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One summer night(2) (13/34)

*

“빌어먹을, 왜 저놈은 성격이 저 모양이야?!”

“해답이 없는 근원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파고들면 좋지 않아.”

뒷자리에서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심드렁하고 나른한 목소리뿐이었다.

저놈 성격을 따지기 이전에 네놈 성격부터 따져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혀를 찼다. 안개등을 켜려고 계기반을 더듬다가 미등을 켜고 말았다. 얼른 도로 꺼 버리며 계기반을 노려보았다. 역시 남의 차 운전대는 잡을 게 못 된다.

돌아가는 길도 제대로 모르는 터라, 생각 같아서는 저 둘 중 누군가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하나는 운전석 바로 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심지어 깨어났을 경우를 대비해 손잡이에, 운전석의 헤드쿠션 지지대에 손목을 수갑으로 채워 놓기까지 했다―, 하나는 그 옆에서 그놈이 깨어나 혹여 날뛰지는 않을지 노려보며 앉아 시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리어뷰미러로 흘끔 뒷자리를 쳐다보았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어둑한 차 안이라 그런지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원래부터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난하다. 정태의의 말에 대답은 하지만 먼저 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좀 어때, 견딜 만해?”

정태의가 묻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뭐 그냥, 하고 대답한다.

“과거에 제일 아팠던 기억에 비하면 이 정도는 긁힌 축에도 들지 않아.”

“언제가 제일 아팠는데.”

“글쎄……원래 기억이란 건 강화되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 릭에게 맞았을 때도 꽤 아팠지.”

그놈은 제대로 때리는 데에는 이골이 난 놈이거든, 하고 덧붙인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열기만 하면 나오느니 독설인 저 입이 지금만큼은 닫히지 않기를 바랐다. 피를 철철 쏟으면서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말까지 없으면 불안하다. 정태의가 보기에 크리스토프는 언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릭에게 맞아?”

“어……, 전에 일 때문에 좀 대치한 적이 있었거든. 방향성이 아예 반대인 곳에 각각 고용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동안 싸웠어. 그놈 배 한가운데에 총구멍 내고 도망가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정태의는 일레이에게서 그가 크리스토프를 고문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총구멍을 내고, 고문을 하고……. 과연, 친구로 여겨지기 싫을 만도 하겠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무던히 대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계기반의 전자시계를 보자 숫자는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막 방금 그곳을 뜬 지 5분이 지났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발등이 타들어가기 시작할 시점이다.

정태의는 눈동자만 굴려 시각을 확인했는데도 뒷자리에 앉은 크리스토프는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중얼거렸다.

“흥……. 그놈한테 쫓기면 기분 더럽지.”

마치 남의 일처럼 한가롭게 중얼거리는 그를, 정태의는 거울 속으로 노려보았다. 정태의의 귀에는 ‘잡히면 죽었어’로밖에 안 들렸는데, 크리스토프에게는 달랐나 보다.

“쫓겨 봤나 보지.”

“예전에 일 하다가 두 번. 한 번은 무사히 도망쳤고 한 번은 잡혔었어. ……그놈에게 쫓기면 기분 더러운 게, 도망쳐서 그놈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해도 제대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는 기분이 안 든단 말야. 한숨을 내쉬는 순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거든. 무슨 호러 영화처럼.”

크리스토프는 입매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돌리며 픽 웃었다.

“아, 그래, 나도 그놈에게 쫓기던 무렵에는 딱 그런 기분이었지. 하다못해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욕실 문을 여는 순간에도, 문을 열면 바로 그 앞에서 ‘오랜만이군, 친구.’ 하고 그놈이 있을 것 같았거든.”

“…….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됐어?”

사뭇 궁금하다는 듯이, 혹은 안쓰럽다는 듯이 되묻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정태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다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다.

“그러게 말입니다……. ……. 그런데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곤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정태의는 진심으로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이 드넓은 우주의 어느 다른 차원에서는 고국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 생활을 순탄하게 보내어 지금쯤은 영관급으로 진급해 출셋길이 보장된 군인으로 행세하며 일레이 리그로우 같은 위험인물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지내는 정태의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삶을 버리고 그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터였다.

생물의 생존 본능과 위험 회피 본능 탓에 가끔 일레이에게서 몇 발짝쯤 물러서고 싶어질 때는 있지만,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가끔은…….

……. 어?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엄지로 가만히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다.

어쩐지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나 꽤 그 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잖아.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번쩍 다시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백미러에 다른 차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머릿속의 아련하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능이 돌아왔다.

설마, 막 방금 그곳에서 출발했을 놈이 공간이동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지금 자신의 뒤에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 심장을 찬물에 담갔다 꺼낸 것 같았다. 역시 쫓긴다는 상황은 심장에 매우 부담스럽다.

정태의는 그 차가 다른 길로 꺾어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액셀을 지그시 밟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크리스토프, 살아 있지?”

“음……. 추워…….”

“자지 마! 자면 죽어! 자지 말고 뭔가 말을 해! 정신 차려!”

“여기가 무슨 설산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태의는 히터를 올렸다. 그러나 정태의는 전혀 춥지 않았다.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나 이 더운 계절에 추위를 느낄 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슬쩍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프의 허리께를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가로등에 가끔 검붉게 번들거리는 빛이 비쳤다.

집에 가자마자 주치의부터 두들겨 깨워야겠다, 아니 미리 전화해서 준비를 시켜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정태의는 혀를 찼다. 병원으로 가려고 했더니 크리스토프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면서 집으로 가자고 서슬 퍼렇게 말했다. 이 정도는 집에 있는 의사에게 보여도 되는 상처라고 우기면서.

정태의는 나이가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타르텐의 상주 주치의 영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솜씨가 믿음직한가 보군, 그 주치의는. 타르텐에 오래 있었나 보지?”

“음……? 앙베르? 그렇지, 그가 프랑스에서 온 뒤로는 줄곧 저택에 있었다고 하니까, 한 35, 6년……?”

“35, 6년? 너보다 더 오래 있었잖아, 그럼!”

아니 그보다 의사 면허를 따고 바로 왔다고 쳐도, 그럼 지금 대체 몇 살이야, 그 영감, 하고 다른 의미로 감탄하고 말았다.

“그렇지.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계속 저택에 있었으니까.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기라도 하면 늘 그가 약을 발라 줬거든.”

그건 주치의보다는 어머니가 할 일 같은데, 하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만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는 어쩌면 그런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몰려다니면 다치기도 곧잘 다치지. ……그때부터 리하르트와 싸우다가 다치곤 했던 거야?”

정태의가 장난 섞어 말하자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욱한 얼굴로 옆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리하르트를 몹시 사납게 쳐다보다가 부루퉁하게 말한다.

“수갑이 저게 뭐야. 좀 제대로 된 거 없어?”

“응? 차에 있던 걸 그냥 썼는데. 설마, 리하르트가 수갑 정도는 가뿐히 부숴 버릴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정태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 힘이 있으면 차력사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거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한 듯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놈이랑은 다칠 만한 싸움을 한 적은 거의 없어.”

크리스토프가 불쑥 중얼거리는 말에 정태의는 조용히 거울에 비친 그들을 바라보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와 온몸이 피투성이 상처투성이로 기절해 있는 남자가 그렇게 다친 원인을 생각해 본다.

정태의의 생각을 읽었는지 크리스토프는 좀 더 못마땅하게 말했다.

“교육을 받는 시간에 정식으로 대련한 게 아니고선, 그렇게 늘 부딪치면서 자라지는 않았어.”

“사이 안 좋았다며. 지독하게.”

“그거랑 부딪힐 때마다 싸우는 거랑은 달라.”

정태의는 이내 납득했다. 하긴 과거를 돌이켜보면 쉽다. 과거에 정태의도 사관학교의 빌어먹을 동기 김소위―지금은 영관급쯤 되었겠지만―와 죽도록 사이가 안 좋았지만, 눈 뜨고 일어나면 달려가 주먹질을 하고 살지는 않았다. 건수가 생기지 않는 한은,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 봐야 이쪽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

“하긴……. 오히려 마주치기만 하면 붙들고 주먹다짐을 하는 편이 더 친하다는 생각도 드는걸.”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사람의 사이가 좋고 나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없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저 성격들로 저렇게 서로를 싫어하기도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왜 리하르트를 그렇게 싫어해?”

