놓았던 위장은, 그러나 오후 느지막이, 무시무시하게 굳은 얼굴로 승마로에서 돌아와 말채찍을 내팽개치는 크리스토프를 보고는 도로 맹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승마 장갑까지 벗어 팽개치고 성큼성큼 서익으로 들어가 버리는 크리스토프의 뒤로, 리하르트가 유유히 뒤따랐다.
저 표정이며 기색들을 보아 하니 결과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니, 애초에 리하르트가 ‘내기’라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일부러 지려는 의도가 있지 않고선, 리하르트는 질 내기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도 그쯤은 번연히 알았을 텐데도 종목이 종목이었으니만큼 넘어가고야 말았던 게다.
“…….”
한스는 주전자 한가득 채워 놓은 양배추즙을 주스처럼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양배추즙이 위통에 효과가 있다던데 왜 이리 안 듣나 모르겠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 때문에 리하르트를 오후 동안 집무실에다 붙들어다 놓긴 했다. 도무지 절대로 미룰 수 없는 일거리가 있다며, 이것만은 오늘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며, 승마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억지로 붙들어다가 집무실에 앉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밤은 길다. 급한 일들을 닥닥 긁어서 그의 앞에 쌓아 놓긴 했지만―덜 급한 일들까지 쌓아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리하르트가 대번에 눈치챌 것 같았다―, 밤을 새워서 할 만한 양의 일거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늦저녁까지는 붙들어놓을 수 있겠지만, 밤까지는…….
한스는 노을도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내다보며 시름에 잠겼다. 정원 저만치 힘멜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멀어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축 처져서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저 정의로운 청년 역시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하다.
“…….”
그래, 아닌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 사기성이 농후한 내기까지야 모른 체한다고 쳐도, 강간은 안 될 말 아닌가.
그의 사기에 본의 아니게 가담한 기분이 들었던 한스는 결국 그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어―극심한 위통이 또 한 번 몰려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리하르트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그 말을 듣고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범죄를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해야지!
그 결심이 흐려지기 전에 한스는 서둘러 방에서 나가 집무실로 향했다.
“리하르트!”
집무실로 들이닥친 한스는 문을 덜컥 열어젖히며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텅 빈 방이 그를 맞아 주었다.
“어……?”
기세 좋게 들이닥치던 걸음을 늦추며 한스는 약간 허탈하게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 기세를 몰아서 얘기해야 하는데, 이러다 또 마음 약해지면 안 되는데, 한스는 혀를 차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직 일거리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걸 보니 멀리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하고 건성으로 책상 위를 내려다보던 한스는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거의 다 했잖아……, 이 괴물…….”
보통사람이라면 밤을 꼬박 새워야 할 양이지만 이놈이라면 밤까지는 다 마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아직 저녁나절인데 거의 다 끝내 놓을 줄은 몰랐다.
한스는 새삼스럽게 혀를 내두르며 창가 소파에 앉았다. 이 굳은 마음이 누그러지기 전에 그가 돌아오길 기도하며.
창밖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다음 대의 후계자감으로 지정된 아이들이 외부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볼까지 빨갛게 해서는 까르륵거리고 있다.
문득 한스는 아주 오래 전, 자신이 저만 하던 때를 떠올렸다. 리하르트도 크리스토프도 저 또래였다. 그때에도 그들은 이미 썩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타르텐으로서의 유대감은 건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
다들 잘살면 좋을 텐데, 한스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둘 다 한스의 형제였고, 친우였다.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의 차이야 있지만 둘 다 잘되길 바랐다. 적어도 절대로, 한 사람의 희생 위에 한 사람의 행복이 쌓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설마하니, 강간이라니.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다시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얼마나 열렬하게 크리스토프만 바라보고 있는지 한스는 잘 알고 있었다. 주말에 크리스토프가 드레스덴으로 올 때마다, 리하르트가 베를린으로 갈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 넘겨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이번에도 크리스토프를 위한 선물이라며 뭔가 특별주문을 했다는 것 같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그 시간을 크리스토프에게 아낌없이 퍼부었다.
한스의 기준에서 보자면 가끔 리하르트는 정신 나간 놈 같았다. 아니, 정신 나간 놈 맞았다.
