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긴 하루(2) (28/34)

***

주인공은 누가 봐도 확연했다.

승계 경쟁이라는 건 말뿐, 실상은 이미 수년이나 전부터 누가 승계하게 될지는 정해져 있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론이 나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겸손한 본인뿐이었다.

그 당사자, 리하르트는 대연회장 앞쪽에 사람들 속에 섞여 서 있었다.

벌꿀처럼 달콤한 웃음을 띤 사탕과자처럼 사랑스런 연인의 허리를 끌어안은 리하르트는, 구름 같은 인파들 사이에 있는데도 단연 눈에 띄었다.

“어디서 본 듯한 여자네…….”

정태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입맛이 쓴지 몇 번 입맛을 다신다.

“흠? 네가 저 여자를? ――아아, 그래, 요전에 바에 갔을 때 봤겠군. 캐비닛 안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을 테지만.”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이내 기억을 떠올린 듯 빙글 웃었다. 정태의는 어, 맞아……하고 어둡게 중얼거리며 맥주캔을 잘근거렸다.

캐비닛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제대로는 못 봤을 거다. 그때 리하르트가 저 여자를 데리고 하던 일은 멀쩡히 고개 들고 구경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때 정태의는 리하르트가 어째서 암암리에 상변태라고 욕을 먹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저 남자는 애인도 있는 주제에 크리스를 건드렸던 거야?”

정태의는 까드득, 맥주캔을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지나가던 급사가 들고 있던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하나 집어든 일레이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정태의를 보았다.

“애인이 있는 것과 크리스토프를 건드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그 물음에, 정태의는 어이없이 일레이를 보았다. 그러다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인다.

“……. 너도 혹시 나 외에 다른, 그러니까 뭐랄까, ……잠자리 상대가 있어?”

일레이는 말없이 정태의를 보았다. 그 무심한 시선은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부분에 대한 관념이 없는 건가.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는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의미였군. 먼저 후자의 물음에 답하자면 UNHRDO에서 나온 뒤로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태이, 네 첫 의문은 애초에 방향이 틀렸어.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손을 댄 건 애인이 있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 그는 크리스토프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것도, 단지 자신의 욕구를 풀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는 단순히 크리스토프를 짓밟고 싶었던 것뿐이지.”

“아니, 하지만 그 수단이 말이지, 애인을 둔 몸으로서는 대단히 불건전하지 않아?”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때려눕힌 거라고 보면 납득하기 쉬울걸.”

정태의는 평연한 얼굴로 말하는 일레이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안 된다. 역시 이 남자와는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사고의 개념이 다르게 생겨먹어서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하나만은 알겠다.

그것은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육체와 함께 정신을 괴롭히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흠, 못마땅한 한숨을 쉬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찌 되었든 몇 시간만 지나면 더는 못 볼 꼴을 보지 않아도 된다. 정태의도 크리스토프도, 좋은 기억이라곤 별로 남지 않은 이 드레스덴에서 떠나게 되니까.

“승계 결정인지 뭔지 빨리 나 버리고, 승계식인지 뭔지도 빨리 끝나 버리면 좋겠군. 어서 베를린으로 돌아가고 싶어.”

정태의가 투덜거리자 일레이의 눈매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타르텐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딱히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좀 씁쓸한 모습들을 많이 봤지.”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떤 모습들일지는 그 역시 어렵잖게 짐작이 갈 터였다.

“끝나면 바로 베를린으로 갈 거지? 아니면 남아서 처리할 일들이 더 있나?”

당연히 같이 돌아갈 셈으로 확인차 물어본 정태의였지만, 뜻밖에 일레이는 가볍게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 가야 할 것 같은데.”

정태의는 고개를 모로 꼬아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뭐야. 석 달이나 바깥에 있었으면서 또 곧바로 다른 일을 하러 가는 거야? 이번엔 얼마나 걸리는 일인데.”

“글쎄. 며칠 안 걸릴걸. 사나흘 정도면 충분하겠지.”

“흠……. 이번엔 무슨 일이야?”

평소에 중장기로 바깥에서 일을 하고 오면 몇 주는 집에서 쉬곤 하는 일레이였기에, 석 달이나 되는 일을 마치고 곧바로 다른 일을 하러 간다니 의외였다.

괜찮은 벌잇거리라도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별 뜻 없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제야 일레이는 “뭐 평소와 별 다르지 않은 일.”이라며 미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군……. ……크리스토프는 어디로 가려나…….”

“그놈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 어딜 가든 몸값 비싸게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놈이니.”

그야 네 동료였었다는데 어련하겠어, 하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먹고 사는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때였다. 안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꺼낸 일레이는 액정을 확인하곤 정태의에게 가볍게 손짓한 뒤 대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눈짓으로만 그를 배웅한 정태의는, 여전히 입구 근처의 벽에 기대어 서서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상상했던 것만큼 화려한 연회는 아니었다.

며칠이나 전부터 사람들이 정신없이 분주하게 오가며 준비하던 모습이며, 아침 일찍부터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들던 모습 따위에서, 정태의는 뭔가 굉장한 것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규모가 크지 않을 뿐, 내실을 따지자면 이 정도로 화려한 연회는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연회장 안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만 봐도, 어디를 가든 가장 상석에 앉아 귀빈 대접을 받을 사람들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문간 옆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나 몰라…….”

정태의는 슬쩍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리하르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그 사탕과자 같은 여자와.

……윽.

반사적으로 꿀꺽, 맥주를 삼키면서 정태의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이미 눈은 마주친 뒤였고, 그녀 역시 정태의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기왕이면 끝까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길 바랐건만. 설령 마주친다 해도 기억 못해 줬으면 했는데.

그때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적나라하고 낯부끄러운 모습을 본 것은 정태의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정태의의 못 볼 꼴을 보았었다.

피차 동지의식을 느껴도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정태의는 그런 일로 동지의식을 느끼고 말을 섞을 만큼 발랄한 성격이 못 되었다.

나가야겠다. 그냥 슬쩍 모른 척하고 나가 버려야겠어.

정태의는 다 마신 맥주캔을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은근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타이밍을 잘 맞춘다고 해야 하는지 못 맞춘다고 해야 하는지,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던 리하르트가 뭘 봤는지 그녀에게 뭐라고 귀엣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홀로 남은 그녀는, 그대로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텐데 그곳에서 벗어나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정태의를 향해서.

“잠깐, 저 여자 왜 오는 거야…….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못 본 척해 주는 게 미덕 아니냐고. 이봐, 오지 마, 오지 마.”

정태의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얼른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필 그때 막 연회장으로 들어온 요한이 정태의를 붙들고, 웰던으로 지나치게 익어 버린 고기의 딱딱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통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간신히 요한을 밀어내고 막 연회장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그녀가 지척에 와 있었다.

“김영수 씨?”

잡혔다. 젠장. 잡혔다. 잡히고 말았다. 아니, 그래도 아직은 벗어날 기회가 있을 터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꼼짝도 않고 침묵하던 정태의는, 이내 여성을 존중하는 상냥한 신사의 웃음을 띠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오랜만에 뵙는군요, 미스……?”

“미리암.”

잠시 기다렸지만 성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색한 기다림 끝에 정태의는 다시 한껏 웃으며 그렇군요, 미리암, 하고 말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정태의는 요 몇 년, 이렇게 가까이 다가서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눈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갑자기 리타가 몹시 그리워졌다.

“그때는……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었죠.”

미리암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면 이쪽도 덩달아 낯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

“뭐……피차 어쩔 수 없었죠.”

정태의는 천천히 걸음을 복도 끝 쪽으로 옮겼다. 화장실이 그곳에 있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쨌든 화장실로 가서 적당히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낯선 여자와―친한 남자라 해도 싫지만―단란하게 수치의 기억을 나누는 취미는 없었다.

“리하르트는, 어……, 그래도 평소에는 잘 해 주죠?”

“예. 원래는 좋은 사람인걸요.”

순식간에 할 말이 궁해졌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성적인 취향이 다소 기괴하다고 해서 그것이 인성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성관계에서 가학적인 성향을 띤다고 해서 평소에도 사람을 괴롭히며 즐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관련성과는 전혀 별개로, 리하르트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의 연인이라는 그녀에게 굳이 말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으니 입은 다물기로 했지만.

“요즘에는 워낙 바빴으니 잘 못 만나셨겠어요. 명색이 애인인데 잘 못 만나면 아무래도 쓸쓸하지 않아요?”

정태의가 최대한의 사교성을 발휘해 말하자 그녀는 약간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애인이라니 그렇지 않아요. 요 얼마간은 만나더라도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는걸요. 이제 그가 집안을 잇고 나면 더 바빠질 테니 거의 만날 수 없겠죠. 어쩌면 또 몰라요, 오늘로 끝일지도.”

“예? 아니 뭐…….”

정태의는 그제야 뒤늦게, 리하르트의 여자 버릇이 나쁘다고 얼핏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나쁘다기보다는 가볍다는 편이 옳을까.

……하긴 저런 성격이면 한 사람을 쳐다보며 살 것 같진 않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가 그녀와 적당히 헤어질 틈을 엿볼 즈음이었다. 문득 그녀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때, 가신 뒤에 생각 많이 했어요.”

