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저택을 찾은 것은, 그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지 약 8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날은 타르텐의 성을 쓰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직계에 가까운 혈족들이라면 거의 빠짐없이 저택으로 모인 날이기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참한 사람들은 적어도 호사스런 선물 상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전해 왔다.
타르텐의 주인이 바뀐 뒤로 처음 맞는, 새 주인의 생일이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여전히 타르텐의 절대적인 권위는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옛 주인, 아돌프 타르텐에게 있었으나 권위는 조금씩 천천히 새로운 주인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
1년에 한 번 타르텐의 혈족이 모이는 그날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저택을 찾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놀란 눈치였다.
놀라워하는 기색을 숨기며 집사가 그를 맞자, 그는 인사 대신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르신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많은 얼굴들이 오가는 저택을 둘러보며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크리스토프에게서 가방을 받아들며 집사가 막 대답하려 할 때, 중앙계단의 층계참을 돌아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자 집사는 대답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 크리스. 네가 왔구나.”
옆에 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던 노인이 현관을 들어서고 있던 크리스토프를 보곤 반가운 듯 말을 걸었다. 노인을 부축하며 옆에서 걷던 남자 역시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인의 뒤를 이어 새로 이곳의 주인이 된 남자, 리하르트 타르텐이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던 그는 곧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연락이 없어서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와 줬군.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크리스토프.”
리하르트의 의례적인 인사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크리스토프는 노인을 향해 약간 고개를 숙였다.
“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어르신.”
“그래, 그래. 듣기로는 너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만,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
“예, 덕분에.”
크리스토프는 웃는 듯 마는 듯 인사를 하고, 리하르트의 반대편으로 노인의 옆에 선 남자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오래 전부터 타르텐의 세무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그에게는 눈짓으로만 인사를 하고 만다.
“그렇지. 산책을 하려고 나가던 참인데, 마침 너도 이렇게 왔으니 함께 가자꾸나.”
노인은 크리스토프에게 손짓을 해 불렀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머뭇거리며 그들을 보았다.
타르텐의 옛 주인과 새 주인, 그리고 세무사라면 단순한 산책은 아닐 거다. 산책을 하는 가운데 외부에 마음 편히 들려주지는 못할 이야기를 나눌 터였다.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자 노인은 그 속내를 짐작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괜찮아.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나 나눌 뿐이니. 천천히 거닐면서 네 이야기도 좀 들어 보자꾸나. 어서 이리 오련. 다리가 불편한 이 노인네를 좀 부축해 주려무나.”
크리스토프는 조금 더 망설였지만, 노인이 재차 손짓을 하자 못 이긴 듯 노인의 옆에 섰다. 노인과 세무사의 사이에 서서 노인을 부축하며 걷기 시작했다.
노인을 사이에 둔 옆쪽에서 리하르트가 잠시 그를 쳐다보았지만 크리스토프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리며 기척 없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재단을 거쳐 명의를 옮기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가장 낮은 세율이 적용됩니다. 증여세보다 낮다고는 하나 상당한 비용이 들긴 할 테지만 무엇보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지요.”
혹은 편법이 있습니다만, 하고 두어 가지로 나누어 세무사가 하는 말을 들은 뒤, 리하르트는 웃으며 “법은 지키며 살아야지요.”라며 그가 가장 먼저 권해 주었던 방법을 택한다.
타르텐의 주인이 바뀐 뒤 그가 맞는 첫 생일에서 그의 백부가 선사한 도하의 별장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세무사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건에 대한 화제는 끝났다.
“도하라……. 이곳보다는 오히려 크리스가 있는 곳에서 더 들르기 가깝겠구나.”
노인이 불쑥 말하자 리하르트는 설핏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토프 역시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언뜻 리하르트를 본다.
리하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넉넉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군요. 그가 저보다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가 원한다면 별장을 그에게 내어주어도 좋은데요.”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없이 빈말도 아닌 투로 리하르트가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낯을 찌푸렸다. 노인이 보기 전에 얼른 다시 표정을 펴긴 했지만.
“그가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을 제가 받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마음만 고맙게 받아 두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노인에게 예의바르게 말하곤,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풋풋한 새잎이 한창 자라나고 있는 서늘한 숲길을 조카들과 더불어 산책하던 노인은 문득 “어디 보자…….” 하고 혼잣말처럼 말을 꺼내었다.
“네 둘째 백부는 별장을 주었으니, 나도 네게 뭔가 근사한 생일 선물을 주어야 할 텐데……. 어떠냐, 리하르트.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노인이 묻자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노인은 서글서글한 눈을 들어 리하르트를 보았다.
“하기는, 물질적인 것은 이미 선물로 받아 기쁠 만한 게 없겠지.”
어떠한 대답을 하기에도 애매한 말에 리하르트는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 그 옆에서 크리스토프는 아주 희미하게 찌푸린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문득 리하르트는 그런 크리스토프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은근하게 말한다.
“크리스토프와 같이, 먼 곳에서 제 생일을 축하하러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와 주기만 해도 그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지요.”
듣기에 따라서는 미묘한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프는 약간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리야드에서 바로 오느라 딱히 뭔가를 준비하지는……못했지만, 나중에 뭔가 찾아보러 나가려고…….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준다면 도움이 되겠는데.”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에게 직접 말한 첫 마디였다.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선량하게 웃는다.
“아니, 정말로 나는 시간을 내어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고 있어. 진심으로.”
리하르트가 상냥하게 말하는 건너편에서, 그들의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세무사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타르텐 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견원지간인 그들이 어르신의 앞에서는 예의바르고 원만한 사촌지간의 모습을 보이는 게 퍽 낯설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번갈아 본 그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야콥 씨가 청첩장을 주시더군요.”
리하르트와 같은 항렬인 육촌 형제의 이름을 말하며, 이제는 거의 친척과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랫동안 타르텐에서 일해 온 세무사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도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그래. 올봄에 스벤과 올번이 보름 간격으로 결혼을 한 뒤로 그들이 안 놀아 줘서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몇 달 사이에 그놈도 좋은 소식을 들려주더군.”
이 자리에서 그 소식을 처음 접한 유일한 사람인 크리스토프는, 그러나 별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관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문득 노인은 크리스토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떠냐, 크리스. 그곳에 괜찮은 아가씨는 있더냐? 나는 네가 데려온다면 이국의 아가씨이든 어떤 사람이든 아주 기쁠 게다.”
크리스토프는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떨어뜨려 잠시 발치를 쳐다본다. 노인의 옆에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어쩐지 유난히 따가운 기분이 들었다.
“저는……, ……죄송합니다, 어르신.”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그 따가운 시선이 누그러드는 듯했다.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노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팔에 손을 얹는다.
노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이미 보고 있었는데도 그 손이 닿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두어 번 크리스토프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크리스토프의 무표정한 얼굴이 살짝살짝,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움칫거린다.
“그래, 언젠가는 너도 익숙해질 사람이 생길 테지. 괜찮아, 느긋하게 기다려도.”
노인은 크리스토프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가 이윽고 그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마치 화제를 바꾸기라도 하듯, 선뜻 리하르트를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두 어깨가 무거워졌으니 그 짐을 나누어 질 좋은 여자를 만나야겠구나. 그래, 너는 어떤 여자가 좋으냐? 내, 마땅히 네게 선물해 줄 만한 것이 없으면 주위에 수소문을 해 중신이라도 서마.”
리하르트는 노인의 말끝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잠시 곤란한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글쎄요, 하고 턱을 쓰다듬는다.
“타르텐을 저와 함께 짊어질 수 있을 만한 사람이어야겠지요. 그 외에는 딱히……. ……아. 굳이 말하자면 궂은일도 많이 해야 할 텐데, 결벽한 데가 있으면 좀 곤란하겠지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원만하게 접해야 할 테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냥 알고만 지내는 사이라도 피곤할 테니까요.”