일만 제대로 해내면 그만이라―사실은 참견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해서― 내버려두긴 했지만, 일만 제대로 해내는 미친 놈 맞다.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한스는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리하르트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성적인 취향 때문에 평판이 다소 갈리긴 했지만 이렇게 제 시간을 깎아 가며 누군가에게 열중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본인의 여유를 넉넉하게 남겨 둔 뒤에 나머지 시간을 적당히 잘라 그녀들을 만나곤 해, 그때의 그는 언제나 냉정하고 여유로웠다.
설마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한 사람만을, 몇 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좇을 줄은 몰랐다.
“…….”
어찌 보면 좀 부럽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발 강간은 아니길. 힘멜의 착각이길. 제발.
“그나저나 어디를 갔길래 이렇게 오래 안 돌아오나 그래.”
이미 컴컴해진 창에 커튼을 치고 일어선 한스는 다 마친 일들이나 정리해 두려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남은 일이라 해 봐야 이삼십 분이면 다 마칠 성싶었으니, 다 된 것들부터 정돈해 둬야지.
서류며 자료들을 차근차근 정리한 한스는 한 꾸러미의 서류철을 끌어안고 서랍을 열다가 응?,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캐비닛 룸의 열쇠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열쇠는 캐비닛 룸의 문에 꽂혀 있는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런이런, 이걸 이렇게 함부로…….”
한스는 혀를 차며 캐비닛 룸으로 걸어갔다.
집무실 안쪽에 딸려 있는 캐비닛 룸은 온갖 종류의 자료들이 빼곡하게 보관되어 있어 엄중하게 관리되는 곳이었다. 열쇠만이 아니라 비밀번호도 알아야 문을 열 수 있다지만, 그래도 열쇠를 이렇게 막 다뤄서는 안 되는 노릇이다.
“누가 이걸 이렇게……, 어이쿠,”
심지어 열려 있잖아, 하고 한스는 혀를 찼다. 문은 당기는 것만으로 쉽게 열렸다.
설마 자료가 유출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한스는 불안스레 캐비닛 룸으로 들어섰다. 자료보관함이 빽빽하게 들어찬 내부로 들어선 순간, 한스는 어라 싶었다.
저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어른거렸다. 누군가 안에 있나 보다. ……아아, 리하르트인가?
한스가 불빛 쪽으로 막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바로 그때.
“――.”
소리가 들렸다.
조그만 짐승의 울음 같은 희미한 소리.
아주 잠깐, 어렴풋이 들린 그 소리에 한스는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다.
뭐지.
뭘까.
이 불안한 예감은.
발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식은땀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정적 속에서 천천히, 천천히, 안쪽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잘 담고 있었나 보군. 오후 내도록. ……하하, 굉장한데. 엄청나게 젖었어.”
“――.”
또다시 강아지가 끙끙거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 거기에 찰박거리는 물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섞인다.
낯익은 목소리다. 너무 낯익은 목소리야.
한스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마치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장면을 앞두고서 그걸 확인해야만 그 공포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이 저절로 캐비닛 사이의 빈틈을 찾았다.
보관함 틈새로 저 너머의 인영이 언뜻언뜻 보였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사이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엉덩이였다. 그리고 그 엉덩이를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
그 손이, 엉덩이 사이에 깊이 박힌 뭔가를 천천히 흔들면서 끌어내고 있었다.
“――미친, 개새끼,”
억눌린 울음소리가 띄엄띄엄 말을 뱉어낸다. 그러자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내기에서 이긴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인데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 오후 동안 이걸 몸속에 넣고 있으라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지 않나? 더한 걸 요구하려다가 나름대로 너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그쳐 준 건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이 따위 걸, 선물이라고,”
“왜. 너도 이게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얼마나 맛있게 물고 있는지, 잘 끌려나오지도 않는다고.”
웃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은 엉덩이 사이에서 끌어내던 것을 도로 푹 찔러 넣었다. 낮은 울음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다시 천천히 끌려나오며 푹 젖은 채 번들거리는 그 물건은, 성기 모양을 한 딜도였다.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큼직한 사이즈의 대형 딜도는, 상당히 길게 끌어냈는데도 아직껏 끄트머리가 몸속에 파묻혀 있을 정도였다.