“예?”

“걱정이 됐거든요. 혹시라도 크게 다치셨던 건 아닐까 하고. 남자분들끼리 관계를 하면 보통이라도 몸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 그래서 계속 마음에 걸렸었는데…….”

정태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난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가 정태의를 바라보며 사랑스레 웃는다.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을 뵈어서 기뻤어요. 저와 절친했던 친구 중 하나도, 운 없이 하룻밤 지낸 상대가 거칠고, ……좀 우람했던 사람이라, 그 뒤로 오래 후유증이 남았거든요. 그래도 김영수 씨는 괜찮아 보이셔서 뒤늦게나마 안심이 되네요.”

정태의는 애매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마음에 걸리던 자그마한 부담을 덜었다는 듯 웃는 그녀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정말로 그동안 계속 정태의를 걱정했었는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정태의는 그렇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 역시, 이번에는 정말로 웃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오래도록 걱정해 준 그 마음은, 마치 뜻밖의 선물처럼 기뻤다. 아마도 이제 다시 볼 일은 없을 테지만, 순수하게 타인을 감싸는 상냥함에 마음이 조금 풀린다.

그녀는 그 말을 전하러 온 모양이었다. 오래도록 마음속의 가시처럼 조그맣게 걱정했던 사람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반갑고 기뻐서.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리하르트가 돌아왔을지도 몰라요.”

달콤하게 웃으며 살짝 한 걸음 물러서는 그녀에게, 정태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서 얼른 벗어나려고 서둘러 화장실 가까이,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와 버린 게 미안하기조차 했다.

그녀가 다시 연회장으로 사라진 뒤, 정태의는 가뿐한 한숨을 쉬었다. 온 김에 손이라도 씻고 자신도 도로 돌아가 봐야 할 듯했다.

어쨌거나 승계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게 된다. 그렇다면 미리 요한이나 그 외에 낯을 익혔던 사람들과도 한두 마디씩은 인사를 해 두어야 할 성싶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곳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어.”

어디든 그렇듯.

온전히 나쁜 기억만 있는 곳은 없다. 온전히 좋은 기억만 있는 곳 역시 없는 것처럼. 비단 장소뿐 아니라 시간 역시.

요한에게는 특별히 레어로 훌륭하게 구워낸 고기를 접시에 담아서 갖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가 타르텐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더니 어르신이 크게 기꺼워하시더군. 하긴 당신은 한결같이 너를 아껴 주셨지. 아니, 어쩌면 너를 아껴 주신 유일한 분이셨던가.”

이럴 때에 적합한 속담이 있었는데 뭐더라.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 였던가.

정태의는 절로 주름이 지는 미간을 문질렀다.

일부러 외부 손님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 구석진 곳의 화장실을 찾아왔는데, 그곳에는 이미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일까.

“네 자리는 마련해 뒀어. 어른들께도 이미 양해는 얻어 뒀으니 신경 쓸 것 없어. 너는 그저 내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아서, 앞으로 타르텐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주어지는 일만 하면 돼.”

리하르트의 목소리다.

그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정태의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예민하게 귀를 세우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저런 음색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라면, 정태의는 크리스토프 이외에는 알지 못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생각했던 대로, 뒤이어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보다 낮고 쌀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태의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볍게 머리를 벽에 툭, 부딪쳤다.

언뜻 평소랑 비슷하게 들리긴 하지만 혹시 기분이 안 좋은가.

얼핏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정태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웃음기 띤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설마하니, 새벽에 약간 장난을 친 걸로 마음이 상한 건 아니겠지.”

말 사이에 짤막하게 섞이는 웃음소리.

“그럴 리는 없겠지만, 크리스토프, 내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듣고 싶지 않아, 그런 말은. 네게서는 절대.”

리하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리스토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더 말을 붙일 여지마저 잘라 버리는 얼음 같은 단호함이다.

정태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멈칫했다.

닫혔다,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순 빈틈이라곤 없이 닫혀 버린 문을 맞닥뜨린 것 같았다.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는데도. 두 번 다시는 열리지 않을 문을 앞둔 것 같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 역시, 정태의만 느낀 느낌은 아니라는 듯.

“크리스토프.”

그의 이름을 부르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소리치지 않아도 들려.”

“……. 뭐 좋아. 네가 타르텐에 머무르며 할 일은 나중에 천천히 말하도록 하지. 지금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도 상황도 적합하지 않으니까.”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며 바깥쪽을 향해 걸음을 돌리는 기척이 났다. 바닥에 묵직하게 부딪치는 구두소리가 둘, 미묘한 속도차를 두고 울렸다.

“……리하르트. 말했을 텐데. 나는 타르텐에는…….”

“아, 그렇지. 작은숙모님도 기뻐하시더군. 네 어머니 말이야,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가 꺼내던 말을 가로막으며, 리하르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네가 앞으로도 계속 타르텐에 머무르며 내 일을 도울 거라고 말씀드리자 매우 기꺼워하셨어. 좋겠군, 크리스토프.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어서.”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뒤따르던 구두소리가 멎었다. 정태의의 어깨가 희미하게 움츠러든 것과 마찬가지로.

왜 그러지? 하고 반문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는 어렴풋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을 것이다. 어째서 크리스토프가 멈추었는지.

정태의는 그녀를 떠올렸다.

비앙카.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타르텐을―타르텐만을―사랑하는 그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아들에게 평연히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의 푸른 눈도 함께 떠오른다.

“……언제?”

“뭐?”

“어머니께 언제……그런 말을 했어.”

“오늘 아침 일찍. 네 방에서 나와 곧바로 그녀에게 갔지. 너에 대한 소식이라면 그녀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마땅할 테니까.”

크리스토프를 옭아맬 수 있는 가장 쉽고도 확고한 수단을, 리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크리스토프를 묶어 놓을 밧줄부터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게 있었다. 아니, 앞으로도 결코 알 리가 없으리라. 늦은 오전, 그녀를 마주보았던 크리스토프의 창백한 얼굴을 그는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음과도 같은 한숨과 함께 손바닥으로 눈 위를 잠시 덮었다. 눈을 감아도 그의 푸르스름한 낯빛은 계속 보였다.

“아침 일찍……, ……그래……, ……그렇군…….”

생각이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리게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그 생각을 마무리 짓듯 속삭였다.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해 드려야겠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그런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크리스토프? 의아하게 리하르트가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다시 구두소리가 들렸다. 바깥쪽을 향해 멈추지 않고 이어진 구두소리는, 이윽고 바깥 벽에 기대어 있던 정태의의 옆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그제야 고개를 기울여 옆을 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연회장이 쓸쓸해서,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서먹한 곳에서 홀로 동떨어진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우두커니 서 있던 정태의를 보고 놀란 듯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인 크리스토프는, 순간적으로 묘한 얼굴을 했다. 그래, 서먹하게 동떨어져 있다가 겨우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다.

아. 문이 열렸다. 영영 굳게 닫혀 버린 줄만 알았는데, 삐걱하고 조그맣게 틈새를 벌린다.

“태이, 너――.”

크리스토프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리하르트가 나왔다. 크리스토프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그는 정태의를 보곤 입을 다문다.

“정태의 씨? ……연회장이 따분했나 보군요. 이런 데에 계시다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는 그에게 정태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면 따분해지게 마련이죠.”

“하하……, 자리를 빛낼 분들은 많이 계실 텐데요. 저도 지금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그 양복, 몹시 잘 어울리시는군요.”

리하르트는 정태의의 차림을 훑어보며 말했다. 옆에서 정작 그 옷을 선물해 준 사람은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한다. 정태의는 가볍게 웃었다.

“칭찬 고맙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옷이거든요.”

그렇군요, 하고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목시계를 흘끔 내려다보곤 이런, 하고 중얼거렸다.

“너무 지체했군요.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두 분은……?”

“아, 가야죠. 승계 결정이 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누구보다도 크게 박수를 치려고 마음먹고 있는 참인걸요. 오늘 밤이 지나면 이곳에서 떠나게 될 텐데, 후의에 기대어 몇 주나 얹혀 살았는데 박수만큼은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쳐야죠.”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곧 사람 좋은 웃음을 띠었다. 타르텐의 경사를 축하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

“재수 없는 위치군. 그쪽에 서지 마.”

저 말은 왠지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 저대로 들은 건 아니고, 비슷한 느낌의 말을 얼마 전에 들었었다. 그때는 재수 없는 이름이라고 했었지, 아마…….

정태의는 냉랭한 얼굴로 딱 잘라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크리스토프가 거기에 서지 말라고 말하는 ‘재수 없는 위치’는,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일레이의 옆자리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일레이의 시선을 뒤통수에 느끼면서, 정태의는 씁쓸하게 엄지로 그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이름은 이 지역과 안 맞아서 횡액수가 있을 것 같아 재수 없다손 치면, 이 위치는 왜 재수 없는데.”

“바람이 드는 곳은 재수 없는 위치라고, 중국 풍수 책에도 적혀 있어.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크리스토프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투로, 그것도 모르냐는 듯 도리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응……?”

“문 가까운 곳은 바람이 잘 든다고. 따라서 재수 없는 위치야. 그러니까 거기에 서지 마.”

