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prologue (7/34)

prologue

그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혀 불공평한 상태에서 주어진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느 쪽을 골랐을 때에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또한 무엇을 잃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을 터였다. 그 선택에 따라 그는 앞으로 한동안, 혹은 아주 오랫동안, 그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선택의 기회를 갖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토록 구경조차 하지 못할 숱한 것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는 신중해야 했다.

그에게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처음으로 찾아왔던 것은, 그가 고작 일곱 살일 때였다.

그러나 그렇듯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라고 아무도 그를 감싸 줄 수 없었다. 그 상황은 불공평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선택의 여지를 가지게 된 다른 네댓 명의 아이들 역시 고만고만한 나이였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여덟 살이었지만 가장 나이가 적은 아이는 바로 얼마 전에 다섯 살이 된 참이었다.

‘어때. 해 볼 테냐, 아니면 하지 않을 테냐.’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렇게 물어본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은연중에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아이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리다고는 하나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에 잠길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다.

마침내 첫 아이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두 번째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아이는 조금 더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 아이는 약간 찌푸린 얼굴로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남자는 부드러운 얼굴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는 남자를 마주보았다.

남자는 ‘어르신’이었다. 남자는 그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하고 높은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큰아버지도, 그밖에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어른들도 모두 남자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던 사람이라, 이렇게 볼 수 있을 줄도 몰랐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귀신같을 줄 알았는데, 남자의 눈가에는 웃을 때에 파이는 주름이 부드럽게 잡혀 있었다.

그는 몇 초쯤 더 침묵했다.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그 주름진 눈매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마음이 바뀐 사람은 없냐고.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무거운 쇳덩이로 새긴 도장처럼 심장 위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선택의 기회였고, 그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선택은, 그가 나중까지 후회할 첫 번째 과오의 기억이기도 했다.

그에게 두 번째 선택의 기회가 온 것은 첫 선택을 한 뒤로 십 년도 더 지나서였다.

이번에는 그는 혼자서 남자 앞에 섰다.

그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아니었다. 십 년도 넘는 시간은 그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누가 딱히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선택의 결과가 나오려면 앞으로도 십여 년은 더 지나야 했지만, 많은 일들에서 그랬듯이 그는 이 일 역시 제법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첫 번째 선택의 기회가 왔을 때 고개를 끄덕여선 안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었고, 이제 그는 그 과오 위에서 두 번째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세 번째의 선택이란 없었다.

‘해 볼 테냐.’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진 남자는 이번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 역시 이번에도 몇 초 가량 지그시 남자의 눈매를 바라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고민하지는 않았다. 이미 대답은 정해 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젓자, 남자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별다른 빛도 없는 남자의 뒤에서 공손하게 시립하고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잠깐 눈썹을 찡그렸을 뿐이다.

그는 두 번째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스스로 만족했다. 비록 두 번째 선택의 기회를 가졌다고는 하나 이미 첫 선택에서 판단을 잘못한 탓에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보다 한 살 많았던 첫아이는 작년에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 선택에서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들었다. 반년 더 있으면 두 번째 아이도 다시 선택을 하게 될 테고, 그 뒤로 1년하고도 더 되는 시간이 지나면 세 번째 아이도 선택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머릿속에서 그들을 지웠다. 이제는 그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두 번째 선택에서 고개를 저은 이상,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홀가분했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고개를 저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야 소용없는 일이었고, 적어도 이렇게 드물게 홀가분한 때만큼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면서, 그는 웃었다. 이제 그는 물러날 수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두려우면서도 또한 더없이 마음이 가벼워, 그는 한가득 웃었다.

그러나 웃어 본 적이 손꼽힐 만큼 드문 얼굴은 그 낯선 표정을 미처 담아내지 못해 입매가 아주 약간 멈칫거리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한번 웃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입매를 조금 찌푸리고 말았다. 웃으려고 했는데도.

그것만이 조금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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