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Bar에서 (11/34)

4. Bar에서

그곳은 주택지구와 상가지구의 경계라는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차 두어 대가 스칠 만한 넓이의, 신호등도 없이 그냥 지나다니는 골목길.

그 길을 사이에 두고 가게들과 주택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이미 한밤중이라 인적도 드문 길가에 주르륵 늘어선 가게들은 거의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안전문을 닫아 걸어 놓은 가게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불빛이 비쳐 나왔다.

그런 가게들 사이에, 언뜻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 녹아들어 있는 건물이 있었다.

심플한 외관이 어딘지 한적해 보이는 건물.

그 1층의 측면 구석에 입구가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그 입구를 통해 계단을 내려가는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르며, 정태의는 혀를 찼다.

거침없이 걸어나서는 그 기세에 일단 따라오긴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건지 모를 이 남자는 어쩔 작정인 건지.

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리하르트의 가게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가게 안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대체로 리하르트의 아래에 있는 사람, 적어도 이쪽의 아군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은 아니다.

“……. 괜찮아?”

정태의가 말을 걸자 앞서가던 크리스토프가 돌아보았다. 뭐가, 라고 눈으로 묻는다. 그 평연한 시선을 보고,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크리스토프 타르텐.

유럽판 킬링필드의 주인공이니, 다시없이 위험할 미친놈이니 하는 말들은 숱하게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위용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은 바로 조금 전이 처음이었다.

서너 명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순식간에 찢어발기던, 그 처참한 과정에도 상대의 피를 덮어쓸지언정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하게 그들을 짓밟던, 그 압도적인 능력.

이미 또 다른 괴물을 목격한 바가 있고 심지어는 그 괴물과 함께 살아 그러한 놀람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신으로―정태의는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었지만 크리스토프에게 그리 유력한 전력이 되어 주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적진을 뚫고 들어가다니, 적잖이 마음이 무겁다.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서 가게 안을 파장내 버리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경우 경찰은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정태의는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시뮬레이션을 해 봐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쓰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네 계단 앞서 내려간 크리스토프가 서슴없이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시선이 일시에 쏟아졌다.

크리스토프의 바로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정태의는 그들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선명하게 느꼈다.

그 시선은 주로 크리스토프에게 집중되어, 먼저 크리스토프를 한 번 훑은 다음에야 그의 동행인 정태의에게로 날아왔다.

“……. 와……, 가게 좋아 보이는걸.”

정태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나타난 크리스토프를 보는 경악의 시선은, 그와 함께 들어선 정태의 역시 같은 류의 인종이라 규정짓고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정말로 따가웠다.

크리스토프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이야,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언뜻언뜻 들려왔다.

놀람과 함께 명확한 적의, 불안, 공포 따위가 범벅이 된 그 목소리들을 좇아, 정태의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여느 바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안쪽에는 단을 약간 높여서 세워 놓은 카운터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위로 테이블들이 놓여 있다. 넓이도 그럭저럭.

“다 좋은데, 구성원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걸. 손님이나 종업원이나…….”

정태의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왔지만,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엔 익숙한 얼굴도 제법 보였다. 그 익숙한 얼굴은 대부분 서익에서 보았던, 리하르트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아는 얼굴은 서넛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나머지 인간들도 그와 비슷하다고 보는 게 나을 거다.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 적어도 이쪽 편이 아닌 건 확실했다.

제발 오늘 하루 탈없이 마감할 수 있길, 하고 정태의가 속으로 간절히 기원하며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들이쉴 때였다.

“크리스토프!”

안쪽에서 크리스토프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석 한쪽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걸어 나온 사람은,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허술하지도 않은 반정장을 걸친 남자였다. 그 차림새나 익숙해 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그것도 아마 제법 지위가 있을.

앞서 걸어 들어가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확인한 순간, 그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멈추었다.

“에리히!”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에리히라고 불린 남자는 두 손을 펼치고 유쾌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이런, 이게 대체 얼마만이지? 그러니까……세르비아에서 보았던 뒤로는 처음이지? 반갑군, 반가워. ……아니 그런데 이 피는 뭐야, 자네 온몸이 온통 피투성이잖아?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크리스토프에게 바싹 다가선 남자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대신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고 하다가,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그 손을 노려보자 ‘아, 맞아, 그랬었지.’라고 중얼거리며 빙긋 웃었다. 그런 다음에야 크리스토프가 피투성이인 걸 깨닫고 몹시 놀란 얼굴을 한다.

그러나 어디 다치기라도 했냐는 그 말이 의례적인 물음이라는 걸, 걱정이라곤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그 표정을 보고 정태의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아마도 크리스토프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린 채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흠? 하고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나야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인생 아니던가? 어디에 있어도 이상할 것 없지.”

“여기엔 언제 왔어.”

“여기? 아아, 독일에 온 건 8개월 전이고 드레스덴에 온 건 두 달 전이지. 여기에 온 것도 두 달 전이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불쾌한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도 리하르트에게 붙었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대번에 차가워졌다. 그러자 남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짐짓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나는 리하르트에게 고용되었을 뿐이야. 아래에서 사람이 갑자기 빠져나가서 한동안 마땅히 가게를 봐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나더러 좀 맡아 달라고 하더군. 자네도 알다시피 리하르트에게 도움을 받았던 빚이 있잖아. 그런데 사람이 낯이 있지, 어떻게 거절하겠어?”

“그래, 그 빚 때문에 리하르트에게 붙었다는 말이군, 그러니까.”

“어허, 크리스토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나는 리하르트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자네 친구이기도 하지. 그렇지 않나? 내가 자네 친구가 아니라면, 뭣 때문에 세르비아에서 내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네를 구했겠어? 그때 다친 무릎이 아직도 비오는 날이면 시큰거리긴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자네를 원망하거나 그때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네.”

“…….”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몹시 삭막했다. 일이 예상치 못하게 틀어져 버렸다는 얼굴이었다.

“……. 그래서, 에리히, 그때 일을 빌미로 나를 방해하려나?”

크리스토프가 싸늘하게 말하자 남자는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두 손을 번쩍 들면서 과장스레 외친다.

“이런, 내가 자네를 방해하다니 설마 그럴 리가! 나는 내 친구의 일이면 발 벗고 도와주고 싶을망정, 방해는 결코 하지 않아! 아무렴, 우리는 친구 아닌가!”

이토록 절친한 우정을 호소하는 남자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점점 표정이 가라앉았다. 찡그린 입매가 사납다.

정태의는 이 정신없을 정도로 유쾌한 남자를 바라보다가 흘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옮겼다. 크리스토프는 대단히 운수 나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충 눈치로 봐서는, 리하르트와도 크리스토프와도 안면이 있는 듯한 이 남자는 예전에 자신의 무릎을 크게 다쳐 가며 크리스토프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뭔지 알 수 없지만 리하르트에게는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대단히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맞이한 이 쾌활한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리하르트를 불러와. 나는 그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리하르트를?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

이 활기찬 남자, 에리히는 리하르트의 이름을 듣자 놀란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짐짓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야, 에리히. 나는 그와 담판 지을 일이 있어서 찾아왔고, 여기에 그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가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빌어먹을 가게를 때려 부숴 버리면 끝이야. 가게가 박살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어서 리하르트를 내 앞으로 데려와.”

“뭐가 어째?! 이 새끼가 남의 가게에 쳐들어와서……!!”

그 말은, 그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남자가 외친 소리였다.

서익에서도 몇 번 스친 적이 있는 그 남자는,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적의 어린 눈으로 살피다가 지금 크리스토프의 말을 듣고는 벌컥 화를 내며 나선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그쪽을 보았다. 남자는 옆에서 만류하려는 사람을 뿌리치고 이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여긴 네가 올 데가 아냐, 이 미친놈아! 집에서 마주치는 것도 꼴 보기 싫은 판에,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함부로 들어와?! 그런 주제에 뭐? 리하르트를 불러오지 않으면 가게를 때려 부숴?! 그래, 어디 해 봐라, 그 전에 나부터 쓰러뜨리고, 어디 해 보라고, 할 수 있으면!”

주먹을 움켜쥐고 크리스토프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이는 그 남자를, 크리스토프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가 살짝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첫 타자는 저놈이로구나, 정태의가 생각하며 슬쩍 눈을 돌렸을 때였다.

“아니 이 친구는 또 왜 이래! 내 친구가 왔는데 그렇게 험악하게 굴면 내 면목은 뭐가 되나, 응! 어서 썩 물러가 있어!!”

남자의 등을 철썩 후려치며 그렇게 외친 사람은,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정신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던 에리히였다.

뭐라고 투덜거리려 하는 남자에게 “점장한테 대들지 말고 후딱 저리 가 있어, 내 친구야, 내 친구!” 하고 외치며 그 남자를 순식간에 마구 밀어 버린 에리히는, 다시 크리스토프를 향해 돌아서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자네가 이해를 좀 해 줘. 여기서 일하는 놈들이 대부분 다 리하르트를 잘 따르는 거, 자네도 알잖아. 응? 자, 내 얼굴을 봐서라도 좀 봐 달라고. 아, 그렇지, 이리로 와, 이리로. 마침 오늘 아주아주 귀한 술이 들어왔거든! 억세게 운이 좋다 싶었더니 자네가 오려고 그랬나 보군. 자, 어서 이리 와 앉아. ―아, 거기 그쪽은 크리스토프와 함께 온 친구였지? 친구도 이리 오게나, 이리 와.”

에리히는 어느 결엔지 모르게 크리스토프를 이끌어 카운터석 안쪽의 빈자리로 데려갔다.

몇 걸음 떨어져 그들을 따라가면서, 정태의는 감탄하고 말았다.

누군지 모를 저 수단 좋은 남자는, 크리스토프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크리스토프를 카운터석으로 아주 잘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의 몸 가까이 손을 가져가면 반사적으로 그 손을 피하는 크리스토프의 습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굉장한걸, 하고 감탄하면서 정태의가 따라갔을 때엔, 이미 크리스토프는 에리히가 내어놓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결에 당했다기보다는 반쯤은 그의 뜻에 스스로 따라준 듯,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자아, 자, 오늘 들어온 게 무슨 술이냐면 말이야―.”

“필요 없어. 리하르트를 데려와. 나는 당장 그를 만나야겠으니.”

크리스토프는 냉담하게 말하며, 그가 내놓는 잔을 거꾸로 뒤집어 발 아래에 쏟아 버렸다. 그러자 에리히는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이고, 이게 얼마나 좋은 술인데,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는, 크리스토프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 옆에 앉은 정태의를 보곤 붙임성 좋게 웃어 보이며 “그쪽 친구는 뭘 드시려나? 내가 살 테니 걱정 말고 주문하시게.”라고 배포 좋게 제안했다.

“그럼 저한테 그 귀하고 좋은 술 주세요. 크리스토프 몫까지 제가 대신 마시죠. 오늘 운은 내가 억세게 좋은 모양이네.”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에리히는 멈칫하더니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정태의의 어깨를 세게 두들겼다.

“재미있는 친구군, 재미있는 친구야! 그래, 주지. 자, 이 술은 말이야―.”

“에리히.”

에리히의 말을 가로막으며, 크리스토프가 쌀쌀하게 말했다. 그 나직하고 얼음장 같은 음성에는, 한 번만 더 사람의 말을 넘겨 버리면 이대로 엎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정태의가 민감하게 느낀 그 의지를 에리히 역시 느꼈는지, 그는 문득 낯을 흐리더니 땅이 꺼져라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몹시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이 그러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텐데도 이 남자는 정말로 풀죽고 힘없어 보여 마음이 약해진다.

어쩐지 이 남자의 능력을 알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정태의가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옆에서, 에리히는 크리스토프의 앞에 무거운 얼굴로 앉았다.