리하르트의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크리스토프에게 흘러갔다.
크리스토프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묘하게 차가워졌다.
그리고 세무사는, 괜스레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시비를 거는구나 싶어 다시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친다. 결벽증에 가까운 크리스토프의 접촉기피 역시, 타르텐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아무런 속뜻도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장은 익혀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군요. 나중에, 타르텐을 거뜬히 짊어졌다는 느낌이 들면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하며 웃음 짓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아주 잠깐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크리스토프가 왔어?! 왜?!”
“왜냐니……, ……, ……리하르트가 승계한 뒤로 처음 맞는 생일이니까 왔겠지.”
황당무계한 환청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되묻는 아이빈에게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대답에 대해 몹시 미심쩍은 얼굴을 하는 야콥이었다.
실상 야콥 자신도, 비록 크리스토프가 저택으로 들어서는 걸 직접 보긴 했지만 스스로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잘못 봤는지도 모른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어르신과 마주쳐, 리하르트를 대동한 어르신과 함께 산책길에 나선 크리스토프의 모습은 모두 야콥이 허깨비를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결혼 준비를 하느라 한동안 운동을 좀 등한시했더니 건강이 안 좋아졌나…….
“아. 아니면 리하르트의 생일이랑은 전혀 상관없이, 그냥 뭔가 볼일이 있어서 온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잖아. 지금 크리스토프를 고용하고 있는 알 파이살은 우리 타르텐과도 밀접한 교분을 맺고 있으니까, 뭔가 사무를 보러 왔는지도 모르지.”
요 며칠, 타르텐에는 친척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타르텐의 새 주인이 맞는 첫 생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때에 크리스토프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형식적으로라도 축하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아이빈의 말을 듣고 야콥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리야드에서 그가 직접 와야만 할 만큼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뭐가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생일을 축하하러 먼 거리를 찾아왔다’는 설보다는 훨씬 그럴 듯했다.
그들이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승마나 하자며 마사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제 말 하면 나타나는 호랑이가 저만치 숲 쪽에서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하고 야콥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보다 조금 늦게 그 호랑이의 모습을 발견한 아이빈도 걸음을 늦춘다.
한 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승마복을 갖추어 입은 크리스토프가, 마치 모범 기마라도 보여 주듯이 곧고 바른 자세로 이쪽을 향해 타박타박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진짜 왔네…….”
야콥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듯 아이빈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니까, 하고 야콥도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저놈은 오랜만에 봐도 여전하네…….”
아이빈이 재차 말하자 야콥 역시 그러게……, 하고 중얼거린다.
얼음 따위로 조각을 한 것처럼 표정 하나 없는 얼굴에 약간의 따분함만을 담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냉랭하고, 여전히 딴 세상에 있다.
크리스토프 역시 그들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불현듯 마주치면 심장이 깜짝깜짝 멎을 만큼 푸르고 깊은 눈동자가 두 사람의 얼굴 위를 스쳤다. 예의 그 귀찮다는 빛이 잠시 감돌았다.
“무슨 상관이야. 저놈이 있든 말든. 건드리지만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인데.”
야콥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크리스토프는, 비록 손댈 수 없을 만큼 골치 아프고 처치 곤란한 인종이긴 했지만, 적어도 이쪽이 건드리지 않는 한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하긴 눈앞에 누가 있든 무시하고 말 한 마디 걸지도 않는 놈이지. ……경사로운 날에 사고나 안 벌어졌으면 좋겠다.”
아이빈이 중얼거렸다.
리하르트가 승계자로 선택되어 타르텐을 잇는 것과 동시에, 젊은 층 사이의 반목은 거의 사라졌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이들은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험악한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결정난 사항에 대해 같은 혈족 내에서 분규를 질질 끌어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애초에 경쟁조차 집안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과거 크리스토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입은 적이 있는 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굳이 크리스토프를 적대시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직접적인 해를 입은 자들이 꽤 많아서 여전히 크리스토프를 노려보고 욕설을 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긴 했지만.
야콥이나 아이빈의 경우는 친구가 크리스토프를 찔러 대다가 병원 신세를 진 전례가 있긴 했지만 당사자는 별 원한이 없었다. 그래도 거리감은 여전해서 먼저 말을 걸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크리스토프 타르텐은 멀리 두는 게 좋은 인간 일순위였다. 야콥이나 아이빈뿐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게 여겼다.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를 스쳐 가면서, 그들은 서로 못 본 듯이 그렇게 지나쳤다. 야콥과 아이빈은 괜한 압박감에 둘 다 침묵했다.
괜찮아, 괜찮아,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돼. 사실 이쪽에서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저렇게 안전한 인종도 없다. 어지간해서는 다 무시해 버리는 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이 크리스토프를 태운 말과 스쳐 지났을 때였다.
몇 걸음이나 떨어졌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낮고 냉담한 목소리.
움찔, 야콥은 발을 헛디딜 뻔했다. 흘끔 시선만 돌려서 옆을 보자 아이빈 역시 비슷한 눈치로 야콥을 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우릴 부른 걸까. 아닐 거야. 그냥 모른 척하고 가자. 그런데 이 근처에 우리밖에 없잖아. 아냐, 그래도 그냥…….
“……야콥. 아이빈.”
그러나 그들이 모른 척 뻣뻣하게 걸음을 다시 옮기려 했을 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빼도 박도 못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움찔, 이번에야말로 발을 삐끗해 버렸다.
얼음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는 아이빈의 옆에서, 그나마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야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왜?”
머뭇머뭇 돌아보자,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크리스토프가 말 위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게, 꼭 노려보는 것 같다.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콥 역시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갑자기 이놈이 왜 불렀을까. 설마 얼마간 못 본 사이에, 이제는 이쪽에서 먼저 안 건드려도 무작정 시비를 걸고 보는 걸로 노선을 바꿨나? 그러면 엄청나게 골치 아파지는데.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굴리면서 그와 눈싸움을 하듯이 마주보고 있는 야콥의 앞에서, 뭔가 고민스러운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건강해?”
“……. ……응?”
처음에 야콥은 크리스토프가 어느 나라 말을 한 건지 의심했다. 그가 아는 말이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되묻자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더니 그들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본다.
“건강해 보이는군. 아무데도 다치지 않고.”
“……. ……. ……어. 너야말로.”
야콥은 여전히 고개를 꼰 채 미심쩍게 대꾸했다.
뭐지. 뭘까. 멀쩡해 보이니 다리 한 대쯤 분질러 주겠다는 뜻인가?! 내가 이놈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
“야콥. 결혼한다면서.”
갑자기 화살이 야콥에게 꽂혔다.
야콥은 어……하고 애매하게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걸까. 내가 결혼하는 게 이놈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는 결혼빵이라는 안 좋은 풍습이 있다던데, 저놈이 외국물 먹으면서 그런 걸 배워 왔나?!
역시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야콥의 옆에서 아이빈 역시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보았다.
―야콥, 너 대체 저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저놈이 갑자기 왜 말을 거느냐고?!
―몰라. 나는 정말로 모르겠어. 왜 하필 나지?!
그들이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미묘한 얼굴로 입을 열더니, 그러고도 몇 초쯤 있다가 말했다.
“결혼한다니, 축…….”
축――그 뒤에 나올 말이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왜. 뭐가 문제야. 뭐가 거슬린 거냐고.
긴장해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크리스토프는 잠시 노려보았다. 그 입이 몇 번쯤 더 움직인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낯을 찌푸리더니 휙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그러나 화가 난 것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서―가던 길로 걸어가 버렸다.
딱딱하게 굳어서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쳐다만 보고 있던 두 사람은,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결혼 축……? 축……하……는 아닐 테고.”
“그럴 리야 없지. 저놈이 어디 아프지라도 않은 이상은.”