크리스토프가 어찌나 딱 부러지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젓는지, 정태의는 말이 막히고 말았다. 반박을 하려야 할 수 없는 논리에, 잠시 동안 입만 뻐끔거리던 정태의는 다시 씁쓸하게 입맛만 다셨다.

“하지만 일레이가 여기 서 있는데.”

“꼭 그놈이랑 나란히 서야 할 이유가 뭐 있어. 너는 딴 데 서. 저만큼 떨어져서 서.”

문 바로 근처, 크리스토프의 주장에 따르면 ‘재수 없는 위치’에 서 있던 일레이의 시선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정태의는 뒤통수가 서늘해져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냥 일레이랑 같이 서는 게 낫겠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몇 걸음 옆으로 옮겨가 일레이의 옆에 자리 잡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가만히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언짢은 한숨을 쉬더니 정태의를 끌어다가 일레이의 반대쪽 옆에 세웠다.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있어서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위치다.

“정 그러면 문 바로 옆의 재수 없는 위치는 그놈더러 서라 그러고, 너는 이 안쪽으로 서.”

“……. 음……, 고마워.”

중국의 풍수마저 미심쩍어진 정태의가 일단은 감사인사를 하자, 졸지에 재수 없을 위험에 처하게 된 일레이는 피식, 차갑게 코웃음을 치곤 고갯짓을 했다.

“더는 훼방 놓을 거리도 없겠지. 그럼 그만 네 자리로 돌아가. 타르텐의 직계는 다 저 앞자리에 모여앉아 있는데 너는 혼자 여기서 뭐하는 거야. 주워온 자식 티내지 말고 어서 가.”

크리스토프는 일레이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승계 결정을 앞두고, 타르텐의 직계는 연회장 앞쪽에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그곳에는 자리가 없었다.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무리가 완성되어 있었다. 빈 곳도 더한 곳도 없이.

“그래……, 그렇지.”

크리스토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르신이 백부의 부축을 받아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토프는 그 완성된 그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정태의와 눈이 마주쳤다.

“이봐.”

정태의는 대답 대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네 손은, 오늘은 내게 빌려준 거야.”

갑자기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정태의는 평소와 다름없는 그 무심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옆에 서서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는 일레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다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피식, 웃는다.

“그래, 오늘은.”

정태의의 대답을 듣자 크리스토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정말로 만족을 했는지 어땠는지 별 변화는 없는 얼굴로―등을 돌렸다.

조화된 가족의 모습 속에 부자연스러운 불균형을 더하며 한쪽 구석자리에 홀로 자리 잡는 크리스토프를 멀찍이 바라보며,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쉰다.

크리스토프가 자리를 잡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앞쪽에서는 승계 결정에 앞서 어르신이 짤막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문 옆에서, 완벽한 외부인의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드디어 결정될 모양이네. ……예상외의 결과 같은 건 없겠지.”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귀빈으로 대우받아 상석이 마련되었음에도 연회장 구석진 곳의 정태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일레이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승계 결정에서는 그렇겠지.”

“그럼 뭐 다른 게 더 있어?”

“글쎄……, 이를테면 아직 공식적으로 확언한 바는 없는 차관 변제 조건이라든가.”

대수롭잖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저만치 떨어진 상석에 앉아 있는 라만을 바라보았다. 그때, 예고도 없이 정태의의 방에 들이닥쳤던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도 스친 적도 없었다. 행여나 하고 걱정했던 것처럼 말리크나 아지즈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그 고요한 수면 아래에 무엇이 숨 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두렵나?”

뜬금없이 들려오는 한 마디는, 일레이가 때로 정태의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증거다. 약간은 어긋나 있었지만.

“두렵다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꼬이면 번거로우니까……, 뭐 닥치면 닥치는 대로. 흐르면 흐르는 대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은, 그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만치 뒤에 있다. 여태껏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게 분명했다. 게다가…….

“사후관리 잘 부탁해.”

“흠?”

“여기까지 내 인생을 끌고 왔으면, 앞으로도 진창길 속에서도 잘 끌고 가 줘야지.”

정태의는 일레이를 빤히 쳐다보며 당연스레 말했다.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일레이는 어이없이 웃는다.

“진창길에 빠지면 거기서 헤엄치며 놀다가 혼자 잘 나올 놈이.”

정태의도 따라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 드디어 짤막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어르신의 입에서 이름이 나왔다.

“……그래서, 차후 타르텐을 현재의 모습에 이어 더욱 나은 모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리하르트가 실로 적합하리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저마다 박수를 치거나 축하 인사를 던지는 말들이 리하르트가 앉아 있는 자리로 쏟아졌다.

정태의 역시 아까 약속했던 대로, 그의 자리까지 들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성대하게 박수를 치면서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는 결과가 나왔군.’ 하고, 조금은 재미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건성으로 박수를 치던 일레이가 의아하게 시선을 준다.

“음……, 밖에서도 박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뜰에는 군데군데 조명등이 켜져 밝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삼엄한 표정으로 띄엄띄엄 서 있는 까만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보였다. 하긴 저 정도 귀빈들이 모여 있는 자리라면 저만 한 인원을 배치할 만도 하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인다.

사나운 눈매로 바깥을 파수하고 있는 저 남자들이 어떻게 알고 때맞춰 박수를 쳤을 리도 없고, 기분 탓이었나.

“아아, 아마 프로펠러 소리일 거다. 본관 위에 임시 헬기 이착륙장을 설치해 뒀거든.”

“헬기 이착륙? 아아, 아까 낮에 사람들이 본관 위에서 뭔가 분주해 보이더니 그거였구나……. 그런데 무슨 기종이길래 프로펠러 소리가 이렇게까지 요란해.”

정태의는 심상하게 중얼거리다가 음? 하고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헬기로 온 사람은 없지 않았나? 게다가 벌써부터 대기라니, 누가 급하게 돌아가야 한대?”

“아니,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시켜 두라고 했을 뿐이야.”

“준비시켜 두다니, 네가?”

정태의는 점점 더 미심쩍게 일레이를 보았다.

“음. 리하르트에게 말해서 타르텐의 헬기를 잠시 빌렸지. 뭐, 실제로 띄울 일은 없을 테지만.”

“헬기는 뭐하러.”

점점 목소리 톤이 기묘해지는 정태의와는 달리 일레이는 앞에서 뭔가 감사 인사 따위를 말하고 있는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주며 매우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어찌 되었든 너는, 정재이에게 있어선 예상할 수 없는 변수이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를 잘 못하겠는데.”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일레이는 정태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으며 따분해 보이는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가벼운 고민을 하고 있는 얼굴이다.

“일레이.”

정태의가 혀를 차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는 흘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손끝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는, 사뭇 고민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어차피 언젠가는 귀에 들어갈 이야기라면 미리 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상황에 맡기고 기다려 보는 편이 나을까.”

“이야기를 하는 입장이라면 상황에 따라 후자를 택하겠지만, 듣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전자지.”

이 상황에서는 명백히 듣는 입장인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잘라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태이, 먼저 말해 두지. 정재이에게는 일체 피해가 가지 않을 거야―피해를 주려 해도 줄 수 없겠지, 그 인간에게는―. 게다가 정재이는 몇 년간 UNHRDO에서 골몰하던 연구도 다 마친 참이다. 이제는 그곳에서 나온들 별 아쉬움도 없을 거야.”

선선히 말을 꺼내는 일레이를 멍하니 쳐다보던 정태의는 잠깐, 하고 손을 들었다.

“있어 봐, 잠깐. 어쩐지 대단히 불온한 말이 그 뒤에 따라올 것 같은데.”

“네 입장에서는 정재이 본인에게 별 탈이 없으면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니었나?”

“아니지, 아냐. 일이란 게 하나 좋다고 나머지까지 그렇게 물 흐르듯 술술 다 좋은 게 아니라고. ……대체 뭐야, 여차하면 헬기로 나를 수송하면서까지 형을 끌어들일 만한 그 일이.”

“아――거기서 오해가 있었군. 아니야, 정재이를 끌어들이기 위해 너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 정재이를 끌어들이기 위해 너를 데려갈까 봐 대비해 두었을 뿐이지. 저 라만이라는 인간은, 아무래도 마음 놓고 믿기에는 꺼림칙한 데가 있어서 말이야.”

정태의는 다시금 잠깐 멍하게 일레이를 보았다. 라만을 믿다니, 형은 또 뭐, 하고 어물어물 중얼거리는 정태의에게서 시선을 거둔 일레이는 앞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타르텐의 새 주인이 나왔군. 박수를 쳐 줘야지, 태이. 아주 성대하게.”

그러면서 박수를 치는 일레이에게 덩달아 정태의도 박수를 치며 앞과 옆을 번갈아본다.

“어이, 일레이――.”

“네 형님은 아무도 손 못 댈 구중심처에서, 가끔 저들이 바라는 물건을 만들어 주는 척이나 하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누리며 아주 잘 살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뭐야, 그게.”

