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백
“우와……, 멍 봐라, 멍.”
정태의는 거울로 옆구리를 비추어 보면서 혀를 찼다.
옆구리에서 배 쪽으로 약간 앞, 그곳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시커멓게 변색될 거다.
“이러다 온몸이 총천연색으로 물들겠다.”
정태의는 혀를 끌끌 찼다.
이미 거울 속에 있는 모습만으로도 색깔이 화려했다.
얼마 전 얻어맞은 얼굴 하며, 팔꿈치 하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멍도 부위별로 울긋불긋해졌다.
타박상이란 건 그나마 견디기 쉬운 아픔이다. 호되게 맞았다 해도 아픈 건 하루이틀, 그 정도만 지나면 어딘가 스치거나 부딪히지 않는 이상은 평소에는 그 아픔을 거의 느낄 일이 없다. 그러다가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다 나아 버리는 것이다.
“그게 좋아, 모르는 사이에 나아 버리는 거.”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샤워기로 온몸에 묻힌 비누거품을 씻어내었다.
조금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북북 문지르다가 멍 위를 눌러서 잠시 욕실 벽을 짚고 부르르 떨어야 했던 걸 생각하며, 거품은 살살 조심해서 씻어낸다.
“이건 무슨 매 맞는 아내도 아니고.”
몸 군데군데 들어 있는 멍을 보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따끈따끈한 옆구리 멍을 내려다보며 슬슬 문질렀다. 손만 닿아도 아프다. 그러나 이것도 내일이나 모레쯤 되면, 일부러 누르지 않는 이상은 아프다고 생각지 않게 될 거다.
“역시 총이란 건 사람이 쥘 물건이 아니야. 위력이 반도 안 되는 모형으로 손톱만 한 고무조각 좀 맞았다고 이 꼴이냐.”
탄환 대신 쓰인 것이 지우개가 아니라 좀 더 단단한 물건이었거나, 혹은 모형총의 위력이 더 세었거나 했더라면, 정태의는 자칫하면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 가는 거야 무섭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수술이라도 해야 하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체질상 마취가 잘 들어먹는 체질이 아니다.
정말이지 총이란 걸 발명해 낸 놈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겨서 돌팔매질을 해야 한다니까, 하고 투덜거리며 정태의는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욕실의 거울에 다시 한번 자신의 울긋불긋한 몸을 비춰 보고, 그러면서 적당히 근육이 잘 붙어 딱 보기 좋은 스스로를 보며 흐뭇해하기도 한 뒤에야 욕실 선반에서 약통을 집어 들었다.
옆구리가 몹시 욱신거리는데 적당히 발라 둘 만한 게 없어 뒤적거리다가 찾아낸, 요전에 크리스토프가 아침나절에 갑작스레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가져왔다가 놓고 간 호랑이 연고였다.
그 특유의 알싸한 냄새에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옆구리를 슬슬 문질렀다.
“이 연고병에 써 있는 수상쩍은 문구―호랑이뼈 포함―가 사실이라면, 호랑이가 멸종 위기에 처한 이유는 여기다가 넣을 호랑이뼈를 구하기 위해 중국 놈들이 호랑이를 있는 대로 몽땅 잡아들였기 때문일 거야…….”
근거 없는 종족 비방을 중얼거리며 연고를 다 바른 정태의는, 그만 욕실에서 나가려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욕실에서 나가기 직전, 멈칫 걸음을 멈춘다.
환기구를 통해 이어진 옆방 욕실, 아마도 욕실 자체는 아닌 것 같았고 문을 열어 놓았는지 그 욕실에 이어진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돌아오는 인기척이다.
“어…….”
정태의는 서둘러 옷을 적당히 걸쳐 입었다. 그리고 옆방으로 향했다.
드디어 크리스토프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간은 이미 상당히 늦어져 있었다. 저녁 시간은 아까 지났다.
“이봐, 크리스토프.”
침실 문을 노크하고서 거의 동시에 열었다.
역시나 욕실에서 잘못 듣지는 않아, 그 안에서 크리스토프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지도록 워낙 돌아오지 않아서 자신이 못 본 사이에 돌아왔다가 다시 외출했나 싶었는데, 크리스토프는 지금 승마복을 벗고 있는 참이었다.
의외로 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는 녀석이니 저 차림으로 다른 일을 하러 가지는 않았을 테고, 오후 내도록 숲에 있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는 침실 문을 열고서 그 문턱에 기대어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태의를 흘끔 보고는 “뭐야.” 하고 짧게 물었다.
그래도 대답을 하는 걸 보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너 손은.”
정태의는 가장 신경 쓰이던 것을 제일 먼저 물었다. 아까, 분명히 크리스토프도 손바닥이 온통 찢어져서 피범벅이 되었었다.
웃옷의 단추를 풀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기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그거 물어보려고 찾아왔나?”
낯을 찡그리며 귀찮다는 투로 말하는 크리스토프에게 정태의는 그래, 하고 부루퉁하게 대꾸한다. 그러면서 그의 손으로 시선을 주었다.
몇 겹이나 상처가 나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던 손은―당연하게도―피가 멎어 있었다. 손수건으로 두 번 감아 손등에서 매듭을 묶은 손이 옷의 단추를 마저 풀어낸다.
“제대로 소독약으로 닦아내고 치료는 한 거야?”
“이 정도야 흔하게들 나는 상처인데 뭘 그렇게 거창하게 그래.”
그냥 바지춤에 두어 번 닦기만 했을 뿐이라는 듯한 어투에 정태의는 낯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으로 흔하게 나는 상처는 아닐 듯싶었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풀어 봐. 약이라도 바르고 제대로 처치하게.”
정태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보고서야 이놈이 남이랑 닿는 걸 싫어했었지, 하고 떠올린다.
정태의는 다시 손을 거두며 혀를 찼다.
“보기라도 하자. 한 번 풀어 봐.”
정태의가 다시 말했지만 크리스토프는 들은 척도 않았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의 표정이 좀 희한해지는가 싶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를 살피는 눈치이더니,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정태의에게 묻는다.
“너 약 냄새가 나잖아.”
이놈도 개코다. ……아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강렬한 냄새는,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위치에서는 알아채지 못하는 편이 더 어렵다.
“응, 멍이 좀 들었어. 아, 네가 내 방에 두고 간 연고 좀 내 마음대로 썼다.”
“멍이 얼마나 들었기에 약을 발라. 어디 봐.”
크리스토프는 낯을 찌푸리며 턱짓으로 옷을 들어올려 보라고 했다.
거 뭐 좋다고 보려고 해, 네 상처나 좀 보자니까,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정태의는 셔츠를 들어올렸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옆구리를 보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꽤 심하게 들었잖아. 어디 부딪힌 것 같진 않고……, 누구한테 맞았어?”
“일레이.”
정태의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대답을 하자 크리스토프는 기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표정으로 잠시 머리를 기울이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냉담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냐. 그 녀석이 지금 네게 손을 댔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설령 손을 댔다면 이 정도 멍으로 그치지 않았겠지.”
매우 타당한 논리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맞아, 라고 감탄한 다음에야 웃었다. 어쩌다 보니까 실수로 그렇게 됐어, 라고 대답하는 정태의의 말을 들으며 크리스토프를 아무 대답도 않고 그 멍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혀를 찬다.
“약이 뭉쳤잖아. 잘 문지르지 않고 뭐했어.”
“으음, 나름대로 잘 문질렀는데.”
정태의는 변명하듯이 중얼거리며 다시 상처 위를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간이같이 어디서 다치고 들어왔어.”
바보 취급하는 얼굴로 혀를 차며 구박하는 크리스토프를, 정태의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그 말을 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네 손에 묶인 그 손수건이 한결 심상찮아 보인다.”
“나는 다른 놈한테 가서 다쳐온 건 아니잖아.”
“자해가 더 나빠, 더!”
정태의는 검지로 마구 삿대질을 하며 혀를 찼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한 게 자해인 줄도 모른다. 아프면 나만 아쉬우니 다음부터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한다. 정태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심술궂게 한 마디 덧붙였다.
“기왕 상처를 입어야 한다면 차라리 타박상이 낫지, 열상 같은 거보다는.”
정태의는 멍 위를 실수로라도 콱 눌러 버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멍을 바라보던 크리스토프는 잠깐 생각하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열상이 나아. 아니면 자상이라든가.”
사뭇 진지하게 하는 말에 정태의도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지. 열상이나 자상은 자칫하면 죽거나 중상에 빠질 가능성도 높고, 세균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잖아. 낫는 데에도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고. 그런 점에서 타박상이 낫지.”
일단 말의 무게부터가 다르다. 타박상과 자상, 열상은. 경찰의 개입 빈도수를 따져 봐도 차이가 확 나지 않은가.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었다.
“타박상은 대체적으로 상대의 손이나 발 따위에 얻어맞는 경우가 많잖아, 무기를 쓰기보다는. 하지만 손으로 피부를 찢어 놓는 경우는 없으니, 열상은 직접 손이 닿을 일은 없지. 그런 점에서 타박상은 안 좋아.”
맞기도 하고 딴놈 몸도 닿아야 한다니 아주 최악이지, 하고 덧붙인다.
“……음……, 그런 의미로 타박상이 싫은 거구나…….”
정태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그나마 견디기 쉬워하는―아픔은 다르겠지만 이런 이유는 처음 들었다. 접촉기피를 하는 인간들은 모두 이런가, 설마.
정태의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양쪽 모두 상처를 입을 당시에 아픈 건 마찬가지다. 다쳤을 때 아프지 않은 상처는 없다.
그러나 타박상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를 누르지만 않는다면 아프지 않다. 상처는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어느 순간 깨닫고 보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열상은 그렇지 않다. 상처가 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아프다. 진물도 나고, 곪기도 한다. 그러다가 더께가 생겨 겨우 아프지 않아졌다 해도, 결국은 흉터가 남는다.
상처란 뭐든 그렇듯 자신이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정태의는 자신이 다친다면 가능하면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래도 아픈 줄도 모르고 깊어지는 병보다는 낫지.”
아픈 줄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몸이 아픔을 호소하지 않아서 그렇다. 아프다고 외치는 걸 가로막아서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셔츠를 다시 덮어버린다.
“너 손이나 이리 내 봐.”
정태의는 괜히 부루퉁하게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순순히 손수건을 풀었다. 건드리지 마, 라고 말하는 건 잊지 않는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지독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아까는 아마도 피투성이가 되어 더욱 심하게 보였었나 보다.
약을 바르거나 치료를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다행스럽게 덧나거나 하지는 않고 잘 아물어들 것 같은 그 손바닥을 보고,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하고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다시 손수건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급사, 병원에서 수십 바늘 꿰맸다더라.”
“흐음.”
