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실에서 한참 동안 물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샤워기 아래에서 눈가에 물줄기를 맞으며, 리하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속을 억누르는 듯 불편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만이 그의 심경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욕실 문턱 위에 기대어 서서, 크리스토프는 무심한 척하는 얼굴로 은근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간이 리하르트가 그를 흘끔 노려볼 때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이윽고 리하르트는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그럭저럭 진정이 되었는지, 불그스름하게 실핏줄이 선 눈을 수건으로 닦으며 샤워부스에서 나온다.
“크리스토프. 내 눈을 멀게 할 작정이었나?”
조용히 말하는 목소리가 무뚝뚝하다. 억누른 울화가 뱃속까지 차오른 눈치였다.
“설마.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훨씬 간단한 방법을 이미 예전에 썼겠지.”
“그러나 눈가에 발라서는 안 되는 약이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내 방까지 구경하러 따라들어왔을 리가 없으니.”
리하르트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래서 뭐’라는 듯 턱을 당기며 리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았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고맙군. 덕분에 긁힌 곳의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아. 손수 발라 주는 그 다정함에 감격해서 아플 새도 없었지만.”
눈가를 손가락 마디로 문지르며 진지하게 비아냥거리는 리하르트를 보고, 크리스토프는 흥이 식은 듯 걸음을 돌렸다. 이제 볼 건 다 봤으니 이곳에는 더 있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설마하니 리하르트가 그 정도로 펑펑 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제대로 못 뜨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기대가 어긋났다.
이상을 느끼자마자 한쪽 눈을 손으로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리하르트는, 잠시 뒤 만찬에서 다시 뵙자고 하곤 그대로 자리를 떴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리하르트의 뒤를 쫓았다. 아마도 뒤에 남겨진 그들은 각자 주어진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쉬다가 만찬 자리에 올 터였다.
크리스토프가 막 그의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뒤에서 수건으로 천천히 몸의 물기를 닦으며 리하르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잘 웃더군.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더니, 몸이 유쾌하면 마음도 유쾌해진다는 건가?”
“뭐?”
크리스토프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니, 누가. 누구 방에.”
“네가. 김영…―아, 아니었지, 정태이라는 그 남자의 방에.”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크리스토프는 불쾌하게 말했다. 리하르트는 약간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 그런 말이 안 퍼질 것 같나? 왜. 동성간의 관계는 그렇게나 순수하다면서, 막상 그 남자와 그 짓을 해 보니까 그것도 아니다 싶나?”
“내가 그 녀석과?! 그런 일은 하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울컥해서 외쳤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남자에게 조롱거리로 던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리하르트는 그 말을 믿을 생각도 없었던 듯 코웃음 쳤다. 천천히, 그의 시선 위로 악의가 스며 나왔다.
“그래. 그럼 밤마다 그곳에서 뭘 한다는 거지? 동화책이라도 읽나, 응?”
그 순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결국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 말 안 해. 그걸 네놈에게 말할 이유는 없겠지.”
리하르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쥔 손에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갔지만 곧 다시 손에서 힘을 뺐다.
“말할 이유라면 분명히 있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뜩하게 스치는 목소리가, 그가 분명히 화가 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라. 설마 네 아래에서 일하는 신세이니 사생활까지 낱낱이 다 까발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네 사생활 따위는 관심 없어. 네가 누구랑 어떻게 난잡하게 놀아나든 내 알 바도 아니다. ……아, 그래. 그 정신병을 가지고서 남들과 부대낄 수나마 있다면 말이겠지만.”
뒷말에 선명한 악의를 담아 말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네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내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용납할 수 없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은 반대의 뜻을 말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수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리고 새로 수건을 한 장 꺼내어, 적당히 물기를 훑은 머리카락을 그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다시 닦기 시작했다. 사소한 부분에서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그 버릇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모든 일을 적당히 느슨하게 흘려보내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완벽주의에 가까웠다.
“네가 나더러 결벽증이라고 손가락질할 게 아니야.”
내팽개쳐진 수건을 내려다보며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지만, 리하르트는 그 말은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리크가 널 데려가고 싶은 눈치더군. 사설 경호대의 지도자급이라……. 제법 괜찮은 자리 아닌가?”
“사설 경호대? 그게 뭐야.”
갑작스런 말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옷장 쪽으로 걸어가던 리하르트는 흘끗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차관 변제만이 아니란 소리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덮어두고.”
옷장 앞에 선 리하르트는 약간 젖어들기 시작한 수건으로 몸을 한 번 더 훔쳤다. 그러면서 확실히 짚어 둬야겠다는 듯 크리스토프에게로 돌아선다.
“아직 마지막 협상이 남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조건 제시를 할지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크리스토프.”
“…….”
“그들이 저들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보다가, 어느 순간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정태이라는 그자와 친하게 지내선 곤란하다는 거다. ……안됐군, 크리스토프. 네가 처음으로 접촉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인데.”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어쩌면 그는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대단히 통쾌하게 여기는지도 몰랐다.
저울 한가운데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은, 크리스토프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었다. 가족이나 동료를 떠나, 주위사람들이 알아차릴 만큼 확연하게 크리스토프가 호감을 표시한 사람은 정태의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조용히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말한다.
“릭을 넘겨줘. 어차피 폭격을 한 당사자는 그놈이잖아.”
그렇게 불현듯 말을 하고 나서야 그 말이 자신의 머릿속에 이해가 된 것처럼 잠시 굳어 있던 크리스토프는, 곧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저 사우디 놈들. 저놈들은 애초에 타르텐과 리그로우의 관계를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조건을 내걸었어. 그 조건을 이행해 리그로우를 잡아 그들에게 넘겨주든, 혹은 조건을 불이행하든, 어느 쪽이든 이쪽이 엿 먹는 건 마찬가지다.”