정태의가 묻자 크리스토프는 점점 더 싫은 얼굴을 했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이 좀 인간다워 보여, 그나마 보기에 낫다. 이 화제가 정답이었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놈이 먼저 사사건건 날 싫어했어.”

“……. 리하르트가?”

본성이 어떻든, 대외적으로 저렇게 품성 좋은 얼굴을 보이고 사는 사람이? ―하고 정태의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발끈한 모양이었다. 세모꼴로 거울 속 정태의를 노려보며 쌀쌀맞게 말한다.

“대놓고 싫어하면 낫지, 이놈은 인간을 음흉하게 싫어해.”

어……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핸들을 천천히 두드렸다.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은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음흉할 것까지야.

“음흉하게……. 몰래 다가와 뒤통수라도 때리고 달아나던?”

“아니 그보다는, 뭐라고 할까. 으음…….”

크리스토프는 고민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골랐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답답해하는 어린애처럼 폭폭 한숨을 쉬며 한참 으음, 그러니까, 음, 하고 중얼거리다가 말한다.

“어릴 때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내 말은 그러니까, 사이가 좋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데면데면했다는 소리야. 같이 교육을 받으면서 대련도 수없이 했고, 사촌이라도 이놈 집과 우리 집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도 있어서 주위에서는 사이가 나쁘다고들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어, 정태의의 말없는 의문이 들린 듯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놈이 날 싫어하고 있는데, 내가 병신이야? 나 싫다는 놈을 그냥 두고 보게.”

“……. 넌 누가 너 싫다고 하든 말든 다 무시하잖아.”

“어떻게 무시해! 이 상변태 같은 놈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크리스토프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까지 벌떡 일으키다가 으, 하고 낯을 찌푸리며 다시 푹 쓰러지고 만다.

그답지 않은 과격한 반응에 정태의는 움찔,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상변태, 상변태 하는데, 그런 개인적이고 내밀한 남의 속사정을 크리스토프가 알 도리가 없다. 그걸 어떻게……, 하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약간 몸을 움츠렸다.

“설마, ……. …….”

입을 떼다가 다시 다물어 버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 없다. 일단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에게 모종의 상변태 짓을 하는 그림도 영 떠오르지 않고―그렇지 않다면 지금 바로 뒤에서 서로의 손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남자 둘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그렇다면 분위기가 이 정도 흉흉함으로 그칠 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크리스토프가 오늘 밤 가게에서 만인들의 앞에서 그 천연―바보숙맥―성을 피로할 리도 없었다.

이 상변태 같은 놈이, 까지 말한 뒤 옆구리 뒤쪽을 부여잡고 낯을 찌푸리며 쓰러진 크리스토프를 거울 속으로 바라보며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뒷말이 궁금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다지 듣고 싶진 않았다.

그때 다시 백미러에 차 불빛이 비쳤다.

시각 때문인지 길이 다소 외곽에 있는 탓인지,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뒤쪽으로 차가 다가오자 다시 경계심이 인다.

시간으로 보아선 아직 무리다. 가게에서 나와 저들을 차에 태우고 출발하기까지 약간, 비록 출발 시각은 몇 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일레이 리그로우라 하더라도 아직은 따라잡기 무리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백미러 안의 차를 유심히 노려보며, 정태의는 아직 한동안은 더 가야 하는 거리를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이 길이 맞긴 맞겠지, 설마. 애매할 때마다 크리스토프에게 물어보고는 있는데 영 낯설다.

등 뒤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기척이 들렸다. 거울로 시선을 돌리자 크리스토프가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백한 탓인지 정말로 조각상 같다.

아니야. 위험하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아직 일분 일초를 다툴 만큼 다급하진 않다.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싸움질 하곤……. 어차피 승계 포기했으면 다 끝난 것 아닌가. 굳이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왜 꼭 험한 꼴을 보고 그래.”

“더는 이럴 일 없어. 앞으로 다시는 드레스덴에 오지 않을 테니까. 원래는 승계를 포기할 때부터, 다시 올 생각은 없었어. 이번에야 곧 어르신이 물러나시니 할 수 없는 거였고.”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졸린 것처럼 느려졌다.

정태의는 운전자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약간 건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었나? 그 때문에 집안에 갚아야 할 돈이 엄청나다면서. 그냥 해 보지 그랬어. 혹시 또 알아, 네가 승계자가 되었을지.”

대외적인 인성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불리했을 테지만, 하고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크리스토프는 창밖으로 눈길을 준 채 별 감흥도 없는 듯 중얼거렸다.

“승계자가 되든 말든 상관없었어. 원래부터 타르텐을 물려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데에도 흥미가 없었고.”

“아하. 적성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지.”

“게다가 차라리 평생 빚을 갚고 말지, 이 집구석에는 절대로 매여 있고 싶지 않았거든.”

“흠?”

크리스토프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잠에 취해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그때 이미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았어. 10여 년 뒤에 누가 승계자로 선택될지, 그때부터 벌써 보였거든.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아래에서는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어.”

술에 취한 듯, 잠에 취한 듯, 어쩌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이,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이, 크리스토프. 괜찮아?”

“괜찮다니까. 이 정도 다친 건 이미 서른몇 번째야. 더 다친 적도 열몇 번 있었고.”

목소리가 약간 짜증스러워지는 걸 보니 아직 괜찮은가 보다.

“그렇다 해도 안 아픈 건 아니잖아.”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의 속도를 아주 약간 늦추었다. 조금씩 뒤차와의 간격이 줄어들면서, 뒤차 운전자의 모습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괜찮아. 아픈 건 견디기 쉬워.”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아픈 건 잘 참는 편이지, 필요에 따라 엄살 부리는 건 더 잘하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백미러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제 얼굴을 좀 알아볼 만한 거리까지 다가왔…….

“리그로우.”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이 미끄러져 저도 모르게 경적을 울려 버렸다. 앞서 가던 차도 없는 밤길에 시끄러운 소리가 한 번 짧게 울린다.

“그래, 그놈이 최악이었어. 사람을 잡아다 놓고……!”

과거의 분노가 떠올랐는지 원한이 절절하게 맺힌 목소리로, 뒤에서 잠들어 가던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한손으로 쓸어내리며 백미러를 다시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

“야, 사람 헷갈리게……!”

정태의는 벌컥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가 정태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팔을 꺾어 버리려면 그냥 해머를 휘두를 것이지, 굳이 팔목을 붙잡고 꺾었어.”

창백하게 쓰러져 있으면서도 눈빛만큼은 사람 잡도록 형형한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며, 정태의는 괜히 움츠러 들었다.

“왜 날 노려봐……. 아니 근데 그놈이 네 팔을 꺾었어?”

“그래, 그것도 맨살 위를 붙잡고. 내가 그렇게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하면, 그게 그놈이었겠냐.”

하지만 손으로 꺾는 게 낫지 그걸 차라리 해머를 휘두르라니 이놈도 참……, 하고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뒤에서 크리스토프는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그래, 그때 내가 풀려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그놈을 짓이겨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작정했는데, 의뢰자가 뒤통수를 쳐서 그쪽부터 해치우는 통에 잊고 있었어. 잠깐, 차 돌려.”

“뭐?! 차는 왜 돌려!”

“기억이 난 김에 끝장을 봐야지. 그놈도 뒤따라온다고 했지? 그럼 조금만 돌아가면 되겠네. 어서 차 돌려.”

정태의는 무심결에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저도 모르게 운전대에서 몸을 반쯤 틀어 크리스토프를 마주보았다.

“끝장을 보다니, 일레이랑, 네가, 지금?”

“그러면 달리 누가 있어서.”

정태의는 싸늘하게 말하는 크리스토프를 몇 초쯤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액셀을 밟았다.

“일단 너 제정신일 때 다시 말하자. 지금은 가던 길 가고.”

“무슨 소리야, 차 돌리라니까.”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자리 시트를 적시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응?”

“뭐?!”

크리스토프는 일순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몇 번 시트를 더듬어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피잖아. ……뭐,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살짝 다쳐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먼저 해 둬야 하는 법이야.”

크리스토프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투로 한숨 섞어 말했다.

