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시종始終의 밤 (31/34)
  • 4. 시종始終의 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꽤 특이한 경험이었다. 심지어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정도도 아니고, 대단히 반가운 얼굴로 눈을 빛내며 ‘바로 당신이!’라고 외친다면, 그 경험은 더욱 각별하게 기억에 남는다.

    정태의는, 틀림없이 이 순간의 기억도 향후 수년간은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져 흐려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하――, 태이? 정, 태, 의? 당신이 바로 그!”

    눈앞에 보는 남자는, 정태의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정태의와는 초대면일 텐데도 대단히 친근하고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투로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묘하게 또렷하게 끊어서 발음하는 이름도 어쩐지 미묘하게 들린다.

    “바로 그――그 다음엔 무슨 말이 나오는 거지?”

    정태의는 눈으로는 그 남자를 보면서 입으로는 크리스토프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블라인드를 벌리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1. 릭이 끼고 사는, 2. 릭을 한 방 먹였다는, 3. 릭에게 잘못 걸린. 버전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지만 대충 저 셋 중 하나를 찍으면 맞을걸.”

    “아아……, 그런 의미의 ‘바로 그’였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남자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정말로 유쾌하지 않았다.

    알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을 안 했지만 한동안 지나자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마음먹고 거의 반시간을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결과 정태의는 홀로 저 남자는 안면근육이 저 상태로 마비된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웃기 좋아하고 거의 언제나 얼굴에 웃음을 띠는 남자라면 그리 흔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찾아볼 수 있지만, 저렇게 완벽하게 ‘웃기만’ 하는 남자는 거의 보기 드물겠지.

    처음엔 몹시 발랄하고 시원시원한 얼굴로 웃는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저 정도까지 되면 불길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저 아저씨들은 너무 티를 내 주시는데.”

    창가에 선 크리스토프의 뒤로 다가간 알랭은 그의 어깨 너머로 블라인드 바깥쪽을 슬그머니 내다보고는 츳츳 혀를 찼다.

    “저런 초짜들 앉혀 놓고 가르치려면 아주 뼛골 빠지겠다. 똥오줌 가리는 것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냐?”

    알랭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크리스토프에게 눈짓했다. 그 눈짓을 알아챈 크리스토프는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알 파이살이 너더러, 자기네 사병 훈련 좀 시키라고 제의했다며. 네가 저런 놈들 데리고 abc부터 가르치는 걸 생각하니까 웃겨서.”

    “흥, 소식 한 번 빠르군. 그 제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이야기는 같이 안 전해졌나?”

    “글쎄 그거야 모르지. 네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저놈들 머릿수를 확 줄여 주겠다고 릭이 그래서, 나는 또 네가 받아들인 줄 알았지.”

    남자는 낄낄거리면서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의에게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아니, 얼굴 자체가 웃는 얼굴로 생겨먹었으니 이게 이 남자 나름대로는 무표정한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좋았을까, 응?”

    남자가 갑자기 불쑥 중얼거렸다. 비스듬하게 턱을 괸 채 눈동자만 치켜 올려 남자를 쳐다보던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일레이가 나한테 꿀단지를 묻어 놨거든.”

    남자는 잠깐 침묵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구 웃었다.

    “아하하, 은근히 야한데, 태이. ……그런데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네.”

    몹시 희한하다는 듯 정태의의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던 남자를, 어느새 창가에서 돌아온 크리스토프가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뒤통수를 얻어맞고서 윽, 하고 고개를 꺾는 그 남자를 본 체 만 체, 정태의의 옆자리에 앉은 크리스토프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내놔.”

    “없어. 그놈 쪽에서 전화해.”

    알랭은 어깨를 으쓱했다. 크리스토프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어차피 숨어 다니는 성미도 아닌 놈이 왜 연락처를 안 남겨.” 하고 투덜거린다.

    “즉 일레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접촉할 수는 없다는 뜻인가?”

    정태의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물었다.

    “음――뭐 그런 셈이지.”

    남자가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테이블 아래로 그의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차는 크리스토프였다.

    “언제 연락하기로 했어.”

    “두 시 반에.”

    크리스토프가 눈을 부라리자마자 알랭은 당장 대답했다.

    정강이를 걷어채이는 순간에도 웃고 있었어……하고 정태의는 자신의 심정적 결론을 더욱 확고히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가 원래 이래?”

    정태의가 잠깐 망설이다 묻자, 크리스토프는 뭘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뭐가.”

    “그러니까――원래 좀 이렇게, 정신 산만해?”

    “천만에. 이놈이 미친놈이라 그래.”

    뭘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몰랐으면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말을 골라서 유하게 묻자 대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마구 웃어 대는 알랭을 보고, 정태의는 어, 그래, 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각은 오후 두 시.

    알랭의 말이 맞다면 30분 뒤면 일레이에게서 연락이 올 터였다.

    정태의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것은 세 시간 전이었다.

    카일이 차를 내어줘서 카일의 집에서 이곳, 프랑크푸르트의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주택가의 한적한 집까지는 탈 없이 무사히 왔다.

    그러나, 짐작은 했었지만 과연 훌륭한 정보망으로, 이 집에 들어선 지 10분 남짓 만에 벌써 바깥에는 수상쩍은 사람들이 하나둘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갈 때 좀 귀찮겠군.”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알랭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눈치 빠르게 아아, 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밖에 저거? 괜찮아, 괜찮아. 내가 처리해 줄게. 처음 만났는데 그 정도야 선물삼아 공짜로 해 주지. ――생색 내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 제법 비싼 선물이야. 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려면 적어도 십만 단위는 필요하거든.”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이 남자는, 역시나 이놈들의 동료인 모양이었다.

    이 집에 온 지 두어 시간도 더 지났는데도 확실하게 소개를 시켜 주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들어 봐선 크리스토프와 일레이의 공통된 아는 사이임에 분명했다. 십중팔구는 그 소문으로 듣던, 미친놈 소굴이라는…….

    “다른 놈들은 어떻게 지내.”

    시계를 흘끔 본 크리스토프는 30분이나 더 남은 시간이 지루한지 소파에 길게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곳에 있는 놈들은 모르겠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놈은 마크랑 이반이랑 율리앙인데, 다들 따분해하던 차에 릭이 오니까 신났어. 뭔가 구경거리 생길 것 같으면 연락하라고, 세 놈 다 어제부터 전화질이던데.”

    “흥. 심심하면 백수처럼 놀지 말고 일이나 하라 그러지.”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리곤 벌써 따분해진 듯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미심쩍게 물었다.

    “혹시 저번에 리야드를 테러할 때의 그 멤버냐……?”

    “아, 율리앙만. 다른 두 놈은 그때 일이 있어서 못했어. 나중에 소식을 듣고는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 그럼 이번에도 혹시 뭔가 떼 지어서……?”

    정태의는 더더욱 미심쩍게 물었다. 미심쩍다기보다는, 지금도 감당할 수 있을까 불안한데 알랭 같은―잠정적으로―인간이 셋이나 더 붙는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알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는 않을 것 같던데. 이번에 나한테 부탁한 것도 그냥 칼 하나거든. 혼자서 가볍게 뛸 작정이겠지.”

    아하. 이놈은 무기 조달이구나.

    “칼이라니 어떤 거.”

    크리스토프가 묻자 알랭은 빙긋이 웃더니 훌쩍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 뒤에 장식처럼 놔두었던 상자를 열더니 그 안을 뒤적거려 큼직한 꾸러미를 하나 꺼내었다.

    와인색의 두터운 천으로 둘둘 감은 그 기다란 꾸러미를 펼치자, 그 안에서는 알랭이 말했던 대로 칼이 나왔다.

    다만.

    사람의 팔뚝만 한 길이는 되는 그 큼직한 톱니날 칼은, 곰의 목이라도 베어죽일 수 있을 것처럼 흉흉했다. 혼자서 가볍게 뛴다는 말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무기다.

    “……이런 불법스러운 물건은 대체 어디서 사는 거야.”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물건을 사서 내가 손 좀 보는 거지. 어때, 근사하지? 나중에 필요해지면 말해. 내가 또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네게는 특별히 염가로 봉사해 줄 테니.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지만 말야…….”

    정태의는 알랭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 흉흉한 물건을 곁눈질로 보곤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쩐지 암담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한대, 그놈은?”

    무기를 만들어 놓고도 어디에 쓰는지는 듣지 못한 듯 알랭이 물었다. 가볍게 손잡이를 잡고 휘둘러 무게를 가늠해 보던 크리스토프는 글쎄,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확실하게 눈 밖에 난 건 일단 둘일 텐데……정작 그 둘로 끝낼지는 모르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를 놈이잖아. 두뇌 구조가 보통 이상해야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일레이도 인생 막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런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막장의 막장까지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앞에서 알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친다.

    “하긴 그렇지. 후안이었나, 예전에 그놈 창자를 칼로 그었던 놈. 정작 그 본인은 살려 놓고 옆에서 그놈 보조 정도나 해 준 놈을 회쳤잖아.”

    “그런 일도 있었지……. 정작 죽여야 할 놈은, 죽은 놈 배를 갈라서 거기에 얼굴만 처박아 주는 정도로 그쳤었지.”

    심상하게 중얼거리는 그 대화를 듣다가 정태의는 스멀스멀 몸을 돌리고 말았다. 어쩐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것 같다.

    ……과거를 자세히 알려고 들지 말자. 들어서 별로 좋은 꼴은 못 보겠다.

    정태의는 그들에게서 귀를 닫고, 30분이나마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로 했다. 눈을 감자 알랭이 발랄한 목소리로 자는 거냐고 재잘재잘 물어왔지만 음, 하고 짧게 한 마디만 하고 그 뒤로는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어쨌든 일레이와 연락만 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가 무슨 흉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든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어디로 가서 그를 태워 도망칠 수 있을지라도 알 수 있다.

    상식적인 범위에서 예측을 해 보자면 리하르트를 한 방 먹이거나 혹은 라만을 한 방 먹이는 정도일 텐데……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리하르트―정확히는 타르텐―에 대한 빚이라면 그날 타르텐에서 나올 때 톡톡히 피를 보고 나왔다고 하니 일단 이자 정도로라도 칠 수 있을 텐데, 라만은 답이 없었다.

    늘 경호원이나 수하들과 떼 지어 다니는 그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 방 먹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설마하니 그 무리에 통째로 폭격을…….

    그런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생각하고 보니 농담으로 여겨지지 않아 얼른 생각을 접어 두고 말았다.

    “이러다가 범죄를 말리긴커녕 범죄에 가담을 하게 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이 들렸는지, 알랭이 또 마구 소리 내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사우디에서 온 그 양반은 골치 좀 아프게 생겼던데. 뒤에 줄줄이 달려온 꼬리들이 많더라.”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랭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아. 라쉬드가 알 파이살을 노린다는 거? 흠. 그 영감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는데 얌전히 승복을 하는 게 노년을 위해 좋을 텐데.”

    “알 파이살을 없애면 다시 승기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기라도 하나 보지.”

    “영감이 나이도 아직 그리 많이 먹지 않았으면서 노망이 났나 보군.”

    흘러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에까지 웃음이 아주 흠뻑 묻어나오는 알랭과, 듣기만 해도 그 부루퉁하고 무심한 얼굴을 짐작할 수 있는 크리스토프.

    저렇게 대조적인데 대화가 이어지는 것도 재미있다면 재밌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 같으면 얌전히 하렘에 들어앉아 노닥거리겠는데, 그 젊은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 아슬아슬한 정세에 독일까지 쫓아왔나 몰라.”

    “알 사우드는 예전부터 정재이를 엄청나게 탐냈었어. 하긴 군수개발과는 거의 연관이 없는 우리……, 아니, 타르텐에서도 한때 그 소문난 천재를 영입해 볼까 하는 말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쪽이야 오죽할까.”

    “정재이라……. 이름만 무성하게 듣고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얘랑 닮았어?”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는 게 이렇게 여실하게 느껴지기도 쉽지 않았다.

    그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글쎄, 하고 중얼거렸다. 손가락질도 여실히 느껴졌지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도 아주 확연하게 알겠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설마 이렇게 반짝거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을까.”

    무뚝뚝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폭소가 터져 나온다. 그래, 웃을 만도 하다. 정태의는 자신의 일만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틀림없이 웃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크리스가 ‘바로 그 정태이’에게 눈독을 들였다가 릭의 눈 밖에 날 위협에 처했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군. 으흐흐, 정말 꿀단지라도 묻혔나? 난 통 모르겠는데.”

    빙글빙글 웃는 목소리에, 딱, 하는 소리가 섞였다. 알랭이 또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모양이다.

    “아. 그렇지. 넌 어때. 리하르트가 타르텐을 승계했다면서. 게다가 묘한 소리도 들리던데…….”

    애매하게 말꼬리를 끄는 말투가 어딘지 미묘했다.

    틀림없이 늘 웃음을 담고 있는 그 눈가에 고양이처럼 야릇한 웃음이 떠올라 있을 것 같았다.

    “……가끔은 입 다무는 게 좋은 소리도 있는 법이야. 나는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야, 알랭 노통.”

    아. 크리스토프의 이 목소리는 위험신호다.