……요즘 딜도는 굉장히 실물과 똑같은 모양새로 나오는구나, 핏줄 모양까지 고스란히 도드라져 있잖아, 하고 한스가 질린 얼굴로 생각하던 때,
“미친 새끼, ……소름 끼쳐, ……네가, 네가 계속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소름,”
“잘 아는군, 그래. 내 물건에서 틀을 떠서 똑같은 모양으로 주문했거든. 질감도 실물과 똑같도록 제법 공들여 제작한 물건이야. 그래도 주말마다 내 걸 실컷 찔러 넣었던 보람이 있군, 똑같은 줄은 알아보고.”
……저거였나. 뭔가 색다른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 같더니.
말을 잃은 채 표정만 썩어들어 가는 한스였다.
“좋지 않았어? 그래서 결국 너도, 기다리다 못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잖아. 어때, 맘에 들었나? 말해 봐, 크리스토프.”
“――.”
“어서.”
웃음 섞인 목소리의 주인이――리하르트가, 다시 재촉하듯이 딜도를 푸욱 밀어 넣었다.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음을 삼키는 기척이 뒤를 잇는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으려는 것 같았지만, 딜도가 철벅거리며 수십 차례나 드나드는 사이에 결국은 띄엄띄엄 말문이 열리고 만다.
“……계속,”
허덕거리며 말마디를 뱉는 것은 작은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로 등을 짓눌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크리스토프다. 이제 보니 손목도 등 뒤에서 셔츠로 묶여 있었다.
“계속, 너랑 하고 있는 것 같았, ――책을 읽는 동안에도,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동안에도, 계속, 네가, 안에――,”
리하르트가 나직이 웃었다. 짓누르고 있던 등을 잘했다는 듯이 쓸어내린다.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래, 착하게 약속은 잘 지킨 모양이군. 앞이 아주 팽팽하게 서 있어.”
등에서 미끄러진 손이 앞으로 돌아간다. 사타구니를 그러쥐는 손길에 크리스토프가 움찔했다.
“――네가, 혼자 하지 말랬,”
“그래, 잘했어. 혼자 한 흔적이 있었더라면 화를 내려 했었거든. ……그렇게 좋아? 만져 주자마자 바로 앞에서 줄줄 새잖아.”
크리스토프가 이를 악문다. 낯빛이 더할 수 없이 붉어졌다. 별안간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뺨을 깨물더니 입을 맞춘다. 아니, 입을 맞춘다기보다는 잡아먹는다고 하는 게 옳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딜도를 느릿하게 흔들어 대는 손은 멈추지 않고, 외려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만, 이 미친, 더는, 싫,”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이걸 어쩌지? 정말로 집어삼키고 싶어. 뼈까지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거칠게 속삭이는 말마따나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뺨을, 입술을,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그럴 때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때,
“이대로 집어넣어도 돼?”
딜도로 꽉 찬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덧그리다가 그 비좁은 입구에 손가락 끝을 살짝살짝 비집어 넣으며, 리하르트가 속삭였다. 숨을 삼키는 기척과 함께 크리스토프의 몸이 굳었다.
“이대로 좀 더 넣어 두고 싶은데――나도 들어가고 싶단 말이야.―― 같이 넣고 싶어.”
“……싫, ……싫어, 못,”
더럭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지만, 그 목소리는 리하르트의 나직한 단언에 끊겨 버린다.
“할 수 있어. 이 정도로 충분히 풀어졌으면. ……봐, 지금도, 손가락 하나 더 넣은 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안이 꿈틀거리잖아. ……하하, 네 성기도 조금 전보다 더 빳빳하게 부풀어 올랐어, 크리스토프.”
“아냐, 싫, 하지,”
“넣고 싶어.”
찰각, 버클을 끄르는 작은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린다. 크리스토프의 얼굴빛이 한층 하얘지는 성싶었다.
“리, 리하르트, 사,”
별안간 다급하게 입을 열던 크리스토프는, 그러나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리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크리스토프의 입을 막은 탓이다. 크리스토프가 커다랗게 눈을 떴다.
몸을 기울여 크리스토프의 위에 바싹 엎드린 리하르트는 아래에―아직 딜도가 들어가 있는 입구에― 자신의 성기 끄트머리를 맞댄다. 그리고 천천히 입구를 벌리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미 굵디굵은 딜도로 빠듯하게 벌어져 있는 입구에 맞닿은 성기는 마치 그대로 하얀 몸뚱이를 찢어발길 흉기처럼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아래에서 몸을 바르작거린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 위로 사나운 짐승의 표정이 겹쳐진다.
