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rabian business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자신은 모르는 것.
자신에게는 생경한 것.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것.
처음부터 자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존재하는 것.
그런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아픈 것은 괜찮았다.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로 인해 어떤 기분이 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낯선 것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낯설다……? 글쎄. 타인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나도 그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침대에서라면 별개의 이야기지만, 일상생활에서 남과 붙어 있으면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하지만 낯설다는 건 잘 모르겠군.’
언젠가 동료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크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서 기피당하는 성질을 가진 그 동료는, 흥미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낯설 수는 없을 텐데. 일단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아, 그래, 네 경우는 유모였지, 어쨌건 남의 손을 타지 않으면 갓 태어난 인간은 살 수 없으니까. 타인과의 접촉이 아예 낯설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기억이 안 나는걸.’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말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일은 뭐든 스스로 했었다고. 유모가 식사를 준비해 주거나 입을 옷 따위를 챙겨 주긴 했지만 입에 대거나 몸에 걸치는 건 내가 했었단 말이야.’
동료는 흠, 하고 중얼거렸다. 관심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네 일을 왜 나한테 말해,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어차피 그런 놈이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뭔가를 바라고 그에게 말한 건 아니었다. 그저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또한 어릴 적부터 알아왔기 때문에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어서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다.
‘상관없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다른 사람과 닿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거나 녹아 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원하기만 하면 네 쪽에서 다른 사람을 만지는 것도 문제없고. 어차피 너는 낯선 걸 싫어하니까, 사람도 낯익은 사람만 만나. 그들은 알아서 너랑 닿는 걸 피할 것 아냐.’
크리스토프는 그의 무심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여태껏도, 그 때문에 불쾌한 일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별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래, 불쾌감이다.
누군가와 접촉할 때의 그 낯선 감각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걸 불쾌감이라고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남과 닿지 않으면 돼. 자신 쪽에서 건드리는 건 필요하면 할 수 있으니까, 여태껏과 마찬가지로 별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면 어떻겠냐는 말이 가끔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념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답시고 앉아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의사가 ‘자, 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나 괜찮아졌을지 어디 한 번……’, 이러면서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기회조차 가져 보지 못한 그 약점은, 지금에 와서야 크리스토프를 무섭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소름끼치고 낯선 느낌 그대로.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그저 문지르거나 핥고 빠는 것뿐이라고 했었지. ……그 말을 한 게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절대로 믿지 않았을 거다. 이 나이에 너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비웃음이라고 판단할 이성조차 없이, 그저 두뇌는 오로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만으로 움직였다.
보다 이성적으로 찬찬히 생각을 했더라면, 어쩌면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한 팔이 묶여 있는 상태라 해도,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붙잡고 누르며, 등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어깻죽지 아래로 등과 허리, 골반까지 다른 사람의 체온과 바싹 맞붙었을 때.
사고가 날아갔다.
이 상태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대를 때려눕혀서 맞서기보다 먼저, 그저 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다. 몸을 세게 부둥켜안는 이 낯선 느낌을.
하지 마, 그러지 마, 입술이 떨렸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싫어? 하지 말라고?’
거칠어진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깨물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그러나 아픔보다는 섬뜩한 감각이 몸을 뒤흔들었다.
‘나도 끝까지 갈 생각 따위는 없어. ……없었지. 남자를 상대로는 설 리도 없었거든. 그런데…….’
크리스토프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듯이 단단히 감싸안은 그 팔은 마치 그대로 몸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뱀이 허약한 희생물을 발견해 그 긴 몸으로 친친 동여감은 것처럼, 크리스토프를 끌어안은 손은 결코 그 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
그 짧은 말과 함께.
뇌가 흔들릴 것 같은 충격.
‘배설물 외의 다른 건 닿은 적 없지?’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그 깊숙이 살에 묻혀 있던 곳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퍼득거리며 몸을 요동치며, 경악으로 부릅뜬 눈으로 등 뒤의 그를 돌아본다.
바로 어깨너머에, 어깨선을 따라 혀로 덧그리고 있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반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서.
‘더, 더럽…….’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말마디가 나오다 말았다.
먼지 하나라도 견딜 수 없어 매일같이 적어도 두 번은 욕실에 들어가 온몸을 신경질적일 정도로 씻고 나오는 크리스토프였지만, 그래도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조차 건드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건드리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 같은 결벽증도 네 몸에 더럽다고 생각하는 곳이 있나? 그래, 그렇다면 남자끼리 ‘고작해야’ 핥고 빨 때, 여기도 핥고 빤다는 건 생각도 못해 봤겠군.’
‘……!!’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얼마나 경악을 했는지, 일순 온몸을 감싸안은 이 낯선 타인의 체온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더러운, ……!’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을, 그 남자는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분 좋게 눈이 가늘어진다.
불쾌해졌다.
이 남자는 늘 친절한 척 웃었다. 눈동자에 전혀 웃음기라곤 없는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그를 두고 웃는 얼굴이 다정하다고들 했다. 모두들 눈이 비뚤어졌다.
입을 위로 휘고 눈을 약간 구부린다고 해서, 저 냉정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다정하다고 하는 눈이라면 차라리 뽑아 버리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의 눈동자가 웃을 때는 오로지 이런 때뿐이었다.
그 비틀린 속내로 꾸민 짓이 멋들어지게 성공했을 때.
‘……!! 아, 그, ……!’
그러나 그때, 그 더러운 곳을 둥글게 쓰다듬으며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그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몸이 크게 떨렸다. 허리 아래가 움찔 굳어졌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바싹 닿아 있다는 것도, 저 더러운 곳을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는다는 것도, 그 안쪽으로 조금씩 파고드는 깊이가 깊어진다는 것도, 그것이 이 빌어먹을 남자라는 것도.
끔찍했다.
이 남자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상변태일 뿐만 아니라 더러운 걸 좋아하는 미친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차피 어디를 쓰다듬어도 크리스토프가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저 더러운 곳을 집요하게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불쾌한 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더러운 놈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는데.
이 남자를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건, 건드리지 마…….’
크리스토프는 간신히 속삭였다.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웃기만 했다. 동시에 아래를 파고들던 손가락을 더 깊이 밀어넣었다.
몸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파고들던 손가락은 어느 정도 감각이 익었는지 점차 빨라졌다. 게다가 어느 결엔가 하나 더 파고들고 있었다.
아래를 마구 휘저어 대는 그 감각은, 마치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두뇌의 약한 살점을 마구잡이로 휘저어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쓰다듬고 문지르던 가슴 역시, 그 끝의 연약하고 조그만 살점을 세게 잡아당기거나 눌러 댄다. 이미 뾰족하게 부어서 빨갛게 부풀어 있는 살점 역시, 짓누를 때마다 몸속이 반사적으로 흠칫흠칫 떨렸다.
뭐야, 이게.
끔찍하다.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그 등에도 남자의 가슴이 바싹 닿아 있었다. 땀이 배어나와 미끈거리며 마찰해서, 그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온몸이.
알몸으로 드러나 있는 온몸이.
이 남자에게 감싸여 있었다.
