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있어야 할 자리 (10/34)

3. 있어야 할 자리

살다 보면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있다.

그때 이걸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은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런 일들은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몇 번이나 있었고, 또한 사소한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후회라는 건 결코 개운치 않은 감정이었다.

그나마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성질의 후회라면 발전적으로 쓸 수도 있을 테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로 완결되어 버린 일은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태의는 후회란 걸 싫어했다. 자신의 손에서 떠난 일을 아쉽게 여기며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임하든, 갈림길에 설 때는 그걸 가장 먼저 생각하곤 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했을 때 과연 후회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 가능성이 비슷하다면, 갈림길의 두 길 가운데 어느 쪽이 좀 더 덜 아픈 후회를―돌이킬 수 있는 후회를―하게 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뭔가를 선택하고, 버리고, 나아갔다.

그런 것들이 늘 옳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후회를 덜하며 보다 편한 마음으로 앞을 보며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끝나지 않은 것은 끝나지 않은 대로, 끝난 것은 끝난 대로.

그래서, 요 몇 년 정태의는 딱히 후회라는 걸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몇 년 만에, 그는 저렇듯 거창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후회가 남는 인생과 남지 않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후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때 이걸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은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걸 묻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은 대답을 듣자마자 이쪽에서도 얼른 응답을 했어야 했는데.”

정태의는 난간에 아무렇게나 걸친 팔에 턱을 괴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날이 저물어 가는 오후, 간이탑 위에는 정태의 혼자뿐이었다.

해가 붉게 서편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리고 옷자락이 펄럭펄럭 소리를 낼 정도로 날린다.

바람은 센데도 노을이 예쁘게 물들어 날이 좋았다. 바람이 거세고 날씨가 좋은 곳. 꼭 산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비록 5층짜리 간이탑이라지만 그래도 해발고도로 따지면 의외로 높을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본관의 뒤쪽을 향해 선 정태의의 눈앞에는 제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별채가 보였다. 그 별채의 옆쪽으로 큼직하고 깨끗한 풀이 보인다. 오늘 날이 더웠던 탓인지, 풀 안에 두세 명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물이 참 시원해 보인다고 생각할 텐데, 지금은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물이 흉흉해 보이기만 해, 암울함만 늘어간다.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혹시 네가 마음을 둔 사람이 나냐?

물어본 직후에 정태의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물어봐서 득이 되는 건 없고 해만 될 물음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민망하고 멋쩍을 따름이다. 덤으로 상대의 어이없는 눈빛도 같이 받을 수 있고, 한동안은 그 상대를 볼 때마다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야 할 거다.

그러나 그러면 차라리 나았다.

어쨌든 일순간의 의문을 참아내지 못한 대가로 기꺼이 감수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대답이 돌아온 경우.

“……. 이를 어쩐다…….”

정태의는 손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턱을 아예 난간에 바로 괴어 버렸다. 그러다가 머리를 쥐어뜯고 만다.

*

대답이 돌아온 것은 그렇게 물어본 한참 뒤였다.

정태의가 그렇게 묻자, 크리스토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 미묘한 시선에, 어쩐지 정태의는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물었다, 그런 낭패감이 온몸을 스멀스멀 타고 올랐다.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한다지, 하고 정태의가 고민하고 있을 때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태의의 가슴께를 내려다본다.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웃어서 넘겨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었다고, 괜히 해 본 말이라고 익살스럽게 말을 건네고 이 자리를 수습하는 편이 나았다.

……안 그러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진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본능이야말로 여태 정태의를 지켜 준 훌륭한 아군이었다.

‘아. 저기 뭐 그냥 웃자고 한―.’

‘그런가 봐.’

그러나 정태의가 얼른 수습하자고, 뒤늦게나마 말을 꺼내었을 때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때까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시선이 정태의의 눈길과 마주쳤다.

뱀과 마주친 개구리가 어떤 기분인지 느꼈다.

아니, 크리스토프는 결코 정태의를 삼켜 버리겠다든가 죽여 버리겠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정태의는 그렇게 느꼈다. 이 상황 자체에.

‘나, 너를 좋아하는가 보다.’

크리스토프는 생각에 잠긴 동안 결론을 내린 듯, 이번에는 단호하게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 표정은 희미하게 굳어서 무뚝뚝하게 보이기도 했다.

정태의는 일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또한 머릿속도 하얗게 비어―그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말을 확실하게 듣자,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죽었다’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수십 가지나 동시다발로 떠오르는 그 모든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 나를 좋아한대’라는, 다소 얼빠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세 번째에야 정태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를 어쩌지.

그야 물론 거절하면 된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과연 거절하면 그걸로 모두 다 말끔하게 해결되느냐 하는 거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낸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란 게 때로 있었다. 어쩐지 이게 그 경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들었다.

아니, 일단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거절이다.

‘크리스,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다니 나는 대단히 기뻐.’

무난하게 말을 꺼내기 위해 제일 먼저 적당한 인사말부터 꺼내었다. 그런데 그게 또 실수였던 모양이다.

무뚝뚝하게 정태의를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희미하게 불이 켜졌다. 입매가 꿈틀하면서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희미한 신호를 감지할 만큼 예민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정태의였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러니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미 같이 살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헤어지지도 않았어.’

정태의가 황급히 두 손을 들며 말을 덧붙이자 다시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그 신호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평소처럼 냉랭하고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와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헤어지면 되잖아. 내가 더 잘해 줄게.’

젠장. 이 대인관계의 상식이 부족한 남자는 거절당했을 때의 대처법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거절을 당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든가. 아니면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특이한 뇌내 질병을 가지고 있든가.

그러면 다른 방향으로 공략해 보자.

‘지금 네가 헤어지라고 하는 그 사람이 말이지, 네 친구이자 옛 동료란 말이지.’

‘친구 아니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크리스토프의 태도가 삐딱해졌다. 기분이 확 틀어졌다는 태도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

‘그놈이 내 입장이라면 어떨 것 같아? 얌전히 물러날 것 같아? 아니면 빼앗아 버릴 것 같아?’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답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이마를 긁적였다. 어느새 관자놀이에 땀이 한 방울 솟아올라 있었다.

‘그럼 제일 중요한 건 내 의견이네. 나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미안.’

이런 경우는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 정태의는 재빨리 정공법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크리스토프도 마땅히 받아칠 마음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적당한 말을 찾느라 골몰하는 눈치다.

어쩌다 이런 난관에 부딪혔을까 괴로워하면서, 정태의는 그를 마주보았다.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인기가 많다는 건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른 문제다.

‘그래서, 거절하겠다고?’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듯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정태의는 오래 생각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래, 하고.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다시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그 삭막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난 네가 좋은데.’

‘…….’

이러면 무한도돌이표가 되기 십상이다.

정태의는 머리를 거의 쥐어뜯을 기세로 잡아당겼다. 그 덕분인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그렇지. 너, 다른 사람이랑 닿는 거 싫어하잖아.’

이번에는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조금 더 뚜렷하게 굳어졌다.

그것만큼은 변명을 할 수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 ……손잡는 정도라면, 익숙해지면 될 수도 있어.’

‘아니지, 그 정도로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그 녀석이랑은 손잡는 정도를 넘어서 같은 침대에서도 자고, 입맞춤도 하고, 심지어는 수음도 한단 말야.’

정태의는 기세를 몰아 이 이야기를 접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줄줄이 말을 늘어놓았다. 늘어놓고 나서야, 자기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참 멋쩍다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게다가 수음이 뭔가, 그보다 더한 짓도 하는데 저 정도까지만 말한 건 모두 동성간의 육체관계에 대해 엄청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순수한 정신을 지켜 주기 위함이다.

재빨리 스스로를 정당화한 정태의가 말을 늘어놓자,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약간 창백해졌다. 눈매가 험악해진다.

‘그건 맘에 안 드는군.’

‘어?’

‘네가 그놈과 그러는 게 맘에 안 들어.’

‘…….’

이런 걸 두고 엉뚱한 놈이 서방 행세한다고 하는 건가, 하고 잠시 딴 생각을 한 정태의는 얼른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정태의의 가슴께까지 시선을 떨어뜨리고 사나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정태의는 그럭저럭 수세에서 회복되자 조금 침착해졌다. 생각에 잠겨서 꼼짝도 안 하는 크리스토프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사나운 얼굴이라고 해도, 평소의 얼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가끔 이성을 잃은 듯 날뛸 때가 아니면, 화를 내든 기분이 좋든 표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웃을 때마저.

……. 아니…….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을 되새겨보며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다시 기울인다.

마치 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앞둔 것처럼, 좀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웃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눈앞에서 열심히 고민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주 약간, 뭔가 살짝 못마땅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은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때의 얼굴이다.

‘크리스토…….’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정태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대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뭔가 아래쪽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분명코 낯선 느낌.

정태의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한 뒤, 매우 뜨악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믿어지지 않는 심경으로 쳐다보았다.

‘……. 뭐야, 별 것도 아니잖아.’

그는 다소 짜증스러운 듯한 말투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표정에도 못마땅한 기색이 스며 있었다. 왜 자꾸 사람을 번거롭게 만드냐고 신경질을 내면 딱 어울릴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의 빛깔이 표정을 배반하고 있었다.

아주 새빨갛게.

홍시처럼 빨갛게, 그 얼굴이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저 아래로, 정태의의 사타구니로 팔을 뻗어 국부를 머금은 크리스토프의 손이 있었다.

아니, 잡힌 사람은 난데 왜 얼굴은 댁이 더 빨개지셨나…….

정태의는 얼굴을 좀 붉혀 보려고 해도, 저 얼굴을 보자 도저히 저보다 더 빨개질 자신이 없었다.

별 것도 아니잖아, 라고 내뱉은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바지 위로 국부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주물럭거리기만 했다. 오로지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

‘…….’

미묘한 침묵만 오갔다.

그런 가운데 홍시처럼 새빨개서 더 이상은 빨개질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던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놀랍게도 점점 더 빨개졌고, 그 얼굴을 보자 여태 멀쩡했던 정태의도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익을 만큼 익은 얼굴로도 표정만큼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무표정하고 무덤덤하던 크리스토프는 왜 부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얼굴을 보니 정태의는 차마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좀 더……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사람이 사람을 아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야. 일단 봐, 너도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을 것 아냐. 나도 마찬가지고.’

사타구니를 잡힌 채로 침착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이 몹시 우스웠지만, 어쨌든 정태의는 진지하게 말했다.

여전히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손에 쥐고서 얼굴을 뜨겁게 익히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말을 듣고 침묵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느 타이밍에서 손을 놓고 어떤 식으로 떨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크리스토프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정태의가 손을 뻗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붙어 있는 그의 손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나 막 손이 닿으려는 순간에, 재빨리 크리스토프는 손을 거두었다.

그 재빠른 동작에 정태의는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고, 크리스토프는―별달리 표시는 안 났지만―머쓱한 얼굴을 했다.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뜬 크리스토프는 훌쩍 말에 올라탔고, 정태의에게 ‘그럼.’이라는 단 한 마디만 남기고 휑하니 가 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정태의는, 별로 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고 고백을 할 정도라면 ‘같이 타지 않겠느냐’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투덜투덜하면서 나머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그 옷을 챙겨 입는 동안 좀 더 이성이 더 돌아오고 나자, 후회가 노도처럼 밀려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짐작컨대, 아마도 그 남자는 폭소를 터뜨리며 대단히 재미있어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성격상 그렇게 배를 쥐며 폭소를 터뜨리는 일은 별로 없으니,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대단히 재미있어하며 눈을 번쩍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해 보면 그는 사건사고를 좋아했다. 좋아했달까, 늘 그는 사건사고가―를―따라다녔다.

뭔가 자신과 관련 없는 데에서 시끄러운 일이 터지면 흥미롭게 구경을 하고, 자신과 관련된 데에서 시끄러운 일이 터지면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그 일을 해결할 때에는 빠르고 신속하게 해치웠다.

그러나 이번 일은 사건사고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정태의는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왜 크리스토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혹은 좋다는 말을 했는지―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 일은 벌어질 리가 없는데 벌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저 남자는 무척 재미있어하며 흥미롭게 구경할 가능성이 컸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어느 선까지 말을 해야 하지…….”

난간에 턱을 박은 채 저 멀리 보이는 풀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국부를 주물럭거리면서 날더러 좋아한다더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말해 놓고 내가 생각해도 말이 이상하다.

게다가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은, 딱 부러지게 끝까지 No를 외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다.

“…….”

좀 이상한 데에서 집착을 보이는 놈이긴 하지만 이 경우는 우스워하며 구경할 것도 같다. 어쩐지 크리스토프가 상대라면 그럴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는 동성간의 육체관계는 플라토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역시 저런 사소한 문제가 걸린다.

“차라리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까.”

그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크리스토프와 저 남자가 미묘한 부분에서 영혼의 쌍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리스토프가 그에게 찾아가서 대놓고 시비를 걸 가능성도 다분했다.

이런 고민도 하나, 저런 고민도 하나, 고민이 또 하나…….

“……어으, 왜 내가 이런 고민이나 하고 있어야 하게 됐지……. 모처럼 베를린을 떠나서 바깥 구경도 좀 하고 놀다 가려는 심산이었는데, 무슨 놈의 팔자가 이래…….”

정태의는 난간에 이마를 박았다. 쿵, 쿵, 두 번 세 번 계속 박는다.

그러면 고민은 다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역시 책이 문제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신이 피폐해지면 책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까지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정태의는 다소 얍삽하고 비겁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날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그 책을 내게 돌려다오.

그런 요구를 해 볼까. ……너무 치졸한가.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난간에 팔을 걸치고 그 팔을 뺨 아래에 괴었다.

“에고……, 모르겠다. 모든 일은 되어질 대로 될 테지.”

“뭐가.”

“…….”

이제 등 뒤에서 갑자기 기척도 없이 불쑥 말을 걸어와도 어지간해선 놀라지도 않는다.

정태의는 고개만 약간 돌려 어깨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계단 쪽에서 일레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 일로 혼자 있어. 리하르트는?”

늘 그 앞에 나타날 때에는 리하르트를 대동하고 나타나더니, 오늘은 혼자 걸어오고 있었다.

일레이는 어이없다는 투로 피식 웃었다.

“내가 늘 그와 같이 다니던가? 하긴 그러고 보니 너와 마주칠 때에는 거의 함께 있긴 했던 것 같군.”

