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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하게 가죽이 타는 역한 냄새를 피치 못하게 맡으며, 정태의는 짧은 후회를 했다.
그냥 얌전히 상황 흘러가는 대로 잡혀 있었더라면, 어차피 그들이 목적하던 사람도 아니겠다, 순순히 풀어 주지 않았을까. 설령 목적하던 사람은 아니지만 정재의의 협박 도구로 쓴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안전에 크게 위협을 주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아마 다시 선택의 여지를 준다 해도 정태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운이 좋으면 얌전히 풀어 주는 거지만, 재수 없으면 딴말 새어나가지 않게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가 몹시 흔하다는 건, 전쟁사 한 권만 읽어도 잘 알 수 있었다.
정재의처럼 탁월하게 운이 좋지 않은 일반인인 정태의는, 언제든 운에 목숨을 맡기는 일은 없었다.
“…….”
라이터 불에 대고 있던 끈의 방향을 살짝 틀던 정태의는 으윽, 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까 얻어맞을 때 어깨 근처에서 뼈가 살짝 접질린 것 같았다. 살짝 움직일 때마다 몹시 욱신거린다 싶더니, 이내 그 근처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긴 어깨뿐만 아니다. 아마 밖에 나가서 거울을 보면 온몸이 시퍼렇지 싶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면서도, 다리의 자유화에 계속 골몰했다. 팔을 묶어놓은 끈은 살갗을 살짝 파고들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어 무리였지만, 발목 사이를 묶은 줄은 어렵잖게 태울 수 있었다.
불을 켠 라이터를 침대의 이음매 사이에 끼워 놓고 거기에 발목의 줄을 갖다 대고서, 정태의는 역시 가죽 타는 냄새는 사람이 맡을 만한 냄새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가죽끈과 철실이 그을리고 타는 냄새가 몹시 지독해서, 이 냄새가 새어나가서 사람이 오면 낭패겠다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아까부터 이 근처로 사람들 오가는 소리가 뜸한 걸로 봐서는, 다들 다른 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바삐 오가는 소리가 멀찍이서 종종 들려왔다.
다리도 그렇고 팔도 그렇지만, 이 입이나 좀 편해졌으면 좋겠는데.
정태의는 입을 가득 틀어막은 마우스피스가 얼마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새카맣게 그을린 발목 줄을 툭툭 당겨 보았다. 까만 잿가루가 부슬거리며 떨어진다.
오케이…….
침대 모서리에 발목 줄을 슥슥 비비며 정태의는 가뿐하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투성이가 된 끈은 약간의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리만큼은 자유로워졌다.
기왕이면 팔이 자유로웠더라면 다리와 입도 덩달아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쉽게 여겼지만 사람은 주어진 조그만 것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정태의는 만족스레 양쪽 발목을 툭툭 털었다. 얻어맞았던 허벅지며 정강이가 찌잉 하고 울렸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발목이 살짝 욱신거렸지만 역시나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이렇게 말을 해도, 제대로 움직일 환경이나 되어야 지장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이지.
정태의는 덧문이 닫혀 있는 창문을 보았다. 몇 시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설마 벌써 날이 밝진 않았을 테고, 그나마 바깥이 내다보이기라도 하면 대충 어림짐작이나마 할 텐데.
팔보다 높은 위치에 달려 있는 창문을 아쉽게 쳐다보다가 곧 깔끔하게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다음은…….
정태의는 나무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에 달려 있는 여닫이문을 바깥 방향으로 열어, 거기서 체중을 실어 좀 더 힘을 주었다. 빠직, 문짝이 부서져 덜렁거린다.
역시 다리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움직이니까 뭘 하기도 편하구나, 하고 즐거이 콧노래를 부르며, 망가진 경첩에서 떨어져 나온 얇은 핀을 뒤뚱뒤뚱 주워 올렸다.
다행히도 이 공관 같은 건물은 문도 허술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핀 하나만 있으면 어렵잖게 열 수 있는 문이었다.
기우뚱하게 돌아서서 손맛으로만 문고리를 더듬으며 묶여 있는 손으로 열려니 아무래도 좀 어렵긴 하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까 문이 열렸을 때에 복도 생긴 걸 보아 하니 정말로 공관이나 별 다름없는 건물이겠고, 그러면 몰래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정태의는 흥흥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문이 열릴 참이었다.
그때.
뭔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잘못 듣기는 힘든 그 소리는, 총소리였다.
“……?!”
고요한 밤에 울린 총소리는, 처음에는 한 방씩 가끔 터지는가 싶더니 점차 빈도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디선가는 기관총이 울리는 소리도 들렸다.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아니다.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분명히 총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을 법한 비명소리나 고함소리 따위까지 어우러졌다.
……. ……뭔가 안 좋다.
당연한 일이지만, 총소리가 들려서 좋은 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총소리에 고함소리까지 섞이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문고리를 달각거리는 손가락이 초조해졌다.
그러나 초조한 가운데서도 실수 없이 움직인 손끝에, 잠시 뒤 달칵, 잠금쇠가 풀리는 손맛이 전해졌다.
좋아.
정태의는 잠시 그대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열자 총소리가 한결 커졌다. 거친 고함소리나 총소리가 건물 밖에서인 듯 약간 둔탁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도, 저 아래층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바깥처럼 잦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여기저기에서 한 번씩 울렸다.
한동안 귀를 기울여 보자 총소리가 들리는 쪽은 주로 저 아래층―짐작컨대 두 층 가량 아래일 듯했다―의 오른쪽.
“…….”
아니, 어쩌면 오히려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쪽으로 사람들이 몰려갔을 가능성도 컸다.
정태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한 치, 또 한 치, 바깥을 살피며 소리 없이 문을 연다.
복도는 어두웠다. 천장에 긴 간격으로 띄엄띄엄 달린 형광등 가운데에는 켜지지 않은 것도 섞여 있어서, 오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좀 어둑한 느낌이다.
그러나 차라리 이런 편이 낫다. 어둑하면 그만큼 눈에 덜 띌 수 있다. 물론 활기차게 움직이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었지만.
정태의는 가만히 복도로 나갔다.
생각했던 대로 이 건물은 공공건물로 썼던 곳인 듯했다.
저 앞쪽에서 한 번 꺾여 있는 복도의 양쪽으로 비슷하게 생긴 나무문이 점점이 늘어서 있었다. 복도 모퉁이 옆에 커다랗게 열려 있는 여닫이 철문은 아마도 계단일 성싶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사히 나가는 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나마 다른 때라면 들키더라도 어떻게든 무마할 가능성이나마 있을 텐데, 지금처럼 팔을 못 쓰는 상황에서라면 누구와 마주치든 정태의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가 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계단에서 누군가 뛰어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차라리 얼른 도로 방으로 들어갔으면 좋았겠지만, 그 소리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울려 미처 뒤로 꺾인 손으로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갈 만한 틈이 없었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계단 정면 쪽의 벽에 있던 소화전 옆에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나 튀어나온 길이가 고작해야 한 뼘 남짓한 소화전 옆은, 숨었다는 의미가 거의 없었다. 계단에서 올라와 고개만 올리면 직통으로 보이게 된다.
휴. 나오자마자 술래잡기 시작이구나.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숨바꼭질이 낫지, 술래잡기는 싫은데.
달리기는 빠른 편이었지만, 상체가 불편하게 고정되어 있으면 운동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달리는 수밖에 없으니, 계단에서 급하게 달려올라 온 남자가 이쪽을 보는 순간 걷어차고 그대로 냅다 달리는 게 상책이겠다, 그렇게 생각한 정태의는 살짝 발을 뒤로 뺐다.
그러나.
정태의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실로 이해할 수 없게도, 남자는 계단을 다 올라오자마자 돌아서서 뒷걸음질쳐 복도로 들어왔다.
마치 뒤에서 뭔가 쫓아오지 않나 돌아보다 못해 아예 돌아서서 슬금슬금 물러서는 것처럼, 그렇게 뒤로 돌아서 다가오는 남자의 빈틈을 정태의는 놓치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기는 한편으로도 단숨에 몸을 띄워, 정확하게 턱끝을 노려 남자의 턱을 걷어찼다.
확 고개가 꺾인 남자는 머릿속이 흔들린 듯 휘청거렸다. 그런 그에게 정태의는 두 번째로 발길질을 했다. 이번에는 뒤통수 조금 아래. 정확하게 들어갔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더니 그대로 기절해서 쓰러졌다. 정태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레 남자를 살폈다.
“…….”
꼼짝도 않는 남자가 기절한 것뿐이라는 걸 확인한 뒤,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십년감수했다.
……하지만.
왠지 몰라도 남자가 뒷걸음질쳐서 와 준 덕분에 정태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해 그를 기절시킬 수 있었지만, 역시 의아했다.
어째서? 뒤에서 뭔가 무시무시한 게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뒤돌아서서…….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구부려 남자를 쳐다보던 정태의는, 아래층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와 얼른 일어섰다.
어찌 되었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숨을 죽이고 아래층의 기척을 살피며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층계참에 표시된 숫자는 3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으니 적어도 4층 이상 되는 건물이다. 아마도 공관으로 쓰인 건물이면 높아봐야 5, 6층 정도가 고작일 거다.
정태의의 조심스런 걸음이 2층에 닿았다.
그대로 아래층에 내려가려 했지만, 계단 바로 아래층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나서 2층 복도로 들어갔다.
이 정도 넓이의 건물이면 계단은 분명히 다른 데에도 있을 것이다.
정태의는 주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단을 찾아 복도를 달리는 동안, 정태의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복도를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했다.
인기척이 묘하게 없었다.
분명히 아까 정태의가 갇혀 있을 때에는 복도 바깥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종종 들려왔었다. 그래서, 건물에 사람이 제법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는 고요했다.
아래층에서는 간간이 총소리가 한 번씩 들려오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마치 사람이라곤 처음부터 없었던 같다. 혹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했다.
“……?”
기분이 안 좋다. 어서 이 건물에서 나가고 싶었다.
복도 끝에 철문이 또 하나 보였다. 계단실일 것 같았다.
그리로 다가가 어깨로 밀어 문을 열자 생각대로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정태의는 얼어붙고 말았다.
시체가 있었다.
바로 앞, 계단 제일 윗단에 한 사람, 그리고 층계참을 돌아 아래로 내려서는 쪽에 또 한 사람.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다.
“……!!”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 있는 시체를 보고 정태의는 일순 숨을 멈추었다.
뭐야, 이게. 왜 이런 데에 사람이 이런 꼴로 죽어 있지.
정태의가 얼어붙어 그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의 철문이 덜컹 열리는 기척과 함께,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얼른 문 뒤쪽으로 숨어 숨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아래층 계단실로 들어온 사람은 계단을 올라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니, 두 사람이다.
가쁜 숨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 중 하나가 불쑥 중얼거린다.
“빌어먹을……,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이런 일, 계약하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어떻게 생겨먹은 상황인지 모르겠어.”
불안과 공포로 가볍게 들뜬 목소리.
잠시 뒤에, 그보다는 다소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긴 뭐겠어. 저놈들이 한밤중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총질을 하는 거지. 젠장, 바깥에 나간 놈들도 뚫렸어. 이미 건물 안에 저쪽 놈들이 몇 명 들어왔다고.”
“아까 그놈이 두목인가? 제일 처음에 유리문 깨부수고 들어온 그놈? 저쪽 놈들이 다 그놈 명령을 따르는 것 같던데. 뭐랬지, 아비드? 알 아비드?”
“알……사우드……였나. 누굴 찾는 것 같던데…….”