마치 거대하고 압도적인 뭔가에 꼼짝도 못하도록 감싸인 것처럼, 몸의 어느 곳이라도 이 남자와 닿아 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마.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이 난다.
‘으, ……, 윽…….’
위장이 울컥 조여들었다. 속에서 토사물이 치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가 귓가에 대고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건드리는 게 구역질이 나서, 나에게 다리를 벌렸다고 해서 토하기라도 한다면, 네 토사물 위에 눕혀 놓고서 쑤셔박을 거다. 내가 건드리는데 구역질하지 마.’
속이 뒤집어져서 생리적으로 눈물이 배어나온 눈을 커다랗게 홉뜨고, 크리스토프는 그를 쳐다보았다.
저 더럽고 소름끼치는 말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그 신경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여태 그를 실제보다 훨씬 더 좋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절대로 상종해서는 안 될 남자였다.
‘쑤, 쑤셔박, …….’
뭘,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얼굴이 새파래진다. 토사물을 다시……라고 생각하자 속이 더더욱 뒤집어졌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그가 떨어져 나갔다. 크리스토프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얼얼할 정도로 아래를 파헤치던 손을 떼고, 몸을 떨어뜨렸다.
반사적으로 크리스토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는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었지만, 몸에는 다시 서늘하게 공기만이 닿는 감각이 돌아왔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안도한 얼굴을 한 것도 잠깐.
그 얼굴을 지그시 살피던 그 남자가 픽 웃었다. 어딘지 기분이 상한 듯 뒤틀린 웃음이다.
‘시간이 없어. 곧 만찬회에 가 봐야 하니까. 핥고 빠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네게 알려주겠다고 했던 것부터 알려주도록 하지. ……그래, 네가 더럽다고 했던 걸로.’
그렇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엎드려 있던 크리스토프의 몸을 뒤집었다. 허리를 붙잡아 퍼뜩 몸을 뒤틀었지만 단단히 움켜쥔 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팔을 묶인 채 비스듬하게 천장을 보고 누운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미는 남자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남자의 사타구니에서 흔들리는 성기가 눈에 들어온 탓이다.
아까보다 더욱 힘있게 위를 향해 고개를 들고 치켜선 그 물건은, 아까 반쯤 일어선 것을 보았던 때보다 훨씬 흉흉했다. 두텁고 굵게 부풀어 핏줄이 불거진 그 거뭇거뭇한 물건이, 마치 끔찍하게 소름돋는 흉기처럼 보였다.
아니, 생각해 보면 흉기처럼 느낄 이유라곤 없는데.
저기서 총알이나 칼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저걸 자신의 몸에 대고 문지르…….
‘……. 리하르트……, 하지 마.’
핏기를 잃어 푸르다 못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간신히 그 말이 새어나왔다.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저 물건 자체도, 씻거나 볼일을 볼 때가 아니면 손에 쥐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럽지만, 그보다 저기에서는 더욱 더러운 액체가 분비될 때가 있었다. 특히나 저렇게 단단히 발기해 있을 때에는 더욱.
저 흉측하고 불쾌한 물건을 자신의 몸에 대고 문지른다는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것 같은데 만에 하나 그 분비물이 묻기라도 한다면…….
얼굴이 노래졌다.
‘하지 마? 내가 뭘 할지는 알고 있나?’
그 남자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반쯤은 재미있다는 듯, 반쯤은 의아한 듯.
그 미묘한 말투에서, 크리스토프는 이 남자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불쾌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더듬더듬,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 나……, 나한테 대고, 볼일이라도 보면, ……정말로, 맹세코, 죽여 버리겠어.’
크리스토프는 서슬 퍼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정말로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아니, 지금껏 건드린 것만 해도 머릿속이 거의 미쳐 버릴 만큼 끔찍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이 남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얼음처럼 굳어 있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에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표정 없이 크리스토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이마를 천천히 문질렀다. 주름진 미간도 문지른다.
‘……. 시들게 하려는 속셈이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 남자를, 크리스토프는 경계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들다니 뭐가, 저건 또 무슨 흉악한 은어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남자는 문득 눈을 들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 시선이 몸 위를 훑는다. 핥는 듯한 시선.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본 남자는, 문득 눈썹을 찡그렸다.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크리스토프. ……그렇게 노려보면서도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야, 더 서 버린단 말이야.’
나도 설마, 네가 진저리를 치는 꼴을 보고 이렇게까지 아래가 당길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남자의 얼굴 위로 얼핏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의 손이 사타구니를 훑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간다.
여전히―아니, 기분 탓인지 한층 더 흉포하게 고개를 든 듯한 그 물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남자의 시선이 못박혔다. 문득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 불현듯 크리스토프는 깨달았다. 이 남자도 긴장하고 있었다. 공포에 가까운 경악으로 움츠러든 크리스토프처럼, 어느 상황에서든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이 남자 역시 심장이 평소보다 한 뼘쯤 높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말야. 아래가 아플 정도거든. 도무지 그냥은 시들 수 없을 만큼.’
그 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크리스토프의 위로 엎드렸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잡아 등 뒤로 밀어넣어 버리고, 두 허벅지를 움켜쥐고 크리스토프의 머리 위까지 밀며 들어올렸다.
무릎이 머리에 닿을 만큼 몸이 굽어졌다. 근육이 당길 정도로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가까이 보였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뭘 하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흐트러진 머릿속에,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표정 없는 얼굴이 크리스토프의 치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런 곳은 처음 본 사람처럼, 세세한 모양 하나하나까지 신기하게 살피듯이, 그 시선이 다리 사이에 못박혔다.
‘……!!’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갑자기 얼굴에 피가 올랐다.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는 손의 감촉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갑자기 무서울 만큼의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틀었다. 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수치로 뜨겁게 물든 머릿속만큼 얼굴도 뜨거웠다. 귀도, 목덜미도,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치부에서 떨어져 크리스토프의 얼굴로 옮겨온 시선은, 마치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뚫어지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놔, ……보지 마!’
수치스럽고 분해서, 머릿속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도록 흐트러져서, 크리스토프는 눈시울이 발갛게 뜨거워진 줄도 몰랐다.
문득 허벅지를 쥔 손에서 힘이 약간 빠지는가 싶었다.
그 다음 순간.
‘……! ……!! ……,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신음도, 고함도, 입술 밖으로 새어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말을 하는 두뇌의 작용마저 멎어 버린 것 같았다.
뭐가 뭔지 알 수도 없었고, 제대로 된 생각이나 판단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은 온통 으깨어져서 뒤섞인 것 같았다.
눈을 더할 수 없이 커다랗게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리 사이, 바로 조금 전까지 손가락이 드나들었던 그 속으로, 좁은 틈을 억지로 벌리며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잘 들어가지 않아서 초조한지 두꺼운 끄트머리가 뱃속을 거칠게 파헤치며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려고 밀려들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몸속에 쐐기라도 박는 것처럼 쾅, 쾅, 쾅.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빠르게 몸속으로 퍼억 박혀들었다 약간 빠져나가고, 다시 후려치듯이 퍼억 밀고 들어왔다가 조금 물러서기를 거듭했다.
