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결여된 자 (22/34)

3. 결여된 자

어릴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 나는 안 될까.

그와 나의 차이가 뭘까. 누구나 같은 사람은 없지만 그와 나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는 되고, 나는 안 될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나는 망연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궁금해했을 뿐이다. 왜 나는 안 되는지.

어머니는 그를 사랑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익애했고 더없이 다정하고 소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나한테도 그렇게 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단지 궁금했던 것뿐이다.

왜 나는 안 되는지.

그러다가 문득 어머니가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결여되어 있어.

무엇이? 어디가? 그것은 어떻게 하면 채워넣을 수 있지?

그런 것은 말해 주지 않았다. 알려준 것은 오로지 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뿐.

그 뒤로 줄곧, 언제나 내 귓가에, 내 머릿속에 들러붙어 시끄럽게 수런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궁금해했다.

왜 나는 안 되는지.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왜 나는 안 되는지.

예전과 마찬가지로, 왜 그는 되는데 나는 안 되는지.

유리조각이 튀었다.

챙! ――섬세한 세공품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며 상쾌한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옆에 있던 것에도 손을 휘둘렀다. 또 한 번 상쾌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화가 났나?

테이블 위에 산산이 흩어진 조각들을 주먹으로 내리쳐 더욱 가느다란 조각으로 만들어 가며, 자문해 보았다.

나는 화가 났나?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불쾌한가? ――그렇지 않다.

손이 엉망으로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나는 손마디로 조각들을 더욱 잘게 부순다. 더 이상은 부서지지 않을 때까지.

이윽고 테이블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조각난 세공품들은 피범벅이 되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져 있었다.

그제야 문득 손을 멈추고, 나는 묵묵히 그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원래의 빛깔을 알아볼 수 없이 검붉게 물든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우울한가 보다고.

***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테이블 위의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큼직한 앤티크 인형이라도 들어가 있음직한, 세련된 로고가 박힌 커다란 상자다.

상자에는 군데군데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그나마 윗면은 군청색의 상자면이 거의 더러워지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옆면과 밑면은 피로 지저분하게 더러워져 있다.

짙은 군청색이라 눈에 띄게 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비록 상자 안은 깨끗하게 흠 하나 없을 테지만, 이렇게 더러워진 건 선물로 줄 수 없다.

“……상관없어. 버릴 거니까.”

크리스토프는 불쑥 중얼거렸다.

자신의 입으로 중얼거린 혼잣말은 자신의 귀로 들어와 고스란히 전해진다.

――상관없어. 버릴 거니까.

크리스토프는 문득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산 것이 얼마만인지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굳이 기억을 떠올려 볼 필요가 없었다. 처음이었으니까.

과거 어르신의 생신 때에 선물을 드렸던 적은 있지만 그것도 드레스덴에서 떠나기 전의 일이고, 그 선물들은 실상 어머니가 골라 어머니가 보낸 물건이었다.

그러니, 크리스토프가 직접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쉽지 않았다.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백화점에 가 기성복 매장에 들어간 순간 기분부터 언짢아졌다.

기성복이라니. 맞춤이라 해도 어설픈 곳에서 맞추면 형편없는 물건이 나오기 일쑤인데 하물며 기성복.

유명하다는 곳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매장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언짢았다. 이런 조악한 물건을 선물이라고 줘야 하다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싫은 티를 다 내면서도, 한참 동안 고심해서 겨우 그 가운데 그럭저럭 입을 만해 보이는 옷을 하나 골랐다.

나름대로 괜찮았다. 하루쯤 입기 위해 급하게 장만한 물건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나마 그 매장에는 전시품뿐 판매용으로 마련된 여분은 없다고 해서 다른 매장에 주문을 해서 바로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오후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곱게 포장된 상자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성복을 샀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가운데서도 열심히 고른 물건을 지금 이렇게 세련되게 포장해 받아보자 제법 괜찮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 어울리겠지.

그 녀석은 겉으로 짐작해 보기엔 마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육이 있는 체형이니까, 동양인치고는 좀 더 황금빛이 도는―남미 계열의 혼혈에 비슷한 피부빛이니까 이 옷을 입으면 제법 보기 좋을 거다. 늘 집 안에서 입고 다니는 그 허술한 셔츠와 면바지 따위보다 훨씬 보기 좋을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보기 싫은 옷가지를 벗겨 버리고 이 옷을 입혀 봐야지. 혹시라도 어울리지 않으면 버려 버리고 내일이라도 다시 사러 가야겠다. 다시 고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일이 늦어져서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난 뒤였지만, 크리스토프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욕실에 가서 샤워만 마치곤 곧바로 상자를 끌어안고 정태의의 방으로 갔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기분도 마치 화가 나거나 흥분했을 때처럼 살짝 들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들뜨는 기분이라면 좋았다.

이런 때는 웃어야 할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웃음이 잘 떠오르지 않는 얼굴로나마 어설프게 웃으며, 정태의의 방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았다.

분명 아까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가 식사를 하고 샤워를 마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태의의 방문이 너덜너덜하게 망가져 있었다.

문은 금세라도 문틀에서 떨어져나갈 듯 삐걱거리고 있었고, 문고리 바로 옆에는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망치로 후려치기라도 했는지 비죽비죽 나뭇결이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커다란 구멍 안으로,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애 정도라면 충분히 드나들 수도 있을 만큼 제법 큰 구멍이었다. 그렇게 큰 구멍이라도 방 전체가 모두 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안의 한쪽 구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컸다.

아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긋난 문틈으로, 그 커다란 구멍 사이로 간간이 억누른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문이 망가진 걸 보고 의아하게 걸음을 늦추던 크리스토프는 안을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등이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이는,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등. 그 등이 언뜻 불에 비쳐 반짝이는 까닭은 땀으로 젖어서다.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한껏 휘어 있었다. 그 휘어진 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크리스토프는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목덜미와 오른쪽 귀, 오른쪽 뺨 약간만 알아볼 수 있는 그 얼굴은 크리스토프가 찾아온 사람과 몹시 닮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크리스토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어깨 언저리에서부터 목덜미, 귀와 약간 보이는 뺨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리를 억누르려는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간간이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신음과도 닮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허리 아래로는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허리를 격렬하게 떨며 흔들 때면 한껏 벌어진 엉덩이골 위쪽까지 보였다.

아마도 알몸으로,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그 남자는 누군가의 허리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크리스토프와 비스듬하게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릭. 일레이 리그로우.

한때 같은 곳에서 일했었던 동료다. 얼마 전까지도 아주 가끔 때가 맞으면 같이 일하곤 했던 남자.

그가 지금 그 방에 있었다.

그 역시 허리 아래로는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반신에는 옷가지 같은 걸 걸치고 있었다. 단추를 가슴까지 열어젖힌 셔츠는 희미하게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그의 위에 올라앉은 남자가 그의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허리, 몸이 흔들릴 때면 가끔씩 보이는 그 아래의 벗은 피부, 릭을 깔고 앉은 남자의 벗은 무릎 따위가 그들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릭이 이쪽을 보았다.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행위를 하는 도중에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상황에도 당황한 빛이라곤 없이, 그저 조금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내 릭은 웃었다.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혹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릭은 허리 위에 앉힌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를 끌어당겨 귓가를 느리게 핥는다. 일부러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릭의 혀가 남자의 귓불에서 뺨, 목까지 핥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릭이 남자의 귀 조금 아래, 목덜미 위쪽을 살짝 깨물었을 때, 남자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움츠러드는 어깨 위로 목덜미가 조금 더 달아오른다.

릭은 웃었다. 남자를 바라보며 기쁜 듯이. 아주 다정하게.

크리스토프로서는 처음 보는―그리고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본 적이 없을―그 상냥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릭은 남자를 바라보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를 애무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간헐적으로 경련을 하듯이 몸을 움츠리던 남자가 점점 더 격렬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을 때, 릭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크리스토프에게 들릴 만큼의 낮은 목소리로.

――태이. 울어.

그리고 그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거세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동시에 등지고 있던 남자는 그의 말대로, 울었다.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소리는, 신음이라기보다는 울음에 가까웠다. 쾌감에 허덕이는 울음이다.

일레이. ―…일레이. ……좋아. ……좋아. ――일레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그 이름을 부르면서, 남자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릭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짧으나 거센 절정이 잦아들고 둘의 거친 숨소리만이 뒤섞여 들려오는 가운데,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던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번 릭과 눈이 마주쳤다.

릭은 크리스토프를 보곤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 기쁘고 자랑스러운 웃음의 의미를, 크리스토프는 절절하게 깨달았다.

크리스토프는 돌아섰다.

자신의 방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모르게.

움찔, 문득 손이 움츠러들어 시선을 떨어뜨리자 자신은 한 손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곱게 묶어 놓은 리본은 어느 결에 한쪽이 풀려 버려 모양이 망가졌다.

그 상자를 보는 순간.

‘―…!!’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것은 머릿속이다.

상자 따위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 앞에 당장 눈에 띈 유리 세공품을 들어 테이블 위에 내리쳤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던 것도 마저.

조각난 유리를 다시 조각내고, 또 다시 조각내고, 주먹으로 마구 내리쳐 더 이상은 작아질 수 없을 때까지 조각낸 그 잔조각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리스토프는 망연히 서 있었다.

‘아―….’

문득 벌어진 입에서 조그만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지 말라고 그랬었는데.

――누가?

지금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내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움찔, 몸을 움츠리고는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지 말라고 했었는데.

누구에게 들은 말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 말을 했었다.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옮겼다. 본관의 의무실에서 대충 붕대로 감기나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러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도 그렇게 언짢은 얼굴을 하지는 않을 거다.

본관으로 가는 길에, 오래 전 크리스토프가 타르텐에서 나가기 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던 오래된 사용인과 스쳤다. 낯 정도는 익히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방을 치워 놓으라고 짧게 말하곤 의무실로 갔다.

마침 그곳에 있던 의사가 크리스토프의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이곳에 있은 지 오래 되어 새삼스럽게 놀라진 않았지만, 피투성이의 손에서 유리조각을 뽑아내고 기본적인 처치를 하는 동안 내도록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는 붕대까지 감아 주려 했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닿을 수밖에 없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무와도 닿고 싶지 않았다.

