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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5/34)

4.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역시 바늘방석은 바늘방석이다.

정태의는 기본적으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닥쳐올 것이 분명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차라리 빨리 겪고 스쳐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전전긍긍하면서 그때를 기다리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적당히 넘겨 버리거나 무마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안 맞고 넘어가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이미 결정된 사실이면 차라리 얼른 해치우고 넘기려는 편이었다. 그리고 여태 대부분은 그렇게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의 이성은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느니 네가 먼저 그놈에게 가 버려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깨어지고 봐라’라고 하고 있었다.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것 아니고, 앞날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짓도 별로 권장할 일이 못 된다.

또한 일레이가 한 번 잡은 꼬투리에 대해 아무 말 없이 넘어가주리라는 희망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오늘 밤에 동익으로 숨어 들어가서 일레이와―일방적인―담판을 지으려고 했는데.

―여자들이 줄줄 따를 만한 게 면상만이 아니라고. ……저놈 거시기, 엄청 크대. 아주 굉장하다더라.

요한의 목소리가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웃기고 있네……. 그 물건을 보고도 그놈을 줄줄 따를 여자가 있다면 내가 장을 지진다.”

정태의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몇 년이나 그놈과 할 짓 못 할 짓 다 해 온 자신도, 이제야 겨우 좀 살 것 같았다. 피눈물 나는 노력과 끈기의 결과였다.

하지만 다시 처음 시점으로 돌아가서 정태의에게 선택지를 준다면, 정태의는 단연코 부르짖을 터였다.

작은 게 좋다고.

정도의 차는 있을 테지만, 저 정도의 물건을 견뎌야 할 바엔 차라리 아쉬울 정도로 작은 게 훨씬 몸과 마음이 편할 게 분명했다.

“……. 그래 봐야 지금 모른 척하다가 나중에 가서 정작 매를 맞을 때가 되었다고 해서, 그때 그놈의 물건이 작아질 리는 없지. 어차피 지금 경을 치나 나중에 경을 치나 마찬가지야. 설마 ‘나가면 죽인다’는 말대로 정말로 죽이지는 않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카일에게 전화 안 했잖아…….”

정태의는 머리를 감싸쥐고 중얼중얼했다. 아마도 누군가 본다면 살짝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고 여길 여지가 다분했지만, 고민에 잠긴 정태의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서익 앞의 벤치에 나와 앉아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식사를 한 뒤 침대에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뇌에 잠겨 있다가, 순간적으로 ‘매도 먼저 맞고 말자’는 사고가 이겨서 충동적으로 방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서익 방으로 나와 서늘한 밤바람을 쐬어 머리가 좀 깨어나자, 요한이 말했던 저주 같은 이야기가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나온 김에 이대로 동익에 가 버릴까, 갈팡질팡하다가 그 중간 지점인 벤치에 앉아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도 역시나 이게 정답이다 싶은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미 밤이 까맣게 찾아들어 주위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비록 실외등은 벤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이 근처까지 비추진 못했지만, 본관이나 동익, 서익, 대부분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어 그렇게까지 캄캄하지는 않았다. 어둑하나마 사람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가끔 밤산책을 즐기러 나왔는지 잘 정돈된 중정이나 숲길 쪽을 거니는 사람도 멀찍이 보였다.

갈까, 동익으로. 반죽음 당할 각오를 하고 일레이에게로―만에 하나 진짜로 죽이려고 든다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칠 예정이었다―.

아니면 어차피 내일 일은 모르는 법인 인생, 닥칠 때까지 모른 척해 볼까. 자수하면 형량을 줄여 준다는 논리는 애초에 통하지 않는 인간인데.

“이 집 담장에는 자정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고압전류가 흐른다.”

갑자기 정태의의 고민을 도중에 뚝 자르며, 이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벤치에 앉은 채 허리를 구부려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정태의는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 인물을 쳐다보았다. 그 낮고 서늘한 목소리 때문에 고개를 들기 전부터 이미 누군지 알았다.

“크리스토프.”

“그 외의 시간에는 담장을 탈 수 있겠지만, 경비가 자주 돌아다니니까 주의해야 할걸. 그나마 안에서 밖으로 타넘는 건 경계가 좀 덜하겠군. 그런데, 5미터짜리 담장을 무슨 수로 넘으려고?”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무심한 어조로 줄줄 읊은 크리스토프는 정태의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팔을 휘두르더라도, 고의가 아닌 한 닿지 않을 만한 거리를 두고.

“담장?”

정태의가 멍하니 되묻자 이번엔 오히려 크리스토프가 이상하다는 듯이 흘끔 쳐다본다.

“담 타서 도망치려는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나? 릭에게서 달아날 고심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일레이를 피할 셈으로 베를린에서 나왔다가 운 없이도 여기서 딱 맞닥뜨린 걸로 결론지은 모양이었다.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그 추측에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이 경우에 매를 미리 맞는 게 나을 것인지 어쩐지를 고민하던 참이야.”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기울이고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이 얽혀 있는지는 몰라도 매 정도로 끝난다면 미리 맞는 것도 괜찮겠지만, 목숨이 오가는 일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낫지 않나.”

과연, 이번에는 제법 그럴 듯한 추측을 한 모양이었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라도 일레이와 연관되면 목숨이 오갈 수 있다는 걸, 그와 함께 일한 바 있는 크리스토프라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할까 싶지만……, 만일 정말로 말 그대로 죽이려고 든다면 얌전히 목숨 내맡길 수는 없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조건 달아나고 봐야지.”

“…….”

크리스토프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무조건 달아날 경우에 말이지. 어쨌든 달리는 거야. 다리에 목숨을 걸고 죽어라 달리겠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뛰다가, 지금쯤은 겨우 따돌렸을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다고 생각해 봐. 그때 네 눈앞에 뭐가 보일 것 같아?”

“……. 담장을 타넘어 무사히 도망치라고 나를 위로해 주던 게 아니었어?”

순식간에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해 버린 탈주 예상도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정태의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대답은 간결했다.

“5미터를 넘어설 방법이 궁금했을 따름이지.”

“……. ……. 이 밤중에 여긴 왜 나왔어?”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성싶었다.

세상에 내 편은 없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바로 얼마 전 아니었던가.

정태의는 바깥에 나와 있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상 어차피 오늘은 그놈을 찾아가기 텄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쨌든 오늘은 동익에 안 가는 걸로 결정이다.

“머리가 아파서.”

크리스토프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자꾸 머릿속에서 떠들어 대서 시끄럽거든. 그럼 곧 두통이 나.”

생각만 해도 초조한 것처럼 혀를 찬다.

그러나 짜증이 날 뿐 별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투의 그 말에, 정태의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마 동안 그의 잔심부름 따위를 하거나 그에게 휘둘려가면서 근처에 있으면서, 정태의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를 지켜보았다.

약을 과자처럼 씹어먹던 그의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습관이 된 듯이 자연스레 진통제를 입에 털어넣는 그는, 약도 효과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늘상 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약병을 새로 채워넣곤 했다.

“누가 떠들어. 네 머릿속에서.”

정태의는 조용히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는 눈치였다.

“글쎄……,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서 잘 모르겠는데. 시끄럽고 머리 아파서 듣고 싶지도 않고.”

“뭐라고 하는데, 그들이.”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시선을 허공에 띄우고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조그만 휴대용 알약 케이스를 꺼내었다. 알사탕을 씹는 것처럼 오독오독, 딱딱한 소리가 울렸다. 밤이 되면 두통이 유난히 심해지는 것 같았다.

“혹시 상담은 받아 봤어?”

정태의 역시 허공으로 시선을 띄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수롭잖게 물었다. 입에 남은 약맛이 쓰다며 벤치 뒤로 침을 뱉은 크리스토프 역시 평연하게 대답한다.

“응,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별 이상이 없다면서, 정신과로 가 보라고 하더라.”

“어땠는데.”

“글쎄. 쓸데없는 소리만 횡설수설 늘어놓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죽여 버렸기 때문에, 어떻다고 할 것도 없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한번 약이 쓰다며 침을 뱉었다.

“언제부터 그랬어?”

“그 다음엔 평소에 환각 성분이 있는 약을 사용하는지, 그런 일이 자주 있는지 물으려나 보군.”

“음……, 네가 어느 시점에서 그 의사를 죽였는지 알려주면, 정확히 그 전 단계까지만 물어보고 그만둬야겠다.”

크리스토프는 흘끔 정태의를 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거리낀다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지겨워진 것 같았다.

정태의도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토프처럼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그러나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안 된다.

정태의는 자신이 어디까지 발을 디뎌도 되는지, 언제가 물러서야 할 때인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경계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과 같다.

이미 자신의 경계선 안쪽은 터무니없이 감당 용량이 큰 미친놈 하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남은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은 부분으로는 여기까지밖에 내디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허용량을 늘리기 위해 그 미친놈을 내쫓을 수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나아가면서 이미 확고해진 우선순위가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옛날옛적에, 잡아서 뜯어먹든 씹어먹든 해 보라며 뗏장 쓰고 누웠지…….

숙부의 말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체제 순응형인데 아주 가끔 예상치 못한 데서 뒤엎어 버리는 반골 기질’인 정태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역시 난 결정적인 순간에 비굴하게 생명을 도모했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어느 순간 상황을 확 엎어 버릴 때가 있다고 해도, 이 남자에 대한 허용범위는 여기까지다.

“너는 말이지……, 분명히 일레이의 친구가 맞는 것 같다. 가끔 보면 살짝 인간이 맛이 가는 것도 그렇고, 영 위태위태한 것도 그렇고, 위험천만에 불안스러운 인간인 것도 그렇고…….”

정태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옆에서 욱하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어두워서 정확하게 보이진 않아도 틀림없이 그 조각 같은 얼굴에 불쾌하고 부루퉁한 빛을 언뜻 떠올리고서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을 거다. 안 봐도 훤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두말없이 나이프로 혀를 그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대조적이다.

그와 대치된 위치에 있는 리하르트는 늘 다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웃음 짓고 있었다. 거슬리는 말을 해도 상대에게 거친 짓은 하지 않는다. 어른스럽고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리하르트보다는 네가 좋아. ……말하고 보니 어쩐지 좀 이상하다……. 그래, 굳이 비교할 것도 없이, 그래도 나는 이래봬도 너를 좋아하고 있단 말야.”

정태의는 아무것도 없이 까만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더 시선을 들자 거기엔 밤하늘이 있었다. 드문드문 구름이 끼어 별도 거의 없이 흐린 밤하늘이었다.

정태의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자 잠시 사이를 두고 크리스토프가 불쑥 말했다.

“난 널 좋아하지 않는데?”

“…….”

나도 네가 좋아, 그런 말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아차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대답을, 저렇게 냉큼 내뱉다니.

“역시 넌, 먼저 배워야 할 게 있어…….”

주위 환경이 안 좋은지, 아무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제반 상식이 부족한 인간이 근처에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정도차가 있긴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만 꼽아 봐도 여럿 된다. 다른 것 다 젖혀두고 과거 한때 몸을 담았던 UNHRDO만 해도 상식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는 인간들이 숱했다.

상식 학원을 차리면 장사가 잘 될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배워야 하는 인간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마도 정태의가 모르는 곳에도 수두룩하게 깔려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 보다가 곧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 학원을 차리면 십중팔구, 정작 와야 할 비상식적인 인간들은 절대로 안 오고, 안 와도 되는 상식적인―그 가운데서도 다소 소심한―인간들이 찾아올 게 분명하다.

대체적으로 비상식적인 인간은 자신이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을 안 하니까, 그래서야 보람도 없고 헛수고지……하고 정태의는 잠시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흠,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무뚝뚝하게 거듭 말했다.

“네가 날 좋아하고 말고는 상관없어. 어차피 서로 좋아해야만 관계가 성립되는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고.”

젠장, 나야말로 화술 학원에 다녀야겠다.

말하다 보니 혀가 꼬여서 결국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 안 하느니만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쩝쩝 입맛을 다신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끝에 크리스토프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난 널 좋아하지 않아…….”

“알아, 알아.”

한 개인을 위한 상식 학원 개업은 어떨까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손을 내저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도 그 손이 자신의 근처에서 설렁거리자 조금 더 떨어져 앉는 저 접촉기피증도, 부족한 상식과 더불어 다소 걱정되는 일이다.

“난 널 좋아하지 않는데.”

크리스토프는 한 번 더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다. 정태의는 뭐라고 입을 열다가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는 조금 안타까운 것도 같고 불안한 것도 같이 들렸다. 그 심드렁한 빛과 어우러져, 문득 우스워졌다. 그래서 정태의는 웃고 말았다.

정태의가 웃는 기척을 듣고 크리스토프가 기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재밌어?”

“어, 재밌어.”

