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 평온한 저녁 (26/34)

1. 평온한 저녁

정태의는 잠시 동안 문고리를 잡은 채 열린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 집에 온 뒤로 줄곧 아침마다 크리스토프의 방문을 열었고, 그러면 침대 안에서 도자기 인형처럼 눈을 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볼 수 있었다.

아주 드물게는 정태의가 깨우기 전에 그가 먼저 일어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적은 없었다. 아예 방에 없는 건 처음이다.

흠, 낮게 중얼거린 정태의는 어쨌든 평소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었다. 햇살이 비치는 창밖으로는 부산하게 아침을 맞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쩌면 이 방이 빈 것은 저들과 같은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승계결정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저택은 눈에 띄게 분주해졌다. 수십 년 만에 주인이 바뀔 그날을 앞두고, 저택 전체가 흥성거리며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바빴다. 식객으로 얹혀 있는 정태의를 빼고는.

하지만 그 바쁜 가운데서도 크리스토프 역시, 비록 리하르트의 일을 돕는다고는 하나 한 발쯤 빼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상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환기시킨 정태의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막 문을 나섰을 때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조그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뭔가 큼직한 상자를 끌어안고 있던 그 그림자 역시 정태의를 알아차렸는지 이쪽을 돌아보더니 아, 하고 알은체를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방에 안 계신 것 같아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정태의의 어깨 높이쯤에 있는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말을 거는 소년을 바라보며, 정태의도 어리둥절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올리버. 좋은 아침이구나. ……날 찾아왔어?”

그러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하고 의아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던 정태의는 올리버가 한 팔에 끌어안고 있는 커다란 상자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택 안에서 오가다가 몇 번 마주쳐 인사를 나누어 낯은 익히고 있었지만 방으로 찾아올 만큼 특별한 친분을 쌓은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볼일이 있어 왔을 테고, 그 정체는 아무래도 저 상자가 아닐까 싶은데…….

정태의가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올리버는 선뜻 그 상자를 내밀었다. 아이가 팔 한가득 껴안을 만큼 큼직한 상자였지만 내미는 모습을 보니 그리 무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아버지가 전해 드리랬어요. 사실은 어제 저녁에 받았는데 조금 늦어졌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올리버에게 손을 내저으며 상자를 받아든 정태의는 더욱 의아하게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상자의 포장을 벗겼다.

굳이 의심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곧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그 자체가 이미 의심이라는 걸 깨닫고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보낸 사람이 보낸 사람이다.

올리버의 아버지라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태의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낼 일은 절대로 없을 사람이었다. 도리어 폭발물 따위를 보내면 또 모를까…….

위험한 데에 생각이 미친 정태의는,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흘끔 올리버를 보곤 슬슬 두어 걸음 물러섰다. 올리버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곧 눈치 빠르게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만 가 볼게요.”

다른 사람이 물건의 포장을 뜯는데 너무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올리버는 약간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포장을 거의 다 풀어 상자의 뚜껑을 열며,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마실 거라도……, 어…….”

맥주로만 한가득 채워져 있는 자신의 냉장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올리버를 불러세우던 정태의는, 상자 안에서 나온 물건을 보고 눈을 껌벅였다.

약간 당혹스러운 눈치로 뺨을 긁적이는 정태의를 보고, 올리버는 흘끔 까치발로 상자 안을 넘겨다보았다.

“양복 같은데요.”

“어, 그런 것 같네.”

올리버의 말에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상자 안에 곱게 포장되어 있는 것은 정장 일체였다. 옷은 물론 부차적인 장식품까지 갖추어져 있는.

혹시나 뭔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태의는 상자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카드를 집어들어, 거기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정말로 내 건가 보네.”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

리하르트가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지만, 그 품목이 옷이라는 것도 영문을 알 수 없다.

“……? ……??”

혹시 어디선가 내게 정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곧 있을 자신의 승계식―어차피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에 추레한 모습으로 오지 말라는 의미로 보낸 건가.

그러지 않아도 카드도 얻어냈겠다, 오늘쯤은 옷을 사러 잠시 나가 볼까 생각하던 참이다. 마침 필요하던 참인데 잘 됐다. 눈짐작으로 보기에 사이즈도 맞을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기웃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의 앞에서 자신보다 더 당혹스러운 얼굴로 뚫어져라 옷을 쳐다보고 있는 올리버를 보았다.

어……,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미심쩍게 옷을 쳐다보는 올리버에게 정태의가 왜 그러냐고 눈짓으로 묻자, 곧 올리버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기울이며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저희 아버지는 옷 선물은 안 하시는데……. 가끔 사귀는 분들에게만 보내시거든요.”

정태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봐도 거기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자신의 것이다. 일단, 어쨌든 이 물건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 맞는 것 같았다.

난감하게 정태의와 나란히 마주보고 있던 올리버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주셨나 보죠. 옷은 처음 봤지만, 친한 분들께는 가끔 선물을 보내곤 하시니까요.”

아냐, 난 너희 아버지랑 친하지도 않아, 절대로,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태의는 으음, 하고 옷상자를 노려보다가 곧 결심한 듯 올리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올리버, 네 아버지는 지금 방에 계실까?”

글쎄요, 하고 자신 없는 투로 대답을 하면서도 올리버는 앞장섰다. 정태의는 옷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그 뒤를 따랐다.

정태의는 리하르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굳이 따지면 앙숙의 친구. 앙숙과 죽어라 싸우는 자리에 끼어 있었던 전적 약간. 개인적인 접점은 일체 없음.

……. 역시 재삼 생각해도, 좋은 관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유 없이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란 건 분명했다.

게다가 아마도 직접 물어보면 그 남자는 담담하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겠지만, 그가 정태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

아무렴 어때, 주는 건데 그냥 받아 둘까, 하고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정태의는 리하르트의 방 앞까지 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방을 찾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도 없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잠시 망설이던 손끝으로 문을 두드렸다.

“…….”

잠시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정태의는 다시 한번 두드리며 “리하르트?” 하고 조용히 방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오히려 평소를 떠올려보면 이 시간에 그 남자는 이미 예전에 일어나 지금쯤은 서재나 집무실에서 몇 종류나 되는 신문을 넘기고 있어야 했다.

곧 그렇게 납득하고 순순히 돌아서려던 정태의의 옆에서, 얌전히 서 있던 올리버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버지, 저 올리버예요. 잠시 들어갈게요.”

문고리로 탕탕, 문을 두 번 두드리고 몇 초쯤 기다린 뒤 올리버는 문을 열었다. 잠시 멈칫하며 반걸음쯤 비켰던 정태의는 앞서 들어가는 올리버의 뒤를 따라 슬쩍 고개부터 들이밀었다.

“리하르트, 다름이 아니라 이 옷 말인데―….”

침대 위에 언뜻 보인 인기척에 먼저 말을 걸고 나서야, 정태의는 그가 리하르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막 일어난 듯 나른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그 남자는, 잠에서 미처 덜 깬 것처럼 몽롱한 가운데 어딘지 언짢은 얼굴이었다. 아침에는 늘 그랬다, 그 남자, 크리스토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치고 만 정태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정태의와 눈이 마주쳐도 크리스토프의 잠에 취한 눈에는 별다른 기색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아, 아직 덜 깼다, 저건.

정태의는 곧 납득했다.

크리스토프는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분명히 잠에서 깨어서, 뭔가를 물어보거나 말을 걸면 짤막짤막하게 제대로 대답을 하는데도 반응이 느리고 어렴풋했다. 몸은 깨었는데 머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저 상태로 몇 분쯤 멍하게 있다가 천천히 깨어나곤 하는 것이었다.

정태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널찍한 방 안에는, 이제 막 들어온 정태의와 소년 말고는 크리스토프만 홀로 앉아 있었다. 반짝반짝, 새하얀 살갗과 백금빛 머리카락 위로 금색 햇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적막하고 눈부신 그림처럼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올리버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올리버를 보다가 손짓했다. 꿈결처럼 서투른 손짓을 쳐다보다가 올리버가 그에게 다가갔다.

“올리비아.”

올리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아주 약간 문지르면서, 크리스토프가 불쑥 중얼거렸다.

올리버를 잘못 부른 게 아니다. 아직 꿈속의 어느 언저리를 헤매는 머리가, 기억 속의 잔상을 혼잣말로 속삭일 따름이다.

올리버는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가 두려울 만도 한데도, 그런 빛이라곤 없이 가만히 크리스토프를 살피다가 올리버는 조용히 말했다.

“난 고모가 아니에요.”

크리스토프는 올리버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 속에서 자신의 기억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겹쳐보는 듯하던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조금씩 머리가 깨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올리버.”

그렇게 속삭이곤 손을 거두었다. 그 뒤로 몇 초쯤 가만히 멈춰 있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꿈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정태의에게 흘끔 눈길을 주었다. 이제야 제대로 깨어났다.

어……하고 머리를 긁적이던 정태의는 딱히 뭐라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아무거나 떠오르는 대로 입을 열었다.

“어제 여기서 잤어? 그러잖아도 방에 가 보니까 없어서 의아해하던 참인데.”

그러나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낸 순간, 괜히 말했나 싶었다.

조금 전까지 꿈결에 취해 정말로 인형처럼 투명하고 덧없던 크리스토프는, 그 말에 기억과 이성이 선명하게 살아났는지 갑자기 눈초리가 휙 치켜 올라갔다. 얇고 매서운 칼날 같은 눈이 흘끗 정태의를 노려보더니, 침대 이불을 확 걷어내며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불쾌한 듯 돌아앉는 모양새가 언짢은 눈치다.

티 하나 없이 하얀 등 위, 목덜미에서 어깻죽지 사이에 몇 군데 점점이 드러나 있는 빨간 흔적들이며 선명한 잇자국을 보고 정태의는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옆에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마는 올리버의 눈치를 괜히 한 번 보곤 소리 없이 한숨을 쉰다.

정태의는 가끔 핀트가 엇나간 데에서 둔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비교적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누구의 표현대로 하자면 감이 좋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어떠한 사실을 의식 위로 떠올려 깨닫는다기보다는, 명확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제야 아, 역시, 하고 별 놀람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이미 알고 봐서 그런지 무척 적나라한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뭐라고 해야 할까.

“거기, 가운 좀 집어 줘.”

잠시 시선을 좌우로 돌리던 크리스토프는, 찾던 것이 침대 반대편의 협탁 위에 반듯이 놓여 있는 걸 보곤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실올 하나 없이 벗은 몸이 내키지 않는지 다른 손으로 목덜미에서 어깨를 공연히 쓸어내린다.

여기, 하고 그 손에 부드럽게 흘러내릴 듯한 가운을 쥐여 주며 정태의는 문득 옆에서 넋을 잃은 듯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는 올리버를 보곤 내심 혀를 찼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색기……아니 염태艶態라고 해야 하나.

어지간히 놀아난 놈들은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분위기가 완연하게 흘러나왔다. 어린아이의 시선까지 끌 정도로.

그나마 저놈이 만인에게 경원시당해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아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온갖 소문이 다 돌았을 거다. 공연히 찔러 보며 수작을 거는 놈도 틀림없이 한 다스는 나오고도 남았다.

저 성질머리가 다행스럽다고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 더웠어?”

여기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 그만 가서 네 볼일을 보라고 올리버에게 인사하며 아이를 내보낸 뒤 정태의가 문득 크리스토프에게 물었다. 약간 머뭇거리면서도 착하게 인사를 하고서 올리버가 나가자, 크리스토프는 가운을 걸치며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 더워? 네 방은 더웠나? 나는 괜찮았는데.”

덥지도 춥지도 않게 딱 알맞은 실내를 둘러본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되물었다.

“아니, 내 방은 딱 좋았어. 그런데……땀을 꽤 흘린 것 같아서.”

이마며 목덜미에 흘러내려 땀으로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불현듯 사납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한동안 정태의를 노려보며 말을 않는다.

에고. 뭔지 몰라도 또 괜한 말을 한 모양이다. 정태의는 애꿎은 관자놀이만 긁었다.

“……. 그놈이 뒤에서 내도록 부둥켜안고 있어서. ……소름끼치고 답답하다고 말했는데. 땀이 나서 불쾌하다고 했는데도.”

그러니까 더 놓아주지 않았어, 띄엄띄엄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는 그 감각이 떠올랐는지 몸을 움츠렸다. 눈초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어, 그래,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그 날카로운 눈매에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눈길을 피해 공연히 방을 둘러보는 척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의 시선이 미심쩍게 방 안을 헤맨다.

바삭바삭, 새로 깐 듯이 말끔한 시트―구석의 바구니를 가득 채운 구깃구깃한 시트가 얼핏 보였다―. 처음부터 크리스토프에게 줄 요량이었던 것처럼 크기도, 그의 취향에도 잘 맞는 가운. 저 생생한 흔적들을 몸에 새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던 몸.

“……. 리하르트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성향이야 어쨌든 매너 하나는 끝내주게 좋구나.’ 하고 말을 이으려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크리스토프가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통에 우물우물 말을 흐렸다. 리하르트가,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정태의는 머리카락만 잡아당겼다.