“크리스토프.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나? 리하르트는 지금 분명히 이 가게 안에 있어. 그런데 지금 그는 아주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있단 말이지. 지금은 도저히 나오라고 할 수 없어.”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내 볼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가야겠어.”

“이보라고, 크리스. 제발 날 좀 이해해 줘. 내가 리하르트에게 신세 많이 졌다는 거, 자네도 알잖아. 그가 나를 믿고 가게를 맡겨 줬는데, 내가 맡은 동안 이 가게에 불행한 일이 벌어지면 무슨 면목으로 그를 보겠나? 부탁이야, 한 번만 좀 봐달라고. 내가 그를 안 데리고 오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 중요한 손님만 돌아가면 바로 알려주겠단 말이지. 응? 조금만 기다려 줘, 조금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했―.”

“어구, 어구구구……, 가, 갑자기 무릎이……. 내가 이 무릎 때문에 어디서든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됐지……. 그러던 차에 이렇게 가게를 맡겨 준 리하르트가 얼마나 고마운지……. 아, 그래도 물론 나는 내 무릎 하나 희생해서 자네를 구할 수 있었던 걸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

크리스토프의 눈에서 시퍼렇게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서 꾹 움켜쥐는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몇 초쯤 그러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결국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그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불쾌한 빛을 노골적으로 비추며 물었다.

“그 중요하다는 손님은 언제 가는데.”

“음? 아, 그것까지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좀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기다려 보게, 내가, 그 손님이 안 돌아가도 적당히 틈이 보이면 슬쩍 리하르트에게 가서 전해 줄 테니. 그도 아마 자네가 왔다면 발 벗고 뛰어나올 거야.”

저렇게 말하니 참 사이좋은 관계처럼 들리는데, 발 벗고 뛰어나오자마자 크로스카운터를 먹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조용히 술만 홀짝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밉살스럽다는 눈으로 에리히를 노려보다가―눈치를 보아하니 이런 식으로 말려든 게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난 그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 테니, 네가 알아서 해.”

“한 시간? 그렇게 빨리?! 아, 아니네, 아니야, 아무렴, 그 사이에 틈이 나겠지.”

목소리를 뒤집으며 꽥 소리치던 에리히는 인내의 실이 끊길락 말락 하는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보곤 냉큼 말을 바꾸며 싱글싱글 웃었다.

어쩐지 리하르트가 이 남자를 점장으로 고용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술잔을 든 채 가게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리하르트 비슷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 중요한 손님과 있다면 따로 마련해 둔 룸에 가 있겠구나. 저 안쪽으로 난 복도가 그건가…….

정태의는 화장실 표시가 되어 있는 조그만 복도 바로 옆으로, 커다란 화분에 가려지다시피 해서 나 있는 또 하나의 복도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왜 그래?”

정태의가 두리번거리는 걸 알았는지, 옆에서 물을 달라고 해서 마시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정태의는 아니,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구조가 좀 희한하다 싶어서. 저쪽 복도로 들어가면 룸이 있나 보지? 어째 가게가 분위기도 좀 미묘하게…….”

정태의는 말을 흐렸다.

가게 분위기가 미묘하게……위험스럽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비상문을 여럿 만들어 놓았을 수 있을 법한 구조며, 천장이며 벽면의 보이지 않는 구석마다 숨겨 놓은 감시 카메라.

게다가 건물로 들어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가게의 넓이가 훨씬 좁았다. 바 자체로는 좁지 않지만, 건물의 규모를 생각하면 평균치보다 훨씬 좁았다. 즉,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룸이 제법 많다는 뜻이다.

단순히, 다소의 불법이 행해지는 술장사를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한 설비들이라고 보기에는 좀 걸리는 데가 있었다.

정태의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테이블 건너편에서 손수 칵테일을 조합하고 있던 에리히가 슬쩍 눈썹을 들어올렸다. 힐끔 정태의를 훑어보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아아, 하고 심상하게 말했다.

“위험한 가게니까 그렇지.”

“위험한 가게…….”

“여기는 리하르트가 소유하고 관리하긴 하지만,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타르텐의 소유야. 타르텐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종종 찾는 곳이지. 자……, 그러면 당연히 밀실에 가까운 룸이 여럿 있을 수밖에 없겠지.”

크리스토프가 대수롭잖게 말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타르텐의 가업을 떠올렸다.

정보업. 사설 정보국.

“아하……. 과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게 구조가 좀 묘하다고 해도 납득이 간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태의에게 덧붙여 말한다.

“원래 암암리에 약물을 좀 대대적으로 다루던 클럽을 사서 개조한 거라서, 구조가 좀 이상해.”

“아아……. ……그런 얘기를 나한테 막 해도 되나, 그런데?”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고 크리스토프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야기의 내용으로 따져보면, 외부인에게 이렇게 술술 함부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사고가 터져서 가게가 낭패를 보면 곤란해지는 건 리하르트니까. 소문내고 싶으면 마음껏 내도록 해.”

“……. 어.”

소문을 낸다고 해 봐야, 낼 만한 상대는 기껏해야 일레이나 카일, 혹은 삼촌이나 형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좀 특이한 가게가 하나 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지금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타르텐의 서익만 흉흉한 줄 알았더니만 여기도 분위기 한 번 아주…….”

정태의는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더 주겠다며 술병을 기울이는 에리히에게 손을 저으며, 대신 맥주나 하나 달라고 한다. 향이나 느낌이 좋은 술 같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입맛에 더 맞는 건 맥주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얼마든지 달라면 공짜로 줄 것 같아 썩 좋았다.

그 맥주의 맛을 확 떨어지게 해 줄 만한 분위기도 함께 갖춰져 있다는 게 좀 문제이긴 했지만…….

“어째 분위기 무진장 험한데.”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약간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조금 전에 에리히가 준비해 준 물수건으로 대충 얼굴이나 손 정도라도 닦기 전까지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던 사람이 뭘 그리 신경 쓰랴만.

그러나 정태의는 신경 쓰였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어째 기분 탓인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무수한 시선이 더욱 험악해진 것 같았다.

서익에서 다니면서도 험상궂은 시선은 숱하게 받았지만, 지금은 리하르트의 가게에 와 있어서 그런지 한층 각별했다. 수틀리면 이대로 뭇매라도 놓을 분위기다.

“아무리 리하르트의 가게라고 해도, 이 가게 분위기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냐?”

정태의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물잔으로 입술을 축이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연락이 들어올 때도 됐겠지.”

“무슨 연락?”

“마사에 눕혀 놓고 온, 저놈들 친구쯤 될 여섯 놈의 소식.”

“…….”

아하. 과연.

정태의는 그제야 납득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험악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그는, 조금 전에 물수건으로 닦은 얼굴과 손 빼고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나마 실내조명이 어두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까만 옷을 입고 왔나 보다 생각할 테니까 낫지만, 밝은 데서 보면 정말로 공포스러울 모습이었다.

아무렴. 화낼 만도 하다.

원수 같은 놈이 갑자기 가게를 뒤집어엎겠다고 나타나서 주인 나오라고 외치는 것도 보기 싫은데, 어디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났나 했더니 알고 보니 그게 다 자기 친구들 피였다면.

……저놈들도 참 성질 좋구나. 당장 대걸레라도 집어 들고 와서 후려갈겨도 시원찮을 심정일 텐데.

“으음, 곤란하네…….”

정태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뭐가.” 하고 물었다.

“조금 전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갔다 오는 동안 봉변을 당하지 싶어서 말이야…….”

정태의는 고개를 들어 애처로운 얼굴로 다시 가게 안을 살폈다. 구석에 화장실로 이어진 길목이 묘하게 어둑해 보인다. 아무래도 길이 험난할 것 같았다.

“가는 길이나 오는 길에 어디론가 끌려가서 멍석말이를 당하기 십상일 분위기야…….”

“……. 같이 가 줄까?”

크리스토프는 무겁게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크게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러나 정태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냐, 그나마 하나가 자리에 남아 있다가 다른 사람이 안 돌아오면 바로 경찰에 알리는 게 낫지, 둘 다 한꺼번에 멍석말이 당하면 어쩌나.”

“그렇게 따지자면, 둘이 떨어지는 순간 각각에게 위험의 손길이 뻗어올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크리스토프의 말에 정태의는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천장의 흐릿한 조명을 올려다보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즉 요는, 어떻게 하든 위험하단 소리군.”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혀 위험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맥락으로 따져보면 어차피 다 똑같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그럼.’ 하고 선뜻 일어섰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올게. 부디 무사귀환을 빌어 줘.”

화장실에 가면서 이렇게 비장한 말을 하고 떠나야 하는 이 분위기를 안타깝게 여기며, 정태의는 걸음을 돌렸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정태의는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운터석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가기 위해 걸음을 내딛자마자, 일시에 따가운 시선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앞에도 뒤에도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정태의는 화장실이라고 표시된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흐릿한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깜빡거리는 화장실 표지판―무려 조명을 받는 화장실 표지판이었다!―을 따라 길목을 꺾어들었다. 그 길목은 10여 미터 앞에서 다시 한번 꺾어지고 있었고, 그 끝에 또 화장실 표지판이 있었다.

화장실이 참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역시 구조가 좀 희한하게 생겨먹은 가게였다.

그 길목의 끝까지 가서 정태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로 이어진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지금 정태의가 걸어온, 가게 홀에서 이어진 길이 하나. 그리고 그 반대쪽,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널찍하고 인적 드문 길목에서 이어진 길이 하나. 그리고 그 안쪽으로 길이 또 하나 더 이어져 있었다.

“구조도 희한한데 길 잃어버리기도 딱이겠다.”

정태의는 ‘이거 건축법 위반으로도 신고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화장실 쪽으로 가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춘 정태의는, 그 반대쪽으로 이어진 길로 슬쩍 가 보았다. 그 길목에는 뭐가 있나 궁금했던 탓이다.

정태의가 걸어온, 홀과 이어져 있는 길에서 몇 미터쯤 안으로 들어간 시점부터 그 반대쪽 길은 내부 장식이 달라졌다.

바닥에 두툼하고 부드러운 융단이 복도 끝까지 깔려 있었다. 조명도 은은하면서도 적당히 밝은 빛을 내리고 있었고, 복도 양쪽으로 지그재그로 나 있는 문들도 육중한 오크목이다.

“세상에나, 가난한 손님들은 홀에서 불편한 자리에 앉혀 싼 술이나 내어주고 부유한 손님들만 이 호화로운 방으로 모셔서 비싼 술을 물처럼 드시게끔 하나 봐, 어머어머.”

정태의는 요 얼마 간 크리스토프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가끔 마주쳐서 좀 놀아 주다가 그 중 여우처럼 영악한 여자애에게 옮아 버린 말투로 중얼거리며, 복도를 기웃거렸다.

아마도 저 많은 문들 가운데에는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곳도 있겠지만, 바깥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딱 보기에도 뭔가 심상찮아 보이는 복도라는 것뿐.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곤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곳이다. 저 방에 들어갈 이유도 없고, 거기에 들어가 봐야 술값을 감당할 자신도 없다.

그 복도에서 돌아 나와서 다시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돌린 정태의는, 그 순간 멈칫, 발을 멈추었다.

“……어.”

입에서 저도 모르게 짤막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화장실에서 안쪽으로 뻗은 복도.

그 안쪽으로 제법 떨어져 있는 곳에서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복도 제일 안쪽에 있는 방이다.

정태의가 막 복도에서 돌아 나왔을 때에 이미 그 남자는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뎌, 그가 어, 하고 다시 시선을 주었을 때에는 이미 그의 어깨와 등 정도만이 시야를 스쳐 방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그리고 곧 육중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울렸다.

“……. 어……?”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의 그 남자가 어쩐지 낯익었다. 아니,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희미하게 스쳐간 옆모습, 그 어깨며 등, 걸어가는 자세 따위가 어쩐지 몹시 익숙했다.

정태의가 아는 사람 가운데 저런 인물은…….

