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Have no choice but to(2) (15/34)

***

크리스토프가 나가고 나자 그 방에서 정말로 ‘혼자 덩그러니’ 외부인이 되어 버린 정태의는 어느 시점에서 이곳을 떠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뭐라고 입을 열려던 당숙이 정태의의 모습을 보더니 나가라고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렴, 집안의 비사를 논하는데 외부인이 있어서야 안 될 말이다.

정태의는 재깍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지기라도 하듯이 문 옆에 서 있던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정태의를 바라보았지만, 두 말 없이 길을 터준다. 심지어는 손수 문까지 열어 주더니, 잘 돌아가라는 듯 정중하게 바깥을 가리키는 제스처까지 보여 준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어.’

정태의가 그의 옆을 스치며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비슷한 정도의 성량으로 속삭였다.

‘기왕이면 복상사가 좋겠군.’

야, 난 싫어, 네가 얼마나 무거운지 너는 모르지?!

벌컥 외쳐 주고픈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정태의는 열린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럼 나중에 다시, 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잠시 그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문 바깥 집무실에서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가끔 정태의에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역시 이곳은 정태의가 있을 공간이 아니었다.

베를린과는 다르다. 카일의 집과 이곳은 너무도 달랐다.

그곳에 몇 년을 머무르며 마음이 불편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어쩌면 정태의가 이곳의 가족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만―하나의 정교한 공동체와 같았다. 가족과 회사의 가운데 어디쯤 위치한.

베를린으로 돌아가고 싶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태의가 있을 곳이 되어 버린 그곳으로.

“어……. 그런데 나중에 일레이랑 틀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집무실에서 나와 서익으로 향하던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이제는 그곳에 정태의의 가족은 없다. 몇 안 되는 친척들과는 그리 교분이 깊지도 않았다.

“그럼 형이 있는 뉴욕 쪽으로 가서 살든가……. 아냐, 난 아마 비자 안 나올 텐데. 테러범한테 비자를 주는 나라가 어딨어. 그냥 한국에서 친구들과 안락하게 지내는 게 낫겠지.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홀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정태의는 서익으로 넘어갔다. 본관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저마다 낯설어, 차라리 칼날처럼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이라곤 해도 서익으로 돌아오자 그나마 나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자신이 지금 있는 이곳말고는, 아무데도 돌아갈 곳이 없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정태의는 알지 못했다. 머리로 상상해서 알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짐작만 할 뿐.

저 남자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크리스.”

정태의는 방 한쪽의 테이블 앞에 앉아 가만히 손톱만 맞부딪치고 있는 남자를 조용히 불렀다. 정태의가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손끝만 노려볼 뿐이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짐정리……도와줄 것 없어?”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내뱉듯 말한다.

“짐은 없어. 이곳에서 가지고 가고 싶은 것 따위는 없어.”

이대로 나가면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앞으로 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얼마간 침묵이 더 흐른 뒤에야 크리스토프는 혼잣말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다시는 오지 않으려 했는데.”

하지만 이곳은 그에게 어울린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홀로 겉돌고 있었지만, 이 집의 공간 공간들은 그가 몸담기에 썩 잘 어울렸다. 설령 그가 있을 곳이 이곳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곧 그는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정태의는 어쩐지 아쉬웠다.

“그래, 이렇게 마음 상할 바에는 차라리 안 오는 편이 나았는지도 모르는데.”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한 눈으로 정태의를 흘끔 쳐다보았다.

“마음 상하지는 않았어. 이 정도로 마음이 상할까 봐.”

어림도 없다는 듯 부루퉁하게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정태의는 픽 웃고 말았다.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거야?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데.”

“어디든 내키는 대로. 어차피 일을 하면 1년 내도록 돌아다니게 되니까.”

“베를린은 어때. 카일의 집은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서, 한적하고 좋은데.”

“베를린……. 카일은 날 싫어하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토프는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소 의외다. 싫어하든 말든 내가 좋아서 산다는데 뭐, 하고 당당히 고개를 들 줄 알았는데.

“왜. 그래도 일레이도 있잖아.”

일단은 나도 있고, 라는 뒷말을 삼키면서 그렇게 말을 꺼내자마자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삭막해졌다.

“릭……. 아니, 역시 안 되겠어. 베를린은 터가 안 좋아. 생각해 보니 거기엔 타르텐의 지사도 아주 커다란 게 들어서 있잖아. 리하르트도 거기엔 자주 간다고. 안 돼, 역시 사람 살 데가 못 돼.”

당장 고개를 내젓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안 좋은 터에 살고 있는 정태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리하르트란, 오래 끌고 있을 주제가 못 된다. 얼른 화제를 앞으로 돌려 버렸다.

“그러면 다른 형제라든가……. 그러고 보니 넌, 형제는 없어?”

정태의가 물어본 순간, 크리스토프는 멈칫했다. 입매가 움칫 굳어지며 표정 없는 눈이 똑바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앞두었을 때처럼.

감정 하나 없이 조각처럼 푸르기만 한 눈으로 지그시 정태의를 보다가, 이윽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

아……, 하고 애매하게 대답한 정태의는 머뭇거리며 뺨을 긁적였다.

혹시 물어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그러나 갑자기 말수가 사라진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이대로 정태의까지 입을 다물면 더 거북할 것 같았다.

“어, 그래. 어머니 쪽으로도 형제라든가……, 없어?”

“응. 어머니도 줄곧 혼자 지내고 계시니까.”

크리스토프는 테이블 옆의 트레이에 놓여 있던 찻주전자를 들었다. 또르륵, 찻잔에 따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조금 전 정태의가 머뭇거렸던 것이 도리어 어색할 만큼, 평연한 기색으로 조용히 차를 마신다.

정태의는 다시금 뺨을 긁적였다.

“음……, 아버지랑 사이가 좋으셨나 보네.”

“어머니는 타르텐을 몹시 사랑하니까.”

크리스토프는 간결하게 말한다.

오히려 조금 전, 불쾌한 낯으로 앉아 있었을 때보다 기분이 나아졌나 싶도록 평연한 얼굴이었다. 분노도 짜증도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하기만 한 얼굴이다.

“지금도 늘 이곳을 그리워하고 계셔. 어른들께는 매일같이 안부 전화를 드린다고 들었고. 오히려 타르텐의 피를 타고 태어난 자들보다도 훨씬 더 타르텐을 애모하는 분이시지.”

문득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는 손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을 헤매는 듯이.

정말로 사람에서 조각으로 바뀌어 버린 듯, 서서히 그의 입술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주전자를 들어, 반쯤 빈 그의 찻잔에 차를 더 따랐다. 물소리와 함께 찻잔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천천히 그의 눈동자가 내려와 그 물줄기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나도 형을 몇 년이나 못 봤어.”

“형……?”

크리스토프는 앵무새처럼 정태의의 말을 따라하면서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음, 하고는 빈 찻잔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베를린에 들어간 뒤로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형도 바빠서 나를 찾아올 틈이 없었으니까. 전화나 몇 번 했나……. 가족이라곤 형밖에 없는데, 한참을 목소리도 못 들었어.”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다시 표정에 빛깔이 돌아온다.

“형이라……. 네 형이라면 정재이였지. 그 운 좋은 천재라는.”

“어. 운 하나는 정말로 말할 나위가 없는 사람이지. 하다못해 뜨거운 물을 붓다가 유리컵이 깨어져도, 정작 컵을 들고 있던 형은 다친 데 하나 없이 말짱하고 물 닦을 행주를 가지러 가려던 내가 그 물을 밟고 미끄러져 무릎 깨지고 발 델 정도였거든.”

“뭐야……, 그의 운이 좋은 만큼 네 운이 안 좋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냐. 말하자면 그렇단 거지. 대신에 뭐랄까, 형은 좀 의외로 어수룩한 데가 있었어. 내가 그런 식으로 다치거나 하면, 자기 탓이 아닌데도 은근히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거든. 그 덕분에 숙제도 형 여러 번 부려먹었지.”

생각해 보면 평범한 동생을 둔 형은 손해를 많이 봤다. 동생은 형에게 숙제도 부탁하고, 모르는 문제도 가르쳐달라고 하고, 가끔 본의 아니게나마 사회생활을 하면서 형의 이름을 써먹을 때도 있었는데, 형은 동생으로 인해 얻은 게 없다.

하지만 정태의는, 자신이 형이었다 해도 그걸로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어떠한 손익을 주고받지 않는 지금도, 이렇게 형이 좋은 것처럼.

역시 한 번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가끔 목소리라도 듣고 지내야지, 하고 생각하는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잘 지냈어도, 지금은 잘 못 만나는 거잖아.”

“응? 어……. 그래도 뭐, 가끔 연락하면서 서로 잘 살고 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면 그걸로 좋은 거지. 가족이라도 평생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그런 거잖아. 떨어져서 서로 연락을 잘 안 하더라도, 잘 있길 바라고, 잘 살길 바라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크리스토프는 뚫어져라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찻잔 너머로 따끈한 온기가 전해지는 오렌지 빛 액체를 바라보다가 문득 희미하게 눈매를 구부리며 중얼거린다.

“응……, 좋구나.”

웃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크리스토프는 웃지 않았고, 정태의는 그가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 굽어져 누그러진 눈매는 웃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정태의는 웃었다.

따끈따끈, 창으로 비쳐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은 찻잔의 차와 닮았다. 금빛에 가까운 짙은 오렌지색도, 기분 좋을 만큼 따끈따끈한 온기도, 나른하고 고요한 정적도.

