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Arabian business(2) (20/34)

***

“밑져야 본전이니 찔러나 보자, 그거잖아.”

크리스토프가 대뜸 중얼거린 말이었다.

정태의는 커튼을 묶다가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눈부시도록 밝게 들어와 침대 발치까지 닿았다.

“아니 뭐……, 그렇게 약삭빠른 투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말투가 어쨌든, 내용은 그거잖아.”

오늘 아침 크리스토프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원래부터 아침에는 기분이 안 좋은 남자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하다. 오히려 어제는 그럭저럭 걸어다닐 수 있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허리 아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정태의는 근육통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의 신경질을 다 뒤집어쓰고 있는 참이었다.

“흥……, 널 설득해서 정재이를 끌어들이고 나면 최종적인 목적은 이루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는 다른 변제 조건을 내세우겠다는 소리잖아. 원하던 정재이도 손에 넣고, 우리한테는 변제도 따로 받아가고. 그렇게 되면 그놈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지. 거절 잘 했어.”

“어…….”

그야 거절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이제 정태의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게 확정된 셈이다.

그러나 매우 경쾌하게 거절 잘 했다고 외치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차관 변제의 실권자는 알 파이살이라면서. 라만의 후견인이라고는 들었지만, 라만과 그렇게 사이가 각별한가 보지.”

정태의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자, 끙끙거리며 간신히 엎드리는 데에 성공한 크리스토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알 파이살이 라만에게 지금은 전권을 양도했을걸. 원래 그는 아들이 없어서 라만이 거의 그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알 파이살은 일선에서 물러서서 한가하게 텃밭이나 가꾸며 살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흥, 젊을 때는 그렇게 공격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 남의 회사를 잡아먹으면서 사업체를 키운 양반이 늘그막에 평화롭게 지내는 걸 보면 세상이 그리 공평하지는 않아.”

말의 전반부는 정태의에게 알려주는 말로 듣겠는데, 후반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연한 짜증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놈이 어떤 신경질을 부려도 다 이해해야지. 아무렴. 지금 저놈이 몸과 마음 모두 얼마나 힘들지 나는 잘 알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빌어먹을, 일어나자마자 그놈부터 요절을 내러 가려고, 어젯밤엔 꿈까지 꿨었는데.”

몸을 뒤척이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린 크리스토프는 다시 서슬 퍼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평소에 백중세인 걸 감안하면, 그러잖아도 다친 데다 몸이 멀쩡하지도 않은 그 상태로 리하르트에게 들이닥치면 십중팔구는 네가 불리할 텐데.”

“내가 왜 불리해!”

“움직일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 보시든가.”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분한 듯 크리스토프가 도끼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넌 누구 편이야.”

“……. 난 이제 누구 편을 잘못 들기라도 하면 일레이한테 죽어…….”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약간 소리를 낮추어 묻는다.

“너는 일레이가 좋지?”

창문의 걸쇠를 풀던 정태의는 손을 멈추었다. 조그맣게 들려온 그 목소리를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본다.

크리스토프는 침대에 엎드린 채 팔에 턱을 묻고 있었다. 베갯잇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 어.”

말하려니 좀 쑥스럽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고, 게다가 당사자가 없으니 그래도 말하기 쉽다.

그래……, 하고 크리스토프는 말을 흐렸다. 정태의는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창문의 걸쇠를 풀었다. 살짝 녹이 슬었는지 뻑뻑해서 잘 풀리지 않았다.

기익, 기익, 귀에 거슬리는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풀려난 걸쇠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창문을 열었을 때,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온다.

“너는 나한테는 안 올 거지.”

정태의는 창문을 열고서 바깥을 내다보는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 돌아본다.

“어, 뭐라고?”

“……. 아냐.”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엎드린 채로 이불을 슬슬 끌어당겨 어깨까지 덮어 버린다.

정태의는 말없이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오전 나절의 맑고 아련한 소음이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렇다면 안 되는 건 빨리 깨닫는 편이 낫다.

약간은 씁쓸한 마음으로 넋 없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자니, 볼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이 바삐 나서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 없어?”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저 몸으로 오늘 일을 하라고 하면 지나치게 가혹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크리스토프의 시간이 오롯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물어보았다.

정태의가 묻자 대번에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치켜올라갔다.

“알 게 뭐야.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아……, 그렇지…….”

하긴 몸 상태가 저런데, 하물며 저 꼴로 만든 인간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면 그만큼 비참한 일도 없겠다.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리하르트도 인간이라면 지금 너더러 일하라고 내몰지는 않겠…….”

――똑똑.

정태의가 입을 열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입을 다물고 있는 정태의와, 귀찮은 듯 문 쪽으로 눈동자만 흘끔 돌리고 대답도 하지 않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그 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열렸다.

“오늘의 일정이 열 시 반부터 있다고 어제 말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리하르트였다.

그의 시선이 흘끔 향하는 곳을 따라 벽시계를 쳐다보자 시계는 정확히 10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에 따르려면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각이다.

들어오자마자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준 리하르트는 뒤이어 창가에 서 있는 정태의를 보곤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기 계셨군요.”

“예, 뭐.”

정태의는 반 토막으로 말을 잘랐다. 당장 이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는 서슬 퍼런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하르트……!”

여태 부루퉁하게 가끔 신음 소리만 흘려내던 목소리가, 한 톤 나직하게 들떠 흘러나왔다.

“너…….”

크리스토프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움찔 낯을 찌푸리며 움직임을 멈추긴 했지만, 그래도 느리게나마 간신히 일어나 앉는다. 그 몸이 가늘게 떨리는 이유는 비단 아픔만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무슨 낯으로 이 방에 뻔뻔하게……!”

입술이 파랗게 질려 떨렸다.

금세라도 달려들어 그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듯 시트를 움켜쥔 손이 가끔 움칫거리며 움직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못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일어서서 침대 밖으로 한 걸음 나오기만 하면 쉽게 손 닿을 만한 거리에 서서 차갑게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정태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토프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너랑 할 얘기 따위 없어!”

크리스토프가 벌컥 외치다가 목이 바싹 말라 갈라졌는지 몇 번인가 마른기침을 한다. 그런 크리스토프에게는 잠깐만 시선을 떨어뜨렸을 뿐, 리하르트는 여전히 정태의에게 눈짓으로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자리를 비켜 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정태의였다. 심지어 그런 일이 있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강간범과 피해자가 조우한 상황에서, 강간범이 나가 있으라고 한다고 얌전히 나간다면 그건 범죄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절대 그렇게는 못하지.

“게다가 이곳은 크리스토프의 방이기도 하니, 크리스토프가 나가 달라고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나가고 싶지 않군요.”

정태의가 덧붙여 말하자 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늘 그렇듯 희미한 웃음이 담겨 있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좋으실 대로. 다소 듣기 거북한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나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하게 말을 한 리하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정태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예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크리스토프만을 보고 있었다. 마른기침을 하며 목을 감싸쥐고서도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만을.

“힘들어서 쉬고 싶나?”

그는 문득 부드럽게 물었다. 입가에, 눈매에, 서늘하게나마 웃음이 떠오른다. 크리스토프는 나직이 대꾸했다.

“…―이 정도 힘든 걸로 쉬고 싶을 만큼 약하게 생겨먹었더라면 여태 살아 있지도 못했어.”

“그래, 그럼 지금 바로 일어나. 오늘은 둘러봐야 할 일정이 많아.”

“……. 너랑 오늘 하루 종일 일정을 함께 한다면, 내가 미친 거겠지.”

잠시 어이없이 리하르트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험악하게 대꾸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를, 억지로 질질 끌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침대 기둥을 붙들고 일어났다.

이마에 언뜻 식은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두 다리로 서서, 더 이상은 약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리하르트의 앞에 마주선다.

“나는 너와 같이 다니지 않아. 이 변태 새끼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처럼, 침대 기둥을 짚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저 손에 칼 한 자루만 쥐어져 있다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 남자에게 달려들어서 그에게 칼을 꽂아 넣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이 태연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문득 웃는다.

“즉 쉬고 싶다는 거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간호라도 받으면서 같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지.”

그 말과 함께 흘끔, 창가에 팔짱 끼고 기대어 서 있던 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그 시선이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야 눈을 깜박였다.

아니 거기서 왜 날 봐?! ……영 잘못 짚진 않았다만.

“크리스토프. 너는 나와 함께 다녀야 해. 애초에 승계가 결정날 때까지 나와 함께 다니며 내 일을 돕는다고 했었지.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걷기 힘들다면 휠체어라도 준비해 주지.”

“……하. 휠체어는 네가 밀어 주려고?”

“그 정도는 해 주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몸으로는 힘들 테니.”

리하르트의 눈에 비웃음과도 닮은 웃음이 서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크리스토프에게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사뭇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속살거린다.

“그 모습을 보니 꿰뚫린 아랫도리가 욱신거려서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는 모양이지. 내 허리를 감아서 조일 때는 다리에 힘이 아주 세던데.”

“……!!”

그때였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가 불시에 침대기둥을 떨치며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한 걸음 앞, 몸을 기울여 팔을 뻗는 것만으로도 닿을 수 있는 그 거리에 있는 리하르트에게 세차게 달려들어 부딪쳐,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침대 옆에 있던 티테이블이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퍼졌다. 찻잔이며 찻주전자가 깨어진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지는 두 사람의 소리가 겹쳐졌다.

