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문과 진실
서가 가장 안쪽에 있는 벽에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고풍스러운 나무 액자 안의 초상화에서는 젊은 귀부인이 우아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옛날 귀부인들은 즐거운 일이 그렇게 없었던 건지, 아니면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활짝 웃으면 안 된다는 법칙이라도 있었던 건지.”
정태의는 그림 위로 가만히 귀부인의 입매를 덧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정태의의 뒤에서, 책상 앞에 앉아 거울과 눈씨름을 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말한다.
“부셰 1753년, 진품이다.”
“…….”
정태의는 그림을 아무렇게나 문지르던 손을 가만히 거두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그가 알 정도의 화가라면 진품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는 엄청날 게 분명하다.
“그런 귀한 그림을, 온도․습도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런 서재 구석에 아무렇게나 걸어 놔도 돼?”
정태의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문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액자와 마찬가지로 서재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었던 온습도계가 걸려 있었다.
습도 55%에 온도는 20°C.
“……. 그냥 먼지투성이의 서재 아니었어?”
정태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다시 액자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에서 웃는 듯 마는 듯 도도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거울을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닮았다.
거울을 노려보며 입끝을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그 표정이 그림 속의 귀부인과 퍽 닮았다.
타고난 태생 때문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귀티는 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경직되어 있는 듯 부자연스러운 미소.
태어나서 한 번도 크게 소리 내어 입 벌리고 활짝 웃어 본 적이 없을 듯한 점에서, 그림 속의 여인과 크리스토프는 아주 꼭 닮았다.
“여전히 이상해?”
“아니……이상하지는 않아.”
입매를 올린 얼굴 그대로, 거울에서 정태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크리스토프가 묻자 정태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추어 모델처럼 굳어서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이상한 얼굴은 아니다. 적어도 처음에 시도했을 때처럼, 그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구분하기 힘든 얼굴은 아니었다.
“도도하고 귀하신 공주님이 구혼자들에게 예의상 웃어 주는 것 같다.”
정태의의 평에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그 웃음을 지우고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뭐야, 그게. 재수 없는 얼굴이란 소리잖아.”
“할 수 없잖아. 빈말로도 따뜻하고 해맑은 웃음이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지는 않다니까. 잘 어울려.”
정태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사람을 약간 내려다보는 듯하면서도 고귀함이 배어 있는 느낌의 그 웃음은, 크리스토프에게 딱이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사라져,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달고 나온 표정처럼 잘 맞을 것 같았다.
다만, 아무래도 크리스토프 본인이 상상하고 바라는 것 같은 웃음의 이미지―상냥하고 즐거워 보이는 느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역시 눈이 문제인가? 그래, 잘 웃는 사람들을 보면 늘 눈매가 이렇게 가느스름하게 구부러지는 것 같긴 해. 어디…….”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거울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정태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도 연습이 필요한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웃지 못하는 것보다는 웃지 않는 게 나았고 웃지 않는 것보다는 웃는 게 나았다. 그리고 기왕 웃을 바에는 보는 사람도 기분 좋을 만큼 환하게 웃는 편이 좋다.
“……역시 영업을 뛰려면 스마일이 필수인가 보지.”
“어차피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는 건 그놈이니까 나야 그렇게까지 표정관리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네가 그렇게 삭막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잘 진행될 상담도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은 듣기 싫거든.”
크리스토프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리하르트에게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욱하고 치밀어 오른 듯 눈을 번쩍였다.
거울을 휙 내던지려는 걸 얼른 알아채고 거울을 콱 붙잡으며, 정태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자자,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스마일, 스마일.”
정태의가 한껏 웃으며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분한 듯 거울을 노려보다가 으음, 하고 불편한 한숨을 내쉬곤 다시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요 얼마간, 크리스토프는 낮 동안에는 거의 반나절은 집에 없었다.
리하르트의 일을 거든다는 데에 동의한 뒤로는 그가 외출할 때마다 늘 동행하곤 했다.
크리스토프가 하는 일이 뭔지 정태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밤마다 정태의를 붙들고 성질을 부리며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면 딱히 뭔가를 거든다기보다는 리하르트의 옆에서 ‘사이좋은 관계’를 과시하듯이 붙어 있는 게 다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같이 다니면서 리하르트가 맡은 타르텐의 사업과 관련된 주요 업무에도 늘 자리를 함께한다고 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크리스토프는 날마다 밤이 되면 정태의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공책만 한 손거울을 하나 붙들고 뚫어져라 노려보며 연습을 했다. 웃는 연습을.
‘아니, 크리스토프가 영업을 뛰는 것도 아닐 텐데, 저런 영업용 스마일이 왜 필요해?’
첫날, 거울을 노려보면서 마음먹은 대로 웃음이 지어지지 않자 온갖 신경질을 다 부리는 크리스토프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며 정태의가 뜨악하게 묻자, 마침 정태의의 방에서 석간신문을 넘기고 있던 일레이가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전반적인 일은 다 영업이라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크리스토프도 영업을 뛰는 셈이지.’
‘타르텐의 업무를 보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거의 다 리하르트가 하는 것 아니었어?’
‘아아……, 이를테면.’
일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귀신같은 얼굴로 거울과 눈씨름을 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흥미 없는 시선을 잠시 던지고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오늘 낮에 리하르트가 만난 상대 중에 과거에 SIS에 관련되어 있었던 중개인이 있었지. 그런데 그 중개인이 크리스토프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어. 대단치는 않고 크리스토프가 기동대에 있을 때 개인 계약 건에서 몇 번 본 정도였는데, 그 남자가 리하르트의 옆에 있는 크리스토프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단 말이지.’
‘어…….’
‘그리고 저놈은 늘 그렇듯이 저 삭막한 얼굴로 고갯짓만 약간 하고 말았으니, 제대로 상담을 시작하기 전부터 분위기는 황량해진 거지.’
크리스토프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기 직전까지 한가롭게 소파 팔걸이에 다리를 걸치고 일레이의 허벅지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던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눈매를 좁히며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험담했다.
‘그렇다고 웃는 연습을 해 오라고 시켜? 너무한 거 아냐, 리하르트?’
‘설마. 불가능한 일은 애초부터 단념하는 놈인데. 단순히 크리스토프 저놈이 그 녀석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게 기분 나빠서 혼자 몰래 애쓰는 거겠지. 뭐, 별 소용은 없어 보이지만.’
무심하게 대답한 일레이는 맥주캔을 입에 물고 크리스토프를 지그시 바라보는 정태의에게 잠시 시선을 주며 턱을 문질렀다. 그 시선을 깨닫고 정태의가 ‘왜.’ 하고 묻자 일레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의아하게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정태의는 이내 낯을 찌푸리며 ‘알았다니까. 신경 안 써. 안 쓴다고.’라고 투덜거렸다. 제법 눈치가 빠른데, 하고 피식 웃는 그의 말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결국은 거울 앞에서 온갖 인상을 다 쓰다가 간간이 정태의를 돌아보며 도깨비처럼 이를 드러내고 ‘어때? 이렇게 웃으면? 좀 괜찮아 보여?’ 하고 진지하게 묻는 크리스토프를 보다 못해, 맥주캔을 내던지고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지만.
크리스토프가 진지하게 지어 보이는 그 ‘웃는 얼굴’은 일레이 역시 나름대로 저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정태의가 크리스토프의 뺨을 마구 잡아당기면서 ‘이쪽 근육을 당기는 기분으로 웃으란 말야, 이쪽 근육을!’ 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못 본 척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고의 밤들을 며칠이나 거쳐, 드디어 크리스토프의 웃음도 제법 그럴 듯해 보이게 되었다.
여느 초상화의 귀부인 같은 그 웃음은 평소의 가벼운 자리에서 어울릴 만한 가볍고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구분이 안 가지는 않았다.
손가락으로 눈초리를 짚어 아래로 내리면서 눈웃음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크리스토프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그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아까 마시다 남겨 두었던 맥주캔을 다시 집어들고 홀짝거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래도 리하르트와 함께 붙어 다닌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다니는 모양이네. 며칠 지나도 아무런 사건사고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음……? 아, 비서실에 있던 놈 하나가 며칠 안 나오긴 했는데……, 대단치는 않아. 다시는 남의 허벅지를 함부로 쓰다듬지 못하게 손가락 마디 몇 군데 부러진 것뿐이라서.”
“……. 리하르트가 괴롭히진 않아?”
“그놈 바라는 대로 일 다 거들어 주고 있는데 왜 괴롭혀.”
크리스토프는 손가락으로 눈웃음을 만들다 말고 눈을 부라리며 사납게 외쳤다. 어, 그래, 하고 얼른 정태의는 꼬리를 말았다.
하긴, 설마하니 옛날 만화 같은 데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신발에 압정을 집어넣거나, 걸레 빤 물을 뒤집어씌우거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린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무리 싫어한다 해도 그렇게 유치하게 괴롭히지야…….
“그러고 보니 밑져야 본전으로 그놈 구두 밑창에 왁스를 칠해 놨더니, 그놈 계단에서 주욱 미끄러질 뻔하더라. 후후……, 내일은 압정을 넣어 둬 볼까.”
“…….”
이제 보니 걱정할 대상을 잘못 골랐었던 모양이다.
사뭇 즐거운 듯, 그제야 겨우 눈웃음에 생기가 도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하긴,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리하르트가 바란 것은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순종시키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였을 거다.
이미 타르텐을 떠난 지 오래인 크리스토프에게 실무적인 능력을 바랐을 리는 없고, 단지 승계를 앞둔 시점에서 자신을 싫어하는―동시에 자신이 싫어하는―사람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어내는 협상 능력이나 지배력 따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려 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실제로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와 얌전히 함께 다니며 그의 일을 거드는 시늉이나마 한다는 말이 돌았을 때,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의 마지막은 으레 ‘리하르트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을까’라는 감탄으로 맺어지곤 했다.
고작해야 사람 하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로 저런 반응이라니, 정말로 사이가 극악하긴 극악했던 모양이다.
“뭐, 나름대로 잘된 일일 수도 있지.”
정태의는 맥주를 홀짝이며 혼잣말을 했다.
어쨌든 가장 큰 사고의 씨앗이 일단은 정리된 셈이다. 더 이상은 두 사람의 험악한 관계로 인한 불운한 사고는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정태의로서도 한숨 돌릴 수 있으니 잘된 일이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너는, 웃는 걸 좋아하잖아.”