붕대를 받아 자기 손으로 서툴게나마 대충 두텁게 감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의무실에 갔다 온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 유리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고 말끔하게 치워진 그의 방에는, 테이블 위에 그 커다란 상자가 얌전하게 올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져 놓았던 그 상자를, 사용인이 테이블과 바닥을 치운 뒤 다시 얌전하게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

문득 크리스토프는 피로를 느꼈다. 왜 여태 몰랐을까. 이렇게 피곤한데.

크리스토프는 손등으로 마른 눈가를 한 번 훔쳤다. 까끌한 붕대에 쓸려 눈꺼풀이 따가웠다. 손도 욱신거린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두어 번 더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깊이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왜…….”

문득 입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나온다. 눈을 감고 있어 얼핏 보면 잠꼬대 같기도 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슬픔도 분노도 없이 그저 어렴풋한 우울만이 담긴 혼잣말이 자신의 귀로 다시 돌아온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다시 한번 나직이 속삭인다.

그러나 몇 번을 속삭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이 속삭임을 듣는 유일한 사람인 자신은 그 대답을 모른다.

그때.

“뭔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기척도 없이, 불현듯 목소리가 다가왔다.

크리스토프는 움칫하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은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낯은 익으나 그리 반갑지는 않은 인물, 리하르트 타르텐이다.

“웬일이야.”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답은 이미 은연 중 알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그 서늘한 시선이 은은한 열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웬일? 아까 말했을 텐데.”

리하르트는 오히려 크리스토프의 그 물음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셔츠의 윗단추를 두세 개 푼다.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까, 그는 일정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리며 크리스토프에게 가벼운 전달사항이라도 알려주듯이 말했었다. 밤에 남은 일을 마쳐 두고 갈 테니 기다리라고.

무엇 때문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갈 테니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는 지시하고 크리스토프는 따른다는, 그 위치를 못박아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래도 다른 데로 자리를 피해 버리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군. 잘 했어.”

리하르트는 착하게 말을 잘 들은 어린애라도 칭찬해 주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한 꺼풀 아래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늘 똑같이 상냥한 웃음이다.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기다리려고 기다린 게 아냐.”

목소리가 약간 날카로워졌다. 아, 물론 그렇겠지, 하고 리하르트는 가볍게 흘린다.

사실은 피하려 했었다. 반드시 그럴 목적만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 방으로 찾아온다는 말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집사가 오후에 배달되어 왔다며 크리스토프에게 커다란 옷상자를 전해 주었을 때, 원래는 내일 본관 뒤쪽의 화원에라도 가서 정원사에게 고운 꽃이라도 한 송이 얻어 상자를 묶은 리본 사이에 끼워서 주고 싶었지만, 방에서 비키려고 하는 마음도 있어서 곧바로 정태의의 방으로 갔던 것이다.

어쩌면 가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보고 의아한 듯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오던 리하르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크리스토프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 리하르트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가에서 잠시 웃음을 지웠다. 그는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려 어느 곳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나직이 혀를 찼다.

“크리스토프. 손.”

리하르트는 손바닥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

마치 개를 두고 훈련이라도 시키는 듯한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다시 한번 말했다.

“크리스토프. 손 달라니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질색하는 그가 혀를 차며 이야기하자 크리스토프는 더더욱 미간의 주름을 짙게 하며 부루퉁하게 말한다.

“왜.”

그 짧은 한 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하르트는 잠시 크리스토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세 번째로 말한다.

“내가 하는 말에는 토 달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손.”

크리스토프의 앞으로 내민 리하르트의 손바닥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도 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 비틀어 올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크리스토프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얼마간 침묵하다가 곧 내키지 않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토프의 오른손에 적당히 감겨 있는 붕대에는 희미하게 피가 배어나와 말라붙어 있었다. 거의 알아볼 수 없이 약간 눈에 띌 정도의 흔적이라고는 하지만 붕대는 두텁게 감겨 있었다.

“이렇게 감아 놓고도 피가 배어나올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찢어먹은 거야.”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리고 붕대 끝에 대충 붙여 놓은 테이프를 뜯어내고 붕대를 풀어 버린다.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려 했지만 리하르트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붕대가 풀려나갈수록 점점 핏자국은 커졌다. 겨우 몇 겹쯤 남겨두었을 즈음에는 붕대 자체의 색깔이 시커먼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붕대를 다 풀어내자 나타난 거즈도 시커멓게 굳어 있었다.

“흥……, 또 어지간히 자해를 해 놨군. 그 정신병은 어떻게 안 된다던가?”

리하르트는 마뜩찮게 중얼거리더니 거즈를 아무렇게나 뜯어내어 버렸다. 투두둑, 피가 굳어 말라붙어 있던 거즈가 떨어지자 상처까지 다시 벌어졌다. 아물어 드는가 싶던 상처 위로 다시 송글송글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거즈를 대었던 손바닥만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가장 심하게 찢어졌을 뿐, 손의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이번엔 뭘 부쉈어.”

리하르트는 유리 따위로 사정없이 긁어 놓은 듯한 그 손을 대충 뒤집어보며 물었다. 잠시 기다려도 대답을 하지 않는 크리스토프를 흘끗 쳐다보곤 방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곧 사라진 물건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베니니의 화병을 깨먹었나 보군. 바로비에르까지. 물건의 가치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너저분한 붕대에서 풀려난 상처투성이 손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크리스토프의 손에 난 상처를 가만히 짚었다.

“…―!”

움찔 움츠러드는 건 아픔보다는 타인과 닿는 감촉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면서 팔꿈치만 살짝 떨리는 그 반응을 보고, 리하르트는 손에서 시선을 떼어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해에, 결벽증에, 접촉기피에. 정말이지 정신병도 골고루 갖췄군.”

코웃음을 친 그는, 갑자기 크리스토프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번에 몸이 떨린 이유 역시 아픔보다는 남에게 잡힌 탓이다.

“이번에는 이유가 뭐야.”

“―….”

“손을 이렇게 찢어먹은 이유가 있을 것 아냐. 아니면, 이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자해를 할 만큼 정신병이 진행되기라도 했나?”

크리스토프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듯 허공을 노려보면서 입을 굳게 다문 그를 바라보다가,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는 곧 시선을 떨어뜨려 그 손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은 듯 한 번 혀를 차더니 풀어 놓은 붕대를 다시 집어들어 손에 감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저녁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리하르트가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그의 손을 노려보며, 붕대를 감는 그의 손이 간혹 손등이나 손가락 위로 스칠 때마다 손끝을 움칫거릴 뿐이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리하르트는 못마땅하게 손을 쳐다보며 붕대를 감았고, 크리스토프는 그의 손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크리스토프는 눈동자만 들어 올려 그를 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리하르트는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 상처 위에 소금이라도 뿌리려고 붕대를 푼 줄 알았는데.”

크리스토프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리자 리하르트는 일순 손을 멈추며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약간 뜨악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본 리하르트는 하, 하고 웃음기 없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매를 찡그렸다.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였나?”

“너는 사람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잖아.”

리하르트는 어이없이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언짢은 한숨을 내쉬며 “방향이 달라.”라고 말한다.

다시 얼마간 침묵이 흐르는 동안 리하르트는 솜씨 좋게 붕대를 다 감았다. 처음처럼 두텁지 않을 정도로만 매어 도중에 매듭을 지어 나머지를 잘라낸다. 그런 다음에야 잠시 붕대 위를 매만져 보고서 손을 놓는다.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붕대가 감긴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 볼까. 집에 돌아오는 동안 내도록 기분이 들떠 있었던 녀석이 고작 몇 시간 만에 또 발작을 한 이유가 뭐야.”

“……. 없어, 그런 거.”

크리스토프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비웃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왜. 이제 조울증까지 생겼다고 할 셈인가? 몇 시간 동안 기분이 하늘에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가, 아주 큰일이군.”

“…….”

그때 리하르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고정되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다가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린다.

“뭐야, 이건.”

“…….”

“이 브랜드의 이 크기면……, 양복인가?”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크리스토프와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네가 어쩐 일로 양복을 기성품으로 샀어, 옷에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녀석이.”

리하르트가 상자로 손을 뻗자, 그의 손이 닿기 직전에 크리스토프가 낚아채듯이 상자를 집어들어 테이블 아래에 내던졌다.

“건드리지 마.”

갑자기 달려들어 상자를 치워 버리는 크리스토프의 기세에 잠시 멈칫했던 리하르트는, 불쾌한 듯 외치는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냉소가 서린다.

“이제 결벽증이 옷으로까지 번졌나 보지. 좋을 대로 해. 네 정신병이 깊어지는 거야 나는 상관없으니.”

리하르트는 막 뻗으려던 손을 도로 거두었다. 그러나 다시 거두어들이는가 싶던 그 손은, 도중에 잠시 멈추더니 크리스토프의 뺨으로 다가간다.

커다란 손이 넉넉하게 뺨을 감싸자마자 눈에 띄게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나머지 손도 다가와 다른 쪽 뺨까지 감쌌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리하르트가 그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오늘 오후엔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았지, 크리스토프. 그래, 오후에 시간이 비었을 때 잠시 나갔다 온 뒤부터 아주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졌었어. ……어딜 갔다 왔을까.”

“손 치워, 리하르트. 나는 오늘 기분이 안 좋아.”

아까부터 기분이 불안정했다. 크리스토프가 지금은 다른 때보다 한층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그의 상처를 본 리하르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뜰 뿐, 손은 치우지 않았다.

“그거 안타까운 일이군. 나는 오늘 기분이 좋은데.”

“리하르트. 손 치워……!”

“치우지 않으면, 어머니한테 가서 이르기라도 할 텐가? 리하르트가 내 얼굴을 만졌어요, 하고?”

리하르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 순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고 만다. 사납게 그를 노려보는 새파란 눈에 더욱 짙은 빛이 감돌았다.

“크리스토프. 대답해 주지 않을 건가? 나는 오후 내도록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어. 네가 그렇게 들뜬 모습은 처음 봤거든. 대체 뭐가 네 기분을 그렇게 좋게 만들었을까. ……정태이라도 우연히 마주쳤나?”

리하르트가 나직이 정태의의 이름을 말했을 때,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굳었다.

불현듯 조금 전 보았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릭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던 뒷모습이.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웃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 하나를 그대로 미끄러뜨렸다.