찢어진 입으로 말은 잘 한다. 저 입만큼 상처는 덜 찢어진 모양이다.

차 세워 놓고 저 입을 딱 다섯 대만 때려 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액셀을 더 밟아 댔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다가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던 차의 뒤쪽으로, 불빛이 하나 더 비쳤다. 또 차가 한 대 오는 모양이다.

“차 돌리라니까.”

“일단 나중에 하고 지금은 가자.”

“할 일은 생각난 김에 해치워야지.”

“그 몸으로?”

“다쳐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한다니까.”

“누가 그래?!”

정태의는 기어코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왜 제 몸을 안 챙기는지, 왜 상황도 안 돌아보는지, 왜 분노를 저렇게 바보같이 부닥뜨리는지, 그런 것들이 답답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 남자는 마치 세상에서 격리되어 지낸 것 같다고. 분명히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마치 얇은 막 하나가 그를 친친 감고서 따로 떼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소리를 지르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약간 놀란 듯이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조금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린다.

“누가 그러냐니……, 원래 그런 거야.”

풀죽은 목소리가 마치 그 얇은 막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정태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 구조가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 놈들은 이래서 싫어…….”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일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차라리 화가 나거나 골치 아픈 게 나았다.

“이봐, 어쨌든 차는 좀 돌려 보―.”

“어차피 금방 또 만날 건데 뭘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기다려.”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흘끔 계기반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우토반도 아닌데 벌써 속도는 백수십 킬로미터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 뒤의 뒤차, 아니, 그 차를 추월해 이제는 바로 뒤에 있는 저 차가 멀어지지 않는 걸 보니 저쪽도 어지간한 속도로 달리나 보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크리스토프의 저 어이없는 고집에 정태의가 잠시 실랑이를 하고 있던 동안, 어느새 그 차는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아니 지금 이 차가 160을 넘었는데 저거 몇 킬로야?!”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계기반의 바늘이 조금씩 더 기울어졌다. 그런데도 뒤차는 멀어지기는커녕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태의는 눈을 부릅뜨고 백미러를 노려보았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는 타이밍을 기다렸지만 워낙 빠른데다, 빌어먹을, 유리에 진하게 선팅이 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정태의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뒤를 따라오던 차를 눈치챈 듯 뒤돌아보았다.

“뭐야, 온 거야? 마침 잘 됐네.”

“오긴 뭐가 와! 아냐, 그놈 아냐! 저건 그놈 아냐!”

크리스토프의 태평하고 심상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액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바로 그때였다.

기어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의 것이다. 움칫, 기어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핸드폰으로 사나운 시선을 주는 정태의의 옆으로, 크리스토프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어, 그래. ……어, 오랜만이야. 어쩐 일이야?”

크리스토프의 심드렁한 목소리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정태의는 그 귀를 누그러뜨렸다.

어떤 친구인지, 전화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하다니 굉장하다. 하긴 사람들 다 잠들었을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라면 보통 친구는 아니겠다.

정태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백미러로 온 신경을 쏟았다.

액셀을 있는 대로 마구 밟아 대고 있는데도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안간힘을 다 써야 줄어들지 않는 게 고작이다.

“이봐. 영수. 김영수. ……정태이.”

몇 번인가 정태의를 부르던 크리스토프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리어뷰미러로 시선을 돌리자 한쪽 귀에 여전히 핸드폰을 댄 채로, 크리스토프가 정태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달리고 있는 이 도로는 제한속도가 100킬로미터까지야. 조금만 더 가면 단속 카메라가 있으니까 과속으로 잡히지 않으려면 속도 줄이라는데.”

“지금 과속을 신경 쓸 때가―. ……뭐?”

정태의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크리스토프를 휙 돌아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예의 그 무심한 얼굴로 핸드폰을 톡톡 두들겼다.

“릭의 전언. 흥, 네가 어지간히 걱정이 되나 보지. 생전 전화 따위 한 번도 안 하던 놈이 전화를 다 하…….”

“너는 바로 조금 전에 본 놈을 두고 뭐가 오랜만이야!”

“이놈이 나한테 전화를 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데.”

“그놈이나 속도 좀 줄이라 그래!!”

“흠? ……들었어, 릭? 너나 속도 줄이라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대. 큰일이네.”

드디어 운전석이 보일 만큼 뒤차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전면유리 윗면이 선팅되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 좋게 핸들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그 손―정확히는 그 손 전체를 감싼 장갑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특유의 짙은 색 장갑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장갑이 웃는 듯이 보인 순간.

갑자기 그 장갑이 차 전면유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게도. 유리에 쩌억, 주먹이 두들긴 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금이 갔다.

퍽, 퍽, 퍽, 딱 세 번을 더 두들기자 뒤차의 전면유리는 반 이상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선팅으로 너덜하게 붙어 있는 유리 아래로, 이쪽을 보며 희미하게 웃는 운전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쪽 귀에 반원형 헤드폰을 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 운전자는, 거울 속으로 정태의와 눈이 마주친 걸 뻔히 알기라도 하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일레이 리그로우.

너무 오래 평화롭게 사느라 잊고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괴력.

“생각보다 일찍 만나 반갑다는군.”

여전히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대로 차를 세우고 한 방 때려 주고 싶었다.

……빌어먹을.

“그냥 얌전히 세울까.”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절로 발이 액셀 위에서 떨어졌다. 엔진 소리가 조금 잦아드는 듯싶자 뒤에서 크리스토프가 반색을 했다.

“그래, 세워! 이제 굳이 차 돌릴 필요도 없으니 잘 됐네!”

기쁘게 외치자마자 창백하게 다시 시트에 기대어 버리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정태의는 지그시 액셀을 밟았다.

망할. 세우긴 뭘 세워. 세우는 순간 최소 한 명 플러스알파는 사망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리 멀지 않았다.

바로 저 앞, 강 위로 걸쳐져 있는 다리를 건너서 몇 분만 더 가면 저택이다. 비록 얼굴이야 내일, 아니 저택 문 넘어서자마자 바로 마주친다 하더라도, 저택 문 안으로만 들어서면 게임 셋이다.

그냥 뚫고 가기로 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은 거리 안에 따라잡힐 확률은 반반이었다. 아니, 사실은 반 이상은 잡히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저 뒤에 있는 놈이 그 괴물이란 걸 감안해서 반반이다. 속도를 더 떨어뜨리지만 않고 달리면, 잘만 하면.

더 이상은 밟을 수 없는 액셀에 엔진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후미에 콰앙, 하고 뭔가 거세게 부딪치는 감각이 온몸을 뒤흔들며 전해져 왔다.

“뭐가……!”

핸들에 가볍게 코를 박은 정태의는 콧대를 문지르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뒤차의 부서진 전면유리 안쪽에서, 두툼하게 굵은 철제 와이어가 날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와이어 끝에 달려 있는 직경 50센티미터짜리 철제 갈고리가 이 차의 트렁크를 우그러뜨리며 틀어박혀 있었다.

줄 하나를 두고 이어진 뒤차에서, 이윽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브레이크 고장이라면서!”

어차피 믿지는 않았지만, 갈고리를 걸어 놓고 속도를 줄여 버리는 일레이에게 들리지도 않을 고함을 질러 댔다.

아니, 들리지 않는다 해도 틀림없이 그는 이 고함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유쾌하게 웃고 있을 거다.

“……. 크리스토프. 손잡이 잘 붙들고 있어.”

정태의는 액셀에서 약간 발을 뗐다. 크리스토프가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강으로 시선을 주었다. 다리 저편에 거의 역방향으로 교차하듯이 이어진 길로.

이내 정태의의 말뜻을 알아들은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태이. 이 속도로 역방향 커브를 틀면 강에 빠지기 십상―.”

“그럼 네가 저 쇠갈고리 뽑을 수 있어?”