속에 든 것이 모두 밀려 구겨지는 것 같다. 아픔보다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끔찍한 압박감. 짓눌려서 터질 것 같았다.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떨리는 입술로 들리지 않는 외침을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나직하고 거친 숨이 섞인 신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몸속 끝까지, 끝까지, 몸을 통째로 꿰뚫어 버린 것처럼 꽉 들어찬 뒤에야, 겨우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들어설 수 없는데도 아직 부족한 듯, 어딘지 조급하게 몇 번이고 허리를 더 추어올렸다.
‘……!!’
머릿속이 시커멓다가 빨개졌다가 하얘졌다. 뭐가 뭔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와 맺혀 있었다. 눈앞이 부옇다. 뭔가가 뺨을 타고 흘러 귀까지 적셨다.
다리 사이가 뜨거웠다. 화끈거리며 얼얼한 감각이 온몸의 다른 감각을 빼앗아간다. 그래서 그가 굶주린 듯이 입술을 겹쳐 오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반사적으로 움찔, 몸이 움츠러들 뿐이다.
그러나 몸이 움츠러들자 아래의 뻐근한 아픔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져서 숨을 삼키고 말았다.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 짐승 같은 짧은 신음이 탄성처럼 흘러나온다.
‘……크리스토프, 솔직하게 말해.’
거친 숨결 때문인지, 혹은 감각이 미쳐 버린 탓에 청각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가 몹시 거칠게 들렸다. 사냥감 위에 올라타 살점을 한가득 베어문 것처럼 잔혹하게 흥분된 숨결이 크리스토프의 귀를 태웠다.
‘나 외의 누군가에게 다리를 벌린 적, 있나?’
‘……?!’
‘다른 놈 앞에서 알몸으로 사타구니를 벌리고 흔들어 댄 적이 있냐고 묻잖아.’
크리스토프는 정신이 아득한 듯 창백한 얼굴이나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시선을 떠올렸다.
눈앞이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팔에 눈가를 비볐다. 팔이 흠뻑 젖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시야가 아득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야 하는 건 오히려 나인데.
노려볼 힘도 없어, 아득한 눈을 겨우 깜빡였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남자는 서로 사타구니의 살이 빡빡하게 맞물려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굵게 발기한 성기를 간신히 받아들여 찢어질 듯 충혈되어 벌어진 입구를 엄지로 덧그린다.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움칫 떨렸다.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조여 대면서 빨아당길 줄 알 턱이 없지. 아닌가?’
‘…―.’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서린 악의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미칠 듯 분이 치밀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사람을 괴롭히면서 심지어 지독한 말로 조롱하고 모욕까지 주고 있다.
‘리, 하르, ……, …―죽……!’
그러나 짤막짤막하게 겨우 뱉어내는 말을 가로막으며, 그는 크리스토프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는 크리스토프의 입을 벌리며, 그는 잔혹한 흥분이 떠오른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사내놈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동네에서, 너 같은 놈이 멀쩡하게 있었을 리가 없잖아. 모두 다 순진한 척 연기를 한 게 아니냔 말이다, ―이 요부야.’
화가 치미는 듯 욕설을 덧붙이며, 그는 갑자기 다시 한번 허리로 크리스토프의 사타구니를 후려갈기듯 세차게 밀어넣었다.
퍼억,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렸다.
몸속을 빡빡하게 벌리고서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유일하게 다행이었던 일은, 다리 사이에 몰린 감각이 너무도 절실하게 온몸의 감각을 빼앗아,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입술을 깨무는 느낌도, 혀를 빨아먹는 느낌도, 온몸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가끔 울컥한 듯 숨이 막히게 부둥켜안는 느낌도, 아득하게 흐려졌다.
오로지 몸속을 찢어 버릴 듯한 감각만이 소름끼치게 선명해서, 끊임없이 허리가 부들거렸다.
‘이 몸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런 놈이 이렇게 찰지게 빨아당기면서 허리를 흔들어? 하, 웃기는군. ――말해 봐. 내가 몇 번째인지.’
쾅쾅쾅, 쐐기를 박아넣는 세차고 급격한 움직임이 심장 고동과 함께 몸속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은 들어올 곳도 없는데 계속해서,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질퍽질퍽하게 뭔가 엉덩이골을 따라 타고 흘러 소름이 끼쳤다.
크리스토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더 이상은 죽여 버리겠다거나, 그냥 두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주 약간이라도 더 견디기 쉬운 상태로.
‘움직, ……움직이지, 마, 숨, 숨이 막…….’
잠긴 목소리는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후둑후둑 눈물이 쏟아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두둑 굴러 떨어져 귓바퀴에 고였다.
‘……, 눈물도 파란색일 줄 알았는데.’
입술 위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입술이 간지럽다.
곧 눈가로 다가와 눈가를 핥는 혀가 뜨거웠다.
그러는 동안, 아래를 두들겨 대던 허리가 문득 멎었다.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숨을 삼켰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비집어들고 있던 성기가 부풀어오르는 듯싶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낮은 탄성이 얼굴 위에 바싹 닿아 들려왔다. 눈가에 뜨거운 입김이 닿는다.
그와 함께 몸속에 가득 차오르며 터져 나오는 질량감.
몸속에 쏟아붓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그 느낌에 크리스토프는 몸서리를 쳤다.
몸이 절로 얼어붙었다. 홉뜬 눈에서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아픈 것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확연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누군가와 몸이 정말로 맞붙어 있다는 실감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
새파랗게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크리스토프의 위에서, 남자는 얼마 동안 그를 숨 막히도록 부둥켜안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끔 허리가 떨릴 때마다, 멈춘 줄 알았던 사정이 이어졌다.
사정射精.
새하얗게 비어 있던 머릿속에 그 단어가 스친 순간, 삽시에 낯빛이 시퍼레진 크리스토프는 부들, 입술을 떨었다.
그제야 깨닫는다.
남자와 남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지, 자신의 몸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이 남자와, 리하르트 타르텐과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섹스를 했다는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만한 기력도, 정신력도 없었는데도, 꼼짝도 못하도록 단단히 크리스토프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남자가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소리를 아득하게 들으며, 크리스토프는 정신을 놓았다.
*
“……. 크리스토프?”
뭔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것 같아서, 정태의는 책에서 시선을 들어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잘못 들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정태의가 이 방에 들어왔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아처럼 몸을 구부리고 스스로를 끌어안으려는 듯 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해 모으고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태의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읽던 책으로 가만히 부채질을 하며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미열이 나고 몸이 안 좋다고 그래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딱히 크게 아파 보이진 않았다. 잠든 걸 확인하고서 살짝 이마를 짚어 보자 확실히 평소보다 약간 뜨거운 듯도 했지만, 그래도 평열에 가까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잠시 그 옆의 의자에 앉아 근처에 있던 책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펼쳤다. 조금만 그렇게 앉아 있다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크리스토프가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던 것은.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토프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잘못 들었나 보았다.
“…….”
정태의는 한 챕터를 다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듣도 보도 못한 철학서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참 곱게도 잠들어 있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 아래로는 제 성격만큼이나 말끔한 파자마를 깔끔하게 챙겨입고 있다. 목까지 단추를 꼭꼭 채우고서.