목덜미에서 어깨, 가슴, 배로 천천히 내려간 그 손은 얇은 셔츠 위로 크리스토프의 살갗을 느끼기라도 할 듯 느리게 짚으며 내려갔고, 크리스토프는 얼굴빛을 바꾸며 몸을 움츠린다.

“리하르……!”

“쉬잇. 창문이 열려 있어, 크리스토프. 그리고 비앙카는 저녁나절에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그녀는 늘 동익 옆의 뜰을 거닐지만, 또 어떻게 알겠어? 오늘은 우연히 지금 저 창 아래를 지나가고 있을지. 안 그런가?”

리하르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크리스토프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입을 다물고 만다. 아니, 그 이름은 주문이었다. 크리스토프에게는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부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프. 말해 봐. 오후에 어딜 갔었는지. 그리 오랜 시간을 비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나 기분이 좋아져서 들어오다니,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온 거지?”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허리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이 크리스토프의 셔츠자락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그 안으로 파고든다. 살갗 위에 바로 닿는 손가락이 차가웠다. 크리스토프는 몸을 움츠리며 커다랗게 뜬 눈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말에 거스를 수 없었다. 아무리 울분이 쌓이고 분노를 터뜨려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크리스토프에게는 어릴 적부터 그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주문이 있었던 탓이다.

분노 가운데 막연한 불안과 체념마저 담겨 있는 그 시선을 마주보다가, 리하르트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를 응시하던 그는 어느 순간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대부분의 남자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누가 가르쳐주기라도 하던가?”

“……?!”

입술을 맞대고 낮게 속삭이는 말에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낯을 찡그렸다. 리하르트는 혀로 그의 입술을 벌리며 비집어 들었다.

“아니면 정말로 타고났든가. ……그래, 그 가능성이 더 크겠군.”

“…―!”

크리스토프의 옷 속으로 파고든 손은 천천히 그의 몸을 더듬으며 기어올랐다. 크리스토프가 아무리 몸을 움츠리며 그 손을 피하려 해도, 그의 허리를 감싸안은 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말해. 오후에 누구를 만났는지.”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나직이 명령한다. 그럼에도 망설이며 침묵을 지키는 크리스토프를 잠시 지켜보다가, 리하르트는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뜨끔, 아픔보다 더한 접촉감에 낯을 찡그린 크리스토프의 셔츠 안에서, 어느새 허리 위로, 가슴까지 더듬어 오른 손이 멈춘다.

“……! 건, 건드리…―.”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다급하게 말하기 전에, 그 손은 그의 가슴에서 겨드랑이 근처까지, 느리고 끈끈하게 쓰다듬었다.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재촉하듯이 그의 이름을 속삭인다. 크리스토프는 오래도록 망설일 여유도 없이, 결국 멈칫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오……, 옷…….”

가슴 위에서 머무르며 유륜 근처를 맴도는 손가락의 느릿한 움직임에 진저리를 치며 크리스토프가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그 대답이 나온 순간,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옷?”

의아하게 되물은 리하르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듯 잠시 멍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몇 번쯤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옷상자를 흘끔 쳐다보았다.

“저걸 사러 나갔다 왔었다고?”

리하르트가 묻자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움칫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다시 몇 초쯤 꼼짝도 않고 눈만 깜박이며 크리스토프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 위에서 머무르고 있던 손으로 가슴팍을 긁어내리듯이 움켜쥔다.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건가?”

“진, 짜야……! 네가, 프라거에서 사람을 만나는 동안, 시간이 잠시, 나서, 그 옆의 카르슈타트에…….”

크리스토프는 가슴의 살점을 주무르듯이 움켜쥔 손이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츠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는 정황상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혀를 찼다.

“……네가 옷에 까다로운 건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고작해야 기성복을 사고서 그렇게 기분 좋아 하다니 의외로군.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지.”

“…….”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 입을 맞추었다. 문득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 다정하게 충고라도 해 주는 것처럼 크리스토프의 뺨에,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평소에 안 그랬으면서 그렇게 유난히 들뜬 티를 내지 말아야지. 그러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지잖아. 안 그런가……?”

리하르트는 문득 크리스토프에게서 몸을 뗐다. 그의 몸을 끌어안고서 쓰다듬고 있던 손도 뗀다. 한 걸음쯤 물러선 곳에서,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 손길의 느낌이 남은 듯 몸을 움츠린 채 불쾌하게 리하르트를 올려다본 크리스토프는, “미친 새끼.” 하고 나직이 내뱉는다.

“싫어?”

“……?”

“내가 이렇게 건드리는 게 싫지?”

“……그래.”

리하르트의 뜬금없는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푹 웃고 만다.

“크리스토프, 바보 같으니. 싫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잖아.”

크리스토프는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런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그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프. 웃어 봐.”

“……?!”

뜻밖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희한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웃어,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다시 말했다.

“싫어. 내가 왜 너한테 웃어야 하지.”

“내가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하는 말은 따라야 하니까.”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거절을 듣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눈을 부릅뜨며 싫어, 라고 한 번 더 말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물러서지 않고 눈짓으로만 그 명령을 반복한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이,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여유롭게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토프는 상황만 허락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 버릴 듯한 눈이다.

그러나 제법 오랜 시간을 그렇게 마주보다가, 결국 크리스토프는 신음 같은 한숨을 쉬었다. 쯧, 혀를 차고는 내키지 않는 듯 한 번 더 리하르트를 노려본 뒤, 머뭇머뭇 입매를 위쪽으로 찡그렸다.

딴에는 웃는 얼굴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그 얼굴을, 리하르트는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연습씩이나 했다면서, 그렇게밖에 못 웃나? 그래도 아까 보니까 이제 제법 웃을 줄도 알게 된 것 같더니, 단순히 우연이었나 보군.”

“……? 내가 언제 널 보고 웃었어.”

크리스토프는 의아한 얼굴로 부루퉁하게 물었다.

“오후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몰랐었나?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웃고 있었는데. 눈매까지. ……덧붙여 말하자면 그 얼굴 그대로, 들어오자마자 너는 나한테 말을 걸었어.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냐면서. 기억 안 나나?”

도리어 리하르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 그렇지, 하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물어봤던 거 같긴 하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더럭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빤히 다가오는 리하르트의 시선을 눈가며 입매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멋쩍은 빛을 띠는가 싶더니 당장 얼굴을 구겼다.

“널 보고 웃은 거 아냐.”

입매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기억도 안 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니 멋쩍은 듯, 표정이 한층 사나웠다.

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눈에 띄게 웃지 말았어야지.”

그의 시선도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나마 의례적인 평소의 웃음이나마 희미하게 띠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조차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문득 다시 웃는다. 그 시선만큼이나 서늘함이 깃든 웃음이다.

“크리스토프. 하나 말해 줄까. 어젯밤에 일이 밀려서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오늘은 나도 피곤했어. 그러니 오후까지만 해도 오늘은 귀가하고 나서 남은 일을 마저 정리하고 일찍 잘 예정이었다고. ……그런데 네가 웃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말투가 미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리하르트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듯 의아한 눈치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웃지 않았으면 오늘 나는 너를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그렇게 웃는데, 안 올 재간이 있어야지.”

“……내가 웃는 거랑 네가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아, 상관이 있지. 있고말고. 네가 웃는 걸 보니, 그 웃음이 울음으로 변하는 얼굴을 꼭 보고 싶어졌거든.”

말을 마치면서, 그제야 리하르트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픽, 바람소리처럼 낮게 웃으며 그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점점 험악해지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바라보며, 셔츠를 벗어던진 리하르트는 바지까지 벗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를 험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뭘 하냐는 듯 고갯짓을 하며 대수롭잖은 투로 말한다.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벗어. 아니면, 벗겨 줄까. 내 손으로 직접.”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동안 이를 악물고 리하르트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선뜻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하르트는 웃었다.

“현명해졌군.”

*

리하르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땀이 배어나와 짤막한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는 이마 아래로, 기분 좋은 듯 휘어진 눈매가 보인다.

크리스토프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단 자신이 접촉기피라서, 그래서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내키지 않고 계속해서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걸까.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 같았다.

몸의 어디든, 스치는 느낌조차 몸서리가 쳐졌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래를 파고드는 성기의 느낌이었다.

그 더러운 것을. 그 더러운 곳에.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광경이 아래에 펼쳐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몸에 오한이 서렸다. 크리스토프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침대에 몸을 눕힌 순간부터, 크리스토프의 몸에서는 경련에 가까운 떨림이 멎지 않았다. 때에 따라 조금 잦아들 때도 있고 매트리스가 흔들릴 만큼 격렬해질 때도 있었지만,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몸이 절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끔 한계가 찾아와 새파랗게 질려서 경련을 일으킬 때면 몸 위를 쓸어내리던 손이 조금 느려졌다. 그러면 살갗을 매만지던 그 낯선 느낌도 조금 둔해져 약간 숨을 돌리곤 했다.

힘들었다. 몸의 감각이 잔뜩 곤두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낯선 손이 몸을 쓰다듬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치워 버리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곳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더욱 민감한 곳을 괴롭히는 통에 실패하곤 했다.

그러나 그나마 처음보다는 나았다. 처음에는 몸을 쓸어내리는, 거의 생전 처음과도 같이 느껴졌던 그 생경함에 정신이 반쯤 날아갔었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정신이 바싹 긴장해 금세라도 깨어질 유리처럼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워져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 섬뜩한 생소함을 견디며 정신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게 정말로 좋은 걸까.

이렇게, 온몸의―때로는 자기 자신조차 손 댄 적이 없는―곳곳을 간질이고 쓰다듬는 이 섬뜩하고 온몸이 절로 튀어오르는 이 감각을, 그들은 어떻게 참을까.

문득 크리스토프의 아득한 머릿속 한구석에 정태의가 떠올랐다. 아까 보았던 모습이.

릭의 이름을 속삭이며 그를 끌어안던 정태의는, 싫은 듯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좋았을 수도 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걸 좋아할 수 있을까.

반사적으로 튀어오르며 부들거리는 몸을 진정시키는 데에 안간힘을 쓰느라 이성은 조그만 조각밖에 남지 않은 머리로나마 아련하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몸속에서 성기가 부풀어오르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맞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해 자꾸 몸이 움츠러드는데, 그곳을 더욱 벌리며 넓히는 듯한 그 느낌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크리스토프는 낮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 순간.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잠시 리하르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문득 그는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바싹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좋은가 보군. 느껴지는 모양이지.”

