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hort story 1. (33/34)
  • short story 1.

    정태의가 눈을 떴을 때에는 오후 빛깔을 띤 햇살이 창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십 초쯤 멍하니 침대에 앉아 눈을 끔벅거리던 정태의의 머릿속을 제일 먼저 스친 것은 ‘아, 그래, 어제 베를린으로 왔었지.’라는 생각이었고,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번째로 머릿속을 스친 것은 ‘아, 맞아, 점심쯤 그 녀석이 온다고 했었지.’라는 생각이었다.

    몇 년 만이더라.

    지난번에 베를린에 왔었을 때도 보지 못했었으니, 삼사 년은 족히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빠르기만 해 삼사 년이라고 해 봐야 엊그제 봤던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찌 됐든 반가운 건 반가운 거다.

    침대에서 훌쩍 뛰어나와 침실 밖으로 나오자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좀 더 뚜렷해졌다. 두세 명이 두런거리는 듯한 말소리에 섞여 있는 저 지루한 듯하고 냉담한 목소리는, 이곳 카일의 저택만큼이나 여전했다.

    “크리스토프, 왔――.”

    부스스한 머리를 털어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정태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반가이 부르던 말을 도중에 멈추었다. 거실에 앉아 있던 인물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며 계단을 올려다본다.

    거실의 응접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은 넷.

    집주인인 카일, 어제 정태의와 더불어 베를린으로 돌아온 일레이, 그리고 오늘 오전 중에 베를린으로 돌아올 거라고 전해 들었던 크리스토프. 그 바로 옆에는 말끔하게 갖춰 입은 차림새가 흠 잡을 데라곤 하나 없는, 언제 봐도 변함없는 리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멈춰선 정태의를 올려다보던 리하르트가 먼저 단정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예, 오랜만이네요.”, 정태의도 덩달아 인사를 하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던 중인지 테이블에는 향긋한 냄새를 피워 올리는 스콘과 홍차가 있었고, 카일이 “리타, 홍차 한 잔만 더 줘요.”라고 외치는 가운데 정태의는 비어 있는 자리에―딱 일레이와 크리스토프의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앉았다.

    주말에 드레스덴으로 갔던 크리스토프가 오늘 점심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고는 들었지만, 그래서 잠시 카일의 저택에 들를 거라고도 들었지만, 이 남자도 같이 올 거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정태의는 일레이의 앞에 놓인 찻잔을 끌어다가 목을 축이며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를 흘끔 보았다. 그러다 말없이 차를 마시던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정태의가 빙긋이 웃기 무섭게 그는 시선을 슥 돌려 버리고 말았지만.

    어째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나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그럴 리도 없고―, 저 남자와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었나.

    정태의는 말없는 가운데 미묘하게 불온한 기류가 흐르는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를 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그들은 여전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나마 앞머리가 조금 길어지기라도 했지, 리하르트는 머리털 한 올도 변함이 없다. ……아니, 아니다. 자세히 보면 눈가에 희미하게 잔주름이 한 줄쯤은 더 생긴 것 같기도 한데, 왜 이렇게 사람이 변함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흥겹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카일에게 조용히 맞장구치며 제 팔을 주무르고 있던 리하르트가 문득 정태의를 보았다. 눈이 딱 마주친다.

    “하실 말씀이라도?”

    정중하지만 정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저 말투까지도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리하르트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냥,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해서요. 하나도 변한 데가 없어서 꼭,”

    “꼭……?”

    말하다 말고 웃는 얼굴 그대로 멈칫 말을 멈춘 정태의에게, 리하르트가 그제야 조금 흥미롭다는 투로 뒷말을 채근했다.

    “꼭 뱀파이어라도 보는 것 같은가 보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어어어, 하고 어물거리는 정태의 대신 말을 던진 것은 일레이였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하고 얼른 얼버무린 정태의는 다른 말 없이 홍차만 삼켰다.

    이놈이랑 너무 오래 붙어 있었나 보다. 이제 이놈이 독심술을 다 하네.

    리하르트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웃어 넘겼다.

    “하하, 그럴 리 있나. 피를 폭포수처럼 흘려도 도무지 죽을 줄을 모르는 인간과 붙어 지내는 분이 나 정도를 뱀파이어에 댈 리가 없지.”

    아무렴, 이를 말씀이십니까.

    몇 년 만에 봐도 역시 이 남자는 불편하다. 예의바르고 정중하지만 그 한 꺼풀 속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가 뭘지를 생각해 보자면――.

    “그래서, 이번엔 언제까지 있어?”

    그때 크리스토프가 불쑥 물었다.

    여전히 냉랭하고 무심한 낯이다. 심지어 정태의를 흘끔 보는 눈길은 불만스러워 보이기까지 해서, 당장에라도 꺼지길 원하는 사람 같았다.

    “글쎄. 언제까지 있지?”