말을 하던 도중에 언짢아진 듯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말을 마쳤을 때, 리하르트는 옷장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비웃음조차도 사라져 있었다. 희미한 짜증과 분노 따위가 뒤섞여 그의 표정 위에 드러나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만일 그들의 제안이 다른 것이면. 즉 리그로우가와의 교분을 해치지 않고 이행할 수 있는 조건, 예컨대 정재이의 동생이며 폭력에도 책임이 있는 자의 목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살짝 핏기가 가신 얼굴로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졌지만 그 사이로는 끝내 말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성가신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막 꺼내던 옷가지를 침대 위에 거칠게 내던져 버리곤 크리스토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상처가 흉하게 남아 있는 나신이 크리스토프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그 가운데에는 바로 얼마 전에 생겨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었다. 심하게 어긋났던 팔 관절은 다시 위치를 맞추었다곤 하나 보기에도 아플 정도로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방해라도 할 생각인가? 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유리 심장에 입김을 좀 불어 살짝 흐려 놓은 정도로, 보는 사람이 우스워질 정도로 넋이 빠져서.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주제넘게 이제 와서 사람 같은 척하지 말고.”
“…….”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뭔가 말한 듯했지만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이 새파랗게 질려 리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들떠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너답게 살아. 어차피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넌 그런 건 할 줄 모르잖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바로 앞에 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용서 없이 칼날 같은 말을 던진다.
“……그렇지, 않아.”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바람이 새어나오는 듯 가느다란 말소리에, 리하르트가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뭐?” 하고 되물었다.
“내가 태이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래.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해. 좋아한다고.”
한 마디 한 마디 띄엄띄엄,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듯이.
그 새하얀 얼굴을 앞두고, 리하르트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마네킹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리하르트의 입술만이 움직였다. 그 무표정을 그대로 담은 채 기계처럼 입술 사이로 무기질적인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래서.”
“…―.”
“방해라도 하겠다고? ……타르텐의 성을 가진 주제에, 그 자를 위해서 타르텐의 일을 방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크리스토프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리하르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화가 난 듯, 당혹스러운 듯, 불안하고 초조한 듯.
마치 뭐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가느다랗게 중얼거린다.
“나는, 그 녀석이, 좋, …….”
고장 난 녹음기처럼 말마디마다 끊기던 그 목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린 탓이다.
“닥쳐. ―잊어버린 건 아닐 테지, 크리스토프. 너는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따르겠다고 했어. 결코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 일은 하지 않고 내 일을 돕겠다고, 너는 약속했어. 잊어버렸나?”
“놔……!”
리하르트의 손이 멱살을 움켜쥐는 순간 움칫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그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험악하게 외쳤다. 그의 팔을 꺾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팔꿈치를 움켜쥐었지만, 옷 위라면 몰라도 벗은 팔의 살갗이 직접 손바닥에 닿자 그조차 꺼려지는 듯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팔꿈치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불쾌한 듯 움칫거리는 그 손가락을 리하르트는 흘끗 쳐다보았다. 문득 그는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래, 타르텐을 등지면서까지 방해하고 싶어질 만도 하겠지. 사람에게 닿는 건 물론, 건드리는 것조차 이렇게 싫어하는 네가 먼저 나서서 가까이 갈 정도로 마음에 드는 놈인데, 응? 설마 그런 인간이 네 인생에 나타날 줄은 꿈도 못 꿨을 텐데, 소중하겠지? 조금이라도 인간 같아진 기분이 들어서 좋겠지?”
“……. ……놔, 놓으라고!”
“잘 들어, 크리스토프. 너는 결코 나를 방해해선 안 돼. 내 말을 거슬러서도 안 되고. 그래도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고 들겠다면, 방해를 못하게 만들어 주지.”
리하르트는 나직이 말을 끝냄과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뱃속으로 주먹을 질러넣었다. 둔탁하고 억센 소리와 함께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약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 아픔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이내 험악한 얼굴로 돌아와 그의 팔꿈치를 위에서 후려갈겼다.
“놔, 놓으란 말이다! 나를 건드리지 마!”
짧으나 매서운 주먹에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크리스토프의 다리를 걷어찼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턱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을 리하르트가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가로막자, 붙잡힌 감각이 소름끼쳐 얼른 뿌리치고 만다. 무릎으로 그의 배를 찍었지만, 짧은 신음을 내뱉은 리하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리스토프의 무릎을 끌어안아 버린다.
“……!”
나신인 리하르트에게 무릎―정확히는 무릎 아래쪽의 다리를 끌어안긴 크리스토프는 진저리를 치며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단단히 끌어안은 그 굵은 팔은 도통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세게 부둥켜안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분명 고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크리스토프의 발목에 뜨끈한 체온이 닿았다.
“……!”
“……!! 놔!!”
리하르트 역시 예상치 못했던 듯 약간 낯을 찌푸렸다. 타인의 발 근처에 자신의 치부가 닿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발목에 닿은 체온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삽시에 핏기가 가셨다. 불쾌감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그를 떠밀었다.
리하르트는 혀를 차면서도 그의 다리를 놓지 않았고, 그 통에 크리스토프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두터운 러그 위로 둔한 소리와 함께 뒹군 크리스토프의 위로, 리하르트가 올라탄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불쾌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배 위에 올라앉은 리하르트를 뿌리치려 안간힘 썼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더라면 뿌리쳐내고 다시 일어서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크리스토프의 기술이나 습관 따위를 잘 알며, 또한 본인 역시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을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서 그가 날뛸 수 없도록 무게를 실으며, 그의 가슴과 목을 짚어 내리눌렀다.