“그렇지? 그럼 뭐였을까. 왜 불러 세웠지?”
아이빈의 물음에 야콥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민을 하다가 머리의 나사가 하나쯤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빈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크리스토프……, 여태 몰랐는데 목소리가 좀 뭐랄까, ……달콤쌉싸름하더라.”
“그러게…….”
두 사람은 나란히 머리의 나사를 풀어헤친 듯 서로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
“크리스토프가 불치병?!”
삽시간에 타르텐에 국지적으로 번진 소문이 요한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정성 들여 도미노를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서익 지하에 마련된 홀의 한쪽 구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서 두 시간째 조심조심 도미노의 말을 세우고 있던 요한은, 몇 조각 남지 않은 말을 쥐고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 니코가 동익으로 가다가 크리스토프랑 스쳤는데, 그놈이 갑자기 말을 걸더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심지어 뭐라고 말을 걸었는지 알아? ‘오랜만이야’라지 뭐야, ‘오랜만이야’!”
거의 눈을 까뒤집듯이 부릅뜨고 그 말을 전하는 딕을, 요한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단 요한뿐만이 아니었다.
홀 여기저기에서 카드며 당구며 게임을 즐기고 있던 몇몇 청년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 괴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한은 딕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곧 간결하게 결론을 내었다.
“헛걸 본 거야.”
“엉?”
“니코가 요즘 위가 안 좋다고 위장약을 먹곤 했잖아. 그런데 바로 엊그제 신문에 났잖아,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부 의약품에 문제성 약품이 섞여 있었다고. 틀림없이 그놈이 먹은 약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
아무래도 그 문제성 약품이 환각제였나 보다, 하고 덧붙이며 요한은 다시 도미노 말을 하나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때였다. 아까부터 좀 넋 나간 얼굴로 다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폴락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아까 그게 정말 크리스토프였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폴락에게 몰리자, 폴락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아까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서둘러 가다가 층계참에서 크리스토프와 부딪혔거든. ……그런데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 주면서 괜찮냐고 묻고 가더라.”
“……. 너도 요즘 위장약 먹었냐?”
미심쩍게 묻는 사촌의 말 뒤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불치병에 걸려서 개과천선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어.”
“아니면 사실은 몹시 닮은 사람일 뿐, 크리스토프가 아니든가.”
불온한 공기가 홀 안에 감돌았다. 그 가운데 달각, 달각, 요한이 조심스럽게 도미노 말을 내려놓는 소리만 들린다.
그때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늘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이라, 그 발소리에는 개의치 않고 다들 뭔가 개운찮은 심경에 젖어 고요 속에 게임을 돌리고 있었다. 새로 한 사람이 들어와 말없이 걸음을 옮겨도, 다들 미묘한 상념 속에서 자신의 게임판만 노려본다.
그러던 차에.
“헉……, 악!!!”
갑자기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구석에서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좌르르륵, 조그맣고 경쾌한 소리가 일시에 번져나간다.
“악, 악! 악!! 딱 일곱 개만 더 놓으면 끝이었는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는 요한의 옆으로, 장대하게 줄지어 서 있던 도미노가 아름답게 연달아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미노의 한쪽 끝에서, 홀에 들어서다가 미처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미노를 건드려 버린 남자가 꼼짝도 않고 굳어 서 있었다.
“이, 이 자식, ……크리스!!!”
요한은 벌떡 일어서 도미노를 걷어차며 그 남자에게 단숨에 다가갔다.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어깨를 움켜쥐고 마구 뒤흔들었다.
“어쩔 거야, 어쩔 거야!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내 역작! 그걸 네가 일순간에 망쳐 놨잖아! 이걸 어쩔 거냐고!!”
눈에 뵈는 것 없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는 요한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석상이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이 홀에 일도 없이 오는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심지어 요한은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붙잡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움칫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요한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몹시 고민하는 눈으로.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정적 속에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다시 고쳐 줄게.”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이윽고 말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고함을 지르고 있던 요한은 곧 손을 떼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앉아서 도미노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 요한도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수십 초쯤, 또각, 또각, 도미노를 세우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없이 자신의 게임으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귀신에 홀린 듯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미니 계단 위에 도미노를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요한이었다.
“그런데 너 불치병이라며.”
“음?”
요한이 불쑥 묻자 크리스토프 역시 무심하게 반문했다.
“어디 아프냐?”
“아닌데.”
“그래, 그럼 됐고. 어쨌든 건강 챙기며 살아라.”
“응. ……. ……너도.”
잠시 침묵하다가 생각난 듯이 덧붙이는 크리스토프의 대답을 끝으로, 그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각자 앉은 자리에서 도미노만 세워 갔을 뿐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애꿎은 큐대만 문지르면서 흘끔흘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던 아이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놈 왔다 갔는데.”
크리스토프를 보면서 말을 던지자, 도미노를 쥔 손끝에서 잠깐 시선을 들어 아이작을 쳐다본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 누구.”
자기가 말을 걸고도 설마 대답다운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아이작은 미심쩍게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왜, 작년에 네가 부려먹던 놈. 그 누구냐, 김영수, 아니지, 정태이라고 했었나.”
도미노를 내려놓던 손이 멈추었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한 듯 빤히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그 새파란 아몬드 모양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자 아이작은 괜히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안 되지, 안 돼. 그러고 보니 심장에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저 남자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는 아이작을 쳐다보면서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왜 왔어, 그 녀석이, 여기를.”
“어, 릭이, 리하르트의 생일에는 독일에 없을 것 같다고 미리 인사를 전하러 들렀었거든. 같이 왔더라.”
“릭이랑?”
“응. 어디더라, 한국? 거기에 잠시 갔다오겠다던데.”
크리스토프가 묻는 말에 아는 대로 술술 읊어대면서 아이작은 흘끔흘끔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어린애처럼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눈을 깜빡이는 크리스토프의 눈가에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아이작은 괜히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한국? ……아아……. ……흥…….”
크리스토프는 짐작이 간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살짝 기분이 상한 듯 코웃음을 쳤다.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다시 도미노를 세우는 데에 착수한다.
제대로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릭 그 자식,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불평을 투덜거리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골똘히 자신의 손끝만 들여다본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피식, 조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얼음처럼 새파란 눈이 가느스름하게 휘어지며, 고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만큼이나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
크리스토프가 웃고 있었다.
웃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표정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따뜻한 빛이 감도는.
툭, 투둑, 여기저기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여 물건을 줍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도미노를 세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요한은, 이내 무심하게 다시 손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난 위장약도 안 먹는데 어째 헛게 보이네…….”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 그는 다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리고 여상하게 말했다.
“그런데 넌 좀 웃고 다녀라. 어쨌든 말야, 보는 사람도 좀 익숙해질 여유쯤은 생겨야 하지 않겠어?”
요한의 말에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잘 못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어쨌든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하나, 손끝을 노려보며 조그만 플라스틱 말을 세워 나갔다.
*
리하르트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이미 대부분의 자리는 차 있었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이제 막 먹기 시작했는지, 전채 접시가 약간 비었을 뿐이었다.
“미안해, 늦어서.”
타르텐을 승계한 뒤로 예전에 비할 수 없이 바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 좋고 믿음직스러운 그들의 사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리하르트는,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의 생일을 정식으로 축하하며 혈연들과 한자리에서 축하연을 여는 건 내일이었다.
오늘은 같은 항렬의 가까운 친족들과 여느 때처럼 가볍게 저녁을 먹으며 술을 약간 마실 예정이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그가 서익에서 머물던 무렵에 곧잘 함께 지내곤 했던 사촌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정신없이 바빴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휴식시간이라곤 낮에 어르신을 모시고 잠시 산책을 했던 때뿐이었다. 그 뒤에도 바로 집무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
뭔가 떠오른 듯 잠깐 생각에 잠겼던 리하르트는 곧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음식을 입에 대기 전에 먼저 술로 입술을 축인 리하르트는, 미묘하게 술렁거리는 자리의 분위기를 이내 알아차렸다. 뭔가 재미난 이야깃거리라도 있을 때의 분위기다.