그러나 역시 의외다. 그 남자가 이렇게나 잠자리 매너가 좋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었다. 아니, 평소의 그 인격적인 태도만 보자면 당연히 매너가 훌륭해 마땅하지만, 음험한 구석이 있는 그 본성을 봐선―심지어 상변태라 불릴 만한 그 성벽을 봐선―잠자리 매너가 아주 극악이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면 일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놈이 이럴 수가?! 하고 믿기지 않았을 만큼 훌륭한 매너를 자랑했었다. 기본적인 뒤처리는 물론 정태의가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개운하고 말끔하게 잠들―정신을 잃을―수 있도록 손써 주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거야 원, 이 상황은 일레이의 매너가 뜻밖에 훌륭했던 것과 비등할 정도로 경이롭다. 특히나 저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저래서야 마치…….

“알고 보면 너 좋아하나 보다, 야.”

혼잣말처럼 거의 9할의 농담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는 뭔가 찜찜해서 어라?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곧 제풀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냐, 저런 식으로 사람을 좋아하면 그건 좀 무섭지, 비뚤어져도 너무 비뚤어진 거지, 혼자 납득하던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바로 눈앞에서, 크리스토프가 매우 기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엄청나게 모욕적이면서도 터무니없고 기상천외한 말이라 언뜻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정태의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재미난 농담이군요.”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정태의의 어깨를 넘어온 목소리가 있었다.

이 방에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방주인, 리하르트 타르텐이 느긋한 걸음으로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젠장, 타이밍 하곤. 정말로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받아치면, 꼭 진담이라도 한 것 같잖아.

정말로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 짓는 리하르트를 돌아보면서 정태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본 체 만 체하고, 리하르트는 못마땅하게 말을 멈춘 크리스토프에게 흘깃 시선을 주었다.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크리스토프?”

“천지가 뒤집혀도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

딱 자른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정답이라는 듯 조금 더 진하게 웃으며 정태의를 보았다.

“그렇다는군요.”

“아――, 아니, 매너가 대단히 좋으셔서 말이지요.”

정태의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최대한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그러자 의아한 얼굴을 한 리하르트는 곧 이해한 듯 아아, 하고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굳이 매너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아, 하긴 릭은 한때 아주 유명했었지요. 아래가 찢어져 피범벅이 된 상대를 내버려두고 제 욕구만 채우고 가 버린다고. ……아, 이런 실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살짝 사과를 하며 정태의를 사뭇 가엾다는 듯 바라보는 리하르트는, 일부러 말한 게 틀림없었다. 웃음은 짓고 있으나 결코 곱지 않은 눈매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일레이도 사후 매너는 대단히 좋은데요. ……나한테는.

그 마지막 말을 붙이기가 어쩐지 몹시 멋쩍어서, 정태의는 심기가 영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

리하르트는 바쁜지, 혹은 오래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손목시계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제야 정태의는 원래 이 방에 찾아온 이유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아침에 올리버에게 받았는데요. 이걸 제게 전해 달라고 하셨다고…….”

정태의는 그때까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간다고는 하나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옷차림을 단정하게 갖춰입고 어딘가 나갔다 온 듯한 리하르트는, 정태의가 내미는 상자를 보곤 아아, 하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렇군요. 마음에 드셨습니까?”

“예? 아, 예, 훌륭한 옷이더군요. 그런데…….”

“그것 잘 됐군요. 옷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고심해서 고른 옷이니 허술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 하고 반문한 정태의는 눈을 깜박이며 어리둥절하게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리하르트가 들어온 순간부터 언짢은 낯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자락을 여미던 크리스토프가, 어느새 표정을 지우고 그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 옷.”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짧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상자에서 떨어진 시선은 리하르트의 얼굴에 못박혔다. 여유롭게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는 그에게.

“너――.”

“크리스토프가 정태이 씨를 위해 직접 고른 옷입니다.”

“리하르트, 네 멋대로―…!!”

크리스토프는 이를 짓씹으며 그를 새파랗게 노려보았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왜 그러냐는 듯이 마주본다.

“왜. 그렇게 기분 좋게 골라 놓고서, 버리기엔 아깝잖아? 네가 버리려던 저 옷을 내가 임의로 가져와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보낸 대신에 네게는 새로 옷을 보내 줬는데, 부족했나?”

네가 즐겨 입는 가게의 물건으로 주문했는데, 하고 덧붙이는 리하르트에게 크리스토프는 속이 치민 듯 외친다.

“네가 보낸 옷 따위는 안 입어! 네게 그런 걸 받을 이유도 없고!”

부득 이를 갈며 리하르트를 거세게 노려본 크리스토프는, 그 사나운 눈길 그대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던 정태의는 거친 걸음으로 다가오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저도 모르게 상자를 등 뒤로 돌렸다.

“어……, 네가 주는 거야?”

“버려.”

“네가 주는 거라며.”

“버리라고! 버리고 네가 새로 사! 버려!!”

“……. 싫어.”

정태의에게서 상자를 팽개치려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냉큼 상자를 감추며 뒷걸음질 치는 통에 실패했다. 순식간에 그의 눈이 세모꼴로 바뀌었다.

“버려!!”

“싫다니까. 그러잖아도 정장이 필요하던 참인데, 어디 가서 며칠 안에 이보다 나은 옷을 구하란 말야. 싫어.”

“너 안 줘! 네 거 아냐!! 내가 버린 거란 말야!!”

“여기 카드에 내 이름 적혀 있어. 그럼 내 거지. 심지어 너는 버렸으면 더 할 말 없겠네. 고마워, 크리스토프. 잘 입을게.”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손을 휘두르는 방향을 슬쩍슬쩍 피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조금 기묘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본다.

뭐랄까, 이건 마치――.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그 심정을 정리하기 전에, 어느 순간 정태의를 향해 달려들던 크리스토프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크리스토프의 등 뒤에서 리하르트가 그의 팔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의 커다란 손이 팔을 움켜쥐자 크리스토프는 움칫하며 그 손을 뿌리치려 팔을 휘둘렀다.

“놔!”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고함은 들리지도 않는 듯, 크리스토프의 뒤에 선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입가에만 의례적인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아셨을 테지만 그 옷에 대해서라면, 제 주인을 찾아 준 것뿐이니 제게 인사하실 것 없습니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나셨을 테니, 이만 제 방에서 나가 주실까요. 오전 일과를 시작하기 전까지 잠시 쉬고 싶은데요.”

다정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정태의는 잠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크리스토프. 고마워. 정말로 기쁜 선물이다.”

정태의는 혹시라도 채어갈까 옆구리에 꼭 낀 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이 옷을 골랐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내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정태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이 옷을 고르기 위해 크리스토프가 얼마나 열심히 둘러보았을지.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언짢은 듯 굳은 얼굴로 뭐라고 하려 했지만, 얼마간 정태의를 사납게 쳐다보다가 휙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맘대로 해, 어차피 버린 거니까, 하는 쌀쌀한 목소리가 뒤따른다.

“응, 고마워.”

정태의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흘끔, 그 얼굴을 본 크리스토프가 다시 공연히 낯을 찌푸린다. 그 찌푸린 미간이며 입매를 보자 괜히 우스워져서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정태이 씨?” 하고 그를 재촉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정태의는 아,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짧게 말하며 리하르트를 보았다. 리하르트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거두지 않고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띤 웃음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알겠다.

리하르트는 정태의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저 웃음 뒤에서, 그는 정태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크리스, 너도 돌아가서 나갈 채비를 해야 하지 않아?”

방문을 열며 정태의가 묻자, 크리스토프가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리하르트가 말했다.

“그 가운 차림으로 돌아가려고?”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노려보았지만 그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분명 크리스토프라면 설령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라 할지라도 타인과 함께 쓰는 공간에 가운 한 장만 입고 나서지는 않을 터였다.

정태의는 문을 닫기 직전 잠시 망설였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그렇게 말할까 싶었다. 몸을 지켜 줄 가시갑옷도 두르지 않은 크리스토프가 별 이유도 없는데 유난히 안쓰러워 보인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자신이 섣부르게 손 내밀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역할이 아니다.

“그래. ……그럼 좀 있다 보자.”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리하르트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달각,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와 함께 이쪽과 저쪽이 나뉘었다.

짧은 적막을 깬 것은 크리스토프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크리스토프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순순히 팔을 놓아주며, 리하르트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쓸데없어? 그가 옷을 받아 줘서 기쁜 것 아니었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던데.”

“…―.”

크리스토프는 눈을 치떴지만 그 입에서는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문 옆에 팽개쳐 뒀던 저 상자 대신 네 테이블 위에 네게 맞을 만한 옷을 가져다 뒀으니 그걸로 바꿨다고 생각해.”

“네가 준 옷은 안 입는다고 했지.”

그 옷에다 뭘 발라놨을지 어떻게 알고 그런 걸 입어, 하고 맵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삭막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준 옷은 입지 않겠다……?”

혼잣말처럼 크리스토프의 말을 되풀이했다. 문득 고개를 약간 돌려 웃는가 싶던 그는, 비스듬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 가운부터 벗어야겠군.”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크리스토프는 멈칫했다. 고개만 돌려 몇 초쯤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욱한 듯 가운의 끈을 풀었다. 그 옷자락이 몸에 닿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가운을 침대 위에 팽개쳐 버린다.

“그래, 그럼 내 옷 내 놔.”

크리스토프가 낮게 말했다. 리하르트는 그 앞에 당당히 선 크리스토프를 훑어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핥듯이. 크리스토프가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노골적으로.

크리스토프가 주먹을 움켜쥐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밤에 네가 입고 있었던 옷 말이라면, 고작 몇 번 네 사타구니를 벌리며 파고들었을 뿐인데 네가 참을성도 없이 사정해서 더럽힌 탓에 지금쯤은 이미 어느 쓰레기통에 들어 있을걸. 그 대신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해 뒀는데, 글쎄, 내가 마련해 둔 옷을 네가 과연 입을지는 모르겠군.”

리하르트는 엄지로 협탁 옆의 장식 소파를 가리켰다. 그 위에는 옷 한 벌이, 크리스토프가 평소에 즐겨 입는 취향에 맞추어 일체로 갖추어져 있었다.

“입기 싫다면 그대로 네 방으로 돌아가도 되겠지. 비록 지금이 사람들이 종종 오가는 시각이라곤 하지만 여기서 네 방까지는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잖아? 운이 좋으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누구의 눈에 띄더라도 부끄러워할 몸은 아니겠지만, 하고 덧붙이며 리하르트는 미니바 쪽으로 걸어가 물을 꺼내었다.

그대로 나가 버리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듯 물을 따라 가볍게 목을 축인 그는, 한 자리에 굳은 듯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입 끝만 아주 약간 올려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옷 선물에는 다른 의미가 있었지. 어때, 크리스토프. 정태이의 옷을 벗겨 보고 싶었나?”

“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아한 얼굴을 보고 리하르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몰랐나 보군. 뭐 좋아.”

소파 쪽으로 다가간 리하르트는 옷가지를 집어들고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불쾌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크리스토프는 뒷걸음질 친다. 침대가 무릎 뒤에 걸릴 때까지.

“발 들어. 입혀 줄 테니까.”

옷가지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제일 위에 있던 속옷을 들고 리하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때, 처음에 크리스토프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의아한 듯 그가 든 속옷과 그를 번갈아 본 크리스토프는 곧 미간에 더 진한 주름을 그었다.

“싫어.”

“알몸으로 복도를 활보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 크리스토프. 오늘도 바빠. 실랑이할 여유도 없다.”

“…―내 손으로 입을 수 있어.”

“발 들어.”

리하르트는 낮고 단호하게 말하곤 크리스토프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눈 아래로 보이는 그의 정수리를 약간은 당혹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않는 크리스토프의 발목을 붙잡은 리하르트가 거침없이 들어올리는 통에 균형을 잃고 뒤쪽의 침대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땅에서 떨어진 다리를 통해 속옷이 미끄러져 올라왔다.

하얀 다리 위를 넉넉한 손바닥이 쓸어올렸다. 그 감촉에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리자, 흘끗 크리스토프를 올려다본 리하르트는 짐짓 더 느리고 은근하게 크리스토프의 무릎을 쥐었다. 무릎 뒤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선뜩하다. 동시에 그의 다른 손이 허벅지 사이를 미끄러져 올랐다.

허벅지에 걸쳐진 속옷 사이로 파고드는 큼직한 손이 유난히 외설스럽게 보인다. 어쩌면 햇빛에 고스란히 비쳐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크리스토프는 더럭 표정을 굳혔다.

“리하르트, 하지 마.”

“하지 마? 내가 뭘 한다는 거지?”

그는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크리스토프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리하르트는 그를 밀어서 침대에 쓰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앞으로 밀었다. 무릎과 어깨가 거의 맞닿을 듯이 몸이 굽어지며, 허리 아래가 허공에 붕 떴다.

“리하르트!”

억누른 비명처럼 낮은 분노를 터뜨리는 크리스토프의 드러난 허벅지며 그 안쪽을 천천히 바라보며,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아파서 죽을 것 같으니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했던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군. 약간 붓기는 했지만.”

“그…―, ……, 그, 그런 적, 없――.”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할 텐데, 크리스토프. 그 입에서 분명히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는 걸 확인해 주고 싶어지니까.”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새파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뜻밖에,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크리스토프의 예상과는 달리 허벅지 사이로 매끄러운 천이 올라가 감쌌다. 속옷이다. 뒤이어 바지도 곧 다리를 감싸며 미끄러져 올라왔다.