하지만 오늘 같은 휴일까지 같이 있어서야 뭐 좋을 게 있겠어, 하고 그는 정태의의 뒤에 와 섰다.

그제야 정태의는 아까 리하르트가 사탕과자 같은 여자와 함께 산책길을 거닐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의 고민으로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아, 그래, 그랬었지. 아까 숲 산책로에서 마주쳤었지.”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가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애인이랑 같이 있던데. 미인이더라.”

“애인? 흠……. 허리까지 오는 고수머리에 뽀얗고 조그마한, 겁이 많을 것처럼 생긴 가냘픈 여자?”

“어, 본 적 있나 보네.”

“아니. 본 적 없어.”

정태의는 기묘한 얼굴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옆까지 와서 난간 너머로 일몰을 바라보는 옆모습에 대고 못마땅하게 말한다.

“본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알았어.”

“그놈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 취향이 딱 그거거든.”

십몇 년 전부터 바뀌질 않았어, 라고 덧붙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잦아들자 그는 약간 의아한 눈치를 비추었다.

“여자와 산책이라……. 너랑 마주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나랑? 나랑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겠어. 산책로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하고 스친 것뿐인데.”

정태의는 자신과 리하르트 사이에 있었던 ‘무슨 일’이라고 할 만한 일을 떠올려 보려고 기억을 되감아 봤지만, 그와 자신 사이에 별다른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별다른 일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차라리…….

……아.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며 슬쩍 물었다.

“왜, 나랑 무슨 일 있었다고 그래?”

“아니. 이쪽으로 오다가 본관에서 잠깐 마주쳤는데 낯빛이 별로 안 좋더라고. 늘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놈이, 본성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서 웃는 척도 안 하던데.”

“움? ……애인이랑 싸운 건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아까 크리스토프와 마주쳐 약간 험악한 분위기를 피워올리긴 했지만 그 정도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보다 훨씬 험악하게 싸웠던 요전에도, 아주 짧은 순간만 험상궂은 면모를 보이고 그 뒤로는 다시 냉정하게나마 웃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태의의 그럴 듯한 추리에도 일레이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곁눈질로 내려다보면서 픽 웃는다.

“여자랑 싸울 만큼 재미난 놈도 아니고, 싸웠다고 표정을 구길 만큼 순진한 놈도 아니야.”

“음……, 그럼 역시 아까 크리스토프랑 싸워서 그런가? 애인이 있는 자리에서 싸웠으니까 의외로 더 마음에 원망스럽게 남았을지도 모르지.”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와 같이 숲에 갔었나?”

일레이가 희미하게 의아한 빛을 띠고 묻는다.

정태의는 말을 타지 못하고, 크리스토프는 말을 타고서만 숲에 가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 아냐, 내가 산책을 하던 길에 크리스토프랑 마주쳤거든. 그 자리에 리하르트도 찾아든 거지.”

“그 넓은 숲에서 그렇게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태의를 바라보는 일레이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어, 그게 냇가에서 멱 감고 노는데 그 자리에 크리스토프가 말을 타고 와서……하고 대수롭잖게 설명을 하던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의 분규에 잠깐 넋이 나가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정태의는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나중에 가서 후회를 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렇다면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일이 꼬였을 때 나중에 후회를 더 크게 할 것은, 입 다물고 속인 쪽이다.

“그러고 보니까 크리스토프가 나한테 좀 재미난 말을 하던걸.”

최대한 가볍게 농담처럼, 정태의는 말을 꺼내었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말이 감정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꺼내고 보니까 갑자기 정말로 재미난 일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나이에, 그런 놈에게, 이런 상황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참 재미난 경험이다. 재미나달까, 좀체 있기 힘든 일이다.

정태의는 갑자기 우스워져서 빙글빙글 웃으며 일레이를 보았다. 어째서인지 일레이도 웃고 있었다. 빙글빙글. 그러면서 일레이는 웃음이 담긴 눈을 둥글게 휜 채로 물었다.

“왜. 그놈이 너한테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하던가?”

“어, 잘 아네. 아하하하.”

농담으로 하는 말에 농담처럼 받아치는 척 대답을 하며 소리 내어 웃었지만, 그 웃음에 대한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라, 하고 슬그머니 웃음을 멈춘 정태의는 일레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곤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우고 만다.

그 짧은 사이에 일레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약간 고개를 치켜들고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선뜩하기 그지없다.

이상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팍 죽었다.

그제야 정태의는 ‘밟았다’ 하고 생각했다. 직감적으로 이건 그야말로 ‘밟았다’.

하지만 정태의마저 이대로 가라앉아 버리면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쓰게 웃으면서 일레이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이. 왜 갑자기 심각해지고 그래. 크리스토프라구, 크리스토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난 네가 굉장히 재미있어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재미있어했겠지.”

대답하는 일레이의 목소리는 그저 서늘할 따름이었다.

정태의는 더 이상은 분위기를 띄울 용기도, 자신도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심각해지다니…….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안 물어봐?”

정태의는 어떻게든 이 순식간에 살벌해진 분위기를 좀 풀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일레이는 ‘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더욱 차가워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본다.

“딱 잘라서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그놈이 말귀도 못 알아먹고 계속 들러붙을 낌새를 보이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럼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는 둥하면서 보류해 뒀겠지.”

“…….”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예전부터 무서운 인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럴 때 또 여실히 느껴 버린다. 정말로 무서운 놈.

자신의 행동패턴이 너무 쉽게 읽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그래. 전에 카일이 나더러 그 비슷한 말을 했을 때엔 웃어넘겼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별로 다를 것 없어.”

언제였던가, 몇 년이나 같이 살다 보니 이미 정태의와 일레이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카일은 한 번은 접대로 술을 진창 마시고 와서 취중진담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저런 놈은 때려치우고 나처럼 건실한 인간을 만나야지, 어쩌다 저런 놈한테 걸려서 착한 네 인생이 이렇게 틀어져 버렸니……, 에고, 가엾기도 하지…….’

자신을 위해 꺼이꺼이 울어 주는 고마운 카일에게 감동한 정태의는 카일을 부둥켜안고 ‘그러게요’ 운운하며 맞장구를 치다가, 그 장면을 일레이에게 정통으로 들킨 적이 있었다.

여차하면 죽겠구나 싶었는데, 일레이는 코웃음을 치며 그냥 넘겼다. 취해서 곯아떨어진 카일의 뺨을 한 대 호되게 후려쳤을 뿐이다.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때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일레이는 이번에야말로 하,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인간이 다르잖아. 크리스토프는 골치 아파.”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정태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응?”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것말고는. 별 일 없었나?”

나직하게 추궁하는 그 목소리에 정태의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뇌리를 스친 것은 홍시처럼 빨갛게 익은 그 얼굴. 그리고 사타구니에서 서툴기 짝이 없게 움직이던 그 손.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얘기를 했다간 뭐든 성치 못할 것 같았다.

정태의가 물끄러미 일레이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태이.”

“별 일은 뭐가 별 일이 있어. 남자끼리의 육체관계는 순수하다고 그 녀석이 주장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뚫어지게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어딘지 미심쩍게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곤 다시 몸을 폈다.

일레이는 성가신 듯 입매를 찌푸린 채 가만히 간이탑 아래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난간에 올린 손이 그 위를 가볍게 두드린다. 저 손짓 안에서 대체 무슨 생각이 맴돌고 있는지 어째 몹시 불안하다.

문득 그 손가락이 딱 멎었다. 그런 뒤에도 얼마간 멈춰 있던 일레이는, 갑자기 걸음을 돌렸다.

“직접 얘기해 봐야겠어. 들어먹힐 것 같지는 않지만.”

혼잣말 같은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그 뒤에 홀로 남겨져 잠시 멍하니 있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

정말로 껄끄러운 상황이다.

정태의는 일레이와 함께 나란히 크리스토프의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냥 모른 척 말 안 하고 있는 게 나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베를린으로 돌아가든가 해서 자연소멸을 꾀하는 방법도 좋았을 텐데.

정태의가 풀이 죽어 일레이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문고리를 막 움켜쥐던 일레이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크리스토프라면, 제 나름대로 납득을 하지 않으면 네가 베를린으로 간 뒤에라도 쫓아가서 따라붙을 거다.”

정태의는 입 속으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흘끔 일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이놈은 무슨, 귀신도 아니고, 아까부터 사람 머리통을 제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이번에도 그는 한 마디 했다.

“너는 가끔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도 못할 짓을 벌이는데, 대체적으로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나온단 말이야. 하긴 너는 굳이 생각을 숨기려 들지 않고 다 내비치지, 원래.”

짤막한 웃음과 함께 그는 말을 맺었다.

정태의는 ‘그런가?’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마따나, 굳이 표정이나 감정을 숨겨야 할 필요를 느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잘 읽어내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텐데, 하고 정태의가 투덜거리는 사이에 이미 일레이는 크리스토프의 방으로 들어섰다.

크리스토프는 서재에 있었다. 창가의 일인용 카우치에 앉아 스툴에 다리를 걸치고, 그대로 잠들어도 좋을 나태한 자세로 책장을 넘긴다.

그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일레이에 이어 정태의에게 닿았을 때, 정태의는 낮게 혀를 찼다. 이 상황이 영 껄끄러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이들 싸움에 어른을 대동하고 나타난 기분이라고나 해야 할까.

“생각보다 늦게 왔잖아.”

이미 그들이 오리라고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투로, 크리스토프는 카우치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책을 덮어 창틀 위에 올려놓고 나서도 몸을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레이는 그 옆에 서서 삐딱하게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웃는 듯 마는 듯, 가벼운 어조로 묻는다.

“크리스. 어쩔 생각이야.”

“나 줘.”

“…….”

정태의는 그 짧은 대사에서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대화의 아귀가 안 맞는 이 느낌은, 아주 최근에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영문 모를 감개무량에 젖는 한편으로, 그런데 내 의견은 어디로 간 걸까, 하고 잠깐 생각해 본다.

남자 둘에 둘러싸여서 서로 네 거니 내 거니 하는 현장에 있다니, 정태의 인기 좋구나.

정태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조적으로.

그 남자 둘이란 게 일레이 리그로우와 크리스토프 타르텐이라고 하면,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저마다 눈망울에 안타까운 동정을 담고 쳐다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뭐랄까, 다행히도 초장부터 정태의가 걱정했던 위험천만한 전개로 가지는 않았다. 의외로 조용히 이야기가 흘러가려는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여전히 일말의 불안을 안고 있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품었던 불안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그 불안을 안고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얌전히 그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 결정되면 알려다오. 그럼 난 그 결정을 들은 뒤, 그 결론이 뭐든간에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릴 테니.

정태의는 이런 상황에서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는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서재 구석에 마련된 미니바가 눈에 띄어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맥주를 두어 캔 꺼내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구경할 채비를 갖추어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일레이는 크리스토프의 옆에 선 채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쳐다보다가, 그는 문득 불쑥 물었다.

“어디가 맘에 들어서?”

그런 물음이 날아오자 크리스토프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기울이며 한참 침묵하는 모습이, 한참 생각해도 좀체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정태의는―어디가 좋다는 대답을 꼭 바란 건 아니었음에도―흰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야, 그것도 모르면 애초에 좋아한다는 말을 해서 사람을 헛갈리게 하질 말아야지.

정태의는 혀를 끌끌 차며 맥주를 삼켰다. 뭔가 대답거리가 필요한지 정태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크리스토프의 눈길이 느껴졌다.

“글쎄……, 몰라. 생각해 보니까 좋아할 만한 구석이 딱히 보이지 않지……?”

크리스토프의 대답과 함께, 정태의의 손 안에서 반쯤 마신 맥주캔이 찌그러졌다.

저놈이 대체 뭐 하자는 건지, 그냥 날 갖고 논 거냐?!

혼자서 도끼병 영화를 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오늘따라 맥주도 쓰다.

“그런데 같이 있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리스토프는 ‘그런데 아직 잘은 모르겠고…….’라는 투로 조금 망설이듯이 느리게 말했다. 찌그러진 맥주캔을 입에 대고 있는 정태의에게로 시선이 날아왔다.

“계속 같이 살면 말이지, 좀 좋을 것 같아. 어떻게 좋을지는 모르겠고, 그냥 좀. 어떻게 되든 이 서익에 득실거리는 얼간이들보다는 낫겠지.”

대단히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좋을지는 모르겠고 그냥 좀 좋을 것 같다.

정태의는 맥주를 빨면서 그 대답을 반추해 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금 크리스토프의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남자도, 막상 물어보면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같이 살면 좀 좋을 것 같다.

없어도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지만, 그래도 있으면 좀 좋을 것 같아.

정태의는 말없이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

순간적으로, 있어 봐야 필요없고 없으면 아쉬운 계륵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면 난 제명에 못 죽겠지.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면 그랬다.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딱히 불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로 있어서 울화가 날 때도 있다지만, 그래도 역시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 줘.”

그때, 저 애매하면서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대답을 하고 곧 이어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 심드렁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싫으면 말고.’ 하고 말할 것 같았지만, 끝까지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일레이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하……, 하고 피식 웃는다.

“그래, 어디가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좀 좋을 것 같다는 거지?”

“어, 맞아.”

“내가 저놈 처음에 데리고 왔을 때 그렇게 생각했지.”

일레이는 흘끔 정태의를 보았다. 정태의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은 희생정신을 품고 갔었는데 저쪽은 그대로 좀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줬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시간이 얼마나 쌓였는지 알아? 시간 지나는 동안 공들여 손때 묻혀 내 걸로 만들어 놨어. 나한테 딱 맞게. 그런데 그걸 네가 탐내? 내 걸 네가 탐낸다? ……정신 나갔나, 크리스토프 타르텐?”

일레이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그 앞자리에서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움츠러들거나 겁먹은 빛을 띠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필요해. 갖고 싶어.”

“크리스토프. 알고 있겠지. 사람을 옆에 두려면 자격이 필요해.”

문득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진다. 은근하고 낮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크리스토프의 귓가를 스쳤다.

조용하고 따분하기만 하던 크리스토프의 표정 위로 얼핏 얼음 같은 무표정이 스쳤다.

카우치의 팔걸이에 올려놓았던 손이 일순 움칫, 주먹을 쥐었다가 편다. 입술이 잠시 닫혔다 열렸다.