둘 다, 분노와 흥분 탓에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리하르트 역시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며, 거칠게 내뱉는다.
“전에 말했었지. 너는 접근전에는 치명적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마땅한 무기도 없어. 그래, 이제 어쩔 작정이지?”
“비켜……! 손대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목줄기를 움켜쥔 손 아래, 그는 의도적으로 크리스토프의 가슴 위로 다른 손을 미끄러뜨렸다. 구깃하게 흐트러진 양복 아래, 얇은 실크 셔츠 바로 위로.
부르르 떨리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바로 전해졌다.
“놔, ……놔, 놔!!”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파란 눈동자는, 마치 그 안에서 시퍼렇게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는 그 역시 이성의 고삐가 반쯤 풀린 듯 잔혹하게 그 눈동자를 내려다본다.
“말해. 나를 방해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따르겠다고.”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바싹 붙어 내려왔다.
크리스토프는 이를 악물었다. 고함조차 삼키며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리하르트는 연이어 말했다.
“말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어쭙잖게 인간다운 척하지 말고, 아무도 좋아할 줄 모른다고.”
“…―.”
“인간적인 감정? 그런 게 네게 왜 필요하지? 넌 그저 날 싫어하기만 하면 돼. 그게, 네가 아는 유일한 감정이면 된다고. 증오만을 아는 인간이라니, 네게 딱 어울리지 않나?”
“……. 너는 타르텐을 이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르신의 뒤를 잇지는 못할 거다.”
크리스토프가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격렬한 분노와 혐오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비열하고 잔인해. 내가 아는 한, 앞으로도, 너만큼 냉혹한 인간은 없을, 거다.”
푸르스름한 입술마저 떨려, 말꼬리가 멈칫거렸다.
리하르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석상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가면을 쓴 듯한 얼굴이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가면은 이윽고 천천히, 천천히 웃었다. 리하르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웃음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설마하니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아니, 너 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만이 나를 그렇게 보지.”
리하르트의 눈매가 휘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무리 연습해도 지을 수 없었던 그 상냥한 눈매가,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입매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거울과 같아서, 나를 보는 사람의 기대대로 부응해 주지.”
조용하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는 푹신한 러그에 묻혀 둔탁하게 울렸다.
가끔은 바닥이 아닌 것을 두들기는 듯 보다 찰진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바닥을 연거푸 두드린다.
거의 반광란에 가까운 상태로 미친 듯이 날뛰며 버둥거리는 인간을 묶어 두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조건이 대등한 상태에 있다면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조건에서 열세에 있다면, 그리고 억압하는 쪽에서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과는 대개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하르트도, 크리스토프도, 처음부터 어느 쪽이 유리하고 어느 쪽이 불리한지 알고 있었다.
한 뼘 가량 차이나는 신장도, 두세 체급은 차이가 날 몸집도,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보다 체격 조건이 나았다.
체력 역시 마찬가지다. 순발력이나 속도에서는 우세하나 체력 자체는 크리스토프가 열세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최초의 자세에서 나는 차이.
아래에 깔려서 거의 몸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리하르트는, 불가피하게 크리스토프에게 얻어맞거나 관절이 가볍게 어긋나는 정도의 데미지를 감수하며 움직였다.
처음부터 크리스토프가 불리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처음부터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결코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육중한 마호가니 테이블 다리에 크리스토프의 한 팔을 묶어 두고 났을 때, 그들은 모두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크리스토프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필연적으로 얻어맞거나 찍히고 만 리하르트의 이마며 배, 가슴 따위에 불그스름한 자욱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하루만 지나면 시커멓게 멍이 들 자욱이다. 테이블에 부딪혀 살짝 찢어진 이마에서는 핏방울이 맺히다가 굳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크리스토프는 시퍼렇게 질려 독이 차오른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먼지 하나 없었던 옷가지는 잔뜩 구겨져 흐트러졌고, 그나마 양복 웃옷은 단추가 떨어져 반쯤 벗겨져 나갔다. 구두 역시 어디로 날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를 가볍게 덮을 만한 길이로 단정하게 사락거렸던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땀에 흥건하게 젖은 이마며 뺨에 너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크리스토프의 아랫배를 단단히 누르고 앉은 채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보는군, 크리스토프.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이 아니면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도 않았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세라도 넘어갈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시퍼렇게 리하르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떻게 할 거지? 지금 나는 네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고, 심장을 파낼 수도 있고, 산 채로 팔다리를 뜯어 버릴 수도 있어.”
리하르트가 느리게 말했다.
그 역시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비록 분노하거나 감정이 들떠도 다른 사람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훌륭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그였지만, 지금은 평연한 듯 낮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서도,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도, 희미하게 흥분해 일렁이는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었다. 어깨를 떨며 움칫 몸을 움츠리는 크리스토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말해. 다시는 내 말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르겠다고, 네 입으로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하란 말이다.”
“…―.”
크리스토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라는 입에서 숨소리 하나라도 내보낼 것 같냐는 듯.
리하르트는 묵묵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정도는 시간의 유예를 주겠다는 듯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조용히 한숨을 쉬며 웃었다.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부드럽게, 사랑스런 어린애를 어르는 것처럼 속삭인다.
“너는 쓸데없이 고집이 세단 말야. 옛날부터 그랬어.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서 넘기는 요령이라곤 없이, 약한 소리는 죽어도 안 하고 견뎠거든.”
문득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위로 바싹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쇄골 바로 아래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면 이번엔 과연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안쓰러운 듯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였다.