“설령 무기나 관련기술 개발에 일체 손을 대지 않더라도 정재이라는 이름 때문만이라도 아주 편하게 살 수 있을걸. 역대의 그 어떤 초빙 개발자와도 비할 수 없이 호사로운 생활을 보장하겠다니, 그 말만큼은 믿어도 되겠지. 돈이라면 땅에서 펑펑 솟아나다 못해 썩어 넘치는 저들이니.”

정태의는 일레이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일레이는 흘끔, 정태의에게 눈길만 주었다. 그 눈매가 웃고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안 좋다. 불길하다기보다는 불쾌한 느낌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에둘러 말하는 건 정태의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아쉽게 생각지 마.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딱 하나 있다면, 언제든 네가 원할 때면 볼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가 원할 때에만 볼 수 있다는 정도일까.”

“뭐야, 그게. 형을 납치해서 가둬 두기라도 하겠단 건가?”

“굳이 말하자면.”

정태의는 넋 나간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뜨악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얼굴로 그를 한참 쳐다보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농담 마. 너라고 모르는 건 아닐 텐데. UNHRDO에서 형을 어떻게 호위할지. 아무리 중동의 왕족이 어떤 식으로 손을 쓴다 해도, 탈없이 그들 사이에서 빼내오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커다란 소란을 일으켜 명예를 실추시키면서까지, 손에 넣어야만 할 가치가 있는 인물일까?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그럴 리는 없지.”

“그들의 명예는 실추되지 않아.”

일레이가 짧게 말했다.

그때였다.

타르텐의 새로운 주인으로 선 리하르트가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동시에, 연회장 문 바깥쪽을 지키듯이 서 있던 남자 서넛이 들어와 안쪽에 섰다. 일레이를 사이에 둔 정태의의 반대편이다.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들을 재빨리 둘러보며, 정태의는 여전히 이쪽의 상황은 알지도 못하는 듯 느긋이 앞만 바라보고 있는 일레이를 본다.

“뭐야, 이건.”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타르텐의 인간들이다. 리하르트나 크리스토프의 사촌이나 육촌쯤 되어 간혹 얼굴을 마주친 그들이 무표정하게 근처에 섰다. 그 가운데에 아지즈도 섞여 있었다. 미리 자신의 말을 따랐으면 좋지 않았냐고, 무언 중에 안타까워하는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잠시 스쳤다.

“며칠만 더 이곳에서 쉬고 있어, 태이. 나는 잠시 프랑크푸르트에 갔다가 데리러 올 테니까.”

“일레이.”

“네 성격상, 일이 다 끝난 뒤에 알려주면 아무래도 진심으로 낯빛을 바꿔 버릴 것 같고, 그렇다고 미리 알려줬더라면 어떻게든 고개를 들이밀어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거든.”

일레이는 바지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고 있던 손을 꺼내었다. 그 안에서 얇고 질긴 장갑을 꺼내어 천천히 손에 끼면서, 그는 정태의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타르텐과는 이야기가 되었어. 저기 왕족님들께서 만에 하나라도 네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이 집 안에서는 틀림없이 너를 보살펴 주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잠시 더 놀고 있어. 며칠 안 걸릴 테니.”

“일레이!”

정태의가 소리쳤다.

한껏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하나 드물게 진지하게 내뱉는 그 노성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듯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문 가까이에서 사람들 몇이 진을 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을 말리려 들지는 않았다.

그때 정태의는 보았다. 연회장 앞쪽, 알 파이살의 뒤를 지키듯이 정중하게 서 있던 라만이 이쪽을 보는 것을.

그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예전, 세링게에서 보았던 적이 있는 표정이다. 빌어먹을, 입속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 표정 뒤에는 정태의에게 변변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건 나와 알 파이살의―알 사우드의―계약이다. 또한 리그로우와 타르텐의 오랜 교분의 약조이기도 하지. 타르텐은 나와 그들 양측에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어. ……아. 마지막 건 오프더레코드이니 다른 데에선 말하지 말아 줘.”

진지한 어조의 농담으로 말을 맺은 일레이는, 살얼음처럼 얇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일레이, 나는 아직 납득하지 않았어. 이대로는 얌전히 이곳에 머무를 생각도 없고.”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두어 번, 각 손의 주먹을 쥐어 보며 장갑의 손맛을 확인한 일레이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일로는 너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거든. 너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네 형에 대해 맹목적이니까. ……사실 이 상황엔 그 점도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건 너도 알겠지.”

정태의는 연회장 앞을 노려보았다.

여상하게 실내를 둘러보던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크리스토프는 흘끔 정태의를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와 알 사우드의 계약.

리그로우와 타르텐의 약조.

정태의는 자신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타르텐의 청년들을 눈동자만 돌려 하나씩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들이 다섯 걸음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숨을 쉬었다.

마음속으로 하나씩 짚어 본다. 수는 다섯. 기본 거리 바깥쪽에 있는 놈을 제외해도 넷. 숫자만으로도 벅찬데 그 안에는 아지즈까지 있었다. 결코 호락해 보이지는 않는.

정태의는 하나하나, 대놓고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못마땅한 듯이 입맛을 다시며 푸욱, 한 번 더 한숨을 쉰다.

“내 참……. 멀쩡하고 당당한 얼굴을 한 주제에 설득이 안 통하면 납치를 불사하겠다는 저 작자나, 집에 대포질을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그놈을 돕겠답시며 하나 있는 애인을 기만하는 너나, 나란히 헛짓하는 놈들을 발 벗고 도와주겠다는 이 집구석이나……. 이런 놈들이 다이아 숟가락이니까 나 같은 선량한 양민들이 괴로운 거지.”

“계산은 다 됐나? 승산은 좀 있을 것 같아?”

정태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일레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적보다 흉악한 아군이다.

정태의는 곧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일레이를 직시했다.

“같이 가자, 프랑크푸르트.”

곱게 생긋 웃기까지 했는데, 일레이는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조차 이미 짐작했다는 듯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렇게 말할 게 뻔해서 지금 얘기한 거다. 미리 알았더라면 남은 기간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는 날 설득하려 들었겠지.”

“설득한다고 설득당할 성격이기나 하냐, 네가!”

“세치 혀야 그렇다 쳐도, 베갯머리송사는 나로서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거든. 네 말마따나 하나 있는 애인인데.”

정태의는 욱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미리 알았더라면 몸으로라도 어떻게……하고 암암리에 생각했었던 스스로가 좀 좌절스러워졌다. 어느새 여기까지 떨어졌던 건가, 나.

하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다니 어쨌든 다음에라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는 있을 모양이구나, 하고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정태의의 옆으로, 타르텐의 청년이 다가왔다. 좌절감에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정태의의 손목을 잡아 올리는 순간,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그 청년의 콧잔등을 후려갈기고 말았다.

“앗,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정태의는 코를 감싸쥐고 허리를 굽히는 청년에게 사과하며 다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여기에 얌전히 잡혀 있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 여기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없는 동안 네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거든. ……쯧. 그러니까 말했잖아. 내가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베를린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아니, 내가 뭐 이럴 줄……, 아 자꾸 잡지 좀 말라니까, 나 여기 안 있을 거야!”

정태의는 다음으로 밀어닥치는 청년마저 후려갈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방어를 하고 온 탓에 주먹이 빗나가고 만다. 칫, 낮게 혀를 찼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결코 정태의를 거들어 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일레이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청년 하나와 맞서고 있는 정태의의 뒤로 다가가 우악스럽게 어깻죽지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꺾으려는 청년의 옆머리를 주먹 바깥쪽으로 거침없이 날려 버렸다.

“살살 해. 그렇게 하면 이 녀석이 아프잖아. 다치면 어쩌려고.”

“병 주고 약 주고 다 해라. 빌어먹을!”

마음 같아서는 하나 있는 애인부터 잡아 족치고 싶었지만 그야말로 역부족이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연회장 뒤쪽으로 절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에 선 남자들에게 눈짓을 하는 가운데서도, 그 앞에 선 리하르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또한, 타르텐에 대한 차관의 마지막 변제 역시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얄밉도록 침착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낭패라고 혀를 찼다. 사람 넷을 당해내기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정작 제일 힘들겠다 싶었던 아지즈는 거의 거들지도 않았는데 남자 셋이 한꺼번에 덤벼들자 아무래도 형세가 불리해지고 있었다.

“곤란해……, 곤란하단 말이지.”

정태의는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얌전히 잡혀 줄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헤어날 자신도 없었다. 그들을 해치지 않는 한은.

“아무리 그래도 몇 주나 더부살이로 얹혀살았는데, 고맙다는 선물은 못 남기고 갈망정 그 가족을 해치고 나가서야 인간된 도리로 할 짓이 아닌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더 힘을 뺄 수도 없었다. 그들 뒤에 유유히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는 저 믿지 못할 아군이 있는 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청년들의 공격을 살짝살짝 비키기만 하던 정태의는 이윽고 혀를 찼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 하고 중얼거리며 가장 가까이에 닥쳐오던 청년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움찔, 반사적으로 정태의의 손을 뿌리치는 청년의 팔을 그가 힘준 방향으로 그대로 꺾어 버렸다. 동시에 그를 잡아당겨, 자신에게로 날아들던 다른 주먹을 대신 받아 버린다. 주먹이 닿는 몸통의 반대편을 살짝 밀어 타격을 높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순식간에 재기불능으로 쓰러지는 청년을 구름판 삼아 뛰어오른 정태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를 실어 팔꿈치로 뒤쪽에 있던 청년의 정수리를 찍어 버린다. 그쪽은 한 방으로 끝이었다.

