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Have no choice but to (14/34)

2. Have no choice but to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 의사는 굳은 낯빛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다친 부위 자체가 대단히 치명적이거나 상처가 지나치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실혈량이 위험한 수준까지 갔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을 맞았을 수도 있다고 엄격한 얼굴로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의사는 걸음을 돌렸다.

정작 그 잔소리를 들었어야 할 사람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침대에 파묻혀 있는 가운데, 다소 억울하게 구박을 받은 정태의는 심신이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겨우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태의가 의사의 잔소리를 뒤집어쓰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방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나타난 일레이는 정태의가 투덜거리며 전한 의사의 그 발언에 대해, 시퍼렇게 피멍이 든 그의 팔꿈치에 어디선가 가져온 타박상 연고를 문지르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로 사람이 죽는다면, 그럼 나는 뭐야. 귀신인가?”

“……어찌 되었든 사람은 아니라는 소리지.”

정태의는 목덜미를 몇 번 주물러 보다가, 일레이가 연고를 다 문지르자 연고통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연고통을 닫으려던 일레이는 의아한 듯 정태의의 손 위에 연고통을 올려놓았다.

“어디 더 다쳤나?”

더 다쳤다.

온몸이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있었다. 뼈마디마디가 삐그덕거린다. 이게 다, 뒤에서 꼭 붙어 운전하면서 종종 들이받기도 한 누구 덕분이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기로 하고, 정태의는 연고통을 열었다.

“다친 건 아닌데 살짝 삐었나 봐. 좀 삐걱거리네.”

목을 구석구석 짚어 본 뒤 연고를 바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연고를 바르던 정태의의 손을 치우며, 일레이가 그의 목을 덥석 쥐었다.

“목이라……. 이리 와 봐.”

목을 질질 끌어당기는 그 악력을 당해내지 못해 정태의는 어어어, 하고 끌려가 그의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앉자마자 갑자기 셔츠자락을 아래에서 잡더니 위로 훌렁 당겨 벗기는 통에, 정태의는 순식간에 상반신 알몸으로 덩그러니 앉게 되었다.

목덜미에서 허리까지, 몸을 살피기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차근차근 쓸어내리는 손길이 어쩐지 선뜩했다.

정태의가 몸을 움찔거리든 말든, 천천히 몸을 훑어본 일레이는 다시 손을 위로 올려 엄지로 천천히 정태의의 목뼈를 지그시 누르며 내려갔다.

“목은 잘못 다치면 고질병이 되기 쉬운데……. 제 몸 하나쯤은 잘 챙겨야지, 집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꼴이야.”

끌끌 혀를 차는 그 목소리를 듣자 뿔이 솟았다. 정태의는 피로가 몰려와 무겁게 늘어지는 눈꺼풀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누가 뒤에서 차로 받아 버리는 통에 그렇게 됐지…….”

지금도 뒤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누구 덕분에.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길 위에서.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끌고 달리는 차 위에서 뛰어내린 뒤에.

정태의는 달렸다.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이제야 말하건대, 그 속도로 레이스 경주에라도 나갔더라면 정태의는 능히 순위권 안에 들었으리라고 맹세해도 좋다.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다.

이미 차와 차가 맞붙다시피 해 달리고 있는데 1미터 이상 거리를 두다니, 심지어 상대가 저 일레이라면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미리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정태의는 사실 일말의 기대는 걸었었다. 계속해서 1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도 없이 딱 한 번만 그 이상의 거리를 벌이면 된다는 점,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짧지도 않은 10여 분 남짓, 게다가 일레이가 말한 코스대로 돌아간다면 그 사이에는 최소한 세 번의 커브가 있었다. 차의 구조상, 달리는 궤도상, 커브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그때 잘만 하면 1미터 정도는 어떻게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 정태의는 그렇게 기대를 했다.

그래서, 까닥하면 대형 참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속도로 목숨의 위협을 각오하고서 달렸다. 엔진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마저 하면서.

그리고 그 결과는.

“아아……. 그러고 보니 너, 진심으로 도망치려 했지.”

목덜미를 누르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 흉포한 손에 얌전히 목을 내맡기고 있던 정태의는 움찔하며 버럭 소리쳤다.

“쇠갈고리를 냅다 박아넣는 놈한테 그럼 목숨을 장난으로 걸고서 도망치겠어!!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고?!”

그렇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남자라면 도망을 치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차를 세우고 그냥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고도 남을 남자였다.

정태의는 주섬주섬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담아 애써 수습했다.

“그러는 너는 그렇다고 그렇게 사정없이 들이받다니, 사고 안 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음? 아―…그 정도로는 사고 안 나.”

뒤에서 차로 들이받은 당사자는 뻔뻔하게도 태연스레 말했다.

실혈사할 뻔한 사람을 두고도 그 정도로는 안 죽는다고 하고, 차를 시속 백수십으로 달리며 뒤에서 들이받아도 그 정도로는 사고 안 난다고 하는 이 남자의 이 대수롭잖은 말을 듣고 있으니 피로가 가중된다.

“태이. 약속은 지켜라.”

“…….”

“태이.”

“알았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크리스토프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됐지?”

“좋아.”

목숨 내놓고 달린 맹추격전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경우는 하는 수 없겠지만, 의도적으로 크리스토프와 접촉하지는 말 것.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좀 더 엄청나고 지나친 요구를 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그 정도라면 충분히 수용 가능한 요구였다.

게다가 사실은, 그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태의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던 참이었던 탓이다. 이 이상 크리스토프와 친밀해져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토프에게 좋지 않았다.

정태의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고 자신의 몫도 아닌 일은 언제든 서슴없이 잘라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크리스토프를 위해서, 이 이상은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묵묵히 일레이를 등지고 앉아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태의는 문득 한숨을 쉬곤, 어깨너머로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내게 약간 닿는 것까지 뿌리쳐야 한다고는 하지 말아 주면 좋겠는데. ……당장은 말야.”

어깨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이윽고 가만히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다 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도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에구구, 하고 앓는 소리만 중얼거렸을 뿐이다.

정말로 긴 밤이었다.

물 먹은 솜이나 매한가지인 몸을 그의 마수에서 지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맡긴 채 무거운 눈을 들어 시계를 보자 조금만 더 있으면 동이 틀 시각이었다.

이대로 잠들면 사흘은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정태의는 목을 주물러 주는 손길에 점점 몸이 노곤하게 늘어져,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노도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이 흉악하게 아름다운 손에 목을 맡겨 두고도 졸음이 오다니 나도 참 배포가 커졌어, 머릿속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승계 후보자라는 것도 인간이 할 짓이 못 되는군.”

“오늘 밤에 벌어진 일은 승계 후보자라서가 아니라, 인간관계 차원의 문제였지.”

“아니, 아니. 그보다는…….”

정태의는 나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지금쯤은 가게에 있을 리하르트를 생각한다.

저택으로 돌아온 리하르트는 필요한 최소한의 치료만 받고는 곧 다시 일어섰다. 크리스토프처럼 실혈로 의식을 잃지까지는 않았지만 겉모습으로만 보면 거의 비등비등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리하르트는, 잠시 쉬지도 않고 일어나 그대로 다시 가게로 돌아갔다.

쉬기 전에 먼저 엉망이 되어 있을 가게 상황부터 수습을 해야 한다며,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저택을 나섰던 것이다.

“승계 후보자쯤 되면 그 정도 책임감은 당연하다는 건가? 운전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피폐해 보이던데.”

정태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시라도 서둘러 수습을 하긴 해야겠지. 가게 내장 따위야 며칠 손보면 되겠지만, 그 난리통에서 피해를 입은 무관한 손님도 있을 테고 한동안 병원에서 나오기 힘들 동료들도 돌아봐야 할 테니.”

“아니 그래도 당장 본인이 쓰러져 죽을 판인데…―.”

“그 정도로 안 죽는다니까.”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네가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거고, 보통 사람은 그쯤 되면 죽어,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해 봐야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죽지도 않았으니 먹힐 리가 없었다.