정태의는 햇살 때문인지 조금 발그레해 보이는 크리스토프의 뺨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차를 마신다. 소리 없이 우아하게 마시는 그와는 달리 호록, 호록, 규칙적인 소리를 내면서.

문득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텐의 윗사람들이 시끌벅적해도, 집안의 분위기가 흉흉하다 해도, 크리스토프가 추방 선고를 받아 이제 곧 이곳에서 떠야 한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기에서 이렇게 평온하게 차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를 괴롭힐 것은 아무것도 없이.

평온하고 아늑하게.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이렇게 조용하게 보낸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때.

그들이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볕을 쬐며 꾸벅거리는 늙고 순한 짐승처럼 두어 잔째의 찻잔을 다 비우고, 저녁 해도 저물어들 즈음.

전화가 울렸다.

정적을 깨며.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이 안온한 공기를 찢어발기는 저 소리가 몹시 거슬린 듯 전화기를 흘끗 노려본다.

조금 더 이 공기 속에 젖어 있고 싶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고 전화만 노려보는 크리스토프를 보다가 정태의는 신경질적인 전화벨이 여섯 번째 울렸을 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버려둬. 귀찮게.”

그러나 정태의가 막 걸음을 내딛기 전에 크리스토프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전화는 그 뒤로도 한참 더 울리다가 끊어졌다.

다시 정적이 찾아들자, 사납게 전화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의 얼굴도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다시 찻잔을 들기 전에 전화는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한참을 울려도 끊어지지 않았다.

“……. 급한 용건인 모양인데.”

귀에 거슬리는 전화 소리에 정태의가 고갯짓으로 전화를 가리키며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기라도 할 기세로 걸어간 그는, 거칠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여보세요, 하고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한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말한 순간이었다.

‘크리스토프! 어떻게 된 일이니?! 어째서 드레스덴으로 오지 말라고 하는 거지? 이미 그곳에 갈 채비를 다 마치고,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오, 맙소사……,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뭐라고 좀 해 보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비명처럼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정태의는, 수화기를 집어든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희미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 버리듯.

파리해지는 얼굴에서는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도록.

그는 그렇게 서늘해졌다. 저녁해가 금빛으로 비추던 그 얼굴은 밤그늘처럼 식어 버렸다.

그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고스란히 바라보며, 정태의의 심장도 식어 버린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바뀌는 것을, 정태의는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저 가느다랗게 떨린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거미줄에 뒤엉켜 바르작거리는 나비처럼, 그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그곳으로, 타르텐으로 찾아갈 수 있길, 내가 얼마나……!’

전화 속의 목소리는 흐느끼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너는 내 마음을 알 텐데,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가느다랗게 수화기 너머로 정태의에게까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비탄에 겨워 그렇게 흐느꼈다.

납빛으로 굳어 버린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아주 가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는 말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고, 그저 뭔가 변명을 하듯이 달싹거릴 뿐이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땅 밑 저 아래에서 유령이 부르는 것 같다.

그녀는 크리스토프의 어머니였다.

저 섬세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창백하고 생명 없는 조각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크리스토프, 너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쫓겨났는데, 이제는 너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구나. 크리스토프, 너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낳은 게 네가 아니었더라면……!’

“…―!”

저도 모르게,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정태의는, 어느 결엔가 자신이 크리스토프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 전화를 끊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전화가 끊긴 줄도 모르고, 수화기가 더 이상 자기 손에 들려 있지 않은 줄도 모르고, 크리스토프는 유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땅 밑에서 그를 끌어당긴 유령에게 이끌려가 그마저 유령이 되어 버린 듯.

“……크리스.”

정태의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대답하지도, 돌아보지도, 알아들은 빛을 보이지도 않고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

정태의는 다시 그를 불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흠칫, 크리스토프는 그 손을 뿌리치듯이 비켜섰다.

그때였다. 찢어질 듯한 비명처럼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가 몸서리를 치며 몸을 움츠렸다. 물러서고 싶은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 듯 아주 약간, 선 채로 몸을 뒤로 물린다.

정태의는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곧 전화기가 질러 대는 비명이 멈추고 방 안에 정적이 돌아왔다.

“……크리스토프.”

이번에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스스로를 감싸안는 것처럼 몸을 움츠린 채,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구토기가 치미는 걸까 했지만 잠시 지켜보아도 크리스토프는 토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의 입매를 가리듯이 턱을 감싸쥔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팔로, 어깨로 전해져 이윽고 온몸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크리스,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초조하게 그를 불렀다. 그는 여전히 정태의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시선을 멈추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려. 귓속에서 계속, 계속…….”

“크리스토프. 들리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여긴 조용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정태의가 말했지만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허공의 어느 언저리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시끄러워……, 그렇게 고함지르지 마,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들리니까, 조용히 좀 해……!”

정태의가 아닌 누군가에게, 귓속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는 누군가에게 크리스토프는 나직이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창백한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어, 정태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도 그는 흠칫 놀라며 정태의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가 팔을 뿌리쳐도 결코 놓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거칠게 팔을 흔들어도 정태의가 손을 놓지 않자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겨우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부릅뜬 새파란 눈동자가 정태의를 향한다.

“놔.”

“크리스토프, 괜찮아.”

“놔……!”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난밤 뼈가 어긋나 아직 움직일 때마다 삐걱이는 팔은 그리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태의의 손을 겨우 뿌리치는 데에 그쳤을 뿐이었다.

끝까지 크리스토프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던 정태의는 얼결에 그의 팔을 놓치고 두어 걸음 뒷걸음질치다 테이블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그 위로 같이 넘어진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 따위가 와르륵 쏟아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얇은 찻잔이며 찻주전자가 깨어졌다. 주위로 부스러져 흩어지는 유리 파편 가운데, 정태의는 넘어져 앉은 채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그 소리에 다시 놀란 듯 움찔 몸을 움츠린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정태의를.

정태의의 이름을 부르려 달싹이던 떨리는 입술은, 그의 이름 대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려내었다.

“추워……, 귀가 아파.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아. 시끄러워.”

몇 마디 말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똑같은 말들만 거듭하면서, 크리스토프는 스스로를 부둥켜안았다. 상처가 터졌는지 허리께에서 희미하게 핏기가 비쳤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하며 귀를 쥐어뜯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위를 살폈다. 뭔가를 찾는 듯하던 그의 눈이 협탁 위에 고정되었다. 그 위에 가느다란 만년필이 뾰족한 끝을 드러낸 채 놓여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그리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정태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크리스, 하지 마!!”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바닥을 짚은 손에 깨어진 찻잔이 닿아 베이고 말았지만 아픔조차 느낄 여유가 없었다.

간발의 차로, 크리스토프가 만년필을 움켜쥐어 그 날카로운 촉을 자신의 귀에 찔러 넣기 직전에, 정태의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만둬!!”

정태의는 만년필을 억지로 빼앗아 내던졌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를 주먹으로 후려갈겨 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몇 걸음쯤 물러나던 크리스토프는 벽에 부딪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팔로 스스로를 부둥켜안은 채 창백하게 발치를 내려다본다.

“크리스, 그러지 마, 괜찮아. 아무도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하고 있잖아.”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는 세 걸음 남짓.

그러나 그 이상은 다가설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 크리스토프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접근치였다.

“소리가 들려.”

크리스토프가 속삭였다. 조각상이 말하는 듯 입술만 움직인다.

“소리가 들려. 계속 나한테 말을 해. 계속. 귓속에서 말하니까 귀를 막아도 소용없어. 나는, …….”

그의 입술은 망설이는 듯 떨리다가 닫혔다. 그 푸르스름하게 메마른 입술을 바라보며, 정태의가 물었다.

“어떤 소리가……?”

순간 크리스토프의 떨림이 멎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짙푸르고 맑은 눈이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는 마치 넋이 나간 듯, 녹음된 기계인형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나는 결여되어 있다고.”

숨이 멎었다.

호흡조차 멈춘 정적 속에 맴도는 건 낮고 조용한 목소리뿐.

“나는 어딘가 비어 있어.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근원적인 뭔가에서부터, 없는 거야. 여기서? 아니면 여기서……? ……없어. 비어서 채워지지 않아.”

가슴에서, 머리로, 천천히 손을 쓸어올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짚은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는 동안 서서히 그의 목소리에는 체온이 돌아왔다. 말을 마칠 무렵, 그는 더 이상 넋 나간 것처럼 시선을 헤매지도 않았고, 기계처럼 억양 없이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했고, 조금 더 창백했을 뿐이다.

“……크리스.”

“그러니, 이런 것도 당연하지.”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벽에 기대어 묵묵히 약간 아래쪽의 어느 허공으로 시선을 준다.

이런 것도 당연하지. 자신이 이런 것도. 이것을 떠난 것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다. 그런 것은 애초에 뭔가 바라는 것이 있었을 때에 생기는 감정이다.

그저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져 결정된 것처럼.

“크리스토프. 너는, …―.”

정태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몇 초쯤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크리스토프의 어느 부분이든, 그것은 정태의의 몫이 아니었고 그의 몫일 수도 없었다.

크리스, 그렇게 그의 이름만 다시 한 번 조용히 부를 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간 것처럼, 조금 전과 같은 그 비정상적인 흥분과 경련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멈추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혼잣말처럼 입을 연다.

