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찰나의 휴식 (29/34)

3. 찰나의 휴식

“이봐. 좀 일어나 봐. ……이봐, 정태이.”

옆에서 태평하게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평하게’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라니 거 참 신기한 느낌이로군, 하고 아련한 의식 속에서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눈을 떴다.

시야 비스듬한 방향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옆모습이다.

조각처럼 반듯한 그 옆얼굴은 정태의가 눈을 뜬 줄도 모르고 심드렁한 얼굴로 정태의를 불러 대고 있었다.

과연, 이 남자라면 고함을 지를 만큼 화급한 상황에 있더라도 저렇게 태평한 얼굴을 할 만도 하지, 하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몹시 졸렸다. 눈꺼풀에 납덩어리라도 달아 놓은 듯이 졸음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고함을 다 지른 거지. 표정을 보니까 별로 급해 보이지도 않는데. ……아. 주위가 시끄러워서 그렇구나. 저 요란하게 쾅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어지간한 목소리로 말해서는 들리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태이. 일어나 보라니까.”

다시 예의 그 심드렁한 고함소리가, 졸음의 늪을 헤매고 있는 정태의의 고막을 두드렸다. 정태의는 다시 억지로 눈을 떴다.

“너 헬기 다룰 줄 알아?”

“응? 헬……?!”

흐릿하게 눈을 반쯤 뜨다 만 정태의에게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정태의는 난데없는 말에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LCH 기종 정도까지라면 아마 대충 다룰 수 있을 건데, 갑자기 그건 왜…….”

무거운 눈꺼풀을 손으로 비벼 억지로 위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들던 정태의는, “그래? 잘 됐군.” 하고 중얼거리는 대수롭잖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제대로 눈을 떴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잠기운이 싹 달아나버렸다.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미적거려서 한 대 후려갈겼더니 기절해 버렸지 뭐야. 오토 모드로 돌려 놓긴 했는데, 어떻게 하면 공중에 세워 놓을 수 있는지 몰라서 계속 근처만 빙글거리던 참이었어.”

매우 심상하게 중얼거리는 말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말보다도 먼저 의식 속에 날아든 것은, 눈앞에 펼쳐진 마을의 전경.

수십 미터 아래에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헬기는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어느 동네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높디높은 하늘 한가운데, 정태의는 떠 있었다.

기절했다가 눈을 떠 보니 하늘 위.

정태의는 눈을 껌벅이며 당혹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이라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하늘을 날고 있는 헬기 안이라는 것만 알겠다.

“아니 잠깐, 내가 왜 이런 데에…….”

“아니면 혹시 근처에 내려앉을 만한 데는 있어?”

정태의의 의혹은 풀어줄 생각도 없는 듯,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일단은 헬기를 착륙시킬 만한 공터가 없나 바깥을 열심히 살피던 정태의는, 곧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주택가라서 불빛도 별로 없어 어둑어둑한 그 마을은, 밤인데다 심지어 이렇게 상공에서 내려다본 적은 없어서 잘 알기 힘들었지만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저쪽에 보이는 작달막한 공원만 해도, 어째 몹시 낯이 익다. 어쩐지 여러 차례 산책을 하러 가 봤음직한 그 공원을 어둠 속에서 열심히 노려보던 정태의는, 주위를 흘끔거리다 크리스토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 베를린이냐?”

“여기서 몇 년이나 살았다면서 보고도 몰라? 매정하기는.”

“이렇게 어두컴컴한데, 하물며 이 고도에서는 처음 보는데, 더욱이 자다 깨서 정신도 없는데, 바로 알아본다면 그놈이 이상한 놈이지!”

정태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더러 매정하다고 타박을 주는 크리스토프에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

머릿속이 욱신거렸다. 아직도 약기운이 다 빠지지 않아, 마치 눈동자 안에 볼록렌즈를 넣어둔 것처럼 시야가 미묘하게 어지러웠다.

하나씩, 느릿하게나마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꿈이라도 꾼 것처럼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떠오르는 그 기억들은,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틀림없었다. 지금 이렇게 헬기로 베를린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현실과 연관지어 보자면, 그 외에는 답이 없었다.

“일레이는?”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그 기억이었다.

정태의의 눈에조차 섬뜩하게 비쳤던 그 모습.

표정 없이, 미묘하게 초점이 안 맞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달려나서 순식간에 사람들 몇의 목을 꺾어 버리며 일직선으로 목적하는 바로 다가들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정태의는 뒤늦게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그 모습을 직접 보았던 그 당시에는 마치 정신이 마비된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평탄하게 살아가던 통에 잊고 있었다.

그것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의 본성이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느릿하게 웃으며 사람의 목을 뜯어 버리는 것이.

그런 그가 쓰러졌다.

아직도 어깨 위에 그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일레이는.”

정태의는 다시 한번 물으며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기억 안 나?”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기억이……났다.

정태의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손을 내민 크리스토프에게 일레이를 넘겨주었었다. 넘겨주었다기보다는 그가 빼앗아간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곳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크리스토프뿐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을 터였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았을 거다.

결론적으로는 크리스토프 역시―일레이에 대해서는―못 믿을 놈이라고 판명이 났지만.

“그대로 버려두고 온 거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 상황에서 일레이까지 데리고 올 수는 없었을 거다. 아니, 정신을 잃은 동안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정태의 하나만이라도 데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온 게 신기했다.

하지만 온 사방에 적을 깔아 둔 남자를, 의식조차 잃어버린 그를, 심지어는 그의 뒤통수를 친 리하르트가 있는 곳에 그대로 버려두고 왔다니.

“설마 릭이 걱정된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크리스토프는 헬기를 내리기에 마땅한 곳을 찾아 바깥을 살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으음, 하고 턱을 감싸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태의는, 곧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타르텐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나는 널 다시 잠재워 버리겠어.”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백 번 생각해 봐도, 일레이 리그로우는 걱정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버려두고 온 곳에 남겨진 다른 인간들을 걱정하면 모를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정태의―정상적인 기준―가 고작해야 반쯤만 맞고도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정신을 잃고 만 그 약물을 그렇게나 몸속에 쏟아붓고도 연회장을 뒤집어 놓은 그 괴물이 걱정된다면 만인의 비웃음을 살 일이긴 했다.

“하긴 내일쯤이면 멀쩡하게 베를린에 나타날지도 모르지.”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멀쩡하게라니, 피로 칠갑을 해서 나타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긴 남의 피로 칠갑을 하는 건 멀쩡하다고 쳐야 하나?”

함께 일한 동료였다면 그런 부분으로는 이 남자가 자신보다 일레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정태의였지만 남의 피로 칠갑을 한 일레이라는 상상도 그리 달가운 건 아니었다.

옛 동료에게도 비인간성에 있어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사고 있는 놈인데, 그런데도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그놈에게 덜 익숙해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헬기의 오른쪽 아래쪽에 스쳐가고 있는 공원을 가리켰다.

“헬기를 내리기에 그나마 적당한 곳이라면 저기에 있는 공원 정도인데, 그리 넓이가 충분하진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가 볼까?”

정태의는 조종석을 아예 눕혀 버리고 뒷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다시피 해 조종간을 잡았다. 이미 스쳐 지나온 공원을 향해 커다랗게 선회해 돌아가며, 기울어진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래의 전경을 살핀다.

“공원이라……. ……카일의 집은 저쪽 근처였지.”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문지르다가 흘끔 시선을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 위치를 어림짐작으로 가늠해 보다가 묻는다.

“도보로 얼마나 걸리지?”

“3분. 뛰어가면 1분 안에도 갈 수 있는 거리지.”

새벽이나 저녁나절에 가끔 산책을 가곤 하는 공원은 집에서 매우 가까이 있었다. 규모가 작아서 집안의 앞뒤뜰을 느긋하게 오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가끔 담장 밖으로 바람 쐬러 나간다는 기분으로 오가곤 했다.

3분……, 하고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곁눈질로 정태의를 노려본다.

