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ne summer night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한결같았다.
철도 들기 전부터 늘 한데 어우러져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던 여러 친척 형제들 사이에서, 그 남자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얼굴로 사기를 치는 인간이었다.
함께 본가에서 살면서 자라온 형제들은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간혹 친척 가운데서는 외국이나 타지에 살다가 오랜만에 돌아오거나 잠시 본가에 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처음 그를 보면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예쁜 아이가 다 있담, 세상에나.
예쁜 걸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지, 처음 그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애나 어른이나 무조건적으로 그를 사랑했다. 처음 마주친 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아니, 어쩌면 그렇게까지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가 웃음기 하나 없이 서늘하고 무심한 표정을 허물지 않아도, 간혹 입을 열어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지껄여도, 그들은 대체로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어린애들이란 으레 예의 없고 심술궂은 법이지.’라며 웃는 것이었다.
나이가 좀 들고 나서는 얼굴값을 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정도의 이중성이야 그리 드물지는 않은 법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조금 입이 거칠고 못된 정도는 별달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외모와 성격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그 남자는 각별했다.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숱한 별명들 속에 얼굴사기꾼이라는 말이 섞여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가 이 바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는 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그 중 반 이상은 이미 그 남자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적의와 경계로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나머지 얼마간은 찬탄과 황홀이 어려 있는 낯선 이의 시선들이었다. 어차피 그 본인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뜻이든 일체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먼저 유리잔으로 상대를 내리친 것도 그였고, 흩어지는 핏방울에 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웬 호기롭고 정의감 넘치는 손님이 분연히 일어서 그에게 다가왔다.
홀로 유유히 앉아 있는 그 남자를 둘러싼 사내들의 험악한 분위기가 끝간 데 없이 치솟고 있는 그 상황에서, 그 손님은 외쳤던 것이다.
어떻게 여러 명이서 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냐, 이게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가 아니고 뭐냐, 라는 요지의 말을.
그 손님의 말은 일견 몹시 타당하게 들렸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네댓 명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어디에 나가더라도 지지 않을 만큼 억세고 흉포해 보였고, 그 가운데에 혼자서 앉아 있는 그 남자는 그 사내들의 고함소리만으로도 파삭 깨어져 버릴 것처럼 덧없고 섬세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며, 적어도 그 사내들만큼은 덩치가 좋은 그 손님이 남자의 앞을 막아섰을 때, 일순 미묘한 침묵이 흐른 것을 그 손님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불찰이었다.
“비켜, 병신아.”
뒤에서 조용하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손님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고운 얼굴만큼이나 부드럽게 귓가를 파고드는 그 낮은 목소리에 퍼뜩 마음이 들떠 “네?” 하고 돌아봤을 뿐이다.
그 순간, 갑자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님의 한쪽 귓가를 감싼 고운 손의 보드라운 감촉에 취해 있을 새도 없이, 그 손은 몹시 귀찮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쪽 방향에 세워져 있던 스탠드에 똑바로 부딪힌 그 손님은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위로 그 스탠드가 넘어져 이마를 호되게 찍힐 때까지도 상황을 알지 못했다.
살짝 찢긴 이마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얼마쯤 지난 뒤에야 그는 깨달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그가 누군가를 붙잡고 뭐라고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하얘진 머릿속에는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미 눈앞에서는 상황이 뒤바뀌어 있었다.
고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사람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소리들과 나른하게 울리던 재즈 음색이 끊겼다.
그리고 그 손님은, 여태 그 남자의 인생에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한동안은 도저히 믿지를 못할 광경을 목도했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유리처럼 섬세하고 약해 보이는 얼굴의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
비명과 고함, 신음이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굵고 네모진 기둥에 멋스럽게 걸려 있던 커다란 액자는 바닥 위에 뒹굴고 있었다. 깨어진 액자 유리를 깔고 누워 있는 피투성이의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쥐고 신음하고 있었고, 이름 있는 신진 사진작가의 흑백 사진은 피 묻은 구둣발로 마구 짓밟혀 있었다.
액자가 걸려 있었던 사각기둥은 공포영화의 세트처럼 핏빛 손자국이 몇이나 찍혀 핏물과 뒤엉켜 있었고, 그 기둥을 등 뒤에 두고서 크리스토프는 서 있었다.
“사람이 참을성 있게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는데 고맙다고 여기고 얌전히 처박혀 있지는 못할망정, 왜 주제도 모르고 헛짓이야, 응? 나랑 같이 온 그놈, 어디다 뒀어. 손가락 하나 대지 말고 당장 여기에 도로 모셔다 놔.”
조용하게 타이르듯이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손아귀에는 한 남자가 멱살을 잡힌 채 낡아빠진 가죽부대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 남자의 어깨너머로는 다른 남자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지만 크리스토프는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내 몸에 총구멍이 나기 전에 이놈 목줄기에 구멍이 나든가 방아쇠 위에 걸친 그 손가락이 날아가는 게 먼저일 거다. 검지가 없는 인생이라니 여러 모로 불편할걸.”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은 한 치의 허세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정도는 알 만큼, 남자들은 크리스토프와 오래도록 함께 지냈다.
어느새 실내는 조용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 안을 가득 채웠던 고함과 비명은 잦아들었다. 신음이나 낮은 욕설, 거친 숨소리 따위 때문에 고요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귓전을 때리는 고함과 비명이 오가던 조금 전과는 비할 바 없었다.
그 불온하고도 조용한 공기 중에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이미 크리스토프의 발치에 고깃덩이처럼 꿈쩍도 않고 쓰러진 몸뚱이가 여럿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몰골을 한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고 멀쩡한 듯했다.
그를 겨누고 있는 총구가 떨렸다.
일부러 그 앞을 가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총구와 크리스토프의 사이에는 피투성이로 늘어진 남자가 있었다. 잘못 빗나가기라도 하면 동료를 쏘게 된다.
그 불안하고 두려운 긴장감 따위는 전혀 아는 척도 않고, 크리스토프는 그 남자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거칠게 벽에 박았다.
“어서 나랑 같이 왔던 놈 데려오라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어?”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머리를 피가 튀도록 벽에 후려갈기던 크리스토프는, 이미 남자는 정신을 잃어 대답을 할 리가 없는데도 대답을 기다리는 듯 몇 초쯤 침묵하다가 혀를 찼다.
“못 알아먹겠나 보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머리통, 그냥 부숴 버리는 편이 낫겠어.”
심상한 혼잣말이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피가 엉겨붙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벽 쪽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 손을 막 휘두르려고 했을 때였다.
탕―.
공기를 진동시키며, 총소리가 울렸다.
“……!”
고요해졌다.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도, 피 끓는 신음소리도, 일순 정적 속으로 잠겨들었다.
크리스토프를 겨누고 있던 총구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한 발 늦게 풍겨 나오는 매캐한 화약 냄새를 끌며 그 총구에서 날아간 탄환은, 그 본연의 목적대로 사람의 살을 파고들어 흉측한 구멍을 내며 피를 뿜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격자가 원했던 피가 아니었다.
“그것 봐……. 이놈 목줄기에 먼저 구멍이 날 거라고 했잖아.”
총구와 크리스토프의 사이에는, 그의 손에 잡혀 늘어져 있던 남자가 들어서 있었다. 여전히 크리스토프에게 멱살을 잡혀 정신을 잃고 있던 그 남자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푹 꺾었다. 그 목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으로 검붉은 피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줄기처럼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옷이 젖어든다.
크리스토프는 살아날 수 없는 그 몸뚱이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앞에서, 총을 쥐고 있던 남자가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고서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왜. 내가 머리통을 부숴 놓기 전에 네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던 모양이지?”
“맙소사, 야콥……. …―크리스토프, 이……!!”
넋 나간 얼굴로 친구의 시체를 망연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던 남자는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괴물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크리스토프를 향해 총을 들어올렸다.
타앙―…, 다시 총소리가 꼬리를 끌었다.
그러나 무작위로 튀어나간 탄환은 크리스토프의 옆으로 비껴가 그 뒤의 기둥에서 돌조각을 튀겨내었다. 부스러진 돌조각이 옷깃을 스치며 떨어질 뿐이었다.
세 번째의 탄환은 제법 정확하게 크리스토프를 노렸지만, 이미 크리스토프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남자를 향해 순식간에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결과적으로는 빗나간 곳을 조준하며 총을 움켜쥐고 있는 그 남자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내 몸에 총구멍 나기 전에 이 손가락이 먼저 날아갈 거라고도, 말했었지?”