“어머니는 타르텐을 사랑했어. 타르텐이라는 이름이 주는 모든 것들을 익애했지.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래서 어머니는 리하르트를 사랑했어. 친아들처럼. 그가 타르텐의 주인이 되리라는 건 이미 알 수 있었으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띄엄띄엄, 끊어지듯이 이어졌다.

“승계 후보자로 막 선택되고 얼마간은 나를 봐 주셨지만 내가 타르텐을 잇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리하르트의 가장 큰 훼방꾼이 됐어.”

그조차 당연하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연한 것처럼.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는…―.”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이어져야 할 말은, 한참을 기다려도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크리스토프의 몸속으로 녹아들어 버렸다.

“머리가 아파. 약을 먹어야겠어.”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병을 넣어둔 서랍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나른하면서도 분명한 걸음걸이며 표정 따위는, 이미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끄러워, 귀가 아파,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낯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평소와 같았다. 마치 어떠한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자 도리어 편안해진 듯이.

크리스토프는 하얀 알약을 손바닥 위에 와르륵 쏟아내었다. 개수도 세지 않고 한가득 흘러나온 그 약들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는다. 물도 없이 그대로 약을 씹으며, 그는 침대로 향했다.

“쉴 거니까 그만 나가.”

“크리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돌아선 채 타이를 풀어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쳤고, 이어 커프스를 풀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지금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망설임이 붙잡는 발목을 무겁게 끌며 정태의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태의가 막 문고리를 잡으려던 나무문 너머에,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느리고 부드러운 소리.

정태의는 잠시 망설였다. 뒤를 돌아보자 크리스토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혹은 들을 생각이 없는 듯―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

그러나 잠겨 있지도 않은 문 너머에 선 사람을 언제까지고 무시하고 있을 수도 없었고, 정태의는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반쯤은 그 노크에 응해, 반쯤은 이 방에서 나가기 위해, 정태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 서 있던 사람과 마주섰다.

“……!”

“음……? 아아, 자네로군. 크리스토프와 함께 있었나?”

정태의보다 반 뼘쯤 작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넉넉하게 웃으며 정태의를 알은체하는 그 남자를 보고,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어르신이었다.

*

복도에는 일레이가 서 있었다.

이번에도 문 옆에서,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몸가짐마저 흠잡을 데 없이 바르던 그 자세는,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미묘하게 삐딱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삐딱해진 것은 자세가 아니다. 그의 분위기였다.

바로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선량하고 건실한 젊은이였던 그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그곳에는 ‘일레이’가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었나?”

안으로 들어간 노인과 교대하듯이 정태의가 문을 닫고 나오자 일레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송곳니가 언뜻 비친다.

“즐겁기는…….”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로 죽을 만큼 피곤한 게 틀림없었다. 피곤하다고 스스로도 느끼고는 있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더 피곤한 게 분명하다. 그래서 머리가 약간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이 남자를 본 순간 이렇게 어렴풋이나마 안도감이 들 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말없이 그의 양복 옷깃을 잡아당겨 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정태의가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도록 순순히 내버려두면서 픽 웃는다.

“한창 몸이 달아오르던 중에 방해받기라도 했나? 어쩐 일로 네가 초저녁부터 사람들 다 오가는 복도에서 이렇게 보채는 거지?”

“보채긴 뭘 보채……. 게다가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양복 안쪽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안주머니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 꺼낸다. 담배다.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창가로 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자, 일레이가 느긋하게 뒤따라왔다.

“문지기 안 해도 돼? 어르신 나올 때까지 문지기 하는 거 아니었어?”

노인을 이곳까지 모시고 온 그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창밖으로 연기를 뿜어낸 정태의는, 창틀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이 복도에 감시해야 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정태의의 옆, 창가에 기대어 선 일레이는 재미있다는 듯 눈매를 구부리고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뻔히 느끼면서도 정태의는 고집스레 창밖만 쳐다보았다.

“네가 꼬인 건 오랜만에 보는군.”

일레이가 말했다. 아르릉거리는 하룻강아지라도 보는 듯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정태의는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워낙 세차게 뻑뻑 빨아 댄 탓인지 혹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담배인지, 몇 모금 빤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반 너머 줄어들었다.

“크리스토프가 괴롭히던가? 어차피 타르텐에서 추방령을 받았다고 해서 슬퍼할 녀석도 아닐 텐데.”

“……. 베를린으로 돌아가야겠어.”

일레이는 잠깐 입을 다물고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내뱉고선 저만치 떨어진 가로수길을 노려보며 담배만 피워 대는 정태의를 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것 반가운 소리이긴 한데, 갑작스럽게 심경이 변한 이유가 궁금한걸.”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금세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버리고 한 개비 더 입에 문다. 그러는 동안에도 옆에 선 남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개비 더. 세 개비째를 반쯤 태웠을 때.

“이렇게 우울할 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보면서 안도감을 느낄 만큼 인생 막장인 나도 있는데.”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렸다. 여전히 시선은 고집스럽게 멀리로 주면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면서 일레이는 잠깐 기묘한 얼굴을 했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혹은 전혀 상상조차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약간 당혹스런 표정이 얼굴 위를 스쳤지만, 정태의는 앞만 노려본다.

“……. ……그런데.”

일레이는 천천히 그 뒷말을 재촉했다. 정태의는 다시 한 번 길게 연기를 뿜어낸 다음에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녀석은, 그것도 없어. 그조차 없어.”

“아하.”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세 개비째의 담배를 다 태운 정태의가 한 개비 더 꺼내려 하자, 그 손에서 담뱃갑을 빼앗는다.

그제야 정태의는 겨우 일레이에게 시선을 돌려 불만스럽게 쳐다본다.

“뭐……어쨌든 저렇게 추방령도 내렸으니, 저 녀석이 이제 여기에서 나가면 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겠어.”

“흠. 크리스토프가 나가면 너도 같이 돌아가겠다?”

“어. 어차피 원래부터 그에게 책을 받으러 왔으니까 다른 볼일은 없거든.”

“그래…….”

일레이는 이번에는 자신이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고,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넣는다. 가만히 연기를 창밖으로 내뿜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럼 당분간 여기 더 있게 되겠군.”

“어?”

“크리스토프는 어쨌든 승계 결정이 난 뒤에야 떠나게 될 테니까.”

일레이의 말에 정태의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정태의를, 일레이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타르텐에서 바로 나가라는 결정이 났잖아.”

“안 나가게 될 걸. 바로는.”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크리스토프의 방문을 쳐다본다.

방 안으로 들어선 노인은 정태의가 세 대의 담배를 연달아 피우는 동안 그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

“결정이 번복된 건가? 어르신이 직접 결정을 엎기라도 하셨어?”

“결정을 엎은 건 어르신이 아니지. 너도 들었잖아.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서 받을 것을 받아내겠다고 한 말.”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거절했다.

그래서 어르신이 몸소 나서 크리스토프를 설득하러 왔다면 모르겠지만, 리하르트의 말만으로 움직일 위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르신은 크리스토프에게, 이곳에 남아서 리하르트를 도우라고는 하지 않아.”

정태의의 생각을 읽어낸 듯 일레이가 말했다. 가벼운 간식이라도 먹는 것처럼 연기를 뱉어내는 일레이는 어딘지 즐거워보였다.

“그러나 두 번 다시 타르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도 하지 않지.”

“……뭐야, 그럼.”

“언제나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타르텐이라는 이름을 잊지 말고. 그것이 당신이 늘 하시는 말씀이지.”

정태의는 일레이가 뱉어낸 연기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금세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그 잿빛 연기를 눈으로 좇다가 한숨을 쉬고 만다.

“저런 분 아래에서 자랐는데 왜 애는 저 모양이야.”

“왜일 것 같아.”

일레이의 반문에 정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해도 입 밖으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 난 그만 방으로 가서 쉬어야겠다. 내일 아침에 크리스토프가 나갈 때에 같이 나가서 베를린으로 돌아가려면, 오늘은 일찍 쉬는 편이 낫겠어.”

“내일이라.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일레이는 그 말만 하곤 미묘하게 눈을 구부렸다.

정태의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뭐라고 입을 막 열었을 때였다.

크리스토프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볼일을 다 마친 듯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모습 그대로 노인이 걸어나왔다.

방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리는 순간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일레이는, 덜컥 놀라서 아래의 화단에 불이라도 나지 않나 뚫어져라 살피는 정태의를 뒤에 두고 그쪽으로 다가섰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그럼 본관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럴 것 없네. 자네는 아직 이야기를 덜 한 모양인데, 마저 이야기하고 오늘은 쉬도록 하게. 나는 기왕 온 김에 아래층으로 가서 조카들이 어쩌고 있나 둘러보기라도 하려니.”

노인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일레이의 등 뒤에서 뒤늦게 몸을 돌려 노인을 보고 어색하게 웃음 짓는 정태의를 본다.

“자네도 공연히 바쁘겠군. 그래도 타르텐에 머무르는 동안은 즐겁게 지내도록 하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는가.”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노인의 뒤를 쫓아 일레이가 다가갔지만 노인은 어깨너머로 몇 마디쯤 사양하는 말을 던지며 손을 저었다. 일레이 역시, 사양하는 노인을 굳이 따라갈 마음은 없는 듯 두어 번 다시 동행을 제안하다가 곧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노인은 느긋하게 복도를 나아가 곧 중앙계단으로 꺾어져 시야에서 사라졌고, 정태의는 그런 뒤에도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일레이의 옆으로―정확히는 자신의 방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걸어갔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인상 좋으신 영감님인걸.”

