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긴 하루
“릭이나 잡아가 버리면 좋겠는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불쑥 꺼낸 말이었다. 그 뜬금없는 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리하르트뿐이었다.
리하르트가 흘끗 크리스토프에게 눈동자만 돌리자, 여전히 생각에 잠겨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생각이 다 정리되었는지 자신이 떠올린 근사한 생각을 아무나 붙잡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자 리하르트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더니, 이거라도 할 수 없다는 태도로 그를 붙들고 진지하게 말을 꺼내었다.
“생각해 보면 영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잖아. 어쨌거나 리그로우는 리야드 테러범이 아니겠어? 심지어 라만은 세링게의 별저가 그 손에 무너져 내렸다는 개인적인 원한도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마땅히 리그로우를 잡아갈 만도 하지. 안 그런가?”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접시만 노려보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리하르트는 다소 어이가 없는 듯 중얼거렸지만 크리스토프의 귀에는 그의 코웃음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태이에게는 그래도 최악의 수는 쓰지 않을 거야. 정재이를 끌어들이려고 하면서 그 가족을 해코지하지는 않을 테니까. 재수 없으면 인질로 잡아 협박 정도는 하겠지만 어쨌든 심각하게 해치지는 않겠지. 하지만 릭은 다르잖아. 저들이 릭을 잡아가 버리고 태이만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그 호박이 넝쿨째 네게로 굴러 들어갈 것 같나?”
한결같이 비웃음이 서린 리하르트의 대꾸에,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조금 욱한 듯 그에게 매서운 시선을 주었다.
“그러지 말란 법은 또 어딨어.”
“크리스토프. 그새 바보가 됐나? 아니면 눈을 뜨고 꿈을 꾸기라도 하는 거야? 인간이 맹목적이 되면 어떤 식으로 멍청해지는지, 아주 여실하게 보여 주는군.”
“내가 무슨――.”
“네 그 생각이 맞아떨어지려면 말이지, 먼저 라만이 여기까지 직접 온 목적이 리그로우의 응징이어야 하고, 또한 릭이 호락호락 그들에게 잡혀갈 만큼 손쉬운 인간이어야 하며, 게다가 릭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정태이가 쉽게 그를 포기하고 마음을 고쳐먹어야겠지. 네 생각은 어때. 그 중 뭐가 가장 쉽게 이루어질 것 같은가?”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바로 크리스토프의 살얼음 같은 희망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 리하르트는, 당장 우울하게 입을 다문 크리스토프를 흘끗 곁눈질하고는 묵묵히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 보니, 사이좋게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을 불러오려고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돌아와선 ‘두 분은 지금은 오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라며 우물쭈물거리더군. 그들은 저녁식사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볼일이라도 보는 모양이야.”
“…….”
크리스토프는 접시를 쿡쿡 찌르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눈살을 찡그리며 중얼거린다.
“입맛이 없어졌어. 난 이만 먼저―….”
“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인지 아니면 그 둘을 방해하러 갈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앉아, 크리스토프. 곧 그들이 올 거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건너편의 빈자리로 눈짓을 했다.
타르텐의 현 주인이 그들을 맞이하러 간 동안, 이 젊은 차기 주인후보는 미리 자리를 정돈해 두었다. 직계 가족만 자리에 모였다고는 하나 그 수가 워낙 많아, 결코 좁지 않은 식당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늦은 시각의 만찬이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시각의 마지막 만찬이기도 했다.
내일로 다가왔다.
내일 저녁, 내일 이 무렵이면 타르텐을 새로 이끌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지게 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래에 사소한 문제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런 문제들은 그가 여태 확고하게 굳혀 온 입지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고작해야 승계 결정일을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만 약간 나왔을 뿐, 그러나 그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그날을 내일로 앞두게 되었다.
“기쁘겠군, 리하르트. 수십 년을 기다려 왔던 날이 이렇게 하루 뒤로 다가왔으니. 내일 이 시각의 네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어?”
리하르트의 말을 듣지 않고 일어서 자리를 뜨려던 크리스토프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허벅지를 꾹 눌러 앉힌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다 한껏 빈정대었다. 반대쪽 옆에 앉은 사람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리하르트는 흘끗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난 타르텐을 승계하고 싶어서 수십 년을 기다렸던 게 아니야. 내가 정작 기다렸던 건, 네가 망쳐 놨지. 십여 년이나 전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의 음색이 한결 싸늘해졌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눈을 치켜뜨다가 이내 낮게 코웃음을 치고 만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 크리스토프가 타르텐의 승계를 포기한 뒤로, 멈춘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어느새 그렇게 뒤로 물러가 버렸다.
그때는 자신이 설마 타르텐의 연회장에서 이렇게 이 남자와 나란히 앉게 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크리스토프는 맞은편 유리창, 이미 바깥에는 새카만 어둠이 깔려 거울처럼 안쪽의 정경을 비추는 그 유리를 바라보았다.
어르신과 귀빈이 앉을 자리를 비워 둔 상석에 리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크리스토프, 그리고 이어진 친척들.
유리에 비친 그 허상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홀로 떠 있었다.
저마다 이웃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제각각의 일을 하는 가운데, 크리스토프만 홀로 그 허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수런스럽고 단란한 연회장을 그 허상 너머에 동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이곳은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가 속삭였다. 귓속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일시에 성량을 높이며 고막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때.
“크리스토프?”
귀를 가득 메우며 아우성치는 유령 같은 소리들을 선명하게 꿰뚫으며,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귀에 와 닿았다.
크리스토프,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불렀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 유리거울 속에서 자신을 향해 의아한 얼굴로 몸을 기울이는 남자를 보았다. 다가와서 뭐라고 귀엣말하던 사촌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던 그는, 조금 뒤늦게 망연히 넋 놓고 앉은 크리스토프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크리스토프의 정면을 향한 시선을 따라갔다. 곧이어 유리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홀로 유령처럼 떠 있던 허상 속에서,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 그가, 홀로 부유하던 크리스토프를 사람들의 자리로 끌어내렸다.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그 남자의 이름을 의식 위로 떠올렸다.
“……그렇게 여러 번 부르지 않아도 들려, 리하르트.”
“흥……. 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가 했더니, 설마 수선화라도 될 작정은 아니겠지.”
여전히 유리 속에서 눈을 마주한 채로 리하르트가 비웃듯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난 나를 보고 있었던 게 아냐.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좋아하지 않아.”
그 말이 몹시 뜻밖이었던 듯, 리하르트는 잠시 움직이지도 않고 똑바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시선을 쏘아보며 크리스토프는 덧붙였다.
“얼굴뿐 아니라 이 몸뚱이 어디든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없어.”
아니, 몸뿐 아니다. 머릿속도, 가슴속도, 생각해 보면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이라는 인간은, 한 번도 크리스토프의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쯧, 혀를 차며, 늦어지는 손님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문을 짜증스럽게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를 묵묵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게 줘.”
“……?”
의아하게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얼굴이든 몸이든,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모두 내게 줘. 어차피 너는 네게서 마음에 드는 거라곤 하나도 없겠지.”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보았다. 유리 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그를 쳐다본다. 이윽고 그 역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 뼘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눈이 마주친다.
어느 순간 리하르트는 설핏 눈매를 찡그리는 듯했다.
“농담이다.”
“…….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는군.”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곤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문득 맞은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하고 엄숙한 얼굴을 한 어머니다.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을까.
표정 없이 그들을 보고 있던 어머니는, 크리스토프가 약간 눈을 크게 뜨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여 보이자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그들은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
“……?”
크리스토프가 미심쩍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귀빈들과 더불어, 이 유서 깊은 집안을 오래도록 이끌어오며 번영시킨 사람, 타르텐의 주인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리스토프는 그들을 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엄격하지만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어르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의 손짓으로 다시 자리에 앉은 뒤에야 그와 함께 들어온 손님에게로 시선을 준다.