기분 좋은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희미하게 거칠어진 호흡이 실렸다.

그게 아니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려다가,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남자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싫어하는 사람과 더러운 곳을 문지르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저렇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인상을 쓰고―일부러가 아니라 연신 몸을 쓰다듬는 선뜩한 감각들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결국 묻고 말았다.

“넌, 기분, 좋아?”

크리스토프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일순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허를 찔렸달까, 놀란 얼굴이다. 조금 희한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그는, 약간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좋아.”

“뭐, 가……, 좋아.”

“네가 그렇게 숨을 허덕이며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토프의 코를 아플 정도로 깨무는 리하르트의 얼굴이 어쩐지 기분 좋은 가운데도 심술궂어 보였다. 하긴 원래 심술궂은 놈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싫어하니까 일부러 이렇게 한다’고 말할 리가 없었다.

그때, 리하르트는 슬슬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허리를 점점 더 빨리 움직였다. 아래가 뿌듯하게 차고, 차고, 또 차올라 더럭 겁이 날 정도로 압박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더욱더 거칠어지고 짙어지는 살갗의 마찰에,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악물었다. 역시 견디기 힘들다. 정신이 비명을 지를 것 같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몸이 점점 더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도 좋은 거지, 너도 좋은 거야, 리하르트는 어쩐지 기분 좋은 듯 속삭였다.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서도 리하르트를 험악하게 노려봤지만, 리하르트는 그런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반쯤 일어서 가늘게 떨리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성기를 움켜쥐고 훑어 올렸다.

소름이 끼쳤다. 행위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럴 때에는,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며 이 감각에 익숙해지려 해도 정신이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미치고 말 거라고 생각하며 새파란 눈을 크게 홉뜬 그때.

“…―!!”

리하르트의 나직한 탄성이 귓가에 터져 나왔다. 그 입김과, 몸속에 뭉클하고 터져 나오는 질척한 느낌에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을 내지르고 몸서리를 치면서, 크리스토프 역시 아래가 아찔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어째서 기분이 좋다는 걸까…….”

자신이 얼마간 정신을 잃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정신을 되찾았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하고, 크리스토프는 아득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만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으니까 좋다고 하는 거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옆에 누군가―리하르트가―누워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방에 갑자기 누가 불쑥 서 있는 걸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며 크리스토프가 돌아보자, 그 옆에서 누워 있던 리하르트도 덩달아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언, 언제부터 거기 누워 있었…―.”

“언제부터라니, 네가 사정을 하면서 정신을 잃고 잠들었던 때부터지. 십여 분 됐어.”

크리스토프는 몇 센티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워 있는 리하르트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정신을 잃었다는 걸 전혀 인식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기억도 잠깐 날아가 버렸다.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턱을 괴고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그 망연한 얼굴을 보고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넋이 나갔군…….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타르텐.”

그 말을 듣고서야 크리스토프는 겨우 정신이 돌아온 듯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 차렸어. 너야말로 정신 나간 것도 아닐 텐데 왜 여기 누워 있어! 할 것 다 했으면 어서 돌아가 버려!”

크리스토프가 부루퉁하게 소리를 치자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즐길 거 다 즐겼으니 이제 볼일 끝났다……?”

그 느릿한 말에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뜨며 입까지 딱 벌렸다. 잠시 그 입에선 말조차 안 나오는 눈치였다.

“즐, ……즐, ……내가 뭘 즐겼어! 네 눈에는 내가 즐기는 걸로 보였어, 응?!”

“아니었나? 그럼 이걸 설명할 길이 없는데.”

리하르트는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한 손을 들어 크리스토프의 얼굴 앞에 들이대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그 손은 하얗고 진득해 보이는 것이 들러붙어 있었다.

“네가 싼 거다.”

리하르트가 무심하게 말한 순간, 몇 초간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손을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얼굴을 굳히며 파랗게 질렸다.

“그, 그, 그럴 리, 그런, …―!”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얼굴로 더듬거리며 혼란 상태에 빠지는 크리스토프를, 한쪽 입매만 틀어올리고 재미있다는 듯이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뭐 좋아, 하고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그 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나마 조금은 침착해졌는지,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고 새파랗게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그런 더러운 걸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히고 있다니…….”

더러운……하고 덧붙이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뭔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도로 입을 다문다.

“가엾어서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놔둔다……. 나중에 욕실에서 기절이나 하지 마.”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는 말을 영문 모를 얼굴로 듣고 있다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 낯을 찌푸렸다.

“너는……싫은 사람을 끌어안고 몸을 비비면, 불쾌해지지 않아?”

리하르트를 노려보면서, 그러나 사뭇 진지한 투로 크리스토프가 말하자 리하르트는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주며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크리스토프를 다시 흘끔 쳐다보고는 말한다.

“감정이 싫다고 육체까지 따라가지는 않으니까, 나는. 게다가 말했을 텐데. 네가 우는 얼굴을 보는 게 좋다고.”

크리스토프는 도끼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악취미는 사라지지 않는군, 하고 쌀쌀맞게 중얼거리며 몸을 반쯤 돌려 등지고 누웠다.

물끄러미 그 등을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가만히 손을 들어 목덜미에서 허리까지 주욱 일직선으로 그어내렸다.

“……!!”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이 펄쩍 뛰어오르며 크리스토프가 번뜩 돌아보았다. 그 부릅뜬 눈을 마주보며 리하르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 마! 이미 오늘치는 다 괴롭혔잖아!”

“오늘치라고 정해진 건 없어.”

“……! ……!!”

크리스토프는 무시무시하게 그를 노려보면서, 그대로 슬슬 몸을 뒤로 물렸다. 큼직한 침대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까지 물러나서 눕는다. 1미터 가량은 될 법한 거리가 가운데 생겨났다.

리하르트는 심드렁하게 그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당장 도로 안 오면 2차 뛸 줄 알아.”

“……? 2차……??”

“한 번 더 ‘비역질’을 하겠단 소리다.”

크리스토프의 표현을 그대로 따라하며 리하르트가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더럭 표정을 굳혔다. 그러면서 흘끔, 눈동자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분명히 바로 얼마 전에 한 판을 마쳤는데 아직 완전히 시들지 않고 있는 그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못 볼 걸 봤다고 생각하며 얼른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다.

“……. …….”

정말로 안 내키는 듯 아주 조금씩 조금씩 슬슬 다가오는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어느 순간 웃은 것 같았지만, 크리스토프가 쳐다보자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잘못 본 모양이었다.

“너는, ……정말로 그게 기분이 좋아? 아니, 굳이 나랑 할 때가 아니라 보통 때에. ……나랑 다른 타인과 몸을 비비면……, 소름끼치잖아.”

“그건 접촉기피증 환자의 논리겠지.”

크리스토프가 심각하게 의아한 투로 묻기가 무섭게 리하르트는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리하르트와 50센티미터 남짓한 거리를 남겨두고 멈춘 크리스토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어째서 기분이 좋을까.”

문득 정태의가 떠오른다.

그는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을까. 만일 내가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더라면, ……그러면 나라도 괜찮았을까. 그랬더라면. 내가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더라면. 나도 다른 사람처럼――.

불현듯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어……?”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어……? 하고 다시 중얼거리며 설마, 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다행히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면서, 리하르트는 중얼거렸다.

“지금 온 만큼 더 와. 안 그러면 2차 간다.”

“…―.”

크리스토프는 하던 생각을 접어두고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곤 슬슬슬 몸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달팽이처럼 다가가고 있는데 조용하고 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행위를 여러 번 할수록 성감도 늘어나는데, 기분이 좋으냐 안 좋으냐도 훈련이겠지. 너도 기분 좋다고 억지로라도 생각해 보든가. 네가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마지막 말에는 피식 비웃음이 섞였다. 크리스토프가 미심쩍게 얼굴을 찌푸리고 그 뒷말을 기다리며 지그시 쳐다보자, 그냥 해 본 말이었던 듯한 리하르트는 일순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한숨을 쉬고 말을 잇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느낌이 어떤지 궁금하면, 실제야 어떻든 흉내라도 내면서 따라나 해 봐. 그놈이 소리를 지르면 너도 소리를 질러 보고, 허리를 흔들면 너도 따라 흔들어 보고, 콧노래를 부르면 너도 그렇게 해. 그러다 보면 너도 그놈이랑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왜 이런 말이나 해 주고 있지, 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리하르트는 거기까지 말하곤 성가신 듯 입을 다물었다.

그 즈음해서 리하르트에게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멈춘 크리스토프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따라서. 정태의가 했던 대로 따라서. 그러면 그가 어째서 좋은 건지, 정말로 좋은 건지, 어떤 걸 느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왜 나는 안 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불현듯 가슴속이 뜨거워지며 욱신거렸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크리스토프는 잠시 숨을 멈춘다.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사뭇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아까 그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을 되새겨 본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단은――.

크리스토프는 흘끔 시선을 들어올렸다.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자, 무심하게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그 눈길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크리스토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곤, 가만히 속삭였다.

“리하르트. ……리하르트……, 리하르트…….”

세 번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더더욱 의아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마주보았다.

몇 초쯤 서로 마주본 채 침묵이 흘렀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먼저 시선을 떼지도 않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은.

“역시 안 되겠다.”

크리스토프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뭔가를 상상하면서 그 이름을 불렀는지 낯빛이 해쓱했다.

“그 짓을 하면서 이렇게 이름을 부를 자신이 없어…….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리는 말을 의아하게 듣고 있던 리하르트는, 한 발 늦게 그 말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약간 뜨악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본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그를 쳐다보곤,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됐어……, 오늘 거기까지 따라하기엔 난 너무 지쳤어. 잘 거니까 그만 돌아가. 언제까지 거기 있을 작정이야.”

그 표정만큼이나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고서도 얼마간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던 그는, 곧 조용한 한숨과 함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반짝 눈을 뜨며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크리스토프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기분이 나아질 일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질 일이라면 있었지만.

“…….”