그는 전채 접시를 끌어당기며 가까이에 앉은 클로드에게 물었다.
“뭐야. 어쩐지 오늘은 재미있는 화제라도 있는 모양인데.”
“응? 어……아니 뭐, 별로 그런 건 아니고…….”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걸 보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하르트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굳이 묻지는 않고 포크를 들었다.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이 하루의 안부 인사나 사소하게 떠오른 일 따위를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던 리하르트는, 흘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들어올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 크리스토프는? 그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는 리하르트에게 클로드가 조금 머뭇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다는 뜻이다.
“흠. 함께 식사를 하면 좋을 텐데.”
리하르트는 의례적으로 말을 하곤 다시 포크를 놀렸다.
클로드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리하르트는 타르텐을 이은 뒤로, 그렇지 않아도 포용력으로 가득 차 있었던 넓은 마음이 더 넓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앙숙이었던 크리스토프까지 챙겨 주다니.
비록 의례적인 말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 말을 한 것만 해도 놀라웠다.
“크리스토프도 불러올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야민이 불쑥 물었다.
리하르트는 식사를 하다가 의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누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크리스토프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가 알기론 없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야민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좋지. 하지만 제 시간에 오지 않은 걸로 봐선 이미 식사를 마친 모양인데 과연 올까? 이유도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니.”
“하긴…….”
야민은 곧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차에, 테이블 끝 쪽에서 접시를 거의 통으로 입 안에 쓸어 담는 신기를 피로하고 있던 요한이 불쑥 말했다.
“불러 보지 뭐. 또 알아? 불치병에 걸렸으니까 순순히 내려올지.”
그러면서 뒷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입이 쉬지 않는 그를 보며, 리하르트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불치병……? 무슨 소리지?”
웃음을 지운 리하르트는 포크를 내려놓는다.
전화를 받은 듯한 크리스토프에게 식당에 내려와서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나 좀 하자고 하던 중인 요한은 통화와 식사를 동시에 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 리하르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리스토프가, 무슨……병에라도 걸렸나?”
천천히 말을 끌며 입을 떼는 리하르트는 희미하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미묘한 눈치로 우물거리던 클로드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게 아니냐는 말이 좀 돈 것뿐이야.”
“그런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아? 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어째서지?”
리하르트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지으며 다시 묻자 클로드는 보기 드물게도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리하르트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움츠렸다.
“아니 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하잖아.”
“……? 그래서.”
“크리스토프가 좀 희한한 짓을 하더라고.”
리하르트는 지그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해 보려는 눈치였지만 결국은 알 수 없었는지 “희한한 짓이라니.” 하고 조용히 묻는다.
클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흘끔 주위를 돌아보며 눈치를 본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비슷한 눈치였다.
말해도 상관없는데 어쩐지 말하기는 좀 꺼려지는, 그런 미묘한 분위기였다.
“크리스토프가……인사를 했어.”
“……. 뭐?”
“크리스토프가 인사를 했어. 복도를 지나가다가. 니코한테. 자기가 먼저.”
리하르트는 침묵했다.
사람이랑 스쳐 가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지, 먼저 인사한 게 뭐가 대수야, 그렇게 대답할 만큼 크리스토프를 모르는 리하르트가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클로드에게 다시 물었다.
“그냥 그것뿐인가? 즉 병이 아니란 말이지?”
“어, 응. ……아마.”
‘아마’를 붙인 이유는, 지금 떠도는 불치병의 소문은 사실과 거리가 있지만 실제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크리스토프가 병에 걸렸을지 아닐지 알 수 없으니 남겨 두는 일말의 가능성이었다.
크리스토프가 불치병에라도 걸렸다고 하면 안쓰러운 듯 혀를 차며 ‘안됐군.’이라고 하면서도 전혀 아랑곳 않을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클로드는 식사를 계속했다. 리하르트는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몹시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크리스토프에게만큼은 냉랭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리하르트는 언제 웃음을 지웠냐는 듯 다시 잔잔하게 웃음을 머금고 식사를 하다가 문득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확실히 신기한 일이군. 크리스토프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다니.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도 무시하기 일쑤인 놈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동안 개과천선이라도 했나?”
리하르트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여느 때와 같이 돌아온 것 같았다. 적당한 담소와 함께 식사를 즐기는 소리로 식당 안이 가득 찬다.
그때, 요한이 폴더를 탁 닫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겠대.”
그리 크지는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순간적으로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그에게 잠시 시선이 모였다.
여남은 쌍의 시선이 한 몸에 모이는데도 꿋꿋하게 칠면조 다리를 뜯고 있던 요한은, 뒤늦게야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기름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왜,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정말 온대? ……그놈 아까 먼저 식사 안 했나?”
“어, 벌써 먹었대. 그래도 그냥 오랜만인데 얘기나 좀 같이 하자고 그랬더니 한참 망설이더니, 오겠다고 하더라. 그놈 성격에 아마 옷은 칼같이 갖춰 입고 올 거니까 시간 좀 걸리겠지.”
다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놈이 정말로 불치병인가 보다, 혹시 시한부인가,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거지?, 그런 이야기가 수군수군 여기저기서 넘쳐났다.
사람 수가 많은 자리에서는 으레 두세 무리로 나뉘어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오늘만큼은 일치단결해서 동일한 주제였다.
그런 불온한 수군거림 가운데 조용히 식사를 하던 리하르트는 가만히 시선을 요한에게 주었다.
“요한, 네가 크리스토프와 친했던가?”
“웅? 글쎄? 싸운 적은 없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았지?”
만인과 두루두루 특별하게 친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으며 고만고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요한이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그래, 너는 그랬었지, 하고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안 똑같은 이야기들로 술렁거리던 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다른 주제로 옮겨 가곤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시선들이 흘끔흘끔 문 쪽을 향한다.
누군가 리하르트에게 불쑥 말을 던졌다.
“그래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네, 크리스토프. 너랑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잖아. 네 생일은 그냥 모른 척하고 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타르텐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지.”
하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타르텐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정도로는 처신하나 보더라, 하고 말을 덧붙인다.
리하르트는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글쎄, 하고 애매하게 웃음 지었다.
“나로서는 먼 길을 와 줬으니 고마울 뿐이지.”
그러자 사람들은 뭔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토프는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기 직전, 리하르트가 승계자로 결정되기 얼마 전부터 리하르트를 도와서 일하기도 했었지, 그때 사이가 좀 좋아졌는지도 모르겠군, 그런 귀엣말도 오간다.
그럴 즈음이었다.
식당 문이 열리며 크리스토프가 들어섰다.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주 짧게 침묵이 스쳤다.
조용히 들어오던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흐르자 의아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하던 이야기들을 하는 가운데, 세 장째의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요한이 나이프를 든 손을 흔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멈칫했지만 말없이 그 옆의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야, 너 인기 많다? 너 온다니까 다들 좋아하더라.”
요한은 테이블 가운데의 큰 접시에서 이미 다리 한쪽이―요한 자신에 의해―뜯겨나간 칠면조의 나머지 다리를 붙잡고 주욱 찢어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프가 이상한 얼굴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이상한 얼굴을 했다.
좋아한 적 없어, 그냥 기이하게 여겼을 뿐이지, 하고 이마에 적어놓고서도 말할 용기는 안 나 아무 말 없이 꾸역꾸역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크리스토프는 “어…….” 하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 무뚝뚝하고 삭막한 얼굴을 보고, 요한은 어? 하고 칠면조다리를 우물거리면서 불쑥 묻는다.