“리하르트, 너는, 넌, 죽어 버려……!!”

바닥에 드러누운 리하르트의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크리스토프는 그의 목을 졸랐다.

원래부터 빛깔이 하얀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새파란 눈동자가 리하르트를 내려다본다. 그의 목을 감고 짓누르는 섬세한 손에는 뼈와 관절의 모양이 살짝 불거져 있었다.

“크리스……!”

저도 모르게 창가에서 떨어져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정태의는,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크리스토프가 아니라 오히려 리하르트가 정태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끼어들지 말고 거기서 보고만 있으라고, 이 자리에서 너는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태의가 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하자 리하르트는 다시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숨통을 짓누르는 손이 역시 괴롭긴 한지 설핏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움직였다.

리하르트의 손은 처음에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를 떨어뜨리려는 듯 약간 힘을 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에 더욱 세게 힘을 준다.

곧 리하르트는 포기한 듯 크리스토프에게서 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 손을 크리스토프의 허리로 옮겼다.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린 뒤 그 손이 파자마 속으로 파고들자, 크리스토프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반쯤 이성을 잃은 듯 살의만 번들거리던 눈에 불쾌한 빛이 섞였다. 약간 움츠린 손은, 그러나 여전히 리하르트의 목을 조른다.

괴로운 듯 얼굴을 약간 찌푸린 채로, 리하르트는 거침없이 크리스토프의 허리에서 바지 아래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파자마 바지가 내려가며 반쯤 드러난 엉덩이를 그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어느 순간 억세게 움켜쥔다.

“……!!”

크리스토프는 낯빛이 굳었다. 그리곤 초조하게, 리하르트의 목을 더욱 세게 틀어쥔다. 어서, 어서 죽어 버리라는 듯.

리하르트는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 손은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라는 것을 찾는 것처럼, 침착하게.

숨통이 막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서도, 리하르트는 언뜻 웃는 듯했다. 그 표정에,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의아한 빛을 띠면서도 한층 더 험해진다.

그러나 몇 초쯤 지났을까.

“크리……!”

“……!!”

옆에서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정태의가 저도 모르게 낯빛을 굳힌 것과, 크리스토프가 눈을 홉뜨며 한껏 몸을 움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느새 한 손으로 자신의 바지 퍼스너 사이에서 성기를 꺼낸 리하르트는, 다른 손으로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밀어 엉덩이 사이에 그 살덩이를 가져다 대었던 것이다.

몸속으로 통하는 입구 끝에 귀두가 맞닿자마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거기로 자신의 물건을 밀어넣었다.

푸욱, 전혀 대비도 않고 예상도 못하고 있었던 크리스토프의 몸속으로 그 불룩한 끄트머리만 파고들어 자리잡았다.

동시에.

경악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던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리하르트의 목을 풀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미친 듯이.

“크리스…―.”

반사적으로 그를 말리려던 정태의는, 두어 걸음 더 다가서다가 멈추었다.

말려야 하는 건지 혹은 도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끝부분 약간이나마 크리스토프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있는 거뭇한 성기가, 그 자세가 고스란히 보이는 상황에서, 정태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자신을 부르는 정태의의 짤막한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는지 크리스토프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본다.

당혹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토프는 일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어……, 크리…….”

정태의가 멋쩍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낯빛을 바꾸며 무섭게 고함을 쳤다.

“나가! 거기 있지 말고, 어서 나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문을 가리키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를 보고 크리스토프는 더더욱 길길이 뛴다.

“어서 나가라니까! 여기서 나가 버려!! 빨리 나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시퍼렇게 고함을 지르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그곳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정태의는 불안스럽게 그들을 쳐다보며 망설였지만, 창백한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그가 걸음을 늦추자 다시 나가라고 고함을 지른다.

불안스런 한숨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정태의가 나간 뒤,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크리스토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 곤란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숨소리가 불안정했다.

“좋아하는 놈 앞에서는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나 보지. 어떻게 하나, 크리스토프 타르텐. 저자가 서 있던 위치에서는 다 보였을 텐데. 꿰뚫려서 잔뜩 벌어진 구멍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크리스토프의 아래에서 느릿하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토프는 핏기 없는 얼굴을 그대로 떨어뜨려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시선으로 난도질이라도 할 듯이.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일부러, 이런……!!”

크리스토프는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사이로 살짝 파고들어 있던 물건이 입구를 문지르며 빠져나갔다.

그 느낌에 몸서리치며, 크리스토프는 다시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더 이상은 맞지 않았다. 그 주먹을 붙잡고, 다른 주먹까지 붙잡아 그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쥔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손목을 뒤흔드는 크리스토프를 잡아당겨, 리하르트는 그의 얼굴에 입을 바싹 갖다 대었다.

“크리스토프. 오늘 아침에 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한 뼘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리하르트의 얼굴을 바라본다.

“타르텐에 머무를 방을 준비해 둘 테니 언제든 편할 때에 천천히 오시라고 했지.”

“…―.”

“뛸 듯이 기뻐하며, 오늘 당장이라도 오겠다더군.”

크리스토프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파란 눈으로 리하르트를 응시하기만 한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놓았다. 그러나 자유를 되찾은 팔은 다시 리하르트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히 아래로 떨어진다.

“오늘과 내일은 저택에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와 있어서 번잡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모레 일찍 오겠다고 했어.”

“모레…….”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 말만 되풀이한다.

“기쁘겠군, 크리스토프. 얼마 만에 만나는 가족이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리하르트의 위에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문득 리하르트는 웃었다.

“자……,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어머니를 오랜만에 뵙게 되는데 이렇게 넋을 빼놓고 있을 셈인가?”

리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 통에 그 위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는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리하르트가 어차, 하고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해 준다.

“네 어머니는 네가 몹시 걱정이 되었나 보지. 너는 어떠냐고 물어보시길래 잘 지내고 있다고 알려드렸어. 네가 요즘 내 일을 도와줘서 아주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크게 기뻐하시더군.”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리하르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른거리는 불쾌감을 읽고, 리하르트는 천천히 손을 뗐다.

“아, 그래도 안심해. 네가 어제 처음으로 동정을 뗐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으니. ……아니, 처녀를 버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모자지간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좀 그렇잖아? 라고 리하르트가 가볍게 말하자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움찔, 입을 꾹 다물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한 불안과 울분이 깃든 그 눈을 가느스름하게 바라보다가,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옆으로 살며시 내려놓고 일어섰다.

옷차림을 정돈하며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는 그에게,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도와주지. 네가 타르텐을 잇는 그 순간까지, 네가 바라는 대로 도와주겠어.”

“호오, 그거 고맙군. 그 마음 앞으로도 잊지 말아 주면 더 고맙겠어.”

“그 대신 계승이 결정되고 나면, 나는 반드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다.”

크리스토프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하고 푸른 눈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 눈과 같은 빛깔로 질려 있는 입술도.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는 웃었다.

“좋으실 대로. 그 전까지 내 말을 잘 따르는 것만 잊지 말아 준다면, 그 뒤엔 마음대로 해 봐.”

할 수 있다면, 그 말이 뒤에 덧붙는다.

묵묵히 자신의 움켜쥔 주먹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걸음을 돌렸다. 뚜걱, 러그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잊혀 있던 구두소리가 다시 울렸다.

“일정 시간은 이미 늦춰 놨어. 그러나 더 늦출 수는 없으니 어서 준비하고 내려와. 오늘은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

냉랭한 목소리가 발소리와 함께 한 걸음씩 멀어졌다.

방문을 막 열던 리하르트는, 조금 전에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하며 돌아보았다.

“그냥 한 번 대어 본 것뿐인데 끝부분 약간 들어간 정도로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더군. 어제 한 번 맛보고 나더니 아주 민감해졌나 보지. ――아, 그래. 칭찬해 주자면, 여태 내가 맛본 몸들 가운데 가장 감칠맛이 났어. 아직 한참 덜 익긴 했지만.”

바드득, 나무바닥을 긁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남긴 리하르트는, 경쾌하게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멀찍이 어디선가 또 마른번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아도 환성이 뒤따르지 않는 걸 보니 헛방이었던 모양이다.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쉬며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사박사박, 정강이까지 닿도록 길게 자란 풀이 가는 길을 살짝살짝 방해한다.

아직 숲이 깊어지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면 나뭇잎으로 가려진 하늘보다는 푸르게 내보이는 하늘이 더 많다.

여우가 다닐 리가 만무한 이 낮은 풀숲에서, 정태의는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니는 중이었다. 간간이 멀리서 말발굽 소리며 사람들이 왁자하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 총소리가 들려오곤 했지만 그런 소리들은 다 숲 깊은 곳 쪽에서 들려왔다.

머리 위에는 크리스토프의 눈동자만큼이나 새파란 하늘이 높다랗게 실려 있고, 발치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난 풀잎이 깔려 있다. 가끔씩 시야를 가리는 큼직큼직한 나무들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빼면 고요한 정적에 감싸여 있는 이 적막하고 청량한 공기도, 모두 다 좋았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 총소리만 안 들리면 참 좋을 텐데.”

정태의는 다시 한번 울리는 번개 소리에 아쉽게 혀를 찼다.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저만큼 척박하고 매서운 소리도 없을 거라고.

“자아, 어디……, 적당히 낮잠을…….”