정태의는 철문 뒤쪽으로 기척과 숨을 죽인 채, 남자들이 나직이 소리를 낮추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제야 상황이 납득되었다.
아비드 알 사우드. 라만이 왔다.
그 남자가 유리문을 깨부수고 들어왔다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아까 뭔가 제재를 가하겠다느니 어쩌고 하더니, 아예 무력으로 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찾고 있을 사람은, ……아직 독일에 도착하지 않았을 형이겠구나…….
정태의는 갑자기 라만이 아주 조금 가엾어졌다.
이 기회에 정재의에게 환심을 사서―혹은 은혜를 입혀서―사우디아라비아로 불러들여야겠다는 계산도 약간은 하고 왔을 텐데, 애시당초부터 어긋난 계산이었다.
내가 그 앞에 나타나면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사실은 그 앞에 나타나면 당장 잡아다가 협박 도구로 써먹을 테니―그에게 들키지 말고 몰래 도망치는 데에 반드시 성공하도록 하자.
정태의가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였다.
“아니……, 하지만 문제는 그놈이 아냐.”
아래에서 나직이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에 갑자기 희미한 공포가 서렸다. 그의 탁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괴물이 하나 섞여 있었어. 악마 같은 놈이. 너도 봤지.”
“어……, ……저쪽에서 고용한 용병인가.”
대답하는 목소리도 떨리며 나직해진다.
“아니, 아닌 것 같아. 그놈이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숨어 있다가 봤는데, 저쪽 놈들에게도 칼을 쑤셔박던걸.”
“뭐? 그럼 우리 편에서 고용한……아니, 그럴 리 없어, 브렛이 그놈한테 죽었잖아!”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듯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럼 그놈은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냐고!”
“그놈도 누굴 찾으러 온 거다. 잘 못 들었지만, ……어디 있냐고, 그렇게 물었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야.”
“빌어먹을……, 라쉬드 이 망할 영감은 대체 누굴 잡아왔길래 이 난리야!! 차라리 그놈을 잡아다가 저놈들한테 넘겨주자고!”
“잠깐……, 아까 잡아왔다는 그놈인가? 위층에 가둬 놨었지?!”
남자가 나지막한 비명처럼 외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
“뭐야, 불이?!”
남자들의 당혹스런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정태의도 약간 몸을 굳혔다. 정태의가 몸을 숨긴 철문 안쪽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도 사라져 버렸다.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광원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이 멀어 버릴 듯 새카만 암흑.
아무래도 건물 전체의 불이 나간 것 같았다. 누군가 퓨즈라도 끊어 버린 것처럼.
“정전? 이럴 때?!”
“뭐야, 아무것도 안 보여. ……어떻게 된 거야. 빌어먹을, 어떤 놈이 건물 전체의 전원을 차단시켜 놓은 거 아냐?! 잠깐, 올 때 보니 바로 이 문 옆에 차단기가 있었――.”
그러나 그때.
남자들의 목소리를 자르며.
“아하……,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일부러 불을 꺼 줬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혹시 또 알아, 어둠 속에서는 내가 미처 못 보고 놓쳐서 무사히 숨어서 잘 도망칠 수 있을지.”
웃음 섞인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지척에서.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정태의는 새카만 어둠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멈춰 선다.
잘못 들을 리 없는 저 목소리.
……일레이다.
정태의는, 손만 멀쩡했더라면 틀림없이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저 목소리에 이미 익숙할 만치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귀에 저 낮은 웃음이 이렇게 끔찍하게 들렸을 정도인데, 저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까.
그러나 정태의가 그들의 심정을 안타깝게 여긴 보람도 없이, 곧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은, 들렸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자, 더 시끄러운 놈을 하나 먼저 조용히 시켜 두고 이야기를 들어 볼까. 아까 잡아왔다는 놈을 어디에 가둬 뒀다고? 위층? 2층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놈들은 다 없앴고, 3층도 지금 막 보고 왔지만 정재이는 못 봤는데. ……아하……, 좀 희한하게도 새카맣게 탄 가죽조각이나 라이터 따위가 널브러진 빈방이 하나 있더니, 거기 있다가 도망쳤나.”
역시 운이 좋은 건 확실하군, 하고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정태의는 여전히 섬뜩한 심장을 두근거리면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일레이 역시 정재의를 찾고 있다.
이곳에 잡혀온 사람이 정재의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아냐, 나야, 나! 나라고!!
정태의는 반갑, ……다기보다는―지금의 떨리는 심장으로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사실을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에 숨어 있던 철문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팔을 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입을 막고 있는 마우스피스와 재갈을 풀 수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저놈이 건물 전원을 내려 버려, 사방은 한 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핫……, 하고 뭔가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어 멈춰 섰을 때엔, 이미 늦었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기척이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일레이가 일어서며 느릿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가 있나?”
맹세컨대, 이 평범한 말이 이렇게 끔찍하리만치 두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마치 어릴 적 괴담에서 나오는 소재 같은 느낌이다.
“이런. 여태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군……. 어느 솜씨 좋은 토끼가 거기에 숨어 있었을까.”
일레이가 웃으며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뚜걱, 뚜걱, 무거운 구두소리가 한 단 한 단 올라오며 가까워진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이대로 달려들어서 저놈의 가슴에 박치기라도 하면 알아챌까. ……아니, 박치기를 하기도 전에 먼저 한 방 맞을 것 같다.
아니면 이대로 얌전히 저놈이 오기를 기다리면, ……아니, 얌전히 있는다고 착하게 아무 짓도 안 하는 성격은 또 아니다.
그렇다면 도망……, ……그것도 좀…….
정태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일레이는 중간의 층계참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층계참에 있는 조그만 창문으로 매우 부옇고 희미한 밤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모습을 분간할 만큼은 안 되는 그 어두컴컴한 빛으로는 실루엣 정도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속에, 층계참으로 올라서는 일레이의 손이 흐릿하게 윤곽만 알아볼 정도로 비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과, 거기에 들려 있는 물건.
“……!!”
시커먼 윤곽뿐이었는데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알랭의 집에서 보았던 그 물건이다.
사람의 팔뚝만큼 길죽한 그 톱니 칼날 끝에, 진득한 물방울이 매달려 잠시 흔들리다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흠……?”
그때 갑자기, 일레이가 잠시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의아한 듯 그렇게 멈추어 있던 그는,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약간, 탄내가 난 것 같지 않았나……?”
순간 정태의는 움찔 몸을 움츠렸다. 양 발목에 끊어져서 매달려 있는 그을린 가죽줄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끝에,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아하……. 나는 코가 좋은 만큼 감도 아주 좋은 편인데……, 특히나 사냥감에 대한 감은 여태 틀린 적이 없었단 말이야.”
“……!”
“오랜만이군, 정재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악수도 못 하겠는데.”
그 손에서 칼 그림자가 즐거운 듯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정태의는 자리를 박차고 계단 위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줄기가 얼어붙으면서 온몸의 털이 비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감이 좋긴 뭐가 좋아, 이 미친놈아!!
입만 멀쩡했더라면, 말만 할 수 있었더라면 정태의는 목 놓아 그렇게 외쳐 주었을 터였다.
하긴 그랬더라면 이렇게 도망칠 이유가 아예 없었겠지, 하고 한편으로는 생각하면서 한달음에 3층으로 올라간 정태의는 더 올라가지 않고 3층 복도로 빠져나갔다.
3층의 계단실 문을 빠져나갈 때, 반층 아래의 계단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따라 올라왔다. 소름이 끼쳤다.
복도는 새카만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불빛도 하나 없고 인기척도 전혀 없다.
정태의는 몇 걸음 걷다 말고, 이내 달려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정태의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된 상태로 달려도 저놈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상반신이 부자유하게 묶여 있다면 당연히 저놈보다 달리는 속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달리는 와중에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 부딪히자 어긋난 어깨는 이러다 문제 생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욱신거리고 있었고, 아까 그냥 살짝 삐끗한 정도였던 발목은 점점 작살이 나고 있었다. 입속에 들어찬 마우스피스마저 숨통을 막는다. 이러다간 저놈 손에 죽기 전에 먼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무조건 달리기만 해서 저놈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자살행위다.
정태의는 최대한 소리 없이, 최대한 빠르게 복도를 나아가면서 짚이는 대로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다 열었다. 손목이 묶여 있으니 그것도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고작해야 문을 서너 개 열었을까 싶을 즈음, 계단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재이. 그렇게 열심히 도망치지 않아도 될 텐데. 네 운이라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결국은 멀쩡하지 않나, 응?”
느긋하게 중얼거리는 넉넉한 목소리가, 쥐죽은 듯 고요한 이 새카만 공간에 울렸다. 그러는 동안에서 저 아래 어딘가에서 타당, 총소리가 들린다.
아까보다 총소리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슬슬 건물 안으로 밀어닥쳐 총격전을 시작했는지, 아래층 어느 편에선가는 제법 격렬하게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곳만이 고요해서―분명히 총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도 이곳만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만 다른 세상 같다.
“예전에 내가 네게 총을 쏘았을 때에도, 멀쩡하던 총이 갑자기 폭발해서 오히려 내가 다쳤었지. 정말이지 굉장한 운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일도 있었어?! 이제 보니 예전부터 우리 형의 목숨을 노렸었구나, 이 자식?!
“그런데 말이야, 궁금하지 않나? 총이 아니라 칼이라면 어떻게 될까. 너도 인간일 텐데 설마 뱃가죽이 칼을 막아내지는 못할 테고, 칼이 갑자기 줄줄 녹아내리지도 않을 테고. 그게 궁금해서, 이번에는 총 대신 칼을 준비해 봤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조금씩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기척을 죽여, 복도의 기둥턱 옆으로 약간 떨어져서 몸을 기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느리고 여유로운 목소리는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건다.
“과연 네 운은 어느 정도일까.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었거든. 그러니 내 사냥과 네 운, 어느 쪽이 우선일지 다시 한번 시험해 보자고. 네 운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해도, 과연 어떻게 벗어날지 궁금하단 말이야…….”
그 목소리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복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일레이라고 해도, 눈으로 정태의를 분간할 수는 없을 터였다. 나머지는 그의 귀, 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감.
정태의는 숨을 죽였다. 심장소리가 가슴 밖까지 들릴 리는 없다는 건 알고 있는데도, 자신의 귀에는 마치 큰 북을 치는 것처럼 커다랗게 울려 그조차 초조했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저놈에게 다가가면, 저놈은 내가 제 사냥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려 주진 않을까.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나 오래 같이 지냈으니 뭔가 그런 류의 감 같은 게 생겨서, 가까이 가면 그 기척만으로도 알아본다든가.
그래, 그럴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저놈은 가끔 내가 한밤중에 컴컴한 제 방에 소리 없이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고 휙 끌어안아 당기곤 하지 않던가.
혹시 밤에 제 방에 들어오면 아무나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몰래 카일을 불러다가 카일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말했다간 도와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일레이의 방에 들여 넣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카일에게 몹시 미안한 짓을 할 뻔했다.)
그때 저놈은 덥석 끌어안긴커녕 냉랭한 목소리로 ‘이 시간엔 왜. 볼일 있으면 내일 아침 먹으면서 말해.’라고 쌀쌀맞게 대꾸했었다. 그 말을 듣고 카일이 투덜거리며 나온 뒤, 잠시 사이를 두고서 카일이 들어갔을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정태의가 조용히 그 방으로 들어서자 여지없이 또 휙 끌어안겼다.
“…….”