잘 때는 속옷만 입고 자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는 정태의였다. 예전에 한 번은 어느 몹시 피곤했던 날, 샤워하고 나와서 알몸 그대로 침대 위에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도리어 피로가 더 쌓여 다음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꼴을 당했던 뒤로는 아예 벗고 자지는 않게 되었지만.
지금도 좀 피곤하다 싶어서 아주 편하게 자고 싶을 때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자고 평소에도 그 위에 가벼운 옷 한 장 정도나 더 걸치고 자는 정태의는, 깨어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 때도 완벽한 드레스코드를 지키는 크리스토프를 매우 감탄스럽게 바라보았다.
“입 다물고 움직이지 않으니까 정말로 그냥 조각이네.”
정태의는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혼잣말했다.
이마며 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블론드며, 뺨 언저리만 약간 발그스름한 하얀 피부, 깎은 듯 곧은 콧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저 정도면 거의 완벽하다고…….
“……. 눈이 좀 부었나?”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보니 눈이 좀 부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고, 볼 때마다 한 군데 흠 잡을 데가 없는 눈매라고 생각했었으니 원래 부은 건 아니다. 지금만 약간 부은 것 같았다.
“별로 오래 자지도 않았을 텐데 뭘 눈이 다 부어…….”
정태의는 희한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정태의가 한참 동안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때였다.
어느 순간, 그 시선이 따갑기라도 했는지 꿈틀, 눈썹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 주름을 짓던 눈매가 펴지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올라간다.
그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
“…….”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팔 길이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정태의는 무릎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채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잠들어 있던 자세 그대로 눈만 뜬 크리스토프 역시 정태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깜빡, 깜빡,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귀를 잘 기울이면 기다란 속눈썹이 바스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 태이.”
불쑥, 정적을 깨며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정태의는 대답보다 먼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보니 눈만 부은 게 아니다. 목소리도 잔뜩 잠겼다. 누가 보면 한 스무 시간쯤 자다가 일어난 사람인 줄 알겠다.
“몸, 많이 안 좋아?”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많이 아픈 걸까 생각하며 정태의가 묻자, 크리스토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크리스토프는 도리어 살짝 낯을 찌푸리며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투로 반문했다.
갓 잠에서 깨어나면 늘 그렇듯 크리스토프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러나 꼼짝도 않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모습은 아직 잠에서 미처 덜 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쯤은 잠에 취해 꿈속에 젖어 있는 듯, 그렇게 몽롱하게 얼굴을 찌푸리고서 눈만 깜빡이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문득 물었다.
“계속 여기 있었어?”
“응? 어……, 한 30분 전부터?”
“……. 나 자는 동안 너…….”
갑자기 크리스토프의 고운 눈매가 사납게 가늘어졌다. 정태의는 공연히 움찔해서 몸을 약간 뒤로 물렸다.
얼굴 감상 하고 있던 걸 들켰나. 아니 하지만 그 정도는 뭐 어때서. 그냥 보기만 한 것뿐인데. 설마 관람료를 내라거나…….
“나 끌어안고 있었지.”
냉랭하게 흘러나온 말에 정태의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안 그랬어!!!”
생사람을 잡아도 엄청나게 잡는다.
거의 반사적으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고서 크리스토프에게서 조금 더 물러앉았다.
“첫째로, 끌어안으려면 일어나 있을 때 당당히 끌어안지 왜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끌어안아, 난 그런 비겁하고 음흉한 사람이 아냐! 둘째로, 나는 그런 취미는 없어! 너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은 추호도 없고, 설령 일레이가 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몰래 끌어안지는 않는다고!”
아니, 일레이라면 몰래 끌어안으려고 침대 위로 무릎 한쪽이라도 올리는 순간 눈을 뜨겠지만.
정태의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몹시 미심쩍은 얼굴로 정태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 그래?”
여전히 미심쩍게, 크리스토프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쪽으로도 한 번 갸웃거린다. 그걸 한 번 더 되풀이하고 나서야, 여전히 미심쩍으나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준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다고 치지.”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네게 손가락 하나 안 댔다니까! 남이랑 닿는 걸 치 떨며 싫어하는 네게 몰래 손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정태의는 속으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입 밖으로 외치기는 포기했다. 괜히 길게 말하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꿈이라도 꿨어?”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꿈? 하고 크리스토프는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흐릿하게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서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베개에 살짝 눌려서 볼록 튀어나오는 볼이 말랑말랑해 보인다.
폭 눌러보고 싶지만 이렇게 누명을 쓰고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 정태의는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억눌렀다.
“꿈이 아니라……, 분명히 누가 끌어안고 있었는데. 등 뒤에 달라붙어서 꼭 끌어안아서, 답답하고 기분 나빠서 몸부림을 쳤는데도 안 떨어져서, 일어나기만 하면 두고 보자고 이를 갈면서 잤는데…….”
“꿈이네.”
정태의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꿈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크리스토프의 말 속에 적어도 두 가지는 나왔다.
일단 누가 끌어안고 있었다면 크리스토프의 성격에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끌어안기는커녕 슬쩍 몸을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 하나를 사단내고 말았을 거다. 아니 그 전에 크리스토프의 접촉기피를 모를 만한 사람이면, 이 방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단이 나고도 남았다.
게다가 백 번 양보해서 누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쳐도, 크리스토프가 나중에 두고 보자고 생각만 하고 그냥 잤을 리가 없다.
정태의가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그런가? 하고 그 근거에 납득을 하면서도 도통 미심쩍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감 있는 꿈이었어?”
“음……. 내가 지쳐서 자고 있는데 뒤에서 이렇게 끌어안고서, 낮게 숨 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단 말야. 어깨에 숨결도 닿았고. 간지럽고 선뜩해서 잔뜩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 그런데 왜 안 일어났어?”
“눈이 안 떠졌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는데.”
“아아. 그럼 그거 가위눌린 거네.”
정태의는 다시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 덜 미심쩍게, 크리스토프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가위?”
“그래. 눈도 안 떠지고 몸도 안 움직였다며.”
“응.”
“그게 가위야. 한 번도 눌린 적 없어? 난 가끔 피곤하면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크리스토프는 감탄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게 가위구나, 처음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얼굴이, 그제야 의심에서 풀려나 그럭저럭 납득하는 빛으로 돌아온다.
험악한 얼굴에서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크리스토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협탁 위의 시계를 본다. 그러다가 다시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시간에 나는 왜 자고 있었어?”
“응? ……아팠다던데. 리하르트의 말로는.”
“아파? 내가? 리하르트가 그래?”
크리스토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래서, 나더러 한 번 들여다보라고 하던데. 걱정하는 것 같더라.”
뒷말은 살짝 거짓말이다.
물론 말투 자체는 사뭇 걱정스러운 듯한 투였지만, 리하르트가 진지하게 크리스토프를 걱정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약간의 미열 정도로 걱정할 인물은 아니다.
정태의가 말하자 크리스토프 역시 어림도 없다는 듯 도끼눈을 뜬다.
“그놈이 걱정을 해? 흥. ……그런데 내가 왜 아파.”
크리스토프는 잘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기억이 살짝 비어 있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 같다. 아직 약간 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살짝 흐리긴 하다.