“아아, 지금은.”

마치 예전에는 달랐다는 듯한 그 말에 정태의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바라보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일레이 역시 물어보지 않은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긴 이 정도나 되는 집안을 일구어내려면 그냥 인상 좋고 푸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나름대로의 부정적인 성정도 틀림없이 갖추고 있을 터였다. 그런 것은, 깊이 알고 지낼 관계가 아닌 이상은 몰라도 된다. 모르는 편이 낫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나는 그만 방으로 가련다. ……크리스에게 인사나 해 둘까.”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던데,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방으로 가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정태의의 뒤로 다가온 일레이가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크리스토프, 자나?”

그 거침없는 태도에 정태의가 가볍게 이마를 짚으며 그렇지, 원래 이런 놈이었지, 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는 가운데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노인이 돌아간 직후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와 똑같은 모습일 듯, 그는 테이블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노인이 앉아 있었을 그 건너편의 빈 의자를 쳐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혹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인형처럼―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 괜찮아?”

정태의가 묻자, 얼마간 사이를 두고 난 뒤에야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정태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것 같은 그 정면의 접근에 정태의가 어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가 향하는 곳은 정태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옆을 스쳐 지났다. 정태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 듯, 어깨가 닿을 듯 가깝게 스쳐 지나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태의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일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문을 박차고 나간 그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갔다. 다소 초조한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어……?”

정태의는 멍하니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돌아본 자리에 크리스토프는 없었고, 흐음……하고 문밖을 바라보는 일레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바깥에서 시선을 거둔다.

“저 녀석은…….”

갑자기 어딜 간대……, 라고 뒷말을 잇지도 않은 채 정태의는 말을 흐렸다. 넋이라도 나간 듯 뛰쳐나가는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가 봐야 할까 싶었지만,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창가로 걸음을 옮기는 일레이를 보자 허둥거릴 마음도 줄어들었다.

“갑작스런 볼일이라도 생각났나 보지.”

창가에 선 일레이는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즐거운 듯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이 남자는 기분이 꽤 좋은 편인 모양이다.

정태의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로 몇 걸음 앞 침대 발치에 있던 스툴에 푹신하게 주저앉았다.

방으로 돌아갈까. 그래, 방으로 돌아가자. 가볍게 씻고 잠자리에 드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일 것 같았다. 자기 전에 맥주 한 캔쯤 마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러나 그대로 일어서 돌아가려 하니, 홀연히 사라져 버린 이 방의 주인이 마음에 걸린다.

“설마 이 어두운 시간에 정신 빼놓고 말이라도 달리는 건 아니겠지, 위험하게.”

요전에도 약간 아슬아슬해 보이는 상태로, 갑자기 말을 달리겠다며 뛰쳐나갔었다. 지금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글쎄, 설령 그렇다 해도 크리스토프라면 위험하지는 않을걸. ……그런데 태이.”

문득 일레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는 듯했다. 정태의는 무거운 고개를 들어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사이에 못다 한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창틀에 손을 짚고 어두워지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일레이가 어느샌가 돌아서 창에 기댄 채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웃음 비슷한 표정을 띤 얼굴은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역시 오늘 밤은 왠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중에 끊겼던가?

의아하게 지켜보는 정태의에게로 일레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리게 다가오는 그 모습이 어쩐지 먹잇감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맹수 같아, 본능적인 위기감이 느껴진다.

이상하다. 표정도 잔잔하고 알 듯 말 듯하게나마 웃고 있는데 어째 등골이 서늘하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는데,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물어볼까. 크리스토프와 뭘 했었다고?”

즐거운 듯이 묻는 그에게 “응……?” 하고 넋 놓고 대답하면서, 정태의는 생각했다.

그래, 눈 때문이다. 입가에는 옅게 웃음이 배어 있는데, 웃는 것처럼 가늘게 굽어진 눈매에는 섬뜩한 뭔가가 담겨 있었다.

“크리스토프와, 뭐……?”

이야기의 맥락을 얼른 알 수 없어 멍하니 되묻자, 일레이가 정태의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친절하게 짚어준다.

“아까 크리스토프를 부르러 왔을 때, 하던 얘기를 멈추었었지. 그 이야기를 계속 들어 봐야겠는데. 어디, 크리스토프와 비역을 했다고 했던가?”

일레이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정태의는 갑자기 찬물을 맞고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피로마저 싹 가셨다.

그러나 정태의가 움칫 눈을 크게 뜨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일레이는 그에게서 네댓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까지 와 있었다.

“잠깐, 잠깐! 넌 지금 아주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어!!”

“오해라.”

일레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스툴 위에 걸터앉은 정태의의 한 걸음 앞에서.

슬슬 엉덩이를 뒤로 밀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스툴에 앉은 채 물러나 봐야 고작해야 몇 인치쯤이다.

“먼저 말해 두자면, 절대로 그런 적 없어. 난 여태 누구랑 몸을 섞은 적은 너밖에―그러니까, 너랑 만난 뒤로는 너와 말고는 한 적이 없다고, 단 한 번도!”

“그래? 그것 우연이군. 나도 너와 잔 뒤로는 다른 사람과 잔 적이 없는데.”

여전히 담담하게 말하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말았다.

마치 ‘나는 너에게 정조를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그 말이, 어쩐지 몹시 의외였다. 그야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마구 놀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직접 듣고 나자 새삼스러운 놀람이었다.

“어……, 그, 그래? 나도…….”

괜히 쑥스러워져서 목덜미를 긁적이는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 역시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고 나자 살짝 사고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정태의의 귓가에 일레이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래, 그러면 크리스토프의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아, 그거. 너도 알다시피, 그놈이 좀 숙맥인 데가 있잖아. 전에 내 사타구니를 좀 주물렀었는데, 그걸 두고 하는 말이야.”

“아하. 네 사타구니를? 크리스토프가? ……어쩌다 그런 일이 다 벌어졌을까, 응?”

“아, 그건―.”

천진하게 입을 열던 정태의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바로 눈앞에서, 일레이가 장갑을 벗고 있었다.

사람의 목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무참하게 따 버리는 그 장갑을 어깨너머로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나자 하얀 손이 드러났다.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늘 장갑을 끼고서 사람을 해치는 그가 장갑을 벗는다는 건, 처참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전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장갑을 낀다면 그게 더 불안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장갑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그 대신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드러나자 정태의는 갑자기 심장이 큼직하게 튀어올랐다.

“아니, 그, 너도 알다시피 그놈이 뭘 좀 모르잖아, 그래서―.”

“그래서, 사타구니를 좀 주무르고서 그걸 비역이라고 한다? 하하, 그놈 참. ……그러니까 지금 그놈 머릿속에서는, 너랑 그놈이 아주 대단한 관계라도 맺은 걸로 되어 있다, 그 소리겠군.”

“응? 어―그―, 얘기가 그렇게 되나……?”

이상하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태의가 의도하고 바라는 방향과는 딴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놈은, 지금 너와 나의 관계나 너와 그놈의 관계나 비슷비슷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뜻인데.”

“설마 그럴 리야…….”

정태의는 애써 부정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는 하얀 손으로 손목의 커프스를 풀면서 발을 들었다. 정태의가 앉은 스툴의 프레임에 살짝 발을 걸치더니, 거침없이 그 발로 프레임을 걷어찼다.

“……!!”

스툴이 바닥을 끌면서 밀려 침대에 부딪혔다. 스툴에 앉은 채 그대로 밀려난 정태의는 침대에 부딪힌 가벼운 충격에 살짝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균형을 잃었다고는 하나 두세 번 상체가 흔들린 정도였지만, 다시 균형을 찾고 몸을 바로잡았을 때에는 이미 전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희고 아름다운 손이 정태의의 쇄골 아래를 덮더니, 그대로 밀어 넘어뜨렸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전히, 그 아름다운 모양새에서는 상상도 못 할 괴력이었다.

“태이. 전에 분명히 새겨 뒀던 것 같은데. 이건 내 거라고.”

그 손이 쇄골 아래에서부터 복부까지 느리게 짓누르며 내려간다. 몸을 쓸어내리는 묵직한 무게감에, 정태의는 숨을 멈춘다.

뭐가 네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히 이 남자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막무가내로, 그는 그 억지스러운 주장을 정태의에게 새겨넣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바지의 앞섶 근처까지 내려간 손은 방향을 돌려 셔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맨살 위로 다시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에서 가슴으로, 몸을 손바닥으로 샅샅이 훑으면서.

서늘해 보일 정도로 하얀 손이 이렇게 뜨겁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걸 다른 놈이 멋대로 굴려서야 되나. 아무리 너라고 해도,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함부로 내돌리면 안 되지. ……왜 내 걸 네가 멋대로 다른 놈한테 내줘, 응?”

“내주긴 뭘 내줘, 안 내줬어……!”

그 전에, 어째서 이게 네 거냐고 먼저 따져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말해 봐야 씨도 안 먹힐 것 같았고, 그 이상으로 덜컥 솟구치는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아무에게나 몸 주고 다니는 헤픈 놈 같지 않은가.

그러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정태의의 외침은 아랑곳 않고, 일레이는 어렵잖게 다른 손으로 그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끌어내리자 허리 아래로 허벅지까지 서늘하게 공기 속에 드러난다.