심상한 속삭임이 크리스토프의 입술에서 떨어진 것과 동시였다.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남자의 검지가 한 마디만 남겨두고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일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듯, 얼떨떨한 얼굴이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터져 나온 피보라가 턱 언저리를 물들인 다음에야, 남자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짐승 같은 비명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내, 내 손가락, 내 손……!!”
남자는 끔찍하게 소리를 지르며 경련하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리스토프는 그가 떨어뜨리는 총을 받아들었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손을 붙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 섞인 고함을 내지르던 남자는 어느 순간 크리스토프를 번뜩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남자에게서 빼앗은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의 얼굴을 갈겼다.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는 그 남자를 더 이상 본 척도 않고, 그는 뒤이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들에게로 돌아섰다.
이미 그곳의 상황은 일방적인 참살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던 차였다.
“크리스토프! 오, 맙소사, 크리스토프, 제발 멈춰 주게. 이 무슨 두렵고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같은 혈족끼리 피를 보다니!”
비탄에 젖은 구슬픈 목소리가 바 안쪽으로 이어진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이 바의 점장인 에리히가 경악과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향해 서 있었다.
미묘하게 이질적인 그 느낌을 알아챈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잘 꾸며진 연극무대에 오른 열정적인 배우처럼, 그는 대단히 분명하고 확연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람, 공포, 슬픔 따위가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처음부터 그런 감정을 표출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에리히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멈칫한 크리스토프는 한 남자의 어깨 관절을 뽑아 버리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망설임 없이 그에게 돌아섰다. 새 목표물을 포착한 로봇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똑바로 에리히에게 다가가는 크리스토프에게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오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진정해. 진정하라지 않나. 이봐, 나를 알아보겠나? 응? 이봐, 크리스토프?”
“에리히.”
“그래, 나야, 에리히! 자네의 둘도 없는 친구 에리히지! 자네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절친한 친구 에리히라고!”
에리히는 마치 주술에 걸려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친구라도 되찾은 듯 감격스럽게 외쳤다. 자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피투성이 크리스토프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그러나 친구 사이의 감동적인 포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리히에게 바싹 다가선 크리스토프는 그의 턱 아래를 틀어쥐며 그를 바 옆의 기둥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기둥에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히고 요란스럽게 비명을 지른 에리히는 자신의 숨통을 조일 듯이 목을 움켜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불안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봐, 크리스토…….”
“그놈 데려와.”
에리히의 말을 끊으며 크리스토프가 짧게 말했다.
에리히는 휘둥그레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허, 하고 한숨을 내쉬며 안타깝게 혀를 찼다.
“아직도 그 말인가? 나는 정말로 모른다니까? 아니 도대체가, 자네가 데리고 온 그 친구에게 내가 해코지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자네 친구라면 곧 내 친구 아닌가! 내가 왜 그런 짓을―….”
“점장 자리를 꿰어차고 있는 놈이 모를 리 없겠지.”
“나는 정말로 모른대도!”
“……. 그렇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 불필요할뿐더러 성가시게 구는 인간이로군.”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에리히의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넣었다. 꺼걱, 기괴한 소리가 에리히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이, 이바, 크리…―.”
숨이 잘 통하지 않아 시뻘게진 얼굴에 한껏 불쌍한 표정을 띠며 울상을 짓는 에리히를 내려다보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가 사람의 숨을 끊는 것은 일순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를 앞두고 공포보다는 그저 과장된 울상만 떠올라 있는 에리히의 얼굴을, 크리스토프는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의아한 듯 고개를 아주 약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에리히. 너는 어째서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거지? 너를 죽이는 건 이렇게 간단한데.”
이렇게―라며 에리히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줄 때였다.
“에리히보다 더 나은 표적이 이곳에 있으니까 그런 걸 테지.”
대답이 돌아온 곳은 등 뒤였다.
그곳에 리하르트가 있었다.
크리스토프에게서 여남은 걸음 가량 떨어진 곳에.
생각해 보면 그는 늘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늘 그렇게, 불시에 허를 찌를 수는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로의 모습이 속속들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그들은 마주보고 있었다. 지긋지긋할 만큼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그 거리는, 승계의 굴레를 벗어던지면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제자리다. 마치 그 거리가 변했던 적은 없었던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그것이 싫어서 이곳을 떠났었는데. 드레스덴 따위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데. 그 거리를 고스란히 남겨놓고서 다시 이렇게 서 있었다.
이미 애초에 적의가 누구에게서 먼저, 어떤 이유로 싹텄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 확연한 선을 긋고서 무관심 속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적의를 보이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얼음처럼 무심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래, 밉다기보다는 싫다는 감정에 더 가까웠다.
어째서?
그런 것 따위는 알 수 없다.
“에리히보다 나은 표적이라……, 과연.”
여전히 에리히의 목줄을 틀어쥔 채 몸을 반쯤 돌려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에리히를 놓았다. 그리고 몸을 마저 돌려 리하르트를 똑바로 앞두고 섰다.
일부는 이미 말라붙고 일부는 새로 흥건하게 젖어든 크리스토프의 피투성이 옷을 흘끗 눈동자만 아래로 굴려 쳐다본 리하르트는 다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변에 펼쳐져 있는 그 처참한 상황들을 둘러본다.
늘 담담하고 부드러운 그의 얼굴에 삭막한 적의가 떠올랐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지.”
리하르트의 냉랭한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짧게 말했을 뿐이다.
“내놔.”
그 짤막하고 무뚝뚝한 한 마디에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뭘?”
“새삼스럽게 나랑 말장난을 치고 싶어진 건 아닐 텐데.”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 남자에게서 빼앗아 아직껏 들고 있던 총이 그의 손 안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위협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위협으로 느끼지도 않은 리하르트는 그의 손매를 차갑게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너와 같이 왔다는 그 친구를 말하는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게다가 아무리 봐도 지금 이 상황을 따지고 들어야 할 입장에 선 건 이쪽일 것 같은데.”
리하르트는 턱짓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매가 가늘어지며, 곧 싸늘하게 일그러진 입술에서는 분노인지 냉소인지 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따지고 들어야 할 입장이라.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애초에 네가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으러 여기에 왔었지.”
리하르트는 의아한 듯 아주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말없이 뒷말을 기다렸다.
“내 말馬에 수작을 부려 사고를 유도하려던 네 아랫놈들은 내가 임의로 처리는 했지만, 네게 그 책임을 좀 물어봐야겠다.”
“네 말?”
리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난데없는 이야기인가 가늠해 보는 눈치였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리하르트에게 다가와 뭐라고 귀엣말했다. 크리스토프가 저택의 마사에서 벌인 소식이 이미 이쪽에 전해질 만한 시간이 흘렀다.
남자가 속삭이는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심상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모리츠 녀석들이 바보짓을 했나 보군. 세 놈은 그나마 당분간 여기저기에 깁스나 하고 다니면 된다지만 두 놈은 병원 침대에서 한동안 누워 일어나지 못할 모양이고 한 놈은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이라니, 그 말 값 한번 대단히 비싼걸.”
리하르트는 평연하게 중얼거렸다. 느리게 말의 여운을 끌며 잠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입매에 아주 희미한 조소가 서렸다.
“그러나 말해 두는데 크리스토프, 네 경직된 사고방식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수직적인 관계에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내 아랫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이며 형제지. ……아, 그래, 네 형제도 되겠군.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사람을 망가뜨려 놓도록 차가운 피를 가진 네게 그런 개념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이며 형제……?”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중얼거렸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그의 얼굴 위로는 웃음조차 스치지 않았다. 어이없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네게 그런 게 있다? 별 개소리를 다 듣겠군. 만인이 네 아래에 있는 양 깔아보는 게 네 속마음 아니던가? ―아무래도 좋아. 너와 말을 섞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니. 말이 통할 놈이라는 생각도 안 했고.”
방아쇠에 걸쳐져 있는 손가락이 빙글, 습관처럼 단총을 돌렸다. 문득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 총으로 날 쏠 셈이기라도 한가 보지.”
“이 가게든 너든, 먼저 족치는 게 어느 쪽이 먼저든 상관없지. 그러잖아도 너와 한 번쯤은 정리를 해 둬서 앞으로 계속 성가실 일은 아예 없애 버리는 게 좋겠다 싶었거든.”
“총으로 위협을 하면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위협이라고 생각했어?”
본인의 말마따나 총으로 위협을 해도 먹히지 않을 상대에게, 태연하게 중얼거린 크리스토프 역시 아무렇지 않게 총을 겨눈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공이치기를 당긴 뒤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튀겼다.
