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찰나의 휴식(2) (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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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자마자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다섯 시를 약간 넘은 이른 시각이었다. 창밖이 아직 어둑어둑하게 푸르렀다.

    몇 년이나 머무르며 익숙했던 방인데, 고작 몇 주 떠나 있었다고 이렇게 눈에 설게 느껴지다니.

    아마도 오늘 하루만 지나면 다시 익숙해져서 이런 생각도 잊어버릴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감각이란 알게 모르게 퍽이나 간사하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정태의는 아직 졸음이 남은 눈으로 방을 구석구석 살피며,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야…….”

    정태의는 문득 낯을 찌푸렸다. 눈을 뜨고 천천히 정신이 맑아지자, 잠결에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 떠올랐다.

    머릿속이 욱신거렸다. 그럭저럭 견딜 만은 했지만 머릿속에 피 대신 기름이 흐르는 듯 끈적끈적한 두통이 못내 기분 나빴다.

    하긴 시판되는 수면제도 먹고 나면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픈데 하물며 약액으로 직접 맞아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저 후유증이 남지 않는 종류의 물건이기만을 바랄 뿐.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몸을 일으키던 정태의는, 다시 한번 아야……, 하고 중얼거려야 했다.

    머리뿐 아니라 허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팠다. 잠이라도 잘못 잤는지 뻐근한 느낌이다.

    “음……? ……내가 드레스덴에서 알게 모르게 고생을 하긴 되게 했나 보다. 하긴 사람이 긴장이 풀리면 몸살을 앓기도 하는 법이라지…….”

    정태의는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나왔다.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허리가 다시 한번 저릿하게 욱신거려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뭐야……, 이 나이 먹어서 야릇한 꿈을 꾼 것만으로도 멋쩍은데, 설마 몸까지 꿈 따라…….”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슬쩍,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을 괜히 한 번 둘러보곤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볍게 두드렸다. 별다를 바 없었다. 혹시 이 나이 먹어 몽정이라도 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고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지만, 남에게 말하기는 부끄러운 꿈을 꿨다. 워낙 그런 일이 많았던 침대에서 자서 그런지, 아니면 잠들기 전까지 일레이를 생각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자아, 정태의……. 넋 놓고 있지 말고 정신 차리자.”

    정태의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흔들곤 방문을 열었다.

    그래도, 몇 시간 자지도 못했는데 비교적 개운한 기분이었다. 비록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잠을 잘못 잤는지 허리 아래도 좀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가뿐했다.

    모처럼 돌아왔으니 천천히 집이나 둘러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로 나가던 정태의는 문을 열자마자 멈춰 섰다.

    자고 있을 줄만 알았던 카일이 거기 앉아 있었다.

    어……하고 말을 흐리는 정태의의 기척에, 소파에 앉아 신문을 넘기고 있던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일어났나? 더 자지 그래. 서너 시간밖에 못 자지 않았나?”

    시계를 보며 말하는 카일이야말로 어젯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들이닥친 정태의 때문에 편히 자지 못했을 텐데, 말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긴 카일은 원래 잠이 별로 없는 편이긴 했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을 하고 그날 볼 업무를 미리 정돈한 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푹 자서 그런지 가뿐해요. 뭔가 재미있는 기사라도 났나요?”

    정태의는 카일이 넘기고 있던 신문을 보고 인사 대신 말하며 그 앞에 앉았다. 카일은 마지막장을 덮으며 고개를 젓는다.

    “다행히 별다른 기사는 안 보이는군. 아직은 일을 치지 않은 모양이야, 그놈이―혹은 아직 기사화가 되지 않았거나―.”

    “…….”

    정태의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대답에서 카일이 그간 일레이의 형으로 살아오면서 겪었을 파란만장한 인생의 질곡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러게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어제 그 자리에서만 해도 사람이 여럿 죽어나갔다. 목이 부러진 인간이 도로 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정태의가 대충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서넛이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미리 손을 써서 기사로 나기 전에 무마를 시키, ……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상대에 따라선.”

    정태의는 이미 오래 전 테러범으로 당당히 신문지상에 사진을 장식한 바 있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 뒤로 이 집 담장 안에 갇혀 지냈지……, 하고 좀 과장스럽게 생각하며 거실의 전면유리창을 내다보던 정태의는 움찔하고 말았다.

    어스름 새벽, 아직 어둑한 바깥의 뜰에 한 남자가 있었다.

    지난밤 페터가 열심히 다독거린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는 그는 크리스토프였다.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헉, 하고 정태의가 숨을 삼키자 카일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크리스토프를 보곤 아아, 하고 다시 이쪽을 돌아본다.

    “저놈은 나보다 일찍 일어났어. 내가 나오니까 어두컴컴하니 소파에 혼자 앉아 있던데. 나도 어두운데 뭐가 움직여서 깜짝 놀랐어…….”

    거의 안 잔 모양이야, 라고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마주보았다.

    정태의를 본다기보다는 그저 시선을 이쪽으로 향한다는 느낌으로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정태의는 픽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저 녀석도 피곤할 텐데……. 리하르트의 일을 도우면서부터는 매일같이 바빴거든요.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 자는 타입인가.”

    “예민한 건 여전한 모양이지.”

    카일은 혀를 차면서, 다른 신문사의 신문을 집어들었다. 아침마다 일곱 종류의 신문을 빠짐없이 다 보는 것도 힘들겠다 싶었지만 카일은 그리 오랜 시간도 들이지 않고 거뜬히 다 읽곤 했다.

    정태의는 문득 카일에게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심상한 얼굴이지만 마뜩찮게 찌푸린 표정이, 흘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곤 다시 신문을 향했다.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크리스 좋아하시잖아요.”

    “뭐, 내가?!”

    카일은 눈을 부릅뜨며 벌컥 외쳤다. 그러나 빙글빙글 웃는 정태의를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 한숨을 쉬고 만다.

    “예쁘잖아.”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왜?”

    “아뇨……, 좀 뜻밖이라서.”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뭐랄까, 이유가 뜻밖이었다. 여태 몇 년이나 카일과 함께 살면서, 그가 타인의 외모에 대해 호불호를 표현한 적은 없었다. 예쁘다는 말이라면 몰라도 예뻐서 좋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래? 하긴 사람들이 잘 모르지? 저놈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쁜데.”

    아니 그냥 대충 봐도 예쁜 거야 확실하지만, 하고 우물거리는 정태의에게, 나름대로 크리스토프를 변호해 주려는 생각인지 카일이 덧붙였다.

    “돌려서 말할 줄을 모르고 사람에게 손도 태연하게 나가서 좀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긴 한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단순해서 예뻐. 생각하는 구조를 알기가 쉽거든.”

    정태의는 그제야 아아, 하고 납득한다. 자신의 독일어가 서툴렀나 싶었지만, 단순히 이 남자가 단어를 희한하게 쓴 것 같았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과 비슷한가요?”

    “그런 셈이지.”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숨을 내쉰다.

    “나이차가 나는 동생이라는 놈들은, 친동생이나 저놈이나 하여간 속만 썩이지…….”

    정태의는 웃었다.

    “그래도 속 안 썩이는 리하르트보다는 크리스토프를 더 예뻐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 아냐. 리하르트도 예뻐. 그놈도 좋아해. 그런데 그놈은 별로 걱정은 안 돼. 조마조마한 기분도 안 들고. 그러다 보니 크리스티나가 좀 더 마음이 많이 쓰이긴 하지. ……살다 보니 바빠서 거의 신경은 못 쓰고 있지만. 그런데 티가 많이 나나?”

    카일은 안경을 벗으며 정태의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별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나요. 그런데 그냥 그런 것 같아서요.”

    티가 전혀 안 나지는 않았다. 가끔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나 미묘한 말투 같은 데에서 문득문득 느껴졌다. 어린 동생이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형 같다고.

    “그래, 그렇군……. 그런데 나는 태이, 자네도 좋아해. 자네도 예뻐.”

    정태의는 난생 처음 듣는 칭찬에,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곧 비슬비슬 웃으며 저도 좋아해요, 하고 쑥스럽게 웃고 만다.

    카일은 정말로 사람을 좋아했다. 일반적인 의미로 인간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주위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보이지 않도록 아낌없는 애정을 베풀었다. 괜찮은 사람에게 굳이 손을 내밀지는 않지만,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의 도움을 내어주면서.

    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태의는 그가 좋았다. 정재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그는 지금은 정태의에게 있어 형과 같은 사람이었다.

    좋아한다는 고백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 너머에서 정태의와 카일이 즐거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훌쩍 일어서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재밌어?”

    재미없는 얼굴로 부루퉁하게 물으면서 들어온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테이블 위의 야트막한 나무바구니에 담겨 있던 포도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 카일이 나 좋아한대, 나 예쁘대.”

    정태의가 싱글싱글 웃으며 스스로를 손가락질했다. 크리스토프는 포도를 입에 물고서 몹시 기괴한 얼굴로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려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 그래? ……. 일레이는 알아?”

    무뚝뚝한 말꼬리에 희미하게 걱정이 밴다. 뭔가 알아서는 안 될 엄청난 비밀을 알고 난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심각하게 포도를 노려본다.

    ……아하, 과연. 이게 ‘예쁘다’는 거로군.

    정태의는 웃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고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그래도 좋아?”

    “음――글쎄, 나도 카일을 좋아하지. 응.”

    정태의가 눈초리에 웃음을 담고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뒤에 불쑥 중얼거린 말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왜 난 안 돼?”

    “……. 응?”

    “일레이가 아니라도 좋아한다면, 나라도 되잖아. 왜 카일이야.”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사나워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는 카일을 노려보았다.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 봐, 거기서 나는 왜――, 아니 그보다, 너희들――.”

    이번에는 카일이 대단히 미심쩍은 눈으로 둘을 번갈아보았다.

    이상하다. 농담으로 시작했는데 왜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까.