“그새 잊어버렸나? 그럼 몇 번이든 다시 새겨 주지. 얼마나 더 새겨 줄까. 어느 정도로 깊이 새겨 주면 다시는 까먹지 않으려나. 이 몸뚱아리는 내 거라고.”

그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아까부터 줄곧 보여 준 그 표정처럼, 즐거운 웃음기마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이 느슨하게, 그러다 어느 순간 손을 떼며 ‘장난이었는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도록.

그런데도…….

“……. 화났어?”

정태의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웃고 있는데도 어쩐지 속이 뒤틀린 것 같다. 타르텐을 방문한 리그로우의 세련되고 말쑥한 가면을 뒤집어 써 크게 감정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속이 비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 그래, 분명히 내 걸 네 마음대로 다룬 점에 대해서는 화가 나기도 하는군.”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은 하는데……역시 화났나 보다.

정태의는 내심 혀를 찼다.

생각해 보면, 어쨌든 살을 섞고 사는 사이다. 비록 이 남자가 정태의를 어떤 식으로 여기며 함께 지내는 것이든, 같은 집에서 살 섞고 사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그런 식으로 터치를 했다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설마 이 남자가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질투나 투기를 할 위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미안.”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과를 덧붙이려던 입은 도중에 닫히고 말았다.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던 아랫도리가 갑자기 뜨끈해졌다.

“일……!”

그 이름마저, 부르려다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새어나올 뻔해서, 정태의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정태의의 엉덩이에서 허벅지를 감싼 두 손이 손쉽게 그 몸을 허공에 띄우는가 싶더니, 서슴없이 그 가운데에 풀죽어 있는 살덩이를 입에 물었던 것이다.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엉겁결에 일레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자신의 사타구니를 입에 머금고 있는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그러쥐고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당황해서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야 무리였다.

“…―!!”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오히려 남의 성기를 입에 문 쪽이 더 수줍어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 남자는 태연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태의의 성기에서부터 그 뿌리 부근의 살덩이까지 살짝살짝, 잘근거렸다.

“일, 일레, ―…!! 잠, 잠깐, 잠……!!”

“다른 놈 손을 타고서 맛이 변하진 않았나 봐야지. 얌전히 있어.”

잠시 입을 떼는가 싶던 일레이는, 그 말만 하고는 다시 성기를 느리게 힘주어 핥아올렸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를 밀어내려다가 포기하고 대신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을 덮고 말았다.

목욕탕에 불이 나면 얼굴만 가리고 뛰쳐나온다는 게 이런 심경일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 생각조차 이내 날아가 버렸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어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축축한 소리까지 가려지지는 않았다. 뭔가를 먹는 듯한 소리와 질척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몹시 외설스러운 소리가 난다.

구음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예 실올 하나 걸치지 않고 짐승처럼 뒹군 적도 있으니, 이 정도야 새삼스러워할 일도 아니다. 아니지만. 그래도.

정태의는 ‘그래, 이 정도야 늘 하던 거에 비하면’ 하고 애써 스스로를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늘 하는 행위도, 늘 하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능수능란하게 리듬에 맞춰 허리를 흔들며 마음 편하게 스포츠 기분으로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남자가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 지금처럼.

“……악!! 긁, 긁지 마, 아파!!”

“아픈 게 아니라 몸이 달기 시작하는 거겠지.”

성기를 문 채로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가벼운 감각도 그렇지만, 어느 결엔가 사타구니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주름을 매만지다 그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을 긁어 몸이 움찔 튀어올랐다.

그 손에서 달아나려고 몸을 버둥거리자, 성기를 물고 있던 입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간다. 살갗 위에 단단한 이를 살짝 세워,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쭈뼛 섰다.

“깨물지 마! 나 죽어!!”

“얌전히 있으면 안 깨물어. 몸에 힘 빼고.”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자국이 멍처럼 남을 만큼 센 악력이다.

얌전히 안 있으면 깨물고도 남을 남자였다. 실제로 몇 년 전이었던가, 비슷한 상황에서 정태의가 설마 깨물겠어, 하고 이 남자의 어깨를 냅다 걷어차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병원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만 호되게 물려, 며칠간 잇자국이 고스란히 남았을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로 아팠다. 정말로 정말로 아팠다. 수십 초쯤 기절마저 했다. 저 희고도 매서운 손에 뺨을 얻어맞고도 못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것이, 일레이 리그로우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 본,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그 뒤에 물린 적은 없지만, 그 경험도 일종의 정신적 외상으로 남은 모양이다. 그 뒤로 이 남자가 구음을 하려고 아랫도리로 입을 가져가면 저절로 몸이 긴장했다.

지금처럼.

“몸에 힘 빼.”

남의 성기를 입에 물고도 잘도 중얼거리는 그는, 정태의의 몸속을 헤집던 손가락으로 점점 큰 원을 그리며 휘저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마치 전류를 짤막짤막하게 흘려보내는 것처럼 성기를 감싸고 아프지 않을 만큼 긁거나 문지르는 그 입 안의 감촉과 함께 몸속을 벌려 대는 감촉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 빼라니까.”

일레이가 혀를 찼다. 동시에 몸속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약간 거칠게 구부려 몸을 벌렸다. 으, 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구부리며 정태의는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빼고 싶어도 안 빠지는 걸 어떡…―, 아, ……아, 아!!”

반쯤은 울먹이다시피 호소하는 정태의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손가락이 몸속을 긁었다.

얄밉게도, 정확하게 정태의의 자극점이었다.

금세 반 너머 훌쩍 일어선 성기를 머금고 있던 입도 더욱 빡빡해졌다. 끈끈하게 감기는 혀며 세차게 빨아들이는 입 안의 점막에 숨이 막혔다.

순식간에 절정이 다가왔다. 무겁게 힘을 얻고 일어선 물건은, 정태의가 숨을 멈춘 순간 거의 동시에 폭발을…―.

“……?!”

……해야 했다. 하얀 손이 밑둥을 움켜쥐고, 그렇게 세차게 빨아올리던 입이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져나가지만 않았더라면.

“일…….”

정태의는 반쯤은 넋을 놓은 듯, 어리둥절하게 일레이를 보았다.

절정 직전에서 물건을 움켜쥔 일레이는, 그 끄트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잘 듣고 고개를 끄덕이도록 해, 태이. 첫 번째, 또다시 다른 놈이 네 사타구니를 건드리는데도 얌전히 있는다면, 나는 그놈부터 없애 버린 다음에 네 물건을 평생 나 아니면 못쓰게 만들어 버리겠어. 나와 함께 있지 않은 동안에는 늘 몸속에 딜도를 박아 넣고 정조대를 차고 다니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몸을 굴려도 좋아.”

몸을 태우던 쾌락이 갑자기 인내의 고문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에서 몽롱하게 그의 말을 듣던 정태의는, 곧 낯이 허옇게 변해서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일레이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 번째,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 너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라. 어쭙잖게 다른 놈을 돕는답시고 나섰다가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네가 도우려고 했던 놈은 더 험한 꼴을 보게 될 거고 너도 그 상처가 흉터 하나 없이 나을 때까지 울면서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뭐……! 상처가 어쩌다가 날지 어떻게 알고……! 아니 그것보다 딜, 정, ……!! ……남의 사타구니를 건드리는 놈이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다가 공중목욕탕이나 풀 같은 데서 스치기라도 할 수도 있잖아!!”

정태의는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며 외쳤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농담이어야 하는 말도 농담이 아닌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한 마디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평범하게 생활을 하다가 상처가 나는 거야 물론 어쩔 수 없겠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우연히 아랫도리가 스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그 판단은, 고의성의 정도에 따라 내가 한다. ……알아 들었겠지?”

“그런 횡포가 어딨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그러나 목청껏 외치던 정태의의 항의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사타구니의 밑둥을 그러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낼름, 귀두를 핥아올리는 혀와 동시에 몸속의 자극점을 정확하게 짚어 긁어대는 손끝이, 불꽃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간 아랫도리에 기름까지 부었다.

“이봐, 내가 무슨…….”

“너는 고개만 끄덕이면 돼. ―내 말, 알아들었지, 태이.”

정태의가 울먹이며 호소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일레이의 추궁만 되돌아왔을 뿐이다.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면 무덤을 파는 격일 것 같은 예감이 막연하게 들어 정태의가 불안스런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만 보고 있자, 아래를 건드리고 있던 손의 힘이 더욱 세어졌다.

“악……, 잠깐잠깐…….”

지금은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의 자극이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고통스런 수준으로 넘어설 것 같았다. 정태의는 다급해졌다.

황급히 일레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지만 일레이는 대답을 촉구하듯이 물건을 두어 번 훑어올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리를 낮추며 매끄럽게 속삭인다.

“왜 그러지? 아무런 문제도 없잖아. 다른 놈이 네 몸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도록 하고, 다른 놈들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만 않으면 되는 건데. 사실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한 일일 텐데, 응?”

“그, 야 그렇지만…….”

그러나 그 말에 붙는 단서가 너무 무시무시하다. 상상만 해도 머리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초조하게 입만 달싹이는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좀 더 생각해 봐. 네가 생각하는 동안 나는 내 볼일을 보고 있을 테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한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속을 파고들며 찔러 대던 손가락으로 안쪽을 몇 번 더 큼직하게 휘저었다. 질척하게 젖기 시작한 아래에서 낯붉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에 낯을 붉히기보다 먼저.

“……잠깐!! 할게, 할게! 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봐. 그래, 한 십여 분 더 생각해 보도록 해. 그래야 나도 느긋하게 맛볼 테니.”