이미 아까 만나 보고 인사도 나누었던 사람들이었다. 리하르트가 공항까지 나가 맞이한 사람들이다. 그럴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왕족 따위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점에 지극히 가까이 있는 남자 알 파이살. 그리고 아직 사업가로서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그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실권을 쥐고 있는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리하르트는 이미 리야드를 몇 번이나 오가며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들을 직접 마주친 크리스토프는 라만과 몇 번 말을 나누면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정신이 나갔군, 일레이 리그로우. 이런 남자의 집에 폭격질을 하다니. 하긴 애초에 그 미친놈이 아니면 못할 짓이다.
이미 암암리에 대부분의 전권을 양도받은 실권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알 파이살을 보좌하는 입장에 선 라만은 지금도 알 파이살의 충실한 피후견인이자 의붓아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나서 의견을 말하는 일 없이, 조용히 의붓아버지의 시중을 거든다.
“양순한 종인 듯 굴어 봐야, 늑대는 양떼 속에 있어도 두드러진단 말이지.”
크리스토프는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옆자리 정도까지는 들렸을 법한 음성에, 리하르트가 잠깐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크리스토프에게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또 다시 미친 짓을 할 생각이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 크리스토프.”
“왜, 네 눈에는 저기서 양인 양 굴고 있는 저 남자가 양으로 보이나? 내 눈에는 늑대―아니 늑대도 아냐, 양가죽을 코끝에만 겨우 뒤집어쓴 불곰 정도로 보이는데.”
태연하게 대꾸하던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낯을 찌푸리더니 ‘젠장,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불곰에 미친곰에 겉다르고 속다른 곰이잖아, 어째 제대로 된 놈이라곤 하나도 없어’, 하고 영문 모를 소리를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크리스토프의 허벅지를 움켜쥔 리하르트의 손이, 그 위쪽으로 미끄러져 올라간 탓이다.
“그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다른 입을 아예 다물지 못하도록 만들어줄 거다.”
“――.”
크리스토프는 삽시에 굳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 한 마디 없이 사납게 곁눈질해 리하르트를 쳐다보았지만, 리하르트는 태연한 얼굴로 여전히 크리스토프의 사타구니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채였다.
“리하――.”
“아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토프 타르텐?”
크리스토프가 막 입을 열었을 때,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사나운 얼굴 그대로 눈길만 돌렸다. 그러다가 말을 건 사람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만다. 불곰 아빠였다.
알 파이살.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물러서 사업체를 일으켜 훌륭하게 성공시킨 유수의 기업가이자, 알리 왕자와는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쌍두 독수리의 한쪽 머리.
이미 50줄에 들어서 실제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노인 같은 그를, 크리스토프는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노인의 빈 잔을 채워 주던 라만은, 잔을 적당한 정도까지 채운 다음에야 병을 내려놓고 뒤늦게 시선을 크리스토프에게 준다. 조용하고 무심한 시선이지만 뺨이 따가울 만큼 날카로웠다.
크리스토프는 예전 언젠가 숲속에서 적진 토벌을 하다가 우연히 불곰을 마주쳤던 때, 탄환 네 발을 정통으로 맞고도 여전히 흉흉하게 움직이던 그 맹수를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말리크에게 들었네만, 사격 솜씨가 훌륭하다지.”
알 파이살이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흘끔 시선을 돌리자 몇 자리 건너서 앉아 있던 말리크가 태연한 얼굴로 눈웃음을 건네왔다. 마치, 얼마 전의 숲에서 크리스토프가 그의 수하를 쏘아 버렸던 일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
크리스토프는 짧은 침묵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일시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을 만큼은요.”
허어, 하고 알 파이살은 담담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옆에서 라만도, 말리크 역시도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말리크는 내가 특히나 아끼는 젊은이인데, 그가 추천하더군. 내 아래에 있는 사병들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인물로 적합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알 파이살이 의향을 묻는 듯 넌지시 말한다. 주위에서 다른 친척들이 놀란 듯이 크리스토프에게 눈길을 주는 가운데, 크리스토프는 말리크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라만이 알 파이살을 거들어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현재 따로 적을 둔 곳은 없어, 타르텐에도 오래 머무를 예정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크리스토프는 라만에게 말없는 시선을 돌렸다.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사람이 상했다. 실수가 아닌 고의로, 심지어 타르텐 측에 의해. 그런 보고가 위에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저토록 신뢰받고 있는 인물이라면 더욱.
크리스토프가 그 시선을 잠깐 말리크에게 돌렸을 때, 그제야 말리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사람의 능력과 미래를 보십니다. 설령 과거에 사소한 실수가 있었더라도 그 일이 거듭되지 않는다면 더 묻지 않으시지요.”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납득했다. 이 말은 다른 어떤 상황과도 무관한 하나의 독립된 제의였다. 아무래도 크리스토프의 전적이며 경력은, 저 남자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분명, 이제 곧 크리스토프는 타르텐에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따로 소속된 곳이 없었다. 굳이 어디로 가고 싶은 곳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피하고 싶은 곳도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지나치게 감사한 제안이라 이 자리에서 바로 답변을 드리기 어렵겠군요. 그는 분명히 오늘 밤 천천히 생각해 본 뒤 좋은 답변을 드릴 겁니다.”
그렇지 않냐는 듯 웃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약간 당혹스레 쳐다보았다.
마치 내키지 않아 하는 크리스토프를 자신이 천천히 설득해서 그들의 뜻에 따르도록 해 주겠다는 듯한 그 미묘한 말에 크리스토프가 어이없이 그를 노려보는 가운데, 알 파이살은 그럴 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천천히 생각해 본 뒤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며 말을 맺은 뒤, 그는 이웃해서 앉은 어르신과 뭔가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의 주의는 조금씩 흩어졌다.
“날 저들 아래로 보내서 장기말로 써먹기라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알 파이살의 아래에 보내려는 듯한 의도를 짚어보다가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딱 잘라 말하자, 리하르트는 흘끗 시선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목소리가 대꾸한다.
“어차피 갈 곳도 없을 텐데. 중동으로는 가기 싫은가?”
“가기 싫을 건 없지만, 타르텐과 그들의 관계에 날 끼워 넣을 생각이라면 그만둬. 나는 더 이상 타르텐과 관련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리하르트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의 낮고 평온한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들은 식사를 계속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근처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크리스토프가 그 화제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타르텐에 계속 머무르도록 해, 크리스토프.”
거부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호한 말에, 크리스토프는 움직임조차 멈추고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벼운 인사말이라도 한 것 같은 태도로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크리스토프를 돌아본다.
“농담 마.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나? 승계 결정이 나는 순간, 나와 타르텐은 끝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관련도 되지 않고.”
“너는 타르텐에 빚이 있어. 그것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평생이 걸려도 다 갚지 못할 막대한 빚이. ……사람의 능력과 미래를 보는 것은 저들만이 아니야. 지금부터라도 타르텐을 위해 일하겠다면 그 빚은 지워 줄 수 있어. 네 능력이라면 어렵잖게 요직에 앉을 수도 있겠지.”
그의 독단으로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자신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어떻게든 지켰던 리하르트에게, 크리스토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무슨 속셈이야.”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면, 중동―혹은 다른 어딘가―으로 가서 일을 하나, 타르텐에서 일을 하나, 네게 다를 것이 뭐지?”
크리스토프는 담담하게 말하는 리하르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른 곳과 타르텐.
일을 하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 남자가 있다. 리하르트 타르텐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타르텐의 인간들이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어떠한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는 그들이.
“크리스토프 타르텐. 이곳에 있어.”
“……왜 그래. 여태 내게 굴욕을 준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크리스토프는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순간 나이프를 들던 손이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시선이 차갑다.
“……. 잘 아는군.”
크리스토프의 시선 역시 차갑게 식었다.
“말해 두지만 리하르트, 내가 알 파이살의 제안을 따른다 해도, 나는 타르텐과의 가교 역할은 결코 하지 않을 거다. 타르텐이라는 성도 버리겠어. 어딜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테니.”
리하르트는 잠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가를 닦고 잔을 들었다. 태연하게 술로 입술을 축이는 그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덜컥 표정을 굳혔다.
예고도 없이 사타구니를 움켜쥐는 손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삼킬 만큼 거침없이 세게 틀어쥔 그 손은, 서슴지 않고 바지의 앞섶을 열어젖혔다.