    “내일 요하네스버그로 넘어갈 거야.”

    ““뭐, 그렇게 빨리?!””

    정태의의 물음에 일레이가 대꾸하기 무섭게, 카일과 크리스토프가 동시에 외쳤다. 모처럼 들른 동생이 고작 이틀 자고 떠난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는―저런 동생인데도 아쉬워하다니 참으로 다정다감한 형이라고 카일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정태의였다― 카일이야 그럴 줄 알았지만, 얼음인형처럼 냉랭하던 크리스토프까지 저렇게 눈을 치켜뜨며 외칠 줄은, ……알았다.

    “……그렇게 빨리?”

    그럼에도 정태의가 그 시선들을 모른 척 외면하며 일레이에게 되물은 까닭은,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여실히 느껴진 탓이다.

    그래, 이래서야. 이래서 저 남자가 불편한 거라고.

    뒤늦게 뭔가 자신이 실수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크리스토프 역시 흘끗 리하르트를 쳐다보았지만, 한 발 늦었다. 무표정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입매가 아주 약간 올라갔다.

    왠지 조만간 크리스토프가 가엾어질 것만 같아 어깨라도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더욱 가엾은 꼴을 당할 게 뻔해서 관뒀다.

    “현명해졌군, 태이.”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다 마는 정태의를 보고 일레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은 이제 독심술 좀 그만하면 좋겠다.

    아니 뭐, 너랑 오래 살다 보니……, 하고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사이에 리타가 새로운 찻주전자와 스콘을 가져와 정태의의 앞에 잔을 놓아 주었다.

    정태의는 홍차를 마시며 여전히 심사 사나운 낯을 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잘 지냈어? 낯빛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너야말로. 험난한 데로 골라 다니면서도 릭이 잘 챙겨 먹이긴 한 모양이지.”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애매하게 말하며 일레이를 노려보는 크리스토프에게 일레이는 가벼운 웃음을 건넸다.

    “아무렴. 매일 아래위로 아주 충분히 잘 챙겨 먹이고 있지. 보아하니 너도 리하르트가 잘 먹여 주고 있나 본데. 낯빛이 좀 사람 같아졌어.”

    “――그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수치를 되새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말려 보는 정태의였다. 대번에 눈에 칼날이 서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막은 것은 리하르트다.

    “석 달간 볼리비아에서 구르느라 고생깨나 했을 텐데 좀 더 쉬다 가지 그래. 요하네스버그에는 하루이틀쯤은 더 늦게 가도 될 텐데. 어차피 네 표적이 움직이려면 비둘기가 날아야 하고, 그 비둘기는 아무리 빨라도 내일 밤이나 되어야 수단에서 뜰 수 있을걸.”

    아하, 하고 중얼거린 일레이는 코웃음 쳤다.

    “소식 한번 빠르군. 쓸모 있는 정보 고마워.”

    “뭘, 이쯤이야.”

    과연 정보업을 하는 인간이 근처에 있으면 편하군, 정태의는 다시금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어찌 되었든 하루이틀은 더 늦게 가도 될 눈치라 잘됐다 싶다. 지구 끝에서 끝으로 옮겨 다니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요하네스버그……, 수단……, 하고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가 문득 인상을 썼다.

    “이번 네 표적이 알레한드로야?!”

    “쉿.”

    일레이는 태연한 낯으로 짐짓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저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아, 그래, 열혈 무장 단체의 돈줄이라고 들은 것 같다.

    “그런 위험한 데에는 네놈 혼자 갈 것이지 태이는 왜 끌고 가?!”

    “내겐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함부로 두고 갔다간 네놈 같은 날벌레가 꼬이거든. 아, 실례. 너는 이제 꼬이려야 꼬일 수 없는 신세였지.”

    하얀 손이 정태의의 어깨에서부터 목을 쓰다듬어 올라와 뺨을 가볍게 움켜쥔다. 보란 듯한 손길에 일순 뭐라 내뱉으려는 듯하던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뒈져 버리라지, 입술로 욕설을 지껄이며 불퉁하게 차를 마시는 크리스토프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희미하게 웃고 만다. 가볍게 손을 털듯이 내젓던 그는 문득 시계를 보더니 찻잔을 내려놓는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아, 그래.”

    애초부터 오래 있지 않을 줄 알고 있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는 카일의 옆에서 정태의는 예의상 인사를 건네었다.

    “벌써 가시게요?”

    “오후에 베를린에서 회의가 있거든요. 그 김에 크리스토프도 바래다줄 겸 잠시 들른 겁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뵈었군요. 반가웠습니다.”

    대단히 형식적으로 덧붙이는 인사에 정태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쩐지. 이 바쁜 남자가 여기까지 웬일인가 했더니.