크리스토프는 잠깐 어두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긴 한숨을 쉬어 그 기분을 몰아내고는 도로 눈을 감았다. 아련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옆에 아직도 이놈이 있는데도 잠이 오는 걸 보니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길고 평온한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곤 몰려오는 졸음에 의식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금세 잠들어 버리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리하르트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크리스토프가 규칙적인 숨을 내쉬기 시작하자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다시 지그시 그를 내려다본다.

“…….”

그렇게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픽 웃었다.

“웃기지도 않기는…….”

리하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손끝으로 크리스토프의 뺨을 툭툭 약간 아플 정도로 두들겨 준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밤늦은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흘끔 보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모아 꿰어 입었다.

어딘지 가뿐한 얼굴로 개운하게 옷을 다 입고 난 리하르트는, 흘끔 침대를 돌아보았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입매를 찡그리고서 혀를 차다가, 다시 피식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는 놈이야…….”

다시 한번 그 말을 중얼거리곤, 침대 근처로 저벅저벅 걸어가 발치에 뭉쳐 있던 이불을 크리스토프의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주었다. 그리곤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뒤 돌아섰다.

방에서 나가기 전 습관적으로 잊은 물건은 없는지 돌아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테이블 아래에 떨어져 있던 상자에 시선을 주었다.

바닥에 뒹구는 통에 리본이 완전히 풀어져 버린 상자는 뚜껑이 아주 약간 어긋나 있었다.

“…….”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리로 걸어갔다.

“옷을 좋아하는 놈인 건 알았지만, 고작해야 옷 하나 사고 그렇게 기분 좋아하긴…….”

리하르트는 듣는 이 없는 비아냥을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상자를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다가 문득 상자 옆면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 시선을 주었다.

리하르트는 아주 약간 낯을 찡그렸다. 잠시 손끝으로 그 핏자국을 문지르다가, 뚜껑을 열어 옷을 살핀다.

옷은 내부 포장지로 다시 한번 포장이 되어 있었다. 티 하나 없는 새 옷이 얌전히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감이 좋은 양복을 아무렇게나 한 번 쓸어본 리하르트는, 내부 포장지에 꽂혀 있는 구입 카드로 시선이 갔다. 사이즈나 취급법 따위와 함께 구입해 줘서 감사하다는 류의 인사가 새겨져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시선을 훑고 다시 뚜껑을 덮으려던 리하르트는, 불현듯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그 구입 카드를 내려다본다.

다소의 오차가 있다 하더라도 크리스토프의 사이즈는 아닐 법한 사이즈 표기, 그리고 취급법 아래에 적혀 있는 인사문구 인쇄의 중간쯤, 거기에만 손글씨로 적혀 있는 구매자의 이름. 정확히는, 구매자가 아니라 그 옷을 입게 될 주인의 이름.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나른하게 감돌던 기분 좋은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그 대신 티끌만큼도 감정을 엿볼 수 없는 서늘한 무표정이 자리 잡는다.

“……하…….”

문득 그의 입술에서 차가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과연……, 옷을 사고서 기분이 좋을 만도 했군.”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드에 적힌 그 이름을 손끝으로 덧그린다. 그 손끝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 카드가 구겨졌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온기라고는 이미 찾아볼 수 없이 싸늘하고 냉담해진 눈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곧 리하르트는 걸음을 돌렸다.

방에서 나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

크리스토프가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왁자한 웃음소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소리 따위가 일시에 멎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반사적으로 조금 잦아들던 소리들은, 들어온 사람이 크리스토프임을 확인하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평소에는 주로 환담을 나누는 장소로 사용되곤 하는 응접실―저택 밖에서 거주하는 타르텐의 친척이 방문했을 때 주로 쓰는 내부용 응접실―에는 오늘도 몇몇 청년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가운데 크리스토프가 들어왔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다른 볼일이 없는 한 이곳을 찾는 일이 없었다. 서익 지하의 휴게실을 찾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그런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았고, 모여서 함께 어우러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크리스토프가 들어선 순간 실내가 조용해진 것은, 비단 그가 이런 장소에 좀체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 탓만은 아니었다.

리하르트와 친하게 지내는 그 청년들은 크리스토프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친구 중 누군가는, 적어도 건너건너 아는 사이라도, 크리스토프에게 험한 일을 당한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었다.

서늘한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선 크리스토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적의 어린 시선들 속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응접실 안쪽에 딸려 있는 방이었다.

“어이, 거기엔 리하르트가 있는데 네가 왜―…!”

크리스토프가 그리로 들어가려 하자 청년 중 하나가 험상궂게 소리를 높이려 했지만, 그 옆에 앉은 청년이 만류한다. 그는 크리스토프가 요 얼마간 리하르트의 일을 거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리하르트가 결정한 일이니 따로 말을 섞지는 않는 그들을 뒤에 남겨두고, 크리스토프는 안쪽 방의 문을 열었다.

바깥의 응접실보다는 다소 좁다고 하나 어지간한 방 정도의 넓이는 되는 그 안쪽 방에는, 리하르트가 홀로 앉아 있었다. 서류 따위가 그의 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는 크리스토프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곧 서류철 몇 묶음을 그 앞으로 밀며, 인사도 없이 곧바로 말을 꺼내었다.

“붉은 글씨로 체크해 놓은 곳, 오류가 없는지 비교해 봐.”

부연설명도 하지 않고 그 말만 마친 리하르트는 넘기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펼쳤다.

리하르트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아침이었다.

욕실에서 막 나왔을 때, 오늘은 나가지 않고 집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겠다며 본관 2층 서편 응접실의 안쪽 방으로 오라는 말만을 일방적으로 남기고 전화는 끊어졌다.

어차피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관계이기는 했지만, 이쪽의 응답 따위는 아예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려서야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내민 서류철을 팔락팔락 넘겨 대충 일을 가늠해 보곤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크리스토프에게 좋은 낯으로 대한 적이 없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여느 때라면 아침에 처음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는데 그조차 없다.

“……?”

크리스토프는 잠시 얼굴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약간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크리스토프는 곧 리하르트가 말한 대로 서류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 정적 속에서, 문 바깥 응접실에서 청년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리하르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옷은 마음에 든다던가?”

서류 체크에 골몰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갑작스런 물음에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옷이라니.”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리하르트는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정태이에게 주려고 구입한 옷 말이야. 리본으로 포장까지 곱게 해 놓은.”

“……뭐?”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크리스토프가 표정이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뚫어져라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리하르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쌀쌀맞은 얼굴로 고개를 든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얼어붙은 얼굴을 보고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서류장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게 선물을 주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떠서 어쩔 줄 몰라하는 네가 준비한 그 양복. ……왜 그래, 그런 얼굴이라니. 그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랬나?”

조금의 온기도 없이 냉랭하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돌았다. 그러나 그조차 평소에 언제나 떠올리고 있는 그 사람 좋은 웃음이 아니다. 냉소라고 해야 할 만한 웃음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런……. 그 얼굴을 보니까 정말로 거절당한 모양이지. 어떻게 하나, 선물을 고르기만 하고서도 그렇게 기분이 좋아졌을 정도인데.”

“네가 어떻게 알았냐니까!”

크리스토프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흐릿하게 비웃음만 띠는 리하르트에게, 크리스토프는 서슬 퍼런 시선을 보내며 나직이 외쳤다.

답은 하나뿐이다. 크리스토프가 실제로 정태의에게 그 상자를 건네지도 않은 이상은, 그가 상자를 열어 봤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었다. 치워 두었던 물건에 그가 마음대로 손을 대었다는 것도, 그 물건이 정태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미 크리스토프의 마음에서는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는 비참함을 이 남자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도, 속이 욱신거리며 조여들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막 자리를 떨치며 일어나 리하르트에게로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문득 바깥의 응접실에서 청년들이 떠들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누군가 찾아온 눈치였다.

그런 데에는 아랑곳 않고 리하르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멱살을 틀어쥔 크리스토프는, 무시무시하게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린다.

“누가 내 물건을 네 마음대로 건드리라고 했어.”

“네 물건이라. 어차피 정태이에게로 갈 선물이 아니었던가? ……아아, 그렇지. 그보다 크리스토프, 어서 이 손 놓는 편이 좋을 거야.”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크리스토프의 손을 툭툭 두드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벌컥 화를 낸다.

“건드리지 마!”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조그만 노크 소리도 미처 듣지 못했던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그쪽으로 험악한 시선을 흘끗 던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 크리스토프?”

리하르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며 숨을 들이켜는 사람은, 비앙카였다.

타르텐의 저택에 들어선 뒤로 한 번도 크리스토프에게 연락을 하는 일이 없던 그의 어머니.

“……, 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크리스토프는 뭔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혀가 굳어 버린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리하르트는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며 굳어진 크리스토프의 손을 가만히 자신에게서 떼어내곤,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셨군요, 비앙카 숙모님.”

“어……머, 그래……, 네가 부르는데 와야지, 그럼…….”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던 그녀는 리하르트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을 걸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문 안쪽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크리스토프를 보며 엄숙한 얼굴로 묻는다.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네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 입에서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자 비앙카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리하르트의 일을 돕는 입장이잖니. 충분히 이야기로 풀어나갈 수도 있을 텐데, 폭력적인 행동은 좋지 않게 보이는구나.”

“……. ……죄송합니다.”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 말만을 꺼낸다.

비앙카는 그 뒤로도 잠시 걱정스럽기도 하고 언짢기도 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곧 안쓰러운 듯 리하르트를 돌아본다.

“괜찮니, 리하르트? 별일은 아니었던 거지?”

그러자 옆에서 겸연쩍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난처한 빛을 띠며 웃는다.

“그럼요, 숙모님. 크리스토프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그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해서 그런걸요.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머, 그렇구나. 어떻게든 사이좋게, 싸우지 말고 잘 지내렴.”

서른 남짓한 남자들에게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비앙카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를 앞두고 리하르트는 안심시키듯이 웃음 짓는다.

“그럼요, 숙모님.”

“응, 그래. ……그런데……, 네가 불러 줘서 오긴 했는데, 혹시 일하는 데 방해가 된 건 아니니?”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종잇장들을 둘러보며 그녀가 걱정스레 말하자,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곧 테이블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요. 마침 조금 쉬려던 참인걸요. 숙모님이 타르텐에 오셨는데 제대로 뵙지도 못했었죠. 오라고 몇 번이나 청해 주셨는데, 요즘 부쩍 바빠서 가 뵙지도 못했네요. ……아. 차라도 마실까요? 숙모님은 밀크티를 좋아하셨죠?”

