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prologue (18/34)

prologue

리하르트 타르텐은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미움, 슬픔, 괴로움, 시기, 질투, 원망, 그러한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어떠한 감정이며,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 자신이 그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도,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도, 그들로부터의 신뢰와 애정도, 필요한 것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특함도, 그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곤란함이나 당혹함, 여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 조각처럼 생긴 소년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

“크리스토프다.”

누군가 속삭였다.

숲 어귀에 선 아름드리나무 그늘에서, 바위나 나무등걸 따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던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숲 안쪽, 말발굽 소리가 따각, 따각 느리고 경쾌하게 다가오는 쪽으로 시선을 준다.

하얀 말 위에서 그 조그만 체구를 곧게 버티고 앉은 소년이 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소년들을 보고 잠시 귀찮다는 얼굴을 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말을 달리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요전번에 부호 해석, 크리스토프가 막내숙부님보다도 빨리 풀었다면서.”

“체……. 그거 빼곤 볼 것도 없잖아, 뭐.”

시기 어린 속삭임을 들으며 리하르트는 말없이 웃었다.

그것 빼곤 볼 것도 없다고? 천만에. 모든 점에서 뛰어난 가운데 그 부문에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거다. 소년들은 그런 질시 어린 말을 내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은 분명 천재였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보다 더욱 훌륭한 결과를 이루어내는 드문 인종이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런 점에서 질시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크리스토프보다 노력을 기울여야 하긴 했지만, 크리스토프만큼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주변에서는 친구들이―때로는 어른들까지도―그들을 경쟁자로 규정하고 사사건건 비교를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싫어하지도 않았다. 늘 외따로 떨어져 지내는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주위에 모여들어 함께 지내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들과 신뢰를 나누면 그걸로 족했다. 그들은 리하르트를 믿고 따랐고, 리하르트는 그들을 든든하게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했다.

“크리스토프!”

소년들 중 누군가 크리스토프를 불렀다. 말을 타고 그들 옆을 스쳐가던 크리스토프는 성가신 듯 그들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그러자 부아가 난 듯,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고함을 친다.

“늘 혼자서 외따로 다니는 사람은 타르텐을 이을 수 없어!”

타르텐을 잇는다. 그것이 그들이 최고로 치는 가치였다.

크리스토프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별달리 상대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태도가 거슬렸는지 약간 짜증이 밴 목소리로 불쑥 내뱉는다.

“늘 무리지어 다니는 네가 이으려고, 그럼?”

말을 던진 소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애초에 승계 후보조차 되지 못했던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크리스토프를 노려봤지만 그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는 멍청이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도 않았던 리하르트는 뒤에서 끼어들지 않고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소년이 급기야 눈물을 비죽거리자 그제야 괜찮다며, 그렇게 마음 상해할 것 없다며 너그럽게 웃으면서 그를 다독여 주었다.

그때 리하르트는 보고 말았다.

그들을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리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리하르트를 비난하는 것처럼.

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리하르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던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어떠한 감정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리하르트는 그 시선을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 누군가가 크리스토프의 그 눈길을 본 모양이었다. 마침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볼멘 목소리로 외친다.

“너는 왜 리하르트를 싫어해?”

아직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 자체가 비난거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리하르트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잘해 주고 감싸 주는, ‘누구나 좋아해야만 할 훌륭한’ 아이였다.

“리하르트는 늘 우리를 도와주고, 또 너처럼 그렇게 거만하게 굴지 않아.”

다른 아이도 거든다.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말을 섞고 싶지가 않다는 눈치였다.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그때.

“너는 내가 왜 싫어?”

불현듯, 충동적으로.

리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그는 타인에게 그런 물음을 던진 적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으면 모른 척하면 되고, 좋아하는 눈치면 웃어 주면 되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물음을 던지고 내심 스스로를 의아해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무시하고 가려나 했지만, 천천히 눈살을 찡그린 크리스토프는 쌀쌀맞게 말했다.

“너는 늘 당연하게 위에 서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고 있잖아. 그러면서 사람 좋게 웃는 게 싫어.”

크리스토프는 그 말만 하고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돌아섰다. 다각다각,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여태 당연한 듯이 친구들을 이끌며 그들의 신뢰를 모았던 그는. 크리스토프가 정확하게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스스로조차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을.

그 순간 리하르트는 부정적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치와 자괴감, 그것을 깨닫게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노력으로는 소용없이 처음부터 사고와 통찰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에 대한 질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폭로해 버렸다는 원망, 그 낯선 감정들로 인한 당혹감과 혼란.

자신의 심장에서 시커먼 싹이 흉하게 자라나 비죽한 가시를 드러내는 그 불쾌한 감각을, 그는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스스로조차―눈치채지 못했던 추악한 자신을 꿰뚫어 보였다는 그 부끄러움이, 분노와 미움과 원망으로 자랐다.

“위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건 저인 주제에.”

“크리스토프는 원래 저렇잖아. 성질이 고약하게 비뚤어졌어.”

아이들이 한 마디씩 투덜거리는 소리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리하르트는 겨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닌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만해져 있었나 봐. 혹시 내가 불쾌하게 만든 적이 있다면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한 얼굴로 난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펄쩍 뛰면서 그렇지 않다고, 크리스토프가 멋대로 한 말이지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리라는 걸. 그리고 자신은 좀 더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리라는 걸.

바로 몇 분 전까지는 의식하지도 않고 행했던 그런 일들을, 그는 이제 계속해서 의식하게 된 것이다.

*

한 번 싹이 터 버린 감정은 아무리 잘라내고 잘라내도 뿌리 뽑히지 않고 다시 끈질기게 싹을 틔웠고, 리하르트는 그 뒤부터 크리스토프를 주시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같이 경쟁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리하르트에게는 다른 경쟁자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오로지 크리스토프만을 주시했다. 가슴속에서 시커멓게 가라앉은 불쾌한 감정들을 어렵잖게 표면의 밑바닥에 가두며.

그러나 그런 흉측한 감정들을 크리스토프는 늘 꿰뚫어 보았고, 점차 리하르트는 그의 앞에서는 그런 감정들을 숨겨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리하르트는 늘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언제나. 꿈속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어떻게 하면 그를 다른 누구의 방해도 비난도 없이 가장 철저하게 자신의 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인지만을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 즈음에는 이미 두 사람은 주위에서도 눈치챌 만큼 ‘사이가 나쁜 관계’였고, 그럴 무렵이었다.

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리하르트의 동생이 죽고, 크리스토프가 동생의 묘에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리하르트는 그때 웃었다.

동생의 죽음 때문에 한없이 슬프고 괴로운 것과는 별개로, 크리스토프가 한 짓 때문에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그는 당당하게 크리스토프를 싫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흉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린 속내를 그대로 부딪쳐도,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는 동생이었던가. 리하르트가 더없이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의 죽음에 크리스토프는 오물을 끼얹었다.

이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당히 긴 시간을 인내한 뒤 절대적인 위치에 서서 그에게 어떠한 짓을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으리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 관한 한은 면죄부를 받았던 것이다.

자신의 의식, 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