“미쳤군, 리하르트, 여길 어디라고――.”
“글쎄, 다만 나는 궁금해졌을 따름이야.”
그러나 딱딱하게 낯을 굳힌 크리스토프와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평연한 얼굴로 잔을 기울이면서도 리하르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크리스토프가 다급하게 그 손을 붙잡으면 바지 안의 살덩어리를 쥐어 터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세게 비틀어, 크리스토프는 눈앞이 하얘져서 그 손을 놓고 말았다.
“이곳에서 네가 다리를 벌리고 뒤를 뚫린 채 우는 모습을 보여 줘도 그들이 네게 일을 맡길지. 어때, 너는 궁금하지 않나?”
특히나 알 파이살은 율법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다는데 말이야,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크리스토프의 귀에만 새어들었다.
“―…리하르트, 그러지 마.”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을 리는 없는데도, 리하르트의 손은 끊임없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손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크리스토프는 움칫거리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크리스토프, 여기 있어.”
“전에 했던 말과, 다르잖아.”
나직이 외치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졌다. 유리창에 그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나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리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과 몇 마디씩 이야기도 나눈다.
직접 살갗에 맞닿아 사타구니를 문지르던 손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지일까, 혹은 중지, 어느 손가락인가 허벅지 안을 밀고 들어왔다. 꼭 다물린 몸속으로 그 끝이 아주 약간, 머리를 들이민다.
“―…!!”
크리스토프는 테이블보를 구겼다. 허벅지가 가늘게 떨렸다.
몸속으로 약간 파고드는가 싶던 손가락은 곧 나갔다. 사뭇 다정한 손길이 옷 밖으로 나와 괜찮다는 듯 허벅지 근처를 두드린다. 그러다가 다시 속옷 밖으로 꺼낸 살덩이를 쓰다듬는다.
“크리스토프,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구나. 그만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낫지 않겠니?”
그때,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비앙카가 냅킨으로 입가를 가만히 닦으며 크리스토프에게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시선을 돌리는 그녀를, 크리스토프는 잠시 넋 없이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창백하게 질려 아, 예, 하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크리스토프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그렇구나, 크리스토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런,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씩 거드는 말에, 크리스토프는 푸른 눈을 테이블 위에 고정시키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아 보였는데 오늘 하루 일이 많아서 좀 지친 모양이에요. 제 방이 더 가까우니, 잠시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바로 옆에서 리하르트가 하는 말이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걱정스런 기색을 띠고 자리에서 일어서 손을 내민 그를, 크리스토프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리 와, 크리스토프. ……괜찮으니 일어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팔꿈치를 잡으며 부드럽게 당기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보일 듯 말 듯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깨닫는다. 속옷 틈새로 치부를 꺼낸 그대로, 어느새 바지의 퍼스너만 올려 두었다는 걸.
흐트러진 옷깃은 재킷에 덮여 크게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크리스토프는 선뜻 일어설 수 없었다. 걱정보다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버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많이 힘든가 보군. 이리 와, 부축해 줄 테니.”
리하르트는 사뭇 걱정스레 말하며 몸을 굽혔다. 크리스토프의 허리에 팔을 감아 거의 안다시피 해 일으켜 세운다. 움찔, 가늘게 몸이 떨리는 그를 부축한 리하르트는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주위 사람에게 짧게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거의 하얗게 빈 머리로 그를 따라 나가는 크리스토프의 뒤로 몹시 의외라는 듯 ‘사이가 퍽이나 좋아졌나 보지’, ‘그보다 리하르트는 책임감이 강하고 본래 상냥한 성격이니까…….’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윽고 연회장 밖으로 나서 등 뒤로 문을 닫고, 그런 소리들이 차단되었다. 그 뒤에도 크리스토프는 거의 꼼짝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리하르트의 부축을 받으며 걷다가, “괜찮나?” 하고 서늘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물었을 때에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너는――.”
크리스토프는 발작적으로 그를 떠밀며 소리쳤다.
“너는, …―미쳤어, 정신이 나갔어, 리하르트 타르텐! 이 앞뒤 생각도 안 하는 변태 같으니. 거기가 어딘데, 거기 누가 있었는데, 오늘이 어떤 날인데, ―…자칫하면 네놈까지 끝장을 보게 된다고! 나만 창피를 보고 끝나는 줄 알아?!”
“천만에. 결코 내가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거고, 또한 내가 원하지 않는 한은 결코 네가 수치를 당할 일도 없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의 소매를 바로잡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조용하나 단호한 말에, 크리스토프는 일순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게 네 맘대로――.”
“돼. 내가 하는 일은. 뭐든 내가 바라는 대로.”
크리스토프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이나 과장이 아니라 담담한 자신감으로, 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여태 하나뿐이었어.”
“――그것 무슨 일인지, 몹시 통쾌하군.”
크리스토프는 이를 갈며 돌아섰다. 그 뒤에서 리하르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한다. 그러나 곧 예의 그 느릿한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크리스토프의 뒤로 날아왔다.
“혼자서 걸을 수 있겠어?”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리하르트를 노려보곤 걸음을 빨리했다. 하마터면 다리가 꼬일 뻔해서 약간 비틀거리고 말았지만, 리하르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기에는 충분했다.
“따라오지 마. 네 얼굴 따위는 지금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웃는 얼굴 같은 건 저 손님들에게나 질릴 정도로 보여 주라고.”
서슬 퍼렇게 외치곤 성큼성큼 걸어가는 크리스토프의 뒤에서, 리하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밤에 갈 테니 쉬고 있어.”
“오지 마! 미친놈.”
크리스토프는 이제는 누가 듣든 말든 아랑곳 않으리라는 기세로 벌컥 소리치곤 서익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본관의 중앙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서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리하르트는 냉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천천히, 미간에 주름을 짓고 만다.
“빌어먹을. ……진짜로 미친 거 아냐?”
리하르트는 낮게 혀를 찼다.
미친 짓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거나, 그로 인해 곤란한 일이 벌어지리라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만큼 얼간이도 아니었고, 설령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결론적으로 무난하게 마무리를 지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친 짓임에 분명하다. 아니, 미친 건 머릿속인지도 몰랐다.
비앙카가 크리스토프를 부르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을 때, 가슴속에 욱하고 치솟은 감정은 당혹감이 아닌 분노였다.
남들에게 보여선 안 될 아까운 것을 어리석게도 펼쳐 내보인 듯한 치기 어린 분노를 느낀 다음에야, 그 분노에 대한 당혹감이 치밀었다.
“……하. 쉬어야 할 사람은 아무래도 나인 것 같군.”
누구에게랄 것 없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리면서도 다시 연회장 쪽으로 돌아가던 리하르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언짢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두어 번 문지른 그는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곤 복도 끝의 휴게 테이블 위의 담배상자에서 담배를 꺼내어 창가로 갔다. 담배를 피우는 게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실히 그것이 필요했다.
승계를 겨우 하루 앞둔 지금은.
***
문전박대를 한 사람과, 문전박대를 당했음에도 무시하고 밀고 들어온 사람.
그 둘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줘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해, 현재 정태의가 선택할 대답은 몹시 간단했다.
자신의 집에서 손님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집주인의 손을 들어 줘야 하는 게 자명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처음 들린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혹은 또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대단히 불행하게도―한 판을 치른 다음이었다.
여유롭게 한 판을 치른 뒤, 그럭저럭 부피감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한숨 돌리기엔 거북한 물건을 언제쯤 빼 주려나, 정태의가 나른한 정신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물건을 뺄 생각은 안 하고 등 뒤에 들러붙은 일레이가 가끔 뜨끔할 정도로 깨물어 가며 정태의의 뺨이며 목 언저리를 입술로 쓸고 다니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
사실은 문 열어 주길 기다릴 생각도 없었던 듯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덜컥 문을 열려는 기척이 났지만, 잠겨 있는 문은 몇 번 덜컥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냉랭한 그 목소리와 신경질적인 문소리를 듣자마자, 성가시다는 듯 한 번 혀를 찬 일레이가 언짢게 소리쳤다.