    정태의가 알고 있는 것을 알랭도 이미 알고 있는 듯, 웃는 기척은 났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이러다 잠들기도 전에 30분 지나 버리겠군, 하고 정태의가 속으로 생각했을 때였다.

    정확히 그때, 마치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휴, 우리 두목은 정확도 하시지. 지금 초침까지 정확하게 맞은 거 봤어?”

    알랭이 웃으며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동시에 정태의도 눈을 떴다.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는 알랭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다.

    버튼을 꾹 누르고 돌아오는 걸 보니 송수화구를 스피커로 돌린 모양이었다.

    “전화 받았어요, 두목――. 오늘은 손님도 있다우――.”

    소파에 탈싹 주저앉은 알랭이 길게 꼬리를 끌며 외쳤다.

    곧 전화기에서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은 왔나 보지, 태이. 거기 있는 걸 보니 크리스토프도 같이 있겠군.’

    “일레이. 너 베를린에 들렀었다며.”

    인사보다 먼저, 정태의는 도끼눈을 뜨고 그것부터 먼저 물었다. 전화 너머에서 잠시 침묵하던 그는 얼핏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아아, 그랬었지.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우고 그냥 왔어.’

    “뭐가 안 깨우고 그냥 와! 어차피 깨울 바에는 제대로 깨우고 말이나 하고 가지!”

    ‘흠……? 약기운이 덜 빠져서 헤롱헤롱하길래, 콘돔도 썼겠다 뒤처리도 해 줬겠다, 꿈 꾼 줄 알 거라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나 보지. ……아. 아니군. 전해 들었구나.’

    베를린에 들렀었다며, 라는 말을 다시 떠올린 듯, 일레이는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정태의는 밟았다고 생각했다. 얼굴 위로 두 쌍의 시선이 꽂혔던 것이다.

    정태의는 슬쩍 이마를 문지르곤,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 어쩔 작정이야.”

    ‘음――, 방해하러 왔나?’

    웃음을 띤 채로 곤란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이던 일레이가 슬쩍 묻는다.

    “방해한다고 방해가 될 성이나 싶겠냐만, 대답에 따라.”

    일레이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 너머에서 비스듬히 턱을 괴고서 웃음을 머금은 채 턱을 손끝으로 톡, 톡, 두드리고 있을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알랭. 말했던 건 다 됐나?’

    갑자기 일레이는 이야기 상대를 바꾸었다.

    옆에서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던 알랭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응, 하고 대답한다.

    “오전에 다 됐어. 워낙 갑자기 말을 하는 바람에 급하게 만들어서 그리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쓸 만은 할걸.”

    ‘알았어. ――크리스토프. 너는 혹시라도 베를린의 집에 붙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같이 왔나 보군. 그놈이 벼르고 있는 것 같던데 괜찮나?’

    일레이의 말끝에 슬며시 웃음이 섞였다.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얼굴이 삭막해졌다.

    “내게 시비를 걸고 싶나, 리그로우?”

    그러자 일레이는 짧게 웃었다.

    ‘뭐 좋아. 이번에는 일단 네게는 고맙다고 해 둬야겠지. 태이를 거기에서 빼내어 베를린으로 데려갔으니.’

    “그래, 사람이 일껏 빼내었더니, 너 때문에 프랑크푸르트까지 와 버렸잖아. 손 뗄 거면 얼른 손 떼. 기다리고 있으니까.”

    ‘……. 크리스토프. 어차피 그러지도 못할 놈이니 내버려두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녀석에게 손대면 죽인다.’

    웃음 섞어 태연하게 죽인다는 진담을 하는 일레이에게,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프랑크푸르트에 들어오자마자 뒤에 붙은 차가 세 대였어. 이 집도, 바퀴벌레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잠깐 딴눈 판 사이에 홀랑 집어가 버리면 어쩔 거야.”

    아무래도 그 대화의 목적어인 듯한 정태의는, 미묘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셨다.

    나름대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대화이기는 하니 기분 나쁠 건 아닌데, 그래도 홀랑 집어가 버리다니.

    ‘그래……, 나도 그럴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 녀석을 계속 베를린에 놔뒀었는데……, 이번에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야.’

    “어떻게.”

    되물은 것은 정태의였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지금은 듣고 있었지만―자신의 안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호시탐탐 너를 노리는 인간들을 근원적으로 없애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인간들……이라는 게 수배범을 쫓는 경찰 말고 누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을 근원적으로 어떻게 없앨 건데.”

    ‘경찰은 문제가 아냐. 그런 것 따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정태이라는 인간 자체를 필요로 하는 놈들이지.’

    정태의는 침묵했다.

    역시나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리 오래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답은 곧 나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인물. 어릴 적에 워낙 자주 겪은 일이라,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정태의의 머릿속에서 답이 나온 것과 동시에, 일레이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정재이가 없어지면 되는 문제야.’

    “…….”

    정태의는 침묵했다. 자신의 귀로 들어온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반추해본다.

    분명 그 말이 맞긴 맞다. 그 말이 정답이다. 그렇긴 한데…….

    “뭐야. 형을 없애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애시당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뭔가 그와 관련된 다른 해법을 내놓으려니 생각하면서.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맞았어.’였다.

    ‘모처럼이니 이 기회에 정재이의 그 놀라운 운이 어디까지인지 한 번 시험도 해 볼 겸, 성의껏 노력해 보도록 하지.’

    일레이가 웃으면서 가볍게 하는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태의는 더럭 표정을 굳혔다.

    “이봐, 잠깐……. 어디선가 대단히 방향이 엇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번에 네게 해를 입힌 건 다른 사람인데 갑자기 왜 우리 형을 죽이겠다는 거야.”

    매우 심각하고, 또한 희미하게 험악한 기운까지 담아서 정태의가 말하자 일레이는 아하……, 하고 나직이 중얼거린다. 곤란하다는 투로 혀를 차다가 그가 넌지시 묻는다.

    ‘네 생각에는 말이야, 외부에서 어떠한 고의적인 방법으로 정재이를 해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불가능하겠지.”

    정태의는 즉답했다. 형의 운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일레이 역시 동의했다.

    ‘그래,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겠지. 그렇다면 말야, 정재이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과연 그렇게 운이 좋을까. 정재이가 위험에 빠지다 보면 그 주위에 있는 평범한 인간 한둘은 죽을 법도 하지 않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 누구야. 원하는 게.”

    ‘주위에 인간들이 지나치게 들러붙어 있는 인간.’

    그 간결한 대답에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라만?”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직이 웃는다.

    정답이구나.

    정태의는 미간과 관자놀이를 동시에 문질렀다. 미간은 주름이 깊게 패었고 관자놀이는 미친 듯이 지끈거리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 그렇게 되면 일단 애초의 사태와는 연관이 되는 셈이다.

    ‘그놈이 제일 까다로워. 그놈만 없어지면, 나머지 정재이를 노리는 인간들은 대수롭지 않거든.’

    일레이의 말마따나 라만이 없어지게 된다면―적어도 그가 정재의라는 목적 때문에 정태의를 노리지 않게 된다면―삶이 훨씬 편해질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 좋아. 다 좋아. 라만을 노려 봐야겠다, 이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치는데, 왜 거기에 형이 끼어드냐고…….”

    정태의가 앓는 소리로 중얼거리자 일레이가 웃었다.

    ‘걱정되나?’

    남의 친형을 죽이려고 노려 보겠다는 인간이 할 말이 아니었다.

    “너 같으면 걱정이 안 될 것 같나?”

    정태의가 어이없이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도리어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는 투로 대꾸한다.

    ‘정재이 정도의 운수라면, 나는 별로 걱정 안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확고하게 그 운수를 믿으면서 뭘 시험해 보겠다고 그래!”

    정태의는 결국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말로 당해낼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정재이가 아니라 그 옆에 어슬렁거리며 들러붙을 놈이지. 정재이를 노리다 보면 근처에 오가는 놈 하나쯤은 없어질 테니까.’

    “이봐, 게다가 그 논리에는 오류가 있다고. 형을 노리면 반드시 라만이 나타난다는 보증이 어딨어.”

    ‘아니, 나타날걸.’

    일레이의 대답은 지극히 간결했다. 더 말해 봐야 들어먹히지 않을 느낌이 매우 확연하게 풍겨 왔다.

    정태의는 더욱 짙어지는 미간의 주름을 열심히 문지르면서 낮게 신음을 흘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튈지도 모른다는 말은 조금 전에 들은 바 있지만, 설마 이 방향으로 튈 줄은 몰랐다. 그에게 아무 짓도 한 바가 없는 애꿎은 사람을 노리겠다니 이건 또 웬 말인지.

    정태의는 정재의의 운수를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것은, 일레이가 특수부대원과 싸우다가 다치거나 고속도로의 대형 트럭 삼중추돌에 휘말렸다고 해서 다치는 일은 있을 리 없다는 믿음과도 비슷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동생의 마음은 아무래도 애틋한 법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냐 안 나냐에 상관없이, 흉흉한 사고를 사전에 막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은 해 봐야 했다.

    그래서 정태의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던지는 그 최대한의 노력을 해 보기로 했다.

    “그 빚을 갚아 주는 게 말야, 일레이…….”

    정태의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나직이 말했다. 흘끔, 시선을 들어 제각각 근처에 한가롭게 앉아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본다. 저 두 사람이 잠깐 어디론가 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나보다 더 중요해?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애정이 식…….”

    차마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그 말조차 악다문 잇새로 겨우 말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것이 진정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 혹시 자신은 이런 말을 했다고 망상만 하고 있을 뿐, 사실은 이런 말 따위는 하지 않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뜨악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알랭 역시 매우 뜨악하게―웃는 얼굴이 몇 초쯤 딱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자신을 보고 있었다.

    “……. 그렇군……. 두목, 평소에 저러고 사는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린 알랭이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을 때 정태의는 스르륵 몸을 구부리고 말았다.

    “절대 안 그래…….”

    정태의는 땅 속 수백 미터까지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믿어 주는 눈치는 아니었다. 심지어 크리스토프는 어쩐지 굉장히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작 그 말이 들어먹혀야 할 사람은.

    전화 너머에서 침묵했다. 꽤 오랫동안을.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정태의는 첫 문장만 듣고도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태이. 이번에 나는 꽤 화가 많이 났어.’

    웃음기가 약간 사라진 그 목소리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다시 이어졌다.

    ‘자칫했으면 너는 이번에 정말로 곤경에 빠졌었을 수도 있어. 네가 위험해졌었을 수도 있다고.’

    “…―.”

    ‘그러니까 태이, 이번에는 나를 말리려고 들지 마라. 나중에 원망받기는 싫으니 네게는 알려줬어. 네 성격에 귀찮게 굴 게 뻔해서 사실은 굳이 네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방해하지 마.’

    “태이가 여기까지 와서 위험해진 건 어쩌고.”

    그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크리스토프가 못마땅한 듯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일레이는 얼마간 침묵했다.

    ‘내일이 포럼이지. 그러면 늦더라도 내일이면 끝나. 빠르면 그 전에 끝날 수도 있겠지.’

    “일레이!”

    ‘게다가 그들은 정재이를 노리는 한, 태이에게 최악의 수는 쓰지 못해. 태이에게 심각한 위험이 생기면 그건 태이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일레이는 할 말은 다 마친 듯, 그렇게 이야기를 맺었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은 있나, 태이?, 그렇게 물어보는 일레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태산보다 더 많았지만, 정태의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말해서 들어먹힐 만한 할 말은 없었다.

    아니, 없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만족스러운 듯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전했다.

    ‘그래, 그럼 내일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고, 실내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침묵은 아니었다. 유유히 일어서 ‘배고프지 않아? 뭔가 먹자.’라고 태연하게 싱글거리는 알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아보다는 고민이 먼저인 정태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며 신음을 내었다.

    어찌 되었든 위험을 무릅쓰고 형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킬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지킨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설마하니 형 옆에 붙어 있는 나를 죽이지는 않…….”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을 중얼거리다가, 정태의는 붕붕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고난거리가 산적한 현재, 불길한 가능성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럼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정태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형을 만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

    과연, 이 정도면 UNHRDO의 경비라고 내세워 자랑할 만하다.

    정태의는 박람회장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국제 항공 기술 포럼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3층이라는 팻말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당장 박람회장의 입구에서 들어서면서부터 보안 감시가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 오가고 있는 낯익은 제복들은, UNHRDO에서 이번 포럼을 대비해 막대한 수의 사람을 풀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데에만 이 정도면, 기술지원실 같은 데에 가서 제대로 보면 보안 상황이 상당할 게 틀림없었다.

    “포럼 전날부터 이 정도라면 어지간해서야 걱정할 일 없겠군.”

    정태의가 감탄스레 중얼거리자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이런 보안 정도는 우습지도 않게 여길 만한, 어지간한 인간이 아니라면 문제가 더 커지지 않나?”

    “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어두워지는데…….”

    정태의는 입구에서 지급받은 임시 패스를 부채처럼 설렁설렁 흔들며 쓰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로 철통같은 경비를 서면서 UNHRDO에서 총력을 다해 지키려고 하는 네 문제의 형님은 어디 있어?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것 아니었어?”

    패스는 이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지 오래인 크리스토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음, 아직 안 왔나 보지.”