“……. ……. ……에이, 설마…….”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정태의는 이내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남자가 이런 데에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 남자는 지금쯤 타르텐의 동익, 귀빈을 모시는 손님방에서 편안하게 뒹굴고 있을 터였다.

정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널찍하게 공간을 잡은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이 정도쯤 되는 규모의 가게라면 타이밍의 문제를 따진다고 해도 이렇게나 화장실이 텅 비는 경우는 별로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이내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화장실이 한두 군데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룸마다 따로 딸려 있기도 할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변기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사람은 앞날을 알 수 없다니까…….”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까 크리스토프와 서재에 있을 때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꽤 오래도 참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내가 평화로운 밤을 맞을 줄 알았지 타르텐을 벗어나 어느 바에 들어와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책을 끌어안고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알까,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하고 뒤이어 중얼중얼거리는 정태의였다.

그러는 사이에 볼일을 다 보고 바지 앞섶을 다시 정돈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덜컹, 화장실 문이 열렸다.

두 남자가 들어왔다. 그 중 한 남자가 화장실문을 닫으며 그 앞에 선다.

정태의는 바지 퍼스너를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남자 두 명이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와서 문까지 닫으면, 그건 십중팔구 게이 아니면―.”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태의에게 곧바로 다가온 남자가 주먹으로 정태의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니, 정확히는 주먹을 휘둘렀지만 정태의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꺾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렇지, 이거지, 좋지 못한 뜻을 품은 무리들. 아니 하지만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러시면…….”

정태의는 얼른 남자에게서 물러서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남자는 주먹이 빗나가자 더욱 사납게 인상을 쓰며 돌아섰다.

“너, 크리스토프와 같이 온 놈이지.”

그렇지, 여기에서 원한을 살 일은 오로지 그것밖에 없지.

“그건 맞는데…….”

“이 자식이, 그럼 너도 그놈이랑 한 패라는 소리잖아, 왜 딴청이야!”

다시 정태의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험악하게 소리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어렵잖게 그 주먹을 피하며, 정태의는 혀를 찼다.

“네놈이 그놈이랑 같이 내 동생을 피떡으로 만들어 놨단 소리 아냐!”

남자는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거칠게 소리치며 정태의를 쫓아왔다.

남자가 말하는 동생이 과연 그 여섯 명 중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 말에서 짐작 가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아니지, 아냐. 난 그냥 구경만 했고 다 크리스토프가 혼자서 했다고. 난 억울해!”

정태의는 냉큼 그렇게 외치는 스스로를 약간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남자가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주먹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정태의가 그렇게 외친다 한들…….

“웃기지 마, 한 놈이 어떻게 여섯 명을 그렇게 박살을 내!”

봐, 안 믿어 줄 줄 알았다.

직접 본 정태의도 못 믿었는데. 서로 무기랄 만한 걸 가지지도 않은 동등한 상황에서 싸워서 한 명이 여섯 명을 능히 당해 내는 기적이라니.

“비겁한 놈, 거짓말을 해서 자기만 발뺌하려 들어?!”

내가 어째 저 말도 듣지 싶더라.

정태의는 다소 억울한 마음으로 진짜라니까, 하고 호소했지만 역시 씨도 먹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정태의가 어렵잖게 화장실 안을 돌아다니면서 피하는 모습을 보고 그 남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겠다고 생각했는지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까지 가세했다.

“아하, 그렇게 비켜 주면 나는 고맙지.”

정태의는 싱긋 웃었다.

한 명이 여섯을 당해 내는 기적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지만, 과하게 넓지 않은 공간에서 한 명이 둘을 당해 내는 솜씨는 제법 흔하게 일어났다.

먼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가까이까지 다가오기 전에, 자신을 쫓아다니던 남자를 붙잡았다. 그의 주먹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의 뒷목덜미를 붙잡아 벽에 처박아 버렸다. 퍽, 호쾌한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나고, 한 명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공격 태세를 막 갖출 때, 콧잔등을 주먹으로 날려 버렸다. 코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확실히 전해졌다. 바닥에 핏방울이 점점이 뿌려졌다.

“그러게 왜 둘이서 덤벼. 하나만 왔으면 적당히 피하기만 하고 말았을 텐데.”

정태의는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콧잔등을 움켜쥔 남자는 벽에 머리를 박은 남자와는 달리 의식이 있어 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코피가 목으로 넘어간 탓에 소리는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난 먼저 실례.”

정태의가 그들에게 성실하게 손까지 흔들어 인사를 해 보이고, 다시 홀로 돌아가려고 막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딱 그때, 한 명의 거구가 화장실로 들어오려는 참이었다.

“어…….”

“음? ……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후드재킷을 뒤집어쓴 그 거구는 대수롭잖게 정태의를 보고 비켜서려고 하다가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와 그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보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얼른 사라지려고 했지만, 거구는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며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너냐?! 이 새끼, 이제 보니까 아까 크리스토프 그놈이랑 같이 온 그 자식 아냐?!”

젠장. 이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날 기억하나 보다.

“손님을 일일이 다 기억하다니 참 친절한 가게이긴 한데 난 어째 좀 내키지 않는 것이…….”

정태의가 적당히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이 거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 소란을 들었는지 복도 모퉁이 쪽에서 몇 명이 더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왜 그래, 거기.”

“어째 좀 시끄럽다?”

“뭐 문제라도 있어?”

그렇게 수런거리며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것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것만 네 명이다. 즉 앞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더 있었다.

정태의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등 뒤에는 코뼈는 부러졌으되 아직 손발은 멀쩡한 남자가 하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구, 그리고 그 거구 너머로 몰려오는 네 명.

“와……, 한 마리가 눈에 보이면 실제로 안 보이는 곳에는 서른 마리가 있는 거라더니 그 말이 맞나 봐…….”

정태의는 눈으로 그 남자들을 헤아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딱 여섯 명이니 아까 크리스토프가 보여 준 그 기적의 숫자와 일치하긴 하는데, 정태의는 그런 기적을 창출할 자신이 없었다.

여섯 명과 대치한다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크리스토프는 맞싸우는 걸 택했지만, 정태의는 달랐다.

“원래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가 줄행랑이란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빨리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이대로 저 남자들을 피해서 홀 쪽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그렇게 하면 그 뒤가 문제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니 거기까지 쫓아올 것 같은데, 가게 안에서 대형으로 난투극이 벌어지면 낭패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자신은 도저히 크리스토프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그러면 다른 쪽으로 도망을 가야 할 텐데, 어디로 가든 외부인인 자신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임시방편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챙길 정신도 없었다.

“일단 달아나고 보자. 어이, 미안.”

정태의는 짧게 사과를 하고,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던 거구에게 달려들었다.

뒤쪽으로 다가오는 동료들을 돌아보고 있던 거구는 불시의 공격에 어?!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정태의에게 주먹을 질러 넣으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아마도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어지간해선 성공하기 어려웠을 다리걸기로, 정태의는 거구를 넘어뜨렸다. 바닥에 육중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 위를 뛰어넘어 달린다.

뒤쪽에서 막 다가오고 있던 남자들이 그걸 보고 놀라서 마구 쫓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달리기 속도는 정태의가 빨라서 조금씩 거리는 벌어졌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젠장, 길을 모르겠다. 아까도 길이 좀 복잡하다 싶었는데,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달리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디를 어떻게 돌았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정태의는 어느새 다시 그 화장실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동안 남자들은 흩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여기저기를 뒤적이는 기척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자, 어떻게 한다. 차라리 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가는 편이 나을까. 아니, 그랬다간 그 성격에 틀림없이 피를 볼 텐데.

“…….”

일단 되는 대로 도망치는 쪽으로 해 보자.

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정태의는 다시 정처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어?!”

묘하게 낯익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린다 싶어 돌아봤더니, 조금 전의 그 거구가 거기에 있었다. 정태의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을 때 다쳤는지, 팔꿈치가 살짝 까져 있었다.

“어……, 그거 아팠겠다. 미안.”

조롱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사과를 한 것뿐인데도, 거구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져서 정태의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정태의는 그 흉흉한 기세를 보고 재빨리 등 뒤에 있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구 역시 얼른 뒤를 따라왔다.

“이 자식아, 이제 독에 든 쥐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득의양양하게 외친 그 거구는, 세면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정태의를 와락 덮쳐들었다.

그리고 그때.

정태의는 약간 몸을 숙여 그 거구의 우람한 팔을 피하며, 그의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그는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 위에 풀썩 엎어졌다.

이 청년은 크게 되긴 글렀다. 학습능력이 없어.

그의 미래를 다소 안타깝게 생각하며, 정태의는 그의 목덜미 조금 위, 뒤통수 아래를 정확하게 노려 짧고 세게 내리쳤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거구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조금 전까지 우레처럼 고함을 지르던 거구가 쓰러지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정태의는 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킷의 후드가 뒤집혀 거구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 ……. 이거나 좀 빌릴까.”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넉넉한 후드재킷, 쫓기고 있는 자신.

매우 그럴 듯한 조합처럼 여겨졌다.

*

그럴 듯한 조합 좋아하네…….

정태의는 이내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거구에게서 후드재킷을 벗겨내어 자신이 대신 걸쳐 입고서, 정신을 잃고 있는 그 거구를 질질 끌어다가 화장실 개실 안에 넣어두고 문 안쪽으로 빗자루를 집어넣어 잘 고정시켜 놓았다.

후드는 정태의의 머리를 푹 덮어 눈 아래, 거의 코까지 덮을 정도로 넉넉하게 내려왔다. 거구에게는 허벅지까지 오던 옷도 정태의가 입자 무릎 가까이 내려왔다.

이거라면 거의 모두 다 가려지니까 썩 좋잖아, 라고 희희낙락했던 것도 잠시였다. 화장실 개실 안에 넣어두었던 거구가 지나치게 빨리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거구의 후드재킷은 몹시 눈에 띄었다.

“저기 있다! 저놈이다! 빌헬름의 옷을 입고 있어!!”

……이런 옘병.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는 가게 안쪽을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이 미친 듯 뛰어다니면서, 정태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다.

이놈의 옷은 너무 더웠다. 머리끝부터 무릎까지 덮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뜀박질을 하는 몸에서 발산되는 열을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 옷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그 크기가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눈앞까지 내려와 시야가 가려지는 후드, 무릎까지 와서 뛸 때 방해되는 옷자락.

이걸 확 벗어서 어딘가 버려 버리고 싶었는데, 어딘가에 적당히 멈춰 서서 재킷을 벗으려고 하면 귀신같이 따라붙은 웬놈이 ‘저기 있다!’를 외쳐 댔다.

도대체 얼마나 뛰었을까.

자신이 가게 안의 어디쯤에 있는지도 잘 가늠이 안 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좀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금도 정태의의 뒤에는, 제법 거리를 두고 한 놈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정확하게 정태의를 보고 쫓아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발소리와 인기척 따위를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어디 적당한 데에 들어가서 잠시 숨어 있으면 저놈은 찾다가 그냥 지나칠 것 같은데.

정태의는 뛰는 와중에 주위로 빈틈없이 시선을 주었다.

그때였다.

정태의가 미친 듯 질주하던 길목의 옆으로 길이 하나 더 가지를 치고 있었다. 그 길 끝에, 캐비닛처럼 생긴 붙박이 창고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

막다른 골목 끝에 있는 캐비닛이다.

저기에 들어가서 숨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더는 도망칠 곳도 없이 끝장이다.

한 마디로 무사히 숨을 수 있으면 장땡이지만 들키면 막장.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아마도 평소라면 그런 곳을 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만약의 경우에라도 다시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거기로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정태의는 이미 다리가 둔해지고 있었고, 후드재킷 안으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만 다리를 멈추고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판단이 흐려졌던 것이다.

“―…에이, 몰라. 달리다 숨이 차서 죽으나, 들켜서 매맞아 죽으나 어차피 인생 매한가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면서, 정태의는 그리로 달렸다.

