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fragile (8/34)

1. fragile

자각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온다.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정태의에게는 그랬다.

가만히 옛일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뭔가 중요한 깨달음은 천천히 조금씩 쌓여서 이루어지지 않고, 언제나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것처럼 깨닫게 되곤 했다.

아직 10대일 무렵 친구들과 화장실에 숨어서 낄낄거리며 담배를 숨어 피우며 콜록거리다가 문득 자신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했던 때에도, 몇 달인가 전에 카일과 함께 저녁 뉴스를 보고 몇 마디 대수롭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럼 쉬세요.’라고 방으로 가다가 문득 이제 더 이상은 자신의 원래 가족과 이런 시간을 보낼 일은 없겠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에도, 그밖에도 몇 번인가 불현듯 아아, 하고 생각하게 될 때에도, 그 깨달음들은 그 당시에 하던 일이나 생각, 감정과는 아무런 인과관계는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의식도 못할 만큼 사소한 일상들이 쌓이고 익어서, 그것이 어느 순간 봉선화처럼 툭 터지면서 깨닫게 되는지도 모른다.

정태의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은 대부분 그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얼마 전 집에서 뭔가 고전영화를 보고 있을 때도 그랬다.

고즈넉한 이국의 골목길을 걸어가며 고개를 기울이는 소년을 화면 속에서 보면서, 정태의는 옆에 놔두었던 접시로 손을 뻗었다. 과일 조각을 집으려는데 손이 스쳤다. 접시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앉아 있던 일레이 역시 화면에 시선을 주면서 접시에 손을 대고 있었다.

스친 손은 아무렇지 않게 과일 조각을 집어 각자의 입으로 가져갔고, 그뿐이었다.

그 과일을 삼키는 순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이 내가 있어야 할 위치구나, 하고.

부정적인 의미도 긍정적인 의미도 없이 그저 그뿐.

그때 자각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위치였는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좀 정신을 차린 뒤에는 그 자각을 매우 뼈아프게 생각하며 잠시 우울함에 잠겼지만, 그 당시엔 좋고 나쁘고가 없이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듯이 여겼다.

그런 식이었다.

자각은 그렇게, 어쩌면 그 전에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을 갑자기 머릿속에 끌어다주곤 했다.

***

그래……, 그 전에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

정태의는 눈을 껌벅거리며 생각했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그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늘 자각은 불현듯 찾아오지……, 하고.

눈을 뜬 정태의는 눈앞, 바로 머리 위에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잠시 저게 뭔가 했다. 몇 초쯤, 그 얼굴이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누구의 얼굴인지는 알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보면 결코 잊을 수도 없고, 헷갈릴 수도 없는 얼굴이다. 저런 살아 있는 조각품이 둘 있을 리 없다.

“이상하네…….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왜 저런 데에 있지…….”

참 흡사하게 새겨 놓은 조각상이다, 하고 생각하기엔 그 눈꺼풀이 가끔 눈을 깜박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과거의 경험치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크리스토프가 저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은 정태의의 방―정확히는 서익 안쪽, 정태의에게 주어진 객실―이었고, 심지어 지금은 일곱 시도 채 안 된 이른 시각이다. 다른 예정이 없는 한 늘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그런 늦은 시간에 일어나면서도 저혈압으로 몹시 힘들어하는―남자가 저기에 있을 리 없었다.

“아직 내가 잠에서 안 깼나?”

정태의는 베개를 벤 채 고개를 갸웃하며 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얼굴도 묵묵히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못마땅한 얼굴로.

아, 이제 보니 정태의가 알고 있는 얼굴과 좀 다르다. 얼굴 윤곽이 다르다. 정태의가 알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저렇게 얼굴이 부하게 부풀어 있지 않았다. 좀 더 날렵하고 매끄러운 얼굴선이 그 조각 얼굴의 특징 중 하나다.

“닮긴 되게 닮았네.”

정태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팔을 뻗었다.

자신의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얼굴을 더듬어 보려고 손을 뻗은 그 순간, 그 얼굴이 불쾌한 낯빛으로 바뀌면서 뒤로 물러섰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주제에 이 시간까지 잘도 퍼자는군. 일어나, 게으름뱅이.”

그 조각 같은 얼굴이 냉담하게 말했을 때, 정태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불현듯.

실물이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잠이 확 깼다.

“너 얼굴 왜 그래.”

정태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그가 혹여 얼결에 닿기라도 할까, 한 걸음 더 물러섰다.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듯 얼굴을 문지르면서 부루퉁하게 말했다.

“네 얼굴이나 보고 그런 말을 하지 그래.”

“어? 내 얼굴이…….”

멍하니 대답하면서 반사적으로 침대 정면의 벽에 걸려 있는 반신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안에는 크리스토프와 함께 정태의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얼굴 반쪽이 둥그스름하게 부어오른.

“헉…….”

조심스럽게 뺨을 문지르던 정태의는 입 안의 찢어진 상처에서 욱신하는 아픔을 느끼고 나서야 다시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얻어맞았다. 호되게.

정태의는 천천히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정태의 정도는 댈 것도 아닐 만큼 가관이었다. 아주 통통하게 부어올랐다.

“조각에 살을 붙여 놨구나.”

정태의가 불쑥 중얼거리자 당장 크리스토프는 눈을 부라렸다. 정태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비록 거울 속의 얼굴은 조금 달라졌지만, 방 안의 정경은 어제와 달라진 게 없었다. 이 방에 이 남자가 이 시간에 서 있다는 것만 빼면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다.

그 한 가지 다른 점이 몹시 위화감을 피워올리고 있었지만.

“…….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여기에.”

“너…….”

크리스토프는 말머리를 길게 끌며 입을 열었다. 어쩐지 오늘은 한층 더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또 머리 아파? 쯧…….”

“―네가 클로로포름 같은 걸 뒤집어씌우니까 그렇잖아.”

앗, 그랬지.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하는 말에 정태의는 까먹고 있던 걸 하나 더 떠올렸다.

정태의는 흘끔 크리스토프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괜히 으흐흐, 하고 웃어 보이면서 베개로 그를 슬쩍 치는 시늉을 했다.

“기억 못할 줄 알았더니 다 기억하고 있네……. 그럼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다 알겠구만. 나는 그저 네가 나를 대상으로 불의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간신히 참고서 말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휘두르던 베개를 빼앗는가 싶더니, 그걸로 인정사정없이 정태의의 머리를 날렸다.

“억…….”

솜베개라서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머리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몹시 아픈 척 머리를 문지르며 낯을 찌푸렸다. 두 대째의 공격은 피하기 위함이다.

그 연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한 대만 때리고 말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크리스토프는 베개를 발치에 내던져버렸다.

“너, 팔은.”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불쑥 물었다.

베개로 얻어맞은 머리를 슥슥 문지르고 있던 정태의는 응? 하고 되물었다. 그 멍한 얼굴을 보고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스쳤잖아. 경봉에.”

“응? 아, 맞다. 그랬었지. 뭐 괜찮은 것 같은데.”

오늘은 깨달음이 많은 날이구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 뒤로 자신도 줄곧 잊고 있었으니 별 대단치는 않을 것 같았지만, 왼팔의 반소매를 둘둘 걷어올려 보았다.

“……오우.”

별 대단치 않을 줄 알았는데 팔꿈치 조금 위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뭐, 괜찮은 것 같아?”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무표정하게 그 멍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아악……! 취소취소……!!”

정태의는 부르르 떨면서 몸을 사렸다. 집요하게 멍의 한가운데를 찔러 대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눈꼬리에 눈물이 한 방울 맺히자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앞으로 다시는 내가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내 앞을 가로막지 마. 어제는 운 좋게 리하르트가 알짱거렸으니까 그놈 먼저 처리하겠다고 한 거지, 다른 때 같았으면 너부터 죽였어.”

크리스토프는 삭막한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로 죽을 줄 알아, 하고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아침부터 횡액이다. 눈뜨자마자 안 보이던 게 보인다 했더니 듣는 말이라는 게 죽인다는 말이다.

“나 죽이겠다는 놈이 왜 이렇게 많아.”

정태의는 한숨을 툭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크리스토프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누가 또 그래. 어떤 놈이 그랬어.”

“……. 일레이.”

이 인간은 왜 또 날 대신해서 흥분해 주시고 그러나,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바로 지난밤 ‘또 그러면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고 했던 인물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침묵했다.

“그놈이라면, ……. ……. ……그럴 리 없는 인간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한 문장 안에서 동시에 반대되는 말을 중얼거리며 크리스토프는 잠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클로로포름에 원한을 품고 온 게 아니면, 다시는 무기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러 온 것 같긴 한데.

정태의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잡아당기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역시 저 조각 같은 얼굴이 상하니까 안타깝다. 다음부터는 일레이한테, 크리스토프를 때리느니 차라리 나를 때리라고 할까. 예술품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어쩐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관두자…….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너 가로막지 않을게. ……그 말 들으러 온 거지?”

정태의는 우두커니 서서 좀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슬쩍 말문을 터줬다.

발치를 쳐다보고서 묵묵히 서 있던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들었다. 정태의를 쳐다보는 시선이 어쩐지 못마땅하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인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

정태의는 고개를 기웃했다. 크리스토프는 불퉁하게 내뱉었다.

“그래. 그 말하러 왔다. 다시는 사서 얻어맞지 말라고.”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꼭 걱정해 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태의는 빙긋 웃었다.

“응. 고마워.”

“저 때린 놈한테 고맙다는 말이나 하고…….”

크리스토프는 혀를 찼다. 그 싸늘한 시선이 숫제 천치 얼간이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말마저도 어쩐지 기뻐서, 정태의는 빙글빙글 웃었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불만스러운 얼굴 그대로, 그 얼굴만큼이나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 이리 내 봐. 얼굴은, ……연고 바르고.”

“어? 팔?”

정태의는 잠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주머니에서 테이프며 튜브 따위를 꺼내는 걸 보고서야 어……하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치료해 주려고?”

정태의가 불쑥 묻자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몇 초쯤 대답 없이 튜브 캡을 열고 습포지 포장지를 뜯고 나서야 무뚝뚝하게 말했다.

“보기 흉하거든. 눈앞에서 그런 팔꿈치가 어슬렁거리면.”

“어, 그래……. ……내가 할까?”

정태의는 반대쪽 팔로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면서, 자신의 팔을 붙들고 뭔가 연고를 처덕처덕 발라 문지르기 시작하는 크리스토프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스스로 하겠다며 정태의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은 본 척도 않았다. 머뭇머뭇, 다시 손을 거두고 마는 정태의였다.

“다른 사람이랑 닿는 거 싫어하면서 괜찮아?”

멍 위를 조심스럽게 문지르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면서 정태의가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바보 같은 소리 말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내가 건드리는 건 괜찮지. 안 그러면 적을 해치울 수가 없잖아.”

총으로 쏴 버리는 거면 또 몰라도 칼로 자르든 너클 끼고 때리든 상대와 닿는 건 불가피하다고, 하고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아, 예, 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참 간결한 이유이긴 한데 그게 참……하고 생각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코를 찌르는 이 독특한 냄새가 퍽 익숙하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팔에 문지르고 있는 연고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 뿌연 색깔도 그렇고, 이 냄새도 그렇고, 점차 뜨끈뜨끈해지는 이 느낌도 그렇고…….

“이거 혹시…….”

“응? 예전에 정창인을 만나러 홍콩에 갔을 때 거기 의무반 교호라는 직원한테 선물 받은 거. 나는 안 써 봤지만 효과가 좋다고 극찬하더군.”

“…….”

예상치도 못하게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을 듣게 된 것보다도 이 약의 출발지가 더 오래 귓속을 맴돌았다. 알게 모르게 참 멀리 퍼져 있달까, 그 우연한 커넥션이 놀랍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이 제약회사는 루터를 명예판매원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이건 바로 타박상, 근육통, 벌레 물린 데는 물론이고 심지어 두통에도 바른다는 그 유명한 호랑이 연고 아냐…….”

“너도 알아? 흠, 동양 쪽에서 잘 쓰는 약인가? 그 친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니.”

크리스토프는 전혀 이 약의 루트와는 개연성이 없는 인물로부터 그런 말을 듣자 조금 기쁜 듯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좋은 물건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지는 것도 당연하다. 당연하겠지만…….

“고개 돌려 봐. 얼굴에도 발라 줄 테니까. ……눈가에 멍이 들었잖아. 여기에도…….”

“악, 잠깐! 그건 눈가에 바르면 안……!!!”

황급하게 외쳤지만 한 발 늦었다.

정태의가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여기에도’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연고를 푹 찍어 눈두덩이 옆쪽의 멍 위에 문질렀던 것이다.

“……! ……!! ……!!!”

먼 과거 언젠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던 시절, 친구가 시험공부를 할 때 자기는 잠을 깨기 위해서 안티프라민을 눈가에 바른다고, 그러면 잠이 확 깬다고 그래서 정태의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따라해 봤었다.