그런 걸로 봐선, 그래, 지금도 그냥 얌전히 순순히 저놈에게 가면 도중에 알아차리고 칼을 거둘지도 모르잖아.
정태의가 아주 짧은 고민을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 어디……, 여기쯤 있나?”
잠시 말소리도 기척도 끊겼다 싶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그때,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동시에 사악 바람을 가르는 기척이 다가온다.
지극히 짧은 순간.
본능이 시키는 대로.
고작해야 한 치,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정태의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카각, 귀에 거슬리면서도 벽에 매끄럽게 스며드는 듯한 소리는, 정태의의 묶인 팔 바로 옆에 꽂혔다. 팔 옆에 선뜩한 칼날의 느낌이 확 끼쳤다.
“……!!”
귀신같은 놈, 정태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벽에 박힌 칼을 뽑아낸 일레이는 나직이 웃으며,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 정확하게, 맞으면 틀림없이 죽을 곳을 노려 휘둘렀다.
땅을 박차고 달려 나서려 하면 그 달려가는 방향으로 휘두르는 게, 이놈 사실은 보이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럭 들었다.
일레이는 문득 하, 하고 감탄스러운 듯 짧게 웃었다.
“과연, 이래서 운이 좋다는 건가. 책상 앞에 앉아 머릿속 세상에만 빠져 계시는 몸이 이렇게 훌륭하게 피해낼 리가 없는데. ……그럼 어디, 슬슬 본격적으로 나가 볼까.”
그럼 여태는 본격적이 아니었냐! 이제 죽었구나.
정태의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없다. 내가 이 짓은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내가 살고 봐야지. 미안, 일레이.
정태의는 기척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다가오는 방향을 가늠해 정확하게 노려, 눈을 딱 감고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정강이에 묵직하게 닿는 감촉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때 처음으로 이 남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매우 선명하게 깨달았다.
낮고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일레이의 입에서 고통으로 터져나오는 신음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듯도 했다. 몸을 구부리며 숨을 삼키는 기척이 났다.
정태의는 아주 짧은 순간만 망설인 뒤, 곧바로 뒤돌아서 눈물을 삼키며 달렸다. 같은 남자로서 이 짓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동시에, 이제는 잡히면 정말로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절망마저 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속도가 나지 않는 가운데도, 몸을 약간 틀어 어깨로 손 대신이나마 앞을 확인하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정태의의 기억으로는 이즈음 모퉁이가 나오고, 그 모퉁이를 돌아서 조금만 가면 다른 계단이 나올 터였다. 그러면 무조건 내려가는 거다.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게임 셋.
젠장. 왜 이 오밤중에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거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어 버린 거야.
정태의는, 그때 처음으로 형을 아주 조금 원망했다.
비록 형이 자신을 대신해 이 상황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맹세컨대 절대로 없었지만, 그래도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의 큰 부분이 형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개미눈물만큼 원망스런 마음이 든다. 동시에, 다시 한번 깨닫는다. 자신의 형이 얼마나 운 좋은 인간인지.
“…―.”
숨이 턱까지 찼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어쩌면 자신이 지금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부터 총소리가 연신, 부쩍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총소리가 가깝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총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가깝긴 하나 이 층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저 소리를 따라가서 내려가면.
비록 총구를 들이댈 인간과 마주치게 될지는 몰라도, 저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저 무시무시한 남자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총소리를 따라갔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의지할 거라곤 저 삭막한 총소리뿐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물의 구조를 따라, 어깨를 몇 번이나 호되게 부딪히면서 모퉁이를 돌아서 총소리를 따라 달린 어느 순간, 정태의의 발 아래로 문턱이 스치며 지나갔다.
계단이다.
정태의의 머릿속에 짧은 희열이 솟구쳤다.
내려가기만 하면. 이곳을 내려가 이 건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오로지 그 생각만을 하며, 어디부터 시작인지도 모를 계단을 발로 더듬어 한 계단 내려섰을 때였다.
“혼자 가시려고?”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
귓가에 바싹 닿아 속삭이는 목소리.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을까. 전혀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순간적으로 정태의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것이 이 남자의 사냥이라는 것을, 그때 깨닫는다.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게끔 하면서도 결코 달아날 수 없는.
“……!!”
등에 뜨끔한 아픔이 달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그 숨결을 느낀 그 순간에 곧바로 몸을 날렸는데도 미처 피해내지 못한 칼날이 옷을 찢고 등의 피부를 긁으며 스쳐갔다.
크게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얼핏 피냄새가 풍겼다.
뒤에서, 이번에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피했나? 이거야 대단한데. 정재이, 댁은 연구자보다는 이쪽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그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얼굴 앞으로 사악 다가오는 바람이 있었다.
뒤에 있던 계단턱에 걸려 정태의는 균형을 잃고 휘청, 벽에 등을 부딪히며 쓰러져 앉았다.
그리고 칼이 정태의의 목을 가른다.
정확히는 귀에서 한 치쯤 아래.
얇은 칼날이 목의 피부를 깊이 베고 벽에 박혔다.
피부 한 장. 그러나 제법 깊이.
여전히 칼자루는 일레이가 쥐고 있었다. 그가 그대로 손을 옆으로 밀어 칼을 쓰러뜨리면, 그 크고 날카로운 칼날은 작두처럼 목을 떨어뜨릴 터였다.
……게임은 끝났다.
“아주 정확하게 맞았어.”
코앞에서, 일레이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아픈지 목소리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린다.
“이렇게 아픈 건 또 오랜만이었지. 정말로 사정없이 차더군. 순간적으로, 앞으로 평생 못 쓰는 건 아닌가 싶었어.”
목을 한 꺼풀 베고 들어온 칼날이 움칫, 움직이는 것 같았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정태의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심경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건가. 이대로. ……일레이의 손에?
그건 안 되는데. 죽는 것도 싫지만, 하필이면 이놈 손에 죽는 건 더욱 안 된다.
잠깐만, 뭔가 수가 있을 거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정신만, 정신만…….
“그러면 안 되지, 정재이 씨. 이 물건을 못 쓰게 되면 네 동생이 운다고.”
절대 안 그래! 절대 안 그래!!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숨이 막혀 죽는다면, 숨이 막히는 원인은 절대로 신체적인 이유는 아니다.
정태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보이지도 않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 따위는 느끼지도 못한 듯, 일레이는 나직이 웃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과연 운 좋은 정재이는, 칼질을 해도 목이 안 잘리는지.”
“……!!”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기척이 칼날을 타고 전해졌다.
순간 심장이 멎었다.
그때.
귓가에서, 공기를 뒤흔드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천둥소리와 닮은 그 소리가 고막을 가득 채운다.
곧 이어 코 끝에 닿는 매캐한 화약 냄새.
“그 사람에게서 비켜.”
낮고 뚜렷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계단 아래쪽, 층계참 가량에서 한 발, 한 발, 구두소리가 다가온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그 총탄에 그의 머리가 박살나든 말든 아랑곳 않고,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 목소리를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다른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자의, 몸에 밴 당당함이 근저에 깔려 있는 그 말투는 쉽게 잊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태의의 목에서 칼날이 떨어졌다. 아마도 정확히 머리를 향해 날아든 총탄을 피하기 위함일 성싶었다.
정태의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선 일레이 역시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듯, 아아, 하고 웃음 섞어 말한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님께서 이런 어둡고 컴컴한 곳까지 와 주실 줄이야.”
“일레이 리그로우. 정작 당신이 해치려고 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일 텐데. 그 사람에게는 손대지 마라.”
“――아하……?”
일레이는 미묘하게 말끝을 올렸다. 뭔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는, 문득 웃었다. 그러나 곧 상관없지, 하고 중얼거린다.
“그래, 올 거라고 생각했어. 올 것 같았지. 그럼 어디, 원하는 대로 해 드릴까. 그러지 않아도 말이야, 내가 아직 덜 갚은 빚이 있었지 않나, 당신한테는?”
그 말과 함께, 일레이는 곧 몸을 움직였다. 라만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늠해. 그가 들고 있는 무기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곧 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몇 번이나 간헐적으로, 때마다 방향을 달리 한 총소리가 이어졌다.
동시에 그 총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악, 사악, 얇게 천 따위가 찢기는 희미한 소리가 간간이 그 사이에 섞여 들린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화할 생각도 없었고 필요치도 않았다는 듯, 어느 쪽도 먼저 무슨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오로지 들려오는 것은 총소리, 그리고 칼의 기척뿐.
총과 칼. 둘 중 어느 것이 더 유리한지.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어느 쪽이라 하나를 짚어 말할 수 없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넓은 범위를 기척 없이 베어드는 칼과, 상대의 위치가 짚이는 순간 거리의 제약이 없이 살을 꿰뚫는 총.
무기를 든 손에 어느 쪽이 더 맞는지. 어느 쪽이 더 잘 다룰지. 또한 감각 하나를 통째로 잃은 이러한 불측의 상황에서, 누가 더욱 싸움에 익숙해져 있는지.
――그렇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점점 피냄새가 더 짙어졌다.
일레이가 총에 맞았든지, 혹은 라만이 칼에 베였든지, 어느 쪽이든 틀림없이 다쳤다. 그리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기척들에, 정태의는 움칫 손을 움츠렸다. 이 소리들 앞에서 손끝이 싸늘한 이유는, 묶여서 움직이지 못하는 탓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치고 있었다. 피 냄새가 몹시 짙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신음 소리는 물론, 거칠어지는 숨소리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간간이 혀를 차는 듯한 짧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누구의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바로 앞에서, 누군가―어쩌면 자신과 절친한 누군가―가 다쳐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공포를 이런 형태로 깨닫게 된다.
그때였다.
아래에서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리던 총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이쪽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쫓아온 듯했다. 인기척도 함께 따라온다.
하나, 둘, ……얼핏 짐작해도 네댓은 되는 수의 사람들이 바로 아래층의 계단실에 다다랐다.
어느 쪽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라만 측, 혹은 라쉬드 측.
그러나 그들끼리는 동료임을 이 어둠 속에서도 확인한 듯,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거칠고 빠른 목소리로 초조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달려온 그들은, 아래의 층계참에서 이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아마도 누군가를 부르는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속에 언뜻 라만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초조하게 그를 부르는 게 누군지, 정태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말리크의 목소리다.
어둠 속에서 라만이 짤막하게 뭐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듣자, 황급히 올라오던 무리들이 멈칫 걸음을 멈춘다.
“……그래, 도중에 다른 놈들이 방해하면 곤란하지.”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나직하게 웃음이 섞인 위험스런 목소리를 듣고 정태의는 그가 아직은 괜찮은 듯해 약간의 안도를 한다.
아래층의―또한 건물 안팎의―싸움은 거의 끝이 난 모양이었다. 아래에서는 멀찍이서 총소리가 두어 번 더 들린 뒤로 그 이상은 더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들이 아래층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상황을 종료시킨 것은 라만 측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 밤의 마지막 싸움.
아래에서 누군가 불을 켜라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예 통째로 선을 끊어 버린 바에는 쉽게 수복될 수 없었다. 얼핏, 저 아래에서 뭔가 흐릿하게 번쩍인 것 같았다. 누군가 손전등이든 뭐든 불빛이 될 만한 걸 가져온 모양이다.
아래층의 층계참에 초조하게 서서 더 올라오지 못하는 몇 명의 남자들도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불빛이 한둘씩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도 새카만 어둠에 휩싸여 있는 정태의의 눈앞에서는, 피비린내가 더없이 짙어졌다.
두근. ――두근. 정태의의 심장이 욱신거리며 요동쳤다.