“어……, 미안미안, 내가 하도 오래 놀고먹어서 잘 안 될 줄 알고 그냥 해 봤는데, 아직 녹슬지는 않았나 보다. 미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살살 했을 거야.”

저기서 구경만 하는 저놈 같으면 애초에 먹힐 리가 없었던 공격인데, 하고 소용없는 사과를 하며 정태의가 나머지 하나까지 가뿐하게 때려눕혔을 때였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살피기만 하던 아지즈가 감탄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내디뎠다.

“아니, 난 당신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

“피치 못한 싸움에서는 어떤 타격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인정은 접어 두고 오셔도 됩니다.”

그나마 일말의 정 때문에 정태의가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지즈는 겸손하게 고개를 저어 주었지만, 정태의는 혀를 찬다.

그게 아니라 당신은, 쉽게 당해낼 자신이 없단 말이야.

정태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지즈는 신중한 얼굴로 다가서다가 일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혼자로는 확실한 자신이 없군요. 도와주시겠습니까?”

“쯧쯧……, 이놈들에게도 미리 말했었는데 사람 말을 잘 안 들었군. 이 녀석이 다소 어벙한 데는 있지만 그렇다고 맹탕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 줬는데도.”

조금만 방심했다간 나도 당하고 말거든, 하고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일레이는 손을 뻗었다.

산 너머 산이다.

“같이 가자니까, 프랑크푸르트! 너 방해 안 할게!”

간발의 차로, 간신히 그 손을 피하면서 정태의가 버럭 외쳤다. 일레이는 아주 잠깐 침묵하며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다가, 그쪽 손의 장갑을 벗어 버렸다.

“방해의 문제가 아냐, 태이. 네 안전의 문제지.”

“내 안전을 생각한다는 놈이 장갑은 왜 벗어!”

“아, 그야 너를 건드릴 때에는 역시 맨손이 좋으니.”

피식 웃으며, 일레이는 걸음을 내디뎠다.

귓가에 “타르텐은 이후, 알 파이살 왕자의 사적 학술기관의 유지와 존속에 최대한의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언뜻 스쳤다. 어째서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놈들은 죄다 말들이 저렇게 허울이 좋을까.

지금은 도무지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 입으로 정태의는 급기야는 “일레이, 이 망할 놈!” 하고 욕설을 외치고 말았지만, 두 팔을 뒤로 붙잡힌 채 벽에 가슴을 맞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로군. 왜, 여전히 부족한가?”

정태의의 팔을 한 손으로 넉넉하게 그러쥔 채, 등 뒤에 바싹 붙은 일레이가 낮게 웃었다. 그제야 그 옆으로 아지즈가 구속 테이프를 들고 다가왔다.

“며칠만 기다려, 태이. 네 형의 안전은 보장해 줄 테니. ……하긴 이건 내가 보장할 필요도 없겠지만.”

“형의 안전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하려는 짓이 문제잖아. 도대체가 무슨 생각이야! 이번엔 UNHRDO라니, 왜 꼭 그런 골치 아픈 일만――.”

벽에 짓눌린 채로, 아지즈가 구속 테이프를 길게 뜯는 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정태의의 뒤에서 일레이는 그의 귀에 비밀 이야기라도 속삭이듯 얼굴을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낼름 정태의의 뺨을 핥았다.

“계속 수배범으로 부자유스럽게 있는 건 싫다고 그랬잖아. 며칠 안에 풀릴 테니 기다려. ……그 외에도 더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코앞에 있는 낯익은 얼굴을 몹시 희한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지. 내 옆에만 있는다면.”

일레이는 평연하게 말했다. 그 당연하다는 듯한 말 뒤로, 정태의는 눈만 깜박이며 뚫어져라 그를 쳐다본다.

문득 설핏, 정태의가 멋쩍은 듯이 입매를 찡그리며 너, 하고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또한 그 지지는, 과거 타르텐이 맺어 온 그 어느 곳과의 교분보다도 우선으로 삼아, 서로 간에 앞으로 쌓아갈 긴밀한 관계에 기반이 될 것입니다.”

리하르트의 말이 장내에 울렸다.

그 말을 맺은 순간의 짧고도 무거운 침묵을, 그 순간 정태의는 분명히 본 것 같았다.

일레이의 표정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 대신 자리 잡는, 얼음 같은 정적. 보는 이의 가슴속이 얼어붙는 무표정.

리하르트의 말이 정태의의 머릿속에 온전히 전해져 이해되기 전에, 그 일은 벌어졌다.

“실례하겠습니다, 리그로우 씨.”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는 일레이의 바로 뒤에서 들렸다.

바닥에 뒹구는 구속 테이프.

정태의의 팔을 붙들고 있던,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넉넉한 손아귀.

정태의는 손목이 풀려 다시 자유로워진 몸으로 황급히 돌아섰다. 정태의의 바로 뒤에 붙어 서 있던 일레이와 바라보듯이 마주선다. 그리고 그때 정태의는 보았다.

일레이의 목 옆에 닿아 있는 아지즈의 주먹. 그 움켜쥔 주먹 끝에서 비죽이 솟아나온 주사바늘이, 일레이의 목을 파고들어 있었다.

“일…….”

정태의가 입을 연 것과 동시였다.

석상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던 일레이가, 바로 그 다음 순간 뒤쪽으로 팔꿈치를 휘둘렀다.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결코 피할 수 없을 속도로, 거센 속도와 무게감을 실은 일격이 아지즈의 머리를 날려 버린다.

짧은 비명과 함께 몇 걸음 뒤의 문까지 날아가 콰당탕 틀어박히는 요란한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근처의 사람들이 엉겁결에 내지른 몇몇 비명이 가라앉자, 연회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얼굴이 뭉개져 피투성이가 되어 꼼짝도 않는 아지즈를 돌아보지도 않고, 정태의를 붙잡고 서 있었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우뚝 서 있던 일레이는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이미 주사는 저만치 날려가 피부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약액은 혈관 속으로 섞여든 뒤였다.

“……일레이.”

정태의의 굳어진 입술에서 바람소리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묵묵히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던 일레이는 이윽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연회장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얗게 굳은 얼굴로 가끔씩 눈동자만 굴리는 가운데, 태연한 얼굴로 그곳에 선 사람은 몇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인 리하르트가,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릭. 즉효성 수면진정제일 뿐이니까. ……즉효성이라는 말은 네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일레이는 표정 없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라만에게로 옮겨가는가 싶더니, 그 뒤에 서 있는 말리크를 스쳐 다시 리하르트에게로 돌아갔다.

“즉 리그로우와의 교분을 깨고, 알 파이살과 손을 잡기로 했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로군, 리하르트 타르텐.”

일레이는 별반 격앙되지도 화나지도 않는 투로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저 아주 약간 낮아지기만 한 그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목에 약액을 맞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리그로우와? 설마 그럴 리가. 우선순위가 다소 밀려서 너와 개인적으로 나눈 약조를 어기게 된 셈이라 그 점은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리그로우와 타르텐의 교분을 깰 생각은 없어. 따지고 보자면 네 뒤에 있는 그 남자는 리그로우라는 성을 가지지도 않은, 외부인이지 않은가.”

리하르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레이는 웃었다.

“과연, 애초에 약조를 맺은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군.”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릭, 타르텐은 원래는 분명히 리그로우가의 손을 잡으려 했어. 의견은 거의 반수로 나뉘었지만, 얼마간의 이득보다는 오랜 교분을 지키는 편이 낫겠다는 쪽으로 결국은 생각들이 기울었거든.”

“그런데?”

일레이의 반문에 리하르트는 난처한 듯 웃었다.

“미안하게 됐군. 내가, 그 약조보다 새로운 관계 구축에 힘을 싣는 쪽으로 기울었어.”

일레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깜빡,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까맣게 번쩍이는 눈동자에 유난히 힘이 실린다.

이미 정신을 놓고 감겼어야 할 새카만 눈동자는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 눈동자에서, 정태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레이.”

정태의가 조용히 불렀다. 일레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정태의의 말을 듣고 있을 터였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날이 선 모든 신경으로.

“……앞으로 친구는 잘 사귀어.”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말하는 순간, 일레이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약간 흔들렸다. 얼어붙은 눈동자가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 피식, 표정이 가셨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리고 다음엔 좀 더 똑똑한 친구를 사귀어.”

“그 말도 맞군.”

“기왕 네 목에 주사바늘을 꽂을 작정을 했더라면, 수면제 따위가 아니라 청산가리를 맞혔어야지.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정태의가 투덜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며,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하하하, 나직이 웃던 몸을 가볍게 벽에 기댄다.

“이봐, 이러니까 내가 너랑 같이 프랑크푸르트에는 안 간다고 했던 거라고. 네가 정신을 다 빼놔서 결국 이 꼴이잖아.”

“……졸리면 자. 혼미한 정신으로 남 탓하지 말고.”

“음――확실히 좀 졸리군. 하지만 그 전에…….”