“――자다가 뒤척여서, 여우로 오인받아 총 맞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상상하기도 싫은 소리를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사람은, 이미 정태의보다 한 발 앞서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남자였다.

얕은 숲에서는 보기 드물게 굵직한 아름드리나무 위에 편하게 올라앉아 있는 그 남자를 발견한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레이.

이놈은 어떻게 이렇게 내가 가는 곳마다 귀신처럼 나타나는 걸까. 혹시 나를 몰래 뒤쫓아 다――아, 하지만 지금은 이놈이 먼저 와 있었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뭐, 괜찮아. 여우와는 절대 헷갈리지 않을 색깔 옷으로 입고 나왔거든. 유비무환.”

정태의는 눈에 확 띄는 노란색―과연 누구의 눈에도 여우로는 보이지 않을―옷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러면서 일레이에게 말한다.

“오히려 네가 입은 그 불그스름한 옷이야말로 딱 여우 색깔이잖아. 너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 아냐?”

정태의는 까만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오늘은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위해 사냥이라는 행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행사라고 해도 자유참가나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상 젊은이들은 거의 다 사냥터로 내몰리는 형국이었다.

덕분에 정태의 역시 별로 내키지도 않는 걸음을 질질 이끌고 어슬렁어슬렁 총 하나 메고 숲으로 왔던 것이다.

일레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도 사냥을 하러 여기 왔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그는 이곳에 온 뒤로 정태의가 늘 보았던 그 세련되고 이지적인 느낌의 차림새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편한 넉넉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장갑.

저런 차림새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혹은 총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이런 환경이라 그런지, 갑자기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몹시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살짝 눈매를 좁히는 정태의를 보고 눈치 빠르게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나무 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일레이는 입 끝을 아주 약간 틀어올렸다.

“잘 알고 있군, 태이. 내 사냥감이 너라는 걸.”

“네가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

“농담?”

일레이는 가볍게 반문했다. 그러나 굳이 더 말하지 않고 픽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다.

정태의가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일레이는 정태의를 스윽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어슬렁거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냥당하기 십상이야.”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여우로 착각할 만한 인간이라면 애시당초 사냥에 참가하지 않았겠지.”

“여우만 총 맞는 건 아니지. 누가 누구를 노리고 숨어 있을지 모르는 법이니.”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은 아무래도…….”

너야, 너, 그 말은 생략하며 정태의는 지그시 일레이를 바라본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사람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저 커다란 몸집으로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지만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거침없고 말끔한 폭력’을 위해 태어난 몸인 것 같았다.

“승계 후보자를 지켜봐야 한다면서, 너는 이런 데에 있어도 괜찮아? 사냥 솜씨 같은 것도 판단 기준이 되나, 그런데?”

“오늘은 사냥이라기보다는 접대라고 해야겠지, 리하르트에게는.”

일레이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아,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여전히 약간 걸음이 늦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움직이는 몸으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따라 사냥에 참가했다.

드레스코드를 아주 열심히 지키는 크리스토프가 사냥복이 아닌 승마복을 입은 걸 보면서, 크리스토프 역시 사냥을 할 생각은 별로 없나 보다고 짐작했다.

아까도, 어슬렁어슬렁 숲을 걸어올라 오면서 제법 멀리 떨어진 다른 숲 입구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았다. 아랍의 귀빈과 리하르트,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역시 정태의를 본 눈치였지만 곧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제 아침에 민망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 버린 게 아무래도 멋쩍었는지, 그 뒤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식당 따위에서 정태의와 마주치면 화가 난 듯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는 돌아섰다.

음……, 하긴 나도 그렇게 정통으로 삽입 상황을 보이면 부끄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 ……이미 나는 여러 번 죽었어야 하는구나, 그렇게 따지면.

정태의가 갑작스런 깨달음에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총소리가 울렸다. 몇 초쯤 뒤이어 환성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아무래도 가엾은 여우 한 마리가 희생된 모양이다.

“너도 한 마리쯤 잡아 보지, 그래. 이 부근의 여우는 질이 좋아서 비싸게 팔리는데.”

“음……, 나는 사냥 같은 귀족적인 취미가 없어서.”

“귀족적인 취미가 아니라 가학적인 취미라고 하고 싶은 거겠지. 하긴 나도 여우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도망만 다니는 걸 쫓아다니는 건 재미가 없거든.”

“아냐, 넌 뭔가 오해하고 있어.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사냥을 안 하는 건 아니거든…….”

별로 달갑지 않은 오해를 받을까 얼른 손사래를 치는 정태의였다.

그러는 동안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또다시 총성에 이은 환성이 들려온다.

무심결에 그쪽을 돌아보며,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한가롭게 숲 산책을 하다가 사냥에 말려들기라도 하면 것도 나름대로 당혹스럽겠군. ……하긴 이렇게 기슭에 가까운 곳에는 여우가 나타날 리가 없으니 여기에서 노니는 한은 말려들 일도 없겠지만.”

“흠……, 그렇지도 않아. 재수가 조금만 없으면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말려들 수 있지. 예를 들면――.”

그러나 일레이가 예를 들기도 전에, 숲 안쪽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그쪽! 그쪽으로 간다!”

“엄청나게 큰 놈이야! ……어, 잠깐, 한 놈 더 있어, 두 놈, ……아니 세 놈이잖아!”

“저쪽으로 몰아! 저쪽으로!!”

흥분에 들뜬 고함소리가 몇이나 겹쳐졌다. 그 고함 소리와 말발굽 소리, 가끔씩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총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정태의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일레이가 한가롭게 중얼거린다.

“그래, 바로 이런 상황이지.”

“잠깐,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어서 피하는 편이 낫―…!!”

그러나 정태의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이미 숲 안쪽에서는 수풀을 요란하게 뒤흔들며 엄청난 기세로 뛰어오는 짐승이 보였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것은 거무스름한 진갈색의 짐승이다.

처음에 그 짐승이 여우라는 걸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몸길이가 1미터는 훌쩍 뛰어넘어 어지간한 여우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그만큼 크지는 않으나 평균에 비하면 큰 편인 여우가 두 마리 더 달려오고 있었다.

“어, ……어, …….”

그러나 문제는 여우가 아니었다.

여우는 정태의와 일레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자 그 옆으로 비껴나 달렸다.

여우보다 더 위험한 인간이, 바로 그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달리며.

피하기에는, 맹렬하게 달리고 있는 말이 지나치게 빨랐다. 게다가 그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의 마술馬術이 딱히 뛰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불운의 요인이었다.

“억……!!”

질주하는 길목 한가운데에 선 정태의를 뒤늦게야 발견한 기수는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정태의의 옆으로 비껴나 저만치 달려가는 여우를 쫓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 비키……!!”

거대한 말이 정태의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고삐를 미친 듯이 잡아당기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지만, 이미 너무 가까웠다.

젠장, 이건 재수가 ‘조금만’ 없는 경우가 아니잖아……!

정태의는 만사를 운에 맡기고, 몸을 최대한 낮게 낮추었다. 부디 짓밟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길 기원하면서.

그리고 눈을 꼭 감았을 때.

탕――.

바로 귓가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 총성과 동시에 소름끼치는 말 울음소리.

순간적인 정적에 이어지는, 당혹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그리고 육중하게 땅 위로 무너져 내리는 진동.

“…….”

눈을 뜬 정태의가 본 것은, 자신과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워 쓰러져 있는 하얀 말 한 필, 그리고 그 바로 뒤에서 나뒹굴며 신음을 흘리고 있는 기수.

말의 미간에 검붉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옆으로, 하얀 털이 차차 빨갛게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는 경우는 보통 없는데 말야. ……예전부터 가끔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이 너는 팔자가 조금 센 편인지도 모르겠어.”

정태의의 뒤에서 태평하게 말하며 일레이가 다가온다. 바삭, 바삭, 풀 밟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

푸들거리며 경련하다가 곧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마는 말을 잠시 망연히 바라보던 정태의는 곧 한숨을 쉬며 “팔자가 아주 드센 편인 것 같아, 내 생각엔…….” 하고 중얼거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넣어두고 있었는지, 어느새 그는 38구경 권총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의 옆으로 다가온 일레이는 무심하게 말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살짝 입매를 찌푸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정태의는, 말의 목 옆으로 또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구멍을 뚫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만치 멀찍이서,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라이플 장총을 늘어뜨리고, 여전히 삭막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흘끔 눈을 돌려버린다.

다각다각,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온 말은 정태의에게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다.

“……. 둘 다 고마워.”

정태의는 미묘한 공기 속에서 잠시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태의가 중얼거리든 말든, 말 위에서 크리스토프는 일레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고, 일레이 역시 평연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본다.

“쏘려면 제대로 쏘지 그랬어. 이 위치라면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지는 못한다고. 말발굽에 짓밟혀서 사람 하나 죽어나간 다음에 말이 죽어 넘어져봐야 무슨 소용이야.”

일레이는 크리스토프가 쏘아놓은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흥, 하고 코웃음 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은근히 기분이 상한 듯했다.

정태의가 혀를 차며 막 입을 열었을 때, 크리스토프가 왔던 방향에서 크리스토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돌아보기도 전에 표정을 굳혔다. 몹시 사나워진 얼굴로 흘끔 뒤로 고개만 돌린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그가 손을 까닥이는 모습이 여기에서도 보였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그리곤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돌렸다.