    “회의 마치면 바로 드레스덴으로 가나? 저녁이라도 들고 가지 그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일이 많아서 바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게다가 간밤에는 새벽녘까지 잠을 못 자서 좀 피곤하기도 하고요.”

    카일에게 고개를 저어 거절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보았다.

    “……? 잠을 왜 못 자? 계속 잤으면서.”

    거짓말 말라는 듯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흘끗 쳐다본 리하르트는 보일 듯 말 듯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베를린으로 온다기에 타르텐이 일거리가 줄었나 보다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군.”

    “주말에 시간을 내기 위해 주중에 바빠지는 거지.”

    일레이에게 대꾸하는 리하르트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언뜻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베를린에서 머무르는 크리스토프를 만나러 주말마다 리하르트가 찾아온다고 들었다. 매달 첫 주말에만 크리스토프가 드레스덴으로 간다고.

    타르텐을 이끄는 인물이 주말마다 시간을 빼려면 주중에는 그야말로 살인적으로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였다. 몇 년이나 줄곧 그렇게 해내고 있다니 감탄스러운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때, 리하르트의 손이 찻잔을 잘못 스쳤다. 그 바람에 잔이 엎어지며 그 안에 약간 남아 있던 차가 쏟아지고 말았다.

    “이런, 실례.”

    리하르트가 혀를 찼다. 다행히 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부근만 약간 적시고 말았지만 그답지 않은 실수다.

    문득 카일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보니까 아까부터 가끔 손을 내젓던데, 어디 아픈가?”

    “아니, 괜찮습니다. 팔이 좀 저릴 뿐입니다. 금방 나아질 거예요.”

    “팔이 저려? 왜.”

    “아아, 간밤에 팔베개를 해 줘서요. 아침까지 줄곧 팔을 내줬더니, 아직까지 좀 저리네요.”

    “팔베개? ……아직 올리버랑 같이 자나?”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올리버가 올해 몇 살이더라, 걔가 이미 열두셋쯤은…… 하고 중얼거리던 카일이 문득 입을 다문 것은, 그 옆에서 별안간 낯을 와그작 구기는 크리스토프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올리버는 용감하고 독립적인 아이라서요. 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혼자 잡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팔베개를, 하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토프의 구겨진 얼굴이 붉게 푸르게 빛깔을 바꾸는 가운데 짧은 침묵만 흘렀을 따름이다.

    “팔베개라……, 과연. 몇 년 새 사이가 퍽 좋아졌나 보군. 잘된 일이야.”

    일레이가 웃으며 말하기 무섭게 크리스토프가 내쏘듯 대꾸했다.

    “아냐, 내기에 져서, 그래서 벌칙으로 억지로……!”

    “아하, 내기에 진 벌칙이 팔베개라……?”

    일레이의 웃음이 짙어졌다. 제 무덤을 더 깊이 팠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는지 크리스토프가 도로 입을 다문다.

    한층 더 사납게 낯을 구기며 리하르트를 흘끗 쳐다보는 눈매가 매섭다. ……과연, 왜 크리스토프가 언짢아 보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정태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내기에 져서 벌로 팔베개……,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아니, 내 몫만은 아니구나. 크리스토프의 불긋불긋하게 익은 얼굴을 못 본 체하며 정태의는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무슨 내기를 했길래 그래.”

    뜻 없이 던진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낯빛만 더 화려해졌을 뿐이다. 그 대신 대답한 것은 리하르트였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가벼운 유희였지요. 그가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뭐 그런.”

    “흠……? 저놈은 저렇게 생겨먹었어도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라 참는 거라면 웬만해선 지지 않을 텐데.”

    “고통은 잘 견뎌도 육욕은 다르거든.”

    “아하……, 하긴 네놈이라면 질 내기를 할 리 없지. 보아 하니 내기도, 하지 않겠다는 놈을 살살 꾀었겠어.”

    일레이의 말에 리하르트는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크리스토프의 낯빛은 점점 사나워져 갔고, 정태의는 보다 못해 그들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내기를 했는지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듣지 말아야겠다.

    “아니, 하지만 벌칙이라면 내기에서 진 사람이 팔을 내줘야 하지 않나요? 팔이 저리고 아플 텐데.”

    “크리스토프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 접촉기피증이 나았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었으니, 남의 팔을 머리에 베고 그 품에 있는 게 진저리가 쳐질걸.”

    일레이의 지적에 리하르트가 동의했다.

    “맞아. 사시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거든. 팔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진단 말이야. 그게 제법―아주―느낌이 좋거든.”

    “사디스트 같으니.”

    아냐, 이 화제도 별로다. 좋지 않아.

    정태의는 어떻게든 다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점점 낯빛이 삭막해지던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내쏘았다.

    “그렇게까지 막 괴로운 건 아니거든. 적어도 그러고 있으면 귀울음은 들리지 않아서, 그것만큼은 편하기도 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잠도 들 수 있는 거고.”