    정태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난 너도 좋아한다고. 카일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일레이를 좋아한다는 의미와는 달라. 응?”

    정태의가 말하자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납득한 듯―그러나 여전히 딱히 유쾌하지는 않은 얼굴로―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턱을 괴곤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크리스토프와 정태의를 얼굴 구석구석 바라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아. 어찌 되었든 오래 이야기할 화제로는 마땅찮아 보이는군. 이런 농담은 오래 하면 거북해지든가 재미없어지든가 둘 중 하나거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려 할 때엔 종종 그렇듯, 짧은 침묵이 그 사이로 지나갔다.

    “친한 사이면 종종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듯 눈썹까지 약간 찡그린 그의 시선을 받은 카일은 흐음, 하고 기억을 되새겨보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친하면 별로 안 하는 편인 것 같은데. 이를테면 가족끼리는 일반적으로는 그런 말들도 별로 안 하잖아. 안 그런가?”

    “그런 편이죠, 아마. 저도 형에게 그런 말을 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정태의도 기억을 떠올리며 맞장구쳤다. 가족이랄 만한 사람과 한 자리에 오래 있어 본 기억도 이제는 아득하지만, 학창시절의 친구나 동료들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좋아한다는 말은, 의외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 말이 그렇게 오해를 받기 쉬울 테지만요.”

    정태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단순히 대상이 문제라서 농담이 통하지 않은 데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어 아수라장이 된 경우는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의도가 다르게 전달되기 매우 쉬운 말 중 하나가 그 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크리스토프의 파란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정태의를 바라본다. 아주 약간, 그 눈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들의 대화에 한몫 거들기라도 하려는 듯 중얼거린다.

    “맞아. 나도 가족과 그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말이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웃음이 가셨다.

    그건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원래부터 하지 않는 말이 아니다. 듣지 않아도 당연히 알기 때문에 하지 않는 말이다. 말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면, 해야 하는 말이었다.

    정태의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자 의아했던지, 크리스토프가 쳐다보았다. 정태의는 어, 뭐, 하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창인과 전화를 하다가 자네 형 얘기가 나왔어. 자네 연락처를 물어보더라던데.”

    그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돌리며 카일이 정태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예. 전화 왔었어요.”

    정태의는 새로운 화제로 따라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심장 한구석이 저릿하다. 크리스토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심상한 얼굴이라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 곧 독일에 온다던데, 만나기로 했나?”

    “아. 아니에요. 그냥 베를린에 있으려고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상황도 그렇고, 만나기 힘들 것 같…….”

    정태의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같, 에서 몇 초쯤 입모양까지 멈추고 있는 정태의를, 카일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는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형이 만나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아실 테지만, 형에 관련된 일은 언제나 제 의지와는 별개로 흘러가거든요.”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형도 정태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단념하고 다음에 보자고 마음먹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번에 보지 않고 다음에 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 형을 만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었다.

    “이 시점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럼이라……. 어쩐지 전조가 심상찮아 보이는데, 형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정확히 따지면 위험한 시점에 포럼이 열렸다기보다는, 포럼이 열리는 시점에 맞추어 위험해졌다는 게 옳을 테지만, 정태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기구에서 잘 챙겨 줄 텐데 걱정할 게 뭔가. 심지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 정재이인데.”

    “형의 신상에 대해서는 저도 걱정하지 않는데, 다만 뭔가, 상황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요.”

    정태의는 미간을 문질렀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더라면 나았을 걸, 이미 들은 바가 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포럼 참석자가 납치라도 된다면 문제가 커지겠죠.”

    “그야 커지겠지. 일반 참석자도 아니고, 실질적인 주인공이 납치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카일은 일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맞장구쳤다. 그러나 그 말에 정태의가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리자 뒤늦게 그의 고뇌를 덜어 주려는 셈인지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 상황에서는, 납치 자체가 난제지. 정재이는 현재 엄연히 소속이 있는데. 게다가 자네도 UNHRDO에 있어 봤잖은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태의도 이미 납치라니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정재의가 현재 적을 두고 있는 인재양성기구는, 그 프로그램 중에 거의 병사 훈련 수준으로 사람을 단련시키는 과정도 있었다. 그런 인간들로 구성된 집단 안에 감싸여 있다면, 형이 일부러 그들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는 한은 납치 자체가 불가능하다.

    굳이 가능성을 논하자면――.

    “그곳에서 교관으로 몸담고 있는 놈이 나선다면,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알고 있으니 빈틈을 파고들기도 쉽겠지.”

    포도를 씨까지 바작바작 씹으면서 크리스토프가 말을 거들었다.

    그래, 그게 문제다.

    설령 그렇다 해도 잡음 없이 빼내어오기는 불가능할 테지만, 일레이가 나선다면 가능성이 제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놈이 나선다면, 무슨 짓을 어떻게 터뜨려서 일을 성사시킬지 그 점이 더 두려웠지만.

    “그러나 라만과의 계약은 깨어진 셈이지. 일레이가 형을 빼올 필요는 없어졌어. 그렇다면 말야……. 과연 이 상황에서 라만은 어떻게 나올까.”

    정태의는 손마디로 천천히 턱을 두드렸다.

    지난밤 리하르트는 말했다. 그들은 그 뒤 곧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고.

    납치가 불가능해졌다면 정공법밖에 없다. 본인을 만나서 직접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는 것이다. UNHRDO 본부 안에 있을 때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기구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완벽하게 차단해 줄 수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직접 만나는 일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가능할 터였다.

    정재의를 만나는 것까지는 가능하다고 하나, 그 입에서 승낙의 말을 끌어내려면――.

    “나라면 널 노릴 거다.”

    정태의가 생각한 바를 고스란히 짚어내기라도 한 듯이 크리스토프가 대답했다.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리며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다가, 역시 그런가?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원점이로군.”

    꼬리물기를 하며 빙글빙글 돌다가 멈춰서고 보니 결국 원래 그 자리였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계속 돌다간 결론을 얻기 전에 내가 먼저 버터가 되어 버리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실제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추측이 더 진행될 수 없다.

    “일레이는 괜찮으려나…….”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벅벅 긁다가, 그 문제의 납치극에 주요인물로 활약할 뻔했던 인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만다.

    정재의와는 다른 의미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정태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만이든 타르텐이든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일레이가 아니라는 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어디에 적을 심어 놓고 있을지 모를 만큼 흉포한 짓을 숱하게 저지른 남자이니,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숨어 있던 피해자가 이때라며 칼질을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소식이 전혀 없으니, ……아무래도 불안하단 말야.”

    들릴락 말락 조그맣게 중얼거렸는데도 거실이 워낙 조용해 그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카일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 없이 눈만 껌벅거리는 표정이 몹시 기묘해서, 정태의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나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빛을 보이자 카일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리며 천장을 쳐다보던 눈동자를 한 바퀴 도르륵 굴리더니, 아냐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뭐……별로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의 옆에서, 포도를 집어먹던 크리스토프가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중얼거린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프로포폴을 그렇게 맞고서도 멀쩡히 달려가며 사람 셋을 죽인 놈을.”

    “뭐, 셋이나 죽였어, 승계식에서?”

    대략의 사정이나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 따위는 들었지만 자세한 상황까지는 듣지 못했던 카일이 금세 신문에서 고개를 휙 들며 되물었다.

    “정확하게 확인은 안 했으니 더 죽였을지도 몰라.”

    비록 연을 끊을 마음으로 뛰쳐나왔다고는 하나 그래도 자신의 집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평연하기 그지없게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카일은 천천히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 자리에서까지, 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어 보니 사람 셋을 죽인 것보다는 장소가 문제였던 모양이다. 하긴 이제 와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말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새삼스럽긴 했다.

    “하지만 릭도, 돌아 버릴 만도 했지.”

    크리스토프는 포도알을 집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오독오독, 껍질은 물론이고 씨까지 씹어서 통째로 삼키는 그를 약간은 경탄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정태의는 그런가? 하고 대꾸했다.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듯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찌푸린다.

    “나 같아도 눈이 돌았을걸. 약조를 맺은 놈이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치면.”

    “분명히 유쾌한 일은 아닐 테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일레이 쪽이 더 의외이기도 한걸. 그가 그렇게 남을 잘 믿는 성격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어수룩하게 계약의 내용과 상대를 철석같이 믿어 버릴 만큼 순진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상대의 뒤통수를 두들겨 버릴 인간이라면 또 모를까.

    “아아……. 그래. 너는 이쪽에는 있어 본 적이 없지. UNHRDO에서만 잠깐 있다 나왔다고 했던가.”

    크리스토프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약조에 붙은 단서 하나에 목숨이 달려 있는 거나 같아. 글자 한 글자를 덧붙이냐 마느냐로 황천길 가게 될 확률이 늘어나냐 줄어드냐가 달려 있는데, 하물며 약조 자체에 통째로 문제가 있었다면 말할 거리도 못 되는 일이지. 이쪽에서는 약조의 일방적인 파기는 금기야.”

    크리스토프는 포도알을 우물거리던 입에서 짤막한 포도줄기를 뱉어내곤, 흘끔 카일을 쳐다보았다.

    카일은 묵묵히 신문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안 듣고 있는 건지 못 들은 척인지, 평연한 얼굴로 신문을 넘기는 카일을 잠깐 쳐다본 크리스토프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리그로우와 타르텐이라면, 신용이나 신뢰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고 봐야지. 설령 타르텐이 리그로우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곳과 손을 잡는다 해도, 그로 인해 리그로우에게 칼을 꽂는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되었어.”

    게다가 릭 본인도 제 성질머리를 알고 있으니까 설마 그렇게 확실하게 등 뒤에 칼을 꽂아 주리라고는 생각을 안 했겠지, 라고 약간 사감을 넣어 말한 크리스토프는, 짧게 말을 맺었다.

    “즉 그들은 그놈이 어떻게 나오든 다 받아 주겠다고―혹은 할 수 있으면 좋을 대로 해 보라고―말한 셈이란 거다.”