바로 지금 그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때 잠이 확 깨긴 깼다. 밤새 눈물을 줄줄 흘리느라 시험공부는 공쳐서 그렇지.

재빨리 눈가를 수건으로 북북 문질러 닦아내고 나서도 한동안 눈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정태의의 앞에서,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멀쩡한 눈에 얼핏 비치는 그는 부루퉁하게 정태의를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연고병을 꾹 움켜쥐고 있는 손에서 당혹감이 엿보였다.

정태의는 한 손으로 눈을 누른 채 다른 손은 설레설레 흔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달리 머리에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정창인이라니, 삼촌?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 아, 그래, 네 숙부였지. 카일의 소개로 얼굴 정도나 아는 사이야. 가끔 책을 빌려보곤 하거든.”

과연, 그쪽은 그런 연결고리가 있었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탁 서랍에 넣어두었던 물티슈를 꺼내어 눈가를 문지르면서 크리스토프를 마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물티슈로 덮여 보이지 않는 정태의의 눈을.

“……. ……이제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정태의는 아직도 뜨끈뜨끈하니 눈물이 나는 눈을 훔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반짝 눈을 뜨고 대꾸했다. 불그스름한 그 눈을 보며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약간쯤은 마음에 걸려하는 건가.

정태의는 더 손볼 데도 없이 완벽하게 습포지를 바르고 붕대를 감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이 방에 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왔을 약품들이다.

“…….”

정태의는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정태의의 눈가에 생긴 멍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의 빨간 눈과 함께.

“이쪽도 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야…….”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태의의 눈가를 노려보느라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크리스토프가 의아하게 시선을 주었지만 정태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

이럴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약간 반칙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정태의에게는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었다.

정태의는 짐짓 눈가의 멍을 문지르며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카일의 책은 언제쯤…….”

“응? 아. 그건 나중에 기분 내키면.”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죄책감과 동정심에 호소하면 혹시라도 좀 들어먹히지 않을까 했는데.

정태의는 그래,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눈가에서 손을 뗐다.

그나마 연고를 바르고 곧바로 닦아낸 덕분에 화끈한 감각이 많이 사라졌다. 이젠 눈가가 좀 뜨끈뜨끈한 정도다. 눈물도 멎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동안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다가 선뜻 일어섰다. 그리고 들어왔을 때―비록 정태의는 자고 있느라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처럼 서슴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할 말은 다 마쳤으니까 그만 간다. 이제 다시는 내가 다른 놈을 해치우는 데 끼어들지 마. 그럴 때엔 네 안전을 나도 보장할 수 없으니까.”

정태의는 어, 그래, 하고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크리스토프에게서 어제의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의 초점조차 잃고서 얼굴이 납빛이 되어 온몸을 가늘게 경련하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와 같이 당당하면서도 만사가 따분하다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

정태의는 불쑥 그를 불렀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정태의를 돌아본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태도나 말 따위에서, 그가 어제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다 기억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여 오로지 감정에만 몸을 맡기고 있던 그 시간들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광기를 모두 기억하고 또한 인식하고 있는 기분은.

“……. 부은 데에도 효과 좋다고 적혀 있더라, 그 연고. 너도 얼굴에 발라 봐. 눈가에는 빼고.”

정태의는 그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러나 문밖으로 막 나가려던 그는 문득 멈칫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이 있으나 망설이고 있는 그 얼굴을, 정태의도 마주보았다.

어느 사이에나 그렇다.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는 말이 있고 하고 싶어도 하지 않는 말이 있다. 시간과 함께 그런 드러나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가면 먼 훗날에는 그런 말들이 녹아서 결국은 사라지고 만다고, 예전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이에는 시간이란 것이 소중한 거라고.

그때 아직 정태의는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저 때로 문득문득, 아, 이런 건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이 남자와도 그런 시간을 쌓아 가게 될까. 혹은 그렇지 않을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사람의 관계란 혼자만의 바람으로는 지속되지 않으며, 때로는 둘 다 바란다 해도 원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남자가 저 불안스럽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외줄을 다 건너갈 때까지는 볼 수 있길 바랐다.

“왜. 눈가에 연고 한 번 더 발라 주고 싶어서?”

정태의는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바보 같은 소리 말라는 듯 입매를 찡그렸다.

잠시 더 침묵을 지키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릭이, 네게 베를린으로 돌아가라고 하진 않던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표정을 마주본다.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여기에 한동안 있기로 했지만. ……카일의 책은 찾아가야지.”

그러니까 어서 책 좀 돌려 달라니까, 하고 덧붙이며 정태의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다가, 이번에도 역시 조금 전과 같은 대답을 했다.

응, 나중에 기분 내키면, 이라고.

***

서익 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험악했다.

하긴 험악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올리버가―리하르트의 어린 아들이―크리스토프로 인해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간 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떠도는 말을 들으면 다행히 올리버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와 지금은 동익에서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 그것 다행이군.”

정태의는 체스판을 노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젠장, 이건 어느 말을 옮겨도 몇 수 안에 룩 아니면 나이트 둘 중 하나는 먹히겠는데.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체스판을 벌써 10여 분째 꼼짝도 않고 응시하는 정태의의 앞에서, 요한은 바로 두 수 전에 거두어간 정태의의 폰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문제라도 있었어 봐. 지금쯤 아주 집안 전체가 전쟁터였을걸.”

“음……. 그런데 올리버는 동익에 산다면서 왜 리하르트는 서익에 있는 거야. 같은 집안에 웬 이산가족이 다 있어.”

나이트로 비숍을 먹어 버릴까. ……아서라. 그랬다가는 열 수만에 체크다.

정태의는 10여 분의 고민 끝에 나이트를 비스듬하게 밀었다.

“아, 원래 결혼을 하거나 가족이 있으면 따로 나가 살거나, 별채에 살거나 하는데, 리하르트는 이혼 상태잖아. 올리버는 지금 할머님이 길러 주시거든. 그러니까 올리버는 할머님과 함께 동익에 살지만, 아직 승계 후보자인 리하르트는 동익에서 살 수는 없는 거지. ……자.”

요한은 그 말을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잠깐 체스판을 훑어보다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폰을 옮겼다. 정태의는 재빨리 그가 옮긴 폰의 위치를 확인했다.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숨은 수가 없나 열심히 고민한다.

“흠……. 네 할머님이면 리하르트의 할머님이기도 하겠군.”

“그렇지. 크리스토프의 할머님이기도 하고.”

“음……. 그럼 연세도 상당하시겠네.”

“그렇지. 몇 년 전에 이미 여든을 지나셨으니. 그래도 아주 정정하셔.”

“그럼 그분이 타르텐의 제일 웃어른이신가?”

“항렬상으로는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어르신이 가장 웃어른 대접을……, 어, 너 지금 그거 옮겼어!”

“안 옮겼어! 그냥 잠깐 만지기만 했을 뿐이야!”

“그런 게 어딨어! 원래 체스의 세계는 비정한 법! 옮겼다 취소하는 법은 없다! 자, 내 차례야.”

“야, 야! 아냐, 내 차례야! 안 옮겼어, 안 옮겼단 말야!”

정태의는 잠시 만지작거리던 폰을 재빨리 내려놓고 체스판 위를 말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으로 덮었다.

“야이 치사한……. 에이, 한 번 봐줬다. 그래, 어떻게 둘 거야. 빨리빨리 해.”

요한은 투덜거리면서 물러앉았다. 그제야 정태의는 체스판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 하고 흐트러진 옷깃을 매만지면서 바로앉은 정태의는 다시 체스판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 앞에서 요한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려니 심심한지 말을 이었다.

“타르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르신이지. 큰 백부님인데, 우리 아버지나 다른 백부님, 숙부님들과는 나이차가 꽤 많이 나셔.”

“흠……. 그 큰 백부님의 뒤를 잇게 되는 게, 그 승계자라는 거지. 괜히 경쟁 같은 거 시켜서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말고, 맘 편하게 그분 자식한테 물려주고 각자 지분을 나눠가지면 안 되나?”

“아, 어르신은 결혼을 안 하셨어. 게다가 타르텐은 원래부터 승계자를 경쟁으로 뽑는 게 전통이니까. 거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긴 하지만 그만큼의 장점도 있거든.”

“……자…….”

정태의는 신중하게 비숍을 옮겼다. 그리고 흘끔 요한의 눈치를 보았다. 요한은 응? 비숍을 옮겼어? 하고 대수롭잖게 쳐다보면서 맥주를 또 한 모금 삼켰다. 정태의도 옆에 놓아두었던 자기 몫의 맥주를 마신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주름져 있는 미간을 문질렀다.

솔직히 말해 놀라고 말았다.

정태의는 어릴 때부터 장기나 체스를 즐겨 했다. 대체적으로는 바깥에서 뛰놀며 지냈지만 비가 오거나 나갈 기분이 나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책을 뒤적이거나, 혹은 형과 나란히 앉아 바둑이나 장기, 체스 따위를 두었다.

아주 솜씨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수를 겨루어서 질 때보다는 이길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일방적으로―라고 할 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눈에 띄게―밀리고 있었다.

이놈은 밥 먹고 체스만 뒀나…….

아무래도 이번 내기에서는 질 것 같았다. 별 다섯 개짜리 풀코스 정식을 얻어먹어 볼 꿈에 부풀었는데, 오히려 지게 생겼다. 정태의의 표정이 무거운 데에 비해 요한은 매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 크리스토프에게 서익의 구조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체스나 당구대 따위의 게임류가 갖추어져 있지만 멍청이들이 많으니까 안 가는 편이 좋다는 말을 들었던 서익 지하 홀에는, 그의 말과는 무관하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지금도 정태의와 요한이 체스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있는 옆으로는 당구대를 둘러싸고 큐대를 움켜쥐고 있는 서너 명의 남자들, 그 옆으로는 카드를 쥐고 포커를 즐기고 있는 남자들, 심지어 그 뒤쪽으로는 구석진 자리에서 젠가를 하고 있는 남자들까지 있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 구석에서 둘이 마주앉아 음침하게 젠가를 두드리고 있는 남자들을 보면 크리스토프의 말에 공감이 좀 가기도 한다…….

정태의는 그들이 들으면 ‘어차피 잡기를 즐기는 건 마찬가지인 주제에’ 하고 벌컥 화를 낼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 보면 무슨 한량들만 모여 있는 것 같지만, 저마다 바깥으로 나가면 그럴싸하게 하고 다니는 인물들이라는 게 참,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어디, 비숍이라……. ……으흐흐, 나이트를 잡으려구?”

잠시 체스판을 들여다보던 요한이 음침하게 웃었다. 정태의는 움찔했다. 젠장, 풀코스 정식……. 젠장, 내 돈…….

정태의는 요한이 옮기는 룩을 노려보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뭐 어쨌거나, 분위기는 한층 험악해졌어도 너는 좀 잘 됐겠어.”

“내가 뭘.”

요한이 희희낙락 말하는 목소리에도 대답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어제 그 현장에서, 리하르트한테 철경봉을 들고 가던 크리스토프의 앞을 막아섰다면서. 그래서 리하르트 아래에 있는 녀석들이 널 두고 ‘의외로 괜찮은 놈인지도 몰라.’라고 중얼거리던데.”

“허허, 단순하기도 하지.”

“그 말을 전해 주면 아마 그 생각을 도로 철회들 할 거다.”

“……아냐, 전해 주지 마. 난 편하게 살고 싶어.”

정태의는 턱을 괴고서 체스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어느새 폰이 이 앞까지 왔잖아, 퀸으로 바꾸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하는데, 하고 심각한 고민에 젖는다.

“그런데 말야…….”

고민에 잠겨 멍하니 체스판을 내려다보면서, 정태의는 문득 나른한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응? 하고 되물으며 요한도 체스판을 살피고 있었다.

“리하르트한테 동생이 있었어? 올리버랑 닮은.”

“음……? 누가 그래?”

요한은 체스판에서 시선을 들어 정태의를 흘끔 보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가슴팍을 벅벅 긁는 게, 그리 유쾌한 주제는 아닌 모양이다. 정태의는 아니 그냥, 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있었지. 죽은 지 10년도 더 됐지만. 하지만 올리버랑은 별로 안 닮았는데. 올리버는 리하르트를 닮았지. 올리버랑 비슷한 거라곤 이름뿐이었다. 올리비아.”

요한은 그렇다고 별반 숨길 이야기도 아니라는 듯 평연하게 말을 꺼내었다.

“흐음…….”

“왜, 어제 그 싸움판에서 그 얘기라도 나왔어?”

“어, 뭐.”

“그럼 크리스의 어머니 이야기도 나왔겠네.”

“어, 잘 아네.”

“내 참, 그냥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지 뭘 굳이 가슴에 못까지 박으면서 그 짓이냐, 그놈들은.”