“지금 몸이 붙어 있어서 못 움직여. 나중에 와.”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정태의는 베개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니 기왕이면 좀 듣기 좋은 변명도 많…….”
그러나 정태의의 힘없는 목소리를 가로막으며, 문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들기며 “문 열어.”라고 다시금 사납게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일레이는 그 소리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정태의의 뺨을 한 움큼 입에 머금으며 그의 성기로 손을 뻗었지만, 끊임없이 들리는 문소리에 정신이 산란해진 정태의가 도무지 아랫도리에 반응을 보일 기색이 비치지 않자, 결국 낮게 혀를 차며 몸을 떼고 말았다.
조금씩 부피감이 늘어나고 있던 물건이 빠져나가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정태의는 얼른 손을 뻗어 가운을 끌어당겼다. 인간과 금수의 차이는 수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느니, 하고 중얼거리면서 막 가운을 어깨 위로 걸쳤을 때,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간 일레이는 그 문을 거칠게 벌컥 열어젖혔다.
천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마자,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걸어들어 온 사람은 이런 때조차 냉정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토프였다.
문을 짚은 일레이의 팔 아래로 스쳐 들어온 크리스토프는, 어지간한 흉기보다 더 흉흉하게 노려보는 일레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정태의에게 다가와 일언반구 없이 그 옆에 앉았다. 살짝, 정태의에게 닿을락 말락 붙어서 얌전히 등을 돌리고 오도카니 앉은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약간 머쓱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한 얼굴로 쳐다본다.
“별 용건 없으면 돌아가. 아니면 빨리 할 말만 하고 가든가. 아직 한창 도중이라서 끝나려면 멀었어.”
일레이가 삭막하게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쌀쌀맞은 시선을 흘끗 던졌다. 그러다가 눈 버렸다는 듯 사납게 도끼눈을 뜨고 만다.
“그 흉측한 거 집어넣어. 짐승보다 더한 놈 같으니.”
정태의의 몸과 부대끼고 있던 그대로 거침없이 나갔던 일레이의 알몸에서 얼른 눈길을 돌린 크리스토프는 공연히 정태의까지 노려보았다.
“왜 저런 놈이랑 그런 짓을 해서 저런 흉측한 꼴을 보게 만들어?!”
“아니, 그, ……좀 더 있다 오지 그랬어.”
“그리고 너도 말야, 응? 꼭 저런 거랑 해야겠어?! 무슨 짐승도 아니고, 저게 뭐야? 적어도 인간이랑 해야 할 것 아냐, 인간이랑! 그렇게 네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막 굴려서 되겠냐고?!”
정태의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사납게 소리치는 크리스토프의 어깨 너머로 어이없다는 듯이 버티고 선 일레이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졌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으음, 하고 입맛만 다시는 정태의를 흘끔 쳐다보던 일레이는 흠,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걸쳐 두었던 자신의 웃옷 주머니를 뒤적인 일레이는 거기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걸 본 정태의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그것을 크리스토프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어, 위험……!”
정태의가 반사적으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몸을 옆으로 뉘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간 그 물건은,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테두리에 퍼억 하고 틀어박혔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철공이었다. 머리에 맞으면 즉사, 몸에 맞아도 뼈 한 대는 너끈히 부러질 물건이다.
테두리가 푹 패도록 박혔다가 바닥에 톡 떨어져 무겁게 구르다 멈추는 그 철공을 정태의가 뜨악한 얼굴로 뚫어져라 노려보는 뒤에서,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어디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여기에 와서 화풀이야. 크리스토프 타르텐. 정신 차려.”
“…….”
“크리스토프.”
대답도 하지 않고, 아예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일어나지도 않고 그대로 정태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서 꼼짝도 않는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온 일레이는,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살점이 날아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거세게 후려치자마자, 크리스토프는 거의 동시에 일레이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날 건드리지 마!”
뚜둑, 살짝 고개가 돌아간 일레이가 위험하게 웃으며 다시 크리스토프를 향했을 때였다. 그가 크리스토프에게 한 걸음 다가섰을 때, 그들 사이로 선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게 있었다.
서로를 향해 자석처럼 다가가던 두 사람은, 거의 반사적으로 제각기 몸을 뒤로 비켰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날쌔게 날아간 물건은, 멀찍이 날아가 방문을 요란하게 두들긴다.
조금 전 일레이가 던졌던 철공이었다.
“생각보다 무거운데. ……이야, 사람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겠다.”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정태의는 감탄스럽게 중얼거렸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 얼굴을,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멈춰 선 두 사람은 지그시 쳐다보았다. 복잡한 심경이 잠시 그들의 얼굴 위로 스치고 간다.
“정태의.”
“음?”
“점점 더 똑똑해지는 건지 멍청해지는 건지 모르겠군.”
일레이는 표정 없이 중얼거리며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처럼 우울하게 말한다.
“이제 네가 그 주먹으로 나를 두들기면 나는 나 자신에게도 멍청이로 낙인찍히겠지.”
어쩌면 나는 학습능력이 없는지도 모르겠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초에 저놈에게 찍힌 이유도 이거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정태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일레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커다란 가운을 주워들어 걸쳐 입는다.
“똑똑해졌다고 해야겠군. 한숨이 날 정도로.”
낮은 탄식처럼 말하는 일레이를 몹시 기괴한 얼굴로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잠시 고민스레 자신의 주먹과 일레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어 정태의에게만 건네어준 일레이는, 냉정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파자마라. ……네놈이 어쩐 일로 그 차림새로 네 침실 밖으로 나왔는지 희한한 일이지만, 얌전히 잠이나 자지 갑자기 왜 왔어.”
평소에 비해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을 가리키는 벽시계 아래에서, 크리스토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잠이 안 와.”
“약이라도 먹고 자. 영원히 잘 수도 있을 만큼 서랍장에 넣어 둔 그 약은 다 어쨌어.”
“없어. 보충해 두는 걸 깜빡했어.”
볼멘소리로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듣고서야, 맥주 풀탭을 뜯던 정태의는 그가 최근에는 약을 거의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이면 거의 언제나 잠에서 깨자마자 머릿속이 시끄럽다며 약부터 삼키던 크리스토프는, 요 근래에는 리하르트의 일을 돕게 되면서 밤마다 늦도록 일더미에 치이다 잠드는지 아침마다 졸음과 피로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졸려, 힘들어, 허리 아파, 새하얀 얼굴로 끊임없이 그런 말들을 쏟아내면서, 약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추워서 잠이 안 와.”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말을 덧붙였을 때, 못마땅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며 맥주를 삼키던 일레이의 눈매가 한층 더 스산해졌다. 여름이 다 가고 있는 현재,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고는 하나 바깥에서 별을 보면서도 잠들 수 있을 만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네 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은 여기서 하지 말고 의사에게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뭐……아침저녁으로는 창문 열어 놓으면 좀 쌀쌀하기도 하더라. ……정말 추워?”
그래도 크리스토프를 도와줄 셈으로 말을 거들긴 했지만, 아직도 창문을 열고 잠드는 정태의는 약간 심각한 얼굴로 크리스토프에게 물었다. 일레이의 말마따나 정말로 신경이나 감각에 문제가 있는지도 몰랐다.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정태의를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불쑥 물었다.
“끌어안고 자면 덥지 않아?”
“음?”
꿀꺽, 맥주를 마시다가 정태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긴……, 날이 좀 더 추워지면 뭐, 나름대로 따뜻할 것 같기도 해. 땀으로 끈적거리지만 않으면 기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요즘은 좀 추운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토프는 고민스러운 듯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그 주름을, 정태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입에는 맥주캔을 문 채, 대화의 맥락을 짚어 본다.
“그거라면 나도 할 수 있는데.”
문득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무심결에 중얼거린 혼잣말인지도 몰랐다.
“나도 끌어안고 잘 수 있는데. 나도 그럴 수 있는데. ……추우니까, 나도 그래도 좋은데.”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허무하고 어렴풋해서,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럼 아무나 끌어안고 자. 이놈 빼고.”