    “……. 어쩐지 더 암담해지는데…….”

    정태의는 쓸어올리던 앞머리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쥐어뜯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애꿎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 그 손을 놓고 만다.

    “그러면 문제의 그 일레이의 행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하나 나오겠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약간 과장스레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하르트를 만나면 알게 될 테지.”

    카일이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그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걸, 정태의는 말없이 곁눈질로만 보았다.

    “음……정말로 이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시려고요?”

    여러 가지로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적어도, 어떤 산해진미가 나온다 해도 식사가 맛있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일은 마지막 신문을 집어들어 펼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확실하게 내 손을 놓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손을 놓을 생각은 없어. 또한 어찌 되었든 이 상황에 있어 허를 찔린 건 리그로우가 아니라 일레이라는 개인이니까.”

    게다가 말이야, 그놈이 뒤통수에 칼을 맞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도 않다고, 굉장하지 않나? 하고 덧붙이는 카일의 목소리에 어딘지 심술궂은 흐뭇함이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간 일레이로 인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카일의 과거를 되새겨보면, 그 느낌은 기분 탓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감은 눈 위로 불그스름하게 비치던 빛이 가려져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크리스토프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어, 깨웠어?”

    머리 위에서 정태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있다. 기분 탓인지 그 양동이 쪽에서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얼굴 앞에서 흔들리는 이 양동이는 뭐야.”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손을 놓으면 바로 얼굴에 직격하겠다.

    “응? 아. 비료. 페터가 갖다달라고 해서.”

    ‘직접 만든 거라서 냄새가 좀 나지? 하지만 천연재료야.’, 라고 덧붙이며 천진하게 웃는 정태의를, 크리스토프는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천연재료로 만든 비료라면…….”

    “아――독일어로 뭐라고 하더라……, 음……, 퇴비? 거름?”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중얼 단어를 읊조리는 정태의의 말을 듣고, 크리스토프는 곧바로 몸을 비켜 일어나 앉고 말았다.

    “그런 걸 내 얼굴 위에서 흔들어?!”

    “아. 미안. 자는 줄 알았거든.”

    “자고 있어도 가까이 대지 마!”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소리쳤다. 응, 하고 순순히 양동이를 옆에 내려놓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던 나무그늘 아래 나란히 앉았다. 곧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나무기둥에 머리를 기대는 정태의를, 크리스토프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아?”

    크리스토프가 불쑥 묻자 정태의는 눈동자만 굴려 크리스토프를 보며 응, 하고 짧게 대답한다.

    “하긴 너는 드레스덴에서도 숲에 가길 좋아했지.”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갑자기 정태의는 뭐가 우스운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리자 아니, 하고 손을 젓는다.

    “숲길을 좋아한 건 나보다는 너였지. 거의 매일같이 승마를 다녔으면서. 말이 다쳐서 타지 못하는 동안에도 자주 갔었잖아.”

    정태의가 웃으며 하는 말에 크리스토프는 냉랭하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 숲이 좋았던 건 아냐. 사람들이 잘 안 가서, 집 안에 있는 것보다 사람들을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지.”

    그곳은 늘 고요하고 한적했다.

    아직 승계 후보를 다투며 타르텐에서 살고 있었던 그 무렵, 거의 쉴 틈도 없이 빡빡하게 짜인 커리큘럼 속에서 오가면 언제나 사람들과 부대꼈다. 그런 가운데 홀로 정적을 맛볼 수 있는 곳은 자신의 침대 외엔 오로지 그곳뿐이었다.

    “그래? 왜 그럴까, 그렇게 멋진 숲인데. 하긴 그곳에서 다른 사람이랑 마주친 적은 별로 없었지. ……아. 리하르트와 마주친 적은 한 번 있었던가.”

    정태의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이는 말에,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다.

    “드문 일이군. 그도 그곳에는 잘 가지 않는데.”

    크리스토프가 말하자 정태의는 더욱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산책로에 대해 설명을 잘 해 주길래 자주 가는 줄 알았는데.”

    “아……. 오래 전에는 자주 갔었어. 올리비아가 숲을 거니는 걸 좋아했거든.”

    몸이 워낙 약해서 그녀가 숲길을 산책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좋을 때면 숲 입구 근처에서 가끔 자리를 깔아 놓고 앉아서 쉬다 가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주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는 정말로 반갑게 웃었었다. 그 옆에서 리하르트가 담담히 웃는 가운데 사실은 안 내켜하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늘 웃었다. 그곳에서 크리스토프와 마주치면 늘 반가워했다. 어떤 때라도.

    ――올리비아는 정말로 널 좋아했을까? ……아니, 나라면 그렇지 않았을걸.

    문득 잔인한 빛을 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 들었던 말이다.

    침묵하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올리비아라……. 올리버랑 닮았다고 했었지. 그러면 리하르트랑도 닮았겠는걸.”

    크리스토프는 잠시 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올리버처럼 꼭 닮지는 않았지만 남매라는 걸 쉽게 알아볼 만큼은 닮았었지. ……그건 싫었어.”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리하르트의 동생인데 심지어 닮기까지 했다. 그래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올리비아는 먼발치에서라도 크리스토프를 보면 반갑게 다가왔다. 언제나 빠짐없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바깥을 돌아다닐 때보다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더 많았는데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마주쳤어. 나를 볼 때마다 다가왔거든. 그래서 그럴 때마다―아니 다른 때에도 가끔―생각했었어. 왜 그럴까 하고. 왜 나를 좋아할까.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이제는 풀 수도 없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여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곧 다시 하늘로 돌렸다.

    “그래……, 그렇다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너도 올리비아가 좋아졌을지도 몰랐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응?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자주 생각한다는 건 그런 거잖아.”

    크리스토프는 눈을 깜박였다.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인다. 잠시 더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나무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 기분 좋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태이. 좋아해.”

    정태의는 눈을 떠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어쩌면 난처한 듯도 하고 놀란 듯도 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나는 잘 모르겠어. 난 정말로 너를…….”

    크리스토프는 말하다 말고 뒷말을 흐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기만 한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막 소리가 나오려 할 때였다.

    “둘이 나란히 여기 있었나?”

    손님방 방향으로 이어진 유리문이 열리며 카일이 나왔다.

    아침 일찍 찾아온 제임스에게 끌려가다시피 해 회사에 나갔던 그는 이제 막 돌아왔는지, 아직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순식간에 옷을 훌훌 벗어던진 그는 속옷 차림으로 걸어와, 그 옆에 있던 풀에 몸을 던졌다. 호쾌한 물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그들이 앉아 있는 근처까지 날아왔다.

    제법 오래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른 그는, 개운하게 후욱 숨을 내쉬며 흠뻑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두어 번 얼굴을 훔치다가 손가락 사이로 정태의와 눈이 마주친 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외쳤다.

    “그러고 보니 태이, 앞뜰 화단에서 페터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던데. 비료를 가져다주기로 했다던가 하면서.”

    “예? ……아!”

    정태의는 낭패한 기색으로 벌떡 일어섰다.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집어들고 크리스토프에게 가볍게 손인사를 남기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건물을 돌아 사라지는 정태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풀을 몇 번이나 오가며 헤엄을 치던 카일이 이윽고 만족할 만큼 물살을 갈랐는지 물 위에 둥둥 떠올라 누웠다.

    “생각해 보면, 성격으로 보아 네가 태이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겠더군. ……그런데 태이는 안 돼. 일레이가 그를 진짜로 아끼고 있거든. 매일같이 보는 나도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말이야.”

    물 위에 뜬 채 카일이 다소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사라진 방향을 넋 없이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냥 한 마디 툭 던진 듯 담담한 말 속에 희미한 염려가 묻어나고 있었다. 릭과 크리스토프가 싸우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고, 혹은 크리스토프를 안타깝게 여기는 건지도 몰랐다.

    “당신은 왜 태이가 좋아.”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앞뒤 맥락도 없는 말에 당황하는 빛도 없이 카일은 눈초리에 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예쁘잖아.”

    “…….”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크리스토프는 왜 그러냐는 듯한 카일의 짧은 반문에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납득할 만도 하다. 반짝반짝거리는 게, 예쁘다고 말 못할 것도 없었다.

    과연, 하고 홀로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좋아?”

    “응.”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오히려 물어본 크리스토프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걸 어떻게 알까. 그게 어떤 건지는 어떻게 알까.

    크리스토프는 눈가에 나이 대신 웃음주름이 패인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그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지, 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혹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말은 언제나 쉽게 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혼잣말은 카일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카일은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더니, 수면에 띄웠던 몸을 바로세웠다. 풀에서 훌쩍 올라와 앉은 그는 사뭇 진지하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크리스토프는 미심쩍게 낯을 찌푸렸다. 글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말이란 건 여러 번 거듭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거든. 그건 때에 따라서는 아주 무서운 일이 될 수도 있어.”

    크리스토프는 희한한 얼굴을 하고 카일을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크리스토프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는 크리스토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여럿 있었지만, 그것과도 달랐다.

    간혹 같은 항렬의 ‘형제’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대부분은 크리스토프의 또래였다. 개중에서도 크리스토프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카일은 크리스토프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다. 같은 항렬 가운데서는 가장 나이가 많을 그는, 크리스토프가 아주 어릴 적에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다른 또래들에 비해 어른이었다.

    희한하게도 크리스토프가 어릴 때에 분명 카일은 어른보다도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그는 엉뚱하고 허술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엉뚱한 구석 가운데 하나가 이거였다. 가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말을 꺼내는 것.

    카일은 물기가 맺힌 짙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흐리게 웃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말은 늘 몇 번이나 생각한 뒤에 말해야 하는 법이지.”

    중요한 말, 하고 크리스토프는 따라서 중얼거렸다. 그래, 중요한 말, 하고 카일은 마치 어린애에게 타이르듯 따라한다.