“리그로우. 나는 오늘은 드물게 기분이 좋아.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편이 낫겠어. 지금은 아주 드문 때란 말이야. 아주.”

나직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갈수록 느려지고 낮아진 목소리는 마지막 단어를 길게 끌어서 발음한다. 아―주, 하고.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하고 정태의는 생각했다.

오늘은 시끄럽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이미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입버릇처럼 시끄러워, 귀 아파,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혀를 찼을 크리스토프였다. 날마다 그 말을 자주 하느냐 뜸하게 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그 말을 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딱히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평소보다 평온해 보였다.

날 건드리지 마. 날 더 이상 시끄럽게 만들지 마. 모처럼 조용하다. 그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 모으지 마.

그렇게 들리는 목소리로, 크리스토프는 일레이에게 말했다.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그런 말을 아주 조금만 더 하면 크리스토프를 쉽게 격발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그 눈가에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러면 지금은 하나만 말해 두지. 주지 않아.”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레이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일단 지켜보기만 하도록 하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 크리스토프, 난 일을 마치고 나면 아주 온건하게 이곳을 떠나고 싶어.”

타르텐과도, 너와도, 굳이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고, 하고 덧붙이며 일레이는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정태의는 다 비운 맥주캔을 납작하게 누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한없이 불온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자리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고 무난하게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그 말은 온건하게 이곳을 떠나려 해도 방해꾼이 있어서 안 되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 뒤에 깔려 있는 다른 뜻이 마음을 감싸안기라도 하는 듯, 자욱한 찝찝함이 남았다.

약간 허리를 구부려 크리스토프에게 얼굴을 가까이 해서 나직이 말한 일레이는, 하고 싶은 말은 다 마쳤다는 듯 다시 몸을 바로세웠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선다.

“난 분명히 미리 말해 뒀어. 나중에 어느 때라도, 아무런 경고도 듣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말길.”

일레이는 돌아섰다. 이미 할 말은 모두 마쳤다며 성큼, 그에게서 물러서 문 쪽으로 향하던 그는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정태의를 보았다.

약간 걸음을 늦추고 정태의를 보고 있던 그는 문득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피식, 정태의를 볼 때면 가장 흔하게 띠는 그 웃음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 웃음에 서늘한 빛이 섞였다. 냉랭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크리스토프. 바라선 안 되는 걸 욕심내면 자신만 괴로워질 뿐이다. 아픈 줄도 모르고 웃지도 못하는 병신 따위가 바랄 수 있는 게 아냐.”

마지막 말마디가 유난히 매서웠다.

그 낮으면서도 분명한 말에 정태의의 가슴이 선뜩해졌다.

명백한 경고다. 일레이로부터 크리스토프에게 향한.

일레이는 다시 문으로 향했다. 정태의의 옆을 스치면서 ‘그를 잘 위로해 준 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라는 대단히 아량 있는 말을 남기고.

***

그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울 앞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일정이 없는 날의 아침―다른 사람에게는 정오에 가까운 오전―, 정태의가 크리스토프를 깨우기 위해 그의 방으로 갔을 때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이 아니면 정태의가 찾아갈 때까지 깨어나 있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크리스토프였다. 그는 늘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면서도 힘들어했다. 눈을 뜨자마자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눈을 못 뜨겠어.’라고 앓는 소리를 중얼거렸고, 그 뒤에는 습관처럼 ‘시끄러워.’, ‘머리가 아파.’를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그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까다로운 윗사람이 없는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보낸 정태의가 그의 침실로 갔을 때, 그는 일어나 있었다.

아직 파자마를 갈아입지 않은 걸 보니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벽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정태의처럼 적당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습관 중 하나가, 드레스코드를 엄격하게 지킨다는 점이었다.

평소에는 일상복, 운동을 할 때에는 그에 맞춘 운동복, 잘 때는 파자마, 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그 옷을 입고 있는 상황을 반드시 정확하게 맞춰야 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나와 욕실에 갔다 나오면 반드시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하다못해 방에서 나가기 전까지 몇십 분 가량의 여유 시간이 있어 외출복으로 미리 갈아입고 있기는 불편하다 싶을 때에도, 씻고 나서까지 파자마를 입고 다니지 않았다. 차라리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가 잠시 후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더라도, 그는 옷을 입는 상황을 칼같이 맞추었다.

저놈은 마음의 병을 참 종류별로 갖춰 놓고 있구나, 접촉기피에 강박증에 인격결핍 등등…….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그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럭저럭 익숙해진 현재.

정태의는 방에 들어서서 크리스토프가 이미 일어나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는 아마도 침대에서 나온 직후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파자마 차림이었다. 이제 보니 머리도 헝클어졌다.

머리가 까치집이든, 혹은 저 나이에 고양이 무늬 파자마를 입고 있든―어쩌면 그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서 늘 재빨리 파자마를 갈아입어 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외모가 따라 주는 사람은 그만큼 득을 보는구나 싶었다.

크리스토프는 거울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벽에 걸어 놓은 반신거울 앞에 서서, 정태의가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거울 속을 통해서 보면서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워낙 지그시 노려보기에 처음엔 거울에 뭔가 벌레라도 붙은 줄 알았다.

“왜 그래.”

옆으로 다가가 보았지만 거울에 비쳐 크리스토프가 바라보고 있는 건 크리스토프 본인뿐.

정태의가 다가가 거울에 비치자 그리로도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곧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태의는 묵묵히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각상처럼 생긴 사람이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만 애타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아래의 화병에 수선화라도 꽂아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놈이 마음의 병 리스트에 나르시시즘까지 추가시킬 모양인가.

여태 보이지 않았던 기괴한 행태를 흥미롭게 관찰하며, 정태의는 그에게 물었다.

“새삼스럽게 자기 얼굴에 반하기라도 했어?”

“바보 같은 소리 마.”

크리스토프는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정태의가 생각해도, 크리스토프는 자기 얼굴에 반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런 면모도 여태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나르시시즘에 빠졌다 해도 저 얼굴이라면 이상할 것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딱 잘라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하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니다.

“설마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어딜 뜯어고칠까 생각하는 건…….”

“자꾸 얼간이 같은 소리나 해 대려면 나가, 정신 사나워. 안 그래도 귀가 시끄러워 죽겠는데.”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짜증스럽게 그 말을 잘랐다.

이놈이 정말로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했던 그놈이 맞는 걸까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정태의는 창문을 열고 침대를 털어내며 ‘이제 아주 가정부 다 됐군.’ 하고 중얼거렸다.

“잘 안 되네…….”

정태의가 침대 정리를 마칠 즈음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울 속 그의 얼굴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정태의는 희한한 얼굴로 그를 보며 목을 긁적거렸다.

“내가 뭔가 도와줘?”

뭔지는 몰라도 거울을 노려보는 게 퍽 힘들어 보이기에 정태의가 말했다. 이번에도 정신 사나우니까 말 걸지 말고 나가라는 말이 날아올까 싶었지만, 잠시 침묵하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래, 그러면.”

“응, 뭘 도와줘?”

“어떻게 웃으면 되지?”

태연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정태의는 잠시 말을 잃었다.

***

몇 시간째 계속 웃었더니 얼굴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웃음이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라는 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맹렬하게 솟은 지 오래였다.

정태의는 계속 웃으면서 크리스토프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태의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그 웃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매가 약간 꾸물거렸다. 입끝이 비스듬하게 올라간다.

“뺨이야, 뺨. 뺨의 근육을 들어올리라고.”

정태의는 생글거리면서 자신의 양쪽 입가에 검지를 대고 밀어올렸다. 크리스토프도 똑같이 따라한다.

웃음 비슷한 게 나왔다.

제일 처음에 먼저 물었던 대로, 안면근육에 이상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억지로 의식하고 웃으려면 그런 표정을 만들 수는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어딘가 웃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

결국 정태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없어졌다.

정태의는 자리에 엎어져서 그대로 나뒹굴며 중얼거렸다.

“야, 가서 나 대신 웃을 놈 하나 붙잡아 와. 더 못 웃겠다. 아, 얼굴 아파…….”

입가를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그는 잠시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별 표정도 없이 말했다.

“됐어. 괜한 시도였다.”

“…….”

저런 말을 들으니 또 기분이 영 찝찝한 것이…….

정태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리고 가만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그가 한 말마따나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약간 입매를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그렇게 찌푸리지 말고 올리라고.”

정태의는 한숨처럼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올린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말대로 한다.

정태의는 고민에 잠겼다.

“뭐가 문제일까. 입술도 제대로 곡선이고, 눈꺼풀에도 힘을 줘서 눈매도 구부렸고, ……그런데 왜 딱 그럴 듯하게 안 보이나 그래…….”

사뭇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정태의에게, 크리스토프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간다.

“됐어. 생각해 보니 그렇게 웃어 주고 싶은 사람도 없다. 웃어야 할 상황도 없고. 여태 이대로 별 불편 없이 살아왔잖아.”

“아냐, 나는 웃음은 본능이라고 생각했었다고.”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자신이 없어져서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말하는 대로다. 얼굴 자체로 웃는 얼굴을 만들 수 있다고 해 봐야 실제로 웃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 아쉬운데.”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얼굴에 경련이 날 정도로 계속 웃으면서 크리스토프를 다독였던 까닭은, 사실 어느 정도는 정태의 자신이 아쉽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 어떤 얼굴이 나올까 궁금했던 탓이다.

천사의 얼굴에 악마의 입이란 아직도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얼굴만은 천사의 얼굴이다. 그러나 정태의는 여태 어떤 명화나 성화를 봐도, 환하게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는 천사의 그림은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웃는다면 그에 한없이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를 이끌고 굳이 이 간이탑 옥상까지 올라와 앉았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 좀 쉬자, 일단.”

정태의는 다시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 볕이 몹시 좋아서, 일부러 차양을 드리워 둔 그늘의 벤치에 앉지 않고 여기, 바닥에 앉았다.

“…….”

하늘을 쳐다보던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렸다.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약간 아래에서 올려다본 크리스토프는, 그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그 미모가 바래지 않았다.

그는 간이탑 옥상의 난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선이 향하는 쪽에는 뭐가 있더라. 그의 시야 왼쪽으로는 숲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산맥을 뒤에 둔 별채가 있었던 것 같다. 별채에 가려서 약간 보이는 풀과, 별채의 뒤쪽으로는 제법 큼직한 마사.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서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따지고 보면 크리스토프가 나고 자란 고향집이었다.

지금 머무르고 있는 서익은 물론 본관이나, 혹은 그가 자주 갈 일은 없는 동익, 별채들에서 그 모든 건물들을 둘러싼 부지 안의 휴양처까지.

이곳을 떠날 때까지 그는 당연하게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어우러져 있었을 터였다.

“어때, 여기는. 살기 좋아?”

“드레스덴이, 아니면 타르텐이.”

별 생각 없이 물어봤던 정태의는 곧바로 돌아오는 반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드레스덴과 타르텐은 분리되어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타르텐은 드레스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치구이기라도 한 것처럼.

“둘 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몇 번쯤 눈을 천천히 깜박인 뒤에 그는 말했다.

“음, 좋아.”

그게 다였다.

그 뒤로 뭔가 부연설명이 나오기를 기다려봤지만 그는 더 말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태의가 기묘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지만 정말로 그 말이 다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뭔가 더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하긴 자신도, 자신의 집에 대해서 살기 좋냐고 한다면 뭐라고 특별히 더 붙일 말은 없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익숙하고 편하다. 그것이 자신의 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익숙하고 편하다.

어디를 가나 쉽게 적응하고 금세 익숙해진다는 평을 듣는 정태의조차, 집이 가장 편했다. 아마도 이제는 고국에 비워 두고 있는 집으로 가면 얼마간 위화감이 느껴지겠지만, 지금의 집이 되다시피 한 베를린이 그랬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분위기에도―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그럭저럭 익숙해졌고 제법 편하게 다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베를린에 있는 카일의 집이다.

“…….”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문득 언젠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마땅히 그가 있어야 할 자리. 혹은 있어선 안 될 자리.

“있어야 할 자리인데 그곳을 좋아할 수 없거나, 혹은 그 반대,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자리가 아닌데 그곳이 너무 좋거나……, 그럼 어떡하나.”

정태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말을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니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간이탑 아래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막하게. 넋을 잃은 듯.

―어때, 여기는. 살기 좋아?

―음, 좋아.

어쩌면 그는 이곳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곳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를 위해 내어준 자리가 아무데도 없었다.

“……이사를 했거든. 철들기도 전부터, 기억도 안 날 때부터 계속 살았던 집에서, 중학생 때였나.”

정태의는 문득 불쑥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크리스토프가 흘끔 시선을 준다.

“어차피 바로 이웃에 위치한 도시였으니까 그리 멀지도 않아서,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 갈 수 있었어. 하지만 막상 볼일도 없는데 그럴 일이 없어서 그대로 안 가게 됐지.”

그러다가 그곳에 간 건, 고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사관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현듯 기억이 떠올라 문득 충동이 일어 훌쩍 가 보았다.

그가 살던 곳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고작해야 몇 년 사이인데도, 집 앞에 있던 공터에는 이미 건물이 올라가 있었고 이웃에 있던 마당 넓은 집은 연립주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골목의 모습이나 드문드문 나타나는 풍경들은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겹쳐졌고, 그 길들을 거닐면서 마냥 그립고 좋았다.

그는 여전히 그곳을 좋아하고 그리워했지만, 더 이상 그곳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그 사실을 깨닫고 조금 적적한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 크리스.”

팔베개를 하고 누워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를 불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듣고 있다는 기색이 느껴졌다.

“혹시 신경 쓰였어?”

“뭐가.”

“일레이가, 웃지도 못하는 병신이라 그래서.”

조금 순화해서 말하는 편이 나았을까. 하지만 괜히 순화하면 오히려 더 이상할 듯했다. 오히려 이쪽이 지나치게 그 말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정태의는 이내 에이, 뭐 어때, 하고 생각해 버린다. 그 정도로 상처를 받을 만큼 약한 영혼이었다면 여태 이렇게 자라 오지도 못했다.

“아니.”

이번에도 대답은 곧 돌아왔다.

일부러 자신을 감싸거나 포장하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하긴 원래 그런 데에는 서투른 남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저 말은 그의 진심이다. 혹은 그가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거짓이거나.