“――! ――――!!”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버둥거리며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고개를 저었지만 입을 굳게 틀어막은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낮춘 리하르트가 그 눈물을 다디달게 핥는다. 잔혹한 희열이 어른거리는 시선이, 정말로 어린 짐승을 잡아먹으려는 맹수 같다.
무어라 호소하는 푸른 눈을 뚫어질 듯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딜도를 움켜쥔 손에 가만히 힘을 준 순간,
“리, 리하르트……! 그래서는, 안 돼……!”
목구멍에서 간신히 쥐어짜내듯이 외친 사람은, 한스였다.
그 부르짖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멈춰 버린다.
움직임도. 소리도. 기척도. 숨소리조차도.
모든 것이.
“안, 안 돼, 리하르트. 다른 건 모르겠지만, 강간만큼은 사람 사이에 벌어져선 안 될 일이야.”
한스는 서류보관함 너머에서도 아예 뒤돌아선 채, 목이 졸린 듯한 음색으로 더듬거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도로 돌아 나가야 하나, 아니면 도우러―구하러― 나가야 하나, 여태 리하르트를 도와 일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은 적이라면 산더미처럼 많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몰아서 고뇌에 몸부림쳤던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던 한스의 곁눈질에 입을 틀어 막힌 채로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들어왔고, ――과연, 아름다운 사람의 처연한 모습은 효과가 컸다.
저도 모르게 더럭 외치고야 만 한스의 목소리에, 그곳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아아, 저질렀다. 저지르고 말았어. 그러나 그래도 어떻게든 범죄의 현장을 막는 데에는 성공…….
한스가 엉망으로 뒤엉킨 머리로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얼핏 리하르트의 손에서 힘이 풀렸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가 몸을 뒤틀어 겨우 입을 막고 있던 리하르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다른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는 듯, 한스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 짧은 틈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ㅇ해.”
잔뜩 잠긴 목소리라, 뭐라고 했는지 처음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곧 잇따라 쏟아내는 말.
“사랑해. 리하르트. 사랑해. ……제발, 그러니까,”
그 억센 손이 다시 입을 틀어막기 전에,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어린 강아지가 어미를 쪼듯 몇 번이고.
한스 쪽으로 무서운 시선을 돌렸던 리하르트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어딘지 움찔한, 낭패한 기색으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그가 혀를 찬다.
“어서, ……이런 것 말고, 네가, ……네가 들어와. ――너만. 너 말고 다른 건, 싫어. 너만, ――제발. ……사랑해.”
크리스토프의 입을 막으려던 손이 멈춘 사이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호소하는 말들.
사나운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멈춰 있던 리하르트가 나직이 이를 갈았다.
“교활해졌어, 크리스토프.”
그 커다란 손은 크리스토프의 입을 막는 대신에 하얀 뺨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조금 더 즐기려 했는데, 이러면――참을 수가 없어지잖아.”
알고 이러는 거겠지만, 혀를 차며 중얼거린 리하르트가 다른 손에 움켜쥐고 있던 딜도를 뽑았다. 거의 동시에, 뻣뻣하게 부풀어 근처를 문지르고 있던 성기가 그 자리를 도로 메우며 파고들었다.
“――!”
크리스토프가 숨을 삼켰다.
퍼억――, 살 부딪치는 소리가 젖은 소리와 함께 고막을 때린다. 곧이어 거친 호흡 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였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이미 둘은 서로의 입술을 뜯어먹을 듯 하나로 겹쳐 탐닉하고 있었으므로.
곧 철벅거리는 소리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울음 섞인 소리가 커진다.
“제발, ……제발 어서, ……빨리, 아까부터, 오후 내내, 네가 안에 있,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 ……사랑해.”
허덕이는 말마디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러다 결국에는 사랑해, 사랑해, 그 속삭임만 들릴 듯 말 듯 이어진다. 마치 그게 자신의 바람을 이루는 주문이라도 되는 양.
리하르트가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다시 그 입을 막아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자꾸 내 인내심을 끊으려 들지 말고. 난 최대한 오래 이 안에 있고 싶으니까.”
“――제발, 나, 이상해질,”
어쩌면 그 뒤로 다시 입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허덕이는 울음소리만 짐승의 거친 숨소리와 뒤섞여 들려올 뿐이었다.