“앉아. 팔 옆으로 들고.”

리하르트가 무심하게 말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크리스토프를 일으켜 앉히더니 그의 팔에 셔츠 소매를 꿰어 준다.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침착하게 손을 놀려 단추를 채운다. 아래부터 하나씩.

“내가 할 수 있다니까.”

크리스토프가 말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매 단추에서 넥타이, 벨트, 베스트까지 다 입히고 나서야 일어선다.

“오늘도 바쁘다고 했을 텐데. 일어나.”

침대에 앉아 뭐에 홀린 듯 리하르트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에게, 그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일어나 옷의 잔주름 따위를 매만졌다. 그러면서 의아한 눈으로 흘끔 리하르트를 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다시 잔을 집어들던 리하르트가 이쪽을 보았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알겠는데, 지금은 안 돼. 그 기대에는 나중에 사무실에서라도 틈을 봐서 충실히 부응해 줄 테니 기다려.”

“기대 따위는 아무것도 한 적 없어!”

크리스토프는 욱해서 외쳤다. 리하르트의 말뜻을 짐작할 수 있었고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추호도 기대는 아니었다.

울컥해서 목덜미부터 달아오르자, 잔에 닿은 그의 입술이 휘어지는 게 보였다. 눈매도 심술궂게 휘어진다.

“그래? 지난밤에는 허리도 제법 흔드는 것 같던데.”

“네가, 흉내라도 내면서 따라해 보라고 했잖아. 그러다 보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네가 그래서 그랬던 거잖아.”

목덜미에서 열기가 점점 얼굴 위로 타고 올랐다. 혀뿌리까지 뜨거운 느낌이다.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화를 내자 리하르트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는 이내 크리스토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웃음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화를 내거나 기분이 상한 것과는 다른 그 희한한 얼굴을, 크리스토프는 뚫어져라 노려본다.

“……아, 그래. 그렇군.”

리하르트는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물만 마신다.

크리스토프는 뭘 생각하는지 모를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요 얼마간 줄곧 이렇다.

크리스토프가 끔찍하게 몸서리칠 만한 짓도 서슴지 않는가 하면, 때로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를 다정한 척도 했다.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도록. 태도에 일관성이 없어 요즘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곧 끝이다. 며칠만 있으면, 이제는 더 이상 새벽마다 등 뒤에서 온몸을 꼼짝도 못하게 부둥켜안는 저 낯선 체온과 감촉도, 예상조차 못한 순간에 입술을 핥는 혀나 사타구니에 밀어넣는 손길도, 원인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상냥함도 끝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크리스토프는 낮게 혀를 차곤 걸음을 옮겼다. 오늘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방에 들러야 했다. 문을 나서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투로 “25분 뒤까지 중앙현관 앞으로 와.”라고 말하는 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려왔다.

크리스토프는 대답 대신 언짢은 심기 그대로 문을 조금 세게 닫았다.

*

정작 정태의가 그 문제의 옷을 입어 본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원래부터 옷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워낙 분주하게 움직이는 통에 정태의까지 뭔가 분주한 기분이 되어 사소하게 그들의 일을 돕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나절에 귀가한 크리스토프와 마주쳤을 때, 오늘 하루도 리하르트에게 실컷 혹사당했는지 몹시 삭막한 얼굴로 들어오던 그가 문득 멈칫했다. 옷은, 하고 말을 꺼내더니 잠시 머뭇거려서 버리라고 다시 소리를 지르진 않을까 했는데, 한동안 못마땅하게 우물거리던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사이즈는 괜찮았어? ……마음에는 들어?’

‘응, 아주 딱이던데. 고마워.’

간발의 차도 두지 않고 냉큼 그렇게 대답한 뒤, 머쓱한 듯 슬쩍 낯을 붉히는 크리스토프에게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잘 놓아두었던 상자에서 옷을 끄집어내어 입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눈썰미에 감탄할 정도로 딱 맞는 치수에, 색감도 그냥 볼 때는 좀 튀지 않을까 싶었는데 입어 보니 그야말로 옷에 사람을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역시 옷이 날개이긴 한가 보다. 이렇게 보니 나도 제법 말쑥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어딜 그렇게 부리나케 뛰어가나 했더니, 새 옷이 생겼나 보지.”

거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정태의의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어느새 귀신처럼 나타난 일레이는, 그 역시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이제 막 들어왔는지 예의 그 잘 나가는 세련된 신진 변호사 같은 차림새로 문에 기대어 넥타이를 풀어내는 참이었다.

“언제 왔어.”

“지금 막.”

일레이는 목깃에서 주욱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안경을 벗어 웃옷 앞주머니에 꽂아 넣곤 미간을 손끝으로 살짝 문지르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정태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정태의는 멈칫,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보았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런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듣고 들어왔는데 내 애인이란 놈은 웬놈한테 옷을 받아 입고 있으니 뭐……딱히 좋을 이유가 없긴 하군.”

정태의의 미간 주름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래도 몇 년이나 같이 지낸 눈치로 보자면 위험수위는 아니다. 저놈 나름대로 농담을 한 모양인데, 그 뒷말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앞말이다.

“달갑지 않은 소식이라니 뭐.”

“달갑지 않은 얼굴을 곧 보게 될 것 같아서 말이지. 뭐 됐어. 그건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니까 내버려두고. ……흠. 옷 고른 걸 보니 크리스 솜씨로군. 그 녀석은 취향이 썩 좋거든.”

정태의에게 다가온 일레이는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 비스듬하게 그를 다시 살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옷이라……. 뭐 좋아. 그 녀석이라면 별다른 생각도 못했을 테고, 안목도 믿을 만하니. 아주 잘 어울리는걸, 태이.”

미묘한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던 정태의는 곧 한숨을 쉬곤 어,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달갑지 않은 얼굴이라니, 굳이 자세히 물을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정태의에게 두세 걸음만에 성큼 다가선 일레이는 한손으로 익숙하게 정태의의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대신 감는다.

“……? 이쪽이 더 나아?”

“아니, 유감스럽게도 그놈이 고른 게 더 잘 어울리는군. 처음부터 한 벌로 골랐을 테니.”

“그래? 그럼――.”

“하지만 이걸로 매. 지나치게 완벽한 차림도 멋없어.”

정태의는 잠시 일레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태연한 얼굴로 그 시선을 마주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어찌 되었든 지금은 벗자고. 역시 양복은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 반드시 필요할 때가 아니면 별로 입고 싶지 않거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넥타이를 도로 풀었다. 웃옷도 벗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낸다.

옆의 소파에 걸터앉은 일레이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턱에 손마디를 대고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왜.”

“아니, 크리스토프의 옷 취향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 있었어.”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라면……취향이 분명한 편이지.”

그 외모라면 누더기를 주워 입더라도 빛이 나 보이겠지만, 그는 옷까지 아주 잘 갖춰 입었다. 그 외모에 옷이 눌리지도 않게, 그렇다고 옷이 지나치게 강조되지도 않게. 그가 좋아하는 색감을 기본으로 해서.

“그래, 그렇지. ……과연.”

문득 일레이는 웃었다. 어쩐지 약간 찡그린 듯도 했지만 재미있다는 빛으로 웃으며 소파에 목을 기댄다.

“네 옷은 그놈이 골라 주고, 그놈의 옷은 리하르트가 내어줬다는 거군.”

“음?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옷을 줬어?”

“적어도 오늘 입었던 옷은 그 녀석이 평소 즐기는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정태의는 셔츠 단추를 풀던 손을 멈추고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순수한 호의로는 안 느껴지는데.”

정태의는 셔츠를 마저 벗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일레이를 마주본다.

“리하르트가 말야,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정태의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일레이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부정이라기보다는 새삼스럽다는 듯한 그 표정을 보고, 정태의는 내심 아, 역시, 하고 생각한다. 동시에 약간 의아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적의 아군은 적, 적의 적은 아군,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본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가 본인과 관련된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정의를 내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리하르트가 정태의를 싫어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정태의는 굳이 따져 보자면 크리스토프와 가깝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약간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은, 정태의가 판단한 리하르트는 그런 성향의 인간은 아닐 것 같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친하다고 해서 그 사람마저 싫어하는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납득할 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아 으음, 하고 눈동자만 굴리는 정태의에게, 일레이가 불쑥 물었다.

“그가 너를 싫어하는 게 싫은가?”

안 싫어한다는 말은 안 하는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매를 찌푸렸다. 대답은 간결하게 나왔다.

“아니, 나와 크게 연관되지 않은 타인이 날 좋아하냐 싫어하냐는 사실 큰 문제가 안 돼. 그들이 나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거나 나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그야 미움받는다는 거야 유쾌하진 않지만, 딱히 마음 상할 일도 아니지.”

“그렇다면 리하르트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래도 좋지 않나?”

“그렇지. 단지 좀……뭐랄까. 의외로운 구석이 있어서.”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째 말하다 보니, ‘나를 싫어하다니 의외다’라는, 정태의가 뜻하는 바와 같으면서도 매우 다른 결론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하고 손을 내젓는 정태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일레이는 순순히 화제를 돌려 주었다. 여전히 시선은 정태의에게서 한순간도 떼지 않으며.

“그렇다면 태이, 너는 타인이 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건가?”

“그야, 내 여기나 여기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정태의는 손끝으로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두드렸다.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이라면?”

“아――그건 엄청난 문제지. 자아의 존속 여부마저 걸려 있는데.”

비록 그런 사람이 한 손으로 꼽고도 넉넉하게 남을 정도라고는 하나,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갓난아기의 생존에 부모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본인이 의식을 하든 그렇지 않든, 어떠한 의미로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극소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정태의가 선뜻 대답하자 일레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가느스름한 눈매가 뭔가 생각에 잠긴다.

“자아의 존속 여부라……. 굉장하군.”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리는, 자아가 세상 누구보다도 굳건할 것 같은 철벽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긁적이곤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야 모를 테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알게 모르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꿔 놓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거든.”

최소한 부모라도 있다.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혹은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닫는―자신의 머릿속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

“흠……?!”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이 남자가 납득은 했더라도 이해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짤막하게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보며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이러니까 이놈이 일레이 리그로우지. 괴물. 미치광이 릭.

하지만 그래도 이 남자를 보면서 이렇게 기분 좋게 실실 웃는 자신을 보면, 이 남자가 어느새 자신을 바꿔 놓은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웃기는커녕, 수백 수천 리 밖으로 도망갈 기회만 엿보며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실실 웃어.”

그렇게 말하면서 일레이도 피식 웃는다. 그게 어쩐지 우스워서 정태의는 낮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니 그냥, 나한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가 있나 꼽아 보고 있었지.”

“그래.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도 있겠군?”

“아? 그야――, ……글쎄, 그건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정태의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문제로 다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다가 일레이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입매를 올렸다.

내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 하고 정태의가 고심하던 찰나였다.

전화가 울렸다. 긴 신호음이 짧은 틈을 두고 거듭 울린다.

외선임을 알리는 그 소리를 듣고, 정태의는 손 뻗으면 바로 잡힐 거리에 있는 전화로 시선을 주었다. 푸른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카일인가?”

외부에서 정태의의 방으로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면 뻔하다.

싸구려 생수 한 통 안 부쳐 준 친동생을 흘끔 쳐다보며, 정태의는 빙글거리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태의야?’

그러나 뜻밖에 들려온 조용한 목소리의 그 명확한 발음에, 정태의는 일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큼직하게 눈을 뜨며 어,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재의 형?”

정태의가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가, 그 이름을 듣자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잘 지내고 있지?’

며칠 만에 통화하는 것처럼 여상하게 묻는 정태의의 친형과는 해를 넘겨 처음 통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심상한 목소리를 듣자 정태의 역시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어, 잘 지내,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좀 거짓말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형과 이야기를 할 때는 어쩐지 늘 그렇게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일 때문에 삼촌이 전화를 하셨더라. 그 김에 네 소식도 전해 주면서 전화번호도 알려주시던데. 마침 네 생각도 나던 참인데 잘 됐지. 타르텐에 있다며.’

“어. 타이밍 좋은 건 여전하구나, 형.”

정태의는 웃으며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헤드쿠션에 등을 기대어 앉다가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지그시 정태의를 보고 있던 일레이는 개의치 말고 얘기 계속하라는 듯 눈짓한다.

‘타르텐이라……. 이제 곧 승계일이겠구나. 계속 거기에 있을 거니?’

“아. 아마 승계만 결정나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은데. 형은, 독일에 온다며.”

‘응. 너도 올래, 프랑크푸르트? 다음 주 초에 들어갈 건데.’

정태의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야 가고 싶지. 모처럼 형 얼굴도 보고. 그러나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곤 고개를 젓는다.

“아니……, 이번에는 힘들 것 같아. 다음에 봐야 할 것 같은걸.”

‘그래……, 아쉽구나. 보고 싶은데.’

정재의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사뭇 아쉽게 중얼거렸다. 어, 나도……하고 중얼거리다가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하다가 깨닫는다. 여태 형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정재의가 입 밖으로 낼 만큼 바라는 일이라면 어떠한 형태로든 결국은 이루어지곤 했다.