크리스토프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정태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파편 때문에 치료하느라 좀 애는 먹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끝났다더군.”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는 것 같다.
정태의는 침대 발치의 스툴에 앉았다. 그리고 마저 옷을 갈아입는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오늘 올리버 봤다. ……멀쩡하게 잘 웃고 놀더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벗은 옷을 옷걸이에 걸면서,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말없이 옷장 안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러다가 정태의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 표정에는 다소 성가신 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뭘 착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걱정하지 않아.”
그는 정태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옷장 문을 닫았다. 가만히 문을 닫는 그 손매에서 짜증스런 빛이 보였다.
“그리고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 두지. 그 급사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 하나 안 했어. 아까 이 방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잊어버려서, 조금 전에 네가 말했을 때에야 생각났단 말이다. 잘못 생각하지 마.”
“어, 미안.”
정태의는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순순히 사과했다. 애초부터 그에게 어떠한 뜻을 밀어붙이거나 논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생각나서 한 말일 뿐이야. 네가 어떤 식으로 생각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았어.”
정태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정태의를 마주보며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눈앞에 앉아 있는 게 대체 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흠, 하고 불편한 한숨을 토해낸 크리스토프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단 그 급사뿐 아니라 늘 그랬어. 내가 누구를 어떻게 했다든가, 그런 건 별로 생각나지 않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다만―.”
크리스토프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뭐라고 하는 게 옳을까 고심하는 듯 말을 고르다가 불쑥 중얼거린다.
“시끄러웠을 뿐이야.”
“……. 불쾌하게 깨어나는 아침처럼?”
“음……비슷해.”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대꾸하곤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그는 그럴 때가 종종 있었다. 아니, 대부분의 아침마다 그랬다.
체질적으로 아침에 일어날 때 힘들어하는 그는 늘 오전에는 기분이 언짢은 편이었다. 간혹 정태의가 그를 깨우러 가는 날에는 일주일에 대여섯 번 꼴로 잠자리가 사나웠던 크리스토프를 마주해야 했다.
그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끊임이 없었다.
크게 소리치듯 들리기도 했고 조그맣게 들릴 때도 있었고, 때로 운 좋은 날이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하게 속삭이기도 했다.
정태의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기분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마도 그 목소리가 작은 편인 모양이었다.
“결국 사람은 말이지.”
정태의는 불쑥 중얼거렸다. 기지개를 켜듯이 허리를 주욱 펴다가 아야야, 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만다. 멍이 든 옆구리가 욱신하게 결렸다.
다시 허리를 구부리고 멍 위를 문지르면서, 정태의는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인이 좋으면 되는 거야. 주위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궁극적으로 본인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정하는 건 자신이거든. 이를테면 네가 엄청난 패륜을 저질러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욕하고 손가락질하면서 네 불행을 바란다 해도, 네가 거기에 개의치 않고 홀로 희희낙락 만족스럽게 살아간다면 그들이 네게 억지로 불행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 ……글쎄, 그게 과연 진정한 행복의 정의에 맞아 들어가는지는 차치하고 말이지.”
어쨌거나 너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만,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입맛을 다셨다.
옆구리가 아파서 그런지 오늘따라 입맛이 더 쓰다.
정태의는 기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이 한 말은 위로가 아니다. 사실은 신랄한 매도다. 그렇기 때문에 정태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 좋네, 안 좋아……. 오늘 끝까지 영 안 좋아…….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굳이 자신의 말에 예를 든다.
“일레이를 봐. 그놈을 죽이고 싶어하는 놈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놈을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미워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걸.”
아니, 사실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아주 극소수의―한 손으로 꼽을 만큼의―사람을 빼놓고 과연 있을까 싶다.
“그래도 그놈은 잘 살잖아.”
타인의 말에는 휘둘리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보아 아무리 따져 봐도 그는 선이 아니라 악인데도, 그는 유유자적하게 잘 살고 있었다.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기를 원하는 사회적 바람의 현실은 그런 거다.
선한 사람이 결국은 잘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하게 살아도 힘들 수 있다. 악한 사람이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또한 잘 살 수도 있다.
무릇 세상은 순리대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순리라는 것을 정태의는 아직 잘 알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만족스럽게 살고 있지. 실제로.”
허공에서 빙글빙글 도는 어떠한 법칙에 대해서 멍하니 생각하는 정태의의 뒤에서,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목소리가 있었다.
흠칫,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지워 버렸다. 멍든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잠시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굳어 있던 정태의는, 이윽고 인상을 쓰면서 천천히 돌아보았다.
“기척 좀 내고 다니시지.”
“내가 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데.”
어느새 크리스토프의 방문턱을 밟고 있던 일레이가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옷장 문에 기대어 정태의와 대치하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은 저녁에 안 보이더군.”
“쉬다 왔지.”
“흐음. ……그런데 어째 낯익은 냄새가 나는군.”
일레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정태의는 흰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개코였다.
“너도 알고 있나 보지?”
크리스토프는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일레이는 고개를 기울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 녀석이 바른 약. 정창인에게 받은 건데 그 녀석은 알더군. 나는 냄새도 이상한 그런 약은 처음 봤는데. ……그런데 정말 효과가 있는 건 맞나? 차라리 멍든 데에는…….”
크리스토프는 애매한 듯이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옷에 가려진 정태의의 배를 노려본다.
일레이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약? 약을 바르다니 무슨 약을.”
“……타박상 약.”
정태의가 중얼거리며 옆구리를 엄지로 가리켰다. 그러자 일레이는 약간 눈을 크게 떴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난 듯 ‘난 잠시.’ 하고 말을 남기곤 방에서 나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그의 자취를 망연히 쳐다보며 정태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와서 나갔나 보다…….”
“왜 갑자기 내가 와서 나가.”
“아니면 나갈 이유가 없잖아. 시기도 딱 맞아 떨어지네. 까마귀는 날고 배는 떨어지고……. 그러니까 네 탓이지.”
“…….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네 탓은 아니지만 네 탓이라는 뜻이지.”
정태의는 당당하게 주장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만다.
“그런데, 이런 밤중에 남의 방에 막 찾아와도 돼?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토프의 방에.”
“저 녀석과 같은 기동대에서 몇 년을 보냈는지 아나?”
코웃음을 치는 일레이를 보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인다. 크리스토프가 일레이의 갑작스런 침입에 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 그런 경험이 쌓여서 그런 모양이다.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정태의는 잠시잠깐 습관으로 붙었는지 저도 모르게 옆구리를 문지르며 혀를 찼다.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가 고갯짓을 했다. 응? 하고 쳐다보자 셔츠단을 턱으로 가리키며 고갯짓을 한다.
정태의는 잠시 머쓱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순순히 옷자락을 들어올렸다.
“오늘 내 옆구리 인기 좋구나…….”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정태의의 앞에서, 그는 드러난 피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냉랭한 눈에는 별다른 빛이 떠오르지 않는다.
“…….”
정태의는 자신의 배 부근을 찬찬히 살피는 그를, 마찬가지로 찬찬히 살폈다.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설마, 미안하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면 그 인사야 받아 마땅하지만, 별로 화나거나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놈이 실수라 해도 제가 쏴 놓고는 사과도 안 해?!’라는 울분은 느꼈을지언정―그런데 원래 그런 놈이라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고였다.
악의 없는 사고에 대해 감정적으로 비난을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대처의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예전에 인간관계론 강의에서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혹여라도 그가 이걸 마음 쓰고 있는 거라면.
정태의는 고개를 외로 꼬고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슬며시 웃으면서 불쑥 말한다.
“이 집에 온 뒤로 나, 너한테 참 여러 번 얻어맞는다.”
그러자 그때까지 묵묵히 정태의의 드러난 몸통을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렇게 봐서는 그가 과연 정말로 미안하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뿌듯하게 구경하는 것뿐인지 구분이 안 간다.
눈이 마주쳤다.
정태의가 실실실 웃자, 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픽 웃는다. 그 웃음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그러니까 베를린으로 돌아가라고 했잖아. 왜 굳이 고생을 자초하고 있어.”
“아니 그러니까 책이…….”
“책.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을 대신 찾아다 주면, 베를린으로 돌아갈 텐가?”
일레이는 천천히 다가와 정태의의 옆에 앉았다. 한 뼘 정도의 틈을 두고, 그렇게 앉는다.
장난스런 웃음을 띠는 듯 마는 듯,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배를 긁었다. 그러다가 멍 위를 쿡 눌러서 윽, 하고 짧게 중얼거리고 난 뒤에야 얌전히 다시 옷자락을 내렸다. 그걸 보고 일레이가 혀를 찼다.
“뭐……,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오래 머물 이유는 없겠지.”
그렇게 말한 정태의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묻는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보내고 싶어하는 이유는 뭐야. 요전부터 자꾸 나를 돌려보내려는 눈치인데……, ……진짜로 몰래 두 집 살림을 하나?”
뒷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저 성격에 무슨 두 집 살림. 저놈은 달리 마음에 드는 인간이 생기면 아예 당당하게 터놓고 데리고 올 것 같았다.
“두 집 살림?”
대단히 뜨악하다는 투로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마치 처음 듣는 단어라는 것처럼.
그 옆에서 정태의는 홀로 공상에 젖어 있다가, 여전히 공상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일레이를 쳐다본다.
“그럼 난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네. 굳이 독일에 안 있고 그냥 우리 집에서……. ……아. 나 수배범이구나.”
말을 하다 보니 생각났다.
정태의가 베를린에 있는 이유의 거의 대부분은 이 남자 때문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카일의 보호력 때문이었다. 수배범의 신분으로 나름대로 맘 편하게 연금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건 다 그의 덕분이다.
그렇게 되면 어쩌지, 형이나 삼촌한테 매달려 볼까, 하고 중얼중얼, 불안한 미래의 계획을 미리부터 짜고 있는 정태의의 머리 위로 대단히 황당하다는 시선이 날아왔다. 그러나 정태의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눈길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워. 그런 일이 벌어질 예정은 향후 없을 테니까.”
“어, 그래?”
그 말에 정태의는 불안한 미래 예정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뭔가 다른 일이 터져 미래가 불안해질지는 몰라도, 저 일로는 별로 불안정해지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허튼 말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능하면 승계일이 오기 전에 베를린으로 돌아가도록 해.”
일레이는 다시 조금 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정태의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승계일과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것의 상관성을 설명해 주길 기다리며.
일레이는 팔을 뒤로 뻗어 스툴의 바로 뒤에 있는 침대를 짚고 편안히 앉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입을 연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가 오면 그는 더 불안정해질 거다.”
지금껏 이어지던 대화와 맥락이 맞는 듯 안 맞는 듯,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는 낯을 찡그렸다.