쏜살같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려는 그를, 정태의는 엉겁결에 소리쳐 불렀다.

“크리스!”

몇 걸음 걸어가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던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고마워. 도우러 와 줘서.”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어딘지 못마땅한 듯 침묵했다. 어느 순간 휙 말 머리를 돌리며,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던진다.

“몸조심해.”

삭막하게 노려보는 시선은 마치 ‘너 앞으로 나랑 안 마주치도록 몸 사리고 다니는 게 좋을 거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잠시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고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돌리는 눈치였지만 곧 말을 달려 가 버렸다.

크리스토프가 순식간에 멀어져 저 멀찍이 있는 리하르트에게로 돌아가고,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정태의는 멍하니 그쪽 방향을 바라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말 바람처럼 가 버렸네……. ……그런데 그 아랍 손님들 접대하는 거 아니었나?”

“손님을 내팽개치고 올 정도로 중요한 볼일이 있었나 보지. 어지간히 중요한 볼일이 아니라면, 버림받은 손님들이 불쾌하시겠어.”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게, 하고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던 정태의는, 에구구……하는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보았다.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행히 큰 탈이 생기지는 않은 듯한 기수가, 다리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여우를 사냥하긴커녕 애꿎게 다리만 다쳐서 돌아가게 된 그 젊은이를, 정태의는 혀를 차며 부축해 주었다.

***

“갑자기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가 했더니, 역시 저 남자인가? 잘도 알아차렸군, 그 거리에서.”

리하르트는 감탄한 듯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를 흘끔 쳐다보곤 그보다 몇 걸음쯤 앞서갔다.

“어떻게 몰라. 반짝거리는데.”

크리스토프의 무뚝뚝한 중얼거림에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말했던 것이 아닌 크리스토프는 얼마간 걸어가다가 문득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하르트가 기묘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슬쩍 낯을 찌푸리자 리하르트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다가왔다.

“반짝거린다라……, 저 남자가?”

리하르트가 물어서 크리스토프는 이번엔 짜증스럽게 그를 흘끗 노려보았다.

“네 눈에 그렇게 안 보이면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나만 보면 되니까.”

그렇게 부루퉁하게 내쏜 다음에, 생각해 보니까 릭 그놈도 보일 것 아냐, 칫, 하고 혼잣말을 투덜투덜거린다.

몇 걸음쯤 뒤에서 따라가며 희한하다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픽 웃으며 물었다.

“탱화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머리 뒤에 둥글게 후광이 비치는 건가?”

“무슨 헛소리야. 난 종교가 없어. 신은 사랑한 적이 없어.”

크리스토프의 냉담한 대답에 리하르트는 핀트가 어긋났다는 얼굴로 약간 낯을 찌푸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잠시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우울한 얼굴로 앞서가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가늘게 뜬 눈으로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눈매가 어쩐지 미묘하게 심술궂다.

“너는 누가 그렇게 반짝거려 보인 적 없지.”

“흠……?”

“그런 주제에, 너 나더러 아무도 좋아할 줄 모른다고 그랬었지.”

문득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 잠깐 창백하게 빛이 바래는가 싶던 그 얼굴은, 이내 삭막하고 무심한 표정을 떠올리며 리하르트를 냉랭하게 노려본다.

“그 뒤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렇지 않아. 난 그렇지 않아.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떤 게 좋아하는 거겠어?”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묘하게 낮아진 그 목소리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같다.

“흠……, 그럼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탱화처럼 보인다는 소리인가, 네 눈에는?”

“탱화 아니라니까!”

크리스토프는 벌컥 소리쳤다. 그런 뒤, 선심이라도 쓰듯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글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인 적은 없으니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동대에서 다른 놈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누가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이면 그 사람한테 반한 거라고 하더군.”

“실제 이상으로 예뻐 보이면…….”

크리스토프의 말을 따라 읊던 리하르트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그렇다면 만일――.”

그러나 그렇게 입을 열던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크리스토프가 의아한 듯 돌아보았지만 그는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앞을 향해 걸었을 뿐이다.

앞뒤로 약간 비껴서 나란히 선 말 두 마리는 점차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울창하다고는 하나 말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잘 다듬어진 승마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보다는 푸른 나뭇잎이 시야를 채운다.

“가끔 들려오는 총소리만 아니면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하는 것 같군.”

불현듯 리하르트가 중얼거리는 말에, 때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크리스토프 역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듯 눈살을 찌푸린다.

“내가 왜 네놈이랑 같이 산책을 해야 하지?”

“실제로 산책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 말은 옳지 않군.”

리하르트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흘끗, 그 말만큼이나 냉담한 시선을 크리스토프에게로 건넨다.

“아마도 이 근처 어디쯤 있을 테니 이제 슬슬 그들과 마주칠 때가 됐군. ……말해 두는데 크리스토프. 네가 그들을 놔두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통에 널 쫓아가느라 나까지 그들을 내버려두게 되었어. 일단 양해는 얻고 자리를 비웠지만, 집에 귀빈으로 모신 손님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짓을 저지른 셈이다. ――잊지 마. 너는 내 일을 제대로 거들어야 해. 네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두고서라도.”

“―….”

리하르트는 점점 울창해져서 가끔씩 시야를 가리며 앞길을 방해하는 나뭇가지를 손등으로 걷어내며 말을 잇는다.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들은 중요한 손님이다. ‘대단히’ 중요하지. 처음부터 이쪽이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아. ……아주 사소한 짓이라도, 긁어 부스럼 만들 짓은 하지 마라.”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굳이 대답을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이 크리스토프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막대한 차관을 변제해 왔다. 그리고 이번이 그 마지막이다. 이번 차관만 변제하고 나면 타르텐은 이제 도약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변제를 앞두고 찾아온 손님이 그들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움직일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일이란 것은 어느 사소한 구석에서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이 네 번째로 굽어진 길을 꺾어들었을 때, 저만치 나무에 가려져 있는 말 엉덩이가 보였다. 다각, 다각, 가볍게 걸어가는 걸음을 보니 그들도 정작 사냥보다는 산책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말리크! 아지즈!”

리하르트가 소리 높여 부르자 흔들흔들 걸어가던 말 엉덩이가 딱 멈추었다. 말이 방향을 돌려 돌아서자 그 위에 앉아 있는 말리크가 보였다. 길을 조금 더 돌아서자 그 옆에 있는 아지즈와, 그들의 수행원인 듯한 젊은 남자 한 명이 더 보였다.

그들에게로 가볍게 다가가며 리하르트는 다시 한번 그들을 내버려둔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말리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뒤에서, 거의 늘 그렇듯 아지즈는 말없이 그의 옆에서 가끔 고개나 끄덕이면서 그를 거들었다. 낯선 수행원은 그들보다 한참 계급이 아래인 듯 뒤에 물러선 채 전혀 끼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여우 사냥도 좋지만 숲이 퍽 아름다워서 천천히 돌아보고 있던 참입니다. 이렇게 풍성한 녹림을 가지고 있다니 참으로 부럽군요.”

감탄하면서 울창한 나뭇잎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던 말리크는, 문득 리하르트의 조금 뒤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면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갑자기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셨는지요.”

“……저쪽에서 여우를 쫓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던 방향이, 아는 사람이 있던 방향이라서요.”

크리스토프는 별반 대답하고 싶지 않은 티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말리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묻는다.

“아하……, 친구 분이 걱정되셨나 보군요. 그래, 별일은 없었습니까?”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을 꺼내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서 가만히 한숨을 쉰 리하르트가 그를 거들었다.

“위험할 뻔은 했지만 사람은 다치지 않은 것 같더군요. 하긴 리그로우가 같이 있었으니 크리스토프가 가지 않았더라도 별 탈은 없었을 테지만요.”

리그로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말리크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그러면 그 친구 분이 혹시……?”

“예, 이미 아실 테지요. 정재의 씨의 동생인 정태의 씨입니다.”

리하르트는 스쳐 지나듯 이야기했다. 흘끗, 그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아지즈가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자니 상당히 건실하고 약간은 고지식한 데가 있는 분 같던데, 어떻습니까, 당신이 보시기엔?”

말리크는 눈짓으로 아지즈를 가리키며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는 글쎄요, 하고 약간 고개를 기울인다.

“그의 성격이나 행동 습관에 대해서라면 저보다는 크리스토프가 잘 알 테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 본인은 별 문제없이 무난한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소 까다로운 편이더군요.”

리하르트가 나직이 웃으며 말하자 말리크 역시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하하, 주위 사람들이 말이지요…….” 하고 되풀이하며 뭔가 잠깐 생각하는 눈치다.

다각다각다각다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여럿 줄지어 울렸다. 가볍게 걸어가는 말 위에 앉아 산책을 즐기는 듯이 숲으로 들어가던 말리크는 문득 나무가 조금씩 듬성듬성해지는 듯싶은 길을 둘러보다가 눈을 크게 뜬다.

“저 아래쪽에 냇물이 흐르고 있군요. 숲속의 냇물이라……. 정취도 좋으니 잠시 쉬어 갈까요.”

적당한 나무 아래 말을 세우고 훌쩍 내려서는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멈춰 섰다.

그러나 정작 냇물 이야기를 하며 멈춰 선 말리크는, 그쪽은 더 보지도 않고 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는다.