뭔가―테이블이나 서류보관함 따위가― 덜컹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고 무더운 그 소리들 속에서, 한스는, 자신의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성으로나마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무시무시한 의혹이 등줄기를 스멀스멀 타고 올랐는데 그것은――범죄를 말리려 했던 자신의 행동이 애당초에 길을 잘못 든 게 아니었나 싶은 뒤늦은 깨달음이라 할 수 있었다.
“――――.”
얼마나 있었을까, 아주 찰나였던 것도 같고 끔찍하게 길었던 것도 같은 격렬한 시간 끝에 낮고 거친 포효와 울음소리가 정점을 찍었고, 그 직후 폭풍 같았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천천히 공기가 식기 시작할 즈음,
“벌써 의식을 놓으면 안 돼, 크리스토프. 나는 아직 멀었거든.”
조용하고도 무시무시한 리하르트의 속삭임을 들은 한스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곤―아마 크리스토프도 마찬가지였지 싶었다― 엉금엉금 돌아섰다.
안 돼. 나가야 해.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안 그러면 내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질지 몰라.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안간힘을 써 캐비닛 룸에서 기어나가며, 한스는 까마득한 머릿속으로,
――나는 대관절 무슨 짓을 했던가.
――이제 난 한동안 리하르트에게 죽도록 쪼이겠구나.
――리하르트새끼나쁜새끼몹쓸새끼부러운새끼변태새끼……
등등의 탄식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
용감하고 정의로운 의도가 반드시 그러한 결과로는 이어지지 않는 법이다.
한스는 두 손을 맞잡고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3미터 앞에는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리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한스? 잠깐 얘기 좀 하지.’
아침나절 걸려온 전화에서 들려온 말은 그것뿐이었고,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 나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불려 나온 한스였다.
창을 등진 리하르트의 뒤에서는 오전의 햇빛이 눈부시게 비쳐들고 있었다. 간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운 한스가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흘끔 그를 보자, 놈은 아주 개운한 단잠을 푹 잔 사람처럼 상쾌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크리스토프를 강간하더라, 힘멜이 그렇게 말해서 그 말을 믿고 나섰다는 거지.”
“…….”
리하르트가 헛웃음을 웃었다. 한스는 입만 우물거릴 뿐이다.
“그래, 어때. 네가 보기에도 그렇던가? 어제 봤으니 알 것 아냐.”
“……아니 뭐……,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않았지만?”
“……그런데 또 그렇게 막 합의되고 조화로운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한 듯도 한 성싶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리하르트 역시 그랬는지 검지 손마디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업무 보고를 할 때 내용이 미진하면 제대로 말해 보라고 채근할 때의 그 손짓이다.
그 손짓을 보자 갑자기 속에 눌러 뒀던 억울함이 부아와 함께 솟구쳤다.
“아니 그래, 솔직히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강제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진 않잖아? 그러게 왜 애를 묶어 놓고 그래?!”
화를 내듯 더럭 외치는 한스를, 리하르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쳐다보다가 태연히 대꾸했다.
“안 묶으면 입을 막을 수가 없거든.”
“――아니 입을 왜 막는데?!”
그러니까 강간이라 그러지!, 한스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따졌고, 리하르트는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안 막으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크리스토프가 지레 말해 버린단 말이야. 내가 그 이상 어떻게 더 할 수가 없도록.”
“무슨 말을――.”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한스는 멈칫했다. 벼락처럼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지난 저녁 한스가 그들 사이에 더럭 고함친 그때,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급하게 입을 뗀 크리스토프가 뭐라고 했던가.
“그놈이 그렇게 말하면 결국 다 그놈 원하는 대로 해 줘 버릴 수밖에 없거든. 그런데 요즘은 그놈이 너무 빨리 그 말을 해 버리려 들어서 일부러 입을 막은 건데, ――어제는 다 잘돼 가고 있었는데, 네가 망쳤어, 한스.”
“――.”
한스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의 원망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은 가시지 않아서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아니 하지만, 네가 너무 심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 큰 걸 넣어 놓고 거기다가 너도 같이…………가 말이 되냐.”
그러나 그 중얼거림도, 냉랭하게 날아드는 시선을 받고는 절로 말끝이 줄어들고 만다.
“크리스토프의 반응을 보려 했을 뿐 정말로 넣지는 않아. 아직은.”
“……아직은…….”
어두운 앞날을 예감한 한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달아나라고 크리스토프에게 외치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전에 자신이 먼저 흉한 꼴을 당하겠지.