일레이는 열없이 웃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 손이 그의 눈에 지금쯤 몇 겹으로 겹쳐 보이고 있을지, 정태의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어떻게 해서 그가 아직도 멀쩡하게 서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저들이 무슨 약을 놓았는지는 몰라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혼절해 발치를 뒹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이미 정태의의 눈앞에서 일레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서 도약한 그는,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그대로 뚫고 지나 똑바로 앞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 충분한 거리가 없었더라면 그가 노렸던 한 사람의 목쯤은 가볍게 분질러놓고도 남았을 것이다.

넓은 대연회장의 안쪽에서 문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일레이가 리하르트의 몇 걸음 앞까지 다가간 뒤였다.

엉겁결에 리하르트의 앞을 막아서듯이 일레이를 향해 달려든 그들은, 정확히 셋, 일순간에 목이 반대 방향으로 부득 꺾였다. 네 번째 사람이 리하르트의 앞으로 지척의 거리에서 끼어들어 권총을 꺼냈을 때에는, 무기를 꺼내는 게 조금 늦었다. 총을 쥔 손은 하늘을 향해 꺾이고, 귀청을 찢는 총성은 샹들리에가 깨어지는 소리와 섞였다.

그러나 그때.

일레이의 귀 바로 밑, 맥박이 뛰는 그곳에, 다시 한번 주사바늘이 꽂혔다.

쇼크를 일으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단숨에 약액을 밀어 넣은 뒤 몸에서 빠져나온 바늘이 피부를 긁어 그 끝에 피가 맺혔다.

일레이의 움직임이 천천히 멈추었다.

아직도 경비병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그는, 악귀처럼 날뛴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만큼 평연하고 선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쾌한 듯도 하다. 코앞에서 그를 바라보며 창백하게 굳어 버린 경비병의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까만 동공이 시체처럼 커다랗게 부푼 탓인지, 혹은 사람 셋을 순식간에 죽이고도 여전히 침착한 하얀 얼굴 때문인지, 그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주사바늘을 꽂아 밀어넣고 물러선 사람은 말리크였다.

말리크는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일레이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는 절대로 당신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굳은 얼굴로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말리크는 쓰게 웃었다. 일레이는 그 뒤쪽에 서 있는 라만에게 시선을 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눈 하나 까딱 않고 바라보고 있던 라만은 잠시 일레이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정재의를 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카드는 저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유감이군요, 일레이 리그로우 씨. 그러나 이걸로 세링게의 별저는 빚을 갚은 것으로 치지요.”

“빚이라……. 이자까지 치더라도, 너무 비싼 걸로 받아가려 하시는데. 거스름이 한참은 더 필요하단 말씀이야.”

일레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경비병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뚜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는 비명에 섞여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비병을 던져버리고 몸을 일으키던 일레이에게, 조금 물러선 곳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빛의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던 말리크가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서 주사기를 하나 더 건네받아 다가섰다.

그때였다.

악마처럼 시커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문득 흐리게 웃음 짓는 일레이에게, 이를 악물고 다가서 주사기를 내리꽂던 말리크의 앞으로 한 사람이 끼어들어 가로막았다.

“태……!”

그러나 일레이가 낭패한 듯 외치는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팔뚝에 바늘이 꽂히기 무섭게 뿌리쳤지만 이미 약액은 반 넘게 들어온 뒤였다.

순간 정태의는 움찔했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이 멍청한…….”

화가 난 듯 낮게 외치는 그 말이, 그 자리에서 일레이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느리게 멈추는가 싶던 그 입술에서는 더 이상 말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땅을 딛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일레이!”

정태의는 겨우 그를 받아든다. 용서 없이 내리누르는 무게에 으윽, 하고 낮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간신히 어깨에 떠받치듯이 버틸 수 있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정태의의 앞을 가로막다가 이가 몇 대나 날아간 경비병 두엇이 뒤늦게야 그를 따라잡았지만, 이미 상황은 일단락된 뒤였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

누군가 일레이를 향해 불쑥 중얼거렸다.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닌 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그 말에 정태의는 깊이 공감했다.

정량 이하로 들어갔는데도, 심지어 팔뚝에 맞았는데도, 벌써 눈앞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역시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정태의는 한쪽 어깨에 일레이를 떠멘 채 시선을 돌렸다. 약간씩 거리를 두고 자신을 둘러싼 건장한 남자들이 몇이나 보였다.

자신보다도 훨씬 무거운 남자를 들쳐메고서 수적으로도 절대적인 열세인 데다 눈앞까지 흔들리는 상황.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짚어 보던 그 시선 끝에 라만이 잡혔다.

“그쪽에서 원치 않더라도, 나는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서늘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눈앞의 이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화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태의는 어깨에 무겁게 늘어진 일레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휘청, 무릎이 꺾일 것 같아 겨우 버티고 선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걸요.”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죽지만 않으면 돼요. 아니, 아파서도 안 되겠군……. 당신은 그저 고통 없이 숨만 붙어 있으면 됩니다.”

“……. 24시간 내도록 사지결박을 해 놓고 밥과 물만 준다든가, 아니면 아예 이 녀석처럼 약으로 계속 재워 놓으면서 숨만 붙여 둔다든가?”

그건 싫은데, 하고 정태의가 짐짓 낯을 찌푸렸다. 그러나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눈앞의 남자는 그럴 필요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거야 원 지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어느 침대에 묶인 채 꼼짝도 못 하고 식물인간처럼 밥만 받아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내 뜻에 저항 없이 따라 준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지요.”

뭐야, 수틀리면 그렇게 하겠단 소리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피식 웃었다.

점점 시야가 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과 눈앞이 빙글거려, 자신이 휘청거리지 않고 제대로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젠 눈뜬 뒤의 행운을 빌어 볼 수밖에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일레이의 몸을 다잡았을 때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문 옆은 풍수지리적으로 안 좋다고.”

불쑥 중얼거린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처럼 보고만 있던 크리스토프였다.

분위기에서 동떨어진, 부루퉁하고 쌀쌀맞은 목소리.

정태의는 여러 겹으로 겹쳐 보이는 크리스토프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득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잡아 두려니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떠밀어 세워 두었던 창 근처 쪽에서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크리스토프.”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정태의가 아닌 리하르트였다.

일레이가 코앞에 들이닥치는 순간까지도 태연한 얼굴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그는, 희미하게 표정을 굳히며 크리스토프를 노려본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정태의만 쳐다본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이리 줘.”

크리스토프가 불쑥 말했을 때, 처음에 정태의는 그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면서 정태의의 어깨에서 늘어진 일레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미친놈 말야. 인간인지 뭔지 모를.”

“…….”

사실은 넘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한 팔로 불안정하게나마 꼭 부여잡고 있는 이 무게를, 꼭 붙잡고서 놓고 싶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서 무방비한 그를 누구에게 넘길 수 있을까.

하지만 정태의는 점점 시야가 까무룩하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더니 성큼 다가와, 정태의에게서 일레이를 빼앗듯이 걷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묵직하게 늘어지는 일레이를 한 팔로 끌어안자마자 무정하게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휙 내던져 버렸다. 와당탕,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이 울렸다.

“생각해 보니 이놈에게는 나도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었어. 나야말로, 이걸로 갚은 셈 치자고.”

냉정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몽롱한 머리로 멍하게 쳐다보았다. 어이, 일레이, 괜찮아? 들리지 않을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이 감긴다.

“태이!”

그때, 크리스토프가 소리쳤다. 정태의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 눈앞에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줘. 네 손. 오늘은 내게 빌려주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이리 줘.”

소리치는 크리스토프를 망연히 바라보던 정태의는, 혼곤해지는 의식 속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크리스토프의 손이 닿았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손을 움켜쥐며, 자신에게로 확 끌어당겼다.

“크리스토프!!”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그는 아마도 짐작했음이 틀림없다. 크리스토프가 어떻게 할지. 그러나 그 짐작은 조금 늦고 말았다.

미안, 부탁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국은 정신을 잃고 마는 정태의를 단단히 끌어안은 반대쪽 손에, 크리스토프는 어느새 총을 들고 있었다. 동시에 뒤쪽에 머뭇거리며 서 있던 경비병의 머리를 그립으로 후려갈겼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경비병을 걷어차 옆으로 치우며, 크리스토프는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유리창이 등 뒤를 가로막으며 닿는다.

“크리스토프. ……바보 짓 하지 마. 너는 네 이름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리하르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입을 뗐다.

“나는 내 이름을 몰라. 여태껏 한 번도, 나는 내 이름을 알았던 적이 없어.”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등 뒤를 가로막고 있던 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쳐나갔던 것이다.

***

크리스토프가 본관의 옥상에 다다랐을 때, 헬기는 막 날아오르려는 참이었다. 아마도 막 방금 무전으로 지시를 받은 듯, 바닥에 내려앉아 있던 기체가 흔들, 그 몸을 띄우려 했다.

크리스토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군데군데 튄 피가 땀과 섞여, 마치 땀 대신 피가 배어나온 것 같았다.

