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onus track. (23/34)

bonus track

리하르트 타르텐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여남은 명도 넘게 모인 고만고만한 소년들 가운데서도 그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또래 소년들보다 키가 크거나 몸집이 커서만은 아니었다.

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담은 그는 일부러 앞에 나서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언제나 태양처럼 모두를 비추는 소년이었다. 같은 또래이면서도 그는 주위 소년들의 우상과도 같았다.

같은 말을 해도 그가 말하면 더욱 그럴 듯했고, 같은 행동을 해도 그가 하면 더욱 무게가 실렸다. 심지어는 그의 아주 약간 느린 말투나, 생각에 잠길 때에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는 버릇을 따라하는 소년들도 있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그랬다.

그는 자신보다 서너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소년들보다도 더욱 현명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르신의 선택을 받은 소년들 가운데 한 명에 들었을 때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본가를 물려받아 가장 위대한 자리에 올라 우리들의 위에 군림할 자격이.

그리고 한편으로 리하르트와는 사뭇 다른 의미였지만, 확연하게 눈에 띄는 존재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소년,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어르신의 선택을 받은 또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 역시 그 자리에 도전할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몇몇 소년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더.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리하르트처럼 소년들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 모으지 못했다.

그는 무뚝뚝하고, 냉랭하고, 잔인했으며, 때로는 괴이했다. 그를 두려워하는 소년도 있었고, 동경하는 소년도 있었고, 싫어하는 소년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가 그런 것처럼 소년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과, 그 표정만큼 얼음장 같은 목소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가 도리어 나쁘게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누구나 첫눈에 혹하며 마음을 앗길 만한 겉모습이 비뚤어진 기대를 낳았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결코 다감하거나 온정 많은 성격이 아니었고, 그런 기대들은 충족될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를 미워해서 험담을 하는 소년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크리스토프의 언행을 과장해서 나쁘게 전했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의 가슴에도 당당히 뻐기며.

그러나 뒤에서 그를 험담하는 소년들도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토록 당당하던 세 치 혀도 정작 크리스토프를 앞에 두면 힘없이 숨을 뿐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욕하며 나쁜 말들을 수군거려도 자신들이 그를 따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가 맞서는 구도가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의도했건 안 했건, 소년들은 나뉘었다.

리하르트를 경애하며 따르는 소년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든―혈족 내의 관계 때문이든, 단순한 열등감이든, 성격 차이든―리하르트를 좋아하지 않는 소년들.

사실 크리스토프는 어느 쪽에도 무리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소년들은 자기네들끼리 크리스토프를 자기네 편으로 여겼다. 굳이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어쩌면 그럴 만한 기회조차 없는 채, 크리스토프는 조금 멀찍이서 그를 둘러싸고서 내 편입네 하는 소년들 쪽에 서게 되었다.

주위의 그런 인식과 더불어 어르신의 선택에 따른 경쟁선상에 서게 된 그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러면서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져, 그들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서로에게 파랗게 칼날을 세운 채 한 치도 뒤지지 않는 호적수였고, 그 사실을 그들조차 부정하지 않았다.

***

나는 어릴 적부터 리하르트에게 동경을 품고 있었다.

체구도 작고 힘도 세지 않고 딱히 영리하지도 않은 내가 보기에 리하르트는 영웅 같았다.

그를 따르는 많은 소년들처럼, 나도 그를 동경했다. 그와 무리지어 다니고 싶어하는 소년들 속에 섞여 있는 나를 아마도 그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늘 눈으로 그를 좇았다. 그는 내가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 자체였다.

자라면서 이성적으로는 그가 그렇게 이상적이고 나무랄 데 없는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감정적으로는 언제나 리하르트는 최고로 멋지고 훌륭한 남자였다. 나는 가끔 내가 리하르트가 된 꿈을 꾸고 나서 황홀해하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사교성은 딱히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다는 갈망은 남보다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인지 타인의 마음에 민감했다. 아주 미세한 표정이나 눈짓, 입매의 변화만으로도 그 사람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관찰력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나의 관찰력의 대부분은 리하르트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사소한 버릇이나 손짓, 몸짓 따위를 살피며 따라하고자 애쓰다가 결국은 포기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은밀한 기쁨을 하나 찾아내었다.