“……. 크리스. 아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손님들이랑 같이 차 마시다가, 네가 리하르트의 눈가에 호랑이연고를 발라서 둘이 같이 응접실에서 나갔잖아. ……그 뒤에 혹시 싸우기라도 해서 좀 다치거나 한 건 아냐?”
몰래 엿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기억을 일깨워줬다.
혹시 아직도 잠에서 덜 깼나. 이것도 꿈꾸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정태의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데,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으음, 하고 중얼거린다.
“호랑이연고……. 그래, 그랬지……. 그리고……어쨌지?”
역시나 잠에서 덜 깬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머리가 무거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천천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친 듯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이었다.
헤드쿠션에 몸을 기대어 앉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움찔했다.
눈에 띄게 몸을 움츠리며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덩달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아, 아래가…….”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파자마 아래로 더듬더듬 손을 넣었다. 깜짝 놀란 어린애처럼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면서 엉덩이 아래를 더듬거린다.
“왜?”
“아래가 좀 축축……. ……뭐가 흘러나오…….”
멍한 얼굴로 띄엄띄엄 말하던 크리스토프는,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무섭게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일시에 핏기가 싹 가시고 창백해지는 그 얼굴을, 정태의는 당혹스레 바라보았다.
“크리스……, 왜 그래.”
“…….”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침대 끝자락에 고정된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부들, 푸르스름한 입술이 떨렸다.
“크리스토프. ……크리스?”
정태의가 조심스럽게 다시 부르자,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유리 같은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싸늘하고 험악한 빛이 파랗게 담긴 눈이, 허공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듯 무시무시하게 노려본다.
“크리스.”
“……. 아무것도 아냐.”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낮게 억누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음색이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하게 얼어붙었던 얼굴에 서서히 붉은기가 돌았다. 그 붉은기는 얼굴만이 아니라 귀에서 목덜미까지 번져나갔다. 파자마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상반신까지, 아니 온몸이 다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았다.
이불 위에 넋 없이 놓여 있던 손은 어느새 이불을 틀어쥐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얗게 관절이 두드러진 주먹도 부들부들 떨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다.
정태의는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도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입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의아하게 몸을 사렸다.
“……. 정말 괜찮아?”
“괜찮아! 빌어먹을, 그냥, ……그냥 좀 젖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눈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러잖아도 눈이 약간 부어 있었는데 눈가까지 빨개지자, 꼭 울기라도 한 사람 같다. 아니 금세라도 울 것 같다는 편이 옳겠다.
“젖다니, ……. …….”
정태의는 아직도 파자마 아래쪽, 엉덩이 아래에 손을 넣은 채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침묵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최대한 귀엽게,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말을 골라 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어떤 단어를 쓰든 결국은 몹시 부끄러운 말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정태의는, 그나마 귀엽게 들릴 만한 단어로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 쉬야……?”
“아냐!!”
정태의가 머뭇머뭇 조그맣게 물어보자, 크리스토프는 당장 펄떡 뛸 기세로 외쳤다.
고개를 번쩍 들어 정태의를 노려보며 부르르 떠는 그 얼굴을 마주보자, 눈가가 더 빨개져 있었다. 저러다가 정말로 울겠다.
설마 그러지야 않겠지만 진짜 울기라도 하면 어쩐지 몹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를 것 같아서, 정태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냥 농담이야, 농담.”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괜히 몸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한참 동안 말없이 정태의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불을 움켜쥔 주먹도 떨린다. 분에 겨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은 농담이라손 치더라도, 아래가 젖다니.
정태의는 아직도 뻣뻣이 굳어 엉덩이 아래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문득 천천히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 부근이 젖을 만한 원인이 하나 더 생각난 탓이다.
“……. 크리스토프. 리하르트랑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목소리가 나왔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으면 오히려 그런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움칫하다가 부정도, 긍정도 않고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고도 언뜻 감정이 출렁이지 않았다.
그저 두통이 일었을 뿐이다. 매우 심하게.
정태의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세게 문지르다가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사나운 얼굴을 하고, 크리스토프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 …….”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라고 물어보기도 애매했다.
정태의의 난감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토프는 한참 동안 허공을 원수처럼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언짢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 어차피 그놈과 비역을 한 게 처음도 아니고. ……역시 용서할 수는 없지만. 죽여 버려야지, 리하르트 놈……!!”
피곤한 듯 중얼거리다가, 다시 분이 치솟은 듯 부르르 떨며 이를 가는 크리스토프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는, 매우 애매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갑자기 누가 가볍게 뒤통수라도 탁 친 것 같았다.
“어……. ……?”
저 입에서 나오는 ‘비역’이란 말이 어쩐지 참 낯익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비슷한 단어를 들었던 것 같다. 그 말 자체는 충격적이었으나 그 내용은 알고 보면 퍽 대수롭잖았던.
정태의는 눈만 껌벅거리며,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이 새끼를 어떻게 죽이지.”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때랑 비슷한 건가. 알고 보면 살짝 스친 거라든가. ……아니, 하지만 젖었다고 했는데. 거기가 젖을 만한 일이면…….
거기까지 생각한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와 같은 효과인지 저 입에서 비역이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사태가 몹시 가볍게 느껴졌다.
아니, 따지고 보면 아래를 건드리기만 한 거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충분히 심각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악의 사태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볍다.
게다가 설령 정말로 최악의 사태라 해도…….
“……. 왜?”
정태의의 지긋한 시선을 느꼈는지, 분노로 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 더러운 걸 그 더러운 데에…….”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구역질이라도 나는 듯 입을 누르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흘끔 노려보며 부루퉁하게 물었다.
그 더러운 걸 그 더러운 데…….
갑자기 상황이 파악될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지금은 더 이상 두통거리를 늘리지 말고 나중에 생각하자고 마음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젓다가 보니 어느새 자신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움찔, 문득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그제야 깨닫고, 정태의는 의식적으로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면서 알아차린다.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이런이런…….”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펼치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른 사람의 일에 화를 내도 좋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또한, 화를 내며 끼어들어도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이 집에서 나가기 전에, 그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 버리고 나간다.”
이를 갈며 혼잣말로 다짐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정태의는 마지막으로 굽어져 있던 새끼손가락을 폈다.
“……. 크리스. 괜찮아?”
정태의가 조용히 묻자 크리스토프는 험한 얼굴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안 괜찮아. 굉장히, ……굉장히 기분 나빴어. 토할 것 같았는데 토하지도 못했어. 아주, 아주 끔찍했단 말야. 소름이……, ……으우……, ……. …―말해 두는데 너, 예전처럼 내가 그놈 죽이려 할 때 끼어들지 마. 괜히 말리겠다고 끼어들면 정말로 너부터 치워 버릴 테니까.”
정태의는 몇 초쯤 아무 말 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리는지 입가와 가슴께를 움켜쥐면서도 험악하게 말을 마친 크리스토프는 왜 대답을 안 하냐는 듯 눈을 부라리며 눈짓했다.
정태의는 문득 웃었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럼 됐고. ……걱정 마. 절대로 방해 안 할 테니까.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법정에서 증언해 줄 수도 있어.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러자 잠시 입을 다문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얼굴을 이상하게 찌푸리더니 픽 웃었다. 그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표정을 굳혔다.