어느새 어느 길로 들어선 건지, 발 아래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달리는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잘 됐다.

모퉁이 저 너머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이 전해졌다.

저 기척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에. 그 전에 어서.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린 정태의가 겨우 그 붙박이 캐비닛에 다다랐을 때, 모퉁이 바로 너머까지 그 기척이 쫓아왔다.

“……!”

캐비닛을 열고 무작정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았다. 소리 없이 나무문이 맞물리며, 바깥과 안쪽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를 쫓던 기척이 모퉁이까지 이르렀다.

정태의는 캐비닛 안에서 숨을 죽였다.

나무문을 덧댄 조그만 창고를 분할해서 개조한 듯한 이 붙박이 캐비닛은, 문에 우드 블라인드처럼 짤막한 나무판자들이 사선으로 촘촘히 붙어 있었다. 그 나무살 사이로 바깥이 내다보였다.

뒤를 쫓아온 청년은 모퉁이를 지나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 저편으로 다시 뛰어가 버렸다.

“…―.”

캐비닛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정태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길게 내쉬며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앗……하고, 작고 가냘픈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 것 같았다.

“―?!”

바로 귓가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운 곳,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소리는 들렸다.

움찔, 정태의는 길게 내쉬려던 숨을 다시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소리가 들려온 옆 방향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정태의가 살폈던 복도 쪽을 향한 문과 마찬가지로, 이제 보니 캐비닛의 옆면도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문은 아니다. 손잡이가 없었다. 아마도 실내구조를 바꾸는 와중에 그렇게 된 듯, 복도 쪽을 향해 문이 나 있는 이 붙박이 캐비닛의 옆면은 복도 끝방과 맞닿아 있었다.

원래는 트여 있는 공간을 합판 따위로 막은 듯, 옆면은 문처럼 빗살로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있긴 했지만 손잡이가 없었다.

굳이 문으로 남겨 놓지 않고 막아 버릴 거라면 왜 블라인드를 터놨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그 바로 위로 환기구가 뚫려 그리로 팬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옆쪽 구석으로는 조그만 구멍을 뚫어 배기관을 연결시켜 놓고 있었다. 아마도 배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듯싶었다.

젠장, 기껏 잘 숨었다 싶었더니 왜 이래. 트여 있는 문 너머에 또 사람이 있다니.

정태의는 일단 숨을 죽였다. 누군지 모르는 바에는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함부로 들킬 수야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밀실 같은 룸이 줄지어 늘어서 있던 융단 깔린 복도의 끝방이었다. 방의 위치만으로도, 수상쩍은 사람이 들어앉아 있으리라고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정태의는 아주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 깊게 몸을 돌려 캐비닛 옆면과 맞닿아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아, ……아, ……아…….”

조금 전의 그 가냘프고 흐릿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간격을 두고 몇 번이나 거듭되는 그 소리는, 이윽고 울음 섞인 흐느낌으로 바뀌어 갔다. 여자의 흐느낌이었다.

정태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느낌이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지만, 여자 목소리라는 게 더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살 사이로 언뜻 그 여자의 모습이 보였을 때, 정태의는 일순 움찔, 몸을 굳히고 말았다.

그것은 비단 여자가 알몸이어서만은 아니었다. 한창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로 한 남자가―나무살의 각도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허리를 들이밀고 있어서만도 아니었다.

정태의가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잘못 보거나 착각했을 리는 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 보았었으니까. 타르텐의 숲에서. 리하르트의 옆에 서 있는 그녀를.

예쁘게 굽이치던 고수머리는 땀이며 눈물로 흠뻑 젖어 그녀의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알아듣기 힘들도록 조그마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를, ……에……, ……세요………….”

언뜻언뜻 들려오는 그 애원의 말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석상처럼 굳어 있는 정태의의 귓불이 달아오를 정도로 음란한 단어들이 뒤섞인 말들이었다.

여자 본인도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것이 죽도록 부끄러운 듯,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태의는 꼼짝도 할 수 없어, 그대로 눈동자만 위로 들어올렸다. 차마 더 볼 수도 없었고, 더 봐서도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저 여자가 여기에서 저런 모습으로 있는 걸까.

저 여자는 분명히 리하르트의 애인이라고 들었…….

“…….”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친 순간, 정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리하르트가 소유한 가게였다. 그리고 저 여자는 리하르트의 애인. 그렇다면 마땅히 지금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는 남자는―.

“좋아, 잘 말했어. 시키는 대로 착하게 말 잘 했으니까 이제 그만 봐주지.”

나직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정태의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여자의 등을 쓰다듬느라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자 얼굴도 보였다. 의심할 나위도 없었다.

리하르트 타르텐.

그 남자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거칠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곧 비명과 신음이 뒤섞인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는 여자에게 귀에 담기 어려울 만큼 음탕한 말을 들려주고, 또 그런 말들을 강제로 여자의 입에서 이끌어내었다.

정태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정말 변태였어. 진짜로 상변태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정태의가 아는 리하르트가 아니었다. 그는 타르텐의 서익에 살고 있는 리하르트라면 결코 할 리가 없는 말들을, 결코 지을 리 없는 표정으로, 결코 그럴 수 없도록 잔인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갑자기 눈앞이 빙글 돌아, 눈을 위로 치켜떠 그 장면에서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생생하고 적나라한 소리들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사람을 저렇게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지 경악을 할 정도였다.

꽉 다문 입술이 벌벌 떨렸다. 와, 정말 상변태였어. 내 주위에 저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니.

어쩐지 들키면 죽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면, “봤단 말이지……?”라고 중얼거리며 그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순식간에 저 잔혹한 상변태의 얼굴로 둔갑시킬 것 같았다.

아득해지는 머리를 겨우 지탱하며 정태의가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정태의가 서 있는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오른쪽 옆으로,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너도 취향이 정말로 안 변하는군. 늘 비슷비슷한 여자들만 고르니.”

헉.

그 목소리가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혔다. 귀까지 멍해지는 것 같았다. 눈앞도 까맣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귀에 익었다. 잘못 들은 거라면 좋겠는데, 잘못 들을 리도 없는 목소리다. 몇 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내가 여우굴을 피해 호랑이굴로 왔구나.

정태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해쓱한 얼굴로 방 안을 보았다.

다른 사람이―일레이가―보고 있는 앞에서도 태연하게 정사를 치른 리하르트는, 볼일을 다 마쳤는지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었다.

저런 섹스의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변태스럽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보니 심지어 남의 눈앞에서 저 판을 벌였다. 가히 상변태라 할 만했다.

리하르트는 몸을 닦고 난 수건을 구석의 바구니에 집어던진 뒤 옷가지를 집어들었다. 벗은 몸을 태연하게 드러내고서 옷을 하나씩 입으면서, 그는 웃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것들이 좋단 말이야. 몇 번만 쓰다듬어 주면, 뭐든 내가 말하는 대로 다 들을 테니까 제발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말하는 목소리들이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나? 이것들이 완전히 내 지배 아래에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맛보는 데에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것들만 한 게 없지.”

“여전하군.”

일레이가 픽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러나 그 전에, 늘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정하고 성실한 말들만 뱉어내던 입이, 똑같은 목소리로 저런 경악스러운 말을 뱉어내다니. 심지어 사랑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사랑스러운 것이란다, 것. 와……, 상종 기피 대상으로 수위권에 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정태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눈이 찢어지도록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보고 다시 봐도 그는 여전히 리하르트 타르텐이었다.

리하르트가 옷을 입는 동안, 언제부터 거기에서 그렇게 있었는지 모를 여자는 탈진한 듯 쓰러진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온 얼굴이 젖은 채 가끔 숨만 달싹달싹 내쉬는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그보다 그쪽은 어때.”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치상으로는 리하르트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목소리가 바로 몇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다. 다만 정태의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바지를 꿰어 입다가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그쪽? ―…아아, 그쪽이라면 지금 당장으로서는 큰 변화가 없어.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뭔가 변화의 조짐이 될 만한 것도 아직 보이지 않고.”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 바지를 다 입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셔츠를 집어들었다.

“아직 현재로서는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떻게든, 결정이 확실해지기를 기다릴 뿐이야.”

리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알 파드가 조금 더 버텨 준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그 애매한 말투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건지 혹은 아쉽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흥미진진하다는 건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표정을 보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리하르트는 ‘알 파드가 버틴다……?’ 하고 중얼거리며 생각해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자가 넘어가는 건 기정사실이야. 조금 빠르냐 늦으냐의 문제일 뿐.”

“그래봐야 그 나라의 친미 정권이 전복될 일은 없겠지. 누가 뒤를 잇든 정책의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을걸.”

“그렇겠지. 그러나 요는 실세가 바뀔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야. 문제가 되는 건 그 자리를 누가 잡느냐 하는 건데…….”

거기서 리하르트는 말을 흐렸다. 말꼬리에 희미한 웃음이 섞인다.

딱 그만큼의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일레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너는 둘 중 누가 잡기를 바라지?”

“하하, 나야 변제하기 쉬운 조건을 제시해 주는 쪽이 좋지.”

“변제하기 쉬운 조건.”

그의 말에 밑줄을 긋듯이, 일레이가 한 구절을 되읊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 안에 적막이 감돈다.

정태의는 숨을 삼켰다.

젠장. 조용하면 안 좋은데. 어찌 되었든 뭔가 말을 하든가 노래를 부르든가 움직이기라도 하든가 하란 말이야.

환기구 아래의 나무살 틈새로 엿보이는 방 안의 광경을 살피며 정태의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원치 않게 남의 말을 엿듣는 상황을 누가 기꺼워하랴만, 이 상황은 정말이지 지독했다.

이 좁디좁은 붙박이 캐비닛 안은 몹시 후덥지근했다. 바로 머리 위에 이어져 있는 환기구에서 팬이 돌아가면서 정태의의 머리에 정통으로 더운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끝부터 거의 무릎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이 후드재킷은 눈을 반쯤 가려 시야까지 답답하게 막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친 듯이 달리고 와서 온몸에 열이 나는 판에 캐비닛 안의 공기도 후덥지근하다. 거기에 더해 이 빌어먹을 후드재킷은 방한 효과까지 완벽해, 이미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후드재킷 따위를 빼앗아 입었을까. 어차피 이런 구석진 곳에 숨을 거였으면, 이런 답답한 것 따위 안 입었을 텐데.

지금은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했다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들키기 십상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무더운 탓에, 호흡마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낭패다.

방 안이 저렇게 고요하면 이쪽은 꼼짝도 못하는 건 물론, 숨소리마저 죽여야 하는데.

그러나 이 정도였더라면 그나마 재수 없구나, 낭패다, 그 정도만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하필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된 인간이, 고르고 골라 저놈이다.

정말 재수에 옴 붙었다.

여기에 리하르트가 있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가게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이곳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에 그가 앉아 있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앞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저놈이어야 하는지.

게다가 모든 걸 통틀어 최악인 것은, 엿들어도 별 상관없는 대화를 엿들었다면 그냥 멋쩍게 웃으면서 슬쩍 나가겠는데, 뭔가 심각한 분위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듣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억울하다. 들어 봐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도 안 가는데. 어쩐지,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옌장.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제발 서로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지 말고 누가 뭐라고든 말을 해, 말을. 언제까지고 숨을 참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정태의는 눈앞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가쁜 호흡을 겨우 억눌러 숨도 막히거니와, 비오듯 흐르는 땀이 자꾸 눈에 스며든다.

이러다가 호흡 곤란으로 기절을 해서 캐비닛 안에서 풀썩 쓰러지다가 들키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였다.

리하르트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분명 내가 알기로 알 파이살은 실리를 중요시하는 인물이야. 어떠한 점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줄지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지. 그런데 이번에는 예측이 어긋났어. 즉…….”

“뒤에 누가 있든가, 혹은 이쪽에서 알지 못하는 모종의 수가 있든가……?”