    “아무렴. 그러니까 아침까지 팔베개를 베고 그놈 품에서 잠들어 있었겠지. 하지만, 축하해. 접촉기피가 제법 나았나 보지. 저놈 품에서는 귀울음이 들리지 않는다니 정신병도 좀 좋아진 모양이고. 아니, 어떤 면에선 더 악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뭐 어쨌든 축하해. 육욕에 넘어간 뒤 팔베개하고 잘 만큼 사이가 좋아졌다니 잘된 일이야.”

    “――!”

    또다시 제 무덤을 제가 판 것 같은 표정으로 일레이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일순 정태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 얼핏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는가 싶었지만, 그 직후 리하르트에게로 눈길을 준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크리스토프.”

    그때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불렀다. 그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크리스토프가 멈칫한다. 가만히 크리스토프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그가 귓가에 입을 가까이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가까운 곳에서 크리스토프를 뚫어질 듯 응시하며 리하르트가 속삭인다. 입술만 움직이다시피 하는 그 작은 말에 크리스토프가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정태의의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건 예전 언젠가의 기억이다. 정태의에게 풋내 나는 호감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에게 어떤 일을 당했던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크리스. 그래, 몇 년 만에 겨우 봤으니 반가울 만도 하지. 딱히 연락도 거의 안 하다가 몇 년 만에야 본 거잖아? 지금 아주 잠깐이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음에 또 보자.”

    정태의가 얼른 크리스토프에게 말했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다가 그 손을 흘끗 쳐다보는 리하르트의 시선을 깨닫고는 그 손도 얼른 거둔다.

    아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둘의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 둘의 적나라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결단코 없었다.

    그 뜻이 겨우 통하긴 했는지, 눈동자만 흘끗 돌려 정태의를 쳐다본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로 기울였던 몸을 다시 폈다.

    그때,

    “――미련 같은 건 없어.”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오랜만이라, 잠깐 반가웠을 뿐이야. 그러니까,”

    삭막한 음색과 함께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를 올려다본다. 눈매가 사납다.

    “네가 그렇게, 의심하며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보는 게――불쾌해.”

    “――.”

    리하르트가 기묘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의심하지 않았어.”

    “했잖아.”

    “하지 않았어.”

    처음으로 리하르트의 음색이 조금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아주 약간 당황한 것 같기도 하다. 그저 느낌뿐인지도 모르지만.

    “했어. 했으니까 어제도――‘그놈이 왔다고 하니 베를린에 얼른 돌아가 보고 싶은 모양이지’라며 날 몰아붙인 거잖아. 지금처럼 날 쳐다보면서. 그렇게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간밤부터 쌓여 있었던 응어리가 터져 나온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쏟아내었다.

    막 돌아가려던 차에 난데없이 거실에서 벌어진 이 사태에, 그들 말고는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일레이는 눈 하나 까딱 않고 유유히 그들을 방관하며 구경하기 시작했고, 정태의도 한 발 물러나 입 다물고 지켜볼 따름이었다―말려 봤자 말려지지도 않을뿐더러 되레 악화시킬지도 모를 터였으므로―.

    일레이가 정태의를 보고는 눈으로 웃었다. 현명해졌군, 딱 그렇게 말하는 눈이라 슬쩍 심기가 상하긴 했지만 모른 체했다.

    그때,

    “크리스토프.”

    굳은 듯 크리스토프를 응시하던 리하르트가 입을 연다.

    “의심하지 않았어. 나는 그저――내가 바라는 걸 얻기 위해 구실을 붙였을 뿐이야. 네겐 벌칙이었겠지만 내겐 반대였으니.”

    “――.”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도 잘 잤던 것 같나? 아니, 난 한숨도 자지 않았어.”

    그렇게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던 크리스토프가 어느 결에 그의 품속에서 잠잠해진 뒤로, 팔을 베고 잠든 그 곁에서, 새벽까지. 그에게 팔을 내준 채 밤새도록 그저――.

    “의심하지 않아.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잃어서는 안 될 유일한 것이 혹여나 거품처럼 꺼지진 않을지 불안할 따름이야. 아무리 내 팔 안에 있어도 이렇게 탐나고 욕심나는 이상은――죽을 때까지 불안하겠지. 나로서도 이 욕심이 진저리가 나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다고.”

    “――, ――너는 왜,”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나직이 외치는 리하르트를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던 크리스토프가 문득 낯을 허물었다. 어렴풋이 일그러진 입술에서 낮은 속삭임이 나오다 끊기고 만다.