한순간이었다.
평연하게―혹은 냉랭하게―말을 주고받으면서, 크리스토프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레 총을 쏘았다. 급박하고 재빠른 손짓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리지도 않았다.
총성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그 순간 말을 잃은 탓이다.
맞더라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맞지 않아도 좋다는 심경이 담긴 그 탄환은, 아슬아슬하게 리하르트의 귓가를 스쳐갔다. 정확히는 크리스토프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리하르트가 간발의 차로 피했다.
탄환은 그의 바로 뒤, 커다란 화분에서 자라고 있던 야트막한 나무의 기둥에 퍼억 소리를 내며 박혔다. 생 나뭇조각이 튀어 리하르트의 목덜미를 긁으며 떨어진다.
“…….”
리하르트는 말없이 손등으로 목을 훔쳤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은 손등에서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표정 없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그의 주위에서 단숨에 험악한 기운이 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에리히가 크리스토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놔.”
크리스토프는 짧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가볍게 총을 돌리다가 그 가벼운 무게에 더 이상 탄환이 남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곤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은근하게 입을 연다.
“나와 정리를 해 둬야겠다면서, 그 친구를 내놓으면 여기서 조용히 물러갈 건가?”
마치, 순순히 물러나겠다면 친구를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멈칫,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고민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천천히 리하르트가 웃었다. 피식, 낮고 느린 코웃음이다.
“당장 이득이 되는 거짓말 한 마디도 제때 못 하나? 그 어리석음을 가엾게 여겨서 말해 주자면, 그 친구란 놈은 알 바 아냐. 들은 바도 없고.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야말로 이 꼴을 보니 네놈과 정리를 제대로 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양복 웃옷을 벗어 근처 자리에 내려놓은 리하르트는 옆에서 눈짓을 보내는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한 걸음, 크리스토프 쪽으로 내디뎠다. 바삭, 구두 아래에서 유리조각이 밟혔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고작해야 여남은 걸음 남짓.
이미 실내에는 그들과 무관한 손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크리스토프, 그리고 그의 적뿐.
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주위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한다. 이윽고 유리조각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느리게 들렸을 때, 크리스토프는 다시 시선을 리하르트에게 주었다.
“말해 두는데 그 녀석이 어디 한 군데라도 성치 않게 돌아온다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 대가를 치를 줄 알아. 거기 후고, 파비안, 스벤…….”
그들을 멀찍이 둘러싸고 마치 동상처럼 서 있는 남자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크리스토프는 느리고 낮게 말했다. 그 무심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섬뜩한 시선이 남자들을 하나씩 바라볼 때마다, 남자들은 파충류의 눈처럼 살의조차 담기지 않은 그 유리알 같은 시선에 가늘게 몸을 떨고 만다. 그 시선은 마지막으로 다시 리하르트의 위에서 멎었다.
“……그리고 네놈 역시, 리하르트.”
유일하게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보는 리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뭔가를 탐색하는 듯. 크리스토프는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손가락 마디 하나가 어긋났다면 네 열 손가락의 관절을 모조리 꺾어 버릴 거고, 그 녀석의 살갗에서 피 한 방울이 흘렀다면 네 몸에서는 웅덩이를 이루도록 피를 뽑아낼 거다. 반드시.”
그 비유와도 같은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니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그 말을 듣지 않기라도 한 듯 표정에 털끝만큼도 변함이 없이 크리스토프를 살피던 리하르트는 몇 초쯤이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낮은 음색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희미하게, 의아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몹시 신기한 일이군. 네게 친구라는 게 있다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이런 곳에 네가 누군가를 동행해 데려왔다는 것도, ……또한 네가 누군가의 안위를 챙기는 모습도,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처음이군. 아니, 상상조차 한 적이 없어.”
크리스토프에게로 다가서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인간다워진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답지 않아, 크리스토프.”
“그건 내가 정해. 네가 아니라.”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짤막한 대꾸가 돌아온 때였다. 비아냥과도 닮은 웃음을 언뜻 보일 듯 말 듯하게 입가에 띠고 있던 리하르트에게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데려온 게 누구지?”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음을 던지는 동안에도 리하르트의 시선은 크리스토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동료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묻는 말이라는 걸 금방 깨닫지 못했다. 잠시 사이를 둔 뒤에야 뒤에 선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이 얼른 대답했다.
“얼마 전부터 서익에 머무르며 그의 심부름을 맡고 있는 청년인데…….”
그 이상은 그 청년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남자가 말을 흐렸지만, 그 말만으로도 리하르트는 이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아, 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알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리하르트는 기묘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듯, 혹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던 시선에 천천히 감정이 담겼다. 그것은 분명한 악의였다.
“그래, 그 남자……. 그 심부름꾼이라면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이더니, 여기에까지 동반해 왔나?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하, 늘 미치광이 독불장군으로 홀로 동떨어져 지내던 놈이, 진짜로 인간 흉내라도 낼 참인가? ……아니면, ‘친구’가 아니라든가.”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 같은 눈빛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흘끔, 리하르트에게서 몇 걸음 거리에 서 있던 남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한결같이 믿음직스럽고 다정한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그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할 냉랭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낯설기는 하나 놀랍지는 않은 까닭은, 크리스토프를 대할 때의 그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를 대할 때는 늘 그랬다. 다른 모든 이들을 대할 때와 결코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곳에서 한 발 먼저 나갔다면 나가는 모습을 본 자가 있을 텐데.”
리하르트는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크리스토프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곧바로 그 물음이 자신에게로 날아온 것임을 알아차린 남자는 즉시 대답했다.
“화장실에서 약간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빌헬름의 옷을 빼앗아 입고 도망쳤다고 하는데 외부로 나가는 출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내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고…….”
“옷?”
“예,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까만 후드재킷으로 빼앗아 입었다고 하던데요.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니 아마 곧…….”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하르트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이상한 얼굴이라기보다는 마치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뭔가에 가볍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일순 얼굴에서 일체의 감정이 사라졌다.
까만 후드재킷……하고 중얼거리던 리하르트는 이윽고 아주 천천히, 하, 하고 웃음인지 놀람인지 알 수 없는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곧 그 소리는 하, 하하, 하고 조금씩 길어졌고, 그는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웃기 시작했다.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는 듯.
“아하하, 하하하하, 과연, 그래, 그러면 그 남자가……. 아, 그래, 그랬었군, 하하하하.”
리하르트는 한참을 웃었다. 무척 통쾌하고 커다란 그 웃음소리를 듣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점차 험악해진다. 리하르트는 분명 그 남자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그 웃음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야 그가 있는 곳이 떠오른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를 이리 데려와. 나는 너무 오래 참았어, 리하르트.”
리하르트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동시에 그의 목줄기에 칼을 꽂아 넣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도록 살기를 피워 올리며.
리하르트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입가에는 유쾌한 웃음을 띤 채 그를 바라본다. 살짝, 유리조각 위에서 구두를 떼는 걸음에 여유마저 깃든다.
“김영수라고 했던가? 그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지, 크리스토프. 네가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취급하는 인간은 처음이야. 내 친애하는 사촌 크리스토프, 그러나 아주 안타깝게도 말이지―.”
듣는 순간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는 작위적인 수식어보다 먼저, 역접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이 크리스토프의 귀에 들어왔다. 손가락 끝이 살짝 꿈틀했다. 순식간에 눈동자가 얼어붙는다.
“네 그 소중한 ‘친구’ 김영수는 지금―.”
느리게, 마치 뒤에 이어질 어떠한 기대감을 위한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 읊조리는 리하르트의 입술.
실내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고요했다. 그 입술에서 떨어질 말이 어떠한 선고와 같으리라고 예감들을 한 듯이. 그리고 그에게서 뒷말이 이어졌다.
“리그로우와 한창 재미를 보는 중이지. 저 안쪽 방에서 말야.”
그의 말이 끝난 뒤, 침묵은 좀 더 이어졌다.
리하르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어떤 경위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며, 크리스토프가 서슬 퍼렇게 찾아 헤매던 그의 ‘친구’는 지금 미치광이 릭에게 터무니없는 꼴을 당하고 있을 터였다.
경악에 가까울 만큼 놀란 빛을 띤 사람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크리스토프의 표정을 살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필경 경악하고, 이어 비탄에 젖고 분노에 휩싸여야 할 그는, 명백하게 뜻밖이라는 놀람을 담은 눈을 부릅뜨고서 리하르트를 마주보았다. 리하르트 역시 그를 마주본다. 그가 뒤이어 보일 반응을 느긋하게 기다리며.
