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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track (6/34)

bonus track

어느 오후 나절, 카일은 모처럼 시간이 빈 휴일에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서재에 앉아 있었다.

컴포넌트의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는 바흐가 흘러나왔다. 그 장엄한 첫 소절을 들으며, 그는 며칠 전에 걸어 놓고 그대로 두었던 음반의 빈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BWV 244번.

일단 가톨릭이긴 하지만 그다지 종교적이거나 경건한 인간은 아닌 카일이 퍽 즐겨듣는 음반 중 하나였다.

“Erbarm dich unser, O Jesu…….”

어느새 심취해 코럴을 따라 읊조리던 카일은 몹시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짓을 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에서 차가 찰박 쏟아지는 걸 느끼고서야 흠칫 눈을 떴다.

“아차……. 내가 이런 실수를…….”

다행히 거의 다 마셨던 참이라 차는 고작해야 몇 방울 정도 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펼친 채로 놓아두었던 책에 방울방울 굴러 떨어진 찻물을 보고 카일은 낭패한 얼굴로 얼른 찻잔을 내려두고 티슈를 뽑아들었다.

“쯧쯧, 이 귀한 책에…….”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보존되어 있어야 할 법한 낡고 누런 책을 조심스레 집어 그 위를 티슈로 살짝살짝 누르면서, 카일은 혀를 찼다.

이 책도 그렇지만, 이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크나큰 노력을 들여 겨우 손에 넣은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평생 가도 다시 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책들도 몇 권 있었다. 그야말로 보물 같은 책들이다. 그 중에서 카일에게 가장 최근에 기쁨을 안겨 주었던 책은―.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카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겨우 진정되었던 두통이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머나먼 이집트에서, 에이전트를 거치고 또 거치다 못해 조바심이 난 카일이 직접 카이로까지 가서 받아온 책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 책은 그의 수중에 없었다.

“내 책……, 내 피 같은 아이너 미어슈…….”

생각하면 또 속이 쓰렸다. 그 귀한 책을 홀랑 훔쳐가 버린 악마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모쪼록 책이 탈없이 자신의 손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쓰린 가슴을 문지르는 카일이었다.

그나저나, 과연 내 기대주는 책을 무사히 찾았으려나. 아니 그 이전에 과연…….

카일은 책을 빈자리에 꽂아 넣으며 흠,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전화가 조용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흘끔 시선을 주자 액정 화면에는 낯익은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하……. 이 친구는 또 어쩐 일로.”

카일은 컴포넌트의 볼륨을 낮추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곧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여어. 잘 있었나?’

“나야 여전하지. 어쩐 일이야.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글쎄, 그냥 안부차 연락해 봤지. 굳이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합동훈련이 끝나고 이제 겨우 유럽에서 온 망나니들이 돌아갔다는 정도?’

“아하, 수고 많았군.”

카일은 화면 속에 비친 오랜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UNHRDO의 정기 합동훈련이 이제 막 끝난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럽 지부와 아시아 지부의 훈련은 거칠기로 유명했는데, 그 트러블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입장인 교관들은 그 기간 동안 여러 모로 고생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UNHRDO의 아시아 지부에서 교관을 맡고 있는 이 친구는 별로 고생한 빛도 없이, 얼굴 표정은 그저 화창하기만 했다.

“이번엔 좀 수월했나 보군.”

‘아아. 누구처럼 유명한 미친놈이 더 이상 없는 바에야, 그렇게 골 썩일 일도 없지.’

빙글빙글 웃으며 태연하게 남의 동생 험담을 하는 친구에게 카일은 태연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아무렴, 그렇겠지. 그 유명한 미친놈이 우리 집에 들어앉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순수하게 자네의 행운을 기뻐해 줬을 텐데 말이야.”

‘아하하하, 어쩌겠나, 태생이 그런 걸. 세상 참 공평해. 안 그런가?’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에 가시를 담아 날렸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카일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격을 가진 동생이 하나 있었다.

원래 가족이란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가 자식을 골라서 낳을 수 없다. 형제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이 카일에게 주어진 부모는 매우 훌륭했다. 태어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었다는 외적인 요인을 차치하고서도, 좋은 부모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인지, 대단히 공평하게도, 역시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카일에게 주어진 형제는 행과 불행의 균형을 맞추기라도 하듯 대단히 훌륭치 못했다.