“멋쩍냐? 쑥스러워? 다 아는 처지에 뭘 새삼스럽게 그래.”
이번에도 숱한 사람들이 ‘저 얼굴의 어디가 멋쩍고 쑥스러운 얼굴이냐’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요한을 흘끔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가장 상석이며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있는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
크리스토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묵묵히 빈 접시에 익힌 채소 따위를 약간 올려놓았다.
“그것 갖고 되냐? 고기 먹어, 고기. 만날 그런 푸성귀나 먹으니까 얼굴이 귀신처럼 허옇게 떴지.”
요한은 스푼을 들어 고기찜을 듬뿍듬뿍 퍼서 크리스토프의 접시 위에 놓았다. 크리스토프는 당장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내 접시에 네 맘대로――.”
그러나 말을 하다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초쯤 미간에 주름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진지한 눈으로 요한을 노려보듯이 쳐다보며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말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응? 엉.”
요한은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고깃점을 한참 씹어서 삼킨 다음에야 뒤늦게 이상을 깨달았는지 의아하게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근처에서 크리스토프의 말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스파르타식으로 인성교육을 시키나?”
요한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후식으로 큼직한 케이크와 과일 조각이 나오자 당장 반색을 하며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야콥은 아까부터 흘끔거리며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었다. 낮에 크리스토프에게 ‘결혼 축……’이라는 뜻 모를 인사를 들은 뒤로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프에 관해서는 소심한 야콥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서만 머리 터지게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케이크를 잘라 담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시선은 계속 크리스토프와 케이크를 오갔다.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크리스토프가 흘끔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야콥은 당황해서 한 손에는 빵칼, 한 손에는 접시를 든 채 불안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엉겁결에 물었다.
“케이크, 먹을래?”
물어보고 나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크리스토프는 디저트류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특별한 용무 없이 말을 걸면 몹시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 케이크는 안 좋아해.”
잠시 침묵하던 크리스토프는, 정말로 뜻밖에도, 슬쩍 귀찮은 기색을 비치는가 싶더니 곧 낯빛을 바꾸어 무표정하게 말했다.
거기서 그만뒀으면 좋았을 걸, 곧 새 신랑이 될 터라 요즘 예비신부에게 매너 교육을 칼같이 받고 있는 야콥은 거의 반사적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과일 샐러드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권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하면서 야콥이 자신의 입방정을 후회하고 있는데,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서 침묵하던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조금만 줘. 고마워.”
저 언짢은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의 내용에 야콥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굳어 버렸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기다려 봐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야콥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야콥은 허둥지둥 빵칼을 내려놓고 샐러드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새 접시에 마구 퍼담기 시작했다.
“자, 여기.”
접시를 주춤주춤 내밀며 야콥이 중얼거리자 이번에도 예의 그 말투와 내용이 전혀 걸맞지 않은 “고마워.”가 돌아왔다.
언제부터인가 먹는 것조차 잊고 이 기현상을 넋 놓고 쳐다보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과 비슷할 정도로 머리가 혼란해진 야콥은 크리스토프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다가, 그 옆에 고기찜이 담겨 있던 접시를 툭 치고 말았다.
“어……!!”
실수는 늘 한순간에 일어난다.
고기찜은 크리스토프에게 와르륵 쏟아졌고, 그의 티 하나 없이 하얗던 셔츠는 순식간에 누렇게 얼룩이 졌다.
“어, 어쩌지…….”
가엾은 야콥은 거의 패닉 상태에 가깝도록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땅한 걸 발견하지 못하자 자신의 소맷부리로 크리스토프의 셔츠를 마구 문질렀다.
셔츠로 셔츠를 문질러 봐야 얼룩이 닦이긴커녕 더 번지기만 하고 이쪽에까지 옮겨 묻을 뿐인데도 아무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크리스토프의 셔츠, 고깃국물로 흠뻑 젖은 배와 가슴께를 마구 소매로 문지르던 야콥은, 몇 박자 뒤늦게야 주위의 분위기가 몹시 싸늘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헉…….”
야콥은 그 이유를 깨달은 순간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열심히 문지르던 소매가 딱 멈춘다.
지금 자신은,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크리스토프에게 마구 손을 대고 있었다.
난 죽었다.
야콥의 머리에 그 생각이 스쳤다.
크리스토프는 순수한 실수로 아주 살짝 닿은 것이 아니면, 자신의 몸을 건드린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야콥은 그에게 고기찜을 엎어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결혼도 못해 보고 오늘 나는 죽는구나, 미안해 아델레, 몇 초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기도까지 올리고 난 야콥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최후를 맞을 각오를 하고서.
그러나.
“……. ……좀 비켜 주겠어?”
옷을 닦느라 어느 결에 바싹 붙어 있던 크리스토프와의 거리는 한 뼘 남짓.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더욱 박력이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조용히 말했다.
야콥은 얼른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두 손을 들고서 “미안해, 아니 그럴 생각은 아니었고 말야.” 하고 열심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잠시 자신의 더러워진 옷을 내려다보다가 언짢은 듯 혀를 차고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됐어. 그럴 수도 있지.”
“……건, 건드렸는데도 괜찮아……?”
엉겁결에 말을 하고나서, 야콥은 오늘 세 번째로 자신의 혀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왜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굳이 매를 벌려고 드는 걸까, 나는.
그러나 야콥의 생각대로라면 금세 눈을 싸늘하게 치켜뜨며 ‘아니, 그건 용납할 수 없지. 이제부터 죽어 봐야지.’라고 말해야 할―실제로는 저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쓸 테지만―크리스토프는, 큰 숨을 두어 번 내쉬어 속을 삭인 뒤 큰 결심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약간 정도라면, 다른 사람과 닿아도 상관없어. 약간 정도라면.”
‘약간 정도’를 강조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분명 크리스토프였다.
그 순간 식당 안은 무서울 만큼 고요해졌다. 간간이 쨍강, 하고 뭔가를 떨어뜨리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야콥은 멍한 머릿속으로 ‘이놈들 알고 보니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이쪽에 귀를 세우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말 상관없어? 어디.”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야콥이 퍼놓고서 까먹고 있던 케이크 접시를 냉큼 끌어당겨 딱 세 입만에 다 먹어치운 요한이었다.
그는 케이크를 우물거리면서 불쑥 손을 뻗어 크리스토프의 손을 덥석 쥐었다.
순간, 모든 사람이 은근히 주시하는 가운데 크리스토프는 잡힌 쪽 팔을 약간 움찔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요한의 손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잡아 봤으면 이제 그만 놓지……?”
조용히, 침착하게, 크리스토프가 말한다.
요한은 그렇게 잡아 놓고서 본인도 놀란 듯 어어, 하고 눈을 크게 뜨며 크리스토프의 손등을 삭삭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보고는 손을 뗐다.
“가진 거라곤 석유랑 모래밖에 없는 나라인 줄 알았더니, 가 볼 만하구나, 사우디아라비아. 거기 인성교육 시스템 아주 제대로 돼 있나 보다.”
“요한. 시비 거는 거지, 그 말은?”
“아냐, 아냐. 설마! 난 그저 순수하게 감탄해서! 야, 그런데 너 보기보다……아니지, 보기대로 손이 보들보들하다. 그 척박한 사막에 뒹굴면서 피부가 아주 그냥……. 인체의 신비로구나.”
요한은 감탄스레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면서, 다시 손은 음식 접시를 잡아당겼다. 이미 그의 앞에 쌓여 있는 빈 접시들을 보며, 크리스토프는 상상만 해도 위장이 무거워진다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진정한 인체의 신비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것 같은데.”
“응? 뭐?”
“…….”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케이크를 포크로 두 번 잘라 먹었다.