이윽고 크리스토프는 입을 열었다.
“릭……, 그가 여기 와 있었나?”
“그래. 조금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지. 네 친구가 그 자리에 들이닥치기 전까지.”
“그가 릭과 함께 있다고?”
“그래. 내가 나올 때 막 시작하는 참이었으니 지금쯤은 이미 한창 즐기고 있겠군. 그가 네 친구인 줄 알았더라면 릭이 그를 건드리기 전에 어떻게든 도와줬을 텐데, 유감이야.”
“…….”
리하르트는 사뭇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 서린 웃음과 냉랭한 시선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여길 만큼 귓가에 부드럽게 파고드는 목소리다.
그의 말이 알리는 사실은 한 가지였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드물게 마음에 들어 하는 청년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심지어는 저 크리스토프라 해도 결코 호락호락하게 상대할 수 없는 미치광이 릭에게―선수를 빼앗겼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아니, 크리스토프가 동료를 내놓으라고 가게를 뒤집던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군, 크리스토프. 그 소중한 ‘친구’가 그런 험한 꼴을 겪게 되다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야.”
리하르트가 다시 말했을 때, 발치를 내려다보며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와 하나 다를 것 없이 무심하고 심상한 얼굴이다.
“그게 왜.”
불쑥, 짧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 또한,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예상했을 범위를 벗어난 대답이었다.
리하르트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곧 하하아, 하고 짧은 숨을 터뜨리며 웃는다.
“그래도 상관없으시다?”
“나는 상변태인 네놈과는 달라서 그쯤은 신경 안 써.”
“아하…….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고결한 마음씨로군. 마음이 중요하지 몸은 중요하지 않다? 과연, 그 점은 훌륭해. 나와는 비할 수도 없겠어.”
“그렇겠지. 네놈은 마음 따위는 수천 길 바다 속에 던져 버려도 몸만 네 멋대로 가지고 놀면 만족하는 놈이니까.”
얼핏 보기에 몹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크리스토프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크리스토프 본인조차도 자신의 입에서 마음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 걸 우습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리하르트 역시 잠깐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혼잣말처럼 한숨 섞인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연쇄 쾌락살인마가 인명의 숭고한 존엄성을 역설하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리하르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평소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얼굴로.
그러나 잠시 그 얼굴을 지그시 살피던 리하르트는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웃는다.
“크리스토프. 이런, 크리스토프.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그쯤은 신경 안 쓴다고 말하고서 그 침울하고 낙담한 표정이라니. 응?”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뱀처럼 매끄럽다.
천성적인 새드 녀석, 낮게 혀를 차는 크리스토프의 입술에서 짤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크리스토프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가끔, 아주 가끔이었지만 그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을 읽어낼 때가 있었다. 때로는 크리스토프 본인마저 인식하지 못한 감정까지. 바로 지금처럼.
“난 신경 쓰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애의 고집을 앞둔 듯 ‘그래그래, 그렇겠지.’ 하는 얼굴로 리하르트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인다. 크리스토프는 낯을 찌푸렸다.
“까짓 혀 좀 섞고 몸 좀 만지작거린다고 해서, 그게 뭐. 그 정도는 애들이 장난으로도 하는 짓인데. 그런 걸로 과민반응을 하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나?”
말을 하면서 크리스토프는 그 말에 스스로 납득했는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리하르트는 다시 웃었다. 크리스토프가 안간힘을 써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 허세를 걷어치워 버리듯, 리하르트가 대꾸한다.
“그래, 그 정도야 애들 장난이겠지. 그러나 크리스토프, 현실을 직시해. 릭이 그렇게 귀여운 정도로 마칠 리가 없잖아. 너는 그놈과 같이 일했던 전적도 있으면서 나보다 그놈을 모를 리야 없을 텐데.”
그러나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코웃음을 쳤다.
“잘 알지. 아무리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불가능할 것도 없는 릭이라지만, 남자를 여자로 바꿔 놓을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어.”
리하르트의 얼굴이 웃는 그대로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짚어내려는 듯했지만, 언뜻 정답이다 싶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남자를 여자로……. 임신이라도 시킬 수는 없으니 그런 식으로 묶어둘 수는 없다는 의미일까. 혹은 몸 가는 곳에 반드시 마음이 따라가지는 않는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걸까. 혹은 여자가 아니니까 어지간히 거칠게 해 대더라도 쉽게 몸이 망가지지는 않을 테니 크게 걱정을 않는다는 뜻일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의문을 머릿속으로 굴리는 동안, 자신의 말에 스스로 힘을 얻은 크리스토프는 일말의 여유마저 되찾고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둘 다 남자인데 딱히 무슨 짓을 할 수도 없고 심하게 나간다 해 봐야 고작 핥고 빠는 정도일 텐데, 상관없어. 내가 무슨 결벽증이라도 있어서 남들이 내, ……친구, 에게 손가락 하나 못 대도록 밤낮으로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 마, 이 자식아, 너 결벽증 심하잖아, 라고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 불쑥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힘없는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 미묘한 침묵 가운데 홀로 당당하게 버티고 선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리하르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무표정이 지그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뭔가 말할 듯 입을 열다가 다시 그 입을 다물어 버리는 리하르트에게, 크리스토프는 냉담한 비아냥을 섞어 말한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주 동요하기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
리하르트는 아무 말도 않았다. 여전히 뭔가 미심쩍고 애매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볼 뿐.
그런 리하르트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가 조금 머뭇거리는 눈치로, 더듬더듬 말을 던졌다.
“남자끼리라고 해서 핥고 빨기만 하라는 법이 어딨어. 살 섞고 몸 섞고, 할 거 다 하지.”
그 힘없고 자신 없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프는 흘끔 그에게 눈동자만 돌려 시선을 던졌다. 짧게 코웃음 친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아니면 네놈이 바보든가.”
비웃음이 말 마디마디마다 서린 목소리에,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
원래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일레이가 방에 딸려 있는 욕실로 들어간 사이에, 넋을 잃고 기진맥진해서 늘어져 있던 정태의는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한결 더 조용하구나…….’ 하고 망연하게 생각하다가 불현듯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에리히가, 밖에서 크리스토프가 난동을 피운다는 둥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잠시 잊고 있었지만, 리하르트가 방에서 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사단이 났든가, 아니면……. ……젠장, 사단이 난 상황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아랫도리는 죽어라 욱신거리고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정태의는 어떻게든 그럭저럭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대로 익숙하게 했던 과거가 있다고, 몇 걸음 절뚝거리며 방 안을 서성이고 나자 무난하게 걸을 만했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욕실을 흘끔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던 정태의는 대충 옷가지를 추스르곤 방에서 나왔다.
그나마 저놈이 재빨리 마쳐 준 게 다행이었다. ‘남의 영역 안에서 맘 편히 벗어던지고 있을 수야 없지.’라고, 이미 할 짓은 다 한 다음에야 말한 일레이는 대꾸할 힘도 없이 늘어져 있는 정태의의 몸을 가볍게 한 번 쓸어내리곤 피식 웃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시지 않은 곳에 홀로 뻗어 늘어져 있던 정태의는, 그대로 정신을 놓고 잠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레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차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유회사. 그들의 내건 요구조건.
젠장, 뭐가 이 따위야…….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일레이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내부인도 아닌 자에게 함부로 돌아다닐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거니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저 남자가 이렇듯 미적지근하게 있을지도 의문이다.
남의 나라 수도에 폭격질을 한 놈이 새삼스럽게 권력 아래 고개 숙이고 착하게 살자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곤란한걸, 어쩐지 영 곤란하게 됐다는 느낌이 막 든단 말야,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갑자기 피로가 일시에 몰려왔다. 지친 몸이 본능적으로 복잡한 생각을 피한다.
그러다가, 바깥의 불상사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만에 하나 사단이 났으면 시체라도 수습을 하는 게 인간된 도리겠지.”
중얼중얼거리면서 방에서 나와 복도로 걸음을 내디딘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도가 다 똑같이 생겨 몹시 헷갈렸다. 일부러 찾아오려 해도 힘들 텐데, 운수 한 번 더럽구나 싶었다.