    크리스토프는 말끄러미 카일을 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여태 몇 번인가 머릿속에서 생각난 적이 있었던 말을 꺼낸다.

    “카일. 당신은 나이를 먹을수록 애가 되는 것 같아.”

    크리스토프의 말에 카일은 살짝 뜨악한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아직 승계 후보로 선택도 되기 전에―그러니까 당신이 한창 영재교육기관에 있을 무렵―당신은, 사람과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날카롭고 사려가 깊다며 어른들의 감탄을 한 몸에 받는, 활기와 지성을 고루 갖춘 어른스런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말야. ……쉽게 말하면, 말수도 적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아서, 뭔가 좀 있어 보였는데.”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기억을 새삼스럽게 밝히는 마지막 한 마디에 카일은 타격을 받기라도 한 듯 가슴을 움켜쥔다.

    “아……그래……, 부끄러운 어린 시절이었지…….”

    “뭐가 당신을 이렇게 바꾼 거야?”

    정신이상자가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인가, 아니면 가업을 물려받는다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말들을 읊조리는 크리스토프에게 카일은 쓰게 웃었다.

    “사람은 어느 순간이 올 때까지 자기가 사실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법이거든. ……그런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말이야, 가슴 아프게…….”

    “몇 번이나 생각한 뒤에는 말하라면서. 예전부터 가끔 생각이 났었거든.”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었어, 크리스…….”

    카일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가 뒹굴 엎드렸다. 무릎 아래는 물에 담가 잘박거리면서 흙 위에 배를 깔고 누운 모습은, 역시나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어떤 거야. 몇 번이나 생각한 뒤에 말해야 할 게.”

    크리스토프가 묻자 카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빙긋 웃더니 으음, 하고 생각에 잠긴다.

    “그래. 예를 들면 이런 말이지. 나는 태이가 좋아. 리타도 좋고 페터도 좋지. 일레이도, ……일레이는 일단 좀 더 생각해 보자.”

    카일은 갑자기 마음이 어두워진 듯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내 인생에 드리운 업業이란 말이야, 그런데 업마저 사랑하려면 부단한 노력과 수행이 필요하거든, 하고 침울하게 중얼거리던 카일은,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이 흰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한숨을 쉬며 열없이 웃었다.

    얼마나 많이 웃으면 저런 주름을 가질 수 있을까, 카일의 눈 끝에 새겨진 주름에 약간 부러운 듯이 시선을 주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카일은 문득 잔잔히 웃었다. 그 주름이 보기 좋게 깊어졌다.

    “그리고 크리스토프, 나는 너도 좋아.”

    카일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표정을 지웠다. 갑자기 전혀 예상도 못한 엉뚱한 말을 들었다는 듯 빤히 카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외로 꼬았다.

    “내가?”

    미심쩍게 눈을 깜박이는 크리스토프에게 카일은 넉넉한 웃음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런가. 난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라는 듯 대꾸하는 카일에게,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오래 생각하지는 않고 잠깐 눈동자를 굴리다가 크리스토프는 대뜸 중얼거렸다.

    “그런 적 없는데.”

    크리스토프는 살짝 낯을 찌푸렸지만, 카일은 그 표정에도 대답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래? 하고 되묻곤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반드시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아니야, 하고 덧붙이는 카일의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몹시 재수 없게 들릴 법도 했지만, 크리스토프는 그저 기묘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토프는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떠오르는 알 수 없는 감각들이 조금 혼란스러워 이마를 문질렀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아득한 불안감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느낌이 희미하게 깔린다. 겁이 난다고 하는 편이 옳을까. 다른 듯도 하고 비슷한 듯도 하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뭔가 몸을 건드려 움찔 움츠러들고 마는 그――낯선 감각처럼.

    그 말이 가슴속 어딘가를 그렇게 낯설게 쿡쿡 건드렸다.

    “이상하네…….”

    크리스토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일이 의아하다는 뜻을 눈으로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가슴께를 천천히 문질렀다.

    “여기가 더 비어 버렸나 했거든.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맛뿐 아니다.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어딘가 둔해진 것 같았다. 분명히 감각은 살아 있는데도 어느 부분인가 마비된 것처럼, 그래, 꼭 꿈을 꾸면서 느끼는 감각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감각을 느끼는 어딘가를 두터운 천 몇 겹으로 감싸 놓은 것처럼.

    “언제부터.”

    카일이 약간 낯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별로 심각한 건 아니야, 전혀 불편하거나 뭔가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하고 무심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생각해 본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최근의 일인 듯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오래 전부터, 마치 한 겹 한 겹 오래 전부터 하나씩 깔아 놓았던 천을 지금 단번에 감싼 것 같기도 했다.

    둔하게. 약간 저릿하게 마비된 것처럼.

    “역시, 여기가 좀 쿡쿡…….”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카일을 보았다.

    “다시 말해 봐.”

    카일은 흠,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리둥절한 얼굴 위로 곧 아아, 하고 알겠다는 듯한 빛이 스친다. 그는 곧 기꺼이 크리스토프의 요구에 부응해 준다. 얼마든지, 하고 푸근하게 웃으면서.

    “나는 너를 좋아해, 크리스토프.”

    “……다시 말해 봐.”

    “언제든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단다. 내가 사랑하는 크리스토프.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짐짓 과장스러운 말투를 쓰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진심을 담아, 카일이 다시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은 손을 한동안 내려다본다.

    “나는 혹시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크리스토프는 카일에게 물었다.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처럼,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로. 카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나?”

    카일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러자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크리스토프는 떨어뜨렸던 시선을 다시 들어 카일을 보았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더 들으면, 좀 더 들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다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말해 줘.”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기분 탓일까. 목이 떨리는 것 같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목에 손을 대었지만, 떨리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왠지 떨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어린 크리스토프. 나는 너를 좋아한단다.”

    더 이상은 어리다고 할 수 없는 크리스토프인데도, 어째서인지 카일이 그렇게 속삭였다. 이미 오래 전에 들었어야 했던 말을,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말해 주는 것처럼. 몇십 번이든 몇백 번이든 얼마든지 말해 주겠다는 듯 다정하게.

    “한 번 더.”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떨리는 건 목 바깥쪽이 아니다. 목 안쪽이 떨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프. 좋아해.”

    자애롭고 다정하게. 모든 것을 넉넉히 끌어안아 주는 아버지가 말하는 것 같은 음색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이렇게 목이 뜨거운 걸까. 조그만 불덩이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목 안이 뜨거웠다. 아니, 가슴이 뜨거운 건지도 모르겠다.

    ――크리스. 좋아해.

    문득 입속으로 파고들던 낮은 숨결이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에 들었던, 겹쳐진 입술 사이로 거듭해서 속삭이던 다정한 목소리.

    갑자기 이유도 없이 더럭 마음이 불안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심장에 새겨졌다.

    기억 속에 가둬 놓았던 것처럼 의식 저 아래에 닫아 놓고 꺼내지 않았던 그의 목소리가.

    “…―.”

    이제야.

    이렇게 뒤늦게.

    “크리스?”

    당혹스러운 듯, 혹은 난처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의 다정한 시선이 크리스토프의 눈동자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시야가 일렁일렁 흐려져서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

    크리스토프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에 와서야,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섭도록 날카로운 칼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때 다쳤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던 그 사실을 이제 와서야 의식 위로 떠올려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은 내가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지.”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카일은 일순 침묵했다. 그 낮게 떨리는 속삭임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서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냐고 묻는 대신에, 한참 크리스토프를 살피듯이 바라보던 카일은 이윽고 천천히 웃었다.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당신은 내 반응을 보면서 즐기려고 한 말도 아니야.”

    이번에도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를 좋아해, 크리스토프.”

    어리고 작은 내 동생, 귓가에 뒤이어 스며드는 상냥한 목소리.

    “한 번 더 말해 줘.”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표정 없이 창백한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일을 바라보지도 않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 기억 속의 목소리를 덮으며 실제로 들려오는 그 다정하고 조용한 목소리만을 의지 삼아, 크리스토프는 말했다. 한 번 더, 라고.

    하얀 뺨이 젖어 있었다. 이토록 사소한 일인데. 그런데도 뺨이 흠뻑 젖어 마르지 않았다.

    “그러면 나도 당신을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한숨 같은 속삭임이었다.

    ***

    정태의는 시들어 버린 잎을 전정으로 썩둑썩둑 잘라 내는 주름투성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평생을 정원사로 일했다는 페터는, 그 손에 그의 삶이 새겨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시커먼 손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정원사를 하다 보면 손을 다칠 일이 많은가 봐요.”

    정태의는, 그래도 나름대로 험하게 뒹굴어 왔던 스스로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작은 흉터가 남아 있는 남자의 손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페터의 손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보니 몹시 고와 보였다.

    “이것도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 손을 다쳐 가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지.”

    페터는 대수롭잖은 투로 중얼거렸다.

    이제 자잘한 가시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덥석 쥘 수 있는 그 굳은살이 박인 손을 보며 생명이라, 하고 정태의는 중얼거렸다.

    “나무는 베지 않는 한은 오래오래 사니까 좋군요.”

    “한 철 살고 죽는 풀도, 씨앗을 남겨 오래 살아.”

    페터의 말에 정태의는 그렇군요,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오래 살지 못하고 어려서 스러진 사람을.

    올리버를―혹은 리하르트를―닮았다는 그 소녀를, 정태의는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약간 안쓰러워 마음이 가라앉는 정도일 뿐, 슬프거나 애통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이 향하는 곳은 어려서 죽은 가엾은 소녀보다는 살아 있는 크리스토프 쪽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올리비아의 이름을 말했을 때의 표정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대수롭잖고 귀찮다는 빛마저 감도는 그 말투로, 하나씩 드문드문 그녀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그럴 때의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제 형도 식물을 좋아해서 예전에 집에서 같이 살 때에는 집 안에 크고 작은 화분도 많이 있었거든요. 워낙 많이 있다 보니 가끔 한둘쯤 시들어서 죽기도 했는데, 오래도록 살뜰하게 봐 왔던 게 그렇게 되니까 슬프더라구요. ……하지만, 생명은 다 귀하다고는 해도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만큼 슬프지는 않았어요.”