“국제수배범 주제에 집 안에 얌전히 숨어 있지 않고 한가롭게 산책을 다녀?”

“……, 반박할 말이 딱히 없긴 한데 네게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쾌히 납득이 안 가는 이유는 뭘까…….”

과거 자신의 행적과 이 남자의 행적을 비교해 본다면, 단연 이 남자 쪽이 더 수배범에 가까운 짓을 저질렀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세상의 불공평함을 느끼며, 정태의는 헬기의 고도를 낮추었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가로등의 위치나 시커먼 공간의 넓이 정도로 마을의 지리를 가늠하다가 고도를 바싹 낮추자, 마을이 더욱 쉽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겠다.

“그런데 넌 괜찮아?”

크리스토프의 손짓에 따라 고도를 더 낮추면서 정태의가 불쑥 물었다. 조금만 더 내려 봐, 조금만 더, 하고 손을 까닥이던 크리스토프는 의아한 시선을 던진다.

“타르텐에서 그렇게 나와도 괜찮은 거야?”

정태의는 일부러 시선을 바깥쪽으로 향하며 심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절로 목소리가 낮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뒤 어떤 경위를 거쳐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도리가 없지만, 최후의 기억이며 그 당시의 분위기 따위를 더듬어 보건대 결코 좋은 모습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계기반이며 전면유리에까지 튀어 있는 핏자국을 보면, 뒤에 남겨진 그곳의 상황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크리스토프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못 들은 건지도 몰랐다.

소리를 평소 이상으로 높여야 대화가 가능한 헬기 안에서, 정태의는 너무 조용하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언성을 높여 다시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아,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헬기는 어둑한 공원 상공에 이르렀다.

“어때, 좀 내릴 만해 보여?”

“글쎄……. 좀 더 내려가 봐. 가로등 빛이 너무 흐리다.”

이미 헬기의 고도는 지상의 건물들이 제법 자세히 보일 만큼의 높이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나마 주택가라 망정이지, 높은 건물이 비죽이 솟아난 번화가에서는 이 높이로 날지도 못했다.

이 이상은 힘들겠다 싶을 정도까지 고도를 낮추어 내려가자, 그제야 공원의 모습도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그럭저럭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드러났다.

“……윽. 안 되겠다.”

정태의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공원 가운데에 트인 공간은 비좁긴 했지만 그래도 잘만 하면 헬기 한 대쯤이나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넓이를 막론하고 내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몇 주, 정태의가 이곳을 찾지 않은 사이에 공원에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단한 공사는 아니고 얼핏 보기에 분수대를 새로 단장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주위에 목재며 벽돌 따위가 쌓여 있었다. 프로펠러의 풍압에 훌쩍 날아가기 십상이다.

정태의는 다시 약간 고도를 높였다. 그리곤 아, 그렇지, 하고 크리스토프를 돌아본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 학교가 있었어. 그렇게까지 규모가 큰 곳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학교 운동장쯤 되면 얼마든지 내릴 수 있겠지.”

“안 돼.”

정태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리스토프는 딱 잘라 말했다.

“너무 멀어.”

“공원보다는 멀지만 걸어서 몇 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아니, 안 돼. 사실은 공원도 너무 멀어.”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침묵하던 정태의는 이내 아아, 하고 납득한다.

착륙에서부터 집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고작해야 몇 분 정도의 거리라도, 앞서 지키고 선 사람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면 먼 길이다.

정태의는 몸을 주욱 펴 시트에 기대며 흐음,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들이 있는 위치는 이미 알려졌을 터였다. 이 위치에서 맴돌고 있는 그들이 어디로 갈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카일에게 죄를 짓게 되는군…….”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하나다.

도주가 허사로 돌아갈 위험을 최대한 방지할 것. 다르게 말하자면 착륙장에서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최대한으로 단축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에서 가장 가까이 헬기를 내릴 만한 곳이라곤 저 공원―그나마 저기에 내리지도 못한다―뿐인 이상,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다.

*

기절해 있는 조종사를 깨우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토프가 어지간히도 호되게 팼던 모양이다.

정태의가 한참을 흔들고 뺨을 두드려도 좀체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던 조종사는, ‘좀 더 세게 패면 일어나겠지.’ 하고 싸늘하게 말하며 크리스토프가 소매를 걷어올리자, 무의식의 와중에서도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낮은 신음을 흘리며 꿈틀, 눈꺼풀을 움직였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종사는 눈을 뜨자마자 총을 들이대는 크리스토프를 옆에 두고 울먹이며 조종간을 쥐었다.

이윽고 그들은 목적지의 상공에 이르렀다.

카일의 집 상공.

몇 년이나 살아온 익숙한 집을 낯선 각도에서 내려다보며, 정태의는 고글을 썼다. 헬기의 문을 열자마자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닥쳐 눈도 편하게 뜨기 힘들었다.

정태의의 옆에서, 눈을 약간 가늘게 뜰 뿐 딱히 고글도 쓰지 않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낙하산 내놔. 비치된 게 있을 테지.”

맡겨놓은 물건을 달라는 듯이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크리스토프에게, 조종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부들부들 고개를 저었다.

“어, 없…….”

“――을 리가 없지. 낙하산이 없는 헬기가 세상에 어딨어. 괜히 사람 귀찮게 수작부리지 말고 얌전히 내놔.”

크리스토프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손바닥을 내밀어 흔들었다.

“저, 정말로 없――.”

크리스토프는 두 번 묻지 않고 조종사를 철썩 후려갈겼다. 그나마 손바닥으로 때려서 이번에는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몹시 아픈 듯 머리를 감싸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조종사는 또 무슨 죄냐, 정태의는 운수 사나운 그를 가엾게 여기며 뒷좌석의 시트 아래를 더듬었다.

“헬기가 거기서 거기지. 낙하산을 비치해 둘 만한 곳이라면……아, 찾았다.”

정태의는 몇 차례 더듬지도 않아 손에 걸린 큼직한 꾸러미를 끄집어내었다.

꽤나 오래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낙하산을 찾아내자마자 기뻐하는 대신 조종사를 사납게 노려본 크리스토프는, 곧 뒤쪽으로 몸을 내밀어 뒷좌석의 뒤쪽 공간을 마저 더듬었다. 고개를 기웃하며 한참 더듬다가 다시 시트 아래를 더듬고, 심지어는 절대로 저만한 꾸러미가 들어갈 리 없는 천장의 부착 캐비닛까지 더듬어 본 다음에야 손을 거두었다.

다시 삭막한 시선이 조종사를 향했다.

“왜 하나밖에 없어.”

“워, 원래 이 기체 자체가 비상기동용이기 때문에…….”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조종사에게 벌컥 화를 내려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없는 걸 어쩌겠어. 이걸로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렇게 달래곤 캐노피를 살피던 정태의는, 커버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보다가 낮게 혀를 찼다.

“경량이잖아. 하중 80킬로짜리면……, 대충 90, 아니 100킬로까지는 어떻게 버틴다 치더라도 나만 해도 70인데……. ……너 몸무게, 30킬로는 넘지?”

대답 대신 주먹이 날아왔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 주먹을 피하며, 정태의는 으음, 하고 고민스레 중얼거린다.

“이거 하나로 두 사람이 내려가기엔, 좀 지나친 모험이로군.”

“그래도 하는 수 없지. 뭐, 괜찮을 거야. 예전에 나 아는 놈들은, 셋이서 하중 120킬로짜리에 매달려 뛰어내린 적도 있었어.”

크리스토프는 캐노피의 연결고리를 체크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것 하나로 둘이 같이 뛰어내릴 심산인 듯했다.

“120킬로에 셋이? 그래도 괜찮았어?”

그럼 80킬로짜리에 둘이라도 뭐 어떻게든……하고 가늠해 보던 정태의에게, 대수롭잖은 대답이 날아왔다.

“아니, 도중에 끊어졌어. 하나는 넉 달, 둘은 반년 동안 병원에 누워 지냈지. ……오케이. 체크 끝. 어디 한 번 뛰어 보자고.”