어쩐지……, 뭐랄까……, 어쩐지…….

“……. ……. 나도 보고 싶어, 형.”

정태의는 애매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이와 눈이 마주친다.

손마디로 턱을 짚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의 눈매가 약간 꿈틀하는가 싶었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몇 걸음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 있던 일레이가 훌쩍 일어나 다가와 정태의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들었다. 정태의가 뭐라고 항의할 틈도 없이 그가 대신 응답한다.

“오랜만이군, 정재이.”

전화 안에서 정재의가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틈을 두고 정답을 말한 듯, 일레이가 대답한다.

“맞았어. 오랜만인데도 목소리를 기억해 줬나 보지. ……하하, 칭찬 고맙군.”

“이봐, 일레이. 수화기 돌려줘. 아직 통화하던 중이라고.”

“그래, 프랑크푸르트에 온다지? 잘하면 만날 수 있겠군. 아니, 당신이 바란다면 만나게 되겠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정태의의 항의를 가볍게 묵살하며 일레이는 정태의에게서 먼 쪽으로 수화기를 바꿔 들었다. 정태의는 두어 번 혀를 차곤,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일레이는 흘끔 그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그렇지. 그러고 보니 당신을 대단히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때마침 곧 독일로 들어올 거라던데, 가급적이면 그쪽이나 만나 보지 그래. 당신에게도 엄청난 환대를 약속하며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 여기까지 들리던데.”

정재의에게 엄청난 환대를 약속하며 러브콜을 보내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새삼스러울 말도 아니었지만, 정태의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 누구?’

정재의 역시 짐작이 가지 않는지 의아하게 되묻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글쎄 누굴까.”

일레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마치 농담이라도 하는 투였지만, 그의 입 끝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살짝 접혔다. 불현듯 정태의는 조금 전 일레이가 하다 만 말이 떠올랐다.

달갑지 않은 소식. 달갑지 않은 얼굴.

그건 설마…―.

‘……알 사우드?’

정태의가 어떤 사람을 떠올린 것과 거의 동시에, 전화 너머에서도 한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래, 잘 아는군.”

“그 남자가 온다고? 독일에?!”

일레이를 붙잡고 외친 것은 정태의였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타르텐까지 얽혀 여러 모로 인연이 괴상하게 꼬여 있는 남자다. 이리저리 배후에 그 남자가 앉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직접 나설 줄은 몰랐는데.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다시 떠올려도 어쩐지 대하기 껄끄럽고 거북한 그 남자를 생각하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낯을 찌푸렸다.

“그래. 타르텐의 승계 결정에 맞추어 직접 온다는군. 그런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국. 타이밍 한 번 근사하지?”

일레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비틀린 웃음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혀를 찼다.

그런 정태의의 귀에, 잠시간의 침묵 뒤에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를 잘못 알고 있군. 그야 초기에는 내게 계약을 요청했지만 한 번 거절한 뒤로는 가끔 안부 메시지나 보내 올 따름이야.’

“아하. 전혀 흑심이라곤 보이지 않는 안부 메시지 말이지?”

‘사우디에 들를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인사말을 흑심이라고 부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정재의는 더없이 담담하고 평연한 목소리였다. 그의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라만이 그에게 다른 뜻―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기 개발이나 여타 일을 맡기고자 하는 속셈―은 전혀 없이 순수하게 우호적인 안부 인사 정도나 하는 줄로만 알겠다. 아니, 실상이야 어떻든 정재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정태의마저, 정말로 그런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미 정권 다툼에서 그쪽이 승기를 쥐었다고 하니, 굳이 외부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을 터였다. 지금쯤은 정말로 그저 순수한 인맥 관리 차원에서 가끔 의례적인 안부 메시지나 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비록 원인을 따지면 제 잘못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별저를 산산이 부수고 나갔는데 형에게까지 해코지를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아, 러브콜을 보낸다는 건 라쉬드였던가, 그럼? 그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일레이가 느릿하게 웃으며 말한다. 잠시 저 너머에서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내 쪽으로 직접 연락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오히려 나보다 그쪽의 소식이 더 빠른 것 같군.’이라는 말로 깨면서 정재의는 그의 말을 긍정했다.

아직은 낯설게 기억이 남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리와 정권 다툼을 하다가 패배했다는 이름이 아니었던가.

“과연, 확고하게 승기를 굳혔다고는 하나, 정재이라는 인물이 걸려서야 알 파이살 측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 ――여전히 군수업계에서는 군침을 흘리며 탐낼 만해. 사람 하나로 정세의 판도가 바뀔 리는 없는데도 그 이름만으로도 최강의 아군이 되리라고 기대해 마지않을 만한 인간은 그리 많지 않거든.”

일레이는 수화기를 다시 정태의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스피커로 돌려져 수화기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정태의는 씁쓸하게 받아들었다.

“가능하면 태이보다는 그들을 만나길 간절하게 바라 줬으면 좋겠군, 정재이 씨. 그쪽 암투에 이쪽이 휘둘리는 건 정말로 내키는 바가 아니란 말이야.”

‘……. 태의가 바란다면 나는 태의와 함께 살아도 좋아.’

“아니, 난 댁과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일레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험악해졌다.

‘나와 함께 있으면 휘둘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태의만 아니면 리그로우 당신에게 어떠한 위해가 가는 일도 없을 거야. 바라는 바가 그것 아니었나?’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전화기를 삭막하게 바라보다가, 일레이는 약간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 형이라는 이 작자만큼은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저쪽에 번연히 들리리란 걸 알면서도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말했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소용도 없는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프랑크푸르트에는 가지 않을 예정이야. 지금으로서는. 별일이 없다면 다음에 보도록 해, 형.”

‘그래, 그러면 하는 수 없지. 보고 싶던 참이지만.’

다른 사람의 ‘보고 싶다’와 정재의의 ‘보고 싶다’는 실현 가능성의 무게가 다르다. 정태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어쩐지 가까운 미래가 순탄치 않을 듯한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일까.

단순히 안부 전화였던 듯,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다시 전화를 끊을 즈음이 되어서 정재의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잘 지내렴, 태의. ……아, 그렇지. 리그로우에게 전해 주겠어? 사실은 나도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미 몇 년이나 전, 그래, 너를 베를린으로 데려갔을 즈음부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드나마나 아무 소용도 없는 수화기를 들고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정태의는, 옆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닿는 걸 느꼈다.

“의외로 애 같은 면이 있군, 천재 정재이는.”

심술궂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고, 정태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

그곳은 언제나와 같이 고요하고 서늘했다.

전체적으로 둥글게 이루어진 그 공간은, 얼핏 보기에 세련되게 꾸며 놓은 서재 같았다.

책장처럼 둥근 벽면을 가득 채우고 둘러싼 문 달린 수납함, 그 가운데 러그 위에 놓인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놓인 푹신한 일인용 카우치가 둘. 비스듬히 기울어진 통유리로 된 천창에서 비쳐들어 실내를 밝히는, 노랗게 저물어 가는 햇빛.

그 수납함을 채운 것이 책이었더라면 그곳은 어느 부호가 한가로운 휴식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고즈넉한 서재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조그만 문이 빼곡하게 달린 수납함 각각을 채운 것은 책이 아니었다. 두 손으로 가뿐히 들 수 있는 조그만 항아리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고운 가루들.

그 문들 중 하나만 열려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 안에 있던 유골함을 감정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애초부터 건드릴 생각 따위는 없어, 그의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어깨를 움츠리며, 기분이 안 좋은 듯 문을 닫아 버렸다. 거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름과, 삼십 몇 년의 간격을 둔 날짜 두 가지가 적혀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오기 전에 이미 누가 다녀간 듯 그 앞에는 아직 생생한 꽃송이가 꽂혀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이리라.

“……기분 나빠.”

듣는 사람도 없는 목소리가 텅 빈 납골당 안에 울렸다.

크리스토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돌아섰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 버린 이름들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 따위는 언제라도 불쾌했다. 오늘이 아버지의 기일이라고, 전화로 짧게 사실을 일깨워 주었던 어머니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데에는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을 거다.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던 크리스토프의 시야 끝에 언뜻 이름 하나가 스쳤다.

무시하고 두 걸음, 세 걸음,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윽고 멈추는가 싶던 그 발이 다시 머뭇머뭇 몇 걸음을 돌아온다.

그늘진 구석에 조용히 닫혀 있는 그 문에는 이미 오래 전, 어려서 죽은 소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올리비아 타르텐.

그러나 그 문 안은 비어 있다. 그 아이의 몸은 드레스덴의 교외, 그 아이가 생전에 좋아했던 별장 뒤의 언덕으로 이장되어 묻혀 있었다. 그 문은 텅 비어, 그저 기억만 새기고 있을 뿐이다.

“…….”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집게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이름자에 닿을락 말락 가까이 간 손가락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멀어지고 말았다.

그 고운 이름이 새겨진 문 앞에는 갖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얀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그녀를 아끼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모양이다. 삭막하게, 기일이 되어야 겨우 꽃 한 송이 앞에 두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녀는 죽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었다.

“……왜 날 좋아했을까.”

불쑥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는 생각보다 크게 울린 자신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이미 두 자릿수에 달하는 해가 지났는데도 기억난다.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병상 위에 누워 있던 그 창백한 소녀는 크리스토프를 유난히 잘 따랐다. 그녀의 친오빠보다도 더욱 크리스토프를 따르며 좋아했다. 한 번도 좋은 내색을 한 기억은 없는데도.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그럴 만한 이유라곤 조금도 없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제는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는지도 애매해졌다. 아니, 좋아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것 같은 기분조차 든다.

“나도 그게 의문이었어. 왜 하필이면 너였는지.”

낮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한 팔에 하얀 꽃다발을 끌어안은 리하르트가 납골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비어 있는 물병에 그 꽃다발을 꽂아 넣은 리하르트는, 그 중 한 송이만을 뽑아내어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그 앞, 여동생의 자리에 꽃송이를 내려놓는다.

단 안에서 항아리를 꺼내어 가만히 손바닥으로 그 위의 먼지를―있지도 않았지만―쓸어내는 리하르트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크리스토프가 바라보다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엔, 매일 오나?”

“매일은 아니야. 주에 두세 번 정도.”

여동생의 유골함을 매만지던 리하르트는 짧은 기도의 말이라도 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어 크리스토프는 모르는 사람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는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밖에 말이 묶여 있어서 네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여기에 네가 온 건 처음 보는군. ……아아, 그래. 작은숙부님의 기일이 이 근처였지. 오늘이었나 보군.”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리는 건, 굳이 이 공간 안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탓만은 아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을 때 귀가했지만 저녁에는 다시 산더미 같은 서류뭉치에 짓눌려야 했다. 그 전에 씻기도 하고 식사도 할 겸 그럭저럭 넉넉한 휴식 시간을 받아 잠시 들렀는데, 여기에서마저 얼굴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여기에서.

“왜 널 좋아했을까.”

리하르트가 다시 중얼거렸다. 혼잣말인 듯, 크리스토프 쪽은 보지도 않고 손끝으로 항아리만 쓸어내린다.

“늘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긴 하지만 멍청한 아이는 아니었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널 좋아했을까. 볼 거라곤 겉거죽 하나밖에 없었던 너를.”

크리스토프의 눈매에 불쾌한 듯 날이 섰다.

“그러면 말리지 그랬어. 나도 달갑지 않았어. 네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으면 좋았잖아.”

리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에게 흘끗 돌리는 시선에 칼날 같은 차가움이 밴다.

그는 말리지 않았던 게 아니다. 크리스토프가 그들 남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일일이 알 턱도 없지만, 그는 올리비아가 크리스토프에게 가까이 올 때마다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며 몇 마디쯤 타이르긴 했지만 꾸짖거나 가로막진 않았다. 몸이 약해 얼마 살지도 못할 여동생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대체로 그랬다. 거의 언제나,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언짢은 얼굴로―그러나 여동생을 향할 때에는 언제나 그지없이 상냥하게―보고만 있었다. 그래, 그 언젠가도.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아직 여름이 되기 직전이었다는 것.

봄치고는 더운 날이었다. 이제는 봄도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머리 위로는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이 비쳐드는 햇살, 땅에는 새로 돋아나 어느새 정강이까지 자란 풀잎, 그 풀잎들을 밟으며 절뚝이던 걸음.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벌들이 날아다니며 꿀을 모았다. 말을 타고 산책을 하던 차에 운 없이 말이 벌에 쏘여, 크리스토프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 푹신한 덤불에 떨어져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다리를 삐었다. 말은 멀찍이 달려가고 말았지만, 아마도 진정하고 나면 스스로 마사로 돌아갈 터였다.

살짝 삐어 걷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크리스토프는 숲길을 거슬러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주쳤던 것이다. 숲의 산책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깔고 올리비아와 리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가끔 저택의 안뜰 정도만 산책할 뿐 거의 숲까지 나오지 않는 올리비아는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은 듯 그곳에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왔을 리하르트 역시 동생에게 상냥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길로 갈 걸, 그렇게 후회하며 걸음을 돌릴 새도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그들을 본 것과 거의 동시에, 리하르트 또한 그를 보았다. 멈칫, 리하르트가 입을 다물자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크리스토프를 발견한 것도 금방이었다.