“……. 나랑 있어서?”

“어, 너랑 있어서.”

그가 하는 말에 맞추어 대꾸해 주며 정태의는 실실 웃었다.

크리스토프는 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하늘 아래 어느 허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잘 보이지 않아도 그 표정은 늘 그렇듯이 따분하고 심상할 것 같았다.

“그럼 나한테 와.”

“어, 너한테……, 응?”

정태의는 웃던 그대로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대답을 하려고 보니 뭐가 좀 이상하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하늘 아래를 쳐다보며 인생이 지루하다는 투로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릭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거잖아, 네 고민은 결국.”

“……. 내가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나?”

정태의는 미심쩍게 되물었다. 웃음이 감돌던 얼굴이 순식간에 씁쓸해진다.

고민의 이유는 크리스토프의 말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벗어나고 싶다기보다는 곧 다가올 그의 폭거를 피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릭에게는 내가 얘기를 해 주겠다고. 그놈은 애초에 뭔가에 집착을 하지 않을뿐더러, 어지간히 아끼는 거라도 뭔가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시하면 깔끔하게 내놓는단 말야.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그놈이 탐낼 만한 것도 제법 될 테니까, 네가 원한다면 뭐, 내 옆에 있어도 좋아. ……만일 그놈이 싫다고 한다면 우격다짐을 해도 좋고. 어차피 요 얼마간 싸움다운 싸움은 거의 못 해 봐서 뻐근하던 참이니까. 네가 바란다면 뭐……,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어.”

특별히 허락해 주겠다는 투로 말한 크리스토프는 “싫으면 말고.”라고 덧붙였다.

정태의는 좀 멍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대단한 호의인 것 같았다. 이 남자의 평소 행실로 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호의.

아니 싫다기보다는……하고 더듬더듬하면서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크리스토프의 추측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이 하나 엇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고쳐 주려고 하니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돈다.

그러면서 문득 정태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우격다짐이라. 즉 폭력이나 강압적인 수단을 동반한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 보겠다는 그 뜻 같은데, 과연 그럴 능력은 갖추고서 하는 말일까.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와 크리스토프의 대치를 떠올려보았다.

……일단 외모부터 크리스토프가 현저히 약해 보인다. 다른 의미로는 누구보다도 박력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외모는 꽃이 어울리지 주먹은 어울리지 않았다.

성격은 뭐, 방향성이 다르긴 하지만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요는 역시 육체적인 힘과 싸움의 기술인데…….

정태의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줄곧, 여자보다는 남자들 틈에 끼어 있었다. 가족도 대부분 남자, 중고등학교도 남학교, 그 뒤의 진학은 사관학교에서 군대, 퇴역한 뒤에는 UNHRDO, 거기에서 나온 뒤에는 줄곧 베를린―여자라고는 오로지, 몇 년만 지나면 칠순을 맞는 리타뿐―.

그렇게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인생을 주욱 살아왔다. 심지어 사관학교 때부터는 남자 중에서도 싸움이나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놈들이 모여 있는 환경을 전전했다.

그런 사내들을 숱하게 봐 온 가운데서도, 정태의가 아는 한 일레이보다 더 싸움에 능한 사람은 없었다. 신속하고 깔끔한 방식이든 과격하고 거창한 방식이든, 싸움으로 인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데에 그토록 능란한 인간은 없었다.

그래서, 굳이 크리스토프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일레이가 당해내지 못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우격다짐을 하면 당해낼 수는 있고?”

얕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없이 사납게 흘겨보는 눈길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고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널 못 미더워하는 건 아니고.”

정태의는 재빨리 덧붙여 말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크리스토프는 위험스런 눈으로 정태의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일도록 쌩하니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 기척에 정태의는 다시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너무하는군. 유럽판 킬링필드를 단신으로 이룩한 남자에게 그런 말이라니.”

웃는 듯 마는 듯,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정태의는 사람의 운이란 게 한 번 꼬이면 계속해서 연달아 꼬이는 법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동시에 미친 듯이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었다.

망할. 무슨 얘기를 했더라. 이놈의 심기가 더 꼬일 만한 이야기를 했던가, 안 했던가. 어째 했던 것 같아서 그게 더 불안하다.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가 우격다짐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정태의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간이탑 쪽에서 그 남자는 다가왔다. 굳이 그쪽을 돌아보지 않아도 저 목소리에, 저 느릿하게 다가오는 기척에, 누군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엿듣는 취미 한 번…….”

정태의는 낯을 찌푸렸다.

흘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크리스토프는 여전히 하늘 아래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꾸는 듯, 표정도 별 변화가 없다. 그저 심드렁하게 잠시 사이를 두고, “왔어?”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태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맞닥뜨릴 줄은 몰랐는데.

동익은 저만큼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동익이 정면으로 보여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도 모두 보였다.

저 안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쪽에서 오―.”

정태의는 괜히 부루퉁하게 말하며 그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도중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레이는 여남은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역광이라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그림자가 이리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익숙한 그림자의 어깨 위에, 큼직한 혹이 하나 솟아 있었다. 일레이의 머리보다도 큰 혹이.

“어? 어깨 위에 뭘…….”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혹이 움직였다. 내려 주세요, 라고 소곤거리는 어린 목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정태의는 거기에 어린아이가 올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레이는 아이를 가볍게 들어 바닥 위에 내려놓았고, 이윽고 어깨 위에 솟아 있던 실루엣이 사라졌다.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도 유성을 구경하러 나왔나요?”

아이는 반가운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익의 불 켜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비춘 아이를 보고서야 정태의는 그 아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올리버다. 리하르트의 축소판.

크리스토프는 그 아이를 보고 약간 낯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따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몰라, 그런 건.”

“아, 오늘 유성우가 내린대요. ……그런데 날이 흐려서…….”

반갑게 말하던 올리버는 문득 말을 흐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듬성듬성 끼어 있는 하늘에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토프는 못마땅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흘끔 하늘을 보았다. 그 시선이 막막하게 밤하늘 위를 떠돈다.

“……아.”

정태의는 문득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마디에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잠깐 날아왔다. 올리버도 정태의를 쳐다본다. 정태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크리스토프는 어쩌면 이 아이를 예뻐하는지도 몰랐다.

……저 마땅찮고 냉랭한 얼굴로 봐서는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지만.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레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그 시선이 몹시 따갑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의문이랄까 경악이랄까.

“……왜 네가 저 애를 데리고 왔어.”

정태의가 미심쩍게 묻자 일레이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곤 뭐가 이상하냐는 듯 대답한다.

“리하르트의 부탁을 받았거든. 오늘 밤 아들과 함께 유성우를 보기로 했는데 볼일이 생겨서 잠시 본관에 갔다 올 테니, 그때까지 아들을 좀 데리고 있어 달라고.”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이의 어깨 너머, 그가 왔던 방향을 보자 그곳에는 본관과 서익을 잇는 간이탑이 서 있었다. 공중정원이 꾸며져 탁 트여 있는 꼭대기에서는 분명 하늘이 몹시 잘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스런 아들을 이놈에게 맡기다니, 리하르트는 생각보다 거물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또 하나, 생각지도 못한 경악은 저 남자가 아이를 목말 태워 주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의외로 다정한 면모가 있었나 보지, 일레이. 애 목말도 태워 주고.”

정태의가 슬쩍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일레이는 잠시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정태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서늘하다. 그 눈빛에 익숙해진 정태의마저 선뜩해질 만큼.

그는 이윽고 생각을 마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면 다시는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김영수.”

“…―. 유념하지, 리그로우.”

정태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그를 잠시 더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올리버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내가 어린아이 목말을 태워 주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약간 웃음을 띠고 있는 그 말에 정태의는 순간적이나마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재빨리 그 시선을 갈무리하긴 했지만.

이 남자가 비록 비상식적이긴 하나 그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여태 그랬던 적이 있긴 했어?”

“아니, 처음이다.”

“그렇겠지.”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애초에 어린이를 자상하게 대해 주는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물은 정태의의 머릿속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환상이었다.

하긴 지금도, 올리버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자상함이나 따뜻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맡고 있는 과업으로만 여기는 눈치였다.

역시 리하르트는 그릇이 크다. 다시 생각해도, 이 남자에게 잠시나마 자기 아들을 맡기는 그 배포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애를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그래도 보기에 나쁘지는 않네.”

경악스러울 만큼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건 정태의가 일레이라는 인간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젊고 멋진 아버지가 자상하게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일레이는 언뜻 웃는가 싶었다. 천천히 그가 다가왔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 미묘한 시선에 정태의는 약간 몸을 움츠렸다.

그는 정태의의 앞에서 잠시 걸음이 느려지는 듯했지만 그 앞을 스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올리버를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뭐라고 하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향해 걸어가며, 정태의의 앞을 스치는 순간 아주 짧은 시선을 주면서 귓가에 간신히 와 닿도록 속삭였다.

“원한다면 애가 생길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네 몸 속에 꽉 차도록 부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슬쩍 물러서는 정태의를 곁눈질하며, 그 앞을 천천히 스쳐간 일레이는 나직이 웃었다.

“아버지 역할로 나도 제법 잘 어울리지?”

일레이가 유쾌한 듯 말하며 크리스토프와 올리버에게 다가가자, 크리스토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고 올리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렀다. 저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난 팔을 슥슥 문지르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저 머리통을 노려 조약돌을 딱 하나만 내던져 줄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

정태의는 홀로 벤치에 앉은 채 자신이 들은 말을 잊으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러던 차, 올리버가 갑자기 “어, 아버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본관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떨어진 본관 중앙현관, 그 계단 위로 리하르트가 나오고 있었다. 올리버가 달려가자 그 역시 알아차린 듯 웃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먼발치로 그들을 보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일레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말조심을 할 필요가 있겠어.”

찔리는 바가 있던 정태의는 움칫 고개를 돌렸다.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부자를 바라보면서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습관인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정태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간이탑 위까지 말소리가 들리던가 보지?”

“누가 앉아 있는지는 환히 내려다보이지. 말소리는 글쎄……, 저 위에서 누가 있는지 보고 내려와서 다가오다 보니 들리더군.”

정태의는 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잠시 잊고 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오기 전까지 크리스토프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리하르트 부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레이는 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크리스. 정작 바라야 할 건 바라지 않는 놈이, 바라지 말아야 할 걸 바라서야 안 되지, 응?”

“내가?”

크리스토프는 눈썹을 찡그렸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일레이를 쳐다본다.

“어차피 자기가 뭘 바라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러면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마.”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냉랭하고 조용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하르트와 올리버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정태의는 옆에 있는 남자들의 미묘하게 험악한 분위기에 ‘여긴 또 왜 이래.’ 하고 혀를 찼다.

냉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웃으며 올리버를 보고 있던 일레이의 입매가 설핏 꿈틀했다. 크리스토프의 말이 거슬린 듯 그의 시선이 점차 싸늘해진다.

“분위기 점점 더 안 좋아지네……, 왜 이래.”

정태의가 슬쩍 끼어들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돌린 일레이는 그 표정 없는 조각 같은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낮고 위험스런 목소리를 뱉어낸다.

“너는 아직도 아프다고 호소해 본 적이 없겠지.”

“…….”

“네가 어디 가서 누구를 붙잡고 울부짖든 말든 상관없지만, 상대는 잘 골라야지, 크리스. 저놈은 안 돼. 달리 찾아봐. ―하지만 과연 누가 널 받아 줄 수 있을까…….”

뒷말은 아주 나직이.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희미하게.

정태의의 낯빛이 굳었다.

그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일레이는 분명 크리스토프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유난히 섬뜩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탓이다.

말없이 중정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인형처럼 그는 움직이지도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일레이가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듣지도 않는 듯, 그에게 한 번 시선을 주지도 않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듯이,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낯빛이 하얗다. 어둠에 뒤섞여 잘 알아볼 수 없는 그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 옆에서 일레이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주 잠시, 입술이 휘어진다. 얼음 같은 눈매가 굽어졌다.

“일―…, ……리그로우.”

정태의는 그에게 딱딱한 시선을 주었다.

어느 부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분명히 크리스토프의 가장 깊숙이 숨어 있던 어느 부분을 베어 버렸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알면서 한 말이다.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었다.

정태의가 뭐라고 입을 열었을 때, 한 발 먼저 그가 말했다.

“말해 두는데, 나는 거슬리는 인간은 놔두지 않아. 제 끼어들 데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며 나서는 놈은 말할 것도 없다. 머릿속에 잘 새겨 두는 게 좋을 거야, 킴.”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유리 같은 눈은, 일레이가 아닌 리그로우다. 정태의가, 정태의가 아닌 김영수인 것처럼.

나서면 죽는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틀림없이, 나서면 죽는다.

그러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서늘한 심장을 움켜쥐며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 웃음을 웃고 말았다.