    정태의는 시계를 보았다. 시각은 다섯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각과 장소는 포럼이 열리는 박람회장 1층 로비에서 오후 다섯 시.

    늘 시간 약속은 어기는 법이 없는 정재의의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이제 슬슬 보여야 했다.

    정태의는 다섯 시 정각에서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초침을 보며 약간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얼마간 늦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정재의는 그런 적이 없었기에 다소 의외로 생각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흠……, 차라도 막히나.”

    “우리도 차 타고 왔는데.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려서.”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런 일도 있는 법이지,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정재의에게는 생각보다 쉽게 연락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재의가 아니라 숙부인 정창인이었다.

    아마도 오늘 오전 비행기로 입국할 거라며, 카일이 직통번호라고 알려준 대로 전화를 걸자,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숙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전화 연락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삼촌, 저예요.’라고 말하자, 바로 엊그제 전화를 한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숙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태의구나, 하고 반갑게 응답했다.

    수속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베를린에 있는 UNHRDO 지부와 연락을 해서 일을 정리하고 이제 막 호텔에 짐을 풀러 들어온 참이라는 숙부는, 내일 있을 포럼의 참석을 앞두고 오늘까지인 참석자 등록을 하기 위해 박람회장에 가야 한다고 했다.

    ‘참석자 등록이면, 형이요?’

    ‘그렇지, 재의.’

    ‘하하, 바쁘네요. 형 잠깐 바꿔 주실래요?’

    ‘응? 아, 잠깐 뭐 수속하러 가서 지금 옆에 없는데. 그런데 이 번호면, 너도 프랑크푸르트에 있나 본데.’

    알랭의 집 번호가 뜬 모양이었다.

    정태의가 웃으면서 예, 하고 대답을 하자마자 숙부는 마침 잘 되었다며,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애초에 정재의를 만나는 것이 바라는 바였던 터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약속을 잡은 뒤, 시간에 맞추어 알랭의 집에서 나와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었다.

    “좀 늦네……. 아, 아니면 참석자 등록을 하러 여기에 들러야 한다고 했던 거니까, 그것 때문에 좀 늦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정태의는 다섯 시에서 약간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계로 다시 한번 시선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약간쯤은 늦어도 상관없지, 하고 박람회장 안내 리플릿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문득 불쑥 중얼거렸다.

    “또 붙었군.”

    의아하게 그를 쳐다본 정태의는 이내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주의를 기울여 보자, 제법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만 해도 여럿이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알랭의 집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은 곳만 다니고 있어서 아직 별일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바퀴벌레가 생각나는걸. 어쩐지 가는 곳마다 있는 것 같아.”

    “가는 곳마다 바퀴……. 카일의 집에서는 정기적으로 방역을 안 하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미심쩍게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에게 손을 내저었다. 이놈은 가끔 기초적인 비유가 안 통할 때가 있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쩐지 조금 더 늘어난 듯한 시선을 등 뒤로 따갑게 느꼈다.

    “이 정도라면 호텔도 불안한데. 오늘 밤에 편하게 잘 수 있으려나 몰라.”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디나 위험지대다.

    “제일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유치장?”

    천진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는 다시금 고개를 내저어보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크리스토프는 곧 대수롭잖게 말했다.

    “여차하면 알랭을 불러서 그 집에 가서 자면 되겠지.”

    “아니, 사양하겠어.”

    “안전은 보장할 수 있는데.”

    “사양하겠어!”

    정태의는 진지한 얼굴로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크리스토프의 말대로, 그 남자의 차를 타고 다니면서 그 남자의 집에 머무르면 뒤를 쫓아다니는 저들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새로운 위협이 생겨날 게 분명했다.

    알랭의 집에서 이리로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두 번, 정태의는 그 새로운 위협을 느꼈다.

    처음은 그의 집 대문을 나서 주택가의 길가에 세워 놓은 차를 타기까지.

    목적이 단순한 감시만은 아니었던 저들은, 정태의를 비롯해 세 사람이―알랭은 대단히 흔쾌히 그들을 여기까지 태워다 주었다―집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들을 둘러쌌다.

    사실 바깥에서 감시하던 그들은 그리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뻔히 눈치채일 만큼 초보들이라면, 정태의 혼자 있다 해도 어렵잖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알랭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 중 하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더니, 그대로 벽에 박아 버렸다.

    버둥거리는 반항 정도는 어깨를 뽑아서 쉽게 눌러 버리고, 머리가 터져서 피가 철철 넘칠 때까지 벽에 미친 듯이 박아 댔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람 하나를 머리 피부가 벗겨져 언뜻 희멀건 뼈가 보일 때까지 벽에 짓이겨 댄 그는, 형태를 알아나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박고 나자 그 사람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잡으려 하자, 알랭이 한 사람만 그렇게 상대하고 있는 동안 정태의와 크리스토프를 제압하지 못한 그들은 그나마 현명하게도 달아나고 말았다.

    질린 얼굴로 그 쓰러진 사람을 내려다보며 병원에 가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차 안에 밀어넣은 알랭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갔다오면 사라져 있을 거야.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더라고.’라고 말하곤 가뿐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역시 이놈도 겉멋으로 그들의 동료를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한 정태의의 앞에 나타난 두 번째 난관은, 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이었다.

    이번엔 조금 전의 그들처럼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의 차를 뒤에서 쫓던 차가 있었다. 그 차는, 인적 드문 길로 들어서자 곧 속도를 올려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차량이 나란히 선 순간, 운전석의 차유리에 쩌억 금이 갔다.

    방탄유리가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깨어졌을 그 흔적은, 옆에서 달리는 차에서 거침없이 운전자를 향해 총을 갈긴 탓이었다.

    ‘이번에는 좀 세게 나오는데. 하긴 운전자부터 죽여 버리고 시작하는 게 손쉽긴 하지.’

    바로 그 운전자인 알랭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더니, 운전석 아래를 한 손으로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정태의는 바로 직후에 찾아올 아수라장을 예감하고서 이마를 짚고 말았다.

    “나는 운전석 밑에 50구경 바렛을 넣고 다니는 인간이 운전하는 차는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아.”

    정태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T&R 기동대, 거기에 몸담았었다는 놈을 보게 되면 절대로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흠, 릭은 네게 운전을 시키나 보지?”

    정태의의 말을 받아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본 정태의는 그곳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데도 거의 변한 데가 없는 그 남자를 보며, 정태의는 환하게 웃었다.

    “삼촌, 오셨군요.”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어? 늦어서 미안하다. 도중에 급하게 약속이 잡혀서, 시간을 조절한다고 했는데도 좀 늦었어.”

    정태의의 숙부, UNHRDO의 아시아 지부에서 교관을 맡고 있는 정창인은, 정태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워낙 바쁘기도 하거니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제약도 있는 정태의와는 그리 자주 만나지 못하는, 정태의의 몇 안 남은 친족 중 하나였다.

    “출장을 나오면 늘 스케줄이 빽빽한 건 여전하신가 보군요.”

    “어――아냐, 이번은 비교적 느슨하게 잡았는데, 하나 미처 생각을 못한 게 있었지 뭐냐. 이번에 반드시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쪽의 중요 스케줄이 이번 포럼과 거의 날짜 차이가 안 나서 연락이 지연되었었어. 아까 너와 전화한 직후에 연락이 와서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야 했지.”

    숙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시간이 아무래도 안 맞아서 말야. 조금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잠시 동안만 동석해도 괜찮겠어?”

    숙부가 묻는 말에 정태의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괜찮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누군데요?”

    “음? ――아, 맞아. 그렇지. 내가 요즘 일에 치이다 보니 정신이 없어져서 원. 그러고 보니 너도 알 사람이지.”

    숙부는 손끝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막 입을 열던 그는, 문득 입을 연 채로 멈추었다.

    갑자기 말이 끊기고 움직임도 멈춘 숙부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그 시선을 따라간 정태의는, 자신의 뒤쪽으로 리플릿 배치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서 있던 크리스토프를 발견했다.

    “크리스틴!”

    크리스토프를 보던 정태의는 숙부의 입에서 짧게 터져나온 이름에 다시 시선을 숙부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스산해지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는지, 숙부는 얼른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군, 크리스토프! 잘 지냈나, 크리스토프? 이게 얼마만이야, 크리스토프!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지, 크리스토프?”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주며 연거푸 크리스토프의 이름을 부른 숙부는, 눈만 껌벅이며 그들을 보고 있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 같이 있지?”

    의아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숙부는, 문득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곤 정태의에게 물었다.

    “너랑 같이 왔다는 친구가 크리스토프였어?”

    “예. 그러고 보니 삼촌이랑도 아는 사이라고 하셨었죠. 친구랑 간다기보다는 크리스토프랑 간다고 해도 될 뻔했네요.”

    숙부와 만날 약속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나갈 거라고 말했던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숙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희미한 웃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그 얼굴은, 사실은 난처하게 머리를 굴리는 얼굴이라는 걸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 왜 그러세요, 삼촌?”

    정태의가 약간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숙부는 그제야 곤란한 듯 웃었다.

    “아니, 나는 너랑 같이 올 사람이 크리스토프라는 건 몰랐지. 알았더라면 약속을 그렇게 안 잡았을 건데.”

    숙부의 말에 잠시 감을 잡지 못하고 슬쩍 눈썹을 찌푸린 정태의는, 그때 박람회장 안으로 보안 시스템을 통과하며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훤칠한 키에 인상 좋은 얼굴로 쉽게 눈에 띄는 그 남자는, 한 번 장내를 둘러보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흘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남자를 본 사람은 정태의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도 그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웃음기를 씻은 듯 지웠다.

    “리하르트, 어서 와.”

    옆에서 숙부가 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걸 때까지, 정태의는 그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뜻밖이었던 탓이다. 그것은 옆에 선 크리스토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정창인 씨. 카일을 통해서 가끔 소식은 전해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뵙는 건 벌써 몇 년만이지요.”

    숙부에게 인사를 하는 그의 담담한 모습을 보며 정태의는, 그는 자신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이미 알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고의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숙부가 이번에 반드시 만나 봐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정말로 숙부와 만나는 김에 우연히 마주쳤는지도 몰랐다.

    “또 뵙는군요, 정태이 씨.”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정태의 역시 가벼운 목례를 되돌려 주었다. 리하르트는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나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곧 만날 거라고 했었지,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웃는 듯했다. 입가가 약간 올라간다.

    여느 때와 같이 웃는데도 그 웃음은 상냥해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둘은 오랜만에 만나는 것도 아니겠네. 바로 엊그제 승계 때 봤을 테니. 그렇지 않나?”

    그때, 숙부가 말을 거들며 끼어들었다. 태연하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고개를 들이미는 숙부를 보고, 막 입을 열어 뭔가 대답을 하려던 크리스토프는 말을 멈추었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숙부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겠네요, 하고 정태의는 숙부의 말에 애매한 맞장구를 쳤다.

    숙부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터였다.

    타르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면 리하르트가 카일의 집을 찾아왔었다는 것까지, 숙부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는 숙부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미묘하게 입을 다문다.

    “아. 그런데 형은요?”

    정태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조금 전부터 의아했던 것을 물었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자 숙부는 아, 맞아, 하고 또 까먹고 있었던 것처럼 새삼스러운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그리고 그때에야 살짝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없어.”

    “……예?”

    “내일 새벽에 전용기로 들어올 거야. 그나마 제일 빠르게 한 게 그거였거든.”

    “예? 왜 따로 오셨어요?”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UNHRDO의 계약만료 시기와 딱 겹쳤더라고. 재의 경우는 해외 업무로 본부를 드나들려면 제출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 같은데, 계약만료 시기까지 겹치고 보니까 도저히 시간 안에는 손쓰기가 힘들더라고. ……게다가 흉흉한 소문도 들리는 모양이고.”

    숙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 말에 정태의는 납득한다.

    과연,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뭐예요, 그럼 형은 내일 포럼이 열리기 직전에야…….”

    형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착하게 연락을 하고 굳은 마음으로 숙부를 찾아왔던 정태의는, 약간 맥이 풀려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곳에 아예 있지도 않는다면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적어도 오늘 형이 해를 입을 일은 없겠다. ……내일도 없겠지.

    다행스런 마음 반, 맥 풀린 마음 반으로 한숨을 내쉬는 정태의였지만, 그때 갑자기 숙부가 정태의의 어깨를 콱 잡더니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는 정태의가 삼촌? 삼촌? 하고 묻자 숙부는 웃는 얼굴 그대로 밝게 말한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등록부터 하자.”

    “등록이라니 무슨 등록이요.”

    “말했잖아. 포럼 참석자 등록이 오늘까지라고. 원래는 그저께까지였는데 그나마 밀어붙여서 오늘까지로 늘려 놨거든. 어떻게 하나 했는데 때마침 네가 와 줘서 잘됐지 뭐냐.”

    역시 재의에 관련된 일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니까,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숙부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정태의는 이야기의 맥락을 짐작하고 더더욱 모르겠다고 소리 높였다.

    “남이 대신 등록해도 돼요?”

    “네가 왜 남이야. 태어날 때부터 분신처럼 반쪽으로 태어났으니 본인이라 해도 틀리지 않지. 넌 지금부터 딱 10분 동안만은 정재의다. 알았지?”