크리스토프, 반갑게 외친 올리비아가 선뜻 일어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 뒤를 따라 내키지 않는 듯 리하르트가 다가왔다.

크리스토프는 의식적으로 걸음걸이를 바로했다. 그 앞에서 절뚝이고 싶지 않았다. 아픔을 참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토프! 여긴 어쩐 일이야? 산책하던 참이야? 잘 됐다, 잠시 놀다 가. 있지, 오늘 아침에 갓 구운 흰 빵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살구잼이 있어. 응, 우유도! 같이 먹고 가.’

요전에 반갑게 크리스토프의 팔에 매달렸다가 크리스토프가 거칠게 뿌리치는 통에 넘어져서 다쳤던 올리비아는―그 일로도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는 싸운 바 있었다―, 그런 일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옆에서 맴돌았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

무뚝뚝하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걸어나설 때였다. 한 걸음 물러선 곳에서 마뜩찮은 얼굴로 냉랭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리하르트가 문득 불쑥 말했다.

‘성치도 않은 다리로 걷느라 애쓰는군. 말은 어쩌고 혼자 오는 거지?’

동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 안에 담긴 비아냥을 알아채지 못할 크리스토프가 아니었다.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데, 그런 무언의 다툼 따위는 깨닫지도 못한 올리비아는 더럭 표정을 흐리며 크리스토프를 올려다보았다.

‘다쳤어? 다리를 다쳤어, 크리스토프? 잠깐만 앉았다 가, 응? 나 약 상자도 있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늘 갖고 다니거든. 제발, 잠깐만 앉았다 가. 붕대만이라도……, 응?’

마치 본인이 다치기라도 한 듯이, 올리비아는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아니, 그 반들반들 젖은 눈동자는 크리스토프가 싫다고 하는 순간 눈물을 흘릴 태세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흘끔, 험악하게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리하르트는 낯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역시 크리스토프를 얼른 보내고 싶었을 텐데,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의 경솔한 말을 후회하고 있는 그 찌푸린 얼굴을 보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가려 했던 크리스토프는 일부러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법이 없는 크리스토프는 그녀에게서 붕대만 빌려 스스로 발목을 감으며, 여동생과 둘이 한가롭게 나온 자리를―하필이면 크리스토프에게―방해받아 언짢은 낯을 한 리하르트를 쳐다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바보같이, 한 번 맵게 야단을 치면 될 텐데. 그렇게 하면 올리비아는, 적어도 리하르트가 있는 자리에는 크리스토프를 불러들이지 않을 텐데.

그러나 리하르트가 올리비아만은 엄격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걸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바보 같은 녀석.’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앞을 스치며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리하르트는 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에 언뜻 분노가 떠올랐다.

그러나 모른 척, 크리스토프는 올리비아를 따라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언짢은 발소리를 약간은 유쾌하게 여기며.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여태 크고 작게 다친 경우는 많았지만, 어지간해서는 크리스토프의 몸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채인 적은 없었다. 아픔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끔, 리하르트가 꿰뚫어 볼 때가 있었다.

그것이 몹시 언짢고 불쾌하면서도, 또한 이상했다.

“왜일까…….”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그래. 왜인지는 나도 지금껏 알 수 없어. 올리비아는 내 말은 뭐든지 잘 들었지만, 너와 친해지려고 하지 말라는 말만은 절대로 듣지 않았거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말은 크리스토프의 의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었지만, 크리스토프는 잠시 그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의 의문을 말해서, 그가 자신에 대해 분석할 단서를 하나 더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 대해, 크리스토프가 모르는 사이에도 뜻밖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나 보지? 그새 뭔가 다른 생각을 했나?”

그래, 이런 식으로.

말이 없는 크리스토프를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히 말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노려보았다. 희미한 불쾌감이 몰려온다.

“너는 나에 대해선 잘도 아는군.”

한껏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할 셈이었지만 불쾌감과 함께 떠오르는 아련한 두려움 때문에 그조차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

“알기 쉬운 얼굴을 하니까. 특히나 숨기는 거라도 있을 때면.”

“흥. 넌 그래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가면을 쓰고 있나 보지.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크리스토프는 미간을 찡그렸다.

타인이 자신에 대해 아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 말은 동시에,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괴롭혀 궁지에 몰아붙일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과도 같다. 지금 리하르트가 그런 것처럼.

“내가 너에 대해? 그래, 여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 하지만 이런 거라면 알고 있지. ……그래, 이렇게 하면 당장 네가 몸을 사린다든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팔뚝을 움켜쥐었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그 손을 뿌리친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삽시에 굳어진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는 듯 낮게 웃었다.

“여전하군. 그래도 이제 조금쯤은 익숙해진 것도 같았는데. 바로 요전에는 내 물건을 몸에 담은 채로도 잠들었잖아.”

“그게 기절한 거지, 잠든…―!”

귓불이 뜨끈해져 울컥 소리를 내지르던 크리스토프는, 웃고 있는 리하르트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틀림없이 크리스토프가 이런 반응을 보이리란 걸 알고서 말한 게 분명했다.

크리스토프는 말을 삼키며 언짢은 신음을 내뱉었다.

리하르트는 자신에 대해 타인보다 더욱 많은 걸 알고 있다. 그 어디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혹은 머릿속의 치부를 드러낸 것만 같은 느낌이 싫었다. 요즘은 날마다 일과처럼 거듭되는 접촉보다도 그게 더 싫을 정도였다.

리하르트는 누구보다도 유효적절하게 크리스토프를 굴욕하고 상처 입힐 수 있다.

“왜. 그래도 이제는 내가 끌어안고 있어도 잠들 수 있게 됐잖아. 선뜩하고 소름끼친다고 투덜거리다가 결국은 잠들면서.”

납골당의 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을 막아서며, 리하르트가 은근하게 말했다.

적당히 틈을 봐서 나가 버리려던 크리스토프는, 그 역시 꿰뚫어 본 남자를 사납게 노려본다. 그러나 그에게 대꾸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이 옳은 탓이다.

이제는 그가 끌어안고 있어도 잠들 수 있었다. 여전히 살갗이 맞닿은 감각이 전해질 때마다 낯설어 몸이 절로 굳었지만, 그저 뒤에서 꼼짝도 못하도록 부둥켜안고만 있는 그 감각과 체온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엊그제 새벽에는, 잠결에 어깨 언저리가 서늘해져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뒤틀어 그의 가슴팍의 따뜻한 체온에 어깨며 이마를 비비다가 제풀에 놀라 눈을 뜨기도 했다.

놀란 건 크리스토프만이 아니었는지, 몹시 기묘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하르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잠이 확 깼었다.

그 뒤에는, 그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 될 때까지 몸을 부둥켜안은 팔을 풀어 주지 않아 생생한 정신으로 그 접촉을 견뎌야만 하는 괴로움이 뒤따랐다.

어쩐지 굉장히 어색한 아침이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경악으로 말을 잃은 크리스토프에게, 그날만은 리하르트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후 나절이 되어서야 겨우 여느 때와 같이 칼날 같은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어, 오히려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이……이불이니까 그렇지.”

크리스토프가 불쑥 꺼낸 말에 리하르트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그를, 크리스토프는 대놓고 노려본다.

“네가 이불 대신 날 덮고 있으니까, 안 덮은 부분이 춥잖아. 제대로 덮지도 못하는 주제에, 조용히 잠들어 주면 고마운 줄이나 알아.”

다른 이불 같았으면 벌써 호청 뜯어다가 물에 넣고 밟았다, 하고 투덜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 지켰다. 그러다가 띄엄띄엄 중얼거린다.

“미안하게 됐군. 앞으론 제대로 덮어 주도록 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기괴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다. 당혹감을 무표정으로 덮고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자 그제야 천천히 그의 표정 위로 평소와 같은 상냥한 웃음이 떠올랐다.

“빈틈없이 구석구석 잘 덮어 주는 착한 이불이 되도록 노력하겠어.”

“……. ……. 아니……, 뭐…….”

크리스토프는 내심 혀를 찼다. 가슴속이 불편하게 들끓는 속내까지 꿰뚫어 본 듯 유쾌하게 좁혀진 시선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이제 곧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리하르트가 매만지던 항아리를 내려다본다. 반들반들하고 새하얀 항아리.

“……그렇군. ……네 어머니가 계속 여기에 머물더라도, 말이지.”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어딘지 의미심장한 울림을 담는다.

크리스토프는 움칫 팔을 움츠렸다. 천천히, 그 흐릿한 웃음이 남은 얼굴을 노려본다.

“그래. 그렇더라도. ……어차피 네가 승계를 하고 나면 어머니는 나를 잊을 텐데, 무슨 상관이지.”

리하르트는 침묵했다. 마치 조금 전과는 사람이 달라진 듯 표정이 사라졌던 얼굴에, 이윽고 조금씩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선뜩하게.

“이런. 크리스토프. 마음이 상했나? 비앙카 숙모님이 내게 더 정을 주셔서?”

“……상관없어.”

“그렇다면 이제 널 보는 건, 기껏해야 그녀의 장례식 때나 되어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너는 결코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래. 돌아오지 않아. 절대로. 네놈과도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거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팔꿈치를 잡은 리하르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팔꿈치를 파고드는 손가락의 힘이 더 세어졌을 뿐이다.

“그래……그렇다면 선물을 줘, 크리스토프.”

“뭐?!”

“이제 네가 이곳을 찾는 일도 평생 없을 테니, 가엾은 올리비아에게 선물을 줘. 꽃 한 송이라도 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아이가 너로 인해 눈물지은 것만큼 너도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보여 줘야지.”

팔꿈치를 부러뜨릴 듯 움켜쥔다. 그러나 그런 아픔 따위보다는, 크리스토프를 끌고 가 올리비아의 이름이 새겨진 문 앞에 세워 놓는 그 단호한 억압이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마지막이란다, 올리비아. 네가 그토록 좋아했던 크리스토프는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하니 실컷 봐 두렴.”

“…―헛소리 마……. 올리비아는 여기에 있지 않아. 모리츠부르그에 묻혀 있잖아.”

“그래, 몸은. 하지만 그녀는 이 숲을 몹시 사랑했으니 넋은 여기에 감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올리비아?”

“웃기지 마! 그 애는 없어! 죽었다고! 이제는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 그 애에게는 들리지 않아!”

크리스토프의 등 뒤에, 그가 물러서지 못하도록 뒤를 막아서기라도 하는 것처럼 리하르트가 바싹 붙어섰다.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팔은, 매일 밤마다 그렇게 끌어안는데도 지금은 유난히 낯설었다. 옷 때문에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탓일까.

“올리비아는 바보였지. 네가, 무덤에 짐승 시체를 내던질 만큼 자기를 싫어했다는 것도 모르고.”

“그, …―그, 개는――.”

크리스토프는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를 납득시킬 생각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욕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연 순간, 그 입을 가로막듯이 그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한 그 손가락이 느리게 혀 위를 쓰다듬는다.

“설마 올리비아를 위해서였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크리스토프.”

“…―.”

“살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냉랭하게 대하고서 죽은 뒤에야 그랬다는 말은, 설마 아무리 뻔뻔해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않나, 크리스토프?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올리비아를 싫어했던 거야. 한순간도 너는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라곤 품은 적이 없었어. ……그렇지?”

덜컥 되살아나는 사고.

리하르트는 언제나 크리스토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득한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로.

“리, 하르, …―.”

그러나 더듬거리며 그의 이름을 읊는 크리스토프의 말마디를 무시하며, 리하르트는 그 입속을 희롱하던 손을 천천히 목덜미로 미끄러뜨렸다. 어느새 그의 숨결이 뺨에 바싹 닿아 있었다.

“올리비아는 정말로 널 좋아했을까? 네가 그렇게나 한결같이 그 아이를 냉대했는데도, 과연 눈을 감는 그날까지 한 번도 널 원망하지 않고? ……아니, 나라면 그렇지 않았을걸.”

톡, 톡, 톡, 셔츠의 단추가 풀렸다. 노랗게 비추어들던 저녁해는 어느새 붉은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군청색으로 물들 터였다.

“리하르트, 하지…―!”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낮게 외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리하르트는 드러난 가슴 끝을 손톱으로 거칠게 긁었다. 지난밤 내도록 물고 빨아 부어올랐던 살점에 날카로운 자극이 스쳤다.

“심지어는 이제 와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 나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그 눈에서 아무리 눈물을 보고, 그 입에서 아무리 신음을 들어도 부족하지.”

“왜, 하필, 여기서……, 나가, 나가잔 말이다, 차라리 나가서……,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여기여야 해. 마침 잘 됐어. 지금이라도 분명하게 알려줘야 하거든. 내 가엾은 동생에게.”

귓속으로 혀를 들이미는 그 선뜩한 감각에,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황급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미 반쯤 풀어헤쳐져 내려가 있던 바지에 다리가 걸렸다. 그 옷자락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는 완강한 손아귀에, 결국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크리스토프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리하르트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몇 번쯤 몸을 뒤척이던 크리스토프는 시퍼렇게 리하르트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포기가 빨라졌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픽 웃은 리하르트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목덜미에 익숙한 입김이 닿았다. 새파랗게 솟아오르는 긴장 속에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알고 있나, 크리스토프?”