그래, 하고 정태의는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굳이 안 웃어도 돼.”

정태의가 심상하게 말하자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토프의 눈길도 정태의의 눈길도 심상했다. 둘 다 별반 신경 쓰지 않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나름대로 보여.”

정태의는 굳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러나 이 말에도 크리스토프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뿐이다.

…….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렇게 대수롭잖아 할 거였으면, 어떻게 웃으면 되냐고는 왜 물어봤나.

굳이 안 웃어도 된다고 자신이 말해 놓고서 다소 비뚤어진 생각을 떠올리면서,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도끼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심상하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시도는 해 봤는데, 그만뒀어. 잘 안 돼서.”

“음……, 포기가 빠른 남자군.”

“힘들여 노력하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없으니 아쉬운 정도, 하고 덧붙인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에야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으나 없으면 아쉬운 것들은 주위에 얼마든지 넘쳐났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작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의외로 거의 없었다.

이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식량이나 물, 공기나 햇빛, 그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잃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었다.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는데.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못내 아쉬운 것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누구에게든 듣고 싶은 말, 굳이 필요치 않은 타인의 체온, 드물게 연락이 닿는 그리운 목소리.

“……. 다시 해 보자.”

정태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시 크리스토프를 향해 마주보고 앉아, 빙긋 웃었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보며 약간 낯을 찌푸렸다.

“관두자니까.”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정태의는 웃는 얼굴로 칼 같은 시선을 보냈다.

“왜. 일단 웃기라도 해야 누구한테 좋아한다는 둥 하는 말을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냐. 봐, 뺨을 이렇게 올리라니까. 이렇게.”

정태의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역시 아무래도 크리스토프의 얼굴 위에는 좀처럼 그럴 듯한 표정이 나지 않았다. 에고에고, 하고 가슴을 치면서 확 하고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이렇게 좀 올려 보―.”

그러나 막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찌르기 직전에, 언뜻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정태의는 금세 아차 싶었다. 황급히 멈춘 손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 앞에서 멈추었다. 한 치나 떨어져 있을까 말까.

“……미안. 잠깐 나도 모르게.”

정태의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하마터면 건드릴 뻔했다. 그랬더라면 저 눈썹 사이에 순식간에 내 천川자가 생기면서, 못 볼 꼴을 봤겠지.

정태의는 거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다시 빙긋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크리스토프의 표정을 무마시키려는 듯.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안 닿았잖아. 안 건드렸어.”

이러다가 갑자기 ‘누가 네 멋대로 건드리랬어.’라면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몹시 억울하겠다 싶어서 정태의는 얼른 두 손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그 손을, 크리스토프가 매우 마뜩찮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정태의의 얼굴로 옮겨 왔다. 정태의는 ‘안 건드렸잖아.’ 하고 투덜거리며 애매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정태의를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문득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만져 봐도 돼.”

정태의는 그 조용하고 평연한 말투에 어,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몇 초쯤 후 어? 하고 그 고개를 딱 멈추었다.

“…….”

정태의는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한 말을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 말을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뭘 만져.”

두 가지 의문을 동시에 풀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토프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혀를 찼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는 눈치이더니, 갑자기 정태의의 두 손을 잡았다.

아, 그래, 제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는 건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 그런데 뭔가 만지라고 했는데.

정태의가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가운데,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뺨으로 끌어당겼다.

“어…….”

정태의는 눈을 껌벅이며 외마디 소리만 어설프게 중얼거렸다. 눈앞에서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태의의 손을 자신의 뺨 바로 앞까지 끌고 온 크리스토프는 거기서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무슨 혐오식품이라도 앞둔 것처럼, 잠깐 정말로 싫은 얼굴을 했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만큼 눈썹을 찡그린다.

“……어이, 굳이 그렇게까지…….”

보다 못해 정태의가 말을 던졌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크리스토프는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정태의의 손을 자신의 뺨 위에 놓았다.

“…….”

“…….”

손바닥에 와 닿는 따뜻하고 보송한 감각.

정태의는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크리스토프의 뺨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고, 크리스토프가 그렇게 이끌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먼저 손에 닿는 그 뺨의 감촉에 놀라 버렸다.

따끈따끈하고 보송보송하다. 따뜻하게 데운 비단쿠션을 쓰다듬는 것 같다.

“너 얼굴이 왜 이래.”

그 뺨을 단단히 감싸쥔 채 정태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지. 그런데 괜찮아, 건드려도?”

정태의는 이차적으로, 먼저 물어봤어야 할 물음을 던졌다.

여전히 정태의의 손목을 움켜쥔 채 몹시 까다로운 얼굴로 기묘하게 찌푸린 낯을 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시선을 준다. 불쾌감과 안도감이 버무려진 것 같은 시선이다.

“……음. 괜찮은 것 같아. 하지만 별로 좋진 않아.”

“그래……. 그런데 왜 남의 손을 끌어가고 그래. 놔.”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서.”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어쩌면 좋은 징조인지도 몰랐다.

“사람이랑 부대끼는 데에 익숙해지려고?”

정태의는 반갑게 물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닿는 데에.”

“……. 왜.”

“장기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너와 같이 살려면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거든.”

크리스토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상대의 뜻을 떠보는 질문도 아니고, 본인이 믿어 의심치 않는 바를 그대로 전하는 그 어조에 정태의는 침묵했다.

어제 분명히 거절했던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을 할까 하던 정태의는, 뺨에 남의 손바닥을 대고 있는 데에 다소나마 익숙해졌는지 그 손으로 아주 살짝살짝, 자신의 뺨을 문지르기 시작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주 조금씩, 불쾌한 듯이 찡그렸던 미간 주름이 펴졌다. 남의 손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듯 약간 자신만만한 빛까지 은근히 표정 위로 퍼진다.

정태의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검지 끝이 보드라운 볼에 살짝 파묻혔다. 그 순간 정태의의 손목을 쥐고 있던 크리스토프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손목 부러진다.”

평연하게 말했지만 반쯤은 진심을 담아서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우악스럽게 틀어쥐는 통에 손목뼈에 금이라도 가는 줄 알았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손을 휙 떼어내진 않았지만 당장 눈초리를 치켜올리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움직여!”

“움직이지 않고 꼼짝도 안 하면, 그게 어디 남의 손이겠어. 남의 팔에 달린 살덩어리지.”

정태의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어 가는 걸 본다. 문득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크리스. 어쩌다 내가 좋아졌어.”

하필이면, 하는 말이 뒤에 붙을 뻔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러나 웃으면서 물어봤지만 사실은 심각한 물음이었다.

왜 자신을 좋아하게 됐을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왜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자신일까, 응해 줄 수 없는데.

그러나 어렴풋한 안타까움이 담긴 정태의의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심상하게 말했다.

“글쎄……. 과연 좋아하는 걸까?”

“…….”

크리스토프의 말 역시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진지한 얼굴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다.

그 입으로 날더러 좋아한다고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정태의는 흰눈으로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지만, 자신의 손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보곤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이라서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결론을 냈는데. 글쎄……, 정말 좋아하는 건가?”

크리스토프는 스스로도 의문이라는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의아하게 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마주보다가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같이 있어서 좋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

“하지만 이제는 네가 나를 만져도 괜찮아. 견딜 수 있다고.”

크리스토프는 거듭 말했다. 어쩌면 화를 내는 것도 같은 그 싸늘한 말투에 정태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이윽고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견딜 수 있는 건 괜찮은 게 아냐.”

견뎌야만 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거라면, 그건 그저 인내를 단련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정태의는 살짝 그의 뺨에서 손을 뗐다.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듯한 위화감이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데에는 원래부터 이유가 없다지만, 그것이 자신이어야 하는 개연성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정태의에게 좋아한다고 했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어쩌면 크리스토프 역시 그 위화감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아니, 본인의 일이다. 설령 의식 위로 떠올리지 못한다 해도 그 희미한 위화감을 모를 리가 없다.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의 결론은 결국 내지 못했는지, 나는 널 좋아해, 라고 약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할 뿐이다. 스스로에게 들려주듯이.

“너는 날 건드려도 괜찮아.”

“네가 견디니까 그런 거지. 견디는 건 원한다면 누구에게나 할 수 있어.”

“그래도 넌 괜찮아.”

정태의는 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거라면, 한동안은 맞춰 줘도 좋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결국은 만족스럽게 웃지 못한 크리스토프도, 그 만족스런 웃음을 보지 못한 정태의도, 이미 웃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간이탑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크리스토프와 정태의는 거의 동시에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두어 층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듯한 그 여러 기척은, 떨어진 곳에서도 알 수 있도록 발랄하고 활기찼다. 어린아이들의 기척이다.

“……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아이들을 여기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오늘과 같은 요일, 같은 무렵이었던 것 같다.

즉 그 말은.

“아이들이 오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성가신 투로 중얼거렸다. 약간 미간을 찡그렸지만 크게 불쾌한 빛은 띠지 않았다.

“아……크리스. 그런데 아마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거, 리하르트일 것 같은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순간, 성가시긴 하지만 불쾌하진 않은 빛이었던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확 변했다. 순식간에 성가시고 불쾌하다는 빛으로 바뀐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믿고 싶지 않은지, 크리스토프는 괜히 정태의에게 언짢은 얼굴로 추궁했다. 정태의는 전에 한 번 마주쳤거든,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여기엔 안 왔을 걸.”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정태의는 리하르트가 온다고 해서 굳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크리스토프를 생각해 어차, 하고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한 무리 안에서 극단적으로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이 있으면 주위 사람이 피곤한 법이다. 비록 이곳의 경우는 주위 사람들이 무리지어 같이 패싸움을 하고 있으니, 정태의와 같은 심경으로 피곤하지는 않을 테지만.

역시 이 동네는 물이 좀 안 좋아, 하고 투덜거리는 동안 아이들이 옥상에 이르렀다.

“……어.”

“어? 또 있다.”

“어? 크리스토프도 같이 있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와르륵 올라온 아이들은 그곳에 정태의가 있는 걸 보고 또 있다며 반가워하다가, 그 옆에 있던 크리스토프까지 보자 더 놀란 얼굴을 했다. 크리스토프가 정기적으로 가르치는 아이들이기도 했다.

정태의는 와글와글 떠들며 뛰어오는 아이들에게 약간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 아이들 속에 섞여 있던 올리버를 보았다.

이제는 상처가 다 나았는지 머리에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올리버가, 몇 걸음 뒤에서 정태의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 옆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에게도 마찬가지로 티없이 웃는다.

크리스토프는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얼굴에 성가시고 귀찮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올리버, 이제 다 나았나 보지. 머리에 거즈도 없고 붕대도 없네.”

“예,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다 왔거든요.”

싹싹하게 대답한 소년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흘끔 크리스토프의 눈치를 본다.

크리스토프는 모르는 척 냉담한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떠들어 대며 인사를 하고 나자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그들의 앞에서 흩어져 옥상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리하르트는 아이들의 뒤로 천천히 올라오는 모양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보기 싫은 면상이 보이기 전에 내려가 봐야겠군.”

“내려가다가 마주칠걸.”

“……. 바로 아래층에서 서익이나 본관으로 빠지면 돼.”

정태의의 그럴 듯한 말에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성큼성큼 걸어나서는 크리스토프를 따라가면서, 정태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올리버, 다 나아서 다행이지.”

크리스토프는 약간 걸음을 늦추었다. 찌푸린 얼굴로 정태의를 내려본 다음에 흘끔 올리버에게 시선을 준 뒤, 마지막으로 다시 정태의를 보았다.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신경 쓰지 않아.”

그래, 하고 정태의는 범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뭔가 다른 뜻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그저 올리버와 크리스토프를 한 자리에 두고 보니까 기억이 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올리버를 멀리서 바라본다. 올리버가 아닌 다른 것을 보는 듯 막막한 눈이다.

“그냥, 올리버를 보면 생각이 날 뿐이야. 많이 닮아서.”

혼잣말처럼 나직이 속삭인다. 어쩌면 약간 가라앉은 듯도 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정태의가 불쑥 말했다.

“리하르트랑?”

그야 많이 닮았지, 라고 덧붙이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태의에게,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눈을 부라린다.

“아니야! 그놈 따위는 닮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냐! 아니, 오히려 닮았으면 더 불쾌하지!”

“올리버랑 리하르트, 닮았잖아. 저 정도면 틀에 넣고 찍어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안 닮았어, 속이 딴판이라고. 올리버는 오히려 올리비아랑 더 닮았다니까!”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외쳤다. 그 거친 음성에 분노와 초조가 담기는 것을 깨닫고, 정태의는 그 즈음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올리버를 바라본다.

다른 아이 하나와 같이 뭔가 장난감이나 퍼즐 따위를 들고서 고민에 잠겨 있는 소년은, 올리비아를 모르는 정태의가 보기에는 역시 리하르트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혹시 또 모른다. 올리비아를 아는 사람들 눈에는 올리비아와 꼭 닮아 보이는지도.

“올리비아라면 리하르트의 동생?”

정태의는 다시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올리버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에게, 뭐라고 입을 열려던 정태의는 다시 입을 닫았다.

할 말은 없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올리비아라면, 그 무덤에 네가 개의 시체를 파묻었다는 그 사람?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정태의는 잠자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쫓아 올리버를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정태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주인 없는 들개였는데, 올리비아가 몰래 먹이를 주며 예뻐했었어.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개를 챙겨 주지 못할 때엔 나한테 그 개를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지.”

정태의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올리버를 바라보며, 크리스토프는 무심한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걔를 굉장히 지긋지긋해했지. 따라다닐 때마다 대놓고 구박했거든.

정태의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 그래서, 맛있는 걸로 챙겨 줬어?”

“응. 들개 주제에 입맛이 까다로워서 꼭 고깃점이 들어간 음식을 줘야 못 이기는 척하고 먹었어. 내가 다가가면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주제에 고개만 휙 돌리곤 했지.”

좀 재수 없는 개였어, 라고 덧붙이며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움츠렸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이토록 다르구나.

정태의는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올리버를 쳐다본다.

“그 개도 올리비아만 유독 따랐으니까……지금은 같이 있겠지.”

크리스토프는 심상하게 말을 맺었다.

정태의는 그래, ……그래, 하고 한 번 더 말한다.

잠시 그곳엔 정적이 흘렀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간이탑 위를, 어디랄 것 없이 바라보았다.