    “아니 그래도――.”

    “괜찮아. 재의 신분증 있어. 게다가 별로 닮지는 않았다곤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들 눈으로 보이게는 썩 닮은 데다, 본인 확인도 아주 간단한 수준까지만 한다고. 쌍둥이라면 들키지 않을 만큼 간단한 수준으로만. 피만 약간 뽑을 뿐이니까 걱정 마.”

    정태의는 당혹스런 얼굴로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나 애타게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머뭇머뭇 따라오는 크리스토프는 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숙부를 보았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고, 아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무표정한 리하르트는 논외였다.

    “정재의 맞나 보자면서 이상한 역학공식 같은 거 내놓고 증명하라고 그럼 어떻게 해요, 난 그런 거 못한다구요.”

    “……. 너랑 재의는 참 구별하기 쉬워서 좋구나.”

    끌려가기 싫어하는 소처럼 끝까지 바동바동거리는 정태의를 어렵잖게 끌고 가면서, 숙부는 그래도 당근을 쓰려는 셈인지 그를 다독거렸다.

    “얼른 마치고 식사하러 가자꾸나. 내가 묵을 호텔에 예약해 두고 왔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돼서 재의 방으로 미리 예약해 놓았던 방이 비게 되었는데, 거기서 묵으려무나. 재의 몫으로 마련해 두었던 데라서 보안도 썩 좋아.”

    “……!”

    다시 한번 반항하는 소리를 외치려던 정태의는, 사소한 고민거리 하나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여태 버둥거린다고 숙부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은 거의 없는 과거를 떠올려 보자면, 그냥 얌전히 따라가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나았다.

    *

    이건 조금 위험하려나.

    정태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배경으로는 화장실의 전경.

    볼일을 보러 간간이 드나드는 손님이 한둘 정도씩 끊이지 않고 있는 화장실에서, 정태의는 말없이 손을 닦았다. 그리고 막 돌아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볼일을 보고 있던 남자 하나, 막 화장실로 들어오고 있던 남자 하나가 아무렇지 않은 듯 순식간에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

    쏜살같이 다가오는 배 근처에서 뭔가 쇠로 된 빛이 어른거렸다.

    그들은 불시에 사람을 습격하는 한 조로는 거의 완벽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정태의가 평균치보다 감이 조금 더 좋다는 것. 그리고 같이 살고 있는 인간이 다소의 비인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류의 급작스런 몸 다툼에는 익숙해져 있다는 것.

    정태의는 피하는 대신, 무기를 내지르는 남자에게 바싹 다가섰다. 무기를 쥔 그의 팔을 불시에 붙잡아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던 남자에게, 보지도 않고 그 팔을 질러넣었다.

    억, 짧은 신음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울렸다.

    틀림없이 불시의 공격이었을 텐데도 신음조차 거의 없다.

    팔을 쥐고 당긴 뒤에 보자, 무기는 칼 따위는 아니었다. 소형의 전기 경봉이다. 간단한 감전 효과가 있는. 가볍게 마비부터 시키고 손쉽게 손쓰기에 좋은 물건이다.

    정태의는 그들의 허를 찌르자마자 앞쪽에 있는 남자의 팔꿈치를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꺾어 버리고, 그가 가로막다시피 하고 있던 문을 통해 뛰쳐나왔다.

    등 뒤에서 그들이 다급하게 어깨를 붙잡았지만 이미 문밖으로 몸은 반쯤 나와 있었다. 끌려들어가지만 않으면 이 자리는 모면이다.

    마침 문 앞에 있던 장식용 대형 항아리에 꽂혀 있던 조화를 와락 끄집어내어 뒤쪽으로 휘둘러 마른가지로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그 틈을 타 얼른 앞으로 나섰다.

    곧 좁은 복도 앞쪽에서 화장실을 가려는 사람이 하나 걸어왔고, 정태의는 그를 스쳐 식당으로 들어선 다음에야 일단의 사소한 위기는 모면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곤란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곳에서 덮쳐오기 시작하면, 공격은 본격화된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조금 전의 그 남자들도, 정태의가 방심하고 있으리란 생각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기에 그나마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걸어오는 움직임만으로 그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처음으로 마주쳤었던 그 얼간이들과는 다르다.

    “왜 그렇게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어.”

    깨끗이 비운 디저트 접시를 앞두고 테이블에 앉아 있던 숙부는 정태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오자 의아한 듯 물었다.

    “아――방으로 돌아갈 때까지가 걱정돼서요. 이젠 화장실에서까지 붙잡는 사람이 등장해서…….”

    “……아하.”

    숙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리가 묵을 객층에는 층 전체에 코너마다 UNHRDO 소속의 대원들을 풀어 뒀으니 마음 놓으시길.”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가까운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요.”

    “아하. 그래서 네가, 내가 나눠준 야채를 안 먹었구나.”

    “먹기 싫다고 익힌 당근을 제 접시에 올려놓고서 하실 말씀이에요, 삼촌? 연세도 잡수실 만큼 잡수신 분이!”

    정태의가 눈살을 찌푸리자 숙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크리스토프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말이 거의 없었다.

    “피곤해?”

    숙부가 말을 걸자 흘끔 쳐다본 크리스토프는 조금, 하고 짧게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다문다.

    호텔까지 동행한 뒤,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리하르트가 자리를 뜰 때까지 크리스토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외라면 의외롭게도, 리하르트 역시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리하르트가 했던 말처럼 정말로 더 이상 타르텐도 뭣도 아닌 ‘남’처럼―남보다 더―말도 섞지 않은 그들에게, 정태의도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말은 걸지 않았지만 시종 서늘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직시하며 눈길로 사람을 꿰뚫기라도 할 듯 쳐다보던 리하르트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저녁을 먹기 직전에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그나마 한두 마디 정도씩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말수가 적어진 그를 보며 목덜미를 긁적인 정태의는,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섣불리 말을 꺼낼 계제도 아니었고, 언짢아진 기분은 본인 나름대로 풀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층 전체에 코너마다 UNHRDO 소속의 대원들이라……. 맨손으로 사람 목을 꿰뚫는 인간을 능히 당해낼 만한 사람들이에요?”

    정태의는 식사의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차 대신 따로 시킨 맥주를 뜯으며 미심쩍게 물었다.

    으음, 하고 숙부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지간해서는 선뜻 ‘그 정도 인원수는 당해내지 못하지.’라고 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으로 일이 벌어졌을 때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치적인 가공의 계산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의 계산이다.

    ‘일레이가 형을 죽이겠대요.’

    정태의가 식사를 하며 말했을 때, 숙부는 집어들었던 포크를 놓칠 뻔했다. 손에서 스르륵 흘러내리는 포크를 떨어뜨리기 직전에 간신히 받아들며 다시 고개를 든 숙부는, 왜? 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일레이와 통화를 하면서 자신이 딱 저랬겠지, 동병상련의 심경을 맛보며 정태의는 일레이의 말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전해 주면서 정태의는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매우 미심쩍고 의아하게.

    정재의를 없애겠다는 첫 번째 목표―이건 그 역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대단히 낮게 보는 듯했지만―. 그로 인해 부차적으로 라만을 끌어들여 없애겠다는 두 번째 목표.

    말을 전하면서 생각해 보니 어불성설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가 직접 그렇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 말이 틀림없이 실현될 것만 같이 느껴졌다.

    비현실을 현실로 만드는 놈이라 그런가…….

    다시 잠깐 고민에 잠겨 있던 정태의의 앞에서, 맥주 대신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던 숙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릭은 이번에는 예전처럼―리야드에서 화려하게 날뛰었을 그때처럼 대대적으로 나오지는 못할걸.”

    정태의는 맥주캔을 입에 문 채 숙부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알랭의 집에서 보았던 그 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무기는 분명히, 대대적으로 폭격하고 때려 부수며 날뛰는 용도로 사용되는 무기는 아니었다.

    알랭의 말도 그렇거니와 무기로 짐작컨대, 이번에 움직이는 건 일레이 하나. 예전처럼 동료들과 함께 테러를 일으키거나 그에 비등한 화제를 불러 모으는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글쎄……, 워낙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이라서요. 상대편의 공격이나 차후의 파장을 두려워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태이가 말하자, 숙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꼬았다.

    “확실히 성격상 그런 것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할 짓을 못하는 놈은 아니지만, 그놈은 그 비상식적으로 무모한 성격을 봐서는 믿어지지 않게도, 머리가 비상한 인간이거든. 자신이 감당하고 싶지 않은 선까지 귀찮은 짓은 결코 만들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 대거 소란을 일으키며 정재의나 라만을 건드리게 되면, 이미 리야드에서 벌였던 사고도 있고 하니 감당하기가 무진장 귀찮아질걸, 하고 숙부는 덧붙였다.

    “적어도 내가 그놈이라면, 나는 혼자 움직인다. 그 편이, 들이는 수고에 대한 효용이 훨씬 나아.”

    숙부는 간결하게 결론지었다. 정태의 역시 그 결론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라만. 라만이라…….”

    숙부는 으음,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목운동이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 사이사이에 똑, 똑, 뼛소리가 들린다.

    잠시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숙부가 중얼거렸다.

    “내일 포럼이 열리기 40분 전에 정재의와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의 약속이 잡혀 있었지, 아마.”

    숙부의 말에, 정태의는 맥주캔을 기울이던 손을 멈칫했다.

    노리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때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만일 단번에 둘 다 해치우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40분 전이라니까. 박람회장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 아주 단촐하고 검소하게 만나네요.”

    “기구에서, 정재의와 라만은 가능한 한 못 만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거든.”

    숙부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 말하는 투로 봐서는, 이번에도 가능하면 그 약속을 안 잡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잡았다는 듯했다.

    “그나마 본부 안에 있을 때에는 만나지 못하게 구실을 대기가 편한데, 이렇게 외지에 나오는 상황에서 심지어는 어떻게 구했는지 스케줄표까지 다 알고 있어서야, 못 만나게 할 구실을 만들 수가 없었다고.”

    정재의 앞으로 때마다 꼬박꼬박 보내는 소식들도 미리 다 검열해서 거의 반은 정재의에게 보여 주지도 않고 돌려보내 버린다고, 하고 말하는 숙부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 남자는 뭣 때문에 미움을 샀어요? 그렇게까지 못 만나게 하려 들다니.”

    “기구의, 심지어 본부의 가장 핵심적인 인적 자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인데, 그럼 그게 곱게 보이겠냐.”

    숙부의 간결한 설명에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 유치해 보이는 태도에도 실상은 치열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거지, 정태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내일 포럼 시작되기 40분 전이라…….”

    “음. 40분 전부터 20분 전까지. 딱 20분이 약속 시간으로 잡혀 있지.”

    “……기구도 참 치사하군요. 그것 좀 만나게 해 주면 뭐 어때서……. 형이 누가 오란다고 훌렁 가 버리는 성격도 아닌데.”

    “아니야. 정말로 내가 들어봐도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막대한 보상을 제시하면서 오라고 꼬드기더라니까. 본부에서 불안할 만도 하지.”

    나라면 벌써 갔다, 하고 중얼거리는 숙부도 정재의와 마찬가지로 물욕은 거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리며, 정태의는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을 앞으로 돌린다.

    “박람회장에서 20분간의 조우라……. ……둘 다 단번에 해치우기에는 그때가 딱인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다.

    리야드 폭격처럼 대대적으로 포탄 세례라도 붓지 않는 이상, 국제 포럼 20분 전처럼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오가는 시각에, 심지어 박람회장 응접실―게다가 라만과 정재의가 만나기로 약속한 자리라면 그 주위에 깔릴 경호 요원만 해도 한 트럭은 될 거다―이라니. 당연히 원거리에서 저격을 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아닐 테고.

    도대체 일레이는 어떻게 하려는 걸까, 고민에 잠겨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짓고 있던 정태의에게, 그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식사를 다 마쳤으면 그만 올라가서 쉬고 싶은데.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어, 아, 그래. 그만 올라가자.”

    정태의는 슬슬 늦어지고 있는 시각을 확인하고, 낯빛이 별로 좋지 않은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살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평소에도 워낙 하얀 탓에 창백하게 보일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유난히 낯빛이 안 좋았다.

    그래도 낮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며 안색이 어두워진 것은 역시 그 남자와 마주친 뒤부터다.

    정태의는 속으로 안쓰럽게 혀를 차면서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정태의는 숙부와 알게 모르게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을 몇몇 보았다. 호텔 안에도 기구의 경호원들이 일반 손님들 속에 섞여서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픽 웃자, 숙부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니……, UNHRDO에서 철통같이 경호한다고 하더니 과연,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음? 아아, 뭐 그리 철통도 아냐.”

    숙부는, 그 기구의 요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듯한 말을 가볍게 입에 담았다.

    “릭처럼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겠다는 배짱과, 막대한 전문 인력을 고용해 쏟아넣을 수 있을 만한 재력만 있으면 쉽게 깨 버릴 수 있는 철통이지.”

    “삼촌이 말한 그 요건을 가지고는 못 깰 철통이 없겠는데요…….”

    정태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리자 숙부는 피식 웃었다.

    곧 직통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섰다.