한쪽 어깨에 푸대자루처럼 들쳐멘 늘어진 몸이 자꾸 흘러내리려 했다. 가볍게 몸을 추어올려 그 몸을 다시 어깨 위에 얹으며, 크리스토프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헬기의 조종사를 보곤 혀를 찼다.

옥상 위에는 거의 사람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한둘 쯤. 그나마 그 한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크리스토프가 박차고 나온 문 안쪽에서 놓치지 말라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오자 그제야 낯빛을 바꾸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크리스토프는 알 파이살 무리와 함께 온 게 분명한 이국인에게 흘끔 시선을 주고는 거침없이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제대로 조준을 하지도 않은 총은 제각기 가슴을, 배를 꿰뚫는다.

불그스름한 땀으로 물들어 헬기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크리스토프를 보고, 조종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를 당겼다.

기체가 둥실, 땅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조종석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정확히는 조수석이다. 유감스럽게도 미처 문을 닫지도 않은 채 떠오르고 있던 조수석에서, 허둥지둥 총을 꺼내고 있던 남자가 운 없이도 미간을 정통으로 꿰뚫리고 말았다.

피가 확 뿜어지며 조수석 근처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얗게 질려 눈을 부릅뜬 조종사를 태운 헬기가 미처 땅에서 다 떠오르기 전에 아주 약간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 헬기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크리스토프는 어깨에 메고 있던 정태의를 열린 문 안으로 던져넣었다. 시트나 내벽 따위에 몸 여기저기를 부딪히면서도 깨지 않는 그를 마구잡이로 집어넣고선, 머리 높이까지 떠올라 있던 기체의 안전바를 움켜쥐고 기어올랐다.

조종사는 헬기 안으로 들어선 크리스토프를 보곤 기겁을 하며 바를 밀었다. 창백하게 부릅뜬 눈으로는 크리스토프를 보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기반을 더듬었다.

허공에 떠 있던 헬기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헬기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폭풍처럼 밀려나가고 있었다.

“띄워. 다시 올라가라고!”

크리스토프가 총구로 위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나 패닉에 빠진 조종사는 부들부들 고개를 저으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옥상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헬기 쪽으로 달려왔다.

“띄워!”

크리스토프가 다시 외쳤다. 그러나 조종사는 조금만 더 버티면 저들이 크리스토프를 끌어내주리라 기대를 하는지, 멈칫거리면서도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를 붙잡아 세워, 조종사의 바로 옆에 기대어놓다시피 했다. 눈을 까뒤집고 늘어진 시체를 보고 조종사가 숨을 들이켜는 옆에서, 크리스토프는 시체의 머리에 대고 다시 한번 총질을 했다. 조종사의 얼굴 위로 핏물이 흠뻑 터져나왔다.

크리스토프는 그 시체를 도로 던져 버리고, 이번에는 총구를 조종사의 목덜미에 들이대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죽기 싫으면 띄워.”

크리스토프의 나직한 목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요란한 헬기 소리에 섞여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종사는 발치에 뒹구는 동료의 아직 따뜻한 시체와, 자신의 목에 바싹 붙은 총구만으로도 크리스토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크리스토프가 총구로 그의 목을 거칠게 찌르자 땀과 피로 얼굴이 얼룩진 조종사는 부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였다.

고막이 터질 듯한 프로펠러 소리가 한층 더 요란해졌다. 온몸을 때리는 진동과 함께 발치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기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엉겁결에 헬기로 올라타려고 발판을 붙잡았지만 크리스토프는 구두굽으로 그 손을 찍어 짓이겼다. 뿌득, 가벼운 감촉과 함께 손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비명마저 기체 소리에 섞여 들리지 않는다.

그때였다.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뛰쳐나온 사람이 있었다.

리하르트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을 헐떡이는 것조차 잊고서 그저 급박하게 달려온 그는, 막 떠오르고 있던 헬기를 보았다. 덜컥, 그의 표정 속에서 뭔가가 내려앉는다. 이미 사람 키를 넘어선 높이까지 부유한 기체를 붙잡아 끌어내릴 수는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크리스토프 역시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외친다. 고막을 가득 채운 프로펠러 소리 때문에 들릴 리가 없는데도, 그 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닿을 리 없는데도 헬기가 이륙한 그 자리까지 와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마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무슨 일이건 눈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는 그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초조한 빛을 드러낸 얼굴을 언제 본 적이 있었을까. 저렇게 다급하고 여유라곤 없는 얼굴을.

그는 늦었다. 크리스토프에게서 정태의를 빼앗아내기 위해 저토록 황급히 쫓아왔을 그는, 한 발 늦어 버렸다.

그런데도, 정태의 쪽은 보지도 않고 오로지 크리스토프만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어느 순간 고함을 질렀다.

“가지 마! ……크리스토프, 이리 와!! 돌아오란 말이다!!”

그러나 그저 고함을 지를 뿐, 그에게는 어쩔 도리도 없다. 리하르트는 땅에 발붙이고 서 있었고, 크리스토프는 그의 머리 위, 손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무섭게 번득이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만을 노려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리하르트를 보며, 크리스토프는 웃고 싶었다. 그래서 입매를 약간 비틀어 올렸지만, 잠시 동안 노력해 봐도 결국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계승 축하해, 리하르트 타르텐.”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소리는 조용했다. 헬기 소리에 파묻혀 자신의 귀에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저 남자는 알아들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대로, 크리스토프가 그렇게 말한 순간 리하르트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굳게 다문 입매가 움칫 떨렸다.

“이걸로 너와 나의 약조는 끝이다.”

리하르트는 이 타르텐을 계승했다. 그리고 이제 크리스토프는 타르텐을 떠난다. 그것이 애초의 약조였다.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토프는 헬기 문을 닫아 버렸다. 조종사의 옆에 들이대었던 총구를 두어 번 까닥거리자 헬기는 고도를 높이며 저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아래를 보지도 않고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앞만 노려보았다. 저 아래에서 끊임없이 따라붙고 있을 그 타는 듯한 시선 따위는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다는 듯.

“어디로…….”

조종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처 없이 드레스덴의 상공을 날고 있는 헬기 안에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시트에 기대어 정신을 잃고 있는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쓰고 이 위에서는 프로펠러가 고막을 찢을 듯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평화롭게.

그곳만 다른 세상 같았다.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토프는 한 번도 그와 같은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베를린. 베를린으로.”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몹시 작아, 조종사는 다시 한번 물어본 뒤에야 행선지를 알 수 있었다.

헬기가 드레스덴의 북쪽 방향으로 커다랗게 선회했다.

외부에서 연락이 들어와 계기반 왼쪽 하단에서 붉은 빛이 길게 깜빡였다. 조종사는 모른 척 그 불빛을 팔꿈치로 덮었다.

크리스토프는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가 가려진 신호를 무시하며 시트에 앉았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팔다리가 늘어진다.

그는 다시 한번 옆을 보았다. 어느 평화로운 꿈을 꾸는지 평온하게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는 정태의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크리스토프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추워…….”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탄식 같은 한숨은 소음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

크리스토프가 정태의를 납치해 중동에서 온 귀빈의 헬기를 탈취해서 달아나 버렸다는 소리가 타르텐 내에 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정태의를 납치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타르텐에 그들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미심쩍게 여겼지만 그 말의 사소한 부분에서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타르텐의 입장에서 중요한 사람을 크리스토프가 끌고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미친 놈.”

벤슨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 앞에서, 말을 전해 준 얀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없이 동의를 표했다.

벤슨은 크리스토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쪽도 아니었다. 크리스토프가 여태 저질렀던 만행들에 대해서도, 전후 사정을 들으면 납득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는 타르텐의 입장에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크리스토프의 행동은 그의 생각에는 비합리적이었다.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오늘 같은 날 그 짓이야? 이건 리하르트를 물먹이는 것도 아니고, 아예 타르텐 전체를 물먹였잖아. 정신 나간 놈.”

벤슨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평소 크리스토프를 싫어했던 얀센은 미간에 한층 더 짙은 주름을 지었다.

“그놈이 그 동양인을 싸고돌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결국 끝끝내 일을 치고 나갔지 뭐야. 빌어먹을, 그 동양인 하나 사우디에 넘겨주는 걸로 순조롭게 끝날 일을 그 미친놈이 다 망쳐 놨어!”

“나름대로 친하게 지낸 모양이긴 하지만 최악의 방법을 택했지. 꼭 이해를 못할 건 아니지만 방법이 안 좋았어.”

“이해를 못하긴, 그쪽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던 건 아니라고. 그 동양인도 봐, 듣자 하니까 저 미치광이가 테러했을 때 같이 가담한 놈이라며. 얼마나 악질적으로 나갔으면 저 미치광이를 놔두고 굳이 그 동양인을 찍어서 신병을 요구했겠어?!”

글쎄, 과연 저놈보다 악질적으로 나갈 만한 인간이 있기는 할까, 하고 미심쩍게 중얼거리며 벤슨은 자신의 뒤쪽, 한쪽 손목에는 철제 수갑을 달고서 간이침대에 누워 정신을 잃고 있는 그 ‘미치광이’를 흘끔 보았다.