암담한 문젯거리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불쑥 말했다. 응? 하고 시선을 돌리자 그는 여전히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금 망설이다가 말한다.
“나는 웃는 걸 잘 못하지만 너는 웃는 얼굴을 좋아하니까. 그래도 너한테는, 좀 웃어 줘도 좋을 것 같아서.”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 말에,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나 때문에 웃는 연습 하는 거냐?”
크리스토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거울만 노려보았다. 그러나 살짝 부루퉁하게 튀어나오는 입술이 삐죽거리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다. 기분 탓인지 볼에도 약간 핏기가 돈다. 기분 탓이면 좋겠다.
정태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조용히 맥주만 삼켰다.
좋지 않다.
타인이 베푸는 호의가 기쁘지 않을 리는 없었지만, 이건 좋지 않았다.
크리스토프가 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상상도 못했던 그의 일면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지금은 이 남자가 매우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좋지 않다.
정태의의 호감은 이 남자의 호감과 같지 않았으며, 그 호감을 받아 주기는커녕 정중하게 돌려줄 여유도 없었다.
―또다시 다른 놈이 네 사타구니를 건드리는데도 얌전히 있는다면, 나는 그놈부터 없애 버린 다음에 네 물건을 평생 나 아니면 못쓰게 만들어 버리겠어.
그렇게 협박을 하는 남자가 바로 지척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시기 좀 만진 것 갖고 깊은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는 놈도 곤란하지만, 저런 놈도 아주 곤란하단 말이지…….”
갑자기 맥주 맛이 몹시 써졌다. 그래도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시고서 캔을 내려놓으며,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것도 문제다.
현재 정태의가 직면한―정태의가 당사자인 건 아니었지만―머리 아픈 문제 중 하나가, 눈앞에서 거울을 노려보고 있는 이 남자에게서 비롯되어 있었다.
그가 리하르트와 대대적으로 사고를 벌이지 않게 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뒤에서는 정태의가 처음 듣고서 5초쯤 기절하고 말았던 사태가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
“어.”
“어?”
소파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앉아 있는 요한을 발견한 정태의가 의외라는 감탄사를 중얼거리자, 요한은 별로 의외롭지는 않지만 정태의의 말에 대답이나 해 준다는 듯 그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대답했다.
“네가 어쩐 일이야, 책을 다 보고.”
정태의는 요한이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소파의 건너편, 일인용 카우치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가 요한과 마주치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식당 홀 아니면 지하의 휴게실. 혹은 아주 가끔 복도에서 스치는 정도였다.
적어도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이 공동서재에서 그와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동서재라고는 하지만, 개인 서재보다 조금 더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사이로 군데군데 안락한 카우치가 놓여 있는, 책이 좀 많은 휴게용 홀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실제로도 책을 읽으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 수와 푹신한 카우치에 몇몇이서 모여앉아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러 오는 사람들 수가 비슷해서, 지금 정태의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서가 두셋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자리에도 두세 명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책읽기만으로 따지자면 과히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편하게 늘어져 앉아 시간을 때우며 책장을 넘기기에는 좋았다. 게다가 분위기가 그런 탓인지, 크리스토프의 개인 서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통속소설류가 제법 많았다.
지금도 정태의는, 얼마 전에 요한이 식당에 던져 두고 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 넘기다가 결국 뒷권을 찾게 된 통속소설 한 권을 손에 쥐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대체 어디서 갖고 왔는지 알 수도 없는 기괴한 제목의 책을 손에 들고 소파에 뻗어 있었다.
“「이제 당신도 밤을 말할 수 있다, 바디랭귀지―이국의 뜨거운 미녀들」. ……도대체 뭐하는 책이냐, 그건.”
“다음 휴가를 알차게 보내려면 미리 대비를 해야지. 유비무환 모르나, 유비무환?”
무슨 대비를 어떻게 하려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무난하게 화제를 돌리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오늘 저녁에 귀한 손님 온다고 다들 분주하던데.”
정태의가 묻자 요한은 귀찮다는 듯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괜찮아. 윗자리에 앉은 녀석들이나 바쁘지.”
이럴 때 바쁘게 뛰어다녀야 한다면 승계를 애시당초부터 포기했던 보람이 없지 않겠어, 하고 태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요한이었다.
이 게으른 남자야말로 사실은 진정한 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속으로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
오늘은 새벽부터 뭔가 분주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며칠 전부터였지만, 오늘은 한층 더했다.
며칠 전부터 말로만 들었던 그 귀한 손님이 온다는 날이 오늘이었던 것이다.
리야드에서 온다고 했다.
리야드.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찾아오는 귀한 손님이시지.’라고 말꼬리를 약간 끌어서 느릿하게 말하며 미묘하게 웃음 짓던 일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웃음 안에 성가시다는 기색이 담겨 있는 걸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리야드라. ……설마하니 대뜸 대테러 포획단이 오는 건 아니겠지.
“차관 변제의 최종 협상이라니까 뭐,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은 바쁘니 직접 오지 않을 테고 그 바로 아래쯤 있는 놈들이 와서 서로 속셈을 캐어보지나 않겠어?”
그런 다음에 위에 보고를 하면 그제야 마지막 결정을 내리겠지, 하고 요한은 정태의의 고민을 꿰뚫어 보았을 리도 없는데도 중얼중얼 태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고개를 비스듬하게 꼬고 있다가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릭은 예전에 리야드에 폭격을 했었잖아. 그런데 그쪽 손님과 마주쳐도 괜찮나?”
“아―지금은 특수 상황이잖아. 승계 결정일이 코앞인데, 타르텐에 귀빈으로 와 있는 놈에게 외부에서 어떻게 손을 뻗겠어. 노린다 해도, 볼일 다 마친 뒤 타르텐에서 나가는 순간을 노리겠지.”
게다가 특전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차관 관련 실무자 두세 명이 온다고 해서 저놈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을까, 하고 요한은 손을 내저었다.
그 말도 맞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카우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멀리 중동에서 오시는 그 귀빈들, 얼른 볼일 마치고 가 주셨으면 좋겠군.”
“그래봐야 윗자리 놈들이나 바쁘지 우리 같은 한량들은 상관없다니까. 아……, 하긴 크리스가 바빠지면 너도 같이 바빠지려나?”
“응? 아, 나는 아냐. 그 녀석이 요즘 낮에는 리하르트랑 붙어 다니는 동안 오히려 나는 집에서 한가해졌지. 내가 타르텐의 업무를 보는데 따라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실제로 지금도, 다른 때였더라면 크리스토프가 시킨 잡일더미에 파묻혀 있었을 정태의는 매우 한가하게 이렇게 노닐고 있었다. 게다가 중동에서 손님이 와서 그들이 바빠진다면 자연히 정태의는 더 한가해질 듯했다.
양 사이드에서 고뇌의 씨앗을 던져 주는 두 남자, 일레이와 크리스토프가 없으니 낮 시간이 몹시 평화로웠다. 이것도 제법 괜찮다.
“크리스토프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정태의는 태평하게 혼잣말을 하며 책장을 펼쳤다.
요한의 말마따나 귀빈의 도래로 바빠진 윗자리 놈들의 대열에 끼게 된 크리스토프는, 오늘 아침에도 해가 비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아침 일찍 나가는 리하르트의 스케줄에 맞춰 다녀야 하게 된 크리스토프는, 아침마다 죽으려 했다. (혹은 죽이려 했다)
저혈압이라서 늘 아침 느지막이, 아침과 점심 사이의 애매한 시간에야 겨우 힘들게 일어나던 크리스토프는 오늘도,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 옆에서 정태의가 혀를 차며 흔들어 깨워도 도무지 눈을 뜨질 못했다.
죽을 것 같다면서 해쓱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깨운 사람은 결국 리하르트였다.
요 며칠 주욱 그렇다.
리하르트는 정태의보다 훨씬 쉽고 편하게 크리스토프를 깨웠다.
어렵지 않았다. 그가 외출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모습으로 크리스토프의 방 안에 들이닥치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방문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대단히 불쾌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한 적 없어. 당장 나가.’
‘당장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으면 구둣발로 침대를 밟고 올라가서 끌어낸다.’
‘……. 아침부터 피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봐.’
미간에 깊이 주름을 새기며 리하르트에게 대꾸하는 동안, 크리스토프는 그럭저럭 일어날 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가 침대에서 나와 힘없는 걸음으로나마 욕실로 가면, 그제야 리하르트는 싸늘한 얼굴로 다시 방에서 나갔다. 머쓱하게 서 있는 정태의에게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아침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고.
“오늘도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나가던데, 지금쯤은 괜찮겠지.”
그렇게 인상을 써서야 밤마다 웃는 연습을 해 봐야 허사라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정태의의 건너편 자리에서 요한은 열심히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에 줄을 그어가면서 대꾸한다.
“밤이면 밤마다 네 방으로 달려가서 뭘 하는지 한동안 나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놈 소식을 딴 데서 궁금해하면 어쩌라고.”
정태의는 잠깐 생각을 멈추고 가자미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거 말투 한 번 야릇하다. 누가 들으면 밤마다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 바디랭귀지 실습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어,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그럼 뭐하는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요한에게, 정태의는 벌컥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밤마다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방에서 웃는 연습을 한다는 말은, 어쩐지 하기가 꺼려졌다.
우물우물 정태의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며 “그런 게 있어……, 그래도 그런 건 아니다…….” 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요한은 한심하다는 듯 정태의를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네가 그러니까 소문이 왕성하지…….”
차마 흘려들을 수 없는 그 말에 정태의가 “내가 뭐!” 하고 묻자, 요한은 끌끌 혀만 차면서 모른 체하다가 목덜미를 붙잡혀 짤짤 흔들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너랑 크리스토프랑 리하르트가 삼각관계라면서.”
“뭐?”
“금단의 관계에 눈을 떠서 요즘 부쩍 사이가 좋아진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 거기에 감초처럼 끼어든 너.”
“그게 뭐야!”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지만, 요한은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이국의 뜨거운 미녀들」의 중요 구절에 줄을 그어 가면서, 입으로는 쯧쯧 혀를 차며 ‘사람이 아랫도리를 가볍게 놀리면 못쓴다.’라고 똥 묻은 개의 충고를 한다.