“―. 넌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한테 대책 없다고 하지 마.”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때, 끊어졌던 휴대폰 벨이 다시 울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핸들을 움켜쥐는 정태의에게, 크리스토프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태이. 전언이다. ‘위험한 짓 그만둬’.”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반쯤 내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귓전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아플 만한 속도에서 멀쩡한 차를 부수고 갈고리를 박아 넣은 남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 생각을 똑같이 했음이 분명한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전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흘끔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아주 싸고돌아라, 싸고돌아. 다른 놈이었더라면 웃으면서 갈고리를 머리통에 박아 넣었을 놈이. ……이제 네놈 전화 따위 안 받아.”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말하곤 휴대폰을 냅다 던져 버렸다. 죄없는 기계는 차 앞유리에 세게 맞았다가 튕겨나 조수석 바닥을 뒹굴었다. 크리스토프의 사나운 눈이 정태의를 쳐다본다.

“예전에 이놈이랑 같이 일을 할 때 이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나더러 저 와이어를 타고 앞차로 건너가서 운전하는 놈을 잡으라고 하더군. 거의 200킬로로 달리는 차에서.”

“……. 그래서?”

“그 정도는 했지.”

“야, 도중에 와이어가 끊기거나 갈고리가 뽑히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지금 너더러는 위험한 짓 하지 말란다.”

대놓고 비웃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씁쓸하게 들으며, 정태의는 백미러를 보았다.

갈고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몰라도, 저 차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일단 저 연결 와이어를 끊어야 했다. 그러려면 여유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택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분명, 이 괴물들과는 다른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확연히 위험했다. 이 속도로 가다가 거의 반대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서 옆길로 돌아가면, 그나마 잘 되면 가드레일을 살짝 받아 차 몇 군데 찌그러뜨리고 방향을 틀 수 있을 테고, 재수 없으면 방향 틀다가 강물로 다이빙이다. 잘 되어서 가드레일을 받고 방향을 틀더라도, 잘못 부딪히면 대형 사고다.

가만있자, 내가 운전대를 제대로 손에 잡은 게 몇 년 만이지, 하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리면서 액셀에서 발을 뗐을 때, 크리스토프가 정태의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여전히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차 세워. 저놈에게 갚아야 할 빚이 떠오르기도 했고, 게다가 나도 뭐, ……, ……네가 위험해지는 꼴은 별로 그렇게 내키지는 않고……. 아니 뭐 크게 걱정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시선은 창밖으로 돌리고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를 거울 속으로 바라보았다.

정태의는 약간 겸연쩍어져서 두어 번 시선을 거울과 전방으로 움직였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방향을 틀면 갈고리가 뽑혀나갈지는 몰라도, 저택으로 가는 시간은 더 지체된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토프에게 결코 좋을 게 없었다.

그냥 이대로 달릴까.

그렇게 생각하며 핸들을 고쳐 쥐었을 때였다.

“싸고돈다는 말은 네가 리그로우에게 할 말이 못 되겠는걸.”

이미 차가 다리 위로 들어서고 있었다.

낮고 침착한 그 목소리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심한 표정 대신 조각상 같은 표정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리하르…….”

언제부터 깨어 있었을까.

정태의는 거울 속으로 리하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늘하게 보일 듯 말 듯 굽어지는 그 눈매를 보며, 그가 지금 막 깨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수갑으로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잘그락, 수갑의 사슬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반사적으로 크리스토프가 손을 뻗기 바로 직전에, 리하르트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쥐었다. 이어 정태의는 자신의 머리를 기댄 헤드쿠션 바로 뒤에서 뚜둑, 하는 섬뜩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깨닫는다. 그는 더 이상 수갑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너답지 않게 허술하군, 크리스토프. 피가 모자라 머리까지 안 돌아갔나?”

사뭇 걱정스러운 투로 중얼거리며, 리하르트는 엄지의 관절을 뽑아내고 어렵잖게 수갑에서 빼낸 손을 가볍게 주물렀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언제부터? 글쎄, 내가 너를 음흉하게 싫어했다는 정도부터였던가.”

리하르트는 빙긋 웃었다.

정태의는 약간 낯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제법 오래 깨어 있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눈매에 더욱 날이 선다.

“그래, 푹 잘도 잔다 싶었더니 그럼 별로 못 쉬었겠군.”

“아니, 그래도 제법 개운하게 기운이 나는걸. ―못다 지은 매듭을 마저 짓기에는 충분할 만큼.”

리하르트는 담담히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맺으며, 동시에 차문을 거세게 팔꿈치로 후려치듯이 열어젖혔다.

“잠까……!”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거칠게 벌컥 열리던 차문이 다리 가장자리에 안전목으로 박혀 있던 쇠기둥에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다리의 거의 한가운데, 강 가운데에 섬처럼 단초롬하게 솟아 다리와 다리를 잇는 이음매로 안전목이 없이 탁 트인 곳에 이르러서는 이미 문이 거의 반 넘게 날아가 버렸다.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어깻죽지를 움켜잡았다. 거의 몸으로 덮치듯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크리스토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내며, 리하르트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

정태의가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여유롭게 웃음 짓던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끌고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고 있던 차에서 강물 위로. 커다란 물소리가 뒤쪽으로 멀어져갔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 아래에서 귀청을 찢는 마찰음이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폈다.

어두워서 강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그리 높지 않았다. 강물 위로 고작해야 한두 층 높이다. 뛰어드는 자체로는 위험하지 않았다.

설마 리하르트쯤 되는 인간이 죽을 작정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문제는 지금 그들의 몸 상태다. 특히 크리스토프.

피가 굳어 딱딱하게 말라붙은 시트 위에는 아직도 축축한 피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돌아가서 얼른 건져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가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덜컹, 가볍게 뭔가 부딪쳤다. 얼결에 백미러를 쳐다본 정태의는 움찔했다.

‘거울에 비치는 것보다 사물이 가까이 있습니다.’

거울 하단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 위에서, 일레이가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차 뒤에 범퍼를 바싹 들이대고서.

“야, 사람 빠졌어!”

정태의는 이미 뒤에서 고스란히 다 보았을 일레이에게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 속도에서 이 거리를 두고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정태의가 소리를 지르는 모습만은 본 듯, 일레이는 의아하다는 시늉을 했다. 정태의는 조금 더 천천히 입모양을 또박또박 만들며 강가를 가리켰다. 일레이는 알아들은 듯 아하, 하고 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상관이냐며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는 그를 보고 정태의는 분통을 터뜨리며 몸을 아슬아슬하게 기울여 조수석 바닥을 더듬었다. 크리스토프가 내던졌던 전화기가 이내 손에 잡혔다.

통화버튼을 두 번, 신호음이 한두 번 울리자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태이.’

“봤지, 저놈들 빠진 거.”

‘아아, 물론. 네가 빠지지 않았다는 건 확인했지.’

“그럼 알잖아, 지금 이러고 놀고 있을 시간 없어, 속도 줄여!”

‘아하……. 너는 지금 ‘놀고’ 있었던 거로군?’

“네가 놀고 있는 거잖아, 네가!”

정태의는 전화에 대고 성질을 부리고 나서야 불현듯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이놈은 ‘귀한 승계 후보자의 신병에 최악의 사태는 생기지 않도록 지켜보기 위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네 그 ‘귀한 승계 후보자’가 신병에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는데, 내버려두고 와도 괜찮아?”

이미 다리는 다 지났다. 방향을 역으로 틀어 버릴 기회도 놓치고, 정태의는 핸들을 옆으로 꺾어 강변로로 들어섰다.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아까 그 자리로 가야겠다.

정태의의 물음에 저편에서는 피식, 바람소리가 되돌아왔다.

‘신병에 최악의 사태? 태이, 이봐, 저놈들이 저 정도로 죽기라도 할 것 같나?’

“글쎄. 하지만 죽는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하아,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어디 한 번 건져 보러 가 봐야겠군. 그런데 그 전에, 태이.’

“또 뭐야.”

정태의는 혀를 차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쫓기고 있는 거지. 생각해 보면 나는 하등의 쫓길 이유가 없잖아. 정작 중요한 인물도 이미 강 따라 흘러갔는데, 그럼 차를 그만 멈춰도…….

‘아까 내가 욕실에 있는 동안 훌쩍 도망쳐 버린 데에 타당한 이유가 있나? 아니면 내 몸만이 목적이었던 건가? 날 갖고 논 거야?’

핸들 위에 놓여 있던 손이 미끌, 아래로 떨어졌다. 그 통에 차가 잠시 비틀거려서 황급히 다시 핸들을 움켜쥔다.

정태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놈이 사람 놀리는 데에 점점 고단수가 되어 가고 있구나.