넉넉하게 펼쳐 쇄골 위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얇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갗이 직접 맞닿기라도 한 듯 체온과 감각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셔츠 아래에서, 크리스토프는 경련하듯이 몸을 떨었다.
“만지지 마! 뭘 하는…―!”
반사적으로 벌컥 소리를 지르던 그의 창백한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가슴 위의 한 곳에서 리하르트의 손이 멎은 탓이다.
“흠……? 갑자기 조용해졌군. 목이 쉴 때까지 고함을 질러 댈 줄 알았는데. 아니면 의외로 여기는 만져 주니까 기분이 좋은 건가?”
뜻밖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셔츠 위로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낸 돌기 위에서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 손톱으로 가볍게 긁을 때마다 흠칫, 흠칫, 몸을 움츠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하지 마, ……건드리지 마…….”
떨리는 목소리가 닫힌 목을 비집고 간신히 새어나왔다.
그러나 리하르트에게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잠시 동안 조그만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듯이 가슴의 그 작은 살점을 문지르던 그는, 어느 순간 세게 비틀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가 하, 하고 웃는다.
“그래, 그게 네 비명이군.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네 비명은 어떤 소리일까 했는데.”
“……그, …―.”
뭔가 말하려는 듯 벌어진 입술은 이내 다시 닫혔다. 이로 악물어 말을 삼킨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졌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가슴을 주무르는 손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을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가슴에서 허리, 옆구리, 배.
마치 온몸을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한 군데도 빠짐없이 샅샅이 훑기라도 할 듯, 셔츠 위로 천천히 손이 오갔다. 그리고 그 손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일 때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움칫움칫 조그맣게 꺾인다.
리하르트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온몸이 손닿는 데마다 다 이렇게 민감해서야, 도대체 여자와는 어떻게 잔 거야. 설마 전희도 뭣도 없이, 그냥 박아넣고 싸기만 하고 끝냈나? 흥……, 매너라곤 없는 놈 같으니.”
“…―.”
크리스토프는 몸을 잔뜩 구부린 채―비록 그 위에 리하르트가 올라타고 있어 제대로 구부릴 수도 없었지만―이를 악물었다.
비웃음 섞어 혀를 차며 그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천천히 손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 위로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설마,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설핏 눈살을 찌푸린다.
“설마 그 나이 먹도록 동정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한 번 말해 본다는 투로, 리하르트가 툭 말을 던졌다.
그 순간, 굳게 다문 크리스토프의 입매가 짧게나마 떨린 것을 리하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얼굴이 경악에 가까운 빛으로 굳어졌다. 크리스토프의 몸을 쓰다듬던 손마저 잠시 멈추었다.
“섹스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질 나쁜 농담은 걷어치우라는 듯 리하르트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지만,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더 세게 깨물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넋이라도 나간 듯 그를 내려다보다가, 하, 하고 헛웃음을 웃더니 말도 안 된다며 묻는다.
“농담이겠지. 그 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잖아.”
처음에는 너무 낮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피라도 날 듯이 세게 입술을 깨문 잇새로, 크리스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이윽고 파문처럼 점차 커져, 곧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했, ……잖아.”
“아……그래, 했겠지. 그렇지,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 적이 없을 리가…….”
“네가……했잖아.”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크리스토프를, 기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끔찍하게 괴롭다 못해 잠시 제정신을 놓았는지도 몰랐다.
“뭐?”
리하르트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자, 크리스토프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네가 했잖아……! 그때, 강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네가 나한테 했잖아, 그 짓을……!!”
이 미친놈, 이 변태새끼, 떨리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욕을 주워섬기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한동안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 올려놓았던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 움직임에 크리스토프 역시 덩달아 몸을 움츠렸다.
내가 너와, 너 따위와 그 짓을……, 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다른 데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혹시?”
“…―왜, 네가 한 짓이면서도 남에게는 말 못하겠나 보지? 나라고, 그런 말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까 봐! 그 따위 짓을 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 걸 몇몇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말을 떠들 것 같아?!”
크리스토프는 울컥 분이 솟구친 듯 외쳤다. 새파란 눈동자가 얼핏 젖어들어 유리처럼 반들거렸다.
머리끝까지 솟은 울화와 분노를 어쩔 줄 몰라 몸을 부들거리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표정 위로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빛이 언뜻 스쳤다.
“그래서 그런 말이 돌아다녔나…….”
한숨 섞인 혼잣말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크리스토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듯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어느 순간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멎은 순간,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몸에 얹혀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리하르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얼간이 짓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 터무니없는 말까지 나돌게 만들었다……? 내가, 너한테 그 짓을 했다고? 이 내가?!”
그의 말투가 점차 거칠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굴욕을 맛보았다는 듯 하, 하고 코웃음을 친 리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럼 오늘 똑똑히 알아두도록 해. 내가 확실하게 가르쳐줄 테니까. 남자가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선뜩할 정도로 나직하게 말을 마치며,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셔츠를 목깃부터 움켜쥐고 뜯어 버렸다. 얇고 부드러우나 튼튼하지는 못한 천조각이 힘없이 뜯겨져 나갔다.
걸레처럼 너덜거리며 어깨며 팔 쪽에만 걸쳐져 있는 천조각 아래에서, 새하얀 살갗이 드러났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지는 가운데, 리하르트는 두말없이 크리스토프의 바지까지 끌어내렸다.
당장 낯빛을 싹 바꾸며 온힘을 다해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부자유스러운 몸으로는 결국 무리였다. 정신없이 고함을 질러도 소용없었다.
“미친 새끼, 뭐하는 짓이야! 건드리지 마! 내 몸에 닿지 마!!”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서슬 퍼렇게 고함을 질러도 그 소리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리하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이내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는 실올 하나 남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마지막으로 벗겨낸 그의 속옷을 멀찍이 내던져 버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골적인 시선이 훑어내렸다.