나직한 일레이의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정태의는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땀이 자꾸 눈에 들어가 시야가 흐려졌다. 어차피 눈 아래까지 처진 후드 때문에 앞이 제대로 안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더하다.

저들은 언제쯤 자리를 뜰까.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 봐야 하는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음 같아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얘기 좀 해, 얘기 좀! 이렇게 조용하면 숨을 내쉬는 기척조차 조심스러워지는데, 얼마나 힘든지 알아?!

몰래 숨어서 이야기를 엿듣는 주제에―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본의가 아니다―적반하장의 생각을 하면서 정태의는 다시 입 속으로 욕설을 쓸어 담았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는 빨리 침묵이 깨어졌다.

일레이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타르텐도 힘들겠군. 어느 쪽이 우선이라고 선뜻 말할 수도 없는 선택지를 앞두고 있으면, 제법 고심이 되겠어.”

“할 수 없는 일이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래, 그런데 말이야…….”

문득 일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차, 하고 소파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들린다.

시야가 흐려진 만큼 더욱 예민해진 정태의의 귀에, 여유롭게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발소리가 다가온다. 저벅, 저벅, 느리게. 즐거운 듯한 목소리와 함께.

순간 온몸이 써늘해졌다.

후덥지근한 캐비닛 안의 더위가 머릿속에서 싹 가실 만큼 선뜩한 감각.

그 발소리는 정확히 정태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붙박이 캐비닛과 저 방을 나누고 있는 합판 바로 너머 쪽으로.

그 소리는 바로 거기에서 멎었다. 거리로 따지면, 정태의에게서 딱 한 걸음 반 떨어진 곳.

“이 좁고 더러운 곳에, 너는 대체 뭘 기르는 거야?”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해 두자면 내가 기르는 게 아냐.”

“아하, 그래? 그럼 어디―.”

웃음 섞인 목소리가 떨어지는가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빠직―…,

방과 캐비닛을 가로막고 있던 합판이 길쭉하고 날카로운 결을 만들며, 쪼개졌다.

방 안의 불빛이 한 줄기로 길게 비쳐드는 그 틈새로, 단단히 틀어쥔 주먹이 정태의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

“기왕 둥지를 틀려면 좀 더 넓은 곳에 틀지, 왜 굳이 이런 좁은 곳으로 기어들어갔을까.”

바로 귓가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그가 낮게 웃고 있었다.

흐린 시야 아래 진남색 가죽장갑을 낀 손이 있었다.

합판을 단숨에 쪼개어 버린 그 괴물 같은 주먹이 이윽고 펴지는가 싶더니, 빠직, 빠지직, 합판을 뜯어낸다. 한 줄기, 두 줄기 새어들던 빛이 홍수처럼 들어왔다.

정태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 바로 옆에서, 합판을 옆으로 치워 버린 일레이가 벽에 팔을 걸치고 이쪽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아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야 원, 덥지 않았어? 쯧쯧……. 이것 봐, 등덜미가 아주 흥건하게 다 젖었잖아.”

그 장갑이 정태의의 등 위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짐짓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옷 위를 꾸욱 누르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언제 살점을 잡아뜯어도 이상하지 않을 손이었다.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스툴에 앉아 있던 리하르트는 이쪽으로 굳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담담히 물었다.

“우리 집안 쪽인가? 아니면 다른 쪽?”

“글쎄, 어디서 왔으려나…….”

일레이가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손이 후드 아래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움츠리는 정태의의 턱을 움켜잡는다.

사람의 턱 정도는 어렵잖게 바스러뜨릴 수 있는 그 억센 손이, 턱에서 뺨에 걸친 얼굴 아랫부분을 그러쥔 채 천천히 움직였다.

“이렇게 시커먼 천조각을 뒤집어쓰고 숨어들 정도라면…….”

장갑의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맡는 그 섬뜩한 냄새에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이런 젠장……. 어째 이렇게 될 것 같더라…….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물러설라 치면 당장 용서 없이 턱을 망가뜨릴 게 뻔한 그 손아귀에 얌전히 얼굴을 맡겨 놓은 채 정태의는 눈을 떴다.

시야를 반 넘게 가린 후드자락 아래로, 일레이의 얼굴 아래쪽이 보였다.

익숙한 콧날 아래, 낯익은 입술이 보인다. 완만한 곡선을 그린, 살아 있는 장난감이라도 찾아낸 어린애 같은 웃음을 띤 입술이다.

얇은 가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일레이의 손이 정태의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이어 뺨을 가볍게 훑어내린다.

그때였다.

문득 그 손이 멈칫,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입술에 희미하게 드리워 있던 웃음이 사라진다.

“…….”

그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닫혔다.

웃음기 하나 없이 굳게 다문 입술이 설핏 찌푸려진다.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손이 다시 한번 얼굴을 쓰다듬었다. 뺨에서 코, 턱에서 이어진 목선.

천천히, 느릿하게 살갗 위를 더듬던 그 손가락은 마지막으로 정태의의 입술에 닿았다. 스윽, 입술 위를 덧그린 손가락이 입술 끝을 지그시 눌렀다.

“……. …―.”

뭔가 말을 하려던 입이 닫히고, 그 대신 그가 소리 없이 혀를 차는 게 보였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하르트가 물었다.

“누구야?”

일레이는 천천히 정태의에게서 손을 뗐다.

“글쎄……, 일단 누구인지 알아보기 전에 말이지, 마침 잘 됐군.”

그에게 대답하는 일레이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별다를 것 없었다. 여전히 여유롭고 나른하다.

“좀 전에 네가 내 눈앞에서 한 판 벌인 탓에 나도 아래가 당겨서, 돌아가기 전에 적당히 아무나 붙잡아 해소하고 갈까 생각하던 참이거든. 그런데 딱 마침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기특한 놈이 있으니, 잘 됐어.”

말꼬리에 아주 희미하게 웃음이 섞였다.

그 나직한 웃음이 귓속을 파고든 순간.

덜컹.

심장이 떨어졌다.

갑자기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시 잊고 있던 진땀이 등줄기에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놈이랑 하겠다고?”

하, 하고 리하르트가 어이없는 빈 웃음과 함께 물었다. 그러나 이미 더욱 가까운 곳에서 잘각, 벨트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두 달이나 금욕을 했으니, 슬슬 풀어 줄 때도 되었단 말이야. 게다가 베갯머리에선 못하는 말도 없다니, 아랫도리로 즐거움을 나누다 보면 이놈도 어디에서 숨어 들어왔는지 제 입으로 기꺼이 말해 줄 테지. ―그러고 보니 넌 비역은 즐기지 않았었지. 그러면 이쪽은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이봐, 잠깐. 농담이겠지. 어이, 야, 잠깐.

수많은 말들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그 중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서 얼어붙어 있는 정태의의 앞에서 버클을 푼 일레이는 문득 ‘아, 그렇지.’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장갑을 벗었다.

그 안에서 낯익은, 하얗고 가지런한 손이 나타났다.

“어때, 아름다운 손이지? 침대에서 백날 버둥거리며 내 어깨며 등을 손톱으로 피가 나게 긁어 놔도 차마 이 손만큼은 함부로 상처를 내지 못할 만큼 좋아하는 녀석이 있을 정도란 말이야.”

낮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 아름다운 손이 다가왔다.

지금의 심경 같아서는 그 손을 물어뜯어 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시퍼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서야 흥이 깨지니까, 일단 입부터 막아 놓을까…….”

일레이는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중얼거리더니, 벗어낸 장갑을 정태의의 입안에 마구 쑤셔넣었다. 저도 모르게 도리질치며 입안을 채워드는 이물질을 뱉어내려고 했지만 머리를 움켜쥔 손이 정태의의 저항을 쉽게 봉쇄했다.

“소리는 적당히 내 주는 편이 더 흥이 날 텐데.”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드에 가려져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느릿하고 나른한 목소리만큼은 명확하게 들렸다.

“그건 네 취향이지. 네가 원하는 말을 뱉어낼 때까지 울리고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건. 나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일레이가 나직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태의는 입 속을 가득 채운 장갑을 뱉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이 거짓말쟁이, 하고 장갑 속에 파묻힌 혀로 웅얼거렸다.

내 귀로 내 신음 소리를 듣는 게 끔찍해서―낯부끄러워서 뇌가 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입 다물고 있겠다고 했더니 기어이 그 소리를 듣고야 말겠다고 난리굿을 한 게 얼마 전인데!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아무리 크게 외친다 한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음―……음, 음―…….”

정태의는 뜻을 담지 않은 소리를 치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손쉽게 정태의를 돌려세운 일레이는 손목을 뒤로 돌려 묶어 버렸다. 아마도 벨트 따위인 듯, 딱딱한 가죽질의 감촉이 손목을 단단히 파고들었다.

미치겠다. 정말로 미칠 것 같다.

내가 미쳤지. 여우를 피하자고 호랑이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다니.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아까 그 남자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목을 모아 내밀었을 거다. 얼마든지 어디든지 데려가세요, 저 제일 안쪽 방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좋답니다, 하고.

손목―팔―의 자유가 사라지자 그만큼 몸이 부자유해졌다. 팔 자체를 뒤로 묶이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잡는 것부터가 평소와 달랐다.

정태의가 가로막힌 입으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이는 뒤로 돌려세운 정태의를 방 안쪽 벽면에 붙어 있는 콘솔 쪽으로 끌고 갔다. 콘솔 위에 놓여 있던 장식품이나 액자 따위를 한 손으로 밀어내어 그 자리를 비웠다. 와르륵,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발치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거기에 엎드려 놓고 하려고? 좁을 텐데 그냥 소파에서 하지 그래.”

“그렇게 본격적으로 할 생각은 없어. 아래에 당긴 걸 한 발 풀어내면 그 정도로도 괜찮으니까.”

리하르트의 말을 가볍게 거절한 일레이는 빈 콘솔 위에 정태의를 엎어놓았다. 배와 가슴이 콘솔에 닿았다. 다리로 바닥을 지탱하고 선 채로 좁은 콘솔 위에 엎드린 정태의는, 정말로 할 태세가 갖추어지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잠깐. 설마 진짜로 할 거야? 진짜로 할 거냐고?! 이런 데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세워 놓고서, 심지어는 저 상변태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 모든 것에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그 조건들 모두 엄청나게 싫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다가와 후드재킷을 무릎에서 허리 위로 걷어올렸을 때, 막연하게 너울거리던 안 좋은 예감은 현실감을 강하게 띠었다.

“……!!”

하지 마, 이놈아. 하지 말라니까. 내가 언제, 네가 하자는데 무작정 거절한 적이라도 있었어?! 나중에 집에 가서 하자면 얼마든지 할 테니까, 하지 마. 지금은 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지금은 그만둬!

정태의는 끝까지 애타게 부르짖었다. 가슴이 터져라 외치는 이 마음의 호소가 설마 일레이의 귀에 닿으리라는 생각은 그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나마 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헝클어지고, 사고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젠장,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런 것들도, 생각하려고 해도 좀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런 생각마저 머릿속에서 확 뽑아가는 감촉이 다가왔다.

허리 앞으로 손을 밀어넣어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 단추와 퍼스너를 내리는 손.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정태의가 보기에는―아름답고, 또한 세상에서 제일 밉살스러운 바로 그 손이었다.

그 손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바지와 속옷을 움켜쥐고 단번에 아래로 내려 버렸다.

“……!!!”

머리가 하얘졌다. 눈앞은 까매졌다.

허리 위로는 아직도 그 칙칙하고 답답한 후드재킷을 덮어쓰고 있는데, 허리 아래는 실올 하나 걸친 것 없이 다 드러났다.

“……. ……. …….”

이게 뭐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게 뭐하는 꼴이야.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이 빌어먹을 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허리 아래로는 홀랑 벗겨서 알몸으로 다 드러내놓은 사람이 정태의라는 것을, 이 망할 놈은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대단히 맛있게 생겼는데.”