“……?”

갑작스레 영문 모를 말로 운을 떼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불안스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입술로 쇄골을 더듬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귀 조금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 맥박 치는 고동이 느껴진다.

어느 순간, 갑자기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가슴께를 더듬다가 손끝으로 작은 살점을 짓눌렀다. 단단해져 있던 살점이 저릿하게 욱신거려, 크리스토프는 작게 숨을 삼켰다.

“남자 맛을 알고 난 뒤부터――즉 네가 내게 다리를 벌리게 된 뒤부터, 네게서 향이 나. ……발정기에 든 짐승의 암컷이 수컷을 불러 모으는 게 이런 향일까.”

“…―!”

“온몸에서 냄새가 난단 말야. 사람을 발정시키는 냄새가.”

“네 후각이 미친 거겠지, 아니면 머리가 잘못됐거나!”

크리스토프는 모욕감으로 핏기가 가신 입술을 사리물며 낮게 외쳤다.

“그래? 내 머리만 잘못된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군. 다른 놈들까지 네 꾐에 넘어가서야 안 될 말이니. 네 사타구니에 정신이 팔려서 일에서 손을 놓는 놈이 생기면 집안을 위해 좋지 않거든. ……알겠나? 어느 순진한 놈을 홀리기라도 했다간 그냥 두지 않을 거다.”

마치 위협처럼 나직하게 말을 맺으며,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었다. 형형하게 번뜩이는 눈이 크리스토프를 노려본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가, ……내가 미쳤다고, 이런, 더러운, ―….”

“하하……, 그래, 그랬었지.”

리하르트는 유쾌하게 웃었다. 문득 그가 몸을 약간 떨어뜨리는가 싶었다. 묵직하게 누르던 가슴 위에서 무게감이 사라져 크리스토프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리하르트!”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허벅지를 벌리며 그 사이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그 아래에서, 마치 잡아먹을 듯 입을 벌리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동시에 아래를 적시는 축축한 살점.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리하르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그 손에 힘을 주며 떼어내려 하자, 느릿하면서도 힘주어 핥아 올리는 혀의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 핥지, …―더럽――, 그…―.”

“더러워? 더러운데도 사타구니가 꿈틀거리는 너는 그럼, 뭐지?”

리하르트의 비웃음이 귀에 닿는다.

크리스토프는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대신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들려주기 싫은 숨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은 입을 가렸다.

아래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듯 입술과 혀를 거침없이 놀리는 그 소리는, 일부러 들려주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 마―….”

크리스토프가 간신히 중얼거리자 잠시 아래에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대신 웃는 기척이 난다.

“하지 마? 네 여기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보이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하는 모양인데, 이봐, 크리스토프. 아무리 그래도 네 몸인데, 모르겠나? 더 해 달라고 보채면서 꿈틀거리는데?”

“그런, 적, 없―…!”

그때였다. 서슴없이 몸을 일으킨 리하르트가 잠시 아래로 손을 가져가 자신의 옷깃을 헤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크리스토프의 허벅지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조금 전까지 작고 두터운 살점이 적시고 있던 곳에, 곧 낯익은―또한 아무리 지나도 낯선―살덩이의 끄트머리가 파고들었다.

“―…!!”

크리스토프는 순간적으로 신음이 터져나온 자신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커다랗게 홉뜬 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유리 천창을 노려본다. 조금 전의 그 목소리는, 결코 자신의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 아주 근사하게 우는데. 봐, 알겠지, 내 물건이 그 신음 소리 한 마디로 더 커졌다는 걸. 나는 내 변화를 아주 잘 알겠는데, 너는 모르겠어? 나를 더 깊이 삼키려고 계속해서 빨아 당기려 드는 이 몸은 분명히 네 몸인데도? ―…하, 아주 사람 잡는군.”

리하르트는 낮은 탄성이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곧 거침없이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때였다. 문득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뒤이어 리하르트가 나직이 짓씹듯이 내뱉는 말들이 귓속을 파고든다.

“올리비아, 봐. 이건 네 몫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좋아했다 한들, 크리스토프는 결국 네 것이 되지 않았다고. ……너처럼 사랑스런 아이는, 사타구니에 남자의 물건을 박아넣고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런 천박한 놈에게는 가까이 가서도 안 되는 거였어.”

순간 크리스토프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파랗게 치뜬 눈으로 경악스레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 창백한 입술에서 이윽고 욕설이 흘러나온다.

“미친놈……! 동생에게, 이 따위 걸 보여 주……!!”

“이제는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 그녀는 모른다고, 네가 그러지 않았던가?”

리하르트가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 희미한 욕망에 들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점차 가늘어졌다.

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린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쫓아가, 입술을 깨문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쓰다듬으며 내려가 사타구니를 그러쥐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움칫 흔들린다.

“너는 너를 좋아하는 사람과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지, 크리스토프.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도 이러지 못했어.”

“―….”

“가엾게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알지도 못하고.”

입술 위에서 움직이는 입술이 간지럽다. 그 입에서 새어나오는 독액 같은 말들이 크리스토프의 입으로 흘러들었다.

“따라해,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도 어느새 거칠게 들떠 있었다. 짐승 같은 숨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가 했던 대로 따라해 봐. 그렇게 하다 보면 그 기분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따라해.”

따라하라며, 크리스토프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부딪치는 감촉이 어딘지 부드럽다. 그것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게 들려, 기묘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어쩐지 정말로 부드러운 것 같아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이던가? 그는 어떻게 했지?”

주문이라도 거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에, 뇌리에는 짧은 기억이 떠올랐다.

얼핏 스치듯이 본 모습. 그러나 선명하게 망막에 들러붙어 머릿속에 새겨진 모습이다.

정태의는 리그로우와 뒤엉켜 있었다. 리그로우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허리를 허벅지로 조이며, 힘든 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도,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낮고 가쁜 목소리가 연신 탄성처럼 속삭였었다.

“리…―.”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떨어졌다. 망설이는 듯, 혹은 내키지 않는 듯 한 마디만 내뱉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 입술은, 아래를 두들기며 사타구니를 들이박는 허리의 충격에 밭은 숨을 내쉬며 뒷말을 잇는다.

“리, ……하, 르트, …―리하르, 트, ……좋, …―.”

마치 수학공식이라도 암기하는 듯 간신히 머리 구석에 떠오른 짧은 기억들을 짚으며, 그 입술이 허덕이는 말들을 뱉어낸다.

팔을 뻗었다. 살갗이 그에게 닿기 전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 팔은 망설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리하르트의 목을 감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움칫, 움칫, 어깨가 흔들리며 움츠러든다.

좋아, 겨우 그렇게 들릴 듯 말 듯 말했을 때, 몸속에서 무겁고 뻣뻣하게 질량감이 부풀어올랐다. 숨이 막힌다.

“나도.”

낮고 거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때, 리그로우가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뜨며 리하르트를 보았다. 경악에 가까운 놀람을 담은 그 눈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리하르트는 문득 쓰게 웃었다.

“쓸데없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닐 테지. 그때, 그의 상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혹은 다르게 말하던가?”

아. 그렇구나.

잠시 멍하니 리하르트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리그로우는 정태의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 리하르트가 한 말처럼.

“나도 좋아. 나도. ……너만.”

리하르트가 속삭이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었는데도, 귓가를 간질이는 그 거친 목소리가 어쩐지 다정하게 들려서, 크리스토프는 몹시 기묘한 기분에 잠겨 흠칫, 흠칫, 감각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리하르트, 좋, ……좋, …―으……, 좋, 좋아. …―.”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몸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부딪쳐 오는 허리의 힘이 더욱 거세어진다. 몸이 잔뜩 벌어져 삐걱거렸다.

커다랗게 홉뜬 눈동자가 부풀었다. 푸른 물이 넘실거린다.

그 말과는 달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끝없이 깊은 물에 빠져, 움켜쥘 지푸라기 조각이라도 찾는 것처럼.

불안하다. 갑자기 미칠 듯 불안해졌다. 육체의 선뜩한 감각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만큼. 그런데도 붙잡을 것이라곤 하나 없었다.

――왜 난 안 되지?

그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태의는 리그로우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무척 만족스럽게, 땀에 젖은 얼굴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왜 나는 안 되지.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걸까. 왜 나는 계속 빈 채로. 어딘가 텅 비어서.

왜 나는.

“……크리스토프.”

이름이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다.

그제야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바로 코앞에서, 리하르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참 이상한 얼굴이다. 저런 얼굴은 처음 봤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내는 것도 아니고, ……그래. 마치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로, 조금은 초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일렁거리는 그 얼굴을 희한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관자놀이를 스쳐 귓바퀴로 토독, 뭔가 흘러내린다.

“……?”

의아하게 몇 번 눈을 더 깜빡인 다음에야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이상해서, 다시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혹감이 언뜻 드러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왜.”

이윽고 짤막하게 묻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 목소리는 그 얼굴만큼이나 이상하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조금 안도했다. 화난 것 같은 그 목소리는 그나마 익숙했다.

“아니, 잠깐 생각을 좀. 아무것도 아냐.”

“무슨 생각.”

“별 건 아니고 그냥, 왜 나는……. ……네게 말할 필요 없잖아.”

넋 놓고 말을 하다 말고 크리스토프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묵묵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핥았다. 느리고 끈끈하게. 이어 입술뿐 아니라 뺨이며 눈꺼풀 등, 온 얼굴을 그렇게 핥기 시작했다. 한 군데도 빠짐없이 샅샅이.

“하지 마!”

그 노골적인 느낌에 소름이 돋아 크리스토프가 외치자 귓가에서 리하르트가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했어.”

“―…왜 나는 안 될까, 그런 생각 좀 하면 안 돼?”

“하……?”

“왜 언제나 나는 안 되는지, 어째서 나로는 안 되는지, 왜 나만 안 되는 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냐고!”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고 나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최대한 돌려 버렸다. 그럼에도 뺨 위로 닿는 시선이 여실히 느껴졌다.

천천히, 뺨 위에 입술이 닿았다. 그 입술은 뺨에서 턱으로, 그러다가 안간힘을 쓰며 피하려는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찾아 그 위로 덮였다.

“애초부터 상대를 잘못 찾으니 그렇지.”

“…―.”

“처음부터, 널 돌아볼 가능성이라곤 요만치도 없는 인간들만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잖아, 너는. 네 어머니든, 그 남자든.”

크리스토프는 뭐라고 대꾸하려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입속으로 거침없이 혀가 밀려들었다. 입 안을 더듬는 혀며 입술을 빨아 대는 입에 가로막혀, 말을 도로 삼키고 만다.

“다시.”

“……?”

“말해 봐. 다시, 따라서 말해 보라고.”

입술에 대고 말을 속삭인 리하르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안쪽 깊숙이 박혀 한 가득 채우고 있던 부피감이 미끌거리며 움직였다. 점차 아래에서 들려오는 젖은 소리가 빨라졌다.

이미 사타구니며 그 근처는 흥건했다. 그 물기가 유난히 선명하게 미끈거려, 크리스토프는 움찔 눈을 감았다. 눈동자 위로 약간 남아 있던 물기가 마저 흘러내린다.

눈앞에 있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것인지 이 남자의 것인지 모르겠다.

크리스토프는 낮게 속삭였다. 자신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예전 언젠가 들었던 그 말들을 따라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그때 그가 느꼈을 감정이나 감각들을 맛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결에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말소리에 맞추어 나직이 대답해 주고 있었다.

마치 그때의 그들처럼. 정신없이 뒤엉켜 열락에 휩싸여 있었던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탓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프는, 여느 때라면 결코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도 미처 기척을 듣지 못했다.

사박사박, 문 앞까지 다가왔다가 멈춰 서는 가벼운 발소리. 숨을 삼키는 기척.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 홉뜬 시선.

그저, 일순 움직임도 소리도 멈추는가 싶던 리하르트가 가만히 크리스토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그의 귀를 덮으며, 자신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 더운 체온에 숨이 막혔을 뿐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열에 들뜨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속삭였다. 이렇듯 따라서 속삭이면 언젠가는 정말로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

그 남자가 드레스덴으로 찾아왔을 때,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맞이하는 자세가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르텐의 자세는 얼마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상대편의 자세가 달랐던 것이다.

저녁나절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각보다 거의 한 나절이나 더 이르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찾아들었다. 타르텐의 동의를 얻어 저택 안팎으로 함께 경비를 서는 그 우락부락하고 심상찮은 남자들의 동태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정태의는 질려 버렸다.

“이거야 원, 무슨 국가원수 행차하시나…….”

“너네 나라 국가원수는 저렇게 행차하냐?”

간이탑 위에서 노닥노닥, 햇볕을 쬐며 뒹굴거리고 있던 정태의는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턱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서 아랍어로 ‘아름다우시군요, 아가씨’, ‘혼자 오셨나요?’ 등등을 어떻게 말하는지 검색하던 요한이 불쑥 물었다.

비록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전역하긴 했지만 명색이 장교였던 정태의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일반적으로 공개된 공공장소에 행차할 일이 생기면, 그 전날부터 일대 비상이지……. 거의 저 상황이랑 맞먹어 보이는데.”

