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Bugger
딱 30분이었다. 정확하게 30분. 오차가 있다고 해 봐야 5분 내외다.
정태의는 벽시계를 노려보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노려본다. 그러다가 괘종시계를 본다. 각각 몇십 초 가량의 오차만이 있는 그 시계들은 모두 거의 비슷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시계 멈추기라도 했어? 약 갈아 넣은 지 몇 달 안 된 것 같은데.”
조금 전부터 낯을 찌푸리고 이 시계 저 시계 다 노려보는 정태의를 지그시 지켜보던 일레이가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정태의에게 훌쩍 던진다. 정태의는 어? 하고 순식간에 눈앞으로 날아오는 시계를 반사적으로 받아들며, 아, 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멀쩡히 잘 가. ……떨어뜨려서 망가지면 어쩌려고 시계를 막 던지고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정태의도 일레이에게 시계를 냅다 던진다. 어렵잖게 받아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러 좀 세게―어지간한 야구 직구보다 약간 느릴 정도로―내던진 묵직한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낚아챈 일레이는 시각을 확인했다.
“10시 50분. 시각이 문제야, 시계가 문제야. 그렇게 도끼눈으로 시계를 노려보는 이유는.”
“시각. 정확히는 시간.”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창틀에 팔을 걸치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중정, 본관의 중앙계단 앞에는 큼직한 승용차가 몇 대나 줄지어 있었다. 며칠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손님들이 왔던 때와 똑같은 차량이다.
막 중앙현관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그 토베 무리들을 내려다보며, 정태의는 혀를 찬다.
“회의한다고 들어간 지 정확히 30분이라고. 그나마 지금 이 시점에서 30분이니까, 실제로 집무실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20분 가량밖에 안 될 거라고. 거기에 차 같은 걸 마시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기껏해야 15분.”
“흠. 그런데?”
“15분의 회의를 위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독일까지 굳이 찾아와 나흘이나 머물다 갈 필요가 있는 건가? 물자와 시간의 낭비라고.”
테이블 앞에서 노트북을 앞두고 앉아 있던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동안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노트북을 덮자 디스크가 시끄럽게 돌아가다가 멈춘다.
“원래가 그런 건데, 뭣 때문에 꼬여서 그래.”
노트북 위에 안경을 올려놓고 일어선 그는 느긋하게 정태의의 옆으로 다가와, 정태의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제 그들은 차를 타고 떠날 참이었다.
“너는 배웅 안 해도 돼?”
“내가 왜?”
정태의가 묻자 일레이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하긴 이 남자도 이 집에서는 손님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손님이 손님을 배웅하는 법은 없다.
“너야말로, 아지즈와 제법 친해 보이던데 배웅 안 하나?”
“아――안 해 안 해, 절대 안 해. 또 덜미 잡혀.”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것이 바로, 정태의가 꼬여 있는 이유였다.
회의가 짧은 것은 당연하다. 물론 저들과 타르텐 사이에 오갔을 대화의 사안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래도 15분은 지나치게 짧은 감이 들긴 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오래도록 생각해 왔을 만큼 중요한 사안일수록, 실제로는 회의나 협의라는 것이 그 말 자체의 의미는 없는 법이다. 이미 서로가 어떠한 결론을 상정한 채 조금씩 의견을 조율해 가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저들도 마찬가지야. 이미 오기 전부터 결론은 다 내어두고 왔을걸. 실권자가 오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 ――다만 그 결론대로 이행하기에 과연 상대방의 정황은 적합한가, 그걸 확인할 따름이지.’
과연 저들이 차관 변제의 조건으로 내걸 요건은 어떤 걸까, 협의 결과는 어떻게 되려나, 그런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정태의에게 일레이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15분은 심했다.
“15분 일하기 위해 나흘을 놀다 가는군.”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삐딱하게 중얼거리는 정태의에게, 옆에서 일레이가 중얼거린다.
“아. 아지즈가 탄 차가 이 아래를 지나는데.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그래.”
“안 해! 절대 안 한다니까!”
정태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고 상황을 보아 깔끔하게 물러날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엊그제 정태의의 방을 찾아와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한 뒤로 마주칠 때마다 그는 정태의를 아주 지그시 바라보았다. 딱히 말을 건 것은 아니지만 아주 지그시.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는 듯한 눈으로.
오늘도, 아침에 떠나기 전에서야 차관 변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며 집무실로 향하던 저 무리들과 우연히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데, 정태의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뒤통수가 따가웠을 정도다.
오죽하면 저들이 떠난다고 하자, 특별히 저들에게 악감은 없는데도 그 말이 그렇게 반가웠을까.
정태의가 한숨을 쉬며 그들이 탄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이윽고 그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이제 한 번 물어볼까. 아지즈가 저렇게 열렬한 눈으로 널 계속 쳐다본 이유가 뭔지.”
느리면서도 가벼운 그 목소리는 마치 농담이나 장난 같았다.
응? 하고 돌아본 정태의는, 그러나 가느스름하게 웃고 있는 그 눈을 보곤 농담도 장난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뭐야. 왜 사람을 그렇게 흉악하게 노려 봐.”
“이런. 웃는 얼굴로 보이지 않나?”
너랑 하루이틀 살았어야 그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보이지.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냥 저 사람이 나한테 부탁한 게 있었는데 내가 그걸 거절했거든. 그랬더니 그 뒤로 계속 쳐다봤던 거야.”
흐음, 하고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일레이를 쳐다본다.
비록 아지즈가 좀 노골적으로 정태의를 주시하긴 했었지만, 함께 마주친 적은 거의 없는데 잘도 알아챘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걸렸으면 왜 미리 안 물어봤어.”
“지금 타르텐에 머무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당장 저들의 목을 꺾어 놓으면 좀 귀찮아지거든.”
“……. 떠난 다음에 물어보면 좀 덜 귀찮아지나?”
“적어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달려가서 꺾어 놓지는 않겠지. 지금은 할 일이 많으니까.”
타르텐의 일부터 매듭짓고 나머지 일들도 처리해 두고 쫓아가면 그래도 한 열흘은 더 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이 농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농담처럼 안 들려서 정태의는 얼른 손을 젓고 만다.
“꺾어 놓을 일 없어. 전혀 없어.”
“과연 그럴까.”
“없다니까!”
정태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차가 떠나간 방향을 잠시 시선으로 좇고 있던 일레이는 흠, 하고 웃고는 대꾸한다.
“네게 했다는 부탁이 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정태의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릴 적부터 수백 번은 들어 본 것 같은 청탁.”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
정재의에게 뭔가를 말해 달라거나, 부탁해 달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많이 들었다.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오히려 정태의가 더 많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왠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정태의는 사뭇 심각하게 물었다.
“내가 형한테 뭔가를 부탁하면 잘 들어줄 것 같나?”
“네가? 정재이에게?”
“음――어릴 때부터 그런 부탁은 종종 받았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누가 집으로 손님처럼 찾아와서 좀 얘기를 하다가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도 은근히 나한테, 형에게 얘기 좀 해 달라는 사람이 더러 있었어.”
“네가 정재이의 길상천이니 그럴 테지.”
일레이의 간단한 대답에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근거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은 좀 접어두고…….”
“아지즈가 네게 부탁한 게 정재이에 관련된 일이란 소리군.”
응, 하고 정태의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만난 적도 없는 정태의를 찾아와 부탁을 할 만한 일이면, 그런 일밖엔 없다.
“형에게 그런 말을 전해 주는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실제로 아마도 내가 뭔가를 부탁하면 형은 내키지 않아도 들어줄 테니까. 내가 그런 것처럼.”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부탁이나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 제안이 형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하지만, 좋은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 볼 때 실질적으로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정재의를 약간이나마 귀찮게 하기도, 부담을 주기도 싫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면서, 그저 가끔 마음을 기댈 수 있으면 그걸로 좋았다.
일레이는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경치가 아니었다. 뭔가 생각에 잠겨 허공의 어느 언저리를 보고 있다.
형제라……, 하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태의는 흘끔 그를 쳐다본다.
“한 달 가까이 떨어져 있으니까 카일이 그리워지기라도 했어?”
정태의가 웃으며 묻자 일레이는 기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딱 그런 눈이다.
물론 정말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가족으로서의 보람이라곤 없는 놈이로구나…….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는다.
“형제라는 주제로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아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요전에 하다가 말았던 생각을 좀 더 심도 있게.”
“뭔데, 그게.”
일레이는 여전히 머릿속의 반쯤은 생각을 굴리고 있는 듯한 얼굴로 가만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흠……, 하고 턱을 문지르는 손이 좀처럼 멎지 않는 걸 보니 해답을 내기 어려운 고민을 하는 모양이다.
“정재이는 워낙 운이 좋아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놈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잘 떠오르질 않거든. 그렇다면…….”
그 운 좋은 정재의의 친동생을 앞에 두고, 일레이는 지금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혀를 찬다.
“아직도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질린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형이 운 좋은 사람이라 천만다행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하긴 그렇지 않았더라면 형은 지금까지 목숨 부지를 하고 있기도 힘들었을 거다. 어릴 적부터 온갖 유괴납치감금을 경험했던 사람이니.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뭔가 형에게 잘못된 부탁을 해서 일이 꼬이더라도 형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긴 하겠다.”
정태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그렇게까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말을 전해 줘도 괜찮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역시 고개를 젓고 만다.
피해를 안 입는다고 해서 일이 귀찮아지는데도 상관없다고 할 수야 없다.
“…….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기억이 났다.
정태의는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창에 기대어 서서 중정을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그 시선을 느끼곤 의아하게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그때, 아지즈가 정태의를 찾아왔을 때, 정태의는 이 남자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아지즈가 정태의를 찾아온 순간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수화기 너머에서는 일레이 역시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 타이밍을 생각하자면 그를 찾아왔을 손님은 아마도――.
“그런데 말리크는 그날 밤에 널 왜 찾아간 거야.”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시선을 주었다. 전정가위를 들고 중정 안을 돌아다니던 정원사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잠시 눈빛이 멎는가 싶더니, 천천히 정태의를 쳐다본다.
“잘도 알았군.”
“음……, 8할쯤 되는 확률로 찍었는데 맞다니 다행인걸.”
일레이는 이 집에서 귀빈에 속하니까 어쩌면 다른 사람이 찾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약간쯤은 생각했었지만, 역시 짐작이 맞았나 보다.
말리크가 일레이를 찾아갔을 이유.
그날 밤 아지즈가 돌아간 뒤로 얼핏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깊이 생각해 보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지즈의 묵묵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말리크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일레이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일레이는 창틀에 팔을 걸치고 바깥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있어도 정태의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시선은 주지도 않고 팔만 뻗어 정태의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려버렸다.
“어이, 뭐야.”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부담스러워서 먹어치우고 싶어지니까 다른 데 봐.”
“다른 데라니 어떤 데. ……저런 데?”
일레이가 턱을 붙잡고 아무데로나 정태의의 고개를 돌린 방향에는, 본관의 서편 끝부분이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갑작스럽게 일정이 바뀌어 예정보다 두어 시간 남짓 일찍 돌아간 귀빈의 배웅을 마친 타르텐의 식솔들은 그 시간만큼 남아 버린 여유시간을 넉넉하게 즐기고 있는 지금.
평소라면 리하르트의 옆에서 삭막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크리스토프가 본관에서 간이탑을 거쳐 서익으로 넘어오고 있는 참이었다.
때마침 간이탑 꼭대기에서 놀다가 내려오는 중이었던 듯, 아이 하나와 마주친다. 크리스토프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아이는 또랑또랑하게 반색을 하며 크리스토프에게 뭔가 말을 걸었고,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 그대로이나마 성실하게 꼬박꼬박 대답은 다 해 준다. 그러다가 아이가 뭘 물었는지 성가신 듯 낯을 찌푸리더니 짤막하게 뭐라고 몇 마디 하곤 걸음을 휙 돌려 버렸다. 그 뒤에서 아이가 토라진 듯 크리스토프를 몇 번 부르다가, 이내 빙긋 웃고는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가 버린다.
“크리스토프는 은근히 애들한테는 인기가 많지 않아?”
“애들한테는 대놓고 인기가 많지. 은근히 인기가 많은 건 오히려 나이가 좀 있는 쪽일걸. ……하긴 이 집구석에서는 별로 그렇지도 않나.”
일레이는 바깥을 보는 데에도 흥이 사라졌는지 창가에서 떨어져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일을 넘겨야 할 기한이 촉박하다며 붙잡고 있었던 노트북을 다시 켠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서익으로 넘어와 더 이상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고개를 주욱 빼고 쳐다보면서, 창밖으로 가슴까지 내민 채 말했다.
“그래그래, 애들한테는 대놓고 인기가 많지. 요전에 산책하다가 올리버를 만났는데 걔는 다친 놈이 오히려 크리스토프를 걱정하더라. 자기 볼 때마다 죄책감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싶다고. 걔는 애가, 어린데도 인성이 됐어, 음.”
“제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인성이 돼먹지 못했는데 말이지.”
“응, 그래, 리하르트는 인성이 돼먹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나한테 남 험담을 시키려 들어.”
정태의는 넋 놓고 일레이에게 맞장구를 치다 문득 뭔가 말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험상궂게 돌아보았다.
일레이는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피식 웃고 있었다.
음……? 어쩐지 뭔가 스리슬쩍 화제가 넘어간 것 같은데…….
정태의는 살짝 걸리는 데가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이 더 걸렸다.
진지하게 모니터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정태의가 말을 걸면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것도 놀랍지만, 역시 새삼스럽게 다시 봐도 놀라운 건 저 말끔하게 정돈된 인상이다.
잘 봐 둬야지. 이제 곧 베를린으로 돌아가면 집에서는 저런 모습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테니.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고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문득 실실 웃고 말았다.
“그런데 너……, 안경 끼면 정말로 악덕 변호사나 뭐 그런 걸로 보이는 거 알아?”
간간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흘끔, 모니터에서 시선만 떨어뜨려 정태의를 쳐다본다.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날아오는 시선이 아주 딱이다. 공갈협박 전문 악덕…….
“아니 의외로 잘 어울린다고……. 총칼을 몸으로 막으면서 싸움터를 누비는 3D업종 종사자로는 도저히 안 보여.”
“칭찬 고맙군.”
일레이가 심상하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조금 전에 본관에서 서익으로 넘어오는 모습이 보였던 크리스토프가 거기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들어오다 말고 일레이가 거기 있는 걸 보곤 약간 걸음을 늦추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태이 방인데.”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쌀쌀맞게 말을 내쏘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일레이는 유유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애인 방에 있는 게 뭐 이상한가? 덧붙이자면 난 어제도 이 방에서 잤다. 저 침대에서. 태이랑 들러붙어서. 한 몸으로 연결된 채로.”
“야!!!”
벌컥 소리를 지른 사람은 창가에 서 있던 정태의였다.
‘태이랑 들러붙어서’에서 슬쩍 표정이 변한 그는, 한 몸 운운하는 부분에서 덜컥 눈을 부릅뜨며, 이미 입 밖으로 나온 소리를 덮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방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올 말은 나왔고 들릴 말은 들렸다.
정태의가 벌겋게 뺨에 핏기를 올린 채 씨근거려 봐야 일레이는 까닥도 않고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삭막한 얼굴로 일레이를 뚫어져라 노려볼 따름이었다.
“너야말로 이 방에 왜 왔어. 태이 방인데.”
일레이가 받아치듯이 묻자 크리스토프는 턱을 당기며 당당히 대답한다.
“우리 집을 둘러보는 게 뭐 이상한가? 덧붙이자면 난 어제도 이 방에 왔고, 요 며칠 매일 왔어.”
“아하……. 웃는 연습은 잘 돼 가? 별로 성과는 없는 것 같던데.”
“네놈처럼 재수 없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그것도 쉽지는 않더군.”