그가 조용히 입을 움직이는 동안 어쩐지 미묘한 침묵을 지키며 눈치만 슬슬 보던 몇몇이 슬금슬금 몸을 내민다.
“나……나도 좀 만져 봐도 돼?”
“나도 어디…….”
슬쩍슬쩍, 더듬더듬, 그래도 차마 몸통 가까이는 못 가고 고작해야 손이나 팔 언저리였지만, 손 몇 개가 다가와서 슬그머니 쓸어 보고는 후닥닥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크리스토프는 아주 미미하게 움찔거리며 인내를 아로새긴 얼굴로 케이크 접시를 노려봤지만, 끝까지 그 입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경솔한 손이 목덜미를 건드렸을 때에는 눈에 띄게 움칫하더니 그 손을 사납게 노려봐서 물리치고 말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모이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미묘했다. 뭔가 까끌거리면서도 술렁거리는 미묘한 분위기다.
크흠, 저만치 떨어져 있는 누군가 헛기침을 하더니 물잔을 들고 식당 한쪽에 있는 정수기 쪽으로 갔다. 가면서, 그 도중에 있는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슬쩍 한 번 건드려 보고 간다. 그러고는 괜히 희색을 띠고 수줍게 비슬비슬 웃었다.
여기저기서 드문드문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접시에 남은 고기의 마지막 한 점까지 다 입에 쓸어담던 요한은 쩝쩝거리면서 식당 안을 의아하게 둘러본다.
“다들 뭐하는 딴따라야? 밥 안 먹고.”
그러나 요한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바쁘게 물을 마시러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토프만 점점 굳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드르륵, 제법 요란하게 의자다리를 끌며, 얼마 전부터 입을 다물고 식사만 하던 리하르트가 일어섰다.
앗, 리하르트도 혹시?! 하고 놀란 시선을 돌리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곤 움찔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웃으려고는 하는데 잘 안 되는 듯한 얼굴이다.
“난 마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해야겠군.”
기분 탓인지 목소리마저 냉랭하다.
갑자기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 가운데, 리하르트는 성큼성큼 걸어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가다가 흘끔, 삭막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봤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가 나간 뒤, 잠시 소리 없이 고요하던 식당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하지만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잖아.
그럼 역시……크리스토프 때문인가?
왜, 그래도 저놈도 별 짓 안 했잖아. 오히려 이제 좀 사람다워진 것 같은데.
아니, 하지만 리하르트랑 사이 무진장 나쁘잖아. 눈치 없는 놈들이 사춘기 소년처럼 크리스토프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기분 나쁠 만도 하지.
아. 내가 싫어하는 놈이 인기는 많을 때 같은 거?
그렇지, 그렇지.
수군수군, 자기네들끼리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사이에서, 크리스토프는 우울하게 케이크만 쿡쿡 찌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손들은 그치지 않았다.
***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다.
신경이 너덜너덜하게 해어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다 씻고 난 다음에도 샤워 부스 안에서 나오지 않고 물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팔이며 손 따위가 불그스름하다. 다른 때보다 몇 번이나 더 벅벅 문지른 탓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물줄기가 아프게 느껴질 무렵이 되어서야 물을 잠갔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부터 닦고 그런 다음에야 몸을 닦다가 팔을 닦을 때,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온통 만져 댄 곳이 대부분은 손이나 팔 정도였다. 친한 척하며 어깨를 두드려 댄 놈도 있었다.
그나마 그 외에는 그래도 손대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른 데를 건드리려 하면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어 그놈을 사납게 노려보았으니까.
꾹 참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어쩐지 좀 서글퍼졌다.
다른 사람들과 닿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부러 닿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견뎌 봐야지.”
크리스토프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서익의 손님방.
어차피 며칠만 머무르다 떠날 예정이라 그냥 손님방에서 머무르다 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 줄곧 이 저택에서 살았을 때도 그렇고, 작년에 이곳에서 달포쯤 머물렀을 때도 그렇고, ‘자신의 방’이라는 게 있었기 때문에 손님방을 쓰는 건 처음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안락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복도 제일 안쪽으로 가장 조용한 위치라, 생각에 따라서는 오히려 예전 방보다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전망도 숲이 바로 가까이 보인다.
앞으로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일이 있더라도 그냥 이 방에서 지낼까. 오래 머무를 일이 언제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씻어내고 나니 그래도 기분이 많이 나아져 가뿐하게 한숨을 쉬며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오던 크리스토프는, 창문을 열려고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창가에 놓인 카우치에 리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 왜 거기 있어.”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아, 너무 냉랭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일관성 있게 무뚝뚝하게 쳐다봐 주기로 했다.
카우치에 깊이 몸을 파묻고 앉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이 끝나지 않았는지 말은 하지 않았다.
“네 방은 저쪽에 있잖아. ……볼일이 있으면 전화로 말하지.”
크리스토프는 동익 쪽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김에 시계를 보자 벌써 열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아까 저녁 자리에서 리하르트가 먼저 자리를 뜬 뒤, 묵묵히 식사를 마치고 얼른 돌아오려는 크리스토프를 요한이 붙잡았다. 기왕 내려온 김에 도미노나 한 번 더 쌓고 가라고.
어쩐지 주위에서 은근히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피곤하니까 그대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최대한으로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그를 따라갔다.
결국, 슬슬 뒤따라 와서 근처에서 다른 게임 따위를 하면서 공연히 말 한두 마디 붙여보고, 근처에 와서 괜히 들여다보고 하는 놈들이 끊이지 않는 통에 도미노를 반쯤 놓았을 때에는 후회막급이었지만.
“잘 놀다 왔나?”
“어?”
다시는 그렇게 안 따라가야지, 밥만 먹고 방으로 돌아와 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리하르트가 불쑥 묻는 말에 짧게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리하르트가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은 그렇게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뭐……, 그냥.”
“식사를 마친 뒤 녀석들과 같이 노닥거리다 왔다면서. 벌써부터 그 말들로 귀가 시끄럽더군.”
이 방에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그런 말들이 돌아다닐 리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찡그리자, 리하르트는 가볍게 발을 까닥거렸다.
“여기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둥그레진 녀석을 몇이나 봤어. ……못 본 사이에 사교성이 아주 좋아졌는걸, 크리스토프.”
“어……응.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과도 좀 편하게 지내 보려고.”
크리스토프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면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질렀다.
약간 마음이 진정된다.
사교성이 좋아졌다.
리하르트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저녁 시간을 그렇게 지치도록 견딘 보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편하게라……좋은 일이야. 좋은 일이지.”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된 일이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석연찮은 것 같았지만, 잘못 보았을 거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리하르트는 예전에 크리스토프와 뒤엉키면서도 ‘너는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며 지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신병, 어디 고칠 수 있겠나?’ 하고 말했던 바가 있었다.
그때는―지금 생각해도―정신병이라는 말에 울컥했지만 따지고 보면 어쨌든 사람들과 무난히 접하면서 사는 편이 낫다는 말은 맞다. 그러면 불시에 누군가와 닿아도 흠칫하고 놀라지는 않게 될 테니까.
“리야드에서 사람들이 잘해 주던가 보지? 거기에서도 그랬나?”
리하르트는 그제야 조금 웃는 낯을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해 보이는 웃음이다. 저 웃음을 크리스토프에게 보이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음……뭐 비슷해.”
크리스토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약간의 거짓을 섞었다. 9할쯤의 거짓을.
어차피 하는 일이 사병 훈련을 도와주는 일이다 보니 다른 사람과 아예 안 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몇 번쯤 크리스토프가 발작하다시피 불쾌감을 드러냈더니 요즘에는 굳이 닿지 않고도 지시를 내리기 편하게 되었다.
“접촉기피는, 좀 고쳤나 보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어. 아까도 봤잖아.”
크리스토프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의 보람이라도 없으면 아까의 노고를 보상받을 수 없다.