그러나 순간적으로 감돌았던 그 허허로운 느낌을, 일레이의 냉랭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베어 버렸다.
가만히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매를 찡그렸다.
“아무나라니, 누구를.”
“내 알 바 아니지. 이놈만 아니라면 네가 누구를 끌어안고 자든 부둥켜안고 자든. 유감이지만 나도 사람 끌어안고 자는 건 좋아하기 때문에 이놈은 양보해 줄 수 없거든.”
순식간에 삭막해진 공기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태의는 맥주를 삼키다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럼 둘이 같이 자면……, ……아냐, 실언이었어.”
그 삭막해진 공기가 일시에 칼날처럼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정태의는 히끅 딸꾹질을 하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
크리스토프는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피곤한 기색이 여실하다.
“잠이 안 와. 잠이 안 오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더 잠을 못 자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는 맥주를 하나 꺼내어 건네었다. 크리스토프는 캔을 받아들고서도 풀탭을 뜯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들어서 그래.”
정태의는 몇 걸음 옆에 있던 소파에 풀썩 몸을 던졌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자, 그는 심각하게 고민스러운 눈으로―필경 이놈을 끌어낼까 어쩔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쯧, 혀를 찼다.
“글쎄……, 어떤 게 중요할까 라든가, 뭘까……. 뭘, 뭣 때문에, 어떻게, …….”
두서없이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 단어를 나열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그가 막 입을 열었을 때, 그보다 먼저 일레이의 대답이 나갔다.
“누군가 대답을 해 줄 수도 없고, 생각한다 해서 결론이 나는 문제도 아니라면 오래 생각해 봐야 시간 낭비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좀 더 야멸차게 딱 잘라 말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는 그 말에 그치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만에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뺨을 날렸다.
이번에는 입술이 찢어졌다. 피가 묻어나오는 입술을 엄지로 문지른 크리스토프는, 그 어렴풋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새파란 눈으로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무의식적인 듯, 습관적으로 침대 위를 더듬는 손길을 정태의는 공포스러운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저 손이 닿는 곳에 이불이나 베개 따위밖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넌 지금 중심을 잃고 있어. 왜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헛소리를 하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해. 아니면 정신을 차리든가.”
“……그래, 덕분에 정신이 좀 드는군.”
찾던 것을 못 찾았는지, 침대 위를 더듬던 손은 아쉽게 멈추었다.
그대로 일레이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싶던 크리스토프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 그러다가 아예 침대 위에 이불 덮고 누워 버린다. 거기서 잘 태세다.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일레이의 앞에서 꾸물꾸물 몸을 옆으로 옮긴 크리스토프는 옆에 사람 하나가 누울 만큼의 공간을 남겨둔 다음 무심한 얼굴 그대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잠이 오면 여기서 자도 좋아.”
“……아니, 그건 내 침대인데…….”
“나는 잠버릇이 얌전한 편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야 네가 인형처럼 꼼짝도 않고 곤히 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하고 중얼거리는 정태의와 크리스토프의 사이에 일레이가 끼어들었다.
침대 옆에서 크리스토프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일레이는, 이번에야말로 사고를 칠 게 틀림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손목을 주물렀다.
“크리스토…….”
“그렇지. 그러고 보니 네게 묻고 싶었던 게 있어.”
일레이가 입을 열기 무섭게 크리스토프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표정 없는 시선이 일레이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바깥 날씨를 묻듯이 평연하게 물었다.
“그때, 말리크는 네게 무슨 얘기를 했지?”
*
깨어난 이유는 추워서였다.
몇 번쯤 무겁게 눈을 깜박이다가 일어나 앉을 때까지,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잠들었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렸다. 믿어지지 않지만, 정태의의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리그로우가 뭐라고 하든 말든 꿈쩍도 않고 있다가 잠들었던 모양이다.
원래 잠이 들고 나면 잘 못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잠자리에서 잠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다소 기묘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나왔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그 침대에서 잠들고 난 뒤 정태의를 잡아끌고 자신의 방으로 갔을 리그로우의 모습이 훤히 떠올랐다.
“……추워.”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몸을 움츠리며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리다가 고개를 기울이고 만다.
추울 리가 없는데.
리그로우가 말했던 것처럼 추울 리가 없는데, 분명히 피부에 닿는 공기는 딱 좋을 정도로 선선한데도.
그런데도 추웠다.
한동안 그 자리에 망연히 서서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고요했다.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커다란 창문으로 오늘따라 눈부시게 밝은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래서 유난히 더 고요한 느낌이 드는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그 달빛 속에 잠긴 것처럼.
방 앞까지 다다른 크리스토프는 달빛이 뿌연 사선을 그리며 비쳐들어 모든 것이 은색과 짙고 옅은 군청색으로 물든 그 소리 없는 공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을 때, 어두운 방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창 아래의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리하르트.”
불을 켜기도 전부터, 그 흐린 실루엣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불을 켰다.
어둠을 몰아내며 하얀 불빛이 방을 채웠다.
크리스토프의 시선 끝에서, 리하르트는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이제는 어젯밤―연회장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늘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탓인지, 혹은 까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 때문인지, 조금 지쳐 보였다.
“……. 계속 이 방에 있었나?”
크리스토프는 입매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짧은 반문이었다.
“너는?”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굳이 대답을 바라진 않았던 듯, 혹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서늘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제야 목을 갑갑하게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뭐 좋아. 어쨌든 결론 하나를 낼 만한 시간적 여유는 얻을 수 있었으니.”
“결론이라니. 어떤 결론.”
“몇 가지가 꼬여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었지만……. 일단 눈에 거슬리는 건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 약조를 깨어 버리는 셈이라서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하는 수 없지.”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내며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리하르트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리하르트의 눈에 거슬리는 것.
즉각적으로 떠오른 것은 크리스토프 자신이었다. 만인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고 친절하다는 칭찬만을 듣는 그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
――타르텐에 계속 머무르도록 해, 크리스토프. ……이곳에 있어.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은 아까 그가 속삭였던 말이다. 무슨 변덕인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던 말이었다. 결국은 변덕에 지나지 않았던.
크리스토프는 픽 웃으려 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입가를 약간 일그러뜨리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굳이 치워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약조를 깰 것도 없이 어차피 곧 사라질 텐데.”
“아니, 어중간하게 잠시 눈에 안 보이는 걸로는 소용없으니까.”
“네가 그렇게 말할 필요 없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나는 내일 이곳에서 떠나면 다시는 드레스덴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리하르트는 소매 단추를 풀던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가만히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하,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의 입가에도 웃음은 맺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뭔가 짜증스러운 듯, 혹은 피로한 듯 한 손으로 이마를 덮어 문지른다. 몇 올쯤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이 더욱 흐트러졌다.
“크리스토프.”
지친 목소리가 낮게 그를 불렀다. 잠시 침묵한 뒤, 그 목소리는 어딘지 서늘한 빛을 띠고 이어졌다.
“만일 내가 아주 옛날부터 너만 보고 있었다면, 어떨까.”
“……?”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계속 생각해 봤어. 어쩌면, 아니, 만일에 내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리하르트는 문득 똑바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평소의 그 사람 좋은 척하는 웃음조차 없어서, 크리스토프의 표정까지 덩달아 사라졌다.
“내가 널 좋아한 거라면.”
“미쳤군.”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갔다.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훔쳤다. 살짝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아니, 그 반대인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아주 대단히 괴상한 말을 들어서 일순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당황하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문득 하, 코웃음을 쳤다.
“그래, 미쳤지.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어.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미쳤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오늘, 아니 지금 이 남자는 이상했다.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움켜쥔 저 주먹과 함께 입술까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시선과, 끊겨 나오는 말들과.
“리하르트. 농담하지 마.”
그 말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다. 무섭다기보다는, 일어날 리가 없는―일어나서는 안 되는―일이 벌어지고 있는, 그런 악몽이다.
농담이라, 그렇게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고작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크리스토프는 움칫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불안과, 당혹과, 초조와, 그런 것들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이 더없이 무방비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 앞에서, 리하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그 입매에 희미한 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지만, 잘못 본 모양이었다.