    그 짤막한 정적 속에서, 바로 이 순간조차도 사납게 굶주린 시선이 잡아먹을 듯이 크리스토프를 본다. 크리스토프가 주춤, 짓눌릴 정도로.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그 짧은 침묵을 종식시킨 것은,

    “음……, 이보게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던 카일이었다. 미간에 진 주름을 손끝으로 문지르던 그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하네만 리하르트, 회의 시간에 늦겠어. 나도 이제 슬슬 서둘러 회사에 가 봐야 하고. 일거리가 쌓여 있다고 제임스가 날 독촉하고 있거든. ――이 와중에 일손을 줄인다면 제임스가 날 잡아먹으려 들겠지만, 크리스토프, 자네에게는 특별히 이번 주에 휴가를 주지. 드레스덴에나 갔다 와. 가서 거기서 둘이 이야기를 제대로 마치고 오면 좋겠군.”

    마칠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들릴락 말락 하게 덧붙인 카일은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회의 끝나고 들러서 데려가겠나? 아니면,”

    리하르트는 카일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감사합니다.”, 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붙들더니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섰다. 크리스토프는 일순 당황한 눈치였으나 입을 꾹 다물더니 따라나선다. 마치 무슨 전장에라도 나서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나가 버린 두 사람의 뒤에서 한 발 뒤늦게 정태의는 ‘어……, 인사를 못했는데…….’라고 멍하게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밖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것은 정적뿐.

    “저놈은 오늘도 못 자겠군.”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이내 심드렁해진 투로 일레이가 중얼거렸고, 그런 그를 정태의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하고 눈을 마주치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아니,”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열없이 웃고 만다.

    “여전하구나 싶어서. 몇 년 만인데도.”

    여전하다. 이곳도. 그들도. 자신들이 그런 것처럼.

    그게 어쩐지 우습기도 한 한편 마음이 느슨하게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았다.

    그 와중에 카일은 그제야 온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소파로 휘청휘청 걸어가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 어떻게 저 녀석들이…….”

    앓는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꼬맹이 때부터 알아 오며 귀여워해 왔던 친척 동생들의 적나라한 사생활에 새삼스럽게 타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잘살면 됐죠 뭐.”

    정태의가 나름의 위로를 하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직접 보고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지 뭐냐.”

    “…….”

    아니, 직접 안 보셔서 그래요. 정말로 ‘직접’ 보시면 상상 자체를 하고 싶지 않으실걸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꾸역꾸역 삼키는 정태의의 옆에서 카일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는 듯 “팔베개, 팔베개라니……, 저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가…….”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그건 나도 상상이 안 되긴 한다.

    “혹시 너희들도 하냐……?”

    문득 카일이 미심쩍은 눈으로 정태의와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얼결에 일레이와 마주보았다.

    “아뇨, 딱히…….”

    일부러 안 한 건 아니지만 일부러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서로의 몸통이나 신체 일부를 베고 잔 적이라면 종종 있지만 ‘팔베개’라는 명확한 호칭이 붙는 행위를 일부러 한 기억은 없었다.

    “해 보고 싶나? 원한다면 팔 하나쯤은 내줄 수 있어.”

    “……온 사방이 네 적인데 팔이 저려서 제대로 못 쓰는 상황이 되면 엄청 위험해지지 않을까?”

    일레이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러나 정태의는 “아냐, 사양하겠어. 굳이…….”라며 손을 젓고 만다.

    이쪽 역시 상상이 안 간달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팔베개’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보드랍고 달콤한 그림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이놈에게 익숙할 만큼 익숙해졌다지만 그건 좀…….

    “흠…….”

    그런 정태의를 바라보며 일레이가 미묘하게 웃었을 때, 저 너머에서 전화가 울렸고 이어 리타가 카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 제임스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화가 난 것 같은걸요.”

    그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카일은 전화를 받으러 억지로 걸음을 떼어 서재 쪽으로 사라졌고, 그제야 정태의는 널따랗게 빈 소파에 풀썩 드러누워 버렸다.

    낮잠 잘 자고 일어났는데 홍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온몸의 진이 도로 다 빠져 버리고 말았다.

    *

    제임스에게 너덜너덜하게 시달리고 왔을 카일은 뜻밖에도 만면에 웃음을 담고 싱글벙글거리며 돌아왔다. 팔에는 리하르트가 보내 주었다는 책 한 꾸러미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원래라면 크리스토프에게 주려고 구했을 그 책들을 뜻밖의 선행으로 얻게 된 카일은 온 세상 보물을 다 가진 듯한 기색으로, 귀가하자마자 신이 나서 서재로 달려가 틀어박혔다. 보나마나 또 책들을 재배열하며 한 권 한 권 소중하게 꽂아 넣고 있을 게 뻔했다.

    “이러다 크리스토프는 매주 휴가를 받겠군.”

    “크리스토프를 T&R에서 잘라 버리면 아마 리하르트는 도서관이라도 선물해 줄걸.”

    정태의는 일레이의 대꾸에 금세 납득하고는 웃고 말았다.

    “크리스토프는 지금 잘 있으려나…….”