“아니 잠깐……, 그런 얘기를 하자마자 뛰어 보자는 말을 할 기분이 드냐, 넌…….”

정태의는 다급하게 크리스토프의 소매를 붙잡았다. 정태의의 한쪽 어깨에 안전고리를 채워 주던 크리스토프는 잡힌 소매를 흘끔 쳐다보곤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달리 방법 있어?”

“……. 최대한 고도를 낮춰서, 나무 위로 뛰어내리자……. 그럼 경상 정도로 그칠지도 몰라…….”

정태의의 말에 따라, 헬기는 고도를 조금 더 낮추었다. 그럭저럭, 그 높이에서 사람이 뛰어내려서 살아남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의 높이까지는 내려갔다.

낙하산을 각자 한쪽 어깨에 메고 안전고리를 연결한 두 사람은,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와 별 차이 없는 고도에서 몸을 던졌다.

맨몸으로 뛰어내리기에는 지나치게 높았지만 낙하산을 펼치기에는 무척이나 낮은 위치였기 때문에, 헬기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캐노피를 펼쳤다.

부욱, 기분 탓인지 머리 위에서 펄럭 펼쳐진 캐노피에서 뭔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일순의 자유낙하에 철렁한 심장이, 몸이 버팀줄에 텅 하고 걸리자 동시에 가볍게 튀어오른다.

아마도 그 낙하산은 특별히 공들여 만들어진 낙하산인 모양이었다.

80킬로의 하중을 견딘다고 표기되었는데도, 걱정과는 달리 그 두 배에 약간 못 미치는 무게를 매달고도 즉각적으로 찢어지거나 끊어지지는 않았다. 매우 위태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긴 했지만.

“다행히 일단은 버틴 모양이군.”

자유낙하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일반적인 낙하산의 하강 속도보다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정태의가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있던 크리스토프에게 중얼거렸다.

“음. 끝까지 버텨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지금 바로 끊어져도 죽지는 않겠다. 뼈나 몇 대 부러지겠지.”

심상한 얼굴로 섬뜩한 말을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는, 안뜰 쪽으로 착지 지점을 잡아 캐노피의 방향을 틀었다.

머리 위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날고 있다는 느낌을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는 소리다.

귀가 먹먹하게 멀어 버린 정적 속에서 오로지 바람소리만이 들려오는 듯한 감각.

그러나 정태의은 오랜만에 맛보는 그 감각을 오래 즐기지 못했다. 바람소리에 섞여 지지직, 불길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휙 고개를 들자 안전고리가 걸려 팽팽하게 당겨진 캐노피의 한쪽 끝에 줄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이……잠깐, 방향, 방향을 아예 확 틀어서 풀장 위쪽으로 가자, 어서!”

정태의가 다급하게 외쳤다.

“뭐? 풀장이면, 저쪽?”

뜰 한가운데를 목표로 방향을 잡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줄을 당겼다. 캐노피의 끝이 굽어지면서 방향이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꽤 깊이 찢어져 마음먹은 대로 방향 조절을 할 수 없게 된 캐노피는, 원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틀어지고 말았다.

코앞으로 거대하게 자라난 아름드리나무가 닥쳐왔다.

“앗, 안 돼, 안 돼, 좀 더 오른쪽, 오른쪽! 안 돼! 저건 페터가 엄청나게 공들여 키운 나무란 말……!!”

그러나 정태의의 외침은 허무하게 허공중에 흩어졌다.

찌직, 찌직, 불안스럽게 조금씩 더 찢어져 가던 캐노피는 결국 그들이 울창한 나무 옆으로 완전히 비켜나기 전에 주욱 찢어지고 말았고, 더 이상은 낙하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천 조각과 함께 두 사람은 추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그들로서는 나무를 쿠션 삼아 그 위에 떨어진 게 다행이었다. 지붕보다 높은 위치에서 수직낙하한 그들은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하지 않고 팔뚝만 한 나뭇가지에 겨우 걸릴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하며 굽어진 우람한 나뭇가지는 그대로 2층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갔고, 유리 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보안장치가 작동해 집이 떠나갈 듯 요란한 경보음이 온 집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숫제 마을 전체가 다 떠나갈 만큼 시끄러운 소리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어둠에 잠겨 있던 집 안에 갑자기 여기저기 불이 켜졌다. 이웃한 집들에서도 무슨 일인가 창문을 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으어…….”

멀리서 경비회사의 보안 점검 차량이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했을 때, 정태의는 옷자락 어디가 걸렸는지 아무리 버둥거려도 나뭇가지에서 헤어날 수가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포기해 버렸다.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나무에 걸려 있는 크리스토프는 처음에 약간 뒤척이는 듯했지만 이미 일찌감치 포기하고 얌전히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이 동네는 밤중에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는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는 결국 벌컥 소리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네가 할 말이 아니잖아, 그건!”

“그럼 넌 안 시끄럽단 말이야, 이 소리가? 네 귀엔 안 들려?”

나뭇가지에 걸린 이 팔만 좀 더 자유스러웠더라면 저 얄미운 멱살을 붙들고 마구 흔들어 줬을 텐데, 하고 애통해하며 정태의가 크리스토프를 노려볼 때였다.

나뭇가지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 2층 방의 불이 번쩍 켜졌다.

“내 책!! 어떤 놈이야!!”

그렇게 소리치며 파자마 차림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집의 주인 카일이었으며, 이제 보니 유리창이 깨어진 그 2층 방은 그가 목숨처럼 아끼는 서재였다.

“내 책! 내 책……?!”

깨어진 유리나 들이닥친 나뭇가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서가를 먼저 주욱 살핀 카일은, 순식간에 책 목록을 확인한 다음에야 창문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왜 나무가…….”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리며 창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던 카일은, 그제야 창밖에 대롱대롱 걸려 머쓱하게 이쪽을 바라보던 얼굴과 마주쳤다.

“……오랜만이네요, 카일…….”

“태이?!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아니 어쩌다 보니…….”

궁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정태의의 뒤쪽 멀찍이, 대문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멎었다. 그 대신 경비회사 직원들이 소란스럽게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도둑이니 강도니 하는 말들이 얼핏 섞여서 들린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카일은, 정태의의 뒤쪽으로 나뭇가지에 한 명 더 걸려 있던 그림자를 뒤늦게 발견했다.

“시끄러우니까 저 경보음부터 좀 꺼 줬으면 좋겠는걸.”

부루퉁한 얼굴로 적반하장을 실현하는 그 조각처럼 고운 얼굴을 본 순간, 카일은 간이 철렁 떨어져 내린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크리스티――, 아니, 크리스토프! 네, 네가 왜 여기!”

“왜냐니. 손님 좋아하잖아, 당신.”

“내가 좋아하는 건 손님이지 골칫덩이가 아냐!!”

대단히 억울하다는 듯 펄쩍 뛰며 부정하는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 아래에서 손전등 불빛이 비추었다.

“저기다! 저기 사람이 걸려 있어!”

“도둑인가?! 어서 경찰에 연락을!”

경비회사 직원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정태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페터! 나예요, 나라구요!!”

“…―태이?!”

늙직한 목소리가 놀란 듯이 정태의를 불렀다. 정태의는 안도의 숨을 쉬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밤중에 소란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별일 아니에요. 경비회사 분들, 그냥 돌아가셔도 돼요. 죄송합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정태의의 아래에서, 잠시 동안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는 사이십니까? 도둑이 아니구요?”

경비회사 직원이 미심쩍게 묻자, 정태의가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페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둑은 아닌데……, 나뭇가지가 저렇게 꺾인 걸 보니 개인 사유물을 훼손한 건 분명해 보이는군요. 경찰에 연락을 해도 무방할 것 같소.”

“페터! 미안해요! 날이 밝는 대로 바로 나무에 부목이라도 대어 놓을게요!”

정태의는 절망스럽게 외쳤다.