“아니, 몸만이 목적이라니, 게다가 갖고 놀……, ……, 내가 지금 잘 안 돌아가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네가 할 대사가 아닌 것 같은데, 일레이. 이런 때에 농담 마.”

‘이런. 나는 제법 진지하게 한 말인데. 농담으로 들렸나?’

슬쩍 웃음기가 묻어 있는 그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농담이었지만, 정태의는 그 말 속에 묻혀 있는 아주 미미한 분노를 그제야 깨달았다.

바보같이, 그제야.

“……. 아니, 사람이 도망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난 지금 네가 내게서 도망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러날 구석이 없다. 완전히 코너에 몰려 있었다.

정태의는 액셀을 밟아야 할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을, 일레이가 끝내 주었다.

‘지금 네 오른쪽 전방에 보이는 다리를 타고 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꺾으면 다시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 그놈들이 빠진 장소까지 돌아가려면 이 속도로 대략 십여 분쯤 걸리겠지.’

“……?!”

‘지금 경사롭게도 진하게 키스를 하고 있는 네 차와 내 차가 그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번이라도 1미터 이상 떨어진다면, 오늘 밤은 즐겁게 ‘놀아 본’ 걸로 치지.’

“……. 떨어지지 못하면?”

정태의의 물음에 대답은 몇 초쯤 뒤에야 돌아왔다.

‘떨어지지 못하면―그렇지, 이게 좋겠어…….’

***

처음에 여자와 잘 뻔했을 때, 크리스토프는 토하고 말았다.

그는 배워야 했다.

여자와 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쳐준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의 일들 백 중 아흔아홉은―방법만 올바르게 선택한다면―경험을 해 보는 편이 낫다고.

그래서 아직 어른은 아니었으나 어린애도 아니었던 그는, 예전에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여자애가 어느 날 연회를 마칠 무렵 은근히 그를 유혹해 왔을 때, 내키지 않았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견디지 못했지만 자신이 상대를 건드릴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다소 불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런 불만쯤은 억누를 수 있을 만큼 크리스토프에게 반해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원한다면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녀의 알몸을 보았을 때부터 속이 거북했다. 그녀의 팔 안쪽을 쓰다듬을 때 그 거북함은 울렁거림으로 바뀌었고, 가슴에 키스를 할 즈음이 되자 더 참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내보냈다. 그리고 방문을 닫자마자 욕실로 달려가 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자신이 건드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호감의 정도와 접촉의 정도 중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호감이 없는 사람과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을 하기는 무리였다.

크리스토프는 고민했다. 그 한계가 어느 정도일까.

자신 쪽에서 상대를 건드리는데도 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차후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자신의 한계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다시 누군가와 침대로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 여자애가 문제였다는 생각도 마치 변명처럼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나는 틀림없이 그녀가 싫었던 거야. 그래, 내가 그렇게까지 예민할 리는 없지. 그래서야 꼭 정신병 같잖아. 나는 그렇게까지 예민하고 날카롭지는 않아.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덮어 두었다.

자신이 다소 예민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여름 휴가철, 십몇 년째 북아프리카의 공관에서 일했던 친척이 매우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왔다. 이듬해에 다시 독일로 귀국할 예정이라 미리 사정도 알아 둘 겸 휴가를 저택에서 보내기로 했다며 찾아온 그 친척 부부에게는 크리스토프보다 두어 살 나이가 많은 딸이 있었다.

벌꿀처럼 사랑스러운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소개받는 자리에 함께 있던 또래 친척들은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무렵, 크리스토프를 처음 본 친척들은 그토록 예쁜 아이는 당연히 여자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잘못 듣고서 ‘크리스티나’라고 첫마디를 떼곤 했다.

크리스토프는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면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는 걸로 그쳤다. 애초에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여기든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짧은 한때, 어린 그를 크리스티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크리스티나를 위한 생일선물’ 가운데 드레스며 장신구 따위가 한가득 섞여들게 되자 그냥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선물들을 받은 어머니가 ‘여자애였더라면 좀 나았을까’라고 속삭이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한 번도 크리스토프를 쓰다듬어 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크리스토프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말을 걸어 주는 그녀의 조용하고 단정한 목소리를, 크리스토프는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순간적으로 핏기가 가시며 심장이 약하게 맥박 치는 것이 느껴졌고 손끝이 가늘게 떨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길 바랐다.

그랬던 것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러나, 더 이상은 그런 생각을 않았을 무렵이었다.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의 소녀가 찾아왔던 것은.

그 즈음은, 누군가 크리스토프를 실수로 잘못된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끔찍한 일을 겪는 상황이 몇 번이나 벌어져 더 이상은 아무도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금기가 되다시피 한 이름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수줍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잠시 침묵하며 크리스토프의 눈치를 살폈고, 크리스토프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흥미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름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자신을 그 이름으로 부르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여름 동안 저택에 있게 된 그녀는 곧 그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그녀를 티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미 금기어가 되어 버린 ‘크리스티나’는 다른 사람의 차지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리하르트만이 그녀를 ‘크리스티나’라고 불렀다. 크리스토프가 있는 자리에서는 유난히 분명한 발음으로.

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굳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를 크리스티나라고 부르는데 무슨 잘못이 있을까. 게다가 리하르트는, 농담으로라도 크리스토프를 크리스티나라고 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름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리하르트와 크리스티나가 평범한 친척 이상으로 친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도 언뜻 들려오는 이야기로 알게 되었지만, 그 역시 상관없는 일이었다.

리하르트는 연인이 있다, 따라서 크리스토프보다 더욱 매력적이다, 악의적인 소년들이 그렇게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타인과의 접촉에 취약한 자신의 결점.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꼭 참아야만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참지 않는 거라고.

게다가 내키지 않기 때문에 몸을 섞지는 않지만, 남녀 간의 관계나 성적인 접촉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할 때에 실수를 하거나 일을 그르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괜찮아. 상관없어. 언제든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럴 때가 되면 그때 해도 된다. 싫은 사람과―그때 자신이 구역질을 한 이유는 틀림없이 그 여자가 싫어서였다―굳이 시험해 볼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토프는 대수롭잖게 여겼다.

그러다가, 크리스티나가 다시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 며칠 전이었다.

유난히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텁텁하게 더운 공기가 몸에 들러붙어, 크리스토프는 일어나 테라스 창을 열어젖히고 창가에 기대어 몸이 식기를 기다렸다. 혹은 말을 달리고 오면 개운하게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간간이 불어와 목덜미를 식히는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문득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리스…….”

언뜻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들려서, 크리스토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래쪽이었다. 바로 아래층, 아니, 그 옆방인지도 몰랐다.

그 방향을 가늠해 보다가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리하르트의 방이었다.

그 방에서, 조그맣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달뜬 목소리가 뭐라고 조그맣게 속삭이며 웃는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프는 이내 그것이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 대꾸하는 듯한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짤막짤막하게 들린다.

무심결에 시선을 떨어뜨리자, 널찍한 테라스 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리하르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목에 팔을 감고서 끌어안은 크리스티나도 함께 보인다.

옷차림은 몹시 흐트러져 있었다. 정확히는 발치에 옷가지가 간신히 걸리다시피 해 널브러져 있다.

아직 미처 다 자라지 않았지만 충분히 듬직하고 넓은 남자의 어깨에, 여자의 가늘고 매끈한 팔이 휘감겼다. 그리고 그들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오는 축축한 소리.

크리스토프는 일순 넋이 나간 듯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리하르트의 무릎 위에서 그녀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그들이 서로의 목에, 얼굴에, 어깨에, 가슴에 입을 맞출 때마다, 서로의 몸을 손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입가에 손등을 댄 크리스토프는 낮게 혀를 찼다.

그때였다. 그녀의 귓불을 핥아올리던 리하르트가 그 기척을 들은 듯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낯을 찌푸린 채 불편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를 본 순간, 리하르트는 잠깐 표정을 지웠다. 일순 그의 얼굴 위로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때 문득 그녀가 낮고 짤막한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리하르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시선도 크리스토프에게서 떨어졌다.

크리스토프를 본 적도 없다는 듯이, 그는 다시는 위로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흔든다.

크리스토프는 불편한 낯 그대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보고 싶지도 않은 걸 보고 말았다.