    정태의는 마른 잎을 뚝뚝 따내는 손길에만 시선을 주며, 어렴풋하게 옛 기억을 떠올린다. 이제는 평소에 거의 떠올릴 일도 없는 기억이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누군가 영원히 사라지는 경험.

    슬프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는 상실감이다.

    설령 얼굴 정도만 알고 지내는 사람을 잃는다 해도,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그 상실감은 피해갈 수 없었다.

    “죽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어지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야 이렇게 하면 좋았을 걸, 그렇게 생각해도 이미 어쩔 도리가 없으니 말이에요.”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랬다.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라’는 너무나 흔하게 듣는 말인데도 늘 가슴에 새기기가 쉽지 않았다.

    정태의는 후회가 되어 기억에 남은 일은 없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일부러 노력을 했다기보다는 삶 속에서 그렇게 살았다.

    친구와 놀다가 크게 다쳐 입원하거나 하는 일로 당신들을 슬프게 한 적은 있지만, 나중에까지 가슴에 맺힐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때로 그들을 떠올릴 때에는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데.

    “틀림없이 나중에 두고두고 가슴에 맺힐 줄 알면서도 잘 모시지 못하는 자식도 있지. 그런 관계가 어디 부모자식뿐일까.”

    페터가 무심히 말했다. 그렇군요, 하고 정태의는 중얼거린다.

    그럴까. 과연 크리스토프는 알았을까. 아주 오랜 뒤에 올리비아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게 될지.

    “어떻게 살든, 후회 없이 살면 좋은 거야.”

    “그러게요. ……그런데 쉬운 것 같지는 않아요, 페터.”

    정태의는 지난 일은 돌아보지 않았다. 늘, 차후에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래도 시간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정태의는 가뿐한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앞에 선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눈가에 웃음을 띠며 불쑥 말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살면 좋으려나요.”

    “내일 세상이 멸망하면 나무 안 심지. 심으면 나무만 가엾어질 텐데.”

    페터는 하얗게 센 눈썹을 한쪽만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내일 내가 죽는다면, 그럼 오늘은 나무를 심어야지.”

    무뚝뚝한 손이 시든 가지를 썩썩 잘라 내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정태의는 웃음 섞어 그를 불렀다.

    “페터.”

    페터는 누렇게 시든 잎을 잘라 내고 그 자른 면에 손끝으로 약을 톡톡 두드려 주며 흘끔 정태의를 보았다.

    “오래 사세요. 그렇지, 그 나무만큼만 오래 살면 좋겠네요.”

    그러자 페터는 “이게 무슨 나무인지나 알아?!” 하고 눈을 부릅떴다. 늙은이더러 수천 년을 더 살라는 건 축복의 말이 아냐, 하고 투덜거린다.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역시 베를린으로 돌아오니 좋군요,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흙 위에 떨어진 시든 잎을 비질로 쓸어 모았다. 나중에 이 시든 잎으로 페터가 거름을 만들 테니 그때에 거들어야겠다, 하고 생각한다.

    그때였다.

    “멋진 회화나무로군요. 이렇게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란 나무는 식물원에서도 보기 드문데, 훌륭한걸요.”

    부드러운 웃음을 품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정태의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자신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는 페터를 따라, 정태의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드레스덴에서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다정한 웃음을 눈가에 띠고서.

    지난밤 인터폰의 좁은 화면 너머로 보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랬던 적은 아예 있지도 않은 듯, 그는 한결같이 온유한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아……, 오셨군요.”

    정태의는 비질을 하던 손을 멈추었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을 뿐, 정태의도 여느 때와 같이 웃어 보였다.

    “좀 더 일찍 오려고 했었는데, 어제 승계를 마친 뒤 뒤처리를 할 경황도 없이 급하게 왔던 터라, 오늘 낮 동안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 조금 늦어졌습니다. 카일에게는 미리 연락을 드렸었는데요.”

    정태의는 다섯 시를 조금 넘어서는 시계를 보았다. 분명히 정신없이 바빴을 거다. 예전에 들은 바 있었다. 승계식을 하고 나면 며칠 동안은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쁠 거라고.

    그런데도 이 시각에 올 수 있을 정도라면, 오늘 낮은 필경 일의 홍수 속에서 살았을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지난밤 연회장이 발칵 뒤집어진 바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크리스토프는? 방에 있습니까?”

    정태의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는 듯, 리하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는 비를 담벼락에 세워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안뜰에서 카일과 같이 있을 거예요. ――페터, 그럼 나중에 뵈어요.”

    가는 길에 창고에 좀 놓아 달라며 페터가 건네어주는 들통을 흔쾌히 받아든 정태의는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쪽입니다, 하고 안내해 주겠다는 말 대신 먼저 걸음을 돌려 앞서 나가는 정태의의 뒤로, 리하르트가 말없이 따라갔다.

    괜찮으려나. 미리 언질도 없이 바로 리하르트를 데리고 가도. 아니, 하지만 리타가 문을 열어 주었을 테니, 이미 리타가 카일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을지도 모르겠다.

    “드레스덴으로 다시 돌아갔다 오신 겁니까?”

    정태의가 어깨 너머로 묻자 곧 대답이 돌아왔다.

    “예. 해 둬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요. ……지난밤에는 늦은 시각에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는 리하르트에게 정태의는 아니요, 하고 약간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들을 인사가 아니다.

    서로 별 말 없이 걸어가면서, 정태의는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이 남자에게 따져도 되는 입장 같은데.

    그러나 한편으로 다시 생각하면 이 남자는 라만의 일을 방관하며 다른 방향으로 약간 거들었을 뿐, 딱히 그가 정태의에게 직접 무슨 짓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지난밤에 찾아왔을 때에도 정태의의 신병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집안과 관련된 사람만을 찾았을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태의는 그에게 있어 부외자라는 뜻이었다.

    “드레스덴은, ……지금 분위기가 좀 안 좋겠군요.”

    정태의는 걸음을 늦추어 그와 반걸음 가량의 사이를 두고 앞서 걸었다.

    말을 꺼내고 나서야 좀 거북한 화제인가 싶었지만,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큰 행사와 소란이 동시에 있었으니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없잖아 있더군요. 그러나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를 잊지 않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는 그에게,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정태의는 아니요 뭐, 하고 애매하게 중얼거리고 만다.

    감탄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리하르트는 완벽했다. 완벽하게 예의발랐다.

    단순히 말만 그런 게 아니다. 태도까지도, 심지어는 표정마저 언짢거나 불편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될 소지도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정중하면서도 냉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다니.

    정말로 이 남자는 지난밤 이곳으로 찾아왔던 그 남자와 같은 인물일까.

    정태의는 문득 한 점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던 지난밤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초조하고 다급해, 애써 표정을 죽인 얼굴 위로 섬뜩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 정태의의 뒤쪽에서 걷고 있는 남자와는 달리.

    정태의는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정태의와 눈길이 마주친 그가 의아한 얼굴로 웃음을 띤다.

    지금이 훨씬 온화한 얼굴인데도, 인간미는 차라리 어제 쪽이 낫군.

    정태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때 불현듯 어제 그가 짤막하게 외쳤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듣는 이의 낯이 창백해지도록 섬뜩하게 으르렁거리던 말이.

    “그러고 보니 크리스토프의 어머니는 괜찮으신가요?”

    정태의는 짐짓 가벼운 투로 웃으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어제의 그 말마따나 죽이지는 않았을 테고, 그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비록 그녀가 크리스토프에게 다시는 타르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하나, 아들이 그렇게 타르텐에게 해를 입히는 형태로 떠나간 다음에야, 그녀의 입장이 편했을 리는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몸져눕거나 신경증을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아……, 그녀는.”

    리하르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곧 웃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자리에 누워 있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 소란 가운데 다치시거나 한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저 조금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리하르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별로 그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한 기색에 정태의도 더 묻지 않았다.

    하긴 정신적으로 약해 보이는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어제의 그 소란이 벌어진 와중에 뭔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을 듯했다.

    하지만.

    정태의는 문득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나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자리에 누웠다고 하는데도 걱정스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뜻밖에 지난밤 리하르트가 그녀에게 분노했던 것이 기껍기까지 했다.

    정태의는 여전히 리하르트도 그렇게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크리스토프를 위해 그녀에게 화를 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때였다.

    정태의의 조금 뒤에서 걷고 있던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당신이 고맙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정태의는 멈칫, 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는 무표정하게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 시선이 벼려 놓은 칼날처럼 차다.

    정태의는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입을 닫고 말았다.

    아, 예, 타르텐 내부의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속으로만 비아냥거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조차 내키지 않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다.

    저만치 자재 창고가 보였다. 창고는 안뜰로 가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정태의는 페터에게 건네어 받은 들통을 가볍게 흔들며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잠깐 이걸 창고에 가져다 놓고 오려고 하는데,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안뜰이라면 어느 쪽인지 알고 있으니 먼저 가 있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정태의가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먼저 대답을 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하긴 그가 이 집의 대략적인 구조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안내라고 할 만한 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럼 곧 뒤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정태의는 잰걸음으로 창고를 향했다.

    역시 대하기 편한 남자는 아니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대하는 일 없이 살고 싶었다.

    여태껏도 별로 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몇 있었고―대표적인 인물과 지금은 함께 살고 있으니 인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그런 사람과 나중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게 된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저 남자는 거북하다. 그래, 싫다기보다는 거북하다는 편이 옳았다.

    사실 인간적인 면모로 따지자면 일레이보다는 차라리 저 남자가 나을 텐데도, 사람과 맞고 안 맞고는 인격과는 동떨어진 문제인 성싶었다. 아니 그렇다고 일레이의 인격이 그렇게까지 작살이라는 소리는 아니……, ……라고 하고픈 심경이고…….