“흥……. 남자를 상대로 과연 설까 싶지만…….”
리하르트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아무렇게나 훑었다.
무겁게 늘어진 성기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얼어붙은 시선을 잠시 그의 사타구니에서 떼지 못했다. 경악과 혐오가 그 시선에 담긴다.
타인의 성기를 이렇듯 눈앞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과 살갗이 스치기라도 할까 봐 사우나 따위에도 간 적이 없었다. 공동욕실을 이용한 적은 있었지만 남의 물건 따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공중화장실에서도 옆에 사람이 있어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 자신의 성기라면 수천수만 번을 봤으니 남자의 성기가 낯설게 느껴질 이유 따위는 없는데도, 눈앞에서 사타구니를 문지르는 리하르트의 성기는 명백하게 낯설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크리스토프의 아래를 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 만다.
“사내놈의 물건 따위는 흉측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본 가운데 빛깔도 모양도 가장 예쁘게 생긴 물건이군.”
크리스토프는 하얗게 표정을 굳혔다.
몸을 건드리는 것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육체관계를 상징하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막연한 앞일을 끔찍하게 연상시킨다.
“리하르트. ……하지 마.”
창백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리하르트는 흐리게 웃었다.
“내가 뭘 할지는 알고 있나?”
“그걸로, ……내 몸을 건드릴 거잖아.”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성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몸이 움츠러든다.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러면서도 성기를 훑어올리다가, 여전히 힘없이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에서 결국은 손을 뗐다.
“역시 남자를 상대로는 서지 않는군. 덕분에 끝까지 가지는 못하겠으니 너로서는 다행이겠어. ……뭐 좋아. 반드시 박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
깔끔하게 아래쪽의 자극을 포기한 리하르트는, 곧바로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 올라탔다.
크리스토프는 펄쩍 뛸 듯이 몸을 움츠렸다. 대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벗은 몸과 벗은 몸이 노골적으로 부딪혔다. 살갗 위에 바로 닿는 살갗의 느낌이 더없이 낯설었다. 소름이 끼친다.
“하지……!!”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비명 같은 외침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미처 다 외치기도 전에, 억센 손으로 거세게 턱을 움켜쥐면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깨물었기 때문이다.
아픔보다도 그로테스크한 충격에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굳어지는 게 훤하게 느껴지는 듯, 그의 등을 어루만지듯이 쓸어내리던 리하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는다.
가슴이 맞닿았다. 배가 맞닿았다. 등에 두른 팔에 세차게 힘이 들어갔다.
마치 온몸이 붙어 버린 듯한 그 낯선 감각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보다도 생소한 감각은 입이었다.
잡아삼킬 것처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깨물었다. 가끔 뜨끔한 아픔을 느낄 정도로 거칠게 깨무는 사이사이, 갈 곳을 잃은 혀를 자신의 입속으로 빨아들인다. 꼼짝도 못하고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간 혀는 그의 혀와 뒤엉켜 미끌거리는 뜨거운 살점을 한참 동안 맛보아야 했다.
뜨거운 호흡이 타액과 함께 그 사이에서 오갔다.
질척하고 끈적한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때, 깨달았다.
분명 처음에는 무심하고 거칠기만 하던 리하르트의 혀가, 이가, 입술이, 언제부터인가 농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애가 타는 듯 초조하게, 점점 더 세게 크리스토프의 입술을 빨아당긴다.
충격으로 떨림조차도 잊고 있던 입술이, 어느 순간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
크리스토프는 얼어붙어 있던 몸이 순간적으로 깨어난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입속을 헤집고 다니던 혀가 아직도 안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당혹감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 시선을 헤매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아쉬운 것도 같은, 그래, 마치 정신없이 열중하던 장난감을 일시에 빼앗겨 버린 듯한 얼굴이다.
“가만히 있어. 어차피 이 정도야 애들 장난인데 뭘 그렇게 굳어 있어.”
무뚝뚝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목소리가 다시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내려왔다.
크리스토프는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름이 끼쳤다. 몸이 오싹했다.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가슴이며 배, 등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 따위가 세포 하나하나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돌리자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울컥한 듯, 크리스토프의 턱을 움켜쥐고 강제로 돌렸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다시 입을 맞춘다.
“…―!”
하지 말라고 내지른 고함은 그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딘지 조금 전보다 더 초조하게, 조급하게,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입 안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혀가 닿는 곳곳마다 핥으며 빨아당긴다. 할 수만 있다면 통째로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때 문득,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목선이나 쇄골 따위를 조심스럽게 덧그리던 손은 어느새 가슴에 닿았다.
가슴 위에서 조그맣게 솟은 살점을 스치는가 싶던 손이, 그곳을 집요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그 순간 몸을 뒤틀며 요동쳤다.
견딜 수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소름끼치게 낯설고 선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저릿하게 타고 올랐다.
놔. 제발 건드리지 마. 낯설어. 낯설어서 견딜 수 없어. 나를 혼자 내버려둬.
크리스토프는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 마, 그만해, 소름이 끼친단 말야……! 속이 울렁거리, 아, 건드리지, 아, ……아, 아, …―!!”
떨리는 목소리는 크리스토프의 의지와 상관없는 밭은 소리를 내뱉었다. 희미하게 울음마저 섞이는 그 목소리를 억지로 삼키려 했지만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리하르트는 잠시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떠오른 빛이 뭔지, 크리스토프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리하르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 표정에는 어렴풋한 당혹감도 섞여 있었다.
“……여기가 좋은가 보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민감한걸. 아니면, 그래서 접촉기피증이 있었던 건가?”