요한은 쯧쯧 혀를 찼다.

정태의는 몇 분쯤 말없이 고민한 끝에 나이트를 도로 물리면서 요한을 쳐다보았다.

“분위기 참 안 좋더만, 이 집안.”

“그 두 놈이 특히 그래. 나머지는 그냥저냥한 경쟁상대로 여기는데, 그놈들이 기폭제가 돼서 그렇다니까.”

내가 그래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를 쓰잖아,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요한은 폰을 옮겼다.

“……악! 두 칸만 더 가면 퀸이잖아! 제길, 그래서 룩을……!”

“으흐흐, 이게 내 필살기 중 하나지.”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점점 더 공짜 풀코스 정식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 운운하며 체스판을 노려보기 시작한 정태의를 보는 둥 마는 둥, 요한은 맥주가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 미니바에서 새로 맥주캔을 꺼내와 앉았다. 그 사이에 속임수를 쓰지는 않았나 형형한 눈으로 체스판 위를 훑어본다.

“뭐 하여간, 원래부터 두 놈 성격이 다르니까 사이가 워낙 안 좋기도 했는데, 보다시피 크리스토프는 얼굴이 저렇잖아. 멋모르고 좋다고 따라붙는 바보들이 가끔 있었는데 그 바보 중 하나가 리하르트의 여동생이었어. 올리비아. 크리스토프는 걔를 굉장히 지긋지긋해했지. 따라다닐 때마다 대놓고 구박했거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학교도 못 가고 일 년의 반을 병원에 누워 있기만 하는 애라서 리하르트가 특히나 가엾어하며 애지중지한 여동생이었는데, 뭐…….”

“……. 제발 크리스토프가 그 여자애를 죽였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 주라…….”

“그랬더라면 지금쯤 둘 중 하나는 사단이 났겠지. 말했잖아, 원래 몸이 약한 애였다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음 환절기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애였어. 열여섯 땐가……, 그래도 의사들이 말한 것보다는 오래 살았지. ……착한 애였는데.”

요한은 어려서 죽은 선량한 소녀를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정태의는 잠시 체스판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보았다. 그 역시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어려서 죽은 것들은 모두 애틋하다.

“뭐……, 그렇게 아끼던 여동생이었으면 애통한 마음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네.”

정태의는 체스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문득 지난밤 들었던 그 담담하고도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네 어머니 무덤을 시체로 장식한다니까 화가 나나? 너는 들개를 죽여 그 시체를 올리비아의 무덤에 파묻었으면서?

“…….”

정태의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었든 혹은 크리스토프의 속에 들어 있는 광기가 그런 짓을 했든, 그런 걸 생각해서 뭘 어쩔 거야.

“올리비아가 죽고 나서 좀 소동이 있어서―크리스토프가 미친 짓을 좀 했지―리하르트가 그 문제를 크게 만들었어. 그래서 원래 저택의 별채에서 살고 있던 크리스토프의 가족은 저택에서 나가야 했지. 크리스토프는 그 당시에 아직 승계 후보자였으니까 계속 서익에 살 수 있었지만.”

“좀 불합리한데. 정작 문제를 일으킨 본인은 남아 있고 그 가족이 쫓겨나다니.”

“가족이라고 해 봐야 미망인으로 남아 있던 그 어머니뿐이었지만……어차피 리하르트가 노린 것도 그거였으니까. ……야, 야, 너 왜 내 비숍을 툭툭 치고 그래.”

“이것만 이 자리에 없으면 나이트가 지나갈 수 있어서 그런다. 옌장, 앞길은 잘도 막아 놨네.”

“으흐흐, 풀코스 정식이다~.”

그때였다.

즐겁게 체스판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을 비비는 요한의 맞은편, 정태의의 뒤쪽으로 열려 있는 문 밖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사람들이 흔히들 드나드는 곳이라 정태의는 신경 쓰지도 않고 체스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 폰이 퀸이 되기 전에 잡아야 할 텐데, 저걸 잡을 만한 건 지금 비숍밖에 없다. 그러나 비숍을 움직이면 당장 룩이 체크메이트를 외칠 테고…….

정태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 한구석으로 형을 떠올린다.

그의 형은 어릴 때, 그 또래 아이들이 흔히들 좋아하는 류의 오락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다 준 오락기는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가 결국 폐품으로 내어놨다.

그러나 형은 이런 류의 게임은 꽤 좋아했다. 호불호를 크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태의가 장기나 바둑판을 꺼내면 어느새 그 앞에 와서 앉아 있곤 했었다.

“확실히 사람마다 두는 방식이 참 달라…….”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어째서인지 잠시 침묵하고 있던 요한이 왜, 하고 정태의에게 대꾸했다.

“형이랑 둘 때도, 내가 이길 때는 거의 없었지만 뭐랄까, 이런 느낌은 아니었거든. 이렇게 몰아친다기보다는 물 흘러가듯이 유유히 즐기는 사람이라서……. 형이랑 두면 마음이 평온해졌지.”

“거야 풀코스 정식이 걸려 있지 않아서 그런 거지.”

“…….”

사람이 모처럼 헤어진 형제를 그립게 떠올리고 있는데 저놈의 입하고는…….

정태의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흐음. 풀코스 정식이 걸려 있나 보지.”

등 뒤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등 뒤에 서서 체스판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척은 느껴졌지만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정태의는, 그 목소리가 낯익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역시나 그 옆에는 일레이도 같이 있다.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체스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을 눈앞에 둔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은 그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서랍을 열어 카드를 꺼내는 걸 보니 그 둘도 시간을 보내러 온 모양이었다.

“오후에는 늘 바쁘신 것 같던데, 어떻게 이런 데에서 놀기도 하시는군요.”

정태의는 적당히 인사를 건네야 할 것 같아 무난한 말을 골랐다. 그 옆의 일레이에게는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리그로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리그로우. 그리고 김영수.

모든 일에는 연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자신이 김영수로 행세하는 이유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쓰는 이름이었음에도. 크리스토프는 이름이 재수 없어서 그렇다고 일축했지만…….

“아. 오늘은 저녁에 어르신이 서익으로 오시기 때문에 미리 돌아왔습니다. 자칫 교통 정체에 말려들어서 어르신보다 늦어져서야 안 되니까요.”

“음?”

“달마다 한 번씩 어르신이 서익에서 식사를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날은 다들 약속을 잡지 않지요. ……그렇게 말은 해도 그냥 노인분을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리하르트는 웃으면서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말로만 듣던 그 어르신,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정태의는 요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자리에 내가 같이 식사를 해도 되나?”

“아, 상관없어, 상관없어. 좀 전에 리하르트가 말했잖아. 그냥 노인네 모시고 같이 밥 먹는 거라고. 뭐, 승계 후보자쯤 되면 몰라도 아닌 사람들이야 그냥 노인공경에만 힘쓰면 되는 거지.”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떻게 들으면 승계 후보자인 리하르트에 대한 비아냥으로 들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리하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요한 역시 별 악의는 없었던 것 같다.

정태의의 옆에서 리하르트가 카드를 섞는 동안 그 건너편 자리―요한의 옆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체스판을 들여다보던 일레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요한이 풀코스 정식을 얻어먹겠군.”

그 무심하고 냉랭한 목소리는, 체스판을 노려보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는 ‘질 게임을 왜 하냐, 멍청아’로 들렸다. 실제로 일레이 역시 그런 의미를 어느 정도 담고 있었던 듯, 정태의가 흘낏 노려보자 눈에 비웃음을 담는다.

“뭐……승패와 관계없이 게임은 즐거운 일이니.”

조금 전까지―사실은 지금도―풀코스 정식 때문에 속쓰려 하고 있던 정태의는 애써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질 게 뻔한 게임을 즐겁다며 시작하는 그 심경은 난 잘 모르겠군.”

일레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는 말에, 태연한 척하고 있던 정태의는 욱하고 말았다.

이놈이 모른 척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지, 왜 자꾸 시비야.

“해 보지도 않고 질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패배주의가 더 이해하기 어려운걸.”

정태의는 입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하면서 눈으로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일레이는 턱을 감싸쥐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입술을 문지르면서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허공에서 마주친 사나운 시선들 옆에서, 카드를 다 섞은 리하르트는 카드를 떼며 담담히 웃었다.

“도전정신은 훌륭하지만, 그랜드마스터와 내기 체스를 둬서야 수지가 안 맞지요.”

“헤?”

정태의는 순간 멍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는 정태의가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 옆에서 그 시선들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일레이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요한. 또 속였나?”

어차피 남의 일이라며 평연하게 말하는 일레이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눈을 껌벅이고 있던 정태의는, 바로 다음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휙, 정면에 앉은 요한에게 도끼눈을 향했다.

“속이다니 무슨 말을……. 나는 그저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이야. 마침 체스판이 보이기에 체스 한 판 어떠냐고 말했을 따름이라고.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까 적당히 내기도 좀 걸고.”

요한은 매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그 말투만큼이나 태연자약하지는 않은 듯, ‘젠장, 거의 다 된 참이었는데’라는 빛이 그 불안하게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한. 체스 그랜드마스터였나?”

정태의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었다. 거 대단하군, 하고 감탄하는 빛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다.

“어……뭐. 거 요즘 흔하잖아. 요새는 천 명도 넘게 있다던데 뭘. 별 대단한 것도 아냐. 그냥 보통 수준인 거라니까.”

요한의 대답은 겸손했다. 별 것 아니라고 강조하는 그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실린다.

정태의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상을 엎는 건 처음만 어렵다는 가르침을 준 알타는 이런 가르침도 줬었다.

―밥상 한 번 엎고 나면 다른 상 엎는 건 문제도 아니야.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그 가르침을 이렇게 유용하게 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태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헉, 짧은 신음이 건너편 자리에서 터져나온 듯했다.

정태의는 잔잔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그 손을 확 들어올렸다.

***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정태의는 잠시 자리를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그곳은 그가 여느 때 앉아서 식사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태 정태의는 이 식당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스물 남짓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식당은, 평소에는 사람이 많아 봐야 열서너 명쯤 있는 정도였다. 아침이나 점심때는 훨씬 적어 혼자 식사를 할 때도 있었고, 저녁에도 보통 열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스무 자리가 모두 차 있었다.

아까 정태의가 엎어 버린 체스판에 얻어맞고서도 끝까지 투덜거리면서 ‘속인 게 아니라니까,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지.’라고 주장하던 요한이 미리 정태의 몫의 자리를 확보해 두지 않았더라면 밥도 못 먹을 뻔했다.

“어르신, 인기가 무진장 많으시구나.”

숨도 크게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의 식당에 들어선 정태의는 자리에 앉으며 요한에게 중얼거렸다. 요한은 아무렴,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르텐에서 제일가는 인기를 자랑하는 분이시지. 그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지나가는 길은 홍해처럼 갈라지지.”

“……. 그러고 보니 안 물어봤는데, 넌 뭐해서 먹고 사냐?”

틀림없이 입으로 먹고사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흰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뭘 어떻게 해석했는지, 요한은 여자들에게 100%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세 명을 대상으로 한 100%였다.

정태의는 그를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측면의 자리에는 빈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는 리하르트와 그 건너편의 크리스토프까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옷도 단정한 정장이다.

아직 사람이 앉지 않은 자리는 단둘.

테이블 제일 앞쪽에 마련되어 있는 널찍한 자리 하나와, 모퉁이를 사이에 두고 그 자리의 옆에 마련된 자리 하나.

널찍한 자리는 어르신이 앉을 자리일 테고, 그 옆자리는……. 비서쯤 되는 사람이 앉으려나. 아니면 집안의 이인자라든가.

“야……. 이 집의 분위기가 이렇게 경건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나름대로 군기가 잘 잡혀 있는 면모도 있구나.”

정태의는 감탄스레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직도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직업군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던 요한은 어, 하고 목덜미를 긁었다. 정태의는 외부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죄다 정장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단정한 차림새로 앉아 있는 가운데, 홀로 러프한 니트에 면바지인 차림이 눈에 띄는 요한이었다.

“그럴 만한 분이시니까 당연하지. 타르텐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다시피 한 입지전적인 인물인걸. 판단력과 결단력, 실행력을 모두 갖춘……, ……외부인한테 말해 줘 봐야 별로 납득도 못하겠다. 그냥 타르텐을 지금처럼 거대한 왕국으로 만든 분이라고 생각하면 돼.”

정태의는 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친구이긴 하지만 다소 성격이 삐딱하고 반골 기질이 있는 요한이 저렇게 칭찬할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이긴 한가 보다.

하긴 이 정도 되는 가문의 정점에 서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면 분명히 대단한 사람일 거다.

“뭐 지금은 거의 일선에서 물러서다시피 한 노인네이시지만, 노인을 공경해야지.”

요한은 다소 핀트가 빗나간 말로 이야기를 맺었다.

타르텐이라.