문득 정태의가 ‘그만 내려갈까.’ 하고 입을 열려던 때였다.

비슷한 말을 하려는 듯 막 걸음을 돌리려던 크리스토프에게, 한 여자애가 조르륵 달려왔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요전에 낙법을 배웠는데, 그게 잘 안 돼요! 하이드리히가 자기만 잘한다고 막 뻐겨! 어떻게 하면 돼요?!”

여자아이는 분한 듯 씩씩거리면서 빨개진 얼굴로 호소했다. 저만치 뒤에서 ‘그것도 못해서 또 배우러 갔냐.’고 심술궂은 얼굴로 외치는 꼬마가 하이드리히인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움찔했지만 저 뒤에서 자신을 놀리는 친구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기는 싫은지 주먹을 꼭 움켜쥔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가르쳐줘요, 하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한다.

정태의는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어서 여기에서 내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아직 저 아래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기척은 들리지 않지만, 곧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자가 여기로 올 터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그 남자와 결코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리하르트한테 가르쳐달라고 해.”

크리스토프는 쌀쌀맞게 말하고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여자애는 답답한 듯이 외쳤다.

“리하르트한테 배운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직접 리하르트한테 모른다고 말해요?!”

“……. 나한테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놈한테 말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토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 여자애 나름대로는 그런 자존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에 완벽하게 다 알아듣고 익혔다고 보이고 싶은 그 마음에 정태의는 가만히 웃고 말았다.

“낙법이라……. 어떻게, 시범을 보여 주면 알 것 같아?”

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게 해서 알 수 있을지 어떨지 자기도 잘 모르겠는 모양이다.

“내가 해 줘?”

정태의는 귀찮다는 빛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그래 봐야 여전히 크게 표시는 나지 않는―크리스토프를 돌아보며 웃었고,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든가, 하고 중얼거린다.

정태의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춘다.

아니 이 아저씨는 심부름하던 그 아저씨 아냐……하고 미심쩍게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좀 마음 아팠지만 정태의는 웃으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숙녀에게 춤을 청하는 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우아하게 손을 내밀자, 아이는 머뭇거리면서도 그 손 위에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자, 그럼 먼저 아는 만큼 해 봐. 간다?”

웃으며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정태의는 가볍게 몸을 틀어 아이를 메어쳤다.

땅에 닿기 직전 아이의 허리와 무릎 뒤를 살짝 받쳐 주면서, 아이가 몸을 쉽게 굴릴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 준다.

그러나 갑자기 그렇게 넘어갈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아이는,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정태의의 보조로 충격 없이 부드럽게 떨어져 내린 아이는, 잠시 눈앞의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머. 나도 모르는 새 낙법을 했나 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다. 하나도 안 아파, 하고 다시 말하며 눈을 깜빡이는 그 얼굴이 몹시 기뻐 보였다.

“보조는 왜 해 줘. 아픈 꼴을 봐 가면서 배우는 건데.”

옆에서 다 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혀를 차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린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음……, 안 되나……. 그럼 차라리 옆에서 잘 봐봐. 엉덩이에서 등, 어깨에서 팔 순서야.”

아이에게 조근조근 가르쳐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에,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넘어뜨려 달라고.”

정태의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몹시 성가시다는 빛을 노골적으로 띠며 언짢은 한숨을 쉬다가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마디 예고도 없이, 그대로 정태의의 팔뚝을 잡아 끌어당겼다. 발목 뒤, 무릎 약간 아래에 짤막한 충격이 다가오면서 정태의의 몸에서 균형이 무너졌다.

“……!!”

다음 순간, 정태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그가 공격해 오리라는 걸 미리 예상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당했을 속도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바닥에 쓰러뜨린 채 위에서 거꾸로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곱지 않은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봤지. 이렇게 하는 거다.”

“……. 잘 모르겠어요. 다시 보여 주세요.”

아이는 당돌하게 똘망똘망 말했다.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순식간에 흉악해지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좀 더 천천히 보여 주세요.”라고 주문을 붙이는 걸 보면 이 아이도 장차 크게 될 인물 같다.

“뭐 어때. 한 번쯤 더 보여 주는 것 정도야. 그럼 좀 더 천천히 넘겨 봐.”

정태의는 어차, 하고 일어서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 천천히는 못해.”

“응?”

“나는 원래 대련용으로 배운 게 아니야.”

오로지 실전에서, 실제로 사람을 해치우는 데에 쓸 수 있도록 배웠다.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상대를 처치하는 법만 배워, 남이 볼 수 있도록 느리게 보여 주는 건 익숙하지 않다고.

아하,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만 내려가자고 턱짓으로 계단을 가리키는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는 말했다.

“그럼 내가 넘어뜨리면 되겠네. 천천히. 잘 받아넘겨 봐.”

“네가?”

크리스토프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약간 당황한 것도 같고 싫은 듯도 한 얼굴이었다. 당장 뭐라고 소리를 치려던 그가 갑자기 머뭇거리는 걸 보고서야 정태의는 이내 깨달았다.

“……내가 건드리는 건 괜찮다며.”

“나를 공격하기 위해 건드리는 것까지 괜찮다고는 하지 않았어.”

“공격은 무슨……. 간다.”

정태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 과연 그의 접촉기피가 자신에게는 얼마나 허용되어 있을까, 그거나 한 번 보자 하는 심술도 슬쩍 피어올랐다.

불현듯 조금 전 그의 뺨을 쓰다듬었을 때의 보드라운 감촉이 손 안에 되살아났다. 깜짝 놀랄 만큼 훌륭한 촉감이었다.

“…….”

저도 모르게 약간 황홀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던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눈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 순간적으로 너랑 자면 정말로 황홀하겠다는 생각을 해 버렸어. 비록 머릿속이나마 널 마음대로 주무른 날 용서해 다오. ……일레이에게는 이런 말을 했다간 그날로 성치 못한 꼴이 될 것 같으니까 평생 비밀로 해야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원래 나는 깔리는 걸 즐기는 성향이 아니었다고, 하고 투덜거리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가슴팍 옷깃과 팔뚝을 움켜쥐었다.

움칫, 손 안에서 그의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확연히 전해져 왔다. 반사적으로 떨쳐내려 하는 그의 몸을, 정태의는 가볍게 허공에 띄웠다.

부웅,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느리면서도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튼 크리스토프는, 떨어지는 순간 혀를 차며 몸을 굴렸다. 몸 전체로 충격을 흡수하며, 그의 손이 바닥을 두드린다.

마치 모범 경기 같은 그 모습에 그를 메어친 정태의마저도 감탄하고 말았다.

실전용으로만 써먹었다더니, 실전에서 이런 움직임으로 싸우는 남자가 있다면 계속 그 움직임을 보고 싶어서라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겠다.

어떤 의미로는 적으로 돌리기 무서운 남자야, 라고 다소 빗나간 감탄을 하면서 정태의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잘 봤어?”

아이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크게 뜬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 보기는 제대로 봤는데 자신이 과연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응……, 보긴 봤는데, 한 번 더―.”

“보기만 하면서 배우는 게 어딨어. 가서 연습하면서 익혀.”

아이가 말을 맺기도 전에, 바닥에서 일어나 앉은 크리스토프가 쌀쌀맞게 소리쳤다. 아이는 짐짓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새끼여우처럼 샐쭉하게 눈을 흘기면서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이는 ‘응, 고맙습니다.’ 하고 납죽 인사를 한다.

정태의는 픽 웃으며 돌아보았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옷이 더러워졌잖아. 다시 갈아입어야겠어.”

마뜩찮은 투로 내뱉으며 짜증을 부린다.

떨어져 누운 통에 바지 뒤쪽이며 등, 어깨나 소매에 조금씩 먼지가 묻었다. 밝은색 옷도 아니라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도 크리스토프는 소매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며 혀를 찼다.

정태의는 공연히 유쾌해져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럼 방으로 돌아가자. 잘됐네, 나는 사실 그 옷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러자 소매나 옷자락에 더 묻은 게 없나 살피던 크리스토프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

목소리가 험악하다.

아침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른 옷이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듣자 언짢은 듯했다.

“그 옷 색깔. 그것보다는 차라리 요전에 입었던 그 풀색 니트가 더 예쁜데.”

“그건 세탁실에 보냈어.”

“그럼 그 낙타색……아니다, 그건 별로였다. 그럼 그 군청색 셔츠는 어때.”

정태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옷을 털던 크리스토프는 그 손을 보고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옷에서 떼어낸 먼지를 그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뭐야, 이게!!”

“달라는 거 아니었어?”

먼지를 홱 뿌리치며 다시 손을 내미는 정태의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먼지를 왜 달라 그러겠어! 일어나라는 거잖아, 부축해 주겠다고!”

정태의는 어이없이 외쳤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 남자는 여태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든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는다든가, 그런 일이 없었다.

언제나 홀로.

오롯하게 혼자서.

그렇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달라는 말을 할 줄도 모른다.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생각지 않는다.

정태의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손을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가슴속이 뜨끈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묵묵히 그를 보다가 물었다.

“내가 건드리는 건, 정말로 괜찮아?”

그 말을 듣고 크리스토프는 약간 불안스런 얼굴을 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기는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건드리는 건 괜찮다고 했지?”

정태의는 다시 한번 그렇게 물으며, 이번에는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팔목을 잡았다. 움칫, 다시 팔을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정태의의 손을 뿌리치려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정태의는 그 팔을 끌어당겼다.

“일어서.”

사선으로 위를 향해 비스듬하게 팔을 당겼다. 그제야 크리스토프는 그 손을 의지해 바닥에서 훌쩍 일어선다.

정태의는 그가 일어선 뒤에도 잠시 그 팔을 놓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팔을 쥔 손에 온 신경이 다 집중되어 불편한 눈치였지만,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 있어서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네가 적당히 눈치 좀 채고 알아서 놓지 그래.’라고 이마에 써 놓은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는 크리스토프였지만, 정태의는 모른 척 계속 잡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 술 더 떠서 물어본다.

“뺨 다시 한번 만져 봐도 돼?”

“…….”

“되게 부드럽더라. 감촉이 무진장 좋던데. 만져 봐도 되지?”

“안―.”

“아까, 나라면 만져 봐도 된다고 했었지?”

“…….”

얼굴이 흙빛이 되어 사납게 노려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정태의는 기쁘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 가까이 오자 슬슬슬 상반신이 뒤로 물러났다. 정태의는 아직껏 잡고 있던 팔을 콱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으로 뺨을 감싼다.

“……!”

눈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떨어뜨린 크리스토프의 표정을 보자니, 꼭 순진한 처녀를 희롱하는 늙은 영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뺨을 쓸었다. 이윽고 조금씩 얼굴 다른 부분까지 슬쩍슬쩍 손을 댄다. 그 뚜렷한 이목구비를 손으로 확인하면서,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적힌 박물관의 조각상을 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제 슬슬 그만하…….”

결국 참다못한 크리스토프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한 손으로는 그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황홀해하고 있던 정태의는, 그때 막 계단을 올라온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크리스토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이 마주친 그는, 리하르트였다.

“…….”

“……. …―.”

기척이 거의 나지 않은 걸 보면 아래층의 서익이나 본관 쪽에서 바로 건너와서 올라왔나 보다.

리하르트는 걸음을 멈춘 채 눈을 약간 크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움직임을 멈춘 채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라면 눈이 마주쳤을 때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걸어오곤 하는 남자인데, 묘하게 오늘은 조용하네……라고 정태의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정태의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크리스토프는, 그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

거기에 서 있는 리하르트를 발견하자마자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다운 느낌이 싹 가셨다.

불쾌함과 냉랭함만이 남은 얼굴로 혀를 차며 ‘보기 싫은 면상을 결국 마주쳐 버렸군.’ 하고 나직이 내뱉는다.

그 결에 크리스토프에게서 손을 거둔 정태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흘끔 그들을 살폈다.

저쪽에 아이들이 있으니 그렇게 험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아주 삭막하다. 여기서 어느 순간 어떤 말마디가 꼬투리가 되어 싸움으로 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적당히 그에게 목례를 한 정태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아이들을 재빨리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직후에는 크리스토프를 붙들고 말한다.

“옷 갈아입으러 안 가?”

어느 쪽을 향해서든 환하게 웃으며 해맑게 이야기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드잡이질을 하는 일은 거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삭막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바람이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뼘쯤 사이를 두고 스치며 리하르트도 옥상 위로 걸어 나온다.

크리스토프가 층계참으로 나서 막 첫 번째 계단에 발을 디디려 할 때, 이미 계단실의 차양 밖으로 나서 햇빛 아래로 나가 있던 리하르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병 하나는 고쳤나 보지.”

이미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운 인상으로,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언뜻 느껴지는 비웃음을 담고서, 그가 어깨 너머로 반쯤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막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 내려가려던 정태의는 멈칫했다. 몇 걸음 앞서가던 크리스토프도 가만히 걸음을 멈춘다.

말없이 고개만 돌려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에, 천천히 돌아서는 리하르트의 시선이 마주친다.

“다행이군. 수많은 병 가운데 다른 사람이랑은 스치지도 못하는 그 정신병은 좀 나아진 것 같으니.”

“……하.”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서늘한 얼굴 그대로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돌아서, 리하르트와 마주보고 선다.

정태의는 그들의 사이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며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그들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서 그 눈빛이 자신을 관통해 지나가는 게 못내 불편했다.

서로 사이 나쁜 사람들끼리 방해물 없이 마음껏 쏘아보라며 자리를 피해 준 정태의는,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가 시비를 먼저 걸어올 줄은 몰랐다.

정태의가 이곳에 온 뒤로 보아온 한, 리하르트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는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다른 사람만을 상대하며, 크리스토프는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했다. 사이에 다른 사람이 걸려 있거나 해서 얽히지 않는 한은.

크리스토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누구든, 자신에게 시비를 걸거나 원인을 만들지 않는 한은 아예 시야에 넣지도 않았다.

대체로는 상대의 행동에 비해 지나친 대응을 해 빈축과 원성을 샀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가 타르텐 내에서 자타 모두 적대시하는 관계라고는 하나 그들 두 사람이 부딪치는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면 얼마 전에 올리버가 다쳤던 일로 아직 앙금이 남은 걸까.

정태의는 흘끔 올리버 쪽을 보았다.