“그래……. 잘 됐군.”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미미하게 웃음을 지은 채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잘 됐다니, 원하던 반응이긴 한데 뭔가 좀 약하다. 그에게는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슬쩍 기분이 틀어졌다.
크리스토프는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왜 왔어.”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리하르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만히 턱을 짚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듯이 천천히 문지르던 그는,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 순간 문득 고개를 숙이며 가만히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안 되겠어.”
“……? 뭐가.”
크리스토프가 되묻자 리하르트는 선뜻 카우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두텁게 깔린 러그 위를 걸어 크리스토프의 정면으로 다가왔다. 똑바로 시선을 주며, 웃음 지으면서.
“그래서.”
“……?”
“이제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무한테나 몸을 막 내주고 있어?”
“뭐?!”
크리스토프는 눈매를 찡그리며 되물었다.
순간 멍해져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몸을? 내주……?!”
“이놈이나 저놈이나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마구 만져 대는데, 그걸 너는 얌전히 다 받아 줘? 하……, 조금만 더 있으면 접촉기피 대신 접촉애호로 정신병을 앓게 되겠군.”
“뭐…….”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낯을 굳혔다. 당장 혀가 굳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리하르트를 빤히 노려보며 입술만 움직이고 있던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여전히 담담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 난처한 듯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좋게 생각을 해 주고 싶은데……, 생각해 보니까 너 예전에, 여러 놈이랑 한꺼번에 자 보고 싶다고 했었지.”
“내가 언……!!”
크리스토프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당혹스럽고 황당한 나머지 말도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한 적도 없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어디서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말은 추호도――.
“나 하나보다는 다른 놈 여럿이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적 없――.”
벌컥 소리를 치다가 문득 말을 흐렸다.
갑자기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금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크리스토프가 말을 끊고 약간 멍하게 리하르트를 노려보자, 리하르트는 흠,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 듯 미간을 약간 문지른다.
“역시 크리스토프. 난 아직 어느 정도는 네가 싫은지도 모르겠다.”
“…―.”
“네가 바라는 대로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드는 걸 보니.”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였다. 바로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섰던 리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 피부가 부드럽다는 말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리하르트는 조용히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아니, 혼잣말이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말을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목덜미 조금 아래, 견갑골 사이에 입술을 묻고서 속삭이자 간지러웠는지 계속 몸이 흠칫거리며 움츠러들었다.
허벅지가 부들거리는 게 맞닿은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쪽에서 천천히 선을 그리며 부옇고 끈적한 체액이 흘러내렸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그 액체가, 크리스토프의 사타구니를 쓰다듬던 손가락 끝에 묻는다.
“쯧……, 네가 축축하게 몸에 묻는 걸 싫어하니까 흘러나오지 않게 빈틈없이 틀어막아 줬는데도……조금 더 들어갈 때마다 새어나오는걸. 미안하게 됐어.”
리하르트는 사뭇 안타깝다는 듯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한 번 더 세게 추어올렸다.
안쪽에서 질퍽거리던 체액이 맞물린 살갗 사이로 흠뻑 스며 나오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베갯잇을 움켜쥐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뱉는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몸속까지 이렇게 부드러운 줄은 모를 테지.”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허리를 묻은 채, 더 들어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 리하르트는 가볍게 추삽질을 했다. 깊은 안쪽을 부드럽게 긁는 이 느낌을 그는 좋아했다. 그러다 보면 얼마 있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며 아플 정도로 세게 조여 올 율동 역시.
“이렇게 부드럽게 페니스를 받아들여서 감싸는 주제에, 빼려고만 하면 친친 감겨서 꼭 움켜쥐고 빨아 당기면서 더 달라고 보채는 줄, 나 말고 누가 알까.”
“…―.”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런 적 없다는 듯 약간 고개를 젓는 듯도 했지만, 그의 성기를 주무르던 손에 힘을 주자 다시 어깨를 떨며 얼굴을 베개에 더욱 깊이 묻는다.
리하르트는 약간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는 듯 꿈틀거리는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좀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허리 아래가 바싹 겹쳐지며 다시 축축한 소리가 들려왔다.
베개에 묻어 거의 들리지 않는 크리스토프의 흐릿한 목소리도 함께 섞였다.
“우는 건 아니겠지.”
잠시 사이를 두고 크리스토프는 아주 약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 걸로 봐선, 반쯤은 울고 있는데 억지로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리하르트는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등. 목덜미에서부터 곧게 뻗어내린 척추, 부드러운 곡선과 매끈한 직선이 더없이 절묘하게 이어진 몸선.
이 몸이 어떤 감촉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만져 본 어떠한 비단보다도 훨씬 부드럽다.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보송하고 손끝에 걸리는 데가 없는 매끄러운 이 피부를, 그는 구석구석 다 알고 있었다.
“…―나만.”
문득 리하르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리문 잇새로 희미한 울화가 새어나온다.
“너는 나에게만 몸을 열면 돼. 다른 사람과 접촉할 필요는 없어. 다른 놈이 너를 건드릴 이유 따위가 어디에 있어. 여태 살아온 대로, 그렇게 살면 돼. 이런 건 나만 알면 돼.”
혼잣말인지, 혹은 그에게 들려주려는 말인지.
아까, 식당에서.
가슴속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식었다가, 점차 뜨거워졌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구쳐 오를 것만 같이.
여느 때라면 별 이유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는 나오지 않는 크리스토프가 그 자리에 나타났을 때부터 가슴이 싸늘해졌다. 하나둘,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그를 스친다. 그에게 말을 걸고, 그는 무뚝뚝하나마 그들에게 응해 준다.
리하르트는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그런 모습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여태껏도, 앞으로도.
목구멍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식당에서 나왔지만, 나오고 곧 후회했다.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지금도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을까, 아니면 이미 방으로 돌아가 버렸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해, 결국 해야 할 일은 거의 손도 못 대고 말았다.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널 얌전히 사우디아라비아에 놔두고 있었던 건가? ……대답해 봐, 크리스토프. 앞으로도 계속 그럴 작정인지. 계속 그렇게 네 멋대로 몸을 내돌릴 건지, 말해 보라고.”
“…―. …….”
크리스토프는 뭔가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베개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점점 허리를 세게 들이밀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추삽질이 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깊어졌다.
새하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리하르트가 그 몸을 끌어안을 때마다, 쓰다듬을 때마다, 매만질 때마다, 늘 그렇게 움칫거리며 움츠러드는 몸이다.
문득 손 안에서 크리스토프의 뻣뻣해진 성기가 떨렸다. 그 떨림이 전해진 순간 리하르트는 그 아랫부분을 손끝으로 눌러 문질렀다. 크리스토프의 몸 전체가 떨리는가 싶더니, 손이 흠뻑 젖어들었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떨리며 쏟아내는 체액을 손으로 받아내면서, 리하르트는 낮은 신음을 토했다.
자신의 성기를 뿌리까지 단단히 머금어 감싼 몸이 거세게 수축했다. 정말로 어린애가 보채는 것처럼 오물거리며 빨아 당기는 그 힘에, 리하르트는 자신의 토정을 맡겼다.
이미 질퍽하게 젖어 있던 몸에서 뭉클거리며 희뿌연 체액이 비어져 나왔다.
낮게 으르릉거리는 신음을 토하면서, 마치 짐승이 교미할 때처럼 크리스토프의 목덜미를 깨문 리하르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이 몸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 이 몸 역시, 리하르트가 아니면 안 되었다. 자신이 오롯이 독차지해야만 했다.
아무에게도, 손끝 하나 내어주지 않고.
다시 화가 치밀었다. 눈앞이 빨개질 정도로 크리스토프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죽여 버려도 좋을 정도로, 그 주위에 몰려 있던 자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한바탕 격정이 가신 뒤, 아직도 미처 다 시들지 않은 물건을 여전히 그 몸속에 남겨두고 등 뒤에서 크리스토프를 끌어안은 채, 리하르트는 그의 목덜미를 잘근거리며 씹었다.