T&R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이 가문이 가업으로 선택한 일은 정보업이라고 들었다. 친족경영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설 정보기관.

카일이 믿을 수 있고 내실 있는 기관이라고 확언할 정도면 상당한 레벨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언뜻 듣기로는 빚이 있다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추정하기로는 상당한 액수로.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차관을 끌어왔다고 한 것 같았는데, 차관은 민간차관이라도 그렇게 쉽게 끌어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관을 얻어왔다면 뭔가 공적인 성격의 사업체를 갖추어야 할 텐데 사설 정보기관이라. ……공공 정보기관과 연계라도 되어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전에, 그렇게 막대한 액수의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정태의는 포크를 집어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샐러드 접시에서 토마토를 찌르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주위의 차가운 시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어르신도 안 왔는데 먼저 포크를 들다니, 하는 빛이다.

정태의는 슬그머니 도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긴 그렇지, 어른과 같이 식사할 때에는 먼저 수저를 들면 안 되지, 암.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앞쪽, 빈자리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올리버가 다쳐 소동이 일어난 게 바로 하루 전이었다. 즉, 만으로 하루쯤 전에 저들은 살벌하다 못해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창백해질 만큼 험악하게 대치했었다. 심지어는 정태의는 그들의 사이에서 목숨까지 내걸어야 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쩌다가 우연히 시선이 스칠 때에는 그 눈길이 삭막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눈싸움을 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제 분위기가 사람 몇 정도는 그냥 때려잡을 분위기라서, 오늘 식당에서 2라운드가 시작되는 건 아닌가 했더니만.”

정태의는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어르신 앞에서는 못 싸우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옆에서 요한이 대뜸 말했다.

과연, 절대적으로 공경받으시는 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만인에게 공평하게 안하무인일 줄 알았던 크리스토프가 저렇게 예의바르게 자리에 앉아 있다니 기묘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조용히 앉아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자, 마치 천사처럼 아름답고 선량한 젊은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이루어졌다.

저 녀석은 정말로 조금만 더 정상적이었으면 매우 알차고 보람된 삶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해 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을 아쉬워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노인과 청년이 함께 들어왔다. 노인을 부축하듯이 정중하게 반걸음쯤 앞서 문을 열고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는 그 예의바른 젊은이는, 일순 자기 눈을 의심한 정태의가 본 바로는, 일레이 리그로우였다.

오늘은 한층 더 악덕 변호사 나부랭이로 보이도록 말쑥하고 번드르하게 잘 차려입은 일레이는 노인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노인은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친다.

“……저 남자는 왜 주인공도 아니면서 제일 마지막에 주인공이랑 같이 들어온다냐.”

정태의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요한은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귀빈이잖아. 아무리 어르신이 윗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미리 상에 앉혀 둘 수야 없는 노릇이지.”

말해 두는데 그를 귀빈이라고 하는 건 내 의견이 아니라 일반론이 그렇다는 것뿐이야, 라고 굳이 덧붙이는 그의 심경을 알 것도 같아 정태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어르신이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고, 비서가 앉으려나 싶었던 그 옆쪽 자리에 일레이가 앉고 나자 드디어 식당의 모든 자리가 찼다.

정태의는 그간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 그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 노인을 찬찬히 살핀다.

언뜻 나이는 좀체 짐작이 되지 않았다. 예순에서 일흔 사이, 제법 넓은 범위 가운데 어디쯤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체구는 보통보다 약간 작은 정도, 온화하게 웃는 얼굴은 길을 오가는 여느 노인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과 무게감은 오히려 그 옆에 서서 그를 부축해 주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나 뒤질 게 없었다.

“다들 나 때문에 기다렸나 보군. 어서 들게.”

거창한 인사 따위도 없이 노인은 그들에게 손짓을 하며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이 먼저 포크를 들어 채소 따위를 입으로 가져갔다.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한이 했던 말대로, 그저 어른 한 분을 모셔 놓고 편하게 밥을 먹는 분위기에 지나지 않았다. 딱딱하거나 거북한 느낌도 없다. 그런 느낌은 오로지 갑갑한 양복을 입고 말수를 퍽 줄인 몇몇의 남자에게만 있을 뿐이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영감님인데 말야.”

이미 신나게 식사를 입안으로 쓸어담고 있던 요한은 정태의가 말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보기에 안 평범한 사람은 또 어딨겠어. 다들 알고 보면 놀랍거나 안 놀랍거나 한 거지.”

“그냥 보기에 안 평범한 사람…….”

“아. 하나 있긴 하구나.”

요한은 심상하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음식을 주워섬긴다.

정태의는 송이구이 따위의 심상찮은 음식은 미리 요한의 접시에 덜어 놓으며―음식에 트라우마가 생기기는 처음이었다―흘끔, 그냥 보기에 안 평범한 사람을 본다.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인의 옆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것만큼은 다른 식사 때와 같이, 식사만 한다. 그러나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묵묵히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은 어딘지 평소와 달랐다.

“크리스토프가 저렇게 순하게 앉아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정태의는 감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말 그대로 순한 어린양처럼 앉아 있었다. 얼핏 보면 뭔가에 겁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다.

“크리스토프가 유순하게 대하는 딱 둘뿐인 사람 중 하나 되시지.”

“그래? 하나는 누군데.”

“지네 어머니.”

요한은 먹는 데에 열중하면서 잘도 말했다. 음식물이 입 안에 있는데도 저렇게 또렷하게 말하는 걸 들으며, 역시 이놈은 입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새긴다.

정태의는 매우 유쾌한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우는 요한을 감탄스럽게 쳐다보다가 자기 몫의 음식을 떴다.

“그래, 요즘 저녁식사는 서익에서 하고 있다면서. 힘들지는 않고?”

문득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와 달리 사람들이 저마다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들을 해 멀리 앉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잘 들렸다.

어린 손자에게 말하는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는 옆에 앉은 일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전채를 집어들던 일레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오랜만에 다들 만났는데 이 기회에 좀 쉬면서 어울리는 거죠. 다들 잘해 줘요.”

툭.

정태의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지금 뭔가 믿어지지 않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 믿어지지 않는 말투라고 해야 할까.

정태의는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뒤로 늘 그렇듯이 오늘도 세련된 젊은 신사 같은 일레이는, 사이좋은 조손지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인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야……, 어르신은 저 말을 믿으시냐……?”

“릭은 말이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도끼를 휘두르던 놈이야. 외부에서도 저 성질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내부에서―심지어 모든 정보가 다 들어오는 위치에 있는 분께서―모를 리가 있냐.”

“그런데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

“왜. 말 자체에 거짓은 없잖아. 저놈이 힘들길 하겠어, 저놈한테 잘해 주지 않는 놈이 있기나 해. 다들 오랜만에 만난 것도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든 거짓말은 아니잖아.”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는 것도 거짓에 포함돼!”

정태의는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했던 그랜드마스터를 쏘아보았다. 그는 모른 척 익힌 채소를 쩝쩝거리고 있었다.

정태의는 다시금 경악이 섞인 떨떠름한 눈으로 일레이를 보곤 접시를 쿡쿡 찔렀다.

생각해 보면 타르텐과 리그로우는 집안의 행사 때마다 서로 사람이 오갈 정도로 절친하다고 했다. 어지간한 친척과 비슷한 정도쯤은 된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본다면, 저 어르신에게마저 패악을 부리면 그건 패륜 수준이다. 비록 저놈이 제 형에게 총구를 들이댔다는 말은 들은 바 있으나 부모에게까지 그랬다는 말은 들은 적 없으니, 최소한―정말로 최소한―의 인륜은 지키는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런 직후에 그걸 깨닫고, 이런 일로 그의 알량한 인간성을 확인해야 하는 현실에 잠시 절망했다.

“그래, 자네가 보니까 좀 어때. 타르텐을 물려받을 싹이 보이는 놈이 좀 있던가?”

노인은 웃으면서 일레이에게 말을 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좌중에 긴장이 감돌았다.

비록 일레이의 의견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으니 대수롭지 않다 하나, 어르신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심상하게 받아넘길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정태의는 그 긴장감을 이내 깨닫고 볼을 긁적였다. 이렇게나 경쟁심이 투철할까.

“그런데 승계 후보가 몇 명쯤 있다면서. 리하르트 말고는 누구야?”

“어? 아. 가만있자, 프리츠랑 또 누구였지, 막스인가……. 하여간 두어 명 더 있는데, 신경 안 써도 돼. 말이 몇 명이지 실질적으로는 리하르트 말고는 달리 물려받을 만한 인물이 없으니까. 아니 뭐 그 두 놈도 똑똑한 놈들이긴 한데, 리하르트가 워낙 압도적인 수완가라서 두각을 드러낼 일이 거의 없었거든.”

“그럼 경쟁 자체가 아예 성립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음―나는 그럴 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보지만, 변수가 있잖아. 나머지 놈들이 합심을 한다거나, 혹은 승계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건 터뜨릴 여지도 남아 있고…….”

“한 건 터뜨릴 여지라니 그건 또 뭐야.”

“아, 그야 이제 곧―.”

거기까지 말하던 요한은 입안에 거의 쓸어담다시피 하던 음식물이 목에 걸렸는지 갑자기 컥컥거리며 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두고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몇 초 안에 더러운 꼴을 볼 것 같아 정태의는 얼른 그에게 티슈와 물잔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좀 늦어 버렸다. 요한은 티슈로 미처 입을 막기 전에 쿨럭거리고 말았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기울인 정태의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이 괴로운 꼴을 당했다.

“……너도 참 걸물이다…….”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접시를 좀 더 바싹 끌어당겼다. 만에 하나라도 요한의 피해를 다시 입을까 봐 미리 방어하고자 함이다.

“그래, 리하르트, 얼마 전에 맥카티를 만나고 왔다면서.”

노인은 이번에는 리하르트에게 말을 건네었다.

리하르트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예, 마침 베를린 쪽으로 올 일이 있었다고 해서 만나고 왔습니다. 아직 M15에 있다더군요.”

“흠, 그래……. 요즘 그쪽은 잘 굴러간다더냐?”

“전체적으로 별 문제는 없다고 하더군요. 단지 얼마 전에 방첩 문제로 암암리에 무하바라트와 껄끄러웠나 봐요. 신베트도 얽힌 것 같던데 거기까지는 듣지 못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하고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잠시 고뇌에 잠겼다. 이 집안의 분위기를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면 적어도 세 나라의 보안국이나 방첩기관이 엮여 있는데, 저 말만 들어서야 대단찮은 일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가족 간의 식사자리에서 할 단란한 이야기는 아닌 성싶었다.

정태의는 괜히 애꿎은 요한을 노려보았다. 요한은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왜 노려보냐는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여기 집안 분위기 참 따라가기 힘들다.”

“어, 그렇지? 나도 따라가기 힘들어. 무엇보다 우리 집안에는 딸이 너무 귀해. 누나나 여동생들이 좀 있어야 집안 분위기가 화사하게 필 텐데 이건 뭐 사내놈들만 득시글거리니 원.”

같은 항렬에서 여자 비율이 20%도 안 된다니 이건 뭐가 좀 이상한 거라고 주장하는 요한의 입을 좀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추한 꼴을 보게 될까 봐 참았다.

정태의는 묵묵히 접시의 음식을 퍼먹었다. 얼른 먹고 그냥 나가 버리는 게 낫겠다. 이 분위기도 썩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리하르트는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야. 타르텐의 기반을 구축한 건 어르신이지만 금전적으로 좀 불안정하던 기반을 단기간에 탄탄하게 회복시킨 일등공신이거든. 저놈은 타고난 사업가란 말이야. 거래와 협상에 능하거든.”

요한은 입 안에 있던 음식을 물과 함께 넘겨 버리고 말했다.

“타르텐은 내실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음, 하지만 요 수십 년은 좀 힘들었지. 어르신이 모험을 크게 하셔서.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선택이셨지만, 어쨌든 금전적으로 부담이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힘드니까.”

“……음?”

“부채 비율이 단기간에 반 이하로 팍 줄어든 기적적인 업적은 거의 다 리하르트의 공이지. 그런 걸 생각해서도, 저놈 말고 다른 놈이 승계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야.”

그렇게 먹고서도 아직 부족한지 흘금흘금 정태의의 접시로 눈길을 주며 주절거리는 요한에게, 정태의는 아예 접시째로 내어주고 말았다. 저렇게 먹은 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요한의 깡마른 몸매를 곁눈질했다.

카일이 타르텐을 두고 믿을 수 있고 내실 있는 곳이라고 해서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큰 부채가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 뭐든 일을 할 때에는 자금을 굴리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다.

노인과 식사할 때는 언제나 그러는지 몰랐지만, 노인은 테이블에 앉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가며 말을 걸고 있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보니 원래 그런가 보다.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르신이라고 해서 좀 더 준엄하고 무서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손자뻘 되는 청년들과 하나씩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온화하고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큰아버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그 항렬과 차이가 많이 나는 모양이다.