정신 차려. 지금 나는 김영수다.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다. 상대에게 어떠한 인정이나 아량을 바라선 안 되는.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서 있었다. 정태의를 보지도 않고 다른 누구를 보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그저 살짝 낯빛이 창백할 뿐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불온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며, 제법 가까이까지 다가왔던 올리버가 다시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그 뒤에서 아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리하르트는 푸근하게 웃는다.

그때였다.

“……아. 별똥별이…….”

갑자기 올리버가 눈을 크게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턱을 한껏 치켜들고, 밤하늘에 드문드문 흐리게 낀 구름 사이로 짧게 반짝이며 사라진 궤적을 좇는다.

“지금 그거, 보셨어요?”

올리버는 눈을 크게 뜬 채 흥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을 넋 놓고 쳐다보던 빛나는 눈동자가 얼마간 떨어진 뒤에서 따라오는 리하르트를 향한다.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더 많이 떨어질 거다. 구름이 조금이라도 개면 좋겠지만…….”

다소 염려스러운 듯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아들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린 리하르트는, 다음 순간,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하늘과 리하르트를 번갈아 보며 뛰어가고 있던 올리버는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 ……으앗!”

앞을 가로막듯이 서 있던 크리스토프를 미처 보지 못하고 달려가던 올리버는 크리스토프에게 온몸으로 부딪쳤다. 균형을 잃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반사적으로 크리스토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지탱했다.

“아……, 죄송합…….”

올리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살아 있는 조각상을 거기에 놓아둔 것처럼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고, 마치 자신의 몸속에 갇힌 듯이 우두커니 서 있던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변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창백하게 빛을 잃은 눈동자를 홉떴다.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입술이 순간적으로 경련한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뭐가 뭔지도 모른 채, 크리스토프는 올리버를 확 떨쳐내었다.

마치 끔찍하고 거대한 벌레가 거기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이 몸을 퍼득 떨면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작은 몸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군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소리를 칠 틈도 없이, 크리스토프의 험악한 손길이 소년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쳐 버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의 허리에 매달려 겨우 균형을 찾는 듯했던 올리버는 눈을 크게 뜬 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몇 미터나 밀려났다.

퍽.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올리버의 머리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크지는 않으나 듣는 이의 가슴이 선뜩해지는 파열음.

“올리버!”

리하르트의 고함소리가 짧은 정적을 찢어발겼다.

올리버를 떨쳐내는 순간 정신이 든 듯, 잠시 혼란스런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자신의 앞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올리버를 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 그대로,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올리버에게 달려갔다.

그들이 서 있던 곳, 서익 앞에 낙낙하게 나 있는 통행길 바로 옆에는 잘 다듬은 중정이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야트막한 돌기둥이 중정을 빙 둘러싸 통행길과 구분을 짓고 있다.

올리버는 그 돌기둥 옆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기둥머리에 거뭇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리하르트와 거의 동시에 올리버에게 다다른 정태의는 돌기둥을 먼저 살폈다. 손에 약간 묻어날 듯 말 듯한 핏자국이 남아 있다.

리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주 조심스럽게 올리버의 등 아래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손을 천천히, 신중하게 머리 쪽으로 올린다.

“……올리버.”

낮게 아들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올리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절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다시 그를 불렀다. 올리버, 올리버, 하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그렇게 불렀을까.

어느 순간 올리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굳게 감긴 눈꺼풀이 가늘게 떨린다.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 않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올리버!”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리하르트의 옆에서, 정태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초조하게 주머니를 더듬었다. 어딘가―어디든―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구급차든 뭐든. 그러나 빈주머니를 다 뒤집은 뒤에야 자신에게는 전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번뜩 고개를 들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일레이가 이미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일단 연락은 됐고, 그렇다면―.

응급 처치의 순서를 되새기며 엄지를 깨물던 정태의는 문득 시야 끝에 우두커니 서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처음에 서 있던 위치에서 그대로, 그는 올리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잃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올리버를 노려볼 뿐이었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창백한 얼굴로.

그때, 본관 쪽에서 사람들 몇몇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아마도 일레이가 연락을 한 곳은 다름 아닌 저택의 본관인 모양이었다.

“이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늙수레한 의원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급사 두어 명이 따라온다. 그 소란을 들었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도 몇이나 있었다.

리하르트는 올리버에게로 다가앉는 의원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의원의 옆에 선 채 침중한 얼굴로 올리버를 내려다보았다.

“…….”

정태의는 올리버를 둘러싼 그들에게서 물러서 뒤로 나왔다.

일레이는 별반 마음에 담지 않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나가도 아랑곳 않는 남자다. 여기서 그가 무거운 안색으로 걱정스럽게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더라면 오히려 이상했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듯 무심한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언제나 그랬다.

과연 저 남자의 얼굴이 걱정이나 불안으로 흐려지는 일이 있을까. 다치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일이.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태의는 한숨을 쉬고 만다.

문득 크리스토프의 걸음이 움직이는가 싶었다.

멈칫, 반걸음쯤 앞으로 나서는 듯하던 걸음은 그러나 곧 멈추었다. 어디로 가려다 멈추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대로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된 그는 이윽고 아주 서서히, 올리버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얼핏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조용히 가라앉은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버가 매달렸던 허리께를 털어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옷 위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 계속 털어낸다.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옷자락을 털어내던 크리스토프는, 한참이나 그런 다음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태의가 그를 부른 지 몇 분이나 지나서 대답을 한다.

“왜.”

심상한 시선이 정태의를 향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라, 정태의는 순간 혹시 그가 넋 놓고 있다가 올리버를 떨쳐내었던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설령 기억을 못한다 해도, 지금 그에게 그 이름을 꺼내어 봐야 그를 책망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를 책망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입을 다문 정태의를 바라보던 크리스토프가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말했어. 그 아이들에게도.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

크리스토프는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올리버를 떨쳐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져 있는 올리버며 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는 시선은 그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이라곤, 알아보기 힘들 만큼 어렴풋이 창백한 상태인 낯빛뿐이다.

정태의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옆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완벽하게 타인의 태도로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일레이가―언뜻 서늘한 웃음기마저 밴 음색으로―평연하게 말을 섞어 왔다.

“건드리지 말라고 늘 말을 해 뒀다고 해서 이 상황이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정당화?”

크리스토프는 코웃음쳤다. 창백한 얼굴 위로 싸늘한 시선이 깃든다. 푸르고 서늘한 빛이 심장을 서걱하고 베어낼 것 같다.

“정당화를 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지?”

그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올리버에게 메마른 시선을 준다.

―정당화를 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지?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정당하든 아니든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이 옳든 그르든,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시선을 좇아 올리버 쪽을 보았다.

올리버를 살피던 의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리하르트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다. 의원의 담담한 표정이며, 굳어져 있던 리하르트의 얼굴이 약간 펴지는 모습을 보면 다행히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혹여 모르는 일이니 정밀 검사는…….”

의원의 말이 언뜻 들려왔을 때, 차고 쪽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곧 남자들이 올리버를 조심스럽게 차 안에 눕히고 흔들리지 않도록 자리를 정돈했다.

급하게 내어온 차는 제법 널찍했지만, 올리버가 뒷자리를 차지하자 조수석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한 듯이 그 자리에 올라앉은 의원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자신이 따라서 갔다오겠다고 했지만 리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의원은 혀를 차며, 혹시 모르니 소년과 같은 차에는 자신이 탈 테니 그럼 다른 차로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났다.

리하르트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다른 차를 내어오라고 말했고, 그 남자는 서둘러 차고 쪽으로 뛰어갔다.

어수선한 침묵이 그 자리에 깔렸다. 멀찍이 창밖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며 본관과 서익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기 시작한 사람들 따위가 웅성거리는 잡음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멀리서 둘러싼 그 사람들의 한가운데에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이 남았다.

원래부터 방관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일레이. 그와 입장은 다르지 않으나 흐려진 표정으로 혀를 차는 정태의. 무심하고 평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하르트를 마주보는 크리스토프. 그리고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다 문득 크리스토프와 시선이 마주치자 낯빛이 차갑게 굳어 버린 리하르트.

여태 올리버에게 모든 정신을 쏟느라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모양인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연하고도 격렬한 분노가 치솟은 듯했다.

“너…―!!”

리하르트가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이르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을 때, 크리스토프의 창백한 낯빛이 꿈틀 움직였다. 주먹을 쥘 듯이 손가락이 움칫한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 손아귀는 느슨하게 풀렸고, 크리스토프는 옆으로 비켜섰다.

간발의 차로 크리스토프를 잡는 데에 실패한 리하르트는 형형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에 뒤지지 않도록 싸늘한 눈으로, 크리스토프도 그를 마주본다.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핏 닫히는 입매 옆으로 이를 악무는 턱의 골격이 드러난다.

“건드리지 마.”

크리스토프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리하르트의 손가락이 얼핏 스친 듯 만 듯한 옷섶을 툭툭 털어내었다. 그 신경질적인 손짓을 바라보며, 리하르트는 하……, 하고 웃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앞뒤도 분간 않고 크리스토프의 멱살을 쥐려고 달려들던 게 거짓말인 듯, 리하르트의 표정에서 격앙된 빛이 싹 가셨다. 다시 평소와 같이 담담하고 침착한 빛이 돌아온다. 다만 웃음만이 없었을 뿐이다.

“너는, 내 아들을 대체 어쩔 작정이었어.”

리하르트가 나직이 물었다. 서릿발처럼 준엄한 그 물음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삭막하고 무표정한 눈빛과는 달리, 말투에는 비웃음마저 서렸다.

“어쩔 작정……? 어쩔 작정도 없었어. 네 아들 따위는 굳이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만한 가치도 없으니.”

“……하아. 그래.”

리하르트는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짐승이 위협을 하는 것처럼 나직했다. 듣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소리다.

“그렇다면 단지 사고였겠군? 네게 부딪혀 비틀거리다가 널 붙잡은 올리버를 사정없이 후려쳐낸 것은.”

“물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뛰어가던 그 애가 네게 부딪힐 때까지, 네가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마치 부딪히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 것도, 단순한 내 기분 탓이고 말이야.”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군. 좋을 대로 생각해. 굳이 내가 네 말에 변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

크리스토프는 잠시 싸늘하게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정태의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올리버가 달려갈 때, 크리스토프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은 올리버 쪽을 향해 있었다 해도, 그 창백하게 굳어진 시야는 그의 몸속에 까맣게 갇혀 있었다. 적어도 정태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크리스토프가 올리버에게 일부러 해를 입힐 리는 없었다.

―그 아들은 나름대로 괜찮아.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못마땅하게 올리버를 내려다보면서도 그의 물음에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해 주던 태도도, 입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시선으로는 물끄러미 소년의 모습을 쫓던 모습도.

크리스토프가 일부러 올리버를 다치게 했다고? ……그렇지 않아.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리하르트, 크리스토프는―.”

그러나 정태의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리하르트에게서는 칼날 같은 시선이 돌아왔다.

평소에 정태의에게 건네는 그 부드럽고 상냥한 눈길이 아니다. 증오스러운 상대를 거드는 밉살스런 참견꾼을 보는 시선에 다름 아니다.

크리스토프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가시다는 시선이 싸늘하게 날아온다.

정태의는 깨달았다. 이 둘은 타인이 발 들여놓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주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리하르트의 편을 들든 말든, 크리스토프가 거의 고립되어 있다시피 하든 말든,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곤 한 걸음 물러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단 한 마디도 섞지 않고 유리 같은 눈으로 구경만 하고 있던 일레이가 얇은 웃음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분명하게 적의를 느낄 수 있는 눈으로 정태의에게 말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던 리하르트는 이윽고 크리스토프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리하르트도 크리스토프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차가운 살얼음처럼 얇고 불안정한 그 침묵 옆에서, 리하르트를 태우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차도 숨을 죽이고 멈추어 서 있었다.

“……그래. 사고였겠지.”

이윽고 리하르트가 말했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언뜻, 여느 때의 그와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흥분이나 분노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음만 없을 뿐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빛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걱정스럽게 충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웃음 없이 조용한 그 표정은 일견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고, 네 탓만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야. 하지만 그런 사고가 나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건 여전하군. 그래, 그 잔인한 성정은 전혀 변하질 않았어. 십몇 년 전부터 지금껏, 하나도.”

차근차근, 입 속에서 한 번 충분히 음미하며 씹은 다음에야 뱉어내는 말들이 그 자리에 퍼졌다.

리하르트는 점점 더 냉정해지고 있었다. 분노를 겉으로 드러낸 게 언제였냐는 듯, 그는 완벽하게 냉정하고 또한 담담했다. 아니, 그는 심지어 희미하게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내 아들 따위는 굳이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만한 가치도 없다고 했지. ―대단해. 사람들은 나더러 인성이 훌륭하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네가 나보다 백 배는 나은 것 같군. 너는 내 아들에게는 손을 쓸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데 나는 네 가족에게까지 원한이 생기니까 말이야.”