본명보다는 미치광이 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남자. 아니, 그 본명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괴물 같은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이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상황 수습을 하러 나간 와중에도 이 방에는 벤슨과 얀센 외에도 그들보다 약간 나이가 적은 축의 청년 셋이 더 있었다. 나머지 셋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크리스토프와 정태의에 관한 억측이며 앞으로의 예측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프로포폴을 규정량 이상으로 맞고 뻗어 버린 인간을 아까운 인력 다섯이나 두고 감시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저 청년들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리하르트는 급하게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고개를 저으며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일정 간격으로 계속 약을 맞혀 두라고.

“……약, 더 써야 할까?”

벤슨은 테이블 위에 던져둔 철제 케이스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여분의 수면진정제 앰플 몇 병이 주사기와 함께 들어 있었다.

얀센은 약간 고민스러운 눈으로 그 가방과 리그로우를 번갈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저놈이 괴물이라 해도, 오히려 지금 약을 더 투여했다간 정말로 영영 뻗어 버릴걸. 아무리 미친놈이라지만 리그로우가의 인간인데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재수 없으면 우리가 덮어쓴다고.”

“하지만 리하르트가…….”

“이봐, 프로포폴을 800mg나 맞았다고. 800mg! 오늘 밤쯤 정신을 차리더라도 한동안은 방바닥을 기어다녀야 할 걸. 아니, 재수 없으면 머리가 살짝 맛이 가 버렸을지도 모르지.”

하긴,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벤슨은 조금 떨떠름하게 리그로우를 보았다.

정신을 잃고 무겁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위압적인 남자였다. 그나마 저렇게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옆에 있고 싶지도 않은 남자다.

“아, 젠장, 처박혀 있으려니 따분해 죽겠네. 어차피 한동안은 정신을 차려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놈 하나를 두고 뭐하는 짓이람.”

청년 중 하나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사납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얀센이 앉은 소파의 등받이에 걸터앉는다.

“지금쯤 그 두 놈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원. 크리스토프, 그 미친놈. 머릿속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또 모르지. 지금쯤 홍콩 하늘이라도 구경하고 있는지.”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청년이 히죽거리며 미묘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얀센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하긴 몰래 그런 짓거리라도 하던 상대가 아니면,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겠지. 뭐야, 그럼 이게 그 유명한 사랑의 도피냐?”

그들이 낄낄거리며 한두 마디씩 난잡한 말을 던지는 가운데, 벤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농담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도주는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아니, 헬기에서 내리는 그 순간 잡힐 게 분명했다.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지금 이미 알려졌을 테고, 갈 만한 곳에는 미리 사람들을 배치시켜 두었을 터였다.

고작해야 한 시간, 길어야 몇 시간 가량 발버둥이나 치는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을 했어.”

벤슨이 못마땅한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들로서는 생각도,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마치 악몽 같았다.

벤슨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낯선―낯설다고 생각하고 싶은―목소리가 그렇군……, 하고 뒤를 이었다.

“과연……. 크리스토프가 태이를 데리고 갔나.”

나른한 목소리였다.

반쯤 잠에 취한, 어쩌면 잠꼬대 같기도 한 그 느리게 잠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벤슨은 잠시 깨닫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지금 들려서는 안 되며 들릴 리도 없는 목소리였다.

“리――.”

그러나 반사적으로 돌아본 벤슨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잠깐 누워서 가볍게 눈을 붙이기라도 했다는 듯, 리그로우가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침대 위에 일어나 앉은 그는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나른한 사람처럼, 머리가 무거운 듯 두어 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가만히 관자놀이를 짚는 희고 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두통이라도 나는 모양이다.

아니……, 두통 정도일 리가 없는데……, 아니, 아니다. 두통 정도가 아니라, 벌써 저렇게 눈을 뜰 리가 없다.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아연하게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는 벤슨과 마찬가지로, 얀센 역시 멍하니 리그로우를 보았다. 청년들 역시 일순 말을 잃는다.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리그로우는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뒤늦게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깨달았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인 듯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 리그로우는 문득 피식 웃었다.

“리하르트 그놈이 어지간히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군. 이런 쓸데없는 낭비를 다 하고.”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뚜둑, 작고 뚜렷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 수갑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철컹, 벽에 부딪히며 늘어져 버렸다.

리그로우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뽑아낸 엄지 관절을 다시 맞추곤, 자유로워진―애초에 부자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손을 몇 번 흔들었다.

“리, ……리그――.”

하얗게 질려 중얼거리는 얀센은 본 척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던 리그로우는 청년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시선을 주었다.

“아아. 거기 놔뒀었군. 이리 가져와, 내 장갑.”

평소보다 아주 약간 느린 어조로 말하며, 리그로우는 테이블 위에 있던 군청색 장갑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청년은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장갑을 집어들어 리그로우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옮겼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벤슨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흠칫 그 발을 멈추었다.

“주지 마!”

공기가 얼어붙었다.

손을 내밀던 리그로우는 천천히 벤슨을 돌아보았다. 벤슨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리그로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말도 안 된다. 벌써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니, 설령 어떻게 일어났다손 치더라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렇게 앉아 있는 게 고작이어야…….

그때, 얀센 역시 벤슨과 같은 데에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허세다……, 허세야.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어. 저렇게 일어나 앉은 게 고작이야. 게다가 봐, 저놈은 무기도 없어. 맨몸이라고. 이쪽은 무기가 있어. 게다가 다섯이야.”

낮게 말을 주워섬기는 얀센의 시선은, 그러나 리그로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새카만 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그 새카만 눈이 희미하게 휘어졌다. 웃고 있다.

“내 장갑이나 이리 주지 그래.”

“아니, 못 줘.”

얀센은 리그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리고 허리춤을 더듬어 총을 꺼내어 겨눈다. 그의 그 성급한 대응에 벤슨이 혀를 차면서 뭐라고 나무라려던, 그때였다.

리그로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직하지만 시원하게 한동안 웃는다. 여유롭게까지 들리는 그 웃음 앞에서, 벤슨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객관적으로 보아 이쪽이 불안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가슴속에 자욱하게 불안감이 맺힌다.

그 웃음이 잦아드는 듯했다. 리그로우는 여전히 웃음이 남은 눈으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씩. 하나씩. 상대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 천천히.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바라본 뒤, 이윽고 그의 입매에 웃음이 맺혔다. 그 웃음이, 벤슨의 불안을 결정지었다.

“얀센. 뭔가 착각하는 것 아닌가? 장갑은 단순히 내 기호일 뿐, 아무런 무기도 아니야. 하지만 뭐……좋아. 어차피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그냥 나중에 손을 씻도록 하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두통이 심한 듯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던 손이 매트리스를 짚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침대에서 박차고 뛰어오른 리그로우는 얀센의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기는 얀센의 손목을 한 발 먼저 붙잡아 그 손목을 꺾는다. 정확히, 총을 막 꺼내고 있던 청년의 목을 노려.

목에 구멍이 뚫린 청년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얀센의 손목을 아예 한 바퀴 비틀어 버리고 그 손에서 총을 거둔 리그로우는 공포에 질려 홉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얀센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유감이군, 얀센. 네 말대로 재수 없이 머리가 맛이 가 버린 모양이야. 지금은 아주 기분이 더러워서,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겠거든.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안 들고.”

바이바이, 짧은 말과 함께 리그로우는 얀센의 미간 위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거침없이 당겨 버렸다.

퍼억, 리그로우의 하얀 얼굴에 시커먼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총을 꺼내어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쏘아 대는 청년 둘의 머리를 마저 꿰뚫어 버린 리그로우는, 자신을 대신해 벌집이 된 육중한 가죽소파를 가볍게 밀어 버리고 일어섰다.

삽시에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던 방 안은, 그 소란이 벌어졌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레 정적을 되찾았다.

순식간에 시체 네 구가 뒹굴게 된 방에서, 리그로우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더니 이마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시 두세 번 고개를 젓는 모습이, 머리가 무겁기라도 한 눈치다. 저 움직임을 보면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정적 속에 굳어 버린 벤슨은 넋을 놓고서 리그로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말도 안 된다고, 이럴 리 없다고 생각할 이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리그로우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벤슨을 돌아보았다. 벤슨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능하면 타르텐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호적인 모습을 유지하려 했는데 말이야, 벤슨.”

“…….”

“성에 안 맞는 짓을 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별로 없거든. 봐, 이번에도 이렇잖아.”

“리, ……리그, 로우…….”

리그로우는 문득 낯을 찌푸렸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머리를 두드리며 나직하게 욕설을 뱉는다.

“빌어먹을, 아직도 어지럽군……. 이봐, 벤슨.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벤슨은 멍하게 리그로우를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반쯤 넋이 나가 버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벌써 깨어나지는 못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건 분명했다.

리그로우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벤슨을 보고 혀를 차더니 재차 물었다.

“이봐. 내가 모르는 걸 알려 달라고.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지금 상황은 어떻고. 응?”

“……모, 몰…….”

벤슨의 혀가 짧은 말마디를 뱉어낸다. 이 방 안에서만 있었던 그가 바깥의 정황을 알 리도 없었고, 알았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할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음, 하고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가볍게 두어 번 흔들고 난 리그로우는 빙글, 권총을 한 바퀴 돌렸다.

“그래, 그럼 너도 쓸모없군.”

그 말이, 벤슨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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