리하르트는 선뜻 일어서 입구 근처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차 세트를 옮겨왔다. 그리고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직접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비앙카는 담뿍 웃음이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내가 끓여 줄게, 하고 일어서 그의 옆으로 간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도 않고서, 설핏 창백해진 얼굴을 들지도 않는다.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 타르텐에 온 뒤로 처음 마주치는 어머니, 크리스토프에게는 짧은 안부 연락조차 한 적이 없는 그녀가 지금 크리스토프의 등 뒤에서 리하르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크리스토프는 잘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굳이 그녀를 이 자리로 부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크리스토프에게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그녀와 같은 자리에 있을 때의 크리스토프를 지켜보며 그 모습을 비웃기 위해.

예전부터 그랬었다.

리하르트는 비앙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는 비앙카에게도 의례적으로 다정하게 대했지만,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있을 때면 한층 더했다.

자신의 친아들보다도 리하르트를―타르텐을 잇게 될 그를 더욱 익애하는 어머니와 즐거운 듯 환담을 나누면서, 그는 가끔씩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곤 했다. 서늘한 웃음이 담긴 가느스름한 시선을.

그리고 그럴 때면, 크리스토프는 생각했던 것이다.

어째서 그는 되는데 나는 안 될까.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만 했었다. 지금처럼.

“그런데, 둘이 여기서 같이 일하는 거니? 평소에도 여기서 일을 하곤 해?”

얼마 있지 않아 쟁반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담아와 각자의 앞에 차를 따라놓은 비앙카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다가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둘이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서는 아주 잠깐 크리스토프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엔 거의 오지 않아요. 평소에는 남은 일을 거의 방에서 혼자 하는데, 오늘은 비앙카 숙모님과 이렇게 차도 마실 겸해서 크리스토프도 부른 거예요. 게다가 크리스토프가 얼마 전부터 제 일을 도와주는데, 아주 큰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어머, 그래. 이 아이가 네게 도움이 된다니 기쁘구나.”

비앙카는 기쁜 듯 말했다. 마치 자신으로 인해 리하르트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어 기쁘다는 듯이.

“남은 일이 아주 많은가 보지. 이렇게나 서류들이 많은 걸 보니.”

“아아.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숙모님도 아시다시피 곧 승계 결정일이라서, 요즘은 특히 바빠요. 꼭 누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일을 처리하는지, 마지막으로 승계 후보자 테스트라도 받는 기분이라니까요.”

농담처럼 말하며 리하르트가 웃자 비앙카는 덩달아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색을 했다.

“너밖에 타르텐을 이을 사람이 누가 있겠니. 어르신의 뒤를 이어 이 집안을 이끌어 갈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란다, 리하르트.”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뛰어난 인재들인걸요.”

리하르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비앙카는 더더욱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아니야, 너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어. 나는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단다. 너밖에 없어, 너밖에.”

정색을 하고 속삭이는 비앙카를 바라보며 리하르트는 쑥스럽게 웃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겨우 나아갈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아, 리하르트. 모두 네가 뛰어나기 때문이란다. ――그래,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 줄게. 너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네가 원한다면 뭐든 해 줄게, 사랑스런 리하르트.”

그녀의 자애로운 말에 리하르트는 웃었다. 잠시 동안 그 상냥하고 다정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그녀를 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이윽고 천천히, 그 얼굴을 크리스토프에게 돌렸다.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에게.

“말씀만이나마 감사합니다, 비앙카 숙모님.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충분히 잘 도와주고 있는걸요. 아주 충분히. ……비앙카 숙모님의 몫까지요.”

리하르트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말이 떨어지는 순간, 크리스토프가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얼굴빛이 조금 더 파리해지는 것을 리하르트는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숙모님과 닮아서 그런지, 마치 숙모님이 도와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요, 크리스토프와 있으면.”

리하르트가 다정하게 덧붙이는 말에, 비앙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기쁜 빛이 꽃처럼 피어났다.

“리하르트……! 사랑스런 리하르트, 나의 리하르트. 그렇게 말해 주다니,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진심으로 감동한 듯이 속삭이는 그녀의 말꼬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사이를 두고서 비앙카가 미소를 지었다.

이 방에 들어선 이래, 아니 타르텐으로 온 이래, 그녀가 먼저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며 웃음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 전, 타르텐을 떠나게 되기도 전부터 헤아려 지금껏.

“크리스토프. 걱정했었는데, 리하르트를 잘 도와주고 있나 보구나. 고마워. 앞으로도 리하르트를 잘 도와주렴.”

마치 리하르트가 자신의 아들이며 크리스토프가 그의 친구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크리스토프에게 인사를 하며 당부한다.

“리하르트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니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틀리는 법이 없어. 그가 하는 말은 뭐든 잘 따라 주려무나. 알겠지?”

그녀의 조용하고도 다정한 목소리에 크리스토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시선을 떨어뜨려 테이블 위만 바라보면서, 크리스토프는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이긴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크리스토프의 대답을 기다리던 비앙카는 의아한 듯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기울여 크리스토프 쪽으로 약간 몸을 내밀었다.

비앙카가 가까워지자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얼어붙으며 아주 조금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에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내 말 알겠지, 크리스토프?”

약간 엄해진 목소리로 못 박듯이 한 번 더 확인하는 그녀에게, 얼마간 더 침묵하던 크리스토프는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어머니.

그 대답을 듣고 나자 비앙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크리스토프가 처음 보는 부드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맺힌 그 입매로 창백한 눈길을 주다가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를, 옆에서 리하르트가 평소와 같은 담담한 웃음을 담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비앙카는 차를 다 마신 뒤에도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리하르트가 아쉽게 웃음 지으며 일이 너무 많이 밀려있다고 했더니 그녀는 선뜻 일어섰다.

――그러면 건강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열심히 하렴. 너만큼은 꼭 건강해야 해, 지금은 특히나 중요한 때이니. ……언제든 한가하면 찾아와 주렴. 혹은 나를 불러 줘도 좋아. 언제든 기쁘게 올 테니까.

걱정과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리하르트에게 속삭인 그녀는, 크리스토프에게도 리하르트를 잘 도와주라고 다시 한번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그녀가 바깥의 응접실마저 나가고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리하르트였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토프의 뒤로 다가섰다. 문 쪽을 향해 얼어붙은 듯 서서 문 아래쪽으로 창백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그의 등 뒤로 가,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하며 조용히 말한다.

“그녀가 타르텐에 도착했던 때 뒤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

“…….”

“그녀가 내게 차라도 마시러 오라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하더군. 네 생각도 나고 해서, 같이 마실까 하고 이리로 불렀어. ……어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오랜만에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나갈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자세로, 소파에서 일어선 채로 그녀를 배웅한 그 모습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응, 크리스토프. 오랜만에 단란한 시간을 보내니 좋지 않던가?”

리하르트는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서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귓불에 입술을 대었다. 그 입술은 살짝 귓불에 닿았다가 천천히 미끄러져, 목덜미까지 조심스럽게 닿는다.

비앙카가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그 서늘하고 냉정한 모습은 어디로 가 버린 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마치 잔혹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난 다음에야 마음이 풀려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어린아이처럼.

가엾고 불쌍한 사람을 위로해 주듯이.

리하르트는 그렇게 크리스토프에게 새털처럼 살포시 입을 맞추어 갔다. 그 입술은 점점 조금씩 더 오래 크리스토프의 살갗 위에 머문다.

흠칫. ……흠칫.

리하르트의 입술이 피부 위로 조금씩 미끄러질 때마다 가느다랗게 몸을 떨며 움츠리면서도, 크리스토프는 넋이 나가기라도 한 듯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건드리지 마.”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꿈속에 잠겨 있는 듯 낮고 희미한 목소리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귀에는 들릴 터였다.

리하르트는 잠시 손을 멈추었지만, 이내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미끄러지듯 팔에서 겨드랑이 아래쪽, 팔꿈치까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위로라도 해 주듯이, 따뜻한 입술이 상냥하다.

그러나 그 순간.

“건드리지 마……!”

크리스토프는 세차게 그를 뿌리쳤다. 팔을 세게 내어쳐 리하르트를 떨어뜨리며, 크리스토프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 새파란 눈이 유리처럼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버석버석 메말라 그 안에서는 눈물조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 안에는 푸르스름한 불길만 있었다. 눈물 대신 그 불길 같은 증오가 터져 나온다.

“나는 네가 싫어, 리하르트 타르텐. ……나는 네가 싫어! 이 세상에 너라는 놈이 있다는 게 역겨워 견딜 수 없어!! 왜 네가, 어째서 너 따위가……!!”

시퍼런 입술에서는 독액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터져 나올 때마다, 리하르트의 얼굴에서는 조금씩 표정이 사라져갔다. 크리스토프의 증오를 정면에서 받으며, 그는 완전히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질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크리스토프의 살갗 위에 입을 맞출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적막하고 서늘한 얼굴.

“이 세상에 내가 있다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싫으시다……?”

그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그래, 너처럼 싫은 놈은 없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너보다 끔찍하지는 않아!”

크리스토프는 나직하게 비명처럼 외쳤다.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푸르게 질려 있었다. 이성이 희미하게 착란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약간 들떠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리하르트는 웃었다.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던 무표정에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표정이 실렸다. 그 특유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그리고 그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 그것 잘 됐군. 나도 네가 끔찍하게 싫던 참이거든. 서로 피장파장이니 아주 잘 됐어. 그렇지 않나?”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몸을 기댄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마주보았다. 한결같은 미소를 띤 채.

어느 순간, 그가 낮게 말했다.

“벗어, 크리스토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칼날처럼 얇아졌다. 그의 시선이 언뜻 문 쪽을 향한 것을, 리하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응접실 안쪽에 딸려 있는 방.

바깥의 응접실에는 사람들 몇몇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즐거운 이야기라도 하는 듯 간간이 웃음소리가 문을 뚫고 안쪽까지 들려왔다.

바깥의 소리가 들리면 안쪽의 소리도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얇은 문 하나뿐이었다.

“――미쳤나 보지, 리하르트.”