비아냥거릴 셈으로 말하는 목소리마저, 어딘지 당혹감이 스몄다.
천천히 리하르트의 입술이 내려갔다.
크리스토프의 목을 훑고, 어깨선에서 쇄골을 따라 내려와, 이윽고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문지르던 가슴 가운데까지 닿는다.
잠시 망설이듯이 그 주위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그 위를 덮었다. 단단하게 솟은 살점을 혀끝으로 간질이다가, 곧 숨을 삼킬 정도로 세게 빨아당겼다.
“…―!!!”
때로는 이로 물고 잘근거리며 뿌리까지 뽑아낼 듯 빨아당기는 그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화급하게, 드러난 전선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요동쳤다. 온 힘을 다해, 죽을 기세로.
얼마간은 리하르트 역시 온 힘을 다해 크리스토프의 몸을 억누르고서 갓난아이처럼 그의 유두에 매달려 있었지만, 곧 그의 몸 위에서 비켜났다.
맞닿아 있던 가슴과 배도, 등을 꼭 끌어안고 있던 팔도 일시에 떨어져 나갔다.
피부를 태울 듯이 뜨겁던 체온이 사라지고 그 대신 크리스토프에게 익숙한 서늘한 공기가 피부 위를 감쌌다.
크리스토프는 온몸으로 숨을 헐떡이며, 부릅뜬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하고 망연히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서 반걸음쯤 떨어진 곳에 무릎으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평소처럼 비웃는 얼굴이나 혹은 차갑게 내려다보는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리하르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그 표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희미하게 몸을 굳히고 만다.
리하르트의 성기가 일어나 부풀어 있었다.
거무스레하고 흉측한 살덩이는 혈관마저 돋우고서 크게 부풀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크리스토프는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몸이 떨렸다.
공포나 분노, 그런 감정과는 상관없이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와 맞닿는 것을, 몸이 받아주지 못했다.
리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싸늘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한다.
“새삼스럽게 왜. 이미 너는 나와 섹스를―그런 관계를 가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와서 몸을 사릴 것 없을 텐데.”
“그런 건 상관없어. 비역질을 하든 두들겨 패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나를 건드리지는 마!”
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크리스토프를 찬찬히 살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은 시선이 다시 온 길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크리스토프의 입술에 머무른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집어삼킬 것처럼 물고 빨았던 입술로 지그시 시선을 주다가, 천천히 눈길을 떨어뜨렸다. 맞닿아 끌어안았던 몸과, 뒤이어 발갛게 부어올라 젖어 있는 유두.
그리고.
“…….”
리하르트는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상한 것이라도 본 듯 약간 눈을 크게 뜬 그는, 곧 크리스토프의 얼굴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성기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이미 뻣뻣하게 굳어서 일어서 있는 그 물건을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제법 오래 훑어도 축 늘어져 힘을 잃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는 몇 번 훑고 나자 더욱 크게 부풀었다.
그런 리하르트를 경악스런 눈으로 보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비웃음과도 닮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아랫도리나 살펴보고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시지.”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아연하게 말을 잃고 만다.
자신의 성기가 비록 아주 약간이나마 힘을 얻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늘어져 있지 않고, 아주 조금 들떠 있다.
어째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 가신 얼굴에 눈만 커다랗게 뜬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모르겠다는 얼굴 할 것 없어. 쉽게 생각하면 될 일이지. 네 비틀린 정신구조나 결벽증에 가까운 예민성과는 별개로, 너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야. 네 몸이 터무니없이 민감한 거라고. ……좋겠군, 크리스토프. 괴로운 건 잠깐이겠어.”
그렇게 말하며 리하르트가 한 걸음 더 내디딘 순간,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납빛처럼 창백해졌다.
***
당연하게도, 말리크 일행은 가장 상석에―어르신은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앉아 있었다.
그 점은 물론 납득이 갔다. 이 자리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만찬이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십여 자리밖에 되지 않는 한정된 만찬석에 자신이 앉아 있는 이유를, 정태의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가장 말석을 주더라도 감지덕지하며―왜 불렀나 의아해하며―앉아 있을 텐데, 말리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태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재이 씨가 얼마 전 RCS 관련으로 연구를 마무리 지으셨다지요?”
“정재이 씨는 계속 UNHRDO에 계실 생각이시랍니까?”
“저희 측에서는 언제든 뛰어난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제 상사께서는 인적자원만큼 훌륭한 자원은 없다고 여기시는 분이라서요.”
“개인적인 접촉은 UNHRDO 측에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더군요. 그래도 형제라면 연락이 자주 되겠어요.”
열 마디에 한 마디씩은 반드시 정태의에게 말을 붙이는 말리크에게, 정태의는 빈 웃음을 웃으며 예, 글쎄요, 그러신가요, 아니오, 단답형 대답만을 건네었다.
솔직하다면 솔직할 수도 있지만,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태의가 프랑크푸르트로 갈 예정이었더라면 저도 모르게 ‘예,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정태의는 말리크가 옆에 앉은 타르텐의 일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채를 슬슬 뒤적이다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르텐에서도 이 자리에 앉을 정도면, 승계 결정에 발언력이 있을 만한 사람일 성싶었다. 과연, 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들 대부분은 만만찮아 보이는 장년․노년의 남자였다.
그런 가운데, 한 자리가 눈에 띄게 비어 있었다.
말리크의 건너편, 정태의의 옆옆자리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자, 답은 쉽게 나왔다.
“호랑이 연고가 그렇게 독했나…….”
리하르트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정태의는 조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일레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곧 오겠지.” 하고 대수롭게 말할 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보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리하르트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정태의였지만,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말리크가 그 생각을 잘랐다.