그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 아래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한층 분명한 목소리다.

“크리스티나, 좋았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 거슬렸다. 그 낯익은 이름에 불쾌감이 솟는다.

그녀가 가쁘게 한숨을 쉬며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리하르트의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아주 미묘하게 나직해진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즐길 차례야, 크리스.”

뒤이어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를 부르는 일 자체가 별로 없지만, 부를 때는 늘 정확한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불렀다. 그러니 저것은 크리스티나의 애칭이다.

그런데도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본능에 가까운 불쾌감이 소름처럼 살갗을 감싼다.

그것은 선명한 악의였다.

가벼운 조롱이나 모욕 정도의 의도만을 담았을 수도 있으나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서 분명한 악의를 느꼈다.

소리가 들렸다.

얼른 창가에서 떨어졌지만 한 번 귀에 들어온 속삭임은 떨어지지 않았다.

끈적하고 난잡한 기척들이 아래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달뜬 목소리로 즐겁게 속살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수치에 젖은 흐느낌과 애원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는 한결같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크리스, 하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크리스’에게 요구하는 그 선뜩할 정도로 변질적이고 색정적인 말들에, 축축하게 젖은 소리들에, 뜨거운 숨결이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듯한 거친 숨결과 신음에, 크리스토프는 문득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조금씩 메슥거리기 시작한 속이 파도처럼 요동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리에 힘조차 빠져 크리스토프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괴롭게 두어 번 구역질을 하다가 곧 토하고 말았다.

피부를 타고 기어오르는 그 낯설고 생경한 느낌.

갑자기 생각났다.

처음으로 여자와 자려고 했을 때, 그녀를 쓰다듬고 입 맞추다가 몸을 겹쳤을 때, 사람들과 가끔 닿곤 하던 손 따위보다 심장에 훨씬 가까운 몸체가 타인과 닿았을 때.

타인의 살갗의 감촉, 더운 체온, 이미 머리로는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직접 자신의 몸에 닿았을 때.

낯설었다. 끔찍할 정도로 낯설어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이런 감각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와 맞닿고, 끌어안고, 감싸안기는, 그런 느낌이 몹시 낯설었다.

어쩌면 아주 어릴 적에는 이런 감각을 맛보았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크리스토프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아무도. 아무와도. 그저 오롯이 홀로.

그렇기에 그 감각은 크리스토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여기는 감각이라 해도, 그것은 크리스토프의 것은 아니었다.

그 낯선 감각이 섬뜩해서. 온몸의 모든 감각이 올올이 다 곤두서는 것 같아서. 심장 저 깊은 곳이 막연하게 두려워져서.

기분이 나빴다. 몹시 불쾌했다. 소름이 돋은 온몸의 감각이 날뛴다.

크리스토프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구역질을 했다. 몸속에 든 모든 것을 꺼내어 버리려는 듯.

*

물이 칼처럼 살을 파고들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후덥지근한 낮이었는데도 강물은 얼음 같아 뼈가 시렸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물귀신처럼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는 타인의 팔이 다른 모든 감각을 덮어 버리고도 남았다. 분노와 구별하기 힘든 불쾌감.

“……! ……!!”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상완을 움켜쥐었다. 건드리기도 싫었지만 허리를 감고 있는 이 팔을 어서 잡아 뜯어 버려야 했다.

물속이라 움직임이 둔했다. 시커멓게 암흑으로 휩싸인 물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촉각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감각이 불쾌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어깨를 뽑아 버리려고 팔을 틀어쥐었을 때, 리하르트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던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허리의 상처를 정확하게 벌리면서.

움칫, 크리스토프의 손에서 아주 잠깐 힘이 빠졌다. 허리에서 뭉클하고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있다면. 칼이 있다면. 아니, 하다못해 조그만 볼펜 따위라도 있다면 허리와 동시에라도 이 손에 구멍을 내어 버릴 텐데.

크리스토프의 생각은 허무하게 몸을 더듬는 손에서 이내 읽어낼 수 있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목을 세게 억눌렀다. 크리스토프는 폐 속에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공기를 토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깨달았다.

감각이 둔한 것은 물속이라서가 아니었다. 허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린 피 때문이다. 이미 손끝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핏기가 가신 머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허리에 들러붙어 있는 불쾌한 감각뿐이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그들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물 밖으로 나가야 했다.

온통 시커멓게 시야를 가리는 물속에서 오로지 수면만 반짝거렸다. 머리 위에서 은처럼 부옇게 반짝거리는 물.

수면을 뚫고 들어온 빛이 일렁이며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그들이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궤적을 따라 가느다란 핏줄기가 흔들렸다.

리하르트에게 끌려 수면으로 올라가며 시체처럼 물살을 따라 흔들리던 크리스토프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직전 리하르트의 팔을 쥐었다. 이미 아까 크리스토프가 팔꿈치를 뒤틀어 버리고 손가락 관절마저 성치 않아 제 구실을 못하는 팔이었다.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는 팔 대신 물살을 저어 수면 위로 올라가는 그 비틀린 팔을 잡고, 크리스토프는 느리고 둔한 몸으로나마 잡아당겼다. 투두둑, 뼈마디가 뒤틀리는 감각이 물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꿈틀,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커다란 손으로 그의 목을 옥죄어 죽여 버리기라도 할 듯 숨통을 조르자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공기방울이 다시 몇 방울 터져나왔다.

수면으로 솟구쳤다가 숨도 쉬지 못하고 다시 물속으로 끌려들어간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머리를 움켜쥐고 바로 옆에 있던 다리 기둥에 세차게 후려갈겼다. 퍼억, 모서리에 찍혀 찢어진 머리에서 핏방울이 후두둑 수면 위에 떨어져 섞였다.

들리는 거라곤 물소리와 거친 숨소리, 알아듣기 힘들 만큼 짤막한 욕설, 그리고 물소리.

둘은 다시 짐승처럼 싸웠다.

물살 가운데 움직임이 둔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도 물고 뜯고, 상대의 피와 살을 강물에 흘려보내며 격렬하게 물살을 일으켰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물속에서의 싸움은, 그러나, 뭍에서의 싸움보다 빨리 전세가 드러났다.

처음부터 크리스토프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남아 있는 체력도, 몸에 입은 상처도, 뒤엉키는 것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 성향도, 무엇 하나 크리스토프에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리하르트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러나 의식의 반은 물속에 담그고 있어 물소리와 섞여 잘못 들었는지도 몰랐다.

몸속에 피 대신 강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피 한 방울에서 쥐어짜낼 수 있는 힘조차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라앉아 버려.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강물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영원히 올라오지 마. 강물 바닥의 진흙에 파묻혀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웃기는군. 그렇게 놔둘 것 같아?”

귓속을 파고들듯이, 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틀림없이 크리스토프만큼은 지쳐 있을 텐데도, 핏물과 범벅이 된 강물을 뒤집어쓴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목을 움켜쥐었다. 강물에 빠져죽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는 듯.

“건드리, 지, …―.”

크리스토프는 목에 닿는 손의 뜨거운 체온이 몹시 낯설고 섬뜩해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말은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왈칵 쏟아져 들어온 물살에 먹혀 버린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이끌고 강둑 쪽으로 헤엄쳤다. 이미 거의 제 기능을 못하는 한쪽 팔로 물살을 저으며, 그 팔과 별다를 바도 없는 다리로 물을 차며, 크리스토프를 끌고 간다.

끔찍하게 기분이 나빴다. 입을 벌릴 때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줄기 때문에 숨이 막혀도, 온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듯한 실혈의 아득함 가운데서도, 그 무엇보다 크리스토프는 목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틀림없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옥까지라도 끌고 갈 것 같은 억센 손아귀는 결코 크리스토프를 놓지 않았다.

강둑에 닿기까지, 간간이 발작적으로 미친 듯이 진저리를 치는 크리스토프를 끝까지 잡아끌고 겨우 뭍에 닿았을 때, 리하르트 역시 악귀 같은 형상이었다. 몸에서 성한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늘어진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리하르트는 크게 가슴이 오르내리도록 거칠게 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눌렀다. 서너 번 무겁게 깜빡이는 눈만을 형형하게 빛내며, 콧날에서 턱으로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를 닦지도 않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그 역시 그대로 쓰러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리하르트는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흙바닥에 엎어진 채 미동조차 않는 크리스토프의 허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냉담하게 그 피에 젖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타르텐이라는 성만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너는 아무도 오지 않는 이 다리 아래에서 흙투성이 시체로 뒹굴게 됐을 거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정신을 잃어 마땅했다.