허공에서 바둥거리며 페터에게 사과를 하는 정태의와, 똑같이 허공에 매달려서도 태연한 얼굴로 이 동네는 밤중에도 지나치게 시끄럽다고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와, 그들을 올려다보는 경비회사 직원 및 속이 뒤틀린 정원사와, 2층 서재에서 정태의보다 더욱 절망스럽게 머리를 감싸쥔 집주인.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냐며 웅성거리는 이웃들의 소란을 해결한 사람은, 리타였다.

어디선가 사다리를 가져와 정태의의 발치에 대어 준 그녀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어 버릴 만큼 냉랭하고 삼엄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일단 내려오세요. 그리고 천천히 자초지종을 들은 뒤, 경찰에 넘기도록 하죠.”

***

아늑한 밤을 맞아야 했던 거실에는 때 아닌 불빛과 함께 침중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침중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카일뿐이다.

정태의는 가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렸고, 크리스토프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카일에게 손님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페터는 이 밤중에 정원의 외등을 켜 놓고서 꺾인 나뭇가지를 가다듬는 중이었고, 리타는 주방에서 그들을 위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래, 대충 너네가 왜 이리로 왔는지는 알겠는데…….”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카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통이 이는 듯 아까부터 계속 관자놀이를 누르는 손매가 어쩐지 애틋해 보였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이유는, 비단 늦은 시각에 갑자기 깨어나서만은 아닐 거다.

“드레스덴에서 아무런 연락도 못 받았어?”

크리스토프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묻자 카일은 끄응, 하고 신음을 내며 고개를 저었다.

“리하르트가 타르텐을 승계했다는 말은 들었어. 그래서, 어차피 전화를 해 봐야 받을 정신도 없을 게 뻔해서 축하 메시지나 전보로 보내고 말았는데, ……그 녀석도 승계한 당일부터 재난이었겠군.”

카일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본인이 재난을 불렀음에야 무슨 할 말이 있겠어.”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리자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뇌에 잠겨 있는 눈치이던 카일은 흘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너는 그래도 요 근래에 리하르트와 함께 다니며 그의 일을 도와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길래,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거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음, 하고 카일은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런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태의는, 배가 고프다고 호소하자 이 시간까지 식사도 안 했냐고 냉랭하게 꾸짖은 리타가 차에 앞서 가져다 준 토스트를 우물거리며―차는 언제쯤 가져다줄까 궁금해하며―그들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일과 크리스토프는, 음……, 일단은 소꿉친구겠네요.”

“음? 아아, 소꿉놀이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집안의 관계나 항렬로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서로의 집안에 큰 행사가 있어 한곳에 모일 때면 으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리곤 했으니까.”

카일은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듯이 허공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일레이와도 터울이 많이 져서 나이차가 꽤 나니까, 그들과 만나도 같이 논 적은 거의 없지.”

정태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한 바퀴 가까이나 나이차이가 난다면, 설령 같이 논 적이 있다 하더라도 같이 놀았다기보다는 데리고 놀아 줬다는 말이 옳을 성싶었다. 심지어 어른들 사이의 여남은 살과 아이들 사이의 여남은 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크리스토프와 가깝게 지내셨었나 봐요.”

카일의 앞에 무람없이 앉아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정태의는 어딘지 기묘하기도 하고 웃음이 날 듯 간지럽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동생에게 약한 넉넉하고 너그러운 형처럼 보였다.

타르텐과 리그로우는 친척이라 해도 다를 바 없을 만큼 절친하게 지냈다고 하니, 실제로 친척 형제와 비슷한 느낌인지도 몰랐다.

친척이라고 해 봐야 거의 없다시피 한 정태의는 유일한 자신의 형제를 떠올렸다. 나이차는 전혀 나지 않는 형을.

비록 드러내는 형태는 다르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재의 역시 동생에게 약한 넉넉하고 너그러운 형이다.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진지하게 말하면 정재의는 대부분의 것에 고개를 끄덕일 것임을. 형이 원하는 대부분의 것에 정태의가 고개를 끄덕일 것처럼.

“그 남자가 영 잘못 짚은 건 아니란 말야…….”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린 정태의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다가왔다. 음? 하고 눈동자만 굴려 그들을 번갈아 보는 정태의의 뒤에서, 리타가 차를 가져왔다.

한밤중에 난데없는 불청객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 때 아닌 차를 끓여야만 했던 리타는, 쌀쌀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늘 엄격하고 냉랭한 그녀의 표정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만히 바라보면 실상 이 집안의 실세는, 집 주인인 카일이라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그를 키워서 여태껏 길러 준 리타이기도 했다.

“정태의 씨.”

유난히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하마터면 막 집어올리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찰랑 흔들린 차를 몇 방울 손등에 쏟는 데에 그쳐서 다행이다.

“예……, 리타.”

정태의는 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그 순간 진심으로 크리스토프를 부러워했다. 어쨌든 이미 이 집에 목까지 푹 담그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이 집에서 확연한 외부인인 그는 리타의 야단을 맞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요. 다음부터는 돌아오기 전에 미리 언제쯤 오리라고 연락을 주세요. 그러면 밤에라도 배곯지 않도록 뭔가 준비를 해 둘 테니.”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이 늦은 시각에도 백발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틀어올린 그녀가 말했다. 정태의는 찻잔을 입에 댄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리타.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뵈어서 반가워요.”

정태의는 활짝 웃었다. 잊고 있었던 인사를 떠올리며 더없이 기쁘게 웃는 그를 보고도 리타는 눈 하나 까딱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정태의는 가만히 웃었다.

돌아왔다. 그런 느낌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이런 게 좋았다. 이 집 사람들과, 이곳의 공기와, 이곳의 분위기, 그런 것들이 마음 편하고 푸근했다.

“그러나 가능하면 상식적인 시간에 상식적인 방법으로 와 줬으면 좋겠군요.”

잊지 않고 덧붙이는 그녀의 칼 같은 말에도 정태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인 시간에 상식적인 방법이라…….”

문득 카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친 얼굴로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일어나 장식장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 안쪽에 화려하게 주욱 늘어서 있던 술병 중 하나를 꺼내었다. 헤네시를 집어들더니 단숨에 마개를 따 버린 그는, 병을 들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찻잔 대신 술병을 손에 들고, 그는 병째로 그 독한 술을 두어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난 이제부터 당분간 이 집에 상식적인 시간에 상식적인 방법으로 찾아올 인간들이 벌써부터 두려워지는데.”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그는, 병을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못 진지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크리스티……프,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나?”

“지금 다른 사람을 부른 것 같은데?”

“잘못 들었겠지, 나는 너를 불렀는데, 크리스토프. 그래, 그냥 크리스라고 하자.”

카일의 진지한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꼬며 지그시 카일을 쳐다보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을까 생각이라도 해 보는 것처럼. 그러다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없어. 전혀. 그냥 어쩌다 보니까 내 행동에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뿐이지.”

“사사건건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고의성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응?”

“글쎄, 가끔 그런 관계도 있는 법이지. 아, 그래, 이를테면 여태 제임스가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비수를 찌르는 걸 보면, 크리스토프는 확실히 카일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임에 분명했다.

당장 입을 다물고 다시 술병을 집어드는 카일을 보며, 정태의는 그 사이 거의 다 비운 자신의 찻잔에도 저 술을 좀 따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술 대신 차를 더 부어 준 리타가 빈 찻주전자를 들고 거실에서 나간 뒤, 거실에는 다시 조금 전과 같은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카일은 지금은 지쳤다기보다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간에 새겨진 주름의 깊이가 그의 고민의 깊이를 알려주고 있다.

“크리스. 네가 날 고뇌하게 만든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은 특별하게 각별하구나.”

이윽고 카일은 긴 한숨을 중얼거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크리스토프는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놈의 머리카락 잘라 버릴까 싶은 눈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노려보던 그는, 그 쌀쌀한 시선을 그대로 카일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선물이 있어.”

“뭐?”

갑자기 이야기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크리스토프를, 카일은 매우 미심쩍고 의심스런 눈으로 보았다.