    그들 세 사람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천장 구석에 조그맣게 설치된 동그만 감시카메라를 쳐다보다가 살짝 한 번 손을 흔들어 주는 정태의에게, 문득 숙부가 불쑥 말했다.

    “그렇지. 형을 걱정하는 착한 네게 알려줘야지. 현재 정재의는 독일에 입국한 걸로 되어 있어.”

    갑작스럽게 말을 꺼내는 숙부의 말투가 너무나 여상해서, 정태의는 무슨 대수롭잖은 잡담이라도 꺼내는 줄 알고 아, 예, 하고 대답을 하다가 멈칫했다.

    정태의가 숙부를 빤히 쳐다보자, 숙부는 오히려 그게 당연하지 않냐는 듯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아니면 어떻게 포럼에 등록을 했겠어. 아무리 네가 있었다고 해도, 독일에 입국조차 안 된 사람이 포럼에 등록을 하는 게 말이나 돼?”

    “아니……, 입국도 안 한 인간을 입국했다고 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정태의는, 별로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힘없이 중얼거리고 말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UNHRDO 내에서도 극소수를 말고는 다 재의가 지금 독일에 있는 줄 알아.”

    숙부는 그렇게 말하더니, 정태의는 보고 자애롭게 웃음 지었다.

    “그러니 릭이 재의를 노린다면, 적어도 오늘 밤은 사고를 치지 못하겠지. 재의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내일 아침까지는 결코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할 테니. 그러니 너도 그 점은 안심하고 편히 자도록 해.”

    아, 예,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어쩐지 내일이라는 날이 다가오는 게 두려워지고 있어요, 힘없이 중얼거리자 숙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고 정태의가 투덜거릴 즈음, 엘리베이터는 목적층에 다다랐다.

    과연 숙부가 말했던 대로, 복도의 끄트머리나 모퉁이마다 기구의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그들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서, 간간이 서로가 사각死角이겠다 싶은 위치가 있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나, 너, 크리스토프. 사이좋게 방이 이어져 있으니까 밤중에 심심하면 놀러오라고.”

    “이어져 있다 해도 구조상 문에서 문까지는 상당히 떨어져 있잖아.”

    그나마 쉴 곳을 앞두자 마음이 조금쯤은 나아졌는지, 객실에 거의 다 가서야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숙부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고 크리스토프를 본다.

    “편하게 쉴 생각은 안 하고 그런 거나 살피다니……. 그런 걸 직업병이라고 부르는 거야.”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리고 나는 놀러가더라도 당신 방엔 안 가. 간다면 태이에게 가겠지.”

    크리스토프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꾸하곤, 그럼 이만 쉬어야겠어,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어째 말 속에 가시가…….”

    크리스토프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숙부는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역시나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며, 정태의는 인사도 할 겸 숙부를 돌아본다.

    “원한이 있을 법도 하죠. 크리스토프가 저녁 내내 왜 기분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아냐, 너랑 같이 왔다는 친구가 크리스틴인 줄 알았더라면 나도 리하르트를 같은 자리에 부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숙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소 과장스럽게 한숨을 쉰 숙부는 ‘밤에 혼자 자기 무서워지면 얼마든지 오려무나.’라는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이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하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 정태의는, 방문 옆에 우뚝 서 있는 제복 차림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까 숙부와 눈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았으니, 실제로 UNHRDO의 대원일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또한 문에서 그가 선 거리까지는 몇 걸음 가량 떨어져 있다. 저 정도면 만에 하나 문을 여는 순간 저 남자가 덮쳐온다 해도 그럭저럭…….

    머릿속으로 저도 모르게 계산을 하던 정태의는 곧 그런 걸 깨닫고 쓰게 웃고 만다.

    “베를린에서 몇 년 편하게 살았는데도, 습관이란 건 무섭다니까…….”

    약간이라도 긴장해야 하는 환경에 있으면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고 만다.

    하지만 그래야 살아남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위안하며, 정태의는 객실문을 열고 들어가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마음 놓고 편히 쉬십시오.”

    선량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하기까지 마친 뒤에야 정태의는 방으로 들어섰다.

    후우……, 가볍게 내쉴 셈이었던 한숨이 어느새 길고 무거워졌다.

    역시 하루 종일 긴장을 하고 다니면 이래서 안 좋다. 긴장이 풀리고 나면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다.

    “내일 하루는 억만 년처럼 길겠구나…….”

    정태의는 에고고, 하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다가 문득 어,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문이 닫히면서 잘각, 하고 오토락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 소리가 안 들린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문 아래에 뭔가 떨어져 있어 문이 닫히다 말았다.

    문 쪽으로 다가가자, 마찬가지로 문밖에서도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전의 그 선량해 보이는 대원이 문 약간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참이었다.

    “…―.”

    반사적으로 주위 손 닿는 곳에 있는 물건들을 체크한 정태의의 앞에서, 대원은 몸을 구부려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그리고 웃으면서 정태의에게 내민다.

    “문이 안 닫혀서 이상하다 했는데, 이걸 떨어뜨리신 모양이네요.”

    “아, 고맙습니다.”

    정태의도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받아들고 보니 열쇠지갑이다. 정태의의 물건이 맞았다.

    아무래도 요 며칠 치열한 삶 속에서 살다 보니 많이 예민해졌나 보다, 정태의는 문 밖으로 다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때.

    정태의가 어차피 닫힐 문이지만 얼른 마저 닫으려고 문에 막 손을 대었을 때였다.

    문 밖으로 거의 나갔던 남자가 문득 딱 멈춰 섰다.

    “……?”

    정태의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드는 게 아니다. 천천히, 벽에 반쯤 기대어 미끄러져 쓰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

    반사적으로 문을 쾅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직전, 그 틈새로 철경봉이 파고들었다. 닫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그곳에는 기구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복도의 모퉁이를 지키고 있던 남자인 듯했다. 다른 코너에서는 사각에 위치한.

    남자는 깊이 눌러쓴 제복 모자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낯선 얼굴이 거기에서 웃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재이 씨. 모쪼록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정태의의 얼굴 앞에 뭔가를 분사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매캐하게 눈앞을 흐리는 가스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가로막히는 시야와 함께, 의식도 아득하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 목소리가 귀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았다.

    “……시끄러워……. 차라리 다른 소리가 낫겠어……. 네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신경질적으로 귀를 문지르는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박람회장에서 호텔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정창인과 리하르트는 줄곧 담소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승계를 축하한다거나, 일 관련으로 떠도는 정보 따위.

    리하르트가 직접 운전하고 정창인이 조수석에 앉아 이야기하는 뒤에서, 크리스토프는 창밖만 바라보았었다.

    영영 다시 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니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가 베를린에서 떠나며 했던 말은 마치 암시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데. 더는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어느 정도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함께 기억과 감정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곧바로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 말이 귓속에서 계속 웅웅거렸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고 새카만 침대 속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는데도, 그래도 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정신이 너덜거리도록 지쳤는데도 잠들 수가 없었다.

    “약, 약이라도…….”

    크리스토프는 문득 중얼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낯선 어둠이 그곳에 있는 걸 보고 깨닫는다. 이 낯선 곳에는 크리스토프를 위한 약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되었다. 이대로는 잠들기는커녕, 밤새도록 귓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러워 결국은 고막이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옷을 걸쳐입고 조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리듯이 다가가자, 그 옆쪽에 감시하듯이 서 있던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호텔 측에서 비치된 상비약이 있을 거다. 아니, 하지만 상비약으로는 이 두통과 이명을 멈추게 해 줄 수 없다. 자신이 늘 먹는 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약은 시중에 판매되는 약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이 층에 가까워졌을 때야 그 사실을 깨달은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예전의 언젠가처럼 귀를 찔러 버리면 나을까. 그때는 귀에 펜을 쑤셔박아도 계속 머릿속이 시끄럽게 울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혹시라도 다를까.

    아니, 하지만 시판되는 약이라도, 많이 먹으면 좀 들을지도 모른다. 한두 알 따위가 아니라, 좀 더 많이…….

    크리스토프가 초조하게 생각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조용히 문이 열렸다.

    이 시간이면 약국을 찾는 것보다는 상비약을 달라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하며 막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이런. 어딜 급하게 가는 중인가? 그 차림을 보니 멀리 가지는 않을 모양이지.”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와 함께 자신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다.

    계속 귓속에서 울리고 있는 이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을 가로막다시피 하며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리하르트를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내려가 버렸다.

    “어딜 가려던 거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묻는다.

    “……귀가 시끄러워서, 약을 받으러.”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리자 리하르트는 잠시 침묵한다. 곧 낮은 코웃음이 뒤를 잇는다. 여전하군, 하는 짧은 말과 함께.

    “무슨 말이 들리기에 그렇게 귀가 시끄러워.”

    “……. 네 목소리가 들려.”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정적이 찾아들면 다시 귓속이 시끄러워질 게 초조해져서, 메마른 입술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듣기 싫어……. 듣고 싶지 않아.”

    머리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좋아. 어쨌든 방으로 가서 얘기해 볼까.”

    리하르트가 간결하게 말했을 때,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눈동자만 들어올렸다. 그리고 못마땅한 시선을 준다.

    “너와 할 이야기는 없어.”

    “왜 없지? 네가 타르텐의 제안을 거절하고 떠난 이상, 짚어 둬야 할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텐데. 네가 변제해야 할 금액과 그 상환 방식. 타르텐의 운영에 있어 법적인 혈연으로서의 네 권한이 어느 정도까지 축소되는지. 타르텐에 어떠한 책임과 의무도 없으나 최소한으로 네가 해야 할 일. 그 외에도 비슷한 일들이 몇 가지 더. ――아, 그래. 너는 더 이상 관심이 없을 테지만 네 어머니의 소식도.”

    리하르트는 사무적인 어조로 하나씩 짚어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거절의 말을 하고 싶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이쪽에 시선을 주는 경비역 대원을 흘끔 마주보곤, 방으로 가, 하고 크리스토프를 두말없이 잡아당겼다.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곧바로 크리스토프의 객실로 가는 리하르트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크리스토프는 몇 번이나 자신의 팔꿈치를 움켜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리하르트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그 손을 놓지도 않았다.

    객실문 앞에 멈춰 서서도 꼼짝도 않는 크리스토프의 주머니를 반강제적으로 뒤적여 문을 열고 들어간 리하르트는, 등 뒤에서 문이 달칵 닫히고 나서야 크리스토프를 놓았다.

    “자, 그럼 얘기해 볼까. 향후 타르텐에 있어서 너의 권리 관계에 대해. 너도 알 테지만 권리와 의무는 동시에 붙어오는 법이지.”

    곧바로 말을 꺼내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마치 집안의 제반 일을 맡고 있는 변호사가 계약서나 동의서를 들고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테이블에 펼친 몇 장의 종이를, 읽어 보지도 않고 그저 시선만 주었다.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리하르트가 기계적으로 읊어 주었지만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해. 됐어. 타르텐에 대한 권리는 모두 포기할 거고, 의무도 지지 않아. 아, 그렇지, 변제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변제할 테니 그거나 말하면 되겠군.”

    크리스토프는 도중에 리하르트를 가로막았다. 피로한 듯 중얼거리자 리하르트는 말을 멈추고 크리스토프를 본다.

    “나중에 못 들었다고 하지 말고 지금 제대로 이야기를 마쳐 두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아.”

    “하……. 왜. 내가 나중에, 법적인 관계를 운운하고 상속권이라도 주장하며 달려들 것 같나?”

    리하르트는 잠시 동안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좋아, 하고 그 종잇장에서 손을 뗐다.

    “나중에 서류를 정리해서 보내 주도록 하지. 그리고 상속에 대해서라면, 크리스토프, 네가 승계 경쟁을 포기하고 나간 시점에서 이미 네게는 그 권리가 없어졌어. 네가 상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아, 그렇지. 작은숙모님이 세상을 뜨면 그녀 앞으로 된 자산은 네 몫이겠군.”

    리하르트는 테이블에 기대어 섰다. 객실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그러고 보니, 하고 말을 잇는다.

    “작은숙모님은 북쪽 별채로 거처를 옮기셨어. 아마 앞으로는 그곳에서 나올 일이 없으시겠지. 타르텐에서 나가지 않는 이상.”

    스쳐가는 듯이 대수롭잖게 한 말에 크리스토프는 움칫, 아주 희미하게 몸을 굳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리하르트가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다.

    “이제야 겨우 쳐다보는군.”

    “――어머니가, 그쪽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나?”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그러나 설핏 찌푸린 눈매는,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하, 하고 나직이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그녀가 타르텐의 저택에서도 특히나 동익을 사랑한다는 걸 너라고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알고 있었다.

    타르텐의 동익. 그곳은 타르텐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타르텐이라는 제국 안에서도 매우 적은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곳이 그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비앙카가, 대체로 방계들이 머무르고 있는 별채로 옮겨가고 싶다고 할 리가 없었다.

    망연히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리하르트는 말을 이었다.

    “승계를 마치고 베를린으로 찾아갔던 그날 밤, 드레스덴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옮겼어. ……뭐,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 되었지. 그곳으로 옮기자마자 앓아누웠으니, 요양을 하기에는 동익보다 차라리 별채가 조용하고 한적해서 나을 거야.”

    “…―.”