“이곳은 조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좋군요.”

말리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내었다.

리하르트는 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에 앉고 아지즈는 말리크의 뒤에, 그리고 크리스토프와 수행원은 앉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옆에 바로 붙어 있는 바위를 흘끔 노려보곤 뒤쪽에 있는 나무에 그냥 기대어 섰고, 수행원은 말을 돌보는 듯 말 근처에서 서성인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그 수행원을 보곤 미심쩍게 고개를 기웃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보를 다루는 분들 앞에서 돌려 말해 봐야 우스울 테니 그냥 곧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모시는 분은 정재의 씨를 저희 사업체로 모시기를 무엇보다도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분은 이미 UNHRDO에 소속되어 있고, 그를 설득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타르텐 쪽에 변제 조건으로 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리크가 꽤 단도직입적으로 꺼내는 그 이야기는 이미 타르텐 측에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리하르트는 내색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뒤에서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있던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타르텐 내부에서 이야기가 오갈 때 크리스토프도 그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알 파이살이―정확히는 그의 피후견인이―정재의를 자신의 사업체와 연계해 독자적으로 두고 있는 연구소에 데려오고 싶어한다고.

그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의라는 이름은 이미 일부에서는 하나의 절대적인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비단 그에게서 뭔가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그 이름만으로도 그 연구소는 매우 유효하게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 당시, 몇 년 전과는 달라졌다.

당시 권력을 두고 한창 암투에 휘말려 있던 알 파이살의 동생, 알리 왕자는 작년 외무장관직에 취임하면서 그 권력다툼의 끝을 알렸다. 이후에 그의 앞날을 방해할 이는 없을 터였다.

이미 권력을 등에 업은 알 파이살 역시 정재의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의 값어치는 예전만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정재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과연 저렇게까지 해서 얻어서 수지타산이 맞을까 싶을 만큼 막대한 공세를 퍼부으면서.

타르텐 내부에서도 의아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정재의에게 다른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런 의견도 분분했다.

결국 결론은 나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알 파이살이 정재의를 원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달리, 독자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타르텐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은 뭐가 있을까. 그걸 생각하다가, 아직 갚아 주지 못한 빚에 결론이 이르렀습니다.”

크리스토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동안에도 말리크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 리야드에 정체불명의 폭격이 일어났던 것은 기억하시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드릴 것 없이, 어쩌면 저희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실 테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때에는 타르텐마저도 거의 뒤집어졌었다.

리그로우가의 둘째 아들이 미친놈이라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대대적인 미친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리야드의 테러를 주도한 것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날 타르텐의 제1정보국에서 제6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정보국이 밤새도록 총동원되었다.

그 당시 크리스토프는 이스라엘 정부군과의 단기계약으로 레바논에 불려가 헤즈볼라와 대치하고 있었기에 그 소식과는 동떨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야 ‘릭이 정재이를 구하기 위해 리야드를 폭격하고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의 별저까지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좀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정재의라는 인간이 온갖 수많은 인간들이 눈을 벌겋게 하고서 탐내는 인재라는 말을 크리스토프도 들은 바 있었지만, 그렇다고 릭이 그 사람을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은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그가 정작 구출하려 했던 건 천재 정재의가 아니라 그 옆에 덤으로 딸려서 덩달아 붙잡혀 있었던 범인凡人 정태의라는 걸 알게 되어 풀렸다. 그러나 다시, 그럼 그 정태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해서 구했느냐는 의견이 또 분분했지만, 그 의문 역시 다시 곧 풀렸다.

그 정태의라는 인간을 꿰어차고 나란히 손 붙잡고―소문으로 듣기에는―베를린으로 가서 들어앉았다는데,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당시 일시적으로 정태의라는 이름은 옛 T&R 기동대며 타르텐 정보국을 비롯해 릭이라는 미치광이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공식 인기명 1위에 올랐다.

‘왜 베를린에 감춰 놓고 그렇게 싸고돌아. 얼굴 좀 보여 주지.’

몇 년 전 리그로우와 잠시 마주쳤을 때 정태의라는 이름을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리그로우는 선뜩하게 웃으면서 싸늘하게 말한 바 있었다.

‘닳아.’

“…….”

갑자기 그때 리그로우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프는 눈에 불을 켰다.

그 당시에는 이놈이 미쳤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까 화가 치민다.

그래서 그렇게 꽁꽁 숨겨 뒀었냐. 그럼 지금쯤 그 녀석 얼굴에는 이미 구멍이 수백수천 개쯤 숭숭 뚫리고도 남았겠다.

공연히 속이 뒤틀린 크리스토프가 속으로 툴툴거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말리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러나 그 범인들 가운데 정재의 씨의 동생이 있다는 점에,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관심을 보이셨지요.”

사뭇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말리크를, 크리스토프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내려다보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게 필요할 때가 있는 줄은 알지만, 온갖 정보가 다 들어오는 위치에 있는 인간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다.

“범인들 가운데 정재이의 동생이 있는 게 아니라, 정재이의 동생을 범인 대열에 끼워 넣은 거지…….”

크리스토프는 코웃음 대신 무뚝뚝하게 불쑥 중얼거렸다.

워낙 작은 소리라 그들에게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있던 리하르트는 조용히 크리스토프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만다.

그 뒤로도 얼마간 말리크의 말이 더 이어졌으나 크리스토프는 거의 듣지 않았다. 알 파이살이 정재의를 맞아들이길 원하든 말든, 그런 데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래서 가능하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태의 씨의 협력을 얻어내어 서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의견을 타진해 보자 아무래도 힘들 것 같더군요. 제가 모시는 분께는, 그런 경우에는 적정한 수준의 강경한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미리 지시하신 바 있습니다.”

말리크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멀찍이서 흘러가는 물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설핏 얼굴을 굳혔다. 눈동자만 돌려 말리크를 바라본다.

리하르트는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다가, 말리크가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자 그제야 가만히 입을 뗐다.

“그 말씀은 즉, 어떠한 류의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정태의 씨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말리크는 빙그레 웃었다. 그 뒤에서, 아지즈는 무뚝뚝한 가운데서도 은연 중 불편한 기색을 풍기며 슬쩍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 타르텐의 손을 빌리시렵니까?”

리하르트가 다시 묻자, 말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지금 당장은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차관의 변제 방법은 저희들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니 충분한 의논을 거친 후 제가 모시는 분께 그 이야기를 전해 드리게 되겠지요. 아마도 의논을 마치면 거기에서 크게 다른 결과가 되지는 않을 테지만요. 지금은 일단 차관 변제보다는, 그에 앞서 사소한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손을 저으며 웃던 말리크는 마지막 말을 할 때에야 짐짓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말씀은……?”

리하르트가 되묻자 말리크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오늘 이렇게 고맙게도 사냥 자리를 열어 주셨는데, 어쩌면 제가 데려온 이들 중 하나가 약간 실수를 해서 사람을 조금 다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르텐의 영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면 몹시 안타까운 일일 테지만, 모쪼록 너그럽게 양해를 해 주십사 하고요. ……아아, 물론 그런 불운한 일이 과연 벌어질지는 알 수 없고 벌어지지 않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고 부드러운 그대로였지만,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크리스토프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말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그 뒤에 선 아지즈에게로, 그리고 얼마간 떨어져 말을 돌보고 있는 수행원에게로 옮겨갔다.

검지와 중지의 마디 위에 박인 굳은살. 두툼한 베스트 안쪽으로 약간 불룩하게 솟은 모양새는, 사냥에는 적합하지 않은 단총.

리하르트의 시선 역시 잠시 그 수행원을 훑었으나 모른 척 다시 말리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눈은 조금 난처한 듯하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속을 모를 눈이다.

“불상사라……, 저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정말이지 불운한 일이겠군요.”

하하, 하고 곤란한 듯이 웃으며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리하르트의 태도는, 내키지는 않으나 모르는 척 묵인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그때였다.

“적정한 수준의 강경한 방법이라면, 어느 정도가 적정한 수준이신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여태 대화에 거의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해 오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묻는 말에, 일순 말리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빙긋 웃음 짓는다.

“하하……, 생명에 지장이 없고 평생 지속될 장애를 주지 않을 정도라면 적정하겠지요.”

크리스토프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잠시나마 리하르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감정을 감춘 그에게 그는 말없이 이르고 있었다.

너는 내 일을 거드는 입장이다. 방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야.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바라보지 않았다. 고집스러울 만큼 뚫어지게 그 수행원의 손가락만을 본다. 크리스토프만큼이나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익숙한 손가락이다.

리하르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말리크를 돌아보았다.

“불운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지만, 피치 못할 경우라면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리하르트의 조용한 말에 말리크는 매끄럽게 웃었다.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렇다면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우리도 슬슬 사냥을 시작해 볼까요. 붉은 여우를 잡아 본 지는 무척 오래 되어 기대가 됩니다.”

말리크는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 역시 뒤따라 일어나는 가운데, 말리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돌보고 있던 수행원이 그 시선을 눈치채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짧은 눈짓이 오갔을 뿐이다.

말리크는 그 수행원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웃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는 아주 솜씨가 좋은 사냥꾼이지요. 우리와는 따로 움직일 겁니다. 그도 근사한 여우를 잡아오면 좋겠군요.”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 수행원을 바라보다가, 그가 목례를 남긴 뒤 훌쩍 말에 올라타 떠나려 할 때 문득 입을 열었다.