리하르트는 조금씩 핏물이 번져 가는 옷을 내려다보다가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그때였다.

리하르트의 손이 옷 위를 스치자마자 크리스토프의 몸이 아주 희미하게 물결쳤다. 실낱처럼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크리스토프가 새파랗게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하지 마……, 건드리지…….”

그러나 간신히 벌어진 새파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거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꿈틀, 크리스토프의 손가락이 간신히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며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옷가지를 잡아당겼다.

“다른 사람이 네놈을 건드리는 건 소름이 돋도록 싫어했었지? 그러나 나 역시 네놈을 건드리기는 대단히 불쾌하다는 점을 알아뒀으면 좋겠군, 크리스토프 ‘타르텐’.”

그 성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버려두고 걸음을 돌렸다고, 리하르트는 말하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옷 아래, 맨살 위로 얼핏 손을 스쳤을 때였다.

시체처럼 거의 움직이지 못하던 크리스토프가 끔찍하다는 듯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얼굴을 팔꿈치로 후려갈겼다.

미처 피할 생각도 못했던 리하르트의 얼굴이 제법 큰 타격음과 함께 휙 돌아갔다.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일격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얻어맞아 고개가 돌아간 리하르트의 목을 꺾어 버릴 기세로 몸을 일으키던 크리스토프는, 그러나 겨우 상반신을 일으켜 스스로의 몸을 버티는 게 한계였다.

강물에 젖은 옷은 이미 반 이상 핏물이 들어 있었다. 물든 걸로만 본다면 실혈 쇼크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게 보인다.

땅을 짚고 몸을 지탱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기도 벅차, 가늘고 짧은 숨결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 옆에서, 고개를 돌린 채 잠시 침묵하고 있던 리하르트가 다시 휙, 크리스토프를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턱을 후려쳤다.

그의 주먹에서도 평소와는 비할 수 없이 힘이 빠져 있었지만, 간신히 버티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쓰러지기에는 충분했다.

“미친놈……!!”

리하르트는 나직이 외치며 얻어맞은 얼굴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흙바닥 위에 피를 뱉어내는 크리스토프의 목을 움켜쥐고 그의 배 위를 무릎으로 내리눌렀다. 다른 쪽 무릎으로는 크리스토프의 손 위를 누른다. 손등이 흙바닥 위에 짓눌린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프의 목을 쥐었던 손을 놓아 자유로이 남아 있는 팔을 쥐었다. 그리고 관절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버린다.

“……!!”

크리스토프의 입에서는 비명 한 마디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을 뿐이다.

“크리스토프. 내가 널 싫어했다고?”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 올라앉듯이 그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초점마저 흐려지기 시작한 눈을 간신히 떠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리하르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어느 때건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얼굴은 찾아볼 수 없다. 섬뜩하게 빛나는 눈이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그래, 맞았어. 나는 너를 싫어했어. 유쾌할 만큼. 사람을 싫어한다는 게 어떤 건지 너로 인해 알게 됐거든. 그래도 나름대로 즐거웠지. 난 사람을 싫어해 본 적이 없어서 제법 신선하기도 했으니까.”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목을 쥐었다. 한 손에 넉넉하게 들어오는 가느다란 목을 천천히 움켜쥐고, 그 손에 힘을 준다.

“너는 말이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었어. 내 주위에 있는 녀석들을 반죽음시켜 놔도, 나에게 무슨 욕설을 지껄여도, ……그래, 올리비아의 무덤에 개 시체를 던져 놔도, 괜찮았어. 너는 무슨 짓이든 마음껏 해도 좋았어. 그래야, 내가 그 오랜 시간을 견딘 뒤에 얻을 보람이 더욱 컸을 테니! ―그런데 말이지, 크리스토프. 네가 그걸 다 망쳤어.”

담담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낮아졌다.

크리스토프의 하얀 목을 잡아 뜯어 버릴 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리하르트는 몸을 숙였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바싹 얼굴을 갖다대며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너는, 승계 경쟁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나직하게 말을 짓씹어내는 리하르트의 입술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유리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바로 위에서 크리스토프를 핥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끝까지 남아야 했어. 승계자를 선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내게 패배하고, 평생 내 아래에서 발버둥쳤어야 했단 말이다.”

“―….”

입을 열어도 숨은 쉴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떠 리하르트를 노려본다.

뭘 바랐었지, 리하르트? 이기길 바랐나, 승계 경쟁에서? 승계자로 선택받는 순간, 패배자를 돌아보며 이겼다는 기분을 분명하게 맛보고 싶었어?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겼다.

크리스토프는 졌다.

십여 년 전, 두 번째 선택의 기회에서 크리스토프가 그 기회를 저버렸을 때. 경쟁에서 내려서, 약속된 부와 명예 대신 막대한 빚을 대신 선택했던 그때,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와의 경쟁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굳이 십 년을 더 기다릴 것 없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그때 도망쳤다. 그렇게, 그는 졌다.

“네가 승계 다툼에서 내려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얼마나 분노했는지, 네가 알 리가 없지. 오로지 너를 내 발 아래에서 짓뭉개기 위해 나는 타르텐을 얻기로 했는데, 그렇게 달아나……? 나는 그때 진심으로 널 죽여 버리고 싶었어. 그게 안 되면 차라리 내 머리를 박살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네가 끔찍하게 증오스러웠다.”

목뼈를 부러뜨릴 듯한 악력으로,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목을 졸랐다. 정말로 그대로 죽여 버릴 것처럼, 그 손아귀에 증오가 피처럼 묻어나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시야가 흐려지는 눈을 감아 버렸다. 질식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도록 머릿속이 빙글거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그러나 그가 아득한 어둠 너머로 의식을 놓아 버리기 직전, 갑자기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리하르트의 얼굴이 멀어져 있었다.

크리스토프를 짓누르고 앉아서, 그는 조금 전까지의 광기가 흐르는 분노를 어딘가에 갈무리하고 냉랭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아직도 타르텐의 성을 쓰고 있다니.”

낮은 코웃음과 함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막혀 있던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크리스토프는 폐가 끊어질 듯이 기침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다가, 리하르트는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거침없이 크리스토프의 몸을 뒤엎은 리하르트는 두 무릎으로 각각 그의 팔과 허벅지를 눌러 고정시키며 앉았다.

기침을 할 힘조차 부치는 듯 힘겹게 헐떡이던 크리스토프가 몸을 뒤척였지만 리하르트는 자신의 체중을 무릎에 실어 그의 움직임을 막아 버린다.

리하르트는 묵묵히 그의 옷 솔기를 튿어내어 셔츠를 등 쪽으로 갈라 찢어내었다. 곧 크리스토프의 등과 허리가 드러났다. 굳어진 피와 엉겨 드러난 참혹한 속살 사이로 아직도 실낱처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혀를 찼다.

상처 바로 위에 손을 올리고 상처를 아주 약간 잡아당겼다. 그러자 크리스토프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 가늘게 떨리며 움츠러드는 어깨를 다소 기묘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리하르트는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가 아니다. 허리의 살갗 위를 쓰다듬는 타인의 손가락이 소름끼쳐서, 크리스토프는 몸을 움츠린 것이다.

“하지 마……! 리하…….”

다친 짐승처럼 낮게 짓눌린 목소리로 이를 갈다가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만다. 리하르트의 손가락이 상처 한가운데를 누른 탓이다. 아니, 상처를 따라 손끝이 마치 헤집듯이 벌건 속살을 파헤치며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자 오히려 태연한 것처럼 떨림이 멈추는 그 어깨를 보며, 리하르트는 하, 하고 웃는다.

“그렇지. 너는 몸이 아픈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놈이었지.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견뎌 보시지.”

리하르트는 그를 깔고 앉아 있던 위치를 약간 틀어, 그의 팔을 꺾어 허벅지에 올리고 그 위를 깔고 앉았다. 그러자 그늘의 방향이 바뀌어,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가로등이 그의 상처를 알아볼 만은 할 만큼 비춘다.