아픔보다도 그 감각 자체를 견디지 못한 크리스토프가 몸을 움츠려 그를 피하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는다.
“하지, ……마.”
그제야 겨우 베개에서 약간 고개를 떨어뜨린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나직하게 잠겨서 쉬어 있는 목소리는, 역시 울었나 보다. 이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자신뿐이어야 했다.
“하지 마……? 다른 놈은 마음대로 만져 대도, 나는 하지 말라고?”
리하르트는 되풀이해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 웃다가, 문득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직이 속삭였다.
“크리스토프. 난 이제는 너를 싫어하지 않기로 했단 말이야. 더 이상은. 그런데 네가 나를 잔인하게 만드는 거야.”
조용히 말을 마치면서, 리하르트는 아직 미끌거리며 손 안에 풀죽어 있던 크리스토프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터뜨려서 못쓰게 만들어 버릴 기세로.
“……!!”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단단히 끌어안은 팔 안에서 몇 번 퍼득거리며 요동치던 몸은 이내 새우처럼 구부러지며 부들부들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 흠뻑 젖어들었다.
“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러면 두 번 다시는 남 앞에서 드러내지도 못할 몸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 ……가, …….”
파랗게 질려 부들거리는 입술이 뭔가 말을 흘려내었다. 리하르트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잔잔히 웃는다.
“뭐라고?”
“……가, 결벽하면, ……곤란하다고……, ……람들이랑도, 스스럼없이, ……야 한다고, …….”
온몸의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죽어 가는 목소리로, 거의 알아듣기도 어려울 만큼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거린다.
뭐? 하고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린 리하르트는, 다음 순간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크리스토프의 성기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점차 더 커졌다.
“네게, ……선물로 줄 만한 것도 없……, 그래서 나는, 이거라면 어떻게든…….”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눈에 띌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리하르트는, 그 모습을 매우 기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움칫거리며 떨리던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한다. 가쁜 숨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려왔다. 곧 그가 손을 들어 손등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치 땀이라도 닦는 것처럼 눈가를 훔치는 걸 보았을 때.
“……!!”
그 손을 잡아 떨쳐내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돌렸다. 반쯤 몸을 일으킨 리하르트는 그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놀란 듯이 커다랗게 뜬 파란 눈이 리하르트를 올려다본다.
“……. 설마하니 말야,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나직이 물었다. 억누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초조하고 조급한 빛이 배어나왔다.
“나를 위한 생일 선물이랍시고, 접촉기피를 고쳐 보려고 든 건 아닐 테지.”
“…―. 그렇지 않, 으면, 내가 뭣 때문에 그 따위, 짓을――.”
여전히 목이 잠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하면서, 크리스토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매가 가늘어지자 그 안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한 방울 투둑, 떨어진다.
“……. ……. ……. 크리스토프.”
한참 동안 침묵하던 리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린 그는 크리스토프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가볍고 부드럽게 겹쳐진 입술은 점차 탐욕을 드러내며 상대를 삼키려 든다.
숨이 막힐 만큼 오랫동안, 그렇게 입 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난 뒤에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내 평생에 받은 것 가운데 가장 최악의 선물이었어.”
“…―.”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찌푸리는 그 입매와 우울하게 시선을 돌리는 그 눈매를 바라보며, 리하르트는 다시 입을 맞춘다.
“뭐……상관없어. 최고의 선물로 하나 더 받으면 되니.”
“……. 뭘.”
이젠 절대로 말도 붙이지 않을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그래도 마음에 걸렸는지 결국 우물우물 물어본다.
리하르트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직 크리스토프의 몸속에 자리 잡고서, 다시 천천히 힘을 되찾아 가고 있던 살덩이를 한껏 집어삼키고 있는 입구를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
반사적으로 움찔, 움츠러들며 조이는 통에 리하르트는 낮은 신음을 흘리고 만다. 그리고 그 신음과 함께 그는 웃었다.
“네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거든.”
“……. 뭔데…….”
크리스토프는 문득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고 리하르트는 다시 웃는다.
과연, 그도 리하르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은 한 모양이다. 무슨 말이 나올까 더럭 불안해하는 저 얼굴이라니.
그러나 리하르트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최악의 선물을, 무려 자신을 위해서, 그 머릿속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용서할 수 없이 화가 나고 또 지독하게 속이 쓰렸다. 통째로 집어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은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내 앞에서만 다리를 벌리겠다고 해 주면 좋겠군. 아아, 그렇지. ‘그러니까 나만을 열렬하게 안아 줘’라는 말까지 덧붙여도 괜찮겠어.”
리하르트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대번에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굳었다. 당장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그 얼굴을 보며, 리하르트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나자 더욱 욕심이 생겼다. 절실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리하르트는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뺨, 눈가, 어디든 도장을 찍듯이 구석구석 체온을 남긴다.
크리스토프는 순식간에 확확 달아오르는 얼굴로 몇 번인가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국은 입을 꾹 다물고 매섭게 노려봤다. 그래 봐야 별 효과는 없었지만,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짐짓 난처하게 한숨을 쉰다.
“싫다면……, 그래, 다른 말도 괜찮아. 이를테면 이런 말.”
그는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바싹 입을 대었다. 그리고 나직이, 들릴 듯 말 듯 짧은 말을 속삭인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움찔, 몸이 떨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새파란 눈이, 천천히, 당혹스레 굴러다녔다. 목덜미에서부터 삽시에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잠시 우물쭈물거리다가, 크리스토프는 가만히 몸을 돌려 도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크리스토프. ……크리스.”
리하르트는 가만히 그를 부르며 어깨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는 기를 쓰고 베개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웃었다.
“뭐, 괜찮아. 이제 겨우 열 시를 좀 넘었을 뿐이니 아직 시간은 많아. 내일의 첫 일정이 열 시 반이니, 열두 시간도 넘게 여유가 있군.”
시계를 보며 느긋하게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에게서 슬쩍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지만, 리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최악의 선물만 받고 그칠 마음은 전혀 없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이것,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계약 상담을 마치고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지려던 찰나, 상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리하르트에게 얇고 널찍한 상자를 건네었다.
리하르트가 의아한 얼굴로 받아들자, 상대는 빙긋이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마침 오늘이 생일이시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으나마 마음을 담아 준비했습니다.”
“이런……, 이렇게 마음 써 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하하, 훌륭한 것들을 많이 받으셨을 텐데, 대단치 않은 거라서 부끄럽습니다.”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으며, 리하르트는 상자를 옆에 선 비서에게 건네어주었다.
“오늘도 댁에서 연회가 있다지요?”
“그냥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서 식사나 같이 하는 자리지요. 그러나 평소에는 잘 만나기 힘든 친척들도 만날 수 있어 몹시 반가운 자리입니다.”
“아아, 그래서 그러셨군요. 이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얼른 댁으로 돌아가셔야겠다고 하셔서 어쩐 일인가 했습니다.”
상대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슬프나 그래도 축하를 받는다는 건 기쁜 일이지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저도 같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 세기 시작한 상대의 말에 리하르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곤 조금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사실은 제가 살아오는 가운데 가장 멋진 선물을 받았거든요, ……심지어 원했던 두 가지를 모두 말이지요.”
“아하, 거 기쁘시겠군요. 그런 선물은 좀체 받기 어려운 법인데, 좋은 분이 주셨나 봅니다.”
리하르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웃음만 지었다. 그의 눈매에 얼핏 스민 따뜻한 빛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그 본인조차도.
“예, 좋은 사람입니다.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속삭인 목소리만이 그 온기를 설핏 머금었을 뿐이다.
[선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