“농담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거지?”
“농담이 아니면, ―…농담이잖아.”
크리스토프는 당혹스레 그의 말을 되풀이하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요 얼마간 계속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그거다. 너는, 떠나지 말아야 해. 아니 애초에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어떤 형태로든 내 옆에 있어야 했어.”
“리하르트, 정신…….”
“크리스토프.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이곳에 있어.”
“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었다.
끔찍한 농담이다. 아니, 크리스토프가 가장 싫어하는 류의 농담이었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좋아해. 네가 좋아.”
다음 순간, 그 말이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뜨겁고 메마른 숨결이 귓속으로 똑바로 파고든다.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게 부둥켜안는 체온과 함께.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눈동자가 굴러 떨어질 듯 커다랗게 뜬 눈은 감길 생각도 않았다.
“이런 말 따위는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런 감개도 없나?”
자조적이고 씁쓸한 목소리가 뺨에 부드럽게 닿는다. 크리스토프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 처음, 한 번도,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하얘졌다.
“크리스토프. ……크리스.”
한숨처럼 애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뺨 위를 쓸며 이윽고 입술 위로 입술이 겹쳐졌을 때, 크리스토프는 정신 나간 말을 하고 있는 이 남자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움츠러든 몸이 그를 뿌리치지 못한 건, 허리를 세게 조여 안은 그 팔이 따뜻해서.
추울 리가 없었는데도 추웠던 몸은, 고작해야 팔 하나로 따뜻해질 리가 없는데도 따뜻했다.
“크리스. 좋아해.”
들릴락 말락, 낮은 숨소리가 다시 한번 좋아, 하고 속삭인다.
그런 농담은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위로 겹쳐진 입술에서 똑같은 말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쏟아져 들어왔다.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떨리는 것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농담이 아니면 어쩌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농담이 아니면. 아니 농담이겠지. 우습지도 않은 장난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농담이 아니면.
뭔가 제대로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욱신거리면서 덜컥 불안함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럴 때마다 그 불안감을 억지로 짓누르기라도 하듯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좋아. ……좋아.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침대 위에서 뒤엉켜 있던 두 사람. 늘 반짝반짝, 어디에 있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빛이 나는 남자와, 어디에 있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살벌함이 감도는 남자. 그리고 그 입에서는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결코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상상 속에서라도 믿어지지 않는 벌꿀 같은 말들.
그 말들이, 지금 자신의 입술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믿을 수 없는 농담들과 머릿속 어디선가 뒤섞였다.
“좋, …….”
어쩌면 조건반사처럼,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다가 움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요 얼마간 밤마다 했던 말이다. 그를, 정태의를 따라서, 그 말을 거듭하다 보면 그가 어떤 기분인지를 단편적이나마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그 말을 따라했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한 번도―사람을 상대로는―입 밖으로 내어본 적이 없었던 말인데도, 어느새 이렇게 입에 익어 있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도, 빈틈없이 맞닿은 체온도, 온 얼굴 위를 쓰다듬는 입술도, 어느새 이렇게나.
그때 문득 손끝에 리하르트의 셔츠자락이 닿았다. 얇은 셔츠 너머로 이제는 이미 익숙해진 살갗이 닿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츠리고 말았다.
크리스,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몇 번이나 더 들렸을까.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귀 아래에 입술을 묻고 있는 리하르트의 어깨 너머로 당혹스럽고 난처하게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아주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멈칫멈칫 셔츠 끝을 잡았다. 자신이 먼저 그를 잡은 것은 처음인 줄도 미처 모르고.
그 순간 갑자기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유도 없이, 확 달아오르는 얼굴만큼 가슴이 뜨거워져 당혹스레 고개를 기울이고 만다.
그때.
갑자기 움직임이 멎었다.
크리스토프를 세게 끌어안고 있던 그대로, 리하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목덜미를 쓰다듬던 입술도, 흘러넘치듯이 쏟아져나오던 속삭임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춘다.
“―…. 리하르…….”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그의 이름을 속삭였을 때였다.
크리스토프가 입술을 파묻고 있던 그의 어깨가 문득 움칫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다. 그가 웃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끌어안은 채 나직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섞인 혼잣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아쉽군……, 아쉬워.”
웃음 섞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갑자기 심장에 찬물을 쏟아붓는 듯 서늘해졌다.
고작해야 몇 초 전인데도, 씻은 듯이 바뀐 음색이다. 냉정하고, 잔혹하기까지 할 만큼.
그러나 그 목소리와는 달리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어루만졌다. 끌어안았던 팔을 느슨하게 풀면서 천천히 몸을 떼고 마주보았다. 크리스토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올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음 섞인 눈동자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방심한 어린애처럼 무방비하게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대단히 만족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쉬워.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설마 세상물정 모르는 숫처녀도 아니고, 이렇게 홀리기 쉬워서야.”
“―….”
“하긴 숫처녀나 숫총각이나 그리 다를 건 없지. 경험이라곤 하나 없는 동정이라고 제 입으로 광고를 할 때도 우스웠지만 이거야 원……, 여태 등 한 번 치이지 않고 살아온 게 행운이군, 크리스토프. 그래, 그 점에 있어서는 그 모난 성격이 도와줬다고 해야겠어.”
“……. 놔.”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넋없이 그를 바라보던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이 무심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밀어내었다. 그런 장난 따위에는 넘어간 적도 없다는 듯 약간 눈살까지 찌푸리는 크리스토프를, 그러나 리하르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바싹 끌어안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화났나? 설마 너도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테지. 아……그래. 옛날부터 너만 보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야. 아까 이 방에 앉아 너를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 내 삶에서 어쩌면 너보다 더 내 머릿속을 차지한 사람은 없지 않나 하고. 그러다가, 이게 만일 좋아하는 감정이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하,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지만.”
리하르트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약간 몸을 기울여 크리스토프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뽁, 장난이라는 게 뚜렷한 소리를 내며.
“……그러다 보니까 문득 궁금해졌거든. 그렇게 말하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 내가 너한테 사랑의 고백이라도 한다면 너는 뭐라고 할까. 너는 어떻게 응답해 줄까. 너는…….”
점차 낮아지던 목소리는 이윽고 끊겼다.
표정 없이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서늘한 얼굴을,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묵묵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곧 한숨처럼 픽 웃는다.
“설마 이렇게까지 호락호락할 줄은 몰랐지만. 이상한 데에서 생각보다 물러빠진 데가 있거든. ……하긴 네 마음은 벌레 먹어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지? 취약할 만도 하군.”
――결여된 마음.
귓속에서 갉작갉작, 술렁이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리하르트가 뭐라고 하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심장 소리 대신 귓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곳에 있어, 크리스토프. 타르텐에서 떠나지 마.”
문득 리하르트의 확고한 말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크리스토프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이번에는 리하르트가 어쩐지 마뜩찮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널 좋아해서 그런 줄 아나? 타르텐을 위해서야. 타르텐을 위해서. 인재는 다른 곳에서 빼앗아올 망정, 이쪽에서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너는 비록 여러 모로 문제가 많지만, 빼어나게 뛰어난 부분도 분명 있으니까.”
“……. 나는 이곳에 있지 않을 거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조용하고 담담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크리스토프도 픽, 숨을 내쉬고 말았다.
뭐야. 뭣 때문에 그렇게 당황했던 거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는데 뭘 그렇게 어쩔 줄 몰라했던 거야. 그럴 이유라곤 전혀 없었는데.
어쩐지 몹시 우스워져서, 크리스토프는 한숨처럼 그렇게 몇 번이나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표정을 지운 채 기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크리스토프의 입매에 못 박혀 있었다. 아주 약간 휘어진 허무한 입매다.
“……그래, 네가 꼭 바란다면 알 파이살에게 가도 좋아. 하지만, 타르텐에서 완전히 떠나는 건 안 돼. 반드시 타르텐에게 정기적으로 들러서 연락해야 해. 그렇게 하면, 타르텐에 대한 네 부채를 없는 걸로 해도 좋아. 그렇게 해 주지.”
“흥……. 벌써부터 타르텐의 주인 행세로군.”