“사냥터에는 여우뿐 아니라 가끔 사나운 맹수도 나오니 주의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맹수이지요, 하고 덧붙이는 리하르트를 수행원은 잠깐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맹수라…….”

말리크가 미묘하게 중얼거리며 쓰게 웃는다.

“사정거리를 둔 사냥터에서는 사냥꾼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법이지요.”

말리크는 낮게 중얼거리곤 흠, 하고 한숨을 쉬더니 일단락을 지었다는 듯 돌아섰다.

“그럼 우리도 이만 출발을…―.”

그러나 말을 꺼내던 그는, 돌아선 순간 입을 다물었다.

리하르트의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정확한 조준도 없이 장난을 치기라도 하는 듯, 긴장한 빛도 없이 아무렇게나 손에 쥔 총은 정확하게 말리크의 머리를 향하고 있다. 여남은 거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리크는 일순 낯빛이 변했지만 곧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크리스토프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보인다.

“아주 손질이 잘 된 총이로군요. 여우를 잡을 총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말리크의 말에, 크리스토프를 등지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당장 뒤를 돌아보는 그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눈 하나 까딱 않고 말리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달칵,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저 남자가 들고 있는 것도 여우 사냥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총이지.”

크리스토프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방아쇠에 가볍게 걸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크리스토프, 그 총 내려.”

리하르트가 낮으나 사납게 말했다.

숲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런 얼굴은 보기 힘들었다.

험악한 빛을 시선에 고스란히 담은 그가 나직이 크리스토프를 다그친다.

“크리스토프. 약속을 잊은 건 아닐 테지.”

“……. 맹수가 한 번 그놈을 구해냈으면, 이번에는 내 차례야.”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 막 출발해 멀어지고 있던 수행원이 뒤쪽에서 벌어진 미묘한 술렁거림을 깨닫고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크리스토프의 손에 들린 총을 본 순간.

반사적으로 베스트에서 총을 뽑아드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총구를 아주 약간 옆으로 기울여 겨누었다. 동시에 검지를 가볍게 튀겼다.

짧고 메마른 소리.

말리크의 바로 옆을 스쳐 가는 조그맣고 치명적인 납 조각.

아무도 말마디를 뱉어내지 못하는 찰나의 정적.

그리고 그 뒤에.

기괴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심장 약간 아래, 수행원은 자신의 몸통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듯 기괴하고 의아한 신음을 조그맣게 흘려내던 그는, 이윽고 눈을 부릅뜨며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꺼내어 든 총으로 크리스토프를 겨누었지만 늦었다. 총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도 구멍이 하나 더 뚫린다.

“……!!”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사태에 침묵했다. 그런 가운데, 수행원이 말에서 굴러 떨어져 흙바닥 위에 뒹구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면서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이런……, 집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에게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다니, 정말이지 불운한 사고로군.”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책 읽듯이 고스란히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총을 쥔 손을 내렸다.

말리크는 약간 핏기가 가신 얼굴로, 낮은 신음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아지즈 역시 침중한 얼굴로 수행원을 쳐다보다가 크리스토프에게 험악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일순 표정조차 잃어버렸던 그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

그러나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자신을 바라보는 말리크를 무심하게 마주보며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생명에 지장이 없고 평생 장애가 없다는 건 이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

뭔가 말하려 하던 말리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도 이미 웃음기는 씻은 듯 가셔 버렸다.

서둘러 수행원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피는 아지즈에게 흘끗 눈길을 주자, 아지즈는 신중하게 상처를 살핀 뒤 말리크에게 눈짓을 했다. 말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즈는 지체 없이 수행원을 말에 태우고 자신도 그 뒤에 함께 올라탔다. 서둘러 말 머리를 돌리던 아지즈는, 험악하게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이 어리석은 짓에 대한 대가는 너 혼자만 받고 끝나지는 않을 거다……!”

선명한 분노를 심어 그 말만을 남긴 그는, 말을 달려 급하게 떠났다. 조급한 말발굽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세 사람과 함께 정적만이 남았다.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한 답변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군요.”

이윽고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말리크였다.

늘 서글서글한 얼굴로 뭔가 말을 할 때면 으레 빙그레 웃곤 하는 그는, 일말의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얼음처럼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본다.

“타르텐에서 이런 식으로 도와주실 줄도 몰랐습니다.”

말리크가 조용히 억누른 목소리로 말하자, 크리스토프의 입매가 움칫 움직였다.

타르텐이 아니다. 크리스토프라는 개인이 벌인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말은 먼지만큼의 무게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씨. 귀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타르텐, 그 이름에 악센트를 넣어 말리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깊이 고개를 숙인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말리크만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 얼굴은 무표정마저 사라질 만큼 놀라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아는 한 리하르트는 어르신이나 집안의 어른들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사과를 할 만한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거니와, 그는 결코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사람 좋게 다정한 웃음을 짓고는 있으나 그것이 그의 본성이 아니라는 걸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서투르게 드러나지 않는 그의 자존심이 사실은 얼마나 드높은지도.

그런 리하르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인해.

크리스토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꽉 맞물린 입술이 약간 비틀린다.

말리크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하르트를 냉랭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얼음 같은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개인은 물론 제가 모시는 분도, 제가 몸담고 있는 곳도 타르텐을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지금과 같은 관계가 맺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고도 내밀한 이야기까지 터놓고 상담을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

“그것이 설령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개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그 집단이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말리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얼핏 고요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그 목소리는 굳게 닫혀 있다. 그 안에는 분노와 적의가 맺혀 있었다.

한낱 수행원이라 하나 자신의 동료이다. 타국까지 함께 온 동향의 동료가 상상치도 못한 일로 크게 다쳤다. 그들의 기질은 온건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어떠한 경위로든 저희 사람이 다쳤군요. ……말씀하신 대로 매우 불운한 일입니다. 심지어 중요한 일을 앞둔 지금 말입니다.”

말리크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언짢은 빛이 억누른 말꼬리에 희미하게 배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숙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침중하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이 일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고 정식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리하르트 타르텐이라는 이름으로, 귀하께 용서를 빕니다.”

――리하르트 타르텐이라는 이름으로, 귀하께 용서를 빕니다.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순간, 크리스토프는 무심결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목에 칼을 들이대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남자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그런 말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갈 날이 있을 줄도 몰랐을 게 틀림없었다.

차갑게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던 말리크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는 문득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사납게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크리스토프는 말리크를 쳐다보았다. 그 내쏘는 시선을 말리크가 마주본다.

“빚은 준 대로 고스란히. ……그렇다면 제가 책임지고 갚을 빚은 이거면 될 테지요.”

크리스토프는 총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말리크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그런 그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서슴없이 자신의 심장 약간 아래, 아까 수행원의 몸이 꿰뚫렸던 바로 그 자리에 총구를 대었다. 그리고 말리크를 바라본다.

말리크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다.

어쩌면 크리스토프가 설마 스스로를 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그 빚을 그대로 받아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말리크는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좋을 대로 해 보라는 듯 눈짓을 했고,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 정도는 생각했었다. 그 대가를 자신이 치를 생각도 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막 검지를 당기는 순간이었다. 무서우리만치 싸늘하게 그를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그 순간 크리스토프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서, 그의 팔을 세차게 걷어내어 버린다. 그리고 곧 연이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탕!, 떨쳐진 손으로 내쏘아버린 메마른 총소리는 나무등걸에 박혔다.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후려갈긴 리하르트의 앞에서, 미처 방비하지 못했던 크리스토프는 두어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곧 자신이 맞았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휙 치켜들며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말리크의 앞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은 리하르트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닿을 듯이 숙인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뻔뻔하다 여기실 테지만 맹우를 아끼시는 마음으로 제 심경도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록 성품이 급하고 모질다 하나 제 혈연입니다. 사람 둘이 상하지 않도록,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리하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꾹 다문 단단한 턱이 잠시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하신들 맹우가 크게 다친 분은 풀리지 않으실 테지만 모쪼록 그것이 오래도록 이어온 관계에 흠을 만들지 않도록,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말을 마친 뒤 다시 이마를 바닥에 댈 듯이 숙이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일어나.”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말리크도, 리하르트도 침묵하고 있어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만이 울렸지만, 그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숙인 앞에서, 말리크는 조용히 리하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인에게 용서를 청한 적도, 그렇듯 내려다보인 적도 없을 남자가 흙바닥을 짚고 엎드려 있었다.

“리하르트. ……일어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살아 있는 것은 크리스토프 한 사람뿐인 듯, 다른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운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다. 내가 벌인 일에 왜 네가 멋대로 나서고 있어……! 너는 비켜!! 내가, 한 대로 받을 테니!”

“……크리스토프. 네가 네 가슴에 대고 총질을 하는 걸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보나?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내가 네게 받을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타르텐의 이름을 가진 주제에, 그 이름을 멋대로 휘둘렀다는 것이나 그 머리에 똑똑히 넣어 둬.”

리하르트는 나직이, 악문 잇새로 거칠게 내뱉었다.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사납게 뿌리치고, 말리크에게 돌아섰다.

다시 흙바닥 위에 무릎을 짚는 리하르트에게, 그때까지 말이 없던 말리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뜻은 잘 알았습니다.”