    달싹, 뭔가 말하려는 듯하던 입술은 다시 닫혔다. 그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문득 낮게 속삭인다.

    “그 정도로 그친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 낮은 속삭임에 문득 그날 밤, 그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그렇게 말하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선뜩하게 떠올랐다. 화면 속에 비치던 서늘한 눈빛이.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그를 보았다. 그 역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가에 서늘하게나마 떠올라 있던 웃음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말했을 텐데. 어머니는 너를 나쁘게 생각한 게 아니라고. 그녀는 어느 경우에든 너를 나쁘게 여기진 않아.”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웃음이라곤 파편조차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시선이 흘끗 크리스토프를 향한다. 그 시선에 얼핏 분노가 스쳤다. 그 시선 그대로, 입가에 짧은 웃음이 떠오른다.

    “그래.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더군.”

    “…―.”

    “그날,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곧바로 그녀를 찾아가 네게 그렇게 말했냐고 물었더니, 파랗게 질려서 내게 그랬어. 미안하다고. 모두 네가, ……하. 그만두지. 입이 더러워질 것 같으니.”

    리하르트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그녀가 뭐라고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간 말이 없던 리하르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비틀린 웃음을 띤다.

    “그래, 내 일만 챙기기도 바쁘지. 게다가 너는 이미 네 대신 화내 주고 네 대신 고맙다고 해 주는 사람도 있으니.”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얼굴이 약간 기울어졌다. 후자는 모르겠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곧 알 수 있었다.

    “태이는, ……나를 위해 그 정도밖에 해 줄 수 없으니까.”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말의 의미 그대로,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위해 그 정도밖에 해 줄 수 없었다. 그 이상은 크리스토프의 몫이 아니다. 또한 정태의의 몫도 아니다. 정태의가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크리스토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곧 고개를 들었다. 언짢은 듯한 얼굴이 고집스레 입을 다문다.

    “뭐, 됐어. 그 집에 자주 가다 보면,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태의가 자신과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리그로우 같은 관계를 바라는 건 아니다. 지금 이대로만이라도.

    “게다가 그 집은, 좋아. 네 말마따나 나를 지켜 주려는 사람도 있고.”

    크리스토프는 입매를 약간 굳히며 말했다. 비아냥거리려는 생각이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고 만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차갑게 바라본다. 어느 순간 설핏 그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냉랭하게 입을 연다.

    “카일은, ――.”

    말이 잠시 끊겼다. 생각에 잠긴 듯 그의 시선은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그 너머의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 속에 남은 모습을 다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움칫, 그의 입매가 떨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억세게 다물린 턱은 잠시 침묵하다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카일은 나이가 많아. 게다가 그는 넉넉하고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사실은 치밀하고 빈틈이 없어. 이중적이지. 그리고 취미도 너무 마니악해. 그 정도면 책을 좋아하는 게 아냐. 거의 편집증이라고 봐야 한다고.”

    “…….”

    크리스토프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뭔가 갑자기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도중에 끊겨버렸다.

    갑작스럽게 무슨 이유인지 카일에 대한 험담을 한 차례 늘어놓은 리하르트는, 표정이 한결 험악해졌다.

    크리스토프는 도르륵,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쩌면 리하르트는 카일이 자신의 집에서 그런 식으로 리하르트를 내보내서 단단히 마음이 상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악의적으로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자신 탓에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카일을 거들어 준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카일은 크리스토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크리스토프가 아는 한은 그랬다.

    “……아프게 하는 농담도 하지 않아.”

    한 번 더 그를 거든다.

    문득 크리스토프는 표정을 지웠다. 귓가에서 소리가 맴돈다.

    ――나는 널 좋아한단다, 크리스토프.

    부드럽고 다정한 말이었다. 문득 마음이 옥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누구에게든.

    누구에게든……?

    어렴풋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불현듯 서늘해져, 몸을 움츠리고 만다.

    카일은 형처럼, 혹은 아버지처럼, 그렇게 몇 번이나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그 말을 더, 좀 더 듣고 싶은데도, 그렇게 여러 번을 듣고 있는데도, 여전히 추워서 몸을 웅크려야 했다.

    움칫,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춥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더욱 추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스스로의 팔을 문지르는 크리스토프의 손 위로, 억센 손이 어깨를 으스러질 듯이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하면서도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나는, 네가 아프――.”

    악문 잇새로 나직이 내뱉던 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어깨를 움켜쥔 손에서 힘을 늦추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어쩐지 초조하고 다급하게.

    이윽고 그는, 그 초조한 시선과는 달리 느리게, 나직이 말했다.

    “너는 아파한 적이 없었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아파한 적이 없었다. 아프다고 한 번 말해 버리면 계속해서 아프다고, 아프다고 할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스스로도 자신이 아프지 않은 줄 알았다.

    “너는 아파한 적도 없었고, 기뻐한 적도 없었고, 웃었던 적도 없었고, 울었던 적도 없었어. 나는 한 번도 그런 걸 못 봤어.”

    그래, 나는 본 적이 없었지, 리하르트가 혼잣말처럼 되풀이했다.

    “말해 봐, 크리스토프. 너는 만일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더라면, ――내가 너에게 좋다고 했더라면, 너는 그러면 타르텐으로 왔을까?”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불안스럽게 들떠서, 초조하게 일렁이면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치 언젠가 크리스토프가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처럼.

    “있을 리 없는 일은 가정할 필요도 없어. 너는 나를 싫어하고 있어, 리하르트 타르텐.”

    크리스토프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던 그의 눈이 조금 커지는 듯했다. 기묘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렇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그는, 그렇지,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이제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었던가? 그래, 나는 너를 싫어했어. 그랬었어.”

    리하르트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얼핏 스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네 몸맛이 좋다고 하면.”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딘지 쓴 빛을 띠고 있었다.

    뜨거웠다.

    더운 것도 아니다. 뜨거웠다. 살갗이 닿은 부분마다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한껏 고개를 젖힌 크리스토프는 머리 위에 있는 헤드쿠션만 노려볼 뿐이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에서 가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알아듣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끝났잖아.”

    억울한 것도 같고 서글픈 것도 같고 혹은 화난 것도 같다. 아마도 제일 마지막 것이 옳을 것 같았다.

    “애초에, …―애초에 말했던 기한은, 이미, …―.”

    크리스토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팔 안쪽을 쓰다듬던 입술이 그 연한 살을 살짝 씹었다. 일순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릴 정도로. 그 탓에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팔 안쪽에 둘, 셋, 점점이 흔적을 남긴 리하르트는 팔을 타고 올라 어깨로 옮겨갔다. 크리스토프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순간마다 몸이 흠칫거리고 있었다.

    “그래. 끝났지. 애초에 말했었지. 내가 승계를 할 때까지라고. 나는 승계를 무사히 마쳤어. 그러니 처음에 말했던 기한은 이미 끝났어. 네 말이 맞아.”

    리하르트가 나직이 하는 말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잠시 그대로 어깨 위에 입술과 뺨을 문지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깨문다.

    “――!”

    잇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하지만 승계를 하고 나면 더 이상은 하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억지, 부리지 마……!”

    억지? 하고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낮게 웃었다. 어깨 위를 숨결이 간지럽힌다.

    “나는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흠, 아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억지를 부린다 해서 뭐 어떨까. 나는 너를 싫어하는데. 싫은 사람의 말을 순순히 따라 줄 이유는 없겠지.”

    리하르트의 비웃는 듯 낮은 목소리가 떨어진 순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파랗게 뜬 눈이 일순 멈칫하며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그 눈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비틀린 웃음을 웃었다.

    “이제는 내가 수십 번, 수백 번을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싫다는 말은 들렸나 보지. ……뭐 좋아.”

    리하르트는 약간 몸을 떨어뜨렸다. 짓눌렸던 가슴이 편해졌는지 크게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그는 크리스토프의 무릎 안쪽을 잡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가 눈을 크게 뜨며 그쪽을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다리를 벌린다.

    “리하르트……! 억지 부리지 마, 나는 약속을 지켰어! 기한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너와 한 약속을 지켜 네가 한 말을 들었잖아, 나는 네가 한 말을 지켰잖아!”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낮게 외치는 동안에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미 거뜬하게 일어서 단단해져 있는 자신의 성기를 두어 번 훑어올렸다. 그러자 성기는 더욱 성을 내며 고개를 든다.

    “그래서?”

    리하르트는 짧게 말했다. 그러면서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사타구니에 자신의 성기 끝을 맞대었다.

    “나는, 더 이상 네가 하라는 대로 따를 이유는 없어.”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팔을 움켜쥐었다. 언제라도 밀어낼 수 있다고 그 손에 힘을 준다.

    리하르트는 멈칫, 허리를 움직이기 직전에 멈춘다. 크리스토프를 표정없이 내려다보다가 웃는다.

    “따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리하르트는 몸을 구부렸다. 가슴이 맞닿았다. 리하르트의 입술은 크리스토프의 뺨을 스쳐 귓가에 이르렀다. 허벅지 안쪽으로 끝을 대고 있던 단단한 살이 살짝, 몸을 열었다.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결에 약간 아래를 열고 들어오려 하던 물건이 떨어진다.

    “그러지 마,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유난히 다정했다. 마치 달콤하게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럽다.

    “그…―.”

    크리스토프가 일순 말을 잃었을 때, 리하르트는 그 다정한 목소리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말이야, 크리스토프. 너는 지금까지는 ‘싫지만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맞춰 주며 그럭저럭 즐겼던’ 거지만, 앞으로는 ‘싫은데 억지로 강간을 당하는’ 게 된단 말이다. ――바로 이렇게.”

    동시에.

    그가 허리를 밀어올렸다. 숨쉴 틈도 주지 않을 만큼 거세게. 예고도 없이.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리하르트의 샅이 크리스토프의 엉덩이에 맞부딪힌다.

    크리스토프는 커다랗게 눈을 뜬 채 굳어 버렸다.

    낯선 감각 속에서 들려온 단어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그 얼굴마저 하얗게 질린다.

    “너, 리하, ―….”

    띄엄띄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짧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뜨거웠다.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벅찬 물건도, 빈틈없이 닿아 마찰하는 몸도, 뺨을 입 한가득 물고 빨아들이는 혀도, 모두 다 뜨거웠다.

    그러나 그보다도 머릿속이.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이제는 신음조차 뱉어내지 못한다.

    그때.

    새파랗게 홉뜬 크리스토프의 눈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간간이 얼굴 위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닿는 리하르트의 입술이,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잠시 침묵하던 입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이를 사리물고 만다.

    리하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 얼굴에 담겨 있는 게 무엇인지, 크리스토프는 알 수 없었다.

    쓰고.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언뜻언뜻 떠오르는 흥분이나 쾌감과는 별개로 그 얼굴에 짤막짤막하게, 그런 감정들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지어야 하는 얼굴인데. 그것은 자신이 품어야 하는 감정인데.

    어째서 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순간적으로 모두 잊어버리고 리하르트의 얼굴만을 넋 없이 바라본다.

    그러다가 문득.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숨을 쉴 수 없었던 탓이다.

    목이 뜨거웠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뜨거운 목의 열기가 점차 온몸으로 번져갔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 번 호흡을 내쉴 때마다 목이 뜨거워 새카맣게 타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 열기는 온몸을 돌아, 마지막으로 얼굴로 갔다.

    눈이 뜨거워서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뜨거워서 델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 팔 위로 입술이 몇 번이고 와 닿았다.

    손등으로 눈 위를 누르자, 그 손바닥에 입술이 닿는 감촉이 다가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러다가 이윽고 그 입술은 조금 더 내려가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덮었다. 손가락에 그의 속눈썹이 닿았다.

    어째서 리하르트가 저렇듯 괴롭고 힘든 얼굴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 얼굴 때문에 크리스토프는 깨달았다. 차라리 그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르는 채로 스쳐갔을 텐데.

    리하르트는 지금 크리스토프를 강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머릿속으로 분명히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 크리스토프를 강제로 범하고 있었다.

    눈이 뜨겁다. 그러나 눈을 뜨면 틀림없이 그 안에서 불길이 뭉클 넘쳐 눈을 태워 버릴 것 같아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손등으로 좀 더 세게 눈을 누를 뿐이다.

    그때 문득.

    천천히, 거의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느리게, 손가락에 뜨거운 습기가 닿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리하르트가 얼굴을 묻고 있던 거기에, 지금도 이마 아래를 가리고 있는 손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움찔,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리하르트는 움츠러든 손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손바닥에 천천히 뺨을 문지르며 다시 입을 맞춘다. 손끝에 닿는 그의 눈가가 어렴풋이 젖어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아선 안 되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감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문득 귓가에 웃음소리가 스쳤다. 낮고 씁쓸하게, 띄엄띄엄 메마른 웃음 뒤에 나직한 말소리가 뒤를 잇는다.

    “네가 보기엔 어때.”

    “…―.”

    “내가 보기엔 내가 미친 것 같은데.”

    낮게 잠긴 목소리가 웃는다. 한참이나. 정말로 미친 것처럼.

    “그렇지 않나? 이렇게 비참한 짓을 하면서, ……그런데도 갖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면서, 낮은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귓가에 닿았다 사라진다.