리하르트가 언짢은 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뒤로 기대며 눈살을 찌푸린 채 한스를 본다.
“너는 그래도 계속 내 옆에 있어 왔으니 나를 조금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스.”
“…….”
“내가 그놈을 다치게 할 것 같아?”
그건――아니다.
단언할 수 있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크리스토프를 보는 매 순간순간, 마치 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열렬하고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한스의 머릿속에 ‘아.’하고 뒤늦은 깨달음이 스쳤다.
그렇구나. 그럴 수 없는데. 이 남자가 그를 다치게 할 수는 결코 없을 텐데도.
바보같이, 헷갈리게 하는 어느 작은 것들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그리고 하나 더, 너는 크리스토프가 누구라고 생각해.”
“어……?”
갑자기 던져 온 물음에 한스는 어벙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토프가 누구냐니, 타르텐의 형제이고, 지금은 베를린의 T&R에서 일을 돕고 있고, 그전에는…….
“그놈에게 강간이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그렇다. 또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어떤 인물이던가.
조각상처럼 생긴 인간 백정…… 이라고 저도 모르게 말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고 마는 한스였다. 그러나 한스가 뭐라고 하려 했는지는 리하르트도 짐작했을 거다.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작정하면 내 목을 딸 수 있을 놈이야. 그런 놈한테, 강간이라고?”
“……하지만 넌 목이 따이더라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야 마는 놈이잖…….”
리하르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의자에 더더욱 깊이 기댄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의 성향을 내 취향대로 이끌기가 쉽거든. ……하지만, 알고 있나, 한스? 본인의 성향이 ‘정말로’ 그쪽이 아니라면, 아무리 내가 이끌려 해도 따라오지 않아. 즉,”
“――.”
“그놈은 애초부터 나와 성향이 맞아떨어지는 놈이란 거야.”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와――그에게만 딱 맞는. 그만을 위한.
“……그런 억지를…….”
“아니, 진심이야, 한스.”
리하르트는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는 억지도 농담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놈을 상처 입히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그놈이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자조적인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운 듯도 한 그 기묘한 음색에는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다.
그가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명백한 진실을 토로하는 그를 한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았다.
*
“많은 말은 하지 않겠어. 하나만 알려 두는데, 앞으로 네가 뭘 보든, 절대로 저들의 관계에 신경 쓰지 마. 그랬다만 네 정신만 다칠 테니까.”
한스는 힘멜을 앞두고 딱 잘라 말했다.
미심쩍은 낯으로 한스를 살피던 힘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이에요? ……마음 놓아도 돼요?”
“돼.”
한스의 단정에 힘멜은 여전히 불안스러운 듯 눈을 굴렸지만, 하룻밤 새 퀭해진 한스의 모습을 보고는 마른침만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정말이야, 저들은 아무 문제도 없어. 저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신은 하룻밤 새 백 년은 늙은 것 같았지만,
그 지친 목소리를 듣고서야 힘멜은 그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인 듯,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는 손을 내저어 힘멜에게 가 보라고 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고 말았다. 벌써 일요일이 다 가고 있었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주말 내내 무시무시하게 혹사당한 기분이다.
공연히 뻐근해지는 어깨를 주무르며 어구구, 하고 신음을 흘리던 한스는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토프가 서익에서 나서고 있었다. 옷을 다 갖춰 입고 나온 걸 보니 베를린으로 돌아가나 보다. 하긴 일요일 오후이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아까 오전에 리하르트와 대면한 뒤, 심란한 마음으로 흐느적흐느적 복도를 걷던 한스는 슬그머니 크리스토프의 방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관절 간밤에 몇 시쯤 잠든 건지 그때까지 침대에 푹 박혀 있던 크리스토프는 퉁퉁 부은 눈으로 사납게 한스를 쳐다보다가, 아직껏 잔뜩 잠겨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 정도는 보통이라지만, 다들 어떻게 그런 걸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거’가 뭔지 알 듯 말 듯해서 선뜻 대꾸하지 못하는 한스에게, 부루퉁하게 침묵하던 크리스토프가 분한 듯 내뱉었다.
‘네가 보내 준 영상을 보면 세 개를 넣는 사람도 있던데, 그럼 두 개쯤은 별것도 아닐 테지만, ……나는 정말로 못할 것 같단 말이야.’