정태의는 아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소문의 앞부분이라면 정태의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정태의가 두통을 호소하는 주요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요전에 크리스토프가 매우 심각하게 ‘리하르트와 비역을 하고 말았다’고 정태의에게 호소하던 말이 어느새 새어나갔는지―소문의 근원지는 금방 찾을 수 있겠다―, 농담 반 진담 반처럼 퍼진 그 소문을 지금은 서익에서 당사자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크리스토프야 자기 입으로 낸 소문이니―소문을 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이, 그저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만을 호소한 것뿐이었지만―그렇다 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대하는 리하르트를 볼 때마다 정태의는 가슴속이 따끔거렸다. 특히나 사람들 앞이랍시고 크리스토프에게마저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 다정한 듯이 대할 때는 더했다.
그러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헛소문은 신빙성을 갖고 널리 퍼져 간단 말야…….
그러나 그런 말은 차마 리하르트 본인에게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소문을 안타까워하며 골을 썩이고 있는 정태의였는데.
갑자기 요한이 그 위에 폭탄을 투하했다.
“내 결백을 위해 말해 두는데, 나는 절대로 그들이랑 어떠한 말 못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추호도! 없다.”
당사자만 모르고 주위사람들은 다 아는 소문이란 게 이래서 무섭구나, 정태의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며 요한에게 엄숙하게 변명했다.
그 말을 믿는지 마는지,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너, 크리스토프를 따라 리하르트의 바Bar에 들이닥쳤을 때, 릭이랑 얼씨구절씨구 했다면서.”
헉, 그 소문까지 돌았냐…….
그건 헛소문이 아니라서 뭐라고 변명할 말도 없다.
요한은 정태의의 표정에서 진실을 짚어냈는지, 이 난잡한……하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책으로 정태의와 자신의 시선을 끊었다.
“야, 아니라니까!!”
“뭐가? 릭한테 뚫렸다는 증언이 여러 입에서 나오던데, 아니야?”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그, ……, 크리스토프랑은 순결하고 결백한 교분을 유지하고 있단 말이다, 나는!”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하긴 나도 처음부터 네가 크리스토프랑 그럴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면상부터가 어울리는 면상이어야 말이지. 네 얼굴에 그런 수천 굴덴짜리 튤립이 가당키나 하냐.”
“얼굴로 사람 차별을―아니, 그게 아니라, 헛소문인 걸 알았으면 정정을 해 줘야 할 것 아냐!”
“내가 왜? 근거도 없이 정정해 봐야 믿을 놈들도 아니고, 뭐 소문이란 게 석 달도 채 안 가서 흐지부지해지는 법이잖아.”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요한에게 순간적인 살인 충동을 느끼는 정태의였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 카우치에 거의 눕다시피 기댄 채 책으로 얼굴을 덮어 버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요한이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릭이랑 얼씨구절씨구……. 병원에 안 실려간 게 용하다. 생각보다 몸이 튼튼한가 봐.”
아니면 나는 안 해 봐서 모르지만, 인체구조란 게 신비하게 생겨먹었으니까 의외로 그 정도 굵기는 쉽게 들어가는가 보지? ―하고 태평하게 혼잣말을 하며 피식피식 웃는 요한에게, 조용히 일어난 정태의는 근처의 쓰레기통 옆에 세워져 있던 1.6리터 맥주 페트병을 거꾸로 쥐고 스산하게 다가섰다.
“어디 네 몸으로 한 번 실험해 봐. 내가 도와줄게.”
응? 하고 정태의를 돌아보던 요한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페트병을 보곤 삽시에 낯빛을 굳혔다.
“야……, 설마 그 크기라는 건 아니지?”
“어, 심리적인 압박감은 비슷해. 육체적인 압박감도 뭐, 한계를 넘어서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많이 차이는 안 날 거다. 자아, 이리 와 봐.”
정태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인격 상실, 그 순간 요한의 뇌리를 스친 것은 그 말이었다.
“야, 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왜 나한테 다가오냐? 어이, 오지 마. 너 지금 꼭 전기톱을 든 제이슨 같은 거 알아?”
“잔말 말고 바지나 벗어.”
“시, 싫, 야, 하지, ……끄, 끼야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벗어! 벗으란 말이야!!”
서가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서 담소를 나누던 남자들이 그 난데없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왔을 때, 정태의는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요한의 벨트 버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소문이 싹을 틔웠다.
***
서익 끄트머리에 위치한 정태의의 방에서 본관 중앙현관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자세한 얼굴까지는 식별할 수 없을 만한 거리였다.
그러나 중앙현관 앞에 새카만 세단 두 대와 중형 왜건 몇 대가 뒤이어 멈춰 서고, 앞선 세단에서 딱 보기에도 귀빈인 듯한 남자 두 명이 내렸을 때, 차가 현관 앞에 설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정태의는 적어도 그들이 예전에 자신이 마주쳤던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남자, 세링게 별저의 주인이었던 그 남자라면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도 이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 남자는 존재감이 남달랐었다.
“뭐……, 다른 사람이라니 일단은 좀 마음이 놓이는걸.”
정태의는 가슴께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집을 그렇게 판판이 부숴 놓고 나왔는데, 그 주인을 다시 마주쳐서야 매우 멋쩍은 일이다. 당장 고개 숙여 ‘집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을 안내하듯이 나란히 서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그들은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도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의 모습을 보고, 정태의는 창가에서 물러섰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가고, 불그스름한 보랏빛 노을만 약간 그 기색이 남아 있었다. 곧 저녁 시간이다.
어쨌든 귀빈이 오셨으니 저들은 오늘 본관이나 동익에서 식사를 하겠구나. 그러면 서익의 식당은 좀 분위기가 한산하겠군.
오랜만에 느슨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방에서 나섰다.
오늘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뒹굴면서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다가 기분 좋게 잠들어야겠다, 그렇게 즐거운 오늘밤을 꿈꾸며 정태의는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며칠이나 전부터 소문으로 떠돌던 그 귀빈이 드디어 왔으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다들 그쪽으로 분주할 테니까 아무도 자신을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태의는 동익 1층 안쪽의 널찍하고 안락한 응접실에 앉아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야만 했다.
“…….”
“왜 그러시나요, 얼굴빛이 안 좋은데. 어딘가 안 좋으신가요?”
친절하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은, 결코 정태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리하르트였다.
관계를 따지자면 이 가운데 가장 정태의에게 세심한 신경을 쏟아야 하는 일레이는 정태의의 낯빛이 잿빛이건 말건 아랑곳 않는 눈치였고, 정태의에게 무뚝뚝하게나마 고백을 한 바 있는 크리스토프는 냉랭한 얼굴로 리하르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건너편 상석에는 낯선 아랍 남자가 둘.
토베에 구트라를 걸친 차림이 이 자리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들 특유의 존재감 덕분에 어색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나흘간 머무르고 돌아갈 예정이라는 그들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곧 어르신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을 뵌 뒤, 곧 간소하게 준비된 차를 마시며 저녁 느지막하게 예정된 만찬을 즐길 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만찬이 준비되기 전까지, 며칠간 이 집에서 그들을 대접하게 될 사람이자 마지막 협상의 상대자, 리하르트와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어째서 자신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정태의는 차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어떤 기준의 인선인지도 알 수 없다.
오늘 방문한 중동의 손님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이 눈앞의 두 남자와 리하르트, 그리고 그와 더불어 크리스토프가 앉아 있는 건 이해하겠다. 한 발 양보해서, 승계 후보를 지켜보며 평가한다는 입장인 일레이가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째서 자신이 끌려온 건지는, 차를 마시는 내도록 머리를 굴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어딘가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리하르트의 말을 거든 사람은 아랍에서 온 두 남자 가운데서도 더 윗자리로 보이는 오른쪽 남자였다.
선이 뚜렷하고 굵직해서 겉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서글서글하게 웃는 눈매 탓에 그 강렬함이 많이 흐려졌다.
“아……여유롭게 식사를 맛있게 하던 중에 끌려나오고 보니 소화가 잘 안 되나 보네요…….”
정태의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런. 부족하나마 정성껏 저녁 자리를 준비하는 중인데 곤란한 일이군요. 소화제라도 준비해 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걱정스러운 듯이 제안하는 리하르트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는 동안, 정태의는 줄곧 시선을 느꼈다.
건너편, 그 아랍 남자가 조용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직선적으로, 그는 정태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모른 체하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그러면 필경 나만 찝찝하겠지.
정태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태의를 살피던 그와 당연한 듯이 눈이 마주쳤다.
“이런 자리에 아무리 봐도 제삼자로 보이는 사람이 끼어 있으니 의아하신 것 같군요. 사실은 저도 의아합니다.”
정태의는 가볍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자 그 아랍인은 약간 눈을 크게 뜨더니 그 다음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이거 실례했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았나 봅니다. 저는 말리크 알 카힘이라고 합니다.”
선뜻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정태의는 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고 말을 흐린다.
어디까지 소개를 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름이라면 어느 이름을 대야 하는지, 과연 대대적으로 지명수배가 된 정태의를 이 남자가 알 것인지 모를 것인지. 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정태의가 먼저 입을 열 수도 없다.
흘끔, 옆에 앉은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그들의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줄 뿐 정태의를 거들어 줄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말리크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정태의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 데에도 개의치 않는 듯, 기분 좋게 손을 놓으며 웃음 지었다.
그 순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정태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태의를 알고 있었다.
비록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는 하나 그는 이미 정태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왔음이 틀림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정태의의 얼굴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일레이의 얼굴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
정태의는 가만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일레이가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일레이는 눈가에만 웃음을 띤다. 이미 몇 년이나 살을 맞대고 살아오지 않았더라면 정태의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옅은 웃음을.
……젠장. 그런 자리구나.
타르텐과 교섭을 하기 전에 미리 봐 두기라도 하려는 건가. 그래 봐야 이미 고국을 출발하기 전부터, 어떠한 결정을 내릴 건지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짓고서 떠났을 텐데.
정태의는 ‘이래서 높은 자리에 앉으신 분들은 그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애꿎은 찻잔을 씹었다.
그들이 바랄 만한 것은, 아예 상관도 없이 동떨어진 조건으로 변제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범위를 좁혀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는 거라면, 리야드 폭격 주도범의 신병 양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일레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록 지금은 대단히 인간다워져서, 요 몇 년 동안은 사건사고 소식 없이 조용히 베를린에서만 머무르고 있는―간간이 일이 있다며 나가긴 하지만―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 시점에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
흘끔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 일레이가 짤막하게 물었다.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아직도 모를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해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와인 병을 집어들어 별 관심 없이 살폈다. 옆에서 일레이가 픽 웃는 기척이 난다.