여동생은 괜찮다. 그 싹싹하고 당차고 어여쁜 아이는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 잘해서 지금은 바다 건너에서 남편과 저처럼 예쁜 딸 둘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문제는 나머지 동생 하나였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그 동생은 장년에 걸쳐 그의 가장 큰 고뇌거리였다. 동생의 손에 죽을 뻔한 것도 수차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릭은 잘 지내나?’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잘 지내는 모양이지.”

‘아직 드레스덴에 있지?’

“그렇지. ……뭐 설마 거기에서 그놈한테 해를 끼치진 않을 테지.”

끼칠 수 있다면 끼쳐도 상관없지만, 다른 데라면 몰라도 그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다. 유구한 세월을 이어 내려온 집안 간의 돈독한 관계란 그런 것이다.

‘하하, 호락호락 해를 당할 인간이기나 한가. 그래, 모처럼 그놈의 마수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노닐고 있을 우리 조카님은 어때. 잘 지내고 있나?’

“음? 아―…태이 말이지…….”

카일은 말을 흐렸다. 아주 잠깐의 머뭇거림이었지만 그 짧은 틈을 알아채지 못할 친구가 아니었다.

‘왜 그래. 뭐 문제라도 있어?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아니, 아냐. 아주 멀쩡하지. 아픈 데도 없이 아주 건강해.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는 그랬지.”

‘며칠 전? 그럼 지금은―.’

친구가 의아하게 입을 뗄 때였다.

마치 때를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친구의 말을 가로막으며 삐, 삐, 삐, 하고 통화 대기음이 섞여 울렸다.

“아, 전화가 왔군. 잠시……. ……이놈도 양반은 못 되겠어.”

친구의 전화를 대기로 돌리려던 카일은 액정에 비친 친구의 얼굴 아래에 파랗게 깜빡이는 숫자를 확인하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동생이다.

그리고 지금 카일은, 이 시간에 난데없이 동생이 왜 전화를 했는지 그 이유에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이놈이 또 나를 잡아먹으려 하겠군. 내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네도 함께 해 주게.”

‘뭐?’

영문 몰라 하는 친구의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카일은 동시대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기계음이 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낮고 건조한 음성이 삭막하게 들렸다.

‘형이 그놈 이리로 보냈지.’

앞뒤 맥락도 없이 대뜸 꺼내는 그 말을, 카일은 아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마주쳤나 보지. 그 넓은 저택에서 잘도 만났군. 잘하면 끝까지 안 만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 상황에서 어쩌려고 그놈을 여기에 보냈어. 그새 정신이라도 나가셨나?’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추호도 아무런 다른 뜻은 없다. 크리스가 내 책을 들고 가 버려서 그걸 대신 찾아 달라고 한 것뿐이야. 뭘 들고 갔는지 알기나 해? 무려 아이너 미어슈의 1908년 초판본이라고!”

너무 열성적으로 말했나 보다. 말을 하다 보니까 감정이 북받쳐서, 말을 맺을 무렵에는 목소리가 한 톤 높아져 있었다.

“아니면 네가 크리스에게서 그 책을 회수해서 태이에게 들려서 돌려보내든가.”

카일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자, 전화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돌아왔다. 이제 보니 액정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서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그제야 대화의 맥락이 잡힌 듯이 알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놈의 책 불살라 버릴 테다.’

그 낮은 목소리가 왜 그렇게 선명하게 들리는지.

카일은 히끅, 딸꾹질을 할 뻔했다.

“야, 인마!!! 뭘 불살라, 뭘!!!”

‘그게 싫으면 애초에 이 따위 짓을 안 했어야지.’

카일의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높아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수화기 너머의 동생은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듯 느릿하게 말했다.

서슬 퍼런 카일의 거친 숨소리와 냉담한 동생의 말없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친구가, 어느 순간 나지막이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사뭇 유쾌한지 그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 심기가 언짢은 카일의 귀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자네는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아니, 좋다기보다는 말이야……. 자네, 우리 조카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닌가?’

모처럼 좀 쉬게 놔두지 굳이 사지로 보낸 저의는 또 뭐야, 하고 덧붙이는 친구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즐거운 빛이었다. 조카를 사지로 보냈다고 책망하면서도 저렇게 발랄한 목소리인 인간도 그리 흔치는 않을 거다. 저렇게 무정한 숙부가 또 있을까.