그러나 적당히 기억을 더듬어 길을 더듬는 동안, 온 사방이 다 조용한 가운데 어렴풋이 술렁거리는 기척이 멀찍이에서 들려왔다. 주위에 아무런 인적도 없이 그 멀찍한 곳에서만 사람의 기척이 들려온다. 소리가 들리는 바에야 그리로 길을 더듬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느린 걸음으로 발을 끌며 그쪽으로 가자, 홀로 통하는 복도 끝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이쪽을 등지고 서 있었다. 홀에서 뭔가 긴박한 상황이라도 벌어지고 있는지, 정태의가 절뚝거리며 바로 뒤까지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정태의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피비린내가 낭자하고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귀청을 찌르는 그런 지옥도는 아닌 모양인 듯했다는 점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뭔가 불온하다.
“어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정태의가 그 남자의 뒤로 다가서며 속삭이듯이 묻자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덩달아 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렸다.
“시끄러, 입 닥치고 있어. 저놈 말하는 거 안 들리잖아. 한창 중요한 대목인데.”
“중요한 대목이라니, 왜, 무슨 일인데. 정전 협정이라도 맺는 참이야?”
정태의는 남자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며 홀의 상황을 살폈다.
어쩐지 묘했다.
당장 드잡이질을 할 만큼 일촉즉발의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서도, 뭔가 묘했다.
사방에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저기서 기둥을 등지고 서 있는 크리스토프가 벌인 짓일 텐데, 그는 저런 흉사를 벌인 사람치고는 몹시 당당하고 태연자약하게 서서 뭔가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리하르트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드문드문 그 주위를 둘러싸다시피 서 있는 남자들은 꼭 뭐에 홀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정태의가 자꾸 뒤에서 추근거리며 속삭이자 성가셨는지,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벌컥 화를 내며 돌아보았다.
“얼간아, 그럴 리가 있냐! 저 육시랄 놈이랑 미쳤다고 정―.”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정태의를 보고는 어라, 하고 멈칫했다. 일순 이건 뭐야, 하는 얼굴로 멍하게 정태의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 위로 금세 험상궂은 빛이 떠오르는 걸 보고, 정태의는 “아니야? 아님 말고.”라고 짧게 중얼거리곤 재빨리 남자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뚜둑,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로 스르륵 쓰러져 기절해 버렸고, 정태의는 그 남자를 뒤로 질질 끌어다놓고서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섰다.
어쨌든 분위기가 칼날처럼 시퍼렇지는 않으니, 가능하다면 끝까지 나서고 싶지 않았다. 괜히 섣부르게 나섰다가 적의 편이 하나 늘었다고 분위기만 싸늘해지면 낭패다.
적당히 분위기를 살피다가 틈 봐서 저 녀석을 끌고 냅다 달아나 버리면…….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아니면 네놈이 바보든가.”
정태의가 남자를 뒤로 끌어다놓는 사이에 누군가 뭐라고 말을 던진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인간의 몸이 어떤 구조로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 같아, 내가?”
앞뒤의 맥락은 알 수 없었지만 크리스토프의 그 말에는 정태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토록 정확하고 확실하게 사람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인간은, 사람의 몸이 이루어져 있는 구조를 잘 알게 마련이었다. 어설프게 잘못 때려서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죽일 작정으로 손을 썼는데 숨이 붙어 있었다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아무렴, 어디를 어떻게 하면 죽는지, 기절하는지,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러나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정태의는 이어지는 크리스토프의 말에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사내놈 아랫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놈들도 아닌 것들이 헛소리는. 설령 비역질이라고 얕잡아 말한다 해 봐야 네놈들이 여자를 붙잡고 하는 짓거리보다는 훨씬 건전할 텐데, 내가 그런 걸로 마음이라도 상할 것 같아?”
숫제 혀까지 찰 기세로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긴 여자를 붙잡고 그렇게 더럽게 놀아 젖히는 놈들이니까 남자 붙잡고 더 깔끔하게 노는 놈들을 보고도 머리를 이상하게 굴리지,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이 뒤를 이었을 때, 정태의는 직감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벽에 가만히 머리를 박아 버렸다.
왜 조금 더 일찍 오지 않았을까. 저놈이 철없이 입을 열기 전에 그냥 끌고서 냅다 튀었어야 했는데. 아니면 차라리 이 대화를 안 듣도록, 아예 나오지를 말 걸.
정태의가 벽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하는 동안,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사내놈 끼고 그 짓을 해 봐야 어차피 별 것 없다……?”
그 목소리는 아주 약간 나직했을 뿐, 평소와 같이 담담하고 평연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서 저렇게 묻는지는 보이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왜, 네 썩어빠진 머리로는 남자들끼리 고작 살가죽 좀 문지르는 게, 여자랑 질퍽거리며 노는 것보다 더 더러워 보이나 보지?”
크리스토프의 그 당당한 냉소 뒤에서, 정태의는 벽을 붙들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 침묵에 동참하는 사람이 퍽 많았다.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듣고 있는 쪽이 더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낯 붉어지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생 통틀어 수위를 꼽을 정도로 각별했다, 지금의 대화는.
저들이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익히 이해가 가는 정태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정확히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고―태연하게 받아치는 크리스토프를 차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붙잡고 있던 벽에서 떨어져 간신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대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다시 저 복잡한 길을 거슬러 갈 자신이 없어서 관두고 말았다.
구석진 복도에서 벗어나 홀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같이 크리스토프만 쳐다보고 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어차피, 네놈들이 그러는 것처럼 지저분하게 분탕질을 치는 게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데, 왜 그 정도로 호들갑이야. 순진한 척들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뭘―.”
“오케이, 크리스. 거기서 그만.”
홀의 거의 한가운데까지 나아가도록 정태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람들은, 정태의가 크리스토프의 말을 자르자 그제야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땀이 배어나오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정태의는 짐짓 따사롭게 웃었다. 그러나 꽂혀드는 시선들이 몹시 따가웠다.
“―….”
정태의를 본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부르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마디가 흘러나오기 전에 다시 입을 닫고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무심한 눈이 정태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멀쩡해 보이네.”
조금 전까지 정태의를 열심히 옹호해 주던―이야기의 맥락으로 보건대 아마도―그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냉담한 얼굴로, 마치 어디 한 군데 안 부러져서 온 게 유감이라는 투로 말한다.
“그래? 보기만큼 멀쩡하지는 않은데.”
다소 느리고 평연한 걸음이었지만 미묘하게 발을 끈다는 걸, 크리스토프라면 이내 알아챌 터였다. 정태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발치를 보며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그놈한테 얻어터지기라도 했나?”
“설마. 그랬더라면 이렇게 걸을 수나 있었겠어?”
“그런데 걷는 게 왜 그래.”
“…….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었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금 전까지 남자를 상대로 격렬하게 몸을 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정태의는 그나마 남아 있던 체면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 상황에서 그들에게 충격적일 것은 정태의의 체면 따위가 아니다. 이 불 보듯 빤한 정황 아래 ‘얻어맞았냐’고 묻는 크리스토프의 머릿속 구조가 더 충격적일 게 뻔했다.
매우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사방에 시체 같은 남자들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분노와 혈기가 술렁이던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미지근한 물을 끼얹은 것처럼 애매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태의가 나타나자 남자들은 다시 아까의 그 혈기 넘치던 기억을 돌이켰는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도로 눈에 불을 켰다.
여전히 무표정한―그러나 기가 찬 듯, 혹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차가운 시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느리게 내려간다.
“오신 줄 미처 몰랐군요. 아까 미리 알았더라면 인사라도 제대로 나누었을 텐데요.”
“아……예…….”
아까는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어서 죄송했습니다, 라는 의미를 나름대로는 담은 그 말뜻을 리하르트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렇게까지 따갑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마저 놀랍게도 그는, 예의 그 믿음직스럽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리그로우가 볼일을 빨리 마쳐 주었나 보군요.”
아. 웃음 속에 뼈가 있다.
“예……뭐…….”
할 것만 한 뒤에 얼른 나와 버렸답니다, 라는 의미를 담아 짧게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리하르트는 약간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정태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만히 주위를 가늠해 본다.
좋지 않았다.
피투성이로 걸레처럼 쓰러져 있는 남자들이나 아수라장으로 뒤바뀌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 아래에서 기물들의 파편이 바삭거리는 이 상황은, 심각하게 좋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을 둘러싸고 흉흉하게 노려보는 시선들은, 여기저기 뻗어 있는 인간이 한둘이 아님에도 아직 여남은 쌍은 족히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리하르트 타르텐, 저 남자였다.