“그래, 나도 몇 년 동안 나 자신을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으니까.”
“음……?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인간이라곤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렇게 보였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몇 년 전까지.”
툭툭, 하얀 손이 정태의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얀 손을 덮은 진청색 장갑이.
아무래도 좋은데, 그대로 허벅지를 계속 문지르는 건 좀 그렇다……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는 정태의였다.
문득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바라보자 정태의의 허벅지 위에 머무르는 손을 크리스토프가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 한 번……, 속으로 혀를 차며 애꿎은 와인 병을 노려보던 그때였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말리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바에 따르면 두 분은 대단히 사이가 좋으시다지요. 과연, 듣던 대로군요.”
와인병의 라벨을 들여다보던 정태의는 문득 멈칫했다. 정태의의 허벅지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던 일레이의 손 역시 잠시 멈춘다.
정태의와 일레이 리그로우의 사이가 좋다.
그 사실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 말이 나온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말리크의 입이었다.
……아하. 과연.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지금 말리크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라고.
설마하니 김영수와 리그로우의 사이가 좋다는 괴소문을 들었을 리도 없는 말리크를 앞두고, 정태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대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낫다.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있던가요?”
정태의가 웃으며 묻자 말리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론이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 짙은 웃음을 보며, 정태의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나 보다. 이래서야 평생 장가가긴 글렀구나. 혼삿길 다 막혔다.
정태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미 퍼져 버린 소문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제발 앞으로는 적어도 저 요한 놈처럼 ‘그놈이랑 여차저차 하는데도 아랫도리가 멀쩡하단 말야?!’라고 대놓고 묻는 놈만 없기를 바랐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들이 테러범으로 수배가 된 것도, ‘그들의 사이가 좋아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때,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장갑을 낀 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고개를 든 정태의의 눈에는 눈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리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어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는 말리크를 그의 까만 눈이 똑바로 바라본다.
“말씀하시고 싶은 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출처에 대해서이신지?”
“하하, 설마요. 그저 좋은 교분을 유지하는 교우 관계가 참 좋아 보였을 뿐입니다.”
말리크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더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끝까지 방관자로 남아 그들 사이에 결코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정태의는, 갑자기 시선이 날아오자 저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입장이 입장인 탓인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한 국가의 수도를 테러한 바 있는 국제수배범.
그 국가의 국유회사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자격으로 온 사람.
수배범의 친우이며, 국유회사에는 빚을 지고 있는 중간자.
“정태의 씨였지요? 요전에는 제 상관이 신세를 졌다고 하시더군요.”
말리크의 말에 정태의는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다고 하나,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이 나오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뒤이어 나온 그 상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국유회사의 협상 대표격으로 왔을 이 남자의 상관이라면…….
정태의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말리크는 말을 이어 의문을 풀어준다.
“아니, 정확히는 형님 되시는 정재의 씨였던가요. 세링게의 별저에 모셨었는데, 편안히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이 남자의 상관이 누구인지 금세 깨달았다.
아마 몇십 년이 더 지나더라도 잊어버리기는 힘들 남자다.
“아―그―.”
그런데 풀네임이 기억나지 않아 잠시 더듬거리다가 번뜩 깨달았다. 그래, 그 상관이라는 남자의 별저도 바로 옆의 이 남자가 포탄을 퍼부어서 판판이 부숴 버렸었다.
정태의가 새로운 기억을 하나 더 떠올리고 어색하게 웃는 옆에서,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일레이가 말없이 웃었다.
말리크는 태연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 당시에는 설마 정태의 씨와 리그로우 씨가 그토록 교분이 깊을 줄은 모르셨었지요, 제 상관께서도.”
별저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 그곳이 폭격을 맞을 줄,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뼈있는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일레이였다.
“깊은 교분이라……. 그 교분이라는 게 과연 어느 정도로 깊은지 궁금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드문 호인 같다.
보기 드문 호인 같은 일레이, 그 수식이 주는 위화감에 정태의가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것과 같은 때, 허벅지 위를 감돌던 일레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한다면 허리 아래가 어디까지 맞아들어가는지도 보여 드리지요. 다만 관람료가 필요하겠지만.”
관람료가 필요하겠다고, 그 말을 덧붙이는 것과 동시였다.
정태의가 흠칫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을 때, 이미 일레이는 권총을 들어 안전장치를 풀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미처 말리거나 피하기도 전에.
퍼억―!
찻주전자가 조각조각 깨어지는 소리. 산산이 흩어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잎들이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던 큼직한 도자기 주전자가 흔적도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지고 그 손잡이며 밑받침만 남았다.
일레이가 총을 꺼내는 순간부터 얼어붙은 듯이 굳어 움직이지 않던 말리크는, 이윽고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자신들의 앞에 놓여 있던 세밀한 세공품의 파편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그 자리에 그 파편 대신 자신들의 피와 살이 흩어졌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임을 깨달았다.
눈앞에 앉은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그는 모르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타르텐을 방문하고 있는 리그로우의 인간’이라는 꺼풀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나, 그는 미치광이 릭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일국의 수도를 폭격하는.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요.”
말리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씁쓸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의 씁쓸한 심경을 만분의 일이나마 대변해 준 사람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크리스토프였다.
찻잔을 입을 가져가고 있던 그는 문득 인상을 찡그리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사납게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조각이 튀어서 차를 못 마시게 되어 버렸잖아.”
“그것 미안하게 됐군. 괜찮다면 내 걸 대신 마시도록 해. 마시던 거지만.”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그의 잔을 노려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물론 손을 뻗을 생각도 않았다.
역시 이 사람들은 핀트가 어긋나 있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귀빈으로 집에 모신 이 상황에서, 총탄이 허공을 날아다니는데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 인간들의 머릿속 구조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가만히 누르는 정태의의 옆에서, 그들 가운데 가장 건실한 리하르트만이 난처한 얼굴로 말리크에게 의례적인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리하르트의 진심 어린―듯 보이는―사과와, 그에 대한 말리크의 너그러운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일레이의 손에서 총을 슬쩍 빼앗아 깔고 앉아 버린 정태의는, 그럭저럭 이 자리를 수습한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는 그를 보고 깨달았다.
파편이 튀었는지, 리하르트의 눈 아래에 조그만 상처가 생겨 있었다.
“어……, 조각이 튀었나 보네요. 다른 데는 괜찮으세요?”
정태의가 묻자,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러자 그는 도리어 그렇게 굳이 말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리하르트는 눈 아래에 빨간 실선처럼 새겨진 핏기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의 말마따나 그리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죄도 없이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셈인데도, 이 선량한 청년은 매우 우호적인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보기까지 하면서 말을 잇는다.
“타르텐과 리그로우는 오래도록 사이가 좋으니까요. 저 두 사람의 관계 못지않게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지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하고 덧붙이는 리하르트에게 말리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미묘한 말투에 정태의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면서 차를 삼켰다.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부터 끼는 것도 아니었는데. 끌고 온다 해도 저항했더라면 좋았을 걸.
아까부터 줄곧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각자의 입장을 담은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말들이 도무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속뜻이 감추어져 있는 말의 향연이라니, 이렇게 지치는 일도 드물다.
“그렇군요. 하긴 제가 들었던 것들이 모두 맞는 말이라고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말리크는 상황을 얼버무리려 함인지 무난하게 말을 꺼내었다.
“타르텐의 두 분도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원만해 보이시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곳에 오기 전에는 두 분의 사이가 제법 험악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도리어 두 분이 보통 이상으로 친밀하다는 말이 또 들려와서……아, 실례했습니다.”
말리크는 말을 하다 말고 유유히 웃으며 슬쩍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애초에 실례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까지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거다. 틀림없이 그들을 야유하는 빛도 언뜻 들어 있는 그 말뜻을, 정태의는 이내 알아들었다. 당장 스산하게 눈빛을 바꾸는 크리스토프와 마찬가지로 일레이도 알아들은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픽 웃는다.
유일하게 의아한 기색을 띠는 리하르트만이 그 문제의 소문을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가 비역을 하는 관계다―라는 소문이 시작된 근원인, 심지어 그 본인은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흘끔 쳐다보고서 정태의는 말없이 찻잔만 노려보았다.
크리스토프의 저 잘못된 상식부터 좀 고쳐 줘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하고 고민하는 정태의의 속내도 모른 채, 리하르트는 곧 의아한 기색을 웃는 낯으로 돌렸다.
“저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잘못된 소문이 그곳까지 갔던가요? 하하, 분명히 집안 사정상 경쟁관계에 있었던 적이 있긴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타르텐에는 어떠한 불화도 없습니다. 보시는 바대로, 크리스토프와 저는 매우 친밀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고요.”
동의라도 구하는 듯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보내는 리하르트의 얼굴만 보자면 정말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이상인 것 같았다. 원래 인상이 몹시 좋기도 한 사람이니 그런 느낌이 다른 사람의 몇 배는 된다.
아냐, 지금 이 타이밍에서 그 눈웃음은 몹시 안 좋아, 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그 모종의 위험한 소문이 진실이라고 역설하는 셈이라고, 정태의는 괴롭게 속으로 외쳤지만 차마 그 말을 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다.
바보 크리스토프와는 달리 자신이 잠깐 그의 성기를 건드렸다는 것쯤은 결코 비역으로 치지도 않을 테고 또한 그런 건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리하르트가 그 소문을 듣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데, 한편 머릿속으로 자신의 피해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자신을 향해 웃는 걸 보고 움찔 입을 다물었다.
강간범이 경찰 앞에서 ‘강간이라니요. 우리는 원래 연인 관계인데 약간 뜻이 달랐을 뿐이에요. 그렇지?’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걸 보는 듯한 눈이다.
말없이 찻잔만 노려보고 있다가 리하르트에게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힘들면 부축해서 바래다주지.’라는 사뭇 걱정스런 목소리까지 들어 버린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면서 쓴 침을 삼켰다.
원래 리하르트는 만인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긴 했지만, 지금 크리스토프에게는 그 정도가 한층 더했다. 그의 말마따나 매우 친밀한 파트너십을 과장하기 위함인지도 몰랐지만, 아마 그보다는 정태의가 짐작하기엔 크리스토프가 진저리치는 저 반응을 보고 즐기기 위함이 틀림없어 보였다.