등 뒤에서 일레이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났다.

정태의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맛있게 생겼으면 먹어라. 그냥 이대로 죽인 다음에, 구워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해.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냥 죽여 다오.

정태의는 목 위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목도 달아오르고 얼굴도 달아오른다. 아마 좀 있으면 몸까지 달아오를 거다.

“글쎄, 나는 아직 남자의 엉덩이가 그런 식으로 보인 적은 없지만, 막상 보니 생각보다 기분 나쁘진 않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리하르트의 목소리.

……그래, 다 봐라, 다 봐. 만인 데려다놓고 다 보여 주라지.

이미 마음속으로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정태의였다.

그러나―당연하게도―그게 끝이 아니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본 적이 없는 속살을 당당하게 다른 사람 앞에 드러냈다는 수줍은 충격에―차라리 목욕탕 따위에서라면 수백만 명에게도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남의 눈앞에서 벗게 될 줄은 몰랐다―반쯤 넋을 잃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천을 헤치는 희미한 소리도 들린다.

……? 아까 내 퍼스너는 내렸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엉덩이가 시원하게 드러나 있지…….

넋 나간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정태의의 귓전을 때린 것은, 리하르트가 혀를 차는 소리였다.

“내 취향을 말할 게 아니야, 일레이. 너도 여전하군, 그 물건은. ……남의 말을 몰래 엿들었던 데에 벌도 겸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집어넣으면 그 남자가 좀 가엾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넋이 빠져나가 약간 몽롱해져 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확 들어왔다.

엉덩이를 드러낸 충격에 잠시 잊고 있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었을까.

정태의가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콘솔에 상반신을 엎드린 채 서 있는 불편한 자세로 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리하르트가 보고 있는 앞에서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저 일레이라는 인간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뇌에 빠져 마땅한 일이었다.

“……! ……!!”

보지 않아도 선연하게 느껴지는,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에 정태의는 펄펄 뛰었다.

지금쯤 자신의 등 뒤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 그 물건에 대한 두세 달 만의 공포가 생경하게 엄습해 왔다.

잠깐. 진정해. 진정하자. 괜찮아, 정태의. 너는 이미 익숙해져 있잖아. 뭘 새삼스럽게. 매일같이 해 대다가 약간, 한 두어 달, 그렇게 떨어져 있었을 뿐이잖아. 어차피 다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아무렴. 괜찮아.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자신이 열심히 타일렀다. 자기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처럼.

그런데도.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몸을 벌리며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그 숨막히는 물건은, 할 때마다 정말로 호흡이 턱턱 막혔다. 내장의 위치를 바꿔 놓으려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런 걸, 몸과 마음이 편치도 않은 이런 데에서 다시 조우하다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건데 이럴 때엔 그조차 안 된다.

일레이. 일레이. 야, 제발. 여기서는 하지 말자. 제발.

뭐든 그가 말하는 대로 다 들을 테니까 제발 용서해 달라고 울먹이는 목소리들이 그토록 사랑스럽다고 말한 저 상변태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서, 정태의는 일레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울먹일 용의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지 말자.

심지어 다른 사람 눈앞에서.

제발.

그러나 정태의가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등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은 무정하기만 했다.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네 그 물건이 그 좁은 데에 들어갈 것 같지 않은데. ……미리 구급차를 대기시켜 두는 편이 낫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마저, 정태의는 원망스러워졌다.

그렇게 말할 바에는 좀 더 진지하게 만류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일레이의 웃음이 등 뒤에서 와닿았다.

“나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엔 해야지. ……그러니까 누가 멋대로 이야기를 엿들으라던가. 제 무덤을 제가 팠지.”

마지막 말은 틀림없이 정태의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가 벌어지면서, 그 안쪽에 바깥공기가 닿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저만큼 뚝 떨어졌다.

결국은.

정태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들을 입속으로 다 쏟아내며 눈을 꼭 감았다. 이 순간 바로 닥쳐올 감각을 각오한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얼어붙는다.

이윽고 사타구니의 깊숙한 안쪽에 뜨거운 열기가 바싹 다가왔다.

그때―.

똑똑.

메마르고 건조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 순간 그 공간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공기도, 시간도, 공간도, 사람들도, 감각도.

눈을 꼭 감은 채 가까운 미래를 각오하고 있던 정태의는, 잠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시 한번 초조하게 울렸고, 그제야 그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태의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을 구해주러 나타난 사람―일 리는 아무래도 없을 것 같고, 자신의 엉덩이를 구경하러 나타난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엉덩이를 환하게 드러낸 자신은 이렇게 낯부끄러운데도, 그보다 더 부끄럽다면 더 부끄러울 수 있는 국부를 드러낸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보았다.

“누가 찾나 본데. 문 열어 보지 그러나.”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벗어나 안도한 것도 아주 찰나의 순간, 정태의는 ‘내 엉덩이를 구경할 인간이 하나 더 늘었구나’, ‘이놈도 일단 방에 사람을 들이려면 그 물건이나 좀 집어넣지’, ‘저 사람 가고 나면 다시 위기가 닥치겠구나’, ‘설마 저 사람까지 구경하는 데서 해 대지는 않을까’ 등등의 생각에 휩싸였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가운데,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일레이가 후드재킷을 살짝 끌어올려 정태의의 머리 위까지 덮는다.

야, 그렇게 잡아당기면 엉덩이가 더 환히 드러나잖아!!!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을 후드재킷 틈새로 보고 정태의는 천 아래로 꾸물꾸물 머리를 숨겼다.

“리하르트, 방해해서 미안하네. 좀 골치 아픈 일이―이런, 좋은 일 하시던 중이셨구만, 이거야 정말로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그거야 저 손님 일이고, 리하르트, 좀 문제가 생겼다네.”

저 쾌활하고 발랄한 언변은 바로, 리하르트에게서 이 가게의 경영을 잠시 맡았다는 그 점장이었다. 크리스토프를 세 치 혀로 순식간에 구워삶았던.

가게 멀쩡해 보이던데 그새 갑자기 웬 문제가 다……하고 정태의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바깥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던 방 안에, 어렴풋이 뭔가가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뭔가 고함소리 비슷한 것도 얼핏 들리는 듯했다.

리하르트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 중에 주정꾼이라도 있었나? 그러면 종업원들 시켜서 쫓아내 버려. 그런 자에게까지 가게 이미지를 생각할 건 없으니, 마음껏 두들겨서 내쫓아도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손을 내젓는 리하르트에게, 그 말 빠른 점장 에리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작자였다면 내가 굳이 자네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지! 그게 말일세…….”

에리히가 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엉덩이만 좀 가릴 수 있다면 좋겠다, 아까부터 그런 사소한 바람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 문득 익숙한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동시에.

“……누구라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방금 에리히가 말한 이름을 듣고 귀를 의심하는 듯,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그러니까, 크리스토프가 와서 지금 밖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어. 내가 어지간하면 막아 보려고 했는데, 그게 처음엔 좀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영 안 되더구만. 그래도 한 시간쯤은 기다리라고 해서 승낙을 받아냈는데…….”

에리히는 난처한 듯 말하며 혀를 찼다.

정태의는 후드재킷 속에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머리 바로 위, 콘솔 위에 걸려 있는 시계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직 한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멀찍이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뭔가를 뒤집어엎고 깨부수는 소리였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섞여드는 걸로 봐서는 어느 멍청이가 크리스토프에게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작신나게 밟히고 있나 보다.

하지만 시간이 다 지나지 않았는데 왜 벌써 가게를 뒤집어놓고 있는 걸까.

젠장, 저놈을 말리려고 따라왔는데 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정태의는 한탄하며 콘솔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는 동안 에리히의 말이 이어졌다.

“같이 온 친구가 화장실에 간다더니, 그새 연락도 주지 않고 먼저 갔나 보더라고. 그런 걸 두고, 친구를 어디다 숨겨 놨다는 둥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둥 내놓으라고 저렇게 날뛰기 시작해서―도저히 손을 쓰기가 힘들지 뭔가.”

에리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더없이 유감스럽다는 투의 말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드러나 있는 엉덩이가 창백해진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머리를 스쳤다.

지금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이 그럼 다 나 때문이란 말인가. 나 때문이란 말 같다.

가게를 피바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크리스토프를 말리려고 따라왔는데 오히려 자신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 될 줄은 몰랐다.

정태의는 다시 콘솔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후드재킷 속에서 조그맣게 소리가 울렸다.

“가 보지 그래. 네가 나가지 않는다면 정말로 이 가게를 다 박살내겠다고 덤빌지도 몰라, 그놈.”

옆에서 일레이가 말했다. 어딘지 유쾌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 나는 먼저 가서 최대한 피해를 좀 막고 있어 보겠네, 그러니 어서 와 주게나, 라는 말을 남기고 에리히는 다시 문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나자 짧은 정적이 그 안에 감돌았다.

“어서 가 봐. 저놈이라면 혼자서 이 가게를 적어도 반은 초토화시켜 버릴걸. 이 가게 운영비 정도야 병아리 눈물보다 적다고 해도, 일부러 때려부수고 새로 살 건 없잖아.”

일레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한 듯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 앞에서 그래, 하고 애매하게 대답한 리하르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흐트러져 있던 옷을 단정히 챙기며, 리하르트는 거울 안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토프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눈빛이 스산하게 얼었다.

“남의 가게에 와서 배짱도 좋군. 제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내 가게에 들어와서 판을 깬다……? 하.”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며, 리하르트는 셔츠 손목의 단추를 채웠다. 목 단추도 채운다.

“소식이 안 들려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너희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았나 보지.”

일레이가 미묘한 웃음을 담고 물었다. 리하르트는 불쾌한 듯 일레이에게 냉랭한 시선을 흘끗 던졌다.

“사이가 좋아지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놈은 미쳤어. 미친놈과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나?”

“흐음.”

일레이는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웃음을 머금는다. 그런 그의 앞에서 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언제든 때가 되면 그놈은 한 번쯤 확실하게 밟아 놓으려고. 더 이상 내 앞에서 그렇게 거만하게 나대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 타르텐에는 발붙이지도 못하도록, 분명히 짓밟아 놔야지.”

리하르트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분노가 맺혀 있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쌓아올린 분노다.

아마도 크리스토프가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만큼 그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때, 불현듯 일레이가 아하……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직이 웃기 시작했다.

조용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한 바퀴 휘감았고, 양복 웃옷을 마지막으로 걸쳐 나갈 채비를 마친 리하르트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보았다.

“왜 그래.”

“아니, 지금 문득 생각났는데 말이야. 크리스토프가 아주 끔찍하게 진저리를 치도록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겠다 싶어서.”

“뭐?”

리하르트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미심쩍은 얼굴로 잠시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곧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것 재미있겠군. 어떤 거지?”

“글쎄, 대단찮아. 크리스토프만큼 접촉을 기피하는 인간이라면, 이 정도로 건드리는 것도 아주 몸서리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이 정도로’라고 말할 때 정태의의 엉덩이를 쓸어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움칫하며 몸을 움츠린 정태의는 다시금 잊고 있던 욕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 남의 엉덩이를, 남의 눈앞에서 그렇게 막!!

그러나 그렇게 벌컥 화를 내고 나서야, 그가 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접촉을 기피하는 크리스토프. ‘이 정도로’ 건드려도 아주 싫어하며 몸서리칠 그 남자.

그 말이 뜻하고 있는 것은 명백했다.

순간 정태의의 몸이 굳었다. 믿어지지 않는 심경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일레이가 하는 말을 리하르트도 알아들은 듯, 그 역시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그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싫어하겠지만 나는 그런 취미가 없어.”

언짢은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리하르트에게, 일레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뿐이야. 정말로 길길이 뛰겠지, 하는 생각이.”

“…―.”