    창고 문 옆에 들통을 내려놓은 정태의는 그제야 불현듯 그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마음에는 걸리는 남자의 행방이 떠올랐다.

    이런, 미리 물어볼 걸.

    혀를 차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린 정태의는, 어서 돌아가서 그것부터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걸음을 돌렸다.

    리하르트는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정태의가 일레이를 본 마지막 기억은, 그가 타르텐의 연회장에서 프로포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 뒤에 정태의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헬기 안에 크리스토프와 둘이서 있었다. 일레이는 그대로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타르텐에 있는 걸까. 감금이라도 해 두었다거나, 혹은 아직도 약의 영향으로 깨어나지 않았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두었다거나, 혹은…….

    “…….”

    정태의는 곧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역시 안 된다. 연락도 없이 전혀 소식을 알지 못하니 자꾸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

    어서 돌아가서 물어봐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다른 방향으로도 마음에 걸렸다.

    비록 카일이 함께 있긴 할 테지만, 타르텐에서 그런 식으로 뛰쳐나온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와 대치하고 있을 게 걱정되었다.

    설마하니 완력으로 끌고 갈 수야 없을 테고 또한 카일의 집에서 여타 물리적인 힘을 동원할 도리도 없겠지만, 그들이 험악하게 대치하고 있다면 그 근원적인 이유를 만든 사람은 자신인 셈이었다.

    점차 걸어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저만치 안뜰이 보일 즈음에는 정태의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뜰에 막 다다른 정태의는, 그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안뜰로 이어지는 길목의 모퉁이에서, 그는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석상처럼 우뚝 서서 안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뭘 보고 있는지는 굳이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카일과 크리스토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정태의가 서 있는 곳에서는 거리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안뜰로 들어서는 길목에 리하르트는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금의 미동조차 없이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정태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었다.

    “혹시 절 기다리신 겁니까? 먼저 가셔서 말씀 나누시면…….”

    스스로도 객쩍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말을 걸던 정태의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리하르트의 바로 뒤까지 가서야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정태의가 온 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크리스토프다. 정태의의 시선도 일순 크리스토프에게 못 박히고 만다.

    그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그것은 몹시 이상한 광경이었다.

    크리스토프의 표정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표정 없는 인형 같은 고요한 얼굴로 그는 카일 앞에 앉아 있었다. 감정이라곤 가질 리가 없는,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조각의 뺨은 끊임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데도 새파랗지 않은 게 이상한 투명한 눈물이 그 푸르고 깊은 눈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계속해서.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도록 끊임없이.

    크리스토프,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려고 벌어진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정태의는 머뭇머뭇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곤란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본다.

    그를 부르기가 거북했다. 심지어 옆에 리하르트가 있어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우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게 싫은 만큼이나, 크리스토프가 우는 얼굴도 어쩐지 보여 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태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그들을 보고 있는 리하르트를 흘끔 보곤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정태의가 저곳에서 자리를 뜰 때까지만 해도 전혀 울 만한 일은 없었다. 카일이 헤엄을 치려고 풀에 뛰어들고, 그와 스치다시피 해서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는, 단언컨대 별 일 없었다.

    그렇다면―비록 그의 앞에서 다정한 얼굴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카일이 뭔가 지독한 짓이나 말을 해서 울린 거라든가, 아니면 눈에 아주 매운 티끌이 들어갔다든가…….

    거의 가능성이 없을 생각들을 하며, 정태의는 자신이 이곳에 다다르기보다 앞서 여기에서 저들을 보고 있었을 리하르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그의 낯빛에서 뭔가를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말없이 그들을 바라볼 뿐.

    “…….”

    정태의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거북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에게서 아주 잠깐 시선을 든 카일이 그곳에 서 있는 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

    카일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는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젖은 속눈썹을 한 번 보고, 정태의를 보고, 그 옆에 서 있는 리하르트까지 본 뒤 난감한 듯 약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윽고 하는 수 없다는 듯 크리스토프에게 고개를 기울여 그에게 뭐라고 귀엣말했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약간 움츠러들었다.

    잠시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있던 크리스토프는, 절대로 그들이 서 있는 쪽은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훌쩍 일어서더니 카일의 뒤에 있던 풀로 뛰어들었다.

    옷을 입은 채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고 난 뒤, 한참 동안 크리스토프가 그 안에 잠겨 나오지 않는 사이에 카일은 어차, 하고 일어났다.

    이미 물기가 다 마른 몸에, 흙바닥에 닿았던 부분에만 흙과 마른풀 따위가 묻어 있었다. ……라고는 해도 속옷 한 장으로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바로 땅 위에서 누웠다 엎드렸다 한 탓에 거의 온몸이 흙투성이였지만.

    “왔나, 리하르트. 오기 전에 미리 기별을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면서, 카일은 지난밤과는 달리 대단히 반갑다는 빛을 온 얼굴에 한가득 띠고 가볍게 팔을 벌렸다.

    “카일, 혹시 인사 대신 포옹을 할 생각이라면 먼저 가슴과 배와 팔과 다리에 묻은 흙부터 털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정태의가 말하자 카일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곤 이런, 하고 혀를 찼다.

    “그렇지, 손님을 맞을 채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군. 미안하게 됐네. 잠시만 기다려 주게. 얼른 가서 물만 끼얹고 올 테니. 리타에게 말해 둘 테니 차라도 마시고 있어.”

    카일은 가볍게 흙을 털어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저분한 몸―게다가 여전히 속옷 한 장 차림―을 결국은 포기한 듯, 집 안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때까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하르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차는 됐습니다. 곧 돌아갈 테니까요. 저는 크리스토프를 데리러 왔을 뿐입니다.”

    낮고 느리지만 단호하게 말하며, 그는 카일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풀만 바라보았다.

    유리문 안으로 막 걸음을 옮기던 카일은 멈칫 발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히 웃었다.

    “리하르트. 난 자네가 손님으로서 내 집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조용하고 낮은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리하르트는 카일에게 눈을 돌렸다. 웃음이라곤 없는 눈이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이곳에 있겠습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유리문이 닫히며, 집의 안과 밖으로 경계가 생긴다.

    바깥은 조용했다. 간간이 담장 너머 멀찍이서 들리는 차 소리며 사람들의 기척 따위가 아련하게 들려올 뿐, 새들이 우짖는 소리들을 제외하면 바깥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 곳에, 차분한 물소리가 울렸다.

    풀에 한참 동안 몸을 가라앉히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물속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당연하게도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물을 머금고 피부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설령 얼굴을 반쯤이나 가리고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뺨이 젖어 있었더라도 더 이상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거다.

    크리스토프는 젖은 머리카락을 성가신 듯 쓸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훔쳐내고 나자 거기에는 평소와 같은 표정이 남았다. 무표정하고 냉랭한 얼굴이다.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리하르트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크리스토프는 풀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걸음을 딛고 선 주위로 금세 물웅덩이가 고였다.

    “괜찮아?”

    정태의가 심상하게 툭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정태의를 흘끔 쳐다보곤 언짢은 투로 중얼거렸다.

    “……옷이 다 젖어서 달라붙어서 기분 나빠.”

    풀에 들어갈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수영복을 갖고 왔을 텐데, 하고 투덜거리는 모습은 드레스 코드를 칼같이 지키는 그의 평소 언행과 똑같아, 정태의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꼼짝도 않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리하르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순간 흠칫 몸을 움츠리며 그 손을 뿌리친 크리스토프는, 새파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건드리지 마.”

    격앙되지는 않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말하곤 다시 돌아서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팔, 조금 전에 잡았던 곳과 똑같은 자리를 움켜쥔다. 쉽게 뿌리칠 수 없도록 단단히.

    “그만 돌아가자,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억눌린 목소리는, 그가 겉보기처럼 담담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보이고 있었다.

    “놔.”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붙잡힌 팔에서 리하르트의 얼굴로 날카로운 시선을 옮겼다.

    “동익의 내 옆방을 치워 놓으라고 말해 뒀어. 아마 지금쯤은 네 물건들도 그쪽으로 다 옮겨 놓았을 거다.”

    크리스토프의 말은 깨끗이 무시하며 말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일순 허를 찔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군, 이제 리하르트는 동익에서 살게 됐겠어, 머릿속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태의도 눈살을 설핏 찌푸렸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가 타르텐으로 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결국은 크리스토프를 타르텐으로 데려갈 생각인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여전히 잡혀 있는 팔을 못마땅한 듯 흘끔 쳐다봤지만 그쪽은 포기한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나도 생각해 봤어, 리하르트 타르텐. 왜 내가 타르텐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잠시 끊겼던 말이 곧 이어졌다.

    “그런데 그럴 이유는 없었어.”

    크리스토프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크리스토프는 말을 계속했다.

    “타르텐을 위해서? 천만에, 나는 그곳을 버리겠다고 말했어. 나는 그곳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아, 더 이상은.”

    “……아니, 네가 원치 않더라도 너는 타르텐에 있어 유용한 인재다. 너는 타르텐에 있어야 해.”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타르텐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지.”

    “그건 네가 돌아오면 없는 걸로 해 주겠다고 말했을 텐데.”

    “아니, 그러지 않아도 좋아. 반드시 변제할 테니까. 그 돈이면, 나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고용할 수 있을 테지.”

    크리스토프는 그에게 잡힌 팔을 천천히 구부렸다. 그리고 한 바퀴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손은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나는 타르텐에서 나오겠어. 타르텐에서 나를 추방했다고 해도 좋고, 네가 나를 쫓아냈다고 해도 좋아.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해 타르텐에게 먹칠을 하는 일은 없도록 하지.”

    크리스토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정면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말을 마친 그는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리하르트의 대답을 기다리는지도 몰랐지만, 리하르트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문득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움츠렸다.

    늦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가을과 맞물려 있는 이즈음,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에 물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바깥에 서 있기엔 싸늘할 시기였다.