“천만에. 나는 아주 제정신이야.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리하르트는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서늘한 웃음이 서린 그 눈매는, 분명 그의 말대로 평소의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만 창피를 당하는 게 아냐.”

“아하……, 걱정해 줘서 고맙군. 알았으니, 벗어.”

“…―.”

크리스토프는 이를 사리물었다. 창백한 빛을 한 분노가 그 표정 위에 어른거렸다.

어느 순간, 그는 거칠게 옷을 벗어젖혔다.

재킷에서 베스트, 타이, 이어 셔츠까지 거침없이 벗어 바닥에 내리치듯이 던져 버린다. 그리고 바지에서 브리프까지.

이를 악물고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옷가지를 내던진 크리스토프는, 곧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 앞에 선다.

“이제 됐겠지, 이 미친놈.”

이를 갈듯이 속삭이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팔걸이에 걸친 팔에 턱을 괴고 천천히 감상하듯 그를 훑어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곳도 빠짐없이 샅샅이.

“위에 올라가 엎드려.”

리하르트는 평연한 어투로 테이블을 향해 고갯짓했다.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도록 커다랗고 육중한 원탁을, 크리스토프는 잠시 망연히 바라보았다.

“……변태놈 같으니……,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좋아…….”

“아아, 변태가 아닌 너는 알 수 없겠군. 울면서 허리를 흔드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특히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

리하르트는 즐거운 영화 감상이라도 앞둔 듯 가볍게 말한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단호하게 덧붙인다.

“알았으면 어서 그 위에 올라가서 무릎 꿇고 엎드리도록 해.”

크리스토프는 몇 초쯤 리하르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곧 사나운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원탁 위에 올라갔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그가 하라는 대로 원탁 위에 엎드렸다.

굴욕과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얼마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크리스토프의 옆으로 다가선 그는 문득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크리스토프의 타이를 주워들었다. 그 부드러운 재질을 잠시 쓰다듬던 그는, 크리스토프가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재빠르게 손목을 묶어 버린다.

“?! 뭐하는 거야!”

“쉬…….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바깥에서 달려올 거야.”

“……!!”

리하르트의 조용한 충고에 크리스토프는 낯빛을 굳혔다.

그러는 동안 리하르트는 타이의 반대쪽 끝을 원탁의 두꺼운 다리에 묶어 고정시켰다.

크리스토프는 얼굴을 험하게 구겼다. 희미하게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손목을 세차게 흔들어 봐도, 원탁이 꿈쩍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타이가 끊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리하르트……, 뭐하는 짓이야, 이게. 풀어……!”

나직하게 외치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리하르트는 가만히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넌 틀림없이 만사 제쳐 놓고 저항할 테니까.”

“뭐……?!”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되묻자, 문득 리하르트가 웃었다. 다정하게. 그러나 뱀처럼 선뜩하고 얇게. 그리고 그는, 갑자기 문 쪽을 돌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아힘! 거기 있나?”

“…―!!”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성량으로 외친 그 소리는 틀림없이 저 문 너머 응접실까지 들렸을 터였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번뜩 고개를 들어 경악스레 부릅뜬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어, 무슨 일이야?”

바깥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들린다.

크리스토프는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태연하게 바깥을 향해 말했다.

“지금 거기 누구누구 있지?”

“어……? 나랑 프리츠, 스벤, 볼프……, 팀은 잠깐 나갔지만 곧 돌아올 거고. 왜?”

그 목소리는 이제 문 바로 밖에서 들려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조금만 비틀면 저 문이 열리고, 이 방 안의 광경은 다 들여다보일 것이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리하르트라면 그의 허락 없이 문을 열어젖히진 않겠지만, 고리 하나 채워져 있지 않은 저 문은 턱없이 허약했다.

새파란 얼굴로 엎드려 망연하게 리하르트를 올려다보는 크리스토프의 넋 잃은 얼굴을, 리하르트는 잠시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자. 잘 들어, 크리스토프. 지금 네 옆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끔찍한 내가 있어. 그리고 저 문밖에는, 그나마 덜 끔찍한 인간이 네다섯쯤 있지. ……결정해. 가장 끔찍한 하나를 견딜 건지, 그나마 덜 끔찍한 네댓을 견딜 건지.”

“…―!!”

크리스토프는 이를 악물었다. 핏기를 잃은 입술이 이에 짓눌려 하얘진다.

몸이 떨렸다. 격렬한 수치와 분노, 불안 따위가 몸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떨림은 점차 거세어졌다.

리하르트? ――밖에서 의아한 듯 리하르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결정해. ――귓가에서 속삭이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

크리스토프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혀뿌리까지 떨렸다.

그 입술은 이윽고 뭐라고 달싹거렸지만, 그 소리는 미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리하르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 상냥한 소리가 따뜻하게 귓가에 스친 순간,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게 빛을 잃은 눈동자가 리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본다.

크리스토프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이나마, 분명하게 말했다.

“너 따위보다, 차라리 저들이 낫겠어……!”

그 말이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떨어졌을 때,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미미하게나마 웃음이 흐려졌다.

조용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푸르스름하게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견디려는 듯 꾹 깨물고 있다.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있던 리하르트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냉랭하게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나와 하는 것보다 네댓과 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렇다면.”

리하르트는 흘끔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높인다.

“아힘!”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부들거리던 어깨가 움칫, 멈추었다가 더욱 세게 흔들린다. 바깥에서 “응, 여기 있어. 들어갈까?” 하고 의아하게 되묻는 소리가 돌아왔다.

크리스토프는 테이블 위에 가만히 머리를 늘어뜨렸다. 머릿속이 울렸다. 귀울음이 지독하게 윙윙거린다.

그때.

“아무것도 아냐. 계속 볼일 보도록 해.”

리하르트가 말했다.

그 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크리스토프는 움찔, 눈을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의아하게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의아한 눈치였지만 순순히 ‘어, 그래.’ 하고 문밖의 기척이 물러서자, 리하르트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

“나와 하는 편이 더 싫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 줘야겠지. 나는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네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셔츠의 제일 윗단추를 하나 푼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 위로 순간적으로나마 안도감이 스쳐 갔다. 그 안도감도, 리하르트가 바지의 퍼스너를 내리자 곧 사라지고 말았지만.

“크리스토프. 나는 네가 바라는 건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거다. 잘 알아 두는 게 좋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한 분노가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몸속으로 거칠게 밀려드는 성기에 숨이 막혔다.

조금도 대비하고 있지 않았던 좁은 입구를 벌리며 밀고 들어오는 그 질량감에, 아직 반 가량밖에 들어차지 않았는데도 벌써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왜 그래, 크리스토프. 차라리 네댓을 상대하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주제에, 이렇게 몸이 굳어서야 어떻게 상대할 작정이었지?”

등 뒤에서 거친 호흡과 함께 리하르트가 나직이 속삭였다. 동시에 허리를 세게 밀어붙인다.

“……!!”

크리스토프는 혀를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등으로 이미 입을 덮고 있어도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았다.

신음도, 비명도, 고함조차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가쁜 숨소리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 가끔 리하르트가 속삭이는 목소리 말고는 조용했다. 그래서 바깥 소리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아직도 저 문밖에서는 몇 명의 청년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까마득히 모른 채, 자기네들끼리 뭔가를 즐겁게 시시덕거린다.

안에서 이상한 기척이라도 났다간 의아하게 여겨서 어쩌면 문을 열어 볼지도 몰랐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갑자기 리하르트가 웃으며 크리스토프를 불렀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우스운 것 같기도 한 그 목소리는, 하, 하고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너는 정말이지 타고났어. 이 주제에 접촉기피라고? 아니, 민감해서 더 그런 건가? ――보란 말이다, 네 물건이 흔들리는 걸.”

리하르트는 앞으로 손을 돌려 크리스토프의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 들어간 연한 빛깔의 살덩이는, 그의 말대로 약간 일어서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크리스토프는, 설마 무슨,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래로 시선을 준다. 그러나 리하르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리하르트의 손이 움켜쥐고서 흔들고 있는 옅은 페니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손가락이 뿌리 근처를 누르는 순간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 없이는 살지도 못할 이런 몸으로, 여태 어떻게 견뎌 온 거야, 응?”

“…―그, 렇지, 않…….”

“그렇지 않아? 그럼 여기에 일어서서 흔들리고 있는 건 네 물건이 아닌가? 더 깊이 박아 달라고 꿈틀거리고 있는 건 네 구멍이 아니란 거야?”

크리스토프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리하르트가 속삭이는 천박하고 거침없는 말들이 그대로 자신을 매도하며 꾸짖는 것 같다.

그의 다른 손은 아까부터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마치 여자의 가슴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쓰다듬는 게 아니라 우악스럽게 주무른다. 그럴 때마다 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살점을 꼬집어, 크리스토프는 목까지 차오르는 신음을 겨우 삼켜야 했다.

이미 빳빳하고 커다랗게 솟아 있는 살점을 꼬집듯이 문지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리하르트가 은근하게 말한다.

“여기에 말야, 매일같이 약물을 아주 조금씩 주사하고 열심히 문질러 주기를 몇 주만 계속하면 손가락 마디 정도만큼은 쉽게 커진다는 걸 알고 있나? 평생 남 앞에 내놓기 힘들어지겠지만.”

지그시 돌기를 잡아당기는 그 손가락이 마치 뭔가를 말하는 것만 같다. 크리스토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순간 아픔도 허덕임도 수치도 잊고,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조각품에 여기만 유난히 큼직하다면 굉장히 음란해 보이겠지.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릴 거야.”

“……하, 하지, 마…….”

저도 모르게 더럭, 겁먹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 남자는 미쳤다. 늘 다정하게 웃음 짓는 이 남자는, 머릿속이 어떻게 됐다. 그러니까 정말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무슨 짓을 하든―칼로 난도질을 하든 해머로 뼈를 산산조각내든 총으로 몸에 구멍을 내든―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크리스토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리하르트는 웃는 그대로 혀를 찬다.

“크리스토프. 나는 네가 바라는 바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겠다고 했지. 잊었나?”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아플 정도로 가슴팍을 세게 움켜쥐는 리하르트를,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 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조그맣게 새어나온다.

“그, 럼, ……그렇, 게, ……해, …….”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새파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잠시 침묵하던 리하르트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유쾌하게. 바깥까지 들릴 만큼 커다랗게.