거의 비명에 가깝게 외치다가 숨을 삼키는 정태의의 아래에서, 일레이는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한 곳을 천천히 혀끝으로 덧그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몹시 회가 동하던 참이었거든. 이렇게 맛깔나게 충혈되어 꿈틀거리는데, 과연 얼마나 신선한 맛일까 하고.”

나직이 웃는 그의 숨결이 아랫도리를 간지럽혔다. 그조차 견디기 힘들어, 정태의는 차라리 몸을 구부려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 쪽을 택했다.

이 자식, 거기에 얼굴 파묻고 숨이나 막혀 죽으라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독설을 내뱉었지만, 곧 그런 생각을 할 여유마저 없어졌다.

***

‘나는 이 땅에서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내키지 않는구나.’

노인은 넉넉하게 웃음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노인의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노인의 가슴팍만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크리스토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늘 어려운 사람이었다. 함부로 다가가서도 안 되고 바라보아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마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노인을 좋아했다. 존경하고 사모했다. 종교를 가진다면 이럴까 싶도록.

‘네가 언제까지든 바깥을 자유로이 다니다가 언제든 지치면 이곳에 와서 잠시 쉬어간다면 좋겠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이곳만큼 네게 잘 어울리는 곳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곳은 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다. 어디든 그렇듯 이곳도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말한다. 이곳이 그에게 어울린다고.

‘앞으로 얼마 되지 않는 기간, 그 아이에게 힘을 보태 주면 어떻겠느냐.’

노인이 조용히 말했을 때, 크리스토프는 멈칫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가슴팍에서 주름진 목, 웃음기가 밴 입, 약간 굽어졌으나 보기 싫지 않은 코, 이어 바깥쪽으로 웃음주름이 새겨져 있는 눈매.

해가 넘어가 이미 하늘은 군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는데도, 노인의 눈은 볕을 받은 것처럼 금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맑게 비치고 있었다. 마주본 사람의 더러움을 비출 것 같은 눈이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말하고 있었다. 리하르트를 도와주라고.

그렇게 해서 타르텐으로부터의 추방령을 거두도록 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물러나 조용히 나이를 먹어 가는 늙은이가 되면, 네가 가끔 찾아와 내 말벗이나 되어 주렴.’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노인의 말꼬리에서, 희미하게 죽음의 향기가 풍긴다. 그것은 아직은 저만치 멀리 있는, 아스라하고도 평온한 향기다.

그러나 이미 노인의 시간은 젊은이의 시간과는 흐름의 속도도, 질감도 달라져 있었다.

이제 노인은 거의 다 타들어가 하얀 재만 남은 숯의 마지막 불씨로 손끝이나 쬘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일어서 떠나게 될 터였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혼자만의 쉼터로.

크리스토프는 아주 약간 입술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스스로도 몰랐다.

노인은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크리스토프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노인은 문득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손을 잡는다.

주름진 손이 자신의 손에 얹히는 순간, 그 낯선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간신히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게 움츠러든 손을, 노인은 세게 쥐지도 않았지만 놓지도 않았다.

‘크리스토프. 너는 내 사랑스런 아이야. 이 타르텐에는 누구든,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는 없지. 너는 내 곱고 사랑스런 아이다. 나는 오로지 너희들을 위해 타르텐을 키웠고, 너희들이 없으면 타르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노인이 속삭였다.

그는 가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정확히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심장을 꾸욱 움켜쥐는 것 같은 말이다. 어쩐지 숨을 쉬기가 갑갑해지는, 심장이 아픈, 그러나 불쾌하지 않은 그런 말들을, 그는 가끔 말해 주곤 했다.

노인의 말이라면 뭐든 듣고 싶었다. 그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러면 크리스토프도 좋았다.

그런데도.

크리스토프는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직도 몸속 깊은 곳이 굳어 있었다. 전화 속에서 들려온 그 찢어지는 비명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틀림없이 그 아이와도 잘 지낼 수 있을 게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거야.’

뭐가?

무엇이 달라진다는 건지 크리스토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물어보지 못했다. 노인이 붙잡고 있는 손의 낯선 온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금방이라도 뿌리쳐 그 낯선 감각을 떨어내고 싶었다. 싫지는 않은데도 낯설어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감각이 아닌 타인의 살갗이 생경해서 어서 헤어나고 싶었다.

‘크리스토프. 이곳을 떠난 뒤에도 간혹 나를 찾아 주겠니?’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이제 타르텐에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 결정했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니라고 대답하면 좋을 텐데, 그 대답도 할 수 없다.

한쪽 귀에서는 여자가 흐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쪽 귀에서는 노인이 조용조용하게 속삭이고 있다.

그 소리들은 서로를 방해해, 두 소리 모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자신이 아닌 무언가에게 지배당하는 것 같은 감각이 몸을 천천히 채워 간다. 예전에 몇 번이나 맛보았던 감각이다. 소름끼치게 싫은.

노인은 끝내 대답하지 않는 크리스토프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웃음 지으며 가만히 크리스토프의 손을 두드렸다.

‘그만 쉬거라. 천천히 홀로 생각해 볼 시간을 빼앗아서야 안 될 말이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돌렸다.

초조해졌다. 그를 붙들고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겠다고, 당신의 말은 뭐든 따르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갑게 식은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크리스토프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고, 노인의 인자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문이 닫혔다. 눈앞에서. 조용히. 굳게.

문 바깥에서 노인이 누군가 낯익은 목소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얼마 있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그 소리는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리그로우와 정태의가 들어왔지만, 마찬가지였다.

노인의 발자취가 사라져 버린 그 공간에서, 크리스토프는 홀로 우두커니 머물러 있었다.

―크리스토프. 너는 내 사랑스런 아이야. ……너는 내 곱고 사랑스런 아이다.

불현듯.

노인의 나직한 말이 그제야.

그렇게 뒤늦게야, 크리스토프의 뇌에 이르렀다.

갑자기 심장이 아팠다. 욱신, 피를 짜내는 듯이 수축한 탓에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크리스토프는 일어섰다. 그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뒤를 쫓아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분을 따라잡아, 그분께 말씀드려야 했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겠다고.

고작해야 며칠 남짓이다. 그놈을 도울 수도 있었다. 달포도 채 남지 않은 시간, 그놈과 부대끼는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테니.

타르텐 따위에는 미련이 없었다.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더라도 자신은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르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을 찾아뵙고, 당신의 산책길 동무가 되고, 말벗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서슴없이 본관으로 갔다. 본관에 있는 노인의 방으로.

아마도 지금 노인과 마주서게 되면 크리스토프는 다시 아무 말도 못하겠지만, 노인은 틀림없이 크리스토프의 뜻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웃음을 떠올리며 크리스토프는 한달음에 본관의 가장 안쪽, 저택 안에서 가장 안락하고 조용한 노인의 방에 들이닥쳤다.

“…―.”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노인은 어딘가 다른 곳을 들러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테지만, 공연히 초조해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말하고 싶었다. 어르신의 말씀을 따르겠노라고.

어디에 가셨을까. ……그래. 서익에 들르신 김에 서익을 둘러보고 오실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리하르트일지도 몰라. 요 얼마간 어르신은 십중팔구는 자신의 뒤를 잇게 될 리하르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알려주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 지금도 리하르트의 방에 들러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 같았다.

그 보기 싫은 녀석의 방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어르신이 말씀하신 바를 따르려면 어차피 한동안은 자주 얼굴을 맞대야 한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자신의 방에서 한 층 아래에 있는 리하르트의 방으로 향한다.

―왜 그렇게 리하르트를 싫어해?

언젠가 정태의가 물은 적이 있었다. 굳이 정태의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들어 본 물음이다.

좋은 데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싫은 데에도 이유가 없다. 어떠한 일을 계기로 좋고 싫어지는 경우보다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좋고 싫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애초에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싫어했다. 그 이유는 모른다. 어느 순간 불현듯 느낄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구나.

그리고 차차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 혼자야?”

노크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리하르트의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 크리스토프는, 문 앞에 서서 미심쩍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방 한쪽에서는 리하르트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가 통화를 하든 말든,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보곤 낯을 찡그렸다.

“어르신은?”

“……잠시만요.”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수화기를 향해 조용히 말을 하고 대기 버튼을 누른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무슨 일이지, 크리스토프. 네가 내 방으로 찾아오다니 별일이군.”

“…….”

크리스토프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노인은 여기에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왔다 갔는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건 확실했다.

비록 노인을 찾아 이리로 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마주친 차에 리하르트에게 할 말은 있었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라,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리하르트를 거들기로 했으니 그 말을 해야 했다.

―앞으로 승계가 결정될 때까지 한동안,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 일을 도와주겠어.

“…….”

그러나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을 뿐,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기가 싫었다.

리하르트는 끈기 있게 크리스토프의 말을 기다렸다. 크리스토프는 말을 꺼내려다 낯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기를 두어 번 거듭했다. 스스로가 초조해져서 혀를 차고 만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어 손을 깍지끼며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그 시선 위로 느긋하면서도 유쾌한 빛이 스친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는 크리스토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크리스토프는 입을 다물었다. 새파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입술을 짓씹으며 걸음을 돌렸다.

어떻게?! 그건 뻔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르신에게 어떤 식으로 청을 드렸는지는 몰라도, 그는 크리스토프가 이렇게 행동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미친 듯이 화가 나 속이 뒤집혔다.