    추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문득 표정을 굳혔다. 다시 그 말을 하지 않도록 푸르스름한 입술을 다물어 버린다.

    그는 걸음을 돌렸다. 물방울을 뚝뚝 끌면서 유리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려 한다.

    그때.

    “농담이 아니었더라면, 너는 내게도 그렇게 말했을까.”

    리하르트가 침묵을 깨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허공의 어딘가를 노려보던 그는 여전히 별다를 것도 없이 여상한 얼굴로 저녁놀이 지기 시작하는 서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혼잣말인 것도 같은 그 말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크리스토프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눈치로 리하르트를 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서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었더라면.”

    리하르트가 나직이 덧붙인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몸이 희미하게 움츠러들었다.

    “네 반응을 보면서 즐기려 했던 게 아니었더라면.”

    리하르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흐릿하게 잠기는 이 무렵에, 그 눈빛만이 유난히 차고 뚜렷했다.

    “너는 그 말을 나에게 했을까?”

    노래하듯 가볍게 뒷말을 덧붙인다.

    크리스토프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대치하고 섰다.

    어느 순간인가, 문득 리하르트의 입매가 꿈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는 것처럼 입가에 희미한 주름이 진다.

    “한 번 더……?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더 말해 줄 수 있어. 몇 번이나 원해. 바라는 만큼 말해 주지. 말해 봐, 크리스토프. 얼마나 말해 주면 내가 하는 말을 들을 거지? 고작해야 세 치 혀를 놀리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듯 굳어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사람은 크리스토프만이 아니었다.

    정태의 역시, 그 가늠할 수 없는 말들 가운데서도 가슴속이 써늘하게 식어 왔다.

    파충류를 쓰다듬은 듯 차갑고 매끄러운 느낌이 선뜩하다.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정태의가 알 수 없는 뭔가를 냉랭하게 흔드는 리하르트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정태의가 본 적이 없는 웃음이었다. 아니,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비웃음이나 비아냥, 멸시 따위도 아니다.

    정점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다.

    어째서?

    그가 무엇에 화내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에 잔인해졌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저 말이 몹시 잔혹하고 혹독하다는 것만 본능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욱 하얗게 보이는 건, 해가 저물며 어둑해진 탓만은 아니다.

    “재미있어?”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그 한 마디를 던졌을 때, 이번에 얼어붙은 것은 리하르트였다.

    “즐겁나, 리하르트? 통쾌했어? ……그래, 기분 좋아해도 좋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나는 아팠거든. 아팠다는 것도 조금 전에야 깨달았지만. 네가 했던 어떤 일들보다도 그게 가장 효과적이었어. ……축하해, 리하르트.”

    크리스토프는 언짢거나 불쾌한 기색조차 없이 밀랍인형처럼 파리한 얼굴로 조용히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했다. 그러다가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하면 비어 있는 뭔가가 조금이라도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듯.

    “그러니까 지금은, 백 번, 천 번, 만 번, 그 수만 배를 말해 준다 해도 네가 하는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말을 맺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끝이라는 듯, 리하르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로, 리하르트의 고함이 울렸다.

    “크리스토프!!”

    심장이 짓눌릴 것만 같이 커다란 노성이었다.

    노성이다. 리하르트는 화가 나 있었다. 맹수처럼 형형한 눈이 크리스토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너는 내게 어떤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잖아. 그래,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감정 따위는 하나도 없었잖아. 그런데 그런 말로 핑계를 대려고 하지 마. 아파? 아팠다고?! 네가 그 정도로 아파할 인간이었나? 내가 그 정도로 널 아프게 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이었어?!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은 집어치워! 너는――아파한 적이 없는 거다. 너는 그랬던 적이 없어.”

    그래야만 한다고, 리하르트는 포효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리하르트의 말로 인해 아파한 적은 없다고. 그랬을 리가 없다고. 그는 그렇게 외쳤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분노를 터뜨리며.

    그때.

    “리하르트!!”

    외침이 있었다.

    움칫, 그 외침에 어깨를 움츠린 사람은 오히려 크리스토프였다. 그러나 동시에 리하르트 역시 입을 다문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조금 전의 그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나직이 울린다.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언제나 가면처럼 덮어쓰고 있는 정중함의 꺼풀이 벗겨져 나갔다. 그러나 본인은 깨닫지도 못한 듯했다. 그 말을 듣는 정태의 역시 아랑곳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크리스토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크리스토프가 어떤 식으로든 납득을 하고서 있었던 일일 테니까. 그러나 용납이 안 되는 폭언에 대해서도, 친구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겁니까?”

    정태의의 차분하지만 직선적인 시선이 리하르트에게서 흘끗, 크리스토프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리하르트는 기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문득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리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겉껍질만이나마 예의라는 가죽을 걸치고.

    “친구라……. 그에게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군요. 뭐 좋습니다. 정태이 씨. 어떤 말을 폭언으로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폭언이라 해도 어떠한 동일한 일에서 연관된 한 상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친구라도 끼어들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이건 안 되는 일입니다.”

    리하르트의 서슬 퍼런 말이 단락을 맺었을 때였다.

    정태의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연 순간, 한숨과 함께 혀 차는 소리가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 집 안뜰에서 내 손님들끼리 반목하는 모습은 썩 아름답지 않군. 내 입장이 영 난처한걸.”

    실로 난감하고 곤란한 듯이 미간에 주름을 짓고, 카일이 다가서고 있었다. 중앙현관으로 나와 앞뜰을 거쳐 온 듯 그들의 뒤쪽으로 다가온 그의 등장에 그 자리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죄송합니다만 카일, 모처럼 청해 주셨는데 오늘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음에 다시 손님으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서슴없이 돌아선 그는, 크리스토프가 문턱에 발을 걸치고 서 있던 집 안으로 성큼 올라섰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을 할 겨를도 없이 크리스토프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거침없이 끌어내었다.

    “……!”

    엉겁결에 끌려나와 뜰로 내려선 크리스토프는, 우악스런 완력으로 몇 발짝쯤 더 끌려가서야 겨우 버티고 멈춰 설 수 있었다.

    “이것 놔! 나는 너와 가지 않아!”

    날이 선 목소리로 무섭게 고함을 치며 자유로운 팔을 리하르트에게 휘둘렀다. 피하지 못한―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던 듯한―리하르트는 제법 호된 소리가 나도록 그 주먹을 얼굴에 얻어맞았다.

    그러나 약간 틀어진 고개를 다시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 역시 피할 틈도 주지 않고 크리스토프의 나머지 팔목까지 잡는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는 내 손님이네.”

    그 거친 실랑이를 보다 못한 카일이 말했다. 리하르트는 카일에게 짧은 시선을 주었다.

    “그렇다면 저는 리그로우가의 손님이 아니니 쫓아내시겠습니까?”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기실 이 집에서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는 입장이 같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리그로우가에 있어 손님이라는 말이 더욱 걸맞은 사람은 자신이라고.

    크리스토프는 자신을 붙잡은 리하르트의 손목을 꺾어 버릴 기세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크리스토프는 카일을 돌아본다.

    “카일, 당신이 좋을 대로 해. 나는 리하르트와 한곳에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를 손님으로 맞아 내가 이곳에서 나가든, 혹은 내가 머무르고 그가 나가든.”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카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 둘 중 원하는 바대로 선택을 하라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한 크리스토프 본인도, 그 말을 들은 카일도.

    그러나 적어도 카일의 대답에 의해, 그가 어떻게 대답하든, 그는 그들로 인해 이 이상 번거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원치 않은 선택 앞에서, 카일은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천천히 리하르트에게 옮겨가 멈춘다. 마지막으로 아주 잠시 정태의의 위까지 스친 시선은, 이윽고 생각에 잠기는 듯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생각에 잠기는 게 아니다.

    카일은 침묵을 선택했다.

    타르텐과의 교분을 택해 크리스토프를 내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카일을 이 자리에서 끌어내지도 않으며.

    그 침묵 자체가 생각이 아닌 선택임을, 다시금 그들을 둘러보는 카일의 조용한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리하르트가 웃었다. 화를 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웃음을 웃다가 그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약간 걸음을 옮겨 크리스토프의 정면에 선다.

    “크리스토프. 돌아가자.”

    조용한 목소리였다.

    언제 그 목소리가 분노나 흥분으로 들뜬 적이 있었냐는 듯 진지하게 가라앉은 그 음색은 부드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함께 돌아가. 아무도 네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거다. 너는 타르텐을 이끌어 가는 주인 중의 하나로, 너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돼.”

    그 말과 함께, 크리스토프의 앞으로 손을 내민다.

    그것은 그가 제안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앞으로 다시는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이렇듯 상냥한 손길이 다가올 일이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크리스토프는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들어 리하르트와 눈을 마주친다.

    “잘 가, 리하르트 타르텐.”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시선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래, 하고 중얼거린 그는 손을 거두었다. 천천히 멀어진 그 손이 이제는 크리스토프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떨어졌을 때, 리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네 뜻은 알았다. 좋아, 너를 타르텐에 마련된 자리로 불러들이려 하는 건 그만두지. 이곳을 더 찾아와서 소란스럽게 만들지도 않겠어.”

    그는 선뜻 말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차가운 시선은 크리스토프를 보며 선언했다.

    “그러나 잊지 마, 크리스토프. 너는 타르텐을 버림으로써, 타르텐의 주인이 아니라 타르텐의 죄인이 된 거다. 나는―그리고 타르텐은, 더 이상은 너를 혈연으로 여기지 않겠어.”

    “…―좋을 대로.”

    “다시 만날 때는 남이겠군.”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곧바로 떠나려는 듯 서슴없이 걸음을 돌린 그는 카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카일 역시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말 없이 걸어 나서던 리하르트는, 안뜰에서 막 벗어날 즈음이 되어서야 생각났다는 듯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정태의를 찔렀다.