“……몸을 씻어야겠어. 더러워.”
불쾌함이 마디마디 서린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나가려고 발을 내디딘 순간 힘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지만.
“괜찮아?!”
“괜, ……. ……으윽, 또 흘러나…….”
크리스토프는 침대에 엎드린 채 새파란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정태의는 옆에서 부축을 할 듯 말 듯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몸에 손을 대면 싫어할 테고, 지금 혼자서 일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씻고 잠든 것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잠들었던 차림새가 아주 말끔했었다. 지금도, 움직이는 통에 약간 주름이 지긴 했지만 옷장에서 새로 꺼낸 듯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 아닌데?”
그러고 보니……, 하고 미심쩍게 대답하며,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럼 뭐……, ……그런가 보지.”
정태의는 말을 얼버무렸다. 크리스토프도 몹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다.
이 상황을 설명해 줄 가설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 가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어 말하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토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몇 번이나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넘어졌다를 반복하던 크리스토프는―정태의가 보다 못해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잠시 그 손을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은 누구든 건드릴 기분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죽여 버려야지, 죽여 버려야지, 혀끝으로 칼을 갈며 겨우 욕실에 이르렀다.
문턱 위에 버티고 서서 파자마 단추를 풀던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여전히 기분은 개운치 않았지만 크리스토프도 귀찮아하는 눈치라서 그만 방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정태의는, 가만히 멈춰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의아하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손으로 몸을 닦고 파자마를 입은 기억이 없어.”
“어…….”
정태의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모른 척 넘어가려던 화제가 결국 다시 튀어나오고 말았다.
물론 정태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렇게 말끔하게 파자마를 다 챙겨입고 잠들어 있던 크리스토프가 반쯤 잠에 취해 얼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리하르트에게 모종의 험한 일을 겪은 크리스토프가 곧바로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몽롱하게 잠들었다면. 그런데도 몸도 말끔하고 옷도 깨끗하게 갖춰 입고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야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다. 다만, 그 결론이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러나 그 현실적이지 않은 결론을, 잠시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었다.
“리하르트, 그놈밖에 없어. 파자마를 입혀서 나를 침대에 눕혀 둘 사람은.”
“……. 그렇지……, 현실적으로.”
차라리 정태의가 그 가설을 믿으면 믿었지 크리스토프만은 절대로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토프가 먼저 진지하게 그 말을 했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 양심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일단은 좋게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선행―과연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가능성을 먼저 말했다는 게 놀라웠다.
크리스토프라면, 설령 모든 상황이 리하르트가 정신을 잃은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침대에 눕혀 줬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차라리 자신이 몽유병에 걸렸다고 주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토프는 파자마의 단추를 풀다 말고 한참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차림새를 보았다.
깨끗하게 빨아 놓은 빳빳하고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몸도 말끔하게 닦아 주었는지 끈적거리거나 미끈거리지도 않았다.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리하르트가…….”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응? 하고 반문한다. 심장이 두근, 뛰었다.
비록 자신에게 극악무도한 짓을 했더라도, 사소한 선행은 인정해 줄 마음이라도 든 걸까.
크리스토프가 새삼스럽게 보여 정태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조금 더 고민하는 눈치이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네소스의 피를 구했나?”
아주 그럴 듯한 가설을 세웠다는 듯 진지하게 눈을 반짝이며 정태의의 의견을 구하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 혹시 그 옷이 네 피부에 달라붙어 안 떨어져?”
“아니…….”
“아니면 그 옷을 통해서 뭔가 타는 듯한 통증이라도 느껴진다든가?”
“아닌데.”
“그럼 아니겠지.”
“…….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얼굴을 찌푸린 채 크리스토프는 욕실로 들어갔다.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리하르트를 악독하게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에 감동에 가까운 감탄을 느끼며―그야 이 상황은 악독하게 바라보아 마땅한 상황이긴 했지만―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직 나도 사람 보는 눈을 기르려면 한참 멀었구나. 그러고 보니 처음에 리하르트가 베를린으로 찾아왔던 때에도, 그를 두고 인상이 좋다고 했다가 일레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었지.
“…….”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묵직한 가슴께를 두어 번 두드렸다.
방으로 돌아가면 씻지도 말고 바로 침대에 뻗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크리스토프의 방에서 나갔다.
***
어디선가 숨어서 보고 있다가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정태의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뚜르륵, 뚜르륵, 짧고 빠르게 울리는 이 소리는 내선이다.
어, 하고 잠시 멈칫한 정태의는 성큼성큼 걸어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받자마자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짧은 침묵이 돌아왔다. 그제야 아, 혹시 다른 사람인가,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저택 안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극소수다. 그리고 그 극소수 중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몇 분 전에 욕실에 들어가 지금은 몸을 박박 닦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 여보세요?”
앞말을 만회하려는 듯 다시 조심스럽게 정태의가 응답하자,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친구 하나 못 만들었나 보지. 전화할 사람이 당연히 나라고 여기는 걸 보니.」
“뭐야, 역시 맞잖아.”
역시나 일레이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곤 소파에 푹신하게 몸을 묻었다. 이대로 잠들면 딱 좋을 것 같다.
“그러잖아도 네 방에 갔다 올까 했는데.”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전화 속에선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 이유는 없었다. 크리스토프의 방에서 나와 걸음을 떼는데,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레이에게 들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원래 정신이 너덜너덜하게 지치면 가끔 뜬금없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그러나 중앙계단으로 슬슬 걸어가다가 계단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이렇듯 지친 몸과 마음으로 가기엔 그의 방이 있는 동익은 너무 멀리 있었다.
역시 관두자. 마땅히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수 없으면 더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정태의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다시 걸음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때.」
어울리지 않게 남의 안부를 묻는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정태의는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눈매가 험해진다.
“그러고 보니 너, 알고 있었지.”
「뭘.」
“리하르트가 그 녀석 건드렸다는 거. 뻔히 다 들렸을 것 아냐.”
「음? 아아.」
모르는 척,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얄밉다.
그러나 애꿎은 전화기를 노려보던 정태의는 이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미리 알았다 한들 뭘 할 수 있었을까. 도중에 들이닥쳐 당장 말릴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종합적으로 보아 별로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거다.
「늘 마주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녀석들이었으니, 올 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그런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정태의는 아까부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세게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거나 몸을 못 움직이지는 않지?」
“어, 좀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깨어나서 멀쩡히 걸어다녀. ……아니 그게 아니라.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보는데.”
「이 상황을 리하르트나 크리스토프가 어떻게 써먹느냐 하는 정치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말하는 문제는 심적인 충격과 부담, 그것 아닌가.」
“어, 그렇지.”
「그러면 몇 시간 전과 상황이 달라진 게 뭐가 있어. 이미 비역질을 하고 난 관계라고 생각했던 녀석인데 걱정할 건 뭐가 있고. ‘비역질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다른 거라곤 몸의 부담뿐일 텐데.」
“…….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딘가 궤변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프를 떠올려 본 정태의는, 리하르트를 죽여 버리겠다고 부들부들 떨긴 했지만 좀 더 부정적인 쪽의 심리 상태에 빠지지는 않은 듯이 보였던 걸 생각하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딴에는 그렇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야.”