주워온 조약돌이라도 꺼내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바지주머니를 뒤적인 크리스토프는, 그 안에서 꺼낸 것을 카일에게 휙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카일은 손바닥 안에 들어온 그 작은 물건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열쇠?”

“응. 비밀번호만 알면 바로 써먹을 수 있어. 금고번호는 열쇠 뒷면에 새겨져 있을 거야. 마이센에 있는 코메르츠.”

“이건…….”

“책 잘 봤어. 그때 가져갔던 책들에 더해서, 프라운덴의 ‘시간의 모습’ 1888년판도 같이 보관해 뒀어.”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어쩐지 서재며 침실이며, 갈 만한 곳은 죽어라 뒤져 봤는데도 책이라곤 종잇조각조차 보이지 않더라니, 처음부터 헛다리였군.

하지만 책을 빌려본 대가로 프라운덴이라. 카일은 대단히 이득 보는 장사를 한 셈이다. 여태 했던 마음고생을 깨끗이 갚고도 남겠다.

정태의는 더 이상은 별반 허탈하지도 의외롭지도 않아, 그저 자신의 헛고생만을 애도했다.

“비밀번호는…….”

“1234.”

“…….”

무겁게 입을 연 카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간결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나 성의 없는 숫자의 조합에, 카일은 다시금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태이 잘 부탁해.”

곧바로 뒤이은 크리스토프의 말에 이번에는 정태의가 잠깐 말을 잃는다.

“말투가 꼭 어디 가 버릴 사람 같군.”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너 데려다주러 온 거야. 나는 곧 나갈 건데.”

그러자 이번에는 카일이 물었다.

“어디로.”

“글쎄, 어디든.”

크리스토프는 손을 뻗어 카일의 앞에 있는 술병을 끌어왔다. 자신의 빈 찻잔에 두어 모금 정도만 따라, 마실 생각은 없는 듯 그 빛깔만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당신 머릿속에 있는 걱정 중 적어도 리그로우와 타르텐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야. 당신은 새로이 타르텐을 이끌어가게 된 리하르트와 얼마든지 교분을 쌓아 가도록 해. 아무리 리하르트라도, 당신의 특별한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태이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명분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다르다. 타르텐에서는 크리스토프를 돌려보내라고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었다. 비록 크리스토프는 타르텐을 떠났다고 하나 태어나 자란 과거를 바꿔 버릴 수는 없는 탓이다.

“생각해 보면 그쪽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나잖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형이지만, 어쨌든 그 수단으로 원하는 건 나지. 굳이 너를 그렇게 집요하게――.”

정태의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찾을 것 같았다. 아니, 찾을 게 분명했다. 집안사람이 집안일을 대대적으로 훼방을 놓고 사라져 버린 상황이다.

“리하르트라면 틀림없이 찾겠지. 집안을 이끌게 된 입장으로서는 물론이고,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네게는 그, 뭐랄까……, 경쟁심이랑은 좀 다르고, 하여간 좀 부딪히는 데가 있었으니까.”

카일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술병을 들어, 이번에는 주욱 넘겨 버렸다.

그 독한 술이 그렇게나 들어갔는데도 취한 기색은커녕 낯빛이 붉어질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이마를 문질렀다.

“내 참……. 그놈이 딴 방향으로 튀어서 골치를 썩일까 싶어 그것 좀 방비하려고 보내 놨더니, 일이 이 방향으로 꼬이나 그래.”

푸념처럼 중얼거리는 카일의 말에 번뜩 짚이는 바가 있었던 정태의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누군가가 딴 방향으로 튀지 않도록 방비하려고 보낸 게 혹시 접니까?”

“……. 술이 왜 맹물 맛이지……. 지나치게 오래 묵으면 술도 물맛이 된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라벨에 3star라고 버젓이 찍혀 있는 풋풋한 술병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카일을 보며, 정태의는 코메르츠로 달려가 저 금고에 홀랑 불을 질러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다가 이미 지나 버린 일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길 그만두고, 여전히 찻잔 안에서 일렁이는 술을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크리스토프.

얼굴이며 옷에는 점점이 피가 튀어 말라붙어 있었지만 그조차 흠을 주지 못하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봐야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알 리는 없을 텐데도.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너도 쫓기는 몸이 되겠군.”

카일은 소파에 푹 파묻히듯이 몸을 기대었다. 그제야 찻잔에서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크리스토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그런 거야 일 때문에 익숙하니까 새삼스럽지 않아. 그저 좀 귀찮을 뿐이지.”

“이제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갈 수도 없겠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어. 이번에도. 애초부터.”

띄엄띄엄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들릴 듯 말 듯 덧붙였다.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흐음, 한숨을 내쉬며 카일은 탁, 탁, 소파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두드렸다. 그 손짓은 어쩐지 뭔가를 체념한 듯 힘이 없다.

그때였다.

한밤의 환한 불빛 아래 흐르던 짧은 정적을 깨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는 전화가 울릴 시각이 아니었다. 업무 관련으로 연관된 비상 연락이라면 휴대폰이 울릴 터였다.

전화가 울린 순간, 정태의는 꿈틀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는 전화 쪽으로 눈길만 잠시 주었다 거두었고, 카일은 오늘 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쉰다.

“받기도 전부터 누구에게 온 연락인지 짐작이 가는 전화는, 거의 예외 없이 받기가 싫은 전화더란 말이야. 지금처럼.”

카일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전화는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전화이게 마련이다. 천근만근 쇳덩이인 양 무겁게 수화기를 집어들려던 손이 멈칫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카일은 수화기를 드는 대신 그 옆의 버튼을 눌렀다.

곧 전화가 연결되며 스피커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예, 카일 리그로우입니다.”

‘크리스토프를 바꿔 주시면 좋겠군요.’

응답을 하자마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낮고 위험스런 목소리다.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아주 약간 들떠 있는 그 초조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약간 뒤늦게야 아아, 하고 중얼거린다.

“리하르트로군. 오랜만이야.”

그러자 목소리는 침묵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실례했습니다, 라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언뜻 당황한 빛을 풍긴다.

정태의는 희한스럽게 전화기를―마치 그것이 리하르트 본인이라도 되는 듯―쳐다보았다. 어지간하지 않아서야 저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 사람은 아닐 텐데.

“조금 전에 소식 들었네. 자네가 타르텐을 승계했다지. 그래,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축하해. 정말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연락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크리스토프가 절 대신해 소식을 전해 주었나 보군요.’

“아아, 뭐 그런 셈이지.”

‘지나치게 늦은 시각에 갑자기 찾아가 놀라셨겠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모쪼록 너그럽게 봐주시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여유로운 웃음기를 띤, 그 웃음만큼이나 인상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문득 낯빛을 바꾼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전화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네가 대신――.”

불쾌한 기색을 고스란히 담아 벌컥 소리를 치는 크리스토프를, 카일이 가만히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스피커 너머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 옆에 있는 모양이군요, 크리스토프가. 목소리를 들어 보니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냉담해졌다. 가라앉는다기보다는 서늘하게 들뜨는 냉담함이었다.

‘갑작스럽게 실례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지금 데리러 가는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 전에 베를린으로 들어왔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 말이 들린 순간,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바뀌었다. 아마 굳어진 정태의의 얼굴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턱을 문지르던 손을 멈칫하며 잠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카일이 되물었다.

“베를린? 지금 자네가?”

‘예. 15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군요. 오래 폐를 끼치진 않겠습니다. 크리스토프만 데리고 바로 나올 테니까요.’

편하게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한번 사과하는 말이 이어졌다.

카일은 턱을 감싸쥐고 허공을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드레스덴에 귀한 손님들도 많이 오셨을 텐데 집을 비워도 괜찮은가?”

‘……. 집을 비워선 안 될 만큼 귀한 손님들은 연회를 마친 뒤 바로 떠나셨습니다. 바쁘신 분들이라서요. 프랑크푸르트에 바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시더군요.’

“흐음, 그렇군…….”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묻는다.

“자네는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베를린이라니, 자네야말로 급하게 이쪽에 볼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뭐 그 김이라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크리스토프를 데리고 가겠다고?”