그 순간, 코끝에 확 더운 비린내가 스쳤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그 엄청난 피 냄새에 정태의는 날카로운 긴장을 넘어 일순 속이 울컥했다.
그리고 그제야 처음으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것이 낯익은 사람의 음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충분했다.
순간적인 안도 뒤에, 그럼에도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선 긴장으로 정태의는 귀를 기울인다. 일레이가 다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라만이 다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때, 짤막한 타격음이 들렸다. 듣는 사람이 아픔을 느낄 만큼 묵직한 소리였는데도 그것이 총소리나 칼의 기척이 아니라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 타격음에 뒤이어, 정태의의 몸 위로 쓰러지며 실려오는 무게감이 있었다.
“…―.”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거칠고 짧은 호흡이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하하아……. 둘이 비슷한 구석이 있어.”
몇 걸음 떨어진 앞에서 들려오는 것은 일레이의 목소리였다.
변함없이 여유롭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거친 숨결이 희미하게 실려 있었다. 그 역시 아주 성치는 못한 듯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어, 둘 다. ……뭐 좋아. 오늘 밤은 충분히 즐겼거든.”
일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그 낮은 목소리는 그도 어딘가 다쳤음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정태의는 자신의 위로 쓰러진 남자에게 보이지 않는 시선을 주었다.
구역질이 날 만큼의 피비린내.
순식간에 정태의의 몸까지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는 뜨겁고 끈적한 피의 냄새에 절로 안색이 굳었다.
보이지 않아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불이 켜졌을 때 이 남자가 어떤 몰골일지, ――아니, 과연 살아날 수는 있을지조차 걱정될 만큼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
문득 일레이의 낮은 목소리가 스친다.
여유나 웃음기 따위는 전혀 없는 목소리가 싸늘했다.
“태이에게는 손대지 마.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 들지 마라. ――나는 말이지, 정재이 씨. 태이가 하는 말은 당신이 거의 모두 다 들어준다는 것도, 당신이 원하는 바는 그놈 역시 거의 다 들어줄 거라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그나마 형제라는 허울이라도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의 운이 좋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댁을 죽여 버리고 말았을 거야. ――하지만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면 태이가 틀림없이 나를 미워할 테니, ……그래서 살려 둔 거다, 오늘도.”
일레이는 혀를 찼다. 냉랭하게 말은 했지만 실상은 몹시 불쾌하다는 빛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태의는 일레이 쪽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문득 몸을 움츠리며 속으로 신음을 흘리고 만다.
큰일이다. 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한숨이 나올 만큼 앞날이 깜깜한 상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쉽게 넘어갈 만한 사태가 아니게 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저 말을 듣고서 멋쩍어서 죽을 것 같다는 게 지금 당장은 더 신경이 쓰이니, 내 머릿속도 정말이지 큰일이다.
그때 문득, 정태의의 위에서 피에 푹 절어 죽은 듯이 꼼짝도 않고 있던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 기척이 났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부디 그 정태이, 당신이 잘 챙기길. 나도 그 남자는 가능한 한 보고 싶지도 않거든. ――그 남자가 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불쾌한 기분이 드니까.”
잇새로 내뱉는 목소리는, 피가 그륵거리는 듯한 소리와 섞여 거의 띄엄띄엄 끊어져 들리는 숨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느린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 난 정태의는 침묵하고 만다. 말을 할 도리도 없었지만, 할 말도 없었다. 어쩐지 이 남자의 이 말을 들으면서, 몹시 불온하고 불길한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순간적으로, 절대로 형을 이 남자 근처에라도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이면 좋겠는데. 제발.
순간적으로 모든 걱정마저 다 잊고 아련하게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정태의의 귀에, 씁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라셨습니까? ――불쾌하신가요?”
라만이 묻는다. 정태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정중하나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갑자기 덜컥 심장이 떨어졌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 말은 절대로 자신이 들어서 될 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정태의가 슬금슬금 라만에게서 물러나려 하기 전에, 라만의 손이 정태의의 팔을 잡았다. 그 손마저 끈적하게 피에 젖어, 이 남자는 도대체 지금 얼마나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 걸까, 일순 정태의의 낯빛이 굳는다.
“정재의 씨. ……정말로 모르셨습니까?”
그가 낮게 물었다.
뭘……하고 되묻는 것보다 먼저, 정태의는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에 얼른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와중에 저 아래에서는 어디서들 들고 왔는지 회중전등 불빛 따위가 주렁주렁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 제발 말하지 마, 더 말하지 마, 난 재의 형이 아니니까 나한테 말하지 마! 나는 절대로,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아!
자신의 입이 막혀 있다는 사실이 지금만큼 저주스러운 때가 없었다.
그러나 허둥지둥 물러서려고 발버둥을 치던 정태의는, 다행히도 자신이 원한 대로, 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차라리 말을 듣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게 되었다.
정태의의 뺨으로 조심스럽게 뻗어온 손은 그 얼굴에 재갈이 감겨 있는 걸 알아차리자 움칫 멈추더니, 황급히 그 재갈을 벗겨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하고 분노 섞인 목소리가 나직이 터져 나온다.
기왕이면 손목도 좀……하고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정태의는, 입이 자유로워진 그 순간 더 이상 손목 따위는 생각할 여유조차 사라졌다.
망설이듯이 정태의의 입매를 매만진 손이, 어느 순간 참지 못한 듯이 정태의의 머리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어, 어, 어?! 하고, 엉겁결에 끌려간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넋이 날아가고 말았다.
“…―!!!”
그리고, 정재의만큼의 행운은 바라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만큼의 행운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태의는, 그 순간 불운의 끝을 보고 말았다.
느낌을 그대로 말하자면 ‘입을 잡아먹혀 버린’ 정태의는, 바로 그때 층계참을 돌아 올라온 회중전등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칼에 묻은 피를 옷깃에 아무렇게나 닦고 있던 일레이는, 그 빛에 비친 정태의―와 라만―를 보는 순간 그 모습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 자리에서 가장 불행했을 수도 있는 라만은 빛으로 시야가 트이는 순간, 자신이 실제로 쏟아낸 막대한 양 이상으로 핏기가 가셔 버린 얼굴로 망연히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게릴라? 영감이 노망이 났군.”
옆에서 알랭이 말을 툭 내뱉는 동안, 크리스토프는 총을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조립하고 있었다. 알랭은 운전을 하면서도 앞을 보는 둥 마는 둥, 흘끔 옆을 보며 그 모습을 확인하곤 빙글빙글 웃었다.
“하지만 의외인데……, 그런 방식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재미없잖아.”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분해했던 총을 하나씩 끼워 맞추면서, 부품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살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알랭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린다.
“너무한데. 날 못 믿는 것 같아.”
“……. 흥. 보관은 잘 해 둔 모양이군.”
크리스토프는 마지막 파트를 홈에 맞추어 밀어넣은 뒤, 공이치기를 한 번 당겼다.
철컥, 전해져 오는 손맛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크리스토프는 개머리판을 아래로 해 장총을 세운다.
“그런데 말이지, 어디로 갈 거야. 벌써 주위는 다 막아 놨는데. 주위 건물부터 싹 막아 놨다구.”
알랭은 천천히 차를 몰고 있었다. 차를 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느리게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차 안에서, 크리스토프는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한가로이, 그곳에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모여들어 있는 사람들을 구경이나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크리스토프의 눈이 뭔가를 찾은 듯 잠시 시선이 고정되었다.
“차 세워.”
크리스토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알랭은 군말 없이 차를 세웠다. 차가 미처 다 서기도 전에 크리스토프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기다려. 갔다올 테니까.”
“뭐? 나도 같이 가!”
“건물 따내러 가는 거니까 넌 필요없어.”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장총을 휙 던졌다.
조금 전에 크리스토프가 분해했다 조립한 그 총을 마치 인질처럼 받아들며, 알랭은 어깨를 으쓱했다.
“건물이라면, 동남쪽 방향에 있는 시민단체연합 건물이 제일 나을걸.”
알랭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차문을 닫으려다 말고 미심쩍은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시민단체연합? 어쩐지 쓸모없어 보이는 이름이군.”
“왜. 그래도 지금 이렇게, 그 이름의 건물만큼은 네게 유용하게 도움이 될 것 아냐.”
빙글빙글 웃는 알랭에게, 그도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곤 크리스토프는 차문을 닫았다.
그가 똑바로 걸어가는 곳은, 지금은 실질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구 사우디 공관의 북문 쪽이었다. 그 근처에서 조금 전에 분명 보았다. 머리를 붕대로 친친 감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아지즈였다.
눈만큼은 자신이 있는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구 공관 근처는 더없이 혼란했다.
경찰을 대신해 먼저 달려온 UNHRDO 측이 구 공관 근처를 에워싸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분주하게 오가는 그들을 곁눈질로조차 보지 않으며, 크리스토프는 저만치 보이는 북문을 향해 달렸다.
지금은 저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고 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 거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거기, 잠시만요!”
뒤에서 기계적으로 말하던 제복 남자의 목소리가 일시에 커졌다. 그러나 무시하고 달려가는 크리스토프의 뒤에서, 짧은 혼란이 이는가 하더니 두세 명의 대원들이 쫓아왔다.
거기 서십시오, 위험합니다, 이리 돌아오세요! 그렇게 외치는 대원들을, 조금 떨어진 곳의 차 안에서 알랭이 구경하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크리스토프는 곧 그 생각마저 지워 버렸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북문에 거의 다다르자 총소리는 지척에서 들려왔고, 심지어 이쪽으로 달려오는 동안 크리스토프의 몇 미터 앞에서 철제 쓰레기통이 펑 소리를 내며 구멍이 나기도 했다.
북문 앞에 그가 있었다. 아지즈다. 이들 가운데 크리스토프가 얼굴이나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정확히는 아지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몇몇 남자들이 북문 근처에 드문드문 서서, 마치 뭔가를 감시라도 하듯이 부리부리한 시선을 주위에 주고 있었다.
그 근처에만 미묘하게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다가가는 모습을, 그들은 제법 일찍 알아차렸다.
하긴 뒤에서 거기 서라고 고함을 지르는 남자들을 두셋이나 달고 쫓아오는데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누군가 쏜살같은 속도로 거침없이 뛰어오는 걸 본 그들은, 단숨에 낯빛을 바꾸며 품에서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거기 서! 누구냐?”
“서! 그렇지 않으면 쏜다!”
다소 뻔한 이야기를 해 대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듯,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도리어 더욱 빨리했다.
그들의 경고는 위협이 아니었다.
남자들 중 앞쪽에 서 있던 자가, 크리스토프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조준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크리스토프는 직선으로 달렸다.
한 발 더 날아왔다. 이번에도 크리스토프는 피하지 않고 달렸고, 총알은 비껴갔다.
세 번째는 달랐다. 세 번째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경로를 약간 틀었다. 이번에도 총탄은 그를 비껴가고 말았다.
그리고 네 번째. 이번에는 정확하게 크리스토프를 조준해서 총을 겨눈 남자가 있었다. 피하기 어려운 각도에서―혹은 명중시키기 쉬운 각도에서―직선을 이룬 총구를 본 순간,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처음으로 품에서 총을 꺼내었다.
가볍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그 다음 순간,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놓쳤다. 바닥에 나뒹구는 총 위로 남자의 손에서 뚝뚝 피가 넘쳐흘렀다.
남자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남자들이 크게 소리를 쳐 주위에 경고를 알리며 본격적으로 총을 쏘려고 했을 때, 그제야 크리스토프를 알아본 아지즈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크리……?!”