크리스토프는 일레이의 옆에 있던 의자에 발을 걸어 끌어당겨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러고 보니 요 얼마간은 매일같이 들르긴 했지만 웃는 연습은 하지 않았다. 어딘지 지친 얼굴로 덩그러니 앉아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정태의는, 사이가 안 좋은 사람과 함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혀를 차곤 했던 것이다.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크리스토프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건지 모를 말투로, 눈은 정태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아, 하고 정태의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일레이가 옆에서 먼저 대답해 버린다.
“네가 3D업종 종사자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
“언제 그런 얘기 했어!!”
심상하고 진솔한 말투로 가볍게 얘기를 꺼내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다시 벌컥 소리쳤다. 그러자 일레이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어 이상하다는 듯 정태의를 쳐다본다.
“그랬잖아. 총칼을 몸으로 막으면서 싸움터를 누비는 건 3D업종 종사자라고.”
“아니 그건――.”
널 보고 한 말이지, 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생각하면 이 자리에 3D업종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어쩐지 자기 무덤을 한 번 더 판 것 같아 정태의는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느끼고 뒤늦게나마 수습을 해 보려고 얼른 손을 저으며 입을 연다.
“아, 그래, 너 애들한테 인기 많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 좀 전에 너 간이탑 건너오는 거 봤거든. 애 하나랑 스치지 않았어?”
“아―….”
크리스토프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인기 안 많아. 난 애들 싫어해.”
“아니, 네가 애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애들이 널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이 경우는…….”
하지만 딱히 네가 애들을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가끔 성가셔하긴 하지만. 그런 말이 솟아올랐지만 말해 봐야 별로 안 좋은 낯을 할 것 같아서 도로 삼켰다.
“뭐……애들뿐 아니라 어른들한테도 인기가 좋다고, 좀 전에 일레이가 그러던데.”
정태의는 화살을 일레이에게 돌렸다. 크리스토프는 놀란 듯 눈을 부릅뜨며 일레이를 쳐다보았고, 순간 키보드를 잘못 눌렀는지 일레이는 백스페이스를 누르며 혀를 찼다.
크리스토프는 그 말 자체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일레이라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는 듯 뚫어져라 그를 노려보았다.
그 삭막하고 사납기 짝이 없는 시선이 영 거슬렸는지, 일레이는 두어 번 더 백스페이스를 누르곤 노트북을 닫아 버렸다.
“아, 그래. 기동대에 있을 때 그랬었어. 다는 아니고 일부 취향 특이한 놈들 사이에서였지만. 네 성질머리 때문에 차마 말도 못 붙여 보면서도 널 상상하면서 혼자 용쓴 놈도 꽤 많을걸.”
“……? 그게 뭐야.”
크리스토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일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아주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정태의에게는 그 눈길이 말하는 바가 들렸다. 어디서 이런 천연기념물 같은 얼간이가.
“뭐, 좋은 거야. 좋게 생각해.”
설명하기가 귀찮았는지 대충 말해 버리고 마는 일레이였다. 그 옆에서 정태의는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홀로 고민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홀로 궁리해 보는지 말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다 못해, 정태의가 얼른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와르륵 꺼내어 테이블 위에 쌓았다.
“날도 화창하고 좋은데, 이럴 때는 상쾌하게 맥주라도 마시는 게 좋지. 자, 자. 카일이 출장 갔다가 지방특산품이라면서 그저께 보내 준 좋은 거야.”
“……나한테는 500밀리짜리 싸구려 생수 하나 안 보내 주면서 너한테는 지방특산 맥주를 박스로 보내?”
일레이가 스산하게 말했지만 정태의는 가볍게 무시했다. 저 비슷한 말은 카일의 입에서도 들은 바 있었다. 간혹 장기로 집을 비운 일레이가 정태의에게 뭔가 선물거리를 불쑥 택배로 부쳐 오면, 정태의가 박스를 뜯는 옆에 서서 구경하다가 그 상자 안에 자신을 위한 거라곤 밤톨 하나 안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형제 다 필요 없어…….’ 하고 우울하게 중얼거리곤 했던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많이 마셔.”
오전부터 낮술을 권하면서 빙긋 웃는 정태의를 보다가,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풀탑을 뜯었다. 그리고 몇 모금 마시고 내려놓더니 문득 중얼거린다.
“사이좋네. 카일까지 같이.”
희미하게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고 평연하다.
그 차이 때문이다. 가끔 크리스토프를 볼 때마다 가슴속이 싸해지는 이유는.
“…….”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맥주를 주욱 들이켰다.
“그래서 말했잖아. 너한테 못 준다고.”
옆에서 일레이가 평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린다.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는 눈길이 차다.
그는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금세 비어 버린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달캉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며 흘리듯이 말했다.
“크리스토프. 나는 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 그래서 호의도 악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 주자면, 너는 이놈에게는 벅차. 그러니까 일찌감치 꿈에서 깨고 딴놈을 찾든가 그냥 살던 대로 살든가 해.”
“――내가 왜 벅차.”
일레이의 말을 새하얀 얼굴로 듣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순순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불쑥 항의한다. 그 항의에 대한 일레이의 대답은 간결했다.
“성질머리가 더럽잖아.”
“…….”
웁……, 정태의는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바로 앞에 크리스토프가 있는데 이 결벽증 있는 녀석에게 뿜었다간 제 명에 살기 힘들다.
일레이는 가끔,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입으로는 하면 안 되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조금 전처럼.
가만히 휴지를 뽑아 몇 방울 흘러나온 입가를 닦은 정태의는 몇 번 헛기침을 하며 캔을 내려놓았다. 그런 정태의의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성격은 맞추면 돼. 맞출 수 있어.”
너도 성질 더럽잖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아 서로에게 소모적이기만 한 싸움을 피하는 걸 보니 크리스토프의 손을 들어 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이번 주장에도 일레이는 태연하기만 했다.
“못 맞춰.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온 성격을, 만난 지 고작해야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처음 얼마간은 가능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무리다. 처음부터 잘 맞는 성격이 아니면 힘들어. 그러니까 너는 태이랑은 안 돼.”
아니야, 그럼 너랑 나는 처음부터 잘 맞는 성격이었다는 소리잖아. 내가 처음부터 너와 잘 맞는 성격이었다니, 나는 인생 그렇게 막 살지 않았어.
정태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주장했다. 입 밖으로 꺼내어 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했기 때문에 속으로만 외친다.
“…―맞출 수 있어.”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일레이를 노려보며 주장했다. 마치 어린애가 고집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번 더 중얼거린다. 맞출 수 있단 말이야, 하고.
일레이는 눈동자만 흘끗 돌려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약간 성가시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좋아, 하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그럼 성격은 맞춘다 치자. 몸은.”
일레이가 딱 잘라 묻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대차게 대답한다.
“맞, 추면 되지. 못 맞출 게 뭐 있어.”
“이놈은 나만 한 크기 아니면 이제 만족 못해.”
“야!!!”
정태의는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목청이 터지기 전에 먼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정태의는 안중에서 지워 버린 두 사람은 서로만 차갑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크리스토프는 약간 굳어진 얼굴로 망설였다. 한참 고민하는 눈치이던 그는 흘끔 정태의를 보았다. 만사 다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태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이, 너, 날것 말고 기구 같은 건 어때.”
“……. ……. ……. 너까지 왜 이러냐…….”
정태의는 기절할 것 같은 심경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이들은 자신을 두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그 대화의 어디에도 정태의의 의사는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크기 문제를 떠나서, 너는 못 넣잖아.”
“……내가 뭘.”
일레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더니 시선을 깔아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대놓고 얕보는 그 태도에 크리스토프는 울컥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반문한다.
“결벽증이나 고치고 다시 말씀하시지. 네가, 아무리 좋아하는―좋아한다는 가정하에―사람이라고 해도, 배설물이 나오는 곳에 네 몸을 댈 수나 있을 것 같아?”
“그, ―….”
과연, 일레이의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약간 창백해졌다. 머릿속으로 뭔가 아주 안 좋은 상상을 했는지 위장 근처를 슬쩍 문지른다. 그런 크리스토프에게 일레이는 결정타를 가하듯이 덧붙여 말했다.
“심지어 항문에 성기만 넣는 게 아냐. 그나마 그 둘은 비슷비슷하게 더러우니까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천만에. 손가락을 넣을 수도 있고 혀도 종종 넣어.”
“야!!!”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벌떡 일어나 일레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서 진땀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번에도 나올 말은 나왔고 들릴 말은 들렸다.
크리스토프는 순식간에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움켜쥔 주먹으로 가만히 입을 누른다. 그대로 마주보고 있으면 상상이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희미하게 눈의 초점을 비낀다.
“……. ……앞만 아니라 뒤도……, ……입을 댄단 말야?”
매우 침중한 목소리가 힘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말꼬리가 떨렸다.
정태의의 손을 치운 일레이는 코웃음을 치며, 이미 게임 끝났다는 듯 다시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더한 짓도 하는데 그 정도로 무슨…….”
이 말에는 다행히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핏기가 아주 약간 돌아왔다. 더한 짓은 아예 상상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레이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마지막으로 심드렁하게 덧붙여 말했다.
“남의 애인한테 눈독을 들이려면 최소한 육체적인 기술이라도 있어야지. 너는 일단, 뒤는 놔두고 앞에라도 입을 댈 수나 있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오든가 말든가 해. ……아니, 오지 마.”
일레이는 어디서 성가시게 모기 한 마리가 맴돌기라도 하는 투로 휘휘 내쫓듯이 손까지 저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꾸도 해 주지 않겠다는 듯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때 크리스토프는 불현듯 번쩍 고개를 들고 사납게 외쳤다.
“아, 앞이라면 나도 어제 했――.”
툭…….
새 맥주캔을 따서 두어 모금 마시고 가볍게 캔을 흔들던 정태의는 캔을 그대로 놓쳐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맥주캔에서 맥주가 쏟아져 바닥의 카펫을 누렇게 적셨지만 그쪽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잠시 활발하게 다각거리던 키보드에서도 소리가 멈춰 있었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일레이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옮겨간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엉겁결에 벌컥 외치다가 도중에 입을 벌린 채 딱 말을 멈춰 버린 크리스토프는, 조각처럼 굳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어제?”
먼저 미심쩍게 말을 꺼낸 사람은, 금방 황당한 빛을 감춘 일레이였다. 그는 여전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는 있지만 손가락을 움직이지는 않고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쳐다본다.
잠시 방 안엔 침묵만이 자욱하게 깔렸다. 몇십 초, 초침이 흘러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일레이는 몸을 젖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인 채 가늘게 뜬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주시했다.
납빛으로 창백해졌던 크리스토프는 어느새 얼굴이 불긋불긋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고구마빛이 될 것 같다.
그 침묵을 다시 깬 사람은 이번에도 일레이였다.
“너, 누구…….”
그러나 그렇게 입을 연 일레이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움칫 입을 꾹 다물고 얼굴만 활활 태우며 서슬이 퍼레진 분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노려보는 크리스토프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가만히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안 물어보마.”
일레이는 조용히 말하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말없이 일에만 집중한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으음, 하고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흘끗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크리스토프는 의자에 앉은 채 테이블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불쾌한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서늘하게 표정이 얼어붙었다. 아주 가끔 모양 좋은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
“…….”
정태의는 뭔가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지만 얼른 고개를 저어 버렸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자신이 입을 댈 일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손가락이 헛나간 듯 다시 백스페이스를 누른 일레이가 혀를 차며 모니터를 툭툭 손톱 끝으로 두드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 비역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던 녀석이…….”
일레이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에, 갑자기 귓불이 뜨끈해진 크리스토프는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뭘 몰랐는지 뭘 아는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나직하게 따져 묻는 험악한 목소리에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동자만 돌려 시선만 주곤 무시했을 뿐이다.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말해, 릭. 내가 뭘――.”
크리스토프가 울컥해서 테이블 위로 막 몸을 내밀 때였다.
똑똑,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방 안에서 나던 소리가 일시에 멈췄다.
크리스토프의 고함 소리도, 일레이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도, 정태의가 맥주캔을 통통 두들기던 소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 안으로, 한 남자가 걸음을 내디딘다.
“손님방은 방음이 별로 안 좋군. 소리가 바깥까지 다 들려.”
평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들어온 사람은, 제일 가까이에 있던 정태의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주었다가 뒤이어 희미하게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일레이를, 마지막으로는 조각상처럼 그 가운데 앉아 표정 없이 삭막하게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오늘은 일정이 다 빈 게 아냐. 곧 나가 봐야 하니 언제까지고 놀고 있지 말고 나갈 준비해, 크리스토프. ――방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니 과연, 여기 있었군.”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리하르트 타르텐이었다.
그는 이윽고 일레이에게 시선을 돌리곤 늘 그렇듯이 담담한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크리스토프를 놀리지 말았으면 좋겠군. 어쨌거나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인데 말야.”
“내가 크리스토프를? 천만에.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일레이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픽 웃으며 손가락 마디로 문을 똑똑 두드려 보였다.
“나도 이제야 알았어. 서익의 손님방은 방음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얼마 전까지 비역도 제대로 몰랐다고 그렇게 비아냥거릴 필요까지 없잖아, 릭.”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는 리하르트를, 일레이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키보드를 탁탁탁, 세 번 연달아 두드리고 작업 하나를 종료시키며 말했다.
“네가 잘못 들었어, 리하르트. 나는 얼마 전까지 비역도 제대로 몰랐던 녀석을 비아냥거린 게 아니라, 그런 녀석에게 구음까지 시킨 녀석을 양심불량이라고 평하려던 참이었거든.”
“하아―….”
리하르트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태연하게 웃었다. 더 말을 섞을 생각은 없는 듯,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일찍 돌아와야 할 테니 서둘러야 해, 크리스토프. 어서 준비하고 본관 홀로 오도록 해.”
그 말을 남기고, 용건은 그것뿐이라는 듯 리하르트는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
정태의는 갑자기 날아오는 시선을 의아하게 마주보았다. 리하르트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크리스토프에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오후 늦게 타르텐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네 어머니가 연락을 하셨으니, 늦기 전에 돌아와서 어머니 마중은 해야 하지 않겠어, 크리스토프?”
말을 마치며 리하르트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서, 크리스토프는 순간적으로 떨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약간 핏기가 가신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그는 “그렇군, 네 말이 맞아.”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처음 본 순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만큼이나 닮았으면 누가 봐도 피가 이어졌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보다 선이 가늘고 부드럽다거나 눈초리가 조금 더 처져 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정말로 쏙 뺐다.
“그런데 나이 차이 좀 많이 나는 누나라고 해도 되겠다.”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일레이는 “스무 살 남짓밖에 차이가 안 나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라고 덧붙인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그녀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크리스토프를 닮았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비앙카가 타르텐의 본관 중앙현관의 계단 앞에 섰을 때, 정태의는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크리스토프와 닮은 만큼, 그녀 역시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탄 차가 멎자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있던 크리스토프가 차문을 열어 주었고, 차에서 내린 그녀가 크리스토프와 나란히 섰다. 꼭 닮은 두 사람은 모자로 보이든, 혹은 남매로 보이든, 누가 보아도 가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선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오랜만이구나.”라고 짧게 인사하며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예,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하고 정중하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이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외문에서 이곳까지 이어져 있는 긴 포장길부터 시작해서 잘 단장된 중정, 그 옆에 대칭으로 서 있는 서익과 동익, 이어 마지막으로 본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쁘게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이곳은 변한 게 없구나.”
감격스러운 듯 속삭인 그녀는, 잠시 더 그곳에 멈춰 서서 본관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른다.
계단 위, 약간 구석진 곳에 서 있던 정태의는 담담하고 조용한 크리스토프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저런 크리스토프는 처음 보았다. 싸늘한 빛도 심드렁한 빛도 없이, 그저 침착하고 정중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어느 귀족 집안의 잘 자란 자제처럼.