여전히 냉랭하고 쌀쌀하나 조금 전과 같은 분노는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말리크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타르텐과의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리하르트 타르텐이 어떤 남자인지.

지금 리하르트 타르텐이 말리크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대는 모습을, 과연 그를 아는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제가 오히려 황송하니 그만 일어서 주십시오.”

말리크는 뒤늦게야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리하르트를 부축하는 시늉은 하지 않는 그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과 허리를 펴고 일어선 리하르트는 참담한 모습이었다.

바지 무르팍에, 바닥을 짚었던 손과 소매에, 이마와 머리카락에, 흙이 누렇게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그가 흙바닥에 머리를 묻었던 사실을 명확하게 되새겨 준다.

“이번 일은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나, 이런 일로 오래도록 쌓아 온 친분이 무너져서야 저희로서도 아쉬운 일입니다. 이번 일은 차후 따로 그에 상응하는 해명을 받을 것이되, 곧 돌아오게 될 변제에 있어서는 문제를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께도 그렇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리하르트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말을 마친 뒤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듯 말리크는 잠시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지만, 곧 걸음을 돌렸다.

“그러면 저도 그가 걱정되니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처럼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끝까지 즐기지 못해 죄송하군요. ……그러나 사냥을 즐길 날은 오늘만이 아니니,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즐기도록 하지요. 그때에는 불운하고 무익한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약간 소리를 낮춘 마지막 문장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크리스토프는 이내 깨달았다. 오늘 하루 정도만 훼방을 놓아 봐야 앞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너는 그저 바보짓을 했을 뿐이라고, 말리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리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를 일별하곤 곧 말머리를 돌렸다.

비록 일단은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하나 여전히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로, 말리크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숲 바깥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는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곳에는 침묵이 남았다.

“…―.”

크리스토프는 입을 꾹 다문 채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꿈치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누가 네 멋대로 끼어들라고 했어. ――누가, 너더러 그렇게 비참한 꼴로 용서를 구걸하라고 했냐고.”

크리스토프는 격앙된 목소리를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그제야 리하르트는 흘끗, 눈동자만 돌려 크리스토프를 본다. 그 시선 속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던 리하르트는, 그 손등에 묻어나온 흙을 잠시 말없이 노려보았다.

자신의 이마에 흙이 묻게 되는 것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을 그는, 몇 초간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않고 지그시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등을 돌렸다.

시내 쪽을 향해 비탈진 언덕을 성큼성큼 내려가며, 리하르트는 거칠게 재킷을 벗어 바위 위에 집어던졌다. 흙이 묻은 바지도, 셔츠도 벗어 재킷 위에 내팽개치는 손길이 사납다. 억누른 울분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크고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는 시냇가에 다다랐을 때, 이미 리하르트는 옷가지를 모두 집어던지고 냇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몸을 담갔다고 해 봐야 허벅지 가량까지 올 뿐이라, 허리를 굽혀 온몸을 물로 적셨다. 물살로 후려치는 것처럼 얼굴이며 팔 따위로 세차게 물을 끼얹던 그는, 어느 순간 물속에 첨벙 잠겨들었다.

그리 깊이 않은 물 안에 온몸을 담그고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냇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원하지 않았다. 거의 충동적으로―그러나 머리 한구석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그 남자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에도, 크리스토프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기껏해야 자신도 같은 보답을 받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저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결코 그런 걸 보려고 한 게 아니다.

크리스토프가 이를 악물고 수면을 노려보는 가운데, 한참 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잠겨 있던 리하르트가 어느 순간 물보라를 일으키며 일어섰다. 촤악, 수없는 물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한가운데, 그 물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시내 바로 옆에 서 있던 크리스토프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난 너한테 그런 짓을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

리하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었어. 같은 상처로 보상이 안 된다면 심장이든 머리든 쏘아 주면 되는 일이었다고. 타르텐을 짊어진 네가 무릎을 꿇지 않아도!”

크리스토프가 외쳤다.

그때, 크리스토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물 밖으로 나오고 있던 리하르트가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네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었다……? 심장이든 머리든 쏘아서?”

그렇게 중얼거린 리하르트는, 문득 하……,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냉랭한 시선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 심장도 머리도 이제 내 것이겠군.”

“웃기지 마. 나는 부탁한 적 없어. 차라리 총으로 쏘아 버릴 수는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넘겨줄 건 아냐.”

크리스토프가 거칠게 내뱉는다. 애초에 진지하게 말한 게 아닌 리하르트는 곧 시선을 돌려 물 밖으로 나왔다. 그의 걸음 아래로 물이 고였다.

“네가 그럴 이유는 없었는데. 네가. 타르텐을 이어야 할 네가. ―…그렇게 꼴사나운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단 말이다.”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 나왔다. 타르텐의 모든 이가 그런 것처럼, 설령 떠나 있더라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해도, 타르텐은 그의 기둥이다.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그때다.

옷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리던 리하르트가 문득 멈칫했다.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돌아본다. 그 눈에 새카맣게 빛을 잃은 울분이 담겼다.

“꼴사납다? ―…꼴사나워도 할 수 없지. 너도 타르텐인 바에야 눈앞에서 네가 죽는 꼴을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으니. 수십 년의 변제가 이제야 끝나려는데, 그걸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그들과 척을 져서 앞으로의 비상飛上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악문 잇새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나직이 속삭이듯이 시작한 말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서슬 퍼렇게 억누른 고함이 되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한 걸음 한 걸음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불길 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본다. 독이 흘러나올 것 같은 혀가 말을 쏟아내었다.

“고개는 얼마든지 숙일 수 있어. 필요하다면 머리를 땅에 박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할 수 있어, 얼마든지! 그래야만 한다면!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절대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다! 내 머리를 으깨어 버린다 해도!”

리하르트는 커다랗게 외쳤다. 그 커다란 외침과 무섭게 굳어 있는 얼굴은 자신의 굴욕을 성내고 있었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네 그 알량하고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런 바보짓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어. 타르텐이 손해를 볼 일도 없었지! 그래, 보상! 오늘 네 그 얼간이 짓 때문에 어느 정도나 손해를 보게 되었는지 알고는 있나? 모를 리가 없겠지!”

“――내가, 갚으면 되잖아!”

크리스토프는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외쳤다.

“내가, 처음부터 내가 그럴 생각이었어! 그 자리에서 내 머리를 날려 버리면 되는 문제였어! 네가 나를 위한답시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어!”

크리스토프는 성을 내며 외쳤다.

화가 났다.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그러나 분을 못 이겨 단숨에 말을 쏟아내고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어느새 분을 갈무리하고서 냉막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냉막한 게 아니다. 지독한 울화와 분노가 쌓여 얼어붙은 거다.

“그래……, 그럼 차라리 얘기가 빨라지겠군. 갚아.”

리하르트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한 걸음, 크리스토프에게 다가왔다.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와 있던 그가 다가오자,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디면 또 한 걸음 더.

“갚……지, 갚겠어.”

크리스토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돈 따위는 필요없어. 어차피 타르텐의 이름으로 나갈 사죄금이다. 돈 같은 건, 차관 변제를 끝내고 나면 쓸어다 버려야 할 만큼 들어올 테니까 그런 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럼, 뭘――.”

“내 굴욕만큼의 네 굴욕.”

리하르트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대답을 잃었다.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겠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좀 더 쉽게 말해 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짓을 했으니, 너에게도 마찬가지의 것을 받아낼 거다.”

“―…. 마찬가지의 것, 이라니.”

크리스토프는 움칫 눈살을 찌푸리며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리하르트가 한 걸음 더 다가왔을 때, 이미 크리스토프의 뒤는 시내였다. 한 걸음 더 물러서던 크리스토프는 발뒤꿈치에서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땅과 물의 경계에 섰다는 것을 깨닫는다.

리하르트는 손을 뻗었다. 그대로 물속에 밀어넣을까 싶어 일순 발밑을 확인한 크리스토프였지만, 그 손은 크리스토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닿는 순간 흠칫, 반사적으로 뿌리쳤지만 풀려나가지 않을 만큼 단단히.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리하르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표정마저 사라진 얼굴로 말없이 그를 노려만 보는 눈동자가 얼음처럼 파랗다. 뭐라고 달싹거리다가 닫히는 입술도 눈동자만큼 파랗다.

크리스토프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움켜쥐고 있는 그 감각이 못내 싫은지 가끔 알아채기 힘들 만큼 팔의 근육이 움츠러드는 게 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문득 리하르트는 잡고 있기도 싫다는 것처럼 뿌리치듯이 크리스토프를 내팽개쳤다.

균형을 잃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물속으로 철벅이며 들어서던 크리스토프는 물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박혀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첨벙, 요란한 물소리가 나며 물보라가 튀었지만,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지만 물이 쿠션이 되어 아프지도 않다.

물보라가 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크리스토프는 몇 걸음 떨어진 정면에 선 리하르트를 사납게 올려다보았다.

서너 걸음, 딱 그 거리만큼 떨어져서 물가에 서 있던 리하르트는 물속에 넘어져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선다.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리고 그는 크리스토프를 얼마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빨아.”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한 듯했다. 의아한 빛이 얼굴 위를 스치는 것도 잠시, 이내 크리스토프의 표정에 경악 섞인 의혹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자신의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을 부정하듯 가만히 고개를 젓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그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크리스토프의 코끝에서 두어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리하르트의 벗은 몸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사타구니 가운데, 무겁게 늘어져 흔들리는 거뭇한 살덩이가.