“뭐, 일단은 가 보도록 해.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이 가게의 기물들은 처참하게 부서져나가고 있을 테니까.”

리하르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잠시 낯을 찌푸렸지만, 곧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래, 그럼 잠시 갔다오지. 너는 그동안 그 남자와 즐겁게 지내고 있으라고.”

“아, 물론이지.”

일레이는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곧 리하르트가 방에서 나가고 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든 뒤에, 일레이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 것을 함부로 탐내면 안 되는 거야, 크리스.”

희미하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귀에 닿은 순간, 정태의는 벌컥 속이 치밀어 올랐다.

이 미친놈. 원래 윤리적인 개념이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나쁜 놈이.

정태의는 콘솔 위에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맹렬히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 위에 뒤집어 씌워져 있던 후드가 등 뒤로 풀썩 벗겨졌다.

그리고 겨우 시야가 제대로 트인 정태의는,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면서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 앞에서, 일레이는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입가에 맺히는 웃음이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이런 데서 이렇게 마주치게 되다니 대단한 우연이군, 태이.”

“……! ……!! ……!!!”

사람이 얼굴 모양으로만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이미 욕설이 이 방을 가득 채우고 남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입으로만 말을 할 줄 아는 정태의는 현재 입이 막힌 상태였다.

그제야 그것을 깨달은 듯이, 일레이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시늉을 하며 이런이런,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이 입에 물려야 할 것은 장갑 따위가 아닌데 말이야.”

일레이의 입술이 완만하게 휘었다. 그 미묘한 웃음과 함께, 그는 정태의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입을 막고 있던 장갑을 빼낸다.

“……푸훅!”

숨은 코만으로도 쉴 수 있지만 입이 막혀 있다는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겨우 커다랗게 숨을 토해 내며 몇 번이나 기침을 한 정태의는, 그런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너 처음부터 알면서 그랬지, 이 빌어먹을 놈아!!!”

그러자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애매한 얼굴 그대로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는 그를 마주보면서, 정태의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 아차 싶은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이윽고 일레이가 이번에야말로 웃었다. 짙게.

“태이, 잊고 있었나 보군. 아직 네 손은 풀어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뭐 좋지. 어차피 슬슬 나도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러 가던 참이고, 기왕 묶어 놓은 김에 그대로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빠!!”

정태의가 당장 반박했지만, 일레이는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 ……지 마……!”

정태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의 목에는 손대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목이 졸린 듯 탁하게 쉬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등을 누르고 있는 커다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 손은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 손에는 큰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정태의가 몸을 뒤틀어 뿌리치면 쉽게 몸에서 떨어져나갈 터였다.

움칫, 몸을 움직여 보았다.

등을 누르고 있는 손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몸을 일으켜 이 손을 뿌리치기라도 하면 필경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손은 다시 자신의 몸을 붙들어 와서 등을 짓누를 거다. 팔도 뒤로 묶여 부자유스러운 몸을 붙잡아 오는 건, 어린애 팔을 비틀어 버리는 것만큼이나 쉬울 터였다. 그리고 그런 뒤에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바위로 짓누른 듯이 움직이지 않으리라. 정태의가 아무리 거칠게 요동친다 해도.

정태의는 자신의 몸과 정신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상황까지 몰렸을 때의 마지막 보루로 삼기 위해 지금은 그 손 아래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마도 일레이 역시 처음부터 그런 것은 다 계산해두고 있었을 거다. 정태의가 어떤 판단을 내리리란 것까지, 모두 다 예측하고서 이러고 있었다.

“교활한 놈…….”

정태의는 한 손으로 등을 누르고 다른 손을 사타구니 쪽으로 밀어넣고 있는 등 뒤의 남자에게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욕설을 했다.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일레이가 웃는 기척이 들렸다.

“겁이라도 나나? 떨고 있는데.”

등을 누른 손바닥이 살갗 위를 몇 센티미터쯤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정태의는 지그시 피부를 눌러오는 그 손길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나랑 같은 상황에서 겁이 나지 않는 용감한 인간이 있다면 꼭 좀 보고 싶군.”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몸이 어렴풋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겁이라. 어째서? 너는 알고 있잖아. 네 생명에도, 네 안전에도 아무런 위협이 없다는 걸. 내가 네 목숨을 끊어 놓을 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 겁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웃음이 밴 목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뜨겁다.

“아냐……. 생명은 몰라도, 적어도 안전만큼은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정태의는 주먹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주먹 쥔 손 위로 하얗게 떠오른 관절이 언뜻언뜻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겁이 나는 게 아니었다. 일레이의 말마따나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목숨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만큼은.

그러나 본능이 긴장을 이끌어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에 가까운 강도로 덮쳐올 부담을 예감하고,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 긴장 탓에 가냘픈 경련이 일었다.

일레이는 그 긴장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떨림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목덜미나 어깨 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그 입술에서 나직이 새어나오는 웃음이 살갗을 간지럽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몸이 떨렸다.

“태이. 오늘은 전적으로 네가 바보짓을 했어.”

문득 그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화가 난 듯도 하고 혹은 곤란한 듯,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그는 혀를 찼다. 그 움직임이 선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어쩌면 모처럼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나라고, 이럴 줄 알고 그랬던 게 아냐……!”

정태의는 그 말에 억울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건 알겠다. 자신이 한 짓은 분명히 바보짓이었다. 애초에 위험하다고 느꼈을 때부터 발을 뺐어야 했다. 혹은 도저히 홀로 발을 뺄 수 없었다면, 이곳에 오기 전에 크리스토프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다른 데로 가야 했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라고 왔을까 봐. 때려죽인대도 안 왔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말은 해 봐야 늦었다. 허무한 탄식이 될 뿐이다.

“바보같이. 너는 여기에 와서도 안 되었고, 이 방까지 숨어들어도 안 되었어. 더욱이 들키기까지 해서는 더더욱 안 되었지. 그러니까, 이건 네가 바보짓을 한 데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라고 생각해. 말해 두지만 나는 드레스덴에 있는 동안은 얌전히, 정숙하게 지내려고 했었다고.”

얌전히 정숙하게 지내려고 했었다는 일레이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서 흩어져 있던 정태의의 바지를 발끝으로 저만치 밀어 버렸다. 속옷과 함께, 마치 벗겨진 허물처럼 옷가지가 멀찍이 밀려갔다. 이 자리에서는 손도 안 닿겠다.

그런 뒤 얌전히 정숙하게 지내려고 했었다는 일레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정태의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워넣어 그 사이를 벌렸다. 또한, 얌전하고 정숙하게 지냈어야 할 손을 그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몸 속을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을 벌리며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기 하나 없는 내벽의 살점이 뻑뻑하게 손가락에 들러붙는 감각이, 정태의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아픔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느낌을 맛보며, 정태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꼴사나운 소리라도 새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망할 놈, 예고라도 하고 침이라도 바를 것이지, 하고 입 속으로 욕을 퍼붓는 건 잊지 않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다소의 불편함은 참도록 해. 게다가 빨리 마치는 게 너로서도 좋겠지.”

정태의가 소리 없이 한가득 퍼부은 욕설이 고스란히 들리기라도 한 듯, 일레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리고 하나 더, 아직 네가 정신이 있을 때 이참에 말해 두지. 태이, 너는 때로 지나치게 무모해.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혹은 모르더라도 거의 정확하게 감을 잡으면서도―거기에 고개를 들이밀지. 이쪽으로선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란 말야.”

“빌어먹을, 내가 알긴 뭘 알아. 나는 위험한 일은 무조건 피해가고 보는 안전주의란 말이다……! 나라고, 이런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을 원했는 줄 알아?!”

정태의는 부아가 치밀어 외쳤다.

그러는 동안 손가락은 둘, 셋으로 하나씩 늘어났다. 그러나 좀처럼 뻑뻑함이 가시지 않아 그 손가락들은 한참을 주의 깊게 드나들었다.

몸이란 규칙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는 우스울 정도로 쉽게 적응하는 법이었다. 정태의는 그 사실을 이 남자 때문에 이미 깨달은 바 있었다.

일레이와 몸을 섞기 시작한 뒤로 얼마나 지난 때였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럭저럭 익숙해져서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 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윤활유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멀쩡히 다리 사이로 파고들고 있는 물건을 아연하게 내려다보면서 정태의가 멍하게 ‘기름은?!’ 하고 묻자, 일레이는 이제 와서 무슨 새삼스러운 말이냐는 얼굴로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몸은 뒤로 나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앞을 자극해 주기만 해도 자연히 뒤까지 젖는데. 아직 모르고 있었나?’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충격적인 느낌을, 정태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몸이란 게 원래부터 생존을 위한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충격에 한없이 가까운 좌절이었다.

일레이를 만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갔더라면 그런 사실은 알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알 일이 없었을 거다. 그런 좌절 따위는 맛보지도 않고서, 아마도 지금쯤 취향에 맞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미청년을 품으면서, 나름대로 인기 좋고 매너 좋은 탑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일레이에게 맞춰진 몸이 되어 버렸다.

일레이에게 맞춰지는 자체가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남자로서 좌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며칠이나 계속되었던 우울증은 이제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 뒤로도 일레이와 일을 치를 때면 자신의 몸이 젖는 걸 느낄 때마다 아련한 회한이 느껴지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몸 속을 파헤치듯이 안쪽을 벌리면서 드나들던 손가락이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뻑뻑한 느낌이 거의 사라지고, 아래에서는 질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태 숱하게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죽을 만큼 낯부끄러웠다. 이 낯부끄러운 기분은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몸은 이렇게 쉽게 익숙해지면서 마음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니,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태이. 베를린으로 돌아가.”

끈적한 물소리가 머릿속까지 채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주문이라도 걸듯이 일레이가 나직이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뜨겁게 익어 가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왜…….”

“돌아가서 기다려. 나도 일을 마치는 대로 돌아갈 테니까.”

“…….”

정태의는 약간 몸을 뒤척였다. 아직도 일레이의 손이 등을 누르고 있었지만 아랑곳 않고 몸을 틀며 고개를 돌렸다.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이유가 뭐야.”

그러고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다.

예전부터 머릿속에서 아련하게 갉작갉작 걸렸던 것들.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러나 정태의는 알아야 했다. 계속 껄끄러운 상태로는, 자신의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베를린에 갈 때 가더라도, 미심쩍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

정태의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지그시 마주보자, 마찬가지로 뚫어지게 정태의를 마주보던 일레이는 이윽고 흠,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올해는 타르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해지.”

정태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이제 곧 승계일이라는 말을, 타르텐에 있는 동안 수백 번은 들었던 것 같다.

“이십여 년이나 걸쳐 키워낸 승계 후보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때이기도 하고, 또한 오랜 채무 관계가 끝나는 해이기도 해.”

“채무 관계…?”

“타르텐에는 제법 오래된 빚이 있어.”

정태의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차관 운운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태의가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타르텐의 어르신은 그래 봬도 욕심이 많은 분이야. 가업을 일굴 욕심이 아주 많아서, 어르신의 윗대에서 기본을 닦아 놓은 가업을 그분이 크게 일구셨지. 그분 대에 아주 비약적으로 커졌어. 그때까지는 타르텐이 제법 괜찮은 사설 정보기관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손꼽아 줄 만한 데는 아니었어. 그러나 그분이 가운을 걸고 도박을 해서 성공한 뒤로는, 정보기관 가운데서는 그곳을 따라갈 만한 데가 거의 없게 되었지.”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치 일을 하면서 잡담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정태의의 아랫도리를 세심하게 파고들었다.

간혹 일부러 그러는 듯―아니 틀림없이 일부러 그런다고 본다―안쪽에서 배어나온 물기를 문질러 질척거리는 소리를 낼 때가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정태의는 이 남자와 몸을 섞기 위해 채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현실적으로 느껴져, 머릿속까지 뜨거워졌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곤 하는데, 일레이는 그것이 재미나는지 가끔 꼭 그렇게 소리를 내곤 했다.