“우아하게 생긴 외모와 몹시 어울리는 분위기이긴 한데…….”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어딘지 위화감이 든다. 처음 보는 낯선 느낌 때문만은 아니다. 잠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정태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크리스토프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묵묵히 비앙카의 뒤를 따르며, 그녀의 뒷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뒷모습조차 바라보는 게 아니다. 오도카니 멈춰 서서 그녀가 태엽을 감아 주기를 기다리는 낡은 장난감처럼, 그렇게 그녀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태의는 다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서른 남짓한 아들을 둔 어머니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곱고 아름다운 그녀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눈가에는 벅찬 그리움이 맺혀 있고 입매에는 터질 듯한 꽃망울 같은 웃음이 서려 있다.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그 위에 서 있던 정태의와 일레이에게 시선이 멎었다.
정태의를 보곤 아주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빛을 띠던 그녀는, 이어 일레이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계단을 다 올라올 때까지 일레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그녀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설 때 갑자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구나. 리그로우가의 작은 도련님! 이게 얼마만인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게 두 손을 가볍게 맞대며 다가와 살짝 고갯짓을 하는 그녀에게 일레이는 의례적인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승계 결정 때문에 온 모양이군요. 댁의 다른 분들도 다 평안하신가요?”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일레이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고 표정 역시 입가에만 꾸며낸 웃음을 띠었을 뿐이었다.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그렇게나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기분 상한 빛도 보이지 않고 환하게 웃음 짓는다. 아니, 지금은 그 어떤 일도 그녀의 기분을 해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른 크리스토프는 그녀에게서 두 걸음 뒤에 멈춰 섰다. 정태의는 공손하게 서서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크리스토프를 조금 낯설게 바라본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정태의에게 향했다.
사뭇 의아한 듯이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일레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분은 처음 뵙는 것 같은데……?”
“크리스토프의 손님입니다.”
“어머, 그래요.”
일레이의 짧은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끗 정태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일레이가 조금 사이를 두고서 “그리고 베를린의 집에서 저와 함께 살고 있는 제 친구이기도 하지요.”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녀는 다시 한번 “어머,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더니 정태의에게 웃음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정태의가 애매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그때 현관문을 열며 리하르트가 나왔다.
아마도 그녀를 태운 차가 현관 앞에 멈춰 선 것을 보고서야 나왔을 그는, 평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 다정한 웃음으로 그녀를 맞았다.
“비앙카 숙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몹시 친근한 사람을 맞는 것처럼 두 팔을 약간 벌리며 리하르트가 다가서자, 그녀는 돌아서서 리하르트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빛을 밝힌 듯이, 여태껏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기쁘고 감격스러운 얼굴이다.
“어머나, 리하르트. 정말로 많이 컸구나! 사랑스런 리하르트, 이렇게 늠름해지다니.”
그녀는 리하르트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리하르트는 자신을 꼭 끌어안는 그녀의 등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고 흘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죄송해요.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일정에 차질이 조금 생겨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났지 뭐예요. 크리스토프만이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어머나, 무슨 말이니. 보내 준 차를 타고 편하게 왔으면 됐지, 집안을 위해 바쁘게 일하는 네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조금도 없단다. 타르텐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데, 아무렴.”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웃는다면 저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석상처럼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본다.
그러나 그와 꼭 닮은 그녀가 저렇듯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나란히 두고 보아도, 그가 웃음을 지으면 저런 느낌일 거라는 상상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가 웃는다면 저렇게 화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 더――.
“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어르신을 뵙고 인사를 먼저 드려야죠.”
“어머, 그래, 그렇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손을 마주치며 그렇게 속삭이더니, 리하르트가 열어 준 문 안으로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던 크리스토프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막 현관문을 통과하려 할 때.
“크리스토프, 너는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비앙카를 위해 현관문을 열어 주고 있던 리하르트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눈길을 주자 리하르트는 몇 걸음 앞서가던 비앙카에게 웃으며 청했다.
“크리스토프는 저와 함께 가도 괜찮겠지요, 비앙카?”
그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란 듯이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그럼 물론이지. 얼마든지 그렇게 하렴. 그 아이가 네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구나, 리하르트.”
그녀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띠고 리하르트에게 말했다. 그런 뒤 그녀의 뒤로 다가온 사용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잠시 그곳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태의는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미묘한 위화감이 든다. 그러나 그 위화감의 정체를 언뜻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곧 눈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곤 짐짓 웃음을 지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구나. 어딜 가든 가족이라는 걸 알아보겠는걸.”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응,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예 넋이 나간 것도 아니고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유난히 조용했다. 약간 아래로 내리뜬 눈은 주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까부터 그랬다.
그녀가 도착할 즈음부터 본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 크리스토프는, 기다리는 내도록 조각상처럼 계단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태의가 내려가 그에게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짤막한 대답만 할 뿐, 정태의의 말을 귀담아 듣는 기색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거나 못 들은 듯하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마치 사람이 바뀌어 내성적이고 고요한 성격이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까.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그때,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눈동자만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그 눈동자에 불쾌하고 냉랭한 빛이 서린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들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기라도 한 듯 어깨나 팔 따위를 쓸어내리는 동안, 그는 다시 평소와 같은 느낌을 되찾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얼굴은 희미하게 굳어서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하군.”
문득 일레이가 웃었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데도 변한 게 없어.”
“그렇군. 나도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그 정도쯤 되었나.”
손을 꼽으며 기억을 되새겨 보는 듯하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그래도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겠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일레이가 대신하듯이 대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휴가를 받았다고 들은 게 4년 전이었으니, 그래도 최소한 4년은 되었을 테지.”
“오랜만의 모자상봉이었군.”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정태의는, 그제야 불현듯 조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서던 그 순간 이후로 한 번도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지 않았다. 저택으로 들어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녀는 의례적인 인사 한 마디 말고는 크리스토프에게 말을 붙인 적이 없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그렇듯.
묵묵히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토프에게 냉랭하게 말한다.
“볼일이 있다면서. 안 가?”
더 이상 그런 류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 앞에서,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볼일이라. 그렇군. 뭘 할까. 오늘의 일정은 마쳤고…….”
생각에 잠긴 듯 흠,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별 일도 없었는데 사람을 붙잡아 놓았다는 거군.”
불쾌한 빛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리하르트는 우습다는 듯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다가 낮고 부드럽게 대꾸한다.
“아니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이니 계속 그녀와 함께 다니는 편이 나았나? 그렇다면 마음 느긋하게 가지도록 해, 크리스토프. 오늘부터 그녀는 승계 결정이 날 때까지 타르텐에 머무를 테니 원할 때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녀가 너를 만나길 원할 경우에 말이지만.”
크리스토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리하르트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그 입에서는 반론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정태의는 불편한 마음이 들어 혀를 찼다. 그리고 목덜미를 긁적이며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를 싫어하시는 모양이군요.”
다소 단도직입적인 말이었지만, 그 외에는 달리 이 자리를 수습할 만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이 화제를 접기를 바랐던 정태의의 뜻과는 달리, 리하르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녀만큼 타르텐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이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지 않는데요, 그 말은.”
정태의는 한숨 섞어 말했다. 리하르트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문득 크리스토프에게 그 웃음 띤 눈길을 주면서 나직이 말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타르텐에 있어서 가장 반골이라고 할 수 있는 너는 그녀에게 충성을 다 하는데. 비록 그녀의 사랑은 타르텐만을 향하고 있어 네게 돌아올 몫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돌변했다. 분노를 넘어서 증오로, 증오를 넘어서 살의로.
명확하게 느껴지는 살의가 리하르트를 향하고 있는데도, 리하르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이 웃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짐짓 두 손을 들어 보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좋아. 오늘은 네가 좋을 대로 해. 지금 곧 그녀를 만나러 가든―아마도 어르신의 방에 있을 테지―, 혹은 네 방으로 돌아가 인형처럼 앉아 있든.”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하는 리하르트를 한동안 선뜩한 눈으로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걸음을 돌렸다. 그 걸음은 곧바로 서익으로 향했다. 화가 난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 이내 서익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
이곳에 온 뒤로 아침마다 줄곧 크리스토프를 깨웠다.
크리스토프를 깨우는 것이 일과가 되었을 만큼 이제는 익숙해진 일인데도, 깨울 때마다 생각했다. 피그말리온은 틀림없이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고.
아침에 약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깨우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정태의가 방 안에 들어가서 크리스토프의 침대 옆에 서도 계속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 정태의는 깨우기 전에 몇 분쯤,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아서 크리스토프를 구경한다.
잠버릇이 얌전한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워서 꼼짝도 않았다. 자세히 보면 가슴이 약간 오르내리지만, 피부가 유달리 하얀 탓도 있어 얼핏 보면 밀랍으로 곱게 빚어 놓은 인형 같기도 하다.
“……크리스토프.”
시간이 되자 정태의는 그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면 아침잠에 약하면서도 잠귀는 밝은 편인 그는 천천히 눈을 뜬다. 잠들어 있던 자세 그대로, 눈꺼풀만 올린다.
그 순간, 정태의는 조각상이 인간으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듯한 감격마저 느끼곤 했다.
아침마다 보지만 볼 때마다 감동스러운 얼굴이다.
“일어나. 시간 됐어.”
정태의는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걸고는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를 들이고 커튼을 묶었다.
“햇빛 끝내준다……. 이런 날엔 놀러를 가야 하는데. 오늘은 일정이 어때, 또 빡빡해?”
중정에 한바탕 물을 뿌렸는지, 중정의 야트막한 정원수며 풀잎 따위에 맺힌 물방울 위에서 햇빛이 부서져 눈부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중정을 내려다보던 정태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혹시 다시 잠들었나 싶어 돌아보자 크리스토프는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아직 꿈속에 젖어 있는 것처럼 몽롱하다.
“크리스토프. ……오늘 아침에도 기분이 안 좋아?”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유리 눈동자가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러나 정말로 정태의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 한동안 말이 없다.
“크리스토프?”
정태의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숨처럼 속삭인다.
“괜찮아. 아직 잠에 취해서 그래. 꿈을 꿔서.”
정태의는 창틀에 기대어 팔짱을 낀다. 아직도 몽롱하게 이불자락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꿈인데.”
“어릴 적 꿈. 그런데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냐. 그냥 어린 내가 나오는 꿈이야.”
“어떤 거였어?”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잠에 취한 탓인지, 혹은 잠에서 깨어나 꿈의 기억이 급속하게 사라지는 탓인지, 그의 입에서는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따랐다.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가 건네어주자 잠시 그게 뭔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곧 알겠다는 듯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말을 한다.
“사람들이랑 말이 안 통하는 거야. 분명히 내가 모르는 언어는 아닌데, 말이 안 통해. 그들도 내가 쓰는 언어를 모르지 않는데. 나는 그들의 말을 못 알아듣고, 그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듣고. ……그래서 결국 말을 못하게 됐어.”
꿈 이야기라기에는 지나치게 줄거리가 없었지만, 이야기를 마칠 즈음이 되자 물컵은 다 비었고 크리스토프도 그럭저럭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컵을 협탁에 올려놓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마지막으로,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었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눈으로 협탁 위의 시계를 쳐다본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여덟 시밖에 안 됐잖아.”
“응. 슬슬 일어나야지.”
“여덟 시 반부터 나갈 준비를 하면 되는데.”
평소보다 고작 30분 일찍 깨웠을 뿐인데, 크리스토프는 마치 세 시간쯤은 수면을 방해당한 것처럼 못마땅하게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잠이 통 안 깨고 머리가 무겁더라니…….”
부루퉁하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기껏 깨어 놓고선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정태의는 얼른 그 이불을 끌어내려 버린다.
“크리스토프. 나가기 전에 어머니한테 가서 아침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그러려면 지금은 일어나야 할 텐데.”
정태의는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다시 한번 굴려 보며 말했다. 그래, 다소 여유있게 잡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일어나는 편이 시간에 쫓기지 않아 좋다.
그러나 정태의가 그렇게 말을 한 순간, 이불 안에 파고들어 있던 크리스토프가 이불을 약간 내렸다. 턱 바로 아래까지, 얼굴이 보일 만큼만 이불을 내린 크리스토프는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본다.
몹시 이상한 얼굴이었다. 뭔가 기묘하고 기이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정태의를 한참 바라보다가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날 부르셨어……?”
희미하고 조그만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정말로 어리고 천진한 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정태의가 약간 이상한 얼굴을 한다.
“그건 아니지만……, 아침 인사를 하는데, 불러야만 인사하러 가는 건 아니잖아.”
정태의가 대답하자 크리스토프의 커다란 눈이 반쯤 감긴다. 의혹과 놀람이 사라지고 아아, 뭐야, 라고 하는 듯한 눈이다. 가만히 실망을 하는 것 같은.
크리스토프는 다시 이불을 조금 끌어올렸다.
“부르시지 않으면 안 가.”
그 담담한 목소리에 정태의는 눈만 껌벅이며 그를 본다.
아니……, 목소리는 별로 화난 것 같지도 않고 앵돌아진 빛도 없는데 어째 말하는 게…….
“어이, 어이. 엄마랑 싸우고 토라진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소리야. 그래도 같은 집에 있으면 어른한테 아침저녁으로 인사는 드려야지.”
정태의는 다시 이불을 끌어내렸다. 이번에는 아예 허리 아래까지 확 당겨 버린다.
크리스토프는 약간 성가신 듯 낯을 찌푸리더니, 그 찌푸린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끄응,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린 그는 신음 섞인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다시 말하도록 하지. ‘부르시지 않으시면 못 가’.”
크리스토프는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정정했다.
딱 한 글자를 조용히 정정한 크리스토프는 문득 낯을 찌푸리더니, 쓸어올리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움켜쥐었다. 뭔가 속이 뒤틀린 듯 버릇처럼 그렇게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폈다 하다가, 그는 침대에서 나와 버렸다.
“괜히 일찍 깨워서 머리만 무겁게……. 씻을래.”
못마땅하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욕실로 가던 걸음을 멈칫 멈추더니 다시 돌아와 서랍장에서 약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대충 부어낸 알약을 세지도 않고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써…….’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마치 사탕처럼 오독오독 맨입에 씹으며 그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 한 뼘쯤 틈을 두고 열린 욕실문 사이로 물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정태의는 고개를 한껏 기울이고 있다가 천천히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로들 두려워하는 모자지간이지.’
문득 가볍게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반응만 다를 뿐이지,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해. 안 느껴지던가?’
정태의가 크리스토프의 어머니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 옆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일레이가 불쑥 중얼거린 말이었다.
두려워하는……하고 그의 말을 따라하던 정태의는 그 꼭 닮은 모자를 생각했다.
확실히 이렇다하게 짚이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지, 정태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크리스토프는.
……크리스토프는, 분명히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평소와 눈에 띄게 달랐다. 그녀와 관련된 일에도 마찬가지다.
“……만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는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자기 귀에 닿고서야, 자신이 혼잣말을 했다는 걸 깨닫는다. 얼른 고개를 저으며 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녀는 타르텐으로 왔고,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우연히 마주치기는 힘들 만큼 드넓은 저택이라지만 이제 그들은 같은 집 안에 있었다.
그러면 크리스토프는 앞으로 줄곧,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지내게 되는 걸까.
정태의는 어제 보았던 그 조용하고 내성적인 청년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시점에서 보면 평소의 성격보다는 어제의 그 모습에서 엿보인 성격이 훨씬 더 건설적이겠지만, 정태의는 그 모습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냐……, 생각해 보면 그놈은 평소 상태가 살짝 정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어제 그 편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정태의가 이부자리 정리를 말끔하게 다 마치고 늘상 깨끗한 방 안도 한 번 더 둘러봤을 때, 욕실의 물소리가 멎고 크리스토프가 나왔다.