“근육이 약간 긴장되었을 뿐 다치지는 않은 것 같군. ……엎드려 봐.”

정태의의 목을 빠짐없이 짚어본 뒤 일레이는 등을 툭툭 두드렸다.

목을 느리게 주물러 주는 손길에 기분 좋게 몸이 늘어져 있던 정태의는 두말없이 엎드렸다. 곧 목 바로 아래에서부터 자근자근 등을 풀어 주는 손길이 다가왔다. 심지어는 아주 본격적으로, 욕실에서 바디 오일까지 가져와 오일부터 등 위에 주욱 뿌리고 문지른다.

정태의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았다.

“아……, 좋다…….”

한숨처럼 토해 내는 노곤한 목소리에, 등을 짚어 내려가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곧 그 손이 손바닥으로 등을 한 번 훑어내린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좋아’지고 싶군.”

“……. ……. 하루만 좀 쉬고 하면 안 될까.”

정태의가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일레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다시 커다란 손이 등의 근육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제법 잘 알아듣는데.”

“눈치라도 없었으면 내가 여태 목숨 부지를 했을까 봐. 내가 너처럼 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처럼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리하르트처럼 집안을 이어받을 책임감이 있어서 정신력만으로 능히 살아남을 것도 아니고…….”

정태의가 반쯤은 잠에 취해 중얼거리자, 목덜미 근처에 희미한 바람이 닿았다. 등 뒤에서 일레이가 웃는 기척이다. 그가 문득 물었다.

“T&R의 시가총액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음……?”

정태의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 상태라도 얼른 짐작하기 힘들 텐데 정신이 몽롱할 때 물으니 더 모르겠다.

“글쎄……, 엄청나겠지.”

“미화로 200억이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 숫자에 일순 정신이 확 들 뻔했지만, 그래봐야 현실감이 있는 숫자가 아니어서 다시 졸음의 수렁에 발을 담갔다. 그 와중에도 투덜거리는 건 잊지 않았다.

“갑자기 왜 돈 자랑이야, 다이아몬드 숟가락이…….”

다시 한 번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결.

“T&R의 자산과 내 개인자산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내가 돈 많으면 좋지 않나? 너는 그저 물 쓰듯 쓰면서 살기만 하면 되는데.”

“응……? 아니, 난 그냥 내가 벌어서 내가 쓰면…….”

“아―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벌어서 날 먹여 살리기로 했었지. 죽을 때까지.”

뒤에 덧붙는 말에, 이번에는 잠이 번쩍 달아났다.

“뭐?! 아니 잠깐, 죽을 때까지는 아니고 그냥 네가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하다. 아니, 이미 알고는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태의가 딱히 돈벌이를 하지 않는 지금도 이 남자는 아주 대단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그 부조리를 호소하기 전에, 일레이는 정태의의 척추 마디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타르텐은 그 자체의 총자산은 그 정도 규모는 되지 않아. 그러나 그들이 다루는 ‘상품’은 그 가치를 크게 상회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나마 T&R은 괜찮아. 이를테면 형이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회사의 존속이 위험할 일은 없으니. 그러나 정보로 먹고사는 곳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거든. 그 입 하나에 걸려 있는 무게가 다르니까. 게다가 그런 일은 특히나 구심점이 흔들리면 말단에까지 영향이 미친단 말이지. 쉽게 말해―.”

일레이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반쯤은 잠들어 있던 정태의는 응? 하고 실눈을 떴다. 그러나 갑자기 어깨를 붙들고 확 꺾어 버리는 바람에 벌떡 일어나고 만다.

“아파!!!”

“뭘 하느라 근육이 돌처럼 굳었어.”

“오늘 밤처럼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으면 굳을 만도 하지! 그래, 쉽게 말해서 뭐!”

“그 정도 일로 이렇게 된다면, 너는 타르텐의 요직에 앉기는 무리라는 거지.”

“안 앉아, 시켜 줘도 안 앉아! 아야야야…….”

잠이 좀 들 만하면 깨워 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고이 재워 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정태의는 마사지를 포기하고 잠을 청할까, 잠을 미루고 몸을 풀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도 아니었고, 의외롭게도 저 손길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지금, 굳었다는 근육을 눌러 대는 손은 제법 아팠지만.

“저 정도로 명줄에 지장이 있거나, 쉬어야겠다고 주저앉아 쉴 놈이면 지금 저 자리에 있지 못했어.”

여유롭게 말하는 일레이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아픔을 삭일 겸 쓰게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토프는 일찌감치 그만두길 잘했군, 그 자리다툼.”

“왜, 걱정되나?”

웃음 섞인 물음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초쯤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만뒀어도 저 모양인 걸 보면, 비단 그 자리다툼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해.”

“자기 자신이 아끼지 않는 목숨을 옆에서 걱정해 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

일레이는 다 됐다는 듯 가볍게 정태의의 허리를 두드렸다. 어, 고마워, 하고 고개를 들자,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옷으로 등을 훔쳐 주고 나서 가뿐히 정태의의 몸을 돌려 눕혀 주기까지 했다.

“크리스토프는 경쟁을 도중에 그만둬서는 안 되는 거였어.”

“음?”

“혹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 드레스덴으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별로 진지하지도 않은 투로 말한다.

“불행하게도 리하르트는 말이야, 거의 내색은 하지 않지만 자존심이 아주 강한 인간이야. 그리고 철도 들기 전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만큼 기억력도 좋지. 제일 좋지 않은 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인내할 줄 안다는 거야.”

“……. 그 말만으로는 왜 그게 불행하고 좋지 않은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말이지, 예를 들어 아무도 흠집조차 주지 못한 자존심을 흙발로 짓밟혔던 일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세세하게 기억하면서 오랫동안 그 기억을 되갚아 주기 위해 인내하며 절차탁마해 왔는데, 갑자기 그게 붕 떠 버렸다면.”

“…….”

“나였다면 포를 떠 버릴걸.”

아니, 이 남자였다면 오랜 시간을 인내하는 과정 따위는 없었을 거다. 기분이 거슬린 그 순간 깔끔하게 해결을 봤겠지.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턱 아래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천장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나는 잘 모르겠다. 나라면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뭐 막상 닥쳐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니.”

“별로 어려울 것 없는데도 괜히 어렵게 구는 놈들이지?”

“……. 글쎄……, 네가 말하는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는 것도 범위가 워낙 넓어서 말이야…….”

과연 일레이 리그로우에게도 대처하기 힘든 일이라는 게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 이 남자도 세상만사가 다 편하고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이 남자라면 복잡하고 까다롭게 얽혀 있는 매듭은 힘들여 푸느니 그냥 칼로 썩둑 잘라 버릴 것 같았다.

정태의는 일레이 쪽으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뜨끈한 물에 푹 잠겼다 나온 것처럼 딱 기분 좋게 풀어진 몸이 몹시 기분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기호로 말하자면, 뭘 생각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어 경계하게 되는 성격보다는 좀 뜨악하더라도 뒷꿍꿍이가 없는 성격이 더 맘에 들어서……, 리하르트보다는 크리스토프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은데.”

“아아,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리하르트를 죽여도 좋아.”

“…….”

정태의는 나른하고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던 상태 그대로 한동안 침묵했다. 천천히 정태의가 눈을 떴을 때, 그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이 없었다.

언제쯤 되면 이 남자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심쩍게 일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이야기의 맥락조차 이해가 안 된다.

새끼손가락에서 마지막 기름기를 걷어낸 일레이는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정태의와 시선을 마주했다. 농담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단히 심각한 빛도 아니었다.

“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내가 막아 주지.”

“크리스토프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해서는 리하르트를 죽여야 한다면, 나는 그냥 중립을 선언하고 싶은데.”

“아, 그보다는―.”

막 입을 열던 일레이는 눈살을 설핏 찌푸렸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이 익숙한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는 사고방식이 다른 상대를 어떻게 하면 가장 쉽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는 시선이다. 자신이 이 남자에게 종종 보내는 시선이기도 했다.