그 순간, 그때까지 그저 냉담하고 차갑기만 하던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리하르트는 이제는 완전히 여느 때와 같았다.

친절하고 인상 좋은 얼굴에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한결 인상을 부드럽게 해 주고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낯빛이 조금씩 얼어붙어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왜 돌아왔어. 너는 앞으로도 줄곧 타르텐으로 돌아올 예정은 없었잖아? 안 그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셈으로 T&R에 간 게 아니었나?”

“……. 승계는,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중요한 행사이니까…….”

“아하. 집안의 중요한 행사를 중시해서 돌아왔다는 소리군. 누가 가벼운 마음으로 네게 연락을 한 건 아니라는 뜻이지.”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일순 해쓱해진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리하르트를 응시할 뿐이었다.

“숙모님은, 건강하신가? 그래, 얼마 뒤 승계 때에 뵙게 되겠군. 몇 년 만이지? 십 년도 더 됐나 보군. 가끔 우편으로 기별은 전해 오는 것 같더라만,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

“……걱정해 줘서 고맙군. 어머니는 건강하셔.”

“그래, 그건 다행이군.”

리하르트는 한껏 다정한 웃음을 웃었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정태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지 오래였다.

조금 전부터 뭔가 머릿속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경고음과도 비슷한 그 알람은 크리스토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점 창백해지며 표정 하나 없이 유령 같은 얼굴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그런데―너도 한참 동안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숙모님이 건강하신지는 어떻게 알지? 그분도 이제 연세가 연세이실 텐데. 게다가 원래부터 지병으로 젊을 때부터 고생도 많이 하셨던 것 같고. ……어디 아프신 건 아니고?”

리하르트는 사뭇 걱정스러운 듯했다. 웃음도 잠시 지우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며 약간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내젓는다.

“곧 뵙게 될 테니까, 미리 걱정해 줄 필요 없어.”

크리스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말했다기보다는 입술을 달싹거린다. 거의 기계적으로. 어쩌면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듯,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듯 가냘픈 대답이다.

얼굴이 밀랍 같았다. 하얗고 창백해서, 손을 대면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때,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가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떨고 있는 줄 알았다. 춥지도 않은데 떨고 있는 그를 보고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인 뒤에야, 그가 뭔가를 속삭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닌 혼잣말이다.

그러나 입술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떨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로, 바로 앞에 서 있는 리하르트의 입술 언저리를 바라보며―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그 자리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았다―가느다랗게 어깨를 떨기 시작한다. 추운 듯이 몸을 움츠리며.

그런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 리하르트는 웃었다. 아주 다정하게, 달콤하게. 곧이어 허리를 약간 구부려 크리스토프에게 몸을 내민 그는,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번에는 모쪼록 건강한 모습으로 뵈면 좋겠군.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무덤 위에 뿌려 줄 시체로 삼을 만한 짐승을 아직 골라 놓지 않았으니까.”

“……!!”

그 낮은 속삭임을 고스란히 귀에 담은 정태의가 굳은 얼굴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크리스토프가 움직였다.

언제 움직였는지도 모르게, 그는 리하르트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메마르게 귀를 파고드는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몇 번이나, 그 소리는 마구잡이로 이어졌다.

“크리스토프!”

정태의가 외쳤다.

크리스토프는 표정이 없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눈앞에는 그저 헝겊인형 따위가 있는 듯 무기질적으로 쳐다보며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시끄러워.”

거의 움직이지 않고 달싹거리는 입술로 뱉어내는 그 조그만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정태의가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나 특정한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입버릇을 읊조리며, 그는 상대의 급소를 노려 조금의 사정도 보지 않고 내리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까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크리스! 그만―.”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말리기 전이었다.

뻐억,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여태 몇 번이나 이어진 소리들과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허를 찔려 몇 대쯤 얻어맞은 리하르트가, 크리스토프의 명치에 주먹을 정확하게 질러 넣었다.

크리스토프가 잠시 멈칫했다. 신음을 터뜨리기 위해 절로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구부리며 명치께를 움켜쥔 채 잠시 그대로 발치를 노려볼 뿐이다.

“왜. 네 어머니 무덤을 시체로 장식한다니까 화가 나나? 너는 들개를 죽여 그 시체를 올리비아의 무덤에 파묻었으면서?”

리하르트는 주먹을 주무르며 말했다. 여전히 담담하고 조용하게, 그는 희미한 웃음마저 띠고서 다정하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다문 그는 이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너도 참 가엾은 놈이야.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타고났고, 아무 거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는 주제에, 여기가 좀 이상하거든.”

귀 조금 위, 머리 옆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면서 리하르트는 한숨을 내쉰다. 정말로 안타깝다는 투로, 가엾다는 듯이, 그렇게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인상 좋은 얼굴에 띤 부드러운 웃음은 가시지 않아, 정태의는 숨을 들이쉬었다.

……빌어먹을. 알고 보니 이 자식도 미친놈이었잖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어느새 움켜쥐어 하얗게 관절이 떠오른 주먹을 다른 손으로 초조하게 주물렀다.

잔혹한 말들이 오갔다. 정태의가 이해할 수 없으나 한 마디 한 마디, 모두가 잔혹한 말이다. 듣는 이에게도, 말하는 이에게도.

그러나 도중에 어떻게든 멈출 수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정태의에게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 권리가 없었다.

쯧, 혀를 찬 정태의는 문득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마치 영화 스크린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상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따분한 영화를 앞두고 그 결말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일레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다가 정태의의 시선을 깨닫고 눈동자만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냉정한 시선을 보고 정태의는 그가 일레이가 아닌 리그로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젠장. 그래, 어차피 세상에 내 편은 없었어.

정태의는 입매를 찡그렸다. 그걸 보고 일레이 역시 냉랭하게 주시하고 있던 눈살을 희미하게 찌푸린다.

그때,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고 있던 리하르트가 유감스럽게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연하지. 어머니가 진저리를 치며 내버린 것도.”

리하르트가 혀를 차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깊숙이 얻어맞은 명치를 움켜쥔 채 허리를 굽히고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크리스토프가, 움직였다.

리하르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자신의 옆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스무 걸음 남짓한 위치에서 심각한 얼굴로―또한 명백한 호기심도 담겨 있는 얼굴로―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경비원에게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씻은 듯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치 영혼이란 게 없는 것처럼, 그에게 일직선으로 다가간 크리스토프는 마치 기괴한 인형 같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 밀랍인형이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오는 모습에 머리털이 쭈볏 곤두선 기색으로, 경비원은 저도 모르게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는 걸음을 제대로 내딛기도 전에 그에게 바싹 다가선 크리스토프는 손을 내밀었다.

다시 손을 거둔 크리스토프가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깨달은 순간, 정태의는 얼굴을 굳혔다.

경비원의 허리에 매달려 있다가 지금은 크리스토프의 손으로 넘어간 그 물건은, 철경봉이다.

“크리스! 하지 마!”

정태의가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초점을 잃고서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리하르트에게 향했다.

저것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다. 아니, 크리스토프의 손에 들어간 이상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기다. 익숙지 않은 사람의 손에서는 대수롭지 않으나, 노련한 손에서는 단매에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했다. 굳이 머리를 노리지 않아도, 어디든 빗맞아 스친다 해도 뼈 정도는 가볍게 부러뜨릴 수 있다.

자신을 향해 표정 없이 다가오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리하르트는 잠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러나 그뿐, 비키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정태의는 악다문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여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대외적으로 합심이 아무리 잘 되면 뭘 하나, 내부에서 패를 갈라 싸움질인데. 게다가 봐, 사이좋게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심각하게 목숨을 노리는 이 상황을 보라고. 미쳤군, 타르텐.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를 박차 나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제 보니 나도 미쳤잖아. 옮았나 보다, 옌장.’ 하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성당에서.

거기에서도 이놈이 남자 하나를 때려잡으려는 걸 가로막으려 들다가 애꿎게 나까지 얻어맞고 기절했었지.

……이번에는 기절로 안 끝날 것 같다, 저 철경봉을 보니.

정태의가 그들 사이에 파고들었을 때, 크리스토프는 이미 몇 걸음 앞까지 다가온 참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눈앞을 가로막은 정태의를 보고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곧 기계처럼 무감정하게 말했다.

“비켜.”

“크리―.”

그러나 정태의가 그의 이름을 미처 다 부를 때까지도 기다려 주지 못하고, 그는 팔을 휘둘러 내렸다.

철경봉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서늘하게 공기가 밀려 내리는 감각이 다가온다.

“……!”

정태의는 혀를 찼다. 동시에 급하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이미 짐작했으니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도 팔뚝을 언뜻 스쳤다.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옆으로 지나갔다.

뒤쪽에서 거친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정태의는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정태의가 비켜나자, 크리스토프는 더 이상 정태의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리하르트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크리스토프의 팔꿈치를 잡았다. 잡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귀신처럼 낯빛이 변한 크리스토프가 거침없이 팔을 휘둘렀다. 그 결에 그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억……!”

어찌나 아픈지 얼굴이 두 쪽 나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별이 보이면서 잠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돌아섰다. 이번에야말로 리하르트를 향해 성큼 다가선다.

이것저것 재거나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욱신거리는 뺨을 감싸쥐고 달렸다.

정태의가 크리스토프를 다시 따라잡았을 때, 이미 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사이의 거리는 몇 걸음도 채 남지 않았다.

“빌어먹을……!”

지금 내 얼굴이 제대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긴 한가, 하고 다소 엉뚱한 걱정을 하면서, 정태의는 다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때까지 냅다 도망이라도 가지 않고 저 빌어먹을 리하르트라는 놈은 뭘 하고 있었나 원망을 하면서.

타이밍이 안 좋았다.

원래 정태의는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일단 크리스토프의 턱에 펀치를 먹여 기절부터 시키고 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아슬아슬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크리스토프는 이미 철경봉을 휘둘러 내리고 있었다.

“……! 칫……!!”

이미 피하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저걸 움켜잡으면 십중팔구 손뼈가 아작나겠지. 손목까지 나갈지도 몰라. 하지만 당장은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정태의는 이를 악물고 그 철경봉을 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쩡……!

둔중하게 울리는 쇳소리.

철경봉을 막 잡으려 하던 정태의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 길쭉한 철창이 철경봉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커다란 호를 그리며 휘둘러 내려오던 철경봉은 끼기긱, 철창과 부대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궤도를 빗나갔다.

곧이어 다시 한번 쩡―…,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크게 쇳소리가 울린다. 크리스토프의 손에 들려 있던 철경봉은 철창에 중심을 맞고서 그 힘을 미처 받아내지 못한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땅그르르……, 철경봉이 돌바닥 위를 구르다가 멈췄다.

“정신 나간 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도 전에 먼저 그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하기 전에, 귓전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리며 뺨 위에서 불이 났다. 눈앞이 번쩍하면서 한동안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며 빙글빙글 돌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뺨을 얻어맞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거의 십여 초나 흐른 뒤였다.

귀가 지잉 하고 울릴 정도로 호되게 얻어맞은 뺨을 감싸쥐고 잠시 넋이 빠져나가 있는 정태의의 앞에서, 그의 뺨을 후려친 남자는 철경봉을 놓치고서도 리하르트를 향해 다가가는 크리스토프의 뒷목깃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그의 뺨도 사정없이 날린다.

“정신 차려. 크리스토프.”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다른 쪽 뺨을 후려갈겼다. 고개가 휙 꺾이도록 세차게 얻어맞은 크리스토프는 몇 걸음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퉤, 내뱉는 침에 피가 고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린 맛이 나는 게, 나도 입 안이 찢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아직도 멍하니 사고가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정신이 되돌아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어디서 뽑아왔는지 모를 철창 하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옆에 철경봉이 같이 굴러다닌다.

저 철창은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하고 생각하던 정태의는 불현듯 벤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벤치의 등받이를 고정하고 있던 철창 받침대가 하나 통째로 뜯겨나간 걸 발견했다.

“……. 저런 무식한 힘으로 인정사정없이 때렸겠다……, 스읍, 아야야야…….”

정태의는 뺨을 감싸쥐고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정태의가 순식간에 부어오른 뺨을 감싸쥐고 아픔을 호소하고 있을 때, 그 앞에 서서 얼음장 같은 눈으로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그 괴력의 남자,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 대신 뺨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일레이 리그로우가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아니, 난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걸랑요……. 손 하나쯤은 작살났을 테지만.”

멀쩡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정태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나마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정태의는 재빨리 고개를 움츠려 몸을 사리기로 했다.