바닥에 물 떨어지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거의 말끔하게 닦고 나오는 크리스토프는 여느 때와 같이 곧바로 옷장으로 가 옷장 안을 들여다보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이제 어머니와 종종 마주치겠네.”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을 때, 마주쳤을 때, 크리스토프가 눈에 띄게 조용해지며 미묘하게 얼어붙는 것을 떠올렸다. 앞으로는 그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 내키지 않는 감정을 씁쓸하게 되짚으며.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다시 옷장을 향한다. 그의 손이 하얀 드레스셔츠를 꺼내었다.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걸. 어머니는 동익에서 나오지 않으실 테니까.”
“음? 아, 하긴 건물 자체가 달라지면 그렇긴 하겠지만, 산책로 같은 데에서 가끔 동익에 사는 영감님들을 마주치곤 하잖아. 새벽에 다니다 보면.”
“새벽에 안 다녀서 몰라. 나는 마주친 적 없어.”
“……. 음. 새벽에 다니면 가끔 비슷한 얼굴들을 마주쳐.”
정태의는 오늘 아침에도 스쳐 간, 며칠에 한 번쯤은 마주치는 그 엄격해 보이는 ‘당숙님’을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크리스토프는 그 옆에서 단정한 감색 바지를 입고, 그 바지와 같은 빛깔로 조그만 무늬가 들어간 타이를 꺼낸다.
“산책은 동익 뒤쪽으로 따로 딸려 있는 안뜰을 거닐기를 좋아하시니까. 티타임도 그쪽에서 즐기실 테고. ……어머니가 부르시지 않는 한은, 드레스덴으로 오시기 전과 마주치는 빈도수는 거의 비슷할걸.”
드레스덴으로 오기 전에 마주치는 빈도수는 딱 잘라 0이었다.
어, 그래, 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정태의의 앞에서, 심플한 체크무늬 재킷을 꺼내며 크리스토프가 덧붙인다.
“아마도 가끔 리하르트가 나를 부르겠지.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
정태의는 입을 다문다.
또다시 일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리하르트에게 있어 비앙카는 크리스토프를 괴롭히기에 딱 좋은 패라고. 절대적으로 유효하면서도 가장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패.
크리스토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알면서도 리하르트가 의도하는 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패의 절대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정태의는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같은 담장 안에 살게 되었으니 앞으로 크리스토프가 줄곧 그렇게 살얼음처럼 얼어붙어 있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면서 왔던 차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소보다 다소 기운이 떨어지는 듯하긴 했지만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마따나 마주칠 일은 거의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정태의 앞에서, 그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오간 대화의 주제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어차피 일주일이면 끝이야. 일주일만 더 있으면 승계가 결정되니까. 그러면 나는――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아쉬운지, 혹은 시원한지. 어느 쪽이든 더 이상 그는 이곳에 묶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정태의가 베를린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친다.
“그래. 나도 뭐……딱히 드레스덴을 일부러 찾을 이유는 없겠지. 그래도 한 달쯤 있었는데 아쉽긴 하네.”
“나는 이십여 년을 살다가 떠났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어.”
크리스토프는 옷장에 딸린 작은 서랍을 열어 커프스를 꺼내며 언짢은 투로 말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러나 문득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그 뒷말은 끝내 잇지 않았다.
정태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돌아섰다. 다시 창가로 가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질 만도 한 중정의 정경을 내려다본다. 수많은 것들은 익숙해지면 안녕이다.
“승계 결정이라……. 그래도 떠나기 전에 리하르트에게 축하 인사는 하고 떠나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태의는, 문득 뺨에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옷장 앞에 서 있던 크리스토프가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주 찬찬히 정태의를 훑어보는 눈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점점 가늘어진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 스스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른 때와 별다를 것도 없다.
“……왜.”
뭐가 묻기라도 했나 자세히 살폈지만 역시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아 정태의가 좀 머쓱하게 묻자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낯을 찡그렸다.
“너 그 옷.”
“내 옷이 왜.”
정태의는 다시 한번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지극히 무난한 차림이다.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고.
“평소에 그냥 다니는 건 상관없는데……. 그날은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해. 외부에서도 사람들이 오니까. 변형 정장도 그다지 좋지 않고, 클래식한 정장으로 입는 편이 좋아.”
크리스토프는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정태의는 잠시 동안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다가 미심쩍게 묻는다.
“나까지 그렇게 입어야 돼? 나는 타르텐도 아니고, 관계자도 아니고, 그냥 더부살이 식객이나 마찬가지인데?”
“승계가 결정 나면 생판 처음 보는 인간들도 축하한다고 몰려드는데, 그 와중에 축하인사도 안 하고 모른 척할 거라면 축연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축연…….”
정태의는 낯을 찡그렸다.
듣는 순간 거부감이 드는 단어다. 연회, 축연 등등.
“굳이 그런 데에는 참석 안 해도 나중에 따로 만나서 축하하면 되잖아.”
“승계 결정이 되고 나면 며칠 동안 결정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친부모라 해도 만나기 힘들걸. ……게다가.”
크리스토프는 말을 끊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체크해 보기라도 하는 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한다.
“……나는 승계 결정이 나는 즉시 타르텐에서 떠날 거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정태의에게 날아왔다. 흘끔, 정태의를 쳐다보고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대충 한 달쯤 뒤에는 그를 만나 축하인사를 해 줄 수 있겠지.”
그 말을 듣고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에게 딸린 손님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타르텐의 손님이 아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프가 이 집에서 나갈 때에 정태의도 같이 나가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는 한 달이라니.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도 없는데 내가 여기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 ……그런데 떠나기 전에 책은 꼭 돌려줘.”
안 그러면 카일이 울 거야,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한 번 더 책의 반납을 촉구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정태의의 그 말은 못 들은 것처럼 무시한 크리스토프는 넥타이의 매듭이 마음에 안 드는지 설핏 눈살을 찌푸리더니 풀어서 다시 매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그날은 지나치게 눈에 띄지는 않되 너무 수수하지는 않은 걸로 깔끔하게 입도록 해.”
“어, 음……, 그런데 꼭 정장이어야 해? 깔끔한 셔츠와 면바지 같은 건 안 되나?”
“……. 그렇게 입고 그 자리에 나타나면, 나랑 마주치더라도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줘.”
아침마다 옷장 안을 노려보며 옷을 고르고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떤 활동을 하든 거기에 어울리는 드레스코드는 칼같이 맞추는 남자 크리스토프 타르텐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정태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곤란하네…….”
조그맣게 중얼거린 혼잣말이 들렸는지, 넥타이를 새로 매어 매듭을 정돈한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니, 정장은 없거든.”
정태의가 난처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매듭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크리스토프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안 가져왔어?”
“안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지만, 원래 없어.”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배범으로 산 지 이미 수 년.
베를린에서는 거의 집에서만 살았다. 아예 갇혀서 산 건 아니라 동네 산책 정도는 자유롭게 다녔고 종종 교외까지 놀러 다니기도 했지만, 그 어디서든 정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부터 정장은 답답해서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정태의의 옷장에는 정장이 없었다.
반드시 정장을 입고 나가야 하는 자리의 경우―몇 년을 지내오면서 그런 자리는 제임스의 결혼식, 딱 한 번 있었다―는 정태의와 체격이 비슷한 카일에게서 옷을 빌려 입었다.
그러니 당연히 정장을―카일에게 빌려서―이런 데까지 챙겨 왔을 리가 만무하다. 애초에 여기로 올 때에 정태의는 며칠쯤 들여 책을 찾아서 곧 돌아갈 예정이기도 해서, 이렇게 오래 머무를 줄도 몰랐다.
정태의가 가볍게 말을 하기가 무섭게, 크리스토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의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정장이 원래 없어……?”
“응.”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그야 계절별 정장은 말할 것도 없고, 승마복, 사냥복, 등산복 등등 없는 옷이 없는 크리스토프가 보자면 정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정태의가 보기에는 용도별로 거의 모든 옷을 다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프 쪽이 신비롭다.
“그럴 수도 있지……. 현실로, 지금 네 앞에 있잖아.”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가슴께를 톡톡 두드렸다.
크리스토프는 멍한 얼굴로 빤히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그 시선을 앞두고, 정태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크리스토프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도끼눈을 떴다.
“왜 여태 말 안 했어!”
갑자기 벌컥 소리를 지르는 통에 정태의는 당혹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응? 아니, 나는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 게다가 거기에 정장을 입고 가야만 한다는 말도, 지금 너한테 막 들은 참인걸.”
“일주일밖에 안 남았으면 옷을 맞출 수 없단 말이야! 선택의 여지라곤 없이 기성복을 사야 된다고, 기성복!”
엄청나게 험악한 기세로 외치는 그의 목소리만 듣자면, 기성복을 사야 한다는 건 마치 텅 빈 옷장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라하고 구멍 난 누더기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인 듯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니 뭐 기성복이라도 나는……, 그런데 그거 꼭 사야 하나? 앞으로도 거의 안 입을 텐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카일에게서 딱 한 번 양복을 빌렸을 때, 카일도 역시 놀라는 기색을 띠며 차라리 옷을 새로 맞추라고 했지만 정태의는 거절했다. 이후로 양복을 입을 자리라고 해 봐야 카일이나 숙부, 혹은 형이 결혼하는 경우나 혹은 정반대의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을 경우일 텐데, 전자는 정태의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향후 10년은 이루어지기 힘들지 싶었고 후자는 별로 미리 대비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뭐 그렇다면, 하고 순순히 물러섰던 카일과는 달리, 크리스토프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사야 해. 인간이 살아가는데 격식에 맞춘 옷 한 벌이 없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단호하게 말하는 그 기세에 눌려서, 정태의는 차마 그에게 옷 좀 빌려 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만있자, 나랑 체격이 비슷한 게 이 집에서 또 누가 있더라, 하고 머릿속으로 명부를 굴려보며 정태의는 건성으로 ‘응, 그래야지.’ 하고 대답했다.
***
“응? ……글쎄. 아무래도 클래식한 디자인이 제일 무난하고 좋겠지?”
요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정태의는 생각했다.
옷을 사기는 사야 하려나 보다,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럭저럭 친하다고 할 만한 인간 가운데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없어, 역시 사람들이 좀 쳐다보든 말든 있는 옷으로 깔끔하게 입고 갈까 생각하던 정태의였다.
옷 고민이라는, 자신의 인생에서는 고민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주제로 고민을 하던 정태의는 바로 앞의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고 앉아 오락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해가 중천인 이 시간에 저 나이에 저런 자세로 저런 걸 가지고 있는 모습을 앞두니, 폐인으로 가는 길이 뭔지를 보는 것 같았다―요한에게 슬쩍 운을 떼어봤다.
이놈이라면 ‘어, 난 청바지에 후드티 입고 갈 건데.’라고 말할 것 같기도 했고, 또 그런 답변을 들으면 정태의는 자신의 셔츠와 면바지에 커다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정태의가 승계 결정일날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냐고 물어보자, 뜻밖에도 요한은 그래 봬도 태생이 은수저라 그런지 처음부터 정장 말고 다른 옷은 아예 생각도 안 한 모양이었다.
뭘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던 요한이 대답한 말이 저것이었다. 아무래도 클래식한 디자인이 제일 무난하고 좋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태의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뭔가를 결심한 기색으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정태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요한은 게임기에만 정신을 팔고서 중얼거렸다.
“어디 가, 옷 사러?”
“옷 살 돈 얻으러.”
베를린을 떠나 드레스덴으로 오면서 정태의는 거의 가지고 온 게 없었다.
원래는 책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싶어 사나흘이나 머무르다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여차하면 당일치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카일의 심각한 당부를 따라 짐을 좀 들고 오긴 했지만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지갑에도 돈이 없었다. 돌아갈 차비 정도와, 며칠 머무르면서 쓸 비상금 정도.
그 비상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저택에 들어온 뒤로 돈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돈 들어갈 일도 없었다. (오히려 여기에 들어와 죽어라고 서재 정리며 청소 등등의 잡일을 한 걸 생각하면 월급을 모아서 돌아가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얼마간의 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양복을 살 만한 돈은 못된다. 양복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청바지와 면티나 살 정도의 돈으로는 못 사겠지.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손 벌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손 벌릴 수밖에.
그리고 마침 이 저택에는 우연히도 정태의가 아주 잘 알고 지내는 다이아몬드 숟가락이 하나 있었다.
“일레이, 잠깐 얘기 좀 해도 돼?”
요전에 한 번 가 본 바 있는 동익의 귀빈실로 찾아가 문을 벌컥 연 정태의는, 텅 비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미 시각은 저녁을 넘어서 있었다. 식사 시간도 지났으니 아마도 방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왔는데, 없다.
“……. 일레이, 없어?”
정태의는 방문 안으로 들어서서 방을 둘러보며 문을 통통 두드렸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봐, ……화장실에도 없네. ……테라스에도 없고. ……침대 밑에는 그 덩치로 못 들어갈 거고 옷장 안에도 힘들 테고…….”
정태의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한 번 휘익 둘러보곤 침대 위에 달랑 앉았다.
어딜 갔을까.
타르텐에서의 그의 행동반경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낮 시간이 아닌 때에 그가 방에 없다면 대개는 정태의의 방에 있거나 아니면 산책 중.
“…….”
그래도 불을 켜 놓고 간 걸 보면 오래지 않아 돌아올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잠시 그를 찾으러 가 볼까 하던 생각을 지우고 거기에서 뒹굴며 기다리기로 했다. 공연히 찾으러 나섰다가 엇갈리기라도 하면 시간 손해, 노력 손해다.
……하지만 그보다는.
침대에 덜렁 올라가 누워 뒹굴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찬찬히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도 그렇고 책상도, 책장도, 너른 방 구석에 있는 미니바에서 샹들리에까지.
생활감이 없는 방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이 석 달 가까이 머물렀을 이 방은, 갖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아무런 불편할 것이 없었지만 가장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사람이 그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건 방 탓이 아니라 사람 탓이지…….”
정태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생각해 보면 몇 년 전, 그들이 처음 베를린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한동안 그랬었다. 들어간 지 사흘 만에 그 집에 완전히 익숙해진 정태의가 자기 집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방에 온통 자기 냄새를 묻혀 놓고 있을 때, 일레이는 그 비어 있는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제법 오랫동안.
그는 어디를 가든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은 한 자신이 있었던 자취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다. 성격 자체가 원래 그랬다.
“성격 삭막한 건 여전한 모양이네.”
정태의는 낮게 혀를 찬다.
이제는, 베를린의 집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사소한 곳에서 그의 자취를 느끼곤 했다. 주로 일레이 자신의 방보다는 정태의의 방에서 느낀다는 점이 좀 미묘하긴 했지만.
그곳에는 일레이가 살고 있다는 자취가 남아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정태의의 방에는.
“……. 갑자기 내 방이 그리워지네…….”
정태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 승계 결정이 되고 나면 정태의는 베를린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베를린을 떠올리자 절로 연상되는 일이 하나.
정태의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전화를 집어들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전화를 안 했었다. 맥주 고맙게 잘 마셨다고.
신호가 몇 번 울리지 않아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늘 연락하기가 편했다.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태이구나! 그럼, 이쪽은 별일 없지. 자네는 어떤가?」
정태의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반가워하는 기색이 확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목소리다.
“저는 뭐 비슷하게 지내요. 뭔가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렇지! 바로 오늘 말이야, 바로 오늘! 자네 타이밍 정말 잘 맞추는군, 바로 오늘! 콩고 브라자빌의 소규모 회원제 옥션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책이 도착했지 뭔가! 그게 뭔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응?」
“……. 아니오, 절대로 짐작 못하겠는데요…….”
거기에도 옥션이 있었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그런 곳의 소규모 회원제 옥션은 또 어떻게 알고 갔을까 싶은 의혹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카일은, 몇 년을 같은 집에서 살아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카일이 기쁨에 들떠 말한 책제목은 정태의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일의 목소리가 한 톤쯤 높아져서 저 정도 성량에 저 정도 빠르기로 말을 할 정도라면 대충 모이어스의 책쯤 되는 가치가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크리스는 책을 돌려주던가?」
“아니요, 아직……. 말해 봐도 아예 못 들은 척해요.”