「목소리나 들어 보고 싶어서.」
“……. 너 누구야.”
정태의는 제법 진지한 마음으로 되물었지만 저쪽에서는 농담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방에 무사히 돌아갔나 싶어서 전화해 봤어.」
정태의는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다시 한번 해 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위험한 밤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저택 안에서만 움직였는데 방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또한 정태의가 묘령의 연약한 여자도 아닌데 그런 안부전화씩이나 할 필요는 또 어디에 있을까.
“방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게 뭐가 있어. 집에 부비트랩이 설치된 것도 아니고.”
「너는 걱정이란 말야, 정태이. 모르는 사람이 사탕 주겠다고 하는데 졸랑졸랑 따라갈 것 같아서.」
“안 그래!”
정태의는 진지하게 부정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 근 30년 전, 아직 정태의가 철모르던 그 시절에.
그러나 정태의는 따라가지 않았다. 사탕 따위는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고,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뭔가를 선물받기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가지 않았던 이유가 일반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어쨌든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 속의 목소리는 피식 코웃음쳤다.
「그냥 준다고 하면 따라가지 않겠지. 하지만 예를 들어 네 친구 ××에게 전해 주고 싶은 사탕이 저쪽에 있는데 잠깐 따라와 볼래, 그러면 따라갈 거잖아.」
“…….”
그런 적도 있었다.
웬 남자가 형에게 주고 싶은 귀한 책이 있다고 해서, 형이라면 책을 좋아하니까 기뻐할 것 같아서 졸랑졸랑 따라갔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우연히 옆집 아줌마를 만나서 도움을 받았지만.
“너 내 뒷조사했어?”
정태의가 미심쩍게 묻자 이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정태의는 아차하고 만다. 그저 입이 방정이다.
「태이……, ……. ……. 진짜로 걱정하게 만들지 마라.」
이 남자의 목소리도 아주 조금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목소리를 다 듣다니, 그래도 입방정의 보람이 조금은 있다.
정태의는 픽 웃었다.
이런 부분이다. 자신이 여전히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이유는.
“사실 따지고 보면 진짜로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인데 말이지…….”
「나?」
의외라는 투의 대꾸가 날아온다. 하긴 이 남자가 누구에게서 걱정된다는 말을 들어나 봤을까.
“그렇잖아. 어디서 대테러 특수부대에게 잡혀가지는 않았을까, 어디서 원한을 품은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을까, 집 비우고 일 나가서 뭔가 터무니없는 일을 하다가 폭탄이라도 한 방 맞지나 않을까.”
말하고 보니 모두 몹시 가능성이 크면서도 또한 별 가능성이 없을 듯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피로하고 나른한 밤에는 실없는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그 상대가 일레이인 것도 좋다. 저 너머에서도 웃는 기척이 들려 더욱 좋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와 이렇게 실없이 전화로 대화를 한 게 얼마만일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정태의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는데, 전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왔군……. 이만 끊어야겠다.」
“어, ……어?”
노크 소리는 자신의 방문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하고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성가시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밤중에 귀찮게 구는군. 그래, 그럼 좋은 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태의는 수화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노크 소리까지 그렇게 또렷하게 전해 줄 만큼 이 전화기의 성능이 좋을 리는 없고…….
그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정태의의 방문이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군.
정태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 시간에 자신의 방으로 찾아올 만한 극소수의 사람을 떠올리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대뜸 반말로 맞이한 정태의의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얀 토베와 구트라만으로도 그 자리에 위화감을 주는 남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귀빈이 거기에 서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친구가 온 줄 알고.”
정태의는 당황해서 사과를 하며 문 앞에서 비켜섰다.
말리크와 함께 온 남자였다. 이름이……, 아까 들었는데 뭐였더라……. 이름을 다시 물어보면 엄청나게 실례겠지.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굴리는 정태의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온 남자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정태의도 그가 앉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잠시 정태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뭔가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짙은 갈색 눈동자가 정태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카림 아지즈입니다.”
“아, 예. ……정태의입니다.”
이름을 가르쳐줘서 다행이었지만, 혹시 이름을 까먹은 게 얼굴에 티가 났던 걸까 살짝 고민하는 정태의였다.
“정재의 씨와 많이 닮으셨군요.”
아지즈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에 정태의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 아, 예,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렇습니까? 별로 닮지 않은 형제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보면 곧 형제라는 걸 알겠는걸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는 아지즈의 말은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정태의는 자신이 생각해도 별로 닮지 않은 형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만난 적이 있으신가 보죠.”
그에게 화제를 맞추면서,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를 찾아갔을 손님을 생각한다.
……아하.
이유를 아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현상 자체를 짐작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짐작한 뒤 이유를 짚어내는 게 복잡할 따름이다.
“정재의 씨와는 몇 년 전에 한 번 만나 뵈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지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리크와는 달리 그다지 웃음이 없는 그는 말투도 사뭇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적어도 이쪽까지 함께 사교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별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늘 조용히 있다가 뭔가 생각이 떠올랐을 때에야 불쑥 중얼거리는 형을 생각하며 정태의가 쓴웃음을 짓자, 아지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식견이 탁월해, 시간이 더 지나도 이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겠구나 감탄했었지요.”
몇 년만 더 지나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할 듯한 아지즈는 조용히 말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정태의는 공연히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내심 한숨을 쉰다. 앞으로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이 보인 탓이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때에는 오래 끌어서 좋을 바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었다.
“형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벌써 몇 년이나 형과는 만나지 못해서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하던 참이라, 오랜만에 형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네요. 어릴 때는 그래도 같이 지냈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이제는 만날 일도 뜸해지고 각자의 생활이 생겨, 타인과 별 다를 바가 없어졌거든요.”
물론 형을 좋아하는 건 여전합니다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아지즈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바보가 아니다. 정태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말리크 같은 남자라면 태연하게 웃으며 짐짓 못 알아들은 척 이야기를 꺼내겠지만, 이 남자라면 그러지 않을 거다.
역시나, 아지즈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약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태의는 지금쯤 일레이의 앞에 앉아 있을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인선이다. 그런 구렁이과의 사람은 일레이에게 보내는 게 옳다. ……그러나 과연 그쪽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최종적인 목적은 같다 하더라도 제시하는 이야기는 같을 리 없을 텐데.
정태의가 흘끔 전화를 쳐다보는데, 아지즈는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태의 씨.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어떻게든 정재의 씨를 모셔서 도움을 얻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여태 수차례 정재의 씨께 연락을 드려봤습니다만, 정재의 씨가 몸담고 있는 기구 측에서 탐탁지 않아 해서 연락이 좀처럼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정재의 씨께도 연락을 주십사 말씀드렸는데 마땅히 답변을 주지 않고 계시더군요.”
“아…….”
그건 아마 형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까먹었을 가능성이 커요, 라고 말하려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의 추이를 짐작컨대, 그렇게 말해서 좋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정재의에게 뭔가 답변을 들어내려면, 생각한 뒤에 연락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굴리느라 바쁜 그는 그런 류의 청원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답변을 주겠노라고 확실하게 약속을 받아냈다면 모를까, 단순히 연락을 달라는 청만 해서는 답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연락이 된 시점에서 바로 답변을 받아내거나, 혹은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면 형만 귀찮아질 게 뻔……, ……, 가만있자, 그러면 나는 편해지겠구나.