정태의는 불현듯 우습고 유쾌해져서 피식 웃고 말았다.

몇 년이나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지내도, 아직도 이 남자와 자신의 사이에는 이렇게나 커다란 몰이해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으로도 그 간극이 메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와 자신은 이렇게나 다른데도.

앞으로도 계속 이럴 텐데도.

그런데도 정태의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는 계속 이렇게 평행선 위에서 함께 나아갈 터였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지도 모르는 이 관계가, 갑자기 그지없이 유쾌해졌다.

“그보다는?”

정태의는 일레이의 말을 거들었다.

웃음기가 남아 있는 정태의의 눈매를 보며 그 뒤로도 잠시 더 말을 고르던 일레이는 약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야만 할 필요가 생길 경우, 네 사소한 안전을 위해서 그에게 큰 위해를 가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도리를 생각해 본 다음에 결정할 문제 같은데, 그건.”

정태의는 생각에 잠겼다. 인간의 도리에 대해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사소한 안전과 큰 위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일레이 역시 알고 있다.

……그다지 유쾌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정말 그 자식들은 낫살 먹어서 왜 싸움질이나 하고 난리야, 난리가…….”

“그러니까 왜 싸움통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와.”

머리를 쥐어뜯다 말고 정태의는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일레이를 올려다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지……,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정태의는 바로 얼굴 옆에 있는 그의 무릎 위에 턱하니 머리를 올렸다.

“아, 몰라. 네가 지켜 주겠지. 너만 콱 믿으련다.”

어쩐지 도끼에 대고 발등을 비벼 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 살짝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 지금은 작두날을 베고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위험스러운 무릎을 베고서 눈을 감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따가운 시선만 뺨에 꽂혔을 뿐이다.

아, 몰라몰라. 이놈도 가끔 내 무릎 베고 자 버리는데, 나도 한 번쯤 이런다고 무릎이 닳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그래도 혹시 몰라. 보다 안전하도록 더듬더듬 손을 더듬어 일레이의 팔뚝까지 가만히 쥐었다.

문득 머리 위로 흠, 하고 낮은 숨결이 떨어졌다.

“태이.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응……?”

“너 말야. 점점―.”

“……?”

“……. 아니, 됐다.”

점점 기어오른다, 점점 겁이 없어진다 등등의 말이 잠시 뇌리를 스치고 갔지만 더 생각하길 관뒀다.

지금은 말 한 마디 더 생각하기도 피곤할 만큼 지쳤고, 이미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졸음은 발등에 대고 도끼질을 한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무거웠고, 게다가 이 딱딱한 무릎은 뜻밖에 놀랄 만큼 안락했다.

그것은 마치, 길고 험난했던 오늘 밤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

“뭐해? 혼자 우울하게.”

“음……, 시간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을 좀…….”

너른 식당 홀에 혼자 앉아 망연히 신문을 펼쳐놓고 딱딱한 흑밀빵을 씹으면서 정태의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자다가 나왔는지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려온 요한은 반쯤 뜬 눈으로 정태의의 건너편에 앉아 컵을 끌어당겨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조르륵, 물소리만 고요하게 울렸다.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끝난 줄 알았던 그 길고 험난했던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 뜨고 나면 다 꿈이었길 바랐는데,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언제 그렇게 순탄한 인생이었을까.

“해가 중천에 뜨도록 퍼자는 것 같더니 이제 일어났냐? 쯧쯧, 게으르긴…….”

차를 물처럼 단숨에 주욱 마셔 버린 요한은 말없이 빵을 씹는 정태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정태의는 빵을 씹던 얼굴 그대로, 세수도 안 해 속눈썹에 눈곱도 달려 있는 요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정태의 역시 새벽녘에 잠들었다가 눈을 뜨고 보니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었으니 그리 부지런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세수조차 하지 않은 요한에게 저 말을 듣기에는 적반하장이라는 글자가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태의의 그 미묘한 시선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듯 요한은 낯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나는 이래봬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조깅까지 하고 나서 본관 홀에서 신문을 읽고 차 마시면서 집안 어르신들께 인사까지 드린 몸이라고. 지금 네가 읽고 있는 그 신문도, 내가 아침에 본관에서 읽다가 여기로 갖고 온 거란 말야. 뭐……그런 다음에 또 자긴 했지만.”

“어쩐 일로 네가 그렇게 일찍 일어났었어.”

다시 잠들었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요한의 말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기엔 정태의는 너무도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눈 떴을 때가 오후 세 시경.

적게 자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잔 탓인지 일어나고 나서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씻고 나서 방에서 나왔을 때, 정태의는 이변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변이랄 것은 없었다.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제까지보다 한층 날카로워졌을 뿐이다.

원래도 그리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 눈길들은 각별했다. 각별하게 험악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당장 때려눕혀 버리고 싶은데 간신히 분을 억누른다는 듯, 부모 죽인 원수라도 보는 눈으로 정태의를 흘겨보며 스쳐가는 그 면면들을 의아하게 여길 틈도 없었다.

비단 타르텐가의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내부의 다툼에 아무런 관련이 없어 평연하게 지내던 사용인들까지 분위기가 아주 싸늘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의아해할 것도 없었다.

지난밤 크리스토프가 벌였던 참상을 생각하면, 여전히 변함없는 분위기인 편이 더 이상하다.

어제 그 자리에서 거의 죽다시피 해 실려나간 사람이 몇이던가. 가게 판판이 망가진 꼴은 또 어떻고. 심지어 집안, 정확히 마사에서도 사람 여럿 실려 나갔다. 아마도 어제 해진 뒤부터 오늘 해뜨기 전까지 피 본 사람이, 정태의가 이 집에 온 뒤로 피 본 모든 인간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을 거다.

그러잖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험악해지던 분위기가 어젯밤 하루 만에 최악으로 떨어졌다.

피부로 느껴졌다. 바늘처럼 따가운 분위기가 공기 속에 따끔따끔 떠돌아다닌다.

조금 전에 이 식당 홀에 들어섰을 때에도, 정태의보다 먼저 테이블 앞에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 두 명이 그를 보곤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험악하게 나가 버렸다. 그나마 좀 거친 부류였다면 그 자리에서 정태의에게 주먹질이라도 했을 분위기였다.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건성으로 신문을 넘기면서 빵을 씹던 차에,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요한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도 어제와 다름없는 요한을 앞두니 그나마 공기 속에 감도는 살기가 좀 누그러드는 것 같다.

정태의의 앞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끌어당겨 빵을 집어 덥석 베어물며, 요한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도 별로 일찍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바깥 분위기가 여간 부산해야지. 일곱 시? 여덟 시? 하여간 꼭두새벽부터 집에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오는데, 창밖으로 왔다갔다왔다갔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원.”

일찍 일어난 김에 숲 한 바퀴 달리고 신문 읽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려니까 어른들이 사람 앉혀 놓고 놓아주질 않잖아, 하고 투덜거리며 요한은 딱 두 입만에 주먹만 한 빵을 다 먹어 버렸다. 그리고 두 개째의 빵으로 손을 뻗는다.

“아침에 사람들이 그렇게 왔었어? 나는 자느라 몰랐네. 하긴 어젯밤에 좀 피곤했으니까……. 그런데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정태의가 묻자 요한은 빵을 씹으며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걸 네가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며.”

“엉? 무슨 자리?”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네 가게 찾아가서 깽판 놓은 자리.”

정태의는 빵을 먹다말고 입을 벌린 채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확실히 좀 심각하게 깽판을 치긴 했는데……, 그게 집안에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로 중대한 사태였어?”

“사람 둘이 죽고 넷이 인사불성이고 일곱이 중태인데, 영감님들 난리 날 만도 하지.”

손에 들고 있던 빵이 툭 떨어졌다. 삽시에 낯빛이 굳었다.

“죽어? ……죽었어?”