“그러고 보니 정재이 씨가 얼마 뒤 프랑크푸르트로 가신다고 하던데, 모처럼 만나시겠군요.”
“예? 아……, 아뇨,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바로 옆에 앉은 남자의 모골송연한 형제상봉 주선계획을 떠올리곤 얼른 덧붙였다.
“굳이 꼭 만나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차후에 기회가 닿으면 만나려고요. 서로 아무런 무리가 없을 때요.”
정태의가 웃으며 말하자 말리크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 탓인지 저 ‘그렇군요’마저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정태의는 저 남자의 상관이라는 사람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납치감금에 가혹한 대가를 치른 그 남자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리해 보면, 말리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유회사와 맺었던 계약 건으로 왔다. 그리고 그 납치감금범은 말리크의 상관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는 정권의 암투를 벌이는 왕자의 동복형제의 피후견인…….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태의는 슬슬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더 생각하면 두통이 날 것 같아서 그건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머리를 식힐 셈 농담이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우디의 국유회사면 어디야. 설마 아람코 이런 데는 아니겠지? 하하.”
옆자리에 앉은 일레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정태의가 가볍게 한 말은 순수한 농담이었다.
“잘 알고 있군.”
그러나 가볍게 돌아온 말은 농담조가 아니었다.
정태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살짝 굳었다. 그리고 매우 미심쩍은 눈으로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괜히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농담이지?”
“농담 같나?”
“…….”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가 없었다.
그 회사의 이름을 댄 이유는 그저 정태의의 짧은 경제지식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우디의 국유회사가 그곳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는 아람코는 아주 잘 나가는 비상장기업을 말하는 건데…….”
혹시라도 동명의 다른 회사가 있나 싶어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레이가 역시나 가볍게 대꾸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비상장기업 가운데 거기보다 기업가치가 높은 곳은 없겠지.”
정태의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두통이 심해질 것 같았다. 갑자기 저 앞 귀빈석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말리크가 심상찮아 보인다.
“라만이라는 그 남자……, 아람코의 요직에 앉아 있었어?”
정태의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아주 잠시 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아아, 하고 말한다.
“그렇군, 오해가 있었어. 라만은 저 남자의 상관이긴 하지만 아람코와는 관계없어.”
“뭐야, 그게.”
“저 남자의 상관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 파이살이지. 원래 알 파이살의 수석 수행원이었으니까. 알 파이살의 사업체로 가지 않고 아람코로 가서 적을 두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금도 알 파이살의 수석 보좌로 보면 돼.”
“……. 좀 더 쉽게 말해 주면 고맙겠는데.”
“아람코와 파이살 사이에 협의가 있어서, 아람코에서는 차관 변제 협상에 대한 전권을 파이살에게 넘겼어. 그렇기 때문에 저 남자가 아람코에서 일시적으로 자리를 얻은 거지. 아마도 이번 일이 끝나면 그는 다시 파이살에게 돌아가겠지.”
“아니 좀 더 쉽게, 쉽게.”
정태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문지르며 말했다.
물 잔으로 가볍게 입술을 축인 일레이는, 아주 쉽게 말해 주었다.
“차관 변제에 있어 실질적인 채권자는 알 파이살이라고 보면 된다는 뜻이다.”
“좋아. 아주 이해하기 쉽군.”
정태의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 사용인에게 부탁해서 받은 맥주잔에 입을 대었다.
알 파이살.
작년 가량까지 몇 년 이상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 내부에서 암암리에 벌어졌던 암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파벌의 주요 인사인 알리 왕자의 동복동생이다.
비록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빠졌다고는 하나, 그 정도 규모의 국유기업과 단독으로 협의를 할 정도라면 그 권력은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남자는―.
“라만의 후견인이란 소리지…….”
어쩐지 맥주 맛이 쓰구나, 정태의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아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후견인이기도 하지.”
정태의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일레이가 덧붙인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 때문이다.
아까부터 말리크라는 남자가 정태의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라만은 정태의를 싫어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처음 볼 때부터 정태의를 싫어했다.
“심지어 그 멋진 별저를 그렇게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밉살스러웠을까. 아무렴.”
정태의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그 멋진 별저를 그렇게 폐허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고, 모르겠다. 그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기만을 기원해야지.
정태의가 가뿐하게 한숨을 쉬곤 다시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리하르트가 뒤늦게 들어왔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하고 두루 사과를 하며 빈 자리에 앉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에 섞여들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리하르트가 묻자 말리크는 넉넉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는 요리마다 대단히 훌륭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하하, 독일에 오실 때면 언제든 편하게 들러 주십시오. 이번에는 겨우 며칠밖에 머무르지 못하신다니 퍽 안타깝습니다.”
틀에 박힌 매뉴얼 같은 대화인데도 리하르트의 입에서 나오면 정말로 순수한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저 남자의 대단한 점 중 하나였다.
정태의는 도무지 가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친근한 미소가 표정에서 떨어지지 않는 리하르트를 감탄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와 말리크의 사교적인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산책을 할 겸 저택 바깥을 둘러보았는데, 숲에 마련된 산책로가 아주 근사하더군요.”
“아아. 그 뒤쪽으로는 산자락과 이어져 있어서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시면 길을 잃기 쉬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리 험준한 산세는 아니니 큰 문제가 생긴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지만요.”
“허어, 산이라. 좋군요. 제가 젊었을 때에는 휴가 때면 종종 사냥을 하러 가기도 했었는데, 일이 바빠진 뒤로는 통 즐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시면 여기에 머무르시는 동안, 내일은 이미 예정이 잡혀 있으시니 모레쯤 가볍게 달려 보시겠습니까? 마침 이 시기 즈음이면 산맥을 타고 붉은 여우가 내려와 있을 무렵입니다.”