크리스토프는 느리게 말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려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이미 조금 전의 그 기묘하고 꿈결 같은―악몽 같은―공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는 여느 때와 같은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가 있었을 뿐이다.
“졸려. 가. 나는 잘 거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밀어내고 침대로 걸어갔다.
“크리스토프.”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무척 피곤해. 누구씨가 쓸데없는 헛소리나 지껄여 준 덕분에.”
크리스토프는 등 뒤에 서 있는 그를 무시하고 침대에 파고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이불이 몸을 덮었다. 춥다.
크리스토프, 다시 한번 리하르트가 언짢은 듯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려는 뜻보다는, 정말로 크리스토프는 피곤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얼마쯤 지났을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좋아. 나도 지금은 지친 참이니.”
그 말과 함께, 그가 옷가지를 마저 벗어내는 기척이 들려왔다. 어렴풋한 머리로도 의아하게 여기던 차, 크리스토프의 뒤쪽으로 매트리스가 약간 패이는 느낌이 들었다. 곧 등 뒤로 달라붙는 체온.
“뭐하는 거야.”
크리스토프는 몸을 반쯤 돌리며 사납게 중얼거렸다. 리하르트는 미처 돌아눕지 않은 크리스토프를 바싹 끌어안아 당기면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자.”
“왜 네가――.”
“덜 피곤한가 보군. 오늘도 지쳐서 잠들고 싶나?”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나른하고 지친 듯 눈을 감고 있지만 언제라도 그 눈을 뜰 수 있는 리하르트를 묵묵히 노려보다가, 쓴 한숨을 내쉬고 만다.
움칫거리며 다시 등을 돌리고 눕자 목덜미 위로 픽 숨결이 닿았다. 울컥해서 눈을 부릅떴지만 어차피 보이지 않는다.
더웠다. 덥고 답답하다.
“답답해. 더워.”
크리스토프가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뒤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설마 벌써 잠들었나, 미심쩍게 고개를 돌렸지만 리하르트의 얼굴이 보일 만큼의 시야는 확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목덜미를 간질이며 와 닿는 숨결이 규칙적이었다.
잠시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약간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잠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걸 비웃기라도 하듯, 곧 허리에 감겨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 더 세게 끌어안는다. 이제는 덥고 답답할 뿐 아니라 숨까지 막혔다.
“숨 막혀. ……숨 막혀. 숨쉬기 힘들어.”
크리스토프는 짤막짤막하게 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손톱 끝으로 쿡쿡 찔렀다. 아주 약간, 팔이 느슨해졌다. 여전히 답답하고 더웠지만 그래도 숨 쉬기는 좀 편해졌다.
춥지는 않았다. 익숙하고 서늘하게 몸을 감싸던 한기는 등 뒤의 남자가 꼭 끌어안은 통에 새어들 틈이 없었다. 춥지 않다.
“…….”
술렁술렁, 술렁술렁.
귓속에서 아득하게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피로한 나날에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또 들려온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고단한데도.
결여된 인간. 텅 비어 부스러지기 쉬운 마음. 껍데기가 부스러져 흩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공간.
크리스토프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했다. 너무나 피곤해서, 이제는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
――그때, 말리크는 네게 무슨 얘기를 했지?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가볍게 표정이 사라진 것을, 정태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레이는 곧 감탄스럽다는 듯 웃으며, ‘타르텐의 정보기관에서는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정보를 알아내나? 놀랍군.’ 하고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그 대답에서 정태의는 일레이의 입에서 더 이상 대답이라고 할 만한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약간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을 뿐 더 캐묻지 않았다.
“말리크라…….”
무뚝뚝한 아지즈와는 달리 늘 웃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더 상대하기 거북했던 남자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볼을 긁적였다.
별로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태의가 그다지 내켜하지 않을 이야기가 오간 것만큼은 분명했다. 게다가 수상쩍은 걸로 따지자면 오늘 아침에도 그렇다.
어젯밤 일레이가 머무르는 방으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자 이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척도 없이 언제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새벽부터 그에게 무슨 할 일이 있었는지도.
정태의는 내 참,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할 얘기라고 해 봐야 정해져 있었다. 정태의와 관련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
정태의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뻔하다. 정재의다.
그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정태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정재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정태의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들 해 보라지. 나한테 형을 설득해 보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좋으실 대로.”
정재의의 머리 위로 포탄을 비처럼 쏟아붓는다 해도 걱정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정태의가 한 달 남짓 머물렀던 서익의 끝방은,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거의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손길을 따라갈 수는 없어서 침대보의 자잘한 주름이나 미세하게 지문이 남은 테이블 유리까지 말끔하게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의 비슷하다. 이 정도라면, 정태의가 떠난 뒤 바로 다른 손님이 이 방에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아 보인다.
오늘 저녁이다.
오늘 저녁이면 드디어 승계자가 결정된다. 수십 년 만에, 드디어 타르텐의 정점에 새로운 주인이 서게 된다.
……그러나 어차피 남의 일이라 정태의로서는 그 수십 년 만의 승계가 대단히 감회가 새롭거나 하지는 않았고, 승계 결정이 되고 나면 드디어 이 집에서 떠나게 된다는 일 쪽이 더욱 감개 깊었다.
다만 떠날 시각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마음에 걸리는 일을 하나 꼽자면.
“책 찾아야 하는데…….”
이미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자신의 짐가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짐이라고 해 봐야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멜 만한 가방에 옷가지 몇 벌이나 넣은 정도였다. 거기에서 늘어난 짐이라고는,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정장 정도.
“결국 못 찾았네……. 어떡하나.”
카일에게 뭐라고 말하지, 하고 고민하면서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잡아당기고 있을 때였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 너머로, 숲 쪽에서 말을 타고 가볍게 달려오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도 양반은 못 될 모양이다.
정태의는 창을 열고 창틀에 팔꿈치를 걸치며 몸을 내밀었다. 막 그를 부르려 하는데, 새벽부터―정확히는 어제 저녁부터―저택 안팎으로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중동의 병사가 크리스토프의 말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오고가며 얼굴을 익혔을 텐데도 우직하게, 혹은 미련하게 크리스토프를 탐문하듯이 뭐라고 말을 하던 병사는, 말 위에 앉아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던 크리스토프에게 결국은 한 방 걷어 채이고 말았다.
에고, 저 병사도 병사지만, 저놈도 저런 식으로 또 괜한 적을 하나 만들어버리는구나.
저 패턴에는 익숙할 만큼 익숙해져 있었는데도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저렇게 된 뒤에는 으레 부작용이 뒤따라오게 마련이다.
그 부작용은 매우 빠르게,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성이던 그 병사의 동료 두엇이 냉큼 달려가는 게 보였다.
정말 익숙하다. 단지 대상이 타르텐의 친척 형제들에서 아랍의 병사들로 바뀌었을 뿐,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싸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상황은 크리스토프와 고작해야 몇 주 함께 있는 사이에 이제 정태의에게는 너무나 친숙해졌다.
“젠장, 마지막 날까지 곱게는 안 끝나는구나…….”
소풍 가는 날의 어린이처럼 아침부터 착하게 차려입었던 양복의 웃옷을 도로 벗어던지며 막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타이밍도 좋게, 막 그때 서익 뒤쪽에서 느긋하게 산책이라도 갔다 오는 길이었던 듯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말리크였다.
저 사람도 양반 되긴 글렀구나,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가 멈칫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자니, 예상했던 대로 말리크는 그들을 보고는 그리로 다가가 끼어드는 눈치였다.
과연 일반병들은 범접도 못할 만큼 높으신 신분이신 만큼, 병사들과 더불어 추한 모습을 보이는 일도 없이 말 몇 마디로 병사들을 물렸다.
머뭇머뭇 병사들이 물러간 뒤, 말리크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말 위에 꼼짝도 않고 앉아 냉랭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도 꿈쩍도 않고 태연하게 웃음 지으며 말을 거는 말리크는,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가 풍겼다.
하긴 저 정도로 발끈해서야 높으신 분들을 모실 수는 없겠지.