어쩌면 리하르트 본인조차 모를지도 모르는 그의 버릇을 하나 깨달았던 것이다. 나도 어느 순간 우연히, 불현듯 깨달은 점이며 또한 확실하지도 않아,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 내 멋대로 내 짐작이 맞다고 생각하며 홀로 기뻐하기로 했다.

언제나 당당하며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온유한 리하르트는, 아주 간혹 뭔가 생각에 잠길 때면 한 손으로 턱을 감싸쥐듯이 해 입가를 가릴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얼굴의 아래쪽 반이 거의 덮여 표정을 좀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무심한 듯도 한 눈빛만이 보일 뿐이다.

더 이상은 우리가 어리지 않을 때, 소년과 청년의 애매한 경계에 있던 어느 무렵, 그때도 그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리하르트는, 믿을 수 없었지만, 뭔가에 당황하거나 경계심을 가졌을 때, 그렇게 입가를 가리곤 했다. 마치 그 표정을 미처 숨길 수 없어 손으로라도 덮어서 감추려는 듯이.

그 시도는 언제나 훌륭하게 성공해, 그렇게 턱 근처를 손으로 감싼 리하르트는 침착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걸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그가 그렇게 얼굴을 가릴 때는 거의 없어, 해가 지나도록 두세 번도 채 보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나를 비롯해 많은 소년들의 우상인 어른스런 그는 뭔가에 당황하거나 경계하는 것처럼 풋내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가 그러는 모습은 몇 번 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를 따르는 무리 중의 한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몸으로 부닥치거나, 혹은 줄곧 그를 미심쩍은 태도로 대했던 소년이 어느 순간 돌변해 이유도 없이 그를 자꾸 찾아와 탐색하듯이 말을 붙일 때, 그럴 때 겨우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속내를 갈무리하는 데에 익숙해진 리하르트의 그런 모습은 보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조금 아쉬웠지만, 어쨌든 한때나마 아무도 모르는 그의 버릇을 나 혼자 알고 있었다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

비록 리하르트를 따르는 소년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일 년 사시사철 그의 주위에만 모여 있을 수는 없었다.

평소에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집―타르텐의 분가―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자기 앞에 주어진 공부나 각종 활동 따위의 과업에 열중하며, 치열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학교 수업이 끝나면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파면서 정기적으로 악기나 외국어, 운동 따위의 교양 과외를 받곤 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본가의 저택에 가서 장차 몸바쳐 일하게 될 집안의 일들에 대해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말에는 반드시 본가에 가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서, 시간이 맞지 않는 소년들은 1년 내내 몇 번도 채 못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가운데 딱 한 번, 타르텐이라는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다 모이는 날이 있었다. 어르신의 생신이 그날이다.

그 해도 그랬다.

어르신의 생신을 사흘 앞두고, 이틀 앞두고, 빠른 사람은 일주일이나 이르게 본가를 방문해 머무르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서로의 사소한 신변 이야기나 집안 내에 떠도는 소문 따위를 화제에 올릴 그때.

그 해만큼은 달랐다.

저마다 몇 살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체로 스물을 전후로, 이제 소년들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무렵이었다.

평소에 그런 것처럼 국제사격대회에서 메달을 땄느니, 첼로 연주회를 성공리에 마쳤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악에 차서, 비웃으며, 혀를 차며, 아쉬워하며. 저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바로 얼마 전 스물을 맞은 그가 어르신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는 소문이 온 저택 안에 퍼져 있었다.

이 집안, 이 조그맣고도 거대한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 그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권리를, 모두가 간절히 바라면서도 얻지 못하는 그 귀한 기회를, 그는 내버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면서. 그러다가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나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크리스토프의 경쟁자. 아니, 크리스토프가 그만둔 이상 이제 가장 유망하고 강력한 승계 후보자, 리하르트를.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연구회의 중요한 모임이 있었던 탓에 어르신의 생신을 하루 앞두고서야 허겁지겁 본가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붙잡아 세운 사람은 나와 비교적 성격이 잘 맞아 가깝게 지내는 사촌, 율리히였다.

“에반스, 왔구나. 소문 들었어?”

“응?”

인사도 하기 전에 대뜸 그렇게 말을 꺼내는 율리히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나는, 율리히가 흥분된 어조로 전해 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토프가 승계 경쟁에서 물러섰대! 지난 달 스무 번째 생일날 어르신께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더라.”