“어, 둘. 마사에서 하나, 가게에서 하나. 그리고 여전히 의식불명인 넷 중 하나도 지금 아슬아슬해. 걔마저 죽으면 하룻밤에 목숨 세 개다. 그나마 여기는 조용하네. 본관 쪽은 영감님들 난리 났더만. 오죽하면 차 마시다가 애꿎은 나까지 끌려가서 영감님 등쌀에 시달렸을까.”

지금은 좀 낫나? 하고 반쯤 뜬 눈을 비비는 요한을 앞두고, 정태의는 차마 넘어가지 않는 빵을 꿀꺽 삼켰다.

어제 사람들 여럿 널브러져 있다 싶긴 했는데, 죽은 사람까지 나왔나. 공기가 칼날처럼 따가울 만도 하다.

“그……,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는 요한 앞의 빈 컵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뭔가 마시지 않으면 빵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응? 글쎄, 누워 있겠지? 아침에 영감님들이 질질 끌고 가는 통에 따라가 보니까 한동안은 눈 못 뜰 것 같던데.”

“아……, 그래, 하긴 그렇겠지.”

정태의조차 한나절 꼬박 쓰러져 있다가 일어났다. 만일 크리스토프가 벌써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다면 정태의는 이 괴물우리 같은 집구석에서 당장 달아나 버리고 말았을 거다.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모두 따라 소리 없이 목을 축이면서, 정태의는 눈앞에서 놀라운 속도로 빵바구니를 비워 가고 있는 요한을 노려보았다.

그러잖아도 타르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설령 그를 적대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감 어린 대우를 받지 못했다. 누구나 그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욱더.

“승계도 포기하고 거의 연을 끊다시피 나가 버린 놈이 십여 년만에 돌아와 집안 일에 깽판을 놓는데, 이번에야말로 영감님들 단단히 벼를 만도 하지. 그러잖아도 예전부터 그놈 좀 어떻게 하자는 말들을 어르신이 감싸 주셨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넘어가지는 못할걸.”

“……리하르트가 아주 기뻐하겠군.”

정태의가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리자 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기뻐할 틈이 어딨어. 어제 일 때문에 그놈도 데미지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역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니까 입맛이 별로 없네.”

빵이 그득하던 바구니를 순식간에 반쯤 비우고 나서야 바구니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내면서 요한은 입가의 빵부스러기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태의에게 심상한 시선을 주었다.

“승계자 결정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 시점에서는 크리스토프가 어떻게 시비를 걸든 싸움을 안 했어야지.”

“음……, 굳이 변호해 주고 싶진 않지만, 어제 그 참상을 생각하면 그냥 구경만 하고 있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하물며 사람까지 죽어나갔다는데 그걸 보고만 있어도 더 문제 아닌가?”

“그럼 차라리 상대를 하지 말고 바로 머리라도 쐈어야지.”

흡, 정태의는 입안에 든 차를 넘기려다가 멈추고 가만히 요한을 쳐다보았다. 빵부스러기 사이에 떨어진 피칸 조각을 주워 먹는 요한은, 농담을 하는 투가 아니었다. 크게 심각하지는 않으나 빈말도 아닌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쐈어야지, 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까지 해 보인다.

얘는 또 이렇게 예상치 못한 데서 범상찮은 면모를 보여 주네…….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혈연을 쏘아 죽여 버리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정태의가 떨떠름하게 말했지만 요한은 다시 코웃음을 친다.

“그것도 통할 상대가 따로 있고 통할 상황이 따로 있지. 이 경우는 어떻게 해도, 어떤 결과가 나더라도 리하르트가 이기는 싸움이었어. 어떤 변명이든 통할 수 있거든. 그런데 그걸, 괜히 제가 나서 싸움질을 해서 온군데 다치기나 하고, 뭐하는 짓이야.”

덕분에 집안은 비상이고, 내 귀까지 시끄럽고, 아주 안 좋아, 하고 투덜거리는 요한 앞에서 정태의는 설핏 낯을 찌푸렸다.

괜히 손 섞을 필요 없이 그냥 쏘아서 죽여 버린다.

요한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우위에서 상대를 짓누를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리하르트는 우두머리 자리에 앉을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해 버렸다. 이미 사람은 죽어나갔고, 본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상대를 눌러 버리지도 못했다. 여러 모로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그래도……승계를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테지.”

달리 팽팽하게 맞서는 호적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결론적으로야 별 변화가 있으랴만, 아무래도 타이밍이 좋진 않지. 여차하면 승계 결정일이 연기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어?”

“글쎄……, 관건은 곧 찾아올 손님들과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뭐, 모르지.”

요한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건성건성 신문을 넘겼다.

손님이라, 하긴 승계일이 다가오면 찾아오는 사람이 많기도 하겠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정태의의 눈에 얼핏 경제면에 조그맣게 난 토막기사가 스쳤다.

작년 말에 반 다르 알파드의 뒤를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외무장관직에 취임한 알리가 원유 정책에 대해 애매하게 언급한 건과 함께, 유가 상승에 따른 파급 효과를 짚어 보는 짧은 기사였다.

정태의의 시선이 머무르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 눈길을 쫓아가 본 요한은 대충 기사를 훑어보곤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이 아저씨는 라쉬드를 젖히고 장관직에 오르더니 승승장구하는 것 같던걸. 하긴 동생이 워낙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니.”

“동생?”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긴 한데 중동 쪽 이름은 좀체 기억하기가 힘들단 말야,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가 되묻자 요한도 얼른 기억이 안 나는지 으음, 하고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왜 그 있잖아. 일찌감치 권력 다툼에서 몸 빼고 사업체 경영으로 돌아선 사람. 알……, 알…….”

아, 뭐더라, 하고 중얼거리며 계속 알, 알, 하고 있던 요한은 곧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한숨을 쉰다.

“가능하면 라쉬드가 이겨 주길 바랐는데,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니까.”

“? 왜. 그쪽이 온건파였어?”

“아니, 알리가 권력을 쥐면서 그쪽에는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되었으니까 그게 좀……. 아, 몰라. 그거야 영감님들이나 리하르트가 신경 써야 할 문제지, 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입이나 벌리고 있으련다.”

말을 하다가 지겨워졌는지 요한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정태의는 흠, 하고 중얼거리곤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별로 특이하거나 중요하다 싶은 기사는 없었다.

유가 상승이라. 그러고 보니 형이 유전을 선물받았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형 주머니가 두둑해지겠구나. 주머니에서 뭐가 불어나고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쓸 사람이긴 하지만.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갉작갉작, 머릿속에서 쥐가 조금씩 쏠아 대는 것처럼 걸리는 게 있는데 뭔지 정확히 짚이지 않았다.

상황도 심경도 복잡다단한 이 상황에서 정태의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크리스토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부터 일단 보러 갈까.”

험악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 속에서 정작 당사자이면서도 홀로 마음 편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그 남자부터 봐야 할 것 같았다. 지난밤 시체 같은 상태로 저택에 실려 왔던 그 남자가 과연 아직 살아 있는지부터, 다소 뒤늦게나마 확인해야 했다.

아까 아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영감님들이 우르르 몰려갈 때 같이 끌려가서 보니 한동안 안 일어날 것 같던데, 하고 말을 거드는 요한을 홀로 남겨두고, 정태의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식당을 나섰다.

*

크리스토프는 홀로 침대 속에 파묻히다시피 누워 있었다.

침대 머리맡 위쪽의 걸쇠에 걸린 팩에서 뻗어나온 두어 줄기의 튜브가 침대 속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만 빼면, 여느 때처럼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턱 바로 아래까지 얌전히 이불을 덮고 쌔근쌔근 잠든 것처럼,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정태의는 낮에 보아도 여전히 창백한 그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침대 옆의 커튼을 약간 당겼다. 어둑하던 방 안에 커튼이 걷힌 만큼만 볕이 들었다. 크리스토프의 발치에 노오란 햇살이 비친다.