“이봐, 창인. 부려먹는다고 하니 내가 말해 두는데, 자네 조카를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은 없을걸.”

적어도 멀리서 무정하게 웃고 있는 숙부보다는 더 아끼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아니, 실제로 저 친구가 조카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그 속까지 들어갔다 나오질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카일은 진심으로 정태의를 아끼고 있었다. 저렇듯 건실하고 올곧으면서도 융통성 있는 젊은이는 요즘 찾기 드물었다. 게다가 지금은 친동생보다 더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 참이었다.

카일이 그렇게 정태의에 대한 자신의 정을 호언장담한 때였다.

갑자기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소리의 근원은 동생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려 들지도 않으며 대놓고 비웃는 그 삭막한 얼굴.

“…….”

카일은 잠깐 침묵했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그 침묵과 거의 비슷한 심경이었을 친구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릭……. 내가 뭐 딱히 네 의견을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닌데 말이야, 방식이 그릇된 건 ‘아낀다’의 정의에서 제외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좋으실 대로.’

동생은 선선히 말하며 고개를 까닥했다.

너는 너 좋을 대로 해석해라, 나는 나 좋을 대로 해석하련다, 딱 그 의미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카일은 침중한 기분에 잠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정태의에게 참 못할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몇 달이라도 떨어져 있게 둘 걸, 왜 저놈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맹수 우리 속으로 그를 밀어넣었을까.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게다가 좋게 좋게 생각하자면―.

“보라고, 창인. 사지는 무슨 사지. 저놈이 버티고 있는데 누가 태이에게 해라도 입히겠어.”

가장 큰 해를 입히는 장본인이 여타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해들은 다 막아 줄 텐데.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뒷말은 친구의 귀에 충분히 들린 모양이었다. 친구는 여전히 유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군. 뭐 걱정이 영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불안을 좀 덜겠어.’

부디 내 가엾은 조카의 앞날에 평화 있기를, 하고 덧붙이는 친구의 말에 카일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어쨌거나 그 평화를 훼방 놓을 가장 큰 원흉은 자신의 혈육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창인, 믿어 주게나. 나는 진심으로 자네 조카를 아끼고 있다네.”

‘아하, 아무렴.’

다행히 친구는 카일의 말을 믿어 주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한편에서 동생은 과연 그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카일의 반석과도 같은 친구는 그때 문득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지금 태이는 크리스랑 같이 있겠군 그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다시 그 자리에는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그 말속에 숨어 있는 뜻을 가만히 되짚어보다가, 카일은 친구에게 다시금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크리스. 크리스토프 타르텐.

과거 T&R의 사설기동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 유럽판 킬링필드의 주인공.

그 까다롭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에게 정태의를 덩그러니 던져 놓았으니, 이미 알고 한 짓이긴 하지만 자신의 죄가 크다.

“그래도 아마 태이라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다.”

자신 없이 그렇게 덧붙인 말은 잠시 뒤 조금 더 확고하게 되풀이되었다. 일단은 일레이도 있는 데다가……라고 말하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문득 크리스토프를 떠올린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토프는 일레이의 소꿉친구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이차가 제법 있긴 했지만 집안 관계상 어릴 적에는 만날 일이 종종 있었다. 양가에서 뭔가 크고 작은 일을 치를 때에는 서로 기별을 보내곤 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가끔 또래 아이들이―일레이나 그들 또래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주로 그들이―몰려서 놀거나 싸우는 모습을,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카일은 옆에서 지켜보곤 했었다.

그들 가운데 크리스토프는 단연 눈에 띄는 아이였다. 지금도, 카일의 기억 속에서는 그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서 크리스가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단순히 외모 때문은 아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단연 눈에 띄는 외모이긴 했지만, 단지 외모 때문에 카일의 기억 속에 유독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스쳐가는 아주 짧은 순간에, 카일에게는 보일 때가 있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냉막한 눈동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혹은 없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아스라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그 소년에게 있는 것이 카일에게는 없고, 그 소년은 가지지 못한 것을 카일은 가진 탓이다.

다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섬광처럼 짧게, 보이지도 않은 듯이 보이는 그것이 가슴에 남았다.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만큼이나 막막하게.