정태의의 시선은 노인의 옆에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옮겨갔다. 저 순서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제일 마지막에 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될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식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로 아름답고 예의바른 젊은이다. 늘 저렇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 그를 쳐다보는데, 크리스토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인지, 그는 잠깐 노인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입끝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눈매가 굽어진다.

아. 웃고 있다.

정태의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거의 웃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웃음’이라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웃을 만한 일이 있어도 입매나 눈초리가 약간 휘는 듯 마는 듯, 웃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에서 그 특유의 냉담함과 심드렁한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내 알 수 있다.

“어르신은 좋은 분이구나.”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저 노인을 좋아하고 있었다. 동경이나 존경에 가까운지도 모르지만, 그는 저 노인에게 분명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잘 드러나지는 않는 게 유감이었다.

정태의가 내어준 접시도 순식간에 반 넘게 비워 버린 요한은 응? 그야 뭐,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다들 어르신을 좋아해. 존경할 만한 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르신은 한 분뿐인 데다 워낙 바쁘시니까 사람들을 일일이 돌아봐 주지는 못하지. 이런 식으로 가끔 시간을 쪼개어 내실 뿐이야.”

그렇게 쉽게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라구, 하고 요한은 괜히 자기가 뻐기면서 말했다.

그렇군,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마치 동경하는 영웅의 옆에 앉은 수줍은 소년처럼,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봤지만―그리고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의외이긴 하지만―나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도 원래는 승계 후보였다면서.”

“음? 음.”

“도중에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르신과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을 것 아냐.”

크리스토프가 보기 드물게도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럼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다.

정태의가 아쉽게 말하자 요한은 입 안 가득 음식물을 채워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글쎄……, 뭐 확실히 크리스토프도 그 당시까지 유일하게 리하르트와 대등하게 경쟁을 할 만큼 뛰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아 봐야 승계자로 선택되지는 못했을걸.”

“……포악하고 미친놈이라서?”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곤 하지만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는 데에 있어선 인성도 무시할 게 못 되거든.”

아니, 인성을 따지자면 리하르트도 의외로 좀 비틀린 구석이 있어 보여……라고 정태의는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구석이니 괜히 험담하듯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평균적으로 썩 훌륭한 인물 아닌가.

“그래, 확실히 인성은 중요하지. 크리스토프의 인성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

정태의는 대놓고 크리스토프를 험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비록 저놈을 싫어하지 않는다지만 저 인성에 부족함이 많은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두고서 돌아온 요한의 대답은 정태의가 뜻한 바와 약간 달랐다.

“인성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 정신이 좀 이상하잖아.”

대단히 거침없는 말투에 공연히 정태의가 움찔하고 말았다.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저렇게 태연하게 ‘그놈은 미쳤어.’라는 말을 하다니, 역시 이놈도 정신세계가 비범하다.

“저놈은 안 돼. 내가 보기엔 이미 잘 살기 글렀어.”

심상하게 말하며 접시를 비워가는 요한의 말에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타인의 삶에서 행과 불행을 재단하는 그 말투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크리스토프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도 알고 있었고 그 이유에도 납득하는 바가 있었지만,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크리스토프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거야 없어 보이는데.”

아마도 그 말에서 정태의의 불편한 심경이 드러났던 모양이다.

흘끔 정태의를 쳐다본 요한은 잠시 말없이 음식을 우물거리다가 삼키곤 그제야 다 먹었는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똑바로 정태의를 쳐다본다. 늘 그렇듯이 쌀쌀맞지는 않으나 냉정함을 유지하는 눈으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크리스토프를 싫어하지 않아. 비록 저놈이 가끔 발작해서 사람을 도륙내려 드는 걸 보면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나는 그를 싫어하지 않아. 굳이 따지자면 싫다기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라고 해야겠지―그러나 ‘굳이’ 따져서 그렇다는 말이지, 나는 별로 그를 좋아하지도 않아―. 그리고 나는 남의 뒷얘기를 하는 걸 대단히 즐기는 편이지만, 싫어하지도 않는 인간을 굳이 나쁘게 말할 만큼 비틀린 인간도 아니란 말씀이야.”

요한은 얼굴에 잔뜩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정태의의 말에 기분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가볍고 발랄한 어투다.

“하지만 저놈은 안 돼. 그를 생각하면 가엾고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저 성격은 행복해지기 힘들어. ……혹은 행복해지더라도 그 행복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든가.”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관계도 없다는 듯이.

그때 마침 저만치서 급사가 들고 오는 쟁반 위에 올려진 디저트를 재빨리도 알아보고 눈을 빛내며, 그는 대수롭잖게 말을 맺었다.

“어찌 되었든 누가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밀푀유인가? 크렘브륄레? 기왕이면 상큼하게 셔벗 같은 거라면 좋겠는데.”

이미 머릿속에서 관심사가 완전히 전환되어 버린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뿐 그 말 자체는 정태의가 생각해도 납득이 갔다.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요한이 마지막으로 맺은 말마저 그른 데가 없었다. 삶은 원래부터 누군가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어쩐지 입맛이 씁쓸해져서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였다.

문득 이마 언저리가 따가워서 약간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일레이가 보고 있었다. 그쪽도 식사를 마친 듯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이쪽을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다.

“……?”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 속에서 시선이 날아왔다. 괜히 시선을 피해도 이상할 것 같아서 그를 뚫어지게 마주본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지 몇 초쯤 뒤에야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서로 쳐다보고 있는 편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눈싸움이 시작된 상태였다.

노려보는 것과 쳐다보는 것의 경계선에서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볼 때였다.

“그런데 그쪽은, 어디 보자……, 그렇지. 크리스토프의 친구가 머무르고 있다더니 그 청년인가 보구나.”

갑자기 자신 쪽으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져서 응? 하고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상한 눈으로 정태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응?”

몇 초쯤 눈을 껌벅이며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야 어르신이 자신에게도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아, 네.” 하고 공손한 척 대답하면서, 얼른 웃는 얼굴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노인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 릭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보지. 그렇게 쳐다보는 걸 보니.”

“예? 아뇨, 그게요…….”

정태의는 화들짝 놀라 노인과 일레이를 번갈아 보면서 진땀을 흘렸다. 이래서야 누가 보면, 몰래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들킨 줄로 생각하겠다.

“릭이 절 쳐다보길래…….”

정태의가 더듬더듬 말하자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내가?’라는 듯 의아하게 눈을 크게 뜬 그는 이내 픽 웃었다. 그 표정은 ‘난 그런 적 없지만 네가 그렇다니 그냥 잠자코 있어 주마.’라는 얼굴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그렇게 읽히는 표정이다.

아니, 난 정말로……하고 중얼거리다가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억울해서 가슴을 치며 뛸 일이었지만 그래 봐야 역효과일 뿐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정태의는 생각을 바꾸었다.

아주 정색을 하고서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노인과 일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에도 생각해 오던 바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세련되고 멋있는 데다 어르신을 모셔오는 정중함과 성실함에 시선을 빼앗겨서 그랬습니다. 저는 이 집에 잠시 들른 사람일 뿐이라서……, 그의 이런 모습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고 눈에 담아 두고 싶었습니다.”

거짓말은 제일 앞의 세 마디뿐. 나머지 말은 순수한 진실이었다. 말뜻만큼은.

저놈의 저런 정중하고 예의바른, 이지적인 호청년의 탈을 뒤집어쓴 모습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지금 자세히 안 봐 두면 아깝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정태의는 다시 뚫어져라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레이는 묵묵히 정태의를 쳐다보았고, 정태의 역시 그런 그를 마주본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들 사이를 오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노인의 웃음이었다.

“허허, 그래. 리그로우가 이목을 많이 끄는 젊은이지. 보는 눈이 있구먼.”

인자하게 웃는 노인의 웃음에 정태의는 잠시 ‘그게 아니라요.’라고 변명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노인의 옆에서 일레이는 잠시 더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약간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노인에게 말했다.

“저렇게 과분한 칭찬을 해 주니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인사라도 다시 하고 싶군요.”

노인 혼자서만 웃으며 그러려무나, 하고 말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중 그 말을 ‘너 나중에 두고 보자’로 듣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태의조차도.

젠장, 왜 난 늘 스스로 뗏장 쓰고 드러눕지.

얼굴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정태의에게서 노인의 질문은 그 다음으로 옮겨갔다.

정태의는 일레이가 나중에라도 저 말을 꺼내면 반드시 그 말은 순수한 칭찬이었다고 주장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디저트로 나온 레몬셔벗―아무래도 요한은 먹을 복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을 퍼먹었다.

정태의는 화가 난 사람처럼 몇 숟갈 만에 셔벗을 말끔히 비워 버리고 난 뒤에야 흘끔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눈싸움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레이 역시, 고개는 지금 노인의 질문을 받고 있는 청년에게로 향한 채 눈동자는 정태의에게 향하고 있었다.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이며 입매를 받치고 있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눈매가 웃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게 확 솟아올라, 정태의는 옆에서 행복하게 디저트를 아껴먹고 있던 요한에게서 디저트 그릇을 휙 빼앗아 차가운 셔벗을 한 입에 삼켰다. 옆에서 요한이 울부짖었지만 모른 척했다. 이놈이라면 어차피 급사를 불러서 한 그릇 더 갖다 달라고 할 거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가늘게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담긴 웃음기가 어쩐지 멋쩍다. 그래서 다시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이윽고 노인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이 하나하나에게 모두 말을 건 모양이었다. 마지막 차례인 크리스토프에게 노인이 시선을 준다.

“그래, 크리스. 지내기는 좀 어떠냐.”

노인이 묻자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약간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투명한 눈으로 노인을 마주보는 얼굴이, 마치 자신에게도 말을 걸어 줄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이다.

그러나 노인의 잔잔한 미소를 보기가 무섭게 크리스토프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르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약간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정태의는 고개를 숙인 채 노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는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늘 저렇게만 있으면, 누가 저놈을 미친놈으로 보겠어……. 앞으로도 계속 저러면 훨씬 나을 텐데.”

정태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그 옆에서, 아니나 다를까 급사에게 새로운 셔벗을 받아낸 요한이 중얼거렸다.

“틀렸어, 틀렸어. 원래 사람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한 번 찍히면 끝이야. 꼬리표라는 말이 괜히 무서운 줄 알아?”

한 번 미운털이 박힌 놈은 뭘 해도 미워 보이는 법이지, 하고 심술궂게 말하는 요한의 등짝을 꼬집어주었다.

“듣기로는 이제 T&R의 기동대에서도 나왔다던데, 그럼 요즘은 뭘 하고 지내고 있는 게냐?”

노인은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다른 모든 이에게 그랬듯, 그 얼굴에는 조카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애정이었다. 세인들이 가장 뛰어나다 말하는 손자에서부터, 세인들의 공포와 혐오를 받는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는 공평한 사랑을 주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쉬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노인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음식으로만 본다면 이미 끝났다. 다만 그들과 말을 주고받는 노인의 대화가 이어져 식사 자리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저녁 시간을 접을 때가 된 듯 노인은 기둥 옆에 기대어 두었던 지팡이를 달라고 했다. 크리스토프가 얼른 일어나 그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태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오늘의 일과는 끝났다. 방에 가서 잠을 자든 책을 보든 쉬면 된다. 아니면 뭔가 영화 따위라도 볼까,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는 어수선한 파장 분위기 속에서, 정태의는 착한 소년처럼 얌전하게 노인의 옆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픽, 웃고 말았다.

그러던 때였다. 지팡이를 짚고 식당에서 나가려고 걸음을 돌리던 노인이 문득 찬찬히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의아하게 노인을 바라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곧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뜨린다.

노인은 다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승계일에 맞추어 네 어머니가 오고 싶다고 하더구나. 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파삭.

정태의는 뭔가 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크리스토프의 눈 속에서 들렸다.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어 커다랗게 홉뜬 눈이, 얼음처럼 파삭파삭 깨어지고 있었다. 하얗게 창백해진 얼굴 위에서.

***

저녁엔 숲이나 한 번 돌고 올까.

정태의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숲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택의 뒤를 감싸고 웅장하게 이어진 산맥과 맞닿아 있는 숲은, 깊이 들어갈수록 울창해지긴 했지만 그 중간의 어느 정도까지는 길이 잘 닦여 있었다.

낙낙한 산책로와 더불어 승마 코스도 갖추어져 있어 크리스토프가 종종 그곳에서 말을 달리다 오곤 했다.

정태의도 가끔 저녁 무렵에 시간이 남을 때면 그곳에서 거닐다 왔다.

대부분은 승마 코스로만 이용하는 탓인지, 산책로를 거니는 정태의가 거기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멀찍이서 말달리는 소리가 때때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 저녁엔 모처럼 삼림욕이나 하고 와야지. 심신의 피로가 좀 풀릴 거야.”