훨씬 낫다. 어둑한 커튼 그늘 속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는 것보다, 발치만이라도 볕이 들자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 보였다.

“크리스토프. ……자?”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테이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그 옆에 앉았다.

그래도 지난밤에는 시체가 따로 없더니, 아직 창백하긴 하지만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긴 한다.

“야……, 지금 너 때문에 웃어른들은 난리가 났다는데 태평하게 잠이 오냐. 집을 아주 발칵 뒤집어 놓고서.”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지만 이번에는 좀 심각한 눈치라고……, 하고 정작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는 정태의였다.

지난 밤,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를 들쳐메고 강둑 위로 올라왔을 때.

흠뻑 젖어 피범벅이 된 두 사람을 보고 정태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맞닥뜨린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박력이 있었다.

정태의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른 리하르트의 앞에서 잠시 말을 잃고 서 있다가 곧 그에게서 크리스토프를 부축받으려고 한 순간 등 뒤에서 일레이가 조용히 기억을 환기시켰다.

‘약속 잊지 말라고 말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엉거주춤 멈춰 서는 정태의를,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리하르트가 바라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뒤에서 비쳐드는 가로등 불빛이 어두워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기묘한 눈이었던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희귀하고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경계하는 듯한, 냉랭한.

……냉랭한.

리하르트가 딱히 정태의에게 호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웃음 짓는 남자였지만 그것을 호감이라고 착각할 만큼 정태의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여태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어, 정태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태의의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잠깐 발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든 리하르트는 여느 때와 같이 웃음 짓고 있었다. 그는 마치 어깨 위를 기어다니는 흉측한 뱀이라도 떨어내듯 아무렇게나 크리스토프를 내팽개쳤다. 크리스토프가 돌부리에 부딪히며 쓰러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그를 부축한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부축 정도는 괜찮잖아, 부축 정도는.’

굳이 크리스토프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할지라도 기절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부축해 주는 건 사람 된 도리다.

정태의가 그렇게 주장하자 일레이는 보일 듯 말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정태의 씨.’

크리스토프를 떠메고 차 쪽으로 막 걸음을 옮기려던 정태의는,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천천히, 분명한 발음으로 정태의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그러나 정태의에게 용건이 있어 부르지는 않은 듯, 잠시 정태의를 훑어본 리하르트는 이내 일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그러나 태연자약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일레이에게, 리하르트는 천천히 웃음 지었다.

‘과연, 그렇군.’

‘…….’

리하르트의 미묘한 말에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 역시 피식,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뭐.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듯 서늘하고 거만한 웃음이다.

리하르트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크리스토프를 짊어진 정태의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미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저놈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글쎄.’

‘모르고서 갖고 싶어졌다면 가엾은 일이고, 알면서도 갖고 싶어했다면 어리석은 일이군. ……하.’

리하르트는 낮게 코웃음 쳤다. 몹시 유쾌한 듯한 그 짧은 웃음에,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리하르트는 한결같이 예의바르고 정중했다. 아까 가게에서, 모든 이가 정태의를 크리스토프의 아군이라 여기고 흉포하게 대했을 때에도 리하르트만은 예의바른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런데도 그는 크리스토프만은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의 평소 모습이나 성격을 봐서는 의아함을 떠나 기이할 만큼 노골적으로.

차라리 저런 성격이라면, 담담하고 상냥하게 대하면서 냉랭하게 끊어 버리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하긴 그렇게 따지면, 만인에게 무심한 너도 그놈을 참 싫어하긴 하지.”

정태의는 잠들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굴만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그 모습은 여전히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지만, 저 이불을 들춰 보면 몸 군데군데에 붕대가 감겨 있을 거다.

정태의가 혀를 차며, 그새 길게 기울어져 방 안 깊이까지 들어오는 햇살을 가리려 커튼을 조금 당겼을 때였다.

커튼을 한 뼘쯤 치고 돌아보자 크리스토프가 눈을 뜨고 있었다. 돌아보는 순간, 유리처럼 새파랗게 맑은 눈과 딱 마주쳤다.

“헉……!”

도자기 인형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고서,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한 박자 늦게야 말을 걸며, 정태의는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순간적으로 정말 놀랐다. 생긴 게 조각상 같아서 그런지 정말로 도자기 인형이 눈을 뜬 것 같아서 더 놀랐다. 그나마 낮이었으니 망정이지 어둑어둑한 늦저녁쯤이었더라면 심장이 멎었을지도 몰라…….

심장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정태의는,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눈을 뜬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허공의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크리스?”

깜빡, 기다란 속눈썹을 바삭거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그제야 그 눈동자가 정태의를 향했다.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는데도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치라도 된 것처럼 말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마주보다가, 정태의가 조용히 물었다.

“아파?”

잠시 더 침묵하다가 크리스토프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가 아파……. 귓속이 울려.”

시끄러워,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이불 속으로 이어진 튜브를 흘끔 보았다. 진통 성분이 있을 텐데도, 크리스토프는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약을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던 크리스토프는 낯을 좀 더 찌푸렸다. 신음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 표정 위로 짧은 고통이 스쳤다. 그러나 고통보다도 먼저, 팔목에 꽂혀 있는 튜브의 바늘을 귀찮다는 듯 쳐다보더니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어제 일 기억 안 나?”

정태의는 왜 이런 게 자기 몸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에게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정태의를 쳐다보면서 몇 번쯤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잠에서 미처 깨지 않은 듯 약간 멍한 시선이,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어,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 나……. 강에 빠졌다가…….”

강에서 나와서……하고 부루퉁한 얼굴로 약간씩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는 크리스토프는, 기억이 맑게 떠오르지는 않는 눈치였다.

하긴 피를 그렇게 흘리고 머리가 멍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두 다리로 버티는 데에 온 기력을 쇠진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몇 달쯤 지난 일이라도 돌이켜보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입매를 찡그리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멀쩡해 보인다. 몸이 다소 부자유스럽기는 했지만 심각한 탈은 없이 깨어나 움직이는 걸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생각해 보면 분위기가 바늘방석이라고 해서 이놈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신경 쓸 인간도 아니고, 뭐 멀쩡하면 됐지.

난 어차피 곧 떠날 몸이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던 정태의는, 눈앞에서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주먹을 움켜쥐는 걸 보고 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움찔, 몸을 움츠리고 만다.

크리스토프가 서슬이 퍼렇게 주먹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표정이 가신 얼굴이, 삽시에 섬뜩한 분노로 달아올랐다.

“……왜 그래.”

정태의는 앉은 의자를 두어 뼘 뒤로 밀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 다소 짜증스럽긴 하나 무심하고 심상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온데간데없고, 거기에는 금방이라도 사람의 목을 분질러 버릴 듯한 기세인 크리스토프가 있었다.

“리하르트……, 죽여 버릴 테다.”

이를 가는 소리가 그 목소리에 섞여 들렸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여실한 진실미가 담긴 그 서슬 퍼런 목소리에, 정태의는 한 뼘쯤 더 물러앉았다.

“아직도 속이 덜 풀렸냐……. 리하르트도 한동안 붕대로 친친 감고 다녀야 될 것 같은 몰골이던데, 서로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지 그래.”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리하르트를 찾아 날뛸 것 같은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가 머뭇머뭇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토할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기괴한 신음이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황급히 손닿는 데에 있던 휴지통을 집어들어 내밀었다. 그 휴지통을 거의 빼앗아들듯이 크리스토프가 받아들자마자, 그는 괴롭고 역한 신음과 함께 토악질을 시작했다.

몸속에 든 것을 모두 쏟아 버릴 듯, 한참 동안 구역질을 하다가 겨우 잦아드는가 싶으면 다시 휴지통을 붙들고 괴롭게 게워내기를 수차례, 더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구역질을 하는 크리스토프의 등을 두드려 주던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약이 이상했나. 멀쩡해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 갑자기 왜 이렇게 속이 뒤집혀 괴로워하는 걸까.