일레이는 천하의 얼간이를 보는 눈으로 지그시 정태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토프가 초점 잃은 눈을 하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리하르트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거기에 서서,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레이는 다시 그의 뺨을 거침없이 후려쳤다. 그의 입 안이 찢어져서 이미 핏물을 뱉어냈든 말든, 일레이의 손속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정신 차려. ……정신 안 차려?”

그는 안부인사라도 건네는 듯 심상하게 말하곤,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또 다시 크리스토프를 후려갈겼다.

“리그로우. 그만해.”

일레이가 한 번 더 크리스토프를 내려치려고 손바닥을 들었을 때, 그를 말린 사람은 그 뒤에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였다.

바로 조금 전에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도, 철경봉을 들고 닥쳐드는 크리스토프를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마주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일레이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 정도로 됐어. 나는 이미 그에게 전할 말은 모두 전했으니까. 원하는 반응도 돌아왔고.”

리하르트는 평연하게 말했다. 마치 이 짧은 순간의 긴박한 소동 속에 그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던 듯이.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 리하르트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문득 피식,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는군, 리하르트. 나는 너를 위해서 그를 가로막은 게 아니야. 그만두고 그만두지 않고는 네가 꺼낼 말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다. 그만해 둬.”

리하르트는 난처한 빛을 띠며 웃었다. 절친한 친구에게 부탁이라도 하는 듯 푸근한 웃음을 띠고서 일레이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의 표정은 예전에 정태의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와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다정하고 호감 어린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일레이. 네 말이 맞았다. 크리스토프가 한 말이 맞았어. 저놈은 상변태에,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야. 저 남자야말로 머릿속 한구석이 맛이 갔다고.

정태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간신히 삼키며, 거의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리하르트를 보았다.

일레이는 혀를 차며 손을 내렸고, 리하르트는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제야,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는 이만 병원으로 가 보겠어. 올리버가 검사를 받고 있을 테니.”

인사 대신 그 말을 남긴 리하르트는 일레이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이어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잠시 미묘한 눈으로,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태의를 찬찬히 훑어본 그는 웃음을 띠며 인사했다.

“날 도와주려고 해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뭘요. 한 것도 없는데요.”

나야 그냥 무작정 몸으로 막아내려 했을 뿐이고, 실제로 막아 준 것은 일레이이고, 또한 굳이 리하르트를 위해 희생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정태의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오늘 밤은 서익이 시끄럽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리하르트의 시선 끝에, 크리스토프가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정태의는 가슴속에 욱하고 뭔가 치밀어 올랐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넋 놓고 있는 모습을, 이미 주위를 멀찍이 둘러싸고서 방관하며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마치 길가에서 치부를 드러내어놓고 정신을 놓아 버린 늙고 지친 노인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욱신거린다.

“크리스토프. 들어가자.”

정태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인형이 된 듯이 흐린 눈으로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병원을 향해 떠나가는 차 안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리하르트가 정태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즐거운 듯이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차는 건물 앞에서 멀어져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네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가만히 당했을 놈 같은가?”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멀리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연배가 좀 있는 남자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리그로우 씨, 하고 정중하게 일레이를 부르는 태도며 이 시간까지 빈틈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모습 따위를 보면, 이 집에 네댓 명쯤 있다고 들었던 집사급의 급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말씀을 듣고 싶은데 잠시 본관으로, 하고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살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며 푸르스름하게 핏기가 가신 입술은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토프. ……들어가. 우선 방으로 가자.”

정태의가 조용히 말했다. 이런 때마저―아니 어쩌면 오히려 이런 때이기에 더욱―그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내심 혀를 찬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 도통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그를, 결국 옷자락을 잡고 잡아당겨 천천히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김영수 씨?”

낯익은 목소리가 부르는 낯선 이름에, 정태의는 잠깐 멈칫한 뒤에야 일레이를 돌아보았다.

급사와 함께 본관으로 가려던 일레이는 정태의가 돌아보기가 무섭게 그에게 뭔가를 던졌다. 주먹 안에 들어올 만한 그 물건을 반사적으로 받아든 정태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유리병이었다. 손가락 두어 개를 묶어 놓은 듯한 크기의, 조그만 갈색 유리병. 그 안에는 뭔가 액체가 들어 있었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감촉이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전해진다.

“이건……?”

정태의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태의가 그 물건을 받아드는 걸 확인한 일레이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미 걸음을 돌린 뒤였고, 정태의는 아무 답도 주지 않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유리병을 다시 쳐다본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물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금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

방으로 돌아오면 조용한 가운데서 천천히 진정이 될 줄 알았다.

옷자락을 잡아끌고 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넋 나간 듯이 정태의의 뒤를 따라오는 크리스토프는 가느다란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서익 건물 안으로 들어온 정태의는 옷자락을 고쳐 쥐느라 돌아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바깥에서는 어두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평소보다 낯빛이 안 좋아 보이지만 불빛이 흐려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밝은 빛 아래서 마주한 크리스토프는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안색이었다. 창백하다는 말조차 걸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그는 입술을 가느다랗게 떨며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정태의가 ‘뭐라고?’ 하고 되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홀로 뭔가에 씐 것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런 일은―명확하게 이성과 동떨어진 상태로,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을 죽일 기세로 달려든 일은―처음이 아닌 듯했다. 크리스토프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저택으로 들어오는 정태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것을 느꼈다.

경악이나 충격, 놀람보다는 혐오와 공포에 가까운 그들의 시선은 이 일이 비단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다고 그리 자주 있는 일도 결코 아닌 모양이었지만.

크리스토프의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정태의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면서도 크리스토프는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방에 도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며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따위와 차단되어 고요한 안정이 감돌고 있는 크리스토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천천히 정신을 차리리라 여겼다. 시간은 조금 걸릴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다시 여느 때와 같이 시선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거 아무래도 좀 위험한지도 모르겠는데, 라고 정태의가 생각한 것은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가 적당히 진정되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문 옆의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던 정태의는, 시간이 지나도 크리스토프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안색은 점점 더 허옇게 빛바래는 것 같았다. 부들, 부들, 몸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고, 그가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져, 이제는 정태의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핏기 하나 없는 시체 같은 얼굴로, 그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의 깜빡이지도 않는 눈동자는 초점 없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 않을 거다……, 그냥 두지 않아……. 죽여 버릴 테다, 죽여 버리……! ……으…….”

쇳소리가 나도록 나직이 쉰 목소리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 목소리는 이미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씌인 것처럼, 반들거리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떨며 그는 목이 졸린 듯이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크리스.”

정태의는 옆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떨리는 것은 눈빛과 목소리만이 아니다. 몸도 떨리고 있었다.

가늘게 부들부들 경련하던 어깨가 점차 크게 흔들리고, 이윽고 그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덜덜 떨리는 몸을 스스로 부둥켜안은 채, 크리스토프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짓씹으며 짐승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크리스, 진정해. 크리스.”

몇 번이나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태의는 끈기 있게 그를 불렀다. 조용히. 천천히.

얼마나 지났을까.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무시무시한 욕설과 신음을 뱉어내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 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까지 작아져, 이윽고 떨리는 숨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부들거리는 몸을 움츠려 꼭 끌어안고서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던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겨우 아주 약간이나마 진정이 될 기미를 보이는 듯했다. 흘끔, 그가 눈동자를 돌렸다.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정태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크리스. ……괜찮아.”

“……. 머리가 아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부들거리는 몸은, 마치 추워서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의 것 같다.

“괜찮아. 괜찮아. 나아질 거다.”

사실은 괜찮지도 않고 나아지지도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정태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며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불거져도, 그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시끄러워……. 자꾸 소리가 들려……. 시끄러워, 귓속이 아파. 머리 아파…….”

크리스토프는 넋 나간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은 누군가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허공의 어느 곳에 시선이 고정된 채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 말들은, 자신의 귀에 다른 소리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무슨 소리가 들려?”

정태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시끄러워, 시끄러워,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조금씩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얗게 질린 정도를 넘어선 얼굴은, 금세라도 눈을 홉뜨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위험하다 싶었다.

“크리스.”

정태의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두커니 서 있던 크리스토프는 확 떠밀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몇 걸음 내디뎠다. 휘청거리는 몸이 아슬아슬해 보여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그 순간.

손에 닿은 그의 몸이 경직되는가 싶었다. 거의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거칠게 확 팔을 뿌리쳤다. 그 결에 정태의는 그의 주먹에 얼굴을 세게 얻어맞으며 밀려나고 말았다.

“건드리지 마!”

마치 부들부들 떨리는 몸속에서 열기를 빼앗으며 잠복되어 있던 불길이 일시에 터진 것처럼, 크리스토프가 고함쳤다. 비명처럼 거칠게 소리를 지른 그는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그 시퍼런 시선이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섬뜩하게 정태의의 위에 내리꽂힌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럽단 말이다!!!”

그는 정태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정태의가 있었고, 그는 점점 더 격렬하게 떨리는 몸으로 정태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위험스럽게 휘청거리는 그 걸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정태의는 혀를 찼다.

“젠장……, 좀 진정해, 이 망할 녀석아……!”

정태의는 크리스토프가 나오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얼마 가지 않아 등 뒤에 벽이 닿는다.

정태의는 끙,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 방 안에는 무기가 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고, 또한 철경봉 따위를 지닌 경비원도 없었다. 그러니 급박하고 절실한 생명의 위협을 눈앞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저 손아귀에 잡히면 좋은 꼴을 볼 것 같진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으려나. 무기 따위 말고, 뭔가―.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걸 넣은 기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지주머니를 공연히 뒤적였다. 손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

딱딱한 유리병.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만한 크기의.

가볍게 흔들자 안쪽에서 찰랑거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그 유리병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뭐든지 도움이 될 만한 게 아니면 화내버릴 테다.”

번지수가 다른 화풀이라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태의는 유리병을 꺼내었다. 자, 과연 이 박 안에서는 금덩이가 나올까, 도깨비가 나올까. ……설마 염산 따위는 아니겠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 유리병을 열었다. 정태의가 유리병을 꺼낸 걸 보았을 텐데도 크리스토프는 신경 쓰는 빛이 없었다. 아니, 그의 눈은 이미 그런 걸 보고 있지 않았다.

유리병을 열자 화악, 콧속을 파고드는 싸한 냄새가 번졌다.

클로로포름이다.

“…….”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낯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두운 과거가 뇌리를 스치며 지나간 탓이다. 기분 탓인지, 이 유리병을 던지던 일레이의 얼굴이 어째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었던 듯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는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박을 타자 그 안에서 나온 건 금덩이다.

한쪽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었다. 그리고 유리병의 내용물을 거기에 쏟아붓는다. 삽시에 주위에 감도는 냄새에 눈앞이 약간 흔들리는 걸 느끼고 얼른 호흡을 멈춘다.

“……!”

등 뒤에는 벽.

크리스토프와의 거리는 금세 줄어들었다.

정태의는 쯧, 혀를 차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에게 바싹 다가서, 그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정태의의 손이 닿자 그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 손을 뿌리치려고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팔꿈치가 귓전을 호되게 때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눈앞이 흔들렸다.

“칫……!”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의 코와 입을 덮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그에게 명치며 아랫배를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젠장. 맞은 데를 또 맞으니까 더 아프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아까 저 괴력으로 얻어맞은 얼굴도 잔뜩 부어오른 참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저기서 맞고 다니는 날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아파, 아프다니까,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크리스토프를 움켜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토프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정태의를 뿌리치려고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진다. 어……하고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온 뒤 곧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무거운 헝겊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는 그의 몸을, 정태의가 재빨리 부축해 버텼다. 늘어지는 몸무게가 어깨 위에 묵직하게 실렸다.

“……. ……후…….”

정태의는 자신의 몸에 온 체중을 싣고 늘어진 크리스토프가 더 이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균형을 잃고 자꾸만 미끄러지려 하는 그의 몸을 간신히 지탱해 침대로 옮겼다. 풀썩, 침대 위에 거의 팽개치다시피 내려놓는다.

“이놈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단 말야…….”

정태의는 등을 젖혀 그를 침대에 내려놓다가 삐끗한 허리를 두드리면서 낯을 찌푸렸다. 그 찌푸린 얼굴 그대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더 이상 부들거리며 떨지도 않았고, 시끄럽다고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죽은 듯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도 아주 천천히, 조금씩 혈색이 돌아온다.

“…….”

정태의는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새 땀이 배어나왔던 탓인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날씨는 오히려 후덥지근할 정도였는데도 어쩐지 몸속이 서늘해서,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미치광이처럼 눈을 번득이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던 남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크리스토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봐……. 너 정말 문제 있어……. 응? 문제가 한둘이 아냐. 너 그래서 어떡할래…….”