그쪽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 아이들은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가 대치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낯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는 조금 전의 그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

정태의는 그 소녀에게 눈짓을 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를 가리키며.

영리한 소녀는 이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곧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곤 소리쳤다.

“리하르트―. 너무 늦으셨잖아요―. 아직 더 기다려야 해요?”

소녀가 외치자, 아이들은 살짝살짝 서로 눈짓을 하더니 저마다 소리를 높였다.

“저 이번 시간 끝나자마자 금방 가 봐야 해요.”

“아―, 나 기다리기 지겨워.”

“꼭 바쁠 때 저러시더라.”

저마다 입 모아 투덜거리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영특한 아이들을 보고 정태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웃었다.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리하르트는 약간 낯을 찌푸리는 눈치였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미안, 미안하다.”

그대로 없던 일로 돌리려는 듯 그는 걸음을 돌렸다.

크리스토프를 무시하고 그들에게로 향하던 리하르트의 등 뒤에 대고, 크리스토프가 하, 하고 짧은 헛웃음을 섞어 내뱉었다.

“정신병―. 그래, 내가 그 정신병을 고친다 해도, 네놈한테만은 계속 병자로 남을 것 같다. 손가락 하나 스치기도 싫으니.”

리하르트는 걸음을 늦추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이윽고 그가 아이들 가까이로 가 제법 거리가 떨어졌을 때,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애인이랑 싸웠나 보다……. 얼마 전부터 기분이 별로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런가 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가자 그는 희한한 얼굴을 하고 정태의를 보았다.

“애인이랑 싸워? 그 여자랑? 그럴 리 없지. 아니, 싸운다고 해서 기분이 나빠질 인간도 아니지만.”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돌려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가며,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일레이도 비슷한 말을 하더니 너도 그 소리네. 애인과 다투지도 않을 만큼 사이가 좋은가 보지. 아, 하긴 어제 보니까 사이가 좋아 보이긴 하더라.”

“애인이 아니라 장난감 노예겠지. 쓰고 버리는. 아―생각하니 또 기분 나빠졌어. 저놈 이야기는 집어치워.”

정태의는 엉? 하고 눈을 크게 떴지만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거슬리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문득 머릿속에, 처음부터 몹시 위화감을 가지고 들었던 그 상변태 운운하는 말이 스쳐갔다.

아는 사람만 아는 뭔가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가급적이면 자신은 알고 싶지 않았다.

***

정태의는 자신이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끔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가 있긴 했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누가 뚫어지게 자신을 보든 말든 끝까지 눈치를 못 채는 일도 왕왕 있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야외수업을 할 때에 부모님이 찾아왔었는데 수업 내도록 그리 멀지도 않은 데서 계속 쳐다봤는데도 끝까지 못 알아채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설령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아,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길 뿐이었다. 얼굴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쳐다보든 말든―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볼일 있냐고 묻겠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학창 시절 언젠가는 대각선 뒷자리에 앉은 학생이 시험 시간에 열심히 노골적으로 자신을―혹은 자신의 시험답안지를―쳐다보는 걸 눈치챘지만 별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나중에 교사에게 패거리가 아니냐는 의심을 샀을 정도다. 심지어는 유괴를 당할 뻔했을 때에도, 웬 남자가 자꾸 쳐다본다고만 생각하고 무시했다가 큰일 날 뻔했다.

몇 번쯤,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다가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학습이라기보다는 천성이 우선하는지, 정태의는 여전히 남의 시선에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정태의가 기대어 앉아 있는 침대에서 3, 4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시간 빼고는 한 시도 그 시선이 정태의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주 뚫어지게, 얼굴에 구멍이라도 나라는 듯이, 그렇게 집요하고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

정태의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크리스토프의 서재에는 카일이 가지지 않은 진귀한 책들도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서 예전부터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을 한 권 발견해 빼온 것이었다.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저자가 50여 년 전 당시, 아직 거의 발 들여놓은 사람이 없었던 오지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살면서 적어 놓은 내용은, 바로 얼마 전에 읽었던 동일 지역의 현재와 바로 대비되기도 해 더욱 재미있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기는 했지만 지난밤에 두어 시간 만에 반을 읽어 버리고, 오늘 나머지를 읽으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약 두 시간이 지났다. 반의 반도 읽지 못했다.

“……. 크리스토프.”

결국 정태의는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지난밤에 악몽을 꾸고 잠을 설쳐서 오늘은 책만 읽고 일찍 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텄나 보다.

지금도 졸음이 와서 자꾸 눈이 감기는데, 저 한결같은 시선이 한시도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태의의 방으로 와서 소파에 앉더니, 그때부터 계속 저기 있다. 정태의는 왜 저러나 하고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저러다 말겠지.

……그런데 저러다 안 말았다.

“내가 어지간해선 다른 사람이 날 보든 말든 신경 안 쓰는데 말이지…….”

두 시간은 좀 너무한 것 같아, 응? 하고 정태의가 정색을 하며 막 타박을 주려고 했을 때였다.

협탁 위에서 전화가 울렸다.

정태의는 삿대질을 하던 손가락을 멈추고 어, 하고 전화를 돌아보았다. 정태의의 방으로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전화가 온다고 해 봐야 지금 저기 앉아 있는 저 남자가 걸어온 내선. 또 달리 연락할 만한 한 남자는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전화가 온다면, 걸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다.

“예, 오랜만이네요, 카일.”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받자, 전화기 안에서는 잠시의 침묵 뒤에 낯익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인가?’

“전화할 만한 사람이 카일밖에 없어요. 이 외지에 나와 있는데 누가 찾아 주기나 해야죠.”

정태의는 웃었다. 전화 안에서도 카일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에 전화를 했을 때, 왜 일레이가 여기에 있는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았냐며 카일에게 엄청나게 퍼부었다. 아마 카일에게 벌컥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싶다.

아니, 그게 일단은 대외비거든, 하고 우물쭈물 사과한 카일은 그 뒤로 두세 번, 미안한 기색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제 예전과 별 다르지 않다.

‘왜. 내선으로라도 전화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 것 아냐.’

“아. 일레이는 거기 있을 때랑 마찬가지로 볼일 있으면 직접 오거든요. 크리스토프는 지금 제 앞에.”

정태의는 여전히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흘끔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정태의가 전화를 받자 그는 더더욱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스가 거기 있었어? 어쩐지 전화해도 안 받더라니. 그 녀석이 남의 방에 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 별일이군.’

“아. 볼일 있으시면 바꿔 드려요?”

‘아니, 아니다. 그 볼일이 어차피 자네한테 전화한 볼일인걸.’

정태의는 쓰게 웃었다.

“안 줘요. 아직 못 받았어요.”

‘그놈이 정말……! 언제쯤 준다던?’

“글쎄요…….”

정태의는 말을 흐렸다.

과연 책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그건 처음부터 알 수 없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아니, 책을 돌려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날 좋아한다면 내게 그 책들을 돌려줘.

얼른 책을 돌려받고 싶은 욕심에, 그런 요지의 말을 장황하게 둘러서 이야기해 봤다. 스스로도 치졸하고 유치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책을 받긴 받아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말하는 게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더더욱 치졸하고 유치하게 대답했다.

―리그로우를 버리고 나랑 같이 있겠다면.

차마 그 말에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뒤로 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크리스토프가 말없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탓에, 요새는 얘기도 거의 못 꺼내고 있었다. 제 무덤 제가 팠다.

그러나 카일에게 그 말은 할 수 없어서 입 다물고 있었다. 카일은 그저 크리스토프가 막무가내로 안 주는 줄 알고―사실이기도 했다―있었다.

‘일레이는 어떻게 지내.’

“아. 일레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녀석이 어디서든 못 지낼 위인이던가요. 무슨 잘 나가는 신진 변호사 같은 모습으로 타르텐 안을 활보하는 것 같던걸요.”

‘아하하, 전에는 신진 실업가라더니 그새 스타일이 바뀌었나 보지. 그래도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좀 인간다워 보이지?’

“원래도 겉모습은 충분히 인간다웠죠…….”

‘그래그래, 자네가 그래서 속았던가?’

“…….”

아니오, 처음 실물을 보기 전부터 이미 그놈이 비범하다는 걸 알고 있었죠. 지부 내에 각종 기록 영상들을 비롯해, 그놈을 가까이해선 안 된다는 근거들이 그놈 오기 전부터 막 돌아다녔었는데.

그러나 그 말을 하면, 알면서도 왜 그렇게 됐냐는 안타까운 침묵이 돌아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지.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혹시 아직 못 받아봤나?’

“예? 뭘요?”

‘아직 못 받았나 보군. 얼마 전에 출장을 갔다가 지방특산으로, 한정수량으로만 내보내는 맥주를 사왔거든. 거 맛이 제법 독특하고 좋아서, 자네 생각이 나서 몇 캔쯤 보냈어. 마침 일레이에게 보내 줄 물건이 있어서 그 편에 같이 보냈으니, 그 녀석에게 받도록 해.’

“어……, 감사합니다.”

정태의는 금세 얼굴에 화색을 띠며 인사했다. 뭘, 뭘, 하고 웃는 카일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들린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그 나름대로 지은 죄가 많은 카일은, 그럼 책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정태의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곧 자신에게 배달될 맥주의 꿈에 부풀었다.

“뭐가 감사해. 뭐 선물이라도 주나 보지.”

그때, 소파에 앉은 채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가 책을 읽는 동안은 한 마디도 않고 얌전히 쳐다보기만 했으니, 저기에 앉은 뒤로는 처음 꺼내는 말이다.

“어, 특산물로 나온 맥주를 보내 준다는데.”

“맥주. 그러고 보니 맥주 많이 마시는 것 같더니. 맥주 좋아하나 보지?”

“음? 아니 뭐 그렇게 좋아하진 않고, 그냥 있으면 마시는 정도지.”

정태의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본인은 거짓말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본인의 머릿속에서는 진실이었다.

흠, 하고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팔을 바꾸어 턱을 괴었다.

조금 전까지 저 시선이 대단히 신경 쓰였지만 카일이 선물을 준다는 소식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정태의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침대 위에 올라가 앉았다.

“일레이…….”

문득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그 낯선 울림에 정태의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일레이’ 하고 중얼거린 크리스토프는 약간 입매를 찡그렸다.

“재수 없는 이름이다…….”

아니 저놈은 사람 이름마다 죄다 재수 없대…….

본의 아니게 이 집안에서는 김영수가 되어 버린 정태의는 그를 흰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끄덕도 않고 크리스토프는 흠, 하고 한숨을 쉰다.

“그놈을 그렇게 부르는 놈은 그 집에 사는 사람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심드렁한 와중에도 무척 의외롭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너도 그렇게 부르고 싶었나 보지. 그럼 불러.”

“멋모르고 그 이름으로 불렀다가 재수 없어지는 인간을 내가 한둘 본 게 아니라서.”

어릴 때에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한둘씩 꼭 그런 인간이 나왔지, 하고 중얼거리는 그 말의 진상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름 따위 어차피 호칭일 뿐인데, 아무렇게나 부르면 어떻다고 그 진상을 떠는 건지 원.”

아무렇지 않은 듯 하는 말 가운데에도 못마땅한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다른 사람한테는 긍정적인 관심도 부정적인 관심도 없던 인간이 갑자기 왜 새삼스러운 험담을 다…….

굳이 일레이의 편을 들어 줄 마음은 없었지만―사실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지, 괴상망측하게 부르는 것도 아닌데 이름으로 부르면 뭐 어떻단 말인가―, ‘크리스티나도 예쁜 이름이잖아.’라고 말해 주고픈 충동이 갑자기 솟았다.

그러나 흘끔 쳐다본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별로 건드리기 마땅해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가기로 했다.

“릭이랑 만난 건 그 UNHRDO에서?”

“어, 응. 잘 아네.”

“아, 유명했거든. 정태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 바로 뒤에 자신의 이름이 나와서, 정태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픽 웃었다.

“너 지금 이름 잘못 말했다. 일레이가 유명했다는 소리겠지.”

“아―그놈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크리스토프는 소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스툴을 끌어당겨 거기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대로 편안하게 잠이라도 잘 것처럼 목소리가 금세 나른해졌다.

“그놈이 UNHRDO에 들어갔을 때부터, 거기는 인성검사 안 하고 사람 뽑냐고 말이 많았지.”

다들 그 생각 하는구나…….

“하지만 그쪽 기동대도 미친놈 소굴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어. 우리는 인성검사 안 하고 뽑았거든.”

“아니, 인성검사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정태의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지만 크리스토프는 별로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아득한 눈으로 중얼거린다.

“심지어 UNHRDO에서 영전되어 아시아 지부에 교관으로 갔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다들 UNHRDO의 적법성과 윤리성을 의심했어. 도대체 어떤 인적자원을 육성하겠다는 거냐고 의아해했지.”

“미친놈 소굴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성은 제대로 남아 있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나 보다. 내 식구 감싸 주기는 안 하는 걸 보니.”

제 식구라고, 일레이가 UNHRDO의 교관이 된 일을 두고 크게 칭찬이라도 하면 만인의 질타를 받아 마땅할 텐데.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이번에도 코웃음칠 뿐이었다.

“내 식구 감싸 주기? 내부분열의 집합체였는데, 거긴.”

“……. 왜……, 그래도 사이좋게 테러도 같이 했잖아…….”

“애초에 과격분자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보수도 줬거든. ……하긴 그때 같이 테러에 낀 놈들은 나름대로 리그로우를 숭배하는 미친놈들이었지.”

야 그건 정말 미친놈이다,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이윽고 시선을 정태의에게 다시 주었다.

“그때는 다른 소문도 돌았어.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괜히 먼저 나서서 몸소 수배범이 되어 앞으로 계속 행동에 제약을 받을 짓을 하다니, 그놈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게 틀림없다고. 그 소문이 돌았을 때 기뻐한 놈들이 수두룩했지.”

“…….”

“그렇게 숱한 소문들이 수없이 오가는 와중에, 일약 유명인이 되었단 말이야. 리그로우가 카일의 집으로 들어갈 때 옆구리에 끼고 갔다는 동양인이.”

“……. 그런 의미로 유명인이었어, 나?”

“어. 몰랐어?”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전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어차피 베를린 밖으로 나간 일도 거의 없었다. 거의 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는 그 기분을 알긴 하겠는데……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런 유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테러범이 되어 신문지상에 뜬 자신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그 뒤로는 외부 일을 별로 맡지 않았으니까, 나도 이번에 꽤 오랜만에 그놈을 본 셈이야.”