“붉은 여우라, 퍽 오랜만이군요.”
사냥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빛내며 반색을 하는 말리크를 곁눈질로 보며, 정태의는 이제 한동안은 그가 자신에게 정재의를 주제로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아 약간 안도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역시 원치 않는 화제를 돌리는 데에는 상대가 좋아하는 또 다른 화제를 던져 주는 게 가장 좋다.
정태의는, 비록 정태의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닐 테지만 딱 좋은 화젯거리를 던져 준 리하르트에게 고마워하며 식사를 즐겼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흘끔흘끔 문 쪽을 보았다.
리하르트가 오면 당연히 크리스토프도 함께 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리하르트는 혼자 온 모양이었다. 약간 뒤늦게 따라올까 했는데 이미 식사가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걸 보니, 이 자리에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아까 엿들은 바로는 리하르트와 꽤 험악하게 싸우는 것 같던데, 그러고서 그가 혼자 온 걸 보니 어쩐지 좀 불안해진다.
크리스토프쯤 되는 인물이 어느 구석에서 죽어 가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런데 크리스토프는 같이 안 왔나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서 정태의가 슬쩍 물었다.
선선하게 웃음을 짓고 있던 얼굴 그대로 리하르트는 정태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
기분 탓인가. 순간적으로 시선이 좀 따갑게 느껴졌는데.
그러나 정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보았을 때 리하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절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는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지금 자리에 누워 있을 겁니다. 그렇지, 식사를 마친 뒤에 혹시 괜찮으시면 한 번 들여다봐 주세요. 정태이 씨가 가면 좋아할 테니. ……깨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걱정스러운 듯 약간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그에게 정태의는 아, 예, 하고 대답했다.
저렇게 말하는 투를 보니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크리스토프와 거의 박빙으로 싸우곤 하는 리하르트는 비록 이마나 목덜미에 상처 처치를 받은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매우 멀쩡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크리스토프에게 들러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포크를 놀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일레이가 서늘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크리스토프를 보러 가도 불쾌하지 않겠나?”
일레이의 나직한 말에 리하르트는 기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아니. 내가 왜 불쾌하겠어.”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리하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릭. 서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일이란 게 있지 않나?”
일레이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하나 단호하게 말한다.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네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아. 나는 이 녀석이 크리스토프를 보러 가면 불쾌하니까, 굳이 이놈을 보내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뭘 보여 주고 싶은 건지는 알겠지만.”
리하르트는 잠시 일레이를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언뜻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살짝 어깨를 추어올린다.
“릭, 나는 다른 뜻은 없어. 그저 그들의 사이가 좋으니까 가엾게도 자리에 누운 크리스토프의 상태라도 보러 가 줬으면 하는 거지.”
“그렇게 가엾으면 네가 돌보든가.”
일레이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정태의에게까지 다다르지 않을 만한 성량은 아니었다.
뭔가 미묘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 그리 상쾌한 느낌은 아니다.
리하르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일레이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뭐야. 크리스토프, 많이 안 좋은 건가?”
정태의는 그들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을 타서 슬쩍 말을 섞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미묘한 불온함에 정태의가 입매를 설핏 찡그렸을 때, 리하르트가 일레이를 대신해서 조용히 대답했다.
“크게 걱정할 바는 못 됩니다. 요즘 심적으로 많이 지치고 체력도 떨어져 있었는지, 약간 미열이 있을 뿐이에요, 지금은.”
“하아……, 예…….”
리하르트는 새 접시가 나오길 기다리며 냅킨으로 입가를 가만히 눌렀다. 그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태의가 알 수 없는 애매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리하르트는 문득 생각난 듯이 근처 자리에 앉아 있던 당숙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백부님, 작은숙모님을 곧 드레스덴으로 모실까 합니다만.”
그러자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당숙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작은숙모라고 하면……?”
“비앙카 숙모님, 그러니까 크리스토프의 어머님 말입니다.”
리하르트의 담담한 대답에 대해, 당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의아하게 눈썹을 찌푸리고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흠, 하고 다시 물었다.
“네 말은, 그녀를 다시 타르텐으로 불러들이겠다는 뜻이냐?”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승계일도 다가오고, 크리스토프도 다소 불안정한 것 같아서 그녀가 잠시 동안 머무르면 좀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뿐입니다.”
그러자 당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곧 승계일이니 다른 사람들도 모일 때가 가까워져 오는구나. 네가 좋을 대로 하려무나.”
리하르트는 믿음직스러운 웃음을 짓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크리스토프의 어머니가 오면 그는 더 불안정해질 거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 녀석이 다른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게, 어머니란 거지.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어머니.
그 말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새어나오던 우아하고 고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수화기를 받아들던 크리스토프의 얼굴도.
창백하게 굳어지던 얼굴. 푸르스름하게 떨리던 입술. 그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수화기를 향해 조용하고 침착하게 속삭이던 짤막짤막한 대답들.
금세라도 깨어질 얄팍한 유리처럼 불안정한 그 창백한 얼굴이, 지금 옆에서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는 리하르트의 얼굴과 겹쳐졌다.
정태의는 가만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사라졌다.
그때 문득, 톡톡, 정태의의 바로 앞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하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일레이가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계일이 다가오면 가까운 친척들은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한 타르텐으로 찾아오지.”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역시, 늦든 빠르든 어차피 곧 타르텐으로 올 터였다.
조용히 사실을 되새겨 주는 일레이를 잠시 마주보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가만히 대답한다.
그의 말대로, 승계 결정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르텐에서 머무를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될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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