“저 이상 어떻게 더 불안정해져.”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나간 문간을 손가락질했다.
지금도 충분히 불안정하다. 그나마 정태의의 앞에서는 정상적인 면모를 더 많이 보여 주고 있었지만, 정태의가 볼 때 크리스토프는 이미 충분히 불안정한 인간이었다. 저보다 더 불안정하면 병원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싶을 정도로.
일레이는 편하게 뒤로 기대어 앉은 상태에서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곳, 천장 조금 아래에서 흔들리는 조명등 쪽으로 눈길을 향한 채 갑자기 불쑥 말했다.
“나비 죽여 봤어?”
“뭐?”
“나비. 아니면 그래, 잠자리라든가.”
정태의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일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은 나른한 어조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좀체 알 수 없었다.
“……응.”
정태의는 입매를 약간 찡그리며 대답했다.
어릴 적 집 근처에는 연못과 넓은 공터가 있었던 탓인지 잠자리가 많이도 날아다녔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잠자리는, 가을이 되자 어느새 꼬리가 새빨간 고추잠자리로 바뀌어 근처의 들판을 덮었다.
정태의는 동네 친구들과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녔다. 친구 중 하나는 나비 표본을 채집하는 것처럼 잠자리를 채집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친구의 잠자리망에는 잠자리가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많이들 죽곤 했다.
벌레처럼 죽어 있는 그 시체들을 보자 기분이 나빠져서, 그 뒤로는 잠자리나 나비 따위를 잡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비를 잡아서 날개를 떼고, 다리를 떼면서 놀기도 하지.”
일레이가 하는 말에 정태의는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아냐, 그렇게 놀지는 않았어, 하고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일레이는 희미하게 웃음 띤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릴 때에는 나비나 잠자리, 아니면 지렁이라든가 콩벌레, 그런 것 따위를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이면서 놀지.”
“음……그런 애들도 종종 있지.”
어릴 적에 그런 조그만 생명들을 한둘쯤은 죽여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하다못해 개미라도. 아이들은 천진하고 잔인하다.
어릴 때 보았던 동화를 지금 다시 읽으면 놀랄 때가 있다.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내용이었던가.
분명히 어릴 때와 똑같은 번역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내용의 책인데도 그랬다.
그때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즐겁게 보았던 이야기가, 지금은 군데군데 걸린다.
실상 잔인함은 동정과 함께 갖추어진 인간의 본성이었고, 자라면서 배우는 것들이 그 본성을 덮어 줄 따름이라고, 정태의는 가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순수한 의미로 따져본다면 아이가 어른보다 잔인하지. 재미로 웃으면서 개미 따위를 밟아죽이기도 하니까.”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개미를 죽이는 아이를 무서워할까?”
정태의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일레이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개미를 죽이는 것과 똑같은 감각으로, 다람쥐나 토끼, 개를 죽이는 아이라면.”
“…―.”
“크리스토프의 어머니는 크리스토프를 진저리칠 만큼 끔찍해했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이 일레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가슴속을 식혔다.
“‘토끼를 죽이는 게 개미를 죽이는 것과 뭐가 달라?’, 당혹스러워하면서 묻더군.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더라면서.”
“……. 너한테 물었다는 게 참 의미심장하군. 같이 죽이기라도 했어?”
정태의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웃었다.
“천만에. 이래봬도 나는 어릴 적에 이유 없이 개미나 나비를 죽인 적은 한 번도 없거든.”
철도 들기 전에 친구―정말로 친구였을까―에게 도끼를 휘둘렀다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정태의는 흰눈으로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곧 그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일레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굳이 짐승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어. 크리스토프는 어릴 적부터 정신이 좀 이상했지―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미로 따져서 말이야―. 고통이라는 것에 극단적으로 무감각했어. 타인의 고통에도, 자신의 고통에도. ……그나마 지금은 자신을 포장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하지,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해치는 거야.”
네가 개미를 밟은 것과 같이. 네가 파리를 죽인 것처럼.
“오히려 나보다 크리스토프를 더 거리끼는 아이들도 있었지.”
“그건……, ……좀 심각했구나.”
정태의는 바보스럽게 넋 놓고 웅얼거렸다.
일레이는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 침대를 짚은 그의 손이 이불 위를 천천히 두드렸다.
“문제는,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했다는 점이지. 감정적인 면에서 자기방어라는 게 없었거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끝을 쳐다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알 것 같아도 막상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태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받고, 받고, 받으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해 계속 무방비하게 내버려두면, 결국은 죽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저 이상하다,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녀석은 이중적으로 사고가 돌아가. 어떠한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어떠한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 그런데 그 녀석이 다른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게, 어머니란 거지.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어머니.”
일레이는 ‘……워하는 어머니이’, 하고 말꼬리를 약간 늘였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처럼.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보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계속 발치를 보다가, 까닥거리는 자신의 발가락을 보다가,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어.”
정태의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크리스토프는 어릴 적과 똑같은지도 모른다. 그는 순수하게 잔인했다. 자신의 행위에 별다른 의미를 두어 기억에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잔혹한 행위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기억에도 남겨두지 않는 건 옆에 앉아 있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와 일레이는 다르다.
어느 부분이?
“……. 정말이지…….”
정태의는 아, 정말 듣고 싶지 않았어, 괜히 들었다, 하고 투덜거리며 애꿎은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일레이가 문득 웃음 지었다.
“자, 그러면 말이지, 태이.”
입가에 떠오르는 그 희미한 웃음을 정태의는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네게 했을까.”
“……. 내 인생에 미친놈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건 너 하나로 충분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일레이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입가에 떠오른 웃음은 너무도 희미해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가늘어진 눈가에 밴 웃음기는 분명 ‘훌륭한 대답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로우면서도 냉정한 빛을 감추고 있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미친놈 하나 건사하는데도 참 벅차다……. 이러다 나중에 나한테 총질할지도 모르는 놈을.”
그 전에 어서 인간화시켜야 할 텐데 알면 알수록 참 갈 길이 멀다.
일레이 리그로우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곤 하나다.
그는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리라는 것.
바로 어제까지 아끼며 소중하게 다루던 것도 오늘 쓰레기통에 휙 내던져 버리는 일이 그에게는 흔했다.
그런 걸 보면―사실 감정적으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언제 그가 자신에게 총구를 돌려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 봐, 오늘도 쐈잖아. 사고라고는 하지만, 장난으로나마 쐈잖아. 총구를 나한테 대고.
정태의는 갑자기 또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아 입 속으로 투덜투덜 불평을 했다.
“……내가?”
그때,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감정이라곤 파편도 찾아볼 수 없이 싹 사라진 목소리다.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정태의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잣말인 듯, 그의 입술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의 그 혼잣말이 조금 전 정태의가 중얼거렸던 말에 대한 답변이라는 걸, 몇 초쯤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것이 너의 일상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또 다 들리게 이야기를 하다니. 아무래도 내가 정말 이런 놈들을 위해 상식학원을 차려야겠다. 기초단계로, 해도 될 말과 안 되는 말 강의부터 넣어서.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그에게 말했다.
“뭐 그때는 그때고. 어쨌든 지금은 잘 건사하고 살아야지.”
이러다가 훗날 언젠가 파장나면, 그때는 며칠쯤 아쉬워하고 말아야지. 나름대로 좋을지도 몰라. 옆에는 더 이상 미친놈이 없어, 가고 싶은 데 아무데나 갈 수 있어, 낯익은 우리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면 사소한 것들이 아쉬울 것 같다.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겨 관자놀이 부근에 손을 대고 가만히 정태의를 마주보고 있는 그의 까만 눈이, 두어 뼘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이렇게 이 남자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 남자의 눈은 때로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거나, 가끔 누군가와 일 이야기로 통화를 하고 있거나 할 때, 그 까만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좁아지며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까만색이 한색(寒色)이라는 걸, 정태의는 일레이의 눈을 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뭐 어때.
처음부터 그런 건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두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느니, 정신상태가 범인과 다르다느니 해도 이미 익히 알고 있던 바다. 그리고 그걸 다 알면서 정태의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것이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인 탓이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어째 무진장 먹기 좋아 보이네…….”
정태의는 문득 중얼거렸다. 바로 앞, 정태의를―혹은 그 너머 어딘가를―응시하고 있는 일레이가 거기 있었다. 다물린 입술이 오늘따라 눈에 띈다.
“…….”
정태의는 불현듯, 충동적으로, 고개를 주욱 내밀었다. 그리고 그 말없는 입술 위에 입술을 겹친다.
서로 다물고 있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입술에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하다. 상대에게도 피가 돌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 녀석에게 입 맞춘 게 몇 번이나 되더라.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천히 음미해 보니 제법 좋았다. 건조하지만 보드랍고 따뜻한 감촉이 마음에 든다.
“……. 이것도 괜찮네.”
정태의는 십여 초쯤 그렇게 입술을 대고 있다가 다시 몸을 원래대로 물리면서 중얼거렸다.
눈앞에는 여전히 일레이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조금 전과 달라,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차갑고 새카만 눈으로 정태의인지 뭔지를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던 그 얼굴이 아니다.
기이하다는 듯이 눈살을 희한하게 찌푸리고서, 그는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대고 있던 손도 꼼짝을 않는다.
“……. 아……, 되게 어이없어 하네. 나는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 마음 상하게.”
정태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기묘한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던 일레이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없다기보다는 난데없다는 편이 옳겠군.”
“난데없다……, 혹시 그 뒤에 종종 ‘봉변’이라든가 ‘횡액’ 같은 말이 붙는 그 ‘난데없다’?”
정태의가 진지하게 되묻자 일레이는 문득 눈매를 휘었다.
“아마 네가 알고 있는 ‘난데없다’와 내가 알고 있는 ‘난데없다’의 뜻이 다르지는 않을 건데, 그렇게 말하니 몹시 다르게 들리는군.”
그 말을 마침과 동시였다.
일레이가 손을 뻗었다. 그 하얗고 커다란 손이 정태의의 귓불을 스쳐 머리 뒤쪽을 넉넉하게 감쌌다. 그리고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입술이 겹쳐졌다. 그러나 명확하게 조금 전과 다르다.
……아. 이놈 맞구나.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감촉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혀가 꼭 몸속까지 파고들 것 같다. 그 입술은 아무래도 오래지 않아 자신을 통째로 훌쩍 삼켜 버리지 싶었다. 혹은 그 전에 숨이 막혀 죽거나.
이 남자와 입술을 겹치면 꼭 이랬다. 처음엔 가볍게 부딪치는 정도로 시작하더라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대로 꿀꺽 삼켜지는 게 아닌가 싶은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뺨과 머리를 감싸쥐고 입술을 밀어붙인 일레이는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맹수나 짐승, 혹은 아예 종이 다른 무언가처럼 정태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입을 맞춘다는 귀여운 말이 아니다.