나가서 의사를 불러오는 게 나을까 심각하게 생각하던 정태의가 보다 못해 막 걸음을 돌렸을 때, 핏줄이 파랗게 도드라져 보이는 손으로 정태의의 소매를 꼭 움켜쥔 크리스토프가 여전히 휴지통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물……수건.”

“어, 잠깐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다시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던 터라 좀 불안했지만, 정태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침대머리에 기대어 말없이 수건으로 입가를 닦는 크리스토프에게 물컵도 내밀어 준다.

입을 헹구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속이 안 좋은 듯 가끔 숨을 멈추곤 하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물컵을 내려놓고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푸르스름하게 불이 붙은 것처럼 반들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그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리하르트, 이 죽일…….”

그러나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문다. 다시 구역질이 치미는 듯 손으로 입가를 덮는다.

정태의는 걱정스럽기도 하고 미심쩍기도 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를 싫어하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유난히도 각별하다. 깨어나기 직전까지 불구대천의 원수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꿈이라도 꿨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태의는 깨달았다.

정태의는 그들이 강으로 떨어지고 난 뒤에 얼마나 싸웠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이 차에서 뛰어내리고 나서, 정태의는 정태의 나름대로 생명의 위협마저 느껴지는 맹추격전을 벌이느라 다른 생각은 할 경황도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다시 그들을 건지러 그 자리로 돌아갔을 때, 이미 한바탕 사투를 벌이고 난 모습으로 리하르트가 기절한 크리스토프를 들쳐메고 나타났었던 것이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리하르트가 화해하자고 해 놓고 돌아서는 네 등 뒤에 칼을 꽂기라도 했어?”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범상찮은 분노를 알아보고자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서서히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새파란 눈은 점점 더 반들반들해진다.

정태의는 움찔, 몸을 뒤로 움츠렸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아니, 화내는 건가 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서 왁 울기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냥 좀 심하게 싸웠나 보다 싶었는데 어쩐지 심상찮아졌다.

“……. 왜 그래…….”

정태의가 크리스토프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하게 묻자 분이 치솟아 거칠게 숨을 쉬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이를 악물었다. 정태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애꿎은 이불만 움켜쥐고서 죽일 듯이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다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놈이, ……, ……을 했어.”

“응?”

잘 못 들었다. 목소리도 너무 작은데다가 중간에 부르르 떨면서 이를 가는 통에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뭐라고? 하고 정태의가 다시 묻자 크리스토프의 눈가가 점점 더 빨개졌다. 크리스토프에게 약간 몸을 기울였던 정태의는 다시 몸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아. 위험하다. 위험하다. 늘 창백한 무표정에 저렇게 선명하게 복숭아빛으로 핏기가 도니까 애가 예뻐 보인다. 아니 원래 외모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자신의 취향은 아니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더니, 자칫 잘못하면 귀여워 보이거나 아니면 취향이 바뀌어 버리겠다.

안 되지, 안 돼.

심장께를 두드려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정태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리하르트가 뭘 어쨌는데?”

“그놈이, …….”

그놈이, 까지 입을 열고 다시 이를 악문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가 더욱 반들반들해지는 게, 정말로 울기라도 할 것 같다. 분하고 억울해서.

정태의의 심장이 초조하게 울렁울렁하기 시작한 순간,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그놈이, ……비역을 했단 말야. ……나한테.”

헉……, 정태의는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 비, ……응? 비여, ……?”

혀가 굳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부터 의심이 갔다.

지금 얘가 뭐라고 했지. 내 귀가 미친 게 아니라면 비역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내가 비역의 뜻을 여태 잘못 알고 있었나. 아니면 이놈이 잘못 알…….

복잡하게 헝클어져 돌아가던 정태의의 사고가 어느 순간 딱 멎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는 정태의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놈이랑 내가 비역을 하다니, ……하필이면 그놈이랑……!”

눈가뿐 아니라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이유는 수치와 분노에서다.

정태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새하얀 머리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리하르트가……너한테 뭘 어쨌길래.”

“그놈이, ……, ……를 잡았어.”

“뭐?”

“내, 성기를 잡았다고! 그, 그 부근도 건드렸고!”

티 하나 없이 하얀 얼굴이 복숭아처럼 물든 모습이 몹시 절경이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그보다는 급기야 일렁거리기 시작한 푸른 눈동자를 보고 정태의는 황급히 손을 들었다.

“아니 잠깐, 잠깐, 일단 진정하고……. 그거 말고는?”

아니, 사실 그 자체도 충격적이긴 하다. 남의 성기를 건드리는 일은, 어지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벌어지기 힘든 일이다. 리하르트가 다소 비겁하게나마 국부를 공격하기 위해 거기를 잡아당기거나 움켜쥐었다면 몰라도 그냥 ‘잡은’ 거라면, 확실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크리스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내뱉은 ‘비역’이라는 말이 이미 한 차례 거대한 충격을 준 뒤이고 보니, 그런 이야기는 크게 놀랍지 않게 느껴졌다.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잠시 미심쩍게 정태의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눈을 부릅뜨더니 부르르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안 만졌어! 나는 그놈 그딴 거 안 만졌다고! 너 설마 내가 그런……!”

“아니, 네가 만졌다는 말이 아니라…….”

정태의는 얼른 손을 저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솟았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황 파악이 안 되는 만큼 더욱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어쩌다 그런 데를 만졌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비역은 아니라고 본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그러나 그 소리를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크리스토프가 눈에 불을 켜고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너는, 내가 다른 놈도 아니고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 상변태 죽일 놈이랑 비역을 했다는데, 네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 너 같으면, 건드리기만 해도 불쾌한 인간이랑 성교를 하게 됐다면 끔찍하지 않겠어?!”

마치 둘도 없는 막역지우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쳐다보는 그 눈을 도저히 마주볼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핀트가 어긋났는지 정태의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뭐 기분이야 좀 더럽긴 할 텐데 그래도 그게…….”

그놈이 내 성기를 건드리잖아, 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거참 기분 더럽겠다, 이상한 놈이네, 라고 순순히 맞장구치며 대답을 해 줄 텐데, 그놈이랑 비역을 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잠깐.

정태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갑자기 심장이 묵직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연다.

“크리스토프. ……그럼 혹시 너랑 나도……, 그걸 한 셈이냐?”

요전에 크리스토프가 정태의의 국부를 주물거렸던 때를 떠올리며 정태의가 조심스레 묻자, 크리스토프는 멈칫했다.

하늘까지 솟구칠 듯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 달아오른 얼굴이 갑자기 허를 찔린 듯 표정을 지우더니, 흘끔 정태의의 눈치를 보며 조금 머뭇거렸다.

“그야……. ……. ……아니, 그래도, 그때는 옷 위로 만졌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잖아……. 아니 물론 뭐…….”

갑자기 머리가 빙글 돌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태의는 의자에 풀썩 기대어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설마 했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는 정태의와도 이미 진한 관계를 가졌다고 입력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단연코 그건 아니다.

크리스토프를 붙들고 차근차근 해명을 해 주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입을 열면 좋을지 몰라서 정태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문제를 회피하기로 했다.

“그, 그래……, 어쨌든 그러니까 리하르트랑 그, 걸 했단 소리지. 그런데 어쩌다가…….”

정태의가 관자놀이와 미간을 문지르며 더듬더듬 입을 열자,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단언했다.

“말해 두는데, 내가 어쩌다가 그놈이랑 비역질을 하긴 했지만, 너랑은 달라. 너랑 한 거랑은 전혀 다르다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서 초조하게 글썽이는 눈으로 심각하게 쳐다보는 크리스토프를 마주하고서, 정태의는 어, 응, 하고 짧은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 화제는 이제 좀 접어두고…….

“아하……. 그런 일이 있었나? 그건 또 몰랐군.”

그러나 그때였다.

정태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나직하고 느린 목소리가 선뜩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

심장에 찬물을 끼얹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거다.

얼음처럼 굳어 꼼짝도 못하고 있는 정태의의 등 뒤로, 카펫을 밟고 들어서는 남자의 기척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졌다.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얼굴로 정태의의 어깨너머, 그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어.”