정태의는 이곳에 온 뒤로 알게 모르게 피폐해진 자신의 심신을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저 숲은 썩 훌륭했다. 독일에서는 보기 드물어진 떡갈나무며 참나무가 숲 안쪽을 널찍하면서도 울창하게 채우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누워 하늘을 뒤덮은 잎사귀들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베를린의 집 뒤쪽으로도 자작나무숲이 이어져 있었지만, 이곳의 오크 숲이 더욱 울창하고 적막했다.

“개인 소유로 그렇게 훌륭한 숲은 보기 드물지. 그 녀석이 숲에만 갔다 하면 한참 동안 안 돌아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니까.”

정태의는 저택에서 몇 분 거리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숲의 입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지금도 숲에 가 있었다.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껏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정태의는 피로 범벅이 된 그의 서재를 닦아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러 나온 참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불안정했다. 원래부터도 종잡을 수 없이 아슬아슬한 구석이 있었지만 요 며칠 부쩍 더해졌다.

오늘도, 다른 때 같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급사 하나가 본관에서 전갈을 가지고 왔다. 아마도 급한 회답이 필요한 일이었던 듯, 급사는 크리스토프가 방에 없자 그의 책상 위에 전갈을 적은 메모를 놓아두고 가려고 했다. 그러면서 급하게 회신해 달라고 덧붙여 적으려고, 필기구를 찾아 크리스토프의 서랍을 뒤적였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때 크리스토프가 돌아왔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귓속이 자꾸 울린다고 중얼거리며 방 안에서 초조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결국 가지고 있는 두통약보다 더욱 약효가 센 것을 받으러 잠시 본관으로 갔다가 오던 참이었다.

정태의는 그가 약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허용량 이상을 씹어먹지는 않을까 싶어―요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그를 따라갔었다.

이번에도, 필요한 양보다 몇 배나 많이 받아온 약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내가 갖고 있을 테니 필요할 때마다 달라고 하지 그래.’ 하고 말했지만 크리스토프는 들은 척도 않았다. 꿈자리라도 안 좋았는지 잠에서 깨었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던 그를 더 자극하면 슬슬 위험할 것 같아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저놈 기분이 좀 나아지면 약을 어떻게든 빼돌려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럴 때였던 것이다.

서익으로 돌아오자마자, 방까지 가는 동안도 참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알약을 몇 개나 입에 털어넣고 씹으면서 서재로 향한 크리스토프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정태의도 크리스토프가 잠시 걸음을 늦추는 걸 보고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토프는 잠깐 멈추는가 싶던 걸음을 서둘렀다. 무표정한 얼굴로, 반쯤 열려 있던 서재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쾅―, 문이 불시에 열리자 그 안에 있던 급사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는 서랍을 열고서 그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저는 메모를 남겨두고 돌아가려고,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잠시 필기구를 찾…….’

급사가 당황하며 변명하듯이 설명하는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왜 마음대로 들어왔지?’

크리스토프가 나직이 말했다. 급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

급사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이제야 크리스토프에 대해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급한, 급한 전갈이라고 하셔서 저는 곧 전해 드―.’

‘내 방에 누가 들어와도 좋다고 했나.’

‘죄,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전갈을 전하러―. 아, 그, 그 전갈은 크리스토프 님의 큰숙부님께서 보내신 건데―.’

급사는 울상이 되어 황급히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태의가 혀를 차며, 뭐라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크리스토프는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말은 더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그는 급사가 덜덜 떨며 서 있는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그 도중에 있던 장식장에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꺼내어들었다.

도자기 인형이었다. 무릎높이쯤 되는 모자상.

만류할 틈도 없었다.

창백하게 질려 눈을 홉뜬 채 꼼짝도 못하는 급사에게 다가간 크리스토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를 내리쳤다.

퍽―,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도자기 인형이 깨어졌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던 우아한 어머니의 머리가, 아기가, 몸이, 팔과 다리가, 원형을 잃고 숱한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급사는 비명을 찌르며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를 감싸쥔 손가락들 사이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크리스토프는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직 손 안에 반쯤 남아 있던 도자기 인형으로 급사를 내리치고, 또 쳤다. 급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으로 목이 쉴 때까지.

정태의는 낯을 굳히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팔을 움켜쥐어 거세게 치워내었다.

‘그만둬, 크리스!’

‘날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크리스토프는 냉정하게 말했다. 드물게 드러나는 그 기이한 경련과 초점을 잃은 푸르스름한 눈빛이 아니다. 그는 완벽하게 평소와 같은 이성으로―평소보다 다소 서늘하게 가라앉은 정신으로―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이제는 큼직한 유리컵과 같은 크기로 줄어 손에 남아 있는 도자기 조각을 정태의에게 내던졌다. 세게.

흠칫 몸을 움츠리며 피한 정태의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정확하게 통과해서 날아간 도자기는 그 뒤의 벽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더 이상 도자기 인형은 남아 있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조각들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맞았더라면 틀림없이 성치 못했을 정태의는 굳은 얼굴로 등 뒤에서 깨어진 조각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크리스! 너, 손!’

크리스토프의 손은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있었다. 깨어진 도자기를 움켜쥐고 몇 번이나 휘둘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해서 정태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빌어먹을, 제 몸 상해 가면서까지 남을 다치게 하는 인간이 어딨어, 이 멍청아!’

정태의는 혀를 차며 그에게 다가갔다.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눈을 하고.

그러나 정태의가 손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서재에서 나가 버렸다.

정태의는 그를 뒤쫓아가려고 하다가 뒤에서 피투성이로 웅크리고 앉아 신음을 흘리는 급사를 보고 그리로 다가갔다.

결국, 사람을 불러 그 급사를 병원으로 보낼 때까지 크리스토프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로 범벅이 되어 도기 조각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는 서재 앞에 넋 놓고 서 있던 정태의는, 지나가는 말로 그가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빈방에 대고 그 주인의 욕설을 한바가지 퍼부었다.

‘사람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 팔자 좋게 승마?! 어이구, 미친놈. 이 방 꼴 좀 보라지. 저기에 제 피는 안 섞여 있는 줄 알아?!’

그렇게, 빈방에서 생각나는 한 모든 욕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 그거 손은 치료를 했나 몰라, 하고 투덜거리며 서재를 청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까지 튀었을지도 모르는 파편을 찾아 온 방 안을 샅샅이 치우고 나니 시간이 제법 지났다.

치우다가 조각에 살짝 긁혀 핏방울이 한두 방울 맺힌 손가락 끝에 반창고를 붙이고, 피투성이인 바닥을 닦다가 바지 무릎을 물들인 핏자국을 보고 혀를 차며, 그렇게 방을 다 치우고 나니 정말로 심신이 지쳐 버렸다.

베를린에서 머무르는 동안 거의 끊다시피 했던 담배가 몹시 간절해졌다.

담배를 사러 나가기엔 바깥문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저택의 위용을 떠올린 정태의는 잠시 생각한 끝에 요한을 찾아갔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안 피운다면 적어도 정태의보다는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 어디서든 담배 한 개비만 얻어오라고 닦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피로 물든 바지를 입고 나타난 정태의를 보고 순간적으로 기겁을 한 요한은, 자신은 별로 피우지 않지만 아주 오래 전에 친구가 두고 간 게 아마 있을 거라며 한참 동안 서랍이며 책상, 심지어는 옷장 속까지 뒤지더니 겨우 한 갑을 꺼내어 주었다. 딱 한 개비만 빈, 거의 새 담배였다.

속도 타는데 줄담배나 피우자, 하고 담배를 줄지어 피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정태의가 도달한 곳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이었다. 저만치 숲이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고 바람 잘 부는 곳.

서익과 본관을 이어 준 간이탑 제일 위, 공중정원이 단출하게 꾸며져 있는 쉼터다.

원래 본관과 동익, 서익을 한 채의 건물로 지으려다가 건물 구조와 기능상의 문제 때문에 세 채를 따로 짓고, 그 대신 그 건물들의 각 층별로 쉽게 오갈 수 있도록 건물 사이를 이어 줄 만한 건축물로 세운 것이, 이 간이탑이었다.

동익과 본관 사이에 있는 간이탑도 이곳과 대칭으로, 구조는 같다고 들었다.

간이탑의 기능은 오로지 본관과 동․서익을 이어주는 것뿐이라, 이 옥상층의 아래층은 모두 복도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옥상에는 이렇게 조그만 인공정원을 꾸며, 먼 곳까지 내다보고 바람을 맞으며 한숨 돌리기에 좋도록 만들어 놓았다.

즉 바람이 통하는 바깥이되 다른 사람들 눈에 지나치게 띄지 않는 이곳은, 담배를 피우기에 딱 좋았다. 더욱이 지금의 정태의처럼 줄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문제 있어…….”

아무래도 그놈은 좀 문제가 있어……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두 개비째의 담배를 뻑뻑 피우는 중이었다.

거의 모든 이가 크리스토프를 두려워한다. 설령 그를 싫어하지 않는 이조차도 그를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아까 급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보내졌을 때, 병원에 연락하고 차편을 마련한 사람들은 끔찍해하고 혀를 차면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뜻이다.

“……. 후…….”

고개를 들어 하늘에 대고 담배연기를 뿜어내었다. 그러는 사이에 두 대째의 담배도 거의 다 타들어갔다.

정태의는 망설임 없이 한 개비 더 꺼내어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피운 탓인지 벌써 목이 칼칼하다.

그럴 때였다.

기본 뼈대 외에는 탁 트여 있는 간이탑의 저 아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아이들 소리다.

혹시 간이탑을 통해 다른 건물로 건너가는 걸까 하고 귀를 기울여봤지만 그 기척들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바로 아래층에서 건물로 빠질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지만 그 발걸음은 아래층을 지나 더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태의는 황급히 담배를 껐다. 어른이면 몰라도 애들이 오는데 담배를 계속 물고 있을 수는 없다.

얼른 담배를 꺼서 그 장초를 담뱃갑 안에 집어넣고 허공을 휘휘 젓는다. 잠시 머물던 담배연기는 곧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계단을 뛰어올라와 옥상을 내디디는 조그만 발소리가 들렸다.

“어.”

“어…….”

이미 기척을 듣고 그들이 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어. ’하고 걸음을 멈추는 아이를 따라 자신도 놀란 척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올라온 여자애의 뒤를 이어, 네댓 명의 아이들이 따라 올라왔다. 그들도 정태의가 거기 서 있는 걸 보고 어, 어, 하고 외친다.

“다 같이 놀러온 거야? 사이좋네.”

정태의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낯익은 아이들이었다. 크리스토프가 가르친다는, 다음 대 승계 후보들이다.

아직 여남은 살 남짓, 이렇게 어린 나이 때부터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다. 과거 크리스토프나 리하르트의 모습이기도 했다.

“에이, 얘랑은 안 놀아요. 얘는 만날 책만 보자고 하는걸.”

“허구한 날 퍼즐게임이나 하자는 너보단 낫지!”

정태의가 사이좋다는 말을 하자마자 아이들은 저마다 왁자왁자 누군가를 가리키며 얘랑은 안 놀아, 얘는 재미없어, 하고 떠들어 댔다. 정태의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는 이렇지는 않았을 거다. 이 정도 나이 때에도, 그들의 관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의는 그들 가운데서 웃으며 “볼프에게 자꾸 지는 건 네가 요령을 몰라서 그래, 내가 나중에 가르쳐 줄게.” 하고 말하는 올리버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는 머리 뒤쪽으로 큼직한 거즈를 대고 있을 뿐 아무렇지 않게 나다니고 있었다.

“올리버, 다친 데는 괜찮아?”

정태의가 묻자 올리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눈이 정태의를 올려다본다.

“약을 새로 바를 때에만 스며서 좀 아프고, 다른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많이 놀랐었겠네.”

그러자 올리버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으응, 하고 망설이다가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는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그들보다 다소 뒤늦게 리하르트가 옥상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저택 안에서 돌아다니는 리하르트의 근처에는 늘 같이 다니는 일레이도 뒤따라 나타난다.

정태의는 일레이를 보는 순간 윽,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반면 그는 살짝 눈을 크게 쓰며 희미하게 웃는다. 심심하던 차에 너 잘 만났다, 이런 웃음처럼 보여 공연히 뒤로 물러서고 싶어졌다.

“어쩐 일로 여기에 계셨나요?”

리하르트는 아이들을 손짓으로 불러 모으며 정태의에게 인사를 했다. 그 뒤로 일레이가 주위 전경을 주욱 둘러본 뒤에 시선을 주었다. 슬쩍 눈썹을 치켜올린다.

“담배 피우러 왔군.”

제일 먼저 달려온 아이들도 몰랐는데 제일 늦게 나타난 주제에 이 개코 같으니.

하지만 피웠다는 사실만으로 떳떳치 못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정태의는 그게 뭐,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술에 담배까지…….”