난 가끔 이놈이 무섭다니까……. 이러다 정말로 물어뜯을 것 같아서.
정태의는 금세 숨이 차올라 허덕이기 시작하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 이대로 있다가는 또 숨이 막혀 기절하겠다 싶어 그를 떠밀었다. 그러나 조금 밀리는가 싶던 그의 몸은 그대로 단단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모양이다.
“잠까…….”
그의 손 안에서 애써 고개를 틀어 겨우 두어 마디 입을 열던 정태의는 그쪽으로 쫓아온 입술에 다시 숨을 먹히고 말았다.
잠깐, 이 상황은 좀 문제가 있다.
일단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숨이 막혀서 기절을 할 것 같았고, 또한 기절을 안 한다 해도 이대로 가면 이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는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게다가 방주인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다.
“잠, 잠깐……!”
다시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휙 돌리고 외쳤지만, 이 남자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태의의 당혹을 즐기는 듯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곧 정태의의 입안으로 웃음이 흘러들어온다.
뭐라고 소리라도 치면서 걷어차 버릴까 생각하던 정태의는 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소리도 치고, 걷어차기도 하자.
정태의는 이 느낌을 좋아했다.
가끔 일레이는 정태의와 입을 맞출 때 뭔가 나름대로 재미있는 대화가 오가던 참이거나, 혹은 뭔가가 불현듯 떠오르거나 할 때 소리 내어 웃을 때가 있었다.
한창 입술과 혀를 겹치면서 그렇게 웃으면 입 안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입 안을 통해 곧바로 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상대의 웃음을 먹고 있다는 그 느낌을 정태의는 좋아했다.
그래서 지금은 잠깐 얌전히 있기로 했다. 비록 저 손이 허리와 그 아래쪽에서 불온하게 움직이기 시작해도, 점점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도.
잠깐만. 아주 잠깐만 더.
그렇게 넋을 팔고 있었던 탓이었다. 정태의는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방음이 잘 되어 있다지만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하면서 귀를 기울이면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이곳에서, 정태의는 그 발소리를 놓쳐 버렸다.
그렇기에 문이 열린 것은, 비록 그 사람이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온 것은 결코 아니라 하나, 조금의 전조도 없이 닥쳐온 갑작스런 사태였다.
“전에 이걸 발랐더니 멍이 빨리 빠졌었어. 타박상이라면 그냥 놔둬도 자연히 낫겠지만, 그래도 뭐 기왕이면…….”
경쾌한 말소리와 함께 덜컥 문이 열렸다.
그 순간, 갑자기 저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듯 정태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쯤 감고 있던 눈을 확 부릅떴다.
자신의 시야를 반 넘게 채우고 있는 일레이의 너머로, 문고리를 잡고서 그 앞에 멈춰 서 있는 크리스토프가 보였다.
한 손에 약병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 막 들어오던 그는, 두 사람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
헉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잠시 넋을 잃고 망연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고, 크리스토프는 그리 망연한 얼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그곳에서 태연하기 그지없는 것은 오로지 일레이뿐이었다.
“……. …….”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알 텐데도, 또한 그 사람이 이 방의 주인이며 자신과도 안면이 있는 크리스토프라는 걸 알 텐데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어온 걸 모르기라도 하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하던 일, 정태의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등을 문지르던 손짓을 가로막은 것은 정태의였다.
“잠깐, 잠깐, ……잠깐! 멈춰!!”
정태의는 두어 번 속삭여도 듣는 척도 안 하는 일레이를 노려보며 그를 확 떠밀었다.
스툴 위에서 굴러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힘을 다해 밀어젖혔지만 그가 굴러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몸이 좀 떨어져, 그 이상 접근하진 않았다.
한창 하던 일을 방해받은 일레이는 좋지 않은 얼굴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왜.”
“왜냐니, 크리스토프가 왔다고.”
정태의는 그 못마땅한 목소리에 질세라 사납게 받아치면서 다시 한번 그를 떠밀었다. 순순히 떠밀려 한 뼘쯤 더 물러선 일레이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방해하는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군.”
일레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아예 발로 그의 허리께를 꾹꾹 밀어냈다.
이걸 어쩌나, 낭패스러운 심경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저놈의 성격에, 제 방에서 이러고 있었다는 걸 쾌히 생각할 리가 없다. 비록 이 방에 정태의가 들어오는 건 이제 묵인해 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제 방 스툴에서―심지어는 침대와 맞붙어 있는 스툴에서―남자 둘이 뒤엉겨 있는데 그걸 보고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게…….”
그러나 변명을 하려다 말고, 크리스토프가 뭔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거기에는 어느새 버클이 풀어지고 퍼스너가 내려가 있는 바지 앞섶이 있었다.
“……!”
조금 전까지 하반신의 감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짓을 막 하려고 했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정태의는 얼굴이 굳었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아랫도리 사정이야 다 이해하고 넘어갈 만한 나이다. 중고생도 아니고, 딱히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줍어하며 숨길 일도 아니다.
그가 걱정해야 할 건 크리스토프의 침대 스툴 위에서 흐트러져 있었다는 사실이지, 정사를 벌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심각한 장면을 보여 준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옷 좀 흐트러지고 입술 좀 부딪치는 정도 아닌가.
……다만 문제라면, 둘 다 남자라는 점일까.
크리스토프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짐작은 하고 있을 터였다.
일레이가 UNHRDO에서 교관을 하던 무렵에는 정태의를 찾아내기 위해 온 곳을 다 족치면서 다녔었고, 찾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 고관의 별저에서 빼내오기 위해 동료들을 동원해 테러범이 되었다. 그런 뒤에는 그렇게 들어가기 싫어했던 본가에 들어가서 정태의와 같은 집에서 살기까지 한 지 몇 년.
이미 동료들 사이에서는 소문 날 만큼 다 났다. 동료들뿐 아니라 일레이와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정태의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바보가 아니라면―혹은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물을 어지간히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면―그들이 범상치 않은 관계이리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역시 이런 상황은 민망했다. 서로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일들을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발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목이 뜨끈뜨끈한 것이, 곧 달아오르려나 보다.
그러나 그때였다.
“됐어.”
정태의가 그렇게 멋쩍어하며 발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의외로 선선한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문간에 문고리를 잡고 서서, 크리스토프는 여상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어색해하냐고 비웃는 것도 같고, 별일도 아닌 걸로 사람 귀찮게 한다는 투 같기도 하다.
“나는 동성애에 대해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그러니 혹시라도 내 눈치를 보는 거라면, 그럴 것 없어.”
“어…….”
정태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눈만 껌벅거렸다. 뜻밖에 담담하고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일레이를 흘끔 보았다. 도중에 방해를 받아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고 스툴에 앉은 그는, 조금 떨어져 있던 테이블을 통째로 그 앞으로 끌고 와 그 위에 놓여 있던 궐련 상자를 열고 있었다.
실제로 피우는 용도라기보다는 장식에 가까운 의미로 놓아둔 나무상자에서 궐련을 꺼내어 입에 문다.
크리스토프는 넋 놓은 얼굴로 일레이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정태의를 보고,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더 얘기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남 일에 크게 흥미가 있지도 않고, 남의 취미에 대해 그렇게 몰이해하지도 않아.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나는 동성애자에게는 감탄하는 편이라고. 힘든 관계일 텐데 그렇게 함께 있기로 결심하다니 보통 각오는 아니었을 것 아냐.”
정태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말을, 뜻밖의 사람에게 듣게 되면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는지 혹은 눈앞의 그 사람이 자기가 알던 사람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정태의는 그런 짧은 피아의 의심을 거쳐, 이윽고 크리스토프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기색이라는 걸 깨닫고 감탄해 버렸다.
이렇게 의외로운 인간적 면모가 있었다니.
소수자의 아픔에 대한 이해심이 있는 인간일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대다수 일반인에 대한 이해심도 없으면서 이런 류의 이해심을 갖추고 있으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어……그래.”
정태의는 조금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남의 방에서 동의도 구하지 않고서 궐련에 불을 붙인 일레이는, 그 역시 조금 멍한 얼굴로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었다.
궐련을 입에 물고 뻑뻑거리면서 뚫어져라 크리스토프를 보던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천장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해한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이해해 줘서 고맙다.”
비록 의외의 면모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어 정태의는 더듬거리며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그러면서 신기하다는 눈치로 일레이를 본다.
“하지만 의외인걸. 릭이 남자를 데리고 산다고 해서 반신반의했었는데. ……설마 다른 놈도 아니고, 릭이 금욕을 견디며 살아갈 줄은 몰랐어.”
크리스토프는 자신이야말로 감탄스럽다는 듯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순간 정태의는 애매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멈칫했다.
음……?
지금 뭔가, 흐름에 안 맞는 말을 들은 것 같았는데.
정태의는 웃는 채로 굳어진 얼굴 그대로 빤히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며 정태의를 보았다.
“따지고 보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애정이 없어도 몸만 섞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남녀 관계에 비하자면, 몸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까 오로지 마음으로만 유지될 수밖에 없는 동성간의 관계가 더 순수하다고 할 수도 있지.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몸을 사릴 것까지야 없지 싶은데.”
정태의는 경악과도 비등한 놀람 속에서, 크리스토프를 아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리라는 듯이.
나름대로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격려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할 만큼의 마음씀씀이가 있는 인물이라니 그것도 또 하나의 사소한 놀람이다. 그런데…….
“자꾸 귀가 좀 이상하네……. 아니면 지금 내가 머리가 좀 둔해졌나? 하긴 어제 소설 본다고 세 시간도 채 못 자긴 했지.”
정태의는 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흘끔, 다시 일레이를 보았다. 여전히 그는 천장을 보며 뻐끔뻐끔 연기만 피워올리고 있었다.
“…….”
아마도 자신이 좀 이해를 잘못 했지 싶었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성싶다.
“몸만의 관계……랄까, 아니 그 마음만의 관계라는 것 말인데…….”
정태의가 관자놀이 근처를 긁적거리며 머뭇머뭇 말을 꺼내자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왜.”
“아니……그 뭐냐, 동성간의 성관계에 대해서 잠깐…….”
“같은 성별 간에 성관계고 뭐고가 어딨어. 여자끼리는 넣을 게 없고, 남자끼리는 넣을 데가 없잖아. ……설마 몰랐어?”
크리스토프는 경악스런 눈으로 정태의를 보았다. 그리고 정태의 역시 경악스런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본다.
“……. …….”
정태의의 뜨악하게 부릅뜬 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크리스토프는 쯧, 하고 혀를 차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야 패팅까지는 할 수 있겠지. 사정만으로 따지면 수음이든 구음이든 가능할 테지만―그것도 섹스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근본적으로 몸을 섞을 수 없다면, 역시 관계를 이어 주는 건 감정이야.”