‘예. 그러면 볼일은 끝납니다.’

아하, 그래, 하고 중얼거리며 카일은 멀뚱히 정태의를 보았다. 심각한 얼굴로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태의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태의 넌 안 찾는걸?, 하고.

원래 전 소외받는 계층이었어요, 정태의도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지만 과연 그가 알아보았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심경으로는, 계속해서 소외받는 계층이고 싶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어디에서나.

“난 돌아가지 않아, 리하르트.”

그때,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스피커를 통한 통화에서는 처음부터 별 의미가 없긴 했지만 갑자기 통화의 대상이 바뀌자 저편에서는 잠깐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내, 말썽꾸러기 동생을 다독이는 엄격한 형 같은 음색으로 되돌아왔다.

‘크리스토프. 적당히 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이 시간에 다른 집에 들이닥쳐서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다니. 돌아오지 않으면, 계속 거기에서 폐를 끼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 여기에서도 곧 나갈 거다. 하지만 드레스덴으로 돌아가지는 않아.”

‘크리스토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말했을 텐데. 승계가 결정되는 대로 나는 드레스덴에서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돌아가지 않아. 나는 더 이상 타르텐의 성을 따르지 않을 거다. ……나는 이제 그 집에 있는 아무와도 관계가 없어. 아무와도.”

아무와도, 마지막 말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 미묘한 어조를 전화 너머에서도 눈치챘을 터였다.

한동안의 정적 뒤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아져 있었다. 낮고 선뜩한, 마치 처음 전화를 걸어왔을 때와 같은, 그런 목소리다.

‘크리스토프. 네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 마음대로?’

“글쎄……. 하지만 적어도 날 그곳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분명해.”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 목소리에 낮은 웃음이 섞였다.

‘크리스토프. 네가 그렇게 떠난 뒤 작은숙모님은 자리에 누웠어. 몹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더군.’

사뭇 안타깝다는 듯 사실을 고하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프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나 곧 담담하게 입을 연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더욱 가지 않는 편이 낫겠군. 나를 보면 어머니는 더 안 좋아지실 거야. 내가 드레스덴으로 돌아간 걸 보면. 그녀는 그러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으니.”

‘―….’

“리하르트.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어떠한 말을 한다 해도, 나는 타르텐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녀가 너를 대신해 어떤 말을 하든, 그녀의 본심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타르텐에 흠집이 나는 일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심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던진다.

“내가, 추잡한 짓으로 네게 흠을 내기를 바라지 않아.”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기 속에서도, 이쪽에서도.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카일의 옆에서, 정태의는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감정이라곤 하나 드러난 바 없이 그런 말을 담담하게, 전혀 아픈 빛도 괴로운 빛도 없이 그것이 당연한 일상인 듯이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정태의는 이를 사리물고 말았다.

오래도록 계속된 침묵은 나직한 목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비앙카가 그런 말을 했나?’

크리스토프의 표정만큼이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냉막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고, 그런 뜻을 담아.

‘비앙카가 그렇게 말했나, 추잡하다고? 네가 내게 흠을 내었다고, 그렇게 말했어?’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답 대신 기묘한 눈으로 전화를 바라보았다.

다시 되묻는 목소리는, 바로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던 그 사람이 아닌 듯했다. 전혀 딴판으로, 가슴속이 싸늘하게 식을 만큼 선뜩하고 무시무시한 빛이 스며 나왔다. 그 누구라 해도 알아채지 않을 수 없도록.

“……. 그녀는 네가 더럽다고 한 게 아냐. 네게 흠이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설핏 눈살을 찌푸린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그러나 그 허약한 변명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하……, 하고, 바람소리처럼 낮은 웃음이 들려왔을 뿐이다.

‘네가. …―네가 추잡하다고, 네가! 하, ――아하하, 네가, ……네가 내게 흠을 냈다……?!’

이윽고 그 웃음은 점점 더 드높아져, 거친 고함소리처럼 바뀐다. 듣는 이의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거칠었다. 그것은, 정태의가 알고 있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 돌연 전화는 뚝 끊어졌다.

전화기의 푸른 램프가 빨갛게 바뀌며, 스피커에서는 뚜――, 긴 신호음만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든 거실에서, 그들은 말없이 그 전화만 바라보았다. 굳은 듯 전화를 바라보던 카일이 천천히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화가…….”

전화기를 가리키며 그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이 집의 대문 바로 앞에 방문객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언뜻 핏기가 흐려지는 듯했다. 정태의는 딱딱한 얼굴로, 인터폰의 널찍한 화면을 바라본다. 그들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는 화면에는, 바로 직전까지 통화를 했던 남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렇게 선뜩하게 외쳤던 게 거짓말인 듯, 리하르트의 얼굴에는 씻은 듯이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분노도, 불쾌감도, 여유나 예의조차도.

초인종 소리를 듣고 리타가 나왔다. 그러나 그녀를 가로막으며 카일이 대신 인터폰을 들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았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는 카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곧바로 크리스토프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크리스토프는 카일의 뒤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카일이 내미는 인터폰 속에서, 거기에 크리스토프가 있다는 게 보일 리도 없는데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리 나와, 크리스토프. 지금 바로 돌아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그 여자를 죽여 버리겠어.’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약간 굳는가 싶었다. 그러나 잠시 침묵하는 동안 다시 표정을 지운 그는 짧게 대답했다.

“난 가지 않아.”

‘크리스토프,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냐.’

“나도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아. ……너는 내게 농담으로 어떠한 말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말하는 와중에도―설령 내가 원하지 않는 말을 했을지라도―네게 농담이나 거짓말은 한 적이 없었어.”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싸늘한 정적만이 흘러나오는 그 인터폰을 내렸다.

카일은 옆에서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불쑥 말했다.

“쉬는 게 좋겠군.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일이 생겼어. 그래, 나는 쉬어야겠어.”

크리스토프는 흘끔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그를 본 체 만 체, 다시 인터폰을 든다. 화면이 켜지자 거기에는 여전히 리하르트가 비치고 있었다. 얼음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 화면 위로 떠오른다.

“거기 있나, 리하르트? 나는 이만 쉬어야겠는데.”

카일이 말을 걸자, 움칫 턱을 당긴 그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크리스토프만 데리고 곧 돌아가겠습니다. 잠시 들여보내 주십시오.’

“아니, 아니, 손님을 집안에 들이고서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마땅히 대접을 해야겠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몹시 피곤해. 리하르트, 자네도 지금은 상당히 피곤한 모양이니, 돌아가서 쉬고 머리를 식힌 뒤 내일 다시 와 주면 고맙겠군.”

손님을 집안에 들이고서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아예 들여보내지도 않고 문전박대라니 그것도 좀……하고 생각한 정태의였지만, 그보다도 그가 말한 내용에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야. 내 귀한 손님으로.”

카일의 말을 뜻밖으로 여긴 것은 정태의만이 아니었는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던 크리스토프가 설핏 고개를 기울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짤막하게 침묵을 지키던 리하르트가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저의, 타르텐의 형제입니다.’

그 말에 크리스토프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더 이상 그 이름을 쓰지 않으리라고 했을 텐데.”

“……그는 아니라고 하는군.”

뻔히 들렸을 그 말을 카일이 다시 한번 전하자, 리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카일을 직시하며 진지하게 말한다.

‘크리스토프가 혼자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는 제 가족입니다.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모쪼록 타르텐과 귀가의 오랜 교분이 빛을 바래는 일이 없도록 재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뒷말에 미묘하게 힘이 실렸다.

카일은 난처한 듯 흠……,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카일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당혹스럽거나 당황스런 빛은 없이 그저 약간 난감하기만 한 듯 잠깐 혀를 찼다.

“리하르트. 오늘 승계식에서 있었던 일―그들이 이 시각에 이곳에 찾아온 경위―에 대해서는 대충 전해 들었어.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탓하거나 책망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는 점을 먼저 알려 두고 말하는 거네만――.”