일레이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건 필경 정태의가 맥주를―다소 지나치게―좋아한다고 구박하는 거다.

그러나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던 일레이가 멈칫했다. 그리고 물끄러미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

순식간에 그 시선이 삭막해졌다. 멈칫, 그가 이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그 새카만 눈동자가 얼음처럼 식어, 정태의는 흠칫하고 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일레이는 잠시 더 아래를 노려보다가 쯧, 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어디서 무릎에 피를 묻히고 와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눈으로 정태의를 한 번 주욱 훑었다. 손가락 끝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밴드까지 귀신같이 찾아내고 다시금 눈빛이 삭막해진다.

“어, 그냥 유리조각에 살짝 찔려서…….”

정태의는 재빨리 말하곤 아무렇지 않게 밴드 위를 문질렀다.

그제야 정태의의 무릎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고 아이들이 수선을 떤다.

“어디 다쳤어요? 어쩌다 다쳤어요?”

“병원 가야겠다. 걸어 다닐 수 있어요?”

사람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는 그 활기찬 수선 속에서, 정태의가 그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걸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크리스토프군요.”

그 목소리는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할 때든 그런 것처럼.

아마도 크리스토프가 급사 하나를 병원으로 보냈다는 소식은 이미 저택 안에 다 퍼진 것 같았다. 리하르트도, 일레이도 납득했다는 얼굴이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피투성이 바닥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치의 에너지를 다 쓴 기분이다. 더 기분이 가라앉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다.

“아―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

리하르트가 올리버만 데리고 나타난 거라면 그냥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바람 쐬러 나왔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이 아이들을 우르르 다 데리고 나와서야 애보기 중이라는 결론밖에 안 난다.

“아,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무기 다루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거든요.”

리하르트는 들고 있던 하드케이스를 흔들어 보였다. 정태의는 그 하드케이스를 보고 희한한 얼굴을 했다.

“총!?”

아이들에게 무기를 다루는 법을 알려준다는 말도 이상하지만, 총을 쥐여 준다는 발상도 매우 뜻밖이었다.

“총이라……. 아니 뭐, 모르는 것보다야 알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거 많은데 왜 굳이 총부터…….”

정태의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혼잣말에 가깝도록 조그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케이스를 풀고 있는 리하르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대신 정태의에게 대답해 준 사람은, 코뿐만 아니라 귀까지 좋은 일레이였다.

“이 애들은 경호원도 붙여 주고 호신법도 최대한 가르쳐 둬야 하는 입장이거든.”

정태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렇다. 이 아이들은 이 집 안을 돌아다니는 여러 아이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선택된 아이들이다. 그러면 위험한 상황도 다른 아이들과는 비할 수 없이 많이 당할 터였다.

사실 아이들이 호신법을 안다고 해도 어른과는 기본적인 완력 차이가 있으니 별 소용은 안 되지만, 여차할 경우를 생각하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편이 당연히 낫다.

“몸조심해서 다녀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정태의 역시, 실제로 당한 적은 없지만 어릴 적에는 여러 번 납치를 당할 뻔했다. 실제로 납치를 여러 번 당하기도 한 형이 워낙 뛰어난 인재였던 탓이다.

아무런 특출한 점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정태의조차 납치의 위협에 맞닥뜨렸는데 이 아이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흠,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리하르트와 아이들을 바라보던 정태의는, 흘끔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팔짱을 낀 채 그 시선을 마주본다.

“댁도 배웠어, 어릴 때?”

생각해 보면 이 남자의 집도 이곳 못지않다. 어릴 적부터 경호원이 붙어다니는 생활을 할 만도 했다.

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지켜 주는―감시하는―걸로도 부족해 만에 하나를 위해 호신술이나 무기 다루는 법까지 배워야만 했던 기분이란 대체 어떤 걸까, 정태의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레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배워 보겠냐는 이야기를 아예 하지도 않던데.”

“그래? 타르텐에 비해 리그로우는 좀 더 안전한 보호방법이라도 도입했나 보지.”

“아냐. 형과 동생은 배웠지. 아버지가 나한테만 그런 제의를 하지 않았어.”

“……. 아하.”

정태의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이 아이들이 여남은 살. 그렇다면 아마도 저쪽 집안에서 아이들에게 호신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도 비슷한 나이일 테니……그때 이미 이놈은 도끼를 휘둘러 댔다고 했었지.

이 아들의 손에 다양한 무기를 쥐여 줘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 그 아버님은 탁월한 혜안을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비록 소용없는 결과로 끝나긴 했지만.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쑥 말했다. 일레이의 시선이 내려왔다.

“크리스토프도 배울 필요가 없었나? 이미 무기를 다루는 방법 따위는 알고 있었어?”

일레이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천천히 두드렸다. 정태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다.

“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언제 배웠냐고 묻는 거라면 나는 모르겠지만, 그 성격이나 정신 상태는 제법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중정원의 가운데에 있는 원탁으로 가, 케이스 안의 내용물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 안에는 완제품인 총이 한 자루, 그리고 부품별로 분해되어 있는 조각들이 한 자루 몫만큼 있었다.

“왜. 그놈이 때려잡은 사람의 피로 칠갑이 된 상황을 구경하고 나니 충격인가?”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는 일레이를 흰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남자가 할 말은 절대로 아닌 것 같다.

“사람 피로 칠갑이 된 걸 보고 충격을 받을 거라면, 난 이미 수백 번은 충격을 받고 노이로제에 걸렸을걸.”

심지어는 피로 흠뻑 젖은 장갑을 버리는 게 자신의 고정 업무 중 하나였던 때도 있었다.

일레이는 마치 남의 일처럼, 잊고 있던 기억이 그제야 떠오른 듯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했었군,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 남자도 양심이라곤 없다.

혀를 차며 다시 숲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정태의에게, 문득 일레이는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연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군. 그 녀석의 성질을 못 알아챘을 리도 없는데, 모르는 사이에 외모에 속아넘어갔나?”

정태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일레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일레이는 말을 잇는다.

“가끔 그런 놈들이 있지.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데도 눈이 보여주는 것에 속아넘어가는 놈들이. ―그러면, 생각해 봐. 크리스토프 타르텐은 T&R의 기동대에 있을 때에도 수위에 꼽히는 녀석이었다. 즉, 험한 의뢰를 그만큼 많이 받고 많이 이루어냈다는 뜻이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나?”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그에게 있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해 줄까. 코소보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 당시 그 녀석은 스물을 조금 넘긴 어린 나이였어. 그리고 그 나이에 거기에 투입된 그놈은, 지금까지도 유럽판 킬링필드를 벌였다는 소리를 듣는 놈이야.”

그 말도 들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속에 홀로 서 있었다는 이야기는, 크리스토프에 대해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단골로 나오는 화제였다.

“릭. 아니잖아.”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일레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태의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사람을 죽이는 게 허용된 공간은 분명히 있어. 사람을 아무리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살인이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는 특수한 환경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것이 반인륜적으로 벌어진 범죄가 아닌 이상은 타인이 말할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본인이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든 말든, 타인이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야. 코소보 사태였든 혹은 용병으로 불려나간 다른 전쟁터였든, 그곳에서의 일을 지금 문제 삼을 수는 없고, 나는 그럴 생각도 없어.”

“그 말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살상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이는 눈가에 서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은데 머리는 다른 말을 하니까, 골치 아프지? 다 좋게 받아들여 주고 싶은데 현실이나 네 가치관이 그렇지 않지? ―네 형이 무기에 손을 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말을 하는 일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허리를 구부려 정태의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 그 안에만 파고들도록 속삭이는 나직한 음성. 그 말을 듣는 순간 정태의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일레이는 웃었다. 다시 몸을 펴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삐딱한 웃음과 함께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상황의 문제는 하나야. 그리 복잡하지 않아. 그놈의 일상과 다른 사람의 일상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 이 상황이 문제가 된다면, 그건 그 녀석이 있을 곳에 있지 않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지 않나?”

“…―.”

“나는―아마 그에 대해서는 너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나는―딱 잘라 말할 수 있어. 크리스토프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야.”

정태의는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반박할 수 없는 그 말을 듣고 있기만 할 뿐이다.

일레이는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리하르트가 분해된 총을 조립해 보여 주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정태의는 잠시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 뒤를 따랐다.

아이들은 리하르트의 손끝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이 스프링을 공이치기에 걸 때, 가늠쇠를 총열에 맞출 때,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다.

분해되어 있던 총을 천천히 조립한 뒤 다시 풀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할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면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고, 리하르트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총을 분해했다가 조립한다. 이번에는 한 아이도 빠짐없이 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아이들이다.

처음 보아 낯설 것임에 분명한 그 숱한 부품들이 어느 위치에서 어떤 구조로 쓰이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들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뽑히게 된다. 20여 년 뒤에.

“흠……, 뭐야, 장난감으로 연습하는 건가?”

각자에게 주어진 부품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이들의 뒤에서 그 부품들을 들여다본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의 꼬물거리는 손을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시선을 주었다.

“장난감이라니, 실물과 똑같이 만들었는데. 위력이 대폭 줄었을 뿐이지 구조며 크기는 실물과 한 치도 오차가 없어.”

“어차피 탄환도 없는데 실물이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일레이는 피식 웃으며 아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다섯이라……. 이번에는 처음부터 승계를 포기한 아이는 없었나 보지.”

일레이가 잠시 숫자를 가늠해 보는 듯하다 불쑥 물었다. 그러자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의아하게 일레이를 보더니 이내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듯 아아, 하고 대답한다.

“없었어. 이 아이들 다섯 명이 모두 다 받아들였지.”

“네 때엔 처음부터 한 명이 포기했었지.”

“음. 요한이었지. 그 녀석도 아주 영리했는데, 어째서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어.”

“영리하니까 처음부터 포기한 거지.”

리하르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일레이를 흘끗 본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마땅히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던 중이거든.”

“흠……?”

이번에는 일레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는지 리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설명을 바라는 듯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러나 정태의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대답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계를 포기한다는 게……, 시점에 따라 의미가 다른가?”

정태의는 일레이에게 답변을 구했다. 일레이는 웃었다. 리하르트는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곧 일레이를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요. 승계할 가능성을 가지는 권리―즉 승계 후보자가 되기를 처음부터 포기하느냐, 혹은 도중에 포기하느냐.”

“어떻게 다른데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가, 혹은 져야만 하는가. 그것이 다르지요.”

정태의는 잠시 말없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일레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그 앞에서 총을 조립하고 있는 아이들을 본 뒤, 말했다.

“승계권을 처음부터 포기하면 불이익은 없으나, 도중에 포기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군요.”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걸, 아이들은 알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다 듣고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거니 물론 알고 있을 테지만, 과연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리하르트는 웃으면서 당연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 아이들의 인생이 걸려 있는 이상, 아이들에게도 선택권은 주어져야 공정하니까요. 처음에 아이들에게 선택을 제시할 때,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들은 모두 말해 줍니다. 타르텐을 물려받을 경쟁에 참여할 건지, 아닌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 아이는 타르텐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어지지만, 그로 인한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지요. 아무런 불이익도 없이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태의는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빠른 아이는 이미 총을 거의 다 조립해 가고 있었다. 손끝이 어설픈 아이는 조금 느리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손 빠른 아이가 뒤처지고 손 느린 아이가 앞서갈 수도 있었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경쟁이란 수단으로 그들의 총체적인 우열을 가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단기간의 우연적인 우열이 아니라, 장기간의 경쟁을 관찰한 끝에 나오는 필연적인 우열.

지금은 어느 아이가 낫다, 못하다 판단할 수 없다. 지금 뒤떨어지는 아이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고, 자신의 앞에 놓인 과업을 하나씩 이루어가면, 이윽고는 누구나―본인들마저도―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한 차가 생겨난다.

지금, 모두가 리하르트를 가장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그 말은, 경쟁을 하던 도중에 포기하게 되면 불이익이 있다는 뜻이로군요.”

정태의는 그렇게 되물으며 크리스토프를 떠올렸다. 정태의가 기억하는 한 크리스토프도 도중에 그만뒀다고 했었다.

리하르트는 거의 다 조립한 아이의 총을 들여다보다가 주위의 바닥을 살폈다. 아래에 떨어져 있던 스프링을 주워 아이에게 건네어준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다시 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천천히 다시 해 보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며 웃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일 처음에 경쟁에 끼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그 뒤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아이는 타르텐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원하는 경험을 모두 쌓을 수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익히고 싶은 것, 혹은 보거나 듣거나 느끼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지원받을 수 있지요. ……믿으실지 모르지만, 한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금액이 소요됩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걸려도 모으기 힘들 만한 금액이지요. 그런 모든 것을, 그 아이들은 제공받을 수 있어요.”

정태의는 예……, 하고 뜻없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의 뒷말을 기다린다.