크리스토프는 얼마나 오랜만인지 꼽아보기라도 하는 듯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리다가 문득 정태의를 보았다. 그리고 묻는다.

“그 녀석, 집에서는 어떻게 지내. 너랑은.”

“나랑?”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집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해 줄 수 있겠는데, 자신이랑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냐니……, 그냥 각자 서로 일하면서 지내는 거지. 둘 다 바쁠 때엔 둘 다 알 바 없고, 하나만 바쁘면 다른 하나가 일을 좀 도와준다거나, 맥주라도 마시라고 갖다 준다거나,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노는 거고. 둘 다 한가하면―그럴 때가 별로 없긴 하지만―그냥 집에서 뒹굴거리거나 어디 놀러라도 가거나.”

“흠……. 그래, 그렇게도 지낼 수 있구나.”

크리스토프는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어, 하고 혼잣말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마치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투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살아 본 적도,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는 것처럼.

“나는 말이야. 릭은 틀림없이 곱게 죽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불쑥 말했다. 그리 듣기 좋은 화제는 아니었지만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바 있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놈이 험한 시체로 발견되어도 납득할 것 같았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레이 리그로우가 참아 줄 만한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틀림없이 그를 참을 수 없이 나쁜 놈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쌓아올린 결과이기 때문에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뭐 그럴 수 있지.”

“네가 지금 말한 것처럼, 그렇게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그놈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는 곳에서 살 줄 알았어.”

정태의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이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일레이는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편이 더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사는 건…….”

크리스토프는 혼잣말처럼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문득 정태의를 본다. 정태의는 갑자기 날아오는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워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크리스토프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태의에게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얼굴을 마주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얼굴이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미묘하게 기울어졌다.

“그러면 나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정태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조그맣게, 입술만 달싹거리며 속삭인다.

“나도, 이제는 머리도 아프지 않고, 귓속이 아프도록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크리…….”

“매일 그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매일 이래. 앞으로 계속. 지난번에는 어찌나 시끄럽고 머리가 아픈지, 망치로 내 머리를 찍어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여전히 시끄러운 거야…….”

“크리스.”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침대 시트를 문질렀다. 무늬 하나 없이 새하얀 시트만큼이나 하얀 손이다. 똑같이 하얀 손이라고는 하나 일레이와는 다르다. 크리스토프의 손은 꼭 도자기 같았다. 건드리면 깨어질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들어 정태의를 보았다.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인데도,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그랬던 것 같다. 저 무심한 얼굴 아래에서.

“나랑 같이 있자.”

“크리스토프.”

“나도 잘해 줄 수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을 거야.”

애처롭게 귓가에 목소리가 닿았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두 손목을 그러쥔다.

다음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입술 위에 살짝 닿았지만, 피하려 하면 그 위로 따라왔다. 입술만 조심스레 스치는 입맞춤이다. 어쩌면 두려운 것처럼, 혹은 끔찍한 것처럼,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이렇게 접촉한 것도 처음인지 몰랐다.

정태의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치려 흔들었다. 그러나 손목을 뺄 수 없었다.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 세게 잡은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리 요동치며 흔들어도 크리스토프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모와 비할 수 없는 완력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야, 너무하잖아!”

고개를 돌리며 외쳤지만, 크리스토프는 아랑곳 않고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닿는 게 너무나 생소하고 섬뜩한 듯 뺨이나 입술 따위가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옷 위라곤 하지만―남의 사타구니를 주무르더니 이젠 입이냐. 적당히 좀 해, 이 미친놈아.

그렇게 외쳐 주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 같았지만 일단 이 손목부터 좀 떼어내고, 하고 정태의는 꿈쩍도 않는 손목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하필 그때. 타이밍을 딱 맞추기라도 한 듯이 그 순간 정확하게.

문이 열렸다.

정태의의 방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여유롭게 걸어들어 오던 발소리가 딱 멎었다.

……으악.

크리스토프의 어깨 너머로, 큼직한 상자를 한 팔에 안고서 들어서던 일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 위에서 애매하게 겹쳐져 있는 그들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동안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살짝 눈매를 좁혔다.

그는 별반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뭔가 딱딱한 것이 안에서 묵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다음, 그는 다가왔다.

여전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러나 그 걸음은 침대에 다다를 즈음에는 제법 빨라져 있었고, 얼굴에는 웃음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저 섬뜩하기만 한.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왜 못 알아먹고 이 짓거리야.”

‘분명히 말했을 텐데’, 라며 크리스토프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이 ‘왜 못 알아먹고’, 에서 그를 정태의에게서 떼어낸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하며, 그의 배를 후려갈겼다. 사정없이.

퍼억, 고깃주머니를 다지는 듯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 이 얼빠진 녀석아. 건드려도 되는지 아닌지, 이젠 그것도 구분 못해? 네 분에 안 맞게 위험한 짓은 피하는 게 상책인데 그것도 까먹었나? 정신 똑바로 챙겨, 크리스토프.”

두 번, 세 번, 똑같은 곳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저렇게 거침없이 뱃속에 주먹을 질러넣는데도,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는데도, 비명소리라곤 없었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을 뿐, 크리스토프의 입에서는 신음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그 뒤엔 참지 못하고 계속 아프다고 호소할 게 뻔하기 때문에 꾹 참았다고.

아프다고 말해도 되는데. 한 번 비명을 지르고 나면 봇물처럼 터져나올 그 비명을 참지 않아도 괜찮은데.

가슴속이 저릿해 왔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네 대째의 주먹을 휘둘렀을 때, 무거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그를 불렀다.

“일레이.”

그 목소리에, 일레이는 잠시 주먹을 멈춘다. 서늘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무슨 말이든, 해 보려면 해 보라는 듯.

어이구, 저거 또 심사가 단단히 틀어졌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 상황에서 정작 피해자는 나인 것 같은데, 나한테도 좀 때릴 차례를 양보해 주면 안 될까.”

정태의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하자, 다섯 대째의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일레이는 지그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그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를 정태의의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 결에 크리스토프는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쳤다. 그 또한 몹시 아플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로 통각이 없는 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들었다. 배를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조금 전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맞았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크리스. 그런데, 정신 차리라는 말은 나도 동감이다.”

정태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으로 섰다. 두어 번, 손목을 흔들며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 다음, 그 주먹을 휘둘렀다. 그 역시 사정 보지 않고, 정확히 명치를 노려서.

크리스토프의 숨이 아주 잠깐 멎었다.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의 눈썹이 모였다.

“남이 너한테 닿는 건 싫어하면서 네가 그 짓을 하면 어쩌라고. 정신 챙겨.”

정태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다음에야 돌아섰다.

일레이는 뭔가 성에 안 찬 듯 테이블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뭐라 말하기 애매한 기분이 들어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런 정태의를 보고, 일레이는 가져온 상자를 풀어 그 안에서 알루미늄캔을 하나 꺼내어 말없이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며 정태의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게. ……아. 혹시.”

“형이 너에게 주라고 보냈다. ……그래, 어땠어. 저놈 입술은.”

심상하게 묻는 그 말에, 맥주를 확인하고 희희낙락하던 정태의는 삽시에 시무룩해졌다.

이놈이 또 꼬투리 하나 잡았구나. 사람을 아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잘 됐다 이거지.

“뭐……입술이 그냥 입술이지 뭐.”

“쓸데없이 친하게 지내니까 그 꼴이 나는 거다. 친구 좀 가려 사귀어.”

일레이가 혀를 끌끌 차며 하는 말에 정태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놈이 지금 누가 누구한테 친구를 가려 사귀라고…….

뜨악하게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언짢은 얼굴을 하고서, 상자 안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어 단숨에 비워 버렸다.

앗, 카일이 나 먹으라고 준 특산품…….

순간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자신이 짓지도 않았는데 많이 억울했지만―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우물 그 캔만 노려보았다.

그 뒤에서, 침대 위에서 배를 누르고서 잠시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크리스토프가 이윽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쩐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불안스러워 보였다.

“난 너랑은 싸우기 싫은데…….”

크리스토프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맥주캔을 내려놓던 일레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음 같은 시선이 크리스토프를 향한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가능하면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이쪽의 피해가 큰 싸움은 하고 싶지 않거든.”

일레이가 나직이 말했다.

테이블 위를 툭, 손마디로 두드리며 잠시 입을 다문 그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탐난다……?”

“그래.”

크리스토프는 망설이지 않았다. 조용히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말투는 언제나와 같이 감정 없이 서늘했다.

테이블 위를 손마디로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일레이의 칼날 같은 시선은 크리스토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착각하지 마. 넌 저 녀석에게 괜한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허기져서 그 허기를 채우고 싶은데 저 녀석이 보여서, 네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내밀고 있는 거야. 저 녀석은 네 몫이 아니다. 내 몫이야.”

“릭. 너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했었지. 굳이 내게 손대고 싶지 않다고.”

크리스토프는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 손마디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레이의 입가에 헛웃음이 서렸다.

“그래. 그래서?”

“그럼 나는 그동안 빼앗을 거다.”

크리스토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일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귀가 먹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서, 정태의는 맥주를 마시다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카일이 특별히 보내어 준 맥주는 과연 특이하면서도 아주 훌륭한 맛이었지만, 지금은 그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술맛을 다 작살내고 있었다.

내 의견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 분위기는 그런 발언이 먹힐 분위기도 아니었다.

정태의는 하는 수 없이 얼마 전과 같이, 두 사람이 알아서 얘기를 나누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람을 놔두고 멋대로 지껄이는 놈들은 지껄이라고 놔두고, 자신은 자신의 결정을 내리면 된다.

정태의는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에 맥주맛이 떨어진 것만을 아쉬워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 길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의 기온이 몇 도쯤 떨어진 것 같았다.

일레이의 얼굴에서, 그나마 미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써늘하게 얼어 버린 그 표정이, 유리처럼 선뜩한 새까만 눈이,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정태의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발겨 버릴 때에도 그는 저런 얼굴이었다.

“일…….”

그러나 그를 부르려 해도, 가슴속이 서늘하게 얼어붙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본 적이 없는 눈.

한동안 감돌지 않았던 공기.

아주 짧은 순간.

그곳에는 미치광이 릭이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꿈틀, 움직였다.

바로 그 다음 순간.

달캉, 작고 맑게 울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울렸다.

정태의가 저도 모르게 움켜쥔 맥주캔이 침대모서리에 부딪힌 소리였다.

아주 잠시 일레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와 닿았다. 정태의와 눈이 마주친다.

정태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미치광이 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일레이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다시 돌아온다. 선뜩한 분노나마 남아 있는 그 감정이 다시 표정 위에 떠올랐다.

낮은 한숨소리가 정태의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일레이는 나직이, 마치 무시무시한 짐승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토프. 굳이 적을 만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냐.”

“너를 적으로 만드는 건 더더욱 좋은 선택이 아니지.”

크리스토프는 일레이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레이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래도 욕심이 나신다?”

“그래. 욕심이 나. 나는 갖고 싶어. ……나도 갖고 싶어.”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정태의는 표정을 지웠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그가 바라는 것이 이곳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 본인뿐.

“그래. ……그렇다면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내 눈에 거슬리지 않는 곳으로 치워야겠군.”

일레이의 말에 크리스토프는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일레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

요 며칠은 유난히 심했다.

귓가에서 뭔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고, 컸다가 작아졌다 하는 그 소리 때문에 귀가 아프고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고 크리스토프는 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욕설을 내뱉곤 했다.

그 정도는 날마다 달랐다.

어떤 날은 그렇게까지 시끄럽지 않다며 하루 종일 무난하고 평온하게 보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아침부터 계속 두통약을 씹어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 며칠 동안, 크리스토프는 날마다 지독한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정태의가 깨워서 눈을 뜰 때면 창백할 만큼 하얀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제발 닥쳐……!

누구에게인지도 알 수 없이 중얼거리는 그 나직하고 거친 목소리는 얼마 동안 끊이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크리스토프는, 오전 내도록 귀를 틀어막고서 창백한 얼굴로 나직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조금 나아졌는지 말을 타겠다고 나갔다. 그러나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말이 다리를 다친 것 같다며 다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서재에 앉아 화집을 펼쳐두고 그 앞에 턱을 괴고 앉아, 그 그림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계속 똑같은 그림만. 어쩌면 그는 그림을 보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차라리 잠을 좀 자 보는 건 어때.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정태의는 이제는 따로 정리할 것도 없이 말끔해진 서재를 주욱 둘러보다가, 아까부터 화집 앞에서 눈을 뜨고 잠든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는 건 싫어. 이상한 꿈만 꾸거든.”

“어떤 꿈인데.”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미니바에서 맥주 대신 물을 꺼내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 손바닥만 한 물병을 통째로 내려두고,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몰라. 뭔가 희끄무레한 게 왔다갔다 해. 그냥 그것뿐이야.”

“그것뿐? ……그럼 그냥 무시하면 안 되나. 너한테 무슨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면.”

“기분 나쁘거든, 그게 스치면……. 몸에 뭔가 닿는 느낌이 나기 때문에 토할 것 같아.”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흠, 하고 한숨을 쉬며 물병에 곧바로 입을 대었다. 어차피 작은 병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물은 단번에 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 경우는 접촉기피도, 마음 먹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만질 때에는―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잘 참았잖아.”

“그렇다고 해서 그 감각이 좋아지지는 않아. 다른 것들과 일부러 참아 가면서 닿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아, 그래,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물만 꼴깍거렸다.

저 말을 다시 해석하면 ‘너도 건드리는 걸 참을 수는 있지만 결코 좋지는 않아’, 이거다.

정태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리고 슬그머니 떠보듯이 물어본다.

“일레이랑 얘기 잘 해서 다시 화해하지 그래. 껄끄러워지면 서로 안 좋잖아, 친구인데.”

“친구 아냐. 달갑지 않은 오해다.”

아, 그래, 그랬었지, 라고 말하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벌컥 성이라도 냈을 텐데 조용한 걸 보니,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서재의 테이블 위에 있던 전화가 울렸다.

크리스토프는 전화가 몇 번이나 울려도 그 전화를 받으려 하지 않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잠시 그와 전화를 번갈아보던 정태의는 볼을 긁적이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크리스토프? ……어머, 아닌가.’