정태의는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문득 가슴속에 뭔가 맺힌 듯 답답해져서 손바닥으로 명치 근처를 몇 번 두드렸다. 그제야 조금 전 크리스토프에게 명치를 얻어맞았던 때의 아픔이 되살아나 으윽, 하고 허리를 구부린다.

오늘은 동네북이었구나.

정태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맞은 곳 위를 스칠 때마다 욱신거리며 아팠지만 그 외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은 걸 보니, 심각할 정도로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틀림없이 앞으로 며칠 정도는 욱신거리겠다고 투덜거리며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본다.

의식을 잃고서 입을 다물고 있는 그는, 마치 침대 위에 잠시 내려놓은 조각상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다시 있을까. 그 얼굴만으로도 모든 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할 텐데. 누구에게라도 원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 응? 그래서 어떡할 거야…….”

그가 들을 수도 없는데 한숨처럼 속삭인다.

한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뻗었다.

그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이 두 쪽 나도 건드리지 못할 그 조각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로, 정태의의 손이 어른거렸다.

벌써 깨어날 리가 없는데도, 막상 손을 대려니 어쩐지 망설여져서 그의 이마 위에 닿을락 말락한 위치에서 손을 내리지도 거두지도 못하며 그대로 머무른다.

아주 살짝, 살짝, 차마 살갗에는 닿지 못한 손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닿는다.

그러나 그때.

“클로로포름을 바로 옆에 두고 환기도 안 시키고서 그러고 있으면 너도 멀쩡하지는 못할 텐데.”

등 뒤에서 비수처럼 선명하게 날아들어 가슴속을 꿰뚫는 목소리.

희미하게 웃음이 밴 그 낯익은 음성은 어느새 기척 없이 거기까지 다가와 있었다.

멈칫, 흔들린 손끝에 크리스토프의 이마가 살짝 닿았다. 서늘하고 매끄러웠다. 정말로 조각상처럼.

말없이 손을 거둔 정태의는 뒤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 쪽은, 뭔가 기별은 있었어?”

“아,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 올리버는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더군. 검사는 결과가 나온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일단 현재 알 수 있는 결과로는 큰일 아니라는 것 같던걸.”

“그래…….”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가슴을 꽉 메우고 있던 응어리 같은 게 아주 약간이나마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나야말로 두통약이라도 씹어먹어야겠어…….”

긴장이 풀린 탓인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봐서 두통약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서랍장을 열어 약병을 꺼내었다.

“그러게 바로 환기시켰어야지, 쯧쯧.”

“아냐, 아냐. 내가 머리가 아픈 건, 굳이 클로로포름 탓만은 아닌 것 같다고.”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고 있던 그 남자는 피식 웃었다.

“머리가 아픈 걸로 치자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봤을 때의 나만하지는 않겠지.”

“클로로포름 같은 걸 상비하고 다녀서 아픈 게 아니라?”

“크리스토프와 어울릴 일이 없으면 나도 그런 건 가지고 다니지 않아. 이것 봐, 지금도 도움이 됐잖아.”

“……. 두 달 동안 집 떠나 있으면서 마취약까지 챙겨서 들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겠어, 릭.”

정태의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그 남자는 얼핏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눈을 빛냈다.

오랜 경험 탓에 그 위험스런 빛을 금세 알아차리고 정태의가 눈을 부라렸다.

“왜 또. 뭐가 문제야.”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호칭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정태의는 잠시 어이없는 눈으로 뚫어져라 그를 노려보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한 뒤로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장단은 하나만 쳐, 하나만.”

“낮말을 듣는 새와 밤말을 듣는 쥐가 없는 데서야 거리를 둘 필요가 굳이 없지, 태이.”

정태의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 입술을 밉살스럽게 노려보다가 끙,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베를린에서 겨우 나왔다 했더니 여기에서까지 마주칠 줄 누가 알았을까. ……아주 신수가 훤해 보이는데, 일레이.”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일레이 리그로우는 다시 한번 유쾌하게 웃었다.

속으로 가만히 손꼽아 보았다.

두 달 하고 열흘 남짓.

마지막으로 이렇게 한 방에서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은 그 정도 전이었다.

방문을 닫은 대신 창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창틀에 기대어 선 일레이를 바라보며 정태의는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란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오랜만에 봐도 바로 엊그제 본 듯 친숙하기 마련이다. 이 남자와 자신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늘상 같은 집에서 날마다 마주치면서 산 게 몇 년인데, 고작해야 두 달 조금 넘게 떨어져 있었다고 그렇게 생경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새삼스러워 어째서일까 생각하던 정태의는, 곧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에게 불쑥 말한다.

“그 차림새는 뭐야. 패셔너블한 신진 기업가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그러자 창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이쪽을 향하고 있던 일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얼마 전에는 새로 들어온 회계사가 날 붙들고 분식회계 감사 이야기를 꺼내더니.”

“……그 말을 듣고 보니 악덕 변호사 나부랭이로 안 보이는 것도 아니네.”

일레이가 갖추어 입은 정장 차림새며 말끔하게 정돈한 머리카락, 도수도 없으면서 왜 꼈는지 모를 안경 따위를 하나하나 살피며 정태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거침없는 시선이 다가왔다.

낯익은 까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미소를 띤 것은 입매뿐이다.

그 순간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본능적인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머릿속에서 삐익,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그래, 생각해 보면 베를린을 떠나 이 저택으로 들어온 이후, 일레이와 불시에 마주친 이후, 둘이서만 대치하는 것은 처음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둘만이 아니라, 정신을 잃고 있는 크리스토프를 옆에 눕혀 두고 있긴 했지만―.

집에서 나가면 죽는다고 짤막한 협박을 남기고 떠난 남자와, 지금 집 밖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그래도 자신이 문에서 가까이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소심하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렇게 와 있어도 괜찮아? 특정한 부류와 개인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늘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서.”

적어도 이곳에서의 안전만이라도 보장받고 싶었던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 채 매우 진지하게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저 입술에서 나오는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이 당면한 현실에서의 안전 여부가 결정된다.

그런 정태의의 생각을 모를 리도 없는 일레이는, 말없이 입가에만 희미한 웃음을 띤 채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생각을 마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이곳에 있는 동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리그로우의 건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일원으로 있어 줘야겠지.”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여기서 그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지는 않을 모양이다.

정태의는 순식간에 얼굴에 도는 화색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 썼다. 지금 지나치게 좋아했다간 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어느 심경에 거슬릴지 모른다.

열심히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정태의를 미묘한 웃음과 함께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는 문득 몸을 바로세웠다. 그의 여유로운 걸음이 정태의가 걸터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려고 했는데, 참 안 도와주는군. 응?”

“―뭐가.”

점점 줄어드는 거리를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정태의가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레이는 거리를 좁혀 갔다.

잠시, 얼른 일어서서 침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편이 나을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1초 뒤에 바로 포기해 버렸다. 원래 맹수는 서투르게 자극하면 더 위험해지는 법이다.

이윽고 일레이는 정태의의 앞에 섰다. 손을 뻗으면 닿도록 가까이 서, 그가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정태의는 시선만 치켜떠 그를 마주보았다.

“정태의.”

문득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 음성에서 불현듯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매끄러운 목소리가 선뜩하게 귓가를 스쳤다.

“정말로 죽고 싶나?”

“아니. 추호도.”

정태의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했다. 여기서 어물어물 대답을 잘못했다간 당장 눈앞의 이 남자의 손에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프와 리하르트의 사이에는 결코 끼지 마라. 네가 뭘 착각하는지는 몰라도, 아까 그 정도의 소동으로 리하르트가 죽었을 것 같으면 그는 이미 수백 번은 죽고도 남았어.”

“……크리스토프는 수백 번이나 조금 전과 같은 발작을 일으켰단 말야?”

“굳이 리하르트와 관련을 짓지 않고 말하자면, 거기에서 몇 번쯤 빠지는 숫자지.”

일레이의 대답에 정태의는 뜨악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수백 번에서 몇 번쯤 빠지는 숫자라는 건 말 그대로의 사실은 아닐 테지만, 일레이는 제법 자주 본 모양이었다.

“아까 이 집 사람들 눈치를 보니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더만…….”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정태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서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겠지.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T&R에 들어와, 그 뒤로는 타르텐에는 거의 돌아오지 않았었으니까. 아마도 그 전에 몇 번쯤 본 정도일걸.”

“수백 번에서 몇 번쯤 빠진다며.”

“T&R에서 수백 번을 봤거든, 나는.”

일레이는 과거를 되짚어보기라도 하는 듯 느리게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지만 곧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들어보였다.

“과연, 그 기동대 미친놈 소굴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그 안에선 그런 일이…….”

정태의는 어쩐지 납득이 갈 것 같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레이는 침대 바로 옆의 협탁에 걸터앉았다. 협탁이라기보다는 서랍장에 가까운 구조로 다소 높은 편이라, 걸터앉았다고는 해도 기대어 선 것이나 진배없었다.

위협적일 정도로 바싹 다가왔다가 물러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번에는 그와 발이 닿았다. 슬리퍼 위를 지그시 누르는 그 미묘한 압박감에 정태의는 순간 움칫했지만 딱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는 이놈과 리하르트의 사이에 끼지 마라. ……아니, 가급적이면 이놈과 관련된 일에는 머리 디밀지 마. 제정신이 아닌 놈들 사이에 끼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일레이는 발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 듯―아니, 발이 닿아 있다는 걸 아예 모르는 것처럼―말했다. 그러나 슬리퍼 위를 내리누른 그의 발을 발등 위로 고스란히 덮어쓴 정태의는 생각에 잠긴 척 고개를 숙여 그 발을 노려본다.

이젠 그냥 대놓고 밟아라.

그러나 그렇게 따지기 전에, 이 남자가 조금 전에 한 말 중 한 부분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너한테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는 말을 듣다니, 크리스토프도 정말로 인생 막장이구나.

그 말을 하고픈 마음이 간절했지만 약간 고쳐서 말해 본다.

“난 너랑 크리스토프가 친구인 줄 알았더니.”

크리스토프가 정색을 하고서 친구 아니라며 싫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도 싫어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낯을 찌푸린 일레이는 묵묵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떤 걸 친구로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의미의 친구는 아닐걸.”

“친구가 별 것 있나.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면 친구지.”

정태의는 별 흰소리를 다 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흘끔 발을 노려본다.

아예 슬리퍼를 벗어 정태의의 발등 위를 밟은 일레이는, 정태의의 슬리퍼 속으로 조금씩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남자 발 둘이 들어가기엔 좁은 슬리퍼가 빠듯하게 찼다.

발가락이 발등 위를 천천히 쓸었다. 발등에서 오목한 발바닥 쪽으로 천천히 짚으며 내려가는 그 감촉이 어딘지 미묘하다.

정태의는 발에서 시선을 들어 일레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태의와 시선을 마주하고서도 일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빛이었다.

“…….”

내가 너무 비뚤어져 있는 건가. 왜 고작해야 발을 갖고 장난을 치는 건데도 이렇게 미묘한 기분이 드는지 몰라. ……하지만 ‘내 발을 그냥 내버려둬, 어쩐지 야한 행동이 연상되잖아.’라고 대놓고 말할 만큼 정신이 단련되지는 못했다.

정태의는 슬리퍼에서 발을 뺐다. 발등을 누르고 있던 그의 발 아래에서도 동시에 빠져나온다. 그리고 슬쩍 뒤로 발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친구는 아니더라도, 동료인 건 맞잖아. 같이 일했었다며. T&R의 기동대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에만 동료라고 하는 게 옳지.”

일레이는 간결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다시 희한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같은 집단 내에서 동료로 일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외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소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면, 같은 집단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하는 와중에서도 내부의 알력다툼이 존재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즉 요컨대…….

“과연, 타르텐도 대외적인 일에는 단결력이 엄청나다고 했었지. 비록 내부에서는 저희끼리 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정태의는 납득을 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일레이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을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는 정태의의 앞에서, 일레이는 침대에 누워 정신을 잃고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준다. 문득 그는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이 그런다면 안쓰러워한다든가 가엾게 여긴다고 느껴질 텐데 이 남자가 저러면 성가시거나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태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간 쌓아온 행적이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하고 심술궂게 중얼거린다.

“이놈의 고약한 점을 말해 줄까.”

갑자기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마치 예전에 있었던 우스운 실수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그는 몸을 뒤쪽으로 약간 젖혔다. 그리고 다리를 뻗는다. 잠시 방심하고 있던 정태의는 다시 발을 밟혔다.

“내가 있던 사설기동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개별 자유계약으로 운영되고 있었어. 쉽게 말하면 내가 몬테규와 계약을 하고 있을 때, 같은 기동대 내의 동료는 캐플릿과 계약을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는 소리다.”