“오랜만이군, 아지즈.”
“멈, ……멈춰!”
아지즈의 제지는 약간 뒤늦어 이미 몇 발쯤 되는 발사가 뒤따랐지만, 그 총탄마저도 크리스토프를 맞히지는 못했다.
아지즈의 외침에 남자들이 경계 어린 얼굴로, 방아쇠는 당기지 않으면서도 총구로는 크리스토프를 겨누었다.
어느새 크리스토프는 여남은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열몇의 총구가 일제히 크리스토프를 향한다.
아지즈는 그들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크리스토프를 보고 기이한 얼굴을 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릭이 머리를 날려서 한동안은 사경을 헤맬 줄 알았더니, 벌써 멀쩡하게 다니는군.”
인사 대신 크리스토프가 말하자 아지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에 내 친구가 있어.”
아지즈가 다소 무뚝뚝하게 묻는 말에, 크리스토프는 굳게 닫혀 있는 북문 안쪽, 구 공관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아지즈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 안이라니…….”
지금 이 북문 안, 정확히는 구 공관의 담장 안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라만 쪽, 그리고 라쉬드 쪽, 둘이다. 아지즈의 동포인 그들 외에 들어가 있는 외부인이라면, 라쉬드가 외부에서 고용한 용병들 정도일까.
아지즈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곤 고개를 기묘하게 꼬며 묻는다.
“그래서, 구 공관에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당신은 들여보내 줄 권한이 있지?”
아지즈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냐, 안 들어가.”
크리스토프의 대꾸에 아지즈는 몇 번쯤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가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어차피 안에는 이미 그놈이 실컷 날뛰고 있을 테니까 나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지, 크리스토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는, 고막을 흔드는 총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귀에까지 닿지는 않았다.
“……?! 그러시면, ……?”
“여기 북문 반대쪽으로 공관에서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시민단체연합이라는 건물이 하나 있을 건데, 거기에 좀 올라가고 싶은데.”
크리스토프는 심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지즈는 약간 낯빛을 굳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구 공관을 중심으로 두고, 주위에서 사정거리 안에 있는 건물은 현재 모두 다 출입을 통제시켜 둔 상태였다. 적이든 아군이든, 예상치 못한 개입을 막기 위함이다.
특히나 구 공관은 지은 지 연수가 제법 된 건물이었다. 층고가 높지 않고 구조가 단순해, 마음만 먹으면 외부에서 목표를 정해 저격을 하기가 매우 쉬웠다.
구 공관의 출입을 막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위의 건물 일체에 대한 출입을 통제시킨 것은 라만이었다. 그가 직접 당부하고 간 일이라, 그 부분은 아지즈의 능력 밖이다.
“곤란합니다.”
아지즈가 고개를 젓자 크리스토프는 낯을 찌푸렸다. 잠시 못마땅한 듯 혀를 차다가 냉랭하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한테는 아무 유감도 없어. 나는 그저 내 친구를 저 안으로 끌고 들어간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그놈만 잡고 나서 비킬 거야.”
“당신 친구를 저 안으로 끌고 들어간 인간, 이라면――.”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아지즈는 그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 얼핏 짐작한 듯, 살짝 안색을 바꾼다. 그리고 곧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안 됩니다. 출입 통제는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 게릴라까지 끌어들여 용병이랍시고 쓰는 멍청이라도 왕족이라서, 불경죄인가?”
크리스토프가 심상하게 중얼거리자, 그제야 크리스토프가 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은 다른 남자들도 낯빛을 바꾸었다.
라쉬드다.
비록 지금 상황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대편이긴 했지만, 그는 ‘사살’의 대상은 결코 되지 못했다. 아마도 안에 들어가 있는 라만 역시, 라쉬드를 붙잡는다 해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은, ……. ……아무튼 안 됩니다.”
아지즈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를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아지즈. 난 시간이 없어.”
“안 됩니다.”
같은 대답만 하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크리스토프가 약간 눈살을 찌푸렸을 때.
“통제를 풀어 주게. 어차피 이 상황에서야 그가 성공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크리스토프의 뒤쪽으로, 담담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황급히 총구를 내리며 자세를 바로한다.
잠시 멈칫하고 돌아본 크리스토프의 앞에 선 사람은, 그리 체구가 크지 않은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서글서글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담고서 크리스토프를 찬찬히 살폈다.
“오랜만이군. 아니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 ……과연, 말리크가 몹시 칭찬을 하기에 어느 정도의 솜씨인가 궁금했더니, 그가 그렇게 말할 만도 하군.”
크리스토프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다가 약간 고개만 꾸벅했다. 옆에서 남자들이 그런 크리스토프를 보고 울컥한 듯 했지만, 중년 남자의 앞으로 나서서 그를 꾸짖을 사람은 없었다.
그 중년 남자, 바로 얼마 전에 타르텐에서 인사를 나눈 바 있었던 알 파이살은 다시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본다.
아마도 그는, 크리스토프가 북문 쪽을 향해 뒤에 경비 셋을 달고서 달려왔을 때부터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크리스토프가 그들의 경계를 순식간에 뚫고 들어서는 것에서부터, 총탄을 적절히 비끼며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정확하게 상대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까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나?”
알 파이살이 다시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무뚝뚝하게 침묵하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알 파이살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크리스토프에게 한 마디 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지만, 알 파이살이 웃으며 손을 저어 만류했다.
“그렇군. 그래서 이쪽으로 왔군.”
알 파이살은 약간은 감탄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즈를 북문 근처에서 본 순간, 크리스토프는 이 남자가 이 부근의 어딘가에 있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다쳐서 붕대를 감고 있다 한들, 몸은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아지즈가 라만과 함께 공관 안으로 들이닥치지 않고 이 근처에서 파수 따위나 볼 리가 없었다.
알 파이살은 얼마간 더 크리스토프를 살피다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나라에 왕족은 구름처럼 많으니 그 중 하나 정도야 뭐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라쉬드는 좀 곤란하네. 너무 드러난 인물이라서, 무마할 수가 없거든.”
알 파이살은 짐짓 웃으며 크리스토프에게 눈을 찡긋했다. 크리스토프가 약간 당혹스럽게 그를 쳐다보자, 그는 허허 웃는다.
“하지만 목숨이 아니라 약간 다치는 정도까지라면, 자네가 우리를 도와주려다가 실수했다는 걸로 잘 무마해 둘 수도 있겠지. ……뭐 어차피 사태가 이렇게 된 바에야, 그의 결말이야 정해져 있겠지만.”
알 파이살은 문득 표정을 흐리더니 혀를 차며 공관 쪽을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약간 다치는 정도’로……. 그러나 보장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가 저격 범위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크리스토프가 말하자 알 파이살은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웃는다.
“나는 자네에게 라쉬드를 어떻게 하라고 한 게 아니야. 그저 자네가 그 위에서 살피다가 우연히 벌이게 되는 어떠한 일이 있다면,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다는 말이지.”
크리스토프는 잠깐 사이를 띈 뒤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지즈가 망설이면서도 어딘가로 연락해 동남쪽 방향 한 건물의 출입 통제를 특정 인물에 대해 풀어 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알 파이살이 말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그렇지. 내가 자네에게 요전에 했던 말, 다시 한번 고려해 봐 주게. 그 솜씨를 보니 몹시 탐이 나지 뭔가. 언제든 환영할 테니 일이 끝나면 모쪼록 와 주게나. 기다릴 테니.”
여느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하게 웃는 그를 미묘한 얼굴로 돌아본 크리스토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번 꾸벅 목례만 하고는 이번에야말로 돌아서, 걸음을 빨리했다.
*
건물 안은 시커먼 어둠에 싸여 있었다.
스코프를 통해 들여다본다 해서, 육안으로도 전혀 빛을 찾아볼 수 없는 건물 안이 보일 리가 없었다.
“아직도 불이 켜지지 않는 걸 보니 차단기를 그냥 내린 게 아닌 모양이군. 아예 통째로 잘라 버린 모양인데.”
알랭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이걸 어쩌나, 저렇게 어두워서야 이걸 어쩌나, 노래하듯이 중얼거리면서도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를 흘끔 돌아보며, 크리스토프는 손을 내밀었다.
짐짓 의아한 얼굴로 그 손을 내려다보며 빙글거리는 알랭에게,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알랭은 더 장난치지 않고 냉큼 적외선 스코프를 내밀었다.
“내가 이걸 안 갖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흥. 이런 것도 없을 만한 놈이라면 내가 널 불렀을 이유가 없지.”
어, 내가 믿음직하고 솜씨가 좋아서 날 부른 게 아니었어?! 하고 충격받은 듯이 외치는 알랭을, 크리스토프는 더 이상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런 걸 이렇게 다 준비해 주고, 총도 훌륭하게 보관해 주고, 운전도 해 주고, 이렇게 착한 나한테 뭐 상은 없어?”
“옆에서 정신 산만하게 시끄럽게 구는 데도 이 총으로 네 머리부터 갈겨 버리지 않는 게 상이다.”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리자 그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알랭은 낄낄거렸다. 그러나 물론 농담이 아니라는 건 뻔히 알고 있는 사이였다.
스코프를 장착하자, 어둠 속에서도 불그스름하게 인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저것도 아니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건물 안에서는 인영들이 하나둘씩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그들의 시야를 잡아먹어,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느렸다.
하나씩 창문을 옮겨가며 찾아보았지만, 찾는 인물은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까지는 그걸로 안 보이잖아? 누가 그놈인지 어떻게 알려고 그래.”
옆에서 알랭이 궁금한 듯 물어보았지만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서 곧 알랭도 아, 하긴, 생각보다는 쉽겠군, 하고 중얼거린다.
들여다보는 스코프를 아주 조금씩 움직일 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크리스토프의 바로 옆에서 알랭은 훌쩍, 옥상의 난간 위로 뛰어올라 앉았다. 금세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상태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리까지 흔들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너, 접촉기피 고쳤다며. 정말이야?”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알랭이 크리스토프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몸에 닿기 직전, 스코프를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크리스토프는 짤막한 진담을 했다.
“건드리면 민다.”
“……. 음……, 내가 소문을 잘못 들었나 보다.”
7층 건물의 옥상 위에서 떨어져도 재수가 좋으면 죽지 않을지도 몰라, 하고 중얼거리면서 알랭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부옇게 흐린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크리스토프를 흘끔 쳐다본다.
“그런데, 그럼 아까 그놈은 뭐야. 끝까지 너 따라오던 놈.”
“…….”
“차 탈 때까지 뒤따라오면서,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던 그놈은, 혹시 건드려도 괜찮아?”
“시끄러워. 정신 산만해. 비켜.”
크리스토프는 거슬린다는 듯 휙 손을 휘둘렀다. 그 통에 난간 위에서 밀린 알랭은 헉, 하고 중얼거리며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어렵잖게 다시 중심을 잡고 앉았다. 놀란 빛 따위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벌컥 소리친다.
“놀라서 심장 멎는 줄 알았잖아!”
“안 닥치면 진짜로 밀어 버릴 거야.”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서 진심의 울림을 느꼈는지, 알랭은 투덜거리면서 입을 다문다.
크리스토프는 스코프를 조절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정적만 흘렀다.
‘왜 그곳에 네가 가야 하지?’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토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이 못내 이상했다. 어째서 막아서는 건지.
정창인이 한 발 먼저 출발한 뒤, 알랭에게 물건을 좀 가져오라고 연락한 크리스토프가 방에서 막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리하르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기동대에서 활약한 네 솜씨를 그런 자리에서 또 보여 주고 싶어서? 이 김에 정태이에게 잘 보이면, 릭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을 것 같나?’