“건드리지 마……! 차라리 칼을 박……!”

이미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는 알아듣기도 힘들 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 상태로도 악이 서린 목소리와는 달리 몸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가끔 생각난 듯이 퍼득, 몸이 꿈틀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상처 깊이까지, 아물어든 상처까지 벌리며 손가락으로 천천히 상처를 덧그리며, 리하르트는 아픔과는 다른 이유로 새파래진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손끝에 다른 이물질은 걸리지 않는다는 걸 마지막까지 느리게 확인한 뒤에야 상처에서 손을 뗐다. 그때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짓씹는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또 토하기라도 하려고?”

문득 리하르트는 나직이 속삭였다.

손가락 끝에 묻은 피를 천천히, 크리스토프의 벗은 등 위에 덧그리며 닦았다. 드러난 어깨가 흠칫거렸다.

리하르트의 손이 멎었다.

흉 하나 없이 새하얀 등 위에 손가락이 그린 핏자국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매끄러운 등 한가운데에, 리하르트의 손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 같던데. 이제는 다른 사람이 건드리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게 된 모양이더군. 그래, 네 그 ‘친구’ 말이지.”

“네놈은, 건…….”

“나도 내키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하르트는 등 위에 얹고 있던 손바닥을 그의 등 위에서 느릿하게 미끄러뜨렸다.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더욱 푸르스름해졌다.

“그만, 해, ……토할, 것, 같…….”

“하, 그것도 보기 좋겠군. 조각 같다고들 하는 그 얼굴이 토사물로 범벅이 되면 아주 볼 만하겠어.”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크리스토프의 귀에 닿았다.

등에서 허리까지, 그 커다란 손이 상처를 피해 천천히 피부 위를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마다 미묘하게 살갗을 터치하며, 마치 애무라도 하듯이, 하얀 피부를 훑는다.

“리하, 그만, ……죽인, …….”

“얼마나 귀한 몸이시기에 손가락 하나만 닿아도 질색을 하나 했더니, 이거야 과연 곱게 아껴 두고 사릴 만한 몸이긴 하군. 남색을 하는 놈들이 보면 환장을 하겠어.”

리하르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허리 위에서 손도 멈춘다.

비웃음조차 잃은 눈이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살폈다.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누르려는 듯 이를 사리문 입술에서부터 핏기를 잃은 뺨, 목덜미에서 어깨, 등. 허리.

“그러고 보니 리그로우가 말했었지. 이렇게 하면 네가 끔찍하게 진저리를 치며 싫어할 거라고. 비록 나는 그런 쪽으로는 취미가 없긴 하지만, …―.”

낮은 목소리가 어느 순간 끊겼다.

허리 위에서 잠시 움직이는가 싶던 손이, 흙바닥에 짓눌려 있는 크리스토프의 복부 쪽으로 파고들었다.

크리스토프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등을 누르며, 리하르트는 손을 더욱 깊이 넣었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당혹스러운 듯 희미하게 미간에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배꼽에서 반 뼘쯤 아래, 그 부근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른다.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마치 아기의 속살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크리스토프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의 몸 위에 체중을 실어 억누르며, 리하르트는 그 손을 약간 움직였다. 배가 아프다며 우는 어린아이의 배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새끼손가락 끝에 까슬한 감촉이 걸렸다. 물에 흠뻑 젖어 들러붙어 있는 그 털결을 새끼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손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린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리하르트는 말이 없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몇 번쯤 요동치며 욕설 비슷한 말을 내뱉다가 지금은 새파란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가끔씩 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는 막힌 소리가 들린다.

아랫배에서 더욱 아래쪽으로 소복하게 자라난 털 위에서 잠시 머무르던 손이 조금 더 내려갔다.

다른 사람이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치부에, 처음으로 타인의 손이 스쳤다. 스친 순간 움칫 움츠러드는 듯하던 그 손은, 몇 초쯤 망설였을까, 다시 치부로 뻗어갔다.

손가락에, 이어 손바닥에 따끈한 살이 닿았다.

퍼득, 크리스토프의 몸이 요동쳤다. 어쩌면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반사적으로 손이 그 힘없는 살덩이를 감싸쥐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세게.

손바닥과 성기의, 살과 살이 밀착하는 그 낯선 느낌.

그리고 그 순간.

“으, ……웁……, 우…―!”

크리스토프는 몸을 움츠리며,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먹은 것이 없어 토해낼 것이라곤 위액 따위가 고작이었지만, 그는 몸서리를 치며 몇 번이고 구역질을 했다.

뭍에 내팽개쳐진 물고기처럼 퍼득거리는 크리스토프에게서, 리하르트는 불현듯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손을 뗐다.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스스로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이내 낯을 찌푸리며 혀를 한 번 찼다. 입속으로 누구에겐지 모를 욕설을 중얼거린다.

“빌어먹을…….”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몸 위에서 비켜 일어섰다.

연신 구역질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크리스토프를 사나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그를 부축이라도 해 주려는 듯 손을 뻗다가 그 손마저 도로 거두고 말았다.

마치 크리스토프의 접촉 기피가 리하르트에게 옮기라도 한 것처럼, 크리스토프의 어깨나 팔 따위로 다가가던 손이 망설이며 허공에서 멈춘다.

겨우 구역질이 멈춘 듯, 몇 번의 기침을 끝으로 숨을 돌린 크리스토프는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만 빼면 꼭 시체 같았다. 눈가에 생리적으로 고여 있던 눈물이, 눈을 감는 순간 토도독 방울져 내렸다.

혀를 차며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크리스토프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차라리 그 편이 편하다. 몸부림이라도 친다면, 지금은 감당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쯧, 다시금 혀를 찬 리하르트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머리카락에 맺혀 있다가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

초조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프는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물에 빠져죽은 시체처럼 흠뻑 젖어 늘어져 있는 그의 옆으로, 희미하게 핏기가 배어나는 물웅덩이가 생겨난다.

주름이 짙게 팬 미간을 엄지 끝으로 문지른 리하르트는,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쳐 떠메다시피 하고 일어섰다. 크리스토프의 체중이 거의 온전히 리하르트에게 실렸다.

생각보다 가뿐하게 일어난 리하르트는 자신의 어깨 위로 고개를 늘어뜨린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등에 무게가 실린다. 물에 젖어 싸늘하게 식은 몸 위로 따뜻한 체온도 같이 실렸다.

“흥, 눈을 뜨고 움직일 때에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리하르트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였다.

머리 위,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다리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 크리스토프!! 거기 있어?”

어둠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그들을 찾아 외치는 목소리는, 크리스토프와 함께 있던 청년이었다.

리하르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흘끗,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준다. 아마도 저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서 은근히 반색을 하며 눈을 빛냈을 남자에게 저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리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흙더미를 밟으며 강둑 위로 올라가는 그 기척을 들었는지,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쪽이야? ……어이, 크리스토프?!”

청년의 목소리에 뒤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하나 더 겹쳐졌다.

“약속 잊지 마.”

“…….”

무슨 이유인지 순식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청년의 뒤에서 나직이 웃는 저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를, 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아하.

그제야 리하르트는 잊고 있던 사실을 되살렸다.

그래. 그랬었다. 아까 강으로 뛰어내리기 전, 리하르트는 분명히 들었었다.

문득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걸음이 아주 약간 경쾌해졌다.

리하르트가 몇 걸음을 더 내디뎌 그늘에서 벗어나자, 다리 위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크리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를 먼저 부른 다음에야 리하르트를 부르는 그 청년을, 리하르트는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낯을 찌푸리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돌린 리하르트는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보았다.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그 남자, 리그로우는 약간 눈썹을 치켜 올렸다.

“멀쩡해 보이는군.”

리그로우의 말에, 그제야 리하르트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다시 떠올렸다.

“아아, 덕분에.”

그런 뒤 그는, 이쪽을 향해 잰걸음으로 내려오는 청년에게 시선을 옮겼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청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핀다.

금세 리하르트의 앞까지 와서 크리스토프를 부축하겠다는 듯 손을 내미는 청년에게서 아주 약간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무색하게 만들며,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새로 해야겠군요, 정태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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