“엿들어? 말해 두는데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건 내가 아니야. 문밖까지 말소리가 들리도록 화를 낸 것도 내가 아니고, 내 발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넋을 빼고 있었던 것 역시 내 탓이 아니지.”

여유로운 목소리가 기척과 함께 다가왔다. 이윽고 그 기척은 정태의의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어깨 위로 장갑을 낀 손이 가볍게 얹혔다.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왔을 텐데 말이야.”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는 가죽장갑이 뱀처럼 차갑다.

정태의는 아주 천천히, 멈칫멈칫 고개를 들었다.

뒤에는 목소리의 주인공, 일레이 리그로우가 서 있었다. 그리고 뭔가 용건이 있어서 온 듯 그들에게서 여남은 걸음 떨어진 문턱에 한 남자가 서서 당혹스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정태의가 그들을 번갈아 보자 일레이가 정태의를 내려다보며 “나중에 자세히 들려주면 좋겠군.” 하고 속삭였다.

“아니, 더 들려줄 만한 얘기는 아무것도……!”

그러나 정태의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걸 어깨를 꾹 눌러 그대로 앉히며, 일레이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군. 아직 자고 있다면 때려서 깨워야 하나 걱정했는데.”

“왜 왔어.”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간에서 서성거리던 남자에게 흘끗 시선을 주며 “들어오지 마. 내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한 적 없어.”라고 내뱉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자 문턱 안으로 반걸음쯤 발을 내디디고 있던 그 남자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머뭇머뭇 말했다.

“어른들께서 불러오라고 하셔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남자에게서 일레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일레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다. 부외자나 다름없는 처지이면서도 확실하게 사고를 쳐 버린 크리스토프 타르텐. 타르텐의 윗분들이 너를 찾으시는군. 싫다고 해도 데려오라면서, 나까지 같이 딸려 보내셨지.”

몸이 아파서 네 발로 걸어가기 힘들다면 휠체어를 준비하도록 하지, 라며 너그럽게 말하는 그를, 크리스토프는 언짢은 낯으로 바라보았다.

“제의는 고맙지만 충분히 내 발로 갈 수 있어. 어디지?”

팔목에 연결된 튜브를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바늘을 뽑아 버리며, 크리스토프는 침대에서 나왔다.

땅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 잠시 눈썹을 찌푸리긴 했지만 곧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얼굴로 일레이를 마주하고 선다.

일레이는 안내하겠다는 듯 짐짓 과장스럽게 한 팔을 뻗어 문 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그를 흘끔 노려보고는 옷장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약간씩 절뚝거리며 그리로 다가가,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옷장 속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향해 서서 정태의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는 일레이의 뒤쪽으로 슬슬슬 게걸음을 걸어 문 쪽을 향했다.

정태의는 다짐했다. 지금 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당장 짐 싸서―아니 짐이고 뭐고 다 버려 버리고―베를린으로 돌아가 버리겠다고. 그러면 적어도, 일레이가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였다.

사람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살아야 하는데도 왜 단기적인 도피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문 앞에 서서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눈짓으로 비키라고 하며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일레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너도 같이 가야 하니까 잠시 시간 좀 내주지?”

“어, 나, 나? 내가 왜 같이…….”

정태의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머뭇머뭇 돌아보았다. 그제야 정태의에게 눈길을 돌리며,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지난밤의 그 자리에 크리스토프와 함께 갔다는 그 동료를 궁금해하시거든, 윗분들이. 별 건 없고 가벼운 증언 정도만 하면 될 거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다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라는 말일까, 찔리는 데가 있어서인지 그 사이에 숨겨진 말뜻까지 짐작해 보며 정태의는 침울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거리 달리기로 대시를 해 버리고 싶었지만 무사히 성공할 자신은 없었다.

흘끗, 일레이를 쳐다본다.

그는 여느 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침착하고 듬직한 그 모습은, 별반 화난 것 같지도 않고 흥분한 것 같지도 않았다.

“…….”

정태의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별로 상관없나? 그야 물론 크리스토프의 말은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어, 그의 말마따나 그와 비역을 한 적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태의의 국부를 주무른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말해서 좋을 건 결코 없겠다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뭐 아무래도 좋았던 건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어쩌다 보니 남자끼리 몸 부대끼면서 살게 되었지만 그걸 괜히 심각하게 여기면 우스울지도 모른다. 성격상 여러 명과 동시에 자유로운 관계를 가지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저놈은 아랫도리 관념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르니까 그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째 그리 유쾌하진 않다. 어쨌든 목숨은 건진 모양이니 다행스럽긴 하다.

정태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토프는 저만치서 불쾌한 얼굴로 옷장 안을 노려보고 있었고 일레이는 별다른 기색도 보이지 않고 유유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방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방.

본관의 널찍한 집무실 안쪽에 있는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정태의는 먼저 방 안에 있는 방이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데에 놀랐고, 두 번째로는 이곳이 자신이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제일 먼저 문 안쪽으로 들어선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 정태의가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일레이가 들어오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집무실의 약간은 북적거리는 분위기에서 완전히 차단되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을 뿐인데, 저 너머와 이곳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바깥은 외부인에게도 열려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곳은 타르텐의 이름에 가까운 자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방 안에는 대여섯 명의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도가 몇 도쯤 떨어진 것만 같이 서늘하고 냉랭한 침묵이 그곳에 감돌았다.

“부르셨습니까.”

그 침묵을 깬 사람은 크리스토프였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 쌀쌀한 침묵을 분명히 느끼고 있을 텐데도 크리스토프는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억눌린 빛이 없었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 혀라도 찰 것 같은 말투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앞둔 남자들의 반응은 여럿이었다. 울컥한 듯 눈을 부릅뜨는 남자도 있었고 혀를 차는 남자도 있었다. 곤란한 얼굴을 하는 남자도 있다.

정태의는 그들의 옆에 조용히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가운데 그나마 낯이 익은 그는 리하르트였다.

양복 아래로 붕대에 감싸여 늘어뜨리고 있는 팔만이 부자유스러워 보일 뿐, 피투성이의 처참한 몰골을 마지막으로 본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그들 옆에 서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바르게 눈인사를 해 보이는 게 리하르트답다.

뒤이어 정태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

늦은 오후의 해가 길게 비쳐들고 있는 창가에는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리하르트 외에 정태의가 본 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타르텐의 주인이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정태의와 거의 동시에 어르신을 본 듯 약간 눈매가 꿈틀거렸지만, 정면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자 다시 조각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간다.

“어젯밤,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구나.”

무거운 목소리로 묻는 그 남자는 어르신을 제외하면 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듯했다.

“당숙께서 알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크리스토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숙이라는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불편하다는 얼굴로, 그는 지그시 크리스토프를 노려본다.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라니,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에게서 들으신 대로라는 뜻입니다.”

짧게 시선을 돌려 눈짓으로 리하르트를 가리킨 크리스토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자신에게로 화살이 날아오자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당숙은 천천히 리하르트를 쳐다보곤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모리츠를 비롯한 몇몇이 마사에서 못된 짓을 해서 네가 그들을 다치게 하고, 이어 리하르트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비롯해 다른 형제들과 다툰 끝에 그렇게 되었다, 이 말에 틀림이 없다는 거로구나.”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표정 없이 당숙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뒤에서, 정태의는 ‘그래도 자신에게만 유리하도록 말을 약간 비틀어서 전하는 비열함은 없을 거라는 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리하르트를 신뢰하고 있나 보구나.’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인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태의가 그 차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당숙의 시선은 크리스토프에게서 떨어져 그 뒤에 서 있는 정태의에게 날아들었다.

“자네가 크리스토프와 함께 있었다는 그 청년인가 보군.”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정태의는 아, 예, 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아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냉정한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눈길이다.