비틀린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긍정이 아니었다.
정태의를 리그로우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니, 리그로우는 상관없었다.
‘릭은…… 상관없어.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그 총격전에 태이가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뿐이야. ……비켜.’
그러나 리하르트는 비키지 않았다. 뒷말은 처음부터 들리지도 않았다는 듯 그는 재차 물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참을 수 없다……?’
리하르트는 낮게 웃었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은 사라지고, 그는 어째서, 라고 묻는다.
어째서.
모른다. 그런 건 여태 몇 번이나 생각해 봤다. 그런데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좋았다. 이제는 리그로우가 있든 말든, 그가 누구와 어떠한 관계에 있든, 그저 그 자체가 좋을 뿐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몰라.’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은 안 된다. 시간이 없었다.
‘비켜, 리하르트. 나는 가야 해.’
어쩌면 가 봐야 별 소용없을지도 몰랐다. 이미 기구 측에서 정태의를 구해내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태의가 걸려 있으니, 어디선가 용케 알아내고 리그로우가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갔을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는 정태의가 있는 곳에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크리스토프는 가고 싶었다. 그는 크리스토프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의식 위로 떠올려서 느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지 마.’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멈칫했다.
낮게 쉰 목소리. 화가 난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마치 분을 억누르는 듯 선뜩하게 들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파란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리하르트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아니, 창백해져 있었다는 편이 옳은지도 몰랐다. 그 얼굴이 어째서 그렇게 초췌해 보였을까.
‘가지 마. 크리스.’
‘……왜.’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었을 뿐이다. 낯을 찌푸리려고 했지만,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크리스토프는 기묘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보기만 했다.
리하르트는 침묵했다. 크리스토프의 왜 그러냐는 물음에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어느 순간 고개를 저으며 조금 전 크리스토프가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몰라, 라고.
‘나는,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거듭하던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는 거친 손길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크리스토프, 나는, …….’
그러나 한 번 더 그렇게 말하다가 다시 도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끊어 버린 그는 문득 하, 쓰게 웃고 말았다. 그 한숨 같은 웃음조차 어딘지 모를 초조함이 밴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똑바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그 눈에는 웃음기라곤 전혀 없이, 그저 초조한 듯이 언뜻언뜻 흔들리는 의아함이 담겼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꼼짝도 않고 그를 보고만 있던 크리스토프는 그의 손이 턱을 스쳐 뺨을 감싸쥔 순간 흠칫, 약간 몸을 움츠렸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이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그래, 덥도록 뜨거웠던 그 체온이 불현듯 떠오를 정도로.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약간 표정을 굳혔다.
덥도록 뜨겁던 체온.
맞닿아 부대끼던 살갗.
낯설지 않다는 것이 도리어 낯선, 그 감각.
그 다음 순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뺨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눈도 감지 않고, 세세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듯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이윽고 천천히 그 입술이 떨어졌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이상하다는 듯, 엄지로 그 입술을 조심스럽게 덧그리며―속삭인다.
‘이제는 안 피하나?’
‘……피해도 할 거잖아.’
크리스토프는 그를 밀쳐내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상하다. 또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있으면 숨쉬기도 벅찰 만큼 아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났으면 비켜. 나는 가야 해.’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문 앞에서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까부터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이번엔 뜻밖일 정도로 쉽게 밀려났다.
크리스토프는 등을 돌려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시선을 당혹스럽게 생각하며, 몇 번이고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감각까지 낯익다고 여길 것 같았다.
그때.
‘크리스토프. 좋아해.’
갑자기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불쑥 해 본 듯, 따뜻하거나 부드러운 빛은 없이 무심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재미없는 농담이야.’
크리스토프는 살짝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두커니 방 가운데 서 있었다.
정말로 우두커니, 기괴하게 서 있는 인형처럼 멈춰 선 그는, 고민스러운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희미하게 낯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피식 웃었다.
좋아해, 자신이 조금 전에 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려 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웃고 만다. 그 어이없다는 웃음이, 그제야 크리스토프를 향했다.
‘나는, 정말로 미쳤나……?’
‘……그런 걸로 보이는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피식, 그렇게 낮은 코웃음을 웃던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표정이라곤 하나 없이, 그는 그렇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까다로운 문제의 해답이라도 있다는 듯이.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하긴 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거든.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 머릿속도 모르겠고.’
혼잣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리하르트는 스스로에게 그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크리스토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왜 그래. 승계를 하더니 머리가 이상해질 만큼 중압감이라도 들었나?’
승계……, 하고 그 말을 따라서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한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혹은 스스로가 우습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웃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전부터 이상했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지만.’
리하르트는 어딘지 자조적인 투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지르는 그의 속눈썹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또 한 번 욱신, 이상하게 심장이 뛴다. 아프게.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에 와 닿던 그의 얼굴. 손가락을 스치던, 그 젖은 속눈썹.
피부 위로 느껴졌던 그의 젖었던 눈매가, 그 촉촉한 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동시에 그때 느꼈던 감각까지도.
더운 체온이 왜 그렇게 뜨겁게 와 닿았는지. 왜 심장이 그렇게 욱신거렸는지. 차마 뜰 수가 없어 꼭 감았던 눈꺼풀 안은 왜 그렇게 뜨거웠는지.
‘……가지 마, 크리스.’
눈을 감고, 꿈결에 중얼거리는 것처럼 속삭인다.
그러나 잠시 후, 약간의 사이를 두고 다소 서늘하게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가지 않을 건가?’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쳐다본다. 그 속삭임은 가식도 아니었고 거짓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보면 틀림없이 모를 그의 옆에, 크리스토프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하르트, 라고 크리스토프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눈을 떴다.
화가 난 듯 거친 눈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얼핏, 뭐가 뭔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초조한 빛이 담기는 눈동자를, 크리스토프는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는,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그 벌어진 입에서는 짧은 주저 뒤에야 속삭임이 새어나온다.
‘리하르트. 나는, 네가 싫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 너 때문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그래.’
‘…―.’
그는 뭔가 기묘한 이야기라도 듣는 듯한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그게 왠지도 모르겠고. 혹은 정말로 그런 건지조차도 모르겠고.’
조금 더 일찍 생각했으면 좋았을 걸.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일찍 생각했더라면. 조금 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기 전부터. 그곳에서 떠나기 전부터. 더 어릴 때부터.
그때부터 생각을 해 왔더라면, 지금은 보다 쉽게 답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나중에는 다시 타르텐으로 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크리스토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흘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묵묵히 바라보는 리하르트를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가야 했다.
객실에서 나서는 크리스토프의 뒤로, 리하르트도 한 걸음 늦게 따라왔다.
‘……가지 마.’
다급하게.
여태 애매하게 품었던 그 비웃음과도 닮았던 말들은 씻은 듯 사라지고, 그저 다급하기만 하게, 그가 말한다.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며 걷는다.
리하르트는 그의 뒤를 따라왔다. 무거운 발소리가 바로 뒤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내키지 않는 듯이, 그러나 내키지 않아도 그 말이 억지로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가지 마.’
여전히 크리스토프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안에서 다시 한번 같은 말이 들려왔다. 1층에서 내려 로비를 벗어나면서도.
크리스토프가 했던 말들은 다 들었을 텐데도, 그런데도 그 말을 한다. 그 말만 한다. 그 말밖에 모르는 것처럼.
혹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토프가 했던 말에 납득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한두 걸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앞서가는 크리스토프를 따라가며, 리하르트는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 손이 멈칫, 가끔 뻗어나가려다 멈추곤 했지만 결국 크리스토프를 붙잡아서 그 걸음을 멈추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저 말을 했을 뿐이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몇 번이나.
타르텐으로 돌아오라고, 돌아가자고, 그렇게 말했던 때처럼.
그러나 이제 그 말에 타르텐은 없었다. 돌아오거나 돌아갈 곳은 ‘타르텐’이 아니라도 좋았다.
호텔에서 나가, 그 앞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알랭의 차에 올라탈 때까지, 크리스토프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오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한 글자도 다름없이 똑같은 말이었는데도 그 한 음절 한 음절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알랭이 누구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눈짓해 물었지만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희한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곧 아무래도 좋다며 어깨를 으쓱한 그가 운전석에 앉고, 크리스토프는 그 뒷자리에 앉았다.
차문을 닫기 직전, 방에서 나온 뒤로 처음으로 리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이번에도 차마 크리스토프를 잡지는 못하고, 그 대신 막 닫으려던 문을 잡는다.
‘가지 마.’
이것이, 그가 오늘 크리스토프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당분간.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처음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웃음도 여유도 없었다. 그 낯선 표정마저, 이제는 낯설지 않다.
어쩌면 이제는 이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낯설지 않은 듯도 했다.
‘그럼, 네가 와.’
어느 순간 불쑥, 여태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갑자기 말이 싹을 틔웠다.
크리스토프는 스스로 생각하거나 의식하기보다 먼저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약간 크게 뜬 눈을 깜박이며 리하르트를 본다.
리하르트 역시 크리스토프를 뚫어질 듯이 보고 있었다.
그를 마주보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가슴 속에 뭔가 가득 들어차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한시도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크리스토프는 말을 이었다.
‘네가 와. 그러면 나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찾아와.’
혼잣말처럼 낮게 속삭인 그 말이 과연 리하르트의 귀에까지 닿았을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의 손을 문에서 걷어내었다. 그리고 차문을 닫았다.
탕, 저 바깥과 이 안쪽의 세계를 문 하나로 나누고,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도 돼?, 하고 운전석에서 거울로 이쪽을 바라보면서 눈웃음을 짓는 알랭에게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뒤에는 리하르트만 홀로 남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크리스토프가 홀로 남았다.
“가지 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하고 크리스토프는 스코프에서 잠시 시선을 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입술 밖으로 튀어나간 그 말을 자신이 왜 했을까 생각한다.
옆에서, 여전히 옥상 난간 위에 위태롭게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던 알랭이 흘끔 고개를 돌렸다.
잠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린 그는, 이내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던 얼굴에 더 진한 웃음을 띠었다.
“난 아무데도 안 가. 가래도 안 가.”
크리스토프는 이 남자의 앞에서 괜히 말실수를 해 버린 자신의 실태에 혀를 차곤 입을 다물었다.
알랭은 재미나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좁은 난간 위가 마치 넓은 침대라도 된다는 듯이 옆으로 몸을 기울여 엎드리다시피 했다.
“어쩐 일이야, 크리스토프. 어쩐 일로 네가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어.”
“…….”
“울면서 붙잡기라도 해?”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문을 붙잡고 자신을 보고 있던 그의 표정이 생각난다.
가지 마. 짧은 말만 겨우 던지고 침묵하던 리하르트.
차에서 끌어내지도 못하고, 그저 문만 붙잡고 있던 리하르트.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크리스토프는 어, 하고 속삭인다.
“응. ……울면서 붙잡아.”
가슴 속에서. 기억 속에서 뭔가가.
그것이 못내 이상했다. 왜인지. 어째서인지.
옆에서 알랭은 흠, 하고 가볍게 중얼거리더니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뭐, 어지간히 좋은가 보지.”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알랭을 보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던 그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삐걱, 옆으로 꺾는다.
“그게 아니면 어지간히 바보이든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 고개를 살랑살랑 내젓는 알랭을 쳐다보며, 크리스토프는 그래, 하고 중얼거린다.
어지간히 좋은가 보지. 아니면 어지간히 바보이든가.