크리스토프가 부르르 몸을 떨며 이불을 더 바싹 끌어당겼다.
여태 내가 이렇게까지 뭔가를 못한 적이 없었는데. 뭘 하든 남보다 탁월한 결과를 얻으며 인생을 살아온 크리스토프가 침울하게 중얼거린다.
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한스는 어물거리다가 말을 뗐다.
‘으음……, 네가 정 못하겠다면야 뭐 꼭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리하르트의 귀에 들어갔다간 경을 칠 터였지만, 그래도 이 가엾은 남자를 위해 그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하던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놈이 원하니까.’
‘――.’
웬만하면 해 주고 싶다. 아직 익숙지 않고 낯설어서 그만, 자꾸 멈춰 달라고 제동을 걸어 버리고야 말지만.
그래도 그놈이 원하는 걸 조금씩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은―아니 제법 자주― 무섭기는 하지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놈이 기뻐하는 그 순간순간들이 마음에 들었다.
‘――, 그래서 넌, 괜찮은 거야?’
한스가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푸른 눈이 흘끔 한스를 본다. 눈을 마주친 채 잠시 더 생각하는 듯하던 크리스토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거짓도, 망설임도 없이.
‘어찌 됐든 나아지고는 있으니까. 그놈도, 나도. ……나름대로 잘해 가고 있는 것 같긴 해.’
잘해 가고 있다.
그것이, 크리스토프가 바라보는 그들의 관계였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 말은 진실일 터였다. 크리스토프는 어리석지도 아둔하지도 않았으므로.
한스의 마음에 얹혀 있던 무게감이 한층 더 덜어졌다. 그와 동시에 느슨히 풀어지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아, 그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맞추어 나아가고 있구나.
그렇게 한스가 가뿐한 한숨을 내쉬던 때,
‘게다가 뭐, 보통들 다 하는 일이라는데, 나도 못할 것 없지. 해내면 나름대로 성취감도 있고, ……또, 과정이 힘들긴 해도 결국은 기분이 좋기도 하고.’
다들 그래서 그런 힘든 것들을 하는가 보지, 하고 크리스토프는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어리석지도 아둔하지도 않았지만, 애가 좀 많이 어수룩하기는…….
가뿐하던 한숨이 도로 쏙 들어가 버렸다. 가벼워졌던 마음이 다시 묵직하게 눌리는 건 기분 탓일까.
――그놈이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불현듯 한스의 머릿속에 아까 리하르트가 했던 말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놈이 바라도록 공들여 조금씩 잘 유도하고 있다는 거로군.
차마 그 말까지 전해 주진 못하고 조용히 크리스토프의 방에서 물러난 한스였다.
아무래도, 강간은 아니라도 사기는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만치 걸어가는 크리스토프의 뒷모습을 보며, 한스는 방조자가 된 기분에 시달리면서 다시 주전자에서 양배추즙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래도 이 위통은 한동안은 계속될 성싶었다.
그때, 동익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리하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동익에서 볼일을 보다가 크리스토프가 나가는 걸 보고는 황급히 뛰어나온 것 같았다.
그가 소리쳐 불렀는지 크리스토프가 돌아본다. 깎아 놓은 조각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희미하게 풀어진다. 귀찮은 듯 찡그린 기색이었는데, 그게 웃는 얼굴보다 더 편안히 누그러져 보이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단숨에 크리스토프에게 따라붙은 리하르트가 그에게서 차 열쇠를 빼앗는다. 그러곤 앞서 걷는 게, 베를린까지 데려다주려는 거다.
이미 오래도록 몇 년이나 그래 왔는데도 여전히, 매주 떨어지는 순간이 아깝고 아쉬워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것처럼.
뭐라고 투덜거리는 눈치이던―아마 저 스스로 운전할 수 있다고 핀잔이라도 주는 거겠지― 크리스토프도 결국은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고, 리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붙들고 걷기 시작했다.
“…….”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그들을 내려다보던 한스는 문득 느슨하게 어깨를 떨구었다.
그래. 어느 길로 가든.
결국은 그런 것이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가 정말로 원치 않는 일은 하지 못한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들은 관계를 채워 가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빈 부분이 없도록.
한스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 끝에는 헛헛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면 되었다.
아무도 끼어들 이유 없이, 끼어들 수도 없이, 그들은 저렇게 서로를 붙들고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