“뭐, 그래도 우리 같은 졸자는 편한 거야. 지금쯤 정작 리하르트 같은 놈들은 그 국가원수 상대하느라 얼마나 피곤하겠어?”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기분으로 만찬이나 기다리자고, 하고 군침을 줄줄 흘리는 요한을 흘끔 보고, 정태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는 그 ‘국가원수’와 함께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알 파이살. 정쟁에서 승리를 거둔 왕자 알리의 둘도 없이 친한 친형제이며,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의 후견인. 동시에 사업가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남자.

지금은 이미 은퇴하다시피 해 물러섰다는 그 남자 자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태의로서는, 그 남자에게 붙어올 인간이 더욱 문제였다.

“그런데 희한하네. 그 바쁠 양반이 이곳에 다 행차하시고. 차관 변제를 대체 얼마나 엄청난 걸 요구하려고 귀한 몸이 몸소 납시고 그래?”

“그러게 말이다…….”

“뭐 나야 좋지. 설마 수염 덥수룩한 사내놈들만 줄줄이 쫓아오지는 않을 테니.”

본 적도 없는 아랍 미녀의 잘록한 허리를 논하며, 언어 검색을 하는 요한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정태의는 약간 안쓰럽다는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문제의, 아랍 미녀를 꼬실 때 쓸 말, 뭐라고 하는지는 찾았어?”

“음……, 이슬람권에서 주의해야 할 언동 목록이 나온다. 첫째, 여자에게 함부로 말 걸지 마시오. 둘째, 여자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마시오. 셋째, 절대로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시오…….”

“그렇지? 모쪼록 목숨은 소중히 하자꾸나, 요한.”

이게 뭐야, 하고 노트북을 뒤엎어 버리는 요한을 뒤로하고, 정태의는 다시 난간에 기대어 돌아섰다.

“……아. 온다.”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택의 안팎으로 배치되어 대기하고 선 남자들이 칼같이 정렬해 늘어선다. 마치 장난감 병정처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그들은, 곧 다가올 귀인을 기다리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태의가 그렇게 중얼거린 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득하게 보이는 외문 쪽에서 자동차의 행렬이 줄지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얼핏 몇 대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한 차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가까워진다.

그 사이에 섞여 있는 낯익은 차가 한 대. 리하르트의 차다.

그 장엄하기까지 한 행렬을 보고 나서야 겨우 실감이 들었다.

타르텐의 승계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결정 나고 끝나는―혹은 시작되는―날이 찾아든 것이다.

*

사실은 최대한 피해 다닐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설령 누가 부르러 오더라도 자리에 없는 척, 온갖 수를 다 동원해서라도 숨을 작정이었다.

정태의는 그 라만이라는 남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원인이야 어쨌든 남의 집을 부숴 놓고 도망가 버린 부끄러운 범죄의 역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문을 닫고, 걸쇠를 걸고, 누가 자신을 찾더라도 없는 척 침묵으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게 하필 이 남자만 아니었더라면.

“태이, 문 열어. ……부수기 전에.”

잘못 들을 리 없는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며칠 전에 부쉈다가 갈아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을 다시 부숴 버리겠다고 가볍게 진담을 하는 남자가 또 있을 리 없었다.

“어? ……일레이?”

문을 열자, 아침 일찍부터 외출해 오늘은 저녁이 되어서야 처음 보는 일레이가 이제 막 들어온 듯 아직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서 거기에 서 있었다.

“오늘은 볼일이 많아서 늦게야 들어올 거라고 하더니.”

“아아, 생각보다 금방들 연락이 돼서.”

“음?”

“너는 왜 문을 잠그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리며 방으로 들어온 일레이는 넥타이부터 풀어 던지며 소파에 앉았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어서.”

“……아하.”

이내 일레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어 그에게도 건네어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가능하면 평생 볼 일이 없길 바랐던 얼굴, 라만을 태운 차가 타르텐의 중앙현관 앞에 서서 그가 나오는 모습을 멀찍이 간이탑 위에서 보았다. 멀리서, 몇 년 만에 봤는데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뒤이어 내린 늙수그레한 남자―아마도 그가 알 파이살인 듯했다―를 부축하는 그는, 정태의의 기억에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정태의는 맥주를 꿀꺽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그를 본 적 있던가?”

“신문이나 자료 같은 데서만.”

그렇군,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화려하게 난장을 벌였던 그때도, 정작 집주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일레이가 한 발 앞서 폭탄을 때려 넣은 리야드로 간 뒤였다.

정태의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일레이는 맥주를 마시면서 그를 마주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숴 놓은 집주인이 나타나서 나보다 더 심기가 안 좋아야 할 건 저 남자일 텐데 말이지……하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젓고 만다. 애시당초에 그럴 남자가 아니다.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고 살고 싶었는데 말야.”

정태의가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금세 맥주를 다 비운 일레이는 빈 캔을 테이블 위에 세워 놓으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피하기보다는 해결하는 성격이 아니었던가?”

“아니, 그것도 문제에 따라 다르지……. 너도 알다시피 난 권력의 횡포에 약하잖아. 맞서서 어떻게 될 것 같기나 하면 몰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취미는 없다고.”

“흠……. 바위더러 비키라고 하지? 바위가 바라는 거나 내어주고.”

“바위가 바라는…….”

거기까지 말하던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바로 요전에 아지즈가 찾아왔을 때 그 바라는 바가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았던가.

“곤란해. 형의 의지는 내 의지와 별개로 움직이거든.”

정태의가 고개를 젓자 일레이는 어딘지 마뜩찮은 웃음을 지었다. 내키지 않는 현실을 짚는다는 듯이.

“태이. 그들은 바보가 아냐. 네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었을 것 같으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을걸.”

정태의는 말없이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하지만, 분명 이상하긴 해.”

빈 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일레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그는 허공을 응시했다.

“천재 정재이의 이름값은 분명 그쪽 업계에서는 엄청나게 비싸게 들겠지만, 이렇게나 시간과 수고를 들여 손에 넣을 만큼이 될까, 과연.”

그 말은, 정태의에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혼잣말이었다.

정태의가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정보였다면 일레이가 모를 리 없었다.

이렇듯 오랜 시간과 막대한 수고를 들여 그 천재의 이름과 능력을 손에 넣어 어디에 쓰려는 걸까. 그 시간과 수고를 상회할 만한 가치를 어디서 뽑아낼 수 있을까.

알 파이살은 사업가라고 들었다.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이미 실권을 거의 쥐고 있다고 하는―라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그 기회비용에 대해서도 생각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 두뇌 속에 든 걸 모조리 다 뽑아내고 그 이름 앞으로 모든 신용을 다 끌어모아 써 버린 뒤 그 몸마저 조각내어 비싸게 팔아 버린다 해도 그 약삭빠른 사업가가 바라는 만큼의 비용을 뽑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아, 아니군, 그 정도의 천재라면 정자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어, 그거라면 앞으로 수십 년은 고갈되지 않고 계속 뽑아낼 수 있을 테니 장기적으로 남는 장사가 될지도 모르겠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만에 하나라도 혼잣말이 아니라면, 그 도마에 오르고 있는 사람의 가족으로 눈앞에 시퍼렇게 버티고 있는 정태의에게 시비를 거는 게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말은 삼가 줬으면 좋겠군. 일단은 우리 형이란 말이지, 네가 말하는 그 대상은.”

정태의가 미간의 주름을 손끝으로 펴면서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매우 태연한 얼굴로 ‘이거 실례.’라고 말했다.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야 써먹을 리 없겠지만, 정태의로서도 이해가 안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형이 세상 만 곳에서 탐내는 두뇌라고는 하나, 정태의였더라면 차라리 그 노력을 돌려 다른 곳에서 그만한 결과를 뽑아낼 방법을 고려했을 거다. 그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그 남자가, 자존심이 어지간히 상했는지도 모르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정태의는 그 말을 뱉은 일레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혹시 자신이 생각을 입 밖으로 말했나 싶었지만, 일레이가 말을 이었다.

“가끔 그런 놈이 있거든. 노리던 바가 어긋나면 속이 뒤틀려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든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놔야 속이 풀리는 놈이. 특히나 배경이 든든하고 머리까지 좋아서 제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없었던 잘난 놈들이 더하지.”

대수롭잖게 중얼거리는 그의 표현을 들어 보면 뭐랄까, 대단히 속 좁고 치사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다.

정태의가 보았던 라만의 인상과는 걸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어쨌거나 실질적으로 라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태의가 보기에는 충분한 이득도 없는데 몇 년이나 집요하게 정재의를 쫓고 있지 않은가. 동시에, 별저 폭파의 장본인인 테러범까지.

“…….”

“왜?”

정태의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험담하고 있는 이 상황에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그렇게 비꼬인 놈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몇 년 전에 벌어진 일을 아직까지 질질 끌고 있는 저 작태를 보니, 하고 덧붙이면서, 정태의는 ‘몇 년씩이나 끌 필요도 없이 당일에 바로 앞뒤 생각도 않고 박살을 내놓는 성격과, 어느 쪽이 더 나을까.’라고 잠시 고민하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고 보면 눈앞의 남자도 사고방식이 몹시 독특하게 생겨먹은 셈이다.

“평온한 삶을 포기하고 테러를 불사하면서까지 나를 되찾고 싶었어?”

정태의는 불쑥 물었다. 진지한 얼굴로 말한 농담에, 일레이는 오래 생각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역시나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그 남자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으려니,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머쓱해져서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그런데 거기에 그가 친절하게 못까지 박는다.

“농담 같나?”

“…….”

애꿎은 머리만 더 세게 긁을 수밖에.

“그럼 예를 들어 태이, 반대 상황이었더라면 넌 어떻게 했을 것 같지?”

재미있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정태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니……, 그 가정은 일단 성립부터가 좀 불가능해 보이는데…….”

정태의는 손을 내저었다. 이 남자가 어느 심심산곡에 얌전히 잡혀서 갇혀 있다는 상황 자체부터가 이미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계속해 보라고 눈짓하는 일레이를 난처하게 쳐다보다가, 정태의는 머리를 잡아당기며 고민해 보았다. 사실은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시점의 문제도 있어. 그 당시, 그러니까 몇 년 전에 그런 상황이 도래했더라면――.”

“너는 뛸 듯이 기뻐하며 수만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겠지.”

정태의가 대답하기도 전에 일레이가 먼저 대답했다.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신다. 알면서 왜 물어.

“그렇다면 지금이라면 어때.”

일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술궂기도 하고 짓궂기도 한 그를 앞두고 한동안 곤란하게 입매를 찌푸리던 정태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차피 그를 상대로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데리러 가야지. 테러를 하든 뭘 하든.”

말하는 순간 정태의는 희미한 절망을 느꼈다. 이 상황만큼은 그렇게나 피하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자신도 인생의 막장에 다다른 모양이다. 아무리 같이 살아간다 해도, 저 사고방식만큼은 절대로 비슷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 차라리 둘이 나란히 쫓긴다 한들, 혼자 멀뚱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고작해야 몇 년 같이 사는 동안 나까지 인생 막장이 돼 버리고 말았어…….”

정태의는 구슬프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문득 웃는 기척이 났다. 멋쩍게, 굳이 그런 걸 물어본 원망까지 약간 담아서 고개를 들자 일레이는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부른다.

“……왜.”

“섰어.”

“왜 서!”

정태의는 벌컥 소리를 지르며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뭐가 섰냐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도대체 자신이 한 말의 어느 부분이 설 만한 부분이었는지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해졌을 뿐이다.

정태의가 한 말이라곤 ‘너 때문에 인생 막장 돼 버렸다’는 말뿐이었는데.

일레이는 비스듬하게 정태의를 쳐다보며 느릿하게 바지 앞섶을 주물렀다. 가늘어진 눈매는 점점 진심이 되어 간다.

징조가 좋지 않았다. 아직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이 초저녁부터, 몹시 낌새가 나빴다.

그러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에 일순의 정적을 가져왔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노크에 뒤이어 짧고 냉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끝난 뒤 곧바로, 그러나 지나치게 성급하지는 않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일레이가 들어왔을 때 미처 잠가 두지 않았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뒤에서 한 사람이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면서 그 남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방 안을 다 훑어본 모양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일레이는 물론, 미니바 근처에 서 있던 정태의의 모습까지.

그리고 정태의는, 시종이나 수하 하나 대동하지 않고 홀로 찾아든 그 남자를 다소 멍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이렇게 빨리, 심지어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던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몇 년 만에 만나는지 모를 남자가 그곳에서 정태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위압감을 뿜어내며,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오랜만이군요, 정태의 씨.”

저 정확한 발음도 여전했다.

정태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라만은 정태의의 힘없는 인사에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시선을 흘끗 일레이에게 돌린다.

“저분은……?”

“아……, 친구랑 얘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

당신의 별저를 판판이 부숴 놓고 당신네 나라 수도까지 테러한 바로 그 사람이랍니다, 하고 이름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태의는 잠시 고민하고 말았다.

어차피 저 남자가 그 이름을 모를 리도 없었고, 설령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해서 저 얼굴을 모를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머뭇거리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일레이 리그로우입니다. 퍼스트네임으로는 거의 불리지 않지만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나 정태의가 망설이는 사이에 당사자가 선뜻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태의가 보는 앞에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태연한 얼굴로 마주서 손을 맞잡았다.