    “그렇지……, 어젯밤 제가 베를린, 이곳으로 오느라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릭이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군요. 제가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그는, 운 없이 그와 맞닥뜨린 사람들 총 열둘을 죽인 뒤 타르텐에서 나가고 없었습니다―그 중 반이 타르텐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베를린으로 왔다고 들었는데――그 눈치를 보니 이곳에는 들르지 않은 모양이니 이상하군요.”

    리하르트는 정황 보고라도 하듯이 기계적인 톤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기묘한 얼굴로 표정을 굳힌 정태의를 보고는 약간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약간 뜸을 들여 ‘이상하군요.’, 라고 말한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은 듯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리하르트는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았지만, 그런 데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일레이가 타르텐에서 나갔다고 했다.

    그 정도나 되는 양의 주사액을 맞고도 밤 사이에 나갔다는 것도, 그 상대로 사람 열둘을 해치우고 나갔다는 것도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을 때도 됐는데, 정태의는 잠시 넋 나간 듯 리하르트를 보다가 하……, 하고 짧게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그 남자는 그 사이에 또 언제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적을 늘렸구나.

    연락도 종적도 알 수 없어서,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여라도 기절한 사이 누군가의 총을 맞지는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니 일단 안심이다.

    그렇게, 죽은 열둘을 애도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쉰 다음에야, 정태의의 머릿속에 그 뒷말이 한 발 늦게 와닿았다.

    “베를린……. ……베를린?”

    정태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러다가 카일을 휙 돌아본다. 카일은 어……, 하고 머뭇거리며 잠깐 눈동자를 굴리다가 모른 척 어깨를 으쓱했다.

    “새벽에 아주 잠깐 들렀었지. 자네가 이곳에 돌아왔는지 확인을 하겠다고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쳐서……한 한 시간? 그 정도 있다가 다시 나갔어. ……들어오자마자 자네 방으로 가서 거기에만 있다 나와 바로 나가 버렸기 때문에, 자네도 알 줄 알았지.”

    정태의는 멍하니 카일을 보았다. 눈만 깜박이며 정신을 반쯤 놓고 있는 사이에, 하나둘씩 애매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약 때문에 욱신거리며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머리에도 제법 선명하게 떠오르던 새벽녘의 꿈―결 같던 기억―이며, 공연히 저릿하게 지끈거리던 허리, 나른한 몸.

    꿈이 아니었다.

    “……하…….”

    정태의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약 때문에 머리가 살짝 맛이 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까. 그 목소리를. 그 손길이며, 그 체온을. 그렇게나 분명했는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괜히 카일이 원망스러워져 그를 사납게 쳐다보며 중얼거리자, 카일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말 안 하고 그냥 간 걸 보니, 그놈이 일부러 그런 것 같아서. ……왔다가 말도 안 하고 떠났다면 자네도 마음이 별로 안 좋을 것 같고 해서 뭐.”

    어차피 카일이 말했다 해도 이미 일레이는 떠난 뒤였을 테지만, 그래도 그 미묘한 배려가 순수하게 고맙게만 여겨지지는 않는 건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진 탓일까. 하지만 곧바로 떠났다니 대체 어디로――.

    그 답은 어쩐지 이미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품으며 정태의가 관자놀이를 문지를 때였다.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며 리하르트가 말을 잇는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이곳에 오기 직전에 소식이 들려왔습니다만,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를 봤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다만 그가 무기를 수소문하고 있는 듯하더라는 말이 같이 들려왔는데, 그걸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곧 중요한 포럼을 앞두고 있는데 별일 없으면 좋겠군요. ……이번에야말로 일을 벌이면 카일, 당신도 손써 주기 힘들 텐데요.”

    사뭇 걱정스러운 듯 하는 말은, 카일을 향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카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말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번연히 알고 있는 그 말에, 정태의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렇게 저를 도발하면 제가 그 위험한 곳으로 갈 것 같습니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이다. 그런 그를 앞두고 몇 초쯤 침묵하던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 정확히 봤군요…….”

    정태의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사나운 시선을 주었다. 태이, 하고 짤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매섭다. 그런 크리스토프에게 흘끗 시선을 주는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가 바란 것이었다는 듯.

    “어쩐지 형이 날 보고 싶어 하더라니……. 에고에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정태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째 이럴 것 같더라니,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서글프다.

    그런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곧 마뜩잖은 듯 혀를 찼다. 하는 수 없지,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말이 들렸을 리도 없는데,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웃는 것과 비슷하게 구부러진 서늘한 눈이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널 지켜 줄 사람이라곤 없는, 이 집 밖에서.”

    그 짧은 말이, 리하르트가 그 자리에서 그에서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럼 행운을.’이라며 누구에게인지 모를 인사를 남기곤 돌아섰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뜰을 지나 정문 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그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것 참……, 힘들어지겠군.”

    카일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머무르고 있던 정적을 깨뜨렸다.

    그제야, 표정 없이 뜰 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움칫, 이쪽으로 눈동자를 돌린다.

    줄곧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던 듯, 얼음처럼 서늘하게 굳어 있던 눈길이 정태의와 카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 순간 푸르스름하게 날이 서 있던 빛을 꺼뜨렸다.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크리스토프는 손등으로 공연히 얼굴을 한 번 훔쳤다. 그러다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문득 중얼거렸다.

    “……추워.”

    어깨를 움츠린 크리스토프가 아직도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는 걸 떠올린 정태의는 이런, 하고 혀를 찼다.

    “어서 들어가서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옷 갈아입어.”

    “괜찮아. 견딜 만해. 그래도 기분이 나쁘니까 샤워를 해야겠지만. ……그래. 추워도 견딜 만해.”

    크리스토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괜찮아, 하고.

    도무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 푸르스름한 입술로 그렇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곧 정태의의 말을 따라 순순히 집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몸에서 긴장이 풀려서일까. 혹은 추워서 몸을 움츠린 탓일까.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정태의는 조용히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어쩐지, 파란만장했던 어제보다 나름대로 평온했던 오늘이 더 지치는 느낌이다.

    “자네도 좀 들어가서 쉬지 그래. 아직 저녁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카일이 조용히 말했다. 정태의는 이마에 이어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의 손가락 사이로 언뜻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 예. ……어쩐지 지치는걸요.”

    “나도 좀 지치는군. 이제 나이도 나이라서.”

    “아니, 나이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정태의는 힘없이 말하며 픽 웃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쩐지 제가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요.”

    “누구를?”

    정태의는 미묘하게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머리만 긁적였다.

    누구를.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여럿이라 딱 꼬집어 누구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눈앞의 이 남자도 있었다.

    정태의가 웃고만 있자, 카일은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곤란해진 건 자네야. 지금 이 상황에서 여기서 나가면 당장 스릴 넘치는 추격전을 벌일 주요 인물도 자네고.”

    아――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생각을 해 봐도―오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더라도―역시 안 갈 수는 없다.

    할 수 없죠, 하고 정태의가 웃자 카일은 그제야 곤란하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레이 때문에 나가려는 거라면, 장담할 수 있는데 그놈은 자네가 이 집 밖으로 발 한 짝도 내디디지 않길 바랄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태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무엇보다도 일레이는, 베를린에 들렀으면서도 정태의를 깨우지도 않고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혼자서 훌쩍 떠나 버렸다. 그 괘씸함이라니.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제가 어떻게 할지 그놈이 설마 몰랐겠어요.”

    카일은 그것도 그렇군, 하고 웃었다. 정태의도 그를 따라 웃다가 문득 그 웃음을 거둔다.

    “저보다는 크리스토프가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걸요.”

    정태의의 말에 카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아까, 크리스토프가 자기랑 리하르트를 두고 선택하라고 카일에게 말했을 때.”

    정태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불쑥 중얼거렸다.

    “그때 카일이 리하르트를 손님으로 맞지 않겠다고――크리스토프를 거두겠다고 하셨더라면, 어떻게든 크리스토프를 설득해서 이곳에 머물러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일 카일이 중립에 서서 침묵을 택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토프의 손을 들어 주었더라면, 그렇다면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이곳에 한동안이나마 머무르도록 다독일 수 있었을 것 같다.

    지금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하고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어, 하고 당혹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낭패한 얼굴로 카일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카일.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아요.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사실 그 상황에서는 카일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그에게 그런 선택의 여지를 들이댄 크리스토프의 잘못이었다.

    설령 크리스토프에게는 자신의 손을 들어 달라는 뜻이 전혀 없었다 할지라도, 그런 류의 선택은 타인에게 제시해서는 안 되었다.

    아마도 정태의였더라도 카일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그것이 옳았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아쉬웠을 따름이다. 크리스토프 역시 곧 이 집에서 나서게 되리라는 것이.

    카일은 정태의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웃었다.

    “그래……, 실상 나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도 크기 때문에, 어지간했으면 크리스토프의 손을 들어 줬을 거야. 게다가 리하르트의 뒤에 설 사람은 많을 테지만 크리스토프와 함께 설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정태의도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짐짓 장난스레 투덜거린다.

    “그럼 그냥 크리스토프를 끌어오고 리하르트를 내보내지 그러셨어요. 더 이상은 크리스토프를 쫓지 말라고 못박으면서.”

    내키지 않는 말을 얌전히 따를 남자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말예요,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가 카일에게 시선을 돌린 그는, 천천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카일도 정태의의 그 말이 농담이란 건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웃음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입가에 조금 씁쓸하고 난처한 웃음을 담고서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자네는 리하르트의 뒤에 서 있었으니 못 봤겠군.”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리하르트의 뒤에 서서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게 뭐였을까, 하고 생각하던 정태의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의 뒤에서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조용히 깜박이던 새파란 눈. 그 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눈물. 흠뻑 젖은 새하얀 얼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던 걸까.

    묵묵히 생각에 잠긴 정태의의 옆에서, 그때에 정태의와는 다른 것을 보았던 카일은 ‘도저히 리하르트를 그렇게 내보낼 수는 없었어.’ 하고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때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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