나는 그 엄청난 소식에 한동안 말을 잃고 있다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더듬더듬 되물었다.

“설마……. 진짜야? 그냥 떠도는 헛소문 아니고?”

“진짜야! 나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큰숙부님이 둘째백부님과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다니까! 심지어 더 놀라운 일은 뭔지 알아? 이걸 들으면 정말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걸.”

율리히는 엄청난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그가 알고 있을 만한 이야기라면 그리 큰 비밀도 아니겠지만, 나는 이 뜻밖의 사태를 미처 받아들이지 못해 덩달아 소리를 낮추며 뭔데, 하고 되물었다.

“크리스토프 그 자식……, T&R 기동대에 들어갔다는 거야……! 어르신께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린 그날 바로,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떠나 버렸대. 알겠어?! 미치광이 릭이 있는 그곳에! 크리스토프도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지만, 정말 놀랐지 뭐야.”

하긴 제정신이라면 누가 그런 선택을 하겠어?, 라고 덧붙이는 율리히의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미치광이 릭이라면, 리그로우의 둘째 아들이다.

백수십 년이 넘도록 타르텐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집안인 리그로우 사람들과는 여러 번 마주쳤다. 특히나 그 집의 아들들과는 비교적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종종 한데 모아 놓고 어울리게 했다. 좀 철이 든 뒤로는 어르신의 생신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에나 가끔 마주칠 뿐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면 소꿉친구라고 말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아무도 리그로우의 둘째 아들, 일레이 리그로우와 소꿉친구라는 말은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입모아 말했다. 그놈은 진짜로 미친놈이라고. 그리고 다들 자신의 사회적 체면과 신변의 안전을 위해, 미친놈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타르텐 안에서 릭과 그나마 이야기 몇 마디 정도라도 나누는 것은 그 두 사람뿐이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나는 마구 흥분하는 율리히를 제쳐 놓고 걸음을 서둘렀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나도 점점 더 흥분되었다.

여기서 말해 두건대, 나는 비록 심적으로 리하르트에게 이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크리스토프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 잔인하고 특이한 성격 때문에 멀리는 했을지언정, 딱히 나와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크리스토프는 경쟁선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이제 타르텐을 짊어지게 될 가장 유력한 사람은 리하르트였다. 다른 경쟁자가 둘쯤 더 있긴 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리하르트나 크리스토프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리하르트에게 축하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축하해, 리하르트. 눈엣가시로 여겼던 크리스토프가 드디어 사라졌구나. 이제 타르텐은 네 거나 마찬가지야. 축하해.

그러나 벅찬 마음으로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내가 리하르트를 찾아내었을 때, 그는 이미 몇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음으로만 세차게 축하를 거듭했을 뿐 현실에서는 여전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는 우물쭈물 그의 근처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리하르트를 둘러싸고 저마다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은 내가 그에게 해 주려 했던 축하의 말과 거의 비슷했다.

“잘 됐어, 리하르트! 이제 그 보기 싫은 얼굴을 더 안 봐도 돼!”

“틀림없이 네게 질까 봐 겁이 나서 먼저 꼬리를 만 거라고. 네가 이겼어! 나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T&R 기동대라니, 그 미친놈들 집합소! 흥, 딱 어울리는 곳을 잘도 찾아갔군. 이제 됐어, 처음부터 너만큼 타르텐의 후계자로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어. 정말로 축하한다, 축하해.”

이제는 물러나 버린 경쟁자에 대한 비난과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지지자에 대한 칭찬이 어지럽게 뒤섞여 오가는 가운데, 리하르트는 조용히 서 있었다.

경쟁자가 사라져 크게 기뻐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불쾌해하거나 언짢아하는 기색도 없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웃으면서 사람들의 말에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어른스럽고, 일견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듯 태연한 그 태도에 감탄하면서 리하르트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어쩌면 리하르트는 그 가운데서 조금 피곤한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하긴 똑같은 말을 수십 번은 들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가 지겨운 내색을 않고 참을성 있게 그들의 칭찬과 비난을 감내하는 사이에, 조금씩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가장 놀라운 화제로 한바탕 이야기가 돌고 나자 그제야 여느 때와 같은 일상적인 화제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뭘 했다는 둥, 어떤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게 어쨌다는 둥.