정태의가 머쓱하게 말하자 그제야 카일의 목소리가 한 톤 가라앉는다. 성량도 약간 줄어들고 말의 속도로 조금 느려졌다.
그래, 그렇군……하는 목소리는 조금 전에 비해 매우 우울하게 들렸지만, 그래도 오늘 얻은 크나큰 기쁨과 상쇄되어서인지 이제야 평소와 비슷한 목소리가 되었다.
“아, 며칠 전에 보내 주신 맥주 잘 마셨습니다. 맛있던데요.”
정태의는 전화한 목적을 되새기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카일도 기쁘게 말한다.
「아, 그거. 그래, 맛있게 먹었다니 기쁘군. 오래 전에 창인이 독일에 왔었을 때 우연히 마셔 보곤 맛있다고 했던 맥주야.」
“숙부님이요?”
「음. 그러고 보니 그가 자네 형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한 열흘? 아니, 열흘도 안 남았나?」
열흘 남짓이거나 그보다 덜 남았다면 승계 결정일과 거의 차이가 안 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프랑크푸르트는 포기한 정태의는 그렇네요, 하고 맞장구만 치고 만다.
「원한다면 그 맥주 더 보내 줄 수도 있어. 지금 제임스가 그쪽 지방에 가 있거든.」
“예, 그럼 부탁드릴게요.”
정태의는 1초쯤 고민하다가 활짝 웃으며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일을 덧붙인다.
“아, 그럼 맥주 보내 주실 때, 500밀리짜리 생수도 한 병 같이 넣어서 보내 주세요. 값은 싸면 쌀수록 좋겠어요.”
「생수? 500밀리? 싼 걸로?」
갑자기 영문 모를 주문을 덧붙이는 정태의에게 카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없는 방을 괜히 한 번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맥주 보내 주셨을 때 일레이가, 자기한테는 500밀리짜리 싸구려 생수 한 병도 안 준다고 투덜거렸거든요.”
「뭐? 아니 저는 나한테 10유로센트짜리 사탕 하나라도 보내 준 적이 있나! 만날 태이 자네한테만 이것저것 사다 안긴 건 생각도 안 하고?!」
당장 벌컥 화를 내는 카일이었다.
“하하, 그 녀석이 속이 좀 좁잖아요.”
뺨 한 대 때리고 도망갔다고 해서 대전차포를 들고 사람을 쫓아오는 녀석인데, 하고 속으로만 덧붙이며 정태의가 카일을 달래자 카일은 그렇지그렇지, 하고 동생 험담을 하며 신나했다.
이 형제들도 참……,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카일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곤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베를린에 있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좀 더 좋아진다.
나른하게 도로 침대 위에 누워서 뒹굴, 엎드렸다. 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기지개를 켜자 손에 바닥이 닿았다. 침대 아래에 깔려 있는 보들보들한 러그가 손가락 끝을 간질인다.
러그를 슬슬 문지르며 기분 좋게 바닥을 휘젓고 있는데, 그때 문득 손에 뭔가 걸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
“……?”
정태의는 침대에 엎드린 채 손을 더듬거렸다. 침대 아래쪽으로 손에 닿는 그 감촉은 단단하고 매끄럽고 네모진 상자……같다. 납작하고 제법 큼직한.
“움……? 침대 밑이면 옷상자……, ……같지도 않고, 침대 밑에 수납되어 있을 만한 감촉은 아닌데…….”
정태의는 슬슬슬 그것을 끌어당겨 보았다. 꽤 묵직했지만 아예 꿈쩍도 않지는 않았다. 끙, 하고 힘을 주자 질질 끌려나온다.
침대 밑에서 나온 것은 상자였다. 까맣고 큼직한 철제 가방.
그리고 정태의는 그 상자를 본 기억이 있었다. 예전에 이 방에 왔을 때에 봤었다.
“어, 이건…….”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고 혼잣말을 하기도 꺼려지는 물건이다. 도청기.
범죄밖에 연상되지 않는 그 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마디로 툭툭 두들겨 보던 정태의는 가방의 잠금쇠를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는 자세히 못 봤는데 이건 어떤 구조로 생겨먹은 걸까. 도청기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정태의가 봤던 도청기라고 해 봐야 대부분은 교육용이나 시범용이라서, 이렇게 주파수 대역이 높은 정식 도청기는 써 본 적이 없었다.
“구조는……, 역시 기본적인 부분은 비슷한가.”
복잡하게 회로가 이어져 있긴 했지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얘를 움직이려면 어디 보자, 제일 먼저 요쪽 회로를 여기에 잇고……, 어, 이거는 위치가 여기가 아닐 거 같은데…….”
남의 기계를 툭툭 건드려 보는 사이에 정태의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을 반짝이며 기계만 열심히 들여다본다.
어릴 적부터 이런 건 좋아했다. 복잡하지 않은 가전제품은 곧잘 분해했다가 다시 맞춰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형에게 새로 분해해서 조립해 달라고 떠넘기면 되니까 걱정할 것도 없었다.
연결이 풀려 있는 회로들을 어렵잖게 다 이은 정태의는 스위치를 톡톡톡 올린다. 곧 빨간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지. 이렇게 하면 제대로 동작하는 거지. ……어디, 제대로 움직이는 것 맞지?”
정태의는 이어폰을 끌어다가 귀에 꽂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 회로를 잘못 이었나…….”
정태의는 볼을 긁적거리며 다시 기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엎드려 뻗어서 팔에다 턱을 괴고 한참이나 바닥의 그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볼을 긁적거린다.
“모르겠네. 다 맞는 것 같은데…….”
도청기를 그 본래의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머릿속에서도 그런 생각은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 단지 분명히 작동해야 할 기계가 움직이지 않자, 기계 전반에 관한 자신의 능력에 회의가 살짝 밀려왔다.
“음……, 아니면 주파수를 고쳐 놨나?”
정태의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갉작거리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몇 분쯤 더 고민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에이, 모르겠다, 하고 막 포기하려던 무렵이었다.
한쪽 귀에만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뭔가 기척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 잠깐, 이거 뭔가 들리는 거 맞지, 응.”
기계를 사랑하는 소년으로 돌아간 정태의는 혼자 신나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볼륨을 약간 높여 본다.
아직 무슨 소리인지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약간 빠르고 규칙적인 울림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다른 소리가 섞여 그 소리도 점차 커진다.
――철컥.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태의는, 조금 전까지 들렸던 소리가 송신기가 설치된 공간의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그것은 문이 열리는 소리.
「결국 최종적인 연락은 기한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주겠다는 뜻이로군. 무슨 속셈인지 모를 바도 아닌데 성가시게 구는군.」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일껏 방까지 찾아왔는데 방 주인은 불 켜 놓고 어딜 갔나 했더니, 이어폰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송신기의 위치를 바꿔 놓지 않았다면, 아마도 리하르트의 방일 곳에.
「글쎄, 또 모르지. 막판에 갑자기 이야기를 뒤집어 전혀 다른 조건을 제시할지도.」
「차라리 그러는 편이 네 입장에선 더 낫겠지.」
송신기의 위치는 그대로인가 보다. 리하르트가 대꾸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제야 정태의는 자신이 도청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생각해 보니 나 지금 범죄를 실천하는 중이잖아…….
조용히 이어폰을 빼고 스위치를 내리고 회선도 도로 뽑아내고 가방을 닫아 침대 밑으로 넣어 두는 편이 좋겠지, 정태의는 양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태의가 막 이어폰을 귀에서 떼려고 하던 그때였다.
「말리크는 뭐라던가?」
갑자기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그들 두 사람의 기척 말고는 따로 들리는 소리가 없으니, 리하르트가 일레이에게 묻는 말이다.
「흠?」
「아지즈는 정태이를, 말리크는 너를 찾아갔다면, 비슷한 용건이기는 하되 같지는 않았을 테지. 아지즈가 했을 말은 그럭저럭 짐작이 가는데―….」
리하르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일레이는 침묵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정태의도 분명 얼마 전에 일레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화제가 바뀌어 대답은 못 듣고 말았었다.
……도청도 하는 보람이 있구나, 정태의는 가방 안을 뒤적거려 나머지 이어폰을 하나 더 꺼내었다.
양심의 가책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일레이의 입장을 따지고 보자면 자업자득인 셈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며 마음속에서 양심의 문을 잠시 잠가 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리하르트의 방은 서익에 있으니 일레이가 저 방을 떠나는 순간 재빨리 가방을 정리하고 수납해 넣으면 완전범죄로구나, 하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는 정태의였다.
그러나 일레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 들려온 것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그 의도를, 내가 어떻게 해석하면 좋지?」
희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다. 그러자 잠시 뒤 조용한 웃음소리가 하나 더 들렸다. 이내 리하르트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두 손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어떻게 나올 생각인지, 그 향방을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내 향방? 간단해.」
일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없애 버리기는 곤란하고, 마음에는 안 들고……. 그렇다면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지. 기왕이면 영영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이면 더욱 좋겠고.」
「하아.」
리하르트는 동의하는 건지 그 반대인지 짐작하기 어렵도록 짧게 중얼거렸다. 그런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잇는다.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게 그들의 진심일지 혹은 다른 걸 꾀하고자 함일지는 알 수 없지. ……개인적으로 보자면 나는 후자라고 보지만.」
「후자라. 그들이 원하는 게 달리 더 짚이는 데가 있나 보지.」
일레이가 은근한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말했다. 리하르트가 대답한다.
「이를테면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원하던 보물을 손에 넣는다면 그걸 다른 사람이 가로채지 못하도록 그 지도는 태워서 없애 버릴걸. 언제 남이 가로채어갈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애초에 싹부터 잘라내는 편이 나으니.」
「아아……, 하지만 이 경우는 불가능해. 지도를 태우면 보물도 같이 사라지거든.」
정태의는 팔에 턱을 묻고 엎드린 채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껌벅였다.
이놈들은 무슨 얘기를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게 한다지. 이거야 무슨 암호해독도 아니고.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혀를 찼다.
정말로 본격적인 도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진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면 정말로 범죄의 길로 빠질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 발은 무릎까지 푹 잠긴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나 어째 저 두 사람이 심도 있게 이야기하는 걸 엿듣는 게 이게 처음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망연히 생각하다가 번쩍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 이미 그랬던 적이 있었다. 지금 이러는 것 같은 고의성은 절대로 없이 그저 도망치다가 우연히 숨어든 곳이 저들의 대화 장소였던 것뿐이지만, 그때도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었다. 그런 뒤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참 많이도 벌어졌었지, 그날 밤엔…….
갑자기 가슴속에 싸하게 솟아오르는 기억들에 정태의는 목이 메어왔다.
지금은 엿들으려는 의도로 이렇게 엿듣고 있어도 멀쩡한데, 그때는 그런 의도라곤 추호도 없었는데 피박을 썼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이 그렇게 공평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더 들어서 좋을 것도 없는 이야기일 것 같고……, 관두자.”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이어폰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한쪽 이어폰을 빼고 나머지 이어폰을 마저 빼려고 했을 때, 또 갑자기 절로 손이 멈추는 이름이 들려왔다.
「보물이라……. 그러고 보니 다른 얘기지만, 얼마 전에 크리스토프가 말하더군. 정태이가 반짝거려 보인다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면 안 들을 수가 없는 법이다. 게다가 뭔가 화제도 아주 엉뚱한 데로 튀어 버렸다.
“…….”
정태의는 뺐던 한쪽 이어폰을 얌전히 도로 꽂았다.
이어폰 속에서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는 흠……, 하고 중얼거리더니 묻는다.
「말하자면 탱화처럼? 머리에 이렇게 둥그런 빛을 이고 있는 그거?」
「어, 비슷한가 봐.」
정태의는 침묵했다.
탱화라……. 자신이 어느새 그렇게 신격화되어 있었을까.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평소에 자신을 대하는 걸 생각하면 결코 그렇게 신성하게 여기지는 않는데.
정태의는 역시 크리스토프의 머릿속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말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짝거려 보인다니, 한 치만 잘못 들으면―아니 잘못 듣지 않았더라도―몹시 멋쩍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멋쩍은 느낌보다 먼저, 일레이가 미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왜, 신경 쓰이나?」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일레이의 대답이 아니라, 리하르트가 덧붙이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어떤 사람이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이면 그 사람에게 반한 거라더군.」
다시 일레이가 흠……하고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다.
「너는 어때, 릭. 처음에 네가 상당한 수고를 들여서 웬 녀석을 라만의 별저에서 빼내더니 베를린으로 데려가서 들어앉혔다는 말이 돌았을 때,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리하르트가 그렇게 묻고 나자, 여태 침묵하고 있던 일레이가 글쎄, 하고 입을 열었다.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인다는 건 잘 모르겠군. 나는 그 녀석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알고 있으니까. 눈코입, 손발이며 손가락발가락이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사진으로 찍어낸 것처럼 기억하고 있지. 현실과 다르게 보인 적은 없어. ……그렇다면 나는 그 녀석에게 반한 게 아닌가 보군.」
일레이가 픽 웃는 기척이 들린다.
정태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뭐랄까,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을지 참 난감하다. 이럴 때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몰래 도청을 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 반짝거려 보이진 않고?」
「그런 적은 없었는데.」
「그래? 크리스토프는 정태이가 반짝거려 보인다고 하더니.」
「제대로 맛이 갔군.」
“야, 야. 네가 할 말이 아니잖아, 그게!”
정태의는 안 들릴 게 뻔한 소리를 벌컥 중얼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생긴 게 평범하고 반짝거리지도 않는다 하기로서니, 몇 년이나 같이 살고 있는 인간을 두고, 좀 괜찮아 보인다는 평가에 당장 나오는 말이란 게 ‘제대로 맛이 갔군.’이라니.
자신과 일레이의 관계에 조그만 회의를 느끼며 애꿎은 베개만 쥐어뜯는 정태의였다.
「하지만 반짝거려 보이진 않는데……가끔 아슬아슬하게 보일 때는 있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일레이가 평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슬아슬, 이라.」
리하르트가 의아한 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정태의 역시 고개를 기울인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치명적이지.」
문득 일레이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렸다. 어딘지 씁쓸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귀에 스민다.
치명적.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다.
「왜, 그가 네 목에 칼이라도 꽂아 넣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아서?」
「설마. 그럴 놈이 아냐.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태이는 결코 나를 해치려고 들지 않을 거다.」
일레이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이번에는 리하르트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이유는 정태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도 말이 잘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레이가 자신을 의심한다거나 경계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해치려고 생각해 본 적도 전혀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확고하게 믿어 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태의는 쑥스럽게 웃었다. 몇 년이나 같이 살아왔던 시간이 드디어 탑처럼 든든하게 쌓이기 시작하나 보다.
「놀랍군, 릭. 네가 그렇게 사람을 신뢰하다니.」
잠시 침묵한 뒤에 리하르트가 진심으로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일레이가 응? 하고 말꼬리를 올리더니 아아, 하고 대답한다.
「아니, 아냐. 내가 말했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라, 태이는 나를 해치려고 들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거지.」
“…….”
탑은 무슨…….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정태의는 다시 한번 애꿎은 베개를 쥐어뜯었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치명적이란 거지?」
그제야 리하르트는 놀랍다는 느낌을 지우고, 그 대신 흥미롭다는 듯이 묻는다. 일레이는 다시 잠깐 시간을 두고,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는 것처럼 느리게 말했다.
「이를테면 그런 거지. 더 이상 나는 혼자 살지 못하는데, 그놈은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을 때.」
「흠……?」
「가끔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 그 녀석이 없으면 무미건조하다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어쩐지……, 막연하게, 더 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일레이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들려줄 생각이 없는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들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왠지 알 수 없지만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난감하게 도청기를 쳐다보았다. 끄기도 그렇고 안 끄기도 그런, 이제 와서는 대단히 처리하기 난감한 물건으로 돌변해 버린 것 같았다.