도로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마음 편히 그들을 구경이나 하려는데, 말리크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곧이어 말리크가 뭐라고 했는지, 크리스토프까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 여어.”
들리지 않을 인사를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정작 인사를 건넨 크리스토프는 그 손인사를 보고도 차갑게 고개를 돌려 버렸고, 그 옆에서 거북한 말리크가 벙싯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음……, 아니 이게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매몰차게 손을 거둘 수는 없어 흔들인형처럼 손을 흔들흔들하다가, 크리스토프가 말고삐를 틀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서야 정태의도 몸을 일으켰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 이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후가 되면 더 바빠져서 자칫하면 제대로 마주칠 수도 없을 텐데, 지금 얼른 책 행방을 물어봐야 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말끔히 책을 내어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노력을 해 보는 게 도리다.
오늘이 최후의 하루인데도, 도리어 정작 이날이 닥치자 어제까지의 그 노도 같던 일더미들은 딱 멈춘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오늘은 리하르트를 따라서 외출하거나 그의 옆에 붙어 그를 거들지도 않았다. 오후부터는 슬슬 다시 바빠질 거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 정작 바빠지는 사람은 윗사람보다는 아랫사람들이다.
마사로 달려가는 정태의의 옆으로, 분주하게 복도를 오가는 사용인들이 스쳤다. 아침부터 외부 손님들이 들이닥치고 있으니 바쁠 만도 했다.
하긴 수십 년 만의 승계식이라니,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이런 날이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큰 행사인 셈이다.
서익에서 나가 마사로 가는 길은, 그래도 인적이 드물었다. 아니 도리어 그쪽은 평소보다 더욱 사람이 뜸했다. 다들 밀어닥치는 외부 손님을 접대하느라 이런 한적한 곳에서 시간을 때울 겨를도 없는 탓이다.
“그런 와중에 한가하게 승마를 즐기고 돌아오는 게 또 저놈답다면 저놈다운 일이지…….”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사로 이어지는 별채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러나 그 걸음은 곧 멈추고 말았다.
정태의보다 고작해야 몇 걸음 앞, 별채에서 막 나와 마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정태의의 기척 따위는 느끼지도 못한 듯 등을 곧게 펴고 똑바른 자세로 정면을 향해 걷는 그 자그마한 뒷모습은,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정태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말을 세워두고 막 마사에서 나오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 쪽을 보고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정태의의 앞에서 걷던 사람을 보고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다.
“……어머니.”
그녀를 부른다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듯한 부름이 크리스토프의 입술 사이로 나왔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비앙카는 한 점도 흐트러진 데가 없는 단정한 차림과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크리스토프의 앞에 섰다. 예닐곱 걸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딱 그 만큼의 거리감을 사이에 두고서.
“크리스토프. 너는 타르텐을 싫어하니?”
아무런 전조도 없는 그녀의 물음에, 인형처럼 창백하게 멈춰 서 있던 크리스토프는 아주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아주 약간 고개를 젓는다.
“그렇……,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타르텐에 흠집을 내려는 거지?”
“―….”
조용하지만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 앞에서, 당혹스럽고 의아한 빛을 띤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
크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온 정태의 역시 아무 말도 못했다.
타르텐에 있어 해를 입힌다고 할 만한 일을, 크리스토프는 여러 번 했다. 사람을 다치게 한다거나 타르텐에서 소유한 곳을 부수는 등의 직접적인 위해는 물론, 그 자신의 곱지 않은 행태로 타르텐의 명예를 깎아먹은 등의 간접적인 위해까지 치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어제오늘 시작되지도 않았고, 또 어제오늘 있었던 일도 아니다. 그녀가 이제 와서야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을 리도 없다.
어째서 새삼스럽게, 하고, 아마도 크리스토프 역시 머릿속 한구석으로 떠올리고 있을 의문을 함께 느끼던 정태의의 앞에서, 그녀가 말을 잇는다.
“어째서 리하르트를,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아이를, 그런, 낯부끄럽고 더러운 짓에 끌어들인 거야?”
가늘게 떨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크리스토프의 표정까지 얼음조각처럼 새파랗게 굳어진다.
정태의 역시 바삭, 저도 모르게 발 아래의 흙을 내리밟고 말았다.
“너는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겠지만, 리하르트에게는 흠을 내지 말아야지. 타르텐의 이름에 어떤 누를 끼치려고 너는 그런 추잡한 짓을, 심지어 선조들이 잠들어 계신 정갈한 곳에서, 너는――.”
그녀는, 그 어느 때인가 그녀가 보았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녀는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일인지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보았는지. 크리스토프의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그런데도 지금 크리스토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벌써 알 것 같은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흘러나온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타르텐에, 아니 드레스덴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마. 타르텐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직 흠집만 주는 너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아 주렴.”
크리스토프는 눈처럼 창백했다.
그 자체가 밀랍으로 된 조각상인 듯,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시선을 허공에 띄운 채 간간이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그곳에는 정적만이 가득 차, 그늘이 드리운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면 바삭, 소리가 날 것 같다.
“알겠지, 크리스토프? 다시는 오지 말아 주렴.”
아주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가, 그 말만은 상냥하게 속삭인다.
그녀는 옳았다. 그녀의 단정한 몸가짐도, 격앙되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도, 크리스토프를 타이르는 말마저도, 그른 데가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달리 대꾸할 곳이 없었다.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달싹 움직인 듯했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조용히 아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크리스토프는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예, 어머니.”
그 말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그녀의 발치를 더듬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좋은 날에 불미한 소리를 하면 안 되는데, 나도 참……. 이제 몇 시간 안 남았구나. 너도 옷 갈아입고 미리 준비하고 있으렴. 오늘 같은 날은 실수가 있어선 안 되니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할 말을 마쳤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이제 걱정거리가 사라져 다시 침착하고 환한 빛이 돌아온 얼굴은, 그제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정태의를 발견하곤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평연을 되찾는다.
그녀는 몇 초쯤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눈인사를 하곤 그 옆을 스쳐갔다. 정태의 역시 얼른 목례를 하곤, 그녀의 걸음 소리가 저 뒤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이윽고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정태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귀 뒤를 긁적였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그녀가 크리스토프와 마주하기 전에.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와 마주 서 있었을 때만큼 새하얗게 굳어 버린 모습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핏기가 가신 얼굴은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들어가자.”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쉬고 말했다.
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미안해요, 카일, 그렇게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크리스토프에게 손을 내민다. 가자, 그렇게 한 번 더 말하고 나서야 사람들과 닿기를 싫어하는 그에게 손을 내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손을 거둔다.
그러나 미처 손을 내리기 전에, 뜻밖에 크리스토프가 손을 뻗었다. 정태의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내리던 손을 엉거주춤하게 멈추고 말았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앞까지 손을 가까이 해 잡을 듯 말 듯 한동안 망설이다가 살짝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 끝이 스쳤다. 그뿐이었다.
“……크리스. 가자. 같이.”
정태의는 한 걸음 다가서 이번에야말로 크리스토프의 손을 잡았다. 악수를 하듯이 넉넉하게 손을 쥐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자, 크리스토프는 표정 없는 얼굴로 기묘한 것이라도 보듯이 정태의를 물끄러미 마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손으로 내려갔다. 맞잡고 있는 두 손을 가만히 보다가, 어느 순간 입매를 찡그렸다.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무뚝뚝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불쑥 물었다.
“내가 잡아도 되는 손이야?”
정태의는 자신의 손을 노려보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객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덩달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만.”
그것이 정태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놓더라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태의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이것은 지금 그에게 빌려주는 손이다. 빌려줘야만 했다.
혹여 크리스토프가 그 손을 뿌리칠까, 정태의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잡힌 채로 묵묵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자.”
정태의는 돌아섰다. 그리고 걸어나섰다.
한 걸음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따라오는 기척이 났다.
손을 맞잡고 앞뒤로 나란히 걸어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크리스토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필경 크리스토프는 여느 때와 같이 그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괴로워하는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그냥 담담하고, 조금 따분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 창백한 얼굴로.
그 눈동자만큼이나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다물고.
그래서 정태의는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