가늘고 고운 목소리.

크리스토프의 이름을 부르고 조금 있다가 자신 없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아마도 크리스토프와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크리스토프에게 건네었다.

넋이 나간 듯 그림만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수화기를 보고 잠깐 성가신 얼굴로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내키지 않는 듯 희미하게 짜증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하고 딱 한 마디만 하며.

전화를 받는 크리스토프의 옆에서, 정태의는 금세 다 마신 물통을 들고 일어섰다.

시간이 제법 늦어 있었다.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 싶었다.

빈 통을 버리고, 아까 꺼내 두었던 책 몇 권을 다시 정리해 두고서 그만 돌아가야지.

그러나 플라스틱 페트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책을 꺼내 두었던 서가 쪽으로 걸어가던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기웃했다.

조금 전에 크리스토프가 전화를 받아들었는데도 방 안이 어쩐지 조용했다. 전화를 끊는 기척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정태의는 꺼내 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으며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주욱 빼 보았다. 그새 전화를 끊었나 했지만,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전화를 들고 있었다.

역시 안 끊었잖아, 이제 보니 조그만 목소리라서 잘 안 들렸을 뿐, 크리스토프는 전화기에 대고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네, 네, 아니오, 네. 네…….

띄엄띄엄 들려오는 그 단답식 대답에, 정태의는 테이블로 향하며 이상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창백했다. 새파랗게 질려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밀랍인형이 입만 움직이는 것 같다.

하얗게 핏기를 잃은 얼굴. 조금 크게 뜬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 입술처럼.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저런 크리스토프는 본 적이 없었다.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마치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가느다랗게 간신히 대답을 하고 있었다. 겁인지, 혹은 불안인지로 질려 버린 눈이, 입술이, 창백한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

간신히 귀에 닿을락 말락 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예. ……예. ……예, 어머니. ……예…….”

만일 목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이 목소리는 틀림없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유리 색깔일 것 같았다. 언제 깨어질지 모르도록 얇고 위태로운.

그때 정태의의 귀에 크리스토프가 속삭인 말이 파고들었다.

어머니.

저 가늘고 희미한 목소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크리스토프의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나중에는 숨까지 막히는 듯 목 아래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관절마디가 하얗게 비친다.

멈춰 있던 정태의의 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걸음은 점차 빨라져, 이윽고 크리스토프를 향해 뛰듯이 다가가고 있었다.

금세라도 기절할 듯이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목소리는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목소리만을 들으면, 알아듣기 힘들도록 작을 뿐 떨리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고 평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이미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눈빛은 허공에 넋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크리스.”

정태의가 막 크리스토프에게 이르렀을 때,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려 천천히 내려놓은 크리스토프는, 창백한 얼굴 그대로 몸을 움츠렸다. 적당히 좋을 정도로 냉방을 틀어놓은 서재 안에서, 새파란 얼굴로 떨고 있는 그는 몹시 추워 보였다.

“크리스.”

정태의는 다시 한번 그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어느 정도 예상은 했듯이―그의 어깨가 크게 떨리며 움츠러 들었다. 정태의의 손을 뿌리치며.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파란 눈동자가 그제야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떨림이 가라앉았다. 어깨도, 몸도, 입술과 손도, 떨림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멈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가만히 깍지 낀 손만 내려다보면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도, 창백해진 낯빛은 좀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갑작스럽게 일어난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서재에서 나갔다. 정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갔다.

“크리스토프, 어딜 가려고.”

“말 타러.”

크리스토프는 짧게 말했다. 그 짤막하고 냉담한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여느 때의 크리스토프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 밤중에 숲길을 어떻게 달리려고. 말을 달리기엔 너무 어둡잖아.”

“달릴 수 있어.”

크리스토프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정태의는 그를 따라 내려갔다. 이미 바깥에는 새카만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아무리 숲에 점점이 등을 켜 놓았다고 하더라도, 말을 타기에는 위험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뭐라고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아.

“다리! 다리를 다친 것 같다면서, 네 말!”

아까 승마를 나갔다가 말이 다리를 다친 것 같아서 그냥 들어왔다고 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저택에서 나가자마자 마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음을 잠시 늦추었다.

“정 하고 싶으면 차라리 숲 산책을 하도록 해. 산책로는 등도 정비되어 있으니까.”

정태의는 차선책을 내놓았지만, 잠시 그대로 머뭇거리던 크리스토프는 다시 마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숲은 늘 그 말과 함께 갔어. 차라리 내가 올라타지 않고 그냥 걸려서 끌고 가더라도, 그렇게 갈 거다.”

정태의는 뭐라고 하려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크리스토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몇 걸음이나 앞서가던 크리스토프는 성가신 얼굴로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눈앞은 제대로 보이고 있어?”

이성은 찾고 있는지, 몸이 떨리지는 않는지,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닌지.

크리스토프는 잠시 말없이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약간, 평소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당연하지.”

그는 쌀쌀하게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마사로 걸어간다.

정태의는 어떻게 할까 하며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어차피 그는 말을 타지 못하니까 그의 뒤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면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냥 산책로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갈까.

정태의는 마사 안으로 모습을 감춘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가며, 역시 나온 김에 산책로나 잠깐 돌아보고 가자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숲의 산책로는 날마다 길을 바꾸어, 단 한 길만 등불을 켜 놓곤 했다. 그래서 때로는 밤 산책을 하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밤이 되어 숲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숲에서 별밤을 즐겨도 좋겠지,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며 정태의는 마사 안으로 들어섰다. 마사 앞에 있어야 할 경비는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출입구 옆에 놓인 의자가 비어 있다.

ㄷ 모양으로 생겨 출입구가 두 곳인 마사는, 열몇 마리의 말을 널찍하게 나누어 놓은 만큼 제법 넓었다.

크리스토프가 늘 타곤 하는 말은 마사의 제일 안쪽에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든 곳에 있어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안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모퉁이를 앞둔 곳에서 멈춰 서 있었다. 멈춰 서서 안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정태의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듯 안쪽만 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말을 데리러 가려면 좀 더 들어가야 하는데 그 앞에서 멈춰서 있는 게 이상하다.

다시 한번 크리스, 하고 부르며 그의 옆으로 가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마사 안쪽에서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로 들어서는 대여섯 명, 웃음소리와 섞여 나직한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러니까 다리를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리를 다치면 탈 수가 없으니까 당연히 위험할 일도 없지.”

“그래도 뭐, 그렇게 좋아하는 말을 못 타니 하루 종일 얼굴이 아주 우거지상이던데, 그 미친 새끼.”

“봐봐, 안장 아래에 가시나 몇 개 눕혀서 끼워 두잔 말이야. 그러면 말이 달리다 보면 안장이 조금씩 쓸려서 가시에 찔릴 테니까, 아무리 그놈이 말을 잘 다루더라도 문제없이 말을 타기가 힘들걸.”

나직하게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그 조그맣게 새어나오는 말들을 듣고 있던 정태의는 차차 낯을 찌푸렸다. 이 저열하고 악랄한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정태의는 불편한 마음으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말들을 듣고 있었다. 정태의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을 그들이, 크리스토프의 위치에서는 보이는 듯했다.

조금 전과 같이 낯빛이 창백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하얗게 질리지도, 경련을 일으켜 떨지도 않았다. 그저 서늘하기만 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얼음처럼 식어 파랗게 날이 선 그 목소리는 마사 안에 싸늘하게 울려, 안쪽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들이 일시에 멎었다.

안쪽에 있던 남자들이 낯빛을 바꾸며 돌아보았다. 그들이 걸음을 옮겨 위치를 바꾸자 그제야 정태의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무리 지어 있는 그 여섯 명의 남자들은 모두 리하르트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따로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종종 식당에서 한둘씩 마주쳤었다. 정태의와 스칠 때면 나직한 목소리로 그 아니면 크리스토프의 욕설을 하며 노려보곤 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리하르트가 시키던가?”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그 눈빛에는 언뜻, 희미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남자를 깔보는 눈이다.

그 의미를 알아챈 남자들이 순식간에 험상궂게 눈을 부릅떴다.

“리하르트와는 상관없어! 너 같은 미친놈이 타르텐에 돌아와서 어슬렁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리하르트와는 상관없어……? 뭐 좋아. 이 일이 리하르트와 상관없다 해도, 너희는 그놈과 상관이 있겠지.”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문득 몇 걸음 뒤에 있는 정태의를 보고 설핏 귀찮다는 얼굴을 하더니 너는 나서지 마, 라고 짧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남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기분 전환거리가 필요하던 참이야. 오늘 너희를 잡고, 그놈도 같이 잡아 봐야겠다.”

“……이 미친 새끼……!!”

남자들이 걸음을 떼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앞에 나서는 데에도.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어떤 남자인지, 정태의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숱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간간이 부분적으로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의 잔인함도, 포악함도, 사람들을 하나씩 눕혀갈 때 그가 어떤 표정을 하며 어떤 눈을 하는지도, 정태의는 몰랐다.

그저 일부를 통해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 실성한 듯 표정 없는 얼굴이며 흐려진 초점, 기계처럼 정확하고도 거침없이 움직이는 몸짓.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격렬한 발작도 없이 그저 냉정하고 조용하게 사람들을 조각내어 가는 그 모습을, 정태의는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기계 같았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목적으로만 보는 기계다.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인형처럼 아름다운 그 기계는 섬뜩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의 살점을 뜯어내는 데에도, 그 살점 안을 채우고 있는 붉고 푸른 것들을 쥐어뜯는 데에도.

그가 지나간 곳에는 점점이 떨어져 원래는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살점이 흥건한 피웅덩이 속에 고여 있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분.

온몸이 피로 범벅되어 있는 그는 이윽고 귀를 긁어 대는 비명조차 멎고 신음소리만이 벌레처럼 움틀거리는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구두에 묻은 핏물이 신경 쓰이는지 건초에 문질러 닦으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이상 그곳에는 그를 공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땅에 쓰러진 여섯 명의 남자는 더 이상 그를 해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말들이 그렇게 많이 떠돌았을 텐데, 너희들은 정말로 어리석어…….”

마치 안쓰럽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조금의 한탄도 동정도 없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다.

고개를 든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한쪽에 서 있는 정태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태의가 미처 끼어들 틈도 없이, 혹은 끼어들고자 해도 오히려 그 남자들 때문에 가로막혀 끼어들 수도 없이, 그렇게 넋 놓고 있는 사이에 그곳은 이미 조용해졌다.

“어……. 아직도 거기 있었어?”

크리스토프는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투가, 이미 옛날 옛적에 어디론가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듯하다.

“크리스토프, 이 사람들은…….”

“살아 있어. 죽이진 않았어. 여기는 필드가 아니니까 죽여선 안 되지.”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 억지로 암기라도 시킨 것처럼 필드가 아닌 곳에선 죽이지 않는다고, 또박또박 말한다.

정태의는 낯빛을 굳힌 채 그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나마, 누군지 몰라도 저 머릿속에 입력은 시켜 둔 모양이다. 허락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위험한 이 남자에게.

크리스토프는 소매로 피 묻은 얼굴을 훔쳤다. 그러나 소매도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소용은 없었다.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숨도 허덕이지 않는다.

이성도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자……, 그럼 그놈을 마저 잡으러 가 볼까.”

크리스토프는 목을 천천히 양쪽으로 까닥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놈이라니.”

“이놈들 위에 앉아 있는 놈.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책임을 물어야지. 그러잖아도 슬슬 한 번쯤 정리를 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었어. 이참에 가 봐야지. 오히려 잘됐어.”

정태의는 이내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

리하르트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지금 그들이 다시 맞선다면, 그야말로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 집안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아, 괜찮아, 괜찮아. 오늘 그놈은 바Bar에 가 있을 테니까.”

“바Bar?!”

“그놈이 가지고 있는 널찍한 술집이 하나 있지……. 마침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그놈이 거기에 가 있을 거란 말야.”

평소에는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겨 두고 화요일마다 가서 체크를 하거든, 하고 덧붙이며 크리스토프는 손을 휘휘 털었다. 손끝에 고인 핏방울이 떨려나갔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안쪽에 밀실을 몇 개나 만들어 놓고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수상쩍은 술집이 있거든. 책임을 물으러 찾아가기에 아주 딱이지 않나? 그래, 가는 김에 칵테일도 마시고 오면 좋겠군. 거기에 독이나 타지 않으면 좋을 텐데.”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선뜻 걸음을 돌려, 마사 밖으로 곧장 걸어갔다.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채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뭔가 대단히 귀찮아질 것 같았다. 아니, 귀찮아졌다.

“……일단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 두고…….”

발치에서 시체처럼 뒹굴며 아주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는 그들은, 어서 어딘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곧 정말로 시체가 될 것 같았다. 원래의 모습이 어땠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꼴이 된 그 남자들을 우선 어떻게든 해 놓고…….

“……젠장. 크리스토프를 따라가서 말려야 할 텐데……. 진짜로 남의 가게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 남을 놈이었잖아.”

정태의는 점점 멀어져 가는 크리스토프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이 남자들을 수습해 놓는 동안 놓칠 게 뻔했다.

그러나 그가 없는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며 헛수고를 하는 동안, 잠시 화장실이라도 갔다 온 모양인 경비가 돌아왔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순식간에 끔찍한 지옥도로 바뀌어 버린 마사 안을 보고 경비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아마도 그 자리에 홀로 멀쩡히 서 있는 정태의를 수상쩍게 여긴 듯 홉뜬 눈으로 정태의를 보며 더듬더듬 뭐라고 소리쳤지만, 정태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병원에 연락 좀 해 줘요. 저택에도. 응? 부탁할게요.”

피비린내 나는 이 현장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부들거리는 경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정태의는 얼른 마사에서 뛰쳐나왔다. 뒤에서 경비가 뒤늦게야 뭐라고 소리쳤지만 듣고 있을 귀도 없었다.

이미 크리스토프는 차고 쪽을 향해 저택의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정태의는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 달렸다.

젠장, 뭐가 이래. 어쩌다 이런 사태가 됐지. 평화롭게 살고 싶었는데 왜 또.

입 속으로 욕설을 한 바가지 쏟아내면서, 정태의는 저만치 멀리, 차고 안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세단에 차 열쇠를 꽂아 넣는 크리스토프를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죽어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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