“거참,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신기하단 말야. 크리스토프가 저렇게 순순히 이런 상황을 견뎌 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불쑥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옆에서, 설마 개미 기어가는 그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닐 텐데 일레이가 엷게 휘어진 시선을 주었다.
그때였다.
리하르트의 그 다정함이 자신의 고통을 즐기기 위함이란 걸 뻔히 알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견디고만 있기에는 그 성질머리로 더 이상은 감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표정 없는 얼굴로 지그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마주보았다. 그래봐야 별 도리가 없는 그의 반응을 기대라도 하듯이.
잠시 그 무뚝뚝한 얼굴로 잡아먹을 듯 리하르트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 어느 순간 갑자기 결심한 듯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
크리스토프를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살피고 있던 정태의는 순간 차를 쿨럭 토할 뻔했다.
크리스토프는 웃고 있었다. 요 얼마간 밤마다 정태의를 붙들고 무던히도 연습했던 대로.
여전히 그 웃음은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웃음이 아니었고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는 느낌이 여실했지만,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웃고 있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까 꼭 초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럭저럭 합격, 하고 도장을 찍어 줄 수 있을 만한 웃음이었지만, 저 웃음이 리하르트를 향하고 있다는 게 심상찮다.
그리고 그 당사자인 리하르트는.
대조적으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서 표정 자체가 아예 사라져 있었다. 아니, 보기에 따라서는 화난 것처럼 볼 수도 있을 만큼 삭막한 무표정이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의 눈매며 입가에 못 박혔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그제야 리하르트는 얼굴에서 무표정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평소와 같은 웃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크리스토프를 보았을 뿐이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좀 더 그럴 듯한 웃음이다. 눈초리까지 살짝 휘어졌다.
“너, 다쳤잖아. 그대로 두면 덧날지도 몰라. 잠시 기다려, 약 갖다줄 테니까.”
“응? 아니, 그럴 것까지는…….”
그러나 리하르트가 사양을 하기도 전에 크리스토프는 일어서 자리를 떴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실내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웃음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라도 잠긴 듯,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입가와 턱을 감싸쥐듯이 덮는다.
그 부자연스러운 정적을 깬 것은, 말없이 자리를 지켜보던 말리크였다. 감탄한 목소리가 낮게 터져나온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대단히, 음, 잘생긴 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이제 보니 정말로 우아하시고, 또 화려한 분이시군요. 하하, 도무지 기동대처럼 거친 곳에 계셨다고는 상상도 못하겠는걸요.”
솔직하게 감탄하는 그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과연 저 남자를 처음 보고서 그런 흉험한 세계를 상상하는 비뚤어진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나저나, 왜 그렇게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짓나 했더니 이 자리를 무난하게 떠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굳이 그를 찾으러 가서 다시 끌어다가 이 자리에 앉히고 계속 이야기를 진행할 만큼 중요한 화제도 딱히 없어 뵈고, 그럴 만한 사람도 없다.
“도저히 저분의 손에 무기가 들려 있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데……여기 계신 분들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말리크는 여전히 감탄한 빛을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 저택 안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거다.
그에게 대답한 사람은, 그제야 다시 웃음을 되찾은 리하르트였다. 푸근한 웃음을 눈가에 띠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저래 봬도 아주 훌륭한 전사이기도 하지요, 크리스토프는. T&R의 기동대에서도 수위를 다투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일레이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고 보니 제 상관과 절친하신 귀한 분께서 사설 경호대에 지도자급으로 맞아들일 적당한 인재를 찾고 계시던데, 나중에 저분의 솜씨를 꼭 한 번 뵙고 싶군요.”
말리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문득 일레이가 웃는 듯 마는 듯 입을 연다.
“라만과 절친한 귀한 분 가운데 사설 경호대를 두고 있을 만한 자라. ……타르텐에서 사람을 데려가 돈독한 관계를 쌓을 만도 하겠군.”
말투는 혼잣말이었으나 그 목소리를 못 들을 만큼 귀가 어두운 사람은 없었다.
……아. 또다. 말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말.
정태의는 공기 속에 짧게나마 미묘한 흐름이 스치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미묘한 흐름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인 말리크는, 잠시 침묵하다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모시는 분들은, 차관의 변제가 끝난 뒤에도 타르텐과 긴밀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더없이 절친하고 긴밀한 관계를 말이지요.”
느릿하게 꼬리를 끌며 말을 마친 말리크는 짙은 웃음을 띠었다.
얼마간 그곳에는 침묵이 흘렀다.
제각각의 상념이 흐르는 그 침묵 속에서, 정태의는 문득 아아, 하고 생각했다.
타르텐과 ‘더없이 절친하고 긴밀한’ 관계. 즉, 150년의 세월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한.
말리크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국유회사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권력이 있다. 일개 회사와는 비할 바가 안 되는.
150년의 교분이 이어진 곳과, 부와 권력의 집산처. 이중 택일을 해야 한다면.
정태의는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선택지를 눈앞에 들이민 이 상황이 다소 희극적이다.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곧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를 그 귀한 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하시는 겁니까? 과연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나,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과연, 그는 이 자리에서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끌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난하게 말을 돌려 버린다.
이내 눈치를 챈 말리크 역시 순순히 그의 화제를 따라가며 웃었다. 짐짓 친근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눈짓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그러나 오해는 말아 주시길. 아무런 동의도 없이 대뜸 아름다운 연인 분을 빼앗아 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헉.
정태의는 숨을 들이켰다.
하마터면 잘 마신 찻물을 토해 낼 뻔했다.
“…….”
정태의는 공연히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당혹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건 완전히 직구다. 직격탄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푸근하게 웃고 있는 말리크의 앞에서, 찻잔을 매만지던 손을 멈칫한 리하르트는 이상한 얼굴로 말리크를 보았다.
이해를 잘 하지 못하겠다는 눈치로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했지만, 몇 초쯤 지나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실례지만 지금 하신 말씀이……?”
“예? 아아.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신 크리스토프 타르텐 씨 말입니다. 설령 그분의 솜씨가 아무리 탐난다 한들, 설마 동의도 없이 강제로 모셔갈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말리크는 사태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에 잠긴 리하르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태의에게로 향했다. 굳이 정태의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단순히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더라면 좋았을 걸, 공연히 진땀이 흘러 정태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름다운 연인이라고 하셨는지요?”
리하르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여전히 눈가에 배어 있는 웃음이 상냥하다.
말리크는 그 반문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아, 하고 그는 감탄스럽게 고개를 내젓는다.
“아름답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달리 찾아보기가 힘들지요. 게다가 외모만 뛰어난 게 아니라니, 저런 분이 연인이라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지요. ……타인의 연인을 칭찬하는 것이 이쪽 문화권에서는 무례가 아니겠지요? 저는 그저 순수한 의미로 감탄한 것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리하르트의 표정에, 웃는 가운데서도 기묘한 빛이 감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깨달은 말리크는 도중에 예의바르게 몸가짐을 삼가며 정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잘못 짚은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다시 정태의에게 날아왔다. 정태의는 다시금 공연히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왜 나만 보냐. ……하긴 일레이는 철벽의 포커페이스를 자랑하니 그놈을 뚫어져라 봐 봤자 소용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지.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하려 했지만,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정태의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가 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러다가 곧 다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저와 크리스토프는 사촌입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긴 하나, 설마 그럴 리가요. 저는 연인도 있습니다. 물론 여성이지요.”
저 남자도 연인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고, 정태의는 며칠 전에 그 바에서 우연찮게 보았던 리하르트의 성행위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연인이라기보다는 거의 가학―피학적 주종관계던데, 이 상변태 같으니.
말리크는 그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눈을 껌벅이며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다가 이내 띄엄띄엄 말을 꺼낸다.
“아……, 아니었습니까? 이런, 그렇다면 대단히 큰 실례를 했군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말리크가 난처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리하르트와 입장이 바뀐다.
정태의는 모쪼록 리하르트가 조용히 넘어가기를―혹은 그 소문에 대해 캐어낸다 해도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기를―기원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정태의는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말리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놀라고 말았다. 단순히 그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런 걸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사소하다면 사소한 소문이었다. 어디까지 그 은밀한 소문이 퍼져 있는지 몰라도, 최소한 타르텐의 저택 바깥까지 벗어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 이야기까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렇게 겉보기만큼 그저 사람 좋게 잘 웃는 사내이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하긴 마지막 협상을 위해 찾아온 사람이 호락호락한 사람일 리가 없다.
정태의는 흠, 하고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아군이기보다는 적일 확률이 높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나저나 여기 공기가 몹시 안 좋다.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한 듯하면서도 등줄기가 따끔따끔한 것이, 꽉 막힌 공간에서 사람들이 들어앉아 이산화탄소만 내뿜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태의가 이 따끔따끔한 자리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나기도 할 겸, 창문이라도 열기 위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이 자리에서 벗어났을 줄로만 생각했던 크리스토프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크리…….”
그러나 정태의가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가 다시 웃었다.
퍽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정말로 즐겁고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눈매가 어린애같이 반짝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웃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리하르트를 향하고 있었다.
잠깐, 바로 조금 전에 리하르트의 귀에 그 흉흉한 소문이 들어간 데다, 그가 그 소문을 부정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타이밍에 그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리하르트에게로 다가서서야, 의심은 깊어지기만 할 뿐이다.
정태의는 어떻게든 크리스토프를 가로막고 싶었지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보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곁에 이르렀다.
“리하르트, 내가 약 발라 줄게. 눈가에 흉이라도 남으면 안 좋잖아. 마침 좋은 약이 있어서 가져왔어. 내가 직접 발라 주지. 직접 내 손으로.”
정태의마저 놀란 그 천진하고 해맑은 웃음을 보고 다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가 선뜻 옆으로 다가와 눈가의 조그만 상처를 살피자 당혹스러운 듯 그대로 있었다.
뭔가 할 말이 몹시 많은 눈치였지만, 크리스토프가 진지하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살피자 입을 다물고 만다. 지금 말을 꺼내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이 자리의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알 바가 아닌 그는, 아슬아슬하게 리하르트의 눈을 비껴간 상처의 위치를 확인하곤 꽃처럼 웃으며 약통을 열었다.
“많이 아프겠다. 잠시만 기다려. 이 약이 썩 효과가 좋더라고.”
심지어는 짐짓 안쓰럽다는 말투로 걱정까지 해 주면서, 크리스토프는 손끝에 연고를 담뿍 묻혔다.
그 순간, 정태의가 앉아 있는 곳까지 알싸하게 풍겨온 낯익은 냄새.