크리스토프의 경악스런 시선이 그곳에 꽂히는 것을 내려다보며, 리하르트가 아주 약간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그 물건에, 크리스토프는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라도 본 듯이 움찔 뒤로 고개를 물렸다.

“빨아.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서서히 들어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금세라도 깨어질 유리처럼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친 놈, 이 변태 새끼……! 누가 그런 더러운, ――싫어.”

창백한 입술을 비집고 욕설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리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에 그 입으로 분명히 갚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

“말했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짓을 고스란히 받아내겠다고. ……하. 아래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더럽다고 낯빛을 바꾸는 네게 말야.”

아무 말도 못하고 해쓱한 얼굴로 노려만 보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더러운 걸 입에, ……느니 차라리 목에 칼이 꽂히는 편이 나아. 절대로 싫어.”

크리스토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말은 예상한 듯,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픽 웃었다.

“나는 그 끔찍하게 하기 싫은 짓을 했는데, 너는 못하겠다? 그래서야 곤란하지. ……크리스토프, 너는 중요한 걸 잊고 있어.”

리하르트는 아주 약간 더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그만큼 크리스토프는 다시 몸을 뒤로 움츠린다.

“너는 날 도와야 한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어. 돕긴커녕 도리어 그 반대였지. 약속의 조건이 뭔지 잊었나?”

리하르트가 은근히 묻는 순간,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삽시에 굳었다.

“네 어머니가 뛸듯이 기뻐하며 달려오겠다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도 잊었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리하르트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냉랭한 얼굴 그대로 나직이 말했다.

“크리스토프. 나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넌 물론이고 네 어머니가 타르텐의 저택에 발을 들이는 것 역시 몹시 언짢아. 한 번 쫓겨난 자는 평생 그 밖에 있어 마땅하다. 원래라면 그녀는 드레스덴의 땅을 밟아서도 안 되는 몸이야.”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비겁한 협박이다. 비열하고 더럽다. 심지어 리하르트는 흥분을 해서 크리스토프에게 윽박을 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성기는 무겁게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그는 오로지, 크리스토프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졌다. 마치 인형처럼 창백해지는 그의 위로,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빨아.”

“……싫, 어. ……못해.”

물 흘러가는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를 잘도 알아듣고, 리하르트는 낮게 코웃음 쳤다.

“‘못해’? ‘안 해’보다 낫군. 크리스토프. 세상에는 못할 짓 따위는 없어. 나는 조금 전 끔찍할 만큼 싫어하는 네놈이 저지른 잘못을 대신해서 흙바닥 위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는데, 너는 무슨 짓을 못한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거친 분노가 서렸다.

그러나 곧 스스로도 깨달은 듯, 그 분노를 삭이려는지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랬다. 가끔 크리스토프를 상대하다가 거친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늘 침착하고 온유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있어야 했다.

이미 조금 전 물로 뛰어들 때까지의 그 거친 모습은 많이 가셔 있었다. 물속에서 엉망으로 뒤틀린 분노를 반쯤 재우고 나와, 나머지 반을 지금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리하르트는 곧 다시 냉랭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 ――빨아.”

크리스토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살덩이를 넋 나간 듯 창백한 눈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서슴없이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고 벌린 그는, 다른 손으로 크리스토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흠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를 용서 없이 끌어당겼다.

“그, 싫……!!”

무섭게 눈을 홉뜨고 몸을 뒤트는 크리스토프를 억누르며, 리하르트는 억지로 벌린 그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넣었다.

“잘 들어, 크리스토프. 살짝 깨무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내일 네 어머니가 타르텐의 문밖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게 될 거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저주와도 같이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는 분명 크리스토프의 귀에 닿았다.

그는 입속으로 파고드는 그 살덩이를 뱉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단단히 움켜잡은 손이 머리를 고정시킨다.

“……! ……!!”

요란하게 요동치는 물소리가 났다. 짓눌린 신음과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뒤섞여 물소리에 섞인다.

“말해 두는데, 나는 네 입속에서 사정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빼주지 않을 거다. 네가 피하려 들면 들수록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있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니까 똑똑하게 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 좋을 거야,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으려 안간힘을 쓰는 크리스토프의 머리를 어렵잖게 휘어잡은 채 말했다.

입 안에 들어온 뒤로 약간 단단해진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무겁게 늘어져 있는 그 성기는, 고작해야 반 정도나 입에 담겼을 뿐이었다. 그 나머지를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어넣어, 크리스토프는 곧 숨을 쉴 수가 없어졌다.

괴로웠다.

목을 찌르며 깊이 파고드는 성기 때문에 구역질이 났고, 숨이 막혔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고이자 입 안의 살덩이가 더욱 질척거리는 것 같아 속이 메스껍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조차 안 된다.

“크리스토프. 간밤에는 잘 잤나?”

문득 리하르트가 던지는 그 뜬금없는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꼼짝도 못하는 머리로 눈동자만 치켜올려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어제도, 그저께도 거의 못 잤어. 네 몸이 어떤 맛인지 맛본 뒤로, 계속 감촉이 남아 있더란 말야. 손바닥에서 네 허리가 미끄러지던 감촉이나, 내 가슴에 보드랍게 비벼 대던 네 등의 감촉이나, 내 손가락 사이에서 뾰족하게 솟던 네 젖꼭지의 감촉이나, 내 페니스를 통째로 삼켜서 오물거리던 네 아랫도리의 감촉이나. 게다가 무엇보다도, 네가, 크리스토프, 그렇게 울면서 힘들어하는 모습까지. ……밤 내도록 그 감촉들이며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몇 번은 더 쌌어. ……아, 그래, 이제 조금 느낌이 오는군.”

리하르트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동안, 크리스토프의 입에 담겨 있던 성기가 점점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추삽질을 시작한다.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갑자기 목구멍으로 치고 들어오는 살덩이의 감촉에, 크리스토프는 사레가 들고 말았다.

폐가 끊어질 듯 괴로워 기침을 하려 했지만 재빨리 알아챈 리하르트가 그의 턱을 움켜쥐고 벌린 채 놓아주지 않는다.

“말했을 텐데, 깨무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 말라고. 크리스토프, 제대로 빨지 않으면 이대로는 오늘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거다. 그나마 이제 발기는 됐으니까 너는 핥고 빨기만 하면 돼. ……어서 해.”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에 맺혔다. 크리스토프는 숨을 허덕이며 고개를 젓는다.

“크리스토프, 모르겠나? 이제부터 당분간 이건 네 일과가 될 거야. ……그래도 결벽증에 접촉기피까지 있는 그 정신병이 가엾어서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손대지 말고 봐줄까 했었는데, 오늘 아주 확실하게 그 마음을 씻어 줬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입 앞에서 천천히 허리를 추어올렸다. 목을 찌르는 깊이가 점점 더 깊어졌다. 문득 리하르트가 혀를 찼다.

“한 번 할 때마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니면 매일같이 몇 시간 동안 내 물건을 입에 담고 있고 싶나?”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약간이나마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본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성기를 머금은 크리스토프의 뺨 위를 문지르며,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치자 차갑게 웃는다.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나? 크리스토프.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까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는 대신에, 그 자들 셋과 함께 너까지 죽여서 거기에 파묻어 버릴까 진지하게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나? 아마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거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일은. ……그러니, 너에게도 딱 그만큼만 받아내겠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과 감각을, 네 몸속에 심어 주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리하르트는 나직이 덧붙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밤마다 아래에 박아 주지 않으면 허전하다 못해 욱신거리는 몸으로 만들어 줄 테니. 아, 그래. 몸에 확실하게 새겨 준 다음엔, 네가 타르텐에서 떠날 때에는 특별히 선물도 근사한 걸로 준비해 주지. 밤마다 아랫도리를 채워 줄 모형이라든가.”

“…―!”

크리스토프가 요동쳤다.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몸 때문에 물방울이 튄다. 그 물방울이 얼굴에 튀고 눈에 들어가 숨이 막히고 시야마저 가려져도, 크리스토프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깨물어 버리려 해도,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넣고서 턱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이러고 있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사냥을 마친 자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마음껏 내 페니스를 맛보고 싶다면.”

“……! ……!!”

“그렇지 않으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는 조용히 말했다.

리하르트의 다리를 쥐어뜯으며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현실을 깨닫는다. 그 현실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토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금세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이 남자는 크리스토프가 설령 구토를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성기를 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끝까지 그렇게 있다가, 다 토했으면 어서 계속하라고 말할 게 틀림없었다.

차라리 그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언제였든, 그가 끔찍하리만치 미웠던 과거의 언제였든 그를 죽이고 말았어야 했는데.

크리스토프는 울었다. 목을 찔러 구역질이 나고 호흡이 막히는 탓의 생리적인 이유와, 그보다 더한 분노, 울분, 수치 따위가 머릿속까지 새카맣게 태우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이 남자를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나 마음속 깊이 탄식하면서도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국 그는 드레스덴을 떠나기 전까지는 리하르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말은 무엇이든 거스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이유로, 그와 약속한 바에 따라 타르텐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크리스토프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입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뜨거운 살덩이에, 떨리는 혀를 가져다대었다.

그 새카만 수치와 굴욕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의 기억을, 크리스토프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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