그러는 사이사이에, 뒤늦게 도착한 청년들이 가끔 하나둘씩 들이닥치면 잠깐씩 그 흐름이 끊어지곤 했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 얘기 들었어?!”

이런 식으로.

그러면 리하르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아, 들었어.”

그러면 청년은 몇 마디쯤 크리스토프의 험담을 늘어놓다가 이렇게 이야기를 맺곤 했다.

“축하해. 그럼 이제 네가 승계하게 되겠구나.”

그리고 그 축하 뒤에는, 난처한 듯 웃으며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라고 겸손하게 대답하는 리하르트의 모습이 뒤따르곤 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 주제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담담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 하지만 간간이 지겨운 듯 관자놀이 언저리를 문지르거나 목덜미를 주무르곤 했다.

그런 태도가, 마치 ‘처음부터 나는 그런 녀석은 경쟁자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제 와서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리만족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은근히 만족스런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과는 관계없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줄곧 똑같은 말만 지겹게 되풀이해서 들은 탓일까, 그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를 조용히 관찰해 왔던, 타인의 기분에는 지극히 예민한 나마저도 긴가민가하며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아주 희미하게, 어렴풋이, 그는 언짢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평연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고, 나는 몇 번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무래도 지겨운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말았다.

어쨌든 그날은 크리스토프 이상 가는 이야깃거리는 없었고, 사람이 새로 하나 올 때마다 그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슬슬 그 이야기에 질리는 기색이었다.

딱 그 즈음이었다.

일레이 리그로우가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가 그곳에 나타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타르텐과 리그로우는 실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집안이었고, 서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참석을 하곤 했다. 하물며 어르신의 생신에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날도 리그로우의 큰어른은 막역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몸소 찾아왔고, 여느 부자간보다 나이차가 제법 나는 그 아들들도 함께 따라왔다.

아마도 어르신을 비롯해 다른 집안 어른들과 함께 있을 리그로우의 큰어른과 큰아들과는 따로 떨어져, 릭은 홀로 저택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순식간에 그 자리에는 싸늘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집안이 친하다고 해서 개개인도 더불어 친하란 법은 없다.

릭은, 아무리 150여 년에 이르는 집안의 교분을 고려한다 해도 결코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 없는 인간이었다. 친해지기는커녕, 기피해야 할 인간 목록의 제일 윗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우연히 이 자리를 찾아들었던 모양인 릭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걸 보곤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싹 불질러서 다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도록 섬뜩하고 잔인한 그 시선을 보고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하나뿐이었다.

“릭, 오랜만이군. 이제 왔나 보지. 큰어른께서는?”

저놈에게 웃으며 말을 걸다니 리하르트는 정말로 그릇이 컸다.

사람들이 저마다 내심 감탄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네들끼리 할 말이 많은가 보더군. 나는 그쪽 이야기엔 관심이 없어서.”

릭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저런 모습만 보면 정상인에 퍽 가까운데, 타고난 성격이 외견의 이점을 다 깎아먹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외견 하나만이 아니었다.

기실 사람들이 릭을 보며 마음 깊이 안타까워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레이! 차 열쇠 좀 줘. 안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어. 어머, 안녕하세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박자박 걸어오는 사뿐한 발소리가 그 목소리에 뒤따른다.

곧이어 그들이 모여 있던 서익의 1층 홀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늘씬하고 선이 고운, 이제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여자였다.

릭을 태연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그녀는, 리그로우가의 고명딸이며 릭의 동생이기도 한 헬레나였다.

하얀 얼굴에 늘 보드라운 웃음을 띠고 빛나는 고수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마치 보송보송 폭신폭신한 사탕과자 같았다. 비록 내면마저 그 겉모습처럼 온유하고 허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 그녀에게 들러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여자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바로 위에 릭이 있다는 걸 아는 한 누구도 그녀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저런 인간 아래에 저런 여동생이 있다니, 그 이상 안타까운 일도 드물 거다.

“오랜만이야, 헬레나. 더 사랑스러워졌는걸.”