    허리를 두드리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이미 크리스토프의 손바닥에 닿았던 물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추삽질을 하며 몸을 흔들 때마다 간간이 손가락 끝을 스치는 그의 눈가는 아직도 젖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팔에 힘을 줘 세차게 부둥켜안는다.

    사타구니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더 이상 웃지도 않았고, 속삭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애틋하게 크리스토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을 뿐이다.

    이윽고 온 몸속이 모두 흥건하게 가득 차올라 더 이상은 빈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몸속을 한계까지 부풀리며 쏟아져나오는 느낌이 뱃속을 거세게 두들겼다.

    크리스토프는 한껏 몸을 움츠렸다. 만일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리하르트가 아니었더라면 태아처럼 몸을 한없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말았을 거다.

    작고 작게 움츠러드는 크리스토프를 세게 끌어안은 채, 리하르트는 그 몸속에 자신이 담고 있던 것을 모두 부어내었다.

    곧 조금씩 가라앉는 정적이 찾아들었을 때,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뺨에 뺨을 맞대고 있던 고개를 떨어뜨려,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라도 어깨가 젖어들진 않을까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몸을 굳혔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리하르트는 한참 동안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잠든 것도 아니었는데 의식이 끊어졌었다.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다가 불현듯 의식을 떠올렸다.

    따뜻하다.

    의식이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그 느낌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깜박였다.

    조금씩 머리가 깨어났다. 마치 공간 속에 녹아 있던 의식이 조금씩 모여들어 다시 자신이라는 인간을 만드는 것 같았다.

    따뜻하다, 그 감각 다음에 찾아온 것은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크리스토프의 위에 리하르트가 엎드려 있었다. 여전히 크리스토프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고서, 그는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꼼짝도 않는 걸 보면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결엔가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등 위에 살짝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살그머니 손을 든다. 그러자 움칫, 아주 약간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크리스토프는 얼른 그 손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다시 꼼짝도 않는 리하르트를 곁눈질로 보다가,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 없었는데.

    “…….”

    뭔가 낯설었다.

    뭐가 낯설까, 그 생각을 하다가 곧 깨달았다.

    자신의 몸 위에 몸을 겹치고서 엎드려 있는 그 무게감이 규칙적으로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이다.

    숨이 답답한데 치워 버릴까…….

    그러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깨닫는다.

    뒤늦게야 깨달아서일까, 따뜻하고, 혹은 덥기까지 한 이 체온이 지금은 낯설지 않았다. 선뜩해서 가슴속이 서늘한 느낌도 없다.

    남의 체온이 낯설지 않다는 게 낯설어,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갸웃, 기울이는 통에 몸이 약간 흔들렸다.

    움칫……, 약간 움직이는가 싶던 리하르트가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는 기묘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약간 찌푸린 것도 같고 희한한 것도 같고 놀란 것도 같은, 자신의 표정을 자신이 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묘하게, 약간은 뚱한 눈매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자 잠기운이 스며 있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그대로 다시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졸리니까 깨우지 말라는 듯이.

    “……. 리하르트.”

    크리스토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몇 초쯤,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부를까 어쩔까 생각하고 있던 그때, 별안간 리하르트가 벌떡 일어났다. 꿈에서 두들겨 맞고 깬 것 같은 얼굴로, 경악스럽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 비켜. 무거워.”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리자 리하르트는 군말 없이 당장 그 위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약간 얼떨떨한 얼굴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일어나 옷가지를 주워모으는 동안, 리하르트 역시 의식의 짧은 부재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한 번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그는 평소의 리하르트가 되었다.

    리하르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얼굴로 한참 동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흘끔 크리스토프를 본다. 크리스토프는 시트를 침대에서 죽죽 끌어내고 있었다.

    “……. 뭐해.”

    “씻으려고.”

    리하르트는 기묘하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이없이 말했다.

    “세탁은 여기서 알아서 할 거니까 그냥 놔둬도 돼.”

    그러자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리하르트를 쳐다본다.

    “나 씻을 거라고. 시트 말고. 나.”

    “그런데 시트는 왜 끄집어 내.”

    “가운이 멀리 있으니까 시트라도 두르고 가야지.”

    리하르트는 고개를 들어 욕실문을 보았다. 열몇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그냥 가면 되잖아.”

    “강간범 앞에서 벗고 다니라고?”

    크리스토프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순간 리하르트는 멈칫,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기만 한다.

    말없이 시트를 줄줄 끌어낸 크리스토프는, 말한 대로 그 시트를 몸에 감으려다 말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넋 없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이래야 마땅한 인간인가?”

    순수하게 그저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는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망가져 있었는데.”

    고개를 기울이면서 홀로 중얼거린다.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까 일순간은 분명히 미칠 듯이 화가 났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다지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보다 궁금한 것은, 그때 왜 저 남자는 그런 얼굴을 했었던 걸까. 왜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크리스토프는 표정이 사라졌다. 리하르트가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내가, …―.”

    입을 열던 리하르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무섭게 굳어 버린 얼굴이 뚫어질 듯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도 덩달아 그를 마주보았다.

    어느 순간 리하르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렇게 몇 번인가 말을 꺼내려다 멈추고, 꺼내려다 멈추다가 나직한 신음과 함께 내뱉는다.

    “나는, 오늘만큼 비참한 때는 없었어.”

    크리스토프는 괴로운 듯 입을 다무는 리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래, 강간까지 하다니, 갈 데까지 가긴 했지.”

    크리스토프가 부루퉁하게 노려보자 리하르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잇새로 나직이 말한다.

    “아니, 그게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다시 좀체 뒷말이 이어지지 않는 듯 리하르트가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바깥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 듯했다.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리하르트를 따라, 크리스토프도 그쪽을 보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수런거리며 다급하게 오가는 발소리가 하나둘 들리는가 싶더니, 그 소리는 점차 늘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호하지만 초조한 그 소리에, 크리스토프는 시트를 내팽개치고 나서 붙박이장에 걸려 있던 가운을 걸치자마자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정창인이 서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각인데도 금세라도 나갈 듯한 차림을 한 그는, 늘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여느 때와는 달리 얼핏 초조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구 사우디 공관 앞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있어.”

    크리스토프는 정창인의 말을 듣고 얼마간 고개를 기울인 채 의아한 빛을 띠었다.

    “구 사우디 공관에서 총격이라니……. ……그게 왜.”

    화젯거리가 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굳이 크리스토프에게 저렇듯 심각한 얼굴로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정창인을 앞두고, 희한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에게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크리스토프는 음색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태이는.”

    “거기에 있어. ……연락이 왔더군. ‘정재의를 데리고 있다’라고.”

    ***

    가장 먼저 자유로워진 것은 청각이었다.

    낯선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소리가 다 낯설었다.

    철제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 간혹 사람이 오가는 듯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 문 너머에서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란 말야…….

    그렇게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마비가 덜 풀려서 혀뿌리가 저릿한 탓만은 아니었다. 입에 마우스피스 같은 것을 물려 놓고 그 위에 가죽으로 꼰 끈으로 만든 재갈을 한 번 더 단단히 물렸다.

    이래서야 말을 하긴커녕 도와달라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겠다. 하긴 그 때문에 이렇게 해 놓은 거겠지만.

    정태의는 그런 생각들이 의식 속에서 명확해진 다음에야 눈을 떴다. 눈앞이 오락가락했다. 시야가 흐릿하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그러나 몇 번 눈을 깜빡이는 동안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보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납치를 당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다. 바깥에서 간혹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를 엿들어 뭔가를 알아내려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러나 무슨 언어인지는 알 수 있다. 몇 년 전 세링게에서 갇혀 있었을 때에 허구한 날 들었던 그 언어와 억양이며 리듬이 같았다.

    아랍 쪽이라…….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사우디아라비아 쪽이겠지.

    정태의는 등 뒤로 묶여 있는 팔을 한 번 흔들어 보았다. 두 팔목을 엇갈려 단단히 조여 놓은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리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몇 겹으로 꼬아 철실과 섞은 가죽끈은 두어 뼘의 거리를 두고 두 발목을 묶어, 종종걸음으로나마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비록 좁은 방 안에서만이었지만.

    여기는 어디쯤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문득,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UNHRDO의 제복을 입고 경비를 서고 있던 대원. 아니 정확히는, 경비를 서는 척하면서 정태의를 납치하는 데에 한몫한 남자.

    사람을 바꿔치기한 걸까. 혹은 매수한 걸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경호경비 업무를 맡은 사람을 외부에서 바꿔치기하려면 보통 공을 들여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후자로 매수를 했다면, 한 명만 매수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다수의 협력자가 필요했다.

    그때 문득 정태의의 머릿속에, 숙부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스쳤다.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겠다는 배짱과, 막대한 전문 인력을 고용해 쏟아넣을 수 있을 만한 재력.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을 만한 사람.

    ……. 일레이?

    당장 불쑥 떠오른 이름을 미심쩍게 되새기다가 고개를 젓고 마는 정태의였다.

    물론 그냥 당장 떠올랐을 뿐이지만, 심각하게 의심을 한다손 치더라도 일레이가 자신을 납치할 이유가 없다. 굳이 생각하자면, 미리 납치해서 안전을 도모하는 경우일까.

    정태의는 잠시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굴리다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인 것도 아니었지만, 생각을 정리해 둘 필요성은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랍어. 대대적으로 일을 벌일 배짱. 막대한 재력과 권력.

    답이 너무 쉽게 나온다. 아니, 정답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일단 정태의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딱 나왔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게다가 그 이름이 떠오른 이상은, 정태의를 납치한 이유도 굳이 짐작할 필요조차 없다.

    원래부터 그 남자는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형을 제 원하는 대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꽤 오래 전부터 보여 왔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은 이 꼴이구나.

    베를린에 있는 카일의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정재의라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손에 넣기 위해 호시탐탐 틈을 엿보는 인물이 있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을 안 해도, 이 라만이라는 인물은 이미 바로 얼마 전에 드레스덴에서 정태의를 가로채려고 한 바가 있었다.

    밉살스러워서라도 저놈의 손에는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건만.

    이를 어쩐다…….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이 잘 생각해 보면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한동안 머리를 굴리다 보니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다소 다르긴 하지만―이런 일이 있었다.

    라만에게 잡혀서 갇혀 있었던 경험.

    그리고 그때 정태의가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났느냐고 하면.

    “……. ……. …….”

    미리 남의 나라 수도에 포탄을 퍼붓고 온 남자가 대전차포로 그 값비싸고 호화로운 감옥을 산산조각 내어 주었다.

    아냐. 이건 좀 아니다. 이건 영 안 되겠다.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긴 하지만,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치는 건 사양이었다.

    “…….”

    그럼 역시 얌전히 라만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자신을 미끼로 삼아 형을 끌어오도록 손가락 물고 구경만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했다. 그렇게 되면 형을 붙들고 애원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나가자고.

    정태의는 삐그덕삐그덕 불편한 몸을 움직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둘러봤지만 마땅히 써먹을 만한 물건이 없었다.

    아무래도 정말로, 지금은 일단 기다려 볼 수밖에 없나 보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누군가 나타날 터였다.

    정태의는 감시라도 하는지 가끔 바깥 복도에서 오가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라만이라.

    그는 내일 형을 만나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직접 만나 형에게 권유를 할 기회가 있을 텐데 굳이 자신을 끌어들여 이런 방식까지 써야 하는 걸까.

    ……아니, 내일 만나니까 오늘 비장의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푹, 침대 뒤로 몸을 젖혔다.

    묶인 몸이 균형을 못 잡고 기울어져 벽에 제법 세게 머리를 박고 말았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입속으로 아야, 하는 소리를 삼켰다.

    손도 쓸 수 없어 침대 매트리스에 대고 부딪힌 머리를 비비며 아픔을 달래려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그러나 슬슬 마비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시야도 또렷해졌고, 감각도 제대로 돌아왔다. 약간 머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이건 좀 전에 부딪힌 탓인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새삼스럽게 방을 둘러보았다.

    돌바닥에 단순하고 실용적인 회벽. 한쪽 구석에는 쓰다 만 지 오래된 듯한 나무책상 하나. 그리고 지금 정태의가 앉아 있는 간이침대가 하나.

    침대만 빼면, 꼭 어딘가 공관이나 학교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학교라기보다는 관청이나 공공건물 따위.

    그러나 사람을 잡아다 가둘 만한 곳이라면 지금은 쓰지 않는 폐건물, 아니면…….

    정태의는 폐건물치고는 대단히 깔끔한 유리창이나 섀시 따위를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도 사용하는 건물인가 본데…….

    그때였다.

    바깥을 지나가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 방은 복도의 가운데 어디쯤에 있는 듯, 가끔 사람들이 앞을 스쳐가곤 했다.

    그 말소리가 귀에 들어온 이유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용주님은 언제쯤 오신다나?”

    “글쎄, 어쨌든 잡아다 놓으란 놈 잡아다 놨으니, 우리 일이야 끝난 셈이지.”

    독일어다.

    고용주라고 부르는 걸로 봐서는 라만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쓰는 용병 같은 자들인가.

    정태의는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아무래도 매수를 했지 싶었지만, 그 외에 용병 따위도 고용한 모양이었다.

    이번 납치 계획은 아무래도 아주 단단히 세우고 왔었나 보다. 하긴 타르텐의 승계식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긴 했었다.