자신과 관계없고 앞으로도 관계없을 사람의 판단까지 신경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공손하고 예의바른 청년으로 비치게 되면 그것도 일종의 거짓을 꾸미는 셈이 될 것 같아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마주본다.

저 뒤의 어르신은 여전히 뭔가 말을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의 처분은 모두 저 당숙에게 맡겨둔 듯―아마도 그가 현재 타르텐의 둘째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이리라―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냥 너그러운 영감님처럼 보인다.

잠깐 어르신에게 주었던 시선을 돌려 다시 당숙을 바라보자, 그 사이에 차근하게 정태의의 관찰을 마친 당숙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태의는 금방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려웠다. 그가 묻는 뜻도 어려웠고, 사람 자체도 어려웠다.

이 당숙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대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지 적의를 품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좀체 느껴지지가 않았다.

정태의는 발치를 보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제가 그들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이 서로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태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처지를 잘 알지도 않고요, 하고 내심으로 덧붙이는 정태의에게 당숙은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로군.”

정태의는 힘없이 웃고 말았다.

“저는 타르텐의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 생각도, 방해가 될 생각도 없는 외부인이니까요.”

원래라면 이 장소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는 외부인이다. 이 자리는 정태의에게 있어 발에 맞지 않는 구두만큼이나 불편한 장소였다.

당숙은 흠, 하고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오래 바라본 뒤에야 물었다.

“자네는 크리스토프의 손님으로 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사람인가?”

이번에도 역시 정태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는 말마다 참 어려운 사람이다.

저렇게나 포괄적인 물음이라니,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크리스토프와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되어 무슨 볼일로 여기에 머무르고 있으며 정체는 뭔지에 대한 답변일 테지만, 정태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어떠한 대답을 해도 좋은지, 어떠한 말은 하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현재 타르텐의 미묘한 상황, 그리고 자신의 상황.

그런 것들을 재어보면서, 정태의는 흘끔 리하르트를 보았다. 그리고 약간은 의외롭게 생각했다.

그는 이미 정태의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으음, 하고 잠시 고민하던 정태의는 거짓이 아닌 최소한의 대답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다 있는 셈이니, 필요하다면 누군가 덧붙여줄 거다.

“빌려줬던 책을 돌려받기 위해 왔는데, 그게 좀 길게 머무르게 되었네요.”

그러나 정태의 스스로도 생각했듯이, 그 대답은 지나치게 짧았던 모양이다. 천천히 눈썹을 치켜올린 당숙이 다시 뭐라고 입을 열었을 때, 그 옆으로 말없이 서 있던 리하르트가 조용히 덧붙였다.

“T&R과 관련되어 아는 사이인 것 같더군요.”

그러자 당숙은 도로 입을 다물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태의는 잠깐 당혹스레 리하르트를 쳐다보았지만 곧 그 시선을 갈무리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정태의는 나름대로 T&R과 관련이 있었고, 크리스토프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고 말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이지는 않은 그 말을 듣고 침묵하면서, 정태의는 가만히 눈동자만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내 이름만 재수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처한 위치도 재수가 없었나 보구나, 홀로 속으로만 생각한다.

다행히 당숙을 비롯한 어른들은 정태의에게는 별다른 볼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언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크리스토프와 정태의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어느 정도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결론을 추측할 수 없는 간략한 질문이나 동의 따위가 짤막하게 오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 정확히는 그 당숙은 마지막으로 “어르신.” 하고 노인을 불렀고, 노인은 무슨 의미인지 알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종의 결론이 내려진 듯했다.

당숙이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어떤 처분이 내려지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마주한 크리스토프에게, 당숙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토프. 네가 승계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나갈 때, 네가 이곳에서 벌였던 다른 문제들은 모두 없었던 셈 치기로 했었다. 큰 일이 있지 않는 한 네가 이곳으로 돌아올 일도 없을 터였으니. 그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잠시 돌아온 네가 또다시 이런 문제를 벌이다니, 그 원인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결과가 지나치게 과하다.”

정태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뒤따를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입맛이 쓰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놀라거나 괴로운 빛도 없이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리라고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 전 이곳에서 떠났을 때부터 더 이상 이곳에는 아무런 미련도 애착도 없었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러니, 너는 곧 타르텐에서 나가라.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 오지 말아라. 이번에 이곳을 떠나는 대로, 드레스덴에는 오지 말아. 그것이 네가, 너를 낳아준 타르텐을 위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예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숙이 짧은 선고를 마치자, 크리스토프는 선뜻 대답했다.

정태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여상한 모습을 더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 크리스토프는 말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더 이상 드레스덴에 올 생각이 없었다고. 이번에도 피치 못하게 이곳에 왔을 뿐이라고.

그러니 더 이상 이곳으로 오지 말라는 당숙의, 집안 어른들의 결정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커다란 침대에서 눈을 떠 낯을 찌푸리고 아침을 맞을 때,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고 도도하게 숲으로 말을 달릴 때, 서재에서 늦은 오후의 금색 햇빛에 나부끼는 책먼지 사이에서 책장을 넘길 때.

그런 것들이 마치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목 안이 씁쓸해진다. 설령 그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이곳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적어도 피투성이로 어느 흙먼지 속을 뒹구는 것보다는.

“당숙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 드레스덴에서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미련 없이 대답하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태의와 같은 아쉬움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윽고 당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 입을 열었을 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그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묵직하나 경쾌하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그곳에는 놀람으로 인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쪽 옆에서 줄곧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서 당숙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곧 중동에서 손님이 올 터, 제가 크리스토프와 함께 그들을 맞겠습니다. T&R의 기동대에 있으면서 중동과도 거래를 한 바 있는 그가 있으면 저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해서, 그가 이번에 벌인 일의 대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여유롭고 힘 있는 그 말은, 아마도 미리 말해 둔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한결같이 놀랍고 의외로운 얼굴로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정태의는, 여태 무심하던 얼굴 위로 놀람에 이어 불쾌감이 번지는 크리스토프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다가 담담하고 여유로운 리하르트를, 그리고 이어 약간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다른 빛은 보이지 않는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난 안 해.”

당장 말한 사람은 크리스토프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리하르트는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과연 누가 타르텐을 잇게 될지 결정이 날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대로는 타르텐을 잇기 위한 통솔력을 지니고 있다고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리고 저에게, 호의를 가진 상대든 적의를 가진 상대든, 상대에게서 서로의 이익이 될 만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저의 능력은 타르텐을 잇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니 저는 저를 위해서도, 그의 도움을 받아 남은 시간들을 훌륭하게 보내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속뜻이 어떠하든 그 말 자체로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리하르트는 설령 크리스토프와 사이가 안 좋다 하나 서로를 위해 양측에 득이 되도록, 감정을 누르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하지 않아. 나는 당숙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드레스덴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타르텐과도, 타르텐에 변제해야 하는 빚을 제외하면 인연을 끊겠어. 나는 너와 연관되지 않을 거고, 네 말에도 따르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명확한 발음으로 딱 잘라 말하곤, 서슴없이 걸음을 돌렸다.

크리스, 하고 뒤에서 어른들 중 누군가 불렀지만 듣지 못한 듯이 성큼성큼 걸어가, 정태의와 일레이의 옆을 스쳐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그렇게 서슴지 않고 크리스토프가 나가 버리고 나무문이 무겁게 닫힌 뒤, 지금이라도 뒤따라 나가야 할까 약간 당혹스럽게 고민하는 정태의의 등 뒤에서 짤막한 침묵 끝에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게 될 겁니다.”

느긋하게 말하면서, 리하르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잔을 집어들었다. 입술을 축이는 그에게서 희미한 커피 향이 풍겨왔다.

“그를 타르텐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소중한 형제 중 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설령 그가 터무니없는 사고뭉치라 해도.”

따뜻하고 자애로운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 저는 그에게 도움을 받아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으로 수습을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몹시 싫어하긴 할 테지만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하게 웃는 리하르트에게 어른들이 몇 마디 격려와 치하의 말을 건네는 동안, 정태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그 온유하고 다정한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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