흉악하게 핏발이 선 눈을 치켜뜨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느긋하고 선량한 얼굴로 서 있는 저 남자가, 어쩐지 가장 꺼림칙했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리하르트가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대단히 걸출하고 유능한 인재라는 사실은 수차례 들은 바 있지만, 그 이야기들의 어디에도 그가 싸움에 능하다는 말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저 남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가 엄청나게 싸움을 못하는 약골이라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다져 놓은 뒤에 나중에 그 후환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향해 사뭇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크리스토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 중 몇몇이 험악하게 소리친다.
“누구 맘대로 돌아가!”
“남의 가게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네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아?!”
그러나 그렇게 험악하게 소리치는 남자들 중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는 않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시선은 리하르트에게로 모였다.
여유로운 태도 그대로, 그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못 본 척해 주겠다고 한다면, 얌전히 물러날 텐가?”
매우 관대한 물음이었다. 그들을 순순히 내보내 주겠다고 하는 듯한 그 표정마저, 웃음기는 없으나마 선량한 얼굴이다.
그러나.
“아직 정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네 얼굴이나 보고 말이나 한두 마디 걸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말야.”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하는 크리스토프의 대답에 정태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웃음이 도는 리하르트의 입가를 보고, 그가 그 대답을 예상하고 그렇게 물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너, 거치적거리게 한가운데 서서 시야 가리지 말고 비켜.”
눈살을 찌푸리며 정태의에게 고갯짓을 하는 남자는, 과연 이 상황에서 정태의의 아군이 맞나 싶은 크리스토프다. 정태의는 뭐라고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입맛만 다시며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하자, 크리스토프가 다시 눈을 부라렸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비켜. 누가 그리로 가래.”
“…….”
턱짓으로 자신의 어깨너머, 옆을 가리키는 크리스토프에게 말없이 예, 예, 하고 입모양으로만 대답하며 정태의는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비켰다.
기둥 옆의 막다른 곳에 서고 보자, 그 기둥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시체(같은 남자)가 둘이나 보였다. 피범벅이 된 그들을 씁쓸하게 내려다보았지만 몸이 고된 게 우선이라, 그 중 하나가 엎어져 있는 테이블에 같이 앉아 버렸다.
정태의가 자신의 뒤에 앉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크리스토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런 모습을 시종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어느 순간 웃었다.
“거참. 정말이지 아주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지. 뭐 좋아.”
저벅, 다시 한 걸음 내딛던 그의 발에 뭔가가 기익, 소리를 내며 밟혔다. 총이다. 아까 크리스토프가 내던져 버린 총이었다.
리하르트는 발끝으로 그 총을 밀어내듯이 가볍게 걷어찼다. 그리고 뒤늦은 물음을 던진다.
“총은 왜 던져 버렸지? 탄창이 비어서? 말을 했더라면 탄환 정도야 얼마든지 줬을 텐데, 총 쓰는 것 말고는 볼 것도 없는 네가 총을 내버려서 어쩌려고.”
“총 쓰는 것 말고는 볼 것도 없다……?”
크리스토프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내 그 기색은 사라지며 그 대신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네 몸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지. 총 외에는 볼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생각이었어, 하고 리하르트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였다.
그의 구두 아래에서 유리조각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귀에 닿기보다도 더 빨리―적어도 그들을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의 지척에 있었다.
“……!”
미처 예고도 없이. 험악한 전조 하나 없이.
리하르트는 한 호흡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크리스토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놀란 척도 않고 맞섰다.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뜨는 듯했지만 그런 표정은 보이지도 않았다.
동시에 크리스토프 역시 움직였다.
어느 결에 움켜쥔 유리병으로 자신의 목을 향해 파고드는 주먹을 후려갈겼다. 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리하르트의 주먹뿐 아니라 유리조각이 스치며 긁고 지나간 그 자신의 뺨이며 관자놀이까지 핏방울이 맺힌다.
순식간에 엉망으로 찢겨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도 리하르트는 애초에 노렸던 그대로 크리스토프의 목을 후려갈겼다. 동시에, 반쯤 깨어진 병을 리하르트의 목줄기에 꽂아 넣으려던 손이 그 통에 빗나가 그의 턱 아래, 목을 사납게 긁고 스친다.
마치 괴물들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성치 않을 그 몸으로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그들은 서로의 목숨을 파헤치려 들었다.
“맙소사…….”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짐승의 싸움이었다.
고작해야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일 뿐이었는데도 흡사 거대한 괴물 두 마리가 뒤엉켜 주위 모든 것을 다 부수면서 서로를 물고 뜯는 것 같았다.
사내들끼리 혈투를 벌이는 모습이라면 정태의는 얼마든지 봤다. 심지어 흉기가 날아다니는 패싸움도 심심찮게 봤다.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 드는 사내들끼리의 사투 따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말려야겠다는 생각조차 들 여지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싸움이었다. ‘반드시 끝을 보아야만 하는’ 싸움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잠시 떨어지는가 싶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파고든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미처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짧은 그 찰나의 순간에.
파삭, 어둑한 실내의 조명에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비쳤다. 그 사이사이 반짝이며 튀어오르는 작은 먼지도 보인다. 미세한 유리조각 따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먼지 아래,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었다. 그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바로 그 위에 올라타듯이 앉은 리하르트가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리하르트의 팔꿈치를 크리스토프가 붙잡고 있다.
“……!”
크리스토프가 쓰러져 있는 위치는, 원래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라면 그렇게 쓰러질 수 없는 위치였다. 아마도 그 전에 몇 번이나 손을 섞었을 그 재빠른 움직임을, 시야가 가려졌던 정태의는 미처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사실은 크리스토프가 리하르트의 손에 의해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진 채 짓눌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하나는, 크리스토프의 손에 팔꿈치를 잡혀 있는 리하르트의 팔이 아주 약간이나마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비틀려 있다는 사실.
팔꿈치를 움켜쥐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뚜둑, 뼛소리가 정태의의 귀에까지 들렸다. 목에서부터 타고 내리는 피가 소매를 적시고 끊임없이 흘러내려 그 주먹의 마디마디에 고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식은땀이 나도록 아플 텐데도, 리하르트는 통각 따위는 애초부터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꿈쩍도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마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옆에서 보기에는 결코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아래에 깔려 누워 있기는 하나 크리스토프는 몇 군데 살갗이 찢겨 피범벅이 되어 있긴 했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듯했고, 반면 그 위를 누르고 앉은 리하르트는 얼굴 아래로 온통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크리스토프에게 잡혀 있는 팔 역시 기괴하게 비틀려 있다. 그 팔 위로 핏방울이 점점이 타고 흐른다.
“리하르트!”
누군가 리하르트의 이름을 부르며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만류했다.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고, 그 짧은 손짓이 말하고 있었다.
그때, 정태의는 ‘어?’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뭔가 이상한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아. 경고등이 깜빡거린다.
“비켜. 내게 손대지 마.”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는 분명한 불쾌감을 표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심드렁했다.
정태의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생각했나. 지금 뭔가,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는데 저 목소리는 어딘가 크게 다치거나 아픈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다.
대수롭지는 않으나 몹시 언짢다는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복부를 짓누르고 있는 리하르트의 아래에서 눈을 형형하게 번쩍였다. 마치 거대한 파충류 따위에게 깔리기라도 한 듯 혐오감이 배어나오는 목소리에, 리하르트가 웃는다.
“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단 말이야. 접근전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 ―…단칼에 끝장을 보지 못하면 당연하게 이어지게 되는 육탄전을, 너는 견디지 못하지. 남의 손가락 하나 닿는 것도 진저리를 치는 그 빌어먹을 성질머리 때문에.”
“손 치워.”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틀림없이 크리스토프에 의해 어긋나 있는데도 그 팔은 크리스토프를 놓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눈매가 더욱 험해졌다.
문득 리하르트가 웃음을 멈추었다. 한 번 깜빡이지도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구부렸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얼굴이 바싹 가까워진다.
“네가 미친놈들과 어울려 킬링필드를 헤집는 동안 나는 안전한 집구석에서 놀고먹었을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너는 장거리에서 통용되는 무기 없이는 아무 볼 것도 없어.”
“손 치우라고 했어.”
크리스토프는 그의 말은 들은 척 않고 다시 말했다. 비틀려 있는 그의 팔을 아예 부러뜨려 버리려는 듯, 그 팔꿈치를 움켜잡은 손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다.
“크리스!”
불현듯 정태의가 외쳤다.