「무미건조……. 못 사는 건 아니잖아.」
「그러나 나는 평생 술, 담배, 여자 없이 수도원에 갇혀서 살고 싶진 않거든.」
조금 심각한 얼굴로 도청기를 보는 사이에 순식간에 술, 담배, 여자로 전락해 버린 정태의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도대체가 이놈의 이야기는 맥락이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영 왔다갔다거린다. 따라가기가 힘들다.
「과연 치명적이군.」
리하르트가 웃었다. 술, 담배, 여자,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또 없으면 못 살지,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납득한 것도 같다.
「그런데 태이는 그런 게 없어도 살 수 있어.」
일레이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태의는 문득 낯빛을 바꾼다.
치명적이라는 말은 그런 거였다. 없으면 살 수 없는. 숨을 쉬되 숨 쉬는 기분이 들지 않는.
그러나 일레이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정태의에게는 치명적이지 않다. 지금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렸다. 언짢아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우울해서인지.
목숨은 때로 모질다. 가까운 누군가 죽는다 해도 나는 살아 있다. 왜 그 사람은 없는데 나는 살아 있는지 한탄하더라도, 그 사람이 없으면 숨조차 쉴 수가 없더라도, 그래도 나는 산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온전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 역시, 누구나 알고 있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였다.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슬쩍 들어, 마치 도청기가 일레이 본인이라도 되는 듯이 사납게 노려본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나라고, 이제 와서 혼자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봐.”
조용히, 한숨 섞어서.
혼잣말이 아닌 혼잣말을, 정태의는 철제가방 끝을 손가락으로 딱딱 때리며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왜 얌전히 베를린에 들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랑 같이 있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답답해도 계속 거기서 안 나오는 이유도, 잘못 잡혀가기라도 하면 다시 보기 힘들어서 그러는 건데. ……나라고 널 안 좋아하겠냐고. 안 좋아하는데 그 생고생을 하면서 너랑 몇 년이나 침대에서 뒹굴었을 것 같냐. 내가 무슨 매저도 아니고. 다 네가 좋아서 그런 거잖아, 좋아서.”
정태의는 혼자서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진다. 혼잣말을 하는 것도 이렇게 멋쩍은데, 대놓고는 죽어도 못할 말이었다.
“아……, 나 왜 이래 정말, 부끄러워서 못 해먹겠네…….”
정태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술에 닿는 천의 감촉마저 부끄러워, 천을 콱 물어뜯고 만다.
“…….”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베개에 턱을 괴었다.
“하여간 성격 이상하다니까……. 가끔 수틀리면 사람을 닦달해서, 꼭 사람 입에서 낯부끄러운 말을 끌어내고야 마는 주제에 뭐가 치명적이야……. 네가 더 치명적이다.”
툴툴툴툴, 작정하고 입을 열면 밤새도록 늘어놓아도 다 말 못할 투덜거림이 계속 흘러나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꼬박꼬박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그럼 여태 다 어디로 들었어. 남의 말은 듣지도 않는구나. 두 번 다시 말하나 봐라.”
정태의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다가 괜히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 앉았다. 이런 말이나 늘어놓고 있는 자신도 낯부끄럽고,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놈도 낯부끄럽다.
“빨리 와……, 돈이나 뜯어가게.”
오늘의 궁극적인 목표를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문득 침대 옆의 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거울로 시선이 갔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아주 새빨갰다. 어느새 정태의는 얼굴에서 목까지, 옷으로 가려진 부분 말고는 아주 발긋발긋했다.
“…―!!”
그 모습을 보자 공연히 더 더워져서, 얼굴이 더 빨개진다.
입이 바싹 말랐다. 정태의는 바삭바삭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말았다.
그때 또로록, 뭔가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나 물 따위라도 마시는 모양이었다. 잠시 뭔가를 마시는 소리가 들린 뒤 리하르트가 말한다.
「그럼 그쪽도 혼자는 못 살도록 만들지 그래.」
「아아……, 그건 성격 문제라서. 태이 같은 녀석에게는 먹히기 힘들어. 크리스토프 같은 놈이라면 차라리 모를까.」
저놈들 둘은 심각한 얘기가 대충 끝났다 싶으면 자리 파하고 헤어질 것이지 뭘 둘이서 나란히 차를 마시면서 수다나 떨고 있담, 하고 공연히 비뚤어진 생각을 하면서 정태의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크리스토프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리하르트가 문득 웃었다. 잠시 동안 낮게 웃는 그 웃음이 어쩐지 미묘하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한 듯이 불쑥 다른 걸 물었다.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어디? 글쎄…….」
「너도 그렇고 크리스토프까지 그렇게 넋을 잃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란 말이야.」
몰라 줘서 고맙다. 일레이나 크리스토프 같은 남자가 하나 더 나타나서 저런 식으로 들러붙는다면, 이미 막장으로 가고 있는 인생이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요……. 일레이 하나만 있으면 됐다니까. 더 이상은 사양이야.”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또한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한계치는 모두 다 차 버렸다. 머릿속에 있는 나머지 부분은 정태의가 정태의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분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대화가 부족한 것 같다.
정태의는 다시 벌떡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어쩐지 스스로가 정서불안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대화가 부족하다. 저 남자가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해도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저 남자가 저렇게까지 자신을 모르는 줄은 몰랐다.
“이상하단 말야……. 사람 말을 의심하는 인간은 아닐 텐데. 그렇게나 자주 좋아한다고 말해 줬는데 그걸 왜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지?”
아니면―대단한 편견을 섞어 말하자면―내가 무슨 B형의 쌍둥이자리라도 되어서, 오늘 열렬하게 좋아하다가 내일 되면 얼음처럼 식어 버릴 것 같은가.
오히려 그건 나보단 네 성격 같은데, 하고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 보라고. 백년의 사랑도 단숨에 식어 버릴 그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한 물건 앞에서 순순히 다리를 벌릴 정도인데, 그게 어지간한 애정으로 되는 것 같아? ……젠장, 앞으로 평생 이 녀석보다 더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인간은 안 나타날 것 같아…….”
자신의 처지와 이 상황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정태의가 으흑, 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마음 아파하는 동안에도 이어폰에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레이와 크리스토프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리하르트가 기이하다는 투로 말하자, 일레이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네 취향은 사탕과자잖아. 조그맣고 약해 보이는 여자. 그 취향의 어느 한군데에도 태이가 맞아 들어가는 구석이 없으니, 그가 네 취향일 리는 없겠지. 아무리 봐도 그놈이 어디가 좋은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아니, 취향이 아니라 해서 그 사람의 매력이 어느 부분인지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그래, 분명히 좋은 사람이긴 해. 건실하고 괜찮은 사람이지. 친구로 둬서 좋을 사람이야. 그러나 성적으로 어디에 매력이 있는지는 통 모르겠는걸.」
「몰라도 돼. 아무나 다 알면 내가 귀찮아져. 크리스토프도 성가시기 짝이 없다고. 그놈도, 근 30년을 알아 온 인연이 아니었다면 이미 저승에 가 있었을걸.」
일레이는 혀를 차며 마뜩찮은 투로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입을 다문 그는, 얼마쯤 있다가 은근하게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어때, 크리스토프와 자 보니.」
피식, 일레이는 웃음 섞어 물었다. 리하르트는 뜻밖의 물음이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크리스토프는 네 취향이 아니었지. 그래, 울면서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는 걸 좋아하는 네 성벽에, 크리스토프가 우는 얼굴을 보면 틀림없이 기뻐서 날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전부터 너는 크리스토프와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여자한테는 절대로 손을 안 내밀길래, 그 취향이 참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랬었나?」
리하르트가 웃는 기척이 났다. 그러나 곧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지금도 그런 얼굴은 취향이 아니야. 그런 얼굴이 울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그래, 그런 얼굴은 마음에 안 들어.」
리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일단은 일레이의 물음에 대답을 해 준다.
「그나마 다행히 몸 맛은 그리 나쁘지 않으니 할 맛이 나는 거지. 뭐……괜찮아. 좋아.」
리하르트가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 듯 ‘좋아.’라고 말을 자르는 느낌이, 더 말을 붙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누군가와 몸을 섞는 느낌이 어떤지,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다. 게다가 적어도 지금은, 리하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크리스토프에 대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억지로 괴롭히는 게 번연히 눈에 보이는데, 곱게 보일 리도 없고 듣고 싶을 리도 없었다.
지금 만일 그들이 정태의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더라면 정태의는 리하르트의 그 웃는 얼굴을 주욱 찢어 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언짢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 역시 그 화제를 오래 유지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일레이가 그러면, 하고 이야기를 정리하듯이 말한다.
「다음번에 크리스토프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전해 줘. 아무리 태이가 반짝거려 보인다 해도 그놈은 이미 내 거야. 백날 손 뻗어 봐야 네게는 안 닿으니까 어리석은 시간낭비 그만두고 일찌감치 다른 반짝거리는 놈 찾으라고, 그렇게 말해 줘.」
「그래, 그렇게 하지.」
「내가 직접 말해도 그놈이 말을 안 들어먹어. 심지어 태이가 말해도 안 들어먹는 눈치고.」
일레이가 혀를 찼다. 리하르트는 약간 시간차를 두고서야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꾸한다.
「그놈 눈에는 정말로 정태이가 반짝거리면서 빛이 나 보이나 보지. 하긴 그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니까, 정태이는. 그렇게 안정되어 있는 인간도 흔하지는 않을걸. 그래서, 그놈 눈에는 그게 그렇게 반짝거려 보이는 모양이야.」
“……음?”
지금 뭔가 살짝 비딱한 말투였던 것 같은데.
정태의는, 그러잖아도 딱히 호감이 가지는 않는 남자가 자신에 대해 미묘하게 비딱하게 말하자 당장 가자미눈을 뜨고 도청기를 노려보았다.
내 눈엔 도대체 매력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어디가 반짝거린대, 마치 이런 뉘앙스가 아닌가.
“나도 내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못마땅하게 말할 것까지야…….”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때, 이야기가 끊어져 잠시 동안 흐르던 침묵을 리하르트가 문득 걷어낸다.
「사람에게 반하면 실제보다 예뻐 보인다고 한다면……, 애초에 완벽하게 생긴 인간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더 예쁘게 보일 수는 없을 만큼 완벽한 인간이라면.」
혼잣말처럼, 사뭇 의아한 듯 어렴풋이.
어쩌면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닌 듯도 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다니던 의문이 불쑥 입 밖으로 새어나온 것 같다.
애초에, 더 아름답게 보일 수는 없을 만큼 완벽하게 생긴 사람에게 반한다면.
“……그거야말로 치명적이겠다…….”
실제로 그런 사람에게 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러면 헤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전제는 난센스다. 세상에 완벽한 얼굴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개개인의 미의식은 다 다른 까닭이다.
그나마 완벽에 가까운 얼굴이라고 한다면…….
“……크리스?”
연예인 명부를 머릿속에서 돌려보던 정태의는 불쑥 다른 이름을 꺼내었다. 말을 하고 보니까 그렇다. 그의 얼굴이라면 그래도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태의가 그에게 가진 호감 때문에 더욱 뒷받침되어 그렇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황홀한 외모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보이는 얼굴은 존재할 수 없으니, 그 생각은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겠군.」
일레이는 정태의가 생각하던 바와 비슷한 말을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그래, 그렇군, 하고 애매하게 중얼거리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즈음이었다.
숨을 두세 번 내쉴 만한 정적이 잠시 찾아든다 싶더니,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난 이만 돌아가 볼까.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이것도 다 끝이군. 얼마 남지 않았어.」
슬슬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을 보였다. 천이 스치는 소리 따위가 들려, 자리를 파하는 기척이 전해진다.
아, 이제 슬슬 정리해서 넣어놔야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 여태 너 기다리면서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다 듣고 있었다’라며 방글거리기는 좀 그렇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다 들었다는 내색을 차마 할 수 없을 만한 화제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오늘 들었던 말들은 평생 가슴속에 담아서 잠가 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갑자기 부담스러워진 심장 부근을 두드리는 정태의였다.
「기쁘겠군, 리하르트.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려 온 승계자 결정이 드디어 코앞까지 와서.」
「그렇군. 이제 일주일 남짓이니 정말로 얼마 안 남았어.」
리하르트는 일레이가 던진 말을 되새겨보기라도 하듯 천천히 중얼거린다.
일주일.
생각해 보면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승계 경쟁에서 후보자로 선택되어 여태 줄곧 타르텐을 잇기 위한 교육을 받고, 훈련을 하고, 실무를 거치면서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목표는 그뿐이었을 것이다. 타르텐의 승계.
수십 년의 거리를 두고 멀리 있었던 목표가 드디어 며칠이라는 거리까지 좁혀졌다면 과연 기분이 어떨까.
정태의는 그런 삶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막연한 상상밖에는 할 수 없지만, 그 상상조차 옳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생각처럼 그렇게 벅차게 기쁘고 행복한 느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아련하게 생각할 뿐이다.
「어차피 결론은 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고,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면 되겠지.」
그래, 그렇지, 하고 리하르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나직이 웃었다.
「그래, 어때, 릭. 선출자 중 하나로서 석 달간 나를 지켜보고 나니, 내 승계에 손을 들어줄 마음이 나던가?」
「――글쎄. 석 달이란 한 인간을 아는 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니까.」
저 비뚤어진 인간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리하르트에 대한 평점은 상당히 높은 모양이다.
만일 기대 이하였더라면 저 입에서는 당장 혹독한 비아냥이나 비웃음이 나왔을 거다. 그조차 귀찮다면 그만둬라, 하고 단매에 끝장을 내는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별 이변 없이 리하르트가 승계하게 되겠군,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뿐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면 크리스토프는 이곳에서 떠난다. 그가 떠나면 정태의도 떠난다. 그리고 볼일을 마친 일레이도.
뭔가 예상 밖의 방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이미 그 방해가 저만치 다가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일주일이 지나면 정태의는 베를린에서 숨을 돌리고 있을 터였다.
「석 달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
문득 리하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낮게 웃었다. 피식, 바람 새는 듯한 웃음에 이어, 그가 가볍게 말한다.
「내 개인적인 생활까지 엿들었는데도 충분하지 않던가?」
움찔.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뛸 뻔했다.
「책장 안쪽에 붙여 둔 저 송신 마이크는 언제 뗄 거야.」
리하르트가 덧붙여서 말했을 때, 정태의는 도청기가 담겨 있는 가방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그 도청기를 귀에 끼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참 가슴 답답하고 죄의식이 몰려오는 발언이다.
미안해요……,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까지 이렇게 엿듣고 있어…….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따지고 보면 도청기를 설치해 둔 일레이야 말 그대로 자업자득이지만 이 남자는 순수한 피해자다. ……아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뒀다면 그렇게까지 순수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피해자다.
정태의가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난감해하고 있는데도, 정작 도청기를 설치해 둔 당사자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역시 알고 있었군, 그렇게 말하는 듯한 웃음이다. 하긴 예전에 일레이가 말한 바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으리라고. 그 말이 정말이었다.
「아아, 그래. 어차피 더 살필 것도 없으니 오늘 온 김에 떼어내도록 하지.」
일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송신 마이크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그 발소리가 마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아, 정태의는 괜히 등줄기가 약간 싸해졌다.
「그런데 말이지.」
책을 치워내고 송신 마이크를 떼어내는지, 크리스토프의 서재를 정리할 때 내도록 들었던 낯익은 소음 뒤로 바작바작, 낯선 소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서 중얼거리는 일레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너는 내 방 협탁 서랍 뒤에 붙여 둔 음성기록장치는 언제 치울 거야.」
그 느릿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 순간.
정태의는 얼어붙었다. 몸도 마음도, 머릿속까지도.
그리고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카일과 통화했던 전화기가 얌전히 올려져 있는 그 협탁을.