정태의는 발등에 얹히는 일레이의 발을 툭 걷어차 볼까 생각하다가 그 말을 듣곤 잠시 그 생각을 잊고 얼굴을 찌푸렸다.

“참 고약한 시스템이군.”

동료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그 말은 자유계약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그리 탐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야 사실상, 대부분의 사설 인력 단체에서 주요한 금지 조항으로 넣고 있는 이중계약에 아슬아슬하게 위배될까 말까 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자들도 왕왕 있지만 그게 우리 측의 시스템인 이상은 납득하는 수밖에. 싫으면 계약하지 않으면 돼.”

일레이는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타인의 동료애를 지켜 주기 위해 보다 일처리 솜씨가 깔끔한 사람을 굳이 거부할 만큼 훌륭한 인격자는 우리를 찾을 일을 벌이지 않지만 말이지.”

그렇게 덧붙이며 그는 픽 웃었다. 그 말에 정태의는 씁쓸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운영되던 차에, 내가 몬테규로 가고 이놈이 캐플릿으로 갈 일이 있었지. 뭐 이 또한 우리 측 기동대 내에선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가 이놈과 대치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너랑 크리스토프가 싸웠다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일레이는 미묘하게 웃었다. 굳이 그렇게 미묘하게 웃지 않아도 정태의 역시 그 두 사람이 ‘싸웠다’고 한 마디로 쉽게 말할 만큼 가볍게 투닥거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맡은 임무상 이놈의 입에서 반드시 끌어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놈도 맡은 일이 일이니 쉽게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지. 그런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다소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데―나는 참 곤란했어. 그때 아주 곤란했지.”

참 힘들었어, 라고 덧붙이며 일레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태의는 자신의 발등을 자근자근 밟아 대는 그의 발 위에 다른 발을 올려서 꾹 밟아 버리며―물론 아래에 깔린 자신의 발이 더욱 무거워졌지만,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라도 상대를 밟아 주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눈을 좁히고 말했다.

“동료에게 차마 험한 짓을 할 수 없어서 곤란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테고, 뭐. 크리스토프가 입을 좀체 열지 않았나 보지?”

“아하……과연, 잘 아는군.”

일레이가 피식 웃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등 뒤에 누워 있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결론적으로는 다른 놈을 붙잡아다 정보를 토해 내게 했지만, 그때엔 이미 이놈도 성치는 않아서 병원에 몇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했지.”

“너랑 친구 아니냐고 하니까 크리스토프가 질색을 하면서 싫어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일레이는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이 담긴 가느스름한 눈매 그대로 정태의에게 약간 몸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아주 약간 낮아진다.

“이놈은 말이야,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다소의 폭력을 휘두르는 동안,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어. 아니지, 신음조차 내지 않았지. 저 재미없는 얼굴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어.”

일레이가 미묘하게 웃으면서 말을 맺자, 정태의의 표정 역시 덩달아 미묘해졌다.

비명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무르고 만만하게 손을 썼을 일레이가 아니다. 이놈의 손이 얼마나 독하게 아픈지 정태의는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얻어맞았던 뺨이 아직도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리며 아픈데.

그렇다면…….

“혹시 통각이 없어……?!”

정태의는 낯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류의 일을 하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나 일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뜻이 다른 대답을 동시에 하고서 다시 웃는다.

“나중에 이놈이 입원한 병실에 위문품을 들고 문병을 갔을 때 심드렁하게 말하더군. 아프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그 뒤엔 참지 못하고 계속 아프다고 호소할 게 뻔하기 때문에 꾹 참았다고.”

정태의는 표정을 지웠다. 약간 눈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

그러나 말을 하다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고통과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다.

말을 멈추고 일레이를 그저 마주보기만 하는 정태의를 내려다보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이놈은 정신에 통각이 없어. 있다고 해도 인식 구조가 글러먹었어. 위장이 울렁거려서 구토를 해도, 위가 아픈 줄은 모르고 목이 따갑다고 생각하는 놈이라고.”

“…….”

정태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별로 가볍게 듣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군.”

입맛이 썼다. 몹시 쓰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깍지 낀 손을 꾹 움켜쥐었다. 드러난 관절을 아플 정도로 문질렀다. 그래도 씁쓸함은 좀체 가실 생각을 않았다.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면서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유쾌한 듯이.

“그래, 너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느릿하게 말하는 그 어렴풋한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정태의는 사납게 눈을 치켜 올렸다.

“그럼 굳이 말을 왜 해.”

어차피 악취미인 놈이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웃으며 즐길 놈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류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놈이다. 타인의 행과 불행 따위는 그에게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굳이 정태의에게 들려준다.

일레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천천히, 정태의의 발을 밟고 있던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렸다. 부드럽게 스치는 발은 따뜻한데도 몹시 차갑게 느껴졌다.

“네 이상형이 다정한 놈이라니 나도 때로는 그런 면모를 보여 줘야 할 것 같았거든.”

정태의는 어디서 예고도 없이 날아온 돌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양 어이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뜨악한 기분이 든 건 이 남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따지고 든 건 그 말의 내용이었다.

“그게 뭐가 다정한 면모야! 다른 사람 고문했었다는 게? 아니면 뭐, 제 손으로 고문한 사람 병문안을 갔다는 게?!”

같이 더불어 살게 된 뒤로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때로 정태의는 이 남자를 이해 못할 때가 있었다. 아니 사실은 꽤 자주 있다. 가끔은, 이 남자를 이해하게 되는 때가 자기 인생의 막장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정태의가 더럭 소리를 지르자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입가에서 희미해질 무렵에는 이미 그의 얼음처럼 새카만 눈이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머릿속에 문제가 있는 놈에게는 말이지, 제 아무리 내놓으라고 별별 수를 다 써서 호소한다 하더라도 널 못 보내 준다는 뜻이다.”

말을 맺으며 일레이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섬뜩하기까지 한 그 시선을 마주보며, 정태의는 일순 새하얀 머리로 눈만 깜박인다.

허를 찔린 듯이 멍하니 넋이 나가 일레이를 바라보다가, 정태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기울이면서 삐딱한 방향으로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에서는 마땅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뇌리를 오갔는데 그 중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골라낼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정태의가 가든 말든, 그를 보내 주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그 말부터 먼저 해야 할까.

그럼 머릿속에 문제가 없는 놈한테는 고이 보내 줄 건가? 그 말부터 먼저 해야 할까.

그보다 네 머릿속에는 문제가 없다는 전제를 암암리에 깔아 두고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그 뻔뻔함이 말이야……, 그 말부터 먼저 해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뒤섞여 머릿속을 마구 오갔다. 정태의는 누구, 그럼, 그보다, 하고 말 첫머리만 웅얼거리다가, 결국 몸을 구부려 한숨을 쉬며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고서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런 걸 다정한 면모라니……, 역시 나는 너를 이해 못하겠다.”

아직 내 인생 막장까지 가지는 않았나 보다.

갑자기 피로가 와르륵 몰려와서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눕고 싶었다.

몸의 피로와 정신의 피로가 뒤섞였다.

오늘은 험난한 하루였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였다.

이대로 오늘을 마무리하고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침대로 파고들고 싶었다.

그래, 그만 방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정태의가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소리 없이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거기에 앉아 있는 건 이미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눈 한 번 떼지 않고 줄곧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움칫,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일레이는 천천히 협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말없이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레―….”

정태의가 막 입을 열 때였다.

발등 위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듯이 움직이고 있던 그의 발이 복사뼈 근처를 건드렸다. 그 발은 조금씩 올라와 정강이며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천천히, 느리게.

“자아……, 무엇보다 먼저 해 둬야 할 말은 대충 다 되었고, 그럼 이제 슬슬 제대로 한 번 들어 볼까.”

그렇게 말머리를 떼는 나직한 말투가 어쩐지 몹시 불온하다.

정태의는 더럭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걸까, 응? ‘한 달 뒤에 내가 돌아가기 전에 확 먼저 떠 버리겠다’고 했던 정태이 씨. 그래, 분명 그 말대로 베를린에서 나오긴 했군.”

집에 조용히 있으라고 그렇게나 다짐하고 왔는데 말이지, 하고 덧붙이며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젠장. 제대로 밟혔구나. 어째 아까부터 자꾸 밟아 대더라니.

정태의는 그의 발 아래에서 슬슬슬 발을 뺐다. 그러나 발목 조금 아래를 지그시 밟아 내리누르는 그의 우악스런 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망이라도 칠 심산이었나?”

일레이가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진짜로 그런 생각은 않는 듯, 정태의의 발등을 발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물론 도망칠 심산은 전혀 아니었지만 저렇게 물어보니 긍정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 뒤가 험악해질 걸 생각하고,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답을 했다.

“아니야……, 나는 네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널 따라온 거라고.”

“…….”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빤히 일레이를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렇게 말했다. 얼굴은 대단히 진지한 무표정이다.

허를 찔린 듯 잠시 침묵하던 일레이는 이윽고 허……, 하고 어이없이 헛웃음을 웃었다.

“날 따라 여기에?”

“그럼.”

“그럼 엊그제 걸려온 형의 연락에서는 내가 헛걸 들었나 보군. 강탈당한 책을 되찾느라 크리스에게 단단히 시달리고 있을 거라며 날더러 도와주라더니.”

카일. 이번만큼은 끝까지 내 편이 아니군요.

마음속으로 잠시 카일을 원망했지만, 정태의라고 해서 저 즉석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다소나마 얼버무리고 싶었을 뿐.

그러나 카일의 연락이 있었다면 얼버무리고 뭐고, 말짱 헛거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물어봤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며 일레이의 발 아래에서 자신의 발을 휙 뽑아 버렸다. 정태의의 발을 누르고 있던 일레이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친다.

일레이가 설핏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애매한 침묵이 흐른 뒤, 정태의는 다시 조용히 슬슬슬 그의 발 아래로 자신의 발을 밀어넣었다.

“……뭐 좋아. 그럼 형의 연락은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치지. 나를 따라왔다니, 듣기 좋게 깜찍한 말을 다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 줘야겠지.”

“다정하기도 해라.”

정태의는 이번에도 매우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물기 하나 없는 입술로 냉큼 중얼거렸다. 비아냥으로 들리기 딱 좋은 말이었지만, 정태의는 비아냥거릴 의도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아부라면 또 모를까.

일레이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만 어렴풋이 웃음을 띠고 있을 뿐 눈동자는 차게 가라앉아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정태의는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까다로운 얼굴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기 어렵고, 어떤 기분인지도 알기 어렵다. 다만 이 얼굴을 한 뒤에 그가 유쾌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는 뭔가 까다로운 난제를 생각할 때 이런 얼굴을 하곤 했다.

어쩌면 난감해하거나 곤란해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각했지만, 저 거침없는 남자가 난감하고 곤란해할 상황이라는 것도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난제라. 지금 그에게 주어진 난제는 과연 무엇일까.

정태의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그가 이제부터 할 말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태이.”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정태의는 말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베를린으로 돌아가.”

그는 그 말만 했다. 달리 덧붙는 설명 따위도 없었다.

……아하.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그가 내켜하지 않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와 버렸는데?”

정태의는 모른 척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나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빤히 보였는지, 일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꾸욱, 발등 위에 올라와 있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 아프다.

“돌아가기 싫은가?”

그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의외로 그 목소리는 돌아가라는 억압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궁금해하는 것처럼 들려, 정태의는 그를 쳐다보며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돌아가기 싫지는 않다. 굳이 이곳 타르텐에 있을 이유는 없었고, 있고 싶은 이유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베를린에 있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러나 아직 카일의 책을 찾지 못했다. 모처럼 카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인데, 가능하면 그에게 책을 찾아다주고 싶었다.

게다가.

“…….”

정태의는 등 뒤에서 잠들어 있는 크리스토프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레이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여기 좀 더 있고 싶은데……내가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이 남자가 몹시 불안해 보여서.

자신이 어쩔 도리는 없겠지만 한없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보여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마음에 걸리나?”

일레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정태의는 흠칫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릎이며 발이 닿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는데, 크리스토프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레이는 협탁에서 떨어져 정태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가 일어선 탓에 발등에 더욱 묵직한 체중이 실린다.

“태이. 거기까지 해. 그 이상은 안 된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불에 닿았다.

어느 순간 발 위에서 무게감이 사라진다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몸 전체가 정태의의 몸 위에 걸린다.

“―이봐, 잠깐, 그만.”

일레이는 정태의를 밀어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엎드려 체중을 싣고 있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침대 위로 밀려서 누운 정태의는 당혹스럽게 흘끔 곁눈질을 했다. 바로 옆, 두어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었다.

“야, 야, 왜 여기서 이래. 제발 장소는 좀 가리자.”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갑자기 뜬금없이,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송이구이 운운하던 요한의 말이 생각났다. 정태의는 얼른 도리질쳐서 그 생각을 떨쳐내곤, 진땀을 흘리며 속삭인다.