나는 가끔 리하르트가 굉장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다. 여자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 하는 나는 죽어도 불가능할 텐데, 리하르트는 아무런 흑심이나 거북함이 없이 한결같이 담담하고 다정한 태도로 그런 말을 잘했다. 그러니 인기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 리하르트는 남자에게 인기가 좋은 것만큼이나 여자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당연하다. 저렇게 남자다운 외모와 체격에, 성격에, 능력에, 배경에. 모든 걸 다 갖추었으니.

그러나 우리는 그런 면에서도 그를 질투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여자를 사귀는 취향이 매우 확고했다. 그는 사탕과자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 자칫하면 부서질 것처럼 순하고 보송보송해 보이는 여자를. 그는 늘 그런 여자만 사귀었다.

지금 저기서 리하르트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헬레나도 겉모습만큼은 그런 류에 속했지만, 얼핏 말을 듣기론 리하르트는 외모와 함께 성격까지 그렇게 순하고 겁 많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기론 그들은 그저 친구일 따름이다.

“그럼 나중에 또 봐. 난 연락 올 데가 있어서 전화를 먼저 찾으러 가 봐야겠거든.”

“남자친구?”

“응. 그러고 보니 리하르트, 이번 연인도 꼭 사슴처럼 사랑스러운 아가씨라면서. 좋겠네. 다음에 소개시켜 줘.”

헬레나는 손가락에 열쇠고리를 잘랑잘랑 건 손을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고, 그 뒤에서 리하르트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취향은 여전한가 보군.”

헬레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 릭이 느릿하게 말했다. 리하르트는 흘끔 그를 돌아본다. 그 눈가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

“폭신폭신하고 따끈따끈해 보이는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만 눈이 가거든.”

“미친놈.”

릭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그 자신에게라면 모를까 리하르트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그런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좋다는데 왜 미쳤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리하르트는 말없이 웃었을 뿐이다.

“왜. 너도 요전에 보니 아주 달콤하게 생긴 귀여운 애인을 데리고 있더니. 그래서 나랑 취향이 비슷한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걱정했는데.”

“왜. 같은 여자라도 두고 싸울까 봐?”

릭이 비웃음에 한없이 가까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리하르트도 그 말이 우스운지 웃는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아마도 리하르트를 추종하는 다른 사람들도―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말대로 그들이 다투게 된다면.

설마 리하르트가 지지는 않을 테지만, 상대는 저 미친놈이다. 둘 다 멀쩡하지는 못할 거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곧 마음을 놓았다.

생각해 보면 리하르트는 다정하면서도 현명했다. 다투기보다는 뭔가 합의점을 찾아낼 거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별로 뭔가에 집착을 하지 않는 성격으로 봐서는, 그 여자가 바란다면 선선히 보내 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 두 사람이 싸우면 어떡하나 일말의 불안을 품고 안절부절못하는 내 귀에, 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어. 나는 딱히 취향이랄 것도 없고, 마음에 들면 그리 가리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굳이 말하자면, 솜사탕 같은 얼굴보다는 조각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거든.”

심상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나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솜사탕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은 바로 조금 전에 보았던 헬레나가 딱 그렇지만, 조각처럼 아름답고 혹은 요염하기까지 한 얼굴은, 나는 한 사람밖에 몰랐다. 아니, 달리 조각 같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람보다 더 아름답지는 못할 테니 아예 생각도 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타르텐.

그 외에 누가 있을까.

나는 일순 숨을 죽였다. 릭의 말에서 무심결에 크리스토프를 떠올리고 나자, 연이어 무서운 상상이 피어올랐다.

릭과 크리스토프.

그 이름을 나란히 이어서 입속에서 중얼거리고 나자 오한이 들었다. 최강이며 최악의 한 쌍이겠다.

그러나 릭이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건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고, 한편으로 크리스토프쯤 되는 성격을 억누르려면 저 정도 미친놈이 아니어선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사고 단계를 거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 생각이란 비슷비슷한 법이다.

어쩌면 릭 역시 자신의 말에 크리스토프를 떠올렸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크리스토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얼굴은 크리스토프 탓에 이제 어지간해선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얼굴 따위야 익숙해지면 곱든 밉든 끝이지만, 하고 덧붙이는 그의 옆에서, 리하르트는 침묵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그는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보고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늘 그 눈매에, 입가에 버릇처럼 배어 있는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를 데리고 갔나?”