「그게 도청기보다 질이 더 나쁘잖아. 도청기는 내가 듣고 있지 않을 때에 네가 한 말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음성기록은 나중에라도 한꺼번에 들을 수 있으니.」
일레이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창백한 얼굴로 느릿느릿 협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협탁의 윗서랍을 아주 살그머니 빼어내었다. 표정만큼이나 손도 완전히 얼어붙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랍을 완전히 빼어 가만히 뒤집었다.
그 뒤에. 서랍 아랫면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칩이 붙어 있었다. 빨간 불빛을 점멸시키며.
「아아……알아차렸으면 떼어 버리지 그랬어. 어차피 너야 늘 방에 혼자 있으니 녹음기록을 들어 봐야 네가 책장 넘기거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정도밖에 안 들렸기 때문에 별 효용도 없었어. 뭐……, 네가 정태이를 방으로 불러서 운우지락을 즐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뻐할 것도 아니고.」
「아하……」
헉, 그때 이 침대 위에서 일레이랑 여차저차하는 소리도 다 들었다는 말이구나, 하고 아득한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 칩을 붙잡고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 방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되고 있다는 말인즉슨, 즉 다시 말해――.
「자, 가져가. 기록 테이프. 어차피 오늘 몫이니 녹음된 내용도 없을 테지만.」
리하르트가 선선히 말하는 목소리에 이어 가벼운 물건을 받아드는 듯 탁, 하는 조그만 소리가 났다.
「3밀리 테이프인가? 이거라면 전용장치가 없으면 들을 수 없겠는데.」
「한 번 들어 보겠어? 새벽 다섯 시 이후의 테이프니 아마도 네가 일어나서 움직이는 소리 정도를 들을 수 있겠지.」
「흠. 이 종류는 아직 써 본 적이 없는데……. 어떤 식으로 나오지? 음질은 어느 정도나 되고?」
이어폰 안에서는 지옥 같은 정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태의는 얼음덩어리가 되어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레이에게서 도로 테이프를 건네받은 리하르트는 재생장치에 테이프를 넣어 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설정해 둔 데시벨 이상의 소리가 날 때만 기록이 되기 때문에, 소리가 안 나거나 설정 수치 이하의 소리는 아예 녹음이 안 되지. 녹음이 될 때는 그 시각도 표기가 되고. 그래서 체크하기는 편해. 자.」
곧 이어폰 안에서는, 테이프가 재생되고 있는지 약간 기계음이 섞인 소리로 일레이가 전화에 대고 말을 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맡은 바가 아니라서,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사무적인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침에 일 관련 전화를 받기라도 했나 보다.
흠, 제법 또렷하게 녹음이 됐는걸, 성능이 괜찮아, 하고 일레이가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말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그 뒤에.
드디어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레이, 없어?
이어폰 속에서 들려오는 건 기계음 섞인 자신의 목소리.
갑자기 저 너머에서도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들리는 것은 오로지 기계소리뿐. 사람은 침묵한다.
빠직.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칩을 부러뜨려버렸다.
그러나 도청기와는 달리, 칩이 망가지는 시점까지는 기록전송이 되어 있는 저 악마 같은 기계에서는 계속해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내가 뭐라고 말했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얼어붙은 머리는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드문드문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는 더더욱 차갑게 질려만 갔다.
그리고 지금, 정태의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도망부터 가야 했다.
***
도망갈 곳이라고 해 봐야 빤하다는 것이 정태의의 비극이었다.
이 늦은 밤에 숲 따위로 도망가서 거기서 밤샐 수도 없고―설령 거기서 밤을 샌다 해도 어차피 영영 거기 숨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 다른 사람 인생까지 말아먹으면 끝장이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서 침대 속을 파고든 정태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문을 열지 않으리라. 백날 밖에서 저 문을 두드려 보라지, 열어 주는가.
일시적인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태의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이 피난처였다.
“역시 완전범죄는 없는 거였어……. 내가 왜 그랬을까.”
범죄를 저지르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절실하게 이해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정태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마구 비비며 으으윽, 하고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
사실은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방에 돌아와서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침대에 파고들어 꼼짝도 않는 동안, 천천히 이성과 기억이 되살아난 머리는 일레이의 방에 들어간 뒤의 자신의 행보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말만큼은 평생 가도 그놈 앞에서 대놓고는 못할 거야’ 싶은 말은 더없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자신이 했던 말을 한두 마디 떠올리곤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고, 또 한두 마디 떠올리곤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고 있던 때였다.
문득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다가오는 그 소리는, 묵직한 구두소리다. 그 구두소리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움칫,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렸다. 눈만 내놓고 이불로 온몸을 감싼 정태의는, 다시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분명히 구두 소리가 들렸는데.”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깥은 조용하기만 했다.
“……. 잘못 들었나.”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태이. 문 열어.”
조용하고 나지막한데도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뚜렷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왔구나.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정태의는 순식간에 해쓱해진 얼굴로 문을 쳐다보았다. 저 바깥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최후의―알량한―방어선인 그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정태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저 문을 얼른 열어 주고 저놈이 들어오자마자 붙들고 늘어지면 정상참작을 해 주지 않을까. 아니 역시 마지막까지 개갤 때까지 개개어 보는 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전자가 나았을 텐데도, 마구 헝클어진 정태의의 감정은 당장의 안온을 주는 후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아냐, 현실적으로 생각해. 역시 내 손으로 문을 열어 주는 게 훨씬 더 나은 방법이야. ……아니 하지만 저 녀석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대한다지…….
정태의를 지배하는 감정이 공포였더라면 차라리 굳은 이성으로 전자의 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 저 남자와 지낸 지 어언 몇 년, 이미 이러한 상황의 공포는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었다―익숙해졌달까, 살짝 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포가 아니다. 공포보다는 자신이 했던 말들이 귓가에 되살아나면서, 견딜 수 없는 멋쩍음 때문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억이 아주 약간이라도 흐려지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도저히 저 남자를 마주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 쑥스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역시 안 되겠어, 기억과 감정이 약간이라도 흐려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도무지 지금 당장은 안 돼.’ 하고 중얼거리며 이불 속으로 더욱더 파고들었다.
그때 문득 바깥이 조용해지는 듯했다.
가볍게 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태의가 숨을 죽이고 얌전히 있자 더 이상 그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정확히 5초 후였다.
딱 5초의 유예 시간 뒤에,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쾅!! ――요란하게 문을 두들겼다.
화들짝 놀라 이불을 얼굴 앞에서 꼭꼭 여미는 정태의의 귀에,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도 한 평연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라니까, 태이.”
조금 전의 그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 해치지 않을 테니까 어서 나오라고 아기염소들을 꼬드기는 늑대가 저런 목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안 열어? ……귀찮게.”
그러나 아기염소들을 날로 삼켜 버린 늑대보다도 더욱 흉포한 저 남자는, 그 다음 순간 바로 실력행사에 나섰다.
――콰지직!
무시무시하게 선뜩하게 들리는 파괴음이 귓속을 얼얼하게 파고들었다.
정태의는 믿어지지 않는 심경으로 멍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비록 방음이 잘 안 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양쪽 여닫이가 잘 맞물려 있는 견고하고 단단한 나무문을.
다시 한번 콰직, 섬뜩한 소리가 들린다. 와직, 와직, 빠직, 그 소리가 네 번쯤 들리고 났을 때, 이미 문은 문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문의 구실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빠지직, 하는 문의 마지막 비명소리와 함께 문고리 바로 위에 구멍이 뚫렸다. 날씬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드나들 수도 있을 것 같은 구멍이다.
흉측하게 부서져 구멍이 뻥하게 뚫린 그 문을, 정태의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바보 같이 왜 잊고 있었을까.
잊을 게 따로 있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을.
머리가 얼어붙다 못해 아주 바보가 되었었나 보다.
그 커다란 구멍 너머에, 남자의 허리가 보였다. 고작해야 허리만, 그것도 옷을 입은 허리만 보이는데도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는 스스로에게 감탄할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그보다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침대 위에 거의 엎어지다시피 엎드렸다.
뚫린 구멍 속으로 남자의 손이 쑥 들어왔다.
손에 잘 맞는 감색 장갑을 낀 그 손은 안에서 잠가 놓았던 문고리를 더듬어 잠금쇠를 풀고는 막 문을 열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장갑을 빼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정태의가 좋아하는 하얀 손이 나타났다.
저 아름다운 손을 공포스럽게 보는 사람들의 심경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고 앉아 눈만 빼꼼 내어놓고 그 문을 바라보는 정태의의 앞에서, 이윽고 문이 열렸다.
저벅, 낮은 구두소리와 함께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쳐 구두에 묻은 나뭇조각을 털어내는 그 남자, 괴물 같은 파괴력의 보유자 일레이 리그로우는 정태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침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선다.
“…….”
정태의는 눈동자만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별반 표정이 없는 얼굴로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뭐야. 불러도 대답도 없고 문도 안 열기에 잠들었거나 욕실에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침대 위에 앉아서 제대로 깨어 있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일레이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정태의의 반경 30센티미터 정도까지만.
이불을 덮어쓴 채 오도카니 웅크리고 앉아 묵묵히 개미집을 이루고 있는 정태의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돈 뜯어가려고 왔다면서. 그럼 돈 뜯어가야지, 왜 내가 돌아가기 전에 그냥 가 버렸어.”
헉……,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했었구나, 내 원망스런 혀가…….
정태의는 그의 입에서, 뜻밖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온 첫 말에 뜨악하게 굳었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애초에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돈 달라고 찾아갔었다.
“얼마나 필요해.”
왜 필요하냐는 말도 하지 않고 대뜸 금액부터 물어본 일레이는, 그조차 대답을 기다리기 귀찮았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협탁 위에 툭 내려놓는다.
“자, 그럼 네가 찾아왔던 볼일은 해결됐고.”
더 묻지도 않고 선선이 정태의의 볼일을 해결해 준 일레이는, 몸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그가 고개를 기울인다.
“이제 내 볼일을 좀 해결해 볼까…….”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무섭게 들리기도 쉽지 않을 거다.
일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눈만 내놓고 있는 정태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다가오자 슬슬슬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정태의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이불을 콱 움켜쥐었다.
“정태이. 우리, 심도 있는 대화를 해야만 할 것 같지 않나?”
“심도 있는 대화……, 그거 좋긴 한데…….”
단숨에 이불을 휙 잡아당기는 통에 정태의는 침대 위에 나뒹굴었다. 일레이의 무릎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혀 으윽, 하고 짧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일레이는 혀를 찼다. 머리를 감싸쥐고 낯을 찌푸리는 정태의의 손을 걷어내어 이마를 살펴보곤 괜찮아,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도 슬슬슬 물러나 앉는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태의가 침대 모서리까지 가서 더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그제야 일레이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나무문이나 이불, 2미터도 안 되는 거리 따위는 엄폐물이 되지 못해.”
그러면서 훌쩍 일어선 그는 딱 두 걸음 걸어와 정태의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너는 머리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바보짓을 한단 말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정태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너는 당황이나 수치를 느낄 만한 신경이 없어서 그래…….
생각해 보면 이 남자가 인간다운 감정을 보인 게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아주 가끔 있기는 했다. 이미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정태의와 관련된 일에서, 설마 일레이 리그로우의 이런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멍하게 생각할 만한 얼굴도 본 적이 있었다.
이 남자도 당황하기도 하고, 크게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분노하기도 하고, 혹은 인간적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이 남자가 그래도 비인간성 중에 인간성이 일말이나마 남아 있다는 걸 알게는 됐지만, 그래도 아직 수치나 양심 같은 덕목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문을 이렇게 부숴 버려서 어떡하려고…….”
바로 지금,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저 입구에, 걸레처럼 너덜해진 문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문고리 옆에는 잘만 하면 사람도 드나들 만한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고, 경첩도 반쯤 뜯겨져 나가 이제는 정태의의 힘으로도 뜯어낼 수 있겠다.
보상 같은 문제와는 별개로, 귀빈이라며 좋은 방 내어주고 잘 대접해 주는 집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배은망덕도 정도가 있다.
게다가 사소한 문제로는, 그러잖아도 방음상태가 안 좋던 방은 이제 방음 문제는 그냥 끝났다고 봐야 하고, 저렇게 구멍이 뻥 뚫려서야 문을 닫아 놔도 이제 밖에서 다 들여다보일 텐데 속옷이라도 갈아입으려면 꼬박꼬박 욕실에 들어가 수줍게 갈아입어야 하게 생겼다.
정태의가 난감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아아, 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 문을 흘끔 쳐다보았다.
“상관없어. 리하르트가 좋을 대로 하라고 했거든.”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 깨닫는다. 이 남자는 이런 상황이 능히 올 수 있다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하르트도 리하르트다. 그는 정태의의 일신의 안전 따위는 전혀 돌아보지도 않고 두말없이 웃으며 방문 파손을 승낙해 줬을 게 틀림없었다. 리하르트에게까지 원망이 솟았다.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을 듣고서 더 초조하게 떠오르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 따위야 백 개를 부숴도, 그보다 더 초조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 ……끝까지 둘이 같이 들었어, 그 녹음?”
“재생 장치가 거기밖에 없어서, 안타깝게도.”
예상은 했지만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레이를 보고 정태의는 우울해졌다. 원래부터 우울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자 나락의 저 바닥으로 떨어진 것처럼 우울하다.
이놈 혼자서만 들었다 해도 부끄럽고 멋쩍어서 땅을 파고 머리를 묻어 버리고 싶은데 그 말을 고스란히 같이 들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니.
정태의는 일레이가 뒤로 치워 둔 이불을 향해 슬슬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을 도중에 하얗고 아름다운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불을 도로 뒤집어쓰기 전에 정태이. 먼저 제일 중요한 걸 하나 확인부터 해 둘까.”
“……? ……뭘.”
갑자기 일레이의 눈빛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저렇게 과격하게 때려 부순 남자답지 않게 평연하고 담담하게 정태의를 대하던 그는, 문득 그 눈을 선뜩하게 좁히며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놈이 왜 이렇게 스산하게 노려볼까, 정태의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좋아한다고, 언제 그랬어.”
일레이가 던진 말은, 예상의 범위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짚어 둬야 할 건 왜 도청기를 멋대로 썼냐는 문제가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먼저 나온 말이 저거니까 그 문제는 접어두기로 했다.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내뱉는 그 삭막한 목소리는, 마치 거짓말을 비난하는 듯한 투였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가느스름한 눈매마저 비난의 눈길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꺼림칙한 점들이 산더미 같지만 적어도 자신이 말한 내용의 참과 거짓에 있어서는 전혀 켕길 게 없는 정태의는 벌컥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든다. 아니, 오히려 이건 자신이 화를 내야 할 사안이 맞았다.
“언제 그랬냐니, 여태 내가 너한테 말한 것만 수백 번은 되겠다! 아니 수백 번이 뭐야,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때마다 또 적어도 두세 번은 말하니까 수천 번도 더 되겠구만!”
“네가 언제 그랬어. 한 번만 말했다 해도 당연히 기억할 텐데.”
일레이는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코웃음까지 쳤다. 그리고 정태의는 허, 하고 짧게 내뱉으며 어이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적반하장이다.
그렇게나 수없이 좋아한다고 말해 줬는데 기억도 못하는 걸 미안하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한 번도 안 말했다고 우기면서 오히려 눈을 부릅뜬다.
정태의는 숨이 턱 막혀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야 물론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면 남겨 둔 증거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래, 바로 얼마 전에 너랑 잘 때도 말했잖아! 그걸 기억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
정태의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소리쳤다. 도리어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이 남자를 피하려고 벌벌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썼던 게 언제인가 싶다.
그러자 덩달아 소리를 높이려고 입을 열던 일레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연 그대로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듯 멈춰 서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정태의는 홀로 분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레이를 노려본다. 정태의를 사납게 노려보던 일레이의 눈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이윽고 그 눈은 매우 미심쩍게, 혹은 난감하게 정태의를 주시한다.