“내 방 바로 저 옆이거든. 야, 야.”

“크리스라서 내버려둔 거야.”

그러나 일레이는 정태의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자신이 하던 말을 이었다.

귓불에서 뺨까지 천천히 핥은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정태의의 바지 앞섶을 덥석 움켜쥐었다.

정태의는 숨을 삼켰다.

비록 옷 위로 잡았다곤 하지만, 그 커다란 손은 정태의의 물건을 정확하게 쥐고서 지그시 내리눌렀다.

코가 맞닿을까 말까 한 거리에서 정태의를 내려다보며, 일레이는 아래쪽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며 열기를 띠기 시작한 손길과는 대조적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태이 네가 좋아하는 얼굴은 저렇게 조각처럼 뚜렷하게 생겨먹은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네가 저놈 옆에서 저놈 편을 들며 붙어 있어도 아무 말 안 했어.”

그래, 게다가 저놈은 마침맞게 중증의 접촉기피증이기도 하니까 말야, 하고 말을 이은 뒤 일레이는 정태의의 입술을 빨았다. 아플 정도로 세찬 감촉이 아랫입술을 쓸고 갔지만, 그보다는 아래가 문제다.

옷 위로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한 손아귀가 아팠다. 하지만 아픔만이 아닌 게 문제다. 밀어내려 해도, 이미 마음을 먹은 듯한 이 남자가 밀려날 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입에서는 숨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다.

야단났다.

정태의는 흘끔, 다시 옆을 보았다. 클로로포름을 덮어쓴 사람이 그렇게 금세 일어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 다른 사람이 누워 있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해.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 마.”

일레이가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다시 입술을 세게 빨아올린다. 마치 아래쪽과 함께, 어느 쪽이 더 자극이 강한지 내기라도 하듯이.

바지 위로 정태의의 성기를 움켜쥐고 다소 거칠게 주물거리면서, 일레이는 바로 위에서 정태의의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그 내쏘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정태의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놈의 안 좋은 버릇이 또 나왔다.

언제부터 저런 버릇이 붙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정태의가 자극을 받아 흥분에 들뜨게 되면 그 자극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때까지 아주 뚫어져라 표정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절정에 이르기 직전까지 자극을 준 뒤 물건을 움켜쥐어 사정을 가로막기도 했다.

그 직전에서 가로막힌 정태의가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으면, 그 얼굴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 눈빛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눈빛이지 싶었다.

지금은 그나마 옷 위로 훑어 올리는 자극뿐인 데다 주위의 상황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그런, 정태의가 나중에까지 두고두고 떠올리며 굉장히 괴로워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흥분이 여실히 떠오른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거북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만 좀 봐…….”

“내 걸 보는데 뭐가 어떻단 거지?”

일레이는 정태의가 고개를 돌리며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그 팔을 치워 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뺨을 깨문다.

“일레이, 제발 좀, 그, …―.”

“돌아가, 베를린으로.”

정태의가 다시 팔을 내리려 할 때, 귓가에 입을 바싹 갖다대고 일레이가 속삭였다.

그 순간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정태의의 달아오른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그러면서도 어딘가 일말의 냉정함을 남긴 채, 일레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뭔가, 예전에 잠시 느꼈던 위화감과도 닮은 의문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여느 때와는 달리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굳이 말하고 간 일레이. 재차 확인하는 연락. 이곳에서 마주쳤을 때 놀람에 이어 떠오른 냉랭한 얼굴.

……. 그것만 갖고 가장 쉬운 결론을 내자면 이놈이 이 동네에 딴집 살림이라도 차려 둔 걸 텐데……. 젠장. 좀 제대로 생각을 해보고 싶은데 저 손이 자꾸 사람 신경을 분산시키잖아…….

아래쪽을 집요하게 훑어 점차 일어서고 있는 성기를 주무르는 그의 하얀 손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정태의는 흠칫흠칫 다리를 움츠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려 노력했다. 딴집 살림 따위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은 저만치 내던져 버린다.

……그러나 역시 육체적 고역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기란 너무 어렵다…….

“여기가 베를린이 아닌 게 문제인 거야, 아니면 드레스덴인 게 문제인 거야?”

정태의가 가쁜 숨을 내쉬는 사이사이에 겨우 물어본 말은 그것이었다.

그때 문득.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주무르던 손이 잠시 멎었다.

바싹 맞닿아 입술을 빨거나 뺨을 핥곤 하던 얼굴이 약간 떨어졌다. 한 뼘쯤 위에서 지그시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을 마주보며, 정태의는 그 짧고도 갑작스러운 공백에 그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리기만 했다.

……어……?!

머리에 얼핏 의문이 스쳤다.

“감이 좋은 것도 좋지만은 않단 말야…….”

혼잣말처럼 나직이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와 동시였다.

“……아!”

아래를 움켜쥔 손에 순간적으로 세게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물건의 아래쪽, 정태의가 민감하게 여기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 문지른다. 옷감의 천에 쓸려 점점 더 감각이 예민해진다.

“잠깐만, 일, 일레…….”

아플 정도로 세게 마찰하는 그 감각을 따라가지 못해 정태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이미 아랫도리는 부풀만큼 부풀었다. 바지 위로 감싸쥔 넉넉한 손 안에 꼭 들어차도록 잡혀, 끝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속옷이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불쾌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밉살스러울 정도로 입술을 꼭꼭 깨물던 일레이가 정태의의 혀를 빨아들여 자신의 입속에서 맛보는 것과 동시에, 정태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 ……!!”

한 번, 두 번, 간헐적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정태의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일레이는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였다.

절정의 그 순간, 일순 아득해지는 머리로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나직했다.

―하지만, 그래, 나도 이렇게 마주치고 만 다음에야, 도로 보내 주기가 아쉬워졌단 말야. 고작해야 앞으로 한 달인데도.

정태의는 멍한 눈으로, 눈앞에서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뭔가 중요한, 들어야만 할 말을 한 것 같지만 듣지 못했다.

사정한 뒤 특유의 탈력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정태의는, 아예 넋이 완전히 외출이라도 했던 건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너는 안 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아차 싶었다. 순식간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잠깐만, 잠깐만, 지금 남의 침대에서―심지어 그 침대 주인이 바로 옆에 버젓이 누워 있는데―못할 짓을 한 걸로도 부족해서, 지금 내가 무슨 망발을 했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여기는 좀 그렇고, 내 말뜻은 그저, 하고 열심히 허둥거리는 정태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일레이는 어느 순간 그의 위에서 훌쩍 일어났다. 뭔가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 창가로 가서 바깥을 내다보는 그를 정태의는 머쓱하게 쳐다보았다.

저놈이 어쩐 일로……, 하고 미심쩍게 쳐다보던 정태의는, 곧 바깥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창 위로 어른거리며 스쳐간다.

이 밤중에 올 사람이 누굴까 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갔던 리하르트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

일레이는 창가에 서서 말없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검지 끝으로 유리창을 툭, 툭, 튀기는 모습이, 말을 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차 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그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일레이의 시선은 그 차를 좇았다. 냉정하게 뭔가를 짚어보던 그 눈은, 차가 사라진 뒤에도 잠시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가 다시 완전한 적막이 돌아온 뒤에야 창에서 등을 돌렸다.

정태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일레이를 쳐다보았다.

뭔가 미묘하게 걸렸다. 개운치 않은 것이 뇌리 한구석에 남아 갉작갉작 소리를 낸다.

고개를 기울인 채 잠시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그게 무언지조차 알 수 없어,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레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

그러고 보니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들썩였었다.

어쩐지, 언제나 당연하게 이어지던 수순이 빠지자 뭔가 불안해졌다. 갑자기 일상이 휙 뒤집혀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진 것 같다. 저 인간이 저런 놈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점점 의심에 가까운 고뇌가 깊어졌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해치우고 개운하게 끝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 …….”

본심을 따지자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활기찬 내일을 위해,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만 욕구를 풀어서야 어쩐지 페어플레이가 아닌 것 같았고, 또한 조금 전에―설령 엉겁결에 나온 망발이나마―이야기를 꺼내고 난 참이니 이대로 슬쩍 넘어가기도 좀 치사해 보였다.

“……. 넌 안 해? ……하더라도, 이 방에서는 말고.”

말을 하고 나서야 혹시나 싶어 단서를 덧붙였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죽을 각오는 했었다. 지금 심경으로는, 이 방의 이 침대, 방 주인이 잠들어 있는 옆에서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심신 모두 지치도록 혹사당해서, 온몸이 물먹은 솜 같았지만.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런 사소한 아쉬움들은 접어두었다.

일레이는 창가에 서서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시선은 정태의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문득 그의 시선이 정태의의 뺨 언저리에서 머무는 것 같았다. 거기에 뭔가 묻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벌레라도 붙었는지, 뚫어지게 뺨을 쳐다보던 일레이의 시선이 일순 서늘해지는가 싶었다. 뒤이어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못마땅하게 눈살을 약간 찌푸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문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어……?

정태의는 허를 찔린 얼굴로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문고리를 잡으며 흘끔 정태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베를린에 있겠다면 반드시 지금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침대에 제대로 눕혀서 옷을 벗겨 놓으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것 같은 얼굴인데, 시체처럼 잠든 인간을 붙들고 밤일을 할 만큼 급하지는 않거든.”

이 거짓말쟁이야, 너 전에 지붕 수리하고 피곤해서 비몽사몽으로 잠들어 있는 나를 굳이 붙들고서 욕구를 채웠었잖아, 그 다음 날 지붕 수리의 근육통과 더불어 내가 죽을 뻔했기 때문에 훤히 기억나는데, 그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정태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거 설마…….

정태의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방문을 열기 직전에 정태의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진심을 그대로 담아 말한다.

“말해 두는데, 한 번만 더 위험한 곳에 네 목을 들이밀면 차라리 나한테 죽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지.”

“……. 어. 안 그럴게.”

남의 일에 목숨까지 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정태의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참 저 인간답지 않은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심경으로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일레이는 말을 마친 듯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만 잠이나 자. ……거기서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서.”

무심하게 그 말만 남긴 뒤, 문을 닫는다.

“……. 어……?”

정태의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 덩그러니 홀로―의식을 잃고 있는 사람은 머릿수로 치지 않고―앉아,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뭐랄까, 뭔가 새 세상에 떨어진 것 같긴 한데…….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반대쪽으로 다시 기울여 보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려 보아도 이 현실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개심을 한 건가. 아니면 인간이 바뀌었다든가, 혹은 남의 집이니까 지나치게 방종한 짓은 삼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든가……아니, 이건 좀 아니겠다.

몇 가지의 가설을 세워 보아도 일레이가 별다른 폭거도 없이 나름대로 얌전히 물러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죽든가, 반쯤 죽든가 각오했었는데.

“희한하네. ……내가 좀 불쌍해 보이긴 했나 보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이며 뺨을 벅벅 긁었다. 그러다가 아야야……하고 손을 멈추고 만다.

뺨은 겉으로는 부풀어 올랐고 속으로는 입 안이 찢어진 상태였다. 뼈가 바스라지지는 않았나 싶을 정도로 얼얼해서, 차마 손도 못 대고 있었는데.

잠시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툴툴거려 주려고 했는데 까먹었다.

아까 바깥에서, 저 무식한 괴력으로 어찌나 세게 후려쳤던지 입 안이 찢어지고 얼굴 한쪽이 잔뜩 부었다. 아마 내일쯤 되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 될 거다. ……몇 대나 맞은 크리스토프는 더 그렇겠지.

정태의는 잠시, 자신보다도 저 조각 같은 얼굴이 망가지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사실 별로 따질 생각은 없었고,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저 성격에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내 손에 죽어라’ 하고 그대로 주먹을 안 날린 게 용했다.

“…….”

정태의는 침대 위에 올라앉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색으로 벽지를 바른 무거운 빛 천장이 저만치 위에 있었다.

―그만 잠이나 자. 거기서 말고 네 방으로 돌아가서.

문득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태의는 멀뚱하니 앉아 있다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침대에 제대로 눕혀서 옷을 벗겨 놓으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것 같은 얼굴인데, 시체처럼 잠든 인간을 붙들고 밤일을 할 만큼 급하지는 않거든.

언뜻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 섞인 듯도 하던 그 목소리도 떠오른다.

정태의는 이번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알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영 알기 어렵다는 말야…….”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하, 하고 한숨도 한 번 쉬어준다.

그러나 한숨을 뱉어내고 난 입은 픽 웃고 있었다. 피식피식, 바람 새어나오는 웃음을 연신 웃다가 결국은 낮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러다가 아야야야, 하고 뺨을 감싸쥐고서 눈살을 찡그렸지만, 그런 뒤 또 다시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2권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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