“자……, 그런데 과연 그 도중에 아이가 승계 경쟁을 포기하게 되면 어떨까요. 그때까지의 노력이 모두 무위로 돌아갑니다. 자금이나 그 아이 본인의 시간도 물론이지만,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다른 사람들의 시간, 노력, 물질, 모든 게 소용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포기한 아이에게는 그만큼의 페널티가 돌아가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

페널티.

아이는 자신이 그간 받았던 것을 다시 내어놓아야 한다.

타인에게서 제공받았던 것은 그가 말했다시피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다.

그 가운데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것.

“그간 그 아이를 키우는 데에 들어갔던 물질을 회수합니다. 그만큼의 금액을 지불할 것.”

“아니, 평생 걸려도 못 모으는 금액이라면서요.”

“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요.”

정태의가 묻자 리하르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의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방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 돈을 되갚아야 하는 건데요.”

“그것은 그 사람의 재량입니다.”

너무나 간결하게 말을 맺어 정태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마찬가지로 되갚아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그 물질을 취득하는 데에 걸리는 비용으로 인정해 줍니다. ……쉽게 말하자면 돈만 갚으면 되는 거지요.”

무슨 놈의 집안이 이래,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정태의는 멍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아이들을 내려다본다.

두 번째로 조립을 완성한 아이가 혹여 빠진 데는 없나 살펴보고 있었다. 가만히 공이치기를 당겨 보던 아이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끝까지, 승계자가 선택될 때까지 경쟁을 하면, 그 비용은 갚을 필요가 없는 거겠군요.”

정태의는 리하르트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렇지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 굳이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기만 하면 그 페널티를 받지 않아도 될 텐데, 포기하는 사람은 왜 있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승계자가 선택되고 나면 나머지 경쟁자들은 승계자의 아래에서 그의 일을 도우며 살아야 하니까. ―승계자로 선택될 자신은 없으나 남의 아래에서 일하기 싫은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차라리 막대한 배상금을 내더라도 타인의 명령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의 옆에서 그때까지 말없이 듣고 있던 일레이가 나직이 웃었다.

“네 얘기를 하나 보군. 너는 만약 네가 승계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평생 걸려서라도 배상금을 내는 쪽을 택했겠지. 남의 아래에서는 일을 못하는 위인이니.”

리하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천만에. 그리고 나는 내가 승계자가 될 거라고 확신은 하고 있지 않아.”

“겸손이 아니라 위선이라고 하는 거지, 그건.”

“칭찬 고맙군.”

코웃음 섞인 일레이의 말에도 리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응수했다. 그리고, 조립을 마친 아이들에게는 다시 분해를 시킨다. 그런 다음에 한 번 더 조립을 하고 나면 너희 또래의 아이들이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용법을 알려 주마, 라고 덧붙이면서.

정태의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사람을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에게 낯설다고 해서 어떠한 구조나 방식에 입을 댈 수는 없다. 어떠한 방식이든 단점이 있는 만큼 장점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선택을 시킨다면 차후에 후회할 가능성도 많을 텐데, 제게는 가혹해 보이는군요.”

정태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고 그대로 삼켜도 될 이야기였지만―말해 봐야 자신에게 좋을 일이라곤 전혀 없는 이야기였지만―결국 말하고 만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 다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 때건 본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리하르트라는 남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생각은, 이러한 방식이 이어져 내려오는 데에 적극적으로―혹은 소극적으로―동의한 타르텐 전체의 생각이기도 하다.

정태의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겼지만, 곧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았다.

본인들의 동의하에 벌어지는 일이라면 아무래도 좋겠지.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잘 알고 있었던 셈이지.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배상의 문제를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야.”

일레이는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미미하게 웃음이 서린 목소리에는 안타까운 빛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었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당기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일레이는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멀리 숲을 바라본다. 마치 그곳에 크리스토프가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여기는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정태의는 힘없이 동의했다. 기운이 빠져서 목소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역시 오늘은 별로 좋은 날이 아니다. 심신에 피로가 쌓이기만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여기에 와서 좋은 날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그래. 맞아. 차라리 미친놈 소굴이라는 T&R의 기동대가 그에게는 더 걸맞은 곳이었겠지.”

“아, 그렇지. …….”

그렇지, 라고 말하고 나서야 그 미친놈 소굴에서 크리스토프와 함께 지냈던 일레이는 애매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정태의는 숲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끔 누군가 숲 입구 가까이에서부터 말에 박차를 가하는지 짧은 고함소리나 말달리는 기척 따위가 아련하게 들려오곤 했다.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보기만 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도록 말을 잘 다루는 크리스토프를 떠올린다. 가끔 그는 말과 이야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저 있었다.

그는 이곳에 걸맞지 않는다.

이곳이 아닌 곳에서는 그토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그만둬야겠다. 이러다가는 별로 좋지도 않은 생각들만 줄줄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크리스토프에 대한 생각을 일단 차단하고 나자, 아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언뜻 마음에 걸렸지만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정태의는 뚫어져라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리하르트에게 옮겼다. 이번에야말로 경악이 담긴 시선으로,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인 정태의가 천천히 물었다.

“아까, 승계 후보자로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는 사람이 요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그 요한……?!”

“내가 아는 한 이 집에 요한은 하나다.”

“아아, 그러고 보니 꽤 친근하게 잘 지내셨던 것 같은데, ……재미있는 친구지요.”

잠시 망설이다가 재미있는 친구라고 말하는 그 칭찬이 별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놈도 잠정적으로 마음에 살짝 병이 있는 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번역되어 들렸다.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씩 이놈이 똑똑한 놈이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있긴 했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였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토프도 그만두기 전까지는 유력한 승계 후보자였다고 했었지…….

“……. ……타르텐은……, 승계자가 될 사람의 인성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래서야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집안이 어떻게 굴러가나, 아니 하지만 얼마 전 보았던 그 어르신은 아주 훌륭한 인격자이신 것 같았는데, 하고 고뇌에 잠긴 정태의는, 눈앞에서 리하르트가 말없이 애매하게 웃는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일레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별로 듣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말을 했다.

“네 인성에 퍽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리하르트.”

아주 훌륭한 안목이야, 하고 감탄하듯이 덧붙이는 일레이의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자신이 리하르트에게 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헉, 하고 얼굴이 굳어지며 얼른 그게 아니라, 제가 말하려던 건, 하고 변명을 주워섬기는 정태의에게 리하르트는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지만, 정태의는 물동이를 엎은 듯한 기분에 빠졌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물동이를.

아니, 사실 이 남자도 인성에 문제가 많다고 은근히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그 뜻을 비칠 생각은 없었는데. 요한의 이야기를 했는데 왜 리하르트가 끼어든 거지.

정태의는 자신의 실수를 뼈아프게 반성했다. 그리고 이 사태가 벌어진 데에 책임이 막중한 일레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일단 수습이나 하고 보자는 생각에, 화살을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인성을 거꾸로 순위 세워 인원을 뽑는다는 T&R 기동대에 비할 수야 없지 않을까……. 거기는 인성뿐만 아니라 인선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타인을 공격해서 자신의 재난을 피하는 수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타인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 타인이 원인을 부르지 않았던가.

정태의의 말에 여전히 유쾌한 빛을 지우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일레이는 문득 느물느물 웃었다.

“크리스토프가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그 기동대 말이지.”

널 두고 하는 말이다, 널.

정태의는 마음속으로 목청껏 외쳤지만 그는 마치 자신은 그곳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게다가 그 문제 많은 인선 말이야……, 죄다 나랑 좀 안면이 많은 놈들이긴 한데, 그 중에서 추려낸 건 내 형이야. 그래, 나도 문제가 좀 많다고 생각했지……. 나중에 전해 주도록 하지.”

헉…….

어쩐지 물동이를 하나 더 엎은 것 같다.

아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지, 하고 정태의는 다시 말을 주워섬겼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네 인성의 문제점에 대한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과거 UNHRDO의 유럽지부에서 아주 대단히 유명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인성에 대해서 말이야.”

“아하……. 하긴 그곳은 인선에 다소 문제가 있긴 했지. 나도 그쪽 기구에서 교관을 할 생각은 사실 딱히 없었고, 교관을 맡길 줄도 몰랐거든.”

“그렇지! 인성을 생각하지도 않고 능력만으로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인선도 아주 문제가 있단 말이지!”

“무기중개와 연관된 탓이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그 자리에 앉도록 암암리에 밀어 준 사람이 거기 아시아 지부의 교관 중 하나였지. 정……, 누구였더라…….”

“…….”

차라리 입을 다물자. 그나마 남아 있는 물동이 다 깨먹겠다.

옆에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채 눈동자만 굴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리하르트는 어째서 갑자기 정태의가 입을 다무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때, 묵비권을 고수하기 시작한 정태의를 도와주기라도 하듯이 한 아이가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한 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여기 있는 격철을 당긴 다음에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가는 거죠?”

“그렇지. 탄환을 넣는 방법은 조금 있다가 가르쳐 주마.”

리하르트는 아이에게 관심을 돌리며 대답했다. 흐음, 하고 총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잠시만, 하고 아이에게서 총을 받아들었다.

리하르트의 말대로 실물과 똑같이 만든 모형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일레이가 들고 있는 총을 보며 정태의는 감탄했다. 요즘은 모형도 저렇게 잘 나오는구나.

일레이는 총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무게는 훨씬 가볍군. 이래서야 장난감 탄환도 제대로 안 먹히겠어. 아니, 쏘아지긴 하나?”

그는 총신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더니, 격철을 당겼다. 잘각, 실물보다 훨씬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애들 연습용이라지만 이건 쏘는 맛도 영 안 좋겠어.”

일레이는 총을 한 번 빙글 돌렸다가 다시 쥐곤, 피식 웃으며 정태의에게 총구를 향했다. 정태의는 자신을 향한 총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둬. 아무리 모형이라도 쥔 사람이 댁이어서야 등줄기가 오싹하다고.”

“하하, 아무리 나라도 빈총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

그때였다.

일레이가 정태의를 겨눌 때부터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을 마주보던 아이는, 그가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당기자 어, 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한발 늦었다.

팡! ―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일레이의 손목이 약간 흔들렸다. 아이의 손으로 어설프게 조립한 총의 총열과 가늠쇠 사이가 약간 뜨며 비틀렸다.

그 짧고 가벼운 파열음과 동시에, 정태의의 입에서 “아!” 하고 짤막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낯을 확 찡그리며 허리를 구부린 정태의는 천천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몇 초쯤, 침묵이 흘렀다.

리하르트는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아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쪽을 쳐다본다. 그 총을 조립한 아이만 우스꽝스럽게 찌푸린 얼굴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세기가 어느 정도나 되나 궁금해서, 지우개를 잘라서, 넣어 봤는데……. 아저씨, 괜찮아요?”

순간적으로 얼어 버린 공기 속에서 그 아이는 당혹스레 정태의에게 다가갔다.

배를 감싸쥐고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정태의는, 잠시 침묵한 뒤에야 겨우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기왕이면……형이 좋겠다……, 그런데 지우개 맞아? 왜 이렇게 아파……젠장.”

정태의가 죽어가는 목소리로나마 중얼거리자 잠시 굳어 있던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아이들은 깜짝 놀랐네, 하고 중얼거리고 리하르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모형이라서 다행이었어요. 실물로 연습을 시켰더라면, 거리도 이렇게 가까운데 지우개라 해도 맞은 위치에 따라서는 위험했을걸요.”

“으……내 옆구리…….”

정태의는 옆구리와 배의 가운데쯤 되는 부분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제법 아팠다.

맞는 순간은 충격 때문에 절로 허리가 굽어질 정도였다.

이거 멍들지 않았나,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허리를 문지르던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인성에 대한 평가 좀 내리려고 했다고, 이렇게 총으로 막 쏜다 이거지……?”

아무리 따져 봐도 정황상 일레이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 수세에 몰렸던 정태의는 자신의 고통을 밑거름 삼아 물고 늘어졌다.

일레이는 총을 든 채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 없는 얼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감정의 표현에 문을 잠가 버린 것 같은 얼굴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 ……리그로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다른 세계에 있다가 돌아온 듯, 이내 마뜩찮은 얼굴로 정태의를 보았다.

“고무조각 좀 맞은 정도로는 사람 어떻게 안 돼.”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모를까 쏜 장본인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뻔뻔스런 그 대사에, 정태의는 도끼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이내 흥미가 없어진 듯, 총을 다시 그 아이에게 가볍게 던져 주었다.

“고무조각 하나 쏘았다고 총열이 어긋난다면 연습용으로도 역부족이다. 돈도 많이 버는 집에서, 이런 데에 돈 아끼지 말고 좋은 걸로 쓰지 그래.”

어이, 좋은 걸로 썼으면 지금쯤 난 죽었어, 하고 옆에서 투덜거리는 정태의의 말에 일레이는 눈길만 흘끔 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도 물고 늘어지긴 텄나 보다.

정태의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속으로 쳇, 하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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