처음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의 눈에, 바닥에 누워 있는 그의 몸 아래로 뭔가 연기처럼 바닥을 타고 스멀스멀 스며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그렇게 생각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 연기가 시커먼 피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크리스토프의 주변으로 바닥에 날카롭게 흩어져 있던 유리조각들이 점차 물들어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아마도 그의 몸 어딘가를 깊숙이 파고들었을 유리조각이 그러할 것처럼.
그러나 정태의가 더럭 낯을 굳히며 그의 이름을 외쳐도, 정작 크리스토프는 소리는 왜 지르냐는 얼굴로 못마땅하게 흘끔 정태의에게 눈길을 주고 말 뿐이었다.
피가 아닌가, 다친 게 아니었어?,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리던 정태의의 뇌리에, 언젠가 들었던 말이 스쳤다.
―이놈은 정신에 통각이 없어. 있다고 해도 인식 구조가 글러먹었어.
“크리스, 너―.”
정태의가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떼자 크리스토프는 낯을 찌푸리며 혀를 차더니 몹시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시끄러워. 그러잖아도 귀가 울리는데 이럴 때 너까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얀 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조명 탓인지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실려 있는 표정은 너무나 아무렇지 않아서 도리어 기괴하다.
그러나 정태의는 보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 그의 이마 위로 솜털처럼 보송보송하게 자라난 머리카락 아래가 식은땀으로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
통각이 없을 리가 있나. 그는 그저 내색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내색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지도 몰랐다.
정태의가 저도 모르게 막 앞으로 나서려 했을 때, 근처에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험상궂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 괜히 끼어들려고 하지 마. 네가 끼어들면 우리도 끼어든다. 누가 유리할지 잘 생각해서 결정해. 지금까지는 그나마 너는 ‘타르텐의 손님’이라서 봐줬던 거야. 끼어들면 넌 더 이상 ‘손님’이 아니게 된다.”
정태의는 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주위를 가늠한다.
그의 말마따나, 정태의가 그들의 싸움을 막으려 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도우려 드는 것은 결코 이롭지 않았다. 일단 수적으로 확연한 열세였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 맡겨둔다 치더라도, 정태의는 그들을 둘러싼 나머지 여남은 명을 감당한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와줘. ……릭.”
힘없이 새어나오는 혼잣말 같은 속삭임에, 그 앞을 막아서고 있던 남자가 움칫 눈살을 찌푸렸다. 정태의의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그 끝에는 천장의 부연 조명등이 있을 뿐이었다.
“……? 누구더러 도와달…….”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나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우습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말이 홀 안쪽에서 들려왔다. 저벅, 가게의 구석구석까지 튄 유리조각이며 돌조각, 나무 부스러기 따위를 밟는 소리가 두세 걸음 다가오다 느려진다.
일순 가게 안이 고요해졌다. 가운데에서 서로를 움켜쥐고 있던 두 남자마저 잠시 시선만 돌려 그쪽을 바라본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은 채.
그렇지. 샤워 다 하고 슬슬 옷 챙겨 입고 나올 때가 됐다 싶었지. 게다가 뒤통수를 찌르는 저 눈길은 어떻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정태의가 이리로 왔던 바로 그 복도에서 일레이가 나오고 있었다. 언제 무슨 짓을 했냐는 듯 흐트러진 데 하나 없는 완벽한 차림새로.
대충 꿰어입고 나오느라 온통 구깃구깃한 자신의 옷자락에서 시선을 돌려 그의 그 반듯한 셔츠깃을 노려보면서,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정태의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일레이가 서슴없이 말을 꺼낸다.
“먼저 말해 두지. 이 상황의 본질적인 문제에는 내가 손댈 수도 없고, 손대고 싶지도 않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라는 개인뿐이다. 자. 그럼에도 네가 도움을 받길 바란다면 말이지만, 묻겠는데,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일레이는 희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온기라곤 티끌만치도 없는 그 시선을 마주보며, 정태의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일레이가 아니었다. 리그로우다.
정태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곤 중얼거렸다.
“이봐……. 난 댁 덕분에 적어도 하루는 꼬박 배앓이를 하며 화장실을 들락거릴 예정이라고. 벌써부터 배가 아프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좀 해 줘도 좋잖아?”
말하고 나서야 이런 자리에서 하기에는 객쩍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낯은 팔 만큼 팔았다.
순간적으로 겸연쩍은 얼굴을 하다가 이내 뻔뻔하게 턱을 당기는 정태의를 보고,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거라면 남의 대화를 엿들은 대가로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렇지 않나, 크리스토프의 친구 김영수 씨?”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주위 온도가 몇 도쯤 떨어졌다.
크리스토프의 친구가 리하르트와 리그로우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남자는 결코 아군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중립에 서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건 적이다, 적.
“뭐, 천천히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내뺀 건 그렇다 치고 조금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너 하나만이라도 도와주면 좋겠다……?”
일레이가 가볍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느릿한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어, 하고 멈칫했다. 그리곤 아니 그건 아닌데, 하고 흘끔 크리스토프의 눈치를 본다.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망할, 바닥에 깔린 그의 몸 아래에 고인 웅덩이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정태의의 얼굴 위로 얼핏 스쳐간 초조감을 보았는지 리하르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때, 크리스토프의 몸 아래에서 점차 넓게 번져가던 피가 리하르트의 무릎을 적셨다. 순식간에 피를 빨아들여 젖어드는 무릎으로 대수롭잖게 잠깐 시선을 떨어뜨렸던 그는 일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안 좋다.
명확하게, 안 좋다. 싸움에서 상대방에게 이쪽의 약점이나 상처를 알리는 것만큼 불리한 짓은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정태의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피해를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황의 본질적인 문제에는 손대지 않는다고 했지, 릭.”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몇 초쯤 아무 대답도 없이 정태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음 같은 눈이 정태의의 머릿속을 더듬는다.
정태의는 그에게 오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사실 본인에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문제에는, 당연히 도움을 주지도 방해를 하지도 않을 테지.”
정태의는 그렇게 못 박았다. 그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일레이와는 반대 방향으로―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가 엉겨 있는 곳으로―박차고 나섰다.
그 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자가 엉겁결에 정태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설마 그렇게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닥쳐들 줄은 모르고 있었던 그 남자를 한 방에 때려눕히기는 어렵지 않았다.
“미안.”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사과를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한탄했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적을 만들고야 마는구나. 돌아가는 날까지 회색분자로 남아 있을 작정이었는데.
정태의가 불시에 한가운데의 두 사람에게로 달려드는 몇 걸음, 고작해야 1, 2초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노리는 정면에 있던 리하르트가 피하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방어를 하며 공격의 태세까지 갖추기에 충분한 틈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싸움에 있어 명백하게 정태의의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
정태의가 외치는 순간, 크리스토프는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팔꿈치를 비틀어버렸다. 뚜두둑, 단단한 파열음이 조그맣게 들렸다. 크리스토프를 짓누르고 있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자 잠시 멈추는가 싶던 피웅덩이가 더욱 빠르게 불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크리스토프는 아랑곳 않았다.
쯧, 혀를 찬 리하르트가 미처 크리스토프에게서 팔을 뿌리치기 전에―호락호락 뿌리칠 악력도 아니었다―정태의는 거의 슬라이딩을 하듯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정태의를 가로막으려 달려오던 남자들은 간발의 차로 늦어 버렸다.
“다들 거기 서!!”
정태의가 외쳤다. 그 급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그들에게로 달려들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멈추었다.
정확히는 그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다. 어느 결에 정태의가 주워든 칼날이 리하르트의 목줄기를 아슬아슬하게 겨누고 있었다.
리하르트를 등 뒤에서 부둥켜안다시피 하고서 그의 목에 번뜩이는 칼날을 바싹 들이댄 정태의는, 멈칫거리는 남자들을 몇 걸음 밖으로 물렸다.
정태의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순간부터 리하르트는 꼼짝도 않고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흘끔, 아직 자신의 팔을 움켜쥐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본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자신의 몸 위에서 반쯤 내려가고 나자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며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께에서 피가 쏟아진다.
“크리스, 움직이지 마. ―거기, 구급차 불러. 너희들 동료도 같이 옮겨야 할 것 아냐!”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리는 남자들을 보고 정태의는 혀를 차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그 대신 정태의의 팔에 목이 졸릴 듯 말 듯하게 붙잡혀 있던 리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부르지 마.”
“무슨 소리야, 지금 사람이 저 꼴인데. 당신도 만만찮게 다쳤다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급한 김에 말투가 험해지는 정태의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마저 리하르트는 정중하고 침착했다. 누가 칼을 들이댄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는 괜찮아.”