“……!”
정태의가 황급히 크리스토프를 말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한 발 늦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딘지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가에 정성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었다. 호랑이 연고를.
그리고,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미심쩍은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낯빛이 변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지 않아서였다.
***
“고작 몇십 분 동안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아…….”
정태의는 침대에 푹 퍼져 엎드린 채 앓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위에서 머리 굴리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 할 게 못된다. 아래에서 몸으로 때우는 놈들은 이야기를 하기가 편했다. 저렇게 말속에 숨어 있는 뜻까지 생각하고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정치적인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
“도대체 나를 저 자리에 왜 끌고 간 거야.”
정태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로 옆에서 침대에 걸터앉아 테이블을 끌어당겨 놓고 뭔가를 만지고 있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큼직한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을 건드리고 있던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원했거든.”
“저들이 정태의라는 인간을 보고 싶다고 말하기라도 했단 거냐, 설마…….”
“정확히는 ‘그러고 보니 정재이 씨의 동생분이 여기에 머무르신다지요.’라고 했었지.”
“……. 숨길 생각도 없고 숨길 수도 없었겠지만, 이미 다 알고 왔다는 거네.”
정태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엎드리고 있던 몸을 약간 틀어 모로 누웠다.
지금은 크리스토프에게 약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그 불편한 담소 자리가 파장나서 이렇게 돌아와 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 바늘방석 같은 자리에 앉아서 찻잔만 노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연고를 눈 바로 아래에 바르자마자, 잠시 침묵하던 리하르트는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림없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끈거렸을 텐데도,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볍게 덮은 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내었다.
그런 다음에 바로 뛰쳐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 즈음에서 자리를 접고 잠시 방으로 돌아가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다시 뵙자고, 그렇게 수습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리하르트가 응접실에서 나가자, 여느 때라면 ‘오늘의 의무는 여기서 끝’이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릴 크리스토프도 일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정태의가 어디 가냐고 묻자 ‘어, 구경.’이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얼른 나가 버린 걸 보니, 리하르트가 괴롭게 눈가를 훔치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도 참, 뭐랄까…….”
“스스로 미움을 사는 성격이지.”
말을 고르느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정태의의 뒤를 이어 일레이가 간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음,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왜.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일레이의 말에서 단순한 말 이상의 것을 느낀 정태의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예전에 일로 여러 번 크리스토프와 얽혔다고 했다. 굳이 동일한 일에서 얽히지 않았다 해도 같은 집단 내에 있었으니 그런 쪽으로 부딪히는 일도 제법 있었을 거다.
함께 일하면 의외로 잘 맞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이런 인간들이 어긋나면 한없이 어긋나는 법이기도 하다.
“하긴 둘이서 쫓고 쫓기고 치고 빠지는 일도 있었다며.”
“그랬었지.”
“따지고 보면 집안 관계도 그렇고, 어릴 때에 종종 같이 어울렸던 것도 그렇고, 친척 형제랑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죽어라 서로를 몰아갈 수 있나?”
말하고 나서야 정태의는 자신이 잘못 물어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친형에게도 총구를 들이댔다는 남자였다.
게다가 당장 지금의 현실에서, 실제로 친척 형제인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 역시 서로를 거의 평생의 원수처럼 대하지 않는가.
일레이 역시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듯, 정태의를 흘끔 돌아보기만 할 뿐 굳이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너는 정재이와 형제 싸움도 안 해 봤나 보지. 아주 사이좋은 형제였던 모양이야.”
“아니……이 동네처럼 격렬한 형제 싸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난…….”
정태의는 잘래잘래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빙글 몸을 돌려 바로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 천장을 쳐다본다.
“하지만 실제로 나와 형은 거의 싸우는 일이 없었지. 싸울 만한 일도 없었고, 나도 그렇지만 형은 특히나 호전성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거든. 승부욕도 없었고. 물욕도 없었고. 욕심이 없는 사람과는 싸우기도 힘들어.”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정태의는 정말로 정재의와 싸운 기억이 없었다. 딱히 둘이 어울려서 사이좋게 논 기억도 별로 없지만, 싸우거나 다툰 적도 없다.
“그렇게 사이좋은 형제인데 요 몇 년 거의 만나지도 못했으니 퍽이나 안타깝겠군.”
“음……, 그러고 보니 전화조차도 거의 한 적이 없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매년 생일 즈음해서 한 번쯤은 연락을 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통화를 한 일이 없었다. 딱히 불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상대 역시 그러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누구보다도 먼저 알려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연락이 끊기다시피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서로 그런 면에 있어서는 건조한 형제들이었다.
“정재이라……. UNHRDO에 들어간 뒤에도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그치질 않는다지.”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아마 자신보다도 이 남자가 더 형의 소식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하고 대수롭잖게 반문했다.
“그 가운데엔 꽤 위험한 놈들도 섞여 있더군. 연관되면 두고두고 귀찮아질 놈들도 그렇고, 연관이 안 되면 두고두고 물고 늘어질 놈들도 그렇고.”
천재도 별로 좋은 게 못 돼, 그런 놈들이 꼬여드니,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등 뒤에 누워, 정태의는 볼을 긁적였다.
‘그런 놈들이 꼬여드는 천재’라는 건 어릴 적에도 그랬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위험하다는 말도 별로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여태 정재의에 대해서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재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프랑크푸르트로 온다던데.”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일레이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가지 말라고 했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라고.
정재의가 온다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도 승계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면 안 되나?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정태의는 은근히 중얼거려 본다.
그러자 당장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타이밍이 안 좋아.”
“…….”
한쪽 귀에 뭔가 이어폰 같은 것을 꽂고 기기를 조작하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입을 다물자 흘끔 돌아보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꼭 가고 싶나?”
“가능하면 가고 싶긴 한데, 꼭까지는 아니야. 그저 타이밍이 안 좋다는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지.”
정재의의 독일 방문과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하나씩 줄을 이어 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런 거였군.
“자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갈 생각은 없어. 전화나 하기로 하고, 드레스덴에서 일을 마치면 어서 베를린으로 돌아가자.”
정태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자신만 위험해지는 거라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질 소지가 있다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 위험을 범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모처럼 숙부와 형을 같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리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흠, 하고 잠시 기기 위를 툭툭 두드리던 일레이가 다시 돌아보았다. 성가신 듯 미간에 주름이 두엇 새겨져 있었다.
“꼭 만나고 싶다면 기다려. 이번 일 끝나고 나서 베를린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정태의는 응? 하고 눈을 크게 뜨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럼 마친 뒤에 시간이 된대?”
그렇다면 정태의가 프랑크푸르트로 가지 않아도 정재의가 베를린에 들러 주면 된다.
보통 그런 일정은 빡빡하게 잡곤 해서, 포럼을 마치면 곧 떠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베를린까지 올 시간은 안 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럼 포럼 마치고 형이 베를린으로 오면 되겠―.”
“힘들겠지. 뉴욕행 비행기가 포럼 당일 밤으로 잡혀 있으니까.”
바로 그 다음날 본부에서 연구회의가 잡혀 있을걸,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을 듣고, 정태의는 반짝반짝 웃던 얼굴을 거둔다. 그리고 조금 어벙하게 눈을 껌벅이며 어, 하고 중얼거린다.
“그럼 베를린으로 데려다준다는 건……, 아, 다음 기회에?”
정태의는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할 수 없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얼굴은 치워.”
“어?”
“포럼 당일날 공항으로 가기 전에 가로채서 데리고 오면 되잖아.”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일레이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얼굴’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지옥문 앞에 선 것 같은 얼굴이 찾아들었지만.
수행원과 경호원이 한둘 따라붙을 행차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포럼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전에 사람 하나를―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급수의 인물을―빼온다면.
범상한 방법은 아닐 게 틀림없었다.
“테러 수배만 해도 이미 죄질이 나쁘고 몹시 무겁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혹시?”
정태의가 진지하게 묻자 일레이는 픽 웃고 말았다.
“아냐, 그냥 다음 기회에 보자. 전화나 하고 마는 편이 낫겠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
정태의는 서둘러 일레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터무니없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기기의 스위치를 연이어 탁탁탁 올리는 일레이의 손가락을 그의 어깨너머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뭐하는 거야.”
일레이의 등 뒤에 앉아 있던 정태의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으며 그가 건드리고 있는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큼직하고 시커먼 철제 가방 안에는 복잡하게 얽힌 회로가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아래쪽의 계기반에는 조그맣게 표기되어 있는 주파수 대역. 심지어 그 숫자는 400을 넘어서고 있었다. 반대쪽 옆에 붙어 간간이 깜빡거리고 있는 건 햄용 수신기.
그리고 그 옆으로 뻗어나와 얇은 코드로 이어져 있는 이어폰이, 일레이의 한쪽 귀에 꽂혀 있었다.
무심하게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정태의의 표정이 차차 무겁고 어두워졌다.
“……. 이봐……, 어쩐지 내 눈에는 이거…….”
“아, 이제 조용히 있어 봐. 욕실에서 나왔으니.”
“누구야?! 어디를 엿듣고 있는 거냐고?!”
정태의가 화들짝 놀라 벌컥 소리쳤다.
원래 범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아니 이 남자와 연관된 일 가운데 범죄와 무관한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지만―이렇게 눈앞에서 생생하게 범죄의 현장과 그 기기를 보게 되자 감개가 새로웠다.
정태의가 퍼렇게 정색을 하고 외치건 말건, 일레이는 계기반의 버튼을 한 번, 두 번 누르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정태의는 가자미눈으로 일레이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정태의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서 등지고 도로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였다.
일레이는 이어폰을 하나 더 꺼내어 잇더니 정태의의 귀에 꽂아 주었다.
“……?!”
“어차피 설치되어 있다는 건 이놈도 알고 있을걸. 서로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일도 종종 있는 법이지.”
“뭐야, 누군데.”
정태의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리곤, 범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크리스토프. 내 눈을 멀게 할 작정이었나?」
헉.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깨달은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오늘 온 그 손님 방에라도 설치해 뒀으려니 했었는데, 이건 예상 밖의 인물이다.
“아니 만날 같이 붙어 다니면서 도청기까지 설치해 둔 이유가 뭐야…….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섭섭해서?”
“아하, 그 농담 잘 기억해 두지, 정태이.”
“헉……, 아냐아냐, 농담이었어, 농담.”