그 말을 되짚으며, 크리스토프는 알랭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얼마간 홀로 즐거운 듯 빙글빙글 웃고 있던 알랭은, 문득 미안하다는 듯 짐짓 눈살을 찌푸리면서 크리스토프를 돌아본다.
“하지만 글쎄……. 나는 사실 그런 건 잘 몰라서.”
조금은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크리스토프는 조금 사이를 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모르겠어.”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는 다시 고개를 숙여 스코프를 들여다보았다.
“어쩌려고?”
자못 궁금하다는 듯, 그러나 사실은 그조차 아무렴 어떠냐는 투로 알랭이 묻자, 크리스토프는 대답 없이 스코프로 건물 안을 살피기만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시커먼 암흑만 가득 찬 창문을 주시하다가, 알랭이 다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즈음에야 불쑥 중얼거렸다.
“조금 있다 생각할래. 그가 올 테니까.”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내가 어디로 가든.”
*
“슬슬 판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알랭이 재미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가장 취약했던 북쪽 입구의 유리를 깨부수고 라만이 들이닥친 뒤로,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던 구 공관의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라쉬드가 반군이나 게릴라 쪽에서까지 고용했다는 용병들은 그들 특유의 전술로 초기에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열세로 돌아서기 시작해, 이제는 뒤바뀐 판도가 확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저렇게 죽여 대는데 판도가 안 바뀌면 이상하지.”
스코프로 건물 안을 주시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불쑥 중얼거렸다. 옆에서 알랭이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 릭이 안에서 도륙내고 있구나. 그런데 그놈은 갑자기 왜 저기 들어가서 무료봉사를 하는 거야?”
크리스토프는 글쎄, 하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뭐 아무렴 어때. 그래, 그런데 표적은 아직이야?”
“음. 하지만 저렇게 판도가 바뀌었으면 저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겠지.”
크리스토프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옆에서 알랭은 건물 쪽을 구경하며 오오, 하고 웃으며 말한다.
“슬슬 사람들이 막 안으로 들어가는걸. 뒷문이 뚫렸어. ……이제 시간문제군.”
“응. ……아. 찾았다…….”
건성처럼 대꾸하던 크리스토프가 문득 조준을 한 방향에 고정시켰다.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불그스름한 그림자들이 스코프에 잡혔다.
서넛 이상의 그림자가 약간씩의 거리를 두고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실 쪽을 향해 가는 그 그림자들의 가운데에 있는 자그마한 그림자. 다른 사람들이 앞뒤로 감싸고 있는 그 사람에게, 크리스토프의 총구가 향했다.
“연세도 있으신 분인데, 살짝 해, 살짝.”
“……그래. ……혼자 달아나지 못할 정도로만.”
크리스토프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가늠쇠의 정중앙에 그 그림자가 담긴 순간,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째로 눈을 깜빡이면서 그것이 천장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 약냄새가 먼저 코를 스쳤다. 그 장소 자체에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배어 있는 약냄새. 그것 때문에, 그곳이 병원이라는 걸 제일 먼저 깨달았다.
그런 다음에야 겨우 시선을 돌려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걸 확인하려던 정태의는, 바로 그 순간 고개를 멈추고 말았다.
자신의 침대 옆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낯익지만 벌써 오래도록 보지 못한 얼굴이다. 그러나 수십 년을 못 보다가 만난다 해도 여전히 낯익을 얼굴이었다.
“……재의 형.”
“일어났구나.”
오랜만에 보는 형, 정재의는 조용히 말했다.
정태의는 눈을 뜨자 갑자기 그 앞에 존재하고 있는 형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누운 채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여기 병원이지. 나 왜 여기 누워 있지? 나 어디 다쳤어?”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눈을 뜨면서 이곳이 병원임을 인식하는 순간, 정신을 잃다시피 잠들기 직전의 일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멀쩡하다고 주장하는 일레이를 끌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온 것도 기억이 났고, 병원에 도착해서 한숨 돌리자마자 갑자기 미칠 듯한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는 것까지도 대충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내가 병원 침대에……,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려던 정태의는, 팔을 들어올리려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어깨가 엄청나게 아팠다. 팔을 약간 움직이려고 하는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미친 듯이 지끈지끈거렸다.
아. 그래. 나 어깨를 좀 다쳤던 것도 같다……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누운 자세를 바로하려고 몸을 좀 움직이는 순간, 온몸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삐걱삐걱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 ……!!!”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비명을 지르는 정태의의 옆에서, 정재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발목 염좌에 어깨는 탈구됐고, 등이랑 목에는 제법 깊은 열상이 있었어. 그 외에 온몸에 타박상이랑. 거울 보면 놀랄 거다.”
아까 봤는데 피부가 살색이 아니더라, 하고 중얼거리는 형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온몸이 욱신거려서 절로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어……. 그런데……, 지금 이런 데 있어도 괜찮아? 포럼 때문에 독일에 온 거 아니었어?”
정태의는 그제야 형이 지금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벽시계는,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포럼이 열린다고 했던 그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외적으로는 납치된 게 정재의였으니, 혹시 포럼 자체가 연기가 되거나 혹은 형은 아예 불참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잠시 침묵하던 정재의가 말했다.
“너 하루 반 잤어.”
“……. 엉?”
“내가 도착한 게 어제 아침이고, 어제 바로 포럼에 참석한 뒤에 여기로 왔지. 오늘은 포럼 이틀째.”
원래부터 첫날에만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던 형의 말을 멍하게 들으며, 정태의는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잠에서 깨어나니까, 온몸이 죽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좀 푹 잔 것처럼 개운하긴 하더라니……하고 생각하며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면 한동안 제대로 못 잤다. 요 며칠,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드레스덴으로 갔던 이후로 제대로 긴장을 푹 풀고 자 본 적이 없었다. 그 긴장이 몸의 부상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왔던 모양이다.
“그래……. 아, 포럼은 무사히 끝났어?”
정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재의를 보며, 정태의는 문득 한숨을 내쉰다.
“그렇구나…….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와서 다행이야, 형…….”
악몽 같던 밤이 지나고 이렇게 살아서 평화롭게 햇빛을 받고 있자, 진심으로 깊은 안도가 되었다.
물론 형이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흉흉한 일을 겪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이런 사태를 형이 겪는다면,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재의는 조금 난처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표정을 띠었다.
“응. 삼촌이랑 같이 들어오려고 했는데, 그 전에 제 날짜에 제대로 넘겼던 수속 서류가 없어졌다고 해서 결국 그날 같이 못 들어왔어. 담당했던 직원도, 분명히 그 서류를 챙겼는데 왜 없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이상해하더니, 어제 연락이 왔는데 캐비닛 아래 틈에 그 서류만 빠져 있었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도 미리 왔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하고 자신 대신 흉흉한 일을 겪은 동생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는 형에게, 정태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순수한 마음으로 정태의는 형에게 험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역시나 다시 한번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형은 정말로 저 하늘 위 어떤 분께 아주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게 틀림없다고.
정태의는 가뿐하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좋았다.
비록 온몸이 아픔을 호소하긴 했지만 사랑하는 형과 이렇게 마주보고 있었고, 형은 여전히 탈 없고 온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자신도 지금은 이렇게 괜찮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정태의도 어딘지 만족스런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사이에 포럼이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도 남몰래 안심했다.
혹시라도 일레이가, 비록 그 난리를 치긴 했지만 여전히 그 뒤로도 정재의를 죽여 보겠다고 두고두고 날뛰지 않을까 어렴풋이 걱정이 되었던 참인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비록 배가 좍 찢어져서 창자까지 슬쩍 비어져 나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옷으로 꽁꽁 감싸고 손으로 누르고 있었던 일레이였지만, 그래도 그놈이라면 그 몸으로 사람 한둘 없애겠다고 나서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헉. 그렇지.
정태의는 불현듯, 보는 순간 온몸에서 핏기가 싹 가셨던 그 끔찍한 상처를 기억 속에서 떠올리며, 번쩍 눈을 떴다.
“일레이는, 어디 있어?”
“나를 불렀나?”
그 이름을 밖으로 내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대답에, 정태의는 하마터면 침대 위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너무나 고요하고 기척이 없어서 무심결에 이 병실 안에는 자신과 형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니 놀랄 만도 하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 옆의 의자에 앉은 일레이가 신문을 넘기다가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아주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듯, 구석구석. 그 시선이 이상했는지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린다.
“음?”
“너 왜 그렇게 멀쩡해.”
“왜 그렇게 멀쩡하냐니……, 별로 아픈 데도 없으니까 그렇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그에게, 정태의는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 없잖아! 너 배가 입을 쩍 벌리고……!!”
“그 정도는 몇 바늘 꿰매면 나아.”
“……! ……!!”
그럴 리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정태의는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고―저 괴물 같은 남자의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아픔이었지만―, 또 실제로 일레이는 정말로 몇 바늘만 꿰매면 될 만한 상처였던 것처럼 아주 멀쩡했다.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이제 와서 말하기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면 저래서는 안 되었다.
그날, 정태의는 그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글 돌 지경이었는데.
그래, 새카맣던 암흑을 헤치고 회중전등의 불빛이 그들을 비쳤을 때,
정태의는 그제야 일레이를 눈으로 보고 파랗게 굳어 버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하긴 했지만 그건 눈앞에 있는 라만 때문이겠거니 했는데―실제로 라만은 눈으로 보니 온몸이 피칠갑으로 멀쩡한 데가 없어, 그야말로 한 구의 시체였다―일레이의 배에서도 피가 물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예리한 손칼 따위로 깊이 그어내기라도 한 듯, 커다랗게 베여 벌어진 배에서는 창자가 엿보였다. 복압 때문에 쏟아져 나오려고 하는 그 창자를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뱃가죽과 함께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피 묻은 칼을 옷에 닦고 있는 일레이를 보고, 정태의는 스플래터 영화 속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병원에 갈 필요 없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그를 붙들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정태의였다.
그를 병원에 끌고 와서 응급실에 밀어넣어 버린 뒤 기절과 같은 졸음을 맞기 전까지 망연히 앉아 있던 정태의는,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이 여기인 탓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줄줄이 응급실로 몰려드는 시체(예비군)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 도중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그러고 보니 그때 언뜻 비몽사몽간에, 다친 사람들을 끌어내느라 건물을 비추어 보는 와중에, 톱니처럼 거칠거칠한 칼날로 벤 것처럼 흉측한 상처를 입고 끔찍하게 죽은 시체가 건물 안의 온 방에 널려 있었다고, 누군가 부르르 떨며 속삭이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체의 대부분이 이미 건물 안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 라쉬드가 용병을 고용하듯이 끌어모은 중동 지역의 반군과 게릴라였던 탓에,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그들을 싹 해치워 버린 남자에게 포상을 줘야 하긴 할 텐데, 저렇게 끔찍하게 사람을 죽인 무시무시한 놈에게 상을 주다니 그건 말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다고 토로하는 목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 …….”
정태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낯을 찌푸렸다.
톱니처럼 거칠거칠한 칼날로…….
시체가 건물 안의 온 방에…….
끔찍하게 사람을 죽인 무시무시한 놈…….
그 무시무시한 놈이 누군지 이름까지는 듣지 못하고 기절했지만, 정태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이건 적반하장……아니아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는구나.”
정태의는, 그런 살육을 저지르고도 어쨌든 그가 그 책임을 지지는 않아도 될 모양인 이 상황에서, 게릴라를 대거로 고용해 자신을 납치해 준 라쉬드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해 봐야, 고맙다고 해야 할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알아볼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아, 그냥 고이 생각을 접고 말았다.