어쩐 일로 이럴 때만 마음이 맞았는지, 크리스토프 역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정태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프면 아프다고 해! 네가 뭐가 모자라서, 아픈데 아프다고 말도 못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통각도 없이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나 듣지, 하고 뒤를 이으려던 말은 삼켜 버렸다. 그저 크리스토프를 노려보기만 하다가 혀를 찼을 뿐이다. 크리스토프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정태의를 쳐다본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러나 왜 그러는지 영문 몰라 하는 어린애처럼, 약간 당황한 듯이.
그런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의 시선은 이윽고 크리스토프의 허리께로 옮겨갔다. 눈으로는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피가 쏟아지고 있는 허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으로만 더듬던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주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를 더듬던 손을 들어서 내려다본다. 허리에 박힌 유리조각에 벤 듯 손가락 끝에 살짝 피가 맺혔다.
그 유리조각을 뽑아내어 슬쩍 던져 버리며, 크리스토프는 흘끔 정태의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아야.”
“…―!”
허리에서는 피를 바가지로 쏟으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 놈이, 고작 손가락 그거 살짝 베었다고―라고 생각하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뜨끔하게 가슴이 아팠다.
“됐어. 됐으니까……그만 돌아가자. 지금 바로.”
정태의가 말했다. 스스로 들어도 자신의 목소리가 몹시 지친 듯했다. 어쨌거나 오늘밤은 유례가 드물도록 피곤한 밤이다.
“지금?”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에게 반문하더니 약간 못마땅한 듯 콧잔등에 주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대로 리하르트를 쳐다본다. 정태의에게 붙잡히고 나서도 크리스토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그를.
정태의는 아까부터 조금의 반응도 없이 얌전히 잡혀 있는 게 미심쩍어, 그의 목을 감싸안은 팔에 약간 더 힘을 주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리 내키지는 않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잠깐만 기다려, 이놈만 죽여 놓고.”
“크리스!!”
기껏 인질이라고 잡아 놨는데 그걸 죽여서 뭘 어쩌자고, 하고 정태의가 화급하게 낯빛을 바꾸자 크리스토프는 더욱 못마땅한 얼굴을 한다.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리 리하르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해도 정태의는 전혀 우위에 섰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피부가 감전이라도 된 듯이 따끔거리는 지경인데, 눈앞의 남자는 허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저 창백한 얼굴로는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얼른 리하르트를 옆으로 돌려 크리스토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린―그래 봐야 여전히 팔을 잡힌 채였지만―정태의는 조금씩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언제든 정태의를 덮치려고 기회를 엿보며 서성거리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따라오지 마. 어차피 또 마주치게 될 얼굴들이니까, 오늘 밤은 여기서 그만.”
그때, 가만히 정태의에게 잡혀 있던 리하르트가 문득 웃었다.
“실컷 남의 영역에서 날뛰어 놓고, 전세가 불리해지니 ‘오늘 밤은 그만’이라니, 참 편리하군요.”
“당신은 여태 줄곧 정당하게만 살아왔습니까?”
정태의는 짧게 대꾸했다. 리하르트는 별반 불쾌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김영수 씨, 당신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들어요, 엄청나게.”
아무렴, 숫제 애들 장난이라도 보는 것처럼 팔짱 끼고 벽에 기대어 이쪽을 쳐다만 보고 있는 저 괴물 같은 남자가 피식피식 웃는 걸 보니, 바보짓도 아주 엄청난 바보짓을 했다는 기분이 드는 참이다.
게다가 정작 크리스토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인상을 쓰며 정태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는데 ‘안 가’라고 주장하는 눈빛만 새파랗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허벅지를 냅다 걷어찼다. 퍽, 몸이 흔들리는 순간 그의 표정 위로 아주 미세한 주름이 졌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약간 구부린다.
“허리를 걷어차려다 말았다. 닥치고 따라 와.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니, 네가 운전해야 할 것 아냐. 네가 그렇게 오매불망하는 리하르트도 같이 끌고 돌아가는데 뭐가 불만이야.”
“오매불망한 적 없어!”
“그럼 조용히 따라와! ……네놈들 말고! 너희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정태의는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미묘하게 다가서는 남자들에게 외쳤다. 남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입구 앞에 버티고 선 남자는 비키려 들지 않았다.
“비켜.”
“찌를 테면 찔러 봐.”
입구에 선 남자는 굳은 얼굴로 정태의에게 말했다. 마치 정태의가 그를 찌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정태의는 리하르트에게 귀엣말하듯이 속삭였다.
“저 사람이 당신 찌르라는데. 같은 편 아니었어요?”
리하르트는 담담히 웃었다. 같은 편이라기보다는 친구지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태연스럽다. 그 점이 껄끄러웠다.
리하르트는 지나치게 얌전했다. 정태의의 칼 때문에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저 담담한 목소리를 굳이 듣지 않아도 분명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정태의는 가만히 위치와 자세를 가늠해 본다.
확실히, 자신이 리하르트의 위치에 있다 해도 함부로 움직이기는 무리인 상황이다. 불시공격이 먹히는 것은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가 자신보다 약할 때이다.
그러니 리하르트가 순순히 따라오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정태의가 잠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입구에 선 남자는 정태의에게 턱짓을 하며 외쳤다.
“네가 아무리 크리스토프와 잘 아는 놈이라 해도, 외부인이 그에게 함부로 손을 대고도 멀쩡할 것 같아?”
그러나 정태의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그 말에 냉랭하게 대꾸한 사람은 크리스토프였다.
“이놈이 못 찌르더라도 나는 찌를 수 있지.”
“크리―….”
그를 부르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턱 끝을 후려쳤다. 정확히는 목과 턱 사이를, 윗방향으로.
그리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정태의의 입에서.
“…….”
리하르트의 고개가 갑자기 확 꺾이는 통에 콧잔등을 얻어맞은 정태의는 코를 감싸 쥐었고,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잠깐 쳐다보았다.
“그 칼이 내 손에 있었으면 그냥 찔러 버렸을 텐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옆으로, 턱 안쪽을 정확하게 맞은 리하르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태의는 엉겁결에 그를 부축해 안았다.
“너희들은 오늘 운 좋은 줄 알고, 비켜. 나는 찌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일 수도 있어. ……아니면 그래, 너를 먼저 치워 버리면 되겠다.”
크리스토프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투로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차라리 그게 쉬운 걸, 하고 입구 쪽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남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흠칫 물러섰다. 그러나 그가 몇 걸음 물러서는 것보다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다가서는 게 더 빨랐고, 그는 그날 밤 가게 안에서 생겨난 마지막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말릴 능력도 기력도 없어, 크리스토프가 터 준 길을 수월하게 나아간 정태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도리어 더욱 움직이기가 힘들어진 리하르트를 끌고 간신히 입구의 문턱을 넘어섰다.
오늘 밤은 뭔가 터무니없다.
운이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추호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정신없이 겹쳐지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다.
젠장, 지금 당장은 이 자리를 무사히 벗어난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저택 안에서도 완전히 바늘방석이겠구만.
“김영수.”
여전히 못마땅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걸어나가는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르며 입속으로 욕설을 한 바가지 씹어 삼키던 정태의는, 문득 자신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멈칫했다.
내키지 않는 고개를 돌리자, 문턱을 사이에 두고 그 바깥에 있던 정태의의 눈에 그 안쪽이 보였다.
앞으로의 가시밭길을 예감케 하는 삭막하고 흉흉한 시선들이 바늘처럼 온몸에 꽂히는 가운데, 멀찍이 벽에 기대어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선 남자가 보였다.
이 험악하고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 먼지 한 톨, 주름 하나 없는 옷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방관자처럼 서 있던 그 남자, 일레이 리그로우는 정태의를 보며 웃었다. 그 까만 눈이 가늘어지자 절로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그는 천천히 한 손을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을 정태의 쪽으로 내보인다.
“5분.”
“……?!”
“5분 뒤에 뒤쫓아 출발한다. 아무리 중립이라고는 하나, 귀한 승계 후보자의 신병에 최악의 사태는 생기지 않도록 지켜봐야 할 테니까.”
정태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몇 초 가량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갑자기 먼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저는 귀한 승계 후보자의 신병에 최악의 사태를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는데요…….”
애써 굳은 혀를 움직이자, 일레이는 마치 선량한 청년처럼 밝게 웃었다.
“하하,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내게도 입장이란 게 있어서 말야.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웃음기 서린 나직한 목소리가 매끄럽게 정태의의 귓불을 핥았다.
“네가 그 입구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부터, 5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