정태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이 남자가 기억해 둔다고 하면 무섭다. 몇 년이 지나서 이제는 잊어먹었으려니 해도 언제 어느 순간 튀어나와 정태의의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었다.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로 보아, 그 불쾌한 목소리의 주인공 리하르트의 방에는 그와 크리스토프 두 사람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하르트가 눈물 펑펑 흘리는 꼴을 보겠다고 좋아라 뒤쫓아갔으니 크리스토프가 거기에 있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얼마 전까지 리하르트의 방은 흉흉한 곳이라며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크리스토프가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도 말야,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지 않아?”
정태의는 이어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레이는 쉽게 동의하기 힘든 듯 슬쩍 눈썹만 치켜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어폰에서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잘 웃더군.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더니, 몸이 유쾌하면 마음도 유쾌해진다는 건가?」
리하르트의 언짢은 목소리에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있자, 이게 어째 별로 좋은 소리가 아닌 것 같다……?
「밤마다 그놈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온다니, 누가. 누구 방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크리스토프의 반문에 리하르트의 대답이 이어진다.
「네가. 김영…―아, 아니었지, 정태이라는 그 남자의 방에.」
“…….”
일레이의 말없는 시선이 날아왔다.
그 순간 정태의는 거의 펄쩍 뛰어올라 단정하게 정좌를 하고 앉아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냐, 아냐아냐아냐, 너도 알잖아, 크리스가 내 방에 왜 왔는지! 그, 그렇지, 오늘 너도 그 성과를 봤잖아, 그 웃는 얼굴!”
정태의의 다급한 변명에도 아랑곳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던 일레이는, 정태의의 표정이 흐물흐물 울 것처럼 일그러진 뒤에야 슬쩍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늦깎이 얼간이가 밤마다 너를 침대에 끌어들일 거라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아.”
“……!! 너 지금 나 갖고 논 거구나!”
“글쎄, 사타구니를 건드리며 찝적거리는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네게 그 정도의 학습능력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태이.”
일레이가 흘끗 시선을 던졌다. 정태의는 다시 입을 합죽 다물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땀마저 흘렀다.
갑자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가 떠오르면서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쾌감이라기보다는 거의 공포다. 수틀리면 가끔 그렇게 날 잡아서 사람을 피폐하게 초토화시킬 때가 있었다, 이 남자는.
정태의는 우울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려 버렸다.
“확실히 주파수를 잘 잡아야 잘 들린다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 설치했어?”
발소리나 작은 기척까지도 제법 세세하게 잘 잡아내는 훌륭한 성능이 감탄스럽다.
“여기에 정식으로 들어오기 전날.”
“……. 재주도 좋습니다, 그려…….”
정태의는 반쯤 질려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번뜩 눈을 부라린다.
“설마 내 방에도 하나쯤 숨겨져 있는 것 아냐?!”
그러자 잠시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 일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정태의는 덜컥 눈을 크게 뜨며 이봐, 이봐! 하고 외쳤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방으로 돌아가면 당장 탐지기부터 돌려 봐야겠다.
정태의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기 방에서 마이크를 숨겨 놓을 만한 데를 떠올려보고 있을 때였다.
「아직 마지막 협상이 남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조건 제시를 할지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크리스토프. ……그들이 저들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들’과 ‘저들’이 누구인지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일레이가 듣고자 했던 이야기라는 것도 곧 깨달았다.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저쪽도 알고 있을 거라고 했으니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을 테지만, 말 자체가 아닌 부분에서 사소한 단서를 짚어내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그들에게 이쪽의 소리가 들릴 리도 없는데, 정태의는 숨을 죽였다.
크리스토프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사우디 측에서, 정태의나 일레이의 신병을 요구한다면.
그렇다면 크리스토프는 어떻게 할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그 무뚝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잘 알 것 같았다.
그 침묵 끝에, 리하르트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네가 정태이라는 그자와 친하게 지내선 곤란하다는 거다. ……안됐군, 크리스토프. 네가 처음으로 접촉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인데.」
희미하게 잔인한 빛을 띤 목소리.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저렇게 한다는 건,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저 둘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거야?”
“어느 쪽일 것 같지?”
“둘 다.”
“잘 알고 있군.”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그래도 요 며칠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일을 거든다고 하기에, 사이가 나쁘긴 해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나 보다 싶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같이 붙어 있어서 정이 싹틀 관계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 둘은 혹시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나?”
정태의가 별 기대도 없이 불쑥 묻자, 의외로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미 오래 전이지만 프로젝트를 한 번 같이 한 적이 있지. 크리스토프가 승계를 포기하고 나가기 전에, 후보자 교육의 일환으로.”
협업 능력을 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플레이가 안 되는 일이었어,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에, 정태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랬어? 어떻게 됐어?”
“실패했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협력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판이 깨어진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훌륭한 예가 되었어.”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인다.
“크리스토프는 그렇다 쳐도, 리하르트는 관계가 어떻든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낼 성격으로 봤는데 의외군.”
“아아, 맞아. 리하르트는 제대로 했는데, 그의 도움은 절대로 받지 않겠다면서 크리스토프가 판을 깨어 놨지.”
“……. 크리스토프…….”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은 정태의도 여럿 본 바 있지만, 저 남자만큼 확연하게 갈리는 인간은 없었다.
“리하르트가 아주 이를 갈았겠군.”
정태의가 푹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일레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두말할 나위 있을까, 하는 무언의 기색이 그 웃음에 담겼다.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사우디에서 이쪽의 신병을 요구한다면―그 주제는 분명, 도청이 꺼림칙한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만큼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불쑥 내뱉는 목소리가 곧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릭을 넘겨줘. 어차피 폭격을 한 당사자는 그놈이잖아.」
“…….”
그렇구나. 이놈은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에 골고루 적을 심어 두었구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대수롭지도 않은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타르텐으로서도 상황은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그쪽의 요구에 따라―아직 변제 요구가 확정이 되지는 않았다 하나―이쪽을 인도해야 한다면, 백수십 년을 이어져 왔던 집안간의 관계에 금이 간다.
그렇다고 변제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사실 타르텐으로서는, 그들에게 정태의를 넘겨주는 걸로 일이 끝난다면 그 편이 훨씬 좋았다. 교분의 의가 상하지도 않고 약조도 지킬 수 있고.
그러니 아마 리하르트는 그쪽을 바라고 있을 테지만, 크리스토프는 말했다. 그냥 릭을 넘겨주라고.
그가 어떤 얼굴로 그 말을 했을지도 훤하게 떠올라서,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웃고 말았다.
크리스토프의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방해라도 할 생각인가? 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유리 심장에 입김을 좀 불어 살짝 흐려 놓은 정도로, 보는 사람이 우스워질 정도로 넋이 빠져서. ……쓸데없이 들떠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너답게 살아. 어차피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넌 그런 건 할 줄 모르잖아.」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지, 크리스토프는 어떤 말로 저 말을 듣고 있는지.
―나는 어딘가 비어 있어.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근원적인 뭔가에서부터, 없는 거야. 비어서 채워지지 않아.
그 조용하게 흘러나오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머리를 짚으며, 어디가 비어 버린 걸까, 그렇게 고개를 기울이던 그가 떠올랐다.
「내가 태이를,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래.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해.」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문득 자신에게 와 닿는 시선을 느꼈다. 일레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고개를 젓고 만다.
알고 있다. 자신이 손을 내밀 한도가 어디까지인지는.
「그래서, 방해라도 하겠다고?」
리하르트의 느릿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목소리는 곧 낮고 선뜩한 음색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고 들겠다면, 방해를 못하게 만들어 주지.」
그 직후였다.
뭔가 무겁게 부딪히는 소리. 나뒹구는 소리. 요란하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전해졌다.
“―…!”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일레이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흘끔 눈길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친다.
“또 싸우는가 보군.”
일레이는 심상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짤막한 욕설이나 고함소리, 묵직한 타격음 따위는 싸우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거 말리러 가야 하나.”
정태의가 인상을 쓰고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하하아,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것 멋지군.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너희들이 싸우는 것 같아서 말리러 왔다’, 이렇게 말하려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니 우연히 볼일이 있어서 들른 척하고 그냥……하고 중얼거리다 말았다. 너무 빤히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구, 하긴 이놈들이 싸우는 것도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
문제는 한 번 치고받으면 거의 사단을 볼 각오를 한다는 점이었지만, 그래도 집 안에서 저러면 그나마 안심이다. 설마하니 경찰이 와야 할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을 테고, 긴급한 사고가 일어나도 대처하기가 편하다.
“아직 둘 다 몸도 성치 않으니 싸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겠지.”
그렇게 덧붙이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격투 소리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
소리만 들리니까 꼭 무슨 격투게임 청취라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가 머무는 방에 제대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몇 번 잔심부름으로 부려 먹히면서 들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안까지 들어와 편하게 침대를 차지하고 앉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동익에 머무르는 귀빈께 준비된 방이라곤 하지만 내가 머무르는 방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짐짓 마음 상한 척 투덜거리자 “그럼 너도 오늘부터 여기서 머무르도록 해.”라는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헉, 정태의는 당장 몸을 사렸다. 하마터면 또 무덤을 팔 뻔했다.
“아냐, 여기엔 이 집안 어른들이 많이 머무르시는데 괜히 심기 어지럽히면 안 좋지. 난 역시 서익이 좋겠어. 음.”
정태의가 냉큼 고개를 젓자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동익에 들어와 살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줄을 섰는데, 거 참 특이한 희망이로군.”
흠? 하고 중얼거린 정태의는 새삼스럽게 방을 둘러본다.
분명 이 방은 썩 훌륭했다. 동익의 다른 방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나, 갖추어진 물건들이며 내부 구조 따위가 아주 훌륭하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나 은근한 박력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그야 싫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집이라면 달리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줄을 서면서까지 들어와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정태의의 의문에는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타르텐의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타르텐의 직계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자만이 들어와 살 수 있으니까, 동익에는.”
혹은 나와 같이 귀빈의 자격으로 머무르든가, 하고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그제야 납득한다. 예전에도 얼핏 들은 적이 있는 듯했다.
“동익에 머무른다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될 수 있다는 거로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셈이지. 실제로 이곳에 머물다 나가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곳에서 나간 뒤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례도 더러 있다더군. …….”
일레이는 잠시 사이를 둔 뒤에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뭔가 말을 이으려다 그만둔 것 같은데?”
정태의가 의아해져서 추궁했지만 일레이는 어깨만 살짝 들어보였을 뿐이다.