감정이라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희박한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도 아주 새로운 기분이었지만, 정태의는 그런 새로운 기분을 맛볼 정신도 없었다.
정태의가 멍하니 크리스토프를 쳐다보며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동안, 크리스토프는 저만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궐련만 피우고 있는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설마 저놈이 금욕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너와 저놈이 그런 류의 관계는 아니고 좀 특이하게 친한 관계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네.”
어쩐지 미묘하게 부루퉁한 목소리다. 불만스러워 토라진 아이처럼, 입매가 희미하게 꿈틀거린다.
아래를 쳐다보며 내리까는 속눈썹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그 위로 우울한 빛이 드리운다.
그 우울함의 이유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정태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고개를 든 크리스토프는,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정태의에게 쥐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여느 때처럼 돌아온 무덤덤하고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 멍 금방 빠지니까 발라. 여기저기 멍들어 있는 거, 보기 흉하니까. 그런 몸으로 내 앞을 왔다갔다거리면 눈에 거슬려.”
쌀쌀맞게 말한 크리스토프는,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태의는 그에게서 약병을 건네받은 채, 아직도 얼음처럼 굳어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알 수 없이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크리스토프는 지그시 정태의를 쳐다보다가―기분 탓인지 어쩐지 노려보는 걸로 보였다―문득 걸음을 돌렸다.
“난 식사를 하러 갔다 와야겠어. ……두 사람은 내가 돌아오기 전에 내 방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군.”
기분 탓이 아니었나 보다. 목소리에 찬바람이 불었다.
정태의는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는데 얼어붙은 몸이 좀체 풀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문이 닫혔다.
여전히 방 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은 어느 때보다 길어져, 정태의가 삐걱삐걱 간신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문이 닫힌 지 거의 분단위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지금 크리스토프가 뭐라고 했지?”
정태의는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불쑥 물었다.
“동성과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관계만큼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은 없다는 말이 주 요지 같던데.”
일레이가 별 흥미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정태의는 궐련을 거의 다 태워 가는 그를 망연히 쳐다보다가 도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금세라도 저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크리스토프가 다시 나타나 ‘조금 전엔 농담이었어.’라고 중얼거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더 기다려 봐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문밖에서는 사람이 서성이는 기척이 없었다.
“…….”
진심인가 보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고 간 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니 설마.
―나는 동성애에 대해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문득 그가 먼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정태의는 그에게 소리 높여 외쳐 줄 수 있었다.
아니야, 너는 엄청난 편견을 가지고 있어, 라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정태의는 흐느적거리며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다시 경악이 차올랐다. 조금 전에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 반추해 본다.
―몸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까 오로지 마음으로만 유지될 수밖에 없는 동성간의 관계가 더 순수하다고 할 수도 있지.
―같은 성별간에 성관계고 뭐고가 어딨어.
“아냐, 말도 안 되지. 이건 뭔가 크리스토프식 독특한 농담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나이에, 저 환경에, 저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정태의는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새 궐련을 다 태우고, 마음에 들었는지 새 궐련을 꺼내어 회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혹여 자신만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낀 듯, 이윽고 궐련을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고 뚜껑을 닫은 그는 정태의에게 대수롭잖은 시선을 주었다.
“뭘 그렇게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어.”
“지금 내 귀에는, 크리스토프가 남자와 남자와의 육체관계를 대단히 플라토닉하게 보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어.”
“그거 우연이군. 나도 그렇게 들었어.”
“…….”
그게 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일레이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일레이는 목이 뻐근한지 좌우로 가볍게 목을 까닥거렸다. 뚜둑, 뚜둑, 뼛소리가 난다.
“나를 그렇게 금욕적인 인간으로 봐 주다니, 30여 년의 사귐이 헛되었군.”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일레이를 움켜쥐고, 결국 참다못해 정태의가 호소했다.
“지금 이게 말이 되냐, 응?! 사내놈들만 득시글거리는 기동대에서 몇 년이나 굴렀다면서? 게다가 용병으로 불려나갔을 때에도, 주위에 온통 다 우락부락하고 환경상 여자에 굶주린 놈들이 우글거렸을 것 아냐!”
“아. 그랬겠지.”
“게다가 저놈 얼굴을 봐라! 생긴 게 저렇잖아! 세상 사람들이 죄다 예술을 아껴서 고이고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아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그런 건 요즘 TV만 본다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라고.”
“저놈 TV 안 보잖아. 아마 영화도 안 볼걸.”
“책은 보잖아.”
“저 녀석이 즐겨보는 건 인문철학서지. 동성애 코드가 나오는 책으로 본 거라곤 기껏해야 유미주의 작품 몇 가지겠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이렇게 엄청나게 놀라운데 이 남자는 몹시 태연했다.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말하는 그 태도가 퍽 기괴했다.
“……. 기동대에서는 어땠어. 크리스토프에게 접근하려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어? 그쪽엔 그쪽 취미가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나?”
“아니, 몇 있었지.”
“그런데?”
정태의가 묻자 일레이는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검지로 허공을 두드리면서 잠시 침묵한다.
정태의는, 반은 본인의 선택이었고 반은 불가피하게, 남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시간을 보낸 때가 많았다.
중고등학교부터 남학교였다. 여자라고는 교사나 교생, 식당 아주머니가 고작이다. 게다가 그 뒤에 진학한 곳은 사관학교.
여자생도를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그렇게 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여자수가 조금 된다고 하지만 남자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었다.
거기서 바로 군대에 말뚝 박으러 들어가서 몇 년 있다가 퇴역하고, 그 뒤 몇 개월 안 되어 숙부에게 끌려간 곳이 UNHRDO 아시아 지부. 다른 지부에는 여성대원도 있다고 하지만 아시아 지부에는 전혀 없었다.
만일 정태의가 동성 쪽으로만 마음이 가는 성향이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비관해도 될 만한 환경이었다.
그런 상황을 지냈기 때문에,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저 부분에 대해 저토록 무지하다는 사실이 거짓말이나 기적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렇게 눈 돌아가는 외모라면, 당연히 찔러 보는 인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질이 나쁜 경우 강간해 보려고 드는 놈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피해자가 굳이 본인이 아니라도 건너건너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 따위 때문에 그런 류의 사정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만 유지되는 순수한 관계. 금욕.
멍한 얼굴로 넋을 잃다시피 하고 ‘아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정태의에게, 잠시 동안 침묵하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일레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란 말이지.”
“뭘?”
“그럼 너라면 말이야.”
“응?”
“필드에 한 번 나갔다오기만 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칠갑을 해 오고, 가끔 수틀리면 발작을 일으켜서 확 뒤집어 놓고, 성격은 또 저렇지. 게다가 접촉기피증. 자, 어때. 건드릴 엄두가 나겠어?”
“…….”
정태의는 다시금 멍해져서 일레이를 보았다.
멍하고 하얗게 흩어져 있던 사고들이 하나씩 다시 모여들었다.
그래, 하긴 생각해 보면 그렇기도 하다. 저 성질머리에, 제 방에 사람 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는 데다, 옷자락 건드리는 것도 불쾌해하는 접촉기피증. 심지어는 사람을 도륙 내는 능력도 출중하다.
“……아.”
정태의는 그제야, 아까 일레이가 의아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얼굴을 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제 정태의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저 남자의 저 성격과 환경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 ……그래도 남녀관계는 알고 있었잖아. 설마 동정은 아니겠지.”
무심코 다른 사람의 성사정에 대해 중얼거린 정태의는 자신이 말해 놓고 자신이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말을 하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 역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 접촉기피증은 남자만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
“…….”
한동안 방 안에 침묵만 흘렀다.
***
공휴일이었다.
나날이 크리스토프에게 시달리며 그의 일을 돕는 정태의에게는 공휴일이든 평일이든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집안의 분위기는 달랐는데, 무엇보다도 본관이나 동익, 서익에 사람 수가 평소보다 많았다.
여느 때라면 일을 하러 나갔을 사람들 가운데 모처럼 휴일을 맞아 교외로 나가거나 놀러가지 않고 집에서 쉬기를 택한 사람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휴일이냐 평일이냐에 상관없이 오늘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던 정태의는 내심 성가셨다.
간이탑 위에서 뒹굴거리며 놀려고 해도, 중정에서 뒹굴거리려 해도, 평소보다는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평소에 워낙 사람이 없었을 뿐, 오늘도 절대적으로 보아 사람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워낙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늘 사람이 없던 간이탑 옥상에 한두 명쯤 있는 걸 봐도 붐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사치에 익숙해져서야 안 되는데…….”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익 밖으로 나갔다. 숲으로 가 볼까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숲의 승마 코스만 이용하곤 했다. 그 안에 따로 잘 닦여 있는 산책로에서 다른 사람을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다.
거기라면 오늘도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딱히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쉬고 싶을 때에 낯선 사람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 편히 쉴 수가 없다.
숲으로 가는 동안 언뜻언뜻 말을 탄 사람의 모습이 두엇 시야 끝에 스쳤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승마 코스와 산책로는 따로 나뉘어져 있다. 승마 코스는 혼잡하든 말든―마사에서 말이 자리를 비운 마릿수를 확인하니 혼잡할 정도로 사람이 붐빌 일은 없었지만―정태의가 알 바 아니었다.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정태의가 숲의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본관 뒤쪽에서 이어진 길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쪽 길은 외길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질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즉 그들도 산책로를 걸어가려는 참인 듯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건 처음이네, 어차피 길이 도중에 몇 갈래로 나뉘어 있으니까 다른 길로 가면 될 테지만,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그쪽을 보았다. 그러다가 아, 하고 짧게 중얼거리고 만다.
리하르트였다.
편해 보이는 면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넉넉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그는, 모처럼 맞은 휴일에 숲을 거닐면서 쉬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리하르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였다.
스치듯이라도 보았더라면 기억은 날 텐데 전혀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타르텐의 저택에서 거주하는 혈족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 그렇구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리하르트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언뜻 들었던 것도 같다. 조그마하고 사랑스런 여자라고, 식당에서 건너건너 들었었다.
정태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소문으로 들었던 대로, 작고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눈망울이 꼭 사슴 같았다. 볼을 살짝 찌르기라도 하면 눈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은 가냘프고 허약한 인상이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옆에서 수줍게 웃는 표정은 무척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사탕과자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에 넣으면 사르륵 녹아서, 그 달콤한 여운만 남기고 사라질 것 같았다.
정태의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살짝 리하르트의 뒤로 물러서며 그에게 뭐라 귀엣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쪽을 바라본다.
“아……, 김영수 씨.”
리하르트는 정태의를 보자 잠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담담히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먼저 산책로로 들어설까 고민하던 정태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며 약간 고개를 까닥이고 손을 들었다.