리하르트가 나직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오늘 처음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낸 직후였다. 아주 짧은 순간, 리하르트는 말을 떼자마자 실수를 했다는 듯 낭패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은 나타났을 때만큼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도 본 이가 없는 듯했지만, 나는 보았다. 그 뒤에 곧 그가 한 손으로 입가를 덮어 가리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턱을 감싸 쥐고서 하늘 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린 리하르트는, 무심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턱이며 뺨을 덮은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그놈이 제 발로 먼저 찾아왔지. 내가 데리고 가다니, 그놈을?”

설마, 하는 투로 중얼거린 릭은 문득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여느 때와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절친한 친구를 보는 듯한 시선을 릭에게 주면서 하하 웃는다.

“언젠가는 얼굴에 상관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심장을 움켜쥐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지. 네게도 말야.”

매우 순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석적인 말에, 릭은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그 기분도 참 희한하군.”

“그래?”

어떻게 들으면 대단히 무례한 그 말에도 너그러운 리하르트는 웃음을 돌려줄 뿐이었다. 릭은 혀를 찬다.

“심장을 움켜쥐는 사람이라……. 나타난다면 재미있겠군. 과연 그런 인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타난다면 재미있겠어, 라고 다시 중얼거리면서도 릭은 여지없이 비웃음을 곁들였다. 나의 우상을 그렇게 비웃는 그가 못내 얄미워, 나는 그가 꼭 그런 인간을 만나서 마음고생 좀 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볼일을 마친 듯 다시 헬레나가 나타나 릭에게 차 열쇠를 돌려주었고, 다시 한번 ‘그럼 나중에 뵈어요.’라고 주위사람들에게 해맑게 웃으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안타깝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미치광이 릭의 동생이라니. 뭐, 비록 릭의 동생이 아니라 할지라도 저렇게 우아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남자는 리하르트쯤 되지 않으면 안 될 테지만.

“다시 봐도 네 여동생은 사랑스럽군.”

속이야 어떻든 외견만은 틀림없이 취향에 맞을 그녀를 바라보며 리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릭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름다운 헬렌이라고 칭송하는 놈들도 많더군.”

자기 동생을 두고 하는 말인데도 마치 ‘눈이 삔 놈들’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말투에 리하르트는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지.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건 저런 게 아니라―….”

말을 잇던 리하르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고작해야 1, 2초, 아주 짧게 침묵하며 자신의 입가를 문지른 리하르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 헬레나의 자취를 노려보는 듯, 허공으로 적막한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 끝에 마치 누군가 있는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 하나 없이, 마치 유령처럼.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쨌든 난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좋아. 솜사탕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는 사람이.”

그리고 그는 망설이듯이 잠깐 침묵하다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넋을 빼앗기기 쉬워서 위험하거든.”

나직하고 느리게, 사뭇 진지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그 자리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정적을 깨뜨리며 리하르트는 “왜 그래, 다들.” 하고 말하며 재미난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그 맑고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이끌려 사람들도 하나둘씩 하하, 그렇지, 하고 따라 웃는다.

다른 사람들이 거의 다 웃음을 터뜨린 다음에야 나도 따라 웃었다. 천천히,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 가운데 끝까지 웃지 않은 사람은 릭이었다.

마치 집단 얼간이들을 보는 듯한 눈으로 서늘하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마지막으로 그는 리하르트를 보았다. 리하르트는 이미 언제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냐는 듯 평소처럼 조용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있었고, 릭과 눈이 마주치자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이윽고 릭은 상관없다는 듯 픽 웃었고, 리하르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있지 않아 화제는 각자의 사적인 이야기로 옮겨갔고, 별달리 할 말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앉아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공연히 그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가끔 맞장구를 쳐 주는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타르텐의 인간도 아니고, 애초에 성격부터가 사람들과 왁자하게 어울리지 않는 릭은 이미 구석진 기둥 뒤에 자리 잡고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들의 우두머리였다. 그에게 맞설 수 있다고 모두가 암암리에 생각했던 유일한 경쟁자마저 사라진 지금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까마득하게 어릴 때부터 늘 당연한 듯이 같은 길 위에서 달려왔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여느 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리하르트를 보면서, 나는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그는 유일하게 우리들의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홀로 그 위에 있었다.

[bonus track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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