“그렇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야 많이 들었겠지, 정태의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말없이 맥주를 꺼내었다. 속이 타서 저도 모르게 풀탭을 뜯으려다가, 그래도 일단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상황을 깨닫곤 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두 남자의 인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석대로라면 여기에서 외다리나무의 결투라도 벌어져야 할 테지만, 그들은 간단히 인사만 나누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손을 놓았다. 약간이나마 긴장했던 정태의가 바보 같을 정도로 맥없는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왜 찾아온 걸까.

정태의는 라만이 잠시 일레이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어 자신을 바라본 순간, 뒤늦게야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을 시켜서 부르지도 않고―물론 다른 사람이 데리러 왔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가지 않았을 테지만―황공하게도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이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태의에게 볼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볼일은, 짐작컨대 별저가 폐허가 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건 아닐 듯했다.

정태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신이 짐작할 수 있는 가장 큰 논의거리를 곧바로 꺼내었다.

“그러고 보니 재의 형과는 가끔 연락을 하셨다고요. 형에게 들었습니다. 가끔 안부차 연락을 하셨다고…….”

어차피 닥쳐야만 한다면 껄끄러운 문제는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정답이다.

정태의가 그 이름을 꺼내자 라만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이제 보니 그는 조금 야윈 것 같았다. 뺨이며 턱선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 든다. 아니, 어쩌면 정재의와 함께 있었을 때와 비할 수 없을 만치 서늘한 눈매로 쳐다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과연……, 정태의 씨는 정재의 씨와 종종 연락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라만은 미묘한 투로 말을 꺼내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린다.

“종종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요. 아……가끔 연락을 주고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들었던가요.”

“아니, 맞습니다. 기구 측에서, 그래도 해마다 두어 번 가량은 제 메시지를 전해 주는 모양이더군요. 덕분에 안부 정도는 나누고 있습니다.”

아, 예, 하고 정태의는 애매하게 말을 흐린다.

저 말투로 봐선, 마치 연락을 무진장 퍼붓는데 제대로 닿는 건 거의 없다는 투다. 바빠서 정신도 없을 신분께서 무슨 연락을 그렇게 끈질기게 했다는 건지, 정태의는 아무래도 오늘 밤엔 두통에 시달릴 것만 같아 관자놀이를 살짝 짚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연락을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형은, 설령 수십 수백 번 연락이 닿는다 해도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을 수락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형이 바라는 일이었더라면, UNHRDO에서 가로막으려고 기를 쓴다 해도 이루어졌을 테지요.”

어차피 돌려 말해 봐야 이 눈치가 비상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소용도 없는 일이다. 정태의는 대단히 직접적으로 말했다. 바라지도 않는 상대에게 끈질기게 청을 넣는 건 그만두라고.

그리고 그 말뜻은, 짐작대로 아주 정확하게 라만에게 전해진 듯했다.

“정재의 씨가 바라지 않는 일이라……. 정태의 씨, 이제 와서 말씀드려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 당시, 당신이 한 달만 더 늦게 왔더라도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아니, 적어도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룰 초석만큼은 분명히 손에 넣었을 테지요.”

삽시에 라만의 음색이 바뀌었다. 냉랭하지만 낮고 정중하던 목소리는, 이미 삭막한 칼날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와 똑같이, 서슴없이 정태의를 노려보는 냉막하고 차가운 시선.

예전에도 느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여전히 이 남자의 미움을 어지간히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바가, 형을 당신의 편으로 삼아 정쟁에 휘말려들게 하는 일이었더라면 저는 제가 한 달 더 늦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야겠군요.”

“정쟁에 휘말려들게 한다? 내가? 그를?”

라만은 천천히, 정태의의 말을 한 마디씩 되짚었다. 어이없다는 듯 낮고 짧게 웃은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태의 씨가 내 별저를 무너뜨리고 그를 데려간 덕분에 여러 가지가 틀어졌지요. 굳이 내 일뿐 아니라 정태의 씨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 덕분에 인생길의 판도가 달라져 버린 정태의는, 이제 와서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어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별저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는걸요. 죄도 없는데 죄인처럼 부자유하게 갇혀 있는 형과 함께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기 때문에 말이지요.”

“갇혀 있었다, 라…….”

정태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만이 혼잣말처럼 되풀이하며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곧 정색을 하며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정재의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그토록 오래 내 집에서 머물렀을 리 없을 테니. …―그래, 당신이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그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사유에 잠겨 있었을 테지요.”

라만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록 그가 정재의를 가두어 두긴 했으나 그것은 동시에 정재의의 암묵적인 동의도 있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누구인들 정재의의 의지에 반하며 억지로 그를 묶어 둘 수는 없었을 테지만, 저 말이 한편으로는 적반하장으로 생각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미간을 긁적였다.

“평온한 사유는 분명 형이 즐기는 일이긴 하지만, 타인인 당신과 가족인 저는 아무래도 보는 입장이 다른 모양이군요.”

“가족이라…….”

라만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거슬린 듯 그의 얼굴에 냉기가 스쳤다.

그래, 가족이다. 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확고한 인연이었다.

잠시 얼음 같은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던 라만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애초의 가족보다 소중한,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법입니다. 거의 만나는 일도 없는 혈연보다 말이지요.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하고 저도 모르게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려던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 그런데 그게, 당신이 형을 잡아다 가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태의는 어쩐지 미묘하게 주제에서 비껴나고 있는 대화의 흐름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 당시의 사건에 있어 가족인 자신의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더 소중한 새 가족 운운하는 이야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혹시.

정태의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얼른 덧붙였다.

“분명 저는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새 가족이 생겼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재의 형이 더 이상 제 가족이 아닌 건 아닙니다. 형이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제가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찾으러 가면 형은 이번에도, 어지간해서는 제 뜻을 따라 주겠지요.”

그러니 또다시 비슷한 수법으로 형을 잡아다 어딘가 가둬 두는 짓은 하지 않도록, 그런 바람을 담아 정태의는 짐짓 웃으며 못 박아 말했다.

“…….”

그러나 어쩐지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눈앞에 버티고 선 라만은 물론, 뒤에서 흥미롭게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일레이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감탄스러울 만큼 부러운 형제애로군요. 과연, 길상천께서는 자신만만하시다는 건가.”

라만이 나직이 말했다. 그 혀 끝에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분노의 빛에, 정태의는 다시 슬쩍 고개를 기울이고 말았다. 뭔가 잘못 밟은 모양인데, 이번엔 대체 뭘 잘못 밟은 걸까.

그러나 정태의가 그 답변을 짐작해 내기도 전에, 라만은 더 길게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거침없이 본론을 꺼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의향을 여쭈러 왔습니다.”

정태의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한 끝에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있을 만한 일이면 좋을 텐데요.”

“오래 생각하신 뒤 대답을 주십사 하고 싶지만,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을 테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재의 씨가 차후 내게 도움을 주시도록, 정태의 씨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짐작은 했었지만, 정말로 단도직입적이고 분명한 용건이었다.

이거야 얼마 전 아지즈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정태의는 확실하게 대답을 했었다.

그렇기에, 정태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이 남자가 정태의에게 제시하는 최후통첩이자 마지막 제안이었다. 이번 제안을 넘기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굳이 말로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형에게 몇 마디 말을 전해 주기만 하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요 몇 년 정태의를 비롯해 일레이나 다른 이들에게 걸려 있었던 제약은 말끔하게 사라질 터였다. 더 이상은 수배 목록에서 그들 자신의 얼굴을 볼 일도 없어질 뿐 아니라, 부수적인 이점도 틀림없이 따를 것이다.

정태의는 고개를 숙여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몇 분쯤, 제법 오랫동안 그렇게 침묵하고 있었는데도 라만은 재촉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답을 기다렸다.

“반드시 형이어야 합니까?”

한참 뒤 정태의가 한숨처럼 묻자 라만은 멈칫했다.

분명 정재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록 특출한 인물이었지만, 찾아보면 그에 비등할 만큼 뛰어난 인물은 또 있을 터였다. 혹은 그에 다소 못 미치더라도 여럿을 아래에 두면 되었다. 이 남자는 그럴 만한 권력과 재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반드시 그여야 합니다.”

서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흘끔, 일레이를 바라본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여 저 남자를 수배범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어쩐지 본의 아니게―여태 살아오는 인생에서 정태의의 본의로 벌어진 일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만―저울 양쪽에 정재의와 일레이를 올려놓고 가늠하게 된 것 같아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짢은 얼굴로 괜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정태의는, 쯧, 하고 혀를 차곤 일레이를 휙 돌아보며 딱 잘라 말했다.

“일레이. 말해 두는데 네가 테러범이든 뭐든 어딘가에 갇혀 버린다면 나도 그리로 갈 거다. 나도 같이 쫓기면서―아니면 갇혀서―살겠다고.”

정태의의 난데없는 선언에, 그저 흥미롭게 그들을 관망하고 있던 일레이는 가볍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정태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일레이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려, 정태의는 라만에게 정중히 거절의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형에게, 바라지 않는 일을 하라고 권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고, 몇 초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끝에 라만은, 별반 의외도 아니라는 듯 담담히 확인한다.

“그렇다면 제 제의를 거절하시겠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군요.”

“예.”

“정태의 씨. 나는 당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정재의 씨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제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겁니다.”

알고 있다. 이 남자는 두 번, 세 번 거듭 기회를 줄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한 번쯤, 돌이킬 기회를 준 뒤 그 기회를 흘려보내면 그대로 거침없이 짓밟아 버릴 인간이었다.

정태의는 대답 대신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야 물론 나도 마음 편하게 말 몇 마디 전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 편하자고 다른 사람을 대신 부자유한 신세로 떠밀 수는 없는 법이다.

라만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럼 이만, 하고 짧은 말을 남기곤 돌아섰다.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이미 아시겠지만―, 라쉬드 왕자가 알리 왕자를 도운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이 제 귀에까지 들리더군요. 알리 왕자가 정권에서 승기를 잡았다고는 하나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는 않았을 텐데―…모쪼록 당신의 후견인 되시는 분께 아무런 해도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뭇 정중하게 말한 사람은, 여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일레이였다. 표정이 없는 듯했지만 눈매에는 언뜻 웃음을 담고 있는 그를, 라만이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요, 리그로우 씨. 그러나 예상치 못한 테러라도 있다면 또 모를까, 우리나라의 국내 정세에까지 걱정해 주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뼈 있는 말을 남긴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그를 붙잡는 목소리도 없었다.

그의 걸음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에야 정태의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역시 오랜만에 다시 봐도 나는…….”

잠시 뒷말을 고르는 듯하던 정태의는,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는지 결국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내뱉었다.

“저 남자가 싫어.”

딱 부러지게 말하며 고개를 내젓는 정태의를, 일레이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명확하게 누군가를 싫다고 규정하다니 드문 일이군.”

“그런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이렇다 할 만한 싫은 사람이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사람을 싫어한다는 건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원래 그 자체를 피하는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싫다.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봐도 그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저 남자가 싫어. 저놈이 싫다고.”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처럼 투덜거리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희한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알 듯 말 듯한 대답이, 정태의의 머릿속에도 얼른 걸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입술을 비죽 내밀고 침묵하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불쑥 말했다.

“불안해.”

“불안하다……?”

“뭔가 소중한 걸 빼앗아갈 것 같아.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한 마디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을, 최대한 비슷한 감정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그 느낌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다.

상실이라니, 무엇의?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느낌만이 들어, 정태의는 라만이 이미 사라지고 난 문만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일레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살짝 옆으로 까닥여 뚝, 뚝, 목의 뼈마디를 풀었다.

“글쎄……어쨌든 배짱은 좋은 남자로군. 지금 상황에 자국에서 나오는 건 위험할 텐데.”

정태의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일레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잇는다.

“라쉬드가 정쟁에서 졌다고는 하나 수복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거든. 알리를 뒷받침한 주요 인물들만 잡아 버리면 그에게도 기회는 다시 돌아와. 다시 말해 알 파이살은―혹은 그의 대리자는―저렇게 태평하게 나돌아다닐 때가 아니란 말이지.”

정태의는 의외로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몇 번쯤 눈을 깜박이다가 흠, 하고 중얼거리고 만다.

“그쪽 동네도 복잡하군. ……내 코가 석자이니 거기까지 관심 둘 여력은 없지만.”

당장 내일부터 저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겁난다고, 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던 정태의는, 갑자기 앞을 막아서는 일레이를 다시금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음?”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지 않나? 함께 쫓겨 살든 갇혀 살든 하면 되는 문제이니.”

일레이의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잊고 있던 멋쩍음이 갑자기 확 덮쳐왔다.

“아, 어…―그, 렇지, 뭐.”

띄엄띄엄 말하며 애꿎은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당기는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는 낮게 웃었다. 어느 순간 허리를 굽혀 정태의의 귓가에 바싹 입을 댄 그는, 나직이 말했다.

“태이. 섰어.”

“―…그러니까, 왜 서냔 말야!”

정태의는 다시금 뜨악하게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미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 전에, 일레이의 팔이 허리에 감기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오랜 경험으로 보건대,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평온한 저녁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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