“……하나 물어보겠는데 태이.”
“뭐. 언제 그런 말 했냐고? 몇 시 몇 분 몇 초에?”
초등학생 수준으로 돌아간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되묻자, 일레이는 잠시 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네가 말하는 그 수천 번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그게…….”
“뭐.”
“너랑 내가 몸을 섞다가 그 막바지에서 네가 느끼고 사정할 때에 ‘좋아, 좋아’ 하고 중얼거리는, 그걸 말하는 거냐?”
“알고 있으면서 왜 들은 적이 없다고 그래!”
“…….”
정태의가 삽시에 얼굴을 확 붉히면서 그 쑥스러움을 흐리려고 부루퉁하게 소리를 지르자, 일레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애매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본다.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주욱 빠진 듯, 일레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피곤한 것처럼 엄지로 관자놀이를 살짝 주물렀다.
“너는 말야, 나더러 상식이 부족하다고 그러는데……, 가끔 나는 너야말로 상식을 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레이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에, 정태의는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상식이라니, 다른 사람한테 들으면 몰라도 저 남자에게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정태의가 어이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일레이는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런 타이밍에서 좋다고 하는 건 당연히 쾌감이 느껴진다는 거지, 누가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다고 생각이나 할 것 같아?”
우둔한 어린애를 가르치기라도 하는 듯 혀를 차며 타이르는 일레이의 말을 듣고,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고개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레이……, 일레이, 잘 생각해 봐. 기억을 잘 떠올려 보라고. 너랑 몸을 섞으면서 좋다고, 좋다고 외쳤던 게 언제부터인지.”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이러다가 틀림없이 몸이 둘로 갈라져서 오늘 밤이야말로 죽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공포에 질렸던 초기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그 뒤에 그럭저럭 견딜 수는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그 말은 했었다. 삽입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그저 앞의 자극으로만 사정을 하던 그 무렵부터 정태의는 이 남자에게 좋다는 말을 분명히 했었던 것이다.
“요 얼마간은 그렇다 치지만, 처음에는 너랑 그걸 하면서 그 행위가 좋다고 외칠 만한 쾌감이란 걸 느낄 수 있었는 줄 알아?! 잘 기억해 봐, 네가 매일 화장실에서 보는 그 물건을!”
따지고 들다 보니 처음 이놈에게 당했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때는 죽는 줄 알았는데, 사람의 목숨이 워낙 질겨서 겨우 살아남았다.
과거를 떠올리며 잠시 눈물짓고 나자, 일레이는 기묘한 눈으로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괴로웠던 과거를 생각하던 정태의는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니…….” 하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어느새 조금 전과는 완전히 형세가 역전된 상황에서,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일레이를 거침없이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는 의기소침이라는 덕목도 갖춘 바가 없는 이 남자가 어쩐 일로 이렇게 대꾸도 안 하고 조용히 있는 걸까, 약간 의아해져서 눈에서 힘을 풀었다.
한동안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눈에서 힘을 풀면서 화까지 같이 약간 풀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런 때마다 했던 그 좋다는 말은, 섹스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했던 말이라는 뜻이로군, 지금 네 말은.”
“그렇지.”
냉큼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정태의는 어라, 하고 잠시 멈칫했다.
뭔가, 평소의 상태에서 냉정한 정신으로는 쑥스러워서 얼굴 마주보고 하기 어려운 말을 해 버린 것 같은데.
정태의는 어라, 어라, 하고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눈동자만 들어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움찔하고 만다.
일레이는 웃고 있었다. 아주 진한 미소를 띠고서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미소를 보자 정태의는 아아, 하고 내심 생각했다.
그렇구나. 말하길 잘 했다. 제대로 말해 주길 잘 했어. 비록 지금 당장은 쑥스럽고 멋쩍어서 얼굴에 불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일레이가 이렇듯 기쁘게 웃는 얼굴은 보기 쉽지 않았다.
“태이.”
문득 그가 속삭였다. 어, 하고 머뭇머뭇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그가 한 번 더 부른다.
“태이.”
“왜.”
부끄러운 것도 멋쩍은 것도 이 정도까지 오면 거의 포기가 된다. 정태의는 푹 한숨을 쉬곤 슬쩍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느새 정태의의 바로 앞까지 바싹 붙어 있었다. 어깨 뒤로 감싸 안듯이 팔을 돌려 정태의의 뺨을 덮는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내린다.
“내가 좋아?”
이마와 이마가 닿았다. 비밀 얘기라도 소곤거리는 것처럼 조그맣게 그가 속삭인다. 어쩐지 굉장히 쑥스러워져서 정태의가 약간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어깨를 감싸안은 팔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단하게 버티고 물러나지 않았다.
“……어. 좋아.”
정태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뺨이 더 뜨거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마를 맞대고 있을 만한 거리에서는 안 보일 거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에는 뜨거워지는 체온이 전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한, 너는 베를린에서 나가지 않겠네.”
“……어. 네가 계속 거기에 있다면.”
“더 이상은 수배당하지 않아 자유로운 몸이 된다고 해도?”
“어. 네가 계속 거기에 있다면.”
그리고 그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면 정태의도 함께 갈 터였다. 적어도 그가 원하는 한은.
정태의는 똑같은 대답을 거듭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망설임이나 애매함이 없는 그 답변을 듣자, 일레이는 나직이 웃었다.
“뭐야, 몇 년을 같이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래.”
정태의가 약간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픽 웃는다.
“말로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너는 그런 말은 거의 안 하니까.”
그랬던가, 하고 애매한 기억을 떠올리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이마를 맞붙인 상태에서도 번뜩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니까 그런 말은 네가 더 안 하잖아!”
“아……, 그랬나?”
일레이는 몰랐다는 듯 반문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다. 여태 정태의는 자신의 혀에서 튀어나온 쑥스러운 말들에 머리가 헝클어져서 제대로 생각을 못해 봤었는데,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일레이야말로 그런 말은 거의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저는 그래 놓고서 남더러 다그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정태의는 약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그에게서 얼굴을 떨어뜨리며 혀를 찼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노려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나운 시선은 다시 누그러들고 말았지만.
사실은, 굳이 말로 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야 말로 듣는다면 얼굴에 불이 붙을 것처럼 기쁘겠지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적적해지거나 불안해지지는 않는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레이는 ‘특별하게’ 정태의를 대하고 있었다.
가끔 그 특별함 때문에 정태의는 타인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정태의 본인도 이런 의미의 특별함은 싫다고 훌쩍일 때도 있었지만―,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의 상냥한 구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정태의뿐일 터였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찰나이나마 빙산의 일각 같은 그 상냥함이 드러날 정도라면, 그 아래에 붙어 있는 얼음덩어리는 과연 얼마나 막대할지, 상상으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넌 속고 있는 거야, 가엾은 태이, 카일은 가끔씩 살짝 술에 취한 정신으로 들어오면 정태의를 붙들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들은 모를 뿐이다.
“네가 없으면, 태이. 맛이 없어.”
문득 일레이가 불쑥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태의는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었지만, 그 말의 내용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뭐가’라고 되묻기 전에, 일레이는 기이하고 희한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찬찬히 정태의를 훑어보았다. 얼핏 냉정해 보이는 그 눈은, 참 이상하단 말이지,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 봤거든. 너를 만나기 전에는 어땠는지.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고 특이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과연 뭐가 바뀌기나 했을까, 그렇게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더란 말야.”
“…….”
약간은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비록 문은 저 꼴이 되었으나 나는 살아난 것 같아서 고맙긴 한데……, ‘너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뀌었어’, 이런 말을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널 만나기 전이나 후나 똑같아’, 이런 말은 굳이 안 해 줘도 좋았을 것 같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이놈과 만나서 인생이 완전히 뒤집혔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여기에 와서 네가 오기 전 두어 달, 있어 보면서 문득 알아차렸는데, 네가 없으니까 화나는 일이 없더군.”
점점 더 이야기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정태의는 약간 뜨악한 얼굴로 일레이의 말이 흘러나오는 그 입을 바라보았다.
“너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어. 사소하게 화가 나는 일은 있었는데, 제정신을 잃을 만큼 화날 만한 일은 없었거든. 약간이나마 화가 나면 그 원인을 치워 버리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만 없으면 화날 일도 없어진다……?”
정태의가 미심쩍게 확인하자 일레이는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만 없으면 크게 화날 일도 불쾌할 일도 없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의 맥락이 어디선가 어긋났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좀 쑥스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그래도 좋았었는데, 갑자기 얘기의 방향이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뭐. 나더러 베를린에서 나가라고?”
“아――그렇게 되면 오랜만에 화가 나겠지. 아주 확실하게.”
“뭐 어쩌라고.”
정태의는 눈을 부릅떴다. 도끼눈을 뜨고서 일레이를 쳐다보았지만 얼굴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제대로 노려볼 수도 없는 게 안타까웠다.
역시나 가까이서 노려보자 박력도 없고 도리어 우스워 보였는지, 갑자기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태의의 눈꺼풀을 낼름 핥았다.
“악! 너 지금 눈 핥았어! 아야야…….”
너만 없으면 화낼 일도 없어진다는 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대사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 비비는 손을 치우며, 금세 눈물이 괸 눈에 일레이가 살짝 입술을 대어 눈꺼풀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가 없으면 감각이 희미해. 화도 거의 나지 않고 불쾌감도 거의 느낄 일이 없어. 기분 좋을 일도 없고, 즐겁지도 않아.”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눈꺼풀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입술의 감각을 느낀다.
“무미건조하단 말이야……. 아무런 자극도 없이. 머릿속이 둔해지는 것 같이. 별로 느껴지는 감각이 없어. 그럭저럭 즐겁고, 그럭저럭 유쾌하고, 그럭저럭 화가 나고.”
일레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정태의는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중얼거린다.
“술, 담배, 여자……?”
아까 잠시 들었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그 순간, 갑자기 일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으며 약간 고개를 떼고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다. 이상해. 일레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아니, 지금이라서 그런 걸까.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를 바라보다가 폭, 입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만다.
막 방금 또 하나 깨닫고 말았다. 어쨌든 그가 즐거워하면 정태의도 좋았다. 어지간한 일은, 그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좋았다.
“하지만 넌 술, 담배, 여자, 별로 안 하잖아.”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자신이 좀 덜떨어진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도, 공연히 멋쩍어져서 그렇게 한 마디 하고 만다.
일레이는 조금 고개를 떨어뜨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술은 예전에는 제법 마시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별로 마시지 않지. 마시려면 마실 수 있지만, 가끔 마시고 싶을 때가 아니면 그다지 안 마셔. 담배도 마찬가지. 여자도 예전에는 제법 많이 놀았지만 요즘은―요 몇 년은―건드린 적도 없어.”
“그럼 어차피 무미건조한 삶이었구만.”
“아……, 그 세 가지가 시들해진 시점이, UNHRDO의 아시아 지부로 간 시점과 거의 겹쳐졌지. 셋을 다 합해도 못 미칠 만큼 더 자극적인 게 있더라고, 거기.”
“…….”
정태의는 뭔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돌아올 답변을 생각하면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어떻게 된 게, 그럴 때는 귀신같이 알아서 먼저 대답을 하곤 했다. 지금처럼.
“그러니까 내 술, 담배, 여자는 네가 다 빼앗아 버렸단 말야, 태이.”
“아냐, 아냐, 말해 두는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인생의 사소한 즐거움을 그렇게 빛바래게 만든 데에는 네 책임이 제일 커, 태이.”
일레이는 빙글빙글 웃었다. 눈매도 가느스름하게 웃는 걸 보니, 정말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나까지 아무래도 좋아지잖아.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그시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그러면, 하고 묻는다.
“나 대신 술, 담배, 여자를 다 끊으라고 하면 어쩔 거야.”
“끊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심지어는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기색도 아니다.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는 듯, 도리어 이상하게 쳐다본다.
정태의는 한동안 약간은 난감한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이미 애초에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실하게 단언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알았어. 책임질게. 인생의 3대 즐거움을 다 버린다는데 내가 책임져야지…….”
아니 뭐, 반드시 꼭 끊을 필요까지는 없어, 여자는 빼고, 하고 덧붙이면서 정태의가 설레설레 손을 젓자 일레이는 픽 웃었다.
그는 정태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핥는다. 살짝살짝, 달콤한 사탕이라도 핥는 것처럼 조금씩 그 입술을 맛보던 일레이는 어느 순간 깊이 입을 맞추었다.
일순 숨이 막혔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익숙해졌다.
정태의는 천천히 코로 호흡을 하며, 나른하게 한숨마저 내쉰다.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가만히 웃자 그 웃음이 입속으로 전해졌는지 일레이가 아주 약간 얼굴을 떨어뜨리며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하게 쳐다본다.
“아냐. ……좋아서. 네가.”
정태의가 조그맣게 말하자 일레이는 기묘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가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며 태이, 하고 속삭인다. 이번에 입술을 덮는 그 입은, 좀체 비킬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그 입속을 더듬은 일레이는 문득 낮게 속삭였다.
“맥주 맛이 나.”
“어? ……아, 네 방에 가기 전에 한두 캔 마셨는데……, 아직도 냄새가 남아 있어?”
“음――상관없어. 네가 내 술이 되어 주기로 했으니. 술맛이 나는 혀도 맛이 꽤 좋거든.”
정말로 맛을 보는 것처럼 살짝 혀를 들이밀던 일레이는, 문득 생각난 듯이 농담조로 묻는다.
“너는 어쩔 거야.”
“응?”
“맥주와 나를 양쪽에 두고 한쪽을 끊으라면.”
“응? 무슨 소리야, 그야 당연히――.”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던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맥주의 시원한 맛을 떠올리고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아주, 아주 짧은 일순간이었다.
뒷말을 잇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그 짧은 간극을 스스로 알아차리자마자 정태의는 재빨리 수습하려고 일레이에게 입을 맞추었지만, 한 발 늦었다.
이 비상하게 눈치가 빠른 남자는, 이런 때에 어수룩하고 둔하게 넘어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일레이의 정적이 점점 두려워졌다. 정태의는 모른 척 열심히 그의 입술에 뽁뽁 귀엽게 뽀뽀를 하며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불길한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알았어.”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일레이의 목까지 끌어안고 고양이처럼 그의 입술을 할짝이는 정태의였지만, 끝끝내 일레이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의 그 푸근하고 기분 좋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다.
“네 뜻은 아주 잘 알았어, 태이.”
그는 조용히 그렇게 말하며, 정태의의 어깨를 잡더니 가만히 떨어뜨렸다.
당혹스런 얼굴로, 불안과 초조로 흔들리는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보는 정태의의 시선이 몹시 간절했지만, 일레이는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토록 맥주를 사랑하는 네게 내가 너무 잔혹한 질문을 했군. 좋아, 그럼 날 끊도록 해. 내가 도와줄 테니.”
아주 묵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일레이는, 갑자기 셔츠 단추를 톡톡톡 풀기 시작했다. 몹시 불안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정태의의 앞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옷가지를 다 벗어던진 일레이는, “잠깐, 잠깐만 있어 봐, 좀 전엔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하고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태의를 두말없이 붙잡아 그의 옷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훌렁 벗겨 버렸다.
“이봐, 잠깐만, 저 문 꼴을 좀 보라고, 지나가면 다 보여, 아니 말소리도 복도까지 다 들리는데 하물며……! 잠깐만, 일레이, 조금 전엔 정말로 실수였다니까, 내가 잘못했……!”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도와준다니까. 네가 말했다시피 ‘백년의 사랑도 단숨에 식어 버릴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한’ 수단으로.”
“아니 잠깐, 그게 아니라, 잠―…!!”
정태의의 입에서는, 그 이상 변명조차 나오지 못했다. 그 뒤로 한동안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차라리 맥주를 끊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