리하르트는 곧바로 정태의에게 다가왔다. 그 바로 뒤에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며 여자가 따른다.
이렇게 보니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호남과, 사탕과자처럼 사랑스럽고 어여쁜 미녀.
문득 가슴속이 씁쓸해졌다.
사람들이 경쟁 구도에 놓고 생각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저렇게, 어여쁜 애인도 있고 잘생긴 아들도 있고 장차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막대한 부와 권력도 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애인이라곤 꿈도 못 꾸는 접촉기피증도 있고 아들은커녕 아들을 만들 시도조차 한 번도 못 해 본 듯한 순결한 동정도 가졌고 심지어 집안에 변제해야 하는 막대한 빚도 있다.
이렇게까지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
“크리스토프. 난 심정적으로는 네 편이야.”
정태의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가까이까지 다가온 리하르트에게 빙긋 웃음 지었다.
“휴일이라 쉬시나 보네요. 이쪽 분은 사귀시는 분인가요?”
정태의는 여자에게도 붙임성 좋게 눈인사를 보내며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산책을 오신 겁니까? 여기는 승마 코스가 더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승마를 많이들 하는데……. 마사에서 한 필 끌고 오셔서 돌아보시지 그러세요.”
“아……, 말을 못 타요.”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했다. 그러자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태의가 이곳에 거의 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산책로를 설명해 주었다.
“산책로는 크게 네 줄기가 나 있어요. 각 줄기마다 조금씩 곁가지 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네 가지지요. 물을 좋아하시면 첫 갈림길에서 제일 오른쪽 길로 가시면, 계속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셨다가 오시면 되고……, 아, 그러고 보니 처음이 아니시겠군요. 이곳에 오신 지도 꽤 되셨으니.”
리하르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다가 문득 설명을 멈추며 정태의에게 되물었다.
“예, 가끔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길들에 대해선 잘 몰라서……말씀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 중이신데 방해하면 안 되겠네요. 어느 쪽으로 가시려고요?”
정태의는 낯을 몹시 가리는 듯 리하르트의 뒤에 숨다시피 선 채 발그레한 얼굴을 들지도 않은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워 할까 봐 일부러 시선도 주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행선지를 묻고는, 얼른 작별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가만 있자, 저쪽이 왼쪽 가운뎃길로 간다고 했었지. 그럼 난 오른쪽으로 가자. 시냇물도 좋지.
정태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부단히 걸어, 첫 갈림길에서 제일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이쪽으로는 예전에 두어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이쪽 길로 들어서 한 십여 분만 걸으면 그의 말대로 조그만 개천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정태의는 몇 걸음쯤 가다가, 길 가운데를 막다시피 자라난 떡갈나무 아래에서 신발 끈을 새로 묶었다. 그리고 흘끔 돌아보니, 여자의 걸음에 맞춰 정태의보다 훨씬 늦게 뒤에서 따라오던 두 사람은 리하르트가 했던 말대로 다른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보기는 퍽 좋구나.”
정태의는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다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두 사람을 멀찍이서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여자가 참 순한 인상이었다. 겁먹은 솜사탕 같다.
“그렇구나……. 리하르트는 저런 여자를 좋아했었군.”
사람마다 좋아하는 타입은 조금씩 다르지만, 저 남자는 귀엽고 사랑스런 타입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약간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언뜻 신루랑 겹쳐져 보였다. 그런 걸로 봐서는 정태의와도 취향이 비슷한지도 몰랐다. 성별에서 극과 극의 차이가 있지만.
“…….”
그러고 보니 언제였더라.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간이탑 옥상에서 쉬고 있는데 우연히 일레이와 마주쳤었다―사방이 탁 트인 구조라서, 올라오기 전부터 미리 알고 왔을 확률이 높았다―.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 위에 누워서 뒹굴고 있는 정태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일레이가 불쑥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뭐……좋아, 크리스라면. 그 얼굴이면 네가 홀릴 일도 없을 테니 옆에 있은들 별 상관없겠지.’
혼잣말로 말하는 투라서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레이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있던 정태의는 머리 위로 앉아 있어 거꾸로 보이는 일레이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홀리지는 않을 테지만―얼굴을 넘어서 그 성격이 너무 인상에 강렬하게 남았다―그 얼굴이면 홀릴 일이 없다니. 그 정도 얼굴이면 사실은 누구든 홀려도 충분한 얼굴인데.
‘희한하네……. 미적인 감각은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줄 알았더니……. 크리스토프의 얼굴 정도면 엄청나게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얼굴은 확실히 걸작이지. 예전에 기동대 안에서는 그놈 얼굴에 익숙해지면 눈이 높아져서 나중에 애인 얻을 때 낭패 본다는 농담도 돌았었어.’
‘그렇지, 그 정도면 홀려 마땅한 얼굴이지.’
‘하지만 그 얼굴은 네가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잖아.’
일레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닌데.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내 미적인 감각도 일반적인 수준인데, 하고 웅얼웅얼 덧붙이는 정태의의 얼굴 위로, 아이들이 테이블 위에 잊어버리고 간 듯한 큐브를 주워서 만지작거리던 일레이는 그 플라스틱 장난감을 던졌다.
네모난 플라스틱 덩어리가 얼굴로 정확하게 날아오는 걸 정태의는 아슬아슬하게 잡아내었다.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건 신루 같은 얼굴이잖아. 애교 있고 귀여운 인상인, 그렇지, 사탕과자 같은 얼굴. 그런 걸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육면 모두 말끔하게 다 맞춰 놓은 큐브를 다시 이리저리 흐트러뜨리던 정태의는 그 말에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한참 동안 잊고 있었다.
취향을 따져 봐야 별 소용도 상관도 없게 된 뒤로는 거의 생각을 안 했었다.
그러고 보니까 원래 정태의는 품에 쏙 들어오는 작달막하고도 귀여운, 그런 예쁜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처음 신루를 만났을 때에는 거의 목을 매었는데.
확실히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이, 반드시 자신과 오래도록 함께 살게 될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10년 전만 해도 정태의는 자신이 설마 미치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흉포한 살인귀랑 같이 살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 안 했다. 가끔 뉴스에서 탈옥한 살인범을 그의 애인 집에서 검거했다는 둥 하는 소식을 들으면, ‘그래, 저 여자한테는 잘해 줬겠지, 그런데 저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같이 살았나.’ 하고 안타깝게 여겼었다.
이래서 남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은 절대 안 했다.
정태의는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겉모습으로 보기엔 멀끔하고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착잡해졌다.
그런 정태의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이는 정태의가 되던진 큐브를 한 손으로 받아 뒤집어보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슥슥 돌리기 시작했다.
‘네 취향이 그렇다는 걸 몰랐더라면, 크리스토프 같은 놈 옆에는 놔두지 않았겠지.’
일레이는 심상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성심성의껏 흐트러뜨린 큐브가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뭐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토프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지간하면 눈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지만 설령 내 취향이 크리스토프 같은 얼굴이었다손 치더라도 말이야…….’
정태의는 눈앞에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큐브를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거의 다 맞추어낸 일레이는 흘끔 정태의를 쳐다보긴 했지만 굳이 뒷말을 묻진 않았다.
‘뭐, 인생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법이지. 되어질 대로 되리니, 케 세라 세라…….’
정태의는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설령 취향에 꼭 맞는 얼굴의 인간이 이제 와서 눈앞에 나타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들과 정태의는 함께 쌓아올린 시간이 없었다.
“……. 하긴……그래도 크리스토프 같은 얼굴이 취향이었더라면, 이렇게 매일같이 마주치는 상황에서는 마음이 좀 혹했을지도 몰라.”
정태의는 가슴께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움찔, 주위를 둘러본다.
한적하니 인기척 없는 숲 속의 산책로에 듣는 이가 있을 리 없는데도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리하르트의 말대로, 얼마 걸어가지 않아 오른쪽에 조그만 개천이 나왔다.
보통 키쯤 되는 사람이 바지 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올리면 간신히 물에 안 젖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그 개천을 사이에 두고, 이쪽 편은 서익과 이어져 산책로와 승마로가 있는 숲이었고 저쪽 편은 산맥과 이어져 있어 따로 산책을 위해 손본 바가 없는 자연림이었다.
자연림도 그 나름대로 맛이 있어서 좋지, 하고 요전번에 저 개천을 건너가 봤던 정태의는, 떡갈나무 사이사이로 울창하고 빼곡하게 자라난 가시나무 때문에 몇 걸음도 채 못 가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사람들이 안 가는 길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더 이상 개천 너머를 아쉬워하지 않는 정태의는, 이번에는 개천을 아쉽게 쳐다보았다.
요전에 저 너머로 가 보기 위해 건넜을 때에는 오늘처럼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쬐지 않아서 물이 차가웠다. 당연히 헤엄칠 생각은 안 했다.
그러나 오늘은 숲 속에 있어도 저만치 머리 위로 햇살이 느껴질 정도로 더웠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만이 숲을 식혀 준다.
“이 정도쯤 되는 개천이면 헤엄을 치기에도 딱이네. ……. 타르텐 사람들은 괜히 멀리 갈 필요 없이 여기서 피서하면 딱 좋겠구만, 오늘 같은 날. ……마침 날도 덥겠다…….”
정태의는 울창하게 나무들이 자란 숲 쪽에서 탐나는 듯이 개천을 보다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을 포기하기로 했다.
산책은 흐린 날에도 할 수 있고 원하면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라도 거닐 수 있지만, 헤엄은 날씨가 더운 이런 날 아니면 물이 차가워 못한다.
나무그늘에서 나갔다.
개천의 양옆으로, 상류에서 내려오는 동안 둥글게 깎인 조약돌이 자박하게 쌓여 있었다.
정태의는 예의상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나 확인을 해 본 다음에―사실은 누가 있었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을 거다―상의를 훌쩍 벗었다. 아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지만 벗고 속옷 차림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돌아갈 때에는 속옷을 벗고 그 위에 바지만 입고 돌아가자는 심산이었다.
따끈따끈하게 볕을 받고 있는 바위 위에 옷가지를 올려 두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웠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그런지, 이렇게 더운 볕에 좀 데워질 만도 한데 얼음처럼 차갑게 살갗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으아……, 심장 약한 사람은 못 들어오겠다.”
정태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다시 한번 물속을 파고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물에 푹 잠기도록, 개천 바닥에 바싹 몸을 가라앉힌다. 물이 깊지 않았지만 그 안에 몸을 눕히기엔 충분했다.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헤엄이라면 베를린에서도 얼마든지 쳤다. 타르텐의 별채 옆쪽에도 있는 것처럼, 베를린의 집에도 풀이 있었다. 몇 명이서 함께 헤엄치기에도 충분한 넓이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숲이나 산 속에 흐르고 있는 물에 몸을 담그는 건 얼마만일까.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헤엄을 칠 만한 환경도, 수온도, 수질도 모두 집에 있는 풀 쪽이 비할 수 없이 나았지만, 이렇게 야트막한 냇물에서 불편하게 헤엄을 치는 기분도 각별했다.