“아. 그렇지. 태이.”
일레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러, 아득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정태의는 음? 하고 고개를 들었다.
“네가 잠든 동안 크리스토프가 왔다 갔는데, 안부 전해 주라더군.”
“어? 어어, 응. ……왜 못 볼 사람처럼 갑자기 안부를 전해 주래, 그 녀석은.”
대답을 하고 나서야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일레이는 신문을 넘기면서 대수롭잖게 말한다.
“아. 아마 한동안은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수속도 밟아야 하니까 여기에 올 정신도 없을걸. 출국하기 전에 한 번쯤은 볼 수 있으려나.”
“어? 어디 가?”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기로 했거든. 알 파이살의 사병단에 고용되어서 거기에서 사병 훈련 같은 걸 하게 될 것 같던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왠지는 몰라도 알 파이살이 그놈을 대단히 좋게 본 모양이던걸.”
그 노인네, 부인들 얻은 걸 보면 얼굴을 어지간히 밝히는 것 같긴 하더라만 그래서 그런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한동안 눈만 깜박였다.
뭔가, 뭐랄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그럼 이제 한동안은 못 보겠네.”
“뭐 그래도 거기서 눌러앉을 눈치는 아니던데. 이제 여기나 드레스덴 쪽으로는 아예 돌아가지 않을 거냐고 했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어쩌면, 가끔’,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별로 어렵잖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늘상 붙어 지내지야 않게 되겠지, 하고 일레이는 심술궂고도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정태의는 그래,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면서도, 어쩐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어떤 기분인지 좀체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볼 수 없게 되는 거라면, 역시 서운한 거겠지.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잘라 말하기도 어려운 게, 어쩐지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를 위해서 잘 된 일이라는 기분도 들었던 것이다. 또한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든 만날 수 있을 테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서운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뭐랄까.
……그래. 이 기분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마치, 천천히 움직이며 굴러가고 있는 내 수레바퀴 옆에서 죽은 듯이 멈춰 있기만 하던 수레바퀴가, 드디어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있는 듯한.
……뭐야. 이건 서운한 게 아니잖아.
오히려 조금은 기쁜 건지도 몰랐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어느 구석에서 약간 서운함과 비슷한 기분도 어렴풋이 남긴 했지만.
“……음. 좋아. ……좋아, 좋을 것 같아.”
정태의는 중얼거리고 보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문득 만족스럽게 웃었다.
크리스토프는 괜찮다.
그런 기분이 어쩐지 이유도 없이 확신처럼 들어, 가뿐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어, 그야……, 음. 나쁘지 않은데.”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사우디아라비아라. 비록 내가 찾아가지는 못하겠지만 멀지는 않으니까 좋네.”
“찾아가고 싶다면, 몇 년에 한 번쯤은 가도 좋아.”
대단한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음……하지만 상황도 그렇고, 아무래도 출국을 하려면 이것저것 번거로우니까……, 뭐 가끔만.”
국제수배범 주제에도 독일 국내는 종종 태연하게 돌아다니는 정태의였지만, 해외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러려면 여러 가지로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정태의가 가끔만, 하고 약간은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흘끔 정태의를 바라보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서야 아아, 하고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아마 조만간에 수배 풀릴 거다.”
워낙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해서, 처음에 정태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응?”
정태의가 다시 되묻자 일레이는 신문을 접어서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태의의 옆쪽에 있는 빈 침대로 천천히 걸어오며―이때 매우 유심히 쳐다봤지만, 역시나 걷는 것도 멀쩡해 보여 정태의는 그의 창자를 보았던 자신의 기억을 잠시 의심하고 말았다―말한다.
“나로서는 그럴 의도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놈들을 처리해 주느라 수고했다며, 알 파이살이 직접 와서 포상을 주겠다더군. 그래서 아마 조만간에 사면될 거야.”
정태의는 멍하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국제수배범이 아니게 된다.
사실 여태껏도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제약이 없어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 정말? 하고 기쁘게 웃는 정태의를 어딘지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일레이는, 싸늘하게 한 마디 덧붙인다.
“다만 너에 대해서는, 라만이 반대했다더군.”
정태의는 웃던 얼굴 그대로 멈칫했다.
“……왜?”
어느새 웃음은 사라지고, 그 대신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라만이 자신의 사면을 반대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라만의 온몸을 칼로 난도질을 해서 그야말로 시체 꼴로 만들어 놓은―그 이유에 대해서는 라만도 할 말은 없었을 테지만―저 남자는 사면을 해 주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반대하다니, 이해도 안 가고 영문도 알 수 없었다.
낯을 찡그린 채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고민에 잠기는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의 시선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왜일 것 같아.”
“……왜.”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미간에 주름을 하나 더 지은 정태의는,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일레이의 가느스름하게 뜬 눈매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선뜩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놈 혀는 맛있던가?”
일레이가 나직이 내뱉는 말에, 몇 초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놈 혀라니 무슨 혀, 하고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바로 그 다음 순간 얼음처럼 시퍼렇게 얼어붙어 버렸다.
“……. …………. 그건, ……그건 내 탓이 절대로 아닌데…….”
당연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을 호소하는데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건, 옆에서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천진한 형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눈앞에서 뱀처럼 바라보고 있는 무시무시한 남자 때문이었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더듬더듬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결코 정태의의 탓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낯을 바꾸어 삭막한 얼굴로, 일레이의 선뜩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애초에 나를 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죽이겠다고 뒤를 쫓아온 사람은 누구야.”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형을 흘끔 보고 무난하게 말을 바꾼 정태의를, 일레이는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는지, 그는 한동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래……, 하마터면 널 해칠 뻔했군. 내가.”
혼잣말에 가까운 그 속삭임이 귀에 들어온 순간,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럴 뻔했다.
정태의는 문득, 그에게 쫓겼던 그 악몽 같은 시간 속의 어느 때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때.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지 않다는 것보다도 먼저, 일레이의 손에만큼은 결코 죽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의 실수라는 형태로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운 좋다는 사람은 그냥 건드리지 마, 하고 덧붙이면서,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그런 정태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일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런 건 사양이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정말로, 생각을 떠올리는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저은 일레이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정태의가 누워 있는 침대에. 그 옆에 비어 있는 자신의 멀쩡한 침대는 놔두고.
“좁아.”
정태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태연하게 중얼거린다.
“그럼 내 위로 올라와.”
“배가 터진 놈 위로 올라가서 어쩌라고!”
그 정도는 몇 바늘 꿰매면 낫는다니까, 하고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정태의는 결국 얌전히 체념하고 그 옆에 눕고 말았다. 눕긴 누웠는데……형의 고요한 시선이 따갑다.
“일레이가……, 보기보다 사람 체온을 좋아해…….”
멋쩍어서 그렇게 한 마디 말하고 보니 뭔가 굉장히 구차해져서, 정태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재의는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래. 그럼 쉬도록 하렴. 나는 잠시 라만의 병실에도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그놈도 같은 병원에 나란히 누워 있는 건가, 어쩐지 좀 싫은데, 하고 입속으로 웅얼거린 정태의는, 그러고 보니 원래 라만과 포럼 전에 만나기로 했었던 약속도 날아갔겠구나 싶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문득.
……어. 잠깐.
정태의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면 떠올리기도 싫은 그 밤의 끝, 생각도 하기 싫은 그 수치의 기억은, 억지로 생각을 되새겨 보자면 그 역시 원래 자신이 받아야 할 기억이 아니었다.
그때 라만은 분명히 형에게――.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든 정태의는 벌떡 일어나서 정재의를 소리쳐 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딱 한 발 앞서 정재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태의야, 그가 네 사면을 반대한다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혀――응?”
정재의는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기웃하는 정태의를 바라보며, 잠시 사이를 두고서 말을 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든 라만은 나를 구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그렇게 다친 셈이잖아.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나를 그쪽 연구 기관에 부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나 정성을 다해 노력을 하는 사람인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다.”
“엉?”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네 사면에 대해 말을 꺼내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거절하진 않을 거야.”
“아니, 잠깐, 형…….”
정태의가 더듬거리며 정재의에게 손을 뻗자, 정재의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 때문에 내가 싫은데도 일부러 그쪽 연구 기관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오래도록 거절을 했는데도 그렇게 정중하게 거듭 청해 주시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그쪽에 가서 잠시 있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야.”
정재의는 그렇게 말하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조금 있다 다시 보자며 병실에서 나가 버렸다.
정태의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의 자취를 멍하니 쫓으며, “아니……, 그놈은 그런 고마운 놈이 절대로 아니라, 형…….” 하고 그는 애처롭게 홀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이미 형에게는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아련하게 넋을 잃은 얼굴로, 금세라도 혀엉, 하고 목 놓아 부를 듯이 병실 문짝만 쳐다보는 정태의를, 바로 그 옆에 몸을 붙이고 누운 일레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 아니, 그게 아닌데, 금세라도 울 것처럼 똑같은 말만 중얼중얼거리는 정태의를 한참 동안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만 보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손을 뻗었다.
굵은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아도 멍하니 넋 나가 있고, 그 팔이 허리를 꼭 조여도 여전히 넋 나가 있고, 그 손이 허리 아래 사타구니로 뻗어가도 끝까지 넋 나가 있던 정태의는, 일레이가 아예 정태의를 훌쩍 들어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혀 놓자 그제야 벌컥 눈을 부릅떴다.
“심각하게 가족의 앞날을 고민하고 있는데 왜 자꾸 방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넌 네 가족이 아니라고 그렇게……!”
“네가 지금 누구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지나 한 번 생각해 보시지?”
일레이가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에, 갑자기 정태의는 뭐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설령 네 형을 실오라기 하나 내주지 않고 저놈의 침대 속에 억지로 밀어 넣는다 한들, 네 형에게 무슨 위해라도 닥칠 것 같나?”
“……. 듣고 보니 그 말이 맞긴 하군.”
정태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개운치 않은지 풀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태의를 보고, 일레이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정태의의 뺨을 감싸쥐는가 싶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리고 그 머리를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등을 두드려 준다.
“어떠한 식으로든, 결국은 다 잘 될 건데 걱정할 게 뭐 있어.”
일레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가슴에 맞닿은 귀를 통해 기분 좋게 웅얼웅얼,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체온, 익숙한 손길이 천천히 몸을 감싸자, 정태의는 천천히 긴장이 풀린 듯 몸에서 힘을 뺐다.
결국은 다 잘 될 건데.
그 말이 어쩐지 선명하게 귀를 파고든다.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 보니 그럴 것 같다, 하는 생각도 따라 들었다.
“그래. ……그래.”
정태의는 가만히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잘 될 거다. 모두들 다.
지금 이렇게 정태의가, 다사다난한 나날 속에서도 결국은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새 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정태의가 일레이의 가슴팍에 순순히 머리를 기대고 약간 문지르자, 머리 위에서 그가 웃는 기척이 났다. 그 소리가 다시 기분 좋게 귀에 닿아, 정태의도 웃고 만다.
*
“헉……, 잠깐만, 내가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안 되지, 너, 배!”
“괜찮아.”
“뭐가 괜찮아, 이러다 터지면 어쩌려고! 손 치워, 나 내려갈래!”
“터지면 다시 꿰매면 되지.”
“내려가겠다니까!”
“흠……. ……그럼 내가 네 위에 엎드리도록 할까.”
그거나 그거나, 하고 외치던 목소리가 ‘그냥 네 위에 얌전히 엎드려 있을게.’, 하고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패션 : 다이아포닉 심포니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