    정태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퍽이나 끈질긴 남자다.

    세링게에서 나온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그 몇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적당히 포기를 할 만도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렇게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니.

    정태의가 생각하는 것보다 형이 훨씬 더 굉장하고 대단한 사람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그 남자가 사소한 데에서 집요한 건지.

    “눈치를 보니까 이번에 아주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던데.”

    “뭐……,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렇겠지, 나이도 나이이니만큼.”

    목소리는 저편 복도에서부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라.

    정태의는 음?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아하. 형을 노리는 게, 혹시 라만이 아니라 그 앞에 앉아 있던 영감님이었나. 알 파이살이라고 했던. 전해들은 바를 종합해 보자면 이름을 걸고 있는 건 그 영감님이고 실권을 휘두르는 건 라만이라는 것 같던데.

    하지만 어차피 정태의의 머릿속에서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번 일은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왜.”

    “예전에 알고 지냈던 놈이 해 준 말이 있거든. 이번 우리 고용주가 잡으려고 벼르고 있는 그 상대가, 건드려서 하나 좋을 게 없는 놈이라나.”

    “흠……, 뭐 우리야 돈이나 받으면 되는 거니까.”

    하하, 그렇지, 하는 대답이 뒤따랐다.

    빨리 이번 일 마치고 술이나 마시러 가고 싶다는 둥, 여자가 고프다는 둥, 그들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화제로 돌아갔다.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쉰다.

    라만이 잡으려고 벼르는 상대……. ……재의 형?

    그야 재의 형은, 건드려서 하나 좋을 게 없긴 하다. 건드려 봐야, 형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이쪽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기 때문이다. 돈도 권력도 폭력도 통하지 않는 대단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맥락이 좀 안 맞는걸…….

    정태의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였다.

    바로 앞을 지나가는 듯하던 남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 안에 있는 놈, 우리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것 아냐?”

    문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 말하는 데에야, 이 안에 있는 놈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게 너무나 명확했다.

    “글쎄……, 동양인이면 영어 정도나 하지 않을까?”

    “아니지. 천재라잖아. 저 남자를 영입하고 싶어 애가 달아 있는 곳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흠. 뭐 십 개 국어, 이런 걸 하는 거야? 하하. 알아들으면 어때. 우리가 뭘 아나. 별 얘기도 안 했잖아. 안 그런가, 천재 씨?”

    안 그런가, 천재 씨? 하고 들으란 듯이 외치면서 남자들은 문을 밖에서 한 번 쾅 두들기고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꼬리를 잇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들의 대화에서, 정태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봤다.

    ……. 형 대신 잡혀왔던 거구나……. 하지만 어쩌나, 당신들이 바라는 그 천재는 지금쯤 비행기를 타고 안락하게 이리 오고 있을 텐데.

    정태의는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졌다.

    뭐야. 형을 협박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잡혀온 게 아니라, 형으로 잘못 알고 잡아온 거였잖아.

    어느 쪽이든 잡혀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어쩐지 김이 빠졌다. 형에게 협박 건수로 쓰이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지 않을까 기특하게 고민했던 게 좀 허무해진다.

    하지만.

    정태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있자……, 그럼 라만이 아닌가. 라만이 형을 잘못 볼 리는 없으니까. ……아니지, 아직 여기서 라만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형인 줄 잘못 알고 나를 잡아왔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겠군.

    하긴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원래 형을 납치하려 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이라고 착각한 나―을 납치한 사람이 라만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아니, 아주 말의 앞뒤가 잘 맞는다.

    “…….”

    어딘가, 알 수 없는 데서 계산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정태의는 미심쩍게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홀로 고민하는 시간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남자들이 지나가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시계도 없이 혼자 뒹굴거리는 동안의 체감 시간이니 실제로는 더 짧을지도 몰랐다―, 멀찍이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나태하게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틀림없이 이 방으로 오고 있는 터일 그 발소리를 기다렸다.

    아까부터 가끔 이 앞을 오가곤 하던 발소리와 명확하게 다른 것이 있었다. 가까워지는 저 발소리는, 적어도 예닐곱 명 이상의 발소리였다.

    한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그 뒤를 따르는 듯한 그, 느리면서도 정중한 발소리가 여럿 섞여, 이윽고 문 앞에서 멎었다.

    정태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짧은 말 뒤에, 문이 열렸다.

    입에는 재갈을 물고 손은 등 뒤로 묶이고 발도 겨우 걸어나 다닐 정도로 묶여 있는 정태의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발소리를 듣고 짐작은 했었지만 상당히 많았다. 얼핏 보기에도 여남은 명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주요 인물은 네댓 정도.

    딱 보기에도 저 중 가장 높으신 분이다 싶은 중년 남자가 한 가운데, 그리고 그 남자를 모시는 듯한 아랫사람이 그 주위에 서넛, 나머지는 힘쓰는 일을 할 법한 사람들로 보였다.

    가운데에 선 중년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곧 냉랭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는 눈이 차갑다. 적의까지는 아니지만 호의라곤 보이지 않는 눈이다.

    정태의는 푹 한숨을 쉰다.

    이렇게 토베와 구트라를 두른 아랍인들이 여럿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우울해지는 건, 그런 사람들과 마주쳐서 좋은 일이 있었던 기억이 별로 없는 탓이다. 세링게에서도 그랬고, 드레스덴에서도 그랬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누굴까.

    라만이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왔다. 연배는 라만이 모시고 다니던 그 남자와 비슷한데, 그 얼굴도 아니다. 그렇다고 라만의 아랫사람……이라기에는 분위기가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정태의가 이 남자와 라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정태의를 살피던 중년 남자가 옆 사람에게 뭔가 말을 던졌다.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다가와 정태의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입 안을 꽉 채운 채 옭아매고 있던 마우스피스와 끈이 풀려나자 정태의는 후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중년 남자가 그런 정태의를 보며 뭐라고 말을 던졌다.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정태의는 고개만 살짝 갸웃해 보였다.

    남자는 낯을 찌푸리고 혀를 차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 천재 무기개발자라는 남자인가? 아직 젊어 보이는데, 그 일을 한 지는 얼마나 됐지?”

    이번엔 영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온 것에 안도하면서도,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날아온 탓이다.

    으음, 하고 난처하게 중얼거린 정태의는, 굳이 오해를 더 깊이 만들기 전에 진실부터 말하는 편을 택했다.

    “천재 무기개발자는 제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한 적은 없구요.”

    정태의가 대답하자, 더 질문을 퍼부을 셈이었던 듯 막 뭐라고 입을 열던 중년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중년 남자가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자, 그 남자는 곤혹스런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네가 정재의가 아니라고?!”

    “아닙니다.”

    “네가 오늘 정재의로 등록을 하고 UNHRDO의 호위를 받고 있던 남자가 아니란 말이야?”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투로 소리를 치는 그 남자에게, 정태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대신 등록을 하고 고맙게도 그 방을 얻어 쓰긴 했는데, 죄송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정태의가 딱 잘라 대답을 하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린 채 뚫어져라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넌 누구냐?”

    대신 등록을 하고 그의 방까지 대신 쓸 정도면 아예 관계없는 사이는 결코 아닐 거라고, 남자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정태의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자신이 정재의의 동생이라는 말을 하는 편이 나을지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지, 당장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가 누군지라도 알면 이야기할 방향이 보일 텐데 그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정태의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오로지 이 남자가 데려오려고 했던 게 정재의였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짧은 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아, 정태의는 가장 무난할 듯한 대답을 했다.

    “UNHRDO의 교관님이 정재의 씨 대신 등록을 하고 그 방을 쓰라고 하셔서 따랐을 뿐입니다. 정재의 씨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참도 진실도 아닌 대답이 가장 나은 경우가 많았다.

    정태의가 다소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하자, 그를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느릿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네가, 라만이 끈질기게 찾던 그 남자가 아니란 말이냐? 알리의 힘이 되어 줄 거라며 알 파이살을 설득해 제 아래로 불러들이려 했던, 그 남자가 아니란 말이지?”

    “그 남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저는 정재의는 아니에요.”

    정태의가 착하고 또릿하게 대답하자 중년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태의를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흥. 그놈들이 그렇게 찾는 걸 헛물을 켜게 만들어 주려고 했더니……. 그 기구 놈들도 미끼를 하나 만들어 놨었나 보군.”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에 순식간에 미끼가 된 정태의는, 풀죽은 얼굴로 빙고를 외쳤다.

    머릿속에 갑자기 전구가 켜지듯이, 몇 번쯤 들어 보았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 남자다. 알리 왕자와 정권을 다투다가 패배했다고 하는 그 남자. 라쉬드.

    라쉬드는 정태의를 일별하고는 옆에 선 남자에게 뭐라고 말했다. 정태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 남자와 라쉬드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십중팔구는 조사해 보라는 말일 거다.

    라쉬드는 언짢은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그가 불쾌한 듯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 야단치듯이 말하며 막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빠르게 걸음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한 청년이 들어왔다.

    “말씀하신 대로 보냈던 연락에, UNHRDO 측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고용된 용병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인 듯했다.

    라쉬드의 옆에 서 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라쉬드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리고 그의 말을 다시 작은 체구의 남자―통역자―가 옮겼다.

    “뭐라고 하나?”

    “예. 그게……기구 측의 답변은 그의 안전을 확인시켜 줄 것, 원하는 요구사항을 정확히 명시할 것, 이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통역자가 말을 옮기는 동안, 정태의는 에고……하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정재의를 납치하고서 기구 쪽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기구 측과 협력을 맺은 쪽인 것 같은데, 다른 송신자명으로 첨부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국제기구의 조직원을 납치, 감금 및 협박을 하여 국제적 문제로 발전시킬 소지가 있는 짓을 벌인 바, 즉각 정재의 연구원을 감금에서 풀어주지 않으면 제재에 들어가겠다, 라는 내용인데……, 서명은 제가 알아볼 수가 없군요. 아랍어 같습니다만.”

    청년이 프린트해 온 종이를 보며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그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방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태의는 조용히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만 굴렸다.

    상황 돌아가는 게 어째 좀 험악해 뵌다……, 그렇게 생각하던 정태의의 시선이 문득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가장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멎었다. 정확히는, 청년이 허리춤의 가죽벨트에 꽂아넣고 있는 조그만 칼로 시선이 갔다.

    저게 있으면 퍽 유용하겠는데…….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슬쩍 팔을 흔들어 보았다. 워낙 단단히 묶어,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는 몰래 슬쩍 빼내기는 어려웠다.

    정태의가 그 청년을 흘끔흘끔 살피는 사이에, 뭔가 긴장된 기색으로 나지막이 수군거리던 남자들은, 서둘러 나가려는 듯했다.

    정태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그 청년이 그들의 뒤를 따라 방에서 막 나가려는 순간, 잰걸음으로 도도독 달려가 몸으로 청년에게 부딪쳤다. 그리고 청년이 휘청하며 잠시 균형을 잃은 사이에, 몸을 숙여 청년의 허리에 꽂힌 칼을 입으로 물어 빼내었다.

    청년이 화가 난 듯 뭐라고 짧게 외쳤다. 나가던 남자 중 몇몇이 다시 들어왔다.

    정태의는 톡, 칼을 뱉어내어 얼른 뒤로 손을 짚어 주워들고 놓지 않았다. 청년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억지로 펼치려 들었지만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해 손을 감춘다.

    다른 남자들 네댓이 성가신 얼굴로 다가왔다.

    앞서 나가던 라쉬드와 그 옆의 몇몇 남자들은 그런 그들과 정태의를 보고 상황을 짐작했는지 혀를 차더니, 뭐라고 몇 마디 하고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남은 남자들은, 정태의에게서 칼을 빼앗으려고 하다가 좀처럼 손을 놓지 않자 화가 났는지 마구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악! 아야! 아파, 때리지 마! 난 얘 칼만 빼앗았는데 왜 네놈들이 패고 그래! 비켜! 왜 사람을 멋대로 잡아와서 이러냐고!”

    정태의는, 그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그러나 이런 경우 잡혀온 사람이 할 말은 대개 정해져 있으니 그들이 그리 궁금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악에 받친 듯이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물고, 차고, 박치기하며 최대한으로 난동을 부렸다.

    몸이 불편하게 구속되어 있는 한 사람과, 자유롭고 건장한 네댓 사람의 승부는 처음부터 뻔했다.

    결국 흠씬 두들겨 맞은 정태의는, 그래도 온통 물어뜯기고 쥐어뜯긴 남자들이 씩씩거리며 나가면서 마우스피스와 재갈을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꽁꽁 물려놓고 묶어놓은 덕분에 입으로 편하게 호흡을 할 수도 없어, 한동안 거의 질식할 듯한 심정으로 거친 숨을 달래야 했다.

    그렇게, 사서 뭇매를 맞고서 온몸에 멍이 들고 군데군데 조금씩 피도 볼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끝에 정태의에게 남은 것은,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물어뜯고 불편한 손으로나마 잡아당기며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담배 냄새가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 훔쳐낸 라이터 하나였다.

    이놈의 라이터 정말로 비싸게 치이는구나……, 뼈나 부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태의는 끙끙 신음을 흘리며 잠시 동안 꼼짝도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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