걸음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 방문을 있는 대로 두들겨 닫으려는 찰나, 등 뒤에서 느린 목소리가 크리스토프를 불러 세웠다.

“어르신이라면 여기에는 계시지 않아. 크리스토프.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나? 가기 전에 이야기는 마치고 가지 그래.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텐데.”

멈칫.

크리스토프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가 멈춰 선 이유는 리하르트가 이야기를 마치고 가라고 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저 여유로운 말투가 몹시 거슬린 탓이다.

“…―어르신께는 네가 말씀드렸나?”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묻자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눈매에 웃음기가 묻어나온다.

“어르신께? 내가? 무슨 말씀을?”

“모른 척할 작정으로 날 불러 세우진 않았을 텐데, 리하르트.”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저 남자의 얼굴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어서이다.

저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저런 면은 정말로 싫었다.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면서, 그 뒤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늘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는 듯하면서 나중에 깨닫고 보면 모든 사태가 이 남자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일이 부지기수다.

크리스토프는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아주 조그만 낌새라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듯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그리고 리하르트는, 이윽고 웃었다. 천천히. 그 상냥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크리스토프의 입매가 꿈틀했다. 리하르트가 그에게 저런 웃음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뭔가 속셈이라도 있지 않은 바에는.

“어르신께―그래, 딱히 내가 어떻게 말씀드린 건 아니지만, 어르신께서 아쉬워하시기에 위로를 해 드린 것뿐이야. 너는 그분께서 특히나 어여쁘게 여기시니까.”

“…….”

“물론 단순히 그뿐은 아니라, 네가 내 일을 거든다면 타르텐으로서도 나쁘지 않으니 어르신도 네게로 가신 거겠지만. 그래, 어르신께서는 네게 뭐라고 하셨지?”

깍지 낀 손이 가볍게 무릎을 두드렸다. 저 여유로운 손짓도 거슬렸다. 저 느긋한 웃음도. 굽어지는 눈매도.

“……너는 날 싫어하잖아.”

크리스토프가 불쑥 말하자 리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맥락이 끊겨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에게, 크리스토프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왜 내게 네 일을 거들게 하려는 거지. 이대로 두 번 다시 안 볼 수 있는데.”

그제야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아, 그거,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별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첫째, 타르텐을 위해서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창 쪽으로 걸음을 옮겨 커튼을 걷고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어찌 되었든 곧 내가 물려받게 될 곳이야. 이곳을 번영시키는 것이 나의 책임이자 바람이지. 그리고 너는,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타르텐의 교육을 받은 데다, 무엇보다도 현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어. 곧 중동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현재, 너는 나를 거들어 타르텐을 위해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인물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그 사이로 불어 들어왔다. 창밖으로 아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둘째, 승계 결정을 위해 더없이 중요한 이 시점에서, 네가 내 영역에 들어와 난장판을 친 덕에 내 평판은 몹시 엉망이 되었어. 만사에 완벽하고 어떠한 문제든 능란하게 해결해 내야 하는 입장에서, 말이지. 즉 통솔력과 지배력을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다는 소리다. ……아주 고마워, 크리스토프. 이렇게 다시 나를 방해해 줘서.”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미묘한 웃음이 담겨, 뭔가 기분 좋은 일을 앞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네가 내 아래에서 나를 돕기로 한다면 그런 점은 무마시킬 수 있게 되지. 사이가 좋지 않은 인간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 이런 면에서, 너는 충실하게 나를 도와야만 해.”

리하르트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문득 흘러드는 서늘한 밤바람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그 공기를 즐기던 리하르트는, 이어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마지막 이유를 말했다.

“셋째로는, 네가 싫어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리하르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아주 약간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나 굳이 화를 내진 않고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솔직해서 좋군.”

“잊지 마, 크리스토프. 너는 원래 승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내 밑에서 움직일 터였어. 네가 그렇게 비겁하게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너는 죽을 때까지 내 아랫사람이었단 말이다. ―그게 고작해야 며칠, 날 돕는 걸로 줄었어.”

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크리스토프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줄곧 여유롭던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억누른 험악함이 배어나왔다.

크리스토프는 지그시 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하지 않아. 네가 바라는 짓을, 내가 해 줄 것 같나?”

비아냥마저 섞인 그 말에도 리하르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도리어 다시 매끄러운 이성을 되찾은 듯, 험악함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미미한 웃음을 돌이켰다.

“어르신이 네게 나를 도우라고 하셨더라도?”

“―….”

크리스토프는 설핏 낯을 찌푸렸다.

곧바로 ‘그래도 하지 않아.’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르신의 말씀이라면 뭐든 따를 생각이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며칠쯤 싫은 일을 참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럴 작정으로 왔다.

그런데도 막상 이 남자를 앞두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승낙하려는 혀를 옭아맨다.

“……하지 않, …….”

마디마디 끊기는 목소리로 말을 하다가 망설이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머뭇거리면서도 불쾌한 낯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그 시선만큼은 돌리지 않는 크리스토프를 잠시 감상하듯이 지켜보고 있던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이런, 깜빡 잊고 있었군. 너무 기다리게 했어.”

대기 상태로 돌려놓았던 전화를 향해 다가가며 혀를 찬다.

다시 수화기를 집어드는 리하르트에게, 크리스토프는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리하르트, 아직 얘기 끝나지 않았어.”

“물론 이야기는 마저 끝내야지. 그러나 그 전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야 실례이니 하던 통화는 마저 마친 뒤에. 그러잖아도 나도 슬슬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상대가 놓아주지 않아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아, 그렇지. 크리스토프, 네가 받아 보겠나? 그 편이 나을 것 같군.”

리하르트는 수화기를 크리스토프에게 내밀었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함과 험악함이 뒤섞인 눈으로 그 수화기와 리하르트를 번갈아보았다.

“왜 네 전화를 내가―.”

“받아보는 게 좋을걸. 네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틀림없이 도움이 될 테니.”

리하르트가 낮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대기 버튼을 해제한다.

문득 불쾌한 빛마저 사라진 크리스토프에게로 내민 수화기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그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약간의 초조함이 섞인 그 곱고 높은 목소리는, 아무리 조그맣게 수화기에서 새어나온다 해도 크리스토프가 못 알아들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삽시에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리하르트가 내민 수화기를 받아들 생각도 않고 망연히 쳐다보고만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리하르트는 가볍게 수화기를 흔들었다.

크리스토프는 눈동자만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받지 않을 텐가……?”

리하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전화를 받아들었다. 받아들면서 손가락이 스치는 순간 움칫, 손을 움츠리다가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얼른 잡아 주며 ‘이런, 조심해야지.’하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크리스토프는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초조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린다.

“……어머니.”

크리스토프가 낮게 쉬어 나올 듯한 목을 가만히 움켜쥐며 조용히 말하자, 수화기 저편에서는 잠시 말이 끊겼다. 이윽고 몇 초쯤 지난 뒤에야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토프……? 어째서 네가 거기에 있지?’

목소리가 의아한 듯 조금 더 높아졌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하고 띄엄띄엄 말하는 동안에도,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는 걸 확신하는 시선.

‘어머, 그래……, 그래……, 그렇구나, 네가 리하르트의 일을 돕게 될 테니, 나눌 이야기도 많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 크리스토프에게 전화를 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아직 초조와 불안이 희미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그보다 많이 진정되었고, 또한 기쁜 듯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리하르트가 내게 말하더구나. 오래 나가 계셨으니 슬슬 다시 타르텐으로 돌아오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럼, 아무렴, 언제든 불러만 준다면 한달음에도 그곳으로 안 돌아갈까. 그는 너그럽고 속이 넓은 사람이니, 너와 다투었던 일쯤은 이미 잊었다고 하더구나. 참 좋은 사람 아니겠니.’

크리스토프는 시선을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다시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가느스름하게 굽어지며 그 눈이 웃었다.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몸에서 핏기가 가신다.

‘크리스토프. 그를 잘 도와주려무나. 그가 네 도움을 받아 타르텐을 잇게 된다면 네게도 좋은 일 아니겠니.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란다. 응? 내 말 알겠지?’

절망과 비탄에 빠져 울부짖던 어머니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다시 타르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필경은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어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크리스토프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요.’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가늘게 손이 떨리려 했다. 그래서 수화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떨리지 않도록. 하얗게 관절이 두드러지는 그 손을 보았는지, 리하르트의 입에서 기분 좋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숨이 가빠왔다. 크리스토프는 불편한 호흡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발치를 쳐다본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귓속에서 술렁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들과 섞여서 잘 알아들을 수 없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내 말 듣고 있니?’

“아……, 예, 어머니.”

‘왜 대답이 없어. 리하르트의 일을 잘 도와줄 거지? 그의 일이 잘 되도록, 성심성의껏 잘 돕겠지? 응,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의 입술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뭔가 대답을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핏기가 가신 입술은 말마저 가셔 버렸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초조해지며 날이 섰다.

그 목소리가 불안으로 가득 차 가늘게 떨릴 무렵이 되어서야, 크리스토프는 겨우 대답했다. 목이 멘 듯 딱 한 마디, 예, 라는 말만 간신히.

그러자 다시 그녀의 목소리는 안심한 듯이 가라앉으며 들뜨고 기쁨이 넘실거리는 빛이 돌아왔다.