정태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아지즈를 향해 빙긋 웃음 지었다. 형아 미안.
“형은 원래 뭔가 하나에 집중을 하면 다른 건 잘 돌아보지 않아요. 특히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 같은 약속은 더 그렇죠. 그러니까 연락이 닿았을 때 바로 답변을 받으시거나,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가 힘들다면 답을 받아낼 때까지 그쪽에서 계속 연락을 해야 해요.”
정태의가 말하자 아지즈는 눈을 크게 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감탄이 서린다.
“자, 그러면 모쪼록 다시 연락해 보시고, 좋은 결과 얻으시길.”
정태의는 짐을 던 기분으로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직접 담판을 지으러 가야 할―혹은 상관에게 그렇게 보고해야 할―이 남자는 다시 고개를 약간 숙이며 생각에 잠긴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정태의의 앞에서 제법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혹여 정재의 씨가 답변을 주시지 않는 이유가 예전의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안 좋은 일이요?”
아지즈의 말을 되풀이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안 좋은 일이라면 어떤……, 하고 물으려는데 아지즈가 먼저 입을 연다.
“정태의 씨도 아시다시피 과거에 정재의 씨를 휴양지의 별저에 모신 적이 있는데, 그때 혹여 정재의 씨가 마음 상하신 바가 있어 저희 측과 연락하길 피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휴양지의 별저라면 정태의도 알고 있었다. 정태의도 덩달아 그곳에 같이 갇혀서 지내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결국 지금 이 꼴이 되지 않았던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태의가 모르는 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때 형이 마음 상한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형은 그 조용하고 평온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머무르고 있었다. 만일 정태의가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거기서 그렇게 있었을지도 몰랐다.
굳이 마음 상할 일이 있다면 오히려 정태의가 있었다. 그 별저의 주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정태의를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정재의에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했다. 심지어는 정재의의 앞에서는 정태의에게도 예의를 지킬 정도였다.
정태의는, 딱 잘라 말하자면 그 남자를 싫어했다.
굳이 그 남자 역시 자신을 싫어했다는 점을 빼고 보더라도, 생각해 보면 설계도면을 주면 내보내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아.
“맞다……, 하긴 형은 약속을 깨는 건 싫어하지요.”
정태의는 막연하게 과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것 때문에 화를 내면서 따지고 드는 성격은 결코 아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태의의 말에 아지즈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태의 씨께서 도와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정태의는 움찔, 과거를 더듬던 기억에서 벗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하긴 앞서 늘어놓은 말의 순서를 보자면 당연히 나올 말이기는 했지만.
“제가요…….”
정태의는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난처할 것도 없고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여태 정태의에게 그런 식의 청원을 넣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태의는 거절했다.
아마도 정태의가 부탁한다면, 정재의는 어지간한 일은 들어줄 거다. 정재의가 부탁하는 일은 정태의 역시 거의 다 들어주리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정태의와 정재의,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태의는 타인의 바람을 정재의에게 대신 전해주지 않았다. 그 바람이 정재의에게 과연 좋은 것인지, 정재의가 바라는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태의 독단으로 판단을 해 봐도 정재의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그에게 말을 전해 주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안 좋은 일일 수 있다는 생각 쪽이 더 컸다. 무엇보다도 정재의를 불러들이려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남자 아닌가. 정태의가 개인적으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 인물, 라만 아비드 알 사우드.
“절대로 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고 말이죠……, 형에게 그런 말씀을 전해 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첫마디부터 거짓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뒷말은 진실이다.
정태의는 난감하게 입매를 찡그리며 아지즈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딱 잘라 거절했을 테지만, 그 점이 문제였다. 아지즈의 뒤에 있는 자가 라만, 더 나아가서는 타르텐에게 차관을 제공한 회사라는 것이.
그의 개인 별저를 폭삭 무너뜨리고 심지어 그 나라 수도까지 폭격한 바에야, 아무래도 입장이 약하다. 너무 약하다.
하지만 그래도 거절할 수밖에 없다.
정태의는 비록 자신의 얼굴이 몹시 두꺼워진다 하더라도, 정재의가 군수에 관련되길 원치 않았고 또한 권력 암투가 몰아치는 정치판에 말려들길 바라지 않았다.
“물론 저희도 그냥 부탁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지즈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긴 ‘거절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도 여태 거의 없었다.
“정재의 씨에게는 저희 측에 머무르시는 동안 최상의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누릴 수 있는 호사로만 말씀드리면 직계 왕족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도록 해 드리겠다고, 제 상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접하는 데에는 절대로 허술함이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보상 역시 결코 부족하다 여기시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해 드릴 예정입니다. 또한――.”
아지즈는 그 뒤로도 안전이나 안정, 편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상세한 금액을 말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글 돌 것 같았다.
정재의에게 제공될 것에 대한 설명을 마친 아지즈는, 짧게 덧붙였다.
“정태의 씨 역시, 도와주신다면 결코 섭섭하게 대접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태의는 귓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갑자기 현실감이 떨어져서, 아, 예, 하고 피곤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피곤하다. 오늘 잠들면 내일은 못 일어날지도 몰라.
“말씀하시는 바는 감사합니다만, 역시 어렵겠습니다.”
이 피로를 더 오래 끌었다가는 내일뿐 아니라 모레도, 글피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정태의는 딱 잘라 말했다.
“저는 형에게 어떠한 청탁을 넣는 데에 도움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정태의의 형인 정재의와는 잘 알고 지냅니다만, 그러한 청탁을 받는 천재적인 연구 개발자인 정재의와는 친하지 않습니다.”
정태의는 단호하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이 화제를 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뜻을, 깍지 낀 손과 의자에 곧게 기댄 자세로 말없이 전달한다.
아지즈는 다시 약간 고개를 숙였다.
거절을 하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라, 그대로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은 침중해져 있었다.
아지즈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조금 전과 같이 담담하나 보다 단호해진 말투로 말한다.
“가능하다면 승낙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저는 타르텐에 손님으로 와 계신 정태의 씨를 찾아왔습니다만, 곧 타르텐이 저희 쪽에서 빌려간 차관을 변제하게 되면 다시 뵙게 될 때 다소 입장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어떠실지요.”
협박하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렴풋이 안타까운 듯, 권유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본론이었다.
정태의는 원치 않게 테러범이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뒤,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정태의가 간결하게 대답하자, 잠시 동안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던 아지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 그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재의 씨에게는 신세를 진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분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도움을 받았던 바,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재의 씨의 동생분에게도 나쁜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호의로 대하는 자에게는 호의를 보이시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용서 없이 냉혹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정태의 씨가 이번에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도와주신다면, 정태의 씨에게 퍽 다행한 일이 될 터입니다.”
아지즈는 조용히 말을 마쳤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순수한 호의로 정태의에게 해 주는 충고였다.
그러나 정태의는 고맙게 여기면서도, 결국 다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지즈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