    몇 년 만에 봤는데도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정태의가 왔다고 해서 일부러 카일의 저택에 들렀던 것일 텐데도 금세 돌아가고 말았다.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흘끔 휴대전화를 쳐다보았지만 관뒀다. 공연히 인사라도 건넸다가 자칫 크리스토프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그래,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지……, 하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는 정태의에게 일레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신경 안 써도 돼. 안부 문자는 내가 대신 보내 뒀으니.”

    “……엉?”

    “네가 신경 쓸 것 같아서, 내가 네 전화로 크리스토프에게 대신 문자를 보내 뒀어.”

    “……언제?”

    “네가 맥주 가지러 갔을 때 갑자기 생각이 나서. 네 성격에 크리스토프를 염려할 게 뻔해서 내가 대신 인사해 뒀지.”

    자신이 이렇게나 배려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듯 팔을 펼쳐 보이며 눈웃음을 짓는 일레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태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보낸 메시지함을 살펴보자 과연, 삼십 분 전에 크리스토프에게 보낸 내역이 남아 있다.

    『잠깐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 오랜만에 천천히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네. 조만간 둘이 따로 얼굴 보자. 잘 자.』

    “무난한 안부 인사지?”

    “…….”

    그래, 무난하다. 보통은 다들 무난하다고 할 거다.

    하지만.

    “……만에 하나 리하르트가 이걸 보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꼬아서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가 아니라 틀림없이 볼걸.”

    “…….”

    정태의는 맥주캔을 움켜쥔 채 일레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너한테? 너한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텐데.”

    “아니 물론 나야 그렇겠지만 이러면 크리스토프가 분명히 더――.”

    “더 사랑받고 있겠지. 팔베개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마 지금 이 순간에 말이야, 하고 일레이가 어깨를 추어올린다.

    즐거운 듯이 웃음 짓는 일레이를 정태의는 말을 잃은 채 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내젓고 만다.

    됐다. 이놈이 못돼먹은 게 하루이틀이었던가.

    “뭘 걱정해.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잖아. 그 정도 인사 문자쯤이야.”

    “……의심은 안 해도 불안은 하다잖아.”

    “그건 문자랑 상관없어. 너랑도 상관없고. 그놈의 본질적인 문제지.”

    맞는 말이다. 이놈은 꼭 결국에는 맞는 말을 해서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정태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맥주는 맛있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서걱거리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열어 놓은 창문으로 풀 냄새가 물씬 풍겨든다.

    페터가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의 풀 냄새, 흙냄새에, 낮 동안 리타가 햇볕에 바삭바삭 말려 놓은 침구의 푸근한 냄새가 섞인다.

    이곳은 여전했다. 몇 년 만에 들러도 이곳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은 휘몰아치는 인생을 살며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인데, 이렇게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분명히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그 변함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부분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더없이 변화무쌍하면서도 동시에 변함없는 걸로 치자면――.

    “왜 그렇게 봐.”

    “……너 독심술 하잖아. 알아맞혀 봐.”

    정태의의 물끄럼한 시선을 마주보던 일레이가 입매를 올렸다.

    “새삼스럽게 반했나 보지.”

    “…….”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닌 것 같아서 그게 더 기분 나쁘기도 하고, 미묘하다……, 웅얼웅얼 입속으로 곱씹는 혼잣말을 그놈이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별말 없이 픽 웃는 걸 보니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정말로 독심술을 썼든가.

    한숨과 함께 맥주를 삼키던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역시 상상이 안 가.”

    “뭐가.”

    “……알아맞혀 봐.”

    “흠――,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팔을 베고 자는 거라든가?”

    역시 귀신같은 놈.

    독심술은 대관절 어디서 배우는 걸까 생각하며 정태의는 두어 모금 남은 맥주캔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보나마나 네놈이 베를린 온다니까 신나서 흥성거리다가 리하르트의 성미를 건드렸을 테지. 리하르트 놈이 그 얼굴밖엔 볼 것 없는 얼간이를 슬슬 꼬드겨서 내기를 하자고 엮어 넣는 거야 일도 아니었을 거고.”

    “……내 잘못이냐?”

    “잘못은 아니지. 책임 소지가 아예 없지는 않을 뿐.”

    “억울하다!”

    “억울하면 그놈을 아예 보질 마.”

    정태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어물거렸다. 아니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데, 것도 고작해야 수십 분 본 걸 갖고…….

    “왜. 너도 불안해서?”

    “불안할 건 없지만 그리 즐겁진 않거든. ……뭐, 오늘은 좀 즐거웠지만.”

    예라이, 성격 파탄…….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맥주만 들이켜는 정태의였다. 그 옆에서 창틀에 팔을 걸치고 “불안이라…….”하고 중얼거리던 일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심경인지는 알겠어. 평생 모르던 걸 우연히 손에 넣었는데 그게 인생을 송두리째 휘감아 버리고 나면, 그걸 잃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거든.”