‘그래, 그에게 말을 잘 전해 주렴. 내가 얼마나 타르텐을 사랑하는지. 그곳에서 다시 머무를 수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응, 너는 알잖니.’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거리껴하며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크리스토프에게조차 이렇게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게 애원할 만큼, 타르텐을 열애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이 저택에 머무르는 것만이 어머니의 모든 꿈이었다. 오래전 그녀가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던 뒤로 아직껏 그녀는 수면제에 의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끝내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통화를 마쳤을 때, 그를 줄곧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어차, 하고 일어서 크리스토프가 얼어붙은 듯이 계속 쥐고 있는 수화기를 살짝 빼앗아 가만히 내려놓았다.

“모자간의 오붓한 통화는 잘 마치셨는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흠, 하고 한숨을 쉬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 그를 지켜본다. 언제까지라도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납빛으로 굳어진 얼굴로 아무데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하르트, 너, 어머니를 다시 타르텐으로 맞아들이겠다고 말했나……?”

“아아, 이곳으로 돌아와 사시는 편이 더 안락하시리라는 얘기는 했지. 내가 타르텐에서 권한이 없어 도와드리지 못해 안타깝다는 얘기와 함께.”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준다. 그 눈동자 빛깔만큼이나 새파랗게 벼린 칼날같은 시선이 리하르트와 마주쳤지만, 그는 조금도 거리끼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흐릿한 웃음이 떠오른다.

“늘 따분해 못 견디겠다는 듯한 그 심드렁한 얼굴보다 훨씬 보기 좋군, 크리스토프.”

“그래서.”

“흠?”

“너는, 네가 그럴 만한 권한이 된다면, 어머니를 다시 드레스덴으로 불러들일 마음은 있어?”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크리스토프는 알고 있었다. 비록 승계가 확정되지 않았다 하나 지금 이미 리하르트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쯤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리하르트 본인이 알고 있듯이.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물음에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약간 미간을 찌푸리면서 곤란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짧게 대답했다.

“설마.”

“……!”

그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의자에 넉넉하게 앉아 있는 그에게, 온몸을 던지다시피 해 달려든다.

이미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던 듯 별반 놀란 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은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와 뒤엉겨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묵직한 원목 의자가 저만치 나뒹굴고 두 사람이 바닥 위에 구르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너는……!!”

눈앞이 새카매질 정도로 지독한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는데도, 그 말밖에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가슴을 무릎으로 짓누르며 그 위에 올라타다시피 해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기세로 손에 힘을 주었다. 호흡이 막힌 리하르트는 당황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약간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너는, 어째서 그런……!!”

이가 갈린 탓인지 목소리마저 덜덜 떨려 나왔다.

일순간에 치솟아 눈앞을 빨갛게 물들인 그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끔찍하게 미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때린다거나 후려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도록 새카맣게 치솟은 분노 속에서 반쯤은 넋이 나간 듯 그의 목을 조르면서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때, 얼마쯤 순순히 크리스토프에게 목을 내주고 있던 리하르트는 어느 순간 크리스토프의 손목을 후려갈겼다.

제대로 기능을 하기에는 턱없이 다쳐 있었던 손목은 가벼운 주먹질만으로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어째서? 말했을 텐데. 네가 싫어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라고.”

리하르트는 짓눌렸던 목을 문지르며 두어 번 기침을 하곤,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 천만에. 그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이유다.”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가벼우나 농담은 아닌 말이다.

순간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로 살의가 스쳤다. 그의 손이 리하르트의 목 바로 위로 올라갔다.

그럼에도. 피하려고도 막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평연하게.

“날 없애기라도 할 건가? 지금 이 시점에서?”

“…―.”

리하르트의 목 위에서, 크리스토프는 손을 멈추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은 이 남자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현명하지 않은 방법이야, 크리스토프. 나라면 달리 생각할 거다.”

크리스토프는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여전히 분에 떨리지만 아슬아슬하게 억누른 낮은 목소리가 말한다.

“어머니의 바람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텐데 내가 너를 도울 이유는 없지.”

“그래? 좋을 대로. 네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말하도록 해. ‘내가 도와줘 봐야 그는 어머니를 타르텐으로 맞아들이지 않을 거라서 나는 그를 돕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그녀가 내게 연락을 하면 나는 그런 적 없다고 하면 끝이야. 그녀의 원망이 내게로 돌아올 리는 없지. 그녀가 나와 너,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테니, 가엾은 크리스토프.”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의 끝자락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이 섞인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빛이 바래 있었다.

이 남자는 크리스토프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그 사실을 크리스토프가 안다는 것도.

푸른빛이 도는 크리스토프의 입술로 잠시 시선을 주던 리하르트는, 문득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무표정한―크리스토프가 보기에는 그 사람 좋은 웃음보다 훨씬 그에게 걸맞은―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뭐, 좋아. 이렇게까지 일방적이어서야 너도 보람이 없을 테니, 이렇게 할까.”

리하르트는 가뿐하게 한숨을 쉬며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승계 결정일까지 내가 뜻하는 바를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큼 네가 따라 줘서, 내가 타르텐을 잇게 된다면.”

“…―.”

“그렇다면 네 어머니를 이 저택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걸 고려해 보겠어.”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말없이 분노가 서린 눈으로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다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코웃음 쳤다.

“고려라. 허울 좋은 말이군.”

확답이 돌아오지 않은 제안을 제멋대로 믿고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손해를 본 멍청이를, 그들 둘 다 숱하게 봐 왔다.

“그런 불안정하고 밑지는 거래를, 심지어는 너를 상대로, 나더러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네 선택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욱하고 입을 다문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보며 리하르트는 크게 선심을 쓴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러면 확답을 주지.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끝나고 나면 나는 네 어머니에게 이 저택의 한 켠을 내어주겠어. 만족하나?”

“…….”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리하르트의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던 무릎을 거두었다. 그 이상 닿아 있기도 싫다는 듯 얼른 무릎을 치우며 일어나는 크리스토프의 발목을, 그때 리하르트가 붙잡았다.

구겨진 바짓단 아래의 맨살에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자,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낯을 굳혔다.

“놔.”

뱀이라도 스친 것처럼 다리를 움츠렸지만 단단히 발목을 감은 손가락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확답을 줬어. 그렇다면 너도 네 입으로 분명하게 말해. 내 승계가 결정나는 날까지, 착실하게 내 밑에서 나를 거들어 일하겠다고.”

“…….”

“내가 하려는 일에는 결코 Nein이라는 말을 붙이지 마라. 나를 불리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말고 나를 돕되,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는 거야. 알겠지.”

리하르트의 시선이 똑바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쥔 그의 손을 노려보면서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절대로 열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을 사리무는가 싶더니, 이윽고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놔.”

“대답해.”

“알았으니 놔!”

크리스토프는 겨우 억눌러 두었던 울분이 단숨에 솟구쳐 오르기라도 한 듯 울컥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다리를 뿌리쳤다.

크리스토프의 말과 동시에 손을 뗀 리하르트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불쾌한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발목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네 입으로 알았다고 했어.”

“너야말로 나중에 가서 딴말하지 마. 그때야말로, 누가 뭐라 하든 네 머릿속에 총알을 쑤셔넣어 버릴 테니까.”

“아하,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리하르트는 유유히 말했다. 마음껏 해 보라는 투로 두 팔을 벌려 보이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머지않았다. 승계일까지는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그 시간만 지나면 이제 크리스토프는 드레스덴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가끔 남몰래 돌아와 노인의 산책길을 거들어 주고 돌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정식으로 타르텐을 찾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그러면 이 남자와도 끝이다.

이제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사람에게 내던져 주는 전별 정도로 여기면 되었다.

“뭘 도우면 되지?”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속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가볍게 울렁거리는 게, 조금만 심해지면 다시 토악질이라도 할 것 같다.

저 밉살스러운 얼굴에 토사물이라도 부어 주면 좋을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앞에서 약점이 될 만한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된다는 생각 쪽이 더욱 강했다.

가슴께를 문지르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아아, 하고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타르텐의 업무에 있어서는 여태 줄곧 이곳을 떠나 있었던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어. 너는 그저 내 비서처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 따위나 하면서, 나와의 사이가 원만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돼. 그러는 가운데, 과연 네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 인간인지 지켜보도록 하지.”

어차피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으니 부담 갖지 않아도 좋아, 리하르트가 덧붙이는 말이 귓가를 스쳤다.

크리스토프는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등을 돌렸다.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대한 비참함이 어깨를 짓눌렀다.

원래 이 방으로 올 때부터, 그에게 손을 빌려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왔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되었다.

다만 그 결정이 이루어진 형태가 몹시 거슬렸다.

이것은 온전히 크리스토프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어차피 같은 결과라고는 하나 이것은 협박과 억압으로 이루어진 쪽에 더 가까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크리스토프를, 리하르트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옷깃에 묻은 먼지 따위를 털어내는 손길이 유쾌했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프가 막 문을 빠져나갔을 때.

“아, 그렇지. 크리스토프.”

생각났다는 듯 말을 걸었다.

못 들은 척 무시하고 가 버리려는 크리스토프를 그 뒷말이 붙들었다.

“며칠 뒤 리야드에서 손님이 올 거다.”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방문 앞에서 몇 발짝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멈춰 선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차관 변제에 대한 최종 협상이 있을 거야. 흥미가 생기겠지? 네 소중한 친구와도 관련된 일이니.”

‘소중한 친구’에 독특한 악센트를 넣어 발음하는 리하르트를,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리하르트는 낮으나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마라. 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돕는 거야. 내 말을 거스르지 마. ……어떠한 경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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