지금도.

정태의는 점점 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몸을 빼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이 초조한 감각에서 헤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의 커다란 손이 허리를 움켜쥐고 거세게 잡아당겨, 손가락들이 더욱 깊이까지 그 물기를 전하곤 했다.

“얘기, 를 하려면 얘기를, 하고, 그, 그걸 하려면 그걸 하고, 뭐든 하나만 하란 말이다!”

정태의는 아랫도리를 미끌거리며 드나드는 손가락의 감촉에 어느새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부루퉁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당연히 일레이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그럼 얘기는 그만두고 여기에 집중하도록 해 볼…….”

“아냐, 잠깐! 계속 얘기해!!”

정태의는 재빨리 소리쳤다. 일레이가 입을 다물고 지그시 쳐다본다. 그 눈길에 못 이겨, 정태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얘기도 계속하고……, 그것도 계속해 줘…….”

그제야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그 도박이란 게 말이지, 돈도 돈이거니와 위험성이 꽤 컸어. 이십여 년 전의 그 상황에서는 말 그대로 도박이었지. 당시 냉전체제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동․서진영에서 각국에 심어 두었던 정보원들이 대규모로 이탈하게 됐거든. ……이때 어르신은, 그 정보원들을 타르텐에서 고용한 거야.”

정태의는 잠시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반 대수롭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투였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다.

동서진영에서 각자 심어 두었던 정보원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났을 테지만 내부에서만 돌아다니는 정보도 비할 바 없었을 거다.

냉전이 무너져도,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정보원과 정보들이 숨어다닌다. 그들을 손에 넣고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이점인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비용이 엄청났을 텐데…….”

정태의는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보원도 한둘이 아니고 정보 역시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활동하는 분야 역시 막대했다.

그런 것들을 총괄해서 끌어안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 발 삐끗하면 그때까지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이 다 같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분명, 그것은 도박이다.

“그래, 비용이 엄청났지. 아무리 건실하다 해도, 일개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은 결코 아니었어. 그래서, 그들은 차관을 들여왔어.”

일레이의 말이 이어졌다.

차관.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조금씩 조합되어가고 있었다.

“민간차관이라도―예외가 있긴 하지만―기본적으로는 정부의 보증이 필요하지. 정부와 타르텐 사이에 어떠한 거래가 오갔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도록 하고, 어쨌든 타르텐은 차관을 얻었어. 자금의 운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네 군데에서 나눠서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조건을 걸었다.”

“…….”

“5년마다 순서대로 한 곳씩 상환하되, 채권자는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그 빚을 돈으로 변제받을 수도 있고, 혹은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5년마다……. 그럼 올해는…….”

“그래. 올해가 마지막 변제다. 올해가 지나고 나면 더 이상 타르텐은 아무데도 채무가 없어. 덧붙여 말하자면 5년 전에 청산한 곳은 T&R이었지. 이쪽은 차관은 아니었지만.”

일레이는 거기서 말을 맺었다. 그리고 문득, 정태의의 아래를 문지르던 손을 가만히 구부렸다.

몸속을 벌리며 부피를 늘리는 그 감각에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잠깐, 잠깐, 일단 얘기부터 다 하고―.”

몸 속 깊은 곳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다가와, 정태의는 당황해서 말했다. 조금만 더하면 아래가 완전히 달아오를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얘기고 뭐고 다 어중간해지게 된다.

그러나 정태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문득 일레이는 몸을 숙였다. 그리고 정태의의 어깻죽지에 이를 박아넣었다.

뜨끔하게 파고드는 느낌에 정태의는 몸을 움츠렸다. 아, 아야, 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은, 정말로 아파서라기보다는 그만두라는 뜻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자 깨물던 감촉은 사라졌다. 대신 그 위를 느릿하게 핥으며 뜨끈한 혀가 선을 그렸다.

“자, ……들어간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가 싶었다.

어째서 베를린으로 돌아가라고 하는지, 거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에서 그가 뒤이을 말을 기다리고 있던 정태의는 갑자기 전혀 맥락에서 어긋난 말이 들려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잠깐, 하던 이야기는 마저……!”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몸을 벌리며 움직이던 손가락들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잘박하게 미끄러질 만큼 물기가 배어나온 곳에 뜨겁고 축축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

몸이 굳었다.

저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숨을 삼키며 신음도 함께 삼켰다.

그러나 그 비명 대신 커다랗게 눈을 부릅뜬 정태의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나뭇결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옌장. 이래서 오랜만에 하는 게 아니야.

진짜 아프다.

물기가 서릴 정도로 풀어 놨는데, 손가락 두셋 정도는 어렵잖게 드나드는 걸 확인했는데, 언제나 이놈이 파고들 때는 곤욕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고 왕성하게 솟은 물건은, 그 끝만 걸쳐도 온 뱃속이 다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좀 더 힘 빼, 태이. ……엉덩이에 힘 빼라니까.”

지나치게 몸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일레이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너무 세게 조여 아픈 듯했다.

“힘을, ……내가 맘대로 뺄 수 있는 게, ……아니…….”

정태의는 짤막짤막하게 대답했다. 숨이 막혀서 호흡이 자꾸 짧아졌다.

뒤에서 그가 쯧, 혀를 찼다.

“이렇게 있으면 네가 힘들잖아. 힘 좀 빼 보라고.”

찰싹, 가볍게 엉덩이를 때리는 손은 틀림없이 저 미운 손이다.

“젖기는 충분히 젖었는데 이렇게 긴장을 하면…….”

일레이는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몸을 구부려 정태의의 귀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잠시만 참아. 곧 좋아질 테니까.”

귓속에 숨을 불어넣는 나직한 목소리에 몸 속이 선뜩해졌다.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리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웃음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일레이는 정태의의 엉덩이에 손을 걸쳤다. 이미 그의 물건 끝부분이 들어가 걸쳐져 있는 그곳을, 그 바로 옆을 잡고 당겼다.

“……아!!”

이미 한껏 굵은 끄트머리를 머금고 있어 벌어질 만큼 벌어진 곳을, 그의 손이 좀 더 벌린다.

몸이 푸드덕 떨렸지만 일레이는 정태의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대고 지그시 눌렀다.

곧 살을 당겨 조금 더 벌린 곳으로 일레이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얕은 추삽질을 거듭할 때마다 깊이가 조금씩 깊어졌다.

얕게, 가볍게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어가는 몸.

“……, ……! 으, ……!!”

굳어 있던 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몸 속이 더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래 봐야 엎드리고 있어서 별 효과는 없었지만.

문득 그 빨개진 목 뒤에서 일레이가 웃었다. 그리고 그 목을 가볍게 깨문다. 그 감각이 왠지 선뜩해 정태의는 다시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조금씩, 조금씩, 끈질기게 추삽질을 거듭하면서 몸을 벌려든 살덩이는, 마치 뱃속까지 파고들어 그곳까지 가득 채우려는 것 같았다. 타인의 몸이 자신의 몸 속을 끊임없이 채워 가면, 때로는 더럭 본능적인 공포에 질릴 때도 있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감각. 혹은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감각.

그러나 그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기 전에, 그 물건은 몸 속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빠져나가기 무섭게, 이번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게 치고 들어왔다.

“……아!”

저도 모르게 숨과 함께 외마디 소리가 조그맣게 터져나왔다.

뱃속에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

한 번 천천히 공들여 파고들어와 몸 속에 길을 터놓은 다음에는, 늘 이랬다.

이렇게 터놓으면 그 다음엔 어지간해선 찢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일레이는 거침없이 정태의의 몸 속에 자신의 살덩이를 밀어넣었다.

뻑뻑하다. 물기가 그렇게 어렸는데도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거대하게 부풀어서, 그 살덩이가 뱃속을 파헤쳤다.

“나, ……죽……, 그……, 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외마디 말들을 더듬더듬 말하면서, 정태의는 밭은숨을 쉬었다. 이미 눈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이, 울지 마. 착하지, 울지 마. ……그만두지 않는 건 내가 아니야. 네가 내 물건을 집어삼키고서 입을 꾹 다문 채 놔주지 않는 거라고.”

일레이 역시 목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그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유로운 듯이 말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그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이 울지 말라고 속삭이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가까이 해 정태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았다.

그러면서 그제야, 단단히 묶어 두었던 정태의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선명하게 자국이 남은 손목이 간신히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자유로워진 손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 바로 눕자……. 그리고 끌어안아야지.”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된 것처럼, 일레이는 정태의를 끌어안았다. 아쉬운 듯 한 번 더 그 몸 속을 깊이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갔다.

간신히 몸 속이 조금 편해진 정태의는, 욱신거리는 아랫도리를 이끌고 겨우 돌아누웠다. 그러나 바로 눕자마자 정태의의 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목에다 감는 일레이를 보며, 정태의는 한숨을 쉰다.

정태의에게 끌어안긴 일레이는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또 다시 다리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었다.

“언제쯤 끝낼 거야…….”

정태의는 다시 몸 속으로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간신히 참아내며,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이 방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만 끝나길 바랐다.

끝간 데 없이 몸 속을 꾹꾹 밀어젖히며 파고들면서, 일레이는 글쎄, 하고 대답한다.

“그간 못했던 두 달치만 하고.”

“……망할…….”

두 달치라는 말을 듣자마자―농담인 줄 알면서도―머리가 아득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일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의 뺨에 대고 입술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어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눈매가 문득 웃음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말, 예전에 정창인 교관에게 물어봤었지.”

“……?”

정태의는 점점 하얘지는 머리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의아한 시선만 보냈다.

“mang-hal-nom이라는 한국어가 대체 무슨 뜻일까 물어봤더니, 흔쾌히 대답해 주더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픽 웃었다.

천천히, 하얗게 넋이 나갔던 머릿속에 기억이 한 가지 떠올랐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번쩍 깨었다.

“아니 잠깐, 그건, 그게 아니…….”

“부족하면 얼마든지 말해. 감당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말은―.”

“그 말은?”

일레이가 되물은 순간, 정태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사실 그대로 가르쳐줄 ……수는 없다.

“……. ……. …….”

“왜. 무슨 뜻인데, 응? mang-hal-nom이란 게.”

“……. ……. ……삼촌이 한 말이랑……, 비슷해…….”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정태의는 문득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자신이 늘 스스로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흙까지 덮어쓰는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저 말을 돌리는 게 최고였다.

정태의는 일레이의 목을 콱 끌어안았다. 숨이나 한 번 막혀 보라지, 하고 있는 대로 팔에 힘을 주었지만 일레이는 웃으며 정태의의 목덜미를 콱 깨물 뿐이었다.

“……그래서.”

“음?”

잠시 혼을 빼놓고 있어서 잊고 있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정태의는 일레이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타르텐이 이번에 마지막으로 변제를 하는 게, 내가 베를린으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

한동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 속에 자신의 살덩이를 파묻고서, 그 자체로 기분이 좋은 듯 천천히 정태의의 몸을 흔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왜…….”

정태의는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 다시 물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윽고 뱃속에서 한참 동안 뿌듯하게 품고 있었던 물건이, 몸 속에 자신의 내용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흠칫, 몸을 움츠리는 정태의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면서, 일레이는 정태의의 몸 속에 자신을 심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렇게 정태의의 몸 속에 부어넣고 나서야, 일레이는 만족스러운 듯 나른하게 말했다.

“마지막 변제 대상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유회사이기 때문이야.”

“사우디…….”

뭔가 미묘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것이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자신과 어떤 식으로나마 연관될 가능성이 있는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빤히 일레이를 보았다.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그 가능성은 틀림없이 이 남자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일레이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았을 텐데도 태연하게, 오히려 정태의의 그 반응이 재미난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경영진들은, 변제 방식을 돈이 아닌 요구사항으로 선택했다.”

[3권으로 계속]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