“왜. 아는 사람 가운데 실제로 여기에서 쫓겨나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뭐……, 일단은.”
일레이는 애매하게 말했다.
이 남자가 말을 흐리다니 드문 일이다. 정태의는 잠시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캐물어 봐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화제도 아니다.
게다가, 이어폰 속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도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욕설과 거친 숨소리 따위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나 부딪히는 소리는 이제 뜸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건드리지 마……!」
드디어 한바탕 치고받는 건 잠깐이나마 끝난 모양이다.
「전에 말했었지. 너는 접근전에는 치명적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마땅한 무기도 없어. 그래, 이제 어쩔 작정이지?」
육탄전으로 체력이 심하게 소진되었는지 리하르트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웃음이 담긴 그 소리는, 지금 그가 다소나마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 손대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휙 뽑아들고, 마치 그 이어폰이 그 목소리의 주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납게 노려본다.
“이놈들은 같이 있으면 싸우는 것밖에 안 하나? 설마 요즘 낮 동안 같이 다니면서도 늘 이 모양인 건 아니겠지?”
“최소한 타르텐의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지 않아.”
“……. 사적인 시간대에는 그런다는 소리네.”
정태의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한 손에 이어폰의 코드를 걸치고 빙글빙글 돌렸다. 손가락에 코드가 감긴다. 다 감은 다음에는 다시 풀기를 몇 번쯤 거듭하며, 천장을 쳐다본다.
“베를린에 있으면서 말야.”
문득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다. 일레이는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준다.
“몇 년이나 집에서 평화롭게 살았더니 적응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이대로는 몇 년 더 있으면 진짜로 다른 데서 살기 힘들어지는 거 아냐……?”
베를린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적응을 못하고 힘들어하게 되면 낭패다. 그때쯤이면 더 이상 적은 나이도 아닐 텐데.
그러나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일레이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깨닫곤 얼른 ‘아, 그래그래, 이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하고 중얼거리며 이어폰을 도로 꼈다. 뭔지 몰라도 또 뭔가 이놈의 마음에 안 드는 화제였던 모양이다.
「너는 비열하고 잔인해. 내가 아는 한, 앞으로도, 너만큼 냉혹한 인간은 없을, 거다.」
이어폰을 끼자마자 들려오는 소리는 거칠게 떨리는 크리스토프의 비난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서 대놓고 이렇게 매도하다니, 몰래 듣는 처지에 할 말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이 껄끄러워질 정도다.
정태의가 그럴 정도인데,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의 기분은 좋을 리가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리하르트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니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아니, 너 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만이 나를 그렇게 보지. ……나는 거울과 같아서, 나를 보는 사람의 기대대로 부응해 주지.」
문득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뭔가, 정확히 짚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마치 심장 위에서 스멀거리며 기어다니다가 비수처럼 박히는 것 같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 목소리는 무척 상냥하고 다정했는데도, 가슴 속이 서늘하다.
그 순간.
“넌 더 이상 듣지 마.”
갑자기 귀에서 이어폰이 뽑혀나갔다.
코드를 잡아당겨 정태의에게서 이어폰을 빼앗아 버린 일레이는, 그 이어폰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심장의 그 싸늘한 느낌이 가시고 나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사람이 듣고 있는데 갑자기.”
꼭 엿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렇게 빼앗기고 나니 그것도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게다가 저렇게 선뜩한 말을 듣고 나니 공연히 심장이 불안스레 묵직해졌다.
여전히 자신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일레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또 치고받는 것뿐일 텐데 더 들어서 뭐하게. 너는 그만 들어. 그보다,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 보지 그래.”
“뭘.”
“몇 년 뒤에 다른 데서 살 때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문득 일레이는 몸을 구부렸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있는 정태의의 위로 몸을 굽혀 상반신을 비스듬하게 겹친다.
“아니, 왜 또 갑자기―.”
그러나 정태의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그 입 속으로 낯익은 혀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태의의 숨통까지 막을 생각은 없는지 그 혀는 가볍게 정태의의 혀와 잇몸, 입술을 몇 번 쓰다듬다 떨어졌다.
“왜. 이제 슬슬 베를린이 지겨워졌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살아 보고 싶어?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봐.”
정태의는 그의 혀가 입술에서 떨어져서 귓불로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직도 이런 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끔 일레이는 그가 의식을 하는지 못하는지, 굉장히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일 때가 있었다.
마치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는 듯한 그 말이 어쩐지 멋쩍어서, 정태의는 조금 머쓱해지고 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잠깐 하던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귓불에서 뺨으로 돌아오는 그 입술의 감촉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그래, 이런 것도 문제다. 어쩌다가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익숙하게 느끼게 되었는지.
정말로 나중에 언젠가 베를린을 떠나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면, 인생이 아주 엄청난 변혁을 일으킬 것 같았다.
“아까 잠깐 하던 생각이라.”
“베를린에도 꽤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이제는 그곳이 내 집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그런데 거기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할까 싶었거든. 그래서 아주 잠깐 그 생각만 좀…….”
문득 뺨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잠시 멈추었다.
약간 고개를 든 일레이는 잠시 말없이 뭘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좀 이상하다는 빛 같기도 했다―정태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대수롭잖은 투로 말한다.
“왜. 내가 없는 동안, 형이 너더러 나가라고 하던가?”
“아니, 그보다는…….”
정태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끈기 있게 뒷말을 기다리며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가끔씩 시선이 비껴난다.
“시간이 지난 뒤에 말야, 너랑 어떤 이유로든 떨어지게 되면 계속 베를린에서 살기는 좀 그렇잖아. 그나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놈들과도 자주 만나긴 힘들 테고, 형은 UNHRDO에 있으니까 형이랑 같이 살기도 힘들겠고. 의외로 갈 곳이 없더라, 나.”
“……. 흐음……. 그래, 그래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몇 초쯤 사이를 두고 일레이가 사뭇 궁금한 듯 물었다. 어쩐지 귓불을 건드리는 입술도, 목소리도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 어린애를 꼬드겨서 중요한 비밀을 캐어내려는 악마의 목소리 같다는 사실을, 정태의는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글쎄……. 그렇게 되면 그냥 너랑은 상관없이 카일의 손님이라는 자격으로만 그 집에 머무르면, ……좀 그런가?”
늘상 손님이 끊이지 않고 넘쳐나는 집이긴 하지만, 장기 투숙 손님이라고 해 봐야 한두 달이 기껏이었다. 몇 년이고 그 집에 죽치며 사는 손님은 정태의 본인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손을 들어 정태의의 뺨을 엄지로 문지르기 시작하는 손길에, 그제야 정태의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뭔가 속이 비꼬이기라도 한 듯 뺨을 아플 정도로 꼬집어 정태의는 아야, 하고 부루퉁하게 눈살을 찡그렸다. 그러나 일레이는 몇 번쯤 더 뺨을 꼬집듯이 문질렀다.
이놈이 또 뭔가 속이 틀렸나 싶었지만, 생각에 잠긴 일레이의 표정에서는 별반 불쾌하거나 언짢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 약간 고민스러운 일이라도 생긴 듯이 으음,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들겠는데…….”
“응?”
정태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대화의 맥락이 맞지 않다.
아니면 혹시, 카일의 손님으로 베를린의 저택에 머무르기는 힘들겠다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정태의의 짐작은, 뒤이어 나오는 말로 인해 멋지게 빗나갔다.
“한국에 있다는 네 친구들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데 정재이 말이지. 그놈은 없애 버리기 힘들 것 같단 말야. 머리에 대고 총을 쏴도 도리어 내가 다치게 되는 놈이니. 어떻게 한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조로 말하고 있지만, 이미 이 남자와 몇 년을 지냈다. 농담처럼 하는 이 말은 진담이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에 헛바람을 들이켜 몇 번이고 기침을 하고 말았다.
쿨럭쿨럭, 헛바람을 잘못 들이켠 탓에 폐가 끊어질 것 같았다.
일레이를 밀어내고 몸을 구부린 채 한참 기침을 하다가 겨우 그 기침이 잦아들자, 일레이는 다시 정태의를 내리누르고 그 위에 상반신을 겹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술을 겹치는 그를 다시 한 번 밀어내며, 정태의는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몰라도 까닥 잘못하면 친구와 가족이 한꺼번에 줄초상 치르게 생겼는데 지금 다른 게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왜왜왜왜 없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렸다. 그런 다음에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너랑 만난 적도 없는 내 친구들이랑, 너랑 만난 지 수백만 년은 된 우리 형이 네게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왜 없애.”
“왜냐니.”
일레이는 여전히 평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고 있는 정태의의 손을 잡아서 떨어뜨렸다.
“갈 곳을 없애야 애초에 그런 생각을 안 하지. 태이, 너는 종종 쓸데없는 생각을 지나치게 할 때가 있어.”
젠장, 뭘 밟았나 했더니 그거였구나.
정태의는 뺨을 느릿하게 핥아올리는 일레이에게 서둘러 말했다.
“아냐, 아냐! 절대 그런 생각 안 할게! 난 베를린에 내 뼈를 묻을 각오를 굳게 다지고 있었단 말이야!”
바로 1초 전부터, 라는 말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뺨을 살짝살짝 깨물며 핥아 대던 그가 문득 피식 웃는 기척이 났다.
이놈이 또 나를 갖고 놀았구나.
정태의는 푹, 몸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아주 갖고 놀아라, 갖고 놀아.”
“흠. 오해하지 않게 말해 두자면, 나는 농담이 아니야.”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는 일레이에게서, 약간 쑥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무작정 사람을 짓누르며 정신없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라면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는데―랄까 그럴 때에는 어차피 생각이란 걸 할 여유가 없어진다―, 가끔 무슨 변덕인지 이렇게 살짝살짝 건드리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거듭되어도 어딘지 좀 쑥스럽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정태의의 그런 기색을 즐기는 눈치인 이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종종 이러곤 했다.
정태의는 자신의 입술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입을 열어 주며,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쪽은 어때. 이제 싸움 좀 그쳤어?”
일레이가 한쪽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는 음? 하고 반문하더니 어딘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라고 혼잣말처럼 말하며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입술을 겹쳤다.
그 말을 듣고, 정태의는 이제야 저쪽 두 사람도 좀 진정국면에 들어섰나 보다, 하고 안심하면서 입 안으로 들어온 일레이의 혀를 툭툭 혀끝으로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