잠시 바깥소리가 끊겼다.

“크리스토프, 아하하, 농담이었어. 어차피 남은 시간은 며칠밖에 안 되는데 그 정도로는 시간이 부족하지. ……시간이 충분했다면 해 봤을 테지만.”

리하르트는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크리스토프에게 말한다.

크리스토프는 창백한 채로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리하르트가 속삭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진짜.”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게, 세차게, 거세게 밀어 넣는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철썩철썩 거침없이 때리는 것처럼 들렸다.

“……! ……!!”

가까스로 신음을 삼킨 크리스토프가 손등을 짓씹었다. 소리 내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어느새 아래에는 리하르트의 성기가 한 가득 뿌듯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도 더 들어가겠다고, 더 들어가겠다고 끝없이 파헤치려 들며 계속 거칠게 부딪혀, 몸속의 내장이 위로 밀리는 것 같았다.

“으, ……, ……으…―!!”

손등의 살점이 너덜해질 정도로 세게 짓씹는데도, 입에서 어린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결국은 새어나오고 만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들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크리스토프는 초조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입을 세게 눌렀다.

그러나 그때, 어깨 너머로 커다란 손이 훌쩍 다가오더니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쥐고 옆으로 치웠다. 가로막을 것 없이 드러난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와,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떨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나는 신음 소리를 좋아해. 특히 견디지 못하고 몸을 흔들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지. 너도 그렇게 울어 보지, 그래. 바깥에 있는 놈들에게도 특별히 들려줄 겸.”

“……!!”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그래, 그럼 힘내서 참아 보도록 해.”

리하르트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 더욱 거칠게 허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몸속이 비명을 질렀다. 구석구석 안쪽을 찔러 대는 그 묵직한 물건이 견딜 수 없는 감각을 자아내고 있었다.

참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크리스토프의 입술 사이로는 끊임없이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바람소리처럼 가느다란 그 소리는,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몸을 느리게 더듬어 내리며 몸속을 더욱 벌리려 들 때마다 조금씩 커졌다.

견딜 수 없었다. 오싹오싹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도 간신히 억누른 신음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입에서는,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바깥에까지 들릴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몸이 뜨겁고 욱신거렸다. 이미 다리 사이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성기를 세게 움켜쥐며 몸속의 어느 부분을 건드린 순간, 크리스토프는 결국 낮게나마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밖까지 그 소리가 새어나간 듯, 떠들썩하던 바깥의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심장이 싸늘해졌다. 몸이 떨렸다. 크리스토프는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금세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눈으로 뚫어져라 바닥을 노려보았다. 손가락을 씹으며 소리를 죽이려 안간힘썼다.

그런데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신음 소리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허덕이는 숨소리가 결국은 바깥까지 들려나갈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입을 열고도 한참 동안 말을 못 하고 있다가, 결국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작게 속삭인다.

“리하, 르트, 제발, ……조금만 더, 살살, …….”

굴욕과 수치 속에서 결국은 무릎을 꿇어 버리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며, 리하르트는 천천히 웃음 지었다.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음 지으며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입을 댄 리하르트는 낮게 노래를 불러 주듯이 속삭였다.

“말했을 텐데. 네가 바라는 것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겠다고.”

“…―!”

그러면서 다시 허리를 거칠게 추어올린다. 흐윽, 크리스토프는 비명처럼 흘러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커다랗게 홉뜬 눈이 자신의 손만을 노려본다. 그러면서도 숨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투두둑 눈물을 흘리고 만다.

“하지만 아까 보니까 의외로 잘 알고 있던데, 크리스토프. 어떻게 말하면 되는지.”

다시금 귓가에 속살거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며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까……, 아까……?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머리에서부터 핏기가 가시는 듯하다, 곧 그 열기가 다시 위로 치고 올라왔다. 목덜미에서부터 확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리하르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그의 엉덩이를 좀 더 벌리며,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박았다.

용서 없이 거칠게, 호되게.

“……! 아, ……으, ……하, 아……!!”

몸속을 거침없이 후벼파며 마구잡이로 파헤쳐 대는 그 느낌에 다시 입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 해도, 뒤에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 ……발……!”

결국 크리스토프는 비명처럼 입을 열고 말았다.

후둑후둑, 테이블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팔에 묻듯이 문지르며, 크리스토프는 소리죽여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말문을 열었다.

“좀, 더……, 좀 더, 세게……, 좀 더 거칠게, 해 줘……!”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흐느끼며 애원한 소리에 돌아온 것은, 짧은 침묵에 이어진 느릿한 대답이었다.

“뭐라고? 그렇게 울먹이면서 말하면 알아듣기가 힘들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똑똑하게 말해, 크리스토프.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잖아.”

“…―.”

크리스토프는 짐승 같은 신음을 삼켰다.

눈이 뜨거웠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면서 눈을 달구는 탓이다. 그러나 눈만큼이나 이마가, 뺨이, 귀가, 목덜미가, 몸이 뜨거워서 눈의 뜨거움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좀 더, 세게 해 줘……, 아래에……네 거, ……좀 더 세게 넣어 줘, 더, 깊이, 날, ……내, 내 몸속을, 좀 더 거칠게 휘저어 줘……!”

마지막 말은 울음과 뒤섞였다. 빨갛게 눈을 달구는 눈물이 얼굴 아래에 조그만 웅덩이를 만든다.

팔에 얼굴을 묻은 크리스토프의 뒤에서 리하르트는 웃었다. 기쁜 듯이 한동안 나직이 소리 내어 웃던 그는, 어느 순간 크리스토프의 귓불을 세게 깨물었다.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잘 말했어, 크리스토프. 이렇게나 착하게 말을 잘 하다니, 상이라도 줘야겠어. ……좋아,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지. 그래, 그 김에 소리도 잘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할까.”

웃음 섞인 목소리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크리스토프의 턱을 붙잡아 돌린 리하르트는 그에게 입을 겹쳤다. 그대로 삼켜 버릴 것처럼 크리스토프의 입을 점령한 채로,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멈추었다.

여태껏은 가벼운 장난이기라도 했던 듯, 뱃속을 격렬하게 두들기는 감각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크리스토프는 원탁 위에 그렇게 누워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 옆으로 누운 채 늘어져 있었다.

하얀 알몸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꼭 인형 같다. 정교하고 세심한 공을 들여 만들어 낸 곱고 아름다운 인형.

흐릿하게 뜬 파란 눈동자가 이따금 깜빡이지만 않는다면, 정말로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얀 나신은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귓불에서부터 목, 가슴, 허벅지 등, 몸 구석구석에 울긋불긋 흉하게 남은 조그만 멍 자국이며 세게 움켜쥐었던 곳마다 희미하게 남은 손자국, 아랫배에서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흥건하게 젖어 끈적거리는 희뿌연 체액.

그때, 방 안쪽에 딸려 있는 욕실에서 리하르트가 나왔다.

그대로 연회 자리에 나가도 될 만큼 말끔한 차림새가 크리스토프와 몹시 대조적인 그는, 원탁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크리스토프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리로 다가갔다.

“……. 다리 벌려 봐.”

그는 손에 뜨거운 물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말을 걸어도 못 들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눈을 뜨고 있긴 하나 넋을 놓았는지도 모른다.

리하르트는 흥,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크리스토프를 바로 눕혀 다리를 벌린다.

그 안쪽에 뜨끈한 물수건이 닿은 순간 꿈틀, 허벅지가 움직였지만 그 손을 피하거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리하르트는 힘없이 벌어져 적나라하게 드러난 허벅지 안쪽을 구석구석, 말없이 닦아 주었다.

세 번, 네 번, 수건을 씻으러 몇 번이나 욕실을 오간 뒤에야 겨우 크리스토프의 몸이 말끔해졌다.

며칠 동안은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 멍 자국과 손자국 따위를 제외하고는, 이제 그 몸은 원래대로 하얗고 깨끗하게 돌아왔다.

“어쩔 속셈이야…….”

문득 낮게 잠긴 목소리로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탄식 같은 그 말에 리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듯, 크리스토프는 재차 묻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인형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고, 리하르트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냉담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리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크리스토프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뗀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움츠려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그는,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나를 어디까지…….”

움츠러든 어깨처럼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 몸은 오랫동안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팔이 축축하게 젖어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런 말없이 지그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어깨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자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뒤에서 크리스토프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손바닥에 떨림이 전해졌다.

리하르트는 몸을 구부렸다.

크리스토프의 드러나 있는 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귀가 움찔 떨린다. 그 입은 천천히 목으로, 어깨로, 등으로, 하얀 살갗이 그리는 능선을 따라 타고 내려갔다. 그 입술이 닿는 곳마다 몸이 움찔거린다.

느리게, 끈기 있게 크리스토프의 몸을 빠짐없이 훑으며 입을 맞춘 리하르트는, 이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가만히 잡아서 들어올렸다.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팔을 빼앗기지 않으려 잠시 힘을 줬지만 곧 체념하고 팔을 맡기고 말았다.

젖어 있는 얼굴을 원탁에 내리며, 리하르트가 그의 어깨에서 팔, 손가락 끝에 일일이 입술을 대는 걸 바라본다.

꽃내음을 맡을 때 그러는 것처럼 살짝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간지러워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고만 있는 크리스토프의 젖은 눈가에 입술을 대는가 싶더니, 젖은 물기를 핥는다. 흥건하게 젖은 뺨도 천천히 핥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입술을 핥았다. 잠시 얼굴을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입술을 핥는다.

그 간지럽고 낯선 감촉에 움칫움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리하르트는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는 얼마 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에게 등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긴 채, 몸을 굳히고 숨을 죽였다. 절로 몸이 긴장한다.

그때 문득,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자조적이기도 한 그 서늘한 웃음소리와 함께, 리하르트는 비웃듯이 말했다.

“분명 세상 어떤 자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짓은 연인들이 하는 거라고 인식되어 있을 테지. ……우습지 않나?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말을 마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움츠러들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어깨와 허리를 가만히, 그러나 단단히 끌어안은 그 팔들을 불안스럽고 의아한 눈으로 흘끗흘끗 쳐다볼 뿐, 그 팔을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흘러오는 낮고 조용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혀도, 돌아보지 않았다.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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