그래서 카일은 가끔 크리스토프의 소식이 들려와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어느 내전에 용병으로 가서 몇이나 죽였다거나, 누구를 없앴다거나,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서 논란이 되었다거나, 그런 말들이 들려 ‘정말로 겉과 속이 다른 놈이라니까.’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레 납득하는 스스로가 있었다.

혹은 그가 뜻밖에도 생면부지의 죽어가는 아이에게 쾌히 자신의 피를 내어주겠다고 해서 그의 본성을 알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경악했을 때에도, 카일은 크리스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만일 필요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장기를 꺼내어 줬을지도 모른다. 무표정한 얼굴로 스스로의 배를 갈라서. 선행도 무엇도 아닌, 단순한 변덕으로.

크리스토프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어떤 것은 가지되, 어떤 것은 가지지 못했으니까. 애초부터 남들과는 달리.

그 알 수 없는 납득의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카일은 정태의를 보내면서 마음속 어디선가 생각했다. 태이라면 괜찮겠구나, 하고.

“그래. 태이는 괜찮을 거야.”

적어도 크리스토프에게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유도 없었지만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화면 안쪽에서 조용히 카일을 보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친구는 이윽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랜 벗의 그 말을 듣자 카일의 마음도 한결 가라앉는다.

그래, 태이라면 괜찮다. 설령 괜찮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다시 괜찮게 해 줄 거다.

게다가, 정태의 본인에게는 어쩌면 결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그 옆엔 저 괴물 같은 동생도 있었다.

“어쨌든 네가 거기 있잖아. 네가 있으면 태이야 걱정할 것 없겠지.”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동생에게 말했다. 시야 한쪽 구석에서 친구가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도 안다. 과거에 비해 혀를 놀리는 솜씨가 대단히 능숙해졌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카일은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뭐,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한들 그리 효과적으로 통할 만한 상대도 아니지만.

아니나 다를까, 동생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시큰둥하게,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렇다고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라고 언짢은 대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정작 걱정을 해야 할 상대일 가능성이 농후한 동생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성가신 방향으로 괜찮아지면 귀찮단 말이지, 나는.’

“성가신 방향? ……태이가 뭐 사고라도 쳤나?”

사고에 휘말리면 휘말렸지 먼저 사고를 칠 성격은 아닌데, 하고 카일이 물었지만 동생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리며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다가 몇 초쯤 지난 뒤에야 그 손가락을 멈춘다.

‘아니……뭐 됐어. 그놈이 좋아하는 건 사탕과자 같은 얼굴이니까, 취향에서도 어긋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카일은 음? 하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이상은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 역시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고 생각을 곱씹어보는 듯했지만 별 말 없었다.

사탕과자 같은 얼굴이 취향이라……. 이건 설마하니…….

카일은 이야기의 방향을 짚어가다가 어떠한 가공의 결론에 이르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태의가 좀 운이 없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 보는 눈조차 영 없어 보이진 않았다. 고르고 골라서 불구덩이에 섶을 지고 들어가는 짓은 안 할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들의 평화로운 귀환을 빌며.

그렇게 속으로 기원하는 카일에게, 동생은 혀를 차며 말했다.

‘번거롭게 되긴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지. 단 그 책이 무사히 돌아가리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카일의 평화는 끝났다.

야, 너 그 책 건드리기만 해라, 건들지 마, 몇 번이고 외쳤지만 이미 끊긴 전화 너머로 그 목소리가 다다를 리도 없어, 공허한 외침만이 메아리처럼 감돌았다.

그렇게 폭풍우 치는 카일과는 대조적으로 태평하게 친구가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뭔가 일들이 사소하게 벌어졌나 보군. 안부전화도 종종 해 볼 만한 보람이 생기는걸.’

친구의 웃음소리가 이렇게 얄미울 때가 또 있었던가.

“이 친구야. 아이너 미어슈야……. 아이너 미어슈 초판본이란 말이다…….”

‘아아, 내 아이너 미어슈는 금고 안에 잘 모셔져 있거든. 자네도 모쪼록 잘 사수해 보게나.’

지금만큼 이 친구가 얄미운 때는 없었다. 어쩌면 조카를 고생시키는 자신의 불행을 은근히 기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카일은 그제야 생각했다.

이제는 그저 정태의가 맡은 바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bonus track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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