기분이 좋았다.
정태의는 어릴 적에 냇물에서 놀 때 종종 했던 것처럼, 냇물 바닥에 배를 바싹 붙여 잠수했다. 잠수를 했다고 할 만한 깊이도 아니었지만 물속에 완전히 몸이 잠기는 기분이 좋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눈을 뜨고, 흐릿한 시야로나마 물속에서 수면을 올려다보는 기분도 더할 나위 없다.
다음번엔 바닷가로 휴가를 가자고 해 볼까.
해마다 한 번씩은 가족들을 이끌고 휴가를 떠나는 카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물속에서 뒹굴거리며 노니는 사이에 금세 숨이 차올랐다.
정태의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푸우, 입 안에 몇 방울쯤 들어온 물을 뱉어내며 일어서자 따가운 볕이 머리 위에서 몸을 데워 줬다.
“어으……, 물이 쬐금만 더 따뜻했으면 오죽 좋아. ……음?”
정태의는 문득 시야 구석에, 물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못 본 뭔가가 스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뭔가를 확인하고서 잠시 말을 잃었다.
말이다. 말. 하얀 말.
가까이서 보니까 더욱 커 보이는 하얀 말이 정태의가 옷을 놓아둔 바위 바로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리고 한 발 늦게, 하류 쪽에서 냇가의 큼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크리스토프를 발견했다. 오늘따라 저 하얀 승마복이 유난히 더워 보인다.
“크리…….”
“앉아.”
“뭐?”
말을 걸려고 입을 떼기가 무섭게 크리스토프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보았다.
“앉으라니, 어딜.”
“물속에.”
“……왜.”
“물이 젖은 속옷이 몸에 달라붙어서 못 볼 꼴을 보고 있거든, 내가, 지금.”
샤워를 하다가 스스로의 몸을 보며 ‘이 정도면…….’ 하고 내심 흐뭇해했던 기억이 바로 얼마 전이었던 정태의는 그의 냉정한 시선 앞에서 조용히 몸을 구부려 물속에 웅크리고 앉았다.
“……추워.”
“그럼 돌아서서 서 있든가.”
고개만 물 밖으로 내민 정태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는 아름다운 청년을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내가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말이지……, 가던 길 가면 어떨까? 아니 그보다 이쪽은 승마 코스도 아니잖아. 왜 여기 있어.”
“이쪽은 내가 늘 다니는 길이다. 덧붙여 여기도 내가 늘 쉬어가는 자리야.”
“여긴 승마 코스가 아닌데!”
“난 원래 코스 따라서 안 달려. 다른 놈들이랑 우연히 스치기도 싫어.”
정태의는 우물우물 입을 다물며 입술까지 냇물에 담갔다.
크리스토프는 훌쩍 일어서더니, 떡갈나무의 굵직한 가지가 드리워 그늘진 바위 옆에서 쉬고 있는 말에게로 다가갔다. 안장에 매단 작은 주머니에서 뭔가 간식 같은 걸 꺼내어 손바닥에 올리자 그 손에 말이 코를 들이밀었다. 다른 손이 말의 갈기를 쓸어내린다.
참 훈훈한 광경이긴 한데……, 춥다.
아예 물속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도 별로 안 했는데 이렇게 의식을 하고 나니까 물이 얼음물 같다.
그때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더니 모자 아래 이마 언저리를 손끝으로 닦았다.
……아.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친근하게 그를 불렀다. 살짝 배어나온 땀을 닦던 그가 의아한 듯 돌아본다. 정태의는 아주 친밀하게 웃었다.
“내가 또 다른 좋은 생각이 났는데 말야, 너도 시원하게 몸을 담그면 어떨까? 아주 좋은데.”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쳇. 역시 안 되나.
정태의는 다시 코 바로 아래까지 물에 잠근다.
그러나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성싶더니 정태의에게 물었다.
“좋아?”
“응?”
“그렇게 몸 담그고 있으면 좋으냐고.”
“어? 응, 시원해. 오래 들어와 있으면 춥긴 하지만.”
정태의는 안되겠다 싶어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허리 위로만 물밖에 내어놓아도 한결 따뜻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흘끔 말을 보더니, 그 말의 콧잔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그리고 물가로 다가온 그는, 정태의가 옷을 놓아둔 바위 옆에서 승마복을 벗기 시작했다.
모자부터 먼저 벗은 뒤 장갑, 갑갑해 보이는 웃옷을 이어서 벗고, 그 다음에 부츠를 벗어 옆에 세워 놓는다.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 바지를 벗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얼룩 하나 없이 하얀 셔츠.
별 생각 없이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던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속옷만 입고, 제일 마지막으로 시계를 풀어 깔끔하게 개어둔 옷 위에 올려놓은 크리스토프는 곧 정태의 쪽으로 다가왔다.
“와……, 조각상이 걸어온다……. 언니 멋져요…….”
정태의는 입을 딱 반만 물에 담근 채 중얼거렸다. 보글보글 물거품과 함께 새어나온 말은 크리스토프가 알아들을 만큼 명확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알아들으면 죽을까 봐 일부러 발음도 어눌하게 했다.
찰박거리며 냇물로 들어오다가 그 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는지 정강이까지만 담그고 잠시 그곳에 머물러 서 있는 크리스토프의 앞에서 정태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정말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외모라고 생각은 했지만, 옷까지 벗으니 그 외견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엄청난 박력이 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후리후리한 몸은 다소 가늘긴 했지만 부드럽게 휘어 있는 몸의 선과 훌륭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저 몸에 얇게 회반죽을 칠해 놓고 사진을 찍으면 그대로 조각상 하나 탄생하는 건데, 하고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정태의는, 이윽고 물의 온도에 조금 익숙해졌는지 다시 이리로 다가오기 시작한 크리스토프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파랗다.”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하는 말에, 그제야 정태의는 다시금 추위를 자각했다. 이제 보니 손톱도 파르스름하다.
“나 일어나도 돼……?”
정태의가 머뭇머뭇 묻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신도 물에 들어오고 나자 마음이 너그러워진 듯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일어서서 몇 걸음 떨어진 곳, 냇물 한가운데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았다. 몸 위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바위가 삽시에 젖어들었지만, 뜨거운 볕이 금세 말려 준다.
서로 위치를 바꾸기라도 한 듯,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어차피 허리까지도 채 오지 않는 깊이라서 몸을 완전히 담가도 밖에서 훤히 다 보였지만, 몸을 담근 사람에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물로 온몸이 감싸인 그 감촉만이 오롯이 남을 뿐이다.
“…….”
정태의는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걸치고 앉아서 크리스토프의 물에 잠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뽀얀 등이 일렁였다. 곧게 뻗은 다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군침이 흘렀다.
그러다가 화들짝, 몸을 움츠리며 괜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말았다.
“……헉. 안 되지, 안 돼. 내 떡도 아닌데 탐내면 안 되지.”
그러고 보니 일레이가 말했었다. 크리스토프가 정태의의 취향에 맞는 인간이었더라면 결코 그 옆에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라고.
정태의는 공연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취향이 아닌데도 이런 순간에는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정말로 내 취향이 아니길 다행이다. 아니면 지금쯤 벌써 기절이라도 해서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을 것 같았다.
정태의가 심장 위를 찰싹찰싹 두드리고 있을 즈음, 크리스토프가 물속에서 일어섰다. 물에 흠뻑 젖자 플라티나 블론드는 조금 더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물이 어린 탓인지 파란 눈동자가 일렁여 보였다.
왜 이러냐, 나. 정신 차려. 여우 귀신한테 홀려가는 총각 서생도 아니고.
“릭이 네 애인인가?”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던 정태의는,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날아와서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진 탓이다.
“……응?”
정태의가 멍하니 되묻자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약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고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도 같다.
하지만 시원한 물속에 잘 들어갔다 나와서 괜히 화가 날 이유도 없고.
정태의는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을 타고 흐른다.
“릭이랑은……, 이미 깊은 관계까지 갔어?”
한참 동안 침묵하던 크리스토프가 재차 물어본 말은, 이번에도 정태의의 다른 사고들을 앗아갔다.
정태의는 다시 멍하게 “엉?” 하고 물어볼 따름이었다.
갑자기 머릿속 한쪽 구석에, 남자끼리의 관계를 매우 플라토닉하게 보고 있는 이 남자가 말하는 깊은 관계란 게 대체 뭘까 하는 의문이 솟았다.
“어디까지 가면 깊이 간 관계인데?”
“……. 입은 맞춰 봤지?”
어찌나 심각한 얼굴로 묻는지, 대답 안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정태의는 어리벙벙한 가운데서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응.”
정태의가 대답한 순간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일순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표독했다.
그 순간 정태의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 남자는 일레이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다. 본인들이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어쨌든 소꿉친구 아닌가. 심지어는 같은 기동대에서 험악한 일들을 함께 거쳐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우정을 넘어서는 감정이 생겨났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정태의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크리스. 너 혹시…….”
일레이에게 마음이 있나? ―라고 끝까지 차마 물어보지 못한 건, 그렇게 운을 떼자마자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한층 더 삭막해졌기 때문이다.
와. 진짠가 봐.
정태의는 가볍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는 일레이와 만나고 이차저차한 관계가 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지만, 또한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남자가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멀쩡했지만, 한 번도 그를 두고 누군가와 다투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다투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보다 그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엄청난 인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의외이다 보니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경쟁 상대가 이놈이라면 내가 너무 불리한데. 인물, 능력, 재력, 내가 당해낼 수 있는 게 없……. ……아니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성격만큼은 이놈들보다 좋아. 아무렴.
현실감각마저 사라진 정태의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침중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던 크리스토프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한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어.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정태의는 자신이 혹시 크리스토프에게 잔인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약간 굳었다.
하긴 다른 것도 그렇지만,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건 접촉기피증이 있으면 좀 무리다.
크리스토프를 생각하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화라도 난 것처럼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다시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 버렸다.
그 와중에 확 튀어오른 물방울을 얼굴에 고스란히 맞으면서, 정태의는 바위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
당황스러웠다.
크리스토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천천히 현실감각이 돌아오면서, 당황스러워졌다.
크리스토프가 일레이를 좋아한다면.
“재앙이라고 하면 너무 실례되려나……. 그럼 재난…….”
정태의는 팔 위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크리스토프와 일레이.
“……. ……나름대로 어울릴지도 몰라…….”