    “잃어도, 한동안 좀 고통스러울 뿐 어찌 됐든 살아질 텐데.”

    “아니, 안 돼.”

    조용하나 단호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정태의는 빈 캔을 내려놓으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극단적이다. 인생은 한치 앞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고,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정작 어떻게 행동할지는 실상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임에도.

    그러나――그래, 알 것도 같다. 다시 얻지 못할 것을 잃었을 때, 그게 삶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면.

    창밖 어둠 속에서 사각거리는 나뭇잎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일레이가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졸음이 온다는 뜻이다.

    하긴 몇 달 동안 정신없이 전장을 누비다가 쉴 틈도 없이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아무리 강철 같은 몸뚱이라도 안 피곤할 리 없다. 게다가 금방 떠나기도 해야……, 아.

    “그래서, 내일 출발하는 거야?”

    “음? 아아, 아니, 하루 더 쉬고. 리하르트의 정보는 정확하거든.”

    “흠. 이번에도 위험한 일인가?”

    “글쎄. 평소만큼.”

    대수롭잖은 말투만큼 표정도 대수롭잖았다. 정태의 역시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안 위험한 일이면 이놈에게 올 리가 없지.

    그나마 정태의와 함께 간다는 건, ‘개중’ 덜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다. 심각하게 위험하거나 여러모로 껄끄러운 일이다 싶으면 그는 홀로 훌쩍 나섰다가 만신창이로 돌아오곤 했다.

    ……너무 위험한 데에는 슬슬 좀 안 갔으면 좋겠는데.

    맥주캔 하나를 더 딸까 말까 고민스럽게 만지작거리며 정태의는 흘끗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일레이가 그 시선을 마주본다.

    “왜.”

    “아니, 그냥. 앞으론 너 일하는 데마다 다 따라갈까 싶어서.”

    그러면 적당히 좀 덜 위험한 데로 가지 않을까――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흠――.”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가 문득 미묘하게 입끝을 올렸다. 아, 어째 예감이 별로 안 좋…….

    “밤마다 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었나 보지. 나는 나름대로 가끔은 널 쉬게 해 주려고 따로 가곤 했던 건데. 뭐, 좋아. 나도 네 상태 봐 가며 참을 필요 없고, 좋지.”

    대환영이야, 라고 덧붙인 일레이가 창틀에서 몸을 훌쩍 떼더니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속으로 ‘아뿔싸’를 외친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쯤 물러앉았다.

    “야, 잠깐!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참자!”

    베를린이다. 카일의 저택이다. 바로 옆이 카일의 서재다. 카일은 지금 희희낙락 책정리를 하고 있다. 이제 와서는 새삼스럽다는 기분도 들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격렬한 육체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알 거 다 아는 사이라 해도 직접 보고 듣는 것과 머리로 알기만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아니던가.

    일레이의 어깨를 붙들어 세운 정태의를, 바로 코앞에서 일레이가 지그시 내려다본다. 문득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참으면……?”

    “엉?”

    “그 대신 너는 내게 뭘 해 줄 거지?”

    일순 말문이 막히는 정태의였다.

    아니 잠깐만요……. 원래 그건 서로 간에 합의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너한테야 씨알도 안 먹힐 얘기긴 하지만 원래는 그런 건데요, 그걸 안 하겠다는 건데 뭔 대가를……, 야이양심도없는새끼야.

    ――그렇게 욕해 본들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정태의는, 금방 단념하고 맥빠진 숨을 내쉬었다.

    “그래, 뭘 바라는데.”

    “흠――글쎄…….”

    일레이는 비스듬히 웃으며 정태의에게서 물러났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그가 불쑥 꺼낸 말은,

    “그렇지. 팔베개를 해 보는 건 어때.”

    “……, ……엉?”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눈만 껌벅거리며 멍하니 되묻는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가 침대에 가볍게 몸을 던졌다.

    “얼마나 좋길래 저놈들이 저러고 노나 궁금하지 않아?”

    아니 별로……, ――라고 해 봐야 역시나 아무 소용 없으리라는 것을 정태의는 잘 알았다. 일레이는 이미 매트리스에 길게 뻗어 누워 있었다.

    잠시 물끄러미 일레이를 내려다보던 정태의는 짧은 한숨을 쉬곤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간다.

    그래, 어차피 이놈도 졸릴 터였다. 자신도 나른하긴 하다. 팔베개를 하고 자는 것쯤이야 양반이지. 까짓 거 딱딱하고 좀 불편한 베개를 베고 잔다고 생각하면…….

    매트리스 위를 기어 일레이의 곁에 누운 정태의는, 이런저런 더한 짓도 하는 마당에 팔베개쯤이야 아무것도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좀 낯 뜨겁다고 생각하며 그의 팔 위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머리가 그의 팔에 막 닿으려던 순간, 일레이가 팔을 뺐다. 머리가 허공을 지나 베개로 떨어진다.