카일은 그렇게 전제를 깐 뒤, 흘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소파 등에 기대어서 오도카니 서 있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친다. 그 하얗고 무심한 얼굴이,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듯 약간 기울어졌다.

카일은 문득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찌푸린다. 아무도 없는 곳에 넋 없이 서 있는 어린애를 바라보는 것처럼.

“타르텐과 리그로우의 오랜 교분에도 불구하고 자네에게는 그 교분보다 더욱 절친한 친교를 맺어 새로 사귈 곳이 나타났듯이, 나에게도 가문의 오랜 교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관계와 그런 상황이 있는 법이라네.”

카일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말대로, 결코 탓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리하르트가 리그로우보다―정확히는 일레이보다―알 사우드의 손을 들어 줬다고 해서 앙갚음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그저 크리스토프는 카일의 귀한 손님이며, 그 이상으로 소중한 벗이었을 뿐이다.

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비록 카일이 그를 탓하는 게 아니라고는 해도 뭐라고 할 말이 없기도 했을 터였다.

“크리스토프는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무를 거야. 어차피 그가 이곳에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타르텐의 정보망이라면 사람 하나의 행방쯤은 쉽게 알 수 있을 테니 상관없을 테지만.”

‘……크리스토프를 타르텐으로 돌려보내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설마 그럴 리가. 내가 돌려보내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지. 나는 그저, 크리스토프가 이곳에 머무르는 한 그는 마땅히 내가 보호해야 할 내 손님이라는 말을 하는 것뿐이야. 그가 어디로 가고 말고는 그의 자유지. 내 말을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그것은 리하르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일을, 몹시 희한하다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 푸른 눈을 깜박이면서.

“……. 나더러 여기 있으라고?”

“그야 네가 좋을 대로.”

간결하지만 냉랭하지는 않은 짧은 대답에, 크리스토프는 잠시 더 눈을 깜박였다. 문득 그 표정 없는 얼굴이 약간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흠, 하고 어쩐지 풀이 죽은 어린애처럼 약간 시선을 떨어뜨린다.

“돌아가서 쉬고 내일 다시 오게. 내일은 자네도 내 손님으로 맞아들일 테니, 만나서 함께 식사라도 하면 되겠지.”

카일은 다시 리하르트에게 말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온 순간, 크리스토프는 덜컥 시선을 들며 카일을 노려본다. 그러나 막 소리를 지르려는 크리스토프의 입을 손바닥으로 덮어 밀어 버리며, 카일은 “그럼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군.” 하고 리하르트에게 말을 맺었다.

‘……. 그러시면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대단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리하르트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크리스토프가 있는 쪽으로 얼핏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돌아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차는 이내 떠나고, 화면에는 어두운 밤의 정적만이 비쳤다.

휴……, 카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사납게 시선을 번뜩이고 있는 크리스토프와 마주쳤다.

“난 저놈 안 만나. 밥도 같이 안 먹어.”

딱 부러지게 주장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카일 역시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럼 이 집에서 나가. 태이도 데리고.”

얌전히 뒤쪽 소파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정태의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갑자기 화제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잠깐, 왜 나까지……!”

“싫으면 둘이 같이 착한 손님답게 여기 있든가.”

대뜸 그렇게 대꾸하며 눈을 부릅뜨는 카일은, 이제 지치다 못해 피폐해 보였다. 지쳤으니 쉬어야겠다고 리하르트에게 했던 말이 완전히 빈말만은 아니었던 듯, 그는 다시 소파에 앉을 생각은 없는 듯 침실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만 가서 마저 자겠어. 자네들도 가서 쉬게나. 미안하지만 태이, 크리스에게 손님방을 안내해 줘. 나는……, 나는 수백 년 어치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군.”

카일은 그들에게 가볍게 손으로 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몹시 서글퍼 보였다. 그만큼이나 서글픈 혼잣말소리가 중얼중얼 뒤를 따랐다.

“가만 있자, 이 사태는 또 어떻게 수습한다……. 타르텐 쪽도 문제지만 알 파이살, 알 사우드……. 심지어 이 사단이 났으니 일레이 이놈은 이제 또 어떤 골치 아픈 일을 벌여 놓을지 모르고, ……아아, 이번에야말로 제임스가 그만두겠다고 할 거야. 이번에야말로 사표를 내던지자마자 종적을 감춰 버릴 게 틀림없다고. 이번에는 무슨 수로 그를 잡아 둔다지……!”

비탄에 젖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실에서 막 나가려는 카일을, 정태의가 황급히 붙잡았다.

“카일, 잠깐……. 아무리 그래도 오늘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인데, 리하르트와는 한동안은 안 만나는 편이…….”

정태의가 애써 허둥지둥 말을 했지만 카일은 삭막하게 눈을 치떴다.

“내가 지금 단 하나 있는 친동생의 생사도 알 수 없어 가슴이 새카맣게 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경 쓸 정신이 있어 보이나?”

고개를 불쑥 들이대며 심각하게 묻는 카일을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보다가,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붙잡았던 팔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가서 쉬세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말로나마 대충 상황을 때워 버리고 지금은 그저 얼른 쉬고 싶을 따름이라는 카일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 온 탓이다.

생사를 알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 가슴이 새카맣게 타는 거겠지, 하고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카일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거실에서 나섰다.

그리고 거실에는 크리스토프와 정태의, 둘만 남았다. 처음에 정태의가 드레스덴으로 그를 찾아갔던 그때처럼, 그들은 다시 그렇게 둘만 남았다.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그때와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는 길목 앞에 서서, 그들은 눈만 껌벅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정태의는 문득 웃고 말았다. 피식, 웃을 일이라곤 하나 없었는데도 갑자기 웃음이 났다.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었는데……, 돌아와도 상황은 바뀐 게 없네.”

“왜. 더 열악하게 바뀌었잖아.”

크리스토프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 심상한 얼굴과 그 대사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있어서, 정태의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우며 웃었다.

그 열악해진 상황 속에 나란히 앉은 크리스토프도, 그런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얼핏 웃었다. 익숙하지 않은 웃음을 저도 모르게 입가에 떠올리면서.

***

어쩌면 사람마다 고유한 체온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주 잠깐 의식 위로 떠올랐다가 도로 사라져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생각이 지금 다시 떠올랐다.

뺨을 감싸는 손바닥이 있었다.

넉넉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체온으로 알 수 있다.

아……, 일레이다.

잠결에 어렴풋이 생각했다. 잠깐 멈칫했던 몸은 그 익숙한 체온을 떠올리곤 다시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의 체온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 직후에도, 차 위에 덮인 눈을 맨손으로 쓸어내고 난 직후에도, 그의 체온은 알 수 있다.

온도와는 달랐다. 그의 손은 시원할 때도 있고 따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는 늘 같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손길도 마찬가지다.

세게 누르건, 살짝 문지르건, 닿을 듯 말 듯 스치건, 그 역시 그의 손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정태의는 눈을 뜰 필요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뜨고 싶지 않았다. 지독하게 피곤하고 졸렸다. 머릿속이 넉다운된 듯이 지쳐,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다.

‘태이. ……죽었나?’

그 봐. 역시 이놈 맞지.

귓가에 바람소리처럼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자는 사람의 귀에 대고 저런 흉흉한 말을 중얼거릴 인물은 정태의가 아는 가운데 일레이밖에 없었다.

――안 죽었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눈꺼풀도 들어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저 말에는 대꾸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었나 보다 하고 파묻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웃는 기척이 들렸다.

이어, 뺨에 닿았던 손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 대신 다른 체온이 닿아 왔다. 약간 까슬하게 메말라 있는 그것은 입술이다.

그 입술은 정태의의 뺨을 문지르다가 입술로 옮겨왔다.

가볍게 잇몸을 핥는 혀는, 입을 벌리라는 신호다.

――졸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을 하느라 벌어진 잇새로, 기다렸다는 듯이 혀가 밀려들었다.

――피곤해. 지금은 잘래. 나중에 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도록 피곤한데도,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눈을 뜨면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눈만은 꿋꿋이 감고서 투덜거린다.