외견적인 부분은 금세 상상할 수 있었다.
외견은 제법 잘 어울릴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둘 다 내면을 배신하는 외견이었다. 딱 좋을 정도로 건장한 사람과 딱 좋을 정도로 날렵한 사람. 얼굴도 그렇고, 아주 좋다.
성격. 성격은…….
“똑같은 사람들끼리 살아야 잘 산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 잘 맞겠네.”
그들과 가까운 곳에서는 결코 살고 싶지 않지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다시금 선뜩해진 팔뚝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정태의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잘 어울리잖아. 집안도 서로 사이가 좋으니까 딱이고. 일하는 곳도 원래는 같았다고 하고. ……이야. 그렇게 잘 어울리는 인간들을 짜맞추기도 힘들겠다.”
하나씩 꼽아보다 보니, 정말로 이상적인 한 쌍이었다.
자꾸 목덜미가 선뜩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퍽 이상적이다.
정태의는 물속에서 몸을 길게 펴고 엎드려 있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벅벅 긁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에 대해 고심하는 동안, 크리스토프가 다시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제 아예 대놓고 정태의를 노려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그러면, ……, ……수음은.”
대단한 결의라도 한 것처럼 사나운 얼굴로 기세등등하게 물어오는 그 말을, 정태의는 처음에 못 알아들었다.
수음, 수음이 뭐더라, 하고 몇 초쯤 생각하던 정태의의 머릿속에 간신히 수음手淫의 뜻이 떠올랐다.
정태의는 일순 말을 잃었다.
아니, 대답을 못해 줄 건 없었지만, 거 참 뭐랄까…….
적당히 얼버무려서 넘어가고 싶었는데, 정태의의 앞에 버티고 선 크리스토프는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정태의는 떨떠름하게나마 말했다.
“……응.”
수음만 했나, 구음을 비롯해서 음淫자가 들어가는 건 거의 다 했지. 또 몰라. 다음엔 구음을 해 봤느냐고 물어볼지도.
정태의는 각오하고 기다렸지만, 동성애의 플라토닉한 관계를 굳게 믿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한계는 거기까지인 듯했다.
갑자기 낯빛이 싸늘해지더니 입을 다문다.
“…….”
“…….”
그리고 다음 순간, 크리스토프는 다시 물속에 들어갔다.
정태의는 여전히 바위 위에 우두커니 앉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는 등덜미가 뜨거웠다. 바위에서 내려가 물에 들어가고 싶은데, 차마 무서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에 발이라도 담갔다간 당장 원한에 가득 찬 손이 머리를 짓누를 것 같았다.
누가 이 상황에서 날 좀 구해 주면 참 좋겠다…….
정태의가 안타깝게 기원할 때였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동아줄이 내려왔다.
“……아. 오늘은 자주 뵙는군요.”
상류 쪽에 무성하게 뻗은 떡갈나무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태의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놀란 듯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 뒤를 따라 나오던 수줍은 아가씨가 반라 차림인 정태의를 보고 새빨개져서 다시 그의 등 뒤로 숨는다.
“아……, 그러네요.”
정태의는 꾸벅 목례를 하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어라……. 이 상황에서 날 좀 도와줄 동아줄을 간절히 바라긴 했는데, 어째 썩은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다…….
아까 분명히 다른 산책길로 갔던 리하르트와 그 애인이었다.
“도중에 그녀가 지치고 덥다고 해서 잠시 물에 발이라도 담그러 길을 돌아왔는데, 먼저 와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 물이 찰 텐데, 몸을 다 담가도 괜찮았습니까?”
리하르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나 정태의를 향해 다가오던 그는 문득 표정을 바꾸며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그늘 아래 서 있는 하얀 말과, 그 옆의 바위 위에 곱게 놓여 있는 하얀 승마복 한 벌을 본 탓이다.
“이…….”
그러나 그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리하르트와 정태의의 사이, 정태의에게서 보다 가까운 위치의 냇물 안쪽에서 물살을 흩뿌리며 훌쩍 일어서는 인영이 있었다.
정태의는 어, 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리하르트에게서 크리스토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정태의를 향해 선 크리스토프는, 길게 한숨을 쉬며 이마며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물방울이 하얀 몸 위로 선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얼굴에서 턱 끝, 목을 타고 가슴으로, 배로.
모래알처럼 물방울이 매달린 속눈썹을 깜박이며, 그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그놈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정태의에게 제일 먼저 물어보는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냉랭했다. 목덜미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성가신 듯이 손가락으로 훑어내면서, 그는 정태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걷자, 물에 흠뻑 젖어 입지 않은 것보다 더욱 선정적으로 보이는 속옷 위로 주름이 졌다.
후리후리하게 뻗은 팔다리, 벗은 몸 위를 새하얗게 덮은 살갗, 그런 것들을 보며 정태의는 어쩐지 자신이 초조해졌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어깨 너머로 리하르트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그는 웃음기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그 뒤에서는 사탕과자 같은 여자가 어깨를 움츠린 채, 넋 놓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놈이 아니라도 상관없잖아. 꼭 그놈이어야―.”
크리스토프는 다시 입을 열며 정태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러나 그러다가 그는 문득 정태의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비껴가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태의는 그의 등이 희미하게 굳어지는 걸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매끄럽게 솟아 있는 견갑골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허리의 골이 보일 듯 말 듯 깊어지며, 더 이상은 속옷을 걸친 의미가 없는 엉덩이와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가 굳어졌다.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일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을 뿐이다.
그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정태의였다.
으음, 하고 볼을 문지르면서, 그는 난감한 듯 말했다.
“여기에서 다들 우연히 만나다니, 이 위치가 쉬어가기 좋긴 한가 봐요.”
그러나 정태의의 말에도 잠시 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차가운 물 안에 잠겨 있었던 경련이 이제야 온 것처럼 아주 가늘게 떨려 어깨의 물을 떨어낸다.
그는 자신의 말과 옷가지 따위로 시선을 주었다. 나직이 혀를 차며 뭔가 욕설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냇물 밖으로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물방울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리하르트는 옷가지를 올려놓은 바위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의 표정 없는 시선이 크리스토프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거기까지 다다른 크리스토프는 말안장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스포츠 타월을 꺼내었다. 리하르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없이 몸을 닦는다.
리하르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크리스토프의 느린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문득 비웃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풀보다는 이런 시냇가가 좋은 모양이지. 의외로군. 풀에 들어가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수영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서 물장구를 칠 만큼은 되나 보지.”
그 말에, 수건으로 다리를 훑어올리던 손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크리스토프는 몸을 닦아나갔다. 그러면서 짧게 한 마디 한다.
“네놈이 몸을 담갔던 풀에 들어가느니 평생 수영 따위는 안 하고 말겠어.”
크리스토프는 몸을 다 닦고 난 수건을 거칠게 안장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옷가지를 거두어 꿰어 입는 몸짓이 화가 난 듯했다.
정태의는 분위기가 참 난처하네, 하고 혀를 차곤 일어났다. 그리고 냇물을 건너 그 역시 냇가로 나갔다. 햇볕에 바싹 마른 조약돌 위로 물발자국이 차박차박 남는다.
“크리스토프. 나 수건 좀 빌려줘. 닦을 거 아무것도 없어. ……리하르트, 그쪽의 여자분이 아까부터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사이에 슬쩍 들어서며 크리스토프에게 손을 내민 정태의는 리하르트의 뒤에 서 있는 여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다시금 그 자리의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다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리하르트는 여자에게 뭐라고 속삭이며 물러섰다. 크리스토프 역시 굳이 그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쉬다 갈까 했는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군요. 그럼 즐거운 산책길 되시길.”
리하르트는 정태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물러섰다. 돌아서기 직전 그의 서늘한 눈이 크리스토프를 한 번 훑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다시 여자와 함께 떡갈나무 사이로 사라졌고,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멀어져 가는 기척이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셔츠의 단추를 담그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거칠게 외마디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진정해. 우연히 마주친 거잖아. 저쪽이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넘기면 되지 뭘.”
크리스토프에게 넘겨받은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훔친 정태의는 아직 몸이 바싹 마르지 않은 탓에 뻑뻑하게 잘 들어가지 않는 옷가지를 억지로 꿰어 입으며, 그를 위로하는 셈치고 중얼거렸다.
“나는 무방비한 상태로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게 무엇보다도 싫어! 특히나 그놈 앞이라면 더욱!”
크리스토프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소리쳤다. 모자를 집어들다가 주먹을 움켜쥐는 바람에 모자의 형태가 구깃해졌다.
“무방비…….”
“그래, 무방비. 아까 그 상태에서 그놈이 총이라도 겨누면 나는 꼼짝없이 당하는 거라고.”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다시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열세를 보여 주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며, 정태의는 어느새 옷을 거의 다 갖춰 입은 그를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엔 이제 겨우 바지 하나 꿰어 입은―그나마 다리만 꿰었을 뿐 단추도 잠그지 않은―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 논리에 따르자면, 지금 네가 나에게 총을 겨누면 나는 꼼짝없이 당하겠네.”
정태의는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하게 눈초리를 치켜올렸다.
“내가 왜 너한테 총을 겨누어.”
그렇게 따지자면 리하르트는 왜 너한테 총을 겨누겠어, 라고 말을 하려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의 그 시선을 생각하면, 총을 겨눌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사람을 그대로 잡아먹을 것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눈길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으며 혀를 찼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크리스토프를 쳐다본다.
“경쟁자 하나쯤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 또 어떻게 알아.”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한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본다.
“경쟁자?”
“……. 일레이 말야.”
정태의는 어색하게 말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째 몹시 기분이 이상했다. 정태의는 여태껏 정말로 추호도, 한 번도, 일레이를 두고 누군가와 겨루거나 할 경우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다.
일레이의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말없이 입까지 다물고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본다.
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정태의는 예상도 한 적 없는 사태에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는, 사이에 있는 일레이 본인이 있어야 이야기가 해결이 된다. 정작 당사자를 빼고 옆에서 와글거려 봐야, 결론을 내는 건 당사자였다.
“그러면, 일레이한테 가서―.”
“일레이를 죽이고 싶은데 왜 너한테 총을 겨누어?”
정태의가 한숨을 쉬며 막 입을 열었을 때,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토프는 도통 모르겠는지 물었다.
정태의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눈만 껌벅거린다.
어……, 하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뭔가 이야기의 아귀가 안 맞아서 어라, 하고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 이내 이야기의 흐름이 재구성되었다.
“……. 크리스. 혹시 아니라면 정말로 미안한데, 그냥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약간 도끼병도 좀 있거든, 그러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듣고 흘려넘기면 되는데…….”
장황하게 단서를 늘어세운 정태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몹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네가 마음을 둔 사람이……, 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