    응……?, 하고 눈을 껌벅이던 찰나, 일레이가 정태의의 손목을 잡아당겨 팔을 곧게 펴더니 그 위로 제 머리를 내려놓고 누웠다. 팔 위에 묵직한 무게감이 얹힌다.

    “……. ……. …….”

    정태의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눈높이보다 약간 아래, 일레이의 머리통이 보인다.

    “……네가 베고 자겠다고……?”

    “안 될 이유라도?”

    “……, 없지.”

    없지만, 무겁다.

    처음엔 그냥 좀 묵직한가 싶었는데,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인체에서 머리가 제일 무겁다더니.

    “생각만큼 불편하진 않군. 이대로 자도 되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일레이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졸음이 묻어 있어, 정말로 그대로 잘 성싶었다.

    “너 잠들면 빼도 되지……? 난 슬슬 팔이 저려 오기 시작했어.”

    “빼면 깰 텐데.”

    “깨지 마.”

    피식, 팔 아래에서 웃는 기척이 났다. 오케이, 그렇게 대꾸하는 소리가 따랐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고요한 정적이다.

    낮은 숨소리와, 바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바싹 붙어 있는 몸에서 체온이 전해진다. 이상도 하지. 외려 몸을 섞고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전해지는 것 같다. 살아 숨 쉬는 것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제법 푸근한 감각.

    팔이 저릿저릿하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살짝 손가락도 움직여 본다. 이러다 피 안 통해서 못 쓰게 되는 것 아냐……?, 그런 걱정도 슬쩍 해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팔 안에 가만히 머리를 눕히고 곤히 누워 있는 기척이 좀 사랑스럽기도 하고……, ……,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나도 제정신은 아니로구나. 어렴풋이 몰려오는 자괴감을 몰아내려고 머리를 휘휘 내저어 보는 정태의였다.

    “왜. 잠이 안 오나?”

    나직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반쯤 잠이 들기 시작한 목소리라는 걸 구분할 만큼은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다.

    “음……, 뭐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어떤.”

    “이를테면, 리하르트는 그래 봬도 은근히 크리스토프를 엄청나게 아끼는 모양이라거나. 이렇게 팔이 저린데도 아침까지 가만히 팔을 내주고 있었다니 말이야.”

    “넌 날 안 아끼는 모양이지?”

    “……. 사람이 말이지, 아무리 거듭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도 있거든.”

    그런 발언 같은 것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자 다시 피식 웃는 기척이 들려왔다.

    “금방 잠들 것 같으니 그때 빼도록 해.”

    그전에 먼저 머리를 치워 줄 생각은 없는 듯 일레이가 말했다. 그 역시 그렇게 누워 있는 게 편안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뚜렷한 목소리였으나마 점차 잠에 빠져들어 가는 걸 알 수 있어, 정태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곧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평화롭고 안온한 고요함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태이.”

    문득 일레이가 나직이 정태의를 부른다.

    “응.”

    정태의는 그에게 대답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어떠한 볼일도 용건도 없었다. 그저 잠들기 직전에 확인하듯 부른 것뿐이다.

    이제 잠들겠구나. 그렇게 예상한 대로, 일레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귀 기울여 봤지만 언제까지고 낮고 고요한 숨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이제 슬슬 팔 빼도 되려나. 팔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둔해지고 있는데.

    빼면 물론 이놈은 잠결에 다 알아채겠지만, 그래도 별말 없이 머리를 치워 줄 터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빼도 되긴 할 테지만.

    “…….”

    정태의는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이의 얼굴이 비스듬히 내려다보인다.

    낯익었다. 그 얼굴은 물론, 숨소리도, 체온도, 체취도.

    모두 다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인데도, 그 하나하나가 마치 새겨지듯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평소 잊고 지내던 것을 여실하게 느끼게 된다.

    자신이 이 남자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이 남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몹시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

    문득 정태의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리하르트가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는지. 품속에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지.

    그 심경은 필경 정태의가 지금 느끼는 것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묵직하게 저린 팔을 선뜻 빼내고 싶지는 않은 마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는 할 터였다.

    그래서 정태의는 내심 조용한 한숨을 쉬면서, 그다지 정이 가지 않는 남자이나마 리하르트를 위한 기도를 짤막하게 외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아, 아픈데. 저린데.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이러다 영영 팔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에라, 모르겠다.’하고 투덜거리며 팔을 그대로 놔두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조용히, 천천히, 밤이 깊어 간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 오늘도 하루가 끝났다. 내일도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과연 모레는.

    이 위험한 놈과 함께 지내며 더 이상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게 된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 체온을 품에 느끼는 나날이 조금쯤은 더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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