‘너는 계속 자도 돼.’

맞닿은 입술이 속삭였다.

정태의는 으으음, 하고 못마땅하게 중얼거렸지만 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

――진짜로 피곤하다니까……. 내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너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정말 별일이 다 있었다구……. 몸도 피곤하고, 정신도 너덜너덜…….

‘그래. 그래. 계속 자.’

정태의가 계속 투덜거려도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낮게 웃어, 그 숨결이 입속으로 불어든다.

――정말 잔다? 또 예전 언젠가처럼 나중에 가서, 이래도 눈 안 뜨고 배기냐고 딴말하면서 괴롭히면 화낸다.

또 웃는다. 그래, 더 자, 지금은 쉬어, 그간 많이 지쳤을 테니, 그렇게 속삭이면서 가만히 입을 맞춘다.

……. 혹시 이놈이 그놈이 아니라 딴놈인가. 어쩐지 목소리가 무척 다정했다. 좀처럼 듣기 힘든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그래서 정태의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입안을 헤집고 있던 혀를 한 번 살짝 빨아 준다.

그 순간, 움직이던 혀가 멈칫했다.

얼핏 의아했지만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다시 꼬박꼬박 의식이 썰물처럼 멀어졌다.

깜빡 불이 꺼졌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고 보니 불이 켜져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불현듯 정태의는 어, 하고 생각했다.

배와 허리 근처를 핥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살갗이 서늘한 걸로 봐선 어느새 옷가지가 몸에서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뭐야……. 나 자면 안 돼? 응?

다시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이 직접 맞닿아 있는 걸 보니 아래에도 옷이 없다. 아니, 온몸에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도 된다니까.’

아랫배 근처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 더 내려갔다. 어, 어, 하고 정태의가 눈살을 찡긋거리는 사이에 축축한 입속으로 힘없이 늘어진 살덩이가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으……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말한다.

몸에 힘 빼고 편히 자, 그냥 맡겨 두고, 그렇게 말하기에, 잠시 몸을 움츠렸던 정태의는 얌전히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말마따나, 곧 기분이 좋아졌다. 어렴풋이 걱정했던 것처럼 숨이 막히고 초조해지는 쾌감이라기보다는, 따뜻한 물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다. 느리고,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혼곤하게, 수면 가까이 갔다가 저 아득한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그렇게 의식이 일렁일렁 흔들렸다.

――좋아…….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아래에서 그가 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물결에 몸을 싣고 흔들거리는 사이에, 머리 위에서 빛이 일렁이던 수면이 다가왔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어느 순간 빛이 급속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 ……!!

짧은 숨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아래에서도 왈칵, 기분 좋게 쏟아져 나오는 뭔가가 있었다. 절로 움츠러드는 몸이, 몇 번이나 튀어오르며 휘어졌다.

그 몸짓과 함께, 간헐적으로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던 빛이 이윽고 다시 저만치 멀어졌다. 그런 뒤에야 정태의는 기분 좋은 정적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 ……혹시, ……. 설마, …….

드문드문 중얼거리자 낮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잘 먹었어.’

――으, ……, ……, 삼켰어?

‘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중얼거리며 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났다. 그걸 왜 삼켜, 하고 투덜거리는 정태의의 입에, 그가 입을 맞춘다.

잠깐, 그걸 삼킨 다음에 입을 맞추면 아무리 내 거라도 좀……, 아니, 내 거니까 더 싫다고, 정태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그는 몇 번이나 더 입술을 겹친다.

‘기분 좋았나?’

정태의가 항의하는 말은 듣지도 않았는지 그가 물었다. 정태의는 잠시 입속으로 투덜투덜거리다가도, 몸에서 힘을 풀며 응, 하고 대답했다. 기분 좋았어, 하고.

‘그렇군. 그럼 이번엔 내가 즐겨도 되겠지.’

――……. 지금 이런 말 하면 약아빠진 거겠지만, 나, 여전히 졸린데…….

‘그대로 자도 돼. 말했잖아, 자라고.’

눈꺼풀 위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도 일어나 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러기에는 역시 아직도 죽을 듯이 피곤했다. 오히려 아랫도리가 녹진하게 풀리고 나자 더 졸리다.

――응, 그럼 미안하지만 난 잔다. 나중에 일어나면 그때 갚아줄게.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쌔근쌔근 숨을 내쉬었다.

웃는 기척과 함께 손이 다가왔다. 그 손은 정태의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곧 손에 두툼한 살덩이가 닿았다. 유난히 뜨거운 그 살덩이는 무겁게 늘어져 있었지만, 정태의의 손가락을 하나씩 거기에 감아서 말아쥐게 하고 나자 아주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맥박이 점차 빨라졌다. 정태의의 손 위에 겹쳐진 그의 큼직한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겁게 두근거리는 성기는 곧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 손으로는 미처 다 감싸 쥘 수 없을 정도로까지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한 손으로 다 잡히지 않을 정도라니 좀 너무한 크기다……, 하지만 이놈은 손도 크니까 다 잡힐지도 몰라, 몽롱한 가운데에도 손 안의 부피감에 질리고 마는 정태의였다.

이윽고 그 물건은 부풀만큼 부풀어 단단해졌다. 슬슬 막바지가 다가왔을 즈음이었다.

문득 그가 정태의의 손을 놓는가 싶더니,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졸음 속에서도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가 가만히 정태의의 손을 걷어내었다. 뒤이어 뭔가 살짝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아, 콘돔이다.

……. ……콘돔? 손으로 하는데 콘돔은 왜.

정태의가 의문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정태의의 다리를 들어올려 벌리며, 그가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나……, 나……, 자고 싶다니까…….

정태의가 잠에 취한 채로도 덜컥 울 것처럼 울상을 하고 중얼거리자, 정태의의 위로 몸을 숙인 그가 속삭였다.

‘괜찮아. 힘 빼고 편하게 있어. 천천히 할 테니까.’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안 돼.’

――…….

‘오늘은 안 돼, 태이. 오늘은 반드시 너를 실감해야겠거든. 네가 정말로 여기에 있다는 걸.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단 말이야, 오늘은.’

가슴이 맞닿았다. 그의 숨결이 귀를 스치면서, 뜨겁게 달구어진 살점이 아래에 닿아 꾸욱 눌러 왔다. 잠결에도 숨이 막힌다.

‘내 심장이 약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잠에 절어 몸이 늘어진 탓일까,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숨이 살짝 막히긴 했지만 정신이 확 들도록 고통스럽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허덕, 허덕, 짧은 호흡을 하며 허리를 약간 당겼다. 좀 더 편하게 몸 안에 담길 수 있도록,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준다.

――응. 넌 절대로 심장이 약하지 않아. 아주 튼튼하지.

‘그래. 그런데도 부스러지는 줄 알았다고. 정신을 잃으면서, 어쩌면 심장이 부서져서 의식이 멀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어졌다. 정태의의 허리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정태의가 으, 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얼른 힘을 풀었지만.

――음……, 그래도 봐, 멀쩡하잖아.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마자 정태의는 약간 후회했다. 몸속 깊숙이 자리 잡은 성기가 얕고 깊은 추삽질을 시작하자, 별로 멀쩡하지도 괜찮지도 않을 것 같았다. 굉장히 많이 힘들어서 조금만 지나치게 움직이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할 걸.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가 여느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확연했기 때문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곧 몸속이 젖어들었다. 잘박거리는 물기가 배어나오는 그 느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빡빡하던 살덩이가 한결 편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내 몸은 이제 정말로 이 남자한테 맞춰져서 길이 들었구나,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태이, 태이, 그 낮은 목소리로 연신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서, 정태의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할 때까지 그에게 맞추어 몸이 흔들리는 율동조차, 지금은 어쩐지 요람을 살살 흔들어 주는 것 같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어느 순간 딱 멈추었을 때, 정태의는 몸속에서 격렬하게 맥박치는 고동에 맞추어, 자신도 또 한 번 아련하게 물결을 쏟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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